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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4-2

5. 195114

통화에는 그날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만주 땅에는 눈이 하루걸이로 내리고, 내려쌓인 눈 위로 거친 바람이 휘몰아쳐 언제나 눈가루를 뿌옇게 일으켜 올렸다. 그래서 눈이 오지 않아도 사람들은 눈보라를 맞는 형국이었다. 거기다가 눈까지 내리게 되면, 하늘의 눈보라와 땅의 눈보라가 뒤엉켜 난무를 이루었다. 그건 경치로는 장관이었고, 사람의 기동에는 장애였다. 그들은 그런 눈의 소용돌이 속을 뚫고 통화 역에 나와 있었다. 김미선은 오래 전부터 속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원조와 이학송한테서 애써 눈길을 돌려 먼 데를 보려고 했다. 나는 당원이다. 그건 당의 명령이다. 그리고 나도 곧 뒤따라간다. 그녀는 이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며 자신의 가슴에 차오르는 눈물을 퍼내고 있었다.

그 결정은 갑작스럽게 내려졌다. 이원조가 고산진에 있는 박현영을 만나고 와서 서울행은 결정되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인민군신문에서 신문발행을 중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자들의 이동을 막았다. 그냥 신문도 아니고 교재의 성격까지 띠고 있는 신문이어서 그 이유는 타당했다. 그러나 이원조의 입장에서는 서울로 돌아가 해방일보를 다시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기자들의 근무는 임시라는 것이 묵계되어 있었다. 인민군신문과 이원조 사이에서 이틀 동안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 그러는 사이에 기자들의 마음은 불안하게 설렁거렸다. 인민군신문이 내세우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기자들의 심정은 이미 서울행으로 쏠려 있었던 것이다.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그건 신문발간과 상관없이 가슴 두근거리는 기쁨이고, 가슴 저려오는 환희가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서울을 떠나오며 뼈저리게 느꼈던 참담한 어둠이 찬란한 빛으로 바뀌는 환호였던 것이다.

마침내 서로가 동의한 최종결정이 내려졌다. 이학송 한 사람만 먼저 떠나고 나머지 기자들은 인원교체를 한 다음에 떠난다는 절충안이었다. 그 결정에 충격을 받은 것은 김미선이었다. 그녀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가슴도 그처럼 내려앉았다. 그녀가 마음을 의지해온 것은 바로 이원조와 이학송이었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이다 떠나고 말면.. 그녀는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암담함을 두 사람이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런 결정을 내린 이원조가 원망스러웠다. 어차피 다 한꺼번에 떠나지 못할 바에는 이학송도 남겨두고 가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학송만이라도 먼저 데려가는 이원조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이학송이 가진 특출한 능력 때문이었다. 사적인 감정을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이학송의 그 특출함은 인민군신문에도 절대 필요했던 것이다. 이학송은 인민군신문의 기사를 절반이상이나 혼자서 써내는 형편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쓴 기사도 그의 손질을 거쳐야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어떤 기사를 쓰든 파지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기사의 종류에 따라 문체까지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목을 뽑거나, 긴 글의 내용을 요약하는데도 남들의 생각을 언제나 저만치 앞질러 있고는 했다. 흡사 마술사 같은 폭넓고 다양한 그의 능력을 김미선은 그저 경이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리는 끝없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는 어떤 빛의 덩어리인지도 모른다고 김미선은 생각했다. 김미선은 그를 만나면서 비로소 인권과 능력이 구분되어야 하는 확실한 이유를 알았고, 같은 종류의 일을 하면서 능력자를 존중할 줄 아는 태도를 배웠다.

개찰이 시작되었다. 대합실 안이 갑자기 웅성거리며 활기가 차올랐다.

"김 동무, 당 중앙을 통해서 곧 해결할 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오."

밝은 얼굴의 이원조의 말이었다.

", 원로에 편히 가십시오."

김미선은 웃음 지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김 동무, 서울에서 만납시다. 기다리고 있겠소."

이학송이 엷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김미선은 이학송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다시 깨문 속 입술을 놓아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열면 말보다는 먼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던 것이다. 기어이 눈물이 후둑 떨어져 내렸다. 이러지 말자고 했는데... 그녀는 목젖이 아프도록 눈물을 삼키며, 금방 얼굴을 들 수 없게 된 난처한 입장을 생각했다.

"김 동무,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세요. 먼저 떠나서 미안하구만요."

김미선은 때마침 들려온 나이든 목소리에 구조되듯 고개를 들었다.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박 영감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니에요, 저도 곧 뒤따라갈 텐데요 뭘. 편히 가세요."

김미선은 머리칼을 걷어 올리며 웃었다. 해방일보 일행은 한 사람씩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김미선은 눈물 어린 눈으로 그 사람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이원조가 눈발 속으로 들어서며 뒤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김미선도 손을 마주 흔들었다. 박 영감도, 다른 사람들도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이학송 혼자서만 뒤돌아보지 않은 채 짙은 눈발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김미선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서너 발짝 앞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학송은 짙은 눈발 속을 계속 걸어가고만 있었다. 눈물이 어린데다 눈발이 짙어 이학송의 뒷모습은 금방 흐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나 이학송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람들 속에 뒤섞인 채 눈발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김미선은 그냥 주저앉아 목놓아 울고 싶도록 서운하고 야속하고 허망했다. 왜 그냥 가고만 것일까. 내가 보인 눈물에 기분이 상한 것일까. 혹시 이원조 선생한테 오해를 받을까봐 그런 것일까. 내가 보인 여자 모습이 주체스러워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도 나 같은 마음이라서 속이 아파 뒤를 돌아보지 못한 것일까.

"김 동무, 그만 돌아갑시다."

남아 있는 일행의 말이었다. 김미선은 줄줄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양쪽 손등으로 닦아내며 개찰구 저편을 다시 눈여겨 바라보았다. 이학송의 모습은 없고 눈발만 가득 차 있었다. 김미선은 차를 타고 돌아가면서도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왜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는지 그 연유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를 동료라기보다는 한 남자로 마음에 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날이면 날마다 위험한 고비를 몇 차례씩 넘기며 후퇴를 계속해야 했던 그 어는 대목에선가 그는 불현듯 커다란 산의 무게를 한 남자로 둔갑하여 가슴에 들어앉았던 것이다.... 박영감과 셋만이 남겨져 강계 길을 가다가 미군으로 앞이 막힌 것을 알고 초산 쪽으로 방향을 바꿔 잡을 때의 그 단호하고도 결연했던 모습...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고 얼마나 자신을 나무라면서, 그를 밀어내려 했던가. 마음은 바로잡힌 것 같았고, 그는 물러난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그와 헤어지는 마당에 맞닥뜨리게 되자 그 동안 자신은 감정의 속임수를 쓴 것뿐이며, 그는 끄떡도 하지 않는 산으로 가슴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죽은 지 삼 년. 어쩌면 자신은 남편의 초상을 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백색 테러에 죽어 시체도 찾지 못한 남편은 중간 간부다운 열정의 소유자였다. 남편의 외모는 이학송과 달랐지만 그 마음씀이나 식견 같은 것은 두 사람이 너무나 흡사했다. 처자가 있는 그를 소유하겠다는 욕심 같은 건 애당초 없었다. 사랑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혼행위의 합법성을 실행에 옮길 만큼 자신은 뻔뻔스럽지 못했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다른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 만큼 자신은 몰염치하지도 못했다. 그저 그가 옆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여자로서 빈 마음의 자리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부대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김미선은 마음을 수습하고 손거울을 꺼내 눈물자국을 지웠다. 이학송이 이곳까지 올 때처럼 그렇게 고생을 겪지 말고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기를 빌었다. 다음날인 십이월 이십사일 마침내 서울에는 시민 대피령이 내려졌다. 날로 심해지는 추위를 따라 불안감이 고조되어가던 전황이 그 본모습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영하 십오 도의 강추위가 계속되고 있던 서울은 금방 혼란의 열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지난 유월과는 반대로 방송과 가두선전도 "신속한 사전 대피"를 숨 가쁘게 알려 서울 탈출의 열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날 밤부터 피난 짐을 이고 진 사람들로 서울역과 용산역은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서로 밀고 밀치는 혼잡 속에서 이름을 불러대는 외침들, 서로 다투는 고함 소리들, 영문을 알 수 없는 아우성들, 아이들의 울음소리들이 뒤죽박죽되고,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는 호루라기 소리들이 쉴 새 없이 찢어져가고 있었다.

"여보, 빨리 피난짐 챙기시오."

민기홍은 대문을 들어서며 말하고 있었다.

"너무 늦길래 걱정했어요. 근데, 사태가 또 그리 급하게 됐나요? 피난 떠날 무슨 방법은 있어요?"

그의 아내는 다급한 목소리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묻고 있었다.

"사태는 아직 그렇게 급하진 않은 모양인데 미리미리 피난시키자는 거요. 그리고 신문사에서 내일 떠날 수 있도록 단체로 기차표를 구하기로 했소."

민기홍도 두 가지 대답을 이어서 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어딘가요?"

"아마 부산일 거요."

"어머! 그럼 또 거기까지 밀릴 작정인가요?"

민기홍은 방으로 들어서며 아내의 잘못된 말을 개의하지 않았다. 정부가 미리 "밀릴 작정"을 할 리가 없었다. 소심하고 세심한 아내는 말이 그렇게 빗나갈 정도로 마음이 동요되고, 겁먹고 있다는 증거였다.

"신문사야 어차피 안전이 보장돼야 하니까 그러는 것뿐이오."

"네에. 곧 밥상 들여올께요."

민기홍은 옷을 갈아입으며 시름 겨운 한숨을 자신도 모르게 내쉬었다. , 중이 개입되어 밀고 밀리는 이 공방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득이 어려운 채 마음만 어둡고 무거웠던 것이다.

"시장하신데 어서 드세요."

민기홍은 밥상으로 다가 앉았다.

"가두방송을 듣고는 곧 중공군이 들이닥치는 줄 알았지 뭐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정부가 정신차렸나보죠? 유월 일로 너무 많이 욕을 먹어서 말예요."

아내의 말에는 정부의 조처에 대해 고마워하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민기홍은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아내가 정부에 대해 불필요한 호의를 갖고 계속적으로 판단을 그르치게 될 것을 염려해서 입을 열기로 했다.

"그게 꼭 유월의 잘못 때문에 국민들을 위해 취해진 조처가 아니오. 그건 일종의 작전이오."

"네에?"

그는 놀라는 아내를 건너다보았다.

"그 조처의 일차적인 목적은 소개 작전이오. 서울을 비워 적을 궁지에 몰아넣자는 작전 말이오."

"아니, 그건 러시아가 나폴레옹한테 쓴 방법 아닌가요?"

배운 티를 내는 아내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자연의 악조건에다가, 점령지가 텅텅 비어 있으니 현지조달을 아무것도 못해 결국 나폴레옹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잖았소."

"소개를 시키다 보면 덩달아 피난도 되는 셈이니까 정부로선 그렇게 법석을 떨 만할 일이로군요."

아내의 말이 시큰둥해지는 걸 그는 느꼈다.

"그런 셈이오."

"근데 말예요, 포로가 되려면 중공군한테 포로가 돼야 살아난다는 소문이 쫙 퍼져 있는데, 그 사람들은 그리 인정도 있으면서 싸움도 잘 한다는 말이가요?"

"글세... 그런 소문이 퍼지고 있긴 하데, 하도 괴상한 말들이 많이 떠돌고 있으니 잘 모를 일이오. 그리고 사람들이 국민당 군을 물리쳤으니까 싸움을 못한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미군한테 있소. 미군들은 일단 후퇴를 하기 시작하자 너무 급하게 뒤로 물러서고 있는 거요."

"겁먹었나보네요."

"전 짐이나 어서 챙겨야겠네요."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싸지 마시오. 기차에 큰 짐은 실을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러죠."

민기홍은 쌀보다는 잡곡이 더 많은 밥을 아무 맛도 모르고 씹고 있었다. 그는 이미 어느 한쪽 편에 가담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처자식을 굶겨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어쨌든 간에 자신은 전시상황의 신문사에서 펜대를 놀리기 시작하면서 일방적으로 한쪽 편만을 들게 되었다. 전쟁은 정치의 적극적 수단이면서, 정치의 목적인 인간의 인간적 삶 자체를 파괴하는 괴물이었다. 전쟁의 기본은 적과 우방을 간단하고 명확하게 가르는 것이었다. 그 양분법 앞에서는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중도적 입장은 기회주의일 뿐이었고, 객관적 판단은 이기주의일 뿐이었다. 전쟁이 정치를 넘어서 역사라는 명분과 맥을 대고 있을 때 그런 결론은 더욱 선명해졌다. 민기홍은 기회주의자의며 방관주의자이며 허무주의자이고 이기주의자인 자신이 그나마 해체되어버리고 한쪽 가담되어 있는 초라한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것을 박차지 않고 주저앉아 있는 것을 체념주의나 패배주의라고 한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다음날 가족을 이끌고 집을 나선 민기홍은 전차를 타는 데서부터 고역을 치르기 시작했다. 서울역행 전차는 피난 짐을 싸 든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눈이 퍼붓고 있는 거리거리에도 커다란 피난 짐을 이고 진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거리의 모습이었다. 서울역은 물론 전날 밤보다 더 북새질을 쳐대며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광장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고, 새로 도착하는 전차마다 계속 사람들을 토해놓고 있었다.

"어머, 저 사람들! 서울시내 사람들이 전부 몰려나왔나 봐요."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기차를 못 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는 아내의 말에 민기홍은 약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저래봐야 만 명도 못되는 수요. 갑시다. 저쪽으로."

민기홍은 신문사에서 미리 정해놓은 집결지인 헌병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울은 역시 어쩔 수 없는 우익의 집합소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역사의 정당성이고 다수의 삶을 위한 혁명이고 다 필요 없이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지키려고 몸부림하는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 사는 도시가 서울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아무런 기득권이 없으면서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로 휩쓸리며 서울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 다만 공산주의가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고 이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민기홍은 자신의 의식 저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이런 식의 생각을 굳이 깃발로 꺼내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기합리화의 변명일 뿐이었고 조금 배웠다는 자가 자기를 위장하는 가증일 뿐이었다. 당면한 위험을 피하고 싶으면 그저 조용히 떠나는 것이 오히려 진실이었다. 서로 뒤엉켜 혼잡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속을 군인들이 둘씩 짝을 지어 헤치고 다니며 젊은 남자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들이 순순히 끌려가지 않는데다, 그 가족들까지 합세하여 군인들에게 맞서거나 대들었다. 결과야 뻔한 그 떼잡이판으로 혼잡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군인들이 왜 남자들을 저리 끌어가고 야단법석이죠?"

민기홍의 아내는 당황해서 물었다.

"아마 국민방위군을 뽑아가는 모양이오."

"국민방위군? 그게 뭔데요?"

"뭐 그런 게 있소. 애 잘 챙기고, 어서 갑시다."

민기홍의 대꾸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기색을 눈치 채고 입을 다물었다.

 

최인석이 속한 국민방위군부대는 대전을 거치고 영동을 지나 추풍령을 앞에 두고 있었다. 지대가 높아져가면서 추위도 혹독한데다가 바람마저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길에는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겨우 대오를 꾸며 걷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는 느린 율동이라도 하듯이 흔들거리고 비틀거렸다. 그들의 옷은 하나같이 구겨질 대로 구겨지고 때가 덕지덕지 끼어 넝마를 걸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목도리나 보자기나 천 조각으로 그저 추위를 막자고 가지각색으로 귀싸개를 한데다가 발에는 새끼줄이나 전깃줄로 감발을 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갈데없는 거지꼴이었다. 그들은 입성만 그렇게 남루한 것이 아니었다. 그 옷들 속에 가려진 몰골은 더욱 비참했다. 굶주림과 추위와 강행군에 시달려온 그들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눈두덩이 푹푹 꺼져 눈알만 퀭하게 드러났고, 메마른 입술은 부르터 갈라진데다가, 수염들은 거칠거칠 돋아나 있었다.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얼굴들은 설한풍에 부대끼느라고 푸릇푸릇 얼부풀어 터지고 살 껍질이 허물처럼 들떠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드러난 얼굴의 모습일 뿐이었다. 허술한 귀싸개에 감춰진 그들의 귀는 거의가 얼음이 박혔고 새끼줄이나 전깃줄로 감발한 발가락들은 동상이 걸린 데다 매일같이 무리를 해서 걷는 바람에 서로 씻기고 터져 진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군인들의 사정없는 닦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군이 느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 모두가 탈진상태에 빠졌고 발들이 다 그 지경인 탓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그나마 평소의 건강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최인석의 소대는 그 동안 서른일곱으로 줄어 있었다. 열셋이 병들어 죽고 얼어 죽었던 것이다. 나머지 아홉 개의 소대들도 거의 비슷한 사상자들을 내고 있었다.

"자아, ! 힘을 내, ! 저 고개만 넘으면 경상도야. 거기 가면 뜨끈뜨끈한 밥도 고깃국도 얼마든지 있어. 기운 내라고, 기운!"

장교가 긴 대열의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쟁쟁한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최인석의 귀에는 그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고 있었다. 소리가 일정하게 들리지 않고 불룩하게도 들리고, 홀쭉하게도 들렸다. 그의 청각만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각도 착각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의 눈에는 산들이 출렁거리고 있었고 길이 붕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몸은 심한 열로 들떠 있었다. 눈은 풀려 있었고 헤벌린 입으로는 숨을 쉴 때마다 목에 무엇이 걸린 것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고 두 다리는 심하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는 벌써 오래 전부터 자꾸 도망가려는 정신을 거머잡으려고 한다는 한 가지 생각밖엔 없었다. 그것은 곧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였다. 대열에서 떨어져나가는 것 곧 죽음이었다. 그 동안 그런 것을 숱하게 보아왔던 것이다. 그 죽음들이 얼마나 허망하게 버려지는지를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죽어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 돼...안 돼...집에...집에까지...앞의 산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뒤집히고 그의 허리가 허청 꺾이는 것 같다가 그대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의 뒷사람이 그에게 걸려 넘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몸을 가누었다.

"정지, 정지!"

뒷사람이 소리쳤다 그의 소리는 기운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금방 알아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밥, 휴식, , , 그런 것들뿐이었다.

"뭐야?"

군인이 뛰어오며 외쳤다.

"쓰러져 버렸소."

뒷사람이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중사가 카빈을 고쳐 매며 눈꼬리를 세웠다.

"모르겠소. 그냥 픽 쓰러졌소."

뒷사람이 여전히 힘없이 대답했다.

"거기 무슨 일인가!"

장교가 뛰어오고 있었다.

", 한명이 쓰러졌습니다."

중사의 힘찬 대답이었다.

"죽었나!"

급히 멈춰 선 장교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아직 확인 못했습니다."

"빨리 엎어!"

"!"

중사가 한 눈길로 주위의 장정들을 훑었다. 서너 사람이 쇠붙이가 자석에 끌리듯 그 눈길을 따라 쓰러져 있는 최인석을 바르게 눕혔다.

"숨쉬나 봐!"

장교가 명령했다. 눈이 감긴 채 입이 반쯤 벌어져 있는 최인석의 초췌하고도 창백한 모습은 얼핏 죽은 것처럼 보였다. 마땅찮은 얼굴의 중사는 마지못해 허리를 굽혀 귀를 최인석의 코 가까이 가져갔다.

"이거 끊어질락 말락, 아주 가늡니다."

"어디, 비켜봐."

장교는 그때서야 무릎을 꺾고 앉았다. 중사가 했던 것처럼 장교도 최인석의 코 가까이 갖다 댔다. 장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또 일 생기겠는데."

장교가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떻게 할까요?"

중사가 물었다.

"양쪽에서 부축해가지고 가다가 집이 나타나면 떨어뜨려놓고 가도록!"

"알겠습니다."

이미 실시해오고 있는 중환자 처리방법이었다. 정신을 잃은 최인석을 중사가 지명한 두 사람이 양쪽 팔을 하나씩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대열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대열을 따라 최인석의 두 발은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눈이라도 내리려는지 검은 구름은 낮게 내려앉고 있었고, 추풍령을 앞둔 길은 갈수록 기울기가 심해지고 있었다. 깊은 산의 겨울은 깊을 대로 깊어져 그 어디에서도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추운 적막만 그 끝을 모르게 깊었다. 그 산 속을 굶주리고 지친 대열이 느릿느릿 움직여 가고 있었다. 최인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처졌던 그의 몸이 더 처져 내렸다. 그의 팔을 어깨에 걸고 있던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그들의 놀란 눈은 똑같은 느낌을 담고 있었다. 다시 대열이 멈추었고, 두 사람은 최인석을 받쳐 잡았다. 땅바닥에 눕혀진 최인석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또 뭐야!"

중사가 뛰어왔다.

"죽었습니다."

최인석을 부축했던 한 사람이 말했다.

"재수 드럽게 없는 놈이군. 다 와가지고."

중사가 고개를 돌려 침을 뱉었다.

"또 무슨 일인가!"

장교가 뛰어왔다.

"결국 갔습니다."

중사가 대답했다.

"안됐군."

장교가 언짢은 얼굴을 하고는,

"땅이 얼어붙었으니 팔 수는 없다. 저쪽 아래에다 옮기고 눈을 모아다 덮어라. 육 소대 전원, 빨리 작업 끝내고 대열의 후미에 붙는다. 중사, 신속하게 지휘하라!"

장교답게 빠른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 알겠습니다."

중사는 뒤축을 모아 차렷 자세를 취해 보이고는,

"육 소대 전원, 열오해서 우측방행으로 이동!"

잽싸게 지휘명령을 내렸다. 최인석의 시체는 대여섯 사람들에게 팔다리가 들려 길옆의 약간 움푹한 곳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서른여섯 명의 사람들은 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눈덩이는 금방 최인석의 봉분을 만들었다. 그들은 자기네 소대의 열네 번째 희생자의 장례를 눈 봉분을 만들어 치르고 있었다.

"됐다, 그만. 출발이다!"

중사가 명령했다. 서른여섯 사람은 다시 네 명씩 줄을 맞춰 섰다. 그리고 혹한으로 얼어붙은 적막 속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최인석보다 사흘 뒤에 붙들려 서울을 떠난 송성일은 천안과 조치원사이를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 부대는 주먹밥일망정 점심도 굶은 채였다. 그들이 점심을 굶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동안 지방관공서들의 살림살이가 거덜나다시피 되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밀어닥치는 방위군에게 양곡권이라는 쪽지를 하나씩 받고 주먹밥이나마 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정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심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뿐만이 아니라 각 지방마다 할당된 방위군을 뽑아 경상도를 향해 남으로 내려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 경기도, 충청남북도 방위군들은 추풍령를 넘어가기 위한 남쪽 분기점인 대전을 향해 도보행군을 하고 있었다.

"중대장님, 저 앞에 마을이 하나 보입니다."

상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앞을 가리켰다.

"규모는?"

"아직 미확인 생탭니다."

"한 두어 명 보내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앞으로 뛰어간 상사가 부대를 경계하고 있는 사병 둘을 지목해서 명령을 내렸다. 송성일이 속한 인솔 장교는 그 나름으로 머리를 쓰고 있었다. 관청에 들어가 되지 않을 실랑이를 벌이며 기분만 상하기보다는 규모가 어지간한 마을을 만나면 거기서 직접 한 끼씩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민폐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장정들은 굶겨 혹한 속을 행군시킬 수 없는 일이었고, 정부가 발행한 양곡권을 이장에게 넘겨줘서 다음에 곡식을 받도록 하면 민폐가 될 리도 없었던 것이다.

"중대장님, 대강 오십 가구쯤 된다고 합니다."

상사의 보고였다.

"오십 가구라... 그럼 좀 무리 아닐까?"

장교가 상사를 옆 눈길로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한 집에 대강 팔구 명꼴인데 좀 잘사는 집에 더 배당을 시키고 하면 한 끼쯤이야 해결이 되잖을까 싶은데요."

상사는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은 눈치로 말했다.

"알았어. 일단 마을까지 가보도 결정하지."

그들의 부대도 벌써 동사자와 중병 낙오자 백여 명이 생겨 부대원이 사백여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인원이 줄어든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장교의 머리를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장교는 금방 머리를 내둘렀다. 열아홉의 동사자와 낙오된 중병자들을 생각하면 차마 못할 생각이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던 것이다. 추위에 못 견뎌 바짝 웅크릴대로 웅크린 채죽은 동사자들의 시체는 상상하기 어렵게 너무나 작았다. 똘똘 뭉쳐놓은 무슨 덩어리 같은 그 작은 시체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시체들은 팔이고 다리고 아무리 기운을 써도 펴지지가 않았다. 그것들은 꽁꽁 얼어 붙어버린 얼음덩이였다. 그 시체들을 땅에 묻어야 하는 것도 비감했지만, 중병자들은 아무 집에나 떠맡기고 떠나는 것도 비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건 인솔 장교로서 갖는 최소한의 책임감이면서, 인간으로서 갖는 양심의 아픔이었다. 중병자들은 거의가 추위를 이기지 못해 생긴 열병이었다. 감기에 걸리고, 기침을 심하게 토하고, 그러다가 몸이 불덩어리가 되면서 헛소리를 하거나 눈을 까뒤집었다. 그런 병세는 하루 이틀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는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약은 전혀 쓰지 못하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지, 날마다 강행군은 하지, 밤에는 맨바닥 잠을 자야지, 모든 것이 불난데 부채질이었다. 아무 집에나 떠맡겨진 그들이 얼마나 건강을 되찾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다 살기가 말이 아니지만, 한 끼라니까 어찌 해봐야지요. 다 하고 싶어 하는 고생들이 아닌데."

장교에게 양곡권을 받아 든 이장의 마지못한 말이었다. 경비병이 하나씩 딸려 장정들은 집집마다 분산되었다. 경비병이 모자라 두 집에 경비병 한 명을 배치하고 장정들을 한 집으로 몬 다음 그 옆집에서 할당된 인원의 밥을 해가지고 옮겨오게도 했다.

"여기 양곡권을 받아놨으니까 담에 세상 좋아지면 곡식을 되받게 될게요. 다 궁한 살림이지만 한 끼니까 어찌 좀 대접을 잘해드리시오."

이장은 집집마다 돌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 갑작스러운 일은 마을사람들에게 횡액이 아닐 수 없었다. 앞에 남은 긴 겨울을 살아내기 위해 거의가 곡식을 피 아끼듯 해가며 시래기죽을 끓이고 있는 형편에 장정 팔구 명의 밥을 알곡으로 지어내야 한다는 것은 눈 뻔히 뜨고 도둑맞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담에 세상 좋아지면" 하는 이장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나라라는 것은 그저 손해만 보일 뿐 언제 한번 그런 약속을 지킨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살 저며 내듯 아깝고 쓰린 마음으로 알곡을 축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장 눈앞에 있는 총 때문이었다. 전시에 총과 군인은 거역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였다. 한 끼 밥을 해내고 어서 그들이 마을에서 떠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입게 된 피해는 곡식만이 아니었다. 대부분 집이 좁아 방에 다 들어앉을 수 없게 된 방위군들은 마당에다 불을 피우고는 멋대로 짚단을 가져다 불꽃을 키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배짱 좋고 비위 좋은 사람들은 군인의 눈을 슬슬 피해가며 주인에게 솜옷을 내놓으라고 은근히 겁을 먹이는가 하면, 방을 차지하고 앉은 어떤 사람들은 아예 주인 몰래 횃대보를 들쳐 목도리나 옷가지를 슬쩍 훔쳐 넣기도 했다. 예정 없이 당한 일인데다가 마지못해 지어낸 밥에 별난 반찬이라고 있을 리가 없었다. 잡곡밥에 시래기 국, 김치가 고작이었다. 한 가지 반찬이 더 오르는 경우 동치미나 무말랭이무침 정도였다. 그러나 주먹밥 한 덩이씩으로 겨우겨우 끼니를 때어온 방위군들에겐 그것이 바로 진수성찬이었다. 모두가 미친 듯이 밥을 퍼 넣고 국그릇이며 반찬그릇들을 핥은 듯이 말끔하게 비워냈다. 그들의 그 게걸들린 모습들을 보고서야 주인집 식구들은 그들이 얼마나 굶주렸는가를 알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안쓰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우리 중대장님이 최고십니다."

"우리 중대장님 만셉니다."

마을을 떠나며 장정들은 큰 소리로 입들을 모았다. 행군 도중 잡담은 일체 금지였지만 그 말들만은 제지되지 않았다. 장교는 마음이 흐뭇했고 앞으로도 그 방법을 계속 쓸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교만이 특출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생각이란 다 비슷비슷한 것이어서 다른 인솔 장교들도 그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며칠이 못가 마을에서도 한 끼 밥을 얻어먹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큰길에서 가까운 마을들을 언제까지나 그런 시달림을 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번 이상 그런 일을 당한 마을에서는 이장이 양곡권을 내밀어 보이며 마을 곡식이 바닥났음을 입증했던 것이다. 모든 마을에서 국민방위군을 꺼리는 것은 양식을 축내는 탓만이 아니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들을 도둑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으름장을 놓아 옷을 얻었거나, 슬쩍 훔쳤거나 간에 얼어 죽은 것을 모면해야만 하는 그들의 절박한 사정 앞에서 그런 행위는 파렴치하거나 부끄러운 짓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 있고 배짱 좋은 행동으로 돋보였다. 교실 맨바닥에서 모두가 부들부들 떨고 앉은 가운데 몇몇 사람이 옷을 갖게 된 경위를 털어놓는 것은 그대로 무용담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 마을에 들어갔다 하면 너나없이 옷이고 목도리고 추위를 막을 것이면 무엇이든지 훔치기에 앞을 다투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을 손 빠르게 닭 모가지를 비틀어 품에 숨기기도 했고 무움막을 뒤져 주머니마다 무를 감춘 사람도 있었다. 송성일도 생전 처음으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 목도리와 개털 모자를 구하게 되었다. 송성일은 훔칠 때 가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 일을 일단 성공하고 나자 죄 의식은커녕 오히려 통쾌감을 느꼈다. 그건, 아 나도 해내고야 말았다는 자신감의 확인이었다. 모두가 그런 심정이다 보니 그들의 행위는 기회만 있으면 아무데서나 저질러졌다. 네댓 명이 가게로 몰려 들어가 앞에서는 물건을 사는 척 소란을 피우고 뒤에서는 물건을 훔쳐 넣었다. 고구마장수나 떡장수의 가난한 좌판을 그들의 굶주림이 구분할 리가 없었다. 어떤 불량기승한 사람은 무턱대고 좌판의 엿을 집어 으득으득 깨물며,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라 위해 목숨 바치러 전선으로 떠나는 국민방위군이다. 누구 덕에 편안하게 엿 장사 해먹고 사는 줄이나 아느냐" 하고 공갈을 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말썽이 생겨도 장교나 하사관들은 그다지 크게 탓하지 않았다. 그들은 탈주가 아닌 한 장정들의 그런 잘못을 적당히 보아 넘겼다. 그건 장정들이 당하고 있는 이중삼중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미안하게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마음은 그 다음이었다. 우선, 그런 잘못을 너무 심하게 닦달해서 이미 장정들의 가슴에 쌓여있는 불만을 자극하지 말자는 속셈이었다. 앞서간 부대에서 그런 것을 너무 심하게 다뤄 집단행동이 일어나 총질을 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라도 해서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아 목적지에 당도해 준다면 자신들의 인솔책임이 그만큼 가벼워진다는 계산도 하고 있었다. 장교나 하사관들의 그런 태도에 따라 방위군들의 자구책은 더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학교의 책상이나 걸상을 때려 부셔 불을 피우게도 되었다.

"사람 목숨이 더 중하오, 이따위 책상 걸상이 더 중하오."

"우리가 이 짓을 못하게 하려면 교실바닥에다 안 재우면 될 거 아뇨."

제지하는 군인들에게 장정들은 이렇게 항의하고 들었다. 장정들이 좀도둑질까지 해가며 배고픔과 추위에 맞서 싸우려고 발버둥 쳤지만 근본적으로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계속 허기에 지치고 추위에 떨었으며, 손발은 동상이 심해져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거쳐 지나가는 곳의 민간인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원성의 대상이고, 경원의 대상이었다.

송성일은 그저 죽은 듯이 참고 견디며 탈출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가다가는 목적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죽고말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얼어 죽는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그 생각은 자꾸만 커져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부에 완전히 환멸하고 있었다. 정부가 그렇게까지 무계획하고 무책임하고 무질서한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정부의 그런 처사는 명백한 살인행위였다. 그로서는 그런 국가, 그런 정부, 그런 정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하등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탈출하면 무조건 사살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언제 얼어죽고, 언제 굶어죽을지 모르면서 이 죽음의 행렬을 따라가며 서서히 죽어가느니 차라리 탈출을 하다가 총을 맞아 죽는 것이 낫다 싶었다. 그리고 탈출이 꼭 실패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계획이 치밀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송성일의 부대는 대전을 거쳐 동쪽 방향인 옥천으로 가고 있었다. 날씨는 매일같이 이가 갈리도록 추웠고, 열에 들떠서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들은 날마다 버려지듯 낙오되고 있었다. 송성일은 대전을 지나면서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동족으로 방향을 틀었으므로 집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 동안에 탈출을 시도한 자가 없어서 그만큼 유리하기도 했다. 경계병들은 탈출에 대해서 그만큼 안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유심히 살펴온 바로는 새벽 서너 시 사이가 좋을 것 같았다. 두 시간마다 교대하는 보초가 잠들기 좋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가 뜰 때까지 어둠을 타고 멀리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시계를 찬 사람들은 거의가 헐값으로 처분해 배를 채우기에 바빴었다. 자신이 그 신침 흐르는 유혹을 그때마다 매정하게 뿌리쳤던 것은 순전히 탈출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옥천에서 탈출하기로 작심했다. 송성일은 옥천으로 가는 길을 세세하게 눈에 담으며 걸었다. 옥천에서는 밥은 물론이고 교실 맨바닥이나마 잠자리를 얻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 다른 지방에서 먼저 도착한 두 부대가 교실을 다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잠자리보다 급한 건 밥의 해결이었다. 책상걸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변소의 판자벽이며 문짝 관사의 판자울타리 같은 것을 닥치는 대로 뜯어다가 태우는 판이었다. 교장이나 교감은 그들의 그런 행위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불길이 약해지자 또 땔감을 구해 와야 했다. 송성일네 분대에 차례가 돌아왔다. 그들은 학교 뒤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경비병이 따라오지 않은 것이다. 송성일은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어둠 속을 더듬었다. 틀림없이 경비병은 없었다. 하늘이 돕는구나! 송성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땔감을 찾아 흩어지고 있는 동료들을 경계하며 옆걸음질을 쳤다. 안전을 확인한 그는 재빨리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 즈음에 이미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국민방위군을 편성한 정부의 무모함에 대해 전국적으로 비난의 여론이 거칠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참한 몰골의 국민방위군 대열을 "죽음의 대열" 이니 "해골의 대열"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일천구백오십일년 일월 삼일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겨갔다. 그날 눈발이 휘날리는 속에 서울시민 삼십여 만 명이 꽁꽁 얼어붙은 한강의 얼음판을 밟고 서울을 떠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인민군이 다시 서울로 들어왔다. 이학송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육일이었다. 매서운 추위 속에 버려진 듯 상처입고 서울을 보자 그는 집 생각이 더욱 간절해져 몸이 비틀릴 지경이었다. 서울이 입고 있는 상처가 자신의 집안에도 미쳤을 것만 같은 애달픔을 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떠날 때는 소식 한 가닥 남기지 않고 떠나놓고서 뒤늦게 돌아와 그리 다급해하는 건 가장으로서 보자면 더없이 무책임한 감상일지 몰랐다. 그러나 압록강까지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아내와 세 자식은 언제나 슬픈 안개로 의식의 배면을 채우고 있었고 안타까운 메아리로 귀울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기저기 사무적인 보고와 연락을 서너 시간에 걸쳐 끝나게 되자 서울에 집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이학송은 숨을 헉헉거리며 추위를 헤쳐 나갔다. 아내의 소담한 얼굴과 아이들의 유리알같이 해맑은 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무사하기나 한지, 그 동안 뭘 먹고 살았는지, 살기가 어려워 혹시 고향으로 내려간 건 아닌지... 그 동안 잊으려고 애써왔던 생각들이 앞을 다투어 일어나고 있었다. 광화문에서 출발할 때는 추위를 느꼈는데 종로오가쯤 이르자 가슴팍에 땀이 배는 것을 느꼈다. 동대문을 지나게 되자 마지막 취재를 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잠깐이나마 집에 들르고 싶었던 간절함을 괴로움으로 바꾸며 발길을 돌렸고, 그 걸음은 그대로 후퇴 길로 이어지고 말았다. 동대문 밖에 새로 만든 동네- 신설동에 접어들면서부터 이학송은 기어이 뛰기 시작했다. 이학송은 낯익은 골목 어귀에서 뜀박질을 멈추었다. 뜀박질로 상기된 그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내가 만드는 별미인 홍어회 냄새가 물큰 풍기고, 세 아이가 깔깔거리며 다투어 뛰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숨길을 가다듬으며 빠르게 걸었다. 골목의 집들은 별로 상한 데가 없이 그대로였다. 변두리라 폭격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이 한결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이학송은 자기 집이 있는 샛골목으로 꺾어 돌았다. 금방 아내가 뛰쳐나오는 것만 같고, 아이들이 뒤따라 아빠를 외치며 뛰어오는 것만 같았다. 네 번째 집, 이학송은 가슴에서 섬뜩하게 찬바람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그건 분명 네 번째인 자신의 집이었다. 이학송은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무슨 검은 날개가 펄럭이며 눈앞을 가로막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사납게 눈을 훔쳤다. 네 번째 집의 대문은 한쪽이 바깥으로 젖혀진 채 위쪽만 겨우 매달려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대문의 그 모양새는 집안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면서도 대문을 그렇게 방치해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아내의 깔끔한 성미를 생각할 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문으로 몸을 디민 이학송은 멈칫 섰다. 빈 집이 품고 있게 마련인 설렁하고 괴기스런 냉기가 끼쳐왔던 것이다. 넓을 것 없는 마당에는 부서진 살림살이와 휴지 나부랑이와 나뭇잎 같은 것들이 뒤섞여 어지러웠고, 대청마루에 달린 네모창살의 유리문은 열어젖혀진 채 유리들은 다 깨져나가고 없었다. 몇 개의 창살에는 깨지고 남은 유리조각들이 무슨 험상궂은 이빨처럼 그대로 박혀 있었다. 그건 집안을 휩쓸고 간 폭력의 모습이었고, 식구들이 당한 수난의 모습이었다. 이학송은 다리가 휘청거리는 걸 느끼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대청마루에는 먼지가 자욱하게 덮여 있었다. 그 먼지의 두께가 집을 비운 지 오래되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문득 마루를 걸레질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셋방살이를 면하고 변두리의 이 집을 장만했을 때 아내는 두 팔을 가슴 앞에 모아 힘주어 바르르바르르 떨어대며 얼마나 기뻐했던가. 아내는 더욱 깔끔함을 드러내 온 집안을 쓸고 닦고 하기에 분주했다. 특히 대청마루를 간수하는 열성은 지나칠 정도였다. 언제나 티끌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을 보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두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와 씻지 않은 발로 대청마루에 올라설 수 있었다. 국민학교 삼학년인 아들은 그런 어머니에게 불만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꿀밤을 얻어맞다가 끝내는 항복하고야 말았다.

이학송은 먼지를 밟으며 안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닫이문에 발라진 창호지는 뻥뻥 구멍이 뚫려 있었고, 창살도 더러 부러져 있었다. 그러나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뜻 모를 두려움으로 방문을 천천히 옆으로 밀었다. 대청마루처럼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장롱은 열어젖혀진 채 옷가지들이 방바닥에 흩어져 있고, 아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경대의 거울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윗목에 놓인 자신의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였던 열댓 권의 책들은 어지럽게 흩어진 채 방바닥에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는 건넌방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아들의 방이었다. 안방처럼 어질러져 있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책꽂이에 공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아빠, 김일성 장군은 아빠하고 나이가 비슷하게 젊은데 어떻게 장군이 됐나요?"

되살아나는 쟁쟁한 목소리였다. 그는 옆방으로 갔다. 작은 창에는 포플린으로 만든 커튼이 상하지 않고 그대로 걸려 있었다. 국민학교 일 학년짜리의 성화에 못 이겨 아내가 난생 처음으로 만든 커튼이었다.

"아빠, 난 전쟁이 싫어요. 사내애들은 주먹으로 맨날 싸우고 어른들은 총으로 싸워요. 남자들은 다 싸움만 좋아해요. 그래서 난 아빠 빼놓고는 이 세상 남자는 다 싫어요."

무릎에 앉은 딸아이의 야무진 말이었다.

"그럼 난?"

아들이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다.

"오빠도 싫어!"

"요게 그냥!"

아들이 주먹을 치켜들었고,

"아빠아아!"

딸아이는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가슴으로 안겨왔다. 그 찬물처럼 싱그러운 딸아이의 냄새가 물큰 풍겨오며 콧등이 찡 울렸다. 딸아이의 체취는 그대로 한 덩이 울음이었다. 그리고 네 살 난 막내아들의 모습이 그 울음을 떠밀어 올리고 있었다. 막내아들은 아직 어렸던 탓으로 엄마의 품과 등에 매달려 사느라고 자신과는 미처 깊은 정이 엮어질 틈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더 가슴을 쓰라리게 했다. 그는 어금니를 꾸욱 깨물며 고개를 치켜 올렸다. 그리고 눈을 내리감았다. 이것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삼킨 울음덩이로 그의 목이 막히고 있었다. 이학송은 대청마루로 나와 섰다. 문득 담장 아래 엎드려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화단을 가꾸는 아내의 그 모습은 환각이었다. 나뭇가지에는 나팔꽃줄기가 메말라 있고 파삭 말라 변색된 꽃나무줄기들이 바람에 떨고 있는 황폐한 화단은 전에 아내의 손길 탄 겨울화단이 아니었다. 아내는 아침의 꽃인 나팔꽃을 좋아했고 다음으로 분꽃을 좋아했다. 장미나 칸나 같은 화사한 꽃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내의 소담한 성품 탓이었을까... 그런데, 나팔꽃이나 분꽃은 그 모양이 똑같이 닮지 않았나! 나팔꽃이 큰 나팔이라면, 분꽃은 작은 나팔이었다. 아내는 그 닮은 모양 때문에 그 꽃들을 좋아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뒤늦게 깨달은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그 뒤늦은 깨달음이 평소의 아내에 대한 무심함으로 그의 가슴에 사무쳐왔다. 가슴 조여 숨이 막히도록 아내가 보고 싶고, 아이들이 그리웠다. 대문을 나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뒷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문을 흔들며 사람을 불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여보세요, 안 계십니까!"

대문을 더 세게 흔들며 목청을 높였다.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대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대청 문이 꼭 닫혔고, 댓돌 위에는 신발 하나 없었다. 역시 빈 집인 모양이었다. 이학송은 돌아섰다. 눈발이 성글게 내리고 있었다. 앞집 대문에서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는 처음부터 목청을 높였다. 마찬가지로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여보세요, 누구 안 계십니까!"

그는 대문을 쾅쾅 쳐댔다.

"누구시유."

안에서 들려온 여자노인네의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드러났다 서로 내왕을 하던 그 할머니였던 것이다.

"네에, 뒷집, 뒷집 태기아빱니다."

그의 큰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누구? 태기아빠! 아이고..."

노인네의 다급한 소리에 이어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아이고, 이리 늦게 오면 무슨 소용이 있소."

노인네가 대문을 열어젖히며 한 말이었다. 노인네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는 인사를 차릴 새도 없이 물었다.

"잽혀갔지요, 잽혀가..."

노인네는 연상 고개를 저었다.

"애들까지 말입니까?"

"아니유, 태기엄마만 잽혀갔는데, 이튿날 어린것들 셋이서 엄마 찾겠다구 집을 떠났다지 않우 글쎄. 난 애들이 떠난 담에야 알았는데, 내가 먼저 알았으면 붙들었을 텐데..."

그는 대문의 기둥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안 돌아온 겁니까?"

그는 짐작을 하면서도 그 말을 마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세, 그 어린 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태기 엄마도, 애들도 종무소식이우. 애들이라도 어디 살아 있었어야할 텐데..."

노인은 눈물이 번지는 눈으로 혀를 하댔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는 중얼거리듯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허청거리며 눈발 속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에 든 그의 오른손에는 팽이가 꼭 쥐어져 있었다.

이학송이 김범우를 만난 것은 이틀 뒤였다. 인민군복차림의 김범우가 신문사로 이학송을 찾아온 것이다.

"이 선배님, 저 김범웁니다."

김범우의 말에 글을 쓰고 있던 이학송은 고개를 들었고, 잠시 어리둥절하는 것 같더니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아니 이게 누구야, 김 형!"

그의 목소리는 마치 울부짖는 것 같았다.

"무사하셨군요."

김범우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섰다. 이학송이 김범우를 덥석 끌어안았다. 김범우는 순간적으로 민망함을 느꼈다. 자신은 악수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끌어안게 되니 자신의 반가움이 이 선배만 못한 것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그는 그런 순간적인 느낌을 내던지고 이학송을 맞끌어 안았다. 이학송은 집을 다녀온 뒤로 줄곧 깊은 허망감과 괴로움에 빠져 있다가 뜻밖에 김범우를 만나게 되자 감정에 격랑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사람,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이학송이 팔을 풀며 김범우를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래 피양서 왔시오."

김범우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인민군복을 가리켰다.

"어서 앉읍시다. 그런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손 형은?"

이학송은 의자에 앉으며 거푸 물었다.

"한마디로 하기는 어려운 얘깁니다. 점심이나 먹으며 차근차근 말씀드리죠."

이학송은 담배를 권했다. 담배를 뽑아 든 김범우가 익숙한 솜씨로 라이터를 켰다.

"전주로 떠난 사람이 평양에서 돌아왔으니 얘기가 간단할 수가 없겠군."

이학송은 담배연기를 씹는 것처럼 흘러나오고 있는 입으로 말하고는,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김범우를 바라보다가,

"인민군복에 지포 라이타는 또 뭐요?"

의아스럽게 물었다.

", 인민해방군에 미 제국주의군대 전용이다시피 하는 지포라이타가 안 어울리지요? 역시 선배님은 눈이 밝군요. 이게 다 그거와 연고가 있는 겁니다."

김범우가 라이터를 머리 높이로 던져 올렸다가 받으며 의미 있게 웃었다.

"서울엔 언제 왔소?"

"오일 날 와서 매일 선배님을 수소문했지요."

"소속은 어디요?"

"밥집으로 가시죠, 순서대로 말씀드릴 테니까."

"그럽시다, 그게 좋겠소."

김범우는 사무실을 나서면서, 전주에 도착한 데서부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시키고 하는 잠깐 동안 중단되었을 뿐 김범우의 이야기는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되었다.

"... 인민군에서는 투항자들에 대해 사상검토를 해서 바로 전선에 배치시키고 있었어요. 물론 감시가 따랐는데, 그거야 어느 군대에서나 마찬가지 일이죠. 제가 OSS 훈련을 받을 때나, 통역을 할 때도 그랬으니까요. 저도 두 번의 자술서를 쓰고 통과가 됐지요. 그 다음에 영어 실력을 테스트 받고나서 통역관 일을 맡은 겁니다. 오나가나 통역관인데, 그 대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미군을 위해 통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을 심문하는 통역을 하는 것이니까요. 그 기분은 참 묘하게 달랐습니다."

"그 기분 알 것 같소. 하여튼 짧은 동안에 너무 고생이 많았소."

이학송이 김범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웃었다.

"고생은 별로 하지 않았는데 이래저래 변화만 많은 거지요. 학병 때부터 아마 그게 제 팔자인 모양입니다."

김범우의 말에 이학송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소리로 웃었다.

"이젠 선배님 차롑니다. 말씀하십시오."

김범우가 입술을 훔치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김 형에 비해 내 얘기는 너무 단조롭소. 추석날 밤에 후퇴를 시작해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 통화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거요."

김범우에게 미안한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이학송은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기분도 기분이었지만 그보다는 전신에 맥이 빠져 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걸어서 거기까지 갔단 말입니까?"

"어쩌겠소, 그때 형편이 그랬으니."

"아이고, 큰 고생 하셨군요."

"고생이야 다 같이 한 고생이고, 산천구경 겸해 좋은 경험이기도 했소."

"그런데, 어디 불편하십니까? 몸이 안 좋아 보입니다."

"아니오, 그 동안의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몸살 기운이 좀 있소."

이학송은 내심을 눈치 채이지 않게 하려고 예사롭게 말하고는,

"손형이 도당과 함께 입산을 했다면 그 동안 고생이 많았겠소."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거야말로 손형만 한 고생이 아니고, 지금쯤 고생한 보람을 느끼며 하산할 준빌 하고 있지 않겠어요?"

"아마 그렇겠소."

이학송이 무겁게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피곤해 뵈는데 그만 가시죠.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좀 쉬도록 하십시오."

김범우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아니, 밥값 여기 있소."

이학송이 김범우를 붙들려고 했다.

"아닙니다. 전 옷만 이렇게 입었지 통역관입니다. 통역관한테는 특별 급료가 나온다는 것 아셔야 합니다."

김범우가 일부러 뻐기듯이 말하며 밥값을 치렀다.

", 식구들은 다 무사합니까?"

김범우가 식당을 나서며 물었다.

"다행히 아무 탈 없소."

"아 예, 그거 참 다행이군요, 참 잘됐습니다."

"다 염려 덕택이오."

이학송은 예의 그 웃음 감도는 얼굴로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애의 칼로 찢기고 있는 그의 가슴 벽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김범우의 말마따나 전남도당에는 총출동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에 따라 모든 지구는 비상상태 아래서 하산준비를 완료하는 한편 각 군단위로 병력이동을 시키고 있었다. 염상진은 총사의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산골짜기마다 엄동의 추위를 녹일 만큼 열기로 차 있었다. 조원제가 염상진을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이때였다. 광주를 재점령하기 위한 선발대에 조원제네 부대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총사 부사령관이 되어 있는 염상진을 다시 만나게 되자 조원제는 그 반가움으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찾아갔던 것이다.

"부사령관 동지, 안녕허십니까!"

조원제는 염상진 앞에 똑바로 서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아니, 이게 누구요? , , 그렇지, 조원제 동무!"

염상진이 반색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조원제는 악수를 나누며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을 알아보면 다행이고 몰라보면 그의 기억을 깨우쳐줄 작정을 하고 찾아왔던 것이다.

"어찌케 지 겉은 것 이름꺼지 다 기억허시고..."

조원제는 염상진의 비상함에 혀를 내두르는 한편 적잖은 감격도 느끼고 있었다.

"당연한 것 아니오. 우리가 만난 게 좀 색달랐고,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이었으니까."

염상진은 밝게 웃는 얼굴로 예사롭게 말하고는,

"조 동무가 이 지구에 있을 줄은 몰랐소. 그래, 무슨 임무를 맡고 있소?"

친근하게 물었다.

", 정보과 분트에 있구만요."

", 조 동무한테 어울리는 일 같소. 그런데 이제 그 임무도 끝나는 것 같은데, 앞으로 할일은 결정됐소?"

", 당에서 김일성대학으로 진학하라는 분류를 받았습니다."

"그것 참 잘된 일이오. 축하하오. 조 동무 같은 사람은 남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게 좋은 일이오."

염상진은 아주 흡족해하는 얼굴로 기뻐했다. 조원제도 당의 그런 결정에 고마워하며, 그 대학에 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입산투쟁이 이렇게 쉽게 끝나버리나, 하는 한 가닥 속생각을 말로 내비치진 않았다. 그것은 다시 찾아온 기쁨의 뒤편에서 생겨난 어이없는 개인적 감정이지 말로 나타낼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찾아온 기쁨은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일으킬 정도로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당에서는 하산 다음에 대비해 입산자들의 임무는 다시 분류하는 신속성을 보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 입산자들은 하산의 설렘 속에서 새롭게 마음들을 가다듬었고, 하산의 기쁨과 열기는 각 지구의 해방구마다 넘쳐나고 있었다.

 

 

6. 거창 그 오지의 낮과 밤

밤이 깊어갈수록 바람 소리는 사납고 거칠어져가고 있었다. 바람 소리는 가지가지였다. 휘이, 휘이, 휘이, 휘이익-높은 음으로 휘파람을 불어 제끼듯 하는 소리는 전깃줄을 울리는 소리였다. 씨이웅, 씨이웅, 씨잉, 씨이웅, 씽씽- 싸리회초리를 세차게 휘둘러대는 것 같은 소리는 나뭇가지들을 괴롭히는 소리였다. 쌔이이, 쌔앵, 쌔앵, 쌔이잉-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자지러지는 듯한 그 소리는 양철지붕 끝에 바람이 찢기는 소리였다. 그런 여러 소리들이 뒤엉키며 밤이 깊어감에 따라 바람은 더 심하게 불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바람 소리들에 섞이고 있는, 바람 소리가 아닌 소리가 있었다. 들들들들, 드글드글, 들들드글드글, 들들들들... 그건 쇠가 맞갈리며 굴러가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저녁밥을 먹고 나서 한참이 지나면서부터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울리게 되자 어른들이 불안스러워허며 밖으로 나갔다. 소리가 울려오는 쪽에 보이는 것이라곤 짙은 어둠 속에 점점이 찍혀 움직이고 있는 빨간 불빛들뿐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찍힌 그 불빛들은 앵두알 같은 뿐 전지처럼 불빛을 내쏘지 않았다. 그 불빛들은 남쪽으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저 탱크들이 이 논산을 저리 지나가 버리면 대전은 벌써 내준 것이고, 여기도 내주겠다는 뜻 아니오?"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며 아저씨가 말했다. 석구는 이불 밑에 발을 넣은 채 아저씨 입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아버지가 뒤따라 들어오며 대답했다. 석구는 얼른 아버지의 입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전이 넘어갔다는 소식은 아직 없는데 탱크들이 논산을 지나 후퇴를 하다니 미군들이 후퇴를 너무 다급하게 한다는 말이 맞긴 맞는 모양 아니오?"

아저씨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며 물었다.

"글쎄요, 무슨 자기들 계산이 있겠지요."

아버지의 대꾸였다. 석구는 또 아버지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아버지는 언제나 말이 없었고, 말을 한다고 해야 짧으면서 그 뜻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여기가 또 넘어가기 전에 피난을 떠나야 되지 않겠소?"

"글쎄요, 천지가 겨울인데..."

"고만 아그덜 재우는 것이 워쩔께라?"

어머니가 말했다. 석구는 불만스럽게 어머니를 쏘아보았다. 무언가를 더 알고 싶은데 어머니 때문에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석구는 옛날이야기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전쟁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자면 어른들의 말을 눈치껏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큰누나가 귀찮아하지 않고 말상대를 해주긴 했지만 큰누나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말문이 막힐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엄하고 무서워 아무것도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식구들 모두가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그래요, 당장 결정 낼 일도 아니니까 애들 재우십시오."

아저씨가 자기네 방으로 건너갔다. 시월 중순에 북소에서 돌아오면서 그 아저씨네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 전에 살던 집은 어찌 되었는지, 왜 그 아저씨네와 사는 것인지 석구는 까닭을 알지 못했다. 너무 궁금해서 큰누나한테 자꾸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큰누나는 알면서도 속인다는 것을 석구는 대충 눈치 채고 있었다. 살기가 어려워져 집을 판 것이라고 석구는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큰누나가 이불을 깔기 시작했다. 아랫목 제일 따끈따끈한 자리는 언제나 아버지 이불이 깔렸다. 잠이 들기 전에는 괜찮은데 잠이 들기만 하면 아버지는 몸을 뒤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어떤 때는 팔을 휘저으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잡혀 들어갔다가 재판을 받고 나온 다음부터 아버지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석구나 형제들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입단속을 시킨 것도 아닌데 형제간들 사이에서는 그때의 이야기를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군복만 입었지 군인도 아닌 사람들한테 아버지가 마당에 뒹굴며 몰매를 맞고, 피 흘리며 끌려가던 것을 형제들은 다 보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또 몰려온 그 사람들한테 어머니와 형제간들 넷이 모두 재판소 앞 넓디나 넓은 마당으로 끌려갔다. 그때 석구는 맨발이었다. 집에서부터 신을 신지 않은 것인지, 끌려오면서 벗겨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넓은 마당에는 총알껍질들이 덕석에 고추가 널린 것처럼 쫙 깔려 있었다. 그리고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석구는 총알 껍질이 발에 밟히지 않게 하려고 아래도 내려다보지 못한 채 발을 앞으로, 뒤로, 옆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맨발바닥에 총알 껍질들이 차가운 감촉으로 섬뜩하게 밟혔다. 그 섬뜩거림은 시체들이 흘린 검붉은 피처럼 징그럽고 무서워 석구는 숨이 막혔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보고 총알껍질 없는 데를 골라 발을 옮겨놓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팡 쏘아버릴 것 같았던 것이다. 동그란 총구멍의 무서움은 어제 아버지가 끌려갈 때도 조금 전에 끌려 나오면서도 오줌방울 질금거리게 겪었던 것이다.

"다들 똑똑히 들어라. 반란군들을 감춰주거나 반란군과 내통하면 너희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총살시켜버릴 것이다. 어젯밤에 일어난 기습은 너희들 가족들이 반란군들을 감춰주지 않았거나 내통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땐 너희들을 몰살시킨다는 걸 명심해라. 이건 최후의 경고다!"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그 찌렁찌렁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반란군의 가족들이라는 많은 사람들은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도 그들은 찍소리 한번 내지 않고 발을 옮기기만 했다. 그때 "나무관세음보살!" 하는 소리가 한숨을 토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 커 석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소리를 토한 어머니의 볼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석구는 저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석구는 그 다음부터 그때의 일들을 꿈으로 꾸게 되었다. 꿈은 꿀 때마다 꼭 생시처럼 너무나 생생했다. 그리고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그 군복만 입었지 군인이 아닌 사람들이 서청이라는 것도 알았다.

"나무관세음보살!"

이불을 다 깐 어머니가 또 한숨을 토하듯 흘린 소리였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순천을 떠나 지금까지 걸핏하면 그 소리를 토하고는 했다. 석구는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그 소리만 들으면 그때의 일이 지금 당하고 있는 것처럼 환하게 떠오르고 무서움도 살아났다. 견디다 못해 큰누나에게 그 말을 했다.

"누나 맘도 니허고 똑같어. 그려도 싫은 기색 허먼 큰일 나. 엄니넌 그때 우리가 살아난 것이 부처님 덕분이라고 믿는 것이고, 그 뒤로 염허는 관세음보살은, 전쟁 통에 우리 식구덜 보살펴주십소사, 허는 뜻잉께로."

정 많은 큰누나의 설명을 들었지만 그 뒤로도 어머니의 "나무관세음보살!" 소리를 들으면 선암사의 부처님 생각은 나지 않고 어김없이 재판소 앞의 일만 생생하게 떠올랐다.

등잔불을 끈 잠자리는 어두웠다. 거친 바람 소리에 섞여 탱크 굴러가는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석구는 아무리 잠을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안 오니까 사타구니며 겨드랑이며 옆구리며가 대중없이 가려웠다. 탱크가 지나가게 되는 바람에 이타작을 안 해서 그러는 것이었다. 저녁끼니를 때우고 나면 꼭꼭 이타작을 하게 되어 있었다. 잘 먹지도 못하면서 이한테 뜯겨서는 안 된다고 어머니가 정해놓은 법이었다. 이타작은 온 식구가 밤마다 하는데도 어떻게 된 것이 이는 밤마다 나왔다. 어머니 말로는 속옷에 꿰맨 자리가 많아 그 속에 숨었던 놈들을 다 잡지 못해서 그렇다고 했다. 석구로서는 이타작이 꼭 귀찮은 일만을 아니었다. 형이 잡아낸 이하고 싸움을 시키는 재미도 있었고, 배가 통통하도록 뜯어먹은 놈을 방바닥에 놓고 엄지손톱으로 잉끄려 죽이는 맛도 통쾌했던 것이다. 손톱에 피가 많이 묻어날수록 복수를 한 기분이었고, 손해 본 피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큰누나는 이를 꼼꼼하게 잘 잡았지만 죽이는 것을 싫어해서 석구는 그것을 도맡았다. 석구는 사타구니며 겨드랑이를 득득 박박 긁어댔다. 짜증나게 탱크 굴러가는 소리는 끝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이고, 그리 긁어대먼 살 다 헤에지겄다. 참고 얼렁 자그라."

큰누나가 돌아 누우며 석구의 귀에 속삭였다. 석구는 큰누나한테 말을 걸까 말까하고 있던 참이라 화뜩 반가움을 느꼈다.

"큰누나, 아직 안 잤능가?"

석구도 큰누나 쪽으로 돌아 누우며 속삭였다.

"쪼깐헌 니가 못 자는디 이 누나가 잠이 오겄냐?"

석구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찔끔했다. 그러나 큰누나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미리미리 알았고, 석구는 그런 큰누나가 언제나 좋았다.

"큰누나, 저리 오래 저 소리가 딛기먼 탱크가 을매나 많을랑가?"

"금메, 저것이 굼벵이 기대끼 찬찬히 가는 소린께 소리만 오래 딛기는 것이제 그리 많지는 않을 상불른디."

"저것이 다 워디로 간당가?"

"고것이야 나도 몰르제."

"인해전술에 탱크도 지는 갑네이?"

"금메, 그렁께 저리 후퇴럴 허겄제."

"워째 탱크가 다 사람헌테 지까?"

"금메, 잘 몰르겄는디."

큰누나가 석구의 코를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석구는 그 이뻐하는 시늉에 그만 큰누나의 말문이 막히는 것을 타박하지 않기로 했다.

"중공군은 워찌 생겠을랑고?"

"중국집 사람덜맹키로 생겠제 워째."

"중공군이 이게불먼 우리나라가 중국이 되야분당가?"

"아이고, 니넌 워째 쪼깐헌 것이 알고 잡은 것도 그리 쌨냐."

어둠 저쪽에서 목에 걸린 듯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일부러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싸게 자자. 지천 듣겄다."

큰누나가 더 낮고 빠르게 속삭이며 석구를 안았다. 그만 자야 한다고 생각하며 석구는 눈을 감았다. 들들들들... 쇠가 맞갈리며 굴러가는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석구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날은 환히 밝은데 탱크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이 덮인 논들의 저편으로 멀리 보이는 큰길은 텅 비어 있었다. 몇몇 아이들도 탱크들을 찾는지 미심쩍은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워메, 사람살리소오!"

느닷없는 여자의 비명이었다. 곧 죽어가는 것 같은 다급하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아버지와 아저씨가 벌떡 일어섰다. 아주머니와 큰누나도 따라 일어섰다. 석구와 다른 형제들은 멍해있었다. 그때 문을 박차고 든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낭자머리는 풀어헤쳐져 있었다. 그런 어머니는 큰누나의 손을 와락 잡더니 뒷문으로 내달으며 소리쳤다.

"얼렁 숨어, 코쟁이여!"

이 소리에 아주머니도 후닥닥 뒷문을 빠져나갔다. 밖에서 무엇이 부서지는 소리가 우지끈, ! 울리더니 곧 방으로 뛰어든 건 군인 셋이었다. 키가 천장에 닿을 것처럼 큰 그들은 흰둥이가 둘이었고, 깜둥이가 하나였다. 그들은 진흙이 묻은 붉은색 군화를 신은 채였다. 흰둥이 하나가 눈을 부릅뜨며 아버지에게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고개를 젓고, 손을 저으며 ","라고 했다. 흰둥이는 어깨에 멘 총을 벗어 아버지의 가슴에 겨누며 또 뭐라고 소리 질렀다. 아버지는 더 급하게 고개를 내젓고 손바닥을 싹싹 비벼대며 "," 만을 연발했다. 아저씨는 그 옆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두 명은 군홧발로 저벅저벅 걸어 다니며 벽장문을 열어젖히고, 뒷문으로 나가 전지를 비춰대고, 부엌에서 그릇을 들바수며 뭐라고 소리쳐대고 있었다. 온 집안을 발칵 뒤집은 두 명이 "쉐엣, 쉐엣" 소리를 내뱉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갓댐, 썬 오브 비치!" 깜둥이가 군홧발로 아버지의 배를 걷어찼다. 아버지는 휘청하더니 사정없이 방바닥에 곤두박혔다. 다른 흰둥이가 아저씨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아저씨가 얼굴을 싸잡으며 푹 주저앉았다. 그때까지 방구석에 몰려 있던 석구와 형제들은 죽을 힘을 다해 울기 시작했다. 흰둥이 둘과 깜둥이 하나는 아버지와 아저씨를 멋대로 걷어차고 짓밟고 했다. 석구는 진저리치고 울어대면서도 두 눈은 똑똑히 뜨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미군들이 아버지를 죽여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더 빠글!"

"보우 쉿!"

이런 소리를 내뱉으며 셋은 방을 나갔다. 석구와 형제들은 울음을 뚝 그치고 아버지를 행해 방바닥을 다투어 기었다. 아버지는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아저씨는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피는 군홧발 자국이 찍힌 방바닥에 번지고 있었다. 작은 누나가 물을 떠오고 형이 수건을 가져오고 하느 동안에도 석구는 꼼짝 않고 쪼그리고 앉아 피 흘리고 있는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높아 보였고 모든 사람 앞에 나섰으며 모르는 것이 없었고, 그래서 엄하고도 어려운 존재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게 힘없고, 약하고, 볼품없고, 허망하게 당하는 것을 벌써 두 번째 보는 것이었다. 석구는 그게 분하고 서러울 수가 없었다. 마루 밑에 숨었던 아주머니가 아저씨의 부축을 받아가며 낑낑대고 나온 다음에도 어머니가 큰누나를 데리고 돌아온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머니는 누나와 함께 장독대를 타고 판자울타리를 넘어 뒷집으로 피했다고 했다. 석구 자신이 엎드려 드나들기에도 힘겨운 낮은 마루 밑으로 아주머니가 어떻게 기어들어갈 수 있었는지 이상했지만 더 희한하고 기막힌 일은 어머니와 큰누나가 장독대를 타고 판자울을 넘어 뒷집으로 피했다는 사실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아무리 살펴보아도 장독대의 항아리들은 뚜껑 하나 깨진 것 없이 말짱했고, 얇은 판자울타리도 어디 한 군데 상한 데가 없었던 것이다. 석구 자신이 밟아대도 항아리 뚜껑은 쉽게 깨지는 물건이었고, 자신이 매달려도 판자울타리는 휘어지고 부러지도록 얇고 약했던 것이다.

"나도 몰르제잉. 정신이 하나또 웂었웅께. 급헌 김에 지절로 그리 됐겄제."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큰누나의 대답이었다. 그날 밤 온 동네에 미군들이 깔렸더라고 했다. 총 맞아 죽은 남자들도 있다고 했다.

"올라가문서 개지랄, 내레가문서 개지랄, 난리가 따로 웂어. 양코배기들이 그 개지랄치는 것이 바로 난리제."

어머니가 부르르 떨며 한 말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바로 피난 짐을 싸게 했다. 그리고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길을 나섰다. 눈이 퍼붓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 속에서 어지럽게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커다란 짐을 진 아버지는 앞서서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검정 고무신에 새끼줄을 감은 아버지의 발이 칙칙 끌리면서 눈 위에 긴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석구는 눈 위에 그어지는 그 자국을 내려 보며 걸었다.

"서청놈들..." 탄식처럼 들려온 소리였다. 그건 아버지의 굵고 낮은 소리였다. 석구는 그 소리에 뒤따라 "나무관세음보살!"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생각일 뿐이었다. 어머니가 나무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처럼 자주 그러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어쩌다가 불쑥 "서청놈들..." 소리를 흘리고는 했다. 어는 마을에선가 작은 방 하나를 빌려 자게 되었다. 석구는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미군들이 들이닥치는 꿈이었다. 마구 소리를 지르다가 잠을 깼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랫도리가 척척했다. 오줌을 싼 것이었다. 그날 밤 뒤로 석구는 그 꿈을 자주 꾸었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오줌을 질퍽하게 싸고는 했다. 창피스럽고 부끄러워 미칠 일이었다. 결국 석구는 어머니에게는 천덕꾸러기요, 형제들에게는 놀림감인 오줌싸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석구는 왜 오줌을 싸게 되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큰누나한테까지도. 자기의 마음을 말로 해서는 큰누나도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똑똑헌 석구가 워째 자꼬 이러는지 몰르겄네이. 무신 병인갑는디 병원에도 못 가보고..."

석구의 실수가 거듭되자 큰누나가 걱정스럽게 한 혼잣말이었다. 큰누나는 석구를 놀리는 일도 없었고, 실수를 할 때마다 말없이 속옷을 벗겨 빨아주고는 했다. 석구는 그런 큰누나가 말할 수 없이 고마웠고, 열여덟인 그 얼굴이 이 세상에서 제일로 이뻐 보였다.

 

국방군 제십일사단은 후방 즉 추풍령 이남의 공비섬멸이라는 분명한 작전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전선의 적보다도 더 위험하고 큰 적일 수 있는 공비를 완전 섬멸해야 할 임무를 띤 그 사단의 주요 작전지역은 지리산 일대였다. 지리산을 에워싸고 있는 세 개의 도를 장악했던 인공세력은 민간지지자들을 이끌고 입산했고, 거기다가 퇴로를 차단한 인민군들까지 합세하여 그들은 이삼 개월 동안에 미수복지구를 기반으로 국군 및 연합군에 다시 대항할 수 있는 전열을 정비했다. 그런 상황 아래서 중공역군의 불법침략은 그 잔비들의 만행을 촉진시키는, 기름을 붓고 불을 당기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국방군에서 내리고 있는 상황파악이었다. 그러므로 전 사단병력이 총동원되어 견벽청야의 작전을 전개하여 공비를 완전 섬멸한다는 기본 작전이 정해졌다. 견벽청야는 국민당군이 홍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쓴 작전 중의 하나로, 아군 쪽은 벽을 치듯 견고하게 지키는 한편 적의 활동지역에는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양효석의 직속상관인 삼대대장이 연대 작전지휘관 회의에 참석한 것은 물론이었다.

"제일대대는 함양에서 산청으로 적을 공격하고, 제이대대는 진주에서 산청으로 적을 공격할 것이며, 제삼대대는 아직 미수복지구로 남아 있는 거창군 신원면에서 준동하고 있는 사백 내지 오백으로 추산되는 공비들을 완전소탕하고 산청으로 공격할 것. 세부적인 작전지시는 연대작전명령부록을 참조할 것이며, 각급 지휘관들은 그 지시를 착오 없이 수행토록 하시오."

연대장이 내린 작전명령이었다. 연대작전명령부록의 지시사항은 세 가지였다.

첫째, 작전지역 내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둘째, 공비의 근거지가 되는 가옥은 전부 소각하라.

셋째, 식량은 안전지역으로 운반하여 확보하라.

"대대장병 여러분, 다들 똑똑히 듣기 바란다. 우리 대대는 공비소탕을 위해 출동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미수복지구로 남아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는 거창군 신원면을 수복시켜야 한다. 그곳은 지난 시월 초순에 수복되어 경찰에 치안책임을 맡겼는데, 두 달 만인 지난 십이월 오일에 공비들에게 다시 뺏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비들은 괴뢰군 제사사단이 방호삼사단의 일부 패잔병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 패잔공비들이 벌써 두 달 동안이나 신원면을 장악하고 있다는 건 우리 국군의 명예를 위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들을 이 잡듯 완전 소탕해버리고 태극기가 펄럭이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일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병 여러분,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지난 일월 중순경부터 재반격을 시작하여 현재 수원까지 재탈환했다. 이제 서울의 재탈환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최전선에서 이렇게 용맹스럽게 적을 무찌르고 있는 이때에 후방에서는 용기백배하여 공비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 공비들은 제 놈들의 주력이 다시 패주하면서 전선이 제 놈들한테서 멀어지게 되자 사기가 다시 떨어졌다. 장병 여러분,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 공비들을 완전 소탕해야 한다. 모두 각오를 단단히 하도록!"

거창의 농업학교 운동장에서 삼대대장은 부하들에게 작전개시를 알리면서 일장 훈시를 했다.

"대대장님 훈시 똑바라지게 들었을 줄 아니께 나넌 더 길게 말하덜 않겄다. 딱 한 가지, 나가 항시 하는 말대로 다른 중대보담 더 용감 무쌍허게 싸우라는 것이다. 이중대, 알겄나!"

이중대장 양효석의 외침이었다.

"!"

중대원들은 힘차게 목청을 맞추었다. 양효석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중대장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중위계급장을 달고 중대장이 되었다. 그로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들보다 앞서 맡은 직책도 직책이었고, 직책에 따라 진급도 남들보다 빠른 것은 더 말할 것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다 열성으로 근무한 결과라는 것을 그는 확인했고, 앞으로 더욱 열성적으로 해나갈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 열성을 바친 만큼 표가 나고, 표가 나는 만큼 계급이 올라가는 군대라는 것에 그는 갈수록 매력을 느끼고 맛이 들리고 있었다. 그 지겹던 학교공부에 비하면 군대생활은 너무 쉽고도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삼대대는 이월 오일 새벽 미수복지구 신원면을 향하여 출발했다. 대대는 중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장갑차 한 대를 앞세웠고, 세 대의 지엠씨 트럭에는 육십 밀리와 팔십 밀리 박격포를 싣고 있었다. 거기다가 수류탄, 기관총, 자동소총까지 합하면 보병대대의 화력으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공비소탕"의 결의가 그 화력에서 잘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대대의 병력은 군인만이 아니었다. 경찰을 포함한 청년방위대원 일개중대의 병력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삼대대는 일전을 각오하고 거창에서 신원면으로 가자면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감악산의 가파르고 좁은 굽이 길을 타넘고 있었다.

"면에 정말 공비들이 없단 말이오?"

대대장이 의심쩍은 눈으로 같은 말을 또 물었다.

"예에, 어지께까지 다 짐 싸질머지고 떠났다 카이께요."

길안내를 맡고 있는 향토방위대장이 답답하다는 듯 같은 대답을 했다.

"그놈들이 그럼 우리가 공격을 감행할 거라는 정볼 탐지해냈다는 거 아뇨."

대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눔아덜 조직망이 거무줄맨쿠로 쳐졌으니 농업학교에 진을 친 대대소식을 알아내는 것이야 그리 에로분 일이 아니지 않겠는교?"

"그야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럼, 그놈들이 어디로 도망쳤을 것 같소?"

"거야 보나마나 아닙니꺼. 즈그 본부가 있는 오부면으로 빠졌을 기라요."

그것들이 위장전술을 쓰기 위해 면을 비운 게 아니겠느냐는 말까지는 대대장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산줄기로 빙 둘러싸여 사발 모양을 하고 있는 신원면의 지형지세를 생각하면 그런 추리를 안할 수 없었다. 공비들이 주변 산들로 분산대피하고 있다가 자신의 대대가 면으로 다 들어가면 기습을 가해오는 경우 자신의 대대는 갈 데 없이 함정에 빠지는 셈이었다. 그건 포위망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어리석음이었다. 그러나 그 말까지 하지 않은 건, 그 말은 자칫 잘못 들으면 미리부터 겁을 먹고 있다는 오해를 살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오부면 본부라는 것은, 일명 팔로군부대라고도 부르는 삼일오부대가 낙동강전선에서 후퇴한 이후 지금까지 해방구로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세 대대의 최종 목적지가 산청인 것은 바로 그 오부면 본부를 공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대의 작전은 본격적이고도 적극적이었다. 대대는 해가 뉘엿뉘엿해질 무렵에 신원면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향토방위대장의 보고는 틀림이 없었다. 마을마다 산 깊은 괴괴한 정적에 싸여 있었고, 낮게 엎드린 초가집들은 파르스름한 연기를 가늘게 피워 올리고 있었다. 저녁을 맞고 있는 그 아늑하고 잔잔한 부위기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의 풍경이었다. 드물게 몰아닥쳤던 강추위의 뒤끝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모습도 별로 볼 수가 없었다. 여자들이 가끔 고샅을 오갔고, 어린아이들이 더러 깡충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대대장 이하 모든 장교들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신원면을 장악하게 되자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대대장은 작전회의의 강도에 걸맞게 각오를 단단히 한 다음 하급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하급 장교들은 상관의 태도에서 느낀 압력과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까지 합해 사병들에게 죽음을 각오한 일전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강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깊고 넓어지듯 사병들이 받는 압력과 긴장의 강도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 격전을 치를 각오를 단단히 시켜놓거나 허풍을 떤 것밖에 되지 않아 그 체면 또한 말이 아니었다.

"모든 방법에 있어서 최상의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가 그렇다. 여길 장악하고 있던 공비들이 이삼 일 동안에 모두 도망쳤다는 보고를 나는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현지에 와보니 과연 공비들이 다 도망치고 없다. 이것은 왜 그랬겠는가. 바로 우리 대대가 막강했기 때문이다. 공비들은 막강한 우리 대대와 맞서 싸울 용기를 잃고 도망치고 만 것이다."

대대장의 힘찬 말이었다. 그 말로 장교들은 체면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고, 사병들은 긴장을 풀며 승리감을 맛보게 되었다. 대대장은 연대본부에 "적정 없음"을 보고했다. 그리고 경찰과 청년방위대 병력으로 지서를 장악시켰다는 것도 아울러 알렸다. 그 간단한 일을 끝내고 나니 대대는 더 할 일이 없었다. 대대장은 제이단계 작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그건 산청까지 계속 진격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물론 공비들이 야간기습을 해올 우려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대병력이 일단 장악한 지역이었고, 경찰과 청년방위대병력 일개중대를 남기는데다가,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대대병력은 산청을 향해 신원면을 떠났다. 신원면에 남게 된 경찰과 청년방위대가 맨 처음 착수한 일은 이미 거창에 발족되어 있는 군비상대책위원회의 면단위 조직인 국민회를 만들고, 청년방위대를 편성한 것이었다. 국민회를 통해서는 면의 자치비, 희사금, , 장작 같은 것을 거둬들이고, 청년방위대는 경찰과 함께 공비를 막을 병력확충을 할 작정이었다. 면민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죽을 지경이었다. 산사람들이 벌써 떠나기 전에 지게부대를 동원해서 곡식을 산으로 옮겨갔는데, 또 곡식을 내놓아야 될 형편이라는 것이다. 그 이중적인 고통을 면민들은 아무데도 하소연할 길이 없었다. 산사람들이 먼저 가져갔기 때문에 겨울날 곡식이 모자라는 형편이라는 말은 아예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그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걸핏하면 "니눔도 빨갱이제?",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니눔도 부역했제?" 하며 총을 들이대는 판에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곧 "나는 빨갱이요" 하고 광고를 하는 격이었다. 더구나 면이 두 달 동안이나 산사람들 아래 있었으므로 모든 마을은 적성마을로, 자신들은 통비분자로 일단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런데, 대한청년단 시절부터 벌써 전국적으로 그 횡포가 널리 알려져 있었고, 모든 민간인들의 원성을 사온 청년방위대의 거칠 것 없는 행위가 그날 밤부터 저질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좀 규모가 큰 집들을 골라 열댓 명씩 떼를 지어 방 차지를 하고는, 술을 내라, 돼지를 잡아라, 소를 잡아라, 기분 내키는 대로 호령을 해댔다. 그들의 횡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젊고 생김이 좀 눈에 띄는 여자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진탕 먹고, 마시고 그리고 여자들까지 마음대로 가지면서 신원면 무혈수복 자축연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잔치는 밤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날도 하루 종일 먹고 마셔댔다. 마시다 취하면 쓰러져 자다가 깨나서 또 마셨고 자기들끼리 쌈박질을 하다가 또 마셔댔고 대낮인데도 남편 있는 여자든 뭐든 가리지 않고 끌어갔다. 사람들은 추위에 부들부들 떨어대며 마을마다 그 뒷수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은 그저 속으로만 분을 끓이고 저주를 씹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만 잠깐씩 분을 토해냈다.

"시상에 저것들이 우예 사람이고?"

"사람이 어디 저렇겄나? 다 개박정눔덜이제."

"저것덜얼 우예 할꼬?"

"디럽고 치사헌 것이 목숨이라. 죽지 몬하니 우얄 것고? 날베락이나 쳐라."

"참말이제 난리가 따로 없는기라. 요런 꼴 당하믄서 살아 머할끼고!"

그런 식으로 "수복"된 또 하룻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만취해 곯아떨어진 시간에 하루의 날짜가 바뀌고 있었다. 그들에게 시달리기에 지친 마을사람들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까마귀의 날개 빛으로 검은 어둠이 겹겹이 장막을 쳐 천지를 채우고 있었다. 산과 산으로 에워싸인 탓으로 바람 소리만 유별나게 자지러지는 울음인 듯, 숨넘어가는 비명인 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칠일이 열리고 있는 새벽이었다. 어둠 속에서 총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산사람들에게 지서가 기습당하고 있었다. 맘껏 마신 술로 잠에 곯아떨어져 있던 경찰들은 허겁지겁, 우왕좌왕하면서 총들을 집어 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경찰들은 무턱대고 총을 쏴 지르면서 그곳이 면사무소라고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강한 바람을 타고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나가며 너훌너훌 춤을 춰대고 있었다. 면사무소는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면사무소는 제 몸을 태우고 불길로 제 모습을 환하게 비취내고 있었다. 가까운 마을에 흩어져 잠에 곯아떨어져 있던 청년방위대원들은 놀라서 잠이 깨긴 했지만 총들만 들고 쪼그리고 앉아 감히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자축연을 벌일 때와는 딴판의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산사람들의 공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면사무소가 불길에 휩싸였을 즈음 총소리는 멎었다. 한번 그친 총소리는 날이 밝을 때까지 더 나지 않았다. 산사람들의 기습 목적은 마치 면사무소를 불태우는 것인 것처럼 그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길지 않은 공격으로 보아 그들이 경찰과 방위대원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했고, 부대도 소규모였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부터 잠을 자지 못한 경찰과 방위대원들은 날이 밝자 허둥지둥 마을을 벗어나 뿔뿔이 흩어지며 신원면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향토 방위대장은 지서를 떠나기 전에 흩어져 있는 시체들의 수를 확인했다. 죽은 경찰은 모두 열한 명이었다. 그러나 수복지역에 주둔했던 경찰이 기습을 당해 사상자를 내게 되자 연대본부는 그만 뒤집히고 말았다. 연대장으로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한 것이 이만저만한 명예손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귀관은 이거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요! 명령대로 작전을 수행치 않고 누가 산청으로 오라고 했소. , 무엇 때문에 작전을 명령대로 수행치 않고 신원면에서 병력을 이동시킨 거요.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시오, 어서!"

연대장은 노발대발이었다. 명령대로 작전수행! 삼대대장의 뇌리에는 연대 작전명령 부록에 명기되어 있던 세 가지 사항이 빠르게 스쳐갔다. 연대장의 노발대발과 그 명령의 강도와... 그는 순간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지금은 분대장한테까지 즉결처분권이 주어져 있는 전시였다. 어물거려 변명을 늘어놓거나, 길게 정황 설명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 제가 상황을 오판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되돌아가 명령대로 작전을 수행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삼대대장은 군인다운 태도를 취했다. 그것만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게 정말이오!"

연대장의 노기 서린 눈이 쏘아보고 있었다.

"!"

"좋소. 빨리 돌아가 공비를 소탕하고, 명령대로 작전을 수행하시오!"

"알겠습니다. 명령대로 작전을 수행하겠음!"

삼대대는 산청을 떠나 다시 신원면으로 맥 빠지는 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대장이 당한 이야기를 대충 들은 양효석은 성질이 불끈 솟아올랐다. "명령대로 작전수행" 이라는 것이 도무지 억지라는 생각에서였다. 연대본부에서 말한 공비 사오백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데 어떻게 "명령대로 작전수행"을 하라는 것인지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군인이라는 신분과 직책의 무게로 양효석은 성질을 꾹 눌러 참았다.

삼대대가 신원면에 다시 들어온 것은 구일이었다. 경찰과 방위대가 떠나버린 데다가, 군인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겁이 난 면민들이 집에 박혀 꼼짝을 하지 않았으므로 마을들은 텅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부락민들은 이제 산사람들이 내려와도 진저리가 쳐졌고, 군경이 들어와도 소름이 끼쳤다. 목숨이 담보된 그들은 두 세력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난감한 처지에 빠져 공포에 떨기만 했다. 삼대대는 면에 오래 지체하지 않고 처음 들어왔던 길을 따라 감악산을 넘어갔다. 면민들을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제발 산사람도 내려오지 말고, 군경도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면민들은 구일날 밤을 아무 일 없이 지내고 십일을 맞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어제 떠난 군인들이 다시 감악산을 넘어와 면내로 들이 닥쳤던 것이다. 그리고 군인들은 소대단위로 각 마을을 향해 신속하게 분산해가고 있었다. 신원국민학교에서 과정리 다음으로 가까운 중유리에 도착한 군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살벌하게 굳어져 있었고, 총에는 착검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집집마다 찾아들어가 똑같은 말들을 외쳤다.

"여긴 위험지역이니 안전한 곳으로 피난해야 하오, 빨리빨리 신원국민학교로 모이시오. 빨리 하시오, 빨리."

"갑작시리 피난이라니? 어디로 가는 기요?"

놀란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이랬다.

"왜 말이 많소. 당신 빨갱이요! 괜히 당하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일이나 빨리빨리 해!"

군인들은 눈을 부라리거나 얼굴을 험상궂게 해가지고 이런 식으로 윽박질렀다.

"얄궂어라. 피난시켜준다 카문서 와 저래 무섭게 구는공?"

낮은 속삭임이었다.

"그러기 말다. 우째 요상시럽네."

사람들은 거의가 불안한 의문을 품었다.

"갑작시리 피난이라 카는 것도 모를 일 아닌교?"

"그래 말이다. 초이튿날(칠일) 새북에 총질헌 뒤로 산사람덜이야 얼씬도 안하지 않았나. 토벌 피해 다 산속 깊이 숨어든 기 틀림없는데, 그리 되먼 피난이고 머고 할 기 머 있나."

"이 땡땡 추분 겨울에 가먼 또 어디로 갈 기라꼬."

사람들의 마음은 이랬지만 군인들의 서슬에 눌려 피난 짐을 챙기는 둥 마는 둥 해가지고 등을 떠밀려 사립을 나서야 했다. 그러나 일은 그 대목에서 벌어졌다. 주인을 집에서 내몰기가 바쁘게 군인들은 짚단을 불을 붙여 안방에도 던져 넣고, 부엌에도 던져 넣고, 지붕 위에도 던져 올렸다. 삭풍에 마를 대로 마른 초가지붕에는 금방 불길이 옮겨 붙었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삽시에 번져나갔다.

"와 넘 집에 불을 질르노, !"

방금 내몰렸던 노인네가 마당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쌍놈에 영감탱이 말이 많앗!"

군인이 총을 내뻗쳤다. 총 끝에 꽃힌 칼이 노인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피그르 쓰러지는 노인의 배를 군홧발이 걷어찼다. 노인의 가슴에 박혔던 칼이 쑥 빠졌다. 초가집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너훌거리고 연기가 매운 불 냄새를 품고 자욱하게 퍼지고, 고샅고샅에서는 사람들이 다급하게 뛰는 발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뒤엉키고, 총소리에 비명이 잇따르는 속에서 중유리는 불바다가 되고 있었다. 중유리가 불바다기 되면서 숨을 헐떡거리는 입에서 입을 통해 짤막짤막한 말들이 군인들의 행동만큼 빠르게 마을마다 퍼져나가고 있었다.

"말대꾸하면 쏴 죽인다."

"군인들이 다 미쳤다."

"시키는 대로만 해라."

중유리 사람들을 학교 쪽으로 몰아가는 것을 확인한 양효석은 부하네댓 명을 이끌고 대현리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는 "명령대로 작전수행" 만을 생각했다. 어제 감악산을 넘어갔던 것은 공비들을 유인해 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공비들은 그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명령대로의 작전수행"을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건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대대장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이기도 했다. 양효석의 다른 중대원들은 대현리에서 또 집집마다 들쑤시고 다녔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네놈들이 내통해서 어젯밤에도 우리 국군이 몇 십 명이나 희생된 줄 알아."

어떤 하사관이 소리 질렀다.

"어지께 밤에 총소리 한 방 안 났는데 그기 무신 소린교? 얼라가 배앓이럴 하는 통에 내가마 어지께 밤에 한숨도 안 잤는기라요."

"요런 빨갱이새끼야, 아가리 닥쳐!"

하사관의 외침과 함께 총소리가 터졌다. 마루에 섰던 중년남자는 배를 싸잡으며 허리가 휘청 꺾였고, 그대로 코방으로 곤두박혀 한 바퀴 데굴 굴러 마당으로 떨어졌다. 사지를 버르적거리다가 곧 잠잠해져버렸다.

상대현도 하대현도 연기 뒤덮인 속에 불길들이 너훌너훌 춤을 추고 있었다. 젊은 남자들이라고는 거의 없는,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네들이 뒤섞인 행렬이 눈길 사나운 군인들에게 밀리며 국민학교 쪽으로 큰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과정리 신원국민학교로 내몰렸다. 신원면의 한가운데인 과정리로 이어진 여러 개의 길에는 각 마을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이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무리지어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논들을 낀 야산의 골짜기 골짜기 사이로 자리 잡은 마을들이 불타오르면서 신원면 하늘을 거세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불티로 자욱하게 뒤덮였다. 그리고 메마르고 메운 불 냄새가 신원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루 종일 저질러진 불질은 해가 덕산리 뒷산에 기울면서 그 불길이 잦아 들어가고 있었다. 집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마을터에는 사위어가는 불기운을 따라 푸른 연기들이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타다만 검은 기둥들이며, 깨어져 흩어진 옹기그릇들이며... 추위 속에 석양빛이 비껴 내리고 있는 집터들의 잿더미는 스산하고도 살벌했다. 해거름까지 모든 면민들은 신원국민학교 운동장에 부락단위로 줄을 서게 되었다. 그런데 와룡리 사람들만 빠져 있었다. 산청으로 넘어가는 밀치재 아랫마을인 와룡리는 과정리에서 가장 멀어 군인들의 도착도 그 만큼 늦어졌던 것이다. 와룡리는 과정리 사람들이 탄량골 가까이 왔을 때는 땅거미가 안개 퍼지듯 하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십여 명의 군인들이 다급하게 몰려오고 있었다. 군인들 사이에는 경찰 두어 명과 지서주임도 섞여 있었다.

"왜 여태까지 여기서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일등상사가 인솔책임자 일등중사에게 쏴질렀다.

"한다고 했는데 거리가 워낙 멀어서요."

일등중사가 어물거렸다.

"양 중대장님이 화가 나서 야단입니다."

어느 경찰의 말이었다.

"날도 어두워지는데 학교까지 갈 것 없어. 이 근방에서 처치해 버려!"

일등상사의 목소리 낮춘 말이었다. 그러나 두려움과 불안으로 모든 신경이 그들에게는 쏠려 있던 사람들의 귀에는 일등상사의 말이 그만 잡히고 말았다. 사람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소리 없는 동요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미적미적 뒤로 물러나고 있었고, 달아나려는 몸짓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꼼짝마랏!"

"반항하면 갈겨라!"

"바짝바짝 붙어서!"

군인들이 총을 꼬나 잡고 사람들을 둘러싸며 외쳐댔다. 그들의 행동은 거칠었고, 눈들은 이상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빨리 걸어라, 빨리!"

"우물거리면 쏴라!"

군인들은 개머리판으로 사람들을 떠밀어 길옆으로 몰아붙였다. 길을 벗어난 사람들 앞에는 탄량골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탄량골로 밀어붙여졌다. 땅거미가 더 짙어진 속에 낮에와는 다른 찬바람이 끼쳐오고 있었다. 가녀린 흐느낌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다. 사람들은 골짜기에 앉혀졌다.

"군경 가족과 방위대 가족이 있으면 나오시오!"

지서 주임이 소리쳤다. 열댓 사람이 다투어 뛰어나갔다. 뒤를 이어 군인들이 사람들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골짜기에 삥 둘러섰다. 그때 어느 남자가 팔을 치켜들며 벌떡 일어났다.

"대장님, 죽어도 말 한마디 하고 죽읍시다. 국민 없는 나라가 무슨 필요가 있소."

따앙! 총소리가 울리고 그 남자가 푹 고꾸라졌다. 그 총소리가 골짜기에 겹겹이 우리며 긴 꼬리를 끌었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이기나 한 듯이 일제히 총소리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 , , , , , , ...

"우악!" "엄니이!"

"우아아-" "아가, 아가!"

총소리들과 온갖 비명들이 뒤엉키고, 사람들이 벌떡벌떡 솟구쳤다가 서로 얽히고 설키며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고꾸라지고 처박혀 있었다. 얼마가 지나자 비명도 들리지 않고, 몸을 솟구치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총소리는 한동안 더 울렸다. 어둠은 앞을 분간하기 어렵게 진해져 있었다. 바람 끝이 일어나며 해질녘부터 하늘을 채우기 시작한 구름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조명타 발사하라!"

메마른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간격을 두고 둘러섰던 군인들이 간격을 좁히며 뒤엉킨 시체들을 향해 다가들었다. 조명탄 불빛 아래 각양각색으로 죽어 넘어진 백여 명의 모습들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 , 총소리가 몇 방 울렸다. 확인사살이었다.

"이상 없나!"

다시 메마른 소리였다.

"!"

"없습니다."

군인들이 대답했다.

"됐어. 그 다음 단계 실시!"

메마른 목소리의 명령을 따라 군인들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얼마쯤 지나 짚단이며 솔가지들이 시체더미 위에 수북하게 쌓여졌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불을 붙였다. 불길은 마치 뱀 혓바닥이 날름거리듯 빠른 속도로 지푸라기에 번져나갔다. 조명탄 불빛이 사위어짐에 따라 밀려들었던 어둠이 짚단에 붙는 불길로 다시 밀려나고 있었다. 짚단을 태우는 불길이 거세지자 그 속에 섞여 있던 생솔가지들도 비지직거리고 툭툭 튀며 불붙어 타기 시작했다. 피비린내에다가 시체 그슬려지는 냄새까지 뒤섞여 시작했다. 군인들이 코를 막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전원, 신속히 학교로 돌아간다."

군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잰걸음 질을 쳐 골짜기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불길 속에서 사람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사람의 옷에 불이 붙어 있었다. 등 쪽이었다. 그 사람은 어딘가로 마구 기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개울로 굴러내려 뒹굴기 시작했다. 옷에 붙은 불이 차츰 꺼져갔다. 불이 다 꺼지자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 사람은 길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그 여자는 넋을 잃은 듯 불길에 싸인 시체더미 쪽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둥지둥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많은 날들이 흘러간 뒤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 여자는 탄량골 학살현장에서 마치 거짓말처럼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임분임 씨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탄량골에서 군인들이 신원국민학교로 돌아왔다. 그때는 벌써 네 개의 교실을 가득가득 채우고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탄량골에서 벌어진 일이 알려진 다음이었다. 군경과 방위대 가족으로 탄량골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학교로 가는 중간에 뒤에서 콩 볶는 총소리를 들었고 모든 마을사람들은 교실에 앉아서 그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탄량골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그 수많은 총소리들이 왜 울리는지 직감으로 알았고, 그들이 뒤늦게 교실로 밀려들자 그때까지 잔뜩 불안한 의혹에 차 있던 마을사람들이 웬 총소리였던가를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탄량골에서 벌어진 일은 삽시간에 교실로 퍼지고 말았다.

"그라믄 피난시키는 기 아니라 우리도 몽땅 죽이는 거 아이가!"

"아이구야, 이 일얼 우짜먼 좋노."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을 그리 할 리가 있나. 이 숫자가 을매고?"

"백 명이 넘이 죽였는데 사오백이라고 몬 죽일 리 있나."

이런 말들이 오가는 속에 교실마다 술렁거리고, 울음소리와 한숨 소리가 뒤섞이고 있었다. 운동장에는 군데군데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닥불의 너훌거리는 불꽃은 교실에서 내간 책상과 걸상들이 통째로 타는 것이었다. 모닥불을 따라 둘러앉은 군인들은 밥을 먹는 축도 있었고, 무슨 이야기들을 하며 웃어대는 쪽도 있었다. 그들이 먹고 있는 국은 소를 때려잡아 급히 끓인 쇠고깃국이었다. 화단가에는 부락민들을 교실로 들여보내기 전에 압수한 크고 작은 피난 짐들이 아무렇게나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중대장님 오신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있던 군인들이 벌떡벌떡 일어났다. 백여 명이 떠들어대던 소란이 뚝 멎었다.

"근무중 이상 무!"

하사관 하나가 목이 터지라 외치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밥을 먹고 있던 군인들도 항고를 든 채 부동자세였다.

", 수고한다."

부하 넷을 거느리고 모닥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양효석이었다.

"모두 쉬어."

양효석의 말을 받아 하사관이,

"중대에 쉬엇!"

탄력 넘치는 구령을 했다. 그때서야 군인들은 부동자세를 풀고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중대장님 오셨습니까."

소위 하나가 어디선가 급히 뛰어와 양효석 앞에 멈추며 경례를 붙였다.

"통비분자 색출심사는 워떻게 되고 있소?"

양효석이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 곧 시작할 겁니다. 지서장, 면장, 사찰계 형사들이 곧 오기로 했습니다."

소위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알겄소, 차질 없이 진행시키씨요. 허고, 외곽경비를 허고는 있지만 여그 경계도 철저허니 단도리허시오."

", 알겠습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날씨가 완연하게 추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유리창들이 깨져나간 교실에는 통바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맨바닥에 웅크리고 쪼그리고 앉은 사람들은 모두가 부들부들 떨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피난 짐을 싸고, 집에서 내몰리고, 마을이 불타고, 학교로 끌려오고 하느라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입에 넣은 것이 없었다. 저녁밥까지 굶은 아이들이 파삭 탄 입술로 밥을 졸랐지만 어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물이나마 얻어 먹여 재우려고 했지만 군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칭얼거리고 보채던 아이들은 제물에 지쳐 추위 속에서도 잠이 들었다. 그들은 배가 곯아 추위가 더했고, 코앞을 알 수 없는 불안으로 몸 떨림은 더 심했다. 운동장 모닥불은 계속 기세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군인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교실마다 들어왔다. 나직나직하게 오가던 말들이 뚝 멎었다. 군인들의 손에는 굵은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다 하사관이었다.

"이 통비분자들! 다 똑바로 앉아!"

교단으로 올라선 군인이 버럭 소리치는 것과 함께 몽둥이로 칠판을 후려쳤다. 칠판과 벽 사이에 공간이 있어서 그런지 그 소리는 의외로 크게 울림을 일으켰다. 자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깼고, 어떤 아이들은 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시끄럿! 아새끼들 못 울게 해."

군인이 몽둥이로 또 칠판을 쾅쾅 쳐댔다. 부모들은 우는 아이의 입을 막거나 품에 안았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군인이 원하는 대로 뚝 그쳐지지 않았다. 나이가 네다섯 살만 먹었어도 어찌 겁을 먹이고 달래고 해서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었지만, 그 아래나이의 어린애들이 놀라서 터뜨리는 울음을 칠판을 쳐댈수록 더 심해질 뿐이었다. 그때 칠판을 쳐대는 소리가 뒤에서도 쿵쿵 울려왔다. 교실마다 칠판을 쳐대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더 기를 세웠다.

"거 아가리 틀어막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잖아."

군인이 소리치며 더 세게 칠판을 후려쳤다.

"알라덜이 쪼맨해서 말귀를 몬 알아묵심더."

어느 여자의 울음 섞인 말이었다.

"우는 아새끼들 데리고 당장 복도로 나가, 복도로!"

군인의 외침에 몇몇 여자가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이들을 안고 일어났다. 그러나 복도라고 빈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복도 쪽의 유리도 다 깨져 있어서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다소 멀어진 것뿐이었다.

"너희들은 공비와 내통해서 어젯밤에도 우리 전우 수십 명의 생명을 잃게 한 악질 통비분자들이야. 그렇나, 안 그렇나!"

군인을 또 칠판을 쾅 두들겼다. 거기에 박자라도 맞추듯 뒷교실에서도 무슨 목청 돋운 소리에 이어 칠판 치는 소리가 쿵 울렸다. 앞뒤에서 번갈이로 칠판이 울려댈 때마다 사람들의 가슴은 움찔움찔 조여들고 있었다.

"왜 대답들이 없나! 대답이 없는 건 다 통비분자란 걸 인정한다 그 말인가!"

그래도 사람들은 죽은 듯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수긍할 수도 없었다. 그 둘 다가 올가미고 덫이었다. 사람들은 군인들이 들이닥친 아침부터 그와 똑같은 말을 연거푸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속으로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은 통비한 적도 없을뿐더러, 산사람들이 마을에 숨어든 일도 없었고, 더구나 수십 명씩이나 죽어야 하는 심한 전투가 벌어졌다면 자신들이 몰랐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 내가 멍청이 잠을 잔 게 아니었을까 싶었던 사람들도 서로가 말을 나누어보고는 간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니다"고 하면 무슨 변을 당할지 몰라 입을 열지 못했고, "그렇다"고 했다가는 통비분자를 자인하는 죽음이었기 때문에 입을 더 다물어야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침묵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 너 일어나!"

군인이 몽둥이 끝으로 한 사람을 지목했다.

"야아? 누구, , 지 말입니꺼?"

더듬거리는 목소리는 완연히 떨리고 있었다.

"그래, 이새끼야, ."

교단이 가까운 쪽에서 한 남자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너가 대표로 대답해. 그래, 너희들이 전부 통비분자라 그거지?"

"아입니더, 그기 아입니더."

"씨끄럿! 그럼 뭐야, 공비와 내통한 적이 전연 없다 그거야?"

"아입니더, 그기 아니고예..."

"이새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너 이리 나와, 빨리!"

군인이 이번에는 몽둥이로 교탁을 내리쳤다. 그 요란한 소리에 좀 가라앉았던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왁 터졌다.

"이새끼, 빨리 나와, 빨리."

남자가 주춤거리며 교단 앞으로 나가자마자 군인이 몽둥이를 내리쳤다. 어깻죽지를 맞은 남자가 숨 막히는 소리를 토하며 비척거렸다.

"너 같은 놈이 바로 빨갱이야, 빨갱이!"

군인은 마구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몽둥이는 남자의 등짝이고 옆구리고 허리고 닥치는 대로 난타해대고 있었다. 그때마다 남자는 비명을 코하며 비틀거리다가 결국 쓰러졌다. 군인은 쓰러진 남자를 군화발로 몇 번인가 더 짓밟고 걷어차고 나서 폭행을 멈추었다. 그리고 교단을 내려서며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교실은 추위보다 더한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추위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운동장의 모닥불들은 여전한 기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추워서 우는 것인지, 배가 고파 우는 것인지, 겁먹어 우는 것인지 모를 어린애들의 울음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다른 군인이 교단으로 올라섰다.

"자아, 잘들 봤지. 정신 똑바로 차려!"

그 군인은 대뜸 소리치며 몽둥이로 칠판을 갈겼다. 사람들의 곧추섰던 몸이 더 곧추섰다.

", 너 일어나, !"

그 군인도 먼저 군인과 똑같은 몽둥이 끝으로 사람을 지목했다.

"아이구야, 지 말입니꺼?"

여자의 절망적인 소리였다.

"맞다, 벌떡 일어나!"

여자가 탄식처럼 한숨을 토하며 일어났다. 그 한숨 소리를 못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빨갱이노래 하나 불러!"

"야아?"

여자가 소스라쳤고, 사람들은 몸을 움츠렸다. 사람들의 심정은 자기 자신들이 지목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를 수도 없고, 안 부를 수도 없고- 부르면 빨갱이라고 할 것이고, 안 부르면 말을 안 듣는다고 트집잡힐 것이었다.

"귀가 먹었나! 빨갱이노래 불러보라니까!"

군인은 더 힘껏 칠판을 후려쳤다.

"지는, 지는 노래 부를지 모름더."

여자는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뭐야? 빨갱이노래 안 배웠단 말야!"

"배우기사 했어도 지는 워낙이 노래재주가 없어서..."

여자는 견디기 어려운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살아날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좋아, 그럼 애국가 불러봐."

여자는, 아이고 살았다, 싶었다. 그래서 추위와 공포로 얼어붙은 몸을 다잡아 노래를 시작했다.

"동해물과 배액두산이..."

", , 그만! 너 이년, 그럴 줄 알았다. 누구 앞에서 잔꾀 부리고 그래, 이년아. 당장 이리 나와!"

여자는 그때서야 덫에 걸린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들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너 같은 약은 년이 바로 악질 통비분자야, 알겠어!"

몽둥이가 여자의 몸을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교실을 흔들고, 어린애들이 기를 쓰고 울어댔다. 여자의 비명이 맥이 빠져서야 군인은 몽둥이질을 멈추었다.

"자아, 다들 똑똑히 들어. 빨갱이 편이면 왼손을 들고, 푸른뎅이 편이면 오른손을 들어라. 거짓말하며 다 아니까 양심적으로 해야 돼. 자아, 팔 들어!"

이 어린애장난 같은 짓에 왼손을 들어 올릴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양쪽 손을 다 들어 올린 사람이 몇몇 있었다. 너무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 어찌 하는 것이 좋을지 몰라 그랬겠지만, 그 엉뚱한 짓이 두 군인의 눈에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저기, 저기, 두 손 다 든 네 연놈 앞으로 나와."

여자 둘에, 남자 둘이었다. 그들이 부부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남편이 하는 대로 여자는 따라 한 것이 분명했다.

"요런 박쥐 같은 새끼들!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

네 사람을 놓고 두 군인이 매타작을 시작했다. 몽둥이가 닥치는 대로 살을 치는 소리도 끔찍했고, 네 사람의 비명이 뒤엉키는 소리도 끔찍했다. 어린애들은 더욱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두 군인이 교실을 나갔다. 사람들은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어깨들을 부렸다. 밤은 깊어가고, 추위는 더 혹독해져가고 있었다. 어린애들의 오줌 싼 기저귀가 금방 버석버석하게 얼어들었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시달림 당하는 것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군인들은 번갈아 가며 들어와 새벽녘까지 그런 식으로 공포분위기를 만들고, 매타작을 놓았다. 그런 경황 속에서도 한 여자가 애를 낳았다. 딸이었다. 문홍한이라는 사람의 아내가 어느 군인의 도움으로 장소를 옮겨 아들을 낳는 바람에 그 일가족이 요행히 살아났다는 것은 나중에 알려진 일이었고, 정작 교실에 갇힌 사람들은 그 일을 모른 채 자기들 옆에서 몸을 풀어 딸을 낳은 산모의 고통과 기구함에 쓰라린 마음들을 모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지서장하고 면장이 얼굴을 나타냈다. 두 사람을 보자마자 교실에서 마다 "우와!" 환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 일어난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글썽이고, 목들이 메었다. 그건, 이제 살아나게 되었다는 공감이고, 확인이었다. 그 두 사람이야말로 자기네들이 용공분자도 아니고, 통비분자도 아니라는 것을 변호하고 옹호해줄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람들 모두가 초저녁부터 애태우며 만나고 싶어 하고 기다렸던 사람이 바로 그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면장과 지서주임이 첫 번째 교실로 들어섰다.

"군경 가족은 앞으로 나오시오."

면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우르르 앞으로 쏠려 나갔다.

"웬 군경 가족이 이리도 많아!"

면장이 차갑게 내쏜 말이었다. 사람들은 주춤 멈춰 섰다. 면장은 손가락 끝으로 군경 가족을 골라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도로 들여보내고 말았다. 면장과 지서주임은 주민들을 위한 말 한마디 없이 다음 교실로 가버렸다.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운동장의 모닥불도 사그라져가고 있었다. 양효석이 대대장과 함께 운동장에 나타난 것은 열시쯤이었다. 간밤의 추위를 녹이는 햇살이 운동장에 가득 깔려 있었다. 군인들이 칼 꽂은 총을 번뜩거리며 사람들은 교실에서 끌러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엉성하게 줄을 맞춰 섰다. 군경 가족을 골라낸 그들의 수는 오백여 명을 헤아렸다.

"집합 끝!"

일등상사가 보고했다.

"출발시켜라!"

조회대에 선 대대장의 명령이었다. 군인들이 경계하는 속에서 줄이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의 대열이 교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압수한 피난 짐에 손을 못 대게하고 줄을 세울 때 벌써 어른들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고, 맨손으로 운동장을 떠나게 되자 실오라기 같이 가늘게 남았던 피난길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끊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길이 어떤 길인가를 분명히 확인시킨 것은 사람들이 교문을 나서면서 부터였다. 군인에 경찰과 방위대가 포함된 토벌대들이 길 양쪽에 늘어서서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사람들이 걸어갈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벌대원들이 만들고 있는 줄은 박산골로 이어져 있었다. 나이든 남자들, 부녀자들 그리고 아이들이 태반이 신원면민 오백여 명은 그 두 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 멀어져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이 박산골로 빨려들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한꺼번에 갈겨대는 수많은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 총소리들은 신원면을 에워싸고 있는 많은 산들과 그 골짜기에 부딪쳐 겹겹의 메아리로 울려가고 있었다. 그 요란하게 튀는 총소리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 한쪽에 빙글빙글 맴돌이질 치는 검은 무늬를 새기는 것이 있었다. 그건 수백 마리가 무리 진 까마귀 떼였다. 까마귀 떼가 유유하게 선회하며 차츰차츰 그 높이를 낮추고 있는 곳은 어젯밤에 학살이 자행된 탄량골의 하늘이었다.

 

 

7. 빨치산,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의 진정성

더 부서질 것이 없다시피 한 인천이 다시 불바다가 되고, 뒤따라 서울도 불바다가 되었다. 비행기들이 서울을 무차별 폭격해대는 정도는 작년 구월에 비해 몇 갑절 심했다. 일월이 끝나가고 있는 추위 속에서 서울은 며칠이고 계속해서 폭탄세례를 받으며 불길에 휩싸였다. 깨지고 무너지고 잿더미가 되어가는 도시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미군 비행기들은 독판을 치고 날아다니며 그저 미친것처럼 폭탄을 퍼부어댈 뿐이었다. 서울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것은 비행기만이 아니었다. 김포 쪽에서 수없이 날아드는 폭탄도 한몫을 거들고 있었다. 이십육일에 재차 인천상륙을 감행한 지상병력의 공격이었다.

해방일보는 다시 후퇴를 서두르고 있었다. 작년 구월과 똑같이 폭격을 피해 변두리로 옮겨 앉은 비좁은 신문사 안은 두서없이 어수선했다.

"이 동무, 어떡하시겠어요!"

갑자기 귓속을 파고드는 낮으나 뜨거운 여자의 음성이었다. 바쁘게 짐을 챙기고 있던 이학송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폈다. 귓속말을 했던 김미선도 황급히 몸을 바로 세웠다. 입을 꾹 다문 이학송은 김미선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감돌던 웃음기가 사라져버린 그의 얼굴에는 무거운 우울이 담겨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듯 하고 있는 김미선의 눈은 물기가 번진 채 무슨 말인가를 간절하게 하고 있었고,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과 함께 괴로움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입김이 귓전에 느껴질 정도로 그녀가 가깝게 말을 해오는 순간 이학송의 뇌리에 퍼뜩 떠오른 것은 두 가지였다. 어찌나 굶주렸는지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녀의 두 아이였고, '저는 못 가겠는데...'하는 생략된 말이었다.

"나는...가야 되겠습니다."

이학송은 그 짧은 말을 해놓고 마른침을 삼켰다. 김미선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달라지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눈길을 떨구며,

", 알았어요."

들릴 듯 말 듯 말하고는 돌아섰다. 이학송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녀가 하려다가 말아버린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이들 찾기를 단념하셨나요?"

그녀가 이 말을 참아낸 것은 자신의 괴로움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이었음을 이학송은 알고 있었다. 김미선은 열사흘 뒤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 이미 이학송은 세 아이를 찾아내려고 일과만 끝나면 서울 시내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니던 참이었다. 부역자나 그 가족을 단심제로 처단한 형편에 그때까지 소식이 없는 아내의 생사에 대해서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엄마를 찾겠다고 저희들 발로 걸어 나간 세 아이의 행방은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시당에 특별히 부탁도 했고, 집이나 부모 잃은 아이들을 모아놓은 곳을 찾아 매일같이 허덕거리고 다녔다. 한복판에 뚫린 구멍이 날마다 커져가는 가슴을 붙안고 그는 추위로 얼어붙은 하늘을 향해 소리 없는 통곡을 토해내고는 했다. 그 어린 것들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한순간인들 살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피가 타고 살이 꼬이는 괴로움으로 그는 나날이 메말라갔다. 비록 기아상태에 빠져 있기는 했지만 두 아이가 친정어머니의 손에 무사히 지켜진 것을 확인한 김미선은 그의 괴로음을 덜어주려고 진정으로 애를 썼다. 입바른 위로의 말 같은 것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녀도 그의 아이들을 찾아 추위를 무릅쓰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지 말고 일과가 끝나는 대로 빨리빨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엄마와 오래 떨어져 산 애들이 엄마를 얼마나 기다리겠어요."

"아니에요. 서너 시간 더 빨리 엄말 본다고 해서 그 애들이 더 행복해지는 건 아녜요. 저나 애들이나 서로 품고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제가 괴로워서 하는 일이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러나 세 아이의 모습은 서울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헛바람이 새는 가슴으로, 허방을 딛는 걸음으로 한 달을 보내고 다시 서울을 떠나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김미선은 그 엇갈림길에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무실의 소란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지시하고 응답하는 소리들이 오락가락 뒤엉키고, 책상 밀어붙이는 소리나 걸상 넘어지는 소리도 요란하게 울리고는 했다. 김미선은 그 소란 속을 곧장 걸어갔다. 그녀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에는 한 남자가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와 예닐곱 발짝 간격을 두고 걸음을 멈춰 섰다. 옆얼굴을 보이고 섰던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그녀 쪽으로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원조였다. 그녀를 알아본 이원조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오르는 것 같다가 이내 의문이 담겼다. 이원조의 눈이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녀도 이원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물기 젖은 눈은 무슨 애절한 말인가를 담고 있었다. 슬픈 애원인 듯, 괴로운 하소연인 듯, 반쯤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담긴 말을 구체화 시키고 있었다. 이원조의 눈이 느리게 느리게 내려감겼다. 그리고 다물린 입술에 힘이 모아졌다. 그 힘이 풀리면서 눈이 다시 느리게 느리게 뜨여졌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원조의 얼굴은 그저 담담했다. 그는 아까처럼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소리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여전히 소란한 사무실을 그녀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들 두 사람의 소리 없는 대화를 목격한 사람은 이학송 뿐이었다. 혹시 누가 눈치 챌까 싶어 그는 그녀가 문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눈길을 돌려 딴전을 피웠다. 적진에서 부디 무사하시오...이학송은 담배연기를 깊이깊이 빨아들였다. 통화를 먼저 떠나오면서는 그녀의 우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자신이 뒤돌아보지 않았고, 이제 그녀는 뼈마디 앙상한 두 아이 곁으로 돌아가면서 그녀 자신이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그는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담배를 끄고, 소각할 종이뭉치들을 한 아름 끌어안았다. 느낌이 서로 다른 폭음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얼어 죽었거나 굶어 죽었을 거야... 그는 그 동안에 애써 피해왔던 생각을 가슴에 못을 치듯이 분명하게 정리했다. 두 아들과 딸아이의 모습이 왈칵 밀려들었다. 그는 현기증과 함께 울음덩이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오른손을 다급하게 주머니에 넣었다. 안고 있던 종이뭉치들이 와르르 마룻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주머니 속에서 그의 손아귀 가득 팽이가 잡혔다. 그는 팽이를 으스러져라 쥐며 부르르 떨었다.

"이 동무, 어디 아프오?"

누군가가 물었다.

"아닙니다, 갑자기 주머니에서 뭘 좀 찾을 게 있어서요."

이학송은 흩어진 종이뭉치들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아 예에, 빨리빨리 합시다. 곧 출발하는 모양이오.“

이학송은 종이뭉치들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담 옆에서 종이들이 타며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불길 속에다가 안고 온 종이뭉치들을 던졌다. 문득 불길이 잦아지는 듯하다가 연기를 물큰 피워 올리며 활짝 기세를 폈다. 혹독한 추위를 뚫고 다시 서울로 와 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열성적으로 기록했던 것들이 불길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그 불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크지 않은 불길은 민족통일의 역사, 인민해방의 역사가 좌절되고 있는 상징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떠나서 또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 시내가 며칠째 계속 불타고 있는 연기가 그대로 겹겹이 뭉쳐진 것처럼 하늘에는 구름이 두껍게 끼어 있었다. 이월로 접어들면서 추위도 어느 만큼 수그러져 있었다.

"이대로 가면 양키들은 곧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남진하는 부대를 따라 서울을 떠나기 직전에 김범우가 찾아와 한 말이었다. 그는 어느 때 없이 미군에 대해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서울을 무자비하게 쑥밭을 만들어대고 있었다. 적이고 민간인이고를 가리지 않는 그들의 무차별한 폭격은 그야말로 자기네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제국주의적 잔학이고, 발악이었다. 다만, 그들의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인간들은 이미 서울을 떠나 이승만 정권을 에워싼 채 덕을 보고 있는 친일반민족세력들과 새롭게 생겨난 기회주의자들뿐이었다. 김범우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이학송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 동무, 빨리 안으로 들어오시오. 곧 출발이오!"

이학송은 외침을 따라 몸을 돌렸다.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이 주머니로 들어갔다. 다시 손에 팽이가 잡혔다. 그래, 가야지. 그는 팽이를 꼬옥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월 칠일이 저물고 있었다.

 

"대장님, 큰일났습니다!"

부관이 뛰어들며 토해낸 말이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이오?"

심재모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찡그러진 얼굴에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 장정들이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데모?"

심재모는 그 색다른 사건에 문득 긴장을 느꼈다.

",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급식을 제대로 하라, 우리는 개죽음할 수 없다 약품을 조달하라, 이렇게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가 얼마나 되오?"

"장병 전원입니다."

심재모는 팔짱을 끼었다가 오른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고개를 수그렸다. 올 것이 온 것이었다. 어쩌면 늦게 온 일인지도 몰랐다. 마음이 무겁게 내리눌리고 있었다. 전혀 수습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교육대들은 어떤지 좀 알아보시오."

", 알겠습니다."

부관이 돌아섰다.

"아니오, 아니오, 관두시오."

심재모는 금방 말을 고쳤다. 주변의 훈련소들이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무슨 뾰족한 해결책이 강구될 리 없었다. 고작해야 사정없이 몰아치라거나, 주모자를 색출해내서 본때를 보이라는 정도의 말을 듣게 되기가 십상일 터였다. 그리고 자기네 교육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소장에게는 흉만 잡힐 일이었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소?"

", 소대마다 막사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양쪽 문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됐소, 그러지 말고 모두 연병장에 집합시키시오. 내가 곧 나가겠소."

"아니, 어떻게 하시려구요? 무슨 좋은 해결책이 있으십니까?"

부관의 얼굴에 의문과 기대가 엇갈리고 있었다.

"일단 집합이나 시키시오."

심재모는 명령을 내리고 등을 돌렸다. 정규훈련소에서 급조된 방위군교육대로 옮겨오면서부터 온갖 문제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이 좋아 교육 대장이었지 그것은 엄연한 좌천이었다. 소위의 구타살인사건은 결국 흐지부지 묻혀지고 말았지만, 자신의 전출이 그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결국 참모부의 장교들에게 떠밀려난 것이었다. 참모부의 장교들로 뭉쳐진 힘을 자신의 혼자 힘으로써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축하하오. 계급은 달라도 심 소령은 나와 똑같은 직책인 교육대장으로 영전하는 거요."

훈련소장이 목울대만 크게 울리는 소리로 껄껄거리며 웃었다.

"군대에서 폭력행위는 꼭 근절되어야 합니다."

심재모는 훈련소장의 눈을 응시한 채 이 말을 똑똑하게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 돼먹지 못한 관동군 출신 놈들아! 부르짖고 있었다.

"아 좋소, 좋아."

훈련소장은 얼굴이 경직되면서도 더 큰 소리로 껄껄거렸다. 국민방위군교육대는 훈련소가 아니었다. 난민수용소거나 병자수용소라는 것이 옳았다. 모두가 영양실조 상태인데다가, 반 이상이 동상환자였다. 그런데 세 끼 밥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급식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었으니 다른 것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피복 지급이 될 리가 없었으며, 추위를 막을 잠자리가 제대로 갖추어졌을 리가 없었고,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의무시설이 규모 있게 꾸며질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전시라고는 하지만 그 무계획과 우격다짐 앞에서 심재모는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그가 해야 할 급선무는 교육대장의 임무가 아니라 난민수용소장의 임무였다. 그래서 그는 상부에 전화를 걸어대는 것이 중요 일과였다. 그가 독촉해대는 것은 정상급식, 난방설비, 의료시설의 조속해결이었다. 그러나 상부의 응답은 변함없이 '예산 미책정'이었다. 영양실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정량미달의 부식도 없는 급식을 겨우겨우 해결해가는 상황 속에서 동상자들의 증세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환자들이 발생하면서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교육대 주변에서 발발하고 있는 민폐 같은 것은 막을 수도, 처벌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각처에서 교육대까지 오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현지 조달'해온 장정들에게 민폐는 몸에 익은 해결 방법이었고, 그들의 생존조건을 행정적으로 강구하지 못한 입장에서 민폐근절이나 처벌 같은 것은 공염불일 뿐이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립시다. 곧 조처가 내려올 겁니다. 일선에선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우리 고생은 좀 나은 편 아닙니까."

심재모는 부지런히 막사를 돌며 장정들을 다독거리고, 환자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런 행위로 악화되어가는 동상을 막을 수 없는 일이었고, 중환자들이 치료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자꾸 생겨나는 병자들을 예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방위군교육대라는 울타리는 생사람들을 몰어넣고 서서히 굶겨 죽이고, 병들어 죽이고 있는 살인장에 지나지 않았다. 심재모는 아무 효과가 없는 전화질을 하기에 지쳐 직접 상부를 찾아갔다.

"치료를 해줄 수 없는 형편이면 동상자들과 병자들은 속히 귀향조처를 취해야 할 겁니다. 훈련을 받을 수 없게 몸이 상한 사람들을 더 붙들어 둬봐야 아무 쓸모가 없을뿐더러, 자꾸 사망자만 늘어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보고를 겸한 의견제시를 했지만 아무런 조처도 취해지지 않았다. 보고는 항의로 바뀌었다. 그래도 아무런 울림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어느 교육대에서 집단탈출극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집단탈출이 용인되었을 리가 없었다. 총격을 가하고,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집단탈출은 진압되었다.

"여러분, 집단탈출을 시도한다는 건 무모한 행위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긴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서 그 해결을 위해 상부를 상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고, 우리 교육대에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당부합니다."

심재모는 집단탈출사건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미리 공개해서 자신의 교육대에서는 그런 일을 예방하고자 했다. 그런데 돌림병이 퍼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 열이 펄펄 끊다가 잇따라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글쎄요, 무슨 병인지는 빨리 조사를 해봐야 되겠습니다. 전염병 예방이라면 대개 파리나 모기, 이 같은 중간매개물을 차단해야 하고, 음식의 불결을 막아야 합니다. 겨울철이니까 파리나 모기는 없고, 금년 겨울은 또 유난히 추우니까 음식이 부패할 리도 없습니다. 그 대신 오랫동안 목욕도 못하고 옷들도 더러운 사람들한테서 이는 엄청나게 들끓고 있을 겁니다. 그것부터 소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성부대 군의관의 처방이었다. 심재모는 소대별로 이 소탕작전을 전개시켰다. 그건 이를 일일이 손으로 잡아내서 될 일이 아니었고, 불을 피워놓고 옷을 털어댄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옷의 박음자리 깊은 곳에 붙어있는 서캐까지 말끔하게 제거하지 않는 한 이는 며칠이 못 가 또 생겨나게 마련이었다. 서캐까지 없애는 방법은 옷을 푹푹 삶아내는 일이었다. 그는 장교들한테서 염출시킨 돈으로 장작을 사들여 소대별로 옷 삶기를 시켰다. 그 일은 효과가 있어 그의 교육대에서는 돌림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한 달이 다 되어 지난 일월 삼십일에 예산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심재모는 너무 반가워 상부에 전화를 걸었는데, 그곳의 반응은 의외로 냉랭했다. 예산이 통과된 것뿐이지 집행이 언제 될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무성의하고 막연한 대답도 대답이었지만, 심재모는 완전히 울화통이 터지다 못해 주저앉는 심정이 되어 버린 것은 며칠이 지나 예산내역을 알고 나서였다. 방위군 총인원을 오십만 명으로 추산하여, 하루 식량을 일인당 네 홉, 취사용 연료대 사십 원, 잡비를 십 원씩으로 계산하여 일월부터 삼 개월 간의 총액 이백구억 원이 책정되었던 것이다. 예산내역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 외에도 당연히 있어야 할 부식비, 난방연료비, 의료비, 피복비, 훈련비, 부대 운영비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반찬은 아무것도 없이 밥만 씹고, 불기라곤 없는 천막에서 얼어 죽든 말든 알 바 아니고, 병든 자들은 죽으면 될 거 아니냐는 식이었다. 그러니 피복비며 훈련비며 부대 운영비 같은 것은 더 따질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하루 일인당 네 홉이라는 급식량이었다. 전쟁포로들에게도 하루 급식량은 다섯 홉이었던 것이다.

장정들이 단체행동으로 들고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런 세부적인 내용은 모른 채로 예산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사실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개선되는 것이 없자 결국 행동으로 나선 것이었다. 심재모는 부관의 연락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연병장에는 장정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그 몰골들이 천상 거지 때와 다름없는 웅성거림을 심재모는 죄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법이라는 강제행위로 저런 참상을 빚어내고 있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군인도 아니면서 군인들의 통제 아래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은 어떻게 보상될 것인가. 보상은 차치하고 그 죽음의 명목은 도대체 무엇인가. 전사인가, 자연사인가. 아직 군인이 아니니 전사로 취급할 리가 없다. 그럼 자연사인가? 그렇지도 않다. 그들이 얼어 죽고, 굶어죽고, 병들어 죽은 것은 아무 대책이 없이 행해진 강압행위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여러 종류로 타살당한 것이고, 정부는 공공연한 살인행위를 저지른 것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이 국민방위군을 창설한 이유는 될 수 있어도, 그런 무책임한 살인행위까지 합리화시킬 수 있는 근거는 아니었다. 소문으로는 각 교육대에 도착할 때까지 죽어간 사람들이 엄청나다는데, 도대체 그 수가 얼마나 될까...

"대장님, 벌써 나와 계셨습니까? 집합 완료했습니다."

부관이 경례를 붙였다.

"갑시다."

심재모는 모자를 고쳐 쓰고 앞장섰다. 심재모는 천천히 구령대로 올라섰다. 또다시 자신 없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런 요구조건들을 내걸고 데모를 벌였던 사람들답지 않게 조용한 것이 고맙고도 미안했다. 그들의 그런 질서유지가 자신에 대한 신뢰의 표현인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장정 여러분, 여러분의 요구사항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곧 내가 상부에 대고 계속 해결을 요구해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집단행동을 하게 된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말할 수 없는 악조건 속에서 참으로 오래참고 견뎌왔습니다. 그 고통에 대해서 나는 잘 알고 있고, 그것을 하루빨리 해결하려고 내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고 상부를 상대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노력에 비해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자꾸 여러분들한테 거짓말만 한 결과가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교육대 장교들이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털어가며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덜어드리려고 노력한 진정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동안 잘 참아준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예산이 통과되었으니 이제 집행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이 막바지에서 며칠만 더 참아내서 우리교육대가 무사하기를 바랍니다. 나를 비롯한 장교들과 사병 모두는 다 여러분들의 편입니다. 우리 교육대에서 일체의 구타가 없는 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집단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그건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끼리 반목을 조장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나는 또 상부를 찾아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진심을 믿고 며칠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나는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이상입니다."

심재모는 구령대를 내려갔다. 장정들은 말없이 소대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교육대마다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고 있었다. 여러 지방에서 뒤늦게 도착한 장정들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거부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 또한 무계획적인 과잉징집이 빚어낸 심각한 문제점이었다. 국회를 통과한 예산은 오십만 명으로 추산되었는데 정작 서울 이남의 각 지방에서 강제 징집된 사람들은 그 두 배인 백만 명을 헤아렸던 것이다. 교육대의 수용을 거부당한 사람들은 아무런 후속조처도 받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빈털터리인 그들은 갈데없는 거지꼴이 되어 고향을 찾아가야 하는 난감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난데없이 수십만 명의 거지 떼가 생겨난 샘이었다. 그들은 끼니와 잠자리를 구걸하지 않고서는 몇 백 리씩이 넘는 고향을 찾아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작 예산집행을 하면서 부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방위군사령부에서는 각 교육대에 예산을 영달하면서 허위영수증 작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 허위영수증은 다름이 아니라, , , 삼월까지 삼 개월 동안의 예산중에서 이미 날짜가 지나버린 일월 한 달분과 이월 분 중에서 수령직전까지의 금액을 착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액수는 어마어마한 거금이 아닐 수 없었다. 부관으로부터 그 보고를 받은 심재모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쳐댔다.

"뭐라고, 이런 개애새끼들! 어떤 새끼가 그런 개소리를 쳐, 개소릴 치길!"

얼굴이 하얗도록 흥분된 심재모는 의자고 책상이고 닥치는 대로 걷어차고 있었다. 그리도 무섭게 화를 내는 상관을 처음 대하는 부관은 심재모의 긴 다리가 쭉쭉 뻗칠 때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심재모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벌교에서 지주들이 입산한 좌익의 집에는 소작을 주지 않기로 결의한 사실을 알고 나서 그랬던 이후 처음이었고, 책상이며 의자를 닥치는 대로 걷어차고 있는 모습도 그때와 똑같았다.

", 대장님, 진정, 진정하십시오."

상관을 붙들 수가 없는 부관은 두 팔을 엉거주춤 든 채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우리 교육댄 그따위 짓 절대로 못한다고 거부하시오!"

심재모가 숨을 몰아쉬며 내린 명령이었다.

"대장님, 저어..."

손을 맞잡은 부관이 어물거렸다.

"뭐요!"

담배를 빼든 심재모가 부관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저어... 제가 먼저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저보다 계급이 높아놔서..."

"알았소. 내가 사령부로 직접 가겠소."

심재모는 성냥을 득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깊게 들이마신 담배연기를 한숨으로 길게 토해냈다. 또 하나의 벽에 부딪쳐 있었다. 그는 암담하고도 착잡한 기분이었다. 이 벽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또 튕겨질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비록 또 튕겨져 나간다 하더러도 자신의 이름으로 허위영수증을 써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 장정들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가짜 영수증을 만들어줘 그런 부정에 동조할 수도 없었다. , 이 나라 군대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는 군대에 몸담게 된 것을 또 후회하고 있었다.

"자 보십시오, 부식비, 난방비, 의료비, 피복비, 훈련비, 부대 운영비 같은 것들이 책정되지 않은 건 전시상황이라 불가피했다는 걸로 좋습니다. 그럼, 이미 경과분의 예산은 마땅히 그런 명목들로 체되어야 옳지, 어째서 수령하지도 않은 공금을 놓고 무조건 영수증을 만들어내라는 겁니까. 내 이름으로 영수증을 쓰는 것은 내가 바로 그만한 액수의 공금을 횡령했다는 결과가 됩니다.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싶지 않습니다."

심재모는 맞은 편의 소령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 참 심소령님,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만 나오지 마시고 협조하는 쪽으로 마음을 좀 돌리십시다. 내가 확실하게 말하지만, 심 소령님한테 공금횡령죄가 돌아갈까 걱정하는 건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심 소령님만 협조해주시면 일은 감쪽같이 되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심 소령님이 협조를 잘해주시면 군대생활에 이익이 갔으면 갔지 손해야 있겠습니까?"

소령은 뒷말을 은근한 어조로 하며, 군복에도 몸집에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눈웃음을 간사스럽게 쳐 보였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역겨움을 느낀 심재모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심 소령님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어쨌거나 심 소령님이 우리 방위군 교육대장이 된 건 운수 대통한 겁니다. 우리 이 분이 말입니다."

소령은 엄지손가락을 빳빳이 세워보이고는,

"저어 위에, 그리고 더 그 위에 직통으로 통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라 그 말입니다."

검지손가락을 세워 하늘을 향해 팔을 뻗치고, 엉덩이를 들먹해서 또 뻗어 올리고하며 자뭇 거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요, 어쨌든 내 뜻은 전했으니 우리 부대 돈은 곧 지급해주기 바랍니다."

심재모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 심 소령, 정말 이러기요!"

소령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내쏘았다. 그 얼굴이 험악하게 변해 있었다.

"내 할 말은 다 했소."

심재모는 소령을 짧게 쏘아보고 몸을 돌렸다.

"건방지게! 분명 후회하게 될 거다."

소령이 외친 소리였다.

다음날 저녁 심재모는 대구시내 어느 요정에 앉아 있었다. 그와 마주 앉은 사람은 방위군 부사령관 윤익헌 대령이었다. 심재모는 윤 대령의 전화를 직접 받고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자아, 심 소령! 심 소령의 젊은 혈기와 정의감, 아주 믿음직스럽고 든든하오. 뭐 긴 말 할것 없이 이번 일에 깨끗하게 협조해주시오. 그럼 나도 심 소령한테 섭섭잖게 하리다. 다른 사람들은 다 협조가 됐는데 심 소령만 안 돼서야 말이 되겠소? 이 일이 다 우리 단독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 알아두고, 자아, 협조하는 뜻으로 한잔 쭈욱 듭시다."

윤 대령이 호걸스럽게 헛웃음을 쳐대며 잔을 들었다.

"저어... 저는..."

"자아, 자아, 말이 많으면 빨갱이고 공산당이야. 어서 잔 들어요."

윤 대령이 밀어붙였고,

"그래요, 어서 잔 드세요."

옆에 앉은 화장 짙은 여자가 냉큼 술잔을 들어올렸다. 술상이 내려앉을 정도로 가득 찬 가지가지 안주며, 야하게 몸치장을 한 여자며, 전쟁은 딴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돈은 전쟁 통에 진기한 안주들을 얼마든지 술상에 오르게 하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 대령이 치를 술값이며 화대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돈일 것인가. 바로 가짜영수증에서 나오는 돈이었다. 그것은 또 수없이 많은 장정들을 굶기고, 얼리고, 병들게 해서 모아진 돈이었다. 심재모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데다가,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으니 술맛이 날 리가 없었다. 이튿날 일과가 시작되자마자 소령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심 소령님, 어젯밤 재미가 좋으셨다구요? 빨리 영수증 좀 부탁합니다."

소령은 턱없이 친근하게 굴었다.

"영수증이라니요? 내 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니, 뭐라구요! 그럼 대령님한테 거짓말한 거요?"

"내가 영수증을 쓸 거라는 건 대령님의 일방적인 생각이고, 난 헤어지면서 분명히, 생각해보겠다고 했었소."

고함과 함께 전화가 끊겨버렸다. 심재모는 손에 들린 야전용 송수화기를 어처구니없이 쳐다보며 흥!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송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 예편도 맘대로 안 되는 판에 군복이나 벗겨줬으면 좋겠구나. 심재모는 끝없이 가라앉아가는 고단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틀 뒤에 심재모는 명령서 한 장을 받아들였다. 그건 예편명령서가 아니라 전출명령서였다. 전출지는 싸움하기에 가장 어렵기로 소문난 동부전선이었다. 신고날짜가 촉박해서 바로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너무 심한 처삽니다. 대장님께서 협조를 하실 걸, 괜히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동부전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합니까."

부관의 애태우는 말이었다.

"괜찮소. 이미 각오했던 일이고, 이런 진창 속에서 사느니 차라리 전선에서 지내는 게 편할 거요."

심재모는 짐을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각 부대마다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그렇게 되니까 영수증을 써준 부대장들이 맘 놓고 돈들을 챙겨 넣느라고 정신이 없는 모양입니다."

부관은 자기네들끼리 오가는 말을 털어놓았다.

"다 그럴 줄 알았소. 어쨌거나 죽어가는 건 장정들뿐이오."

심재모는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국민방위군에 얽힌 여러 가지 문제들은 사회여론으로 들끓어 오르면서 '하나의 큰 사건'으로 뭉쳐져 부산의 피난정부를 위협하고 있었다.

 

반쪽달이 구름 사이로 떠가고 있었다.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어슴푸레한 달빛의 감도가 묽은 물감의 농담처럼 은근하게 변했다가 잿빛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 빛의 변화를 따라 드넓은 들녘은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가 하는 것처럼 환상적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너무 환하지도 않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속에서 그들 소대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 해치우기 딱 좋은 밤이지."

소대장 솥뚜껑이 톱을 든 손에 침을 튀기며 했던 혼잣말이었다. 전선줄을 제거하기 위해 전봇대를 잘라 쓰러뜨리는 작업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전봇대를 하나씩 타고 올라가 전선줄을 끊는 게 더 빠르지 않겠어요?"

무작정 톱으로 전봇대를 자르려고 드는 솥뚜껑에게 손승호가 말했다.

", 계산상으로야 분명 그렁마요, 근디 우리가 일얼 쉽게 해불먼 적들도 쉽게 줄을 이서불지 않겄소? 허고, 저 전선줄이란 것이 전기선, 체신선, 전화선, 경찰선, 군인선, 철도선 해서 한두 가닥이 아닌디, 선얼 전봇대동 끊어대는 것이나 전봇대를 너덧 개 짤라서 엎어치는 것이나 그 시간이 그 시간일 것이오."

솥뚜껑의 설명이었다.

"그렇겠군요. 그게 좋겠어요.“

손승호는 금방 동의했다. 속에서 일어나는 면구스러움을 지우려는 듯이.

"손 동무는 저 왼쪽에서 보초나 스고 있다가, 이따가 불르면 와서 오짐이나 푸지게 누씨요."

"오줌이요?"

"이따가 알게 될 꺼싱게 얼렁 가 보초나 스씨요.“

솥뚜껑이 씨익 웃으며 돌아서 다른 대원들에게 임무지시를 시작했다. 손승호는 작업을 시작하는 대원들을 등지고 섰다. 그리고 전방좌우에 눈길을 모았다. 자신에게 보초임무를 맡기는 것은 물론 솥뚜껑이 베푸는 호의였다. 그리고 그건 거절할 수 없는 소대장의 명령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호의를 베풀고자 했고, 다른 대원들의 눈치가 보여 사양하려고 하면 '소대장의 명령'이라는 말로 묵살하고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가식 없는 순박한 웃음을 웃고는 했다. 그로서는 한문선생에 대해 깍듯한 예절을 차리는 셈이었다. 상부에서 받은 오늘밤의 과업은 전선줄을 삼백 미터 정도 절단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솥뚜껑은 힘든 것을 무릎 써 가며 전봇대까지 잘라버릴 작정을 하는 것이었다. 솥뚜껑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그런 빨치산이었다. 자신의 고달픔이나 괴로움 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조직의 임무에 충실하고, 조직의 이익에 봉사하려는 그의 태도에 손승호는 그저 고개가 수그러질 뿐이었다. 혁명 경력자로서 소대장이란 직책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도당사령부에서 그에게 맡기려던 직책도 소대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굳이 사양을 해서 소대장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높은 직책을 맡자면 싸우는 기술로만 되는 것이 아닌데 자신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해방전쟁 전에는 일개 전사에 불과했는데 소대장을 맡는 것만도 과분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진정 어린 겸손을 총사에서도 접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직책 앞에서 그런 겸손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손승호는 잘 알고 있었다.

소학교 때 급장은 말할 것도 없고 분단장을 뽑는데도 가슴 조마조마하고, 전신이 팽팽해지는 긴장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마련인 피의 농도만큼 진한 명예욕의 발동이었다. 그 욕구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커졌으면 커졌지 줄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의 도당이 유격부대를 조직하고 간부를 선정하는 것은 한 학급에서 반장이나 분단장을 뽑는 일일 수가 없었다. 그의 겸손이 학교공부라고는 전혀 배운 바 없는 머슴이라는 출신성분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열등감의 발로였다면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어떤 직책이든 능력보다 더 탐하게 마련인 것이 대부분의 경우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는 신분이나 배움에 대해 전혀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은 기본출로서 혁명의 주체계급이며, 배우지 못한 것은 언제든지 배우면 된다는 생각을 그는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계급혁명론을 통해서 열등감을 극복한 건강한 의식을 가졌음과 동시에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 그의 자발적인 혁명의 열정과, 과욕이 없는 겸손은 바로 그런 의식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것이었다.

"속에 든 것 없이 높은 자리만 차고앉는 것은 해당 행위제라. 빨치산은 쌈만 하는 것이 아닌 당의 정치군댄디, 나가 속이 덜 차서 신문에서고 학습에서고 해득이 안 되는 말이 쌔고 쌘 판에 워찌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겄소. 산이나 넘보덤 쪼깐 빨르게 타고, 총질이나 헛방 덜 쏜다고 혀서 높은 자리에 앉어기간디라.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손 동무 겉은 사람덜이 많아지는디 쌈 허는 기술만 갖고서야 워디 자리 값을 지대로 할 수가 있겄소. 나가 바래는 것은 우선에 해득이 안 되는 말이 없이 속을 채우는 일이고, 그 담에 나 속에 든 생각얼 사석에서고 공석에서고 술술 풀어낼 수 있어야 허는 것이오. 위원장 동지맹키로 그리 될 수 있으먼 그때야 무신 자리고 맡을 수 있겄제라."

솥뚜껑의 차분한 말이었다. 부하들에 대한 사상교육이나 연설 같은 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완벽한 지휘관이나 간부이기를 목적하고 있는 그에게 '정치위원'이나 '문화부지도원'이 따로 있지 않느냐고 일깨울 필요는 없었다. 그가 말하는 위원장은 바로 도당의 방준표였다. 그가 방준표 위원장을 표본으로 우러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방준표 위원장은 모든 면에서 표본이 될 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철도노동자 출신인 방 위원장은 투쟁경력과 당의 학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일제 때부터 철도노동자들을 이끌며 투쟁했고, 대구 십일항쟁을 주도한 다음 월북해서 당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대학 단기 이년을 마치고 해방전쟁과 함께 전북도당을 책임 맡은 당의 대들보 중의 한사람이었다. 마흔이 가까운 그는 언제나 금방 낯을 씻은 것 같은 신선하고 맑은 인상이었다. 그런 인상은 얼굴이 희고, 마른 편인 몸에 옷차림이 단정한 데서 오는 것이었다. 얼핏 스치는 인상만으로는 혁명이니 투쟁이니 하는 말이 어울리지도 실감할 수도 없는, 멋이 밴 중년남자로 보기 쉬웠다. 그러나 그 얼굴을 자세히 보면 강직한 차가움과 예리한 번뜩임을 품고 있었다. 특히 순간순간 날카롭게 빛나는 눈은 그의 사람은 물론 솥뚜껑 하나만이 아닐 것이었다. 많은 농민출신들이나 기본출들은 거의가 같은 심정이라고 보아야 했다. 철도노동자에서 도당위원장에 이른 그의 경력은 모든 그들의 선망이었고, 가능성이고, 또한 그들을 고무시키는 힘이기에 충분했다.

"손 동무, 절로 가서 오짐 잠 누시게라."

언제 가까이 왔는지 솥뚜껑이 나직하게 말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손승호는 뒷덜미가 섬뜩해지도록 놀랐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놀라움을 감추며 태연한 척했다. 솥뚜껑은 구빨치답게 언제나 걸어도 발소리를 내지 않았고, 목소리도 나직나직했다. 일체의 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산 생활이 몸에 완전히 배어 있었다. 손승호는 무슨 오줌을 누느냐고 묻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미리 묻지 않고 일을 치르면서 알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방법은 머리를 좀 쓸 줄 안다는 자들이 흔히 하는 약삭빠른 교활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러나 그 방법을 순간적으로 써놓고는 깨닫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솥뚜껑의 솔직함으로 일관된 태도 앞에서 자신의 그 어설픈 지식훈련으로 고질화된 교활에 진정 미안함을 느끼고는 했다.

"여그다가 씨언허게 오짐얼 누시씨요."

솥뚜껑이 톱질을 하고 있는 전봇대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여기다요?"

손승호는 난처한 얼굴로 솥뚜껑을 쳐다보았다.

"그래야 톱질 소리가 안 나는구만요. 대원들이 돌아감서 다 누고 인자 손 동무 차례요."

손승호는 사람들 앞에 그것을 내놓고 오줌을 눌 자신이 없어서 한 말이었는데, 솥뚜껑은 어슴푸레한 달빛으로 손승호의 난처해하는 얼굴을 잘못 보았는지 그 이유를 댔다.

"그게 아니고, 이거 사람들 앞에서..."

손승호는 더 난색을 표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 알겄소."

솥뚜껑은 쿡쿡 웃고는,

"밤인디다가 여자도 없는디 낮개리기넌. 동무덜, 절로 물러나서 쪼깐 숨 돌리더라고."

톱질을 멈추게 해서 동지들을 멀어지게 했다.

"어먼 디로 안 가게 저 톱 꽂힌 자리다가 푸지게 누씨요."

솥뚜껑은 웃음 섞어 낮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손승호는 전혀 뇨기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꺼냈다. 아니, 뇨기가 가셔버렸다고 해야 옳은 말이었다. 그는 아랫배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기껏 소변이 급하다가도 어느 사람이 옆에 있게 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소변이 나오지를 않았다. 소변을 보는 도중에 누가 옆에 와서 소변을 보게 되면 상관이 없는데, 시작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소학교 때 아이들이 흔히 하는 자지힘겨루기인 오줌발 창밖으로 넘기기는 해본 일이 없었다. 그것을 남 앞에 내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누가 옆에만 있어도 오줌이 나오지 않는 그 증상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 일 이후가 아닌가 싶었다. 여섯 살 때였던가 그랬다. 어떤 어른이 아파서 그런다며 동네 할머니가 아이들 오줌을 받으러 다녔다. 큰 아이들 오줌은 약이 안 되니 소학교에 안 들어간 아이들만 오줌 눌 자격이 있었다. 굳이 자격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할머니가 사탕을 가지고 있어서 아이들이 서로 오줌을 누려고 다투는 바람에 정해진 것이었다. 꽁꽁 힘을 써대며 오줌을 눈 아이들은 사탕 하나씩을 입에 물고 깡충깡충 뛰었다. 아무데나 깔겨버릴 오줌을 누고 그 달고 맛난 사탕 하나를 얻어먹는다는 것은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도 당연히 줄을 섰다가 자지를 꺼냈다. 막 기운을 쓰려는 참인데 어떤 아이가, ", 니 자지 넌 워째 꼬부랑허니 삐틀어졌냐!" 하고 외쳤던 것이다. 그러자 아이들이 "워디, 워디" 하며 몰려들었다. 왈칵 창피스런운 생각이 들면서 자지가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곧 나올 것 같았던 오줌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서로 머리를 디밀고, 할머니는 오줌 쏟아진다고 소리를 지르고, 사탕생각은 간절하고, 그러나 아무리 힘을 써도 오줌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사탕은 얻어먹지도 못하고 '삐딱 자지'라는 놀림만 당하게 되고 말았다. 그 별명은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끈덕지게 따라다녔다. 그래, 빨치산이 되었으니 그 고질병을 고치자. 내가 오줌을 뉘야 소리 나지 않게 톱질을 해서 작전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옆에 붙어 있는 사람도 없지 않느냐. 그는 숨을 몰아쉬며 몇 번이고 아랫배에다 힘을 쓰고 또 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줌은 나올 듯 나올 듯하면서도 나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반듯한 모양을 갖추었는데도 어찌하여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짐이 안 매러운 갑제라?"

가까이 온 솥뚜껑의 물음이었다.

", 잘 안 나오는데요."

"안 매러운 오짐 억지로 눌 수야 없는 일인게 진작에 말씀허실 것인디."

솥뚜껑이 내려준 사면조처였다. 손승호는 비감하면서도 살아난 기분으로 그것을 밀어 넣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다시 보니 그동안 잘려진 전봇대는 네 개였다. 네 개의 전봇대는 전선줄들로 연결되어 있어서 밑이 잘렸는데도 넘어지지 않고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전봇대들의 무게를 지탱하느라고 전선줄들은 늘어질 대로 늘어져 아래로 처지는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필요한 만큼 전봇대를 자를 다음 좌우 양쪽의 전선줄을 끊어버리면 잘린 전봇대들은 한꺼번에 곤두박힐 판이었다. 손승호는 전선줄을 제거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적들이 그 전봇대들을 새로 박고, 전선줄까지 다시 잇는 복구를 하자면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니었다. 통신이 단절된 그 사이에 총사에서는 모종의 큰 작전을 전개하게 될 참이었다. 손승호는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경계에 들어갔다. 어떤 전화선이든 먼저 끊어져 전화가 통하지 않으면 적의 수색대가 나타날 위험이 있었다. 지난해 십이월로 접어들면서부터 적들의 공격은 차츰 심해지기 시작했다. 경찰력을 제치고 군 병력이 공격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대적인 화력에 따라 이쪽의 공격이 수비로 바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섬진강을 낀 화문산 일대를 해방구로 장악하고, 임실과 순창 사이의 국도에서 밤낮에 구애받지 않고 적을 공격해대던 초기의 적극작전은 차츰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군인은 경찰과 달라서 몸을 사리는 것 없이 무작정 밀어붙이기 작전으로 나왔다. 화력을 앞세운 그 저돌성에 이쪽의 사상자는 늘어가면서 해방구가 위협당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닥치는 대로 마을들을 불질러댔던 것이다. 통비마을의 소탕작전인 초토화였다. 그 작전 앞에서 민간인들의 생명이 보존될 리가 없었다. 통비분자, 곧 적이었다. 그런데 일부러 한 달 동안은 군인들의 공격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주전선이 밀리고 있는 탓이었다. 그와 반대로 이쪽의 기세는 불붙어 올랐다. 도당이 다시 전주로 옮겨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지역 군당들의 기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오산에서 전선이 다시 북으로 밀리기 시작하면서, 이월 들어 군인들의 공격은 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적들의 공격은 훨씬 강력했다. 해방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거기에 강력 대응하는 작전을 펼치기 위한 예비 작전으로 전선줄 절단 지시가 내려진 것이 틀림없었다. ! ! 땅 울리는 소리에 놀란 손승호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전봇대들이 땅바닥에 나가넘어지고 있었다. 물러섰던 소대원들이 다시 달겨 들어 넘어진 전봇대들 사이에 연결된 전선줄들을 마저 끊어대기 시작했다. 소대원들은 말 한마디 없는 가운데 민첩하게 움직이며 실로 완벽한 절단작업의 끝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손승호는 그 모습들을 또 신선한 감동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한 덩어리고 뭉쳐져 생각하고, 돕고, 싸웠다. 그는 입산을 하고 나서 그러한 인간집단을 최초로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입산 전에 도당에서 일하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현상이었다. 조직의 분산과 응집의 차이일 터였다. 서로 몸을 사리는 일도 없고, 서로 다투는 일도 없고, 서로 도와가며 자기가 맡은 일을 다 해내며, 함께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그들 - 그건 같은 목적을 두고 자각한 사람들만이 지어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고, 신선한 감동이었다. 나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삶을 위해 나선 자각과 그 행동. 손승호는 산 생활 다섯 달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생피의 뜨거움과 떨림이 자신의 저 깊은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는 비로소 지식의 각질을 깨고, 위선을 벗어나 삶 앞에 알몸의 진실로 선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었다.

"출발이시!"

솥뚜껑이 언제나처럼 앞장섰다. 소대원들은 자기 위치를 찾아 일렬종대 사보 간격의 행군대영을 이루며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푸른 색조의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담긴 들녘에는 새벽의 고요가 바다처럼 깊었다. 대기는 아직도 싸늘했지만 무슨 여린 향기처럼 문득문득 스쳐가는 냄새가 있었다. 그건 봄이 오고 있는, 땅이 부푸는 흙 내음이었다. 나지막한 산들이 들녘 끝머리를 따라 무덤의 적막한 모습으로 검게 앉아 있었다. 길을 가로지르고, 야산자락으로 접어들려면 개울둑을 타넘어야 했다. 개울둑을 막 오르려고 하던 솥뚜껑이 순간적으로 몸을 바짝 낮추며 팔을 빠르게 흔들었다. 정지와 동시에 몸을 낮추라는 신호였다. 소대원들은 몸을 땅바닥에 납짝 붙였다. 손승호는 총을 움켜잡은 두 손아귀, 열 개의 손가락에 철사 줄 같은 힘이 뻗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전신이 팽팽한 긴장과 함께 빳빳한 힘으로 뭉쳐지고 있었다. 적과 대치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언제나 변함없이 일어나는 응결된 힘의 충동이었다. 그 충돌은 곧바로 적에게 돌격하며 사격을 가할 수도 있고, 적을 피해 순식간에 질주할 수도 있는 완벽한 준비상태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총질을 할 수 있게 되고, 동지가 피 뿌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되고, 동지를 겨냥하는 적을 먼저 쏘아 쓰러뜨리게 되고, 위장한 반동에 대한 적개심으로 날창질을 하게 되면서 그 두려움과 공포는 용기와 힘으로 바뀌게 되었다. 솥뚜껑은 돌을 주워 개울둑 너머로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돌 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타당탕탕 총소리가 적막을 찢어대기 시작했다. "돌진!" 솥뚜껑이 외쳤고, 소대원들은 양쪽으로 흩어지며 내닫기 시작했다. 적이 듣기에 돌진이라는 명령은 후퇴였고, 대원들은 제각기 흩어져 비상선을 찾아가게 되어 있었다. 적을 기만하기 위한 그런 용어는 단위 부대마다 다르게 약속되어 있었다. 지금의 후퇴는 모택동의 유격전 십육자전법의 첫 번째 적진아퇴였다. 미리 매복, 대기하고 있는 적과 맞서 싸울 필요가 없었다. 적은 보나마나 이쪽보다 수가 많을 것이고,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낮도 아닌 밤에 매복을 칠 적이 아니었다. 손승호는 솥뚜껑의 뒤를 쫓아 왼쪽 산자락을 밟으며 내달리고 있었다. 총소리가 숨 가쁘게 울려대고, 피웅, 삐웅 총알 날아가는 소리가 허공에서 휘파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가까이 와서 박히는 총알은 없었다. 허공에서 휘파람을 불어대는 총알은 하나도 위험할 것이 없었다. 적들은 이쪽의 동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총을 쏘아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적들의 추격을 염려할 것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적들이 한밤중에 산속으로 추격을 해올 리가 없었던 것이다. 군인이든 경찰이든 야간접전을 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대원들은 한 사람도 이상이 없이 비상선으로 다 모였다.

"검은 개들이시."

솥뚜껑은 뚜벅 한마디 하고는 앞장을 섰다. 손승호는 고개를 내둘렀다. 자신은 정신없이 뛰기만 했는데 그는 어느새 적들이 경찰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까 적정을 탐지해낸 것도 그랬다. 자신은 아무런 낌새도 느낌도 갖지 못했는데 그는 정확하게 매복을 감지해냈던 것이다. 그는 야생동물과 같은 예리하고 기민한 청각과 후각 그리고 남다른 육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물총새가 물속의 고기를 실수하는 법 없이 찍어내듯이 그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서 적정을 틀림없이 탐지해내고는 했었다.

"그냥 지절로 그리 되제라."

"글쎄요, 말로 꼭 집어 하기는 곤란하더라도 그래도 뭔가 그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손승호는 또 자신도 모르게 감각의 문제를 지식인적인 논리로 풀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가 배운 문자 한 분 쓸게라?"

솥뚜껑은 그 순한 웃음을 씨익 웃더니,

"정신일도허고 산 생활허먼 시나브로 그리 되는구먼요."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 그 말이 맞겠지요.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그게 말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손승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솥뚜껑은 시원하게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며, 군경한테서는 비누냄새, 치분냄새, 궐련 냄새가 나고, 밑창 두꺼운 구두들을 신었기 때문에 땅 밟는 소리, 돌 차는 소리가 잘 들린다고 했다. 반대로 빨치산한테서는 불 냄새(연기 냄새), 몸 냄새(오래 된 땀 냄새), 잎담배 냄새가 나서 토벌대에게 들키는 수가 있다고 했다. 다른 냄새들은 어찌 구분이 된다 하더라도 궐련냄새와 잎담배냄새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지 손승호는 아연해질 뿐이었다. 그런데 솥뚜껑은 그 구분이 어렵지 않다고 했다.

중대의 트에 가까워지면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들녘과는 멀어져 산들의 어깨동무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리쉼덜 헙씨다."

솥뚜껑이 소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약간 크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안심해도 좋은 안전지대에 들어섰음을 알리고 있었다. 모두 주저앉아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 참아낸 담배들이었다. 빨치산들에게 담배는 그 불빛이나 냄새로 적에게 위치를 노출 당하게 될 위험물이면서, 전투의 긴장을 풀어주고 깊은 휴식에 잠기게 하는 유일한 위안물이었다. 솥뚜껑은 정말 솥뚜껑처럼 투박하게 크고 거친 손으로 놀랍도록 빠르게 담배를 말았다. 그리고 불을 붙여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의 눈이 사르르 감기고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손승호는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담배를 안 피우면서도 그가 느끼는 담배 맛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산 생활을 철저하게 하듯 담배도 철저하게 피웠다. 산 생활에 대해 그에게 배운 것이 수없이 많았는데,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것이 담배 피우기였다.

"참말로 좋으요이."

솥뚜껑의 말에 손승호는 눈길을 들었다. 그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넌 저리 기맥힌 경치럴 보먼 항시 눈물이 날라고 허요."

앞을 바라본 채 그가 말했다. 동녘 하늘은 밑에서부터 뻗쳐오르는 햇살로 붉게 물들고, 뭉텅이져 떠 있는 구름덩이들의 아랫부분은 맑고 빛나는 황금빛으로 적셔지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붉은 햇발의 싱그러움과, 구름덩이들에 배어들고 있는 황금빛 현란함의 빛살무늬는 그 눈부심이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그 싱싱하게 살아 일렁이는 빛의 바다 아래로는 억센 산줄기들이 검은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겹을 이루는 산골짜기들을 감싸며 안개가 자욱하게 차 있었다. , 저 아름다움, 눈물이 날 만도 하지. 그렇게 동의하면서도 너무 엉뚱한 말 같아 손승호는 솥뚜껑에게 눈길을 돌렸다.

"나넌 저런 경치럴 보먼 새 심이 솟기요. 저런 기맥힌 하늘이고 땅얼 반동덜한테 언제꺼지 뺏기고 있을 수 웂응께요. 기엉코 우리가 쥔이 되야제라."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앉은 채 솥뚜껑이 말했다. 손승호는 그만 충격을 느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는 말은 솥뚜껑의 단순한 감상도, 나약한 마음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눈물 나려고 하는 감격을 곧바로 혁명의지로 환치시키고, 혁명의 동력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아침 해가 내쏘는 그 싱그럽게 살아 움직이는 현란하고도 황홀한 빛살을 향하여 혁명완수를 맹세하고 있었다. 해의 뜨거움에다 혁명의 열정을 데우고, 해의 생명력에서 혁명의 힘을 얻는 그는 혁명의 그날까지 식을 줄 모르는 불덩어리가 아닐 것인가. 아아, 또 하나의 염상진! 아니, 기초적인 배움을 갖지 못했으면서 그런 자각과 의지와 신념을 세울 수 있는 그는 염상진을 앞질러가고 있는 무산자혁명의 완벽한 전사가 아닐 수 없었다. 산골짜기 골짜기마다 또 다른 솥뚜껑들이 진을 치고 투쟁의 피땀을 흘릴 때 인민의 역사는 해 쪽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음을 손승호는 또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인자 가보드라고."

솥뚜껑이 몸 가볍게 땅을 차고 일어났다. 손승호가 중대의 트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총사의 전출지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 알 수없는 것은 자신이 새로 조직되는 연예대에 소속된다는 점이었다. 자신은 연예에는 아무런 소질도 재주도 없었던 것이다. 인문학교에 비해 연예의 비중을 크게 잡고 있었던 사범학교에서도 연극은 아예 해본 적이 없었고, 노래나 풍금치기는 겨우 수준을 지탱하는 정도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총사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다음날 선요원을 따라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참말로, 정들자 이별이요이."

솥뚜껑은 이 한마디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투쟁에 나설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그의 눈언저리에 서려 있는 우수가 더 짙어지는 것을 손승호는 놓치지 않았다.

"섭헌 맘으로야 소럴 잡어야 헐 일인디, 보잘 것이 없소."

솥뚜껑의 나직한 말이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도 진수성찬입니다. 이리 애쓰시지 않아도 되는 걸요."

손승호의 말은 입 끝에 걸린 예의가 아니었다. 대원들은 반찬이 없는 잡곡밥으로 살아온 지가 오래였다. 그것에 비하면 삶은 닭은 분명 진수성찬이었고, 해방구를 장악하고 있다고는 하나 닭 다섯 마리를 차려낸다는 것은 보통으로 애를 써서는 안 될 일이었다. 손승호는 그의 마음씀에 그저 가슴이 먹먹할 뿐이었다. 술도 노래도 이별연은 담담하게 시작되어 담담하게 끝났다.

"원체로 손 선상님 같은 분이야 화선투쟁에 나스게 된 것이 잘못된 일이었구만요. 재목도 쓸 디가 다 지각각인디 사람이야 더 말할 것 있간디요."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솥뚜껑이 한 말이었다. 동무가 아니고 선상님이란 호칭이 야릇한 아픔으로 가슴을 찔러오며, 그와 자신과의 사이에 벽이 막히는 것을 손승호는 느꼈다.

"아닙니다. 솥뚜껑 동무. 난 명령에 따라 가긴 합니다만, 화선투쟁에서 보람을 느꼈고, 동무가 모든 걸 잘 가르쳐준 덕에 화선투쟁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소. 앞으로도 큰 힘이 될 것이오."

손승호는 진심으로 말했다.

"손 동무가 나헌테 갤차준 것에 비허자먼 나가 헌 일이야 하품나는 것이제라. 나가 아매더 배울 복이 없느갑소."

"아니오, 내 말 들어보시오. 옛날에 어느 부자가 외아들을 잘 가르치려고 유명한 선생을 사방으로 수소문했다는 거요. 그래서 고명한 선생을 찾아와 외아들을 집 떠나보냈소. 그 선생이 어찌나 엄하고 까다롭던지 학생이 글공부를 다 마칠 때까지는 집에를 내왕할 수 없다는 조건이었소. 부자는 귀한 외아들을 오래 못 보게 되는 것이 마땅찮았지만, 외아들을 크게 만들 욕심으로 그 조건에 응할 수밖에 없었소. 물론 부모가 아들한테 내왕하는 것도 금하게 되어 있었소. 부자는 아들이 떠나고 나서 반년을 가까스로 참아냈는데 더는 참을 수가 없게 되었소. 아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 또 글공부는 얼마나 했는지 보고 싶어서 말이오. 그래서 선생 몰래 아들의 모습이나마 보자고 작정을 하고 집을 떠났소. 선생 집에 가까워지니 글 읽는 소리가 들렸소. 부자가 귀를 기울여보니 그건 분명 아들의 목소리였소. 부자는 반가워 당장 선생 집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고 글방의 봉창에 침 바른 손가락으로 구멍을 냈소. 아들은 선생 앞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게 천자문이 아니겠소. 서탁에 펼쳐진 책도 천자문이 분명하고 말이오. 부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소. 한 달이 못 걸려 뗄 수 있는 천자문을 반 년 동안이나 붙들고 있다니, 저 자식이 그리도 머리가 둔하단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소. 부자는 못내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갔소. 그러나 또 반년이 지나게 되니 다시 아들이 보고 싶고, 그동안 얼마나 배웠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소. 그래 또 선생 집으로 갔소. 봉창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니,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여전히 천자문을 공부하고 있는게 아니겠소. 부자는 그만 하늘이 무너지게 낙담하고 말았소. 내 자식이 완전히 바보 멍텅구리로구나 하고 말이오. 아무리 낙담을 했어도 그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부자는 또 반년 만에 길을 나섰소. 아니, 정말로 이게 어쩐 일이란 말인가. 그때까지도 서탁에 펼쳐진 책은 천자문이었던 것이오. 도대체 저놈이 공부를 가르치는 건가 마는 건가. 부자는 그만 선생한테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소. 아무리 자기 아들이 머리가 돌덩이라고 하더라도 선생이 애를 쓰면 일 년 반 동안에 천자문 하나 떼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오. 공부고 뭐고 다 작파하고 아들을 당장 끌고 가고 싶었소. 그러나 그동안 들인 돈도 아깝고, 그리 유명하게 소문난 선생이 엉터리일리도 없고 해서 부자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돌아섰소. 또 반년이 지나 부자는 선생 집을 찾아왔소. 아니, 그런데 이게 정말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가요. 서탁에는 그대로 천자문이 펼쳐져 있으니 말입니다. 부자는 더는 참지 못하고 집으로 뛰어들었지요. 선생에게 그동안 쌓인 분풀이를 하고 아들을 끌어냈어요. 부자가 온갖 험한 소리를 다 해도 선생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어요.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온 부자는 천자문을 펼치고 읽어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들은 눈 딱 감고 숨도 안 쉬고 한달음에 외어버렸어요.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그런데 왜 천자문만 펴놓고 있었을까. 부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동몽선습을 폈어요. 그런데 막히는데 하나 없이 줄줄이 읽어 내리고 말았어요. 부자는 놀랐고, 이상한 생각은 더 들었어요. 그래서 다음에는 논어를 펼쳐놓았어요. 아들은 그것도 막힘없이 술술 읽고 말았어요. 부자는 그만 귀신에 홀리는 기분이었어요. 또 다른 책을 내놓았지만 아들이 막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어요. 그렇게 해서 아들은 결국 사서삼경을 다 읽어내게 됐어요. 그때서야 부자는 무릎을 쳤어요. 그 선생이 정말 기막힌 선생이로구나 깨달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쌀 수십 가마니를 달구지에 싣고 아들을 앞세워 선생을 찾아갔어요. 선생 앞에 큰절로 백배사죄하며 아들을 다시 맡아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런데 선생을 고개를 저었어요. 선생이 한 말은, 저 아이의 학문은 인제 버려버렸다는 한마디였어요. 이 얘기는 곧 천자문이 모든 학문의 근본이고, 모든 문장은 천자문의 응용이라는 뜻입니다. 동무는 천자문을 다 뗀지 오래고, 응용도 얼마간 해보지 않았나요. 나와했던 것처럼 계속 해나가면 늘게 됩니다. 그리고 이건 입에 발린 소리가 절대 아닙니다만, 지금으로서도 동무의 한문 실력은 높고, 내가 더 가르쳐줄 게 없습니다."

손승호는 그의 손을 잡았다.

"손 동무 은혜야 평상 못 잊제라."

그는 손승호의 손을 맞잡았다. 이튿날 아침을 먹자마자 길을 나섰다.

"이것으로 공부 열심히 하세요."

손승호는 그에게 만년필을 내밀었다.

"아니 손 동무..."

솥뚜껑은 주춤했다. 손승호는 그의 손에 만년필을 쥐어주었다.

"손 동무..."

그의 눈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손승호도 콧날이 찡 울리는 걸 느끼며 얼른 돌아섰다. 그리고 선요원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총사에서 손승호를 맞은 사람은 박두병이었다.

"손 동무, 그간 고생 많았지요. 진작 가깝게 있고 싶었지만, 화선경험이 산 생활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라서요. 그건 무엇보다 강한 무기니까요."

", 화선투쟁을 보람 있게 생각합니다."

박두병의 마음을 헤아리며 손승호는 솥뚜껑에게 했던 말을 또 했다.

"아주 강인해 보이는 모습을 대하니 반갑소. 김범우가 손 동무의 변한 모습을 보면 너무 놀랄 거요."

박두병이 밝게 웃었다.

", 기절할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저는 연예에 대해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데요."

손승호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움이 드러나 있었다.

", 별걱정 다 하십니다. 아마 손 동무가 할 일이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요. 손 동무의 문학실력을 발휘해서 연극대본도 쓰고, 우리의 현장투쟁을 소재로 한 시도 쓰고, 할 일이 너무 많지요."

"네에?"

손승호는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자신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솥뚜껑에게 선뜻 빼주고 온 만년필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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