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누가 묵어도 묵을 떡인디
거무칙칙한 색깔의 뻘밭이 차창 밖으로 한정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뻘밭은 판판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두렁들이 아귀를 맞춰가며 뻘밭을 반듯반듯한 네모로 나눠놓고 있었다. 그것은 소금밭이었다. 질펀하게 펼쳐진 소금밭 가운데로 뚫린 길가로는 큰 허우대에 비해 실한 느낌이 없는 건물들이 등성등성 서 있었다. 판자로 벽을 둘러치고 양철로 지붕을 얹은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들은 소금창고였다. 드넓은 소금밭은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이 텅 비었고, 거무충충한 색의 옷을 입은 허우대 큰 건물들의 모습이 소금밭은 한층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마른 갈대줄기 하나 찾을 수 없는 황량한 소금밭 여기저기에서 땅커풀이 얼 부풀어 오르며 들뜬 얼음장들이 창백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인태의 아내 목포댁은 창밖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 냉기 가득한 소금밭에 하염없는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저눔에 소금밭이 똑 내 가심이로시... ’
남편 일로 조바심나는 마음 한편에서는 이런 생각이 망연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순천도립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기별을 받고 허둥지둥 기차를 탄 길이었다. 병원에 있다는 것뿐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광양경찰서로 전근을 떠난 이후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이 조마조마하게 살아오다가 기어코 그런 기별을 받고 말았다.
"거그넌 전쟁터시. 허고, 무신 수럴 써서라도 금방 빠져나을 것잉게. 나가 누군디, 최익숭이 눔이고, 김사용이 눔이고 기엉코 원수를 갚고 말 것이다."
이사를 할 필요 없는 분명한 이유와 함께 남편은 이를 갈며 혼자 몸으로 벌교를 떠났었다.
목포댁은 또 무심결에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에 대한 마음졸임과 경찰가족으로서의 세상살이가 자아내는 한숨이었다. 비록 계급이 낮았을망정 남편이 경찰 노릇을 제 맛 나게 한 것은 아무래도 일정 때였다고 그녀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경찰 안사람 노릇도 역시 일정 때가 제철이었다 싶은 것이다. 일본 순사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위세를 누렸던 것은 그만두더라도 그때는 지금처럼 빨갱이라는 것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워야 하는 위험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도 좌익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쪽에서 잡아내려고 눈에 불을 켰었다. 그것들을 잡아내기만 하면 특별 상금을 받거나 승진이 되었다. 그 위세당당 했던 꿈같은 시절은 해방이 되자마자 뒤엎어져 정반대의 암흑천지로 바뀌고 말았다.
"워메 큰 탈 나부렀네. 대일본제국이 요리 허망허게 망해뿔다니. 참말로 알다가도 몰를 일이시. 그나저나 인자 워째야 쓸꼬. 큰 탈 나부렀어, 큰 달."
해방이 되던 그날 사색이 된 남편은 마치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이런 말을 중얼대며 어지러울 지경으로 방안을 맴돌았던 것이다.
"봇씨요. 방안만 요리 뺑뺑이럴 돌지 말고, 우리도 항꾼에 일본으로 델다도라도 주임님헌테 매달리씨요."
그녀는 머리를 짜낸다고 짜내 그런 해결책을 내놓았다.
"즈그 발들에떨어진 불똥도 못 꺼 환장헐 판이디 우리 겉은 것덜얼 일본으로 델꼬가야?"
남편이 얼굴을 찡그려 붙였다.
"다 즈그덜 위해서 순사질 헌 것인디, 몰른 척이사 헐랍디여."
"아, 시끄러! 왜눔 순사덜이 조선눔 순사덜얼 사람으로 보는지 알어?"
남편은 냅다 소리를 질러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소스라쳤다. '왜눔'이라는 소리가 남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 입을 나불거렸다간 남편의 주먹이 날아들 것만 같아 그녀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남편은 안절부절 못한 채 이틀을 더 보내고 결국 피신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자우리 시상은 깨끔허니 끝장 나부렀네. 집언 아부님헌테 맽게놓고 자넨 새끼덜 델꼬 친정으로 뜨소."
"당신도 항꾼에 친정으로 피헙씨다."
"여러 말 말어. 목포는 더 큰 불구뎅이여."
"가먼 워디로 가시게라?"
"무담시 아는 것이 병이시. 나가 알아서 피헐 것잉게 자낸 새끼덜이나 잘 간수혀."
남편은 핫바지저고리를 걸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남편의 추레한 모습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문 닫혀졌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댓 명의 청년들이 들이닥친 것은 다음날이었다. 그들은 집을 에워싸듯이 하고 남편을 찾았고, 어젯밤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우르르 마루로 뛰어올라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요런 백여시 겉은 새끼가 금세 냄새 맡고 째부렀구마."
"금메 말이여, 우리가 한발 늦어뿌렀는갑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런 소리들을 들으며 그녀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허, 요것 잠 봐라. 해방된 지가 원젠디 요것덜언 이적지 일장기럴 신주 모시디기 떡허니 걸어놓고 있단 말이여."
"아니, 머시여!"
이런 외침에 그녀의 가슴은 그만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너무 경황없이 며칠을 보내느라고 일장기 떼 내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저눔에 여펜네도 남가눔허고 똑겉은 악질 반역자시."
"하먼, 일심동체 아녀?"
"쩌리 비켜나그라, 때레뿌식어뿔랑께."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가 요란했고, 그녀는 두 귀를 막으며 몸을 조여뜨렸다. 그녀는 반항은 고사하고 말 한마디 못한 채 청년들에게 끌려갔다. 그들은 자치대라고 했고, 그들의 입에서는 친일파 처단, 민족반역자 처단이라는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남편이 어디로 도망했는가를, 왜 일장기를 그대로 붙여놓고 있었는가를, 그녀는 이틀 동안 계속 추궁 당했다. 그들은 겁을 주거나 소리를 지를 뿐 때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풀려나기는 했지만 남편의 말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갈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 자치대의 명령이었다. 물론 시아버지도 끌려가 조사를 받고 나왔다.
"젊은 사람덜이 참말로 무던혀. 일본 것덜 같았음사 폴세 사지가 녹아내렜을 것인디..."
자치대에서 풀려나온 시아버지가가 고개를 떨군 채 힘없이 한 혼잣말이었다. 잔뜩 기죽어버린 시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녀는 남편이 저지른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었다. 팔월의 늦더위가 더 더워질 지경으로 세상은 온통 활기가 넘치는 가운데 술렁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은 바깥세상과는 달리 썰렁한 냉기로 차 있었다. 그녀는 그 냉기에 갇혀서 비로소 해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하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외로움,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스스로 피하고자 하는 두려움, 그것이 그녀가 깨달은 해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편과 자신이 해방 전에 저지른 죄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먼, 해방이 되얐응께."
"금메, 해방이 되얏단 말시."
"음마, 해방이 되얐는디도?"
"어허, 해방이 되얐당께로."
사람들은 앞으로의 세상살이에 대해 이야기들을 분분하게 했고, 옳다는 말끝에도, 의심스런말끝에도, 아니라는 말끝에도 해방을 갖다 붙였다. 세상 사람들이 표 안 내는 속에서 해방을 얼마나 고대해왔으며, 이제 해방을 얼마나 반기고 있는지를 그녀는 날이 갈수록 알아가고 있었다. 그 확인이 되풀이될수록 그녀는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가는 고적감에 파묻혀갔다. 그 고적감은 앞으로의 평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무서움이었다.
"죄럴 졌으면 죽은 디끼 죄딱음험시로 사는 것이 도리다. 몸안 상허고 요만헌 것도 다 인심이 후헌 덕잉께."
시아버지의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걸음이 늦었던 어느 순사는 도망을 치다가 잡혀 몰매를 맞고 병원으로 실려 갔고, 어떤 순사보는 숨어 있다가 잡혀 '저는 왜놈의 앞잡이 민족반역자입니다' 하는 글을 쓴 커다란 종이를 가슴과 등에 붙이고 이틀 동안 읍내를 돌기도 했다. 해방된 세상은 나날이 달라져갔다. 자치대가 치안대로 바뀌고, 곧 새 나라가 설 것이라고 했다. 그 나라는 너나없이 공평하게 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나라가 서게 되면 제일 먼저 토지개혁을 해서 소작인 없는 세상을 만들 것이고, 그 다음으로 할 일이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을 법으로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식들은 시아버지가 가져왔고, 신경을 곤두세운 그녀는 그런 사실들을 낱낱이 머릿속에 담았다. 새 나라를 세울 준비를 하는 것이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것도, 서울에 있는 그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여운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들을 법으로 다스린다는 그 새 나라가 하나도 반가울 것이 없는 그녀의 앞에 신변의 위협은 현실로 나타났다. 치안대 사람들이 하루거리로 집에 나타나고는 했는데, 그 사람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좌익농민조합을 한다고 해서 남편이 잡아서 징역 보낸 사람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주로 그런 사람들이 치안대에서 힘을 쓴다고도 했다. 그녀는 앞길이 암담하게 막혀버렸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것과 치안대라는 것의 위세는 일정 때의 총독부나 경찰의 위세만큼이나 등등해 보였다. 순사질을 한 집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관공서에서 일했거나 일본과 친하게 지낸 부자나 지주들까지도 그 위세 앞에서 꼼짝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것이 틀림없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고, 어서 새 나라 세우기를 고대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세라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그런 믿음과 떠받듦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고것은 사람 심으로는 위치케 혀볼 수 웂는, 하늘이 갤치는 순리요. 공은 딱은 대로 가고 죄는 진 대로 가드라고, 인자우리 겉은 인종들이야 그 순리가 시키는 대로 허기로 맘 묵고 참허니 기둘리는 도리밖에 또무신 방도가 있거냐. 발싸심헌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시아버지의 기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금방 새 나라를 세울 것 같던 건국준비위원회의 기세는 미쳐 한 달이 가지 못하고 꺾이기 시작했다. 남한 땅을 해방시킨 미국이 자리를 잡고 군정을 실시하게 되자 건국준비위원회고 치안대고 힘을 잃게 되었다고 했다. 세상 판세의 돌변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치안대를 해산시킨 미군정은 치안대 대신 전처럼 경찰대를 만들기로 했는데, 거기에 일정 때의 경험자들을 그대로 써준다는 것이었다. 옛날의 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경찰 노릇을 하게 해준다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들어도 그녀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인자 우리 겉은 사람 살판 생겼당께요. 싸게싸게 남 순사님헌테 연락 취하씨요."
앞뒤로 종이를 붙이고 읍내를 돌았다는 그 순사보를 지낸 사람이 처음 찾아와 한 말이었다.
"와따매, 아짐시넌 걱정도 팔자요. 미국은 일본맹키로 공산주의다 빨갱이다 허는 것에는 딱 정떨어져 하는 나란께로 좌익 못자리판인 치안대 때레뿌식어뿔고 경찰을 새로 맹금시고 우리럴불러들이는 것 아니겄소. 왜 우리럴 불러들이느냐, 일정 때부텀 좌익얼 때레잡은 것이 우리덜이고, 지끔도 누구누구가 좌익인지 그 연줄을 훤히 아는 것이 우리덜이다 그것이요. 폐일언허고, 나럴보고, 남 순사님도 싸게 나오라고 허씨요."
순사보가 아니라 정식으로 경찰이 된 그 사람이 두 번째로 찾아와 한 말이었다.
"금메, 하도 요상시럽게 왔다리 갔다리 허는 시상이라 논께..."
시아버지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허, 워쩔라고 요리도 땁땁허니 말귀럴 못 알아묵고 이러요. 요러고 늦장부리고 있다가는 남 순사님 밥통 딴 눔이 채가뿔 것이요. 인자 알아서 허씨요."
그 사람이 세 번째 찾아와 내던지고 간 말이었다.
남편이 집을 찾아든 것은 밤중이 아닌 대낮이었다. 남편은 그 동안의 경위 같은 것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산중에 너무 깊이 백혔든 것이 손해나 안 보게 될란지 몰르겄다."
남편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며 흘리듯 말했다. 남편의 서둘러대는 기세 앞에서 그녀는, 경찰을 다시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에 대해 한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기는 시아버지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남편은 다음날로 경찰이 되었다. 그것도 그냥 경찰이 아니라 지서주임이 된 것이다. 캄캄한 밤이 환한 대낮으로 뒤바뀐 그 느닷없음 앞에서 그녀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남은 인생의 가망 없음에 대하여 참담해했던 만큼 그 느닷없는 변화는 현실감이 없었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그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의 뒤바뀜을 '천지개벽'이라고 한 시아버지의 말이 합당한 것만 같았다. 짧은 기간 동안에 두 번의 천지개벽을 겪은 그녀로서는 세 번째의 천지개벽을 겪게 될까 무서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미국이 워떤 나란지 당신이 몰릉께로 고런 새 날아가는 소리럴 허는 겨. 미국이 워떤 나라냐! 대일본제국을 이겨뿐 나라다 이것이여. 을매나 힘이 씨먼 대일본제국을 이겨뿌렀겄냐 그 말이여. 대일본제국을 이겨뿐 미국은 대대미국인 것이고, 그 힘으로 따지자먼 아무리 에누리혀서 잡아도 미국 힘이 일본 힘보담 두 배는 된다 그것이여. 고것이 무신 말인고 허먼, 대일본제국이 이 땅에서 사십 년 가차이 버텼응께로 힘이 두 배인 대대미국인은 팔십 년은 버틸 것이다 그 말이시. 우리 남은 평생을 따지자먼 사십 년으로도 족헌디, 그 두 배나 되는 팔십 년이 미국 덕에 우리 편이 된셈인디 무신 근심 걱정 헐 것이 있냐 그런 말이시. 알아묵겄는가, 못 알아묵겄는가?"
"그리만 됨사 무신 근심이고 걱정 허겄소마는... 하여튼지 간에 미국은 우리럴 불구뎅이서 살려내준 은인이고 보살이시요."
그녀는 다소 안도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제, 그 은혜 갚자먼 일정 때보담 더 열성으로 빨갱이럴 때레잡아야제."
"봇씨요, 아무리 미국이 씨다고 허더 시상이 원제 워치케 돌변헐란지 몰릉께 눈치 봐감서 인심 안 잃게 요령지게 허씨요."
"자네가 철든 소리럴 허니라고 허는 갑는디, 고것은 하나만 알았제 둘언 몰르고허는 소리시. 인자 판이 뒤바뀐 이상 미국이 시키지 안허드락도 좌익이고 공상당언 씨럴 몰리고 뿌리럴 뽑아야혀, 또 그눔덜헌테 판얼 뺏길 수는 웂은 일잉께로. 앞으로 판이란 것이니가 죽냐, 나가 죽냐 허는 판이란 것을 알아야 써."
그녀는 가슴에 냉기가 왈칵 끼쳐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너나없이 공평하게 사는 새 나라를 고대하던 세상의 활기와 술렁거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근디 말이요... 만일에, 만일에 미국이 채럴 잡고 나서지 않었으먼 시상 판세가 워찌 되었을께라?"
그녀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입을 놀렸다.
"자네가요분 일얼 당허등마 부쩍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쓰게 됐네그랴. 자네 생각으로는 워찌됐을 것 같은가?"
남편은 묘한 웃음을 입에 물고 되물었다.
"음마, 나 무식헌 거 귀경허고잡아 이러신다요 시방?"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화난 시늉을 해보였다.
"미국이... 미국이... 손을 안 댔으먼 판이 워찌 됐을 것이냐... 그것 참 고약허고도 중요헌 문젠디, 미국이 이 땅에 손얼 안 댔음사 쏘련도 손얼 안 댔을 것이고, 그리 되었으면... 필시 여운형의 뜻대로 나라가섰겠제."
남편의 말은 더디었는데 그만큼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은 이 년 가까이 지서주임 노릇을 열성스럽게 해냈다. 일정 때와 달라진 것은 언제나 권총을 차고 다녔고, 잠자리에서도 그것은 머리맡에 놓여졌다. 처음에는 그 사람 죽이는 구멍 뚫린 쇠뭉치가 징그럽고도 무서웠는데 차츰차츰 친밀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것이 머리맡에 놓여야만 그녀도 편한 잠을 잘 수 있게끔 되었다. 좌우익으로 엇갈린 시국은 그만큼 뒤숭숭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남편의 열성은 마침내 경찰서장 승진을 가져왔고, 벌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임시에 여운형이라는 사람이 암살을 당했다. 그 일로 세상은 시끌시끌했다. 장례식을 보려고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었다.
"모난 돌이 채이드라고, 너무 똑똑헌 것이 죄여."
남편의 한마디였다.
이런 반란사건을 당하기 전까지의 벌교 생활은 순탄했었다. 좌익을 검거하는 일로 언제나 신경을 써야 했지만 그건 으레 하는 일로 만성이 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당한 것이 반란사건이었다.
"당장 떠야 써. 맨몸으로 당장 뜨라니께."
남편은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이 한마디를 외치듯 하고는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고메, 세분째 천지개벽이 오고 말았구나!’
그녀는 시아버지와 함께 허둥지둥 세 아이들을 수습하고, 돈만 챙겨가지고 무작정 집을 나서야 했다. 우선 아는 얼굴이 많은 벌교를 벗어나야 했다. 걷고 타고 하면서 목포 친정에 당도하기까지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남편한테서 돌아오라는 기별을 받고 보름이 넘어 다시 벌교를 찾아든 그녀는 자신들의 피신이 얼마나 아슬아슬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경찰 노릇 그만두라는 말은 남편 앞에 내놓지 못했다. 그 말은 속에서만 맴도는 안타까움이었다. 수없이 간 떨어져 내리는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생각하면 권력이고 권세고 다 필요 없게만 느껴졌다.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한시름 놓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또 느닷없이 전근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것도 영전이 아니라 좌천이었다. 남편은 전혀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좌천당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반란군들이 득실거린다는 광양으로 밀려가고, 결국 몸을 상해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애가타면서도 그녀는 한편으로 입원이나마 하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기차가 완전히 멎기도 전에 뛰어내린 목포댁은 곧 넘어질 듯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몸을 바로잡았다. 기차를 향해 눈을 흘겨댄 그녀는 부산하게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남인태는 왼쪽어깨에 총상을 입어 수술을 받고 가료 중이었다. 목포댁은 붕대에 감긴 남편의 어깨를 보자마자 눈물바람부터 했다.
"넘새시럽게, 인자 그만 울소."
남인태는 아내를 질벅였다. 그는 아내나 식구들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 사투리를 썼다. 공무 중에 표준말을 흉내 내야 하는 고역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였다.
"내빌라두씨요, 내 설움도 풀어야제라."
목포댁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저 사람덜에 비허자먼 나넌 다친 것도 아닌디, 자네 설움꺼지 풀자리가 아니시. 눈물 딲소."
남인택의 음성은 낮았지만 그 어조는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만한 눈치 못 챌 목포댁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남편 옆으로는 두 사람이 더 누워 있었다. 그들의 몸에 감긴 붕대만으로도 그들이 남편보다 심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눈물을 쏟았던 것은 남편의 부상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안도해서였다.
"의사 말이 워쩝디여? 혹시..."
목포댁은 그 다음 말은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빙신이 될란지 안 될란지는 치료가 끝나봐야 알 일이제."
남인태는 무뚝뚝하게 말해놓고 나서, 자신의 말이 재수 없게 여겨져,
"빙신이야 되겄는가"
하고 토를 달았다.
"요리 다치기꺼지 헜는디, 그 공얼 생각혀서 워디 존 디로 안 보내줄께라?"
목포댁은 남편의 귀 가까이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쓰잘 데 웂은 소리 말소."
남인태는 퉁명스럽게 말해버렸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마누라의 그 머리 돌아가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그의 퉁명스러움은 자신의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생긴 것이었다. 남인태는 처음부터 이번 부상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려고 궁리하고 있었다. 광양이라는 데는 경찰복을 입고는 한시도 맘 놓고 살 수가 없는 땅이었다. 반란군에다 민간 빨갱이들까지 합세해서 군경과 밀고 밀치는 공방전이 거의 매일이다 싶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 위험지대에 부임해서 그가 줄기차게 매달린 생각은 첫째, 안전도모, 둘째 조기전출이었다. 안전도모를 위해서는 서장의 권한을 최소한으로 축소해가며 군인이나 서북청년단을 앞세웠고, 그 축소시킨 권한마저도 부하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안전한 장소인 경찰서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살이란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밤 벌어진 긴급 상황 앞에서는 도저히 발뺌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마을에 병력을 투입시키고 난 다음인데 그 반대편 마을에 또 반란군이 출현한 것이다. 그 내키지 않은 야간출동에서 몸을 사린다고 사렸는데 그만 어깨에 총을 맞고 말았다. 그는 수술을 받고서야 그 부상을 전출에 이용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난장판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자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생명에는 아무 지장 없는 부상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절대로 돌아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난장판에서 죽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그곳이 난장판인 것은 전선도 없고 작전도 없는 싸움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적과의 전투를 따지기 전에 아군의 조직이라는 것부터가 난장판이었다. 군인에, 경찰에, 서북청년단에, 지방청년단까지 얽히고 설켜 모두 제멋대로 설쳐대는 바람에 좌충우돌이었고, 거기다가 어느 조직이고 전투경험이 별로 없는 형편이어서 총질을 해대는 것에 비해 토벌효과는 그리 좋지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민간인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속에 반란군들은 날이면 날마다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언제 어떻게 개죽음을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특히 서북청년단원들은 민간인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군인들하고도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경찰이나 군인이 무색할 정도로 투철한 그들의 반공의식은 국책 수행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지만 그 도가 지나쳐서 판을 어지럽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남인태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데 그들을 십분 이용해먹었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까지나 자신의 방패막이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인태는 부상을 이용할 수 있는 묘안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기별을 보낸 것은 병간호를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미리 돈을 장만시키기 위함이었다.
제각의 대문 앞 오망한 공지에는 햇살이 따스하게 괴어 있었다.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라도 크고 두꺼운 대문이 바람을 막아주는 탓으로 햇빛만 반짝 비치면 거기는 안방보다 따스했다. 그래서 길남이와 종남이는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고, 회정리 이구 아이들이 놀러오기도 했다.
"성, 영 심들제?"
쪼그리고 앉은 종남이고 입술까지 흘러내린 누런 코를 훌쩍 들이켜며 물었다. 그러나 고개를 잔뜩 웅크려 박은 채 손을 놀리고 있는 길남이한테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종남이로서도 자기 때문에 애를 쓰고 있는 형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한마디 한 것뿐 무슨 대꾸를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길남이는 동생의 썰매를 만드느라고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틀째 만들고 있는 썰매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양쪽 받침 밑에 쇠줄을 붙이는 것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쇠줄붙이기가 썰매를 만드는 일 중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기도 했다. 썰매가 잘 나가고 못 나가고는 그 쇠줄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우선 쇠줄이 좋아야 했고, 좋은 쇠줄을 요동하지 않도록 단단하게 붙여야 했다. 썰매에 달 최고의 쇠줄로는 유리 창문 밑에 붙은 쇠줄을 당할 것이 없었다. 그 쇠줄은 굵고 곧을 뿐만 아니라 중간 중간에 못을 박는 구멍까지 뚫려 있어서 요동 못하게 붙이기도 쉬었다. 그러나 그건 최고인 만큼 구하기도 힘들었다. 철물점에 가면 수북하게 쌓여 있지만 돈이 없었고, 관공서나 학교의 유리 창문 밑에 달린 것은 군침만 돌게 하는 먹지 못하는 떡이었다.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서부터 썰매를 만들어달라고 졸라대는 동생 종남이의 성화를 견디다 못해 길남이는 회정리 이구의 동철이를 찾아갔었다.
"잉, 창문철로? 고런 것 구허기야 눠 떡묵기제. 근디, 을매 줄래?"
쇠줄을 창문철로라고 말한 동철이는 그의 버릇대로 대뜸 대가부터 따지고 들었다. 그가'을매 줄래?' 한 것은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 것을 얼마나 주겠느냐는 것이었다. 동철이는 아이들이 탐낼 만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많이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그는 아무 때나 아이들 앞에 내밀어 보이고는 했다. 그건 자랑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그의 말대로 손님을 끄는 일이었다.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아이가 나서면 동철이는 꼭 장터의 장수처럼 먹을 것을 놓고 흥정을 했다. 그가 아이들한테 인기가 있는 것은 먹을 것이면 무엇이거나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이 갖고 싶어 하는 물건과 그들이 내미는 먹을 것이 잘 맞지 않아 흥정이 어려운 경우는 더러 있어도 동철이가 먹을 것 자체를 가리는 경우는 없었다. 그가 제일 높은 갚을 쳐주는 것은 인절미나 시루떡 같은 것이었고, 죽은 쥐만 빼놓고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고 일단 물건 값이 되었다. 동철이가 그렇게 먹을것을 밝히는 것은 끼니를 굶도록 가난하기 때문이었는데, 그 물건들이 끝도 없이 어디서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아이들은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말이 없는 속에서 서로가 다 알고 있었다. 동철이가 어디선가 훔쳐온다는 것을.
"고구마 두 개."
길남이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말을 기운차게 내놓았다.
"고구마 두 개?"
동철이는 되묻고는,
"한쪽에 고구마 한 개씩이라 고것이제."
눈을 말똥하니 뜬 채로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고구마도 크고 작은 놈이 있는디, 을매나 허제?"
고구마 크기를 당장 확인하자는 듯 고개를 쑥 뽑아 늘였다.
"요만허다."
길남이는 동철이 코앞에다가 주먹을 불쑥 내밀어보였다.
"주먹뎅이만 하다아..."
동철이는 꼭 어른 시늉을 내며 하늘을 쳐다보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쪼오타, 길남이 니니께 특별허니 싸게 혀줘야제."
하며 눈을 찡끗해보였다.
"원제 찾으로 올끄나?"
길남이도 그의 눈짓을 친숙하게 받으며 물었다.
"낼 아칙에."
"알았어, 낼 만내."
"근디 길남아!"
길남이는 돌아서다 말고 몸을 되돌렸다.
"니, 쇠줄만 갖고 썰매 못 맹근다는 것 알지야? 판자때기도 있어야 허고, 못도 있어야 허고, 톱, 장도리, 별것별것 다 있어야는디, 니 다 있냐?"
길남이는 동철이를 멍허니 쳐다보고 있었다. 말을 듣고 보니 판자만 있었지 다른 것들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니, 못도 썰매작대기에 박을 대못, 판자에 박을 중 못, 쇠줄에 박을 새끼 못, 못만 해도 천층만층인 것 아냐?"
길남이는 어느새 동철이 앞으로 완전히 돌아서 있었다. 길남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하고 나이는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도 동철이한테서는 언제나 어른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도 두 살을 더 먹으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나 길남이는 그렇게 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다.
"판자는 있고, 톱허고 장도리넌 워치케든 빌릴 것잉께, 못 값은 을매냐?"
"야, 그리 복잡허니 따지지 말고 니 판자럴 나헌테 갖고 오니라. 나가 썰매럴 삐까번쩍허게 맹글어줄 팅께, 몰아때레서 고구마 열 개만 내라. 으쩌냐?"
동철이는 눈을 반질반질 빛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받으며 길남이는 잠시 생각했다. 고구마가 열 개면, 이 오는 십, 동생하고 둘이서 점심을 닷새나 굶어야 될 판이었다. 자신은 굶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배고픈 귀신 들린 동생이 참아낼 것 같지가 않았다. 더구나 썰매를 가지려고 그런 짓까지 한 것을 어머니가 알게 되면 생판 난리가 나게 될 것이다. 닷새씩이나 점심을 쫄쫄이 굶어대며 동생이 비밀을 지키리라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동생을 위해 자기 혼자 열흘씩이나 점심을 굶기는 싫었다.
"야, 멀 그리 생각허냐!"
동철이는 바락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라렸다.
‘힝, 니가 내 맘 홀릴라고?’
길남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앞뒤를 차근차근 따져나갔다. 닳아 없어지는 것 아니니까 톱이나 장도리는 빌려 쓰면 될 것이고, 못이 아무리 여러 종류가 필요하다 해도 쇠줄 두 개에 고구마가 두 개였으니까 못은 고구마 한 개면 될 것이고, 그렇다면, 고구마 일곱 개가 순전히 수고비인 셈이었다.
‘씨펄눔, 순 도적눔 심뽀시!’
"야, 워째 눈깔이 괭이눈깔로 변해뿌냐?"
동철이가 약간 켕기는 기색으로 길남이의 눈치를 살폈다. 길남이는 속으로 욕한 것이 들킨 것만 같아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아녀, 아무리 생각혀봐도 고구마 열 개럴 구할 수가 웂어서 속이 상헌 것이여."
길남이는 얼떨결에 둘러대고 있었다.
"그려, 니도 느그 아부지 웂이 무당집에 붙어사는 신센께로."
동철이는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내깔겼다. 그가 기분이 잡치거나 속이 상할 때면 하는 버릇이었다. 그럴 때 그는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불량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글먼 워치케 헐래?"
동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못이라도 바꿔먹자는 속셈이었다.
"못이나 구해도라."
"고구마 두 개"
"얼래 , 쇠줄이 고구마 두 개였는디 그까진 못이 워째 두 개여?"
"못이 한 가지람사 고구마 한 개로 되겄지만 못이 세 가지다 이것이여, 세 가지."
동철이는 손가락 세 개를 펴서 길남이의 눈앞에다 디밀었다. 못이 아무리 세 종류라 해도고구마 두 개를 내놓기는 억울했다. 한 개로 하자고 말을 할까 하다가 길남이는 그냥 돌아섰다.
"야, 길남아! 말얼 끝내고 가야제."
동철이가 다급하게 앞을 막아섰다.
"말허먼 멋 혀. 나넌 한 개먼 쓰겄는디, 니가 안 깎아줄 것인디."
길남이는 배짱에다가 오기까지 부리고 있는 참이었다.
"화아, 시발눔아, 말얼 허여 속얼 알제."
동철이는 하늘로 고개를 젖히며 헛웃음을 치고는,
"글먼 요렇게 하자. 무신 말이냐 하먼, 썰매 작대기에 대못얼 박아야 허는디, 그 대못얼 박을라먼 그냥 박는 것이 아니라 못대가리 쪽이 작대기 속으로 들어가게 못얼 꺼꿀로 박아야허는 것 니도 알지야? 그려, 그러자먼 못대가리럴 장도리로 뚜둘겨 웂애야 허고, 꺼꿀로 박고나먼 못 끝이 에지라져 또 뽀쭉허니 갈아야 하고, 고것이 을매나 심드는 일이냐. 나가 그 썰매 작대기럴 맹글어줄팅께 고것꺼지 합쳐서 고구마 두 개럴 내라."
길남이는 빠르게 생각을 했다. 별로 손해 볼 것 없는 일이다 싶었다. 썰매작대기를 만드는 것도 큰 일거리였던 것이다.
"좋아, 근디, 되나케나 맹글먼 안되야!"
길남이는 동철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부지게 말했다.
"걱정 말고, 고구마 요만 헌 것으로 네 개란 것 잊어뿔지나 말어라. 썰매작대기는 특별허니 맹글어줄 팅께."
동철이는 주먹을 들어보이며 눈을 찡긋했다. 길남이도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근디, 니가 썰매럴 잘 맹글 자신이 있냐?"
"하먼, 공작숙제는 나가 우리 반에서 질이여."
"햐아, 장난이고 맹그는 공작숙제허고 사람이 올라타고 달리는 썰매하고 똑겉은 줄 아냐? 야가 시방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 허네."
동철이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봉창 뚜딜기는 소린지 아닌지는 두고 봐."
길남이는 오기를 부리며 돌아섰다. 고구마가 아깝기는 했지만 썰매를 손수 만들어보고도 싶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공작품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재미가 있었다. 특히 공작품을 만드는 손재주는 선생님의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길남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철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동철이가 먹을 것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다. 가난하면서도 동생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것은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잠시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영영 죽어버렸다. 그의 아버지는 방죽에서 총살당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철다리 옆 부둣가 식당에서 물일을 해주고 얻어오는 국밥 한 그릇으로는 세 동생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장남인 자기가 동생들 배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철이는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온 아이였다. 그가 귀환동포로 불리는 회정리 이구에 사는 것도 그 까닭이었다. 그는 거기에 살면서도 귀환동포라는 말을 끔찍하게 듣기 싫어했다. 그는 몹시 화가 날 때면, 특히 동생들에게 일본 욕을 퍼부어댔다. 그는 언제나 주머니에 조그만 칼을 넣고 다녔다. 아이들이 아무리 졸라도 그것만은 먹을 것과 바꾸지 않았다. 접었다 폈다 하는 그 칼의 손잡이는 뿔로 덮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무슨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값비싼 칼 같았다.
"우리 아부지가 쓰든 것이다."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입에 올리지 않듯 그도 그때 말고는 아버지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야학을 다녔다. 그러면서 그까짓 공부는 해서 뭘 하느냐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다. 어느 날인가는 불쑥, 야학의 여선생을 지 각시 삼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너무 엉뚱하고, 너무 기막히고, 너무 싹수없는 소리라서 자신은 입을 못 다물고 있는데 그는 느물느물 웃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는 또 가슴에 얼어붙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율어를 차지한 그 사람들이 쌀을 고루 나눠줘서 죽 끓여 먹던 사람들이 밥을 해먹는다는 소문이 읍내에 쫙 퍼졌는데, 그것이 정말이냐고 여선생한테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선생은 딱 부러지게 대답은 하지 않고 긴가민가하게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질문을 했던 것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는데, 결국 질문은 하나마나가 되었고, 그러잖아도 배고픈데 질문을 하느라고 기운을 빼서 자기만 손해를 보고 말았다고 했다. 그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문이 정말이라고 여선생이 대답했다면 동생들 끌고 율어로 이사를 갈 작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끔찍하고 무서운 말을 해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질린 쪽은 자신이었다. 그는 마음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는 말이나 짓이 너무 어른 같을 때가 많아 별로 정이 들지 않고 서먹거렸다. 그는 곧잘 니넌 특별허니 어쩌고 하며 눈을 찡긋거리고 했다. 그렇다고 정작 특별하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물건을 바꿀 때는 다른 아이들이나 마찬가지로 먹을 것을 꼬박꼬박 챙겼다. 그러나 그 말이나 눈짓이 꼭 싫지는 않았다. 그의 말이나 눈짓은 이상스럽게도 가슴을 찡하니 울리며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고는 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찡긋 하게 되고는 했다. 어쨌거나 동철이는 자신보다 불쌍한 아이였다. 아버지가 없는 것이 그랬고, 학교 못 다니는 대신 야학을 다니는 것이 그랬고, 어머니의 벌이가 형편없는 것이 그랬고...
길남이는 신작로를 가로질러 집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며 소화 아주머니를 생각했다. 고맙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고구마를 바꿔 썰매를 만들게 된 것도 소화 아주머니의 덕이었다. 점심은 고구마 하나씩으로 때우지만 아침과 저녁은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상머리에 앉을 때마다
"남덜언 죽도 못 낋이는 판에 우리는 밥얼 묵는 것은 다 기자님 덕분이다"
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종남이가 불쑥
"엄니, 다 알어"
했다가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모른다.
길남이는 끼니때마다 되풀이 되는 그 말이 하나도 지겹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소화 아짐씨,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소화 아주머니가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배를 곯았을 것인가는 어머니가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길남이는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겉으로는 '기자님'이라고 불렀지만 속으로는'소화 아주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얼굴도 이름도 예쁘고, 마음씨까지 예쁜 소화 아주머니가 무당인 것이 싫었고, 더구나 무당을 높여 부르는 것이라는 기자님은 더 싫었다. 그런데 길남이가 진짜로 부르고 싶은 말을 따로 있었다. 아주머니라고 하니까 너무 먼 것 같고, 너무 늙은 것 같고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과 나이에 어울리는 말, 그것은 '소화 누님'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곱고 예뻐서 부르고 싶은 것은 이름의 뜻을 딴 '흰꽃 누님'이었다. 소화, 소화... 그 흔하지 않은 이름은 뇌일수록 정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슬픈 느낌이 생기기도 했다. 봉선화, 채송화 그런 것들처럼 꽃이름 같기는 한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어머니 몰래 물었던 것이다.
“흰꽃이란 뜻이제."
소화 아주머니는 정말 흰 꽃처럼 잔잔하게 웃으며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그러나 속으로라도 '소화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버릇없고, 신령님이 벌을 내릴 것 같아 소화 아주머니로 부르기로 했던 것이다. 소화 아주머니가 순천까지 넘어가게 된 다음부터 길남이는 어머니가 애달파하는 것만큼 걱정이 되고 잠이 오지 않았다. 거의 매일 밤 꿈을 꾸었는데, 소화 아주머니를 찾아 길을 떠났다가 어디인지 모를 산속을 헤매기도 했고, 신령님 옆에 있는 호랑이를 탄 소화 아주머니가 시퍼런 물이 출렁거리는 강 저편으로 끝없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발을 동동 굴러대다가 놀라 잠이 깨기도 했다. 좋은 꿈을 꾸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길남이는 어머니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지만 소문이 귀 기울려 소화 아주머니와 어머니가 왜 잡혀 들어갔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성, 날이 땡땡 춰야 썰매럴 탈 것인디, 워째 해가 쨍쨍 비치고 이런당가."
춥거나 배고픈 것은 한시도 못 참는 것이 썰매 탈 욕심으로 해 뜬 것을 타박하고 있었다. 동생의 하는 짓이 하도 어이가 없어 길남이는 쇠줄을 구부린 뒤쪽 끝에 못을 박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동생은 어제와 오늘 점심을 굶었으면서도 배고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길남이는 반쯤 박힌 못을 장도리로 가만가만 두들겨가며 반대쪽으로 휘어지게 하고 있었다. 쇠줄 양쪽에 못을 쳐서 서로 엇갈리게 구부려 쇠줄을 고정시키는 일이었다. 못은 처음보다는 몇 갑절 쉽게 마음먹은 대로 말을 들었다. 솜씨가 익숙해진 탓이었다. 반대쪽에 못을 하나만 더 박아 구부리면 쇠줄을 까딱도 하지 않게 고정되고, 그럼 썰매는 완성이었다. 길남이는 서너 개 남은 못 중에서 녹이 덜 슬고 잘생긴 놈을 마지막으로 골라 들었다. 그의 왼쪽손가락 여기저기에는 피멍이 잡혀 있었다. 장도리 질이 빗나가며 입은 상처들이었다. 길남이는 못을 비스듬히 누인 상태로 잡고 못끝을 쇠줄에 바짝 붙여 장도리 질을 시작했다. 그렇게 반쯤 박아 반대쪽으로 휘어야만 쇠줄을 물고 힘을 받게 되었다.
"다 되얐다!"
길남이가 썰매를 떠다 밀며 소리쳤다.
"와아, 우리 성 최고다아!"
종남이가 환성을 터뜨리며 썰매를 끌어안았다. 길남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팔다리가 찢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정신이 아지랑이 밭으로 아른아른해지는 속에서, 어머니가 집에 없어서 썰매 만들기가 편했다는 것과 한시라도 빨리 소화 아주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재판을 받고 오늘에야 풀려나게 된 소화 아주머니를 모시러 아침 일찍 순천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반란사건에 가담했다가 연루된 자들의 집에는 새해부터 소작을 일체 내주지 않기로 한 지주들의 결정은 며칠에 걸쳐 읍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마침내는 골목골목에서 아이들의 입에까지 오를 정도였다.
"인자 칠상이 느그 집 큰탈 나부렀다."
"허먼, 농새 뺏게불먼 멀 묵고 살어."
"묵을 거 암것도 웂이으면 굶어죽는다."
"참말로 칠상이 니 큰탈 났다."
대여섯 살씩 나 보이는 그만그만한 꼬맹이들이 양지바른 토담 구석에 모여서서 작은 입들을 다투듯이 놀리고 있었다. 그런데 네댓 명에게 둘러싸이듯이 서 있는 한 아이만 고개를 수그린 채 말이 없었다. 얼굴이 핼쑥하게 굳어진 그 아이는 아랫입술을 꼭 물고 있었다.
"다 공산당 해서 그런 겨."
"긍께 공산당 허지 말어야제."
"칠상이 니 멍청이다. 느그 아부지 공산당 못허게 니가 말기제."
"요런 빙신아, 워떤 어런이 고런 일얼 아그덜 말 듣냐."
가운데 선 아이는 아랫입술을 다 꼭 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라는 말을 듣게 되자 눈물이 나려고 했던 것이다.
"칠상아, 니 인자 워쩔래?"
"안 굶어죽으라먼 동냥이라도 해야제 워째."
"동냥?"
"그려, 동냥. 니 동냥이 먼지 몰러?"
"허먼, 칠상이가 거지놀이럴 헌다고?"
"안 굶어죽을라먼 그래야제."
가운데 선 아이의 고개는 더 수그러들었고, 굳어졌던 양쪽 볼이 씰룩거렸다.
"칠상이가 쪽박 들고 장타령허는 동냥아치가 되야?"
"히히, 고것 참 우습겄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금방 장난기가 서리고, 가운데 선 아이를 향한 눈들에 윤기가 들었다.
"잉, 칠상이넌 노래럴 잘헌께로 장타령도 잘헐 것잉만."
"맞어, 장타령이 바로 비렁쟁이 노랜께."
"칠상아, 지끔부텀 연습해야 쓸 것잉께 워디 한분 혀봐라."
"어얼시구시구 들어가안다아, 저얼시구시구..."
가운데 선 아이가 아앙 울음을 터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머쓱해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제각기 눈길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칠상이는 외서댁의 남편 강동식에 의해 좌경화된, 샘골댁의 남편 유서방의 아들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귀를 조심해야 할 이야기가 아니어서 마음 놓고 입을 모았던 것이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먹고 굶는 것에 대해서는 곤충의 촉수처럼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아이들에게 그것은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그 문제에 대한 반응이 날이 바뀌어감에 따라 모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참말이제 혀도혀도 너무덜 한다. 세세만년 살것도 아닌 한편상에 워째 그리 모지락시럽게 척지고 살라고 허는고."
"있는 것덜이 허는 짓거리란 것이 다 그리 베락 맞얼 짓거리덜뿐인 것이여, 닌장맞을."
"각단지게 베락얼 열두 분썩만 맞어라."
"죽을 병 들어 눈 사람 가심에 칼질허고 뎀비는 것이 꼭 요것이구만그랴."
"그나저나 남은 입덜이 워찌 살란지 큰일 아니라고?"
"참말로 삥아리 겉은 어린 새끼덜 델꼬 안에서들 당헐 고초가 깜깜헐 일이시."
"글씨말이시, 요런 일맨치로 각다분헐 일이 또 어디 있겄어."
이렇듯 처음에는 거의 모든 소작인들의 입에서 지주들의 처사를 비난하는 소리가 거칠게 쏟아졌고, 그와 반대로 관련 소작인들을 염려하는 소리는 바람 자듯이 점차 잠잠해져가면서, 그들이 소작논을 거둬들여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은근한 관심들을 쓰기 시작했다.
"근디 말이시, 요분에 지주덜이 거둬딜이는 소작이 을매나 될랑가 몰라?"
"금메 말이여, 입산자만이 아니고 진작 죽어뿐 사람덜것꺼정 몰수 헌다니께 굉장허덜 않겄어?"
"근디 그 농새럴 워찌헐랑가?"
"즈그 손수 안 헐 것잉께 새로 소작얼 부치겄제."
"천상 그러겄제?"
"말이 났으니 말인디, 소작 뺏긴 사람덜 가심 절통헌 것이야 다 지 죄딲음 허는 것잉께 우리가 으짤 수 웂은 일이고, 몰수해딜인 전답은 누가 묵어도 묵을 것 아니라고?"
"그렇겄제."
이렇듯 믿을 만한 사람끼리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일을 당한 당사자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침묵이 아니었다. 절망이었고, 체념이었다. 그렇게 되리라는 낌새는 오래 전부터 느껴져 왔던 것이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뿐이었다. 그 현실 앞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주들을 찾아가 사정을 하거나 빌어서 될 일도 아니었다. 지주들이 자기네를 원수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먼저 알고 있었다.
어두운 고샅을 허리 구부정한 남자가 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좁고 어두운 고샅을 한사코 왼쪽으로 붙어서 걷고 있었는데, 왼손에 들린 묵직한 느낌의 물건을 감추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미처 열 발짝도 떼어놓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고는 했다. 그런 식으로 얼마를 걸어가던 그는 어느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좌우를 빠르게 살폈다. 고샅에는 어둠뿐이었다. 그는 어깨 숨을 쉬며 판자문을 거칠게 흔들어댔다.
"어이 와, 아가. 숙자야아."
판자문을 흔들어대는 기세에 비해 그의 목소리는 크지 못했다. 계속 주위를 경계해왔던 것처럼 일부로 죽이고 있는 목소리였다. 방문에는 불빛이 희미하게 배어 있는데 사람의 기척은 나지 않았다.
"야아야, 숙자야, 사람 왔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듯 다시 좌우를 빠르게 살폈다.
"누구다요?"
방문이 열리며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싸게 문 따그라."
"나가 누구다요?"
여자아이는 마루에 그대로 선 채 물었다.
"아, 목청 들으면 몰르냐. 싸게 문이나 따랑께."
그는 짱증스럽게 말하며 문을 마구 흔들었다.
"음마, 음마, 문 뿌시거지겄소. 아부지, 나와봇씨요."
여자아이가 놀란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런 오살헌 년이,"
그는 욕을 내뱉으며 또 좌우를 살폈다.
"뉘기여?"
방에서 남자가 나오며 물었다.
"나요, 칠복이."
그는 힘준 음성으로 빠르게 대답했다.
"칠복이이? 자네가 워쩐 일여, 어둔디."
남자가 마루로 내려서며 컬컬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크게 불리는 것에 진저리를 쳤다.
"무슨 일이여, 뜽금웂이"
"누구, 와 있는 사람 웂제라?"
그는 대문을 들어서며, 사랑방에 불빛이 없음을 확인하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웂구만. 누구 또 오기로 혔는감?"
"아니구만요. 오늘 밤에 넌 아재허고만 둘이서 쪼깐 헐 이약이 있구만이라."
그는 보라는 듯이 왼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것을 약간 높이 치켜 올려 오른손으로 바꿔들었다.
"헐 이약이 있음사 들어봐야제."
남자가 점잔을 빼는 목소리를 꾸미며 앞장섰다. 작인 장칠복이가 마름 오동평이를 찾아온 것이다.
"이약허소."
등잔에 불을 당긴 오동평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요것이 지리산 토종꿀인디요, 산삼 담 가는 보약이라는디, 잡숴보시씨요."
장칠복이는 보퉁이를 오동평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지리산 토종꿀? 지리산이 빨갱이 천지가 된 것이 언제라고 꿀이 나오고 자시고 헐랑가?"
장칠복이는 그만 가슴이 뜨끔했지만 아랫배에 힘을 주며 헛기침부터 한번 했다.
"어허, 무신 말얼 그리 섭허게 혀뿌시요. 꿀이야 따서 오래 묵힐수록 약효가 나는 법인디, 요것언 일 년도 더 넘은 것이요. 우리 장모님이 내 생일에 갖고 온 것인디, 우리 집서 묵은 것만도 열 달이 넘었소."
장칠복이는 정말 역정을 내는 것처럼 얼굴이고 목소리를 꾸며대고 있었다.
"꿀이야 부자지간에도 믿지 말라고 허는 말 안 있더라고? 그려 그냥 해본 소리시."
오동평이 헛웃음을 치며 눙치고 있었다.
"장모가 사우 가짜꿀 먹이진 않겄제라. 즈그 딸년 신세 엎어뿔 심뽀 아닐람사."
장칠복이는 한 번 더 못을 치고 있었다.
"하먼, 사우 사랑 장모닝께."
오동평이는 어느덧 흡족한 얼굴로 맞장구를 치고는,
"요것에 까시가 들기는 들었는디, 고것이 무신 까시까?"
보퉁이를 끌어당기며 장칠복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묵어도 안 걸릴 만헌 까시요."
장칠복이 자리를 고쳐 앉고는,
"속씨언허게 그냥 확 까놓고 말 혀뿔겄소. 긍께, 요분 좌익헌 사람덜 소작 뺏어갖고 새로 작인 정헐 적에 나도 한몫 부쳐도라 그것이요."
그는 가슴이 벌떡이는 것을 느끼며 숨을 들이마셨다.
"새로 소작얼 부치기는 부쳐야겄제."
오동평이는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막연한 말을 흘렸다. 그는 장칠복이가 왜 찾아왔는지 이미 간파했던 것이고, 이제 낚시를 던지고 있었다.
"동평 아재, 나도 더 나이 묵기 전에 심 잠 얻어야 쓰겄는디, 아재가 눈 딱 감고 한분 봐주씨요."
"금메, 나서는 사람이 많은디다가, 자네야 기왕 부치고 있는 소작이 있응께로 그 일이 말맨치로 쉽덜 안혀."
"아재, 아재 심으로 소작 부치고 띠는 일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담 쉰일이 아니시요. 은혜 두고두고 갚을 팅께 나 잠 잡아줏씨요."
"고 까시가 너무 크시."
오동평이는 끌어당겼던 보퉁이를 다시 제자리로 밀어놓았다. 거절이었다. 아니, 꿀 정도로는 배가 안 찬다는 뜻이었다.
‘씨부랄눔, 지도 종놈 신세에 더 불쌍헌 눔덜 피 뽈아묵자고,’
장칠복이는 배창자가 뒤틀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밥상은 차려진 밥상이고, 배가 고픈 쪽은 이쪽이었다.
"좋소, 가실에 쌀 반 가마니 내겄소."
장칠복이는 급한 성질을 못 이기고 불쑥 말을 뱉었다.
"글씨이, 쌀이고 보리고 그것이야 나중 이약이고, 자네야 기왕 부치고 있는 소작이 안 있응가. 고것이 문제시."
오동평이는 두 다리를 뻗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장칠복의 가슴에서는 불길이 솟기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자칫 잘못 나갔다가는 부치고 있던 소작마저 떼일지 몰랐다.
"아재, 사람 피 보트게 허지 말고, 워쩌먼 쓰겄는지 아싸리허게 말해뿌시요."
"어허, 요것이 자네 일이제 나 일인가?"
오동평은 먼산바라기를 한 채 담배연기를 푸우 내뿜고는,
"근디, 한분 소작얼 부쳤다 하먼 인정상, 의리상 일이 년 만에 띨 수 웂은 일 아니겄는가?"
고개를 갸웃하게 틀어 장칠복이를 의미 깊은 눈길로 겨냥하고 있었다.
"알겄구만이라. 한 가마니럴 채우겄소."
장칠복이가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며 말했다.
"그려, 자네가 새끼덜이 많제."
오동평은 뻗었던 다리를 접어들이며 꿀보퉁이를 다시 끌어당기고는,
"요것에다가 인삼 서너 뿌리 갈아서 쟀다가 묵으먼 지대로 된 정력 보약이라든디."
흘리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말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장칠복이는 그 말을 못 들은척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통금이 다 되얐는디 그만 가보소."
오동평이 먼저 일어섰다.
"워쨌거나 고맙구만이라."
장칠복이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안직은 고마울 것 웂네. 나가 심이야 쓰겄지만, 꼭 된다고 믿지는 말소."
오동평이 방을 나서며 하는 말이었다.
"아재, 나가 인삼얼 구헐 것잉께 아재가 먼첨 구해뿔지 마시요."
장칠복이는 토방으로 내려서며 기어이 이 말을 하고야 말았다.
"아니시, 그럴 것 웂네."
두 사람은 더 말이 없이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나 아재만 믿겄소."
대문을 나서며 장칠복이 말했다.
"어이, 염려 놓고 잠 편케 자소."
오동평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흔쾌하게 울렸다.
회정리 삼구 초입에 자리 잡은 노덕보의 집에서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왁자했다.
"아이고 요런 웬수녀러 것덜아, 지금 아깝고 배 꺼지는디 싸게싸게 자빠져 안 자고 무신눔에 북새질이여 북새질이이."
부엌에서 나오던 조성댁은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아랫방으로 내달았다. 아이들 떠들던 소리가 뚝 그치면서 지게문도 캄캄해졌다. 조성댁은 내달아온 기세 그대로 지게문을 열어젖혔다.
"요런 웬수녀러 새끼덜아, 밀금헌 죽 한 그럭씩 처묵은 것이 얹힐 성불러 그리 뛰고 발광이냐. 낼 아칙에 배고프다고만 혀봐라, 주딩이를 쫙쫙 찢어놀 것잉께. 죽 처묵은 것덜이 밥 처묵은 것덜맨치로 뛰고 발광을 허먼 그 배가 워찌 될 것이냐. 싸게 찍소리 허지 말고 자빠져들 자! 또 북새질만 쳐봐라."
조성댁은 방안의 어둠 속에다 대고 한바탕 소리를 퍼붓고는 지게문을 닫았다. 방문 앞에서 돌아서는 그녀의 가슴에는 찬바람 이는 공허감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저녁으로 밀기울마저 탈탈 털어 시래기죽을 끓였던 것이다. 서운상과 얽혀있는 소작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당장 내일부터는 무슨 수로 끼니를 대나하는 막막하고도 답답한 심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이들한테 포악을 부리게 되었다.
묽은 죽으로 헛배를 채운 노덕보는 벽에 몸을 부린 채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조성댁은 그런 남편을 한동안 바라보고 섰다가 조심조심 흔들었다.
"예 말이요, 정신 채리고 나 말 잠 들어보씨요."
"말언 무신 말. 들으나마나 헌 소리."
노덕보가 짜증스럽게 팔을 휘저었다.
"우리가 살 방도가 있당께요!"
조성댁이 빠락 소리를 질렀고, 노덕보는 눈을 껌벅이며 몸을 바로 잡았다.
"무신 말인고 허니, 되지도 안헐 일로 서운상이 찾아댕기지 말고, 좌익헌 사람덜헌테서 거둬딜인 전답을 새로 소작놀 것잉게 싸게 그 구멍을 뚫으라 그것이요. 내 생각이 으쩌요?"
"그려, 가만 있어보소."
노덕보의 어조가 달라지며 얼른 담배쌈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담배를 빡빡 빨아대며 무슨 생각인지를 하고 있었다.
"근디, 고것은 곤란헌 문젠디. 넷이나 다 그리 허먼 몰라도, 우리가 항꾼에 힘얼 합치자고 약조헌 말이 있는디 나 혼자 그래불먼 남자 체면에 의리 웂은 짓거리가 되제."
"음마, 음마, 체면이 밥 믹여주고, 의리가 떡 준답디요? 오늘 저녁으로 밀지울도 딱 떨어져뿌렀소. 새끼가 넷에, 엄니, 당신, 나, 입이 일곱인디 체면이고 의리고 찾을 마당이요, 시방? 다 지 살 구녕 지가 찾아야제 공염불이 무신 소양 있소. 그라고, 넷이서 항꾼에 그리헌다는 것도 앞 짜른 생각이오. 지끔 서로 표식은 안 내지만 속으로는 넘 먼첨 소작 얻을라고 눈에 불킨 판인디, 당신언 태평스럽게 그 사람덜꺼정 끌어딜일라고 허다니, 그래갖고는 될 일도 안돼뿌요. 다 경쟁잔께."
노덕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네 말도 맞는 말인디, 결국은 다 알아질 일이고, 그리 되먼 사람 체면이..."
"엄니허고 새끼덜 굶기는 것보담 낫제라. 우리넌 가만 있었는디 알음 있는 사람이 권한 것이라고 헐 수도 있고, 그때 가서 둘러붙일 말이야 을매든지 있응께, 고런 것이야 다 나헌테맽기씨요. 으쩌요, 헐라 안 헐라?"
"늙은 엄니나 어린 새끼덜얼 굶게 쥑일 수야 웂은 일이제.“
6. 술찌끼를 먹고 취한 아이
"요런 빙신 겉은 새끼야, 눈까에 명씨 백혔냐, 고것도 못 지키게."
염상구는 부동자세로 서 있는 부하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아이쿠쿠쿠..."
부하는 숨막히는 소리를 토하며 다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요거, 요거 노는 것 잠 보소. 다리 작씬 뿐질러뿔기 전에, 차려엇!"
염상구는 호령을 하며 또 걷어찰 것 같은 몸짓을 했다.
"아이고메 단장님, 죽을 죄를 졌구만이라."
부하는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새끼야, 난 인자 단장이 아니라 감찰부장이다, 감찰부장"
염상구는 옆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고까운 어조로 소리치고는,
"요런 얼빠진 새끼야, 니 모강댕이가 멫 개라고 죽을 죄럴 그리 쉽게 저질러뿌냐 그것이여"
다시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이고 엄니, 나 죽네."
"새끼야, 차렷! 차렷!"
염상구는 경찰서 안인데도 거칠 것 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지금 외서댁을 감시하게 했던 부하를 닦달하고 있었다. 그가 부하를 굳이 경찰서로 끌어들인 데는 그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요새끼야, 나가 워째서 그 년얼 감시허라고 헌질 아냐. 고년이 내 새끼럴 배고 있응께 잘 모시라는 뜻인 줄로 알었디야? 고것이 아니먼, 고년이 또 저수지에 퐁당 빠져 뒤지는 것이 무서바 그런 줄 알았었냐? 그려서 좆묵어라 허는 맴으로 헛눈 폴고 자빠졌다가 온 디 간 디몰르고 둔전기리는 것이여! 요런 쎄빠질 자석아, 나가 감시럴 허란 것은 고런 짜잔헌 이유가 아닌 것이여. 그년 냄편 강동식이, 강동식이럴 잡자는 것이었어. 나가 애시당초 그년 뱃대기에 올라탈 적부텀 고런 계획이 서 있었다 그 말이여. 재미럴 보잠사 쌔고쌘 것이 처년디 멋 땀세 헌 지집얼 건디리냐 그것이여. 고런 계획이 아니었음사 고년이 내 새끼 변 것얼 머 헐라고 느그 시켜감스로 소문냈을 것이냐. 강동식이 그 눔이 그 소문 듣고 분허고 원통혀서 마누래 족칠 심뽀로 집 찾아들먼 고때 딱 때레잡아뿔라고 헌 것이다 그 말이다. 근디 니가 그 년얼 장흥으로 내빼게 혀분 것이여, 빙신아!"
염상구는 또 정강이를 걷어찼다.
"엄니! 나 죽어."
"차려엇! 싸게 차려엇!"
염상구는 바로 그 말을 심재모와 서장에게 간접적으로 하기 위해 경찰서에서 판을 벌인 것이다. 외서댁이 자살 소동을 벌이고, 그 소문이 좋지 않게 퍼졌는데도 심재모도 서장도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묻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먼저 이유 설명을 하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똥 누고 밑 안 닦은 기분으로 찜찜하게 지내다가 단장자리 빼앗기는 일을 당했고, 부장자리나마 지키자고 마음 정리하고 나니 외서댁이 생각났던 것이다. 당연히 친정에 있는 줄 알고 거처를 집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리려다보니 외서댁은 이미 장흥으로 떠나고 없었다. 부하에게 기합을 넣을 겸 자신의 열성을 증명할 겸 부하를 경찰서로 끌어들였다. 감찰부장으로 밀려난 마당에 자신의 열성은 더욱 증명될 필요가 있었다.
심재모는 사무실에 앉아서 염상구가 떠들어대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별로 좋지가 않았다. 염상구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대목은 사실 그대로였다. 외서댁의 임신 사실을 청년단원들이 퍼뜨리고 다닌 점이었다. 그것을 얼핏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거기에 바로 그런 흉계가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면 외서댁을 범하게 된 동기도 사실일 수 있었다. 여자와 관계하는 쾌락은 덤으로서, 염상구가 쓰기 좋아하는 말인 꿩 먹고 알 먹고 인 셈이었다. 그것이 사실 그대로라면 심재모의 마음은 더욱 언짢아지는 것이었다. 염상구의 그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잔인성을 어떤 측면에서든 수용할 수가 없었다.
"독사 같은 녀석."
심재모는 담배를 빼들며 그의 가늘게 째진 눈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눈에는 언제나 잔인과 교활이 함께 도사리고 있었다.
"니까진 얼빙이가 강동식이 모가지 띠갖고 오기는 열 분 죽었다가 깨나도 틀린 일이고, 오늘 당장 장흥으로 가서 외서댁이나 붙들어와!"
심재모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염 부장, 외서댁은 데려올 필요 없소."
심재모의 목소리가 염상구를 향해 날아갔다. 염상구가 고개를 홱 돌렸다. 심재모의 뒷모습이 사무실로 사라지고 있었다.
"니넌 사무실로 가 있어."
염상구는 독기가 내밴 얼굴로 부하에게 손짓했다. 그의 가슴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이 솟고 있었다. 솟기는 성질대로 하자면 당장 심재모의 방으로 뛰어들어 그놈의 두 눈에 칼을 꽂고 말아야 했다. 사람을 뭘로 보고 여럿 앞에서, 더구나 부하에게 내린 명령을 낚아채며 개망신을 시킨단 말인가. 이렇듯 무참한 꼴을 당하기는 나이 먹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갑시다."
임만수가 염상구의 팔을 끌어당겼다. 염상구는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임만수의 손아귀는 옷을 그대로 틀어잡고 있었다.
"나도 그만큼 당하고도 참고 있소."
임만수가 염상구를 달래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며 다시 팔을 끌어당겼다. 염상구는 숨을 훅 내뿜으며 일어섰다. 어디 두고 보자, 염상구는 어금니를 뿌드득 갈아붙였다. 그의 성질에 불이 붙은 것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해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노력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만 분함도 섞여 있었다. 심재모가 외서댁을 데려오지 못하게 한 것은 자신의 말을 전부 거짓말로 취급했기 때문이라고 염상구는 생각했다.
심재모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근무 순찰을 나가볼 시간이었다. 그는 총을 들고 일어섰다.
"사령관님, 마침 기셨구만요."
형사부장이 헤벌쭉하게 웃으며 들어섰다. 그 뒤에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이 네모지게 큰 중년의 사내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양복을 받쳐 입은 그 사내는 미끄럽게 느껴질 지경으로 머리에 기름을 맥질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모아 잡은 두 손에는 중절모가 들려 있었다.
"무슨 일이요?"
형사부장의 태도나 사내가 풍기고 있는 인상으로 보아 시덥잖은 일로 판단한 심재모의 태도는 지극히 딱딱했다.
"예예, 이분이 악극단 단장이신디, 음력설도 닥치고 혔응께 읍민들 설 기분도 돋과줄 겸 혀서 공연 허락얼 잠 내주십사 허고..."
"그런 일이라면 서장님한테 말하시오."
심재모는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사무실을 나갔다. 계엄 하에서 형사부장이란 자가 악극단 단장이나 달고 다니는 것이 한심스러웠고, 한쪽 공무원들은 음력설을 쇠지 말고 양력설만 쇠자고 계몽하고 다니는데 경찰공무원이란 자가 음력설 기분을 돋운다는 명분을 엉뚱하게 이용하려 드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심재모는 설날의 고향을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윷놀이, 연날리기, 세배꾼놀이, 유과의 맛...그런 것들은 하나같이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설날의 기억 속에 중학생 교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더 나이가 먹어서 설을 회상해도 역시 어린 시절의 기억만 떠오르게 될 것 같았다. 추억이라는 것은 이상스럽고, 묘한 데가 있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인데도 추억으로 남는 것은 어느 특정한 나이 때의 것일 뿐이다. 감동의 정도가 제일 강한 때의 것들만 남게 되는 탓일 것이다. 설날 가장 신바람 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세배꾼놀이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친지들 중에서 돈을 타낼 만한 분들의 집을 정신없이 돌다보면 점심 먹는 것도 깜빡 잊고는 했었다. 장사를 오래했고, 상점의 규모도 제법 커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관계하는 사람들은 꽤나 많았다. 세뱃돈은 버는 재미도 좋았지만, 쓰는 재미는 더 좋았다. 설날의 기억이 집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이제 설이 며칠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심재모는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나, 아나, 날 잡아봐라."
"워리, 워리, 오로로로..."
"그려, 날 잡아라아. 요 사탕 줄 것잉께."
"어야, 어야, 삐틀빼틀, 넘어진다, 넘어진다. 헤헤헤헤..."
서너 명의 아이들이 한 아이를 어지럽히듯 부산스럽게 돌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하면서 놀려대고 있었다. 그런데 놀림을 당하고 있는 아이가 심상치 않았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아이들을 잡으려고 하는데 다리는 다리대로 휘둘리고 휘청이고 꺾이고, 팔은 팔대로 허공을 휘젓다가 처져 내리고 다시 허공을 헤집고 하다가 뒤뚱 넘어지거나 털썩 주저앉고는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좋아죽겠다는 듯 웃어댔다. 그 아이는 무슨 병을 크게 않은 불구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술 취한 어른들의 몸놀림과 비슷하기도 했다. 어린 아이가 술에 취했을 리는 없고, 불구인 아이를 성한 아이들이 놀이개감 삼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놈드을, 못써어."
심재모는 아이들 가까이 다가서며 엄하면서도 아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목소리를 꾸며댔다. 아이들은 조작되는 인형들처럼 움직임을 일제히 뚝 멈추었다. 그런데 그 아이 혼자서만 중심 잡히지 않는 동작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키 큰 심재모를 올려다보느라고 얼굴들이 하늘을 향해 있었다.
"이놈들, 몸 아픈 아이를 그렇게 정신없이 놀려대면 어떻게 해. 이 군인 아저씨한테 혼나볼래?"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아이,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 씽긋 웃는 아이, 곧 울듯이 입이 씰룩이는 아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피이, 아자씨는 암 것도 모름시롱. 쟈가 술찌기미 묵어서 저러재 아픈 디는 하나또 없어라."
씽긋 웃던 아이가 야무지게 말했다.
"뭐라고? 술찌기미가 뭐지?"
"아이고 참말로 우스버라. 군인대장이 돼야갖고 술찌기미가 먼지도 몰르네."
그 아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다른 아이들도 킥킥, 히히, 눈치 살피며 따라 웃었다. 심재모는 민망해져, 술찌기미, 술찌기미를 뇌며 그것이 무슨 뜻의 사투리인지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때였다.
"자, 잡았다아. 사, 사탕, 사탕 내."
불구라고 생각했던 그 아이가 한 아이의 팔을 잡고 매달리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그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심재모의 머리에는 "술찌끼"라는 말이 퍼뜩 떠올랐다. 그 아이의 얼굴은 벌겋고 눈은 풀려 있었다. 술 취한 어른의 모습 그대로였다.
"새끼야, 지끔은 쉬는디 사탕은 무신 사탕."
팔을 잡힌 아이가 팔을 뿌리쳤다. 술 취한 아이는 그대로 나뒹굴어졌다.
"이눔아! 그게 무슨 짓이야."
심재모는 아이를 나무랐다.
"술찌기미가 먼지 갤차디릴께라?"
씽긋 웃던 아이가 자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술 거리고 남은 찌꺼기라는 것 아저씨도 알았다. 그런데 말이야, 쟤는 왜 그 독한 걸 먹었지?"
"요상하시, 어른이 몰르는 것도 많네"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고,
"배가 고픈디 묵을 것 웂응께 밥 대신 묵었제라"
딴 아이가 샘내듯이 얼른 말했고,
"우리는 다 묵어봤는디 아자씨만 못 묵었는갑다. 히히히..."
그 옆의 아이가 재미있다는 듯 히히거리자 다른 아이들도 따라 웃었다. 심재모는 머리가 잠시 공백상태가 되는 것을 느꼈다. 술찌끼를 먹은 아이가 술기운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흐늘거리는 모습도 처음 보는 것이었고, 배가 고프면 술찌끼를 밥 대신 먹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아이들의 말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심재모는 흔들거리고 있는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이 앞에 쪼그려 앉으며 양쪽 팔을 붙들었다.
"얘야, 너 지금 정신없지? 어지럽지?"
아이가 눈꺼풀을 무겁게 껌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에 가서 자야지. 어서 가거라."
"싫여, 집, 집 추어 싫여."
도리질하는 아이한테서 그리 진하지 않는 술 냄새가 났다.
"너 이 군인 아저씨 말 안 들으면 야단맞는다. 집에 가서 자겠다고 약속해."
아이는 금방 입술을 씰룩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 너 이에 집 알지?"
심재모는 씽긋 웃던 아이를 지목했다.
"아는디요."
"그럼 이앨 데려다줘라. 이건 아저씨가 시키는 일이니까 안 들으면 혼난다."
"알았어라."
"그리고 너희들 모두 이 애를 아까처럼 놀리면 안 돼. 또 그런 짓 하면 아저씨가 혼내준다. 알겠지?"
아이들이 제각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심재모는 아이들이 멀어지는 것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서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직접 목격한 사실이었다. 돈이 없는 술주정꾼이 막판에 술찌끼를 먹는다는 말은 들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어느 집에선가 돼지에게 술찌끼를 먹여 돼지가 술기운으로 꽥꽥거리며 이리 박치고 저리 박치고 하는 꼴을 본 일이 있었다. 어른들도 아니고 아이들이 술찌끼를 먹고 흐느적거려야 하는 가난, 심재모는 밥을 굶어본 일 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이 오히려 비정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전에 남의 보리 싹을 밤중에 뜯다가 붙들려온 여자가 있었다. 죽 끓일 거리가 없어서 그랬다고 여자는 울먹였다. 그것까지만 해도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하고 여자를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 다음 단계가 바로 술찌끼를 먹을 수밖에 없는 막다른 길이라는 것을 그때는 생각해내지 못했다. 심재모는 그 아이들을 만나기 직전까지 자신이 했던 설에 대한 회상이 문득 부끄러워지고 죄처럼 여겨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설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기쁘고 즐거운 날이 아니라 슬프고 서러운 날일 뿐이리라. 그 아이들이다음에 커서 회상하게 될 설은 어떨 것인가.
심재모는 총을 추슬러 매고는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어느 때 없이 빠르면서도 보폭이 컸다.
이지숙은 염상진으로부터 내려온 지시사항을 어떻게 이행해야 할 것인지 고심하고 있었다.
"소작을 떼였다고 절대 실망하지 않도록 할 것. 우리가 율어를 해방구로 장악하고 있는 한 생활대책은 완전 해결될 것임. 이 점 명백히 주지시킬 것."
이처럼 반가운 소식이 또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식을 각 집마다 비밀리에 전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지숙은 자신의 뒤에 언제나 감시의 눈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행동해왔다. 그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며 움직여왔지만 아직까지만 미행의 낌새는 포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상대방의 감시의 방법이 더 능란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읍내의 조직은 병원사건이 발생했을 때보다 갑절 이상 강화된 상태였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직접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일단 보류되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한 방법이, 각 마을마다 한 집씩을 고르고, 그 집을 통해 전파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건 비밀 유지가 어려운 위험이 따랐다. 이지숙은 더 이상의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여기서 난감해져 있었다. 물론 그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조직의 활용이 당연히 선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 조직구축이 안된 상태였다. 그렇게 활용할 만한 조직을 구축하기에는 그 동안 시간적인 여유가 너무 없었던 것이다. 혁명투쟁이 의지와의 싸움이라면 조직구축은 시간과의 타협이었다. 의식화의 필연적 요인 발견, 인간적 신뢰의 바탕 마련, 점진적인 의식화 작업 착수, 이 세 단계를 거쳐서야 비로소 조직화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최소한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지숙의 그 동안의 생활 전부와 의식 전체는 오로지 조직구축에만 집중되어왔다. 교회를 꼬박꼬박 나가는 것도 야학선생으로서 기본적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야학의 선생이 되고자 했던 목적이 그랬던 것처럼 교회를 나가는 것도 지하조직의 구축을 위함이었다. 야학이나 교회는 그 목적을 손쉽게 달성시킬 수 있는 더없이 좋은 밭일 뿐 아니라 신분을 위장시켜주는 아름다운 옷이었다. 그러나 그 밭을 일구고만 있을 뿐 아직 씨앗을 뿌리지는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염상진의 지시를 받게 되자 이지숙의 고심이 시작되었다. 이지숙은 임무수행의 방법을 찾아 고심하는 한편으로 염상진이 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현재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염상진인데, 그가 내린 지시는 조직기반이 없이는 수행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돌발적인 사태에 직면해 그 점을 간과한 것이었을까. 염상진이 그렇게 단순하고 즉흥적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문제에 연결되어 그 지시가 과업수행에 얼마나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될 것인가도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시의 골자는 가족들에 대한 "생계위협 해결이었다." 그럼, 그 사실을 전하자는 목적은 무엇인가. "불안해소"일까. 그렇다면 과업수행을 위한 지시치고는 너무 단순한 것이었다. 과업수행의 지시는 단순효과가 아니라 복합효과를 내는 것이어야 하며,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이어야 하고, 소아적인 것이 아니라 대의적인 것이어야 했다. 이런 의문 앞에 그 의문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이라도 하듯이 떠오르는 것은 염상진과 안창민이었다. 두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런 점을 모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그 지시에 담긴 복합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지숙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려고 지시 내용을 다시 곱씹게 되었다.
조성을 기습했다가 율어를 기습당해 불의의 인명손실을 입은 염상진은 그 뒷수습을 위해 며칠 동안 우울하고도 분주하게 보내야 했다. 사상자는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부상자의 치료가 큰 근심거리였던 것이다. 물론 찾아갈 병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당원이 운영하고 있는 광주까지 부상자들을 옮긴다는 것이 문제였다. 순천에 한 군데 있던 당원의 병원은 이번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존재가 노출된 때문이었다. 여덟 명의 부상자 중 다섯은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기차를 탈 수 없는 입장에서 환자들을 도보로 광주까지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엉성한 응급처치를 했을 뿐인 환자들을 뉘어놓고 한시를 지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아산 지구에 선을 대서 화순군당의 지원을 받아 지름길을 골라가며 어둠을 헤친 그 강행군은 사흘이 걸렸다. 가는 도중에 숨이 끊긴 부하 하나를 산골짜기에 묻어야 했다. 광주로 가면서도, 광주에서 돌아오면서도 염상진은 율어를 기습당한 사실에서 잠시도 놓여나지 못했다. 아니, 그는 의식적으로 그 문제를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그는 심재모라는 존재에 대하여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심재모가 그렇게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짜여진 경찰조직의 구조화를 의식하고 있었다. 물론 벌교 병력으로 조성을 지원하고, 보성 병력으로 율어를 공격하게 한 심재모의 능력을 경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나 심재모의 입장에서 그런 상황을 맞게 되면 하나같이 벌교와 보성 병력을 동시에 움직여 조성을 양쪽에서 협공 지원하는 작전을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심재모는 그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작전을 넘어서 의외로 이중 작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의외성은 심재모 개인이 갖춘 남다른 능력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심재모 개인의 판단력이나 추리력이 아무리 뛰어나다해도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체계적 조직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면 그런 의외적인 이중 작전은 수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벌교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심재모가 보성의 병력으로 율어를 기습하도록 작전지시를 내릴 수 있는 통신망의 조직화,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그 통신망의 조직화는 조성을 공격하는 여섯 가지 목적 중 세 번째였던 적의 기동성 파악을 유감스러울 만큼 만족시켜준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기동성의 파악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들을 달성하는 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예상하지 못했던 기습공격을 당해 너무 많은 인명피해를 입음으로써 해방군의 건재를 알리려던 첫째 목적을 손상했고, 계엄군의 전략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그 위신을 추락시키고자 했던 둘째 목적을 실패했고, 공격의 완전승리로 부하들이 가지고 있을 불안감을 일소하여 사기를 진작시키고 해방군으로서의 자신감과 긍지를 세우려던 넷째 목적이 와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염상진이 통신망의 조직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장의 피해나 손실을 따져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앞으로 닥칠 문제점이었고, 자신의 부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반적 투쟁에 걸쳐 영향을 미치게 될 문제였다. 염상진은 다시금 미군정 삼 년을 돌이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통신망의 확대와 강화는 경찰력의 조직과 함께 군정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남한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던 미군정은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조직된 세력을 필요로 했다. 그것이 일제시대의 경찰조직과 그때에 경찰관이나 끄나풀 노릇을 했던 집단이었다. 일정 때의 경찰조직은 일사불란한 명령하달과 상부보고가 이루어지도록 짜여진 중앙집권적 조직이었다. 그 조직은 사령부를 서울에 두고, 각 도마다 도 경찰국을 두었으며, 그 아래 군 경찰서가 설치되고, 다시 그 아래 읍과 면 단위의 지서가 있고, 마을에 따라 파출소를 두었다. 도 단위로 구분된 경찰조직은 모든 지시나 명령을 도 경찰국으로부터 받아 움직였고, 도 경찰국은 도지사가 아닌 서울의 사령부지시를 직접 받도록 되어 있었다. 경찰조직은 행정조직과 완전히 분리 독립된 상태에서 자체의 통신시설과 운송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경찰력을 이용한 무력식민통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일제는 그런 경찰조직을 이용하여 모든 정치성을 띤 단체나 그런 회합에 대해 등록, 통제, 감시를 했으며, 인쇄물이나 신문, 영화, 우편물 등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실시했고, 곡물의 공출을 강요하고 감시했으며, 고도의 훈련을 거친 비밀경찰과 정보원 조직을 갖춰 그것을 활용함으로써 물샘 틈 없는 식민통치를 자행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군정실시와 때를 같이해서 그 경찰조직을 그대로 이용하기 위해 대중들의 반대와 비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경력자 우선"을 내세우며 일제치하의 경찰조직에 가담했던 여러 종류의 민족반역자들을 경찰에 복귀시켰다. 그것이 그들의 재생의 기회가 된 것은 물론이었고, 이북에서 내몰리거나 도망 나온 일제 경찰관 출신들이 더없이 좋은 피난처를 마련한 것도 그때였다. 미군정은 "일제치하에서 일본을 위해 경찰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한 한국인들은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것이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재생을 얻은 경찰들은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일본 경찰이 식민통치를 위해 자행했던 짓들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미군정이 원하는 공산주의척결에 선봉장이 되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그런 경찰의 수를 급속히 확대시키는 한편 장비의 강화도 꾀해나갔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통신망의 강화였다. 일제시대부터 갖추어졌던 경찰의 자체 통신망이 미군에 의해 더욱 보완되고 확대된 것이다. 염상진은 이번 경험을 통해서 과학화된 통신시설이 얼마나 강력하고 효과적인 전투장비인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실감은 앞으로 전개해야 할 모든 지역의 투쟁에 어두운 예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혁명의 성취는 의지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가 작전만으로 이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혁명은 의지투쟁과 무력투쟁의 복합으로 성취되는 것이었다. 지하활동 기간이 의지투쟁의 단계였다면 여수, 순천의 투쟁을 기점으로 무력투쟁의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무력투쟁의 요건은 작전, 병력, 화력이었다. 여수, 순천의 투쟁이 열세로 몰린 절대적인 원인은 바로 화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지상병력의 투입만이 아니라 폭격기와 군함까지 동원된 화력 앞에서 일단 후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 화력은 곧 이차대전의 주도권을 잡았던 미국의 화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작전을 그렇게 신속하게 짜고 병력을 기민하게 동원한 것도 순전히 미군들의 능력이었다. 그들이 폭격기를 띄워 순천을 무차별 폭격해대고, 군함을 동원해 여수를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가해댄 것은 새삼스럽게 놀랄 일이 못되었다. 그들은 벌써 십일 인민항쟁 때 비무장인 군중들을 향해 탱크를 몰아댔고, 비행기로 위협폭격을 해댔다. 그리고 제주도 사삼사건이 터지자 군함을 동원해 섬을 봉쇄하는 한편 비행기로 폭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자기네의 구미에 맞는 괴뢰정권을 세우자마자 일어난 여수, 순천의 항쟁에 그런 입체작전을 감행하고 나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자기네의 괴뢰정권을 향한 첫 번째 도전인 동시에, 완전무장을 갖춘 현역군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첫 번째 도전을 최단시간 내에, 완전무결하게 파괴함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과시함과 아울러 재도전이 소용없음을 시범적으로 세상에 알리고자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화력의 무자비함은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지만, 항쟁세력을 완전무결하게 제거하려던 계획은 그야말로 완전무결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이 신속한 만큼 항쟁세력도 신속하게 대응해서 제이의 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인민들이 그들에게 또 한 번의 적대감과 증오심을 품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군정은 경찰을 앞세운 계속적인 폭압으로 공출제를 밀고 나가면서, 통일조국을 바라는 절대다수 인민들의 뜻을 짓밟고 단독 괴뢰정권을 세웠다. 그들은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어 인민의 생존권을 손아귀에 넣고, 배급제를 미끼로 해서 인민의 정치권을 희롱해대면서 자기네들의 정치목적을 무난하게 달성시켜나가는 교활하고도 잔인한 방법을 썼다. 그건 표본적인 제국주의적 지배방식이었고, 인민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목에 올가미가 걸린 노예들이 되어 있었다. 선거가 임박해서 전에 없이 많은 배급표가 나돌았던 것은 그게 쌀이 아니라 독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굶주림에 지친 인민들은 그게 독약인지 무엇인지 구별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 민족이 사회주의를 선택하든 자본주의를 선택하든, 그것은 오로지 우리 민족 전체의 총의에 따라 결정하고 선택되어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그들은 제국주의 폭력과 간악을 앞세워 우리 민족의 삶을 파괴하고 지주를 강탈했다. 그들과의 싸움은 필연적인 것이고, 아무리 앞길이 험난하더라도 기필코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싸움이었다. 염상진은 그런 각오 속에서 부대를 정비하는 한편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러다가 입수하게 된 것이 소작 몰수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는 담담한 심정으로 그 소식을 받아들였다. 그건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보복조처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야산대가 해방구를 확보해가며 활동을 전개하게 된 것은 혁명의 결정적 시기를 향해 무력투쟁을 벌임과 아울러 인민의 지지기반을 지속적으로 확대함에 있었다. 그것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활동목표였다. 인민의 지지를 확대하는 방법으로 채택한 것 중의 하나가 활빈이었고, 그것은 조성을 공격했을 때 여섯 번째 목적이었다. 동지들의 가족이 소작을 몰수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세워둔 활빈의 필요성이 좀 더 구체성을 갖게 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율어를 지켜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첨가된 셈이었다. 염상진은 소작 몰수에 대처하는 방안을 즉각 만들 필요를 느꼈다. 그것은 가족들의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가족들의 생활대책을 해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심리전의 효과를 확대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체 없이 이지숙에게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지숙은 그 지시문을 "각 집마다 비밀리에 전하는 것"으로 해독하고 있었다. 사실 지시문에는 그 내용을 "유포"시키라는 말이 없었다. 이지숙이 며칠 고심하고 있는데 다시 지시가 내려왔다.
"왜 사업 진척이 없는지, 그 사실을 널리 유포시키는 것은 하시가 급한 일임".
그 지시를 받고 이지숙은 어깨가 처져 내리도록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꾸만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 동안 혼자 애달아했던 고심이 허망하도록 어이없었던 것이고, 지시문을 모호하게 작성해서 자신을 그토록 애먹인 염상진이나 안창민이 야속했던 것이다. 지난번 지시문의 끝 문장인 "이 점 명백히 주지시킬 것"이 "이 점 널리 유포시킬 것"이어야 했고, 그랬더라면 시간의 소모도, 신경의 소모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지숙은 지시문의 명확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인식했고, 두 사람의 실수 아닌 실수를 인간적인 일면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 사실은 이틀이 못 가 읍내 안통을 휘도는 소문이 되었고, 사흘이 못 가 조성과 보성까지 퍼져나갔다.
정현동 사장은 늦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창호지문에는 햇발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이불 속에서 기지개를 켰다. 아무리 기지개를 켜보아도 몸은 개운해지지 않았고 기분도 맑아지지 않았다. 감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없었던 증상이었다. 미결감에 갇혀 겪어야 했던 심신의 고초가 아직 덜 풀린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몸은 이렇다 하더라도 마음이 왜 그렇게 끄무레하고 께끄름한지 모를 일이었다. 무죄가 아니고 집행유예로 풀려나서 그러는 것일까. 정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법을 다룬다는 놈들은 집행유예도 벌은 벌이라고 아주 근엄한 얼굴로 말하며, 집행유예로 내보내는 것을 무슨 큰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생색을 내지만, 그것은 다 허가증 가진 도둑놈들이 저지르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낯짝 두꺼운 행티였다. 벌을 줄 만한 죄는 못되고, 그냥 내보내자니 서운한 생각이 들고, 제 놈들 배 불릴 만큼 불리고 벌 주는 척해서 내보내는 것이 집행유예라는 것 아닌가. 정 사장의 심사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한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 동안 감방살이의 고생도 억울했지만 그것이야 공산당 하는 아들에게 돈을 몰래 준 죄 닦음으로 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풀려나기 위해서 터무니없이 많이 없애버린 돈을 생각할수록 아깝고 억울했다. 그에 잇따라 보증서에 도장 하나 누르는 것을 외면해버린 유지라는 작자들에 대한유감이 꼿꼿하게 목을 치받고 올라왔다. 그리고 아들이 공산당에서 깨끗하게 발을 빼지 않은 한 이 일은 집행유예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살인죄목보다 더 무서운 사상문제로 재판까지 받고 나왔으니 경찰들은 더 버르장머리 없이 나대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것들이 뒤엉켜 정 사장의 마음은 어수선하고도 우중충했다. 잠기운이 완전히 가시고 몸이 잠자리를 벗어나도 좋을 만큼 탄력감이 생기자 정 사장의귀에는 바깥 소리가 담기게 되었다. 밖에서는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정 사장은 그만 짜증이 솟구쳤다.
"봐라, 봐라, 누구 없냐!"
정 사장은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앉으며 소리 질렀다. 그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내다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일어나셨구만이라. 몸언 잠 워떠시요?"
낙안댁이 방문을 옆으로 밀치고 들어오며 그 몸짓만큼 다급하게 말하고 있었다.
"저것덜 싹 다 쳐내뿔소. 귀가 시끌시끌혀서 못살겄네."
정 사장은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렸다.
"음마, 듣기 싫어도 쪼깐 참으씨요. 나가 나가서 못 떠들게 헐 것잉께요."
"어허, 쫓으라먼 싹 쫓아뿌러. 사람 소리 듣기도 싫고, 저것들이 떠들지 말란다고 안 떠들것들이 아닝께."
"금메, 요맘때먼 내둥 저러는 것 암스로 꾸척시럽게 왜 그래쌓소. 돈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뿌리는 것 얻어가는 것인디. 그라고, 우리 처지가 처진디 못 사는 사람덜 그리 박대해서 인심 잃으먼 졸 것이 머 있겄소. 글안해도 우리 집 손꾸락질험스로 나쁜 소리만 헐라고 하는 시상인디."
정 사장은 아내의 말에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술도가 앞에는 술찌끼를 얻으러 온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을 것이고, 그들을 내몰았다가는 그야말로 온갖 욕을 먹게 될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도 예년과는 달랐다. 술찌끼를 얻으러 온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피해는 얼마든지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시궁창에 버리고 말 술찌끼를 나눠주지 않고 사람을 내쫓더라 하는 말로 시작될 그들의 험담이 퍼지는 경우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맘 편허니 잡숫고, 지내간 일 다 잊어뿌리씨요."
언제 나갔다가 들어왔는지 아내가 약사발을 앞에 놓으며 말했다. 정 사장은 아내의 말을 마땅찮아하는 듯 뻑뻑하게 느껴지는 소리를 끄으응 내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저어... 서운상이 그 사람도 만내보셔야겄제라?"
낙안댁은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허! 남정네 허는 일에 배 놔라 감 놔라 해쌓지 말고 자네 헐 집구석 일이나 챙기소."
정 사장은 약사발을 들려다 말고 벌컥 화를 냈다.
"알겄구만이라. 맘이 껄쩍찌근해서 그냥 혀본 소린께요."
낙안댁은 변명을 서두르며 금방 날아올 것 같은 불화살을 피해 섰다. 남편의 온몸에는 분이 서려 있었고, 걸핏하면 화를 벌컥벌컥 냈다. 그녀는 완전히 죄인이 된 기분으로 남편 앞에서는 살얼음을 걸었지만 남편의 곤두선 신경은 아무 때나 불똥을 튀기려 했다.
"밥상이나 들이소."
정 사장은 끓어오르는 성질을 토해내듯 가래를 돋궈올렸다. 그의 마음이 칙칙하게 흐려져 있는 데에는 서운상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처음 계약대로였다면 서운상은 이미 중도금을 치렀어야 했다. 그런데 그 중도금 날짜가 자신이 갇혀 있는 동안에 지나갔고, 서운상은 그것을 빙자했음인지 집안에도 일언반구 없이 중도금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그의 기분을 우중충하게 만들고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 다 지나가버린 일들이라면 서운상과의 일은 앞으로 해결을 보아야 할 중대한 문제였다.
"손님 오셨구만요."
겨우 얼굴이 보일 정도로만 방문을 밀친 낙안댁은 대청마루에 선 채 말했다. 그 얼굴에는 새치름한 냉기가 표 나게 서려 있었다.
"뉘여!"
아내의 기색을 직감적으로 읽어낸 정 사장의 어투 또한 곱지가 못했다.
"최익달이 양반이요."
말을 하는 낙안댁의 입술이 틀려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최익달이 놈이요" 하고 싶었지만 당사자가 댓돌 아래 서 있었으므로 마지못해 "양반"이라고 존대를 붙이는 그녀의 속은 뒤틀릴 대로 뒤틀리고 있었다.
‘보증서에 도장 하나 눌러달랄 적에는 그리도 야박허게 퇴짜허든 눔이 무신 낯짝 들고 집안으로 끼대들어와, 끼대들어오길.’
그녀는 최익달의 발등에 침을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익달이...?"
정 사장의 얼굴은 의아했다. 최익달이 왜 자신을 찾아왔을까에 대해 그의 의식의 촉수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얼른 잡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불유쾌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정 사장, 나 최요."
컬컬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정 사장은 혀를 차듯 하는 마른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오씨요."
그전과는 달리 정 사장은 방에 선 채로 말하고 있었다.
"기동이 애롭다냐 어쩐다냐."
어느새 낙안댁은 사라져버리고, 그대로 조금 열려 있는 방문을 옆으로 밀며 최익달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손이 왔는데 내다보지도 않은 채 방안에서 들어오라고만 하는 상대방의 태도에 그의 심사는 벌써 꼬였던 것이다. 그런데 방문을 열자마자 방 가운데 버티듯 허고 선 정 사장과 그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러자 그의 심사는 더욱 꼬여들었다.
"지기럴, 뉘 있는 줄 알었등마..."
최익달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보증서에 도장 찍기를 회피한 열쩍음도 있고 해서 용건과는 상관없이 우선 예의 갖춰 인사를 차리려 했던 그의 마음은 싹 변하고 말았다.
"고만헌 고상에 골병들어 구둘장 짊어질 만치 강단이 없지는 않소. 무신 일인지 앉기나 헙시다."
정 사장도 반기는 기색 전혀 없이 말에 가시를 박고 있었다.
"입에 발린 인삿말 헐 것 웂고, 용건만 말허겄소."
최익달은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고, 정 사장은 그 심상찮은 기세에 등줄기가 뻣뻣해지도록 긴장감을 느꼈다.
"나가 걸음한 용건이 무엇인고 허니, 서울 가신 우리 익승이 성님 앞으로 술도가 소유권을 이전하는 문제 땀시요."
정 사장은 머리가 쿵 울리는 것을 느꼈다. 꺼림칙하게 마음에 걸려왔던 문제가 말썽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근디, 최익달이 니눔이 나서는 이유가 머여?’
정 사장의 마음은 이내 냉정해졌다.
"성님이 나헌테 편지를 보내셨는디, 양력설에 내레오실라다가 일이 분주혀 그리 못허셨고, 음력설에나 내레오실 참이었는디 또 일이 산데미라 못 오시게 생겠응께, 나보고 금년 양력 초하로부텀 술도가 소유권 반을 성님 앞으로 돌리는 일을 맡어 허라고 허셨소."
힘을 넣은 고개를 뒤로 잔뜩 끌어당긴 최익달은 정 사장을 깔보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허, 당최 무신 눔에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럴 그리 요상시럽게 허는고? 최 사장 성님이 안직 노망헐 나이도 아닌디 넘 술도가럴 놓고 그 무신뜽금웂는 소리다요?"
정 사장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최익달에게 묻고 있었다.
"아니, 그리 약조가 되얐다고 말만 전허먼 정 사장이 다 알아서 헐 것이라고 핀지에 씨엿었소."
최익달의 언성이 높아졌다.
"심바람을 맡었으먼 심바람만 헐 일이제 목청 돋구지는 마씨요. 나넌 고런 약조 헌 일 웂응께, 내 말 성님헌테 편지로 써보내든지, 서울로 찾어올라가서 전허든지 고것이야 알아서허씨요."
"아니, 정 사장, 우리 성님이 안헌 약조럴 혔다고 헐 리가 웂은 일인디..."
"어허, 최 사장! 최 사장은 심바람꾼이제 나헌테 이렇다저렇다 말헐 자겨깅 웂은 사람이요. 심바람얼 허자고 나섰으먼 똑똑허니 허씨요."
정 사장은 태연하고도 당당했고, 속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 최익달로서는 정 사장이 거짓말을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속절없이 심부름꾼이 될 수밖에, 무엇을 따지고 캐고 할 방법이 없었다.
"쪼오쏘. 워디 두고 봅씨다."
최익달은 방바닥을 차고 일어났다.
"질 미끄러운 디 있을란지 몰릉께 잘 가씨요."
정 사장은 최익달의 뒷꼭지에다 대고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속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고 암담했다. 일단 최익달을 그런 식으로 쳐내기는 했지만 최익승이 놈이 그대로 단념할 놈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액운이 닥쳐온 것이다. 내 팔자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가, 정 사장은 자신의 앞날이 더없이 걱정스러웠고, 그건 자식이 아니라 원수로다... 무시로 터져 나오는 아들에 대한 탄식을 또 어금니에 물었다.
7. 쑥떡뿐인 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바람에 차츰 생기가 실려왔다. 율어면의 서편 산들은 제 그림자에 덮여 어슴푸레했고, 동편 산들은 석양햇살을 받아 붉게 상기된 모습으로 이루고 있었다. 집집마다 파르스름한 저녁연기들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산으로 에워싸인 사발모양의 율어에 석양빛이 그득했고, 그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저녁연기는 그지없이 한가로웠다. 염상진은 징광산 마루의 초소에서 그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석양빛에 감싸인 율어의 특이한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멀고 멀게 뻗어나가 있는 그의 눈길은 행여 연기가 오르지 않는 집이 없는가를 살피고 있었다. 밥 때에 연기를 피워 올리지 못하는 집은 끓일 것이 없다는 증거였다. 자신이 율어를 해방구로 장악하고 있는 한 그런 집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 일이 없도록 이미 조처를 처했으면서도 그는 신경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율어를 장악하고 식구들 수에 비해서 곡식을 분배해주며 남자들에게 금지시킨 것이 있었다. 사랑방의 화투놀음이었다. 겨울철은 게으름피우며 그냥 노는 시간이 아니라 내년 농사를 짓기 위한 준비기간인데, 화투놀이에 빠져 농사준비를 소홀히 하고, 빚까지 짊어지고 하는 짓은 바로 인민해방을 가로막는 행위이므로 만약 그 짓을 하다가 적발될 경우 전 재산을 몰수하고 율어에서 내쫓는 엄벌을 가할 것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처벌받는 것이 두려웠던 것인지, 아니면 해방에 대한 진정한 자각 탓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직까지 놀음을 하다가 적발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비록 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처벌을 무서워한 결과라 해도 염상진은 그 결과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은 어차피 제도 속의 동물이고, 그 울타리 안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습관을 익히게 되고, 좋든 싫든 생존을 유지하게 되어있다. 화투놀음이라는 것은 병든 부르주아 근성과 타락한 자본주의 의식이 뒤섞여 만들어낸 대표적인 악성 습관이었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일 뿐인 처지에서 그 못된 병에 감염되어 손쉽게 돈 얻기를 소원하고, 그 돈으로 부르주아 생활을 향유할 수 있기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악성 습관에 병들어 있는 착각이고 몽상일 뿐이었다. 화투놀음으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가 되는 계급상승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그런 기적 아닌 이변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아편중독자가 끝내는 완전한 파멸인 죽음에 이르고 말 듯이 화투라는 악성 습관도 계급상승이 아니 그 반대인 완벽한 파탄을 초래하는 질병이었다. 봉건적 계급이든 자본주의적 계급이든,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계급체제 아래서 계급의 상승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계급의 본질과 속성이 무엇인가. 계급은 수평적구분이 아니고 수직적 체계인 것이다. 하층계급이 상승을 꾀하면 꾀할수록 상층계급이 억누르는 압력은 상대적으로 커지게 된다. 그것은 영원히 풀리지 않은 수직구조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 해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혁명은 완전한 새로움의 창출이고, 완벽한 새로움의 건설이다. 그 세계의 전개를 위하여 인간의 의식은 새롭게 탄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제도의 삶을 수용할 수 있는 의식의 탈바꿈, 그것을 위해서는 새로운 규율의 강압이 불가피하며 악성 습관에 병들어 있는 모든 자들은 그 병이 치유되는 동안 새로운 규율이 요구하는 건설적인 고통을 달게 인내해야하는 것이다. 아편중독자가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감금의 기간을 거치는 고통을 인내해야 하듯이. 이제는 율어는 해방된 땅이다.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의식이 탈바꿈 과정을 거쳐야하고, 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처벌이 무서워 화투를 못 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기간이 길어지게 되면 점차로 화투를 쳐야하는 못된 습관이 고쳐지면서 새 질서에 의한 습관을 익히게 될 것이다. 더구나 처벌을 위한 규정만 만든 것이 아니라 안창민을 통해 의식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므로 그 영향이 보다 좋은 효과로 나타나게 되리라 믿었다.
"저 산 높이에다 농토가 현재의 열 배쯤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공상에 빠지곤 했지."
염상진은 율어를 내려다보며 선배 김태규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김선배는 자신의 생각을 부질없는 공상이라고 말해버렸지만 그건 결코 허황한 공상만은 아니었다. 그의 생각은 효과적인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근거지가 필요하다니 절실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율어는 해방구로서의 입지조건은 거의 완벽했지만 역시 농토의 넓이는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염상진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숨길이 닿는 껏 담배를 깊이 들이마셨다. 담배연기에 적셔지는 의식의 아련함 속에 김태규에 대한 그리움이 서려들었다. 그는 지금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종적없음에 대하여 염상진은 한 번도 불길해하거나 불안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어디선가 건재하고 있을 것임을 믿었다. 그러나 한 가닥 염려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 염려는 작년에 조선민주주의인인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가슴에 자리 잡게 된 것인데, 물론 김태규 개인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공화국 수상은 김일성 동지였고, 부수상은 박헌영 동지였다. 바로 그 점이 염상진의 염려를 자아냈다. 해방이 되면서 공산당 재건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각 계파의 통합을 거쳐 조선 공산당이 결성되었을 때 그 책임비서는 박헌영 동지였다. 그때 중앙당은 북조선분국을 정식으로 인준하며 그 책임비서로 김일성 동지를 임명했다. 그런데 미군정은 공산당활동 불법화 조처를 취했고, 그에 따라 무력탄압이 가해짐으로써 박헌영 동지는 이북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이 년여의 세월이 흐른 다음 수립된 공화국에서 김일성 동지가 수상이, 박헌영 동지가 부수상이 된 것이다. 여러 가지 현실적 작용이 있었을 것이고, 사전에 충분히 이해와 납득을 거쳐 이루어진 일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미심쩍은 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약 현실적 제약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공화국이 평양이 아닌 서울에서 수립되었을 경우에도 그런 결과가 나왔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은 곧바로 염려로 이어졌다. 두 동지의 위치 바뀜이 상호간의 충분한 이해와 납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어떤 물리적 힘이나 상황적 조건에 의해 마지못해 짜여진 것이라면 그 미래가 순조로울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두 동지 사이에 불화가 내재되어 있다면... 염상진은 이 대목에서 스스로의 생각에 제동을 걸고는 했다. 그 생각을 더 점진 시켜보았자 의문만 깊어질 뿐이고,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자꾸만 커져 당장의 투쟁의욕까지 손상시키려고 할 뿐 이었다. 그리고 그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반당적 사고였던 것이다. 안창민과 단둘이 앉은자리에서도 토론에 붙일 수 없는 중대한 문제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슴속 깊숙이 묻어두어야 할 의문이고 염려였다. 여러모로 생각이 깊은 안창민은 그런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 그도 입 밖에 내지 않을 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공화국 수립 소식이 퍼졌을 때, "흥, 박헌영 제 놈도 별수 없지" 하며 우익반동들도 예사로 코웃음을 쳤던 문제였다.
"대장님, 쩌 아래 본부서 신호 연기가 올르는구만이라."
부하의 보고에 염상진은 왼쪽다리를 꺾어 구두 뒤축에다 꽁초를 잉끄렸다.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지서가 아득하게 멀리 보이고, 그 앞에서 연기 두 가닥이 곧바로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는 다른 집들에서 나는 연기와는 달리 바람을 타서 흩어지지 않았고, 색깔도 검푸르게 짙었다. 그건 불길이 잘 모이지 않는 낮에 사용하는 봉화로서, 토끼 똥을 태운 연기였다. 그 신호는 조성책 오판동과 보성책 이해룡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근무 철저히 하도록!"
염상진은 초소에 있는 부하들에게 이르고 몸을 돌렸다.
"옛, 알겄습니다.!“
서너 명의 기운찬 합창이 염상진을 떠밀 듯 했다. 염상진은 아래쪽을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가풀막진 내리막인데다가 크고 작은 바위들과 나무들이 장애물로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거침없이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바위를 뛰어넘고,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고 하면서도 그가 달리고 있는 속도는 거의 일정했다. 바위를 뛰어 내려가다가 새로운 장애물을 발견하면 그는 공중에 몸을 띄운 채로 그 장애물을 피해 발이 놓일 자리를 찾아 순간 동작을 했다. 잠시의 멈춤도 없이 산을 달려 내려가고 있는 그는 흡사 몸 날쌘 한 마리 산짐승이었다. 그가 산을 오르내리는 것을 몸에 익힌 것은 지리산에서였고, 그의 주력은 심마니들과 맞먹는 것으로 보통사람의 다섯 배쯤 빠른 속도였다. 대성골 화전마을에서 출발해서 세석평전을 지나 천왕봉에 올랐다가 그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데는 한나절 족했다. 평지만 밟고 사는 사람들로서는 그 빠르기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거짓말 같았지만 지리산 속에 사는 사람들 앞에서는 별다른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본부로 들어서는 염상진을 안창민, 오판돌, 이해룡 세 사람이 맞았다.
"어찌, 준비들은 다 됐소?"
염상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다 완료혔구만이라."
오판돌이 대답했고, 이해룡은 눈길로 대답을 대신했다.
"진작 한 말이지만, 오늘 작전은 적과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절대로 인명피해를 입지 안허도록 해얄 것이오.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우리들 입장에서는 인명보호가 최우선책이 돼야 하오. 적은 갈수록 병력을 강화할 수 있는 데 비해 우리 형편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오."
염상진은 잠시 말을 끊고 담뱃갑을 꺼냈다. 담뱃갑아래를 손가락으로 톡톡 쳐서 담배개비 서너 개가 반쯤씩 나오도록 해서 염상진은 담뱃갑을 오판돌 앞으로 내밀었다. 오판돌은 두 손을 받쳐 조심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뽑았다. 염상진은 담뱃갑을 이해룡 앞으로 옮겼다. 이해룡도 오판돌과 같은 동작으로 담배를 뽑았다. 염상진이 끝으로 담배를 뽑아들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안창민이 성냥을 그어 염상진으로부터 차례로 불을 붙이게 했다. 염상진이 담배를 돌린 것은 단순하게 담배를 한 대씩 나눠 피우자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앞에 남겨둔 작전에 대한 서로의 결의를 다짐하는 것이었고, 대장으로서 부하들에게 보내는 격려였다. 작전을 앞둔 염상진은 언제나 그것을 잊지 않았다.
"오늘밤 열한시 정각을 기해 작전개시, 두 시간 동안 작전완료, 각 부대가 현재 은폐되어 있는 지점까지 퇴각하는 데 각각 세 시간, 내일 아침 일곱 시에서 여덟시 사이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황에 따라 최대한 대처하되 절대로 무리한 작전은 피하시오. 이건 처음 시도하는 각 부대별 작전이리만큼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하오. 자아, 그럼 두 분, 수고해주시오."
의자에서 일어선 염상진은 오판돌, 이해룡과 악수를 나누었다. 염상진이 오십 명의 부하를 이끌고 벌교를 향해 율어의 주리재를 넘은 것은 밤 아홉 시였다. 오판돌과 이해룡도 각기 오십 명씩의 부하를 이끌고 있었으므로 율어에는 안창민을 포함해서 이십여 명이 있을 뿐이었다. 염상진은 마을을 피해 산자락을 밟아가며 병력을 이동시켰다. 아무런 장애 없이 예정시간대로 전동리 뒷산에 도착했다. 거기서 하대치에게 삼십 명의 부하를분리시켜 주었다.
"하 동무, 전투개시 총소리가 나고 나서도 담배 두 대쯤 피울 시간 간격을 두었다가 행동하도록 하시오."
"알겄구만요."
“그러나, 고정보초는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방심하지 말고, 이 점 잘 살펴야 하오."
"알겄구만이라."
하대치는 어둠 속에서 힘을 꽁꽁 쓰듯이 야무지게 대답하고 있다.
"만약 사태가 위급해지면 작전을 포기하고 신속하게 후퇴해서 단 한 명이라도 인명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시오."
"알겠구만이라."
"작전을 마치는 대로 나와는 상관없이 부대를 지휘해서 신속하게 본부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알겄구만요."
염상진은 무장병력 이십 명을 이끌고 부용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용연사를 돌아 부용동 가까이 접근했을 때 예정된 열한시가 이십 분쯤 남아 있었다. 염상진은 부하들을 가까이 모이게 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시작했다.
"오늘 작전은 적과 전토를 벌여 적을 죽이자는 것이 아니다. 적들을 우리 쪽으로 유인해서 시간을 오래 끄는 것이 오늘의 작전 목적이다. 그러니까 몸을 최대한 낮춰가며 명령에 따라 총을 쏘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총을 하늘이나 땅바닥을 향해 갈기라는 말은 아니다. 반드시 적을 향해 쏘되 우선 몸조심을 하라는 뜻이다. 적을 유인하면서 한 놈이라도 죽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우리는 적을 유인하면서 칠동 쪽으로 서서히 물러날 것이다. 옆 사람과의 간격을 절대로 한 팔 이상 벌리지 말 것. 너무 간격을 벌렸다가는 날이 어둡기 때문에 부대를 이탈할 염려가 있다. 만약에, 부대를 이탈해서 혼자 떨어지게 되는 경우에는 본부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반드시 산을 타야만 한다. 그것이 제일 안전한 방법이다. 모두 내 말 명심하도록."
열한시 정각에 총성이 어둠을 찢어대기 시작했다. 막 잠자리에 들었던 심재모는 튕기듯이 일어나 방바닥을 더듬어댔다. 두 손을 아무리 휘저어도 머리맡에 두었던 성냥은 잡히지 않았다. 놀라 일어나는 바람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반 바퀴나 돌아섰던 것이고, 그가 머리맡이라고 생각해서 더듬고 있는 곳은 문 쪽이었다. 총소리는 한층 심해지고 있었다. 총소리에 따라 그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냥은 잡히지 않았다.
"빌어먹을 !"
심재모는 버럭 소리 질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심재모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서는 불이 번쩍 튀겼고, 그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신음을 흘리고 주저앉고 있었다. 그는 성냥을 찾느라고 책상 가까이까지 와 있었고, 그런 줄도 모르고 전화를 받기 위해 급히 일어나다가 책상 끝에 그대로 머리를 짓찧은 것이었다. 총소리와 전화벨 소리를 어슴푸레하게 들으며 심재모는 한동안 꼼짝 못하고 앉아 있었다.
"서장입니다. 습격입니다. 칠동 쪽 후미끼리 부근입니다."
심재모가 수화기를 들자마자 쏟아져 나온 소리였다.
"알겠소. 곧 나갈 테니 병력 대기명령부터 내려주시오."
"조처했습니다."
심재모는 아직도 욱씬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자신이 엉뚱한 곳에서 성냥을 찾고 있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는 성냥을 찾아들며 어이없는 웃음을 픽 흘렸다. 호롱에 부를 당기며 심재모는 이번 공격의 목적이 무엇일까를 신중하게 생각했다. 별교를 직접 치고 들어오다니, 정면대결을 해서 끝장을 보자는 것인가. 심재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염상진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공격을 해온 마당에 맞서 싸우는 것이 우선은 급선무였다. 심재모는 서둘러 옷을 입고 숙소를 나섰다. 경찰서까지는 삼십여미터의 거리였다. 열 시까지 경찰서에 있다가 서장과 교대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던 것이다.
"방금 조성과 보성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곳에서도 공격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심재모가 들어서자마자 권 서장이 긴장해서 한 말이었다.
"이거 야단났군."
심재모의 입에서 얼떨결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이렇게 되면 전면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정말로 끝장을 보겠다는 속셈인가? 심재모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보고받고, 뭐라고 지시했습니까?"
심재모는 서장에게 눈길을 돌렸다.
"여기도 같은 상황이니 최선을 다해 퇴치하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죠. 그런데, 다른 방향에선 공격이 없습니까?"
"아직까진 없습니다."
"칠동 쪽이라... 미리 퇴로를 확보해놓고 공격을 시작한 모양이군"
심재모는 혼잣말을 하며 M1소총의 노리쇠를 후진시켜 익숙한 솜씨로 탄창을 장정하며,
"서장님은 여길 지키십쇼. 난 전방을 맡겠습니다. 우릴 그쪽으로 유인해놓고 소화다리 쪽에서 치고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하고는 민첩한 동작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심재모는 역전까지 한달음에 뛰었다.
‘어쩌자고 일제히 공격을 가해 온 것일까. 지난번과 같은 작전을 못 쓰게 함인가. 그리고 지난번에 허를 찔린 데 대한 보복공격인가. 글쎄, 개인화기도 제대로 못 갖춘 상태에서 보복공격? 아니지, 천지가 아닌 염상진이가 승산 없는 싸움을 걸어올 리 만무하다. 전면공격을 감행해왔다면 율어는 비었을 것 아니가. 이 개 소대 병력만 더 있었더라도 율어를 치게 하는 것인데. 경찰병력과 청년단을 율어에 투입해? 아니다, 무리해선 안 된다. 어디에 함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병력을 출동시킬 수는 없다.’
심재모가 역전에 당도할 때까지 정리한 생각이었다.
병력은 역과 차부를 중심으로 포진해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총성만 엇갈리고 있었다.
"상황은 어떤가?"
심재모는 상사에게 물었다.
"상황이고 뭐고, 너무 어두워 적의 위치도, 숫자도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적이 여기만이 아니라 조성과 보성도 지금 동시에 공격하고 있으니 숫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회공격을 시도해보면 어떻겠나?"
"글쎄요, 오른쪽은 산줄기고, 우회공격을 하자면 천상 왼쪽 철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지리를 훤히 알고 있는 적이 그만한 대비 안하고 있겠어요?"
상사의 어조는 다분히 부정적이었다. 작전 앞에서 몸을 사리는 일이 없는 상사의 말이라서 심재모도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은 오히려 우회공격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좋겠소?"
"어두워서 아주 망했어요. 민가들이 촘촘히 박혔으니 수류탄을 까서 던질 수도 없고, 답답한 일이긴 하지만 그냥 천천히 밀어내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요."
"세 군데서 동시에 쌈이 붙은 형편에 적이나 우리나 지원병을 못 받기는 똑같은 입장이니까 그것도 한 가지 작전일 순 있소. 그런데, 시간이 너무 걸리지 않겠소?"
"우리 하는 일이 싸우는 일인데, 싸우면서 시간 좀 끌면 어떻습니까. 저놈들한테 밀리지만 않으면서 총질을 하다 보면 우리보다야 저놈들이 먼저 총알이 떨어지겠지요."
안전도모를 위한 물량작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지난번 같은 인명손실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상사의 의중이라고 심재모는 생각했다. 그때 부상당해 순천도립병원으로 후송된 병사들 중에 원대복귀한 사람은 아직까지 한 명도 없었다. 병력 손실이란 사망자만이 아니고 중상을 입은 부상자까지 포함되는 것이었다. 총으로 입은 부상은 십중팔구 중상이게 마련이었다.
"좋소. 총알이 떨어지면 도망을 안 갈 도리가 없겠지. 얼마든지 있는 총알, 마구 갈겨대시오."
심재모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상사가 어둠 속에다 대고 외쳐댔다.
"전원 전방을 향해 집중사겨억! 낮은 자세로 집중사겨억! 전진 일보씩, 집중사겨억!"
총소리가 갑자기 요란해졌다. 염상진은 유인작전임을 눈치 채이지 않기 위해 요령껏 응사해가며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야트막한 산자락을 밟아가며 척령리 가까이까지 물러났을 때 예정된 두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염상진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부하들을 확인했다. 이십 명, 전원 무사했다.
"지금부터 후퇴한다. 각자 앞사람을 놓치지 말고, 기운을 다해 달려야 한다. 자아, 후퇴다!"
횡계다리 위에 쌀가마니가 높게 쌓여 있었다. 그것은 모두 스물일곱 가마니였는데, 다리위에 쌓여있어서 그런지 그 형체는 유별나게 높고 크게 드러나 보였다. 그 쌀가마니들을제일 먼저 본 것은 김범우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어젯밤에 총성이 울리고 있는 동안에 그 쌀가마니들이 다리 위에 쌓이고 있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총성이 울리기 시작한 직후 김범우는 예기치 않은 사람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하대치였다.
"가난한 사람덜한테 한 주먹씩이라도 골고로 노놔줘서 설얼 쇠게 허자 고런 뜻인디요, 따른 지주덜헌테야 강제로 쌀얼 뺏어내는 것이제만, 대장님 말씸이, 김 선상님헌테는예 갖춰 우리 뜻을 전허면 선선히 쌀얼 내주실 것이다, 그러시등마요."
하대치란 사내가 막힘없이 한 말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돌덩어리 같은 견고한 느낌의 체구를 가진 하대치라는 사내를 김범우는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키도 인상도 염상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도 그 사내가 염상진의 부하로서는 더할 수 없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으쩌실라요?"
사내의 팽팽한 어조가 김범우의 행동 결정을 독촉하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 따라 하대치의 어깨에 메어진 총의 방향이 달라질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김범우의 머릿속에서는 많은 생각들이 다투듯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염상진을 상대로 했을 때나 필요한 것이었지 하대치라는 사내를 상대로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하대치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 하나, 쌀을 그냥 내놓겠느냐, 강제로 빼앗기겠느냐, 하는 태도결정이었다.
"얼마나 필요하오?"
"다섯 가마니요."
"그럽시다."
김범우는 조용히 광 문을 열었고, 다섯 사람은 쌀 한 가마니씩을 거뜬거뜬 업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김 선상님, 고맙구만이라."
마지막으로 대문을 나서며 하대치라는 사내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혁명전사의 순결, 김범우의 머리를 얼핏 스쳐간 그들의 용어였다. 염상진과는 달리 정치의식의 무장이 다소 덜 되었을 그 모습, 처녀의 정조에다만 쓰는 것으로 통념화된 "순결"이란 말을 혁명전사 뒤에 왜 붙였는지 김범우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하대치의 모습과 순결이라는 말은 이상스럽게 생기를 띠고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다리 위에는 쌀가마니들만 쌓여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글씨로 쓰인 한지 한 장이 나붙어 있었다.
‘벌교 인민 여러분! 이 쌀을 고루 나눠 설을 쇠십시오.’
주먹만큼씩한 크기로 쓴 붓글씨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약간 작은 크기의 글씨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만약 이 쌀을 나눠 갖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들은 모두 인민의 적이다.’
김범우가 이 격문을 대한 것은 날이 희번하게 트여올 즈음이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총소리가 멎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던 김범우는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눈을 떴다. 발걸음은 자연히 횡계다리로 옮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서 보니 예상했던 대로 그런 격문이 붙어있었다. 그때 이미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쌀가마니 주위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까막눈인디, 머시라고 썼소?"
수건을 머리에 쓴 한 여자의 수군거림이었다.
"요 쌀얼 갖다가 설얼쇠라고 썼소."
한 남자의 낮은 목소리였다.
"아무보고나 갖고 가라 고런 말이다요?"
다른 여자의 말이었다.
"벌교 인민이라고 혔응께 아매 그런갑소."
같은 남자의 대꾸였다.
"허먼,먼 첨 가지가는 것이 임자시?"도
다른 여자의 말이었다.
"짐칫국 먼첨 넴기지 마씨요. 요 쌀임자야 뻔헌께, 날이 더 새먼 눈에 불키고 쫓아와 찾어갈 것이고, 넘 먼첨 요 쌀 손댔다가는 목구녕에 넘게보지도 못허고 좌익으로 몰려 졸갱이럴 칠 것잉께."
다른 남자의 입바른 말이었다.
"워따, 요 쌀얼 묵든 안 묵든간에 총질꺼정 혀감스로 요리 맘 쓴 그 맴이 아즘찬이 아즘찬이 또 아즘찬이요."
남자의 입바른 말을 면박하듯 하는 어느 여자의 더욱 입바른 말이었다. 김범우는 사람들 사이를 슬그머니 빠져나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 속에는 자신이 염려했던 문제점들이 다 들어있음을 김범우는 느끼고 있었다. 쌀의 소재를 알게 된 주인들이 어떻게 나올 것이냐가 문제였고, 주인들이 쌀을 찾아갔을 경우 그들이 표 나게 인심을 잃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따른 가난한 민심의 흔들림이 문제였고, 경찰이나 계엄군이 쌀을 통제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그 처리가 문제일 것이다. 어떠한 문제점들이 있든 간에 그것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건 이쪽이었고, 그런 문제점들과 상관없이 완전하게 목적달성을 한 것은 염상진이었다. 둘째 문구에 내포되어 있는 다각적인 의미와 함께 염상진의 자신에 찬 모습이 김범우의 뇌리를 채워왔다. 어쩌면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물며 김범우가 한 생각이었다. 횡계다리에서 총성이 울리는 소란이 벌어진 것은 아침밥 때 즈음이었다. 밥을 먹고 있다가 총소리를 들은 김범우는 반사적으로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바로 코앞인 횡계다리에서 울린 총성은 그만큼 요란했고, 김범우는 사람이 죽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고무신을 질질 끌며 대문을 나선 김범우는 부리나케 골목을 벗어나 큰길에 나서보니 횡계다리 위에뿐만 아니라 다리 양쪽으로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총을 든 군인들이 쌀가마니를 에워쌌고, 한 군인이 쌀가마니위에 올라서서 뭐라고 소리쳐대며 공포를 쏘고 있었다.
"쩌 자석 저것, 무신 허깨비춤 쳐감스로 머시라고 떠들어쌓는다냐?"
“아, 보면 몰르겄능가. 싸게싸게 물러스란 것이제, 쌀 도라고 안헐 것인디 워째 귀경허는 권리리꺼정 막을라고 허냐 그 말이시, 나 말은."
"닌장을 헐, 난 또 무신 소리라고. 하여튼지 간에 싸까쓰 본 지도 오랜디 귀경치고는 한분 헐 만한 귀경거리지."
"염상진이 그 사람 인물은 인물이랑께. 워찌 요리 기맥힌 일얼 꾸며내냔 말이여."
"어허, 실답잖은 소리를 허고 앉았네. 염상진이니께 요런 일 해내제 워째."
김범우는 다리 쪽으로 눈을 보낸 채 두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하는 말을 들으려고 신경을 모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든 탓만이 아니었다. 모여선 사람들은 두 남자처럼 제각기 짝을 맞춰 말들을 주고받고 있어서 그 소란스러움은 공포로 쏘아대는 총소리로도 잡을 수가 없었다.
"쩌, 쩌, 총질 군인눔얼 갱물에다 처박아뿌러라! 싸구웂이 누구 앞에서 총질이여, 총질이. 갱물에다 대갱이부텀 카악 처박아뿌러!"
어느 남자의 외침이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 올랐다. 소란스러움이 뚝 멎었다. 그 순간적인 고요는 섬뜩하게 차가웠다.
"맞아, 지가 군인이먼 다여? 요 많은 사람얼 멀로 보고 총질이여. 저런 버르장머리 싹 뜯어고쳐줘야 혀."
다른 목소리의 맞장구였다. 그 목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는데도 조용함 때문에 또렷하게 들렸다.
"말이야 맞는 말인디 순서가 틀렸구만. 저눔 버르장머리 고치는 것이 먼첨이 아니라 쌀 가마니럴 갱물에 처박아뿌는 것이 먼첨이시. 우리야 묵은 것이나 진배 웂응께로 부자눔덜이 못 챙게가게 갱물에 풀어 괴기덜이나 묵게 혀."
김범우는 문득 긴장했다. 그 말은 사태의 결과를 환히 내다보고 있는 오기의 발동이었고, 파급효과가 큰 선동이었다.
"어허, 고것 참말로 존 생각이시."
"하먼, 니도 나도 못 묵을 눔에 쌀 , 괴기덜이나 믹여야제 공평허제."
"그려, 그려, 우리 항꾼에 밀어 붙여뿔드라고."
여기저기 외침이 터져나오고,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소란은 아까보다 한결 심해졌다. 김범우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만약 몇 사람들이라도 힘을 합쳐 사람들을 다리 쪽으로 떠밀기 시작하면 사태는 심각하게 변할 위험이 컸다. 난간이 없는 다리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었고, 군인들이 거칠어질 수도 있었다. 사람들의 동요는 일단 막아야 될 일이었다. 김범우는 몸을 빠르게 놀리며 길 가장자리를 살피고 있었다. 높직하게 올라설 만한 것을 찾는데 그런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싸게 밀어붙여뿌러."
"떡 묵은 심치고 확 기운써부러."
"하먼, 여자덜언 뒤로 빠져."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가고 있었다. 다급한 김범우의 눈에 잡힌 것은 전신주였다.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체면불구하고 전신주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여러분,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시오!"
전신주의 첫 번째 발 받침쇠에 몸을 실은 김범우는 목청을 다해 소리 쳤다. 소란이 멎으며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원생이맹키로 전부선대에 달랑 올라앉은 저 물건은 뉘기여?"
"아, 김부잣집 아덜 아닌가."
"옳지러, 글고 봉께로 그 사람이시."
"시끄럽소, 잠."
한 여자가 두 남자를 향해 쏴질렀다.
"여러분, 우리 집에서도 저기다가 쌀을 내놨습니다."
김범우는 면구스러움이 왈칵 끼쳐오는 것을 느꼈고, 그러나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설득시키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러나, 우린 그 쌀을 다시 찾아오는 짓은 안 할 겁니다. 저 쌀을 바닷물에 던지는 것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우리 집처럼 다른 사람들도 저 쌀을 찾아가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해결은 지금부텁니다. 여러분들은 결과를 기다리십시오. 일이 좋게 처리되도록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봐봐야 쌀가마닙니다. 돌아들 가세요."
그는 사람들은 휘둘러보며 말을 마쳤다.
"어이쿠메 서방님, 워디 다치신 디는 없으신게라?"
전신주에서 뛰어내린 김범우를 머슴 천 서방이 부축하며 울상을 지었다.
"김 선생, 고맙습니다."
김범우 앞에 우뚝 서 있는 건 심재모였다. 김범우가 말을 하는 동안 그는 전신주 아래 와있었던 것이다.
"고맙긴요."
김범우는 손바닥을 털며 어색한 웃음을 피웠다.
"누가 선동을 하는 줄 알았지 뭡니까."
김범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 해도 상관없는 말을 굳이 하는 것이 심재모의 솔직성이라고 생각했다.
"저걸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선 경찰서로 옮기게 했습니다. 해결 방법을 찾을 때까지 그게 좋을 것 같아서요."
김범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서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해결 방법, 그것은 찾으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싶었던 것이다.
"김 선생, 죄송하지만 조금 있다가 제 사무실로 좀 나와 주시겠습니까. 의논드릴 일도 있고, 김 선생 댁도 피해자고 하니까요."
"그러지요."
김범우는 "피해자"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그냥 지나쳤다. 사람들이 흩어져가고 있었다. 군인들이 쌀가마니들을 달구지에 옮겨다 싣고 있었다. 김범우가 심재모의 사무실에 도착하니 네 사람이 그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버티고 앉아들 있었다. 최익달, 윤삼걸, 안재길, 최익도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낙안벌을 깔고 앉은 지주들이면서 집들이 읍내 안통이 아니라 횡계다리 언저리인 봉림이거나 홍교동이어서 변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말을 못하게 하는 벌에서 풀려나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 말을 많이 하려고 들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김범우 혼자만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많은 말은 결국 염상진에 대한 욕이었다. 염상진은 그들의 입에서 몇 번씩이고 죽어갔다. 심재모는 그들의 말을 제지했고, 쌀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는 말을 꺼내놓았다. 도둑맞은 물건을 찾았으니 응당 주인이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그들의 말은 분명했고, 그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간단하게 해결 방법이 찾아진 것이었다. 김범우는 심재모의 시선을 느꼈다. 김범우는 심재모를 향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뜻대로 해주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됐습니다. 다들 쌀을 가져가시도록 하시죠."
심재모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들은 심재모의 노고를 치하하는 말을 한마디씩 던지고 사무실을 나섰다.
"난 번번이 심리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어디 무기로만 하는 겁니까. 난 이번에 갈 데 없는 인민의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염상진, 그 사람 당할 수가 없는 무서운 적입니다."
얼굴이 구겨진 심재모의 말은 침통했다.. 김범우는 말없이 그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당신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상황이 염상진을 유리하게 만들고 있소, 하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김선생은 어떡하시겠어요?"
심재모가 담배를 뽑아들며 물었다.
"아까 사람들 앞에서 말한 대로, 난 찾아가지 않겠어요. 난 강도를 당한 게 아니라 자의로 내놨으니까요. 그렇다고 그 쌀 처분을 심 사령관한테 맡길 수고 없는 노릇이군요. 심사령관이 그 쌀을 맡아 아무리 좋은 뜻으로 쓴다 해도 결과는 염상진의 뜻에 동조하는 것이 되고 마니까요. 직책상 그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되는 일이지요. 난 그 쌀을 서영민 선생의 야학에 기증할 작정입니다. 선생님이 유익하게 쓰시겠지요."
"자의로 내놓다니요?"
"아, 뭐, 강제로 뺏긴 게 아니란 뜻입니다."
"아, 예. 저는 조성을 거쳐 보성까지 가야 합니다. 그 두 곳도 여기와 똑같은 일이 벌어져 있습니다. 내가 어젯밤 완전히 속고 말았어요."
심재모는 쓴웃음을 지으며 모자를 집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느리게 일어서고 있는 김범우는, 어차피 정치의식을 기반으로 한 전술 전략이란 복합적이고 다목적적이게 마련이지만 이번 일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설을 진정으로 아파한 염상진의 마음이 무엇보다도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음력설이 이틀 남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명절이란 없으니만 못한 것이었다. 맨살 드러나듯 한 가난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며 서러워야 했고, 철없는 어린것들의 기대에 찬 눈망울을 애써 외면하며 가슴아파야하는 것이 명절이었다. 그러나 설은 명절 중의 명절이었다. 추석이고 대보름을 큰 명절이라 하지만 그것은 다 설을 앞세운 다음의 이야기였다. 설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을 때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 나름의 설 채비는 끝내놓고 있었다. 설이 되면 비렁뱅이도 쪽박에 낀 때를 벗기는 법이라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설 채비라는 것은 거의 어슷비슷했다. 농사일에 쫓기는 틈틈이 뜯어 모아 처마그늘에 말려두었던 쑥을 꺼내 물통에 담궜다. 쑥의 독기를 울궈내고, 쌀을 많이 섞지 못하는 떡을 보드랍게 하자면 서너 차례 물갈이를 하면서 이틀은 걸렸다. 그사이 온 식구의 빨래를 하고, 밤이면 해진 데를 깁는 손질을 하는 것이다. 쑥을 건져내 물을 짜내기 전에 쌀을 물에 담가야 했다. 그때 가난한 아낙네들은 새로운 시름에 잠겨들었다. 하루 한 끼를 죽으로 살면서도 깊이깊이 묻어두었던 쌀을 꺼내놓고 보면 한 뒷박. 그것은 산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조상님 네의 몫이라고 없는 것으로 잊고 있었던 것인데, 막상 펼쳐놓고 보면 쌀알에 서린 빈한이 가슴을 저미는 서러움이었다. 인절미는 아예 바라지도 않지만 흰떡이나마 만들고자하는 마음이 자아내는 감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치마에 묻은 검불 털어내듯 훌훌 털어버려야 했다. 그 쌀이나마 없어 장리쌀을 얻으려고 있는 집 문전을 기죽어 기웃거리지 않는 것만도 조상님 덕분이라 여겼다. 쑥떡은 쪄내놓고 나면 말이 떡이지, 쌀가루 기운으로 겨우겨우 엉긴 상태의 쑥 덩어리였다. 그것을 절구통에 넣고 쳐대면 쌀의 찰기가 좀 더 살아나고 쑥이 몽그라져 풀이 죽으며 떡 모양새가 설 기분을 돋우었다. 염상진의 아내 죽산댁은 물통에서 건져낸 쑥을 두 손아귀에 몰아넣고 꽁꽁 힘을 써가며 물기를 짜내고 있었다. 딸 덕순이는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있었다. 덜 마른 솔가지는 매운 연기를 내뿜었고, 아궁이 앞에 앉은 덕순이는 이리 저리 연기를 피하며 저고리 소매 끝으로 연상 눈을 훔쳤다.
"장자가 집을 비웠어도 큰집은 큰집이께 우선 요것으로 설채비럴혀라. 나가 또 눈치 바감스로 쌀 말이나 더 갖고 올 요량잉께."
며칠 전 시어머니가 쌀을 이고 와서 한 말이었다. 남편이 율어에 진을 치고 난 다음부터 시어미의 몸짓은 한결 질정이 없어 보였다. 무엇에 쫓기듯 허둥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무엇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이 다 자식 둔 어미의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인 것을 죽산댁은 제 마음을 짚어 헤아리고 있었다. 남편이 좌익에 미쳐 그리 정신없이 돌아치며 집안을 외면할수록 아들 광조에게 쏟아지는 정은 더 애닯고 간절하고 살뜰해져갔다. 남편과 자식의 차이라는 것은 어떻게 말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은 없어도 살아지겠는데 자식이 없어져서는 살아질 것 같지 않은 마음, 그런 차이였다. 내외지간은 한 몸이라 무촌이고, 자식지간은 한 발 건너서 일촌이라 했다. 그것은 도무지 신용할 수 없는 말이었다. 부부가 무촌이라는 것은 뜻 맞고 몸 맞았을 때 이야기지, 부부는 갈라서면 남남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자식과 갈라설래야 갈라서지는 것이 아닌 법이었다. 그것은 피 나눔을 해서인 것이고, 피 끈으로 이어져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그 피 끈이 당기고 또 당겨 그리도 허방을 딛는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런 시어머니를 대할수록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죽산댁, 멀 허시오?"
한 여자가 시루를 들고 시립을 들어서고 있었다.
"잉, 까끔댁,어서 오씨오."
죽산댁은 오른팔을 들어 이마 짬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며 여자를 맞았다.
"나가 요것얼 지때에 갖고 왔느갑소이, 쑥 건지는 것 봉깨로. 잘 썼구만이라."
까끔댁이 시루를 조심스럽게 놓으며 말했다.
"다 까끔댁이 매시라운께 그러요."
죽산댁이 흐릿하게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일손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나가 매시라운께 죽산댁은 워쩌라고라? 빈손으로 오기 미안시러바 쪼깨 갖고 왔는디, 아직 따땃한께 요것 한 개 잡솨봇씨요."
까끔댁이 치마폭에 감싸가지고 온 놋그릇의 뚜껑을 열어 쑥떡 한 개를 집어내선 죽산댁의 입가까이 디밀었다. 죽산댁은 입을 크게 버려 떡을 받아 넣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좀 더 확실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맛나요." 죽산댁이 떡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맛나기는, 간이나 맞을란지 몰르겄소. 쌀이나 쪼깐 낫게 넣었음사 묵을 만헐 것인디."
"금메 말이오. 그리만 됨사그 매시라운 솜씨에, 을매나 좋겄소."
"그려라, 웂이 삼스로 솜씨 매시라운 것도 서럼이제라."
까끔댁은 측은한 눈길로 죽산댁을 바라보았다. 죽산댁은 큰 허위대로 보아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게 음식 만드는 솜씨가 좋았다. 친정이 밥술이나 먹고 사는 살림살이였다는 것을 알면 누구나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솜씨라는 것도 살림살이에 따라 층하가 지게 마련이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더라고 음식솜씨도 생활이 넉넉한 속에서 자라나며 가지가지 손끝에 익혀 배우는 것이다.
"참, 정재에 덕순이가 있는 것 아니요?"
까끔댁이 뒤미처 생각난 듯 물었다.
"불 때고 있을 것이요."
"글먼 식기 전에 떡 한쪽 믹여야제라."
까끔댁은 부엌을 향해,
"야아야, 덕순아! 일 오니라, 떡 한쪽 묵고 불때그라."
있는 껏 목청을 뽑았다. 부지깽이를 든 채로 덕순이가 뛰어나왔다. 덕순이는 멈칫 서며,
"아짐씨 오셨는게라."
하며 고개를 꾸벅했다.
"워따 인사성도 볽다. 얼렁 요 떡 한 개 묵어봐라, 아짐씨가 맹근 것잉께."
까끔댁이 떡을 집어 내밀었다. 덕순이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묵어라."
죽산댁이 딸을 옆눈길로 보며 똑똑하게 말했다. 그때서야 덕순이는 떡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아이고메 으짤그나, 내가 매와서 우리 새끼 눈에 눈물범벅이시웨."
까끔댁이 끌끌끌 혀를 찼다. 연기가 매워 눈물을 찔끔거린 덕순이의 눈 가장자리는 얼룩이 져서 지저분했다. 덕순이는 부끄러운 몸짓을 지으며 얼른 돌아섰다.
"워낙에 낭구가 설몰라논께로..."
죽산댁이 말끝을 흐렸다.
"금메 말이요, 낭구할라 흔허덜 안해논께 몰를 새가 있어야제라. 나가 시집와서 첨에 똑 죽겄든 것이 낭구 맘대로 못 싸질르는 것이드랑께라. 쌀 애낄라, 낭구 애낄라, 숨이 맥혀 살 수가 있어야제. 처녀 적에넌 낭구야 허천나게 많았응께 죽을 묵음시롱도 구둘장이야 드끈뜨끈헌께 겨울나기가 행결 숼했당께요."
"긍께 까끔댁 아니요. 처녀적이약 허먼 멀 헐 것이요. 여자야 시집 팔자 잘 타고나야제 친정팔자 잘 타고 나봤자 아무 소양웂소. 살아감스로 더 서럽기만 허제."
죽산댁은 가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까끔댁은 무심결에 그 한숨을 따라서 쉬고 있었다. 까끔댁은 산이 많은 승주에서 시집을 왔고, 산이 겹겹인 산골마을을 "까끔실"이라고 부르기에 그녀의 택호는 자연히 까끔댁이 되었다.
"워치케, 떡헐 살언 구했습디여?"
까끔댁은 조심스럽게 말을 떼었다.
"시어무니가 조깐 가져오셨제라."
"다행이요. 근디 광조 아부지가 횡계다리에다만 쌀가마니 쌓지 말고 이 마당 가운데다가 한 가마니 툭 던지고 갈 일이제."
까끔댁은 아쉬운 듯한 어조였다.
"그 문딩이 맘보가 모지락시러바 넘덜언 다 줘도 지 집구석만은 쏙 빼놀 물건이요."
죽산댁의 얼굴에는 금방 노여움이 서렸다.
"죽산대액, 그리 말허덜마씨요. 여자 몸으로 죽산댁이 을매나 몸고상 맘고상 젺음서 사는지, 그 속이 을매나 씨리고아프고 서런지 워째 몰르겄소. 그려도 광조 아부지럴 거짓꼴로라도 그리 말허먼 못쓰요. 광조 아부지는 장허고 또 장헌 사람이요."
"시끄럽소, 그 문딩이 이약."
죽산대은 물기를 뺀 쑥 덩어리를 패대기치듯 했다.
"금메 죽산대액, 죽산댁이야 어지께 횡계다리럴 안 나가봤응께로 몰라 그렇제, 시상에, 시상에 사람도 그리 많이 모였을 랍디여. 그 많은 사람덜이 경찰이 욱대겨모인 것도 아니것고, 청년단이 겁믹여 모인 것도 아니겄고, 니도 나도 다 지 맘 동혀서 지 발로 걸어서 모인 것인디, 고것이 워째서 그리 되얐겄소. 그것이 다 광조 아부지가 장헌 일혀서 그렇고, 광조 아부지 심이 그 많은 사람덜얼 끌어댕긴 것이요."
"금메, 고것이 다 무신 소양 있는 짓거리요. 자석새끼덜언 쫄쫄이 굶게놓고."
"글씨 죽산댁, 나 허는 말 들어봇씨요, 거그묀 그 많은 사람덜이 다 하나씩 달린 입으로 각단지게 말허는디, 염상진이가 사람이다, 염상진이가 질이다, 염상진이가 장허다, 모다모다 요런 존 소리럴 노래허대끼 혔단 말이요. 요 인심 험헌 시상에서 광조 아부지 아니고는 그 누가 그런 존 소리만 들을 수 있겄소. 죽산댁이 그 소리덜얼 들었으먼 그간 쌯이고 쌯인 서럼이고 분험이고 고상이고 싹 다 갱물에 빠지대끼 깨끔허니 씻겨나감스로 배가 조계산만허니 불렀을 것이요."
"고런 말 듣고 헛배 불러봐야 머헐 것이요. 돌아스먼 진짜 배만 더 고픈 법이요."
"글안해라 죽산댁."
까끔댁은 죽산댁옆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나가 요런 소리넌 아무헌테도 못혀본 소린디라, 그 많은 사람덜이헌 말을 듣고 집으로 갈어옴스로 생각혀봉께, 광조 아부지가 넘 못헐 고상 사서 허는 것이 결국은 헛고상허는 것이 아니구나 허는 것이고, 달븐 생각 하나는, 우리 집 남정네넌 멀 허는 남정넨고 허는 생각이 들드랑께요. 남정네로 한평상 삼스로 광조 아부지맹키로 넘덜 위해 일험스오 우러름 받고 살기도 허는디, 거그다가 우리 남정네럴 비허니께 워찌 그리 짜짠허고 쫌팽이로 뵈는 지, 참말로 기가 찹니다. 글타고 살림살이나 지대로 건사허먼 또 몰르겄소. 참말로 기가 찹니다. 그타고 살림살이나 지대로 건사허먼 또 몰르겄소. 나무 한 짐 여축이 웂이 게을러 빠졌음스롱도 술이야 허먼 두 눈에 불을 키고, 화투야 허먼 자다가고 귀가 번쩍허는것이 그 문딩이요. 요분에 광조 아부지가 쌀을 골고로 갈라 설얼 쇠라고 혔는디, 우리 집은 그쌀 한 알갱이도 받을 자격이 웂은 집이요. 광조 아부지가 쌀을 주고 잡아헌 것이 지성으로 일험스로도 가난허게 사는 사람덜이겄제, 우리 집 남정네맹키로 께을른 물건덜헌테는 외레 벌얼내랬을 것잉마요. 하여튼지간에 광조 아부지는 장허고, 죽산댁도 헛고상허는 거이 아닝께 심지게 살어야 쓰요. 말들을 안혀서 그렇제, 워디 나만 요리 생각허겄소."
"그리 말얼 헌께로 고맙소. 근디, 고런 맘 아무헌테나 표식내지 마씨요."
"하먼이라, 나가 애기간디라? 워쨌그나 사람덜이 지 발로 걸어 그리 많이 뫼기는, 재작년 그러껜가 순천서 광주로 가는 김구선상을 보겄다고 역전이 미어터지게 사람덜이 몰린 뒤로 첨 일이요. 고것이 다 말은 안혀도속은 있는 시상 인심이요. 워따, 허고 잡은 말 다 혀분께로 속이 씨언허요. 나 인자 가볼라요."
"떡 잘 묵겄소."
죽산댁은 까끔댁이 사립 밖으로 나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은, 추위로 얼어붙은 몸이 뜨거운 물을 한 사발 훌훌 불어 마시고 나면 속에서부터 풀리는 것처럼 훈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죽산댁은 전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횡계다리에 쌀 가마니을 쌓았다는 말을 듣고, 문딩이 잡지랄 허네, 하는 감정이 불쑥 솟겼던 것이고,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오랜만에 사람 같은 짓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회정리 삼구의 김복동의 아내 장흥댁과 노덕보의 아내 조성댁은 예년처럼 지삼봉이가 머슴살이를 하는 이춘삼의 집에 불려가 설 채비 음식 장만을 거들고 있었다. 그네들은 하루 밤낮을 꼬박 엉덩이 한번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허리 한번 제대로 편지 못한 채 종종걸음을 치며 일에 시달렸지만 일정하게 정해진 품삯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안주인인 박씨도 품삯을 정하지 않았고, 그네들도 품삯을 정하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일을 끝내고 나면 박씨는 자기 요령대로 쌀됫박을 퍼주었고, 그네들의 설 쇨 밑천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그네들은 설이 임박하면 행여나 불러주지 않았으면 어쩌나 하는 은근한 걱정도 없지 않았다. 박씨네는 천 석, 이천 석 하는 부자들에 비하면 부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씨네는 농사가 얼마 안 되는 대신 이춘삼이가 자애병원 건너편에 물방을 차려놓고 있어서 그 재산이 얼마인지 속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그 물방은 장날이 아니어도 언제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양잿물만 팔아도 먹고 살 돈은 넉넉하게 번다는 소문이 일직부터 나 있었다. 그런데 그 가게에는 없는 것 없이 온갖 물감가루가 갖춰져 팔려나갔고, 성냥이 양초며 석유까지 팔았다. 박씨네는 알부자로 불렀고, 회정리 삼구에서는 꼽히는 부자였다.
"장흥댁,요 찹쌀이 다 익었구마, 언넝 들내야겄네."
부뚜막에 한쪽 다리를 걸친 조성댁이 주걱 끝에 약간 찍어낸 찹쌀을 씹으며 말했다.
"어이, 번부터 띠내야제."
쌀가루를 반죽하고 있던 장흥댁이 칼을 들고 시루로 다가갔다. 김이 새나가지 못하도록 솥전과 시루가 맞닿는 부분을 삥 돌아가며 붙인 시룻번이 그 동안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익어버려 그것을 떼 내지 않고는 어떤 장사라도 시루를 그냥 들어 올릴 수는 없었다.
"고것 잘 간수허소."
조성댁이 말했고,
"칙간에 내뿔라네"
장흥댁이 엇지게 말을 받았다. 남의 집 음식 장만을 해주며 그네들이 마음 놓고 차지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떡꼬리도 입에 넣기에 눈치 보이고, 전을 부치며 간보기로 입에 넣는 것도 주인이 신경 쓰이는데 시룻번만은 마음 놓고 싸가지고 갈 수가 있었다. 그런 만큼 그것은 딱딱하기만 하고 별다른 맛이 없었다. 소금으로 간을 맞춘 것도 아니어서 더 맛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배곯는 아이들은 그것도 환장을 했고, 그것이 분명 쌀가루인 이상 묽은 죽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박씨네는 떡을 한두 가지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을 다 모아다가 둘이 똑같이 나누면 수월찮은 양이 되었다. 둘이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시룻번을 붙일 때는 주인에게 타박 듣지 않을 정도로 넓고 두껍게 붙이고는 했다.
"야아야, 점예야, 시루 띠내는 것 암스로 멀 허고 있냐. 싸게 삼봉이 불러 떡칠 채비 시켜야제."
"내사 몰르겄소. 조성댁이 불르씨요."
나물거리를 다듬고 있던 점예는 빠락 소리를 지르며 조성댁을 향해 눈을 흘겨댔다.
"아니 저년이 워째 저려. 경기럴 허는 것도 아니고 양잿물을 묵은 것도 아니고, 니 워따 대고 소리 질르고 지랄이냐, 지랄이."
조성댁이 억누른 목소리였지만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없이 산다고 저런 것들까지 하시하나 싶은 자격지심이 발톱을 세웠던 것이다. 양쪽 볼에 살이 쪄서 눈 위쪽보다는 아래쪽이 곱절은 더 커 보이는 얼굴을 한 범예는 연상 뭐라고 꿍얼대고 있었는데, 즈그 아덜눔인가, 어쩌고 하는 말이 섞이고 있었다.
"저년이 문어 잡는 눔맹키로 알아듣지도 못헐 소리럴 머시라고 씨불거린다냐 시방. 니 나 욕허고 자빠졌냐!"
조성댁이 자기의 머리 수건을 홱 잡아채며 일어났다.
"에헤 이사람아, 쟈 말얼 찬찬히 들어보소. 다 큰 총각보고 삼봉이, 삼봉이 불러싼다고 저리 역정이 난 것이지."
장흥댁이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오라, 즈그 하늘 겉으신 님보고 존대럴 안 쓰고 버르장머리 웂이 이름얼 불렀다, 고것이구만. 워따, 워따 열녀 났다. 춘향이 찜 쪄묵을 열녀 낫다. 남원골 춘향이요, 벌교골에 점예로시."
조성댁은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장흥댁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화가 난 이유와 잔득 부어터진 살찐 얼굴이 웃지 않을 수가 없게 했던 것이다.
"머이가 그리도 우습소. 떡시루에 침 튕게감서."
점예가 소리치며 발딱 일어섰다. 조성댁과 장흥댁은 그만 웃음을 뚝 그쳤다. 정말 떡시루에 침이 튀기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삶은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고, 서로가 민망해져 눈길을 돌렸다.
"점예야 이년아, 느그 님헌테 그리도 존대 바치게 허고 잡으면 싸게싸게 시집이나 가그라. 니가 시집가먼 존대허지 말라고 혀도 우리가 알어서 지 서방,지 서방, 헐 거이다. 어런 앞에서 부끄러운 것도 몰르는 요런 철따구니 웂은 가시내야. 싸게가서 삼봉이 불러 오니라!"
조성댁은 쥐어박기라도 하듯 끝말에 힘을 박아 야무지게 쏴질렀다. 아직도 부어터진 얼굴인 점예는 두 발로 부엌바닥을 퍽퍽 내지르며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년아, 시집가기 전에 엉치에 금가것다."
장흥댁이 혀를 차며 시루 손잡이를 잡았다.
"저 미런 툭시발 겉은 년, 시집가서 삼봉이 주먹에 다근다근 맞어야 저 미런 고칠 것이네."
조성댁이 시루를 맞잡으며 말했다. 나란히 붙은 세 개의 솥에는 다 떡시루가 올려져 있었다. 지금 들어내고 있는 것이 인절미였고, 가운데가 시루떡이었고, 그 다음이 가래떡 만들 쌀이 앉혀져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시루가 비워지는 대로 흰떡, 백설기, 쑥떡을 차례로 앉혀야 했다. 그 중에서 제일 적게 만드는 것이 쑥떡이었다. 쑥떡은 떡살로 찍어내는 흰떡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시늉하듯 만들뿐이었다. 그 많은 종류의 떡을 쪄내고, 치고, 만들고 하다보면 겨울 하루해가 다 저물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는 가지가지의 전을 부치고, 이런저런 나물을 무치며 밤이 깊어가게 되었다. 몸을 놀리고 난 조성댁과 장흥댁의 허리는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듯 했다. 그러나 나무다발에나마 잠시 엉덩이를 걸치고 허리를 풀 처지가 아니었다. 그네들은 살강 옆에 선 채로 한술씩 뜨고 또 일에 달라 붙어야했다. 숯불 위에 올려진 번철은 이미 달아 있었다. 조성댁과 장흥댁은 제각기 번철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흥댁이 끄윽 트림을 해 올렸다.
"문딩이, 에지간히 돌라묵었는갑다."
조성댁이 중얼거렷고 장흥댁이눈을 흘겼다. 번철에서 기름이 지지직거리며 끓자, 고소한 기름 냄새가 퍼져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명절 치레하는 기분을 돋우는 것은 떡 쪄내는 냄새가 아니라 전 부치는 기름 냄새였다. 전감을 놓을 때마다 번철은 깜짝깜짝 놀란 듯 피지직거리고 푸드득거리는 소리를 소란스럽게 앓았고, 기름 냄새는 부엌을 넘쳐나 온 집안에 진동하게 되었다. 조선댁이 끄윽 트림을 했다.
"문딩이, 넘 말허고 앉았네“
장흥댁이 픽 웃었고,
"금메 말이시. 묵은 것도 웂이 속만 끄득허시"
조성댁이 목을 늘이며 또 한 번 트림을 해 올렸다. 그네들은 여러 종류의 떡을 만들면서 주인의 권에 딸라 떡꼬리를 주섬거리고, 간을 본다며 팥고물을 한 주먹, 뜸이 들었는지 본다며 떡살을 한 입, 그러다 보니 배가 찰대로 차 있었다. 못 먹던 속에 갑자기 많은 양이 들어가니 연방 트림이 올랐고, 그네들은 배곯고 있는 자식들을 생각하며 속이 거북함을 죄의식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엄니, 어엄니."
잔뜩 도사린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장흥댁과 조성댁은 거의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네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아 있었다.
"엄니, 나여 나."
부엌 뒷문에 얼굴만 간신히 내밀고 있는 아이가 빠르게 말했다. 그건 조성댁의 셋째아들 천수였다.
"아이고 문딩아, 여그는 머 헐라고 와."
조성댁은 질겁을 하며 팔을 치켜들었다. 장흥댁은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엄니, 나 배고파서 까물치겄단말여."
천수는 어느새 문지방을 넘어 쪼르르 달려와 조성댁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아이고 요런 잡긋아, 엄니가 여그넌 얼찐도 말라고 안 허디야. 니 다리몽댕이 뿐질러지기 전에 싸게가그라."
조성댁의 얼굴은 일그러져 이었고, 그 목소리는 살벌했다.
"엄니, 나 배고파 죽겄당께."
아이는 제 어머니의 태도에는 아랑곳없이 번철에서 지지직거리고 있는 전에만 눈길을 쏟아 붓고 있었다.
"엄니이, 쩌 부치기."
"안뒤어, 가, 싸게 가!"
조성댁은 곧 쥐어지를 것처럼 주먹을 치켜들며 이빨을 응등 물었다.
"기왕지사 와뿐 것인디 하나 믹여 보내씨요."
점예가 선선하게 한 말이었다. 어떻게 할까, 조성댁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헝클어졌다.
"조성대액!"
장흥댁의 목소리는 찐득하게 길었고, 조성댁은 그 순간 마음을 간추렸다.
"안뒤어, 젯상에 올르지도 안헌 넘 음식을!"
조성댁은 강단진 어조로 말하며 고개까지 세차게 저었다. 그건 주인박씨가 엄하게 내려놓고 있는 말이었고, 조성댁은 그 말을 점예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워쩐 애기다냐!"
모두들 눈길은 일시에 부엌문 쪽으로 쏠렸다. 거기에는 소쿠리를 받쳐 든 박씨가 곧게 서 있었다.
"금메 여그넌 얼찐도 허지 말라고 쎄가 닳게 말얼 일렀는디도 요런 문딩이 겉은 새끼가 생쥐새끼맹키로 뽀르르 기와갖고 지 엠씨 애간장얼 태웅마요. 지끔 쥐어뱅게갖고 쫓아낼 참이었구만요."
두 손을 모아잡고 일어선 조성댁의 변명이 구구했다.
"워쩌냐, 전에 입 댔냐 어쩌냐!"
박씨는 싸늘한 얼굴로 점예한테 묻고 있었다.
"아니구만이라. 쪼깐 아까 와갖고 전얼 묵고 잡아 허는디 조성댁이 안된다고 잡아띰스로 막 가라고 왈기든 참이구만요."
"참말이냐?"
"야아."
박씨는 부엌을 한 발짝 들어섰다.
"누릉밥 긁어논 거 있냐?"
"있느디요."
"그것을 들려 보내라."
"아니구만요. 그냥 보낼라능마요."
조성댁이 황급히 말하며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자넨 가만 있소."
박씨의 말은 차고도 엄했다. 살강의 바가지에 든 누룽지를 점예는 꽁꽁 뭉쳤다. 박씨 쪽으로 힐끗 눈길을 보낸 그녀는 누룽지뭉치를 아이의 손에다 쥐어주었다. 그것은 아이의 야윈 두 손아귀에 넘치는 정구공만한 크기였다.
"가그라, 싸게 가."
조성댁의 목소리는 메어들었고,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아이는 다람쥐처럼 부엌 뒷문을 넘어 자취를 감추었다.
8. 어두운 정월 대보름
음력설날 교회는 어린이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교회는 약간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주위가 별로 넓지 못한데다가 읍내의 아이들이 몰려들어 어디에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교회주변의 빈터만 채운 것이 아니라 계단에까지 겹으로 줄을 잇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추운 것도 모르는 듯 닥은 입들은 쉴 새 없이 놀려댔다. 그런 아이들의 표정은 거의가 밝았는데, 그 얼굴 피부나 입성은 가난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떡을 받으러 온 것이었다. 김범우에게 쌀 다섯 가마니를 받은 서영민은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이지를 궁리하다가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이지숙에게 의논하게 되었다. 이지숙은 별 망설임 없이 떡을 해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나눠주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것이 염상진의 뜻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다섯 가마니의 쌀로 떡을 한댔자 읍내의 가난한 아이들을 얼마나 먹일 수 있겠는가를 서영민은 염려했다. 떡을 못 얻어먹는 아이들이 생기는 경우 그건 하지 않음만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영민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며 쌀 두가마니를 보태게 했다. 이지숙은 떡을 만드는 일부터 나눠주는 것까지를 떠맡았다. 이지숙은 백설기와 쑥떡 두 가지로 했고, 나무 값이며 콩 값이며 인건비 등속은 자신의 돈으로 충당했다. 그리고 야학의 학생들을 동원해 선전하게 했다. 와글거리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지숙의 마음은 더없이 흡족하면서도 한편으로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떡이 모자랄까봐서였다. 두 번 타는 것을 막기 위해 팔목에 찍을 도장을 준비한 것은 잘 한 일이라 싶었다. 열 살 미만인 아이들의 한 끼 밥,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백설기 한 쪽과 쑥떡 두 개씩을 나눠주기로 했다. 교회의 문이 열리고, 떡 배급이 시작되었다. 어린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질러대는 기쁨의 소리가 겨울 햇살을 뚫고 솟아올랐다. 야학 학생들이 두 패로 나뉘어 줄을 세워 떡을 나눠주었다. 그 옆에서 이지숙은 아이들의 손목에 잉크 도장을 누르며, 꼭꼭 씹어 먹어라, 하는 말을 꼬박꼬박 하고 있었다. 교회 문 앞에서 멋 적게 돌아서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누가 보나 열 살이 넘은 아이들이었다. 한나절이 겨워서야 아이들의 발길이 끊겼다. 다행이 떡은 약간 남아 있었다.
"여러분은 다 열 살이 넘었으니까 자격미달이지만 특별히 봐주겠어요. 다 같이 나눠먹도록 해요. 고생들 했어요."
피로감과 홀가분함이 함께 어우러진 상쾌한 기분으로 이지숙은 야학 학생들을 향해 소리 높여 말했다.
그건 바람소리만이 아니었다. 뒤란의 돌담에서 울려 바람에 섞인 소리. 그건 돌이 맞갈리는 소리가 분명했다. 누군가가 돌담을 밟지 않고서야 생길 수 없는 소리였다. 베틀에 올려진 명주 올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그녀의 신경줄들은 격자창으로 뻗어가 있었다. 갈그락... 두 손바닥으로 가금을 누르고 누워 있던 그녀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소리는 분명 돌담을 밟는 인기척이었다. 두근거리던 그녀의 가슴은 이제 벌떡거리고 있었다. 그 심한 요동에 그녀는 가슴을 꼬옥 누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숨이 가빠지도록 심한 가슴의 벌떡거림은 확연한 인기척 때문인지 너무 갑작스레 일어나 앉은 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분일지 몰라, 꿈에 뵈던걸, 그녀는 흐릿한 윤곽의 창에 눈길까지 박고 있었다. 특,특,특. 간격을 두고 창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그렇제! 그녀는 속으로 소리치며 창문에 달라붙었다.
"누, 누구시오."
"소화, 나 정이요."
그녀의 가슴에서는 불꽃이 확 일었다.
"기둘리시씨요."
저고리를 꿰고, 치마를 두르는 소화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하섭은 장독대 옆에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 소화는 그만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우뚝 멈춰선 소화에게 다가선 정하섭은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소화, 미안하오."
정하섭의 나직한 음성이었다. 소화는 울컥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래도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따스하고 굵은 음성은 소화의 가슴속에서 메아리쳐 울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여러 개의 산들이 담겨 있었다. 그분이 준 소중한 생명을 피로 쏟아버린 안타까운 산, 너무 갑자기 어머니를 떠나보낸 한스러운 산, 낙안댁에게 냉대를 받았던 서러운 산, 견디기 어렵게 고문을 당했던 고통스러운 산, 감방에 갇힌 막막한 나날 속에서 키웠던 사무치게 그리운 산, 그 산들 사이에 그분의 음성은 메아리쳐 흐르고, 그 음성이 스쳐간 산들은 하나씩하나씩 흔적을 감추어가고 있었다. 나도 함께 끌어안고, 이대로 죽고 싶어라. 소화는 얼핏 이런 생각을 했고, 그 터무니없는 자신의 욕심에 소스라치며 정하섭의 가슴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리럴 옮겨야 허는디요."
"그럽시다."
정하섭은 팔을 풀었다. 소화는 어둠속 여기저기를 살피며 제각을 향해 빨리 걸었다. 자정이 가까웠을 거라고 그녀는 깊이를 헤아렸다. 제아무리 감시가 철저하다 해도 이 깊은 밤에 여기를 지킬 눈은 없으리라 싶었다. 그러나 밤이라고 예전같이 마음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화는 방문을 열었다. 어둠 가득한 속에서 냉기가 끼쳐왔다. ‘아이고 이일을 워쩌꼬,’ 그녀는 마음이 암담해졌다. 방으로 들어선 소화는 어둠 속을 더듬어 윗목의 이불부터 옮겼다.
"여그구만요, 여그요. 금세 군불을 땔 것잉께 이불 우에 앉아 기시씨요."
"불 때지 마시오. 이불도 없이 바깥에서 자는 게 이골난 몸인데, 방안이겠다. 이불 요 있겠다, 이만하면 대궐이요."
정하섭은 어둠 속에서 태평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지가 옆에 있음서 그리는 못하구만요. 참, 진지는 워쩌셨는가요."
소화 쪽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불 켜지 마시오 밤이 깊어 불빛이 멀리 가니까."
빠른 정하섭의 말이었다.
"문에 칠 이불은 따로 있구만이라."
소화의 말이었고, ‘아 그런 여자였지,’ 생각하며 정하섭은 고개를 젖혀 뒷머리를 벽에다 기댔다. ‘생김은 꽃 같고, 마음은 어머니 같은 여자... 머리는 기특할 만큼 영리하고, 몸은 ..몸은..’
"진지 워쩌셨는가요."
"아, 나 밥 먹었소."
정하섭은 소화의 알몸의 환상에서 깨어나며 황급히 대답했다. 방안이 환해졌다. 방문에는 이불이 쳐져 있었다. 소화는 등잔에 불을 당겼다. 불빛을 받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을 정하섭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전보다 야윈 얼굴이었다. 율어에 들렀다가 아버지와 소화가 당한 고초에 대해 대충 들었던 것이다. 야위기는 했으나 소화는 여전히 예쁜 꽃이었다. 아니, 전의 모습이 붉은 기운이 감도는 흰 꽃이었다면 지금의 모습은 그 붉은 기가 빠져버린 그야말로 흰 꽃, 소화였다. 고초를 당하면서 더 예쁘게 피어나는 꽃...
"쪼깐만 참으씨오."
소화는 정하섭 쪽으로 눈길도 못 돌린 체 일어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이 겨울에 어찌 맨발이오?"
정하섭이 놀라서 말했고, 소화는 제발을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주저앉으며 치마로 발을 가렸다. 너무 경황없이 밖으로 나오느라고 버선 싣는 것을 잊어버렸음을 소화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가슴 깊은 곳까지 다 들켜버린 부끄러움으로 소화는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급한 김에 버선을 신는 것을 잊어버렸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자신의 지적에 그녀가 당황해서 발을 가린 것은 그때까지 맨발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표시였다. 이 차가운 방바닥을 딛고 있으면서도 발이 시려운 것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 이 여자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인 것을 깨닫는 정하섭의 가슴에는 기쁨 아닌 괴로움이 먹먹한 통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버선을 가질러 갈 수도 없는 일이고, 냄새나고 더럽지만 이 양말을 신어요."
정하섭은 재빨리 양말을 벗어 소화 앞으로 밀었다.
"아니구만요, 아니구만요."
소화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때 두 사람의 눈길이 엉겼다. 소화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난 이불속에 발 넣고 있으면 되잖소. 그걸 안 신을려면 불도 때지 마시오."
정하섭의 단호한 말에 소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양말을 집어 들었다.
"그 양말이 더럽긴 해도 버선보다는 뜨뜻할거요 미군 군인놈들 거니까."
방을 나가는 소화의 등에다 대고 정하섭은 말하며 빙그레 웃음을 짓고 있었다.
"거기는 노출됐어."
염상진이 말했다.
"포탄은 한 번 떨어진 자리에는 두 번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대꾸했다.
"그래?"
염상진은 제법이라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는,
"포는 기계고 자네 상대는 사람이란 걸 구분은 하겠지?"
하며 웃었다.
"물론입니다."
자신은 그 묘한 웃음의 의미를 해득하려고 신경을 모았다.
"자네의 판단을 믿기로 하지. 그런데, 그 처녀무당한테 더 기대하는가?"
웃음의 의미가 포착되었다.
"동일 임무는 물론 포깁니다. 그러나 다른 임무는 계속 가능합니다."
"어떤 근거의 확신인가."
"제 판단에 근거합니다."
"당원의 판단이니 믿겠네. 단, 무리해서 하 동무네 식구들 생활터전까지 망치는 일이 없도록."
염상진은 역시 냉정한 판단력과 남다른 자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소화와 자신과의 관계를 심상치 않게 판단내리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그 말은 입에 올리지 않고 "당원"이라는 한마디로 정신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그의 앞에 서면 자신의 몸이 투명한 유리로 변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에서 언제나 벗어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소화는 싸리나무를 아궁이 가득 밀어 넣고는 부랴부랴 목욕탕으로 갔다. 그 아궁이에도 불을 지피고는 물을 퍼다 날랐다. 목욕통에 물을 채우고 나니 이마에 땀이 직득하게 내뱄다. 그녀는 양쪽 아궁이를 부산하게 왔다 갔다 했다. 서너 달 동안 싸리나무는 바싹 말라 있어서 급한 마음이 시원하게 풀리도록 불땀이 좋았다. 소화는 아궁이 앞에 앉아 고무신을 벗고 양말을 내려다보았다. 투박스럽게 생긴 양말이었다. 그 생김처럼 정말 버선보다 따듯했다. 그 생각이 미치자 아까와 똑같은 부끄러움이 전신을 덮어왔다.
‘미친년, 버선 신는 것도 잊어 묵어 뿐 것도 워디헌디, 워쩌자고 그때꺼정 맨발인 중도 몰랐는고. 근디, 워째 냉돌인디도 발이 안 시렀을꼬? 넋 빼고 있다봉께 발이 시언 것도 몰랐겄제. 고것이 내 맘이 아니여, 모다모다 신령님 뜻이여.’
소화는 불길이 물기에 젖어 흐릿거려지는 것을 느꼈다.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냉돌에 맨발로 서도 그분 앞이라면 발이 시려운 것도 모르는 자기가 소화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그런 것은 결코 처음의 경험이 아니었다.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감방의 암울 속에서도 그분은 언제나 신령님과 나란히 서 있는 빛이었었다. 소화는 양말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았다. 양말의 감촉이 새롭게 발가락들 마디마디에 자극되고, 그 짜릿거림은 수천의 불꽃이 되어 일순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건 바로 정하섭 그분이 자신의 몸에 심는 뜨거움이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인연의 씨를 다시 자신의 몸속에 심기를 욕심하는 바로 자신의 뜨거움이었다. 소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신령님, 이년의 가슴에 가득 찬 욕심을 태워 주십시요. 이년의 가슴에서 타오르는 욕심의 불을 꺼주십시오. 소화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시 아궁이 가득 싸리나무를 밀어 넣고 일어섰다. 목욕물은 따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소화는 가만가만 방문을 열었다. 그분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방에서는 냉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이불 위에 올라앉은 정하섭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다보고 있었다.
"목욕물 디워졌구만요."
"아, 어느새 목욕물을.."
정하섭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밝음이 그대로 자신의 마음의 밝음이 되는 것을 소화는 느끼고 있었다.
"고맙소. 미안해서 말을 못했었는데."
정하섭은 한 달 가까이 목욕을 못했음을 상기했다. 소화의 마음에서는 금방 밝음이 사그라지고 서운한 어둠이 차왔다. "고맙소"라는 말도 서운했고, "미안해서"라는 말도 서운했다. 그까짓 목욕물을 데우는 일일 뿐인데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그분이 야속했고, 행여 그런 마음의 간격을 가지고 있나 싶어 동한 서운함이었다.
‘욕심내덜 말어, 욕심내덜. 애시당초 현생의 집짓기를 바래지 않고 시작헌 일 아니여.’
엉뚱하게도 자꾸만 방문에 쳐진 이불을 들치다 말고 돌아섰다. 그리고 소화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소화, 우리 함께 목욕합시다."
그는 속삭였다.
"워메!"
소화는 비명을 지르듯 하며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므로 그는 그녀가 가슴을 떠미는 곱절의 힘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어머니 사십구제도 지나지 않았소."
그는 더 낮게 속삭였다.
"그것이 아니고라, 그것이 아니고라..."
그녀는 품을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것이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다는 말이었다. 그는 그 부끄러워하는 꽃 소화를 보고 싶었고, 그 부끄러움을 찢어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할 것 없소.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잖소. 난 갈 길이 바쁘고, 따로따로 목욕할 시간이 없소."
"그려도, 그려도..."
소화의 힘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때 그의 머리에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그는 빙긋 웃음 지었다.
"소화, 이게 다 신령님의 뜻이요."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녀의 눈이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묘한 빛으로 타고 있었고, 그는 눈이 매운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타고 있는 눈은 묻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이 아니라 연이어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따라 그녀의 눈에서는 그 묘한 빛이 가라지며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끄덕거림을 계속하고 있는 그의 고개는 차츰차츰 숙어들어 마침내 그의 입술은 소화의 입술에 포개졌다. 그는 흰 꽃이 내뿜는 흰빛 뜨거움을 가슴속 깊이깊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소화, 나 때문에 겪은 고생 내 다 알고 있소."
정하섭이 말했고, 소화는 엉겁결에 손을 들어 그의 입을 가리며 얼굴을 돌렸다. 만나자마자 미안하다고 했던 그 첫마디가 무엇을 뜻했던 것인지 알았고, 소화는 또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하섭은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는 소화의 손을 어루만졌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었다. 그 손은 생김새와는 달리 너무나 큰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베풀기만 하고 당하기만 하면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손, 그건 소화의 마음이었다. 어머니 같은 여자... 정하섭은 어루만지던 소화의 손을 잡고 방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롱불이 밝혀진 목욕탕에는 김이 자욱하게 서려 있었다. 창문이 없는데다가 김이 서려 있어서 목욕탕 안은 훈훈했다.
"여기가 방보다 낫군."
정하섭은 눈에 익은 목욕탕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소화는 정하섭의 뒤에 등을 돌리고 굳은 듯이 서 있었다. 알몸이 된 정하섭이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스쳐갔다.
"자아..."
정하섭이 소화의 어깨에다 손을 얹었다. 그때서야 소화의 손이 옷고름으로 올라갔다. 정하섭의 손으로 그녀의 저고리가 벗겨졌다. 치마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속적삼이 다시 정하섭의 손으로 벗겨졌다.
"아니, 이게 뭐요!"
정하섭이 느닷없이 소리였다. 소화는 입술을 물며 눈을 꼬옥 내리 감았다. 정하섭은 얼떨결에 소리쳐놓고 다음 순산 그것이 무언인지를 퍼뜩 깨달았다. 맨살로 드러난 소화의 등에 푸릇푸릇하기도 누릇누릇하기도 한 멍 자국. 그건 고문을 당한 상처의 흔적이었다.
"망할 자식들! 이럴 수가..."
정하섭은 뻗쳐오르는 분노에 휘감기며 이빨을 맞물었다. 분노의 열기만큼 그의 남성적 열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울음을 거친 숨결로 바꿔 토해냈다. 그는 그녀의 속곳을 끌어내렸다. 입술을 문 채 눈을 질끈 감은 소화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단속곳을 끌어내렸다. 고문의 흔적은 소화의 전신에 흩어져 있었다.
"소화..."
그는 소화의 두 다리를 감싸 잡으며 얼굴을 그녀의 허벅지에다 비벼댔다. 그까짓 살 껍질이 터지고 멍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준 인연의 끈을 피로 끊어버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에 잡힌 멍이야 날이가면 시나브로 풀려가는 것이지만 마음에 잡힌 멍이야 세월이 갈수록 커져나가 뿌리가 한정 없는 한이 됩니다. 임신을 했었다는 것도, 고문으로 낙태를 했다는 것도 입에 올릴 수 없음의 서러움에 사무치며 소화는 정하섭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소화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정하섭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소화..."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도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제가 당한 일을 이리도 아파해주고 쓰라려 해주는 것만으로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녀는 그의 알몸을 온힘을 다해 끌어안고 또 끌어안았다. 이대로 이 몸 바스러지리라 마음먹으며. 소화를 목욕통 안으로 끌어들인 정하섭은 그녀의 몸에 물을 끼얹어 주며 멍 자국들을 핥기 시작했다. 그건 애무의 행위가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그녀의 몸은 남자의 욕정을 불러 일으키는 여자의 몸이 아니었다. 자신이 당해야 될 고통을 당한 순직한 희생물이었고, 자신은 교활하게도 예견된 위험을 피한 또 다른 가해자였다. 전신에 찍혀 있는 그 참담한 고문의 흔적 앞에서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너는 뻔뻔스럽고 간사스러운 혓바닥을 열 토막, 스무 토막을 내버려야 한다. 그 멍 자국들은 어떠한 말도 용납하지도 허용하지도 않고 다만 죄의식만을 확인시키고 있었다. 부모가 자식의 종기에서 고름을 빨아내듯, 모든 짐승이 새끼의 상처자리를 핥듯이, 그는 그 순직한 인간의 몸에 찍은 자신의 죄를 건성으로 비는 마음으로 멍 자국을 핥아나가고 있었다. 혁명전사는 인민해방에 복무해야 하고, 인민은 혁명투쟁에 복무해야 한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인민의 복무라는 것이 투쟁자가 미리 피한 위험의 희생물이 되는 것까지 말하는 것인가, 결코 그것은 아니다. 투쟁자의 복무의 마지막은 자아희생으로 완결되는 것이지만 인민의 복무는 선의의 협조로써 끝나는 것이다. 그것은 자각과 비자각의 차이이며, 능동과 수동의 차이인 것이다. 혁명을 자각한 자는 스스로에게 의무를 지운 것이며, 그 의무의 짐은 혁명을 성취했을 때 권리의 힘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인민은 자각의 의무를 스스로 지우지 않았으므로 혁명이 성취되어도 인민일 뿐이다. 인민은 혁명의 목적이며 바탕이되 수단일 수는 없다. 인민은 흐르는 물줄기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만 흐르고, 낮은 데를 만나면 스스로 그 높이를 높여 흐르고, 장애를 만나면 피해서 흐른다. 인민을 혁명의 수단으로 삼을 때 인민은 혁명적 존재가 아니라 생활적 존재다. 그러므로 인민의 복무는 생활을 침해받지 않는다는 보장 아래서만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인민의 수동성을 기회주의나 이기주의로 파악하는 혁명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혁명자가 아니다. 그래서 혁명은 외로움이 고통이라고 했다. 소화가 당한 고통은 인민의 복무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었다. 자신의 죄가 아니었으려면 소화가 자각된 혁명의 분자였어야 했다. 다시는 소화에게 이런 죄를 짓지 않으리라. 방으로 돌아와서 정하섭은 비로소 남자로 소생할 수가 있었다. 소화의 예사롭지 않은 뜨거움에 촉발되어 그의 남성은 거세게 불을 뿜어 올렸다. 소화의 알몸은 그대로 불덩어리였다. 그도 불덩어리가 되어 불덩어리 속으로 빨려들었다. 빨려 들어갈수록 뜨거워지는 불 속,깊은 혼미함, 더 깊어지는 혼미함. 그녀는 훨훨 타오르는 불길 속을 춤추고 있었다. 불길을 마시며 마시며, 그녀는 그때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신령님, 애를 배게 해주십시오. 땀이 범벅된 몸을 끌어안고 두 사람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등잔의 흐린 불빛이 그들의 알몸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설은 워디서 쇠셨는가요."
소화가 실오라기 같은 소리로 물었다.
"산에서"
"산?"
"지리산"
"멀기도 혀라. 설떡은 잡숫고요?"
"애들이나 먹는거지."
소화는 자신도 모르게 정하섭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아니, 그의 말이 끌어당겨 끌려간 것이다. 존대가 아닌 그의 말이 그렇게 정답고, 다정하고, 편안하고,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쭉 그리 말씸허시씨요."
"무슨 소리요?"
"그것이 아니고요, 말씸을 낮춰 허시랑께요."
소화는 그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반말을 했었소? 그거 미안허게 됐소."
"그것이 아니랑께요. 지는 낮춘 말이 훨씬 좋구만요. 정답고..."
소화는 입을 다물었다. 정하섭은 그때서야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들꽃 냄새가 스쳐갔다.
"그러지, 그럼."
"고렇게요."
소화는 더 가슴으로 파고들며 바르르 떨었다. 그 떨림이 정하섭의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내가 이 여자를 너무 목마르게 만들고 있구나, 그는 마음이 어두워졌다.
"근디, 허시는 일언 지대로 잘 돼가는가요?"
"소화,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안 시킬 테니까 우리가 하는 일에 관심 쓰지 말어."
"안되어라, 안되어라."
소화는 소리치듯 하며 그를 떠밀고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얼른 치마를 끌어다가 앞을 가렸는데, 그 얼굴이 금방 울 것 같았다.
"왜 그래, 소화."
정하섭이도 일어나 앉으며 이불을 끌어다가 아래를 덮었다.
"글먼 더시는 안 오시겄다는 말씸인디오."
소화의 목소리에 벌써 울음이 섞여 있었고, 붉은 입술과 그 언저리가 씰룩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야. 소화한테 죄 짓는 짓 다시 안하겠다는 뜻이지, 안 온다는 말은 아냐."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제라. 시키실 일 웂는디 지 겉은 년 보실라고 역부러 오실리 만무제라."
그것은 소화의 자학이면서, 자신의 심장을 정통으로 찔러오는 꼬챙이였다. 정하섭은 할 말이 없었다.
"지가 감옥에 갇혀 있음시로, 허시는 일얼 되작되작 생각혀봤구만이라. 무식헌 소견이라 세세헌 것이야 알 방도가 웂고, 시상 워떤 사람이고 천대 천시 안허고 공평하게 사는 시상을 맹그는 것은 일 중에 질로 잘허는 일이란 생각이 들고, 그런 존 일이먼 지 겉은 연도 허고 잡다는 맘이 생기드만요."
소화의 그 엉뚱한 말에 정하섭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래, 고문을 당하고 갇히고 하면서도 정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다니, 무섭고 겁나지 않아?"
"무섭고 겁나는 일이야 고비만 넴기면 되는 일이제라. 그라고, 그리 큰일 허는디 그만헌 고초야 따라댕기겠제라."
꼭 골수당원이 교육과정에서 하는 말을 한다 싶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이 혁명의식의 자각이 아니라 사랑이 매개가 된 감상의 산물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는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지 맘이 그렁께 지 겉은 것, 허시는 일에 끼주지는 안혀도 그전 맹키로 심바람을 시켜주시씨요. 더 영축웂이 헐 것잉께요."
"그러지."
"지 얼굴 보고 대답허시씨요."
소화는 또렷하게 말했다. 정하섭은 빙그레 웃으며 눈길을 들었다. 눈앞에 정색을 한 소화의 얼굴이 있었다. 지금까지 보인 태도는 소화답지 않은 면모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색한 얼굴을 보는 순간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알았다. 그건 가장 소화다운 면모의 변형이었던 것이다. 맨발이 시려운 줄도 모르는 바로 그 열정의 변형이었다.
"앞으로도 심바람 시켜주시시씨요."
"그러지."
"신령님 앞에 약조허실 수 있으신게라?"
"약조하지."
"고맙구만이라."
소화가 정하섭의 가슴에 쓰러져왔다. 정하섭은 소화를 끌어안았다. 종이기를 불사하며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이리도 갈망하는 여자. 종 같은 아내를 얻은 남자가 가장 행복한 남자라 적고 있는 불경이 아니더러도 그는 행복감 같은 것이 가슴에 넘치는 걸 느끼고 있었다. 정하섭은 새로운 들꽃 냄새에 휘말리며 욕정의 불꽃이 터져 오름을 느꼈다. 소화를 요 위에 눕혔다.
금융조합장 유주상의 집에서는 거창한 명칭을 내건 회의가 소집되어 있었다. "벌교, 보성지구 좌익척결 준비 위원회"가 그것이었다. 이 길이도 길고 내용도 엄숙한 명칭을 작명한 것은 집주인인 유주상이었다. 행정단위가 보성군 벌교읍이 엄연한데도 그는 멋대로 행정단위까지 바꾸어 벌교를 군으로 승격시켜 놓고 있었다. 그가 척결하고자 하는 좌익의 조직도 벌교군당 아래 보성읍당이 있는 것처럼 되어 있었다. 그 명칭 하나에 그의 성품이 여러모로 드러나 있었다. 벌교를 앞으로 끌어낸 것에서 약삭빠른 현실주의를, 길고도 거창함에서 허풍스런 권위주의를, 엄숙한 내용에서 음흉스런 저의주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돈을 만지는 사람답게 양지 지향적 현실감각이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는 한편으로 그에 못지않은 권력 욕구도 남모르게 감추고 있었다. 그 양면의 성취를 위해 그는 나름대로 주도면밀한 인생설계를 짜놓고 부단히 밀고 나아갔다. 그가 마흔이 안된 나이에 금융조합장 자리를 따내고, 봉변을 당해가면서까지 청년단장 자리를 차지한 것이 다 그 설계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꿈꾸고 있는 인생의 목표는 금융인으로서의 성공이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성공이었다. 그의 권력지향은, 금융조합에 몸 담고 있으며 돈이야 뜻한 대로 주무를 수 있지만 권력 앞에서는 꼼짝 못하는데, 정치인이 되면 권력과 돈을 한꺼번에 몰아 쥘 수 있다는 파악에서 비롯되었다. 정치가로서의 일차적 입신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었고, 청년단장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 기초 포석이었다. 회의라는 명목을 붙여 오늘 사람을 모은 것도 그러한 계획과 무관할 수 없었다. 그의 방에는 걸게 차린 술상이 놓여 있었다. 그 술상에 둘러앉은 사람은 최익달, 윤삼걸, 최익도였다. 안재길은 몸이 아프다며 오지 않았고, 김범우의 집에는 아예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유주상이 대상으로 삼은 것은 모두가 염상진한테 쌀가마니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사람들이었다.
"오늘 이렇게 모신 것은 지난번 일로 놀라시고 속들 상하신 걸 위로할 겸 저 좌익들을 뿌리 뽑을 대책을 강구하자 그런 뜻이 있습니다. 위로라면 다소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설 명절이 끼어서 일부러 날짜를 늦춰 잡은 겁니다. 그리고 남원장으로 모실까도 생각했었습니다만 계집들이 새로 온 것도 아니고 그게 그 타령인데다가, 오늘 나눌 얘기가 중요한 얘기라서 신중을 기해 집으로 모신 겁니다. 편히들 드시면서 좋은 말씀들 나누십시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점잔을 빼가며 유주상은 주인으로서 한마디를 했다.
"거 조합장이 벌교사람도 아님스로 자리럴먼참 맹글어뿐께 우리넌 당최 미안시럽고 면목이 웂어 얼굴을 들 수가 웂소. 하야간에 고마운 일이고, 우리가 진작에 요런 자리럴 맹글어서 빨갱이 문제럴 다바고 들어야 혔을 것이요."
윤삼걸이가 말을 받았다.
"말을 허자고 멍석 깔았응께 말을 안헐 수가 웂은 일인디, 그 심재몬가 사령관인가 허는 물건은 대체 멀 허고 앉었는 제겐이여. 염가눔이 정광산에 진을 치고 앉었는 것은 우리덜 머리꼭대기에 불화로가 얹친 것이나 또 겉은디, 고것덜얼 팍팍 문질러뿌러 씨럴 몰리든지, 고것덜도 빈대가 아니라 사람잉께 그리 못허겄으면 조계산이고 지리산으로 몰아내얄 것이 아니냐 그말이여. 근디 그 제겐 허고 자빠졌는 쌍통머리는 머냔 말이여. 늘어진 붕알 맨지작이는 눔맨치로 태평치고 있다가 염가눔이 뻗대고 대들먼 당허고 당허고 험스로 포드시 응대허는 시늉만 허고 있다 이거시여. 그 자석 믿고 우리가 워처크름 두 발 편히뻗고 자겄소."
최익달이는 뜸도 들일 것 없이 본격적으로 치고 나왔다. 정 사장 일을 처리하는 것을 계기로 심재모에 대한 감정이 근본적으로 뒤틀렸던 그는 이번 일을 당하고는 아예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그날 밤 당한 일을 생각하면 그는 정말 불알이 오그라 붙는 것을 느꼈다. 샅에 찬바람이 휘익 일어나며, 최익달의 노골적인 말은 유주상이가 바라고 있던 바였다.
"예에, 바로 그 점이 문젭니다. 적을 무찌르자면 적극적으로 공격을 해야지, 적이 공격해오기를 기다리며 수비만 해서 언제 좌익의 뿌릴 뽑겠습니까."
유주상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쪽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우린 죽은 목숨이나 진배 없지요. 이리 살아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염상진헌테 고마워해야 할 일이오. 그러니 이게 말이 됩니까. 쌀을 도로 찾은 것도 그래요. 그게 어디 심재모 힘입니까. 염상진이가 힘이 드니까 한곳에 쟁겨 놓아서 찾은 것이지, 만약 졸개들이 많아 그 쌀을 각단지게 가난헌 사람들 집에 풀었드라먼 무슨 수로 도로 찾았겠어요. 그러니까 심재모가 그날 밤 총질을 해댔지만 그건 말짱 헛방만 쏴질러댄 허깨비 장난이었다 그겁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심재모는 마땅히 추궁당해야 합니다."
세무서장 최익도의 말은 윤삼걸이나 최익달에 비해 아주 분석적이고 논리적이었다.
"거 자네, 말 한분 조단조단 야물딱지게 잘혔네. 그려, 추궁혀야 혀고말고."
최익달이 자기 동생 자랑이라도 하듯 윤삼걸과 유주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먼, 요 벌교바닥에서야 최씨, 윤씨 가문 빼먼 머 보잘것이 있소."
윤삼걸은 자기네 가문까지 높이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 기준이 농지 소유에 따른 것이 빤한데 윤삼걸은 김씨네나 안씨네는 깔아뭉개고 있었다.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놓칠 유주상이가 아니었다
"그러믄요, 금융조합도 두 성씨가문 덕에 운영되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런데, 우리의 적인 빨갱이를 척결함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책이 무엇이며, 심재모를 추궁하자면 그 방법이 무엇인지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유주상은 유연하게 이야기를 제 길로 끌어들였다.
"추궁이고 머고 다 션찮은디, 아조 싹 바까치워서 우리럴 잘 받듬시로 빨갱이도 쥐잡데끼 씨언씨언허게 때려잡을 괭이맹키로 싸나운 사람얼 불러딜일 방도를 세웁시다."
윤삼걸의 열 받친 말이었다. 그 앞 뒤 없이 막가는 말에 당황한 건 유주상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일을 도모하자고 오늘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었고, 현실적으로 그런 방법이 실현될 가능성도 희박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동조가 있기 전에 빨리 방향을 틀어야 했다.
"아, 예, 윤회장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합니다. 그렇게 돼야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마음 편안하게 일할 수가 있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마음 편안하게 일을 해야 이 나라가 부강하게 잘되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허나, 빨갱이라는 것들이 우리 벌교에만 들끓는 것이 아니고 저 제주도부터 장성, 진주까지 전라남도 전주, 남원, 고창, 무주로 해서 전라북도반 이상, 하동, 진주, 합천으로 한 경상북도 반, 이런 식으로 따져놓고 보면 거의 온 나라가 지금 빨갱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허니 어딘들 급하지 않은 데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군대라는 것은 일반 행정조직과는 달라서 어느 특정지역의 요구가 잘 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형편이 마땅치 않더라도 그 범위 내에서 방법을 강구해야 되지 않을까합니다."
유식함을 내보여 상대방들 기도 죽일 겸 자기가 목적하는 대로 이야기를 몰아붙일 겸 해서 유주상은 그의 생리대로 그야말로 거창하게 의견을 피력하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허어 참, 유 조합장은 금융합장으로 앉었기는 아깝소. 아는 것 많고, 말 잘허고, 똑똑허기가 우리 익도 동상허고 저울에 달면 그 눈금이 서로 쉴락말락 헐, 도지사 깜덜이여."
최익달은 단순한 성품 그대로 순진한 감탄을 마지않으며,
"이약허든 짐에 유 조합장이 아조 그 방도꺼지 말해봇씨요."
하고는 술잔을 기울였다.
"아닙니다, 최 서장님부터 말씀하시지요. 분명 좋은 의견이 있으실 텐데요."
유주상은 영리하게도 작은 위험까지 살짝 피해 섰다. 찬물도 상이라면 좋더라고, 최익달의 말이 아무리 입 끝에 발린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와 최익도를 나란히 비교해서 도지사감이라고 한 것은 열 번 들어도 싫은 말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칭찬을 듣고도 최익도는 자기만큼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이 차이가 서너 살이나 났던 것이다. 유주상은 최익도를 대접하는 척 발언의 기회를 넘겨주었다.
"글쎄올시다. 지금까지 일만 가지고 심재모를 갈아친다는 건 어려운 게 사실일 것이고, 심재모를 불러다 앉혀놓고 지금까지 공격만 당해온 잘못을 따지고, 앞으로 공격을 당할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게끔 압력을 가하자는 겁니다."
"아아, 역시 최 서장님이십니다. 제 생각도 바로 그것입니다."
유주상은 허풍스럽게 손바닥까지 맞 때리며 동의를 표하고는,
"그런데 말씀입니다, 우리가 할 말의 골자는, 소극적으로 수비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라 이것인데, 심재모가, 그것도 작전이니 간섭하지마라, 이러면서 우리 공박을 피하려고 하기가 십상입니다. 심재모가 그렇게 나오면 우린 할 말이 없어지게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 최서장님 의견에다가, 심재모가 그따위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짜야 할 것이다 하는 제 의견을 첨가합니다."
그는 정종 잔을 꼴깍 비웠다. 목적한 바를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는 기분이 느긋해졌다.
"맘 급헌디 고것이 먼저 싸게싸게 말혀봇씨요."
윤삼걸이 담배를 잉끄려 껐다.
"아까 최 서장님이 압력을 가하자고 했는데, 압력을 가하자면 이쪽 힘이 크면 클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유주상은 다 따놓은 감 먹을 것 서두를 게 없다는 기분으로 좌중의 반응까지 확인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대답으로 당연하다는 동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쪽 힘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벌교 유지들만 모일 것이 아니라, 벌교가 중심이 되어 보성, 조성 유지들까지 단합시켜 하나의 단체를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니까 단체 명칭을 "벌교, 조성지구 좌익척결 위원회"같은 것으로 내걸고 말입니다. 좌익을 없애자는 단체는 생길수록 나라에서도 환영하고 하니까 말입니다."
"아아, 고것 한분 쪼오쏘오!"
]윤삼걸은 기분이 좋거나 화가 나면 하는 버릇대로 술상을 치며 소리쳤다.
"어허, 과시 유 조합장은 달브당께로."
최익달은 양쪽 입꼬리가 처져 내리며 끄덕였다.
"단체라면 이적 구성이 문제겄지요?"
최익도는 한 발 건너뛰고 있었다. 너에게 주걱을 빼앗길 수가 없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표시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최익도는 이미 유주상의 적수일 수가 없었다.
"그거야 물론입니다. 덕망 있고 능력 있는 유지들이 자리를 맡아 명실상부한 최고의 단체를 만들어야겠지요. 그러니까, 모두의 찬동에 의하여 이 자리를 "벌교, 조성지구 좌익척결 준비 위원회"로 하고, 벌교, 보성, 조성을 총괄하는 본부와 그 아래 각 지역단위위원회를 두는 겁니다. 그리고 세 분 중에서 본부위원회 위원장 직책과 벌교위원회 위원장 직책을 맡으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유주상의 입에서 감투가 들먹여지자 벌써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한 세 사람은 그의 말이 끝나게 되자 더 긴장의 빛을 드러냈다. 특히 최익도는 긴장을 한 것만이 아니라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정작 유주상 본인이 차지할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근디, 우리야 의논혀서 그리 헌다 허고, 유 조합장 자리넌 워치케 되얐어?"
최익달이가 최익도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이렇게 물었다.
"저야 벌교가 아직은 타향이고 나이도 제일 연하고 하니까 궂은 일이나 심부름할 자리나 하나 정해주시면 맡기로 하죠, 뭐. 그런데 말입니다, 아까 본부에 위원장이라고만 했는데, 거기에 부위원장이 빠졌습니다. 지역위원회에는 필요 없을지 몰라도 본부에 부위원장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유주상은 세 사람을 위해 세 개의 감투를 만들어냈다.
"이거 뭐 돈 생기는 것도 아닌데 위에서부터 연장자 순으로 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익도가 던진 말이었다.
"어엉, 고것 쫗네, 쪼와. 그리허세."
윤삼걸이 쫓기듯 다급하게 말하며 희멀건 하게 웃고 있었다. 최익도의 뜻은 제 형을 위원장에 앉히려는 것이었고, 그 말은 바로 자기를 향해 한 것임을 윤삼걸이 모를 리 없었다. 친형제는 아니라도 형제인 데다가, 세무서장의 말이었던 것이다.
"그리하먼, 유 조합장 자리넌?"
최익달이 술기운만이 아닌 불콰해진 얼굴로 유주상에게 물었다. "저야 뭐, 아까 말씀드린 대로 궂은 일 하는 총무자리나 맡기로 하지요."
"그렇제, 그렇제, 그 자리가 있구만. 인자 빨갱이 뿌랑구 뽑게 되얐다. 자아, 우리 항꾼에 술 한 잔썩 쭈욱허니 합시다."
최익달의 말에 따라 모두는 술잔을 들었다. 모든 것은 유주상의 뜻대로 끝이 났다. 그가 내세운 좌익 척결은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목적이었다. 그가 필요로 한 것릉 벌교, 보성지구 유지들의 자연스런 규합이었다. 그 규합을 위해 단체가 필요했고, 그 조직을 통해 유지들과 자연스런 접촉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벌교, 조성지구는 바로 국회의원 선거구였던 것이다. 그는 두 번째 목적도 물론 누구 못지않게 중대하게 생각하는 터였다. 그 두 가지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자리가 총무였다. 모든 조직의 총무라는 자리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능력에 따라 실권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실권을 손에 쥐게 되면 유지들과의 접촉이 원활하게 되고, 총무로서 뒤로 물러나 앉아 있으면 염상진의 표적이 되는 것도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열흘이 넘었는디도 워째 염가눔이 잠잠허시?"
최익달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닭장에 장닭이 홀레붙는 것이 일이데끼 그눔 허는 일이 죽으나 사나 총질허는 것인디, 워디가 워쩌크름 총질얼 헐끄나 허고 종그는 참일 것이요."
윤삼걸이가 정떨어진다는 듯 짭짭 입맛을 다셨다.
"그자식 그거, 그 풍신에 그 머리로 공산당만 안했으면 좀 좋아. 지눔 좋고, 우리 좋고, 참 골칫거리요."
최익도가 혼잣말처럼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김범우란 사람, 아니 김씨 집안이 좀 문제 아닙니까? 쌀을 안 찾아가 다른 분들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것도 뭐한데, 그 쌀로 결국 떡을 만들어 배급하는 바람에 더 난처하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 행위가 염상진의 뜻에 동조한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 그걸 내가 법으로 얽어볼려고 아무리 머리를 짜 봐도 법에는 안 걸리는 일이거든요. 거 참 쾌씸해서."
유주상의 말이었다.
"그눔의 집구석이 옛적부텀 삐까닥혔소. 김범우란 눔도 한때 빨갱이 사상을 가졌고, 지끔도 허는 행투로 보먼 뿔근 물이 붉으딕디그리헌디, 법이란 것이 틀려묵었소. 빨갱이럴 잡자 혔으먼 고런 눔덜부텀 타작마당 검불 쓸데끼 싹싹 잡어다가 처박어야 한다. 그말이요. 그래야지 아랫것들도 갑묵고 꼼지락을 못헐 것인디, 핫바지맹키로 그냥 많이 몰려든 것 아니겄소. 김범우란 놈도 실은 염가눔하고 내통허는 빨갱인지도 모를 일이요. 우리 성님이 사람 보는 디는 귀신인디, 무담씨 고눔을 잡아가두게는 안혔을 거인디 말여..."
최익달이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가 이 나라 빨갱이를 다 어쩔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우리는 우리 사는 데만 단속하면 되니까, 오늘 만든 단체로 심재모를 밀어붙여 염상진을 죽이는 수밖에 없어요. 그눔을 죽여 소화다리에 널어버리면 우린 두 다리 뻗고 편케 잘 수 있어요."
최익도는 결론 내리듯 말했다.
"맞는 말이시."
"오늘 참 잘 됬네그랴"
"한잔씩 쭈욱 드십시다."
한반도의 겨울기온은 삼한사온이라고 하였다. 남도지방에서는 그 자연의 변화가 신기할 정도로 잘 지켜져 나갔다. 마치도 무슨 법칙이나처럼, 사흘이 추우면 나흘이 따스하고, 그 신비로운 번갈이로 겨울은 깊어갔고, 그 번갈이를 따라 겨울은 한 꺼풀씩 엷어져갔다. 그 이음목이 음력설이었다. 절기의 변화는 하늘에서 오되 땅이 먼저 깨닫고, 살아 있는 것들 중에서는 지심에 목숨을 대고 나무들이 제일 먼저 깨달음을 다시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 음력설을 고비로 절기가 달라졌음을 서둘러 알리는 것은 동백이었다. 음력설을 넘기면서 동백나무들은 서로가 다툼이라도 하듯 이 가지 저 가지에 선연한 핏빛의 꽃들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초록빛 잎사귀들에 떠받들려 매운 추위 속에서 피어나는 핏빛으로 붉은 꽃. 동백 잎들은 제각기 사이사이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초록빛 속에서 선홍의 모습을 더욱 붉게 치장했다. 동백나무는 무리를 지어 사는 까닭에 가지마다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핏빛의 꽃 무덤을 이루어놓았다. 앞서 핀 꽃은 쉬 지지 않고 아랫가지의 봉오리가 벙글기를 기다리므로 선홍빛 꽃숲은 오래도록 찬바람에 시달리는 처연한 외로움이었다. 누구나가 동백꽃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느낌은 사람도 저어하는 추위 속에 피는 까닭이리라. 아침 안개에 묻힌 동백의 핏빛 꽃들은 안타까운 서러움이었고, 흩날리는 눈발 속의 동백의 핏빛 꽃들은 사무치는 한이었다. 동백은 남도지방의 꽃이었다. 동백꽃은 질 때도 그 빛깔도 모양새도 변하지 않은 채 꽃잎 하나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꽃술만 남겨놓고 본래의 모양 그대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마치도 핏빛의 눈물을 떨구는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동백꽃을 한 많은 처녀의 넋의 희생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또는, 한 많은 청상의 환생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동백이 그 꽃을 피워 올리는 것은 정월 대보름 임시부터였다. 읍내의 마을 여기저기에 동백꽃이 무더기무더기 피어 있었고, 성급한 아이들은 보름을 이삼 일 남겨둔 대낮부터 불붙는 깡통을 빙글빙글 돌려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보름을 이틀 남겨놓고 계엄사령관 이름으로 불놀이 일체를 금한다는 조처가 각 마을을 통해 집집마다 전해졌다. 어두워진 다음에 아이들이 불 깡통을 돌려서도 안 되고, 만약 그것을 어기면 그 아이의 부모를 구속한다는 것이었다. 그 조처는 물론 보름놀이의 술렁거림을 틈타 염상진네가 저지를지 모를 어떤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강력한 조처가 내려진 것이나, 누구도 건의 한마디 못하고 그 조처를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루 전에 일어난 큰 사건 때문이었다. 장흥경찰서가 습격을 당해 경찰이 반이나 죽었는데, 그 주력병력이 염상진네였다. 도당의 지시를 받은 염상진은 오판돌과 함께 백 명을 이끌고 지원공격을 나갔던 것이다. 설이 차분하게 새해를 맞는 명절이라면, 보름은 기운차게 새해를 시작하는 명절이었다. 보름을 기점으로 농사절기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정월 대보름이 달의 잔치이면서 또한 불의 잔치인 것은 농사의 시작을 의미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어른에 이르는 불놀이는 재미만으로 하는 명절맞이 놀이가 아니라 농사의 해충을 방제하는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풍년을 기원하는 불놀이가 곁들어지는 것이다. 해마다 벌교 사람들은 오곡밥을 먹은 다음 마을마다 자기네 뒷산으로 올라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 올리며 달맞이를 했다. 달이 둥실 솟아오르면 그 불길을 기운발이 센 총각들의 오줌으로 껐고, 사람들은 다투어 타다 꺼진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집어 들고 산을 내려갔다. 그 나뭇가지들은 처마 밑에 걸리거나 꽂혀 일 년 액운을 막아내는 신주 노릇을 했다.
눈에서 별이 오락가락하도록 아랫배에 힘을 넣어 모닥불을 끈 총각들은 그대로 산에 남아 돌싸움할 준비를 했다. 이웃마을 총각들과 돌팔매질을 해가며 서로의 산을 빼앗으려고 다투는 놀이였다. 총각들이 떼 지어 와와 소리 지르며 돌팔매질을 하는 것은 꽤나 위험스런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러 머리가 터지거나 이마가 깨져 된장을 붙이는 일은 있어도 돌에 맞아 죽은 총각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 힘겨룸은 어느 마을이 농사를 잘 짓느냐 하는 겨룸이었고, 그 해에 장가를 가느냐 못 가느냐 하는 겨룸이었다. 총각들이 돌싸움을 벌이는 동안 처녀들은 지신밟기와 달맞이를 하는 것이다. 돌싸움에 져 산을 빼앗긴 총각들은 마을에 흉작이 들게 했다고 어른들의 야단을 맞았을 뿐만 아니라 기운 없는 남자들로 취급되어 처녀들의 외면을 당했다. 처녀들은 지신밟기로 땅의 음기와 달맞이로 하늘의 음기를 흠씬 받아, 임신을 했다 하면 모두모두 아들을 낳을 몸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년에는 그 푸짐한 보름놀이들을 하나도 즐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아이들은 제 나름으로 정성을 다해 구멍을 뚫은 깡통을 빼앗기고 방에 갇혔고, 총각들은 투덜거리며 사랑방을 차지를 했고, 처녀들만 몇몇씩 모여 앉아 말없는 속에 달을 바라다보았다. 정월 대보름의 밤은 적막 속에 깊어가고, 둥글고 둥근 달은 외로운 걸음을 서산으로 옮겨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