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새로운 출발
16
테스가 트랜트리지에서 돌아온 지 3년(테스에게는 묵묵히 재기를 꾀한 세월)째. 사향초 향내 그윽하고 새가 알을 품는 5월의 어느 날, 그녀는 다시 집을 떠났다. 꾸려 놓은 짐은 따로 부쳐 달라고 부탁을 하고 빌린 마차로 스토어캐슬이란 작은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스토어캐슬은 목적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거쳐 가야 했다. 트랜트리지로 향하던 방향과 비교하면 지금 가는 쪽은 정반대가 됐다. 그녀가 그렇게도 떠나고 싶어 하던 말로트 마을이 막상 가까운 언덕의 모퉁이를 돌 때는 서운한 마음이 들어 다시금 돌아다보게 되었다. 헤어짐은 슬펐지만, 집에 남아 있는 동생들 역시 며칠 지나면 변함없이 웃고 뛰놀며 지낼 것이다. 누나와 작별하는 아쉬움은 잠시일 뿐,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잘 적응해 갈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동생들 곁을 떠나는 것이 무엇보다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스토어캐슬을 지나 큰길 네거리를 향해 갔다. 그곳에서 남서 지방으로 가는 역마차를 갈아 타게 되어 있었다. 이 지방의 둘레에는 철도가 나 있지만, 내륙을 횡단하는 철도는 아직 부설되지 않았다. 네거리에서 역마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가 갈 방향으로 농부가 모는 짐마차가 다가왔다. 낯선 사람이었지만, 그가 권하는 대로 짐마차에 올라 나란히 앉았다. 그 남자의 호의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곁에 앉았다. 그가 웨더베리로 가는 길이라니까 그곳까지만 타고 가면 역마차로 캐스터브리지를 지나가지 않아도 남은 길은 걸어갈 수 있었다.
지루한 시간을 마차로 달려 웨더베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농부가 가르쳐주는 집으로 가서 간단한 요기를 했다. 드넓게 펼쳐진 목장과 웨더베리와의 중간에 가로놓인, 관목이 무성한 고지를 향해 그녀는 서둘러 바구니를 들고 걸었다. 테스는 이 지방에 와 본 일은 없지만 눈에 들어오는 경치에 친근감을 느꼈다. 왼편쪽으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검은 물체가 보였다. 조상들이 묻힌 교회가 있는 킹스베리 근처라고 짐작한 그녀가 행인에게 물어보자 추측이 틀림없었다. 테스는 조상을 조금도 숭배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를 구렁텅이로 빠지게 한 조상을 오히려 저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란 낡아빠진 도장과 은수저뿐이었다.
"흥, 나는 양친한테서 똑같은 피를 이어받았어. 나의 아름다움이란 엄마를 닮은 거고, 엄마도 젖을 짜는 여자에 지나지 않았지."
이그돈 고지나 낮은 지대의 거리는 몇 마일 남짓해 보였는데, 실제로 걸어 보니 훨씬 힘이 들었다. 몇 번이나 길을 헤매서 고지에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이나 걸렸다. 기대하던 골짜기에 널따란 낙농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그곳에서 나는 버터와 우유 맛은 고향인 말로트 마을보다는 못하지만, 많은 양이 생산됐다. 바 강이라고도 부르고, 프룸 강이라고도 하는 강물을 끌어들여 푸른 들판에 물을 댈 수 있었다.
그녀가 불행을 겪은 트랜트리지를 배놓고는,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 소규모 낙농 마을인 블랙무어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큼직하게 규모가 잡혀 있었다. 블랙무어는 고작 10에이커의 낙농장에 얼마 안 되는 들이었으나, 이곳은 50에이커나 되는 넓은 지대에 건물이 딸린 농장도 훨씬 많고, 또 소들도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까마득히 흩어져 있는 무수한 소떼를 그녀는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면 초원에 많은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이곳 초원은 소떼들로 빈틈이 없었다. 윤이 나는 송아지의 붉은 빛과 다갈색은 저녁 햇빛을 빨아들이고 있었고, 흰 젖소는 반사하여 높은 곳에 서 있는 테스를 눈부시게 했다. 지금 눈 아래 펼쳐진 한 폭의 그림 같은 경치가 그녀의 고장만큼 풍성하지는 않았으나 훨씬 상쾌해 보였다. 블랙무어가 지니고 있는 포근한 대기와 기름진 토지, 그리고 향기로움이 이 고장이 좀 못 미치는 듯했지만 공기는 맑고 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이름난 이 낙농장의 초원을 푸르게 하여 젖소들의 양식을 대주는 하천도 블랙무어와는 달랐다. 그곳의 하천은 소리도 없이 느리게 흐르는데다 가끔씩 흐려지고, 또 밑바닥은 갯벌이 깔려 있어 자칫 서투른 사람이면 빠져 죽기까지 했다. 그러나 프룸 강물은 성서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의 강처럼 맑고, 물줄기는 구름같이 빠르며, 자갈이 깔린 얕은 강물은 하루 종일 하늘을 보고 재잘거렸다. 또, 그곳 강가에서는 수련이 피지만, 이곳에서는 미나리아 제비꽃이 피어있었다.
공기가 탁한 곳에서 맑은 곳으로 온 탓인지, 그녀의 기분은 놀랄 만큼 상쾌해졌다. 부드러운 남풍을 안고 경쾌하게 걸어가면 희망은 태양과 한데 엉킨 이상적인 빛이 되어 그녀를 둘러쌌다. 귓전을 스치는 바람 곳에서 즐거운 음성이 들리고, 새의 지저귀는 소리는 기쁜 노래인 듯 경쾌하기만 했다. 마음의 변화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도 활기가 돌았다. 그러나 심경의 변화에 따라 활짝 핀 장미 빛 같은 날이 있는가 하면, 창백하고 우울한 빛을 띠는 날도 있었다. 마음이 안정될수록 완전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테스. 그녀는 지금 남풍을 가슴 가득 받으면서 걷고 있었다. 태어난 가문이나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기쁨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것은 테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희망은 점점 높아져 갔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여러 민요를 불러 봤지만, 좀처럼 조바심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기 이전, 일요일 아침마다 읽곤 하던 시편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읊조렸다.
"오, 하늘의 태양과 달이여. 그리고 뭇별들이여. 자사의 가축들이여 공중에 나는 새들이여. 들짐승과 가축들이여. 세상의 아들들이여. 주님을 축복할지어다, 찬양할지어다. 영원토록 그를 경배할지어다."
일요일 아침마다 읽곤 하던 시편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읊조렸다. 그녀는 갑자기 찬미를 멈추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하느님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어."
그녀가 반은 무의식중에 읊조린 이 시편은 일신교를 배경으로 해서 배물교를 표현한 것일 게다. 외부 세계와 같은 자연 의 여러 가지 형태와 힘을 흔히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여자들은 현대의 조각적인 종교보다도 조상으로 부터 전해 온 미신적인 공상을 훨씬 더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적어도 자신의 감정에 가장 비슷한 표현을 테스는 어릴 때부터 외어 오던 이 시편에서 찾아냈다.
그것으로 그녀의 감정은 흡족해졌다. 자립하려는 목표를 향해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순간에도 커다란 만족을 느끼는 것은 더비필드 집안 기질의 일면이었다. 사실 테스는 아무에게도 굽히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의욕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조그만 일에도 만족하거나, 또 한때는 융성했으나 몰락해 버린 더비필드 같은 집안이 영달을 꿈꾸고 노력하기를 싫어하는 점에 있어서는 테스도 아버지를 닮고 있었다.
한동안 그토록 테스의 기를 꺾어 놓았던 그 일이 있은 뒤로 그녀의 나이로 보아 으레 있는 정력과 아직 다하지 않은 어머니에게 받은 혈기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나 할까. 사실 여자들이란 그런 일을 겪고, 또 제정신을 되찾은 다음에는 대개 흥미 있는 눈으로 세상을 살피게 마련이다. 생명이 있으면 반드시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어느 낙천주의자가 우리들에게 이해시키려 한다면 잘되지 않겠지만 배신을 당해 본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가는 말이다.
테스 더비필드는 끗꿋한 마음으로 삶에 대한 흥미를 느끼면서 그녀의 목적지인 낙농 마을을 향해 이그돈 비탈길을 내려갔다. 블랙무어와 이그돈과의 뚜렷한 차이점은 이제 독특한 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블랙무어 분지의 비밀은 주의의 높은 곳에서 가장 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골짜기의 특징은 한가운데로 내려가 봐야만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테스가 그 같은 추측으로 산 밑에 이르렀을 대, 그녀의 몸은 동서로 펼쳐져 있는 양탄자를 깐듯한 평원에 서 있었다. 비에 씻긴 높은 지대의 흙이 흘러내려 이 골짜기를 메우고, 한가운데를 흐르던 강줄기는 갑작스런 흙의 무게 때문에 물이 줄어들어 지금은 좁고 길다란 강줄기만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방향을 확실히 알지 못해, 마치 넓은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주위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지만, 조용한 골짜기에 던진 단 하나의 파문이라면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 가까운 데 내려앉은 왜가리를 놀라게 한 것뿐이었다. 왜가리는 목을 곧바로 세운 채 그녀를 지켜봤다.
바로 그때, 갑자기 이 평원의 여러 곳에서, 워어. 워어. 워어. 힘찬 소리가 들려왔다. 길게 꼬리를 물면서 거듭 들려오는 이 고함소리는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이 퍼져 나갔다. 가끔 개 짖는 소리도 들렸다. 소란한 이 소리는 이 마을에 도착한 아름다운 테스를 환영하는 아우성이 아니라, 남자 일꾼들이 젖소를 몰기 시작하면서 젖 짜는 시간인 4시 반을 알리는 신호였다.
한가로이 이 신호를 기다리던 붉은 색과 흰색의 소들은 걸을 대마다 커다란 젖통을 흔들면서 떼 지어 뒷마당으로 들어갔다. 테스는 소떼의 뒤를 따라 남자들이 들어갈 때 열어 놓은 문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이엉을 입힌 외양간은 울을 따라 둥글게 늘어섰고, 경사진 지붕에는 이끼가 선명하게 끼어 있었다. 옛날부터 수많은 소들이 비벼댄 기둥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있었으나 이제는 낡아 버려서 거의 눈여겨보는 사람도 없었다. 기둥 사이마다 젖소가 한 마리씩 매어져 있었는데, 만약 누가 뒤에서 그 모양을 본다면 젖소들의 하나하나가 마치 두 개의 막대기 위에 쟁반 같은 것이 얹혀 있고, 그 중심 아래쪽으로 회초리 같은 게 시계추처럼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 틀림없다.
저물어 가는 태양의 고아선이 젖소들을 비추어 그 그림자를 안쪽 벽에 선명하게 드러냈다. 해가 질 때마다 궁전 벽화에 있는 미인들의 옆모습을 그리듯이, 저녁 햇살은 이들 동물의 모습을 조심스레 벽에다 그리는 것이었다. 마치 옛날 대리석 건물 정면에 올림피아의 신들이나 알렉산더, 시저 또는 고대 이집트 왕들을 그렸듯이.
외양간 안에 가둔 채 젖을 짜는 소는 성질이 거친 것들이고, 성질이 온순한 젖소들은 안마당에서 젖을 짰다. 안마당에는 온순한 젖소들이 줄을 지어 젖을 짤 때를 기다렸다. 이처럼 특상품에 속하는 젖소들은 다른 지방에는 거의 없고, 이 지방에서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 년 중에서도 가장 좋은 이 계절에 기름진 초원이 공급하는 양분 많은 양식을 먹고 자란 소들이다. 하얗게 얼룩진 소는 눈부시도록 햇빛을 반사하고, 잘 닦여져 뿔 위에 붙어 있는 놋쇠 구슬은 군대의 견장을 연상케 했다. 굵은 힘줄이 튀어 나온 젖통은 무거운 모래주머니 모양으로 축 처져 있고 젖꼭지는 집시들이 쓰는 질항아리에 달린 꼭지 같았다. 젖을 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젖이 젖꼭지에 맺혀서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17
목장에서 젖소들이 돌아오자 젖 짜는 아가씨들과 남자들이 그들의 집과 착유장에서 몰려나왔다. 여자들은 모두 나막신을 신었는데, 날씨가 궂어서가 아니고 마당에 깔린 짚에 신이 파묻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들은 각각 세 발 달린 걸상에 앉아 얼굴을 비스듬히 옆으로 돌려 오른편 뺨을 젖소 옆구리에 갖다 대고, 그 옆구리를 따라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체하면서 다가오고 있는 테스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남자 일꾼들은 차양이 달린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으므로 테스가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남자 일꾼들 중에 건장하게 생긴 중년의 사나이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입은 흰 앞치마는 다른 사람들 것보다 깨끗하고 좋아 보였으며, 속에 입은 재킷은 여러 사람 앞에 입고 나가도 괜찮을 정도의 것이었다. 바로 그 남자가 테스가 만나려는 낙농장 주인이다. 엿새 동안은 농장 일을 거들다가 안식일에는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가족과 함께 교회로 향한다.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라 다른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놀릴만큼 두드러졌었다.
‘엿새 동안은 젖 짜는 딕이지만 안식일이 오면 리처드 크릭 씨가 된다네’
자기를 바라보는 테스를 발견하고 주인은 그녀 앞으로 갔다. 젖 짜는 남자들이란 대개 일하는 동안엔 시무룩한 얼굴이지만, 주인은 지금 새 일꾼이 온 것을 기뻐했다. 한창 바쁜 때에 그는 그녀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주인은 더비필드 부인과 가족들의 안부도 물었지만, 테스의 소개장을 받기 전까지는 부인의 존재도 몰랐던 것이 사실이었으므로, 그의 안부는 어디까지나 인사치레에 불과했다. 인사가 끝나자 그가 말했다.
"그곳에 가 본 지가 오래 되긴 하지만, 옛날에 가 본 일이 있어서 그쪽 사정은 잘 알지. 오래 전에 사망했지만 우리 집 근처에 살던 아흔 살쯤 된 할머니가 블랙무어에 있는 더비필드라는 사람의 얘기를 해 준 적이 있어. 요즈음 사람들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나, 더비필드의 조상은 한때 이 지방에서 자릴 잡고 영화도 누리다가 몰락했더군. 그러나 난 그 할머니의 잠꼬대 같은 소리는 상대도 하지 않았어.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담."
"그건 사실입니다. 쓸데없는 얘기죠."
잠시 후 이야기는 일에 관한 것으로 옮겨졌다.
"아가씬 소젖을 완전히 짜낼 줄 알아? 한창 젖 짤 시기에 젖이 가라앉으면 곤란하니까."
그녀가 자신 있다고 대답하자 주인은 아래 위롤 그녀를 훑어봤다. 테스는 오랫동안 집 안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살결이 부드러웠다.
"정말 이런 일에 견딜 수 있겠소? 억센 사람들에겐 쉬운 일이나, 누구에게나 쉬운 건 아닌데."
그녀는 해 낼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일을 하려는 그녀의 결심과 성의가 보이자 주인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차를 마시든지 뭘 좀 먹어야겠군. 아직 괜찮다고? 그럼 좋을 대로 해요. 하지만 내가 그렇게 먼 길을 여행했더라면 반드시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말라 비틀어졌을 거야."
"손을 익히기 위해 우선 우유를 짜 보겠어요."
그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우유를 좀 마셨다. 낙농가 크릭은 우유를 마실만한 음료라고 생각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그녀가 마시고 있는 우유 통을 받쳐주었다. 그리고는 무관심하게 말했다.
"마실 수만 있다면 좋지. 난 마시기만 하면 납덩어리가 뱃속에 가라앉을 것 같아서 입에 댈 생각도 하지 않았어. 저걸 짜 봐요."
그는 옆에 있는 소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놈은 젖 짜기가 힘들어. 사람도 다루기 쉬운 사람과 거칠어서 힘겹게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소도 마찬가지야. 이곳에서 같이 일하면서 차츰 그런 것도 곧 알게 될 거야."
테스는 모자를 수건으로 바꾸어 쓰고 젖소 배 밑에 의자를 놓고 앉아 허리를 구부렸다. 쥐어짜는 두 주먹 사이로 소젖이 우유 통으로 흘러내리자, 정말 새로운 출발이 시작됐다는 기쁨이 그녀의 얼굴에 내비쳤다. 그런 자신감이 그녀를 침착하게 하여 흥분해서 뛰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비로소 주위를 살펴볼 수 있었다. 거기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족히 일 개 대대가 될 만한 숫자였다. 남자들은 젖꼭지가 단단한 젖을 짜고, 여자들은 순한 젖소를 짜게 돼 있었다. 착유장은 상당히 규모가 컸다.
크릭이 기르는 소는 거의 백 마리나 되는데, 그가 집에 있을 때는 언제나 대여섯 마리의 젖을 짜고 있었다. 그가 직접 짜는 소는 젖 짜기가 무척 힘든 것들이어서 성실치 못한, 임시로 고용한 남자들이나 손가락 힘이 약한 여자들에겐 결코 그런 소를 맡기지 않았다. 젖을 완전히 짜지 않으면 차츰 젖이 굳어서 젖의 양도 적게 나올 뿐 아니라, 나중에는 완전히 굳어져서 한 방울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테스가 젖소를 맡아서 짜기 시작한 뒤 안마당엔 얘기소리 한마디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소에게 몸을 돌리라든가, 가만히 있으라고 소리치는 것 외에는 우유 통 속으로 젖이 흘러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래위로 오르내리는 젖 짜는 사람들의 손동작과 흔들리는 쇠꼬리뿐이었다.
젖 짜는 일은 이 분지의 양편 비탈까지 이르는 넓고 평평한 초원 한복판에서 계속되었다. 새로 조성된 경치와 오랫동안 잊혀졌던 옛 경치가 한데 어울려 변화 있는 초원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래도"
첫마디를 던지던 주인은 젖을 자던 소 옆에서 일어섰다. 한 손에는 의자를 들고 다른 손에는 우유를 든 채 다음 소에게로 옮기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젖이 잘 나오지 않는군. 윈커란 놈이 벌써 젖을 내지 않는대서야. 이대로 가다가는 한여름이 지나도록 젖 짜기는 틀렸는데."
"일손이 새로 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어요."
하고 조너던 케일이라는 여자가 말했다.
"옳아, 그럴지도 몰라. 난 미처 생각지 못했지 뭐야?"
"젖이 안 나오는 건 모두 뿔 있는 쪽으로 올라가 버린다고 말하던데."
젖 짜는 처녀가 말했다. 젖이 뿔로 올라간다는 생리적인 작용을 요술쟁이인들 막을 재간이 있겠느냐는 듯이, 주인은 그녀들의 말에 대꾸했다.
"글쎄, 젖이 뿔로 올라간다는 건 잘 모르겠는데.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러나 뿔이 없는 소도 뿔 있는 소처럼 젖을 내지 않을 수가 있으니까 그 말은 틀렸어. 조너던, 도대체 뿔 없는 소가 뿔 있는 소보다 어째서 젖을 적게 내는지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어?"
"몰라요. 주인께선 아시나요?"
"그건 몇 마리 안 되니까 그런 거야. 하여간 이 엉터리들이 오늘은 젖을 내지 않을 작정인가 보지. 자, 모두들 이 친구들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 한두 곡 노래를 불러 줘야겠다."
이 부근의 낙농장에서는 소젖이 잘 나오지 않으면 소의 신경을 풀어 주기 위해 가끔 노래를 부른다. 주인의 청을 받아 그들은 의무적인 투로 노래를 할 뿐, 하고 싶어서 즐겁게 부르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 결과 그들이 믿고 있는 대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안 젖 나오는 분량이 늘은 건 사실이었다. 도깨비불이 무서워서 침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살인범을 주제로 한 명랑한 민요를 계속해서 부르고 있을 때 젖 짜는 남자 일꾼 하나가 말했다.
"이렇게 구부리고 노래하다간 숨통이 막히겠군요. 나리의 하프를 내오셔야겠어요. 바이올린이면 그만이지만."
테스는 그 말이 주인에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어째서?"
하는 대답이 우리에 갇힌 젖소의 뒤쪽에서 들렸는데, 그녀는 거기에도 남자한 사람이 앉아 있는 줄은 몰랐다.
"참 그렇지, 바이올린만큼 효과를 내는 건 없어. 내가 경험해 잘 알지만, 암소보단 황소가 음악을 더 잘 알아듣지. 멜스톡이라는 곳에 윌리엄 듀이란 노인이 있었는데, 상당히 크게 하던 운송업자 집 사람이었지. 조너던, 듣고 있어? 그와는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였어. 그런데 어느 달 밝은 밤, 혼사가 있는 집에서 바이올린을 켜 주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어. 그는 40에이커나 되는 들판을 질러가려고 지름길로 접어들었는데, 소들이 풀을 뜯고 있더라는 거야. 한데 뒤를 돌아보니까 황소 한 마리가 뿔을 곤두세우고 뒤에서 따라오더래. 대개가 잘사는 사람들이 모인 혼인집이었지만, 과음하지 않았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는데, 그러나 앞에 있는 울타리를 뛰어 넘을 재간이 없었대. 그래 마지막 수단으로 뛰어가며 바이올린을 꺼내들고 뒷걸음질 쳐 구석으로 물러서며 경쾌한 곡을 켜기 시작했다더군. 그러자 황소는 온순해져 윌리엄 듀이를 열심히 쳐다보더래. 계속해서 켜자 황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더라는 군. 그래서 윌리엄이 곡을 멈추고 돌아서서 울타리를 기어 넘으려 하자 황소는 웃다 말고는 반바지를 입은 그의 엉덩이를 향해 뿔을 들이대더라지 뭐야. 윌리엄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아서서 바이올린을 켰는데, 아직 겨우 새벽 3시밖엔 안 되어 사람이 왕래하려면 앞으로 몇 시간 더 있어야 했고, 배고프고 지친데다 오도 가도 못해 그는 어째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는 거야. 새벽 4시가 되도록 계속 켜고 나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어 이젠 이게 마지막 곡이로다. 하느님 굽어 살피소서. 그렇잖으면 저는 죽는 수밖에 없나이다 하고 중얼거렸다는군. 그런데 크리스마스 전날 밤 소가 무릎을 꿇던 걸 본 일이 기억나더래. 그래 크리스마스이브는 아니지만 황소를 한 번 속여 보자 싶어 크리스마스 캐롤을 켜니까, 글쎄, 그놈은 가짜 크리스마스이브인 줄도 모르고 무릎을 꿇더니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더래. 뿔 달린 친구가 머리를 조아리더래. 뿔 달린 친구가 머리를 수그리기가 바쁘게 재빨리 몸을 돌리고 황소가 머리를 쳐들어 다시 쫓아오기 전에 사냥개처럼 날쌔게 재빨리 몸을 돌리고 황소가 머리를 쳐들어 다시 쫓아오기 전에 사냥개처럼 울타리를 뛰어넘었대. 하고많은 멍청이들을 보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가 아닌데도 자기의 종교를 끌어다 댄 꾀에 빠졌다가 속은 것을 깨달았을 때의 황소의 그 멍청한 얼굴 같은 것은 본 적이 없다고 윌리엄 듀이였어. 난 지금이라도 그의 무덤이 멜스톡 묘지의 어느 곳에 있는가까지도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 바로 둘째 번 주목나무와 교회 별관의 중간에 있지."
"참 신기한 이야기군요. 마치 신앙이 살아 있던 중세기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인데요."
착유장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이 유식한 말은 다갈색 소의 뒤쪽에서 들려왔으나 그 말뜻을 이해하는 이도 없었다. 다만 얘기한 주인공만이 자기가 한 얘기가 그들에게 허황된 인상을 주었는가 보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 얘기는 사실입니다, 나리. 나는 그 남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죠."
"물론이죠, 저는 그 얘기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다갈색 소의 뒤쪽에 있는 사람이 말했다. 테스의 관심은 주인과 얘기하는 그 남자에게로 쏠렸으나, 그는 암소 옆구리에 꼼짝도 않고 붙어 앉아 젖만 짜고 있어서 겨우 옷자락밖엔 보이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주인까지도 그 남자를 보고 나리 라고 존대하는지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설명이 될 만한 관계라도 눈에 띄는 게 아니었다. 세 마리의 젖을 짤 만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일어설 줄 모르고 간간이 혼자서 큰 소릴 쳤다. 젖이 잘 짜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하십시오, 나리. 아주 천천히 말입니다. 젖 짜는 일은 요령과 기술로 하는 거지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하고 주인이 말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대답을 허더니 힘겹게 일어나서 두 팔을 쭉 폈다.
"하지만 이놈만은 그럭저럭 짜긴 다 짰는데, 덕택에 손가락이 심하게 아프군요."
그때 테스는 비로소 그 남자의 전신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농부들이 젖을 짤 때 흔히 입는 흰 앞치마와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는데, 장화에는 앞마당에 깔린 짚 부스러기 같은 것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풍기는 시골 냄새란 고작 그가 입은 그런 옷차림에서일 뿐 어딘지 교양과 겸손, 지혜를 겸비한 듯 같이 일하는 사람과는 다른 어떤 점이 엿보였다. 그러나 테스는 이전에 어디선가 본 일이 있는 사람임을 깨닫자, 더 이상 그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볼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뒤 테스는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으므로 그 남자를 어디서 만났는지 금방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말로트 마을의 무도회 때 끼어들었던 나그네라는 사실이 잠시 뒤 그녀의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그때 그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게 나타나서 테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른 여자들과 춤추다가 함께 온 일행과 가버린 바로 그 사람이었다. 트랜트리지에서의 사건보다 먼저 있었던 무도회 때의 일이 되살아나자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여서 그녀의 마음은 잠시 우울해졌다. 만약 그 남자도 자기를 알아보고, 또 혹시 자기에게 일어난 과거의 사건을 알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알아보지 못하는 걸 그의 눈빛으로 읽어 낸 그녀는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무도회에서 보았을 때의 풍부한 표정은 침착한 모습으로 변했고, 청년다운 콧수염과 턱수염이 보기 좋게 자라 있었다. 또 뺨에 난 구레나룻의 밑 부분은 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으나 끝부분은 짙은 갈색이었다. 삼베로 된 앞치마 밑에는 검정빛 비로드 재킷과 올이 굵은 천의 반바지를 입고 다리에는 긴 양말을 신었으며, 풀 먹인 셔츠를 입었다. 젖 짜는 차림새만 아니었다면 그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줏대 없는 지주이거나 품위 있는 농부 같다고 할까. 한 마리의 젖을 짜는 데 매달려 있는 시간으로 보아, 그 남자도 젖 짜는 일에 서툴다는 것을 그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때 한쪽에 있는 여러 명의 젖 짜는 아가씨들이 웅성거렸다.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까."
좀 지나치게 칭찬하는 것 같은 말투로, 서로 새로 온 테스를 평하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테스의 매력은 어떻다고 잘라 말하기 힘든 것이었다.
젖 짜는 작업이 저녁 무렵에야 끝나자 아가씨들은 크릭 부인이 있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좀 거만한 듯한 부인은 착유장엔 나가지도 않고, 젖 짜는 아가씨들과 같은 옷을 입는 것조차 꺼렸다. 오늘도 따뜻한 날씨여서 여자들은 얇은 옷을 입었는데 부인만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가씨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착유장에는 불과 서너 사람만이 기숙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인의 얘기를 비평하던 그 고급 착유 일꾼도 저녁 식탁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테스는 그 남자 얘기를 물어 보지 않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남아 있는 아가씨들은 침실로 들어가서 잠자리에 들었다.
침실은 우유 창고 2층에 있었는데, 길이 10미터나 되는 커다란 건물로써 아가씨들은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테스보다 좀 더 나이 먹은 여자 한 사람만 빼곤 다들 나이 어린 처녀들이었다. 지칠대로 지친 테스는 잠자리에 들자 곧바로 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녀만큼 피곤을 느끼지 않는 옆자리의 아가씨는 낙농장의 사정과 근래에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고 싶어 했다. 점점 몽롱해져 가는 테스의 뇌리에는 그녀의 속삭이는 듯한 얘기가 어떤 환상과 어울려 마치 어둠 속에서 춤을 추듯 넘실대는 것 같았다.
"젖 짜는 일도 배우고 하프도 탈 줄 아는 그 에인젤 클레어 씨 말이야, 그이는 여자와 얘기하는 일이 거의 없어. 그 사람은 목사 아들인데, 언제나 자기 혼자 생각에 잠기느라 여자에겐 관심조차 없어. 지금은 주인의 제자로 있으면서 낙농 기술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우는 중이야. 이곳에 오기 전엔 양치는 일을 배웠대. 그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에민스터라는 지방에서 목사 일을 보시는 분인데, 클레어 목사라고 하더군."
그녀의 친구가 잠자려다 말고 일어나서 대꾸했다.
"그래, 그 목사 얘긴 나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어.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라면서?"
"맞아, 바로 그 분야. 웨섹스 지방에서는 가장 성실한 목사라고 소문났어. 복음 교회파 중에서 남은 단 한 사람이래. 이 지방에서는 고등 복음파라고 부르지만 말야. 여기서 일하고 있는 클레어 씨만 배놓고는 그분 자제들 모두 역시 목사가 됐대."
클레어 씨는 왜 다른 형제들처럼 목사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어 볼만한 호기심도 테스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옆방에서 스며 나오는 치즈 냄새며, 아래층 제수기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우유 방울 소리와 함께 뒤섞인 그녀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테스는 다시 잠이 들었다.
18
에인젤 클레어의 모습은 하나의 뚜렷한 형태를 갖춘 인상은 아니었다. 침착한 목소리나 시원한 눈매, 그리고 이따금씩 입을 굳게 다무는 걸로 봐서 결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래도 좀 작은 듯한 입술을 보노라면 그의 과거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무엇엔가 열중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무관심하여 얼빠진 사람 같기도 했다. 그의 그러한 흐릿한 태도로 보아, 장래를 위한 물질적 관심이나 뚜렷한 목적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는 이 지방 끝에 사는 가난한 목사의 막내아들이었다. 농사 기술을 배우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낙종 기술을 배우려고 6개월 기한으로 이곳 탤보데이스 낙농장으로 왔다. 그의 목적은 농업에 관한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워서 형편 돌아가는 대로 식민지로 진출하거나 국내에서 농장을 경영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농업이나 목축업에 손을 댄 것은 자기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출발이었다.
아버지는 딸만 하나 낳은 첫째 부인이 죽은 뒤 늘그막에 다시 재혼을 했는데, 뜻밖에도 그녀에게서 아들 셋을 얻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막내아들 에인젤과의 나이에는 손자뻘이 될 만큼의 커다란 간격이 있었다. 느지막이 얻은 세 아들 중 막내인 에인젤이 대학 교육에 가장 적합한 아이라고 인정 되었으나, 그는 끝내 대학 교육을 거부했다.
에인젤이 말로트 마을의 무도회에 모습을 나타낸 게 2,3년 전의 어느 날, 학교를 그만두고 자기 집 서재에서 연구하고 있을 때 서적상에서 목사 앞으로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그 소포를 풀자 안에서는 책이 나왔는데, 몇 페이지를 읽던 목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즉시 책을 들고 서적상으로 가서 책을 든 채 흥분해서 말했다.
"이 물건을 왜 나한테 보냈소?"
"이건 댁에서 주문하신 겁니다."
"이런 책을 주문한 사람은 아무도 없소."
점원은 주문 장부를 펼쳐 봤다.
"아, 이건 이름을 잘못 적은 것입니다. 주문하신 분은 목사님이 아니라에인젤 클레어 씨입니다."
클레어 목사는 한 대 얻어맞은 듯 움찔했다. 그는 창백하게 기가 죽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에인젤을 서재로 불러들였다.
"너, 이 책 좀 봐라. 짐작 가는 게 없느냐?"
"제가 주문한 겁니다."
에인젤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뭣하려고?"
"읽으려고요."
"어째서 이따위 책을 읽을 마음이 생겼지?"
"어째서라니요? 이건 철학 서적인 걸요. 도덕이나 종교에 관한 서적으론 이만한 게 없습니다."
"도덕에 관한 책이라는 점에서는 네 말이 옳다. 그러나 이 책이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니. 더군다나 복음 전도사가 되려는 네가 감히 이런 책을 읽다니."
에인젤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면서 거리는 듯 말했다.
"아버지께서 말씀을 꺼내신 김에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양심으로는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만큼 교회를 사랑하고, 또 교회에 대한 뜨거운 신앙에도 변함이 없어요.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품고 있는 만큼 깊은 존경을 기울일 만한 대상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는 속죄주의를 교회가 고집하는 한 저는 형들처럼 목사가 될 순 없는 겁니다."
마음이 곧고 단순한 목사는 자기 혈육인 아들한테서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목사는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에인젤이 교회에 봉직할 생각이 없다면 캐임브리지 대학엔 보내서 뭘 하겠는가? 대학 교육이란 성직을 얻기 위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 것은 본문이 없는 서문과 같다는 주장이 이 완고한 목사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는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라 열렬한 경배자요, 충실한 신자였다. 엉터리 전도사들이 사람의 비위에 맞춰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복음주의파의 적극적인 해석을 했다. 참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읊조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영원한 것과 거룩한 것이 모든 진실에 있어서 지금으로부터 18세기 전에’
에인젤의 아버지는 토론도 하고, 설득하기도 하고 애걸도 해 보았다.
"안 됩니다, 아버지. 다른 것은 다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제 4조(영국 교회의 39개 신조 가운데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적은 조항)의 고시문은 뜻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로선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어요. 종교 문제에 있어 저의 목적은 그런 모순을 고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늘 즐겨 말씀하시는 <히브리서>만 보더라도 피조물 중에서 흔들리는 것들을 뽑아 버림은 흔들리는 것을 남겨 두려 함이니라고 씌어 있지 않습니까?"
에인젤이 민망할 정도로 아버지는 크게 낙심하고 있었다.
"기쁨과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을 바에야 너의 어머니와 내가 애써 돈을 모아 너를 학교에 보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목사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지만 인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 도움을 주면 되지 않습니까, 아버지?"
만약 에인젤이 끝가지 버티었다면 형들처럼 대하게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학교 교육을 목사가 되기 위한 디딤돌이라고 믿는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가슴에 뿌리박혔고, 또 이 집안의 전통이었다. 그래서 철없는 아들이 자기 고집대로 한다는 것은 신의에 대한 배신을 키우는 행위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의 말은 거역하면서도 애써 지급해 주는 돈으로 공부하겠다는 것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에인젤은 결심했다.
"저는 캐임브리지 대학에 가지 않겠습니다. 부모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대학에 갈 권리는 저에게 없습니다."
이 같은 결정적인 토론의 결과는 얼마 가지 않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에인젤은 목적도 없는 연구와 실험, 그리고 공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인 형식과 습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지위라든가 재산 같은 물질적인 영달을 점점 천하게 여겼다. 훌륭한 가문조차도 그 집을 대표하는 사람들 가운데 새로운 어떤 결의를 찾아볼 수 없다면 에인젤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굳은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에인젤은 런던으로 갔다. 그때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여인에게 유혹되어 타락할 뻔했으나 다행히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어릴 때 보낸 시골 생활은 근대적인 도시 생활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부당한 반감을 에인젤의 마음에 심어 주었다. 그래서 목사직은 갖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직업으로 성공할는지도 모를 직업같은 것마저 아예 단념해 버렸다. 그러나 놀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시간을 낭비했다. 바로 그대, 식민지에서 농업으로 성공한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농업이야말로 자기가 택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기술을 배워서 농업을 할 만한 자격만 갖춘다면 식민지든 미국이든 간에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풍부한 재산보다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지식의 자유를 희생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리하여 스물여섯 살의 에인젤 클레어는 이 탤보데이스 낙농장의 연구자로 온 것이며, 마땅한 숙소가 없어 주인집에 기숙하게 된 것이다.
우유 창고의 넓은 고미다락이 전부 그의 방이었다. 그가 다락방을 쓰기 전에는 오랫동안 비어
있었는데, 치즈 저장실에서 사다리로 출입해야 했다. 방이 상당히 넓어서 에인젤이 돌아다니는 소리를 착유장 사람들은 종종 들을 수 있었다. 한쪽을 커튼으로 막아 뒤쪽에는 침대를 놓았고, 바깥 쪽은 응접실로 꾸며 놓았다.
처음에는 거의 방에만 틀어박혀서 책을 보거나 경매장에서 사온하프를 탔다. 거리에서 하프를 타는 것이 호구지책의 수단이 될는지도 모르겠다는 심각한 농담을 할 만큼 음악에도 열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와 다른 남녀 직공들과 어울려 식사를 할 만큼 그들과 친해졌다. 낙농장에서 기숙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되지만, 식사 때는 다른 사람들도 몇몇 끼기 때문에 식사 분위기는 화목했다.
클레어는 이 집에서 묵을수록 일꾼들과 친해져서 그들과 함께 살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스스로 놀라울 만큼 그들과 사귀면서 마음속의 기쁨을 맛보았다. 사실, 이전에 그가 알고 있는 농부란 불쌍할 정도로 무식한 시골뜨기였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런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자신이야말로 더없는 시골뜨기라고 생각되었다.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사고방식대로였다면 지금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분명히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낙농장 주인과 자리를 같이 한다는 건 처음에는 버릇없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 환경조차도 퇴보적이고 무의미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예민한 연구자는 날마다 새로운 면을 느끼게 되었다. 눈에 띌 만큼의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똑같아 보이던 인간들이 제각기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주인과 그 가족들, 또 남녀 고용인들이 클레어와 친밀해짐에 따라, 마치 화학적 변화라도 나타내듯 그들은 각각 특성을 나타냈다.
그는 파스칼의 사상을 이해할 만했다. 슬기로운 사람일수록 인간의 특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이 말이 가슴에 와 닿듯이 그들에 대한 편견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연스레 변화 있는 인간으로 바뀌었다. 복잡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없이 변덕스러운 사람도 있었다. 행복한 사람은 얼마 안 되지만, 평온한 사람도 있고 더러는 우울한 사람도 있었다. 가끔 천재다운 지혜를 나타내는 사람도 있고 점잖은 사람도 있었다. 입이 무거운 밀턴 같은 사람도 있고, 크롬웰과 같이 남모르는 힘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크롬웰이 친구들에게 한 것처럼 서로 간에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로 칭찬도 하고 비난도 하며, 상대방의 약점이나 악덕을 생각하며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다. 그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제각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클레어 자신이 계획한 일생과 그들이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제쳐놓고라도, 뜻밖에도 자연이 주는 매력과 여기서 얻어지는 만족 때문에 현재의 생활을 좋아하게 되었다. 에인젤은 그의 출신답지 않게, 자비스런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줄어들고 문명인을 사로잡는 만성적 우울증에서 급작스레 벗어난 것이다. 그가 배우고 싶어 하던 몇 권의 농업 서적을 모두 읽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으므로 오래간만에 한가로이 마음 내키는 대로 이 책 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차츰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생활과 인간성과의 사이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전에는 분명히 느끼지 못하던 여러 가지 자연 현상, 즉 계절 감각이나 낮과 밤, 더운 바람이나 찬바람, 초목들, 바다와 안개, 그리고 그늘과 침묵, 무생물들의 여러 가지 소리를 자세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른 아침, 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커다란 식당은 아직 난롯불이 생각날 만큼 찬 기운이 맴돌았다.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기에는 클레어의 가문이 너무 훌륭하다는 크릭 부인의 배려에 따라, 식사 때는 벽난로 옆에 따로 그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또 벽난로 옆에는 찻잔과 다른 접시들이 얹혀진 조그만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가 앉은 맞은편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굴뚝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은 어느 때라도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강렬했다. 클레어와 창문 중간에 모두가 앉은 식탁이 놓여 있고, 식사하는 그들의 옆모습이 유리창을 배경으로 뚜렷하게 보였다. 우유 창고로 들어가는 옆문을 통해 신선한 우유가 가득 찬 네모꼴 우유 통들이 즐비하게 줄지어 있고, 훨씬 저쪽에는 교유기가 빙빙 돌아가는 게 보였다. 창으로 넘겨다 본 교유기의 모양은 마치 한 청년에게 쫓기는 힘없는 말이 원을 그리며 도는 것 같았고, 우유가 출렁이는 소리도 들렸다.
클레어는 자기 앞으로 우송되어 오는 정기 간행물이나 음악 서적을 읽는데 열중하느라고 테스가 온 지 닷새가 지나도록 그녀가 식당에 나타나는 것도 몰랐다. 또, 다른 아가씨들이 지껄이며 떠들 때에도 테스가 얘기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귀에 익지 않은 테스의 목소리를 그가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일상적인 세세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게 그의 버릇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악보를 보고 머릿속으로 곡조를 떠올리며 정신을 쏟고 있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벽난로 앞에 악보를 한 장 떨어뜨렸다. 마침 조반을 준비하느라고 벽난로에 불을 피운 뒤였으므로, 나무토막에서 타들어가는 한 가닥 불꽃은 마치 발레리나가 발끝으로 맴돌며 춤추듯 타고 있었다. 황홀한 춤의 축제 분위기였다. 불꽃은 그가 마음속으로 반주하는 음정에 맞추어 춤추는 것 같았다. 반쯤 담긴 끓는 물조차도 가냘픈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식탁에서 재잘거리는 아가씨들의 목소리가지도 클레어의 머리에 맴돌고 있는 환상적인 음악과 뒤섞여 의문을 갖게 했다.
‘누구의 목소린데 이처럼 아름다운 음성을 가졌을까. 아마 새로 온 여자의 목소린가 보다.’
다른 아가씨들과 함께 앉은 그녀를 클레어가 쳐다보고 있었으나,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사실 클레어는 너무 오래 한쪽 구석에서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테스는 계속해서 얘기를 끌어 나갔다.
"저는 도깨비에 관한 건 몰라요. 그러나 사람이 죽지 않고도 영혼을 떠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주인은 입에 가득히 음식을 놓고 씹으면서 사뭇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교수형을 집행하려는 사람처럼 커다란 나이프와 포크를 식탁에 곤두세웠다.
"아가씨, 그게 정말이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아주 간단하게 알 수 있어요. 밤에 풀밭에 누워서 큰 별을 똑바로 쳐다보세요. 그리고 마음을 온통 그 별에 쏟아 보세요. 그러면 오래잖아 자신이 육체에서 수만 리나 떨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육체 따위는 무가치하다고 느끼실 거예요."
주인은 테스에게서 눈을 돌려 부인을 쳐다봤다.
"여보, 크리스티나, 거 정말 괴상한 얘기지? 나는 지난 30년 동안 연애도 하고 장사도 하고 의사나 간호원을 부르러 별이 총총한 밤길을 수없이 쏘다녀 봤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어.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육체를 떠났다고 느껴 본 일이 없으니까."
구석에 앉아 있던 클레어를 포함한 방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자 테스는 얼굴을 붉히며, 그것은 자신의 공상이라고 변명을 하곤 다시 식사를 했다. 클레어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그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 감시당할 때의 거북한 기분을 느끼면서 그녀는 손가락으로 식탁보 위에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그 동작에는 거북함이 있었다. 클레어는 중얼거렸다.
"자연의 딸인 저 아가씨는 어쩌면 저토록 신선하고 순결하게 보일 수 있을까."
천국까지도 어둡다고 생각하는 현재와는 달리 모든 것을 즐겁게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보니, 까마득한 옛날로 이끌어가는 어떤 정다운 힘이 그녀에게 있는 것 같았다. 장소를 기억할 순 없지만, 전에 만난 일이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분명히 시골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만났겠지만, 굳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여성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는 어여쁜 아가씨들을 제쳐놓고라도 테스를 선택할 만한 가능성을 이 조그만 인연은 충분히 간직하고 있었다.
19
젖을 짤 때는 소의 성질 따윈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짜는 게 습관으로 되어 있지만, 오히려 소가 사람을 가리는 경우가 있다. 기분에 맞지 않는 사람이 젖을 짜려 하면 말을 잘 안 듣고 우유 통을 걷어차 버릴 때도 있다. 그래서 젖 짜는 사람을 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바꿈으로써 못된 젖소들의 버릇을 고쳐 버리려는 게 주인 크릭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자나 아가씨들 중에서 일을 그만두고 가버리게 되어 주인이 곤란에 빠지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약삭빠른 아가씨들의 속셈은 주인과는 정반대였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잘 길들여 놓은 여남은 마리의 젖소를 선택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젖소는 자진해서 젖이 나오도록 해주므로 힘들이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테스도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소가 자기의 젖 짜는 법을 좋아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지난
2,3년 동안 집안에 오래 틀어박혀 있는 바람에 그녀의 손이 부드러워졌기 때문에 그 손놀림이 젖소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적합함을 깨닫고 기뻐했다. 아흔다섯 마리의 젖소 중에서 특히 덤플링, 팬시, 로프티, 미스트, 올드 프리티, 영 프리티, 타이디, 그리고 라우드 등 여덟 마리는 한두 개 젖꼭지가 홍당무같이 딱딱한 것도 있었지만, 손을 대기가 바쁘게 젖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을 잘 아는 그녀는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사나운 소만 배놓고는 닥치는 대로 젖을 짜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소의 위치와 마음속으로 바라는 그녀의 생각이 이상하게도 꼭 들어맞는 것을 눈치 챘다. 또, 그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얼마 전부터 클레어는 소를 늘어세울 때 가끔 그녀를 도와줬다. 그런 일이 대여섯 번쯤 됐을 때 그녀는 그를 쳐다보고 소한테 기대면서 살짝 말을 걸었다.
"클레어 씨, 당신이 소를 줄 지으셨군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나무라는 듯 말하면서도 얼굴엔 웃음을 띠었다. 아랫입술은 그대로 있으면서도 윗입술이 저절로 올라가서 하얀 이가 드러났다.
"네, 그렇지만 뭐 문제될 건 없겠지요. 언제나 이곳으로 우유를 짜러 오시죠?"
"어떻게 알고 계세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모르겠어요."
구석진 곳에서 일하는 그녀의 마음을 모르고 클레어가 오해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그녀는 슬며시 화가 났다. 그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그녀의 소원인 양 열심히 얘기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의 마음을 눈치 채고, 또 그것을 경솔하게 물어 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그녀는 땅거미가 덮인 뜰을 혼자 거닐었다.
아름다운 6월의 초여름 밤이었다. 평온한 기운이 대기에 가득 차고 무생물가지도 흥겨워하는 것 같았다. 가까운 데 있는 것과 먼 곳에 있는 것과의 구별이 없어지고, 귀를 기울이면 지평선 안에 있는 온갖 만물이 하나같이 느껴졌다. 그 적막은 단순히 소리가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만물이 조용한 한 가지 음성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그때, 조용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서투르게 타는 하프 소리였다. 테스는 고미 다락방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를 가끔 들은 일이 있었다. 방안에서 어렴풋이 들리던 그 소리는 지금 들리는 것처럼 온몸을 드러낸 듯이 조용한 공간을 울림으로서 뚜렷하게 들리진 않았다. 사실 말하자면, 하프 타는 기술은 그다지 감명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환경과 어우러져 있었으므로 그걸 듣고 있는 테스도 마치 무엇에 홀려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새처럼 그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자리를 뜨기는커녕 들키지 않게 울타리 뒤로 몸을 숨기면서 하프를 타는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지금 테스가 들어온 뜰 변두리는 여러 해 동안 돌보지 않아서 질척하게 습기가 차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꽃가루가 안개처럼 번지며 떨어지는 물기 있는 풀과,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꽃이 만발한 키가 큰 잡초들 그리고 빨강, 노랑, 자줏빛 등 잘 가꾼 꽃처럼 형형색색의 잡초들이 그득히 자라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벌레의 거품이 치마에 묻기도 하고, 발아래 달팽이가 밟히기도 하며, 엉겅퀴의 진딧물이 손에 닿기도 했다. 사과나무에 달라붙어 있을 땐 희게 보여도 그녀의 흰 살결에 붙으니까 피처럼 붉게 보이는 잔디를 털어 버리기도 하면서, 이 부성한 잡초 사이를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빠져나가 그녀는 클레어의 눈에 띄지 않게 그에게로 다가갔다.
테스는 시간도 공간도 잊은 채였다. 별을 쳐다보고 있으면 느낄 수 이 다는 그 희열이 지금 이 순간에 그녀에게 찾아왔다. 낡은 하프의 가냘픈 가락에 그녀의 마음은 설레었고, 그 소리는 산들바람처럼 마음을 휘어잡아 그녀를 눈물 짓게 했다. 흩날리는 꽃가루는 클레어가 타는 가락이 형태로 나타난 듯했고, 습기로 가득 찬 뜰도 감상에 젖어 눈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해질녘인데도 악취를 풍기는 잡초의 꽃은 잠시라도 쉴 수 없다는 듯 자태를 자랑하고, 그 꽃들의 빛깔은 소리의 물결과 함께 춤추고 있었다. 아직도 비치는 저녁 햇살은 서쪽 하늘 구름장 사이로 새어 나왔다. 사방은 땅거미가 덮여서 그 햇살은 마치 우연히 남아 처진 낮의 한 조각 같았다.
솜씨가 없어도 탈 수 있는 간단한 곡을 클레어는 끝마쳤다. 그런데 그녀는 또 다른 곡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타기를 끝마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울타리를 돌아 천천히 뒤로 오고 있었다. 볼이 달아오른 테스는 그가 알아차리지 않게 살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에인젤은 그녀의 여름옷을 발견하곤 말을 건넸다.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나 그의 낮은 음성은 그녀에게 뚜렷이 들렸다.
"테스, 왜 그렇게 도망가죠? 겁이 나나요?"
"아, 아녜요. 무섭지 않아요. 특히 지금은 조금도 무서울 게 없어요. 사과 꽃은 모두 떨어지고 만물은 온통 푸른 걸요."
"그러나 마음속에는 뭔가 두려움이 있는 모양인데요, 그렇죠?"
"네, 그래요."
"뭐가 두렵습니까?"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힘들군요."
"우유 맛이 변하는 것 때문에?"
"아뇨."
"살아 나가는 것 때문에?"
"네, 바로 그거예요."
"아, 그런 문제라면 나도 종종 생각해 보는데, 잃게 되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같이 젊은 아가씨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된 까닭이죠?"
그녀는 망설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 테스 터놓고 말해 봐요."
그녀는 이 세상이 자기 눈에 어떻게 비치느냐는 뜻으로 알아듣고 수줍은 듯이 대답했다.
"나무는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강물은 왜 그런 얼굴로 나를 괴롭히느냐 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또 내일이라는 수많은 날이 한 줄로 늘어서서 맨 앞의 것은 가장 크고 뚜렷한데 차츰 작아져서 맨 끝까지 아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한결같이 두렵고 잔인한 것들이에요. 그래서 그 하나하나가 마치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당신은 아름다운 음악으로 희망을 북돋워서 그런 무서운 공상을 쫓아 버릴 수 있을 거예요."
함께 기숙하는 친구들에게 선망을 받고 있지만, 한낱 젖 짜는 여자에 불과한 그녀가 그처럼 서글픈 공상에 잠기는 것을 본 클레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6년간의 교육만을 뒷받침으로 한 그녀의 말은 현세대의 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현대주의의 고민을 자기 나름대로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른바 진보된 사상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대개 세상 인간들이 여러 세기를 두고 품어 오던 막연한 감정을 근래 유행하는 해석에 따라 정의하여 무슨 주의니 무슨 학이니 하는 현대적인 용어와 방법으로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한 것이라 한다면, 그녀의 생각은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젊은 나이에 그런 생각을 품는 것은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일뿐 아니라 흥미 있는 일이며, 또 서글픈 일이다. 그녀가 사물을 그러한 시선으로 관찰하는 원인을 알 수 없었다. 현재의 생활 태도를 보고 그 삶의 지난 일을 알아내거나 어떤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일 것 같았다. 테스의 일시적인 우울은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얻어진 커다란 수확이었다.
한편, 테스는 클레어가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고 훌륭한 교육도 받았으며 신체적 결함도 없는데, 살아가는 것을 왜 불만이라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불행한 인생 순례자 같은 테스에게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지만, 훌륭하고 지식이 풍부한 이 사람이 어떻게 굴욕의 골짜기에 틀어박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3년 전에 테스도 깨달은 내 영혼은 살기를 원하기보다 오히려 숨 막혀 죽기를 원하노라. 나는 살기를 싫어한다. 항상 사는 것만을 원하지 않노라 하는 생각을 클레어도 깨달았을까?
클레어가 현재 자기가 속해 있는 계급 사회를 떠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피터 황제가 조선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직공으로 일했던 것과 같이, 그도 알고 싶은 것을 배우고 있는 데 불과한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낙농장에서 일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농업자로, 지주로, 임업가로, 또는 가축의 사육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처럼 남녀 하인들을 거느리고, 양떼, 소떼, 젖소와 그 밖의 가축들을 호령하는 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농업 왕이 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책을 즐기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색적인 이 청년이 부친이나 형들처럼 목사가 되지 않고 어째서 굳이 묻혀서 일하는 농부가 되려 하는지, 그녀로서는 궁금한 일이었다.
그들은 상대방의 마음속을 알아볼 만한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표면에 나타난 일도 이해하지 못해 안타까웠다. 그러나 상대방을 알게 될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클레어는 테스의 성격을 조금씩 알게 되고 테스 또한 그녀 나름대로 그의 성질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생활을 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자신에게 그러한 생활력이 있는 것은 몰랐다. 처음에는 테스는 클레어를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성의 존재로 생각했다. 그러한 눈으로 항상 그와 자신을 비교해 오곤 했었다. 풍부한 그의 지식을 발견하고, 하늘과 땅처럼 거리가 먼 인격의 엄청난 차이를 생각하면서 그녀는 한없이 기가 죽었었다. 그러한 생각을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는 욕망마저 우러나지 않게 했다.
고대 그리스의 유목에 관해서 이따금 얘기를 나누던 어느 날, 그는 테스가 풀이 죽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강둑에 핀 로드 레이디 의 꽃봉오리를 따 모으고 있었다.
"왜 갑자기 슬픈 얼굴을 하고 있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 일을 좀 생각했어요."
서글픈 웃음을 억지로 지어 보이며 레이디 꽃봉오리를 껍질을 벌렸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운이 좋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잠깐 생각해 보았어요. 저는 좋은 기회를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채 소중한 나날들을 보냈어요. 선생님이 읽고, 보고, 아시는 것, 생각하시는 것에 비하면 저는 저 가엾은 시바의 여왕 같아요. 이제 용기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요."
"쓸데없는 소릴.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아요. 역사와 문학, 무엇이든 간에 배우고 싶어 하는 걸 당신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그 이상 기쁜 일은 없겠소."
"어머, 이번에도 레이디 꽃잎이에요."
껍질을 벗긴 로드 레이디 봉오리를 내밀면서 그녀는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네?"
에인젤이 물었다.
"이 꽃봉오리들을 까 보면 로드보다는 레이디가 언제나 많이 나와요."
"테스, 그보다 당신은 무언가 공부하고픈 생각은 없나요? 이를테면 역사에 관한 공부 같은 것
말이오."
"역사에 관한 것이라면 지금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더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건 또 무슨 까닭이죠?"
"저라는 존재가 같은 운명으로 행렬 지어진 인간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역사에서 저와 같은 운명의 인간을 발견하고, 저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본들 마음만 슬퍼질 거예요. 자신의 과거 생활과 성격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것과 똑같고, 또 앞으로 계속될 자신의 갈 길이 수만 수천의 다른 인간들과 똑같다는 사실은 오히려 모르는 게 더 나아요."
"아니, 그럼 정말 아무것도 배울 생각이 없단 말인가요?"
"태양은 왜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골고루 빛을 주는가 하는 식의 문제라면 배우고 싶어
요."
그녀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거예요."
"테스, 너무 비꼬지 말아요."
그의 그런 말은 어디까지나 의무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천진난만한 그녀의 입술을 복 있는 동안 시골 아가씨의 그와 같은 생각은 남에게 들어서 얻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여전히 꽃봉오리를 뜯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보드라운 뺨으로 내리덮이는 속눈썹을 잠시 바라보다가 떠나기 싫은 발길을 돌렸다. 테스는 그가 가버린 다음, 마지막 봉오리를 뜯으면서 생각에 잠겨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자신의 어리석음에 짜증이 나서 마음속으로 심한 흥분을 느끼면서 이제껏 모은 아름다운 꽃을 모조리 팽개쳤다.
그는 나를 얼마나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마음에서 그녀가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던 일, 즉 한때는 생각하는 것조차 기분이 불쾌하던 더비필드 가문과 더버빌 가문이 같은 혈통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다시 이끌렸다. 그것은 테스에게 온갖 불행을 가져다 줬지만 킹스베리 묘지의 대리석 비석에 새겨진 이름들이 테스의 정통 조상이라든가, 또 돈이나 야심으로 이름을 산 트랜트리지의 가짜 후손이 아니라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을 클레어가 안다면 꽃이나 가지고 어린아이같이 장난하던 그녀를 이해하고, 어쩌면 지식 있는 역서가의 입장에서 보다 존경해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집안의 내력을 말하기 전에, 돈이나 토지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옛 조상의 후손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를 주인에게 물어 봤다. 주인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클레어 씨는 여지껏 본 일이 없는 반항심이 강한 젊은이지. 저희 집 식구들과는 무엇 하나 닮은 곳이 없어.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옛 조상들에 관한 관념이야. 그들이 온갖 영화를 다 누렸기 때문에 이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하다는 거야. 빌레트, 드랜크하드,그레이. 세인트 퀸틴, 하디, 그리고 골드 등 여러 가문은 옛날 이 지방에서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민요를 한 곡조만 불러도 그 따위 가문의 이름쯤은 모조리 살 수 있어. 우리 집 고용인 중에 레티 프리들이라는 여자만 해도 프리들 가문의 후손이야. 지금은 웨섹스 백작의 소유인 킹스 힌툭 근방의 광대한 토지를 옛날에 소유했던 명문이지. 한데 클레어 시가 그 사실을 알고는, 그녀에게 경멸하듯 말하곤 했어. 아가씨는 소젖을 잘 짜낼 수는 없어. 아가씨 가문의 재능은 먼 옛날 팔레스타인에서 이미 써버렸으니, 일할 수 있는 힘을 다시 얻으려면 몇 천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거야 라고 말이야. 언젠가 메트라는 소년이 일자리를 구하러 온 일이 있었지. 성을 물었더니, 성이 있다는 얘길 듣지 못했다는 거야. 까닭을 물었더니 저희 집은 뿌리를 박을 만큼 오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어. 그랬더니 클레어씨는 기뻐하며 소년과 악수를 하더니, 너야말로 내가 원하던 소년이야. 너 같은 소년들에게 난 희망을 걸 수 있어 라고 말하면서 반 크라운을 주더군. 그는 가문 같은 건 질색이야."
클레어의 생각을 듣고 나자 가문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으로 생각됐다. 가문이 다른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역사가 긴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옛 집안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다른 한 아가씨도 그녀와 사정이 같았다. 더버빌 가문의 묘지나 그 이름을 그녀도 이어받고 있는 정복 왕 윌리엄 왕조의 기사였다는 점에 관해서나, 또 그들이 후손이라는 사실 등을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테스에 대한 클레어의 관심은 그녀가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인간으로 보이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0
계절은 바뀌고 만물은 무르익어 갔다. 수명이 짧은 꽃과 나뭇잎, 나이팅게일이나 티티새, 방울새 들은 일 년 전엔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한 세대 전에 같은 생물들이 차지했던 자리에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아침 햇살은 새싹들을 일깨워 길다란 줄기를 뻗게 하고, 소리도 없이 수액을 끌어올려 꽃피게 하며, 보이지 않는 대기와의 호흡 속에서 향기를 풍겨 주는 것이었다.
낙농장 주인 크릭 댁에서 일하는 남녀 식구들은 안락하고 조용하며 즐겁게 살고 있었다. 그들의 처지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행복했다. 이제 빈곤을 벗어난, 그러면서도 체면이나 형식 때문에 자연스런 감정을 해친다거나, 불필요한 허영 때문에 생활이 안정되지 않는 그런 처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수목처럼 자라기만 할 것 같던 녹색의 계절도 지났다. 지극히 태연하게 보이지만은 언제나 위험한 정열의 가장자리에 머물면서 테스와 클레어는 무의식중에 서로를 관찰했다. 마침 한 골짜기에 흐르는 두 개의 물줄기처럼 불가항적인 법칙에 지배되어 둘이 합쳐지는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제껏 느껴 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다시없을 행복한 생활을 그녀는 지금 누리고 있었다. 다른 이유도 있겠으나, 우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현재의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씨 뿌린 장소에서 튼튼한 뿌리를 뻗을 수 있게 좀 더 기름진 땅으로 옮겨 심은 격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클레어도 마찬가지지만) 그와의 관계에 놓인 상태에 대해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보며 불안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물어 보곤 했다. 이 같은 새로운 물결은 과연 나를 어느 곳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 또, 지금의 이 일은 나의 미래에 무엇을 의미하며, 나의 과거와 어떤 관계가 있게 되는 것일까
에인젤 클레에게 테스의 존재란 마치 잡힐 듯 말 듯하던 현상이 이제 겨우 마음속에서 잡히기 시작한 장밋빛 환상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생각에 잠길 때면, 남달리 고상하고 싱그러운, 또 여성의 표본처럼 관심을 끄는 여자를 생각하는 것은 철학자다운 태도라 자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만나지 않곤 견딜 수 없었다. 저녁놀이 물 드는 초저녁이나, 먼동이 트는 이른 아침, 신비하고 엄숙한 시간에 그들은 매일 만나고 있었다. 그 집에서는 상당히 일찍 일어나야 했다. 젖을 짜는 일은 아침 일찍 마치기로 되어 있었고, 젖 짜기 전 세 시만 되면 통에 있는 크림을 걷어 내기 시작했다. 누구든지 제일 처음 자명종 소리에 잠이 깬 사람이 다른 사람을 깨우게 되어 있었다. 테스는 새로 들어온 데다가 늦잠도 자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은 잠 깨우는 일을 그녀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세 시를 알리는 자명종 소리가 울리기 바쁘게 그녀는 방을 나와 주인 방문 앞으로 가서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입을 크게 벌려 속삭이듯 귀에 대고 클레어를 깨운 다음 돌아와서 친구들을 깨웠다. 테스가 옷을 완전히 갈아입을 무렵엔 클레어도 아래층으로 내려와 아직 습기가 찬 밖을 서 있곤 했었다. 주인과 다른 직공들은 잠을 깬 뒤에도 15분 정도 자리에서 뒹군 다음에야 나오는 버릇이 있었다.
새벽녘과 초저녁의 밝은 빛은 활동적인 데 비해 초저녁의 빛은 어둠을 몰고 오기 때문인지 조는 듯 힘이 없어 보인다. 우연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두 사람만이 제일 먼저 일어났으므로 그들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는 것 같았다. 요즈음 그녀는 크림을 떠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에서 개기가 바쁘게 거의 언제나 밖에서 기다리는 클레어에게 달려갔다. 널따란 초원에 잔뜩 물기를 머금은 흐린 빛은 그들이 마치 아담과 이브인 것처럼 이 세상을 벗어난 느낌을 줬다. 이때의 테스는 클레어에게 마치 여왕과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이 신비로운 시간에 그녀만큼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가 클레어의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한여름의 이른 새벽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한참 잠에 빠져 있는 시간이다. 그때 테스만은 깨어서 그의 앞에 있었으며,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밝음과 어두움이 묘하게 엇갈리는 대기를 가르며 젖소들이 있는 곳으로 그들이 함께 걸어가노라면, 그는 자주 예수가 부활한 시간을 떠올리게 되곤 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 옆에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사방은 희미한 장막에 가려 있고, 바로 옆에 있는 테스의 얼굴은 안광이 비친 것처럼 보이면서 안개 속에 떠올랐다. 깨끗한 영혼만을 지닌 천사같이 보였다. 언뜻 봐서 그런 것 같지는 않으나, 그녀의 얼굴은 동북쪽에서 비쳐 오는 싸늘한 빛을 받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주는 시간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한낱 우유 짜는 여자가 아니라, 환상적인 요정이었다. 세상 모든 여성의 표본적인 모습을 응결시킨 존재였다. 아르테미스라든가, 데메테르 또는 그 밖의 가공적인 이름으로 짓궂게 그녀를 불러 보았으나 그녀는 뜻을 알지 못했고, 또 그렇게 불리는 걸 싫어했다.
"테스라고만 부르세요."
라고 말하면, 그는 그대로 따랐다.
주위가 점점 밝아 오면 그녀의 얼굴은 평소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것은 인간을 축복하는 여신의 용모에서 여신에게 행복을 갈구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적이 없는 이 시간만이 그들이 서로에게 바싹 다가설 수 있었다. 그들이 이따금 지나다니는 풀밭 옆에서 덧문을 여는 듯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왜가리가 큰 몸짓으로 날아 나왔다. 왜가리가 물속에 있을 때에는 태엽을 감은 장난감이 움직이는 것처럼 조용하고 침착한데, 어느 때는 목을 수평으로 움직여 지나가는 두 사람을 경계하면서 제자리에 지켜 서 있기도 했다. 부드럽고 두껍지 않은 여러 겹의 홑이불 두께만한 여름 안개가 흩어져 목장 가득히 번져 가는 게 보였다. 습기 찬 회색빛 풀밭에는 밤새 젖소가 자고 간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것은 안개 바다 가운데 남겨진 소의 몸집만한 녹색의 마른 섬 같았다. 소가 누웠던 자리에서 꾸불꾸불 걸어간 발자국이 나 있는 것은 젖소가 자고 난 다음 풀을 뜯으러 간 것으로, 발자국이 끝나는 곳에서 젖소는 발견됐다. 소는 그들을 알아보고 코를 벌름거리면서 숨결을 내뿜어 이미 온 누리에 자욱이 낀 안개 속에 한층 더 짙은 조그마한 안개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소를 몰고 다른 장소로 가거나, 그 자리에서 젖을 짰다. 더욱 짙게 갈린 여름 안개 때문에 목장은 하얀 바다 같았으며, 여기저기서 있는 수목들이 마치 암초같이 보일 때도 있었다. 새들은 안개를 뚫고 날아올라가 맑은 하늘을 날거나 유리처럼 반짝이는 목장 난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안개의 습기가 엉겨 자잘한 금강석 같은 물방울이 테스의 속눈썹에 맺혔고, 그녀의 머리에는 조그만 진주알 같은 방울이 망울져 있었다. 차츰 햇빛이 강렬해지면서 물방울들이 증발해 버리면, 신비롭고 섬세하던 그녀의 아름다움은 자취를 감춘다. 입술과 눈은 햇빛 아래 빛나고, 다만 우유 짜는 평범한 아가씨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다시 다른 여자들과 어울려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갔다. 언제고 이맘때가 되면 늦게 나온 아가씨들을 훈계하거나, 손을 씻지 않는다고 데보라 팬더 할머니를 힐책하는 주인 크릭의 큰소리가 들렸다.
"제발 좀 펌프에 가서 손을 씻고 오시오, 데보라 할머니. 할머니처럼 이렇게 손도 씻지 않은 그 지저분한 꼴을 런던 양반들이 안다면 우유와 버터를 먹으려고 하지 않을 거요. 그렇게 되면 큰일이니까."
젖 짜는 일이 계속되어 끝날 시각이 되면 크릭 부인이 끌어내는 무거운 식탁 소리가 일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들린다. 그 요란한 소리는 식사 때마다 미리 알리는 신호 같았고,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마친 다음에도 어김없이 들려오곤 했다.
21
아침 식사가 끝난 뒤에 우유 가공장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교유기는 평소와 같이 돌고 있었으나 버터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기면 언제나 모두들 당황했다. 커다란 통 속에서 우유가 혼합되는 출렁거리는 소리는 들려오지만, 그들이 기다리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인과 그의 아내, 테스, 마리안, 레티 프리들, 이즈 휴에트, 그리고 마을 에서 온 새색시, 클레어, 조너던 케일, 데보라 할머니, 그리고 다른 일꾼들도 낙심하여 멍하니 선 채 회전 기계를 들여다봤다. 밖에서 말을 몰던 소년도 그 상황에 맞는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우울한 표정을 지은 말까지도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올 때마다 그들의 실망을 궁금히 여기는 듯 창 너머로 기웃거리는 것 같았다. 주인은 쓰디쓴 말투로 말했다.
"이그돈에 있는 트랜들 점쟁이의 아들한테 가 본 지가 굉장히 오래됐어. 그 녀석은 저희 아버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너 같은 친구는 믿을 수 없다고 수없이 더 말했을 거야. 지금도 믿진 않아. 그러나 그 녀석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아무래도 가 봐야겠어. 암, 가봐야지. 이런 사고가 계속 된다면 가 봐야지."
주인의 푸념에 클레어도 슬퍼지는 듯했다. 조너던 케일이 말했다.
"캐스터브리지 쪽에 폴이라는 점쟁이가 있는데요, 내가 어렸을 때 참 잘 맞췄죠. 지금은 마치
썩은 고목 같지만요."
주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올스콤이라는 곳에 있었던 민턴 점쟁이에게 쭉 다니셨는데, 상당히 용했던 모양이야.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점쟁이를 찾아볼 수 없어."
크릭 부인은 간단한 방법을 생각하며 동정을 살피듯 말했다.
"이 집안에서 연애하는 사람이 있나 봐요. 나는 어릴 때부터 연애하는 사람이 집안에 있으면 이런 일이 생긴다는 얘길 들었어요. 여보, 그 왜 몇 해 전에 일하던 아가씨 생각나지 않으세요? 그대도 지금처럼 버터가 나오지 않았었잖아요."
"아, 생각나는군. 그러나 그땐 그 여자 때문에 그런 게 아냐. 기계에 고장이 나서 그랬던 거지, 연애와는 상관없어,"
주인은 클레어를 향해 말했다.
"잭 돌로프라는 아비 없는 녀석을 고용한 일이 있었는데요. 아, 그 녀석이 늘 하던 버릇으로 멜스톡에 사는 젊은 여자와 연애를 하곤 속여 버렸답니다. 그러나 여자를 잘못 건드렸지 뭡니까. 하필 부활 주일인 목요일에 지금처럼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요 있고 기계는 쉬고 있는데, 그때 황소라도 때려눕힐 만한 놋쇠 손잡이가 달린 우산을 든 여자가 문 앞에 다가오면서, 젝 돌로프라는 사람이 여기서 일하고 있나요? 그 녀석을 좀 봐야겠어요. 난 그 녀석과 한 번 따져 봐야겠으니까요. 이건 정말 예삿일이 아니에요 하지 않겠소. 어머니 뒤에는 그 딸이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면서 따라오더군. 창 너머로 그녀들을 발견한 잭은 하느님 맙소사, 기어코 나타났구나 나를 때려죽이려고 할 거야 어떻게 숨지? 어디 숨어야 안전하지? 내가 숨은 곳을 가르쳐 주지 마십시오 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교유기통 속으로 들어가서 뚜껑을 닫고 숨어 버렸지요. 잭이 숨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해서 그녀의 어머니가 가공장 안으로 달려 들어와서 소리쳤어요. 불한당 같으니라고. 어디 숨었지? 그 녀석 있는 곳을 가르쳐만 주세요. 그놈의 낯짝을 할퀴어 줄 테니까. 하고 갖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구석구석 찾아다녔죠. 통속에 숨은 잭은 숨이 막힐 지경이고, 그 불쌍한 아가씨는, 그녀는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채 문에 서 있었지. 그 광경은 도무지 잊혀지질 않는군요. 잊어버릴 수가 있나? 아무리 돌 같은 마음이라도 흔들리지 않고는 배겨 내질 못할 거요. 그러나 그 여자는 끝내 잭을 찾아내지 못했지요."
주인이 잠시 얘기를 멈추고 있는 사이에 듣고 있던 사람들이 두서너 마디 무엇이라고 의견을 말했다. 사실은 얘기가 끝난 게 아니지만, 주인의 얘기하는 버릇은 가끔 중간에서 끝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그 버릇을 모르는 사람은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중간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인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 늙은 부인이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녀는 두말 않고 기계 손잡이를 잡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교유기가 수동식이었거든요. 마구 돌려대니 그 속에서 잭은 이리저리 뒹굴기 시작했죠. 견딜 수 없게 된 그는 불쑥 머리를 내밀면서 고함을 쳤어요. 제발 그만 해요. 기계를 멈춰요. 나를 나가게 해 줘요. 곤죽이 되겠어요. 여자나 건드리는 녀석들이 대개 그렇듯이 잭도 어지간히 갑이 많은 녀석이었죠. 내 딸을 더럽힌 놈은 맛을 톡톡히 봐야해 라고 늙은 부인이 대꾸하자 늙은 마귀할멈이라고 잭이 큰 소리 치지 않겠소. 그 늙은 부인은 같이 악을 쓰면서 여전히 기계를 멈추지 않았으므로 잭은 뼈가 부딪쳐 뿌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감히 말리려고 뛰어드는 사람도 없자, 그 녀석은 견디다 못해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을 했죠. 약속을 받은 다음에서야 겨우 일이 끝났어요."
얘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고들 있을 대, 그들 뒤에서 무엇인가 조급하게 움직이는 듯해 돌아다보니, 테스가 창백한 낯빛으로 문 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조그만 소리로,
"어쩌면 이렇게 더울까."
하고 중얼거렸다. 사실 날씨는 굉장히 더웠으므로 그녀의 행동을 주인이 한 얘기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인은 문을 열어주고 부드럽게 농담조로,
"웬일이야, 우리 목장에서 가장 귀여운 아가씨께서 이만한 더위에 벌서 맥을 추지 못한대서야 되겠나? 정작 한 더위가 닥치면 쩔쩔 매게 되겠는걸. 그렇지 않습니까, 클레어 씨?"
"좀 어지러워서 바깥 공기를 쐬면 좀 나을 것 같아요."
그녀는 기계적으로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행히도 그녀가 주인 앞에서 빠져나가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말썽을 부리던 기계가 정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 때였다.
"버터가 나온다."
하고 크릭 부인이 소리를 지르자, 테스를 주시하던 사람들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 마음에 충격을 받았던 아름다운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다시 침착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기분은 종일토록 우울했다. 오후 작업이 끝나자 친구들을 피해 밖으로 나와서는 무작정 이리저리 혼자 돌아다녔다. 주인의 얘기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재미있게만 들리는데, 그녀만 가슴 아프게 들어야하는 처지가 말할 수 없이 슬펐다. 그 얘기가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물어 가는 석양도 하늘에서 쓰리고 아픈 커다란 상처가 불타는 듯 보기 싫게 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강가에 있는 갈대밭에서 기름이 마른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처럼 슬프고 목이 쉰 듯한 외로운 새의 울음만이 그녀를 반겨 줄 뿐이었다. 그 울음소리는 이제 싫증이 난 옛 친구의 목소리 같았다.
해가 가장 긴 6월 한 달 동안은 일꾼이나 주인 가족들 모두 해만 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해가 지기도 전에 잠자리에 들 때도 있는데, 우유가 많이 나올 때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하고 또 하는 일도 상당히 힘들기 때문이었다. 다른 때는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 침실로 올라갔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그녀 혼자 일찌감치 방으로 돌아왔고, 친구들이 왔을 때엔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오렌지 빛 저녁놀을 온몸에 받으면서 옷을 벗는 그녀들을 쳐다보다가 잠이 들었으나 그녀들의 떠드는 소리에 눈이 떠져 그쪽을 돌아봤다. 그녀들 셋은 잠옷을 걸친 채 맨발로 창가에 모여 서 있었다. 불그레한 저녁놀은 아직도 그들의 얼굴과 목, 그리고 방안의 벽들을 물들였다. 그들은 깊은 관심을 모으고 마당에 있는 어떤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들의 얼굴은 서로 바싹 맞닿아 있었다. 둥근 얼굴, 새까만 머리에 파리한 얼굴, 또 적갈색의 머리를 땋은 아름다운 얼굴들이었다.
"밀지 마. 밀지 않아도 잘 보이지 않니?“
가장 나이 어린 적갈색 머리의 레티가 꼼짝도 않으면서 말했다.
"아무리 그 사람을 생각해 봤자 소용도 없어, 얘."
쾌활하게 보이고 가장 나이가 많은 마리안이 익살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은 네가 아닌 다른 여자의 뺨을 생각하고 있어."
레티 프리들은 여전히 서서 지켜보고, 다른 둘도 다투듯이 다시 밖을 내다봤다.
"어머, 저기 또 나왔어."
창백한 얼굴에 검은 머리와 윤곽이 뚜렷한 입술을 가진 이즈 휴에트가 말했다. 그러자 레티가 말을 가로막았다.
"이즈. 말 안 해도 알아. 네가 그 사람의 그림자에 키스하는 걸 난 봤어."
마리안이 나섰다.
"뭘 하는 걸 봤다고?"
"그이가 치즈 통에서 치즈를 거두어들이고 있었는데, 그림자가 뒤쪽 벽에 비치지 않았겠니. 그때 이즈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단 말야. 그이의 입 있는 그림자에다 자기 입술을 갖다 대지 않겠니. 그 사람은 몰랐지만 난 봤단 말이야."
"어머나 어쩌면, 이즈 휴에트."
이즈 휴에트의 뺨이 붉은 장미 빛깔처럼 상기되었다. 잠시 후 그녀는 냉정한 체하면서 대꾸했다.
"그 사람을 생각하는 점에선 레티도 그렇고, 마리안 역시 마찬가지지 않니?"
얼굴이 둥근 마리안은 자기의 본래 얼굴빛보다 더 붉어지지는 않았으나, 말을 얼버무리고 있었다.
"내가? 별소릴. 어머, 저기 또 나왔어. 그리운 클레어 씨."
"저것 봐, 자기도 그러면서."
"너는 그러지 않았니? 다 마찬가지야."
남이야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마리안은 솔직히 말했다.
"세 사람이 시치미를 뗄 필요는 없어. 왜 숨기려고들 하지. 난 당장 내일이라도 저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
"나도 그래, 난 그뿐만이 아냐.
이즈 휴에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결혼하고 싶어."
레티는 더 수줍어하면서 속삭였다.
"그녀들의 얘기를 듣자니까 테스는 점점 가슴이 설렜다.
"세 사람이 함께 결혼할 수는 없어.“
이즈가 말했다. 그러자 마리안이 대꾸했다.
"저 사람은 테스 더비필드를 제일 좋아하고 있어. 나는 날마다 그 사람 뒤만 살피다가 그 사실을 발견한 거야."
마리안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들은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레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테스는 그 사람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나도 가끔 그런 느낌이 들었어."
이즈 휴에트가 초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따위 시시한 얘기들은 집어치워. 우리 세 사람 중 아무하고도, 그리고 테스하고도 결혼하지 않을 거야. 가문이 좋은 집의 자손이니까 외국에 나가서 농장을 경영할 거야. 일 년에 얼마씩 줄 테니까 자기의 농장 일을 거들어 달라는 게 고작일 거야."
몸집이 뚱뚱한 마리안이 가장 크게 한숨을 쉬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테스 역시 한숨지었다. 이 지방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는 파리델 가문의 마지막 꽃봉오리이며, 셋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고 붉은 머리털을 가진 레티 프리들의 눈에는 눈물이 비쳤다. 그들은 세 가지의 머리 빛깔이 서로 엉킨 채 여전히 머리들을 맞대고 한동안 더 마당을 내려다봤다. 그들의 심정을 알 까닭이 없는 클레어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둠은 차차 짙어가고, 그들은 자리 속으로 들어갔다. 마리안은 금방 잠이 들었으나, 이즈는 모든 걸 잊고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레티 프리들은 울다가 잠이 들었다.
누구보다도 깊은 정열을 품은 테스는 잠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고받던 얘기는 그날 그녀가 참고 삼켜야 할 도 하나의 쓴 약이었다. 그런 얘길 듣고서도 마음속에 어떤 질투도 느끼지 않는 걸 보니, 그런 점에서 테스는 그녀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 같았다. 테스는 세 아가씨 중에서 누구보다 얼굴이 잘생겼고, 교육도 더 받았으며, 그리고 레티를 빼놓으면 그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데다 여자다운 면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약간의 조심만 하면 한결같이 버릇없는 그녀들을 제쳐놓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이 그녀의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그녀들이 애태운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들은 실제로 접근할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테스는 그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만이라도 그의 일시적인 애정을 불러일으켜 그의 친절을 최대한 누리고 싶었고, 또 사실 그런 기회가 여태까지 주어졌었다. 하루는 클레어가 웃으면서,
"1만 에이커나 되는 식민지의 농장에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해야 할 사람이 귀부인과 결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라고 얘기하더라는 것을 크릭 부인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농촌 여자가 부
인으로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클레어가 진심에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인지 아닌지는 별 문제로 치더라도, 지금 처지로서는 양심을 속이지 않는 한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도 없고, 또 그런 유혹에는 넘어가지도 않겠다는 것을 신앙적인 자세로 맹세한 그녀가 탤보데이스에 있을 동안만이라도 그 사람의 사랑을 받기 위한, 덧없는 짧은 행복을 위해서 그녀들의 꿈을 짓밟을 수 있겠는가?
22
이튿날 아침 그녀들은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듯 하품을 하면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평소처럼 우유 거품 걷는 일과 젖 자는 일을 마친 다음 아침 식사를 하러 집안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주인 크릭은 방안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늘 거래하고 있는 단골손님한테서 온 편지를 받았는데, 버터에서 떫은맛이 난다는 불평이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버터 덩어리가 붙은 나무 주걱을 왼손에 들고 주인이 말했다.
"틀림없어. 불평한 그대로야. 자, 여러분이 직접 맛을 봐요."
대여섯 사람이 주인 앞으로 모여들었다. 클레어가 맛을 보고, 테스도 시험해 보았다. 기숙하는 아가씨들과 한두 사람의 남자 일군, 그리고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던 크릭 부인까지 와서 맛을 봤다. 버터에서는 분명히 떫은맛이 났다. 주인은 좀더 신중하게 맛을 감별해 보고 그 원인이 되는 해로운 잡초의 종류를 가려내기 위해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소리쳤다.
"이건 마늘이야. 우리 목장 마을은 모두 뽑아 버린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듣자 오래된 일꾼들은 며칠 전에 젖소 서너 마리가 들어갔던 마른 목초 지대가 몇 해 전에도 버터 맛을 못 쓰게 만들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는 주인이 맛을 가려내지 못하고, 다만 버터에 귀신이 붙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 풀밭을 샅샅이 뒤져 봐야겠어.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되다간 큰일 나겠어."
그들은 함께 날이 무디어진 칼을 들고 풀밭으로 나갔다. 잡초들은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아주 좁은 장소에만 나 있었으므로 눈앞에 펼쳐진 무성한 풀밭에서 찾아내기란 힘들었다. 그러나 반드시 찾아내야만 했기 때문에 한 줄로 늘어섰다. 주인은 자진해서 나온 클레어와 함께 맨 앞장을 서고, 다음으로 테스, 마리안, 이즈 휴에트, 레티, 빌류엘, 조너던, 까만 곱슬머리에 눈이 둥글둥글한 결혼한 벡 닙스, 그리고 겨울철 목장의 습기 때문에 폐병에 걸려 얼굴이 누런 프란시스의 순서로 섰다. 그들이 땅을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들을 건너간 다음, 약간 아래쪽으로 비켜서서 아까와 같은 식으로 되돌아오곤 해서 끝이 났을 때는 한 치의 풀밭도 소홀히 지나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했다. 넓은 초원에서 대여섯 뿌리의 마늘을 발견했을 정도였으므로 그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독초의 매운 맛을 단 한 마리가 꼭 한 번 뜯어먹는 것만으로도 그날 하루 동안 생산되는 우유 맛을 망쳐 버린다. 그들은 성격이나 감정이 서로 달랐지만, 하나같이 허리를 꾸부린 채 정돈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나그네가 근처를 지나가다 이들의 모습을 구경하였다면 그들은 시골뜨기라고 간주해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그들이 허리를 굽히고 독초를 찾기 위해 천천히 앞으로 나갈 때 등에 따거운 오후의 햇살을 듬뿍 받고 있었지만, 햇살을 받지 않은 그늘진 얼굴에는 미나리아재비에서 반사하는 노르스레한 빛을 받아 마치 요정 같았고, 달빛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든 일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 없이 함께 행동하려는 에인젤 클레어는 이따금씩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가 테스 뒤에서 걸어가고 있는 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었다.
"기분이 어때요?"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좋아요."
그녀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들이 신상에 관해서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 불과 30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새삼스레 이런 식으로 말을 붙이는 것이 조금 싱겁게 생각됐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천천히 나아갔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클레어의 장화에 닿기도 하고, 그의 팔꿈치가 그녀의 팔꿈치에 스치기도 했다. 그들 뒤에서 따라오던 주인은 견디다 못해 일어섰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펴며 자못 괴로운 듯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정말 못해 먹을 노릇이군, 이렇게 구부리고 있다간 허리를 쓰지 못하겠어. 그런데 테스 아가씨. 엊그제 몸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이런 일을 계속하면 안 될 텐데. 어지러우면 그만둬. 뒷일은 다른 사람들이 하면 되니까."
주인은 줄에서 빠져나가고 테스도 뒤로 처졌다. 클레어도 줄밖으로 나와 혼자서 독초를 찾아다녔다. 옆에 클레어가 있는 걸 알자 지난밤에 들은 얘기가 생각나,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예쁘게들 보이죠?"
"누구 말이오?"
"이즈 휴에트랑 레티 말예요."
테스는 두 여자 중 누구든 훌륭한 농부의 좋은 아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을 좋게 이야기해 줌으로써 불행한 아름다움은 숨겨 버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예쁘다고요? 글쎄, 그렇지. 예쁜 처녀들이지. 건강하게 보이는 게 말이오.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지요."
"아름다움이란 안타깝게도 영원히 있는 게 아니에요."
"저 처녀들은 젖 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에요."
"잘하죠. 하지만 당신보다는 못하지요."
"우유 거품을 걷어 내는 일도 나보단 훨씬 잘해요."
"그래요."
클레어는 그 처녀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으나, 그들은 클레어를 보지 못했다. 테스는 침착하게 말을 계속했다.
"얼굴이 붉어지네요."
"누가요?"
"레티 프리들 말이에요."
"오오, 왜 그럴까?"
"당신이 레티를 쳐다보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했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그녀들 중의 하나와 결혼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주인을 따라 가면서 뒤에 남아 있는 클레어를 떠올리면서 서글픈 만족을 느꼈다.
그날부터 테스는 클레어를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우연하게 만나는 일이 있어도 이전처럼 오랫동안 얘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기회를 세 사람의 처녀들에게 양보했다. 그녀들의 고백을 엿듣고 클레어가 존경의 대상이 돼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테스는 여자로서 성숙해 있었다. 그녀의 생각이 옳든 그르든 간에 남자들이란 자제력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녀에게, 처녀들의 단순한 마음을 상실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클레어의 태도는 한층 흠모의 정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클레어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더라면 한집에서 기숙하는 그녀들을 일생동안 눈물 짓게 했을 것이다.
23
7월의 무더운 날씨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이 평탄한 골짜기의 대기는 마취라도 된 듯 무겁게 변해 가고 있었다. 일꾼들과 소, 그리고 수목들까지도 내리눌렀다. 뜨거운 증기 같은 빗줄기가 자주 쏟아지며 젖소들을 방목하는 초원은 더욱 기름지지만 다른 쪽의 건초 만드는 작업장엔 때늦게 방해가 됐다.
작업이 끝나고 통근하는 일꾼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간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테스와 세 처녀들은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그녀들은 약 십 리쯤 떨어진 멜스톡 교회에 가기로 약속을 한 때문이다. 테스가 탤보데이스에 온 지도 두 달이 지났지만, 함께 어울려 외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제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초원에 퍼붓던 세찬 소낙비는 약간 마른 풀을 강으로 휩쓸어 갔다. 그러나 날이 밝자 태양은 더욱더 찬란하게 빛나고 공기는 향기롭고 맑았다. 탤보데이스에서 멜스톡에 이르는 오솔길은 도중에 가장 낮은 분지를 따라 가게 돼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 이르렀을 때 약 50미터 가량의 길이 어젯밤 비로 인해 발목이 잠길 만큼 물에 잠긴 것을 발견했다. 다른 날 같으면 이런 것쯤이야 문제될 건 없었는데, 오늘처럼 몸치장을 하고 나가는 날에는 문제가 달랐다. 특히 오늘은 분홍색, 흰색, 라일락 빛깔의 웃옷들을 입고 흰 양말에다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기 때문에 흙탕물 한 방울만 튀어도 당장 눈에 띌 것이다. 그러므로 이 흙탕물은 귀찮은 방해물이었다. 교회까지는 아직도 1마일 가까이 남았고,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길 옆 높은 둑으로 기어 올라가 길을 건너려고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때 마리안이 말했다.
"한여름에 길이 막힐 줄 누가 알았담."
레티가 낙심하여 그 자리에 서면서 대꾸했다.
"이렇게 해서 건너가긴 다 글렀어. 물속으로 그냥 지나가든지, 큰길로 돌아가든지 해야지, 이러다간 많이 늦겠어."
마리안이 실망한 듯 다시 말했다.
"늦게 들어가면 사람들이 쳐다보는 통에 난 창피해 죽겠어.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를 끝내야지만 겨우 마음이 가라앉거든."
그들이 둑 위에서 서성대고 있을 대 길 모퉁이에서 철벅철벅 물 튀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에 그녀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에인젤 클레어의 모습이 보였다. 네 사람의 심장은 다투듯이 동시에 크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독단적인 목사의 아들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안식일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옷차림은 평소에 입는 작업복에다 장화를 신고, 머리의 열을 식히기 위해 양배추 잎사귀를 모자 밑에 끼웠으며, 풀을 베는 낫까지 들고 있었다. 일하러 가는 사람으로선 어느 것 하나 빈틈이 없는 차림새였다.
"저 사람은 교회에 안 나가나 봐."
마리안이 말했다. 그러자 테스가 나직하게 대꾸했다.
"저 사람도 갔으면 좋겠는데."
에인젤은 실제로 자기 행동이 옳든 그르든 간에 모호한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맑은 여름날엔 교회에서 설교를 듣기보다는 자연을 보고 배우는 게 더 흥미가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엔 건초가 얼마나 떠내려갔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그녀들은 물을 건널 생각에 골똘했으므로 클레어가 지나가는 걸 보지 못했지만 그는 멀리서부터 그녀들이 둑 위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온 것이다. 특히 그들 중의 누구를 어떻게 건네줄까 생각하면서 그들 앞으로 급히 달려온 참이었다. 장밋빛 얼굴에 반짝이는 눈을 가진 네 처녀들이 엷은 색 여름옷을 입고 둑 위에 모여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지붕 위에 앉아 있는 비둘기처럼 매력적이었다. 그녀들에게 다가가기 전에 그는 잠시 동안 그녀들을 쳐다봤다. 그녀들의 망사 같은 치맛자락은 풀잎을 스치며 파리와 나비를 쫓았다. 미처 날아가지 못한 파리와 나비는 새장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투명한 치마폭에 갇혔다.
에인젤의 눈빛은 매 뒤에 있는 테스에게 멈춰졌다. 오도 가도 못하는 자기들의 꼴에 웃음이 터질 것만 같던 상황이었지만, 그의 빛나는 시선을 밝은 표정으로 맞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과히 물이 깊지 않은, 그녀들이 서 있는 바로 아래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의 치마폭 속에 갇힌 파리와 나비를 보며 서 있다가, 맨 앞에 있는 마리안에게 다른 두 처녀도 포함시키듯 말
했다. 그러나 테스에게만은 의식적으로 무신경한 듯했다.
"모두들 교회에 가는 길이오?"
"네, 하지만 늦었어요. 늦게 들어가면 창피해서"
"제가 모두 건네다 드리죠."
네 사람은 똑같이 얼굴을 붉혔다.
"힘드실 거예요."
마리안이 말했다.
"그러나 건너려면 그 도리밖에 없지 않소. 가만히 서 있어요. 아가씨는 그리 무겁지도 않으니까. 난 넷을 한꺼번에 건네 드릴 수도 있어."
하며 자신 있는 투로 말을 계속했다.
"자, 마리안,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그렇지, 됐어. 단단히 잡아요. 됐어요."
마리안은 시키는 대로 그의 팔과 어깨에 몸을 맡기자 에인젤은 성큼성큼 건너갔다. 그의 호리호리한 모습은 마치 마리안이라는 꽃송이가 달린 꽃줄기 같았다. 그들은 길모퉁이를 돌아 자취를 감추었으나 마리안의 모자에 달린 리본만이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었다. 3분 정도 지나자 다시 에인젤이 나타났다. 이즈 휴에트가 그 다음 순서로 둑에서 기다렸다.
"저기 온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년의 입술은 흥분으로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저 사람 목에다 팔을 감을 테야. 그리고 마리안이 한 것처럼 얼굴을 들여다볼 테야."
"그렇게 한다고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니야."
테스가 재 빨리 말했다.
"무슨 일이든지 때가 있어."
이즈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안을 때가 있고, 안는 것을 멀리할 때가 있어. 안을 때가 바로 내 차례에 온 거야."
"이즈야, 집어치워. 그건 성경 구절이야."
"그래, 맞았어. 난 교회에 가면 그런 아름다운 구절에만 귀를 기울이니까."
그녀들을 대하는 태도는 친절에서 우러나 당연한 것이라고 에인젤 클레어는 생각했다. 그는 이즈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꿈꾸듯 얌전하게 그의 팔에 안기자, 그는 기계적으로 걸어갔다. 다시 그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을 때 레티는 고동치는 심장으로 몸마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붉은 머리의 그녀에게 다가와 안으면서 그는 테스를 힐끗 쳐다봤다. 에인젤의 표정엔 너무도 분명하게, 이젠 당신과 내 차례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도 나타났다. 그녀는 흥분되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가엾은 레티는 가장 가벼웠으나 클레에게는 반갑잖은 짐이었다. 마리안은 마치 밀가루 부대 같아서 육중한 그녀의 몸은 에인젤을 비틀거리게 했다. 이즈는 가볍고 침착하게 안기었지만 레티는 신경질로 뭉쳐진 여자 같았다. 그러나 클레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레티를 무사히 건네다 놓고 돌아왔다. 길 건너 언덕 위에 건네다 놓은 그녀들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이번에는 테스의 차례가 왔다. 그녀들이 흥분하는 것을 무시한 채 클레어의 숨소리와 눈길과 마주칠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몸이 뜨거워져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의 흥분이 드러날까 봐 두려웠던 그녀는 그가 앞에 왔을 때 망설이며 말했다.
"저는 둑을 타고 건널 수 있어요. 저애들보다는 잘 올라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클레어 씨는 너무 지쳤어요."
"처, 처만에."
그가 급히 말했다. 테스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의 품에 안겨 어깨와 팔에 몸을 맡겼다.
"한 사람의 라헬을 얻기 위해 세 사람의 레아를 건네줬소."
그가 속삭였다.
"그 애들이 저보다 훌륭해요."
그녀는 자신의 결심을 다짐하면서 너그럽게 대답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
그 말을 들은 테스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클레어는 누치챘다. 그들은 말없이 몇 발짝 나아갔다.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상당히 무겁죠?"
"무겁지 않아요. 마리안을 한 번 들어 봐요, 굉장한 몸집이지. 당신은 햇빛으로 따뜻해진 출렁
이는 물결 같아요. 그리고 모슬린의 이 옷은 물거품 같고."
"그렇게 보인다면 퍽 예쁘게요?"
"당신을 위해서 세 번이나 같은 일을 한 심정을 이해하겠소? 이 순간을 위해"
"모르겠어요."
"오늘 이런 일이 생기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소."
"저도 마찬가지예요. 물이 갑자기 불어서."
가쁜 숨결은 그녀의 생각을 뒤엎고 있었다. 클레어는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오, 테스."
그는 숨 가쁘게 말했다. 그녀의 뺨은 에인젤의 숨결로 뜨거워지고, 흥분한 그녀는 그의 눈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우연한 기회를 너무 이용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행동을 멈추었다. 사랑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한 일도 없는 그들이기에 서로에게 자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되도록 느린 걸음으로 남은 길을 걸었다. 그리고 굽은 길목을 돌아 나오자 기다리고 있는 세 아가씨들이 한눈에 보였다. 그들이 있는 곳이 테스를 내려놓았다. 친구들은 눈을 크게 뜨고 미심쩍은 듯 그들을 바라봤다. 테스는 자기의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에인젤은 급히 그녀들에게 인사하고 물에 잠긴 길을 첨벙거리며 돌아갔다. 그들 네 사람은 처음 올 때와 마찬가지로 함께 걸어갔다. 얼마 안 가서 마리안이 침묵을 깨뜨리고 입을 열었다.
"안 돼, 정말이지 우리들은 안 되겠어. 테스하고라면 가망 없어."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테스를 봤다.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은 널 가장 좋아하고 있어. 누구보다도 좋아한단 말야. 너를 좋아한단 말야. 너를 안고 올 때 우린 그걸 알 수 있었어. 네가 조금만 눈치를 보였어도 그 사람은 키스했을 거야."
"아냐, 그렇지 않아."
떠날 때 간직했던 기쁨은 어찌 된 일인지 사라져 버렸지만, 적의라든가 악의는 없었다. 그들은 마음이 착한 아가씨들이었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려 버리는 순박한 시골 처녀들이기 때문에 테스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에인젤을 그녀에게 빼앗기는 것조차도 운명이라고 생
각했다. 그녀는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들이 에인젤을 사모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 그녀 자신도 더욱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은 특히 여자들에게 번지기 쉬운 것이었다. 테스의 애타는 심정은 같은 처지에 있는 그녀들을 가련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그런 마음을 꺾으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날 밤 테스는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나는 절대로 너희들을 방해하지 않겠어. 너희들 누구라도 말이야. 그 사람은 결혼할 생각도 없었겠지만, 만약에 결혼을 하자고 그러더라도 나는 거절해 버리겠어. 누구하고도 결혼은 하지 않을 테니까."
"어머, 그게 정말이니? 왜 그러지?"
레티가 의심쩍은 듯 물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솔직히 내 자신을 그이에게서 제쳐놓고 생각하더라도, 너희들 중 누구하고도 결혼할 것 같진 않아."
자신도 모를 감정 대문에 마음이 괴로운 가련한 레티는 마침 그때 올라온 두 처녀를 돌아봤다.
"우린 테스하고 다시 친해질 수 있어. 저애도 우리처럼 그 사람을 생각지 않기로 했대."
그래서 서먹서먹하던 기분은 사라지고, 그들은 이전처럼 다시 친밀해질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어. 나한테 두 번씩이나 구혼한 스티클포트의 목장 주인과 결혼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그 사람의 아내가 될 바에야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 그런데 이즈, 넌 왜 잠자코 있어?"
마리안이 잔뜩 침울해서 말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즈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말야, 오늘 그가 나를 안고 건널 때 틀림없이 키스를 해 줄 줄로 믿었거든. 그래서 얌전하게 그의 가슴에 몸을 맡긴 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단 말야. 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어. 그러나 그이는 끝내 키스해 주지 않았어. 이제는 탤보데이스에 있고 싶지도 않아. 난 집으로 돌아갈 테야."
침실의 공기는 마치 그녀들의 절망적인 감정과 더불어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은 그녀들의 가슴속에 있는 불길을 부채질해서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주었다. 그녀들을 따로따로 구별하려 했던 여러 가지 차이점들은 이 정열로 인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이제 여성이라는 공통된 한 유기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들에겐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비밀도 없고 질투도 하지 않았다. 저마다 상당한 상식을 갖추고 있어 쓸데없는 자부심으로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고, 자기의 사랑을 부인하지도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우쭐대지도 않았다. 한 남자를 놓고 그녀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행위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혀 어린애 장난 같은 짓이라는 사실을 그녀들 자신이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무 목적도 없는 시작이고, 그들대로의 생각일 뿐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그녀들의 사랑은 정당화될만한 이유가 부족했던 것이다. 본능적인 면에서 말할 대 이성을 그리워하는 건 조금도 이상할 리 없고, 에인젤을 사모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어 그녀들을 황홀하게 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만약 에인젤과 결혼하고자 하는 욕심이 그녀들에게 있었다면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끄러운 짓들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그릇된 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를 체념하고 자기 나름의 자리를 되찾은 것이다.
그녀들은 작은 침대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아래층의 치즈 자는 기계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반시간쯤 지났을 때 누군가 테스에게 말을 건넸다.
"테스, 아직 안 자니?"
이즈 휴에트의 목소리였다. 테스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레티와 마리안도 갑자기 이불을 걷어차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사람의 색시감으로 골라 놨다는 여자 말야, 도대체 어떻게 생긴 여잘까?"
"글쎄 말야."
하고 이즈가 말을 받았다. 잠시 후 잠자코 있던 테스가 숨 가쁘게 물었다.
"색시를 골라 놨다고? 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아니, 정말이래. 그런 소문이 들이더군. 가문이 비슷한 집에서 정했대. 클레어 목사의 교구인 에민스터 근방에 있는 신학 박사의 딸이라더라. 에인젤은 그 여자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지만, 집안끼리 약속이 됐으니까 틀림없이 결혼할 거야."
그녀들이 그의 결혼 얘기를 자세하게 들은 일은 없지만, 어둠 속에서 공상으로 애태우며 그려 보기에는 충분한 이야깃거리였다. 그녀들은 에인젤이 결혼에 동의하는 모습과 결혼 준비, 축복에 넘치는 그들의 가정생활 등 온갖 상상을 눈앞에 그렸다. 그 사람은 그녀들의 사랑과 관계있는 일 따위는 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잠이 들어 슬픔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잠이 들어 슬픔을 잊어버릴 때까지 얘기하고 괴로워하며 흐느껴 울었다.
클레어에게 혼담이 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 테스는 자기에 대한 에인젤의 태도가 어떤 깊은 의미를 두고 있다는 부질없는 생각은 하지 않기고 했다. 다만 여름 한철 지나가는 덧없는 연정일 뿐, 그밖에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슬펐던 것은 그녀가 윤리 도덕적인 면에선 에인젤이 무시하는 아가씨들보도 훨씬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는 사실이었으며, 이 때문에 그녀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24
바 골짜기의 습기를 머금은 비옥한 토지가 훈훈하게 발효하고,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들이 양분을 빨아올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계절이다. 이러한 계절에 환상적인 사랑이 더욱 열렬해지지 않을 수 없으니 이미 사랑을 위해 열려 있던 가슴도 자연 환경과 더불어 사랑이 잉태되기 시작했다. 7월이 가고 뒤이어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됐다. 이 무더위는 마치 탤보데이스 낙농장의 의지와 맞서 보려는 자연의 도전 같기도 했다. 봄에서 초여름까지는 그렇게도 맑고 신선하던 이곳 공기가 지금은 짜증나도록 무력하게 만들었다. 자연의 향기마저 그들을 내리누르는 것 같고, 한낮의 경치는 마치 기절해 누워 있는 것처럼 널브러져 보였다. 높은 지대에 있는 초원은 뜨거운 태양에 누렇게 타 버렸으나 냇물이 흐르는 이곳에는 아직도 푸릇푸릇 풀들이 무성했다.
클레어는 밖으로 느끼는 더위도 괴로웠으나 상냥하고 말이 적은 테스에 대한 끓는 열정으로 마음을 태웠다. 장마가 걷힌 뒤라 고원지대는 메말라 있었다. 시장에서 집으로 향하는 주인의 짐마차가 먼지에 뒤덮인 길을 뽀얀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렸다. 그것은 마치 불붙은 화약 열차가 한 줄기 흰 연기를 뿜으면서 달리는 것과 같았다.
쇠파리 떼에 따끔따끔 찔리는 암소들이 빗장이 다섯 개나 달린 농장의 뒷문을 뛰어넘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인은 언제나 셔츠 소매를 걷어 붙인 채 지냈다. 창문과 출입문을 모두 열어 놔야 겨우 공기가 좀 통하는 것 같은 요즈음, 안마당에 있는 지빠귀 새와 티티새들은 날짐승이라기보다는 길짐승처럼 날갯죽지를 늘어뜨린 채 덤불 속 그늘 밑으로만 기어 다니고 있었다. 부엌에 있는 파리들까지 잘 도망치지도 않고 사람을 괴롭히며, 마룻바닥이나 옷장 서랍 속, 젖을 자는 아가씨들의 손등 등 평소 잘 앉지 않던 곳으로만 기어 다녔다. 사람들의 대화는 언제나 일사병에 관한 것뿐이었고, 버터 제조나 저장 문제 같은 건 아예 절망적이었다. 시원하고 손쉽게 하기 위해 소들을 몰아들이지 않고 목장에서 그대로 젖을 짰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동안 소들은 작은 나무 그늘이라도 찾아가서 그늘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녔다. 젖을 짤 때에도 파리 떼 때문에 소는 가만히 서 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아직도 젖을 짜지 않은 너댓 마리의 소가 그들의 소떼에서 벗어나 생울타리 모퉁이 뒤에서 있었다. 그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테스를 더 잘 따르는 덤플링과 올드 프리티도 끼어 있었다. 방금 젖을 자고 난 소 곁에서 테스가 일어서자 얼마 동안 그녀를 지켜보던 에인젤 클레어가 이번엔 건너편에 있는 소들을 가리키면서 젖을 짜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고 걸상과 우유 통을 들고 소 있는 데로 갔다. 얼마 뒤 올드 프리티의 젖이 통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생울타리를 통해서 들려왔다. 에인젤도 다루기 힘 드는 소의 젖을 짜 준 다음 일을 끝마치기 위해 소가 있는 모퉁이 구석으로 갔다. 이제는 그도 주인 못지않게 젖 짜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
젖을 잘 때는 모든 남자들도 그렇지만 여자들 중에도 더러는 한결같이 소의 배 밑에까지 깊숙이 머리를 수그리고 우유 통을 들여다보면서 짠다. 그러나 대개 나이가 젊은 서너 사람은 머리를 소 옆구리에 기댄 채 젖을 짠다. 테스도 그런 버릇을 지니고 있어 관자놀이를 소 옆구리에 붙이고 일정한 표적도 없이 그냥 목장 먼 쪽을 바라보며 올드 프리티의 젖을 짜고 있었다. 햇빛이 젖 짜는 테스의 옆모습을 정면으로 비쳐 분홍색 웃옷과 차양이 달린 흰 모자를 쓴 그녀를 마치 조각품처럼 보이게 했다. 다갈색 젖소 옆구리를 배경으로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그녀의 육체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클레어가 뒤로 다가와서 젖소 밑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테스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와 표정은 놀라울 만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은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황홀한 기분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이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곤 젖소가 흔드는 꼬리와 분홍빛을 띤 테스의 손뿐이었다. 혈액 순환에 따라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녀의 손도 어떤 자극에 따라 움직이듯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더구나 먼 곳에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는 동작이고 느낄 수 있는 체온이며, 또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장밋빛 입술이 오늘따라 더욱 매혹적이었다. 테스의 말하는 듯한 까만 눈과 아름다운 뺨, 그린 듯한 눈썹, 잘 다듬어진 턱과 목은 다른 여자한테서도 본 일이 있었으나, 이 세상에서 그 입에 비길만한 것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아무리 정열적이지 않는 남자일지라도 한가운데가 위로 약간 쳐들린 듯한 그녀의 빨간 입술을 본다면, 넋을 잃게 될 것이다. 눈에 덮인 장미꽃이라는 옛 엘리자베스 시대의 비유가 떠오르며, 가슴이 벅차도록 아름답게 보이는 그녀의 입술만을 응시했다. 완전한 듯하면서도 약간의 불완전이 깃들여져 있어 인간미를 더해 주기 때문에 더욱 매혹적이었다. 마음속에서 쉽게 그녀를 그려 낼 수 있도록 클레어는 수없이 그녀의 입술을 살펴 왔었다. 그녀의 입술은 언제나 선명한 색깔과 움직임을 드러낸 채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마다 그는 현기증과 전신에 오한을 느끼며 가슴을 울렁거렸다. 그런 상상에 빠져 있을 때, 어떤 심리적 작용 때문인지 멋 적게 재채기가 났다. 테스는 비로소 에인젤이 쳐다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꿈꾸는 듯 꼼짝 않고 있던 그녀의 표정은 자취를 감췄으나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시치미를 땠다. 그러나 그녀를 자세히 살폈더라면 붉은 빛이 볼에 살짝 스치는 걸 봤을 것이다.
클레어의 가슴속에 파고든 자극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결심이나 침묵, 조심성, 두려움 등은 패주하는 군대처럼 물러가 버렸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젖소가 차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그는 우유 통을 젖소 옆에 놔두고 그의 눈길이 쏠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녀 옆으로 온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두 팔로 껴안았다. 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팔에 안겼다. 놀라움에 입을 벌린 채 황홀한 기쁨에 찬 소리를 억누르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너무나 매혹적인 입술에 키스하려던 순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욕망을 억눌렀다.
"귀여운 테스, 용서해 줘요. 먼저 허락을 받았어야 할 텐데.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하겠군. 하지만 장난으로 한 짓은 아니야. 귀여운 테스.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해.“
하고 그는 속삭였다. 이때 올드 프리티는 어리둥절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기 배 밑에 두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걸 보자 젖소는 뒷발을 들어올렸다.
"젖소가 골이 났어요. 아마 우유 통을 걷어차 버릴 거예요."
테스는 소리치며 젖소의 동작에 신경을 쏟았지만, 마음만은 더욱 깊이 에인젤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일어선 에인젤은 테스를 여전히 안은 채 함께 서 있었다. 먼 곳을 쳐다보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괴기 시작했다.
"왜 울지, 테스?"
"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지금 처해 있는 입장을 깨닫자 불안해져서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는 실망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그의 이성이 일시적인 감정에게 패한 후회에서 나온 한숨이었다.
"난 결국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군요. 진심으로, 그리고 깊이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소. 그러나 나는 이 이상 말하지 않겠소. 당신을 괴롭힐 뿐이니까. 당신이 놀란 것만큼 내 행동에 대해서 나 자신도 놀라고 있습니다. 당신이 마음을 놓고 있을 때 그랬다고 생각하진 않겠지요. 또 성급하고 경솔하다고 생각지는 않겠죠?"
"아뇨,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는 그녀를 놓아 주고 잠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게 젖 짜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서로 하나가 됐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생울타리를 지나 주인이 그들을 돌아보러 왔을 때 그들이 단순히 아는 사이 이상의 관계로 된 사실을 눈치 챌 만한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들의 마음속엔 지축이라도 흔들 수 있는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만약 농장 주인이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안다면, 무척이나 현실적인 그는 그들을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떤 강한 힘, 불가항력적인 흐름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제 테스 앞에 드리워졌던 장막이 활짝 걷히면서, 그들 앞에는 새로운 지평선이 열린 것일까? 그것이 잠시이든, 영원히이든 간에
제4부 어둠의 사슬
25
에인젤은 자기 마음을 사로잡은 테스가 제 방으로 돌아간 뒤에도 안절부절 못하다가 저녁이 되자 어둠이 깃든 밖으로 나A다. 밤인데도 낮과 마찬가지로 찌는 듯 무더웠다. 풀밭 위가 아니면 조금도 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는 더위였다. 풀밭 위가 아니면 조금도 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는 더위였다. 큰길이나 오솔길, 뒷마당의 벽까지도 난로처럼 뜨거웠고, 이 뜨거운 바람은 몽유병자 같은 클레어의 얼굴에 부딪쳐 왔다.
그는 착유장 뒷마당의 동쪽 문에 가 앉았다. 자신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어리둥절했으나, 그땐 감정이 이성을 마비시킨 것 같았다. 갑작스런 포옹을 하고 난 뒤 두 사람은 다시 떨어져야만 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테스는 아직까지 멍해 있었고, 에인젤은 또한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사려 깊은 그는 자기들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또 다른 사람들 앞에선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몰랐다. 에인젤 클레어가 처음 이곳으로 올 때엔 기술을 배우기 위한 일시적인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그 몇 달이란 기간은 일생에 비하면 아주 작은 얘깃거리밖에 안 되고, 또 세월이 지나면 기억에서 사라질 것으로 알았다. 그는 마치 외계와 차단된 듯한 한 구석에서 재미있는 바깥 세계를 조용히 바라보며 월트 휘트먼과 더불어,
"평범한 옷차림의 남녀의 무리, 내 눈에 비친다. 신기하게."
라고 노래 부르며 계획을 세우려고 이곳에 왔던 것이다. 물론 재미있는 일이 이곳에도 있었다. 그러나 원래 그의 마음을 끌었던 세계는 무언극처럼 단조로워졌고, 침침하고 생기 없던 이곳에서 어디서도 겪지 못했던 신기한 일이 활화산처럼 터져 버린 것이다. 집안의 창문은 모두 열려 있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는 낙농장 사람들의 작은 소리까지 남김없이 들렸다. 그가 잠시 머물러 있는 이 누추하고 보잘것없는 건물을 이 골짜기에서 찾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이끼 낀 이 벽돌집의 처마가 마치 속삭이는 듯 머무르시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창문은 미소 짓고, 출입문은 달콤하게 손짓하며, 덩굴은 둘만의 비밀이라도 아는 듯 얼굴을 붉혔다. 이 집안에 있는 한 여자의 영향력은 벽돌과 땅과 넓은 하늘까지도 불타는 열정으로 감동시킬 만큼 깊은 것이었다. 젖 짜는 아가씨에 지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존재도 분명치 않은 이 낙농장의 그녀가 그에게 커다란 문제를 안겨 준 것은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다.
새로 싹트기 시작한 사랑이 그가 갖고 있는 문제의 일부분을 이루긴 했지만, 단지 그것만도 아니었다. 생활의 중대성이 외부적인 변화보다도 주관적인 경험에 좌우된다는 사실은 에인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우둔한 왕자보다는 감수성이 강한 농부들이 오히려 마음이 넓고 생활에 충실하며, 또 재미있게 살아간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곳의 생활 역시 다른 어느 곳의 생활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고 깨달았다. 이단적이고, 결점도 약점도 가지고 있지만, 클레어에겐 양심이 있다.
테스는 노리개 역할이나 하다가 내버려질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그녀 자신은 현재의 생활을 만족하게 느끼는지 또는 할 수 없어 견디는지는 몰라도, 그가 볼 때는 누구 못지않은 위
대한 생활, 즉 가치 있는 생활을 한다고 생각됐다. 테스에게는 온 세상이 자기 느낌에 따라 좌우되고 자기가 있음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존재했다. 이 우주마저도 그녀가 탄생한 그 해, 그날에 테스를 위해서 생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에인젤이 끼어들어 본 이 의식이야말로 냉정한 운명이 그녀의 생존을 위해서 준 단 하나의 기회였고, 또 그녀의 전부였다. 일생을 통해서 단 한번뿐인 기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자기보다 못하다고 그녀를 무시할 수 있으며, 가지고 놀다 싫증나 버리는 예쁜 노리개로 볼 수 있을까? 그녀의 마음에 불어놓은 애정을 진지한 마음으로 다루고, 그것으로 괴로워하거나 파멸당하지 않도록 돌봐야 하지 않겠는가? 친숙한 태도로 그녀와 매일 만나는 것은 돋기 시작한 싹을 키워 주는 일이다. 이처럼 밀접한 관계에서 생활하고 있으면, 서로 만난다는 것은 바로 새로 정이 깊어지는 것이 된다. 생명이 있는 인간인 이상 이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의 관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냐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당분간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는 일은 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에게 준 상처가 아직 크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겠다는 결심의 실행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맥박이 뛸 때마다 그녀에게 마음이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친구들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클레어는 그들을 찾아가 보려고도 했다. 앞으로 다섯 달만 더 있으면 낙농 기술은 다 배우게 되니까 다른 농장에 가서 두어 달 더 익히면 농사에 관한 지식도 완전히 터득하여 혼자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농부에게는 아내가 필요치 않을까? 농부의 아내는 응접실의 납 인형 같아야 하는가? 아니면 농사일을 잘 아는 농촌 여자라야 될까? 잠자코 있어도 마음에 드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떠나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아침 탤보데이스 낙농장의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어느 아가씨가 아침부터 클레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자 주인 크릭이 대답했다.
"응, 그래. 클레어 씨는 가족들과 며칠 동안 같이 지내려고 고향인 에민스터에 갔어."
가슴을 설레며 식탁에 앉았던 네 아가씨들에게 이 소식은 아침의 맑은 햇빛이 단번에 빛을 잃고 새들도 지저귐을 멈추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말로든 행동으로든 낙심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또다시 주인은 덤덤하게 말을 계속했다.
"우리들하고 같이 있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다른 데서 일을 배울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아."
"얼마나 더 여기 있게 되나요?"
슬픔에 잠긴 네 아가씨들 가운데 태연한 목소리로 물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한 이즈 휴에트가 말했다. 그녀들의 생명이 마치 그 대답에 달렸기나 한 듯, 나머지 아가씨들은 주인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레티는 멍청하니 입을 벌린 채 식탁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마리안은 원래 붉은 얼굴이 더욱 상기되었으며, 테스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바깥 목장을 내다봤다. 크릭은 역시 안타까울 정도로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글쎄, 수첩을 보지 않고선 확실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 날짜도 조금 변경될지 몰라. 외양간에서 소가 해산하는 걸 배우려면 좀 더 있어야 하지. 금년 말까지는 있을 거야."
괴로움을 둘러싼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는, 그와 함께 지낼 안타깝고도 쓰라린 기쁨을 맛보며 지내게 될 넉 달. 그 뒤에 닥쳐올 견딜 수 없는 깜깜한 밤.
그 시각에 클레어는 낙농장에서 10마일쯤 떨어진 좁은 길로 말을 몰면서 에민스터에 있는 부친의 목사관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는 크릭 부인이 그의 양친에 대한 인사의 표시로 보내는 까만 카스텔라와 벌꿀 술 한 병이 담긴 조그만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들고 있었다. 그의 눈은 앞으로 길게 뻗어나간 하얀 오솔길을 주시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년 일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테스를 사랑하고 있다. 그녀와 결혼을 해야 되는가? 그 결혼에 대해 어머니와 형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들의 애정이 일시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적인 향학에서 출발한 것인지의 동기에 달렸다.
언덕에 둘러싸인 조그만 마을의 튜더 왕조풍의 붉은 벽돌로 지은 교회의 탑과 목사관 근처에 있는 조그만 숲이 마침내 눈 아래로 보였다. 그는 낯익은 문을 향해 말을 몰고 내려갔다.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교회당 있는 쪽을 힐끗 바라봤다. 예배실 출입문 옆에 열두어 살에서 열여섯 살 가량으로 보이는 소녀들보다 몇 살 더 먹어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풀을 빳빳하게 먹인 흰 예복을 입었으며, 책을 두어 권 들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클레어가 온 것을 그녀가 보았는지도 모르나 보지 못했기를 바랐다. 그쪽에서 알아봐 인사하는 게 귀찮았다. 그녀 역시 나무랄 데 없는 여자였지만 인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녀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에인젤은 단정했다.
그녀의 이름은 머시 찬트로 이웃에 사는 아버지 친구의 외동딸이다. 에인젤 부모는 그가 장차 그녀와 결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신앙 절대주의와 성경 클럽의 강의에는 대단히 열성적이어서 지금도 성경을 가르치러 들어가는 참이었다. 그러나 클레어의 마음은 여름의 막바지에 찌는 듯 무더운 바 골짜기의 정열적인 이방인들에게로 마음이 쏠렸다. 그들은 쇠똥으로 얼룩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건강한 장밋빛 얼굴도 웃고 있었다. 그중에서 누구보다도 정열적인 한 여자에게로 마음이 내달리고 있었다.
그는 에민스터에 가려는 충동이 순간적으로 생겼기 때문에 부모에게 편지도 내지 못했지만, 양친이 교구 일로 나가기 전인 아침 식사 시간에 당도하기 위해서 급히 말을 몰았다. 그러나 시간이 좀 늦어져서 가족들이 식사하고 있을 때 도착했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가족들 모두 벌떡 일어나 반겨 주었다. 그 자리에는 양친과 이웃 교구에서 부목사로 일하다가 두 주일의 휴가로 돌아온 펠릭스 형, 그리고 고전어 학자로서 자기 출신 대학의 특별 연구원이며 학감인 카드버트 형이 케임브리지의 장기 휴가로 돌아와 있었다. 어머니는 캡에 은테 안경을 썼고, 아버지는 65세로 흔히 교직자에게서 풍기는 경건한 풍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엔 사색과 의지력으로 잡힌 주름이 있었다. 벽에는 에인젤의 누이 사진이 걸렸는데, 에인젤보다 열여섯 살 위인 이 집의 큰 딸로 선교사와 결혼해서 지금은 아프리카에 가 있었다. 클레어 목사는 지난 20년 동안 현대 생활에서 거의 낙오된 완고한 목사였다. 위클리프, 후스, 루터, 그리고 칼빈 등 신학자들의 정통 후계자로서 복음파 중의 복음파이며, 개종주의자이기도 했다. 생활과 사상이 사도다운 순박성을 지녔고, 또 젊을 때 심각한 인생 문제에 대해 마음을 정하고 난 뒤로는 전연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같은 시대 목사들이나 같은 학파에 속한 목사들한테서도 극단주의라는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뜻을 굽히지 않는 굳센 태도라든지, 주의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의 의혹을 몰아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 놀라운 힘에 대해서는 그의 사상을 전적으로 반대하는 목사들까지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탈사스의 바울을 사랑했고, 사도 요한을 좋아했으며 성 야곱을 끝내 미워했다. 그리고 디모데와 디도와 빌리몬은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는 감정이었다. 그가 알기로는, 성경의 신약 성서는 논증이 아니라 즐거움의 외침이며, 하느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사도 바울의 서한집이었다. 그의 결정론의 교의는 너무나 엄격해서 거의 악덕에 가까웠으나 이것을 세부적인 면에서 본다면, 쇼펜하우어나 레오파르디의 사상과 비슷한 절망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교회 법규와 예배 규정을 무시하고 신앙 조목을 외면하면서도 모든 범주에서 자기는 변함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태도가 전부 옳다고 할 수 없을 진 몰라도 한 가지, 성실하다는 것만은 확
실했다.
바 골짜기에서 아들이 경험하는 자연의 환경이나 싱싱하고 탐스런 여성에 대한 탐미적이고 관능적이며 이기적인 즐거움에 관해서는 연구나 상상력으로 충분히 이해한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성질에는 마땅치 않을 것이다. 언젠가 한 번 에인젤이 흥분했을 때 근대 문명을 지배하는 종교의 근원이 팔레스타인이 아니고 그리스였더라면 인류에게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런 주장에 대해 반 가량의 진리는 그만두고라도 천분의 일의 진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당치않은 설명이라고 생각한 그 아버지의 슬픔은 대단했다. 얼마 동안 아버지는 근엄하게 에인젤을 타이르기만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 오래 마음에 두지 않는 다정한 아버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미소를 가득 지은 채 아들을 반겼다.
에인젤은 자리에 앉자마자 내 집의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을 느꼈으나, 전에 같이 모인 가족 중의 하나라고 느꼈던 것과는 좀 달랐다. 그는 집에 돌아올 때마다 서먹서먹했지만, 지난번 가족들과 함께 목사관 생활을 한 뒤로는 유난히 그런 생각을 더 했다. 목사 가정의 생활이 에인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의 초월적인 사고방식이란 하늘 위에 낙원이 있다든가, 땅 밑에 지옥이 있다는 등 지구 중심적인 사리 판단이라, 마치 별나라 사람들의 공상 같아서 에인젤에게는 부자연스러웠다.
요즈음 에인젤은 인생에 관한 것만 보아 왔다. 인간 스스로가 기꺼이 조정하려는 지혜를 무조건 막으려고만 하는 신앙 교리에 굽히지도 않고, 비뚤어지게 생각지도 않으며, 또 얽매이지도 않는 삶의 열정적인 맥박만 느낄 뿐이었다. 가족들이 보기에도 이전의 에인젤과는 아주 달랐다. 이전의 클레어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특히 그의 형들이 볼 때 그 변화는 에인젤의 행동 어디에서도 나타났다. 에인젤은 농부처럼 굴었다. 다리를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얼굴은 거침없이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행동은 마음속의 변화를 그대로 나타냈다. 학생답던 모습은 자취도 없고, 사교적인 청년의 인상은 찾아볼래야 볼 수 없었다. 점잖은 체하는 사람이 본다면 교양 없다고 할 것이고, 새침데기의 여자가 본다면 버릇없는 남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에인젤의 이런 인상과 태도는 탤보데이스 목장에서의 생활이 그로 하여금 그대로 그들을 닮게 한 한 것이다.
아침 식사를 미친 다음 그는 두 형들과 함께 걸었다. 형들은 교양이 풍부했고, 또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청년들로서, 다시 말하면 조직적 교육이라는 기계에서 해마다 생산되는 것 같은 전형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썼는데, 그때그때 유행에 따라 줄 달린 외알 안경을 낄 때도 있고, 또 두 알짜리 코안경을 끼다가도 테 있는 보통 안경으로 유행이 바뀌는 즉시 바꿔 낄 뿐 자기들의 시력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워즈워드가 계관 시인으로 지면되면 그의 시집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셸리의 인기가 떨어지면 그의 책은 책장에서 먼지에 파묻혔다. 화가 코레지오의 성가족이 칭송될 때 그들은 예찬하고, 벨라스케즈가 칭송을 받으면 아무런 이의도 없이 그들의 비판에 발을 맞추었다.
형들이 에인젤을 점점 거칠고 부도덕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듯이 에인젤의 눈에 형들 또한 정신력이 점점 한계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펠릭스는 교회의 화신같이, 그런가 하면 카드버트는 대학의 일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펠릭스한테는 교구 종교회와 감독 관구 시찰이, 카드버트에게는 케임브리지 대학이 그의 세계를 움직이는 큰 태엽이었다. 문명사회에 성직자도 아니고 대학 출신도 아닌 사람들이 몇 백만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형들은 다 같이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의 값어치를 알고 동등하게 존중하려는 게 아니라,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로 알고 있었다.
형들은 모두 효성이 지극한 아들로서 부모를 정기적으로 찾아왔다. 신학의 전통에서 본다면 아버지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새로운 종파에 속하지만, 펠릭스는 아버지에 비해 희생정신이 강하거나 이해를 초월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장하는 사람의 위험이 예견되는 반대 의견에는 아버지보다 너그러웠지만 자기 이론을 모독하는 자를 아버지만큼의 아량으로 용서해 주지 못했다. 카드버트는 대체로 형보다 너그러운 성격이지만, 감정만 섬세할 뿐 다정하지 못했다.
형들이 에인젤보다 아무리 유리한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진실한 생활을 깨닫지도 못하고 말할 줄도 모른다는 전날의 느낌이 산허리를 따라 걸을 때 되살아났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처럼 형들도 의견을 말할 기회가 적은 것만큼 관찰하는 기회도 적었던 것 같다. 형들이 속한 사회의 부드럽고 잔잔한 흐름 저쪽에 일렁이는 복잡한 힘의 작용을 충분히 알지 못했고, 또 부분적인 진리와 보편적인 진리의 차이도 몰랐다. 또, 그들이 교회나 학원에서 얻어 들은 내부 세계는 외부 세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펠릭스는 안경 너머로 들판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에인젤에게 말했다.
"이제 너는 농사를 짓는 도리밖에 없겠구나. 그러니 우리도 그걸 인정하는 수밖에 없지. 그러나 너한테 바라고 싶은 것은 도덕적인 정신을 잃지 않도록 힘써 달라는 거야. 농사가 육체적으로 힘 드는 일이라는 건 사실이지만,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도 고상한 정신을 가질 수 있을 거다."
"물론이죠. 그건 벌써 1900년 전에 입증된 거 아닙니까. 형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지만 말이죠. 그런데 형님은 왜 내가 도덕이나 고상한 정신을 저버린 것처럼 말씀하시죠?"
"아, 그건 내 짐작이야. 내 편지나 네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 보면, 슬며시 너의 지식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구나. 카드버트,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에인젤은 무뚝뚝하게 펠릭스한테 말을 건넸다.
"그런데 형님, 우리는 다정한 형제간이지만 우리는 제각기 주어진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지성을 가지고 다진다면, 형이야말로 자기만족에 빠진 독선가로 생각되는데, 제 지성 따윈 염려 마시고 형님의 지성에 대해 생각하는 게 나을 거예요."
그들은 서로의 기분은 접어 둔 채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점심은 일정한 시간 없이 아침 교구에 나간 양친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야 비로소 하게 되어 있었다. 희생적인 클레어 목사 부부도 오후에 찾아오는 교구민에 대한 생각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들은 다 같이 이런 점에 대해 양친이 좀 현대적 관념을 따라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산책을 하고 난 뒤라 시장기를 느꼈다. 노동자로서 낙농장 부인이 해 주는 소박한 음식을 양껏 먹던 에인젤은 특히 배가 고팠다. 그러나 늙은 양친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들이 거의 다 지쳤을 무렵에야 양친은 돌아왔다. 그들은 병들어 누워 있는 교구민의 간호를 해 주느라고 늦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라도 더 살게 해 줌으로써 하느님 곁에 가는 것을 늦추는 셈이므로 평소의 설교와 모순된 것이 아닐까.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자 식어 빠지고 변변찮은 음식이 나왔다. 에인젤은 농장에서처럼 맛있게
구워 달라고 일러 놓은 농장 부인이 준 까만 푸딩을 두리번거리면서 찾았다. 풀냄새가 향긋하게 풍기는 훌륭한 맛을 부모님도 같이 즐기길 바랐다.
"아, 너 그 까만 푸딩을 찾는 모양이로구나.“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이 설명을 듣고 나면 아버지나 나처럼 너도 섭섭히 생각지는 않겠지. 사실 우리 교구 내에 정신병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 크릭 부인이 준 고마운 선물을 그 집 아이들한테 갖다 주자고 했더니 네 아버지도 찬성하시더구나. 그들에게 큰 기쁨도 될 것 같아서 그 집에 갖다 줬단다."
"잘하셨어요.“
라고 대답한 에인젤은 이번에는 벌꿀 술을 찾았다. 어머니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 벌꿀 술엔 알코올 성분이 너무 많이 섞였더라. 음료로 마시기엔 적합하지 않지만, 다치거나 기절했을 때 브랜디 대신 쓰면 좋을 것 같아서 약상자 속에 넣어 뒀다."
"원칙적으로 우리들은 이 식탁에서 술은 안 마시는 거야."
아버지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지만 크릭 주인 아주머니한테 뭐라고 그러죠?"
"사실대로 말해야지.“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 푸딩과 벌꿀술을 참 맛있게 잘 먹었게 잘 먹었다고 가서 말하고 싶었는데. 그 부인은 쾌활하고 친절한 분이죠. 제가 돌아가면 당장 그것부터 물어 볼 겁니다."
"먹지 않은 걸 맛있게 먹었느니 뭐니 할 수야 없지."
아버지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그건 근사한 술입니다."
"뭐, 근사하다고?"
카드버트와 펠릭스는 동시에 말했다.
"아, 그건 탤보데이스 낙농장에서 쓰는 말이지요."
에인젤은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부모에게 정서가 없는 것은 마땅찮은 일이었지만, 실행 면에 있어서는 정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6
초저녁에 가족 예배를 드린 뒤 에인젤은 가슴에 품고 있는 두어 가지 중요한 일에 대해서 아버지와 얘기할 기회를 만들었다. 형들 뒤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동안 에인젤은 형들의 구두 뒤축에 박힌 작은 못을 바라보면서 그 문제를 열심히 생각했다. 예배가 끝나자 어머니와 함께 형들은 다른 방으로 가 버리고 아버지와 둘이만 남게 되었다.
영국 본토나 식민지에서 농장주로서 크게 성공해 보려는 계획을 의논했다. 에인젤을 케임브리지에 보내지 못한 비용만큼 아들이 땅을 사든지, 무엇에 쓰든지 간에 매년 얼마씩이라도 저축하는 것을 부모의 의무로 생각하는 아버지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에인젤이 불공평한 냉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세속적인 재산으로만 따진다면, 너는 몇 년 안으로 형들보다훨씬 낫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이러한 호의에 힘을 얻은 에인젤은 좀 더 중요한 문제를 끄집어냈다. 나이도 이미 스물여섯 살이나 됐고, 또 농부로서 일을 하려면 뒤를 돌봐 줄 사람, 이를테면 자기가 밖에 나가 일할 동안에 집안일을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하게 될 텐데, 결혼하면 어떻겠느냐고 아버지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에인젤은 의도적으로 질문을 끌어갔다.
"검소하고 부지런한 농부가 될 자에겐 어떤 여자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네가 나들이를 할 때 도움을 주고 위안이 될 만한 참다운 기독교 신자여야겠지. 그 외엔 문제되는 게 없어. 그런 여자가 없는 건 아니지. 이웃에 사는 극진한 내 친구인 찬트 박사라고“
"그렇지만 소젖을 짤 줄 안다든가, 좋은 버터와 훌륭한 치즈도 만들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닭이나 칠면조가 알을 품게 할 줄 알아야 되고, 병아리를 까게 할 줄 알아야 하며, 바쁠 때는 밭에 나가서 일꾼들도 감독해야 하고, 염소나 송아지의 값을 어림할 줄도 알아야 할 텐데요."
"그렇지, 농부의 아내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솔직한 얘기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까지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순결하고 고상한 여자를 원한다면, 네가 늘 관심을 갖는 것 같더라만 머시도 너에게 도움이 될 게고, 또 그 애보다 네 어머니나 내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참이다. 요즘 이웃 찬트의 딸도 이 근방 젊은 목사의 본을 따서 성찬대를 꽃과 다른 것들로 장식하고 있지. 축제 주간의 어느 날, 그녀가 성찬대를 제단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을 때 난 질겁을 했다만, 그녀의 아버지도 나만큼 그런 헛소리에는 반대여서 언젠가 딸의 행동을 고칠 수 있을 거야. 그런 건 어디까지나 처녀로서의 일시적인 기분에 불과하니까, 난 오래 가지 않을 거로 믿는다."
"네, 그렇습니다. 머시는 온순하고 또 믿음이 돈독하다는 걸 저도 압니다. 그러나 아버지, 찬트 아가씨 같은 순결함과 정숙과 종교적인 교양은 없는 대신 농부와 마찬가지로 농장 생활의 의무를 잘 알고 있는 쪽이 저한테 훨씬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인간성에 대한 바울 사도의 의견에 의할 것 같으면 농부의 아내로서 해야 할 의무를 잘 아는 것만이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니라는 신념을 아버지는 끝내 고집했다. 충동적인 성격의 에인젤은 부친의 기분도 존중하고 자기 자신의 마음도 털어놓을 겸 그럴 듯하게 얘기를 해 댔다. 아내가 될 만한 모든 자격과 진실한 마음을 품은 여자가 자기 앞에 나타났는데, 그것은 하나의 운명이거나 하느님의 뜻일 거라고 그는 말하였다. 또, 그녀가 아버지의 저 교회파에 속하는지 아닌지는 그 자신이 아직 밝혀 보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교리를 틀림없이 따를 거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성실한 신자이고 마음이 정직하며, 감수성이 예민한데다 총명하고 어느 정도 품위도 있고 여신처럼 순결할 뿐 아니라 외모도 흔치 않게 아름답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너하고 결혼할 만한 가문의 딸이냐?"
"흔히 말하는 명문의 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가 농부의 딸이라는 것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명문의 딸에 못지않은 정서와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머시 찬트는 아주 훌륭한 가문이야."
"그까짓 가문이라는 것이 제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어머니, 지금이나 앞으로나 거친 일을 해야 할 사람한테 가문 따윈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열을 올려 말했다.
"머시는 교양을 갖춘 여자야. 교양이란 여자의 재산이기도 해."
어머니는 은테 안경 너머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외면적인 교양 같은 건 저하곤 거리가 멉니다. 독서에 관한 문제라면 저라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그녀는 확실히 잘 배울 거예요. 한 번 만나 보시면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녀는 시정이 넘칠 듯해요. 그것은 현실화된 시지요. 말로만 떠드는 시인이 종이에 쓰는 걸 그녀는 곧바로 행동으로써 나타냅니다. 그리고 흠잡을 데 없는 교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전도하시고자 하는 부류에 속하는 여자일겁니다."
"아니 에인젤, 너는 빈정대고 있구나."
"죄송합니다. 어머니, 하지만 주일에는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는 진실한 교인입니다. 교양이 부족한 점은 그녀의 신앙을 봐서 너그럽게 봐 주실 것으로 생각해요. 만약에 다른 여자를 얻게 되면, 그보다 못한 여자를 선택하게 될 겁니다."
에인젤은 사랑하는 테스의 정교에 대해 열성을 다해 말했다. 그러나 자연 원리를 따른 신앙에 비해서 비현실적인 정교주의를 그녀들이 실천하는 걸 볼 때 비웃기까지 하던 그였으나, 그것이 자기의 체면을 세워 줄줄은 몰랐었다. 보지도 못한 그 처녀가, 아들 자신이 정교주의로 내세워 주어도 좋을 여자인지는 미심쩍었다. 하지만 그녀가 건전한 정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두 사람의 결합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양친은 느끼게 됐다. 정교주의를 부정하는 에인젤이 그것을 조건으로 내세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를 한 번 만나 보긴 할 테지만, 너무 조급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에인젤에게 타일렀다.
에인젤은 그 이상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부모의 성격은 순진하고 희생적이지만, 중류 계급의 사람들이 그렇듯 잠재적인 편견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완전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약간의 요령이 필요했다. 법률상으로는 에인젤에게 선택의 자유가 보장돼 있고, 테스를 아내로 맞는다 하더라도 멀리 떨어져 살 테니 양친에게 어떤 지장을 가져오는 건 아니지만, 일생의 가장 중대한 일을 결정짓는 데 부모의 마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테스의 모든 부수적인 특질들을 마치 본질적 특질인 듯 생각하는 자신의 모순을 에인젤은 발견했다. 사실 그는 테스라는 그녀 자체를 사랑했다. 그녀의 여혼과 마음, 성격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녀의 낙농 기술이나 학문을 배울 수 있는 적응성, 또는 순박하고 형식적인 신앙 태도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단순하고 야성적인 성격을 인습적인 허례 없이도 그의 기분에 맞았다. 교육은 가정의 행복을 좌우하는 정서나 충동에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에인젤은 아직 갖고 있었다. 몇 세대가 지나가면 향상된 지와 덕의 교육 제도는 본의가 아닌, 또는 무의식적인 인간의 본능조차 발전시킬 것이다. 그러나 에인젤이 아는 바로는 오늘날까지 교육이 이루어 놓았다는 것은 고작 인간의 껍데기만 약간 건드렸다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여자를 접촉해 본 뒤로 더욱 확실해졌다. 에인젤의 여성 교제가 중류 사회에서 농촌사회로 넓혀지고 보니, 같은 사회나 계층에서의 선한 여인과 악한 여인, 또는 현명한 여인과 우둔한 여인과의 차이점에 비한다면 가각 다른 사회 계층의 착하고 현명한 여자들 간의 근본적이 차이란 아주 작은 것임을 깨달았다.
에인젤이 집을 떠나려는 날 아침, 형들은 이미 아버지의 목사관을 출발하여 북부 지방으로 가서, 그곳에서 한 사람은 대학으로, 다른 한 사람은 자기교구로 가기 위해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에인젤도 형들과 함께 갈 수 있었으나 탤보데이스에 있는 애인에게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에인젤은 형제 중에서 가장 앞선 인도주의자이며 가장 이상적인 종교가이고, 가장 박식한 신학자이긴 하지만, 자신의 모난 성격은 형들과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서먹서먹한 기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카드버트 형과 펠릭스 형에게는 테스에 관한 얘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간단한 점심을 마련해 주고, 아버지는 잠깐 동안 말을 몰아 에인젤을 전송해 주었다. 에인젤은 마음먹은 자기 일에 상당한 진전을 보았으므로, 그늘진 오솔길을 가는 동안 교규에 관한 아버지의 얘기에 흡족한 기분으로 귀를 기울였다. 교구 목사가 겪은 여러 가지 곤란한 일과, 남들이 파괴적인 칼빈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교리에 비추어 신약 성서를 엄격하게 해석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끼는 목사들까지 쌀쌀하게 대한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나의 설교가 파괴적이라는 거야."
아버지는 그들의 태도에 부드러운 경멸을 나타내는, 그들의 모순을 뒷받침하는 경험담을 얘기하였다.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 가릴 것 없이, 비뚤어진 생활을 하는 자들 사이에서 봉사하여 신기하게도 개종시킨 일들을 얘기하고, 여러 가지 실패를 솔직히 인정도 했다. 실패한 한 가지 예로, 40마일쯤 떨어진 트랜트리지 마을의 벼락부자가된 더버빌이라는 청년 얘기를 했다. 에인젤이 물었다.
"킴스베리나 그 밖의 여러 지망에 살고 있었던 더버빌 가문 말인가요? 그 왜 사두마차에 관한 유령 같은 전설과 괴상한 내력을 지닌 몰락한 가문 말이죠?"
"아, 아니지, 진짜 더버빌 가문의 후손은 적어도 60년이나 80년 전에 자취를 감춘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어. 지금 말한 것은 그 가문의 이름만 쓰고 있는 새로운 집이야. 그 기사 일가의 명예를 위해서도 지금 그 사람들이 가짜이길 바라고 있지. 그건 그렇고, 네가 그런 일에 관심을 보인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구나. 옛날 가문에 대해서 나보다 관심이 적은 줄 알았는데.“
"종종 그렇듯이 아버진 저를 오해하신 거예요. 정치적으로 그들이 과연 어떤 이익을 끼쳤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들 중에서도 현명한 자는 햄릿처럼 자신의 세습에 반대한다고 부르짖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정적으로든가 극적인 면, 역사적인 면에서는 그들에게 퍽 호감을 가지지요."
에인젤이 말하는 내용의 구별이 그리 미묘한 것이 아닌데도 아버지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부터 하려던 얘기를 계속했다. 더버빌이라고 부르던 사람이 죽은 뒤의 얘기는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의 대를 이은 청년은 앞을 보지 못하는 모친과 함께 살기 때문에 응당 분별 있게 처신했어야 했는데 죄스럽게도 정욕에 빠져 있었다. 우연히 그 지방에 전도를 갔다가 소문을 들은 클레어 목사는 기회를 보아 그 불량한 청년의 정신 상태를 뜯어고치려고 마음먹었다. 다른 교회의 설교단 위에 서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설교 제목으로, 누가복음에 이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라는 성구를 인용했다. 직접 비난받는 설교를 듣자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뒤이어 만난 자리에서 토론을 했는데, 목사의 체면이나 연령 등을 미루어 경의를 표하기는커녕 오히려 모욕을 주었다는 것이다. 에인젤은 마음이 괴로운듯 얼굴을 붉히면서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무엇 때문에 그런 장소에 나가셔서 괜한 일로 고통을 당하십니까?"
주름진 얼굴을 자기희생의 열의로 빛내며 아버지는 대답했다.
"고통이라고? 단 한 가지 고통스런 것은 가련하고 미련한 그 청년을 생각할 때 느끼는 거야. 내가 모욕을 당하거나 심지어 얻어맞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고통을 느낄 것 같으냐? 치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이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사람에게 보낸 이 고귀한 말씀은 지금 이 순간에도 거짓이 없는 진리의 말씀이야."
"아버지, 설마 폭행까지는? 그 청년이 아버지를 때리는 어리석음까지는 범하지 않았겠지요?"
"응, 때리지 않았어. 그러나 술이 취해 미치다시피 된 사람에게 얻어맞은 일은 있지."
"설마."
"그런 일은 수십 번이나 있었지.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이냐? 내가 참음으로써 육체를 죽이는 죄에서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다면 난 기꺼이 견뎌 낼 수 있지. 그 후 그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나에게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송했단다."
"그 청년도 잘못을 뉘우쳤으면. 하지만 아버님 말씀대로면 그 사람은 가망이 없겠군요."
에인젤은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희망은 가질 수 있어. 이 세상에 있을 동안 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없을 진 모르나, 나는 그를 위해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단다. 내가 던진 보잘 것 없는 한마디가 언젠가는 그의 가슴속에 좋은 싹이 되어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듯이 지금도 아이들처럼 낙관적이었다. 막내아들은 부모의 독선을 받아들이진 않지만 아버지의 실행력과 두터운 신앙심 속에 가려진 영웅적인 마음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스에 관한 얘기를 할 때 그녀의 가정 형편은 한마디도 물어 보지 않는 아버지의 성품을 보고 에인젤은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존경을 지금 느끼는 것이었다. 물질을 중요시하지 않는 아버지와 비슷한 성격이 에인젤로 하여금 농부의 길을 택하게 하였고, 형들로 하여금 일생 동안 가난한 목사 작업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에인젤은 아버지의 그 같은 성품을 숭배했다. 자기는 좀 이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다른 어느 형보다도 아버지와 가장 비슷하다는 사실을 에인젤은 종종 느꼈다.
27
한낮의 쨍쨍한 뙤약볕 아래 20마일이나 되는 골짜기를 넘고 넘어 오후에는 탤보데이스에서 서쪽으로 2마일쯤 떨어진 언덕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그는 활기에 넘치고 습기로 가득한 바 골짜기를 다시 바라보았다. 언덕 밑에 펼쳐지는 기름진 충적기의 땅으로 그는 말을 몰아 달렸다. 내려갈수록 골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여름 과실과 안개, 마른 풀과 꽃들의 나른한 내음이 커다란 향기의 바다를 이루어 가축과 벌과 나비들을 나른하게 했다.
클레어는 멀리 떨어져 있는 소라도 얼룩진 무늬만 보면 이름을 이내 맞힐 수 있을 만큼 젖소들의 생김새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미처 학생 시절에 알지 못했던 생활 태도와 인생을 내면으로부터 관찰하는 능력을 이곳에 와서 터득하게 된 것은 아주 흐뭇한 일이었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간절했지만, 며칠간의 귀가를 마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온 클레어는 부목이나 붕대를 풀어 버린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왜냐하면 탤보데이스에는 지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흔히 영국 농촌에서 느끼는 관습적인 하찮은 구속감마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낙농장 바깥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름철에 너무 일찍 일어나는 그들은 하루 1시간씩 낮잠을 자지 않고는 못 견딘다. 출입문 옆에 있는 떡갈나무로 만든 우유 통 걸이에는 하도 물에 씻겨서 하얗게 벗겨진 나무 테를 두른 우유 통들이 마치 모자처럼 걸려 있었다. 저녁에 우유를 짜기 위해 우유 통은 모두 깨끗하게 물기 없이 말려져 있었다.
에인젤은 집안으로 들어가 조용한 복도를 빠져나가 뒷문 쪽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짐수레를 두는 헛간에서 자는 남자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좀 더 먼 곳에서는 더위에 시달리는 돼지들의 꿀꿀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 잎을 가진 대황과 양배추도 그 넓고 부드로운 잎을 반쯤 편 우산 모양 축 늘어뜨린 채 뜨거운 햇볕 아래 졸고 있었다.
말안장을 풀고 먹이를 준 다음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자 시계가 세 시를 알렸다. 오후 세시면 우유에서 크림을 떠내는 작업이 시작된다. 시계 소리가 들리자 위층 마룻바닥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계단으로 내려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그것은 테스의 발자국 소리였고, 다음 순간 그녀는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인젤이 돌아온 것을 알지 못하는 그녀는 길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크게 벌린 그녀의 빨간 입 속은 마치 뱀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틀어 올린 머리채 높이까지 한쪽 팔을 쭉 폈으므로 에인젤은 그을지 않은 고운 피부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낮잠으로 상기되어 불그레했고, 눈꺼풀은 무겁게 처져 넘칠 듯한 풍만함이 온몸에서 풍겨 나왔다. 이 순간이야말로 여자의 영혼이 육체적으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정신의 아름다움도 육체를 보여 주는, 성이 밖으로 자연히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아직 맑은 정신이 들지 않은 무거운 눈꺼풀 속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빛났다. 반가움과 수줍음과 놀라움이 야릇하게 뒤범벅된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소리쳤다.
"어머나, 클레어 씨.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세요. 저는... 저는..."
에인젤이 사랑을 고백한 뒤에 그들의 관계가 좀 더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테스에겐 없었다. 그러나 계단 바로 밑에까지 다가오는 그의 다정한 모습을 대하자, 그녀의 얼굴에는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클레어는 재빨리 그녀를 안고 상기된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허둥대며 속삭였다.
"귀여운 테스. 난 당신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급히 달려왔다오."
테스의 뛰는 가슴이 대답하는 양 그의 가슴에 전해졌다. 빨간 벽돌이 바닥에 깔린 문간에 서 있는 동안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은 그녀를 꼭 껴안고 있는 클레어의 등과 약간 기울인 그녀의 얼굴, 그리고 그의 관자놀이의 파르스름한 힘줄과 드러내 놓은 그녀의 팔, 그녀의 목덜미와 머리채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옷을 입은 채로 자고 나온 그녀의 몸은 햇볕을 쬔 고양이처럼 따뜻했다. 처음에는 클레어를 똑바로 쳐다보려 하지 않았지만,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에서 파랑색으로, 햇빛에 빛나는 비단처럼 변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클레어는 깊이 들여다봤다.
"크림을 걷으러 가 봐야겠어요. 도와줄 사람이라곤 뎁 할머니밖에 없어요.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장보러 가셨고, 레티는 몸이 불편해서 자리에 누웠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간 모양인데, 저녁 작업 시간에나 돌아올 거예요."
그들이 창고로 들어가자 데보라 팬더가 계단위에 나타났다.
"데보라, 이제 돌아왔어요. 당신은 상당히 피곤한 것 같으니 내려오지 않아도 좋아요. 내가 테스를 도와줄 테니까."
하고 위를 쳐다보며 클레어가 말했다. 아마 이날 이후 탤보데이스의 크림은 제대로 걷히지 않았을 것이다. 테스는 꿈을 꾸는 듯하여 평소에 익숙하던 물건들조차 도무지 뚜렷하게 보이질 않았다. 크림을 떠내는 국자를 식히기 위해서 펌프 물에 갖다 댈 때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클레어의 애정이 너무나 열렬해서 마치 뜨거운 햇볕을 쬔 식물처럼 오므라드는 듯했다. 클레어는 그녀를 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통 가장자리에 졸아붙은 크림을 저으려고 테스가 집게손가락으로 휘젓자 클레어는 테스의 손가락을 빨아 깨끗이 해 주었다. 탤보데이스의 구김살 없는 습관이 이런 때엔 퍽 편리했다.
"아무 때 말해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지난주일 풀밭에서 만난 뒤 줄곧 생각한 것인데, 중요한 문제를 얘기할 게 있어. 나는 가까운 시일 안에 결혼하려고 마음먹고 있어. 그런데 테스도 알다시피 나는 농부니까 농사일을 잘하는 여자가 필요하단 말야. 테스가 그런 사람이 돼 줄 순 없겠어, 테스?"
자기의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 일시적인 충동에서 나온 말이라는 인상을 주기가 싫어서 클레어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근심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에 굴복하긴 했지만 필연적인 결과가 이렇게 갑자기 오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사실 클레어도 조급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불쑥 털어놓게 되었다. 쓰러져 버릴 것 같은 괴로움을 느끼면서 테스는 말했다.
"아, 클레어 씨. 저는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어요. 전 자격이 없어요."
자기의 결심을 밝힌 그녀의 대답은 가슴을 에는 것 같았다. 그녀는 슬픔을 참지 못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한 클레어는 그녀를 더욱 바싹 끌어안으면서 확인하듯 말했다.
"아니, 테스. 나를 거절한다는 거야? 당신은 날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녀의 아름답고 정직한 음성이 괴롭게 대답했다.
"사랑해요. 사랑하고말고요.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그러나 당신과는 결혼할 수 없어요."
그는 두 팔을 뻗쳐 테스를 붙들고 말했다.
"테스. 약혼한 남자라도 있는 모양이지?"
"아니에요, 없어요."
"그럼, 왜 거절하는 거야."
"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결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할 수도 없어요. 저는 그저 당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
"도대체 왜 그래?"
이유를 말해야 할 궁지에 몰리자 그녀는 더듬거렸다.
"당신 아버님은 목사이시고, 또 어머님은 저 같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실 거예요. 어머님은 가문 좋은 아가씨를 원하실 거예요."
"당치도 않은 소리. 이미 부모님께 말씀드렸단 말야. 그 일도 겸해서 집에 갔던 거요."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로...절대로 안 돼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그러는 거야?"
"네, 이런 일은 짐작도 못했어요."
"테스, 만약 이 문제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면 여유를 주겠어. 돌아오자마자 이런 얘길 한 것이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 당분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
그녀는 국자를 꺼내 펌프 물에 식힌 다음 다시 일을 시작했다. 크림의 바로 밑에다 재치 있는 솜씨로 국자를 대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하려고 해도 다른 때처럼 되질 않았다. 우유의 복판을 쑤시거나 헛손질을 하기 일쑤여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슬픔에 젖은 두 줄기의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 슬픈 사연을 가장 다정한 친구에게도 결코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크림을 못 걷겠어요. 안 되는 걸요."
그녀의 마음을 더 혼란시켜서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클레어는 부드럽게 말했다.
"테스는 나의 부모를 오해하고 있어. 살아 있는 인간들 가운데 그들은 가장 소박하고 또 야심이 없는 분들이야. 지금은 몇 사람 남지 않은 복음파에 속한 두 사람이지. 테스, 당신은 복음파 교인이 아닌가?"
"모르겠어요."
"주일에는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지?"
"네."
"내가 듣기론 이곳의 교회도 그다지 높은 교회파는 아니라던데."
교구 목사의 의견에 대한 그녀의 개념은 매주 설교를 들으면서 아직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는 클레어의 개념보다도 오히려 더 막연한 것 같았다.
"지금까지보다 더 잘, 들은 이야기를 마음속에 새겨 둘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귀에 들어오는 말이 하나도 없을 때는 서글픈 생각도 들어요."
하고 그녀는 그저 무난한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테스가 너무 꾸밈없이 말했기 때문에, 그녀 교회의 교리가 어느 파에 속하는지 모른다 할지라도 아버지가 신앙 문제를 가지고 반대하진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익혀 온 중심 없는 신앙은 클레어가 볼 때 어법상으로는 트랙타리안 파에 속하며, 또 본질 면에서 일종의 범신론에 속한다는 걸 알았다. 중심이 없는 신앙이든 어떻든 간에 그녀의 마음을 건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너, 누이가 기도할 때 방해하지 말아라. 어린 마음에 그리는 천국과 행복한 꿈을 어두운 말로 어지럽히지 말아라. 행복하게 지내는 한 어린 삶을."
이러한 충고가 음률은 아름다우나 그리 성실한 얘기는 못 된다고 클레어는 생각했지만, 지금만은 그 말을 기꺼이 따르기로 했다. 그는 아버지의 생활 태도라든가 자신의 주의에 대한 열성 등, 집에 가 있는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테스의 마음은 진정되고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녀가 크림을 하나하나 떠내면 클레어는 그 뒤에서 마개를 뽑아 우유가 흘러 나가도록 했다. 그녀는 자신에 관한 얘기를 피하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처음에 들어오실 때 당신은 좀 우울하신 듯하더군요."
"음, 사실은 아버지가 그 자신이 겪으신 여러 가지 고통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얘기를 듣고 나면 언제나 마음이 우울해져요. 아버지는 너무 열성적이어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한테 푸대접을 받고 얻어맞는 일까지도 있어요. 그만한 연세에 말 못할 모욕을 당하신다는 건 차마 들을 수 없는 얘기지. 더군다나 열성도 그 지경에 이르면 별로 좋을 게 없다는 걸 생각하면 말이오. 최근에 일어난 아주 불쾌한 얘기를 해 주셨지. 어느 선교 단체의 대리로 전도하기 위해 약 40마일 떨어진 트랜트리지라는 마을에 가신 적이 있다는 군. 그 근방에 사는 지주의 아들로 장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방종하고 파렴치한 청년이 있어서 좀 타이르셨대요. 아버지는 직설적으로 말씀하셔서 소동이 일어난 모양이오. 아무 소용없는 걸 뻔히 아시면서도 낯모르는 사람에게 충고하는 것부터가 어리석은 짓이지 뭐겠어. 그러나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되면 때를 가리지 않고 덤비시거든. 그래서 타락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섭받기 싫어하는 다른 교인들한테도 미움을 사고 있지요. 그러시면서도 모든 모욕을 하느님이 영광이라고, 또 그렇게 해서 간접적으로 선이 베풀어진다는 거죠. 그러나 내 생각 같아서는 이제 연세도 드셨으니까 돼지 같은 무리들은 그대로 두고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테스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생기가 사라졌다. 빨갛게 익은 입술은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조금도 떨지 않았다. 클레어는 다시 아버지 생각이 떠올라서 그녀를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긴 네모꼴 통의 하얀 줄을 따라 내려가며 하나하나 크림을 떠내고 우유 통을 모두 비워 버렸다. 이렇게 해서 순조롭게 일을 마쳤을 때, 다른 아가씨들이 들어와서 우유 통을 가져가고, 뎁 할머니는 다른 우유 통을 채우기 위해 빈 통을 씻으러 내려 왔다. 젖소가 있는 풀밭으로 테스가 나가려고 움직이자, 클레어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런데 나에 대한 대답은, 테스?"
알렉 더버빌의 얘기가 나와 자신의 지나간 날의 소용돌이를 새삼스럽게 들은 그녀는 암담한 절망을 느끼며 대답했다.
"아, 안 돼요. 할 수 없어요."
그녀는 답답한 가슴을 자연 속에 씻어 내려는 듯 초원에 있는 친구들 쪽으로 뛰어갔다. 아가씨들은 멀리 소떼가 풀을 뜯고 있는 쪽으로 몰려갔다. 그녀들은 파도에 몸을 맡기고 헤엄치는 사람처럼 온통 대기에 몸을 맞기며 앞으로 나갔다. 마치 야수와 같은 대담함과 무한한 공기에 익숙한 자유로운 몸짓이었다. 클레어는 인공이 깃든 곳이 아닌, 구속 없는 대자연 속에서 테스가 벗을 구하여 뛰어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28
테스의 거절은 뜻밖이었지만, 그는 결심을 꺾진 않았다. 여자에 대한 그의 경험에서 거절은 때때로 승낙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테스가 거절한 이면에는 수줍음만이 아닌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클레어는 그녀가 이미 자기의 사랑을 받아 준 것이 또 하나의 확증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들이나 목장에서는 공연히 한숨 짓는 사랑 이라는 말이 결코 헛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체면이나 소문을 두려워하는 지방에서는 처녀들이 결혼하기만 애타게 바라기 때문에 정열만을 목적으로 하는 건전한 생각이 마비되는 데 반해, 탤보데이스에서는 사랑을 고백하면 달콤한 사랑 자체를 위해 쉽사리 그 사랑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충분히 몰랐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클레어가 그녀에게 물었다.
"테스, 왜 그렇게 딱 잘라서 안 된다고 말했지?"
그녀는 흠칫 놀랐다.
"그런 건 묻지 마세요. 어느 정도 이유도 말했잖아요. 저는 훌륭한 가문의 여자도 아니고, 자격도 없어요."
"어째서 자격이 없다는 거요? 훌륭한 가문의 여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이오?"
"네, 당신 가족들은 저를 멸시할 거예요."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건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는 거야. 나의 형님들은 상관 할 것도 없어."
그는 그녀가 피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안으면서 말했다.
"자, 말해 봐. 진심으로 그러는 게 아니지? 난 그렇게 믿고 싶어. 난 당신 때문에 초조해서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무슨 일이든 손에 잡히질 않아. 난 서두르는 게 아냐. 다만 언젠가는 나의 아내가 돼 주겠다는 말을 당신의 따뜻한 입술을 통해 듣고 싶어. 언제이든 당신이 결정하면 돼요. 어느 땐가는 그렇게 해 주겠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외면할 뿐이었다. 클레어는 그녀의 얼굴을 상형문자라도 읽듯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 거절은 진정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당신을 이렇게 포옹하고 있을 수 없지. 그렇지 않겠소? 당신이 어디 있든 찾아다닐 권리도, 같이 산책할 이유도 내겐 없어. 분명히 말해줘.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거요?"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어쩌면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나도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 믿어. 그런데 어째서 나를 거절하는 거야?"
"전 거절하지 않았어요.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시길 바랄 뿐이에요. 저하고 함께 걷고 있을
땐 언제든지 그렇게 말해 주세요. 그게 결코 제 마음을 언짢게 하진 않아요."
"그러나 나를 남편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인가?"
"그것과는 다른 문제예요. 그것도 당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아, 제 말을 믿어 주세요. 오직 당신만을 위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것이 되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 행복할 순 없어요. 전 그런 짓을 할 순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텐데."
"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녀의 거절이 일종의 겸손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 클레어는 안간힘을 썼다. 재치 있고 클레어를 흠모하는 그녀는 그가 쓰는 어휘나 억양, 지식의 단편까지도 놀랄 만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달콤한 시비가 테스의 승리로 끝나면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젖 짜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한가한 시간이면 사초 더미 속이나 자기 방으로 가서 겉으로만 냉정히 거절한 직후의 슬픔을 혼자 씹는 것이었다.
마음의 갈등은 괴로웠다. 그녀의 마음은 클레어에게만 향하고 있었기 때무넹 두개의 불타는 마음이 조그맣고 가련한 양심과 싸워야 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결심을 지키려 했다. 후일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한 남편에게 괴로움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또한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을 때 양심이 결정한 일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에 관한 얘기를 그에게 들려주는 사람이 왜 하나도 없을까? 불과 40마일밖에 안 떨어졌는데. 그런 소문이 여기까지 들리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 내용을 아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러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에게 얘기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삼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냈지만, 같은 방 친구들은 테스의 슬픈 표정에서 무엇인가 읽을 수 있었다. 생명의 끈이 뚜렷한 괴로움으로 엮어진 이런 순간을 이전엔 깨달은 적이 없었다. 다음 치즈를 만들게 됐을 때, 그들은 다시 둘만 남게 되었다. 지금까진 주인도 치즈 만드는 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부인과 마찬가지로 크릭도 요즈음 두 사람 사이에 싹튼 애정을 눈치 챈 듯했다. 그래서 그들만을 남겨 둔 채 주인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통에 넣을 수 있도록 먼저 응유 덩어리를 조각조각 부수고 있었다. 이 작업은 마치 굉장히 많은 빵을 부수는 것과 비슷했다. 새하얀 응유를 다루는 테스의 손은 장미꽃같이 붉게 보였다. 응유 덩어리를 큰 통에 담고 있던 에인젤은 갑자기 일손을 멈추고 그녀의 양손위에 그의 손을 얹었다. 그녀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몸을 굽혀 보드라운 그녀의 팔 안쪽에다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 9월 초순의 날씨는 아직 무더웠지만, 차가운 응유 덩어리를 만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팔은 갓 따온 버섯처럼 시원하고 촉촉했고, 우유 맛이 났다. 그녀는 그의 입술이 닿자 심장의 피가 용솟음쳐 손가락 끝까지 흐르고, 차갑던 팔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뛰는 가슴속에서 심장이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를 쳐다봤다. 테스의 눈은 온 마음을 바치는 듯 그의 눈 속에 빛을 던졌고, 입술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내가 왜 팔에 대고 키스했는지 알아?"
"저를 무척 사랑하니까 그렇죠."
"맞았어. 그리고 다시 애원하기 위한 예비 행동이야."
"제발 그만두세요."
자신의 욕망 앞에 저항이 무력해질 것을 그녀는 갑자기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클레어는 말을 계속했다.
"오, 테스. 왜 이토록 애타게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무엇 때문에 나를 실망시키는 거야. 당신은 꼭 요부 같아. 화려한 도시의 요부 같단 말야. 남잘 마음대로 희롱하는 일급요부야. 탤보데이스 같은 시골구석에서 이런 일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는 그 표현이 좀 지나쳤다고 생각하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테스, 나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또 조금도 티 없는 여자란 걸 알고 있어. 그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바람둥이로 생각할 수 있겠어. 나를 사랑하는 게 사실이라면 나의 아내가 돼 달라는데, 어째서 싫다고 하는 거야?"
"싫다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전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더 견딜 수 없어 입술이 떨렸다. 그래서 테스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괴로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클레어는 그녀를 뒤쫓아 가서 붙잡았다. 손에 우유가 범벅이 된 것도 잊어버린 채 그녀를 붙들고 흥분하면서 말했다.
"말해. 어서 말해줘. 사랑하는 사람은 나밖에 아무도 없다고 말해 보란 말야."
"말하겠어요. 말할게요. 지금 저를 놓아 주시면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어요. 저의 과거라든가, 저에 관한 것 모두 얘기하겠어요."
"과거를 얘기하겠다고? 물론 해야지. 얼마든지 해야지."
클레어는 유쾌한 말투로, 그러나 비꼬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나의 테스는 아마 오늘 아침 울타리에 갓 피어난 저 나팔꽃들처럼 많은 경험을 갖고 있을 거야. 무엇이든 다 이야기해도 좋지만, 제발 그 내 아내 될 자격이 없다는 말만은 하지 말아요."
"네, 그런 소린 하지 않겠어요. 내일이나 다음 주일쯤 그 까닭을 다 말씀드리겠어요."
"일요일에?"
"네, 일요일에 하죠."
마침내 그녀는 클레어 곁을 벗어났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마당의 낮은 쪽으로 올 때까지 그녀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버드나무 숲이 서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눕듯 바삭거리는 소리가 나는 갈대밭 위에 몸을 내던지고, 거침없이 솟아나는 괴로움으로 꼼짝도 않고 웅크린 채 있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과 억누를 수 없이 용솟음치는 기쁨으로 마음이 엇갈렸다.
사실 그녀의 마음은 클레어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녀가 내뿜는 숨결과 피와, 귀에까지 들리는 심장 뛰는 소리는 본능과 함께 어우러져 그녀의 양심에 거역하는 것 같았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서 성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 채 무르익은 즐거움을 움켜잡고 싶었다. 공포에 가까운 환희에 사로잡힌 테스는 여러 달에 걸쳐 외로이 자책했고, 앞으로 엄격히 독신 생활을 지켜 나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까지도 그의 속삭임 앞에 굴복할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후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그녀는 버드나무 그늘에서 떠날 줄 몰랐다. 통걸이에 걸린 우유 통을 벗기는 덜거덕 소리와 소를 부르는 외침이 들려와도 젖을 짜러 나가지 않았다. 일꾼들은 그녀의 들뜬 마음을 눈치 챈 것이고, 주인은 딘지 사랑 때문에 그런 줄 알고 호인답게 놀리리라. 그러면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참을 수 없을 것이다. 테스를 찾거나 부르지도 않는 것으로 미루어 그녀의 격한 기분을 짐작한 클레어가 대신 변명해 준 것 같았다. 6시 반이 되자 태양은 하늘에 거린 용광로 같은 모습으로 지평선에 가라앉고, 이내 괴상한 호박덩이처럼 둥근 달이 반대편에서 떠올랐다. 가지를 쳐낸 버드나무들은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머리를 산발한 괴물처럼 달빛을 받아 우뚝 서 있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서 불도 켜지 않은 채 2층으로 올라갔다. 어제는 수요일이었다. 목요일이 되자 클레어는 생각에 잠긴 채 멀리 떨어져서 테스를 바라볼 뿐 가까이 가진 않았다. 침실에서도 말을 건네지 않는 걸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매듭을 지을 만한 단계에 와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마리안과 다른 처녀들은 생각하는 듯했다. 금요일이 지나고 토요일, 내일이면 그녀가 확실한 대답을 할 날이다.
"나는 지고 말 거야. 좋다고 대답할 거야. 결혼하게 될 거야. 내 힘으론 어쩔 수 없어."
테스는 옆에서 자는 친구들이 그의 이름을 한숨 섞어 부르는 것을 듣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질투로 가쁜 숨을 쉬었다.
"내가 가져야 돼. 그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길 순 없어.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을 그릇되게 하는 짓이야. 그리고 그 사람이 나의 과거를 알면 고민한 나머지 죽을지도 몰라. 아, 어찌하면 좋을까, 이 괴로운 심정. 아아."
29
이튿날 아침 분주하게 음식을 먹고 있는 일꾼들을 마치 수수께끼를 낼 때와 같은 눈으로 휘둘러보면서 주인 크릭이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누구 소문을 들었는지 알아? 자, 누굴 것 같아? 알아맞혀들 봐."
그들은 한마디씩 다 했으나, 크릭 부인만은 벌써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말이야, 건달 잭 돌로프에 관한 소문이지. 그 녀석이 얼마 전에 어느 과부와 결혼했다는 거야."
"설마 잭 돌로프가? 거 고약한 놈인데요. 생각도 못할 일인데."
젖 짜는 한 남자가 말했다. 테스는 금방 그 남자의 이름이 생각났다. 애인을 망쳐 놓고 나중에 처녀의 어머니한테 교유기 속에서 혼난 사람이었다. 에인젤은 점잖은 신분이라고 해서 부인이 언제나 정해 주는 외딴 식탁에 앉아 읽던 신문을 뒤적이면서 무심코 물어 봤다.
"그 씩씩한 아주머니 딸하고 약속대로 결혼을 하지 않았던가요?"
"네, 하지 않았어요. 그 녀석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지금 말한 것은 과부랍니다. 돈푼깨나 있는 여자인가 본데, 일 년에 약 50파운드씩의 수입이 있대요. 녀석이 노린 건 바로 그거죠. 그 후 결혼식을 급히 서둘러 올리자 과부는 그 녀석한테 결혼을 했기 때문에 연 수입 50파운드를 잃게 됐다고 얘기했다는군요. 이 말을 들은 그 녀석의 꼴을 좀 생각해 보세요. 그 순간부터 그들은 고양이와 개 같은 사이가 된 거죠. 그 녀석한테야 그래도 싸지만, 그 여자만 가엾게 된 셈이지."
하고 주인이 말했다.
"정말 그 여자도 바보 같은 여자죠. 죽은 남편의 귀신이 못살게 굴 거라고 진작 말해 줬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 그래"
주인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가정을 갖고 싶었고, 놓칠지도 모르는 모험을 할 생각은 없었던 거야. 아가씨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주인은 처녀들이 앉은 쪽을 둘러봤다.
"그 여자는 결혼식을 올리러 교회에 가기 바로 전에 그런 말을 미리 했으면 좋았을 거예요. 그때는 남자도 들을 돌릴 수가 없었을 테니까."
마리안이 의견을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하고 이즈가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레티는 발칵 성을 내면서 말했다.
"그 남자의 꿍꿍이속을 몰랐을 리가 없어요. 그렇다면 그녀는 마땅히 거절했어야 할 거예요."
주인은 테스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런 사정을 여자 쪽에서 미리 이야기하든지, 아니면 청혼을 거절하는 게 마땅하죠. 전 모르겠지만요."
테스는 버터 바른 빵이 목에 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잔일을 돌봐 주러 이웃 마을에서 온 백 님스라는 부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고백을 하거나 청혼을 거절할 바에야 난 차라리 죽어 버리겠어. 사랑과 전쟁에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상식이에요. 나 같으면 그 여자처럼 당연하게 결혼을 하겠어요. 그래서 하기 싫은 전 남편의 얘기를 미리 하지 않겠다고 해서 남자가 뭐라고 한다면 국수방망이로 때려눕혀 버리지 그 따위밖에 안 되는 조그만 말라깽이 녀석쯤이야. 어ㄸ너 여자라도 때려눕힐 수 있어요."
그 여자가 하는 농담에 사람들이 와 하고 웃었으나 테스는 마지못해 쓸쓸한 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들에겐 희극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녀에겐 비극으로 들렸다. 그들이 흥겨워하는 것을 견딜 수 없이 식탁을 물러나 테스는 밖으로 나갔다.
클레어가 뒤따라오려니 생각을 하면서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걸었다. 도랑을 사이에 두고 걸으면서 바 강가에까지 이르렀다. 강 위쪽에서는 남자들이 물풀을 낫질하고 있고, 강물 위로는 커다란 풀 더미가 마치 움직이는 미나리아재비의 풀 섬처럼 그녀의 옆을 흘러갔다. 풀 더미는 사람이 올라탈 수 있을 만큼 컸다. 소들이 강물을 건너지 못하도록 박아 놓은 말뚝에 길다란 풀 다발들이 걸렸다. 과거를 얘기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일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고통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남의 순교를 보고 사람들이 비웃는 것과 같았다.
"테스."
그녀의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클에어가 도랑을 건너 테스의 옆으로 내려섰다.
"내 미래의 아내."
"안 돼요. 진정 당신을 위해서. 아, 클레어 씨. 전 당신을 위해 그럴 수 없어요."
"테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하고 그녀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런 대답을 예기치 못하는 클레어는 이내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머리 밑 허리로 가볍게 팔을 감고 있었다. 만약에 그녀가 그런 대답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끌어안은 채로 입맞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단호한 거절은 마음이 약한 그의 행동을 막았다. 같은 지붕 밑에서 함께 사는 우정으로 억지로라도 얼굴을 마주 대해야 하는 테스는 여자로서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약 테스가 자기를 피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다면 당당하게 이용했을지도 모를 달콤한 말을, 지금 불리한 처지에 있는 그녀에게 하기 싫었다. 클레어는 잠시 붙들고 있었던 그녀의 허리를 놓아 주고 키스 또한 하지 않았다. 감았던 팔을 풀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됐다. 테스가 이번에 거절할 힘을 얻은 것은 단순히 주인이 말한 과부에 관한 얘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쯤은 이내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알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가 버렸다.
두 사람은 전에 비해 자주 만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3주일이 지나고 9월 하순으로 접어들었다. 테스는 클레어가 다시 결혼 문제를 얘기할 때마다 피하는 그녀의 태도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 준 것이다. 그래서 포옹하는 따위의 행동은 삼가해 달래면서 말로써 자연스레 그녀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클레어는 줄줄 흘러나오는 우유처럼 낮은 음성으로 변함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때로는 암소 곁에서, 때로는 크림을 떠내면서, 버터나 치즈를 만들면서, 심지어는 새끼 낳는 돼지우리 안에서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많은 처녀들 가운데 남자에게서 이처럼 끊임없는 사랑의 고백을 들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머지않아 클레어에게 꺾이고 말 것이라는 것을 테스는 알고 있었다. 알렉 더버빌과의 관계가 도덕적으로 유효하다는 종교적 감정이나, 솔직해야겠다는 양심만으로 클레어에게서 버틸 힘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클레어가 마치 하느님같이 보일 만큼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훌륭한 교육은 받지 못했을망정 아름다운 마음씨를 타고난 그녀는 클레어가 보호자처럼 감싸 주기를 목마르게 기다렸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 뇌까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약해졌다는 증거는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되는 말까지 자꾸만 되풀이해서 말해 주기를 바랐다.
어떤 비밀을 고백하더라도 여전히 사랑하고 보호해 줄 사람 같아 클레어를 만나기만 하면 테스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계절은 초가을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었다. 날씨는 좋았으나 해는 훨씬 짧아졌다. 낙농장에서는 날이 밝을 때까지 촛불 밑에서 또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새벽, 클레어의 청혼은 다시 되풀이되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오늘 새벽에도 잠옷 바람으로 2층에 올라가 그를 깨운 다음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친구들을 깨웠다. 그녀가 촛불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하자, 마침 셔츠를 입고 내려오던 클레어는 양팔을 벌린 채 계단 중간에서 그녀를 막았다.
"자 바람둥이 아가씨,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본심을 말해 줘야겠어. 대답을 기다린 지도 두 주일이 됐으니까, 아직도 말할 수 없다면 나는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소. 내 방문이 열린 틈으로 당신을 보았지.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내가 여기를 떠나야 해. 당신은 내 마음을 잘 모를 거요. 그렇지? 승낙하는 거지?"
테스는 뾰로통해서 대답했다.
"클레어씨. 전 이제 막 일어났어요. 잠도 덜 깬 사람한테 그런 얘길 끄집어내는 것은 너무 성급하지 않아요? 절보고 바람둥이라는 건 너무 심한 말씀이에요. 당치도 않아요. 제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발. 그 문제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테니까 그만 비켜 주세요."
촛불을 옆으로 든 채 너무 심각하게 말을 얼버무리며 웃는 그녀의 모습은 클레어의 말대로 약
간 바람둥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 그럼 클레어 씨라고 하지 말고 에인젤이라고 불러 봐요."
"에인젤."
"사랑하는 에인젤이라고 말해도 좋을 텐데?"
"그렇게 말하면 청혼을 받아들이는 뜻이 되지 않나요?"
"그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뜻에 지나지 않아. 사랑한다는 건 벌써 얘기했잖아. 설사 결혼은 못하더라도."
"좋아요, 사랑하는 에인젤. 반드시 그렇게 불러야만 한다면 부르지 못할 것도 없죠."
그녀는 촛불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불안해하면서도 그녀의 입가에는 귀여운 웃음이 번졌다. 클레어는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는 키스를 하지 않으려고 결심했었지만, 귀엽게 걷어 올린 작업복을 입은 채 미처 손질도 하지 않은 머리를 되는 대로 감아올린 모습을 보자 그녀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을 하거나 뒤돌아보지도 않고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른 아가씨들은 이미 내려와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는 다시 추궁되지 않았다. 새벽을 알리는 바깥의 찬 기운과는 달리, 아늑한 촛불 아래서 마리안을 빼놓은 아가씨들은 부러운 듯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들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을이 다가오자 젖이 나는 양이 날로 줄었다. 따라서 크림 걷는 일도 적어졌다. 일을 마치자 레티와 다른 처녀들은 밖으로 나갔고, 테스와 에인젤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먼동이 트는 새벽의 싸늘한 공기 속으로 앞서 걸어가는 세 사람의 처녀들이 보였다. 클레어는 갑자기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듯한 말투로 테스에게 말했다.
"우리의 마음 설레는 생활과 저들의 생활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 같지? 어떻게 생각해?"
"뭐, 꼭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마음 설레며 살지 않는 여자는 별로 없을 거예요."
하고 자기가 대답한 이 새로운 말에 스스로 감탄한 듯, 테스는 잠시 그 말을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저 처녀들의 가슴속에 있어요."
"뭘까?"
"저 세 아가씨는 모두 저보다는 좋은 부인이 될 수 있는 처녀들이에요. 그리고 저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오, 테스."
그녀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려는 결심까지 했지만, 안타까운 듯이 외치는 클레어의 음성을 듣자 더할 나위 없이 흐뭇했다. 그때 농가에서 온 남자 일꾼 한 사람이 그들 사이에 끼었기 때문에 잠시 얘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테스는 오늘 안으로 이야기의 끝이 날 것이라고 직감했다.
오후가 되면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주인과 집 식구들 몇, 명. 그리고 거들어 줄 일꾼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목장으로 갔다. 거기서는 많은 젖소들을 집에 몰아넣지 않고 젖을 짜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꾸만 새끼가 불어남에 따라 우유 생산량은 점점 줄었다. 그래서 목초가 무성한 계절에 고용했던 임시 일꾼들은 모두 되돌아갔다.
작업은 한가롭게 진행되었다. 우유 통에 젖이 가득 괴면 낙농장에서 온 짐마차의 큰 통에다 부었다. 젖을 다 짠 젖소들은 어슬렁거리며 각기 제자기로 돌아갔다. 흐린 하늘 아래 유별나게 흰 일복을 입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 있던 주인 크릭은 갑자기 회중시계를 꺼내 보고 있었다.
"제기랄, 이렇게 늦은 줄 몰랐는걸. 우물쭈물하다간 기차 시간에 우유를 대지도 못하겠어. 집에 들러서 모아 놓은 우유와 함께 보낼 수도 없어. 여기서 곧장 역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누가 가겠어?"
클레어는 자기가 할 일이 아니지만 가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테스에게 함께 가자고 청했다. 저녁때라 해는 지고 없지만, 가을 날씨치고는 너무 후덥지근했다. 테스는 재킷도 입지 않고 팔을 드러내 놓은 채 머릿수건만을 쓰고 나왔기 때문에 마차를 타고 달리기엔 마땅치 않은 차림새였으므로 사양했으나 클레어가 다정하게 재촉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우유통과 걸상을 주인에게 부탁하고, 마차에 올라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30
밝은 빛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 까마득한 초원을 가로지르는 평탄한 길로 마차를 몰았다. 초원의 맨 끝 쪽에 이그돈 히드의 험한 산봉우리들이 거무스름한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산꼭대기에 쭉쭉 뻗은 전나무의 뾰족한 나무 끝은 시커먼 도깨비 성 위에 세워진 톱니 모양의 감시탑 같았다.
그들은 서로 바짝 다가앉은 느낌에 마음이 설레어 얼마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큰 통 속의 우유가 출렁이는 소리만이 그들의 침묵을 깨뜨렸다. 그들이 달리는 길엔 개암이 완전히 영글어서 저절로 떨어지고, 그는 나무딸기 송이를 따서 테스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잔뜩 흐린 날씨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보이고, 텁텁하던 대기는 변덕스런 바람으로 변해 그들의 얼굴을 스쳤다. 강이나 늪에 일렁이던 빛이 사라지자 번쩍이던 거울이 광택 없는 우툴두툴한 납덩어리로 변한 것 같았다. 이런 풍경도 테스의 깊은 생각을 깨뜨리진 못했다. 원래 불그레한 그녀의 얼굴빛은 햇볕에 그을어 연한 갈색이었는데, 빗방울을 맞을수록 그 빛은 더욱 짙어졌다. 작업할 동안에 옥양목 모자 끈 밖을 흘러내린 머리칼과 비에 젖은 모습은 마치 해초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전 오지 말 걸 그랬어요."
"비가 안 와서 안 됐는 걸. 그러나 당신이 옆에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
하고 그가 말했다. 멀리 보이던 이그돈 봉우리는 빗방울에 가려 점점 보이지 않았다. 길에는 군데군데 밭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어서 걷는 속도 이상으로 말을 달리지 못했다. 공기는 좀 차가왔다.
"아무것도 걸친 게 없으니, 당신 감기 들 것 같군. 내 곁으로 바싹 다가앉아요. 비가 나를 도와줄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더욱 괴로웠을거야."
그녀는 옆으로 살짝 다가앉았다. 그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우유 통을 덮는 커다란 무명으로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클레어는 고삐를 잡고 있어서 테스는 무명이 두 사람에게서 흘러내리지 않도록 움켜쥐고 있었다.
"자, 이젠 됐어. 어, 그렇지도 않군. 내 목으로 조금씩 떨어지는 걸 보면 그쪽으론 더 떨어지겠는걸. 됐어. 테스, 당신 팡느 비에 젖은 대리석 같군. 그 천으로 닦아요. 이젠 움직이지만 않으면 비가 새지 않을 거야. 그런데 테스, 내 문제에 관한 건데, 오래 끌어오던 그 문제 말야."
대답 대신 들리는 소리라곤 비에 젖은 길을 밟는 말굽 소리와 큰 통 속에서 출렁이는 우유 소
리뿐이었다.
"당신이 한 말 기억하겠지?"
"알고 있어요."
하고 테스가 말했다.
"그럼, 집에 돌아가기 전에 알았지?"
"해 보겠어요."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마차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캐롤라인 왕조 시대의 우뚝 솟은 낡은 장원이 나타났다가는 금세 뒤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를 즐겁게 해 주려고 클레어가 말했다.
"저건 흥미 있는 고적이야. 노르만 계의 어떤 가문에서 갖고 있던 많은 저택 중의 하나지. 더버빌이라는 가문으로, 이 지방에서 상당한 세력을 잡고 있었어. 나는 그들이 갖고 있던 저택 앞을 지날 때마다 자연히 그들을 생각하게 돼. 그들이 설사 난폭하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봉건적인 명성이 드높았다 할지라도, 어쨌든 명문 후예의 몰락이란 비참해."
"정말 그래요."
테스가 말했다. 그들은 사방을 덮은 어둠의 장막 속에서 잠깐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을 목표삼아 천천히 나아갔다. 이 지점은 낮에는 짙은 초록색 대지 위에 이따금 난데없는 한 줄기 흰 연기가 나타나서 외딴 세계와 현대 생활을 잇는 단속적인 순간이 새겨지는 곳이다. 현대 생활은 하루에 서너 번씩 증기로 된 촉각을 이곳으로 뻗어 소박한 생활을 만져 보다가 촉각을 이곳으로 뻗어 소박한 생활을 만져 보다가 촉각에 닿은 것이 못마땅한 듯 황급히 손을 걷어 가는 것이었다.
그을음이 잔뜩 낀 램프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비치는 조그만 역에 그들은 도착했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탤보데이스의 낙농장과 그곳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별보다 더 귀중한 것이었다. 실어 온 우유를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내려놓는 동안 테스는 가까이 있는 사철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증기를 내뿜는 기차가 비에 젖은 철로 위로 아주 조용하게 와서 멈추자, 우유 통은 하나하나 재빨리 화차에 실려졌다. 화통에서 비치는 불빛이 커다란 사철나무 밑에 꼼짝도 않고 있는 테스의 모습을 잠시 비췄다. 기차바퀴나 바퀴에 달린 번쩍하는 크랭크가 본다면 통통하게 드러난 팔, 비에 젖은 얼굴과 머리, 온순한 표범이 쉬고 있는 것같이 꼼짝 않고 있는,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이 순진한 처녀만큼 눈에 낯선 것은 없었을 것이다.
테스는 클레어가 시키는 대로 다시 그의 옆자리에 올라앉았다. 그들은 온몸을 베로 뒤집어쓰고 깜깜해진 어둠속에서 마차를 몰았다. 몇 분 동안 본 기차의 움직임이 그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런던 사람들이 내일 아침엔 저걸 마실 테죠? 우리가 전혀 만나 본 일 없는 낯선 사람들이."
하고 그녀가 물었다.
"아마 그럴 거야. 우리가 보낸 우유를 그대로 마시지 않고, 너무 진하지 않도록 물에 타서 마실 거야."
"젖소는 구경도 하지 못한 귀족, 외교관, 장군, 귀부인, 상점 여주인,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마시겠죠."
"그렇겠지, 특히 장군들이 말야."
"그 사람들은 우리를 알지도 못할 것이고, 우유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를 거예요. 기차 시간에 맞추려고 이렇게 비를 맞으면서 달린 것도 생각 못할 거예요."
"런던 사람들만을 위해서 마차를 몬 건 아니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우리들의 얘기를 하기 위해 왔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난 승낙할 줄 믿어. 이렇게 말하는 걸 용서해 줘요. 당신은 이미 내 사람이야. 당신 마음 말이오. 그렇지 않아?"
"잘 아시면서. 네, 네,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은 왜 내 것이 돼 주지 않지?"
"그 이유는, 오직 당신을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문제가 하나 있어요. 당신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 얘기라는 게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또 내 생활에 도움이 되는 거겠지?"
"네, 맞아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당신 생활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이곳에 오기 전에 제가 지내온 생활을, 그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렇지, 그것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나의 생활에 도움이 될 거야. 영국이든, 식민지에든 큰 농장을 갖게 되면 당신은 나의 귀중한 아내가 될 거요. 당신은 훌륭하게 자란 어떤 여자보다 내 아내 역할을 잘 해 낼 것이오. 그러니 제발 당신이 내게 방해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 줘요."
"하지만 저의 과거에 대해 말해야만 하니까, 제 얘길 잘 들어 주세요. 얘기를 듣고 나면 당신의 마음도 달라질 거예요."
"꼭 하고 싶으면 해 봐요. 나는 어느 곳에서, 어느 때 태어났으며 하는 식의 얘기를."
"저는 말로트 마을에서 나서 그곳에서 자랐어요.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에 학교를 그만두었을 때, 재능이 있어 선생이 되면 좋을 거라고 모두들 말하곤 했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렇게 마음먹었으나, 집안에 사고가 생겼어요. 아버지는 게으른데다가 술까지 하셨거든요."
클레어는 그녀를 좀 더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그랬군, 가엾게도. 하지만 뭐 흔히 있는 일이야."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어요. 저와 관계되는 일인데, 저는 그만 제게..."
테스의 숨결이 가빠졌다.
"그래서? 주저 말고 얘기해요."
"저는 더비필드가 아니라 사실은 더버빌이에요. 우리가 지나온 그 저택을 갖고 있던 가문의 후손이죠. 지금은 몰락해 버렸어요."
"더버빌이라고. 아, 그렇군. 테스, 걱정거리란 그것뿐이오?"
"네, 그래요."
테스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내가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당신을 사랑하는데 무슨 문제가 된다고 그래?"
"당신은 오래된 가문을 미워한다는 말을 주인한테서 들었어요."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지. 귀족들의 세습주의를 나는 무엇보다 미워해요. 우리가 존경할 단 하나의 가문은 육체적인 혈통을 내세우지 않고 지혜와 덕망을 갖춘 현명하고 덕 있는 정신적인 가문이오. 하여간 나는 상당히 흥미 있는 얘기를 들은 건 사실 이오. 그리고 내가 얼마나 흥미를 느끼는지 상상도 못할 거요. 그런 유명한 가문의 후손이라는 점에 당신은 어떤 흥미를 느끼지 않소?"
"흥미 없어요. 오히려 저는 슬픈 일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이곳에 온 후 제 눈에 띄는 많은 산과 들이 한때는 저의 조상들의 소유였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더욱 그래요. 그러나 어떤 것은 레티의 조상이, 또 어느 것은 마리안의 조상이 소유했던 것인지도 모르니까, 가문이라는 걸 가치 있게 생각지 않아요."
"사실이야. 지금 땅을 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한때는 자기들의 것으로 그 땅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랄 일이야. 정치가들이 이런 사정을 왜 이용하지 않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그들은 이런 내용을 모르나 봐. 명백한 언어의 와전도 발견 못하여 당신의 이름이 더버빌과 닮은 것도 알지 못했다니. 그토록 망설이고 망설이던 비밀이라는 게 바로 그것이로군 그래."
그녀는 끝끝내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녀는 용기가 꺾인 것이다.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고 꾸짖을까 봐 겁도 났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고백하려는 용기보다 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클레어는 말을 계속했다.
"물론 테스가 남을 희생시켜 세도를 얻은 몇몇 자기 본위의 후손이 아니고, 순수한 영국인으로 오랫동안 수난을 받은 한낱 평민의 피를 이어받았더라면 더 반가왔을거야. 그러나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난 완전히 노예가 돼 버렸어(그는 말하면서 웃었다.). 나도 그들처럼 자기 본위가 돼 버린 것 같은데, 그 가문의 후손이라니 나 기뻐. 어처구니없이 점잖은 체하는 세상이니까 나한테 교육을 좀 받기만 하면 당신이 내 아내가 되는 데 있어 그 형통은 효과를 나타낼 거야. 나의 어머니도 낡은 생각을 갖고 있어서 혈통 때문에 당신을 훨씬 좋게 볼 거야. 테스, 당장 오늘부터 이름을 똑똑히 쓰도록 해야 돼. 더버빌이라고 말이야."
"지금 쓰는 이름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아요."
"아니야, 꼭 그 이름을 써야 해. 놀라운 일이지. 하고많은 벼락부자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가지려고 야단들이겠어. 응 그렇지, 그 이름을 따서 쓰고 있는 작가가 있지. 어디 산다고 그러더라? 체이스 숲 근처라고 그런 것 같아. 언젠가 내가 말한 적이 있지? 우리 아버지하고 다툰 바로 그 사람이야. 참 우연의 일치군."
"에인젤, 그런 이름은 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불길한 이름인 것 같아요."
그녀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러면 테레사 더버빌이라고 내가 지어주지. 이제부터 내 이름을 쓰면 당신 이름은 안 써도 돼. 그 비밀이란 것도 다 말했는데, 왜 나를 거절하는 거요?"
"저를 아내로 맞이해서 틀림없이 당신이 행복해지신다면, 저와 결혼을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고 생각하신다면."
"물론 그렇고말고."
"제 말은 이를테면, 당신이 저를 갖기를 원해서 살사 내가 어떤 잘못이 있더라도 저 없이는 살 수 없으시다면 거절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승낙하겠다는 거지? 알았지? 당신이 영원히 언제까지나 내 것이 되는 거야."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키스했다.
"네, 승낙하겠어요."
그녀는 대답을 마치자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흐느낌이었다. 그는 놀랐다.
"왜 그러지 테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아내가 되고,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린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기뻐요."
"하지만 기뻐서인 것 같진 않은데."
"제 결심이 꺾인 걸 생각하고 우는 거예요. 저는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기로 맹세했었어요."
"그러나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부부 되는 걸 좋아해야 하는 것 아냐?"
"네, 정말 그래요. 하지만 저는 세상에 태어난 걸 이따금 후회한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테스, 당신이 지금 흥분하고, 또 세상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금방 한 말은 이해할 수 없어. 내가 마음에 있다면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지? 나를 사랑하는 거야?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면 좋겠어."
"이 이상의 증거를 어떻게 보여요?"
그녀는 미칠 듯한 애정을 느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면 보다 좋은 증거가 되겠지요?"
그녀가 클레어의 목에 매달렸다. 테스가 클레어를 사랑하듯이, 정열적인 여자가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 사랑하는 남자에게 퍼붓는 키스가 어떤 것인가를 클레어는 처음 알았다.
"이젠 저를 믿으시겠어요?"
상기된 얼굴에 눈물을 닦으면서 그녀가 물었다.
"응, 믿고말고.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어. 한 번도."
그들은 마차 위에서 한 몸이 되어 어둠을 뚫고 달렸다. 말은 기분 좋은 듯 신나게 달리고 있었고, 비는 두 사람에게 몰아쳤다. 테스는 마침내 무너지고야 말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승낙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거센 물결이 보잘것없는 잡초를 휩쓸어 가듯이, 목적을 향해 치달리게 하는 무서운 힘을 가진 만물에 공통되는 기쁨을 쫓는 욕망 을 사회 질서에 대한 어렴풋한 관념만으로는 다스릴 재간이 없었다.
"어머니한테 편지를 써야겠어요. 괜찮겠죠?"
"괜찮고말고, 나의 귀염둥이. 당신은 나에 비하면 어린애야. 이런 일이 있을 때 집에 알리는 것이 얼마나 당연하고, 내가 편지를 못 쓰게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당신은 아직 모르니까 말야. 어머니는 어디 사시지?"
"같은 곳이에요. 말로트라고 블랙무어 분지 끝에 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작년 여름에 당신을 만난 일이 있어."
"네, 그 초원에서 춤출 때 말이에요. 그러나 저하곤 춤추려 하지 않았어요. 그때 일 기억해요? 그 일이 우리들 사이에 나쁜 징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31
바로 이튿날, 테스는 정성껏 쓴 속달 편지를 어머니한테 띄웠다. 토요일이 되자 서투른 옛날식 필체로 두서없이 쓴 답장이 더비필드 부인에게서 왔다.
사랑하는 테스에게
너에게 몇 줄 적으며 너가 무고하기를 바란다. 나도 별일 없이 지내는 걸 하느님께 감사한다. 너가 머지않아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들은 모두 기뻐하고 있단다. 너가 물어 온 것에 대해서 너하고 나만이 아는 얘기지만, 어떤 일이 있더래도 너의 지난 얘기는 그에게 하지 않도록 해라.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너의 아버지는 가문을 가지고 굉장히 우쭐대고 있기 때문에 너의 얘기는 다 알리지 않았다. 많은 여자들이, 그중에는 신분이 높은 여자도 있겠지만, 젊은 시절에 사고가 있었던 거야. 그런 짓을 하고도 다른 여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너만 얘기할 게 뭐냐? 이미 오래된 얘기고, 또 네 잘못도 아닌데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말도록 해라. 네가 쉰 번을 묻더라도 나는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너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솔직히 털어놓는 어린애 같은 성질이 있다는 걸 명심해라. 그렇기 때문에 너의 행복을 위해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절대로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약속했지. 집을 나갈 때에 너도 약속하지 않았니? 그 약속을 꿈에라도 잊어선 안 된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네 아버지가 사방으로 떠들고 다닐까 봐 너가 질문한 것하고 결혼 얘기는 알리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테스야, 기운을 내라. 그곳에는 능금술이 흔치 않고, 있더래도 맛이 시큼하다고 듣고 있으니까 결혼 선물로 능금술을 보내겠다. 그럼, 이제 그만 쓰기로 하고, 너의 약혼자에게 나의 인사를 전해 다오.
너의 사랑하는 어머니
존 더비필드
"아, 어머니. 어머니."
하고 테스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테스에겐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합리적인 더비필드 부인에겐 이 일이 얼마나 사소하게 느껴지고 있는가를 깨달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테스처럼 인생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마음을 괴롭히는 지난날의 사건도 어머니가 볼 때에는 한낱 흘러간 작은 일에 지나지 않았다. 테스의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이제부터 취해야 할 태도로는 어머니의 생각이 옳았다. 이 문제에서 그녀가 흠모하는 남자의 행복을 위해서는 침묵이 최선책일 것 같았다. 침묵이 아니고선 아무것도 안 되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 세상에서 테스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지배할 권리를 가진 오직 한 사람의 이 같은 명령으로 그녀의 마음은 가다듬어지고 태도도 침착해졌다. 그녀는 마음의 부담을 벗어 던지기라도 한듯 요사이 몇 주일 동안 기분이 훨씬 가벼워졌다. 테스가 청혼을 승낙한 늦가을 내내 그녀의 일생을 통해서 느껴 본 일이 없는 황홀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클레어에 대한 테스의 사랑은 하나의 신앙과 같았다. 지도자로서, 철학자로서, 또는 친구로서 갖추어야 할 것은 다 갖춘 선의 전부인 것처럼 테스는 거룩하게 그를 믿었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윤곽의 모든 부분은 남성미의 표본이었고, 영혼은 성자의 것이며, 그의 총명은 예언자의 것인 양 생각되었다. 사랑으로써 클레어에게 보이는 슬기로운 아름다움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하여 그녀는 마치 왕관을 쓰고 있는 듯했다. 클레어의 다정한 사랑을 엿볼 때마다 그녀는 더욱더 그를 사모했다. 눈앞에 신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을 두려운 듯 크게 뜨고 쳐다보는 모습을 클레어는 가끔 발견할 때가 있었다.
그녀는 과거의 불씨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마치 타다 남은 연기가 아직도 피어오르는 위험한 석탄불을 밟아 끄듯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는 클레어처럼 너그럽고 담대하며 또 여자를 감싸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 점에 있어서 에인젤 클레어는 그녀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정말이지 그녀의 상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남자였다. 그는 본능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이어서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렸고, 저속한 취미 따윈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의 성격은 냉정하지는 않았으나 열정적이라기보다는 쾌활한 편이었으며, 바이런보다는 셸리의 성격을 닮았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생명을 걸고라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오히려 공상적이고 가공적으로 사랑하는 편이어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육체적인 본능을 끝까지 억제하는 깨끗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클레어의 이같이 유별난 성격은 미숙한 경험으로 모든 것을 비뚤어지게만 판단하던 테스를 놀라게도 하고 더없이 기쁘게도 했다. 그래서 남자들을 터무니없이 미워하기만 하던 것만큼 그녀는 상식에서 벗어날 정도로 클레어를 존경했다. 그들은 진정으로 서로 함께 있고 싶어 했고, 그녀는 전적으로 그를 믿는 마음에서 만나고 싶은 생각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남녀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간추린다면, 보통 남자들이 다루기 힘든 성질을 가진 매력 있는 여자가 사랑을 맹세한 다음에도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진실하지 않은 것으로 의심을 받게 되므로 클레어와 같은 유별난 남자에게는 오히려 불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약혼 기간 중에 밖에서 남녀가 마음대로 만나는 것은 테스가 알고 있는 시골의 흔한 습관이어서 그녀에게는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테스가 얼마만큼이나 다른 아가씨들처럼 정상적으로 생각하는지를 알기까지는 어색하고 지나친 행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날씨가 활짝 개는 10월 한 달 동안을 그들은 짝지어 목장의 구석구석으로 돌아다녔다. 시냇물이 흐르는 물가를 따라가기도 했고, 시내에 놓인 작은 나무다리를 뛰어 건너 시내 저편까지 갔다 되돌아오면서 목장을 거닐기도 했다. 테스와 에인젤은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시냇가를 맴돌면서, 재잘거리며 흐르는 계곡의 말벗이 되어 주었다. 초원 위에 거의 수평으로 비치는 햇살은 그들을 위해 오색의 아롱지는 꽃가루를 뿌리는 듯했다.
눈부신 햇빛 아래 수목과 생울타리 그늘에는 파르스름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태양은 땅위로 다가들고, 평평한 초원에 드리워진 두 사람의 그림자는 마치 부채꼴의 초원이 잇닿은 산기슭을 가리키는 긴 두 손가락처럼 보였다. 목장 주변을 손질하는 계절이어서 일꾼들은 조그만 도랑을 치거나 젖소들이 밟아 무너뜨린 둑을 메우는 등 여기저기서 바삐 일손들을 움직였다. 목장 바닥에 깔린 새까만 구슬같이 빛나는 진흙은 이 분지 가득히 전부 가을 이루고 있을 때 휩쓸려 온 것으로, 흙 가운데에서도 으뜸가는 기름진 흙이며, 옛날부터 내려오는 고귀한 약과 같았다. 그래서 오랜 세월을 두고 물에 씻기는 동안 고운 가루가 되어 이 초원을 기름지게 했다. 목초가 무성했고, 이 풀을 먹는 젖소가 잘 자라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클레어는 태연하게 일꾼들이 보는 데서도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거닐었다. 그러나 입술을 약간 벌리고 약삭빠른 동물같이 그들을 곁눈질해 보는 테스와 마찬가지로 사실 클레어도 부끄러운 생각을 품고 있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도 저와 함께 거니는 걸 북그럽게 생각하지 않는군요."
그녀가 기쁜듯이 말했다.
"부끄러울 게 뭐 있어."
"하지만 만약 당신이 이처럼 저와 함께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에민스터에 계시는 가족들도 아신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기껏해야 젖 짜는 여자 따위와 말이에요."
"가장 아름다운 젖 짜는 아가씨라고 그러겠지."
"그분들은 체면을 손상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나의 귀여운 아가씨, 더버빌의 후손이 클레어 가문의 위엄을 손상시킨다고? 당신이 그런 가문에 속한다는 사실은 여간 도움이 되는 게 아니야. 우리가 결혼하여 트링엄 목사가 당신 혈통을 증명해 줄 때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 줄 테야. 혈통 문제를 떠나서 말하더라도, 내 장래는 우리 집과 하나도 상관이 없는 거야. 터럭만큼도 해를 끼치는 일이 없을 테니까. 우리들은 이 고장을 떠날 텐데, 남들이 뭐라 하든 무슨 상관이겠어? 나하고 같이 가는 걸 싫다고는 하지 않겠지?"
이 세상을 클레어의 가장 정다운 벗으로서 함께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서 겨우 긍정하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설레는 가슴은 파도 소리같이 귀를 울리고, 그것이 물처럼 눈에서 밀려 나왔다. 테스는 클레어의 손을 쥔 채 햇빛이 물 위에 일렁이는 강가까지 왔다. 태양은 다리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다리 밑 강물 위에서 끓는 쇳물처럼 빛나는 광채는 그들을 눈부시게 했다. 그들은 걸음을 멈췄다. 복슬복슬한 조그만 물새의 머리가 조용한 수면 위로 불쑥 솟았다가, 정적을 깨뜨린 인간이 지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걸 보자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른 초저녁에 안개가 자욱이 끼기 시작하며 그들을 둘러쌌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와 눈썹에 수정과도 같은 이슬이 맺히도록 강가를 거닐었다.
일요일에는 날이 완전히 어두운 다음에야 산책을 했다. 약혼을 하고 처음으로 맞는 일요일 저녁, 밖에 나와 있던 몇몇 낙농장 사람들은 테스의 낭랑한 목소리와 행복에 겨워 이따금씩 목에 걸리는 격정어린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 클레어의 팔에 매달려 걷다가 숨이 차면 간간이 얘기를 멈추고 내뿜는 숨소리와, 극히 만족해 영혼에서 우러나는 듯한 나직한 웃음소리. 모든 여자들을 물리치고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는 여자들을 물리치고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는 여자만이 웃을 수 있는 웃음 소리였다. 새가 땅에 내려앉으려는 순간에 파드득거리는 날개 소리와도 같이, 마음이 들뜬 테스의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클레어에 대한 테스의 사랑은 이제 그녀의 호흡이요, 생명이었다. 그것은 어떤 광채와 같이 그녀를 둘러싸서 의심이나 두려움, 고민 등을 되살아나게 하려고 발버둥치는 기분 나쁜 유령들이 그녀를 감싼 벌의 둘레에서 늑대처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굶주려서 영영 숨져 버리게 할 끈질긴 힘이 그녀에겐 있었다. 정신적인 망각과 지적인 기억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녀는 빛 속을 걷고 있었으나 등 뒤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그림자는 매일 번갈아가면서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것도 같기도 하고, 또 다가오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 해질녘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밖에 나가고 없어 테스와 클레어가 집을 지켜야 했다. 클레어와 얘기하던 테스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한 눈초리로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사랑이 담긴 눈으로 그녀의 시선을 맞았다.
"저는 자격이 없어요.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아요."
그의 다정한 호의와 그녀 자신의 넘치는 기쁨에 증오를 느끼듯 낮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버럭 소리쳤다.
"테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제일 싫어. 되잖은 인습을 요령 있게 이용하는 건 훌륭한 사람이 할 짓은 아냐. 사람은 당신처럼 진실하고, 정직하고, 또 평판이 좋아야 한단 말이오."
그녀는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으려 애썼다. 지난 몇 해 동안 교회에서 똑같은 교훈을 헤아릴 수 없이 들을 적마다 그녀는 얼마나 괴로웠던가. 그런데 똑같은 말을 그가 되풀이하다니.
"왜 그때 머물러 저를 사랑해 주지 않았어요. 제가 동생들과 함께 살던 열여섯 살 때. 당신이 풀밭에서 춤출 때 말이에요. 아, 어째서 우린 그대로 헤어졌을까요."
그녀는 두 손을 쥐어짜면서 말했다. 클레어는 그녀를 좀 더 잘 돌봐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를 위로하고 진정시키려 했다.
"정말 그래. 내가 왜 그때 그곳에 남지 않았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 말야. 그때 알기만 했던들. 그러나 그렇게까지 후회할 건 없지 않아. 후회할 이유가 어디 있지?"
감추려는 여자의 본능으로 그녀는 재빨리 말끝을 돌렸다.
"지금보다도 4년이라는 더 많은 세월을 당신과 함께 지내고 싶었던 거예요. 그랬더라면 제가 보낸 시간은 낭비되지 않았을 거고, 또 그만큼 더 오랜 행복을 누렸을 것 아니에요."
이렇듯 마음에 고통을 받는 그녀는 철나기 전 덫에 걸린 새처럼 사로잡힌 스물한 살의 순박한 아가씨였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치맛자락이 의자에 걸려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장작불이 훤하게 비치는 벽난로 앞에 아직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활활 타는 장작 끝에서는 나무진이 이글이글 끓어 나왔다. 테스가 다시 방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기분은 진정돼 있었다.
"테스, 당신은 자신이 좀 변덕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뭘 좀 물어 보려고 했는데, 마침 나가더군."
방석을 펴 주고 자기도 그 옆에 앉으면서 클레어는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해 주지 않으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갑자기 옆으로 바싹 다가앉고는 한 손을 그의 팔에 올려놓고 조그맣게 말했다.
"네, 변덕쟁이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에인젤, 천성이 그런 건 아니니까 이해해 주세요."
테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하려는 듯 긴 의자에 앉은 그에게 바싹 다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물어 보고 싶다는 게 뭐예요? 꼭 대답해 드리겠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나의 청혼을 받아들였으니까 결혼 날짜는 언제로 할까? 그것을 묻고
싶었소."
"저는 이대로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나도 내년 봄에는 사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러니까 새로운 사업으로 일이 바빠지기 전에 결혼식을 올려야 돼요."
"하지만 사업이 안정된 다음에 결혼하는 게 오히려 좋지 않을까요? 당신 혼자 가 버리고 저 혼자 남는다면 괴로운 일이지만."
하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내 처지로 본다면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야. 사업하는 데 당신의 많은 도움이 필요해. 언제로 할까? 두 주일 뒤면 어때?"
"안 돼요.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많아요."
"그렇지만 말이오."
그는 상냥하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사실 결혼 문제가 눈앞에 닥칠 때는 누구나 당황하게 마련이다. 얘기가 다시 계속되기도 전에 크릭 부부와 두 사람의 젖 짜는 아가씨들이 긴 의자 모퉁이를 돌아 벽난로 불빛이 환한 방으로 들어왔다. 테스는 탄력 있는 공처럼 그의 옆에서 발딱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눈은 장작불에 비쳐 반짝거렸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변명했다.
"저이 옆에 가까이 앉았다간,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요. 그의 무릎 위에 앉은 걸로 보였을진 몰라도 사실은 그게 아녜요."
"아가씨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이런 불빛 속에서 사람이 어디 앉았는지 분간 못했겠는데."
하고 결혼에 대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은 무관심한 표정으로 부인에게 말했다.
"크리스티나, 이것만 보더라도 남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 미리 겁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지. 이 애가 아무 소리 하지 않았어도 어디 앉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클레어는 억지 점잔을 피우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우리는 곧 결혼할 겁니다."
"아, 그래요. 이건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언젠가는 그런 결정을 내리시리라 짐작했지요. 테스는 이런 데서 일하기엔 아깝죠. 나는 첫눈에 벌써 알아봤지요. 누구라도 탐낼 겁니다. 더군다나 농부의 아내로는 안성맞춤이죠. 관리인이 섣불리 굴다간 용서 없을 겁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테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주인의 멋없는 칭찬이 창피해서라기보다는 그를 따라 들어온 세 아가씨들의 표정을 보고 그녀는 놀란 것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침실에 들어오니까 친구들은 모두 한자리에 있었다. 흰 잠옷을 입은 처녀들은 침대에 앉아서 테스를 기다렸다. 등불이 비치고 있는 방안에서 그들은 마치 복수를 하려는 귀신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것처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조금도 악의가 없는 것을 테스는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이 바랄 엄두도 못 냈으므로 서운해 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으며, 다만 객관적이고 사색적인 태도였다. 테스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레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과 쟤와 결혼한다지. 테스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어."
"그 사람과 결혼할 셈이냐?"
마리안이 물었다.
"응."
하고 테스는 대꾸했다.
"언제?"
"어느 때고."
그들은 그녀의 대답을 그저 회피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 그 사람과 결혼한대. 그 신사와 말이야."
이즈 휴에트가 혼자 다짐하듯 되풀이했다. 그들은 어떤 환상에 흘린 듯이 차례차례 침대에서 맨발로 내려와 테스를 둘러쌌다. 기적이 일어난 뒤 친구들의 몸을 검사라도 하는 것처럼 레티는 그의 어개에 두 팔을 얹고, 다른 두 처녀는 팔로 테스의 허리를 감은 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기분이 어때?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이즈 휴에트가 말했다. 마리안이 테스에게 키스를 했다.
"그래, 참말이야."
하고 입술을 떼면서 말했다.
"테스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입술이 금방 거기 닿았기 때문에 그러는 거니?"
레티가 쌀쌀하게 마리안한테 말했다.
"난 그런 생각까진 하지 않았어. 다른 사람들을 다 제쳐놓고 테스가 그와 결혼한다는 게 하도 신기해서 그러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나쁘다는 건 아냐. 아무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어. 우리는 그 남자를 사랑했을 뿐이지, 결혼은 생각지도 않았으니까. 이 세상에서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 귀족의 딸도 아니고 갑부의 딸도 아닌 우리하고 똑같이 생활하는 테스라니 난 오히려 기뻐."
"그 때문에 나를 싫어하는지는 않겠지?"
이에 대한 대답을 그녀의 표정에서 읽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녀들은 잠옷을 입은 채로 바싹 다가섰다.
"난 몰라. 너를 미워하고 싶은데, 그래지지 않아."
레티 프리들이 중얼거렸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미워할 순 없어. 어찌 된 셈인지 미워지지가 않아."
이즈와 마리안이 대꾸했다.
"그 사람은 너희들 중의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데."
테스가 말했다.
"왜?"
"너희들은 모두 나보다 훌륭하니까."
처녀들은 나직이, 그리고 천천히 속삭였다.
"너보다 훌륭하다고? 아니야, 테스. 그렇지 않아."
"훌륭하단 말이야."
테스는 성급하게 말을 가로막고 돌아서며 매달린 그녀들의 팔을 뿌리치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옷장에 기대어 미친 듯이 그 말을 되풀이 하며 외쳤다.
"그렇고말고, 정말이야. 너희들이 더 훌륭하단 말야."
그녀의 울음은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그 사람은 너희 중에서 한 사람하고 약혼했어야 옳았을 거야. 지금이라도 그이가 그렇게 해야 한단 말야. 너희들이 더 잘...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아아."
그녀들은 테스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녀의 흐느낌은 여전했다.
"물 좀 갖다 줘. 얘는 우리 때문에 흥분한 거야. 가엾게도."
마리안이 말했다. 그녀들은 조용히 테스를 침대가로 데리고 가서 다정하게 키스를 했다. 마리안이 말했다.
"그 사람에겐 네가 제일 잘 어울려. 너는 좀 더 숙녀다운데다가 우리들보다 배운 것도 많지 않니. 더구나 그이한테 많은 것을 배우고 난 뒤로 너는 더 훌륭해진 것 같아. 그러니까 넌 자존심을 가져야 해. 난 네가 자존심이 있는 여자라고 믿는데."
"그래, 그런가 봐. 너무 법석을 떨어 미안해."
그들이 다 자리에 눕고 불이 꺼지자 마리안이 테스에게 속삭였다.
"테스야, 그 사람의 아내가 되더라도 우리가 그 남자를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너를 미워하지 않으려 했고, 미워하지 않았던 것, 그런 것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이런 말을 듣는 테스가 살을 저미는 듯한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이유를 그녀들은 몰랐다. 비밀을 덮어 둠으로써 클레어를 배반하고 친구들에게도 해를 끼치느니 어머니와의 약속을 깨고 모든 비밀을 그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그래서 믿고 살아가던 사람한테 모욕을 당하고, 자기를 어리석다고 하는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테스는 가슴이 미어질 듯한 괴로움으로 이런 결심을 했으나, 그녀들은 그녀의 심정을 눈치 채지 못했다.
32
지난 과거를 참회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테스는 결혼 날짜를 정하려 하지 않았다. 클레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번 말을 꺼냈지만, 11월이 되어도 날짜는 여전히 미정이었다. 테스의 심정은 영원히 현재대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초원의 경치도 많이 바뀌어졌으나 정오의 햇살은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거닐기에 알맞을 정도로 아직 따뜻했다. 또 1년 중 이맘때면 산책할 시간을 가질 수 없을 만큼 낙농장 일이 바쁘진 않았다. 태양이 떠 있는 쪽의 젖은 잔디밭을 보노라면 잔물결처럼 반짝이는 거미줄이 바다위에 달그림자 같이 눈에 들어온다. 빛을 내는 불이라도 속에 있는 듯 오솔길의 태양 광선 속을 보잘것없는 생명인 줄도 모르고 떠돌아다니는 하루살이들은 광선의 테두리를 빠져나가 다른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런 광선을 볼 때마다 클레어는 결혼 날짜를 빨리 정해야겠다고 테스에게 말했다. 이따금 클레어에게 기회를 주려고 크릭 부인이 일부러 시키는 밤 심부름을 함께 갈 때에도 그는 테스에게 청했다. 부인이 시키는 심부름은 거의 이 골짜기의 위쪽 기슭에 있는 농가에 가서, 그곳 헛간에 옮긴 해산달이 가까운 암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암소들에게는 커다란 변화가 생기는 계절이어서 날마다 한 떼의 암소들이 이 산으로 옮겨져 왔다. 짚을 먹이로 해서 지내다가 새끼를 낳고, 새끼가 걸을 수 있을 만큼 되면 송아지와 함께 낙농장으로 돌아왔다. 송아지를 시장에 내놓기까지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데, 그 동안에는 젖을 거의 짤 수 없었다. 그러나 송아지들이 팔려서 어미 곁을 떠나기만 하면 젖 짜는 아가씨들은 평소처럼 일을 시작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캄캄한 밤, 평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갈이 깔린 커다란 벼랑 위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많이 불어난 냇물이 둘을 통해 스며들어 배수구로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조그만 도랑까지도 물이 넘쳐서 아무데도 질러갈 지름길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득이 신작로로 가야 했다. 보이지 않는 골짜기 곳곳에서 갖가지의 소리가 들려와 그들의 발밑에 커다란 도시가 있어,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아닌가 하고 착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수십 군데의 장소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군중대회를 여는 것 같아요. 토론을 하고, 전도를 하고, 다투고, 흐느껴 울고, 으르렁거리고, 기도 드리고, 또 저주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고 테스가 말했다. 클레어는 별로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겨울철에는 일손들이 많이 필요치 않다는 말을 오늘 주인한테서 못 들었소?"
"아뇨."
"젖소들의 젖이 점점 말라붙는단 말야."
"네, 여남은 마리가 어제 헛간으로 옮겨졌어요. 그저께는 세 마리를 보냈고요. 그래서 그곳으로 옮긴 소는 거의 스무 마리나 되는 걸요. 그러면 송아지를 낳는 데 저는 필요 없다는 건가요? 오오라, 저는 이곳에서 필요 없게 됐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전 지금까지 열심히..."
"당신이 필요 없다는 말을 주인이 분명히 말하진 않았어. 그러나 우리 사이를 알고 있으니까 크리스마스에 내가 여길 떠날 때 당신도 함께 데려가는 줄로 생각했다고 친절하고 공손한 태도로 말하더군. 그래서 당신 없이 어떻게 일을 하겠냐고 물었더니, 바쁜 계절이 아니어서 여자가 적어도 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하더군. 못된 생각이지만, 크릭이 그렇게 해서 당신이 할 수 없이 결혼을 승낙하도록 해 준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있어."
"기뻐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쪽에서 편리한 경우라도 그만두라는 건 슬픈 일이니까요."
"암, 편리하고말고, 당신도 그것을 인정하는군."
그는 손가락을 그녀의 볼을 만졌다.
"하아."
하고 그는 말했다.
"왜 그러세요?"
"꼬리가 잡혀서 얼굴이 붉어졌군 그래. 내가 실없이 굴었나 보군. 이제 실없는 소리 그만둡시다. 인생은 너무나 심각하니 말이오."
"그건 당신보다 제가 먼저 알았을 거예요."
지금도 테스는 심각한 인생을 맛보고 있었다. 어젯밤과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끝내 결혼을 단념하고 낙농장을 떠난다는 건 낙농장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제 송아지 낳는 시기가 돌아오므로 젖 짜는 아가씨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집에 가는 건 더욱 싫었다. 클레어가 말을 계속했다.
"테스, 그러니까 진심에서 말하는 거요. 크리스마스에는 당신도 이곳을 떠나야 할 테니까, 여러 가지 형편을 봐서도 내 아내로서 그때 함께 떠나는 게 가장 좋고 편리할 것 같소. 게다가 당신이 무계획적인 여자가 아니라면 언제까지나 이대로 지낼 수 없다는 것쯤은 알지 않소."
"이대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여름과 가을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말이에요. 그래서 항상 저에게 속삭이고, 지난여름처럼 저를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나는 변치 않아."
그녀는 갑자기 그를 믿는 뜨거운 사랑에 넘쳐 말했다.
"저도, 당신이 변치 않으실 줄 알아요. 에인젤, 영원히 당신과 함께하는 그날을 정하겠어요."
이리하여 마침내 드센 물결 소리가 들리는 밤길에서, 그들은 결혼 날짜를 정했다. 목장에 돌아오자 그 사실을 곧 크릭 부부에게 알렸다. 또 되도록이면 조용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마음에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라는 당부도 했다. 테스를 곧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막상 잃게 되니까 주인으로서는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크림 걷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이며, 앤글버리와 샌드본의 귀부인들한테 보낼 장식용 버터는 누가 만들 것인가? 오랫동안 질질 끌던 일이 해결된 것을 크릭 부인은 축하하면서 첫눈에 훌륭한 남자의 신부가 될 줄 알았다느니, 도착하던 날 마당으로 걸어오든 그녀의 모습이 뛰어나게 의젓했다느니, 또 훌륭한 가문의 후손임을 장담할 수 있었다느니 하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제 테스는 아무 생각도 없이 시간이라는 날개에 실려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청혼을 승낙했고, 결혼 날짜도 이미 정했다. 날 때부터 영리한 테스는 다른 아가씨들이나 농부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현상과 한층 광범위하게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에 공통된 숙명론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클레어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의 특징인 순종적인 태도로 변해 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결혼 날짜를 알리기 위한 것 같았으나 사실은 어머니의 의견을 한 번 더 들어 보기 위해 그녀는 편지를 썼다. 어머니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그녀가 택한 남자는 신사라는 것과, 결혼 후에 고백을 하면 그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라면 가볍게 용납해 줄 테지만, 에인젤 성격으로는 절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연을 적었다. 그러나 더비필드 부인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들이 속히 결혼해야 할 필요성을 클레어는 자신과 그녀한테 그럴 듯하게 설명은 했지만, 뒤에 밝혀진 바로 미루어 볼 때 사실 이 처사에는 너무 서두른 점이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열렬하게 기울인 사랑에 비해 이상적이고 공상적이긴 하지만, 클레어는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클레어가 생각했던 대로 무지한 농촌 생활을 시작했을 때에는 전원 시대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처녀의 매력을 이런 생활 속에서 발견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말로만 듣던 순진한 아름다움이 과연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인지 그는 이곳에 와서 비로소 알았다. 아직도 장래를 분명히 내다볼 만한 시기는 멀리 있는 것 같았다. 훌륭하게 사업이 시작됐다는 자신을 가지려면 적어도 2년은 더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일의 성패가 가족의 편견으로 인해 진정한 운명에서 빗나갔다는 생각 때문에 그의 정력과 성격에 심어진 무모한 기질에 좌우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당신이 중부 지방의 농장에 정착할 때까지 저는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언젠가 조심스럽게 그녀가 물어 본 적이 있었다(마침 그때 영국 중부 지방의 농장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테스, 난 사실, 내 보호와 사랑에서 당신을 떼놓고 싶지 않아."
라고 그는 대답했다. 문제가 그것뿐이었다면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클레어가 테스에게 끼친 영향은 너무나 뚜렷한 것이어서 그의 태도나 습과, 말투, 그의 기호까지도 그대로 닮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두고 떠나면 닷 옛 습관으로 돌아가 그와 어울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있으려는 또 하나의 이유는 클레어가 식민지로 가든 어느 곳으로 가든 간에 먼 곳으로 떠나기 전에 그의 부모는 부모 된 심정에서 테스를 꼭 한 번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양친이 어떤 의견을 말한다 해서 자기의 생각을 바꿀 클레어도 아니지만, 유리한 농장을 찾는 동안 두어 달 방을 얻어서 생활하는 것이 테스에게 고생스러운 시련으로 느껴질지도 모르는 대인 관계, 목사관에서 어머니와 상면하는 데 사교적인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에인젤은 밀 농사와 방앗간을 겸해서 할 생각이었으므로 방앗간의 작업 과정을 보아 두려고 마음먹었다. 한때는 어느 수도원의 소유였던 웰브리지의 오래되고 커다란 물방앗간 주인은 아무 때라도 그가 오기만 하면 작업 과정도 보여 주고, 며칠 동안 실습하여도 좋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클레어는 어느 날 저녁,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려고 몇 마일쯤 떨어진 물방앗간에 갔다가 탤보데이스에 돌아왔다. 클레어가 얼마 동안 그 방앗간에서 지내기로 결심한 사실을 테스는 눈치 챘다. 그것은 제분 과정을 견학하려는 것보다는 옛날 더버빌 가문이 저택으로 쓰던 바로 그 농가에서 하숙할 수 있다는 우연한 사실 때문이었다. 이것이 언제나 클레어가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말하자면 당면한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감정만으로 정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결혼식을 마친 다음 마을이나 여관으로 가는 대신 곧장 그쪽으로 가서 두 주일 가량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 이전에 들은 적이 있는 런던 교외에 있는 농장을 찾아가 봅시다. 3월이나 4월쯤
에 부모님을 방문하도록 하고.“
라고 클레어는 말했다. 이처럼 연속되는 문제가 여러 번 되풀이되는 사이에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할 믿을 수 없는 그날인 12월 31일이 바싹 다가왔다. 그녀는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모든 고락을 함께 나눈다는 것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느 일요일 아침, 이즈 휴에트가 교회에서 돌아오자마자 테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 오늘 아침에 결혼 예고를 않더라."
"뭐?"
이즈는 침착하게 테스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오늘은 첫번째 예고일이야. 12월 31일에 결혼하기로 되어 있잖니?"
테스는 얼른 그렇다고 대답했다.
"결혼식 전에 세 번 예고해야 하는데, 주일은 두 번 남았어."
테스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즈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결혼식 전에 세 번 공개 문답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마 클레어가 그걸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결혼식은 한 주일 더 연기해야 한다. 그러나 연기한다는 것은 불길한 일이다. 그에게 귀띔해 주면 좋을까? 그녀는 이제껏 소극적이었으나, 이번 일만은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갑자기 초조해졌다. 그러나 우연한 일이 그녀의 근심을 덜어 주었다. 이즈는 결혼 예고 문답에서 테스가 빠뜨린 것을 크릭 부인한테 알렸다. 그러자 부인은 기혼 여성이 갖는 특권을 이용하여 그 점에 관해 클레어에게 말했다.
"클레어 씨, 잊으셨나요? 결혼 예고 말입니다."
테스와 단둘이 만나자 클레어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할 것 없어. 예고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결혼 허가장을 받는 편이 간단할 것 같아서 당신한테 의논도 하지 않고 결정했어. 그러니까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가도 당신 이름은 부르지 않을 거야."
"뭐 이름을 꼭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하고 말했다. 누군가 그녀의 과거를 들추어내서 결혼 예고를 방해할까 봐 두려워하던 그녀에게 유리하게 되어 간다는 사실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테스에게 얼마나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난 안심할 수 없어."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 모든 행복이 여러 가지 액운으로 짓밟힐지도 몰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대개 그런 일이 많으니까. 차라리 남들이 하는 대로 결혼 예고를 하는 게 좋았을 걸"
그러나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결혼식 때 입을 옷은 지금 갖고 있는 가장 좋은 흰 드레스를 그대로 입는 것을 좋아할는지, 아니면 새 옷을 사 입어야 하는지 클레어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녀의 이러한 걱정은 클레어의 빈틈없는 배려로 몇 개의 큰 꾸러미가 그녀에게 배달되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꾸러미 속에는 그들이 계획하는 간소한 결혼식에 어울릴 물건들, 이를테면 아침에 입을 예복을 포함해서 모자와 구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잠시 후 테스는 눈물이 글썽해진 얼굴로 층계를 내려왔다. 그녀는 클레어의 어깨에 얼굴을 파
묻고 속삭였다.
"아냐, 런던의 양장점에 주문한 것뿐이야. 그뿐이라니까."
너무 고마워하는 그녀의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주문한 옷이 맞지 않으면 마을의 재봉사에게 부탁해서 고쳐 입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가서 옷을 입어 봤다. 거울 앞으로 비단옷을 입은 자신의 자태를 혼자 보다가,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신비로운 의상에 대한 민요가 떠올라 흥얼댔다.
"한 번 실수한 여자에게는 영원히 어울리지 않는 옷"
이 노래는 테스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요람에 한발을 딛고 장단에 맞춰 흔들어 주며 아주 쾌활하게 들려주던 노래였다.
"궤네버 왕비의 옷이 왕비의 비밀을 폭로했듯이 테스의 옷도 빛깔이 변해 그녀의 비밀을 폭로한다면“
낙농장에 온 후로 그녀는 한 번도 이 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33
에인젤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그들이 단순히 연인으로 있을 동안의 마지막 소풍으로 낙농장에서 떨어진 곳에서 하루쯤 지내고 싶어 했다. 그것은 그들 바로 앞에 미소 짓고 있는 보다 중대한 다른 날과 함께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의 낭만적인 하루를 보내고 싶은 것이었다. 가까운 마을에 물건을 사러 가자고 지난 주 클레어가 귀뜀을 했기에 지금 그들은 함께 나가게 된 것이다.
친구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낙농장에서의 클레어의 생활은 은둔자의 생활과 같았다. 몇 달이 되도록 마을에 한 번 나가 보지 않았고, 마차란 것은 도무지 필요치도 않아서 자기 것을 가지지도 않았다. 꼭 필요할 때는 주인의 마차나 조랑말을 빌렸다. 그날도 그들은 주인의 이륜마차를 빌려 타고 집을 나섰다.
그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둘이 의논해 가면서 물건을 샀다.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여서 장식할 사철나무와 겨우살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각처에서 모여든 나그네들로 거리는 온통 붐비고 있었다. 테스는 클레어와 팔짱을 끼고 아름다운 얼굴에다 행복한 미소를 띠면서 사람들 틈에 돌아다니는 대신 뭇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혹독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예약해 두었던 여관으로 저녁때쯤 들어갔다. 클레어가 마차를 문 앞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보러 나간 동안 그녀는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틈 휴게실은 손님들로 가득 찼으며, 그들은 쉬지 않고 들락날락거렸다. 손님들이 현관문을 여닫고 드나들 때마다 현관 안에 있는 등불이 테스의 얼굴을 밝게 비추었다. 바로 그때, 남자 두 사람이 옆을 지나가다가 그중 한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트랜트리지는 이곳에서 굉장히 먼 곳에 떨어져 있어 그 마을 사람들이 그 곳에 오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녀는 그 남자가 트랜트리지 사람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른 남자가 입을 열었다.
"거 멋진 아가씨네."
"정말 멋지군. 그러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러다가 그는 말끝을 흐려 버렸다. 마침 그때 클레어가 마구간에서 돌아왔다. 그는 문턱에서 그들과 마주치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겁먹을 표정을 봤다. 그녀가 모욕 당했다고 느껴지자 클레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있는 힘을 다해 주먹으로 그 남자의 턱을 후려갈겼다. 그는 비틀비틀 뒷걸음쳤다. 그 남자가 몸을 바로잡고 덤빌 기세를 보이자 클레어는 문 밖으로 나가 대항할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상대는 사태에 대해 생각을 달했는지 테스의 곁을 지나다가 다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클레어를 향해 말했다.
"미안합니다. 사람을 완전히 잘못 봤어요. 저는 이곳에서 40마일 떨어진 마을에 살고 있는 여자인 줄 알았습니다."
클레어도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여관 복도에다 그녀를 세워 둔 것은 자기의 큰 실수라 생가하고, 이런 경우 으레 하는 사죄로 그 남자에게 5실링의 약값을 지불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서로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클레어가 마부한테서 고삐를 받아들고 테스와 함께 마차를 몰아 출발하자, 그와 때를 같이하여 두 남자도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두 번째 남자가 말했다.
"정말 사람을 잘못 봤나?"
"천만에, 조금도 잘못 보진 않았어. 그 신사의 감정을 상하게 해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야."
한편 사랑하는 두 사람은 계속해서 마차를 몰고 있었다. 테스가 맥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식을 좀 뒤로 미룰 수는 없을까요? 만약 우리들이 원한다면 말이에요."
"테스, 그건 안 돼. 진정하라고, 그 친구가 폭행했다고 나를 고발할까봐 그러지?“
하고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연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된다면 하는 말이에요."
그녀가 말하는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공상은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테스는 가능한 한 순순히 그의 말에 복종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분은 여전히 우울했다. 그 기분은 낙농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가시질 않았다. 그녀는 이 지방에서 몇 백 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으로 가기로 생각을 돌려먹었다.
그날 밤 층계 앞에서 서로 다정하게 헤어진 뒤 클레어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테스는 며칠 남지 않은 결혼식을 앞두고 필요한 것들을 챙기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이것저것 매만지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쿵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마루를 차면서 후닥닥거리는 소리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잠자는데 클레어가 갑자기 병이 나지 않았나 걱정스러워 그녀는 급히 뛰어올라가 방문을 두드리면서 물었다.
"아, 테스, 아무것도 아냐. 놀라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그 이유는 재미있어. 곤히 자고 있는데, 아까 당신을 모욕한 그놈이 또 꿈에 나타나 한바탕 싸움을 했어. 당신이 들은 소리는 오늘 짐을 싸려고 내놓은 여행 가방을 주먹으로 두들겨대는 소리였어. 나는 잠자면서 가금 이런 짓을 곧잘 해 자, 이제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자요."
마음을 결정짓지 못하던 그녀에게 클레어의 이 얘기는 저울추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를 마주 보고서는 도저히 고백할 수 없었지만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3,4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넉 장의 편지지에다 간추려서 쓴 다음, 봉투에 넣고는 클레어의 이름을 적었다. 다시 약한 마음이 생기기 전에 그녀는 맨발로 살금살금 기어 올라가 편지를 문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처음으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나 그 소리는 평소와 같은 것이었고, 클레어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계단을 내려왔다. 테스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클레어는 아래층에서 그녀를 만나자 키스를 했는데, 그 입맞춤은 언제나 변함없는 정열적인 것이었다. 클레어는 좀 불안하고 피곤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만 있을 때도 그는 그녀의 고백에 대해 한마미도 말하지 않았다. 그 편지를 읽어 본 것일까? 그러나 그녀로서는 그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아무 얘기도 먼저 꺼낼 수 없었다.
그날은 그대로 지나갔다. 클레어는 테스의 비밀을 홀로 가슴속에 간직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의 태도는 여전히 솔직하고 부드러웠다. 그녀의 의심은 한낱 부질없는 것이었을까? 그녀를 용서해 주는 것일까? 클레어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 주고, 그녀의 불안을 마치 악몽이라고 미소로 대해 주는 것일까? 그는 정말 그 편지를 받았을까? 그녀는 그이 방을 흘끗 훔쳐봤지만 아무 흔적도 볼 수 없었다. 클레어의 태도는 혹시나 그녀를 용서해 준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그가 편지를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열광적인 신뢰를 그녀는 갑자기 갖게 되었다.
언제나 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리하여 섣달 그믐날, 그들의 결혼식 날이 닥쳤다. 그들은 새벽 젖 짜는 시간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낙농장에서 마지막으로 유숙하는 지난 한 주일 동안은 마치 손님과 같은 대접을 받았고 테스에겐 독방까지 주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 그 커다란 식당이 어제와는 딴판으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매우 이른 아침인데도 주인은 벽난로가 있는 벽에 흰 칠을 했으며, 바람구멍을 장식했던 갖가지 무늬가 있는 때가 낀 푸른 색 무명 바람막이를 떼고 눈부신 황금색 비단 막을 아치 위에 걸었다. 사실 이 방에서 가장 중심적 자리에 위치했던 벽난로를 단장하니까, 음침한 겨울 아침인데도 방 전체에 화사한 웃음을 던지는 것 같았다.
"축하하는 뜻에서 뭘 좀 해 드리려고 마음먹었죠. 옛날에 하던 식으로 비올라나 바이올린까지 갖추어서 한바탕 떠들썩하게 하려 해도 나리께서 싫어하실 테니까 조용하게 축복하는 방법을 생각다 보니, 이렇게 하게 됐지요.“
하고 주인이 말했다. 테스의 가족과 친구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설사 초대를 했다하더라도 오기가 힘들었겠지만, 사실 말로트 마을 사람은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 에인젤의 가족에겐 결혼 날짜와 시간 등을 알리고, 다만 한 사람이라도 와 주시면 기쁘겠다는 사연을 적어 보냈다. 그런데 에인젤의 행동을 괘씸하게 생각했는지 형들한테서는 아무 답장이 없었고, 부모한테서는 성급하게 결혼하는 것을 한탄하는 투의 편지가 왔다. 사랑하는 아들의 부인이 젖 짜는 아가씨임을 못내 서운해 하면서도 에인젤은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연령이니까 그것으로 위안을 삼겠다는 내용이었다.
클레어는 머지않아 그들을 놀라게 해 줄 그녀의 유리한 혈통이 없었더라면 이토록 냉정한 편지에 크게 낙심할 뻔했다. 낙농장에서 갓 나온 테스를 더버빌 가문의 후손이니 또 숙녀니 하고 내세우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몇 달 동안 여행도 하고 책도 읽히면서 사회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녀의 혈통을 숨겨 두었다가 그의 양친을 만나게 될 때 명문의 후손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여자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할 셈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만이 갖는 아름다운 꿈이었다. 테스의 혈통은 에인젤 클레어에게
있어서는 세상의 다른 어느 가문보다도 더 귀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편지를 직접 전했는데도 그녀에 대한 클레어의 태도에 변함이 없는 것을 보고 그녀는 죄스러운 생각을 느끼면서도 과연 그가 편지를 받아 봤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레어보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이라고 하기 보단 오히려 오랫동안 클레어의 동지였던 괴상망측한 그이 침실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 열린 문 앞에 서서 곰곰 생각에 잠기면서 살펴봤다. 2,3일 전에 흥분해서
편지를 밀어 넣은 문지방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양탄자가 문지방 가까이까지 깔려 있고, 그 양탄자 밑에는 클레어한테 보낸 하얀 편지 봉투의 끝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그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바로 문 밑으로 넣는다는 것이 너무 급히 서두른 나머지 양탄자 밑으로 집어 넣었기 때문에 클레어가 그것을 보았을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녀는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편지를 꺼냈다. 편지 봉투는 그녀가 밀어 넣을 때 봉한 그대로였다. 앞을 가리고 있는 산은 아직도 걷히지 않았다. 집안은 온통 준비로 법석을 떨고 있어서 클레어에게 다시 편지를 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편지를 찢어 버렸다.
그들이 만났을 때 그녀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고 클레어는 적이 염려했다. 편지를 잘못 넣은 사실이 그녀의 고백을 방해한 것처럼 생각도 됐으나, 그녀는 그렇게 속단할 필요가 없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시간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오락가락거림으로 집안은 온통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부산했다. 주인 부부는 그들의 입회인으로 동행해야 했기 때문에 모두 옷을 차려 입어야 했다. 그래서 조용히 생각해 본다거나 신중히 이야기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이 단둘이 얘기할 수 있었던 시간은 계단에서 잠깐 만났을 때뿐이었다. 테스는 일부러 명랑한 척하면서 말했다.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저의 결함과 지난 실수에 대해 전부 고백하겠어요."
"안 돼, 서로 결함을 얘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적어도 오늘 하루만은 완전한 아가씨로 보여야 해. 서로의 잘못을 얘기할 시간은 앞으로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나도 그때 고백하겠어."
그는 다급한 듯 말했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게 저한테는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만 당신이 나중에라도 뭐라..."
"이 괴짜 아가씨야, 정 그렇다면 우리가 하숙에 자리를 정하면 그때 무엇이든지 다 말하라고. 지금은 안 돼. 오늘 같은 날 그런 예기로 기분 상해서는 안 돼. 그런 얘기는 무료할 때 해야 어울리는 거야."
"그럼 당신은 제 얘기를 듣고 싶지 않으세요?"
"테스, 정말 듣고 싶지 않아."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떠나야 했으므로 더 이상 얘기할 시간도 없었다. 곧 다가올 결정적인 두 시간 동안이 그에 대한 애정의 힘찬 물결에 휩쓸려서 자꾸 앞으로 밀려나가 그 이상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녀가 오랜 세월을 두고 억눌러 오던 단 하나의 소원, 즉 그의 아내가 되고, 그를 남편이라고 부르며,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바치려는 소원은 지루하게 더듬어 오던 반성의 골목길에서 그녀를 끌어올렸다.
테스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여러 가지 빛깔로 아롱진 이상의 구름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 이상은 밝은 빛으로, 모든 불길한 사건들을 덮어 버렸다. 교회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겨울철이어서 마차를 타야 했다. 길가 여관에서 보관되어 있는 승용마차를 부탁했는데, 이 마차는 역마차로 여행하던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사용하지 않고 이 여관에 보관한 채로 있는 것이었다. 이 마차는 튼튼한 바퀴살과 육중한 바퀴테, 커다랗게 구부러진 마차 밑바닥과 또 무지무지하게 굵은 가죽 끈과 용수철, 그리고 망치 모양으로 생긴 채가 달려 있었다.
마부는 젊어서 풍상을 너무 겪은데다가 그 반발로 독한 술을 마셔서 류머티스 성 통풍을 앓는 육순이 된 늙은 역마차 마부로서 직업이 없어진 지난 25년 동안을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여관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옛날의 젊은 시절이 되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부의 오른발에는 캐스터브리지의 캉스 암스 여관에서 정식 고용원으로 일할 때 귀족 마차의 채에 쓸려서 생긴 상처가 남아 끊임없이 고름이 나고 있었다.
늙어빠진 마부가 모는 거추장스럽고 삐걱거리는 마차 안에는 신랑 신부와 주인 부부, 이렇게 즐거운 네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에인젤은 형들 중 한 사람만이라도 신랑의 들러리로 참석해 주기를 바랐고, 편지에도 그런 희망을 비쳤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 오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형들은 이 결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니까 와서 축복해 줄 리가 만무했고, 오히려 참석하지 않는 편이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일반의 세속적인 젊은이가 아니었으므로 이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낙농장의 일꾼들과 자리를 함께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편파적이고 까다로운 성질을 지닌 그들에겐 불쾌한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테스는 시간의 흐름에만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몰랐고,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으며, 또 어느 길로 해서 교회에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에인젤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 그 밖의 모든 것은 밝게 빛나는 아지랑이 같았다. 그녀는 이를테면 시에 사는 천상의 선녀와 다름없었다. 그들이 함께 산보할 때면 클레어가 흔히 들려주던 고전 속에 나오는 여신과도 같았다.
결혼 허가장만으로 진행되는 결혼식이어서 참석한 사람은 12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참석한 사람이 설사 1천 명이었다 하더라도 그녀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조금도 없었으리라. 지금의 그녀에겐 그들은 별세계만큼이나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테스가 클레어에 대한 정절을 맹세하는 엄숙한 순간에는 흔해빠진 성의 감각 따위는 경박하고 하찮아 보였다. 그들이 함께 무릎을 꿇고 있는 사이 식이 잠깐 멈췄을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기울어지면서 어깨가 클레어의 팔에 닿았다. 무심코 스쳐 가는 생각에 깜짝 놀라는 순간 클레어가 정말 옆에 있음을 확인하고, 그의 성실성만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자기의 신념을 더욱 다짐하는 것이었다.
클레어는 테스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 하나하나에 그 진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 애정의 깊이와 순정과 상냥한 마음씨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알지 못했고, 그 사랑이 얼마만한 고뇌와 정직성과 참을성, 그리고 또 어느 만큼의 진실성을 밑받침하는지 몰랐다.
그들이 교회 밖으로 나올 때 종각에 있는 종이 힘차게 흔들렸고 3박자의 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이 조그만 마을에서 경사를 알리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건립한 사람들이 마련한 종으로, 이 종은 있는 힘을 다해 울리는 것이었다. 남편과 함께 종각 옆을 지나 문 쪽으로 발을 옮길 때, 진동하는 공기가 갑옷처럼 둘러싼 종루에서 둥글게 음파를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숨 쉬고 있는 긴장된 정신적 분위기와 어울리는 것 같았다. 사도 요한이 태양 속에서 보았다는 천사처럼 밖에서 오는 빛을 받아 영광스러워졌다고 느낀 그녀의 정신 상태는 교회의 종소리가 사라지고 결혼식의 감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테스는 이제 비로소 모든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크릭 부부는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마차를 보내도록 이르고, 타고 온 마차는 젊은 부부용으로 내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비로소 그 마차의 구조와 외관을 살펴봤다. 그렇게 말없이 앉아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테스,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군."
하고 클레어가 말했다. 그녀는 이마에 손을 갖다 얹으면서 말했다.
"네, 가슴이 떨리는 일이 많아요. 에인젤, 모든 것이 신기할 뿐이에요. 무엇보다도 이 마차는 언젠가 본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본 것 같은 참 이상해요, 꿈속에서 봤는지 모르겠어요."
"아, 당신은 더버빌 마차에 대한 전설을 들었군 그래. 이 지방에서 당당히 행세할 때 당신네 가문에 관해 파다히 퍼졌던 미신이지. 그래 이 오래된 옛날 마차를 보자 그런 생각이 났군."
"저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어떤 전설인지 들려주실 수 없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걸. 16~17세기경에 더버빌 가문의 어떤 사람이 자기 집 전용 마차 안에서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다는 거야.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 집안사람들은 마차가 보이거나, 또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다음은 나중에 얘기하지, 아주 어두운 얘기니까. 희미한 기억이 이 마차를 보자 되살아난 것이 틀림없어."
"그런 얘기를 들어 온 기억이 없어요. 에인젤, 우리 가족이 그 마차를 보게 되는 것은 죽으려고 할 때인가요, 아니면 죄를 지으려고 할 때인가요?"
하고 테스는 중얼거렸다.
"테스, 이젠 그만."
클레어는 키스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깊은 뉘우침에 젖어 있었다. 에인젤 클레어 부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도덕적인 자격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일까? 알렉산더 더버빌 부인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마땅하지 않을까? 흠 없는 사람에게는 죄 많은 눈가림으로 보일 행동을 굳센 사랑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런 경우 여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좋을지 테스는 알지 못했다. 의논할 사람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동안 방에 혼자 남아 있게 된 것을 알자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다. 하느님께 기도드리려 생각했지만, 그녀가 매달려서 호소하는 상대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클레어에 대한 그녀의 숭배는 우상화할 만큼이어서 불행의 징조가 아닌가 하고 두려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로렌스 신부의 말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걷잡을 수 없는 기쁨은 걷잡을 수 없는 종말을 본다. 그것은 인간의 처지에서 보면 너무나 무모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철저하고, 또 너무나 치명적이었을지도.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 내 사랑 당신이여, 어째서 이다지도 당신을 사랑하나요. 당신이 사랑하는 여인은 지금의 제가 아니라 한때는 저도 그러했을 저와 비슷한 여자일 거예요."
오후가 되어 출발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들은 웰브리지 방앗간 근처의 농가에서 며칠 묵으려던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클레어는 제분 과정을 견학할 동안 그곳에 머무를 셈이었다.
오후 두 시가 됐다. 모든 준비를 끝냈으므로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낙농장 일꾼들은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 모두 나와서 빨간 벽돌로 된 입구에 서 있었고, 크릭 부부도 문간까지 따라 나왔다. 같은 방에서 거처하던 세 사람의 친구들이 나란히 벽을 등진 채 서글픈 모습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서 있었다. 그들이 떠날 때 그녀들이 나와 줄까 테스는 궁금하게 생각했으나 그녀들은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고 나와 주었다. 어째서 우아한 레티가 그토록 창백해 보이며, 이즈는 슬픔이 가득해 보이며, 마리안은 멍청해 보이는 지 테스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의 슬픔을 생각하느라 끊임없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불행한 그림자를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클레어에게 속삭였다.
"저 아가씨들에게 키스해 주시겠어요?"
클레어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형식에 불과한 그런 작별 인사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들 앞을 지날 때 일일이 키스를 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문 앞에 다다르자 테스는 여자다운 궁금증에 뒤돌아봤다. 작별의 키스는 처녀들이 애써 진정하려던 감정을 불러 일으켜서 옳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클레어는 그런 사실을 조금도 몰랐다. 조그만 사립문을 빠져나가면서 크릭 부부와 그 동안의 호의에 감사해 했다. 인사가 다 끝나고 그들이 걸음을 옮기는 사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별안간 수탉이 우는 소리가 그들의 침묵을 깨뜨렸다. 빨간 볏에 털빛이 흰 수탉이 그들로부터 두어 야드 떨어진 곳의 울타리 기둥 위로 날아올라가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울음소리는 그들의 귀를 쨍쨍 울리고 산골짜기에 메아리를 일으키며 사라져 갔다. 크릭 부인이 말했다.
"어머? 낮에 닭이 울다니."
두 사나이가 마당 문을 열고 그 사립문께 서 있었다. 쪽문에 있는 사람들 귀에 들릴 것을 꺼리지도 않은 듯, 그중의 한 사람이 옆의 남자에게 말했다.
"이건 좋지 않은데."
수탉이 클레어를 향해서 다시 울었다. 주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이상한데."
"전 저 소리가 듣기 싫어요.
테스가 남편에게 말했다.
"마부한테 말을 몰라고 말해 주세요. 안녕히들 계세요."
수탉이 또 울었다.
"쉿. 저리 가 버려. 빌어먹을, 안 가면 목을 비틀어 버릴 테다."
주인은 짜증스레 닭을 내쫓았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부인을 보고 말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울 게 뭐람. 저놈의 수탉이 낮에 우는 건 이년 내내 들은 일이라곤 없었는데."
"날씨가 바뀌려고 그러는 거예요. 당신 생각은 당치도 않아요."
라고 그의 부인이 말했다.
34
골짜기를 따라 평탄하게 뻗친 길을 3마일 가량 달려 웰브리지에 도착했다. 마을에서 왼쪽으로 돌아 이 마을의 명물인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의 양식을 본뜬 커다란 다리를 건넜다. 다리의 바로 뒤쪽에는 그들이 머무를 집이 있었는데, 이 집의 겉모양이 프룸 분지를 지나는 여행자들에게는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 이 집이 한때는 훌륭한 저택의 일부였고, 또 더버빌 가문의 소유로써 저택으로 쓰였던 일이 있었으나 그 일부가 부서진 뒤로는 농가로 사용되고 있었다.
"조상께서 쓰시던 저택에 잘 오셨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클레어는 마차에서 내리는 테스의 손을 잡아 줬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야유에 가까웠으므로 클레어는 자신의 농담을 후회했다. 방은 두 개만 부탁해 놓았는데, 집안에 들어가 보니까 주인은 그들이 머무르는 동안을 이용해 새해 인사 겸 친구들을 찾아보려고 이미 외출 중이었고, 집에는 그들의 간단한 시중을 들 여자를 이웃 농가에서 한 사람 데려다 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둘이서만 집을 독차지하게 된 것을 기뻐했고, 그들만의 보금자리에서 생활하는 경험의 시초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 보기에도 낡은 옛 저택이 어딘지 모르게 테스의 마음을 침울하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마차가 돌아가 버리자 손을 씻으러 하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섰을 때 테스는 멈추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하고 그가 물었다.
"저 무서운 여자들을 보세요. 전 깜짝 놀랐어요."
테스는 웃음을 띠면서 대답했다. 그는 뒤를 쳐다봤다. 돌벽을 파서 고착시킨 두 개의 화판에는 실물과 똑같은 크기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저택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누구나 알게 되는 이 두개의 초상화는 약 2백 년 전에 그린 부인들의 초상으로 한 번 보기만 하면 오래도록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갸름한 얼굴과 가느다란 눈에 선웃음을 치고 있는 그림은 무정하고 앙칼진 인상을 풍기고 있고, 매부리코에 커다란 이빨,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또 하나의 그림은 흉측하게 보일 만큼 도도한 인상을 풍겼다. 이 그림을 본 사람은 꿈에서도 그 환상이 나타날 정도의 사나운 얼굴이었다. 클레어가 하녀에게 물었다.
"이것이 누구의 초상이죠?"
"이 집의 옛날 부인이던 더버빌 가문의 귀부인들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하지만 벽에다 끼워 아주 고정시켜 놓았기 때문에 떼어 내지를 못한답니다."
초상화가 테스를 놀라게 한데다가 더욱 불쾌한 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과장된 초상화의 모습에서 명백히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클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첫날밤을 지내기 위해 이런 집을 택한 것을 후회하면서 옆에 딸린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서둘러 준비되어 대야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은 한 대야에서 함께 손을 씻었다. 물속에서 클레어의 손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어느 게 내 손가락이고 어느 게 당신 것이지? 엇갈려서 잘 모르겠군."
그가 얼굴을 들면서 다정스레 말했다.
"모두 당신 거예요."
그녀는 재치 있게 대답하고 되도록이면 즐거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클레어는 테스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조차 그녀의 섬세한 감정 때문이라고 이해하며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테스는 자신의 태도가 우울하게 보이는 것 같아 굳이 명량한 기분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 해의 마지막 날인 오후의 짧은 햇살도 이미 다 저물어 창틈으로 새어드는 황금빛 줄무늬를 이룬 광선이 그녀의 치맛자락에 아른거렸다. 옛날식으로 갖추어 꾸민 응접실로 들어가 그들은 처음으로 단둘이서 식사를 했다. 비로소 오붓한 식사 시간을 갖게 된 클레어는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한 접시에 담은 빵과 버터를 둘이서 나누어 먹었고, 그녀의 입술에 붙은 빵부스러기를 핥아먹는 것을 무척이나 재미있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어울려 주지 않는 그녀의 의연한 태도를 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잠시 동안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치 어려운 문제에 대한 결론을 혼자 내리는 것처럼, 자신의 성실과 운명에 의해서 좌우되는 연약한 여인을 위해 끝까지 그녀를 보호할 것을 하느님께 맹세했다.
해가 지기 전에 그들의 짐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한 농장 주인의 말을 떠올리며 그들은 응접실에서 짐이 도착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저물도록 짐은 오지 않았다. 그들은 빈 손으로 왔기 때문에 입은 것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해가 저무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조용하던 겨울 날씨는 변덕을 부렸다. 창 밖에는 비단 스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나뭇잎이 몸부림치듯 바림에 흩날리며 부딪쳤다. 잠시 후 굵은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그 수탉은 날씨가 변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군."
하고 클레어가 말했다. 시중드는 여자는 식탁에다 초를 갖다 놓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초에다 불을 켰다. 촛불은 벽난로 쪽으로만 쏠렸다. 흘러내리는 촛농을 바라보며 클레어가 말을 이었다.
"이런 옛날 집은 바람구멍 투성이로군. 짐마차는 어디쯤 왔을까? 솔도 빗도 하나도 안 가져왔는데 말야."
"글쎄 말예요."
그녀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테스, 다른 때는 명랑하더니, 오늘 저녁엔 조금도 즐거운 기색이 없어. 2층에 있는 흉측한 초상화가 당신 기분을 불안하게 했나 봐. 이런 곳으로 데리고 와서 미안해. 그런데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궁금하군. 말해 봐."
그녀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클레어도 안다. 그래서 심각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갑자기 그녀는 설움이 북받쳐 상처 입은 짐승처럼 움츠러들었다. 참으려고 애를 써도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말한 게 아니야. 당신은 짐이 오지 않아서 걱정하는 거지? 나도 그런 줄 알아. 조너던 영감이 왜 짐을 안 가져오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군. 벌써 7시 아냐? 아, 드디어 왔나 보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클레어 밖에는 나가 볼 사람이 없었다. 그는 조그만 꾸러미를 한 개 들고 돌아왔다.
"조너던 영감이 아냐."
"큰일이네요."
하고 테스가 말했다. 그 꾸러미는 특별히 보낸 심부름꾼이 가지고 왔다. 에민스터에 있는 목사관에서 온 심부름꾼으로 신혼부부가 낙농장을 출발한 직후에 탤보데이스에 도착했으나, 반드시 본인에게 직접 전달하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으로 그들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클레어는 불이 있는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왔다. 30센티 길이도 안 되는 이 짐을 천막천으로 싸서 꿰매었고, 아버지의 도장이 찍힌 빨간 봉인이 되어 있었다. 겉에는 아버지의 친피젤 클레어 부인 앞 이라고 씌어 있었다. 클레어는 꾸러미를 테스한테 주면서 말했다.
"테스, 당신한테 주는 작은 결혼 선물이야. 참으로 생각이 깊으신 분들이야."
테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꾸러미를 받았다. 그녀는 클레어에게 짐을 되돌려 주며 말했다.
"당신이 풀어 주세요. 이 어마어마한 봉인을 뜯고 싶지 않아요. 너무 위엄 있게 보여서 제 대신 좀 풀어 주세요."
그는 꾸러미를 풀었다. 안에는 모로코가죽으로 만든 조그만 상자가 들어있고, 그 상자 안에는 간단한 편지와 열쇠가 놓여 있었다. 클레어 앞으로 온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난 사치스럽고 친절한 네 대모피트니 부인이 네가 택할 신부와 너에 대한 호의의 표시로 자기가 갖고 있던 보석 중 일부를 내게 맡긴 사실을 너는 잊었을 거다. 그 보석은 어느 때고 네가 결혼을 하게 되면 네 아내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이 말을 존중하여 내가 거래하는 은행에 그 보석을 보관시키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봐서 좀 안 어울리는 점도 있었으나 너도 알다시피 일생 동안 사용할 소유권울 가진 부인에게 이 보속을 전해 줄 의무가 있는 나는 즉시 이것을 보낸다. 그러니까 이 보석은 너의 대모의 유언에 따른 상속 재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문제에 관한 정확한 유언장을 동봉한다."
"이제야 생각나는군.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어."
그 상자를 열자 안에서는 목걸이와 팔찌, 귀고리, 그리고 다른 몇 가지 장식품이 들어 있었다. 처음엔 테스가 보석에 손대기를 두려워했으나 클레어가 그중 한 개를 펼쳐 보이자 그녀의 눈은 그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내 거예요?"
"당신 것이고말고."
그는 난롯불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클레어가 열다섯 살일 때 세상을 떠난 대모는 대지주의 부인으로 그가 사귀어 본 유일한 갑부였고, 클레어의 성공을 확신하고 또 훌륭한 운명도 예언해 주던 일이 겨우 생각났다. 자신의 아내와 그 후손들을 위해서 이런 보석을 간직한다는 것은 화려한 앞날을 예측해 준 대모로서 당연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보석들은 비웃는 듯 반짝였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왜 간직하는 걸까? 보석을 간직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허영심에 불과했다. 며느리한테 물려준다는 원리가 부부라는 방정식에 적용된다면 그것은 남편에게도 권리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아내는 더버빌 가문의 후손이다. 과연 테스보다 이 보석이 더 잘 어울릴 사람이 어디 있을까?
"테스, 걸쳐 봐."
갑자기 열을 올려 말한 클레어는 그녀를 거들어 주기 위해 불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마술이라도 걸린 듯 그녀는 이미 목걸이와 귀고리, 팔찌, 그리고 다른 것들까지 모두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테스, 그 가운이 안 맞는군. 그런 다이아몬드와 어울리는 건 앞가슴이 트인 옷이라야 되겠어."
"그래요?"
"그럼."
옷의 윗부분을 어떻게 접어 넣으면 야회복과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지 가르쳐 주자, 그녀는 그가 일러 주는 대로 웃옷의 깃을 안으로 접어 넣었다. 목걸이에 달린 장식이 하얗게 드러난 목 한복판에서 제 모양을 드러냈을 때 클레어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녀를 훑어봤다.
"멋있는데, 정말 눈부시도록 아름다워."
날아오르는 새도 아름다운 깃털 때문에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면 눈에 띄지 않는 시골처녀로 보이지만, 인정적인 미를 가하여 사교계의 부인처럼 꾸며 놓는다면 놀랄만한 미인으로 활짝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밤의 무도회에 나타나는 미인이라도 시골 사람들이 입는 허름한 옷을 입힌 채 순무 밭에 세워 놓는다면 초라하게 보일 것이다. 단장한 테스의 얼굴과 자태가 이처럼 뛰어나리라고는 클레어 자신도 미처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 자태로 무도회에 나타나기만 하면. 그러나 아니야, 차양 달린 모자와 수수한 작업복을 입은 당신이 나는 더 좋다. 그 모습이 가장 잘 어울려. 그렇고말고, 이 옷을 입었다고 해서 품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훌륭한 치장을 한 그녀는 마음이 설레어 얼굴이 상기되었지만 아직도 행복을 느낄 수는 없었다.
"조너던이 보면 창피하니까 풀어 놔야겠어요. 이런 것들이 나에겐 어울리지 않죠. 그렇죠? 모두 팔아 버리는 게 좋겠어요."
"그대로 좀 더 있어요. 팔아 버린다고? 그건 절대로 안 돼. 그건 신의를 배반하는 거야."
그녀는 생각을 달리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리고 할 말이 있었다. 지금의 분위기가 그런 얘기를 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보석을 걸친 채 자리에 앉았다. 조너던은 짐을 가지고 지금쯤 어디 왔을까 하고 그들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오면 주려고 따라 놓았던 맥주는 이미 오래 전에 김이 다 빠졌다.
얼마 후 그들은 작은 식탁에 마련해 놓았던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갑자기 벽난로의 연기가 확 풍기더니 마치 거인의 손이 굴뚝 위를 덮는 것처럼 방안 가득 연기가 솟아 번졌다. 그것은 바깥문이 열려 바람이 불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때 복도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 에인젤이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서요."
하고 조너던 케일이 변명했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조너던 케일이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게다가 밖에 비가 오고 있으니까 제가 문을 열었죠. 여기 짐을 가져왔어요."
"무사히 도착해서 반갑군. 그러나 꽤 늦었는데."
"네, 그렇게 되었죠."
그의 말투에는 낮에 느끼지 못하던 좀 언짢은 기색이 엿보였다. 그의 이마에는 나이를 알리는 주름살 외에 근심스러운 주름살이 깊이 패어 있었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서방님과 아씨께서 이젠 아씨라고 부르겠습죠만, 오늘 오후에 출발하시고 나서 말씀예요, 낙농장에선 하마터면 끔찍한 불상사가 생길 뻔해서 모두들 혼이 났답니다. 저, 대낮에 수탉이 운 걸 설마 잊어버리시지는 않았겠죠?"
"아니, 어떻게 된 가요? 무슨"
"하여간 그걸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지요. 구구했습죠. 그 사건이라는 것은 가엾게도 레티 프리들이 물에 빠져 죽으려 했지 뭡니까."
"아니, 그럴 수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한테 작별 인사까지 했었는데..."
"네, 그랬죠. 서방님과 아씨께서 떠나신 다음에 레티하고 마리안은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갔어요. 연말이니까 할 일도 별로 없는데다가, 다른 사람들은 거나하게 한 잔씩 했으므로 눈여겨 보는 사람도 없었죠. 그들은 류에베라드 술집에서 술을 약간 마시고 드리 암스 크로스 술집까지 함께 간 후 그곳에서 헤어진 모양이에요. 레티는 집으로 가는 척하면서 관개 목초지를 가로질러 갔고, 마리안은 다른 술집이 있는 이웃 마을로 갔다더군요. 뱃사공 한 사람이 집으로 가는 길에 그레이트 풀이라는 큰 늪가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 할 때까지 레티의 소식은 아무도 몰랐었죠. 물속에서 레티를 발견해서 그 뱃사공과 다른 사람이 그녀를 메고 왔는데요. 처음엔 죽은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나 차차 되살아났습죠."
우울한 이야기가 테스에게 들릴라 싶어 에인젤은 그녀가 있는 안방과 복도 중간의 문을 닫으러 갔으나 어깨에 숄을 걸친 그녀는 이미 방문 앞에 와서 조너던 이 가져온 짐과, 그 위에 반짝이는 빗방울에다 시선을 떨군 채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소동에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마리안의 하는 짓이죠. 전엔 맥주도 조금밖에 못 마시던 그 아가씨가 술에 곤죽으로 취해서 버들 숲이 있는 늪 근처에 쓰러져 있는 것을 찾아냈죠. 그녀가 대식가라는 건 얼굴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술은 못하거든요. 보아하니 처녀들은 모두 정신이 나간 것 같아요."
"이즈는 어떻게 됐죠?"
하고 테스가 물었다.
"이즈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집에 있었죠.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안다고 말하더군요. 그걸 생각하고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가엾은 아이죠. 마침 아씨 잠옷이며 화장품 등을 마차에 실으려 할 때 이런 일이 생겨 도착하는 게 늦어졌지 뭡니까."
"그랬나요. 조너던, 이 짐들은 2층으로 갖다 주시오. 그리고 맥주나 한 잔 하고 속히 돌아가시오. 그쪽에 또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테스는 안방으로 돌아가서 난롯가에 앉았다. 그녀는 괴로운 듯이 물끄러미 난롯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너던이 부산하게 오르내리면서 짐 나르는 무거운 발자국 소리와 클레어가 대접한 맥주와 사례금에 대한 인사가 들렸다. 이윽고 조너던의 발자국 소리가 문 쪽에서 나는 듯싶더니 짐마차가 삐걱 소리를 내면서 떠나갔다.
에인젤은 굵다란 떡갈나무 빗장으로 대문을 잠그고 테스가 있는 방으로 돌아와 그녀의 볼을 뒤에서 두 손으로 감쌌다. 안타깝게 기다리던 짐이 왔으므로, 그녀가 기뻐하며 뛰어 일어나 화장품을 꺼내 볼 줄 알았는데,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으므로 클레어는 불빛이 비치는 그녀 옆에 가서 앉았다. 식탁 위에 있는 촛불은 거의 다 타서 난롯불 앞에 가냘프게 빛나고 있었다.
"퍽 안됐군, 당신에게마저 아가씨들의 슬픈 얘기를 들려주어서. 하나 그런 일에 상심할 건 없어. 당신도 알다시피 레티는 원래 성질이 병적이었으니까."
하고 그는 단정지어 말했다.
"왜들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은 시치미를 떼고 가만히 있는데요."
테스는 짜증 섞인 어투로 말했다. 이 사건은 테스의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녀들은 소박하고 순진한 여자였음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불행을 맛보았다. 테스는 지금 행복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녀들의 불행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자기의 행복이 그들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도 일종의 죄악이다. 마지막 한 푼까지라도 대가를 치르자.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모든 것을 고백하자. 클레어가 테스의 손을 잡고 난롯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결심했다.
이제 불꽃이 일지 않는 숯불에서 줄기차게 발하는 강한 빛이 벽난로 안을 밝게 물들였다. 잘 닦아 놓은 불받침쇠걸이가 맞지 않는 놋의 부젓가락을 붉게 물들였다. 벽난로 바로 앞의 마룻바닥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의자 다리가 뚜렷하게 빛나며, 테스의 얼굴과 목도 불빛을 받아 따뜻한 빛을 반사했다. 그녀의 목에 걸린 보석들은 하나하나가 흰색과 붉은 색, 녹색으로 빛나는 황우성이나 천랑성의 성좌처럼 변하고, 그녀의 심장이 뛸 때마다 여러 가지 색깔로 바뀌며 반짝였다.
"오늘 아침에 우리들의 과실을 서로 고백하자고 주고받은 말을 기억하오?"
그녀가 아직도 꼼짝 않는 것을 보고 갑자기 클레어가 물었다.
"우리는 서로 가벼운 마음에서 그런 얘기를 하였지. 당신도 그런 기분이었겠지? 그러나 나는 진정에서 한 말이야. 난 당신한테 고백할 게 있어."
클레어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므로 마치 하느님이 도와주는 것 같았다. 테스는 기쁨과 안도의 빛마저 보이면서 재빨리 그에게 말했다.
"무언가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그녀는 반가운 듯이 물었다.
"나에겐 과실이 없는 줄 알았어? 아, 당신은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자, 내 얘기를 들어 봐요. 머리를 그쪽으로 기대고 말이오. 난 이미 용서를 빌었어야 마땅했겠지만, 지금 고백한다고 해서 화내지 말기를 바라는 거야."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도 그녀와 똑같은 인간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까닭은, 당신은 곧 내 일생의 보물, 그 보물을 잃기 싫었기 때문이야. 형님들은 대학에서 장학금을 탔지만, 난 탤보데이스 낙농장에서 당신이란 귀한 보물을 얻은 셈이야. 알겠어? 나는 그처럼 귀중한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 약 한달 전에 당신이 나의 청혼을 받아 줬을 때 말하려 했으나 못했어. 그래 미뤄 오다가 어제 말하려 했었지. 적어도 당신이 결혼에 반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러나 역시 그러지를 못했어. 오늘 아침 낙농장 2층에서 당신이 서로의 과실을 고백하자고 했을 때만 해도 나는 말하지 않았어. 나는 실제로 죄를 저지르고 있었어. 그러나 당신이 지금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걸 보니까 아무래도 고백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어. 당신은 나를 용서해 주겠지?"
"용서해 드리다 뿐이겠어요."
"그런가, 그렇게 해 주길 바래. 하지만 잠깐 기다려, 처음부터 얘기하겠어. 내 부족한 신앙으로 아버지는 나를 영원히 잃어버린 한 마리 양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테스에 못지않게 도덕을 믿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지. 나는 언제나 늘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려고 마음먹었어. 그러므로 내가 교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크게 실망했어. 나는 결함 없는 인간을 숭배하고, 더러운 인간을 미워했어. 그럴 권리가 내게는 없지만 말야. 지금도 그와 같은 생각엔 변함이 없어. 성경이 모두 하느님이 말씀이라는 주장에 이론이 있을지는 몰라도, 사도 바울이 말한 이 말만은 진심으로 따라야겠지. 말과 햇살과 사랑과 믿음과 절정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가엾은 인간에게는 이것만이 오직 단 하나의 반성의 방패야. 올바른 생애 와 사도 바울과를 결부시키는 건 우습지만, 로마의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어.
‘나약함을 벗어나 꿋꿋이 사는 사람이야말로 무어 족의 창이나 활이 소용없나니’
그런데 이 지구 위엔 생각하는 것뿐이지, 실행이 따르지 않은 소망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 훌륭한 목적을 품고 일하다가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얼마나 뼈저린 뉘우침이 솟아나는가는 당신도 잘 알거야."
그리고는 런던에서의 한때 의혹과 고민으로 몸부림치며 마치 물결위에 떠돌아다니는 코르크 병마개와 같은 생활을 할 때의 낯선 여자와 함께 지낸 이틀 동안의 방탕한 생활을 그녀에게 사실대로 고백했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다행하게도 난 곧 어리석은 행동을 깨달았어. 그 여자와는 한마디도 더 얘기하지 않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어. 그런 실수는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지.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솔직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당신을 맞이하고 싶었어. 그러기 위해서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용서해 주겠소?"
그녀는 대답 대신 클레어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러면 그런 일은 이제 당장, 또 영원히 잊어버리기로 합시다. 오늘같이 기쁜 날 이런 얘기는 너무나 괴로워. 자, 이제 밝은 얘기를 합시다."
"오오, 에인젤, 저는 정말 기뻐요. 당신도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수 있으니까요. 저는 아직 고백하지 않았어요. 말씀 드린대로 저도 고백할 게 있어요. 기억하시죠, 그렇게 말한걸."
"아 그렇군. 자 그러면 말해 봐요. 심술쟁이 아가씨."
"당신은 웃고 계시지만, 당신 못지않은, 어쩌면 그보다 더할지도 몰라요."
"테스, 그보다 심하지야 않겠지."
"그럴 리가 없다고요? 그럼요, 그럴 리는 없었어요."
클레어가 용서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정말이에요. 그보다 더할 까닭은 없죠. 당신과 같으니까. 그럼 말씀드리겠어요."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여전히 손을 마주잡고 있었다. 받침쇠 밑의 재는 장작불빛에 수직으로 비쳐 불탄 사막처럼 보였다. 공상에 잠긴 자가 보면 새빨간 숯불의 빛도 심판 날 의 괴상한 불같이 보일 것이다. 그 불빛은 그들의 얼굴과 손을 비추고, 또 그녀의 흐트러진 앞머리로 스며들어 그 밑의 보드라운 살결에 닿았다. 그녀의 커다란 그림자가 뒤쪽 벽과 천정에 떠올랐다. 그녀가 몸을 앞으로 구부리자 목에 건 보석 알 하나하나가 두꺼비가 눈을 껌벅이듯 불길하게 번쩍였다. 테스는 클레어의 관자놀이에 이마를 기대고 알렉 더버빌을 알게 된 동기와 그 결과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했다. 두려워하지도 않고 눈을 내리뜬 채 그녀는 나직하게 이야기를 끌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