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T. Hardy
제1부 우윳빛 처녀
1
오월 하순의 어느 저녁 무렵, 중년 사나이가 샤스톤에서 바로 이웃인 블레이크모어(블랙무어)라고 불리는 골짜기에 있는 말로트 마을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나이의 두 다리는 비틀거렸고, 걸음 거리는 버릇인 양 일직선에서 왼편으로 빗나가곤 했다. 별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나, 어떤 의견에 다짐이라도 하는 듯 이따금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빈 달걀 바구니가 한쪽 팔에 힘없이 걸려 있었고, 보자는 보풀이 엉긴 데다 엄지손가락이 닿는 차양 부분은 완전히 다라 반질거렸다. 그때, 잿빛 암말을 탄 채 콧노래를 부르며 오고 있는 나이 등 목사와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목사님."
바구니를 든 사나이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오, 존 경."
목사가 맞받아 목례를 했다. 걷고 있던 사나이는 힘없는 걸음오로 두어 발짝 더 가다가 갑자기 멈춰 돌아섰다.
"저, 목사님, 요전 장날 바로 이맘때쯤 여기 이 길에서 만나뵀을 때 인사를 드렸더니, 저보고 편히 쉬시오, 존 경. 하고 오늘처럼 대답을 하셨지요?"
"그랬소."
목사가 말했다.
"그리고 또 그 한 달쯤 전에도"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러시다면, 나는 잭 더비필드라는 아주 보잘것없는 행상인에 지나지 않는데, 이렇게 만날 때마다 존 경 이라고 부르시는 까닭은 무언가요?"
목사는 한두 걸음 다가오며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소. 그러나 사실은 얼마 전에 향토지를 새로 엮으려고 족보를 뒤적거리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소. 나는 스택푸트 레인에 사는 트링엄 목사인데, 고고학을 좋아한다오. 더비필드, 당신이 유서 깊은 기사 집안인 더버빌 가문의 직계 자손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오? 더버빌 집안은 배틀 교회의 고문서를 보면, 정복 왕 윌리엄을 따라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저 유명한 기사 페이건 더버빌 경이 시조요."
"전혀 들어 본 일조차 없습니다, 목사님."
"아니,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요. 당신의 얼굴 옆모습, 특히 그 코와 턱이 바로 더버빌 집안임을 말해주고 있소. 당신의 조상은 노르망디의 에스트레머빌러 경이 그래머간셔를 정복할 때 공을 세운 열두 명의 기사 중의 한 분이오. 한때 당신집안 사람들은 영국 각지에 장원을 갖고 있었고, 그 이름들이 스티븐 왕 시대의 국고 연보에도 올라 있소. 존 왕 시대, 문중에는 십자군 구호기사단에 장원을 기증할 만큼 유복한 사람도 있었고, 에드워드 2세 때 당신의 조상 브라이언이라는 분은 웨스트민스터까지 가서 귀족의 종교 회의에 참석한 일도 있었다오.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는 좀 기울었으나 대단치는 않았고, 찰스 2세 때에는 충성의 공으로 로열 오우크라는 기사 칭호까지 받았었지요. 당신 집안은 몇 대를 내려오면서 존 경 행세를 했고, 옛날에는 대대로 물려받기도 했지만, 만약 기사라는 칭호가 남작의 칭호같이 세습제라면 당신도 지금은 틀림없이 존 경이 되어있었을 거요.“
"원 당치도 않은 말씀을."
그러나 목사는 채찍으로 자기 다리를 내리치면서,
"온 영국에 더버빌 가문만큼 좋은 집안은 거의 없소.“
"그런데도 저는 이 교구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천민처럼 해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았습니까. 트링엄 목사님, 대체 저에 관한 이 일이 알려진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더비필드가 목사에게 물었다.
목사는, 이 사실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다 잊어버린 일이어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목사 자신이 그것을 조사하기 시작하기 시작한 것은 더버빌 가문의 흥망을 캐내는 일을 하던 지난봄 어느 날, 우연히 존의 짐마차에 새겨져 있는 더비필드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을 때부터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의 부친과 조부에 관해 조사한 결과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이런 부질없는 일을 알려 주어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싶진 않았소.“
라고 목사는 말했다.
"그러나 이따금 인간의 충동이 이성적인 판단보다 앞설 때가 있지요. 한편, 나는 혹시 당신이 이 일에 대해서 전부터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그러고 보니 저희 집안이 블랙무어로 오기 전에는 한때 잘 살았다는 얘기를 한두 번 들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말밖에 없는데, 집에 오래된 은 스푼과 도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그 문벌 높은 더버빌 가문과 한 혈통이라니요. 전해지는 얘기로는 저의 증조부님은 많은 비밀이 있었다더군요. 하물며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얘기하시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목사님, 주제넘은 말씀입니다만, 저의 집안은 지금 어디서 연기를 올리고 있을까요? 말하자면, 더버빌 집안은 어디에 모여 살고 있을까요?“
"아무 데도 살고 있지 않소. 이미 오래 전에 없어져 버린 셈이지. 한 군의 가문으로서는"
"거 참 섭섭한데."
"거짓말투성이 족보에는 남자의 대가 끊어졌다고 씌어 있지만, 사실은 몰락한 거야. 망해 버린 거지."
"지금 우리 조상들은 어디 묻혀 있나요?"
"킹스베리 서브 그린힐이라는 곳이요. 퍼벡 대리석으로 된 지붕 밑에 몇 줄로 초상과 함께 누워 있지."
"그렇다면 우리 집안의 장원과 유산 따위는요?"
"아무것도 없지."
"네? 땅도 없습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 가문은 분가한 집이 너무 많아서 한때는 땅도 많았지만 지금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 이 고장만 해도 킹스베리, 셔튼, 밀폰드, 웰브리지 등 더버빌의 소유지가 있었지만."
"언젠가 다시 그걸 찾을 수 있을까요?"
더비필드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물었다.
"아무것도 할 것은 없소. 바른 몸가짐으로 열심히 살 수밖에 끝내 쓰러지고만 그대의 가문은 지방 사가나 족보 학자들에게는 흥미 있는 사실이겠지만, 그 이상의 아무 의미도 없소. 사실 이 마을 농가 중에도 당신 가문 못지않은 집안이 한둘이 아니잖소. 그럼 잘 가시오."
"트링엄 목사님, 저와 맥주라도 한 잔 안 하시겠습니까? 저 퓨어 드롭에 아주 좋은 생맥주가 있지요. 물론 롤비버 술집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요."
"더비필드, 고맙소만 오늘은 사양하겠소. 당신은 이미 어지간히 마신 모양인데그려."
이렇게 말을 맺은 목사는 되돌아오면서, 벌써 오래 전에 잊혀져 버린 이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것이 과연 분별 있는 일이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목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더비필드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발걸음을 몇 발짝 옮겨 놓다가, 길옆 풀이 무성한 둑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그때, 길 쪽으로 걸어 나오는 젊은이를 보고 더비필드는 손을 들었다. 젊은이는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왔다.
"여보게, 내 심부름 좀 해 주게나."
깡마른 젊은이는 상을 찌푸렸다.
"아니, 존 더비필드, 당신이 뭐길래 심부름을 시키는 거요? 그리고 당신은 내 이름도 알고 있
잖아요?“
"다 알고 있지. 하지만 그건 비밀이야. 자, 내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만 전달해야 돼. 프레드, 내가 바로 귀족의 신분이란 말야. 바로 오늘에서야 이 사실을 발견했지.“
더비필드는 취한 듯한 목소리로 외치면서, 들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둑 위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젊은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더비필드 앞에 서서 그를 훑어봤다.
"존 더버빌 경, 이것이 바로 나란 말일세. 나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역사 에 올라 있어. 자네
킹스베리 서브 그린칠이란 데를 아나?"
"알죠, 그린힐 장날에 가 봤죠."
"그래, 그 읍의 교회당 밑에 묻혀 있는 것이"
"내가 말한 건 읍이 아니에요. 내가 갔을 때, 그곳은 읍은 고사하고 아주 보잘것없는 어둑한 마을이던데요."
"아무튼 상관없어. 그런 건 우리에겐 문제가 안 돼. 그곳 교구의 교회당 밑에 몇 백 명이나 되는 우리 조상들이 갑옷에 보석을 휘감은 채 납관 속에 누워 있단 말이야. 남부 웨섹스 일대의 고장에서는 나만큼 훌륭한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단 말이야."
"네에?"
"자, 그 바구니를 들고 말로트 마을로 가게. 퓨어 드롭 주막에 가거든 내게 마차를 보내라고 이르게. 럼주도 작은 병에 넣어 함께 실어 보내도록 하고 그리고 우리 집으로 가서 마누라에게 빨래 따윈 그만두고, 할 얘기가 있으니 내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하게."
젊은이가 미심쩍은 태도로 서 있자, 더비필드는 호주머니에서 몇 개밖에 없는 1실링짜리 은돈을 꺼냈다.
"이건 수고한 값이다."
그 대가로 인해 젊은이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네, 존 경. 고맙습니다. 그밖에 다른 일은 없습니까?"
"우리 집 사람에게 저녁밥은 양고기 튀김으로 푸짐하게 준비하라고 그래."
"네, 존 경."
젊은이가 바구니를 들고 막 자리를 뜨려 할 때 마을 쪽에서 악대 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뭔가? 설마 나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겠지?"
"저건 부인회의 들놀이랍니다. 존 댁의 따님도 회원일 텐데요."
"참, 그렇군. 그것보다 더 큰 일을 생각하느라 깜빡 잊었군. 자, 발리 말로트로 가서 마차를 보내 줘. 부인회를 시찰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젊은이는 떠나고, 더비필드는 저녁 햇살을 받으며 들풀 속에 누워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그 길을 지나가지 않았다. 푸른 언덕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어렴풋한 악대의 선율만이 멀찍이서 들려오고 있었다.
2
블랙무어의 아름다운 골짜기의 동북쪽 계곡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말로트 마을은 런던에서 불과 네 시간 남짓한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것 관광객이나 화가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인 동떨어진 고장이었다. 이 골자기의 참 묘미를 느끼려면 햇빛 쨍쨍한 여름날을 제외하고는, 이곳을 둘러싼 여러 언덕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가장 좋다. 궂은 날씨에 길을 잘못 들었다가는 꼬불꼬불한 좁다른 진창길을 만나 불쾌한 느낌을 갖게 마련이다. 결코 가뭄에도 갈색으로 변하지 않고 샘이 마르는 일이 없는 이 기름지고 아늑한 들녘은 남쪽으로 햄블든 힐, 블배로우, 네틀콤타무트, 도그베리, 하이스토이 버브 다운 등 여러 뾰족한 봉우리를 안은 두드러진 백악질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해안 쪽에서 찾아오는 나그네는 석회질 언덕이나 옥수수 밭 사이로 북쪽을 행해 20마일 가량 걷다가 갑자기 이들 낭떠러지에 이르면, 여지껏 지나온 땅과는 전혀 다른 고장이 눈 아래 지도처럼 펼쳐져 있음을 보고 놀라 기뻐하기도 한다. 뒤에는 산들이 시원스레 틔어 있고, 햇볕이 찬연히 비치는 들판은 너무도 광활하여 이 풍경이 사방에 둘러싸인 곳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오솔길은 마치 뽀얀 어린아이 속살처럼 드러나 있고, 공기는 맑다.
여기 이 가려진 듯한 골짜기 안의 세계는 유난히 작고 세밀한 규모로 만들어 져 있는 듯이 보인다. 들판은 조그만 목장으로 나뉘어져 있어, 이 높은 곳에서 보면 칸막이 울타리가 연초록 풀 위에 펼쳐진 진초록 실그물처럼 보인다. 눈 아래 대기는 한가롭고 하늘빛으로 물들어 있어 화가가 흔히 중경이라 일컫는 곳까지 그 빛에 물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먼 지평선은 짙은 군청색을 띠고 있었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은 적고 한정되어 있으며, 풍성하고 광대한 나무와 풀이 작은 언덕과 골자기를 큰 언덕과 골짜기로 감싸고 있다. 이것이 바로 블랙무어 골짜기다.
이 지역은 지형 상으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흥미 있는 곳이다. 일찍이 이 골짜기는 헨리 3세 때의 이상한 전설에 따라 흰 수사슴의 숲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왕이 한 마리의 아름다운 흰 사슴을 잡으려고 몰아 가다가 놓아 주었는데, 토마스 드 라 린드라는 사람이 이 흰 사슴을 죽였기 때문에 많은 벌금을 물게 하였다는 전설이다. 그 시대뿐 아니라 가까운 근래까지도 이 땅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한 옛 흔적은 아직껏 언덕의 비탈에 선 채 살아 있는 늙은 참나무에 돋아난 잔가지나, 불규칙한 삼림지대에서, 또는 목장 여기저기에 점점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속이 빈 고목 따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미 숲은 오래 전에 사라졌으나 그 나무 그늘 아래 벌어졌던 옛 풍습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 풍습은 또한 변형되었거나 변질된 채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가령 5월의 무도 같은 것도 앞에서 말한 이날 오후의 클럽 대소동, 즉 이 지방에서 부인회 들놀이라고 불리는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행사의 참가자들은 사실 진정한 흥미를 느끼지 못하지만 말로트의 젊은이로서는 더할 수 없이 흥미로운 행사였다. 이 놀이의 특색은 참가하는 사람이 여자라는 점이다. 남자들의 모임에서는 이런 축하 놀이가 차츰 없어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타고난 수줍음 때문인지 또는 남성 편의 냉소적인 태도 때문인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가령 이 밖에 또 남아 있다 하더라도) 여자끼리의 모임에서 영광스러움과 완전미는 사라져 버렸다. 오직 말로트 마을의 이 모임만이 향토적인 세레즈(농업의 여신)의 축제를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것은 자선을 위한 모임 따위가 아닌, 일종의 종교적인 부인네의 모임으로써 수백 년에 걸쳐 계속돼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 행렬을 잇는 여자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즐거움과 5월이란 말이 같은 뜻이었던 구력시대-먼 앞날을 염려하는 버릇이 사람들의 정서를 단조롭고 평범한 상태로 떨어지게 하는 일이 있기 전부터 줄곧 이어져 온 명랑한 풍속이었다.
여자들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교구 안을 행진함으로써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낸다. 푸른 울타리와 담쟁이덩굴이 엉긴 집을 배경으로 햇빛이 그녀들의 얼굴을 황하게 비춰 줄 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다소 부조화가 생겼다. 모두 흰옷을 입었지만 옷의 흰빛이 모두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옷은 백색에 가까웠으나 어떤 것은 푸르스름한 것도 있고, 나이 든 여자가 입고 있는 것은 (아마 몇 해 동안 갠 채로 장롱 속에 간직해 둔 탓이리라) 주검 같은 빛이 도는 조지 왕조 시대의 구식 디자인이었다.
이 흰옷차림의 특색 외에, 부인네들이나 처녀들은 저마다 오른손에는 껍질을 벗긴 버드나무 가지를, 왼손에는 한 묶음의 하얀 꽃다발을 들었다. 이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기는 일과 꽃을 고르는 일은 스스로 해야만 했다. 행렬 속에는 몇 사람의 중년 부인과 심지어는 늙은이도 기어 있었는데, 세월과 고생에 시달린 그들의 은빛 철사 같은 머리며 주름진 얼굴은 더없이 가여워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나이 든 부인들은 제쳐놓고, 허리에 꼭 끼는 의상 아래 인생이 빠르고 뜨겁게 맥박치고 있는 처녀들에게 눈을 돌리기로 하자. 사실 이모임은 대부분이 젊은 처녀들이었다. 그녀들의 숱 많은 머리채는 햇빛을 받아 금빛과 검은 빛 혹은 갈색 등의 여러 색조로 반사되고 있었다. 어떤 처녀는 눈매가 아름다웠고, 어떤 처녀는 눈이 부실만큼 입과 몸매가 예뻤으나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처녀는 드물었다. 처녀들은 뭇사람들이 거침없이 지켜보는 시선 앞에 노출되어 입술을 어떻게 다물어야 할지 몰라 하며 고개를 떨군 채 어색해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그녀들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지 못한 시골 처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녀들은 내리쬐는 태양보다 더 뜨거운 무엇을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씩 품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꿈, 사랑, 취미 등 적어도 무언가 막연히 살아남는 그런 희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명랑했고, 많은 사람들도 함께 즐거웠다.
그들은 퓨어 드롭 주마그이 모퉁이를 돌아 작은 문을 빠져나와 한길에서 목장 쪽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 한 명이 말했다.
"어머나, 얘, 테스 더비필드, 저기 마차를 타고 돌아오시는 분이 너의 아버지 아냐?"
이 소리에 행렬 속의 한 젊은 처녀가 머리를 돌렸다. 그녀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몹시 아리따운 처녀였다. 잘 움직이는 작약 빛 입술과 크고 천진스러운 눈이 얼굴빛과 몸매에 풍부한 표정을 더해 주었다. 머리에는 붉은 리본을 달고 있었는데, 흰옷을 입은 이 모임 속에서 이같이 화려한 차림새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그녀가 뒤돌아보았을 때, 존 더비필드는 퓨어 드롭 주마그이 이륜마차를 타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억센 고수머리의 힘센 여자에게 마차를 몰게 하여 한길을 올라오는 참이었다. 이 여자는 주막에서 무슨 일이고 도맡아 하며, 때로는 말을 몰거나 돌봐 주기도 하는 쾌활한 하녀였다.
몸을 뒤로 젖힌 더비필드는 매우 흡족한 듯이 눈을 감고, 머리 위에서 손을 휘두르면서 느릿느릿한 곡조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에게는 킹스베리에 훌륭한 조상의 납골당이 있다네. 그곳 납관 속에는 기사가 된 조상이 잠들어 계시다네."
테스라는 여자를 빼놓고, 행렬의 여자들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테스는 여러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자 가슴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피곤하셔서 그러실 뿐이야. 우리 집 말은 오늘 쉬어야 하니까 마차를 빌려 타고 돌아오시는 거야."
그녀는 짧게 잘라 말했다.
"테스야, 모르는 것이 약이다. 너의 아버지는 오늘 장술에 취하신 거야. 호호."
친구들이 말했다.
"우리 아버지를 자구 놀려댄다면 난 너희들하고 함께 갈 수가 없어."
테스는 소리쳤다. 그녀의 상기된 빛이 얼굴에서 목으로 번져 갔다. 곧 그녀는 눈물이 글썽해지고 시선이 땅에 떨어졌다. 그제서야 테스가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친구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스는 아버지의 그런 행동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자존심은 다시 뒤돌아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그녀는 일행과 함게 춤을 추게 되어 있는 풀밭 울타리 속으로 몸을 옮겨 가는 동안 다시 마음이 가라앉아 조금씩 입을 열게 되었다.
이 무렵의 테스 더비필드는 오로지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순수한 처녀였다. 마을의 학교를 마쳤지만, 그녀의 말에는 이따금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이 지방 사투리의 특징적인 억양은 UR이라는 음절을 거의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인데, 이 음절이 튀어 나올 때의 그녀의 뾰족하고 새빨간 입은, 그 버릇으로 그녀가 기억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어릴 적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뺨을 보면 열두 살 때의 모습이 떠올랐고, 반짝이는 눈동자와 입매의 곡선을 보노라면 아홉 살 적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작은 부분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았다. 다만 몇 사람만이, 그녀의 신선함에 잠시 매혹되어 있을 뿐, 그녀는 누구에게든 순진하고 아름다운 시골 처녀 그 이상은 아니었다.
주막집 하녀가 모는 마차에 타고 있는 더비필드에게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클럽은 예정된 장소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 사나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여자들끼리 서로 춤을 추었으나, 이윽고 하루의 일이 끝날 무렵이 되자 마을의 한가한 남자들이며 지나가던 나그네들이 그들의 주위로 모여들어, 파트너를 물색할 교섭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구경꾼 속에 작은 배낭을 짊어지고 탄탄한 지팡이를 쥔 상류 계급 출신인 듯한 청년 세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닮은데다가 나이도 비슷한 것으로 보아 형제 같았고, 사실 그들은 형제간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청년은 흰 넥타이에 못까지 오는 조끼를 입고 차양이 좁은 모자를 쓴 부목사의 정장을 하고 있었다. 가운데 청년은 보통 대학생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셋째 번의 가장 나이 어린 청년은 겉모습만으로는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 눈초리나 옷차림으로 미루어 얽매이거나 형식적인 데가 없어서 아직껏 직업적인 세계의 문 앞에는 가보지 않은 듯했다. 다만 이 청년은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시험 삼아 배우려 하고 있다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모험과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이 세 형제는 성신 강림절의 휴가를 이용하여 블랙무어 골짜기를 도보로 횡단하는 중인데, 동북쪽인 샤스톤에서 서남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우연히 인사를 나눈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한길 가에 있는 문에 기대어, 이 춤과 흰옷차림을 한 부녀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어보았다. 위의 두 형제는 분명히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는 듯했으나, 셋째 동생은 한 무리의 여자들이 상대 남자도 없이 춤을 추는 것이 흥미 있다는 듯 멈칫거렸다. 그는 배낭을 풀어서 지팡이와 함께 울타리 위에 얹고 문을 열었다.
"뭘 하려고 그래, 에인젤?"
맏형이 물었다.
"안에 들어가서 아가씨들과 춤추려고요. 우리 다 같이 가지 않겠어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안 돼. 당치도 않은 소릴."
맏형이 말했다.
"시골 말괄량이 처녀들과 여러 사람 앞에서 춤을 추다니. 만일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어쩔 셈이냐. 어서 가자, 스토어캐슬에 닿기도 전에 어두워지겠다. 도중에는 잘 데도 없어. 또 자기 전에 우리들은 <불가지론에 대한 반박>을 한 장 더 읽어야 하잖아. 내가 일부러 책까지 가지고 왔는데."
"알았어요, 오 분 내로 형들을 따라갈 테니, 기다리지 마세요. 꼭 그렇게 할게요, 펠릭스 형."
두 형은 마지못해 그를 남겨 놓은 채 뒤에서 따라올 때 몸이 가볍도록 그의 배낭까지 들고 떠났다. 동생은 형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풀밭으로 들어갔다.
"그거 정말 안됐군요."
춤이 멎자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두세 명의 처녀들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여러분의 파트너는 어디 있나요?"
"아직 일터에서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 가운데서 가장 대담한 처녀가 대답했다.
"이제 곧 이리로 올 거예요. 그동안 같이 추지 않겠어요?"
"좋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분들 속에서 나 혼자서야 어떻게 없는 것보단 낫지요, 뭘. 여자끼리 얼굴 맞대고 춤추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서로 껴안지도 않고 추는걸요. 그럼, 상대를 고르세요."
"쉬. 너무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좀 부끄러워하는 처녀가 말했다. 이렇게 청을 받은 청년은 실속을 차리느라 여자들을 둘러보았으나 모두가 처음 보는 얼굴이라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맨 처음 손을 잡게 된 처녀를 택했다. 그 여자는, 자기가 뽑힐 것을 은근히 바라며 말을 건네던 처녀도 테스 더비필드도 아니었다. 혈통도, 조상의 유골도, 역사적인 기록도, 더버빌 가문의 특유한 용모도 아직껏 테스의 삶을 위한 투쟁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흔해 빠진 시골 처녀들을 제쳐놓고 춤의 파트너로 뽑힐 정도의 도움조차 되지 못했다. 빅토리아 왕조의 부의 도움 없는 노르만 족의 혈통이란 기껏 이런 것이었다. 다른 여자들을 물리치고 뽑힌 이 처녀가 누구였는지 그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날 저녁, 맨 처음으로 남자와 짝지어 춤을 추는 기쁨을 누렸다고 하여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그런데 본보기의 힘이란 큰 것이어서, 좀처럼 누구도 앞장서지 않더니 이제는 마을 청년들도 같이 합세하여 차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자 나중에는 가장 평범하게 생긴 처녀마저 남자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남녀 쌍을 이루어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그때 교회당 시계가 울리자, 갑자기 학생은 서두르기 시작했다. 형들을 뒤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그는 허둥댔다. 바로 그때, 그의 시선이 우연히 테스 더비필드에게 멈추었다. 사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그가 자기를 선택해 주지 않았음을 원망하는 빛이 역력했었다. 그도 역시 이 처녀를 몰라본 것을 새삼 유감스럽게 여겼다. 이런 생각을 가슴에 품은 채 그는 풀밭을 떠났다. 너무 오래 지체했으므로 서둘러 좁은 길을 서쪽으로 달려 이내 낮은 곳을 지나 다음 등성이로 올라갔다. 그래도 형들을 따라잡지 못했으나, 숨을 좀 돌리기 위해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 잔디밭 울타리 안에서는 아직도 빙글빙글 돌고 있는 흰옷차림의 처녀들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벌써 그를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그러나 흰 모습 하나가 멀리 떨어져 혼자 울타리 곁에 서 있었다. 그녀의 위치로 미루어 그가 같이 춤추지 못했던 예쁜 처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 풍부한 표정과 얇은 흰옷을 보는 순간 자신의 태도가 어리석었다고 한숨지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서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마음속에서 그 일을 몰아냈다.
3
테스 더비필드로서는 그 일을 그처럼 쉽사리 가슴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춤출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 낯선 젊은이의 환상에서 깨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잠시의 슬픔을 떨어 버리고 춤을 청하는 남자에게 승낙의 대답을 한 것은, 낯선 청년의 모습이 언덕 위로 멀어져 가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
그녀는 친구들과 어두워질 때까지 남아 열을 올리며 춤을 추었다. 아직 사랑을 모르는 그녀는 그저 박자에 맞춰 춤추는 즐거움만 느낄 뿐이었다. 사랑을 청하는 남자에게 마음을 준 처녀들의 부드러운 고민과 즐거운 괴로움, 흐뭇한 슬픔 따위는 그녀에게 찾아오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더 늦게까지 있을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아버지의 이상한 모습이 떠올라 걱정이 되어 춤추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부모의 오두막이 있는 마을 끝 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쯤 가고 있을 때 지금까지 들려오던 음악 소리와는 다른 음률이 멀리서 들려왔다. 그녀의 귀에 익은, 너무나도 귀에 익은 소리였다. 그것은 집안으로부터 들려오는 덜커덩덜커덩하는 규칙적인 소리로, 돌바람 위에서 세차게 요람을 흔드는 소리였다. 그 요람의 움직임에 맞추어 여자의 힘찬 음성이 들렸다. ‘얼룩 소’라는 경쾌한 무도곡으로 그녀가 즐겨 부르는 노랫소리였다.
"저어기 저 푸른 숲속에 누워 있는 그녀가 보이는구나. 님이여, 이리 오라, 어디인가 가르쳐 주리."
요람 소리와 노랫소리가 갑자기 동시에 멎는가 하면, 힘껏 부르짖는 소리가 노래 대신 들려 오곤 했다.
"하느님이 너의 부드러운 두 눈에 축복을 내리시기를. 너의 매끄러운 볼에도, 버찌 같은 입에도. 큐핏 같은 다리에도, 복 받은 몸뚱이의 구석구석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이 기도가 끝나면 다시 요람 소리와 얼룩소 노래가 전과 같이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테스가 문을 열고 방안의 공경을 바라보았을 때도 바로 이러한 정경이었다. 그 노랫소리와는 달리 방안의 분위기는 웬지 그녀의 기분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하루의 들뜬 축제 마당-흰옷차림, 꽃다발, 버들가지, 풀밭에서 빙글빙글 돌던 운동, 문득 가슴을 스치는 낯선 청년을 향한 순정-과 한 자루의 촛불에 비치는 음산한 분위기가 주는 묘한 대조를 느끼면서, 좀 더 일찍 돌아와서 어머니를 돕지 못한 뉘우침이 한동안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테스가 집을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여러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언제나 분주했다. 이번 주일에도, 주말이 되도록 월요일부터 그대로 쌓인 채 밀린 빨래 통 앞에 서 있었다. 테스가 지금 입고 있는 푸르름이 감도는 흰 웃옷도 어머니가 손수 다림질을 해 준 것이다. 그런데 조심성 없게 습기 있는 풀에 스치게 해서 옷자락을 파랗게 물들여 버렸던 것이다. 테스는 자기 자신을 힐책하며 그 자리에 얼마간 서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더비필드 부인은 빨래 통 옆에서 한쪽 발로 몸의 균형을 잡고, 한쪽 발로는 갓난아기가 잠들어 있는 요람을 흔들고 있었다. 요람은 돌바닥 위에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아이들의 무게에 눌린 탓으로 거의 편편하게 닳아 있었다. 더비필드 부인은 자신의 노래에 흥분하면서 종일토록 비누거품 속에 파묻히면서도 남은 힘을 다해 요람을 흔들어 대는 것이었다. 덜커덩 거리는 요람 때문에 길게 타오르던 촛불이 아래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팔굼치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고, 노래의 가사는 마지막을 향해 달음박질쳐 가고 있었다. 더비필드 부인은 아까부터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도 노래를 몹시 좋아하는 테스의 어머니는 바깥세상에서 블랙무어 골자기로 흘러들어온 노래면 한 주일 안에 그 가락을 익혀 버리는 것이었다.
조무래기들의 등살과 가난에도 불구하고 더비필드 부인의 용모에서는 아직도 젊었을 때의 싱싱함을, 아니 아름다움마저 엿볼 수 있었다. 테스가 자랑할 수 있는 개성적인 매력도 아마 주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듯하며, 기사의 혈통이나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입증해 주었다.
"어머니, 요람은 제가 흔들 게요.“
딸은 상냥하게 말했다.
"아니면 빨래 빠는 것을 도와 드릴까요? 전 벌써 다 끝난 줄 알았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어머니."
어머니는 이렇게 집안일을 혼자 맡는 것에 대해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러한 일로 테스를 꾸짖는 일은 거의 없었다. 딸이 일을 거들어 주지 않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대신, 일을 뒤로 미루면서 하나하나 처리하는 것이 그녀의 습관처럼 되어 있어서 테스의 도움 없음을 그다지 아쉽게 여기지 않았다. 오늘 밤은 여느 때보다도 기분이 더 좋아 보였다. 어머니의 표정에는 딸이 알 수 없는 꿈꾸는 듯한, 황홀한 흥분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 돌아왔니?“
노래를 마지막까지 다 부르고 나서야 어머니는 말을 이었다.
"이제 너의 아버지를 데리러 가고 싶다만. 아니, 무슨 일이 있었나 이야기 해 주마. 얘야, 너도 알면 몹시 좋아할 걸."
더비필드 부인은 아직도 늘 사투리를 썼다. 런던에서 교육받은 여선생 밑에서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친 테스는 사투리와 표준어를 다 사용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대부분 사투리를 썼고, 밖에서나 점잖은 사람을 대할 때는 보통 표준어를 썼다.
"제가 나간 뒤 생긴 일이에요?"
테스가 물었다.
"암."
"오늘 오후 아버지가 마차를 타고 아주 뽐내며 오시던데, 그것과 무슨 관계라도 있나요? 아버지는 왜 그런 짓을 하셨죠? 난 너무 부끄러워서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것도 다 소동과 관계된 일이란다. 글쎄 우리가 이 고을에서 제일 가문 있는 집안이란 걸 알게 됐다는구나. 조상은 올리버 그럼글(올리버 크롬웰의 잘못된 발음) 때에서도 훨씬 더 옛날 아무튼 이교도 야만인들이 있었던 때부터 내려오는 가문이래. 글쎄 비석이라든가 납골당, 문장, 방패 등 없는 것이 없다지 뭐냐. 성 찰스 시대에는 로열 오우크의 기사로도 뽑혔고, 우리네 정말 성은 더버빌이라고 한다는구나. 아니, 이걸 듣고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니? 아버지가 마차를 타고 돌아온 것도 이 때문이란다. 남들은 술이 취한 탓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아이 좋아라. 그러면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건가요, 어머니?"
"있고말고. 이제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야. 이 일이 알려진다면 반드시 우리와 지체가 같은 사람들이 저마다 마차를 타고 줄줄이 이 집으로 찾아들 걸. 아버지는 스토어캐슬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야기를 듣고 와선 자초지종을 다 나한테 얘기해 주셨어."
"아버진 지금 어디 계세요?"
테스가 불쏙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 대신에 엉뚱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버지는 오늘 스토어 캐슬에서 진찰을 받으셨는데 폐병은 아닌 모양이더라. 심장 주위에 지방층이 생겼대. 이봐, 이렇게 되었다나 봐."
더비필드 부인은 물에 젖은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굽혀 C자 모양을 만들고, 다른 쪽 엄지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의사가 하는 말이, 아버지의 심장 여러 곳이 막혔다는구나. 단 한 곳만 아직 열려 있는데,"
그것을 가리켰다.
"그것이 맞붙어 버리는 순간"
더비필드 부인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부분의 상태에 따라 아버지는 앞으로 십 년을 더 실지도 모르고, 열 달, 아니 열흘 안에 끝장이 날지도 모른다고 했다는구나."
테스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가문에 대한 변화 때문에 그렇게 즐거워하셨는데, 이제 죽음이라
니...
"지금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그녀는 다그쳐 물었다. 어머니는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얘야, 짜증내지 말아라. 가엾은 양반이 목사님한테서 그 얘길 듣고는 어찌나 흥분했는지, 반 시간쯤 전에 롤리버네 술집으로 가셨다. 내일은 벌통을 싣고 떠나야 하니까 기운을 차리시려는 게지. 집안 지체야 어떻든 간에 벌통은 갖다 줘야 하거든. 길이 멀어서 오늘 밤 열두 시 조금 지나면 곧 떠나셔야 할 걸."
테스는 어느새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 맙소사, 기운을 차리시기 위해 술집엘 가시다니. 그리고 어머니마저 아버지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고 계시다니."
그녀의 퍼붓는 비난 때문에 촛불도, 가까이서 놀고 있는 아이들도, 그리고 어머니마저도 겁에 질린 듯한 눈빛이었다.
"그런 게 아냐."
어머니는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나라고 아무렇지 않겠니? 너의 아버지를 데리러 갔다 오는 동안 너더러 집을 봐 달라고 너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제가 가겠어요."
"테스야, 넌 안 돼. 또, 니가 간대도 소용없어."
테스는 어머니가 반대하는 까닭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더비필드 부인의 윗도리와 모자는 쉽게 손이 미치는 옆 의자에 걸려 있어서 언제라도 외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테스야, 이 <운명 통감>을 바깥 광에 갖다 둬라."
그렇게 말한 뒤 어머니는 부산히 손을 닦고 옷을 챙겨 입었다. 낡고 두꺼운 <운명 통감>은 어머니 곁 탁자 위에 놓여 있었는데, 늘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뺐다 한 탓으로 글자 있는 데까지 가장자리가 다 닳아 있었다. 테스는 그 책을 집어 들었고, 어머니는 집을 나섰다.
주책없는 남편을 찾아 술집에 가는 이 일조차 더비필드 부인에게는 많은 아이들을 기르는 번거로움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롤리버네 술집에서 남편을 찾아내어 그 옆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아서 그동안 아이들에 대한 모든 성가심이나 근심을 잊어버리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런 때면 저녁 하늘의 놀 같은 것이 그녀의 생활 위에 비치는 것이었다. 세상살이의 고달픔이며, 그 밖의 현실이 어느덧 하나의 막막한 형이상학적인 것이 되어 고요히 명상하는 심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괴롭히던 모든 것들조차 다급한 구체적 현실로 압박해 오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어린 조무래기들은 눈앞에 보일 때마다 오히려 집안을 유쾌하게 하는, 꼭 있어야 할 필수품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들도 이러한 기분으로 돌이켜보면 절로 웃음이 나고 즐거운 멋이 있기도 했다. 지금의 남편에게서 구애를 받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바로 이 롤리버 술집에서, 그의 결점에는 눈을 감아 버리고 오직 이상적인 애인으로서만 그를 생각하던, 그 시절의 기분을 조금은 느끼는 것이었다.
잠시 어린 동생들을 둘러보던 테스는 먼저 <운명 통감>을 가지고 바깥 광으로 나가 그것을 이엉 밑에 쑤셔 넣었다. 이 너절한 책을 이상하게 미신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는 어두워지면 그것을 집안에 두지 않았으며, 점을 치고 난 후에 반드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미신이며 민속, 사투리, 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민요 등 급속히 소멸해 가는 것에 대한 잡다한 지식을 가진 어머니와, 수없이 개정된 교육령 아래서 의무 교육을 받고 표준 지식을 갖춘 딸 사이에는 많은 거리감이 있었다. 그 거리감은 마치 제임스 1세 시대와 빅토리아 여왕 시대가 나란히 맞서는 것 같았다.
테스는 뜰의 좁은 길을 돌아보면서 오늘따라 어머니가 그 책으로 무엇을 알아보려 하였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조상에 대한 이번 발견과 무슨 관련이 있을 성싶었지만, 그것이 우독 자기의 일신과 관계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곧 이런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낮에 말린 속옷가지에 물을 뿌려 추기는 등 바쁘게 일손을 놀렸다. 아홉 살 난 사내동생 에이브러햄과 열두 살이 조금 넘은 여동생 엘리자 루이자가 거들어 주었다.
테스와 바로 다음 동생과는 네 살 차이였으며, 그 사이에 있던 두 동생은 갓난아기 때 죽어 버렸다. 그래서 동생들과 같이 있으면 자연스레 어머니다운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에이브러햄 아래 세 살 난 사내아이와 이제 갓돌이 지난 갓난아기가 있었다. 이 어린 생명들은 모두 더비필드라는 배의 선객들이었다. 그들은 의식주도, 즐거움도, 아니 생존까지 더비필드네 두 어른의 판단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만약 더비필드 집안의 두 우두머리가 불행과 굶주림, 질병과 타락, 그리고 죽음 속으로 배를 몰아간다면 갑판 아래 있는 이 여섯 명의 작은 포로들도 그들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력한 여섯 생명들은 어떤 조건 아래 태어나고 싶어 스스로 택한 삶이 아니기 때문에 더비필드 집안의 어떠한 어려운 역경 속에서라도 곱게 키워 나가야 했다.
밤은 꽤 깊었는데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테스는 밖을 내다보며 마음속으로 말로트 마을을 떠올려 보았다. 마을은 이제 잠들려 하고 있었고, 촛불과 램프가 하나하나 꺼져 갔다. 어머니가 마중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데려올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테스는, 그다지 몸도 좋지 못한 아버지가 내일 첫새벽에 길을 떠난다면서 이렇게 늦도록 까지 술집에 앉아 조상의 혈통을 축복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에이브러햄.“
하고 그녀는 남동생을 불렀다.
"모자를 써, 응. 무섭지 않지? 롤리버네 술집으로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렇게 늦도록까지 왜 안 돌아오시는지 좀 알아보고 와."
소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방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다시 반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에이브러햄마저도 그 술집의 덫에 걸린 것일까.
"내가 가 봐야지."
테스는 중얼거렸다. 테스는 잠이 든 아이들만 두고는 문을 잡근 채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걷기엔 너무 캄캄하고 구불불한 오솔길과 한길이었다. 그 길은 오래 전에 만들어진, 즉 바늘 한 개뿐인 시계로도 넉넉히 하루의 시간을 가리키던 그러한 시대에 만들어진 험한 길이다.
4
롤리버네 술집은 인가가 드문 길다란 마을의 끄트머리에 하나밖에 없는 선술집이라고 자랑하지만, 실은 술만 팔 뿐 합법적으로 안에서 술 마시는 것은 허가받지 못한 집이었다. 가게 안에서 술을 먹을 수 없는 까닭에 그나마 손님을 위해서 공공연히 허락된 설비라고는 마당 울타리에 선반 같은 판자를 철사로 엮어 매어 놓은 곳뿐이었다. 목마른 나그네들은 길가에 서서 술을 마시고는 이 판자 위에 술잔을 올려놓기도 하고, 먼지 이는 길바닥에 먹다 남은 술 찌꺼기를 버려 폴리네시아 군도의 지도를 그리기도 하면서, 가게 안에 편안히 쉴 자리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낯선 길손들의 작은 바람이다. 그러나 역시 이런 것을 바라는 토박이 단골들도 있었으니, 뜻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나 할까``````
위층에 있는 넓은 침실 창문은 이 집 안주인인 롤리버 부인의 큼직한 털 숄로 두툼하게 가려 놓았는데, 이 방에는 오늘 저녁에도 여느 때와 같이 여남은 명의 술꾼들이 즐거움을 찾아 모여 있었다. 말로트의 아랫마을 가까이에 살고 있는 토박이들로, 이 구석진 술집의 단골이었다. 인가가 드문드문 서 있는 마을 저쪽 끝에는 술집으로써 허가를 받은 퓨어드롭이 있었으나, 너
무 멀어서 이쪽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사실상 이용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쪽의 넓은 집에서 마시는 게 낫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방안에 놓인 초라한 네 발 침대는 그 주변에 둘러앉은 몇 사람들에게 자리를 제공했다. 두 사람은 장롱 위에 올라앉았고 한 사람은 조각을 한 참나무 궤짝에 걸터앉았으며, 둘은 세면대 위에, 한 사람은 걸상에, 이렇게 제각기 편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시간쯤 되면 그들의 상쾌한 기분은 몸 밖으로 넘쳐 나와 각자의 개성이 온 방에 따뜻하게 퍼져 있는 듯이 무르익는다. 방도, 구차한 세간까지도 조화를 이루어 화려하게 보였다. 창문에 드리운 숄은 벽걸이처럼 호사스러웠고, 장롱 서랍의 놋쇠 손잡이가 금장식처럼 빛을 발하기도 했다. 또, 조각들이 새겨진 침대 다리들은 솔로몬 왕궁의 장엄한 신전 기둥들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듯 힘이 있어 보였다.
더비필드 부인은 집을 나와 이곳까지 급히 걸어와서 앞문을 열고 깊은 어둠 속에 잠긴 아래층 방을 지나 익숙한 솜씨로 층층대의 문을 열었다. 구불구불한 충계를 올라가던 그녀는 잠시 걸음을 늦췄다. 마지막 층계에 이른 그녀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불빛 속에 서 있는 그녀의 얼굴에 침실에 모인 사람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쏠렸다.
"부인회의 들놀이 끝에 오늘 밤 한턱 쓰려고 친밀한 몇몇 분을 오시라고 했지요."
하고 발자국 소리를 들은 안주인이 마치 교리 문답을 되풀이하는 아이처럼 큰 소리로 지껄이면서 층층대 족을 기웃거렸다.
"아니, 이게 누구야. 더비필드 부인이었군. 어쩌면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해. 난 또 관청에서 나온 사람인 줄 알았지."
더비필드 부인은 비밀 집회에 모인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눈길과 고갯짓으로 인사를 나누며 남편이 앉아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남편은 낮은 소리로 혼자 얼빠진 듯이 콧노래를 칭얼대고 있었다.
"어느 누구 못지않은 훌륭한 내 가문일세. 킹스베리 서브 그린힐에 우리가문의 굉장한 납골당이 있고, 웨섹스 지방의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벼가 있다네."
"그 일로 말이에요, 얼핏 생각난 일이지만, 당신한테 할 말이 있다오. 대단한 계획이라오."
쾌활한 그의 아내가 속삭였다.
"여보 존, 내가 안 보여요?"
그녀는 팔꿈치로 건드려 보았으나 남편은 그녀의 얼굴을 마치 유리창을 통해 보듯이 멍청하니 쳐다볼 분 연신 노래만 흥얼거렸다.
"쉬. 너무 그렇게 큰 소리 내지 마오, 영감. 하고 안주인이 말했다. 만일 관청 사람이라도 지나가다가 내 허가장이라도 빼앗아 가면 어쩌라고요."
"이번에 우리 집에 일어난 일을 저이가 얘기했지요?"
더비필드 부인이 물었다.
"예, 그래 그런 일로 돈이라도 좀 생긴대요?"
"아, 그건 비밀이에요."
더비필드 부인은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다.
"마차를 탈 신세는 못 된다 하더라도, 그런 신분에 가가이 가는 것만도 나쁘지는 않을 거요."
그녀는 여러 사람에게 다 들리도록 말하다가 소리를 낮추어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한테서 그 얘기를 듣고 줄곧 생각한 건데, 저 사냥터 숲 끝의 트랜트리지라는 곳에 더버빌이라는 굉장히 돈 많은 부인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 냈어요."
"이봐, 뭐라고?"
존 경이 물었다. 그녀는 다시 되풀이해서 이야기했다.
"그 부인은 틀림없이 우리 집안이에요. 그래서 난 테스를 그 집에 보내서 우리가 친척이라는 걸 내세울 참이에요."
"그래, 당신이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데, 그런 부인이 있기는 있지."
하고 더비필드는 말했다.
"트링엄 목사님도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군 그래. 그렇지만 그 부인도 우리 가문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지. 아마 노르만 왕조 시걸 훨씬 전에 우리 집에서 분가해 나간 집안임이 분명해."
이 문제 때문에 정신이 팔린 부부는 꼬마 에이브러햄이 밤길을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에이브러햄은 집에 돌아가자고 조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 부인은 부자이고, 우리 딸애는 그 부인의 눈에 꼭 들 거야."
더비필드 부인은 말을 이었다.
"그러면 좀 좋아? 헤어진 집안끼리 서로 오가고 해서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
"정말이야, 우리 모두 한집안이라고 그래. 침대 아래서 에이브러햄이 기쁜 듯이 말했다.
"그리고 누나가 그 아줌마 집에서 살게 되면 우리 모두 가서 만나 보는 거야. 그리고 그 아줌마의 마차를 타고서 까만 나들이옷을 입고 이곳저곳 구경할 수도 있을 거야."
"아니, 넌 언제 여기 왔니? 어처구니없는 소릴 하고 있네. 저리 가서 아빠 엄마가 일어설 때까지 놀고 있어. 그러니 테스는 꼭 그 일가 집에 보내야 해. 그 애라면 마님 눈에 들고말고. 테스라면 틀림없어. 그렇게만 된다면 어느 지체 높은 분이 그 애와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난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어떻게?"
" <운명 통감>으로 그 애 운수를 봤더니, 꼭 그렇게 나오던걸. 그 애가 오늘 얼마나 예쁘게 보이던지 당신도 봤으면 좋았을걸. 살결이 마치 공작부인처럼 보드랍더라니까."
"그 애는 뭐라고 그래?"
"아직 물어 보지 않았어요. 그렇게 훌륭한 마님하고 친척이라는 걸 그 애는 아직 몰라요. 하지만 꼭 훌륭한 결혼을 하게 될 텐데, 설마 가는 걸 싫다고 하진 않겠죠."
"테스는 좀 까다로운 애라서."
"그래도 바탕은 순한 애예요. 그 앤 나한테 맡겨 둬요."
이 대화는 두 사람끼리 주고받은 말이었지만, 주위 사람들도 그 내용을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었다. 더비필드네가 지금 중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아름다운 맏딸인 테스의 앞날에 좋은 일이 있겠다는 것을 어슴푸레 짐작했다.
"테스는 참하고 명랑한 애야. 오늘 다른 애들하고 신이 나서 교구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나
혼자 그렇게 생각했지. 나이 많은 술꾼 한 사람이 나직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하지만 더비필드 부인도 테스가 마룻바닥에서 파란 엿기름을 기르는 일 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텐데."
이것은 특별한 뜻이 담긴 이 지방의 속담이었으나, 이 말에 누구 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얘기는 다시 여러 사람으로 번져 갔으며, 얼마 후 아랫방을 지나오는 발소리가 들려 왔다.
"부인회의 들놀이 끝에 오늘 밤 내가 한턱 쓰려고 친밀한 몇몇 분을 오시랬지요."
안주인은 예고 없이 들어오는 사람 때문에 언제나 준비해 둔 판에 박은 듯한 말을 다시 재빨리 지껄이다가, 새로 나타난 사람이 테스임을 알았다.
주름살이 진 중년 남녀들에게서 풍겨 오는 술 냄새로 가득 찬 이런 장소에 나타난 딸의 어린 모습이 어머니 눈에도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테스의 까만 눈에 책망하는 빛이 일기도 전에 양친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남아 있는 술을 들이마신 다음 딸의 뒤를 따라 조심스레 층층대를 내려갔다. 롤리버 부인의 목소리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제발 소리 좀 내지 말아 줘요. 허가장을 뺏기고, 불려가고, 그리고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다오. 그럼 잘들 가요."
테스가 아버지의 한쪽 팔을, 어머니는 나머지 팔을 잡고 그들은 함께 집으로 갔다. 사실 아버지는 별로 술을 마시지 않은 듯했다. 존 경은 체질이 허약한 탓으로 술을 조금만 마셔도 하찮은 실수를 수없이 저질렀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는 그의 걸음걸이는 매우 위태로워서 세 사람의 행렬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이런 장면은 밤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패들에겐 흔히 있는 일이지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두 여자는 이 강요된 탈선과 역행이 장본인인 더비필드에게도, 에이브러햄에게도, 또 그들 스스로에게도 자연스러운 것인 양 넘겨버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이렇게 그들은 차츰 집 가까이로 가고 있었다. 그때 가장인 더비필드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가족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외치기 시작했다.
"킹스베리에는 우리 집안의 납골당이 있다네."
"쉬. 주책 떨지 말고 좀 조용히 해요."
마누라가 입을 막았다.
"당신 집안만 옛날에 훌륭했던 게 아니잖아요. 앤크텔 집안이나, 호시 집안, 트링엄네 집안도 그렇다오, 당신네 집안처럼 다들 망했지만 말이지. 그야 그들보다 당신 가문이 더 훌륭했던 건 사실이지만, 난 지체 높은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덕분에 못살아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오."
"그렇지도 않을걸. 당신 성품으로 봐서, 당신 집안 역시 옛날에 왕과 왕비도 나왔을 거야. 다만 우리들보다 더 형편없이 망해 버린 거지만 말야."
테스는 조상에 대한 생각보다 현재 처하고 있는 일이 더 염려가 되어 이야기를 꺼내어 화제를 돌렸다.
"아버진 내일 아침 벌통을 갖고 길을 떠나셔야 하잖아요. 괜찮으시겠어요?"
"나 말이야? 걱정하지 말아라. 한두 시간 지나면 거뜬해질 거다. 아직 난 취하지 않았어."
더비필드는 말했다. 더비필드 가족들은 열한 시가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토요일 날 장이 열리기 전에 캐스터브리지 소매상에 벌통을 배달하려면 늦어도 이튿날 새벽 두 시엔 떠나야 했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20~30마일쯤이나 되는데다가, 말도 짐마차도 더할 수 없이 느렸다. 한 시 반이 되자 더비필드 부인이 테스와 동생들이 함께 자고 있는 침실로 들어왔다.
"가엾게도 아버지는 못 가신단다."
어머니가 딸에게 근심스런 말투로 말했다. 딸의 커다란 눈은 어머니의 손이 방문 손잡이에 닿을 때부터 떠져 있었다. 테스는 방금 꾸던 꿈과 어머니의 소식 사이의 어렴풋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그럼 누구든지 가야지요."
그녀는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벌통은 이미 철이 늦었어요. 올해 통 가르기도 곧 끝날 테고, 다음 주 장날까지 늦추다가는 살 사람도 없어져 결국은 처분도 못하고 말거예요."
더비필드 부인은 다급해진 일을 감당 못하는 듯한 표정으로 서성대며 중얼거렸다.
"혹시 누구 젊은 사람이 가주지 않을까? 어제 너하고 춤추고 싶어 하던 젊은이들 중에서 말이다."
힘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제의했다.
"아니, 안 돼요. 난 세상없어도 그렇게 하긴 싫어요."
테스는 당당한 말투로 분명히 말했다.
"그런 일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왜 아버지가 못 가시게 됐는지 알아 버리잖아요. 에이브러햄이 같이 가 준다면 나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머니도 이 생각에 결국 찬성하였다. 어린 에이브러햄은 세상모르게 자다가 깨워졌는데, 아직도 꿈나라에 있는 듯 입혀 주는 옷을 거부감 없이 따라 입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테스는 분주히 옷을 입고, 둘은 초롱불을 받쳐 든 채 마구간으로 갔다. 삐걱거리는 조그마한 짐마차에는 이미 짐이 실려 있었다. 테스는 덜컹거리는 마차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비틀거리는 프린스라는 말을 끌어냈다.
가엾은 이 말은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이 제 집에서 편히 쉬는 이 시간에, 자기만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어둠 속 초롱과 두 사람을 둘러보았다. 둘은 초롱 속에 타다 남은 초 토막을 여러 개 집어넣고는 그것을 짐 바깥쪽에 걸고 말을 몰았다. 처음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에는 기운 없는 말을 생각해서 둘은 말 어깨 옆에 붙어 서서 걸어갔다. 되도록 서글픈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초롱불 아래서 버터 바른 빵을 먹으며 우스운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해 보았지만 우울했고, 아직 아침이 오려면 까마득했다. 에이브러햄은 이제 조금 잠이 깨었는지 하늘에 펼쳐진 기이한 형상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지나치는 나무를 보면서, 성난 호랑이가 굴속에서 뛰어나오는 형상 같기도 하고, 동화에 나오는 거인의 머리를 닮은 것 같다고 하면서 수다스러워졌다.
두툼한 다갈색 지붕 아래 적막이 감도는 스토어캐슬이라는 작은 거리를 지나자, 다소 지형이 높은 곳에 다다랐다. 왼편으로는 그보다 더 높이, 남부 웨섹스에서는 제일 높은 벨배로우, 또는 빌배로우라고 부르는 산이 동족으로 물 없는 도랑에 둘러싸여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길죽한 길은 이 부근에서부터 한참 동안 천천히 기울어져 내려갔다. 그들은 짐마차 앞에 올라타고 있었는데, 에이브러햄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테스 누나."
한참 침묵을 지키던 그가 뭔가 말하려는 듯이 소리쳤다.
"왜 그래, 에이브러햄?"
"우리 집 지체가 높아진 게 누난 기쁘지 않어?"
"별로 기쁠 것도 없다."
"그래도 신사하고 결혼하게 될 테니 좋겠지 뭐."
"뭐라고?"
테스는 의아한 얼굴로 동생을 쳐다봤다.
"우리 일가에 굉장한 집안이 있는데, 누나를 그 집 신사한테 시집보낸다던데"
"나를? 굉장한 우리 일가라니? 그런 일가는 우리에겐 없어. 어디서 그런 걸 알게 됐니?"
"아버질 찾으러 갔을 때, 롤리버네 주막에서 사람들이 그런 얘길 하고 있었어. 트랜트리지란 마을에 우리 집안 되는 부자 아주머니가 산대. 엄마가 그러는데 그분이 누날 신사하고 결혼하게 해 줄 거래."
테스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에이브러햄은 남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말만 재잘거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나이였으므로, 누나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는 벌통에 몸을 기댄 채 하늘을 쳐다보며 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별들은 이 두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생명은 아랑곳없이 머리 위 검은 허공 속에서 차갑게 맥박치고 있었다. 그는 저 빛나는 별은 우리와 얼마나 먼 곳에 있으며, 그 저편에 하느님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의 어린아이다운 재잘거림은 이따금 천지 창조의 놀라움보다 더 깊은 상상력을 발휘하기까지 했다.
"만일 누나가 신사와 결혼해서 부자가 된다면, 저 별들을 네틀콤타우트만큼이나 가까운 거리까지 끌어당겨 주는 큼직한 망원경을 살만한 돈을 가질 수 있을까?"
온 집안사람들의 머릿속에 가득 차 버린 듯한 이 이야기 때문에 테스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소린 이제 그만해."
하고 테스는 소리쳤다.
"별들도 세계가 있다고 그랬지, 누나?"
"그래."
"별세계도 우리들이 사는 세계와 같을까?"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럴 거야. 가끔 별은 우리 잡 사과나무에 달려 있는 사과와 비슷하게 보일 때가 있지. 모두가 싱싱하고 거짓이 없어 보여, 가끔 벌레 먹은 것도 있긴 하지만."
"우리들은 어느 쪽에 살고 있지? 싱싱한 거야, 벌레 먹은 거야?"
"벌레 먹은 쪽이지."
"저렇게 싱싱한 별이 많은데, 그런 걸 고르지 못한 건 매우 운이 나쁜 거야."
"그래"
"정말 그래, 누나?"
이 신기한 얘기를 떠올리며 생각이 깊어진 에이브러햄은 누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만일 우리들이 싱싱한 놈을 골랐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글쎄, 아버지는 저렇게 기침을 하지도 않으실 게고, 이번 장에 못 갈만큼 술에 취하지도 않으셨을 거야. 그리고 어머니도 늘 빨래만 하시면서 삐걱거리는 요람을 흔드시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누나는 처음부터 부잣집 아가씨라서 신사한테 시집을 가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그만둬, 제발 그런 소린 이제 하지 마."
혼자 생각에 잠기게 된 에이브러햄은 살포시 잠이 들기 시작했다. 테스는 말을 다루는 데 익숙지 못했으나, 에이브러햄을 재우기 위해 혼자서 말을 몰아갔다. 동생이 떨어지지 않도록 벌통 앞에 둥우리 같은 자리를 만들어준 그녀는 고삐를 두 손에 쥐고 전과 같이 터벅거리며 어두운 길을 재촉했다. 프린스는 야위어서 양순하게 가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주의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정신을 팔 말동무도 없게 된 테스는 아예 벌통에 등을 기대고 전보다 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무와 울타리의 소리 없는 긴 행렬은 마치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했다. 잠시 환상적인 기분에 빠지게 되었고, 때론 잔잔하게 이는 바람은 공간적으로는 우주와, 시간적으로는 역사와 서로 통하는 뭔가 거대하고 슬픈 영혼의 탄식 같았다. 얼마간 자신의 생활 속에 일어난 착잡한 일들을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자랑하는 모든 일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순간, 어머니가 기대하고 있는 자기의 청혼자라는 신사의 얼굴도 보이는 듯했다. 그는 테스의 빈곤이나 수의를 입은 기사인 조상을 비웃는 오만한 얼굴의 사나이로 떠올랐다. 모든 것이 점점 더 어처구니없게 되어 가고 있었다.
테스가 앉은 자리를 뒤흔드는 느닷없는 충격에 깜빡 잠들어 있던 그녀는 번쩍 눈을 떴다. 생각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었고, 마차는 멈춰진 채였다. 텅 빈 헛기침 같은 소리가 가까이서 들린 데 이어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마차 옆에 걸렸던 초롱불은 꺼지고, 그보다 훨씬 밝은 다른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구가 길을 막고 있는 무엇인가에 얽혀있었다. 놀라서 마차에서 뛰어내린 테스는 무서운 사실을 발견했다. 신음소리는 아버지의 가엾은 말인 프린스가 내는 것이었다. 두 바퀴가 달린 아침 우편 마차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화살처럼 이 오솔길을 달려오다가 불도 없이 느릿느릿 오고 있던 테스의 짐마차와 부딪쳐 버린 것이다. 뾰족이 나온 우편 마차의 수레 채 끝이 불행한 프린스의 가슴에 칼처럼 꽂혔고, 귀한 생명의 피가 상처에서 물줄기처럼 뿜어 나와 소리를 내며 길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테스는 앞으로 뛰쳐나가 프린스의 상처 난 곳을 손으로 막았으나 얼굴에서 치마 아래까지 붉은 피가 튈 뿐이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프린스도 버틸 수 있는 한 몸을 가누고 가만히 서 있더니, 이윽고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서야 우편 마차의 마부도 테스 곁에 와서 함께 아직 따뜻한 프린스의 몸뚱이를 끌어당겨 마구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말은 죽어 있었고,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음을 알게 된 우편 마차의 마부는 상처를 입지 않은 자기 말 쪽으로 돌아갔다.
"네가 길을 반대쪽으로 왔어."
그는 말했다.
"나는 우편물을 운반해야 하니까, 너는 여기서 짐을 지키며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어. 되도록 빨리 도와줄 사람을 보내 주지. 이제 곧 넣어 밝을 테니 무서워할 것 없어."
그는 마차에 올라타고 급히 내달렸다. 테스는 우두커니 서서 기다렸다. 울타리 속에서 몸을 털고 나온 새들은 뿌연 허공 속을 재잘거리며 날고 있었다. 희끄무레하게 멀리까지 좁은 길이 보였다. 얼굴이 창백해진 테스는 눈을 반쯤 뜬 채 누워 있는 프린스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모두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이야. 모두. 실의에 빠진 테스는 울부짖었다. 변명이 있을 수가 없어. 아무것도.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엇으로 살아가시지?"
그녀는 이 참사가 일어나는 동안 내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동생을 흔들어 깨웠다.
"에이브러햄, 이젠 잠을 가지고 갈 수가 없게 됐어. 사고로 프린스가 죽었어."
뒤늦게야 모든 것을 알게 된 에이브러햄의 어린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 어저께만 하더라도 난 춤을 추며 웃고 있었는데. 정말 어쩌면 나는 이렇게도 바보일까."
테스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건 우리들이 벌레 먹은 별에서 살고 있어서일 거야. 싱싱한 별에서 살고 있다면 오늘처럼 슬픈 일은 없을 거야. 응, 누나?"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에이브러햄이 중얼거렸다. 둘은 완전한 침묵 속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이 끝없이 길게만 여겨졌다. 마침내 가까이 다가오는 말굽 소리가 나고 물체가 보이자 그들은 우편 마차의 마부가 약속을 지켜 주었음을 알았다. 스토어캐슬 가까운 곳에 사는 농부가 튼튼하게 생긴 몸집이 작은 말을 끌고 다가왔다. 벌통을 실은 짐마차에 프린스 대신 새 말을 매어 캐스터브리지 시장으로 짐이 운반되어 갔다.
그날 저녁, 빈 수레가 다시 사고 현장에 돌아왔다. 프린스의 시체는 아침부터 도랑 속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피가 고였던 곳은 지나가는 수레바퀴로 짓밟히고 뭉개진 채 아직도 길 복판에 그대로였다. 프린스의 시체는 자신이 전에 끌던 짐마차에 실려 말굽을 하늘로 쳐든 채 말로트 마을로 되돌아 갔다. 프린스의 말굽쇠가 석양빛에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테스는 그보다 일찍 돌아갔다. 어떻게 이 소식을 알려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부모의 얼굴빛으로 보아 벌써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으나 잠들어 버린 자신의 부주의에 대한 자책감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부유한 집의 경우라면 이런 일쯤이야 약간의 불편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지만, 그들의 처지로서는 파산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살림살이가 궁핍하고 정돈돼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 오히려 더 태연할 수 있었다. 부모라면 응당 터뜨렸을 딸에 대한 불같은 노여움을 더비필드 내외는 내식하지 않았다. 테스가 자신을 책망하는 만큼 그녀를 책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죽을 다루는 폐마상이 늙은 말이라 해서 프린스의 몸뚱이 값으로 겨우 2,3실링밖에 주지 않겠다는 것을 알자, 더비필드는 단호한 결의를 보였다.
"좋아."
그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말의 늙은 몸뚱이를 팔지 않겠다. 우리 더버빌 가문이 이 땅의 기사였을 적에 누가 군마를 고양이 먹이로 팔았던가. 그런 푼돈은 저희들이나 가지라고 그래. 이 녀석은 살아서 나를 잘 도와주었으니, 이제 와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이튿날, 더비필드는 식구들이 먹을 곡식을 가꾸던 지난 몇 달보다도 더 열심히 프린스의 무덤을 팠다. 다 파고 난 뒤 그의 부인과 함게 밧줄로 말의 몸뚱이를 묶어 무덤가지 끌고 갔다. 아이들이 장례행렬을 지어 그 뒤를 따랐다. 에이브러햄과 리자 루는 흐느겨 울고 호우프와 모데스티도 슬픔을 참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 모두의 울음소리가 바람벽에 메아리쳤다. 프린스가 구덩이 속에 떨어지자 모두 무덤 둘레에 모여 섰다.
"프린스는 천당에 갔어?"
에이브러햄이 훌쩍이면서 물었다. 더비필드가 삽으로 흙을 덮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테스만은 울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 흔적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5
주로 짐을 운반하는 일을 해 오던 프린스의 죽음으로 그날부터 당장 일이 뒤틀어져 돌아가기 시작했다. 빈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곤경의 그림자가 멀찍이서 모습을 드러냈다. 더비필드는 이 고장에서 이름난 게으름뱅이였다. 때로는 일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회가 잘 들어맞지 않았으며, 날품팔이 노동자의 일상적인 노동에 길이 들지 않아 어쩌다 시작한 일을 끝까지 해 내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테스는 부모를 이러한 궁지에 빠뜨린 자신을 책망하면서 그들을 구해 낼 수 있는 방법을 혼자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자기 계획을 털어놓았다.
"사람의 생활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테스야, 때맞춰 고귀한 혈통도 알게 되었으니, 친척을 만나 뵐 때는 바로 지금이야, 너는 저 사냥 숲 끝에 더버빌 부인이라는 돈 많은 마님이 살고 있는 것을 아니? 그이는 틀림없이 우리 집안이야. 네가 그곳을 찾아가서 친척이라고 밝히고, 우리 집 사정이 어려우니 도와 달라고 청을 드려 보는 거다."
"난 그러고 싶지 않아요."
하고 테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부인이 있다면 우리에게 친절히 대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잖아요. 도움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너라면 그 부인이 무슨 일이고 해 주리만큼 마음에 들어 할 게다. 그뿐 아니라, 네가 아는 이상의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니. 얘야, 내가 들은 것이 있어 그런다."
테스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 때문에 여느 때와 달리 어머니의 권유에 순순히 따르려고 했지만, 그 뒤에 가려져 있는 계획에는 응할 수가 없었다. 설령 어머니가 더버빌 부인의 인자함과 덕망을 다른 사람한테 들어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친척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구걸하는 듯한 행동은 그녀로서는 매우 못마땅하게만 여겨졌다.
"난 차라리 무슨 일자리든 찾겠어요."
테스는 중얼거렸다.
"더비필드, 당신이 결판을 내구려. 뒤에 앉아 있는 남편을 향해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가라고 하면 가겠지."
"나도 내 자식이 낯선 친척 집을 찾아가서 신세지는 건 원치 않소. 난 권유할 수 없소."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나는 문중에서 제일 지체 높은 가장이니까, 분수에 맞게 처신해야 돼."
테스에게 가지 말라며 내세우는 아버지의 명분 역시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 하긴 제가 말을 죽였으니까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요. 그분을 찾아가는 일뿐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도와 달라고 청하는 것은 저한테 맡겨 주셔야 돼요. 더욱이 그분이 저를 결혼시켜준다느니 하는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마세요. 어리석은 일이에요."
그녀는 슬픈 듯이 말했다.
"옳은 말이다, 테스."
아버지가 점잖게 말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누가 그러든?"
어머니가 물었다.
"짐작일 뿐이에요. 어머니가 혹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닌가 하는. 하지만 가 보겠어요."
이튿날 아침 일찍, 그녀는 샤스톤이라는 언덕 위의 마을까지 걸어가서 한 주일에 두 번 동쪽 체이스버러까지 다니는 포장마차를 탔다. 이 포장마차는 트랜트리지 마을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지나가는데, 그곳에 막연히 소문으로만 듣던 신비스러운 더버빌 부인의 저택이 있었던 것이다.
이 잊지 못할 아침, 테스 더비필드가 더듬어 찾아간 길은 그녀가 태어나고 삶을 영위해 온 골짜기의 동북쪽 산하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 블랙무어 골짜기가 그녀의 모든 세계였고, 그곳에 사는 주민이 바로 그 민족이었다. 그녀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이상하게만 비춰졌던 어린 시절을 잠시 떠올렸다. 말로트 마을의 대문 앞에서나 층층대에서 온 골짜기를 샅샅이 내려다보곤 했는데, 그때 신비로웠던 것이 지금도 그때 못지않은 경이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매일같이 자기 방 창문가에서 탑과 마을들, 저택들을 바라보았는데, 무엇보다도 언덕 위에 의젓하게 우뚝 솟아 있는 샤스톤 마을의 온 풍경, 집집의 창문들이 저녁 햇빛을 받아 등불처럼 반짝이는 것을 즐겨 바라보곤 했었다. 그러나 그 마을에 가 본 적은 없었으며, 분지와 그 주변조차도 그녀가 자세히 아는 것이라곤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하물며 이 골짜기를 멀리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싼 산들의 윤곽이라면 친척들의 얼굴만큼 그녀에겐 친밀한 것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것들에 대해선 마을 학교에서 배운 상식 정도로 어렴풋이 상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한 어린 시절, 그녀는 또래의 계집아이들한테서 사랑을 듬뿍 받았다. 테스는 그때 나란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같은 또래의 무리에서 언제나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본래의 빛깔이 바래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색으로 변한 털실로 짠 원피스에 고운 바둑판 무늬가 분홍빛으로 새겨진 앞치마를 걸친 채 긴 줄기 같은 다리로 걸어 다니는 테스는 길바닥이나 둑 위에서 풀이나 돌멩이를 찾느라고 무릎을 꿇는 바람에 언제나 무릎에는 사닥다리 모양의 조그마한 구멍이 나 있었다.
그 무렵, 그녀의 흙빛 머리는 불 위에 냄비를 거는 고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양쪽에 선 두 소녀는 테스의 허리에 팔을 감고, 테스는 자기를 기고 있는 두 동무의 어깨에 팔을 얹은 채 언제나 가운데 포위되어 있었다. 테스는 점점 자라면서 집안 사정을 알게 되었고, 아이들을 돌보고 먹이는 일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닌데도 어머니가 생각 없이 그 많은 동생들을 낳은 데 대해 극히 맬더스(빈곤의 원인을 인구 증가에 돌린 영국의 경제학자. 1766-1834년)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지각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정도에 불과했다. 더비필드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줄줄이 태어난 가족들 가운데 하나 더 보태진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테스는 어린 동생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으며, 가능한 한 그들을 도우려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 이웃 농가에 가서 건초를 만들거나 추수 을을 거들어 주곤 했다. 또 우유 짜는 일이나 버터 만드는 일을 즐겨했는데, 이런 것은 아버지가 암소를 기를 때 배워 두었던 일로 워낙 손이 민첩해서 썩 잘해 냈다. 집안의 무거운 잠이 나날이 어린 테스의 두 어깨에 얹혀지는 사실은 그녀가 더비필드 집안의 대표로써 더버빌 저택에 가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트랜트리지의 네거리에서 마차를 내려 보통 체이스라고 부르는 곳을 향해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그녀가 들은 바로는 이 체이스 기슭에 더버빌 부인의 영지인 슬로우프 저택이 있다고 했다. 보통 말하는 장원의 저택에는 밭이랑 목장이 딸려 있었고, 지주 자신과 가족이 생활을 위해 어떤 수단으로든 착취하기 때문에 항상 투덜거리기만 하는 소작농이 있는데, 이 저택만은 달랐다. 더버빌 부인의 저택은 오히려 순수하고 단순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지은 별장에 훨씬 가까웠으며, 지주에게 필요한 땅 외에는 한 에이커의 땅도 없었다. 주인은 소일거리로 조그마한 농장을 갖고 있었으나 관리인이 돌보고 있었다. 처마 끝까지 울창한 상록수가 가린, 붉은 벽돌로 된 문지기의 옆문을 지나 마찻길이 굽이 돈 곳에 이르자 본채 건물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전에 새로 지은 집으로 문지기 집의 상록수와 대조를 이루는 똑같은 진한 붉은 빛의 건물이었다. 그 주위의 차분한 색채를 배경으로 빨간 제라늄 꽃이 피듯 산뜻하게 서 있는 이 저택 모퉁이의 저 뒤쪽 멀리 체이스의 연한 하늘빛 풍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체이스는 참으로 숭엄했다, 영국에 남아 있는 거의 태고적 수명을 가진 얼마 안 되는 산림지대의 하나로, 그곳에선 드루이드 교파가 숭배했다는 겨우살이를 늙은 참나무 줄기에서 지금도 볼 수 있고, 사람의 손으로 심어지지 않은 거대한 무화과나무가 활을 만들기 위해 가지를 치던 시대에 자랐던 그대로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예스러운 숲의 전체 모습은 슬로우프 저택에서 보이긴 했으나 영지의 경계 바로 밖에 있었다. 이 아늑한 영지 안에 있는 것은 모두가 맑고 풍요롭고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몇 에이커나 되는 온실이 경사지를 따라 언덕 아래 관목 숲까지 뻗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돈같이, 방금 조폐국에서 만들어 낸 새 동전같이 보였다. 오스트리아 소나무와 상록의 참나무로 반쯤 가려진 마구간은 회신 기구를 다 갖추고 있었으며, 교회의 분당만큼이나 위엄이 있어 보였다. 널따란 잔디밭에는 장식을 한 천막을 쳐 놓았는데, 그 입구는 테스를 향하여 열려 있었다.
순진한 테스 더비필드는 자갈이 깔린 마찻길 한쪽 가에 거의 얼빠진 듯이 선 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기까지 발길이 가는 대로, 자기가 어디에 왔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무심히 걸었는데, 와서 보니 모든 것이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우리 가문은 매우 오랜 집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긴 아주 새집이잖아."
테스는 소녀답게 꾸밈없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친척이라고 주장해 보라고 하던 어머니의 계획에 선뜻 따르지 말고, 집 근처에서 도움을 얻도록 애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더버빌네는 처음에는 스토우크 더버빌을 자칭했었지만, 영국의 고풍에 젖은 이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좀 색다른 집안이었다.
휘청거리며 걷는 존 더비필드가 이 고장에 남아 있는 옛 더버빌 집안의 단 하나의 진짜 직계 자손이라고 한 트링엄 목사의 말은 옳았다. 그때 목사는 스토우크 더버빌네가 존과 같이 정통을 이은 더버빌 집안이 아니라는 자기가 잘 아는 사실을 덧붙여 말해 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집의 재흥을 매우 필요로 하는 한, 가명을 접목하기에 아주 훌륭한 대목이 되어 준 것만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죽은 시몬 스토우크 노인은 북부 영국에서 착실한 장사꾼으로 (대금업자였다는 말도 있다) 재산을 모았다. 그 후, 자기가 장사하던 지방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 남부의 한 시골 사람으로 영주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때 빈틈없는 장사꾼이었던 자기의 본색이 얼른 드러나지 않을 만한) 하는데 있어서는 본래 있던 멋없고 뚝뚝한 성보다는 덜 평범한 성을 가지고 재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대영 박물관을 찾아가 이제부터 그가 영주하려는 지방의 명문 가운데서 아주 없어져 버렸든가 또는 반쯤 없어져 버린 집안들을 연구한 기록 문서를 몇 시간에 걸쳐 조사한 끝에, 더버빌이 다른 것들보다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여 더버빌이라는 것을 그 자신과 후계자의 이름에 영구히 붙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에 있어서 그는 엉뚱한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새로운 바탕위에서 자기 집의 계보를 만드는 데 있어서도 다른 집안과의 인과 관계나 귀족과의 연관 관계를 맺는 데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고, 엄격히 합당한 계급 이상의 칭호 같은 것은 하나도 삽입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문이 이런 작업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문이란 걸 가엾게도 테스의 부모들이 알 리가 없었다. 이것이 그들의 실패의 원인이었다. 사실 이렇게 성을 뜯어 만들 수 있다는 것조차 그들은 전혀 몰랐다. 잘 산다는 것은 운명의 혜택일지 몰라도, 집안의 성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테스는 수영하려는 사람이 물로 뛰어들기 전에 주춤거리는 몸짓처럼 얻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주저하며 서 있었다. 그때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면서 천막으로부터 한 사람이 나왔다. 키가 후리후리한 젊은 사나이로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얼굴빛은 붉고 거무스름했으나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나 흉하게 생긴 두툼한 입술 위에 끝이 뾰죽하게 말려 올라간 잘 다듬어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는 스물 서넛 이상 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겉보기에 야만스러운 데가 없지도 않았지만, 이 신사의 얼굴과 대담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눈에는 특이한 힘이 있었다.
"아, 예쁜 아가씨께서 무슨 볼일이십니까?"
그는 가까이 오면서 경쾌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테스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날 어려워할 건 없어요. 누구를 만나러 오셨나요?"
하고 덧붙여 물었다. 더버빌 집안의 한 사람이자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의 출현은 저택과 정원이 그러했던 이상으로 테스의 예상과 어긋났다. 그녀가 꿈에 그리고 있던 것은 더버빌 집안의 용모적인 특징을 모조리 순화시킨 것 같고, 늙고 위엄 있는 얼굴, 온갖 추억을 구상화한 듯 주름이 잡히고 몇 세기에 걸친 일족의 역사와 영국의 역사가 상형문자처럼 나타나 있는 그러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면한 일을 피할 수 없었기에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어머님을 뵈러 왔어요."
"어머니는 만나시지 못할 겁니다. 편찮으시니까"
가짜 가문의 현 주인은 대답했다. 그는 최근에 죽은 분의 외아들 알렉이었던 것이다.
"내가 물은 용건에 대답할 수 없겠어요? 어머니를 무슨 용무로 만나러 오셨지요?"
"용무가 아녜요. 그건, 뭐라고 설명 드려야 좋을까"
"놀러 오셨나요?"
"아,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말씀을 드리면 아마도..."
테스는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워서 어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또, 그가 두렵기도 하고, 불안해서 일부러 장밋빛 입술로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소가 알렉산더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아주 어처구니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말씀드릴 수도 없을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좋아하니까. 얘기해 봐요, 아가씨."
그는 정답게 말했다.
"어머니가 가 보라고 하셨어요."
테스는 머뭇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실은 저도 그럴 생각이었지만요. 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저는 댁과 우리 집이 한집안이라는 말씀을 드리러 왔어요.
"호. 가난한 친척이란 말이지?"
"네."
"스토우크 집안?"
"아뇨, 더버빌이에요."
"아, 참, 더버빌 집안이지."
"우리 집 성은 바뀌어서 더비필드가 됐지만, 우리가 더버빌 집안이라는 증거는 여러 가지 있어요. 옛것을 연구하는 분들도 그렇게 말하고요. 그리고 또 우리 집엔 오래된 도장이 하나 있는데, 방패 모양의 윤곽 안에 사자가 뒷발로 서 있고, 그 위로 성이 그려져 있어요. 또 아주 오래된 은 스푼도 하나 있는데, 오목한 데가 마치 조그만 국자같이 되어 있고 손잡이에 뛰어오르는 사자 한 마리와 성이 그려져 있어요. 그런데 너무 오래된 것이라서 어머니는 완두 수프를 휘젓는 데 쓰고 계시지요."
"은으로 된 성은 분명히 우리 집 문장의 윗장식이지요."
그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리고 사자가 뒷발로 서 있는 것이 문장이고요. 그래서 어머니는 댁에 가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저희 집에서는 불행한 사고로 말을 잃었고, 또 집안 중에서는 제일 오래된 집안이라서."
"퍽 친절한 어머님이시군요. 그리고 나로서도 어머님이 하신 일을 유감으로 생각지는 않겠는데요."
알렉은 이렇게 말하면서 테스가 살짝 얼굴을 붉힐 만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예쁜 아가씨, 당신은 한집안으로써 우리 집에 친선 방문차 오신 셈이군."
"그런 셈이에요."
테스는 머뭇머뭇 말하고 저택을 둘러보았다.
"글쎄, 그거야 조금도 해로울 건 없지. 댁이 어디쯤 되지? 아가씨 뭘 하고?"
그녀는 간단히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시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한 뒤, 올 때 타고 온 마차 편으로 되돌아갈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그 마차가 돌아와서 트랜트리지 네거리를 지나가자면 아직 시간이 있어요. 시간을 보낼 겸 같이 집안을 산책하면 어떨까, 어여쁜 아가씨?"
테스는 되도록 빨리 이 방문을 끝내고 싶었으나 젊은이가 권하므로 따라 가는 데 동의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잔디밭과 화단, 화초용 온실을 보여 주었다. 거기서 다시 과수원과 과일용 온실로 들어가서 딸기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네."
테스는 짧게 대답했다.
"여긴 벌써 익어 있지."
더버빌은 여러 가지 종류의 딸기를 몸을 구부린 채 그녀를 위해서 따기 시작하더니, 뒷손질로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다가 영국 여왕 종의 특별히 잘 익은 딸기를 따서 꼭지를 쥔 채 그녀의 입에 갖다 댔다.
"아니, 아니에요."
그녀는 그의 손과 자기 입술 사이를 손가락으로 막으면서 재빨리 말했다.
"제 손으로 먹겠어요."
"못난 소리."
그는 고집스레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약간 난처해하면서도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거닐며 얼마 동안 시간을 보냈다. 테스는 더버빌이 권하는 것을 반은 즐겁게, 반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제 더 이상 딸기를 먹을 수 없게 되자, 그는 그녀의 조그마한 바구니에 가득 채워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장미 나무가 서 있는 곳을 돌아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꽃을 꺾어 그녀에게 주며 가슴에 꽂으라고 했다. 테스는 그가 하라는 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꽃을 가슴에 더 꽃을 수 없게 되자, 그는 꽃봉오리 한두 개를 따서 손수 모자에 꽂아 주었고, 호기롭게 인심을 쓰면서 그녀의 바구니에 꽃을 수북이 담아 주었다. 이윽고 자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이제 뭘 좀 먹고 나면 떠날 시간이 될 거야. 샤스톤으로 가는 마차를 타려면 말야. 이리로 와, 먹을 것을 좀 찾아올 테니까."
스토우크 더버빌은 그녀를 잔디밭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천막 안에 그녀를 남겨 놓고 나가더니, 곧 가벼운 점심 식사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나타나 손수 테스 앞에 펼쳐 놓았다. 젊은 신사는 하인들이 이 유쾌한 시간을 방해하지 말기를 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담배 피워도 괜찮을까?"
그가 물었다.
"아, 그럼요. 조금도"
그는 귀엽게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있는 그녀의 예쁘장한 모습을 천막 안에 퍼지는 담배연기 사이로 지켜보았다. 테스 더버빌은 자기 가슴의 장미꽃을 천진스럽게 내려다보면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파란 마약의 안개 같은 연기 뒤에 그녀의 인생에서의 비극적인 위협이 숨겨져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 사건은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그녀의 젊은 인생 속에서 핏빛으로 뚜렷이 나타날 재앙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지닌 특성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알렉 더버빌의 눈이 그녀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것은 풍만한 가슴과 무르익은 육체의 완전함이었으며, 이 때문에 그녀는 실제 나이 이상으로 성숙하게 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자태는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았지만, 아직 관능미를 풍길 정도는 아니었다. 친구들은 이러한 그녀의 염려에 대해 시간이 흐르면 아무 일도 아닐 거라며 위로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일로 이따금 괴로워하곤 했었다.
테스는 곧 점심을 끝마쳤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겠어요."
그녀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름이 뭐지?"
그는 그녀를 따라 저택이 보이지 않는 찻길까지 나왔을 때 물었다.
"말로트 마을의 테스 더비필드예요."
"그래, 집에서 말을 잃었단 말이지?"
"제가 말을 죽였어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프린스가 죽은 경위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어요."
"무슨 방도가 없는지 내가 생각해 봐야겠군. 어머니가 틀림없이 당신에게 무슨 일자리를 하나 구해 주실 거요. 그런데 테스, 더버빌에 대한 쓸데없는 소리는 이제 그만하도록 해요. 더비필드면 그만이요, 아시겠어요? 전혀 다른 성이니까."
"저는 그 이상 바라지 않아요."
그녀는 약간 위엄을 보이면서 말했다. 두 사람이 높다란 석남화와 침엽수 사이의 문간채가 아직 보이지 않는 찻길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알렉은 키스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 쪽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먹은 듯 그녀를 그대로 놓아 주었다. 이렇게 하여 불행은 시작되었다. 만일 그녀가 그날의 이 만남의 의미를 깨달았더라면, 어째서 모든 면에서 올바르고 바람직한 남자를 만나는 대신 엉뚱한 남자를 만나도록 운명 지워졌을까 하고 반문했을 것이다. 훌륭한 판단으로 계획된 일도 그릇된 판단으로 실행되면 그 계획이 바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거의 드물 듯이, 사랑할 만한 남자를 적기에 만난다는 것도 힘든 일이다.
자연은, 가련한 인간이 보기만 하면 행복한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는 때에 보라. 고 가르쳐 주는 일은 흔하지 않고, 지리하고 낡아빠진 숨바꼭질이 되기까지는 무엇을 찾는 인간의 어디? 라는 부르짖음에 여기라고 대답해 주는 일도 드물다. 인류의 진보가 극치와 정점에 이르면, 현재 우리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보다 더 정묘한 직관이나 더 밀접한 사회 기구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이러한 시간의 착오가 시정될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완벽한 상태가 가능하다고 예언할 수는 없으며, 심지어 가능하다는 그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현재의 경우 이렇게 말하면 족할 것이다. 즉, 몇 백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의 완벽한 하나가 될 반쪽 둘은 완벽한 순간에 서로 만난 이상적 전체의 반쪽이 아니라, 짝을 찾지 못한 반쪽들이 저마다 외로이 매우 어리석게 한참동안 지상을 방황하다가 간신히 만난 반쪽이라고 하면 족할 것이다. 이런 서투른 망설임에서 근심과 충격과 비극과 기구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운명이 솟아나오게 마련이다.
더버빌은 천막으로 되돌아가자 기쁨으로 얼굴을 빛내면서 의자에 걸터앉아 무엇인가를 생각하고는 한바탕 웃어댔다.
"아,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하하하, 그런데 어쩜 그렇게 귀여운 계집애가 있을까."
6
테스는 언덕에 내려 트랜트리지로 가서 체이스버러에서 샤스톤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타려고 멍하니 서서 기다렸다. 그녀는 마차에 오르면서 말대꾸는 했지만, 다른 승객들이 자기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도 그녀는 밖을 내다보지 않고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그때 승객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 들어 본 일이 없는 날카로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을 걸어 왔다.
"마치 꽃다발 같군요. 거기다가 유월 초에 장미꽃이 만발해 있다니."
테스는 모자와 가슴에 장미를 꽂은 자신의 모습과 바구니에 넘칠 듯 가득 찬 딸기와 장미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신기하게 보이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이 꽃들은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머뭇머뭇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자 그녀는 눈치를 보면서, 특히 사람 눈에 띄는 모자에 꽂은 꽃은 꽃을 뽑아 바구니에 넣고는 손수건으로 그 위를 가렸다. 그녀가 다시 생각에 잠겨 아래를 내려다볼 때에 가슴에 달고 있던 장미꽃 가시가 그녀의 턱을 찔렀다. 블랙무어 지방에 사는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테스도 환상과 예언적인 미신에 젖어 있어서, 가시에 찔린 것을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느낀 불길한 예감이었다.
마차는 샤스톤 마을까지만 가기 때문에 말로트 마을 골짜기까지 가려면 5, 6마일이나 되는 비탈길을 걸어서 내려가야만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샤스톤에 있는 아는 댁을 일러 주면서 너무 피곤하면 그 댁에서 자고 오라고 했었다. 그래서 테스는 샤스톤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서자 어머니의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고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곧 눈치 챘다.
"그렇고말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잘될 거라고 내가 말했잖았니. 내 생각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단 말야."
"제가 없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테스는 약간 지친 듯이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그 집 사람들이 너한테 홀딱 반했더구나."
"어머니가 어떻게 알아요?"
"벌써 편지를 받아 봤단다."
테스는 잘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에 편지가 올 만한 시간은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더버빌 부인이 말하기를, 자기가 취미삼아 하는 조그만 양계장 일을 돌봐 줬으면 좋겠다는구나, 그러나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너가 딴 생각을 먹지 않고 그 집에 오도록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그리고 너를 친척으로 맞이하겠다더라."
"하지만 전 그 부인을 보지도 못했는걸요."
"그럼, 다른 사람을 만난 게로구나?"
"부인의 아들을 만났어요."
"그래, 그 사람이 너를 친척으로 생각하더냐?"
"그건 알 수 없지만 저를 사촌누이라고 불렀어요."
"내 그럴 줄 알았지. 여보. 그 청년이 우리 애한테 사촌누이라고 그러더래요. 그것 보세요."
부인은 남편한테 말하면서 다시 호들갑스레 얘기를 이었다.
"그러니까, 아들한테서 그 얘기를 듣고 너를 쓰겠다고 그러는구나."
"그렇지만 그 일을 잘해 낼는지 모르겠어요."
테스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그런 일로 자란 너가 못하면 누가 잘할 수 있겠니?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어떤 일꾼보다도 그 일에 대해 더 잘 아는 법이야. 또 그런 일을 시키는 건 네가 미안해 할까봐 시키는 척하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누가 쓴 편지인지 좀 보여주시겠어요?"
생각에 잠기면서 테스가 말했다.
"자, 여기 있다. 더버빌 부인이 쓴 거더라."
그 편지는 3인칭으로 쓴 것이었다. 테스가 양계장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것과, 만약 승낙만 한다면 좋은 방도 주고 또 그들 마음에 들기만 하면 보수도 두둑하게 줄 수 있다는 짤막한 내용을 더비필드 부인에게 한 것이었다.
"어머, 이것뿐이에요?"
"그럼 어떻게 처음부터 너를 얼싸안고 입맞춰 줄 것을 바랄 수 있겠니."
테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차라리 엄마 아빠하고 이 집에서 같이 사는 게 좋겠어요."
"그건 또 왜?"
"왜냐고요? 그건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니, 사실은 저도 그 까닭을 확실히는 몰라요."
1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저녁, 테스는 이웃집에 간단한 일거리라도 얻기 위해 갔다가 헛걸음만 하고 돌아왔다. 그녀는 한철 동안에 가족이 다 같이 돈을 벌어서 말을 장만해야겠다고 늘 마음먹고 있었다. 그녀가 집안에 들어서자 동생 하나가 방안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떠들고 있었다.
"멋쟁이가 왔다갔어."
어머니는 입을 함지박처럼 벌리고 좋아하면서 숨차게 얘기했다. 더버빌 부인의 아들이 말로트 마을을 지나가는 길에 들렀는데, 테스가 일을 도와주러 올 것인지 부인이 다짐을 받아 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또 지금까지 그 일을 맡아 보던 청년이 믿음성이 없어 그만두게 했다는 것도 늘어놓고는,
"더버빌 도련님은 네가 외모로 보아 착한 아가씨임에 틀림없다고 믿는대. 널 네 몸무게만큼의 금덩어리처럼 알고 있더라니까 글쎄. 사실은 그 사람이 널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테스는 자기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하는데, 낯선 사람이 칭찬해 준다고 하니까 기분은 좋았다.
"그 청년이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준다니 고맙지 뭐에요. 그 집 사정을 알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가겠어요."
"그 사람 아주 잘생겼더라."
"제가 보기엔 그렇지도 않던데요."
"어쨌든 가거나 말거나 네 마음에 달렸지만, 그 사람은 멋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던데."
창가에 앉았던 에이브러햄이 쾌활하게 말했다.
"맞아. 나도 끼고 있는 걸 봤어. 그리고 그 사람이 콧수염을 만질 땐 반지가 반짝반짝 빛나던 걸. 근데 엄마, 왜 자꾸만 콧수염을 만지지? 그게 궁금했어."
"조그만 녀석 말하는 것 좀 보지."
하잘것없는 말인데도 더비필드 부인은 기뻐하며 말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뽐내고 싶어 그러는 게지."
"다시 생각해 보겠어요."
하면서 테스는 방에서 나갔다.
"여보, 테스가 그 집안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했나 봐요. 그런데 만약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저애는 멍청이임에 틀림없어."
부인은 남편 쪽을 향해 보면서 말했다.
"나는 그 앨 보내고 싶지 않아. 내가 직계 후손이니까, 그들이 우릴 찾아오는 게 당연한 일이지."
생각이 모자라는 부인은 남편을 타일렀다.
"아니에요, 그 애를 보내야 해요. 여보, 그 청년은 테스에게 홀딱 반해 버렸어요. 그거야 당신도 아시겠지만서도, 그는 우리 애를 누이동생이라고 불렀대요. 틀림없이 결혼을 해서 아내로 맞이해 조상들이 누리던 그런 생활을 하게 될 거예요."
존 더비필드는 그의 기력이나 건강 이상으로 우쭐대는 성질이 있었으므로 그런 얘기는 그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지당한 말이야. 그게 바로 그 청년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 또 직계후손과 혈연을 맺어서 자기 가문을 든든하게 하려고 깊이 생각했었는지도 모르지. 깜찍한 테스 같으니라고. 한 번 찾아가 이렇게 좋은 결과가 있게 하다니."
한편 테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서 뜰에 있는 야생 딸기 덩굴 사이를 거닐다가 말의 무덤까지 갔다.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자 어머니는 급히 다그쳐 물었다.
"얘, 어떻게 할 셈이냐?"
"그 부인을 만나 봤더라면 좋을 걸 그랬어요."
"니가 결심만 하면 당장이라도 뵈올 수 있을 거 아니냐."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서 밭은기침을 하고 있었다.
"전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두 분이 결정해 주세요. 저 때문에 말이 죽었으니까, 다른 말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제가 책임져야죠. 하지만 그 남자와 한 집에서 사는 건 정말 싫어요."
동생들은 테스가 부유한 친척집으로 살러 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망설이며 가기 싫어하자 울기 시작했고, 망설이고 있는 그녀를 괴롭혔다.
"누나는 그 집에 안 간대. 귀부인도 안 된대. 이젠 근사한 말도 사긴 틀렸고, 번쩍번쩍하는 금화도 없어서 작고 싶은 것도 못 사게 됐어. 누나는 좋은 옷도 입기 싫은가 봐."
어머니도 동생들의 말장단에 맞장구를 쳤다. 항상 집안일을 질질 끌어서 별것도 아닌 일을 실제보다 힘들게 보이게 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이러한 논쟁에서는 한몫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아버지만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테스는 참다못해,
"그 집에 가겠어요."
어머니는 그녀의 승낙을 얻자 기쁨을 참지 못했다.
"참 잘 생각했다. 착하고 아름다운 너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야."
테스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난 이 기회에 돈을 벌려는 거지, 별다른 생각은 없어요. 어머닌 이런 시시한 얘길 교구 사람들한테 퍼뜨리지 마세요."
더비필드 부인은 약속을 할 수 없었다. 그 청년이 한 말을 속이 후련하도록 떠들어 대지 않겠다는 장담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은 이렇게 해서 일단락 지어졌다. 테스는 그쪽에서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출발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더버빌 부인한테서는 지체 없이 답장이 왔는데, 요구를 들어 줘서 감사하다는 말과, 테스를 맞이하기 위해 이틀 뒤에 짐마차를 산마루까지 보낼 터이니 채비를 차리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더버빌 부인의 필체는 남자 글씨 같았다. 더비필드 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투덜댔다.
"짐마차를 보낸다고? 자기 친척을 위해서 승용마차쯤은 보낼 수 있을 텐데."
태도를 결정하자 테스는 불안하던 마음이 사라져서 오히려 편안했다. 과히 힘들지도 않은 일을 해서 아버지에게 다른 말을 사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는 매우 기뻤다. 테스는 늘 학교 선생이 되기를 바랐지만, 운명의 신은 다른 곳으로 그녀를 인도하는 것 같았다. 정신 연령으로 어머니보다 앞서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갖고 있는 결혼에 대한 간절한 소원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각이 모자라는 어머니는 테스가 태어났을 때부터 좋은 사윗감을 찾는 데만 골몰했을 정도로 어리석었다.
7
테스가 출발하기로 된 아침, 그녀는 동이 트기도 전에 눈을 떴다. 먼동이 트기 직전의 숲은 아직도 고요한데, 바지런한 참새 한마리가 일찍부터 많은 소리로 지저귀고 있다. 모든 것이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을 때, 그녀는 아침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2층에서 짐을 꾸렸다. 그녀는 일요일에 입는 외출복까지 잘 개어서 상자에 넣은 다음, 집에서 늘 입는 옷을 입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어머니는 그녀를 보자마자 타일렀다.
"그런 옷을 입고 어떻게 그 집엘 가지? 새 옷으로 갈아 입거라."
"저는 일하러 가는 거지, 초대받은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처음 방문하는 거니까 일꾼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깨끗이 입는 게 좋지 않겠니?"
"알겠어요, 엄마 말씀대로 하겠어요."
그녀는 거부하고 싶지 않아 조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부모를 기쁘게 해 주려고 모든 것을 어머니한테 맡기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엄마 좋을 대로 하세요."
더비필드 부인은 딸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마음이 놓여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머니는 먼저 큰 대야를 가져다 테스의 머리를 감겨 주었는데, 어찌나 꼼꼼하게 하는지 머리를 말리고 빗질을 하고 나니까 다른 때보다 두 배나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 큰 분홍색 리본을 달아 주고 친목회놀이 때 입던 흰옷을 입혔다. 테스의 풍만한 육체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웠고, 탐스럽게 땋은 머리는 나이보다 훨씬 성숙하게 보여서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그녀를 나이찬 처녀로 보이게 했다.
"엄마, 양말 뒤꿈치에 구멍이 났는데."
"그런 건 걱정할 것 없다 양말 구멍이 말을 하진 않을 테니까. 나는 처녀 시절에 모자만 갖고 있어도 아무 걱정이 없더라. 귀신이 아니고야 구두 속을 들여다볼 재간이 있겠니."
어머니는 딸의 아리따운 모습이 흐뭇하여, 마치 화가가 화판에서 물러서며 멀찍이서 자기 그림을 감상하듯 몇 발짝 뒷걸음질 치며 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얘. 네 눈으로 네 모습을 보렴. 아주 딴 사람 같구나."
그러나 손거울로 몸 전체를 볼 수 없게 되자, 유리창 밖으로 검은 천을 걸어서 큰 거울로 만드는 극성을 보였다. 그리고는 아래층에 있는 남편한테 내려갔다. 부인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 그 청년이 테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그 청년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이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모처럼 잡은 기횐데 성질이 아주 별난 애니까 그 청년에게 반감을 품을지도 모르고, 또 마음이 변해서 안 간다고 하면 큰일이니까요. 일이 잘되기만 하면 목사님께 사례를 해야 돼요. 그런 사실을 알려 주다니, 참으로 고마운 분이로군요."
그러나 딸의 출발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딸에게 옷을 입힐 때의 설레던 기쁨은 사라지고, 서운한 마음만 더해 갔다. 그런 느낌이 들자 부인은 딴 마을이 잇닿은 언덕 아래까지 만이라도 딸을 배웅하고 싶었다. 테스는 스토우크 더버빌네에서 보내는 짐마차를 언덕 위에서 타게 되어 있었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그녀의 짐은 젊은 일꾼을 시켜 밀수레에 실어 내 갔다. 모자 쓰는 어머니를 보자, 동생들은 저희들도 따라가겠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어머니는,
"누나를 전송하러 거기까지만 갔다 오는 거야. 이제 누나는 멋쟁이 아저씨한테 시집가서 좋은
옷을 입게 된단다."
테스는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 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어머니. 왜 자꾸만 아이들한테 그런 소리를 하세요."
더비필드 부인은 애들을 보면서 타이르듯 말했다.
"얘들아, 누나는 부유한 친척집으로 일하러 가는 거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면 다른 말을 살 수 있단다."
테스는 목멘 소리로 작별 인사를 했다.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존 경은 딸의 출발을 축하하는 술이 약간 지나쳐 졸고 있다가 머리를 들면서 말했다.
"내 딸아, 잘 가거라. 이 가문의 그림자 같은 귀여운 너를 그 청년한테 말야, 완전히 몰락했을망정 어엿하게 남아 있는 가문의 작위를 팔 생각도 있다고 전해라. 암 팔고말고. 엄청난 값은
결코 아니라고 말야."
"1천 파운드 이하로는 안 판다고 그래라."
존 경의 부인께서 소리쳤다.
"1천 파운드만 주면 판다. 아냐, 그것보담 조금 적어도 팔 테야. 나 같은 건달이 선조의 명예를 지니고 있는 것보다는 그 청년이 갖는 편이 더 어울릴 거야. 하니까 1백 파운드만 내도 준다고 그래라. 아니다, 다 필요 없다. 오십 파운드라면 판다고 말해 줘. 그렇지, 이십 파운드. 이십 파운드면 돼. 그 이하론 어림도 없어. 제기랄. 가문의 명예란 역시 명예로운 거니까 말이야."
더비필드가 소리쳤다. 테스의 눈엔 눈물이 가득 괴고, 말문이 막혀 가슴속에 있는 말은 한마디도 못한 채 급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동생들이 그녀의 양쪽에서 하나씩 팔을 잡았고, 어머니도 함께 걸었다. 동생들은 마치 굉장한 일을 하러 가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누나를 자꾸만 쳐다봤다. 어머니는 막내아이를 데리고 테스의 바로 뒤에서 가고 있었는데, 이들의 모습은 마치 양쪽에는 철없는 시녀들과 뒤에는 순진한 허영의 여신에게 둘러싸여 걷고 있는 성실한 미녀의 그림 같았다. 그들은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산기슭까지 갔다.
테스는 트랜트리지에서 마중 오는 마차를 언덕 위에서 탈 예정이었는데, 그것은 마지막 비탈을 달리는 말의 피로를 덜기 위해 그곳을 택한 것이었다. 고개 넘어 저쪽엔 샤스톤 마을의 뾰족뾰족 솟은 듯한 집들이 산맥을 가르고 있었다.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언덕 위에는 테스의 총 재산을 손수레에 싣고 와서 앉아 있는 청년 외엔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면 마차가 곧 올 거다. 아, 저기 마차가 보이는구나."
부인이 소리쳤다. 마차는 언덕 위로 불쑥 나타나더니 짐수레를 지키고 있는 청년 옆에서 멈췄다. 부인과 애들은 더 가지 않기로 결정했고, 테스는 그들에게 황급히 작별 인사를 하고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짐을 옮겨 실을 마차 쪽으로 테스의 하얀 모습이 다가가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마차에 이르기도 전에 언덕 숲속에서 또 하나의 마차가 나타나더니 모퉁이를 돌아 짐마차 옆을 지나 놀란 듯이 쳐다보는 테스 옆에 가서 멈췄다. 부인은 첫눈에 그 마차가 짐마차하곤 비교도 안될 만큼 훌륭하게 장식한 새로 만든 이륜마차임을 알 수 있었다. 마차를 모는 사람은 스물 두셋 가량의 담배를 문 청년인데, 갈색 재킷과 모자를 썼으며, 하얀 목수건에다 빳빳한 칼라, 그리고 갈색 승마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는 한 보름 전에 테스의 대답을 듣기 위해 온 일이 있는 잘생기고 건강한 바로 그 청년이었다. 더비필드 부인은 어린아이같이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청년의 그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아는 것처럼 흐뭇해하면서 기뻐했다.
"저 아저씨가 누나의 신랑이 될 사람이야?"
하고 막내아들이 물었다. 한편, 모슬린 옷차림을 한 테스 더비필드는 갑자기 나타난 청년의 얘기를 들으면서 아직도 망설이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의구심은 좀 더 심각한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불안감이었는데, 그녀는 오히려 짐마차 쪽으로 가고 싶었다. 청년은 마차에서 내리더니, 그녀에게 빨리 타라고 재촉하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그녀는 가족들이 서 있는 언덕 아래로 얼굴을 돌리면서 조그맣게 보이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내려다보았다. 자기가 말을 죽게 했다는 자책감이 그녀의 마음을 속히 결정짓도록 작용했지만, 작별의 순간만은 더없이 슬펐다. 테스가 마차에 오르자, 청년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말채찍을 휘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마차는 느릿느릿한 짐마차를 앞지르더니 고개 너머로 사라져 갔다. 테스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구,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던 상황이 지나자 모든 가족들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난, 불쌍한 우리 누나가 귀부인이 되러 가지 않길 바랐는데."
막내아이가 입을 삐죽거리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순식간에 전염이라도 된 듯이 세
아이 모두가 차례차례 터뜨렸다.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존 더비필드 부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모든 것을 그대로 순응하며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잠자리에 눕자, 허탈해지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남편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테스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왜 좀 더 일찍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 애한테는 좋은 기회였는걸요. 그 애가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 청년이 정말로 마음이 착한 사람인지, 또 그 애를 친척으로서 친절하게 대해 줄 것인지를 확인하기 전에는 안 보내겠어요."
"그런 일쯤은 당신이 벌써 알아봤어야 할 것 아니야."
존 경은 졸린 듯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했다. 더비필드 부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스스로를 위로할 구실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젠 별수 없어요. 그 애는 똑똑한 가문의 후손이니까, 자기가 지니고 있는 장점을 올바르게 이용하기만 한다면 그분들과 잘 어울릴 게 틀림없어요. 청년이 당장 결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머지않아 하게 되겠죠. 테스한테 홀딱 반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으니까 말예요."
"당신이 말하는 그 애의 장점이란 도대체 뭐야? 더버빌 가문의 혈통을 말하는 거요?"
"당신도 참. 그렇게 모르시겠어요? 나의 처녀 때 같은 그 애의 고운 얼굴 말이에요."
8
테스 옆에 앉은 알렉 더버빌은 테스의 짐을 실은 짐마차를 까마득하게 앞지른 채 관례적인 인사말을 하면서 첫째 번 산비탈 길로 쏜살같이 말을 몰았다. 산마루에 다가갈수록 활짝 트인 경치가 그들의 사방에 펼쳐졌다. 뒤쪽엔 그녀가 태어난 마을이 보이고, 앞쪽으론 트랜트리지를 방문했을 때 간단히 들른 일밖에 없는 회색빛 마을이 보였다. 드디어 마차가 산마루에 이르자 거의 1마일 길이나 되는 쭉 뻗은 내리막길이 전개됐다. 천성이 용감하고 굳센 편에 속하는 테스지만, 사고가 있은 다음부터는 지나치도록 마차에 겁을 먹고 있었다. 마차가 조금만 심하게 흔들려도 그녀는 금방 불안해했고, 그래서 그녀는 청년이 마차를 거칠게 모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리막길은 천천히 몰 테지요?"
테스는 태연한 척 말했다. 더버빌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다음 앞니로 담배를 질끈 문 다음 천천히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담배를 두어 모금 깊이 빨고 나더니 대답했다.
"왜 그러지, 테스? 테스처럼 용감하고 굳센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우스운데. 난 언제나 최고 속력으로 내려가거든. 용기를 돋구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지. 그때의 쾌감 또한 어디에 비할 수 없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지 않아요?"
청년은 머리를 저으면서 말했다.
"아니지, 달려야 될 이유가 두 가지 있어. 나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탑도 생각해 줘야 하거든. 그녀는 괴상한 성미가 있거든."
"탑이 누군데요?"
"이 암말이지, 누구긴 누구야. 나는 이 말이 조금 전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돌아보는 걸 눈치 챘단 말이야. 아가씨는 그걸 몰랐지?"
"놀리지 마세요."
테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놀려 주려는 게 아니야. 만약 사람들 중에 이 말을 부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지. 아무도 이 말을 부릴 사람은 없어. 그런 힘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뿐이란 말이야."
"그럼 뭣 때문에 이런 말을 갖고 계시죠?"
"그렇게 물을 만도 하지. 그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해. 이 말은 사람을 죽인 일이 있고, 내가 이 말은 사들인 얼마 뒤에 이놈을 다루다가 나도 죽을 뻔했지. 또 그 얼마 뒤엔 내가 이 말을 죽일 뻔한 일도 있고. 그런데 아직도 이 말은 거칠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래서 이 말 뒤에 서 있는 건 항상 위험하지."
그들은 마침내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말 자체의 성질이 사나워서인지, 아니면 청년이 거칠게 몰아서인지, 난폭하게 질주하기를 바라는 청년의 기분을 말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암시를 줄 필요도 없었다. 아래로 아래로 내리 치닫는 마차의 속력이 점점 빨라졌다. 바퀴는 내리치는 채찍 때문에 빨리 도는 팽이처럼 윙윙 소리를 냈고, 좌석은 좌우로 기우뚱하며 마차가 뒤집힐 듯 기울었다. 내리막길을 달리는 말의 모습은 마치 물결처럼 솟구쳤다간 내려앉았다. 때로는 한쪽 바퀴가 공중에 뜬 채 몇 야드씩이나 달리고, 바퀴에서 튄 돌이 총알같이 길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말발굽에서 튀는 불꽃은 한낮인데도 마치 부싯돌을 치는 것처럼 번쩍였다. 가느다란 비탈길은 순식간에 확대되어 눈앞에 닥쳐오고, 마치 대나무를 쪼개듯 양쪽 길 옆 둑이 각각 어깨를 스치면서 사라졌다. 바람은 테스의 흰옷 속을 거쳐 살결까지 스며들고, 그녀의 머리털은 머리 뒤에서 바람에 나부꼈다. 그녀는 나약함을 보이지 않으리라 결심하면서도 청년의 팔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 팔을 잡아선 안 돼. 두 사람이 함께 날아가 버린단 말이야. 내 허리를 껴안아요."
테스는 그의 허리를 껴안은 채 산기슭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녀는 불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어리석은 짓을 했지만, 무사하게 내려왔으니 다행이에요."
"테스, 무슨 소릴 하고 있어. 내가 침착했기 때문이지."
"사실 그래요. 인정하겠어요."
"그런데 테스,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해서 그렇게 매정하게 손을 놓을 건 없잖아."
그녀는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또 막대기든 돌이든 간에 그녀는 무의식중에 청년을 껴안은 것뿐이었다. 그녀는 제정신으로 돌아가자 한마디도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휩싸였다. 잠시 후 마차는 다음 내리막길에 다다랐다.
"자, 다시 한 번 시작해 볼까."
"싫어요, 싫어. 제발 부탁이에요. 그런 무모한 짓은 더 이상 하지 말아주세요."
"그렇지만, 이 고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상 내려가지 않을 도리가 없잖아."
그가 쏘아붙였다. 청년이 고삐를 쥐자 마차는 둘째 번 비탈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차가 흔들리는 가운데 얼굴을 그녀에게 돌린 채 놀리듯이 짓궂게 말했다.
"테스, 그 동백꽃 같은 새빨간 입술에 키스를 허락한다면 세게 달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따뜻한 뺨에라도 좋아."
테스는 깜짝 놀라 뒤로 몸을 움츠리면서 좀 더 떨어져 앉았다. 그러자 청년은 또다시 채찍으로 말을 거세게 몰아 그녀의 몸을 심하게 흔들리게 했다. 그녀의 큰 눈은 야수 같은 청년을 쏘아보면서 절망한 나머지 부르짖었다.
"이렇게 하지 않곤 직성이 풀리지 않나요?"
어머니가 테스를 이토록 아름답게 단장해 준 것도 지금에 와서는 한심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딴 방법은 없어, 귀여운 테스."
"아아,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는 비참하게 헐떡였다. 그는 고삐를 늦추었고, 속도가 느릿해지자 그토록 갈망하던 키스를 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경솔함을 깨달은 듯 옆으로 몸을 피했다. 청년의 양쪽 팔은 고삐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막을 길이 없었다.
"빌어먹을. 우리들의 목이 부러지든 말든 해 보자꾸나. 이 여우 같은 계집애야, 그렇게 해서 약속을 어길 수 있는 줄 알아?"
기분 내키는 대로 욕구를 발산하려던 이 청년은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대면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좋아요, 당신이 계속 그런 태도로 나온다면, 나도 굽히지 못하겠어요. 전 당신이 친척으로서 좀 더 친절하게 대해 주고, 또 보살펴 줄 줄 알았어요."
"뭐 말라 죽은 게 친척이야. 자, 가자."
"전 키스 같은 건 하기 싫어요. 절대로."
굵다란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울음을 참으려는 그녀의 입술이 심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오지도 않았어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청년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테스는 꼼짝도 않은 채 앉아 있었고, 그래서 더버빌은 의젓하게 그녀의 뺨에 승리의 키스를 할 수 있었고 키스를 받은 그녀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손수건을 꺼내 청년의 입술이 닿은 뺨을 몇 번이고 닦았다. 무의식중에 그런 행동을 하는 그녀를 본 청년은 더욱더 욕정이 끓어올라 짐승처럼 눈을 번뜩였다.
"촌색시답지 않게 깐깐하군 그래."
테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뺨을 닦은 행위가 그에게 모욕감을 줬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으므로, 청년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결한 키스의 흔적을 완전히 씻어 버린 것이다. 멜베리다운의 언덕 윈그린 부근까지 와서야 비로소 테스는 자기 행동이 청년의 기분을 상하게 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꼼짝 않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또 다른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후회하는 꼴을 보고야 말 테니까."
청년은 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몰았다.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하지만 자진해서 다시 한 번 키스를 허락하고, 그러고도 손수건을 사용하는 따위의 짓을 하지 않는다면 별문제가 없지만 말야."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좋아요, 당신 말대로 하겠어요. 어머. 모자를 집게 해 주세요."
그들이 말하는 동안에 모자가 날아가 땅에 떨어졌으나 마차는 여전히 빨리 달리고 있었다. 청년은 마차를 멈추고 자기가 집어 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테스가 먼저 뛰어내려 되돌아가서 모자를 집었다. 더버빌은 그녀 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아가씬 모자 벗은 모습이 더 귀엽군 그래, 정말이야. 자 빨리 타도록 해요. 왜 그러고 있어?"
그녀는 모자를 주워 머리에 쓰고서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얀 이와 빨간 입술을 보이며 또렷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승리의 기쁨에 반짝이는 말투였다.
"타지 않겠어요,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아는 이상 절대로 타지 않겠어요."
"뭐라고? 내 옆에 앉지 않겠단 말이지?"
"네, 전 걸어가겠어요."
"즈랜트리지까진 아직도 오륙 마일 가량 더 남았는데."
"몇 십 마일이 남았다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더군다나 짐마차도 뒤따라오고 있으니까 걱정 없어요.
"이 교활한 계집애야. 자, 말해. 모자를 떨어뜨린 것도 일부러 그런 거지?"
그녀의 책략적인 침묵은 그의 의혹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래서 그는 테스가 자기를 속인 데 대해 온갖 저주와 욕설을 생각나는 대로 퍼부었다. 그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그녀 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그는 길옆에 있는 울타리와 마차 사이에 끼어 꼼짝도 못하도록 말을 몰려했으나 그녀를 다치게 할 것 같아서 그렇게까지 하진 못했다. 마차가 점점 다가오자 울타리에 기어오른 테스는 힘차게 소리쳤다.
"그렇게 심한 욕지거릴 함부로 내뱉는 당신은 창피한 줄 알란 말이에요. 난 당신이 미워 죽겠어요.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란 말예요. 어머니한테로 돌아가 버리고 말겠어요."
화가 잔뜩 났던 더버빌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노여움이 가신듯 천연스레 웃고 있었
다.
"나는 그러는 아가씨가 더욱 마음에 들어. 자, 우리 화해합시다. 당신이 싫어하는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테니까, 날 믿어 봐. 꼭 약속을 지키겠어."
마차에 다시 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마차를 몰며 옆에서 따라오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마차는 느린 걸음으로 트랜트리지를 향했다. 청년은 테스로 하여금 마차를 벗어나 걷게 한 잘못을 뉘우칠 때마다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자 테스는 실제로 그의 말을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충동적인 그의 난폭성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테스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결정돼 있었다. 어찌 할 수 없는 사정이 아닌 바에야 이제 와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어린아이 같은 행동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해서든 집안을 일으켜 보겠다는 부모님을 떠올리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몇 분 더 가니까 슬로우프 저택의 굴뚝이 보이고 그 집 오른쪽에 잘 정돈된 한구석에 테스의 목적지인 양계장과 조그만 집이 보였다.
9
테스가 돌봐야 할 양계장은 사방을 돌담으로 쌓아올린 울안에다 이엉을 올린 농가를 그 본부로 삼고 있었다. 양계장이 있는 네모진 마당은 원래 정원으로 쓰던 것인데, 지금은 닭들이 밟아 뭉개서 모래만 깔린 땅으로 변해있었다. 이 집은 담쟁이로 뒤덮였고, 그 때문에 더 크게 보이는 굴뚝은 마치 황폐한 탑 같았다. 교회 묘지에 묻혀 있는 사람들이 옛날에 지었다는 이 집은 지금은 마치 닭들을 위해 지어진 것처럼 닭들에게 아래층 방들이 제공돼 있었다.
옛날에 그 사람들은 이 집을 짓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고, 또 스토우크 더버빌이 이사 오개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후손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법적 절차를 거쳐 스토우쿠 더버빌의 소유로 되자 부인은 자기 생각대로 거침없이 그 집을 양계장으로 사용해 버렸다. 그런 행동을 본 전 소유자의 후손들은 일종의 모욕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 시대에는 기독교가 신자가 살기에 알맞은 집이었는데 하고 그들은 넋두리하듯 말했다.
옛날에는 유모가 돌보는 몇 십 명의 어린아이들이 야단법석을 떨던 여러 개의 방에서 지금은 부화한 지 며칠 안 되는 병아리들의 모이 쪼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점잖은 지주가 쓰던 의자가 놓여 있었던 자리엔 마음 들뜬 암탉이 갇힌 조그만 닭장이 놓여 있었다. 굴뚝 옆과 한때는 불길이 활발히 타올랐을 벽난로 옆엔 엎어 놓은 꿀벌 통이 쌓여 있는데, 암탉들은 그 통속에다 알을 낳고 있었다. 옛날 집 주인들이 정성껏 삽으로 일구어 놓았던 밭고랑은 닭들 때문에 형편없이 거칠어져 있었다. 이 농가가 서 있는 뜰은 사방이 담으로 둘러있었고, 하나밖에 없는 문으로 출입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테스는 양계를 하던 집안의 딸다운 재치와 판단으로 한 시간 가량 이것저것 손질하고 있었다. 그때 흰 모자에 앞치마를 두른 하녀가 들어왔다.
"더버빌 마님께서 여느 때와 같이 닭을 가지고 오시랍니다."
라고 말했으나, 테스가 집안 사정에 어두운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는 덧붙여 말했다.
"마님은 늙으신 분이에요. 그리고 앞을 못 보신답니다."
"앞을 못 보신다고요?"
뜻밖의 사실을 듣고 캐어물을 사이도 없이 하녀가 가르쳐 주는 대로 햄버그 종 중에서 가장 탐스러운 걸로 두 마리를 골라 안고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는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었으나, 안채 바깥쪽에서는 이 집안의 누군가가 말 못하는 생물에게 정을 쏟고 있는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현관에 떨어진 닭털이라든가. 풀밭에 가져다 놓은 조그만 닭장 같은 것들이 그대로 말해 주는 듯했다. 아래층 거실에는 이 저택의 소유자이며 여주인이기도 한 여자가 등에 햇살을 받으며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성성한 백발에 육십 안팎으로 보이는 부인은 차양 없는 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시력을 잃은 지 오래된 사람이라든지, 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의 굳은 표정과는 달리 부인의 얼굴은 안타까움과 체념이 엇갈리는 민감한 표정이었다. 테스는 한 팔에 한 마리씩 닭을 안고 조심스레 부인 앞으로 걸어갔다.
"아, 네가 내 닭을 돌봐 주려고 온 젊은 색시냐?"
부인은 처음 듣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물었다.
"내 닭들을 잘 보살펴 주기 바란다. 우리 집 관리인이 그 일엔 네가 가장 적합하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가져온 닭은 어딨지? 오, 그래그래, 이건 스트럿 종이군. 오늘은 기운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 아마 낮선 사람이 와서 겁이 난 모양이지. 이놈도 역시 조금 놀란 것 같은데 그렇지? 그러나 곧 너한테 길이 들 거야."
부인이 말하고 있는 동안 테스와 하녀는 그녀의 손짓에 따라 한 마리씩 차례차례 무릎 위에 갖다 놓았다. 부인은 닭의 부리며 볏, 목털, 날개와 발톱까지도 손으로 더듬어 빈틈없이 조사했다. 한 번 만져 보기만 해도 닭의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했는데, 털이 한 개 꺾어졌다든가 처진 것까지도 찾아냈다. 부인은 닭의 발톱을 만져 본 다음 무엇을 먹었는지, 또 얼마나 먹었는지를 판단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손으로 만져서 판단하는 부인의 얼굴은 마치 무언극을 하는 사람처럼 품평할 때마다 그 표정이 표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가져왔던 닭은 다시 닭장으로 되돌아가고, 부인이 좋아하는 닭들이 전부 그렇게 검사를 마칠 때까지 사랑으로 보살피는 행동은 되풀이 됐다. 햄버그 종, 밴텀 종, 코친 종, 브라만 종 등 수많은 닭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검사하면서도 부인이 닭의 상태를 그릇 판단하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테스는 부인의 이런 모습을 보고 견신례가 생각났다. 더버빌 부인은 주교이고 닭들은 젊은 신도들이며, 테스와 하녀는 신도를 인솔해 온 교구 목사와 부목사로 생각되었다. 검사가 다 끝났을 때, 부인은 주름 잡힌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움직이더니 테스에게 말했다.
"휘파람을 불 줄 아니?"
"마님, 휘파람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휘파람으로 노래하는 것 말이다."
대부분의 시골 아가씨들처럼 테스도 휘파람을 불 줄 알았지만, 가능한 한 점잖은 사람들 앞에선 불지 않았다. 그러나 휘파람을 불 줄 아는 것은 사실이므로 불 줄 안다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매일 휘파람 부는 것을 연습해. 전에 있던 청년은 참 잘 불었는데, 다른 곳으로 가버렸어. 피리새라는 새가 있기는 하지만, 눈으로 볼 순 없으니까 노랫소리라도 들을 수 있도록 휘파람을 가르쳐 줘야겠어. 엘리자베스, 새장이 어디 있는지 테스에게 가르쳐 줘라. 그리고 테스는 내일 부터 당장 가르치도록 해요. 며칠 동안 훈련을 안 시켜 배운 것도 잊어버리겠어."
"오늘 아침엔 도련님께서 가르쳤답니다, 마님."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흥. 그 애가 가르쳤다고."
부인의 얼굴은 이내 노여움으로 찌푸려졌고,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스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부인과의 대면은 이렇게 해서 끝나고, 닭은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테스는 저택의 규모를 본 다음부터 여러 가지를 상상했으므로 막상 더버빌 부인을 대면하고서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테스는 친척 관계에 대해선 부인에게서 한마디 말도 듣지 못한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눈먼 부인과 아들 사이의 애정이 별로 두텁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았지만, 이것 역시 테스의 그릇된 판단이었다. 자식의 행실을 괘씸하게 생각하면서도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어머니들이 이 세상에 많은 것처럼 더버빌 부인도 그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첫날의 일과가 유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게 되자 나름대로 안정되고 한가로워 마음에 들었다. 테스는 자기가 맡은 일을 잘 감당하여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부인이 분부한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녀는 담 옆에 있는 닭장으로 가서 오랫동안 불지 않았던 휘파람 연습을 하려고 입을 오므렸다. 하지만 이전의 휘파람 솜씨는 온데간데없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입술 사이로 헛바람만 나올 뿐 소리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불어 왔던 휘파람이 이렇게도 안 될 수가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돌담 덩굴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을 눈치 챘다. 그녀가 그쪽을 보니까 마당으로 뛰어내리는 꾸부린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알렉 더버빌이었다. 전날 묵은 정원사 집 앞까지 안내를 받은 뒤로 그를 처음 보는 것이다.
"이봐, 사촌누이. 난 자연에서도, 예술에서도 너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여자는 본 적이 없어. 담 너머로 이제껏 보고 있었지. 기념탑 위의 조상처럼 휘파람을 불려고 앞으로 내민 새빨간 입술, 후후 하고 불다가 안 되니까 투덜대던 모습을. 아무리 해도 허탕만 쳐서 그러는지 몹시 짜증을 내는 것 같더구먼."
"짜증을 냈는지 모르지만, 투덜대진 않았어요."
"아하. 아가씨가 뭣 때문에 휘파람 연습을 하는지 까닭을 알았어. 우리 어머니가 피리새한테 노래를 가르쳐 주라고 하셨나 보군. 염치도 없는 어머니야. 닭을 돌보는 것만으로는 너무 할일이 적은 줄 아시는 모양이군 그래. 나 같으면 그런 명령 따윈 깨끗이 거절해 버리겠어. 알겠니?"
그렇지만, 이 일을 꼭 해야 한다고 그러시면서, 내일 아침까지 연습해 두라고 그러시던 걸요."
"어머니가 그렇게 말해요? 그렇다면 내가 한두 번 가르쳐 주지."
"어머, 싫어요. 안 가르쳐 줘도 괜찮아요."
테스는 문 쪽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다.
"바보 같으니라고. 아가씨 몸에 손을 대려는 게 아니야. 자, 봐요. 나는 철망 이쪽에 서 있고, 당신은 그쪽에 있으니 아가씨는 조금도 두려워할 게 없단 말야. 그럼, 내가 해 볼 테니 잘 봐야 해요. 아가씬 입을 너무 오므린단 말야. 자 이렇게 해 봐."
청년은 몸짓을 하면서 ‘오, 가져가세요, 이 붉은 입술을’ 이라는 노래의 1절을 휘파람으로 불었으나, 테스에게는 그 노래의 의미가 통하지 않았다.
"자, 이제 한번 해 봐."
청년이 말했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으려 했고, 얼굴은 조각처럼 굳어졌다. 그는 계속해서 재촉했다. 테스는 청년을 빨리 쫓아 버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입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다시 해 봐."
이번에는 보기에 미안할 정도로 긴장해서 열심히 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아주 부드러운 휘파람 소리가 나왔다. 그녀는 성공했다는 순간적인 기쁨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환히 웃음을 지었다.
"됐어, 됐어. 내가 첫걸음을 이끌어 준 셈이니까, 이제부턴 잘 될 거야. 지금 나는 참을 수 없도록 유혹을 느껴 하지만 가까이 가지 않겠다고 말했으니 약속을 지키겠어. 그런데 테스, 우리 어머니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아직 마님의 성격을 잘 몰라요."
"곧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새에게 휘파람을 가르치라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야. 난 현재 어머니한테 미움을 받고, 나 자신도 어머니를 경멸하지만 아가씨는 시키는 대로 동물을 잘 돌보기만 하면 귀여움을 받을 거야. 그럼 잘 있어. 만일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관리인한테 가지 말고 내게 와요."
테스 더비필드가 처음으로 일을 맡으면서 치른 것은 바로 이런 일이었다. 첫날의 경험은 앞으로 계속될 생활 중의 일부분과 같은 것이었다. 알렉 더버빌의 친밀한 응대는 그를 만날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을 조금씩 없애줬다. 그는 우스운 얘기를 하거나 단둘이 있을 때에는 익살스럽게 사촌누이라 부르거나 해서, 그녀가 자기에게 품고 있는 경계심 같은 것을 자연스레 풀어 주었다. 하지만 새로운 호감이나 이전보다 부드러운 마음씨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테스는 청년의 지배하에 있는 단순한 친구의 처지를 떠나서 좀 더 온순하게 그를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부인에게 의지해야 할 그녀이지만, 비교적 부인에게 받는 도움이 적었으므로 청년의 힘을 빌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테스는 옛날에 불던 휘파람 솜씨를 되찾게 되어 더버빌 부인의 방에서 새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게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녀는 음악에 소질이 있는 어머니의 노래가 귀에 익어서 새에게 가르칠 만한 멜로디쯤은 풍부하게 알고 있었다. 뜰에서 휘파람 연습을 할 때보다도 매일 아침 새장 옆에서 하는 것이 훨씬 더 즐거웠다. 청년이 옆에서 보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태연하게 입을 내민 채 새장에 입술을 대고 듣는 새를 향해 기분 좋게 열심히 휘파람을 불었다.
더버빌 부인은 수놓은 무거운 커튼이 드리워진 큼직한 다리가 네 개 있는 침대에서 잠을 자게 되어 있었다. 그 작은 멋쟁이 새도 부인과 같은 방을 차지하고 있는데, 때로는 몇 시간이고 마음대로 날아다니다가, 옷장이나 장식품 위에 앉아 배설물로 조그만 얼룩을 만들기도 했다.
어느 날, 테스는 여느때와 같이 새장이 나란히 걸린 창가에서 새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때 부인이 나가고 없는 침대 뒤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그녀가 방안을 휘둘러보자 커튼 밑으로 신발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그녀의 휘파람은 떨리기 시작해서 잘 되지 않았다. 만약 숨어 있는 자가 있었다면 그녀의 떨리는 휘파람 소릴 듣고 자기가 들킨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녀는 매일 아침 조심스레 커튼 뒤를 살펴봤으나 숨어 있는 자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알렉 더버빌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던 엉뚱한 생각을 집어치우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을 바꾼 듯했다.
10
어느 마을이든지 그들 나름의 생활 태도와 조직, 그리고 독특한 도덕적 규범이 있다. 트랜트리지 마을 근방 여자들의 품행은 두드러지게 좋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웃 경사지에 군림하고 있는 (알렉)에서도 그대로 말해 주고 있다. 이 마을의 큰 결점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인데, 밭에서 농부들이 주고 받는 얘기들은 으레 돈은 모아 뭘 하겠느냐는 식의 넋두리뿐이었다. 또 계산에 밝은 농부는 곡괭이나 삽에 매달려서 한평생 피땀 흘려 돈을 모으는 것보다는 늙은 뒤 고을에서 주는 구제 기금을 받는 편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계산에 열중하기가 일쑤였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오락은 일과를 마친 토요일 저녁이면 몇 마일 떨어진 체이스버러의 조용한 주막에서 자정이 넘도록 술 마시는 일이었다. 옛날에 흥청대던 이 주막은 독점 상인이 경영하고 있는데, 여기서 파는 엉터리 맥주는 항상 위장을 해쳤다. 그래서 이 술을 마시고 배탈이 난 농부들은 일요일은 종일토록 자리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테스는 주일마다 있는 그들의 모임에 얼마 동안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비슷한 나이 또래인가정부인들의 권유에 못 이겨 그녀도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곳의 품삯은 스물한 살이 돼도 마흔 살이 된 부인이나 같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서둘러 결혼하는 습관이 있었다. 모임에 처음 끼어 본 테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느껴졌다. 떠들썩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양계장에서 1주일 동안 시달려 온 테스의 우울함을 사라지게 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모임에 참석했다. 얌전하면서도 매력이 있고, 또 여자로서 성숙한 시기에 달한 테스는 체이스버러 마을 건달꾼들의 엉큼한 시선을 온몸에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 움직였다.
이런 생활이 한두 달 지났을 즈음, 장날과 축제가 겹친 9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이날따라 트랜트리지에서 온 사람들도 여느 때보다 더 흥겨워하고 있었다. 일 때문에 늦은 테스는 친구들이 떠난 한참 뒤에 혼자서 출발했다. 해가 막 지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9월의 저녁 무렵 저녁놀과 푸른색이 뒤섞여 신비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려는 어슴푸레한 대기 속을 테스는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어둑어둑할 때 체이스버러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축제일과 장날이 겹친 것을 알았다. 간단히 몇 가지 물건을 산 트랜트리지에서 농부들을 찾아 다녔다. 처음에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거래 상인의 집에서 저희들끼리만 하는 비밀 무도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상인은 건초와 토탄을 매매하는 사람으로, 그의 집은 거리의 한쪽 구석 으슥한 곳에 있었다. 그녀가 길을 찾고 있을 때, 길 한 모퉁이에 서 있는 더버빌을 발견했다.
"아, 아가씨 아냐? 이렇게 늦게 여긴 웬일이야?"
그녀는 길동무를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잘 가."
청년은 뒷길로 들어가는 테스의 뒤에서 소리쳤다. 건초 상인 집 근처에 오니까 뒤쪽 어느 집에서 릴 이란 무도곡을 켜는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는데, 춤추며 떠드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춤추며 돌아가는 소리가 음악을 누르는 것이 상식인데도 음악 소리만 들리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대문이 열려 있어서 어둠 속이지만 눈이 미치는 데까지는 집안을 통해 뜰 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따라 외딴집이 있는 곳까지 갔다. 밖에서 들리던 음악 소리는 바로 그 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집은 창이 하나도 없는 건물로써 창고로 쓰고 있었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흔들리는 걸 봤을 때 처음에는 등불 아래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외딴집 안에서 일어나는 구름 같은 먼지가 촛불에 반사된 것임을 알았다. 먼지에 반사된 불빛으로 입구의 모습이 마당의 넓은 어둠 속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까 얼굴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가득한 먼지 속에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춤을 추고 있었다. 바닥엔 토탄 가루와 다른 물건들의 가루로 된 찌꺼기가 발목까지 쌓여서 그들의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소란하게 춤추는 데 따라 바닥의 먼지가 일어나 창고 속을 마치 구름이나 안개가 낀 것처럼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곰팡이 냄새가 짙게 풍기고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체온과 땀 냄새가 범벅이 되어 식물 가루와 사람의 몸이 한 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활기 있게 춤추는 사람들의 기분에 비하면 처음으로 켜는 바이올린 소리는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그들은 춤을 추다가도 먼지 때문에 기침을 하고, 기침을 하고 나선 웃어댔다. 쌍쌍이 뛰노는 그들의 모습은 높이 매달린 희미한 등불처럼 겨우 분간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정욕의 신이 요부신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염소신이 셀 수 없는 목동신과 맴도는 것 같기도 하며, 또 여성신의 품에서 도망치려다간 다시 붙들리는 것같이도 보였다.
그들은 가끔 신선한 공기를 쐬려고 짝을 지어 문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문간으로 나오니까 희미하던 모습이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얼굴로 바뀌었다. 소박한 트랜트리지 마을 사람들이 두세 시간밖에 안 되는 짧은 동안에 이토록 미친 사람들처럼 변할 수 있을까. 몇몇 술에 취한 사람들은 벽에 기대 놓은 긴 의자나 마른 풀단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사람이 테스를 보고 아는 체했다.
"아가씨들은 루스 홀 에서 춤추기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남자 친구를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해요. 또 그 집에선 손님들의 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에 문을 닫아 버릴 때가 많죠. 그래서 우리는 술을 사다가 여기서 노는 거요."
"그런데 집에 돌아갈 사람은 없습니까?"
테스는 약간 걱정스럽게 물어 봤다.
"이제 거의 끝날 때가 됐습니다. 이번이 끝에서 둘째 번 춤일 테니까요."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릴 곡은 끝나 가고 있으나, 그만 하고 돌아가려는 사람과 더 놀다 가려는 사람으로 나뉘어서 한곡을 더 추기로 했다. 테스는 이번이야말로 끝나겠지 생각했으나 춤은 또다시 계속됐다. 그녀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으나, 그렇다고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새삼스레 혼자 갈 수도 없었다. 오늘은 들뜬 축제 분위기 때문에 여자를 노리는 건달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리 경계할 수 있는 위험이 두렵고, 갑자기 부딪치는 사건을 겁내고 있었다. 말로트 마을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는 그처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굴은 땀에 젖고 커다란 밀짚모자를 머리 뒤로 젖혀 슨 청년이 기침을 하면서 테스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그의 모자 테는 마치 성자 후광처럼 등불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안절부절 할 건 없어요. 바쁜 일도 없잖아요? 내일은 일요일이겠다, 교회 가는 시간에 낮잠을 자면 될 것 아니오. 자, 한 번 추지 않으시렵니까?"
그녀가 춤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이곳에서 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분위기는 무르익어 춤은 더욱 열정적으로 되어 갔다. 구름 기둥 같은 먼지 속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곡에 맞지도 않은 엉뚱한 줄을 퉁기거나, 손이 빗나가기도 해서 음악은 가끔 엉망이었다. 그러나 춤추는 사람들은 불협화음의 리듬 따윈 아랑곳없이 정열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좀처럼 춤의 상대를 바꾸지 않았다. 왜냐하면 파트너를 바꾼다는 것은 그들 중 누군가가 짝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싫증을 느끼지 않는 한 원래의 상대와 그 기분을 그대로 끌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춤만이 인생의 전부인 양 모든 짝과 잘 어울려 황홀한 듯 춤을 추고 있엇다. 그때 별안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쌍의 남녀가 바닥에 넘어졌다. 그 위에 건초더미가 쓰러지고, 뒤따라오던 다른 한 쌍이 걸려서 또다시 그 위에 겹쳐 쓰러졌다. 창고 안의 가득 찬 먼지 위에 겹겹이 먼지가 일고, 그 속에서 뒤엉켜 뒹구는 사람들의 팔다리를 볼 수 있었다.
"집에 가면 혼날 줄 알아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그 속에서 넘어지게 한 남편한테 소리치는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는 결혼한 지 오래된 부부들도 자신들의 애정을 확인이라도 하듯 자주 어울려 춤을 추었다. 마당의 어둠 속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테스의 등 뒤로 들려오고, 그 소리는 창고 안에서 낄낄대는 웃음과 뒤섞였다. 그녀가 뒤돌아보자 빨간 담뱃불이 보였는데, 바로 알렉 더버빌이 홀로 서 있는 것이었다. 청년이 부르자 테스는 마지못해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가씬 여기서 뭘 하고 있어?"
그녀는 집에서 늦도록 일하고, 또 길동무를 찾아 오래 헤매느라 너무 피곤했으므로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밤길이 무서워 함께 갈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들은 아직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이젠 더 기다릴 생각이 없어요."
"그렇고말고, 더 기다릴 수야 없지. 오늘은 내가 타고 온 말 밖에 없으니까, 당신이 루스 홀 로 온다면 마차를 대절해서라도 집까지 바래다주지."
테스는 그 말에 귀가 솔깃했으나 그에 대한 불신감이 아직 남아 있어서 늦더라도 친구들을 기다렸다가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친절은 고맙지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사양했다.
"내가 그들을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아마 지금쯤 나를 찾고 있을 거예요."
"좋습니다. 도도한 아가씨.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나도 급히 돌아가야 할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저 사람들은 웬 법석들이야."
그가 밝은 곳으로 나가진 않았으나, 어떤 사람은 더버빌을 알아봤다. 청년이 그곳에 있는 것 알자 마을 사람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시간을 살피는 듯했다. 청년은 담뱃불을 다시 붙여 문 채 어둠을 가르며 몸을 움직였다. 트랜트리지 마을 사람들은 함께 출발하기 위해 다른 마을 사람들과 떨어져 한 곳에 모였다. 모든 짐과 바구니도 한군데로 모았다. 준비가 끝나고 30분쯤 지나자 교회의 종이 11시 15분을 알렸다. 그제서야 많은 사람들은 언덕으로 뻗은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해 걸었다. 하얀 모래땅이 3마일이나 계속되는 이 길은 달빛을 받아 오늘따라 더 유난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테스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술을 많이 마신 남자들은 시원한 밤바람을 쐬면서도 몸을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살결이 검고 욕지거리를 잘하며 얼마 전까지도 더버빌과 사이가 좋았던 카 다치(스페이드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있는), 다이아몬드의 여왕이란 별명을 가진 그녀의 동생 낸시, 그리고 무도장에서 넘어진 새색시 등 남자 뺨칠 만큼 흐느적거리는 그녀들의 술 취한 걸음걸이는 절로 웃음이 나왔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정상적인 사람의 눈에는 그녀들의 술주정이 고약하게 보였지만, 그들 자신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독창적이며 깊이가 있는 사상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하늘이라도 날 듯한 기분으로 걷고 있었다. 즉 자신들은 자연과 한 덩어리가 되어 세상을 이루었고, 규모 있고 즐겁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이나 별같이 의기양양했고, 달과 별까지도 그들처럼 정열에 불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테스는 아버지의 술주정을 뼈저리게 겪었기 때문에, 그들의 꼴을 보자 눈부신 달빛의 감흥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 동행 할 수밖에 없었다.
큰길에서부터 서로 흩어져서 걷고 있었는데, 맨 앞에 가던 사람이 농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려고 애쓰는 동안 다시 한군데로 몰렸다. 문을 열려던 사람은 스페이드의 여왕이란 바로 카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드릴 잡화와 자기 옷감, 그밖에 일주일 동안 쓸 다른 물건들을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바구니는 크고 무거웠다. 그녀가 두 팔을 허리에 버티고 걸을 때마다 바구니는 중심을 잃고 떨어질 듯 흔들거렸다. 일행 속에서 어떤 사람이 갑자기 소리쳤다.
"어머 카 다치.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뭐지?"
모두가 카를 쳐다봤다. 얇은 웃옷을 입은 그녀의 등에는 밧줄 같은 것이 허리 쪽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중국 사람이 머리를 땋아 내린 것 같았다.
"머리칼이 흘러내린 거야."
하고 다른 여자가 말했다. 그건 머리칼이 아니었다. 바구니에서 천천히 흐르고 있는 물줄기였다. 그러나 잔잔한 달빛 아래 그것은 마치 매끄러운 뱀처럼 반들거렸다.
"이건 당밀이야."
자세히 보던 부인이 덧붙였다. 사실 그건 당밀이었다. 카의 할머니는 그걸 무척 좋아했다. 양봉을 해서 벌꿀은 많았으나, 당밀을 더 먹고 싶어 하므로 그녀는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사 가지고 가던 길이었다. 그녀가 서둘러 바구니를 내려 보니 당밀이 든 병이 깨어져 있었다. 그때 그녀가 지은 표정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큰 소리로 웃었다. 머리끝가지 약이 오른 카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기 혼자 처리하기 위해 막 일행이 가로질러 가려는 밭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잔디 위에 벌렁 누워서 등을 좌우로 흔들어 비비기도 하고 팔꿈치를 땅에 대고 몸을 끌어올리기도 하면서 웃옷의 얼룩을 떨어 버리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점점 더 높아져 갔다. 카가 하는 짓을 보고 배꼽이 빠지도록 웃던 그들도 맥이 풀려서 농장의 문과 기둥, 지팡이 등에 기대섰다. 이제껏 침묵을 지켜 오던 테스도 그들의 소란한 소용돌이 속에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생각지도 않은 불행을 가져왔다. 카는 술이 취하도 않은 테스가 다른 사람들보다 큰 소리로 웃는 것을 보자, 오랫동안 쌓였던 그녀에 대한 시기심이 머리를 쳐들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카는 벌떡 일어나 증오의 대상인 테스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이 왈패 같은 년아, 잘도 비웃는구나."
"남들이 웃는 걸 보니까 참을 수 없었어."
그녀는 아직도 킥킥 웃으면서 사과했다.
"네가 그 남자의 사랑을 받아 지금은 제일인 줄 알겠지만, 잠깐만 기다려. 잠깐만 기다리라니까. 너 같은 년 둘이 덤벼도 문제없단 말야. 날 좀 봐. 자, 맛을 좀 톡톡히 보여 줄 테니."
테스가 떨고 있는 앞에서 피부가 검은 여왕은 웃옷을 벗어 젖혔다. 마을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린 원인이 웃옷에 있으므로 그녀는 벗어 던지면서도 쾌감을 느꼈다. 드디어 그녀는 토시토실하게 살이 오른 목덜미와 어깨, 그리고 팔을 달빛 아래 드러냈다. 기름이 흐르듯 반질반질하고 아름다운 몸집은 마치 프락시델레스의 작품 같았다. 그것은 피둥피둥하고 건강한 시골 아가씨의 건강한 아름다움이었다. 카는 주먹을 불끈 쥐고 테스에게 싸울 듯이 대들었다. 테스는 당당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게 덤벼도 당신 같은 사람하곤 절대로 싸움 안 해요. 당신이 그런 여자인 줄 알았다면 이따위 하찮은 사람들과 같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여러 사람을 한데 묶어서 말한 것 같은 이 말로 인해 다른 사람들까지도 재수 없다는 듯 테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특히 카에게 의심을 받을 만큼 더버빌과의 관계 더버빌과의 관계가 수상한 다이아몬드 여왕은 카와 함께 테스를 공격했다. 평소에 얌전하던 대여섯 사람의 여자들도 춤추던 흥분이 아직 남아서 그런지 들뜬 기뿐으로 그들과 장단을 맞췄다. 테스가 까닭 없이 욕먹는 것을 안 여자들이 남편이나 애인들은 그녀의 편을 들어 화해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싸움만 더 번지게 할 뿐이었다. 테스는 약도 오르고 창피하기도 했다. 돌아가야 한다는 걱정 따윈 까마득히 사라지고, 지금은 오직 될 수 있는 대로 이곳에서 속히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자기를 공격하던 여자들 중에서도 착한 사람은 내일이면 후회할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일행은 이제 모두 들판 안으로 들어섰다. 테스가 그들에게서 빠져나가려고 뒷걸음질치고 있을
때, 마침 길옆으로 두른 담장 한쪽에서 발자국 소리도 없이 말을 탄 사람이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의 일행을 훑어보던 그 사람은 바로 알렉 더버빌이었다.
"대관절 어찌 된 영문이야?"
청년이 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을 간단히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청년 역시 어떤 대답을 듣기 위해 물어 본 것도 아닌 듯했다. 그는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떠드는 소리를 들었으므로, 조심스레 다가와 그들이 하는 짓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테스는 일행과 떨어져 문 가까이 서 있었다. 청년은 그녀에게 몸을 구부려 속삭였다.
"자, 빨리 내 등 뒤로 올라타요. 저 떠들어대는 무리들을 순식간에 앞질러버릴 테니까."
그녀는 기절해 넘어질 것만 같았다. 여자들이 싸움을 걸어 왔을 때 그녀의 신경은 극도로 긴장됐던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면, 이전에도 청년의 호의를 거절했듯이 역시 동행이나 친절을 거절했을 것이다. 쓸쓸한 밤길만이 그녀의 적이었던들 청년의 친절을 받아들일 리 없었을 것이다. 한 걸음 뛰어오르는 것만으로 적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를 승리로 바꾸어 버릴 수 있는 바로 그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대 청년은 친절의 손을 내민 것이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판단하여 문으로 올라가 청년의 발등을 밟고 그의 등 뒤로 말에 올라탔다. 다투기 좋아하는 술주정꾼들이 벌어지고 있는 일을 눈치 챘을 때엔 이미 두 사람은 멀리 어둠속으로 사라질 무렵이었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옷에 묻은 당밀도 잊어버린 채 다이아몬드 여왕과 술에 취한 새색시 옆에 서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멀찍이 사라져 버린 길 쪽을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테스와 청년이 함께 말을 타고 달려간 사실을 알지 못하는 남자가 그녀에게 와서 물었다.
"무엇들을 보고 있지?"
"호호호."
피부가 검은 카가 웃었다.
"히히히."
술 취한 새색시가 남편의 팔에 매달리며 웃고 있었고, 카의 어머니도 의미 있는 말을 덧붙였다.
"여우 굴에서 도망쳐 호랑이 잎으로 뛰어든 격이야."
술에 취하긴 했지만, 언제까지나 쉬쉬덕거릴 수만도 없었던 이 남녀들은 밭두렁 길로 발길을 재촉했다. 밤이슬을 흠뻑 맞은 그들의 머리는 달빛에 반사되어 우윳빛이 광륜이 그들 머리에 붙어 가는 것 같았다. 그 후광은 희미하게 빛나기 때문에 다른사람의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끝까지 그들의 머리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아름다운 경치와 신비로운 달빛, 그리고 술에 취한 그들의 정열이 포근한 대자연과 잘 조화되어 밤은 더욱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11
두 사람은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말을 달렸다. 테스는 위험을 벗어난 기쁨에서 청년을 의지하고는 있었지만, 왠지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말은 평소 그가 가끔 타는 거친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점에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지만, 자꾸만 또 다른 불안함이 더했다. 그녀가 말을 천천히 몰아달라고 부탁하자, 알렉은 순순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청년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때? 테스, 멋있게 빠져 나왔지?"
"네. 감사하지 않을 수 없군요."
"정말 고맙게 생각한단 말이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테스, 어째서 내 입맞춤을 언제나 거절하는 거지?"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가 봐요."
"그게 정말이야?"
"당신이 하는 짓을 이해할 수 없고, 불쾌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흥,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알렉은 그녀의 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는 테스가 무슨 말을 해도 태연한 척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아가씰 기분 나쁘게 했을 때, 왜 잠자코 있었지?"
"그 까닭은 더 잘 알고 있잖아요? 난 이곳에서 멋대로 행동할 수 없으니까요."
"내가 지나치게 치근거리면서 아가씨를 못살게 군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따금 그러신 적도 있어요."
"몇 번이나 그랬지?"
"여러 번이에요. 굳이 시치미 뗄 필요는 없어요."
"만날 때마다 내가 그러던가?"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초저녁부터 퍼지기 시작한 흐린 안개가 낮은 지면에 자욱이 퍼져서 그 일대를 덮어 버렸다. 그 때문에 달빛이 가려져 길은 어두웠다. 알렉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트랜트리지로 가는 갈림길을 훨씬 벗어났는데, 테스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주일 동안 새벽녘부터 해질 때까지 꼬박 서서 일을 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고단했다. 그런데다가 지난밤에는 3마일이나 되는 체이스버러까지 걸어갔고, 저녁도 굶으면서 3시간 동안이나 길동무를 기다렸다. 또 돌아오는 길엔 한참 동안 걸었고, 싸움 때문에 흥분했었다. 그녀가 잠시 깜박 잠이 들었을 때,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테스의 순간적인 방어심 때문에 말은 갑작스레 움직였고, 다행히도 말이 온순해서 비틀거리기만 했기 때문에 다행히 말에서 떨어지는 것은 면했다.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 난 단지 떨어지지 앉게 받쳐 주려고 했던 것뿐이야."
그녀는 의심쩍어 했으나,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미안한 태도로 상냥하게 말했다.
"불쾌하게 해 드려서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불쾌감이 사라지질 않어."
하고 그는 쏘아붙였다.
"이게 무슨 꼴이람. 너같이 하찮은 계집애한테 핀잔을 받다니, 날 뭘로 아는 거야. 석달이 다 되도록 나를 조롱하고 피해 다니며 창피만 줬지? 난 이제 더 참을 수가 없어."
"전 내일 집에 가겠어요."
"안 돼. 절대 보낼 수 없어. 한 번 더 말하겠는데, 나를 믿는다는 증거로 내 품에 안겨 보란 말야. 우리 둘밖엔 아무도 없어. 자, 어서. 우린 서로 잘 알고,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도 알지? 난 너를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해. 넌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너를 사랑해선 안 될 이유라도?"
테스는 급히 몸을 피하고 못마땅한 얼굴로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먼 산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난 몰라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난 모르겠어요."
"청년은 더 이상의 대답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은 채 테스를 끌어안았다. 그녀도 이젠 반항하지 않았다. 얼마 뒤 두 사람은 말 등에 가로 걸터앉아서 말을 몰아갔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아 주위를 살펴보니까 큰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낯선 조그만 샛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와락 겁이 났다.
"어머, 도대체 여기는 어디예요?"
"숲을 지나가고 있는 거야."
"어느 숲이죠? 큰길에서 많이 벗어났어요."
"체이스 숲의 일부야. 영국에서도 가장 오래 된 숲이지. 이렇게 멋있는 밤인데 좀 천천히 간다고 해서 나쁠 건 없잖아."
"어쩌면 당신은 계속 나를 실망시키는 거죠."
타이르는 듯한, 아니 원망하는 말투로 테스는 말했다. 말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위험도 있었으나, 그녀는 자기를 껴안고 있는 청년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잡아 젖히면서 빠져나오려 했다.
"아까 뿌리친 것이 미안해서 당신 원하는 대로 이렇게 그대로 있었어요. 그런데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이거 놓으세요, 내려서 걸어가겠어요."
"이것 봐, 날씨가 개었어도 혼자선 갈 수 없어. 사실 지금 우린 트랜트리지에서 몇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단 말야. 그리고 이렇게 안개가 짙은데, 숲속에서 길을 잃으면 어쩌지."
"그런 걱정일랑 마세요. 제발 내려 주세요. 여기가 어디든 상관없어요. 내려만 주세요, 부탁이에요."
"좋아, 정 그렇다면 내려 주지. 그러나 이렇게 으슥한 곳으로 테스를 끌고 온 이상, 안전하게 돌아가게 해 주는 것이 나의 책임이지. 짙은 안개 속을 여자 혼자 집을 찾아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사실은 여기가 어디쯤인지 나도 확실히 모르고 있어. 그러니까 말 옆에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하면 기꺼이 내려 주지. 내가 이 근방의 길이나 집을 찾아서 우리가 어디 있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면 테스를 붙들지 않겠어. 내가 돌아오면 길을 가르쳐 줄 테니까 그때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녀는 청년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강제로 입맞춤당한 불쾌함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그녀는 재빨리 말 등에서 내렸고, 청년은 반대쪽으로 뛰어내렸다.
"말고삐를 잡고 있을까요?"
"아냐, 그럴 필요는 없어. 오늘 밤엔 말이 지쳐 있으니까 잡고 있지 않아도 괜찮아."
알렉은 씩씩거리며 숨을 거칠게 쉬는 말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는 말머리를 숲으로 향하게 한 다음 큰 나뭇가지에다 고삐를 묶었다. 그리고 마른 풀이 쌓인 곳에다 그녀를 앉게 할 자리까지 만들어 주며 말했다.
"자, 여기 앉아. 가랑잎은 아직 습기가 차지 않았으니까 앉아도 괜찮을 거야. 말이나 지키고 있으면 돼."
그는 몇 발짝 걸어가더니 돌아섰다.
"그런데 말야, 오늘 어떤 사람이 당신 아버지한테 조랑말을 선사했더군."
"그가 바로 당신이지요."
더버빌은 머리를 끄덕였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에 감사를 표시해야 하는 어정쩡한 자신의 마음에 신경을 쓰면서 그녀는 소리쳤다.
"그런 일을 해 주시다니, 무어라 감사 표시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아이들에겐 장난감을 주었지."
"아이들에게까지 신경을 써주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녀는 감동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아무것도 주지 않은 편이 더 좋았을 걸 그랬어요. 정말이에요. 아무것도 받지 않는 편이."
"그건 무슨 까닭이지?"
"대답하기 곤란해요."
"테스 당신은 조금도 날 사랑하지 않는군."
"선물을 주신 것은 감사해요. 그러나 사랑한다고는..."
그녀는 자기에 대한 청년의 열정을 생각하자 말끝을 맺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자, 울음을 그치고, 여기 앉아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줘."
그녀는 그가 쌓아 준 마른 풀 더미 한복판에 순순히 앉았다. 그러나 자꾸만 몸이 떨려 왔다.
"추워?"
"네, 조금."
청년은 조심스레 그녀의 몸에 손을 대 보았다. 그러자 모든 것이 큰 물결 속에 가라앉듯이 온몸이 그녀에게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살결은 마치 솜사탕 같았다.
"이렇게 얇은 모슬린만 입고 있었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건 제 단벌 여름 나들이 옷이에요. 집에서 나올 때는 이 옷이 무척 따뜻했었는데 사실 이렇게 늦도록까지 말을 타고 돌아다니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9월의 밤은 기온이 꽤 내려가지. 가만 있자."
그는 자기가 입고 있던 가벼운 외투를 벗어 다정스럽게 그녀를 감싸 주었다.
"이젠 됐어. 좀 있으면 따뜻해질 거야. 그럼 테스, 내 빨리 돌아올 테니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준 외투의 단추를 끼워 주던 그는 안개가 짙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어디쯤인지는 모르지만 언덕을 올라가는지 나뭇가지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그의 인기척은 조그만 새의 바스락거림처럼 작더니만, 아주 조용해졌다. 차츰 달이 기울어지면서 희미한 빛마저 사라져 갈 때 사방은 완전한 어둠에 싸여 버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테스는 곤하게 잠이 들었다.
알렉 더버빌은 체이스 숲속의 어디쯤에 자기들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사실 그는 조금이라도 오래 테스와 함께 있고 싶은 욕심에서 달빛에 비쳐진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채 길가 표지판에 눈을 돌릴 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한 시간가량이나 돌아다닌 것이다. 고개를 넘어서 길이 잇닿은 골짜기로 내려가자, 눈에 익은 길가의 울타리가 보였다. 청년은 비로소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테스가 기다리는 쪽으로 향했다.
동이 틀 때는 가까웠지만, 달은 완전히 기운데다 안개조차 걷히지 않아서 체이스 숲은 두터운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도록 양팔을 앞으로 벌려 더듬으며 나가야만 했다. 이런 어둠 속에서 자기가 있던 장소를 바로 찾아내기란 매우 힘들겠다고 깨달았다. 청년은 몇 번이나 근방을 헤매던 끝에 바로 옆에서 말이 움직이는 소릴 들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자기의 외투 소매가 발에 걸려 움찔 놀랐다.
"테스."
하고 더버빌은 불렀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다만 희끄무레한 것이 자기 발 있는 곳에 보였다. 그것은 가랑잎 위에 누워 있는 테스의 흰옷이었고, 다른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더버빌이 몸을 구부리자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숨결이 얼굴 가까이 느껴지도록 더 몸을 숙였다. 그 뺨이 그녀의 뺨과 맞닿았다. 그녀는 곤히 잠들어 있었구, 짙은 속눈썹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어둠과 고요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이 머리 위에는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체이스 숲의 주목과 떡갈나무가 높이 솟아 있었다. 그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포근한 새벽잠을 즐기고 있었고, 그들의 주변에는 산토끼들이 눈치 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테스를 지키는 천사는 어디에 갔으며, 그녀가 순진하게 믿어 오던 하느님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얇은 비단결만큼이나 연약하고 티 없는, 이렇듯 아리따운 여자의 몸에서 마치 무슨 운명이기나 한 듯 왜 저 추잡한 무늬를 찍어야 하는지. 눈앞에 닥친 이 비극에는, 사실은 인과응보의 법칙이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틀림없이 테스 더비필드의 몇 대조 조상인자가 갑옷을 입고 싸움터에서 의기양양하게 개선했을 때, 그들 중 어떤 자는 시골 처녀들에 대해서 똑같은 방법으로. 아니 그보다 더한 거친 방법으로 욕망을 채웠을 것이다. 그러나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미친다는 건 신들을 위해서는 훌륭한 도덕률이 될지 모르지만, 보통 인간들에게 이런 일은 비난받을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론을 내세워 본들 그의 행동이 당연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테스의 고향 사람들은 어떤 일이든지, 더욱이 나쁜 일은 운명으로 일축해 버리는 일이 잦았다. 이런 사건의 억울함 또한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다. 트랜트리지 마을의 양계장에서 운명을 시험해 보려고 부모님 곁을 떠난 주인공 테스의 성격은 헤아릴 수 없는 사회의 모순으로 인해 완전히 변해 버렸다.
제2부 어둠의 세월
12
바구니는 무겁고 보따리는 커서 불편했지만 짐의 무게쯤은 문제도 아닌 양 테스는 계속해서 걸었다. 걷다가 힘에 겨우면 길가의 문이나 기둥에 기대서서 잠깐 쉬었다간 토실토실 살이 오른 팔에 보따리를 걸고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것은 테스 더비필드가 트랜트리지에서 온 지 넉 달쯤 되고ㅡ 또 체이스 숲속에서 밤을 지낸 지 20일쯤 되는 10월 하순의 일요일 아침이었다. 날이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 뒤쪽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황금빛 광채는 그녀가 가는 안쪽 산봉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 산은 그녀가 고향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길, 즉 넉 달 전까지만 해도 트랜트리지 마을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 오던 골짜기 사이와의 경계선이기도 했다. 이쪽에서 올라가는 오르막길은 가파르지 않고, 또 지형이라든가 경치 같은 것도 블랙무어 골짜기와는 퍽 달랐다. 양쪽에는 철도가 통하고 있어 서로 이어진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성격과 언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트랜트리지와 고향과의 거리는 채 백 리도 못 되는데도 굉장히 멀리 떨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향 사람들은 장사나 여행, 심지어는 사랑과 결혼까지도 북서부 지방 사람들과 했다. 한편 트랜트리지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정력이나 관심을 주로 동남부 지방 사람들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테스가 걷고 있는 고갯길은 6월 어느 날, 더버빌이 그녀를 태우고 난폭하게 마차를 몰던 바로 그 언덕이었다. 테스는 얼마 남지 않은 산꼭대기까지 쉬지 않고 단숨에 올라갔다. 그녀는 고갯마루에 서서 반쯤 아침 안개에 가리워진 정든 푸른 땅을 바라다봤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경치는 언제나 아름다웠지만 오늘따라 더욱 눈부셨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 경치를 본 뒤로는, 새가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는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음모가 숨어있다는 무서운 사실도 알았고ㅡ 그로부터 그녀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뀌어져 갔다. 고향에 있을 때의 순진하던 소녀와는 딴판으로 변한 테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 한참 동안 서 있다가 고개를 들어 올라온 길을 돌아다봤다. 마음이 괴로워 고향 마을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다.
조금 전 그녀가 힘들여 올라온 길고 하얀 비탈길에 이륜마차가 보였다. 한 남자가 마차와 나란히 걸어오면서 주의를 끌려고 테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별 생각 없이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잠시 후 그는 마차를 끌고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왜 아무도 모르게 도망쳐 온 거지?"
더버빌은 나무라듯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또 오늘은 일요일 아냐. 남들은 다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난 네가 없어진 걸 알고 이렇게 놀라서 허둥지둥 쫓아왔단 말이야. 저 말의 꼴을 좀 봐.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해. 너를 못 가도록 붙잡는 사람이라도 있어? 게다가 이런 무거운 짐까지 갖고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뭐 있어. 난 정말 미친 사람처럼 말을 몰고 왔어. 네가 정 다시 돌아가기 싫다면 남은 길이라도 태워 주려고 말이야."
"난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럴 줄 알았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좋아, 그럼 짐을 실어, 바래다 줄 테니까."
그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바구니와 보따리를 마차에 싣고 자리에 올라 더버빌과 나란히 앉았다. 이제는 더버빌이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그 사실이 그녀를 슬프게 했다. 더버빌은 반복적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대수롭지 않은 것을 화제로 삼으면서 그는 말을 몰았다. 지난여름 같은 길을 반대쪽으로 달리면서 테스에게 키스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사실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인형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그가 하는 얘기에 간단히 대꾸만 했다.
몇 마일을 달렸을 때, 조그만 숲이 나타나면서 말로트 마을이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가냘픈 흥분이 일더니, 한두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왜. 우는 거지?"
그는 쌀쌀하게 물었다.
"저 마을에서 태어난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디서든 태어나게 마련이지."
"난 안 태어났더라면 좋았어요. 아무 데서도."
"체, 시시한 소리. 트랜트리지가 싫다면 왜 왔었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온 건 아니지? 그렇지?"
"그건 사실이에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왔더라면, 또 진심으로 사랑했거나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면 지금처럼 내 자신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잠시 눈이 어두워졌던 것뿐이에요. 그 이상 아무것도, 또 달리 생각할 것도 없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다시 말을 잇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의 속셈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어요. 그러나 뒤늦게 알았을 땐 이미 일은 끝났던
거예요."
"그건 여자들이 늘 하는 소리지."
"어떻게 그런 뻔뻔스런 말을 하는 거죠."
그녀는 성급하게 머리를 돌리면서 소리쳤다. 깊숙이 숨어 있던 증오가 폭발하듯 그녀의 눈은 이글거리며 불타올랐다.
"당신을 마차에서 밀어 떨어뜨려도 시원치 않겠어요. 여자들이 늘 하는 그런 말을, 진심에서 하는 여자도 있다는 건 모르셨군요.“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잘 알겠어. 마음을 상하게 해서 미안해. 사과하지."
그는 말을 계속하는 동안 또다시 거친 말투로 변해 갔다.
"언제까지나 화만 낼 필요는 없잖아? 잘못에 대해선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책임지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요즈음처럼 자신이 번 돈 이외엔 리본 하나 살 수 없는 그런 엉성한 옷차림보다도, 더 훌륭하게 단장할 수 있단 말야."
그녀는 외고집으로 천성이 너그럽고 솔직해서 남을 무시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비쭉거리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받지도 않고 받을 수도 없어요. 당신의 욕망을 채워 주는 노예밖엔 될 수 없는 그런 짓은 절대로 할 수 없어요."
"그런 태도를 누가 본다면, 그야말로 틀림없는 더버빌 가문의 후손일 뿐 아니라 공주라고 생각할 거야. 하하하, 귀여운 아가씨, 난 더 할 말이 없어. 내가 나쁜 놈이지. 나는 나쁜 놈으로 태어났고, 또 그렇게 살아 왔으니까 틀림없이 나쁜 놈으로 죽고 말 거야. 그러나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지만 너에게만은 두 번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겠어. 만약 네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게 꼭 알려줘. 필요할 땐 언제든, 어떤 일이든 다 도와줄 테니까. 난 트랜트리지에 없을지도 몰라. 얼마 동안 런던에 가 있을 작정이야. 난 늙은이가 보기 싫어 죽을 지경이야. 그러나 나에게 오는 편지만은 연락이 될 거야."
그녀는 이제 이쯤에서 내려 달라고 말했다. 조그만 숲의 나무 아래서 그는 말을 세웠다. 더버빌이 먼저 내려서 그녀를 안아 내린 다음 짐도 옆에 내려놓았다.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하면서 그의 두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짐을 들고 떠나려했다. 알렉 더버빌은 그녀에게 몸을 굽히면서 나직이 말했다.
"이대로 그냥 헤어질 생각은 아니겠지? 이리 와."
"나를. 원하신다면."
그녀는 냉담하게 말하면서 그를 향해 얼굴을 치켜들었다. 형식적이면서도 아직 미련이 남은 듯한 태도로 알렉이 그녀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녀는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멀리 보이는 숲만 응시하고 있었다.
"자, 옛정을 생각해서 저쪽도."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뺨은 마치 길가에 있는 버섯처럼 축축하고 미끄러우며, 또 차가웠다.
"넌 나에게 키스해 주지 않는군. 단 한번도 해 준 적이 없어.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거지?"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절대로 사랑할 수 없어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양심이 아직 내게 남아 있어요. 만약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걸 고백함으로써 커다란 대가가 뒤따른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테스,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이군 그래. 아첨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슬퍼할 필요는 없어. 가문이야 좋든 나쁘든 이 지방에서 테스의 아름다움을 따를 여자는 하나도 없어. 이건 세상을 아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테스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말하는 거야. 당신이 현명한 여자라면 그 아름다움이 시들기 전에 세상 사람들에게 버젓이 보이려고 할 거야. 지금도 늦지 않으니 내게로 돌아오지 않겠어? 진정으로 말하지만, 이렇게 헤어지고 싶진 않아."
"돌아가지 않겠어요. 결코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기 전에 깨달았어야 했어요. 그 일이
있은 다음, 나는 굳게 결심했어요. 절대로 안 돌아가요."
"그럼 잘 가요. 내 넉 달 동안의 사촌 누이동생 안녕."
그는 날쌔게 마차에 올랐다. 고삐를 고쳐 잡더니 곧 붉은 열매가 달린 울타리 사이로 사라져
갔다. 테스는 그의 뒷모습을 보지도 않은 채 꾸불꾸불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이른 아침이라 태양은 겨우 산봉우리에 얼굴을 내민 채였고, 햇살이 피부에 느껴지지도 않았다. 부근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길 위로 쓸쓸한 10월과 깊은 슬픔을 간직한 그녀만이 걷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재빠르게 걸어오던 그 남자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미처 그 남자의 인기척도 느껴지기 전에, 안녕하십니까. 하고 남자가 인사를 했다. 마치 직공 같아 보이는 그는 붉은 페인트가 든 통을 들고 있었다.
"짐을 좀 들어다 드릴까요?"
사무적인 태도로 그가 말했다. 테스는 그에게 짐을 하나 건네주고 나란히 걸었다. 남자는 유쾌한 듯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안식일인데 아침 일찍 걷고 계시다니, 참 부지런하십니다."
"네."
"모두 한 주일을 마치고 쉬고 있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나는 다른 어느 날보다도 보람 있는 일을 안식일에 합니다만"
"그러세요?"
"토요일까지는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노력하지만, 안식일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이게 더 보람 있는 일이죠.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고 그는 다시 말을 덧붙였다.
"아, 참 저 난간에 잠깐 할 일이 있군요."
그는 길옆 목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끝납니다."
그 사람이 테스의 바구니를 들고 갔기 때문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가 하는 대로 지켜보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목장 난간 앞으로가더니 바구니와 페인트 통을 내려놓고 붓으로 페인트를 잘 섞은 다음 석 장의 널판으로 막은 목장 난간의 가운데 칸에 크고 네모나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읽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한 마디 음미하며 읽게 하려는 듯 글자마다 구두점을 찍어 가면서,
THY, DAMNATION, SLUMBERTH, NOT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제2장 3절
평화스런 정경과 숲의 쓸쓸한 빛깔, 지평선의 파란 하늘과 이끼 낀 목장의 난간 따위를 바탕으로 주홍색 글씨는 불붙는 듯 눈부시게 빛났다. 글씨는 스스로 부르짖고, 그 소리는 공간에 메아리 치는 듯했다. 종교의 전성시대에는 인류에게 더 없는 지표가 되었을 이 계명이 괴상한 모양으로 천하에 씌어진 마지막 모습을 본다면 어떤 사람들은 오오, 불쌍한 신학이로다. 라고 개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글은 그녀의 가슴에 파고들어 책망하는 듯한 무서움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분명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최근에 겪은 테스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일을 마치고 그는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멍청한 태도로 다시 나란히 걸었다.
"지금 쓰신 글을 그대로 믿으세요?"
그녀가 나직이 물었다.
"그걸 믿느냐고요? 내가 살아 있느냐고 물을 수 있어요? "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자기 잘못으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면"
그는 머리를 저었다.
"그런 중대한 문제를 나로서는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지난여름 내내 수백 마일을 돌아다녔죠.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니면서 벽이나 대문, 목장 난간 등을 가리지 않고 계명을 썼습니다. 그 계명들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읽는 사람들의 양심에 맡겼습니다."
"그건 너무 지독한 것 같다고 생각해요. 사람의 마음을 짓밟아 숨통을 막아 죽이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그 말들이 목적하는 겁니다."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아가씨는 내가 항구나 빈민굴에 붙이려고 준비해 놓은 정말 따끔한 문구를 읽어 보면
머리가 산란하게 될 겁니다. 그 문구들은 비록 시골에서 사용한다 하더라도 역시 훌륭한 교훈이 될 겁니다."
아, 저기 쓰러져 가는 회색 벽은 마치 난처하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아 보았다. 그 남자가 글을 반쯤 썼을 때, 테스는 그 의미를 깨닫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THOU, SHALT, NOT, COMMIT __
너희들, 간음하지 말지니라 의 앞부분
<출애굽기> 제20장
그 쾌활한 친구는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을 알고 붓을 놓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만약 아가씨가 이 귀중한 교훈의 설명을 듣고 싶으면, 충실하고 착한 목사가 오늘 저녁 아가씨가 가는 마을에서 자선 예배를 하게 되어 있으니 한 번 만나 보시오. 에민스터의 클레어라고 하는 분인데, 이전엔 나도 그분의 교인이었죠. 참 훌륭한 분입니다. 내가 아는 목사 중에선 설교를 제일 잘하시고, 이 일을 하게 된 것도 그분 때문이지요."
테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땅만 내려다보면서 다시 걸었다.
"시시하게, 하느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고는 믿어지지 않아."
그녀는 비웃듯이 중얼거렸다. 달아올랐던 얼굴도 많이 식어 있었다. 바로 눈앞의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눈에 띄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집에 도착하자 방금 아래층으로 내려와 껍질 벗긴 떡갈나무로 아침밥을 지으려고 불을 지피던 어머니가 뛰어나와 테스를 맞았다. 일요일 아침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이들은 아직 2층에 있었다.
"아니고, 테스가 아니냐."
"그럼 휴가로?"
"네, 휴가에요. 아주 긴 휴가를 받았어요."
"왜 그 청년이 잘 돌봐 주겠다고 안 하든?"
"그는 친척이 아니에요. 그리고 결혼할 생각도 없는 사람이에요."
어머니는 테스를 나무라듯이 쳐다봤다.
"얘야, 사실대로 말해 봐라."
테스는 어머니 앞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얘기했다.
"그래, 그런 일을 당하고도 넌 결혼하자고 매달리지 않았다니, 그렇게 물러나는 여자는 너밖에
없겠다."
"다른 여자들은 그럴지 모르지만, 저만은 그럴 수 없단 말이에요."
"니가 결혼을 하고 돌아왔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어디 있겠지."
더비필드 부인은 울화통이 터져서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너와 그 사람에 대한 소문이 이 마을까지 다 알려졌어. 그런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니. 니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집안 식구 생각도 좀 해 보면 어떠냐. 자, 봐라. 나는 노예처럼 일에서 헤어날 날이 없고, 아버지는 몸도 약한데다가 프라이팬에 기름이 낀 것처럼 심장이 그름으로 막혀 있지 않니.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좋은 소식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넉 달 전 너희들이 마차를 타고 떠나갈 때, 정말 난 잘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선물한 걸 봐라. 우리가 그의 친척이니까 그렇게 하는 줄 알았지. 친척이 아니더래도 너를 사랑하는 걸로 생각했단다. 그런데 결혼을 하도록 만들지 못하다니."
"알렉 더버빌과의 결혼이라니."
그는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껏 한마디도 말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청혼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테스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딱한 어머니는 알렉에 대한 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심정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자연스럽고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 그런 묘한 감정 때문에 돌아온 것이고, 그러한 기분에 자꾸만 빠져드는 자기 자신이 무엇보다 싫어졌던 것이다. 그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테스는 그가 두려웠다. 그 앞에서는 웬지 위축됐고, 그의 교묘한 수단에는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한때는 그의 열렬한 태도에 잠시 눈이 어두워져서 그가 하는 대로 굴복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야비함이 역겨워 도망쳐 나온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돌아온 이유의 전부인 것이다. 그를 죽도록 미워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테스에게 그의 존재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또 그녀의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그 청년과는 결혼할 수가 없었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면 좀더 몸조심을 할 걸 그랬구나."
"오 어머니, 나의 어머니."
당장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테스는 몸부림치면서 몸을 세워 어머니 쪽으로 돌렸다.
"어떻게 그런 걸 미리 알 수 있어요. 넉 달 전 집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린애였어요. 남자들의 속성에 대해서 왜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어째서 미리 주의시켜 주지 않았느냐 말이에요. 부잣집 아이들은 소설 등을 읽고 그들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방법을 알아요. 하지만 난 그런 걸 배우지도 못했고, 또 어머니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어요.
그녀의 어머니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널 좋아해서 어떻게 될 거라는 걸 네게 미리 말해 준다면, 거만하게 굴면서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젠 다 지나간 일이니 잊어버리자꾸나. 그렇게 되도록 이미 작정된 것이고, 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야."
그녀의 어머니는 앞치마로 눈물을 닦으면서 넋두리처럼 뇌까렸다.
13
테스 더비필드가 친척집으로부터 되돌아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이 소문은 고작해야 사방 1마일이 좀 넘는 이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 말로트 마을에 사는 학교 친구들이 찾아왔다. 감히 흉내도 못 낼 만큼 큰 성공을 거두고 돌아온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그들은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려 입은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들은 테스를 방 한가운데 앉혀 놓고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이모저모를 살폈다. 먼 일가뻘인 더버빌은 단순한 지방 유지와는 달리 신사인데다가 난봉꾼이며, 또 테스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트랜트리지 마을에서 들려왔다. 그녀의 가문이 가난해서 그런 관계를 불안하게 생각했으나, 일이 잘되어 가고 있다면 테스의 매력은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친구들은 그녀에게 깊은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래서 테스가 잠깐 몸을 돌렸을 때 나이 어린 처녀가 소곤거렸다.
"어쩌면 저렇게 예쁠까. 좋은 옷을 입으니까 더 예뻐 보여. 저 옷은 꽤 비쌀 거야. 그 남자가 사 준 건가 봐."
구석진 곳에 놓아 둔 찻잔을 끌어당기던 테스는 그녀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테스가 그 말을 들었다면 사실대로 얘기해서 친구들의 오해를 풀어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말을 들었다. 당장 결혼하게 될 줄 알았던 그녀의 소망은 헛되게 꺼져 버렸지만, 그가 딸에게 몸을 태우던 장면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다. 덧없고 보잘것없는 결과가 테스의 체면을 손상시킨다 할지라도 다시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머니는 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칭찬하는 허물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테스를 칭찬하고 부러워하자 그녀의 기분도 되살아났다. 저녁 무렵에는 친구들의 재잘거림으로 테스도 쾌활한 기분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대리석처럼 굳어져 있던 얼굴 모습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전의 활발한 걸음걸이로 움직이며 아름다운 자태를 남김없이 드러냈다. 자신의 경험을 좀 색다른 것이라고 인정하는 듯 선배 같은 태도로 친구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로버트 사우드의 시처럼 나 자신의 파멸을 사랑했다. 하는 심정은 아니었으므로 테스의 환상도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냉정한 이성이 되살아나서 어리석은 그녀의 약점을 비웃는 듯해 다시금 침울하게 되었다.
이튿날 새벽, 그녀가 눈을 떴을 때의 기분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한가롭던 일요일은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입고 있던 새 옷은 헌 옷으로 바뀌었고, 떠들썩하던 친구들도 모두 가버렸다. 천진하게 잠자는 동생들 틈에서 테스는 홀로 일어나 앉아 있었다. 그녀가 돌아옴으로 해서 일어났던 일시적인 소동과 들뜬 마음은 사라지고, 그 대신 누구의 도움도 없이 겪어야 할 숱한 일들만이 앞에 놓여 있었다. 테스는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죽어 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럭저럭 몇 주일이 지나자 마음도 안정되어 일요일 아침에는 교회를 찾게 됐다. 그저 겉치레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찬송을 듣고 옛 시편을 읽었다. 그녀가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민요를 잘 부르는 어머니에게서 유전된 것인데, 아무리 단순한 음악이라도 때로는 온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힘까지도 느끼는 것이었다.
청년들의 짓궂은 눈길을 피하려는 생각에서 그녀는 교회종이 울리기 전에 교회에 도착했다. 그녀는 노인들만이 들어가 앉는 아래층 헛간 가까운 맨 뒷줄에 자리 잡았다. 그 헛간에는 묘지 연장이 있고, 테스가 앉은 의자 바로 옆에는 관을 올려놓는 받침대도 있었다. 두서너 사람씩 들어와서 앞자리에 앉았다. 그들의 기도를 하지 앉으면서도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머리를 숙이기도 했고, 머리를 든 채 바로 앉은 사람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둘러봤다. 그때 찬송가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테스가 가장 좋아하는 합창곡이었으나 가사를 잘 몰랐다. 테스는, 작곡가에게는 하느님과 같은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합창곡속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의 찬송은 죽은 것 같은 그녀의 영혼을 일깨워 주었다.
사방을 둘러보던 사람들은 예배가 진행 중인데도 테스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자 서로 수군거렸다. 그들이 주고받는 얘기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짐작한 그녀는 마음이 상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동생들과 함께 쓰는 침실은 그녀가 숨어 사는 도피 장소 같았다. 두 칸쯤 되는 이 방안에서 그녀는 계절이 바뀌도록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바람이 부는 것, 눈보라가 치는 것, 비가 내리는 것, 그리고 찬란한 저녁놀과 둥근 보름달을 여러 차례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테스가 그 집에서 살지 않고 어디로 가 버렸다고 생각했다.
이 무렵의 테스는 어두워지고 난 다음에만 산책을 했다. 그녀가 쓸쓸함을 잊을 수 있는 곳은 숲속에서뿐이었다. 빛과 어둠이 골고루 어울려 있는 시간에는 낮의 피곤과 밤의 휴식이 잘 조화되어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자유를 느끼게 했다. 삶의 괴로움이 거의 자취를 감추는 때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녀는 어둠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인간 세계란 뭉쳐 있으면 무서운 힘을 발휘하지만, 산산이 흩어지면 가련할 만큼 힘이 없는 존재가 된다. 이른바 세상이라 일컫는, 인정도 없는 미물의 집합체인 인간들을 피하려는 것이 요즈음 그녀의 생각이었다. 이 쓸쓸한 골짜기의 숲속을 거니는 그녀의 조용한 발걸음은 그녀의 존재를 끊임없이 주위의 사물들과 결합시켰다. 어둠에 싸여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를 둘러싼 경치에서 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이 자연의 물체들이 서로 결합하여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란 심리적 형상에 지나지 않아서 사물이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겨울밤에 얼어붙은 나무 싹과 가지 사이로 몰아치는 돌풍이며 바람소리는 가슴 아픈 가책의 반증이었다. 비가 온다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막연한 도덕이란 존재가 그녀의 나약함을 깊이 슬퍼해 주는 표시 같았다. 그녀가 어렸을 때엔 흔히 말하는 도덕이란 것이 하느님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판단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낡아빠진 풍습에 근거하여 테스가 마음대로 만들어낸 이 생각은 그녀의 공상에서 생겨난 슬프고도 잘못된 창조물이었다. 그녀가 그런 생각 속에서 까닭 없이 무서워하는 도덕이란 도깨비 떼들이었다. 현실에서 피해 다니는 것은 도덕이란 도깨비 떼들이지 결코 테스 자신은 아니었다. 새들이 잠자고 있는 나무 사이를 거닐면서, 달빛 아래 토끼우리에서 뛰노는 토끼를 보면서, 또는 꿩의 보금자리가 있는 나뭇가지 아래 서서 테스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데, 테스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질책했다. 또한 그녀는 다른 사람과는 색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름이 없었다. 오랫동안 지켜 내려오는 사회의 관습을 그녀는 어기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법은 그녀가 그처럼 자기가 그 안에서는 색다르다고 상상하는 환경에ㅔ서는 무시당하는 법이었다.
14
짙은 안개로 뒤덮인 8월의 어느 새벽이었다. 밤새 깔린 짙은 안개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서 양털처럼 흩어지고 움츠러들어 골짜기나 숲속으로 숨어버렸다. 안개에 가려진 태양은 마치 묘한 감정을 지닌 사람의 표정 같았다. 사람의 모습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들판에서 이제 막 떠오른 태양의 모습은 마치 그 옛날 태양 숭배의 교리를 금방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 같았다. 이만큼 건전한 종교가 일찍이 세상에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장엄했다. 빛을 내고 있는 그 광채는 황금빛 머리에 상냥스런 웃음을 띠었으며, 부드러운 눈매의 하느님과도 같은 존재였다. 젊은이처럼 씩씩하고 의지가 있는 그 생물체는 흥미에 가득 찬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살은 덧창 틈 사이로 스며들어 선반이나 옷장, 그 밖의 다른 가구들 위에 벌겋게 단 부젓가락 같은 광선을 비추어서 아직 잡자고 있는 농부를 깨웠다.
그러나 이날 아침, 온갖 것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은 페인트칠을 한 두 개의 폭이 넓은 받침대였는데, 말로트 마을 바로 옆에 있는 누런 말밭의 한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것은 그 밑에 있는 다른 두 개의 받침대와 함께 오늘의 추수를 위해 간밤에 갖다 놓은 것이었다. 네 개의 받침대로 회전하는 말티스 식의 곡식 거둬들이는 기계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칠한 페인트는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강한 빛을 발하여 마치 용광로 속에 잠긴 것 같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마차나 기계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놓기 위해 밭 둘레를 따라 1미터 정도의 넓이로 밀을 손으로 거둬들였다.
동쪽 울타리 맨 위 그림자가 서쪽 울타리의 중간쯤에 비쳤을 때 한패의 남자 일꾼들과 다른 한패의 여자 일꾼들이 오솔길을 내려왔다. 이 두 패의 얼굴은 햇살을 받은 길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두 돌기둥 문 사이로 사라져 갔다. 이어서 밭 있는 쪽에서 귀뚜라미의 짝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추수하는 기계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세 마리의 말과 페인트칠한 목재로 만든 기계가 덜커덕거리면서 한 줄로 나가는 모습이 저 너머로 보였다. 한 사람이 기계를 끄는 말 위에 앉아 마부 노릇을 했고, 기계 윗자리에는 일을 돕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밭고랑을 따라 세 마리의 말이 끄는 추수하는 기계의 가로대는 천천히 빙빙 돌아 마차 전체가 저쪽 끝까지 나가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되돌아서, 갈 때와 같은 속도로 옆의 밭고랑을 따라 올라왔다. 맨 앞의 말머리에 단 반짝이는 놋쇠별이 고갯마루 턱에 제일 먼저 나타나고, 뒤이어 빙빙 도는 새빨간 가로대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추수하는 기계 전체가 나타나는 순서로 진행되고 있었다. 밭을 둘러싼 그루터기가 보이는 좁은 길은 추수하는 기계가 한 바퀴 밭을 돌 때마다 폭이 점점 넓어져 갔다.
해가 높이 솟아오름에 따라 밀밭은 차츰 그 범위가 좁혀져 갔다. 집토끼나 산토끼, 뱀이나 들쥐, 새앙 쥐들은 그 좁아져 가는 밀밭이 잠깐 숨을 수 있는 하루살이 거처일 뿐 뒤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 속에서 분주했다. 마지막 손바닥만큼 남은 밀밭도 추수 기계가 베어 버리면 마침내 들짐승들은 추수꾼들의 막대기와 돌멩이에 맞아 모두 죽고 마는 것이었다. 추수 기계가 한 묶음이 될 만산 밀포기를 베어 뒤로 떨어뜨리면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이 다발로 묶는다. 이 일은 대개 여자들이 맡아 하는데, 간혹 무명 셔츠를 입은 남자들도 섞여 있다. 그들은 가죽 띠로 바지를 허리에 졸라맸기 때문에 나머지 붉은 두 개의 단추는 소용없게 되어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 달린 두 개의 눈동자처럼 햇빛에 반짝였다. 그것은 마치 성난 눈동자와도 같았다.
그러나 밀 다발을 묶는 사람들 가운데도 가장 관심을 끄는 건 여자들이었다. 평범한 가정의 자리를 떠나 들판에서 움직이는 여인들을 볼라치면 자연과 어우러져 생기가 넘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밭에서 일하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여자들은 들판의 일부가 되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여자로서의 한계를 뛰어 넘어 자연의 요소를 빨아들여 그것과 동화되어 버린다고나 할까. 아가씨라고 부르는 편이 오히려 어울릴 만큼 젊디젊은 여자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펄럭이는 커다란 무명 모자를 쓰고 손을 보호하려고 장갑을 끼고 있었다. 어떤 여자는 연분홍색 재킷을 입었고, 어떤 여자는 소매 끝이 좁고 긴 크림색 옷을, 또 가로대에 칠한 페인트만큼이나 붉은 치마를 입은 여자도 있었다. 좀 더 나이든 여자들은 올이 굵은 갈색 작업복을 입었는데, 이 옷은 예부터 추수 때 입는 옷이었고, 들일엔 가장 적당했으나 요즘 젊은 여자들은 차츰 입지 않게 되었다.
오늘 아침엔 연분홍 재킷을 입은 여자한테 사람들의 눈이 집중됐다. 많은 여자들 중 그녀의 몸집이 탐스럽고 몸매가 가장 아름다웠다. 그녀는 모자를 깊이 눌러 썼기 때문에 밀단을 묶는 동안은 얼굴이 조금도 안 보였지만, 모자 차양 밑으로 한두 갈래 뻗어 나온 짙은 갈색 머리칼로 미루어 그녀의 피부색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여자들이 자주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녀의 태도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시계바늘처럼 단조롭게 밀단 묶는 동작만 계속했다. 이제 막 베어 놓은 밀대에서 한 줌씩 집어 왼쪽 손바닥으로 밀포기 끝을 탁탁 쳐서 가지런히 했다. 그러고 나서는 마치 애인을 끌어안 듯 허리를 낮게 구부려 장갑을 낀 왼팔은 단 밑으로 하고, 오른팔은 위로 하고는 무릎으로 받치면서 밀대를 끌어 모았다. 끈 양끝을 앞으로 당기고 무릎으로 밀짚을 눌러서 단으로 묶었다. 가끔 산들바람이 치마 끝을 펄럭이면, 그녀는 손끝으로 툭 쳐 내린다. 물소 가죽 장갑과 옷소매 사이로 뽀얀 팔이 드러나 보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루터기에 스친 자국이 근의 부드러운 살결에서는 피가 맺히는 것이었다. 가끔 일어나서 허리를 펴고는 비뚤어진 앞치마를 고쳐 입거나 모자를 바로 쓰기도 했다. 무엇에나 매달려서 하소연할 듯이 보이는 길게 땋은 머리와 크고 가만 눈동자를 가진 그녀의 둥글고 잘 생긴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파리한 뺨과 고르게 난 이빨, 그리고 붉으면서도 얄팍한 입술은 흔히 보는 시골 아가씨들의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더버빌이라는 가명의 테스 더비필드. 어딘가 이전과 달라진 듯하면서도 이전과 변함이 없는 테스였다. 자기 고향에 살면서도 나그네나 다른 곳에서 온 사람처럼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추수기에는 집에서 하는 일보다 바깥 일이 더 많고 수입이 좋으므로 오랫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그녀도 밖에 나가 일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다른 여자들의 동작도 테스가 하는 것과 비슷했다. 한 단씩 묶고 나면 그들은 쿼드릴을 하는 것같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이 지방의 풍습대로 열 단이나 열두 단씩 무더기를 지어 놓았다.
그들은 아침 식사를 한 후에 다시 일을 계속했다. 11시가 가까워졌을 때 그녀를 살펴본 사람이면, 일을 계속하면서도 재빨리 언덕 쪽으로 눈을 돌리는 그녀의 태도를 읽었을 것이다. 드디어 그 시간이 되자 여섯 살에서 열네 살쯤 된 한 패의 아이들이 그루터기만 남은 언덕 위로 나타났다. 테스의 얼굴은 조금 붉어지는 듯했으나 그대로 일을 계속했다. 그중 제일 큰 계집애가 어깨에 두른 숄을 땅바닥에 끌면서 인형 같은 것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긴 옷을 입힌 갓난아기였다. 다른 한 아이는 점심밥을 가져왔다. 추수꾼들은 일손을 멈춘 채 밀단을 쌓아 놓은 곳에 그대로 기대앉아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식사와 곁들여 서로 술잔을 권하기도 했다. 남들이 제각기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테스는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피해 밀단을 쌓아 놓은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앉았다. 그녀가 편안하게 자리 잡고 앉았을 때 토끼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허리층에 손수건을 꽂은 남자가 낟가리 너머로 그녀에게 술잔을 넘겨줬으나 이를 사양했다. 점심을 펼쳐 놓자 그녀는 동생을 부러 아기를 받았다. 아기를 풀어 줄 동생은 좋아서 맞은편 낟가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한테로 갔다. 테스는 꺼리는 듯한, 그러나 체념한 동작으로 단추를 끌러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 갔다.
가까이 있는 남자들은 다른 곳으로 얼굴만 돌린 채 담배를 피우고, 또 어떤 남자는 빈 술병을 아쉬운 듯 기울이며 토닥거렸다. 점신을 먹고 힘을 얻은 여자들은 얘기꽃을 피우기에 한창이었고,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기도 했다. 테스는 아기가 배불리 젖을 먹고 나자 무릎 위에 세운 채 먼 곳을 응시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이에게 격렬한 입맞춤을 했다. 경멸과 정열이 묘하게 뒤섞인 이 입맞춤에 아기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를 미워하면서 함께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역시 자식은 귀여운 거야.“
빨간 치마를 입은 여자가 말했다.
"그런 말은 이젠 하지 않을 거야. 누구나 저런 일에 익숙해지다니, 참 알 수 없어.“
누런 옷을 입은 여자가 대꾸했다.
"저렇게 되기까진 아무래도 말로만 추근거린 것 같지 않아. 작년 어느 날 밤에 말야, 체이스 숲속에서 여자가 흐느껴 우는 소릴 들은 사람들이 있대. 만약에 이웃 사람들이 그걸 봤다면 그 청년은 톡톡히 망신을 당했을 거야."
"글쎄....그 남자의 꼬임에 넘어갔는지, 적당히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야. 하고많은 여자 중에서 하필이면 저 꼴을 당하다니, 참 가엾어. 저런 변을 당하는 건 거의 예쁜 애들뿐야. 얼굴이 못생긴 여자는 교회처럼 안전하기 마련인가 봐. 안 그래, 제리?"
동의를 구하는 그녀의 얼굴은 과연 안전한 생김새였다.
꽃송이 같기도 하고, 푸른 것도 회색도 아니 크고 순한 눈을 가진 테스를 보면 누구든지 그녀의 불행을 동정할 것이다. 여러 가지 색을 섞은 것 같은 그녀의 검은 눈을 들여다보면 그늘 뒤에 그늘이, 빛 앞에 또 빛이 있는 것 같은 색깔이 끝없이 까만 눈동자를 둘러싸고 있다. 갑자기 떠오른 한 가지 결심에서 테스는 여러 달 만에 처음으로 밭에 나온 것이다. 혼자만이 겪어야 했던 온갖 뉘우침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지친 끝에 비로소 평범한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또 다른 출발을 해야겠다고 그녀는 마음먹었다. 과거는 과거로써, 그것이 설사 어떤 것이라도 가까이 존재하진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 그런 것들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그녀 또한 땅에 묻힐 것이다. 초목은 옛날과 다름없이 푸르고, 새는 노래하고 태양은 언제나처럼 지금도 빛나고 있지 않은가. 그녀를 둘러싼 낯익은 환경은 그녀의 슬픔으로 인해 어두워지지도 않았고ㅡ 그녀의 괴로움으로 뒤엉키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녀의 고집을 이토록 부드럽게 만든 것은, 자기가 이제껏 움츠리며 두려워하던 염려가 한낱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존재이고, 지금의 결과는 경험에 불과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녀의 존재란 한낱 스쳐 지나가는 이야깃거리 정도였다. 다만 용케 잘 참아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그러나 만약 무인도에 홀로 있다면 자신이 당한 일을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름 없는 아기의 어머니라는 것 외에 인생에 대한 경험이 없는 어머니의 처지라면, 그런 환경은 그녀를 절망케 했을까? 오히려 그녀는 그 환경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서 즐거움을 발견했으리라. 그녀의 불행은 사회적 관심에서 오는 것이지, 타고난 감정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다. 테스가 설사 어떤 변명을 한다 해도, 어떤 마음이 그녀를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해서 마침 밭일이 한창 바쁠 때 일하러 나가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고, 갓난애를 품에 안았을 때에도 사람들의 얼굴을 넌지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추수꾼들은 낟가리에서 부산히 일어나 팔다리를 힘껏 펴 보고 담뱃불을 껐다. 말들에게 사료와 휴식을 주기 위해 끌러 놓았던 빨간 기계를 다시 달았다. 급히 점심을 마친 테스는 동생을 불러 아이를 데려가게 한 다음 옷차림을 고치고 장갑을 꼈다. 다시 밀단을 묶기 위해 허리를 굽혀 일을 계속해 나갔다.
오전 중에 하던 것과 똑같은 일이 다시 저녁녘까지 계속되었다. 테스는 다른 추수꾼들과 더불어 어두워질 때까지 밭에서 일을 했다. 일이 끝나자 그들은 마치 좀먹은 타스카니 성자 상의 낡아빠진 금박 후광처럼 때마침 동녘 지평선 위로 떠오른 둥근 달을 벗 삼아 큰 짐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테스의 여자 친구들은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변해서 돌아온 처녀를 비웃는 민요를 한두 곡 다른 노래와 뒤섞어 부르긴 했지만 그녀의 처지를 위로도 하고, 다시 함께 일하게 된 것을 기뻐하기도 했다. 인생이란 얻는 것이 있는 반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온 마을에 경종을 울린 그 사건은 흥미 있는 얘깃거리가 됐으나, 친구들의 다정한 마음씨와 어울리는 가운데 테스의 슬픔은 가셔갔다.
그런데 새로운 슬픔이 어머니로서의 테스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집에 돌아오자 젖먹이는 오후부터 심한 열로 앓아 뉘어져 있었다. 그녀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이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사회에 대해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테스는 잊고 있었다. 그녀의 진실한 소원은 이 아이의 생명을 붙잡아 놓고, 그 죄를 이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걱정했던 것보다 빨리 이 조그만 육체의 죄인이 해방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기를 잃는다는 것이야말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 더욱 슬펐다. 그녀는 죄 때문에 화형을 당해야 하고, 그것으로 모든 일이 제대로 해결된다면 조용히 형장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을의 다른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테스도 성경을 많이 읽어서 간부 아로타와 아호리바에 관한 얘기를 잘 알고 있어서 어떤 결론이 그 얘기에 나오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똑같은 문제가 그녀의 젖먹이에게 나타나자 양상은 달라졌다. 귀여운 아기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의 영혼을 살릴 길이 없었다.
식구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 목사를 불러 와야겠다고 말했다. 마침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롤리버 주막에서 아버지가 막 돌아와 있었다. 자기는 이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의 후손이고, 테스가 그 명예에 흙탕질을 했다는 아버지의 완고한 생각은 술기운으로 한층 굳어 있을 때였다. 지금은 테스가 가문을 더렵혔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집안 일을 숨겨야 할 터인데, 목사를 불러들여 수치스런 집안의 사정을 알릴 수는 없다고 아버지는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문을 잠근 채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가족은 모두 자리에 들었다. 테스는 한없는 슬픔을 껴안으며 2층으로 올라가 자리에 누우니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자정쯤 됐을 때 아기의 병이 점점 더해 가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죽어 가고 있는 듯했다. 조용하고 편안하게. 그녀는 침대 위에서 괴로움으로 시달렸다. 벽에 걸린 시계가 둔탁하게 한 시를 알렸다. 온갖 공상이 활개치고, 불길한 억측이 거짓 없는 현실로 다가올 때였다. 세례를 안 받았다는 것과 사생아라는 두 가지 죄목으로 지옥의 맨 밑바닥 구석으로 떨어질 아이를 생각했다. 마치 마왕이 빵을 굽는 날에 솥을 달구기 위해 쓰는 삼지창 같은 갈퀴로 자기 아기를 올려놓는 장면을 떠올렸다.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얘기하는 여러 가지 기묘한 형벌까지도 머리에 계속 떠올랐다. 이처럼 무서운 생각들이 모두 잠든 이 형벌까지도 머리에 계속 떠올랐다. 이처럼 무서운 생각들이 모두 잠든 이 시간에 그녀를 심하게 괴롭혔기 때문에 잠옷은 땀으로 흠뻑 젖고,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침대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의 숨소리는 더욱더 가빠져서 테스의 마음을 아프고 슬프게 했다. 아이를 껴안고 아무리 입을 맞춰 봐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침대에서 내려와 미친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오,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가련한 아이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그녀는 간절하게 애원했다.
"하느님의 노여움이 풀리도록 저에게 어떠한 벌이라도 주시옵소서. 저는 기꺼이 달게 받겠습니다. 그렇지만 제발 저의 아기만은 가엾게 여기시여 당신의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옵소서."
그녀는 장롱에 기대어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를 올리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아. 이애는 어쩌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 구원받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말한 그녀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테스는 촛불을 켜서 한 방을 쓰고 있는 동생들을 깨웠다. 그리고는 세면대를 앞으로 끌어 낸 다음 세면대가 놓였던 자리에 가서 섰다. 주전자에 담긴 물을 세면대에 쏟고 동생들은 누나의 행동에 겁을 집어먹고는 점점 눈만 크게 뜬 채 그녀를 지켜봤다. 그녀는 침대에서 아기를 안아 올렸다.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성숙해 있지 않은 그녀가 낳은 아기를 테스는 갓난애를 안고 세면대 옆에 서고, 바로 아래 동생은 교회에서 집사가 목사에게 하는 것처럼 기도 책을 펼쳐 그녀 앞에 섰다. 이렇게 아이의 세례 준비는 끝났다. 흰 잠옷을 입고 허리께까지 곧게 땋아 늘인 까만 머리 단이 이상할 만큼 그녀의 모습을 드높게, 또 늠름하게 보이게 했다. 햇빛 아래 같으면 모조리 눈에 보일지도 모를 그루터기에 다친 상처라든가 피곤한 눈동자 등은 어슴푸레 비치는 다정한 촛불 아래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성스레 행하는 그녀의 태도는 비극적인 얼굴을 아주 다른 사람인 양 맑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무릎을 꿇고 둘러앉은 동생들은 벌겋게 된 눈을 껌벅이면서 놀라움에 참 몸짓으로 준비가 다 되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기하게 생각하던 동생이 물었다.
"테스 누나, 아기에게 정말 세례를 줄 참이야?"
테스는 진지한 태도로 그렇다고 대꾸했다.
"이름은 뭐라고 하지?"
그녀는 아직 이름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세례 준비를 하면서 <창세기>에 나오는 이름 하나를 생각해 냈다. 그래서 그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로 하고 즉시 행했다.
"소로우,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세례를 주노라."
그녀는 물방울을 뿌렸다. 방안은 숨소리도 멎은 듯이 고요했다.
"자, 모두 아멘 이라고 해요."
동생들은 시키는 대로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따라 했다. 그녀는 기도문을 쭉 외다가 우리는 이 아기를 받아 십자가의 표지를 그리노라 라는 구절에서 잠시 멈추고는 손에 물을 묻혀 아기 머리 위에다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나서 아기가 죄악과 세상과 또 악마와 더불어 용감히 싸워 그의 생명이 다하는 날에 충실한 하늘의 군병이 되기를 축원하는 일정한 기도문을 계속했다. 순서대로 형식을 갖춰 외어 가는 테스의 주기도문을 동생들도 한 구절 한 구절씩 따라 했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더듬더듬 외던 동생들은 마지막 구절에 이르자 집사만큼이나 큰 목소리로 아멘 을 따라 하는 바람에 방안의 고요를 깨뜨렸다.
세례의 효과에 자신을 얻은 테스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감사의 기도를 했다. 정신을 집중할 때 폭발할 듯 터져 나오는 대담하고 울리는 듯한 소리로 그녀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한 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을 가슴을 뒤흔드는 음성이었다. 믿음에 도취된 그녀의 모습은 은혜를 받은 듯 얼굴에는 밝은 빛이 떠오르고, 두 뺨은 붉게 물들었다. 마치 속세를 떠난 사람 같아 보였다. 테스의 눈동자에 조그맣게 반사된 촛불이 금강석처럼 반짝였다. 동생들 눈에는 누나가 점점 더 경건하게 보여서 감히 말을 붙일 엄두도 못 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우뚝 서 있는 탑처럼 보였고, 또 저희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무서운 존재같이 여겨졌다. 세상의 죄악과 악마에 대한 가련한 소로우의 싸움은 보잘것없는 운명을 지녔다.
먼동이 틀 무렵, 허약한 병사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잠에서 깨어난 동생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울부짖으며 다시 예쁜 아기를 낳아 달라고 누나에게 졸랐다. 세례를 주고 나서부터 느낀 마음의 안정은 아기가 죽었는데도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다. 한나절이 되었을 때에야 아기의 영혼에 관한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만약 이런 부당한 세례 흉내를 하느님이 인정하지 않거나, 또 정식으로 세례를 받지 않은 자는 천당에 갈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천당 따윈 없어도 좋고, 무시할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소로우는 하늘나라로 갔다. 사회의 규범을 무시한 세상의 불청객 사생아는 그렇게 간 것이다. 짧은 일생을 살다 간 아기에겐 해나 세기가 있음을 알 까닭이 없다. 다만 시골의 작은 방만이 그의 세계요, 일주일의 기후가 온 세상의 기후였다. 며칠 동안의 삶이 인생의 전부였고, 젖을 빠는 본능만이 그 아이의 지혜의 전부였다.
기독교 의식으로 아기를 매장하기 위해서 교의상 이 세례가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목사뿐인데, 교구 목사는 새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몰랐다. 해가 진 다음에 그녀는 목사를 찾아갔으나 집안까지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일 외출에서 돌아오는 목사를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목사를 다시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서슴지 않고 말했다.
"목사님, 무얼 좀 여쭈어 보려고 하는데요."
목사는 기꺼이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아기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과 임기응변으로 세례를 준 일까지도 목사에게 얘기했다. 그녀는 진지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목사님, 제가 행한 세례가 목사님께서 베푸시는 것과 똑같은 효력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순간 언짢은 목사는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떳떳한 모습과 신비에 가까운 부드러운 음성은 형식에 얽매인 신앙보다는 인간으로서 감정에 호소하였다. 사실 십 년 가까이 직업적인 목사 생활을 하면서도 아직 버리지 못한 그의 신앙에 대한 회의심을 그녀의 기품이 자극한 것이다. 성직자의 양심과 인간의 감정이 목사의 마음속에서 갈등을 일으켰으나 승리는 인간에게로 돌아갔다.
"사랑스런 아가씨, 그것은 조금도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시다면 그 아이를 기독교 의식으로 매장해 주시겠습니까?"
그녀의 재빠른 물음에 목사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아기가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세례를 주기 위해 한밤중에 그녀의 집을 찾아갔으나 거절당했다. 그것이 테스가 아니고 그녀 아버지의 거절이었음을 안 그는 테스의 곤란한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아, 그건 또 문제가 다릅니다."
"문제가 다르다뇨. 무슨 뜻이죠?"
"우리 둘만이 관계되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해 드리겠습니다만, 그렇게 따르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다."
"꼭 한 번뿐이에요, 목사님."
"글쎄, 안 됩니다."
그녀는 목사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목사님, 제발."
목사는 손을 뿌리치며 좌우로 머리를 저었다.
"전 그런 목사님을 존경하지 않겠어요. 교회엔 두 번 다시 안 나가겠어요."
"그렇게 지각없는 소린 하는 게 아닙니다."
"목사님이 해 주지 않더라도 죽은 아기한테는 마찬가질 거에요. 그렇죠? 성자가 죄인에게 말씀하듯 하지 마시고 인간적인 면에서 제게 조언해주세요."
목사는 그녀의 정성에 감동되어 역시 같은 대답을 했다.
"그건 차이가 없습니다."
테스는 아기의 시체를 담은 조그만 궤짝을 낡아빠진 숄에 싸서 한밤 중 묘지로 향했다. 돈 1실링과 맥주 한 병을 묘지기에게 건네지자, 볼품없는 묘지 한구석, 하느님이 배정한 땅에 그 아기는 묻혀졌다. 쐐기풀이 무성한 묘지에는 알 수 없는 무덤들이 즐비하였다.
어느 날 밤, 테스는 남의 눈을 피해 길이 험한 묘지에 다시 찾아왔다. 자기가 만든 조그만 십자가에 꽃을 담아 아기의 무덤 위에 꽂았다. 그리고 꽃 한 다발을 시들지 않도록 작은 물병에 꽂아 어머니의 마음과 함께 무덤 앞에 세웠다.
15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오랜 방황 끝에 비로소 지름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로저 애스캄은 말했다. 그러나 오랜 방황 끝에 지름길을 찾았다 해도 그때는 이미 지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도 없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렇다고 하면 경험이 우리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테스 더비필드의 경험 또한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을까. 오랜 절망과, 다시 그 절망으로부터 간신히 탈출한 그녀는 이제야 바로 서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지나간 그녀의 과거를 단순하게 이해해 줄 사람은 없었다. 만약에 그녀가 더버빌의 저택에 가기 전에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격언이나 교훈을 배워 자신 있게 처신했더라면 결코 이용당하는 일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훈이나 격언의 진리를 완전히 터득하여 필요할 때 이용한 다는 것은 테스뿐 아니라 누구한테도 불가능한 일이다.
겨울 한철 동안 그녀는 아버지 집에 머무르면서 닭털 뽑는 이로가 칠면조와 거위도 돌봤다. 또한 더버빌한테 받은 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아직도 옷장에 처넣어 두었던 옷으로 동생들의 옷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더버빌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바쁘게 일을 하다가도 그녀는 가끔 머리에 손을 얹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녀는 지난 일 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봤다. 트랜트리지의 캄캄한 체이스 숲속에서 있었던 파멸의 불행한 밤과 아기가 태어나던 날, 그리고 숨을 거두던 날을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됐던 날들을 차근차근 그려 봤다.
어느 오후, 아름다운 얼굴을 거울에 비쳐보고 있을 때 지금까지 지내온 날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새로이 맞는 그 시간 속에 기척도 없이 교묘하게 숨어 있는 죽음의 날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사라져 버릴 죽음의 날. 그날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날은 언제일까? 힘겨운 현실과 끈질기게 연계되어 있는 냉정한 그날을 해마다 겪으면서 한 번도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그녀의 일생 중에 마지막 날로 정해졌을 그날이 어느 주간, 어느 계절, 어느 해에 끼어 있는지 테스는 알지 못했다. 테스는 갑자기 복잡한 여인으로 변화했다. 깊은 사색은 그대로 얼굴에 나타났고, 슬픈 감정은 때때로 그녀의 음성에도 배어나왔다. 눈은 전보다 더 커지고 표정도 풍부해져서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남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지난 2년 동안의 숱한 시련에도 꺾이지 않은 여자로서의 굳센 성격으로 변화해 갔다.
요즈음 그녀는 남과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불행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또 말로트 마을 사람들 역시 지난 일은 거의 잊은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집에서 더버빌 가문의 친척 관계를 주장하고, 또 테스를 통해 어떤 밀접한 관계를 이루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오랜 세월이 지나 그녀의 날카로운 의식이 무디어지기 전에는 그곳에서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테스는 아직까지도 희망에 가득 찬 삶의 고동이 몸속에서 뜨겁게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아픈 기억 같은 건 묻어 둔 채 외딴 곳에 가서 살면 행복해질 것 같았다. 모든 과거와 슬픔을 잊을 길은 그것들을 깨끗이 매장해 버리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말로트 마을에서 떠나는 방법밖에 없다고 단정 지었다. 한 번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라는 말은 정조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일까. 그녀는 지나간 일을 숨길 수만 있다면 모두 감추고 싶었다.
새로운 생활을 꾸려 갈 기회를 찾지 못한 채, 그녀는 오랫동안 집에서 기다렸다. 유난히 화창한 봄날이어서인지 꽃봉오리 속에 움트는 생명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봄의 속삭임이 들짐승들을 깨우듯 그녀의 마음도 활동하고 싶은 간절한 충동을 느꼈다.
5월로 접어든 어느 날, 기다리던 소식이 마침내 날아들었다. 한 번도 만난 일은 없지만, 어머니의 옛 친구한테서 편지의 답장이 온 것이다. 편지 내용은, 여기서 남쪽으로 백 리쯤 떨어진 목장에서 젖 짜는 일에 익숙한 여자를 고용하여 여름 한철 같이 지내겠다는 것이었다. 바라던 만큼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지만, 그녀에 대한 소문이 퍼진 것은 아주 좁은 범위였으므로 그만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굳은 결심을 했다. 즉, 이제부터 시작할 새 생활에서는 알렉 더버빌의 생각은 말끔히 떨쳐 버리기로 했다. 오직 우유 짜는 일에만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테스의 심정을 이해하는 듯 어머니조차 더버빌 문제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인간의 모순 같은 것이기도 했지만, 이제 가려는 마을에 대한 관심 중의 하나는 그 지방이 공교롭게도 이전에 조상이 갖고 있던 영지에 가깝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어머니는 블랙무어 출생이었지만 조상들의 고향은 그 고장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기로 되어 있는 텔보데이스라는 목장은 더버빌 가문의 옛날 영지에 가까이 있었다. 목장 부근에는 그 당시 세도가 당당했던 증조모들과 남편들의 큰 가족 유골 안치소도 자리하고 있어, 목장에만 가면 그곳에 가 볼 수 있었다. 바빌론과 같이 멸망한 더버빌 가문의 옛 자취를 더듬어 볼 수도 있고, 또 죄 없는 어린 후손의 영혼도 그들처럼 조용하게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같았다. 또, 조상의 옛날 영지에 가 있는 동안 생각지도 않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나무의 수액이 가지를 타고 오르듯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용기가 그녀의 가슴에서 힘차게 솟아올랐다. 그것은 희망과 환희에 차서 다시는 패할 줄 모르는 본능을 안겨 주는, 그래서 절대로 사라져 버리지 않을 청춘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