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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3-2

4. 태백산맥에 내린 소개령

강원도의 산들은 전라도의 산들과는 사뭇 달랐다. 전라도의 산들이 나지막하면서 둥그스름한 모양새로 유연하게 흐르며 이어지는 것에 비해 강원도의 산들은 드높으면서 날이 선 모양새로 억세게 각을 이루며 솟구치고 있었다. 전라도의 산들은 평야를 거느리고 멀리 풍경으로 잡히는 데 비해 강원도의 산들은 평야를 제 몸으로 다 차지하고 앉아 바로 눈앞을 가로막았다. 전라도의 산들이 부드럽게 출렁거리는 물결이라면 강원도의 산들은 폭풍을 타고 내달아오는 겹겹의 성난 파도였다.

심재모는 살이 많은 전라도의 산에서는 푸근한 친근감을 느꼈지만 뼈가 많은 강원도의 산에서는 살벌한 위압감을 느꼈다. 지역에 따라 말이나 풍습만이 아니라 산도 달라진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경기도의 산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도의 산들은 어떤 모습이던가? 강원도와 전라도의 중간 모습이던가? 그렇지 않았다. 지역적으로는 강원도와 가까우면서도 평야를 끼고 있는 탓인지 오히려 전라도의 산을 닮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산을 먼발치로만 보고 살며 어쩌다가 오르고 했으므로 그에게 산은 익숙한 대상이 아니었다. 대학시절에 금강산을 거쳐 설악산을 구경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기암괴석들의 신기한 아름다움에 눈이 팔려 그저 악산이라는 정도로 생각했을 뿐 지역에 따른 비교의 눈은 갖지 못했었다. 그런데 산이 구경의 대상이 아니라 목숨을 내건 싸움터로 변하고 보니 그 다른 점이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강원도는 산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전라도와 달랐다. 험하고 깊은 산으로만 이루어지다시피 한 땅에서 그나마 좁은 평지나 경사 덜 급한 비탈에 밭을 일구어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순하고 소박한 듯했고, 한편으로는 둔감하고 단순해 보이기도 했다. 전라도 사람들이 무슨 말인가를 감춘 채 적의를 품고 있는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과, 눈을 내리깔거나 옆걸음질을 치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것은 예민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순간순간 그저 덤덤하고 묵묵했다. 말도 전라도는 알아듣기가 어려울 지경으로 사투리가 독특한테 강원도는 경기도말 비슷해서 별 다른 특색이 없었다. 강원도 사람들을 대하면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사람냄새를 진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 심한 차이의 원인을 찾아내는 데는 손승호가 진작 했던 말이 열쇠가 되어주었다. 그것은 소작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논밭이 넓은 땅에 살면서도 거의가 소작인이었고, 강원도 사람들은 비록 산골의 비탈 밭이나 돌투성이 밭을 일구어도 그것이 자기네 소유였다. 빼앗기며 사는 사람들과 빼앗기지 않고 사는 사람들과의 차이는 그처럼 현격했던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 사람들을 전라도 사람들처럼 변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심재모는 고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임무는 인민해방투쟁이란 이름으로 이북에서 넘어와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산재한 적을 소탕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 작전을 효과적으로 달성시키기 위해서는 적들의 식량 보급원과 잠자리 제공처가 되고 있는 산골마을 사람들을 가까운 읍이나 면으로 소개시켜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임무였다. 보급원을 차단시켜 적을 산중에 고립시킴으로써 섬멸하고자 하는 동계대공세를 전개하려는 작전계획 앞에서 소개는 전투보다 더 중요한 선결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이 계속적으로 난관에 부딪치고 있었다. 어느 산마을 사람들이고간에 소개령을 순순히 따르려 하지 않았다. 소개시한을 못박아놓은 상부에서는 매일 불같은 닥달을 해댔고, 이미 겨울이 닥쳐온 강원도의 십일월에 한사코 집을 떠나지 않으려고 버티는 산마을 사람들 사이에 끼여 심재모가 겪어야 하는 곤혹은 말이 아니었다. 효과적으로 작전수행을 위해서는 소개시키는 것이 불가피했고, 따스한 겨우살이 준비를 다 끝내놓은 마당에 느닷없이 집을 비우고 낯선 곳으로 옮겨가라는 말에 사람들이 저항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무조건 몰아내라니까. 기한 내에 나오지 않는 것들은 모두 통비분자로 간주해 사살 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라 그 말이오."

연대장은 날마다 전화통 속에서 열 받친 소리를 질러댔다. '무조건 몰아내라'는 우격다짐이 심재모의 입장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소개령을 내렸으면 그에 따르는 최소한의 대비책은 마련되어 있어야 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는 것만이 아니라 입을 것이 있어야 하고, 잠잘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은 상식도 못되는 철칙이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당사자들의 것으로 해결한다 하더라도 잠잘 곳은 마땅히 소개시키는 쪽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더구나 계절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아무런 대비도 없었고, 상부에서는 무조건 몰아내라고 답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시골 사람들일수록 낯선 도시에 대해 두려움을 갖거나 꺼리게 마련이듯 산골 사람들은 하나같이 집을 떠나면 금방 죽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읍이나 면은 어쩌다가 장이나 보러 나가는 곳이지 자기네들 같은 것들이 살 곳이 아니라는 굳은 생각을 돌릴 길이 막연했다. 그뿐만 아니라, 좌익 때문에 자기네들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 하나도 안 나쁘데유. 예의차려 밥 좀 달라고 허구, 잠 좀 재워달라고 허구, 그뿐인 걸유."

어떤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눈을 껌벅거렸다.

"살기 좋은 나라 만든다는 같은 동포 아닌가유. 살기 좋은 나라 된다고 해도 우리 같은 사람 살기야 그게 그것이겠지만서도, 고생하는 사람들 밥 좀 주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어유."

다른 마을 남자가 태평스럽게 하는 말이었다. 전라도 소작인들이 좌익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을 철저하게 감추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강원도 산골 사람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인간적 감정으로 좌익을 대하는 것이었고, 전라도 소작인들은 좌익이 세상을 뒤바꿔주기를 기대하며 공범의식을 느끼고 있는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빼앗기지 않고 사는 사람들과 빼앗기고 사는 사람들이 보이는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총은 장난감으로 가지고 다니는 거야, 뭐야! 빨랑빨랑 몰아내라구, 빨랑빨랑. 작전 날짜가 코앞으로 닥치고 있소, 코앞으로."

총으로 협박을 해서라도 사람들을 소개시키라는 성화였다. 그 악의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험악한 얼굴을 만들어 보이고, 총을 들이대고 하는 짓을 할 수밖에 없는 괴로움을 심재모는 혼자 씹었다. 집을 떠나기 두려워하는 그들의 속성이나, 집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는 그들의 기준 따위는 얼마든지 강압으로 묵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처 해결이 전혀 안된 상태인 것을 뻔히 알면서 그들의 엄동의 추위 속으로 내모는 짓을 앞장서서 지휘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일이라 여겨졌다. 물론 소개령이 내려진 즉시 사령부에 그 문제에 관해 문의를 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심중위가 염려할 문제가 아뇨. 우리 군은 소개만 시키면 되는 것이고, 천막을 치든 움막을 치든, 그거야 각 읍면이나 도청에서 알아서 할 일이오."

그 불분명한 책임한계 속에서 강행된 소개는 벌써부터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다. 먼저 소개당한 사람들에게 천막 한 장씩을 나눠주다가 사람들의 수가 계속 불어나게 되니까 그것마저 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천막을 치고 겨울을 난다는 것도 말이 아닌데다가, 그것마저 지급이 중단된 것은 사람들 보고다 얼어 죽으라는 말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 행정의 무책임 앞에서 사람들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고, 그것을 저지당하자 그 다음으로 집단행동을 감행했다. 읍사무소나 면사무소로 떼지어 몰려가서 언행이 난폭해지는 것은 극한상황에 몰린 사람들로서 당연히 취하게 되는 자구책이었다. 살집을 내놓든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든지 하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였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갈 집은 이미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논농사가 거의 없는 까닭에 짚을 구하기가 어려워 흔한 나무를 얇게 켜서 지붕을 덮은 그들의 너와집은 그들이 소개당한 다음에 말끔하게 불태워지고는 했던 것이다. 고립섬멸작전을 감행해야 하는 마당에 적에게 유리할 뿐인 은신처를 하나라도 더 남겨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심재모는 사령부의 성화를 더는 견뎌낼 수가 없어 소대 선임하사를 불러 모았다.

"인제 더는 방법이 없소. 우리 관할구역 내에서 아직 소개가 안 되고 있는 마을은 앞으로 사오일 안으로 완전히 소개시키도록 하시오. 사령부의 최후명령이니까 반드시 완료해야 하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강압적으로라도 시행해야 하고, 특히 식량과 옷은 전량을 옮길 수 있도록 장병들이 철저하게 협조해주도록 지휘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 집을 소각하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절대 비밀에 부칠 것이며, 소각 시에 산불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를 철저히 하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만약 집을 소각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미리 알려지면 그들은 사생결단 덤비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예상하지 못한 불상사가 일어날 위험이 있으니 그 점 특히 명심들 하시오. 질문 있으면 하시오."

심재모의 단호하게 달라진 태도를 다 헤아린다는 듯 선임하사들은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질문이 없으면 좋습니다. 곧 실시들 해주기 바랍니다."

그런데, 면마다 읍마다 일어난 말썽은 현지에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위로 위로 행정조직을 타고 번져 올라 마침내 도청의 문젯거리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면사무소나 읍사무소는 물론이고 도청이라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의 주거를 해결할 수 있는 예산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들을 얼어 죽게 만들어놓은 사태를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도지사는 토벌사령관을 향해 그 무계획적이고 무모한 행위를 비난하는 동시에 그 책임을 떠넘기고 들었다. 토벌사령관이라고 당하고 있을 리 없었다.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와 국가백년대계를 지키기 위한 군작전의 효과적인 수행을 함에 있어서는, 하는 식의 거창한 대응으로 군과 행정부의 불편한 관계가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마찰열은 도의 경계선을 넘어 중앙에까지 끼치게 되었다. 그 열전도체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신문이었다. 좌익 무장병들을 섬멸하는 것은 좋으나 수많은 양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여론이 전국화되었고, 결국 그 문제는 국회의 안건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심재모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선임하사들에게 소개 작전을 잠시 중단하라고 명령을 수정했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투표를 통해 소개령의 발동이 타당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 결정을 내렸으면 의당 뒤따라야 할 소개당한 사람들의 주거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워지지 않았다. 국민의 손으로 뽑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국회에서 그 지경을 하는 것을 보며 심재모는 어지러운 가치혼란과 함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다시금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좌익 무장병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양민들은 희생되어도 상관없다는 논리 앞에서, 국민의 생존보호가 먼저냐, 좌익척결이 먼저냐를 놓고 우선순위를 따지려는 자가 오히려 어리석을 뿐이었다. 대통령의 이름으로 세계반공 투쟁에 한국의 참가를 선언한 반공국가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소개령이 일단 국회의 결정을 거치게 되자 그 강압적 실시는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심재모는 관할구역의 책임완수를 위해 군인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기둥을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들의 몸부림을 외면한 채 공포를 쏘게 했고, 불길에 휩싸이는 너와집들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빼 물었다. 심재모의 그런 공적인 고심 한편으로는 사적인 근심거리가 께름칙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순덕이의 문제가 그것이었다.

"지가...... 지가 그 손수건을...... , 순덕이라고......"

시골티가 역연한 한 처녀가 얼굴을 들지 못하고 더듬거렸을 때 심재모는 다섯 장의 손수건이 떠오름과 동시에 '사령관님을 멀리서 등대불로 삼고 있는 못난 여자'가 바로 그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여자의 출현으로 심재모는 잠시 멍멍해져 있었다. 그 먼 벌교라는 거리감과, 자신이 거쳐 온 길을 저 여자가 어떻게 더듬어 찾아온 것인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얼굴 몰랐던 여자는 엄연히 자신 앞에 서 있었던 것이고, 그건 사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먼 길을 온 사람답지 않게 별로 지친 기색이 없는 여자는 붉게 물든 얼굴을 숙인 채 몸을 움츠리고 서 있었다. 이쪽에서 무슨 방도를 강구하지 않는 한 그 여자는 언제까지고 그렇게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심재모는 그 방도가 무엇인지 당황스럽고 난감할 뿐이었다. 무슨 말인가부터 하긴 해야 되겠는데 마땅한 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왜 왔느냐고 물을 것인가. 그건 대답이 필요 없는 바보 같고 피차에 쑥스러운 물음일 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행동으로 '임 찾아 불원천리'라는 대답을 해놓고 있었다. 일제시대를 거치고 해방이 되면서 세상이 아무리 급속도로 달라지고 있다고 해도 어찌 여자가 남자를 찾아 그 먼 길을 나설 수 있단 말인가. 그 적극성과 과감성에 이해가 미치지 않는 놀라움과 함께 앞에 선 여자의 품행이 슬그머니 의심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채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서는 처녀로서 갖는 부끄러움과 두려움 같은 것이 무슨 진한 향기처럼 드러나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나요?"

심재모는 겨우 이렇게 입을 뗐다.

"야아...... 수원 주소럴 알아내갖고...... 거그서부텀 물어물어 찾아 왔구만요."

"수원 집에는,"

심재모는 문득 말을 끊었다가,

"어떻게 내가 단양으로 갔다는 걸 알아내셨소."

그는 '우리가 어떤 사이라고 말했소'하는 말을 재빨리 바꾸었던 것이다.

"워찌 헐 수가 웂어...... 심바람얼 가는 질이라고 둘러 부쳤구만이라."

순덕이라는 처녀-보통 키에 수더분한 생김을 한 여자. 눈에 이끌리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못난 얼굴이 아닌 여자. 부끄러움을 잘 타는 포근한 느낌의 평범한 얼굴에서 눈만은 유난히 검고 선량해 보였다.

"지는 인자 집으로는 못 들어가는구만요. 아부지 손에 맞어 죽을 것잉마요. 참말로 지 맘얼 워찌 헐 수가 웂어서 죽기럴 작정허고 나슨 것인디...... 지발 가라고만 허지 마시씨요. 그냥 요렇게...... 더 바래는 것 웂이 그냥 요렇게 있으먼 된께요, 가라고만 허지 마시씨요."

말 수가 적은 그녀는 이 말만은 힘 꽁꽁 써가며 다지듯이 해나갔다. 그런 그녀의 눈은 애원의 빛으로 가득 찬 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 말과 눈물 앞에서 심재모는 그녀를 모질게 돌려세우지 못하고 말았다. 어물어물 하숙집 딸네 방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양순하고 말수가 적은 그녀를 대할 때마다 심재모는 그녀의 어디에 집을 뛰쳐나올 수 있는 강단진 마음이 감추어져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자기 하나만을 보고 그런 행동을 감행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날이 갈수록 심적인 무게가 더해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로서의 품행이나 성품을 의심할 데가 없는 그녀를 심재모는 가끔씩 먼 눈길로 바라보며 '역시 벌교여자'라는 생각을 떠올리고는 했다. 벌교의 그 도회적이고 개방된 분위기와 활달하면서도 억센 것 같은 사람들의 기질이 그녀에게도 숨겨져 있을 듯싶었다. 그곳은 지주들까지도 의외로 신식물이 많이 들어 있었다. 옷부터 양복차림의 대부분이었고, 재산도 논만 가진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사업체들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논만 믿고 장죽 물고 앉아 헛기침하는 옛날식 양반 지주가 아니라 사업의 손익을 재빨리 계산하고 돈버는 요령을 아는 사업가이면서 지주였다. 물론 그들은 가문이니 양반이니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지만 그건 자기네들을 과시하려는 거드름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의 언행에는 이미 양반다운 품격도 체통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최익달. 윤삼걸. 정현동이었다. 양반다운 언행으로 품격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김사용이나 서민영 정도였다. 순덕이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빨래를 하숙집 주인여자의 손에서 모두 넘겨받은 모양이었고, 하숙집 식구들은 자연스럽게 애인 취급을 하려들었다. 심재모는 엉거주춤한 상태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와의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기에는 공무에 쫓기는 나날이 너무 번잡스러웠고, 한편으로 그녀의 존재가 공무를 젖히고 장가를 생각하게끔 충동적이지 못했다. 저만치 거리를 유지한 채 순덕이라는 처녀와 언제까지 지내야 할 것인지 심재모는 마음 무거운 고민을 안고 있었다.

 

지리산지구 일대에서도 소개 작전은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심해져가는 추위와 함께 소개되는 마을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염상진은 전망이 밝지 못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군경의 소개 작전은 단순한 인명의 소개가 아니라 산골마을의 초토화 작전이었다. 염상진은 부대를 분산시켜가며 소개 작전을 벌이고 있는 군경부대를 기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건 전투를 겸한 산마을을 보존하려는 이중 작전이었다. 그러나 그건 거의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군경이 여기저기서 작전을 펴는데다가, 일단 불붙기 시작한 집들은 손을 쓸 길이 없었다. 옹달샘이나 실개울이고작인 산마을에서 불길을 잡을 만한 물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여섯 채 또는 예닐곱 채씩 모여 있는 산골마을들은 산중투쟁에서, 특히나 겨울투쟁에는 활용도가 큰 소중한 임시거점이었다. 주간보다는 야간투쟁을 주로 하는 자신들에게 산마을은 이모저모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독점 시설물 같은 것이었다. 그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적들은 겨울을 맞으면서 산마을의 초토화를 본격화시키고 있었다. 동계대공세를 감행한다는 것이 소문만이 아니라 현실로 육박해오는 것을 염상진은 실감하고 있었다. 야생동물도 한파가 몰아치거나 폭설이 내리면 마을로 접근하게 마련이었다. 하물며 사람이 겨울산중에 고립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위기였다. 적들은 이번 겨울을 이용해서 끝장을 보겠다는 속셈이 분명했다. 적들의 작전방법이 환히 드러난 이상 거기에 맞서는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적들이 고립섬멸 작전을 세웠다면 이쪽에서는 소조분산투쟁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다만, 산마을들이 초토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연의 악조건이었다. 앞으로의 투쟁은 적과 싸우고, 자연의 악조건과 싸우며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생존유지투쟁, 그것은 혁명의 과정에서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고, 중요시되어야 할 투쟁이었다. 제주도의 투쟁처럼 비극적 종결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적들은 제주도에서처럼 다시 승전가를 부르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어리석은 몽상이었다. 제주도는 고립된 섬이었다. 그래서 물량작전과 고립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지리산지구는 제주도가 아닌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고 뻗어가는 산들이 있었고, 소조분산투쟁을 전개하면 그 산줄기들을 따라 수만 개의 비트를 만들어가며 얼마든지 안전을 도모할 수가 있었다.

"대장님! 또 경찰이 뵌다는 보고구만이아."

한 사람이 비트로 뛰어들며 알렸다.

"거기가 어디요?"

염상진은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쩌 신학리 쪽으로 두 골짝 너메라는 구만요."

"갑시다, 거긴 분명 우리 관할이오."

염상진은 총을 들고 비트를 나섰다. 지구사령부는 각기 삼십 명씩, 육 개 중대로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정치 위원인 그는 부대를 직접 지휘할 책임은 없었다. 그러나 군당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물러나 앉아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갈수록 상황의 분리가 심화되고 있는 형편에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치 위원으로서 직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사령부 본부중대와 제일 가까운 부대를 맡은 것이다. 그리고 사령관과는 매일 한두 차례씩 만나도록 하고 있었다.

염상진은 부대를 일렬종대로 이끌며 구보 시켰다. 산을 구보한다는 것이 신체적으로는 무리였지만, 그 무리를 정신력과 숙달로 극복하고 체질화시키는 것만이 빨치산 활동을 극대화할 수 있는 동시에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는 부대이동에는 언제나 구보를 시켰다. 휴식이라는 것이 보통속도로 걷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방법은 자신의 부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정치위원의 발언으로서 전 사령부 병력에게 똑같이 시행되고 있었다. 두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섰을 때 염상진의 눈에 잡힌 것은 연기와 불길이었다. 산골짜기 저 아래 오목한 평지에 자리 잡은 서너 채의 오두막이 불붙고 있었다.

"워메, 한 발 늦어뿌렀구만이라."

일소대장이 숨을 몰아쉬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군경은 불을 지르고 즉시 퇴각해버리는 작전을 썼으므로, 집이 불타고 있는 것은 공격의 기회도 놓치고, 산마을 보호도 못한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염상진은 연기와 불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장님, 워째야 헐께라? 부대럴 돌릴께라?"

"아니오, 가봅시다."

염상진은 아래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한 줄을 이룬 병력이 무서운 속력으로 비탈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삼십여 명이 그리도 빨리 뛰고 있는데도 땅을 차는 발소리는 의외로 작았다.

네 채의 집은 손쓸 가망이 없도록 불길이 처마 밑을 휘돌고 있었다. 염상진은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한 채 똑바로 서 있었다. 피가 그러하듯 불길도 언제나 그의 가슴 벽을 치는 신선한 자극이었고, 가슴의 바다를 끓게 하는 뜨거운 충동이었다. 적에 대한 증오에 탄력을, 혁명의 의지에 열기를 가해 가슴을 끓게 했다. 피가 그렇듯이 불길도 분명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 살아 있는 생명이 무형체의 재로 변해가는 마지막 모습이 불길이었다. 피가 그리도 농도 짙은 아름다움이고, 불길이 그리도 현란한 아름다움인 것은 거기에 들어있는 생명력 때문은 아닐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색깔은 피와 불길이었다. 그것은 바로 혁명의 상징이었다.

"대장님, 닭장에 달구 새끼덜도 그대로 있고, 무시구뎅이도 그대로 있는디 고것덜얼 워째야 쓸랑가요?"

염상진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무슨 말이요?"

"야아, 정신웂이 닥달얼 해대는 통에 급히 뜨니라고 그랬는지 달구 새끼덜도 닭장에 그대로고, 무시구뎅이도 멀쩡허당께요. 인자 임자가 웂어져뿐 것인디 우리가 차지혀도 안 될랑가 말씸디리는 구만이라."

"임자가 있기야 있지요."

염상진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 달구새끼덜, 모시 안 주먼 시나부로 비틀어져 죽든지, 여시 밥이 되든지 헐 것인디요?"

선임소대장은 의아한 눈길로 염상진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그럴 거요. 주인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가 먹도록 합시다."

"야아, 알겄구만이라."

선임소대장은 신바람 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나팔을 대고 뛰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 보소, 동무더얼, 대장님 허락이 떨어졌응께 달구 새끼고 무시고, 묵을 것 있으먼싹 다 찾어내드라고잉. 싹 다 찾아내여."

불길 속에서 통나무며 살림살이들이 튀는 소리에 닭들이 꼬꼬댁거리고 날개 퍼득이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섞이고 있었다. 거기에 부하들의 들뜬 소리까지 섞여 출렁거리는 것을 들으며 염상진은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대장님, 다 되얐구만이라."

선임소대장의 흡족한 얼굴이 염상진의 시야를 막았다.

"출발합시다."

돌아서던 염상진은 주춤했다. 부하들은 제각기 무언가를 들고, 지고 있었던 것이다.

"뭐가 저리 많소?"

"야아, 고구마도 찾아내고, 된장, 꼬치장도 아까바서 퍼담고 그랬구만이라."

"횡재했소. 그만 갑시다."

염상진이 걸음을 떼어놓았다. 불길들은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벌교의 고읍들 둘레로 흩어져 있는 동네 언저리나 회정리 삼구와 장양리의 산자락에는 하늘만 겨우 가린 급조한 움막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옥산 너머에서 소개당한 사람들은 고읍들에 자리 잡았고, 제석산 뒷골에서 소개당한 사람들은 회정리 삼구나 장양리에 움막을 친 것이다. 그들이 거처하는 움막은 대나무로 얼기설기 뼈대를 엮고, 이엉을 둘러쳐 간신히 바람막이 시늉을 해놓고 있었다. 이엉이라도 네댓 겹으로 둘렀으면 통바람이 제멋대로 드나드는 것을 다소나마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겨우 두 겹 정도 두르고 만 움막 안은 한데나 다름이 없었다. 구들이 놓였을 리 없는 바닥에도 짚이나 가마니가 깔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나마 움막을 칠 수 있었던 것은 집집마다 짚단을 추렴했기 때문이었다. 지붕갈이를 끝낸 농가들이 쌓아두고 있는 짚단을 빼낸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읍사무소 직원과 경찰은 그들의 버릇대로 터무니없이 으름장을 놓고 다녔다. 졸지에 집을 잃은 산마을 사람들은 그 움막 안에서 오들오들 떨며 두고 온 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겨울나기는 배부르고 추운 것보다는 배 덜 부르고 등 뜨신 것이 한결 낫다는 것을 그들은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산밭을 일군 양식이라서 비록 넉넉하게 먹고 살지는 못했지만 나무는 흔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구들을 식히지 않고 살아온 살림살이였다. 양식이고 이부자리고 챙길 수 있는 데까지 챙겼지만 경황이 없기도 했고, 힘이 부치기도 해서 두고 온 것들이 더 많았다. 마당가에 갈무리한 무우도 손도 못 댔고, 아랫방의 고구마도 그대로 두었고, 도토리가마니도 헐지 않은 채였고, 가지가지 산나물말림도 헛간 벽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세간살이도 긴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동이가 필요한가 하면 바가지가 없었고, 불덩이를 오래 간수하려고 보면 화로가 없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고 캄캄하여 산마을 사람들은 모여 앉으나 혼자 있으나 한숨이었다. 그들은 용기를 내서 읍사무소를 찾아보기도 했으나 냉대만 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읍사무소에서는 유지들로 얽어진 후원회의 눈치 살펴가며 계엄군이나 토벌대의 뒷수발을 하기에도 힘이 부치는 판에 그들의 생계문제에까지 관심 써줄 리가 없었다. 더구나 동계대토벌작전을 앞두고 있는 경찰에서는 그들의 존재 같은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관업무가 한 발 멀어진 데다가, 새 작전에 대한 상부의 지시가 전에 없이 강력해 그 대비에 신경을 집중시키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경찰이 아무리 긴장상태에 있다고 해도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해야 하는 계엄군에는 비할 것이 못되었다. 계엄군이나 지휘관들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강도 높은 상부의 명령이 매일 전통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전사자나 중부상자로 그동안에 생긴 결원이 보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병력보충은 새 작전이 임박하고 있음을 전화로 하달하는 명령보다 더 강하게 실감시켰다. 보충병을 부대에 배치시켜가며 백남식은 식욕도 성욕도 차츰 떨어져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몇 달을 편하게 지낸 방어근무가 위험을 무릅쓰는 전투태세로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동계고립이라는 작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빨갱이들은 깨끗하게 씨를 말려야 될 일이지만 꼭 겨울에 공격전을 벌일 이유가 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적에게 불리한 상황이 꼭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일 수만은 없었다. 특히 자연조건의 경우에는 적에게 불리한 만큼 아군에게도 불리했고, 어떤 경우에는 적이 당하는 불리보다 아군이 당하는 불리가 더 크기도 했다. 이번 작전이 그런 경우이다. 산촌들을 소개시켜 보급을 차단하고 은신처를 없애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거기다가 적극적인 소탕전을 벌인다는 것은 무모하고 무리한 일이었다. 그렇게 고립을 시켜놓은 상태에서 산 속으로 파고드는 적극전을 펼 것이 아니라 산 가까운 마을들에 병력 배치만 하면 되었다. 보급원이 고갈된 적들은 마을로 접근하게 마련이고, 그때를 포착해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 유인작전으로 겨울을 넘기면 적들은 얼어 죽고, 굶어죽고, 총 맞어 죽어 힘들이지 않고도 반 정도는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봄을 이용해서 잔당을 섬멸해버리는 것이다. 이런 여유 만만한 작전을 세우지 못하고 상부에서는 번갯불에 콩 볶아먹을 생각만으로 무조건 밀어붙이기를 해대고 있었다. 개도 막다른 골목으로 쫓지 말라, 적을 포위하되 최소한의 퇴로까지 차단하지 말라, 하는 방법의 기초도 모르는 자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하는 꼴들인 것이다. 산 속으로 파고드는 공격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 어느 쪽인가 쯤은 알아야 할 일이 아닐 것인가. 산에 익숙한 것으로 치자면 적에 비해 아군은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적은 토끼나 노루가 아니라 엄연히 무장을 갖춘 병력이었다. 그런데 마치 토끼몰이라도 하는 것처럼 산 속으로 병력을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산에 익숙한데다, 악조건에 처한 적들은 발악적으로 대항할 것이다. 적이 발악할수록 아군의 피해는 커지는 법이었다. 성질 급하기로 이름난 일본 놈들 군대도 이따위 식의 작전은 하지 않았다. 아군이 불필요한 피해를 입어가며 겨울 안으로 토벌을 끝내는 것하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 줄여가며 봄까지 토벌을 연장하는 것하고, 어떤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인가. 그 몇 개월 차이가 무슨 그리 대수라고 우격다짐으로 몰아치는 것인가. 이 대통령이 해를 넘기지 않고 빨갱이들을 완전 소탕하겠다고 국민들 앞에 약속했다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었지 군인은 아니지 않는가. 전투작전이라고는 쥐꼬리만치도 모르는 영감탱이가 멋대로 한 장담을 들어주기 위해 작전도 아닌 작전을 작전이라고 세워 밀어붙이다니, 다 간신배 같은 놈들이다. 백남식은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걸핏하면 짜증을 터뜨렸다.

"어엄니! 엄니, 나 죽어!"

목이 터지도록 솟구쳐 오르는 이 소리를 외서댁은 이빨을 갈아붙이며 짓씹었다. 전신이 비비 틀리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속에서도 소리가 문 밖으로 새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은 그녀는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눔아, 웬수야, 내 웬수야. 염상구에 대한 증오를 질겅질겅 씹는 것과 마찬가지로.

", 그려, 쪼깐만 더 심 써라, 잉 쪼깐만 더!"

외서댁의 손을 잡고 힘을 북돋우고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워메, 이눔아, 웬수야, 으으윽......"

외서댁은 눈을 부릅뜨며 이빨을 맞갈았다. 염상구 그놈이 남편을 죽이고 있었다. 칼로 남편의 가슴을 찌고 있었다. 남편이 시뻘건 피를 철철 흘리며 죽고 있었다.

"안 뒤야! 안 뒤야아!"

외서댁은 염상구의 목을 낚아채려고 모든 힘을 모았다. 그런데 염상구도 남편도 간 곳이 없고, 아래로 내장이 쏟아져 내리는 훵 빈 기분과 함께 반짝 정신이 들었다.

"와따, 되얐다. 불거져 부렀다!"

어머니의 기쁨에 찬 소리가 외서댁의 귀를 때렸다.

웬수 놈에 씨가 인자사 떨어져 나갔구마.’

외서댁은 왈칵 울음이 솟구치며, 온몸이 한정 없이 아래로 까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안직 정신 놓덜 말어."

아이 울음소리가 울리면서 뒤따라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눈을 감은 외서댁은 양쪽 관자놀이께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서늘한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도 까닭 모르게 눈물이 흘렀지만 그때는 서늘한 감촉이 아니었었다. 따뜻하고도 아늑한 감촉이었다. 그때는 남편이 문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 자신은 아이 울음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뭐냐고 물었다.

"염병허고, 가이네다."

어머니가 낮게 말하며 혀를 찼고,

"워쩔께라!"

자신은 너무 실망스러워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기운을 다 써버려 풀려 버린 몸은 일으켜지지 않았다.

"젊디나 젊은 나이에 무신 걱정이다냐. 자꼬 낳먼 되제."

어머니의 태평한 말이었다. 아이 울음소리가 울리자 남편의 목소리가 밖에서 먼저 들려왔다.

"머신게라?"

"......"

어머니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조갑지구마."

했다.

"잘되얐구만요. 첫 딸언 살림 밑천이라는디."

남편의 흔쾌한 대꾸였고, 자신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이쪽서 헐 말얼 먼첨 혀뿌네."

어머니는 중얼거리고는,

"안 섭헌가?"

하고 물었다.

"섭허기는이라. 이만 낳고 말란 간디라?"

주저 없이 넘어온 남편의 대꾸였다.

"하먼, 하먼. 앞으로 을매든지 낳먼 되제. 자네가 장부는 장부시."

어머니의 홀가분해하는 말을 들으며 자신은 떠밀려오는 잠 속으로 묻혔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남편은 끝내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이제 가고 없고, 자신은 남의 자식을 낳아놓고 있었다.

"염병허고, 꼬치다와."

어머니의 말이 외서댁의 가슴을 심하게 쳐왔다. 그녀는 가슴의 벌떡거림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엄니, 그 말얼 멀라고 허요, 생김도 보지 말고 갖다 주기로 해놓고.’

그녀는 남편에 대한 죄가 다시 사무쳐오는 걸 느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가 울지 마라. 나가 하도 기가 차서 안헐 말얼 혔다."

어머니의 손이 이마를 쓰다듬었다. 외서댁은 흐느낌을 삼키려고 애썼지만 가슴에 가득한 서러움은 자꾸 위로만 솟아올랐다.

"다 끝났응께 한숨 자그라."

어머니의 손이 이마를 떠났다. 허전함이 찬바람처럼 섬뜩하게 밀려들었다.

엄니, 이년 신세가 워찌 요리 꾀일께라. 인자워쩌크롬 한 평상을 산당가요.’

외서댁은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과 외로움으로 몸을 비꼬았다. 남편이 염상구가 쏜 총을 맞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혼절했고, 정신을 되찾고는 딸을 데리고 다시 죽을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다. 남편이 없는 세상을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남편의 그 허망한 죽음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친정에서는 그런 눈치를 챈 것이었을까.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았다. 그리고 여자의 세상살이에 대한 아리고 쓰린 이야기들을 이모저모 들려주었다.

"아가, 아가."

외서댁은 어렴풋이 눈을 떴다. 어느 사이엔가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일나그라, 식기 전에 멱국 먹어야제."

"무신 잘난 일 혔다고 멱국할라 묵고 그래라."

외서댁은 얼굴을 돌렸다.

"무신 소리다냐. 씨야 워쨌그나 간에 니가 적근 고상이야 이때나 저때나 매일반이제. 염가눔 씨 좋으라고 묵는 거이 아니고 니 몸 건지자고 묵는 것잉께 어여 일나그라."

어머니가 등을 받쳐주는 대로 외서댁은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모르게 방안을 둘러보았다. 넓지도 않은 방 그 어디에도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벌써 데려다준 것일까? 내가 그리 오래 잔 것일까? 그녀는 다시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자아, 얼렁 밥이나 묵어라. 아그넌 목간시켜 아랫방에 뉘어놨응께 걱정 말고."

어머니가 외서댁의 손에 숟가락을 들려주며 쯧쯧 혀를 찼다.

"걱정이야 무신......"

외서댁은 굳이 이 말을 했다. 어머니와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젖을 빨리지 말고 아이를 낳자마자 염가네 집으로 갖다 줘야 한다는 것이 이모의 의견이었다. 어머니는 그 말에 찬성하면서, 얼굴도 볼 필요가 없다며, 이모를 앞지르는 의견을 내놓았다. 외서댁은 군말 없이 어머니의 생각을 따르기로 약속했다. 낙태를 시키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허사였고, 결국 낳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을 포구 썰물에다 띄울 것인지, 뻘밭에다 묻을 것인지, 절간 앞에다 버릴 것인지, 별의별 궁리를 다했던 것이다. 어차피 핏줄의 연을 이을 수 없는 처지에 그 얼굴은 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방안을 두리번거렸던 것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첫 아이 때 익힌 습관일 뿐이었다. 배를 그득하게 채우고 묵직하게 눌렀던 포만감과 무게감이 갑자기 없어져 버리게 되자 몸 가벼운 상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감이 정신을 엇갈리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저 액물이 니 몸에서 떨어져 나감스로 니 팔자 액운도 항꾼에 떨어져나간 것잉께 인자 다 잊어뿔고 몸 보존이나 잘혀야 쓴다."

어머니가 젓가락으로 미역 건더기를 외서댁의 숟가락에 올려놓아 주며 말했다.

"엄니, 암 말도 마씨요. 냄편꺼지 잡아묵은 이 팔자 그른 년이 요일로 액운 때웠다고 앞질에 무신 신신헌 꼴 있겄소."

그녀는 목이 메어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외서댁의 어머니 밤골댁은 딸이 깊은 잠에 빠진 것을 보고 나서 아이를 안고 총총히 집을 나섰다. 사람들을 피하느라고 신작로를 버리고 철길을 따라 걸었다.

요런 찔기고 모진 목심아, 무신 영화, 무신 공명 얻을 것 있다고 그리 악착시리 이 시상으로 왔을끄나와. 태어남스로 에미 품 떠야허는 기구헌 팔자에, 애비라고 막돼묵은 왈패 오야붕인디, 니 전정이 막막허다.’

바람막이를 하느라고 얼굴까지 엎은 포대기 속에서 기척 없이 자고 있는 아이를 고쳐 안아가며 밤골댁은 이런 심란스런 생각을 떼칠 수가 없었다.

"손지 받으씨요."

염상구의 어머니 호산댁 앞에 아이를 내려놓으며 밤골댁이 한 첫마디였다. 그 얼굴만큼이나 냉기서린 말이었다.

"워메!"

호산댁은 소스라치며 입을 헤벌린 채 굳어졌다.

요 일얼 워쩔 것이다냐, 요 일얼 워쩔 것이다냐.’

막연하게 걱정해왔던 일이 막상 눈앞에 닥치자 호산댁의 생각은 딱 정지해서 제자리만을 맴돌았다.

"나 가겄소."

밤골댁은 선 자리에서 그대로 돌아섰다.

"봇씨요, 쪼깐만 있으씨요."

호산댁은 질겁을 해서 일어나며 밤골댁의 저고리 소매를 붙들었다.

"나 할 말 웂소."

밤골댁의 싸늘한 내침이었다.

"고 맘 나가 다 아요. 나도 딸자석얼 키우고, 예운 사람인디 워찌 그 기맥히고 절통헌 속얼 몰르겄소. 나야 입이 열기, 백 개라도 헐 말이 웂은 사람이요. 근디 말이요, 저 핏뎅이럴 요리 덜퍽 좋고 가불머 이 늙은 것이 워쩌겄소."

호산댁의 늙은 얼굴은 더 많은 주름이 잡히며 울고 있었다.

"무신 소리요, 시방. 죽이든지 살리든지 거그서 맘때로 헐 일이제 우리야 몰를 일이오."

밤골댁이 소매를 뿌리쳤다.

"워메 나 잠 봇씨요."

소매를 놓치며 비틀하던 호산댁은 후닥닥 다시 소매를 붙들고는,

"아요, 인자부텀 우리가 맡을 책음인 것 다 아요. 근디, 애비란 것이 병원에 눠 있는 디다가, 쩌것이 뱃속에 나온 지 삼칠일도 안지낸 핏뎅인디, 이 늙은 것이 무신 수로 쩌것 명 보존얼 시키겄소. 우리 아덜이 병원에서 나올 날이 오늘 낼 허고 있응께, 존 일 헌다고 그때꺼정만이라도 명줄을 이어주씨요."

그녀는 침 마르게 애원했다.

"아덜만 불량시런지 알었등마 엄씨할라 뻔뻔시럽소이. 그그서도 아그낳고, 티우고 혔땀시로, 씨가 문딩이 씨든 개잡눔에 씨든 여자가 지 속으로 빼닌 새끼헌티 젖꼭지 한분 물려뿌렀다 허먼 그 정 띠기가 삭신 짤라내는 것만치 에롭다는 것을 몰라서 고런 소리 뻔뻔허게 허고 앉었소, 시방? 우리 딸 신세 그리 진창 맹글어 놓고도 머시가 또 모지래서 정붙인 핏줄 끊는 한꺼지 가심에 박아줄라고 허요. 사상이 드러바서 나가 가심에 든말 하나또 못허고 있다는 것이나 똑똑허니 알어두씨요."

밤골댁이 팔을 세차게 뿌리쳤고, 소매를 놓친 호산댁은 비틀거리다가 문지방을 넘어섰다.

"봇씨요, 나가 다 잘못혔소. 나 맘 급허다 봉께로 짚이 생각 못허고 그리 말이 잘못 나갔소. 무신 욕얼 묵어도 싸요. 근디 말이요, 아그 엄씨는 몰르게, 우리 나이든 사람찌리 한 가지만 도와주시씨요. 아그가 젖얼 안 뽈아도 엄씨 젖이야 불어나는 법인디, 그 아까운 젖 짜내 암디나 찌끄러뿔지 말고 나헌테 살짝허니 넘게주씨요. 애비 소퉁이가 밉제 새끼가 무신 죄가 있겄소. 새끼헌테야 에미 젖이 질인디, 나가 쥐도 새도 몰르게 걸음헐 것잉께 이 늙은 것 불쌍허니 생각혀서 짜낸 젖 웂애지 말고 넘게주시씨요."

호산댁은 밤골댁을 따라 종종 걸음치며 애원하고 있었다.

"몰르겄소, 워째야 쓸란지."

매정하게 끊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상대방의 그저 사죄뿐인 태도와, 기왕 내버릴 젖일 바에야 하는 마음이 들어 밤골댁은 그런 대꾸를 하게 되었다.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나가 눈감을 때꺼정 그 은혜 안 잊어뿔겄소."

호산댁은 굽어진 허리를 몇 번이고 더 깊이 굽혀보였다. 호산댁의 그 눈치 빠른 대처에 밤골댁은 아무 말도 안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그 일은 약속이 이루어졌다.

"산모는 탈이 웂소?"

호산댁은 굽어진 허리를 편다고 펴며 처음으로 밤골댁을 바로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 슬픈 울음 같기도 하고, 죄스러운 울음 같기도 한 수심이 서려 있었고, 눈에는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그냥 그만 허요."

밤골댁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걸음을 옮겨놓았다.

"나가 죄인이오."

호산댁은 밤골댁의 뒤에다 대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목소리가 메어 있었다. 밤골댁이 고샅을 벗어나는 것을 보고 호산댁은 부산하게 돌아섰다. 혼자가 되자 갑자기 마음이 집으로 쏠려갔다. 꼭 무엇이 끌어당기는 것만 같은 이끌림이었다. 부정하게 얻은 핏줄이라도 핏줄은 핏줄이었다. 사립을 들어서는데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워메, 잠이 깼는갑네!"

호산댁은 멈칫 섰다가 치마귀를 거머잡으며 잰걸음을 쳤다.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까와는 다른 탄력이 실려 있었고, 얼굴에도 밝은 기운이 드러나 있었다. 좁은 마당을 가로지르는데도 그녀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죄를 빌고, 젖을 얻어내고 하느라고 아이가 어느 쪽인지를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방으로 들어선 호산댁은 서둘러 포대기를 젖히기 시작했다.

"아이고메, 꼬치시, 꼬치!"

아이가 가늘고 작은 팔다리를 꼼지락거리며 숨차게 울어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산댁은 감격적으로 소리쳤다.

하먼, 우리 상구가 을매나 야물딱지다고. 요렇그름 태인 새낄수록 꼬치럴 달고 나와야제 넘 보기도 덜 숭허고, 지 신상도 덜 에롭제.’

그러나 아들손자라는 반가움이나 다행감은 별로 오래 가지 못하고 호산댁의 마음에는 걱정이 커가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시작된 걱정이었다. 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니, 잘했다고 할 것 같지가 않은 예감이 차츰차츰 부풀고 있었다.

그래서야 안 되제, 지가 사람으로 낯들고 살라먼 인륜을 거실려서는 안 되제. 지가 뿌린 씬께 고마웁게 받아 고이 거둬야제. 지가 저질른 잘못 시상이 다아는 일인디, 지가 딴 맘 묵어서야 죄받고, 벌 받제. 나가 쪼깐만 덜 늙었어도 졸 것인디.’

호산댁은 마음이 초조하기만 했다. 아이를 다둑거려 재운 호산댁은 부엌으로 나갔다. 아직 시간은 일렀지만 병원으로 가져갈 아들 점심을 서둘렀다. 아이를 위해서도 방이 따뜻해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핀 호산댁은 뒤란으로 나섰다. 판자울 너머로 뒷집여자를 불렀다.

"헐 말이 있는디 우리 집으로 잠 올 수있겄소?"

"그러제라."

뒷집여자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것처럼 금세 사립을 들어섰다.

"나가 핑허니 빙원에 댕게올 동안에 방안에 앉아서 아그럴 잠 봐주씨요."

"아그라고라?"

뒷집여자가 무슨 소리냐는 얼굴이 되었다.

"소문 들어 다 알겄제만 우리 작은 아덜 애밴 여자안 있습디여. 그 여자가 몸 풀어 아럴 보냈소."

"고것이 원젭디여?“

뒷집여자가 마른침을 삼키며 호산댁 옆으로 바싹 다가 앉았다.

"을매 안 지냈소."

"멋입디여?"

"꼬치요."

"워메 아까와라."

그 말이 걸렸지만 호산댁은 그냥 지나쳤다. 부정한 짓을 했기에 듣는 말이었던 것이다.

"글먼 작은 아덜언 안직 몰르고 있는 것 아니겄소?"

"인자 가서 알려야제라."

"아덜이 워쩔께라? 워째, 반가와라 헐랑게라?"

"안 반가와도 워쩔 것이요. 지 새끼 지가 건사허는 것이사 당연지사제."

"아이고메, 총각 아부지 되야부렀소이. 장개 가자먼 쪼깐 말 씹히게 생겼는디라?"

"환영이야 받겄소만 남잔께 워찌 되겄제라."

"그래저래 남자가 좋긴 존디, 그리 흠 있음시롱도 처녀장개 들라고 허겄제라?"

그 입바른 소리에 호산댁의 심사가 꿈틀 꼬였다. 그러나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 또한 부정한 짓을 해서 듣는 말이었다.

"고것이 이 시상 남자가 지닌 도적눔 심뽀 아니겄소."

호산댁은 자기가 먼저 이렇게 말해 뒷집여자의 말을 막고자 했다. 그 말은 얼핏 들으면 아들을 욕하는 것 같았지만, 따지고 보면 아들에 대한 철저한 변호였다. 어디 내 아들만 그러느냐, 하는 말이 감추어진.

"그러제라. 옛적부텀 여자야 실금이 가도 안 되고, 남자야 한쪽이 떨어져나가도 암시랑 안 헌 것이 이 시상 법칙잉께요."

호산댁은 무심한 듯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아들이 욕을 피하게 돼 적이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호산댁은 밥보퉁이를 작은아들 옆에 놓고 앉았다. 그리고 방바닥을 내려다본 채 불쑥 말했다. "니가 오늘부텀 아부지가 되얐다."

"야아? 그 무신 뜽금웂는 소리다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던 염상구가 윗몸을 벌떡 세웠다.

"뜽금웂기는. , 외서댁이란 여자가 니 씨 담고 있다는 것 잊어불고 살었냐!"

호산댁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아들을 쏘아보았다.

"잊어뿔기야 혔겄소만...... 워째, 일이 워찌 되얐소."

몇 년 동안에 볼 수 없었던 어머니의 기운찬 태도에서 염상구는 젊었을 때의 어머니 모습을 보며 마음이 켕기는 것을 느꼈다.

"일이 워찌 되기넌...... 외서댁 친정엄니가 품고 왔드라."

그래, 받었소?’ 하는 말이 곧 터져나가려고 했지만 염상구는 꾹 눌러 참았다. 약간 기분이 묘한 것뿐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었고, 기를 세우고 있는 어머니를 상대로 긴 말을 엮고 싶지가 않았다.

"워째 암 말도 웂냐."

호산댁은 불안한 기색으로 아들을 살폈다.

"품고 온 것 받았으먼 되얐제 무신 말얼 더 혀라."

염상구는 요 밑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니 담배 텔라고 그냐? 의사선상님이 담배넌 입에도 대지 말라고 그리 당부 허시든디, 병 도지먼 워쩔라고 그러는겨."

"와따, 그리 말 혀갖고 원장헌테 딛기겄소? 더 크게크게 말허씨요."

염상구는 거침없이 성냥을 그어댔다.

"아이고메거 징헌 삼시랑. 워째 시상에서 무선 것이 암것도 웂으까이. 딴 것이야 다 몰라도 아플 적만이라도 의사선상님 무서바 헐 줄은 알어야제."

호산댁은 빠르고 길게 혀를 차댔다.

"의사 말대로 혔다가는 병 더 도지요. 실밥 뽑았으먼 빵꾸야 다 때와진 것인디 담배럴 워째 못 꼬실리게 혀라. 나가 다 알어서 허니께 엄니넌 가만 잠 있으씨요."

염상구는 상을 찡그리며 푸우 소리가 나게 연기를 내뿜었다.

"아덜이다."

호산댁이 불쑥 말했다. 염상구는 어머니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꼬치여."

염상구는 어이가 없어 어머니를 쳐다보았던 것인데, 호산댁은 아들이 자기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으로 생각하고 재차 말했던 것이다.

"밥묵게 보튕이 끌르씨요."

염상구는 손바닥으로 상처부위를 누르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호산댁은 밥 보퉁이의 매듭을 빠른 손놀림으로 풀면서 가슴에 차 있던 불안감을 소리 안 나는 숨결에 실어 내보내고 있었다. 아이를 받아들인 것을 트집잡을까봐 처음부터 마음을 공그리고 아들을 대했던 것인데, 아들은 의외로 순순하게 넘어갔던 것이다. 그런 아들이 고맙고, 전에 없이 실해 보였다. 염상구는 밥을 건성으로 먹으며 외서댁을 그리고 강동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강동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부하가 물고 왔을 때 이상하게도 먼저 떠오른 것은 외서댁이었다. 그것도, 그 여자를 마음놓고 가질 수 있다는 탐심이 아니었고 그 여자의 가슴에 너무 큰 못을 박았다는 죄책감이었다. 그 여자를 놀이개 삼으면서 강동식도 잡자고 마음먹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이 막상 일이 계획대로 되어 강동식이 없어지게 되자 엉뚱한 마음이 생겨난 것이었다. 왜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지는 자기의 마음이면서도 스스로도 알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저 놀이로 몸을 섞으면서도 무슨 정이 들었던 것인가. 내 씨를 품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쓰였던 것인가. 하긴, 저수지에 빠져서 되살아났을 때 겉으로야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더 당당하게 행세했지만 속으로는 놀라고, 병원을 한 번쯤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꼭 그런 것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강동식을 내 손으로 직접 쏴 죽여서 그런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어느 것도 흡족한 이유가 되지 못한 채 그녀에 대한 마음쓰임은 가슴 한구석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보내왔다는 말을 듣자 그 마음은 더 확실하게 모양을 드러냈다.

"손이 이쁩디여?"

염상구는 숟가락을 놓으며 불쑥 물었다.

"무슨 소리 헐라고 그리 묻냐?"

호산댁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아들을 쳐다보고는,

"사람 시늉만 헌 핏뎅이가 이쁘고 밉고가 워딨다냐. 핏줄이라고 헌께 중히 생각키고 맴이 씨이고 허제 그냥 핏뎅이로만 봄사 모다 정내미 떨어지고 징상시럽제."

불안감으로 말을 길게 했다.

"멀 믹에 키울라요?"

염상구는 성냥을 칙 그어대며 물었다.

"산 목심 쥑이기야 허겄냐."

호산댁은 보퉁이를 싸며 대답을 피했다. 아들이 훼방을 놓을지도 몰라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일을 하려고 했다.

염상구는 나흘이 지나 퇴원했다. 그 동안 그도 아이에 대해 묻지 않았고, 호산댁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퇴원을 한 그는 집으로 가지 않고 경찰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에 가서 눠야제 걸음이 그래갖고 워디로 간다냐와. 높은 양반덜헌테 인사야 쪼깐 더 있다가 채레도 안 되겄냐?"

호산댁이 안타까운 얼굴로 앞을 막아섰다.

"참말로, 걱정도 팔자요잉. 엄니가 좋아라 허는 의사선상님이 머라고 헙디요? 자꼬 방구가 나와야 얼렁 낫고, 방구가 나오게 헐라먼 심드는 것 참음시로 걸어댕게야 헌다고 안 그럽디여? 나가 방구 뽕뽕 나오게 혀서 얼렁 나슬라고 그러는 것잉께 나넌 냅두고 엄니나 집으로 가씨요."

", 의사선생님이 그리 말씸허시기는 허셨는디, 글먼 니 혼자 댕기지 말고 니 꼬붕 한둘 델꼬 댕게라."

"나도 그럴라고 혔소."

그렇게 어머니와 헤어진 염상구는 경찰서로 가지 않고 소화다리를 건넜다. 그는 느리고 힘겨운 걸음걸이로 도래등을 넘어 회정리 삼구로 들어섰다.

"워메!"

방문을 열었다가 토방에선 염상구와 눈이 마주치자 외서댁은 질겁을 하며 문을 닫아버렸다.

"대낮에 사람얼 보고워째 그리 놀래고 그러요."

염상구는 부드럽고도 점잖은 어조로 말하며 마루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생각처럼 선뜻 올라가지지가 않았다. 상처자리가 묵지근하게 당기면서 무릎에 힘이 모아지지 않았다. 조금 무리해서 걸어온 길이었다. 그는 다리를 내리고 손부터 마루를 짚고 한 다리씩 올려놓았다.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열리지 않았다.

"봇씨요, 문 끌르씨요. 나가 시방 퇴원허는 질인디, 걷기가 몰뚝잖은디도 헐 말이 있어서 역부러 왔소."

염상구는 문을 질벅였다. 지게문이 힘없이 삐꺼덕거렸다.

"들을 말 웂소."

방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짧고 차가운 말에서 염상구는 자기가 너무 빨리 찾아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몹쓸 말 허잔 것이 아니오."

"들을 말 웂소."

"외서댁 위허는 말이오."

"......별 징헌 말 다 있소."

염상구는 울컥 화가 치밀려고 했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게 마음 쓰려고 찾아와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되었다.

"워메, 무신 남정네다냐!"

등뒤에서 바락 소리치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염상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워메, 요것이 뉘기여!"

밤골댁이 흡 숨길을 멈추며 우뚝 섰다.

"염상군디요, 헐 말이 있어서 퇴원허는 질에 역부러 찾어왔는디 문얼 안 열어서 이러고 있구만이라."

파리한 안색의 염상구는 변명처럼 말했다. 마당에 선 여자가 외서댁의 친정어머니라는 걸 직감한 염상구는 한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밝힐 필요를 느꼈고, 몸이 불편하다보니 목소리까지 기운이 없었던 것이다.

"할 말언 무신 헐 말!"

상대방의 맥없는 태도를 보고 놀라움을 말끔히 씻어낸 밤골댁은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토방으로 올라섰다.

"외서댁허고 의논지게 이약 헐란 것이었는디, 가야 쓰겄소."

염상구는 마루를 내려서려 했다.

"음마, 요상허시? 딸헌테 의논지게 헐 이약이먼 워째 엄씨가 있다고 못허까? 그리 꽁댕이 실실 숨킬라고 허는 것 봉께 필경 의논지게 헐 이약이 아니고 또 못된 짓 헐라고 온 것 아니여? 인자 우리도 청년단 감투 하나또 무서버허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허니 알어야 써. 강서방이 죽어뿌렀응께 인자 우리넌 좌익집안도 빨갱이집안도 아니다 고것이여."

밤골댁의 목소리는 점점 열이 받치고 있었다. 그 억지소리에 염상구의 성질은 날을 세웠다. 그러나 끝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찔러왔다. 그 말은 강동식을 죽인 죄책감을 느끼게 한 것이 아니라 묘한 슬픔을 느끼게 했다. 그는 참자고 마음을 눌렀다.

"맘 한분 좋게 묵어보자고 배창새기 땡기고 꾀는디도 참아감스로 도래등 넘어온 놈 놓고 그리 애맨 소리 혀서 오기 도지게 헐라요? 나가 못된 짓거리 또 헐라고 왔다는디, 아짐씨 눈에는 시방 나 꼬라지가 못된 짓거리 혀질 상불르요?"

염상구는 밤골댁을 쳐다보며 쓰게 웃었다.

"병색이야 맥질혔구마......"

밤골댁은 말을 얼버무리고는,

"시상이 다 아는 못된 속아지에 맘 한분 좋게 묵자고 혔어도 을매나 좋게 묵어지겄어. 까마구가 지 아무리 목간헌다고 황새 되간디?"

그녀는 얼굴을 하늘로 쳐들고 콧방귀를 뀌었다.

"무신 말인지 들어보도 않고 그리 오기 질를라요!"

염상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입을 딱 벌리며 상처부위를 감싸 안았다.

"나가 듣데는 말 안 험담스로?"

밤골댁은 아파하는 염상구를 보며,

아이고 꼬시다, 배창시나 팍 터져뿌러라,’

저주하고 있었다.

"못헐 것 웂소. 어디 들어봇씨요."

염상구는 결기를 세웠다. 세상살이에 닳아진 저런 늙은이가 있으면 이야기가 더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왕 뚫린 귄디 못 들을 것 웂제. 어멈아, 방문 따그라."

어떤 자신감에 찬 밤골댁은 기세 좋게 마루로 올라섰다. 자리를 잡고 앉은 염상구는 담배부터 피워물었다. 담배연기를 두어 번 뿜어내며 가느다란 눈으로 외서댁을 빠르게 훑었다. 애 낳은 여자들한테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희멀건하면서도 푸슥푸슥한 부기가 외서댁한테서도 느껴졌다.

"나가 배운 것 웂이 무식헌 디다가, 요런 일로 말얼 허기로는 생전 첨이라서 나가 묵은 맘얼 말로 지대로 전허게 될란지 워쩔란지 몰르겄소만 이약허기로 된 마당잉께 있는 대로 혀보겄소. 긍께, 나도 총 맞고 병원에 눠서 강동식이, 아니, 아그 아부지가 죽었다는 소식얼 들었는디, 그 소식얼 듣고 봉께 영판 맴이 요상시럽고 지랄 겉습디다. 그짓말 안허고 말허자먼, 그 사람이 죽어뿔먼 속이 씨언헐지 알었는디, 정작 죽었다는 말얼 듣고봉께 씨언허덜 않고, 등께 고것얼 머시라고 혀야 헐끄나. 껄쩍찌근헌 것도 아니고, 미안시런 것도 아니고, 몰뚝잖은 것도 아니고, 하여튼지 간에 요상시럽고 지랄 겉드란 말이요. 나 맴이 워째 그러는지 아무리 되작되작 생각혀바도 딱 잽히는 것 웂이 몰르겄고, 그런 맴허고는 또 달브게, 나가 외서댁 가심에 너무 큰 못얼 쳤구나, 허는 죄시런 맴이 생깁디다. 나가 아짐씨헌테 말 안 헐라고 헌 것이 요런 대목 말허기가 옹색시러바서 그런 것,"

"아니시, 아녀. 암시랑토 안 헌께 헐 말 다 허소."

염상구의 말을 미심쩍은 얼굴로 그러나 유심히 듣고 있던 밤골댁이 말허리를 자르고 들었다.

"근디, 아그럴 낳서 보냈다는 말얼 들은께 그 생각이 더 커지드랑께요. 나가 헐라는 말은 우선, 아그 아부지가 죽은 문제로 나럴 원수 삼지 말고 나가 허는 이약얼 들어도라 허는 것이요. 요것이 무슨 말인고 허니, 그 사람이 좌익으로 나서서 우리덜 가심에다 총구녕 종그는 것이나, 우리가 좌익 막을라고 좌익 가심에다 총구녕 종그는 것이나 피장파장이고, 서로 죽기로 작정허고 나선 쌈잉께 누구 손에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인디, 으쩌다봉께 그 사람허고 나허고 맞붙은 것뿐이다 그것이요. 그것이야, 그리 가차이서 맞붙지 안허고 멀리서 총질 허다가 나가 쏜 총알에 그 사람이 죽은 것이나 달븐 것이 암것도 웂이다 그 말이요. 그라고, 나도 그 사람 총에 맞어 요 꼬라지가 되얐소. 나가 살아난 것은 병원이 가차운 덕이었제, 나가 좌익얼 허고 그 사람이 우익얼 혔드람사 나가 죽고 그 사람이 살아났을 것 아니겄소. 죽기 아니먼 살기로 벌린 쌈판에서 나가 쏜 총에 우리 성님이 죽을 수도 있고, 우리 성님이 쏜 총에 나가 죽을 수도 있응께, 그 사람이 죽은 것이야 지 좋아서 허든 일 끝막음이 그렇다고 치고, 그 담 나가 허는 이약얼 들어도라는 말이요."

염상구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자칭 무식허다등마 말만 청산유슈시."

밤골댁이 중얼거리며 입을 삐쭉했다.

"나가 진짜배기로 헐라는 말언 지끔부텀 허는 외서댁 이약인디, 사내자석이 속에 든 말 세세허니 허먼 짜잔허고, 한말로 딱 짤라 말혀서 나도 사람새낀디 미안시럽고 죄시럽고 혀서 앞일얼 워찌 잠 도왔으먼 허는 맴이다 그것이요."

"허먼, 우리 딸헌테 장개라도 들겄다는것잉감?"

밤골댁이 엇지르고 나왔다.

"와따, 나 꼬라지가 문딩이 상호맹키로 뵈기 싫어도 화 질르는 애맨 소리 자꼬허지 마씨요. 사람이 속에 든 참말 험스로 사람 노릇 허겄다는디 워찌 그리 삐까닥허게 나가고 그래쌓소. 나도 삐까닥허니 나가 볼께라?"

", 왈패 곤조 워디 가겄어?"

밤골댁이 정색을 하며 곧바로 앉았다.

"허 참, 왈패 곤조통 부릴 디가 웂어서 요런디서 부려라? 나가 헐라는 삐까닥헌 소리가 먼고 허니, 나가 외서댁 그리 맹근 것은 나 죄가 아니라 나 홀린 외서댁 죄다 그 말이요."

"아니 요런 빌어묵을 눔이!"

밤골댁이 눈을 부릅뜨며 팔을 치켜들었다.

"으쩌요, 애맨 소리 들을 만허요?"

염상구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담배를 빨았다.

", 싸게싸게 헐 말이나 혀!"

"다 초치고 짐뺀 것이 누구요? 나가 간딴허게 말허겄는디, 외서댁얼 평상 믹여 살릴 수는 웂는 일이고, 무신 장시라도 험시로 살 밑천얼 장만혀줬으먼 허는구만요."

", 그렁께 새끼럴 맡아도라 고것이구만? 아이고메, 우뭉허고 숭허고 징헌 거, 사람얼 멀로 보고."

"시끄럽소, 시끄러!"

염상구가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내리치며 외쳤다. 핏기 없는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고, 가늘게 째진 눈은 밤골댁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이허는 참말얼 끝꺼정 그리 비비 틀어서 듣는 것이야 당신 맘때로요. 헌디, 나가 고런 생각얼 묵고 여그 찾어왔으먼 개아덜이요. 외서댁이 술집여자도 아니겄고, 나가 그냥 재미로만 헌 짓이 외서댁얼 망치게 허고, 냄편할라 죽어뿌러 아럴 델꼬 앞날 살기가 각다분허겄다 싶어쪼깐 맘 써볼라고 헌 것이다 그 말이요. 내 새끼야 엄니가 키우는 것이고, 고것 있다고 나 살기에 불편시런 것 하나또 웂소. 청년단 감찰부장 자리가 떨어지겄소, 처녀장개럴 못 가겄소? 나가 원체로 불량허다고 소문나서 나가 허는 말언 다 못 믿겄는 모양인디, 나도 양심 쪼가리넌 쪼깨 있는 사람새끼요. 나가 허고 잡은 말 다 끝냈고, 거그서 나 말 안 믿은께, 가겄소."

염상구는 일어섰다. 밤골댁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고, 외서댁이 빠르게 어머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염상구는 지게문을 거칠게 밀고 나갔다.

 

 

5. 소화의 씻김굿

굿은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길 닦음에 쓸 작은 꽃상여의 네 기둥에 노란 붕어를 매다는 것으로 소화는 굿 준비를 모두 끝냈다.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홀가분하면서도 뿌듯한 기분과 함께 아득하면서도 상그러운 피로감이 전신을 적셔들었다. 첫 고비의 큰 짐을 부린 만족감과 안도감이 겹치면서 맛보게 되는 기쁨이었다. 굿을 잘 치르려면 준비물 마련부터 순조로와야 했다. 눈썰미 좋고 일손이 엽렵한 들몰댁 덕에 일을 쉽게 마무리 짓게 되자, 처음에 다소 내키지 않았던 기분도 말끔히 가시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몸을 편히 갖고 마음을 정리해 굿풀이 사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독하는 일이었다.

"들몰댁, 고상허시었소."

소화는 밝으면서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들몰댁을 바라보았다.

"아니구만이라, 지야 무신, 기자님이 다 애쓰셨제라."

색색의 종이 조각들을 치우던 들몰댁은 쑥스러워하며 눈길을 피했다. 그녀의 얼굴에도 밝은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길남이가 안직도 서운해헐란지 몰르겄소. 그 고마운 맘얼 그리 무질러뿌렀으니 미안허기도 허고 짠허기도 허고, 영 맘에 걸리요."

소화가 생각에 잠기며 나직나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무신 말씸이신게라. 다 지 전정 생각허시는 짚은 맘으로 허신 일인디라. 기자님이 그리 짚은 맘으로 지 자석덜 대혀주신께 지가 을매나 고마운지......"

들몰댁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손을 코로 가져갔다. 지전이며 지화 등속으로 준비물에는 한지를 가위질하는 일이 많았다. 무엇이든 만들기를 즐기는 손재주 좋은 길남이는 그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소화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사내아이에게 무당이나 굿이 너무 친숙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어렸을 적에 예사롭게 넘긴 보배움이 장성한 다음에 잘못 될까봐 저어했던 것이다.

"후제커서 장헌 일 해야 헐 남자넌 어려서부텀 요런 짜잔헌 일에 손대는 것이 아닌 법이다."

소화는 일부러 엄하게 꾸짖었다. 길남이가 퍽이나 무색해하며 입술이 실룩이고 코가 벌름거리도록 울음을 물었지만 달래거나 풀어주지 않았다. 평소에 꼭 살붙이처럼 따르는 그 아이의 정어린 눈이 가슴을 싸아하게 만들었지만 애써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들몰댁, 곤허드라도 술도가 집 잠 댕게오실라요. 여그 일이 다 막음 되었다고 알리고, 거그 일 단도리 영축웂이 허라고 새참으로 일러두는 것이 좋겄소. 큰 일 앞에 놓고 맘들만 바뻐 두세두세 허다 보먼 빠치는 것이 더러 있는 법이오."

소화는 그 생김과 나이에 걸맞지 않게 침착하고 무거웠다. 평소의 그녀와는 꽤나 다른 모습이었다. 큰굿을 앞두고 생긴 변화였다.

"야아, 핑허니 가서 말씸 전허겄구만이라. 무신 딴 말씸 웂으신게라?"

"금메, 떡이나 잠푸지게 혀서 여그저그 널리 돌렸으먼 좋겄는디, 너무 실인심 혔응께요. 근디, 그 말얼 혀야 좋을란지 어쩔란지 몰르겄소."

"알겄구만이라. 지가 요령지게 그 말얼 전허겄구만이라. 댕게오겄구만이라."

"찬찬허니 댕기씨요.“

소화는 사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한 화색이 맑은 살 속으로부터 돋아 오르고 있었다. 건강을 되찾은 그녀의 얼굴은 생생한 탄력과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담고 안온하게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가슴은 항시 기다림으로 출렁이고 있었고, 마음은 지향 없는 길을 헤매어 산을 굽이굽이 넘고 하늘 끝 그 멀리에 이르고 있었다.

마음은 수만 가닥이 되어 당신을 찾아 더듬고, 가닥가닥 나뉘고 쪼개지는 마음 하나로 묶으려 하나 내 뜻으로 이루어질 일 아니고, 당신 오시며 거두어 오실 길 잃은 마음입니다. 당신을 기다림이 턱없이 큰 욕심임을 아는 까닭에, 마음을 묶어 신당을 가두어 두어도, 마음은 어느새 바람이 되어, 당신을 찾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수천 리를 갑니다.’

그녀가 가슴 벽에 새기는 기다림이었다. 내키지 않았던 이번 굿을 받아들였던 것도 순전히 그분의 아버지였던 까닭이다. 처음에 낙안댁이 찾아왔을 때는 말도 다 듣기 전에 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보소, 밤마동 그 양반이그 험헌 꼴로 찾어와서나 사람얼 괴롭히는디, 나럴 잠 살레주소. 그리 흉헌 죽음을 했이니 워찌 이승에 한이 웂겄는가. 그 한얼 풀어줘야 고이 저승으로 갈 것이 아니겄는가."

이 애원에도 소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 흉사 혀서 넘보담 많고 많은 한이 끌어댕게서 이승을 못뜨고 저리 발싸심 허는 원혼의 씻김굿이 훨썩 에롭다는 것을 나 다 아네. 굿 모시는 택이야 원허는 대로 다 치룰 것잉께 나 잠 살레주소."

이 말에도 소화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지낸 일로 나럴 사람으로 안 보는 갑는디, 그때 나가 잠시 잠깐 맘 잘못 묵었든 거 신령님 전에 사죄허고, 자네허고 헌 약조도 어김웂이 지키지 안혔등가. 자네가 하섭이럴 보드라도 워찌 이럴 수가 있겄는가. 망자가 딴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섭이 아부지란 말이시, 하섭이 아부지."

이 말 앞에서 소화는 마음에 걸었던 빗장을 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 분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마음의 빗장을 흔드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그 말까지 듣게 되자 더는 고개를 저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십구제에 씻김굿을 하기로 한 것이다.

"소화 씨, 계신가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소화는 눈을 떴다. 자신을 '소화 씨'라고 부르는 것은 이지숙 뿐이었다.

"이 선생님."

소화는 반갑게 문을 열었다. 다른 말은 몰라도 '선생님'만은 이지숙 앞에서 '선상님'이라고 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신경써가며 고쳤던 것이다.

"계셨군요. 일이 바쁘지 않으세요?"

이지숙이 방에 눈길을 보내며 웃음 지었다. 그녀가 굿을 한다는 걸 알고 있음을 소화는 직감했다.

"다 끝냈구만요, 들어오시씨요."

소화는 어색하게 웃으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소화는 이지숙을 대하면 인간적인 신뢰감과 친근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등감과 비애감도 느끼고 있었다. 아는 것이 너무나 많은 이지숙 앞에서 자기는 얼마나 무식한 못난이인가를 알았고, 남자들이나 하는 줄 알았던 좌익을 이지숙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무당 노릇에 대하여 서글픔을 느꼈던 것이다. 그 서글픔은 정하섭이 자신의 무당 노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더 진해지고 커졌다. 사람은 다 제각기 맡아 하는 일이 다르다는 사실로 자신이 선 자리를 단단하게 해보려고도 했지만 그 열등감과 비애감을 없앨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좌익 하는 일과 무당 노릇이 똑같은 무게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지숙이 가끔 찾아와 목소리 낮추어 하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마음에 새기려고 애쓰는지도 몰랐다.

"정현동씨네 굿을 하는 모양이지요?"

이지숙이 앉으며 친근한 웃음을 지었다.

"흉사라서 굿을 허겄다능마요."

"씻김굿이겠죠?"

"워찌 고런 것꺼지 아신당가요?"

소화의 큰 눈이 더 커졌다.

"조선 사람이면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죠. 그래요, 너무 흉악한 꼴로 죽은데다가 초상도 마당에서 치렀으니 유족들이야 당연히 굿을 하고 싶겠죠."

"생전에 정 사장님도 굿을 좋아했구만요."

무심코 말을 해놓고 소화는 금방 실없는 소리를 한 자신을 나무랐다. 망자를 놓고 할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는데요,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이지숙은 검지손가락을 입술로 물며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소화는 등줄기가 꼿꼿해지는 긴장을 느꼈다.

"굿 중에 망자의 혼을 불러 가족에게 망자의 소원인가 뜻을 전하는 대목이 있지요?"

", 손대잡이라고 허능마요."

"그래요, 손대잡이. 시누대가 막 떠릴지요. 그때 말예요, 당골은 자기 정신이 없이 망령이 시키는 말만 하는 건가요 아니면,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건가요?"

이지숙은 신중을 기해 말해나갔다.

"워째 그러시는디요?"

사르르 냉기가 도는 얼굴로 소화가 반문했다. 이지숙은 소화의 거부를 강하게 느꼈다. 불가침을 향한 어렵고 위험한 질문인 것을 다시 확인하며 이지숙은 다음 말을 서둘렀다.

"제가 하는 말은 그 내용을 알자는 게 아니라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그걸 물은 거예요. 그 부탁은 다름이 아니라, 만약 소화씨가 어느 한 대목이라도 뜻대로 할 수 있다면, 정 사장이 이번에 바닷물을 채우려고 했던 논들을 그대로 뒀다가 농지개혁 때 작인들에게 넘겨주라는 내용의 말을 끼워 넣어달라는 거예요. 그렇게만 되면 가족들이 망자의 말인데 안 들을 수가 없을 것이고, 그 논들이 작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면 자그만치 이백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의 생계문제가 해결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가족이 딴 사람 앞으로 명의 변경을 해버리거나, 사방으로 처분해버리면 지금 소작을 부치고 있는 사람들은 어찌되겠어요. 소화씨도 아다시피 그 논 때문에 지금 열두 사람이 잡혀 들어가 있잖아요."

이지숙은 숨이 가쁠 정도로 빠르게 말을 해댔다.

"진작에 그 말씸부텀 허실 일이제라. 지가 위칳게든지 혀보도록 허겄구만요."

소화는 쑥스러운 듯 부끄러운 듯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씨, 잘 좀 부탁드려요."

이지숙은 의미 깊은 눈길로 소화를 쳐다보며 그 손등에 손을 포겠다.

그려라, 아배 그 일언 그분이 허고 잡아 허는 일일 것잉께라.’

소화는 정하섭의 체취를 물큰 냄새 맡고 있었다.

십이월이 중순 고비를 넘기면서 해는 완연히 짧아지면서 조계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리고 거칠었다. 어둠살이 번지고 있는 정 사장네 마당에는 차일이 높게 쳐졌다. 그 안에는 임시로 내건 두 개의 알전구가 내쏘는 밝은 불빛 아래 굿판을 벌일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었다. 중간 높이의 여덟 폭 병풍이 집 쪽으로 돌렸고, 그 앞에 굿상이 기다랗게 차려져 있었다. 굿상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조부 내외. 증조부 내외. 조부 내외 순서로 차려졌고, 위치에 따라 병풍에는 지방이 붙어 있었다. 정현동의 굿상은 왼쪽 끝이었는데, 병풍에는 지방만 붙은 것이 아니라 그 위에 한지를 오려서 사람형상을 만든 넋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옥색 모본단으로 지은 남자 한복이 발목에 하얀 버선까지 매달고 병풍에 걸쳐져 있었다. 병풍에는 묵으로만 친 여러 가지 화초들이 폭마다 쌍을 이루고 있었다. 굿상 앞에는 액상. 향로. 손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앞으로 잇대어 깔린 덕석 왼쪽 한옆으로는 무명두루마기에 갓까지 받쳐 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북. 장고. . 아쟁 같은 악기가 줄 맞춰 놓여있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대문이 활짝 열어젖혀져 사람들은 아무나 마음대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덕석 가장자리를 경계로 벌써 굿 구경을 온 사람들이 서너 겹을 이루었고, 병풍 뒤로도 빼꼭하게 몰려 있었다. 그들은 끼리끼리 입을 맞추고 있었지만 머릿수에 비해 별로 소란스럽거나 시끄럽지는 않았다. 굿이란 원래 권하는 사람이 없어도 구경할 만한 것이었고, 그렇지 않고도 굿판이 벌어지면 이웃이나 근동에서 마음 써 보아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경사 굿은 경사 굿대로, 흉사 굿은 흉사 굿대로 서로 한 자리에 마음을 모아 축하를 하며 즐기고, 애도를 하며 즐겼다. 아무리 가슴 아픈 흉사 굿이라 하더라도 무당의 혼신을 다한 매듭매듭 풀이를 따라 굿은 흥겨움으로 막음하게 마련이어서, 가슴 미어지는 슬픔이나 아픔으로 시작된 굿도 어깨 숨 내쉬며 더덩실 춤추는 기쁨을 서로 나누고 즐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당의 신통력이었고, 사람들은 그 신통력을 믿었고, 의지했다. 한 바탕 흐드러진 굿판을 통해서 사람들은 평소의 미움도 삭이고 삶의 고단함도 위안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굿판에 모여들 때는 어떤 기대감으로 가슴이 흔들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되었다. 다만 보이지 않는 건 오늘의 당곡네인 소화와 굿 주인 낙안댁이었다.

"참말로 상다리 뿌러지게 체렛네잉."

"워째 안 글컸는가. 재산 많이 냉게 놓고 비명 횡사헌 냄편 한 풀어줄라는 것인디 아까운 거이 머시가 있겄어."

"그렇제, 재산이 지 아무리 중혀도 목심만은 못헌 법잉께."

"근디, 굿값얼 앞돈만도 엄칭이 줬담시로?"

", 나도 그 소문 듣기야 들었는디, 뒷돈이 또 건너갈 것잉께 고것이 을맨지 알 수가 있겄다고. 다 줄만 헌께 주겄제."

"그려, 원체로 엄니 때부텀 뼉다구 실헌 물림잉께로. 그러다가 그 처녀무당 금세 부자되야 불겄네."

"와따 별걱정 다 허네. 거그도 잽이덜에다가, 조무에다가, 딸린 입이 수십이여. 무당질 혀서 부자 됐다는 말 들었는가, 자네?"

"그러시, 우리야 옛말 이른 대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 묵으먼 그만이제."

소화는 안방에서 일어날 채비를 하며 두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동도 동백기름 발라 빗은 머리는 머리카락 한 올 빠져나옴 없이 단정하고 정갈했다. 검은 머리는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고, 하얗게 곧은 가르마는 인중과 일직선을 이루면서 차가운 위엄이 서린 미모의 얼굴을 더욱 돋아 올리고 있었다. 쪽진 머리에는 평소와는 달리 긴 은비녀가 꽂혀 있었다.

"들으씨요."

소화는 마주앉은 낙안댁을 향해 눈길을 모으고는,

"굿은 나 혼자서 모시는 것이 아니요. 나허고 항꾼에 맘이 뫼져야 망자가 왕생극락을 이룰 수 있을 것이요. 딴 맘, 딴 생각 묵지 말고 온 지성으로 나럴 따르씨요."

그녀는 냉정하고 엄하게 일렀다.

"하먼, 하먼이라."

낙안댁은 합장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소화도 낙안댁도 평소와는 판이한 모습이고 태도였다. 소화는 폭넓은 치마를 살짝 들고 일어섰다. 그녀의 몸 전체에는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서려 있었다. 소화가 병풍 오른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시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뚝 멎었고, 잽이네 남자가 앉음새를 고쳐 똑바로 앉았다. 치마귀를 잡은 소화는 고개를 약간 수그린 자세로 굿상 앞으로 옮겨갔다. 길게 끌리는 치마로 발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가비얍은 움직임은 걷는 것이 아니라 마치도 사르르 떠가는 듯싶었다. 낙안댁과 상주인 아들은 병풍 오른쪽으로 자리 잡았다.

"참말로 이쁘시잉. 콰자럴 안 걸친께로 훨썩 이뿐 것 아니라고?"

"쾌자 걸치먼 걸친 대로또 이쓰겄제, 동백꽃 맨치로. 쪼깐 선무당맹키로 뵈서 탈이겄제만."

"하먼, 지대로 된 당골네가 쾌자 걸치고 설레발 쳐서야 되간디. 굿맛 떨어지게."

"참말이제 무당 해묵기 아깝게 꽃맹키로 이쁘시. 작약이 저리 이뿔랑가?"

"아니시, 작약이야 너무 야허고, 머시다냐, 저리 깨끔허고 복시럽게 생긴 꽃 안 았드라고? , 대웅전 앞에 핀 수국이시."

"와따, 용케도 찍어내네웨."

소화는 하얀 모본단 치마저고리 차림이었고, 저고리 섶. 소매 깃. 고름을 남색으로 받치고 있었다. 하얀 모본단의 우아한 색조 속에서 남색은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며 소화의 얼굴을 떠받치고 있었다. 소화는 굿상을 행해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징을 왼손으로 받쳐 잡고 징채를 오른손에 들었다. 굿의 시작을 아뢰는 안당이었다. 풍악의 전주가 울리면서 소화가 징을 가볍게 가볍게 두들기며 가락에 실은 주문이 시작되었다.

"! 인금아 공심은 젊어지고 남산은 본이로세. 조선은 국이옵고 발 많은 사두세경 세경두본 서울은 경성부 동불산 집터 잡아 삼십삼천 내리굴러 이십팔숙 허궁천 비비천 삼화도리 천열시왕 이덕마련 하옵실쩍, 오십삼관 칠십칠골 충청도 오십오관 오십오골 돌아들어 관은 곽나주, 나주는 대모관, 승주는 군수구관, 낙안은 선지선관이요, 정중은 정씨 정중이요 정씨가문 정정중께서 정성이 지극하여 대궐 같은 성주님을 모셔놓고 원근 선영님을 모셔놓고 이 잔치를 나서자 상책 놓고 상날 가려 중책 놓고 중날 가리고 생기복 덕일을 받어서 이 잔치를 나섰습니다. 찬독술 왼독술에 산해진미 장만하여 마당삼기 뜰삼기 염천도우 시우삼기 야력잔치 나서서 불쌍하신 망제님을 씻겨서나 천도하자 이 잔치를 나섰습니다......"

장구. 피리. . 아쟁이 반주를 하는 가운데 징이 동동 동동동 울리며 소화의 주문이 가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소리가 심이 좋네."

"하먼, 젊은디."

"말도 멍청허니 받네. 젊다고 다 소리가 심지간디?"

"와따 귀도 볽. 소리 심 알라먼 당아 멀었어. 제석굿 짬에나 가야 지대로 알아지제. 씻김굿 열두거리 중에서 안당거리는 소리 듣고 심 좋다는 소리 나 생전 첨 듣는 소리시."

"어허! 에지간히 넘어가제 워째 그리 찝어뜯고 그려."

두 남자가 시비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소화는 굿상을 향해 가볍게 읍하고 돌아섰다. 웃음기 없는 소화의 밝은 얼굴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감정이 깃을 세우기 시작한 증거였다. 소화는 정면을 바라보며 똑바로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잽이들이 악기를 들고 따랐다.

"질 잠 틔우씨요, ."

어떤 여자가 대문 쪽으로 선 사람들을 헤치고 있었다. 손에 흰 고무신을 든 들몰댁이었다.

"워째 쩔로 가까?"

젊은 여자가 말했고,

"혼맞이 헐란 것이제."

좀 더 나이 먹은 여자가 말했다.

"혼맞이라?"

"이 집 망자가 워찌 죽었는지 몰러? 집 밖에서 객사 혔으니 혼이 공중에 떠돔스로 집으로 못 들어온께 당골이 질 틔워 맞어딜이야 굿이 될 거 아니겄어. 오늘 굿에서 저것이 질로 중헌 대목 아닌갑네."

"맞소, 인자 알아묵겄소."

대문밖에서 소화의 가락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흐름의 폭이 넓어지고 음색이 진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움직임 없이 숙연한 얼굴들로 그 소리흐름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액상에 놓인 세 개의 쌀 주발에 꽂힌 세 개의 촛불이 타고, 향로에서는 긴 연기가 파르스름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화는 틔어져 있는 길을 따라 조용조용 걸어 들어와 덕석으로 올라섰다. 뒤따르던 들몰댁이 흰 고무신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우르르 사태를 이루었다. 소화는 잽이들 쪽에 자리 잡고, 조무가 굿상 앞으로 나섰다. 살이 오른 몸피에 얼굴이 펑퍼짐한 조무는 손대소쿠리에 담아두었던 지전을 들고 가벼운 몸짓을 시작했다. 하나하나에 정성들인 가위질을 해서 돈을 상징한 수십 가닥의 지전묶음은 작은 움직임에도 긴 꼬리들을 제각기 예민하게 흔들고 떨었다. 그것은 마치도 흰빛의 커다란 꽃송이 같기도 했고, 부풀어 오르는 하이얀 구름덩이 같기도 했다. 조무는 가벼운 춤사위로 흔들던 지전을 팔을 굽혀 어깨에 올린 듯한 모습으로 가락을 시작했다. 상을 차린 조상과 그 친구들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초가망석이었다.

".......굿을 불러 외야보고, 석을 불러 다녀보세. 굿은 한님에 굿이요, 석은 단님에 석이로세. 선영님네 오시라고 두대바지 챌을 치고, 화초병풍 둘러치고, 선영님께 축원하네......"

조무는 이음동작으로 손대소쿠리에서 혼대를 집어들어다. 한 자 정도 길이의 시누대 끝에는 네댓 개의 댓이파리가 붙어 있었고, 그 밑을 한지를 겹 접어 홑 묶음을 했는데, 망자의 넋은 그 대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조무는 혼대를 지전으로 감싸 춤사위와 함께 가락을 계속했다. 모신 넋들을 즐겁게 해드리고, 맘껏 흠향하게 하는 쳐올리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쳐올리기가 끝나자 상복을 입은 두 상제가 나가 절을 올렸다.

"으쩌끄나와, 정작 장자가 웂으니."

한 여자가 혀를 찼다.

"장례 때도 장자 배웅 못 받었는디 머. 고것이 다 정 사장 팔자제."

옆의 여자가 입을 삐죽했다.

장구가 세워져 덕석의 가운데 놓여졌다. 혼대가 장구의 숫바줄 부전에 끼워져 있었다. 소화가 나와 장구를 왼손으로 살짝 들고 징채로 가볍게 두들기며 가락을 시작했다. 잽이들의 반주가 없이 당골 혼자서 하는 손님 굿이었다.

"손님네 본을 받고 대신에 안철을 받세. 손님네 나오실제 손님네 근본이 어디메가 근본인가. 강남나래...... 손님네 나오실제 청기 한 쌍 홍기 한 쌍 쌍쌍이 거느리고, 조선국 나오실제 선두거리 나오셔서, 궁아사공아......"

공포의 병이었던 마마를 두려워해 그 신을 손님처럼 후하게 대접하여 다시 바다건너로 물러가게 하는 굿이었다.

"은제나 저 동드랑 동동, 동드랑 동동 허는 장단얼 들으먼 맴이 요상시러바잔당께. 자네넌 안 긍가?"

어느 남자가 물었다.

"나도 귀가 있는디 워째 안 그렇겄어. 손님얼 고향으로 보내잔께 손님네 쪽 장단을 쳐야겄제. 자네 맴이 워떤디?"

", 저 귀선 소리만 들으먼 펄떡펄떡 뛰고도 잡고, 어깨가 들썩들썩 심쓰고도 잡고, 하여튼지 요상시러."

"나도 그렁마. 저것을 보고 무장단이라고 허든디, 필시 우리 장단이 아닐껴. 우리 장단이야 들으먼 덩실덩실, 두리둥실 춤추고 잡제 워디 그러간디."

소화는 장구를 놓고, 지전과 혼대를 들고 흐드러진 가락을 한동안 뽑았다. 그리고 지전을 두 손에 나눠들고 춤사위를 처음으로 펼쳐 보였다. 두 팔을 수평으로 벌리고, 손목의 움직임만으로 두 지전묶음이 허공에서 휘돌고 맴돌게 하며 몸은 느리게 앞뒤로 또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그 단순한 듯한 몸놀림 속에서 지전다발만은 맘껏 꽃피움 하듯 펼쳐지고, 비행하듯 수십 개의 꼬리를 파득거렸다. 두 팔을 벌린 조용한 춤동작은 마치 학이 흰 날개를 펼치고 느린 선회를 하듯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였다.

"와따, 너 이쁜 인물에 저 조신헌 춤 솜씨 바라. 참말로 기맥히다."

"지끔부텀 그리 탄복허덜 말어. 이따가 제석굿이 나오먼 워쩔라고 그려. 저것이야 맛 뵈기제, 맛 뵈기."

"이 사람이 춤 볼지 멀 안당가. 저 눈 사르르 네레감은 인물보고 환장이제."

"이눔아, 거저 뚫린 구녕이하고 막 내질르먼 다 말인지 알어? 이눔이 베락 맞을라고 굿날 당골님 놓고 무신 잡소리여."

이지숙은 소화에게 눈길을 모은 채 남자들의 말에 웃음 지었다. 여자의 눈으로도 소화는 탐나도록 신비롭고 고왔다. 이지숙은 물론 굿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었지만, 밥술깨나 뜨는 사람들의 지극히 이기적인 욕구에 의해 벌어지는 큰 굿판에 꼭 손님 굿이 끼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마마 신을 위무하는 손님 굿은 굿주와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언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를 마마 병을 예방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굿이었다.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면서도 이웃의 안위를 빌고 유대감을 가지려 한 삶의 슬기라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었고, 굿판을 벌이자고 해도 경제적 능력이 없는 더 많은 사람들의 질시에 찬 감정을 해체시키려는 방편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었다. 소작인이 논두렁에 콩을 심고, 밭 가장자리를 따라 고추를 심어도 지주들이 모르는 척하는 것과 동일한 성질의 문제로 그녀는 파악했다. 지주들의 그 행위는 퍽 관대한 것 같지만 실은 자기네들을 보호하기 위한 소작인들의 숨통 틔워주기의 교활이었던 것이다.

소화는 어느새 치장을 달리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는 한지고깔을 쓰고, 반소매 얇은 장삼을 입은 위에 금박의 부적이 줄줄이 찍힌 손바닥 넓이의 빨간 띠를 오른쪽 어깨로부터 왼쪽 아래로 엇지게 두르고 있었다. 굿을 주관할 제석님을 인도하여 모시는 제석 굿의 시작이었다. 서장이 끝나고 본굿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지전을 두 손에 든 소화는 잽이들의 반주를 받으며 전보다 더 고조된 가락을 뽑기 시작했다.

"오시드라 오시드라 천황지석 일월지석 불의지석이 나려를 왔네 에이야아 에헤에 지것이 왔네 에이야. 지석님이 오실 적에 해가 돋아 일광지석 달이 돋아 월광지석 낙산관악 제불제천 원불지석이 오실 적에 명줌치 목에 걸고 자손줌치 품에 안고 복줌치는 팔에다 걸고 산중지석이 나려를 왔네 에이야아 에헤에 지석이 왔네 에이야아......"

온갖 판소리 장단에다가 굿 장단까지 합한 소화의 가락은 지전다발의 흔들림을 타고 하늘로 끝없이 솟기며 나부끼다가 느닷없이 쏟아져 내려 땅 속으로 스며들다가, 출렁이고 내닫고 자지러지고 자지러지고 속살거리며 제석님을 맞고 있었다.

"저 맑음시로도 틉지고, 살랑기림스로도 짚은 저 소리 보소."

여자 노인네가 고개 장단을 맞추며 그윽한 얼굴이었다.

"그 인물에 그 소리, 제석님이 홀까닥 반해 걸음이 바쁘시겄소."

옆의 노인네가 받았다.

"아서, 아서, 제석님 귀가 을매나 볽다고."

먼저 노인네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락을 마친 소화의 춤이 시작되었다. 손님 굿에서보다 한결 다양해지고 폭넓고 빠른 동작이었다. 소화의 휘돌이에 따라 두 개의 지전다발은 무수히 나부끼는 깃발이 되고, 앞으로 나아가듯 하다가 멈추듯 반회전하며 손목 꺾어 쳐올리면 지전다발은 활짝 피어나는 흰 꽃송이였다. 지전다발을 놓고 소화의 춤은 새로운 고비를 넘고 있었다. 발을 빨리 움직이되 쿵덕쿵덕 뛰는 법이 없었고, 버선발이 치마 밖으로 벗어나도록 발을 치켜드는 법도 없었다. 춤은 오로지 윗몸과 두 팔로 추어지고 있었는데, 장삼 자락의 펄럭임과 붉은 띠의 나부낌이 두 팔의 뿌리치고 감아 돌리고 휘어져 감기는 움직임과 조화되어 야하거나 천박하지 않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을 꽃피워내고 있었다. '제석'이라는 굿 이름이 그러하듯 복장이며 춤이 승무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소화는 몸부림치듯 흐느끼듯 하는 절절한 몸놀림으로 앉은 춤을 추다가 바라를 들고 일어섰다. 팔과 손목의 동작에 따라 바라는 제각기 엎어지며 땅을 굽어보고, 뒤집어지며 하늘을 받치다가, 챵앙챵 차장챵 맞울어 인간고를 쫓고 있었다. 바라를 든 채 잽이들과 마주앉은 소화는 중사설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이 중은 근본 있는 중으로서 가실동봄등 춘추양등으로 동냥 다니는 중도 아니요, 법당 앞에 준양허는 화기중도 아니니 이 중에 근본을 잠깐 들어보기를 바랍니다 그려. 중에 근본을 찾자면......"

긴 사설을 또랑또랑하고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숨도 쉬지 않은 듯 빠르게 늘어놓고 있었다.

"아이고메 총기도 존 거."

"맨날 허는 것잉께 총기야 뒷전치고 저 또록또록헌 소리 들은께 속이 씨언허시."

여자들의 말이었다.

중사설이 끝나고 소화가 춤동작을 하며 일어서자 한 여자가 쌀을 시주했고, 그 쌀을 받은 소화는 손대소쿠리에 담겨 있던 쌀을 한 주발 퍼서 그 여자가 벌린 치마폭에 부어주었다. 여자는 황송한 듯 깊은 절을 했다. 소화가 굿상에서 명태를 들고 춤사위와 함께 가락을 읊어나가며 병풍에 붙은 지방을 차례로 떼 내 소지를 했다. 흠향 넉넉히 하셨으니 조상님들은 먼저 가시라는 대목이었다. 그 대목이 다 끝나자 병풍 뒤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긴 작대기 끝에 칼을 매달아 굿상의 과일이며 떡을 찍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일이나 떡은 그 무게 때문에 반쯤 올라가다가 떨어져 내리기 일쑤였다. 성공을 해서 떡이나 과일을 갖게 된 사람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서로가 그것을 가지려고 다투었으므로 찍어 올린 사람이 꼭 갖는다는 보장이 없는 흥겨운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조상 상에 놓인 제물에 한해 허용되는 일이었고, 제사지낸 음식은 널리 나눠먹는다는 풍속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다음 굿이 시작되면 중지해야 되는 놀이였다. 소화는 액맥이 상에서 놋쇠주발 두 개를 양손에 들었다. 굿주의 자손들에게 미칠 액을 막고, 살펴달라는 액맥이 굿이었다. 쌀이 소복하게 담긴 주발 가운데 초가 꽂혔고, 초를 감싸고 아들들의 나이만큼 감긴 실타래와 돈이 끼워져 있었다. 실타래의 크기로 보아 소화의 오른손에 들린 것이 정하섭이었다. 소화는 겉으로는 막힘없이 굿을 해나가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정하섭의 액맥이를 따로 하고 있었다.

막으소사 막으소사 온갖 액을 막으소사. 구액일랑 털어내고 신액대액 막으소사. 정씨 장손 가는 길에 천중광휘 다 비치어 신액대액 막으소사.’

소화는 목이 메어옴을 느꼈다.

차일의 높은 기둥에서부터 덕석까지 필로 드리워진 무명에 한 자정도 간격으로 이십여 개의 홑매듭이 지워져 있었다. 그 매듭들 탓인지 길게 드리워진 무명은 천 같지 않은 무게감을 묵직하게 담고 있었다. 마침내 정현동을 위한 씻김굿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참이었다. 제석 굿으로 흥겨워졌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고 있었다. 고깔이며 장삼을 벗어버린 소화는 처음의 모습으로 무명끝을 잡았다. 이승에서 맺힌 고로 왕생극락을 못한 망자의 한을 풀어 내리는 고풀이였다.

"......불쌍헌 망제님 천고에가 맺혔는가 만고에 맺혔는가. 천고만고에 맺혔으면 천고만고 풀 것이요......"

진양조로 시작된 가락은 기구한 사연을 애절한 떨림소리에 실어 찬바람 속에 파문을 일구며 흘림가락으로 넘어가고, 흐르듯 유연한 춤사위가 문득 허공을 쳐올리면 매듭 하나가 풀리고, 쓰다듬듯 부드러운 춤사위가 문득 허공을 헤집으면 또 하나 매듭이 풀려나갔다. 팔이 허공을 가르며 난해한 선을 그려낼 때마다 맺힌 매듭이 풀려나가는 무명 폭은 한을 토하듯 바람을 품고 공중에 뜨고, 끝없는 창공에 한을 다 삭인 듯 무명 폭이 서서히 날려 내리는 사이 망자의 편안해진 넋을 거두듯 이미 풀린 쪽을 접어나가는 자연스러운 연속동작은 절절한 가락과 어우러진 슬프고도 아름다운 춤이었다. 차일의 기둥에 묶인 매듭까지 다 풀어낸 소화는 무명을 두 손에 받쳐 올려 하늘을 우러렀다. 그녀의 큰 눈은 먼 하늘의 별빛을 담고, 고풀이가 시작될 때부터 손을 맞비비기 시작한 낙안댁은 매듭이 풀릴 때마다 점점 빨리 비비던 손을 이제 모으고 소화를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무릎 끓어 앉은 그녀의 볼에는 줄줄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병풍에 걸쳐졌던 망자의 옷이 내려져 돗자리 위로 옮겨졌다. 그리고 돗자리가 둘둘 말렸다. 다시 돗자리가 일곱 매듭으로 묵어졌다. 돗자리를 세웠다. 그건 망자의 몸이었다. 그 위에 머리를 상징하는 누룩을 올렸다. 누룩 위에 병풍에서 떼 낸 넋전과 저승노자인 돈을 넣은 놋쇠주발인 행기를 올렸다. 행기를 솥뚜껑으로 덮었다. 영돈말이 곧 이슬털기의 준비였다. 망자가 왕생극락을 하려면 이승에 한을 남기지 않고 깨끗해야 하는데, 망자의 원한이 이승에 이슬이 되어 맺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그야말로 '씻김굿'이었다. 눈물을 훔치며 나온 낙안댁이 솥뚜껑을 잡았고, 다른 여자가 돗자리를 붙들었다.

"......불쌍한 금일망제 넋이 되야 오시고 혼이 돼 오셨으니 넋방에 모시고 혼방에 모시고 비린내도 가시고 단내도 가시게 씻겨서나 천도를 허옵시면......"

소화의 주문은 엄중머리가락을 타고 흐르며, 지전다발은 솥뚜껑을 쓰다듬다가 낙안댁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하며 춤사위를 그려냈다. 지전 춤에 이어 지전다발과 함께 신 칼을 들고 신 칼춤이 한바탕 어우러졌다. 두개의 신 칼은 서로 엇갈리며 허공을 가르다가 모아져 솥뚜껑을 다드락 두들기고는 했다. 놋쇠와 무쇠가 맞부딪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춤과 가락이 끝나고 씻김이 시작되었다. 쑥을 담근 쑥물을 빗자루로 찍어 솥뚜껑부터 몸체까지 씻어 내렸다. 다음에 향을 담근 향물로 씻어 내렸다. 끝으로 청계수로 씻어 내렸다. 그리고 수건으로 닦은 다음 지전다발로 솥뚜껑을 감싸 들었다. 그것을 하늘로 받쳐 올리고 춤을 추었다. 행기를 내려 다시 청계수로 씻어 닦은 다음 뚜껑을 열어 넋전을 꺼내어 춤을 추었다. 주룩이 내려지고, 소화는 몸체를 받쳐 들고 하늘을 향해 절을 올렸다. 줄기차게 노랫가락으로 주문을 외고, 쉼 없이 춤을 춰가며 그 긴 예식을 지치는 기색 하나 없이 치러내고 있는 소화를 지켜보며 이지숙은 오히려 자기가 지칠 지경이 이르고 있었다. 쌀이 수북하게 쌓인 소쿠리 가운데 혼대가 꽂혀 있었다. 혼대를 낙안댁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망자의 혼이 혼대를 타고내리면 혼대를 잡은 사람의 손이 떨리고, 망자는 무당의 입을 빌어 소원을 말하는 손대잡이였다. 지전다발이 혼대를 감싸 돌고, 낙안댁을 휩싸고 돌며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을 타고 주문이 흘렀다. 낙안댁의 손이 조금씩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지전다발은 더욱 격렬하게 바람을 일으켰고, 낙안댁의 팔도 따라서 심하게 떨려댔다.

"임자 임자 나가 왔네, 임자 보러 나가 왔네. 엄동설한 설한풍에 오도가도 못험스로 망망창공 떠도는디 임자가 불러 요리 왔네. 이승 이별 하였으먼 저승길로 가야는디 내가 워째 막막창공 울고울고 떠도는지 그 연유사 임자 알제. 그 연유를 못 풀으먼 이내몸은 영겁토록 불망귀신 못 면허니 임자가 풀어주소."

"말씸 허시씨요, 말씸 허시씨요. 무신 말이든 다 들을팅께 싸게싸게 말씸 허시씨요."

팔을 무섭게 떨어대는 낙안댁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타게 말했다.

"워메 용허기도 용헌 거. 저 눈 깜짝헐 새에 신 내리게 허는 것 잠 보소."

"아니시, 고것보담도 저 목청 잠 들어보소. 영축웂이 정 사장 아니라고."

여자들은 끼리끼리 속달거렸다.

"듣소듣소 내 말 듣소, 이내몸이 죽어서도 저승길이 맥혀서나 암흑천지 망망창공 끝도 없이 떠도는 건 낫에 찍힌 비명횡사 그 까닭이 아니라네. 임자임자 내 말 드소, 듣고 나서 명심허고, 명심혀서 실행해야 이내 몸이 죄 면혀서 옥황상제 알현허고 왕생극락 원푼다네."

"싸게싸게 말씸허씨요, 싸게싸게."

"나가 죽은 그 연고가 나가 지은 죄업인디, 그 죄업을 안 풀먼은 왕생극락 못 이루네. 임자임자 내 말 듣소, 염전헐란 그 논배미 처분 말고 두었다가 농지개혁 허거들랑 작인헌테 넘게주소. 그 죄업을 풀어야만 왕생극락 이루는디, 임자 맘은 워쩌는가. 나 소원 들을랑가."

"하먼이라, 열 분도 약조허제라."

"고맙고도 또 고맙네. 그 약조가 지켜지먼 이내몸은 죄업 씻고 왕생극락 헐 것이네. 왕생극락 성취허먼 두루두루 집안살림 알뜰살뜰 자식사랑 저승에서 살필거니 걱정말고 평안하소. 가네가네 나는 가네, 임자믿고 나는 가네."

"여엉가암!"

낙안댁은 벌떡 일어서며 두 팔을 뻗쳐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고,

"여엉가암......"

흐느끼며 허물어지듯 덕석위에 쓰러졌다. 이지숙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긴 숨을 내쉬었다. 꼼짝을 하지 않고 망자의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던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술렁거림에는 아랑곳없이 소화는 다음 굿으로 넘어갔다. 낙안댁은 주체할 수 없이 터져 오르는 울음을 가까스로 어금니로 물며 소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서러움에 앞서 남편을 왕생극락부터 시켜야 했던 것이다. 망자의 모습을 한지로 오린 넋전이 낙안댁의 머리 위에 올려졌다. 지전다발로 그것을 달아 올리면 망자의 왕생극락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손대잡이의 신 내림과 함께 무당의 신통력을 판가름하는 굿이기도 한 넋풀이였다. 소화의 춤사위는 어느 때 없이 짧고 힘찼으며, 따라서 지전다발도 격렬한 몸부림으로 가닥가닥이 서로 엉키듯 쥐어뜯듯 하며 허공을 어지럽혔다. 그러기를 이십여 차례, 소화는 지전다발을 낙안댁의 머리 위로 가만히 내려놓고서, 잠시 머물러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던 사람들 사이에서 화하! 하는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낙안댁의 머리 위에 놓였던 넋전은 간 곳이 없었고, 그것은 소화가 지전다발을 살랑살랑 흔들자 그 속에서 떨어져내렸다. 그 넋전을 확인한 사람들의 입에서 햐아! 하는 탄성이 다시 일어났다. 소화가 지전다발을 낙안댁의 머리로 내릴 때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이지숙은 이제 편안해져 있었다. 그건 전기의 원리였던 것이다. 지전다발을 세게 흔들어대 전기를 일으켰고, 그 힘에 동질의 가벼운 넋전은 끌어올려지게 되어 있었다. 손대잡이 신 내림이 심리 최면인 것처럼. 그러나 이지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식의 분석을 하고 있는 스스로의 어줍잖은 이성에 경멸을 느꼈다. 그건 자신의 부탁을 어김없이 들어준 소화의 노력마저 모독하는 행위 같았기 때문이다. 영돈말이 때의 돗자리를 펼쳐놓고, 망자의 옷 위에 넋전을 올려놓은 다음 당골 혼자서 그 옆에 앉아 장구를 동동 치며 회심곡 가락으로 굿을 꾸몄다. 왕생극락한 넋을 저승에 고하고, 이승육갑과 저승육갑을 맞춰 넋의 거처를 정하는 희설이었다. 무명베를 두 사람이 큰방 쪽에서 대문 쪽으로 팽팽하게 잡고 섰다. 그 질배 위에 작은 꽃상여가 올려졌다. 남색 포장과 노란 몸띠, 포장 네 귀퉁이에 달린 흰 꽃술과 빨간 댕기, 빨간 실에 매달린 노랑 붕어-작은 꽃상여는 흰 무명 위에서 더욱 앙징스러웠다. 영돈말이 때쓴 행기를 써도 그만이었지만 소화는 일부러 정성들여 그 꽃상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성실은 어머니의 물림이었다. 망자가 극락으로 천도해가는 길 닦음이었다. 낙안댁을 선두로 친척들이 줄지어 질배 위에 저승노자를 놓았다. 소화는 꽃상여를 나지막하게 들고 질배 위를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며 가락을 시작했다. 꽃상여가 질배 위를 왕복할수록 가락은 경쾌해져가고 있었다. 저승노자를 놓는 사람마다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구경하는 여자들도 춤을 추었다. 왕생극락해서 떠나는 망자에게 모두가 보내는 축하였다. 굿이 끝나가고 있었다. 꽃상여가 내려지고, 돈이 모아졌다. 질배 위에 망자의 옷을 올리고, 그 위에 꽃상여를 올려 질배가 접어졌다. 지전이 불붙어 타고, 넋전이 타고, 망자의 옷이 타고, 꽃상여가 타고, 그 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별빛들이 멀고 먼 어두운 하늘을 우러르고 홀로 선 소화는 징징 징을 울려대고 있었다. 굿을 막음하는 종천맥이었다.

떡을 나눠 받느라고 사람들이 일으키는 소란의 한구석에서 이지숙은 먼발치로 소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고운 여자가 간직하고 있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무엇일까. 내가 혁명에 쏟는 열정과 어떻게 다를까. 혁명이 성취된 땅에서 혁명은 저 여자가 담당하고 있는 몫까지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의 질문에 이지숙은 멋 적게 웃었다. 무슨 까닭인지 소화를 아는 체할 수가 없었다. 이지숙은 소화가 일을 끝내고 돌아서는 것을 기다려 그 집 대문을 바삐 벗어났다.

굿을 치른 이틀 뒤였다. 소화는 이지숙과 마주 앉았다가 의외의 사람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즈그덜언 쩌그 삼구에 사는 사람덜인디라, 요분참에 굿 풀이럴 잘혀주신 덕분에 살아나게 된, 그 논 부치고 있는 작인덜이구만이라."

소화와 이지숙의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어지께 저녁참에 그 소문이 마실에 퍼졌는디, 하도 요상시럽고 얄궂어서 니나 나나 믿덜 못허는디, 쌩쌩헌 논얼 염전 맹글겄다고 나선 그 독허고 징헌 인종이 아무리 불지옥 못 면허게 헹펜이 똥줄타게 급해졌다 혀도 그리 손바닥 뒤집대끼 회개헌 거이 요상시럽고, 설혹 이승에서 욕심 많던 그 인종이 저승에 가서도 왕생극락헐 욕심으로 그리 사설얼 깠다 혀도그 예편네가 그 말얼 그대로 지키겄다고 약조혔다는 거이 아무리 생각혀도 얄궂드라 그것이구만이라. 그리혀서, 헛소문이라도 존께 알아나보자, 허고 뜻이 뫼져 멫멫이 읍내로 나가 알아봉께, 워따 고것이 참말 아니드랑가요. 살판난 작인덜이 한바탕 얼씨구야럴 허고 나서 지 정신덜 채레갖고 고것이 대체 워찌 된 연고인지럴 되작되작 생각혀봉께로, 고것이 바로 신통력 씨기로 소문 짜아헌 우리 당골님이 그 씬 신통력으로 그런 인종도 회개허게 맹그시고, 그 마누래도 개심허게 굿풀이럴 자알 혀주신 덕분이란 것을 알게 되얐구만이라. 우리덜 살레주신 그 음덕 갚을 질언 막연허고, 글타고 모른칙끼 입 딲아뿌는 것도 사람도리가 아니라서 즈그덜찌기 쪼깐썩 쌀추렴혀서 떡 한 시루 해갖고 요리 찾아뵙구만요."

앞으로 나선 남자가 연습이라도 하고 온 듯 줄줄이 엮어댔다. 그 남자의 뒤로는 네 남자가 하나같이 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서 있었고, 그 옆에 받쳐진 지게에는 커다란 시루가 올려져 있었다.

"멀라고 떡꺼정......"

얼굴이 붉어진 소화는 민망해하며 이지숙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기분 좋은 얼굴인 이지숙은 소화를 빤히 쳐다보며 그저 웃음만 짓고 있었다. 소화는 바로 얼마 전에 이지숙에게 치하를 받은 데다 또 이런 일이 겹쳐서 마음이 흐뭇하면서도 쑥스러움을 이기기가 어려웠다.

"저어, 서로가 마음이먼 되는 것이제 살림살기 에로운 헹편에 떡은 멀라고 해오시고 그러신당가요. 지야 묵을 입도 많잖고 헌께 그냥 가지가서 아그덜헌테 갈라믹이씨요. 지야 묵은 것이나 매일반잉께요."

소화가 조용히 말했다.

"아이고메 고것이 무신 당치않은 말씸이당가요? 절집허고 당골네집서 부지깨이 하나락도 입어내서는 십년 재수에 흉 낀다는 것 몰르시지는 않겄제라. 당골집 울안에 들어온 물건이야 응당 당골집 것잉께, 즈그덜이야 십년 재수 생각혀서라도 그리 못허겄구만이라."

남자는 능란하게 말을 받아내고는,

", 멋덜 허고 섰냐! 싸게 떡시루 쩌그 말래다 안 내레놓고."

뒤에다 대고 버럭 소리쳤다. 뒤에 섰던 남자들이 황급히 지게를 잡는다, 떡시루를 내린다, 부산하게 움직였다. 소화는 난감한 얼굴로 다시 이지숙을 쳐다보았다.

"받아두는 수밖에 웂구만요. 들몰댁 아그덜 믹일 만치 냉게놓고 선생님이 가지가셔서 야학 학생들헌티 믹이먼 어쩌겄는가요?"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게까지 마음 써줘서 고마워요."

이지숙은 반가움을 표하고는 눈길을 밖으로 돌렸다.

"저는 야학선생 이지숙이라고 합니다. 아저씨들께서는 저를 모르시겠지만."

"아니구만이라, 지는 알어뵙구만요. 지 자석눔얼 갤차주시는디, 진작에 인사 못 여쭙고 여그서 불시에 뵌께 면목이 웂어서 그냥 몰른 칙끼 허고 있었구만요. 용서허시씨요."

한 남자가 허리를 구부렸다.

", 그러세요. 학생 이름이 뭔가요?"

야아, 지가 지점동이 애비구만요."

"네에, 점동이 착하고 공부 열심히 합니다."

"아이구메, 그 멍청헌 자석얼 그리 말씸 해주시니, 황송시럽구만요."

그 남자는 금방 얼굴이 환해지는 웃음을 담으며 또 허리를 굽혔다.

"선상님, 무신 허실 말씸이 있으신 것 아니었는가요?"

처음의 남자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네에, 한 가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혹시 정 사장 문제로 잡혀 들어간 분들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고 계신가 해서요."

"야아, 집집마동 면회럴 왔다갔다헌께 소식이야 듣는디, 사람이 죽어뿌러논께 법얼 피헐 방도도 웂고, 옆에만 섰든 사람덜꺼지 싹 다 살인 죄인으로 몰린 것은 복통해 죽을 일이고, 재판만 기둘리고 있는디 고것이 깝깝헌 일이제라. 돈이 있으니 변호사럴 대겄는가요, 배운 것이 있으니 손수 나서 법얼 따지겄는가요. 옆에서 보기만 허자도 짠뜩 심이 들고 한숨만 나온다니께요."

"혹시 그 일을 해결해보려고 오늘 떡을 해오는 것처럼 서로 의견을 모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글씨요...... 그러덜 못혔구만요."

남자는 기가 죽으며 말을 어물거렸다.

"제 생각으론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소작을 잃을 염려 없이 농지개혁을 받게 된 건 여기 당골님 덕이 큰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당골님이 그런 좋은 굿 풀이를 할 수 있게 된 건 정 사장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잡혀 들어간 열두 분이 없었으면 여러분들께 오늘과 같이 기쁜 날이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열두 분은 정 사장을 그냥 죽인 살인자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논을 지켜주기 위해서 여러분들 대신 싸우다가 감옥에 갇힌 여러분들의 은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찌 여기에 떡을 해오는 것처럼 은인들을 구해낼 힘은 합치지 않는 겁니까. 여러분들이 그분들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굿 소식을 들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네들만 좋아하면서 여러분들의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때 여러분들의 가족들 심정은 어떨지 생각해 보십시오. 분하고 억울하고 낙담되어 세상 살맛이 나겠습니까? 여러분,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쌀을 추렴해서 오늘 떡을 해왔듯이 모두 그분들을 수해내자고 굳게 마음을 모아 변호사 댈 비용을 장만하십시오. 농지개혁을 못 받게 될지도 모를 형편에서 농지개혁을 틀림없이 받도록 되었는데, 쌀 한 가마니가 아깝습니까? 아니, 쌀 두가마니가 아깝습니까? 제 생각으로 쌀 한두 가마니씩만 모으면 첫 번째 재판의 변호사를 댈 수 있습니다. 재판은 첫 번째가 중요합니다. 분명히 정 사장이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변호사만 대면, 한 분은 어떨지 몰라도 다른 열한 분은 틀림없이 살려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당장 변호사 비용을 모으세요. 그걸 모아가지고 야학을 운영하시는 서민영 선생님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세요. 그분은 발 벗고 도와주실 겁니다. 저도 말씀드리겠어요. 만약 여러분들이 쌀 한두 가마니가 아까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멀쩡한 논에다가 바닷물을 끌어댄 정 사장보다 더 나쁜 사람들입니다. 제가 진작부터 몇 분을 만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만나게 돼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이지숙은 팽팽한 눈길로 처음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말씸 듣고 봉께 즈그덜이 사람이 아니구만요. 즈그덜이 소견이 짧어 미처 생각허지 못헌 것을 말씸해주셔서 고맙고, 그 말씸이 가심얼 찡허니 찔르는구만이라. 선상님 말씸대로 당장 일얼 꾸밀 것잉께 선상님께서도 뒤럴 잠 봐주시먼 좋겄구만요."

남자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네에, 아주 잘 생각하셨어요. 저는 얼마든지 돕겠어요."

이지숙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고맙구만이라. 글먼 즈그넌 이만 물러가겄구만요."

그들은 고개를 꾸벅거리고 돌아섰다. 이지숙은 또 하나의 성취감을 맛보며 남자들의 뒷모습에 눈길을 박고 있었다.

"또 존 일하나 더 보태셨구만요. 선생님 맘언 워찌 그리 넘 위허는 디로만 열렸는지 몰르겄구만요."

소화의 조용한 말이었다.

"남을 위하긴요,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생각하고, 틀린 것을 바르게 잡으며 사는 것이 사람으로 제대로 사는 거라는 생각에서 하는 작은 일일뿐인걸요."

"워째 고것이 작은 일이당가요. 시상에서 질로 허기 심든 일이겄지요."

"소화 씨는 저보다 훨씬 더 남을 위해 사는지도 몰라요. 그 날 굿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무신그런 말씸얼...... 지는 선생님을 가차이험서부텀 요런저런 생각얼 많이 되작이게 됐구만요. 워찌 넘만 위허는 일에 저리 열성일끄나, 워쩌머 저런 맘이 묵어지는고, 나가 원제 저래본 일이 있는다, 나가 헛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얼 허다 보먼 선생님은 관음보살 현신맹키로 높아 뵈고, 지는 지 혼자만 배불리고 사는 벌거지맹키로 천해 뵈고 그렁마요. 워찌고런 귀헌 맘이 묵어지는 것인지, 좌익을 허먼 그리 되는가요?"

이번 굿을 치르고 나서 그런 생각을 더욱 구체적으로 하게 된 소화는 숨김없이 마음을 털어놓았다.

"소화 씨와 저는 조금치도 차이가 나지 않게 똑같은 입장에 있는 겁니다. 이번 굿에서 제 부탁을 들어준 게 바로 그 증겁니다. 저는 굿을 전혀 모르니까 그 일을 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드는지에 대해서도 또한 모릅니다. 그러나 소화 씨가 한 일은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그건 제가 칠팔 년 동안 한 일보다 더 큰 성과입니다. 세상에 어느 당골이 그런 부탁을 받아들이겠어요. 그런 부탁을 선뜻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긴 소화 씨는 이미 우리의 동지입니다. 그런 행동의 실천은, 억압받는 사람, 착취당하는 사람, 그래서 억울하고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편이 되려는 자각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소화 씨는 앞으로도 계속 그 마음을 키워나가고 넓혀나가면 저와도 더 친한 동무가 될 수 있습니다."

이지숙을 어느새 소화의 손을 꼭 잡고 말하고 있었다.

"저겉은 무당이 워찌......"

"소화 씨, 스스로를 자꾸 그렇게 낮춰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린 사람의 직업을 차별하거나 가리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린 기본출을 더 필요로 합니다. 지금 전사들 중에 당골의 아들이나 백정의 아들이 얼마나 많고 그들이 또 얼마나 당당하게 투쟁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천대와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열성으로 일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소화 씨는 자각에 따라 벌써 그 일을 해냈고,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하면 됩니다. 소화 씨의 그런 자각적 행동을 알면 정하섭씨도 아주 반가와하고 기뻐할 겁니다."

이지숙은 일부러 정하섭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아직 익숙하지 못할 소화의 감정을 생각해서 '동지''동무'라는 호칭을 피했다. 소화의 얼굴은 금방 발갛게 물들며 고개를 떨구었다. 소화가 정하섭을 얼마나 마음에 깊이 담고 있는지를 이지숙은 여자로서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안창민을 놓고 저럴 수 있는가. 이지숙은 고개를 저었다. 소화가 품은 농도에는 비교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소화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강해 자신이 마치 상처라도 건드린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이지숙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들몰댁은 무슨 볼일이 있어서 친정에 갔나요?"

이지숙은 일부러 화제를 바꾸었다.

"친정에 우환이 생겼는디, 들몰댁 심으로야 워쩔 방도가 웂은 일이기넌 해도, 굿이 끝나고 해서 댕게오라고 혔구만요."

"무슨 우환인가요?"

말이 이어져 다행이라고 이지숙은 생각했다.

"긍께, 두어 달 전에 지주덜이 논 뒤로 빼돌리는 것 막자고 들몰 작인 수백 명이 들고 일어난 것, 선생님도 아시제라?"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소화는 그때서야 이지숙을 쳐다보았다.

", 알지요."

"그 일에 친정동상이 주동헌 죄럴 쓰고 순천으로 넘어갔구만요."

"그렇군요, 그 사람들 속에 들몰댁 동생도 끼어 있었군요."

이지숙으로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다.

"사우가 그런 디다가, 아덜꺼정 그리 되고 봉께 친정엄니 애태우는 것이 예사가 아닌 모양이드만요. 그 일이 워찌 될란지, 선생님은 멀 잠 아시고 기신가요?"

정하섭에 대한 감정이 다 사그라진 소화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너무 걱정들 안 해도 괜찮을 거예요. 좌익을 한 것도 아니고 소작인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한 일이니까, 아마 얼마 안 가 풀려나게 될 겁니다. 큰 벌을 줄 수 없는, 억지로 만들어낸 죄니까요."

이지숙은 자신 있게 말했다.

"어서 그리 됐으먼 좋겄구만요. 갇힌 사람이나 기둘리는 사람이나 하로가 천 날일 것인디. 일정 때나 지끔이나 말자리나 허고, 똑똑헌 사람언 죽기 아니먼 감옥살이니 원."

소화는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런 잘못된 세상은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모두가 공평하게 사람대접을 받으며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예요. 이번에 소작인들을 돕게 되어 소화 씨가 그렇게 기뻐했는데, 우리가 하는 일로 온 세상 소작인들이 전부 골고루 잘살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때의 기쁨은 천 배, 만 배가 될 거예요."

이지숙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진득거렸다. 소화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니, 뭐가 어쩌고 어째!"

전화기를 잡은 백남식은 구둣발로 마룻장을 굴러대며 목을 찢어내고 있었다.

"요런 병신 같은 새끼야, 한 놈도 아니고 세 놈씩이나 행방불명이라니, 너 이 새끼 그게 말이라고 아가리 놀려대는 거야! 당장 찾아내, 당장."

"다섯 시간 이상 수색을 했지만 못 찾아서 이렇게,"

"이 새끼야, 아가리 닥치라니까! 너 마빡에 바람구멍 뚫리고 싶지 않으면 그 새끼들을 꼭 찾아내. 그렇지 않으면 넌 당장 총살이야, 총살! 계엄 하에서 부하를 세 놈씩이나 잃어먹는 너 같은 새낀 직결처분이다, 직결처분! 내일 아침까지 다시 보고해."

백남식은 전화통이 깨져라 하고 수화기를 난폭하게 걸고는 숨을 헐떡거렸다. 이거야말로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기껏 병력보충을 받아놓고 작전개시를 하기도 전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재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중사가 앞에 있다면 당장 쏴죽이고 말 것만 같았다. 말이 행방불명이지 다섯 시간 동안이나 그 좁은 바닥을 뒤졌는데도 찾지 못했다면 그건 분명 계획적인 탈영이었다. 탈영이라면 그놈들이 어디로 갔을까. 백남식은 이 대목에서 암담해졌다. 그것들이 집으로 갔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직감은 불길한 쪽으로 쏠렸고, 아무리 반대쪽으로 돌리려 해도 돌려지지 않았다. 직감대로 그놈들이 적진으로 도주했다면 예삿일이 아니었다. 병력 잃고, 화력 잃고, 사기 잃고, 군기 잃고...... 잃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다가 책임문제까지 뒤따르고 있었다. 여순반란 이후 일 년 동안 장교와 하사관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숙군을 단행해 장교와 하사관의 기근현상이 벌어질 정도로 군부 안의 좌익을 뿌리 뽑으려 했지만 사병들까지 그렇게 철저한 조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미 좌익의식을 가진 자, 좌익성향을 가진 자를 골라내기 위한 사병들의 동태파악과 좌익세력침투를 막아야 하는 건 작전에 앞서서 상하급 지휘관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런데 세 명이 무기를 가진 채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적에게로 넘어가 이쪽을 공격하게 된다면, 병력보충을 받지 못할 경우 이쪽의 손실은 여섯 명 거의 일개분대를 잃게 되는 셈이었다. 이런 계산을 할수록 백남식은 속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또 무슨 사곱니까?"

권 서장이 백남식의 눈치를 살피며 들어섰다.

"이거 참 골치 아픈 일이 생겼소. 조성에서 세 놈이 탈영을 한 모양이오."

"세 명씩이나요?"

권 서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섯 시간을 뒤져도 못 찾았다는데, 어찌 됐을 것 같소?"

"글쎄요, 집단행동인걸 보니......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군요."

권 서장은 신경 써서 자극적인 말은 피했다.

"서장님 생각도 그렇다면 틀림이 없습니다. 이 새끼들이 여태까지 숨죽이고 박혀 있다가 본격적인 작전이 개시될 눈칠 채고 적진으로 내뺀 겁니다. 요런 찢어죽일 새끼들!"

백남식은 두 눈에 세모진 각을 세우며 빠드드득 이빨을 갈아붙였다. 권 서장은 이 끝도 한도 없는 진흙구덩이 같은 현실에 현기증을 느끼며 돌아섰다. 그들 두 사람의 예측대로 부대를 이탈한 세 명은 조성책 오판돌의 선을 따라 주월산을 넘었다. 세 사람 중에 둘은 작년 십이월에 염상진이 율어를 장악하고 첫 번째 조성을 공격했을 때 염상진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염상진의 명령에 따라 다시 부대 안에 잠적했고, 그 선은 오판돌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 년 동안 오판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다가 노출 위험에 직면해 긴급조처를 요구했고, 오판돌은 부대탈출을 지시했다.

"위원장동무, 새 동지 한동일럴 소개 드리겄습니다."

", 한동일 동무, 어서 오씨요. 선얼 통해 보고받고 기둘리고 있었소."

오판돌이 힘차게 손을 내밀었다. 앳된 얼굴의 한동일이 왼손으로 팔을 받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한 동무넌 집이 워디고, 멫 살 묵었소?"

오판돌은 기운차게 팔을 흔들어대며 물었다.

"집은 해남이고, 시물두 살이구만요."

"장개는 갔소?"

"안직......"

"집안 어런언 멀 허시오?"

"농새꾼인디요."

", 전사로서 아조 찍어낸 절편이오. 앞으로 항꾼에 피나는 투쟁얼 혀봅씨다, 한 동무."

"열성으로 허겄구만요."

그때서야 오판돌은 한동일의 손을 놓았다. 오판돌의 힘이 넘치는 악수는 이미 부대 안에서 유명했다. 손아귀의 힘이 유난히 센 그는 상대방의 손을 우악스러울 정도로 힘껏 잡는데다가, 마구 팔을 흔들어대면서 한 매듭의 말을 하는 습관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습관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손아귀에서 손이 구겨지는 꼴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악수를 제일 질색하는 사람이 안창민이었다. 그렇다고 악수를 마다할 수도 없는 일이라서 안창민은 그의 얼굴만 보면 미리 심호흡을 하며 손과 팔에 힘을 모았다. 그러나 손이 작은 안창민으로서는 매번 손이 구겨지는 기분을 떼칠 수가 없었다.

"오 동무 투쟁할 기운을 악수할 때 다 써버리는 것 아뇨?"

이해룡의 가시 박힌 말에도 오판돌은 전혀 그 버릇을 고칠 눈치가 아니었다.

"악수야 반가운 정 나누자고 허는 것인디, 그리 짱짱허니 잡고 짤짤 흔들어야 씨언허제, 헐렁허니 잡고 손바닥이 닿는지 안 닿는지도 몰르게 허고 마는 악수가 무신 악숩디여? 그럴라먼 허덜 말아야제."

오판돌의 말에 찬동하는 것은 하대치였고, 염상진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하는 악수는 바로 '독립군 악수'였던 것이다. 생사를 걸고 싸우다가 다시 만나게 된 독립군들은 서로 반가움을 이기지 못해 그런 식으로 열렬한 악수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간도살이를 한 그의 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거창한 이름의 악수는 차츰차츰 '빨치산 악수'로 부대 안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생사를 걸기는 독립군이나 마찬가지인 그들 사이에서 싱거운 악수보다는 그런 기운찬 악수가 더 동지애를 실감시켰던 것이다.

"여그, 총도 두 자리 더 갖고 왔구만이라."

오판돌 앞으로 총 두 자루가 불쑥 내밀어졌다.

", 요것 에무왕 아니라고?"

오판돌은 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하고는,

"와따, 두 동무넌 더 볼 것 웂이 영웅이요. 일 년 동안 적진 속에서 암약헌 디다가, 새 동지럴 포섭허고, 거그다가 요 존 에무와꺼지 두 자리썩이나 더 갖고 오는 공얼 세왔응께 말이오. 참말이제 장허요, 장해. 총 한 자리가 사람 하나 택인 판에 두 자리나 더 챙게왔시니."

그는 M1 두 자루를 껴안다시피 하고 쓰다듬으며 감격스러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이 셋에, 총이 다섯 자루나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근디, 그짝 기운이 더 달라진 것 웂었소?"

오판돌이 총을 옆구리에 낀 채 물었다.

"판이 아조 급허게 돌아가고 있구만이라. 그 날짜가 원젠지는 몰르겄는디, 을매 안 있어 율어를 밀어붙인다는 소리가 뿌쩍 심해지고, 웃 사람덜이 부하 닥달허는 것도 달라진 것 봉께로 무신일얼 한바탕 벌리기는 벌릴 눈치드만이라."

"알겄소. 애썼는디 푹 쉬씨요."

오판돌은 세 사람을 내보낸 다음 담배를 피워물었다. 안창민에게 보낸 선 요원이 돌아올 때가 가까워져있었다. 지리산 일대에서는 벌써 새로운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지난번 회의 때 들었다. 그 회의에서 군경의 움직임에 대해 정보가 모아졌고, 그 결과 군경이 율어를 칠 계획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되었다. 현재의 병력으로 군경을 막아낼 수 있느냐가 그 다음 토의 사항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지구사령부 결성을 거친 군당 병력은 이미 그 전의 병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하기를 주저하는 그 침묵이 바로 정확한 대답입니다. 현재 우리의 병력으로는 군경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군경의 작전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는 저 혼자서도, 이 자리에서도 결정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젭니다. 적들은 벌써 지리산일대에서 전투를 개시했고, 이제 지방별로 전투를 개시할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여순병란의 주력은 주력대로, 각 지방 당 야산대는 야산대대로 공격하겠다는, 왈 동계대토벌작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지리산 일대의 지방 당 야산대들은 등 뒤로 적을, 눈앞으로 적을 두게 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해야 할 기본전략이 곧 당에서 하달될 것입니다. 그 전략을 바탕으로 우린 세부작전을 상황에 따라 세우게 될 겁니다. 우리 군당의 전체상황을 긴급보고하고, 당의 지시를 기다립시다."

안창민의 말로 회의는 끝났다. 그리고 아직까지 회의소집이나 당의 지시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쯤은 무슨 소식이 있겠지 하고 생각했던 오판돌은 세 사람을 맞이하고 나자 마음이 더 급해지고 있었다. 날로 추위가 심해져 가는데 지금까지 유지해온 공격상황이 수비상황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수비상황이 꼭 불리한 것은 아니더라도 적의 상세에 따른 여건의 변화인 것만은 분명했다.

"긴급회의 소집인디요, 당장 뜨셔야 되겄구만요."

서너 시간이 지나 도착한 선 요원의 보고였다. 오판돌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두 부하와 함께 어둠살이 내리는 산굽이를 타기 시작했다.

"도당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율어를 포기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안창민의 첫 마디에 세 사람은 긴장했고,

"이는 앞으로의 투쟁방법이 전면적으로 달라진다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는 당분간 생산력이 중단된 해방구를 지키기보다는 적이 유발시킨 긴급 상황에 대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에 따라 당이 결정한 바는, 첫째 군당 전 지역의 사수, 둘째 효과적 투쟁을 위한 읍. 면당 단위의 독립투쟁입니다. 이 원칙 아래 지금부터 우리 군당의 투쟁조직을 의논하고자 합니다."

그는 하대치. 이해룡. 오판돌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6. 산중의 엄동설한

백남식이 휘하의 이백 명 병력과 각 읍면의 경찰. 청년단 병력까지 총동원해서 벌교와 보성 양쪽에서 율어에 대한 협공작전을 개시한 것은 북서풍이 강하게 몰아치는 십이월 십팔일이었다.

"나의 작전에는 후퇴가 없다. 일단 작전이 시작되면 전진이 있을 뿐이다. 오늘 우리는 무조건 전진만 한다. 명령 없이 적에게 등을 보이고 후퇴하는 자는 가차 없이 즉결처분이다. 단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워, 오늘 우리는 반드시 율어를 점령해야 한다. 오늘 점령하지 못하면 점령할 때까지 산에서 버틸 것이다. 제군들은 단단히 각오하고 작전에 임하도록!"

백남식이 부하들을 북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한 말이었다. 같은 내용을 보성의 하사관과 서장 남인태에게도 전화로 지시했던 것이다. 그건 지휘관으로서의 허풍이나 협박적 독려가 아니었다. 그에게 떨어지고 있는 상부의 지시가 그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해방구'라는 것을 일단 없애라는 것이 상부의 신경질적인 지시였다. 백남식의 부대는 백동마을이 눈에 띄면서부터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백남식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적정을 탐지해서가 아니었다. 물량작전을 과시하려는 위협사격이었다. 군경과 청년단까지 가세한 이백 명 가까이가 일제히 쏘아대는 총소리는 그야말로 산이라도 무너뜨릴 것처럼 크고도 요란스러웠다. 안창민과 하대치는 산등성이 바위 뒤에서 그런 식으로 몰려 올라오는 적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린 총을 쏠 필요도 없겠소."

안창민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금메 말이요. 저리 하늘에다 대고 쏴 질러대니 즈그 총소리에 즈그 귀창 터져나가서 우리가 멫 방 쏘는 소리가 워디 딛기기야 허겄는가요. 공연시 아까분 총알이나 허실허제라."

하대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갑시다, 우리 계획을 자기들이 미리 알고 저리 도와주니 우리는 이래저래 이익을 봤소."

안창민이 뒤로 앉은걸음을 쳤다.

"니기럴, 저 꼬라지덜 참말로 눈뜨고 못 보겄네. 대포 멫 방만 있으먼 저 빙신덜헌테 팡팡 쏴질러 뿌렀으먼 속이 씨언허겄네."

하대치가 침을 퉤퉤 뱉으며 뒷걸음질을 했다. 이미 병력을 분산 배치시켜 율어를 비워버린 그들은 적진을 교란시켜 적이 화력이나 소모하게 하면서 뒤로 빠질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백남식의 부대는 긴 공격선에 걸쳐서 아무런 적의 저항도 받지 않고 산등성이를 넘어섰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백남식이 불안한 기색으로 권 서장에게 물었다.

"글세요......"

권 서장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쪽으로 신중한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둥그스름한 분지의 가운데로 여기저기 모인 마을이 멀리 보였고, 분지에 이르는 경사를 따라 구불구불한 길과 밭, 그리고 논들이 아스라하게 펼쳐 지나가고 있었다. 거기 어딘가에 적들이 판 함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적들이 무슨 유인작전을 쓰는 것 아니겠소?"

"글쎄요.....,."

"그게 아니면, 우리가 작전을 짠 대로 우리 위세에 밀려 다 도망쳐 버린 것 아니겠소?"

"글세요......"

"권 서장, 말끝마다 글쎄요, 글쎄요가 뭐요 도대체!"

백남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거 죄송합니다. 너무 뜻밖의 상황이라 아무렇게나 판단할 수도 없고, 신중을 기한다는 것이 그리됐습니다."

"좋소, 이것도 저것도 알 수가 없는 형편이니 처음 작전대로 아래 동네까지 밀어붙입시다."

그래서 가로줄서기를 한 군경은 비탈을 내려가면서도, 평지의 논밭을 가로지르면서도 총을 갈겨대고 있었다. 산으로 둥그렇게 에워싸인 율어에는 수많은 총이 계속 토해내는 총소리와 그 소리를 산들이 되뱉아내는 소리가 얼키고 설켜 날벼락을 치는 형국이 되고 있었다.

"워메 저 총알 아까운거, 참말로 아까운 거."

하대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안타까와하고 있었다.

"그만 아까와하고 어서 뜹시다. 저 자들은 하나도 아까와하지 않는, 얼마든지 있는 물건입니다."

안창민은 칼빈 총을 고쳐맸다.

"계산얼 안혀봤응께 똑떨어지게야 몰르겄제만, 좌우당간 쩌 총알 한 개 값이 보리쌀 한 됫박값이야 넘을 것이구만요. 저것이 결국은 다 인민의 핀디, 저리 헛방질로 쏴제끼는 걸 보자니께 속이 뒤집어질라고 허느만요."

"그렇지요, 인민의 피지요."

안창민은 그 분명한 인식에 하대치를 새삼스럽게 쳐다보며,

"아마 저 자들은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모를 겁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을 거구요."

그는 다정하게 웃었고, 하대치도 따라 웃었다. 안창민과 하대치는 부하들을 이끌고 총소리만 들볶아대는 율어를 등졌다.

결국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지서까지 점령하고 나서 백남식은 허탈에 빠졌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창피스러움을 느꼈다. 적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대고 줄기차게 헛총질을 했다는 것은 여러 모로 그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쉬쉬해가며, 군경 앞에서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 율어를 '모스크바'라고 하고, 염상진을 '작은 스탈린'으로 부른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심한 모독감과 함께 부글거리는 울화를 참아왔던 것인데 이렇게 속고 보니 감정은 더욱 뒤집히고 있었다.

"면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몰아내서 운동장에 집결시키시오. 여기 사람들은 빨갱이와 오래 붙어 살았으니까 사상조사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소. 그리고 그놈들이 떠나면서 틀림없이 세포를 박았을 테니까 그것도 깨끗하게 색출해내야 하겠소."

백남식의 비꼬인 감정은 면민들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사령관님, 제 생각으론 말입니다.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적에 대한 대비책부터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적이 이렇게 물러가 버린 데는 분명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힘이 모자라서 미리 피했다고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떤 작전을 위한 방법으로 여길 일부러 비웠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적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든 간에 일단 여길 장악한 우리 입장에선 다시 적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자면 여길 완전하게 지켜낼 수 있는 병력배치부터 서둘러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적은 오늘밤에라도 기습 공격을 가해올 수도 있는 일입니다. 벌써 지도로 확인하셨다시피 이곳을 장악하지 못하면 북서쪽으로 위치한 다른 면들에 대해서는 또 속수무책이 됩니다. 면민들의 문제는 그 다음 단계로 처리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그들은 이 겨울에 여기서 살 도리밖에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권 서장의 아귀가 맞는 말에 백남식은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물론이요, 나도 그 문제쯤은 다 생각하고 있소. 두 가지 문젤 동시에 처리할 작정이니까 빨리 면민들부터 모이게 하시오."

백남식은 위신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둘러댔다.

"그리고 말입니다, 면민들을 다루는 데도 강경책보다는 유화책이 어떨까 합니다. 아시다시피 적들은 여길 장악하고 있는 동안 면민들에게 선심공세를 취했습니다. 그렇다고 면민들을 다 좌익 취급할 수도 없는 일이고, 또 의심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필요한 건 그들을 우리 편에 서게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대하면서 조사할 것은 철저하게 조사하는 이중방식을 쓰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의 강경책이 적의 선심공세와 비교되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염려가 있는데다, 적과 함께 살아온 면민들은 모두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한데, 이때 부드럽게 나가면 오히려 협조를 얻을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권 서장의 말에 백남식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전적인 동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권 서장님의 말씀을 참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면민들부터 모이게 합시다. 그러데, 남 서장은 뭘 하길래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는 거요!"

백남식은 보성 쪽의 지휘를 맡은 남인태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

면민들을 모이게 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백남식은 권 서장과 부대배치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남인태는 그때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적정도 없는데 왜 이렇게 늦었소?"

백남식은 남인태를 보자마자 대뜸 쏴 질렀다.

"예상했던 적정이 없을수록 경계를 더 철저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인태는 담배를 빨며 태연하게 응수하고 있었다.

"해당 경찰서에선 도대체 뭘 하고 있었소. 끈 하나도 제대로 박아놓지 못하고 말이오."

"글쎄요, 내가 벌교를 떠나기 전에는 분명 율어는 빨갱이들 손에 들어가지 않았었고, 보성으로 다시 부임해 와서 보니 빨갱이들이 차지하고 있었소."

"그래, 남 서장한테는 아무 책임도 없다, 그런 말이오?"

백남식이 눈에 각을 세웠다.

"사실이 그렇지 않소. 끈이라는 거야 전부터 계속 박아져서 움직이는 거지 갑자기 적 속으로 파고 들어 박아지는 건 아니잖소."

"됐습니다. 그건 다 지나간 문젭니다. 적들이 무슨 생각으로 여길 미리 떠났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잖습니까. 적이 우리와 맞서 싸울 힘이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이 겨울에 스스로 물러갈 리가 없는 일 아닙니까. 우린 일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리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갖춘 힘 때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지난 일 더 따지지 말고 앞으로 일이나 잘해 나가도록 마음을 합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권 서장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감정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정했다.

"나도 지난 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오."

남인태가 얼른 권 서장의 말에 동의했다. 백남식은 구겨진 얼굴로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다.

율어를 계속 장악하는 동시에 서북쪽 산간을 따라 자리 잡은 면들을 중심으로 토벌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율어 군 병력을 반 정도 배치하기로 했다. 병력의 재배치에 따라 군사령부가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백남식은 상부와의 긴밀한 연락 등을 이유로 사령부를 벌교에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남인태도 권 서장도 그 점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친애하는 면민 여러분, 그동안 좌익들의 등쌀에 얼마나 고초가 많았습니까. 진작에 좌익들을 몰아내서 여러분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조처했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이렇게 늦어진 점,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앞으로는......"

백남식의 연설은 이런 식으로 겸손하고도 부드럽게 끝났다. 잔뜩 겁 질리고 두려움에 차 있던 면민들은 그 의외의 연설에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쳐댔다.

그런데 군경의 조사를 앞질러 다음 날로 면민들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윤삼걸을 위시한 지주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소작인들을 모아놓고 이년 치 소작료에 대해서 닥달을 해대고 있었다. 그들의 열기 받친 목소리가 점점 커가면서, 소작을 영영 떼겠다, 경찰에 넘기겠다, 살림살이나 집을 빼앗겠다, 동원할 수 있는 공갈이나 협박을 다 동원했지만 소작인들은 기운 빠지고 무표정한 얼굴로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싹 다 좌익덜이 가지가뿌렀구만이라."

그 말은 안창민이 떠나면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준 말이었다.

"여러분, 모든 걸 우리한테 떠넘기십시오. 군경이나 지주들한테 우리가 욕먹는 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편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우리한테 떠넘기십시오."

안창민이 면민들에게 남기고 간 말이었다. 어찌할 수가 없게 된 지주들은 마름 닥달에 나섰다. 그러나 마름들의 말도 한결같았다.

"맞구만이라, 빨갱이덜이 가실허는대로 다 몰아가뿌렀구만이라."

마름들은 안창민에게 따로 불려가 들은 말이 있어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면에서 지주들 편을 들 사람은 당신네들 밖에 없소. 만약 작인들이 당하게 되면 그땐 당신네들을 살려두지 않겠소. 우린 여길 아주 떠나는 게 아니요. 싸움을 위해 잠시 비우는 것뿐이오. 우린 계속 당신네들 옆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안경 속에서 그들을 차갑게 쏘아보며 안창민이 한 말이었다. 자력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된 지주들은 백남식을 찾아가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면민들에게 열렬한 박수를 받은데다가, 권 서장의 귀띔을 들은 백남식은 아주 그럴듯하게 거절을 하고 말았다.

"저도 도와드리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재산문제라 관이 개입할 수 없는 성질 아닙니까. 더구나 거기는 좌익이 오래 진을 친 곳이라 우리 입장에서는 대민관계를 인상 좋게 해야 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상부에서도 특별히 지시를 내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게 된 지주들은 벌교에서 사람들을 몰고 가 집뒤짐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만큼 곡식이 나올 리 없었다. 소작인들은 이미 오래 전에 곡식을 멀찍멀찍 떨어진 장소에다 감춰두고 한두 말씩 가져다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일월로 접어들면서 산중 추위는 혹독하게 변했다. 거기다가 가을에 준비해서 여러 비트에 보관했던 양식은 이미 바닥나고 없었다. 그리고 군경의 공격은 예상했던 것보다 한결 강하고 적극적이었다. 낮에만 공격을 하고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퇴각을 하곤 하던 몇 달 전까지의 방법을 완전히 버리고 밤중에도 산에다 천막을 칠 정도로 변했다. 자연조건. 자체여건. 적진상황, 그 어느 것도 유리한 것이라곤 없었다. 날이 갈수록 동상자가 늘어났고, 하루에 한 끼를 먹기에도 힘들 지경이었고, 분산된 적정으로 돌발전을 계속하다 보니 인원은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적들이라고 사상자가 안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쪽은 끝없이 보충을 받고 있기 때문에 힘은 날이 갈수록 차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염상진은 사그러드는 불덩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본 채 말이담배를 느리게 빨고 있었다.

"무신 생각얼 그리 허시요?"

옆에 앉은 남자가 옷 위로 허벅지를 긁적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 우리 투쟁이 앞으로 어떻게 돼야 할 건지를 더듬어보고 있었지요."

염상진은 그 남자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구사령관 주문철이었다.

"무신 존 방법이 있으시요?"

"글쎄요, 무슨 방법이 강구되긴 돼야겠는데...... 이러다간 겨울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까?"

"문제야 문제지요잉. 근디, 우리 둘이가 생각혀도 똑별난 수가 웂는디, 지리산이나 도당이라고 무슨 수가 있겄소? 지리산도 우리보담 더 에로우먼 에로왔제 잣덜 않을 것이요."

주문철은 지리산의 투쟁경험을 가진 사람답게 말했다. 집중표적이 되고 있는 그 곳은 더 어려우리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의 투쟁은 지금 막대한 소모전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걸 벗어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방안이 생겨야 당에 보고를 해서 시행 할수 있을 텐데, 답답하게 그게 생각나지 않으니 말입니다."

"지리산총사에서도, 도당에서도 아무 지령이 웂은 것 보먼 지끔 투쟁이 최선이라는 뜻이 아니겄소."

"그건 압니다만, 이래가지고서야 해동까지 몇이나 살아남겠습니까. 우리 부대만 하더라도 벌써 반 가깝게 인원이 줄어들었습니다. 그건 너무 많은 희생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희생이 계속될 텐데, 문제 아닌가요?"

"문제야 문젠디, 어쩌겄소. 묘수묘안이 웂은 바에야 지끔 상황이 최악임스로도 최선이란 뜻 아니겄소?"

말은 아무런 진전이 없이 제자리만을 맴돌고 있었다. 염상진은 이런 의미 없는 말을 되풀이하려고 대꾸를 시작하고, 말을 묻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마음에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것을 당에 건의하기 전에 주문철에게 타진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 주문철은 총을 귀신처럼 잘 쏘고, 산토끼처럼 몸이 빠른 것만큼 상부의 지시나 충실히 따르는 군인이었지 생각의 여유나 폭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에게 모험성이 강한 생각을 꺼냈다가 괜히 불필요한 오해나 사게 되는 번거로움을 겪고 싶지 않았다. 주문철은 그 나름의 긍지와 투철성을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여순병란의 주력인 십사연대 출신 중사라는 사실과 지리산투쟁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언제나 가슴에 쌍기둥으로 세우고 있었다. 그런 그는 평소에도 자신이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별로 달가와하지 않음을 염상진은 알고 있었다.

"염 동무는 다 존디, 무신 생각얼 앉으나 스나 그리혀쌓소? 말이 많으먼 못쓸 말이 많드라고, 쌈터에서 생각이 많으먼 총알 피허기가 에로와지는 법이요. 따른 것이야 다 쌈터에 제격인디, 당 일꾼이라서 그런가 그 생각 많은 것은 틀려묵었소."

서슴없이 말하는 그는 자신보다 한 살 위인 고흥 출신이었다. 지리산에 비하면 조계산 언저리의 산들은 묏등밖에 안 된다며 그는 지리산을 그리워하고는 했다. 그런 그에게 장기투쟁을 위한 전사의 보호를 위해 위장자수나 위장전향을 시키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타진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전략전술의 모색을 전제로 한 자유로운 의견개진이 있는 발언이었던 것이다. 자멸이 빤히 내다보이는 이중삼중의 악조건 속에서 당의 운명과 투쟁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극한투쟁의 끝에 당의 소멸이 있다면 투쟁의 의미는 무엇인가. 투쟁은 일차적으로 당의 존속을, 당은 혁명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닌가. 투쟁이 당을 소멸시키면 혁명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산 속의 이런 극한투쟁은 혁명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투쟁을 위한 투쟁이 아닐까. 인민과 유리되고 격리된 투쟁, 이것이 과연 현명한 것인가. 중국공산당의 오만리 대장정이 비겁한 후퇴였는가, 아니다, 그건 현명한 선택이고 용감한 전진이었다. 그리고 홍군의 깃발을 내리고 국민당국의 일부인 팔로군이 된 것은 비굴한 항복이었는가, 아니다, 그거야말로 슬기로운 전략이고 지혜로운 전술이었다. 이런 생각만으로 위장자수나 위장전향을 구상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전사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상자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중에 삼 할은 이탈자였다. 투쟁의 악조건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그들은 산을 등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을 사상무장의 빈약이나 투쟁의식의 결여라는 도식적인 말로 비판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당원에게나 해당되는 단죄의 기준이었다. 그들은 당원이 아니라 전사였을 뿐이다. 결과만으로 그들을 배반자 취급하기 전에 그들이 갖는 한계성을 파악하고 최소한의 투쟁여건을 유지시켜야 하는 것은 당의 책임이었다. 당이 처한 상황이 그것마저 할 수 없을 때 그들을 무작정 적으로 돌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등을 돌린 그들은 이쪽에서 반동으로 낙인찍기 전에 벌써 자신들이 먼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쪽과 적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집을 떠나 혁명의 대열에 섰을 때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 품었을 각오와 용기와 정열과 기대의 순수함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모든 것을 버리고 적진을 향해서 떠나가는 고통과 괴로움도 치지도외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투쟁여건이 유지되었을 때 그들은 과연 등을 돌렸을 것인가부터 검토, 반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그들을 죄인 만들어 등 돌리게 방치할 것이 아니라 어떤 긴급조치를 취해야만 마땅할 것이 아닌가. 장기투쟁에 대비한 전사의 보호를 위한 위장자수나 위장전향이란 생각은 그래서 생겨나게 된 것이다.

"대장님, 대장님, 보급사업 끝내고 부대가 돌아왔구만요."

비트 밖에서 들리는 보초의 조심스러운 보고였다.

"그려, 중대장 거그 와 있소?"

주문철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야아, 여그 왔구만이라."

"언넝 들오씨요, 추운디."

중대장이 거적을 들추고 들어섰다.

"욜로 앉으씨요. 사업은 잘 끝냈소?"

주문철이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대장님, 면목 웂이 되얐습니다."

중대장이 선 채로 주눅 든 소리로 말했다.

"워째, 무신 일 났소?"

주문철이 윗몸을 곧추세우며 눈을 부릅떴다.

"한 눔이 째부렀구만요."

"!“

주문철이 이빨을 빠드득 갈더니,

"긍께 아까 떠날 적에 나가 머시라고 당부혔소."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사령관 동무, 중대장이 책임은 있지만 너무 나무라진 마십시오. 보급 사업하랴, 적을 경계하랴, 부하들 살피랴, 하다 보니 어둠 속으로 내빼버린 것인데, 그걸 어쩌겠습니까. 열 사람이 한 도둑 못 지킨다고, 내빼기로 작정한 그 사람은 오늘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가게 되어있습니다."

염상진은 거의 다 사그라진 불덩이의 흔적인 흰 재에 눈길을 보낸 채 담담하게 말했다.

"사업은 워찌 되얐소?"

"무사허니 끝냈구만요."

"되얐소. 가서 쉬씨요."

중대장이 나가자 주문철이 불쑥 말했다.

"요거 영판 난리요. 학습얼 더 철저허니 시켜야 되덜 않겄소."

"그래야지요."

염상진은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팔베개를 하고 몸을 눕혔다. 나뭇가지와 솔잎들을 회초리 질하는 바람소리가 세차게 울리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군당의 얼굴 얼굴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율어를 버리고 분산투쟁으로 들어간 그들이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걱정이었다. 군당의 경계 안에서 투쟁해야 하는 그들은 그만큼 불리를 안고 있었다. 그 불리를 극복하는 방법은 기동성밖에 없었다. 적의 예상을 앞지르는 기동성으로 끝없이 비트를 옮겨야 하고, 그 사이에 기회를 엿보아 적을 기습하고 빠지는 작전을 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땅 속으로 비트를 파고 들어가서 겨울이 지나갈 동안 동면투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는 식량의 사전 확보가 문제였고, 발각되는 경우 몰살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건 비전투요원에게나 용납되는 방법이었고, 전투요원인 경우에는 적은 수가 위장을 위해서 짧은 기간 동안 활용할 수는 있었다. 그들에게 한 가지 유리한 것이 있다면 식량조달이었다. 그러나 마을이 가깝다는 것뿐 그건 적의 덫이 도사리고 있는 함정일 위험도 컸다. 이 살을 찢어대는 추위 속에서 안창민의 다리 상처는 말썽을 부리지나 않는지. 모두 살아남아야 한다, 이 몰악스럽고 혹독한 겨울이 끝날 때까지. 투쟁여건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상황 속에서 겨울은 또 하나의 무자비한 적이었다. 겨울은 추위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병 아닌 병인 동상까지 주었다. 동상예방에 대해서는 수시로 교육하고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말로만 동상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죽구두는 고사하고 운동화도 못 신은 발들은 고무신이나 짚신이 태반이었다. 거기에 발싸개인 버선이나 양말마저 신통치 않아 발은 언제나 동상 걸릴 준비나 하고 있는 것 같은 형편이었다. 그런데다가 발이나 매일 씻어 청결을 유지하면 또 모르겠는데,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돌발 상황에 대비하느라고 자면서도 신발조차 벗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염상진은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따끔거리면서 아릿한 가려움이 다 헐어빠진 일본군 지까다비 속에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오른쪽 새끼발가락과 왼쪽 넷째발가락에 얼음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매일같이 몇 십리인지 계산할 틈도 없이 산길을 걸어야 하는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신발 문제가 양식 문제만큼이나 중대하고 절실했다. 염상진은 무의식중에 사타구니께를 옷 위로 긁적였다. 움직임을 멈추자 이들이 기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가만가만 스멀거리고 살금살금 간질거리는 이들의 꼼지락거림은 언제나 짜증스럽고 기분 나빴다. 여름에는 자취도 없던 것들이 겨울만 되면 어디서 그렇게 생겨나 번창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깊은 산중이라도 물 있는 곳에는 고기가 있듯 겨울철만 되면 번식하는 이도 불가사의한 생명현상중의 하나였다. 도저히 퇴치가 불가능한 이들도 산중생활의 또 다른 적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몸뚱아리에 달라붙어 극성스럽게 번창하는 그것들의 끈질긴 흡혈은 지주들의 지칠 줄 모르는 탐욕적 착취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착취계급을 다 쳐없애는 혁명의 그날에나 이놈들도 박멸되려나...... 염상진은 긴 꼬리를 늘이며 쉼 없이 불어대는 매운 바람소리를 들으며 씁쓰레한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등을 파고 들던 따갑도록 아린 냉기는 이제 별 감각이 없었다.

그 시간에 하대치와 안창민은 제석산 상봉 가까운 비트에서 머리를 마주 대하고 있었다. 안창민은 군당 병력을 오개 소대로 편성하고, 일개 소대가 두 개씩의 면을 관할하도록 했다. 이해룡과 오판돌은 규모가 작은 산간 면을 하나씩 더 맡고 있었다. 독립 사업을 전개하되 필요에 따라 협동작전을 편다는 원칙을 정하고, 안창민은 주기적으로 중대장들과 선을 대고 있었다.

"읍내를 치는 문제는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벌교는 한쪽이 갯가라 보성하고는 조건이 다르거든요. 더구나 율어에 병력이 있어서 퇴로를 차단당할 위험도 있습니다."

안창민이 신중하게 하대치의 제의를 눌렀다.

"그렇기사 헌디, 벌교에 병력이 을매 웂응께 번개치기로 치고 빼먼 안 될랑가요? 자꼬 쬧겨댕기다 봉께 동무덜 사기도 처지고, 쩌눔덜헌테도 시퍼뵈고 허는디요."

하대치는 그냥 주저 물러앉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해룡이 보성을 한바탕 뒤집어엎을 것처럼 자기도 벌교를 멋들어지게 들쑤셔놓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이유야 충분히 압니다. 그러나 지금은 적에게 피해를 입히기보다는 우리가 입을 피해부터 먼저 생각해얄 땝니다. 적은 우리를 이 겨울 동안에 다 없애겠다고 하지만 우리의 투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전사라도 지키는 쪽으로 우리 사업은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전부 힘을 모아 율어를 다시 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율어요? 고것 좋구만이라. 고것이야 우리 땅잉께 또 뺏어야지라." 하대치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만족스러운 소 웃음을 웃었다. 그의 팽팽하던 얼굴도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염상진 대장님은 어쩌고 계신지 모르겠소."

안창민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고상허시겄제라. 지는 사흘거리로 꿈에서 뵈는구만이라."

"잠도 얼마 못 자면서 꿈까지 꾸나요?"

안창민이 하대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금메 말이요, 마누래나 새끼덜언 꿈에 안 뵈는디 대장님은 자꼬 뵌당께요."

안창민은 콧등이 찡 울리는 걸 느끼며 고개만 끄덕였다.

며칠이 지나 염상진은 도당의 연락을 받았다. 도당이 장흥 유치지구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도당의 이동은 상황의 긴박성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었다.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염상진은 어금니를 맞물며 휘몰아쳐오는 북풍을 맞바라보고 섰다.

 

 

7. 소작인의 의지

군당 야산대의 세력이 약화되어감에 따라 율어면에 전진기지를 구출하고 있던 백남식의 부대는 각 면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적극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건 상황변화에 따른 자신감 때문만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이 불길 같았던 것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겨울 안으로 산중 빨갱이들의 씨를 말리라고 성화였다. 백남식은 병력을 분대단위로 분산시켜 산골짜기마다 투입하는 전략을 썼다. 이틀 간격으로 교대시키는 그 작전은 기동성 빠르게 이동 저항하는 적들을 추격하고, 적들 상호간의 연결을 차단시키기 위해서는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물론 효과에 비해 위험부담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적의 섬멸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불사한다는 상부의 방침이 일단 선 이상 백남식으로서는 효과 있는 방법이라면 그 어떤 것도 시행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희생된 병력은 보충되어 오게 마련이었으므로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관할구역 안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무장빨갱이들을 쓸어 없애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우선 분대장들의 입만 놀리는 전과보고를 믿지 않았다. 전과보고는 증거제일주의를 채택했다. 첫째가 적 살해였고, 둘째가 무기노획이었다. 첫 번째의 증거로는 코나 귀 한 짝을 제시해야 했고, 두 번째의 증거는 원시무기가 아닌 총에 한했다. 그건 일본군대에서 배운 방법이었다. 그런 전과를 올린 장병에게 계급 특진이나 표창장이 수여된다는 단서가 붙은 것은 물론이었다.

"남 서장님, , 나 백남식이오. 그 문젠 어찌 됐소? 아직도 못 정하고 있는 거요?"

전화에 대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백남식의 어조는 찡그려진 얼굴만큼이나 거치고 시비조였다.

", 그 문젠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마땅한 사람을 정해서 그저께 배치시켰소."

전화기에서 울리는 남인태의 목소리에도 어떤 성깔이 묻어 있었다.

"그럼 미리 알려줘얄 것 아니오. 대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오?"

백남식은 남인태의 처사나 현재의 태도에 그만 배알이 뒤틀려서 어조는 더욱 거칠어졌다. 그러면서도 '보고'라는 말은 신경 써서 피하고 있었다.

"그 새끼들이 또 전화선을 절취해가서 전화가 불통된 걸 몰라서 허는 소리요, 시방?"

백남식은 느닷없이 볼때기를 쥐어질린 기분이었다. 그는 머쓱해진 기분이었고, 저쪽에서는 공격에 만족이라도 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이근술이라고, 회천면에 근무하던 사람을 옮겼소."

"늦었지만, 잘 됐소. 근무 철저히 하도록 지시해주시오."

백남식은 먼저 전화를 끓어버렸다. 한바탕 몰아치려던 계획이 빗나가 버려 화가 나기도 했고, 맥이 빠지기도 했다. 아직도 지서주임 자리를 못 채우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얼빠진 놈을 잡아다 앉힌 것이었다.

"! 개애자석, 지랄허고 여물통 돌리고 자빠졌네. 워따가 대고 지눔이 잘난 칙이여, 잘난칙이. 지눔이 앞으로 멫 조금이나 가겄다고."

남인태는 화가 나거나 마음이 급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사투리를 내뱉으며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그는 겉마음만 화가 났을 뿐이지 속마음까지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일에 얽힌 남모르는 수확을 가슴 뻐근하게 즐겨왔던 것이고, 멋모르고 설쳐대는 백남식 같은 존재를 향해서는 통쾌감까지 만끽하고 있었다.

율어면 지서장 자리를 놓고 보름 남짓한 사이에 거둬들인 옹골찬 수입을 생각하면 남인태는 자다가도 입이 벙긋 벌어질 지경이었다. 율어면을 싱겁게 되찾은 다음 당연히 경찰력 배치가 뒤따랐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전에 근무했던 사람들을 복귀시키려고 했다. 그건 자연스럽고도 바른 조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전 지서장이 집을 찾아들었다.

"서장님, 지발 저를 좀 살려주시씨요. 제가 거그서 반란사건 터지기 전부텀 근무 했응께 연한으로 보드라도 자리 바꿈헐 만치 된 디다가 전번 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는디 워찌 또 그 징헌 지옥으로 들어가겄는가요. 서장님 권한으로 다 되는 일잉께 이놈 불쌍허니 생각허시고 한분만 살려주시씨요. 요건 얼마 안 되는디......"

지서장은 품안에서 종이에 싼 것을 꺼내 어려운 몸짓으로 방바닥에 밀어놓았다. 한눈에 그건 돈뭉치였고, 그 크기로 보아 예사 액수가 아닐 것이 분명했다. 남인태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찌르르 울리며 어금니 사이에서 신침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애써 감정을 누르며 고개를 틀어 눈길을 멀리 보냈다.

"그게 거 난처한 일 아니겠소. 김 주임이 가기 싫어하는 것은 거기가 위험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가려고 하겠소? 목숨 아까운 거야 누구나 다 똑같고, 나는 일을 공평하게 처리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오."

있는 껏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고 있는 남인태의 머릿속은 빠른 계산으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선, 생각지도 못했던 돈벌이 기회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휘하의 면단위 지서장 모두를 한 차례씩 돌려가며 먹이로 삼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광양에서 빠져 나오느라고 속 쓰리게 탕진한 재산을 벌충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했으며,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인사 청탁을 받으며 그 액수를 확인하지 않고 대답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김 지서장은 머리를 조아리며 돈뭉치를 남인태 앞으로 조금 더 밀었다.

"글세올시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이 비상시국에 이런 인사 청탁이나 하다가 소문이 나는 날에는......"

남인태는 엄하고도 냉정한 어조로 말하며 담배를 집어 들었다.

"그럴 리가 있겄습니까. 쥐도 새도 몰르게 허니라고 마누래헌테도 입을 봉헌 일이구만요."

김 지서장이 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내가 밤새 생각해볼 것이니 내일 아침 일찍 와보시오."

"고맙구만이라, 서장님만 믿겄습니다."

김 지서장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연신 굽실거리면서 물러갔다. 남인태는 곧바로 종이를 찢어발겼다. 돈 다발 네 개가 허물어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한 다발을 덥썩 집어든 남인태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 끝에 퉤퉤 침을 튀겨 세기 시작했다. 빠르게 넘어가는 돈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은 야릇한 열기와 함께 윤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돈 네 다발을 다 세었다. 그리고 짭짭 입맛을 다시며 담배를 빼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에 비하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일단 딴 마음을 먹은 그의 심사에는 어딘가 미흡한 액수였다. 물론 서장 자리와 지서장 자리는 하늘과 땅 차이이긴 하지만, 자신이 쓴 비용에 비하면 너무 차이가 나 남인태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려고도 했다. 목숨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목적은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쌀 다섯 가마니 값이면 적은 돈은 아니다만 요것 갖고는 안 되겄다. 하나뿐인 모가지 온존허게 보존헐라먼 그 곱쟁이는 내야 쓸 거이다."

남인태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혼잣말을 또렷하게 하고는 오른손으로는 입을 야무지게 훔쳤다. 그는 이미 목숨을 담보로 잡은 전투놀이를 각 지서장을 상대로 비밀리에 벌일 작정을 하고 있었다. 열 가마니씩만 후려내면 자신이 쓴 비용을 벌충하고도 또 그만큼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돈 네 다발을 꼼꼼하게 쌌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법인디, 그런 돈으로 도에 어그러지는 일을 허고 잡지 않소. 서장이란 자리가 오뉴월 참외 익데끼 해서 따낸 자리도 아니겄고."

다음날 아침 김 지서장 앞으로 돈뭉치를 밀어놓으며 남인태가 무겁고도 싸늘하게 한 말이었다.

"아이고 서장님, 알겄구만요."

무릎 끓어 앉은 앉음새를 고치며 김 지서장은 억지웃음을 지어내고는,

"지가 생각이 짧었구만요, 긍께, 여그다가 을매나 더 보태야 될란지......"

억지웃음이 굳어지며 그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어허, 점잖찮게 고것이 무슨 소리요. 장바닥 장사치 흥정도 아니겄고, 서로 체면 생각해서 눈치껏 곱쟁이로 채우든 말든 헐 일이제, 원 그리 짜잔헌 뱃보로 어디 관리로 출세허겄소?"

남인태는 먼눈을 팔며 혀끝에 힘이 잔뜩 들어간 혀차기를 해댔다.

"죄송스럽구만이라. 지가 다 알아서, 이따가 저녁참에 다시 찾아뵙겄구만요."

김 지서장은 허둥거리며 옆걸음질을 쳐 방을 나갔다. 남인태는 출근을 하자마자 안전지대에 있는 면부터 골라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아, 다름이 아니라, 율어에서 빨갱이들을 몰아낸 걸 박 주임도 알지요? 거기 지서가 비어서 사람을 채워야 되겠는데, 아무래도 박 주임이 가줘야 될 것 같소."

남인태는 지극히 사무적인 듯 건조한 소리로 이렇게 운을 떼었고, 상대방 쪽에서는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아니, 서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율어로 저를 보내시다니요, 쪼끔만, 쪼끔만 기다려주십시오. 오늘 안으로 당장 찾아 뵈옵겠습니다."

그래서 남인태는 서로 다른 날을 잡아가며 지서장들을 하나씩하나씩 요리해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벌교의 백남식으로부터는 왜 빨리 경찰병력을 배치하지 않느냐는 독촉전화가 사흘거리로 걸려왔다. 이미 차석 이하의 경찰은 배치시켜놓고 있었으므로 남인태는 이런저런 이유를 그럴싸하게 붙여대며 여유만만하게 목적달성을 해나갔다. 그러던 중에 이근술 지서장이 엉뚱하게도 자원을 하고 나섰다.

"저런 얼빠진 새끼 봤나. 누가 공 알아줄까봐 나서는 건가, 나서긴."

남인태는 담배꽁초를 내던지며 혼자 역정을 냈다. 아직 접촉하지 못한 지서장이 두어 명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원자가 나서 버린 이상 그 일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놈이 쥐어지르고 싶도록 밉고, 느닷없이 날아가 버린 돈이 아까와 배가 아팠지만 남인태는 꾹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초장에 자원을 하고 나섰으면 어떻게 할 뻔했을까를 생각하며.

한편, 그런저런 내막을 전혀 모른 채 율어면으로 자리를 옮긴 이근술 지서장은 그날부터 빙그레 웃는 얼굴을 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껑충하게 큰 키에 얼굴마저 펑퍼짐하면서 길었다. 그래서 키는 더 커 보이는 데다, 얼굴 전체에 담긴 선하디 선한 웃음은 큰 키와 함께 그 인상을 그야말로 싱겁게 보이도록 하고 있었다.

"회천면에서 새로 온이 주임이라고 허느만요. 요 북새통에 사시기는 좀 워떠신게라?"

그는 이런 식으로 집집을 들여다보며 인사를 하고 다녔다. 더러 그를 알아보는 남자들도 있었다.

"아이고메, 그 말로만 듣든 미륵 주임님이시구만이라!"

이런 말로 반색을 하는가 하면,

"오랴, 그 고진인 말......,아니 쩌 머시냐, 욜로 잠 앉으시제라."

어떤 남자는 계면쩍은 얼굴로 마루를 더듬거리기도 했다. 그 남자가 당황스럽게 삼켜버린 말이 무엇인지 알면서 이 주임은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자신에게 붙여진 점잖은 별명이 미륵주임이었고, 장난스러운 별명은 말자지주임이었다. 허위대가 크니까 그것도 크리라고 생각해서 그런 별명을 붙인 모양인데, 듣기가 좀 쑥스럽고 민망해서 그렇지, 그는 속으로는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남자의 뿌리고 기둥이고 중심인 그것이 크고 실하다는 것만큼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는 '말자지'라는 상스러운 듯한 별명에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호감이 깃들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개자지도 아니고 토끼자지나 쥐자지라고 몰아댔더라면 어쩔 것인가. 그런 악의에 맞서서 그것을 내보일 수 없는 이상 자신은 영락없이 큰 덩지에 어울리지 않는 볼품없는 연장을 매단 병신 꼴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것에 비하면 말자지라는 별명은 얼마나 호의에 넘치는 것이냐며 그는 내심으로 흡족해하고 있었다. 덩치 값 하느라고 그는 남들보다 큰 그것을 달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가 자신의 별명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까닭은 농업학교 시절의 훈육주임을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일제치하의 모든 학교 훈육주임들은 일본 놈이면서 악바리였듯이 그가 다닌 농업학교의 훈육주임도 예외가 아이었다. 그런데 훈육주임의 별명은 악바리에 어울리지 않게 '백자지'였다. 훈육주임은 먼발치로라도 그 별명을 들으면 그야말로 부들부들 치를 떨었다. 서너 학생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거리에 떨어져 "후꾸다 자지는 백자지, 민숭민숭 털이 없는 백자지"를 장타령조로 합창을 해대다가 훈육주임에게 추격을 당해 순천 오리정 뒷산 세 개를 넘으며 쫓겨야 했던 일은 너무나 유명했다. 그때 만약 그들 중에 하나라도 훈육주임에게 잡혔더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거라는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기 없이 수긍된 사실이었다. 그 일이 벌어진 다음부터 훈육주임의 별명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확실한 백자지가 되고 말았다. 소문이 그렇듯이 별명이라는 것도 진원지나 발설자가 모호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별명이라는 것은 대개 얼굴 생김새나 성질 또는 유별난 버릇 등을 놓고 지어지는 것이지 남성의 그것이 대상이 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훈육주임이 하필이면 그런 별명을 얻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근거를 따지자면 그는 딸만 셋이었다. 조선인 학생들이 그에게 앙갚음하는 심정으로 딸만 셋인 것을 빙자해 그런 모욕적인 별명을 붙였을 확률이 컸다. 그는 네 번째에도 딸을 낳음으로써 백자지인 것을 확고하게 증명하고 말았다. 조선인 학생들은 그 흉사를 더없는 경사로 받아들이며 서로서로 숨죽여 웃으며 고소해하고 통쾌해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근술의 자기 별명에 대한 이해도 다소 빗나가 있었다. 그 별명에 사람들의 악의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했지만, 그가 해석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 의미가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허위대가 큰 사람처럼 행동이 민첩하지 못했으며, 특히 그 목소리는 평균 이하로 느릿거리면서 얼굴만큼이나 부드러웠던 것이다. 태평스럽도록 느린 목소리가 부드럽기까지 해서 그의 행동은 더욱 느려 보였다. 별명은 여기서 비롯되고 있었다. 그의 별명 앞에는 '늘어진'이란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근술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매사를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순조롭게 받아들이려는 심성의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지서장들이 싫어하는 율어 근무를 자원한 것도 기회주의적 공명심이나 영웅주의적 객기 같은 것이 발동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지서장들이 서로 그곳으로 가지 않으려고 발뺌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런 행위가 경찰로서 추하고 창피스럽게 느껴졌고, 멀지 않아 자신에게도 차례가 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가도 가야 할 자리였고, 지목을 당하고 가느니 차라리 자원을 해서 그 추하고 창피스러운 소문을 하루라도 빨리 지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곳이 지형적으로 다소 불리할 뿐이었지 좌익무장대가 사방에 분산되어있는 상황에서 다른 면들에 비해 특별히 위험할 까닭도 없었던 것이다.

"주임님, 날도 추운디 멀라고 그리 집집마동 다니시는 게라."

"그렇구만요,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안 좋구만요. 버리장 머리도 없어지고요."

차석 이하 경찰들의 반응이었다.

"그려, 다들 앉어 보드라고."

이근술은 느리게 몸을 돌려 자리를 잡고는,

"자네들, 앞으로 나허고 일헐라먼 나가 허는 말 똑똑허니 들어 두드라고. 우리 경찰이란 것이 머신지 다들 알겄제? 민중의 지팡이 아니드라고. 말만 뻔지르르허게 내걸지 말고 실지 행동도 그렇기를 이 자리서 당부허는 바이여. 나는 일정 때버텀 순사질을 험스러도 순사가 사람들 위에 올라스는 것이라고 생각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여. 인자 일정 때도 아닌 디다가, 이름도 '순사'가 아니라 '경찰'로 달라졌응께 우리 생각도 달라져야 된다 그 말이네. 경찰이 사람들을 올라타고 앉어 욱대기고 잡지고 왈기먼 된다는 생각을 싹 없애라는 말이시. 긴말 더 헐 것 없고, 그리 못헐 사람은 나허고 일 못헌다는 것만 알아두더라고."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으며, 그 목소리도 느릿하면서 부드러웠다. 그런데 부하들은 꼼짝을 못하고 앉아 있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조선인 순사들이 앞을 다투어 몸을 숨기는 속에서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군내의 유일한 사람이 이근술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해꼬지를 당하지 않았다. 그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순사질도 전혀 그의 뜻으로 한 일이 아니었다. 그를 농업학교에 보내준 문중의 뜻에 밀려 순사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남다를 뼈대에만 의지해 평생을 가난하게 산 심덕 좋고, 술 좋아한 무능자였다. 그의 아버지가 일곱 형제를 남겨놓고 죽게 되자 장남인 그를 문중에서 공부시켜 주었다. 그는 농업학교의 배움을 실천하려고 했지만 현실적 여건은 그의 뜻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민영은 순천에서 넘어오고 있었다. 그는 기차의 창밖으로 하염없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일월의 추위만 가득한 황량한 들판이 연이어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도 들판의 추위가 그대로 옮겨와 있었다. 그의 의식 속에는 겁에 질릴 대로 질린 열두 명의 핏기 없는 모습이 얼어붙어 있었다. 법정의 구형 장면이었다. 낫을 들었던 농부는 사형이었고, 나머지 열한 명은 오 년 징역이었다. 살인죄와 살인방조죄가 각각 적용된 것이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저로선 최선을 다한 겁니다."

변호사의 말에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변호사를 대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사형을 구형 받았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우울은 형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피해자이면서 법정에 섰다는 사실에 있었다. 지주라는 부류들이 어떤 각성을 하지 않는 한 소작인들과의 관계는 계속 그런 식으로 끝판을 보게 될 것이고, 이중 피해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세상이 어떤 꼴로 되어갈 것인지는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상소를 하시겠습니까?"

변호사의 이 말에도 그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기각을 밥 먹듯이 하고 있는 법원 실정에 상소는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했고, 아무리 많은 돈을 쓴다고 해도 지주를 살해한 작인을 사형에서 구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 법원 분위기이기도 했다. 판검사들은 공정한 법의 집행에 앞서 심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지주들의 편이었다. 거기다가 그 작인들도 더는 재판비용을 댈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처지였다. 서민영은 우울과 함께 깊은 허탈에 빠져 있었다. 일을 부탁받고 최선을 다한 결과치고는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다시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가족들에게 형량을 알려주는 곤혹스러운 일뿐이었다. 가족들이 겪을 마음고생을 생각해서 재판 날짜를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그건 자신이 짊어져야 할 어쩔 수 없는 짐이었다. 그는 얼굴을 본 일이 없는 소화라는 무당을 생각했다. 이지숙에게 들은 말로는 그 무당이 해낸 일에 비하면 자신이 한 일은 정말 하잘 것이 없었다. 그들은 비록 실형을 받았지만 무당의 덕으로 농토는 잃지 않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다행을 삼을 도리밖에 없었다. 서민영은 절름거리며 역 앞마당을 걸어가고 있었다.

"안녕허신게라? 또 순천 댕게오시는구만요."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며 앞을 막아서듯 했다. 서민영은 걸음을 멈추며 무거운 듯 고개를 더디게 들었다.

"지구만요. 재판은 워찌 돼가고 있당가요?"

염상구는 고개를 꾸벅 해보이며 물었다. 바로 앞에 있는 염상구를 아주 먼 눈길로 바라보듯 하며 서민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염상구를 헤치듯 하며 걷기 시작했다.

저 쩔뚝발이 빙신이 저것, 사람 알기럴 쥐좆만도 못허게 안단 말이여. 저것을 팍 그냥......’

염상구는 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건 오기였을 뿐 그의 마음에 서민영은 언제나 어려운 존재였다. 풍채도 없고, 입성도 꾀죄죄하고, 권세도 없는 데다, 다리는 절름거리는 병신인데도 왜 그 앞에만 서면 기가 죽고 주눅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학식이 많이 들어서 그런가, 뼈대 있는 양반이라서 그런가, 남에게 흉잡힐 일을 안 해서 그런가, 그의 몸에서 풍기는 냉기 같기도 하고 찬바람 같기도 한 그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라, 쩔뚝발이 서민영이야 서민영이고, 나넌 난께로."

염상구는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내깔기다 말고 옆구리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는데도 총 맞은 자리가 문득문득 맞바람이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때마다 손바닥으로 옆구리를 누르고는 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생각은 번번이 손이 옮겨진 다음에 떠오르고는 했다. 물론 전 원장을 찾아가서 따져보기도 했다.

"이거 수술이 잘못된 것 아니다요?"

전 원장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처럼 이상스럽게 웃기만 하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다른 큰 병원에 가서 알아봐도 좋지만, 수술엔 이상이 없어요. 총을 맞고, 수술을 하고 했으니 아무리 완치가 된다고 해도 다치기 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인 데다, 총을 맞은 충격 때문에 정신적으로 그 부분에 맞바람이 통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겁니다. 정신적인 충격이 회복되고, 신경이 안정될 때까지는 어쩔 방법이 없는 일입니다."

염상구는 옆구리에서 손을 떼며 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는 맞바람만 통하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귀나 코보다도 추위를 먼저 타서 시리고 아린가 하면, 꿈에서는 거기로 창자가 다 흘러나오기도 했다. 강동식을 죽인 대가가 자신의 몸에 그렇게 분명히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건 강동식 이놈의 귀신이 붙은 것처럼 기분 나쁘고 재수 없는 일이면서, 사사로운 원한이 없는 입장에서 더없이 죄스러움을 갖게도 했다. 그런 면에서도 외서댁에게 쌀 열 가마니 값을 줘서 장흥으로 떠나보낸 것은 가슴 편안하고도 마음 홀가분한 일이었다. 그가 외서댁을 찾아갔다 돌아온 다음 며칠이 지나 외서댁의 어머니 밤골댁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자네 말 듣고 요리조리 많이 생각혀보고 이리 찾어왔네. 내 딸년 신세 저리 된 것이야 다 지 팔자소관으로 치고, 앞일만 생각혀보드락도 딸린 새끼가 있으니 재가나 지대로 될 것이며, 재가럴 헌다 혀도 아시팔자 그른 년이 무신 팔자치레가 지대로 되겄어. 나 생각이나 지 생각이나 매일반인디, 그려, 워쩌크름 뒤럴 봐줄 심산인지 자네 생각얼 들어보세."

"어허, 실답잖소. 나 맴이 폴세 변해뿌렀소."

고개를 외로 꼰 염상구의 대꾸였다.

"워쩌?"

밤골댁은 몸을 들먹할 정도로 놀라며 소리쳤다.

"와따, 배때지 빵꾸 포도시 때와 논께 인자 귀창에 빵꾸 낼라고 그리 소리 질르고 그요, 시방?"

"맴이 변해뿔다니, 그 무신 쎄빠질새 날아가는 소리여. 니가 사람얼 멀로 보고 이 지랄이여, 지랄이!"

밤골댁은 곧 염상구의 눈을 찌를 듯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쳤다.

"으쩌요, 애맨 소리 듣는 맛이. 가심에 콩 얹으먼 톡톡 튀겄제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염상구는 밤골댁을 쳐다보며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무신 소리여?"

밤골댁은 그때서야 자신이 지난번에 염상구에게 했던 억지소리의 갚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근디, 외서댁도 맘이 통헌 것이요?"

"맴이 통허나마나, 지 신세 각다분헌께 자네허고 일 매듭짓고, 나가 살살 달게먼 말 듣겄제 워째."

"고것이야 장모님이 알아서 허씨요."

염상구가 담배를 뽑아들며 불쑥 말했고,

"워메, 염병헌다 문딩이!"

밤골댁이 화들짝 놀랐고,

"야아야, 니 쩌 집으로 장개 들기로 혔다냐?"

그때까지 바짝 쪼그리고 앉아 말의 내용을 알아내려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던 호산댁이 아들의 팔을 덥썩 붙들었다.

"머 질게 말헐 것 웂이, 쌀닷 가마니로는 터잡고 해묵을 만헌 장시가 웂고, 이왕 맘쓰는 짐에 열 가마니럴 주기로 혔소."

밤골댁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기껏해야 네댓 가마니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갑작스러움에 고맙다고 할 수도 없고, 놀라움을 드러낼 수도 없어 밤골댁은 난감해져 있었다.

"워째, 심에 안 차시요?"

염상구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아니시, 아녀. 그만허먼 된 상싶으네."

밤골댁은 서둘러 대답했다. 염상구가 쌀 열 가마니를 선뜻 내놓겠다는 것하고, 밤골댁이 많아야 네댓 가마니를 기대했던 것하고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적 경제수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힘 안 들이고 모은 돈으로 장터에서 고리대금까지 하고 있는 염상구의 입장에서는 쌀 열 가마니 정도는 손쉬운 것이었고, 시집가기 전까지 쌀 한 말을 먹었으면 잘 얻어먹고 산 것으로 치부되는 소작인의 빈한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밤골댁에게 쌀 열 가마니는 어마어마한 재산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구 상구야, 니 맘 한분 잘 묵었다. 죄넌 진 대로 가고 공은 닦은 대로 가드라고, 하먼 그리 맘써서 니가 헌 일 깨끔허게 뒷감당혀야제 복 받제. 나가 인자사 허는 말이다만, 그간에 저 맘씨 너른 밤골댁이 아그엄씨가 짜내는 젖얼 안 내뿔고 고이 받아갖고 쥐도 새도 몰르게 나헌테 넘게줘서 니 새끼럴 키웠니라. 그리 허는 것도 하로이틀이제 질게는 못헐 일이고, 사람이나 즘생이나 새끼야 에미가 품고 키우는 것이 순리고 법칙잉께, 쌀 열 가마니 아까와라 않고 니 참말로 맘 잘 썼다. 시상사람덜이 다 니 잘혔다고 헐 거이다."

호산댁은 쌀 열 가마니가 어린 것의 양육비로 건너가는 줄 알고 진정으로 기뻐하며 말하는 것이었고, 염상구는 어머니의 그 장님 문고리 잡듯 하는 말이 별로 손해될 것 없다 싶어 막지 않고 그대로 있었고, 밤골댁은 염상구가 침묵하고 있는 속마음을 어머니가 대신 말하는 것이라 헤아리면서 평생 살 밑천을 장만한 마당에 애 하나 더 키우는 것쯤이야 어려울 것 없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쌀 열 가마니 값과 함께 아이도 데려갔고, 외서댁이 벌교를 떠나기를 원해 염상구는 백남식에게 강동식이가 이미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그녀가 장흥으로 떠나도록 길을 터주었다.

염상구는 다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또 옆구리로 손을 옮기며 희정리 삼구 쪽으로 먼 눈길을 보냈다. 찬바람 속에서 진하고도 끈끈한 외서댁의 체취가 물큰 맡아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콧날개를 벌름거렸다. 그러나 그 육감적인 냄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꼬막 맛이 제철인 이 깊은 겨울에 그 꼬막 맛처럼 짠득짠득하고 쫄깃쫄깃한 그 맛에 전신을 찌릿찌릿 녹아내리며 따스한 아랫목에 눕고 싶었다. 그녀의 풍성한 젖가슴과 탄력 좋은 알몸이 눈앞에 어릿거렸다. 그 맛만을 생각한다면 외서댁을 마누라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맛만으로 세상살이를 끝낼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나 청년단에 빌붙어 살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벌교바닥의 이렇다 할 유지가 될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겹겹으로 막을 친 데다가 쉴 새 없이 음죽거리면서 쫄깃거리는 외서댁의 니노지는 명물 중에 명물이었다. 그 명물이 가까이에 없다고 생각하자 허전하고도 서운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녀가 그대로 있었다 해도 강동식이가 밟혀 당분간 가까이 할 수 없는 기분이었고, 그리고 강동식이가 죽어버린 이상 그녀도 전처럼 그렇게 몸을 허락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려나 그녀는 떠났지만 장흥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였다.

 

"가만 있거라, 그 장관눔 이름이 머시더라?"

최익달이가 젓가락을 두어 번 상 바닥에서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애치슨이지요."

유주상이 불고기를 질겅거리며 말했다.

"맞소, 애치슨이. 그 애치슨인가 먼가 허는 미국 눔이 영판 느자구 웂은 눔이오. 지까진 눔이 먼디 쪽집게로 흰 털 뽑디끼 우리나라만 쏙 빼놓냐 그 말이여. 수수만리 바깥에 앉어서 빨갱이덜이 요리 난리판 굿 꾸미는지도 몰르믄서 말이여."

최익달은 열이 받치고 있었다.

"위원장님 말이 맞으시오. 태평양 그 너메에 태평치고 앉어서 여그 위태헌 사정 몰른께 고런 시건방진 결정을 내린 것이요. 빨갱이덜이 저리 죽자 사자 지독시럽게 뎀비는 것을 알았음사 워찌 그런 결정을 내렸겄소."

윤삼걸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동조하고 나섰다.

"글쎄요, 문제는 애치슨이란 한 장관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문제 아니겠어요?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애치슨이 아니라 미국정부고, 애치슨이야 담당 장관으로 발표만 한 것뿐이지요."

유주상이 표정 없이 말했다.

"그리 되먼 그거 더 큰 문제 아니오! 미국이 우리나라럴 나 몰라라 허는 것인디, 그리 되먼 이 나라 꼬라지가 머가 되겄소!"

최익달은 두려움을 드러낸 채 흥분한 어조였다.

"보나마나 빨갱이덜이 더 날칠 것이고, 종당에넌 빨갱이 손에 나라 엎어묵는 것 아니겄소."

윤삼걸이 화를 터뜨리듯 말했다.

"요것 참 예삿일이 아니시. 미국이 워쩔라고 맴이 그리 변해뿌렀으까? 미국이 지키는디도 빨갱이덜이 그리 악착시럽게 나댔는디, 미국이 손띠는 날에넌 더 말헐 것 머 있다고. 그나저나 우리 신세가 큰 탈나게 생게부렀네."

최익달이 금방 풀죽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국이 갑작시리 도망을 허는 것도 아니겄고, 워째 우리럴 서자 보디끼 허는 것 겉으요?"

윤삼걸이 불안한 낯빛으로 유주상에게 물었다. 그때까지 고기만 씹고 앉았던 유주상은 끄응 힘을 쓰며 자리를 고쳤다.

"그것을 두 가지로 볼 수가 있겠지요. 하나는, 미국이 우리나라 공산당 정도는 자신 있다 허는, 좋은 쪽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 우리나라 정도는 지켜줄 필요가 없다 허는, 나쁜 쪽으로 보는 것이지요."

유주상은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 더 말이 계속될 줄 알았던 두 사람의 가슴에는 그만 돌이 얹히는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허먼, 유 조합장 생각으로는 어떤 쪽일 것 겉으요?"

윤삼걸이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요, 그걸 알 도리가 있나요. 신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시끄럽기만 허지 나라에서도 미국 속을 모르고 있는 눈치거든요."

유주상의 목소리는 맥 빠졌고, 두 사람의 가슴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미국도 넋 나간 눔에 나라여. , 우리나라가 그 쪼깐헌 대만만도 못허다 그것이여!"

윤삼걸이 버릇대로 밥상을 내리쳤다.

"가만있어 봇씨요."

최익달이 윤삼걸을 제지하며,

"만일에 미국이 우리럴 더는 지켜줄 필요가 웂이다 혔을 적에 나라에서는 워쩔 심판일 것 같소?"

고개를 늘여빼며 유주상에게 물었다.

"그거야 나라 다스리는 사람들이 다 우리와 같은 입장이니까 미국을 향해 그 결정을 바꿔달라고 말하겠지요. 허나 떡을 줄 사람이 줘야 먹는 것이지 안 주기로 작정을 해버리면 아무리 졸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햐아 이것 참, 미국이 뜽금웂이 어쩐 일이까? 사람 복통해 죽을 일이시."

최익달이 검은 연기 같은 한숨을 토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가만 있으씨요, 나헌테 존 생각이 있소."

윤삼걸이 목을 늘여 마른 침을 넘기고는,

"우리가 요리 탁상공론만 허고 앉었을 것이 아니라 미국이 그 못돼묵은 정책을 바꾸라고 좌익척결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군단위로 궐기대회럴 대대적으로 엽시다."

자신의 생각이 어떠냐는 듯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고, 최익달은 유주상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유주상은 벌써 쓴웃음을 입에 물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이런 촌구석에서 그래봤자 우리 목만 아픈, 김칫국만 마시는 일이라니까요."

"그러허먼, 우리넌 아무 방책도 웂이 빨갱이덜 손에 목심이고 재산이고 다 뺏길 때꺼정 기둘리자 그 말이오?"

윤삼걸이 눈을 부릅떴다.

"그럴 리야 있나요. 미국 생각이 아직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나쁜 쪽으로만 생각해서 마음 다급하게 먹을 것이 아니라 좀 더 기다려봐야겠지요. 우리만 걱정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몸 다는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무슨 방책을 세워도 세우겠지요."

"그나저나 미국이 우리럴 이쁘게 보고 그 안전보장선인가 방어선인가에 우리나라도 끼워 넣어 줘야제, 글안허고 미국이 손얼 띠는 날에는 우리덜 신세는 참말로 동냥아치 쪽박신세가 되는 것 아니겄소. 해방되고 작인이고 상 것들헌테 당헌 꼴을 또 당해서야 워찌 살겄소. 그때도 미국 심 아니었음사 우리가 워찌 되얐겄소. 미국이야 우리 은인이고, 빨갱이덜 씨럴 몰릴 때꺼정은 변심 말고 우리럴 지케줘야 헐 것인디, 요것 참말로 큰 탈이요, 큰 탈."

최익달이 또 뭉텅이진 한숨을 토해냈고, 윤삼걸도 따라서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의 태평양 안전보장 선을 알라스카. 일본. 오끼나와. 대만. 필리핀 선으로 한다는 언명에 따라 한국이 제외되자 새로운 근심거리를 안게 된 것이다.

"그것이야 아직 멀리 있는 문제니까 너무 걱정들 마시고 바로 코앞으로 닥친 농지개혁에나 손해 보지 않도록 단속들 잘하십시오. 이번에 정신 똑바로 못 차리고 어물어물하는 지주들은 정말이지 거렁뱅이 쪽박신세가 될 겁니다. 앞으로 세상은 때 낀 족보나 떠받들던 옛날하고는 물론이고 일정 때하고도 또 다릅니다. 자본주의 세상이다 이겁니다. 자본이 뭡니까. 돈입니다. 돈이 제일인 세상이 된 겁니다. 옛날에도 돈으로 양반을 사고팔고 했으니 돈이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안 중한 때가 없었습니다마는, 앞으로는 더욱더 돈이 판치는 세상이 될 겁니다. 벌써 세상이 얼마나 변했습니까. 요새 젊은 작인 놈들 나대는 꼴 보세요. 양반 우습게 알고, 뼈대 안 부러워하지 않던가요. 그게 다 기본출을 높게 보아주는 좌익사상에 물들고, 인간평등이라고 떠들어대는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고 해서 그런 겁니다. 그런 놈들한테 돈푼께나 생겨봐요, 양반위세나 뼈대자랑이 통하겠어요? 위신도 체면도 힘도 다 돈이 결정하는 자본주의 세상이 오는데 이번 농지개혁에서 정신 못 차린 지주들은 볼 것도 없이 상놈이 되는 겁니다."

유주상은 금융 조합장답게 말하고 있었다. 최익달은 태연하게 앉아서 큼큼 목을 다듬었고, 윤삼걸은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가 글안해도 유 조합장헌테 상의헐라고 혔었는디 말이요, 명의변경을 시키고 어쩌고 허고도 안직 남은 논이 솔찬헌디, 고것얼 싼값에라도 작인 눔덜헌테 찢어서 폴아야 헐 것인지, 그냥 농지개혁얼 당혀야 헐 것인지, 워떤 것이 더 유리허겄소?"

윤삼걸이 무슨 쓴 것이라도 씹는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글쎄요, 싼값이라는 게 얼만지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 가격 결정이 지주 입장에서는 시기적으로 아주 불리합니다. 명의변경 날짜를 작년으로 소급 작성하는 것이야 담당직원한테 몇 푼 집어주면 되니까 하등 문제가 아닙니다만, 농지개혁이 곧 실시될 거라는 소문이 이리 자자한데 값이 아주 싸지 않고서야 작인들이 사려하겠어요? 농민들도 얼마나 귀가 밝고 똑똑해졌습니까. 시기적으로 가격 결정권이 작인들한테 있는 형편이니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군요.“

"빌어묵을 것, 나도 염전을 맹글 수도 웂고."

윤삼걸은 신경질적으로 성냥을 그어댔다.

"그 보담도 더 중헌 문제가 있소. 작년 시월에 잽혀 들어갔든 들몰 것들이 풀려나갖고 또 들고일어날 것이라든디, 그 소식 들었소?"

"그려라?"

최익달의 말끝과 윤삼걸의 놀라는 소리가 겹쳐지고 있었다.

"고것덜이 또 난장판을 지기먼 애써 숨콰둔 논할라 뺏기게 될 판이오. 고것덜이 다시 일어나덜 못하게 막는 방도가 급선무요."

최익달이 구겨진 얼굴로 짭짭 입맛을 다셨다.

"그눔덜이 물줄기니 둑을 쌓겄소, 바람이니 포장을 치겄소. 또 일어나게 냅둡시다. 또 일어나기만 허먼 그때는 주모자 눔덜얼 빨갱이로 몰아치도록 손을 쓰는 것이오. 한분 잽혀 들어갔다가 폴려난 눔덜이 또 그 짓거리헐 때넌 빨갱이로 몰아치기가 딱 좋소."

윤삼걸이 단호하게 말했다.

"고것 한분 쓸 만헌 방법이요."

최익달이 폭넓게 고개를 끄덕였고, 유주상은 의미모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김종연과 서인출 등 일곱 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한 번의 시위로 석 달 동안이나 옥살이를 한 셈이었다. 계엄하의 집단시위를 주동하여 공공질서를 파괴하고 민심을 교란하였으며, 로 계속된 거창한 내용의 조서 탓도 있었지만, 변호사가 붙지 않은 소작쟁의 사건에 대해서는 법원에서 자꾸 뒤로 미룬 탓이 더 컸다. 살인이나 방화가 동반되지 않은 단순 소작쟁의 사건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시일을 끌어 집행유예로 내보냄으로써 소작쟁의를 막고자 하는 판검사들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그런 눈치는 당사자들이 먼저 알아챘고, 그래서 그들의 기는 꺾인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살아 올랐다. 지주만이 아니라 판검사한테까지 당했다는 억울함이 그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켜를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진작에 다 알고 있었든 일이지만서도 요분에 당해봉께로 법얼 맹근다는 국회의원 눔덜이나 법얼 공평하게 시행헌다는 판검사 눔덜이나 모다 지주 눔덜허고 한통속이란 것이 더 확연해졌소. 거그다가 관리에 군경꺼지 한 울타리럴 치고 있는 판이니 우리 편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웂은 것이요. 요런 판굿에서 우리가 우리 밥통얼 지대로 찾아묵자먼 워째야 쓰겄소. 우리 찌리 뭉치는 방도밖에 웂소. 선수머리 뻘맹키로 찐득찐득허게, 상답서 난 찹쌀떡맹키로 쫀득쫀득허게 우리찌리 똘똘 한 덩어리가 되야 쓴다 그것이요. 우리가 요분참에 우리밥통 못찾으먼 배꼽이 등짝에 들러붙는 신세 영영 못 면허게 될 것이요."

약간 수척한 모습인 김종연의 눈에서는 전과 다른 힘이 뻗쳐 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이 시상얼 삼스로 질로 중헌 것이 머시요! 밥얼 지대로 묵고 사는 것 아니겄소. 근디, 작인덜 살기 좋게 혀준다는 농지개혁이 벌어지는 판에 우리넌 지주덜 드럽게 만내 소작신세만도 못허게 굶어죽게 생겼소. 안 굶어죽을라먼 워째야 쓰겄소."

평소에 별로 말이 없던 서인출도 말재주 좋은 김종연의 열기에 못지않았다. 그는 자형 하대치 때문에 언행을 될 수 있는 대로 조심을 해온 처지였는데 이번 일을 당하고는 분함과 오기가 한꺼번에 뻗질러 올라 어느 면에서는 김종연보다 더 강한 발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 두 사람보다 나이가 많은 유동수도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앞에 나서서 자극적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뒤에서 두 사람의 행동을 응원하고 있었다. 평소에 늘 온건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살아온 그로서는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이번에 계획하는 것은 전과 다른 방법이었다. 관을 상대로 지주들의 불법행위를 고발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이 이쪽만 당하므로 각기 소작인별로 뭉쳐 지주 집으로 직접 치고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작년 하반기에 실시한 농가실태조사라는 것이 농지개혁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갇혀 있는 동안에 알게 되어 그들의 분노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농가실태조사를 해간 그대로 자기네들이 소작하고 있는 논이 농지개혁을 통해 분배되리라 믿었던 것이고, 읍사무소 직원이나 이장도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주들의 논 빼돌리기를 읍사무소에서 막아달라고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참고조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농사실태조사가 그러한 오해유발을 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 무관성을 홍보하라는 지시가 뒤따랐지만 좌익문제에 정신을 팔고 있던 군에서부터 그 문제를 소홀히 지나치게 되어 줄줄이 그냥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시래기죽을 한 사발 비우고 트림을 한 차례 하고 나서 담배를 말고 있는데 누가 찾아왔다는 말에 김종연은 지게문을 팔굽으로 밀쳤다.

"아재, 울 아부지가 쪼깐 오시라고 그요."

문이 열리자마자 계집아이의 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니가 누구냐?"

짙어진 어둠 속에 선 계집아이를 향해 김종연은 눈길을 모았다.

"나요, 필자도 모르요?"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더 야물게 카랑했다.

", 니가 워쩐 일이냐?"

저 쥐방울만한 것꺼지 애비 탁해서 느자구 웂기넌,’

김종연은 싸악 기분이 상하고 있었다.

"아부지가 불른당께라."

"무신 일로?"

"나가 아요."

"니 여그 말고 딴 디도 심바람 댕기냐?"

김종연은 이상한 생각이 스쳐서 물었다.

"동수아재헌테 말혔고, 인자 인출이 아재헌트로 갈 참이어라."

"알었다."

자기 혼자만이 아닐 거라는 예감의 적중에 김종연은 이상스러운 거부감을 느꼈다. 이제 마름 오동평은 필요한 존재도, 두려운 존재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지주의 편에 서 있는 또 하나의 간사한 적일뿐이었다. 그의 꼴은 보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만나는 것은 기피할 이유는 없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긴 했지만 김종연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일어났다.

"자네덜이 나헌테꺼정 유감을 묵은 모냥이제? 풀려나고 나서 낯이라도 비칠지 알었등마 나가 요리 뫼셔서야 대면덜얼 허게 되네잉."

오동평이 마뜩찮은 얼굴로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오라고 호출을 해놓고, 뫼셔라?"

김종연이 툭 쏴질렀다.

"아아니, 술 한 잔썩 허자고 헌 말이 자네 귀에는 호출로 딛기든가?"

"그런 말 못 들었소."

"요런 빙신 겉은 가시네, 워야, 필자야아!"

오동평은 방문을 떠다 밀며 고함을 질렀다.

"다 끝난 일, 냅두씨요. 어린 것이 어둔디 심바람헌 것만도 고상혔소."

유동수가 말했다. 김종연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눈길을 서인출과 유동수에게 빠르게 옮겼다. 동감을 표시하는 세 사람의 눈길이 등잔불빛으로 흐린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합해졌다.

"필자야아, 술상 싸게 내오니라아."

오동평은 어딘가 허풍기가 섞인 듯한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곧 술상이 나왔다. 겸상소반에는 음식이 그득했다. 상 가운데 놓인 통째로 삶아낸 닭이 유별나게 눈길을 끌었다. 오동평이 전에는 한 번도 차려낸 바 없는 걸고 푸진 술상이었다.

"짜아, 고상덜 허고 나왔는디 한 잔썩 허드라고 우리."

오동평이 포개진 술 사발을 하나씩 건네며 상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요것을 그냥 목으로 넴게서는 안 된다는 무신 냄새가 폴폴 나는디라?"

김종연이 오동평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주전자를 들던 오동평이 멈칫하더니,

"아니시, 아녀, 냄새넌 무신 냄새가 폴폴 나? 고상덜 허고 나왔응께 그냥 한잔 허잔 것이제."

그는 태연한 척하며 손까지 내저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그 어색스런 몸짓에 담긴 그 어떤 목적을 동시에 읽어냈다.

"그러덜 말고 용건부텀 내놔봇씨요. 술 다 묵어불고 우리가 아재 말 못 들어주먼 본전 생각나 배창시 꾀일 것잉께요."

김종연은 농담 같은 말을 딱딱한 표정으로 하고 있었다.

"자네 시방 나럴 멀로 보고 허는 소리여. 나가 요까징 것 아까와 배창시 꾀일 쫌팽이고 빙신으로 뵌가?"

오동평은 화를 내는 척 호기를 부렸다.

"그러먼 되얐소. 토해낼 때 토해내드락도 말 대접혀야 쓴께 묵고보드라고."

서인출이 가시 박힌 소리를 하며 김종연의 무릎을 툭 쳤다.

"어이, 하먼 그래야제."

오동평이 기세 좋게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김종연은 서인출에게 눈총을 쏘며 묘하게 웃었고, 유동수는 헛기침을 하며 술상으로 다가앉고 있었다. 막걸리 한 사발씩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닭부터 뜯기 시작했다. 시래기죽을 먹었을 뿐인 세 사람의 손에서 닭 한 마리는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세 사람의 모습을 오동평은 경멸하듯 천시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막걸리를 다시 한 잔씩 비우고 나자 오동평이 입을 열었다.

"자네덜이 각단지게 지주 집으로 밀고 들어갈 심판이람시로?"

"그러요."

기다렸다는 듯 김종연이 말을 받았다.

"근디 말이시, 글안허고는 안 될랑가아?"

오동평은 낮으면서 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 무슨 뜻인가를 담고 있는 은근함이었다.

"글안허게 헐라먼 빼돌린 논얼 도로 지 자리에 갖다놔야제라."

이미 막보기로 작정을 해버린 김종연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어허, 그리 대꼬챙이맹키로 말허덜 말고 말시, 나 말 잠 들어보드라고."

오동평은 목소리를 더 낮추며 어깨를 숙이고는,

"시상일이란 것이 말시, 그리 무대뽀로 몰아 때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시. 워쨌그나 간에 자네덜이 그리 발싸심허는 것도 다 한 평상 살아보자고 허는 짓인디, 워쩐가, 나가 새중간에 서서 자네덜이 지끔 부치고 있는 논얼 반값에 넘게 주게 헐 팅께, 자네덜언 앞장 스는 일에서 발얼 빼는 것이."

그의 은밀한 말이었다. 방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종연은,

에라이 잡새끼야, 뒤져서도 마름질이나 해 처묵어라,’

하는 말을 참아내고 있었고, 서인출은 가소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유동수는 심장의 박동이 갑자기 빨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반값이 아니라 공짜로 줘도 우리넌 그리 못허겄소!"

서인출의 말이었다. 김종연이 아니고 서인출인 것에 유동수는 놀라며,

쟈가 즈그 자형을 탁해간다냐 어쩐다냐,’

생각하며 머쓱하게 건너다보고 있었다.

"아니 이사람아, 공짜로도 그리 못허겄다니, 고것이 무신 심뽀여?"

오동평이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우리넌 그런 드런 짓거리 험스로 살고 잡지 않소. 빼돌린 논얼지 자리로 안 돌려놓먼 우리넌 끝꺼정 한 덩어리로 뭉쳐 뎀빌 것잉께 그리 아씨요. 이약 끝났소."

김종연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서인출이 일어났고, 유동수도 따라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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