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용도
가을 거울
가을 소녀
가을 하늘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갈대
갈잎나무 노래
감나무 바라보기
강산
검은 꿈
게다리 선인장
겨울 아침
고향
교대역에서
구석 자리 사람들
귀
그때는
그리운 세상
그림자
그 손
그저께 보낸 메일
까만 목도리
끈
나
나뉨
나는 그를 모른다
나무의 기적
나뭇잎 하나
나비 두 마리
나사에 관하여
나의 자식들에게
난초꽃
남긴 이야기
남김없이
남몰래 흘리는 눈물
남해 푸른 물
낯선 간이역
낯익은 구두
네 바퀴 굴림
노동절
녹색 두리기둥
놀지 않고 쉬는 날
누군가
누군가를 위하여
누런 봉투의 기억
누워 있는 부처
눈 내리는 날
느릿느릿
늦깎이
늙은 마르크스
늙은 소나무
늙지 않는 화가
다른 자리에서
달력
달밤
달빛 어린 메밀밭을 거닐다
달팽이의 사랑
당시의 유행
당신의 보드라운 손
당신들의 용병
대원군의 늘그막
대장간의 유혹
대추나무
도다리를 먹으며
독립문역
돌아오지 않는 강
동사목
동서남북
때
떠난 뒤
똑바로 걸어간 사람
마중
마지막 물음
막스 리버만 길
만나고 싶은
매미가 없던 날
메아리
모르지요
목발이 김씨
몸의 소리
묘비명(墓碑銘)
물기
물길
물뫼의 집
물오리
미끄럼
바람둥이
바로 그런 사람
반달곰에게
밤꽃 향기
밤눈
백설기를 만들기로 했어요
버스를 탄 사람들
법고(法鼓) 소리
보리수가 갑자기
봄 놀이
불혹(不惑)
비 맞이
빈집
빨래 널린 집
빨리 먼저 앞질러
뺄셈
뿌리의 기억
사골
사랑니
상행
새 문
생각보다 짧았던 여름
생각과 사이
서녁으로
서서 잠든 나무
서서 죽는 나무
서울에서 속초까지
석근이
성산동 가랑잎
소리 없는 힘
소액주주의 기도
수박
시론(詩論)
시조새
싫어
심전도
쓰레기
쓰레기 치는 사람들
쓸모없는 친구
아니다 그렇지 않다
아무도 모르는 별명
안개의 나라
야바위
약수터 가는 길
어느 가을날
어느 돌의 태어남
어느 지사(志士)의 전기(傳記)
어둠 속 걷기
어떤 죽음의 회고
어린 게의 죽음
어린 친권자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얼굴과 거울
얼음의 노래
여름날
여름에 일어난 사건
여섯 시
연기
연의 미학
영산(靈山)
오늘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오래된 물음
오른손이 아픈 날
왼손잡이
유령
유무
육포(肉脯)처럼
왼손잡이
은수저
이름
이사장에게 묻는 말
이야기 들어줄 사람
일요일에도 자라는 나무
일주문 앞
잃어버린 비망록
잊혀진 친구들
잃어버린 비망록
자라는 나무
작은 꽃들
작은 사내들
저녁 길
절벽 위에 서서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조개의 깊이
조심스럽게
조화(造花)
좀팽이처럼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
중년(中年)
중얼중얼
지금 여기서
짬뽕이나 짜장면
책 노래
책 찾기
처음 만나던 때
청단풍 한 그루
초록색 속도
춘추(春秋)
치매 환자 돌보기
침묵 요금
크낙산의 마음
타인과 나
톱니는 돌고 돌아
팽이 2
하루 또 하루
하얀 눈 푸른 물
하얀 비둘기
하얀 운전자
하행(下行)
한강
향나무 한 그루
형이 없는 시대
호박 그 자체
홉스굴 부근
홍제내 2길
홰나무
효자동 친구
효자손
흐린 날
희망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월의 가로수
5월의 저녁
1981년 겨울
가난의 용도
김광규
달동네 좁은 골목 언덕길로
연탄을 날라다 주고
독거노인과 소녀 가장에게 남몰래
쌀과 김치 보내준
가난한 이웃들의 이름
아무도 모른다
빈민 운동가로 막사이사이 상을 타고
빈곤층 대변하던 그 국회의원
누구인가
우리는 알고 있다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고
공표한 명망가도 있었다
중산층이나 부자보다 빈민들의 수효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던
의회주의자 그는
가난의 용도까지 속속들이 깨달은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그렇다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은
무리 지어 떠도는 불쌍한
정치적 동물 아니냐
가을 거울
김광규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
구름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을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가을 소녀
김광규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며
두 손모아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것 같네
시간은 150년 전 그대로 멈춰 있는데
두 눈을 내리뜨고 웃음 짓는
소녀의 옆얼굴 보니 이곳에서도
와이파이 터지는 듯
늑대 몇 마리 양떼 곁으로 다가와도
밀린 메시지 읽기에 바쁘고
카카오토크에 열중하는 양치기 소녀
눈매는 감자 심는 엄마 닮았고
입매는 밭을 가는 아빠 비슷하지만
마음은 아득한 미래
디지털 세상으로 날아가네
누런 풀밭에서 고개 숙인 가을 소녀
화폭에 담긴 그림은 아닌 듯
늙지 않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앞으로 태어날 딸의 딸의 딸의....
변함없는 모습 여기 있네
가을 하늘
김광규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은
허전하다
땅을 덮은 것 하나도 없이
하늘을 가린 것 하나도 없이
쏟아지는 햇빛
불어오는 바람
하늘을 가로질러
낙엽이라도 한 잎 떨어질까봐
마음 조인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렇게 견딜 수 있을까
명령을 받고
싹 쓸어버리기라도 한 듯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은
두렵다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김광규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무명 바지저고리
흰 적삼에 검은 치마
맨발에 고무신 신고
나란히 앉아 있는
머슴애와 계집아이
사랑스럽지 않은가
착한 마음과 젊은 몸뚱이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이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곳마다
땅에는 온갖 꽃들 피어나고
지붕에는 박덩이 탐스럽게 열리고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히고
해와 달과 별들이 하늘에 가득하네
팔을 꽉 끼고 함께 뭉치면
믿음직한 두 친구
뺨을 살며시 마주 대면
사이 좋은 지아비와 지어미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너와 나의 어버이
가진 것 하나도 없이 태어났지만
슬기로운 머리와 억센 손으로
힘들여 이룩한 것 많지 않은가
어느새 여기에 와 앉아 있네
우리의 귀여운 딸과 아들
갈대
김광규
이승에 반쯤 잠긴 육신으로 서서
영원을 바라보는 서늘한 눈
바람에 흔들림은
저항도 순응도 아니었습니다
요동치는 욕망을
떨치려는 몸부림
물컹한 살은 여름에게 주고
메마른 뼈로
가을을 살아갑니다
무거움을 부리고
비로소 찾은 평정
나를 찾기 위해
나를 놓아준 나날이면 좋겠습니다
갈잎나무 노래
김광규
갈잎나무 그림자들 가을이 깊어
갈수록 흐려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뭇잎들
이제는 나무에 매달리지 않고
한 개도 남지 않고
떨어진다 울긋불긋
흩날리며 미련 없이 낮은 곳으로
내리는 나뭇잎처럼 떨어져
나도 이제는 훌쩍 떠나고 싶지만
아스팔트 위에는 싫고
콘크리트 지붕 위에도 싫고
산골짝이나 들판에 쌓이고 싶은
마음 남았으니 아직도
나뭇잎처럼 되기는 멀었다
갈잎나무처럼 살기는 틀렸다
감나무를 바라보기
김광규
나뭇잎 모두 떨어지고
열매만 빨갛게 익어
아름답구나
맛았겠구나
그런 생각 다 버리고
멍청하니
오랫동안
감나무를 바라보면 어떨까
바쁘게 달려가다가
힐끗 한번 쳐다보고
재빨리 사진 한 장 찍은 다음
앞길 서두르지 말고
그 자리에 서서 또는 앉아서
흘린 듯
하염없이
감나무를 바라보면 어떨까
우리도 잠깐
가을 식구가 되어
강산
김광규
매일 성산대교 건너다니며 창 밖으로
한강을 바라보지만
강가를 걷거나
강물에 손 담가본 적 없다
그래도 한강보다 낙동강이 길다는 것
알고 있지
청계천 복원 공사 때문에 막히는 길 피하여
가끔 북악스카이웨이로 우회하지만
북한산 숲길을 거닐거나
보현봉까지 올라가 본 적 드물다
그래도 설악산보다 지리산이 높다는 것
알고 있지
강도
산도
인터넷에 드니까
검은 꿈
김광규
막다른 복도였다
컴컴했다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앞으로 간다는 것이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복도의 끝에서
마지막 문을 열고
천천히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뒤로 문을 닫았다
서 있다는 의미도 없이
나는 혼자였다
끝이었다
어쩌면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간은 아니었다
전혀 의지할 데 없는
나의 속은 그렇게 생겼었다
그리고
- 꼬박 3일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살고 있다.
말뿐만 아니라 사람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살아보았는가?
이것이 얼마나 사람을 갉아 먹는지…
게다리 선인장
김광규
플라스틱 화분에 심어
층계참 벽감에 놓아둔
게다리 선인장
끝마디가 가려운 듯
3월 하순 소리 없이
연분홍 꽃 가녀리게 피어나
한 송이 두 송이
수줍게 계단을 밝히고
그윽하게 번지는 생기
집안에 감돈다
가족밖에 보는 사람 없어도
게다리 마디 끝마다 퍼져 나오는
소박한 아름다움 때문에
도자기 화분에 담긴 외래종
라벤더의 화려한 향기가 오히려
천박하게 느껴지는 봄
겨울 아침
김광규
얼어붙은 새벽 네 시 아직 캄캄한데
하늘로 열린 천창 창문 밝히면서
빵 굽는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밀가루 반죽을 나르는 분주한 모습
전조등 부릅뜨고 눈길을 달려가는 화물차들
임대아파트 창문에 하나 둘 불이 켜지면서
조금씩 어둠이 녹아내립니다
가로등 불빛도 차가운 전철역 입구에서
계단을 쓸고 있는 청소부
두툼한 목도리로 얼굴 감싸고
출근길 서두르는 근로자들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이
어둠을 밀어내는 덕택에 힘겹게
겨울 아침이 밝아옵니다
고향
김광규
등이 굽은 물고기들
한강에 산다.
등이 굽은 새끼를 낳고
숨 막혀 헐떡이며 그래도
서울의 시궁창 떠나지 못한다.
바다로 가지 않는다.
떠나갈 수 없는 것
그리고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곳
고향은 그런 곳인가.
교대역에서
김광규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로 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 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 그와 마주쳤다
반세기만이었다
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구석 자리 사람들
김광규
넓은 홀 샹들리에 불빛 아래
한번도 제대로 나서보지 못하고
언제나 비켜서서 쓰레기 치우거나
기둥 옆에 숨어서서 일할 차례 기다리고
계단 및 비스듬한 천장 아래 쭈그리고 앉아
차디찬 도시락 까먹던 사람들
힘겹게 아들딸 길러 대학까지 보낸
청소원 아줌마와 주차장 아저씨들
느닷없이 고층 빌딩 주저앉으며
무너져내린 순간
거대한 연회장과 화려한 매장 한가운데서
수많은 목숨 죄없이 깔려 죽었는데
구석 자리에 숨어서 일하던
막일꾼 아저씨와 아줌마들
덥쳐내린 죽음의 무거운 어둠 헤치고
햇빛 찾아 꿋꿋하게 살아나오데
귀
김광규
후박나무 잎에 내리는 가을비
늘어진 담장이 넝쿨 흔들면서
유리창을 후드득 두드리는 빗줄기
수녀원 회랑을 스쳐가는 옷자락 소리처럼
그것은 일종의 침묵이라고 생각했다
목련꽃 소리없이 떨어뜨리고
라일락 향기를 살짝 풍기는 봄바람
또는 고층 건물 모서리에 부딪혀
윙윙거리는 하늬바람 소리도
침묵의 변형이라고 생각했다
조개의 침묵과 나무의 침묵
바위의 침묵도 되도록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쏟아진 비가
파주와 연천을 물에 잠기게 하고
남지나해에서 올라온 돌개바람이
중앙로의 가로수를 뽑아버리고
서해대교 간판을 몇 개나 떨어뜨렸을 때
그것은 침묵이 아니었다
말없이 오랫동안 참아온
바위나 나무와 조개의 침묵
그 침묵의 소리도 이제는 듣고 싶다
그가 굳이 말을 안 해도
김광규
지게를 눕혀놓고
역 광장 맨바닥에 주저앉은
말수가 적은 박씨 아저씨
햇살이 기울도록
손님을 기다리며
줄담배를 피우고 있네요
일거리가 있으면
어깨가 무겁고
일거리가 없으면
마음이 무겁다는 말씀
이래저래 무거운데
담배 연기만 가벼운
겨울 이 한 때
그가 굳이 말을 안 해도
조금은 그를 알 수 있는
그때는
김광규
누가 모르겠는가
누구나 느끼고
누구나 겪은
그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모두가 알면서도 그때는
모르는 체했었다.
아무도 말하지 못하고
아무도 쓰지 못한
그것을 이렇게
우리말로 이야기하고
우리글로 써서
남겼다.
그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이제 와서 쉽게 말하지 말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그때
무엇을 했는가
그리운 세상
김광규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아마도
그 세상이 있겠지
온갖 꽃과 나무들 뒤섞여 큰 숲을 이루고
사람과 짐승이 같은 물을 나누어 마시고
쓸 만큼 돈을 벌어서
편리한 기계를 함께 부리며
모두가 사이 좋게 어울려 살아가는 곳
언제나 꿈꾸면서도
아직껏 가보지 못한
그 세상 그리워
벌써 몇 번째인가
신중하게 투표권을 행사했건만
내가 찍은 후보는
번번이 떨어졌네
그림자
김광규
굴곡진
생의 뒤안길
물끄러미 바라보네
그림자는 그림자가 아니라
그 이름이 그림자일 뿐*
마음 비우면
저렇게 가볍게
몸 깎으면
저토록 얇게 될 수도 있네
껍질을 벗긴 과일처럼
화장을 지운 여인처럼
내면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화려를 버려
더욱 빛나는 들꽃이듯
나를 잃고 나를 알아
그림자로 살아가네
* 『금강경』에 나오는 '제불 즉비제불 시명제불(諸佛 卽非諸佛 是名諸佛)', 즉 '붓다는 붓다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붓다이다'의 표현 기법 응용
그 손
김광규
그것은 커다란 손 같았다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
쓰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손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
시간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가녀린 손
아픈 마음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
팔을 뻗쳐도 닿을락 말락
끝내 놓쳐버린 손
커다란 오동잎처럼 보이던
그 손
그저께 보낸 메일
김광규
오늘은 어제의 다음 날
어제는 예스터데이
비틀스 노래 속에 날마다 되살아나는
어제는 오늘의 바로 전날
독일어로 gestern / 게스테른
그저께는 어제의 바로 전날
vorgestern / 포어게스테른
영어로는 좀 길지만
the day before yesterday
그 긴 날 저녁때도 원고를 고쳐 쓰고
와인 한잔 마셨던가
가물거리는 그저께 기억
수첩을 꺼내 보지 않으면 누구를
만났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네
손을 뻗치면 곧장 닿을 듯 가까운
어제의 하루 전날
안타깝게도 되돌릴 수 없네
그저께 보낸 메일
까만 목도리
김광규
어디 있나 찾을 때마다
장난삼아 둘째 음절에 악센트를 주었던
나의 부드러운 「목도:리」
영하 15도 C. 뺨이 얼어붙던 겨울날
어두운 산자락 길 걸어 올라가
워밍암 운동틀 돌리고 내려왔을 때
등산점퍼 속에 걸쳤던
목도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밤길
나 혼자 걸었는데
어디서 흘러내렸나
오던 길 되돌아가 살펴보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목을 잃어버리지 않고
목도리만 없어져 다행이지
그것은 결국 내 목에
두르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떠나가버린 것
도대체 무엇을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여태까지 살아왔는데
분실과 더불어 느닷없이
나를 찾아온 손재수
반갑지 않은 친구
내 곁에 잠시 머물렀다가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린 놈
따스했던 그 까만 목도리
끈
김광규
낡은 혁대가 끊어졌다
파충류 무늬가 박힌 가죽 허리띠
아버지의 유품을 오랫동안
몸에 지니고 다녔던 셈이다
스무해 남짓 나의 허리를 버텨준 끈
행여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물에 빠지거나
땅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도록
붙들어주던 끈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나의 허리띠를 남겨야 할
차례가 가까이 왔는가
앙증스럽게 작은 손이 옹알거리면서
끈자락을 만지작거린다
나
김광규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뉨
김광규
소형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오고 가지 못하도록
주상복합 고층 아파트 입주자들이
통로를 막고
길에 철조망을 쳤다
그렇다
우리는 예부터 나누어진 겨레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
나는 그를 모른다
김광규
모른다고 대답하겠다
오랫동안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모른다고 말하겠다
새벽에 일어나 오줌을 눌 때부터
한밤중 잠자리에 들어갈 때까지
때로는 자다가 깨어서도
언제나 생각해왔다
출근길에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순두부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전화번호를 돌릴 때도
혼자 있거나
여럿이 어울리거나
잠시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누가 물으면
그를 모른다고 대답하겠다
가을 산마루에서 내려다보면
개미처럼 바장이는 자동차와 행인들
아무런 관계도 없이 서로
타인이 되어 헤아리는
겨울 밤하늘의 차가운 별자리
태어나기 전에도
죽은 다음에도
변함없는 세상을 그려보면서
누가 물으면 태연하게
그를 모른다고 대답하겠다
아직도 오랫동안 생각나겠지만
나는 그를 모른다고 말하겠다
나무의 기척
김광규
댓돌에 한 발 올려놓고
헌 신발 끈 조여 매는데
툭
등 위로 스치는 손길
여름내 풍성했던 후박나무 잎
커다란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가을 나무의 기척
나뭇잎 하나
김광규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면서
나비 두 마리
김광규
빨래 말미도 없이
한 달 내내 쏟아지는 장맛비에
주황색 능소화
아깝게 뚝뚝 떨어졌다
검은 구름 동쪽으로 몰려가며 겨우
앞산의 모습 나타나고 잠시
비가 멎었을 때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니 하얀
나비 두 마리
안쓰럽게 나풀나풀
잡초 우거진 채마밭으로 날아간다
장마철에 잘못 태어나
축축하지 않니
해도 못 보고
꽃도 못 찾고
금방 땅으로 떨어질 듯
서투르게 나풀나풀 날아가는
하얀 나비 두 마리
풋사랑 이루지 못하고 비 맞으며
사라지는 어린 영혼들인가
나사에 관하여
김광규
창고마다 지저분하게 널려진
수백만 개의 나사들
크기만 다를 뿐 모두 비슷한
암나사와 수나사들을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다
도무지 매력 없어 보이는 저것들이
수많은 부품을 합치고 조이면
자동차가 되어 달려가고
비행기가 되어 날아가고
로보트가 되어 작동한다
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어쩌다 한 개의 수나사가 빠지거나
한 개의 암나사가 부서지면
그 한 개의 나사 때문에
자동차의 엔진이 꺼지고
비행기가 불시착하고
로보트가 작동하지 않는다
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한 개의 나사 때문에
귀중한 목숨을 잃기 전에
그리고 한 개의 나사를 갈아 끼우기 위하여
수천 개의 나사를 풀어야 하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느냐
나의 자식들에게
김광규
위험한 곳에서 아예 가지 말고
의심받을 짓은 안 하는 것이 좋다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대로 집에만 있으면
양지바른 툇마루의 고양이처럼
나는 언제나 귀여운 자식이었다
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사람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인생이 힘들 것 무엇이랴 싶었지만
그렇게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수양이 부족한 탓일까
태풍이 부는 날은
집안에 들어앉아
때묻은 책을 골라내고
옛날 일기장을 불태우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
자꾸 찢어버린다
이래도 무엇인가 남을까
어느 날 갑자기 이 짓을 못하게 되어도
누군가 나를 기억할까
어쩌면 그러기 전에 낯선 전화가
울려올지도 모른다
지진이 일아나는 날은
집에도 있는 것도 위험하고
아무 짓을 안 해도 의심받는다
조용히 사는 죄악을 피해
나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평온하게 살지 마라
무슨 짓인가 해라
아무리 부끄러운 흔적이라도
무엇인가 남겨라
난초꽃
김광규
마루에서 동화책 읽고 있던 나를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할아버지는
무슨 보물이라도 보여주려는 듯
창문에 늘어진 속 커튼을 젖혔다
창턱에는 난초 화분이 네 개
그 가운데 하나가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하얀 줄기에 샛노란 꽃잎
난초꽃 향기가 그윽하지 않으냐
난초가 들으면 안 되는
무슨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추어 내게 말했다
화분에 심은 풀잎처럼 보이는 난초에
흥미 없는 손자 녀석은 시큰둥하게
힐끗 쳐다보고
별것 아니라는 듯
횅하니 거실로 되돌아가 멈추었던
컴퓨터 게임을 계속했다
작은 손가락이 나는 듯 움직였다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옛날의 손자는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머쓱해졌다
녀석이 나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남긴 이야기
김광규
빚이나 세금 및 범칙금은 말할 나위도 없고
지식이나 관습이나 예의도 모조리 잊어버리고
마른 북어의 지느러미처럼
바스러져야지
수많은 외국어 단어나 까다로운 법조문
그럴듯한 잠언이나 경구
치솟은 국제 유가와 인상된 택시요금 따위를
기억해서 무엇 하랴
등기권리증이나 유서는 물론
냄새조차 남기지 말고
살았던 흔적 모두 지우고
소리 없이 죽어 있는 노린재처럼
아무도 모르는 주검으로
버려져야지
남김없이 까맣게
잊혀져버린 다음에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남을 테지만
남김없이
김광규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보던
그 위대한 지휘자는 평생을
호텔에서 살았다고 한다
취미는 제트기 조종
결혼도 하지 않고
애인만 자주 바꾸었다고 한다
후회 없이 자기의 생애를 살고
재산이나 자손 대신
장엄한 미사곡과 방대한 교향곡들을
레코드와 카세트와 CD에 담아서
남김없이 후세에
전했다고 한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
김광규
수술을 며칠 앞두고 환자를
격려하러 찾아온 중학교 때 친구들과
점심을 함께 먹고 헤어졌다
안국역에서 3호선 전철을 타고 떠나가는
늙은 친구들 배웅하고 돌아서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슬퍼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혹시 앞서가게 되더라도 제각기
살아남아 각종 세금과 건강보험료에 시달리며
지저분한 잔반(殘飯)을 치워야 할 그들이
문득 불쌍해져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었다
남해 푸른 물
김광규
창밖으로 남해의 푸른
물 보인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에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햇빛
가끔 큰 화물선이 지나간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노래
바람에 실려 바닷가 외딴 방
창문을 넘나든다
바다가 잔잔한 날은
영원이 어떤 색깔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누워서 물을 바라보는 위안이
진통제처럼 편안할 때도 있다
낯선 간이역
김광규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간이역마다 서며가며
세 시간쯤 달려왔다
경지 정리가 안 된 먼 시골
논밭을 지나
난간 없는 다리를 건너
도룡뇽이 많이 산다는
산자락을 빙 돌아서
터널을 통과하니 저 아래
눈 덮인 계곡 한가운데
초라한 교회 종탑이 서 있는 마을
낯선 간이역에 도착했다
승하자 여해액도 별로 없고
멀리 산중턱에
조그만 암자가 보이는 곳
여기는 아무도 모를 것 같아
반세기를 이어온 인연 모두 끊어버리고
홀로 여생을 보내고 싶어지는 곳
여기서 내릴까
내려서 주저앉아 버릴까
망설이는 사이에 호각소리 울리고
기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츰 멀어지는 그곳
몇 번이고 되돌아보면서 나는
또다시 기회를 잃어버렸다
낯익은 구두
김광규
1301호 문앞에 오늘은
구두가 한 켤레 놓여 있다.
뒤축이 비뚜로 닳고
허옇게 코가 벅겨진
저 낡은 구두는 틀림없이
그가 신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젊었을 때
어렵게 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키웠을지도 모른다.
늙은 아내를 잃은 뒤
그는 억지로 시골을 떠나
아들집으로 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뉴타운 고층 아파트 구석방에서
죄진 듯 말없이 살게 되었다.
손주들은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고
며느리는 빨래를 하기 귀찮아하고
아들은 바빠서 만날 수도 없었다.
밤마다 텔레비젼을 끝날 때까지 보았다.
아침에는 뒷산에 올라가
지갑에 든 천원짜리를 세어보고
농협 저금통장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낮에는 13층 베란다에서
우리에 갇힌 여윈 동물처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승강기에서 누군가 만나면
얼른 눈길을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이 아파트에서 열 달쯤 살았을 것이다.
한 번도 인사를 나눈 적 없지만
낯익은 그의 구두가 오늘은
1301호 문 밖에 놓여 있다.
네 바퀴 굴림
김광규
힘차게 네 바퀴 모두 잘 돌아가도
달리지 못하는 자동차 많습니다
앞바퀴와 뒷바퀴
왼쪽 바퀴와 바른쪽 바퀴
저마다 다른 속도로 돌아가기 때문이지요
빨리 돈다고 기뻐할 것 없습니다
늦게 돈다고 슬퍼할 것 없습니다
방향을 바꿀 때가 아니라면
네 바퀴가 함께
속도 맞춰 돌아가야지요
앞으로 달리지 못한다면
돌아가는 바퀴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노동절
김광규
오늘은 주차장이 텅 비었다
관리인도 나오지 않았다
오일 자국으로 얼룩진 광장에
온종일 햇볕이 내리쪼이고
가끔 비둘기가 모이를 찾고
바람이 지나간다
일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널려진 물건들 하나도 없이
하늘 아래 비어 있는 땅
부당한 온갖 점거를 벗어나
잠시 제자리를 찾아
쉬고 있는 이 빈터를
오늘은 주차장이라고 부르지 말자
녹색 두리기둥
김광규
전깃줄 끊긴 채 자락길 어귀에
시멘트 기둥으로 홀로 남은 전신주
담쟁이덩굴이 엉켜 붙어
앞으로 옆으로 위로 퍼져 올라가
우뚝 솟은 녹색 두리기둥 만들어놓았네
폐기된 전신주 꼭대기
담쟁이 더 기어 올라갈 수 없는 곳
바람과 구름을 향해
아무리 덩굴손 허공으로 뻗쳐보아도
이제는 더 감고 올라갈
기둥도 나무도 담벼락도 없네
살아 있는 덩굴식물이 한자리에
그대로 소나무처럼 머물 수 없어
제 몸의 덩굴에 엉켜 붙어
되돌아 내려오네
온갖 나무들 드높이 자라 올라가는
저 푸른 하늘에 앞길이 막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 되돌아 내려오며
삶터 잘못 잡은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두리기둥 만들어놓았네
놀지 않고 쉬는 날
김광규
해가 바뀌는 신정과 정월 초하루 설날
떡국이나 끓여 먹고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연휴 동안 체중만 늘고
물가만 두 차례씩 오르니까
부처님 오신 날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확성기 없는 깊은 산
외딴 절 찾아가
혼자서 예불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가위 보름달만 밝고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귀성행렬로 전국 도로 막히고
하루 종일 고스톱 치는 꼴 보기 싫어
크리스마스 캐럴에 들뜬 성탄절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눈 오는 겨울밤 조용히 불 밝히고
밀린 책 혼자서 읽을 수 있도록
저만치 비켜 서서 혼자 바라보다가
여럿이 어울려 놀지 못한 날들
젊어지는 세상으로 흘러가버리고 이제는
혼자서 쉬는 날도 며칠 남지 않은 듯
누군가
김광규
누군가 종로의 버스 정류장을 없애버렸다
멀리서 호각을 불며 누군가
우리의 뒤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엿듣고
우리의 사랑을 엿보고
우리의 깊은 잠을 빼앗아갔다
단란한 가정을 사창굴처럼 뒤지고
애써 가꾼 꽃밭을 짓밟아 버렸다
누군가 우리의 맑은 하늘을 더럽히고
우리의 푸른 마을에 철조망을 치고
우리의 넓은 바다에 폐유를 쏟아 버렸다
우리의 진지한 모임을 방해하고
우리의 힘찬 발걸음을 가로막고
우리의 선량한 이웃을 잡아가고
누군가 우리의 등에 총을 겨누고 있다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목을 조이고
핏줄에 바람을 넣고
누군가 우리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큰 골에 칼을 꽂고
씌어지지 않은 글을 읽고 있다
멀리서 북을 치며 누군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고 있다
우리가 초대하지 않은 이 사람은 누군가
누군가를 위하여
김광규
예컨대 자기의 남편을 위하여
아들딸을 위하여
어버이와 형제자매를 위하여
또는 병든 마음과 헐벗은 몸을 위하여
쫒기는 사람들과 억눌린 이웃들을 위하여
오로지 남을 위하여 살면서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너무나 무심했던
당신이 갑자기 떠나갔다
당신의 웃음짓던 환한 모습
당신이 앉았던 풀밭의 움푹한 자리
당신이 쪼이던 가을 햇볕
당신이 부르던 정다운 목소리
모두 그대로 남겨놓은 채
혼자서 훌쩍 사라졌다
물이 되어 한강을 건너고
구름이 되어 북한산 연봉을 넘어서
서북쪽으로 날아가버렸다
어쩌면 몽고의 어느 초원에 풀을 눕히는
바람이 되었을 당신
또는 별이 되어 밤새도록
어두운 지붕들을 내려다볼 당신
아니면 안개가 되어
우리를 포근히 감싸줄 당신
당신을 나는 때때로 바라보기만 했는가
당싱을 우리는 그저 떠나보내기만 했는가
당신이 입던 옷을 정리하고
당신이 남긴 돈을 은행헤서 인출하고
당신이 오고 가던 길을 걸으며
당신이 언제가 다시 나타날 것만 같아
우리는 자꾸만 되돌아본다
한없이 당신을 그리워하며 이제야 우리는
조금씩 달라지려 하는가 저마다
말없이 당신을 닮아가려 하는가
누런 봉투의 기억
김광규
흔하디흔한 누런 봉투였지요
손때 묻고 귀퉁이가 해어진
그 누런 봉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육십 년 생애를 담아놓은 사진들
봉투째 쓰레기 더미로 사라진 것입니다
사오십 년 전의 또렷한 모습들
기억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입니다
컴퓨터에 저장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지 마십시오
클릭 한 번 잘못으로
몽땅 날아가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진이나 계약서나 값진 유물은
순식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가물가물 멀어져가지만
희미한 기억 속이 가장 안전하지요
누워있는 부처
김광규
꼭 무엇이 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종심(從心)의 나이에 이르러
아직도 되고 싶은 것 한 가지
있음을 깨달았다
한 팔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몸의
부처
나무도 짐승도 사람도 죽으면
어차피 땅 위에 쓰러질 것을
정신의 온갖 질곡 벗어나
살과 뼈와 터럭과 욕망 모두
떨쳐버리고
아무런 자세도 없이 편안하게
땅 위에 누워있는
부드러운 모습
와불(臥佛)을 볼 때마다
아직도 부처처럼 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
내 마음 부끄럽다
눈 내리는 날
김광규
오늘 하루는
눈을 닮아 눈 맑아져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날
혹시라도 죄지으면
사르르, 봄눈 녹듯
하나님보다 먼저
눈이 용서해 주는 날
홀로 산길 걷다가
부르는 이 없어도
자꾸 뒤돌아보네
걸음을 따라오는
검은 발자국
때 묻은 생의 뒤안길 덮어주려고
아직도 내리는
눈
느릿느릿
김광규
가끔 다람쥐가 쪼르르 달려가는
전나무숲 산책길을 가로질러
민달팽이 한 마리
기어간다
혼자서
가족도 없이
걸어잠글 창문이나
초인종 달린 대문은 물론
도대체 살면서 지켜야 할 아무런
집도 없이
그리고 안으로 뛰어들어가거나
밖으로 걸어나올
다리도 없이
보이지 않는 운명이 퍼져가는 그런 속도로
민달팽이 한 마리
몸으로 기어간다
눈을 눕힌 채
생각도 없이
느릿느릿
늙지 않는 화가
김광규
처음에는 샛노란 개나리색이나
연분홍 진달래색으로
캔버스를 칠하다가
슬며시 연녹색으로 바꾸고
짙푸른 녹색을 마구 문지르다가
싫증나면 얼룩덜룩 단풍색 물을 들이고
이 모든 색깔이 마음에 안 들면
화면을 온통 백색으로 칠해버리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새봄을 그리기 시작하는
늦깎이
김광규
우리는 우연히 형제로 태어나
병정놀이를 좋아하던 형은
훈장을 많이 탄 장군이 되었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나는
돌멩이에 페인트 칠하는 사병이 되었다
인생은 때로 그런 것이지
하지만 앞으로 달라질 거야
제대할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우리는 또한 남매로 태어나
인형처럼 똑똑하던 누나는
돈 많은 회장댁 사모님이 되었고
울기를 잘하던 나는
안경을 쓴 근로자가 되었다
인생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지
하지만 누구나 자기 길을 가는 거니까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결국 동포로 태어나
더러는 우리를 다스리는 관리가 되었고
개처럼 충실한 월급쟁이가 되었고
꽁치를 사들고 가는 아주머니가 되었고
더러는 우리 손으로 지은 감옥에 갇혔다
언제나 달라지며 그대로 있는
역사는 어차피 이긴 사람의 편
그러나 진 쪽의 수효는 항상 더 많았지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끝내서는 안 되겠다고
나는 요즘서야 생각한다.
늙은 마르크스
김광규
여보게 젊은 친구
역사란 그런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생각하듯 그렇게
변증법적으로 변모하는 것이 아니라네
문학도 그런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생각하듯 그렇게
논리적으로 변모하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는 젊어
아직은 몰라도 되네
그러나 역사와 문학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라고 깨달을 때쯤
자네는 고쳐 살 수
없는 나이에 이를 지도 모르지
여보게 젊은 친구
머리 속의 이데올로기는
가슴속의 사랑이 될 수 없다네
우리의 주장이 서로 달라도
제각기 자기 몫을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리고 이렇게 한 번 살고
죽어 버린 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우리는 죽어 과거가 되어도
역사는 언제나 현재로 남고
얽히고설킨 그 때의 삶을
문학은 정직하게 기록할 것이네
자기의 몸이 늙어가기 전에
여보게 젊은 친구
마음이 먼저 굳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게
늙은 소나무
김광규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 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둥을 싸 바르로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다른 자리에서
김광규
서재의 한구석
박새나 비둘기 소리 가끔 들려오는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언제나 앉아 있고 싶은 자리
바로 옆에 있건만
왜 밤낮 비워두나
운전석 뒷자리
잠깐 신문을 뒤적거리며
카세트 음악을 듣거나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곳
앉아서 기다리고 싶은 자리
바로 뒤에 있건만
왜 노상 겉옷만 싣고 다니나
가까운 곳 또는 먼 곳에
앉고 싶은 자리 놓아둔 채
다른 자리에서 왜
모두들 한세상을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나
달력
김광규
TV드라마는 말할 나위도 없고
꾸며낸 이야기가 모두 싫어졌다
억지로 만든 유행가처럼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글도 넌더리가 난다
차라리 골목길을 가득 채운
꼬마들의 시끄러운 다툼질과
참새들의 지저귐 또는
한밤중 개짖는 소리가 마음에 든다
가장 정직한 것은 벽에 걸린 달력이고
달밤
김광규
한가위 달빛 아래
유리창에 비치는 후박나무
그림자
보았나
가을바람에 가늘게 흔들리는 나무
가지와 잎사귀 들 수런거리는
소리
들어보았나
꼼짝 않고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이
혼자서
창문 앞에
앉아 있었나
아니면 나뭇잎들 사이로 들여다보는
달과
둘이서 한밤
새우고 있었나
달빛 어린 메밀밭을 거닐다
김광규
촘촘한 꽃들을 다 헤아릴 수 없어
하나의 꽃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달도 빛이고 꽃도 빛이기에
사람은
그림자가 되고
밤을 밝히는
눈빛이 있었습니다
적막 속의 적막
홀로 거닐어도 외롭지 않은
꽃 속으로 들어가는
환한 길
길 잃어 헤매어도
꽃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따스한 밤
달팽이의 사랑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 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 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당시의 유행
김광규
당시의 청소년 유행 가운데 하나는
새로 산 나이키 운동화
그 비싼 신발의 뒤축을 꾸부려
찍찍 끌고 다니는 거였다
블루진 바지의 무릎 위
10센티미터 부위를 일부러 찢어서
너덜너덜하게 입고 다니기도 했다
힙합 바지는 그 뒤에 등장했다
유행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어느새 그들이 오십대 초반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기도 했다
그 자녀들이 대학생 되어
홀태바지를 입고 다니며
스마트폰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정보의 속도는 믿을 수 없이 빨라지고
마음의 깊이는 점점 얕아지고
얼굴은 모두 어슷비슷해지고……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밤하늘 별자리를 찾던 시인들
이제는 인터넷 사전을 뒤지거나
몽골여행을 떠나고……
*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인용.
당신들의 용병
김광규
배불리 먹고
늘어지게 자고
비디오를 보거나
실내 수영을 즐기고
참으로 따분한 생활이다
30년이 훨씬 지나도록 이 땅에는
전쟁이 없었다
무료한 안정과 평화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차라리 외인부대 병사처럼
위통 벗어젖히고
기관단총 난사하면서
적진으로 달려 들어가
피를 뿜으며
거꾸러지고 싶다
대기업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갑종근로소득세 꼬박꼬박 내면서
지루하게 일생을 살아가느니
차라리 도시 게릴라처럼
명망가의 등을 칼로 찌르고
재벌의 딸을 납치하고
주유소에 불을 지르고
경찰과 헌병에게 쫓기다가
한강으로 뛰어내리고 싶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이 순수한 욕망
당신들은 모를 것이다
서울빌딩 주차장의 붉은 낙서를
누가 썼는지
끝내 모를 것이다
땡볕 아래 엎드려 온종일
논밭을 매는 당신들이여
졸음을 참아가면서 밤새워
기계를 돌리는 당신들이여
온종일 개혁 정책을 연구하고
밤새워 혁명전략을 토론하는
당신들이여
당신의 보드라운 손
김광규
광부 어부 농민 노동자 소매상인……
제 발로 모여든 수십만
청중을 열광시키고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의 원한을 업고
감옥살이까지 겪은 당신은
두려울 것 하나도 없다
가족의 생계 때문에 고심하고
바작이며 일하지 않아도 당신은
말과 글로 살아갈 수 있다
나무 한 그루 손수 심은 적 없지만
생명의 존엄을 역설하고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어 당신은
세상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다
별다른 직업도 없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당신의
손은 갓난아기보다도 곱다
굳은 못 박힌 두 손으로
당신의 보드라운 손
잡아본 사람은 깨닫는다
인생을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구나
삶의 새로운 길을 보여준 당신을
모두들 사상가라고 부른다
대원군의 늘그막
김광규
대원군*이 이순(耳順)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하루는 다섯 살짜리 손주가
제 엄마를 따라 이모네 다녀오더니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언제 하늘나라에 가느냐고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짐작이 갔다
진짜 대원군(大院君)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지만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이제는
노엽지 않은 나이라 태연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고 한다
하느님이 부르시면 곧
가족과 집과 땅과 자동차
모두 남겨놓고 맨몸으로
훨훨 날아 하늘로 갈 것이라고
*흥선 대원군(1820~1898)이 아니라, 어떤 친구의 별명임.
대장간의 유혹
김광규
제 손으로 만들지 않아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 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대추나무
김광규
바위가 그럴 수 있을까
쇠나 플라스틱이 그럴 수 있을까
수많은 손과 수많은 팔
모두 높다랗게 치켜든 채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 마음 벌거벗은 몸으로
겨우내 하늘을 향하여
꼼짝않고 서 있을 수 있을까
나무가 아니라면 정말
무엇이 그럴 수 있을까
겨울이 지쳐서 피해 간 뒤
온 세상 새싹과 꽃망울들
다투어 울긋불긋 돋아날 때도
변함없이 그대로 서 있다가
초여름 되어서야 갑자기 생각난 듯
윤나는 연록색 이파리들 돋아내고
벌보다 작은 꽃들 무수히 피워내고
앙징스런 열매들 가을내 빨갛게 익혀서
돌아가신 조상들 제사상에 올리고
늙어 병든 몸 낫게 할 수 있을까
대추나무가 아니라면 정말
무엇이 그럴 수 있을까
도다리를 먹으며
김광규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 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에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
독립문역
김광규
한 생애의 마지막 날처럼
바쁜 마음으로 그러나
되도록 크레디트 카드를 쓰지 않으면서
하루를 살고
어두운 지하철 층계를 내려간다
땅속을 달려가는 동안
비좁은 찻간에 끼여 서서
어깨를 비비대며
스포츠 신문을 읽는 얼굴들
검은 유리창에 가득하다
길었던 어제의 터널을 따라
오늘이 지나가고
내일은 몇 번째 역에 있는가
땅 위의 세상은 눈을 감아야 보인다
녹슨 드럼통 속으로 흐르는 하수
머리 위로 아스팔트를 걸어가는
천만 명의 발걸음
철근과 시멘트와 자동차들
갑자기 무너져 내리고
이 캄캄한 땅속에 묻혀
다시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아
도망치듯 전동문을 빠져 나온다
이제 오래된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밀린 빚을 빨리 갚아야지
대리석 계단을 황급히 올라와
서울 구치소 맞은쪽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며
돌아오지 않는 강
김광규
-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허튼소리 하지 말게
모름지기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타고
시대와 함께 흘러갈 줄 알아야지......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화국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변함없이 중심을 맴도는 인물들
그 친구 말고도 얼마나 많은가
시대와 함께 흘러가는 그 많은 동시대인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망연히 물가에서 바라보았다
도도한 물결을 타고 그들은 자랑스럽게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능숙하게
무자맥질하면서 순식간에
아득히 멀어져갔다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동사목
김광규
유달리 추웠던 지난겨울
영하 17도의 혹한을 비켜 갈 수 없어
뒷동산 언덕배기에 뿌리박은 채
꼿꼿이 서서 얼어 죽은 나무들
전기톱으로 잘라내는 소리
비명처럼 들린다
산 아래 첫 집 담 너머
우리 마당에도 누렇게 얼어 죽은
낙엽송과 단풍나무
한여름 녹음 속에 처연하게 숨 멎은
동사목(凍死木) 두 그루
살아있는 나무들만 바람에 수런거리고
마른 잎을 떨어버릴 수 있다는
수목의 유언에 귀 기울이며
말없는 미이라를 보듯
두고두고 바라보기만 할 뿐
동서남북
김광규
봄에는 연록색 물결 북쪽으로
북쪽으로 펴져 올라간다
철조망도 군사분계선도 거리낌 없이
북상한다
산맥을 넘고
들판을 지나서
진달래도 개나리도 월북한다
여름이면 뻐꾸기 노래 소리
개구리 우는 소리
어디서나 똑같다
가을에는 황금빛 물결 남쪽으로
남쪽으로 퍼져 내려온다
비무장 지대도 민통선도 거리낌 없이
남하한다
강을 건너고
계곡을 지나서
코스모스 단풍도 월남한다
겨울이면 시원한 동치미 맛
얼큰한 해장국 맛
어디서나 똑같다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온 세상을 하나로
하얗게 뒤덮는 눈보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때
김광규
남녘 들판에 곡식이 뜨겁게 익고
장대 같은 빗줄기 오랫동안 쏟아진 다음
남지나해의 회오리바람 세차게 불어와
여름내 흘린 땀과 곳곳에 쌓인 먼지
말끔히 씻어갈 때
앞산의 검푸른 숲이 짙은 숨결 뿜어내고
대추나무 우듬지에 한두 개
누르스름한 이파리 생겨날 때
광복절이 어느새 지나가고
며칠 안 남은 여름방학을
아이들이 아쉬워할 때
한낮의 여치 노래 소리보다
져녁의 귀뚜라미 울음 소리 더욱 커질 때
가을은 이미 곁에 와 있다
여름이라고 생각지 말자
아직도 늦여름이라고 고집하지 말자
이제는 무엇인가 거두어들일 때
떠난 뒤
김광규
나는 여러 번 출발도 해 보고
도착도 해 보았다 그리하여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짐을 꾸려 놓고
여권을 주머니 속에 넣고
일찍부터 준비는 해 왔지만
이렇게 도착할 수 없는 곳을 향하여
갑자기 출발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배웅을 해 주었다
웃으며 울며 손을 흔들고
또는 무관심하게 힐끗 바라보는
그들 가운데는 낯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모두 나의 동시대인임을
나는 떠나고 나서야 알았다
똑바로 걸어간 사람
김광규
단풍잎과 은행잎이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어느 오래된 절에서 그를 본 사람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서 사천왕문에 다다를 때까지 그는 직선을 그어놓고 그 위를 밟으며 가듯, 곧바로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리를 쩍 벌리고 여덟팔자 걸음을 걷는 관광객들 틈에서, 그는 준수한 사슴의 모습처럼 환하게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가 결코 직선으로 걷는 연습을 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지 않아도 그는 평생을 똑바로 걸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속임수도 에움길도 모르고 오로지 한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그는 그렇게 우리 곁을 지나갔다. 조금도 서둘지 않고 똑바로 걸어서 우리를 앞서더니, 어느새 까마득히 멀어지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말을 잃고, 홀린 듯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가 떠난 것을 너무 늦게 알았던 것이다.
나중에 어느 천주교 성지에서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걸어가는 그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다.
언젠가 갑자기 그와 마주치게 되지 않을지, 헛된 희망을 품고, 우리는 오늘도 그를 뒤따라가고 있다.
낙엽을 밟고 가는 그의 발소리나,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저 앞에서 들려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뒤쪽에서 곧바로 눈길을 걸어오는 젊은 목소리로 들려올지도 모른다
마중
김광규
연락도 소식도 감감하여
빈 가슴 속은
애간장이 타고
밤의 적막을 뚫고
행여 들릴지도모를
발자국 소리
귀는 늘
사립문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언제 돌아올까
가출한 막내를 기다리며
차마 외등을 끌 수 없는
늙은 어미의 뒤척이는 밤
눈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지만
마음은 백 리 천 리에
마중 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물음
김광규
전화기도
TV도
오디오 세트도
컴퓨터도
휴대폰도……
고장 나면
고쳐서 쓰기보다
버리고
새로 사라고 합니다
그것이 더 싸다고 합니다
사람도 요즘은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하더군요
우리의 가정도
도시도
일터도
나라도
이 세계도……그렇다면
고칠 수 없나요
버려야 하나요
하나뿐인 나 자신도
버리고
새로 살 수 있나요
막스 리버만 길
김광규
'겨울에는 가로 관리를 하지 않음'*
이 공지 사항은 이미 가을부터 유효하다
좁은 비탈길에
누렇게 물든 자작나무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자동차를 타고 이 길을
통행할 수는 없다
제각기 위험 부담을 안고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올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울 것이라 한다
미끄러운 이 길을
누구나 혼자서 걸어가야 한다
'겨울에는 가로 관리를 하지 않음'
이 공지 사항은 이미 가을부터 시작된다
만나고 싶은
김광규
모두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낯익은 얼굴들이다
내가 모르는 낯익은 사람들이 너무 많구나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어디였던가
병아리 떼 모이를 쪼으던 유치원 마당이었던가
솜사탕을 사먹던 시골 장터였던가
아카시아꽃 한참 핀 교정의 벤치였던가
불볕 아래 앉아 버티던 봉제 공장 옥상이었던가
눈물 흘리며 짐승처럼 쫓기던 봄날의 광장이었던가
술 내기 바둑을 두던 숙직실 골방이었던가
간첩을 뒤쫓으며 헐떡이던 산마루였던가
친구를 기다리던 새벽의 구치소 앞이었던가
두부 장수 지나가던 골목길 여관방이었던가
줄담배를 피우던 산부인과 복도였던가
마늘을 싣고 도부치던 아파트촌이었던가
부가가치세 신고를 하던 세무소였던가
민방위 교육을 받던 변두리 극장이었던가
흰 봉투를 건네주던 다방의 구석 자리였던가
비행기를 갈아타던 어느 공항 대합실이었던가
고인을 추모하며 밤새우던 초상집이었던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모두가 거짓된 기억 헛된 착각이다
우리는 부딫쳤을 뿐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는 낯선 사람들이 너무 적구나
매미가 없던 날
김광규
감나무에서 노래하던 매미 한 마리
날아가다 갑자기 공중에서 멈추었다
아하 거미줄이 쳐 있었구나
추녀 끝에 숨어 있던 거미가
몸부림치는 매미를 단숨에 묶어버렸다
양심이나 이념 같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후회나 변명도 쓸데없었다
일곱 해 동안 다듬어온
매미의 아름다운 목청은
겨우 이레 만에
거미밥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걸리면 그만이다
매미들은 노래를 멈추고
날지도 않았다
유달리 무덥고 긴 여름이었다
메아리
김광규
보이지 않는 소리의 기억을
그 화가는 아홉 번이나 그렸다
반세기 전의 메아리가
점과 선과 면으로 바뀌어 이렇게
한 폭의 그림으로 되울려 온 것
오랜 세월 지났어도 갓 칠한 듯
페인트 냄새 풍기며
최신작처럼 환하게 빛나는 유채화
밝은 화면의 한가운데 금방
화필을 잘못 떨어뜨린 듯
의도적 결점까지 남긴 수화의 솜씨
러닝셔츠 바람으로 땀 흘리며 그린
메아리의 흔적이
지난번 경매에 출품되어
30억 5천만 원을 호가했다
보름달보다 둥글고
백자보다 희고
두루미보다 높이 날아오르는
그림의 메아리
모르지요
김광규
구름 없는 밤하늘
한가운데 환하게 떠 있는
둥그런 보름달보다
소나무 밤나무 감나무 가지들 헤치고
나뭇잎 사이로 수줍게 발돋움하는
초승달 일그러진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
모르지요
목발이 김씨
김광규
지하 5층
지상 30층
연건평 35,000평
서울빌딩 기초 공사 때
김씨는 막일을 했다
현기증나는 비계를 오르내리며
자갈을 져 나르고
미장을 돕고
타일을 붙이고
창틀을 달았다
서울빌딩 주춧돌 밑에는
김씨의 고된 인생이 3년쯤
깔려 있고
하늘로 꼬여 올라간
아찔한 비상 계단 어디엔가
김씨의 잃어버린 왼쪽 다리
걸려 있다
안전모를 착용한 덕분에
그래도 목숨은 건져
몸의 소리
김광규
몸을 전혀 못 느끼고
내 몸이 있는 줄도 모르면서 오래
살아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어금니가 욱씬거리고
눈앞이 흐려지고
속골치가 아파지면서
참을 수 없이 기침이 터져 나오고
바른쪽 늑골이 뜨끔거리고
왼쪽 허리가 결리고
팔다리마저 쑤셔대서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괴질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다양한 삶의 증세지요
정신이 멀어져가는 자리에
몸뚱이 혼자 주저앉아 조금씩
안으로부터 무너지는 소리
송도음(松濤音)처럼
나의 귀에 들려옵니다
묘비명(墓碑銘)
김광규
한 줄의 시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물기
김광규
1
메미른 4월의 도시에 비가 옵니다
목 타게 기다리던 가로수들
시원하게 씻겨주고
아스팔트 보도와 골목길 곳곳에
스며들지 못하는 물이
고입니다 진창을 튀기며 뛰어가는 개구쟁이
크레파스 뺨에 묻은 손주 데리고
조개껍데기 물놀이 하는 할머니
세월이 물들인 흰머리
인간은 시를 쓰는 동물이라고 언젠가
용기 있게 발언한 선배이기도 하지요
화려한 옛날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장작불의 마지막 불꽃이 타오를 때까지
탁탁 튀어오르는 나무 속 물기
마른 버섯처럼 쪼글쪼글한 얼굴
아직도 티 없는 함박웃음 터뜨리는
눈꼬리에 물기가 번집니다
몸으로 스벼들어 마음 적시고
연녹색으로 환하게 빛나는 물기
물은 자꾸만 퍼내야 고입니다
2
생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가 떠난 뒤 그러나
조그만 두 눈에서
웬 눈물이 이처럼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지
비방과 욕설과 고함 쏟아내던
그 험한 입들 온통 일그러지며
웬 울음 이처럼 억누를 수 없이
터져 나오는지
눈 감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혼자서 기도할 수도 없어
수십만 인파가 조용히 모여들었다
실핏줄 깊숙이 스며들어
가슴 속으로 하염없이 번지는
눈물과 울음
아낌없이 그가 나누어 주고 간
사랑의 물기
아닐까
물길
김광규
언젠가 왔던 길을 누가
물보다 잘 기억하겠나
아무리 재주껏 가리고
깊숙이 숨겨놓아도
물은
어김없이 찾아와
자기의 몸을 담아보고
자기의 깊이를 주장하느니
여보게
억지로 막으려 하지 말게
제 가는 대로 꾸불꾸불 넓고 깊게
물길 터주면
고인 곳마다 시원하고
흐를 때는 아름다운 것을
물과 함께 아니라면 어떻게
먼 길을 갈 수 있겠나
누가 혼자 살 수 있겠나
물뫼의 집
김광규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물뫼의 집
검은색 현무암 화산석으로
얼기설기 쌓아놓은 돌담
옛날 그대로 있네 제주도
바람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돌담
돌멩이 사이로 숭숭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이라네
사람들 사이도 이와 같아서
두고두고 만나볼 때마다
반갑고 즐거운 마음
바다처럼 가득하고 푸근하네
파도처럼 끝없이 몰려오네
물오리
김광규
수직이 아니면서도
가장 곧게 자라는 나무
전기를 일으키지 않는
그 위안의 나뭇가지에
결코 앉지 않는
거룩한 새
오리는 눕거나 일어서지 않는다
겨울 강 물 위를 부드럽게 떠돌며
단순한 몸짓 되풀이할 뿐
복잡한 아무 관습도 익히지 않는다
눈 덮인 얼음 속에 가끔
물의 발자국 남기고
지진이 나면 돌개바람 타고
하늘로 날아 오르며
죽음의 땅 위에 화석이 될
마지막 그림자 던지는
완벽한 새
오리가 날아왔다가
되돌아가는 곳
그곳으로부터 나는 너무 멀어졌다
기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고
비행기로 바다를 건너
나는 아무래도 너무 멀리 와
이제는 아득한 지평을 넘어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무심하게 날개치며 돌아가는
오리는 얼마나 행복하랴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애써 배운 모든 언어를
괴롭게 신음하며 잊어야 한다
얻을 때보다 훨씬 힘들게
모든 지식을 하나씩 잃어야 한다
일어서도 또 일어서고 싶고
누워도 또 눕고 싶은
안타까운 몸부림도 헛되이
마침내는 혼자서 떠나야 할 것이다
날다가 죽어 털썩 떨어지는
오리는 얼마나 부러운 삶이랴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곳
그 먼 곳을 유유히 넘나드는
축복받은 새
나는 때때로 오리가 되고 싶다
미끄럼
김광규
달동네 놀이터에서
코흘리개 꼬마들
미끄럼타기 바쁘다
미끄럼틀 계단을 종종종종 올라가
쭈룩 미끄러져 내려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지 엉덩이가 해지도록
미끄럼탄다
너희들 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오느냐
아무도 묻지 않는다
머나먼 알프스 높고 높은 마터호른
근처까지 올라와서
눈부시게 하얀 빙하의 벌판
거침없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온 세상 곳곳에서 몰려든 스키어들
개미보다도 훨씬 작아 보이는
형형색색 장난꾸러기들
솟아오른 아버지의 드넓은 가슴팍에서
흐르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겨드랑이에서
가파른 눈 언덕 아래로
겁도 없이 미끄럼 탄다
당신들 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요
묻지 않는다
바람둥이
김광규
봄볕의 따스한 손길
닿는 곳마다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산수유와 목련
개나리와 진달래
꽃망울 터뜨리고
게으른 모과나무 가지에도
새싹들 뾰족뾰족 돋아난다
아직도 깊은 잠에 빠진
능소화와 대추나무
마구 흔들어 깨우려는 듯
횡단보도 아랑곳없이 한길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봄바람 맞아
벽돌 담벼락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
움찔움찔 몸을 비꼰다
바로 그런 사람
김광규
맞아
방금 떠올랐던 생각
귓전을 스쳐 간 소리
혀끝에 감돌던 한 마디
그것이 과연 무엇이던가
그래
그것이 맞아
틀림없어
참으로 기막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을 뭐라고 해야 할지
달리 바꾸어 말할 수도 없고
글로 옮겨 쓸 수도 없는
바로
그것을
어떻게 되살려낼까
궁리하다가 평생을 보낸 사람
반달곰에게
김광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창조도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태초에 원인이 있었고
뒤이어 결과가 따랐다
그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고
그 원인은 다시 결과를 낳았다
오래된 원인과 결과가
새로운 원인과 결과로 뒤바뀌며
마침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는 오늘의 원인이고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며
오늘은 내일의 원인이고
내일은 오늘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원인과 결과를 끊으려는 미련한 곰아
새로운 원인을 오래된 결과라 부르고
오래된 결과를 새로운 원인이라 부르며
원인 없는 결과를 만들려 하지 마라
때로는 죽음도 하나의 원인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밤눈
김광규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밤꽃 향기
김광규
술잔처럼 오목하거나
접시처럼 동그랗지 않고
양물처럼 길쭉한 꼴로
밤낮없이 허옇게 뿜어내는
밤꽃 향기
쓰러진 초가집 감돌면서
떠난 이들의 그리움 풍겨줍니다
대를 물려 이 집에 살아온
참새들
깨어진 물동이에 내려앉아
고인 빗물에 목을 축이고
멀리서 고속철도 교각을 세우는
크레인과 쇠기둥 박는 소리에 놀라
추녀 끝으로 포르르 날아오릅니다
참새들이 맡을 수 있을까요
아까운 밤꽃 향기
백설기를 만들기로 했어요
김광규
마음만 먹으면
온달이 될 것 같은
여차하면 눈썹달로 변할 것만 같은
그런 반달이 떠 있는 밤
귀를 간지럽히는 감언이설처럼
이 맛 저 맛으로 혀를 헷갈리게 하며
내 편 네 편 가르는
달을 닮은 송편은 싫어요
자르르 기름 도는
찰진 표면
그 안에 무엇을 감추었을지 모르는
그런 떡과는 다른
백설기를 만들기로 했어요
겉과 속이 한결같은
무던한 당신이듯
떡 위에
고명 하나 얹어 놓지 않은
순백의 떡을
버스를 탄 사람들
김광규
책을 든 젊은이들에게서
최루탄 냄새가 난다
대학가를 지나갈 때면
버스를 탄 사람들은
눈을 비비고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흘리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들도 옛날에 학교에 다녔다
병역을 필하고
세금을 납부하고
자식들을 기르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은 평범한 시민들이다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것을
그들도 좋아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각형처럼 모난 꼴을
자연스럽게 여길 수 없는
그들은 때묻은 어른들일 뿐이다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고
최루탄을 쏘아대는 틈바구니로
입을 손수건으로 막은 채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
그들은 실없는 구경꾼이나
무관심한 행인이 아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낯익은
그들은 결국 누구인가.
법고(法鼓) 소리
김광규
하필이면 쇠가죽으로 만들었나
부처님 앞 법고
아침저녁 서녘 산에서 들려오는
둥 둥 둥 외로운 북소리
평생의 구업(口業) 갚을 길 없는
울음일까 아니면
묵언 공양일까
오늘도 가슴 깊이 울려오는
황갈색 법고 소리
보리수가 갑자기
김광규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운 한낮
대웅전 앞뜰에서 삼백 년을 살아온 나무
엄청나게 큰 보리수가 갑자기
움찔한다
까치 한 마리가 날아들어
어디를 건드린 듯
숨겨진 급소가 없다면
벗어나야 할 삶이 있을까
봄놀이
김광규
아스팔트 길에서 골목길로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 들어간다
전봇대 옆길에서 한길로
고양이 새끼들처럼 후다닥
뛰어나온다
조그만 자전거를 한 대씩 타고
자동차들 사이로 쏙쏙
누비고 다니며
아슬아슬하게 숨바꼭질 벌인다
마을버스를 급정거시키고
두부 장수 오토바이와 하마터면
정면 충돌을 할 뻔한다
발갗게 얼굴이 상기된 꼬마들
온갖 걱정 아랑곳없이
어른들의 노곤한 발걸음 사이로
바람처럼 빠져가는 개구쟁이들
그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뒤돌아보며 앞을 내다보며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살아갈 필요도 없이 그들은
온몸으로 놀고 있는 봄이다
불혹(不惑)
김광규
나는 의사가 아니다
청진기를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웬일일까
요새는 낯 모르는 사내가
가슴 속의 시뻘건
허파로 숨 쉬는 것이 보이고
지나가는 여자의 몸
속에 들은 내장이 보인다
어떤 사람은 얼굴을
뱃속에 넣고 다니고
어떤 사람은 튼튼한 아랫배를
얼굴 대신 내놓고 다닌다
얼굴을 옷 밖으로
내놓는 것도 이제는
유행에 뒤떨어진 것일까
몸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뒤이어
몸에서 힘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마침내
몸이 얼굴에 달려 잇지 않음을
깨닫는다
비 맞이
김광규
깃털 하나 적시지 않고
비둘기처럼 빗속을 날아가고 싶으냐
물방울 하나 묻히지 않고
연못을 떠도는 오리가 부러우냐
창 밖을 바라보는 사람들아
하늘에서
현기증나게 떨어지는 빗방울들
추녀 밑으로 살짝 비켜서고
까마득한 공중에서
수직으로 쏟아져내리는 빗줄기
우산 한 개로 막으면서
옷자락 하나 적시지 않고
땅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아.
빈집
김광규
아버지는 이미 30년 전에 작고하셨고
어머니 혼자 여생을 살다가 돌아가신 집
허물어져 가는 시골집
추녀 아래 깨진 물독 하나
모두들 도시로 떠나버려 이제는
팔아버릴 수도 없는 집
아무도 살지 않지만
흉가처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
양철 지붕을 얹었다
거주하는 사람 없어도
재산세는 해마다 꼬박꼬박 나온다
본의 아니게 집 두 채 가진 죄인으로
늙어가는 고아의 가슴 한구석에서
짚불처럼 사그러지는 집
빨래 널린 집
김광규
산책길 옆에 퇴락한 기와집
오늘도 비어 있는 듯
마당과 옥상에 널어놓은
얼룩덜룩 빨래들
늘어난 셔츠와 해어진 바지
빛바랜 바지와 꼬마 팬티
크고 작은 양말들이
가끔 바람에 흔들리며
빈집을 지키고 있다
주인은 어디서 고단한 하루를 견디는지
야들은 어느 아가 방에 맡겨 놓았는지
낮에는 알 수 없지만
저녁때는 단촐한 식구들
모여서 살고 있는 듯
빨리 먼저 앞질러
김광규
신문 기사와 TV 뉴스는 모두 지나간 이야기
팩스로 전하는 소식은 너무 늦고
안테나에 잡히는 전파도 믿을 수 없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남보다 빨리 알아내서
먼저 뛰어야 한다
묻기 전에 대답을 준비하고
살았을 때 묘지를 마련해야 한다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야
살아남는다
빨리 먼저 앞질러 달려가서 그러나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냐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가도 결국
먼저 죽는 자가
일찍 도착하지 않겠느냐
뺄셈
김광규
덧셈은 끝났다
밥과 잠을 줄이고
뺄셈을 시작해야 한다
남은 것이라곤
때묻은 문패와 해어진 옷가지
이것이 나의 모든 재산일까
돋보기 안경을 코에 걸치고
아직도 옛날 서류를 뒤적거리고
낡은 사전을 들추어 보는 것은
품위 없는 짓
찾았다가 잃어버리고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 또한
부질없는 일
이제는 정물처럼 창가에 앉아
바깥의 저녁을 바라보면서
뺄셈을 한다
혹시 모자라지 않을까
그래도 무엇인가 남을까
뿌리의 기억
김광규
땅속이 캄캄해 너무나
답답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저 굵은 소나무 뿌리들
슬며시 땅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을까 처음 보는 햇빛
눈부셔 움찔 멈추는 순간 그대로
우불꾸불 굳어버렸을까 아니면
땅 밖으로 가출한 뿌리들
땅속으로 다시 불러들이기를
저 늙은 소나무가 잊어버린 것일까
등산객들에게 밟혀 반들반들
닳아버린 소나무 뿌리들
땅 위의 가벼움 참을 수 없어
끝내 땅속으로 되돌아가버린
뿌리들의 사춘기가 잠깐 땅 위의
기억으로 남은 듯
사골
김광규
수십 년 전의 히트곡 하나를
오늘도 불러대는 가수처럼
어머니는 자꾸만 사골을 우려내셨지요
다친 소를 잡는다는 소식을 듣고
먼 동네까지 걸어가 한밤중에 이고 온
살점 한 덩어리 붙지 않은
무거운 소 다리
밤낮으로 장작불을 붉게 지피던 열흘 동안
입곱 식구의 핏기 없는 얼굴에
모처름 번지레 흐르던 개기름
저마다의 사발에
몇 번씩이나 퍼담았지만
일용한 양식은 메마르지 않았지요
도대체 몇 바가지의 물을 부었나요
모유같이 진한 뼈 국물이
희멀겋게 될 때까지
가마솥 국물 속에 가라앉은 허물어진 뼈가
어쩌면 자신의 닳고 닳은
연골을 닮았다는 것도 모른 채
사랑니
김광규
귀찮은 것
빼어버리지
충치만 생기고
어금니를 괴롭히는
사랑니는 빼어버려
철이 들면 무엇해
씹지도 못하는 걸
( 의사의 말은 언제나
의학적으로 옳다)
하지만 빼어버리는 것도
고치는 것일까
(겁 많은 환자에겐 으레
어리석은 고집이 있으니까)
잠 못 자게 괴롭히는
미운 이빨을 그래도
나는 버리지 않을 테야
비록 귀찮은 사랑니지만
내 몫의 아픔을 주는
내 몸의 일부인 것을
내가 아니면 누가
씹으며 지그시
참을 수 있겠어
간직할 수 있겠어
상행
김광규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를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새 문
김광규
일 년에 한 번쯤 한 사람이
드나들기 위하여
저렇게 커다란 정문을
한가운데 만들어놓고
열두 명의 수위가 밤낮으로 지킨다
'정문 사용 금지'
보통 사람은 절대로
드나들 수 없는
저 으리으리한 정문을 보아라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게 열려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닫혀 있다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기 위해서 있는
드나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로막기 위해서 있는
저것은 우리에게
문이 아니라
벽이다
우리를 가로막는
저 벽을
허물어뜨리자
아무도 밟지 못하게 하는
저 대리석 계단을
없애버리자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저 화강암 기둥을
뽑아버리자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저 육중한 쇠문을
부숴버리자
그리하여 없애버리자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저 큰 문을
없애버리고 차라리
거기에다 벽을
만들자
그리고 그 벽에다
새로 문을
만들자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그런 문을 만들자
생각과 사이
김광규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생각보다 짧았던 여름
김광규
샅바를 넓적다리에 걸고
힘겨루는 한마당 한복판에서
그는 한때 씨름꾼이었다
상대방을 모래판에 힘차게 팽개치고
호기롭게 외마디 고함지르던 그는
젊었을 때 이름난 승부사였다
환호 소리 진동하는 씨름판 등지고
혼자서 골목길로 사라지는 어제의
늙은 장사를 누가 알아보는가
지나간 봄은 아름다웠고
여름은 생각보다 짧았다 어느새
인적 없는 들판에 어둠이 내리는데
가을은 걸어서 간다 해도
다가오는 겨울은 어떻게 맞으리
서녘으로
김광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듯
하루는 나날이 그렇게 시작된다
눈부신 태양 떠오르지 않아도
이마는 맑게 빛나고
힘찬 일손은 오전을 짧게 한다
한낮의 보석은 눈이 부셔서 보이지 않고
천천히 차를 마실 시간은
중년이 지나서 온다
숨 막히게 쫓기고 뛰면서
기름 묻은 손으로
은행 마감 시간을 넘기면
플라타너스 그림자 주유소 앞을 가린다
또다시 하루 일 끝낸 뒤
한잔 술을 나누거나
혼자서 신문을 들여다보며
오늘도 어제처럼 살았음을
부끄러워할 때도 많다
하지만 저녁이 없다면 어떻게 살리
하루가 저물어 고단한 몸
깊은 잠에 빠지는
밤이 없으면 어떻게 살리
어둠의 끝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리
서서 잠든 나무
김광규
5층 연립주택보다 훨씬 높이 자란
가죽나무 올해는 여름내
싹트지 않고 꽃피지 않았다
나뭇잎 하나도 없이
검은 골격만 허공에 남긴 채
살기를 멈춰버린 것 같다
겨울보다도 앙상한 모습으로
숨이 멎어 버렸나
신록의 숲속에서 날아오는 텃새들
까치 까마귀 비둘기 직박구리
한 마리도 나뭇가지에 내려앉지 않는다
죽음의 뿌리 까맣게 땅속에 내린 채
뒷마당에 서서 잠든 가죽나무
동네 이웃들 지나가며 쳐다보지만
왜 죽었나 아무도 묻지 않는다
서서 죽는 나무
김광규
오래 가문 날씨 탓인가
여름내 대추나무 가지에
꽃 피지 않고
열매 맺지 않더니
가을 되어 갑자기 새순으로 돋아났다
낯선 이파리들 노랗게 피어나서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았다
(저것이 바로 나무의 암이라고
정원사는 진단했다)
머리도 없이
내장도 없이
몸 밖으로 암세포를 길러내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서서 죽는 나무
뿌리가 없어
쓰러져 죽는 무리들 썩도록 남겨놓고
혼자서 바싹 마른 채 열반하는가
서울에서 속초까지
김광규
서울에서 속초까지 장거리 운전을 할 때
그를 옆에 태운 채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려간 것은 잘못이었다
틈틈이 눈을 돌려 북한강과 설악산을 배경으로
그를 바라보아야 했을 것을
침묵은 결코 미덕이 아닌데...
긴 세월 함께 살면서도 그와
많은 이야기 나누지 못한 것은 잘못이었다
얼굴을 마주 쳐다보거나
별다른 말 주고받을 필요도 없이
속속들이 서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를 곧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여름 바닷가에서 물귀신 장난치고
첫눈 내린 날 살금살금 다가가서
눈 한 줌 목덜미에 쑤셔넣고 깔깔대던
순간들이 많았어야 한다
하다못해 찌개 맛이 너무 싱겁다고 음식 솜씨를 탓하고
월급이 적다고 구박이라도
서로 자주 했어야 한다
괜찮아 워낙 그런 거야 언제나
위안의 물기가 어린 눈웃음
밝은 목소리
부드러운 손길
포옹할 수 없는 기억
속으로 이제는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을.
석근이
김광규
여의도 지하철 공사장 지나다가
길이 막혀 철판 위에 서 있으려니
좌회전 우회로를 가리키는 늙은 인부 한 사람
거무튀튀한 얼굴과 귀에 익은 쉰 목소리
안전모 쓰고 노란 깃발 흔드는 모습
돌아보니 틀림 없는 석근이
국민학교 시절 닭쌈 잘하던 놈
돌처럼 무겁게 시골에 뿌리박고
농사꾼으로 한평생 살아온 친구
지난 가을 시제 때 말했었지
쌀농사 공들여 지어봤자
한 가마에 십이만오천 원
한 섬지기라야 별 것 아니여
겨우 먹고 살 수 있다 해도
아이들 가르치기는 힘들어......
고향의 담북장과 동치미 맛
쉰 살이 넘도록 지켜왔는데
넓은 멧갓과 적잖은 논밭 놀려둔 채
일단 오만 원의 일용 잡부가 되어
마침내 서울로 올라온 석근이
안전모와 작업복이 어색한 농부
성산동 가랑잎
김광규
어쩌다가 나뭇가지를 놓쳐 버린
아쉬운 몸짓으로
느릿느릿 떨어져 내려
과수원 모퉁이에서
천천히 땅으로 돌아갈 가랑잎들
오늘은 그 낙엽들이 돌풍에 휘말려
시커먼 아스팔트 위를 굴러다니며
구둣발에 짓밟히고
버스 바퀴에 치어
갈기갈기 찢겨진 채
쓰레기 소각장으로 운반된다
교통사고로 쓰러진 시인이
응급차에 실려서
시립병원 영안실로 가듯이
소리 없는 힘
김광규
설악산 울산바위 오른쪽으로 쳐다보며
동해바다로 달려가 하염없이
수평선 바라보는
눈에는 보는 힘이 있지
스마트폰 온종일 들여다보는
스몸비들이 갖지 못한
부드러운 힘이 있다네
악보도 읽을 줄 모르면서
토카타와 푸가 듣고 또 듣는
귀에는 듣는 힘이 있지
알아듣기 어려운 강연
끝까지 듣는 청중에게도 그 지겨움
견뎌내는 힘이 있다네
대하소설이나 그리스신화
또는 난해한 시집 끝까지 읽어내는
독자에게는 끈질긴 독파력이 있지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지
소액주주(少額株主)의 기도(祈禱)
김광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얼마 전에 고층 건물이 하나 쓰러졌습니다.
강철과 시멘트로 지은 79층, 그 튼튼한 건물이 그처럼 갑자기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재벌의 소유인지는 몰라도 도심에 우뚝 솟은 그 빌딩은 멀리 떨어진 우리 집에서 바라보아도 저것이 국력이거니 마음 든든했고, 언젠가 나도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면 저 꼭대기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가 오렌지 쥬스라도 한잔 마셔보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고층 건물이 쓰러진 것입니다.
더구나 그 건물이 우리 집 쪽을 향해 쓰러진 덕택으로 그 옥상에 설치되었던 용량 3,000t짜리 냉각탑이 멀리 날아와 우리 집에 떨어지며 순식간에 저의 가족과 재산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라 저는 슬퍼할 겨를도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 사실 앞에 저는 다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을 따름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선량한 시민이자 모범적 가장으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저의 이력서 및 신원조회 서류를 참조하면 아시겠지만 저는 여지껏 한 번도 이 사회의 법과 질서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효도했고, 스승을 존경했고, 국방의 의무를 다했으며, 처자식을 사랑했고, 세금을 언제나 기일 내에 납부했고, 신앙생활을 돈독히 했으며, 여유 있는 대로 저축을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석유가 쏟아져나오기를 남달리 속으로 기원했습니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요즘 와서는 코오피까지 끊었습니다. 물론 거액의 방위성금을 낼 처지는 못 되지만 그래도 육교를 오르내릴 때 계단에 엎드린 거지에게 10원짜리 한 개를 던지지 않고 지나간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졸지에 가족과 재산을 잃은 저는 천벌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과연 무슨 천벌을 받을 죄를 지었습니까.
하느님, 저에게 이성을 되돌려주시어 저로 하여금 올바르게 생각할 힘을 주옵소서. 잃어버린 저의 가족과 재산을 정당하게 슬퍼할 능력을 저에게 주옵소서. 그리고 계속하여 약속된 미래, 낙원의 땅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수박
김광규
작년 여름에도 그랬었다
매연 자욱한 버스정류장에서
테레사를 닮은 아주머니는 신문을 팔고
아이들은 고가도로 밑에서
런닝셔츠 바람으로 자전거를 탄다
생선 냄새 비릿한 서울시장 입구
딸기 아저씨 리어카에는
얼룩말이 낳은 알처럼
둥그런 수박들이 가득하다
골목길 막다른 집 홍제옥
과부댁은 자식들과 모여 앉아
커다란 수박을 단숨에 먹어치우고
다시 헛헛한 땀을 흘리며
개장국을 끓이기 시작한다
작년 이 무렵에도 그랬었다
새로운 여름은 오지 않고
밤에도 깊어지지 않고
변함없는 여름만 가버린다
네모난 수박이 나올 때까지
돌아갈 집도 없이
여름은 언제나 이럴 것인가
시론(詩論)
김광규
여름 한낮 땡볕 아래
텅 빈 광장을 무료하게 지나가다
문득 멈춰서는 한 마리 개의
귓전에 들려오는
또는 포도밭 언덕에
즐비한 시멘트 십자가를 타고
빛과 물로 싱그럽게 열리는
소리를
바닷속에 남기고 물고기들은
시체가 되어 어시장에서
말없이 우리를 바라본다
저 많은 물고기의 무연한 이름들
우리가 잠시 빌려 쓰는
이름이 아니라 약속이 아니라
한 마리 참새의 지저귐도 적을 수 없는
언제나 벗어던져 구겨진
언어는 불충족한
소리의 옷
받침을 주렁주렁 단 모국어들이
쓰기도 전에 닳아빠져도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아무런 축복도 기다리지 않고
다만 말하여질 수 없는
소리를 따라
바람의 자취를 쫓아
헛된 절망을 되풀이한다
시조새
김광규
아득한 옛날 이름없는 원시림에서
둔중한 꼬리를 끌고 다니던
공룡에게도 머리가 있었다
길이 없는 질펀한 소택지에서
배를 끌고 기어다니던
파충류에게도 꿈이 있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울부짖으며 헤매다가
앞발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매달리며 떨어지며 가까스로
나뭇가지 위에 기어올라가서
언덕 너머를 바라보기도 했다
멀고 높은 곳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늘로
날아 올라가 생명의 꿈을
화석에 남겼을 것인가
싫어
김광규
두 돌이 가까워오자 아기는
말을 시작한다
엄마
아빠
물 ...
강아지는 뭉뭉이
고양이는 야우니
그 다음에는
시여 ...
싫다는 말이다
벌써 싫으냐
심전도(心電圖)
김광규
가을바람을 타고
잠자리들 날아오른다
나뭇잎들 떨어져도
돌아갈 곳 없는
텃새들의 자지러진 울음 소리
서리가 내리고
날이 일찍 저문다
눈발이 흩날릴 때쯤
철새들의 노래도 그치고
겨울 산은 한밤이 되어
어둡고 답답하다
땅은 깊이 잠들어
해가 떠도 깨어나지 않는다
텃새들의 수다스런 지저귐이
다시 꽃을 피우면
산비둘기 울 때마다
마을이 조금씩 밝아지고
뻐꾸기와 꾀꼬리 노래할 때는
산이 온통 환해진다
쓰르라미와 풀벌레 소리
물처럼 쏟아지는
여름날 한낮이 되면
나무들의 힘찬 맥박에
땅이 두근거리고
가물거리는 기억 속으로
어제 본 나비가 날아온다
쓰레기
김광규
아파트 마을 재활용 쓰레기 터
신문지 뭉텅이와 찌그러진 포장지들 사이에
유럽에서 날아온 노란색 소포상자
예쁜 연하장과 함께 나뒹군다
외국의 눈 나리는 창가에서 써 보낸
외로운 필적이 몇 줄 삐져나와 있다
수취인은 선물만 받아 챙기고
나머지는 그대로 버렸구나
쓰레기 치는 사람들
김광규
당신들은 우리를 전혀 모른다
쓰레기치고 받은 돈으로
눈 오는 날은 소주 한잔 걸치고
적금 들어 3년 뒤
레어카 한 대 사서
엿장수나 고물 장수 차리는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래된 잡지나 헌 신문지
버리는 빈 병이나 쇠토막까지도
몇 푼의 강냉이로 바꿔 가고
저승의 골목길 지키고 서서
송장의 금니빨 노리는
그들과 우리는 전혀 다르다
세상의 모든 욕망 끝나버린 곳
돈이 죽어버린 쓰레기터에서
우리는 연탄재를 흙으로 돌려보낸다
주인 없는 신발짝과 피묻은 넝마
썩은 생선 가시와 찢어진 비닐 조각들
모두가 정답게 함께 어울려
바람에 흩날리고 비에 젖으며
고향으로 떠나가는 쓰레기터
이승의 마지막 벼랑에서
역겨운 땅 위의 냄새 모닥불로 태우는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르다
엿장수나 고물 장수 가위 소리에
한가한 봄날의 권태를 들고
되도록 쓰레기터를 멀리 피하여
은행으로 가는
교회로 가는
당신들은 우리를 전혀 모른다
쓸모없는 친구
김광규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것이 아니였다
애초에 무슨 용건이 있어서
만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빚 갚을 돈을 빌려주지도 못하고
승진 및 전보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아들딸 취직을 시켜주지도 못하고
오래 사귀어보았자 내가
별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는 오래전에 깨달았고
나도 그것을 오래전에 알아차렸다
그래도 내가 모른 척하는 것을
그도 오래전에 눈치챘을 것이다
만나면 그저 반가울 뿐
서로가 별로 쓸모없는 친구로
어느새 마흔다섯 해 우리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김광규
굳어 버린 껍질을 뚫고
따끔따끔 나뭇잎들 돋아나고
진달래꽃 피어나는 아픔
성난 함성이 되어
땅을 흔들던 날
앞장서서 달려가던
그는 적선동에서 쓰러졌다
도시락과 사전이 불룩한
책가방을 옆에 낀 채
그 환한 웃음과
싱그러운 몸짓 빼앗기고
아스팔트에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그는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무러가라 외치던 그날부터
그는 영원히 젊은 사자가
되어
본관 앞 잔디밭에서
사납게 울부짖고
분수가 되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멋적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와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어느새
중년의 월급장이가 된
오늘도
그는 늙지 않는 대학
초년생으로 남아
부지런히 강의를 듣고
진지한 토론에 열중하고
날렵하게 볼을 ㅉ는다
굽힘없이 진리를 따르는
자랑스런 후배
온몸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아들이 되어
우리의 잃어버린 이상을
새롭게 가꿔가는
그의 힘찬 모습을 보라
그렇다
적선동에서 쓰러진 그날부터
그는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
우리의 앞장을 서서
달려가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별명
김광규
아빠는 왜 어른이 되어서도 노상
책상에 꾸부리고 앉아 있느냐고
고딩 아들놈이 면박을 주었다 그 당시
대입시험 준비에 찌들었던 이 녀석이
어느새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는데도
늙은 애비가 여전히 서재를 떠나지 못하고
책을 뒤적이거나 원고지 메꾸는 꼴 보더니
새로 나온 회전의자를 고희 선물로 사 주었다
이 의자를 편리하게 뒤로 젖히고 앉아
두 다리 쭉 뻗어 낡은 와인 상자에 올려놓으면
책 읽기 편할 뿐만 아니라
창밖의 오동나무 바라보기도 좋다
넓은 나뭇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듣다가 문득
두 발 받쳐주는 와인 상자가 고마워
내심 '지족'이라고 이름 붙여주었다
알 知, 발 足, 두 글자를 합친 이 별명을
아직 아무도 모른다
안개의 나라
김광규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게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야바위
김광규
동전은 다섯 개뿐
던지면
결과는 뻔하다
앞
아니면
뒤
그래도 속임수로
섞고
바꾸고
던지고
받고
순열과 조합 다 해봐도
달라질 수가 없어
돈을 대면
눈 깜짝할 사이에
물주가 먹어버린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동전은 다섯 개뿐
앞
아니면
뒤
달라진 것은 없다
누가 돈을 먹는가
그것밖에는
약수터 가는 길
김광규
내가 먼저 죽어야 마누라가 깨끗하게 치워주지 하지만 늙은 홀어미를 자식들이 얼마나 구박할까 마누라 병구완을 하고 무덤이라도 가꾸어주려면 그래도 내가 더 오래 살아야지 오늘따라 오르막길이 숨가쁘다 내가 먼저 세상을 떠야 영감이 나를 묻어주지 하지만 늙은 홀아비를 누가 곰살궂게 돌봐줄까 수의라도 제대로 입혀 보내고 제사를 챙겨주려면 그래도 내가 더 오래 살아야지
어느 가을날
김광규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골목길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동네 사람들이 탐내던
우리 집 감나무
큰 가지가 어느 가을날
뚝 부러졌다
주황색으로 익어 가는 그 탐스런
열매들의 무게 때문에
어느 돌의 태어남
김광규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도
돌이 있을까
아득한 옛날부터
홀로 있는 돌을 찾아
산으로 갔다
길도 없이 가파른 비탈
늙은 소나무 밑에
돌이 있었다
이끼가 두둑이 덮인
이 돌은 도데체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을까
2천 년일까 2만 년일까 2억 년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 없다면 이 돌은
지금부터
여기에
있다
내가 처음 본 순간
이 돌은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어느 지사(志士)의 전기(傳記)
김광규
관청에서는 그를 특이자(特異者)라고 불렀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길바닥에 쓰러진 이교도(異敎徒)를 보살펴 주었고, 젊었을 때는 교활하고 잔인한 강도범(强盜犯)을 옹호했으며, 나이가 들자 불온한 모임에 드나들며 지하운동(地下運動)을 벌였다.
세상은 언제나 난세(亂世)였다.
도저히 그는 편안하게 자고, 맛있게 먹고, 돈을 벌어 즐겁게 살 수가 없었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언제나 몸보다 마음을 앞세운 그는 수많은 일화(逸話)가 증명하듯 크고 높은 뜻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형대(死刑臺)에 올라가기 전에 성자(聖者)처럼 태연할 수 없었던 그는 담배 한 개비와 술 한 잔을 달라고 했단다.
그의 마지막 소원이 이뤄졌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자기의 몸과 헤어지게 된 순간 그는 큰 소리로 만세를 부르는 대신 연약한 인간이 되어 떨었던 것이다.
그의 지사(志士)답지 못한 최후(最後)가 나를 가장 감동시킨다.
어둠 속 걷기
김광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그들은 눈을 비비며 깨어나는 모양이다. 그들 가운데는 내가 아는 얼굴도 많다.
장악원장 할아버지는 거실 안락 의자에 앉아 근엄하게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누하동 할머니는 끊어진 전구를 양말 속에 넣고, 구멍 뚫린 뒤꿈치를 깁고 있다.
정치에서 손을 뗀 뒤부터, 아버지는 옛날 책력을 뒤적거리거나, 앞뜰 채마밭을 가꾸며 소일한다. 큰 항아리에서 바가지로 쌀을 떠내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직도 광 문 앞에 쓰러져 있다. 누님은 큰절을 되풀이하며, 자꾸만 지장보살을 되뇌인다.
시역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는 김구 선생과 교수형을 당한 죽산의 데드 마스크도 보인다. 사일구 때 죽은 친구들이 여전히 젊은 모습으로 왔다갔다 하고, 분신 자살한 투사들은 중화상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이처럼 한밤중에는 우리 집안이나 마당뿐만 아니라, 서울과 시골, 산과 들, 강과 바다가 온통 죽은 이들로 가득차 있어 이들을 피하여 발걸음을 옮기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가기는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어떤 죽음의 회고
김광규
까만 셔츠
하얀 바지에
외국 가수처럼 머리를 빗어 넘긴
그 친절한 젊은이들은
고개 위에 이르자 갑자기
흉포하게 나의 팔을 비틀고
시계와 지갑을 빼앗고
길바닥에 때려뉘었다
구둣발로 사정없이 짓밟다가
나의 가슴을 칼로 찌르고
골목길로 사라지는 그들
나의 아들 조카 형제 동포들
그들의 뒷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두 손으로 허공을 잡으며 나는
이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린 게의 죽음
김광규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어린 친권자
김광규
담요를 접어 만들어 준
제자리 마다하고
한사코 딸내미 방문 앞에서
엎드려 자는
열일곱 살
늙은 개
오늘도 의료 보험 해당되지 않는
동물병원에 다녀왔다
그래도 여전히 다리를 떨고
짖지도 못하며
하루 종일 잠만 자는
병든 개
어차피 모든 생명은
영생불사 할 수 없는데
몇 번씩 수술 받으면서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뱐려견도 앞으로는 세금을 낸다는데
아직도 연명치료 중단을 모르는
착한 딸내미
우리 집 늙은 개의
나이 어린 친권자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김광규
귀에 익은 목소리 들린 것 같아
뒤돌아보니 저기서 그가 손짓하네
- 오래간만이야
악수를 건네려고 반갑게 다가서보네
그러나 다가갈 수 없네
밀랍 인형처럼 한자리에 서 있는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네
하룻밤 사이에 생긴 간격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
안타깝게 마주 바라보지만 우리는
서로 육성으로 말할 수 없네
유현한 시공 속에 잠시 공존할 뿐
기억의 강물 건너편에 그는 바위처럼 서 있고
나는 혼자서 자맥질하며 떠내려가고 있네
가위 눌린 꿈도 아닌데 지금
가슴 답답하고 숨 막히는 이곳에서
어제의 그 모습과 아쉽게 헤어지네
얼굴과 거울
김광규
울퉁불퉁한 거울을 들여다보면
눈이 턱 아래로 내려가고
코가 눈 위로 올라가고
귀가 머리 위로 뿔처럼 솟아오르고
드라큘라처럼 송곳니가 뻐드러져 나온다
우리의 얼굴이 정말로 그렇게 생겼는가
아니면 이것은 거울이 잘못된 때문인가
눈이 턱 아래 붙어 있고
코가 눈 위에 달려 있고
귀가 머리 위에 뿔처럼 솟아 있고
송곳니가 뻐드러져 나온 드라큘라가
울퉁불퉁한 거울을 들여다보면
아주 반듯한 사람의 모습이 된다
드라큘라의 얼굴이 정말로 그렇게 생겼는가
아니면 이것은 거울이 잘못된 때문인가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소원이지만
사람에겐 사람의 모습을
드라큘라에겐 드라큘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을 갖고 싶다
얼음의 노래
김광규
물을 가둔 것은
저수지가 아니라 얼음이었네
출렁이는 마음을 잠잠하게 하려는
예견된 몸부림이었을까
물 위를 건너간 예수처럼
얼음 위를 걸어가네
제 한 몸으로
사랑 때문에 뜨거웠다가
미움 때문에 차가워 질 수도 있음을 알았네
핍박받는 자를 더욱 핍박하듯
몰아치는 바람
얼음판 아래 억눌린 생명들이
따스한 물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네
어딘가에 있을 숨구멍을 뚫어
숨통을 트이게 해야겠네
오늘의 이 혹한에
그대는 뜨거운 여름의 물을 길어
내게 부어야만 하네
마비된 내 몸이
스르르 녹을 무렵
영혼은 수증기로 가물대며
하늘로 올라가겠네
여름날
김광규
달리고 싶다
가시덤불 우거진 가파른 산비탈
기관총에 맞은 게릴라처럼
피를 뿜으며
굴르고 싶다
풀에 맺힌 이슬로 혀끝 적시고
새가 되어 계곡 깊숙이
날아내리고 싶다
넘어지고 싶다
몰려오는 파도에 채여
깎이지 않는 바닷가
한낮의 햇볕 아래 무릎 꿇고
마지막 땀방울까지
흘리고 싶다
바다 밑 깊은 골짜기에
그림자 드리우고
알몸으로 돌처럼
가라앉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끈끈한 어둠의 숨결
무더운 수액 출렁이는 숲속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싶다
쓰러져
잦아들어
땅속을 흐르고 싶다
여름에 일어난 사건
김광규
팔오금팽이가 짓무를 만큼 무더운 여름
매미와 여치조차 울기에 지친 날
수박 장수의 확성기 소리 시끄럽고
TV 화면에서는 브라질과 네덜란드 축구팀이
8강 진출을 다투던 순간
느닷없이 터진 특종 뉴스
한 해만 더 살았더라면 50년
새로운 기록을 세울 뻔했는데
사람은 결국 누구나 죽는구나
전방에 비상이 걸렸다 6.25
끔찍하게 길었던 그 여름을
전생이 겪은 젊은이들
조문을 가겠다 나서기도 했고
슈퍼마켓에서는 또 라면 사재기
그러나 주식값이 내린 것도 잠깐
별다른 일은 없었다
걱정했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태평양으로 여름 휴가 떠났던 사람들이
1인당 1억 6천 5백만 원씩
돈이 되어 유족의 품에 돌아온 것이
훨씬 큰 사건이었지
여섯 시
김광규
저녁 예불 종소리에
오늘이 저문다
가족과 함께 사는 세상
비좁은 집을 떠나
머리 깎고
깊은 산속
큰 집으로 들어와
속절없이 하루 또 하루
살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연기
김광규
들판에서 비스듬히 일어나
일제히 소리치고 싶은
풀잎들의 눈빛
수많은 잎새들 모두 떨구고
애써 기른 열매들 고스란히 남겨주고
몸마저 공양하는
나무들의 혼
보일락말락 가뿟하게 하늘로
날아올라
구름이 되고 싶은
땅의 기지개
흙의 그림자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
모두 잊어버리고
육신의 흔적마저 태워버리고
훨훨 이승을 떠나가는
마지막 몸짓
연의 미학
김광규
끊을 수 없는 연(緣)줄 같은
연(鳶)줄
지상에 남겨둔 애증
수많은 얼굴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을까
바람 부는 언덕
높은 곳이 두려워
야트막한 허공에 뒤뚱거리다가
곤두박질칠 때도 있었네
아득한 곳에 떠 있는
마음 조각 하나가
무거워 날지 못하는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있네
영산(靈山)
김광규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靈山)이었다.
영산(靈山)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영산(靈山)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靈山)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靈山)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靈山)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이미 낯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오늘
김광규
교회당의 차임벨 소리 우렁차게 울리면
나는 일어나 창문을 열고
상쾌하게 심호흡한다
새벽의 대기 속에 풍겨오는
배기가스의 향긋한 납 냄새
건강은 어차피 하느님의 섭리인 것을
수은처럼 하얀 콩나물국에 밥 말아 먹고
만원 버스에 실려 직장으로 가며
나는 언제나 오늘만을 사랑한다
오늘은 주택은행에 월부금을 내는 날
아침 아홉 시 계기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나는
매일 자라는 쇠 앞에 선다
문득 쇠 속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개구리 우는 소리
결코 잘못을 모르는 쇠가
나를 때때로 죄인으로 만든다
안전제일로 살아온 사십 평생을
어떻게 뉘우쳐야 할까
참회한다 나는 기도해야 한다
핏발선 눈에 두툼한 안경을 쓰고
오늘도 나는 쓰레기통을 뒤진다
담배꽁초와 구겨진 낙서
찌그러진 깡통 속에 들어 있을
음모를 찾기 위해
온종일 쓰레기통을 샅샅이 뒤진다
마침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
나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진다
음모가 없는 세상은 믿을 수 없는 것
연리 10%에 상환 기간 15년
원가 계산에 골몰하며 하루를 보내고
저녁때 나는 친구들을 만난다
오늘을 이기고 진 영리한 사내들이 모여
취하지 않기 위해 술 마시고
말하지 않기 위해 떠들어대고
통금 시간에 쫓겨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길 전봇대 옆에 먹은 것을 토하고
잠깐 소주처럼 맑은 눈물 흘리며
뿌옇게 빛나는 별을 바라본다
나무 없는 마을에 텔레비전이 끝나면
우리들은 저마다 개들에게 집을 맡기고
씩씩하게 코를 골며 남의 잠을 잔다
안타까운 몸짓으로 낮의 꿈을 꾼다
- 성난 표정이라도 좋다
노예들아 너희들의 얼굴을 보여다오
욕설이라도 좋다
노예들아 너희들의 목소리를 들려다오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봐라
너희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꿈속에 들려오는 귀에 익은 소리를
우리들은 잠에서 깰 때마다 잊는다
오래된 물음
김광규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으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길은 향기
볼품없는 밤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오른손이 아픈 날
김광규
시집 속으로
밤새도록 오른손이 아파서
엄지손가락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
설 상 차리는 데 오래 걸렸어요
섣달그믐날 시작해서
설날 오후에 떡국을 올리게 되었으니
한 해가 걸렸네요
엄마 그래도 괜찮지?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 시달려
이제는 손까지 못쓰게 된 노모가
외할머니 차례 상에 술잔 올리며
혼자서 중얼거리네)
눈물은 이미 말라버렸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 들려와
가슴 막히도록 슬퍼지는 때
오늘은 늙은 딸의 설날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였지
왼손잡이
김광규
남들은 모두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고
글씨 쓰고
방아쇠를 당기고
악수하는데
왜 너만 왼손잡이냐고
윽박지르지 마라 당신도
왼손에 시계를 차고
왼손에 전화 수화기를 들고
왼손에 턱을 고인 채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느냐
험한 길을 달려가는 버스 속에서
한 손으로 짐을 들고
또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어야 하듯
당신에게도 왼손이 필요하고
나에게도 오른손이 필요하다
거울을 들여다보아라
당신은 지금 왼손으로
면도를 하고 있고
나는 지금 오른손으로
빗질을 하고 있다
유령
김광규
쉿!
어둠 속을 달려가는
저 새카만 자동차를 보라
담배를 피우며 골목으로 사라지는
저 평복의 사나이를 보라
황폐한 땅 위에 번지는 기름 자국을
거리마다 널려진 쇳조각들을 보라
유령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당신들은 장님이다
숨쉴 때마다 가슴으로 스며들어
마침내는 우리를 질식시켜버릴 듯
흩날리는 먼지와 시멘트 가루 속에
유령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당신들은 귀머거리다
어느 깊은 물 속엔가 가라앉아 썩고 있는
저 시체들의 소리를 들어보라
굴뚝마다 피어올라 하늘을 가득 채우는
저 부서지는 몸뚱이의 소리를 들어보라
꽉 다문 입에서 끝내 나오지 않는 신음 소리를
나무 한 그루 없는 모래 벌판에 울려오는 저 구령 소리를 들어보라
쉿!
유무(有無)
김광규
그것은 멀리 지평선 위로 희미하게 떠돌기도 하고 아주 가까이서 나의 주위를 맴돌기도 했다.
나비처럼 너풀너풀 날다가 어깨 위에 내려앉고, 살그머니 손을 뻗치면 다람쥐처럼 재빨리 달아나고, 숨을 헐떡이며 쫓아가면 어느새 나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언젠가 그것이 내 곁에 온 것을 붙잡은 적이 있었다. 뱀처럼 차갑고 미끈미끈한 것이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꿈틀댔다. 씨름하듯 그것과 맞붙어 엎치락뒤치락했으나 끝내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몸통도 머리도 다리도 날개도 없고 또한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꾸만 나를 따라다녔고 나는 언제나 그것을 뒤쫓았다.
어쩌다 책방에서 마주치는 수도 있었지만 집어 보면 그것은 한 권의 책일 뿐이었다. 때로는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그것이 눈에 띄었으나 손에 잡힌 것은 생선이나 과일 또는 의복 따위였다. 한번은 그것이 단정한 중년의 사나이가 되어 걸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는데 그는 평범한 보험회사 사원이었다. 밤에도 환하게 빛나는 곳이 있어 달려가 보았더니 거기에는 24시간 가동하는 중화학공장이 있었다.
우연히 처음 와보는 어느 골목길에서 마침내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느낌이 드는 허름한 양옥집의 뒤쪽이었다. 반쯤 햇볕이 든 장독대 곁에 쓰다 버린 가구들이 널려져 있고 한 귀퉁이에 굴뚝이 비스듬히 서 있는 그것은 지저분한 풍경이었다.
골목길을 되돌아 나오며 나는 행인들과 자동차와 가로수와 담배 가게와 길가의 리어카에서 그것을 보고 놀랐다. 그것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모습 같았다.
그러나 손으로 붙잡으려면 그것은 여전히 아무 곳에도 없었다.
육포(肉脯)처럼
김광규
육즙은 어디로 증발했을까
생각이 생각을 우려내듯
질긴 고기를 씹어보네
겉으로는 가벼워보였지만
속으로는 오석烏石처럼 무거웠던 나날들
오장육부도 없이
납작하게 엎드려 살아온 나는
육포와 다를 바 없네
몸속에 잠긴 피와 물을 쏟고
뼈에 붙은 흰 살을 떼어 내어
이글거리는 태양 앞에 나아가네
젖은 몸을 말리며
조금은 죽어가는 내가
서서히 굳어만 가네
어디론가 바람에 실려 가는
비릿한 내음
은수저
김광규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이름
김광규
일찍이 내가 올랐던 산
건너온 강
몇 개 되지 않지만 그 이름들조차
모두 기억하지는 못한다
내가 모르는 산과 강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수많은 얕은 언덕과 짧은 물줄기
어딘가 적혀 있지 않아도
그 많은 이름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다
헤아릴 수 없구나
모르는 이름들
남들도 내 이름을 모른다
서로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누군가 어디서 이름 부르고
때로는 자기의 이름 제각기 쓰면서
곳곳에 살아 움직이고
더러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술 한 번 함께 마셨다고
절에 한번 같이 잤다고
그 이름을 유행 가수처럼 소리쳐
부를 수 있나
진실로 사랑하고 흠모하는 이를
강아지나 고양이 부르듯 그렇게
부를 수 있나
목청 높여 연호할 수 있나
가만히 입속으로 되뇌어보거나
가슴속에 간직한 채 혼자서
아껴야 할 이름
이사장에게 묻는 말
김광규
가슴 가득히 훈장을 단 당신은
담배를 피우며 회고했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는 아군이 아니면 적군이다
명령을 내리기 전에 당신이
파이프를 한 대 더 태웠더라면
오늘이 조금 달라졌을까
아침마다 승마를 하고
주말에는 골프를 치면서
요즘도 당신은 퇴역 사성 장군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적 아니면 동지라고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복덕방 김 영감은
적인가 동지인가
오너드라이버가 된 이 과장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미스 박은
도서관에 가득한 저 학생들은
과연 동지인가 적인가
공판장의 정 서방은
생산부의 최 기사는
거동이 수상한 저 청년들은
적인가 동지인가
거리에 정거장에 백화점에 넘치는
저 많은 사람들은
그리고 지금은 이사장이 된 당신 자신은
도대체 동지인가 적인가
이야기 들어줄 사람
김광규
어둠 속에 세차게 불어오던
시커먼 비바람 멈추고
동녘이 훤하게 밝아오자
밤새 숨죽이던 사람들
모두들 저마다 떠들어댔지
그는 혼자서 가만히 있었어
두려운 밤 함께 지새며
슬픈 일 억울한 일 가리지 않고
하찮은 이야기라도 귀담아
들어주며 고개 끄덕이고
빙긋이 웃어주던 사람
조용한 눈길과 낮은 목소리
큰 귀와 꾹 다문 입
낯익은 그의 얼굴 사라져버리고
부드러운 그의 손 잡을 수 없네
그와 닮은 사람들 어디에나 있지만
말없이 이야기 들어줄 사람
이제는 아무도 없네
일요일에도 자라는 나무
김광규
후박나무 밑으로 굴러온 감 한 개
저절로 땅속에 묻혀 싹 트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커지면서
담벼락보다 높게 자랐고 올해는
주황빛 열매 주렁주렁 매달렸다
온종일 살펴보아도 어느 틈에
줄기 굵어지고 잎 돋아나고
꽃 피고 열매 맺는지
자라나는 짧은 순간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추녀 끝보다 웃자란 후박나무가
아래서 올라오는 어린 감나무에게
슬며시 하늘 한 모퉁이 비켜주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쟁반보다 넓은 후박나무 잎에
접시보다 좁은 감나무 잎에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들 서로
어울려 빗소리 화음 내면서
귓가에 울려올 때까지
나무들의 아름다운 목금 소리
미처 듣지 못했다
비록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듯해도
어느새 10년 동안
사계절 밤낮 가리지 않고
주말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무성하게 자라나
일요일 아침마다 창밖에서 수런거리며
잠든 마음 흔들어 일깨워주는
우람한 갈잎 나무
풍성하고 믿음직한 그 모습
언제나 변함없이 보고 싶구나
일주문 앞
김광규
갈잎나무 이파리 다 떨어진 절길
일주문 앞
비닐 천막을 친 노점에서
젊은 스님이
꼬치 오뎅을 사 먹는다
귀영하는 사병처럼 서둘러
국물까지 후루룩 마신다
산 속에는 추위가 빨리 온다
겨울이 두렵지는 않지만
튼튼하고 힘이 있어야
참선도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비망록
김광규
여권과 지갑을 안주머니에 넣어둔 것은 그래도 천만다행이었다.
고속전철에 짐을 옮겨 싣는 이삼 분 사이에 가죽 서류 가방이 없어졌다. 경찰에 신고하느라고, 기차 두 대를 놓쳤다. 도난품 명세서를 작성하기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가방을 뒤적거리며 끄집어낼 물건들을 기억 속에서 찾아내려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험회사 손해사정 팀도 휴대품 목록을 요구했다.
품목과 수량은 그럭저럭 기입할 수 있었지만, 물품 가격과 구입 시기를 기억해내기는 힘들었다.
통째로 잃어버린 가죽서류가방과 싸구려 카메라 및 상비 약품은 비교적 최근에 산 것이라, 대략 비슷한 내용을 적어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상받을 수 없는 품목들이 사실은 더 많았다. 예컨대 일기장과 비망록, 사진 촬영 필름, 행사 계약서와 여행경비 증빙서류, 각종 수집 자료와 명함 모음 등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분실물이었다. 특히 자잘한 생활 일정이 담긴 탁상 캘린더, 관찰과 느낌과 단상의 토막들을 적어둔 비망록이 없어진 것은 내 생애의 일부가 잘려 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나는 잃어버린 다음에야 깨닫게 된 셈인가.
잊혀진 친구들
김광규
늦잠에서 깨어나 목욕하고 마시는 향긋한 코오피 맛을 그들도 잘 안다.
귀여운 꼬마들을 데리고 어린이 대공원에서 즐거운 일요일을 보낸 적도 있었다.
차가운 굴을 놓고 뜨거운 청주를 마시던 겨울 바닷가를 그들도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는 안부도 물을 수 없는 곳에 가 있는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많다.
어떤 친구는 용돈이 없어 담배를 끊었고, 어떤 친구는 홧김에 술만 더 늘었다.
섣불리 사업에 손을 댄 그는 전셋집까지 홀랑 날리고, 지난 가을부터 강남의 어느 복덕방에 나간다고 한다. 바둑은 많이 늘었지만 먹고 살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중이 되려고 했다가 간첩 혐의로 몰려 혼이 난 친구도 있다.
마누라가 선생 노릇을 하는 덕택에 아도르노를 번역하겠다고 집 속에 틀어박힌 그는 오랜만에 만나보니 맹꽁이처럼 배가 나왔다.
구두닦기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길가에 포장마차를 차리는 것도 보기와는 달리 아는 사람이 없으면 힘들단다.
이발소를 냈다가 실패하고, 월부책을 팔다가 때려치우고, 택시를 몰다가 사고를 내고, 마지막으로 장의사를 개업하겠다고 벼르던 그 친구는 국민학교 4학년짜리를 남겨놓은 채 간장염으로 죽고 말았다.
세상은 이성을 잃고 너무나 오랫동안 그들을 잊었다.
그리고 손끝에서 피 한 방울만 나도 파상풍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아서 신문에 난 호메이니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이란의 앞날을 걱정한다.
자라는 나무
김광규
실뿌리가 자라서
굵은 뿌리 되고
나무 밑동에서 조금씩
조금씩 줄기가 생겨 갈라지고
줄기에서 나뭇가지 퍼져나가
가지마다 수많은 이파리 돋아나고
마침내 하늘을 가리는
커다란 나무가 된다 보아라
땅으로부터 하늘을 향하여 나무는 위로
위로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위로
아래로 힘껏 온몸을 뻗으며
실처럼 가늘어지는 나뭇가지들
그 무수한 가지 끝마다
햇볕이 쌓이고
빗방울이 머물고
바람이 걸려 조금씩
조금씩 줄기를 기르고
밑동을 굵게 살찌우고
마침내 땅속으로 들어가
엄청나게 많은 뿌리로 갈라지며
넓고 깊게 퍼져나간다 보아라
하늘로부터 땅을 향하여 나무는 아래로
아래로 자라는 것이다
작은 꽃들
김광규
사방에서 터져 올라간 최루탄 가스
마침내 하늘의 코를 찔렀나보다
때아닌 태풍에 비바람 휘몰아쳐
탐스런 목련꽃들 모조리 떨어뜨리고
새로 심은 가로수 뿌리째 뽑아놓고
서울빌딩 간판까지 날려버렸다
갓 피어난 작은 꽃들 애처롭게
몽땅 떨어졌을 줄 알았는데
철늦은 꽃샘바람 지나간 뒤
길가의 개나리 눈부시게 노랗고
언덕 위의 진달래 활짝 피었다
빗속에 떨던 조그만 꽃이파리들
바람에 시달리던 가녀린 꽃줄기들
떨어져나간 간판 버팀쇠보다
오히려 굳세게 봄을 지키고 있구나
작은 사내들
김광규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가서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이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
마당에서 추녀 끝으로 나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졌다
그들은 이제 마스크를 쓴 채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
슬프지 않은 일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
속마음을 이야기 않고 서로들 성난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고
아무도 묻지 않는 의문은 생각하지 않을 줄 알고
미결감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다행함을 느낄 줄 알고
비가 오면 제각기 우산을 받고 골목길로 걸을 줄 알고
들판에서 춤추는 대신 술집에서 가성으로 노래 부를 줄 알고
사랑할 때도 비경제적인 기다란 애무를 절약할 줄 안다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저녁 길
김광규
날을 생각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요즘은 달리려 하지도 않는다
걷기조차 싫어 타려고 한다
(우리는 주로 버스나 전철에 실려다니는데)
타면 모두들 앉으려 한다
앉아서 졸며 기대려 한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돈벌이가 끝날 때마다
머리는 퇴화하고
온몸엔 비늘이 돋고
피는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눈을 반쯤 감은 채
익숙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간다
우리는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간다
파충류처럼 늪으로 간다
절벽 위에 서서
김광규
허무로 채워진
허공이 두려워
뒷걸음질 치는 곳
당신의 목소리는 안개에 젖어
들리지 않습니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도
서늘한 가슴
왜 무모한 질주 했는지
추궁받고 있습니다
홀로 외로운 자는
둘이 있어도 외로운 것처럼
절벽과 함께 있어도
혼자임을 알게 됩니다
생을 깊이 있게 살아온
사람 앞에 서면
이렇게 떨리는 것입니까
몸은 점점 소멸하여
마음은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수직 낙하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없어도
어두운 곳으로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김광규
네가 벌써 자동차를 가지게 되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네가 대견스러웠다.
면허증은 무엇이나 따두는 것이
좋다고 나도 여러 번 말했었지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 장수나 생선 장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값이 또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 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60km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조개의 깊이
김광규
결혼을 한 뒤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첫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도 물론 자기의 비밀을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렇잖아도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환멸을 짐짓 감추기 위하여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했지만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환멸은 납가루처럼 몸 속에 쌓이고, 하지 못한 말은 가슴 속에 암세포로 굳어졌다.
환멸은 어쩔 수 없어도, 말은 언제나 하고 싶었다. 누구에겐가 마음 속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이 발견되면 반가워서 밑줄을 긋기도 했고, 말보다 더 분명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의 입은 조개처럼 다물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끝없는 환멸 속에서 살다가 끝끝내 자기의 비밀을 간직한 채 그들은 죽었다. 그들이 침묵한 만큼 역사는 가려지고 진리는 숨겨진 셈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그들의 삶을 되풀이하면서 그 감춰진 깊이를 가늠해 보고, 이 세상은 한 번쯤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조심스럽게
김광규
조심스럽게 물어보아도 될까.....
역사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고
주먹을 부르쥐고 외치는 사람이
누구 앞에서 눈물 한번 흘린 적 없이
씩씩하고 튼튼한 사람이 하필이면
왜 시를 쓰려고 하는지......
아무런 부끄러움도 마음속에 간직하지 못한 채
언제 어디서나 마냥 떳떳하기만 한 사람이
과연 시를 쓸 수 있을지......
물어보아도 괜찮을까......
조화(造花)
김광규
아무렴 어떻습니까
꽃이면 됐지
시들지 않으리라는
헛되지 않은
그 맹세
진짜가 아니라는
당신의 진한 고백에도
가짜라고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젖은 내 맘속에 몰래 들어와
살아 있는 마른 꽃 하나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향기를 잃고도
향기로운 꽃 하나를
좀팽이처럼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끊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에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
김광규
CD에 담긴 오페라 아리아 대신
바로크 현악 되살리고 싶어
음악당 103호 입구에서
청중이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관상용 고무나무 한 그루
눈높이 같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지만
물기 없는 관엽식물 아랑곳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 대신
부드러운 귀를 가진 사람들
그 앞에 줄지어 서 있네
생김새와 옷차림 모두 다르지만
착하고 사랑스럽지 않은가
중년(中年)
김광규
낯선 도시에서
술 취한 저녁
부동산 업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오며 경적을 울렸다
나는 모른 척 걸어갔다
주유소 앞을 지나 비탈길을
자갈이 깔린 비탈길을
비틀대며 걸었던 것이다
어두움 피해
어느 사진관 입구
불빛 앞에 섰을 때
나는 안으로 들어갈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
그리하여 밤새도록 술 마시고
웩웩 토하고
해장국집을 나섰을 때
밤을 새운 가로등은 피곤해 보였고
부지런한 행인들은 더욱 낯설었다
냉수를 마시고
손을 씻고
어딘가 여름 풀밭에 누워
나도 여유 있는 웃음을 웃고 싶었다
중얼중얼
김광규
차렷!
한마디로 연대병력을 움직이고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여러분!
목쉰 부르짖음으로 군중을 열광시키고
사랑해 당신을
달콤한 속삭임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사로잡고
짜장면 하나에 짬뽕 둘!
경제 성장률 하향 조정! 임금 총액 동결!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자반 고등어나 먹갈치 사려!
저마다 목청 높여 부르짖는데
중얼중얼
혼자서 지껄이는 말
누가 들으려 하겠는가
어디를 가나 그래도 바람결에 실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 곳 없고
한평생 중얼거리는 사람 또한
없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중얼중얼중얼…………
지금 여기서
김광규
아무런 기억도 없이
어둠의 몸을 빌어 태어났다
그것은 부모의 바람일 수도 없고
자식의 선택도 아니며
동회에 신고할 사항도 못된다
어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밝은 세상에서 살고 싶을 뿐
재산도 부채도 상속받고 싶지 않다
세상이 어둡다면 밝히고
견딜 수 없이 컴컴하다면
환하게 바꾸어야 한다
뜻대로 바꿀 수 없으면
견디지 말고
그대로 익숙해지지 말고
느닷없이 목숨을 끊지도 말고
스스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헛된 희망을 가르치기보다
차라리 절망을 되풀이하면서
지금 여기서
몇 번이고 거듭 태어나
세상을 밝혀야 한다
다시 태어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기 전에
짬뽕이나 짜장면
김광규
중국집 식탁 한 귀퉁이에서
8백 원짜리 짬뽕으로
점심을 한 끼 때운다.
애꿎은 식초만 단무지에 듬뿍 치고
양파를 춘장에 찍어 먹으려니
오늘따라 한낮인데도 TV에
낯익은 얼굴들 보인다.
해삼 전복 갈매기살에
피망 죽순 송이버섯 곁들인
전가복을 시켜놓고 점심때에도
배갈을 마시면서 호탕하게
웃던 사람들
오늘은 청문회 증인으로 나와
심문하는 국회 의원들보다
더욱 당당하구나
저들 가운데 누군가 사라져버리고
새 얼굴이 나타나 그 자리를 채우고
그 얼굴이 다시 낯익어져도 나는
변함없이 이곳에 죽 수그리고 앉아
값싼 짜장면으로
점심을 때우면서
쿵후 비디오를 힐끔힐끔 쳐다보거나
간장 묻은 신문지 쪽을 들여다보겠지.
책 노래
김광규
혁명이란 위험한 짓
금지된 장난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라
일찌기 끔찍한 혁명이 없이
위대한 나라
새로운 시대가
탄생한 적 있는가
위대한 생각을
새로운 언어로
기록한 것이 훌륭한 책이라면
그것은 앞으로 역사를 이끌어 갈
머리의 힘
마음의 꿈이다
그러나 혁명을 일으킨 자들은
언제나 혁명을 가장 두려워하고
천성이 책을 좋아하지 않아
훌륭한 책을 읽는 대신
금지할 책을 골라낸다
그리하여 책을 금지한 자들은
생각과 느낌마저 금지하고
책을 불태운 자들은
마침내 사람마저 불태우고
결국은 스스로 파멸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라
금서(禁書)와 분서(焚書)는 혁명보다도
위험한 장난 아닌가
책 찾기
김광규
분명히 어딘가 잘 두었는데
찾을 수가 없다
세 시간이 넘도록 구석구석 뒤져보았으나
헛수고였다
누구에게 빌려주지도 않았는데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겨우 잃어버린 책을 찾는 데
이렇게 바쳐야 하다니……
지쳐서
의지 등판에 기댄 채 졸다가
눈을 떠보니
바로 눈 앞의 책상서가에
그 책이 비스듬히 꽂혀 있지 않은가
책 속의 진리처럼
처음 만나던 때
김광규
조금만 가까워져도 우리는
서로 말을 놓자고 합니다
멈칫거릴 사이도 없이
- 너는 그점이 틀렸단 말이야
- 야 돈 좀 꿔다우
- 개*끼 뒈지고 싶어
말이 거칠어질수록 우리는
친밀하게 느끼고 마침내
멱살을 잡고
싸우고
죽이기도 합니다
처음 만나 악수를 하고
경어로 인사를 나누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앞으로만 달려가면서
뒤돌아볼 줄 모른다면
구태여 인간일 필요가 없습니다
먹이를 향하여 시속 140km로 내닫는
표범이 훨씬 더 빠릅니다
서먹서먹하게 다가가
경어로 말을 걸었던 때로
처음 만나던 때로 우리는
가끔씩 되돌아가야 합니다
청단풍 한 그루
김광규
물 한 번 주지 않았다
타이어 고무줄로 뿌리를 칭칭
동여맨 채 바싹 말라버린
어린나무 한 그루
신축 건물 외벽과 시멘트 블록 담 사이
마른 땅에 되는대로 꽂아놓고
준공검사 끝나자마자
시공업자는 서둘러 철수했다
그리고 긴 가뭄
비 한 번 오지 않았다
봄이 되어도 꽃 필 줄 몰라
죽은 줄 알았다
목숨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이
4월이 가고
초여름
어느 날 갑자기
쌀알처럼 작은 꽃과 연녹색 잎
한꺼번에 돋아났다
강인하구나
좁은 땅에 한갓 나무로 태어났어도
광야의 꿈 키우며
제 몫의 삶 지켜가는
청단풍 한 그루
초록색 속도
김광규
이른 봄 어느 날인가
소리 없이 새싹 돋아나고
산수유 노란 꽃 움트고
목련 꽃망울 부풀며
연녹색 샘물이 솟아오릅니다
까닭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며
갑자기 바빠집니다
단숨에 온 땅을 물들이는
이 초록색 속도
빛보다 빠르지 않습니까
춘추(春秋)
김광규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치매 환자 돌보기
김광규
어려운 세월 악착같이 견뎌내며
여지껏 살아남아 병약해진 몸에
지저분한 세상 찌꺼기 좀 묻었겠지요
하지만 역겨운 냄새 풍긴다고
귀여운 아들딸들이 코를 막고
눈을 돌릴 수 있나요
척박했던 그 시절의 흑백
사진들 불태워버린다고
지난날이 사라지나요
그 고단한 어버이의 몸을 뚫고 태어나
지금은 디지털 지능 시대 빛의 속도를
누리는 자손들이 스스로 올라서 있는
나무가 병들어 말라죽는다고
그 밑동을 잘라버릴 수 있나요
맨손으로 벽을 타고 기어들어와
여태까지 함께 살아온
방바닥을 뚫고 마침내 땅속으로
돌아가려는 못생긴 뿌리의 고집을
치매 걸렸다고 짜증내면서
구박할 수 있나요
뽑아버릴 수 있나요
침묵 요금
김광규
엄마는?
(멀리 북유럽에서 동아시아로 들려오는 가까운 목소리)
엄마는 이제 전화를 받을 수 없다.
...
(아무 말도 없다고 쓰는 대신 점을 네 개 찍어서 원고지의 한 줄을 메꾸는 것은 작가적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매도한 문인도 있었다.)
...
그럼 엄마가?
그래,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믿을 수 없어.
...
아빠.
그래.
...
(0시 이후 45분 24초동안 아빠와 딸 사이에 오고 간 몇 마디의 짤막한 대화와 긴 침묵에 대하여 ₩27,849의 전화 요금이 부과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지구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침묵도 들려줄 수 있게 되었지만...)
크낙산의 마음
김광규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마음이 무거운 날은
편안한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크낙산 마루턱에 올라서면
세상은 온통 제멋대로
널려진 바위와 우거진 수풀
너울대는 굴참나뭇잎 사이로
살쾡이 한 마리 지나가고
썩은 나무 등걸 위에서
햇볕 쪼이는 도마뱀
땅과 하늘을 집삼아
몸만 가지고 넉넉히 살아가는
저 숱한 나무와 짐승들
해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꽃과 벌레들이 부러워
호기롭게 야호 외쳐보지만
산에는 주인이 없어
나그네 목소리만 되돌아올 뿐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도
깊은 골짜기에 내려가도
산에는 아무런 중심이 없어
어디서나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
여울에 섞여 흘러가고
짙푸른 숲의 냄새
서늘하게 피어오른다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을 수 없고
바위 틈에 엎드려 잠잘 수 없고
낙엽과 함께 썩어 버릴 수 없어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
남겨둔 채 떠난다 그리고
크낙산에서 돌아온 날은
이름 없는 작은 산이 되어
집에서 마을에서
다시 태어난다
타인과 나
김광규
타인이다 하지만
그들을 과연 남이라 할 수 있는가
바로 우리가 그들을 낳아서
길러오지 않았는가
지금도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자디잔 사랑 틈나는 대로 끊어버리고
따스한 기대도 모두 털어버리고
아득한 희망이나 말없이 간직해야만
그들은 비로소 남이 아니다
마음속의 이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희망마저 버린다면 그들은
바로 우리다
톱니는 돌고 돌아
김광규
입술을 잃고 말았다
감미로운 입맞춤을 되뇌며
톱날 같이 빼곡한 이빨이 맞물릴 즈음
한 번의 일탈도 꿈 꿀 수 없었던
긴장의 나날들
서로의 밀착으로
야금야금 목숨은 마모되고
목마른 자유를 염원하는 바퀴는
허무의 원을 그릴뿐
돌아도 돌아도 제자리였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캄캄한 곳
이 쓸쓸한 회전이
저 편 누군가에게는
긴요한 힘이 되겠지
팽이
김광규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얼음판 위에도 미끄러지지 않는
평정의 무게 중심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때린 것은
몸이 아니라
내 몸에 숨겨진 나태였음을
넘어져 동정을 받기보다는
일어나 채찍을 받겠습니다
아파도 아파하지 않는 당당함
돌아도 돌지 않는 것 같은
달관의 모습으로
하루 또 하루
김광규
느닷없이 암 진단이 떨어진 날부터
우리의 건강한 동료 이선생이
유기수가 되었습니다
육 개월 남짓
기한만 채우면
출옥합니다
갑갑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지요
뒤에 남은 무기수들
조만간 출옥할 가망도 없이 우리는
계속 복역합니다
억지로 견디는 것이지요
버드나무 붙들고 울던 사람들
불쌍하게 되새기면서
헛된 희망의 세월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우리는
하루 또 하루
습관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얀 눈 푸른 물
김광규
바닷가에 함박눈 밤새껏 내려
아침 풍경 온 세상이
하얀 땅 푸른 바다
모래톱에 무릎까지 쌓인 새하얀 눈
코끝이 싸해질 만큼 짙푸른 바다
인적 없는 해변에 혼자 남긴
발자국
하늘과 땅과 물과 바람이 온통
한 사람을 위한 풍경으로
얼어붙는 순간
몰려오다가 멈춘 파도 소리
들려오기도 전에 알아들은 듯
색깔은 바래가지만
살았던 시간 속에 뚜렷이 찍혀
이제는 되풀이될 수 없는
아까운 배경
하얀 눈 푸른 물
하얀 비둘기
김광규
애초에 비둘기를 기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비오는 날 떼지어 날아다니는 비둘기가 몹시 축축하게 보여서,구멍이 네개 달린 비둘기집을 만들어 예쁘게 페인트 칠을 한 다음,옥상 창문 위에 달아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 아랑곳 없이 비둘기는 한마리도 이곳에 날아들지 않았다. 십년이 지나도록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비바람에 시달려 비둘기집은 칠이 벗겨지고 나무가 썩어 보기 흉하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전 마당을 쓸다가 보니 하얀 비둘기 두마리가 그 속에 앉아 있지 않은가 우리 비둘기집은 다 낡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비둘기의 마음에 들었나보다. 비둘기의 그 조그만 가슴속에 다른 하늘과 다른 땅이 있고,그 가는 핏줄 속에 다른 물이 흐르고 다른 바람이 불고 있음을 나는 십년 동안이나 몰랐던 셈이다
하얀 운전자
김광규
150미터쯤 떨어져서
안전한 간격을 두고 신중하게
따라오던 하얀 승용차
넥타이 매고 안경 쓴
점잖은 운전자
너무 호감이 가서
후사경으로 번호판 돌아보다가
어이쿠 외칠 사이도 없이
가드레일을 긁으면서
나는 급정거했다 내 차를
살짝 비켜서 능숙한 운전 솜씨로
우측 깜박이등을 켜고
하얀 운전자는 내 곁을 지나갔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져 버린 하얀 승용차
다시는 볼 수 없었다
하행(下行)
김광규
자동차도 놓아둔 채 때로는
그냥 떠나고 싶어
서울역으로 달려나온다 헐떡거리며
플랫폼 계단을 구르듯 뛰어 내려와
출발하는 기차의 마지막 칸에
가까스로 올라타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창밖으로 한강이 자나간다
깜빡 눈을 붙였다 뜨니
어느새 천안이다
떠나가는구나
읽어야 할 책 엎어놓고
쓰다 만 원고 내버려 두고
교통 범칙금이나 종합소득세 납부
결혼식 주례와 처갓집 조문
모든 약속의 의무 저버리고
신분증과 크레디트 카드 놓아둔 채
어디로 가나
생각도 없이
멀어지는 곳도
가까워지는 곳도 없이
이렇게 떠나가다니
한강
김광규
금강산 골짜기 늙은 소나무
솔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
바위에 떨어져 굴러 내려와
땅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긴 어둠 지나가고
동녘이 밝아올 때
가녀린 물줄기로 다시 태어나
백제의 여울 되고
고구려의 개울이 되고
신라의 시냇물이 되어
남쪽으로 서쪽으로
몇천 년을 흘러왔다.
아득한 옛날 우리의
할아버지가 고기 잡던 북한강
대덕산 골짜기 바위틈에서
솟아오른 한줄기 맑은 샘물
울창한 숲을 지나
고려의 냇물이 되고
가파른 산을 돌아
조선의 강물이 되었다.
때로는 진양조로 논을 적시고
때로는 휘몰이로 들판을 지나
물속에 고기들 뛰놀게 하고
물가에 철새들 기르면서
북쪽으로 서쪽으로
몇천 년을 흘러왔다.
아득한 옛날 우리의
할머니가 머리감던 남한강
해를 따라
달을 쫓어
흘러온 두강물
양수리에서 몸 섞어 소용돌이치고
팔당호에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더욱 깊고
더욱 넓은
더욱 푸른 한국의 큰 강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다리를 놓고
댐을 세우며
쉬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유장하게 흘러가는 한강
저 길고 힘찬 흐름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역사의 모든 상처 아물게 하고
서울의 기쁨과 슬픔
물결에 일렁이며
서쪽으로 남쪽으로
굽이쳐 흘러간다.
육천만의 몸을 씻고
겨레의 목숨 기르며
반도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한강
작은 강물들 하나로 모두고
온갖 구정물 다 받아들여도
줄지 않고 늘지 않고
아름답게 흘러가는 한강
저 넓고 맑은 흐름을
누가 더럽힐 수 있으랴
언제나 스스로 깨끗해지며
남쪽으로 서쪽으로
천 리를 흘러간다.
승리의 행주산성 지나
임진강과 만나면
분단의 아픔에 흐느끼면서
말없이 흘러가는 우리의 한강
그 넓은 하류에 지금은 비록
구름의 그림자만 건너가고
바람 소리만 들려오지만
강화만에 이르면
압록강과 합치고
황하와 만나
아시아의 바다가 되고
태평양 대해로 나가서
온세계의 물과 섞인다.
품속에 고래를 기르면서
용의 마음 가다듬고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눈과 비로 내리면서
온 세상 곳곳마다
한강의 얼을 펼친다.
누가 한강을 다스릴 수 있으랴
강물의 모습 눈여겨보고
강물의 소리 귀담아듣고
강물의 갈 길 뚫어 넣으면
한강은 우리의 땅
기름지게 하고
한강은 우리의 하늘
드높게 하리라.
향나무 한 그루
김광규
가보셨지요 도산서원(陶山書院)
입구에 들어서며 곧장 왼쪽으로
높은 문턱 넘어 인사하듯 머리
숙이고 들어가 조선왕조 때 기숙사
농운정사(농雲精舍) 툇마루 들여다보고
나와서 진도문(進道門) 지나
전교당(典敎堂)으로 올라가지요
가다가 혹시 오른쪽으로
앞마당 바깥 담장을 뚫고 비스듬히
서 있는 향나무 한 그루
보셨나요 빛바랜 바늘잎들 성글고
적갈색 가지들 멋대로 뻗어나간 이 나무가
300년 묵었다지요
오른쪽 앞마당 아니
역사의 뒷마당에서 홀로 살아온
이 못생긴 향나무가 서원의 동쪽을
향기롭게 밝혀주네요
형이 없는 시대
김광규
형처럼 믿고 싶은 선배
밤새워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
아들처럼 돌보아주고 싶은 젊은이
옛날에는 있었는데
웃음 섞인 눈길
따뜻한 물 한 모금
옛날에는 있었는데
이제는 모두 돈을 달라고 한다
외상은 안된다고 한다
계산을 끝내고 혼자서
전철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굴다리
시커먼 물방울 떨어지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알아듣지 못할 유언을 흘리는 저 사람
낯익은 얼굴 구부정한 어깨
매일 거울 속에서 그를 본다
형이 되어버린 나를 본다
호박 그 자체
김광규
뒷산에서 자란 호박 덩굴이 옆집
담을 넘어 들어오더니 밤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 끝에 연두색 호박을 매달아 놓았다
호박은 공중에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밖에서 담을 넘어 들어왔으니
옆집에서 심은 것은 아니지…
그러니까 긴 골프 우산 손잡이를 담 너머로 뻗쳐서
호박을 끌어다가 따 먹을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누구에게 들키지 않는다 해도
시쳇말로 다툼의 여지는 있겠지 이를테면
옆집 영감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피할 수 없을 걸
요즘도 호박 도둑이 있는 모양이여…
늦장마 지나가고 매미와 풀벌레 소리 요란한
오늘도 옆집 밤나무 가지에 매달린 호박을
바라본다 따 먹고 싶은 욕심일랑 몽땅 버리고
짙푸르게 익어가는 호박 그 자체만 바라볼 수는 없을까
가을이 가버리기 전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홉스굴 부근
김광규
타이가 산 중턱에 올라와
이발소 풍경화처럼 눈에 띄는 남청색
물빛을 내려다봅니다 해발 1천 5백 미터
고원에 고여 있는 시간의 색깔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루에 몇 번씩
천천히 바뀝니다
야생화 만발한 산록 초원에서 온종일
풀을 뜯는 양 떼들
측백나무 숲 위를 떠도는 솔개들
침엽수림 뒤덮으며 소리 없이 퍼지는 안개가
때로는 모든 경계를 지워버리기도 하지요
홉스굴 호수와 짙푸른 원시림
90일 비자로 입국한 관광객들에게
자연은 국경이 없다고 가르쳐줍니다
홍제내 2길
김광규
이름이 새로 바뀐 골목길
홍제내 2길의 이른 아침
이집 저집에서 꼬마들이 튀어 나온다
등에 멘 책가방 탈싹탈싹 좌우로 흔들면서
두 팔 활짝 벌리고 초등학생들
서둘러 학교로 달려간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훤하게 트인 한길로 사라진다
뒤이어 우체부가 지나간 소식 전하고
노인들 드문드문 경로당으로 모여들고
등산복 걸친 중년 남자가
자기보다 큰 개를 데리고 간다
길가에 삐뚤빼뚤 세워놓은 자동차들
먼지를 쓴 채 하루 종일
그 자리에 서있다 출퇴근하는
젊은이들 별로 없고
양파와 햇감자 파는 행상들의 확성기 소리
유아원 미니버스와 청소 차량이 가끔 지나갈 뿐
비어 있어 아까운 한낮 기울 무렵
오후의 골목길에서
꼬마들이 다시 나타난다
축 처진 책가방 짊어지고
맥 빠진 걸음걸이로
콜라깡통을 발로 걷어차면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걸어온다 하루 사이에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 나풀거리며
아침에 나타났던 골목길 모퉁이
전신주 곁으로 사라진다
홍제내 2길에서 오른쪽으로 꼬부라져
집으로 가는 거겠지 어제저녁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지
홰나무
김광규
밤마다 부엉새가 와서 울던 그 나무를 동네 사람들은 홰나무라고 불렀다.
홰나무는 우물가에 넓은 그림자를 던져주었다. 두레박이 없어지고, 펌프가 생기고, 뒤이어 공중수도가 설치되었던 그 자리에 얼마 전에는 주유소가 들어섰지만, 홰나무는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6․25 때는 홰나무 아래 폭격 맞은 군용 트럭의 잔해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고철 장수가 쓸 만한 부속품들을 뜯어간 뒤,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그 커다란 쇳덩어리는 3년 가까이 시뻘겋게 녹이 슬다가 마침내 해체되어 사라졌다.
홰나무에도 파편이 몇 개 박혔는데, 그 쇳조각들은 차츰 녹아서 수액으로 흡수되고, 그 자리에 옹이가 생겨났다. 언제부터인지 거기에는 자연 보호 팻말이 붙어 있다.
홰나무를 바라보면 지금도 그 거대한 나무를 만지고 싶고, 그 나무에 기대고 싶고, 기어올라가고 싶고, 때로는 그 나무의 뿌리나 가지가 되고 싶어진다. 그리고 부리나케 걸음을 재촉하거나, 택시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부끄러운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것은 바로 저 홰나무이고, 예나 이제나 한자리에 서 있는 것은 정작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효자동 친구
김광규
중년이 넘도록
홑어머니 모시고 이제는
머리칼 희끗희끗해진 저 친구
모친상 상장을 옷깃에 달고
쇼핑하러 나와 오늘은
아내와 둘이서
넥타이를 고르고 있구나
저 친구 내외가 결혼한 뒤로
저렇게 홀가분한 모습
환한 얼굴은 처음 본다
효자손
김광규
우체국 앞 가로수 곁에
아낙네가 죽제품 좌판을
벌여놓았다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와 키와 죽침 따위에 섞여
효자손도 눈에 띄었다 건널목
신호등이 황급하게 깜빡이지 않았더라면
그 조그만 대나무 등긁이를 하나
사왔을지도 모른다
노인성 소양증만 남고
물기 말라버려 가벼운 등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장난 삼아
간질간질 긁어주던
고사리 같은 손
이 작은 효자손이 어느새 자라서 군대에 갔다
옆에는 나직한 숨결마저 빈자리
어둔 창밖으로 누군가 지나가며
빨리 떠나라고
핸드폰 거는 소리
뒤에서 슬며시 등을 떠미는 듯
보이지 않는 손
벽오동 잎보다 훨씬
커다란 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부드러운 손
흐린 날
김광규
태어나기 전에는
몸이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얻어
세상에 태어나자
나도 모르게
이름이 정해졌다
주어진 이름을 지니고
살아온 반평생
이제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태연하게 견딜 수 있으니
귀찮은 이름 떼어버리고
무거운 몸을 떠나
가뿟하게 날아오르고 싶다
그림자 없는 바람이 되어
비 맞지 않는 넋으로
가뭇없이 떠돌고 싶다
희망
김광규
희망이란 말도
엄격히 말하자면
외래어일까
비를 맞으며
밤중에 찾아온 친구와
절망의 이야기를 나누며
새삼 희망을 생각했다
절망한 사람을 위하여
희망은 있는 것이라고
그는 벤야민을 인용했고
나는 절망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데카르트를 흉내 냈다
그러나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유태인의
말은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은 결코 절망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희망에 관하여
쫓기는 유태인처럼
밤새워 이야기하는 우리는
이미 절망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은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일까
통금이 해제될 무렵
충혈된 두 눈을 절망으로 빛내며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다 절망의 시간에도
희망은 언제나 앞에 있는 것
어디선가 이리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얻고 지켜야 할
희망은
절대로
외래어가 아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4월의 가로수
김광규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잘렸다.
전기줄에 닿지 않도록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숨 막히게 답답하다.
라일락 향기 짙어지면 지금도
그날의 기억 되살아나는데
늘어진 가지들 모두 잘린 채
줄지어 늘어서 있는
길가의 수양버들
새잎조차 피어날 수 없어
안타깝게 몸부림치다가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어
몸통으로 잎이 돋는다.
5월의 저녁
김광규
신록의 바람 타고
우울한 소식
어느 집에선가 들려오는
서투른 피아노 소리
바크하우스느 벌써 죽었고
루빈슈타인도 이미 늙었는데
어른들의 절말 아랑곳없이
바이에르 상권을 시작하는 아이들
신문지에 싸서 버릴 수 없는
희망 때문에
평온한 거리마다
부끄럽게 나리는 어둠
1981년 겨울
김광규
낮과 밤이 하나로
검은 땀 되어
숨 가쁘게 흘러내리는
지하 300m
막장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터졌다
쏟아져 나오는 죽탄
순식간에 갱도를 막아버린
시커먼 죽음
그 차가운 광물을
몸으로 밀어내며
하루 이틀 사흘
비상갱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을 때 비로소
시간이 다시 흐르고
목숨은 거듭 태어났다
힘겹게 견뎌온 우리의 삶을
1분도 멈출 수 없는
시뻘건 목숨을
낙서처럼 지워버린 그것은
결코 기계의 잘못이 아니다
콤퓨터에 자료를 넣은
그들의 잘못도 아니고
그들에게 지시한
그 사람의 잘못도 아니다
그 사람이 받은 명령은
아득히 먼 곳에서 왔다
어딘가 너무 멀어
보이지 않는 그 곳은
우리의 머릿속에
가슴속에
마음속에도 있다
눈감고
귀 기울이면
가파른 산을 넘고
녹슬은 철조망을 지나
우리를 찾아오는 바람 소리
육신을 잃고
휘파람으로 떠도는 말들이
허공을 할퀴며 달려들어
혀를 찌른다
거리마다 침묵의 구호들
시체처럼 널려 있고
상점마다 바겐세일의 깃발
만장처럼 펄럭이는데
자유를 자유라 부르며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는
우리의 모국어는 어디 있는가
온종일 들려오던
호각 소리 멈추고
유리로 된 진열장이
모두 닫힌 밤
우리는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
심장의 고동 헤아리며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생각했다
동이 트면 또다시
어제의 옷을 입지만
이제는 쫓기며 뛰지 않겠다
안개 낀 새벽길을
천천히 걸으며
잊었던 말들을 되살리고
몸속에 퍼지는 암세포까지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