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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1-2

11. 개명 양반

윤씨부인에게 인사를 올리고 물러난 서울 손님이 길상을 따라 사랑으로 발길을 돌렸을 때 어정대고 있던 하인들과 계집종들의 눈은 일제히 그의 뒷모습으로 쏠렸다. 육 년 전이었던지 서희가 갓 났을 무렵, 잠시 동안 다녀간 일이 있는 최치수의 재종형 조준구였다. 그러니까 치수의 조모, 조씨부인 오라버니의 의 맏손자인 것이다. 조준구가 사랑으로 사라지자 하인들, 계집종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몇 해 전에 한분 오싰제?"

"와 아니라. 그때는 갓 쓰고 도포 입고 인물이 훤하더마는 지금은 영 숭업게 됐구마."

"옷이 망했네. 까매귀가 보믄 아재비라 안카겄나."

"제비가 보믄 할아배야 하겄다."

킬킬 웃는다. 검정빛 양복에 모자, 구두를 신은 서울의 신식 양반 조준구는 상체에 비하여 아랫도리가 짧은데다 두상은 큰 편이었으므로 하인들 눈에도 병신스럽게 보였을 것이며, 하인들은 그것을 양복 탓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조씨댁의 내림이 그러하였던지 행시 조씨부인도 작달막한 몸집에 다리가 무척 짧았었다.

"왜놈들 병정이 말 타로 가는 거를 보았지만는 같은 홀태바지라도 저렇지는 않은데?"

"그거사 그눔들 전복이니께 다를 테지."

"전복이고 머고, 같은 홀태바지 아니가. 그놈들은 늘씬해 뵈든데."

"큰 칼 찼인께 니 간이 콩알만해져서 그리 뵀일 기다. 그보다 갓끈도 아닐 긴데 모가지는 와 그리 쫄라맸일꼬?"

물은 아래도 흐르게 마련이더라고, 하인들의 투를 보아 조준구는 윤씨부인이나 최치수에게 반가운 손님은 아닌 듯 싶다.

"김서방은 어디 갔느냐?"

사랑 뜰에 들어서면서 준구는 길상에게 물었다.

"구례에 갔십니다."

"구례에?"

"."

"그런데 사랑에 계시냐?"

"나으리마님 말심입니까?"

"."

"초당에 가 기십니다."

준구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놈, 그럼 가서 아뢰어라, 서울서 형님이 오셨다구."

꾸짖듯 말했다.

"."

길상이 뛰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준구는 마루에 오르지 않고 파초 그늘 밑에 서 있다가 모자를 벗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다. 모자 그늘에 가려졌던 이마는 창백하리만큼 희었다. 몸집은 어떻든 눈시울이 길고 깔끔하게 생긴 얼굴에는 귀티가 있다.

"! 태평성세구먼."

얼굴을 닦아낸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호주머니에 넣고 뒷짐을 진 그는 구두 끝을 내려다본다. 다음, 등을 뒤로 재면서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소리개 한마리가 날갯죽지를 펴고 빙 돌고 있었다. 몇 번을 도는가 싶더니 소리개는 날개 짓을 하며 당산 쪽으로 날아 가버리고 구름도 없는 하늘은 텅 비어서, 다만 들판 쪽으로부터 아낙들의 노랫소리가 메마른 바람에 실리어 들려오곤 했다. 길상은 얼굴이 빨개가지고 뛰어왔다.

"저 나으리마님께서 초당으로 뫼시오라십니다."

"초당으로? 알았다!"

준구는 양 어깨를 치키듯하며 휭하니 사랑문 밖으로 나갔다. 초당까지 와서

"나으리마님, 뫼시왔십니다."

대답 대신 방문이 열렸다. 치수 또래의 선비 한 사람이 버선바닥을 슬슬 만지면서 신돌에 올라서는 준구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민망해하는 닟빛이 되어 고개를 돌려버린다.

"올라오시오."

치수는 앉은 채 이웃에서 온 손을 대하듯 심상하게 말했다.

"손님이 계신가 본데..."

"개의치 마시오."

방으로 돌라간 준구는 모자를 벗고 양복바지 무릎께를 두 손으로 걷어올리듯하며 자리에 앉는다. 열려 있는 들창에서 솔내음을 실은 바람이 들어왔다.

"먼 길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겄소."

역시 심상하게 말하고 한동안 사이를 두더니

"인사하게, 언젠가 내가 말한 서울의,"

하며 낯선 선비에게 눈짓을 한 다음

"하동에 사는 이동진이라는 사람이오."

준구에게 소개를 했다. 그들은 수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았으나 서로 머쓱해져서, 초면인만큼 치수가 마음을 써주지 않는다면 어느 쪽에서든 입을 떼기 난처한데, 주인이 말이 없어 침묵할 수밖에 없다. 한참 만에

"웬일루 오시었소."

겨우 치수는 입을 떼었다.

"뭐 별 볼일은 없고 바람쏘일 겸 왔네."

"집안은 두루 안녕하시오."

"그저 그렇지. 자네는 여전히 안색이 안좋군 그래."

치수의 엷은 입술이 꾹 다물어진 냉랭하기가 섬진강 겨울바람 같았건만 준구는 치수의 성미를 익히 알고 있었던지 태연했다. 이동진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준구의 앉은 키는 그들보다 조금 높은 편이었다. 정연한 이목구비에 서울서 닦여진 세련된 모습은 아무래도 시골 선비보다는 돋보였으며 치수보다 두 살 위였으나 오히려 앳되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 그간 별일은 없었겠지?"

준구가 물었다.

"별일이 있었지요."

갑자기 드높아진 목소리였다.

"계집이 머슴놈을 붙어 달아난 일이 있었지요."

씹어 뱉았다. 준구의 눈시울이 바짝 곤두선다. 가끔 치수는 발작 같은 신경질을 부리곤 했었지만 설마 이같이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집안을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얘기는 좀 들었다만... 절손이구먼."

할 말이 아니었을 것이나 무망중에 한 모양이다.

"계집이 있어도 절손이긴 매일반 아니겠소. 아무 쓸모가 없이 됐으니 말이오."

해놓고 치수는 무엇이 그다지도 유쾌한지 껄껄껄 소리 내어 웃어젖혔다. 이동진은 버선바닥을 슬슬 쓸며 아무 말 없이 치수의 웃음소리만 듣고 있었다.

"후사가 걱정일세. 선영봉사는 어쩔 셈인가?"

"서학하는 자들은 기왕의 사당도 때리부싰는다 하잖소."

"헐마 자네 외가 판을 벌이자는 건 아니겠지."

농조로 했으나 어설펐다. 이동진의 눈이 조금 사나워져서, 준구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찾아서 약을 할래도 최씨네 붙이가 있어야 말이지요. 조씨나 윤씨라면 모를까."

"실없는 소리, 결국 외손봉사 할 수밖에 없다 그얘기구먼."

"걱정하실 것 없소. 악양 최씨네는 옛적부터 암탉이 울어야 날이 새었으니, 그보다 어머님 만나보시었소?"

"인사는 드렸는데 어쩐지 노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

"노하고 계신지 기뻐하고 계신지 그분 마음은 뉘가 알겠소."

"자격지심에서 그런지 모르지만 자네 일 땜에 원망하구 계시지 않나 싶어 바늘 방석에라도 앉은 것 같더구먼."

"글쎄요... 차라리 그때 고분고분, 말씀대로 세도가의 사돈팔촌 놈들하고 고당 명기만 찾았더라도 이런 변은 없었겠지요."

치수는 다시 껄껄껄 웃어젖혔다. 그는 결코 준구를 향해 형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고분고분 형님 말씀대로' 했어야 할 말을 용케 형님이라는 말만 빼어먹는 고집도 고집이려니와 이야기의 내용을 짐작컨대 명예롭지 못한 자신의 행적을 체모 없이 쏟아 놓는 폼은 상대를 무시하지 않고서는 취할 수 없는 것이다.

"허나 숙모님께서는 내가 자넬 서울로 불렀기 때문이라 생각하실거구 잘못 질잡이한 거로 곡해하실 테니 말일세."

이렇게 된 바에야 난들 체면 차릴 것 없다는 시늉으로 이동진을 흘끔 보아가며 준구도 지껄였다

"글쎄.. . 그럴까요? 그보다 상투 자르고 양복 입으신 게 못마땅하시어서 그러신 거나 아닐는지요."

준구가 씁쓰레 웃는데 연거푸

"아니면 전과 같이 또 어려운 청을 하러오셨나 생각하신 게지요."

그 말에는 여지껏 태연하였던 준구의 얼굴빛이 달라진다. 그것은 그러나 순간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치수의 눈을 피하였다.

"이번에는 그런 일로 온 게 아니구, 아무리 집안이 망하여 풍찬노숙이기로 거듭 체모 없는 청이야 드릴 수 있겠나. 서울 형편이 하 어수선하여 바람 쏘일 겸 내려온 걸세."

"서울서 곧장 내려오는 길이시오?"

이동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

"어떻습니까, 서울의 요즘 형편은. 산간벽촌에 묻혀 있으니 눈뜬 장님이나 진배없소이다."

"글쎄올시다."

"알아 뭐하겠나. 서울 장안에 꽹과리치면서 잡인들 모으러 갈란가?"

치수가 이동진에게 핀잔이라 할 수도 없으리만큼 빡빡한 소리로 말했다.

"허허 이 사람아, 할 수만 있으면 못할 건 또 뭐 있누. 그래 서울서는 변의장이나 단발이 어느 정도요?"

"양복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은 아직 지극히 희소하오만 단발은 그보다는 많이 했지요."

"서울서는 상민들 쪽에서 도리어 반발이 심했다더구먼요."

"그런가 봅니다. 외국 사신들의 고부들도 삭발을 겁내어 도망치는 판국이었으니까. 인심이 흉흉했었소. 게다가 민비를 살해한 뒤끝이어서,"

"요즘도 서울 근교에서 의병들이 출몰하다고 들었는데."

준구는 버선바닥을 슬슬 쓸고 있는 이동진의 큼지막하고 힘줄이 울뚝불뚝 솟은 손을 쳐다본다.

"글쎄올시다. 서울 근교뿐이겠소. 도처에서 낭당을 이끌고 소란들 피우는 모양인데, 단발령 하나 가지고 나라 안이 벌컥 뒤집힌대서야 남들 보기에는 딱하고 어릿광대스럽지요."

분위기로써 이동진의 의중을 짐작한 준구는 선수를 치듯 비웃었다.

"그야... 우리네 시골 선비는 천하 대세를 모르니 뭐라 비판할 수 없겠소이다만."

"허나 벽촌이라 해서 언제까지 대세 밖에 떠밀리어 무사태평할 수 만은 없겠지요."

"그렇긴 하지요. 여기라고 태평했던 것도 아니었고."

"여까지 말을 타고 내려오는데 향촌의 선비들이 소생을 보기로 짐승 보듯 하더이다.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개명하겠소?"

말하고, 너희들도 지금 나를 그렇게 보고 있지 않느냐 하듯이 픽 웃었다.

"그렇게들 옹졸해가지고, 한심스럽지요. 세계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가 판단하지는 못할지언정 사소한 단발령 하나 탓으로 한사코 대항하며, 그러지 않아도 어지러운 나라 일을 더 어려운 판국으로 몰아넣으려 드는 이 땅에서 국정을 쇄신한다는 것은 아예 바랄 수도 없는일 아니겠소?"

"글쎄올시다. 단발령 하나 가지고 그런다 할 수만은 없을 것 같소. 어느 놈의 손이 나라 일을 주무르려 라는가 그게 관심사 아니겠소."

"어디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는데 따지고 든다면 한이 있겠소? 실속 차릴 생각은 않고 왈가왈부하며 허송하는 동안 남들은 천리만리 밖에 가 있을텐데 하찮은 의관만 가지고."

할 때 치수는 소마 보러 가는지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어차피 풍습이라는 것은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르게 마련인데 조만간에,"

이동진이 말을 가로막았다.

"알맹이를 모르고서 겉치레만 따른다고 문명인이 된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소이다. 이거 조공을 결코 드는 것 같아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허허헛..."

준구는 애써 낭패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태초부터 사람은 살기 편한 것을 좇게 마련이오. 그래 연장이라는 것도 생겨나고 모든 것이 발전해간다고 소생은 생각하오. 등잔불보담이야 전등 켜는 편이 편리하지요."

"하아, 대궐 연당물을 끌어들여 전등이란 걸 켰다니 희한한 일이오. 암 편리한 거야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필요한 거구말구요."

준구는 입속으로 흥! 하고서

"왜구니 양이니들 하지만 실상 그네들이 우릴 보구 야만인이라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거외다. 옹졸한 양반네들 예의지국이라 아무리 뽐내봐야 그네들 눈에 미개한 나라의 기괴한 구경거리로밖엔 안 보이니까요."

"야만인이라... 원래 예의범절이란 편리한 거는 못 되는 게요. 윤리 도덕이라는 것도 거추장스러운 거지요, 우리네 의관 모양으로,"

준구는 그 말대꾸는 아니 한다. 이동진이 만만찮은 인물임을 느낀 모양이다.

"조공의 말씀 듣고 보니 생각키는 바가 많소이다. 체통 지키느라 굶어죽는 자는 짐승이 아니요 사람인 탓이겠는데 한사코 먹이를 챌려는 짐승의 본성도 잃지 말아야... 그래야 생이 보전될 것이오. 그렇다면 의관을 바꾸고 상투 자르는 게 뭐가 대수겠소. 조상의 묘소인들 못 파겠소?"

"그렇지요. 뜻한 바를 이룩하려면은 수모를 겪는 용기와 인내심도 필요하겠지요."

하고 준구는 응수했다. 마침 치수가 방으로 들어왔다.

"여긴 태평성세 같구먼."

여태까지의 얘기를 시답잖은 것으로 돌려버리듯 준구는 치수 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지도 않소."

"겉보기에는,"

"언제 쇠스랑 쳐들고 달겨들지 거 뉘 알겠소."

"설마, 수십만 동학군이 추풍낙엽 꼴이 되었는데 일본 세력이 쇠퇴하면 모를까 경거망동하겠나."

"변란은 연달아 일어나야, 그래야 왜굴이 판을 치지 않겠소. 사실 동학놈들 혼령 앞에 소대가리 얹어놓고 왜인들은 큰절해얄 게요. 청국을 친 게 뉘덕인데? 그네들 역관으로 계시면서 그것도 모르시오?"

"역관이랄 것 있나. 밖의 사정을 알아보려구 남의 글줄이나 읽다보니 자연 그네들하고 사귀게 된 거지."

준구는 이동진의 얼굴을 살피며 싫은 표정을 지었다.

"언짢아하실 것 없어요. 옛날이면 모르되 역관이 어때서 그러시오. 항간에선 나라일을 역관이 좌지우지한단 말도 있고 잘하면 고방에 은전이 그득해진다잖소."

"하기야 그것도 빈말은 아니지."

그 말에는 만족을 나타내었는데,

"짚신 신고 대창 든 상놈들이 미쳐 날뛰는 세상이오."

치수는 확 잡아채어 팽개치듯 전혀 줄기에서 벗어난 말을 뇌까렸다. 이동진은 저 친구 또 한바탕 비바람 불고 오는구나 싶었던지 잠자코 쓴 웃음을 띠었다.

"돼먹질 않았소. 갑오년 공사노비 제도 혁파한 것부터가. 썩어빠지고 얼이 빠진 놈들! 천비한테 아양떠는 사당 같은 놈들!"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고 그 따위 말을 하나."

"어느 세상이냐구요? 세상이 변했다 말씀이오, 아니지요. 양반놈들 창자가 썩은 것뿐이오."

"허어, 자네는 자네 처지에서만 얘길 하는데 지나친 편견이 되네."

치수는 날카롭게 웃었다.

"옳은 말씀이오. 편견임에 틀림이 없소. 허나 재물과 목숨 지켜려고 상것들에게 허리 굽히는 짓은 아니 하겠소. 두고보시오. 이젠 상놈들은 양반 상투 움켜쥐고 올라앉아서 끝장까지 망하는 꼴 보려할 게요."

"지금 시국에 그런 것은 소소한 마찰이구."

치수는 들은 척하지 않고 제 말만 이어나간다.

"굶주린 이리떼를 잡아 가둘 생각은 않고 쌓아 놓은 울타리 터주는 격이지. 갈 데 없어요, 이젠 양반들 내장까지 파먹으려 들터이니. 배고프고 헐벗었기 때문에 민란이 난 줄 아시오? 벼슬아치들 수탈이 심해 민란이 난 줄 아시오? 언제는 상놈들이 호의호식 했었소? 울타리만 높고 튼튼했더라면 뱃가죽이 등에 붙어 죽는 한이 있어도 팔자거니 생각했을 게요. 허한 구석이 있어야, 기어들 구멍이 있어야 소리를 질러보고 연장도 휘둘러보고 그러다 막는 힘이 약할 것 같으면 밀고 나오는 게요, 아우성을 치면서. 천대받는 놈치고 약지 않은 놈 보았소?"

치수의 눈이 준구를 뚫어져라 본다. 어쩌면 준구를 향해 퍼붓는 욕설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무릎을 꿇고 기어야 할 판이면 그네들은 그렇게 할 게요. 쇠죽을 먹더라도 목숨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밥 먹으려고 둘도 없는 목숨 내어놓겠소? 어리석은 자들, 사탕으로 꼬임을 당할 놈들인가? 어리석은 자들, 한치를 내어주면 모조리 내어주게 되는걸. 어리석은 자들."

"자네 말같이 일이 어디 그리 단순한가."

준구는 간신히 반박했다.

"동학란의 경우만 하더라도 반드시 몽매한 상민들이 제 밥그릇 작다고 들고 일어났다, 그럴 수만은 없지. 사교임에는 틀림없으나 종교의 힘이란 것을 얕볼 순 없거든. 서학의 경우를 보게나. 제 목숨 바치기를 원하는 데서야 뉘 이길 재간 있겠나? 밥이 적다고 투정 하는 놈은 굶겼다가 주면 아무 말 없이 처먹겠지만 죽어 저승에 가서 편히 산다는 생각이 박혀버리면 사정이 달라지지. 나라의 경우도 그렇지, 벌통을 쑤셔놓은 판국인데 이러나저러나 고비는 넘겨야겠으니 다스리는 방법에 융통은 있어야잖겠나, 달랠 수도 있고 말길 수도 있고."

"메치나 둘러치나 매일반이오. 아까 편견이라 하셨는데 땅을 지키고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네들을 사당 같은 놈들이라, 욕을 한 성 싶소?"

치수는 준구에게 대어들 듯 말했다.

"그랬다면 나 자신도 별수 없는 사당 같은 놈이오. 몽매한 백성이란 저승이든 이승이든 그 대가가 확실해야 움직이는 무리들이고 제 이익과 관계가 없으면 관여치 않는 꾀가 있는 놈들이오. 말하자면 그들에겐 지조가 없단 말이오. 존엄이나 지조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무리들은 아니란 말이오. 제 목숨도 제 이익을 위해 팔아 버릴 지언정, 그네들의 속에 전봉준, 김개남 같은 인물이 없진 않았으나 필경 그네들도 야심가에 불과한 거고, 허나 무리들을 쓸 줄 았았으니 비록 적이지만 제법 그, 그렇지요, 지금 내로라 하는서울의 벼슬아치 백을 묶어도 그네들 하나를 못 당했을 게요. 상놈들한테 아첨하는 개 같은 양반놈이나 자비를 베푸는 늑대 같은 양반놈이나 그게 다 한 무리가 아니겠소? 그놈들은 또 제 목숨만 보전된다면 의관이고 족보고 다 싸질러서, 백정이라도 해먹을 놈들이지."

"허허, 그만해두게, 자네가 아무리 지껄여도 피장파장이네. 최참판댁은 늑대양반이 틀림없으니 말일세."

가르고 들어서듯 이동진은 껄껄 웃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가봐야겠네."

이동진은 일어섰다. 몹시 흥분한 줄 알았는데 치수는 가라 말라는 말 없이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준구를 향해 말했다.

"내려갑시다."

그들은 함께 초당을 나섰다. 이번에는 엇비슷하게 서서 가는 준구의 키가 이동진의 귀밑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초라했다. 누각 왼편 밤나무 밑에 나귀를 매어놓고 이동진의 하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은 미친 또출네가 누각 앞에서 하는 양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엉덩이를 털며 급히 일어섰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터줏대감께 비나이다. 내 아들 감사 되어 금의환향할 시에는 안반들여 떡쳐놓고,"

또출네는 손을 모아 누각의 현판을 햐해 절을 하고 또 한다. 이동진은 또출네 옆을 스치고 지나서 나귀 옆으로 간다.

"다음 또 뵙겠소."

한마디 인사를 준구에게 남기고 그는 나귀 등에 올랐다. 칠빛 같은 검은 갓에 눈이 부시게 흰 도포자락이 놀을 받아 아름다웠다. 하인은 말고삐를 잡았다. 언덕을 향해 내려가는 이동진의 갓끈과 도포끈이 바람 부는 곳으로 나부낀다. 치수와 준구가 발을 옮기려 했을 때 또 출네한테서 고약한 냄새가 풍겨왔고 다음 순간 갑자기 또출네는 팔매같이 달려왔다.

"신장대왕께 비나이다아!"

크게 외쳤다. 또출네는 하늘과 땅을, 온 세상의 초목과 강물을 아름 속으로 품어넣듯 두 팔을 활짝 빌리어 원을 그리면서 치수를 향해 예배를 올리었다. 찢겨진 옷 사이에서 내어 비친 살은 땟자국이 밀려 얼룩얼룩했다. 할퀴고 찔혀 피가 엉겨 붙은 얼굴 근처를 벌 한 마리가 붕! 하며 맴을 돈다. 치수의 얼굴은 주홍빛이었고 눈알까지 핏물이 피어드는 듯 보였다.

"신장대왕께 비나이다. 우리 자식 가갯길을 일월같이 비쳐 주시옵고, 용상에 이름 얹어 피맺힌 어미의 소원을 풀어주사이다!"

"이년! 썩 물러가지 못할까!"

"신장대왕께,"

치수의 긴 팔이 허공을 짚는 것 같더니 또출네는 땅바닥에 굴렀다. 그러나 발딱 일어섰다. 또출네는 손뼉을 쳤다.

"훨훨 붙는다아! 후루헐 붙는다아! 지붕 땅 모래잉가 무너지네에- 고부백산은 사활만민이라 하고오! 백립 쓰고 백의 입은 녹두장군아! 백오염주 손에 들고오! 삼칠성주 외우시네애애-"

여자는 벌룸벌룸 춤을 춘다.

"실성도 보통이 아니구먼."

준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치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셔지고 냉랭한 미소가 돌았다. 언덕을 내려간다.

"정월이라 초여드렛 계명 소리 울릴 적에- 새야새야아- 파랑새야앗! 녹두낭개에 앉지를 말아라."

가락이 바람을 타고 뒤쫓아온다.

"미치기는 미쳤는데 심상찮게 미쳤구먼."

준구는 돌아본다.

"소위 개화당이오."

치수는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아들놈이 동학당에서 이름께나 날린 놈인데 포살되었지요."

"개화당이라니?"

"기왕의 것을 들어엎으려는 뜻에서 개화당이라 할 수 있지 않소. 어쩌면 서울의 개화당보다 만민평등을 들고 나온 동학이 더 개화된 것이 아니겠소. 헌데 아들의 감사 벼슬을 꿈꾸었으니."

치수는 껄껄 웃다가

"어디 저 계집뿐이겠소?"

준구는 쓰디쓴 얼굴로 다시 돌아본다. 밤나무 밑에서 또출네는 여전히 춤을 추고 있었다.

"포전 쫓던 놈도 고부 백산으로 달려갔을 적에는 눈앞에 기름진 땅이 얼른 거렸을 게요. 만민평등이랴 교주 최 뭐라는 위인의 생각일 뿐, 만민평등이라... 세상스런거요? 흥 양반의 족보가 종문서만큼 슬픈 것이 될지 뉘 알겠소. 그렇게 되면 만민평등이 또 일어날 게요."

뽕잎을 따가던 마을 처녀들이 준구를 보자 왜인인 줄 잘못 생각하였던지 옆길로 빠져 부리나케 달아났다. 준구뿐만 아니라 치수도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였었으나, 조준구는 딱정벌레 같았다. 최치수는 마을에서 그렇듯 버마제비 같았다. 사랑에서 치수는 준구와 함께 저녁상을 받았다. 밥상을 놔놓고 귀녀는 뒷걸음질쳐 나가면서 비스듬히 눈길을 흘려 준구를 보았다. 준구는 벌써 먼저 귀녀를 보고 있었다. 방문을 나가면서 귀녀는 눈시울을 바싹 쳐들어 아주 대담한 시선을 던져본다. 크고 까무까무한 눈은, 그러나 추파는 아니었다. '당신은 대체 멀 할라고 이곳에 왔소?' 눈은 그렇게 물었던 것 같았다. 치수는 바람이 잔 바다같이 아무말이 없었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이자의 변덕을 어떻게 감당하지? 아무튼 참아보자.' 준구는 저녁을 끝내자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고 물러나 앉는다. 물러진 밥상을 들고 나갈 적에도 귀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준구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추파를 던지는 눈은 아니었다. '이상한 계집이군.'

 

 

12. 꿈속의 수미산

봄 한철을 누었다 일어났다 하며 큰 탈 없이 보내더니 초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간난할멈은 제법 나돌아 다니길 잘했다. 가만히 있으면 오금이 붙어 운신을 못하게될 것이기에 그런다는 것이다.

"할매, 땅이 꽁꽁 얼어서 뫼구덕 팔라 카믄 괭이자리 몇 개 뿌러질 기라 싶더마는, 본께 검은머리 다시 나겄소. 이자는 맘 푹 놓고 나 장가가서 첫아들 놓을 때까진만 사이소."

까대기 옆, 그늘진 곳에서 낫자루를 고쳐 박고 있던 돌이가 히죽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놈아, 악담마라."

땅바닥에 흩어진 곡식알을 자루바가지에 주워 담던 간난할멈은 웃음을 참으려 하는데 절로 입이 헤벌어져서, 입술에는 늙은이 특유의 경련이 일었다.

"무신 말이요? 악담이라니, 또 오래 살겄다 그 요랑이요? 그라믄 머리칼이 새도록 장가 안 가야겄구마."

"지랄 안 하나."

엎드려 바짓가랑이를 말아올리던 복이 꾸부린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할매, 제발 오래 살라 카거든 돌이놈 장가 못 가게 꼭 붙들어놓으소. 장가가서 눈먼 삼신이 덜컥 첫아들을 점지하믄 우짤 기요."

"지랄 안 하나. 무신 죄졌다고 벼루박에 똥칠하도록 살꼬."

"할매 말이 맞소. 제발 이분에는 춘삼월이나 구시월에 가도록 허소. 여름 송장, 겨울송장, 그거 다 망했더마. 땅이 얼어도 걱정이고 송장에 쉬포리가 앉아도 걱정이고."

뒤쪽에서 돌아나온 삼수가 지껄이며 지나갔다.

"운냐, 걱정마라. 내가 죽더라도 삼수놈 니는 참니 안 하게 이은 할기니께."

". 제발 그러소."

삼수는 밖으로 나가며 대꾸했다. '괘씸한 놈! 코도 닦아주고 얼굴도 씻기주고 자식같이 키운 놈이! 많이 받은 놈은 많이 악문하고 작기 받은 놈은 작기 악문한다 카더마는 옛말 하나 그른 기이 없다카이.' 돌이는 눈시울을 모으며 낫을 쳐들어 살펴본다.

"아니 이기이 운제 이가 빠짔노? 길상이 그눔으 자식이 또 갖고 가서 지랄했구마."

날이 두 군데 빠져 있었다.

"할매."

"!"

간난할멈은 복이한테 역증을 낸다.

"돌이놈 말 듣지 말고 나 장가가서 아들 다섯 좋으믄 죽으소이."

하자,

"저놈으 도둑심보 보래? 그러니께 어서 마님한테 말심디리서 니부터 장가 먼저 보내도라 그 말이제?"

"이놈들이 늙은 것을 쭉다말 받듯이 하네. 지랄 고만하고 못나가겄나. 어서 죽어줄 기니 내 걱정 말고 처니 집에 가서 목을 매던가 까꾸로 없고 오던가."

"허 참, 이 동네는 처니 씨가 말랐는가배요."

복이는 바지게를 짊어지고 나갔다. 돌이는 까대기 속에서 다른 낫을 챙겨들고 그 역시 바지게를 짊어지면서

"오래 살아야제요.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캅디다."

하며 나간다.

"요새 아아들은 우찌 곡식 소중한 줄 모를꼬? 아무데나 철철 뿌리놓고 하늘 안 무서븐가?"

간난할멈은 자루바가지를 들고 일어선다.

", 아이구 허리야."

헛간 옆의 절구통에다 자루바가지를 올려놓는다.

"밤도 길고 해도 길다. 어이구."

간난할멈은 무정한 삼수 말에 슬펐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더 왁살스럽기는 해도 돌이나 복이의 애정표시에 만족을 느끼었다.

"후유우잇, 나무아미타아불, 자는 잠에 열반하소."

모두 바빠서 날뛰는 계절이아. 꿀벌은 알을 까고 누에는 애기 잠에서 깨어나 물신물신 크다가 다시 한잠으로 접어들었고, 그러고 나면 뽕잎 따는 손이 바빠질 것이다. 목화씨를 뿌리고 논에는 풀을 베어 넣고 삼밭의 삼은 무릎만큼 자라고 날따라 뜨거워지는 햇볕에 모든 생물은 생장을 향해 달음박질이다. 비만 좀 더 와주면 푸성귀 밭의 진딧물을 씻어줄 것을. 마을 아낙들은 보리타작까지, 누에치기도 그러려니와 끝장을 내야 하는 봄길쌈에 매달려 있었다. 보리타작도 멀지는 않았다. 파아란 떡보리를 맛보았으니. 햇볕 바른 곳에서부터 보리는 익어갈 것이다. 간난할멈은 별당 뜰로 들어간다. 마루에 윤씨가 오도마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간난할멈은 윤씨 모습을 보지 못하고 연못가에 가서

"임자가 없이니 마당에는 풀만 우묵장성이네."

군지렁거리며 엎드려 풀을 뽑는다. 해당화가 연방 피고 진다. 분홍 꽃잎이 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윤씨부인은 간난할멈의 쭈그리고 앚은 뒷모습을 지켜본 채 말이 없다. 항라 치마저고리를 입은 그는 몹시 여위었고 얼굴빛이 나빴다.

"이리 좋게 꽃은 피었건마는 거지 중의 상거지가 되어... 쯔쯔..."

앉은 채 엉금엉금 오금을 옮겨가며 풀을 뽑는다.

"사주는 속이도 팔자는 못 속이더라고 아, 아얏! 이놈의 불개미가."

간난할멈은 살가죽이 허물허물하게 밀린 목에서 개미 한마리를 집어낸다.

"명태맨치로 말랐는데 물 데가 어디 있을 기라고."

하며 문드려 죽인다. 간난할멈의 하는 양을 여전히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던 윤씨는

"할멈!"

나직한 소리로 불렀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간난할멈은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허리가 결렸던지

", 아이구!"

윤씨는 잠시 기다린다.

", 아씨."

"이제 몸은 좀 어떤가."

", 아씨, , 마님 덕분에, 그만 갔이믄 좋을긴데 보시락보시락 살아나누마요."

"그래야지."

"쇤네는 갈만큼 살았십니다."

"자네가 나보다 오래 살지 누가 아나."

", 큰일날 말심을."

"죽음에 노소가 있던가?"

윤씨는 간난할멈에게만은 마음을 조금 터놓은 것 같았다. '아씨! 환이 도련님하고 별당아씨는 거지 중의 상거지가 돼서...' 할멈은 말을 목구멍 속으로 꿀꺽 삼킨다. 윤씨는 눈길을 거둬 하늘을 올려다본다.

"날이 가물겠다."

"그러기 말입니다. 한줄기 퍼부어주시믄 좋겄는데."

"하나님 하시기 탓이지."

"그러기 말입니다. 아씨, 아니 마님."

"자네 고집도 어지간하군, 아씨라..."

윤씨는 실소하다가

"김서방한테 얘기 들었네."

"저어."

"듣고 보니 자네 생각이 옳아. 절에 올리는 것보다... 이팽이 댁네는 음전한가?"

", 제집이 보지런하고 정갈스럽고 효붑니다."

"애들은 몇인고?"

"머시매가 둘이고 여식이 하납니다."

"많은 편은 아니군."

"염치가 없십니다. 아무 헌 일 없이 늙어가지고 늙은 것이 의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죄가 많은데."

"아닐세. 내 생각이 거까지 못미쳤구나."

윤씨는 천천히 마루에서 일어섰다. 항라 흰 치마저고리에 휩싸인 헌칠한 모습에서 장엄하기까지 한 분위기가 번진다. 간난할멈은 허리를 굽히고 그의 뒤를 따르다가 별당문밖으로 사라지는 윤씨를 향해 '아씨! 환이 도련님하고 별당아씨는 거지 중의 상거지가 돼서...' 침을 꿀꺽 삼킨다. 풀 뽑던 자리로 돌아온 그는 아까 윤씨가 그랬던 것처럼 버드나무에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 본다. '영감, 아씨께서 허락해주싰소. , 영감, 자식 없이도 물 얻어묵겄소. 우리 제후답이 있인께 영만이놈이 물 떠놔줄 기요. 영감 우리 제후답이...' 간난할멈은 오히려 슬픈 얼굴이 되어 일어섰다가 다시 주질러앉아 풀을 뽑기 시작한다. '그럼 그렇지. 아씨께서 청을 안 들어주실 리가, 그럼 그렇지. 보소, 늙은네 이자는 눈감고 가겄소.' 간난할멈 눈앞에 물이 치렁치렁 괸 논이, 검푸르게 약이 오른볏모가, 바람 부는 곳으로 나부끼는 모양이 선하게 떠오른다.

"할매요!"

삼월이 서희를 업고 별당 뜰에 들어왔다. 등에 업힌 서희는 시무룩했다.

"머한다고 풀은 뽑소. 돌이 보고 하라 안 카고."

"야아야, 놀믄 머하겄노. 곰뱅이 성할 때는 일을 해야 하니라."

빙그레 웃는다.

"머가 그리 좋소."

"날씨가 좋고, 세상 오만가지가 다 크간께 늙는 이치도 알겄고."

딴전을 폈으나 입은 저절로 벌어져서, 입술에는 늙은이들이 흔히 그렇듯 경련이 일었다.

"나 내릴 테야."

서희가 비비적거렸다.

", 애기씨."

하고 삼월이 내려준다. 서희는 할멈과 마주보며 그도 쭈그리고 앉았다.

"할멈, 뭘 하는 거야?"

서희는 공연히 그래보는 것 같았다.

"풀 뽑십니다. 봉순이는 어디갔노?"

삼월이를 보고 묻는다.

"어매 따라갔소."

"봉순이 외삼촌이 죽었다믄서?"

". 암만 해도 초상 치르고 오라 카믄 한 사나흘 걸린 긴데 그라자믄 내가 애기씨한테 노 붙어 있어야겄소."

"할멈!"

"."

"머리가 왜 그래?"

역시 공연히 그래보는 것 같았다.

"늙어서 안 그렇십니까."

"꼬부랑 할멈이 돼서 그래?"

". 꼬부랑 할매가 돼서 그렇십니다."

"봉순이가 바람할망구라 카든데?"

할멈과 삼월이 함께 깔깔대며 웃는다. 그새 서희는 해당화의 떨어진 꽃잎을 주워 치마폭에 담고 있었다. 풀이 죽은 것 같았다.

"요새는 좀 잊어부맀는갑다."

"그래도 물물이 생각이 나는지 징징거리요."

"한창 어매 좋을 때라 와 안 그렇겄노."

하다가

"삼월아"

"?"

"지금 고비는 한물갔겄제?"

"와요?"

"그러세, 고비 너물 생각이 나네."

"혹시 모르겄소. 당산에 가믄 아직 덜 센 기이 좀 있을란가."

"보시락보시락 살아난께 별눔으 기이 다 묵고 접네."

"동지 섣달에 죽순도 구해온다 카는데, 가서 좀 캐보끼요."

"나도 사알사알 따라가보까?"

"할매가요?"

"엎어지믄 코닿을 긴데, 너무 아무것도 안 해도 다리가,"

"그라믄 가입시다. 애기씨 데리고 놀면가면 할 긴께 애기씨 가입시다. 산에 고비 캐로요. 봉순어매가 없인께 그만 풀이 폭 죽어서,"

삼월이 서희의 코밑을 치맛자락을 끌어당겨 닦아주고 손을 잡는다. 뒤란을 돌아 김서방이 사는 채마밭으로 나온다. 길상이와 개똥이 제기를 차고 있었다. 개똥이 누이동생 남이는 채마밭에 엎드려 열무를 솎고 있었다. 간난할멈이

"지랄한다. 다 큰 놈이 무신 제기로,"

침을 질질 흘리는 개똥이는 와와와으으... 혓바닥을 굴려 괴성을 내며 간난할멈에게 약을 올린다.

"이눔 자식이."

간난할멈은 지팡이를 들어 치는 시늉을 한다.

"너거 생이 젖 잘 난다 카더나."

삼월이는 남이에게 물었다.

"."

채마밭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며

"김서방댁도 첫손자 봤인께 좀 점잖아지겄소."

삼월이 말에

"제 버릇 개 주까."

지팡이를 짚고 언덕길을 쉬엄쉬엄 올라가며 간난할멈은 대꾸했다. 시무룩한 서희는 삼월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그 음전한 김서방을 어디 가서 만날 기라고, 질정 없는 제집, 제집이 소나아를 잘못 만나도 펭생 골베이지마는, 남자가 제집 잘못 만나믄 그것도 마목이지."

"건대, 할매요."

"?"

"서울서 온 손님 말이요."

"..."

"참 우스바 죽겄소. 귀녀가 그라는데 무신 금관조복인가 길상이 더러 옷을 털고 불고 말리라 카고 머리에 쓰는 그것도 털고 불고 말리라 카더니 신주단지 위하듯 모시놨다 안 카요."

"제집맨치로 곰살스런가 부네."

"봉순어매가 갈아입을 옷을 지어드렸는데 또 한 불 지어달라 하더랍니다. 엔간히 기실 모양이지요?"

골짜기는 짙은 잎새로 덮여 있었다. 군데군데 햇빛 따라 새순 같은 연초록이 아른거리기도 하는데 숲속의 공기는 썰렁하고 습기찬 것이었다. 산딸기, 머루덩굴에 가려보이지 않은 개울에서 도루룩도루룩...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발자국을 느낀 산비둘기가 푸드덕 날아올라 서희를 놀라게 한다.

"애기씨 업어라, 구링이 나올라."

간난할멈이 주의를 주었다. 삼월이는 바구니를 할멈에게 건네고 서희를 업는다.

"삼월아."

", 애기씨."

"그때, 그때 말이야. 산딸을 봉순이가 따왔어."

"산딸은 좀더 있어야 익십니다."

"몇 밤이나 자면 익어?"

"보리 벨 때가 돼야, 달포나 돼얄 깁니다."

"달포가 몇 밤이야."

"서른 밤 더 되지요."

"할머니 나이보다 적지."

"하믄요, 아버님 연세쯤 됩니다."

"그거 참 맛나는데."

서희는 삼월의 목을 껴안으며 군침을 삼킨다.

"맛나기는요. 시큼텁텁하고 잘지도 않소."

"아니야."

"산딸보담은 엿이 더 맛나지요. 꿀이 더 맛나지요"

"아니야! 딸이 맛나!"

서희는 주먹으로 삼월의 등을 쳤다.

"하낫도 안 단 딸이 머가 맛납니까."

"아니래도!"

"쇤네는 아무리 해도 꿀이랑 엿이 더 맛나더마요."

"아니래도! 딸이 맛나!"

서희는 삼월의 목덜미를 꼬집고 머리를 꺼들었다.

"아 아야!"

"딸이 맛나다고 해!"

", , 애기씨 딸이 맛나요."

"거 봐."

간난할멈이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찍어낸 나무 밑동 옆에 회색토끼 한마리가 있었다. 주둥이를 나불거리며 뭣인가 열심히 먹고 있다가 간난할멈과 눈이 마주친 토끼도 졸지간이어서 그랬던지 어리벙벙하여 미처 도망갈 궁리를 못한다. 간난할멈은 살그머니 주질러앉으며 지팡이를 놓고 두 손을 내어밀었다.

"토끼야 토끼야, 이리 오니라."

하는 순간 토끼는 뛰어 달아났다. 그리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호호홋... 으흐흐훗 토끼야 토끼야 이리 오니라? 흐흐훗... 아이구 배야!"

삼월이는 발버둥치는 서희를 내려놓고 배를 움켜쥐었다.

"할매, 흐호홋... 흐호훗... 이리 오니라 하믄 토끼가 와주겄소? 아이구 참 흐흐훗... 아이구 참 우서바서 죽겄네."

"나도 머 어마도지해서 그만, 머가 그리 우습노."

하면서도 간난할멈은 땅바닥아 주질러앉은 채 히히 하고 웃는다.

"토끼 어디 갔어!"

서희가 소릴 질렀다.

"토끼가 어디 갔냐 말이야!"

발을 동동 구른다.

"버얼써 달아났십니다."

삼월이 이거 야단났다 싶어, 일부러 먼산을 보며 말했다.

"데리고 와!"

"달아났는데도요?"

"데리고 오라니까!"

"잡히어주어야제요."

숲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옥신각신하고 있는 데 길상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길상아! 토낄 쫓았어. 삼월이가 쫓았어! 할멈이 쫓았단 말이야!"

서희는 고자질을 하듯 하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길상은 영문을 몰라하다가 삼월이한테서 대충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애기씨, 요담에 토끼 잡아디릴 기요. 덫 놔서 잡아디릴 기요."

"애기씨, 길상이가 토끼 잡아디릴 기요."

삼월이 함께 달래는데

"싫어잇! 바보 덩신! 바람할망구! 왜 토낄 쫓았어!"

서희는 달려가서 땅바닥에 주질러앉은 채 있는 할멈의 어깨를 쥐어박는다.

"아이고 참 우짜노. 학을 떼겄네. 그 빌어묵을 토끼가!"

간난할멈은 눈이 멀뚱해가지고 연기같이 없어진 토끼가 달아난 곳을 바라본다.

"그치시오. 울믄 여시가 와서 물어갈 깁니다."

서희의 울음이 조금 낮아졌다. 여우가 무서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울음을 잡혀보아야 삼월이나 간난할멈은 봉순네 같지 않기 때문이다. 봉순네에게는 엄마 같은 냄새가 난다. 그러나 이들에겐 그 냄새가 없다.

"나 집에 갈 테야! 가서 일러줄 테야! 봉순네한테 일러줄 테야!"

하며 서희는 울음을 뚝 그쳤다.

"봉순네가 없는데도요?"

삼월이 약을 올리듯 말했으나 서희는 들은 척 안 했다. 그리고 허세를 부리듯

"할멈은 미워! 삼월이도 미워! 오지 마, 집에 오지 마!"

"그러시오. 애기씨 우리끼리만 가입시다."

길상은 울음을 그쳐준 것만 고마워서 얼른 등을 내어민다.

"길상아, 니는 우예 왔노."

"오고 저버서 왔소."

길상은 서희를 업고 숲속길을 내려가며 대답했다.

"우리도 고만 가자."

간난할멈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그럽시다."

"어마님 생각이 나서 저러지."

"그러게요. 봉순네가 있었이믄 더 울고불고할 긴데, 불쌍한 애기씨."

"거 봉순네가 사램이니라. 심덕이 다시 없지."

그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서희를 업고 가는 길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쉬엄쉬엄 내려간다. 길상은

"애기씨."

하고 불렀다.

"?"

"토끼 잡아드릴 기요."

"."

"털 하나 안 상하게 덫으로 잡아드릴 기요."

", 토끼는 뭘 먹고 살어."

"풀 묵고 나무 열매도 묵고 살지요."

"밥은 안 먹어?"

"안 묵소."

"떡도 안 먹어?"

"."

"그때 어머닌 새들한테 쌀을 주었어. 새가 마당에 날아왔거든."

길상은 입을 다물었다. 골짜기에서 당산 누각 앞에까지 왔다. 길상은

"애기씨."

"?"

"저기 저 하늘의 구름 뭐 같소?"

"어디?"

"저기 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말입니다."

"그게 뭔데?"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 것 안 같십니까."

"몰라."

"커다란 연을 타고 올라가 봤이믄 얼매나 좋겄십니까. 자꾸자꾸 연을 타고 올라가 봤이믄,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보믄 참 희한하겄지요?"

"뭐하러 올라가아?"

"스님이 말심하싰습니다. 자꾸자꾸 올라가믄 수미산이 있다 캅디다. 그수미산에 가믄 말입니다. 은금보화로 말짱 집을 맨들어놨다캅디다."

"은금보화가 뭐야?"

"와 애기씨 설날에 찬 노리개 안 있십니까? 그 파아랑 구슬이랑 마님께서 손가락에 끼신 가락지랑 그런 거를 은금보화라 합니다."

"아아 알어. 나도 알어. 울 어머니도 파아랑 가락지 노오랑 가락지, 하얀 것, 그리고 또, , 비녀랑 또, ..."

하다가 서희는 말을 탄 것처럼 등에서 한번 우쭐대더니 두 팔을 벌리었다.

"이만큼, 이만큼 많이 있어."

"..."

"어머니가 그랬는데 그것 다 나 준댔어. 구슬이랑, 가락지랑, 비녀랑 그것 다 나 준댔어."

길상은 말이 없다. 서희는 실망한다. 요즘 서희는 엄마 데려오라 하면서 패악을 부리지는 않았다. 차츰 엄마의 일은 뭔지 모르나 불가한 것이며 입 밖에 내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은 마음이 솟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코투리 잡고 울부짖었고 누구든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해 주었으면 싶을 때 그는 겉돌려가며 방금 길상에게 한 것처럼 더듬어보지만 아무도 그에게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희의 마음이 자란 것이다. 슬픔은, 다른 아이들보다 그에게 더 많은 지혜를 주었던 것이다.

"길상아."

"."

서희는 공연히 불러보고 나서 등에 볼을 대고 구름을 본다. 구름은 강건너 산봉우리에서 자꾸 피어올랐다.

 

 

13. 무녀

마지막 나룻배에 남은 손님은 화개로 가는 엇비슷한 삼십대 나이의 두 남자였다. 해거름에 하동 나루터에서 월선이와 함께 탔다. 농부들인 모양인데 땅마지기나 가진, 넉넉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날은 아주 어두워져서, 뱃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월선이는 강바람을 막기위해 모시치마를 걷어 머리를 싼다. 달이 없는 그믐밤이지만 수없이 나돋은 별빛에 사방은 희부염했다. 초여름이라고는 하나 밤의 냉기를 흠씬 머금은 강바람이 오삭오삭 살에 스며든다. 노 젓는 소리, 뱃전에 와서 출렁이는 물살 소리는 먼 저승길을 떠나는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하게 들리어왔다. 들물이 팽팽하게 들어찬 강변은 별빛을 받아서라기보다 제물에 희번덕이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손님을 내려놓고 떠나온 작은 마을의 불빛이 가물가물 멀어져간다. 노젓는 소리, 뱃전에 와서 출렁이는 물살 소리, 이때까지 아무 소리 없이 앉아 있던 두 남자 중 한 사람이 곰방대를 꺼내어 담배를 담는 것 같더니 불을 붙였다. 뱃전 가까이 푸드득 고기가 뛰어올랐다.

"지내놓고 보니,"

하다가 사나이는 곰방대 물부리를 연거푸 빨아당긴다. 담뱃불은 빨간 불씨 모양 피었다 사그러지고, 피어날 때 바람에 갓전이 젖혀진 사나이의 수염짙은 얼굴은 불그레해 보였다.

"문이원 말심이 똑 맞아떨어졌구마."

아무 대꾸가 없자

"촌구석에 들어푸맀이니 그렇지 문이원은 명이라카이."

"명이는 무슨 놈의 명이요, 죽는 사람 못 살맀는데 밀이요?"

상대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 사람아, 진나라 진시황도 불로초를 못구했다 카는데 누가 갬히 불로장수를 바랄 것고? 내가 명이라 한 거는 죽을 시기를 문이원이 미리 알고 있었더라 그거구마."

"점쟁이 무당도 알긴데 그기이 머가 대단하다고."

"허나 돌팔이사 어디 그렇든가? 진맥을 하고 난 뒤 문이원이 상구보고 허는 말이 약은 지을 수 없네, 벵자 청하는 거나 주게, 그 말 한마디에 딱 고만이더라 그 말이구마."

"..."

"허나 상구 마음이야 어디 그렇든가? 동기간이니께, 설마 새파랗게 젊은놈이 죽으랴 싶었겄지. 문이원한테 달라들었다더마. 생대 같은 젊은놈을 두고 그런다고 악정이 나서 그랬을 기지마는 어디 두고 보자 내 동생이 정말 죽는가 이를 빼물고 백방으로 약을 쓰니, 소용있나? 벵이 골수에 백힜이니. 살림만 축갔제."

"이 마작에 죽은 사람 말하믄 머하겄소. 내사 만삭이 된 과부 우는 거 못 보겄더마는."

침을 꿀컥 삼기고 성급히 담배를 빨다가 사나이는

", 그렇더마. 간데없는 유복자제. 씨는 남기고 갔지마는, 청상의 신세 애연하지."

문상 갔다 돌아가는 두 남자 사이에 말이 끊어졌다. '어디 봉순네 겉은 사램이 또 하나 생깄는갑다.' 생각하며 월선이는 더욱 긾이 치마를 뒤집어쓴다.

"참상이 났는가배."

여태 노만 젖고 있던 늙은 사공이 한마디 했다.

"스물세 살, 한창 나이구마."

사나이는 대꾸하고 뱃전에 곰방대를 두드리고 나서 허리춤에 꽂았다.

"문이원이사 명이지."

사공이 다시 한마디 했다.

"문이원 말심만 들었이믄 살림은,"

하는데 사공이 다시

"내 한창 시절이었지. 시나부로 아파서 꼭 죽게 됐는데, 좋다 카는 약 안 묵어본 기이 없구마. 송장물도 묵으신께, 굿은 안 했건데? 다 소용없는 기라. 그래 연때가 맞일라고 그랬던지 문이원한테서 약 열 첩을 지어묵고 씻은 듯이 나았더라 그 말이구마. 비싼약도 아니고 장복을 한 것도 아니고 딱 열 첩 그것뿐이제. 그런께 머니해도 진맥이 용해야... 문이원이사 명이제, 명이라. 그뿐이건데? 없는 사람 사정 알고, 아무리 먼 곳이라도 벵자가 있다 카믄 오밤중이라도 마다 안 허고 가시니께. 그런 어른은 정말 없구마. 개뿔도 아닌 돌팔이들이 배때기에 기름이 올라서 가네마네 하는가 하믄 거부지기 겉은 약 몇 첩지어주고 팔잘 고칠라카이, 문이원이 돌팔이들맨쿠로 했이믄 아무래도 집채만한 동더미 위에 앉았일 긴데 어진 어른이제, 어진, 길 가다가도 고뿔 걸린 아이만 보믄 주머니 속의 황약을 끄내어 아이 입에 물리주고 정말이제, 그런 어른 없구마."

"한데 너무 그 어른 촉빠른 기이 탈이요. 병자들이사 아무리 죽을 벵을 실어도 죽을 기라는 생각은 못허니께."

담배 피우던 사나이가 말했다. 월선이도 기억한다. 어릴 적 일을. 어디서였던지 발그레한 환약을 문의원이 입에 넣어주던 일을. 입안이 화하고 시원했다. 마을 나루터에서 보따리 하나를 들고 월선은 나룻배에서 내렸다.

"월선아, 발밑 조심해라. 어둡구마."

작대기로 배를 떠밀어내며 사공이 일렀다.

", 잘 가시이소."

배는 떠나고 월선은 물가, 축축이 젖은 모래밭을 벗어난다. 말라서 보드라운 모래밭은 발바닥이 폭폭 빠져 발목에 힘이 든다. 끝도 없이 펼쳐진 것 같은 백사장, 하늘에는 또 어쩌면 그리 별은 많은지 월선이는 옛날 용왕제를 올리던 제 어미 생각을 한다. 차려놓은 제물이 촛불에 울긋불긋했다. 월선네는 촛불에 소지를 사르어 검은 하늘로 올려보내며 관음보살처럼 유연한 팔짓으로 예배를 올리었다. 흰 치마가 바람에 나부끼었다. '우찌 그리 못 살고 왔노, 용이가 그러데요. 우찌 그리 못 살고 왔겄노. 어매, 불쌍한 우리 어매. 팔자치리하고 살라 카더마는 내 신세가 어매 한세상 맨치로 우찌그리 똑같겄소. 짝도 없고 임자도 없고 어매자식 어매 안 닮고 뉘 닮았겄느야고 했더마는... 너무 보고 저바서 왔소. 용이 사는 울타리라도 한분 보았이믄 싶어서 왔소. 어매, 날 미친년아, 기든년아 하겄지요? 나도 모르겄소. 보고 저바서 미치고 기들겄십디다. 나도 모르겄소.'

강물은 제물에 희번득이고 하늘의 별도 제물에 반짝거리고, 꺼무한 산허리만이 헤매는 월선이를 가만히 지켜본다. 옛날 시집 안 가겠다고 울었을 적에

"이 미친년아, 이 기든년아, 그라믄 태일 데 태이나지 왜 무당 문전에 떨어졌더노! 미친년아, 기든년아, 와 내 간장에 이리 못을 박노!"

괄괄하고 우스갯소리 잘하고 사내같이 잔정이 없는 월선네는 딸의 등을 치면서, 그러나 그도 울었다.

"에미 근본 모르는 데 가서 니나 팔자치리하고 살아라. 오르지 못할 낭구 쳐다보지도 말라 캤다. 나이 많으믄 어떻노? 다리 병신이믄 어떻노? 니 섬기주고, 자식 낳거든 노리에 늘이나 보고 살아라. 아예 에미 찾을 생각 말고, 내사 살다살다 신풀이나 하고 살다살다 죽으믄 고만이다. 최참판댁의 마님께서, 설마 송장이사 안 치워주시겄나."

"최참판댁 마님이 멋 땜에 어매 초상까지 쳐주겄소."

딸 말에 월선네는 묘한 대답을 했다.

"그기이 다 전생의 업 아니가. 그기이 다 인연이란다."

들물의 거센 물결이 모래밭을 치고 있었다.

"어매, 이 백사장이 와 이리 끝도가도 없이 머요?"

월선이는 언덕에 오르지 않고 모래밭을 헤매고 있었다. 밤이 좀 더 깊어져서 길에 사람이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월선이는 보따리를 두 손으로 싸안으며 그 위에 얼굴을 얹는다. 그 동안, 달포 동안 용이는 모습을 나타내주질 않았다. 처음 월선이는 들일이 바빠 그렇거니 생각했었다. 다음은 강청댁이 눈치를 채고 말리기 땜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느 편으로 봐도 용이 야속했다. 술청을 걷고 나면 입은 옷에 팔베개를 하고, 새우같이 옹그려 누워서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이는 밤이면 더욱더 월선이는 용이를 원망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날에는 염치를 무릎 쓰고 마을 사람을 찾아 용이의 안부를 물었다.

"용이 말가. 아프기는 어디가 아파? 아까 올 때 소 몰고 나가는 거를 봤는데."

'무상한 사람... 옛적에도 그렇더마는.' 오광대 판이 떨어졌던 밤 이후 몇 번인가 바람같이 한밤에 다녀간 용이, 만나면 고통스럽고 헤어질 때는 더욱 고통스러웠던 그 순간들.

"보소, 이서방은 별일 없겄지요?"

다음 장날에도 월선이는 장에 온 영팔이에게 물었다.

"머 별일 없더마."

영팔이는 딱해하며 얼른 그의 앞에서 달아났던 것이다. 모래밭을 한참동안 헤매다가 월선이는 둑길로 올라가서 마을길로 들어섰다. 오목한 초가에서 엷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마당에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집도 있었다. 열어젖혀 놓은 용이네 삽짝 가까이까지 온 월선이는 마당에서 나는 인기척에 허리깨만믐 자란 수수밭으로 몸을 숨긴다. 수수이파리 사이에 뵈는 용이네 마당은 희끄무레하게 밝았다. 늦게까지 일을 하다 저녁상을 물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마루기둥에 초롱불이 매달려 있었으며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나 장독가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아마 강청댁이 뒷설거지를 하는 모양이다.

'우짤라고 여까지 왔일꼬? 구신이 씌았는가. 환장했지. 아무 일도 없임서, 아무 일도 없임서... 발걸음을 딱 끊고, 내 몰라라 하는 건가. 무상한 사람, 옛적에도 그렇더마는.' 눈물이 왈칵 솟는다. 찝찔한 눈물 맛과 콧가에 스치는 수숫잎의 냄새.

"나 두만네 성님 집에 갔다오겄소. 먼지 자든지 말든지."

가까이서 강청댁 목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작달막한 모습이 삽짝에 나타났다. 팔짱을 끼고 잠시 사방을 둘러보는 듯하더니 수수밭 앞을 지나간다.

"빌어묵을 년, 그년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문대 버리야지."

강청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모습은 수수이파리 사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늘에서는 눈보라같이 별이 쏟아져 내려왔다. 쏟아지는 별들은 반공중에서 제각기 맴을 돈다. 그러나 그것은 별이 아니었다. 월선의 눈에서 튀는 어지러운 불꽃이었고 뛰는 가슴과 현기증에서 오는 불꽃의 난무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을까, 월선은 마을 외딴 곳에 있는 제 집으로 가려고 수수밭을 나섰다. 열려진 삽짝 앞을 지나가려다가 걸음이 멎는다. 기둥에 걸어둔, 초롱불빛이 비치는 마루에 용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소."

분명 입속으로 중얼거린 것 같았는데 용이 번쩍 얼굴을 쳐들었다.

"누고?"

"..."

"누고?"

"..."

곰방대를 팽개치고 용이 달려 나온다.

",누고?"

월선임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보고 난 뒤에도 그는 누구냐고 물었다.

"나 집에 다니러 왔소. 지나는 길에,"

여자의 목소리는 쌀쌀했다.

", 집에, 집에 온다고?"

한동안 우리에 갇힌 짐승같이 용이는 뱅뱅이를 돌았다.

"그라믄, 그라믄 거기 가 있거라. 내 곧 갈 기니, 곧 갈기니!"

"오지 마시오."

보따리를 들고 돌아선 월선이는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

"오지 마시오."

했다. 용이는 여전히 삽짝 앞에서 왔다갔다 뱅뱅이를 들고 있었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숱한 하늘의 별도 보이지 않았지만 월선이는 울타리를 따라 걸어 올라간다.

"오지 마소, 오지 마소, 내 새북녘에 나릿선 타고 떠날기요."

월선의 입속에서 뇌인 제 목소리가 징 소리처럼 울려서 제 귀에 돌아오는 것을 듣는다. 외딴 오두막으로 들어간 월선이는 더듬어서 문고리를 풀고 방안에 발을 들여놓는다. 방안에서는 곰팡내가 물씬 코를 찔렀다. 보따리를 끌러 초하고 부싯돌을 찾아낸 그는 촛불을 켰다. 얼룩진 벽에 월선의 머리 그림자가 흔들렸다. 등짐장수가 빈 집에 묵고 갔던가, 방바닥에는 비워둔 세월에 비하여 그다지 많은 먼지가 쌓여 있지는 않았다. 촛불을 켜든 월선이는 옛날과 다름없이 신위를 모셔놓은 앞에 가서, 촛대의 먼지를 입김으로 불어내고 초를 꽂는다. 양켠 백자항아리의 종이꽃은 울긋불긋한 빛깔이 구별되지 않을 만큼 빛깔이 바래졌고 뿌연 먼지에 싸여 있었다. 월선네가 죽은 뒤 살림이라고는 숟가락 하나 남겨진 것이 없었으나 도둑도 신벌만은 겁이 났던지 신위 모셔놓은 곳은 변한 것이 없었다. 향로도 그냥 있었고, 아랫목에는 다 찌그러진 농짝 하나가 있었다. 역시 그 속에 든 옷가지는 다 없어졌지만 전복이나 꽃갓은 남아 있으리라. 월선은 나머지 촛대에도 촛불을 켜 꽂고 향로에는 향을 비워서 꽂는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니 바람이 들치면서 촛불이 흔들리고 향의 연기도 흔들린다. 그는 미리 마련해온 마른 걸레를 챙겨 집앞 도랑에 가서 빨아왔다. 방을 말끔히 훔쳐낸 뒤 다시 도랑에 나가 걸레를 빨고 다음 얼굴을 씻는다. 방으로 되돌아온 그는 보따리 속에서 백자두루미(술병), 유과, 삼실과 오곡, 떡을 꺼내어 신위 앞에 차려놓고 술도 부어놓고 그런 뒤 농짝 속에 든 것을 챙겨내어 전복을 입는다. 관띠를 두르고 망건을 쓰고 그 위에 꽃갓을 쓴다. 방울과 부채를 들었다. 부채를 활짝 펴고 방울을 흔들어본다. 야밤에 울리는 청아한 방울 소리, 이곳에 그의 어미 월선네의 숨결이 있고 눈빛이 있고 힘찬 목소리가 있었다.

"어매."

장구 소리, 피리소리, 꽹과리 소리, 한 자 높이로 괸 오색찬란한 제상의 제물과 흰빛 노랑빛 분홍빛 푸른빛 종이꽃들, 모란과 연꽃, 신들린 어미의 눈이 월선의 시야 가득히 다가온다. 숨소리가 가쁘게 들려온다. 칠쇠 방울을 흔들고 쉰 대부채를 활짝 펴는 어미의 모습- 어어허에헤야아- 비리데기 나와주자 어허어- 비리데기 아부니는 천별산 대장군님이고 비리데기 어무니는 금탈의 병운님인데 천별산 대장군이 금탈의 병운한테 장개를 들믄 아들 구형제 낳는다 말을 듣고 '어매, 차라리 나한테도 신내리게 해주소. 그라믄 온갖 설움 잊을기요.영신이 날 잡아두지 않겄소? 어매는 말하였소. 사람하고 인연이 먼 거는 영신이 가르지르고 있어서 그렇다고 안 그랬소? 이 가시나야 니를 보믄 어디 소리도 매도 없이 달아나얄긴데 안 그랬소? 니는 무당질 하지 말고 자식 늘이나 보고 살아라 안 그랬소? 자식이 어디 있소? 나이 삼십에 늘이볼 자식이 어디 있소. 천지간에 혈혈단신, 영신이랑 나랑 있게 하소. 그란하믄 똑 죽을 것 같소! 어매, 어매!' 월선이를 보내놓고 마당을 왔다갔다하던 용이는 마루에 올라가서 굴러 있는 목침을 끌어당겼다. 목침을 괴고 마루에 드러눕는다. '밤기운이 설렁하고나. 마룻바닥이 찹다.' 감긴 용이 눈까풀 위에 희미한 초롱불빛이 머문다. 콧날이 솟고광대뼈와 미간이 솟은, 굴곡 깊은 얼굴은 죽은 얼굴 같았다. 외양간에서 소의 새김질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멀리 논바닥에서 개구리 울음이 들려온다. 마루 밑에서 귀뚜라미 울음이, 자꾸자꾸 들려온다. '마룻바닥이 찹다. 마룻바닥이 찹다!' 벌떡 일어난다. 짚세기를 신고 뒤란으로 돌아간 용이는 솔가지 한 단을 들었다. 앞마당으로 되돌아 나온 그는 기둥의 초롱불을 훅 불어 끄고 삽짝을 나선다. 두만네 집의 불빛이 보였다. 윗마을에서 개가 짓는다. 무당집 마당에 들어선 용이는 조심스럽게 삽짝을 닫아 붙이고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서 아궁이에 손을 가져가본다. 썰렁한 냉기가 닿았다. 그는 나뭇단을 끌러 지끈지끈 부질러 아궁이에 밀어 넣고 불을 붙인다.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불은 바람길이 좋았던지 순하게 누워서 구들 속으로 들어갔다.

"불쌍한 것."

불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를 바라보고 지가 살아? 나한테서 바랄 기이 머 있노. 바랄 기이 머가 있다고, 흐음."

다시 나무를 부질러 아궁이 속에 밀어넣는다. '용아 이놈아야. 니 그 초롱초롱한 눈알이라도 하나 뽑았이믄, 그라믄, 우리 월선이 짝이 될 긴가... 월선이 따라댕기지 마라. 영신이 노명하싰으니 눈알 빠질 기다.' 마당에 퍼질러앉아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던 무당 월선어미 얼굴이 떠오른다. '그라믄 내 눈 뽑으소. 눈은 하나만 있어도 안 되겠소?' '부질없는 일이제. 부질없는 일이다.' 월선어미는 껄껄껄 웃으며 일어난다. 어느새 불길은 사그라지고 보송보송한 재에 덮인 불씨만 남았다. 일어선 용이는 방 앞으로 간다. 찢어진 문종이 사이로 방안의 울긋불긋한 것이 비쳐나왔다. 방문을 잡아당겼다. 안열렸다. 힘을 주어 다시 잡아당긴다. 쇠고리 흔들리는 소리뿐 방문은 잠겨져 있었다.

"문 열어라."

"..."

"문 열라니까."

"싫소."

"허 참, 문 열어라."

"..."

"내가 잘못했네."

"혼벼락이 날 기요. 새는 날에 쥐도새도 모르게 갈 기요. 집에 가소."

"정 내 말 못 듣겄나."

"못 듣겄소."

용이는 문살 하나를 부숴버리고 손을 넣어 문고리를 풀었다.

"!"

꽃갓을 쓰고 전복을 입고, 관띠를 띠고 그런 모습으로 월선이 노려보고 있었다. 용이의 얼굴은 금세 일그러지고 관자놀이가 흔들린다.

"이기이 무슨 짓꼬!"

월선의 꽃갓을 낚아챘다. 턱에 걸린 갓끈이 끊어진다.

"이기이 무슨 짓꼬!"

갓을 방바닥에 짓밟아버리고 망건을 벗겨 팽개치고 전복을 갈기갈기 찢어 벗겨낸다. 용이는 성난 짐승 같았다. 그는 신위 모셔놓은 곳으로 달겨들었다.

", 이러지 마소! , 추굴 받으믄 우짤라고 이,이러요!"

용이 허리를 껴안으며 월선이 소리쳤다.

", 우리가 멋 땜에 못 만났노! , 설마 그 까닭을 모르지는 않겄제?"

", , 아요."

월선이는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 그라믄 와 이 짓을 하노."

", , 아요."

"내 눈이 멀어도 좋다. 내 입이 막혀도 좋다. 불을 싹 질러 버릴 기다! 영신이 어디 있노!"

용이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생각지 말자, 그만두자, 무슨 수가 있겄노."

목소리를 떨어뜨리며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월선을 별안간 꽉 껴안았다.

"월선아!"

"."

"우리 어디 도망을 가까?"

"그랬일라 카믄 옛날에 했지요. 이마작 해서... 얼굴만 보믄 될긴데, 얼굴만 뵈주믄 여기 안 왔일 긴데."

용이는 여자의 등을 다독거리다가 촛불을 껐다. 가는 몸이 바스라지고 으깨어져서 끝내는 세상에서 없어지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용이는 전신의 힘을 죄어 여자를 포옹하고 월선이는 비명을 깨물며 부질없는 말을 지껄인다.

", 가소. , 이러믄 안 될 기요. 보고 저버서, , 얼굴만 보고, ,울타리라도 보고, 이러믄 안 될 기요."

"안 될 기이 어디 있노! 아무 안 될 것도 없다!"

용이는 광포하게 날뛰었다. 여자를 사랑하는 짓이 아니었다. 여자를 짓밟고 자기 자신을 짓밟고. 그 폭력에 놀란 월선이는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으나 끝내는 그도 고행을 감수하는 갸날픈 짐승이 되어 축 늘어지고 말았다. 희열과 고통스러움, 절정이 지나가고 어둠과 정적이 에워싼다. 용이는 여자 가슴 위에 머리를 얹은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는 신위도 제물도 없고 월선네의 힘찬 무가도 없고 용이 모친과 강청댁의 얼굴도 없었다. 마을도 없고 삼거리의 주막도 없었다. 논가에서 울어쌌는 개구리소리, 숲에서의 뻐꾸기 소리뿐이었다.

"월선아!"

"..."

"아무데도 가지 마라."

"..."

"와 니가 무당이 될라 카노."

"안 될 기요."

"그래, 되지 마라."

용이는 미끄러져 내리며 여자에 팔베개를 해주고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나는 체모 없는 놈이다."

"..."

"니를 술청에 내어놓고... 그래놓고 밤에 니를 찾아가는 내 꼴을 생각해봤다. 자꾸자꾸 생각해봤다. 부끄럽더라. , 그래서 못 갔다. 니가 눈이 빠지게 기다릴 것을 알믄서 니가 밤에 잠을 못 자는 것을 알믄서. 영팔이가 그러더마, 내 안부를 묻더라고. 간장이 찢어지는 거 같더마. 천분만분 더 생각해봤제. 다 버리고 다아 버리뿌리고 니 하구만 살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가자고. 안 될 일이지, 안 될 일이라. 이 산천을 버리고 나는 못 간다. 내 눈이 멀고 내 사지가 찢기도 자식 된도리, 사람으 도리는 우짤 수 없네."

"우찌 저리 뻐꾸기가 울어쌌겄소."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월선이 말했다. 머리칼을 더욱더 쓸어주며 용이는

"날이 가물라고 그러는갑다."

"울 적에는 나릿선을 탔는데 강바람이 실없이 찹디다."

"밤이니께."

"지가 잘못 왔소?"

"아니다. 잘 왔다. 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꿈인가 싶었지. 구신같이 니가 서 있더마."

"낼 새북에, 첫새북에 갈라요. 봉순네는 찾아볼 수도 없소. 무슨 낯으로 만나겄소. 마님도 아시믄 얼매나 욕하시겄소."

"..."

"욕하시겄지요?"

"욕을 묵어야지. 욕만 묵고 될 일이라믄..."

", 보소. 가봐야... 가보시요."

별안간 월선이는 날카롭게 말했으나 손은 오히려 용이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용이 팔이 파르르 떨린다.

"?"

"어 가시요. 이자 나는 마음놓고."

움켜쥐었던 옷자락을 놓으며 월선은 일어나 앉으라 했다.

"머할라꼬."

"불 킬라요."

"키지 마라. 이대로 좀더 있다가."

어둠 속에서 용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자거라, 니가 잠들믄 갈 기니."

잠들 리도 없지만 월선은 잠든 척하고 용이는 한숨을 죽인다. 자정이 훨씬 지났을 것이다. 용이는 여자 머리에서 팔을 빼고, 일어나 앉아서 오랫동안 월선의 숨소리를 듣다가 이윽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뻐꾸기 울음에만 귀를 기울이려고 더욱더 숨을 죽이며 월선이는 어둠을 쳐다본다.

이튿날 새벽, 월선이는 보따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마을길에 나섰다. 다음 마을까지 걸어가서, 그곳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기다릴 참이었다. 별빛은 여전하였다. 해일 수 없이 많은 별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길, 길섶의 이슬 머금은 풀이 버선을 적신다. 마을은 아직 잠들어 괴괴했으나, 몇 번째인지 닭이 홰를 쳤다. 그 소리를 들은 월선이 허둥지둥 걸음을 빨리한다. 어느 달모퉁이를 막 돌아가려는데

"!"

월선이보다 부딪쳐온 쪽에서 먼저 비명을 질렀다. 새벽 어둠속이라지만 얼굴과 얼굴이 닿을 만큼 세차게 부딪쳤으니 상대방이 누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월선이도 인사 없이 피해 달아났거니와 상대편, 그러니까 임이네도 무슨 까닭인지 몹시 낭패하여 달아난다. 임이네는 뒷간에 나왔다가 막딸네 집 울타리에 탐스럽게 매달렸던 호박생각이 나서 그것을 따가지고 치마폭에 숨겨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집마당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임이네는

"머 내가 무슨 짓 했는가 지가 알 턱도 없고 여기 사는 것도 아닌데 조맨치도 겁날 것 없다. 한데 그 기집이 머하로 왔일꼬? 달아나기는 또 와 달아날꼬? 이상체? , 옳지! 이서방하고 옳지! 그렇구나."

임이네는 치마에 숨겨온 호박을 부엌 부뚜막에 놓고 바구니로 덮는다.

"속는 거는 강청댁이고나. 월선이 그년도 예삿년이 아니구마. 개눈깔 같은 눈깔 머가 좋아서 이서방이 반했일꼬?"

임이네는 샘이 나서 못 견디어한다.

"이서방도 망조 들었구나. 무당년하고 상관하믄 재수가 없는 법인데, 그년도 그년이지, 눈이 시퍼런 여편네가 있는데 동네까지 기어 들어왔이니 보짱도 예사 보짱 아니구마."

방안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났다. 임이네는 불은 젖을 손 바닥으로 풀면서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에게 젖을 물려놓고

", 속는 거는 강청댁이고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14. 악당과 마녀

아침 내내 지껄이고 또 지껄이던 막딸네는 그래도 분이 안 풀렸던지 해질 무렵 널어놓은 보리를 거두려고 멍석을 채면서 다시 시작했다.

"어느 놈의 손목때기가 그 아까운 호박을 따갔노. 누구는 입이 없어 안 따묵은 줄 아나. 익으믄 풀태죽 쑤어서 묵을라꼬 애끼둔 긴데, 도둑질이 이리 펄펄해서는... 막딸아! 이눔으 가시나야. 부석 앞에만 꼭 붙어 있이믄 우짤 것꼬! 어 와서 이 섬 좀 맞잡지 못하겄나."

보리쌀 안친 솥에 불을 지피고 있던 막딸이 부지깽이를 버리고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같이 걸어 나온다. 생김새는 열네댓 나이쯤 됨직한데, 아마 막딸이는 난장인가 보다.

"옴마, 인자 고만해라. 시부린다고 없어진 호박이 나올 것가."

섬아가리를 벌려주며 막딸이 말했다. 막딸네는 자루바가지로 무덤진 보리를 퍼서 섬 속에 넣으며

"이년아, 그라믄 금쪽 같은 내 거 잃고 꿀 묵은 버부리 놀음하까!"

"그래도 머, 없어진 긴데..."

"생각해보믄 다 나를 없수이 녀기서 그랬일 기다. 소나아 없는 과부라 생각한께 그렇지. 말할 사람이 없일 기라고. 에이, 빌어묵을 놈의 팔자."

"우리 거만 잃어뿌맀나 머, 그눔으 자석 손버릇이 그런데."

"한두 번가."

이때 마침 김평산이 제 집에서 나와 마을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막딸네는 자루바가지를 멍석에다 팽개치고 삽짝 밖으로 쫓아나간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노! 동네가 궂어서는 안 될 기다. 안 돼! 무슨 과단을 내리야지!"

막딸네는 큰소리로 외쳤다.

"어느 놈 집구석의 손이 했는지 내가 안다! 다 안다! 시상에 닭우장 달걀을 안 훔치나 콩밭의 콩을 안 훑어가나! 가지는 나는 쪽쪽, 이자는 담부랑의 호박까지 따내가니이, 이리 동네가 궂어서 우찌 마음놓고 잠자겄노!"

막딸네는 허공에다 대고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물론 김평산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달걀을 훔쳐내고 콩밭의 콩을 훑어내어 구워먹은 도둑은 김평산의 큰아들 거복이었다. 달걀을 훔치고 콩을 훑어 구워먹은 것은 그 당장에 들키어 혼을 내주었으나 호박의 경우는 따는 손목을 잡지 않았으니, 게다가 개다리 출신이니 노름판의 구전 뜯어먹는 건달이니 망나니니 하고 뒷구멍에서는 사람으로 추비하지 않았지만 명색이 양반이라 면대히 놓고 퍼부을 수는 없는 노릇, 간접으로 악을 쓸 수 밖에 없다.

"허어,원님네 도임길인가? 왜 이리 떠들어."

평산은 코방귀를 뀐다. 막딸네가 호박 도둑을 거복이로 지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산 역시 아들의 소행임을 짐작은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알 바 아니로다 하는 시늉으로 거품을 물며 떠들어대는 막딸네를 빤히 쳐다본다. 막딸네의 눈알이 불거진다.평산은 부채든 팔을 천천히 내저으며 불그레한 얼굴에 웃음기마저 띠고 팔자 걸음의 거만한 태도로 그 앞을 지나간다. 그러자 막딸네는 발딱 돌아서서 평산의 뒤통수에다 대고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동네 궂히는 놈으 새끼는 대체 어느 놈으 집구석 손고오! 한분도 아니고 두 분도 아니고 도둑질이 이리 퍼뜻퍼뜻해서는 동네 가운데 두고 어디 살겄나! 한 분도 아니고 두 분도 아니고 실삼스럽게 이래가지고는 그냥 못 둔다! 시상에 놀고 묵는 놈치고 도둑질 안 하는 놈 봤나?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더라고 내 호박 따간 놈으 손목때기 당장 밤새 썩을 기다! 내가 쥐 잡아놨인께, 양밥만 해봐라! 그눔으 손목때기 안 썩고 성할 기든가! 뉘는 입이 없어 못 따묵었던가? 뉘가 저거 아가리 처넣어줄라꼬 호박 심었나!"

하거나말거나 평산은 벓써 저만큼 부채 든 손을 저으며 팔자걸음으로 거만을 떨며 올라가고 있었다. 막딸네의 목소리는 차츰 작아졌다.

"더런 놈으 손,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더라고, 나무 될 거는 떡잎부터 아더라고, 이래가지고는 남으 집 자식들까지 궂히겄네. 양반? 양반 꼴 좋네. 썩어질 놈의 양반!"

치맛말기 겨드라이 밑에까지 바짝 추켜서 치마끈을 다시 여미며 구지렁거리는데 평산은 최참판댁에 이르는 언더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세빠질 놈의 손! 화적같은 놈으 새끼! 조선 팔아묵고 대국 팔아묵을 놈!"

"와 거카노!"

호미를 들고 밭에서 돌아오던 야무네가 물었다.

"말도 마라."

"?"

"아 시상에 하다하다 할 기이 없인께 담부랑의 호박까지 안따가나, 화적 같은 놈의 새끼가!"

"누가 그랬노?"

"말해 머하노, 빤하지. 평산인가 개산인가 그 양반나리 아들놈이지 누가 누긴?"

"그놈 아아가 그런 짓이사 잘 하더라마는, 호박은 머할라꼬 그랬일꼬."

"배애지가 고픈께 삶아 처묵었겄지."

"어마니 성미에 추달 안 받고 그거를 집안에 딜있이까?"

"아 어매 알리고 처묵었일까? 베틀에 앉아 세상 가는 줄 모르는데 밖에서 죽이 끓는가 장이 끓는가 우찌 알 것꼬?"

"하기사... 그 머사마 질엎이 그래서 그 성님도 인병 들겄다."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 맑제."

"우리집 아이놈들보고 어울리서 놀지 마라 캤는데, 동네 궂히서 큰일이네."

"말도 마라. 연지부터 그래가지고 크믄 지 아배는 접방 나가라 칼기다."

"자식 둔 사람이 남으 자식보고 화냥년, 도둑놈 소릴 안 한다 카더라마는거 우찌 아바니를 닮았는가, 어마니사 세상에 그리 엄전할 수가 없는데 콩 심은 데 콩나고 퐅 심은 데 퐅 나고 글이 안 좋나, 손끝 야물고 가장 덕 못 보믄 자식 덕도 못 본다카더마는 정말이제 인병이구마."

"와 아니라, 나도 어매 눈이 보시서 참기도 참았다마는 언제꺼정 쉬쉬할 것만도 아니라고. 동네 어른들이 모이서 동네 밖으로 쫓아내든지 과단을 내리야 할 기다."

"아즉 철이 덜 들어서 그러는 거로 그럴 수야 있나. 셈만 찼다믄 동네에서 쫓아내든지 우쩌든지 하겄지마는, 아이구 내 정신 좀 조래? 밥 늦겄다! 해가 그렁그렁 져가는데."

야무네는 급히 갈려고 했다. 그런데 막딸네가 야무네룰 잡았다.

"이 보래?"

"."

"니 소문 들었나?"

"무신 최참판댁 소문 말가."

"그것도 그렇지마는, 강포수가 구천이 찾는다 카는 거는 벌써 얘기고 어짓밤 무당집의 일 안 들었나?"

"없이?"

"월선이가 왔다갔단다."

"그기이 머가 우째서,"

"우째서가 멋꼬. 첫새북에 도둑앵구맨치로 상구 도망치는 것를 보았다 카는데,"

"와 그랬일꼬."

"허 참, 이 멍청이 보래, 와 그랬일꼬라니. 이서방을 찾아와서 강청댁 몰래 정을 풀고, 들키까바 첫새북에 달아났겄지."

"... 그렇겄네. 강청댁이 천길만길 뛰었겄다."

"그랬이믄 구갱이 볼 만했일 긴데 강청댁은 까마귀같이 모르고 있일 기다."

"그라믄 어이서 소문이 났노. 잠도 안자고 남으 정분 난 거, 무슨 헐 일이 벗어서 요사왔을꼬?"

"임이네가 봤다안 카나. 새북에 통시에 갔다가."

"봤이믄 금나 혼자 가슴에 접어놓고 있일 일이지 멋을 그리 시끄럽게. 임이네 심청도 여간 아니더라. 지서방도 아닌데 와 그리 용을 쓰는지. 그러니까 강청댁하고 튀각튀각 안 허나."

"잇몸이 간지러버서 우찌 가만 있일꼬? 그뿐만 아니라 무당집에 불이 키져 있는 거를 누가 봤다누마. 밤낚시하고 돌아오는 길에 봤다카든가? 그런데 그 실없는 임이네는 또 우쨌기에? 강청댁한테 가서 실무시 물어봤다 안 카나."

"참 할 일 없네."

하기는 했으나 귀추가 궁금하여 야무네 역시 떠나지는 못한다.

"이서방, 어젯밤 읍에 안 갔나? 한께 군대쟁이 영문 모르는 강청댁이 의기양양 해가지고 요샌 그년한테 발길을 싹 끊었는데 읍내에는 머하러 갔일꼬? 장날에도 안가는 사램이, 하더란다. 그거사 머 임이네가 미버서 그랬겄지마는, 그래서 그라믄 어젯밤 이서방이 집에 있었나? 하고 짓궂게 또 물었더란다. 그랬더니 하모 집에 있었고말고, 두만네집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밤늦게 오니 코를 골고 자든데 왜 남의 남정네 있고 없는 거를 염탐하느냐고 징을 벌컥 내는데, 그러니께 마을간 새 제집 사나아 깨가 쏟아지게 재밀본거라. 삼이웃이 다 알아도 모르는 거는 지 서방뿐이더라고 이자는 제집 쪽에서 물이나 심을하게 됐으니 월선이 그년도 여사 제집이 아니라니."

"시끄럽다. 양편 말을 들어야 알더라고 누가 아나. 강청댁만 해도 그렇지, 너무 강짜가 심해서 나이 삼십에 자식도 없는데 어디서든 자식이사 봐야 할 거 아니가. 여자 마음은 다 일반이다만 그래도 멧상 들 자식 낳아놔야 큰소리를 쳐도 치제."

"강청댁이 들었이믄 잡아묵을라 안 카겄나."

"입 놔두었다 머할라꼬, 말이사 바른 말이제. 어이구 내 정신 좀 봐라. 이러고 있일 기이 아닌데. 저녁이 한밤중 되겄다."

야무네는 이번에야말로 거머잡는 막딸네를 뿌리치고 종종걸음으로 달아난다.

"아따 한밤중이라도 코밑에 찾아넣으믄 될 긴데 멋을 그리 서두노. ! 서방 있는 년들은 다르다 카이. 세상에 설운 것이 이년의 팔자네."

삽짝 앞에서 서서 연신 지껄이고 있는데 김평산이 그 옆을 쑥 지나간다. 지나가면서 그는 팔을 벌려 부채를 소리 나게 착 펴들었다. 하마터면 햇볕에 타서 꺼풀이 희뜩희뜩 벗겨진 막딸네 코끝을 찌를 뻔했다.

"아아니."

다시 한 번 으르릉거리고 나서 잃은 호박의 사연을 꺼내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기승스럽게 내 호박 따간 놈은 자손만대까지 빌어먹을 것이라는 둥, 밤사이 손목이 오그라져서 문둥이가 될 거라는 둥 별의별 악담을 연달아 내뿜는다. 마을 조무래기들이 와글와글 모여들기 시작했다. 들판에서 돌아온 남정네들은 막딸네의 악쓰는 꼴을 보며 피식 피식 웃고 지나간다. 아침 밥상의 호박나물을 맛나게 먹었을 뿐만 아니라 호박이 어디서 났는가 알고 있는 칠성이는 보릿대를 한 짐 짊어지고 지나가면서

", 어느 놈의 손목때기가 그 짓을 했일꼬."

악쓰는 막딸네에게 편역을 들어서 말했다.

"뻔하지 않소, 뻔해! 늘 하는 놈이 하지 누가 하겄소. 조선 망해 묵고 대국 망해묵을 놈 아니겄소? 동네 어른들이 모이서 동네밖으로 쫓아내든지 무슨 수를 내야지 이래가지고는 동네가 궂어서 안 될기요."

"무슨 과단을 내기는 내야겄네."

칠성이는 히죽히죽 웃으며 지게받침 작대기로 아이들을 쫓듯 휘휘휘 둘렀다. 어느덧 사방에 땅거미가 지고 맞은 켠 섬진강 너머, 꺼무끄럼해진 산에 아슴한 저녁안개가 내리덮이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송판으로 얽어놓은 굴뚝에서도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들은 모두 흩어진다. 배고픈 아이들은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제가끔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새끼를 여러 배 뽑아내어 이젠 형편없이 늙어 버린 두만네의 개 복실이는 삽짝에 오도마니 나앉아 있더니 허둥지둥 뛰어가는 거복이 동생 한복이를 보고 우우 하며 짖어댄다. 막딸네한테 직사하게 악담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평산은 저녁이 다 되었으냐고 고함을 질렀다. 함안댁은 급히 부엌으로 쫓아 들어가고 거복이는 아비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뒷걸음질쳐 집밖으로 뺑소니를 친다. 호박은 분명 제 한 짓이 아니나 전죄가 있었기 때문에 막딸네의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를 숨어들었지만 억울타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노릇이며 아비가 추달을 한다면 호박의 경우는 물론 전죄까지 잡아뗄 수는 있지만 우선 매가 무섭다. 뺑소니치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평산은 마루에 올라서며 '! 니꺼 내께 어디 있나. 남의 손의 것도 뺏아 묵을 뱃심이 있어야, 그래야 산다!' 아무 일도 모르는 함안댁은 짜증날 정도로 공손하게 저녁상을 차려왔다. 저녁을 끝낸 김평산은 식곤증을 풀기 위해 목침을 베고 모로 눕는다. 옆방에서는 남편의 심기를 염려한 함안댁이 베틀에 오를 것을 단념하고 남편의 버선을 기우면서 낮은 목소리로, 낡아 거의 연초빛으로 변한 책을 펴고 한복이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년이 나올는지 모르겠군. 설마... 제년이 안 나오고 어찌 배기누.'

평산은 모로 누워 숨을 헐떡이다가 반듯하게 몸을 돌려 천장서까래를 뚫어져라 올려다본다. 사람의 운이란 알 수 없는 거지. 나라고 평생 이리 살라는 법은 없다. 나는 속도 없고 쓸개도 없나? 죽일 연놈들! 옛날 같으면, 세상이 세상 같으면 어디라고 감히... 낸들 허랑한 신세가 되고 싶어 됐나? 오냐, 좋다. 저절로 굴러온 복을 차버릴 수는 없지. 크게 한판 벌여보는 거다.' 밤은 캄캄했다. 어젯밤 그렇게 총총히 나돋았던 별은 하나 찾아볼 수 없게 어두웠고 더운 바람이 쓸고 간다. 내일쯤 비가 쏟아질는지 뻐꾸기는 마지막 기세를 올리는 모양이다. 평산은 불빛이 새어나는 작은방께로 흘깃 눈을 주며 마당을 질러 밖으로 나온다. 담모퉁이를 돌아설 때 남편이 나가는 기척을 알았던지 베 짜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억머구리 같은 제집, 뼈가 빠지게 하다하다가 뒈지기밖에 더할라구. 그것도 다 제 복이지."

평산은 누각으로 아르는 뒷길, 그러니까 최참판댁을 거치지 않고 당산뒷등성이로 하여 올라간다. 잡풀이 우거져서 옷과 부딪는 소리가 서걱서걱 났다. 누각 뒤켠에까지 온 평산은 어둠을 헤치듯 하며 삼신당이 있는 오솔길로 접어든다. '좋은 밤이구나. 누가 뺨을 쳐도 모르겠고 칼 맞아 죽어도 모르겠구만. 언제 망해도 망하기는 망할 거고... 운이란 본시 변덕스러워서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는 법이 없다. 억척스런 계집들만 아니었다면 벌써, 버얼써 골망태가 됐을 거 아닌가.' 개울에 걸쳐놓은 돌다리를 평산은 더듬더듬 건넌다. 삼신당까지 온 그는 삼신당 축대 위에 몸을 놓고 사방을 살펴본다. 어둠뿐이다. 개울물 소리가 나고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 소리가 들려온다. '본시 재물이란 들고나고 하는 거 아닌가. 고방에서 썩으면 절로 사가 나는 법인데 최가놈 집구석의 고방에는 백 년 넘기 재물이 썩고 있었으니, 그 살을 내가 낚아채서 한번 판을 벌여보자는 거다. 김평산이 언제꺼정 노름판의 구전이나 뜯어먹고 살 수 없다, 그 말이지. 헌데 이년이 왜 안 와? 허나 제 년이 안 오고는 못 배길걸. 공을 들여 그년 꼬랑지를 잡아왔는데, 어림도 없지. 날고뛰어도 제년 혼자서는 재줄 못 부릴걸.' 어둠에 익은 눈에 뭔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삼신당 앞의 커다란 팽나무기둥이 아슴하게 보였다. 그 뒤에 귀녀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 평산은 그곳에 가서 손을 내밀어본다. 아무것도 없다. 허공이었다. 평산이 삼신당 축대에 도로 와 앉았을 때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새 소리와는 다른 수풀에 옷 스치는 소리, 멀어진 나뭇잎새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그렇지, 너가 안 오구 어찌 배기겠나.' 평산은 궁둥이에 스며드는 축대의 냉기를 지그시 누르며 귀를 기울인다. 치마를 뒤집어쓰고 눈만 내놓은 귀녀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뭣 땜에 오라고 했소?"

계집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뭣 때문인지 몰랐으면 네가 여기 왔겠나?"

평산도 냉랭하게 응수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겄구마요. 가락지 우짜고저쩌고 안하싰소? 그렇다믄 가락지가 우찌 되었는지 말해보시오."

"가락지 한 짝 같은 거 새발의 피도 아닌데 그거 들출 것 없다."

"그거 들출 것 없다믄 나도 볼일 없소. 가락지 내력이 궁금해서 그러는 줄 알았더마는... 그라믄 나는 가겄소."

"갈라면 가도 좋지. 허나 가지는 못할거로."

"무슨 소리요!"

귀녀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너가 비록 종년이기는 하나 도도하고 간악하다는 것쯤은 나도 아는 일이다. 허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느니라."

"쓸데없는 억측 마시오. 뛰고 날고가 어디 있소. 그 강포수 놈이 발설을 한 모양이요만, 날 도둑년으로 몰라 캐도 그거는 알 될 기요. 발당아씨께서, 작년 늦가을 그 일이 일어났일 적에 애기씨를 당부하시믄서 손데 끼고 계시는 가락지 한 쌍을 나한테 뽑아주신 기요."

"그건 아까 말한 대로 들출 것 없고 누가 본 일 아니니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냐."

귀녀는 말이 없다. 문제의 금가락지는 사실 별당아씨가 귀녀에게 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떠날 시에 뽑아서 장농 위에 얹어놓은 것을 귀녀가 아무도 몰래 가진 것이다.

"귀녀."

"..."

"이쯤하고 탁 털어놓지. 금가락지 같은 건 최참판네 만석꾼 살림에는,"

"멋을 털어놓으라 카요?"

귀녀는 마음을 떠본다. 평산은 픽 웃으며

"만판 여우 XX를 지녀봐야 소용없고 삼신당에 공을 딜여봐야 아들은 커녕 목침도 못 낳을걸."

"..."

"내가 그 동안 사정을 다 알아봤다. 귀녀가 무슨 짓을 하나 하고나하고 손을 잡으면 어쩌면 귀녀의 소원이 성취될지도 몰지. 어두컴컴한 일이란 천하 없어도 혼자서는 쳐내지 못하거든. 손발이 맞아야,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

"최치수는 양기가 모자라서 자식 보기는 글렀다 그 말이지. 귀녀가 하늘을 이고 도리질을 해도 그거는 어려운 일이란 말이야. 샛서방이 있어야, 샛서방이. 뭐 내가 샛서방 돼주겠다는 말은 아니고. 내 낯짝도 그렇지마는 씨가 있을 건지 그것도 장담은 못하지."

귀녀는 킥 하며 웃었다.

"양기가 모자라는지 어쩐지, 하늘을 봐야 별을 따제요."

"?"

"그 양반 양기가 모자라는 기이 아니요. 본시부텀 여잘 가까이 안 허니께."

해놓고 귀녀는 다시 킥 하고 웃었다. 밝았으면 평산의 얼빠진 얼굴을 좀 봐주겠다 하듯이. 그러나 평산은 당황하거나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런 줄 알았지. 그러니 안타깝다는 게야. 귀녀 나부대는 게 말이야."

평산은 일어섰다. 그는 귀녀에게 바싹 다가섰다.

"귀녀."

귀녀는 순간 막연해지는 모양이었다. 평산도 내심 막연함을 느끼었다. 황금의 더미가 소리도 없이 무너져서 흐트러져 가는 것 같았고, 희한한 꿈을 깨고 난 늙은이가 뼈다귀 같은 천장의 서까래를 바라보는 허무한 마음, 그러나 절망은 아니었다. 손을 뻗치기만 하면, 좀 더 안간힘을 쓰기만 하면, 뭔가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귀녀와 평산은 꿈이 무너질 것 같은 허망함에서, 그 공통적인 심리 때문에 그들은 말로보다 더 강하게 손을 잡았음을 느꼈다. 손을 잡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노력한다는 기대만이 아들의 허망한 순간을 구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되는 수가 있다. 너하고 나하고 의논이 맞기만 하면, 알겠나? 좀 기다려보면은 되는 수는 반드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알겠나? 내가 주선할 테니 니는 어떡허든 애만 배면 된다. 종년이 그만큼 큰마음을 먹었다면 끝장을 내야지, 아암."

며칠이 지나갔다. 식전이었다. 용이는 바지게를 지고 풀을 베러 나섰다. 마을길을 걸어가는데 저만큼 무엇이 이상한 것이 걸어왔다.

"...?"

뿌윰한 아침안개 속에, 그것은 키를 뒤집어쓴 아이였다. 마치 키가 걸어오는 것 같았다. 걸어오는 키 옆에 잠이 덜 깬 듯 하품을 하며 두만이 따라오고 있었다. 키를 쓴 아이는 경만이었고 그는 간밤에 오줌을 싼 모양이었다.

"영만아, 소금 얻으러 가나?"

말하는 용이는 웃음을 참고 두만이는 하품을 하다 말고 슬며시 웃는다. 영만이는 눈물을 찔찔 짜면서 눈을 희뜨고 용이를 노려본다. 용이 옆을 지나친 아이들은 야무네집 삽짝으로 들어간다. 얼마 있지 않아

"웬 소금 주었더나!"

야무네 목소리에 뺨 때리는 소리가 철썩 났다. 영만이 앙! 하고 우는 소리가 났다. 용이는 싱긋이 웃다가, 그러나 웃음은 이내 얼굴에서 지워졌다. 자식 없는 자기 처지를 생각했던 것이다. 두 과부만 사는 윗마을 김진사댁 고추밭에는 고추보다 잡풀의 키가 더 높았다. 고추밭에서 비스듬히 올라간 둑까지 온 용이는 바지게를 내려놓고 풀을 베기 시작한다. 풀물이 손끝에 베어든다. 강위에 뗏목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오늘이 장날이제?' 용이는 풀을 베다 말고 낫을 든채 우두커니 강물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다시 풀을 베려 하는데 저만큼 당산으로 오르는 뒷길, 언더막 쪽에서 두 사나이가 나란히 걸어 나왔다. 평산이와 칠성이였다. 칠성이는 용이를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얼른 외면을 하고 평산을 좇아 둑길로 나선다. '장에 가나? 일찍이도 가네.' 장에 가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평산의 모습이 눈에 걸리었고 칠성이 외면하는 것도 심상치가 않아 용이는 엎드려 풀을 한 움큼 거머잡고 낫을 댄다.

 

 

15. 첫 논쟁

처음 준구를 만났을 적에, 초당에서 별당아씨에 관한 얘기를 했을 뿐 치수는 그 후 일제 그 치욕적인 사건에 대하여 언급이 없었다. 오만한 성미에 그 일을 잊을 리 없고 어물어물 어둠 속에다 묻어버릴 리도 없건만 준구는 아무런 움직임을 그에게서 찾아낼 수 없었다. 육년에 적지 않은 액수의 금전을 변통하기 위해- 그때 윤씨부인은 잠자코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준구가 이곳을 다녀간 후 이듬해의 일이었다. 최치수는 온다는 기별도 없이 김서방을 데리고 서울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 무렵 준구는 목이 기다랗고 허약하기만 한 치수의 사람됨을 전혀 간파하질 못했다. 다만 고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제 하고 싶은 대로, 청상과부 손에 자란 시골 서방님으로만 생각하였고 어리석고 물정 모르는 위인으로만 생각했었다. 하기는 치수가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감추어버리기만 하면 얼뜨게 보이기는 했으나 준구가 치수를 그렇게 밖에 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 큰 실수였었다. 준구는 치수를 적당히 주물러서 그의 재물로 자신의 출세길을 터보려고 지나치게 조급히 군 탓으로 그의 본색을 쉽사리 드러낸 결과가 됐었던 것이다.

"생각해보게. 그 동안 내리 삼 대가 모두 단명하여 벼슬길엔 오르지 못하고 말았지만 자네 고조부께서는 참판벼슬까지 하셨는데 이리 빈둥거리고 있어 쓰겠나? 옛날하곤 달라서 벼슬자리가 힘든 것도 아닐세. 어렵다면 그건 가난한 선비 얘기고, 그 동안 외국 사신들과 가까이 지낸 덕분에 굵직한 줄은 얼마든지 잡을 수 있으니, 어떤가."

처음부터 체모 없고 치사스런 언동으로 준구는 치수를 꼬였다. 치수는 빙그레 웃으며 준구가 주선하는 대로 세도가 자제들- 실은 먼 족간이었지만 -과 어울려 기방을 쓸고 다니며 돈을 물 쓰듯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치수는 벼슬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잠자코 준구의 노는 꼴을 구경만 하는 것이었다. 비굴하고 천박한가 하면 호언장담의 허세를 부리고 외국 문물에 정통한 듯 내리 지껄이는가 하면 형편없이 무식을 드러내기도 하고, 끝내는 웃기만 하는 치수 따윈 젖비린내 난다는 식으로 한곁에다 밀어붙여 놓고 제 일들 위한 흥정을 벌이는 판국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치수 눈빛 속에 감추어진 조소를 조금도 깨닫지 못했었다.

"그 동안 덕분에 좋은 곳을 두루 구경했소. 이번에는 제가 재미나는 곳의 길잡이가 되겠소이다."

어느 날 객사에 찾아온 준구에게 치수는 넌지시 말했다. 그 동안 치수는 준구 집을 방문한 일이 없었다. 더러 서울을 오르내리는 김서방으로부터 준구의 집안 형편을 들어 그랬던지 준구가 한 번 권하기는 했으나 그곳에 유하기를 사양했고 준구 역시 한 번 더 이상 권하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러니 준구 편에서 치수가 묵고 있는 곳을 늘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러지. 자네도 이젠 이력이 난 모양이로군 그래."

준구는 체구에 맞지 않게 너털웃음을 웃었으나 치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준구를 안내한 으슥한 뒷골목은 놀랄 만한 장소였다. 하층 잡인배들이나 출입하는 초라하고 더러운 갈보집이었다. 가무나 풍류하고는 아무 인연도 없는 다만 몸을 파는 여자의 집이었다.

"이 사람아,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치수는 준구 힐난에 날카로운 웃음으로 응했다.

"왜요?"

"왜라니? 선비가 발 들여놓을 곳인가."

"국사를 논하려면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다 알아야 하오."

"알 곳이 따로 있지. 어서 돌아가세."

준구는 옷자락에 때라도 묻어올 것처럼 치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체통만 찾아서 언제 개명하겠소. 고당명기 집에선 체통이 있습디까?"

"허허, 그거야 풍류 아닌가."

치수는 잡힌 팔을 뿌리치고 반대로 준구의 팔을 꽉 잡았다. 그리고 질질 끌어 기우는 것 같은 초라한 집 속으로 들어가면서

"허파가 썩어서 피고름이 문적문적 나는 서울 양반놈들! 이곳도 감지덕지해야지! 그놈들 썩은 콧구멍에는 갈보들의 살 내음은 사향보다 나을 거요."

이때 비로소 준구는 치수의 본색을 보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순간 최치수를 물정 모르는 과부의 외아들로만 보아온 제 눈을 뽑아버리고 싶게 후회를 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날 밤 준구는 꼼짝없이 갈보방에서 밤을 새웠다. 본시 준구는 여색에 빠지는 체질이 아니었고 제 몸 위하기를 하늘같이 했으며 천성적인 결벽증도 있어 여자에게 손을 대기는커녕 옷자락에 닿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하며 밤을 드새웠으나 치수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음 치수는 다시 준구를 제물포까지 끌고 가서 청인들을 상대한다는 천기방에서 욕을 보였다. 치수의 그런 식으로 준구를 괴롭히는 행동은 상당히 집요하고 잔인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여자를 서슴없이 상대하면서 조금도 쾌락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 행위는 무엇을 향한 투쟁인 것처럼 광포했고 파괴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속 밑바닥에서부터 여자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차 있는 것같이 보였다. 여자를 짓밟아주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심리가 추잡한 방탕으로 폭발되었으며 준구를 괴롭히는 것은 부수적인 일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치수는 결코 아름다운 별당아씨를 사랑한 일이 없었으며 어머니인 윤씨에게도 냉담한 아들이었다. 서울에 머문 지 반 년가량, 치수의 몸은 망가졌다. 허깨비가 되어 마을로 돌아온 그를, 목숨이나마 건져준 사람은 문의원이었다. 그러나 문의원은 윤씨부인에게 다시 자손을 볼 수 없으리라는 선언을 했다. 이런 사실은 윤씨부인 이외 최치수를 따라 서울로 갔던 우직한 충복 김서방과 당자인 최치수가 막연하게 알고 있었으며 준구는 가끔 서울을 다녀가는 김서방으로부터 원망하는 투의 말로써 짐작을 했던 것이다. 조준구는 최참판댁에 온 지 보름 만에 부산을 한 번 다녀왔다. 부산서 왔을 때 그는 깨끗하게 이발을 하고 머리에는 하얀 여름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보름을 넘겨 보냈는데 서울로 돌아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치수가 과히 기분이 나쁘지않을 때는 바둑을 두기도 하고 활터에 나가 활을 쏘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시국 이야기도 했었다. 준구 자신이 치수의 비위를 맞추다 보니 일관되지 못한 자기 견해를 깨닫지 못한 바는 아니었고 한편 자신의 시국 얘기가 치수에게는 조소감 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치수의 압력에 눌리다 보면 무엇이든 지껄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답답함을 느낀다. 치수의 침묵에 대항할 힘이 없었고 준구는 내심 치수를 몹시 겁내고 있었다. 자기 속셈을 다 드러내 보인 약점과 치수의 강인한 성격, 그 두 가지가 합하여 준구를 위축케 했던 것이다. 때문에 치수 이마빼기에 푸른 줄이 솟을 지경이면 그는 허둥지둥 치수를 피하여 마을로 내려가곤 했었다. 일단 치수 앞을 떠나면 준구는 의젓하고 너그러운 서울 나으리가 된다. 그는 마을의 농부들하고 친해지려고 많이 노력했다. 오가는 길에 논둑에 올라와 쉬고 있는 농부들과 마주치면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그들이 묻는 말에 친절히 대답했으며 농주 같은 것을 권할 경우 그는 그의 결벽증을 희생시켜서까지 사양하지 않았다. 처음 양복차림의 그를- 요즘은 봉순네가 지어주는 잠자리 날개 같은 모시옷을 입었지만 - 경계했던 마을 사람들은 사글사글하고 자상스러운 말투에 호감을 가지게 이르렀다.

언제 양반들이 농민에게 이토록 친절했던가. 더욱이 준구닌 지체 높은 서울 양반으로 머리에 박힌 사람인데, 사실 농민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농민들은 또한 권위에 대한 숭배가 지극한 생리를 지니고 있다. 개다리 출신인 김평산을 개다리 출신이기에 존경을 아니하지만, 양반이 잡인들과 몰려다니며 투전판을 벌이기 때문에 미워하고, 경멸하는 그 이유는 양반의 권위를 잃은 때문이다. 김훈장의 경우도 그러하다. 친애의 정은 가지나 종부들과 진배없이 농사를 짓고 종 하나 없는 처지는 이 역시 양반의 권위를 잃은 존재이기에 숭배감을 못 가지는 것이다. 최참판댁의 최치수를 하늘같이 생각하는 것은 그가 농부들에게 다정스런 지주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만하고 조금치의 접근도 불허하는 양반의 권위 의식 때문에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준구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비록 농부들이 권하는 농주를 받아 마시기는 했지만 그의 행동이나 입음새는 사치스럽고 깔끔했다. 아는 것도 많아서 서울의 신기로운 얘기며 농부들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높은 벼슬의 사람들과 사귄 이야기, 그것은 모두 농민들에게 존경심을 일게 하는 것었는데 그런 양반이 농주를 마다 아니하고 마셔주며 넓은 도량을 보여주는 데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참판댁 나리라믄 어림이나 있는 일이건대."

한편 농민들을 두둔하고 양반들을 깎아내리는 말을 준구가 할 때 '개멩한 양반은 우리 편인가?' 막연한 의문을 품으면서도

", 세상이 이잔 그리 돌아가는가? 글만 잘하고 제 똑똑하믄 상사람도 벼슬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된다고?"

"나락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지체 높은 가문에서 호의호식으로 컸을 긴데 그런 긴피 하나 없고, 아이 알고 어른알고, 그기이, 다 예삿일 같지마는 쉽지 않은 일이구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건대?"

늙은 농부는 나이 대접하여 깍듯하게 대해주는 것이 고마워서 칭찬했다. 자연 준구를 칭찬하다 보면 치수를 헐뜯게 되는 것이 인심이다.

"가문 좋겄다 재물 있겄다, 그러고도 벼슬 한자리 못 허니 불출이지, 불출이라."

"가문 좋으믄 뭐하노. 재물 있어도 소용없다. 당자가 잘나야 재물이고 가문이고 빛이 나는 거지. 바리바리 서울로 실어올 리도 지 못난 데야 우찌겄노. 할 수 없제."

"서울 그 나으리는 장차 멋을 해도 한자리 해먹겄더마. 사람이 그만하믄 키가 좀 작아 탈이제 인물이야 좀 좋은가? 선골이란."

마을과는 딴판으로 최참판댁 집안에서는 준구의 처지가 좋은 편은 못 되었다. 윤씨부인이나 최치수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어 도외시하거니와 노비들은 내막을 알지 못하면서 상전이 달까와하지 않는다는 그 기색에서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준구를 꺼림칙한 존재로 치부하고 있었다.

"이런 말 할 거는 아니지마는 좀... 아무리 친척이라고는 하지마는 갈아입을 옷 한벌 없임서 양복인가 홀태바진가 남 안 입는 옷을 먼지 입고... 우리 서방님께서도 안 그러시는데 해 내놓은 옷이 어찌나 까탈을 부리시든지 고운 때만 묻어도 벗어 내놓으니 모시옷 수발이 어디 그리 쉬운가."

봉순네는 조심스럽게 불평을 했다. 삼월이 역시

"그러게 말이요. 와 그런지 처음부터 주는 거 없이 밉더마요. 얼굴은 뭐 핥아놓은 죽사발맨치로 미끈하지만."

"아서라 입정이 그래서 쓰나."

"귀녀는 이마가 번듯하고 살빛이 희어서 잘생긴 인물이라 카지만 남자란 어글어글한 데가 있어야... 손은 와 그리 여자 같고 다리는 또 얼매나 짧십디까."

"내림인가배. 돌아가신 노마님께서도 다리는 짧으싰는데."

"우리 서방님이사 성미가 무서바서 그렇지, 키가 훤칠해서 도포 입으시고 통영갓 쓰시고 나시믄... 남자란 얼굴보다 풍신이 좋아야."

"옷맵시야, 그렇지. 왠간해도 입으시믄 번치가 나니께. 마님께서도 그러시지마는."

"그런데 머하러 오시서 저리 안 가지요? 서울에서는 멀 하싰는고요."

"그러게... 김서방 말이, 집안이 쑥밭이라고만 하더마."

행랑 하인들 역시

"서울 못 가실 사장이 있어 피신오싰으까."

"그러세... 연한 배같이 사글사글하기는 하더라마는."

"와 아니라."

"한데 끼름하니."

"속을 모른께 그렇지."

"아무리 어진 사램이라도 오만 사램이 다 좋을 수만은 없세. 헌데 그 양반 마을에 내리가시믄 아이도 좋다 어른도 좋다, 종사치기들하고 농주까지 마시니, 머 개멩이 되믄 양반 상놈이 없어진다 하심서 등을 쓸쓸 만져주는 것같이 한다카는데 보통으로 능수능란한 사램이 아닌가배."

이러는 중에서 다만 삼수만은

", 사람대접 해준께 흥감해서 그러누마."

하고 핀잔을 주었다. 한번은

"우리 상전가? 와 그리 떠받치고 치키들고 해쌌노."

대수롭지 않은 복이 말에

"네놈은 자손만대까지 종 노릇만 하겄다."

삼수 입에서 대뜸 말이 튀었다.

"머라꼬?"

"와 듣기 싫나? 나는 듣기 좋아할 줄 알았는데 와 듣기 싫노."

복이는 씩씩거렸다.

"그 양반이 괴팍을 안 부린다 캐서 숭 될 리아 머 있이며 노비나 상놈들을 사람 대접 해준다고 그기이 허물 될 거는 머 있노, ?

그래 양반끼리라믄 또 모르겄다. 종놈인 니 아가리서 너 어째?"

"아따, 싱갱이할 거 머 있노? 삼수 니도 피올릴 거 하낫도 없거마는,그만두어라."

돌이 말리었다.

"피가 오른다! 개돼지맨치로 천대를 받아야만 돋보이고 벌벌 기고, 그래 성루 나리가 상하 구별 없이 대해준다고 괄시를 하는 너거들 심보는 평생 종질밖에 더하겄나! 천년만년, 자손만대까지 종살이나 해처묵을 놈들 아니가!"

"놈들이라니?"

나이 십여 세나 많은 수동이 눈을 부릅떴다. 삼수는

"누가 박서방보고 그러요."

하다가 자리를 훌쩍 떠났던 것이다. 치수는 어제 저녁때 장암선생 문병 간다고 떠나서 밤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나절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준구는 사랑 대청에 무료하게 앉아서 내려앉을 것 같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준구는 이곳에 오래 있고 싶어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전과 같이 또 어려운 청을하러 오셨나 생각하신 게지요.' 했을 때 이동진도 옆에 있고 해서 '이번에는 그런 일로 온 게 아니구, 아무리 집안이 망하여 풍찬오숙이기로 거듭 체모 없는 청이야 드릴 수 있겠나...' 하기야 했으나 실상 준구는 채귀에 쫓겨 도망온 것이다. '어딜 간다? 날씨도 이 모양이니.' 치수가 없어서 느끼는 해방감보다 그는 적적함을 더 이기질 못했다.'옳지! 그 늙은이한테 가보자.' 준구는 김훈장을 퍼뜩 생각해냈던 것이다. 마을길에서 그를 만나 인사를 나눈 일이 있다. 머리를 깎은 것을 보고 다소 못마땅해하기는 했으나 자기 지체에 대해서는 충분한 경의를 표해주었다.

준구는 마을로 내려가서 지나가는 아이에게 김훈장댁이 어디냐고 물어 그의 문전에 이르렀다.

"일 오너라아!"

아무 소리가 없다. 헛기침을 한번 하고 나서

"일 오너라아! 거 누구없느냐?"

이때 김훈장의 꼿꼿한 모습이 문간에 나타났다. 조준구를 본 그는 가랑잎 같은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웬일이시요."

"하 답답하여 담소나 할까 하고 찾아왔소이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누추한 곳을. , 어서 드십시요."

명색뿐인 사랑으로 인도하는 김훈장은 몹시 허둥대었다.

"신겸노복의 처지라 이, 이거 예가 아니외다."

적잖게 감격하고 한편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서당도 되고 사랑도 되는 대청 하나가 따른 두 칸 방에는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객인과 대좌한 김훈장의 몸가짐은 단정했다. 아까 답답하여 담소나 하러 왔다는 준구의 말을 분명 듣기는 들었으나 너무 졸지간이어서 행여 딴 볼일이 있지나 않을까 생각했음인지 김훈장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긴장이 된다. 김훈장은 우선 형식이나마 준구에게 담배를 권했다.

"못합니다."

못하는 것은 사실이나 준구는 연소자로서 공손하게 사양한다. 이때 장독을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방안이 캄캄해진다. 김훈장은 방문을 열어젖혔다. 하늘에는 시커먼 구름이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

"단비올시다."

준구는 더욱더 겸허하게 말했다.

"시절만 좋으면 향촌의 살림은 걱정이 없을 것 같구먼요."

"글쎄올시다."

하다가 김훈장은 윗문을 열고 안을 향해

"여기 상 내오너라! 거 매화주가 있을 게다."

하고 딸아이에게 이른다.

"이거 송구스럽소. 너무 무료하여 왔더니만 패를 끼치오."

"별말씀을, 누추한 곳을 찾아주시니 고맙소."

"이곳에 와서 여러 날을 지내고 보니 묻혀사는 선비들 뜻을 알 것 같소. 산천이 좋고 인심이 후해서..."

"욕심만 없다면, 허나 한이야 없겠소. 모두 부실한 자손들이지요."

"세상이 어지러워 기개 있는 선비들이 어찌 양명하겠소."

그 말은 김훈장에게 위로가 된 모양이다.

"원래 비재천학하여 소생은 아예 벼슬길을 바라지도 않았소만 촉망했던 문중 사람이 뜻을 펴지 못하고 단명하여 가버렸으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지요. 웃마을의 김진사는 생의 재종이었소."

잠시 말을 끊은 그의 얼굴에 순간 자랑스러운 빛이 지나갔다.

"신언서판이 분명하고, 이십 세에 등제하여... 가문을 빛낼 줄 알았더니 그만 요절하고 말았소이다."

눈에 눈물이 글썽 돈다.

"살아 있었으면 소생보다 다섯이 아래니 마흔셋... 그 사람 유복자마저, 아비의 뜻을 이을줄 알았는데 이십이 못 되어 가버리고... 청상의 두 분이 남아서 기가 막히지요."

하면서도 김훈장은 자신에 관한 일은 입 밖에 내지를 아니했다.

"허 참, 그거 애석한 일이구먼요."

마침 술상이 들어왔기에, 김훈장은 처음 맞은 객인에게 아니 할 말을 했다고 느꼈음인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매화주올시다, 벽촌의 술이 입에 맞으실지."

 

술을 따라 준구에게 권한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술이 거나해지자 그들은 차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터놓기 시작했다. 김훈장은 준구의 상투 자른 것을 마땅찮아하는 뜻을 비치게끔 되었고 준구는 준구대로 그의 장기인 시국 얘기를 들고 나오며, 최치수에게보다 조심성 없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술 탓도 있고 애당초 촌로로 얕잡아본 속마음 탓도 있었다.

"지금 이 나라 형편은 꼭 맛있는 고깃덩이 같은 거요. 나라라 해도 좋고 왕실이라 해도 좋은데, 뺏고 빼앗기고 쫓기고 아귀 싸움이요. 찢어질 지경이지요. 이런 판국이니 외인들의 활개짓 하기가 오죽이나 좋겠소? 광산 채굴 이다, 철도 부설권이다, 심지어 삼림의 벌목까지 내맡겨 그네들 배만 불려주고 있지 않소. 그게 다 누구 잘못인지 아시오? 수구파의 잘못이란 말씀이오. 수구파가 나라를 망해먹은 거요. 진작부터 문호를 열어놓고 그네들의 앞선 것을 눈치껏 배웠더라면 이 지경은 되지 않았을 게요. 소생은 생각이 있어서 남의 나라 글을 읽고 그네들 형편을 많이 연구해 보았지만 이래가지고는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을 게요. 진작부터 했어야 할 양병을, 뒤늦게 포대다 총포다 외국인 연군 교사를 초빙한다, 그래가지고 뭐가 되겠소."

준구는 잠시 말을 끊었다. 무슨 생각을 했던지 몹시 심각해지더니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 그렇지요. 총포다 외국인 연군 교사다 하고 말이요. 사후 약방문 아닙니까? 송두리째 먹히게 된 마당에서 허둥지둥한다고 될 일이오."

김훈장은 어리벙벙한 얼굴이다. 뭐라고 말을 하여 의견을 내놔야 할 터인데 김훈장으로서는 국사를 논할 만한 상식이 없다. 그가 지닌 것이라고는 백 년 전의 상식일 뿐 오늘의 상식, 그도 본바닥 서울서 묻혀온 실감나는 준구 이야기에 쉽사리 뇌동할 수도 없고 반박을 할 수도 없다. 비는 줄기차게 퍼붓고 있었다. 준구는 빗줄기를 내다본다. 처음과 달리 시국 이야기에 흥미를 잃은 얼굴이었다. 빗줄기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빨리 멎어주었으면 하고, 맥 빠진 어투로 이야기를 잇는다.

"어쨌든 앞으로는 남의 나라에 나가서 견문을 넓혀오거나 아니면 국내에서라도 세계 정세에 민첩하고 선진국의 문물제도에 소상하지 않고는 행세하기가 어려울게요. 덮어놓고 추종이다 망국풍조다 할 게 아니라 바로 그 점에 있어서는 일본이 선수를 쓴 셈인데 하잘 것 없는 섬나라가 대국 청나라 세력을 꺾고 지금 아라사하고 겨룰 수 있는 것도 그네들이 진작부터 문호를 개방하고 약삭빠르게 서양 문물제도를 들여오고 최신 무기로 준비를 갖추어 양병에 힘쓴 탓이오. 그러니 그네들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게지요. 게다가 백성들에게는 그네들이 우월하다는 것을 힘으로 보여주었고 우리는 왜구니 어쩌니 하고 업수이 여기려 하나 그것은 허세요. 의병의 봉기 따위는 짚둥우리의 아우성에 불과할 거란 말이오. 우리도 약삭빠르게 그네들한테서 뺏을 것은 뺏고 양보하면서 얻어내고 힘없는 자존심 같은 게 무슨 소용이겠소? 앞으로 보십시오. 일본이 아라사를 쳐넘길 게요. 아라사는 덩치만 컸지 허한 나라요. 청국같이 노대국이거든. 일본을 말할 것 같으면 신흥국."

준구는 혓바닥에 익어서 줄줄 나오는 말을 그대로 계속하면서 가늘어진 빗줄기에 마음이 가 있다. 엉거주춤 묘한 얼굴이던 김훈장에게서 확실한 반대 의사가 나타나기로는 의병의 봉기 따위, 짚둥우리의 아우성, 그 말이 준구 입에서 나왔을 때부터였다. 드디어비가 멎었다. 준구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

", 이거 너무 말이 길었소이다."

"별말씀을, 폐를 끼쳤소."

김훈장은 문밖까지 준구를 배웅해왔다.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이...' 문밖에서 다시 인사를 나누며 김훈장은 생각했고 '총포... 외국인 연군 교사... 그렇지, 한번 권해볼 만하군.' 준구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작달막한 다리를 급히 떼놓아 마을길을 내려간다. 그새 메말랐던 땅에는 빗물이 흠씬 스며들어 그렇기도 하려니와 급히 가면서도 조심성스런 준구는 흙물 한방울 버선에 적시지 않고 최참판댁까지 왔다. 사랑 신돌 위에는 치수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빗길을 왔을 리는 만무였다. 준구가 나간 뒤 곧이어 치수가 화심리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준구는 잠시 멈추어 섰다. 흔들리는 파초 잎에서 빗방울이 구르며 떨어지고 있다.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얼굴에 닿는다. 숨을 가다듬은 준구는

"돌아왔구먼."

하고 방문을 열었다. 치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병세는 위독하시던가?"

"..."

준구는 치수와 마주보고 앉는다.

"무료해서 김훈장인가 그 사람 집에 다녀왔지."

"..."

"아무래도 자네 몸을 좀 다스려야 할 것 같단 말이야. 약도 좋겠지만 몸을 단련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그래서 생각했네만 사냥을 해보는 게 어떨까?"

"사냥요?"

", 전에 해보았나?"

"옛날에 좀 해보았지요."

"그때는 번거로웠을 게야. 몰이꾼 생각 말구 단촐하게 할 방법이 있지. 엽총으로 말이야."

"엽총?"

"거 포수가 가지고 다니는 그따위 화승총 말고 아주 좋은 엽총을 입수해서, 그 사냥 재미가 보통 아니더구먼, 나도 서울서 외국 사람들을 따라가 보았네만 아 여긴 지리산이 가깝겠다 사냥터론 좀 좋은가."

"좋은 엽총이라구요?"

치수의 눈에는 완연하게 흥미스런 빛이 떠올랐다.

"값이야 고가겠지만 외인들에게 부탁하면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게야."

 

 

16. 구전

십육칠 년이 넘는 지난날의 일이다. 물론 봉순네가 봉순이를 낳기 훨씬 전이다. 민란에 가담하여 쫓기는 처지요, 본시부터 역마살이 들었던지 바람 잡아 나간 남편이 기여 여자까지 거느리고 종적을 감추어버린 뒤 기약도 없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봉순네가 최참판댁 침모로 몸 붙여 있을때, 그날 밤은 드물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느질하는 봉순네에게 물레질을 하면서 간난할멈이 들려준 얘기에 의할 것 같으면 최치수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것은 스물한 살 적이며 뒤꼍에 알밤을 묻느라고 한창 법석을 떨었던 늦가을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 밤 일은 진저리가 치인다."

끊어진 무명올을 이으면서 간난할멈은 으스스 몸을 떨었다.

"우리 김서방(그의 남편)은 그때 집안을 도맡은 수동이아배 박서방을 따라서 구례에 가고 없었지. 우찌 일이 그리 될라고 그랬던가... 날씨는 종래없이 바램이 불고 칩더마. 꼭 이월 바람할매 내리올 때맨치로 으실으실 칩더마, 박서방이 있었어도 그리는 안 됐일기든가. 초지녁부텀 애기가, 그러니께 지금 서방님이지. 막 돌을 넘긴 그런 땐데 서방님은 나시믄서부텀 실하지를 못해 늘 골골거리싰지. 첫아드님을 잃어버린 뒤 나신 애기고 게다가 원치 자손이 귀해서 머리만 따따무리해도 집안이 슬렁슬렁했네라. 그날 밤은 초지녁부텀 우찌나 애기가 보채든지 아씨하고 나는 번갈아가믄서 재우느라 땀을 뺐지. 한참 실랭이를 하다가 게우 잠드는 거를 보고 난 뒤 별당 건넌방으로 물러나와 가지고 잠을 한잠잤이까? 대숲 쪽에서 개들이 수지야지를 떠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지는데 전신에 찬 바램이 휭불더마. 울부짖고 금방 창자가 끊어지는지 죽는 소리를 지르고 대숲이 떠나갈 거 겉고, 말이 개라 카지마는 이만저만한 개라야제? 덕채 겉은 큰놈이고 심이 세기로 법 겉은 놈인데 그눔으 개 두 마리가 굿을 치는 기이 예삿일 아니라는 생각이 안 들었겄나? 아씨께서 놀래시겄네, 건너가봐얄 긴데, 아음은 그러지마는 당초 오금이 떨어져야제. 턱이 덜덜 까불리고 멋이 방문을 박차믄서 달기들 것 겉고, 용을 바짝바짝 쓰믄서 가까스로 아씨방에 갔더마는 아씨는 잠이 든 애기 옆에서 바느질을 하고 기시더마. 아씨가 무서바하실까 바서 내가 갔는데 심상한 아씨를 보니께 도리어 내 무섬증이 달아나지 않았겄나? 그때부텀 나는 아씨를 범연한 분이 아니시라 생각했지. 담이 크시고 싫고 좋은 것 낯색으로 나타내시지 않고... 그래 내가 아씨 저눔으 개들이 와 저리 굿을 치는 지 모르겄소, 하니께 아씨는 아무 말심 안 하시더마. 말이 개라 카지마는 덕채 겉은 개 두마리가 저리 수지야지를 꾸니는 거를 본깨 아무래도 산신이 왔는깁십니다, 그러니께 아씨 말심이 그러게, 큰 짐승이 내려왔나 부다, 정성이 부실해서 그런가 보군. 아닌게 아니라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한거는 아니네라. 와 그런고 하믄 마침 그날 마님하고 함께 아씨는 절에서 막 돌아오싰거든. 애기 수명장수를 빌어서, 불공을 디리고 돌아오신 뒤끝이었으니께. 우예 맘이 섬뜩하고 흉사가 있일 거 겉고. 그렇다카더라도 정성이 부실했십니다 할 수 없는 일 아니가? 해서, 그럴 리가 있겄십니까. 네 발 가진 짐승이 어딘들 안 댕기겄십니까. 하기는 하는데 죽어 자빠지는 거 겉은 개 울음 소리는 머리끄뎅이를 당그라매는 거겉이 무섭데. 앉아서 꼬박이 밤을 안 샜나? 나중에 들었지마는 안에서는 마님께서도 못 주무시고 밤새 염불만 모싰다 안 카나."

"그래 정말 산신이 내리왔던가요."

봉순네 묻는 말에

", 차라리 개라도 물어갔임사?"

"그라믄 사람을?"

봉순네는 하던 일손을 멈추고 간난할멈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것도 아니고, 그래 내가 아침이 돼서 밖으로 쫓아가는데 이기이 우찌 된일이고? 바로 별당 중문 앞에 개 두 마리가 쭉 뻗어져 누워 있지 않았겄나? 똑죽은 줄만 알았던 그눔으 개 두 마리가, 아씨! 이눔 개들이 자빠져 자고 있심다! 엉겁결에 소리를 질렀지. 아씨는 기우시 내다보시더마. 나는 개가 성해서 들어온 기아 하도 신기스럽고 우찌 좋든지 이눔 개야! 안 뒈졌고나 하고 발로 툭 찼더마는 대가리를 치키들고 나를 보는데 시상에 내사 그런 무선 개 눈깔은 난생 첨 봤구마. 시뻘개가지고 눈까리가 터져부린 거겉고 밤새도록 송장이라도 뜯어묵고 온 거맨치로... 일은 그 다음부텀 터진기라. 한나잘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지. 그러니께 지금 우리맨치로 뒤채에는 수동애비 박서방이 나가 살고 있었는데 해나절 쯤해서 뒤채 쪽이 두신두신하더마. 한데 누가 알었이야 말이제. 까매기겉이 몰랐네라. 세빠질 놈들이(하인들) 대숲에 죽어 자빠진 노루를 본 기라. 그거를 보고 눈까리 뒤집어진 그 세빠질 놈들이 놓은 일 한 거는 알 바없이 개가 창자를 파묵다 둔 중송아지보다 큰 노루를 뒤채에 메들있다 안카나 . 박서방은 없것다, 박서방댁도 애을 없고 안에 와 있었것다. 서방님도 진주 나가신 지 여러 날 되시것다. 별호천지, 아무것도 꺼릴낄기이 없었이니께. 한데 저희 놈들이 몰랐일 뿐이지 서방님은 그새 돌아오시서 사랑에 드싰든가배. 세빠질 놈들이 노루개기에 환장해서 몰랐던 기라. 다 일이 잘못될라고 그랬던가... 그래 뒤채에서 하도 두신거리니께 서방님이 나가보신 모양인데, 우너치 그 양반 나이깐에는 호협한 분이싰지. 지금 서방님하고는 영 딴판이고 어굴어글하게 생기신 분이 뼈대가 장대하시고 글도 좋으싰지마는 사냥도 즐기시고, 이십 전에 벌써 진주까지 나가시서 기생방을 드나들었이니 엔간이 조달하시기도 했제. 그래 그렇든지 세상물정에 능통하시고 사람 다루는 법도 대단하시고 하인들을 꾸짖으시는 일이 없는 대신 이따금씩 우스개 비슷이 말심하심서 잘못을 알아차리게 하시더마. 동네 어른들이 늘상 말심하싰지. 청탁을 가리지 않는 거를 보아 능수능란하느니 그릇이 커서 참판어른 증조부맨치로 장차 큰 벼슬길에 오를 거라느니 하고 노마님께서도 일구월심 손주 벼슬에 오르시어 금의환향하실 날까지는 사시야겄다고 소원이셨고, 다만 호협한 서방님 성품을 근심하시더마. 그런 서방님이 뒤채에 나가시니께 우찌되었겄노? 노루 개기를 처묵던 그 세빠질 놈들이 주녁이 들어 아가리에 개기가 들어갔겄나? 서방님이 웃으시믄서 누가 노루 사냥을 했느냐고 물으신 모양이라. 그래 나잇살이나 묵은 쇠돌이가, 지금 삼수할애빈데 그때 서른은 더 넘었일 기다. 우리 김서방보다 한두 살위였으니. 쇠돌이는 어릴 적에 서방님을 업어주기도 했이니 다른 놈보담이사 덜 어려바 했겄지. 그래 쇠돌이가 사냥은 개가 했심다, 하고 대답을 하니께 서방님께서 짐승이 잡은 것을 창골들이 모여 앉아 먹으니 자네들 염치도 좋네, 하시니께 그 세빠져 죽을 놈들도 주텩이 풀릴 거 아닌가. 방정맞기도 하지, 쇠돌이가 무심결에 개기를 권했다 안 카나, 어릴 적에 밤도 줏어다 디리고 했이니 지도 무심해야 했겄지. 서방님이사 머가 기러바서 개기를 드싰겄노? 쇠돌이가 무안 탈까봐서 잡수신거지."

"저거를 우짜노? 그러시는 거 아닌데 불공 디리고 나서 우짜실라고."

"와 아니라. 그저 그놈들이 직일 놈, 그 놈들이사 부처님도 개로 치부하겄지마는 서방님도 배맨하싰지. 하기사 안에서 하시는 일 밖에서 아실 턱도 없고, 또 선부들이 절을 어디 좋아하시건대? 중을 알기로 머맨치로... 추굴 받으신 거라. 그날 밤 당장에 동티가 나는데 집안이 물끓듯 안 했나? 당장에 말문부텀 맥히고 복장을 치고 잡아뜯고 하심서 숨을 몰아쉬는데, 말도 마라. 눈에 심이 찌어서 못 보겄더마. 오밤중에 이원이 오고, 그때는 문이원말고 하이원이라고 선대 때부터 댕기시든 이원인데 아무 소용없더마. 노마님께서는 늦게사 노루 얘기를 들으시고 그만 까무라치싰지. 세상에 영신 없다고는 천하없이도 말못하네라. 그때 내 눈으로 똑똑히 안 봤나? 하모 봤지러. 새북에 정기에서 미움을 쑤는데,"

간난할멈음 물레질을 멈추고 얼굴을 찡그렸다.

"미움을 쑤어가지고 솥뚜방을 여는데 세상에도 그리 해괴망칙한 일이 어디 또 있겄노."

봉순네는 침을 꼴딱 삼킨다.

"아 그러세, 거짓말 하낫도 안 보태서 신짝만한 지네가 한 마리 미움 속에 삶기 있더라니께."

"지네가!"

"눈앞이 막막하고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더마. 그러니께 아무것도 목에 넘기지 말라는 추굴이제. 가슴이 벌렁벌렁 뛰더마는 우짜겄노. 다시 허불며떠불며 쌀을 갈아서 미움을 쑤었지. 그걸 가지고 갔더마는 잡수기는 어디로 잡사? 떠넣어도 그냥 입가에 흘리시믄서, 한낮이 지날 때쯤 해서, 숨을 거두시데. 노마님은 땅을 치시다 그만 까무라치고 마님하고 아씨는 넋이 나간 사람맨치로, 참혹해서 그 정상을 우찌 보겄디노. 그 길로 삼수할애비 쇠돌이는 상수애빌 두고 제 목을 매달아 안 죽었나. 심은 고운 사램인데 우짜다가 그만... 그거를 생각하믄 삼수놈이 불쌍해서 코도 닦아주고 임석도 생기 먹이고."

"그라믄 삼수아배는 우찌 됐소?"

"그놈? 모르제... 어디서 내질렀는지 핏덩이겉은 삼수놈을 행랑방에 넣어놓고 달아났제. 나이라 캐야 열여덟밖에 안되는 놈이 처녀를 건디맀든가 아니믄 아 에미가 죽었든가, 클수록 삼수놈은 지애빌 빼썼이니께. 씨는 틀림이 없는가배."

이야기가 빗나간 것을 깨달은 간난할멈은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서 개 두 마리는 때리잡고 그런 다음부터 개를 안 기르누마. 노마님은 그 길로 중풍이 들어 한 해를 누워 계시다 돌아가시고,"

이밖에도 간난할멈은 최참판댁이 살림을 이룬 내력을 자세하지는 않았으나 대충 들려주었다. 살림이 일기로는 최참판의 모친 때라 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남편과 사별한 청상과부로서 다만 그의 힘으로 오늘의 기틀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께 옛적에는 가문이 좋기는 해도 기찹았던가배. 참판어른 조모님이 살림일기를 소원해서 육경신을 하싰더란다."

"그거 예사 사램이 예사 정성으로 못한다 카든데,"

"하모, 예사 정성 가지고는 못하제. 일 년에 여섯 분 하는데 안 묵는 기사 말할 것도 없고 한 분이라도 꼬박 자불기만 하믄 뒤꼭대기서 신관이 지키고 있다가 사늘에 고해바치니께 다 허사제. 수울한 짓이라믄 안 할 사램이 없게? 그래 그랬던지는 몰라도 살림이 일기 시작했는데 참판어른 어무님이 대단한 분이든갑데. 피가 나게 살림을 모았다더마. 한 대를 뛰어서 지금 아씨, 아니 마님이, 하기사 친정에서 짓덕도 많이 자지오싰지마는 영민한 분이라 인심항 잃고도 살림은 더 많이 컸지. 한 때씩 섞바꾸어감서, 그러니께 참판어른 어무님 때하고 며누님 때하고 증손주며누님, 이렇게 세 분인데 우찌 그리 한결같이 청상이고 외아들이신고, 생산은 더 못하신 것도 아닌 모양이지마는 자손이 질이질 못했는 갑더라. 하기사 낳는 쪽쪽 다 기르는 그런 복많은 사램이 흔한가? 우쨌든 간에 그 위의 조상님 일은 모르겄고지금 서방님이 오대독자구마. 노마님께서는 절에 가시서 치성도 많이 드리싰고 뒷산에다가 삼신당을 모아 지극한 정성도 올맀지마는 자손 귀한 것만은 인력으로 안되는 모양이라."

"그라믄 서방님 아버님께서는 그리 돌아가싰지마는 할아버님께서도 일찍 돌아가싰소?"

"그 어른도 삼십 안 적에... 처가가 서울 조씨 가문 아니가. 서울서 오시는 길에 낙마하시서 그 길로,"

간난할멈은 그 일에 대해서는 떨떠름해하며 더 깊은 이야기는 피하는 듯싶었다. 봉순네가 들은 선대의 사인 이외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은 참판의 조모님이 육경신을 했다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마을에 전해 내려온 이야기는 좀 더 상세했을 뿐만 아니라 해괴한 것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갔으나, 그렇기 때문에 최참판댁 내력은 전설이 되었다. 공공연하게 들추어질 수 없는 성질이었음에도 마을을 둘러싼 숲이나 강물, 들판에 되풀이 찾아오는 사계절처럼 되풀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 마을의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최참판의 어머니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 중 된장 속의 구더기를 방벌렌데 어떠냐하면서 빨아먹고 버렸다는둥 오밤중에 노비를 모조리 강가로 내몰아서 밤이 새도록 후리질을 시켜, 잡힌 물고기를 장에 가서 팔아오게 했다는 둥 겨울이 되면 늑대 같은 안늙은이가 잠 한숨자지 않고 방방이 돌아다니면서 아궁이마다 불을 지폈는지 안 지폈는지 살폈으며 냉방에서 떨며 새우잠을 잔 노비들을 날도 새기 전에 두드려 깨워 나뭇단 실어 장에 팔러 보내고 산에 나무하러 보냈다는 둥 메주 쑬 때는 메주 먹는다고 밥을 안 주었으며 김장 담글 때는 김치 먹는다고 밥을 안 주었다는 둥 모두 지독한 구두쇠임을 나타낸 것들이었다. 몇 해 전에 죽은 봉기의 조부가 어릴 적에 제 눈으로 보았노라 하며 한 말도 역시,

"한 분은 이런 일이 있었제. 그 해는 가뭄이 들어서 괴불을 내걸고 중들이 수룩을 하는데 지나가다 구겡을 하고 있는 등짐장사 둘이 하도 배고픈 얼굴을 하고 있이니께 중이 밥을 주었다 말이다. 그랬더니 어디서 날아왔는고 할망구가 쫓아솨서 바리때를 빼앗더마. 그래가지고는 밥을 착착 보시기에 부어버리더니 바리때에 물을 가시서 홀랑 이녁이 마시부리고 허는 말이 이리 날이 가믄데 곡식이 금탕겉이 귀한 줄 모르고 아무한테나 밥 주느냐, 그래서 중이 그만 얼굴이 뺄개져서, 허참 그래가지고도 삼악도에 안 떨어졌다믄 세상에 영신이 없는 거지."

이 정도면 있음직한 일이다. 그러나 황당무계한 얘기를 마을사람들은 더 좋아한다.

"종년이 하도 배가 고파서 쌀을 씻다가 쌀 한줌을 집어묵었더란다. 그것을 본 할망구가 방맹이로 종년 뒤꼭대기를 때맀다 안 카나. 살이 동해서 그랬던지 종넌은 그만 급살을 했는데 그 원귀가 최씨네 지붕 땅 모랭이를 돌다가 하나 있는 손주, 그 씨종자에 붙어 부린 기라. 별안간 주하고 사하고 눈을 까집고 집안이 수라장이 되었는데 봉사가 오방신장을 불러내고 육호를 빼고 정문을 친께 구신이 나타나더란다. 그 종년이지 머. 그래 봉사가 정문을 막 치믄서 소수를 대라고 소리소리 지르니께 이리저리해서 방맹이 맞고 억울케 죽은 혼신이라 하더란다. 그래 회원굿을 크게 해주고 천도를 시키주어 게우 씨종자 하나는 구했다 카더라마는,"

"그 그 할망구는 죽어서 구링이가 됐다 카더마. 종년이 쌀뒤주에 쌀을 내러 간께 쌀뒤주 밑에서 말이다, 조깬썩 하는 소리가 나더라 안 카나. 그래 본께 누우런 대맹이가 있더란다. 종년은 그만 화통이 터져가지고 살았일 적에도 밤낮 조깬썩, 조깬썩 하더마는 죽어서도 조깬썩 조깬썩! 하믄서 쓿는 물을 확 찍티맀더란다. 등이 홀딱 뱃기진 대맹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집안을 돌아댕깄다 카는데 지금도 그 등이 뱃기진 흰구딩이가 집찌꺼미로 있다 안 카나."

이런 말이 최치수 증조모 귀에 들어가서 벌설한 아낙이 죽도록 맞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내용보다 최씨네 가문을 멍들게 한 것은 다음의 이야길 것이다. 어느 해, 마을에는 가뭄이 들었다고 했다. 들판은 누우렇게 타버리고 강물은 말라서 고기들이 말라죽는 무서운 가뭄이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기민 쌀을 내었으나 그것도 한도가 있는 일, 길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나동그라지고 그것을 파먹는 짐승조차 얼씬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 최씨네 고방에 쌓인 곡식은 그네들, 굶주린 농부들의 전답문서하고 바꾸어졌으며, 석 섬 나는 논 한 마지기는 몇 말의 곡식으로 둔갑을 했어도 조상 전래의 땅이 없어지는 설움보다 당장 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했다는 것이다. 이때 자식일곱을 거느린 과부는 가물가물 정신을 잃어가는 자식들을 보다못해 죽물이나마 목을 축여주려고 바가지를 안고 기다시피 최씨네 문전에 가서 애절하게 구걸을 했다는 것이다. 전답문서와 바꾸어지는 금싸라기 같은 곡식이 나올 리 없었고 과부는

"오냐! 믹일 기이 없어서 자식새끼 거나리고 나는 저승길을 갈기다마는 최가놈 집구석에 재물이 쌯이고 쌯이도 묵어줄 사램이 없을긴께, 두고 보아라!"

저주를 남기고 굶주려 죽은 과부와 그 자식들 원귀 때문에 최참판댁에 자손이 내리 귀하다는 이런 구전으로하여 한시절 전까지만 하더라도 청빈한 선비들은 이 마을에 들어서면 강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고래등 같은 최참판댁 기와집을 외면했고 최씨네의 신도비에 침을 뱉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말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 많은 재물을 쌓은 이면에는 죄악의 행위가 있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랑 대청에 치수와 준구는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다. 바둑판에 바둑 부딪는 소리가 들릴 뿐 무더운 한낮은 조용했다. 뒤뜰 처마밑에 서서 길상은 흘러가는 구름을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참말이제, 저 구름은 어디로 가는 길까? 와 사람은 저 구름을 타고 갈 수 없이까? 구름을 탈 수 있이믄 노스님 한분 만나보로 갔이믄 싶다. 이놈 길상아! 곡식 한알이라도 아낄 줄 모르믄 후일 배고파 울 날이 있으리니 하시더마는.' 우관스님이 못견디게 그리웠다. 엄하고 무서운 노스님이었다.모두들 그의 앞에서는 떨었고 길상이도 떨었다. 그러나 길상이 세상에 나와 맨 먼저 기억한 얼굴은 어머니 아닌 우관스님이다. 김서방댁 채마밭 사잇길을 귀녀가 지나간다. 구름을 보다가 길상은 자주댕기가 흔들리는 귀녀 뒷모습을 바라본다. 발을 내려놓은 사랑 대청에서 바둑을 두던 치수도 발을 통하여 아른거리는 귀녀 모습을 힐끔 쳐다본다. 얄팍하고 빨간 입술, 입매를 조금 비틀며 희미한 웃음을 머금는다. 길상은 돌담을 따라 사랑 옆곁으로 나가면서 돌담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보다가 빨갛게 핀 석류꽃을 올려다본다. 다시 눈길을 돌려 둥둥 떠내려가는 구름을 본다. '노스님은 와 나를 여기 보내싰으꼬? 혜관스님은 금어가 될 기라고 하싰는데?' 우관스님은 무서운 분이었지만 다른 상좌얘들보다 길상에게 눈길을 많이 보냈다. 눈길이 슬프게 보인 것을 길상은 기억한다. 이노움! 할 때는 굵은 눈썹이 꿈틀꿈틀 움직였지만 석상을 짚고 산봉우리 중턱을 안개같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모습- '우째 그리 서러버 뵀일꼬?'

"날씨 고약하다."

바둑을 끝낸 치수는 바둑알을 모아 그릇에다 쓸어담는다.

"상당히 찌는구먼."

준구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밴 땀을 닦는다.

"산에 가보시지 않겠소?"

"산에?"

"재미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재미나는?"

준구 낯색이 좀 달라진다. 재미난다는 말에 덴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서 처음 갈보집에 끌고 갈 때 그런 말을 했었다. 산골에 갈보집이야 있을까마는 무슨 심통을 부릴런지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며 아집이 강한 치수인 만큼 안 가겠노라 할 수도 없고 불안한 것이다. 치수는 웃고 있었다. 조조가 웃음에 망했다 하던가? 최치수의 웃음도 과히 좋은 징조는 아니다. 밖에 나와서 작달막한 준구와 헐렁하고 큰 키의 치수가 누각 가까이까지 올라갔을 때 밤나무 그늘에서 또출네가 쭈그리고 앉아서 이를 잡고 있었다. 웃통은 아예 벗어젖힌 채였고 찢어진 치마밑의 아랫도리를 그냥 드러내놓고 있었다. 준구는 히죽히죽 웃다가 외면하고 치수는 무감동한 눈길을 그곳에 보내고 있었다.

"허어 이 사람아."

준구는 치수의 팔을 끌었다. 또출네 옆을 지나친 치수는

"요즘 마을로 자주 내려가신다죠?"

하고 물었다.

"글세... 하도 무료해서."

"상것들하고 대작을 하신다면서요?"

"대작?... 뭐 먹고 마시는 데 귀천이,"

"아암 그렇고말구요, 썩 좋은 일이지요."

숲속으로 들어서자 준구는 다시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오던 길을 되돌아본다. 밤나무 아래 또출네가 조그맣게 보였다.

"여기서 꺾어져 곧장 가면 삼신당이 있지요."

되돌아보는 준구의 목덜미를 되돌려 놓듯이 치수는 말했다.

"삼신당?"

골짜기를 향해 곧장 누워 있는 길에서 옆으로 꺾어든다. 한참 갔을 때 실개천, 작은 개울치고는 푼수에 넘는 돌다리가 걸려 있었다.

", 삼신당 말이오."

돌다리를 지난 뒤 치수는 준구 반문에 대꾸했다.

"삼신당이라면 자수당말인가?"

"그렇지요. 전에 오셨을 때 안 가보셨소?"

"그럴 새가 있었나? 삼신당이라면 아무데나 있는 거구."

"삼신당은 그리 흔치 않을걸요."

"글세 삼신당이고 사낭당이고 뭐 그런 구별 알아야지."

치수는 오솔길을 따라가면서

"그 삼신당은 증조모님께서 지으셨답니다."

"그래?"

"명험이 없었나 부지요."

"미신이야 미신, 공연한 짓이지."

"여기서 또 꾸부러집니다. 이 길은 삼신당 뒤로 나가는 길이오. 삼신당 앞으로 곧장 나가면 아까보다 큰 개울이 있고 거기 서낭당이 있지요. 그 개울은 여인네들 목욕하기 안성마춤인 곳이오."

준구는 마음속으로 하아, 여인 목욕하는 꼴을 숨어 보자는 건가 뇌며 실죽 웃는다. 그러나 치수는 삼신당 뒤쪽으로 돌아가자 더 이상 안 나가고 돌아섰다.

"기척을 내지 마시오."

족히 한 칸은 넘을 것 같은 삼신당 뒷벽에 치수는 준구를 떠다밀다시피 붙어서게 했다. 짐작이 엇나갔으므로 준구의 얼굴은 묘하게 된다. 떠미는 바람에 두렵기도 했던 모양이다. 제법 거리가 있는 곳에 서낭당 지붕과 빛깔이 바래기는 했으나 단청 입힌 처마끝이 잡목 사이로 엇비슷하게 보였다. 그리고 나무에 가려서 끊어지고 이어지면서 서낭당으로 이르는 길이 보였다.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치수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 보였다.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실려 있었다. 어쩌면 그 모습은 소년 같기도 했다. 편모슬하의 외아들 모습이 역력하였다. 다음 치수의 눈이 무엇을 잡은 것 같았다. 개울에서 목욕을 한 귀녀가 수건을 손에 들고 이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치수는 몸을 돌리더니 준구 곁에 나란히 등을 붙이며 섰다.

"기척을 내면 파흥이요."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한참 후의 일이다. 삼신당 앞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 쇠고리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신당 안을 저벅저벅 밟는 발소리, 마룻장 울리는 소리가 난다. 한동안 기척이 없더니

"삼신제앙님네, 목신제앙님네."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태산제앙님네, 천조랑씨제앙님네, 은조랑씨 제앙님네, 열아홉 살 묵는 김씨방성 씨종자 아들이 소원이요. 최씨가문의 씨종자 아들 하나가 소원이요."

준구는 눈이 휘둥그래진다. '최씨 가문의 씨종자라니? 저년은 귀녀 아닌가.' 곁눈질로 치수를 보는데 치수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귀녀의 축원하는 소리는 계속하여 들려온다. 아마 수없이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축원하는 목소리는 멎고 발소리는 삼신당 밖으로 사라진다. 숲속에서 팔매같이 날아가며 소쩍새는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대단한 욕심이군 그래."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다가 준구는

"아아니 이 사람아 자네 저년을 건드렸군 그래."

하고 껄껄 웃는다. 치수도 따라서 껄껄껄 소리를 내어 웃어젖힌다.

"썩 재미있지 않소?"

"허허어 참, 그년 허파에 바람이 들어도 대단하게 들었구먼."

"만석꾼 살림이 눈앞에 얼른얼른했을 게요."

"자네도 죄가 많네."

치수는 웃던 웃음을 멈추었다. 껄껄 하던 웃음은 맥이 차츰 빠져서 허허허 하다가 눈에 독기가 번득 섰다.

"그년을 내가 건드려요? 안 건드리고 바라보는 재미가 어떻다고 건드립니까?"

"?"

더 이상 부언하지 않고

"집념이요."

"...?"

"계집의 집념에는 사내가 따를 수 없지요. 욕심도 많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조그만한 욕심, 조그만한 원한, 미움만으로도 살인하는 일이 허다하죠."

"그게 무슨 소린가?"

"최씨 집안의 살림은 여자 집념의 상징 아닙니까?"

하다 말고

"내려갑시다."

돌다리 가까이까지 치수는 완강한 침묵을 지키며 갔다. 돌다리를 지난 뒤 치수는 뒤따르는 준구를 돌아본다.

"서울 올라가보시겠소?"

"?"

"엽총을 구하러 가시겠소?"

", 그러지."

준구는 엉겁결에 돌에 채여 넘어질 듯하면서도 황급히 대답했다.

 

 

17. 습격

모깃불이 타는 연기 속에, 용이는 곰방대를 문 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성긴 삼베 등지게 구멍으로 눅눅한 연기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스며든다.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에 감겨들어 기침을 하며, 용이는 연신 곰방대를 빨아댄다. 종일 논바닥에 엎드려 짐을 매어 허리가 뻐근했다. 하나 육신의 고달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삼거리 월선에게로 달려가려는 자신을 휘어잡는 일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슬그머니 일어서서 땅바닥을 오랫동안 내려다보다가 도로 주질러앉는다. 타버린 재를 털어버리고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다시 붙여문다. 십여 년 전에 타관 남자를 따라 마을을 떠나는 계집아이의 뒷모습을 보리짚단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을 때 뜨거운 것이 용이 눈에 울컥 솟았다.

"어디든 가서 잘살아라."

하며 잊어버리려 했던 월선이 십여 년 만에 마을로 돌아왔고 읍내 장터 가까운 곳에 주막을 차린 뒤 장날이면 오가는 길에 얼굴이나 바라보며 술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래던 용이가 지금은, 그러나 달랐다. 오광대놀음이 있던 날 밤 이후 월선이는 그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버렸다. 부드러운 살결과 체취는 항상 그의 곁에서 맴을 돌았다. 사내로서의 체면이 무엇인지, 뼈가 으스러지게 안간힘을 써서 발길을 끊었을 때도 그는 월선이 내 여자 아니라는 생각은 못했다. 월선이 마을을 다녀간 후 한 번 읍내에 나가 묵고 왔다. 하여 싸움이 벌어지고 강청댁이 나 죽이라고 악을 쓰며 덤벼들었을 때도 월선이는 내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보고 싶은 정이야 못 참으까. 우리는 남남이 아니니께.' 계집아이의 뒷모습을 숨어 보며 어디든 가서 잘살라고 빌던 마음이나 장날에 가며오며 얼굴을 바라보던 마음이나 그것은 모두 환상이었다. 목이 메이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마음도. 육신이 합쳐져서 처음으로 한이 무엇인가, 바위산의 한 그루 소나무며 슬피 우는 외기러기, 그런 것의 뜻도 깨달아지는 것이다.

용이는 부지런해졌으며 강청댁이 어떤 수라장을 꾸미든 눈을 가린 나귀가 연자매를 돌리듯 사랑이 희생을 낳고 헌신을 낳고 고통을 낳고 다시 사랑을 낳는, 그같이 둥근 마음의 터전을 되잡아 가면서 또한 둥근 제 생활의 터전을 묵묵히 돌고 있었다. '보고 싶은 정이야 못 참으까. 우리는 남남이 아니니께.' 한숨을 내쉰다.

"용아!"

박꽃이 하얗게 핀 울타리 밖에서 부르는 소리부터 났고 다음 칠성이 마당으로 쑥 들어섰다. 뒤에서 비치는 달빛에 칠성이 상투머리는 시커멓고 크게 보였다.

"영팔이 집에 안 갈라나?"

"개 잡았나."

"음 오래간만에 솟정 풀겄다."

용이는 곰방대를 털고 허리춤에 찌르며 일어섰다.

"우리 집 여핀네도 아즉 안 왔는데 자네 마누라도."

칠성이 방 쪽을 기웃거려본다.

"오겄지..."

"끝났일 긴데 모여들 앉아서 주둥이 까고 있는갑다."

"..."

"요새도 강짜 부리나?"

"..."

"사내가 오입 좀 했이믄, 거 너무 심하더마."

며칠 전에 식칼을 들고 나 죽어라며 덤비는 강청댁을 뜯어말린 일이 있어 하는 말인 모양이다.

"니가 물이 눅어서 그렇다. 복날 개 패듯이 나 같으믄 버르장머릴 싹 고치놓을 긴데, 계집이란 사흘 안 맞이믄 여시가 된단 말이다."

"조막만한 것 때릴 구석이 어디 있노. 그래 개를 잡았이믄 술도 있겄구나."

"설마 술 없이 개 잡았이까."

껑충하게 큰 키에 단단하게 되바라진 두 사내는 사립문을 나섰다. 앞 켠에서 떠오른 달빛에 그림자 두 개는 뒤로 길게 뻗는다. 그들은 논둑길을 따라서 걸어가고 물이 찬 논에서는 개구리가 울고 있었다. 이 무렵 두만네 집에서는 햇보리 밥에 풋고추를 넣어 얼얼한 된장찌개, 열무김치 등 정갈스럽게 차린 저녁을 배불리 먹고 따끈한 숭늉에 입가심한 마을 아낙들이 더러는 집으로 돌아가고 더러는 마루에, 나머지 몇 명이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 앉아 땀을 식히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낙들은 낮에 강가 삼막에서 삼을 쩌내고, 껍질을 벗기고, 강물에 바래고, 이 공동 작업에 땀들을 많이 흘린 데다가 제가끔 제몫의 양식을 내어 주고 지은 저녁이라서 그랬는지 양껏 먹느라고 더욱 땀들을 흘렸던 것이다.

"밤을 밝혀가면서 조복을 지었는데 무슨 청승의 잠이 그리 오던고, 종년이 조복을 다리다가 자부는 바람에 그만 깃을 태워버리지 않았겠나. 입실할 시간은 다가오고 눈앞이 캄캄해진 부인은 앞 뒤 생각 없이 대리미로 종년 면상을 때렸더라네. 부인도 부처가 까꾸로 서서 그랬겠지. 다 전생의 업이었겠지만 그만 종년이 죽었는데 엉겁결에 종년을 마판 밑에,"

함안댁 얘기는 뜸이 들기 시작했고 마루에 앉은 야무네와 막딸네는 낮은 목소리로 임이네 흉을 보고 있었다.

"두고보지? 임이네 저거, 잘살기는 글렀다. 퍼묵기로는 젤 많이 퍼묵으믄서 아침에 그 보리쌀 담아온 그릇 봤제?"

"그것도 그릇가? 접시지 접시."

야무네는 목구멍 속으로 끄럭끄럭 웃는다.

"나 임이네 제삿밥 얻어묵었이믄 소원이 없겠구마. 세상에 노리도 우찌 그리 노린고. 서방 없는 나도 갈라묵고 사는데, 말이 사랑도 품앗이라 카는데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안 있겄나?"

"안팎이 다 똑같다. 임이아배 술 얻어묵었다는 말 못 들었구마. 요전분에 서서방이 볼일이 있어서 갔던가배? 갔는데 마침 저녁을 묵고 있더란다. 밤낮 허허 하지마는 서서방 얌치바른 사람 아니가? 밥을 먹던 임이아배가 밥상의 개기접시를 등 뒤로 돌리서 숨기더라 안 카나. 서서방이 더런 놈이라고 욕을 해쌌더마. 안팎이 우찌 그리 요상케 닮았는고."

야무네와 막딸네가 멍석으로 바리를 옮겼을 때 함안댁의 얘기는 끝막음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파란 보따리를 낀 계집하고 엄덜이 총각놈이 큰대문집을 들어서는데, 들어서자 계집은 쇠방망이를 찾아들고, 총각놈은 새끼를 집어 들고, 그러더니 막 밥상을 받고 있는 그 댁 아들을 총각놈은 묶고 계집년은 쇠방망이로 막 내리치더란다. 아들은 밥 묵다가 별안간 골을 싸고 네 방구석을 매면서 까무라치고 하는데 귀신이 눈에 봬야 말이지. 그래서 나그네는 집안으로 쑥 들어갔더란다. 계집이 나그네를 보자 달아나는데 나그네가 뒤쫓아가니 마구간 마판 밑으로 쏙 들어가 버리지 않겠나? 그 댁 하인을 시켜 마판을 뜯어보니 썩지도 않고 자는 듯이 종년이 누워 있더란다. 일이 이쯤 됐으니 할 수 없지, 부인은 자초지종을 다 말할 수 밖에. 그래서 종년하고 총각놈 넋을 모아 혼인을 시켜주고 회원굿을 해주어서 원귀를 풀었지."

"그래 나그네 아니더믄 아들은 죽을 뻔했구마. 최참판댁 얘기하고 같네."

"구신도 혼자서는 일 못 쳐내는가배. 그러니께 총각놈하고 살을 섞어서 혼을 빼갔지." "

거는 그렇고 최참판네 일은 우찌 될 긴고? 벌써 반년이 넘었는데 꽁 구워 묵었는가 캄캄소식 아니가? 설마 대가댁에서 그 망신을 그냥 넘길 리는 없고, 그렇다믄 무신 조치가 있어얄 긴데,"

"씨끄럽다 씨끄럽다."

두만네가 지겹다는 듯 막딸네 말을 막았다.

"팔자라니, 안 할 말도 그렇게라도 했이니, 누가 아나? 어느쪽이든 죽어서 상사라도 붙었디믄 그거 참 큰 골벵이제."

야무네 말이었다.

"그럭허니께 그렇기도 하겄네. 나도 어릴 적에 상사풀이 하는 구겡했구마."

땀을 흘려 머리가 가려웠던지 긁적거리며 임이네가 말했다.

"무당이 징을 치고 미친 듯이 서둘러도 안 떨어지믄 모두 함께 바위 밑으로 차던진다믄서."

"그래가지고 살믄 머하겄노. 죽는 편이 낫지. 그런다더마. 나 머리빗을 란다하믄 턱밑에 감김 붙은 상사벵이 떨어지고 머리단장 하고나믄 다시 감기 들고. 아이도 징거러바라."

달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감나무 그림자 사이로 실뱀이라도 기어 나올 것처럼 무섬증을 느낀 아낙들은 바싹 모여 앉는다.

"상사벵 걸린 쪽이 숨넘어가기 전에 피묻은 속곳을 쓰고 통시에 앉아 있이믄 상사벵이 안 붙는다 카더라마는."

"복숭나무는 구신을 부른다 카데. 옛적에 어느 고을의 안범식이라는 사램이,"

강청댁이 한마디 하려 하는데

"그것은 무당 넋 들이는 소리고, 복숭나무 울 안에 안 심는 거는 옛적부터 얘기 아닌가배."

임이네 말허리를 꺾었다. 그것만이라면 좋았겠는? 무당 얘기가 나온 김에 월선네 죽은 뒤론 볼 만한 굿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모두들 선무당이니께, 오구굿 한다 캐서 화개까지 구겡갔더마는 이 근방에서는 내로라 하는 쌀개도 별 수 없더마. 월선네한텐 댈 것도 아니더라."

무심히 두만네가 한 말이 강청댁 비위를 거슬러놓고 말았다. 강청댁은 대뜸 무당, 월선어미를 걸쳐서 욕설을 퍼부었다.

"넋 팔아묵고 사는 년들! 그런께 옳은 죽음 못했지. 월선넨가 뭔가 술 처묵고 오다가 얼어죽었다믄서요?"

"허허 참."

두만네는 무안쩍어서 헛웃음을 웃었다.

"강청댁."

함안댁이 점잖게 불렀다.

"너무 서슬 푸르게 해도 못쓰네라. 남자들이란 다 바람기는 있기 마련인데,"

나무란다.

"성님은 마음이 대천지 한바다 겉애서 살 가겄소. 술값에다 노름 밑천을 대주믄서까지 하늘겉이 가장을 섬기지마는 나는 그럴 수 없구마요."

마구잡이로 해대었으나 함안댁은 여전히 점잖게 너를 깔봐서 쓰겠는가 하는 투의 웃음을 깻잎 같은 얼굴에 띠고

"그러니 하는 말 아닌가. 나한테 비하면 자네는 대금산일세."

옆의 두만네가 딱해하여 거들었다.

"시끄럽다. 바람났다고 이서방이 어디 동승을 구박하던가? 요새사 전보다 더 부지런히 들일하고 하는데 멀 그래쌌노."

"그리 안 하믄 우짤 기요? 개뿔이나 있어야 말이제요. 지닌 거라고는 그 잘나빠진 X X 하나밖에 더 있소? 꼴에 꼴방망이 차고 남해 노량 가더라고 상놈의 집구석에서 작첩이 될 말이요?"

상말을 하며 강청댁은 비양을 쳤다.

"그만해두어라. 그러다가 누구 하나 죽어서 상사라도 붙으믄 우짤라노? 죽는 것보담은 낫제."

야무네 말에 덩달아서 막딸네가

"원은 풀어야 하는 기라. 못 풀면 병이 되고."

"그런 소리는 와 하노! 원이 있고 한이 있이믄 내 편에 있지. 그 연놈들한테 무신 한이 있일꼬!"

"저눔으 말버르장머리 보게."

두만네는 또 헛웃음을 웃었다.

"죽는다믄 내가 죽지, 피가 말라서 내가 죽을 긴데, 그래 죽어서 천년만년 상사 붙을란다!"

강청댁 눈에 눈물이 글썽 돈다.

"아아니 강청댁 니 아즉 철이 덜 들었고나. 소가지가 노래미 창자같이 그리 좁아서 어디다 쓰겄노. 그러다가 바람잡으믄 고만인데, 육례 갖추고 만났이믄 그기이 젤이지 머엇을 죽네사네 하노. 살림이나 정붙이믄 그런 생각할 새가 어딨더노? 너거 미영밭에 풀이 우묵장성이더마. 누가 이서방 심성을 몰라서? 가숙 박대할 사램이 따로 있지."

두만네가 타이르는데 강청댁은 짚신을 찾아 신는다.

"나 가요."

나가려 하는데 임이네가 불렀다.

"강청댁 혼자서 용만 쓸 거 아니구마. 무당집 방에 불이 켜졌나 그거나 잘 살펴봐야 할 거로."

야무네가 눈살을 찌푸리며 옆구리를 쿡 찔렀으나 늦었다. 옆구리 찌르는것까지 강청댁은 보았다.

"머라꼬? 똑똑히 말 좀 해도라."

돌아서 온 강청댁은 임이네 곁에 바싹 다가섰다.

"말해달라 카믄 말 못할까바서?"

"그러니께 똑똑하게 말해도라 안 카나."

"월선이가 밤에 와서 무당집에 자고 가도 모르니 하는 말이지."

두만네가 혀를 두드린다.

"자고 가아? 우리 남정네하고 말이가."

"그거사 가서 물어보라모. 당자가 더 잘 알 거 아니가."

강청댁은 두말도 않고 사립문 밖으로 휑하니 나간다. 논길을 지나간다. 논가 도랑물에 잠긴 달이 강청댁을 따라온다. '그년이 와서 자고 갔다고? 그년이!' 눈앞에 용이가 있었다면 강청댁은 하루키고 주먹질을 했을지 모른다. 가만히 있어도 시시로 그런 발작이 이는데. 열려 있는 사립문을 들어섰을 때 집안은 비어 있었다. 마당가의 모깃불도 잦아지고 없었다. 강청댁은

"날 직이라! , 직이란 말이!"

방문을 잡아젖혔다. 달빛이 비쳐들었다. 강청댁은 방안을 헤매듯 더듬었으나 빈 방이다. 뒷간으로 쫓아간다. 역시 없었다.

"보소!"

마당귀에서 벌레만 운다.

"오냐! 또 갔고나! 끝판내자! 누구 하나 죽는 꼴 봐라!"

헛간으로 달려간 강청댁은 낫을 들었다. 달빛에 날이 희번덕였다.

"내가 와 죽노! 죽더라도 나 혼자는 안 죽는다!"

낫을 팽개치고 삼베치마를 추켜서, 치마끈을 반허리쯤, 동여맨 그는 날 듯 밖으로 쫓아나간다. 읍내까지 삼십 리 길 끝없이 굽이진 강물과 들판과 숲을 따라, 강물에 잠긴, 때론 도랑물에 잠긴 달이 아까보다 빠르게 강청댁을 뒤쫓아가고 있었으며 개구리들은 아우성치듯 울어대었다. 삼거리 주막 앞에 당도했을 때 거리에 강아지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고 불 꺼진 야트막한 주막 지붕이 작은 몸집의 강청댁을 압도해왔다. 그는 한참 동안 가쁜 숨을 다듬으려 애썼으나 방망이질하는 가슴은 터질 듯 아팠다. 마른 입술은 불룩불룩 떨고 있었다.

"여보시요."

목구멍에서 소리가 꺼진다.

"여보시요!"

소리를 크게 지르며 대문을 주먹으로 친다.

"!"

연달아 대문에 주먹질을 한다.

"이 문 못 열겄나!"

"뉘요. 오밤중에."

월선이 목소리다.

"문 열어라! 이년!"

"아니..."

하는 소리와 함께 문틀 사이로 방아네 켜진 불빛이 보였다.

"어디서 오싰소."

대문 앞까지 온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디서 온 거를 몰라서 묻나?"

"..."

"문 못 열겄나!"

"와 그러십니까, 새는 날에,"

"뭐라꼬? 문 때리뿌시기 전에 열어라! 그냥 돌아갈 성싶으나? 그냥 돌아갈 사램이 오밤중에 여기 왔일 것까!"

빗장 빼는 소리가 났다. 대문 한 짝이 열리자 강청댁이 뛰어든다. 방을 향해

"니 죽고 나 죽자! 사램이 한 분 죽지 두 분 죽나!"

마루를 지나 방문을 두르르 열었다.

"...?"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노!"

멍청히 서 있던 월선이

"누구 말이요?"

"이년 숭물스런 년이, 우리집 남정네지 누군 누구라!"

"안 왔소!"

"안 와?"

그는 집에서처럼 빈 방안을 더듬어보고 뒷간까지 달려가보고 숲청도 살펴본 뒤

"참말 안 왔나?"

"안 왔소."

강청댁은 풀썩 주저앉는다. 월선이는 하얀 속적삼 밑의 가슴이 뛰는지 바른손으로 가슴을 누른다. 불빛과 달빛을 받은, 울듯울듯 찡그리다가 다시 긴장으로 돌아간 월선의 얼굴은 나무로 깎은 듯 딱딱해진다. 얼마 후 강청댁은 벌떡 일어섰다. 월선에 대한 증오심에 불이 뎅겨진 것이다.

"이녀언!"

달려들어 월선의 속적삼을 북 찢는다.

"와 와, 이러시오."

"몰라서 묻나? 이녀언! 갬히 어디라고? 동네까지 와서 사내를 홀카냈더라고?"

속적삼이 찢어진데다가 서슬에 치맛말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미처 감당할 겨를을 주지 않고 돌진해간 강청댁은 머리채를 낚아채서 휘감는다.

", 이거 놓구 얘기하시오."

"못 놓겄다! 간을 내서 묵어도 분이 안 풀릴 긴데 내가 네년을 곱게 두고 갈 성싶으나? 네 년이? 나보다 잘났이믄 얼매나 잘났고소나아 간장을 녹이는 기이 먼가, 어디 보자!"

월선이를 쓰러뜨리고 주먹질을 하고 옷을 발기발기 찢으며 강청댁이 날뛰는데 작은 몸집이 콩튀는 것같이 보인다. 얹은머리가 풀어져서 주먹을 내리칠 때마다 머리채마저 월선의 얼굴을 쳤다. 맞서서 싸운다면 그토록 당하지는 않았을 것을 몸을 피하기만 하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이러지 마소. 우리 옛적부텀, 아아 이러지 마소. 댁을, 댁을 만나기 전부텀,"

할 뿐이다.

"이년! 이년! 이래도 동곳 못 빼겄나! 니 겉은 년은 만나는 쪽쪽 사내를 잡아묵을 년이다! 갬히 무당년이 뉘집 망해묵을라꼬!"

했으나 강청댁은 이미 맥이 풀린 것이다. 혼자 하는 주먹질이 싱겁고 무안쩍게 되어간다. 주먹질에 힘이 빠지면서 '이 남정네가 그라믄 어디 갔일꼬?' 뭣인지 잘못 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 간긴가? 안 오기는 안 온모양인데 이걸 알믄?' 겁이 더럭 난다. 그 고집이 어떻게 나올 지 모를 일이다. '날 새기 전에 돌아가얄 긴데,'

"이년! 이래도 동곳 못 빼겄나?"

입으로는 허세를 부리면서 은근히 자기 주먹다짐을 어떻게 수습할까 궁리에 바쁘다.

", 이러지 마소."

"이년! 네년이 잘했다 소린 못허겄지?"

", 안 갈라고 했는데... , 멋을 잘했다고 하겄소."

월선이는 몸을 뽑으려고 비비적거렸다.

"오냐!"

물러난 강청댁은 풀어 헤쳐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모아서 얹은 머리를 한다.

"다시 우리 남정네를 불러들이거나 동네에 발목때기를 딜이놨다가는, 그때는 니 멩대로 못 살 줄 알아라!"

옷매무새를 고치며 으름장을 놓다가 땅바닥에 주질러앉아 울고 있는 월선이에게 힐끔 곁눈질을 주고 자서 종종걸음으로 나선다.

"내가 갈 길이 바빠 지금은 간다마는 네 년이 멩심 안 하믄!"

문간에서 외치고 거리로 나섰다. 저만큼 휑하니 빈 장터가 보였다. 여전히 거리에는 강아지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강청댁은 날 듯 달려간다. 낮의 열기가 식은 들판에서 썰렁한 바람이, 숲을 끼고 강을 따라 바삐 달음질쳐서 가는 강청댁 땀 배인 목덜미를 식혀준다. 바람이 땀을 식혀주지만 마음까지는 식혀주지 않는다. 때린 쪽은 이편이건만 분풀이는 커녕 오히려 싸움에 지고 도망쳐가는 것같은 생각만 들어 갈 길이 바쁘지 않으면 강변 모래밭에 가서 두 다리를 뻗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빌어 묵을 년의 팔자야! 자식새끼만 하나 있어도 내 신세가 요모양은 안됐일 긴데, 이름이 좋아 불로초다! 빛 좋은 개살구지. 육례를 갖추고 만나기만 하믄 고만이가. 마음은 온통 그년한테 가 있고 껍디기만 내 차지, 무신 낙에 밭 매고 길쌈할꼬. 설고 불쌍한 거는 나다! 이년이다! 아이고 아이고오!"

달음박질쳐 가면서 강청댁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올 때는 악이 받쳐 몰랐는데 밤길이 무섭기도 했다. 여름밤은 짧다. 짧은 밤에, 가는 데 삼십 리 오는 데 삼십 리, 육십 리 길을 걸었으니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방은 옥색빛으로 걷혀져가고 있었으며 울타리에 핀 박꽃에 이슬이 맺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사립문은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열려진 채였다.

"어떻게 된 일고?"

윗간에도 방에도 부엌에도 용이는 없었다.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읍내를 오가는 동안 돌아온 흔적조차 없었다. 속았다는 생각에 전신이 훌훌 떨린다. 그러나 가고오고 육십 리 길을 미친 듯이 달렸었고 월선이 두들겨주느라고 힘을 쓰고 악을 썼다. 낮에는 삼막에서 삼베속곳이 젖도록 땀을 흘려 일을 했기에 전신은 풀어진 솜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올 때까지는 몰랐는데 월선이를 때리면서 삐었는지 왼쪽 팔꿈치가 쑤셨다. 해가 솟아오르려고 사방이 벌겋게 타올랐을 때 용이 성큼 집안으로 들어섰다. 마루에 도사리고 앉은 강청댁을 보자

"닭우장의 닭이나 안 내놓고..."

닭장에서 닭이 목청을 뽑고 있었다. 강청댁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와 그러노? 또 미친병이 도지는갑다."

외양간 쪽으로 돌아가려 하는 용이를 강청댁은 뒤에서 달려들어 용이의 허리끈을 움켜쥔다.

"날 직이고 가서 그년하고 사소!"

"꼭두새북부터,"

떠밀어낸다.

", 아이구 아얏!"

삐인 팔을 다른 한 손으로 감싸며 강청댁은 땅바닥에 주질러앉는다.

"아 아얏!"

"엄살 고만 피고."

"아 아얏! 아이구 팔이야."

소리 지르는 품이 엄살만도 아닌 것 같아 용이는

"팔이 우찌 됐다 카노?"

"! 팔만 가지고는 안 될 기요. 내 다리 뿌질러 앉히놓고 그 그라믄 마음놓고 읍내,"

하다가 다시 아프다고 소리지른다. 용이 강청댁의 팔을 주물러 주려고하는데

"약 주고 병 주구마. 아 아얏! 아이고오."

"새북부터 어디 상막 차맀나? 이리 내봐. 삐었는갑다."

강청댁은 생각한다. 용이 월선이한테서 왔다면 그 소동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아는 기색이 도통 없다.

"보소."

"..."

잠자코 팔을 주물러준다. 해가 솟는다. 솟는 해와 같이 용의 눈알도 시뻘겋게 핏발이 서있다. 강청댁의 눈 역시 그러했다.

"어젯밤 어디 갔소. 내 죽는 꼴 볼라요."

"그만 해라."

얼굴을 찌푸리고 용이 일어섰다.

"어디 갔던고 안 묻소!"

외양간 쪽으로 가다가 돌아보며

"영팔이 집에 갔다, ."

다음은 어세가 누그러졌다.

"개를 잡았다 캐서, 가서 한잔씩 했지."

"그래 한잔씩 하는데 밤을 샜다 그 말이요?"

"더워서 칠성이하고 누각에 가서 잤지."

강청댁은 입을 다물었다.

 

 

18. 유혹

보리 사이에 심은 목화는 보리를 베어내고 타작이 끝나면서부터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햇빛이 쨍쨍 내리 쏟아지고 있었다. 정자나무 아래에선 노인들이나 앉아 담뱃대를 물고 물부리 사이로 침을 흘리면서 어눌한 음성의 얘기들을 하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강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다. 완연하게 목화밭으로 변한 밭둔덕에 엎드린 아낙들은 목화 쪽으로 불을 쳐가면서 호미 끝으로 보리뿌리를 뒤집어내고 있다. 살아서는 햇빛을 막고 흙의 양분을 독차지하더니 이제 목숨을 다한 보리 뿌리는 썩어서 목화의 거름이 되는 것이다.

"전라도라 동백산에 실패 겉은 울 어무니, 임으 정도 좋거마는 자식사랑 그리 없나, 반달 겉은 나를 두고 딤을 따라 간 곳 없네."

두만네의 가락이 마알갛고 쨍하니 뜨거운 들판을 울리며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목청이 좋기로는 두만네가 아낙들 중에선 으뜸이다.

"최참판댁 얘기씨가 부를 노래다."

"임으 정도 좋거마는 자식 사랑 그리 없나, 반달 겉은 나를 두고 임을 따라 간 곳 없네... 옛적부터 이야기는 거짓말이라도 노래는 참말이더라고 옛적에도 골골마다 그런 일이 흔히 있었던갑다."

노래를 부르던 두만네는 목이 말랐던지 밭둑에 갖다놓은 물동이 곁에 가서 미적지근해진 물을 바가지로 떠 마신 뒤

"이 사람들아, 좀 쉬었다가 안 할라나?"

아낙들은 호미를 놓고 옹기중기 일어서서 비탈이 진 곳, 기우뚱하게 비틀어져서 가지를 뻗은 소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겨간다. 줄곧 시무룩해 있던 임이네는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얼굴을 닦고 짚세기를 벗어 바닥에 든 흙을 털어내면서 말했다.

"머가 싫네 싫네 해도 내사 오뉴월 글밭 매는 기이 젤 싫더마."

막딸네가 받아서

"싫으믄 우짤 것고? 흥 이내 팔자 기생이나 되었이믄 천석지기 살림떨어 고대광실 빈벽 사창 꾸며놓고."

춤까지 덩실덩실 추며 뇌는 막딸네 가락에 아낙들은 소리내어 웃는다.

"지랄한다. 지랄해. 대마도 뱃좀 겉은 낯짝 가지고 열섬지기 살림이라도 떨어지믄 내가 손가락에 불을 키고 등천을 하겠다."

야무네의 말에

"말 마라아, 오뉴월 땡볕이 내 얼굴을 요모양 맨들었제. 소시적엔 눈흘기는 총각놈도 많았거마는."

아낙들은 또다시 소리내어 웃는다.

"오늘 함안댁 성님은 안 오싰네요?"

이번에는 두남네에게 야무네가 물었다.

"말도 마라."

내뱉는다.

"와요?"

"운신도 못허고 누워 있다 안 카나."

"또 맞았구마. 그눔으 사람 치는 손목때기 작두로 댕강 짤라버리세. 도둑질하고 제집 차고 노름하는 손목때기는 딱 짤라버리야 하는기라."

기분을 내던 막딸네는 그새 잊었던 울화통을 불러들인 듯이 지껄였다.

"시끄럽소. 호랭이도 제말 하믄 온다카더마는 저기 그 양반이 가누마. 듣겄소."

나이 떨어지는 아낙이 막딸네 소매를 집적거리며 말했다.

"듣는다고? 제발 좀 들으도라! 도둑질허는 속목때기는 작두로 댕강 짤라버리야, 와 내가 말 잘못했나? 나라 법이 그런데 내가 못 할 말을 했나?"

떠들었으나 노름하고 계집 친다는 말은 빼먹는다.

"요새는 읍내도 안 나가고 늘 동리를 서성거리데요."

"몽둥이 맞일 짓을 했나 부제? 읍내에 못가는 거 본께. 노름쟁이가 노름판에 못 가니 몸살이 나서 죄 없는 집사람을 치는가배."

한마디씩 하는데 임이네는 입을 다물고 평산의 뒷모습에 시선을 겨누고 있었다.

"큰일이다. 머시매들 빌빌거리는 꼴 우찌 보겠노. 어마니가 운신을 못하게 됐이니,"

평산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두만네는 근심스럽게 말했다.

"치혼사한다고 시집올 때는 짓덕도 좀 가지왔다 카더마는."

"그기이 인지 있나? 어느 시울에 날맀일 기라고, 허리끈 졸라매도 온, 양반이 그리 좋은 건가 몰라."

"족보만 치키들믄 솥에 쌀이 들어가요?"

"내사 금방석에 앉힌다 캐도 싫더마. 사시장철 바짓말에 손 찌르고 주랫통 맨치로 벌건 낯짝 해가지고 가숙은, 손바닥만한 자식들 그 양을 못 채워서 줄지갈지 하는데 사대육신 멀쩡한 인사가, 양반 양반 하지마는 그깟 위관 벼슬, 신도비가 섰나 정승판서가 났나."

"차라리 과부 팔자가 낫제."

잠자코 있던 임이네는

"굿을 하믄 떡을 묵든 우리집 일이 더 큰일이구마."

하며 말문을 열었다.

"."

목을 틀고 임이네를 쳐다보며 막딸네가 물었다.

"우리집 임이아배 말이요."

"임이아배사 부지런하고 심 좋고 피가 나게 살림을 하는데 와."

"믿는 도끼에 발 찍힌다 카더마."

밀빛으로 탄 임이네 얼굴은 여전히 예뻤고 건강해 보였다. 지난 이월에 아들을 낳은 산후가 좋아서 그랬던지 얼굴에 윤이 흘렀다.

"어디 제집이라도 생깄나?"

막딸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랬이믄 오죽이나 좋게? 누구맨치로 내가 새 볼 것 같소? 밤만 되믄 울타리 밖에서 칠성이 칠성이 하고 부르는 통에 환장하겄소."

"머가 와서?"

"머긴? 사램이 와서 그러지. 평산인가, 평산인가 뭔가."

"와 머할라꼬?"

"속을 모르니께 나도 걱정이제. 노름 밑천 한푼 없는 사람을, 처음이사 임이아배도 없다카라 카믄서 피하더마는 옛날 바람잡아 댕길 때 배운 솜씨가 있는데 한두분 하다 보믄 미쳐나지 않겄소? 요새 며칠은 새북에 돌아와서 해가 중천에 뜨도록 송장같이 자빠져가지고... 정말 이제 속이 썩누마."

"아닌 게 아니라 나도 한분 봤구마, 함께 가는 거를."

"내사 천하없이도 그 꼴을 안 볼 기요. 질기, 장로로 그러믄 초가삼간 싹 불질러부리고 끝장볼 기요. 함안댁 성님같이 멋 땜에 그리 살겄소."

이때 건너편 논둑길에 논에 물을 푸다 점심을 하러 가는지 바짓가랑이를 둥둥 걷어올린 채 맨발로 걸어가는 용이 모습이 보였다. 하던 말을 끊고 임이네는 용이를 빤히 쳐다본다.

"제집이 점심이나 갖고 안 오고."

두만네는 혀를 찼다. 야무네는

"그만치 가서 뚜딜기팼이믄 분이 반은 풀맀을 긴데."

용이 모습이 논둑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임이네는 훌쩍 일어나서 밭으로 내려가 호미를 든다. 다른 아낙들도 일어나 목화밭으로 내려간다. 목청 좋은 두만네는 가락을 뽑고 아낙들도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부르며 해 떨어지기까지 밭을 맨다. 이날 밤 늦게까지 임이네는 논에 물 푸기에 남들은 정신이 없는데 살림 안 살 작정이냐고 앙앙거렸다. 혼인 이래 임이네 쪽에서 바가지 긁는 일이라곤 거의 없었다. 그만큼 칠성이는 열심히 일을 했으며, 오히려 칠성이가 힘 좋은 암소 한 마리 사다놓은 것처럼 임이네를 몰아세워 고되게 부려먹었던 것이다. 임이네는 또 그악스럽게 일을 했고 먹성도 좋아서 해산하는 이외 자리에 눕는 일이 없었다. 임이네가 건강하고 일 잘하는 것에는 칠성이도 얼마간 흡족해하는 것 같았으나 입이 미어지게 밥을 끌어넣는 임이네를 볼 적에 까닭 없이 남들은 죽 먹는데 밥 먹느냐고 역정을 내곤 했다. 그럴 때면 여느 아낙들같이 서럽게 생각지 않는 것이 임이네였다. 눈을 흘기고 입을 비쭉거릴 뿐이었다. 서로가 다 우애를 지키는 처지에서는 남남이었고 실속을 차리는 데만은 일심동체였다고나 할까. 다음날 해가 지기 전에 임이네는 보리방아를 찧고 칠성이는 장에 내갈 열무단을 만들고 있는데 울타리 밖에서 평산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칠성이는 열무를 내려다보면 망설이다가 나갔다.

"읍내에 가자."

"지금 말이요?"

"."

"낼 장에 갈 긴데. 열무가,"

"잔소리 말고 따라오게. 다 사는 수가 있네."

불러내어 함께 나갈 때마다 뇌는 말이었다. 칠성이 부리나케 나갈 채비를 차리고 쫑알거리는 임이네 말은 들은 척 않으며 쫓아 나왔다.

"아무래도 여시한테 홀낀 것 같소. 나가자고만 하믄 발부텀 네먼지 나가니께 말임다."

불안이 맴도는 목소리였다.

"그게 다 그렇게 되기로 돼 있는 걸세."

칠성이 걸으면서 칼끝으로 찢어놓은 것 같은 평산의 작은 눈을 살핀다. 언젠가 봉기에게 따지고 들었을 적에 제 스스로 말했듯이 칠성이는 단돈 한 푼 손해를 볼 위인이 아니다. 공것이라면 양잿물도 마다 안 할 사내지만 근자에 와서 번번이 술을 사고 노름 뒷돈을 대는 김평산이, 그러면서 속셈을 내놓지 않는 것이 궁금하고 꺼림칙하긴 했다. '낸들 허수애비가? 주는 거 싫다는 덩신이 어디 있노. 설마 나중에 가서 묵은 거 내놔라 하겄나. 설사 그렇다 카더라도 개뿔이나 줄 기이 있어야제. 내가 언제 술사라 했나 노름 뒷돈 대라 캤나.' 그들은 큰길 쪽으로 나갔다. 어둡기도 전에 반달이 나와 있었다. 들판이 꺼무꺼무하게 얼룩진 것같이 보인다. 멀리서는 벌써부터 여우 우는 소리가 났다.

"이 넓은 들판은 다 누구 거더라?"

평산이 히죽히죽 웃으며 물었다.

"최참판네 땅 아니요."

칠성이도 히죽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이중에서 절반만 가졌음 쓰겠나?"

"?"

"왜 안 갖고 싶은가?"

"마음대로 된다믄야 갖고 싶지 않을 사램이 어디 있겄소."

"... 사람의 욕심이란 한량이 없지."

평산은 꺽쉰 목청으로 헛웃음을 웃는다. 칠성이는 손가락이 잘려진 쪽의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는데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는 도중 나룻배를 만난 그들은 밤이 깊어지기 전에 읍내로 나갔다. 그들은 투전판에서 밤을 새웠다. 노름의 뒷돈은 물론 평산이 댔다. 강포수의 금가락지 한 짝을 농간질하여 남긴 돈이 적잖았고 세심하게 일을 계획했으므로 자신은 그다지 낭비를 하지 않았으며 한편 귀녀에게 남은 금가락지 한 짝을 자금으로 궁래해 두었기 때문에 평산은 칠성이와 함께 어울릴 적에는 여유 있는 쓰임새를 보였다. 이날 밤 그들은 재미를 보았다. 칠성이가 더 재미를 보았다. 평산에게 밑천을 돌려준 뒤 적잖은 돈을 끈에 끼워 허리에 찰 수 있었다.

"술 한 잔 해야지."

새벽녘에 노름판을 피해 나와 객줏집에서 낮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평산이 팔을 뻗고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중얼거렸다.

"월선이 집에 가입시다."

칠성이 후딱 일어나 나서며 말했다. 주막을 들어섰을 때 월선이는 부성부성 부은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은 가게 안 보요."

"가게를 안 보여? 손님이 찾아오면 오밤중이라도 술상을 차리는게 주모의 법도이니라." '곧 죽어도 양반이라고?' 칠성은 웃음을 참는다.

"가게 안 볼 기라고 아무 장만한 기이 없소. 다른 주막에 가시요."

"술도 없단 말가."

"술이사 조금 남았일 기요만 몸이 아파서."

"낯짝 보아하니 간밤에 어떤 놈 땀 많이 빼었구나, 흐흐흣..."

"멋이!"

순간 월선의 눈에서 파아란 불꽃이 튀었다. 마치 비오는 날 묘지근처에서 나는 인광 같은 빛, 얼굴은 백지장으로 변해 있었다.

"술 파는 계집이 그만한 말도 못새겨서야. 자아 술이나 내놓게."

월선의 기세에 눌린 평산은 술청으로 올라서며 달래었다. 월선이 얼굴에 웃음이 지나갔다. 귀기에 찬 웃음이었다. 자리에 가 앉은 월선은 술을 부은 술잔을 평산 앞에 놓았다. 술은 술잔 밖으로 넘쳐서 흘렀다.

"장사는 오늘만 하고 말 것가?"

나무라듯 말하고 칠성이는 눈을 찡긋하며 월선에게 상대할 것 없다는 시늉을 했다. 그들은 각각 서너 잔 넘게 술을 비웠다. 술잔은 나올 때마다 여전히 넘쳐서 술상에 술이 쏟아졌다.

"아니 정말 안주는 안 주는 겐가?"

평산은 턱을 쳐들고 월선을 노려본다. 턱을 쳐든 바람에 목덜미는 혹처럼 살이 부풀어 올랐고 그것이 벌겋게 보였다. 파란 불을 뿜어내는 월선의 눈도 평산을 쏘아본다.

"아니 이게? 공술 먹으러 왔나? 왜 이리 풀세게 나오누 응?"

평산은 주먹질이라도 할 듯 월선의 눈앞에다 삿대질을 한다.

"공술이요, 객구 물리는 공술이요."

"아아니 이년이, ? 무당년이 재수 없게시리, 술 사먹으러 온 손한테 뭣이 우째?"

"이당초 잘못 오싰소. 서울 다방골에 갈 어른이."

"이년이!"

술판 너머 팔을 뻗쳐 월선의 가슴팍을 잡아채려 하는데

"그만두소. 몸이 아픔께 그런갑소."

우선 칠성이는 평산이부터 잡아놓고

"월선이도 아무보고나 함부로 말해 쓰겄는가? 우리네들 겉으믄 모르까. 김위관댁 나리보고 그럴 수 없다 말심이야."

말심이야 할 적에는 은근한 평산에의 희롱기가 있었다. 양반이라니까 덮어놓고 생원이라 부르던 강포수와는 달리 한 마을에서 족보를 알고 있는 칠성은 김위관댁 나리라고 정확하게 존칭을 붙여주긴 했으나 아니꼬운 마음은 있었던 모양이다.

"무당은 백정네 집에 가서도 할머니 할아버니 넋을 부르고 정승댁에가서도 할머니 할어버질 찾소!"

"시끄럽다. 내 성미가 급해서 그랬느니라, 어하핫핫..."

김위관댁 나리라는 말에 썩 기분이 좋아진 평산은 뻐드렁니를 벌리며 웃는데 삼국지에 나옴직한 변방 졸렬한 장수쯤의 호기는 있어 뵌다.

"자아 자아 술 부으라니."

월선의 팔을 잡아 끌었다. 월선은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마루를 질러 안방 문을 열어젖혔다. 큼지막하게 꾸린 보퉁이 하나가 얼핏 보였다. 월선이는 세차게 방문을 닫아붙인다.

"전에 없이 와 저럴꼬?"

칠성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평산은 공연히 체면치레 하느라고 허세를 부렸다.

"허참 고것, 그러니까 제법 감칠맛이 있군 그래? 저런 줄 알았으면 어젯밤 내가 와서 엉덩일 뚜디려주는 건데, 하하핫..."

"칼 맞아 죽을 인사! 잡귀가 되어 환생을 못할 기다!"

짐승 울음 같은 저주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칠성은 등골이 오싹했다. 평산도 기분이 언짢은 듯 얼굴빛이 조금 달라졌다. 월선의

목소리는 손신을 부르듯 그만큼 처절했다. 전에 없었던 일이다.

"나갑시다. , 나가요."

칠성이 황급히 평산을 겨드랑이에 끼고 일어섰다. 멀쩡했으면서도 일부러 곤드레가 된 시늉을 하며 어울려서 나오는데 술판에는 단 한 푼의 돈도 놓여 있질 않았다. 그것을 두 사내가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삼거리를 빠져나올 때까지 서로 모른 척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며 치사하게 취한 시늉을 하는 것이다. 읍내를 벗어나자 어느새 그들은 껴잡은 손도 풀고 멀쩡하게 걸어가는데 구두쇠인 칠성이는 신이 떨어지지 않게 도랑물에다 짚세기 적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정들이며 읍내길이 발에 익은 그들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마을 어귀 가까이까지 올 수 있었다. 주막 앞에서 평산은 걸음을 멈추었다.

"또 술 할라꼬요?"

아니라고 평산은 고개를 저으며 주막 맞은편에 있는 숲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머할라꼬..."

따라가며 칠성이 묻는다.

"여기가 시원타. 땀 좀 식히면서."

평산은 소나무 밑동에 가로놓인 바위에 걸터앉았다. 칠성은 엉거주춤 그의 앞에 섰다. 소나무 사이에 주막이 보이고 길이 보인다.

"역시 여기가 젤 시원하군 그래."

잠자코 칠성이는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으며 돈꾸러미를 만져본다. 그러다가 곰방대를 도로 찌른다.

"날씨 덥다. 모두 개미떼처럼 들판에서 일들 하고 있겠지?"

다시 평산이 말했다.

"그럴 기요. 나도 김을 매얄 긴데, 계집년이 지랄지랄하는 거를."

무슨 얘기가 있다 생각한 칠성이는 얘기 내용에 따라 몸을 뺄 심산에서 슬그머니 임이네를 들먹여놓는다.

"자네 평생 땅만 파먹고 살 작정인가?"

"안 그러믄 우찌겄소. 농사꾼이 땅 안 파고 달리 살 구멍이 있겄소."

"못난 소리."

"잘나도 별 수 없지요. 농사꾼 땅 안 하믄, 등짐장사말고 달리 머를 하겄소."

칠성이도 제깐에는 단단하게, 그러면서 낚싯줄을 끌 듯 힐끔 평산을 쳐다본다. 평산은 잠시 멍해 있더니

"마음만 크게 먹으면, 시운만 잘 타면... 이런다고 자네 그 초가삼간 팔아서 노름 밑천 사자는 거는 아닐세."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까놓고 말심해보소."

칠성이는 마음속으로 낚싯줄을 좀 많이 잡아끌었다.

"벌써 오래 전에 계영한 일이네. 잘만 하면 자네나 내나, 아니 나보다 자네 신세가 확 필걸세. 운이란 그리 쉽게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

"하루 이틀에 될 일도 아니네만, 어쩌면 더 오랜 세월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네만, 하기는 십 년 땅을 파보아야 등빠진 적삼 면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긴 세월이라 할 수도 없지."

"무신 말심인지."

"차차, 차차... 급하게 서둘 거는 없고, 자네 아들만 삼형제든가?"

"아니요, 여식 하나하고 아들놈이 둘이요."

"내가 자네를 심중에 두고 생각해본 거는 아들 잘 낳고... 그랬는데 여식이 하나라? ... 객지바람을 쐬었으니 분별도 있을 것 같고 해서."

"도무지 영문을 모르겄구마요."

그러나 칠성이 머릿속에 희미한 것이 떠올랐다.

"내가 명색은 양반이니 책을 덮은 지가 오래여서... 이건 귀동냥한거네만."

평산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잠시 지나갔다.

"진나라의 진시황은 임금의 자식이 아니고 장사꾼의 자식이었다더구먼."

"서천서역에 불로초 구하러 보냈다 카는."

칠성이 아는 체했으나 그 말대꾸는 없이

"그 진시황의 친아비 장사꾼은 꾀가 많고 배포가 크고 앞일을 내다보는 눈이 있었던지 볼모로 잡아온 진나라의 왕자를 뒷구멍으로 많이 도우면서 지 자식을 밴 애첩을 왕자한테 바쳤더라 그 말이지."

"?"

"그래 별의별 놈의 계책을 써가지고 고국에 돌아간 왕자는 왕위에 올랐더란 말일세. 그러나 장사꾼이 바친 애첩이 낳은 자식을 제 자식으로만 믿었으니 자연 그 장사꾼의 아들놈이 왕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진나라의 진시황이되었다는 건데."

"한마디로 말해서 씨를 속있다, 그 말심이구마요."

"그렇지."

"그런데 그 친애비 장사꾼은 호강을 했이까요."

칠성이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입술을 우물거리는 바람에 코밑이 몹시 길어 보였다.

"했다 뿐인가? 지금으로 치면 정승 벼슬까지 했다더군."

"-"

희미했던 것이 좀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을 칠성이 느낀다. 그러나 어쩌자는 것인지 김평산의 얼굴은 아리송하게 보이기만 했다. 무슨 궁리를 하는지, 주변에서만 뱅뱅이를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가세."

칠성이는 서운한 얼굴로 그러나 아주 공손해져서 평산의 뒤를 따른다. 주막을 지났다. 솔숲도 끝이 났다.

", 들판 넓기도 허다. 김매는 저 사람들 등에 불이 나겄군. 한 줄기 시원하게 퍼부어주었으면 좋으련만, 평생 등빠진 잠뱅이 입고 새벽이슬 밟으며 보리죽 한 사발로 허기를 달래고 해가 꼴딱 넘어가야 마구간 같은 흙방에서 다리를 뻗게 되니 소 돼지 신세하고 뭐가 다를까. 조기 한 마리 제상에 올리려면 밤새도록 짚세기를 삼아야 하고 자식새끼 혼사가 있거나 초상이라도 생기면 도지 빚을 내야 하고 손톱이 빠지게 길쌈을 하건만 허리 펼 날 없으니, 개똥밭에 굴러도 날 데만 나라 했지만 재물 없는 양반족보 삶아먹겠나? 씨는 살찐 땅에 떨어져야, 돈방석 위에 떨어져야."

", 암요. 그렇고말고요."

칠성이는 납작 엎으려버린 듯이 맞장구를 친다. 갑자기 평산의 뒷모습이 위대하게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개망나니로 치부했던 그에게는 남다른 면이 숨겨져 있었던 것 같았고 무슨 비상한 일을 해치울 수 있는 힘을 가진 것 같은 생각이 칠성이를 들뜨게 하였다.

"칠성이."

"."

"자네 장가 늦게 갔지? 생산은 잦은 편인가."

", 그렇지요. 잦은 편이지요. 상투는 벌써부터 올맀지마는 예를 차리고 장가들기로는 육년 남짓했이니께요."

"그렇군. 자넨 몸이 좋아."

"일 년 열두 달 무병이지요."

그들은 어느덧 마을길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만큼 논둑길에서 마을길을 향해 두만아비 이평이가 소를 몰고 온다. 논에서 물을 푸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매어놓고 잊어버린 채 있는 소를 몰고 오는 것이다.

"이평아!"

평산은 평소 모습으로 돌아가며 두만아비를 불렀다.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그는 채찍으로 소를 갈겼다.

"여보게 이평이! 귀는 시집보냈는가?"

두만아비는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목구비가 모두 자그만자그만했다. 성질은 꼼꼼해 보였다.

"우리 집사람, 기동하든가?"

평산은 공연히 신들신들 웃는다.

"입 좀 오므리소. 허파에 바람 들겄거마는."

내뱉는다. 동년배로서 어릴 적에 함께 뒹굴며 자랐다고는 하나 두만아비가 평산을 보기를 이웃집 개똥이만큼도, 그러나 어쩐 일인지 평산은 화를 내기는커녕 헤헤 웃는다.

", 저 상놈이 양반보고 허파에 바람 들겄다구?"

"서천 쇠가 웃겄네. 양반 꼴 좋소. 아낙 치는 기이 양반이고 노름판에서 구전 무는 기이 양반이고, 애 퇴퇴, 그런 양반 될까 무섭네. 초하루, 보름 다 보내고 연 띄우는 백정이 됐이믄 됐지."

두만아비는 침을 퇴퇴 뱉고 다시 소 등을 갈긴다. 요령 흔들리는 소리가 해지는 무렵 풀 냄새와 함께 울려왔다.

"허허 제에기... 조상 묏구덕 판 원수가? 나만 보면 못잡아먹어 앙앙거리니 볼기짝에 군살 좀 올려놔야지 안 되겠는걸."

두만아비는 들은 척 만 척 가다가

"칠성이, 니 정신 똑똑히 채리라."

돌아보며 말했다.

"그 양반 따라댕기다가 패가망신할 기다. 약은 쥐가 밤눈 어둡더라고, 하기는 어지간히들 죽이 맞기는 맞다마는."

그러고서는 가버렸다.

 

 

19. 사자

엽총을 구입하는 데 부족하지 않게, 거기다 곤궁한 집안 형편을 감안하여 적잖은 금액을 받아낸 조준구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으며 나귀를 타고 답답하기만 했던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난 뒤 치수는 길상을 데리고 서고에 들어박혀 며칠을 먼지 냄새, 종이 썩는 냄새를 맡으며 책자 정리를 하더니 끝내 총기에 관한 것을 찾아내지 못하고 화약에 관한, 약간의 책자를 꺼내어 요즘에는 그것을 읽는 모양이었다. 윤씨부인은 몸이 불편하다 하며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귀녀는 조준구가 서울로 떠나게 되고 치수가 책을 챙기려고 서고에 들어간, 모든 그런 연유를 알고 싶었던지 발톱을 오므린 살쾡이 모양으로 귀를 기울이며 집안을 맴돌았다. 지금은 읍내의 이동진이 사랑에 와 있었다. 그는 침울해 보였다. 최치수는 맹맹하게 이동진의 침울함과는 상관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울의 그 신식 양반은 떠났는가?"

"... 다시 오겠지."

"뭐하러?"

"엽총을 구해오겠지."

"엽총을? 어디다 쓸려고."

"사냥꾼이 될려네."

치수를 바라보는 이동진의 눈이 움직이지 않는다. 입맛을 다셨다.

"자넨 뭔가 늘 잘못 생각하고 있네."

그러나 이동진은 자기 한 말의 결과에 기대 같은 것은 갖지 않는다는 투였다.

"잘 생각하면 천하가 변하겠는가?"

"울타리 안만 생각하지 울타리 밖은 생각 안 하고 있네."

"울타리 안에 무진세계가 있을 수 있고 울타리 밖이라 할지라도 한치 땅이 없을 수도 있네."

"또 억지를 쓸 텐가?"

"내 머리카락 하나 뽑아서 천하가 이롭다 한들 나는 그 짓을 아니하겠네."

"죽일 놈!"

치수는 빙그레 웃었다. 중국 춘추시대의 철학자, 철저한 개인주의와 쾌락설을 주장한 양자의 말을 치수가 인용하였기에 이동진은 양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집안은 조용했다. 봉순네와 삼월이는 당산 개울로 목욕하러 가고 없었다. 하인들은 들판으로, 부엌의 드난꾼들은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점심을 나르고 연이네만이 부엌 부뚜막에 걸터앉아 주걱으로 잣죽을 짓고 있었다.

"조밭 매기가 젤 어렵더마. 별수도 없는 과조밭 땔라 카믄 부애가 부굴부굴 끓어서."

내리막길 옆에 있는 채마밭에서 열무를 솎아내며 김서방댁은 간난할멈을 상대로 지껄인다. 간난할멈은 밭둑에 오뚝이같이 앉아 있었다. 저녁 찬거리를 위해 가지랑 오이를 따며 연이와 남이는 저희끼리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도 없는 사람한테는 과조가 살림 밑천이네라. 사독 오는 거 보고 무한 바가지 더 부우믄 밥 한 그릇이 불어난다 카는데 농사꾼이 무신 성시로 찰조 심어묵겄노."

간난할멈 말에

"내사 떨어진 옷 입었임 입었지, 임석은 설게 못묵겄더마는."

"숭년들어 보제? 쓰고 달고... 사람도 잡아묵을라 칸 긴데,"

"숭년하고 무신 상관이요. 만 사람애 굶어죽어도 우리는 안 굶을긴께."

"속없는 소리 마라. 옆에 굶어죽는 사람 보고 입에 밥이 들어가까?"

"숭년들믄 우리 상전댁 땅이 불어날 긴데 멋이 걱정이요."

"벼락맞일 소리, 입도 도꿋날 겉다. 니도 거 주둥이 땜에 망할 기다."

"아따, 입 없이도 망합디다. 김진사댁 고치밭에 한분 가보지?"

".,,?"

"종놈이 달아나니 말이 있이까, 과부 시엄씨는 웃방에, 과부 며느리는 아랫방에 앉아서 마당에 매구를 치니 말이 있이까, 굶어서 창자가 붙으니 말이 있이까, 고치밭은 소 멕일라꼬 그러는지 풀이 우묵장성인데, 내 겉으믄 남 내어주겄더마는, 어리곳의 햇병아리도 아니고 김훈장이 큰 없을 짊어졌더마요. 어제도 보니께 김진사댁 논 매준다고, 이녁 농사도 못 감당하믄서."

하다가 김서방댁은 흙 묻은 손으로 속곳을 걷어 올리더니, 말라 뱀가죽같이 된 허벅지를 긁적긁적 긁는다. 별당 뜰에는 권태로운 한낮이 쭉 늘어져 있었다. 조그마한 머리통이 두 개, 갑사 댕기도 두 개, 앙증스럽게 바라진 어깨, 나무 그늘에서 비어져 나온 그림자도 두 개다. 연못가에 아이 둘이 오도카니 앉아 있었던 것이다. 갈매빛 상침을 둔 모시 적삼과 양 어깨에 분홍빛 꽃수를 놓은 생명주 적삼 위에 버드나무 그늘이 들숭날숭 걸려 있다. 푸른 대추만한 참개구리 한 놈이 여 이파리 위에 의젓하게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다. 연잎이 뜸한 수면에서는 소금쟁이가 뱅뱅이를 돈다. 작은 꽃, 노랑 빛깔의 말꽃이 흔들린다.

"봉순아."

"."

"저걸 왜 소금쟁이라 해?"

서희가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모르겄소."

"왜 몰라. 말해봐."

"모른다 카이요."

"왜 몰라? 난 알아!"

빨딱 일어선다. 꽃신 콧등에 흙이 묻어 있다. 봉순이는 손바닥으로 서희 신발의 흙을 닦아준다.

"난 알어! 구천이, 중놈! 구천이가 소금장수야!"

"?"

봉순이는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걸어서 버드나무 뒤켠으로 돌아간다. 화가 나고 답답했던 서희는 씩씩거리며 방금 흙을 닦아준 꽃신으로 땅을 연거푸 걷어찬다. 돌멩이가 연못으로 퐁당퐁당 뛰어든다. 연잎의 청개구리가 도망을 치고 소금쟁이는 뱅뱅이를 그만두고 몸을 움츠린다.

"애기씨! 애기씨!"

별안간 봉순이 소리를 질렀다.

"이리 와보시요!"

"..."

"여기 말입니다! 개미가 크다란 벌을,"

"..."

"조맨한 개미 놈들이 크다란 벌을 잡아묵을라 갑니다."

"어디, 어디!"

눈을 반짝반짝하며 서희는 달려간다.

"이거 보이소. 조맨한 놈들이!"

벌은 산 놈이었다. 날개가 상하였는지 날지 못한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벌한테 개미 네댓 마리가 덤벼드는 것이다. 엉덩이에 올라탄 놈, 등에 올라탄 놈, 다리를 물고 늘어진 놈, 벌이 뒹군다. 사방에 나가떨어진 개미들은 미친 듯이 맴을 돌다가 그악스럽게 다시 덤벼든다. 잔인하고 무서운 아귀다. 아이들은 머리를 마주대고 땅을 내려다본 채 꼼짝없이 곤충의 격투를 지키고 있다.

"애기씨."

"..."

"요눔으 개미새끼들 직이부립시다."

"안 돼."

응원의 전령을 받았음인지 더 많은 개미들이 달려왔다. 디뚝디뚝 걷다가 딩굴곤 하던 벌이 이젠 딩굴기만 한다.

"애기씨,"

"..."

"요눔으 개미, 나쁜놈이요! 직입시다."

"아냐."

"불쌍하요."

봉순이 딩구는 벌에게 손을 내민다. 서희는 봉순이를 떠밀었다. 뒤로 나자빠지면서

", 불쌍치도 않소!"

"누가 이기는지 볼 테야."

"봉순아 머하노."

길상이 얼굴을 쭉 디밀었다.

"이리이 멋꼬?"

", 개미놈들이 벌을 잡아묵을라 칸다. 죽지도 않았는데,"

길상의 손가락이 어느새 벌을 낚아챘다. 개미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머야앗!"

서희가 고함을 쳤다. 그러나 길상은 날개가 상하고 기진맥진한 벌을 소중하게 싸들고 가서 백일홍나무의 그 분홍 빛깔 꽃 속에다 넣어준다.

"꿀 묵고 정신 차리라."

발을 구르며 서희는 울부짖었다. 길상은 무정한 눈을 하고 울부짖는 서희를 쳐다본다.

"나쁜 놈! 중놈! 소금장수! 거짓말쟁이! 토끼도 못 잡는 덩신!"

"길상아!"

담장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께서 부르신다."

머리까지 감아 빗은 삼월이와 봉순네가 돌아왔다. 서희 울음소리, 봉순네가 달래는 소리를 들으며 길상은 사랑으로 달려간다. 이동진은 돌아갔는지 없었다. 마루 끝에 우뚝 서 있던 치수가 말했다.

"김서방 불러오너라."

"."

늦은 점심을 먹던 김서방이 입가를 닦으며 왔다.

"소인 부르셨습니까."

"."

"..."

"강포수라는 엽사가 있다며?"

"."

"재간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예 그렇습니다. 산에 들믄 귀신이 되고 마을에 내리오믄 덩신이 된다고들 합니다."

일러바치는 말에 치수는 피식 웃는다.

"거처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

어리둥절하다가 다음 김서방의 낯빛이 달라진다.

", 그거는, 마을에 내리오는 일이 좀체 없느니께,"

달라진 김서방 낯빛을 지켜보던 치수는

"모르겠다 그 말이냐?"

", 그런 거는 아니옵고, 저 김위관 집의,"

"김평산이?"

", 혹 강포수 거처를 알고 있일는지 모르겄십니다."

"그래... 가서 김평산이 그 사람을 내가 보잔다고 일러라."

"나리마님께서 말심입니까."

"오냐."

김서방은 엉거주춤 서 있다.

"어려운 일이라도 있느냐?"

", 아니옵니다."

김서방은 급히 나간다.

'강포수는 와 찾으시까.' 조준구는 엽총을 구하려고 서울 올라간, 그 내력을 모르는 김서방은 지리산에 구천이가 있다는 마을의 소문이 마음에 꺼림칙했다. '설마... 그거는 그렇고 망나니 겉은 그 인사를 불러다가 우짜실라 카는지, 나도 양반입네 하믄서 고분고분하지도 않을 기고, 나으리는 나으리대로 마구 하인 다루듯 하실 기고 시끄럽게 되지나 않을란가 모르겄네.' 평산의 집에 내려갔으나 집은 비어 있었다. '당자를 못 만나믄 댁네라도 만나서 행처나 알아얄 긴데.' 아무도 돌아오는 기척이 없고 모이를 찾는 닭 한 마리 볼 수 없는 빈집에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서 김서방은 밖으로 나온다. 내려갈 적에는 못보았던 함안댁이 개울가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었다.

"저 말심 좀 묻겄심다."

빨래하던 동작은 멎었으나 돌아보지는 않는다.

"참판님댁의 개똥애비올시다마는."

"말해보오."

새삼스럽게 내외를 하는가 함안댁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으며 말했다.

"우리 댁 나으리께서 김위관..."

다음 말은 슬쩍 빼어먹고

"좀 보자 하시오."

처음으로 돌아보았다. 좁은 이마에 땀방울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양미간이 모여든다. 푸릇푸릇한 피멍이 돋아난 얼굴에, '이놈, 김위관댁 나으리라 하면 혀가 동강이 나겠느냐?' 그러나

"주막에나 가보지."

하고는 빨래를 개울에 점벙 넣어 흔들며 하던 일을 계속한다. '허허 참 몹쓸짓을 했구나.' 입속에 쓴 것을 머금은 듯 얼굴을 찡그리고 김서방은 주막을 향해 내려간다. 그는 평산을 대하기가 싫었다. 함안댁 얼굴의 푸른 멍을 생각하니 더욱 그를 만나는 일이 싫어진다. 옛날, 벌써 삼십 년 세월이 지나갔는데 포졸들이 집안으로 몰려들던 그 당시의 사건은 심약한 김서방에게 우둔증을 심었다. 그때 포졸들 속에 평산을 닮은 얼굴을 보았던가, 김서방은 웬일인지 평산을 보기만 하면 우둔증이 도졌다. 그럴 때마다 '하 지금은 그런 세월이 아니지.'하고 한참 후에야 마음을 가다듬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산이도 김서방의 심정을 알고 천주학장이, 어쩌고 하며 놀려주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주막 앞에까지 갔을 때 평산의 꺽쉰 목소리가 밖에까지 울려나왔다. 김서방은 기웃이 들여다본다. 짧고 퉁거운 목을 저으며 지껄이고 있는 평산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을에서 보지 못한 건달풍의 사내가 그의 말상대였다. 건달풍의 사나이는 연신 술을 퍼마시고 안주를 질겅질겅 씹으며 맞장구를 치곤 한다.

"여보시오."

평산이 돌아보았다.

"저어."

"...?"

"디릴 말심이 있심다."

"그렇다면 썩 들어오게나."

", 여기서, 잠시만."

"날더러 나오라 이 말이냐?"

"."

"고얀 놈! 간밤에 다리몽댕이 뿌러졌느냐!"

김서방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는 비실비실 주막 안으로 들어왔다.

"원치 술을 못허니께 술독 옆에만 가도."

하얗게 된 얼굴에 억지웃음을 띤다.

"허 참 그렇지."

하더니 평산은 큰소리를 내어 껄껄 웃는다.

"귀창 날러가겄소이. 하룻강아지 머 무순 줄 모르더랑게?"

빈정대는 주모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는 시늉으로

"그렇지 그래, 그러고 보니 자네 천주학쟁인 것을 내가 몰랐구나. 아암 술독 옆엔 얼씬도 못하구말구."

", 아니 별소릴 다 듣겄소. 벼락내릴 소리 마시요!"

김서방은 우짖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불끈 쥔 두 주먹도 부르릉 떨었다. 분명 그것은 김서방의 착각이다. '천주학쟁이를 박다하던 세월은 가고 없는데, 서울서는 지금 종현 언덕에다 천주학쟁이 큰 집을 짓고 있다 카든데, 하 참 지금은 그런 세월이 아니지.' 그 말을 뇌후에 김서방은 비로소 마음을 놓는다. 본시 김서방은 최참판댁의 종은 아니었다. 남원의 윤씨부인 친정인 윤씨댁의 종이었다. 그가 열일곱 되던 해 천주교도들의 대학살이 시작되어 이듬해 윤씨 집안은 결단이 났다.이 무렵 병으로 누워 있던 윤씨부인의 부친은 기적으로 일가 몰살에서 살아남았다. 천성이 소심하면서도 충성을 목숨으로 아는 우직한 판술이(김서방)는 늙은 상전을 업고 최참판댁으로 도망쳐왔던 것이다. 판술이는 천주교도가 아니었으나 그는 그때 당한 몸서리쳐지는 참상을 오래 잊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언제 또 그런 환난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불안이 삼십 년 세월동안 그를 괴롭혀왔었다.

"자네가 천주학쟁이건 동학군이건 내겐 상관이 없다."

"..."

"난쟁이건 키다리건 말이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우리 나으리마님께서,"

"최치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아 나도 만석꾼네 최참판 자손을 마구잡이로 부를 수 있네!'하듯이 건달풍의 사나이를 거들떠본다.

"우리 나리께서 좀 보자 하시오."

"나를?"

평산의 눈이 민첩하게 돈다.

"?"

"나도 모르겄소."

"무슨 일인지 알아야 갈 거 아닌가. ! 간밤에 꿈자리가 사나왔던가?"

떵떵 울렸으나 눈동자는 심각해졌다. 그러나 김서방은 제 상전의 분부가 거절당할까 겁내어

", 부탁하실 일이 있는 모양인데."

평산의 기분을 상케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한테 부탁할 일이 있다... 노름 솜씨나 가르쳐달라면 모를까, 무슨 부탁인고?"

김서방의 얼굴이 벌개진다.

"흥 간덩이가 마구 부풀어 올라가요이."

주모 빈정거림에 용기를 얻은 김서방은

"강약이 부동이더라고 범 겉은 중놈들은 치레로 둔 줄 아시요?"

역정을 버럭 낸다.

"우리 댁 나으리가 개똥이 쇠똥이요? 와 함부로 이름을 부르는 거요?"

아까 못한 말까지 시원하게 내뱉는다. 김서방의 역정은 효력이 있었다. 그러나 옆에 있는 건달풍의 사내에게 체신머리를 세우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평산은 다시 뇌까렸다.

"이름은 부르라고 지은 것, 상전이면 네 상전이지. 아무튼 가기는 가야겠군. 사랑도 없는 내 집에 와서 부탁 말하랄 수도 없으니."

우둔한 몸집에 비하여 김평산은 재빠른 동작으로 밖에 나왔다.

"김서방."

사뭇 목소리가 부드럽다. 대신 김서방 대답은 우악스러웠다.

"와 그러오."

곰곰이 생각하니 화가 난 것이다.

"그 양반이 뭣 땜에 날 오라 하든가?"

"가보믄 알 거 아니요."

"나하고는 사이가 뜬데 무슨 일일까?"

"설마 나무에 매달고 몽둥이뜸질 하겄소."

"애키, 이 사람."

"실데없이 뻣뻣하게 하지 마소. 우리 나으리 성미 모르시오? 동네에서 쫓기 안 날라 카거든."

"누구 마음대로?"

"나으리 마음대로 아니요."

김서방은 은근히 압력을 주며 치수 앞에 가서 고분고분하라는 암시를 준다. 마을에서 소마통을 지고 가던 칠성이를 만났다. 칠성이는 김서방과 평산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무신 일이요?"

눈으로 평산에게 물었다.

'걱정 마라.' 평산은 씩 웃는다. 칠성이는 그들이 지나친 뒤 한참만에 돌아본다. 사랑 뜨락에 들어간 김서방은

"나으리 마님."

"."

방문에 친 발을 거두며 치수가 내다본다. 눈 속의 빛을 죽이면서 김서방 뒤에 엉거주춤 서 있는 평산을 바라본다. 평산은 김서방 어깨 뒤에서 적당히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지체가 다르고 보잘것없는 무반의 후예이긴 하나 명색이 양반이니 의젓하게 대해야 할까, 아니면 전락하여 상사람과 다름없이 된 자기 본색을 드러내어 애당초부터 허릴 굽히고 들어가야 할까, 평산은 그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방에서 대청으로 나온 치수는 화문석을 깔아놓은 자리에 앉았다.

"올라오시요."

의외로 치수의 말씨는 정중했다.

"."

평산은 절로 허리를 굽히며 조심스럽게 마루에 올랐다.

"안녕하시옵니까."

저도 모르게 평산은 굽실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보자 하시었는지요."

"김서방은 가게."

서성대는 김서방을 보고 치수가 말했다.

"."

김서방은 물러가면서 불안스럽게 한번 돌아보았다.

"강포수를 아시요?"

"?"

평산의 얼굴빛은 변한다. 강포수에게 부탁을 받아 금가락지 한짝을 팔아준 일이 번개같이 머릿속을 지나갔고 다음은 귀녀를 불러내어 공모할 것을 위협한 일이 생각났다.

"강포수라면,"

"산에서는 귀신이요 마을에서는 덩신이라든가? 그 위인 말이요."

", 알기야 알지만 무슨 일로,"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시오?"

"산에 있겠지만 별안간 강포수를 무슨 연유로 그러시는지요."

평산은 자신을 가라앉히며 되물었다.

"산에 있는 줄은 나도 아오."

"."

"사람을 보내면 찾아올 수 있겠소?"

"글쎄올시다. 못 찾을 것도 없지요."

"..."

"정한 거처는 없느나 제가 나서면,"

하고 평산은 치수의 마음을 떠보고 눈빛을 살핀다.

"찾아보겠소?"

"어려운 일 아니지요. 강포수가 다니는 길목은 빤하니까요. 산중의 목기막이나 화전민들 우막을 뒤져나가면 행방은 알 수 있습니다. 전에도 한번 그렇게 해서 찾아낸 일이 있었습지요."

"실은 사냥을 해볼 생각에서,"

"사냥을!"

놀랐다기보다 마음이 놓여 언성을 높였는데 치수는 의아하게 평산을 바라보다가 불쾌한 듯 눈길을 거두었다.

"예 사냥을."

"..."

"강포수를 선생으로 모실까 싶어서."

완연히 조롱하는 투였으나 평산의 기분은 흐려지지 않았다.

", 그렇습지요. 사냥이라면 문리가 난 강가놈이야말로, 거 명포숩니다. 명포수지요. 그놈 발바닥이 안 닿은 곳이 없을 겝니다."

평산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벌죽벌죽 웃는다. 그는 뜻밖에 일이 잘되어간다고 생각했다.

"말이 났으니, 그놈 눈독 딜인 짐승치고 총 끝에서 놓여난 일이라곤 없었지요. 그놈은 사냥에 미친놈입니다. 집도 제집도 자식도 없지요. 혈혈단신, 총 한 자루 울러메고 발이 멎은 곳에서 잠을 자고 닥치는 대로 처먹으면서 천하태평, 그렇게 속 편한 놈은 아마세상에는 없을 겝니다."

"홀가분하겠군."

"아암요. 계집을 얻어 살림을 안 차린 것도 아니었지만 사냥에 미친놈이고 보니 계집이 붙어나야지요. 계집이란 근본부터 괭이 같은 것이라 잠시라도 쓰다듬어주지 않으면 달아나게 마련 아닙니까."

평산은 손짓 몸짓 해가면서 지껄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본시 주접스러워 그렇기도 했으나 또 마음을 놓아 그렇기도 했으나 차츰 그는 그대로 울분이 치솟았던 것이다. 최치수의 지체, 최치수의 재물, 최치수의 학식, 최치수의 오만, 그런 것이 말할 수 없는 큰 덩어리가 되어 자신은 그 밑에 짓눌리어 자꾸 작아지는 것 같은 생각이 그를 슬프게 했고 걷잡을 수 없게 안정을 잃게 했던 것이다.

"언제 가겠소?"

평산은 지껄이던 입을 오므렸다. 저도 모르게 주착머리 없는 자기 군소리를 사과라도 하듯이 비죽이 웃는다.

", 그야 내일이라도 가라시면."

"누구 한 사람 따라가야겠소?"

", 그러면 더욱 좋겠지요."

"그럼 길 떠날 채비를 차려보시오."

평산은 최참판댁을 물러나왔다. 가래침을 돋우어 칵 뱉는다.

"내가? ..."

발부리 가까이 두꺼비가 엉금엉금 기어간다.

"내가? ..."

주모한테 수모를 당했을 대도 평산은 웃었다. 노름꾼 패거리한테 뭇매를 맞았을 때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그만두었다. 마을에서 멸시의 눈초리를 받을 때도 평산은 흥! 하고 코웃음치고 말았다. 그러나 최참판댁에서 물러나는 평산의 눈에는 비애의 눈물이 글썽 돌았다.

"제기럴!"

엉금엉금 기어가는 누더기 꼴의 두꺼비를 걷어찬다. 누리팅팅한 뱃바닥을 그러내고 저만큼 나가떨어졌던 두꺼비는 몸을 뒤집더니 다시 엉금엉금 기어간다. 사랑 담장 안에 심은 석류나무가 담장 밖으로 넘어져 나와 그늘이 된 곳, 그 담벽에 귀녀가 붙어 서 있었다. 귀녀는 평산의 거동을 유심히 쳐다본다.

"무슨 일로 오시었소."

담벽을 따라 다가서며 물었다. 크고 검은 눈동자는 미련하리만큼 평산의 표정 전부를 핥았다.

"요망 떨지 마라1"

"소리가 크시오."

"천둥만하냐!"

"관에서 매 맞고 집에 와서 제집 친다 카더니마는 왜 이러시요."

"?"

평산의 얼굴에 심술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강포수를 찾아오라누만, 최치수가!"

"강포수를?"

귀녀의 얼굴이 굳어진다. 평산의 목소리는 더욱 낮았다.

"걱정 마라. 귀녀도 겁이 많군 그래. 최치수의 계집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네."

"..."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느니라. 설마 가락지 일이 누설되겠느냐?"

"실없는 소리 마시오. 몇 분 말해야 알아듣겄소. 그것은 아씨가 나한테주신 기요."

"그렇다면 여우 XX 땜에 그러느냐?"

귀녀는 눈을 치뜨고 평산을 노려본다.

"아아, 노염 탈 것 없네. 귀녀 말마따나 그것은 다 실없는 소리고."

"..."

"내가 열이 좀 나서 그랬네."

"그런데 나으리는 왜 강포수를 찾아오라 하시오?"

"사냥을 하겠다는 건데, 짐승 사냥을 할란지 사람사냥을 할란지 그것은 모르겠다만."

"?"

"강포수를 선생님으로 뫼시겠다 그 말이구먼."

평산이 목구멍을 굴리며 웃는다.

"하지만..."

"강포수가 걱정이다 그 말이냐?"

"개 모래 묵듯이 시부릴지 누가 알겄소."

"그 걱정은 안 하는 게 좋다. 내 일이자 귀녀 일이니 강포수 입을 초병마개처럼 내가 꼭 틀어막아놓겠다."

"사냥을 한다 카믄..."

귀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일이 재미있게 되어갈 게다. 이런 일도 어짜믄 좋은 징조가 아닌가 모르겠네."

결심을 굳게 하는지 평산의 얼굴이 쌍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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