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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3-3

8. 어떤 여자 빨치산의 죽음

"대장님, 대장님, 저기 빨치산 시, 시체가 있습니다."

하사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시체 한두 번 봤나."

심재모는 모자 속에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닙니다, 여잔데, 아주 이상하게 죽어 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잠자는 것처럼 앉아서 죽어 있는데, 아주 희한합니다."

"그래? 가보자."

무르춤해 있던 하사는 얼굴이 밝아지며 앞장섰다. 등성이에는 분대원들이 둘러서서 시끌덤벙하게 떠들고 있었다.

", 비켜, 비켜. 대장님 오신다."

하사의 외침에 떠들던 소리가 뚝 멎으며 사병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시체가 드러났다. 심재모는 긴 다리의 보폭을 넓히며 다가갔다. 하사의 말마따나 여자는 마치 잠이라도 든 것처럼 앉아서 죽어 있었다. 목 높이의 돌덩이가 그 여자의 등을 받쳐주고 있었다. 여자는 공목 누비저고리에 낡은 몸빼를 입고 있었고, 때 낀 버선발에 코 째진 검정 고무신을 새끼줄로 감발하고 있었다. 목에는 얼금얼금 짜인 무명목도리가 겹으로 감겨 있었고, 이미 돌의 차갑고도 딱딱한 느낌처럼 굳은 핏기 없는 얼굴은 의외로 앳되어 보였다. 어딘가 배운 티가 나는 얼굴에는 묘한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그 웃음기를 느끼는 순간 심재모의 가슴은 섬뜩해졌다. 그의 눈은 재빨리 여자가 뻗치고 있는 왼쪽 다리로 다시 옮겨갔다. 허벅지와 무릎 위가 새끼줄로 두 겹씩 묶여 있었고, 그 가운데 총상이 나 있었다. 그 여자가 죽게 된 근본적 원인이었고, 그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도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심재모의 가슴에 차가운 전율을 일으켰다. 심재모의 눈길은 앞으로 모아 잡은 그 여자의 손으로 옮겨졌다. 자그마한 두 손은 산중 추위를 견뎌내느라고 수 없이 많은 실금이 피를 물고 터 있었고, 그 손은 무슨 책인가를 감싸 잡고 있었다. 심재모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그것이 무슨 책인가를 알아내려고 했다. 여자의 손가락 사이로 해득되는 글씨는 ', , ' 자였고 다른 것은 가려서 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삼아 책을 빼내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책을 감싸 잡고 있는 손의 모양으로 보아 책이 쉽게 빠질 것 같지 않았고, 억지로 빼내려고 하면 손가락 마디마디를 뚝뚝 부러뜨려야 될 것만 같았던 것이다.

, , ? , , ...?

연이어진 그 세 글자를 곱씹으며 심재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그때 머리를 치는 것이 있었다. '조선공산당사'였다. 총상과 조선공산당사와 미묘한 웃음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었다. 심재모는 다시 한줄기 찬바람이 가슴을 훑는 걸 느끼며 새삼스럽게 여자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여자야. 저 아랫동네를 내려다보고 앉아서 죽은 거야."

어느 사병의 말이었다. 그 말이 심재모의 귀에 잡혔다. 그는 여자한테서 눈을 돌려 산 아래 여기저기를 살폈다. 여자가 앉은 정면 저 아래 골짜기로 이삼십 호의 마을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였다. 비로소 심재모의 머리에서는 하나의 이야기가 엮어졌다. 여자는 어디선가 총을 맞고 낙오되어 부대를 찾아 이 지점까지 와서 주저앉은 것이다. 그리고 마을로 내려가고 싶은 유혹을 당사를 껴안고 이겨내며 혼자 죽어간 것이다.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고 했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투쟁의 긍지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야말로 그 세 가지 죽음을 차례로 죽어간 것이다. 당사를 감싸 잡고 묘한 웃음까지 피우며.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불가사의함에 심재모는 가슴이 조여 드는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 총을 맞고 죽어가는 순간에 "조선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남자들을 보았을 때보다 몇 갑절 더 불가사의함이 컸다. 사상이라는 것과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갈수록 알 수가 없이 난해해지는 것 같았다.

"이걸 어쩔까요?"

처음의 하사가 물었다.

"그대로 두고, 다들 능선에서 내려서라. 작전계속이다."

심재모는 앞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시체를 그대로 두게 한 건, 묻어주기도 이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죽기로 작정한 여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이미 적일 수 없는 죽은 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저 여잔 어느 부대였을까?"

"보나마나 김달삼 부대지."

"그럼 여자도 넘어왔단 말야?"

"그야 지방 빨갱이로 합세한 거겠지."

"저런 여자한테 걸렸다간 국물도 없었겠다."

"저런 여자한테 장가 들면 더 난리지."

"?"

"저리 독한 여자가 좆뿌리를 그냥 남겨놓겠어?"

"히히히..."

"잡담 마라!"

심재모가 내쏘았다. 말소리가 뚝 끊기고, 일월 하순의 살 찢어지는 추위를 실어 나르는 거센 바람 속에 어디선가 쏜 총소리가 메아리와 함께 묻어왔다.

 

염상진은 비상선의 전갈을 받았다. 급히 도당을 구하라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의 사족도 설명도 붙어 있지 않은 그 짧은 구원요청은 도당이 위기에 몰려 있다는 사실과, 신속한 행동만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염상진은 부대원을 모두 모았다. 스물일곱이었다. 동상이 심하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 아홉을 뺐다. 거기에 사령관 주문철도 포함되었다. 그는 장딴지에 총상을 입고 있었다.

"나가 꼭 가야는디 요걸 위째야 쓰겄소."

주문철은 염상진의 팔을 꽉 붙들며 아랫입술을 물고 한동안 있더니,

"도당꺼지 당허는 판에 게우 열여덟으로..."

침통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다녀올 동안 몸이나 잘 간수하세요. 가다가 군당 병력이라도 만나게 되면 포함시켜야죠."

염상진은 일부러 기운차게 말했다.

"그리라도 되먼 좋겄고. 조심허씨요."

선 요원을 앞세운 염상진은 잠시도 쉬지 않고 강행군을 했다. 혹독한 추위에 손가락은 마비가 되는데도 가슴팍에서는 땀이 내맬 지경이었다. 가장 안전하게 보존되어야 할 도당까지 위기에 빠지는 상황이었다. 이건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귀결인지 몰랐다. 이쪽의 병력이 줄어들면 그만큼 적의 세력은 강해지고, 활동범위도 넓어지게 마련이었다. 소모된 병력을 계속 보충하는 적과 그렇지 못한 이쪽과의 힘의 상대성이었다. 도당이 위기에 빠진 것은 상징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투쟁의 절망상태를 의식하게 했다. 조계산지구에 국한하더라도 석 달 동안의 병력손실이 백오십여 명이었다. 정확한 파악은 할 수 없지만 다른 지구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런 결과는 더 말할 것 없는 참담함 이었다. 지금 살아 있는 군당이 몇 개나 되는지도 의문이었다. 여순병란을 기점으로 지하투쟁으로 전환된 지 일 년 삼 개월만의 결과였다. 지리산을 거점으로 삼은 병란의 주력부대와 공개투쟁으로 들어간 지방당의 병력은 현재 얼마나 살아남아 있을까. 염상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생각에 제동을 걸거나, 떼쳐내려는 순간적인 행위였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괴로움과 고통과 회의가 밀어닥쳤던 것이다. 투쟁에 따르는 육체적 고통이야 오히려 혁명의욕을 고취시켜주는 자극이고 보람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인명손실은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이고 아픔이었다. 그건 승리가 보장된 희생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회의를 키우지 않기 위하여 그 생각을 의식적으로 지우고 몰아내려했다. 도당의 피해는 또다시 염상진을 참담한 늪으로 빠뜨렸다. 도당 보위병력은 거의 전사 상태였고, 간부들은 겨우 위기를 모면해 있었다. 왼쪽어깨를 크게 다친 정하섭이 그 속에 끼어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염상진이 정하섭의 손을 잡았다.

"수류탄 파편에 맞았습니다."

"아직 손을 못 썼겠지?"

"예에..."

"많이 아픈가?"

"그저 참을 만합니다."

정하섭이 고통스러움이 역연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그 억지웃음이 염상진의 가슴을 긁어내렸다.

"조금만 더 참게, 내가 어찌 해볼 것이니."

염상진은 불쑥 말했다. 그러나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하섭을 치료시켜야 된다는 생각이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

"다시 백운산으로 이동합시다."

도당위원장의 결정이었다. 아무도 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도당은 어차피 옮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적에게 그 위치가 일단 노출된 이상 신속한 대처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으므로 적이 다시 공격해오는 경우 방어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이미 떠나왔던 백운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현명한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이었다. 도당의 비트를 정하는 데에는 백운산만한 산이 없었고, 그곳은 적의 관심으로부터 이미 떠난 있었던 것이다. 염상진은 정하섭을 부축하고 걸었다. 정하섭은 고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염상진 위원장을 만나게 되자 더없이 마음의 위안을 얻으면서도 한편으론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염상진의 직책이 어떻게 바뀌든 그의 의식 속에서는 항시 '위원장' 이었고, 존경감과 어려움도 중학교 시절 그대로였다. 염상진 위원장 역시 자신에 대한 정이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원은 그 직책여하를 막론하고는 당원 사이는 물론 일반전사에게도 존대를 쓰도록 당규는 엄연히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 이론에 밝고, 당규 준수에 철저한 염상진 위원장은 자신에게만은 중학생 때처럼 반말을 쓰고 있었다. 당원이 되고난 다음에 만약 그분이 존대를 썼으면 얼마나 서운하고 쑥스럽고 거리감을 느꼈을 것인가.

"자네 어떤가, 하 동무 부인과 함께 사는 그 무당이 믿을 만한가?"

염상진 위원장이 왜 이런 말을 묻는지 정하섭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원의 이성으로 말인가?"

순간 정하섭은 오른쪽 볼에 찬 기운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은 곧, 사사로운 감정으로 오판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말을 바꾼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정하섭은 힘주어 대답했고, 염상진 쪽에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둠이 짙었는데도 정하섭은 염상진 위원장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다 아는 말이지만, 자네 목숨은 자네 혼자만의 것이 아니네. 분명 인민의 것이야. 이 말을 자칭 자유주의자라는 것들은 비웃고 비난하네. 계급주의의 비인간성에 대해서, 다수의 삶의 쓰라림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파렴치한 이기주의자들의 의식으로는 당연히 실감할 수 없는 말이지. 그러나 우리는 달라. 나를 버리고 인민의 혁명을 성취하고자 나선 우리에겐 굶주림 앞의 밥처럼 절실하게 실감나는 말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부축하고 부축 당하느라고 몸을 밀착시킨 두 사람은 속삭이듯이 그 목소리가 낮았다. 염상진 쪽에서는 또 잠시 말이 없었다. 염상진 위원장이 유격대의 행군 중 삼대 소리수칙을 어겨가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정하섭은 그 뜻을 익히 알아차리고 있었다. 부상을 당해 자신의 마음이 행여 약해지거나 허물어질까봐서였다. 그러니까 그건 소리수칙의 위반이아니라 긴급한 사상교육 실시였던 것이다. 그 소리는 물론 사 보 간격으로 걷고 있는 앞 뒷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낮고 낮았다. 행군도중, 특히 야간행군에서 총소리, 발소리, 말소리는 절대로 내서는 안 되는 규칙이었다. 이쪽을 노출시키지 않음과 동시에 적에게 탐지되지 않으려면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듯 그 규칙을 지켜야 했다. 그 규칙을 어기면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부대원 전부가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그건 모택동 동지의 십육자전법과 함께 입산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입시키는 교육이었다. 그 규칙을 위반한 자에게는 당연히 엄중처벌이 내려졌다.

"우리 도당이 특히 규율이 엄한 것은 공개투쟁을 하기 때문이네. 그러나 그 동안 이성문제로 투쟁 사업을 파괴해 처형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규정된 시간을 어겨 처형된 선 요원은 꼭 한 사람일게."

염상진이 또 말을 끊었다. 나뭇가지들이 세찬 바람에 시달림당하는 소리가 비명처럼, 신음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도당위원장님한테 허락을 받을 테니 그 무당집에서 치료를 받도록 하게."

정하섭은 묵묵히 발만 떼어놓았다. 염상진 위원장은 결국 이 말에 이르기 위하여 앞의 말들을 한 것이었다. 정하섭은 조계산 비트에서 도당 사람들과 분리되었다.

"이걸 자애병원 전 원장님한테 전하게."

염상진은 손가락 매듭만큼 작게 접은 종이를 정하섭에게 내밀었다. 정하섭은 선 요원을 따라 하대치에게 연결되었다. 하대치는 네 명의 부하와 함께 제석산 중턱을 무질러 도래등 뒷산을 넘었다. 기진맥진한 정하섭을 번갈아가며 업었다. 정하섭은 업히지 않고 제 발로 걸으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다리는 다리대로 휘청거리며 접혀졌고, 의식은 의식대로 흔들리며 흩어졌다.

"정 동무, 기운채리씨요. 인자 다 왔소."

하대치가 정하섭을 흔들었다. 정하섭은 정신을 다잡았다. 바로 눈앞에 제각이 보였다.

"여그 둘이서 그 집 문앞꺼정 델다줄 텡께 거그서부텀은 정 동무가 알아서 혀야 쓰겄소."

"아닙니다. 다시 이 제각으로 옮겨야 하니까 누가 한 사람 가서 무당을 불러오는 게 빠를 겁니다. 부인과 아이들을 잠시라도 만나볼 겸 하 동무가 가시는 게 어떻겠어요?"

"아니요, 고런 말 마씨요. 처자석 만낼 생각 눈꼽째가리만치도 웂소. 나가 떠난 담에라도 왔다갔다는 말 뻥긋도 허지 마씨요."

하대치의 단호함에 정하섭은 그만 민망해지고 말았다. 어두워서 다행이다 싶었다.

"강 동무, 핑허니 댕겨오씨요."

하대치의 말에 강동기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담을 넘어가서 두 번째 방 봉창을 두들기고, 장독대 옆에 섰다가 무당이 나오면 정하섭이가 와 있다고 말하시오."

정하섭은 서둘러 말했다.

남녀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드러나자 하대치는 몸조리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뒷걸음질을 하기 시작했다.

"을매나 다치셨소."

정하섭을 부축하며 소화가 울음처럼 토해낸 말이었다.

"별거 아니요. 그간 잘 있었소?"

정하섭은 가까워진 소화의 몸에서 들꽃냄새와 온기를 함께 느꼈다.

"얼렁들어가 누셔야제라."

소화의 부축을 받으며 정하섭은 오래 전부터 시달려온 한기와 함께 온몸의 무게가 아래로만 쏠리는 것 같은 현기증에 휘둘리고 있었다.

"추위, 불을 때 불..."

이불 위로 무너져 내리며 정하섭은 신음처럼 소리를 흘렸다. 부상당한 몸으로 그는 이틀 동안 산길 백오십 리를 걸어댔던 것이다. 부들부들 떨어대는 그의 몸이 불덩이로 뜨거운 것을 안 소화는 미친 것처럼 부엌으로 내달았다. 아궁이 가득 불을 지피고 방으로 들어와 정하섭의 부상을 확인한 그녀는 입을 가리며 소스라쳤고, 그리고 하얗게 굳어져갔다. 왼쪽 어깨를 싸맨 헝겊과 옷은 굳어진 피로 떡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심하게 다치고,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으면 누비솜옷의 왼쪽 등판이 피범벅으로 굳어졌을 것인가. 소화는 주체할 수 없도록 울음이 솟구쳐 올랐다.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았지만 울음은 코로 새나오고 눈물로 쏟아져 내렸다. 두 손을 포개 입을 가리고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울음이고 눈물이었다. 무릎을 꿇는 소화는 허리를 다 굽혀 얼굴을 무릎께에 묻어 두 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울고, 어깨가 울고 등줄기가 울고, 마침내 조그맣게 오그라뜨린 몸 전체가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참을 울다가 그분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의사를 불러올 수 없는 깊은 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절박감에 떠밀리며 부엌으로 가서 나무를 다시 밀어 넣었다. 그분은 자는 것인지 정신을 잃은 것인지 구별을 할 수 없는 채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랫목을 더듬어 봐도 아직 냉기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소화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부끄러움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사람을 살려야 했다. 옛날이야기에서 들은 방법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을 살려 열녀문이 세워졌다고 했다. 소화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치마가 흘러내리고, 저고리가 떨어져 내렸다. 솜바지를 벗자 속곳이 드러났다.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속곳까지 벗어 던졌다. 알몸이 된 그녀는 이불을 들추고 몸을 디밀었다. 그리고 때에 절고 냄새나는 옷을 입은 채 떨고 있는 정하섭의 몸을 거침없이 그러나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신령님, 신령님, 신령님...’

전신으로 전해져오는 정하섭의 몸 떨림을 수없이 많은 바늘에 찔리는 아픔으로 느끼며 소화는 피 마르게 신령님만을 불렀다. 그러다가 다시 옷을 꿰입고 부엌으로 내달아 불을 돋우어 지폈고, 밥을 안치다가 먹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떠올라 물을 더 부어 죽을 끓이기도 했고, 뜨거운 물을 떠다가 수건에 적셔 정하섭의 수척하고 핏기 없는 얼굴을 조금조금 닦아냈다. 바싹 마르고 터진 입술에는 실피가 맺혀 있었고, 헤벌어진 입에서는 단내가 뿜어져 나왔다. 베개에도, 요에도 소화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랫목 장판이 눋도록 불을 땠다. 그분의 몸 떨림은 가라앉았지만 몸은 여전히 불덩어리였다. 죽을 끓여놓고 깨웠지만 그분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분은 자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을 놓치고 있었다. 찬물을 떠다가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 얹으며 소화는 가슴을 쥐어짰다.

신령님, 신령님, 어서어서 날이 새게, 닭이 울게 해주십소사...’

해가 떠오를 무렵 정하섭이 눈을 떴다. 한 대접의 물을 다 마시고 난 그는 속주머니에서 작게 접은 종이를 꺼내 소화에게 건넸다.

"표 안 나게 병원에 전하시오."

그리고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면목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도와주십시오. 술도가 집 아들이 어깨에 파편상을 입었습니다.’

전 원장은 쪽지를 내려다본 채 굳은 듯 말이 없었다. 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고개를 약간 수그리고 선 소화는 올려 뜬 눈으로 그런 전 원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 계세요, 뒤따라갈 테니."

전 원장의 목소리가 낮고 무거웠고,

"야아..."

떨려 나오는 소리와 함께 소화의 허리가 반으로 접어졌다. 이틀이 지나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일천구백오십년 이월 오일이었다. 계엄령 해제를 현실감 있게 알린 것은 극장의 스피커였다. 닷새가 못가 악극단이 밀려들었고, 변사는 그 동안 목에 곰팡이라도 슬었다는 듯 멋대로 감정치장을 한 어조로 신바람 나게 떠들어댔다. 볼륨을 한껏 높여댄 스피커의 소리는 장터거리를 넘치고, 읍내 안통을 찌렁찌렁 울려댔다.

"친애하고 친애하는 읍민 여어러분, 마침내 바야흐로 계엄령이 해제되어 우리 읍내에 고대하고 고대하던 평화와 자유가 찾어왔습니다. 계엄령 해제를 축하하고, 그 동안 읍민 여어러분들께서 겪으신 고생과 불편을 위로하기 위하야 당 극장에서는 오늘밤 일곱 시부터 동방악극단의 <이수일과 심순애>를 무대에 올려 여러분들을 모시기로 한 것입니다. 돈에 울고 사랑에 울고, 아아, 사랑이란 그다지도 열매 맺기 어려운 쓰라린 형벌이었더란 말이냐. 돈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돈이 운다. 사랑만으로 살 수 없는 인생, 돈만으로도 살 수 없는 인생, 아아 어차피 인생은 쓰라린 고통이 아니더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사랑의 거편, 삼 막 오 장 <이수일과 심수운애>. 오세요, 오세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손에 손을 잡고 오시어이 청춘남녀의 기구하고도 한 많은 사랑의 쌍곡선을 감상하시라.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눈물의 호화 무대, 미남 미녀 배우들의 애간장 녹이는 명연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일생일대의 대실수, 저승에 가서도 후회하고 또 후회할 거딥니다. 연극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담도 있고, 노래도 있습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삼 막 오 장의 연극, 배꼽 빠지고 오줌 질금거리게 하는 만담, 가슴살이 살짝 녹여주는 노래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무대의 입장료는 단돈 백 원, 계엄령 해제 특별할인요금, 봉사가격 단돈 백 원으로..."

변사의 사설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계엄령이 해제되었지만 군인들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만족하고 안심할 만큼 '공비소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판단이었다. '공산비적'을 줄인 '공비'라는 말은 지난 일월 초순에 강원도 경찰책임자가 신문기자를 상대로 쓰게 되면서 '빨갱이'란 말을 젖히고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공식 용어화하고 있었다. 따라서 '반란도배'라는 말의 준말인 '반도'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염상진은 옥산 비트에서 안창민을 만나고 있었다. 염상진은 수염이 더부룩했고, 안창민의 오른쪽 안경다리는 언제 부러져나갔는지 삼끈을 꼬아 귀에 걸고 있었다.

"아무 곡기도 안하고 물만 마셔가며 열 시간에 걸쳐 계속된 도당회의 결과는,"

염상진은 말을 끊고 담배를 깊이 빨아 천천히 연기를 내뿜고는,

"지금까지의 투쟁 사업을 방법적으로 변경하기로 했소. 적극 투쟁을 피한 조직의 보존. 유지투쟁으로 바꿨소. 열 시간 동안이나 걸린 회의 결과로는 싱거울지 모르나. 회의는 그 결과를 찾기 위해서 열 시간을 소모한 것이 아니라 그 동안의 투쟁방법의 문제점이나 모순점 등에 대한 강한 비판토론이 벌어졌던 것이오."

"대개 어떤 점들 이었나요?"

"여러 이야기가 많았는데 큰 줄기를 간추리자면, 투쟁의 실패 원인은 무엇이냐, 이런 지역적 무장투쟁은 옳은 것이었느냐, 당원과 전사를 잃은 것만큼 얻은 것은 무엇이냐, 당의 무력투쟁 채택은 모험주의가 아니었느냐, 하는 것들이었소.“

"제기될 만한 문제들이긴 하군요. 그러나 시기가 잘 안 맞는 것 같군요. 그런 것들이 제기되었으려면 여순병란 직후 야산대투쟁으로 접어들기 전에 제기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으로서는 결과론밖에 나올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의 투쟁을 실패로 규정하는 것도 그렇고, 당의 무력투쟁노선을 모험주의로 보려는 것도 그렇습니다. 과오에 대한 비판은 마땅히 행해지고 그 책임도 져야 하겠지만, 과오에 대한 명백한 상대적 대안 없이 결과론에만 입각한 과오의 지적이나 비판은 그것이 또 책임 전가적 기회주의의 과오를 범하는 행위가 될 겁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서 더 이상의 방법이 없이 최선을 다하다가 좌절된 투쟁을 실패로 볼 것이냐, 성공으로 볼 것이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될 무젭니다. 이번 투쟁을 실패로 보는 경우 저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엄연히 대장님도, 저도 이렇게 살아 있고, 몇 안 되지만 우리 동지들도 살아 있어 군당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투쟁은 중단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습니다. 만약 실패로 단정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먼저 죽어간 동지들의 죽음을 모독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짓밟는 반동적 무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앞으로의 전략전술을 세울 때지 결론적 비판을 내릴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장의 부족은 말할 것 없고, 투쟁 방법이나 요령 같은 것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나 하는 것은 별개로 검토되어야 할 문제입니다만."

안창민은 숨을 돌리고는,

"도당의 조직이나 생존자는 얼마나 파악이 되었습니까?"

슬픔이 낀 듯한 눈으로 염상진을 쳐다보았다.

"안동무 의견에 찬동이요."

염상진은 안창민에게 그윽한 눈길을 보내며,

"두어 군데를 빼고는 모든 군당이 살아 있소. 도당 전체의 생존자가 이백여 명, 지리산지구가 백이십여 명쯤인 것으로 파악되어 있소. 그리고 우리의 투쟁 방법이나 요령은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경험부족으로 미숙한 점이 없지 않았을 거요. 그 해결은 더욱 철저한 연구와 경험축적밖에 없을 것 같소."

그는 곤혹스러운 심정으로 말했다.

"참 많이들 죽었군요."

안창민은 눈길을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염상진은 담배를 새로 말기 시작했다. 의식 속에는 안창민의 논리적인 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말에서 안창민의 그 동안의 변모를 선명하게 감지할 수가 있었다. 언제나 정연하던 논리는 그대로였지만 그 어조나 태도가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어조는 신념에 찬 강인성이 느껴지게 완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유격투쟁을 통해서 이론에 살을 붙이고, 피가 돌게 한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투쟁이 실패로 규정되는 것을 그가 거부하고자하는 것은 혁명의식의 새로운 무장이기도 했고, 자기존재의 부정에 대한 대응이기도 할 거라고 염상진은 생각했다.

"이지숙 동무의 사업은 어떻소?"

"무사하게 해나가고 있습니다."

"장한 일이오, 애로가 많을 텐데."

"대장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구사령부도 자연히 해체된 형편이니 당분간 도당에 머무를 것 같소. 율어의 조직은 어떻소?"

"아직까지 별 노출 없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군민들이 붙여준 영광스러운 이름 '모스코바'가 끝까지 지켜졌으면 좋겠소. 벌교는 어떻소?"

"이 동무 관리 아래 피해 없습니다."

"다행이오. 그만하면 우리 군당이 유지되기는 별 어려움이 없지 않겠소?"

"적극대응만 피한다면 유지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유지시키면서, 확대도 꾀하는 거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맞쳐다보았다.

 

"엄니, 설에 우리 무신 떡 헐랑가?"

어머니를 향해 베틀 옆에 배를 깔고 엎드린 광조가 소리를 높여 말했다. 쉼 없이 달가닥거리고 철거덕거리는 베틀 움직이는 소리와 바디치는 소리를 이기려는 것이었다.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얼굴이 부석부석한 죽산댁은 무표정인 채 기계적으로 손발만 움직이고 있었다.

"어이 엄니, 요분 설에 무신 떡 허냐니께."

광조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공부 안헐라먼 자빠져 자그라!’ 하는 꾸짖음이 터지려 했지만 죽산댁은 꾹 눌러 참았다. ‘애비 정도 몰르게 배곯려 키움시로,’ 하는 죄된 마음과 안쓰러움이 앞을 막았던 것이다. 그나마 기죽지 않고, 병치레하지 않으며 저리 커가는 것만으로도 황감하고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자식을 싸안고 있는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워째 그래쌓냐, 또 쑥떡이나 쪼깐 허제 무신 떡얼 더 허겄냐."

죽산댁은 일손을 놓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엄니, 우리넌 은제나 철떡 해묵을랑가?"

광조와 마주보고 쪼그려앉아 글씨를 쓰고 있던 덕순이가 고개를 들어 동생을 향해 눈을 흘기며 입을 삐쭉했다. 광조는 어머니를 올려다보고 있어서 그런 누나의 눈치꾸중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금메말이다, 이 엄씨도 잘 몰르겄다."

죽산댁은 시름겹게 말했다. 빈말로라도, 아부지가 오먼, 하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녀의 가슴에 어둠이 차게 했다. 남편은 돈벌이를 떠난 것도 아니었고, 징용을 끌려간 것도 아니었다. 그 장래가 아무 기약도 없는 일에 미쳐 언제 돌아올지, 언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지 모를 사람이었다.

"엄니, 나 소원이 먼지 안가?"

"광조야, 니 방학숙제 하나또 안 해놓고 무신 실답잖은 소리만 그리해쌓냐."

덕순이가 동생의 약점을 찌르며 말을 막고 나섰다. 동생이 철없는 소리를 자꾸만 해대며 어머니 속만 상할 뿐이었다.

"찰떡 한 가마니럴 묵는 것이여."

광조는 오기스럽게 제 할 말을 해치웠다. ‘아이고메, 저 기 승헌 거, 천상 즈 애비여,’ 죽산댁은 끌끌 혀를 차며 다시 일손을 잡았다.

"아이고 빙신아, 학교럴 댕기기 시작했으먼 남자가 좀 똑똑해져라. 니넌 워째 맨날 묵는 생각밖에 못허냐."

"배가 고픈께 그러제 워째."

"그런 생각 헌다고 배가 불러지냐? 멍청이."

"누나넌 몰러서 그랴. 고런 생각얼 허먼 배가 고픔스로도 불러."

"하이고 참, 요상허너 말도 다 듣겄다."

덕순이는 어이없는 코웃음을 치고는 공책으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광조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누나를 쏘아보다가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베짜기만 하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얼굴은 화가 난 것도 같고, 배가 살살 아픈 것도 같고 해서 진짜 기분이 어떤지 알아내기가 아주 어려웠다. 어머니는 화는 잘 냈지만 웃는 일은 별로 없었다. 배고프게 사는 것도, 어머니가 그러는 것도 다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누나한테도 하지 않았다.

"엄니이..."

어머니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베만 짜고 있었다.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죽 먹은 것이 다 꺼져버려 그냥 잘 수가 없었다. 배가 고프면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엄니, 나 배고파 죽겄는디 무시 하나 꺼내다 묵세."

광조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쏟아냈다. 덕순이가 고개를 발딱 들며 상체를 세웠다.

"니 정신 있냐, 웂냐. 반찬 해묵을 무시도 웂어. 배 고프먼 물 떠다 줄 것잉께 한 사발 묵고 자."

덕순이의 야무진 말이었다. 죽산댁은 스산한 마음으로 웃음 지었다. 자기에게 동생이 야단맞을까봐 덕순이는 미리 막고 나서고 있었다. 그 동기간의 정이 더 가슴 아리게 했다.

"멫 개나 남었는지 몰르겄다. 한나 꺼내다가 묵어라."

"야아, 우리 엄니 질이다!"

광조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두 팔을 뻗쳐 올렸다. 덕순이는 배시시 웃으며 어느새 일어서고 있었다. 광조도 따라 일어났다. 무는 광조가 받쳐 들고, 칼과 도마는 덕순이가 들고 들어왔다. 껍질을 깍아 내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찬물에 무를 깨끗하게 씻느라고 덕순이의 손은 바알갛게 일어 있었다. 배고픔을 줄이기 위해 똥도 매일 누지 못하게 하는 빈궁 속에서 무 껍질을 깍아 낸다는 것은 상상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를 도마 위에다 올렸다. 무는 노오란 순을 꽃모자인 양 달고 있었다. 무는 움 속에서 봄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순이는 칼을 들어 순 밑에 바짝 칼질을 했다. 덕순이는 그 노오란 순을 볼 때마다 꽃보단 곱다는 생각을 했고, 두리뭉실하게 생긴 무에서 어쩌면 그리도 예쁜 노란색의 순이 돋아나는지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순을 도마 끝에 바로 세웠다. 내일 아침 죽을 끓일 때 넣을 것이었다. 무 옆구리를 광조가 잡았고, 덕순이는 입술을 오므려 붙여가며 힘을 써 길게 반 토막을 냈다. 반을 다시 반씩으로 칼질했다. 길게 네 토막이 난 무를 하나씩 나누어 들었다. 마침 바람이 들지 않아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바람이 든 무는 퍼석거리는 게 싱거워 먹으나마나였다.

"남은 것은 느그 둘이 갈라묵어라."

죽산댁이 말했고, 덕순이는 재빨리 동생의 다리를 툭 치며 눈짓을 했다. 광조는 무를 볼이 미어지게 넣은 채 입술을 빼 물었다. 남아 있는 한 쪽은 당연히 어머니 몫이어야 했다. 자기들은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는데도 그리 배가 고픈데, 베짜기를 쉬지 않는 어머니는 얼마나 더 배가 고프고 기운이 없을 것인가. 자기는 동생 나이 때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런 눈치를 전혀 모르는 동생이 덕순이는 밉고도 야속했다. 어쩌면 동생은 알면서도 당장 먹고 싶은 욕심에 모르는 척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끔 엉뚱한 소리를 잘하는 걸 보면 속이 멀쩡하기도 했던 것이다.

"달고 맛나제?"

광조가 덕순이에게 눈웃음을 쳤다. 남아 있는 한 쪽이 자기 차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안 광조는 무를 아껴 먹고 있었다.

"이빨이 시렵다."

"긍께로 더 맛나제."

"."

덕순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딩이, 계엄인가 먼가가 풀렸다는디 살었는지 죽었는지 소식이나 전헐 일이제,’

죽산댁은두 어린 것들한테서 애써 신경을 돌리며 일손을 더 재게 놀렸다.

 

이중과세 폐지조치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며 설을 맞았다. 철시하는 상점에 대해서는 영업정지 처분을 내리겠다는 통보를 미리미리 했지만 문을 연 상점은 읍내에 하나도 없었다. 작년처럼 관공서만 문을 열어놓고 썰렁하게 자리들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민심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랜 풍습을 도외시한 강압적 행적의 본보기였다. 아무리 가난에 찌들려도 설을 설이었다. 헌 옷이나마 빨고 기워 입혀 아이들의 입성은 깨끔했고, 쑥떡이나마 손에 들고 깡충거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웃에 세배를 가서 세뱃돈 대신 받은 떡이었다. 아이들은 양지쪽을 골라 팽이치기를 하거나, 둑길에서 연을 날려 올렸다. 팽이싸움에서 이기면 떡이 한 개에다 일 년 재수가 좋았고, 연 끊어먹기에서 이기면 소원성취가 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설날만은 말 타기 놀이나 닭싸움 같은 험한 놀이는 하지 않았다. 설날에는 그래야 복을 받는다는 어른들은 말을 지켜 아이들은 얌전한 놀이만으로 싸우거나 다치는 일없이 하루를 보냈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버릇을 바로잡으려 하거나 금기시하는 일을 훈계하는 말에는 으레 '가난하게 산다'거나 '재수가 없다'거나 '부자로 산다'거나 '복 받는다'거나 하는 말들이 뒤 따라 붙었다. 다리를 꼬고 자면 가난하게 산다, 낯을 푸푸거리며 소리 내서 씻으면 재수가 없다, 다리를 까불어대면 복이 달아난다, 밥을 께질께질 먹으면 가난하게 산다, 문턱을 밟고 다니면 복이 깨진다, 어른을 보면 꼬박꼬박 절을 잘해야 복 받는다, 밥을 한 알도 흘리지 않고 먹어야 부자로 산다. 가난에 진저리가 난 아이들은 더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두려워했고, 어른들의 말은 주문처럼 먹혀들었다. 그 다음으로 많은 말이 부모에게 피해가 미친다는 내용이었다.

 

강동기의 아내 남양댁은 혼자 차례상을 차려놓고 방구석에 오두마니 앉아 있었다. 볼품없는 차례상이나마 차렸는데 절을 올릴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남편이 없다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절절하게 가슴에 사무치고, 외로움과 서러움으로 목이 메었다. 남자가 없다고 하여 여자가 감히 절을 올릴 수도 없는 일이었고, 남양댁은 울음이 가득찬 가슴으로 차례 상을 바라보고 앉아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다 아시대끼 아그아부지가 집 나가 해럴 넴겠십니다. 워디서 멀 허고 사는지, 그저 무사허게 살펴주십소사. 워디서고 무사허게 살어만 있으먼 더바랄 거이 웂응께, 살펴주십소사, 살펴주십소사...’

남양댁은 차례 상을 물리고도 남편 생각에 가슴이 막혀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설이 되면 날짐승 들짐승도 한자리에 모인다는데 남편은 어느 하늘 아래를 떠돌고 있는 것일까. 발단이야 어찌 됐든 간에 멀쩡한 사람을, 그것도 예삿 사람이 아니라 지체가 높은 양반이고 지주를 숨길만 붙어 있지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만들고 말았으니 언제나 그 죄가 풀려 만나게 될지 앞날이 막막할 뿐이었다. 좌익 하는 사람들은 군인에 경찰에 청년단까지 눈에 불을 켜고 지키는 속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하건만 남편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기에 그리도 까마득히 소식이 없는지 몰랐다.

부쩍 가슴이 삼동 응달처럼 된 것은 동서 외서댁마저 옆에서 떠나버린 탓이었다. 동서가 장흥 이모네로 떠나는 것이 못내 싫었지만 옷깃 한번 잡아 만류해보지 못하고 말았다. 동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떠날 수밖에 없는 기박한 처지였다. 부정한 씨를 낳자마자 갖다 주었다가 다시 데려온 것도 그랬지만, 그 자식을 사람들 눈총 받아가며 키운다는 것은 얼마나 바늘방석일 것인가.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벌써 열 가마니 쌀이면 팔자 고쳤다느니, 남편 노릇 제대로 못하더니 죽으면서 부조하고 갔다느니, 입들을 놀려대는 판이었다. 아이를 다시 데려온 것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분간이 어려운 채로 동서의 팔자를 생각하면 기막히고 안쓰러워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자신도 신령님이 보살피고 조상님이 도우사 임신을 피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허가 놈의 씨가 달라붙었더라면 어찌 됐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등줄기에 얼음이 맺혔다. 그러나 허가 놈과의 일은 과거지사만이 아니었다. 남편이 이리 소식이 없고 빚이 남아 있는 한 그놈은 언제 또 지게문에 구멍을 뚫을지 몰랐다.

그러고 보면 장흥댁 남편과 목골댁 남편은 그 의리 단단하기가 제석산 바웃덩어리요, 그 마음 깊고 넓기가 오동도 앞바다였다. 내색 한번 없이 두 마지기 농사를 나눠 짓고 타작까지 해서 마루에 부려놓았던 것이다. 인정사정없는 세상인심 속에서 부처님이 따로 없고, 신령님이 따로 없었다.

"그저 몰른 디끼 있으시오. 공연시 소문 나먼 허가 눔이 그 핑계허고 소작얼 띨라고 헐 것잉께요."

장흥댁의 남편 김복동의 말이었고,

"동기가 당허는 고초에 비허먼 우리가 헌 고상이 무신 고상이간디라. 우리가 헐 일 동기가 대신허고 당허는 것잉께 우리도 이만헌 일이야 응당 혀야제라."

목골댁의 남편 마삼수의 말이었다.

남양댁은 아이를 업고 보퉁이를 챙겨들었다. 나이가 더 많은 김복동이네로부터 들르기로 했다. 서너네댓씩 패를 지은 아이들이 다람쥐처럼 빠르게 뛰며 고샅을 오갔다. 아이들은 그들 특유의 해맑고 싱그러운 목소리들을 고운 꽃잎이듯 낭자하게 뿌리고 다녔다. 얼굴이 익숙한 아이들은 "과세 안녕허신게라?" 하고 인사했고, 그럴 때마다 "인냐, 한 살 더묵었응께 쑥쑥 더 커라이" 하며 남양댁은 새해 덕담을 보냈다.

"아이고, 요런 것얼 멀라고 챙기고 이러시오. 요래불먼 고마운 것이 아니라 섭해지요."

남양댁이 내놓은 흰 고무신을 보고 김복동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자네 맘얼 알제만, 안 이래도 되는 것을 그랬네. 나도 가실이 다 되야서야 그 이약얼 듣고, 허든 일 중에 잘헌 일이라고 생각혔네. 우리 아덜 아부지가 그런 처지 당허먼 자네 서방이 그런 일 안 맡고 나서겄는가. 긍께 인자 요런 인사 채릴라 말고 빚버텀 끄도록 허소."

장흥댁의 말이었다. 그 말이 가슴의 추운 외로움과 그늘진 적막감을 걷어내는 걸 느끼며 남양댁은 눈물을 찍어냈다. 설을 닥치고 그 고마움을 어찌 표할 수가 없어서 마음써가며 대목장에서 두 내외의 흰 고무신 한 켤레씩을 준비했던 것이다.

"기왕 사온 것잉께 고맙게 신겄소마는 인자 당최 요런 맘 묵지마씨요. 나가 동기 생각만 허먼 미안시럽기도 허고, 나잇값얼 못헌 것 겉기도 허고 혀서 똑죽을 것 같은 맴이요. 동기도 고상이고 아짐씨도 고상이제만 다 참고 기둘리씨요. 요런 사람못살 눔에 시상이 은제꺼지 가는 것도 아니겄고, 동기가 워낙에 강단지고 똑똑헌께 워디서고 아무 탈 웂이 지내고 있을 것잉께요."

김복동의 말이 남양댁의 마음에 훈훈하게 담겨왔다. 마삼수 내외는 한결 더 그녀의 행동을 꾸짖듯 했다.

"참말로 아짐씨가 영판 요상허요이. 못헐 말로 그 나이에 노망이 든 것도 아니겄고, 요것이 멋 허는 짓이다요. 고런 일 쪼깐 허고 고무신 받아 신은 것 동기가 알먼 나럴 멀로 보겄소. 참 아자씨 드럽게 짜잔허고 보초웂다고 사람 취급을 안헐 것이요. 긍께 싸게 갖고 가서 도로 바꾸씨요. 아짐씨가 몰라서 그렇제 동기허고 나허고는 성만 달랐제 성제간이요, 성제간."

"아는구만요."

", 암스로도 요런 짓 혔소!"

마삼수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메, 자는 아그 경기 들리겄소."

목골댁이 놀라 남편을 향해 허공을 쳤고,

"잘못혔응께 한분만 용서허시씨요."

남양댁은 오랜만에 사는 맛을 느끼며 과장되게 고개까지 숙여보였다. 목골댁과는 그만큼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네가 섭헌 짓 허기넌 혔네. 요분 일 봉께 남정네덜이 우리 여자 덜허고 워찌 달븐지 새시로 알겄드랑께. 남정네란 것이 그냥 생김만 달버서 남정네가 아니드란 말이시."

목골댁이 정겨운 눈길로 한 말이었다. 남양댁은 편안한 마음으로 눌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보도연맹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계엄령을 풀었으면 그만이제 워쩔 심판으로 동네마동 지부럴 맹근다고 그 북새질얼 치는지 몰르겄데."

목골댁의 말에 남양댁은 금방 샘골댁을 떠올렸다. 며칠 전에 샘골댁이 청년단원에게 시달리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미친 눔에 새끼덜이 있는 좌익얼 잡는 것이 아니라 웂은 좌익얼 맹그니라고 그 염병이제 워째."

마삼수가 굴뚝처럼 코로 연기를 내뿜으며 불퉁스럽게 말했다.

"와따, 담배 잡 에진간히 꼬실리씨요. 숨 맥히겄소."

"연기 타박 말고 자네도 담배럴 배와뿔소."

"아이고메 저 징헌 심뽀. 나 땀세 그러는 거이 아니라 아그 땀세 그러요."

목골댁이 내지르는 말에 마삼수는 쩍은 얼굴로 남양댁과 자는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슬며시 일어섰다.

"나 나가야겄네. 놀다가시씨요."

"존 일 헌다고 싸게 나가씨요."

목골댁은 기다렸다는 듯 새 쫓는 손짓을 했다. 남편은 사랑방을 찾아갈 구실이 생겨서 좋고, 아내는 남편을 내몰 기회를 잡아서 좋았다.

"인자 다리 쭈욱 뻗고 앉소. 오늘이야 세상천지가 다 쉬는 날잉께."

목골댁이 남양댁의 무릎을 눌렀다.

"나가 말이시, 보도연맹에 가입허라고 청년단원덜이 샘골댁얼 왈기는 것을 봤는디, 그 억지춘향이놀음이 사람 못 당헐 일이등마."

남양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고초 당허는 것이 워디 샘골댁뿐이겄는가. 읍내 좌익헌 남정네 마누래덜이야 다 당허는 것이제."

"금메 말이시, 워찌 그리 쌩사람덜얼 잡을라고 그까?"

"다 베락 맞을 짓거리덜 허니라고 그러제. 좌익 마누래로 몸고상 맘고상 젺은 것도 워디 헌디."

남양댁의 눈에는 샘골댁이 시달림당하는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고, 귀에서는 악쓰는 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샘골댁이 당하는 것을 일삼아 열심히 보았던 것은 남편이 몸을 숨기고 나서 자신이 시달렸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샘골댁이 딱하게 여겨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여러 말 말고 여그레 손도장 눌르씨요."

청년단원 둘이 버티고 서서 샘골댁 눈앞에다 종이를 흔들어댔다.

"아 금메 나넌 빨갱이질 헌 일이 웂당께로 워째 이래쌓냐니께."

샘골댁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듯 짚신발을 굴렀다.

"와따 그 아짐씨 고집 드럽게 씨네. 빨갱이 마누래먼 그것이 그것인디 워째 그리 말이 많소. 싸게 눌르씨요."

"머시가 워쩌고 워쩌? 느그가 먼디 나럴 빨갱이 맹글고 지랄이여, 지랄이. 나가 좌익이고 빨갱이라먼 치가 떨리고 피가 꺼꿀로 솟기는 사람이여. 헌디, 빨갱이 마누래먼 그것이 그것이라고? 고것이 워따 대고 놀리는 주딩이여, 주딩이가."

샘골댁은 분을 참지 못해 마구 삿대질을 하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어허, 그 아짐씨 참말로 땁땁허시. 보도연맹이 빨갱이 잡자는 디니께 빨갱이가 그리 싫으먼 더 잘된 일 아니겄소. 여그에 손도장 팍 눌러뿔고 빨갱이 잡는 일에 협조허먼 을매나 좋소."

"염병허고 사람 흘기지 말어. 나가 아무리 무식혀도 그런 소리에넌 안 넘어간다."

두 주먹을 말아쥔 샘골댁이 부르르 떨었다.

"아짐씨, 참말로 말 안 들을라요? 정 그리 뻐시게 나가먼 우리가 완력을 써서 그까징 손도장 하나 못 눌르게 헐 성 불르요?"

두 청년단원은 샘골댁을 곧 덮칠 것처럼 한 발짝씩 다가섰다. 샘골댁은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옆으로 내달았다. 청년단원들이 주춤하다가 뒤쫓았다. 샘골댁은 담 가까이에서 무엇인가를 집어 들었다.

"그려, 완력으로 혀라. 느그덜 죽고 나 죽고 허자. 뎀베라, 뎀베. 요눔에 시상 더 살고 잡은 생가 웂응께 느그랑 나랑 향꾼에 죽자!"

샘골댁은 악을 쓰며 도끼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그 몸에 기운이 펄펄했고, 눈에는 파란 불이 켜져 있었다. 돌발 사태를 당한 두 청년단원은 허둥지둥 뒷걸음질을 치다가 사립이 가까워지자 다투어 도망질을 쳤다. 샘골댁은 소리소리 지르며 사립 밖까지 달려 나갔다. 짚신이 벗겨지고 옷고름이 풀어진 채 그녀는 도끼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그 즈음까지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의 수는 전국적으로 삼십만 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좌익세력 제거에 어느 만큼 실효를 거두고 있기도 했다.

 

이월이 저물고 있었다. 읍사무소에서는 지난 이월 십일에 공포된 법에 따라 농지위원회를 구성하느라고 분주했다. 먼저 읍 단위 농지위원회를 만들고, 그 아래로 각 이, 동 단위 농지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농지개혁 실시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농지위원회의 구성 소식을 듣고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이 좌익척결위원회였다. 임시총회라는 명목으로 소집된 회의에는 회원으로 가입된 읍내 지주들이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빠진 사람이 김사용 이었다. 열 명이 미처 못되는 그들이 가결한 사항은, 무슨 방법을 써서든 농지위원회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뜻은 일사불란하게 하나로 합해졌다. 제일 중요한 읍 농지위원회 장악을 위해서 좌익척결위원회 위원장 최익달, 부위원장 윤삼걸, 총무 유주상이 읍장을 만난다는 것도 결정했다. 그 비용은 전체가 분담한다는 것도 뒤따랐다.

그날 밤 남원장에 술자리가 차려졌다.

"세상이 못쓰게 변혀서 결국 나라가 지주 웂애는 농지개혁인가 먼가럴 허게 되는 모양인디, 읍장님은 농지위원회럴 워떤 식으로 꾸밀 요량이시오?"

최익달은 그 성질대로 직사포를 쏘아대고 있었다.

", 읍장님께서도 다 헤아리고 계실 줄 압니다만 이번 일이 국가대사라 공평무사하게 성사돼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견지에서 볼 때 작인들을 너무 안하무인으로 난동을 일삼고, 지주들은 이익보호를 받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서야 나라 기강이나 장래가 우심하지 않습니까. 이 난국을 타개하는 데 있어서 농지위원회의 소임이 지대할 것으로 보는데, 읍장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유주상이 직사포의 방향을 곡사포로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읍장 이병주의 입장에서 들으면 그 말이 그 말이었다. 술자리를 마련한 그들의 의중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들으나마나 한 소리였다. 그리고 농지위원회 구성 규정에는 그들이 요구하는 바가 명시되어 있어서 아무 고심 없이 인심 쓰기가 좋았다.

"내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마는, 하시는 말씀들 뜻을 익히 알았으니 너무 걱정들 안하셔도 될 겁니다."

읍장은 확답을 슬쩍 피해 섰다.

"그리 말씸 허신께 고맙기는 헌디, 워째 기분이 만족시럽지는 못허구만요."

윤삼걸은 읍장이 사린 꼬리를 잡아채려는 듯 말했다.

"여긴 사석이니까 공적인 얘기는 이 정도로 끝내는 게 어떨까 합니다. 나머지 일이야 읍장님이 선처하실 것이고, 이렇게 자리한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이제 기생들 불러들여 술맛 돋우게 하십시다."

유주상이 윤삼걸에게 눈짓하며 가로막고 나섰다.

"그리헙씨다. 단출허니 술 맛나게 생겼소."

최익달이 맞장구를 쳤다.

각급 농지위원회의 위원장은 지방행정기관의 장으로 하며 그 위원은 농지사정을 숙지하며 학식과 명망이 있고 공평무사한 인격을 겸비한 관민 중에서 선임한다... 읍장은 농지위원회규정의 한 대목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들이 그 규정에 얼마나 합당한 인물일지는 모르나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끼워 넣기로 하자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막상 그 조건에 맞는 인물을 찾아낸다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농지개혁은 추진될 것이고, 그들이 농지위원회에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이미 자기네 뜻대로 마음대로 일을 주무르기는 어렵게 되어 있었다. 정부는 어디까지나 행정관리의 책임 아래 농지개혁을 시행하도록 방침을 정해놓고 있었다. 왜냐하면 농지개혁의 성패는 바로 정부의 존립에 직결되어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대다수 소작인들은 좌익의 선전선동에 쏠려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소작인들을 좌익으로부터 떼어내 그 위기를 넘기는 방법은, 비록 이북에서 이미 행한 조건에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농지개혁밖에는 없는 실정이었다. 미군정이 자기네들의 점령지가 자본주의사회가 아니라 사회주의사회가 되어버릴 위기를 막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귀속 농지를 분배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의 계속이었다. 군정이 그때 동척 소유의 귀속농지만이 아니라 모든 농지를 분배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지주들의 조직적인 반대와 방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형편은 많이 달라져 정부는 농지위원회의 권리를 형식적인 면에서 허용하고 있을 정도로 지주들을 현실적인 권력의 버림을 받아가고 있는 처지였다. 정부권력이 튼튼해야만 자기 자리도 튼튼해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읍장은 농지개혁에 대한 태도 결정을 진작 끝내놓고 있었다. 눈치 빠른 지주들은 벌써 반 이상, 그렇지 못한 지주라 하더라도 평균 삼 할씩은 매각했거나 명의변경을 한 것을 생각하면 읍장 이병주의 마음은 편하지가 못했다. 농지개혁은 하나마나 실패가 아닐까 하는 회의가 생겼던 것이다.

"자아, 한잔 쭈욱 드십시다아."

최익달이 왼쪽에 기생을 품은 채 정종 잔을 들었다.

"고맙습니다, 쭈욱 드십시다."

읍장도 흔쾌한 척 술잔을 높였다.

 

 

9. 민중의 승리, 2대 국회의원 선거

남로당의 최고급 간부 김삼룡과 이주하가 검거되었다. 삼월 이십칠일이었다. 그 사실은 신문들을 요란하게 장식하는 사건이었고, 누구에게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우익은 우익대로 충격을 받았고, 좌익은 좌익대로 충격을 받았다. 다만 그 충격의 색깔이 다를 뿐이었다. 우익이나 그 동조자들 입장에서는, 마침내 남로당이 괴멸되었다! 하는 환희적 충격이었고, 좌익이나 그 동조자들 입장에서는, 아니 이럴 수가! 하는 절망적 충격이었다. 다만 두 쪽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잡혔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물론 그 의문도 좌,우익의 입장에 따라 감정의 색깔이나 모양이 다른 것은 분명했다. 우익의 입장에서는 호기심이나 흥미가 유발한 의문이었고, 좌익의 입장에서는 낙망이나 안타까움이 유발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일치점은 있었다. 그 의문의 주체가 경찰이 아니라 그들 두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잡히지 않는 사람,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는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신비스런 소문들을 별다른 의문 없이 믿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축지법을 써서 동대문에 나타났다가 오 분 뒷면 서대문에 나타난다. 무술이 능해 기합도 넣지 않고 기와집을 뛰어넘는다. 기운이 임꺽정만 해서 장정 열이 당하지 못한다. 신통술이 기막혀 자기 모습을 마음대로 지웠다가 나타냈다가 한다. 이런 소문들이 오래 전부터 항간에 떠돌았던 것이고, 경찰들마저 그런 소문들을 완강히 부인하지 못했으므로 그 신빙성은 더 커져갔다. 그들이 그러한 신화적 인물이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도 했다. 그들은 일제치하에서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해오면서 그 지독한 일본경찰에게 잡힌 적이 없었고, 오랜 세월동안 일부러 사진을 찍지 않아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점조직과 가명 사용으로 자체 당원들도 바로 옆에 앉았더라도 알아볼 도리가 없었고, 조직화된 지하활동으로 경찰의 수사망을 숱하게 기만시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김삼룡과 이주하가 잡혔다고 하여 그들이 신화가 깨어진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 중의 하나인 이현상이 지리산에 엄연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계곡과 계곡을 날아다니고, 날아오는 총알을 떨어뜨린 다는 소문과 함께.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문은 그런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잡혔느냐는 점이었다. 그건 얼핏 생각하면 그 답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그들의 완벽성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그 누구-결국 조직 내부의 배신자에 의해 그들은 체포된 것이었다. 이학송이 체포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인 삼십일일이었다. 김범우와는 업무관계로도 매일 한 차례씩은 전화를 주고받는 까닭에 그의 체포는 당일로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김 형도 거 왜 아시죠? , 이 두 사람을 검거하고 나서 경찰들이 기고만장해서 기세올리고 있는 것 말요. '점수 따기'에다 '판쓸이'가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에 이 형도 휩쓸려 들어간 거지요."

"그래도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경찰 눈으로 보자면 근거야 충분하겠죠. 내가 알기로 이 형은 한때 문학가동맹에도 가입했고, 그간 그가 쓴 기사들이 여러 차례 경찰의 비위를 뒤틀리게 만들었어요."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시경이요."

김범우는 전화를 끊으면서도 문학가동맹이란 엉뚱한 말에 놀란 기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엉뚱한 말이 아니었고 이학송이 시를 썼다고 한 사실과 연결되고 있었다. 그는 문학가동맹에 가입할 정도로 사회주의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구나... 김범우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이학송을 되짚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전향을 한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활동을 해온 것일까. 그 동안의 언행을 더듬어보았지만 그 구분을 명확히 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그를 가리켜 민족적 사회주의자라고 한 법일 스님의 말이 무슨 응답처럼 떠올랐다. 바로 시경으로 갔다. 그러나 면회가 되지 않았다.

"당신, 그자하고 어떤 사이야!"

"선배요.“

"선배? 당신 신분증 내놔."

김범우는 어이가 없어 지갑을 꺼내 그대로 내밀었다. 형사는 지갑을 받아들며 고약한 눈초리로 김범우의 위아래를 훑었다.

"기자? 이것들 시건방지고 재수 없는 종자들이야. 수사 중이니까 면횐 안돼."

형사는 지갑을 책상 위에 내던지며 쏘아댔다. 김범우는 한마디 할까하다가 그냥 돌아섰다. 혁대를 압수당한 이학송은 취조실에서 시달리고 있었다.

"점잖게 좋은 말로 할 때 불어, 저 소리 들리지? 진작 저 꼴 만들었을 텐데 그래도 기자라고 봐주고 있는 거야. 다시 묻겠다, 남로당의 직책을 대."

이학송은 숨을 들이켜며 눈을 감았다. 고문당하는 비명소리가 핏빛으로 의식을 덮어왔다. 벌써 네 번째의 같은 추궁이었고, 네 번째로 같은 대답을 할 차례였다.

"더 할 말 없소."

이학송은 눈을 뜨며 말했다.

"이 새끼, 너 정말 까불 거야! 뚜렷한 증거가 있는데두 오리발을 내밀어!"

형사는 눈을 부라리며 경찰봉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증거가 있으면 대시오."

"! 새끼 이거 허여멀쑥하게 생겨가지고 순 악질이네. 이 새끼야, 문학가동맹에는 왜 가입했어! 그래도 빨갱이가 아니라고 개소리 칠 거야."

형사는 기운이라도 돋우듯 끝말을 소리쳐 하며 책상 밑으로 이학송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어쿠!"

이학송의 입에서는 비명이 울컥 터지며 고개가 휘청 굽어졌다. 그는 숨이 멎는 통증 속에서 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시기를 생각했다. 아 그때, 해방의 감격과 흥분 속에서 시까지 긁적거렸던 열정은 열 번이라도 가입서를 쓸 수 있었다. 모든 반민족적인 요소를 제거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 그것만이 민족이 살 길이고, 민족을 복되게 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했었다.

"그건 이미 옛날 일이오. 시 쓰기를 포기하면서 거기서도 발을 끊었소."

", 그렇게 씨부릴 줄 알았어. 그럼, 왜 전향문을 신문에 안 냈나. 유진오고 김팔봉이고 내는 걸 못 봤어? 기자님이시니까 못 봤다고는 못하겠지?"

형사는 포획의 만족감을 드러내며 입가에 비웃음을 물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도 좋소만, 그런 거물들에 비해 난 피라미였소. 사회적으로 그런 거물 문사들의 전향문을 필요로 했지 나 같은 것이 신문에 그런 것을 내면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일이었소."

"이 새끼 이거, 주둥아리 한번 그럴싸하게 놀려대네. 너 정말 뼉다구 금가고 싶어!"

형사는 또 책상을 내리쳤다.

"그럼 왜 경찰에선 그때 당장 문제 삼지 않고 이제 와서 이러는 거요."

"이 새끼 말이 많아!"

형사의 외침과 함께 경찰봉이 이학송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이학송의 몸이 불끈 솟기듯 하다가 왼쪽으로 푹 기울어졌다. 이학송은 정신이 아뜩하게 멀어지는걸 느끼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 그때, 미군정이 인공을 부인하며 식민지화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그 다음 단계로 좌익세력 제거를 목적으로 삼았을 때 감지한 어둠. 민족은 두 강대국 이데올로기 앞에 분열을 면할 수가 없게 된 상황이고, 민족이 살아날 길은 남북이 공동으로 두 외세에 대항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단기적인 싸움일수 없었고, 폭력에 의한 정면대결로 될 일이 아니었다. 조직적인 민족의식 고취와 외세 축출의식을 심어 민족적인 대항을 전개해야 된다고 믿었다. 좌익의 정면대결을 아까운 인명손실과 함께 자멸을 초래하는 길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이 새끼 발딱 일어나. 너 같은 악질은 말로 되는 게 아냐. 따라와!"

형사는 이학송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이학송은 흘러내리는 바지를 붙잡고 뒤뚱거리며, 이런 미친 새끼들아, 네놈들 같은 민족반역자들을 다 쳐 없애고 순수한 민족만이 모인 민족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어, 어디 네놈 맘대로 해봐, 이렇게 소리 없이 외치며 비명소리 낭자하게 퍼지는 복도를 끌려가고 있었다.

 

"아이고오오, 아이고오오, 원퉁허고 절퉁해라아, 우리 서방 불쌍혀서 워쩔끄나 워쩔끄나. 소작질에 골빠지고, 배곯아서 골빠지고, 묵을 것 못 묵음서 허천나게 산 것만도 서럽고도 원퉁헌디, 요것이 머시다냐, 생목심 졸라 쥑이는 요것이 머시다냐. 아이고메 불쌍헌 것, 우리서방 불쌍헌 것, 시물아홉 시퍼런 나이에 요것이 웬일이여어. 이눔덜아 이눔덜아, 우리 서방 살려내라아."

마룻바닥을 치며 통곡을 해대던 예당댁은 제물에 겨워 눈을 뒤집으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싸게 찬물 믹이소."

토방 아래 둘러섰던 열댓 명의 여자들 중에서 나이 지긋한 여자가 일렀다. 젊은 두 여자가 재빠르게 움직여 하나는 예당댁을 뒤에서 떠받쳤고, 다른 여자는 마루 끝에 놓아둔 물 사발을 들어다가 손끝으로 물을 찍어 예당댁의 얼굴에 서너 차례 뿌리고는 사발을 입에다 갖다 댔다. 물이 입으로 흘러들어가고, 잠시 뒤에 예당댁은 긴 숨을 토해내며 잠에서 깨나듯이 부시시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통곡을 시작했다.

"아이고메 아이고메 서럽고도 원퉁허다, 기맥히고 절퉁허다. 아이고오오, 이이고오오, 워쩔끄나 워쩔끄나 이내 신세 워쩔끄나. 서방있어도 심든 시상얼 서방 웂이 워쩔끄나. 삥아리 겉은 새끼덜 셋얼 나 혼자서 워쩔끄나. 예말이요 눈뜨씨요, 새끼덜 보고 눈뜨씨요, 이 새끼덜 불쌍치도 안혀 혼자서 떠나시오. 아이고오오, 아이고오오, 가지 마씨요, 가지 마씨요, 이년 혼자 못 사니께 혼자서는 가지 마씨요. 갈라먼 나도 델꼬, 나도 델꼬 가줏씨요오."

예당댁은 다시 거품을 물었다.

"되얐소? 인자 말기소."

아까 여자가 말했다. 두 여자가 다시 다급하게 마루로 올라갔다. 둘러섰던 여자들은 그때서야 쯧쯧 혀를 차고, 눈물을 찍어내고 하며 지금까지의 숙연한 긴장에서 풀려났다. 그건 남편의 죽음을 당한 아내가 치르게 마련인 일차적 예식이었다. 죽음치고 허망한 죽음 아닌 것이 없고, 남편을 앞세운 아내에게 그건 충격이고 서러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날 살 비비고 살며 겪고 넘겼던 괴롭고 고통스럽고 안쓰러웠던 삶의 여러 기억들이 돌이킬 수없는 희환으로 뭉쳐지며 커지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홀로 남겨진 자기 삶에 대한 두려움이나 고적감 같은 것도 올올이 사무쳐와 자기 설움까지 키우게 마련이었다. 그런 여러 가지감정의 매듭매듭을 맘껏 풀어놓은 통곡에 실어 굽이굽이 엮어 내리게 해 가슴에 맺힌 것 없이 풀게 하는 것이었고, 이웃들은 옆에서 지켜 보아줌으로써 미망인의 슬픔과 서러움을 함께 나누고 마음을 위로하는 정표로 삼았다. 그래서 미망인의 통곡이나 사연은 평소부터 몸에 밴 판소리 가락이나 사설을 예외 없이 닮아 있었고, 기운이 좋거나 말 엮음이 좋은 여인의 경우에는 그 통곡의 길기가 반나절을 족히 가는, 전라도 특유의 서러움과 가슴풀이였다. 예당댁의 남편은 정현동을 살해한 죄로 사형을 당함으로써 예당댁의 한스러움은 물론이고 이웃들의 가슴 아픔도 그만큼 컸다.

예당댁의 남편 초상이 치러지고 있는 가운데 소작인들의 집에는 읍장 명의로 된 '분배예정지 통지서'가 발급되고 있었다. 진달래꽃은 이미 졌고, 들녘에는 아지랑이가 현기증처럼 아롱아롱거리고 있는 사월 중순이었다. 그 통지서가 발급되면서 동네마다 뒤집히기 시작했다. 소작인들의 불만이 터진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예상했던 것보다 분배농지가 형편없이 적었던 것이고, 둘째는 분배된 농지가 자기네가 소작을 부치고 있던 것이 아니고 엉뚱한 곳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지주들이 이미 매각을 했거나 명의변경 또는 지목변경 등을 해서 분배대상농지가 줄어들어 있었고, 그것을 가지고 행정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균등분배를 하다 보니 분배량이 적은데다 위치변동이 야기될 수밖에 없었다. 소작인들은 제각기 분배예정지 통지서를 들고 읍사무소로 달려갔다. 그러다보니 소작인들은 읍사무소 앞에 떼를 이루게 되었다. 그들이 떼를 이룰수록 군경은 읍사무소를 단단하게 에워쌌다. 총 앞에서 그들의 항의는 무참하게 묵살 당했다. 성질 급하게 안으로 뛰어들던 사람들은 개머리판에 맞아 이마가 깨지고, 볼이 터지고, 이빨이 부러져 나갔다.

"일단 빠짐없이 농지를 분배한 이상 개인적인 사소한 불만은 관이 책임질 수 없는 일입니다. 관은 공명정대하게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도 불만이 있는 사람은 각 동네마다 있는 농지위원회를 통해서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시고, 법적으로 재판을 통해서 해결하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 식으로 난동을 부리게 되면 일도 해결이 안 될 뿐 아니라, 여러분들은 국법을 어기는 범법자로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공행위가 뭐 딴것인 줄 압니까. 정부의 혜택을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런 식으로 난동을 부리는 것이 바로 용공행윕니다."

읍장의 연설이었다. 소작인들은 사지가 풀리고 말았다. 농지위원회라는 것도 자기네들 편이 못되었고, 더구나 나라를 상대로 재판을 걸어 어느 장사가 이기랴 싶었던 것이다. 농지위원회는 대개 예닐곱 명으로 짜여졌는데, 이장을 선두로 지주가 한둘, 자작농이 둘 정도, 그리고 똑똑하다는 소작인이 한둘이었다. 그러나 소작인이 제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우선 수적으로 부족해서 작인들의 권익을 도모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소작인들은 그저 구색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소작인들 뒤에서 소작인들보다 몇 갑절 큰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머슴들이었다. 그들은 소작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예 분배대상에서 제외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처자식이 딸려 있었고, 농지소유에 대한 열망은 소작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인의 배려로 농지를 얻게 된 것은 김범우네 머슴 천 서방 정도였다.

"요런 드런 눔에 시상얼 으째야 쓰까? 머심살이허는 것도 원퉁헌디 사람대접할라 못 받음서 요대로 참고만 있어야 쓰겄어?"

"그리넌 안 되제. 무신 사단을 내도 내야 헐 일이시. 우리도 사람이란 것얼 뵈야 헌단 말이시."

"근디, 그 방도가 머시제?"

말은 여기서 끊기게 마련이었다. 상대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였고, 수많은 소작인들이 뭉쳤다가 군경에게 무참히 당하는 꼴을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보아왔던 것이다.

"우리 무시허는 나라라는 것도 개녀러 것이제만, 우리 쥔이라는 것들도 사람새끼덜이 아니여. 그리 쎄빠지게 부려묵었으먼 요런 때 응당 도와줘야 되는 것 아니겄어. 그런디 입 싹 씻거뿌는 그 심뽀가 나라 보담 더 나쁘단 말이시."

"그려, 그려, 나라야 그리 세세헌 것꺼정 몰를 수도 있는 일이제. 근디 쥔덜이야 우리가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덜 아니드라고."

"긍께 말이시. 웬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여."

"맞구마, 그 웬수 갚음을 워치케 헐꼬!"

"누가 듣겄네."

머슴들의 헛바람 새는 분노였다. 농지를 분배받은 소작인들은 농지값으로 평년작 생산량의 한 배 반을 오 년간 분할상환하고, 정부는 지주들에게도 같은 조건으로 지가증권을 교부해주기로 한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농지개혁은 대다수 소작인들의 불만과 실망을 그대로 남겨둔 채 그 막을 내려가고 있었다.

 

금년부터 모든 학교의 학년도 시작이 사월로 바뀌었다. 양효석의 뒤를 따라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현오봉은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생활 한 달째를 맞고 있었다. 말이 서울이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넓지도 않은 논밭과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산줄기뿐이었다. 신입생이라서 외출도 허용되지 않은 채 새로운 규율을 익히느라고 매일같이 시달리며 보낸 한 달이었다. 현오봉은 조그만 상자 속에 틀어박힌 것 같은 답답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자기 몸이 규율이라는 틀에 맞춰져 네모꼴이 되는 듯한 착각이 생기기도 했다. 규율의 기본은 직선과 직각이었다. 서는 것도 직립자세라 했고, 걷는 것도 직각보행이라 했다. 밥먹을 때 앉는 것도 직립자세요, 숟가락질도 직각보행이라 했다. 갑자기 소화시킬 수 없는 그런 강압적 규율들이 고향생각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다.

"야 오봉아, 멀 허고 있냐?"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현오봉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효석이성..."

현오봉이 어색스럽게 웃어보였다.

"니 또 집 생각 허고 있었냐?"

양효석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육사럴 잘못 온 것 겉은디. 안 그럴라고 해도 꼭 미칠 것맹키로 집 생각이 나서 못살 것다니께."

현오봉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니만 그런 것이 아녀. 서울 아덜만 빼고는 일 학년이먼 다 똑같어. 나도 작년에 미치는 줄 알었다. 그것이 다 촌놈 병이라는 것이다. 그 고비만 넘기면 지절로 낫는 병이다."

"아녀, 나넌 달버. 밥맛도 떨어지고, 잠도 안 오고 허는 것이. 나 보따리 싸갖고 집으로 가야 될랑가부네."

"임마, 니 정신 채려!"

양효석이 느닷없이 소리치며 현오봉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니 육사에 멀라고 왔냐? 구경 왔냐, 원족 왔냐. 원수 갚을라고 오지 안혔냔 말여, 원수! 빨갱이덜 손에 억울허고 분허게 돌아가신 아부지덜 원수 갚을라고 말여. 니 그 결심 개 줬냐, 돼지 줬냐. 니 그런 꼬라지 저승에서 느그 아부지가 내레다보고 머시라고 허겄냐. 그려도 니넌 나보담 훨썩 나슨 거여. 나라도 옆에 있지 않느냔 말여. 작년에 나넌 혼자서 집 생각이 날 때마동 팔뚝을 물어뜯음서 참아냈다. 다 니 알어서 혀."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열을 내서 말하고 있었다. 현오봉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아버지께 부끄러웠고, 양효석에게 창피스러웠다. 혼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스리려 했던 때와 남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것과는 그 차이가 상상 밖으로 컸다.

나가 다시 그런 못난 생각얼 허먼 개자석이다!’

현오봉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성 말이 맞구만. 나야 성이 옆에 있응께로 훨썩 낫제."

현오봉의 낮은 목소리였다.

"그려, 나 말 야속허니 생각허지 말고 맘 단단허니 묵어라. 니넌 몸집도 크고 기운도 씬께 맘만 단단허니 묵으먼 군인으로 아조 적격 아니냐. 아부지 원수도 갚고, 군인으로도 크게 출세헐 수 있다. 장군으로 말여, 장군."

양효석이 현오봉의 어깨를 툭툭 쳤다. 현오봉이 멋쩍게 웃으며 양효석을 쳐다보았다.

"나가 집 생각이 그리 나는 것은 꼭 맘이 덜 야물어 그런 것만이 아니시. 한 가지 근심이 있어서 그러네."

", 애인이라도 띠 놓고 왔냐?"

양효석의 밝아진 음성이었다.

"글먼 좋기나 허게. 요분 농지개혁얼 엄니 혼자 워찌 넘겠는지, 손해는 안 봤는지, 걱정이 태산이시."

"아니, 느그집 논이 그리 많앴디야?"

아버지가 장사와 돈만을 최고로 알았던 탓에 논밭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양효석으로서는 관심조차 쓰지 않은 문제였다.

"많은 지주들에 비허먼 하품 나는 것이제만, 삼백 석은 했응께 농지개혁이야 당허고도 남을 농사제."

"전답얼 그냥 뺏기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무신 증권인지 먼지럴 준담시로?"

양효석은 귀동냥한 말을 했다.

"그것 받으면 머 혀. 폴기 싫은 논 강제로 폰 것잉께 뺏긴 것이나 한가지제."

"나라도 한심허고 답답허다. 원체로 농지개혁이란 것이 빨갱이덜 법 아니겄냐? 근디 워째 빨갱이물이 든 작인 눔덜이 원허는 그대로 혀주냐 그것이여."

"긍께로 말이여."

"워쨌그나 끝난 일잉께 잊어뿌러라. 그라고, 느그 집언 농새로 돈버는 것이 아니라 여관으로 돈버는 것 아니냐?"

"큰돈이야 그렇제."

"글먼 되얏다. 여관이 외상이 있냐, 에누리가 있냐. 문만 열어놓고 앉었으먼 즈그덜 발로 찾아들어 돈 떨구고 가는 그런 편헌 장사도 이 시상에 웂다. 다 잊어뿌러. 군인언 앞으로 전진만 헌다!"

"결국은 그래야겄제. 근디, 워디 나갈라는 참인가?“

현오봉은 정장차림의 양효석을 부러운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 니 땀세 그 존 이약이 늦어져뿌렀다. 성일이 누님 송경희 약속을 기엉코 받아내뿌렀다 그 말이다."

양효석이 좋아죽겠다는 몸짓을 했다.

"와따 좋겄네. 소원 성취혔구만."

현오봉은 맥이 빠지는 걸 느꼈다. 서울대학으로 진학을 한 성일이의 주소를 알려줄 때만 해도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코웃음을 쳤던 것이다. 그리고 사흘거리로 편지를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양가가 송씨한테, 하고 비웃었다. 그건 보부상 내력의 양효석을 동급으로 취급해 줄 수 없음이었고, 같은 양반을 옹호하고자 하는 자존심이었다.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성일이의 누님을 어찌 된 일일까. 현오봉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이 기맥힌 오월 호시절 일요일에 절세미인을 만내로 가는디 워째 기분이 안 좋겄냐. 근사헌 음식점에서 고급 요리도 묵고, 다꾸시럴 타고 뚝섬으로 나가 뽀트로 탈 참이다. 춘풍 살랑기리는디 뽀트럴 탐스로 사랑을 속삭인다, 고것이 을매나 기맥히겄냐."

"급허기도허시, 첨 만내서 사랑을 속삭이게. 아매 성일이 누님이 한 살이 더 많을 것인디?"

"두 살이 더 많으먼 무신 걱정이냐. 고것이 우리 풍습으로야 지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인디."

현오봉은 기분이 불쾌해져서 더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안부 전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양효석은 송격희가 지정한 장소인 반도호텔을 찾아갔다. 먼발치로만 서너 번 바라본 반도호텔 앞에 서자 어찌나 크고 높아 보이는지 그는 선뜻 들어가지를 못하고 머뭇거렸다. 까닭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고 주눅이 들었다. 건물의 크기도 크기였지만 들고나는 사람들 중에 서양인들이 섞여 있는 것도 적잖이 신경 쓰였다.

빌어묵을, 워째 해필허고 요런 디서 만내자고 해갖고...’

그는 입맛을 다셨다.

아니제, 나가 얼렁 찾기 좋으라고 그렸을 것잉만...’

그는 생각을 고쳤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직립자세로 척척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서 그는 완전히 기가 죽고 말았다. 구둣발로 밟아서 될지 안 될지 모를 푹신푹신한 양탄자, 생전 처음 보는 호화로운 실내, 실내를 떠도는 향기로운 것도 느끼한 것도 아닌 냄새, 그 별천지 속에서 어찌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어리뜩하고 쭈뼛거리며 어찌어찌 커피숍이라는 데를 찾아갔다. 구석자리를 찾아 앉고 나서야 그는 가슴팍에서 땀이 흐르고 있는 것을 의식했다. 땀은 손바닥에도 끈적하게 배어 있었다. 송경희는 십 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십오 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이십 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십오 분이 다 되어서 나타났다.

"안녕허십니까."

양효석은 벌떡 일어서며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어머머, 창피하게 이게 무슨 짓예요. 빨랑 앉아요, 빨랑."

송경희는 얼굴이 싹 굳어지며 차갑게 내쏘았다. 양효석은 얼른 의자에 앉았다. 그러면서 송경희가 무지무지하게 예뻐졌다고 생각했다.

"군인은 실내에서도 모자를 안 벗는 건가요?"

송경희가 다시 내쏘았다.

", 아니구만요, 벗어야제라."

양효석은 황급히 손을 모자로 올렸다. 그는 그때까지 자신이 모자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남자가 와서 허리를 굽혔다.

"커피, 블랙."

송경희가 말했다.

"나도요."

양효석이 잇따라 말했다. 송경희의 입가에 경멸적인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물방울무늬가 찍힌 하얀 원피스를 목이 다 드러나게 입었고, 목에는 실오라기처럼 가는 금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머리칼은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했다. 달걀형인 얼굴과 긴 편인 목은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을 배경삼고, 하얀 원피스와 가는 금목걸이에 받쳐져 그 윤곽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그녀의 미모를 한결 돋아 올리고 있었다.

"서울생활 몇 년이죠?"

"예에, 일 년이구만요."

"전라도 사람인 게 그리 자랑스러워요?"

"무신 말씸이시다요?"

"징그럽게 쓰는군요, 그 사투리. 창피하지도 않아요?"

양효석은 처음으로 창피함을 느꼈다. 같은 전라도 여자 앞에서.

커피를 가져왔다. 눈을 내리깐 송경희가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양효석도 따라서 했다.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순간 그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눈이 뒤집힐 정도로 뜨거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도로 뱉아낼 수도 없었다. 그냥 꿀떡 넘기고 말았다. 커피가 흘러내리는 대로 목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얼얼했다. 쓰디쓴 맛은 그 다음에 느껴졌다.

"묻겠어요, 송씨하고 양가하고 지체가 같다고 생각하나요?"

송경희는 독기 서린 매서운 눈초리로 양효석을 쏘아보며 물었다.

"아니, 고것이 무신 말씸이요. 요새 겉은 신식 세상에 고런 것이 무신 소양 있소."

양효석은 당황한 속에서도 비위가 뒤틀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눈치 받아와 그의 가슴 한편을 어둡게 적시고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지체가 낮은 쪽일 뿐예요. 분명히 말하겠어요. 앞으론 절대 편지 보내지 마세요. 동생 보기에 창피하고, 나도 기분 나빠요. 이 말 하려고 여길 나온 거예요. 그만 가겠어여."

송경희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꼿꼿하게 걸어 나갔다. 양효석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똥바가지를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송경희가 문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양효석은 벌떡 일어났다. 다 허물어진 가슴에서 불기둥이 솟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양효석은 좌우를 살폈다. 송경희는 시청 쪽을 향하여 한창 유행하고 있는 폭넓은 후레아 원피스를 팔랑거리며 눈부시게 밝은 봄 햇살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요씨, 워디 보자. 쌍놈 좆이 양반 년 보지럴 뚫나, 못 뚫나."

양효석은 침을 내뱉고는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그 매운 삼동 잘 보내고 저 무신 조환지 몰르겄네웨. 무신 늦감기가 저리 찔기고 독허까이."

콩나물시루에서 콩나물을 한 움큼 뽑아내며 들몰댁은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작은아들이 또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들몰댁은 소쿠리를 내던지듯 놓고 아랫목의 작은아들에게로 돌아섰다.

"아가, 아가..."

숨 잦아지도록 기침을 해대는 작은아들을 붙들고 들몰댁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등을 쓸어줄 수도 없었고, 품에 안을 수도 없었고, 터지기 시작한 기침을 멈추게 해줄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기침이 한번 터지기 시작하면 머리가 사타구니 사이에 박힐 지경으로 심해서 작은아들은 하얗게 죽어가고는 했다. 작은 몸뚱이가 당하는 그 괴로움을 지켜보면서 들몰댁은 피가 마르고 있었다. 기침감기에 효험이 좋은 갱엿물을 두 번이나 내서 먹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기침은 떠나가지 않고 오히려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만들려고 콩나물을 뽑고 있던 참이었다.

"야아야, 쩔로 비켜나그라."

간신히 기침을 잡은 작은아들을 품은 들몰댁은 퍼질러 엎드려 무언가를 쓰고 있는 큰아들의 다리를 밀어붙였다. 큰아들이 공부에 정신을 팔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쏟아지는 짜증이었다. 작은아들을 조심스럽게 눕히고 있는 들몰댁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흐려진 눈앞에 문득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은아들 때문에 애가 타는 만큼 외로움이 깊어졌고, 외로움이 깊은 만큼 생각나는 남편이었다.

워디로 쬧겨댕기는고...’

들몰댁은 볼을 작은아들의 볼에 갖다 댔다.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며칠 전에도 또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시달림을 당했다. 소화가 다시 돈을 쥐어줘서 보냈다. 이제 돈맛이 들려 언제 또 올지 모를 일이었다. 소화에게 미안하고 면목 없는 일이었다. 작은아들이 잠이 든 것을 보고 들몰댁은 소쿠리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햇살이 든 마루에 자리 잡고 앉아 콩나물을 다듬기 시작했다. 대가리를 따고 뿌리를 잘랐다. 몸체만이 남게 다듬어 그것들을 놋쇠주발에 넣고, 그 위에 갱엿 덩어리를 놓고 뚜껑을 닫아 따뜻한 아랫목이불 속에 묻어두는 것이다. 네댓 시간이 지나면 갱엿이 녹아내리며 콩나물에 담긴 수분을 다 빨아내 주발 아래는 맑은 갱엿물이 고였다. 수분이 다 빠진 콩나물은 마치 실오라기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그 갱엿물을 서너 시간 간격으로 먹여 하루가 지나면 어지간한 기침감기는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또 엿물을 맨들라고요. 종남이가 지침헌 지 메칠 되얐제라?"

언제 나왔는지 모르게 소화가 옆에 서 있었다.

"긍께, 저어... 닷새 되는 갑만요."

"금세 닷새나. 고것 맹글지 말고 싸게 병원 델꼬 가씨요."

들몰댁은 손을 멈추고 소화를 올려다보았다.

"고것 믹여서 날 병이 아니요. 아가 들어봉께 지침이 너무 심허요."

"지침갖고 병원에넌 무신..."

들몰댁은 돈 생각부터하며 얼버무렸다.

"얼렁 업으씨요. 아그덜헌테넌 지침이 큰병인 것잉께라."

들몰댁은 결국 소화에게 떠밀려 집을 나섰다. 소화는 멀어지는 들몰댁의 뒷모습에서 진한 외로움을 보고 있었다. 언뜻 들몰댁의 모습이 자기 모습으로 바뀌어 보이기도 했다. 지난번에 유산을 하지 않았더라면 들몰댁의 아이 업은 그 외로운 모습은 천상 자신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소화의 눈앞에는 정하섭의 모습이 어렸다. 갈수록 정이 깊어지면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사람. 한 달 동안의 치료를 받고 무사하게 떠날 때가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그 긴장과 초조. 그러나 그분이 다시 떠나버린 지금은 그게 바로 행복이고 보람이었다. 상처가 아물고, 예전의 준수한 얼굴을 되찾으면서 그분이 자신의 몸을 품게 되었을 때, 어디론가 도망쳐 가 살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욕심, 그게 안 되면 산으로 따라 들어가고 싶었던 마음.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몸에 수많은 손자국만 찍어놓고 떠나갔고, 그 손자국이 지워지는 것이 아까워 목욕마저 하기가 싫었다. 그분은 산같이 무겁고 큰 남자였다. 전 원장의 입으로 아버지의 흉사를 알게 되었는데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가실 줄 알았어요."

이 한마디뿐이었다. 산으로 보이는 그분과 살을 맞댄 다는 것이 더욱 황감하게 느껴졌다.

"소화, 난 소화한테 아무것도 줄게 없군. 소화의 고생이 너무 컸는데."

그분이 떠나기 전날 밤 한 말이었다. 마음을 주셨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마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차마 소리 내 말하지 못하고 그 분의 넓은 가슴 한 귀퉁이를 눈물로 적실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그리도 과분하게 말했지만 정작 고생을 한 사람은 전 원장이었다. 전 원장은 마치 산보를 하는 것 같은 차림을 하고 찾아오고는 했다. 그래도 눈이 무서워 매일 올수 없는 그분은 간호원을 보내기도 했다. 작년에 그 고생을 겪었으면서도 치료를 마다지 않고 또 위험을 무릅쓰는 전 원장과 간호원을 대하며 사람 사는 뜻의 소중함을 새롭게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날마다 망을 보느라고 들몰댁도 고생깨나 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고, 언제 오겠다는 말없이 그분을 어둠이 되어 어둠 속으로 떠나갔다. 소화는 고무신을 신었다. 하면 할수록 빨려드는 그분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길남이하고 이야기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약간 우울한 듯 하면서도 가끔 엉뚱한 것을 묻기도 하는 길남이는 만만찮은 이야기 상대였다.

"길남아, 머 허냐."

기척이 없었다.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길남이는 손가락에 연필을 낀 채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자신을 그윽하게 쳐다보고는 하는 평소의 눈처럼 잠든 얼굴도 착하다고 생각하며 문을 닫으려다가 소화는 멈칫했다. 눈자위가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고개를 디밀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운 흔적이 분명했다. 소화는 머리맡에 펼쳐진 공책에 이끌리듯 방으로 들어섰다. 살금살금 걸어 공책 옆에 쪼그려 앉았다.

글짓기. 우리 아버지. 4학년 119번 하길남.

나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아주 오래오래 식구들하고 같이 살지 않아서 그럽니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잘 모릅니다. 어떤 때는 똑똑하게 생각나다가도 어떤 때는 영 생각이 안 나기도 합니다. 동생 종남이는 더 그럴 것입니다. 아버지하고 왜 떨어져 사는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비밀입니다.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같이 살고 싶습니다. 동생 종남이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엄니한테 그런 말을 죽어도 하지 않습니다. 동생이 그런 말을 했다가 엄니가 운 일이 있습니다. 동생은 나한테 반 죽게 맞은 담부터 그런 말은 죽어도 안하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썰매를 탄다고 겨울을 좋아합니다. 그런다고 동생을 때릴 수는 없습니다. 동생도 더 나이 먹으면 나처럼 겨울을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겨울이 되면 아버지가 더 보고 싶고, 더 걱정됩니다. 엄니도 한숨을 더 자주 쉽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순사입니다. 제일 미운 것도 순사입니다. (이 대목은 두 줄을 그어 지워놓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라는 글짓기가 싫습니다. 쓸 것은 많아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납니다. 엄니가 불쌍하고 동생이 불쌍하고 나도 불쌍

글짓기는 여기서 중단되었고, 공책에는 눈물방울 떨어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곧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소화는 입술을 안으로 끌어당겨 위아랫니로 꼬옥 물며 손등으로 눈을 차례로 눌렀다. 길남이의 우울한 기색이 아버지 탓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속에 그런 어른스런 생각을 감추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소화는 눈물 젖은 눈으로 잠든 길남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만히 끌어안았다.

 

하대치는 징광산으로 이동하기 위해 조계산 줄기를 뒤로 등지고 외서면이 내려다보이는 비트에서 안창민과 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성책 오판돌과 보성책 이해룡을 만나 보급 사업을 일으키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 무신 소리 들리제라?"

하대치가 오른쪽 귀에다가 손바닥을 오그려 붙이며 주의를 밖으로 모았다. 안창민도 안경을 밀어 올리며 눈에 힘이 모아졌다.

"비행기 소리 같소."

안창민이 먼저 말했다.

"그렁마요. 넋 빠진 자석덜이 잊어뿔만 헝께 또 삐라 뿌리로 오는구만이라."

"그럴 거요. 국회의원 선거가 눈앞으로 다가왔으니 자꾸 뿌려대야겠지요."

"빌어묵을 눔덜, 삐라 보고 산 내레갈 사람 워디 있다고 돈지랄 에진 간히 허고 자빠졌네."

하대치가 쓴 얼굴로 등을 기댔다. 비행기 소리는 한결 뚜렷하게 들렸다.

"저게 꼭 귀순시키기 위해서만 뿌려지는 게 아닐 거요."

"허먼, 무신 딴 뜻이 또 있소?"

"저자들은 우리가 대체 산 속에 있나, 없나를 알아내고 싶어 하는 거요. 우리가 직접대응을 피한 뒤로 우리의 남은 수가 얼마인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거든요. 다 죽어 없어졌다고 생각하자니 불안하고, 얼마가 살아 있는지 모르니 답답하고, 그런 거지요."

하대치는 길지도 못한 고개를 빼듯해서 끄덕거렸다. 그는 다시 안창민의 말을 새겨듣고 있었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안창민의 생각 깊은 말을 소홀하게 들어 넘기지 않았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유심히 듣고 되짚어 따져보고는 했다. 자신도 안창민처럼 남보다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 남다르게 어떤 일에 감추어진 뜻을 찾아내고, 그래서 세상 전부가 돌아가는 판세를 상하좌우로 환하게 내다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싶었다.

비행기는 바로 머리 위를 날고 있는 것처럼 그 소리가 요란했다. 안창민은 일어나 비트를 위장한 갈대 사이를 약간 헤쳤다. 비행기는 어느 쪽을 날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약간 더 시야를 넓혔다. 왼쪽 산줄기를 따라 날고 있는 비행기의 옆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비행기의 몸통 뒷부분에 찍힌 눈에 익은 표지도 보였다. 미국 비행기라는 표시였다. 저것들이 왜 우리 하늘을 제멋대로 날아다니는가. 비행기만 보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안창민은 또 했다. 제주도의 하늘을, 여수, 순천의 하늘을 저런 식으로 멋대로 날아다니며 저것들은 무차별로 폭탄을 투하했다. 자주적 생존을 찾으려는 인민들을 학살하고 저희들의 썩은 자본주의를 세우기 위해. 안창민은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비행기에 증오에 찬 눈길을 박고 있었다. 비행기는 산줄기를 따라 낮게 날며 일정한 간격으로 수많은 종이쪽을 토해내고 있었다. 높낮이가 제각각 다른 종이쪽들이 석양빛을 받아 해뜩거리며 봄기운 무르익은 산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계엄령이 해제 되면서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한 비행기는 언제나 지리산 쪽에서 넘어와 지리산 쪽으로 넘어갔다. 삐라에는, 전향하면 일체의 전과를 묻지 않고 용서할 것이니 어서 산을 내려와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 부모형제와 처자식과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빨치산을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암행 중에 줍게 되는 삐라로 담배를 말아 피우거나, 뒷닦개 종이로 유용하게 쓸 뿐이었다. 비행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야 안창민은 자리에 앉았다.

"계엄이 풀렸는디도 워째 군인덜언 그대로 있을께라? 선거가 남었응께 그러는 것 아닐랑가요? 재작년 선거 때 맹키로 우리헌테 방해 당헐까 무서바서 말이어라."

하대치는 조심스럽게 자기의 의견을 덧붙였다.

", 정확하게 보신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군대를 그대로 주둔시킬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안창민의 전적인 수긍에 하대치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자기 판단의 옳음을 확인하는 기쁨이었다. 아까도 마음으로는 계엄령 '해제'라고 말하고 싶은데 결국 입으로 나온 것은 '풀렸다'였다. 무산자 대중, 혁명적 정열, 역사의 현 단계, 영웅적 투쟁, 전사의 순결, 혁명의 복무, 역사의 주역, 이데올로기 투쟁, 민족적 자주, 계급의 모순 같은 유식한 말들이 마음속에서는 들끓으면서도 막상 말로는 쉽게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그 뜻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염상진 대장이나 안창민 선생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보란 듯이 그런 말들을 써보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는 말이 떠올라 입이 얼어붙고는 했다.

"요분 선거에서는 투쟁 사업얼 못 벌이겄제라?"

"그렇겠지요. 지금은 적극 투쟁단계가 아니라 조직의 보호 육성단계니까요."

"눈 잠 붙이시씨요. 나가 지킬 것잉께요."

하대치는 바깥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들의 옷은 때가 낄 대로 끼고, 해질 대로 해져 있었다. 얼굴도 옷만큼 지저분하고 말라 있었다. 벌써 몇 개월째 하루 두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아낸 것이다. 그러나 눈들은 맑고 깨끗하게 형형한 빛으로 살아 있었다.

 

읍내에서는 벌써 선거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큰길에는 후보자들의 현수막이 가로걸이로 내걸렸고, 각 동네의 토담 벽에까지 후보자들의 사진을 박은 선전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입후보자들은 자그마치 여섯이었다. 그중에 무소속은 셋이었다. 국회의원 최익승은 세무서 옆에 선거사무실을 차려놓고 이십여 일 남은 선거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내려오자마자 서민영을 찾아갔다.

"서 선생, 어떻게, 딱 한 번만 찬조연설을 해주시오. 내 그 은혜 평생 안 잊겠소."

최익승은 머리를 조아리듯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민영은 눈을 내리깐 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꼭 좀 부탁합니다. 이거 얼마 안 되는데, 야학에 기부하는 거요."

최익승이 한지에 싼 것을 내밀었다.

"가져가시오. 우리 야학은 돈이 모자라지 않소."

무겁고도 찬 서민영의 말이었다.

"어디 두고 봅시다. 이 세상이 혼자서만 살아지나."

최익승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내뱉았다.

최익승은 초장부터 속이 뒤집혀 있었다. 일진이 더러웠든지 어쨌는지 기호 제비뽑기에서 하필이면 '4'이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못내 바랐던 것은 지난번과 같은 '2'이었다. 그것은 당선을 안겨다준 행운의 번호였을 뿐만 아니라 눈도 둘이요, 귀도 둘이요, 손도둘이요, 기호는 둘 최익승... 하는 노래 식 선전문구가 유권자들의 귀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걸 그대로 이용하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그는 재수 없고 불길한 생각으로 뒤집어진 속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런 기분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운동원들의 사기나 경쟁자들의 입질 등, 긁어 부스럼이 될 따름이었다. 넉 사야, 넉 사! 그는 아무래도 개운해지지 않는 기분을 청소하기라도 하듯 매일 아침 잠이 깨면 속으로 외치고는 했다. 그런데 그 외침에는 생략된 말이 있었다. 그것이 제대로 아귀가 맞으려면, 죽을 사가 아니라 넉 사야, 넉 사! 가되어야 하는데 그는 그놈의 '죽을 사'라는 말은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해 '넉 사'만을 외쳐댔던 것이다. 그런데 최익승의 고민은 또 한 가지가 있었다. '4' 기호를 가지고는 '2' 때처럼 사람들의 귀에 쏙쏙 박히는 쉽고 그럴 듯한 선전 문구를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 좀 돌아간다 하는 고급 참모들에게 지난번과 같은 선전 문구를 빨리 지어내라고 닦달을 놓았지만 날만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팔다리는 넷이요, 돼지 다리도 넷이요, 개다리도 넷이요, 소다리도 넷이요, 책상다리도 넷이라, 기호는 넷 최익승, 어쩌고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놈의 것이 전부 아랫도리인데다가, 천한 짐승들이 태반이었다. 아무리 형편이 급하다 해도 자신의 이름 앞에 그런 것들을 끌어다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것들처럼 자신이 천해지는 기분이었다.

 

몸도 다 회복이 되었겠다, 제철을 만난 염상구는 물론 최익승의 편으로 신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섯 명이나 난립한 상황은 그의 주기를 십분 높여주었다. 그는 또한 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도 알았다.

"하먼이라, 지가 의원님 각하럴 위해 일 안허고 누구럴 의해 일허겄는가요. 지가 발 벗고 나섰다 허먼 우리 아그덜 싹 다 발동 걸어서 싹수머리 웂이 나대는 딴 후보 운동원덜부텀 쳐웂애고, 멋 떨어지게 헐 수는 있는디, 근디..."

"근디?"

최익승이 눈을 키웠다.

"청년단장이 아니라 감찰부장이라논께 체면이 영..."

", 그건 염려 말아. 내가 당장 뜯어고치게 할 거니께."

"그리 혀주시먼 백골난망이고 분골쇄신허겄구만요."

염상구는 이제 막힘없이 말했다.

"쪼오아, 쪼아."

최익승이 만족스럽게 웃어 제쳤다.

"근디 보성 아그덜꺼정 다 싸잡아서 맘대로 휘둘르자먼 고것이..."

", 알았어. 기름이 있어야 차가가고, 석탄이 있어야 기차가 가지."

그래서 염상구는 잃었던 청년단장 자리를 되찾았고, 거금을 받아 반을 뚝 잘라서 챙겨 넣었던 것이다.

 

벌교, 보성의 오일장은 대목장보다 더 흥청거렸다. 여기저기서 신나는 먹자판이 벌어졌다. 후보마다 술판을 벌여놓았던 것이고, 투표권을 가진 남자라는 남자는 다 장터로 몰려나와 아무 데서나 맘껏 술을 마셔댔다.

"주는 술잉께 묵고보드라고."

"하먼, 돈 많은 눔덜이 즈그 좋아서 돈 쓰겄다는디 쓰게 혀줘야제."

"그렇제, 우리가 술 안 묵어주먼 돈 못 쓰게 혔다고 원수 살라고?"

남자들은 이 자리에서 마시고 곤드레가 되고, 장터를 떠날 때는 거의가 취할 대로 취해 있었다. 서너네댓씩 몰려 집으로 돌아가며 그들은 장터에서 감추었던 속을 비로소 털어놓기 시작했다.

", 호로자석덜, 애국자 아닌 눔은 하나또 웂데."

", 농민 안 위허는 눔은 워디 있고?"

"다 좆이나 빨 씨벌눔덜이여. 전분에 입 달린 새끼덜이 다 머시라고 떠벌렸어. 토지는 싹 다 농민헌테 준다, 농민언 나라의 쥔이다, 허고 떠든 눔덜이 그눔덜이여. 근디 농지개혁은 워치케 혔냐 그것이여, 개잡녀러 새끼덜."

"긍께 말이여. 그럼시로 또 농민얼 위허겄는디, 순 도적눔덜이제 머시여."

"술 얻어묵고 요런 소리 허기넌 안되얐다마넌. 찍어줄 눔 하나또 웂드라."

"말 그리 빙신맹키로 허덜 말어. 술 얻어묵고 안되얐다니 안 되기넌 머시가 안 되야. 우리넌 술얼 얻어묵은 것이 아니라 우리 술 찾아묵은 것이여. 그눔덜이 지닌 돈이 다 머시여. 불쌍헌 우리 피뽈고 등까죽 벳게서 모은 것이다 그것이여. 후보자 중에 당당허니 돈 번 눔이 있으먼 대부야. 싹 다 지주 아니먼 지주네 새끼덜이 아니냔 말여. 술언 묵었어도 정신언 똑똑허니 채려, 또 당허기 전에."

"어허이, 그 말 한분 쌈빡허니 잘혔네. 하먼, 우리 술 우리가 찾아묵은 것이제."

"그나저나 최익승이럴 으째야 쓰까?"

"으쩌기넌으째. 요분에 야물딱지게 원수 갚음 혀야제. 그눔이고 한민당이고 우리 원순께."

"하먼, 요분에 워디서나 우리 농민덜이 빙신이 아니란 걸 갤차줘야 허네."

", 공자님 말씸이시. 최익승이가 요분참에 당선되기넌 애시당초 글러묵었네. 그 기호럴 보소, 기호."

"그 뒤질 사짜? 하먼, 기호맹키로 칵 뒤져야제."

"고것이 다 하늘이 미리미리 알어서 정헌 것이시."

"최익승이 그눔언 참말로 양심이 터럭 끝맨치도 웂은 개자석이여. 우리 쉑인 것도 머시헌디, 그것도 모지래서 국회의원 권세 갖고 술도가 맹근 것 보드라고. 고것이 워디 사람이여!"

어느 후보가 집집마다 고무신을 돌리면, 다른 후보가 질세라 빨랫비누를 돌리고, 뒤따라 또 다른 후보가 세수수건을 돌려댔다. 술 인심만큼 후한 것이 담배인심이었고, 거렁뱅이들도 한 바탕 호시절을 맞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살판이 난 것은 작년 늦가을부터 소개를 당했던 산골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뇌물공세가 집중된 것이다. 겨울을 움막에서 난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지꼴이었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추위에 아이를 얼어 죽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벌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아이를 굶겨 죽인 사람도 있었고, 해동이 되면서 그들이 끼니때에 맞춰 쪽박을 들고 읍내 안통으로 몰려든 것은 거의가 아는 일이었다. 그런데 술판도 벌이지 않고, 물건도 돌리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기호 '3'인 무소속의 안창배였다. 입후보자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젊은 그는 낙안벌의 안씨 문중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안창민과 같은 항렬인 그는 광주에서 변호사를 하다가 이번에 고향을 찾아내려와 출마를 한 것이다. 그도 물론 지주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재산은 오백 석 정도라서 큰기침하는 지주 축에 들 수가 없었다. 낫에 찔려 죽기 직전에 정현동이 소작인들 앞에서 손가락 끝으로 넓은 네모를 당당하게 그려 보이며 "봉림리 안씨, 회정리 박씨헌테 이백 말뚝을 사딜였다"고 한 봉림리 안씨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사는 그는 농지개혁을 앞두고 자기 아버지가 그런 거래를 했는지 몰랐고, 그 여파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은 더구나 모르고 있었다. 출마를 결정하고 나서 벌교에 내려와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 일로 출마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이 자기에게 미칠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그는 직접 나서서 조사했다. 그 동네사람들은 죽은 정현동만 욕해댈 뿐 자기 아버지나 또 다른 지주 박씨에 대해서는 별다를 관심이 없었다. 지주들이 너무 잘못을 저질러 자기 아버지의 잘못 정도는 덮어지는 것인지, 농지를 분배받아 사람들은 그 일을 잊어버린 것인지, 그는 변호사다운 분석력을 동원했지만 속 시원한 까닭을 찾아낼 수 없었다. 소화의 굿판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고 있는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큰 다행으로 여기고 선거운동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가 유권자들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워 누구나 두세 번 낙방은 예사로 하는 법관시험을 한 번으로 합격했다는 것이고, 검사생활 일 년 만에 변호사로 돌아서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새 나라의 정치를 바르게 하려면 때 묻지 않은 새 사람을 국회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머리 좋다는 것은 어린애들 같은 촌스러움이고, 친일행위를 하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투쟁적인 변호사 노릇을 한 것은 아니었고, 새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장유유서의 인습사회에서 젊다는 것이 약점이라는 것까지 그는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새 사람'을 자칭한 이상 술판을 벌이거나 선물공세를 할 수가 없었고, 다섯 명의 경쟁자들 행위를 역공세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만회하는 작전을 쓰고 있었다. 그는 운동원들에게 그저 '기호 3번 새 일꾼 안창배'만을 외고 다니게 하는 한편 자신은 젊은 기운을 쏟아 동네마다 집집마다 한 집도 빼놓지 않고 찾아다녔다. 깊이 인사했고, 손을 잡았다. 그리고 주는 건 무엇이고 다 받아쓰고 받아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찍을 때만은 진짜 깨끗한 사람, 일할 사람을 찍으라고 했다. 그래야만 받아먹고 받아쓴 것이 잘못이 안 되는 거라고 역설했다. 술판도 벌이지 않고, 선물도 돌리지 않는 그는 분명 다른 후보들에 비해 이색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고비에서 역시 판세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현역인 최익승이었다. 안창배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출마할 때 꼭 당선되리라는 생각은 없었다. 다음을 위한 연습이라는 생각이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뛰어들고 보니 날이 갈수록 승부욕은 커져 연습이라는 생각을 잡아 먹어갔다. 승부욕은 꼭 당선되어야 한다는 욕심으로 바뀌었고, 그 욕심은 또 강박감으로 바뀌어 그를 괴롭혔다.

질 때 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보고 져얄 것 아니냐, 서민영 선생을 찾아가라, 어서 찾아가!’

강박감은 그를 떠밀어댔다. 그는 고민 고민하다가 마침내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선생님,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서민영의 성질을 아는 까닭에 안창배는 여러 말 앞뒤에 붙이지 않고 솔직하게 필요한 말만 했다.

"자네 소식 듣고 있네. 정치로 나서다니, 어쩌려고?"

서민영의 느리고 낮은 말이었다.

"변호사로 돌아설 때와 같은 심정입니다."

서민영의 눈길이 서서히 안창배에게로 옮겨졌다. 안창배는 포박당하는 느낌으로 무릎 위에 올린 주먹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검사의 괴로움을 토로해왔을 때, 조선 사람으로 괴로운 건 당연한 것이고, 괴로움을 느꼈으면 돌아서게, 했던 자신의 말과, 지체 없이 결행을 했던 청년 안창배를 서민영은 떠올리고 있었다.

"정치에 자신이 있는가?"

"없습니다."

"헌데 무얼 어쩌려고?"

"제 몫만이라도 지켜볼 작정입니다."

독서모임에서와 야학을 돕던 안창배를 기억 속에서 더듬으며 서민영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최익승을 이기기 어렵겠나?"

"그런 느낌이 듭니다."

"내가 어찌 도우라는 것인가?"

"제가 어찌 그것까지..."

서민영은 고개를 숙였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래, 한몫만 제대로 해내도 큰 힘이지. 이런 타락, 협잡선거에서 올바른 방법으로 이기는 것부터가 그 일을 하는 것이지. 기왕 나서는 김에 내가 자네 찬조연설을 하지."

"선생님!"

안창배는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으며 허리를 꺾었다.

"내가 연락을 해둘 테니 병원 전 원장님을 찾아뵙게."

"예에..."

선거전 양상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뒤집히기 시작했다. 사람들 입에서 기호3번이 빈번하게 오르내렸고, 반대로 아이들 입에서까지 '죽을 사 최익승, 뒤질 사 최익승'이란 말이 가락을 맞추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폭력사태가 일어난 것은 그 즈음부터였다. 김종연이 술기운에 입바른 소리를 해대다가 서너 명에게 둘러싸여 매타작을 당해 이빨이 두 개나 부러져나갔다. 마삼수도 최익승의 험담을 늘어놓은 다음날 끌려 나가 몰매를 맞고 논바닥에 처박혔다. 자애병원 전 원장은 하루에도 열 번이 넘게 전화로 공갈협박을 당했다. 그럴수록 전 원장은 환자들을 상대로 선거운동에 열을 올렸다. 그런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민심이 돌아서고 있는 속에서 최익승은 돈을 그야말로 물 쓰듯이 하고 있었다. 돈으로 표를 사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런 치열한 대결의 닷새가 지나고 마침내 오월 삼십일이 다가왔다. 제이대 국회의원 선거 날이었다. 투표가 실시되는 두 국민학교 운동장까지 막걸리 통이 즐비했다. 남자들은 너나없이 막걸리를 서너 사발씩 들이켰고, 어김없이 '기호 넷 최익승'이란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투표장으로 들어갔다. 그 술판은 투표가 끝나는 해질녘까지 계속되었다. 아침부터 다른 후보들의 항의가 강력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투표장의 분위기로 보아 최익승의 재선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개표가 군청에서 시작되었다. 초반부터 안창배와 최익승의 싸움으로 판도가 드러났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표는 열 시가 넘으면서부터 안창배 쪽으로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 두 시에 완료된 개표결과는 안창배의 당선이었다. 천이백 표의 차이였다. 안창배는 압승을 한 것이고, 최익승은 참패를 한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 소식이 읍내 전체에 퍼지자 읍민들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목소리 높여 최익승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그러기는 보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다 선생님의 덕이었습니다."

안창배가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소린가, 민심의 심판일세."

서민영은 지그시 웃음 짓고 있었다.

신문들은 전국의 선거결과를 보도했다. 먼저 돌출시킨 것이 여당인 대한국민당의 참패였다. 국민당은, 대통령이 되고나서 한민당에 등을 돌려버린 이승만을 옹립하며 결성된 의석 칠십 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여당이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겨우 스물두 명의 당선자를 냈을 뿐이다. 그 다음으로 주목을 끄는 것이 한민당계였다. 절대다수 대중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가운데 이승만한테까지 버림을 받게 된 한민당은 궁여지책으로 민주국민당으로 변신을 꾀했다. 그런데 선거결과는 고작 스물세 명의 당선이었다. 거기에 맞서서 무소속의 당선자는 자그마치 백스물여섯 명이나 되었다. 선거결과는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과 친일지주 중심인 한민당 계열의 배척을 분명하고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이변은 벌교, 보성지구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국에 걸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변이아니라 서민영의 말마따나 '민심의 심판'이었다.

 

 

10. ,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손승호가 경찰에 끌려갔다. 그리고 그가 근무하던 출판사가 문을 닫았다. 사상적으로 불온한 서적을 출판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김범우는 면회를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단 '사상'에 관계되는 한 경찰의 통제와 폐쇄는 철저했다. 그리고 경찰은 기자라는 존재를 '주의자'만큼이나 적대하고 꺼렸다. 담당형사를 아무리 회유하려 했지만 손승호의 면회는 가망이 없었다. 담당형사의 태도는 사무적인 책임감 때문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으로도 주의자들을 사람 취급할 수 없다는 뜻이 확고했다. 경찰 거의가 품고 있는 그런 감정은 이북체제에서 친일경력의 경찰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맥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기는 대부분의 군인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면회할 길이 막혀버린 김범우는 막연한 기분으로 자신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대문구치소 미결감으로 넘겨진 이학송의 면회도 안 되고, 그 길을 뚫을 만한 사람이 자신의 주위에서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김범우가 궁색하게 생각해낸 사람은 서울신문의 민기홍이었다. 그가 사회부 기자니까 혹시 선이 닿는 형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 형의 면횔 두어 번 시도했었지만 실패였소."

민기홍이 고개를 저었다. 그 쓴웃음이 어린 얼굴을 바라본 채 김범우는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반공세력화한 막강한 경찰력과 사상범죄가 그 어떤 범죄보다 혹독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다시 실감 할뿐이었다.

"손승호 씨가 어떤 조직에 가담해서 활동한 것이 아니고 출판사 직원으로 잡혀 들어간 것이면 그다지 염려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소? 다 검열 받을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출판물이 불온하면 얼마나 불온하겠소. 경찰들의 건수 올리기 과잉 단속일 테지요."

"글쎄요. 경찰들의 행위야 그렇지만 일단 사상적으로 혐의를 받은 이상 경찰에서 두들기기부터 할 것이고, 어떤 사건이라도 조작해서 얽어 넣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김범우는, 이학송의 소개로 손승호가 그 출판사에 취직한 것이 혹시 문제가 될지도 모르지 않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너무 비약인 것 같고, 또 민기홍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도 아닐 듯싶기도 했던 것이다. 민기홍은 사회부 기자를 하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현상에 대해서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 밖에서 바라보고, 그리고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냉담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비웃는 것도 같고, 무시하는 것도 같은 미묘한 그의 코웃음은 사색적인 얼굴과 함께 그런 인상을 더 진하게 했다.

"그야 뻔한 일 아니겠소. 그자들이야 다시 일정시대 같은 권력을 확보하는 게 목적이니까요."

"도대체 이놈의 세상을 어찌 해야 좋을지, 환멸스러워 살 수가 없는 노릇이군요."

"글쎄요, 일말의 양심을 가진 지식인치고 해방이후의 현실에 대해 환멸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환멸은 환멸일 뿐이지 무슨 방도가 되겠소? 김 형이나 나나, 뭘 좀 배우고 생각할 줄 안다는 식자층들은 현실 속에서 이미 허수아비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이분론적 선택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식인들이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소. 혼자 고민해봤자 공염불이고, 서넛이 모여 앉아 고민 해봐도 공염불이오. 양심상 현실세력에 가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항하자니 좌익으로 몰아치는 정치적 올가미가 목을 낚아채고, 이런 상황 속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식인적 고민은 할 필요가 없소.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대중의 한 존재로서 현실을 올바로 지켜보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요."

민기홍은 가운데 손가락으로 안경의 코걸이를 밀어 올리며 김범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대중의 앞에 서지 못할 바에는 대중의 삶이나 제대로 살라는 뜻인가요?"

", 꼭 그런 뜻이라기보다...내 생각으로는 이놈의 세상이 달라지는 데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을 것 같소. 그게 뭔가 하면, 기왕 썩은 세상이니까 한 이삼 년 더 푹푹 썩게 내버려두는 거요. 권력이 썩을 대로 썩다보면 제물에 무너지게 될 거고, 그러는 동안에 대중들의 불만과 썩다보면 제물에 무너지게 될 거고, 그러는 동안에 대중들의 불만과 불신은 쌓일 대로 쌓여 폭발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세상이 뒤집어질 것 아니겠소. 종기야 곪을 대로 곪아야 뿌리가 빠지는 법이니까요."

"글쎄요, 그게 이삼 년이 아니라 이삼십 년이 걸리면 어찌 됩니까?"

"글세,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돌아가는 형편으로 보아 이런 식의 권력의 횡포와 부패를 대중들이 그렇게 오래 참으리라 생각되진 않소."

민기홍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경찰력으로 대표되는 안하무인격인 권력의 횡포는 갈수록 대중들의 원성의 대상이었고,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각종 관공서의 부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민기홍의 말은 막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또 틀린 말도 아니었다. 권력지배층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고조되면서 광범위하게 일체감을 이루게 되고, 그러면서 권력이 부패하고 타락해서 자체 균형을 상실하게 되면, 그건 사회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계기가 되는 셈이었다. 역사의 많은 사례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기홍이 그 시기를 이삼 년으로 점치고 있는 것에 대해 김범우는 다소 놀라움과 함께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예감이나 예견이 꼭 객관적 구체성을 띠는 것 아니라 하더라도 그 나름의 근거는 있게 마련이었다. 민기홍은 사회부 기자였고, 그 나름의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가 흘린 묘한 웃음은 어떤 자신감의 표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삼 년이라고 한 데는 무슨 근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김범우는 신중하게 물었다.

"있소,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요."

민기홍의 어조는 확신에 차 있었고, 김범우는 선거결과를 한순간에 떠올렸다.

"그 선거 결과가 현 정권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놀랄 만한 결과였던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김 형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지난번 선거가 이성적 대중혁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선거 결과는 대중들이 얼마나 제대로 된 정치를 원하고 있는가를 표현한 것임과 동시에 현 정권에 보내는 마지막 경고인 것이오. 현 정권이 그 민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각성하지 못할 때 대중들은 어떻게 하겠소. 그때는 행동적 대중혁명을 일으키는 일밖에 남지 않았소. 권력의 횡포와 부패가 시정되지 않고 이런 식으로 계속되었다간 대중들은 다음 선거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오. 여당이나 한민당 계열의 공공연한 금품매수를 물리치고 선거 결과가 그렇게도 의외였던 것은 그만큼 대중들의 정치의식이 높고, 정치욕구가 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소. 그런 대중들은 정치인들의 타락이나 권력의 배신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해결도 되지 않을 쓸데없는 지식인적 고민 집어치우고 대중의 한 사람으로 정신이나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다가 그런 시기가 닥치면 행동이나 제대로 하라는 민기홍의 생략된 말을 김범우는 찾아내고 있었다.

"민 선배님 말씀에 수긍이 갑니다."

"하여튼 고민스런 세상인 건 틀림없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 또한 틀림없는 것 아니겠소. 이 형이나 손승호 씨 문제도 다 그 테두리 안에서 야기되는 권력의 폭력이오. 나로서도 당장 어쩔 수가 없으니 좀 두고 봅시다."

민기홍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바쁘실 텐데 이거 시간을 너무 지체했습니다."

김범우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피차일반인 직업 아뇨."

민기홍이 웃음 지으며 일어섰다. 김범우는 그 웃음에 왠지 적막함을 느꼈다.

 

멍이 든 손승호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어제 취조를 받으면서 양쪽 볼을 어찌나 얻어맞았던지 밤을 새고 나니 코가 없어질 정도로 얼굴이 부어오른 것이다.

"밤새 잘 생각했겠지? 오늘은 바른 대로 대. 느네 사장 남로당 직책이 뭐야."

형사는 나직하지만 질긴 목소리를 물었다.

"어제 말한 대로, 모릅니다."

손승호는 눈길은 떨어뜨린 채 대답했다.

"이쌔애에끼! 뒈지고 싶어!"

형사가 책상을 내려침과 동시에 소리를 질러댔다. 손승호는 이를 악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또 볼을 칠까봐 일어난 반사작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음을 삼키며 맞물었던 어금니를 떼어버렸다. 뺨을 너무 맞아 이뿌리가 모두 들떴는지 갑자기 솟는 시고 아린 통증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 볼 다 터지고, 이빨 다 빠지기 전에 순순히 불어. 느네 사장 남로당 직책이 뭐였어."

"정말 모릅..."

"개애새끼!"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형사의 손바닥이 손승호의 왼쪽 볼을 후려쳤다. 눈에 불이 번쩍 일며 비명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러나 비명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도록 손승호는 주먹을 부르쥐며 참아냈다. 어제부터 꼭 따귀만을 때리는 형사 놈에게 첫 번부터 비명을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볼에 느껴지는 통증은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어제는 타격이 가해지는 순간의 아픔이 지나면 얼얼하고 화끈거리는 통증이 남았는데, 오늘은 타격 당하는 순간의 아픔도 어제보다 훨씬 심할 뿐 아니라 뒤에 남는 통증도 쏙쏙 아리고 속살을 후벼 파는 것이 견디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 새끼, 그럼 네놈 직책은 뭐였어!"

"직원일 뿐..."

"닥쳐!"

이번에는 오른쪽 볼에 주먹이 날아왔다. 손승호는 코로 신음을 흘리며 손바닥으로 볼을 감쌌다. 어제부터 형사는 오른손으로 손승호의 왼쪽 볼을, 왼쪽 주먹으로 오른쪽 볼을 번갈아가며 후려치고, 갈겨대고 했다. 그래서 주먹으로 맞은 손승호의 오른쪽 볼에는 멍이 더 많이 잡혀 있었다. 저 죽일 놈이 어쩌자고 얼굴만 이리 때리는 것인가. 이놈아, 차라리 몽둥이질을 해라. 손승호는 통증과 함께 끓어오르는 모욕감으로 가슴이 푸들거리는 증오에 떨고 있었다.

"이 새끼, 엄살 떨지 말고 똑바로 앉어. 빨갱이 새끼들이 아무리 독하다 해도 우리 손에 안 잡혔을 때나 통하는 얘기지 일단 우리 손에 잡힌 이상 그 독기 안 꺾이는 놈들 하나도 없어. 느네 놈들 독기 빼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어. 골병 다 들고 나서 불지 말고 피차에 좋게 어서 불어. 남로당 직책이 뭐야."

"..."

손승호는 더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 새끼,내 말 안 들려!"

형사가 벌떡 일어서며 손승호의 왼쪽 뺨을 후려갈겼다.

"어크으으으..."

손승호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며 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책상 위로 피가 뚝 뚝 뚝 떨어져 내렸다. 그 선연하게 새빨간 핏방울들의 떨어져 내림을 손승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너 같은 친일파 놈에게 내가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너 같은 민족반역자들이 이 땅에 도대체 몇이냐. 내가 이렇게 견딜 수 없을 때,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네놈들한테 이런 꼴을 당한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이게 무슨 나라냐.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마자 너 같은 놈 하나를 죽이고 나도 죽었더라면 얼마나 의미 있는 죽음이었을 것이냐. 너 같은 종자들이 백오십만,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백오십만 이라면 이 땅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냐. 네놈을 죽일 무기만 있다면 네놈을 당장 죽이고 나도 죽고 말겠다, 정말이지 죽고 말겠다.’

"이 새끼, 고개 쳐들고 코 막어!"

형사가 손승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고개를 뒤로 제쳤다. 그리고 손승호의 손에 솜뭉치를 쥐어주었다.

‘'친일문학과 민족정신의 훼손'이란 책이 어쨌단 말이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잘 쓴 내용의 책인데, 네놈들이 빨갱이 짓으로 몰아친단 말이냐. 이거야말로 친일파 놈들이 작당해서 꾸며대는 가당찮은 연극이다. 각계각층에 도사리고 있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은 저희 놈들을 서로서로 보호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작당을 하고 있는 것이다. , 편집을 하고 교정을 보았을 뿐인 나를 이렇게 다룰 때 정작 필자와 사장은 어떻게 다루고 있을 것인가. 그들은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나보다 나이가 아래였던 필자 신기식, 그는 원고를 쓸 때 이런 수난이 닥칠 것을 예상했고, 각오했던 것일까. 책으로 남겨질 이유가 분명한 그 내용과, 나보다 나이 적은 사람이 그런 막중한 일을 해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얼마나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느꼈던가. 신기식이여, 당신이 해낸 그 장한 일에 비하면 이까짓 수난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마땅히 칭송을 받아야 될 일을 해놓고도 정작 범죄 당사자들 손에 이런 꼴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지만 현실이 이럴수록 그런 책은 더 필요한 것 아니겠소. 견디시오, 꿋꿋하게 견디시오. 나도 당신의 책을 만든 보람만으로 이 수모와 분함을 견딜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손승호는 건건하고 비릿한 피를 자꾸 목으로 넘기며 신기식이 해낸 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요런 시건방진 새끼, 친일파가 느네 할애비를 죽였냐, 애비를 죽였냐, 어디다 대고 시비냐 시비가. 내가 친일을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다, 내 한 몸 버려 민족과 나라에 다소나마 이익이 될 수 있다면 나를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나선 것이다. 이런 유명한 이광수 선생의 말씀을 니놈은 듣지도 못했어! 바로 그런 애국자들을 친일파다, 민족반역자다, 하고 물어뜯는 놈들은 다 빨갱이새끼들이야. 너 이 새끼, 코피 그칠 동안에 자백할 생각이나 해둬."

형사가 손승호의 머리를 쥐어박고 돌아섰다.

 

가지가지 봄꽃들이 시새움하듯 제각기 맘껏 꽃피움 했다가 시나브로 시나브로 시든 꽃잎들을 떨어뜨리면서 파릇파릇 새 잎들을 피워내며 봄을 떠나보내고 유월이 시작되면 들녘의 춘기는 여름을 알리면서 봇도랑 온기 품은 물속에는 배불뚝이 올챙이들이 하나뿐인 꼬리를 부산스레 흔들어대며 용케도 헤엄질을 치고 있었다. 갓 깨어난 병아리들이 노오란 주둥이들을 열어 삐약거리며 어미닭을 좇아 종종걸음을 치고, 북으로 북으로 추위를 몰아내는 남풍에 실려온 제비가 집짓기에 분주한 날개 짓을 쉴 틈이 없을 즈음이면 모든 농가들도 일손이 모자라 토방에서 게으른 낮잠을 자고 있는 검둥이의 엉덩이도 차서 일으킬 지경이었다. 고읍 들녘이고 중도들판이고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논 여기저기에 머리를 맞댄 사람들이 열댓 명씩 오글거리고, "어허어이, 담 줄을 놓세그려어!" "얼싸 조옻네, 심얼 쓰소오!" 모내기 줄을 맞들어 옮기느라고 화답하는 소리가 어기차게 울려 퍼지며 긴 여운을 남기는 들녘에는 모의 초록빛만큼이나 싱싱한 생기가 살아 올랐다. 추수를 앞둔 들녘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비얍은 바람결에 넘실거리는 것이 장관이라면, 넓디나 넓은 흙덩이일 뿐인 땅에 사람들의 생기가 어우러져 푸른빛으로 채워져 가는 모내기도 그에 못지않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소작인들은 비록 장리변을 내서 치르는 모내기였지만, 모내기를 하는 마당에서는 빚 걱정 말끔히 잊고 일손에만 신명이 올랐다. 빚에 쪼들릴 때 쪼들리고, 소작료를 빼앗길 때 빼앗기더라도 그들은 하늘의 뜻에 따른 일의 즐거움에 만취하는 것이었다. 장인이 일 자체의 의미에 몰입하는 것처럼. 그런데 금년의 모내기는 예년과 달랐다. 농지개혁이란 것이 비록 기대했던 것만큼 논마지기가 많지 않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위치가 달라지긴 했지만, 이제 자기네 논밭에 자기네 농사를 짓게 된 것이다. 앞으로 오 년 동안 상환금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끝도 한정도 없이 빼앗겨야 하는 소작료에 비하면 그건 전혀 근심거리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금년의 모내기는 어느 때 없이 활기차고 신바람 났고, 그 기운이 들녘마다 넘쳐 들녘에는 팽팽한 꽹과리 소리가 파문을 짓고, 탄력 좋은 잡가타령이 물여울을 이루었다.

계엄군 병력 반이 역 앞마당에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주둔지 보성군을 떠나는 참이었다. 송별식을 마친 백여 명은 차례로 역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뒤를 읍장을 위시한 관공서 장들과 유지들이 따랐다. 기차가 성난 황소처럼 검은 몸체를 플랫폼으로 디밀어왔다.

"중대에, 차려우왓! 사령관님을 향하야 받드러으 총!"

인솔자 강 상사가 구령을 붙였다. 사병들이 기계처럼 동작을 하고, 백남식이 경례를 받았다.

"장병 제군, 목적지까지 질서정연하게 행동하기 바란다. 이상."

다시 받들어 총의 경례가 끝나고, 강 상사가 사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일 분대부터 승차!"

군인들은 빠른 동작으로 줄지어 기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 타자 기차는 곧 출발했다. 읍장 이하 유지들은 멀어지는 기차를 향해 손들을 흔들었다. 그러나 백남식 혼자만은 꼿꼿이 선 채 기차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체구는 더 야무져 보이고, 그 미동도 하지 않는 똑바른 자세는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도록 엄격성을 지닌 표본적인 군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속은 겉과는 정반대였다.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계엄사령관이란 직책이 주둔군 지휘관으로 변했고, 그에 따라 손아귀에 쥐고 있던 막강한 권한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허망한 꼴을 당했는데, 이제 병력마저 반으로 줄어들고 말았으니 꼴은 더욱 초라하게 되고, 그는 허전함과 함께 누구에겐지 모를 울화를 씹어대고 있었다. 내가 저 기차로 떠났어야만 체면 유지가 되는 건데... 그는 중도들판을 가로지르고 있는 기차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물었다. 그런데 연대의 명령은 '별명이 있을 때까지 주둔하라'는 막연하고 울화통 치미는 것이었다. 빨갱이 놈들은 눈 씻고 찾아도 없다고, 다 섬멸된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했지만 상부에는 먹혀들지 않았다. 백남식은 자신의 속이 그럴수록 더 당당하게 걸어 역을 나갔다. 그러면서 그는, 할 일도 별로 없는데 그 일이나 해치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꿩 먹고 알 먹는 일임에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해치울 수 있게 되어 있는 일이었다. 그는 샅이 부푸는 걸 느끼며 침을 꿀떡 삼켰다.

토벌대장 임만수는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직후 떠나갔다. 그는 떠나기 전에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곤욕을 한바탕 치렀다. 남원장 춘심이가 애를 뱄다며 그의 옷깃을 틀어잡은 것이다.

"아니 요런 미친년 봤나. 기생년 뱃속에 든 아 새끼가 누구 새낀지 알게 뭐야. 내 새끼라는 증거를 대, 이년아!"

임만수는 푹 꺼진 콧등에 있는 대로 주름을 잡으며 눈을 부릅떴다. 여자를 곧 걷어차기라도 할 기세였다.

"고것이 무신 복장 터지는 억울헌 소리다요. 나가 임 대장님 봄서부텀은 몸 깨끔허니 간수헌 것이야 우리 식구덜이 다 아는 일인디, 워째 인자 와서 나럴 잡년 맹글고 그요. 분허고 억울허요."

춘심이는 몸을 사려가며 눈물 젖은 목청을 뽑아냈다. 그녀의 말은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

"이년아, 아가리 닥쳐! 너희들이야 다 한패거리니까 네년 편드는 것이야 뻔한 일이고, 요새 기생년이 한 남자만 보는 년이 어디 있어. 그것도 말이라고 씨부리면서 날 골탕 먹일려고 해? 이년을 그냥!"

임만수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음마, 음마, 고것이 무신 쌍시런 소리다요. 잡기생만 드글드글헌 서울서 살다봉께 나도 잡년으로 뵈는갑는디, 여그넌 전라도 땅이요, 전라도 땅. 시상이 지 아무리 변혀도 안직꺼정은 시퍼런 춘향이 절개 지킴서 기생질 해묵는다 그 말이요."

새침해진 춘심이는 주인여자 옆에 붙어 서서 야무지게 입을 놀렸다.

"와따 우리 춘심이 말 한분 찰방지고 쌈빡허니 자알헌다. 하먼, 전라도라 춘향이골 기생이먼 절개 하나야 평양기생이 당허겄냐, 진주기생이 당허겄냐. 그 절개 깨끔헌 것이야 나 염상구가 보징스제."

염상구가 과장된 몸짓을 하고 들어서며 목청을 드높이고 있었다. 그는 주인여자가 뒤로 보낸 사람의 연락을 받고 오는 길이었다.

"아 염 단장, 마침 잘 왔소. 아 글쎄 저년이 재수 없게 내 새낄 뱄다고 저 억지니 어떻게 좀 해보시오."

임만수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반색을 했다.

"워메, 아무리 천헌 기생이라도 이년 저년 허지 마씨요. 나도 어메 아베 있는 몸이고, 투표권도 있는 몸이요."

어느새 춘심이가 기를 세우며 내쏘는 말이었고, 둘러선 기생들도 안심이 된 얼굴로 킥킥거리며 웃었다.

"나가 묻겄는디,"

염상구가 임만수와 춘심이의 중간쯤으로 들어서며 목청을 가다듬고는,

"춘심이니 참말로 임 대장님 애럴 뱄냐?"

마치 재판관 같은 태도로 물었다.

"야아, 하늘이 내레다보고 있구만요."

춘심이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어이 월매, 쟈가 그 동안에 임 대장님 한 사람만 본 것을 자네가 보징슬 수 있겄는가?"

염상구는 주인여자에게 물었다.

"하먼이라, 열 분이라도 스제라."

"아니 염 단장, 지금 뭘 하는 거요?"

임만수가 염상구의 팔을 붙들었다.

"어허, 멀 허는지 보먼 몰르겄소? 꾀인 일 잘 해결 보자는 것 아니겄소?"

염상구가 가는 눈으로 임만수를 쏘아보듯 했다. 임만수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허먼, 춘심이 뱃속에 든 것이 임 대장 씨가 영축웂는디, 그려, 춘심이 니넌 멀 워째 도라는 것이냐."

"긍께, 머시냐...법도대로 머리 올레갖고 서울로 딜고 가든지, 그리 못하먼 아그 키우고 살 밑천얼 장만해내든지 혀야제라."

춘심이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모두가 다 듣게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 저년 뻔뻔하기가 소가죽 낯짝이네. 이년아, 할 때마다 화대 꼬박꼬박 받아 챙겼으면 애새끼 배고, 안 배고는 니년이 책임질 문제 아니냔 말야. 이런 쌍년이 어디다 대고 개소리치고 지랄이야, 이거."

임만수는 곧 춘심이에게로 내닫을 기세였다.

"어허, 점잖찮게 이러덜 마씨요. 임 대장이 하로밤 번개씹을 헌 것도 아니겄고, 얼굴이 맘에 들었든지 니노지가 맘에 들었든지 간에 춘심이가 맘에 들어 멫 달이고 끼고 자다가 애럴 밴 것잉께 뒤끝을 깨끔허니 허고 떠나는 것이 남자 도리가 아니겄소?"

염상구는 임만수에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 염 단장. 당신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기요! 난 그리 못하겠소."

임만수는 얼굴색이 싹 변하며 염상구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그리 못허겄으면 여그 못 떠나요."

염상구의 얼굴도 살벌하게 변했다.

"뭐라고?"

"나 말 똑똑허니 들으씨요. 인자 계엄도 풀려뿔고, 당신언 토벌대장도 쥐좆도 아닌 타향에 떨어져 나온 순사여, 순사. 그라고 여그가 워디냐 허먼 전라도허고도 남도고, 남도허고도 벌교여, 벌교. 전라도 밥 일 년 넘게 묵었으먼, 순천 가서 인물 자랑 말고, 여수 가서 멋 자랑 말고, 벌교 가서 주먹자랑 말라는 말 정도야 귀동냥 허셨겄제. 여그가 바로 그 벌교고, 벌교주먹 오야붕이 바로 이 염상구여. 이 염상구 비우짱 긁덜 말어. 그 좆겉은 계엄령 땀세 쪼깐 죽어지내는 칙혔는디, 인자는 요 벌교바닥이 싹 다 내 것이여. 순사 한나 쥐도 새도 몰르게 쥑여서 통통배로 여수꺼지 실어내는 디 한나절이고, 돌뎅이 매달아 바다에 처박아뿔먼 깨끔허니 괴기밥이여. 처자석 있는 서울로 고이 살아갈라먼 춘심이가 말헌 두 가지 중에 하나럴 골라야 쓸 것이여. 워쩌시겄어?"

염상구는 목소리를 높이는 일없이 말해나갔다. 그러나 그 어조는 싸늘했고, 잔인함이 서려 있었다.

"염 단장, 어찌 나를 이렇게 대할 수가 있소."

임만수는 완연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나도 고런 막보는 말 안허고 웃는 낯으로 작별허고 잡은 사람이여. 근디 당신이 나보고 그런 말 허게 맹글었어. 드럽고 짜잔허게 꼬랑댕이 뺄라고 허덜 말고 남자답게 싸게 하나럴 골라. 워떤 것으로 골르시겄어?"

"데려갈 수는 없고, 돈을 줄 수밖에 없는데, 얼마면 되겠소?"

임만수는 완전히 염상구에게 덜미를 잡혀 끌리고 있었다.

"쌀 열 가마니값."

"뭐요? 그 많은 돈을!"

"허먼, 을매럴 내실라는디?"

"그 반에 반이요."

"허참, 좆겉이 나오네."

염상구는 하늘을 쳐다보며 코웃음을 치고는,

"하로밤 씹 값허고 애밴 값허고는 달브다 이거시여. 기생질도 못해묵게 생긴 판에 쌀 두 가마니 반 묵고 떨어져라 그 말이여?"

그는 침을 내뱉았다.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내두르는 그는 금방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위기감을 풍기고 있었다. 임만수는 권총을 차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저놈이 만약 칼을 던지는 경우 꼼짝없이 맞을 판이었다. 창피에 앞서 몸을 상하게 될 위험에 빠져 있었다. 제 기분에 맞지 않으면 얼마든지 칼을 던질 놈이었다. 생돈을 뜯기는 것이 아깝지만 위기는 벗어나고 볼 일이었다.

"다섯 가마니요."

"아 시끄럽소. 나가 열 가마니럴 불른 것은 되나케나 불른 것이 아니다 그 말이요. 다 먼첨 헌 기준에 맞춘 것인디, 나가 외서댁헌테 그리 혔다는 것 듣지도 못혔소? 요것이 장바닥 흥정도 아니겄고, 사람 한 평상이 걸린 문젠디, 열 가마니냐 아니냐 딱 짤라 말허씨요."

염상구는 감정이 가라앉았는지 다시 존대를 쓰고 있었다.

"염 단장, 그게 내가 가진 돈 전부요. 내 편도 좀 들어보시오."

임만수의 꼴이 더없이 초라했다.

"저것이 새끼 델꼬 묵고 살자먼 지 재주에 보나마나 술장시럴 헐 것인디, 그 돈 갖고는 셋방 하나 얻기도 택도 웂소. 남치기야 다 채울 방도가 있응께, 열 가마니값얼 내겄소 워쩌겄소."

"채울 방도라니?"

", 고것이야 이따가 말헐 것잉께 대답부텀 싸게 허씨요."

"그럽시다, 열 가마니 값을 내기로 헙시다."

임만수는 염상구를 쳐다본 채 눈을 껌벅이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되얐소? 열 가마니!"

염상구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외치고는,

"춘심아,니 맘언 워쩌냐."

마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여자 뒤에 몸을 반쯤 숨기고 선 춘심이는 얼굴을 두 손바닥에 묻고 있었고, 주인여자가 대신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임만수는 나머지 쌀 다섯 가마니값을 채우기 위해서 관공서의 장들이나 유지들을 찾아다니는 망신을 감수해야 했다. 권 서장이 한 가마니 값, 유주상이 한 가마니 값, 하는 식으로 나머지 돈을 마련했다. 그러나 염상구는 임만수를 냉담하게 외면했다. 임만수는 약속한 돈을 남원장에 치르고서야 부하들을 데리고 벌교를 떠나갔다. 기차가 중도들판을 지날 때 그는 문에 매달려 뭐라고 욕을 퍼부으며 권총을 쏘아댔지만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벌교 중, 상업고등학교가 정식으로 개교되었다. 지난 사월에 문교부가 전국에 고등학교를 설치한다고 발표한 데 따른 것이었다. 새 학제 변경에 따라 중, 고등학교를 분리시키는 법은 이미 작년 말에 공포되었던 것이다. 벌교중학교와 벌교상업고등학교가 정식으로 개교되었다고 하지만 어떤 새로운 모습을 갖춘 것이 아니라 기존하는 상업학원에다 뒤늦게 새 간판을 바꿔 단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새 교육법만 만들었을 뿐 예산이 없어 학교 건물을 새로 지을 수 없는 가난한 나라살림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였다. 그러나 벌교에 중, 고등학교가 생겼다는 것은 적잖은 사건이었다. 우선 군청소재지인 보성을 덮어 눌렀다는 것이 벌교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했고, 다음으로 벌교도 이제 순천만 못지않다는 자부심을 갖게 했다. 일정시대가 끝나면서 표 나게 활기가 꺾였던 판에 중, 고등학교의 정식인가는 무언가 새로운 활력소가 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고등학교가 '상업'이라는 사실에 다소 논란이 생겼다. 일정 때야 일정 때니까 경리인력이 필요했지만, 일정 때의 호경기가 거의 없어져버린 지금에 와서 상업고등학교 공부시켜 어디다 써먹을 것이냐는 문제 제기였다. 차라리 농업학교로 바꾸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 이의는 흐지부지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어디 벌교에서만 써먹을 것이냐. 순천, 여수, 광주까지 서먹을 데는 많고, 실력만 있으면 서울가지라도 못 올라갈 게 뭐 있느냐. 벌교의 인재들을 여러 곳으로 많이 퍼뜨릴수록 좋은 일 아니냐. 교감이 된 조한규의 이런 주장이 주효했던 탓이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일어난 그런 여러 가지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안창민네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 열성스럽게 뿌려대던 삐라도 볼 수가 없었고, 그 어디에 나타났었다는 소문 한 가닥 들리지 않았다. 농사일에 바삐 쫓기는 사람들은 그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군경마저 그들이 완전 소탕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들의 소식이 감감할수록 가족들만이 속이 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미군비행기가 삐라를 뿌리는 일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산속에 엄연히 살아 있었다. 소조로 분산된 그들은 산마다 비트를 틀고 앉아 서로 선을 대고, 이동을 하고, 은밀하게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동면상태를 지속시키는 한편으로 조직의 복구로 그들은 전략을 바꾼 것이다. 일체 흔적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이 다 섬멸당한 것으로 적을 속이고, 그래서 모든 상황을 여순병란 전으로 돌려놓지는 계획이었다. 그것은 곧 자신들의 활동범위를 넓히고, 조직복구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권 서장은 새로운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소개를 당해 있던 산골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매일같이 떼 지어 몰려들고 있었다. 좌익의 준동이 전혀 없는데다가 마침 농사철이 되었으므로 그들의 요구는 타당하고 옳았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여전히 그들의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계대책도 세워주지 않은 채 방치해오면서 타당한 요구를 묵살한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권 서장은 행정력의 강압에 한계를 느끼며, 하는 일 없이 나날을 빈둥거리며 지내는 백남식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행정력의 한계는 곧 드러나고 말았다. 밤을 이용해 그들이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보고를 받고 조사를 해보니 벌써 삼 할 정도가 짐을 싼 다음이었다. 권 서장은 남은 사람들에게 산속의 상황을 다소 과장되게 설명하고, 도망간 사람들은 다시 잡혀 와서 처벌을 받을 거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제 삶터를 찾아 이미 떠난 사람들을 다시 잡아올 생각은 없었다.

백남식은 순천을 다녀오겠다며 일요일 아침 일직 집을 나섰다.

"해 전에 오시겄제라?"

사복차림인 백남식의 옷에서 무엇을 떼 주는 척하며 송씨는 눈웃음을 쳤다. 나이는 속일 수가 없어 그녀의 눈꼬리에는 서너 개의 잔주름이 부챗살로 일어났다.

"당연하지요."

백남식은 사복 속에 찬 권총을 추스르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권위를 세우고, 두 사람의 관계를 자식들에게 감추기 위해서 백남식은 그동안 송씨를 대하면서 일부러 거드름을 피워왔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일을 해치우기로 작정하고 나자 송씨의 늙음이 갑자기 확대되어보였고, 늙은 교태가 징그럽게 느껴져 그의 감정은 진짜로 무뚝뚝하게 변해 있었다. 백남식은 역으로 가지 않고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차부로 전화를 걸었다.

", 나 사령관인데, 녹동 표 두 장만 남겨놔."

자리를 잡고 앉은 백남식은 느긋한 마음으로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말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를 닮아 펑퍼짐한 얼굴이 예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미운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가늘면서 진한 눈썹이 고왔고, 언제나 물기가 밴 것처럼 윤기가 흐르는 싱싱하게 붉은 입술이 탐욕을 일으키게 했다. 볼우물 깊거나 눈자위에 그늘 짙은 여자가 그렇듯, 도도록한 입술에 혈색 붉은 여자도 그 음기 세기로는 족보에 오를 만했다. 그래서 그런지 스물한 살 말자의 눈짓이며 몸짓은 날이 지날수록 달라져갔던 것이다. 어머니의 눈을 피해 살랑거리는 것이나, 단둘이 있기를 원하는 눈치나, 그 속셈이 무엇인지는 유리알 들여다보듯 환했다.

"소록도 경치가 아주 좋다던데, 우리 일요일 날 구경 갈까?"

이 한마디로 말자와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여럿이서 가는 건 싫어요."

여학교까지 나왔다고 서울말을 흉내 내며 그녀가 먼저 한 말이었다.

"당연하지, 우리 단둘이 가는 거지."

그녀는 못내 부끄러워하며 이빨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하이얀 이빨에 살짝 물린 붉은 입술, 그것은 본능에 불을 붙이는 더할 수 없는 자극이었다. 하얀 이빨은 더 하얗게 보이고, 붉은 입술은 더 붉어 보이는 그 묘한 성적 조화를 보면서, 여자의 입은 또 하나의 그것이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여자의 입이 또 하나의 그것인 것은 이미 관동군 시절에 경험한 바였다. 중국여자들, 특히 화류계 여자들은 입이 말을 하고, 밥을 먹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들은 발이 큰 여자는 치지 않듯 입술이 푸르거나 메마를 여자도 치지 않았다. 입술이 푸른 여자는 거기가 차고 습하며, 입술이 메마른 여자는 거기가 무디고 보드랍지 못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꽃빛으로 붉으면서 윤기 흐르는 입술이 상급일 수밖에 없었다.

"저어, 사령관님..."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백남식은 음탕한 생각을 후닥닥 털어냈다.

"응 나왔군. 거기 앉지."

흰 브라우스에 연보랏빛 후레아 스커트 차림인 말자를 백남식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 저거 입맛 돌게 하네. 그녀는 집에서 보다 훨씬 예쁘고 탐스러워보였던 것이다.

"저어... 차시간이 다 됐는데요."

말자는 다방 안을 조심하는 눈길로 살폈다. 그녀가 남들의 눈을 의식한다는 것을 백남식은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구먼, 나가지." 백남식은 시계를 건성으로 보며 일어섰다.

차가 뱀골재를 더디게 올라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중도 들판에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흰 점으로 찍혀 있었다. 그리고 밀물이 실린 포구와 무성해진 갈대밭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 방죽과 함께 중도들판을 벗하고 있었다.

", 경치 한번 근사허다."

백남식이 불쑥 말했다.

"어디가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옹색스럽게 앉아 있던 말자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저기 저 포구하고 들, 얼마나 경치가 좋아."

백남식은 굳이 손가락질까지 해보였다.

"그렇군요, 아주 멋있어요."

"저 경치에 사람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싱거웠겠어. 사람들이 있으니까 경치가 더 근사해졌지. 꼭 한폭의 그림이야."

"그래요, 사람들이 없었으면 심심했을 거예요. 경치를 보시는 눈이 아주 높으시네요."

"아 뭘, 그저 그렇지."

차가 굽이를 돌면서 경치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백남식은 고개를 돌리며 거만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데 말야, 말자라는 이름의 뜻이 뭐지?"

말자는 금방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대답이 없었다.

", 내가 물어선 안 될 말을 물었나?"

"아니에요. 전 이름만 생각하면 세상을 살고 싶지가 않아요."

말자의 목소리는 물기가 젖어 있었다.

"여자 이름으로 별로 좋진 않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할 거 뭐 있나. 이름이야 맘에 안 들면 백 번이라도 갈면 되니까 어서 그 뜻부터 말해봐."

백남식은 더없이 다정스럽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녀는 흠칫 놀랐고, 손을 오그리며 빼내려고 했다. 백남식은 그녀의 손을 더 꽉 쥐며 말했다.

"어서 말하라니까."

"저어... 아부지가 저까지 딸만 셋을 낳게 되니까 더는 딸을 낳지 말라고 그렇게 지었어요."

"으아하하하..."

백남식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차 안을 온통 흔들어댔다. 사람들의 눈이 전부 자기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며 말자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백남식은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적중한데다가, 딸에게 그런 고약스런 이름을 붙이고도 딸을 줄줄이 셋이나 더 낳은 꼴을 생각하며, 넷째 딸을 또 말자, 다섯째 딸은 또또말자, 여섯째 딸은 또또또말자라고 이름 지었으면 조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까지 해가며 제물에 신이 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우스우세요?"

뾰로통해진 말자가 눈을 흘겼다.

", 화났어? 내 말 들어봐, 셋째 딸한테 말자라고 이름을 붙였으면 넷째 딸한테는 또말자, 다섯째 딸한테는 또또말자, 여섯째딸한테는 또또또말자, 그렇게 붙여얄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러지 않았으니 말자만 억울하게 손해 본 것 아닌가 말야. 그 생각하고 웃었지."

말자는 그만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제가 새로 이름을 지었어요."

"뭐라고?"

"연희라고요."

"연희?"

"연꽃 연자에 계집 희자예요."

"연꽃 같은 여자? 좋군, 아주 어울려."

"앞으론 그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 그러지."

백남식은 담배를 피워 물었고, 연희는 창밖으로 눈길을 던지며 손에 그대로 남아 있는 남자의 감촉과 체온을 음미하고 있었다. 온몸을 불붙이는 뜨거움과 온몸을 흔드는 저릿거림이 아직도 정신을 아득한 혼미함 속에 가둬놓고 있었다.

"소록도가 정말 그리 경치가 좋은가?"

백남식이 다시 연희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연희는 처음처럼 놀라지 않았고, 그리 자연스러울 수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리고 남녀관계란 이런 것인가, 하고 얼핏 생각했다.

", 나환자들이 살아서 그렇지 아주 아름다워요. 섬이야 다 아름답지만요."

"나환자들은 한쪽에만 산다면서?"

", 의사들이 사는 데하고는 완전히 구분되어 있어요."

"해수욕장이 아주 좋다던데?"

"다 아시네요. 그 해수욕장 모래가 모래가 아니라 조개껍질 부서진 것이라고 해서 유명해요. 그걸 덮고 찜질을 하면 신경통이고 풍이고 다 낫는데요."

"옴도 낫고, 습진도 낫고, 만병통치겠지."

연희는 쿡쿡 웃었다. 차는 고흥반도의 황톳길을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논밭에서 일손을 놀리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차의 움직임에 따라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며 계속 스쳐지나갔다. 소록도는 녹동 부두에서 건너뛸 수 있을 것처럼 가까웠다. 섬을 뒤덮은 무성한 소나무 숲 사이사이로 흰 건물들이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었고, 맑고 푸른 바닷물이 섬을 에워싸고 있었다. 투명하고 강한 유월의 햇살 속에 전신을 드러내고 있는 소록도는 마치 부자들의 별장지대 같을 뿐 그 안에 한 많은 나병환자들을 품고 있는 슬픈 섬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록도 뒤로는 여러 섬들이 바닷물을 깔고 앉은 그 층과 색깔을 달리하며 멀어지고 있었다.

"듣던대로 경치가 아주 좋구먼, 물도 맑고."

백남식이 배로 오르며 말했다.

"이 바닷물이나 저 섬이나 다 슬퍼요."

연희가 뒤따르며 말했다.

"슬퍼?"

"네에, 저 섬에 있는 나환자들이 이 바닷물이 많이 빠져 죽거든요."

"그건 슬픈 게 아니라 기분 나쁘고 재수 없는 일이군. 그럼 이 물에 어떻게 해수욕을 해."

백남식이 퉁명스럽게 말했고, 눈을 크게 뜬 연희는 그의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직 해수욕 철이 일러서 그런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은 잘 자란 소나무숲 속에 있는 병원이며 학교를 거쳐 해수욕장에 이르렀다. 거기서 잠깐 발길을 멈추고 가까운 바다와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숲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를 걸었는지 인적 없는 숲속에서 새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좀 쉬도록 하지."

백남식이 풀숲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희도 약간 간격을 띄워 그 옆에 앉았다. 백남식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희는 시집 안 가나?"

백남식은 불쑥 말해놓고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푸우 내뿜었다. 나무숲의 초록빛으로 하여 햇빛마저 초록빛으로 물든 숲 그늘 속을 담배연기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연희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풀만 쥐어뜯었다.

"난 어때."

연희는 담배냄새에 섞인 남자냄새가 왈칵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몸이 뒤로 벌렁 넘어가는 것도 느꼈다. 남자의 입과 몸이 자신의 입과 몸을 동시에 덮쳐왔다. 그녀는 버둥거리며 남자를 떠밀었다. 그러나 그건 마음속에서 뿐이었다. 어느새 두 팔은 남자에게 붙들려 있었다. 남자의 입술이 무서운 기세로 자신의 입술을 빨아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남자의 행위가 그것으로 끝나기만을 빌었다. 그러나 남자의 욕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자의 입술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손이 치마를 헤집고 들었다. 남자의 손이 허벅지에 감촉되는 순간 그녀는 어둠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제서야, 이 남자가 말만 총각이었지 이런 식으로 수없이 많은 여자들을 다루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의 팔다리는 어디로 갔는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왜 이래요, ."

그녀의 절박한 소리는 눈물방울로 떨어졌다.

"결혼하자니까."

"안돼요, 결혼하기 전에는 안돼요."

"내가 괜찮으면 괜찮아."

"여기선 싫어요, 누가 와요."

"오면 총으로 쏴버리지."

"제발 여기선 싫어요."

"방구석보다 이 숲속이 얼마나 근사해."

이런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그녀의 팬티는 벗겨져나갔다. 맑고 푸른 숲 그늘 아래 그녀의 연갈 빛을 품은 흰 하체가 드러났다. 그 위에 털투성이의 억센 두 다리가 겹쳐졌다.

 

"참말로 끝꺼정 거짓말허겄어!"

한 차석이 소리 지르며 싸리회초리를 휘둘렀다. 싸리회초리는 허공을 가르는 싸늘한 소리를 뿌리며 남자의 등줄기를 후려쳤다.

"워메!"

남자의 몸이 들썩 솟았다가 내려앉았다.

"너도 왜 거짓말해!"

싸리회초리가 다시 날아갔다.

"어이쿠메!"

옆의 남자도 몸을 솟구쳤다. 삼베저고리를 걸쳤을 뿐인 두 남자의 몸은 싸리회초리 앞에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질기고 낭창낭창한 싸리 회초리는 여지없이 그들의 몸을 파고들어 눈에서 불똥이 튕기는 아픔을 심었다. 몽둥이나 가죽혁대나 그 어느 것이 맞을 만할가마는 싸리회초리의 매맛은 특히나 맵고 독하기가 명이 나 있었다. 몽둥이처럼 얼병도 들게 하지 않고, 가죽 혁대처럼 살지 찢지 않으면서도 싸리회초리는 몸에 찰싹 감겼다가 튕겨나가며 번갯불이 이는 아픔을 남겼고, 그 아픔은 살이 푸득푸득 뛰면서 비비 틀리는 새로운 아픔으로 바뀌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싸리회초리는 초보단계의 고문도구인데도 그 효과가 아주 좋았다.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싸리회초리질 스무 번 이상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일본 놈들은 싸리회초리질을 즐겼다.

"싸게 말혀. 느그 빨갱이제!"

"아니랑께라, 그냥 당혔당께라."

"하먼이라, 총 앞에서 워쩔 것이요."

두 남자는 다투듯이 말했다.

"이 새끼덜, 시끄러! 글먼 워째 신고를 안 혀!"

한 차석은 또 연거푸 회초리질을 해댔다. 두 남자가 박자를 맞추듯 비명을 토하며 몸을 들썩들썩했다.

"허기 존 말로 당혔다는 것이제 느그덜언 틀림웂이 빨갱이 세포여. 여그 율어눔덜언 하나또 믿을 눔덜이 웂어. 싸릿대야 을매든지 있응께 워디 누가 이기는가 보드라고. 느그 빨갱이제!"

한 차석은 갑자기 소리치며 싸리회초리를 휘둘렀다. 공평한 배급을 하듯 한 차례에 두 번씩이었다.

"워메 미치겄는거, 아니랑께라."

"워째 쌩사람 잡고 이러요."

"시끄러, 빨갱이제!"

다시 싸리회초리가 날아갔다.

"참말로 아니랑께요."

"너무허시오."

"싸게 불어, 빨갱이제!"

또 싸리회초리가 바람을 일으켰다. 한번 매질을 하기 시작한 한 차석의 감정은 점점 뜨겁고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어떤 확신도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어허, 어허, 요거서이 무신 난리판 굿이여, 한 차석!"

느릿한 어조이긴 했으나 커다란 목소리가 지서 안을 울렸다. 때마침 회초리를 내려치던 한 차석은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지서장 이근술의 웃음기 가신 얼굴이 그의 눈앞을 막았다. 한 차석은 싸리회초리를 든 손아귀에서 스르르 힘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서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는 것은 무지무지하게 화가 났다는 표시였고, 지서장이 본서에서 돌아오기 전에 기어코 자백을 받아내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이구메 지서장님, 우리 잠 살려주시씨요."

두 남자는 지서장에게로 쭈르르 달려가 그 앞에 엎드렸다.

"얼렁 일어들 나씨요. 일어나서 걸상에들 앉으씨요."

이근술은 두 남자에게 이르고는,

"워쩐 매질이오."

한 차석을 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산 빨갱이헌테 보리쌀을 장만해준 빨갱이 혐의구만죠."

한 차석은 공비도 아니고 빨치산도 아니고 '산 빨갱이'라고 했다.

"확실헌 좌익이라도 법으로 처리허먼 될 일인디, 민간인을 혐의만 갖고 매질은 무슨 매질이여. 나가 있으씨요."

이근술이 한 차석을 외면해버렸다.

빙신 팔푼이 겉은 새끼, 니 겉은 눔만 있다가는 빨갱이새끼덜헌테 나라 폴세 망해묵었다.’

한 차석은 끄응 힘을 쓰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근술 밑에서 이근술 식으로 했다가는 도대체 빨갱이 세포 하나 잡아낼 수 없고, 그러다가는 점수 따기는 다 글러 승진이고 뭐고 없이 차석으로만 한평생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이근술이 없는 사이에 한건을 하려고 했던 것인데, 내일이나 올 줄 알았던 그 물건이 예상보다 빨리 들이닥치고 말았던 것이다.

"자아, 요쪽으로 오씨요."

이근술이 자기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두 남자는 앉았던 걸상을 들고 이근술의 책상 앞으로 옮겨갔다.

"워째, 많이 맞었소?"

이근술이 평소의 웃음기 담긴 얼굴로 부드럽게 물었다.

", 그냥 그리..."

한 남자가 어물거렸고, 다른 남자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너무 섭허게 생각덜 마씨요. 한 차석도 맘이 나뻐서 그런 것이 아니고, 좌익을 막을라다봉께 그리 된 것이요."

"알겄구만이라."

"하먼이라."

두 남자는 거의 동시에 대꾸했다. 이근술은 두 남자의 재빠른 동의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죄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자기의 살이 아픈 매질을 당하고, 그 아픔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매질당한 감정을 풀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들은 경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감정을 가장할 뿐이었다. 그는 그 허약한 가식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괴로웠다. 그래서 그는 일정 때부터 때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 억지는 생사람을 잡기 일쑤였고, 그렇게 해서 밥 빌어먹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매질하지 않아서 잡아야 될 범인 못 잡은 일 없었고, 풀어야 할 사건 못 푼 일 없었다. 마음의 아픔은 살의 아픔보다 몇 십 갑절 진하고 질겨서 평생을 가는 것이었다. 대를 물리는 원한은 마음에 담긴 것이지 살에 박힌 것이 아니었다.

"보리쌀을 가지간 것은 은제요?"

"어지께 밤이구만이라."

"얼매나 가지갔소?"

"우리 집서 한 말, 이사람 집서 한 말, 그렇구만이라."

"몇 사람이 왔습디여?"

"시 사람이드만요."

"아는 사람덜입디여?"

"둘은 몰르겄고, 키가 땅딸막헌 대장은 금시 알아보겄드만이라."

"키가 땅딸막헌 대장?"

"야아, 이름은 몰르겄고, 벌교사람인디라."

"혹여 하대치란 사람 아닙디여?"

", 이름얼 듣고봉께 그런 상 싶구만이라."

"어지께로 몇 분째 왔습디여?"

"여그 떠난 뒤로 첨이구만이라."

"무신말 허고 간 것 웂소?"

"새 시상 되먼 꼭 갚는다고라."

"그 말을 믿소?"

"안 갚겄다는 말보담이야 낫제만 워째 믿기야 허간디라."

"보리쌀 뺏긴 것 억울허덜 않소?"

"금메라..."

"고것이 무신 소리요?"

"지서장님 앞인께 그짓말언 못허겄고, 그 사람덜이 여그 차지허고 있을 동안에 우리헌테 워낙이 잘해줘논께로 억울허단 맴은 벨로 안 드는구만이라."

"다 됐구만요. 인자 돌아가시씨요."

이근술은, 왜 신고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것은 괜한 트집일 뿐이었다. 유도심문이 섞여 있는 자신의 질문에 남자는 아무런 대비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는 그가 좌익이라는 혐의나 세포라는 의심이 전혀 가지 않았다. 그의 솔직은 오히려 의심을 살 정도였다. 그걸 안 믿으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다만 그 남자의 좌익에 대한 호감은 경찰의 감정을 긁기에 딱 좋았다. 그러나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건 정치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책임질 문제였다. 좌익이 호감을 산 것은 좌익의 노력의 결과였고, 경찰이 호감을 사지 못한 것은 경찰의 책임이었다. 경찰이고 군인이고 정치하는 사람들이고 그 엄연한 사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말단에서부터 위에까지, 층층이 우격다짐이고 억지춘향이일 뿐이었다. 한 차석은 좌익의 호감을 우익의 호감으로 바꿀 생각은 않고 오히려 매질을 해서 괜한 사람들을 좌익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근술은 그런 사람들과의 경찰 노릇에 또다시 염증을 느꼈다.

 

병력을 다시 반으로 줄이면서 백남식도 벌교를 떠나게 되었다. 출근을 하면서 송씨에게 이틀 후에 떠나게 되었음을 알렸는데 바로 그날 밤으로 셋째 딸과의 관계가 문젯거리로 등장했다. 그리 되리라고 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떠난다는 어머니의 말은 듣고 연희는 그동안 감추어왔던 자신과의 관계를 털어놓았을 것이다. 딸의 말을 듣고 송씨의 속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또한 뻔한 것이었다. 그런 것은 이미 계산속에 다 들어 있었던 것이어서 백남식은 여유만만하게 송씨를 상대할 수가 있었다.

"아이고메 요런 숭헌 인종, 몸이 안 좋아 기운이 떨어진 줄 알었등마 그것허고 딴짓 허니라고 그랬었드마. 나넌 그런 줄도 몰르고 나가 잘못 믹여서 그런 줄만 알고 괴기반찬 해대니라고 발싸심만 혔제. 그것허고 그리 되얐으먼 얼렁 그 소식 알리고 나허고넌 그짓얼 끊었어야제 사람 도리제, 무신 징허고 드런 맘뽀로 그럴 수가 있는 일이여, 금메."

송씨는 목소리도 높이지 못한 채 자신의 가슴을 치다가 백남식에게 삿대질을 하다가 했다. 그러나 백남식은 그런 송씨는 아랑곳없이 비시식하게 웃으며 담배연기만 풀풀 날리고 있었다.

", 말 잠 혀봐. 고것이 무신 심뽄지."

"그 말을 꼭 들어야 하겠소? 지금 중요한 건 딸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지 그까짓 말이 무슨 소용 있소."

"아녀, 그 심뽀가 하도 드럽고 요상혀서 듣고 넘어가야 쓰겄어. 고런 행투 허는 남자헌테 내 딸얼 워찌 맽기겄어?"

", 안 맡기면 나도 좋소. 나야 손해 볼 것 하나도 없으니까. 딸이야 처녀 아니란 소문나면 시집가기 곤란하겠지만."

"워메 잡것, 고것이 사람이 헐 소리여?"

송씨는 또 자기의 가슴을 쳤다.

"그 말도 듣고 싶다니까 하겠소."

"아녀, 아녀, 안 듣고 잡어."

송씨는 그만 우는 얼굴이 되어 두 손을 저어대고 고개를 흔들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려, 우리 떨언 워쩔 심판이여?"

송씨가 한숨을 토해냈다.

"어째야 좋겠소?"

"머시여!" 송씨는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응당 결혼을 하겠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저눔이 나럴 우습게 보는구나. 그 망헐눔에 음기가 딸년 신세 망치게 맹글었구나.’

송씨는 뒤늦은 후회에 발등을 찍고 싶었다. 그리고 백남식을 당장에 와드득 쥐어뜯고 싶었다. 그러나 그나마 딸년의 신세를 생각해야 했다. 자신과의 관계를 덮기 위해서도, 딸년을 위해서도 백남식을 사위로 맞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의 비위를 거슬려 그가 돌아서서 입을 놀려대는 날에는 자기는 자기대로, 딸년은 딸년대로 죽게 될 판이었다. 에미와 딸년이 같은 남자한테 놀아났다는 소문 앞에서 살아날 길은 없었다. 그건 곧 집안이 끝장나버리는 일이었다. 저놈은 그것을 환히 다 알고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송씨는 참담한 마음으로 그러나 현실적인 손익 앞에서 침착을 회복했다.

"내 딸얼 맡어주소."

송씨는 처음으로 확실하게 하대를 쓰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백남식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것이야 좋소.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소."

"무신?"

"내가 군인으로 떠돌다보니 무일푼이오."

"고것이야 나가 알어서 허겄네."

어차피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송씨는 선뜻 말했다.

"아니, 장가갈 밑천을 말하는 게 아니오. 장가를 들어 처자를 거느리자면 나도 남들을 앞질러 빨리빨리 출세도 해야 하고, 위험하게 앞에 나서서 싸우는 자리가 아니라 안전하게 뒤로 빠지는 자리에 앉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톡톡한 재산이 있어야 된다 그 말이요."

"그려서, 우리 재산얼 띠도라고?"

송씨는 긴 꼬챙이로 머릿속을 깊이 쑤시는 것 같은 날카로운 현기증에 휘둘렸다.

저것이 생김새 맹키로 독허고 징헌 도적눔이로구나. 내년이 독새헌테 물렸구나.’

송씨는 헝클어진 감정을 가다듬으려고 속입술을 씹었다.

"반은 너무 많고, 반에 반만 주시오."

"워쩌!"

마침내 송씨가 소리쳤다.

"싫으면 그만두시오. 나 혼자 좋자는 게 아니라 딸년도 좋자고 한 말인데, 싫으면 별수 없지요. 사위도 자식인데 재산 좀 나눠줘서 뭐 나쁠 것 있겠소. 하여튼 싫다니까 나도 다 싫소. 결혼 얘긴 없었던 걸로 하고, 나 그만 자야겠소."

백남식은 벌렁 누워버렸다.

"반에 반은 너무 많고, 그 반이먼 워쩌겄는가."

송씨의 다급한 말이었다.

"관두시오, 다 필요 없소."

백남식이 버럭 소리 질렀다. 송씨는 머리를 방바닥에 박치고 싶었다. 딸년 주고, 재산 뺏기고, 그러나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었네, 그리 허세."

송씨는 맥이 탁 풀린 소리를 흘리며 일어섰다.

"서로서로 좋도록 일이 잘 풀렸으니까 인자 연희나 들여보내시오."

방문을 옆으로 밀려던 송씨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연희?" “

말자 새 이름이 연희요."

송씨는 전신을 후들후들 떨며 간신히 방문을 밀치고 있었다.

 

유월 중순을 넘기면서 더위는 완연해지고 있었다. 날씨처럼 김범우의 마음도 나날이 후덥지근할 뿐이었다. 일요일이라서 늦은 아침을 먹은 그는 문턱에 다리를 걸친 채 편지를 읽고 있었다. 심재모한테서 온 것이었다. 심재모의 편지는 앞의 안부를 빼고는 순덕이라는 여자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다섯 장의 손수건을 보냈던 미지의 주인공이 자기를 찾아온 연유와, 함께 지내게 된 사연을 자세하게 적어놓고 있었다. 아직 잔당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수가 극소수여서 토벌작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진데, 멀잖아 있을 부대이동에 그 여자를 어찌 했으면 좋을지 몰라 고민 중이라는 말로 편지를 끝맺고 있었다. 그 여자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데 도움을 청하는 것인지, 특별한 용건이 없는 안부편지에 그냥 자기의 생활을 적은 것인지, 구분하기가 모호했다. 김범우는 편지를 문턱 위에 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별로 싫지 않으면 결혼할 일이지, 그는 담배를 빨며 생각했다. 심재모가 그 여자를 몇 개월 동안이나 옆에 두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동정만의 행위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남녀관계라는 것은 묘한 것이었다. 자신의 경우를 보더라도 결혼 전에 딱히 마음 사로잡게 좋은 게 없이 중매로 결혼을 했어도 살붙이고 살다보니 부부만 아는 깊고 얕은 정이 생겨나고 쌓이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은 만들며 사는 것이라고 했고, 만들면서 살아지는 정은 있어도 까먹으면서 살아지는 정은 없다고 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필요가 앞섰던 자신의 결혼도 아무 탈 없이 세월을 쌓아가며 자신을 어느덧 세 아이의 아버지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남녀관계의 묘함은 혈연관계나 우정관계와는 다르게 육체라는 것이 접착제 역할을 함으로써 그 농도나 밀도가 우정관계는 물론이고 혈연관계보다도 강하고 진해지는 것 같았다. 자유연애라는 말이 떠돈 지는 꽤나 오래되었지만 그것은 말뿐이었고 세상은 아직도 중매로 결혼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임을 찾아 그 먼 길을 찾아간 고향 처녀의 과감성이 놀랍고, 그러지 않을 수 없었을 마음이 측은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어지간하면 심재모가 그 처녀를 아내로 맞기를 바랐다. 그러나 한자리에 앉았으면 농담 삼아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편지로 쓰기는 난처한 내용이었다. 말과 글의 차이 때문이었다.

김범우는 담배를 빨며 화단에 하염없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비좁은 화단에는 분꽃, 채송화, 맨드라미, 칸나, 접시꽃 같은 여름꽃들이 그득 피어 있었다. 감방에서 얼마나 답답하고 더울까, 그는 이학송과 손승호를 생각했다. 그들의 면회는 계속해서 되지 않았다.

"선생님,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김범우는 눈길을 모았다. 송경희가 화사하게 웃고 서 있었다.

", 어쩐 일인가?"

"어쩐 일이긴요, 선생님. 손 선생님 일이 걱정돼서 또 왔죠."

"그런가, 면횐 아직도 안 되네."

"아이 선생님, 앉으라는 말씀부터 좀 해보세요."

송경희는 서운한 척 표정을 바꾸며 눈을 흘겼다.

", 앉지 앉어."

앉고 싶으면 앉을 일이지 꼭 권해서 앉아야만 맛인가.’

김범우는 또 달갑지 않은 생각을 하며 담배를 비벼 껐다. 그 서양식을 흉내 내는 언행도 마땅찮았고, 입으로는 '선생님'이라고 하면서도 대접은 '여자'로 받기를 원하는 태도도 마땅찮았다.

"편질 읽으셨던가 보죠?"

송경희 눈길이 편지에 꽂혀 있었다. 김범우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집에서 온 거예요?"

송경희는 채듯이 빠르게 편지를 집어갔다. , 저렇게 무교양하고 천박할 수가 있나. 절제라고는 없이 풍겨대는 그녀의 여자냄새에 김범우는 역겨움을 느꼈다. 그녀가 풍기는 여자냄새를 감지한 것은 두 번째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처음에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 것은 손승호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손승호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가 '존경하는 선생님을 만나뵙겠다'며 굳이 따라온 것이었다. 사무실이 화신백화점 뒷골목인 손승호가 종로통에서 그녀와 마주쳤고, 그녀의 아는 체에 따라 다방으로 갔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신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이 나온 것까지는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는 입장인데, 그녀가 왜 자신을 존경한다는 것인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죽은 금융조합장 딸이라는 말에 그저 아는 척했을 뿐이고, 존경함이란 십대 후반의 나이에 흔하게 갖게 되는 감상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는 두 번째부터 당돌할 만큼 노골적으로 여자냄새를 풍김으로써 존경이란 뜻을 확실하게 깨닫게 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회사로든 집으로든 불쑥불쑥 찾아왔다. 오늘도 그녀는 손승호를 빙자해서 찾아든 것이다.

"집에서 온 편지가 아닌데요?"

다행이라는 뜻인지 어쩐지 송경희는 얄궂은 웃음을 흘리며 편지를 던지듯 놓았다. 그게 실례된 일인 줄 모르느냐고 나무랄까 하다가 김범우는 마음을 닫아버렸다. 그럴 만한 관심도 없었고, 그녀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았던 것이다.

"선생님, 오늘 무슨 요일인지 아세요?"

송경희는 영양 좋은 복숭아 빛 얼굴에 여자냄새 진한 웃음을 환하고도 야하게 피워 올리며 감겨드는 콧소리를 섞어 물었다.

"일요일 아닌가."

"아시는군요. 선생님, 집에만 계시지 말고 정릉이나 우이동 골짜기로 나가요. 손 선생님 땜에 상하시는 속 제가 위로해 드릴께요. 제가 새로 쓴 시도 들어주시구요."

"난 곧 회사로 나가야 돼. 사건취재를 떠나야 하니까."

김범우는 무뚝뚝하게 말하며 불끈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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