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인연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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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트리지를 떠난 뒤 오늘까지 더버빌을 만난 일도, 또 그의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다. 이 우연한 부딪침은 조금만 자극을 주어도 폭발할 듯한 고통스러운 순간에 발생했다. 그러나 기억력이란 참으로 엄청난 것이어서 알렉이 과거에 방탕한 생활을 뉘우친 개심자로 마을사람들 앞에 서 있는데도 테스는 겁에 질려 꼼짝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 그의 얼굴에서 풍겨 나던 인상과 지금의 그 여전히 훌륭한 풍채지만 불쾌함을 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새까만 코밑수염이 없어지고 깨끗하게 손질한 턱수염을 가진 알렉. 그의 복장은 인자한 목사라고 믿을 만큼 완벽했고, 표정까지 변해 있었다. 잠시 그녀조차도 더버빌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는 다른 사람 같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 사람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성경의 엄숙한 구절들까지도 귀에 거슬리는 오싹한 목소리로 부조리하게 들렸다. 4년 전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전혀 다른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에 그녀는 심한 구토를 느꼈다. 그것은 굉장한 변모였다. 이전의 정욕적인 곡선은 신앙적인 열성의 곡선으로 다듬어지고, 유혹을 일삼던 입술은 이제 기원을 나타내는 열띤 외침으로 변해 있었다. 방탕한 생활에만 물들었던 그의 뺨은 경건함을 나타내는 빛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수욕은 광신으로, 이단주의는 사도주의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 옛날 그렇게나 지배적인 위엄으로 대답하고 부리부리하게 번쩍이던 눈이 지금은 사나울 정도로 무서운 신앙의 정력으로 빛났다. 자신의 욕망을 방해받을 때 으레 나타내던 심술궂은 표정 따윈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상을 주는 그의 용모에도 불구하고, 그는 뭔가 불평을 품은 것 같았다. 그것은 타고난 원래의 목적에서 빗나간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의 승화된 것 같은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안간힘 쓰는 노력이 위선으로 보이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지만 그런 변화가 있을 수 있는가? 그녀는 너그럽지 못한 편견적 감정을 갖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타락한 생활에서 영혼을 구원하려고 신앙을 택한 사람은 비단 더버빌 뿐만이 아닌데, 그 사람의 행동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옛날 음성을 통해 복음을 들었다고 해서 귀에 거슬리게 느끼는 건 그녀의 타성적인 선입관이 작용한 까닭이리라. 죄 많은 자일수록 더 깊이 깨우쳐 거룩한 자가 된다는 사실은 구태여 기독교 역사를 깊이 연구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생각들이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막연한 상태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뜻밖의 사실에 얼이 빠졌던 테스는 제 정신으로 돌아가자, 그의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을 했다. 햇살을 등지고 서 있는 그녀를 그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몸을 움직였을 때 그는 테스를 알아 봤다. 그녀가 옛 애인에게 준 충격은 전기가 온몸에 감전된 것보다 훨씬 강했다. 그의 열정과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던 설교도 자취를 감추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은 무슨 말인가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그녀가 눈앞에 있는 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듯했다. 그의 눈은 한 번 그녀를 흘긋 보고 나서부터는 중심을 잃은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금 테스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초조한 행동은 얼마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알렉이 당황하여 안절부절 못하자 오히려 테스는 기운이 회복되어, 그대로 헛간을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반성해 볼 여유가 생기자, 서로간의 변화에 깜짝 놀랐다. 그녀에게 재앙을 준 사람은 지금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되어 있지만, 그녀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마치 전설에 나오는 음탕한 여신이 변화된 알렉의 제단에 갑자기 나타나서 그곳의 거룩한 불길을 꺼 버린 결과가 되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받는 그녀의 등은 뭇사람들의 시선까지 분간할 수 있을 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헛간 앞에서 그녀의 등에 쏠릴지도 모르는 눈길에 그녀는 이토록 민감했다. 이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의 가슴을 누르던 슬픔은 이제 새로운 걱정으로 바뀌었다.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애정에 대한 갈증은 아직까지 그녀를 따라다니던 끈덕진 과거의 무자비한 감각과 잠시 자리를 바꾸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과오를 뼈저리게 느꼈고,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과거와 현재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기를 늘 바랐지만, 그 사슬은 여전히 한 줄에 묶여 있었다. 자신이 과거의 존재로서 사라지지 않는 한 완전하게 현실과 격리된 과거란 있을 수 없는 듯했다.
오고 사는 사람이나 수레 등 눈에 띌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지루하게 뻗어 나간 건조하고 하얀 이 길에는 말라붙은 갈색 말똥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언덕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가고 있을 때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뒤돌아봤다. 눈에 익은 모습-감리교의 신자답게 괴상한 복장을 한- 이생에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랐던 바로 그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도, 도망갈 기회도 없었으므로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한 태도를 보이면서 그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몹시 흥분한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빨리 걸어오느라고 흥분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난 격한 감정 때문이었다.
"테스."
하고 알렉이 불렀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걸음만 늦추었다.
"테스. 나야, 알렉 더버빌이야."
그는 거듭 말을 걸었다. 그제야 그녀는 뒤돌아보았으며, 알렉은 가까이 다가갔다.
"아, 당신이군요."
그녀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인사가 겨우 그거요? 하긴 그 이상 더 바랄 자격도 없지. 물론이지."
그는 씽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당신은 우스꽝스럽게 여길 거야. 그러나 나는 이런 생활을 견뎌야 할 당신이 집을 나가 버렸다는 얘길 들었지만, 당신이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소. 내가 따라온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테지?"
"네, 나는 따라오지 않길 바랐어요. 아니, 평생 당신을 만나게 되지 않길 기도했어요."
"그럴 테지"
그녀와 함께 걸으면서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그녀는 마지못해 그와 나란히 걸었다.
"오해는 하지 마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당신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 나의 당황한 모습을 눈치 챘다면 당신이 오해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요.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내 모습이고, 당신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행동이지. 그러나 그런 충격 속에서 내 의지는 끝까지 나를 도왔어. 나는 냉정을 되찾은 다음 이렇게 생각했어. 하느님이 심판이 임하기전에 사람을 구워해야 한다고. 테스, 비웃을 테지. 그러나 비웃어도 좋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상처를 입힌 그 여자야말로 구원해야 할 사람이라고 외쳤었소. 그런 생각 때문에 당신을 따라온 거지, 그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소."
그녀가 대꾸하는 말에는 경멸하는 듯한 냄새가 짙었다.
"당신 자신은 구원하셨나요? 자선은 먼저 저희 집부터라는 말이 있던데요."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소. 교인들의 구원을 내가 설교하듯이, 내 구원에 관한 것은 하느님이 맡으셨으니까. 당신이 아무리 나를 경멸해도, 몇 년 전에 내가 자신에게 퍼부은 채찍에만은 미치지 못하니까. 하여간 믿건 믿지 않건 간에 어떻게 해서 내가 개심했는지 듣고 싶지 않소? 에민스터의 목사 이름을 들어 본 적 있소? 아마 들었을 게요. 클레어 목사라고 하는 분이오. 그의 교파에서 가장 열렬한 분이고, 교계에서 몇 분 안 되는 강력한 목사 중의 한 분이지. 나의 운명을 맡겼던 극단파보다 강력하진 못하지만, 국교 목사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에 계신 분이오. 젊은 목사지만, 국교 목사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에 계신 분이오. 젊은 목사들은 그들의 궤변으로 진리를 가리어, 교파의 그림자 같은 상태로 타락했지. 내가 클레어 목사와 의견을 달리한 점은 국가와 교회라는 문제뿐이오. 즉,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고린도후서> 제6장 17절) 라는 성경구절의 해석이오. 그분이야말로 당신이 아는 어떤 목사보다도 가장 많은 영혼을 구한 겸손한 일꾼이라고 나는 믿소. 그분의 소문을 들었소?"
"네, 들었어요."
2, 3년 전에 어느 종교 단체 대표로 트랜트리지에 전도하러 온 일이 있었는데, 방탕아였던 나는 도리를 설명하고 갈 길을 가르쳐 준 그분에게 모욕을 주었소. 그래도 그분은 노여워하지 않고 그래도 언젠가는 성령의 첫 열매를 얻으리라. 조롱하는 자도 기도할 때가 있으리라 라고만 말했지. 그 말씀에는 이상한 힘이 들어 있어, 그때부터 내 마을을 파고 들더군. 사실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이 나의 마음에 더욱 충격을 줬을 테지만, 그로 인해 차차 빛을 보게 됐소.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의욕이 불붙기 시작하면서 오늘 집회도 이루어진 거요. 이 근방에 전도를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오. 처음 몇 달 동안은 불신자들이 많은 영국의 북부 지방을 돌아다녔지. 그 지방을 택한 이유는, 서투른 설교도 익혀서 친지들이나 암흑 시절의 방탕하던 친구들 앞에서 엄숙한 시련을 받기 전에 용기를 주기 위해서였지. 테스, 만약 확신이나 구원의 기쁨을 알 수 있다면 당신은 아마 틀림없이"
"그만두세요."
테스는 버럭 소리를 지른 다음 길가의 난간으로 달려가서 기댔다.
"그 따위 엉뚱한 얘기는 믿을 수 없어요. 그런 말을 계속한다면 소리치겠어요. 당신이 나를 어떻게 망쳐 놓았는지 잘 아시잖아요. 당신 같은 사람들은 나 같은 여자들을 마음대로 망쳐 놓고 그것을 낙으로 삼지 않았어요. 쾌락을 즐기고 난 다음은 회개했다면서 천당의 낙이나 누려 보려고 신자가 된다는 거죠. 참 훌륭하군요. 난 당신을 못 믿어요. 지금의 그런 행동까지도 증오해요.
알렉도 굽히지 않았다.
"테스, 그렇게 말하는 게 아냐. 회개한다는 것이 아주 새로운 생각처럼 내 가슴에 떠올랐단 말이오. 나를 믿지 않는다고? 무엇을 못 믿겠다는 거요?"
"당신의 개심 말이에요. 당신이 종교로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 말이에요."
"왜?"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당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도 그런 걸 믿지 않으니까요."
"여자의 이론이란 참. 그 더 훌륭한 사람이란 누구지?"
"말할 수 없어요."
가슴속에 억눌렸던 감정이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투였다.
"좋아. 하느님 앞에서 감히 내가 착한 인간이라고 말할 순 없어. 내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 것이오. 선이 무엇인지 이제 겨우 알기 시작한 것뿐이니까. 그러나 늦게 온 자가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도 있소."
테스는 서글프게 말했다.
"네,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됐다는 건 믿을 수 없어요. 알렉, 당신이 느끼는 밝은 빛은 오래 가지 못할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기댔던 난간에서 몸을 세워, 그녀는 알렉을 쳐다보았다. 눈에 익은 얼굴과 몸에 눈길이 머물자, 알렉도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열한 성질이 숨은 건 사실이지만,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도, 또 부드러워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알렉이 별안간 소리쳤다. 자신의 태도와 표정에 신경을 쓰지 않던 테스는 크게 뜨고 쳐다보던 까만 눈을 얼른 내리뜨고 얼굴을 붉히며 머뭇머뭇 말했다.
"죄송해요."
그러자 가슴에 묻어 두었던 비참한 생각이 되살아났다. 자연이 준 육체라는 장막에 머무르는 것도 자신의 허물이 아닐까.
"아냐, 죄송할 건 없소.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기 위해 베일을 썼을 텐데, 왜 그걸 내리지 않소?"
그녀는 베일을 내리면서 급히 말했다.
"바람을 막으려고 쓴 거예요."
"명령하듯 말해 무례한 것 같지만, 당신 얼굴을 자주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어떠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듣기 싫어요."
"어쨌든 여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내게 큰 힘을 미쳐 왔단 말이오. 전도사는 여자의 얼굴과 아무 관계도 없겠지만, 여자만 보면 잊으려는 과거가 자꾸만 되살아나지."
격한 대화가 끝난 다음에 그들의 얘기는 점점 줄어들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이따금 몇 마디 주고받을 뿐이었다. 도대체 그가 어디까지 따라올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가 달라고 말하긴 싫었다.
문이나 목장 난간 같은 곳을 지날 때마다 거기에는 빨간색이나 파란색 페인트로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저것을 쓰러 다니면서 수고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가 말하기를, 그 사람이 이 지방에서 알렉과 그의 동료들이 고용한 것이고, 세상 사람의 마음을 깨우칠 수 있는 방법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경구를 쓰고 다니게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크로스 인 핸드라는 지점에 다다랐다. 거칠고 메마른 고원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쓸쓸한 곳이었다. 비극적인 바람이 이는 듯한 소극적인 미, 즉 새로운 현대의 아름다움이어서 미술가나 유람객들이 찾아드는 풍경과는 다른 정경이었다. 여기 지명은 그곳에 있는 돌기둥에서 딴 것인데, 그건 이 근방의 어느 채석장에도 없는 괴상하게 험한 지층에서 갈라 낸 돌로써 그 위에 사람의 손이 서투른 솜씨로 새겨져 있었다. 돌기둥의 유래와 목적에 대해선 구구한 설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십자가의 형태를 갖추었던 것인데 지금 남은 받침돌이라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지금 서 있는 돌기둥이 원래 형태이며, 경계선이나 회합 장소를 알리려고 세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고적의 연유야 어떻든 간에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그 모습이 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불길하게, 또는 엄숙하게 보여서 아무리 둔감한 길손이라도 어떤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이었다. 그 지점에 다다르자 알렉이 말했다.
"나는 여기서 돌아가야겠소. 저녁 6시에 애보트 셔넬에서 집회가 있으니까. 당신이 내 마음을 뒤엎어 놓은 것 같소. 그 까닭은 말할 수 없고, 또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가서 좀 쉬고 다시 힘을 얻어야겠소. 그런데 당신, 무척 유창한 말을 쓰는데, 어찌된 일이오? 그 훌륭한 말을 누가 가르쳐줬소?"
"그 동안 고생을 겪으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그녀는 더 이상의 대답을 피했다.
"어떤 고생을 했기에?
그녀는 맨 처음의 고생, 즉 그와 관계되는 그 일만을 그에게 얘기했다. 더버빌은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잠시 후,
"나는 그런 사정을 통 몰랐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왜 편지라도 하지 않았소?"
그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알렉이 말을 덧붙여서 침묵을 깨뜨렸다.
"자, 그러면 다시 만나기로 하지."
"안 돼요.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세요."
"생각해 보지. 그러나 헤어지기 전에 이쪽으로 와 봐요."
그는 돌기둥 쪽으로 다가갔다.
"이것이 한때는 성 십자가였소. 고적 따위는 내 교리와 무관하지만 가끔 당신이 무서울 때가 있어. 당신이 지금 나를 두려워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서워진단 말이오. 나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당신의 손을 저 돌기둥의 손자국에 대고 당신의 매력과 행동으로 결코 나를 유혹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줘."
"기가 막혀서 어떻게 그 따위 어처구니없는 말을 해요. 나는 상상도 못한 일이에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맹세해 줘요."
테스는 어처구니없었지만, 그의 고집스런 부탁에 양보를 하고 손을 얹어 맹세했다.
"당신이 신자가 아닌 게 유감이군. 불신자가 당신을 유혹해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다른 얘기는 그만두겠소. 적어도 집에서만은 당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니까 꼭 기도하겠소. 난 이만 가겠소, 잘 가요."
그는 사냥꾼 통로가 있는 울타리 쪽으로 가더니,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훌쩍 뛰어넘어 애보트 셔넬 쪽으로 걸어갔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걸음걸이에서 그의 마음의 동요를 읽을 수 있었다. 알렉은 옛날 일이 되살아난 듯 조그만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낡고 때 묻은 편지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5, 6개월 전의 날짜가 있고, 클레어 목사의 서명이 든 편지였다. 그 편지는 더버빌의 개심을 들은 목사의 숨김없는 기쁨과 그런 사실을 알려 준 데 대해 감사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되어 있었다. 지난날 더버빌의 무례한 행동을 기꺼이 용서하고, 장차 그의 계획에 큰 관심을 가지며, 클레어 목사가 여러 해 일을 보던 교회에서 함께 일하겠다면 신학 대학의 입학을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 기간이 길어서 생각이 없다면 굳이 강요하진 않겠고, 모든 사람은 자기 힘껏 일해야 하며 성령이 가르치는 방법에 따라서 한다고 적혀 있었다. 더버빌은 그 편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 내용은 자신의 태도를 비웃는 것 같았다. 또 그는 수첩에 적어 놓은 성경 구절을 읽었다. 차차 마음이 가라앉고, 테스의 환상은 이제 그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 것 같았다.
한편 테스는 지름길이 있는 언덕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1마일도 채 가기 전에 그녀는 한 목동을 만났다.
"내가 지나오다가 본 옛날 돌기둥은 도대체 무엇이에요? 십자가로 쓰였던 일이 있었나요?"
테스가 물어 봤다.
"십자가? 아니죠, 그게 십자가였다니. 그건 불행의 상징이란 말이오, 아가씨. 기둥에 묶여 손바닥에 못 박히고 교수형을 당한 어떤 죄인을 위해서 그 친척이 거기 세운 거래요. 뼈는 그 밑에 묻었조. 죄인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기 때문에, 그곳을 가끔 귀신이 되어 거닌다는군요."
뜻밖에 무서운 얘기를 들은 그녀는 어지러운 머리로 목동을 남겨 둔 채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녀가 플린트콤 애쉬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황혼이 깃들고 있었다. 그 작은 마을 어귀에서 그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나란히 앉아 있는 젊은 남녀를 봤다. 그들은 비밀을 얘기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남자의 다정한 음성에 응답하는 여자의 맑고 거침없는 음성은 황혼이 깃든 지평선에 갈린 단 하나 부드러운 소리로 차가운 대기를 뚫고 번졌다. 그들의 음성은 잠시 동안 테스의 가슴에 상쾌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테스에게 고난의 실마리가 된 사랑의 출발처럼 그들의 사랑도 누군가가 먼저 마음에 끌린 거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더욱 다가가자 처녀는 침착하게 돌아보고 비로소 테스를 알아봤지만, 남자는 겸연쩍은 듯 그곳을 떠났다.
처녀는 이즈 휴에트였다. 그녀는 테스의 여행에 대해서 품었던 관심이 솟구쳐 자신을 잊고 있었다. 테스는 여행 결과를 자세히 얘기할 수가 없었다. 약삭빠른 이즈는 테스가 방금 목격한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말했다.
"그이는 앰비 시들링이라는 사람인데, 텔보데이스에 있을 때 가끔 일을 도우러 오곤 했어.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따라 온 거야. 지난 2년 동안 내내 나를 사랑했다는 거야. 선뜻 대답해 주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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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의 어려운 결단과는 상관없이 헛된 여행을 마친 지 여러 날이 지났다. 그녀는 다시 밭일을 시작했다. 건조한 겨울바람은 세차게 불고 있었지만 병품처럼 둘러진 짚단 울타리가 그나마 그녀를 막아 주었다. 울타리 옆에는 새로 칠한 순무 써는 기계가 있었다. 새 칠을 한 기계의 번쩍이는 파란색은 음산하기만 한 주위의 정경과는 대조적으로 두드러지도록 뚜렷했다. 맞은편에는 초겨울부터 순무를 저장하는 길다란 무덤 같은 움이 있었다. 테스는 지붕이 없는 울타리 끝에 서서 순무에 붙은 흙과 잔털을 낫으로 깨끗이 털어 낸 다음 절단기 속으로 던졌다. 한 남자가 기계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통에서는 갓 자른 무채가 쏟아져 나왔다. 순무 써는 소리, 그리고 가죽 장갑 낀 테스의 순무 다듬는 낫질 소리가 어우러져 음산한 겨울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 같았다. 순무가 다 뽑힌 넓은 농장은 더욱 짙은 황갈색 밭고랑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그때 열개의 다리를 가진 어떤 물체가 밭고랑을 따라 서두르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면서 느긋하게 일하고 있었다. 그것은 봄에 씨를 뿌리려고 두 필의 말이 끄는 쟁기로 밭고랑을 일구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즐거움이 없는 단조롭고 지루한 이 풍경을 깨뜨릴 일은 생기지 않았다. 테스가 얼마쯤 그 광경을 보고 있을 때, 밭을 가는 사람 가까이에 까만 물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울타리의 벌어진 틈을 빠져나와 비탈길을 따라 순무 자르는 사람들 쪽으로 오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마치 작은 점처럼 보이던 것이 차츰 기둥처럼 커지고, 조금 뒤엔 플린트콤 애쉬쪽에서 오는 까만 복장의 남자임을 알았다. 순무 써는 기계를 돌리고 있는 남자는 손만 놀리면 되는 일이므로, 그의 눈길은 시종 걸어오는 사람에게 쏠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에 열중하던 테스는 동료가 알려 줄 때까지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는 성질이 까다로운 작업 감독인 농장주 그로비가 아니라, 한때는 부랑자였던 알렉 더버빌이 제법 목사다운 복장을 한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전도할 때처럼 열렬한 의욕이 보이지 않고, 또 일하는 남자가 있어서 좀 거북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테스의 얼굴은 이미 고뇌의 빛으로 물들었고, 머리에 쓴 수건을 깊숙이 당겨 내렸다.
"테스, 좀 얘기할 게 있어."
알렉이 다가와 조용하게 말했다.
"다시는 오시지 말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내 청을 어겼군요."
그녀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러세요? 그럼, 까닭을 들어 보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야."
누가 엿듣기나 하는 것처럼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작두 소리 때문에 알렉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알렉은 테스가 보이지 않도록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그녀 앞에 섰다. 그리고 뉘우치는 듯이 말을 계속했다.
"사실은 말이오, 지난번엔 당신과 나의 영혼 문제에만 열중해 있어서 당신이 처한 상황을 생각지 못했소. 그러나 생활이 어렵다는 걸, 내가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보다 더 어렵다는 걸 이제야 알았소. 그것도 모두 나 때문일 거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건으로 완전히 가린 얼굴을 숙인 채 다시 순무 다듬는 일을 시작하자, 알렉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봤다. 그녀는 계속해서 일에 열중함으로써, 그가 뭐라 하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불만스러운 한숨을 쉬며 알렉이 덧붙여 말했다.
"테스, 당신의 경우가 내가 저지른 과오 중에서도 가장 큰 과오였소. 그런 결과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순진한 사람의 일생을 망쳐 놓다니...나는 정말 나쁜 놈이지.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소. 트랜트리지에 살 때의 방종한 행동 말이오. 당신도 어리석었지.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후손이고 나는 천한 가짜에 불과했는데, 앞길을 전혀 모르는 여자였다고 할까. 진정으로 말하지만 악한 인간들이 마련해 놓은 함정이나 그물에 아랑곳없이 딸을 함부로 키우는 부모도 이유야 어떻든 창피한 일이오."
테스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다듬던 순무를 집어 던지고 또 다른 순무를 집으면서 여전히 듣기만 했다. 그러는 그녀의 모습은 단순한 시골 여자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얘길 하러 이곳에 온 것은 아니오. 내 형편은 이렇소. 당신이 트랜트리지에서 떠난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곳이 내 소유가 됐소. 그러나 나는 그 집을 팔고 아프리카로 전도하러 가려고 결심했었소. 전도 사업에 아주 서투른 건 사실이지만. 당신에게 부탁하는 건 부디 나의 의무, 즉 당신에게 저지른 잘못을 갚을 단 한 가지 보상을 내게 맡겨 달라는 거요. 다시 말해서 내 아내가 되어 나와 함께 가 줄 수 없겠소? 나는 이 귀중한 서류도 이미 얻어 놓았소. 그건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기도 했소."
그는 약간 주저하며 호주머니에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내 테스 앞에 내놓았다.
"그게 뭐죠?"
하고 그녀가 물었다.
"결혼 허가장이오."
"안 돼요, 천만에."
그녀는 놀라 황급히 뒷걸음치며 말했다.
"싫다고? 이유가 뭐요?"
알렉이 되물을 때, 자신의 잘못을 갚지 못하는 데 대한 실망이 아닌, 다른 실망의 빛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것은 틀림없이 옛날 그녀에 대한 옛정이 되살아난 징조였다. 의무와 욕망이 서로 엇갈리며 줄달음치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하고 그는 뜻대로 되지 않아 초조한 듯, 다시 입을 열더니 작두를 다루고 있는 사나이를 돌아보았다. 테스 또한 그 자리에서는 쉽게 얘기가 끝날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찾아와서 잠시 쉬겠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 그녀는 더버빌과 함께 좀 거칠어진 밭을 지나갔다. 새로 갈아 놓은 밭에 도달했을 때 그녀를 건네주려고 알렉이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밭이랑 위를 건너갔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지, 테스. 그래서 난 평생을 이 과오를 그대로 지닌 채 살라는 거요?"
그들이 밭고랑을 건너자마자 알렉이 되풀이했다.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어째서?"
"당신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용서해 준다면 자연히 사랑을 느끼게 될 거 아니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요."
"어째서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지.
"나는 다른 분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 말에 알렉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그래, 다른 남자를? 하지만 당신은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걸 따져 볼 힘도 없다는 말인가?"
"없어요, 그런 말 하지 말아 주세요."
"그렇다면 그 남자에 대한 당신의 사랑도 극복할 수 있는 일시적인 감정뿐일 테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렇지, 그렇고말고. 왜 아니란 말이오?“
"그 까닭은 말할 수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얘기해야 하오."
"정 그러시다면, 나는 그분과 결혼했어요."
"아아."
그는 탄성을 올리고는 꼼짝도 않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테스는 애원하듯 말했다.
"그런 얘기는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 말할 생각이 없었어요. 여기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안다 해도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에요. 그러니 제발 그런 질문일랑 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지금은 우리들이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아셔야 해요."
"우리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남이라고?"
순간, 그의 얼굴에는 옛날 짓궂은 인상이 번뜩였다. 그러나 단호하게 그런 표정을 지워 없앴다. 손짓으로 순무 자르는 남자를 가리키며 기계적으로 물었다.
"저기 저 남자가 당신 남편이오?"
"저 남자라니요. 천만에요."
하고 그녀는 자랑스럽게 부정했다.
"그럼 누구요?"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자꾸만 묻지 마세요."
하고 그녀는 부탁했다. 치켜든 그녀의 얼굴과 까만 눈이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더버빌은 어리둥절했다.
"당신을 생각해서 물어 보는 거요."
그는 안간힘을 쓰면서 받아 넘겼다.
"오, 하늘의 천사들이여. 하느님이여. 이런 말을 사용함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맹세코 말하지만, 내가 이곳에 온 건 오로지 당신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해서였소. 테스,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 줘. 그런 눈초리는 정말 견딜 수 없어. 나는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되지. 절대로 안 돼.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의 그 눈초리가 사라진 줄 알았던 나의 모든 감정을 되살려 놓았어. 결혼이 우리 둘을 정결하게 해 주리라 생각했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고린도전서> 제 7장 14절) 라는 성경 구절을 홀로 외곤 했소. 그런데 내 생각은 수포로 돌아가고, 나는 또다시 실망에 잠겨야 하다니..."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혼, 결혼했다지. 결혼을 했다면야."
조용하게 말을 덧붙인 그는 허가증을 찢어 주머니에 넣으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결혼이 수포로 돌아간 바에야 그 사람이 어떤 지위의 사람이건 당신과 남편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소. 알고 싶은 일이 많지만, 당신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구태여 묻진 않겠소. 당신 남편이 누군지만 알 수 있다면 쉽게 도와줄 수 있을 거요. 그 사람은 이 농장 안에 있소?"
"아니에요, 먼 곳으로 갔어요."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먼 곳에? 당신을 남겨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를 나무라지 마세요. 모두 당신 때문이에요. 나의 과거를 알았기 때문에."
"아, 그래? 그거 안됐군, 테스. 하지만 당신을 남겨 두고, 당신을 이렇게 고생하도록 내버려두다니."
"고생하라고 내버려둔 게 아니에요."
눈앞에 없는 에인젤을 열렬히 변호하듯 그녀는 벌떡 일어서면서 부르짖었다.
"그이는 사실 아무 것도 몰라요. 내가 자진해서 이런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면 편지는 오나?"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우리들만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겠지. 편지도 없다 그 뜻이군. 귀여운 테스, 당신은 버림받은 거요."
충동적인 그는 갑자기 일어서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물소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격정적인 체온은 느낄 수 없었다.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듯 그녀는 크게 소리쳤다.
"싫어요. 제발 가 주세요. 나와 내 남편을 생각한다면 가 주세요. 당신의 하느님을 대신해서 부탁하는 거예요."
"알았소, 가겠소."
하고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는 돌아서서 얼마쯤 가다가 다시 뒤돌아보며 말했다.
"테스, 하느님께서는 잘 아실 거요. 오늘의 내 행동이 당신을 위한 진실이라는 것을."
이제껏 얘기에 열중한 그들은 밭 위로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소리는 바로
그들 뒤에 와서 멈추고, 다음과 같은 사나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시길래 이렇게 일을 팽개쳐 두고 뭘 하는 거지?"
주인 그로비는 멀리서 그들을 발견하고 달려온 것이었다.
"이 여자에게 그 따위로 말하지 마시오."
더버빌은 기독교인답지 않은 태도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렇군요, 나리. 그런데 감리교 목사께서 이 아가씨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더버빌은 테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대체 저 작자는 누구요?"
그녀는 더버빌 옆으로 다가갔다.
"돌아가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뭐라고, 저런 난폭한 작자한테 당신을 맡기고 가란 말이오? 얼마나 야비한 작잔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나를 해칠 사람이 아니에요. 또, 탐낼 사람도 아니고요. 성모 마리아의 날에는 이곳을 떠날 수 있어요."
"알았소, 나는 아무 자격도 없으니까 당신 말대로 하겠소. 잘 있어요, 테스."
알렉이 마지못해 사라지자 농장주는 새삼스레 테스를 책망했다. 그러나 남녀 문제와는 관계없는, 일의 책임에 대한 꾸중이었으므로 그녀는 냉정하게 듣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능히 때리기까지 할 목석같은 이런 남자를 주인으로 만난 것이 테스로서는 오히려 속이 편했다. 그녀는 말없이 작업 장소인 밭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그로비의 성난 콧등이 그녀의 어깨에 닿을 정도가 돼도 알지 못할 만큼 방금 끝낸 알렉과의 얘기에 정신이 쏠려 있었다.
"성모 마리아 날까지 일하기로 했으니, 끝까지 해치워야 될걸. 계집들은 알 수 없단 말야. 지금 이러쿵저러쿵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딴소릴 하거든 그러나 그 따위 버릇은 그냥 두지 않겠어."
주인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한번 무안을 당한 앙갚음에서, 다른 여자들에겐 그다지 과격하지 않은 사람이 그녀에게만 심하게 구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돈 많은 알렉의 아내가 되어 달라던 청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 봤다. 그렇게 한다면 가혹하게 구는 주인뿐 아니라, 그녀를 경멸하는 세상에 대한 굴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안 돼. 그와 결혼할 수 없어. 어쩐지 불쾌한 사람이야."
테스는 숨 가쁘게 중얼거렸다. 그날 밤 그녀는 괴로운 사정은 숨긴 채 사랑의 호소가 담긴 편지를 클레어에게 썼다. 그가 편지에 적히지 않은 사연을 짐작할 줄 아는 지혜가 있다면 거의 절망적이라고 할 두려움이 숨어 있음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안타까운 사정만은 끝내 쓰지 않았다. 에인젤이 이즈에게 함께 가자고 요구한 것이 사실이라면 자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그녀는 편지를 상자 속에 놓으면서 과연 이 편지를 에인젤이 볼 기회가 있을까 의심했다.
그로부터 그녀의 일과는 나날이 무거워지고, 어느덧 농부들에겐 아주 중요한 성촉절의 장날이 다가왔다. 곧 닥쳐올 성모 마리아의 날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일 년간의 새로운 계약이 바로 이 장날 맺어지는 것이어서, 농부들 가운데 일자리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지체 없이 장이 서는 마을로 나갔다. 대부분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플린트콤 애쉬 농장의 농부들은 10마일 이상 되는 산길을 향해 이른 아침부터 농장을 나섰다. 몇 사람만이 농장에 그대로 남았는데, 테스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물론 3월 에는 농장을 떠날 작정을 하고 있었지만 품팔이를 하지 않아도 좋을 어떤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에서였다.
겨울이 다 지난 것 같은 생각이 들 만큼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포근하고 고요한 2월 초하룻날이었다. 점심을 거의 끝낼 무렵, 그녀가 머물고 있는 하숙집 창문에 더버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테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방문객은 이미 문 앞에 서 있어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더버빌이 노크하는 태도와 걸어오는 모습은 지난번과는 다른 어떤 변화가 있는 듯해 보였다. 그것은 알렉의 수줍어하는 듯한 태도였다. 문을 열어 주지 않으려 하다가 문고리를 벗겨 주고 뒤로 물러섰다. 방으로 들어선 그는 그녀를 한 번 보고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테스, 오지 않을 수 없었소."
그는 상기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절망적으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 설레임과 흥분을 볼 수 있었다.
"적어도 당신의 안부만은 물으러 와야겠다고 생각했어. 정말이지, 지난 일요일 당신을 만나기 전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소.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애써도 당신을 잊지 못하겠소. 착한 여자가 악한 남자를 괴롭힐 리는 없지만, 당신은 나를 괴롭히고 있소. 테스, 나를 위해 기도라도 해준다면."
격정을 억누르는 그의 모습은 가련할 정도였다. 그러나 테스는 측은하게 생각지 않았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나를 위해 그 계획을 바꾼다고 믿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어째서 당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그럼요, 나의 억측을 치료해 준 사람이 있었어요."
"해 주다니, 누가?"
"굳이 알고 싶으면 말씀드리겠어요. 내 남편이에요."
"아, 당신 남편. 당신 남편. 정말 듣기 싫어. 언젠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소. 테스, 당신은 이 문제에 관해 대체 뭘 믿는 거요?"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신앙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것 같아. 그것도 내 탓이겠지만 말이오."
"하지만 나도 믿는 게 있어요. 오직 인간의 힘만을 믿는 거예요."
더버빌은 의아하게 그녀를 봤다.
"그렇다면 내가 믿는 신앙이 모두 거짓말이오?"
"대개는 그렇죠."
"음 하지만 나는 확실히 믿으니까."
그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산상수훈의 정신만큼은 나도 믿고, 나의 사랑하는 남편도 믿어요.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는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내 생각으로는, 당신 남편이 믿는 것을 당신도 따라서 믿는, 즉 자신의 입장에서는 따지지도, 의문도 품지 않는 당신네 여자들의 태도. 당신의 마음은 그의 노예가 된 거나 같소."
알렉이 냉정하게 말했다.
"네, 난 그래요."
아무리 완전한 인간이라도 상대가 안 된다는 듯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럴 거야. 그러나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태도를 당신도 똑같이 따라가선 안 돼요. 당신에게 회의론을 가르치다니, 그 사람은 어지간하군."
"내 판단을 강요한 적은 없어요. 그 문제에 대해서 다툰 일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이렇게 판단했어요. 교리를 깊이 연구한 그 사람의 생각은 교리를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한 내가 믿는 것보다 옳을 거라고요."
"그의 주장은 어떤 거요? 무엇인가 늘 설명했을 텐데?"
그녀는 생각해 봤다. 에인젤의 말을 깨닫지 못했을 때라도 그 말은 분명히 기억했다. 가끔 그녀를 옆에 두고 생각에 열중하여 혼잣말을 할 때 그가 즐겨 쓰는 냉혹한 논쟁적인 삼단논법에 귀를 기울였으므로 지금 그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한 번 더 그 말을 해 보오."
그녀의 얘기에 주의를 기울여 듣고 있던 더버빌이 말했다. 그녀는 에인젤이 주장하던 내용을 되풀이하고, 더버빌도 생각에 잠겨 그녀의 말을 따라 외었다.
"그밖에 다른 말은 없소?"
이윽고 그는 다그쳐 물었다.
"어느 땐가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테스가 기억나는 대로 일러 주었다. <철학사전>과 헉슬리의 <수상록>계열에 속하는 서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었다.
"아하. 어떻게 그런 말들을 다 외고 있소?"
"그이는 원치 않았지만, 그이가 믿는 것은 뭐든지 나도 믿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졸랐죠. 그 사상을 전부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옳다는 건 알아요."
"흠, 이해도 못하는 사상을 나에게 설명해 줄 수 있다니."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나는 그이의 정신 속에 내 정신을 쏟아 넣었어요. 서로 어긋나는 정신을 갖고 싶지 않았어요. 그이한테 좋으면 나한테도 좋으니까요."
"그 사람은 당신도 그에 못지않은 철저한 불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
"내가 신자니 불신자니 하는 얘기는 한 적이 없어요."
"테스, 결과적으로 당신은 나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오. 당신은 내 교리를 꼭 설교해야 된다고 생각진 않을 테니까 설교를 안 한다고 해서 당신이 양심에 가책이 되지는 않을 테지. 그러나 나는 꼭 내 교리를 설교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오. 그러면서도 지금은 악마에 홀린 것처럼 겁이 난단 말이오. 왜냐하면 갑자기 설교를 포기하고 당신에 대한 애정에 굴복하고 말았으니까."
"어째서요?"
알렉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글쎄 말이오. 나는 당신을 만나려고 먼 길인 여기까지 왔소. 그러나 집에서 출발할 때는 캐스터브리지의 장에 가서 마차를 연단으로 해서 2시 반에 설교할 계획이었소. 이 순간에도 교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요. 여기 그 집회 광고가 있소."
안주머니에서 꺼낸 포스터에는 그가 말한 대로, 더버빌이 복음을 전도할 날짜와 시간, 장소 등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시간에 맞춰 가시겠어요?"
"내가 이곳에 왔으니까 못 가는 거요."
"아니, 설교하기로 해 놓고도, 그럼"
"설교하기로 약속은 했지만, 가지 않겠소. 한때는 경멸하던 여자를 보고 싶은 간절한 욕망에서 말이오. 아냐, 경멸한 일은 사실 한 번도 없을 거야. 당신을 경멸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순결하기 때문이었소. 당신은 자기 처지를 깨달았을 때 재빨리 결단력 있게 내 곁에서 떠났소. 그래서 난 당신을 경멸할 수가 없었소. 그러나 당신은 얼마든지 나를 경멸해도 좋소. 나는 산 위에서 기도를 올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직도 숲속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어. 하하."
"오, 알렉 더버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뭘 했다는 거예요?"
그는 비웃는 투로 말했다.
"뭘 했느냐고? 고의적으로 한 일은 없지. 그러나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타락을 부채질했어. 난 정말 저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베드로후서> 제 2장 20절) - 그 후의 결과는 애초보다 더욱 나쁜, 멸망의 종 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 물어 보았어."
알렉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갑자기 그녀를 흔들면서 말했다.
"테스, 적어도 당신의 그 눈과 입을 다시 보기까지는 더할 수 없이 의지가 굳은 사람이었소. 그런데, 왜 그때 나를 유혹했지? 다시 보지 않더라면 나는 꿋꿋한 남자로 변함이 없었을 거요. 이브의 입을 빼놓는다면 이토록 남자를 미치게 하는 입은 없었어."
그의 음성이 가라앉았고, 까만 눈에서도 뜨겁고 장난스러운 빛이 번뜩거렸다.
"이 마녀, 귀엽고도 요염한 바빌론의 요부, 당신을 다시 만난 순간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단 말이오."
"당신이 나를 다시 만난 것은 나로서도 피할 도리가 없었어요."
테스는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그 일은 나도 알아. 거듭 말하지만 당신을 나무라는 게 아니오. 그러나 당신이 천대받는 걸 보면서 법적인 권리도, 또 당신을 가질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정말 미칠 것 같소."
"그 사람을 욕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지금 여기에 없단 말이에요."
그녀는 몹시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분을 대접하세요. 당신한테 나쁘게 한 것도 없잖아요. 떳떳한 그 사람의 이름을 더럽힐 추잡한 소문이 나지 않도록 제발 돌아가 주세요."
"가지, 돌아가지."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 말했다.
"난 장터의 가엾은 주정뱅이들에게 설교하겠다던 약속을 어겼소. 이런 장난 같은 짓을 하다니.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이런 건 생각지도 않았소. 난 가겠소. 그러나 당신을 멀리 할 수 있을까."
그러더니 갑자기,
"테스, 한 번만, 꼭 한 번만 안아 줘. 지금."
"난 약한 여자에요. 알렉. 그러나 나는 남편의 명예를 생각해요. 부끄러움을 아세요."
"좋아, 그래 그래."
알렉은 자신의 무력함에 굴욕감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에는 세속적인 신념도, 종교적인 신앙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가 개심한 뒤 잠자고 있던 과거의 발작적인 정욕의 잔해가 부활이라도 한 듯 거칠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 없는 태도로 나가 버렸다. 설교의 약속을 어긴 것은 신자의 일시적인 타락에 불과하다고 더버빌이 말했지만, 에인젤 클레어에게 메아리쳐 오는 것 같은, 테스가 들려준 말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테스와 헤어진 뒤에도 그 감명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신앙심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지도 않던 일이 생겼으므로 그는 온몸이 마비된 듯 무거운 기분으로 묵묵히 걸었다. 그의 일시적 개심은 원래 이성이 개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는 인간의 일시적 충동에 지나지 않았으며, 모친의 사망으로 생긴 결과였던 것이다. 그의 열광적인 신앙의 바다에 테스가 떨어뜨린 두서너 방울의 논리는 들끓는 거품을 가라앉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녀가 들려준 말을 되씹던 알렉은 중얼거렸다.
"그 영리한 친구도 그런 말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 말이 내가 그녀한테 돌아갈 길을 터놓아 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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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린트콤 애쉬 농장의 마지막 남은 밀을 타작하는 날이었다. 3월의 새벽은 이상하게 흐려 있어서 동쪽의 지평선이 어느 쪽인지 분간하기 못할 정도였다. 겨울의 비바람에 씻기고 바래져서 쓸쓸히 서 있던 사다리꼴의 노적가리가 새벽노을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즈 휴에트와 테스가 타작 마당에 도착했을 때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으로 먼저 온 사람이 있음을 알려 줄 뿐 몹시 어두운 시간이었다. 차차 날이 밝아지자 노적가리 위에 두 사람의 남자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짚가리 벗기기, 즉 밀단을 던져 내리기 전에 일단 엎은 이엉을 걷고 있었다. 그들이 일을 계속하는 동안 이즈와 테스는 연한 갈색 앞치마를 입은 다른 여자들과 추위에 떨며 그곳에 서 있었다.
농장 주인인 그로비는 하루 동안에 그 일을 다 끝내려고 서둘러 그들을 일찍 끌어 낸 것이다. 노적가리 옆에는 그녀들이 섬겨야 할 붉은 폭군-제목으로 틀을 짜고 가죽 띠와 바퀴가 달린 탈곡기가 희미하게 보였다. 탈곡기는 작동하는 동안은 그녀들은 근육과 신경의 인내를 끝없이 요구하는 폭군인 기계였다. 지금보다 약간 떨어진 곳에 다른 기계가 또 한 대 희미하게 보였다. 씩씩 소리 나는 까만색의 물체는 상당한 힘을 지닌 것 같았다. 느릅나무 옆에 솟은 긴 굴뚝과 거기서 번지는 온기가 태양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이 좁은 세계에서 중심 동력으로 가동될 발동기임을 알려 주었다. 기계 옆에는 그을음과 때에 찌든 까맣고 키가 큰 남자가 꿈을 꾸는 듯이 꼼짝 않고 석탄 더미와 나란히 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관사였다. 그의 모습과 색깔은 동떨어진 것이어서, 토박이들을 놀래 주려고 누런 곡식과 푸른빛 토지로만 가득 찬 이 마을에 잘못 뛰어든 쓰레기 더미에서 나온 사람 같았다. 외모에 나타난 대로 그는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농촌에 와 있지만 그는 농부는 아니었다. 이곳 주민들은 채소와 날씨, 서리, 그리고 태양을 섬기는데, 그는 불과 그을음을 섬겼다. 웨섹스 지방에는 아직 증기 탈곡기가 순회용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기계와 더불어 마을에서 마을로, 농가에서 농가로 돌아다녔다. 그는 귀에 익지 않은 북부 지방의 사투리로 말했다. 생각이 내부로만 파고들어 자기 일만을 걱정했고, 눈은 기계에만 쏠려 있어서 사방의 풍경 같은 것엔 관심조차 없었다. 이 고장 사람들과는 꼭 필요한 교제만 했다. 마치 무슨 태고 시대부터 짊어진 운명 때문에 본의는 아니지만, 불의 지옥을 모시며 할 수 없이 이곳을 헤매는 자 같았다. 기계의 회전축과 탈곡기를 연결하는 길다란 피대만이 농사와 그를 잇는 단 하나의 줄이었다. 그들이 노적가리 덮개를 벗기는 동안 그는 이동 동력기 옆에 무관심하게 서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까만 기계 주위에 아침 공기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는 타작을 준비하는 일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불은 달아오르고 증기는 높이 팽창하면서, 잠시 후엔 길다란 피대를 빠른 속력으로 회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피대가 연결된 부분을 제외한다면 곡식이든 집단이든 그밖에 어떤 것이든 그와는 상관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은 뭐라고 부르는 사람인가고 물으면 그는 단지 기관사라고 간단히 대답할 뿐이었다.
햇살이 활짝 밝은 무렵엔 노적가리 이엉도 다 벗겨졌다. 남자들은 맡은 자리에 서고, 여자들은 노적가리 위로 올라가면서 일은 시작된다. 일꾼들이 그놈 이라고 부르는 주인 그로비는 아침 일찍 나타나 테스에게 탈곡기의 단 위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테스는 탈곡기 발판에 선 남자의 바로 옆에 자리 잡았다. 노적가리 위에서 이즈가 내려 주는 밀단을 풀어 주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그러면 밀을 터는 남자는 그걸 집어 삽시간에 알알이 털어 버리는 탈곡기에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한두 번 기계가 고장이 나서 멈췄을 때 기계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친구들이 은근히 좋아했으나 곧 일은 전속력으로 진행됐다. 일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조반 때나 되어야 탈곡기가 멈추면서 겨우 30분가량 일을 놓게 된다.
식사가 끝난 다음 작업이 시작되자, 남은 일손을 모조리 짚단 쌓는 데 동원했다. 일자리에 선 채 새참을 마친 그들은 점심시간까지 몇 시간 동안 계속했다. 지칠 줄 모르는 바퀴는 힘차게 돌아가고, 귀청을 찢을 듯한 탈곡기 소리는 바퀴 가까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뼛골까지 뒤흔들었다. 높아지는 짚단 위에서 노인들은 옛날 헛간의 떡갈나무 바닥에서 도리깨로 타작하던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때는 키질까지도 손으로 했는데, 느렸지만 성과는 좋았다는 얘기다. 노적가리 위에 있는 사람들도 잡담할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테스를 포함하여 탈곡기에 매달려 땀 흘리는 일꾼들은 얘기하면서 일할 여유가 없었다.
테스는 힘에 부치자 플린트콤 애쉬에 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너적가리 위에 있는 여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마리안은 이따금 일손을 멈춰서 병에 든 맥주나 시원한 차를 마시기도 하고 잡담도 하며, 또 다른 여자들은 땀을 닦거나 옷에 붙은 지푸라기를 털기도 했다. 그러나 테스에게는 조금도 쉴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탈곡기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고, 남자는 밀단을 털어야 하며, 이 남자에게 밀단을 집어 주는 테스 또한 손을 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일손이 느려서 곤란하다는 그로비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마리안이 30분가량 테스의 일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경제적인 이유에서였겠지만, 그처럼 특수한 일에는 흔히 여자를 시켰다. 그래서 그 일을 테스한테 맡긴 이유도, 밀단을 푸는 솜씨라든가 참을성이나 동작이 재빠른 면에서 적합하다고 그로비는 설명했다. 그건 그럴듯한 얘기였다.
잡담을 못하게 하는 탈곡기의 윙윙거림은 밀단의 공급량이 줄어들면 더욱 커진다. 테스와 밀 터는 남자는 곁눈질할 틈도 없었으므로 점심시간이 임박 했을 때 어떤 남자가 농장으로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그 남자는 둘째 번 노적가리 곁에 서서 테스가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는 최신식 스코치 복지의 양복에다 화려한 단장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이즈 휴에트가 마리안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테스한테 물었으나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누군가의 애인이겠지."
마리안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돈을 걸어도 좋아. 틀림없이 테스를 따라온 남자야."
"어머, 아냐. 요새 그 애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사람은 돌팔이 목사야. 저런 멋쟁이가 아니야."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야."
까만 양복과 흰 타이를 벗어 버리고 수염도 깎았거든. 하지만 역시 같은 사람이야.
"정말 그렇구나. 그럼 테스한테 알려야지."
마리안이 말했다.
"그러지 마, 그 애가 이제 곧 돌아볼 텐데."
"전도한다는 사람이 유부녀 꽁무니를 따라다닌다는 건 잘못이야. 비록 남편이 외국에 있어서 과부 같은 처지에 놓였다 하더라도 말야."
"어머, 하지만 그 애를 건드리진 못할 거야. 구멍에 빠진 수레처럼 까딱 않는 그녀의 마음을 끌어내진 못할 거야. 꾀든, 설교를 하든, 어떤 으름장을 놓는다 하더라도 끌어내지 못할걸. 비록 그렇게 하는 것이 테스를 위해선 낫더라도 말이야."
점심시간이 되자 기계는 멈췄다. 테스가 자리를 뜨려고 했을 때 기계의 진동으로 무릎이 계속 흔들렸기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마리안이 말했다.
"나처럼 한 잔 마시면 얼굴이 그렇게 창백하진 않을 텐데. 정말이지, 네 얼굴빛이 형편없어."
마음씨 고운 마리안은 테스가 너무 피로해 있기 때문에 염려해 주었다. 그때 마침 신사는 노적가리 있는 곳까지 와서 테스를 쳐다봤다. 테스는 조그맣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머."
집에서 멀리 나와 일을 할 때는 노적가리 위에서 식사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오늘처럼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은 아래로 내려가서 짚더미 위에 자리를 잡는다. 복장과 모습은 바뀌었지만, 이 새로운 방문객은 전날의 전도사 알렉 더버빌이었다. 그의 타고난 속세적 정욕이 되살아났음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테스를 찬미했던 첫 번째 남자로, 그리고 사촌이라고 불러 주던 옛날의 화려하고 대담한 차림새에다 서너 살의 나이만 더한 거의 변함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노적가리 위에 머물기로 결심한 그녀는 땅에서 보이지 않도록 밀단 복판에 앉은 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다리로 올라오는 발소리에 이어 알렉이 노적가리 위에 나타났다. 정방형으로 평탄하게 된 밀단 위에 나타난 그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와 아무 말 없이 그녀 앞에 마주앉았다. 그녀는 집에서 가져온 팬케이크로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다른 일꾼들은 노적가리 밑에 흩어진 밀짚 위에 모여 앉아 편히 쉬고 있었다.
"보다시피 다시 왔소."
더버빌이 말을 꺼냈다.
"왜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 거예요."
그녀는 불만이 가득 찬 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괴롭힌다고? 그런 내가 할 소리요. 당신이야말로 나를 괴롭히고 있소."
"난 결코 당신을 괴롭힌 일이 없어요."
"그런 당신은 날 괴롭히고 있어. 잠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조금 전에 날 노려보던 그 매서운 눈초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를 따라다닌단 말이오. 테스, 당신을 다시 만나고 부터 청교도의 물결 속에 흐르던 강한 힘이 다시 당신에게로 쏠리고 있소. 그때부터 종교로 통하던 운하는 바짝 말라 버렸어. 그렇게 만든 건 당신이란 말이오."
알렉이 외치듯 말했다. 그를 잠자코 쳐다보던 테스가 말했다.
"네? 전도를 완전히 그만두었다고요?"
근대 사상은 믿을 수 없다는 회의적 태도나 일시적 종교의 열광을 경멸할 수 있을 만큼 에인젤한테 얘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막상 닥쳐 보니까 여자인 까닭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엄격한 태도를 지어 보이며 알렉이 계속 말했다.
"캐스터브리지 장터에서 주정꾼들에게 설교키로 했던 그날 오후부터 나는 모든 약속을 완전히 깨뜨렸어. 교우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그건 악마만이 알아. 교우들. 그들 나름으로 친절한 인간들이니까. 그러나 내가 알게 뭐야. 믿을 수 없게 된 것을 어떻게 믿고 따라갈 수 있어? 믿지 않으면서도 따라간다는 건 가장 비열한 위선이야. 선량한 그들 가운데서 나는 하느님을 모욕하지 않기 위해 마귀에게 넘겨진 히메네오와 알렉산더 같은 존재였을 거야. 당신은 그야말로 멋진 복수를 했어. 나는 순진무구한 당신을 속였지. 4년이 지난 뒤에 당신은 열렬한 신자가 된 나를 발견하고, 이내 나를 사로잡아 완전히 파멸할지도 모를 길로 나를 몰아넣기 시작했어. 하지만 테스, 늘 부르던 나의 사촌 누이, 나의 표현 방법이 이런 것뿐이니까 그렇게 겁에 질린 눈으로 보지 마. 물론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를 그대로 지녔다는 것 외에 당신의 잘못은 없어. 당신이 나를 알아보기 전에 노적가리 위에 있는 당신을 봤어. 꼭 맞는 앞치마랑 차양이 달린 그 모자, 남의 눈을 끌지 않으려면 당신들 같은 촌 아가씨는 그런 걸 입어선 안 되는 거야."
그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그녀를 훑어보며 비웃는 듯이 웃으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아마 독신이었던 사도 바울도, 나는 그의 대변자였다고 생각했지만, 그도 당신 같은 아름다움에 유혹됐다면 반드시 나처럼 신앙을 버렸으리라 생각해."
그녀는 그에게 충고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엔 아랑곳없이 말했다.
"하여간 당신이 주는 낙원은 어떤 것에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것일 테지. 그러나 진정으로 말하지만 테스."
더버빌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짚단에 비스듬히 기댄 채 팔베개를 했다.
"지난번 당신과 헤어진 뒤로 당신의 얘기를 줄곧 생각했어. 결국 낡아빠진 그 신학 이론에는 상식이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지. 어떻게 해서 가엾은 클레어 목사의 열성으로 나까지 불붙었는지, 또 목사가 무색하도록 전도 사업에 열중할 수 있었는지 통 모르겠어. 당신은 남편의 이름을 한 번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이 놀라운 지식에 힘입어 지난번에 당신이 말한 독단주의를 포함하지 않은 이른바 윤리설이 있다는 주장을 나는 찬성하지 못하겠어."
"하지만 종교에서는 독단주의는 갖지 못해도 자비와 순결의 신앙은 가질 수 있잖아요."
"오, 천만에. 난 그런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야. 이렇게 하라, 그러면 죽은 후에 너에게 해로우리라. 저렇게 하라. 그렇잖으면 너에게 해로우리라 하는 식으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면 나의 신앙은 뜨거워지지 않아.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아. 달리 아무도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으므로 행위나 정욕에 대한 책임 따윈 느끼지 않을 테니까. 테스, 만약에 내가 당신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럴 생각은 없어."
원시 시대에는 완전히 구분했던 신학 더덕을 알렉의 둔한 머리가 혼돈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에인젤 클레어의 과묵한 성격에 길들여졌고 지식이 부족했다. 또 이성보다는 감정적인 성격이었으므로 토론을 끌어 나가지 못했다. 알렉이 말을 계속했다.
"그거야 어떻든 상관할 게 없어. 나는 옛날 그대로이니까."
"옛날과 같지 않아요. 같을 수 없어요. 당신은 옛날과 달라요."
그녀는 애원했다.
"나는 애정을 느끼지 않았어요. 왜 신앙을 버렸어요. 나에게 이런 소릴 하려고 그런 거예요."
"당신이 내 신앙을 쫓아 낸 거야. 그러니까 당신에게 죄가 있는 거야. 당신 남편은 당신에게 가르친 지식이 올가미가 돼서 되돌아갈 줄은 생각도 못했겠지. 하하, 난 당신이 나를 변절자로 만들어 준 게 굉장히 기쁘단 말이야. 테스, 어느 때보다도 당신한테 반했고, 또 당신을 동정한단 말야. 당신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당신의 딱한 형편을 잘 알아. 당연히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한테도 버림받고 있다는 걸."
그녀는 입에 든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입술은 바짝 마르고 금방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노적가리 밑에서 먹고 마시며 웃어대는 일꾼들의 음성이 먼 곳인 듯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건 너무 잔인해요.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하신다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시죠?"
"사실이야, 사실이야."
하고 알렉이 주춤하며 말했다.
"내 잘못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우려고 온 게 아니야. 테스, 사실은 당신이 이토록 고생하는 걸 버려두지 못해 온 거야. 당신을 생각해서 왔단 말야. 내가 아닌 다른 남편이 있다고 당신은 말했어. 그야 남편이 있을 테지.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고, 당신은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그래서 당신이 남편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보다는 내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어떻든 나는 당신의 고생을 덜어 주려고 애쓰지만, 그는 현재 그렇지 않아. 내가 즐겨 외던 엄격한 예언자 호세아의 말이 생각나는군. 테스, 당신은 모르지?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세아>제2장 7절) . 테스, 내 마차가 고개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의 것이 아닌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 더 계속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녀의 얼굴엔 진홍색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타락하게 만들었어."
벌린 팔을 그녀의 허리에 뻗치면서 알렉은 말을 계속했다.
"내 타락의 원인이 되었으니 당신도 기꺼이 그 책임을 져야 해. 그리고 남편이라 부르는 미련한 작자는 영원히 단념하라고."
팬케이크를 먹으려고 벗은 장갑이 그녀의 무릎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긴 장갑으로 그의 얼굴을 호되게 후려갈겼다. 투구처럼 무겁고 두꺼운 그 장갑은 정통으로 그의 입에 들어맞았다. 그 동작은 마치 화살을 가진 그녀의 조상들이 훈련을 거듭한 무술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알렉은 누웠던 자리에서 미친 듯이 벌떡 일어났다. 장갑에 맞은 상처에 빨간 피가 비치더니 삽시간에 밀단 위로 입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알렉은 감정을 억제하고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닦았다. 그녀도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목을 비틀리기 직전의 절망적인 참새 같은 눈초리로 그를 보면서 테스가 말했다.
"나 좀 꾸짖어 주세요. 때려 주세요. 소리치지 않을 테니까, 밀단 아래 있는 사람들은 신경을 쓸 것 없어요. 한 번 희생당한 인간은 언제나 그러게 마련이에요."
"아, 아니야 테스."
하고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 일은 다 용서하겠어. 그러나 당신은 까맣게 잊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어. 즉 당신이 그토록 나를 뿌리치지 않았더라면 당신과 결혼했을 거라는 사실 말야. 이봐, 내가 아내가 돼 달라고 간청한 일이 없었어? 말해봐."
"있었어요."
"그런데도 안 된단 말이지.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 둘 게 있어."
그녀에게 청혼했던 자신의 진실이 그녀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함을 알자 다시 그의 음성이 거칠어졌다. 그녀의 옆에 다가가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녀는 억눌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단단히 기억해 두는 게 좋아. 나는 한때 당신의 주인이었단 말야. 다시 주인 노릇을 해야겠어. 설사 누구의 아내가 되었다 할지라도 당신은 내 거란 말이야."
아래에서는 탈곡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싸움은 이 정도로 해 두지."
그녀를 놓아 주면서 그가 말했다.
"지금은 돌아가지만 오후에 대답을 들으러 다시 오겠어. 당신은 아직 나를 모르지만, 난 당신을 알고 있어."
그녀는 정신 나간 사람같이 아무 말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더버빌은 밀단 위를 지나 사다리를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밑에 있던 일꾼들은 기지개를 켜며 방금 마신 술기운을 털어 버렸다. 탈곡기가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밀단이 부스럭거리는 자리에 돌아온 테스는 윙윙 돌아가는 탈곡기 옆에서 마치 꿈꾸는 사람처럼 밀단을 한 단 한 단 풀어 나갔다.
48
그날 오후, 주인은 달이 밝아 일할 수 있고, 발동기 주인도 내일 아침엔 다른 농장으로 가게 되어 있으니, 오늘 밤 안으로 타작을 마쳐야만 한다고 알렸다. 그 순간부터 털털거리고 윙윙거리는 소음은 어느 때보다도 바삐 돌아갔다. 오후 새참 시간인 3시가 채 봇 돼서 그녀는 잠깐 머리를 들어 사방을 둘러봤다. 농장 문 울타리 곁에 알렉 더버빌이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으나 그녀는 과히 놀라지 않았다. 테스가 고개를 든 것을 본 그는 점잖게 손을 흔들어 키스를 보냈다. 그것은 그들의 싸움이 끝났다는 신호를 알리는 듯했다. 테스는 그쪽을 보고 싶지 않아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지루한 오후 시간이 흘러갔다. 노적가리는 점점 낮아지는 대신 짚단더미는 차차 높아졌고, 밀알 자루는 수레에 실려 나갔다. 오후 6시쯤 됐을 때 노적가리의 높이는 어깨 부분만큼 낮아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밀단이 젊은 여자의 두 손으로 공급되어, 기관사의 손을 거쳐 기계가 해치웠으나, 아직도 손대지 않은 밀단은 상당 양이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자리에 산더미처럼 쌓인 짚단은 마치 이 붉은 대식가가 먹고 내보낸 배설물 같았다.
거친 3월의 해질 무렵, 으레 그렇듯이 서쪽 하늘에서 성난 것처럼 새빨간 태양이, 흐르던 날씨가 걷힌 다음에 찬연히 빛났다. 피로와 땀에 젖은 타작꾼들의 얼굴에 넘치는 햇살은 그들의 얼굴을 구릿빛으로 물들이고, 햇살에 물든 여인들의 옷자락은 뿌연 불꽃처럼 그녀들의 몸에 엉겼다. 허덕이는 고통이 노적가리를 스쳤다. 밀단을 터는 남자도 지쳤다. 테스는 먼지와 밀 껍질이 덮인 그의 목을 보았다. 그녀는 일을 계속했다. 땀이 배고 붉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은 곡식 가루로 뒤덮였으며, 하얀 모자는 갈색으로 변했다.
탈곡기 발판에 서서 일하는 여자는 테스 하나뿐인데다가 노적가리가 낮아짐에 따라 이즈하고 마리안과의 거리도 점점 멀어져서 이제는 잠시 교대할 수도 없었다. 전신의 세포가 끊임없이 진동하므로 무감감적인 몽롱 상태에서 테스는 기계적으로 손만 놀렸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으며, 머리채가 풀렸다고 알려 주는 이즈의 음성까지도 듣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서 가장 힘이 있던 사람들도 얼굴이 창백해지고 두 눈은 쾡하니 커졌다. 테스는 머리를 들 때마다 북쪽 하늘에 높이 솟은 짚단더미 위에 셔츠 차림의 남자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짚단더미 앞쪽에 야곱의 사다리처럼 길고 붉은 사다리가 놓여 있어서, 그 위를 누런 물줄기가 거꾸로 흘러 짚단더미 위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어느 곳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알렉 더버빌이 어디선가 지켜 본다는 것을 테스는 알고 있었다. 그가 그 장소에서 떠나지 않는 한 가지 구실이 있었다. 그것은 타작이 거의 끝날 무렵이면 언제나 쥐 사냥을 하는데, 타작에 관계없는 사람도 때로는 그 장난에 끼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여러 가지 오락을 즐기는 사람들이어서, 괴상한 파이프를 물고 개를 끌고 나오는 신사가 있는가 하면, 지팡이와 돌을 가지고 나오는 왈가닥 패 등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나 쥐들이 모여 있는 노적가리 구석을 들어내려면 아직 한 시간 분량은 더 털어야 했다. 자이언트 힐 쪽으로 저녁 해가 사라지자 반대편 미들톤 애비와 포드 쪽 지평선에서 3월의 흰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마리안은 두어 시간 남은 작업 시간을 가까이 가서 말을 걸 수도 없는 테스 때문에 걱정하며 보냈다. 다른 여자들은 간단히 맥주를 마셔 힘을 돋우지만, 테스는 술로 인한 비극을 어릴 때 보았으므로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버텼다. 맡은 일을 다 하지 못하면 그녀는 일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런 일이 두어 달 전이라면 실직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마음 편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버빌이 그녀의 곁을 맴도는 지금 일터를 잃는다는 건 큰 두려움이었다.
밀단을 던지는 사람과 터는 사람들이 일한 보람으로 서로 얘기를 나눌 만큼 노적가리가 낮아졌다. 놀랍게도 농장주 그로비가 테스가 있는 쪽으로 올라오더니, 친구를 만나고 싶으면 다른 사람과 교대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그 친구라는 것이 더버빌임을 테스가 모를 리 없었다. 또 이런 선심이 친구인지 적인지 알지 못하는 알렉의 부탁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 일을 계속했다. 마침내 밑바닥이 드러나고 쥐 사냥이 시작됐다. 노적가리가 낮아짐에 따라 쥐들은 자꾸만 밑으로 파고들어 모두 밑바닥에 모였다. 마지막 밀단을 벗기자 쥐들은 땅바닥을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이때 반쯤 취한 마리안이 자기 몸에 쥐가 덤볐다고 째지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여자들은 치마를 걷어 올리고 발돋움하여 쥐를 피하려고 야단들이었다. 짚단 밑에 숨어든 쥐는 기어코 쫓겨났다. 개 짖는 소리, 남자들이 고함치는 소리, 날카로운 여자의 소리, 욕지거리, 발 구르는 소리 등 마치 난장판 같은 혼잡 속에서 테스는 마지막 짚단을 풀었다. 탈곡기는 속도가 떨어지면서 소리도 멈춰졌다. 그녀는 비로소 땅바닥에 내려섰다. 쥐 사냥을 구경만 하던 알렉이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달려왔다.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왜 또 왔어요."
그녀는 꺼져 가는 소리로 말했다. 큰 소리로 말할 힘도 없을 만큼 기진맥진해 있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짓을 하든 성내지 않기로 했어."
트랜트리지에서처럼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귀여운 몸을 저렇게 떨다니. 당신은 갓난 송아지처럼 연약하단 말야, 알겠어? 내가 온 순간부터 일하지 않아도 괜찮을 건데, 왜 그토록 고집을 부리지? 하여간 기계 타작 일을 여자한테 맡기는 건 불법이라고 농장 주인에게 말했어. 그건 여자들의 할 일이 아니니까. 좀 나은 농장에선 그런 일에 여자를 쓰지 않아. 절대로. 그도 역시 잘 안단 말야. 자 테스, 집까지 바래다주지."
"네, 좋아요."
무거운 다리를 끌면서 그녀가 대답했다.
"원하신다면 함께 걸어도 돼요. 당신이 내 입장을 모르고 나와 결혼하려는 걸 잘 알아요. 아마, 어쩌면 당신은 내가 생각해 온 것보다 좀 더 선량하고, 친절한 분일는지도 몰라요. 무엇이든 친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라면 나는 고맙게 생각하겠어요. 그렇지 않고 딴 생각을 품은 거라면 나는 가만있지 않겠어요. 이따금 당신의 행위를 이해 못할 때가 있어요."
"우리의 옛날 관계를 정식 부부로 성립시키진 못하더라도 당신을 도울 순 있어. 돕는 것도 이전처럼 내 멋대로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의사에 따라 할 테야. 종교적 광신이라 하든 뭐라 하든 이제 그 생활은 끝났어. 그러나 아직 양심은 남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테스, 남녀 간의 부드럽고 또 강한 힘에 의지해서 나를 믿어 줘. 당신과 당신 부모, 그리고 동생들을 경제적 고통에서 구하기에 족한, 아니 그 이상의 것을 나는 가졌어. 당신이 나를 믿어만 준다면 그들을 모두 잘살게 해 주겠어."
알렉이 애원하듯 말했다.
"요즘 우리 집 식구를 만난 일이 있어요?"
그녀는 놓치지 않고 물었다.
"응, 그런데 그들은 당신이 어디서 사는지 모르더군. 당신을 이 지방에서 만난 건 그야말로 우
연이었어."
테스가 임시로 거처하는 농가 문 밖에 그들이 함께 다다랐을 때 싸늘한 달빛이 생울타리 가지 사이로 피로한 그녀의 얼굴을 비스듬히 비쳤다. 더버빌도 그녀 옆에 섰다.
"어린 동생들 얘기는 꺼내지 마세요. 나의 결심이 꺾이지 않게 해 주세요. 궁핍한 건 하느님이 아실 테지만, 돕고자 하신다면 나에게 아무 말도 말고 도와주세요. 하지만 싫어요. 당신한테선 하나도 받고 싶지 않아요. 그들을 위해서도, 또 나 자신을 위해서도 말예요."
테스는 그 집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알렉은 더 이상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 집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씨고 함께 저녁을 마치자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벽 아래 놓인 책상의 조그만 등불에 의지하여 그녀는 격렬한 감정으로 편지를 썼다.
"그리운 남편에게
당신을 남편이라 부르도록 해 주세요. 저같이 하찮은 아내를 생각하여 노하실지라도 그렇게 부르지 않고는 못 견디겠어요. 저의 괴로운 심정을 당신께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아무도 의자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저는 지금 심한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에인젤. 그게 누구라고 말하기도 싫고, 또 그 내용을 쓰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당신에게 매달립니다.
어떤 불행이 닥치기 전에 지금 당장 저한테 돌아오실 수 없을까요? 아아, 오시지 못한다는 것도 저는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너무 먼 곳에 계시니까. 만약 당신이 곧 돌아오시든지. 아니면 당신 곁으로 오라고 하시지 않는다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저에게 내린 처벌은 당연합니다. 저는 잘 알아요. 당연하고 말고요. 저 때문에 노여워하시는 건 조금도 잘못이 없어요. 하지만 에인젤, 제가 자격이 없는 여자라 할지라도 이제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세요. 그래서 저에게 돌아와 주세요. 만약 돌아와 주신다면 당신 품에 안겨 죽어도 좋아요. 당신께서 저의 잘못을 용서하신다면 만족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어요.
에인젤, 저는 당신만을 위해 살고 있어요. 당신을 너무 사랑하는 까닭에 당신이 떠나신 것도 원망하지 않아요. 농장을 구하셔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저의 말을 원망하는 뜻으로 듣진 마세요. 다만 돌아와 주세요. 당신 없는 저는 쓸쓸해요. 제가 하는 고생 따윈 아무렇지도 않아요. 속히 돌아오겠다는 한마디만 보내 주신다면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겠어요.
에인젤, 결혼 후 이제까지 모든 생각과 행동에 있어. 당신의 충실한 아내가 되는 것이 저의 변치 않는 신앙이었어요. 심지어 다른 남자에게서 칭찬을 들어도 당신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낙농장에서 지내던 일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일이 있으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저를 버려두실 수 있으세요? 저는 당신이 사랑하시던 그 여자에요. 네, 바로 그 여자에요. 당신이 싫어하거나 본 일이 없는 여자가 아니라, 당신이 저를 본 순간 저의 과거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요. 저의 과거는 당신을 만남으로써 모두 매장된 거예요. 당신이 주신 제 생명으로 저는 다른 여자가 된 거예요. 제가 어떻게 과거의 그 여자로 될 수 있을까여. 왜 당신은 그런 사실을 모르시나요? 저를 변화시킬 만큼 강한 힘이 있다는 생각이 좀 더 있고, 또 믿으신다면 당신의 가련한 아내에게 돌아오시려는 생각이 날 거예요.
언제나 사랑해 주실 것을 믿고, 행복하기만 했던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요. 그런 행복은 가엾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어야 했죠. 그러나 저는 지난 일 때문에 아니라, 당장 눈앞에 닥친 일로 가슴 태우고 있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언제까지나 당신을 보지 못한다면 저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는가를. 아아, 만약 끊임없이 겪는 그러한 저의 괴로움을 하루에 잠깐만이라도 당신이 느끼게 할 수 있다면, 당신도 외로운 아내의 심정을 알게 될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들이 칭송하는 모든 것은 당신 것이고, 또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을 돌아오시게 하려는 생각에서 말씀드리고 있을 뿐이에요.
당신이 오시지 못하면 제발 당신한테 제가 가도록 허락해 주세요. 말씀드린 대로 저는 지금 마음에도 없는 짓을 강요당하며 괴로워하고 있답니다. 한 치라도 굽힐 수 없는 일이지만, 어떤 일이 생길지 알지 못하고, 또 지난 과실 때문에 무력한 처지에서 극도로 불안한 가운데 놓여 있어요. 너무 비참한 일이어서 더 말씀을 드릴 수가 없군요. 하지만 제가 무서운 덫에 걸려 다시 넘어진다면, 그 결과는 첫째 번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불행해지리란 생각이 들어요. 하느님이시여, 이런 일은 생각조차 못하겠어요. 저를 그이에게 곧 보내 주시든지, 그이를 제게로 보내 주시옵소서.
당신의 아내로 함께 살 수 없다면 당신의 종으로라도 만족하겠어요. 참으로 기쁘게. 그리 되면 당신 곁에 있을 수 있고, 당신을 바라볼 수 있으며, 당신을 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당신 없는 이곳에선 태양마저 저에게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고, 들에 있는 갈가마귀나 날짐승조차 대하기 싫어요. 그것들을 함께 바라보던 당신이 생각나서 슬픈 마음 그지없으니까요. 천당에서나 땅 위, 지옥에서라도 당신을 보고 싶은 것이 제 유일의 소원입니다. 그리운 당신이여, 돌아오세요. 그래서 저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구해 주세요.
슬픔에 잠긴 당신의 충실한 아내 테스 올림"
49
그녀의 애절한 편지는 서쪽에 있는 고요한 목사관의 아침 식탁에 배달됐다. 플린트콤 애쉬에 비해 공기가 맑고 토지가 기름진 그곳에서 농사에 필요한 일이란 그저 간단한 일만 돌보면 충분했고, 테스가 볼 때 그곳 사람들은 다른 세상사람 같았다(사실은 다를 것도 없지만). 반드시 아버지를 통해서 서신 연락을 하도록 에인젤이 당부한 이유는 단순히 서신의 안전을 위한 의도에서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멀리 외국에 나간 에인젤은 주소가 바뀔 때마다 아버지에게 꼬박꼬박 알리고 있었다.
"자."
겉봉을 읽고 난 클레어 목사가 부인을 향해 말했다.
"그 애가 이전에 말했듯이 이달 말경에 리오를 출발해서 여기로 돌아올 예정이라면 이 편지는 에인젤의 계획을 앞당기게 할지도 몰라. 이건 분명히 며느리가 썼을 테니까 말이오."
목사는 그녀를 생각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편지는 이내 에인젤 앞으로 발송하게 되었다.
"아무쪼록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클레어 부인이 중얼거렸다.
"내가 죽는 순간에도 그 애한테 잘해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릴 것 같아요. 신앙생활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애를 케임브리지 대학에 보내 형들처럼 똑같은 기회를 주었어야 했을 거예요. 그랬다면 올바른 교육을 받아 부족한 신앙심을 극복하고, 아마 지금쯤은 성직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또, 성직과는 상관없이 대학은 보냈어야 당연했어요."
클레어 부인이 자식들 일로 목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단 한 가지 불평이었다. 그러나 부인은 좀처럼 이 같은 불평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신앙으로 이겨 내는 분별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에인젤에 대한 처사로 남편 자신도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밤중 남편이 일어나서 에인젤을 위해 숨을 죽여 가며 기도하는 소리를 부인은 종종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타협을 좋아하지 않는 이 목사는 대학의 유리한 지위가 교위, 즉 그것을 보급시키는 것을 그의 한평생 사명으로 하는 것을 소망하여 동시에 같은 성직에 있는 두 아들들의 사명이기도하나, 비방하는 목적에 이용되는 일은 없다 할지라도 가능성은 없지도 않은 에인젤에게 다른 두 아들처럼 대학 교육을 받을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이 정당하다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신앙심이 두터운 두 아들의 발판을 마련해 주고, 다른 손으로 신앙심이 없는 또 한 아들을 같은 방법으로 높은 위치에 올려 준다는 것은 자신의 신념이나 지위, 희망에 어긋나는 일이라 생각했다.
불행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산에 오르던 에이브러햄이 마음속으로 진정 슬퍼한 것처럼 에인젤에 대한 그런 처사를 클레어 목사는 남몰래 괴로워하면서 에인젤을 사랑하고 있었다. 목사의 말없는 후회는 부인이 입으로 불평하는 어떤 원망보다도 훨씬 뼈아픈 것이었다. 아들의 불행한 결혼에 대해서도 목사 부부는 자신들을 탓했다. 에인젤이 농부의 길을 택하지만 않았던들 시골 처녀와 인연을 맺진 않았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헤어졌으며, 또 언제 헤어졌는지 그들은 분명히 몰랐다. 처음에는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그러려니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영구적인 불화가 아닌가 하는 불안도 있었다. 에인젤은 아내가 친정에 있다고 말했으므로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목사 부부는 달리 어떻게 할 방도도 없는 일이라 간섭하지 않기로 하고 있었다.
테스의 편지를 읽고 있어야 할 에인젤의 눈은 남미 대륙의 내륙에서 노새를 타고 해안으로 향하는 도중, 광막한 대평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낯선 타향에서 그가 겪은 일들은 서글픈 것뿐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직후에 걸린 중병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고, 머무를 수 있을 때까지는 계획의 변경을 부모에게까지 감추고 있었지만, 이곳에서의 농장 경영 계획은 언제라도 단념할 결심으로 있었다.
에인젤과 마찬가지로 쉽게 자립할 수 있다는 선전에 현혹되어 브라질로 건너간 많은 농업 노동자들은 병에 걸리기도 하고 죽기도 하여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영국 농장에서 건너온 어머니들이 열병에 걸려 죽은 아이를 안고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그는 흔히 볼 수 있었다. 맨 손으로 푸른 땅을 파서 아이를 매장한 부인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면서 많이 슬퍼했었다.
에인젤의 당초 목적은 브라질로 이민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 본토에서 북부나 동부 지방에 농장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브라질로 온 동기는 순간적인 그의 실망에 있었지만, 그 당시 영국 농민들 사이에 있던 브라질 이민열이 과거에서 도피하려는 에인젤의 욕망과 우연히도 부합했던 것이다.
고국을 떠나 있는 동안 정신적으로는 10여 년이나 더 지난 것처럼 나이를 먹었다. 지금 그가 느끼는 인생의 가치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애처로움이었다. 오랫동안 신비주의의 낡은 제도를 불신하던 그가 지금은 도덕적인 낡은 가치 평가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도덕적인 관념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덕적 인간이란 어떤 사람인가? 좀더 적절한 말을 인용한다면 도덕적인 여자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성격의 추하고 아름다움은 그 행실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그 목적과 동기에도 달렸다. 성격의 거짓 없는 역사는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스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런 관점에서 그녀를 생각할 때 조급한 판단에 대한 후회가 마음을 억눌렀다. 그녀를 영원히 배척한 것일까? 아니면 일시적인 것이었을까? 영원히 배척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지금 그녀를 용서한다는 뜻인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테스가 플린트콤 애쉬에서 일할 그 무렵이었다. 그때는 그녀의 형편과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남편의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때였다. 에인젤의 마음은 몹시 흔들었다. 마음이 너무 혼란해진 그는 그녀에게서 소식이 없는 동기조차 묻지 않았다. 이렇듯 그녀의 유순한 성격이 오히려 에인젤의 오해를 샀다. 테스의 침묵을 그가 이해했더라면 그녀의 심정을 알 수 있으련만. 그렇다, 에인젤이 일러 놓고도 잊어버린 명령을 그녀는 아직도 충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대담한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아무런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에인젤의 판단대로 복종하는 테스. 그러한 그녀를 언제부터인가 에인젤은 그리워하고 있었다.
노새로 내륙을 횡단하는 에인젤에겐 길벗이 한 사람 있었다. 영국의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이지만 그도 같은 계획을 품었었다. 그들은 다 같이 침울한 기분에 잠긴 채 고향 얘기를 나눴다. 믿음은 더욱 굳은 믿음을 낳았다. 이런 묘한 기분은 남자들의 경우 빈번히 있는 일이지만, 고향을 떠났을 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다정한 친구한테도 말하기를 꺼리는 내용까지 낯선 친구에게 털어놓게 마련인 그런 기분에 잠긴 에인젤은 말을 몰면서 자신의 슬픈 결혼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낯선 나그네는 에인젤보다도 더 많은 타향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겪어 왔다. 그의 세계주의자다운 눈으로 본다면 가정생활에서 아주 중대하고 또 사회 질서에서 벗어난 것 같은 커다란 이탈도 지구의 전체 곡선에 나타난 보잘것없는 골짜기와 산맥의 굴곡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에인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관찰했다. 테스의 과거란, 그녀의 미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솔직히 지적했다.
이튿날, 번개가 치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에인젤의 길벗은 열병에 쓰러지고, 그 주말에 숨을 거두었다. 그를 매장하느라 몇 시간 지체한 에인젤은 다시 길을 떠났다. 아주 평범한 이름 외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넓은 마음을 가진 나그네가 무심코 던진 그 말은 그의 죽음으로 더욱 송고해지고, 철학자들의 어떤 윤리보다 클레어를 감동시켰다. 자신의 옹졸한 마음을 떠올리며 스스로 창피함을 느꼈다. 모든 모순이 홍수처럼 그에게 밀어닥쳤다. 그는 기독교를 물리치고 줄곧 그리스적인 이교를 숭배해 왔다. 더군다나 그리스인의 문명에서 볼 때 불법적인 굴종이라고 해서 반드시 모욕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신비주의 교리와 함께 불완전에 대한 증오감을 이어받은 그가 그 증오심이 결과적으로 어떤 속임수에 기인한 것임을 알았다면 적어도 그녀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했을 것이다.
심한 뉘우침이 에인젤을 괴롭혔다. 이즈 휴에트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테스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녀는 부정했었다. 테스는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버릴 여자지만, 자기는 따라가지도 못하노라고 말했던 것이다.
결혼식 날의 테스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녀는 얼마나 끊임없이 자기를 바라봤던가. 에인젤의 말이 절대적인 양, 얼마나 믿고 있었던가. 난로 옆에서 단순한 생각으로 자신의 과거를 에인젤에게 고백하던 동안 그의 사랑과 보호가 물러갈 것도 짐작 못하던 그녀의 불빛에 비친 얼굴은 얼마나 측은했던가. 이리하여 테스를 용서할 수 없어 피해 온 그가 이제 그녀를 감싸 주는 심정으로 마음이 바뀌어 갔다. 그녀에게 퍼부었던 비웃음을 혼자서 되뇌어 본 적도 있었다. 인간이란 가볍게 남을 비판하거나 조롱할 수 없다. 그래서 에인젤은 그런 태도를 고쳐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조차도 케케묵은 것 같았다. 우리 모두 이렇듯 사소한 문제들을 겪으며 살아간 것은 어제 오늘에 비롯된 것도 아니다. 클레어가 테스한테 가혹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랑하거나 사랑하던 여자에 대해서 남자들은 빈번히 가혹하게 대하지만, 그것은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인간들은 서로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면서 지내 왔는가.
쇠잔한 존재라 해서 에인젤이 경멸하던 테스의 혈통에 대한 역사적인 관심, 즉 더버빌 가문의 훌륭한 혈통이 새삼스럽게 그의 감정을 자극했다. 혈통 문제에 있어서 에인젤은 왜 정치적인 가치와 상상적인 가치의 차이를 깨닫지 못했을까? 상상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녀가 더버빌 가문의 후손이란 것은 커다란 비중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하등의 가치가 없다 치더라도 공상가나 교훈을 얻으려는 도학자들에게는 가장 유익한 자료다. 그것은 머지않아 망각될 사실들이다. 가련한 테스의 혈통과 이름 속에 담긴 양간의 영예도, 그리고 킹스베리에 있는 대리석의 묘비나 조상들의 납골당과 함께 그녀가 대대로 이어받은 가문도 잊혀지고 말 것이다. 이리하여 시간은 무참히도 모든 것을 파괴해 가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몇 번이나 머릿속에 그려 보는 동안, 그는 이제 그녀의 얼굴에 번득이는 고귀함을 보았다. 이전에 그런 환상을 보았을 때 그 다음에 불쾌감을 일으키게 했던 그 영기가 지금 이 순간 그의 혈관으로 스며들었다. 순결을 지키지 못한 과거는 지녔을망정 테스의 마음속에 담긴 것은 무엇 보다 훨씬 값진 엇이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훌륭하지 않았던가?
되살아난 애정의 이런 속삭임은 마치 아버지로부터 보내진 테스의 애정 어린 편지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내륙에 있는 에인젤에게 편지가 도달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한편, 자신의 호소를 받아들여 남편이 돌아오리라는 테스의 기대는 때로 부풀기도 하고 한없이 줄어들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가 과거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돌아오면 어떤 방법으로 그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즐거운 염려로 마음을 기울였다. 에인젤이 하프로 타던 곡과 시골 아가씨들이 부르는 민요 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도 떠올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우연히 탤보데이스에서 이즈 휴에트를 따라온 앰비 시들링에게서 에인젤이 좋아하던 노래를 알 수 있었다. 특히 낙농장에서 젖이 잘 나오라고 젖소에게 불러 주던 <큐핏의 뜰>, <나에겐 사냥터와 사냥개가 있네>, <동틀 무렵> 등을 좋아한 것 같았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멋지게 부르고 싶은 것이 지금 그녀의 소원이었다. 그녀는 여가를 틈타 <동틀 무렵>을 남몰래 연습했다.
일어나요, 일어나요, 어서 일어나세요.
정원의 예쁜 꽃 한데 엮어서
님에게 바치리라, 사랑의 꽃다발을.
모든 가지마다 참새들 집 짓네
모든 가지마다 산비둘기 집 짓네
이른 봄날
먼동이 터오는 새벽하늘에.
이 춥고 건조한 계절에 다른 처녀들과 떨어져 일할 때 부르는 테스의 노래를 듣는다면 돌 같은 심장을 가진 남자라도 마음을 바꿀 것이다. 갑자기 에인젤이 끝내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노래의 천진한 가사는 그녀의 괴로운 마음을 비웃는 듯 울려 퍼졌다.
테스는 이런 공상에 담뿍 젖어 있었으므로 계절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도 몰랐다. 해는 조금씩 길어지고, 성신 강림절도 코앞에 다가왔으며, 또 얼마 안 있어 그녀의 해약 기일인 음력 성모 마리아의 날이 올 것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러나 사반기 품삯을 받는 날이 오기 전에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할 어떤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저녁, 하숙집 아래층에서 다른 때와 같이 그 집 가족들과 함께 앉아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테스를 찾았다. 키는 어른 같았으나 몸매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야위고 초라한 여자가 기울어 가는 햇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테스."
하고 부를 때까지는 희미한 달빛 때문에 누구인지 분간을 못했다.
"아니, 리자 루 아냐?"
테스가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일 년 전 고향을 떠날 때 아직 어린애였던 동생은 지금 보는 것처럼 부쩍 커 있었다. 작년만 해도 길던 원피스는 짧아져 삐쩍 마른 두 다리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다 부자연스럽도록 길게 늘어진 두 팔이 동생의 젊음과 순결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리자 루는 흥분한 기색도 없이 조용히 말했다.
"응, 나야. 하루 종일 걸었어. 언니를 찾으러 다니느라 힘들었어."
"집에 무슨 일이 있니?"
"엄마가 몹시 편찮으셔. 의사는 엄마가 곧 돌아가시게 될 거라고 그랬어. 아빠도 몸이 상당히 약해 지셨어. 그리고 자기같이 훌륭한 자손이 천한 노예처럼 노동을 할 수는 없다고 그러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테스는 오랫동안 멍청하게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동생을 방으로 불러들여 앉게 했다. 그리고 리자 루가 차를 마시는 동안 그녀는 결심했다. 아무튼 고향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계약 기간은 4월 6일이 되는 음력 성모 마리아의 날로써 불과 며칠 남지 않았지만 거리낄 것 없이 당장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지쳐 버린 동생을 내일 아침까지 걷게 할 수 없었던 테스는 이즈와 마리안의 하숙에 가서 사정 얘기를 하고, 내일 아침에 주인한테 잘 말해 달리고 부탁했다. 하숙에 돌아온 테스는 루에게 저녁을 먹여 자기 침대에 눕히고는 버드나무 바구니에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짐을 채운 다음, 동생에게는 내일 아침 뒤따라오라고 이른 다음 고향 길에 올랐다.
50
시계가 10시를 알렸다. 그녀는 싸늘한 별빛 아래 15마일의 먼 길을 가기 위해 차가운 춘분의 어둠 속으로 나섰다. 쓸쓸한 곳에서 혼자 걷는 길손에게 밤은 위험보다는 오히려 위한을 느끼게 했다. 테스는 낮 같으면 두려워할 사잇길을 따라 가장 가까운 지름길로 접어들었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걸음을 재촉한 그녀가 벌배로우에 도착한 것은 거의 12시가 가까웠을 때였다. 그녀는 멀리 고향 골짜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캄캄하고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깊은 벼랑을 내려다봤다. 고원 지대를 이미 5마일 가량이나 지나왔지만, 발밑에 보이는 평지를 따라서 아직도 10마일은 더 가야 그녀의 목적지에 닿는 것이다. 꼬불꼬불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자 푸른 별빛 아래 어렴풋이 발아래 길이 보였다. 곧 그녀가 밟는 땅이 고원과 다르다는 것은 발에서 느껴지는 감촉과 흙냄새로 알 수 있었다. 진흙땅으로 이루어진 블랙무어의 변두리인 이곳은 일찍이 신작로가 뚫린 적이 없고, 다른 어느 곳보다도 여러 가지 미신이 오래 남아 있었다. 한때는 숲을 이루었던 이곳의 어두침침한 모습은 원근 경치가 한 덩어리가 된 가운데 모든 수목과 높은 생울타리가 제각기 뚜렷이 나타나 그 옛날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잡히던 수사슴, 바늘에 찔려 물에 던져진 마녀, 사람이 지나가면 낄낄대며 웃는다는 번쩍거리는 녹색 옷을 입은 요정 등, 아직도 이곳엔 이런 것들을 믿는 사람이 많아서 짓궂은 마귀들이 지금도 우글대는 것 같았다.
너즐베리 마을에서 여인숙 앞을 지날 때 그녀의 발자국 소리에 응답하듯, 여인숙 간판이 덜거덕거리며 흔들렸다. 인간으로서 그 소리를 들은 것은 테스밖에 없었다. 이엉을 이은 지붕 밑에서 햄블돈 언덕배기에 동이 트는 순간, 새로운 아침 일을 나가기 위해 보라색 헝겊 조각을 모아 만든 이불을 덮고 나른해진 긴장을 잠의 힘을 빌어 풀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이 그녀 마음의 눈에 보였다.
3시에 그녀는 지금까지 걸어온 꼬불꼬불한 길의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서 말로트 마을로 접어들자 지난날 친목회 때 처음으로 클레어를 만난 초원을 지났다. 그때 함께 춤추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아직도 그녀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 집이 있는 방향의 불빛이 비쳤다. 침실에서 새어 나오는 그 불빛은 창문 앞 나뭇가지에 가리어 가지가 흔들릴 때 반짝반짝 그녀에게 눈짓을 했다. 테스가 보낸 돈으로 새로 이엉을 이은 집의 윤곽이 나타나자 그녀는 옛날과 다름없이 마음에 감회가 돌았다. 그것은 여전히 그녀의 육체와 생활의 일부분인 것 같았다. 지붕에 난 비스듬한 창문, 바람받이의 끝머리, 굴뚝 윗부분의 드문드문 이어 붙인 빨간 벽돌 등, 모든 면에서 테스의 성격과 공통되는 점이 있는 것처럼 그녀의 눈에 다가왔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병환이었다.
그녀는 집안사람들이 깨지 않게 살짝 문을 열었다. 아래층 방은 비어 있었으나 어머니를 간호하던 이웃 아낙이 층계 위에 나타나서, 더비필드 부인이 방금 잠들었지만 병세가 좋지 않다고 속삭였다. 테스는 조반을 준비하고 어머니를 간호하러 침실로 들어갔다. 아침이 되어 동생들의 모습을 대하자, 그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야겠다는 절실감 때문에 그녀 자신의 문제 따윈 돌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여전히 건강이 나쁜 아버지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테스가 도착한 그 이튿날의 아버지의 기분은 유난히 밝은 것 같았다. 생계를 이어 나갈 그럴듯한 방법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테스는 그것이 어떤 방법인지 물어 보았다.
"영국 내에 있는 모든 고고학자들에게 내 생계유지를 위한 기부금을 내도록 회람을 돌릴 작정이야. 그들은 틀림없이 내 요구에 찬성할 거야. 낭만적이고 멋지며, 또 그럴듯한 생각이지. 허물어진 고적 보존이나 어떤 유적 발견에 막대한 돈을 쓰는 그들이니까 말야. 내 존재를 알기만 하면 나는 살이 있는 고적인 셈이니까 더 큰 관심을 기울일 거야. 누구든 상관없으니까 그들을 찾아다니면서 고적이 엄존해 있는데도 그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 줬으면 좋겠어. 우리 가문을 발견한 트링엄 목사만 살아 있어도 틀림없이 이 일을 맡았을 텐데."
테스는 야단스런 계획에 대한 시비는 뒤로 미뤄 놓고, 돈을 보냈어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 당면한 문제를 우선 처리하기로 했다. 대강 집안 정리가 끝나자 그녀는 바깥일에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모내기와 파종의 철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채소밭과 소작지의 밭갈이를 거의 다 끝냈다. 그러나 더비필드 집안만은 밭일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더욱 실망한 것은 종자로 쓸 감자를 먹어치운 -앞날을 생각 않는 사람의 최후 실수인- 것이었다.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살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될 수 있는 한 서둘러 얻을 수 있는 데까지 씨감자를 얻었다. 며칠 후에는 아버지도 딸의 설득에 못 이겨 채소밭을 돌볼 용기를 냈다. 한편, 그녀는 마을에서 2백 야드 정도 떨어진 소작지를 빌려 농사를 시작했다. 며칠 동안 어머니를 간호하느라 병실에 갇혔던 그녀였으므로 밭일을 하는 것이 생동감 있어 좋았다. 어머니의 병세는 상당히 좋아져서 그녀가 없어도 괜찮았다. 육체적인 노동은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소작지는 건조하고 높은 지대의 넓은 울타리 안에 있는데. 그곳에는 비슷한 소작지가 수십 개나 몰려 있었다. 여기 일은 하루의 품일이 끝날 때가 제일 부산했다. 밭일은 언제나 아침 6시경에 시작하지만, 끝나는 시간은 일정치 않아서 어느 때는 달이 뜨는 시간가지 계속할 때도 있었다. 건조한 날씨가 모닥불을 지피기에 적합했으므로 여기저기에서 마른 풀이나 쓰레기더미를 태우고 있었다.
어느 맑게 갠 날, 테스와 리자 루는 석양이 소작지 흰 경계 말뚝에 비칠 때까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저녁놀이 물들 즈음, 개밀과 호배추 줄기를 태우는 불빛이 밭을 밝게 비춰 밭의 윤곽은 짙은 연기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었다. 그 광경에서 낮에는 성벽이 되고 밤에는 불기둥이 됐다는 성경의 구름 기둥의 모습을 상상해 낼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밭일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의 소작인들은 남은 파종을 마치려고 밭에 그대로 있었다. 동생만 집으로 돌려보내고 테스는 그들과 함께 남았다. 개밀이 여러 곳에서 불타는 가운데 테스는 쇠스랑을 쥐고 밭을 일구었다. 네 개의 번쩍이는 갈퀴는 돌과 마른 흙에 부딪쳐 달그락거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그녀의 밭에서 태우는 연기가 온몸을 완전히 감싸는가 하면, 연기는 사라지고 풀더미의 놋쇠 빛 불길에 비쳐 그녀의 온 몸뚱이가 드러나기도 했다. 좀 색다른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색이 바랜 겉옷 위에다 까만 재킷을 입고 있어서 전체의 느낌은 마치 장례식의 손님과 결혼식의 손님을 하나로 묶은 것 같았다. 훨씬 뒤쪽에 있는 여자들은 흰 앞치마를 둘렀는데, 불꽃이 활짝 필 때는 좀 다르지만, 가물거릴 때는 그녀들의 흰 앞치마와 창백한 얼굴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서쪽에는 밭의 경계를 이룬 헐벗은 가시나무 울타리의 앙상한 가지들이 나직한 젖빛 하늘을 배경으로 환히 드러나 있었다. 머리 위에는 활짝 핀 황수선 같은 목성이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눈부시게 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조그만 별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먼 데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이따금 마른 땅에 덜커덕거리며 짐수레가 지나갔다. 시간이 과히 늦지 않았으므로 아직도 쇠스랑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기는 맑고 차가웠지만, 그 속엔 일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돋우는 봄의 속삭임이 있었다. 지금의 이장소와 이 시간, 타닥타닥 튀는 모닥불의 신비로운 불빛과 그림자가 뭔지 모르게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었다. 찬 서리가 내리는 겨울에는 마귀처럼, 무서운 여름에는 다정한 애인처럼 찾아오는 황혼이 3월에는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이었다.
아무도 곁눈질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눈은 파헤친 흙이 불빛에 드러나는 부분에만 쏠렸다. 그래서 테스는 땅을 일구면서 그 부질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언젠가는 클레어가 이 노래를 들어 주겠지 하는 희망도 이젠 사라졌다. 한참 후에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계속 같은 밭을 일구는 남자를 발견했다. 길다란 작업복을 입은 그 남자는 일을 같이 거들라고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남자가 땅을 파며 점점 그녀에게로 다가오자, 테스는 더욱 그를 의식하게 됐다. 가끔 연기가 그들을 갈라놓을 때도 있으나, 연기가 비스듬히 방향을 바꾸면 다른 일꾼들에게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그들끼리 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테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남자도 아무 말이 없었다. 혼자 곰곰이 생각해도 낮에 일할 때는 보지 못한 거 같고, 말로트 마을에 사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궁금증을 지워 버린 채 그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얼마 후 더욱더 둘의 사이가 가까워지자 그들의 쇠스랑은 불빛을 받아 뚜렷이 반짝였다. 모닥불을 더 밝게 하려고 테스가 불 곁으로 다가가 마른 풀을 던지자 그 남자도 맞은편에서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불빛이 활짝 피어오르는 순간, 그녀는 더버빌의 얼굴을 보았다.
생각지도 않은 그의 출현과, 지금은 아무도 입지 않은 주름 잡힌 노동복을 걸친 괴상한 모습은 소름끼칠 만큼 우스꽝스러워서 그의 밭 가는 모습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오싹하게 했다. 더버빌은 낮은 음성으로 한참 동안 웃고 있었다.
"내가 만약 농담을 할 줄 안다면, 이곳이 바로 낙원 같다고 말할 거야."
그는 머리를 기울여 테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무슨 기분에선지 장난 투로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요?"
그녀가 힘없이 물었다.
"농담을 잘하는 사람 같으면 이건 곡 낙원 같다고 할 거라고 그랬어. 당신이 이브라면 나는 천한 동물의 탈을 쓰고 당신을 유혹하러 온 교활한 마귀란 말이지. 내가 신앙에 빠져 있을 때는 밀턴의 <실락워> 가운데서 그 장면을 전부 외었어. 그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
여호와이시여, 길은 마련되고 멀지 않나니
소귀나무 줄지은 저쪽에
그대 만약 제 길잡이를 받아들이시면
그곳으로 그대 곧 모시오리라.
그럼, 인도해 주사이다 하고 이브는 말했노라.
"이런 대목이지. 테스, 그리운 테스, 당신은 나를 엉뚱하게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이런 말을 한 거요. 당신은 나를 고약하게만 생각하니"
"나는 당신을 마귀라고 말한 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한 일도 없어요. 조금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나를 모욕하지 않는 한 당신에 대한 내 생각은 항상 냉정해요. 땅을 파러 이곳에 온 것은 오직 나 때문인가요?"
"정말 그렇다오. 당신을 만나려는 것 외에 아무 목적도 없소. 여기 오는 길에 노동복을 사 입었소. 이것만 입으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말리러 온 거요."
"하지만 난 이런 일이 좋아요. 아버지를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요."
"다른 데서 일하던 건 계약이 끝났소?"
"네."
"다음엔 어디로 갈 거요? 그리운 남편을 만나러 가나?"
그녀는 모욕적인 말투엔 더 참을 수 없었다.
"아아, 그건 몰라요."
그녀는 씁쓸하게 말했다.
"난 남편이 없어요."
"그건 사실이오. 그러나 당신은 친구가 한 사람 있소. 당신이 싫어하든 말든 당신을 편안하게 해 주려고 결심했소. 집에 돌아가면 당신을 위해서 무얼 갖다 놓았는지 알 거요."
"알렉,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했잖아요. 난 결코 받지 않겠어요. 난 싫어요. 그건 옳은 일이 아녜요."
"아니오, 내겐 옳은 일이오. 내가 아끼는 여자가 고생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소."
"하지만 나는 조금도 곤란을 느끼진 않아요. 내가 걱정하는 것은 제 자신의 생계 때문은 아니란 말이에요."
그녀는 돌아서서 자포자기한 듯 다시 땅을 일구었다. 쇠스랑 자루와 흙덩이 위에 눈물이 떨어졌다.
"당신 동생들 때문이겠지. 나도 이제껏 당신 동생들에 대해 줄곧 걱정해 오고 있었소.“
알렉이 위로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테스의 가슴은 떨렸다. 가장 약한 곳을 그가 건드렸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뒤로 그녀는 열정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동생들에게 줄곧 뜨거운 애정을 쏟고 있었다.
"어머님의 병이 완전히 낫지 않는다면 누군가 그 애들을 돌봐 주지 않으면 안 되지. 그러나 당신 아버지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할 것 같은데."
"내가 도우면 하실 수 있어요. 아버지는 일을 하셔야 해요."
"나도 도와주고."
"아녜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에요."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군."
더버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 아버지는 나를 같은 친척이라고 생각하시니까 아주 만족하실 거라고."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바른말을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더 어리석군."
화가 잔뜩 난 더버빌은 그녀 곁을 떠나 생울타리 쪽으로 물러갔다. 그리고는 변장하고 있던 길다란 노동복을 벗어 둘둘 뭉친 다음 모닥불 속에 쳐넣고는 돌아가 버렸다. 테스는 이제 일을 더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알렉이 아버지한테 돌아간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미치자 쇠스랑을 집어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20야드쯤 되는 거리에 이르렀을 때, 테스는 자기를 데리러 오는 동생을 만났다.
"언니, 어쩌면 좋아. 리자 루 언니는 울고, 집에는 마을 사람들이 잔뜩 모였어. 엄마는 괜찮은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같다고 야단들이야."
동생은 큰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슬픈 소식인지 몰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테스를 쳐다보던 꼬마는 테스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보자 다시 말했다.
"근데 언니, 아빠하고는 이제 다시 얘기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아빠는 조금 편찮으셨을 뿐이데?"
테스는 낙담해서 부르짖었다. 이때 마침 리자 루가 달려왔다.
"아빠가 방금 돌아가셨어. 엄마를 왕진하러 왔던 의사가 그러는데, 심장이 아주 막혀 버려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대."
사실 그대로였다. 더버빌 부부는 서로의 운명이 뒤바뀐 것이었다. 죽어 가던 아내는 살아나고, 별로 대단치 않던 남편이 죽어 버린 것이다. 더비필드가 죽었다는 소식은 단순한 죽음 이상의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생명에는 몸소 해 놓은 개인적인 업적과는 상관없는 가치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의 죽음이 그리 대수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3대로 한정된 토지 차용 계약으로, 차용 기한이 끝나는 마지막 3대손이 바로 더비필드라는 점이다. 거기에다 장기로 일꾼을 둔 소작농들은 그들이 거처할 집이 모자라 항상 그 집을 탐내고 있었다. 더구나 종신 임대자는 그 태도가 거만해서 마을 사람들은 마치 소지주만큼이나 싫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임대 기간이 끝나면 계약의 갱신을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때는 더버빌 가문에 속했던 더비필드 일가가 이 지방에서 유력한 존재로 행세하던 그 시절에, 현재의 그들처럼 땅 없는 자들에게 냉혹한 처사를 수없이 가하던 운명이 그들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밀물과 썰물, 이를테면 변화무쌍한 리듬과 같은 현상이 땅위의 모든 것에 끊임없이 엇갈려 그칠 줄을 몰랐다.
51
드디어 음력 성모 마리아의 날 전날 밤이 다가왔다. 그래서 농가에서는 1년 중 어느 때에도 보지 못한 열띤 소란에 휘말려들었다. 이날은 계약이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성촉절 (2월2일)에 체결한 1년간의 고용 계약이 이제 끝나는 날인 것이다. 노동자, 이 말은 옛날부터 오랫동안 써 오던 말이지만, 이 노동자들은 일하던 곳에 더 있고 싶지 않으면 모두 다른 농장으로 옮겨갔다. 이 지방에서는 농장에서 농장으로 옮겨 다니는 그들의 수가 해마다 늘어 가기만 했다. 테스의 어머니가 아직 어렸을 때는 말로트 부근의 농부들은 거의 모두 평생토록 한군데 농장에서 생계를 이어 갔었다. 그것은 그들 조상의 일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근년에는 해마다 일자리를 바꾸려는 경향이 상당히 높아졌다. 좀 더 젊은 일꾼의 가족한테는 어떤 이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유쾌한 자극이 계기가 됐다. 어느 가족에겐 모세가 고난을 겪은 이집트, 이곳도 먼 데서 보는 가족에겐 약속된 낙원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곳에 가 살아 보면 그들에게도 역시 이집트가 된다. 이렇게 그들은 한 군데 머무르지 않고 자꾸만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농촌에서 눈에 띄게 늘어 가는 이주가 단순히 시골 생활의 불안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인구의 감소 현상도 일어나고 있었다. 예전의 농촌이라 하면 농업 노동자 외에 그들보다 신분이 높고 취미와 지식이 훨씬 앞선 계급(테스의 양친이 속하던 계급)과 더불어 목공, 대장장이, 구두장이, 행상인, 그리고 농업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를 포함한 계급, 또 테스 아버지처럼 종신 임대권 소유자라든가, 토지 등기부 소지자, 때로는 소규모나마 자작농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목적과 생활이 안정된 한 무리의 주민들이 속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임대 계약이 끝나면 그 가옥을 똑같은 사람에게 다시 빌려 주는 경우는 없고, 지주가 고용인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 한 대개 헐어 버리는 것이었다.
지주에게 직접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은 푸대접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쫓겨나는 노동자들이 생기면 그들을 의지했던 장사꾼들도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농촌 생활의 뼈대를 이루고, 또 농촌 전통의 수호자였던 이런 가족들은 피난처를 커다란 도시에서 구해야만 했다. 통계학자에 의해서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 경향 이라고 규정된 그 과정은 기계력을 이용하여 물줄기를 억지로 산꼭대기에 끌어 올리는 경향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헐렸기 때문에 말로트 마을의 주택 사정은 상당히 부족해 졌으므로 남아 있는 가옥들은 농장주가 구입해서 그들 고용자들의 숙소로 사용하려고 했다.
테스의 생애에 그 같은 그림자를 던진 사건이 생긴 이후 더비필드 일가(그의 혈통을 믿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가 그 임대권이 끊어졌을 때 마을 사람들은 도의적 견지에서라도 떠나야 할 사람들로 무언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금주라든가 절도, 또는 경조라는 점에서 볼 때 이 가족은 실제로 모범될 만한 것이 조금도 없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가끔 술에 취하기가 일쑤요, 아이들은 좀처럼 교회에 나가지 않으며, 또 큰딸은 묘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에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기풍을 잡아야 했다. 이리하여 더비필드 가족은 성모 마리아의 날 첫날에 마을을 쫓겨나게 되었고, 이 집은 넓기 때문에 대가족을 거느린 마차꾼이 들기로 되었다. 그래서 과부 존과 테스, 리자 루, 아들 에이브러햄, 그리고 그 밑의 아이들은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떠나기로 한 전날 밤은 하늘이 잔뜩 흐리고 이슬비까지 부슬부슬 내려서 어느 때보다도 일찍 어두워졌다. 그들이 태어난 고향인 이 마을에서 지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므로 어머니와 리자 루, 에이브러햄은 친지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러 갔다. 테스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에 얼굴을 바싹 대고 창가 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매우 오래 전에 굶어 죽은 성싶은 거미줄에 눈이 멎었다. 파리 한 마리 걸려 들지 않는 곳에 잘못 쳐진 거미줄은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약한 바람에도 하늘거리고 있었다. 가족들의 난처한 처지를 곰곰이 생각하니, 자신의 잘못이 원인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어머니와 동생들은 적어도 1주일 동안 더 머무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녀가 돌아온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성격이 까다롭고, 또 유력한 위치에 있는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그들은 죽은 아기의 무덤을 흙손으로 정성껏 다듬으며, 교회 묘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테스를 보았다. 그녀가 말로트 마을에 돌아와 산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들은 테스를 감싸준다고 하면서 그녀의 어머니를 비난하였다. 그러자 존도 되받아 넘겨 당장 떠나겠다고 잘라 말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장담했으므로 이런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테스는 쓸쓸하게 혼자 중얼거렸다.
"돌아오지 않을 걸 그랬어."
그녀는 그런 생각에 골똘하느라 흰 우장을 입은 남자가 말을 타고 오는 것을 보고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창가에 얼굴을 바싹 대고 있었던 탓인지, 그 남자는 그녀를 금방 알아보고 현관 앞까지 바싹 말을 세웠으므로 말발굽이 담 밑의 조그만 꽃밭을 밟을 뻔했다. 그가 말채찍으로 창을 두드렸을 때에야, 그녀는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다. 비는 이미 멎어 있었다. 알렉의 손짓에 따라 그녀는 창문을 열었다.
"날 보지 못했소?"
하고 더버빌이 물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소리가 들린 것 같긴 했지만, 여러 필이 끄는 마차인 줄 알았어요. 꿈을 꾸고 있었나 봐요."
"아아. 아마 저 더버빌 가의 마차 소리를 들었나 보군? 그 전설을 알고 있소?"
"아뇨, 누가 얘기해 주려다가 그만둔 일이 있지만요."
"당신이 틀림없는 더버빌 가문의 사람이라면 나도 얘기 않는 것이 좋겠어. 나야 가짜니까 상관없지만 말야. 우울한 얘기야. 사실은 유령과 같은 마차 소리가 더버빌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한테만 들린다고 하는데, 그 소리를 들은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긴다는 거야. 몇 백 년 전에 그의 조상 한 사람이 저지른 살인 사건에 관계되는 거요."
"말씀하신 이상 끝까지 다 얘기해 주세요."
"그렇다면 하지. 그 가문의 어떤 사람이 어느 아름다운 여인을 유괴해서 마차로 데리고 가는 도중에 여자가 도망치려 했다는군. 그래서 다투다가 남자가 여자를 죽였다든가, 아니 여자가 남자를 죽였는지, 그건 잊어버렸소.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 얘기지. 양동이와 대야를 꾸려 놓았는데, 이사 가는 거요?"
"네, 내일 음력 성모 마리아의 날에."
"얘길 듣긴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믿어지지 않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소?"
"아버지는 이 집에 살 수 있는 마지막 소유권자였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상은 권한은 없어졌으니, 이제 더 있지 못해요. 내 일만 아니었더라도 1주일쯤은 더 머무를 수 있었을 텐데 말예요."
"당신이 어떻게 했길래?"
"저는 저... 올바른 여자가 아니니까요."
더버빌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빌어먹을 그 따위 일이 있나. 변변치 못한 더러운 정신머리들이란 불태워서 재나 만들어버리지."
그는 비꼬는 듯한 노여움에 소리쳤다.
"그래서 떠난다는 거요? 쫓겨난단 말이지?"
"쫓겨난 건 아니지만, 빨리 비워 달래요. 모두들 자리를 바꾸는 지금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슨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어디로 갈 적정이오?"
"킹스베리예요. 그곳에다 방을 얻어 놓았어요. 어머님은 아버지 가문을 믿고 어리석게도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군요."
"그러나 당신 집같이 많은 가족을 거느리고 셋방살이를 하기란 어려울 걸. 더구나 좁은 마을에서 말이오. 그러지 말고 트랜트리지의 우리 집 아래채로 오면 어떻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닭장을 다 치워 버렸지.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집과 뜰은 그대로 있어. 하루면 깨끗이 전부 회칠을 할 수 있고, 거기 같으면 당신 어머니도 편히 지낼 수 있을 거요. 그리고 동생들은 좋은 학교에 보내 주겠소. 정말 난 당신을 위해서 무언가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단 말이오."
알렉이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킹스베리에 방을 얻어 놓았어요. 거기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하고 그녀는 명확하게 말했다.
"기다리다니, 무엇을? 그 훌륭한 남편을 기다린단 말이지. 하지만 이것 봐, 테스, 나는 남자가 어떤지 잘 알아. 당신들이 헤어진 원인일 생각하면 그는 절대로 화해할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단정할 수 있소. 봐요. 난 옛날엔 당신의 원수였지만, 지금은 친구야. 당신이 믿지 않더라도 말이오. 내 집에 와서 정식으로 양계를 해 보지 않겠소? 그렇게 되면 당신 어머니도 잘 돌볼 거고, 또 아이들은 학교에도 갈 수 있을 테니."
더버빌의 간곡한 말에 테스의 호흡은 점점 빨라졌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으며,
"당신이 하는 말을 어떻게 다 믿어요? 당신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다시 집 없는 신세가 될 거 아니에요."
"오오, 천만에, 그럴 리가 있나. 필요하다면 증서라도 쓰지. 한 번 잘 생각해 봐요."
테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더버빌은 강하게 주장했다. 그렇게까지 확고한 그의 태도를 그녀는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끝내 동의를 얻으려는 듯했다.
"제발 어머니한테 말이라도 해 봐요. 어떻든 당신 어머니가 판단하도록 말이라도 한번 해 봐요. 칠도 다시 하고 집을 말끔히 청소하여 불을 지펴 놓겠소. 저녁때면 다 마를 테니까, 곧장 들어갈 수 있을 거요. 그런 오는 것으로 알고 기다리고 있겠소."
그는 간절하게, 그러나 강하게 말했다. 테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여러 가지 뒤얽힌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버빌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과거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으면 안 돼."
하고 그는 또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신앙에 미친 나를 고쳐 준 사람도 당신이니까. 그러니 나는 기꺼이 오히려 신앙에 대한 정열이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나는 지금이라도 보상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을 기뻐하고 있소. 내일 당신 어머니의 이삿짐 내리는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겠소. 자, 우리 그런 의미에서 악수라도 하지. 아름다운 테스."
말을 마치자, 음성을 낮춰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열린 창문 틈으로 한쪽 손을 내밀었다. 노여움에 가득 찬 눈초리로 그녀는 이내 창문의 쇠고리를 잡아당겼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팔이 창문과 돌쩌귀가 달린 문턱 사이에 끼어 버렸다.
"빌어먹을! 이건 정말 지독한데."
알렉이 얼른 팔을 빼면서 말했다.
"아냐. 괜찮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테지. 하여간 당신을 기다리겠소. 적어도 당신 어머니와 동생들만이라도 오는 걸 기다리고 있겠소."
"난 가지 않겠어요. 돈은 넉넉하게 있으니까요."
하고 그녀는 부르짖었다.
"어디에?"
"시아버지한테 있어요. 부탁만 하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어요."
"부탁만 하면 말이지. 하지만 테스, 당신은 그런 부탁 따윈 하지 않을 걸. 난 당신을 잘 아니까 말이야.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런 돈 부탁을 할 여자가 아니야."
이 말을 마치자, 그는 말을 몰고 가 버렸다. 마침 길모퉁이에서 페인트 통을 들고 있는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교우를 저버릴 생각이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악마한테나 찾아가 보게나."
하고 더버빌은 말했다.
테스는 꼼짝도 않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지만, 드디어 자기가 부당하게 괄시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남편인 에인젤 클레어마저도 남들처럼 그녀를 괴롭혔다. 그렇다. 분명히 그녀를 괴롭혔다. 이전에는 이런 원망어린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지만, 이처럼 가혹한 심판에 견딜 만한 힘도 없어졌다. 부주의로 말미암아 생긴 일에 이토록 끈질기게 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녀는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종이를 움켜 쥐고는 몇 줄의 사연을 갈겨 써 내려갔다.
"오오, 에인젤. 당신은 왜 이다지도 저를 학대하시나요. 에인젤. 저는 그런 보복을 받을 만큼 나쁜 짓은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내게 주는 고통에 이제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저는 결코 당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제가 당신을 욕되게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아시면서 어째서 이토록 저를 괴롭히시나요? 당신은 너무나 가혹해요. 전 이제 될 수 있는 대로 당신을 잊도록 노력하겠어요. 당신이 저에게 내리신 판단은 모두 합당치 못해요.
T로부터"
밖을 내다보던 그녀는 우체부가 지나가는 걸 보고 달려 나가 편지를 전했다. 그리고는 다시 창문 앞 그 자리로 돌아와 멍하니 앉았다. 편지를 어떻게 쓰건 에인젤의 마음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사실 테스의 생각대로 에인젤은 그녀의 애처로운 호소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즉, 그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새로운 사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난로의 불빛이 방안을 밝게 비췄다. 큰 아이들은 어머니를 따라갔고, 네 살에서 열한 살까지의 네 아이들은 까만 옷들을 입은 채 난롯가에 모여 앉아 어린이다운 요령 없는 말들을 저희들끼리 지껄이고 있었다. 마침내 테스도 촛불을 켜지 않은 채 그들 틈에 끼어 앉았다.
"얘들아, 우리들이 태어난 이 집에서 자는 것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야."
하고 그녀가 우울한 듯 말했다.
"그것을 잘 생각해야 한단다. 그렇지 않니?"
그들은 모두 잠잠해졌다.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는 기쁨에 온종일 들떠 있던 아이들은 모두 쉽게 감동하기 쉬운 나이였으므로 테스의 마지막이란 표현에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테스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노래를 들려주지 않을래?"
하고 그녀가 말했다.
"무슨 노래를 할까?"
"너희들이 아는 것을 하렴, 무엇이든 좋아."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먼저 한 아이가 시험 삼아 가만히 입을 열자, 낮은 음성이 침묵을 깨뜨렸다. 그러자 두 번째 음성이 노래에 힘을 합하고, 세 번째, 또 네 번째 음성이 한데 어울렸다. 그들은 주일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선 우리들은 슬픔과 고통을 겪고,
세상에선 우리 다시 만나면 이별이라네,
그러나 천국에선 영원히 이별이 없다네.
가사에 나타난 문제 따위는 이미 터득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냉담하고 무관심한 태도처럼 네 아이는 노래를 계속했다. 한 구절 한 구절 똑똑히 외려는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은 끊임없이 난롯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내 동생은 다른 아이들의 노래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서투르게 계속하고 있었다.
테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창가로 돌아갔다. 창 밖은 이제 짙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어둠 속을 뚫어보려는 듯 창틀에 얼굴을 대고 있는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동생들이 부른 노래의 가사처럼만 된다면. 그러나 그녀에겐 확신이 서질 않았다. 어떻게든 믿는 마음으로 내세의 천당에 동생들을 맡길 수 있다면. 그러나 그렇지 못한 그녀는 무엇인가 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의 확실한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테스는 워즈워드의 시구가 떠올랐다.
완전히 알몸이 아닌
영광의 구름을 타고
우리들은 이승에 왔노라.
그러나 그녀와 같은 인간에겐 태어났다는 것이 그들의 의지를 점점 꺾는 하나의 시련이었다. 그 시련은 정당한 어ㄸ너 결과도 주는 것 같지 않았고, 고작해야 그것을 누그러뜨려 주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다. 비에 젖은 어두운 길을 어머니가 키 큰 리자 루와 에이브러햄과 함께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더비필드 부인의 나막신 소리가 현관 앞에 이르자 테스는 문을 열었다.
"밖에 말발굽 자국이 있던데. 누가 왔다 갔니?"
하고 어머니가 물었다.
"아뇨."
테스는 짧게 대답했다. 난로 옆에 있는 꼬마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테스를 바라보더니, 그중 한 애가 말했다.
"테스 누나, 말 탄 신사가 왔었잖아."
"그 사람은 찾아온 게 아니야. 지나가다 얘기를 한 것뿐이지."
"그 신사란 누구지?"
하고 어머니가 다그쳐 물었다.
"네 남편이냐?"
"아니에요, 남편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아요."
테스는 아주 절망적인 투로 대답했다.
"그럼 누구란 말이냐?"
"뭐, 아실 필요 없어요. 이전에 한 번 보신 일이 있고, 저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 뭐라고 하든?"
어머니는 사뭇 궁금하다는 듯 채근했다.
"내일 킹스베리에 이사한 다음에 말하겠어요. 무엇이든 다 말씀드리겠어요."
남편이 아니라고 그녀는 극구 부정했지만, 육체적으로는 오직 그 남자만이 자기의 남편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점점 무겁게 압박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52
채 밝지 않은 새벽은 아직 컴컴했다. 길가에 사는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잠을 방해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되는 것을 어슴푸레 들었다. 그것은 이 달 첫 주와 셋째 주간이면 으레 둘리는, 반복되는 소리였다. 이사할 사람들의 이삿짐을 실어 나르려고 빈 짐마차가 지나가는 소리로, 이것은 이사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왜냐하면 일꾼의 이삿짐을 농장주의 짐마차로 목적지가지 실어다 주는 것이 보통이며, 농장주는 해가 지기 전에 일이 다 끝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늦어도 6시까지는 이삿짐을 다 실어야 하기 때문에 채 날이 밝기도 전에 이내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테스의 집에는 마차를 보내 줄 걱정을 해 줄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여자뿐이었고, 또 고용된 정식 일꾼도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자기네 비용으로 마차를 빌려야 했으며, 아무 대가 없이 무엇 하나 실어 달라고 할 수 없었다.
테스는 아침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람이 불고 날씨는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고, 또 마차가 제 시간에 닿아 있으므로 한결 마음이 놓였다. 비가 오는 성모 마리아의 날이란 이사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은 날이다. 젖은 가구며 젖은 이부자리와 옷가지가 이 유령을 따라 불길한 옷자락을 뒤로 잡아 끄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리자 루, 그리고 에이브러햄은 깨었지만 어린 동생들은 아직 자고 있었다. 네 사람은 희미한 불빛 아래 조반을 마치자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짐을 챙길 때에는 친한 이웃 사람 두어 명이 와서 도와주었으므로 별 어려움 없이 진행됐다. 큰 가구를 마차에 실은 다음, 더비필드 부인과 아이들이 쉬며 갈 수 있도록 침대와 이부자리로 둥그렇게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짐을 싣는 동안 안장을 풀어 놓았기 때문에 짐을 다 올리고 말을 맬 때까지는 잠시 시간이 있었다.
오후 2시쯤 되자 마차는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의 굴대에 매달아 놓은 냄비는 멋대로 흔들리고, 짐 위에 앉은 더비필드 부인은 마차가 흔들릴 때 깨가지 않도록 무릎 위에 벽시계를 얹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마차가 덜커덕거릴 때마다 시계추는 짓눌린 듯한 소리로 불규칙적인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테스와 리자 루는 짐수레가 마을 어귀를 벗어날 때까지 수레와 나란히 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몇몇 이웃에게 작별 인사를 다녔다. 막 출발하려고 하자 몇 사람이 떠나는 것을 보러 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테스 집안의 행운을 빌었으나, 이러한 집안에 별다른 행운이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침내 짐수레가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고, 그러자 바람은 더욱 차가워졌다.
4월 초엿새인 그날, 그들처럼 짐 위에 가족들이 탄 여러 대의 마차를 만났다. 꿀벌의 집이 육가형으로 일정한 것처럼 시골 삶들의 짐 싣는 모양도 대부분 방법이 비슷했다. 그 짐 맨 밑에는 반짝이는 손잡이가 다린 장롱이 있고, 살림의 때가 묻은 흔적이 역력한 물건이 말 엉덩이 위에 소중하게 얹혀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정중하게 모셔야 할 어떤 경전이라도 들어 있는 성스러운 궤 같았다.
어떤 가족은 생기에 넘쳐 있는가 하면, 슬픔에 잠겨 있는 가족도 있었고, 또 한길 가 주막 입구에 짐마차를 멈추어 놓고 있는 패도 있었다. 더비필드 가족도 말에게 먹이를 줄 겸 쉬려고 이곳으로 마차를 몰았다. 그들이 쉬는 동안 테스의 눈길은 떨어진 짐마차 위에서 술병을 기울이는 여인들한테 쏠렸다. 그녀의 눈길은 공중에 솟은 술병을 더듬어 내려가다가 그 술병을 쥔 손의 주인공이 잘 아는 여자임을 알아차렸다. 테스는 그 마차 쪽으로 갔다.
"마리안. 이즈"
하고 테스가 외쳤다. 그들은 하숙하고 있던 집이 이사하는 바람에 함께 따라 가는 것이었다.
"너희들도 다른 집처럼 오늘 이사하니?"
그녀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플린트콤 애쉬에서의 생활이 너무 고생스러워 그로비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목적지를 테스한테 알렸고, 테스도 그녀들에게 말했다. 마리안이 집 위에서 몸을 굽혀 그녀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테스, 네 뒤를 쫓아다니던 남자 생각나니? 누구인지 짐작이 가겠지? 네가 떠난 다음에 그 남자가 플린트콤 애쉬로 너를 찾아온 거 알고 있니? 그런데 네가 싫어하고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너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
"아아, 하지만 벌써 만났어. 나 있는 곳을 알아냈어."
하고 테스는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 네가 가는 곳도 그 사람이 알고 있니?"
"알고 있을 거야."
"남편은 돌아왔니?"
"아니."
마침 양쪽 마부가 주막에서 나왔으므로 그녀는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두 짐마차는 각기 반대 방향으로 다시 길을 떠났다. 마리안과 이즈, 그녀들이 하숙하던 집 가족들이 탄 산뜻하게 칠한 짐마차는 안장에 번쩍이는 놋쇠 장식을 단 세 마리의 튼튼한 말이 끄는 반면, 더비필드 부인과 그 가족이 탄 수레는 실은 짐을 겨우 지탱할 만큼 삐거덕 거리는 마차였다. 이제껏 페인트칠이라곤 해 본 일이 없는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레를 보면서, 번창하는 농장주를 따라가는 사람과 고용주도 없이 스스로 살 길을 찾아가는 사람과의 뚜렷한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갈 길은 아직도 아득했다. 하루해의 여행길로는 너무 멀고, 말들이 감당하기에도 벅찬 것 같았다. 상당히 일찍 출발한 편이지만, 그들이 그린힐 고원의 일부를 이루는 산허리를 돌 때는 느지막한 오후였다. 말들이 멈춰 선 채 배설을 하고 숨을 돌리는 동안에 테스는 사방을 둘러봤다. 그들이 서 있는 언덕 앞쪽에 그들의 목적지인 조그마한 마을 킹스베리가 음산하게 놓여 있었다. 그곳 킹스베리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마음에 사무치도록 이야기하고 노래하던 조상들이 묻혀 있었다. 그리고 더버빌 가문이 줄잡아 5백 년 동안이나 살던 곳이므로 세상의 어느 곳보다도, 특히 더버빌 가문의 고향이라고 생각되는 곳이었다.
읍 어귀에 지켜 섰던 사나이가 이곳을 향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짐 실은 수레를 발견하자 그
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더비필드 부인이신가요?"
그가 테스 어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그때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길을 걸으려고 마차에서 내렸던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말씀드리자면, 최근에 돌아가신 가난한 귀족 존 더버빌 경의 미망인입니다. 지금 조상의 영지로 돌아가는 길입니다만."
"네, 그렇습니까?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만, 더비필드 부인이시라면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실은 댁에 빌려 드리기로 되어 있는 방에 딴 사람이 들었다는 전갈입니다. 오늘 아침 편지를 받고서야 이리로 오신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때가 늦었죠. 하지만 어디든지 빈 방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 남자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테스를 쳐다봤다. 그녀의 어머니 더비필드 부인은 난처해하며 실망하는 듯했다.
"이것이 조상들이 묻힌 땅에 돌아와서 받는 대접이구나. 하여간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하자."
어머니와 리자 루가 방을 얻으러 샅샅이 헤매는 동안 테스는 아이들도 돌볼 겸 마차와 함께 남아 있었다. 한 시간쯤 뒤에 어머니가 마차 옆으로 돌아왔으나 방을 얻는 일은 허탕만 쳤다는 것이다. 마부는 말이 녹초가 된 데다가 오늘 밤 안으로 조금이라도 온 길을 돌아가 두어야 하므로 짐을 풀어야겠다고 말했다.
"좋아요. 여기에다 내려 주세요. 어디 임시 거처라도 얻을 테니까."
하고 부인이 무작정 말해 버렸다. 교회당 묘지의 담장 밑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마차를 몰고 갔다. 잘됐다는 듯이 마부는 얼마 안 되는 초라한 살림살이를 이내 내렸다. 테스는 짐을 다 내린 다음 마차 삯을 치렀다. 이제 수중에 남은 돈은 마지막 1실링 남짓이었다. 마부는 가족과의 거래를 끝낸 것이 기쁘기만 한 듯, 그들을 남겨 두고 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졌다. 날씨가 좋은 밤이었으므로 하룻밤 이슬쯤은 괜찮다는 듯 마부는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테스는 절망의 눈길로 짐더미를 바라봤다. 봄날 해질 무렵의 차가운 햇살은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약초 다발과 버드나무로 만든 요람, 그리고 둘레가 반질반질하게 닳은 벽시계 등을 일일이 비추었다. 전에는 공원이었던 언덕이며 비탈이 지금은 목초지가 되어 있었고, 한때는 더버빌 저택이 서 있던 지점을 표시하는 풀에 덮인 주춧돌이 사방에 길게 뻗쳐 있다. 바로 그 가까이에는 더버빌의 희랑이라고 불리는 교회의 희랑이 태연하게 사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족 묘지는 우리의 부동산이 아니냐?"
교회와 묘지를 둘러보고 온 테스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렇고말고, 우리의 소유일 테지. 그러니까 조상이 살던 영지에서 집을 얻을 때까지 임시로 사는 거야. 자, 테스야, 그리고 리자와 에이브러햄도 모두들 와서 도와줘라. 동생들 잠자리를 만들어 주고 우리는 다시 한 바퀴 돌아보자."
테스는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어머니를 도왔다. 15분쯤 걸려 이삿짐에서 네 발이 달린 침대를 꺼낸 그들은 더버빌 회랑이라 알려졌고, 또 그 밑에는 커다란 납골당이 있는 건물의 일부인 교회 남쪽의 벽 밑에다 세웠다. 침대 덮개 위쪽에 15세기경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여러 가지 색체로 장식한 유리창이 줄지어 있었다. 그것은 더버빌의 창이라 불리는데, 그 유리창의 높은 부분에는 더비필드 집안의 인장과 수정에 새겨 놓은 것과 똑같은 문장이 보였다. 어머니는 침대 둘레에 커튼을 쳐서 훌륭한 천막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아이들을 들여보냈다.
"하는 수 없으니 하룻밤쯤 여기서 지내야겠구나. 하지만 더 찾아보기로 하자. 그리고 애들 먹을 것도 구해 봐. 테스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바엔 신사 양반과의 결혼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우리들이 이렇게 된 바에야."
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어머니는 리자 루와 사내동생을 데리고 교회와 마음을 연결하는 좁은 길을 따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오는 남자를 보았다.
"아, 마침 찾고 있던 중입니다."
말을 몰아 앞으로 다가오면서 알렉이 말했다.
"이건 정말, 역사적인 땅에서 가족끼리 모임 셈이군. 테스는 어디 있습니까?"
하고 그가 물었다. 테스 어머니는 알렉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뚝뚝하게 교회 있는 곳을 가리키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어갔다. 그는 방금 들은 얘기지만, 방을 얻지 못했을 경우엔 다시 뵙겠다는 말을 던지고 가 버렸다. 더버빌은 여관으로 돌아갔다가 잠시 후에 다시 나왔다. 그 동안 테스는 동생들과 함께 침대 안에 남아서 그들과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으나,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달랠 명분도 없어지자 저녁놀이 물들기 시작한 교회 근처를 거닐었다. 교회의 문은 마침 열려 있어서 태어난 후 처음으로 교회 안에 들어가 보았다. 침대를 마련해 놓고 위쪽 창문 안에는 몇 백 년에 걸친 조상들의 무덤이 있었다. 무덤은 각각 천정이 덮여 있어 제단 모양으로 만들어진 평범한 것이었다. 놋쇠 비명은 닳아서 없어지고 파손됐으며, 못이 빠진 커다란 못 구멍은 사암 절벽에 있는 족제비 구멍처럼 남아 있었다. 그녀의 가문이 사회적으로 소멸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일들을 숱하게 보아왔지만, 이곳의 황폐한 모습만큼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는 까만 돌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Ostium sepulchri antiquae familiae D'Urberville
(더버빌 집안 묘지 입구)
테스는 라틴 어를 교회의 추기경처럼 읽지는 못하지만 이것이 조상들 묘지의 문이고, 또 아버지가 술잔을 놓고 항상 흥얼거리던 저 건강한 기사들이 이 안에 잠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각에 잠긴 그녀가 돌아갈 양으로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제단 모양의 무덤 앞을 지날 때 그 위에 모로 누운 사람을 발견했다. 교회 안이 어두웠으므로 그녀는 미처 깨닫지 못했고, 그 모습이 움직인다는 섬찟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녀가 좀 더 앞으로 다가간 순간, 그것이 살아 있는 인간임을 알았다. 여태껏 자기 혼자만 있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떨린 데다, 그것이 바로 더버빌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자 충격이 심했던 그녀는 거의 기절할 것같이 주저앉았다. 그는 뚜거운 돌바닥에서 껑충 뛰어내려 그녀를 붙들어 주었다.
"나는 당신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지."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명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저 위에 올라간 거요. 우리 발밑에 있는 조상들과 처음으로 상면한다는 것인가? 그럼 잘 들어 봐요."
그가 발꿈치로 힘껏 찼다. 그러자 발밑에서 속이 텅 빈 듯한 소리가 울려왔다.
"조상들이 조금 놀라셨겠는걸. 분명히."
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나를 조상 중 누군가의 단순한 재제품으로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어. 세상은 자꾸만 바뀌게 마련이오. 지금은 가짜인 더버빌의 조그만 손가락 하나가 이 밑에 있는 조상들의 손가락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훨씬 당신을 위할 수 있소. 자 나에게 명령하시오. 무얼 해 드릴까요?"
"가 주세요."
하고 그녀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가서 어머니를 찾아봐야겠소."
하고 짧게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 옆을 지나면서 다시 속삭였다.
"알아둬요. 머지않아 당신도 내게 친절해질 거요."
그가 돌아간 다음, 그녀는 납골당 입구 위에 몸을 구부린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왜 이 문 바깥에 있어야 하나."
한편, 마리안과 이즈 휴에트는 그 농부의 이삿짐과 함께 가나안 의 농장-오늘 아침에 막 떠난 다른 사람들로선 이집트 의 농장이었던-을 향해 마차를 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가씨들은 목적지에 대한 생각에만 골몰하지는 않았다. 그녀들의 얘기는 에인젤 클레어와 테스, 그리고 테스를 끈덕지게 따라다니는 남자에 대해서 주고받았다. 그녀들은 그 남자가 그녀의 과거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소문을 듣고, 추측할 뿐이었다.
"테스 말야, 그 남자를 전혀 몰랐던 건 아닌 모양이지?"
마리안이 말했다.
"그 남자가 옛날에 그 애를 손에 넣었던 일이 있다면, 문제는 아주 달라질 거야. 만약 그 남자가 다시 데려간다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된단 말이야. 우리한테 클레어 씨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니? 이봐 이즈, 그이를 테스에게 빼앗긴 것이 안타깝다고 이 상태를 내버려둘 순 없잖니? 테스가 고생하고 있다는 것과, 또 어떤 남자가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는지 만약 클레어가 알기만 한다면 그녀를 보살피려고 돌아올지도 몰라."
"어떻게 알릴 방법이 없을까?"
그녀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그 일을 생각했으나,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자 새로운 농장에서 자리 잡는 일에 몰려 살림을 꾸미는 데에만 정신이 쏠렸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고 자리가 잡혀 갈 즈음, 테스의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지만, 머지않아 클레어가 돌아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 그녀들은 아직도 가슴 설렘을 느꼈다. 그러나 테스에게 부끄러운 짓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리안은 이즈와 함께 값싼 잉크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래서 두 아가씨는 머리를 맞댄 채 상의해서 짤막한 몇 줄의 글을 적었다.
"존경하는 선생님.
선생님의 부인께서 선생님을 사랑하는 만큼 선생님께서도 부인을 사랑하신다면 부디 부인을 돌봐 주세요. 왜냐하면 부인은 지금 친구의 탈을 쓴 자에 의해 괴로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요 선생님, 지금 부인 곁에는 있어서는 안 될 자가 있답니다. 여자라는 것은 힘에 겨운 시련을 당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방울도 쉴 새 없이 떨어지면 돌이라도, 아니 그보다 더한 금강석도 구멍이 뚫리니까요.
행복을 비는 두 친구 올림"
에인젤 클레어 앞으로 쓴 편지를, 에인젤과 관계가 있다고 들은 유일한 주소인 에민스터의 목사관으로 부쳤다. 이 일은 있은 후 그녀들은 자신들이 보여 준 행동에 아주 흡족해서 흥분을 누르지 못해 노래를 부르기도, 또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제7부 끝없는 사랑
53
에민스터 목사관에 짙은 황혼이 깃들고 있었다. 목사의 서재에서는 여느 때처럼 두 개의 촛불의 갓 아래 밝혀져 있었다. 그러나 목사는 그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목사는 이따금 들어와서 점점 포근해져 가는 봄기운에 알맞게 난롯불을 쑤셔 일구어 놓다가는 다시 나가곤 했다. 목사는 현관에서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하고 응접실로 가서 서성거리기도 했다. 현관은 서쪽을 향하고 있어 집안은 이미 어둠이 깃들었지만, 문 밖은 아직 사물을 분간할 만큼 밝은 빛을 남기고 있었다. 여태까지 응접실에 앉아 있던 목사 부인은 뒤를 따라 현관으로 나왔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어."
하고 목사가 말했다.
"기차가 제 시간에 닿는다 하더라도 6시까지는 초크 뉴턴에 도착하지 못할 거요. 거기서부터는 10마일이나 되는 시골길을, 그중에서도 8마일은 클리머크 레인 고갯길을 지나야 하니, 우리 집 늙은 말로는 그렇게 빨리 오지는 못할 거요."
"하지만 그 말이 우리들을 태우고 한 시간에 달린 일도 있지요."
"옛날 얘기지."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두런거리며 다만 기다릴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지루한 시간을 잊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골목길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리더니, 조그만 망아지가 끄는 마차가 울타리 밖에 나타났다. 한 사람이 마차에서 내렸으니 망정이지, 만약에 길에서 지나쳤다면 실제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목사 부인은 캄캄한 복도를 따라 현관으로 달려 나가고, 목사는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 나왔다. 이제 막 문에 들어서려는 사나이는 현관에 서 있는 두 사람의 근심스런 얼굴이 기우는 마지막 햇살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안경에 반사하는 황혼 빛을 보았다. 그러나 목사 부부는 햇빛을 등지고 서 있는 그의 모습만을 볼 뿐이었다.
"오오, 내 아들, 드디어 돌아와 주었구나."
목사 부인이 소리쳤다. 그때 부인은 그의 옷에 묻은 먼지를 개의치 않듯이, 오랫동안 헤어져 있게 한 이단자의 허물도 상관하지 않았다. 실제로 진리에 가장 충실한 신봉자 가운데서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큼 깊이 하느님의 약속과 위협을 믿는 여자가 있을 것인가. 또, 자신의 신앙과 자식의 행복을 비교할 경우, 그 신앙을 아낌없이 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촛불이 밝혀져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부인은 이내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오오, 에인젤이 아니야. 내 아들이 아니야. 집을 떠날 때의 에인젤이 아니에요."
부인은 그의 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한 슬픈 투로 소리쳤다. 그의 아버지도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국에서 생긴 짓궂은 사건에 대한 반발로 무작정 달려간 낯선 땅의 기후 속에서 경험한 온갖 고초와 풍상의 부모를 놀라게 할 만큼 그의 모습을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얼굴은 마치 해골 같아서, 거의 망령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마치 이탈리아의 화가 크리벨리가 그린 죽은 그리스도의 모습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움푹 파인 눈은 병적인 빛을 띠었고, 눈빛은 생기를 잃고 있었다. 그의 늙은 조상들의 형편없이 여윈 주름투성이의 모습이 20년이나 빨리 그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저는 그쪽에서 병을 잃었지요. 이젠 다 나은 걸요."
에인젤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양쪽 다리는 지금이라도 자지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급히 주저앉았다. 그것은 그날의 지구한 여행과 집에 도착한 흥분 때문에 생긴 대수롭지 않은 현기증에 지나지 않았다.
"요즈음 제게 온 편지는 없어요?"
하고 그는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주신 편지는 내륙에 가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지체된 후에, 그것도 정말 우연한 기회에 받았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좀 더 일찍 돌아왔을 거예요."
"그건 네 아내한테서 온 것 같은데?"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 온 편지가 한 통 있었으나 에인젤이 곧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에게 보내지 않고 있었다. 에인젤은 부모님의 건네주는 편지를 재빨리 뜯어 봤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급히 쓴 편지 속에 나타난 테스의 감정을 그녀의 필적에서 직접 느낀, 그의 마음은 적잖이 어지러웠다.
"오오, 에인젤. 당신을 왜 이다지도 저를 학대하시나요. 에인젤. 저는 그런 보복을 받을 만큼 나쁜 짓을 하지 않았어요. 모든 일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당신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저는 결코 당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제가 당신을 욕되게 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이토록 저를 괴롭히시나요? 당신은 너무나 가혹해요. 정말 가혹하세요. 저는 이제 될 수 있는 대로 당신을 잊도록 노력하겠어요. 당신이 저에게 내리신 판단은 모두 합당치 못해요. T로부터"
"사실이야."
하고 편지를 집어 던지며 에인젤이 말했다.
"아마 나하곤 절대로 화해하지 않을 거야."
"얘야, 기껏 흙에서 태어난 여자 때문에 근심해선 안 돼."
하고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흙에서 난 여자라고요. 네, 우리들은 모두 흙에서 태어났죠. 어머니가 말씀하신 뜻과 같은 여자라면 좋겠습니다만, 이제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농촌 생활을 하고, 흙에서 태어난 아들이라 불리는 많은 시골 사람들처럼 가장 오래된 노르만 가문에 직계 후손입니다."
그는 곧 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은 너무 몸이 불편해 자기 방에서 꼼짝도 않고 이것저것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테스를 어려운 환경에 내팽개쳐 두었으므로 적도 남쪽에서 애정이 듬뿍 담긴 그녀의 편지를 받았을 때는 용서할 마음만 생기면 언제든지 서둘러 그녀에게 돌아가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돌아와 보니 생각하던 것처럼 쉽게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정열적인 성격이어서, 지금 이 편지는 자기가 지체하는 바람에 그녀의 마음이 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내용이었다. 지나치도록 당연한 변화를 슬픈 일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친정 부모 앞에서 예고도 없이 그녀를 만나는 것이 과연 현명한지 생각해 봤다. 별거 생활의 마지막 몇 주일 동안에 그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극도의 혐오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면, 갑작스런 대면은 씁쓸하기만 할 것 같은 불길한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클레어는 말로트 마을에 편지를 보내 자기가 돌아온 사실과, 그리고 영국을 떠날 때 약속한 대로 아직도 친정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리고, 테스와 그 가족에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에인젤은 그제서야 여러 소식을 묻는 편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1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더비필드 부인한테서 짤막한 답장이 왔다. 그 편지는 뜻밖에도 말로트에서 부친 게 아니었고, 주소조차 없이 에인젤의 궁금한 마음은 더해가기만 했다.
"나는 지금 테스가 집에 없다는 것을 글로 전해 주겠네. 언제 돌아올지 확실한 날짜도 모르네. 그러나 그 애가 돌아오는 즉시 알려주겠네. 그 애가 임시로 있는 곳을 나로선 알릴 수가 없네. 그리고 말로트 마을을 떠난 지가 꽤 오래되었다네. J.더비필드"
어떻든 테스가 무사히 잘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므로, 그녀의 어머니가 굳이 거처를 밝히지 않는다 해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가족들까지 에인젤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부인의 편지는 머지않아 테스가 돌아올 것이라고 했으므로 돌아왔다고 소식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이상 다른 길을 더 바랄 자격도 없었다. 에인젤이란 사람이야말로 다른 대상을 찾으면 변하는 사람이었다.
고국을 떠나 있는 동안 그는 기구한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그는 명목상의 코넬리아 같은 여인한테서 실질상의 포스티나를 봤고, 피리니 같은 육체적인 여인에게서 정신적인 여인 루크레티아를 발견했다. 간음하다 들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여인, 그리고 왕후가 된 우리야의 아내를 생각했다. 에인젤은 자신이 왜 테스를 의지에 대해 실질적으로 판단치 못했으며, 어째서 그녀의 행위만을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던가 하고 자책해 보기도 했다.
약속했던 더비필드 부인의 두 번째 편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또 좀 더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아버지 집에 머무는 동안 다시 2, 3일이 지났다. 기운은 차차 회복이 되었으나, 그녀의 어머니한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브라질에 있을 때 플린트콤 애쉬에서 테스가 보낸 편지를 찾아 다시 읽어 봤다. 그 사연은 처음 읽을 때 못지않게 그의 가슴을 울렸다.
"저는 괴로운 심정을 당신께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까. 만약 당신이 곧 돌아오시든지, 아니면 당신 곁으로 오라고 하시지 않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어요. 제가 자격이 없는 여자라 할지라도 제발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세요. 돌아와 주신다면 당신 품에 안겨 죽어도 좋아요. 당신께서 저의 잘못을 용서하신다면 만족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어요. 속히 돌아가겠소 라는 한마디만 보내 주신다면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겠어요. 에인젤. 생각해 보세요. 언제까지도 당신을 보지 못한다면 저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는가를. 아아, 만약 끊임없이 겪는 그러한 저의 괴로움을 하루에 잠깐만이라도 당신이 느끼게 할 수 있다면, 당신도 외로운 아내의 심정을 알게 될 거예요. 당신의 아내로 함께 살 수 없다면 당신의 종으로라도 만족하겠어요. 그리되면 당신 곁에 있을 수 있고, 당신을 바라볼 수 있으며, 당신을 완전한 저의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천당에서나 땅 위에서나 지옥에서라도 당신을 보고 깊은 것이 단 하나의 행복입니다. 그리운 당신이여, 돌아오세요. 제 곁으로 돌아와 주세요. 그래서 저를 위협하는 것에서 구해 주세요."
이 편지를 일고 나자 최근에 보낸 그녀의 편지가 자신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혹독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 곧 출발하여 그녀를 찾기로 결심했다. 에인젤은 자기가 없는 동안 테스가 돈을 청구한 일이 없는지 아버지한테 물었다. 아버지는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에인젤은 비로소 테스의 자존심이 그런 행동을 억제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퍽이나 궁핍한 생활을 겪었으리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의 얘기를 들은 부모님은 그제서야 그들의 별거 원인을 알게 되었다. 신앙이 두텁고, 특히 타락한 인간들에게 깊은 동정을 보내기 때문에 그녀의 유서 깊은 혈통이나 소박한 성품, 또 빈곤 같은 것에 동정심이 우러나진 않았지만, 목사 부부의 마음은 그녀의 죄에 대해서 진심으로 동정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서 몇 가지 여행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최근에 마리안과 이즈에게서 온 솔직한 편지에 눈길을 돌렸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편지였다.
"존경하는 선생님
선생님의 부인께서 선생님을 사랑하는 만큼 선생님께서도 부인을 사랑하신다면 부디 부인을 돌봐 주세요.
행복을 비는 두 친구 올림"
편지를 손에 든 에인젤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54
클레어는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사라져 가는 그의 여위 뒷모습을 집안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는 늙은 암말이 집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말을 빌려 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륜마차를 한 대 빌린 에인젤은 말을 모은 동안에도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서너 달 전에 그렇게도 부푼 가슴을 안고 내려왔다가 테스가 깊게 낙심하여 돌아간 언덕길을 향해 지금 에인젤이 마차를 몰며 올라가고 있다. 울타리가 새싹으로 파릇파릇하게 물들어 있었고, 곧게 뻗은 수목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한 자연의 경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두 시간도 채 못 돼서 킹스 힌톡의 영지 남쪽을 돌아 음산하고 쓸쓸한 크로스 인 핸드의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에는 한때의 변덕으로 개심한 알렉이 두 번 다시 테스를 유혹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불길한 돌기둥이 있다. 강둑에는 지난해에 시든 쐐기풀이 줄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그 뿌리에는 올봄의 새싹이 파릇하게 돋고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그는 힌톡 지방의 반대편에 잇단 고지를 지나 오른편으로 꺾어 나아갔다. 언젠가 보낸 편지가 적혀 있던 주소가 바로 그곳이었으므로, 그녀가 어머니가 말하는 테스가 거주지일지도 모른다고 여기면서 플리트콤 애쉬를 향해 달렸다.
상쾌한 석회질의 지역으로 들어섰다. 에인젤은 몰론 그녀를 찾지 못했다. 세례를 받은 테스라는 이름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만 클레어 부인 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일도 없다는 농부와 농장주의 말을 듣고 에인젤은 더욱 낙심했다. 그들이 별거한 동안 테스가 남편 성을 쓰지 않은 게 명백했다. 남편에게 기대지 않겠다는 그녀이 자존심은 에인젤의 아버지에게 돈을 요구하기를 꺼리고, 오히려 고생을 택한(이런 심정을 그는 처음 알겠지만) 사실 못지않게 클레어의 성을 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에인젤이 들은 바에 의하면,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블랙무어 쪽에 있는 고향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이번엔 더비필드 부인을 만나야 될 것 같았다. 말로트에 살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까닭 없이 거처를 밝히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 마을에 가서 그들의 간 곳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테스에겐 거칠게 굴던 농장주가 클레어한테는 고분고분한 태도로 대하면서, 말로트까지 갈 마차와 마부를 빌려 주었다. 에인젤이 타고 온 마차는 하루 한도 내에서 빌린 것이기 때문에 에민스터에 돌려보냈다. 클레어는 농장 주인의 마차를 블랙무어 골짜기 기슭까지만 빌리고 하고 마차를 돌려보냈다. 그날 밤은 여인숙에서 머무른 다음 이튿날 아침 걸어서 그리운 테스의 고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채소밭에나 나무에 푸른빛이 오르기엔 아직 이른 계절이었다. 봄철이라고는 하지만 엷은 녹색 외투를 걸친 겨울에 지나지 않았고, 에인젤이 품은 기대 역시 그처럼 덧없는 희미한 것이었다.
테스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에는 그녀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새로운 거주자들은 여기 살던 가족이 옛날에는 다른 사람들의 과거와 연결된 화려한 시대를 누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뜰에서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이전에 살던 사람들에 비하면 그네들의 과거는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뜰을 거닐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그들 뒤에 있는 희미한 망령이 늘 따라다니는 것도 모르고, 테스가 살던 시절이 지금보다 흥미 있는 사건이 없던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 새조차도 달라진 것이라곤 없지 않느냐는 듯 머리 위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먼저 살던 사람의 이름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는 분별없고 순박한 이 사람들한테 물어서 에인젤은 간신히 존 더비필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부인과 아이들이 킹스베리로 살러 간다고 떠났지만, 계획이 바뀌어 다른 곳에 살고 있다는 데까지 알게 된 클레어는 지긋지긋한 그 집을 뒤돌아보지도 않고 급히 떠나 버렸다.
지금 그가 걷고 있는 길은 맨 처음 들놀이에서 테스를 만났던 무도장 옆이었다. 그 무도장도 그 집만큼 보기 싫었던 그는 급히 교회 묘지 사이를 빠져나왔다. 묘지에는 새 비석들이 여기저기 들어섰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묘비가 있었다. 그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존 더비필드, 정확하게 더비빌. 한때는 유력한 세력을 지닌 기사의 일족으로서 정복왕의 기사 중 한 삶인 페이건 더비빌 경의 찬란한 혈통을 이어 받은 직계 후손을 기념하기 위해. 18XX년 3월 10일 죽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사무엘하>제 1장 19절)"
얼마 후 묘지가 같아 보이는 남자가 클레어를 보고 다가왔다.
"아, 선생님. 그분은 이곳에 묻히는 걸 싫어하고 늘 조상들이 묻힌 킹스베리에 잠들길 바랐습죠."
"그럼, 왜 원대로 해 주지 않았을까요?"
"그거야 돈이 없었기 때문이죠. 기막힌 이야깁니다만, 이런 소문이 퍼지는 걸 바라고 싶진 않습죠만, 저 묘비에도 퍽 거창하게 씌어져 있지만 실은 아직도 돈을 치르지 못했는뎁쇼."
"그런가요, 누가 묘비를 세운 건가요?"
묘지기는 마을에 사는 석공의 이름을 댔다. 그 내용이 사실임을 알고는 클레어는 돈을 치러 주었다. 그는 이사한 사람들을 찾아 다시 발길을 옮겼다. 걷기엔 너무 먼 거리였지만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므로 기차와 마차를 이용하지 않은 채 걸어갔다. 그러나 샤스톤에 이르렀을 때는 길이 나빠 마차를 이용해야 할 것 같았다. 그곳에서 마차로 달려 더비필드 부인이 사는 곳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경이었다. 말로트 마을을 떠나 20마일이 넘는 길을 달린 것이었다. 이 고을은 매우 작은 마을이어서 더비필드 부인의 셋집을 쉽게 찾았다. 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담으로 둘러싸인 뜰이 있는 집으로, 낡아빠진 세간들을 겨우 쌓아 놓고 있었다. 에인젤이 찾아온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부인이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앞에서 에인젤은 함부로 뛰어든 침입자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문 앞으로 나온 부인의 얼굴에 저녁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에인젤이 부인을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테스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부인이 옷차림과 나이에 비해 아직도 젊어 보이는 것과 같은 인상 외에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에인젤은 자기가 테스의 남편이며, 또 찾아온 목적을 알려야 했기 때문에 서투른 설명을 늘어놓았다.
"저는 하루바삐 테스를 만나고 싶은데요."
하고 덧붙였다.
"편지를 다시 하겠다고 한 후 소식이 없소. 그에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소."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소식은 아십니까?"
"난 모르오. 당신이야말로 알아야 할 사람이 아니오?"
하고 그녀는 쏘아붙였다.
"당연히 알아야죠. 지금 어디 가 있죠?"
그녀는 에인젤을 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손을 한쪽 뺨에서 떼지 못한 채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난 그 애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한 것을 몰라. 한때는."
"한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좌우간 지금은 그곳에도 없소."
부인은 사실을 감추려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마침 그때 막내둥이가 살그머니 다가와서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종알거렸다.
"이분이 테스 누나와 결혼한다는 그 신사야?"
"벌써 결혼하신 분이야."
하고 부인이 조그맣게 말했다.
"안에 들어가 있어."
부인이 열심히 무엇인가 숨기려 하는 기색을 눈치 챈 클레어가 물었다.
"테스는 제가 애써 찾아 주기를 바라고 있지 않아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물론."
"기다리는 것 같지 않군요."
"정말 그럴까요?"
"틀림없이, 정말 그럴 거요."
그는 몸을 돌렸으나 테스의 다정한 편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아닙니다, 틀림없이 저를 기다릴 겁니다. 제가 테스를 더 잘 압니다."
그는 흥분해서 대꾸했다.
"과연 그럴는지도 모르죠. 사실 나는 여태껏 그 애의 속을 잘 모르니까."
"이 불행하고 비참함 사나이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십시오. 제발 그녀의 주소를 가르쳐 주십시오."
테스의 어머니는 불안스럽게 손바닥으로 볼을 문지르면서 괴로워하는 에인젤을 보더니, 기어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애는 샌드본에 있어요."
"네? 샌드본의 어디쯤인가요? 그곳은 큰 도시로 변했다던데요."
더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샌드본이란 말만 들었으니까요. 그곳은 나도 가 본 일이 없답니다."
에인젤은 부인이 숨김없이 얘기한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 이상 물으려 하지 않았다.
"혹시 뭐 불편하신 건 없습니까?"
하고 그는 친절하게 물었다.
"아뇨, 별로 아쉬운 것 없이 살아가요."
클레어는 집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돌아섰다. 3마일 가량 더 가면 정거장이 있으므로, 그는 마차 삯을 지불하여 마차를 돌려보내곤 그곳까지 걸어갔다.
에인젤은 샌드본으로 가는 막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55
에인젤은 밤 11시가 지나서야 여관에 숙소를 정할 수 있었다. 곧바로 전보로 이곳 주소를 아버지에게 알리고는 샌드본 거리를 산책했다. 수소문하러 다니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으므로 테스를 어쩔 수 없이 내일 아침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뭔가 불안하여 잠자리에 그대로 들 수가 없었다.
동쪽과 서쪽의 기차 정거장을 비롯해서 선창과 소나무 숲 산책길, 옥살, 정원 등이 갖추어져 있는 이 새로운 해수욕장은 마술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순식간에 만든 선경에 먼지를 일으켜 놓은 것 같았다. 광활한 이그돈 황야의 동쪽 끝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만, 태고의 아름다움이 아직 남아 있는 이 지역이 변두리에 이렇게 찬란하고 새로운 유흥도시가 불쑥 솟아난 것이었다.
교외에서 1마일만 나가도 땅의 기복 하나하나가 원시 시대의 모습 아닌 것이 없고, 길이란 길은 모두 고대 영국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한줌의 흙이라도 로마의 황제가 지배하던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밭으로 일구어진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이질적인 요소가 저 예언자의 표주박처럼 갑자기 이곳에 생겨났고, 그래서 자연스레 테스를 끌어들인 것이다.
한밤중의 가로등을 의지 삼아 에인젤은 원시 세계 속에 있는 이 신세계의 꾸불꾸불한 거리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수목 사이에 별들을 배경으로 해서 이 거리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우아한 주택의 놓은 지붕이나 굴뚝, 노대, 그리고 탑 등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영국 해협에 면한 지중해식 유원지로써, 한 채 한 채가 따로 떨어진 별장으로 이룩된 도시였다. 그리고 지금 어둠 속에서 보는 이 거리는 실제 이상으로 훨씬 웅장해 보였다. 바다는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파도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게 어렴풋이 들려왔다. 마치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처럼 연약해서 착각할 정도였다.
모든 부와 유행이 물결치는 이 세계에서, 더없이 순수한 그의 젊은 아내인 테스는 과연 어디에 발을 붙일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파 왔다. 이곳 어디에 젖을 짤 만한 농장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리고 경장할 밭도 없다는 것이 확실했다. 그녀는 반드시 이 많은 저택들 가운데 어느 집에 고용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집의 창문과 하나씩 꺼져 가는 불빛을 일일이 살피며 정처 없이 걸으면서 어느 집에 그녀가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었다.
몇 시간을 서성이다가 12시가 지나서야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는 불을 끄기 전에 정역적인 테스의 편지를 다시 읽어 봤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이토록 가까이 와 있으면서 한없이 떨어져 있는 기분을 느껴야 하다니. 그는 커튼을 여닫으며 건너편에 있는 저택들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뛰어 나올 것 같은 환상에 빠져 버렸다.
에인젤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난 그는 밖으로 나와 중앙 우체국이 있는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체국 문 앞에서 그는 아침 우편물을 배달하러 나오는 우편집배원을 만났다.
"클레어 부인의 주소를 아십니까?"
하고 에인젤이 물었다. 집배원은 고개를 저었다. 순간, 클레어는 테스가 아직 결혼하기 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다시 물었다.
"그러면 더비필드 양의 주소는?"
"더비필드?"
집배원에게는 이 역시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이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수많은 손님들이 드나드니까요. 주소를 모르면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마침 그때 다른 집배원 한 사람이 급히 나왔으므로 에인젤은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여 물어 보았다.
"더비필드라는 이름은 모릅니다만, 백로정에 더비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고 둘째 번 집배원이 말했다.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클레어가 소리쳤다. 그녀가 원래의 성을 되찾은 게 기뻤다.
"백로정이란 어떤 곳입니까?"
아주 멋진 하숙집이지요. 이것은 어느 집이나 모두 하숙집이니까요.
집배원으로부터 그 집으로 가는 설명을 듣자마자 걸음을 재촉했다. 에인젤은 우유 배달원과 동시에 그 집에 닿았다. 백로정은 보통 하숙집과 같은 구조처럼 보였지만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하숙집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고즈넉했다. 만약 그의 추측대로 테스가 가엾게도 이 집에 하녀로 고용되어 있다면, 우유 배달부가 왔으므로 그녀가 뒷문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한 그는 잠시 머뭇거렷다. 다시 생각을 가다듬은 그는 현관으로 돌아가서 벨을 눌렀다. 시간이 너무 일렀으므로 그 집 안주인인 듯한 여자가 직접 문을 열었다. 테레사 더버빌이나, 혹은 더비필드라는 여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더버빌 부인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테스가 클레어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이 좀 서운했지만, 그래도 그는 몹시 기뻤다.
"죄송합니다만, 친척 되는 사람이 꼭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너무 일러서. 성함은 누구라고 전할까요?"
"에인젤이라 합니다."
"에인젤 씨라고요."
"아뇨, 그냥 에인젤입니다. 이건 저의 세례명이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알 겁니다."
"일어나셨는지 가보고 오겠어요."
그는 현관 앞 방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봄의 커튼을 통해 좁은 잔디밭과 관상목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처지가 걱정한 것처럼 곤란한 것은 아님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생활을 하기 위해서 아마 물려 준 보석을 팔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다. 에인젤은 조금도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에인젤은 얼마 후 계단을 밝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의 심장이 심하게 쿵쿵거려 겨우 서 있을 정도였다. 만약 이렇게 변해 버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또 지금이 모습을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망설여졌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 테스가 나타났다. 그가 상상하고 있던 그녀와는 아주 딴판인, 정말 어리둥절할 정도로 변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타고난 아름다움은 그대로 있다 하더라도 옷차림 때문에 한층 더 뚜렷하게 눈에 띄었다. 상중임을 표시하는 색의, 까만 수를 놓은 연한 잿빛의 캐시미어 화장복을 느슨하게 걸쳐 입고, 같은 잿빛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묵은 테로 꾸며진 깃 위로 드러나 보였는데, 그것은 아마 서둘러 나온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그는 두 팔을 벌렸으나, 그대로 다시 내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문턱에 우두커니 선 채 달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누런빛을 한 해골 같은 모습으로 변한 에인젤은 자기 자신과 테스와의 외적인 변화를 깨닫고 그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테스."
바싹 타 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그는 말했다.
"당신을 두고 간 나를 용서해 주겠소? 나에게로 와 줄 수 있겠소?"
"너무 늦었어요."
그녀의 음성은 날카롭게 방안에 울렸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당신을 올바르게 생각하지 못했소.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오."
그는 애원하듯 말했다.
"그 이후에, 아니 너무 늦게 나는 깨달았다오. 그립고도 사랑스러운 테스."
"너무 늦었어요, 늦었어요."
심한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한순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초조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에인젤. 오시면 안 돼요. 비키세요."
"그럼 당신이 내가 앓아서 이렇게 되었대서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오? 당신은 이처럼 변덕스런 여자는 아닐 텐데. 난 일부러 당신을 찾아온 거요. 이젠 어머니와 아버지도 당신을 기꺼이 환영할 거요."
"그래요?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늦었어요.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단 말이에요."
그녀는 마치 꿈속에서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는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렸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은 이곳 사정을 모르시나요? 모르신다면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았소."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그녀는 다급한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갑자기 피리 소리 같은 지난날의 애조 어린 음성으로 변해 갔다.
"하지만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애원하는 편지를 썼어요. 그래도 당신을 오시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당신은 이제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고, 또 기다리는 제가 바보 같은 여자라고 늘 말하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저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들한테도 무척 고맙게 해 주었어요. 그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그이는 나를 다시 찾아온 거예요."
클레어는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린 그는 병에 지친 사람처럼 갑자기 풀이 죽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한때 장밋빛을 띠었던 손, 그러나 지금은 한결 부드럽고 화사한 그녀의 손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 사람은 지금 2층에 있어요. 왜냐고요? 당신은 결코 돌아오시지 않을 거라고 나에게 거짓말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 돌아오셨어요. 이 옷도 그가 해 준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어요. 그러니 제발 떠나 주세요. 에인젤, 이제 다시 찾아오지 말아주세요. 네?"
그들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보기에도 애처로울 만큼 덧없는 그들의 심정을 뚜렷이 엿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현실에서 자기들과 감싸 줄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 같았다.
"아아, 내 잘못이었소."
클레어가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의 말은 아무 반응도 일으키지 못하는 침묵과 같았다. 나중에 가서야 뚜렷하게 느낀 것이지만, 그는 어떤 한 가지 일을 어렴풋이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의 테스가 지금 자기 앞에서 서 있는 육체를 정신적으로 자기의 것이라 인정하지 않고, 다만 물 위에 뜬 송장처럼 살아 있는 의지에서 떨어져 나가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맡겨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몇 순간이 또 흘렀다. 그는 테스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정신력을 집중하고 서 있던 얼굴이 점점 싸늘해지면서 비참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얼마 후 그는 정처 없이 홀로 거리를 걷는 자신을 발견했다.
56
백로정의 여주인이자, 또 모든 아담한 가구의 소유자이기도 한 브룩스부인은 남달리 호기심이 강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가엾게도 너무나 오랜 세월을 두고 이득과 손실이라는 숫자의 마귀에 사로잡힌 탓으로 물질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으므로 손님들의 호주머니 속을 떠난 순수한 호기심은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하숙비를 미루지 않고 잘 내는 더비빌 부부라고 하는 하숙인에게 에인젤 클레어가 찾아온 것은 유난히 이른 시간이었다. 그의 태도로 미루어 영업에 관계가 없는 불필요한 방문으로 일축하면서도 여자다운 호기심으로 무엇인가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브룩스 부인은 테스가 식당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턱에서 에인젤과 주고받고 있는 운명적인 얘기를 간간이 단편적으로 엿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테스가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과 에인젤이 나가면서 닫는 현관문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이층의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테스가 자기 방에 들어간 것을 알았다. 브룩스 부인은 발소리를 죽여 이층으로 올라가 응접실 문 앞에 섰다. 이 방의 구조는 흔히 있는 형식대로 두 짝의 문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침실 바로 앞에 있는 응접실이었다. 백로정에는 가장 좋은 방이 있는 이층은 더버빌 부부가 매주 세를 내고 들어 있었다. 침실은 조용했으나 응접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맨 처음에 그녀가 들은 것은 익시온의 수레바퀴에 묶인 인간의 나직한 신음 소리와도 같은 외마디 소리가 쉴 새 없이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오오, 오오- 오오."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무거운 듯한 한숨 소리가 신음 소리와 함께 가늘게 들렸다. 안주인은 열쇠 구멍으로 방안으로 들려다봤다. 방안의 아주 일부분만 보였으나, 거기에는 이미 조반을 차려 놓은 식탁의 한 귀퉁이와 그 옆에 있는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의자 앞에 테스가 무릎을 끊은 채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있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화장복의 옷깃과 수놓은 잠옷자락이 방바닥에 길게 드리워졌으며, 슬리퍼가 벗겨져 나간 맨발은 양탄자 위로 삐죽 나와 있었다. 분명하지 않은 절망적인 넋두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옆방 침실에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왜 그래?"
그녀는 대답도 않고 울부짖었다. 넋이 나간 독백 같기도 했고, 장송곡 같은 가락으로 무어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브룩스 부인에게는 띄엄띄엄 들릴 뿐이었다.
"내 그리운 남편이 돌아왔어. 그런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당신은 진절머리 나도록 쉬지 않고 악착스럽게 나를 졸라 이렇게 만들었어요. 동생들과 어머니가 가엾어서 결국 난 무너지고 말았어요. 당신은 내 남편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을 기다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했죠. 끝내 당신 말을 곧이 듣고 당신한테 모든 것을 맡겨 버렸어요. 그런데 그이는 돌아왔어요. 그런데 이제 또다시 그는 가 버렸단 말예요. 이번에야말로 나는 영원히 그이를 잃어버렸어요. 이제 그이는 조금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나를 미워할 거예요. 그렇고말고요. 또다시 그이를 잃어버린 건 바로 당신 때문이에요."
테스는 오열을 참지 못했다.
의자 위에 엎드린 채 몸부림치는 테스의 얼굴이 문 쪽을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의 빛이 뚜렷했고, 깨물고 있던 입술에선 피가 흘렀다. 눈을 감은 그녀의 길다란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브룩스는 이런 테스의 고뇌에 찬 표정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이는 죽을 것 같아요. 마치 죽어 가는 사람 같았어요. 내 죄가 그이를 죽이고, 나를 죽이지는 않았어요. 아, 당신은 내 일생을 산산이 망쳐 놨어. 두 번 다시 이런 꼴을 만들지 말아 달라고 그토록 애원했는데도 당신은 나를 또 망쳐 놨어. 진실한 내 남편은 이제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오오, 하느님. 저는 이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정말로 못 참겠어요."
이번엔 좀 더 격한 넋두리가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뒤이어 날카로운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그러자 갑자기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벌떡 일어난 것이었다. 브룩스 부인은 넋두리하던 그녀가 문으로 달려 나오는 줄 알고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응접실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엿듣는 건 안전치 못하다고 생각한 브룩스는 아래층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귀를 기울였으나 천정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먹다 만 아침 식사를 마치려고 부엌으로 갔다. 조반상을 물리라는 초인종이 울리기를 기다리면서 바느질한 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직접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볼 샘이었다. 그때 누군가 거니는 듯 마룻바닥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계단 난간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로 나서는 테스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깃털이 모자와 베일을 드리운 것만 빼면 그녀의 복장은 이곳에 올 때와 같이 부유하고 젊은 귀부인다운 화려한 나들이 차림이었다.
일시적이든, 어떤 형식이든 간에 그녀가 나가면서 남편과 주고받은 인사말은 조금도 듣지 못했다. 그들이 다투었다고 하더라도 더비빌은 아직 자고 있을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는 늦잠 자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브룩스는 혼자만 쓰는 뒷방으로 들어가서 바느질을 계속했다. 외출한 테스도 돌아오지 않고, 또 그 남편도 벨을 누르지 않았다. 브룩스는 궁금해 하며 아침 일찍 찾아온 남자와 이층의 부부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의자 등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러자니 그녀의 눈은 우연히 천정을 바라보게 됐다. 순간 여태껏 보지 못하던 그 흰 천정 표면이 한가운데에 있는 한 점에 눈이 멎었다. 그녀가 처음 봤을 때는 동그랗게 과자만 하던 그 얼룩이 순식간에 그녀이 손바닥만큼 번졌고, 그것이 붉은 빛의 얼룩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한가운데가 진홍으로 물든 장방형의 하얀 천정이 마치 한 장의 커다란 카드의 하트 에이스장 같았다.
브룩스 부인은 묘한 불안감에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손가락으로 천정에 묻어 있는 얼룩을 만져 봤다. 그것은 축축하게 젖어 있는데, 핏자국인 것 같았다. 테이블에서 내려온 그녀는 방을 나와 응접실 뒤쪽 침실인 위층 방으로 가 볼 양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겁이 난 그녀는 아무래도 손잡이를 돌릴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죽은 듯 고요한 방안의 침묵. 다만 어떤 규칙적인 소리가 그 침묵을 깨뜨릴 뿐이었다.
"뚝, 뚝, 뚝"
브룩스 부인은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웃 별장에 고용되어 있는 아는 남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층에 든 하숙인 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으니 함께 올라가 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 남자는 부인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문을 열고 비켜서면서 남자를 들여보낸 다음 그녀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은 비어 있었다. 커피, 계란, 그리고 햄 등 영양 있는 아침 식사가 그녀가 가져다 놓은 그대로 식탁 위에 있었지만, 다만 고기를 베는 나이프만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녀는 문을 지나서 옆방으로 들어가 보도록 남자에게 부탁했다. 그는 문을 열고 두어 걸음 안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굳어 버린 얼굴을 하고 되돌아 나왔다.
"아이구 맙소사, 큰일 났어. 침대에 남자가 죽어 있어요. 칼에 찔린 것 같은데. 피가 온통 마룻바닥에 흘러 있어."
사건은 즉시 경찰에 알려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던 집은 여러 사람들로 발칵 뒤집혔다. 그중에는 외과 의사도 끼어 있었다. 상처는 작았지만 칼끝이 희생자의 심장을 찌른 모양이었다. 반듯이 누운 시체는 단 한 번에 찔린 즉시 숨이 멎은 듯 창백한 얼굴로 움직이지 않고 죽어 있었다. 그로부터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이곳에 머물던 신사가 침대에서 칼에 찔러 죽었다는 소문이 이 이름난 해수욕장의 온 거리와 별장마다 퍼져 나갔다.
57
한편, 에인젤 클레어는 먼저 왔던 길을 돌아서 기계적으로 여관에 들어가자 멍청하게 허공을 바라보면서 아침상 옆에 앉았다.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먹던 그는 갑자기 계산서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숙박비를 치른 다음, 그가 가져왔던 유일한 소지품인 조그만 가방을 들고 그곳을 나왔다. 마침 출발하려 할 때 한 통의 전보가 배달됐다. 어머니한테서 온 그 전보에는 주소를 알아서 고맙다는 것과 형 카드버트가 머시 찬트에게 구혼하여 승낙을 받았다는 간단한 사연이었다.
클레어는 전보를 꾸겨 버리고는 정거장으로 통하는 길로 걸어갔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앞으로 한 시간 정도 안에 출발하는 기치가 없었다. 그는 앉아서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15분쯤 지나자 더 이상 그대로 기다릴 수는 없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하고 감각마저 마비된 그에게 별달리 급히 서둘러야 할 일은 없었지만, 그런 쓰디쓴 아픔을 안겨 준 이 고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 정거장까지 걸어가 그곳에서 기차를 타기로 작정한 그는 발길을 재촉했다. 그가 걸어가는 넓게 트인 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은 분지로 변하면서 그 끝에서 끝까지 길이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 골짜기를 가로질러 서쪽 바탕 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때 잠깐 쉬려고 걸음을 멈춘 그는 무심코 뒤를 돌아다보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으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 같았다. 테이프처럼 보이던 한 줄기 길은 눈길이 미치는 한 뒤쪽으로 뻗쳐 사라졌다. 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움직이는 한 개의 점이 까마득히 보이는 하얀 공간에 점점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뛰어오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클레어는 누군가가 자기를 쫓아오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비탈길을 내려오는 모습은 여자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테스가 뒤쫓아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훨씬 가까이 다가왔을 때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더욱이 달라진 옷차림을 한 그녀를 테스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에인젤은 뒤늦게야 그녀가 테스임을 알게 되었다.
"제가 정거장에 거의 다다랐을 때 당신이 거기서 나오시는 걸 봤어요. 그래서 줄곧 뒤쫓아 왔어요."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의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쥔 채 함께 걸어갔다. 길 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큰길에서 벗어나 전나무가 줄 지은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바람을 맞아 괴로운 듯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갔을 때 비로소 에인젤은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에인젤."
마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말했다.
"무엇 때문에 당신 뒤를 따라왔는지 아시겠어요? 그 남자를 죽였어요. 그 사실을 알리러 온 거예요."
서둘러 내뱉은 그녀의 얼굴에는 애처롭도록 쓸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무슨 얘기요?"
심상치 않은 그녀의 태도로 보아 일시적인 정신 착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전 기어이 일을 저질렀어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도, 또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래야만 했어요. 오래전부터 항상 생각해 왔었어요. 철없고 어린 나를 유혹했고, 또 나를 통해서 당신까지 괴롭힌 그를 언젠가는 죽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어서 우리를 파멸시켰지만, 그 따위 짓을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없어요. 에인젤, 당신을 사랑한 것만큼 그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세요? 난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아직도 모르세요? 정말 믿지 못하는 거예요? 당신이 돌아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토록 당신을 사랑했는데 당신을 떠나 버렸어요. 저는 그런 당신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당신을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에인젤, 이제 그 사람을 죽여 버렸으니, 당신에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주시겠지요? 난 그를 죽였어요. 줄곧 달려오면서 이제는 당신이 반드시 용서해 주시리라 생각했어요. 그런 방법으로라도 당신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던 거예요. 전 이제 당신 없이는 잠시도 살지 못해요. 당신이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당신은 몰라요. 여보, 말해 주세요.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이제 그 사람을 죽였으니까요."
"사랑해, 테스. 아, 정말 사랑하고말고, 이제 모든 것이 옛날을 되돌아간 거야."
그녀를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주면서 에인젤이 말했다.
"그러나 그 남자를 죽였다는 건 무슨 말이야?"
"죽여 버렸어요."
테스는 꿈꾸듯 중얼거렸다.
"뭐, 그의 몸을? 그래 그 사람이 죽었단 말이오?"
"그럼요. 그 사람은 당신 때문에 우는 나를 보고 욕하며 당신한테까지 욕을 퍼부었어요. 그래서 죽여 버렸어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전에도 당신 때문에 나를 괴롭힌 적이 있어요. 우리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그를 죽이고 당신을 쫓아온 거예요."
잔뜩 긴장한 채 설명을 늘어놓은 테스의 얘기를 듣고 있던 클레어는 그녀를 안정시키려고 애썼다. 테스의 범행에 대한 에인젤의 두려움은 그에 대한 그녀의 강한 애정과, 또 그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 듯한 비장한 애정을 깨달은 놀라움으로 범벅이 되었다.
자신이 저지른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알지 못하는 그녀는 오히려 모든 구속에서 벗어난 듯 편안한 얼굴이었다. 자기 어깨에 기대어 행복감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고, 에인젤은 더버빌은 가문의 핏줄엔 무슨 잘못된 힘이 있기에 이런 탈선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마차와 살인에 얽힌 전설이 문득 그의 마음을 스쳤다. 어지럽고 흥분된 머릿속을 가다듬어 상상력이 미치는 데까지 생각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고, 일시적인 환상이라면 서글픈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든 여기 버림받은 아내, 에인젤이 반드시 보호자가 돼 줄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매달려서, 오직 사랑만을 생각하는 여자가 있는 것이다. 그가 보호자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테스의 마음을 에인젤은 잘 알았다.
그녀의 사랑은 클레어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는 핏기 없는 입술로 테스에게 끝없는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손을 잡고 호소하듯 말했다.
"난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겠소. 여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당신을 지켜 주겠소. 당신이 어떤 일을 했든 간에."
그들은 계속 나무 밑을 걸어가고 있었다. 테스는 이따금 에인젤은 쳐다봤다. 고생으로 얼굴이 많이 야위어 옛날 같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는 아직도 그녀의 안티너스요, 또한 아폴로였다. 병으로 수척해진 그의 얼굴이지만 사랑이 넘치는 그녀의 눈으로 볼 때 그는 옛날과 다름없이 신선한 아침처럼 아름다웠다.
클레어는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에서 처음 생각한 대로 다음 정거장으로 가지 않고, 이 근방 몇 마일에 걸쳐 빽빽하게 들어선 전나무 숲을 향해 깊숙이 들어갔다. 그들은 조금 전 살인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서로를 감싸 안고 마른 전나무 잎이 쌓인 메마른 땅 위를 헤매고 있었다. 이렇게 한참을 가다가 겨우 정신이 든 테스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나직하게 물었다.
"여보, 지금 우리는 어느 목적지라도 있는 건가요?"
"모르겠어. 그런데 왜?"
"그냥요."
"어쨌든 몇 마일만 더 가자고. 그러면 해가 질 테니까. 그때 어디 지낼 곳을 찾아보도록 하지. 아니면 외딴 농가라도 있을 거야. 테스, 잘 걸을 수 있겠어?"
"네, 그럼요. 당신의 팔에 안겨 함께라면 어디까지라도 영원히 걸을 수 있어요."
그곳에서부터 걸음을 재촉해서 큰길을 피해 약간 북쪽으로 향한 인기척 없는 좁은 길을 따라갔다. 그러나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도 재치 있게 도망친다든가 변장한다든가, 또는 어느 곳에 숨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란, 마치 두 어린이의 계획처럼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점심때쯤 되어 길가에 있는 여인숙 가까이에 다다랐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테스는 그와 함께 가려 했으나 에인젤은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반은 숲이고 반은 황무지인 이곳 나무와 덩굴 사이에 기다리도록 그녀를 타일렀다. 그녀의 옷차림은 최신 유행을 따른 것이었고, 들고 있는 상아 손잡이가 달린 양산만 하더라도 그들이 헤매고 온 이 외딴 지방에선 좀처럼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주막에라도 들어갔다간 그녀의 낯선 물건이 남의 눈을 끌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에인젤은 이네 너덧 명 분은 됨직한 음식과 포도주 두 병을 가지고 돌아 왔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하루나 이틀쯤은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마른 나뭇가지 위에 같이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 1시 반쯤 됐을 때 남은 음식을 싸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젠 얼마든지 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내 생각엔 외진 시골 석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곳에서는 얼마 동안 숨을 수 있고, 또 해안 근처보다 발각될 염려도 적으니까. 얼마간 시일이 지나 우리를 찾지 않게 되면 항구 쪽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어."
그녀는 에인젤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주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숲속 길을 걸어 들어갔다. 계절은 영국의 5월답게 하늘은 맑게 빛났고, 오후의 햇살은 한결 따뜻했다. 그들의 걸어온 여러 마일의 길은 뉴 포레스트라는 숲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저녁 무렵쯤 어느 오솔길 모퉁이를 돌게 되었다. 그 조그만 개천과 거기 걸린 다리 건너편에 커다란 게시판이 눈에 띄었다. 게시판에는 흰 페인트로 가구가 갖추어진 아담한 셋집 이라고 크게 씌어 있고, 조그만 글씨로 런던에 있는 소개소로 신청하라는 자세한 안내가 적혀 있었다. 대문은 들어서니 널찍한 건물이 보였다. 그것은 흔히 있는 설계로 구식 벽돌로 지은 꽤 넓은 집이었다.
"나는 잘 알지. 이건 브람셔스트 영주관이라는 저택이오. 창문은 닫혀 있고, 마당에는 풀이 나 있잖소."
"열려 있는 창문도 있는데요."
테스는 의아해 하며 말했다.
"아마 공기를 통하게 하려고 그랬을 거요."
"이 많은 방들이 비어 있는데 우리가 누울 자리는 없군요."
"피곤한 모양이군, 테스."
"이제 조금만 더 가서 쉬기로 하지."
그녀의 입에 키스를 한 에인젤은 그녀를 이끌고 다시 걸었다. 이미 여러 날을 걸었기 때문에 에인젤은 피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쉴 곳을 찾아야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했다. 그들은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농가나 여인숙을 멀리서 바라보며 그 중 여인숙 하나를 지정해 다가갔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 다시 돌아섰다. 무거운 다리를 끌다시피 걷다가 지쳐 버린 그들은 끝내 걸음을 멈추고 서 버렸다.
"나무 밑에서 자도 되겠지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그러나 노숙하기엔 아직 철이 이르다고 에인젤은 생각했다.
"우리가 방금 지나온 그 빈 집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자, 그쪽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그들은 다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그 집 앞에 이르기까지는 30분이나 걸렸다. 에인젤은 그 집에 누가 있는지 살피고 올 동안 테스에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대문 안 덩굴 속에 쭈그리고 앉았고, 그는 집안 이곳저곳을 살피는 듯했다. 그러나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서성대고 있을 때 그가 돌아왔다. 그곳에는 집을 지키는 노파 한 사람이 있는데, 근처에 가까운 마을에서 날씨가 좋은 때만 와서 집안 공기를 갈아 놓고 간다는 사실을 어느 소녀한테서 알아냈다는 것이다.
"자, 저 아래쪽 창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쉬도록 합시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그가 말했다. 에인젤의 부축을 받아 무거운 다리를 끌면서 그 집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덧문이 내려진 창은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없음을 말해 주는 것 같아 적이 안심이 됐다. 몇 발짝 더 가자 현관문이 있고, 그 옆에 열린 창문이 하나 있었다. 클레어가 먼저 그곳으로 기어 올라가서 테스를 조심스레 끌어 올렸다. 현관만 제외하곤 어느 방도 빛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2층도 역시 덧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바람이 통하도록 열어 놓은 유리창은 현관 쪽과 이층 뒤쪽 두 군데 있었다. 클레어는 어느 큰방의 문고리를 벗기고는 더듬더듬 그 방을 지나 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 눈부신 한 줄기 햇살이 방안을 비치자, 육중한 고풍가구와 진홍빛 수를 놓은 실크 커튼, 그리고 사람들이 뛰는 모습을 앞머리에 조각한 커다란 침대가 눈에 띄었다. 그 조각은 애틀란타의 경기 모습을 그린 것처럼 생명력이 넘쳐 있었다.
"겨우 쉬게 됐군. 자, 이제 편하게 쉽시다."
가방과 음식 꾸러미를 내려놓으며 에인젤이 말했다. 집을 지키는 사람이 오리라고 짐작되는 시간까지 그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만약 금방이라도 노파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들은 문고리를 건 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7시쯤 노파가 나타났으나, 그들이 있는 방을 지나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창문을 닫고 현관문을 잠근 다음 돌아가는 노파의 기척을 두 사람은 확인했다. 노파가 돌아간 다음 클레어는 다시 창문을 열어 햇살이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테스와 함께 식사를 나눴다. 그들은 어둠이 짙게 다가오는 동안에도 한 자루의 초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실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래서 암흑 속에 휩싸인 채 그렇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58
신비하도록 엄숙하고 조용한 밤이었다. 새벽녘에 테스는 에인젤에게 지난 얘기를 들려주었다. 언젠가 잠든 그녀를 안은 채 프룸 강을 건너 황폐한 사원의 석관에다 그녀를 눕힌 일을 얘기했다. 에인젤은 지금까지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왜 이제껏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소? 좀 더 일찍 말했더라면 여러 가지 오해나 화근을 방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지나간 일은 생각지 마세요. 우린 지금 이렇게 함께 있잖아요. 다른 문제는 생각하기 싫어요. 내일 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아요?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요."
그 다음날, 슬픔 따윈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아침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렸고, 안개가 짙었다. 집 지키는 노파는 날씨가 좋은 날만 창문을 연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마음이 놓였다. 테스가 잠든 동안 침실에서 빠져나와 집안을 두루 살펴봤다. 집안에 먹을 것이라곤 물밖에 없었다. 그래서 안개 속을 더듬어 나온 에인젤은 2마일 가량 떨어진 마을 상점에서 차와 빵, 버터 그리고 연기를 내지 않고 불을 피울 수 있는 알코올램프를 사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깨어 있었다. 그들은 즐겁게 아침 식사를 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해가 지면 밤이 오고, 또다시 새 날을 맞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덧 닷새를 보냈다. 그들이 다른 어떤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며칠이 지난 것이다. 복잡하고 탁한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생활이었다. 날씨의 변화만이 하루의 흐름이었고, 뉴 포레스트의 새들만이 그들의 벗이었다. 그들은 결혼한 이후의 지난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울했던 그 기간은 혼돈 속에 가라앉아 버려서, 마치 그런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의 평온한 시간만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은신처를 떠나 사우덤톤이나 런던으로 가야겠다고 말할 때마다 그녀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즐겁고 정다운 생활을 왜 끝맺지 않으면 안 되나요."
그녀가 반대하며 말했다.
"오고야 말 일은 꼭 오겠죠."
덧창 틈으로 밖으로 내다보며 덧붙였다.
"밖은 어둠과 괴로움뿐이에요. 그렇지만 이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렇듯 평온해요."
에인젤도 밖을 내다봤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사랑과 이해와 용서받는 과오가 있었다. 그러나 밖에는 냉랭한 바람만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하며 에인젤의 볼에 그녀의 볼을 부비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 저를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두려워요. 당신이 사랑이 식을 때까지 살고 싶진 않아요. 오히려 그 전에 죽는 편이 나아요. 당신께서 저를 경멸하기 전에 땅에 묻히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테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을 미워할 수 없을 거요."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제 과거를 생각하면 어떤 남자라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내가 저지른 죄악. 어쩌면 그 따위 악한 일을 저질렀을까요. 옛날의 저는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고, 새장에 갇힌 새만 봐도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그들은 하룻밤을 더 묵기도 했다. 밤이 되자 날씨는 맑게 갰다. 이튿날 아침, 집 지키는 할머니는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났다. 화사한 아침 햇살이 유별나게 할머니 기분을 상쾌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이야말로 저택에 달린 모든 문을 활짝 열어젖혀서 공기를 갈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6시 전에 저택에 도착한 할머니는 아래층에 있는 모든 방문을 열어 놓은 다음 이층으로 올라가 그들이 자고 있는 방의 손잡이를 돌리려고 했다. 바보 그 순간, 방안에서 사람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슬리퍼를 신어서 전혀 소리 없이 이층까지 올라온 할머니는 이내 달아나려 하다가 다시 문 앞으로 다가가서 손잡이를 살짝 돌려 봤다. 걸쇠는 망그러져 있었고, 안쪽에 가구를 하나 문 앞으로 옮겨 놓았으므로 조금 밖에는 문을 열지 못했다. 덧문 사이로 밝은 아침 햇살이 흘러들어 잠든 그들의 얼굴 위에 미치고 있었다. 테스의 입술이 에인젤의 바로 옆에 반쯤 핀 꽃봉오리처럼 열려 있었다. 그들의 순수한 모습과 의자에 걸쳐 놓은 테스의 웃옷, 그 옆에 벗어 놓은 견직 양말과 예쁜 양산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화가 났던 할머니는 그들의 행색이 점잖은 남녀들의 사랑의 도피 행각 같아 보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할머니는 방문을 닫고, 자기가 발견한 이 이상한 일을 이웃과 의논할 양으로 들어올 때처럼 발소리를 죽여가며 조용히 내려갔다. 할머니가 사라진 지 채 1분도 못 되어서 테스가 눈을 뜨고, 곧 이어 클레어도 잠을 깼다. 그들은 동시에 어떤 것에 의해 잠을 방해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츰 불안해진 그들은 옷을 여민 채 이내 좁게 벌어진 덧창 틈으로 바깥 잔디밭을 살펴봤다.
"당장 떠나기로 하지. 날씨가 참 좋군. 그런데 저택 부근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어. 아무튼 오늘은 집지키는 노파가 꼭 올 거요."
그녀는 순순히 그의 의견을 따랐다. 방을 깨끗이 정돈하고 짐을 챙긴 다음, 그들은 발걸음을 죽여 가며 밖으로 나왔다. 숲으로 접어들면서 그녀는 걸음을 멈춘 채 돌아서서 그 저택을 보았다.
"아, 행복했던 집이여. 왜 그곳에 더 있으면 안 되죠?"
"테스, 그런말 하지 마. 우리는 곧 이곳을 벗어나게 돼. 처음에 가던 대로 이 길을 따라 곧장 북쪽으로 갑시다. 거기까지 찾으러 올 사람은 없을 테니까. 수사를 한다면 웨섹스의 항구쯤에서나 수사망을 펼 거야. 북쪽에 도착하면 어느 항구에서든 외국으로 갑시다."
이렇게 그녀를 설득해서 계획대로 북쪽을 향해 걸었다. 저택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그들은 벌써 그들이 지나가기로 되어 있는 지붕이 뾰족뾰족 솟은 멜체스터 시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았다. 에인젤은 오후에는 그녀를 푹 쉬게하고, 어둠을 타서 다사 걷기로 결심했다.
저녁놀이 깃들 무렵, 에인젤은 여느 때와 같이 음식을 사 왔다. 계획대로 밤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저녁 8시쯤 북부 웨섹스의 경계를 지나게 되었다. 한길을 떠나 산길을 걷는 것이 테스에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옛날의 민첩한 걸음걸이로 길을 재촉했다. 앞을 가로막는 옛 도시 멜체스터는 그들 앞에 가로놓인 강을 건너기 위해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데군데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치는 인적이 없는 거리를 발소리가 울릴까봐 포장한 길을 피하며 지나간 것은 거의 자정이 가까운 때였다. 웅장하고 화려한 사원이 왼편에 우뚝 솟아 있었지만, 지금의 그들에겐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사방에 덮여 있었다. 그러나 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조금이나마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달도 기울어져 버려서 밤은 굴속처럼 암흑으로 변해 버렸다. 그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될 수 있는 대로 풀밭 위를 걸었다. 생울타리와 담장이 전혀 없었으므로 걷기에 어렵지 않았다. 사방은 광활한 적막에 싸인 캄캄한 고독의 세계였다. 그 위를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이렇게 더듬듯이 몇 마일을 더 갔을 때, 눈앞의 풀밭에 거대한 건물 같은 것이 우뚝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하마터면 그 물체와 부딪칠 뻔했다.
"이건 정말 괴상한 곳인데."
하고 에인젤이 말했다.
"웅웅 소리가 나요. 저것 봐요, 들어 보세요."
하고 테스가 말을 받았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건물에 부딪쳐 마치 거대한 줄기 하프를 타는 것 같은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팔을 뻗고 두어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건물의 수직면에 손이 닿았다. 이음새도 없고 다듬은 자리도 없는 단단한 천연석으로 만든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위쪽을 더듬어 보니 거창한 장방형의 돌기둥이었다. 이번엔 외손을 뻗어 보니 옆에 있는 것과 같은 비슷한 돌기둥이었다. 머리 위 무한히 높은 곳에 캄캄한 밤하늘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이 이 두 기둥을 수형으로 잇는 거대한 대들보 같았다. 그들은 조심조심 그 대들보 밑 돌기둥 사이로 들어갔다. 돌기둥 표면은 그들이 내고 있는 조용한 옷 스치는 소리를 울렸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건물 밖에 있는 기분이었다. 천정이 없었다. 테스는 무서워서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에인젤 역시 당황한 채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제 뭘까."
옆으로 가서 더듬어 보려고 하자, 또 다른 돌기둥 같은 것에 부딪쳤다. 그것도 처음 것과 같이 네모진 단단한 탑과 같은 돌기둥이었다. 그런 식으로 돌기둥은 하나하나 줄지어 있었다. 그곳은 마치 문과 기둥만 있는 것 같았고, 어떤 것은 큰 대들보로 기둥이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이거야말로 바람의 신전이로군."
하고 에인젤이 말했다. 다음 돌기둥은 따로 떨어져 있고, 어느 것은 세 개의 돌기둥으로 문을 마든 것도 있었다. 옆으로 쓰러진 것도 있어서, 그 옆쪽은 마차가 한 대 지날 수 있을 만큼 넓은 돌로 포장한 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 평원 일대의 초원의 돌기둥 숲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돌기둥 사이로 더 깊숙이 들어가 이윽고 그 복판에 다다랐다.
"이건 스토운헨지야."
하고 클레어가 말했다.
"이교도의 신전 말인가요?"
"그렇지, 여러 세기 전의 유물로, 더버빌 가문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거요. 한데 여보, 어떡할까? 좀 더 가면 쉴 곳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그때 테스는 지칠 대로 지쳤으므로 바로 옆에 있는 길쭉한 석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개의 돌기둥이 바람을 막아 주고 있었다. 낮의 태양열을 받았기 때문에 그 돌은 따뜻하게 말라 있었다. 치마와 구두를 축축하게 했던 사방의 거칠고 싸늘한 초원과는 달리 기분이 좋았다.
"에인젤, 더 가고 싶지 않아요."
에인젤의 팔을 끌어당기려고 손을 내밀면서 테스가 말했다.
"여기 있으면 안 되나요."
"안 될 것 같은데. 낮에는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이곳이 보일 거야.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지금 생각났는데, 외가 쪽 누군가가 이 근방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탤보데이스에 있을 때 당신은 나한테 이교도라고 늘 말씀하셨죠. 그러니까 나는 당신 고향에 돌아온 거나 다름없어요."
에인젤은 길게 누운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입술에 긴 입맞춤을 했다.
"피곤하지? 당신이 꼭 제단 위에 누운 것 같군."
"난 여기 있는 게 좋아졌어요. 이곳은 참 조용하고, 적막하기까지 해요. 벅찬 행복을 맛본 뒤라서인가 봐요. 내 머리 위에는 널따란 하늘만 보여요. 마치 세상에 우리 둘 외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정말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리자 루만 빼놓고."
클레어는 날이 좀 밝을 때까지 그녀를 이곳에 쉬게 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외투를 덮어 주고 그 옆에 앉았다.
"에인젤, 만약 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저를 생각해서 리자 루를 돌봐주세요."
돌기둥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를 한참 듣고 있던 테스가 불쑥 말했다.
"그러지."
"그 애는 정말 착하고 순진해요. 그리고 순결해요. 아, 에인젤, 만약 제가 없어진다면 그 애하고 결혼해 주세요. 당신이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당신을 잃는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요. 그리고 그녀는 내 처제가 아니오."
"그건 문제가 아니에요. 리자 루는 정말 착하고 귀여워요. 그리고 점점 아름답게 자라고 있어요. 우리가 영혼이 되면 저는 기꺼이 그 애와 함께 당신을 나누어 가질 수 있어요. 만약 당신께서 앞으로 그 애를 잘 가르치고 길들이면, 그리고 당신 마음에 맞도록 잘 돌봐 주신다면 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그 애는 저의 좋은 점만 전부 갖추고 있어요. 나쁜 점이라곤 조금도 없어요. 그리고 그 애가 만약 당신의 아내가 된다면 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지 않는 것처럼 느낄 거예요. 이제 모든 걸 다 말씀드렸으니까 다시는 그런 말 않겠어요."
그녀는 입을 다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멀리 북동쪽 하늘에 돌기둥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골고루 덮였던 검은 구름장이 항아지 뚜껑을 열 때처럼 그대로 들려 나가고, 대지 끝쪽에서 이제 막 올라오는 태양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그 먼동을 등지고 높이 솟은 한 개 또는 세 개의 돌기둥으로 된 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옛날에 하느님께 제물을 드린 곳일까요?"
테스가 물었다.
"아니."
"그럼 누구한테?"
"태양한테 바쳤을 거요. 따로 떨어져 서 있는 저기 높은 돌이 태양 방향이오. 자, 봐요. 지금 곧 솟아오를 태양을 향하고 있소."
"여보, 이제 생각나는 게 있어요.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제가 무엇을 믿든 당신은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기억하시죠? 하지만 난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따랐을 뿐이에요. 에인젤, 지금 말해 주세요. 우리가 죽은 뒤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전 그것이 궁금해요. 알고 싶어요."
테스의 질문에 그는 대답을 피하기 위해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오, 에인젤, 우리 다시 못 만난다는 뜻인가요?"
울음을 터뜨릴 듯한 투로 테스가 말했다.
"그런데도 저는 당신과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랐어요.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요. 우리는 이토록 뜨겁게 사랑했는데."
그는 테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얼마 후 그녀의 숨결은 고르게 쌔근거렸고, 그의 손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잠이 들어 있었다. 동쪽 지평선을 따라 나온 온빛을 띤 한 줄기 광선은 대평원의 먼 부분까지도 검게, 그리고 가깝게 보이게 했다. 광활한 사방의 경치는 날이 밝기 직전에 흔히 느껴지듯이 어딘지 말이 없으며 수줍어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동쪽에 있는 돌기둥과 그것을 누르는 큰 대들보는 광선을 등에 받고 시커멓게 솟아 있었다. 그 너머엔 커다란 불꽃 모양을 한 태양석이, 그리고 희생의 돌은 중간쯤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바람은 잠잠해지고, 돌의 물그릇처럼 움푹 파인 곳에서 출렁이던 물도 고요히 가라앉았다. 마침 그때 동쪽의 경사진 언저리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한 개의 점에 지나지 않는데, 태양석이 있는 저쪽 너머 땅이 낮은 곳에서 다가오는 한 남자의 머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클레어는 계속해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었으므로 조용히 그냥 있기로 했다. 그 모습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돌기둥이 선 곳으로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등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발 스치는 듯한 소리여서 돌아다보자 옆으로 쓰러진 돌기둥 저쪽에 더 다른 모습이 또 하나 보였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오른편 돌기둥의 세 탑이 서 있는 곳에 또 한 사람, 그리고 왼편에도 한 사람이 있었다. 새벽 햇살이 서쪽에 있는 남자의 정면을 비췄다. 클레어는 광선을 통해 그 남자의 훤칠한 키와 훈련된 걸음걸이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한 말이 현실로 눈앞에 나타났다.
에인젤은 벌떡 일어서서 도주할 방법을 생각했다. 돌이든, 무엇이든, 아무 거라도 좋았다. 무기로 삼을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이미 가장 가까이에 와 있던 남자가 그를 잡았다.
"소용없습니다, 이 평원에는 우리의 동료가 열여섯 명이나 있으니까요."
"잠이 깰 때까지 만이라도 저 여자를 그대로 두십시오."
그는 모여든 사나이들에게 낮게 애원했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테스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자는 모습을 뒤늦게 발견한 그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지켜보면서 둘레에 있는 돌기둥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에인젤은 그녀가 누운 돌 쪽으로 다가가서 가냘픈 그녀의 한 손을 쥔 채 몸을 구부렸다. 그녀의 호흡은 사람의 숨결이라기보다는 가냘픈 생물의 그것처럼 빠르고 여렸다. 그들은 점점 밝아 오는 햇살을 받으며 고정된 그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과 손은 은이라도 입힌 듯 빛나고, 몸의 다른 부분은 검은 대로였다. 주변의 돌은 암녹색으로 빛나고, 들판은 여전히 그늘 덩어리였다. 잠시 후 햇살은 강해지고, 그 광선이 무의식 상태에 놓인 그녀의 얼굴을 활짝 비췄다. 광선이 눈꺼풀 아래 스며들어 그녀의 잠을 깨게 했다.
"웬일이에요, 에인젤?"
그녀가 급히 일어나 앉으면서 말했다.
"저를 잡으러 온 건가요?"
"그렇소, 그들이 왔소."
"하지만 당연하죠. 에인젤. 저는 정말 기뻐요. 이런 행복이 오래 갈 순 없잖아요. 전 이 상태로 만족해요. 무엇보다 당신한테 멸시받을 때까지 살지 않아도 되고요."
그녀는 일어서서 몸을 털고 앞으로 나아갔으나, 사나이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 갑시다."
테스가 조용히 말하며 그들을 따라 나섰다.
59
옛날 웨섹스의 수도였던 아름다운 옛 도시 윈톤스터의 거리는 7월의 어느 아침, 상쾌하도록 따뜻한 대기에 감싸인 채 기복이 심한 분지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바람받이 ^형 지붕으로 된 벽돌집이나 기와집, 또는 돌집들은 계절 탓으로 이끼가 거의 말라붙어 깨끗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목장 복판을 흐르는 시내도 물이 줄었고, 서쪽 문에서 중세기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또 그곳에서 다리에 이르기까지 경사를 이루는 큰길은 으레 구식 장날에 하는 한가로운 대청소가 진행되고 있었다. 서쪽 문에서 시작되는 큰길은 윈톤스터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인가에서 벗어나 점점 가파른 경사가 1마일이나 뻗어나간 언덕길이다. 이때 시가지를 벗어나 이 언덕길을 급히 올라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힘드는 비탈길 따윈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한 그들은 비탈 아래쪽의 담이 둘린 좁은 문을 빠져나와 이 길로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민가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오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빠른 지름길인 이 큰길을 택한 듯했다. 그들은 젊었으나 고개를 푹 숙인 채 걷는 슬픈 걸음걸이가 석연치 않았다. 매정하게도 밝은 태양은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은 에인젤 클레어였고, 또 한 사람은 키가 컸는데, 마치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아가씨- 소녀 같기도 했지만 여인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그녀는 클레어의 처제 리자 루였다. 그들은 창백한 얼굴은 반쪽으로 수척해 있었고, 그들은 손을 잡고 묵묵히 걷고 있었다. 머리를 숙인 모습은 마치 이탈리아 화가 지오토의 두 사도와도 같았다. 그들이 높다란 서쪽 언덕에 거의 다다랐을 때 거리의 시계가 8시를 알렸다.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두 사람은 몇 걸음 더 나아가 푸른 초원 가장자리에 하얗게 서 있는 첫 번째 이정표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초원이 큰길로 통하고 있었다.
초원에 들어선 그들은 어떤 힘에 움직여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서 우뚝 선 채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굳은 표정으로 이정표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끝이 없었다. 이제 막 떠나온 도시가 눈 아래 있고, 그중에서도 한층 눈에 띄는 건물 옆 긴 낭하와 바깥채가 있는 대사원의 탑이 보였다. 또, 성 토머스 사원의 뾰쪽 탑이 솟은 건물과 오른 쪽에는 오늘도 순례자들에게 빵과 맥주를 베풀어 주는 오래된 사원의 탑과 바람받이 지붕이 보였다. 도시의 뒤쪽에는 둥그런 성 캐더린 언덕이 펼쳐 있고, 더 멀리에는 마지막 지평선이 그 위에 걸린 찬란한 태양 속에 파묻혀 있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퍼져 있는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시내의 여러 가지 건물을 전경으로 한, 회색 지붕과 창살 달린 창문이 전체적인 구조를 이루어 우뚝 솟은 빨간 벽돌 건물은 주위에 있는 고풍의 우아한 건물들의 다양한
모습과는 아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을 감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 강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날 때는 주목나무와 사철나무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곳에 올라와 보니 뚜렷하게 보였다. 조금 전 두 사람이 나온 좁은 샛문은 이 건물의 담에 뚫린 문이었다. 이 건물 중앙부에는 꼭대기가 평평한 보기 흉한 팔각탑이 동쪽 지평선을 배경삼아 서 있었다. 이곳에서 보면 태양으로 등진 도시의 그늘진 쪽이 보이므로 그 탑은 도시의 미관을 더럽히는 하나의 오점 같았다. 그러나 주의해서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못 박힌 곳은 아름다운 정경이 아니라, 바로 이 오점이었다. 그 탑의 돌출부 위에는 길다랗고 높은 깃대가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그곳에 정지된 지 오래였다. 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나고 이삼 분쯤 지났을 때 무언가 깃대 위로 서서히 올라가더니 미풍에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은 깃발이었다.
정의의 심판은 이루어졌다. 그리스의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말대로 불멸의 수호신은 테스와의 희롱을 끝마친 것이었다. 그리고 더버빌 가문의 기사와 귀부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의 무덤 속에서 잠들고 있었다. 묵묵히 바라보던 두 사람은 마치 기다라도 하듯 땅에 꿇어앉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 깃발은 여전히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기운을 되찾은 그들은 함께 일어나 손을 마주잡고서 언덕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