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아부지는 얼굴도 몸도 뻘건 디는 하나또 웂는디 워째 사람들은 아부지보고 빨갱이라고 헐까?
북쪽 징광산 줄기를 넘어온 바람이 낙안 벌을 달음박질쳐 포구로 몰려 들고 있었다. 썰물 진 포구에 가득 찬바람은 갈 숲을 성가시게 흔들어대고, 물살을 못 견디게 괴롭히며 선수머리로 빠져나갔다. 거친 바람결에 시달리는 갈 숲에서는 마르고 억센 잎들이 서로 비벼대 서걱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바람이 심할수록 날카로워지고 음산해지는 그 소리는 깊은 병을 앓는 신음소리 같기도 했고, 한스런 가슴앓이를 못 견뎌하는 여인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바람이 센 어두운 겨울밤이면 그 소리는 유독 치렁치렁하게 머릿단을 풀어 포구를 넘쳐났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 소리는 바다에 빠져 죽은 혼령들이 추위에 쫓겨 뭍으로 올라오며 떠는 소리라는 말이 퍼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두운 겨울밤 방죽 길을 걷는 사람은 드물었다. 갈대의 마른 꽃술들은 잎들보다도 몇 갑절 심하게 바람을 타고 떨었다. 갈 숲을 뒤흔든 바람은 잇따라 수면을 거칠게 핥아댔다. 바람에 부대낀 물살은 잘게 쪼개지고, 서편으로 기웃한 햇살이 그 물 조각들에 부딪쳐 수없이 많은 금가루를 뿌렸다. 수면이 금빛으로 반짝거림에 비해 거무튀튀한 색깔의 뻘밭은 빈 운동장처럼 넓고 썰렁하게 펼쳐져 있었다. 여름 뙤약볕 아래 그 많던 꽃게도, 크고 작은 바닷벌레도, 발이 수 십 개 달린 갯지렁이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추위를 피해 뻘 속 어딘가로 숨어든 것이었다. 뻘밭 여기저기에 뚫려 있는 빠끔빠끔한 구멍들이 바로 꽃게의 집이었다.
덕순이와 광조는 철도를 넘어 방죽 길을 걷고 있었다. 광목저고리에 검정색 몽당치마를 입은 덕순이는 단지를 안고 있었다. 속옷을 입고 버선까지 신기는 했지만 속옷이 짧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속옷과 버선목 사이로 장딴지가 얼핏얼핏 드러났다. 드센 바람결에 단발머리와 몽당치마가 어지럽게 나부꼈다. 덕순이를 뒤따라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광조는 꾀죄죄하게 때가 낀 수건으로 귀를 싸매고 있었다. 일본 군복을 뜯어 만든 광조의 옷은 한복도 아니고 양복은 더구나 아닌 얼치기였다. 재봉틀이 있을 리가 없는 죽산댁이 모양새야 볼 것 없이 추위막음만을 생각해서 손수 지어 입힌 옷이었다. 둘이는 참게를 잡으러 가는 길이었다. 몸살을 며칠째 앓고 있는 죽산댁은 고열에 시달려 입맛까지 완전히 잃고 있었다.
"진간장에 푹 담군 참게다리나 씹으면 입맛이 돌아슬란지, 원...“
죽산댁은 밥상을 밀치며 무심코 말했고, 덕순이는 어머니 몰래 참게를 잡으러 나서게 되었다.
"당아 멀었는가?"
광조가 빽 소리를 질렀다. 덕순이는 얼른 뒤돌아섰다. 벌써 두 번째 하는 투정이었다.
"쪼깐만 더 가먼 된다. 다리 아푸냐?"
심통이 난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덕순이는 온정스럽게 말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까칠한 얼굴에는 목소리만큼 따스한 웃음이 담겨있었다.
"아까도 쪼깐, 또 쪼깐, 나 발 아퍼 죽겄단 말이여어!"
광조는 두 발을 굴러댔다.
"인자 참말로 쪼깐만 가먼 돼. 손잡고 싸게 가자."
덕순이는 동생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참말이여?"
"참말."
광조는 씨익 웃으며 덕순이의 손을 잡았다. 둘이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똑 엄니 한숨맹키로 길다."
광조가 불쑥 말했다.
"머시가?"
덕순이가 동생을 쳐다보았다.
"방죽 말이여."
"방죽이 엄니 한숨맹키로 길어?"
덕순이는 의아해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방죽 길은 끝없이 뻗쳐 있었다. 길고 길게 뻗어나간 방죽 길은 끝이 선수머리에 닿아 있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지만 거기까지 걸어가 본 일은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거기까지 가볼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 멀고먼 길을 걸어갔다가는 다리에 힘이 빠져 다시 되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아이들은 겁먹고 있었다. 동생은 어째서 어머니의 한숨을 저 방죽 길처럼 길다고 했을까. 어머니가 밤낮없이 내쉬는 한숨을 이어놓으면 방죽 길만큼 길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학교에도 못 들어간 쪼깐헌 것이... 덕순이는 그런 생각을 하는 동생이 갑자기 철 들어 보이기도 했고 건방지게 느껴지기도 해서 입을 삐죽였다.
"그려, 엄니 한숨이 방죽보다 더 길란지도 모르제."
덕순이는 동생의 손을 꼭 쥐었다.
"엄니 한숨은 아부지 부르는 소린디, 아부지는 그 소리 들을랑가?"
"하먼, 아부지가 누군디. 다 듣겄제."
"글먼 아부지넌 워찌 대답허는가? 아부지도 한숨 쉴까?"
"아녀, 남잔디. 원체 남자는 짜잔하게 한숨 쉬는 것이 아니여. 그런 디다가 아부지넌..."
덕순이는 그만 말을 꿀꺽 삼켰다. 하마터면 '아부지는 대장인디' 할 뻔했던 것이다.
"그런디다가 아부지는 위쨌다는 것이여? 워째 말얼 허다 만가?"
광조가 누나를 올려다보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아녀, 아녀, 누가 듣니디 아부지 이약 허지 말어."
덕순이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말해다.
"누나 니넌 바보 빙신 겁보여. 여그 방죽에 순사가 있냐, 군인이 있냐. 사람은 우리 둘뿐인디 워째 아부지 이약 못허게 허는 겨."
덕순의 손을 뿌리친 광조는 목청껏 소리치고 있었다.
"니 엄미 말 잊어뿌렸냐!"
"알어, 알어, 다 알아.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들은께 입 놀리지 말란 말 다 안단 말이여."
광조는 계속 소리 지르며 숨을 씨근거렸다.
"다 암스로 워째 그러는겨."
"여그는 쥐도 새도 웂이고 바람뿐이란 말이여. 우리가 아부지 이약 아무리 배가 터지게 혀도바람에 다 날라가뿐단 말이여."
아, 정말 그래! 덕순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시리게 맑고 푸른 하늘이 넓고 넓을 뿐 바람은 보이지 않았다. 덕순이는 옆얼굴을 간질이며 나부끼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다가 문득 느꼈다. 나 여기 있어. 바람이야. 무슨 이야기든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 해. 멀리멀리 날려 보내 줄 테니까. 머리칼을 날리고 있는 바람의 속삭임이었다.
"약속 걸어. 여그서만 말허겄다고"
덕순이는 새끼손가락을 세워 동생 앞에 내밀었다. 광조는 누나의 새끼손가락에 자기의 새끼손가락을 걸며 씨익 웃었다.
"오늘 일 엄니헌테도, 세상 누구헌테도 비밀인 것잉께. 알겄어?"
광조는 누나의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는 손을 잡고 타박타박 걷기 시작했다. 포구에는 물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갈 숲만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아부지는 얼굴도 몸도 뻘건 디는 하나또 웂는디 워째 사람들은 아부지보고 빨갱이라고 할까?"
덕순이는 대답이 난감해졌다. 공산당의 이름이 빨갱이인 줄만 알았지, 어째서 빨갱이라고 하는지는 생각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공산당 이름이 빨갱이제."
"글먼 성이 공산당이고"
"금메...?"
덕순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디 워째 순사나 군인덜 이름이 파랭이가 아녀?"
"고런 걸 나가 워치께 아냐."
덕순이는 그만 짜증스럽게 내쏘았다.
"학교 댕김스롱도 고런 것도 멀러?"
"학교서는 고런 것 안 갤친께 모르제."
"치이, 니 공부 잘헌다는 것 순 그짓말이여. 다 넘덜 시험지 보고 써서 점수 잘 받은 것이제."
덕순이가 동생의 손을 홱 뿌리치며 걸음을 멈춰 섰다.
"니 참말로 분 지를껴?"
동생을 노려보고 있는 덕순이의 기세는 안고 있는 단지를 곧 내동댕이칠 것만 같았다.
"누나는 고런 걸 다 안 줄 알었는디..."
광조는 눈을 내리깔았다. 금방 기가 꺾이는 동생을 보자 덕순이는 마음이 짠해졌다. 알고 싶은 것을 속 시원하게 알 수 없게 되니까 억지 소리를 한 것이었다. 동생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제대로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뉘우쳐졌다.
"광조야, 고런 생각 다 잊어뿌러라. 고런 것은 어른들찌리 허는 일잉께."
덕순이는 동생의머리를 쓰다듬었다. 광조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덕순이는 동생의 손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동생은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없이 걷기만 했다. 덕순이는 돈이 없어 약도 지어다 먹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다리마다에 털이 숭숭 나고 눈이 툭 불거진 참게를 열 마리쯤 잡아 단지에 담아갔으면 싶었다. 한번 잘못 물리면 아이들 손가락은 잘려나간다는 크고 억센 집게발이 겁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까짓 것쯤, 하고 마음을 사려먹고 있었다. 덕순이는 참게를 잡아본 적이 없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어머니를 따라 참게잡이를 구경했을 뿐이었다. 참게는 바닷물 반대편인 개울둑물 가까이에 굴을 파고 살았다. 어머니는 비탈진 개울둑에 거꾸로 엎드려 곧 개울물에 처박힐 것 같은 아슬아슬한 자세로 참게를 용케도 잘 잡아냈다. 큰 것은 장에 내다 팔아 돈을 만들었고, 작은 것들만 끓인 간장에 담갔다. 참게 한 마리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다 먹을 수 있었다. 참게는 짜면서도 고소한 맛이 침을 스물거리게 했다. 앞쪽 포구 위에 나란히 줄을 선 기러기떼가 날아가고 있었다. 끼룩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물오리 날르는 것 봉께로 저녁이 다 되얐는갑다."
덕순이는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해는 부용산 쪽으로 꽤나 기울어 있었다. 덕순이의 걸음은 빨라졌다.
"빙신 겉은 물오리!"
광조가 기러기 떼를 향해 침을 뱉었다.
"물오리가 워째서?"
"저것 우는 소리 들으머너 더 배 고푸고, 눈물 날라고 헝께 그렇제."
"니 배는 항시 고픈 배고, 워째 눈물이 날라고 허냐?"
"아부지 보고 잡은 생각나게 헝께 그렇제."
광조는 퉁명스러웠고, 덕순이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말이 막혔다. 동생은 계속해서 아버지만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나, 물오리들도 순사고 빨갱이고 있으까?"
"물오리가 사람이간디? 물오리는 그냥 물오리제."
"나 물오리가 되얐으먼 좋겄다."
"머시여? 물오리?"
광조는 아무 대꾸도 없이 한결 멀어진 기러기 떼를 향해 먼 눈길을 보낸 채 발만 옮겨놓고 있었다. 덕순이도 묵묵히 걷기만 했다. 동생은 싸움만 야무지게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덕순이는 동생의 손을 꼭 쥐었다. 동생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덕순이는 언뜻 겁이 났다. 그 꼼지락거림이 또 무슨 엉뚱한 말을 물을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꼭 거짓말처럼 그때 동생이팔을 당기며 걸음을 멈추었다.
"누나, 나 똑 하나만 허고 잡은 일이 있는디."
광조가 덕순이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또 무신 뜽금 없는 소리 헐라고 그러냐?"
덕순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여그 아무도 웂은 디서 아부지럴 목 터지게 불러보고 잡은디..."
누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광조의 눈은 간절했다.
"그려, 나랑 항꾼에 허자."
덕순이는 안고 있던 단지를 마른 풀섶에다 내려놓으며 활기차게 말했다.
"근디 말이다, 읍내럴 보고 소리 질르먼 안돼야."
덕순이는 읍내를 후딱 돌아보며 말했고,
"하먼 순사가 들으먼 워쩌라고."
광조가 재빨리 대꾸했다.
"하나, 둘, 셋 허먼 항꾼에 허느 겨. 자아, 하나아, 두울, 셋!"
아부우우지이이이---선수머리를 향해 선 덕순이와 광조는 허리가 차츰차츰 구부러져 반으로 접힐 때까지 목청을 뽑고 있었고, 바람은 둘이의 긴 외침을 멀리멀리 실어갔다.
외서댁은 뉘엿뉘엿한 석양빛을 등에 논둑길을 걷고 있었다. 머리에는 묵직한 느낌의 보퉁이를 이었고, 등에는 아이를 업고 있었다. 끼니 끓일 것이 없어 친정에 눈치걸음을 해서 쌀이며 잡곡을 얻어 가는 길이었다. 업은 아이를 받쳐 잡은 한쪽 손에는 황홍색 치자가 달린 가지묶음이 들려 있었다. 친정집 부엌문 옆에 탐스럽게 걸려 있는 묶음 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가지 몇 개를 꺾어 지푸라기로 묶었던 것이다. "고것얼머 헐라고 그러냐?" 어머니는 무심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외서댁의 가슴에 서러움이 복받치게 했다. 어머니의 말은, 끼니 끓일 것도 없는 신세에 치자물 들여 옷 해 입기는 틀렸는데 그것을 가져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뜻으로 들렸던 것이다. 머리에는 곡식 말을 이고 뒤에는 아이까지 매단 거추장스러운 몸가짐으로 치자가지를 꺾으려고 비척거렸던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는 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햇볕에 마를수록 선연한 황홍색을 피워내는 치자들이 무슨 꽃다발인 양 벽에 거꾸로 걸려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것을 꺾고 싶은 욕구가 불현 듯 가슴에서 일렁였던 것이다. 그건 어쩌면 처녀 적의 그리움이 되살아나서였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곡식을 얻으려 친정에 눈치걸음 하는 무색함을 다소나마 감추려 했음인지도 모른다. 남달리 큰 젖가슴이 근심거리이던 처녀시절에 그녀가 유달리 좋아했던 꽃이 봉숭아와 치자 꽃이었다. 꽃이라면 어느 꽃이나 다 곱고 예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꽃이라고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눈바람 속에서 제일 먼저 피는 진홍빛 동백꽃에서부터 찬바람이 비쳐서야 꽃망울을 여는 보랏빛 들국화까지 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동백꽃은 한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었으나 그 나뭇잎이 너무 억세어서 싫었고, 작약은 흐드러진 큰 꽃송이에 넘치는 붉은 빛이 눈 시리게 고왔지만 어딘지 거만스러운 것 같아 친해지지 않았고, 연보랏빛 수선화는 꽃 모양도 특이하고 곧게 뻗은 진초록 잎새도 정갈해서 좋았지만 꽃이 너무 연약해 빨리 지는 것이 아쉬웠고, 진하게 붉은 칸나의 선명함도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지만 턱없이 큰소리로 웃어대는 실없는 가시네같이 마음에 닿지 않았고, 보랏빛 잔 꽃송이가풍성한 덩이를 이루는 수국은 먼발치에서 보면 구름덩이 같아 가슴을 설레게 하지만 가까이가면 쿠린 느낌의 향기가 역해 마음을 돌리게 했고, 마치 와와 소리치기라도 하는 듯 무더기로 일시에 피었다가 꽃샘바람을 타고 숨 자지러지도록 나부끼는 벚꽃의 그 지향 없는 슬픔이 가슴 저리게 했지만 일본 놈들의 꽃이라서 마음이 앞섰고, 땅바닥에서 반 뼘도 자라 오르지 않고 연분홍 꽃을 피우는 채송화의 그 앙증스러움도 귀여웠으나 그건 예뻐할 수는 있어도 이쪽 마음을 담을 수는 없었고, 장닭의 붉은 볏을 빼박은 맨드라미는 친근한 꽃이었지만 계절이 바뀌어도 시들거나 변할 줄을 모르는 그 둔감이 지루했고, 보랏빛 꽃망울을 열어 가을을 장만하는 것 같은 들국화는 그 외로움이 마음을 끌어당겼지만 한편으로 그 외로움이 앞으로 팔자가 될까 두려워 뒷걸음치게 했다. 다른 꽃들에 비해 그다지 곱지도 않고 탐스럽지도 않은 봉숭아를 좋아하는 까닭은 아무래도 손가락에 물을 들이는 꽃이어서일 것이었다. 모기가 극성을 부리는 한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봉숭아 꽃물이 진해지면 그녀는 손가락에 물들이는 것을 일삼아 했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나서 갓 피어난 싱싱한 꽃을 따고 시디신 백반을 섞어 장독대 가장자리 돌에 꽃잎을 콩콩 다질 때의 설레임이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정성스레 다진 꽃잎을 종지에 담고, 울 옆에 큰 키로 선 피마자 잎을 따다가 등잔 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서로가 묶어줘야 하는 일이라서 품앗이 친구가 있게 마련이었다. 묶어줄 사람이야 어머니도 있고 동생도 있었지만 그런 일이란 친구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키득거리는 재미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꽃 다짐을 손톱 위에 올리기 전에 손톱 가장자리로 밀가루반죽을 먼저 붙였다. 꽃물이 살로 번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손톱을 따라 밀가루반죽을 붙이는 일은 여간 정성이 들지 않았다. 그것도 손가락 한 두 개가 아니라 엄지손가락 두 개를 빼고 여덟 개의 손가락에 붙여야 하는 것이었다. 해마다 품앗이를 하는 친구 점분이는 네 손가락에 물을 들을 뿐인데도 아무런 불평 없이 그녀의 여덟 손가락에 밀가루반죽을 붙이고, 꽃 다짐을 놓고 피마자 잎으로 싸서 실로 동여매는 일을 정성스럽게 해냈고, 그녀 또한 점분이에게 일로 배로 시키는 것에 대해 전혀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서로 흥겹고 즐거운 일일 뿐이었다. 밀가루반죽을 아무리 정성스럽게 붙이고, 실을 아무리 꽁꽁 동여매도 아침에 일어나보면 야속스럽게도 피마자 잎이 터져 있거나 꽃 다짐이 엉뚱한 데로 옮겨가 있기가 일쑤였다. 잠을 자는 동안에 일어난 변고였다. 그래서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동생에게 묶으라고 해서 잠을 자보기도 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물들이기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못해도 세 번은 반복했대. 그래야만 흑홍빛이 되도록 진하게 물이 들었다. 그 색깔은 처음에는 약간 칙칙해 보이지만 물일을 하면서 한 보름 정도 지나면 물에 탈색이 되어 밝고 고운 제 색을 갖추게 되는 것이었다. 봉숭아물이 제일 아름다울 때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시작되면서 새하이얀 손톱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살 속에서 솟아오를 즈음이었다. 손톱눈과 봉숭아물은 서로대조를 이루어 손톱눈은 손톱눈대로 더 희게 빛나고, 붕숭아 물은 붕숭아 물대로 더 붉게 빛나 꿈꾸는 것 같은 아름다움에 젖어들게 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봉숭아물은 시나브로 손톱을 떠나가고, 봉숭아물이 반 나마씩 남은 손을 놀려 베갯잇 수를 놓는 깊은 밤이면 식어가는 아랫목 온기마저 넘치는 행복이었다. 그믐달로 손톱 끝에 걸려 있던 봉숭아물마저 사라지고 말면 어느덧 겨울도 끝나 있었다. "이년아, 귀신발맹키로 징허게 무신 짓이여. 끝엣 손꾸락 두 개에만 딜여" 어머니는 질색을 했고, "냅둬, 그 짓도 한철인디 시집가먼 허라도 안헐 짓잉께" 아버지는 그것만은 너그럽게 보아 넘겼다. 엄지손가락에 물을 안 들인 것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꼭 아버지같이만 여겨져 감히 물들일 엄두를 내지 않았던 것이다. 치자 꽃은 희고 작았다. 어찌 보면 소복한 청상 같은 꽃이었다. 그런 춥고 외로운 느낌의 꽃에서 어떻게 황홍빛 물감이 풀리는 열매가 맺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치자 꽃을 좋아하기보다 어쩌면 그 열매인 치자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잘 마른 치자를 반으로 쪼개 물에 띄우면 누에 실처럼 풀려나가는 황홍빛 물감. 그 물감을 따라 피워 올렸던 부끄럽고도 가슴 두근거리던 꿈. 결 좋은 모시를 담그면 올올이 물드는 그 곱고 고운 황홍빛 저고리에 남빛 치마를 받쳐 입고 친정나들이를 하고자 했다. 처녀 적에는 얻어 입지 못했을망정 시집은잘 가 그 꿈을 이루리라 했었다. 그러나 그 꿈은 깨어지고 끼니를 끓일 수 없어 눈치걸음까지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형편이었다. 눈시울이 젖어 그녀는 코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이를 추슬렀다. 실수인 듯 치자가지 묶음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 이걸 가져가면 뭘 해, 치솟는 서러움을 삼키며 그녀가 한 생각이었다.
"니 무신 근심 따로 있냐?"
고샅 끝에 이르자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아니어라, 근심은 무신..."
그녀는 가슴이 철렁해지며 황급히 대답했다.
"얼굴에 근심이 덕지덕지허다. 속 낋이지 말고 젼뎌라. 다 팔자니께."
그녀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돌아섰던 것이다. 그러면서, 엄니, 속이 껄쩍지근헌 일이 생기긴 생겼구만이라, 그녀는 속으로 뇌고 있었다.
외서댁의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처녀 적부터 어느 때 한번 거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꽃이 비치지 않고 지나친 것이었다. 만약 그리 되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녀는 이 불안감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와 몸을 섞은 것이 한 차례도 아니면서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은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녀는 걸음을 옮겨놓을 수 없이 다리가 팍팍해 옴을 느꼈다.
십이월로 접어들면서 산중에는 강추위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기울 대로 기운 해는 늦게 뜨고 일찍 졌다. 온기 잃은 햇살이나마 서산에 가리고 말면 추위는 어둠살과 함께 골골을 채워왔다. 밤이 깊어 갈수록 추위는 기승을 부렸고, 산들마저 추위를 견뎌내기가 어려운 양 이따금씩 긴 울음을 울고는 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시달림당하는 소리와 솔잎들이 휩쓸리는 소리가 쉼 없이 퍼져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었다. 쩌을산이 울었다. 줄기가 길고 골이 깊어서인지 산울림은 둔중하고 긴 파장으로 울려나갔다. 그 울림은 흡사 쇠북소리 같았다. 그러나 느낌의 가닥을 세심하게 잡고 보면 그 울림은 엇비슷하게 닮아 있을 뿐 똑같지는 않았다. 쇠북소리나 산울림이 긴 여음을 남기는 것은 동일했다. 그러나 그 울림의 감도는 동일할 수가 없었다. 쇠북소리가 귀에 울려와 마음에 닿는 소리라면 산울림은 가슴을 울려 가슴을 치는 소리였다. 쇠북소리가 청각적 울림이라면 산울림은 근원적 흔들림이었다. 그건 쇠가 울리는 소리와 땅이 울리는 소리의 다름일 것이고, 인공적인 소리와 자연적인 소리의 차이일 것이었다.
"그럼...우리는 위대한 지도자 레닌 동지의 지도의 말을 끝으로 오늘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레닌 동지께서 일찍이 투쟁이 난국에 봉착했을 때, '필요한 것은 공산주의 이념에 최대한 철저하게 충실하면서 동시에 타협이나, 방침전환, 협정체결, 우회, 후퇴 등 필요한 온갖 형태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일'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지도의 말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혁명의 열정을 투쟁의 불길로 태워 올립시다."
말을 마친 염상진이 팔을 뻗어 돗자리 위에 힘주어 편 손바닥을 붙였다. 그 위에 한 사내의 손이 포개졌다. 다시 그 위에 다른 사내의 손이 포개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창민의 손이 포개졌다.
"사회주의혁명 완수 만세!"
염상진의 음성은 낮았지만 견고했다.
"사회주의혁명 완수 만세!"
세 사람은 염상진과 똑같은 어조로 복창했다.
네 사람의 손은 포갤 때의 역순으로 차례차례 거두어들여졌다.
"산이 깊어서 그런지 자주 우는구만요."
멀어져간 산 울음을 쫓아가는 듯한 세심한 얼굴로 사내가 말했다.
"삼동이 닥쳤으니..."
염상진이 무심한 듯 대꾸했다.
"산도 저리 추위럴 타는 판인디..."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꽁초를 집어 들었다. 그는 사그라져가고 있는 모닥불 가장자리를 헤집어 작은 불씨를 꽁초 끝으로 찍듯이 해서 빨았다. 연기가 피어오르자 사내의 한쪽 눈이 찡그러들었다.
자정이 넘어 있었다. 숯막 안은 어둠침침했다. 가물거리는 흰 석유등잔의 불빛은 숯막의 어둠을 사르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거기다가 담배 연기마저 자욱하게 담겨 있어서 침침함은 한결 더했다. 제각기 시선을 달리한 네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음산하고 괴기스런 소리들을 뿌려대며 바람이 달음박질하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 여자의 비명, 짐승의 신음소리, 바람소리에는 그런 것들이 섞여 있었다. 숯막 안에는 문득문득 냉기가 끼쳐들었다. 모닥불이 사그라드는 만큼 추위가 기세를 올리는 터일 것이다. 안창민은 미적미적 앉음새를 고쳐 마른솔가지를 두 손으로 모아 잡았다. 허벅지의 부상은 거의 완치되었지만 거동이 자유롭지 못함과 함께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상처 부위가 꼭 온도계의 수은주처럼 추위에 민감한 것이었다. 약간만 추워도 상처 부위에서 사르르 찬바람이 일어나 허벅지를 감았고, 조금 심한 추위에는 시리다 못해 아려오는 통증이 등줄기로 뻗어 오르는 듯하며 전신을 옥죄들었다.
"안 동무, 그냥 앉아 있으시오. 말을 하잖고 왜..."
염상진이 재빨리 다가들어 안창민의 손에 들린 솔가지를 빼앗듯이 했다.
"안 동무가 추위럴 많이 타는 것은 요분에 피럴 많이 쏟아부러 몸이 허해져서 그럴 것이요. 보럴 시켜야 할 것인디, 때레잡을 멧도야지도 웂고..."
말끝을 얼버무린 사내가 입술이 델 정도로 짧아진 꽁초를 한쪽 눈을 찡그려 붙이며 빨아댔다. 그의 감기지 않은 한쪽 눈은 염상진의 옆 얼굴에 박혀 있었다.
"그렇잖아도 보약을 지어오게 조처했소."
염상진이 사내의 눈길을 이미 의식하고 있고, 그 의미까지 다 파악하고 있다는 듯 솔가지를 옮겨놓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참말로 자알 허셨구만이라, 자알 허셨어라."
'자알'에 유난히 힘을 넣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의 음성은 그지없이 밝았고, 염상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는 진한 신뢰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염상진의 하부조직인 조성책 오판돌이었다.
"보약도 환약으로 지을 수가 있는데요."
여지껏 오판돌 옆에 묵묵히 앉아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보성책인 이해룡이었다. 염상진은 솔가지를 부러뜨리며 엷게 웃었다. 이해룡답게 기민한 머리 회전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물론 환약도 생각해봤소. 허나, 탕약에 비해 효과가 느릴 뿐만 아니라 적다는 건 상식 아니오? 두 번 먹을 보약도 아니겠고, 탕약으로 짓게 했소."
"약효야 두말 헐 것 웂이 그런디, 탕약 대리자면 애 잠 묵을 것인디요?"
오판돌이 넓적한 어깨를 추스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염려 없소, 내 손으로 할 일이니까."
염상진의 담담한 어조였다.
가는 솔가지들이 톡톡 소리를 내며 실오라기 같은 연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염상진은 숨을 한껏 들이켜 한 곳을 향해 길게 내뿜었다. 사그라져가던 불씨들이 빠알갛게 살아 오르며 연기가 더 진하게 일더니 솔가지에 확 불이 붙었다. 불길이 일어남과 동시에 연기가 줄어들었다. 그래, 불길이 일 듯이, 불꽃이 피듯이 그렇게, 그렇게 끝없이 일어서는 것이다. 나무만 있으면 불길은 끝없이 타오르게 마련이다. 다만, 일시적 악조건이 닥침으로써 불씨가재 속에서 그 열도를 지키듯 자신들은 은신하는 동안 혁명의지를 투철하게 지키는 혁명의 불씨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땔감과 산소만 공급되면 언제 어느 때나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처럼 자신들은 혁명의 불씨로 이글거려야 하는 것이었다. 아니다, 불씨처럼 타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불씨는 땔감이 주어지고 산소가 공급될 때에만 비로소 불길을 일으킬 뿐이다. 끝내 땔감과 산소가 주어지지 아니하면 불씨는 재 속에서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혁명의 열정은 불 같아야 하고, 혁명의 의지는 물 같아야 하는 것이다.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갖되 물길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끈기를 지녀야하는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이 끝끝내 바다에 이르듯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혁명 전사들이 불길 같은 혁명의 열정과 물길 같은 혁명의 의지를 고수하는 한 기필코 혁명의 바다, 인민 해방의 바다에 당도하고 말리라. 그날의 승리와 영광을 믿을진대 투쟁이 고통일 수 있으며, 고난이 고생일 수 있으며, 죽음이 두려움일수 있으랴. 염상진은 불길을 응시한 채 몇 시간에 걸친 회의를 되새기고 있었다. 오판돌이나이해룡의 혁명적 열정이나 의지는 소나무처럼 굳세고 청청했다.
"인자 밤도 에진간히 저문 상싶으고, 새복에 길 뜨자면 눈도 쪼깐 붙여야 쓸 것인디, 한 가지 염려시런 것이 있구만이라."
오판돌의 말에 염상진이 눈을 들었다.
"다른 것이 아니고, 삼동이야 대장님이 계획허고 예비허신 대로 그작 저작 난다고 혀도, 그담이 또 문제 아니겄는 게라? 입이 한둘이 아닌 식구들인디..."
"오 동무, 그 저은 염려 안 해도 될 거요, 거기에 대비해서 당 중앙은 지금 모종의 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중이오."
"알겄구만요."
오판돌의 수긍하는 태도는 확실하고 분명했다. 그건 '당 중앙'에 대한 신뢰의 표현으로서 완전무결한 태도였다. 염상진은 당 중앙을 내세움으로써 옹색스런 답변을 대신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임기웅변이나 임시변통이 아니었다. 부하에게 당을 신성시하고 신뢰하게 하는 것은 염상진은 벌써부터 해동 후의 문제에 대해 내심으로 고심하고 있었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대처해나간다는 대전제 아래 몇 가지 방법을 구상 했었다. 그러나 어느 방법도 아직 확신을 갖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병력은 이미 옛날의 지하세포조직이 아니었다. 전투 병력화해서 집결되어 있었다. 무력투쟁 이전에 그 병력유지를 위한 의식(衣食) 문제 해결이 급선무였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이해룡이 물었다.
"없소, 그만 눈들 붙이도록 하시오."
염상진이 이글거리는 솔가지불 위에 장작들을 엇갈리게 놓아가며 말했다.
"대장님도 지무셔야제라."
오판돌이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며 염상진을 쳐다보았다.
"그러지요. 먼 길 왔다가 또 떠나자면 너무 늦었소. 어서들 주무시오."
염상진은 오판돌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오판돌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이해룡도 그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참이었다. 요는 물론 이불이 있을 리 없었다. 입고 있는 옷이 바로 요이고 이불이었다. 그나마 산이 깊어 나무가 흔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염상진은 너훌거리는 불길 너머로 두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오판돌은 염상진보다 나이가 네 살이나 많은 서른셋이었다. 그는 조성에서 태어난 토박이였지만 간도 땅에서 십오 년 남짓 산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작쟁의에 연루되어 일본인 중도의 소작을 잃게 된 그의 아버지는 말로만 들어온 간도 땅을 향해 길을 떠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열 넷이었다. 간도 땅이라고 하여 그들의 삶을 편안하게 보장한 것이 아니었다. 동포들이 모여 사는 땅이라는 것뿐 맨주먹인 그들 가족에게 간도는 배고프고 추운 타향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동을 일삼았다. 돈도 기술도 없는 그들로서는 생계수단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몸뚱이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농사철이면 농촌으로, 추수가 끝나면 산판을 찾아, 벌이가 되는 일이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점 물일에서부터 임질까지 안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부모가 그토록 몸을 사리지 않았던 것은 여섯 식구가 먹고 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와 그의 동생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요런 개명천지에서 배와야 산다. 죽으먼 썩을 살, 애비 에미가 뼈 닿게 일혀서 느그 사내 눔 둘 뒷수발 헐 것잉께 느그덜언 공부나 열성으로 혀야 써. 그려야 못 배운 이 애비 한도 풀리제."
그의 아버지의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 결심은 그의 아버지의 독자적인 깨달음에서 비롯되었고, 그 한 가지 방법으로 자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상식으로의 공부는 미처 육 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이 났다. 통나무들이 무너져 구르는 산판사고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그는 나잇값을 해서 보통학교를 사 년 만에 마치고 중학교 이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학업을 중단한 그는 상점에 사무원으로 취직을 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한 독학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남모르게 읽어가고 있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상이 담긴 서적들이었다. 그 사상에 빠져 들어갈수록 그는 조직에 가담하고 싶은 유혹과 행동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건 실현이 불가능한 꿈이었다. 다섯 식구의 가장이라는 현실이 그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 그의 어머니는 딴사람처럼 변하고 말았다. 거의 말을 잃어버린 데다 일손도 놓아버린 상태로 나날을 보냈다. 상심이 만든 병 아닌 병이었다. 시름시름 앓으며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가 조성 땅을 다시 밟은 것은 해방 이태 전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어머니는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처럼 한 달을 못 채우고 눈을 감았다. 그는 간도에서 보고배운 대로 잡화상점을 차려놓고 속으로는 공산당조직에 가담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염상진이라는 존재는 쉽게 포착되었다. 그의 사상성은 염상진을 만족시켰고, 특히 그의 간도 체험담과 견식의 폭은 염상진을 감동시켰다. 그는 염상진의 손에 다듬어져 어렵지 않게 조성을 책임 맡았다. 이해룡은 보성의 지주 이상원의 셋째아들이었고, 김범우보다 순천 중학 일 년 선배였다. 그는 보성전문 법학부를 다니다가 학병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염상진을 따라 자취를감추어버렸다. 그는 일 년 반 동안 지리산 속을 헤매며 산짐승처럼 거칠고 험하게 살았다. 지리산 속에는 학병을 피해온 젊은이들이 전라도 쪽 골짜기에만 백 명이 가까웠다. 소문으로는 경상도 쪽 골짜기에도 그만한 수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위험을 피해 몇 명씩 조를 이루어 산재해 있었지만 모두 조직화되어 있었다. 그들을 정신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공산주의였다. 처음에 소극적이거나 미온적이던 사람들도 해방도 더불어 하산을 할 때는 완전한 공산주의자로 변해 있었다. 피신하는 산 생활 일 년은 사상무장을 시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학병이나 징병을 피해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세간에 퍼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순천경찰서에서 몇 차례 색출대가 파견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리산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색출작업이 이루어지는 산이 아니었다. 앉음새가 열두폭 치마처럼 넓고, 품고 있는 골짜기가 그 치마의 주름보다 많아 피신하는 백여 명을 찾아내기란 모래밭에 빠뜨린 바늘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가당찮은 일이었다. 이해룡은 피신생활 동안 사상무장은 물론 체력단련까지 톡톡히 한 셈이었다. 그건 다름 아닌 빨치산훈련이기도 했다. 개구리나 뱀을 눈에 띄는 대로 잡아먹을 수 있게 길들여졌던 것이다. 해방이 되었으나 그는 학업을 계속하지 않았다. 염상진과 함께 공산당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나갔다. 그의 집안에서 그의 공산당활동을 이해하거나 지지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특히 두 형의 반대는 극렬했다. 그의 이름을 족보고 호적에서고 빼버려야 한다는 극단적인 말을 부모 앞에서 서슴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두 아들의 극언이 못내 마땅찮고 서운했지만나무람 한마디 하지 않았다. 광주에서 공무원과 은행원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은 동생 때문에 자신들에게 언제 끼칠지 모를 피해에 전전긍긍하는 형편이었고. 그의 부모도 그런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이재에 눈이 밝은 그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소작인들이나 근동에 인심을 잃은 부자였다. 그리고 두 형은 일제시대에 공무원과 은행원이 된 터였다. 해방을 억울하게 받아들인 전형적인 친일파 집안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런 성분과 환경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이라도 치듯 공산당활동에 열성적으로 몰입했다. 검도 유단자인 그는 행동이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판단력도 기민했다. 총의 휴대 유무와는 상관없이 그의 허리춤에는 언제나 퉁소가 꽃혀 있었다. 그는 어쩌다 어떤 불리한 상황에 처해 퉁소를 뽑아들었다 하면 그는 혼자 힘으로 서너 명의 상대를 물리치는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남다른 솜씨는 안창민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몸집이 작은데다 가늘기까지 해서 도무지 힘이라고는 쓸 수가 없는 안창민으로서는 그런 번개 치듯 하는 솜씨가 부러울 만도 했다. "안 동무, 그 퉁소 끝으로 눈도푹 쑤셔뿔고, 명치도 팍 찔러서 그저 한 방으로 상대방얼 때레 잡는 기술도 장허요. 근디, 한방으로 때려잡는 기술이 퉁소 안 쓰고도 또 있응께 너무 부러워허덜 마씨요. 고것이 무엇인고 허니, 부자지럴 걷어차뿌는 것이요. 부자지럴 걷어채였다 허먼 지아무리 천하장사라도 힘못 쓰고 나가뻗게 되야 있응께요. 부자지럴 걷어차는 기술은 검도기술 배우는 것에 비허자면 백배로 심이 안 드는 쉰 것이요. 그저 하로에 열 분썩만 다리 쭉쭉 뻗어 감서 걷어차는 연습을 허먼 되는 것이요. 검도란 것은 퉁소라거나 작대기가 없으면 써묵지 못허는 기술이제만 부자지 걷어차는 기술이야 워디 그러요? 안 동무, 나가 갤차드릴께라?" 하대치가 느물느물 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그만 주무시지요."
안창민이 말했다.
"그럽시다"
염상진이 불길에 눈을 던지 채 대꾸했다. 그의 견고한 앉음새로 보아 쉽게 잠을 잘 것 같지가 않았다. 눈이 씀벅거림을 느끼며 안창민은 안경을 벗었다. 눈을 내리감았다. 모래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눈알이 꺼끌거리고 따끔거렸다. 피로한 탓만이 아니었다. 부상을 당하고 나서부터 심하게 느껴지는 증상이었다. 과한 출혈에 따른 허약증상일 것이었다. 이지숙과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서로 색채가 다른 아픔이 가슴에 담겨왔다. 배성오 편에 어머니가 돈을 보내오기 전에 벌써 염상진은 보약 먹기를 제의했었다. 그는 완강히 거절하고 말았다. 염상진의 말로는 겨울 날 돈은 걱정이 없다고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보약을 먹는다는 것은 지극히 뻔뻔스럽거나 아니면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돈을 보내왔다. 그것은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안창민은 그 돈이 어떻게 장만된 것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그 동안 모아둔 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들에게 돈을 돌릴 수 있을 만큼 인간관계를 넓히고 살았거나 융통성이 있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일 년 동안 살아야 될 쌀을 몽땅 내다 팔았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한결 강해진 염상진의 태도가 아니었더라도 그는 보약 먹기를 작정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뜻을 거역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지숙에게는 진정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재판소로 넘어갔다는 데까지밖에는 모르고 있었다. 염상진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음인지 그녀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녀가 실형을 받지 않고 풀려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유롭게 되면 염상진은 필경 무슨 말인가를 꺼낼 것이었다. 그녀와 조직과의 관계는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였다. 염상진은 마침내 조직책회의를 비밀리에 소집했다. 그것은 전략회의인 동시에 투쟁개시였다. 월동대비를 겸한 투쟁은 제이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도당의 지시에 따라 그 동안 해온 일은 군당의 조직 강화였다. 조직 강화는 사상교육과 무장투쟁교육, 양면으로 이루어졌다. 사상교육은 혁명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과 한글깨치기였다.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대원들의 욕구에 힘입어 사상교육은 기대보다도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무장투쟁교육이었다. 소총무장이 가까스로 삼 할 정도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대창이나 농기구를 이용한 원시무장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소총이나마 제대로 갖추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건 순간순간 스쳐가는 안타깝고 그러나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염상진은 그런 생각을 단호하게 뿌리쳐가며 삼 할 정도밖에 안되는 소총이 모든 대원의 것이 되도록 훈련을 시켜나갔다. 누구나 총을 다룰 수 있도록 한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무장투쟁과 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익히게 했다. 비밀 아지트 장소 물색 요력, 그것을 만드는 법, 전호 구축 방법, 산의 경사면을 타야 하는 필요성과 요령, 은폐의 여러 가지 방법, 암호의 이용과 비상선 찾는 법 등 다양했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앞서서 그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치중한 것이 기동성 기르기였다. 적보다 기민하고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 그는 그것을 유격대의 기본이고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력을 기르기 위해 산타기를 계속시키면서 그런 여러 가지 훈련들을 실시했다. 무장의 빈약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행동의 기민성뿐이었다. 대대원들은 그 점을 충분히 납득했고, 조계산은 그 능력을 기르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조계산은 경사가 급한데다 나무가 많았고, 다른 산줄기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어서 여러 모로 좋은 훈련장이었다. 산은 탈수록 그 요령이 늘게 마련이므로 주력은 보통기준의 세 배 정도까지 빨라져야 한다는 것이 그가 세운 목표였다. 그는 그 목표달성을 위해 대원들을 독려하고 이끌었다. 그런 훈련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목표에 다다라 있었다. 염상진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야산무력투쟁개시...그는 다시 뇌었다. 상황의 진전에 따라 당연히 올 것이 온 것이다.
"십사연대가 여수에서 일어나지 말고 제주도까지 가서 그곳 동지들과 합류했으면 오히려 좋지 않았을까요?"
읍내를 떠나온 직후에 안창민이 한 말이었다. 그의 말은 꽤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궁지에 몰리고 있는 제주도의 사삼투쟁을 다시 활성화시키면서, 반면에 몇몇 지역을 겨우 일주일 안팎으로 장악하고 나서 지하조직을 노출시켜야 하는 손실은 보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안창민의 지적은 결과론이기는 해도 매우 예리하고 논리적이었다. 제주도의 고립된 투쟁에 어떤 돌파구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절실한 문제였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도 총지휘를 맡고 있는 미군은 공군과 해군으로 섬을 완전봉쇄하고, 육군에 군경병력과 서북청년단을 합세시켜 인민투쟁을 잔악하게 저지해나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십사연대가 아무런 통제나 의심을 받지 않고 제주도로 들어가 동지들과 한 덩어리가 될 수 있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완전무장한 연대병력의 투쟁화, 그렇게만 되었다면 제주도의 투쟁은 완전히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행하게 된 결과에 집착해서 나오게 된 방법론일 뿐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적은 제주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남쪽 땅 전역에 있었으며, 미군을 완전히 척결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투쟁은 전역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필연적인 현실 앞에서 안창민의 생각은 무위할 뿐이었다. 미군정이 공산주의를 용납할 수 없는 적으로 단정한 이상 미군은 혁명의 적이 아닐 수 없었고, 그 본격적이고 대대적인 그 싸움이 바로 십일인민항쟁이었다. 그 싸움을 통해 미군정은 일찍이 자기들 멋대로 부정해버렸던 '조선 인민공화국'의 실체를 완전히 파괴하고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해방과 함께 인민들이 새 나라 세우기를 염원하며 자발적 협동으로 이룩한 수많은 인민위원회를 군정은 산산이 부셨고, 자각한 인민들을 수없이 죽였다. 군정의 그 행위는 이미 구축된 혁명민족국가의 기틀을 파괴하고, 인민들이 갖추고 있는 국가수립 능력을 말살하려는 만행이었다. 군정은 그 만행을 통하여 인민의적이 되기를 자청했고, 인민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을 자인했다. 그것은 곧 남쪽 땅의 식민지화 선언이었고, 인민의 노예화 선언이었다. 그 흉계를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위해 일단계로 좌익의 무력탄압을 공개적으로 가속화시켰으며, 이단계로 괴뢰정권을 세우려는 단독선거 실시안을 내놓게 되었다. 그러나 군정의 흉계는 각본대로 착착 진행될 수는 없었다. 인민의 투쟁의지는 엄연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 불길은 바로 제주도에서 솟아올랐다.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지배를 거부하는 제주도 인민항쟁은 결국 거기서 단독선거를 실시할 수없도록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군정의 무력으로 괴뢰정권은 세워졌지만 또다시 전라도 땅에서 투쟁의 불길은 오른 것이다. 과뢰 정권이 세워지고 최초로 일으킨 대규모의 투쟁, 그 의미는 결코 작을 수가 없었다. 제주도의 투쟁을 확산 시키고, 미국의 흉계를 박살낼 수 있도록 투쟁은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제이단계 투쟁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염상진은 모닥불의 불꽃을 응시하고 있었다. 역사의 확신 위에 이 한 몸 저 불꽃처럼 태우이라...
소화와 들몰댁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고문취조를 당하고 있었다. 계란장수로 변장한 정하섭이 현 부자네 별장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돈을 장만해 떠난 것을 청년단에서 알아챈 것이었다. 끄나풀에게 별장에서 나와 소화가 전송하는 장면을 들켰으므로 범행을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끄나풀의 보고를 받은 염상구는 계엄사령관이나 경찰서장에게 알리는 것은 뒷전 쳐놓고 정하섭을 뒤쫓아 청년단원들을 비상 출동시켰다. 회정이 삼구와 장양리를 거쳐 진트재에 이르기까지 두 시간이 넘게 수색을 했지만 정하섭의 모습은 자취가 없었다. 끄나풀이 청년단으로 뛰어가고, 사건보고를 하고, 단원들을 모으고, 뒤쫓고 하는 시간 동안에 정하섭의 한가로울 수 없는 걸음걸이는 진트재를 넘어 자취를 감추기에 넉넉했던 것이다. 맥이 빠질 대로 빠져버린 염상구는 돌아오는 길에 이삭을 줍듯 소화와 들목댁을 잡았던 것이다.
"이거 도대체 무슨 시건방진 짓이야! 청년단원이 무슨 기동성이 있고 수색능력이 있다고 그 따위 짓을 하느냐 이거야! 너의 월권은 명령불복과 동일하고, 계엄하의 명령불복종은 즉결처분이야!"
뒤늦게 보고를 받은 사령관 심재모는 눈에 불을 켠 채 고함을 질러댔다. 곧 총살이라도 시켜버릴 것 같은 기세 앞에서 염상구는 바들바들 떨며, 잘못했습니다만을 연발했다. 심재모가 그렇게 감정이 고조된 것은 단순히 빨갱이를 놓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흘 전에 해결지은 정 사장 사건의 후유증이 의외로 커서 신경을 소모하고 있는데 그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서민영에게 진정서를 작성을 은밀하게 제의하자 그는 오히려 고마움을 표하며 그 일을 정식으로 제출했다. 그 신속성과 사람 수의 많음에 심재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틀 동안에 그 많은 사람들의 도장을 받아낸 것은 유치장에 갇혀 있는 소작인들을 관대하게 조처하기로 한 자신의 판단에 만족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다. 심재모는 진정서를 접수한 다음날 오전에 정 사장과 네 소작인을 동석시킨 가운데 사건종결을 알렸다. 사백여 읍민들의 진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고, 칠일간의 구속 상태로 가해의 잘못은 충분히 면죄된 것으로 판단되어 귀가 조치한다. 단, 사인(四人)의 가해자는 피해자의 치료비 및 일체의 피해에 대하여 보상하여야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들에 대한 감정을 이성적으로 수습하고, 일체의 피해보상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본 사건의 종결에 협조하여야 한다. 이런 결정을 내리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후유증은 터지기 시작했다.
"당신, 벌교 지주덜얼 홍어좇으로 아는 기여, 아니면 개좇으로 아는 겨? 느자구 싹수머리 웂은 작인눔덜 편얼 들었다는디, 그래갖고 벌교바닥서 붙어나질 상싶으당가아? 거그는 워치께 생각허셔?"
윤삼걸이라는 사람의 전화였다.
"와따매, 명사또 나으리시시여? 어허, 해방인지 지랄인지 되니께 깨구락지도 뛰고 짱뚱이도 뛰고, 오만잡것들이 다 뜀스로 작인눔덜이 상전 집얼쳐들어와 가족을 복날 개 패디끼 허고 집얼 뚜들겨뿌시는 무법천지가 되얐는디. 법을 지키게 허고 질서를 잡겄다고 온 사람이 고런 폭도들을 엄벌하는 것이 아니라 뎁되 편얼 들어기럴 세워줘? 명사도 하나 벌교 땅에서 났네. 사또 나으리, 사또께서 받으시는 월급이 누가낸 돈인 줄은 아시는가? 다 우리 겉은 지주들이 뭉텅뭉텅 낸 돈이다 이것이여. 벌교가 갯가라는 것은 아시겄제? 갯가는 짜운 물이 많여. 우리는 고런 땅 지주들잉께 딴 땅 지주들 보담은 훨썩 짜울 것잉만. 고 짜운 맛을 앞으로 간간허니 보고 잡은 모낭이구만. 솔찬히 속이탈 것잉께 물이나 수십 통 준비혀두드라고잉."
최익달이라는 사람이 걸어온 전화였다.
그가 아연한 것은 협박에 앞서 지주라는 사람들이 거침없이 쏟아내는 상스러운 말투였다. 지주라면 그래도 양반이고, 양반이면 무슨 격이 있어야 할 텐데 그들의 말투는 형편없이 천박했던 것이다. 아무리 감정이 상했다 하더라도 그런 말투를 서슴없이 내뱉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이해되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지주들의 압력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해 남원장에서 모인다느니, 광주 도청과 경찰국에 사건조사를 의뢰한다느니, 그들의 움직임이 심재모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낮에 읍내에 침투한 빨갱이를 발견하고서도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그 과실이 지주들의 귀에 들어가면 그들은 자신을 공격하는 무기로 그것을 십분 활용하리라는 것을 심재모는 직감했던 것이다. 직책상 그것은 피할 도리가 없는 공격이 될 것이었다. 그는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놈은 어떤 놈이야?"
"정하섭이라고, 술도가 정 사장 큰아들로..."
"뭐라고? 정 사장 아들?"
염상구의 말을 문지른 심재모의 음성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술도가 정 사장의 큰아들'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재모는 출구가 열리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두 여잘 잡아왔다고 했지?"
"옛!"
"철저히 심문해서 배후를 완전히 캐내. 관련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뿌리를 파내란 말야. 알겠어?"
"옛, 철저히 명령 수행하겄습니다."
심재모는 정 사장과 그 아들의 침투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기를 바라며 그런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지주들의 움직임을 제지하고 그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일 수 있었던 것이다. 심재모의 명령을 받은 염상구는 소화를 불탄 경찰서의 지하실로 끌어다가 초장부터 매타작을 시작했다. 심재모 앞에 보란 듯이 공을 세우려다가 오히려 궁지에 몰려버린 염상구는 분풀이할 데가 필요했던 판인데다가, 남김없이 뿌리를 파내라는 명령이나마 철저히 지켜 궁지에서 빠져나갈 기회를 잡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염상구의 매질은 무작스럽게 가해졌다. 소화가 세 차례에 걸쳐 정하섭의 심부름을 한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것은 매질이 시작되고 삼십 분이 미처 못되어서였다. 소화는 매질을 못 견뎌서 있는 대로 다 털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무사히 몸을 피한 정하섭에게 해가 미칠 리 없었고, 자신에게 품고 있을 의심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소화의 자백은 염상구를 통해 곧 심재모에게 보고되었다. 세 차례에 걸쳐 정 사장이 아들에게 공산당 활동자금을 조달했다는 사실은 심재모를 충분히 만족시키고도 남았다. 심재모는 즉시 정 사장 내외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소화는 그 자백만으로 염상구의 손아귀에서 놓여날 수가 없었다. 예상보다 쉽게 입맛을 다신 염상구는 더 가혹한 매질을 가해댔다. 두 번째로 빨갱이라는 자백을 받아야 했고, 세 번째로 읍내의 세포조직을 고구마 캐듯 해버려야 한다는 확고한 계획이 염상구에게는 서있었던 것이다. 정하섭을 놓친 실수를 공으로 만회하고자 하는 그에게 소화는 회가 동하는 먹이였다. 또, 그에게는 그런 계획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증거도 있었다. 자백을 듣고서야 뒤늦게 무릎을 친 것이지만, 그녀를 술도가집 앞에서 처음 맞닥뜨렸던 때 그건 바로 자금운반책 노릇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그녀는 능청스럽게 재수굿을 빙자했던 것이다. 그 태연스러운 배짱은 갈 데 없는 빨갱이들의 가면이고 위장이었다. 그리고 하대치의 마누라를 식모로 부리는 척 꾸며서 동거를 시작한 것이야말로 움직일 수 없는 결정적 증거였다. 그때 만약 끄나풀을 붙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할 뻔했던가. 염상구는 아슬아슬한 위기감에 몸서리를 치며, 손바닥에 침을 뱉아 가죽혁대를 손아귀에 두어 번 감아 돌려 힘껏 팔을 치켜 올렸다. 공중을 회전하며 싸늘한 마찰음을 부린 가죽혁대는 그대로 소화의 몸뚱이를 감고돌 았다. 그녀의 매달린 몸이 꿈틀 흔들리며 비명이 터졌다.
"싸게 불어, 원제부터 빨갱이가 됐어!"
가죽혁대를 내려칠 때마다 기합이라도 넣듯 염상구는 이렇게 소리 질렀다.
"아니구만요. 그냥 심바람만 혔구만요."
소화는 같은 소리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살이 찢어지는 매질의 아픔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도 그녀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일깨우고 있었다. 매질의 고통을 못 이겨 한마디라도 거짓자백을 하는 날에는 끝장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죽는 길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요런 오살육시헐 년아, 빨갱이가 아님서 그런 심바람얼 허다니, 고것이 곧이딛길 말이라고혀? 불어, 싸게 불어."
가죽혁대가 그녀의 몸뚱이를 난타했다.
"아니구만요, 아니구만요."
그녀는 몸을 비비 틀며 피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녀의 홑적삼에는 새로운 피가 번져나고 있었다.
"빨갱이가 아니먼, 돈얼 받아묵고 심라람얼 혔냐. 싸게싸게 불어!"
소리 지름과는 달리 염상구의 마음에는 일체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냉정한 마음으로 먹이를 몰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어라, 그냥 혔어라."
염상구는 소화의 턱을 거칠게 받쳐 올렸다.
"눈떠!"
그는 주먹으로 소화의 볼을 후려갈겼다. 소화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흐리게 흔들리는 시야에 눈이 옆으로 째진 강파른 얼굴이 맞바라보였다.
"요런 설빠진 무당년아, 고런 거짓말 헌다고 요 염상구가 믿어줄 상 불르냐? 날 똑똑허니봐라. 니가 실토럴 안혔다가는 여그럴 살아서 못 나가. 내 손에 죽고 말겄으먼 고것도 니 맴이여. 나야 니까징 거 하나 죽이기는 식은 죽 묵긴께. 무신 말인지 알아묵겄어?"
독물이 흐르는 것 같은 눈과 질겅질겅 씹는 것 같은 말은 여지껏 당한 매질보다 더 무섭고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여기서 죽어? 소화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온정신은 아랫배로 쏠렸다. 거기에는 분명 그분의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벌써 두 달째 꽃이 비치지 않고 입맛이 멀어지며 아침저녁으로 신열이 스치는 것은 무슨 까닭이랴. 마음도 몸도 영원히 그분의 것이고자 그 얼마나 간절히 소원했던 씨받음이었던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를 살아서 나가야 한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분을 마음에 두어 왔음을, 앞으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으려 했었다. 만약 발설을 하면 그분과의 소중한 인연에 액이 끼고, 인연의 실이 끊길 것만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신령님에게만 고함으로써 그분과의 인연을 보호받고 싶었고,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무작정 아니라고만 했다가는 끝내 매타작을 당해 죽게 될 것만 같았다. 살아나려면 그분과의 인연을 발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분의 씨를 지키기 위해 의당 그래야 할 일이었다.
"다 말허겄구만이라."
소화는 숨을 들이켰다. 염상구의 눈이 빛을 발했다.
"옛날 옛적부터 지 맘속에 그분이 있었구만이라. 그런디, 그분이 꼭 꿈에 뵈디끼 지 앞에 나타나서 심바람얼 시켜서, 지는 그냥 심바람허는 것만 좋아서, 그분얼 돕는 것만 좋아서 그냥 정신웂이 한 일이구만요."
"머시기 워쩌고 워째!"
이빨을 부드득 갈아붙인 염상구는 소화의 면상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언제부터 빨갱이가 되었고, 또 다른 세포는 누구누구인지 하는 자백이 나올 줄 알고 잔뜩 긴장해 있던 그는 엉뚱한 소리를 씨부리는 바람에 그만 걷잡을 수 없이 성질이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 소화의 코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요런 싸가지웂은 무당년아, 싸게 불어, 불어!"
가죽혁대가 소화의 몸을 휘감았고, 뚝뚝 떨어지는 코피가 흰 적삼을 선홍으로 물들였다.
"인자 헐 말 다 혔응께 죽일라면 죽이씨요. 니가 그짓말 안허는 것은 신령님이 내라다보고기시오."
소화는 이빨을 앙 다물며 염상구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화, 요거 사람 미치고 사까다찌 허겄네웨. 선생년도 사랑타령, 무당년도 사랑타령, 요런 니미럴눔에 시상이 워찌 돌아가니라고 지집년덜이 먼첨 꼬랑댕이럴 치고 지랄이여 이거. 암탉이 먼첨 울어 날 새는 법 웂는디, 암컷덜이 요리 설레발치는 것 봉께로 망쪼가 들어도 단단히 망쪼가 든 시상이다. 헌디, 지집녈덜이 설레발얼 쳐도 한도가 있제, 이년들이 문딩이고 빨갱이고 안 개리는 것은 으짠 일일꼬, 빨갱이 좆대감지에는 개좇맹키로 싱이 들었는감?"
한바탕 떠들어댄 염상구는 카악 가래를 돋구어 내뱉었다. 그리고 책상 위의 종이를 북 찢어 손바닥으로 비벼서는 소화의 코를 틀어박았다. 코피가 멎을 줄을 모르고 흘러내렸던 것이다. 그가 소화의 코를 틀어막아주는 것은 결코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출혈이 과해 다음 취조에 지장을 줄까봐서였다. 염상구는 가죽혁대를 책상 위에 던지고 손바닥을 털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출출한 배를 채워 기운을 돋울 필요를 느꼈다. 그는 지하실 철문을 밀었다.
한편, 들몰댁은 형사부장 장길춘에게 고초를 당하고 있었다. 식모로 위장해 무당과 함께 살며 어떤 공산당활동을 했고, 염상진에게 무슨 지령을 받고 있으며, 정하섭 외에 어느 입산자와 접선했으며, 남편 하대치는 몇 번이나 다녀갔고, 읍내 세포는 누구누구인지를 추궁 당했다. 그러나 들목댁으로서는 하나도 모를 소리였다. 정하섭이라는 사람이 별장에서 하룻밤을 잤다는 것도, 소화가 그 사람 심부름을 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다. 소화는 정하섭이라는 사람과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언제 한번이라도 입을 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번 일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소화가 왜 그리 자신에게 고맙게 했는지를 확연하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일손을 들이자면 사람은 얼마든지 많은 터인데도 왜 굳이 자신을 택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들몰댁은 계속되는 추궁에 모른다는 대답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나 매질은 차츰 거세어져갔다.
징역 일 년에 집행유예 일 년을 선고받은 전 원장 일행이 기차 편으로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집행유예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전 원장과 간호원, 이지숙은 엄연히 실형을 받은 것이었다.
"어떻게, 세 사람을 만나보시겠습니까?"
경찰서장이 심재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요, 관심이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역으로 나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이리로 오라고 할 명분도 없는 일 아닌가요. 차츰 만나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리하시겠습니까. 그럼 저는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맡았던 사건이고 해서."
"그러시지요."
심재모는 경찰서장을 따라 의자에서 일어서는 예의를 보였다.
노천 플랫폼에는 마중 나온 가족으로 보이는 열서너 명의 사람들이 광주 쪽 철로를 향해 몸들을 돌린 채 서성이고 있었다. 권 서장은 그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포구 쪽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경찰이란 직업의 곤혹스러움을 씹고 있었다. 일제하에서 경찰이 되고자 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돌연한 죽음과 다섯 형제가 들끓는 빈한을 구제하라고 외삼촌이 어렵게 마련했다는 자리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그건 부족할 것이 없는 명분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것일 뿐 대의 앞에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해방이 되고 친일파들을 죄인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인심이 뜨겁게 일어났을 때 두렵기보다 차라리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흐지부지되고, 다시 배운 도둑질인걸 뭐 어쩌고 우물쭈물하며 경찰복을 입게 된 것이다. 누가 누구를 죄인이라고 잡아넣고, 재판을 하고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는 가끔 자괴감에 빠지고는 했다.
기차는 검고 육중한 동체를 밀어붙이듯 하며 역구내로 진입해오고 있었다. 권 서장은 자신도 모르게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달리는 기차를 근거리에서 대할 때면 그 거리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반사작용이었다. 증기를 내뿜으며 육박해오는 기차는 언제 보아도 숨을 씩씩거리며 달려드는 황소 같았다. 검은 칠을 맥질한 터무니없이 큰 체구에 못생기기까지 한 기차는 도무지 사람 손으로 조작되는 기계 같지가 않았다. 자주 대하는 것에 비해 정이 붙지 않기로는 돈푼깨나 깔고 앉아 거드름을 피우는 지방유지라는 사람들과 흡사했다.
기차가 멈추자 마중 나온 듯한 사람들의 발길은 우왕좌왕 엇갈리고 있었다. 권병제는 아까부터 김범우를 찾아보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거기에 끼여 있지 않았다. 아마도 광주에서 전 원장 일행과 함께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김범우, 나이에 비해 의젓하고 당당하고,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침착한 사나이. 그도 한때 염상진과 함께 사회주의에 물들어 있었다고 했다. 사실 일제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치고 똑바른 정신과 올바른 양심으로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염려했다면 사회주의에 경도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 경찰이나 헌병들이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아나키스트나 모두 한두름에 엮어 색출하느라고 그렇게 혈안이 되었던 것만큼 그것은 일본을 무너뜨릴 수 있고,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믿어졌을지 모른다. 염상진이라는 사람도 김범우와 비슷한 사람일까. 그는 아무런 근거 없이,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이 많이 닳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권병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전명환 원장이 그 천진스러운 것 같은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끌려 나갈 때는 이미 혼이 다 빠져나가버린다고 했다. 마지막 소원으로 담배를 받아 피우거나 하는 짓은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갇히고, 조사받고, 포승에 묶이고, 하는 것은 반 사형을 당하는 고초나 다름없었다. 매 앞에 장사 없음을 그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전 원장에게 표현할 길이 없는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그의 진실을 알면서도 법원송치를 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직업상의 괴로움이었다. 전 원장 옆으로 반쯤 등 돌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여자가 있었다. 부인인가 싶었지만, 이내 간호원이라는 판단이 왔다. 그 옆에 고개를 약간 수그리고 있는 여자가 이지숙이었던 것이다. 이지숙은 간호원과는 달리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창백하게 여윈 얼굴은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냉정해보였다. 저 여자는 독을 품고 있구나! 그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었다. 그는 전 원장에게 가지는 죄의식과는 또 다른 곤혹감에 빠지고 있었다. 징역 일 년에 집행유예 일 년, 그 실형은 그녀한테서 교직을 박탈할 것이다. 자유직업인 의사는 생업에 구애를 받지 않지만 공직인 선생은 자격을 정지당할 수밖에 없었다. 면대하기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입장도 못되었다. 그는 전 원장에게 건넬 첫마디를 생각하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인과 함께 유치장에 갇혀 있는 정 사장은 그 시간에 중대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아들에게 돈을 장만해준 사실을 모두 자신이 뒤집어쓰도록 한 것이다. 마누라가 자기 몰래 세 차례나 그 짓을 했다는 것은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볏짚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그따위 멍텅구리 같은 짓을 저지르다니, 속에서 천불이 끓어오르고, 성질대로 하자면 여편네 머리끄덩이를 낚아채 대가리를 벽에다 직신직신 해버려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새끼를 어쩌지 못하는 에미의 마음이었다. 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시 퍼 담을 수는 없어도, 닦아내기나 제대로 해야 할 판이었다. 우선, 둘이 다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나 하나는 풀려나야 했다. 그런데 마누라를 남겨놓고 자신이 풀려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마 남자의 체신으로 할 짓이 못되었다. 마누라를 일단 내보내고 나서 심재모와 담판을 짓든지 조사를 받든지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정 사장의 마음은 전혀 밝지가 못했다. 그는 담판 쪽으로 일을 몰아가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의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가 옛날 서장 남인태가 아니라 심재모였던 것이다. 돈 앞에 녹아나지 않는 놈이 어딨어, 그는 이 불변의 법칙을 스스로 강조했지만 심재모를 생각하면 그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꼬락서니 보기 싫은 절뚝발이 예수쟁이 놈 서민영이가 진정서를 만든 것이 화근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진정서 아니라 협박장을 받았다 하더라도 묵살해버리면 그만일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어느 편을 들어야 유리한것인지는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는 판에 심재모는 소작인들 편을 든 것이다. 그런 놈이 돈에 녹아날까?... 정 사장의 자신감은 물에 녹는 설탕이 되고 있었다. 담판이 안 된다면 벌을 받는 길밖에 없었다. 정 사장은 몸서리를 쳤다. 그것은 끔찍해서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나는 공산당 빨갱이라면 치가 떨리는 사람이여. 하섭이 그놈 이름을 호적에서 파라면 파고, 지우라면 지울 수 있어. 그는 속으로 외쳐댔다. 하섭이 그놈은 자식이 아니었다. 낳고 키운 공을 갚지는 못할망정 애비를 두 번씩이나 유치장에 처넣은 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안을 망쳐 먹고 말 놈이었다. 그래서 벌교를 뜨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어쩌자고 하필이면 이 대목에서 사건이 터진단 말인가. 정 사장은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애가 탔다.
"똑똑찮은 눔, 빨갱이들을 해 처묵을라면 들키지나 말고 해처묵을 일이제."
정 사장이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무슨 소리다요?"
세운 무릎에 얼굴을 박고 쪼그려않았던 낙안댁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무신 소리는 무신 소리!"
정 사장은 아는 정 보던 정 없이 내질렀다. 그리고 주머니를 더듬었다. 손이 헛집혔다. 유치장에 갇히며 압수당한 담배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이빨을 뿌드득 갈아붙였다. 낙안댁은 그런 남편한테서 얼른 시선을 거두어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이틀 동안 줄기차게 고문을 당한 소화는 혼미한 의식 속을 헤매고 있었다. 위로 치켜들려 묶인 두 팔의 통증도 잊은 지 오래였고, 매질의 아픔도 둔감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염상구의 자백강요만은 또렷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아무리 매질의 아픔이 가혹하다 한들 빨갱이라고 거짓자백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그녀는 명백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죽어서는 안 되었다. 다시 정하섭을 만나야 했다. 거의 씨를 정히 보존해야 했다. 그 일념은 매의 아픔도 이겨내게 했고, 거짓자백도 거부하게 했다. 매질이 가해질 때마다 그녀는 신령님을 불렀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니라. 그녀는 여실한 신령님의 응답을 듣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염상구는 짜증이 받쳐오르고 있었다. 매질을 몇 차례 하지 않아 술술 불어대기에 녹록하게 보았는데 정작 필요한 대목에 가서는 매질이 전혀 효과가 없어진 것이었다. 저것이 참말로 멋모르고 심바람만 헌 것이 아닐랑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그 생각을 야멸차게 뿌리치고는 했다. 정하섭이는 말단세포가 아니었다. 그자가 믿어 거점을 확보하고, 임무를 부여할 정도면 빨갱이가 아니고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리고 정하섭을 놓친 실수를 만회하야만 했다. 골수 빨갱이일수록 독하다, 그는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힘을 돋우었다. 그의 매질은 갈수록 난폭해졌다.
"아우, 아우, 아우 배야. 아우 어엄니이이..."
소화가 몸을 비비 틀며 신음을 토해냈다. 한바탕 매질을 하고 나서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빨고 있던 염상구는 후딱 소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우우 배야, 어엄니, 나 죽어, 아우 배야..."
소화는 몸부림치며 발을 버둥거렸다.
"저년이 워째 저려."
염상구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담배를 내팽개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워째 이여, 정신채려!"
염상구는 소화의 턱을 틀어잡았다. 그녀의 눈은 뒤집혀져 있었고, 이빨은 응등물려 있었다.
이년이 배창새기가 터져부렀능가? 염상구는 덜컥 겁이 났다.
"아우 엄니이, 나 죽네, 안 되야 엄니, 안 되야, 아이고 배야..."
"정신채려! 어디가 아파서 이려."
소화는 염상구의 고함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랫배가 비틀리고 찢어지고 갈라지고 터지는 것 같은 통렬한 아픔에 휘둘리며 환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신령님이 들고 있는 동삼을 받으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한사코 앞을 가로막는 꿈의 장면이었다.
"엄니, 안되야, 엄니, 엄니이..."
염상구는 심상찮은 느낌이 들어 두 팔을 매달아 묶은 밧줄을 풀었다. 그녀의 몸이 시멘트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아니, 워쩐 일이여!"
염상구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시멘트 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괴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그녀의 다리에도 흘러내린 핏자국이 선명했다. 참말로 배창시가 터져부렸는갑다! 염상구는 아찔해졌다. 이대로 죽게 되면 자신의 앞날은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무당을 잘못 건드리면 해를 입는다더니 그 말이 영축웂다 싶었다.
"정신채려, 어이 정신채려."
염상구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거리는 마음으로 소화의 볼을 쳐대며 소리 질렀다. 소화는 차츰 정신을 수습해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푸르죽죽한 얼굴이 사라지고 정하섭의 모습이 나타났다. 정하섭의 얼굴이 흔들리더니 염상구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려, 정신채려. 배 워디가 아픈겨? 말얼 혀봐."
염상구는 다급하게 다그쳤다. 소화는 자신의 팔이 풀려 있음을 알았고, 아랫배의 통증이 소용돌이치는 속에 무엇인가가 쏟아져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불현 듯 몸을 일으켰다. 하체는 피범벅이었다.
"안되야, 엄니이!"
그녀는 느닷없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시멘트 바닥에 괸 피를 두 손으로 떠올리듯 하며 소리쳤다.
"안되야, 안되야. 엄니, 그이 씨럴 요리 맹글어뿔먼 안되야. 내 소원얼 요리 망쳐뿔먼 안되야. 엄니, 엄니이이..."
그녀는 꼭 실성한 것처럼 몸부림치며 울부짖고 있었다. 염상구는 그때서야 소화가 정하섭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정하섭이는, 무당 뱃속에 새끼를 까다니, 순간적으로 야릇한 질투심이 솟았다.
괸 피 위에서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소화의 옷은 전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염상구는 그녀의 하체를 유심히 살폈다. 피는 계속 흐르고 있었다. 애가 떨어져 흐르는 피가 어느 정도 흐르다가 멎는 것인지, 아니면 계속 흐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계속 흐른다면 죽고 말 것이었다. 매질을 심하게 해서 애를 떨어뜨리고, 하혈을 방치해 죽게 했다. 그건 모면할 길 없는 살인이었다. 배창자를 터져 죽였건 아이를 떨어뜨려 죽였건, 사람이 죽은 것은 매일반이었다.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하게 해야 했다.
"꼼지락 말고 자빠져 있어."
염상구는 몸부림을 그치지 않고 있는 소화를 향해 내뱉았다. 그는 철문을 떼밀었다. 피 냄새가 확 끼쳐왔다. 외기를 쐬자 피 냄새가 의식된 것이었다. 그 피 냄새는 염상구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그는 계단을 서너 칸씩 뛰어올랐다.
29. 대나무 전설
첫 얼음이 얼었다. 십이월의 하늘을 검은 날개로 뒤덮인 까마귀 떼들은 어디로인지 자취를감추어버리고 십이월의 하늘은 기러기 떼 차지가 되었다. 기러기 떼는 까마귀 떼와는 달리 아무리 많은 무리가 날아도 하늘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정연한 대오를 갖추어 날았고, 우짖음ㄷ 대오만큼 정확하게 박자를 맞추는 합창이었다. 얼음이 얼고 날새가 기러기뿐이면 바야흐로 엄동이 열린 것이었다. 삼남의 겨울은 늦게 오고 일찍 떠나갔다. 바다가 가까운 남녘은 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유난히 추위를 꺼려했다. 긴 여름을 살아내는데 익숙해진 체질 탓인지도 모른다. 결빙 추위를 헤치며 이른 아침부터 고샅, 고샅을 바지런하게 잰절음질 치고 있는 것은 큰 광주리를 무겁게 인 꼬막장수 여인네들뿐이었다. 꼬막맛은 제 철이었고, 살림살이가 어지간한 집들은 꼬막장수를 그냥 지나쳐보내는 일이 없었다.
김범우는 바쁜 걸음으로 소화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들몰을 줄달음 질쳐 온 매운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입에서는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 귀가 시린 것을 느꼈다. 벌써 겨울이구나, 그는 겨울을 실감했고, 뒤따라 염상진이 생각났다.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쫓겨야 하는 겨울 산생활이 앞으로 얼마나 어려울것인가. 김범우는 자신도 모르게 옥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창민의 부상은 어떠한지, 염상진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염려스러운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며 김범우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걸음을 더 빨리했다. 순천행 통학열차 시각이 임박해 있었다. 전 원장의 집행유예 판결과 석방을 기다리며 광주에 머물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학교에서 보낸 편지가 와 있었다. 십이월 초하루부터 정상수업에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본의 아니게 이틀 동안 무단결근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결근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상수업을 실시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정상수업이 이루어지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던 것이다. 선생들이나 학생들이 적지 않게 죽고 상한데다 사회분위기도 뒤숭숭하고 불안한 상태였다.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열 서너 명의 남학생들이 김범우를 보자 인사들을 했다. 거지반 거수경례를 하는데 굳이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는 학생도 두어 명 있었다. 대충인사를 받고 난 김범우는 담배를 빼 물었다. 통학열차를 타기 전에 담배를 피우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학생들이 태반인 열차 안에서는 되도록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먼 눈길로 첨산을 바라보며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리 염려하지 마시오. 선방이 어디 따로 있나요. 그저 선방에 앉아 있는 것이려니 생각하면 되는 게지요. 마음 놓이는 자리에 따라 극락이고 지옥이고 정해지는 법 아니던가요."
송 선생, 아니 법일 스님이담담한 어조로 한 말이었다. 잔잔한 미소가 감돌고 있는 그의 얼굴은 감방에 갇혀 있는 몸이라는 것을 위식할 수 없도록 평온했었다.
"어디 나만 겪는 고초인가요. 나는 역사의 줄기를 꿰뚫어볼 안목이나 식견은 갖추지 못했지만 어차피 해방이 되고 한번은 치러야 할 역사의 홍역이 아니었겠소?"
법일 스님은 어조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빛이 변화를 나타냈다. 약간 치켜뜬 듯한 눈은 의지적이고 신념에 차 있었다. 그 눈은 관념적 허무를 바라보는 승려의 눈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눈이었다. 법일 스님과 작별한 다음에도 '역사의 홍역'이라는 말이 자꾸만 되씹혀졌다.
"그 중, 골치 아픈 중이오. 중이면 열심히 목탁이나 칠 일이지 뭘 먹겠다고 빨갱이 질이냔 말야."
검사는 거침없이 내쏘았다.
"순수한 사회개혁 의식이라고요? 그게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이요? 김 선생, 괜히 동정하지 마시오. 그자는 골수빨갱이요. 순천지구에서 발행된 지하신문에 자금을 댔소. 그런데도 순수하오?"
검사는 증오의 빛까지 드러냈다. 그의 앞에 내놓은 소개장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사회개혁이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나 다를 게 뭐가 있소. 다 이웃사촌이고 그게 그거지."
일정치하에서 자격을 획득한 검사다운 말이었다.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검사실을 등지고 나오는데 빗장뼈가 부러져 한쪽 어깨가 기울어져 있는 법일 스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기차는 쇠끼리 맞갈리는 마찰음을 뿌리며 멈춰서고 있었다. 김범우는 학생들이 먼저 오르기를 느리게 걸음을 옮겨놓았다.
"선생님, 여기 앉으시지요."
한 학생이 자리를 권해왔다. 빈자리는 드문드문 있었다. 학생의 얼굴은 다소 눈 익었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저 잘 모르시지요?"
자리를 권한 학생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고,
"짜아석, 니까진 걸 선생님이 워처께 아시냐?"
맞은편 자리에 앉은 학생이 비꼬는 투로 말했다. 자리를 권한 것이 의례적인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슨 용건이 있어서였음을 느낀 김범우는 두 학생의 명찰을 빠르게 살폈다. 옆자리에 앉은 학생은 양효석이었고, 맞은편의 학생은 현오봉이었다. 현오봉의 옆에 앉은 학생은 책읽기에 열중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는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저는 양효석이라고 합니다. 본정통에 있는 포목점이 제 집입니다."
옆자리의 학생이 말하며 엉덩이를 들먹했다가 앉았고,
"저는 현오봉입니다. 청년단장이 제 아버님이었습니다."
맞은편의 학생이 모자를 약간 들어 올리며 고개를 꾸벅했다. 아, 네가 바로 죽은 현준배씨의아들이구나, 그 확인과 함께 김범우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염상구에게 제지를 종용했던 테러행위였다. 거기에 청년단장의 아들이 끼여 있다는 염상구의 말은 기억에 남아 있지만 포목점의 아들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 둘이 함께 행동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저어... 선생님께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현오봉이가 어려워하며 말을 꺼냈다. 김범우는 무슨 말인지를 눈으로 묻고 있었다.
"저어... 다름이 아니고, 내년 봄에 학교를 졸업하는데, 육군사관 학교를 가는 게 어떨지, 그걸 좀 알아보고 싶어서요."
"육군사관학교?"
김범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했다. 의외의 질문이었던 것이다.
"짜아석, 말재주도 드럽게도 웂네. 으째서 육군사과학교럴 갈라고 허느냐, 이만저만해서 육사럴 갈라고 허는디 선생님 생각은 어떠시냐, 허고 조단조단 말얼 해야 선생님이 쉽게 알아들으실 것 아니겄냐, 요런 등신아."
양효석은 상대방이 무색하리만큼 핀잔을 주었다.
"그렁께 애초에 성보고 말허라고 혔잖냔 말여."
현오봉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핀잔을 튕겨냈다.
"알겄어."
모자챙을 매만지며 자리를 고쳐 앉은 양효석은,
"선생님, 다른 것이 아니고 요번에 우리 아부지나 오봉이 아부지나 다 염상진 이놈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너무 분하고 참을 수가 없어서 원수를 갚자고 뜻 맞는 사람 다섯이서 멸공단을 조직했습니다. 멸공단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판인데 강제로 해산을 당했습니다. 분은 다 풀지 못했고, 두고두고 빨갱이 놈들한테 원수 갚을 생각을 하다가 육사를 가면 좋겠다고 우리끼리 의견을 모으게 됐습니다. 우리들 계획이 어떤지, 선생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양효석의 말은 그런대로 조리가 있었다. 책을 읽고 있건 옆자리의 학생은 어느새 책을 덮고 양효석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김범우는 불현 듯 흡연욕구를 느꼈다. 그러나 담배를 꺼내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차는 순천만의 염전지대 옆을 달리고 있었다. 겨울철 염전은 벼 포기만 남은 들판보다 더 황량해 보였다. 김범우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들이 군인이 되고자 하는 데는 그 원인이 지극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바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행동의 계기인 셈이었다. 그건 교육적인 의견을 피력할 성질의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의견을 듣고자 하는 것도 부정이 아니라 긍정 쪽일 것이고 반대가아니라 찬성을 원하고 있을 터였다.
"다섯 사람이 다 육사를 가기로 했나?"
김범우는 선생으로서의 최소한의 임무를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우리 둘이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야만 이야기가 순조롭게 풀릴 것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그렇게 묻지 않았다.
"자네들 생각이 나쁠 건 없지. 그런데 육사를 가는 건 평생 직업군인이 되는 길이네. 부친들의 원수를 갚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한데, 군인으로 일생을 살아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도 원수를 갚는 일과 구분해서 진중하게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두 학생은 말이 없었다. 김범우는 담배를 피울까말까 생각하며 그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김범우는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그들의 침묵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굳이 살펴보고 싶지는 않았다. 양효석의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다시 책을 폈다. 기차는 야산 굽이를 돌아가며 쉰 듯한 소리의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난 공산주의라면 치가 떨려요. 이가 갈린단 말요. 빨갱이는 내 철천지 웬수요."
선우진 선생의 증오였다. 그의 반공에는 피해자로서의 원색적 감정뿐이었다. 배울 만큼 배운 그에게서 이성을 기대할 수 없었는데 부친을 잃은 두 학생이 이성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일지 몰랐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말할 자격이 없어요."
선우진 선생의 그런 부르짖듯 하는 거부 앞에서는 논리적 이해라는 것이 오히려 감상이 되었다. 빼앗긴 자가 빼앗으려는 욕구나, 빼앗은 자가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구가 본능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본능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빼앗긴 자의 본능이 생존권 선언이라면, 빼앗은 자의 본능은 재산권 옹호였다. 빼앗긴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힘은 공격적일 수밖에 없고, 빼앗은 자는 어쩔 수 없이 방어적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 대립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고, 그 피해자인 선우진 같은 사람들은 감정적 반공세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은 아니, 싸운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될지 모르겠는데, 이게 대체 누구 잘못인가요? 꼭 미국이나 쏘련의 잘못일까요?"
기차를 타고 광주에서 내려오며 전 원장이 꺼낸 말이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한 그의 표정이나 어감은 다분히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마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김범우는 입을 열기에 앞서 전 원장을 바라보며 어색스런 웃음을 지었다. 전 원장도 따라서 떨떠름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된 전 원장은 감방에 갇혀 이런저런 정치적 문제를 되작거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전 원장을 생각하자 자신이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민망하고 난처해서 어색하게 웃음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장님 말씀은... 바로, 분단의 책임은 누구한테 있느냐 하는 것인데요. 글쎄요, 그게 한마디로 하기는 불가능한 일일 것 같습니다. 지금 원장님께서 의문을 표시한 대목만 잡아 말하자면, 물론 미국과 쏘련만의 책임일수 없습니다. 각 개인의 집에 주인이 있듯이 한 나라에도 분명 주인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둑이 든 것까지는 주인의 책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들어온 도둑에게 어떻게 대처하고 무슨 방법으로 몰아낼 것이냐 하는 것은 주인의 책임입니다. 도둑을 맞아 한 집안이 망하게 되었을 때, 도둑은 그 집안을 망하게 한 원인일 뿐이지, 책임을 물을 대상은 아닙니다. 도둑은 직업상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다만 그 집안사람들이 비겁하고 빈충맞아 자신들이 져야 할 책임을 도둑에게 전가시킬 수는 있겠지요. 아니면, 무식하고 아둔해서 원인과 책임을 구분조차 못하고 있거나 말입니다."
"그래요. 내 짧은 생각에도 그러리라 싶었어요. 그런데, 도둑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늘었는데 어째서 힘을 합쳐 두둑들을 몰아낼 생각은 안하고 양쪽으로 갈라져 도둑들 편을 드나요?"
"예, 그건 분단의 원인규명이 되겠는데요, 그게 참 복잡하고 미묘한 문젭니다. 저도 서민영 선생께 그 점을 여쭤봤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이,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야 밝혀질 문제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제 나름대로 막연하게나마 몇 가지로 의문을 정리하고 있는 상태일 뿐입니다."
"그거라도 좀 들려주시지요."
"글쎄요, 원장님이 아시고자 하는 데 도움이 안 되고 혼란만 드릴 텐데요."
"혼란이라도 안 겪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요? 이런 시국에 살면서."
"그런 문제에 관심 쓰시다가 우리 읍이 명의 한 분 잃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나도 당이나 하나 만들어야겠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그 웃음은 아까처럼 어색하거나 떨떠름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냥 한번 들어보시지요. 그게 그러니까, 먼저 외적인 원인과 내적인 원인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적인 원인을 다시 열강들의 국제적인 역학과 이데올로기의 상층으로 나눕니다. 국제적인 역학은 세계이차대전 전과 후로, 이데올로기의 상층은 미, 쏘의 냉정상황으로 세분합니다. 그리고 내적인 원인은 사회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으로 구분합니다. 사회적 측면은 다시 전통적 인습사회와 서구적 개조사회로, 정치적 측면은 식민지시대와 해방 후 시대로 나눕니다. 그리고 서구적 개조사회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식민지시대 정치는 보수적 독립운동과 진보적 독립운동으로, 해방 후 시대 정치는 보수적 독립운동과 진보적 독립운동으로, 해방 후 시대 정치는 식민지시대 정치세력과 친일세력으로 세분됩니다. 대충 이렇게 갈라놓고 보면 외적인 원인은 수평적이고 횡적이 되며, 내적인 원인은 수직적이고 종적이 되어 상호 교차하게 됩니다. 위에서 구분한 항목들을 따라 세밀하게 조사하고, 그것들의 상관관계를 따져가며 종합하게 되면 원인이 규명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머리만 혼란해지셨지요?"
"짐작했던 대로 역시 간단치 않은 문제로군요. 그런데 말이지요. 난 이번에 너무 딴 세상을 겪으면서 정치니 사상이니 하는 것에는 무식한 대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봤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식한 결론은 하나였어요. 왜 우리끼리 죽이고 죽고 하느냐는 것이었지요. 서로 한 발씩 양보하고 힘을 합치면 될 게 아니냐는 것이지요. 역시 단순하고 무식한 결론이죠?"
전 원장은 춥게 느껴지는 웃음을 어색하게 지었다.
"아닙니다. 바로 그 방법이 우리 입장에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영리한 방법이었습니다. 구라파에서 연합군한테 분할 점령된 나라가 독일 말고 또 오스트리아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지금 연합군의 신탁통치를 받으며 모든 정채세력들이 신탁통치의 종식을 위해 단합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에도 공산당이 있고, 보수정당이 있고, 종교세력 정당이 있습니다.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서죠. 그들은 되는데 왜 우리는 안 되느냐, 그것이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이고, 우리의 문제점입니다."
"그것 참 묘한 일이군요. 똑같은 조건 아래서 한 나라는 외세를 몰아낼 준비를 하는데, 또한 나라는 외세에 앞장서 둘로 갈라졌으니,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게 아까 말했던 분단 원인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김 선생은 이쪽에도 저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입장이니까 그런 일을 하기엔 적임자란 생각이 드오."
"원 별 말씀을..."
김범우는 담배를 꺼내다가 언뜻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눈길을 의식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지숙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그녀는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핼쓱하게 야윈 얼굴은 차가울 정도로 무표정했는데, 눈에는 파악하기 어려운 무슨 말인가를 담고 있었다. 김범우는 성냥을 켜는 체하며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로서는 여자의 눈길을 그처럼 똑바로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눈길이 여자가 남자에게 보내는 것이 아님을, 그러나, 어떤 호감을 표하고 있었음을 김범우는 느끼고 있었다. 김범우는 비로소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던 안개가 걷히는 것을 의식했다. 너는 단순히 안창민의 애인만은 아니다!
기차 안이 소란스러워지고, 기차는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김범우는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두 학생이 언제 자리를 떴는지 의자는 비어 있었다. 김범우는 빙그레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자신의 말을 올곧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우운처어어언, 수우운처어어언, 여기는 순천, 순천역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잊으신 물건 없이 차례차례 하차하시어 후미끼리를 건널 때 유의하시와 개찰구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울리고 있었다. 김범우는 자신도 모르게 어이없는 코웃음을 흘렸다. 도착역의 이름을 청승맞을 정도로 길게 늘여 빼는 것도 일본식 그대로였지만, 후미끼리라는 일본말을 아직까지도 우리말로 바꾸지 않은 채 쓰고 있는 것이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그 말은 들을 때마다 신경에 거슬렸다.
예상했던 대로 수업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유고를 당한 학생들의 책상은 반마다 모두 치웠기 때문에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출석부에는 유고자의 수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한 반에 칠팔 명이 보통이었고 어떤 반은 열 명이 넘기도 했다. 학생들은 공부 할 의욕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선생들도 기계적으로 종소리에 맞춰 움직일 뿐이었다.
김범우가 선우진 선생이 사고를 당한 것을 알게 된 것은 네 시간째가 끝나고서였다. 선우진은 개학 첫날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공산주의와 빨갱이에 대해서 거침없는 비판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날 밤 서너 명의 괴한들에게 난도질을 당했다고 했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는 바람에 주의사람들에게 빨리 알려졌고, 병원으로 옮겨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었다. 사건전말을 듣고 난 김범우는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때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선우진의 성급함이 딱하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안타까왔다. 그는 단순하게도 좌익학생들이 완전히 제거된 줄 알았을 것이고, 어리석게도 자신의 증오에 찬 감정을 마음껏 토로했을 것이다. 그가 조직의 생리에 대해 몰이해했던 것이 불찰이었고, 화를 자초한 원인이었다. 정치성을 띤 조직이란 그 어떤 것이나 양성과 음성의 양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고, 특히 공산당조직이란 자기네가 본받은 천주교조직을 능가할 정도로 치밀하고 비밀스럽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야 했다.
김범우는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도립병원을 찾아갔다. 선우진이 당한 자상은 예상했던 것보다 심했다. 배를 깊이 찔려 내출혈이 심했으므로 개복수술까지 받은 것이었다.
"그나마 천만다행한 일입니다. 가슴부위를 찔러 허파가 상했거나 심장이라도 다쳤더라면 큰일 당할 뻔했지요."
담당 의사의 말이었다. 선우진은 실물대 크기의 붕대 뭉치라고 해야 옳을 지경이었다. 머리부터 팔다리까지 온통 붕대로 감겨져 있었다. '난도질을 당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 선생, 내가 이 꼴이 될라고 월남을 한 게 아닙니다."
김범우를 알아본 선우진이 목이 메어 한 첫말이었다. 그의 눈에 괸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려 붕대로 스며들었다. '월남'이라는 말과 나이 든 남자의 눈물이 기묘한 힘으로 김범우의 가슴을 자극해왔다. 자신의의사와는 상관없이 고향을 버려야 했고, 다시 타향에서 생명의 위기를 당한 한 남자의 외로움과 비통함이 붕대에 싸여 있었다.
"선우 선생, 의사 말이, 경과가 아주 좋다고 하더군요."
김범우는 궁색한 거짓말을 찾아내고 있었다.
"김 선생, 범인들, 아니 날 이 꼴로 만든 빨갱이 놈들은 잡았다고 하던가요?"
"글쎄요, 난 오늘 첫 출근해서 선우 선생이 변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병원으로 오는 길이라서 그것까진 장 모르겠군요."
"세 놈이었어요, 세 놈. 어두워 얼굴을 보지 못한 게 원통해요. 김 선생, 그놈들을 꼭 잡아야합니다. 김 선생이 그놈들을 꼭 좀 잡아주세요."
선우진의 감정은 격해지고 있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선우 선생은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몸이나 빨리 회복하도록 해요."
김범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런 자기 자신에게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알았다는 말이나 고개 끄덕임을 선우진은 분명 약속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 선생, 내가 월남해서 크게 잘못한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선우진은 어느새 감정을 다스렸는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뭘요?"
"월남했을 때 선생이 되지 말고 남들처럼 경찰에 투신하거나 군대에 들어갔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빨갱이한테 원수도 속 시원하게 갚고, 이런 꼴도 안 당했을 것 아닙니까."
김범우는 한심스러운 심정으로 선우진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기차에서 두 학생의 말을 듣고 선우진을 떠올렸었는데 이제 선우진의 말을 듣고 두 학생을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선우 선생, 그렇게 편리할 대로 생각하지 말아요. 만약 경찰이나 군인이 되었더라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경찰이나 군인이 되면 빨갱이한테 속 시원한 복수를 가할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죽을 확률도 크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김범우는 매정하다 싶게 말을 해버렸다. 그 말은 진작 기차 안에서 두 학생에게 하려다가 그들이 나이 어린 것을 생각해서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런데, 선우진의 말이 그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완치가 되면 경찰이나 군인이 되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싶어 미리 그 말을 해버린 것이다. 선우진은 더 말이 없었다. 그는 눈을 꼭 감고 누워 있었다. 눈두덩이 부석부석했다. 김범우는 자신의 말이 다소 지나쳤나 싶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눈까지 감아버린 선우진의 침묵이 자신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선우 선생, 나 다음 수업이 있어서 들어가 봐야 되겠습니다. 또 들를 테니 몸조리 잘 하세요."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우진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김범우는 붕대로 감싸인 그의 몸을 측은한 눈길로 훑어보고는 침대에서 돌아섰다. 있는 집 자식으로 아무런 고생을 모르고 자라 영문학을 전공했고, 지주의 기득권을 천부적인 절대적인 것처럼 믿어 그 부가 형성된 과정의 모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회의해본 적이 없는 사나이. 그러므로 시대의 흐름이나 사회의식의 변화를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우리에 갇혀 불행을 키워가는 연약한 사나이. 가문의 재산이나마 보호되어 있으면 모르되 빈손에 혈혈단신이 되어버린 처지에 세파를 헤쳐 나가기에는 부적격한 사나이. 김범우가 긴 복도를 걸어 나오며 정리하고 있는 선우진이었다.
낙안댁은 남편이 시키는 대로 아들 하섭에게 세 차례에 걸쳐 돈을 장만해준 것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다.
"남정네가 허는 일얼 안에서 어찌 다 알겄소."
그녀는 이 말을 태연스럽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아주 그럴듯하다고는 느낌과 동시에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스란히 남편에게 뒤집어씌우는 죄스러움에 가슴이 아팠다. 남편과 이십 년이 넘게 살을 맞대고 살아오면서 수다하게 거짓말도 하고 속이기도 했지만 죄스러움으로 그렇게 가슴이 아픈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들 하섭한테는 전에 없던 미움이 솟는 것이었다. 남편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아들을 향해 미움으로 바뀌었다. 세 차례씩이나 남편 모르게 돈을 구려줄 때만 해도 에미의 안타깝고 안쓰러운 정풀이로 한일이었을 뿐 남편이 죄인으로 갇힌 후환이 끼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고, 더욱이 공산당이 번창하고 융성하라는 뜻은 털끝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전혀 몰랐던 일이라고요? 그게 사실인가요?"
심 대장이라는 사람은 찬바람이 이는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그 웃음이 이쪽의 속을 환히 알고 있다는 표시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더 캐묻지 않았다.
"좋습니다. 부부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죄 없는 아주머니까지 잡아둘 수는 없지요."
아들이 미워지는 건 그 심대장이라는 사람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젊은 사람이 어느 한 구석이라도 녹록해 보이는 데가 없이 강단지고 반듯해 보였던 것이다. 인상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지난번 사건을 소작인들 좋도록 해결한 것을 보면 분명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낙안댁은 집으로 돌아와서는 줄곧 그 생각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수로 그 사람의 마음을 돌려 남편이 풀려나게 할 것인가... 아무리 궁리를 해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애가 타고, 애가 타다보면 아들에 대한 미움이 살아 오르고는 했다. 그리 애를 끓이고 앉아 있는데 염상구가 찾아들었다. 낙안댁은 마음이 조급하고도 허하던 참이라 염상구를 대하는 순간 평소에 하시하던 감정은 간데가 없고 반가움이 앞섰다. 저것이 그래도 청년단장인데 무슨 수가 있을지도 모르지. 저 구름에 비 들었으랴 싶은데 소나기 쏟아진다 하지 않던가.
"어쩐 일이신가, 날도 추운디."
낙안댁의 음성은 어느 때 없이 부드럽고 그 얼굴에는 반가움이 드러났다.
"전헐 말이 있어 왔구만이라."
염상구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옳지 죄럴 짓고 봉께 나 겉은 놈헌테도 기가 팍 죽어 요리살붙게 허는 구만, 하고 넘겨짚고 있었다.
"무신 말, 심 대장이 무신 말 전허라고 허등가?"
낙안댁은 성급하게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 대장이요? 아닌디요."
염상구는 상대방의 심정을 다 헤아리며 일부러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허먼, 무신 전헐 말이 있으까아?"
말꼬리가 길어지며 낙안댁의 안색은 새치름하게 변했다.
"워따메, 날이 쇠불알 얼어붙게 칩네이."
염상구는 혼잣소리처럼 말을 뱉으며 과장되게 진저리를 치고는,
"나가 정헐라는 말이 사령관님 말씸은 아니드락도 요분 사건에 직접 관현된 말이구만이라. 워째, 들어보실라요?"
싫다면 그냥 돌아가겠다는 태로를 취했다.
"어이, 날이 찬디 방으로 잠 들오소. 나가 정신이 웂어서 사람얼 추운 디다 세우고 이러네, 시방."
낙안댁은 자신의 경솔을 책하며 염상구를 방으로 들게 했다. 염상구는 간단히 한마디 전하고 돌아서려 했던 당초의 마음을 바꿔 일삼아 안방으로 들어갔다.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반기는 척했다가 홀대하다가 하는 못돼먹은 심보에 비위가 상해, 속을 좀 긁어주고 싶은 오기가 동했던 것이다.
"아짐씨, 무당며느리 보게 생겼습디다?"
염상구는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고개를 외로 틀며 느닷없는 말을 내던졌다.
"머시여? 고것이 무신 소리여?"
생각했던 대로 낙안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굴이 딱 굳어졌다. 염상구는 낙안댁을 곁눈질하며 태평스럽게 담뱃갑을 꺼내고 있었다.
"이사람아, 고것이 무신 소리냐니께?"
말을 다그치고 있는 낙안댁의 가슴은 쿵쿵 울리고 있었다. 소화가 임신이라도 했단 말인가. 설마 하섭이가 천한 무당의 몸에 손을 댔으랴. 소화가 심부름한 것을 그렇게 과장하며 이놈이 돈푼을 알겨내려는 것인가. 낙안댁의 머릿속은 어지럽게 엇갈리고 있었다.
"아짐씨넌 안직 몰르고 있었습디여? 그라먼 나가 먼첨 알았는가아?"
염상구는 담배 연기를 천장을 향해 푸우 뿜어내고는 딴전을 피우듯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아, 사람 속 태우지 말고 싸게싸게 말을 허소."
"알겠구만요. 확 말얼 해뿔제라. 그 처녀무당이 아덜 애럴 뱄드만이라."
염상구는 낙안댁을 똑바로 쳐다보며 터무니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워메, 이 일얼 워쩔끄나!"
쪼그려 앉았던 낙안댁은 털퍽 주저앉고 말았다. 아랫입술을 문 채 눈을 꼭 감은 낙안댁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담배연기를 건성으로 내뿜으며 실눈 아래로 낙안댁을 보고 있는 염상구의 입 언저리에는 가소로와하는 웃음이 는적거리고 있었다.
"나 인자 가볼라요."
낙안댁이 질겁을 하며 눈을 떴다.
"이 사람아, 이러고 가먼 워쩔 것인가. 나허고 의논 잠 허세."
낙안댁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염상구의 소매를 붙들며 매달렸다.
"시악씨가 아조 이쁘고도 얌전튼디, 아짐씨 허는 것 본께, 며느리 삼기가 싫은갑제라?"
"이 사람아, 넘 속에 불 질르지 말소. 근디, 애럴 뱄어도 안직 표는 안 날 것인디, 자네 취조에 그것꺼정 자백허등가?"
머리 돌아가는 것이 제법이라고 염상구는 생각했다.
"활동사진 보디끼 훤허게 아시능마요."
"고것이야 워찌 되었거나 상관웂은 일이고, 인자 워쨌거나 애럴 못낳게 해야 헐 것이디..."
낙안댁은 속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감정을 수습하고 냉정하게 해결방법을 찾고 있었다. 염상구는 이제 그만 사실대로 털어놓을까 하다가 기왕 시작한 거 좀 더 애를 먹이기로 했다.
"이보소, 무신 존 방도가 웂겄는가?"
"글씨요, 무당 배에 씨럴 뿌리지 말았어야제라."
"인자 고런 소리 허먼 무신 소양이 있어. 애럴 못 낳게 헐 방도럴 말허랑께."
낙안댁이 짜증을 부렸다. 그려, 애가 타제? 쪼깐 더 애가 타야 써. 염상구는 박하사탕을 와삭와삭 씹는 기분이었다.
"금메 말이요, 나는 무당헌테 씨럴 못 뿌려봐서 잘 모르겼는디요,"
"자네 시방 내 가심에 불 질를라고 작정혔능가!"
낙안댁이 그만 소리를 질렀다.
"와따메 귀창 떨어지겄소. 나도 답답헌께 허는 소리지라."
염상구는 낯 두꺼운 능청을 떨고 있었다.
"그려, 존 방도가 있네."
낙안댁이 갑자기 밝은 음성으로 말하고는 염상구와 눈길이 마주치자 앞으로 다가앉으며,
"자네가 애럴 띠주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 나가 의사도 아니고 무당도 아닌디 무신 수로 애럴 띠어라. 의사먼 수술이나 허고, 무당이먼 굿이라도 허겄지만 나넌 헐 것이 아무것도 웂이지 않는가비요?"
"내 말 듣소. 자네 취조험시로 매질 안허는가? 고때 애 떨어지게 해도란 말이시."
낙안댁의 목소리는 속삭이듯이 낮았다. 아, 이 무서운 여자. 양반입네 부자네 하며 겉으로는 점잖은 척, 깨끗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런 끔찍한 생각을 품고 있는 징글맞은 여자. 그래, 기왕 애는 떨어진 것, 이런 부탁을 맨입으로 하지는 못할 것이다! 염상구는 낙안댁을 응시한 채 두 가지 생각을 거의 동시에 하고 있었다.
"글씨요, 아무리 보도 듣도 못허는 것이라 혀도 고것이 인종은 인종인디..."
"보소, 수고비 톡톡허니 낼 것이니 나 잠 살려주소. 무당이 새끼럴 나서 안고 들어오는 날에는 우리 집안 망허네."
"근디, 을매럴 주시겼소?"
"쌀 닷 가마."
염상구는 고개를 저었다.
"허먼, 여섯 가마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음마, 그라먼 일곱..."
"니기럴, 다 그만두씨요. 누구럴 거지새끼로 아요? 실인얼 허라고 시킴스로 헌다는 짓거리가 요게 머시여."
염상구는 방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시, 아녀. 여자 소견에 그리 되얐으니 자네가 불러보소."
낙안댁은 염상구를 붙들고 늘어졌다.
"좋소. 일곱에 세 곱얼 내씨요."
"글먼, 고것이 을매여?"
낙안댁이 입을 딱 벌렸다.
"삼 칠에 이십에 일이요. 남자가 짜잔허게 꼬랑댕이 붙은 것꺼정 받기 싫은께 딱 스무 가마니만 내씨요. 더 무신 말 허먼 나허고는 그만이요."
"알겄네."
낙안댁은 맥 빠진 소리를 흘리며 염상구를 붙들었던 두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당장 가서 일얼 끝내겄소. 쌀언 일 끝내고 챙길 것잉께 준비혀두시씨요."
염상구는 당당하고도 기운찬 걸음걸이로 안방을 나섰다. 그 뒤로 염상구한테서 낙안댁에게 전화가 걸려온 거의 두 시간쯤 지나서였다.
"패도 너무 무작허게 팼는지 피가 주체럴 못허게 쏟아져, 죽을까 겁이 나서 병원으로 옮겨놨구만이라. 애 떨어진 것 확인도 허고 병문안도 허고 겸사겸사 혀서 병원에 한차례 가보시제라."
이 말은 처음에 전하려고 했던 말이었다. 다만 '애 떨어진 것 확인도 허고'하는 대목이 새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확인헐 것 웂네. 근디 병원에 있음서 그 일이 소문 나먼 워쩔 것인가?"
"매질 심허게 혀서애 떨군 것이야 나가 뒤집어쓰는 잘못으로 끝나제 그 일이 워찌 소문이 나겄소?"
"알었네, 쌀 실어가소."
"고맙구만이라. 헌디, 그 여자가 피 쏟아지는 것을 보고 애 떨어진 줄 알고는 피럴 보듬고보듬고 험시로 발광허대끼 통곡을 해대는디, 맘이 짠혀서 못 보겄드만이라. 은제라도 병문안얼 한분 가보시는 것이 워쩌실께라?"
"내 알아 헐 일인께 간섭 말소."
낙안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낙안댁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두워진 다음에 병원을 찾아간 것은 나흘 뒤였다. 다음날이소화의 퇴원이었다. 낙안댁은 치료비와 입원비를 치르고 소화의 방을 찾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던 낙안댁은 소화를 보는 순간 걸음을 주춤했다.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것은 소화가아니라 전혀 다른 여자 같았던 것이다. 그 곱고 풋풋하던 모습은 간곳이 없고 창백하게 시든 병자가 누워 있었다. 저것이 못할 고생을 하는구나. 낙안댁은 뜨거운 물이 덮씌워져오는 것 같은 죄의식을 느꼈다. 작정하고 왔던 마음이 허물어지려고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꾸짖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낙안댁을 알아본 소화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닐세, 그냥 눠 있게."
낙안댁은 소화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머 헐라고 이리 오셨는게라."
소화의 목소리는 병색 짙은 파리한 모습만큼이나 가녀리고 힘이 없었다.
"하섭이 땀시 자네 고상이 너무 크고 무겁네. 입이 열 개라도 미안허고 면목웂은 말언 다헐 수가 웂네. 차차로 갚아가도록 험세."
낙안댁은 품위를 갖추어 반듯하게 인사치레를 했다.
"아니구만요, 그리 말씸허시먼 지가 더 면목 웂이고 부끄러지는구만요."
낙안댁의 귀에는 소화의 말이, 당연히 할 일을 했고, 당연히 당할 일을 당한 것이라는 뜻으로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화의 입에서 금방 '어머님'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자네가... 워째서 입원얼 했는지 다 들었네. 우선 책임 못 질 짓헌 하섭이가 양심 웂은 인종이시. 그라고 그 담이... 여자로 몸 간수 지대로 못헌 것이 자네 잘못이네. 둘이는 애당초 인연이 아니었네. 젊은 사람덜이 철웂어 저질른 잘못이었응께 인자 깨끔허니 잊어뿌러야 헐것이네. 허고 앞으로는 하섭이가 무신 소리럴 혀도 심바람 나서지 말고 퇴허소. 자네가 심바람얼 와도 자에럴 내가 퇴헐 것잉께. 아픈 자네 앞에서 차마 못헐 소리 허고 있는 줄 알제만, 나만 야속타고 타박허진 말아주소. 요런 좋잖은 소리 허는 내 속도 편치럴 않네."
낙안댁의 말 마디마디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소화의 양쪽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관자놀이께의 머리카락을 적시며 아래로 스미고 있었다.
이지숙은 중병을 앓듯 하며 이틀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식은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끝이 없는 악몽과 환각에 시달렸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도록 뼈가 드러나도록 끊임없이 매질을 당하고, 염상구에게 목이 졸려 죽기도 하고, 자신이 염상구를 난도질 쳐 죽이기도 하고, 안창민의 한쪽 다리가 썩어 들어가고, 목발을 짚은 안창민이가 염상진에게 버림받아 산골짜기를 헤매며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고, 안창민이가 건강한 두 다리로 자신에게 뚜벅뚜벅 걸어와 손을 내밀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자기 학급 아이들이 자신을 향해 일제히 빨갱이를 외치며 신주머니고, 필통이고 돌멩이를 던지고, 선생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온갖 욕을 퍼붓고, 자신이 난사하는 총 앞에서 염상구고 경찰이고 안창민이고 김범우고 꺼꾸러져 죽고... 그녀는 눈 감기를 두려워하며 이틀을 보냈다. 서너 숟가락을 뜨다 말고 아침밥상을 물린 그녀는 벽에 몸을 부린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고, 정신마저 흐리멍덩한 태 갑작스러운 현기증으로 아뜩해지거나 터무니없는 환각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몸 여기저기에 잡힌 멍자국들은 처음의 검푸르칙칙한 색깔에서 누르퉁퉁하고 푸르죽죽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이 선생님, 선생님 계십니껴?"
조심스러운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방문 가까이에서 들렸다. 누구일까를 생각하며 몸을 수습한 이지숙은 앉은걸음으로 몸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선생님, 안녕허셨어요?"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단발머리의 소녀는 학교사환이었다. 이지숙은 그 아이가 왜 왔는지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선생님, 교장선생님게서 뵙자고 허십니다."
이지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소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을 닫으려는데 소녀는 돌아설 낌새가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이지숙은 소녀에게 먼저 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선생님이 영 아파뵈는디 지가 뫼시고 갈라능마요."
소녀가 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나 혼자 갈 수 있다. 학교 일이 바쁜데 늦게 가면 야단맞는다. 난 세수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해야 하니까 어서 가서 교장선생님한테 금방 오신다더라고 여쭤라."
이지숙은 소녀의 마음으 고마워하며 다정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참말로 혼자 오실 수 있으신게라?"
"그러엄."
"글먼 지 먼첨 가겄구만요."
소녀는 꾸벅 인사를 했다. 까만 단발머리가 탄력 있게 흔들거렸다. 이지숙은 그 머리결의 흔들림을 보며, 곱기도 해라, 순간적인 신선감을 느끼고 있었다. 봄의 양지에서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노란 솜털을 보았을 때 감정의 현을 울려오는 감탄스러운 경이로움 같은 것이었다. 내가 교단을 떠나기를 아쉬워하고 있구나,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판독하며 씁스레하게 웃음 지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끝낸 교장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호흡 짧은 연기를 두어 번 내뿜고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담배를 뻐끔거렸다. 눈을 아래로 뜬 이지숙은 교장의 그런 동작들을 빠짐없이 감지하며 어서 말을 꺼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의 서두를 시작하기만 하면 더 이상 교장의 입장을 난처하게 방치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이 선생, 저어 다름이 아니라... 나도 중간입장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난감한..."
"교장선생님, 말씀 안하셔도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돌아오는 날로 사표를 제출하는 것이 예의고 도리인줄 알고 있으면서도 몸이 아프고 기동하기가 어려워 부르시게까지 한 불찰을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지숙은 준비했던 말을 한달음에 마치고, 써가지고 온 사표를 손가방에서 꺼내 교장 앞에 밀어놓았다.
"이거 참, 내가 아무 힘도 되지 못해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전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이지숙은 일어섰다. 교장이 담뱃불을 끄며 따라 일어섰다. 이지숙은 교무실을 향해 복도를 걸었다. 이 년 동안 낯익었던 환경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어느 교실에선지 풍금소리와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울려왔고, 어느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방울 구르듯 맑게 들려왔다. 내 학급은 누가 가르치나! 이지숙은 뒤늦은 생각에 부딪치며 걸음을 멈칫했다. 사표를 내기 전에 이미 자신의 자리를 없어진 것이었다. 불현 듯,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태반이 가난하여 점심을 굶어야 하는 아이들, 손가락마디만한 몽당연필을 대나무에 끼워 써야 하는 아이들, 그들이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교직을 박탈당한 것과는 별개로 그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되었음이 새로운 슬픔과 헛헛함으로 가슴을 아리게 했다.
수업중이라서 교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교감은 정물처럼 멀리 앉아 있었고, 사환아이가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지숙은 책상정리를 서둘렀다. 수업이 끝나기 전에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선생들을 만나보았자 반가와 할 사람도 없었고, 반가운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겉으로는 입에 발린 소리들을 늘어놓으면서 속으로는 구경거리를 삼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이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지만 담임이 이미 바뀌어 있었다. 만나보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면 되었지 정작 만나서 무얼 할 것인가. 그리고 학교 측도, 새 담임도 원하는 바가 아닐 수도 있었다. 책상서랍들에서 챙겨야 할 사물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보자기에 싸서 들고 교감 앞으로 다가갔다.
"교감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무언가를 읽고 있던 교감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길로 이쪽을 보다가 이지숙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교, 교장선생님은 만나보셨는가요?"
"네에."
"아아, 그러셨구만요. 뭘 좀 읽니라고 이 선생 들어오신 것도 몰르고 있었습니다그려."
"책상은 다 정리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지숙은 고개를 숙였다.
"아, 예, 이거 서운해서..."
교감은 교무실 문까지 따라 나왔다. 이지숙은 고개를 숙이고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뒤돌아보지 말자고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다시는 교단에 설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냉정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과 맞서게 된 것이었다. 이지숙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교문을 벗어났다.
이지숙의 교향은 담양이었다. 담양은 예로부터 농산물보다는 죽세공품으로 이름난 고장이었다.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만큼 무성한 대밭이 사철 푸름 속에 산재해 있었다. 담양의 대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타지방의 대에 비해 질이 월등히 좋은 까닭이었다. 삼남지방에서만 자생하는 대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다년생 나무였는데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집집의 윗울차리 노릇을 하는 양하며 울울히 퍼져 있었다. 그런데 담양의 대는 그 많은 고장의 대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힐 만큼 질이 좋았던 것이다. 담양의 대는 흔히들 '왕대'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대로 원통의 크기가 대개 어른의 양쪽 손가락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만든 원만큼씩 했고, 키도 열 길 높이로 치솟았다. 담양대가 그렇게 걸출한 것은 품종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담양대를 다른 지방에 옮겨다 심으면 그 걸출한 모습은 간 데가 없고 '좀대'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상해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기후와 토양 탓이라는 것쯤은 헤아리고 있었다. 담양에서 대가 아무리 유명하다 하나 치부의 수단이나 기준은 역시 전답이었다. 이지숙은 담양 지주 이자원의 사남일녀 중 막내인 고명딸이었다. 그녀가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은 셋째오빠의 영향이었다. 그녀는 생김새는 물론 성격까지 셋째오빠를 닮은 데가 많았다. 셋째오빠는 말수가 적은 냉정한 성격에 사리분별이 정확했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그런 셋째오빠가 좋아 유달리 따랐고, 오빠도 여동생을 남달리 사랑했다. 그녀의 셋째오빠는 광주서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사회주의의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소학생인 그녀에게 셋째오빠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서로 같으냐, 틀리냐?"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하대하는 것은 옳으냐, 그르냐?" 하는 말을 불쑥불쑥 묻고는 했다. 그녀가 대답을 제대로 하면 셋째오빠는 그녀를 꼭 끌어안아주기도 했고, 캐러멜을 교복주머니에서 꺼내기도 했다. 그리고 대답이 잘못 되면 셋째오빠는 왜 잘못 된 생각인지를 알아듣기 쉬운 말로 차근차근 설명해주고는 했다. "떡 한 쪽이라도 가난함 아이들과 나눠 먹어라." "내가 배가 부를 때 배가 고픈 동무가 열이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이런 말도 수시로 들려주고는 했다. 대나무의 전설을 들려준 것도 셋째오빠였다.
옛날 어느 작은 마을에 큰 부자가 하나 있었다. 작은 마을에 큰 부자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을의 논밭이며 산이 모두 그 부자의 것이었고, 삼십여 가구 사람들은 모두 그 집의 종이나 마찬가지인 소작인들이었다. 그 부자는 어찌나 욕심이 많고 마음이 혹독한지 추수 때 나락을 받아들이며 자기가 보는 앞에서 일일이 말질을 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을 쿵쿵 두 차례씩 다지게 했다. 자기 산에서는 솔가지 하나 꺾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솔잎 한 갈퀴 긁어내지 못하게 단속을 했다 동네사람들은 나무 한 짐을 하자면 몇 십리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소작인들의 닭을 예사로 잡아갔고, 자기 집 잔치에 돼지를 추렴시키고는 했다. 그런 그가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소작료에 사정을 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 해도 아니고 내리 삼년을 흉작이 덮쳐왔다. 빚 무서운 줄 알면서도 굶어죽을 수는 없어 두 해에 걸쳐 빌어다 먹은 장리쌀 빚이 있는데다가 또 흉년이 겹쳐 소작료에 장리 빚 이자만을 합쳐 나락을 바치더라도 사람들은 거의가 굶어죽게 될 형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리 빚을 내년으로 연기해주거나, 그것이 아니면 소작료 반을 일 년 동안 연기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그 사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네사람들은 추수가 끝나고 오히려 굶주리기 시작했다. 겨울이 닥치는데 그대로 굶어죽을 수가 없어 사람들은 몇 차례나 지주를 찾아가 장리쌀을 풀어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지주는 쌀쌀하게 고개를 저었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죽마저 끓일 수 없는 집들이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세 남자가 부자 집 담을 넘어갔다가 그 집 하인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다음날 세 남자는 동네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부자 집 하인들에게 맞아죽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그 누구도 부자 집 창고를 넘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는 않았다. 여섯 남자가 비밀리에 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 굴은 부자 집 창고를 향하여 뚫려나갔다. 죽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도 여섯 사람은 사생결단 굴을 파서 마침내 창고아래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쌀가마니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 쌀가마니 무게로 굴이 무너지고만 것이다. 결국 여섯 가람은 쌀가마니에 갈려 죽은 것이었다. 부자 집 종들이 파낸 시체들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모두 한구덩이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여섯 사람의 가족들은 마을에서 강제로 내몰렸다. 그것은 부자가 분풀이를 한 것만이 아니었다. 농사지을 남자가 없어졌으므로 그 가족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집 저 집에서 굶주려 죽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노인네들이 죽어갔고, 아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부자 집으로 몰려가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애걸했지만 대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겨울이 지나고 났을 때 동네 사람들은 삼할 정도가 굶어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영양실조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서야 농사지을 일이 걱정이 된 부자는 장리쌀을 풀어 내놓았다. 그런데, 땅에서 싹이 돋고 나무에서 움이 트기 시작하면서 동네 이곳저곳에서는 이상야릇한 일이 벌어졌다. 전에 볼 수 없었던 괴상스럽게 생긴 싹이 돋아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잎도 줄기도 없이, 성낸 새벽 남근같이 생긴 그 싹은 부자 집 마당은 말할 것도 없고, 안방 구들을 뚫고도 솟았고, 창고 쌀가마니를 뚫고도 솟았다. 부자는 종들에게 그 싹을 다 쳐 없애라고 호령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이면 다른 싹이 돋아 올랐고, 쳐내고 나면 또 다른 싹이 돋아 올랐다. 여름이 되자 부자 집은 그 이름 모를 나무로 가득 차 완전히 폐가가 되었고, 농토에도 빽빽이 들어차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부자가 마을을 뜬다는 소문이 퍼졌다.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졌으므로 소작인들도 마을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밤이었다. 동네 남자들은 꿈을 꾸었다. 맞아죽은 세 사람과 굴에 파묻혀 죽은 여섯 사람이 함께 나타나서, 배곯는 것도 서러운데 우리는 죽음도 너무 원통절통하게 했다. 우리는 가슴에 서리서리 맺힌 한을 풀 길이 없어 나무로 환생을 했다. 먹을 것은 전부 부자 놈한테 뺏기고 배를 곯을 대로 곯아 겉모양만 사람이었지 속은 텅텅 비었던 생전의 꼴새 그대로 환생한 까닭에 나무속도 마디마다 텅텅 비어있다. 나무를 잘라보면 알 것이니 놀라지 마라. 그 나무를 길게 잘라 한쪽 끝을 뾰족하게 다듬어 그것으로 부자 놈 배째기를 찔러 죽여라. 그리고 빈 통에 그놈의 피를 채워 우리 묻힌 자리에 뿌려주면 맺힌 한을 풀고 저승길을 편히 갈 것이다. 부자 놈이 떠나기 전에 당장 우리 원수를 갚아라. 너희들은 우리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이번에도 우리 원수를 갚아주지 않으면 화가 너희들에게 미칠 것이다. 이런 말을 남기고 아홉 사람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꿈이 하도 기이하고 생생해 남자들은 일시에 잠이 깨었고, 옆집 옆집으로 연락을 취해 다 한자리에 모여 앉고 나서 모두 똑같은 꿈을 꾼 줄 알게 되었다. 남자들은 망자들의 뜻을 따라 원수를 갚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나무를 잘랐고, 나무는 과연 속이 텅텅 비어 있었다. 남자들은 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아 창을 만들고 들어 어둠을 헤쳐 부자 집으로 쳐들어갔다. 부자는 창에 전신을 찔려 죽었고 창을 뺐을 때는 그 빈 통에 부자의 피가 가득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피는 아홉 사람이 묻힌 자리에 뿌려졌다. 며칠 뒤에 마을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농통에 솟은 그 나무들이 노란 꽃을 피우더니만 꽃이 지면서 그 나무들도 죽어갔다. 왜 하필 농토에 솟은 나무들만 죽는지를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노란 꽃은 한을 푼 넋들의 승천이고, 나무들이 말라죽은 것은 다시 농사를 짓고 살라는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죽은 나무숲에 불을 질러 다시 농토를 일군 다음 골고루 몫을 나누었다. 그런데 그 농토는 전보다 훨씬 기름져 곡식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누울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보살피는 망자들의 넋에 고마워하며 추수 첫 곡식으로 제사장을 걸고 정성스럽게 차렸으며, 그 나무는 옮겨 심는 사람도 없는데 해마다 이 고을, 저 고을로 번창해나갔다. 누가 이름 지었는지 모른 채 사람들은 그 나무를 '대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대를 물린 가난한 넋의 환생이란 뜻이기도 했고, 남들 대신 죽어 남을 이롭게 한 넋의 환생이란 뜻이라 말하기도 했다. 대나무는 가난한 소작인의 넋이라서 춥고 배고픈 것을 싫어해 기온이 따뜻하고 농지가 넓은 땅에만 산다고 했다. 그리고 겨울에 댓잎들이 유난히 서걱거리는 것은 '추워, 배고파, 옷 줘, 밥 줘'하는 넋들의 읊조림이라고 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소학교를 졸업한 이지숙은 공주사범에 진학하자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셋째오빠가 세상을 떠나 것은 그녀가 삼학년 때였다. 일본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주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오빠의 죽음을 계기로 그녀는 더 열성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녀가 벌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것은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은신책이었다.
이틀동안 자리에 누워만 있던 이지숙은 사흘째 되는 날 외출을 했다. 그녀가 찾아간 것은 서민영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대충 소개했고, 전 원장 사건의 결말에 관심을 기울여왔던 서민영은 이지숙을 그런 대로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저를 선생님 야학에서 일하게 해주십시오."
이지숙은 또렷하게 한 말이었다. 서민영은 아무런 내색 없이 이지숙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야학에는 보수가 없소."
서민영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생계는 어찌할 거요?"
"그 동안 저축한 게 있습니다."
"결혼할 연령이 아니시오?"
"아실지 모르지만 아직 결혼할 처지가 못 됩니다."
서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강요는 아니오만, 신 앞에 기도할 수 있으시오?"
"지금까지 종교를 갖지는 않았지만, 모든 종교는 경배해야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건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이오. 뜻이 있다니 일을 해보도록 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지숙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일정보수는 없지만 주식을 해결할 만큼 양식은 드리게 될 게요."
"그런 건 신경 안 쓰셔도 좋습니다."
"그건 최소한의 내 소임일 뿐이오. 신성한 노동의 착취란 인간 최대의 죄악이오."
이지숙은 감동 어린 눈으로 서민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법으로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이상 자신이 굳이 그녀의 사상문제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서민영은 되짚고 있었다.
30. 전라도
소화는 퇴원을 하기는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유치장에서 그녀를 맞은 건 들몰댁이었다. 자신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들몰댁은 혼자 유치장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들몰댁………"
소화는 들몰댁의 손을 움켜잡으며 목이 메었다. 그 목메임은 반가움이나 서러움으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죄스러움과 미안함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들몰댁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고초를 당하고 있는 처지였다. 조사를 받으며 들몰댁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조사관은 그 참말을 거짓말하는 것으로 여겨 자꾸만 심하게 다루었을 것이다. 그 억울함과 답답함이 어떠했을까. 소화는 들몰댁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함께 살기로 마음 정했을 때 이런 고초를 겪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몸언 잠 어떠신게라?"
들몰댁은 반가움으로 소화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그만허구만요."
소화는 핏기 없이 부석부석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죄럴 졌다고 혀도 사람얼 병원에 떠메 가도록 무작시럽게 패다니………"
들몰댁은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 멍이 잡힌 그녀의 얼굴이 곧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들몰댁은 소화가 낙태로 입원했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계엄사령관 심재모는 소화의 입원사실을 보고받았었다. 그러나 정도에 지나친 고문취조에 대해서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입원을 시킬 정도로 심한 고문을 했다는 사실이 읍민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기가 십상이기는 했지만, 그 반면에 여러 측면에서 파급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주둔하고 나서 처음 발생한 좌익사건인데다가, 침투한 자를 놓치고 말았으므로 심재모는 꽤나 긴장해 있었다. 그는 체포된 두 여자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취조해서, 분명히 뿌리를 내리고 있을 읍내의 지하조직이 어느 정도라도 드러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두 여자는 빨갱이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말단세포도 아니었다. 소화라는 여자의 행위는 사상이나 조직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단순범죄에 지나지 않았다. 조직 구성이 치밀하고, 기밀 유지에 철저하다는 공산당이 그런 식으로 허술하게 공작을 해왔다는 사실이 심재모로서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건 또 다른 그들의 전략전술일 수 있었다. 조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의외의 인물을 동원함으로써 상대방의 탐지를 철저하게 피할 수 있는 기만술인 동시에 불리한 상황에서 기존조직을 움직이는데 따른 위험부담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의 기대는 어긋났고, 그는 한층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한 여자가 입원함으로서 얻게 될 파급효과에 만족할 도리밖에 없었다. 첫 번째 파급효과는, 읍내의 지하조직에게 계엄군의 단호함을 보이고, 그 사실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염상진 일당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앞으로 포섭당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와 예방이 될 수 있었다. 세 번째, 정 사장 사건으로 무례하게 굴고 있던 지주들의 콧대를 꺾고, 악의에 찬 발언에 대한 충분한 응답이 될 것이었다.
심재모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매일 고심하고 있었다. 정 사장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인 아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돈을 건네준 것은 피할 수 없는 범법행위였다. 그 액수는 아버지가 공산주의에 빠져있는 아들의 신변을 염려해서 마련해준 노자 정도가 아니고 거액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 거액의 돈이 공산당 활동자금으로 소모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정 사장은 공산당의 자금책 노릇을 한 셈이었다. 그것도 한 번이었으면 또 모르겠는데 세 번씩이나 저지른 일이었다. 만약 이번에 발각되지 않았더라면 앞으로도 계속 돈을 대주었을 것이다. 정 사장은 횡설수설하며 어떤 방법으로든 풀려나려고 급급했다. 그러나 심재모에게는 그런 정 사장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신경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심재모는 계엄사령관으로서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치안권, 작전권, 즉결처분이었다. 그 세 가지 권한 중에 어떤 것을 행사해서 정 사장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곰곰이 따져보았지만 어느 것도 합당한 것이 없었다. 그 권한들은 어디까지나 공산당이나 부하들을 대상으로 하여 행사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민간인을 상대로 하는 경우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거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쓰여지는 권한일 뿐이었다. 정 사장은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 군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민간인 재판권이 부여된 것도 아니었다. 정 사장의 죄를 공정하게 따지기 위해서는 그를 법원으로 넘기는 방법밖에 없었다. 정 사장을 그렇게 조처하는 경우 자금운반책 노릇을 한 여자도 함께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읍민들의 관심이 쏠려 있는 사건인 만큼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경찰서장이 동의를 표해왔다.
"읍민들의 관심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요?"
"예, 여러 말들이 많은 모양이지만 간추려보면, 벌을 받을 것이냐, 그냥 풀려날 것이냐, 하는 것일 겁니다."
"사람들은 어느 쪽을 더 바라나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고, 돈 많은 정 사장이 그만한 일 가지고 벌을 받을 리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허어, 그럼 정 사장 돈을 먹은 사람은 바로 나 아니요?"
심재모는 어이없어하는 헛웃음을 흘리며 경찰서장을 바라보았고, 경찰서장은 민망해하는 얼굴을 슬며시 돌렸다. 날이 지체될수록 마음이 조급해지는지 정 사장은 돈거래를 차츰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사실이었다. 심재모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여서 혹독할 만큼 매정하게 잘라버렸던 것이다.
"서장님, 정 사장 문제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게 뭔고 허니, 만약 정 사장 아들 정하섭이를 우리가 추격하다가 사살했거나, 아니면, 체포해서 총살을 했다면 읍민들 반응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글쎄요, 그건 참……… 뭐라고 하기가………글쎄요, 그게………"
경찰서장은 예상했던 것보다 한결 더 난처해하며 이쪽의 눈치를 살피려 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딴 저의를 가지고 묻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었을 때 좋아하는 사람들보다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은 것이 제 느낌입니다. 제 느낌이 틀린 것인지 맞는 것인지를 서장님 말을 듣고 확인하고 싶어서 한 말입니다."
"예에, 그런 뜻이었군요."
서장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이쪽을 경계했음을 감추지 않았다.
“예에, 직책상 조심해야 할 말이겠지만, 제 생각도 사령관님 생각과 같습니다."
서장은 신중을 기해 말을 했다.
"그렇군요,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군요. 그게 말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군인이나 경찰을 대하는 사람들의 눈치나 태도가 어쩐지 이상했어요. 슬슬 피하는 것도 같고, 무서워하는 것도 같고, 믿지 않는 것도 같고, 미워하는 것도 같고, 하여튼 뭔가를 꼭 찍어내거나 딱 잡아낼 수는 없는데 어딘지 석연찮고, 찜찜하고, 떨떠름한 눈치들이었어요. 나는 처음엔 도시사람들과 촌사람들의 차이겠거니 생각했지요. 그리고 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이 그렇겠거니 생각했지요. 그런데, 내 나름으로 정보를 수집해가면서 따져보니 그게 아니라는 판단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곳 사람들 대부분은 근본적으로 군인이나 경찰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 어떻습니까, 제 판단이?"
"예, 이곳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농촌지역의 가난한 대다수 사람들은 군, 경이 지주나 부자들 편이란 생각이겠지요?"
"그런 셈이지요. 대민 접촉이 별로 없는 군인들한테야 그다지 심한 편이 아니겠지만, 경찰한테 갖는 원한은 일정 때부터 계속되어온 것 아닙니까"
"그거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가 일선에서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무슨 효과가 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소작농들을 위한 근본정책을 하루빨리 시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군, 경도 제대로 설 자리를 찾게 되고, 공산당의 뿌리도 뽑게 될 겁니다."
"그럴 것이요, 그래야 될 것이오………"
심재모는 지향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현장에 와서 확인한 사실이었지만 반란군은 진압된 것이 아니라 화력의 열세로 후퇴한 것뿐이었다. 전투에서 후퇴라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엄연한 작전 중의 하나였다. 여수 앞바다에서 군함의 포격을 받고, 순천 상공에서 폭격기의 폭격을 받고, 지상군의 공격까지 받아야 했던 연대병력의 반란군은 후퇴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지리산 줄기로 방향을 잡았고, 산을 이용해 일단 위기를 넘긴 그들은 거점을 확보하고 나서 다시 전투를 개시한 것이다. 그 전투가 벌써 두 달 가깝게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반란세력과 대치함에 있어서 큰 문제점은 김지희가 이끌고 있는 군 주력부대가 아니었다. 파견명령을 받고 출발하기에 앞서 요약해서 들은 상황설명으로는,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부대가 인접도시 순천까지 장악했고, 그 기회를 틈타 주변지역에서는 공산당 지하세력이 준동한 것이며, 반란군들은 일단 진압되었으므로 잔당들로부터 지역의 치안을 유지시키는데 주력하면서 소탕전을 병행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현지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단순하지도 명료하지도 않았다. 적들은 진압된 잔당이 아니라 일시 후퇴한 주력이었고,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말이 없는 속에서 군,경을 불신하거나 귀찮아하고 있었다. 가난에 지친 그들은 상황의 변화에 대해 거의 무표정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자기네들의 행, 불행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한 무관심한 태도들이었다. 반항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협조도 하지 않는 사람의 무리. 눈만 힐끗거리고, 자기네들끼리만 수군거리고, 군, 경과 마주치면 부산하게 옆걸음질을 치는 상황 속에 김지회는 하나가 아니었다. 각 지방마다 또 다른 김지회가 있었다. 지역적으로 구분해서 볼 때 그들은 또 다른 김지회일 뿐 전체를 합쳐서 보면 그들은 얼굴도 이름도 없어지고 오로지 공산당이 있을 뿐이었다. 군부대의 주모자 김지회나, 보성책이라는 염상진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자인 그들이 하나의 목적으로 성취시키고자 하는 사회주의혁명이 문제였고, 그 두 가지가 쉽게 접촉될 수 있는 위험성이 문제였고, 그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군, 경이 우격다짐으로 나가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 못 된다는 점이 문제였다. 심재모는 읍내의 지하조직이 일망타진되었다는 경찰이나 청년단의 보고를 믿지 않았다. 조직원끼리도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점조직의 일망타진이란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재모는 염상진 조직의 움직임을 탐지해내기 위해서 자신의 병력은 말할 것도 없고 각 지역 경찰과 청년단에도 비상을 걸어왔었다. 그런데 염상진의 조직은 씻은 듯이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조직이 그동안 어느 지역에도 전혀 침투한 일이 없다고 안심하지는 않았다. 밤을 이용해 얼마든지 침투는 가능했고, 다만 이쪽에서 발견을 못했을 것이었다. 그건 물론 경계의 소홀이나 실수는 아니었다. 어둠이란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최선의 무기였지만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최악의 무기였다. 버마 전선에서의 일이었다. 그가 소속된 연대는 패주하고 있었는데, 어느 지점에선가 영국군 부대 앞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부대의 앞은 강이었고 뒤쪽은 밀림이어서 우회할래야 우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밀림 속에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린 연대는 자정이 가까울 무렵 영국군 부대로 접근했다. 허리와 허리를 끈으로 연결한 병사들은 수신호에 따라 낮은 포복을 하기 시작했다. 먼동이 터올 무렵 연대병력은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영국군 부대 앞을 통과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보초가 서 있는 부대 정문과 연대병력이 통과한 강가의 풀숲과의 거리는 불과 삼, 사십 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어둠은 그토록 신효한 무기였던 것이다. 염상진 조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어려울수록 심재모의 신경은 긴장되어 갔다. 그 긴 침묵을 의식할 때마다 이쪽이 노출된 표적으로 겨냥당하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전상 염상진은 어딘가로 멀리 이동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가능성이 희박한 예측이었다. 혹시 이동을 했다 하더라고 그는 기필코 돌아올 것이었다. 보성책이라는 그의 직책이 바뀌지 않는 한, 반란세력이 산개하여 산줄기마다 거점을 확보함으로써 전선이 없어짐과 동시에 전투지역은 가늠할 수 없게 넓어진 상황이었다. 적들은 이미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그 적들을 상대로 지구전과 소모전은 불가피하게 되어 있었다. 심재모는 정하섭의 침투를 여러 모로 중시했다. 벌써 세 차례에 걸친 침투라는 점, 결코 세포가 아닌 그가 직접 움직이고 있다는 점, 그의 주 임무가 자금조달이 아닐 것이라는 점, 아무리 변장을 했다 하나 버젓이 대낮에 움직이고 있는 점 등을 면밀하게 짚어나갔다. 그런 사실들의 점검에서 어떤 명확한 결론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조직이 끊임없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과, 멀지 않아 그들의 어느 세력과 맞서게 되리라는 예감은 확실했다. 정하섭의 침투를 계기로 심재모는 휘하부대의 일제 점호를 실시했다. 민폐근절, 군기엄수, 근무 철저를 재삼 강조했고, 멀지 않아 적전을 개시하게 될 것임을 시사했다. 그것은 부하들의 정신무장을 촉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지하조직에 전해질 것을 전제로 한 발언이었다.
소화는 미처 부기가 빠지지 않은 몸으로 정 사장과 함께 순천재판소로 송치되었다. 들몰댁은 자기만 풀려난 것이 죄스럽고, 타지로 끌려가는 소화가 걱정이 되어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한사코 기차를 따라 뛰다가 끝내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신령님, 신령님, 살펴주십소사………"
들몰댁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멀어져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염상구는 양쪽의 높낮이가 다르게 삐뚜름히 치켜 올린 어깨에, 상체를 건들거리는 그 불량스러운 걸음걸이로 공설시장 앞을 지나고 있었다. 휘파람으로는 일본군가의 같은 소절을 되풀이하여 불어대면서 그의 눈은 좌우측 상가며 행인들을 살피느라고 빠르게 희번덕이고 있었다. 그는 무엇을 특별히 찾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썩 기분이 좋은 상태로 사무실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눈을 잠시도 고정시키지 못하고 어지러울 정도로 굴려대는 것은 그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그의 잽싼 몸놀림은 그 빠른 눈놀림으로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염상구는 정 사장 부인 낙안댁을 만나고 가는 길이었다. 낙안댁은 염상구를 붙들고 남편의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느냐고 애달아했던 것이다. 그는 낙안댁의 말을 그저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이미 법원으로 넘겨져 버린 정 사장 일을 놓고 왈가왈부해보았자 국물도 떡고물도 생길 리 없었던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쌀 스무 가마니를 깨끗하게 먹어치웠으니 낙안댁과는 더 이상 상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재판소로 넘어가분 마당에 인자 사령관인가 심 대장인가도 닭 쫓든 개 신세요. 앞으로는 검사 영감이다, 판사 영감이다 허는 사람덜이 칼자리 잡엇응께 돈얼 쓰든 금뎅이럴 주든 그 사람덜 붙들고 늘어지씨요. 나 겉은 눔 붙들고 세월 보내봐야 정 사장 어런 고상만 늘어난께 싸게 면회부텀 가시씨요. 정 사장 어런 만내보먼 무신 말씀 일러줄 것이요."
그가 떼치기 위해 한 말인지 모르고 낙안댁은 그저 고마워했다. 그러나 그 말이 전혀 터무니없거나 황당한 것은 아니었다. 일을 제대로 풀어가자면 그것이 바른 길이었던 것이다. 염상구가 술도가를 나서며 마음이 홀가분하고 기분이 썩 좋았던 것은 쌀 스무 가마니를 감쪽같이 먹어치운데다가, 무당을 입원시킨 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지나간 때문이었다. 심한 고문을 한 것에 대해 심 사령관에게 문책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책을 당해보았자 별것이 아니겠지만 문책을 당하지 않은 것에 비하면 기분 상으로 천양지차인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쪼깐 요상허시?"
고개를 갸웃한 염상구는 혼잣말을 흘리며 걸음을 늦추었다. 책방 앞이었다. 군인이 손짓을 해가며 무슨 이야기를 열심히 하고 있고, 아가씨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어대는 광경이 유리문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저 군인 눔은 책얼 사로 온 것이여 새살을 까로 온 것이여. 그라고 저년은 워째 또 저려. 저년이 장사럴 허잔 심뽀여 쌕을 쓰자는 심뽀여. 저것덜 노는 것 봉께로 하로이틀 눈맞춘 사이가 아닌갑는디? 저 호로새끼, 벌교바닥 반반헌 기집년헌테 말뚝 박아보겄다 고런 심뽀다냐, 시방? 워디 잠 보자."
염상구는 책방의 유리문을 거칠게 옆으로 밀어젖혔다. 두 남녀가 움찔 놀라며 엉거주춤한 몸짓을 지었다.
"아부지넌 워디 가셨다냐?"
염상구는 책방으로 한 발을 들여놓으며 버럭 소리치듯 하고 있었다.
"야아, 워디 쪼깐 나가셨구만요."
정님이는 달갑지 않은 얼굴로 대꾸하며 털이개를 집어 들었다.
"김 상병이시구만." 염상구는 군인의 명찰을 힐끗 보고는,
"나가 누군지 잘 몰르시겄는가?" 시비조로 말했다.
"아요."
군인이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아야요오?"
길게 늘여 빼는 목소리와 함께 염상구의 작은 눈이 옆으로 가늘게 찢어졌고,
"암스롱도 인사 안허는 버르장머리는 워디서 배와 처묵은 것이제? 육군 상병 눈꾸멍에는 청년단장이 개좇으로 뵈여!"
곧 후려칠 것 같은 기세였다.
"단장님, 단장님, 단장님이 간 떨어지게 급허니 밀어닥쳐뿐께 인사헐 새가 웂었제라. 지도 인사럴 못 올렸는디라."
정님이는 염상구 앞으로 다급하게 나섰다. 군인을 치든 말든, 우선 책방이 난장판이 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니년은 또 머시여? 니년이 저눔 변사냐, 각시냐? 아가리 쫙 찢어지기 전에 새살 까지 말어."
염상구는 정님이를 밀쳐버렸다.
"이분 말이 맞습니다. 너무 급해서 그만……… 제가 잘못했습니다."
군인은 위기를 모면하자고 판단했는지 거수경례까지 붙여 올렸다.
"그려, 잘못얼 알고 늦게라도 경례를 허는 것은 존디, 시방 허는 짓거리가 참말로 잘못헌 것얼 알아서 허는 것이여 아니먼, 속으로는 좆묵어라 험시로 겉으로만 시늉하는 것이여?"
"진심입니다."
군인의 말을 들으며 정님이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먼 되얐어. 근디, 한 가지 물을 말이 있는디, 여그 책 사로 온 것이여, 이 시악씨 보로 온 것이여?"
실눈을 뜬 염상구는 낮으면서도 끈적거리는 어조로 묻고 있었다. 군인은 당황한 얼굴로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려, 나가 딱 봉께로 책 사로 온 것이 아니라 시악씨 히야까시 헐라고 왔드라 이거시여. 나 말 똑똑허니 들어. 앞으로 이 시악씨헌테 히야까시 헐라고 여그 오덜 말어. 이 시악씨는 내 각시가 될란지도 몰른께. 무신 말인지 알아 잡수시겄어?"
"음마, 음마, 음마,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염상구의 느닷없는 말이 너무 놀랍고 어처구니가 없어 정님이는 있는 대로 목청을 돋아 올렸다. 염상구는 못 들은 척 책방을 나서고 있었다.
"워메 염병헌다와, 누구 맘대로 지 각시여, 각시가. 허랭이가 칵 씹어가라그라."
오냐, 내 맘대로다. 염상구는 뒤따라오는 정님이의 화가 받친 목소리를 들으며 그저 흐흐거리고 있었다. 책방 집 딸 정님이가 인물이 반반하게 생긴 것은 눈 둘 박힌 사내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님이를 놓고 무당 소화한테서 느꼈던 것 같은 음심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정님이가 사내놈과 이상한 느낌의 수작을 하는 걸 목격하게 되자 속이 뒤틀리는 오기가 치받쳐 올랐던 것이다. 유독 파닥거리는 생선일수록 회쳐먹고 싶은 마음을 동하게 하듯 악다구니 쓰는 정님이한테서 전에 느낄 수 없었던 여자를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이 시악씨는 내 각시가 될란지도 몰른께, 염상구는 자신의 말을 되씹으며 피식 웃었다. 마누라를 삼기에는 집안이 볼품이 없었다. 족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재산이 더 있어야 했다.
사무실에는 토벌대장 임만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염상구는 그 원숭이 낯짝이 사무실을 드나드는 것이 싫으면서도 겉으로는 반기는 척, 친한 척 해두고 있었다. 지나간 관계를 보아서가 아니라 앞으로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광주서는 원제 오셨소?"
염상구는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지금 막 도착하는 길이오."
"일은 워찌 되얐소?"
"빌어먹을, 계속 합동 근무하라는 거요."
임만수는 담배연기를 신경질적으로 내뿜었다. 그는 벌교지구를 떠나기 위해서 도 경찰국을 벌써 두 번째 찾아갔다 온 것이었다. 병력을 더 충원해야 될 형편이라는 이유로 그의 원대복귀 상신은 묵살되었다. 토벌대장의 권한을 행사할 때도 볼품이라고는 없이 못생겼던 얼굴이 권한을 잃고 나서부터 항시 찡그리고 있거나 짜증을 냈으므로 한층 못생기고 험해 보였던 것이다.
"머시냐, 요것은 나 혼자 생각잉께 오해 웂이 듣도록 헙시다이."
염상구는 다짐부터 먼저 했고, 임만수는 무슨 소리든 상관없다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긍께 말이오, 뜰 때 뜨더락도 기왕지사 합동근무럴 허는 판에는 심 사령관허고 화해럴 허는 것이 워처컸냐 그 말이오. 병력 수로도 그렇고, 법으로도 계엄사령관이 먼첨이먼 일단 머리 숙여주고, 합동 근무허는 입장에서 토벌대장 권한이 따로 있을 것잉께 고것얼 찾아 챙기라 그런 말이오, 경찰서장도 못나서 자기보담 나이 어린 사령관헌테 머리 숙이겄소? 법이 그렁께 참고 견디는 것이제라. 근디 등 돌리고 있응께 요것이 머시오? 워쩌요, 손잡는 것이 낫겄제라?"
"글쎄, 골치 아픈 일 뒀다 생각하고, 오늘밤 술이나 한잔 합시다."
임만수는 담배를 비벼 껐다.
"아, 술도가집 아들 놓친 담부터 보성, 조성꺼지 비상 걸린지 몰르요? 임 대장이 광주 간 새에 사령관이 부대 순시꺼지 허니라고 뺑뺑이럴 돌았소."
염상구는 다소 허풍을 섞어 말하고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딴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한바탕 북새질 쳤던 일이 말끔하게 끝났으니 외서댁을 품고 하룻밤 지낼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헐, 그렇다면 혼자 마실밖에 없지."
임만수는 맥 빠지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비상만 풀리면 나가 코가 삐틀어지게 한잔 사겄소."
"심재모 사령관 각하 계시는 동안 비상 풀리기 기다리느니 차라리 술을 끊지."
임만수는 비양거리는 듯 목소리를 길게 늘이며 사무실을 나가고 있었다.
한편, 문기수는 딸에게 염상구가 책방으로 들이닥쳐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떠난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문기수가 입 한번 떼지 않고 딸의 이야기만 듣고 있는 것은 과묵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속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것이다.
"아서라, 그 군인 발걸음 못허게 혀라. 큰 난리 당허겄다."
딸이 이야기를 마치자 문기수가 막힌 숨을 토하듯 한 말이었다. 문기수는 군인이 아무나 하나만 책방으로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을 기다린 끝에 책방을 기웃거리는 군인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문기수는 이때다 싶어 굳이 밖으로 나가 군인을 맞아들이는 친절을 베풀었다. 책을 살 돈이 없다느니, 안 사도 좋으니 오늘은 구경이나 하고 돈이 생기면 다음에 사라느니, 해서 군인을 반강제로 끌어들이다시피 했다. 군인을 일단 안으로 끌어들인 문기수는 딸에게 눈짓을 보냈다. 정하섭이를 낚았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딸년의 모란꽃 같은 얼굴에 피는 그 곱고 차진 눈웃음을 한번 받아본 젊은 놈은 두 번 걸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문기수는 자신하고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안채로 들어가고 있었다.
문기수는 염상진의 '최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염상진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었지만 동지들의 고생을 생각해서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은 최소한 해내고도 싶었다. 그러나 청년단원이나 읍내 사람들을 상대로 포섭공작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청년단원들은 아예 가망이 없는 일이었고, 읍내 사람들 사이에도 바늘구멍 들어갈 틈새를 찾아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염상진이 읍내를 장악한 동안 어설프게 공산당 시늉을 했거나 멋모르고 신바람을 냈던 사람들까지 몰이를 당해 죽어가는 꼴을 본 읍내 사람들은 공산당이라는 말조차 입에 담기를 무서워하고 꺼리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문기수가 눈을 돌린 것이 군인 쪽이었다. 군인이 만만할 리 없었지만 일면식이 없는 상태로 접근하는 것이 자기보호에 유리하리라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군인을 제대로 포섭하기만 하면 실속도 크리라는 계산도 되어 있었다. 짐작대로 그 군인은 다음날 바로 책을 사러 왔다. 딸은 더욱 친근한 눈웃음을 보냈고, 군인은 이미 거미줄에 걸린 나비였다. 그 군인은 시간만 나면 벙글거리며 책방을 찾아들었다. 그는 차츰 집안 이야기도 털어놓게 되었고, 이쪽에서는 밥을 먹여 보내기도 했다. 나비의 몸을 거미줄로 한 가닥씩 감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염상구가 난데없이 훼방을 놓고 든 것이었다. 염상진의 명령도 무서웠지만, 염상구의 감시도 그에 못지않게 무서운 것이었다. 염상구가 엉뚱한 일로 눈총을 쏘기 시작했지만 그의 눈길이 모아진 이상 그 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눈치 빠르기가 비린내 맡는 고양이 콧구멍 같은 염상구를 상대로 벌일 일이 따로 있었다. 문기수는 일을 작파하기로 결정을 내리고서도 마음 한구석은 꺼림칙했다.
‘그눔이 참말로 정님이럴 각시 삼을라고 허는가?’
그게 사실이라면 야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놈이 마음 작정하고 덤비는 날에는 딸을 못 주겠다고 버틸 재간이 없을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딸을 요절을 내고 말 것이고, 그런 위험을 막자고 딸을 어디로 피신시키면 자신의 이마빼기에 그 무서운 단칼을 꽂을 놈이었다. 그놈이 사위가 되면 염상진 대장하고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이야 어찌 되거나 말거나, 어쨌든 딸을 그놈한테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불량하고 독한 놈이 딴 계집 보기를 예사로 할 것이고, 제 뜻에 안 맞으면 사흘거리 개패듯 할 판이었다. 딸 신세 쪼그라진 망태기 꼴 되는 것은 정한 이치였다.
‘문딩이헌테 줬으먼 줬지 니눔은 안 되겄다.’
문기수는 되신음을 씹으며 이빨을 앙다물었지만 그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묘안은 쉽사리 떠올라주지 않았다.
염상구는 왼팔로 외서댁의 목을 끌어안고 오른손으로는 샅을 매만지며 혀로는 탱탱한 젖을 핥아대고 있었다.
‘정님이 고년이 낯짝이야 해반닥허게 잘 생겼는디, 니노지 맛도 쓸만 헐랑가 몰라? 탱자가 동골동골허게 잘 생겼음스롱도 속맛은 지랄이고, 유자는 얼턱얼턱허게 못 생겼는디도 속맛이야 지대로 아니드라고. 정님이년이 탱자 아닐랑가 몰라? 정님이년 낯짝에 비허자먼 외서댁이야 천상 유자제. 그런디도 속맛이야 을매나 찰지고 쫄깃쫄깃허냐 이말이여. 외서댁은 얼굴이야 그냥저냥 생겼어도 속맛 좋다는 것이 얼굴에 쓰였는디, 정님이년은 해반닥허게만 생겼제 얼굴에 고것이 맛나다는 표시가 쓰이질 안했단 말이여. 얼굴도 잘나고 속맛도 좋으먼 을매나 홍시감 맛일꼬. 고런 년이 있음사 당장에 장개 들겄다. 아녀, 그런 년이 고런 년이여. 낯짝이 잘났음시롱도 잔잔허고 새피름헌 고것이 바로 그 표시여. 정님이년헌테는 바로 고것이 웂은 것이여. 정하섭이 그눔이 상품 중에 상품을 입다셔뿐 셈이시? 에라 이 좆겉은 눔, 무당 배에 씨 깔린 죄로 총 백 방만 맞고 뒤져라.’
염상구는 소화와 정하섭을 생각하자 시멘트 바닥에 맥질이 되었던 피가 떠오르며 성욕이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외서댁의 샅 사이로 손을 더 깊이 디밀며 두 젖무덤 사이에 얼굴을 비벼댔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외서댁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음을 의식했다. 어느 때라고 외서댁이 다방 화자년이나 남원장 경월이년처럼 야단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언제부터인가는 몸이 다소 풀렸던 것이다. 외서댁의 변화를 의식하자 욕구는 완전히 식어버렸다.
"자네, 무신 근심 있는가?"
샅으로 뻗고 있던 오른팔을 걷어 들여 외서댁을 감싸 안으며 귀엣말로 물었다.
"아니어라."
외서댁은 고개를 외로 튼 채 대꾸했다. 염상구는 그녀의 짧은 한마디에도 냉기가 서려 있음을 느꼈다.
"보소, 날 속일 생각은 말소, 나가 풀어줄 만헌 근심이먼 풀어줄 것잉께 얼렁 말얼 허소."
염상구의 음성은 다정했다. 외서댁은 그 다정스러움이 오히려 징그럽고 정떨어졌다.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한번은 입 밖에 내야 할 말이었다. 어쩌면 빠를수록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쌀이 웂는가, 워디가 아픈가? 다 풀어줄 것잉께 싸게 말얼 허소."
염상구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간에 자신이 해야 될 말은 해야 했다. 언제까지 미적미적 뒤로 미루어둘 수는 없는 문제였다.
"일 나부렀소!"
외서댁이 불쑥 말했다.
"일?"
반문을 함과 동시에 염상구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임신 - 그녀가 언제던가 걱정했던 문제였다.
"애가 들어서 부렸소."
외서댁은 염상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하고 있었다.
"낳소."
염상구는 몸을 일으키며 거침없이 말했다.
"무신 소리다요?"
외서댁의 배 위로 한쪽 다리를 걸친 염상구는 태평스럽게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자꼬 무신 엉뚱헌 소리 허고 그러요, 시방?"
외서댁은 그만 짜증을 냈다.
"엉뚱헌 소리? 허먼, 자네가 듣고 잡은 소리가 고것이 아니고 따로 있었드랑가?"
염상구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외서댁을 내려다보았다.
"인자 발을 끊으란 말이요."
염상구는 가슴이 뜨끔해졌다. 본심을 들켜버린 것 같았던 것이다.
"애기는 워쩌고?"
"나가 알아 헐 일이요."
"허먼, 강동식이 자석 맹글겄다 고런 말인감?"
"그러요."
외서댁은 아랫입술을 물고 염상구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염상구는 그녀한테서 끼쳐오는 찬 서슬을 느꼈다.
"알겄네, 자네 뜻대로 허소. 그리 허겄다먼 총각인 나야 훨썩 이문 아니겄는가. 근디 오늘로 끝판이라먼 서운혀서 으쪄까?"
담뱃불을 끈 염상구는 외서댁의 다리를 감고 들었다. ‘자네 겉은 물건이야 애럴 퍼질러대먼 베레부는디,’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외서댁은 비로소 올가미를 벗어난 기분이었다. 남편에게는 죽는 날까지 죄로 남을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기 전에 염상구를 떼쳐내고, 남들 눈을 속여 넘기기에는 애가 빨리 생긴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긴 소샅길의 바닥에는 꼬막껍질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엎어져서 등을 휘게 드러낸 것들이 있는가 하면, 뒤집어져 배에 흙을 가득 채운 것들도 있었다. 그런데 한 눈에 잡히는 것은 흰 등을 드러낸 것들이었다. 흰 바둑알을 뿌려놓은 것 같은 꼬막껍질들은 흙 색깔과 조화를 이뤄 고샅길을 치장하고 있는 하얀 꽃무늬 장식이었다. 그것들이 질서정연하게 박혔더라면 무미했을는지도 모른다. 어느 부분에는 듬성듬성, 어느 부분에는 빼곡하게 흩어짐을 이루었음이 들녘을 덮고 있는 꽃무리나 매한가지였으며, 소낙비가 한 차례 쏟아져 고샅길을 씻어낸 다음이면 꼬막껍질들은 해맑은 유백색으로 빛을 머금었다. 길고 짧은 고샅마다 꼬막껍질이 박히지 않은 곳은 없었으며, 두껍고 단단해서 길바닥에 박혀 자갈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장마에 길바닥이 패이거나 씻겨나가는 것을 막았고, 남도지방에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의 미끄러움을 줄였다. 그뿐만 아니라, 새싹이 움터 오르는 봄이면 양지바른 곳을 찾아 소꿉놀이를 차리는 계집애들은 꼬막껍질을 파내 각종 소꿉으로 삼았다. 그리고 구슬이 없는 사내아이들은 꼬막껍질로 구슬을 대용했다. 심술이 난 어떤 아이는 코를 씩씩 불어대며 대꼬챙이로 꼬막껍질을 마구 파헤쳐 심술풀이를 하기도 했다. 옆을 지나치는 어른은 "이눔아 손꾸락에 물 잽힐라" 할 뿐 꼬막껍질 파헤치는 것은 탓하지 않았다. 이 집, 저 집에서 내다버리는 꼬막껍질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내다버려진 꼬막껍질들은 며칠 동안 사람들의 발에 밝히면서 땅바닥에 제자리를 잡아 갔다.
꼬막껍질은 고샅길을 다지는 데만 쓰여 지는 것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장독대 바닥에는 몇 겹인지 모르게 꼬막껍질들이 깔려 있었다. 여자들이 장독대에서 움직일 때면 발이 옮겨 놓일 적마다 꼬막껍질들이 밟히고 부딪치는 소리가 다그락다그락 맑게 울렸다. 봉선화가 핀 토담 밑의 화단 가에도, 흙으로 쌓아올린 낮은 굴뚝의 몸피에도 꼬막껍질은 하얗게 박혀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꼬막껍질들이 유난히 희게 돋아 보이는 고샅길을 호산댁은 힘겨웁게 걷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굽어진 호산댁의 허리는 쌀자루의 무게에 눌려 반으로 접히다시피 되어 있었다. 큰며느리가 몸져누운 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일어나지를 못해 찾아오는 길이었다.
"과앙조야아."
호산댁은 언제나처럼 사랍을 들어서면서 손자의 이름부터 불렀다. 거친 숨결에 막혀 그 목소리가 굴곡져 떨렸다.
"할메!"
덕순이가 부엌에서 뛰어나왔다.
"온냐, 얼렁 요것 잠 받어라."
호산댁은 숨을 몰아쉬며 쌀자루를 받쳐 잡았다. 너무 욕심을 부려 쌀을 퍼 담았던 모양이었다. 쌀자루를 붙잡은 덕순이가 휘뚱거렸다.
"워메, 나도 인자 저승 갈 날 낼모랜갑다. 워따 죽겄다."
호산댁은 두 손으로 허리를 받치며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할메, 오늘은 멀 사왔는가?"
고무신도 제대로 꿰신지 못하고 쫓아 나온 광조가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며 성급하게 물었다.
"이눔아, 니는 항시 묵는 타령이여."
호산댁은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얼굴에는 더없는 흡족한 웃음이 퍼지고 있었다.
"밥얼 쪼깐씩밖에 못 묵은께 그러제."
광조는 옹골차게 대꾸했다.
"워따 내 새끼 똑똑키도 허다."
호산댁은 손자의 볼기를 토닥거렸다.
"할메, 멀 사왔냐니께 그러네."
"이눔아, 추운께 어여 방에 들어가서 풀어봐라."
광조는 제 누나가 막 마루에 올려놓고 있는 쌀자루를 향해 뛰어갔다. 거기에는 집에서 삶은 고구마 네댓 개와 발 굵은 설탕이 묻은 왕사탕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왕사탕은 지난번에 광조 놈이 사오라고 신신당부한 것이었다. 큰며느리는 일어나 앉아 머리쪽을 고치고 있었다.
“날도 추운디 워찌 요리 일찍허니 걸음허셨는게라. 욜로 내려 앉으시씨요."
큰며느리는 이불을 걷어 아랫목 자리를 권했다.
"괜찮허다, 니나 얼렁 눠라. 근디, 몸언 잠 어떠냐?"
"많이 낫구만요. 인자 곧 일어나질 상 싶구만이라."
"그려, 얼렁 일어나야제. 웂은 살림에 맘고상꺼지 허고 사는 판에 몸이나 실해야제. 니가 이집안 기둥이고 대들본디. 니 병이 그냥 몸살이 아니다. 끌려댕김서 겁묵고, 매타작 당혀서 얼병 들고, 마음고상 몸고상이 항꾼에 도진 거이다."
호산댁은 일부러 이 말을 했다. 너의 고생 내 다 안다는 뜻과 시어미니로서 미안한 마음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아무리 부부가 무촌이고 한 몸이라 한들 궂고 험한 일 당하면서 살게 되면 말 같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살림살이 편안하고 얼굴 맞대고 웃음 나눌 적에 부부는 무촌이고 한 몸인 것이지 살림살이 팍팍하고 고생으로 울타리 친 신세가 되면 부부사이는 자연히 금이 가고 간격이 생기는 것이었다. 고생을 함께 겪어내고 험한 고비 함께 이겨내며 서로 다독이고 살아간다면 또 모른다. 남자 쪽은 제멋대로 잘못만 저지르며 놀아나고, 여자는 그 잘못을 고스란히 떠안고 혼자 마음고생 몸고생 치르다 보면 원망도 미움도 안 생길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여자는 자식을 위해 밥을 굶을 수는 있어도 남편을 위해 밥을 굶기는 어렵고, 자식을 위해 죽을 수는 있어도 남편을 위해 죽기는 어려웠다. 여자는 자식에게는 어머니였지만 여자의 하늘은 남편인 까닭이었다. 자식한테서도 원망이 생기고 미움이 생기는 법인데 남편한테서야 더 말해 무엇 하랴.
"아가, 심드는디 눠라."
허우대만 컸지 진기라곤 다 빠져나가버린 것 같은 큰며느리가 측은해서 호산댁은 이불깃을 들쳤다.
"야아, 쪼깐 어지러운께 눌라능마요."
"하먼, 하먼. 몸 아픈 사람이 상감 앞이라고 체면 채리겄냐."
호산댁은 큰며느리의 어깨를 부축해서 뉘었다. 어깨뼈가 맞잡히는 것이 가슴을 찡하게 울려왔다. ‘몹쓸 놈 못된 짓 많이도 헌다.’ 호산댁은 큰아들을 타박했다. 언제라도 큰며느리를 생각하면 그저 가엽고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시집이라고 온 뒤로 햇볕 드는 날을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자칫 남편 하나 잘못 만나 시집살이 아니 지옥살이를 해온 것이었다. 부처님이야 부부는 삼천 년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지만, 모자라는 소견으로 보면 제비뽑기 요행수 같은 것이 남녀의 만남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큰며느리는 허고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 하필 큰아들을 만나 젊은 세월을 그리 아프게만 살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뒤얽힌 실꾸리처럼 풀 길 없는 답답한 인생사니 그저 제 팔자요 제 운수라고 할밖에 없었다.
"맘 단단허니 묵어라. 한 시상 살다보먼 느그 냄편 시상도 올 때가 안 있겄냐."
호산댁은 이불을 다독거렸다.
"다 틀려묵었소. 군대고 경찰이고 다 핫바지 저구리간디라?"
큰며느리 말을 듣고 호산댁은 불현듯 작은 아들을 생각했다. 큰아들 세상이 오면 작은 아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과는 반대로 작은 아들이 쫓기는 신세가 될 밖에 없었다. 큰아들 세상이 오기를 바랄 수도, 작은 아들 세상이 계속되기를 바랄수도 없었다.
‘빌어묵을 눔덜, 아무 쪽으로나 한패가 되든지………’
호산댁은 자신의 팔자 기구함을 가슴 삭아내리는 아픔으로 느끼고 있었다. 형제간이 무슨 짓을 못해서 서로를 겨누어 총질을 해대고 있단 말인가. 아무나 하나 딴 일을 하면 간단할 것을, 큰아들이고 작은 아들이고 에미의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큰아들 총에 작은 아들이 죽고, 작은 아들 총에 큰 아들이 죽는 꿈에 놀라 잠이 깨고는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흉악한 꼴 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어야지 생각하다가도 뒤미처 떠오르는 두 손자새끼의 얼굴과 부딪치면 그래도 내가 오래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바뀌고는 했다.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작은 아들 눈치 보아가며 쌀말이라도 이어 나르지, 자기 죽고 말면 작은 아들이 조카들 돌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쌀말이나마 퍼내는 것을 모른 척 해주는 작은 아들의 마음이 변하지 말고, 자기가 오래 사는 방법밖에 당장은 다른 도리가 없었다.
"광조야, 워디 있냐? 할메 갈란다."
호산댁은 아랫방 쪽에 대고 목청을 높였다.
"이잉 할메, 나 여깄어."
금방 사잇문이 열리고, 광조가 얼굴을 내밀었다. 한쪽 볼이 불룩했다. 사탕에다 고구마에 정신이 팔려 찍소리가 없었던 것이다.
"사탕 엄니 잠 잡숴봇씨요 허제, 니 혼자 묵었냐?"
호산댁이 나무라는 얼굴을 해보였다.
"사탕은 애기덜이나 묵제 어른이 묵간디?"
광조는 베실 웃으며 옆눈질을 쳤다.
"아이고메 저 말허는 것 잠 보소."
호산댁은 그만 웃음 짓고 말았다.
"할메, 담에 올때넌 모찌떡얼 사다 주소. 고것이 묵고 잡아 죽겄는디."
"온냐, 니가 애 쓰는갑다. 묵고 잡은 것도 많게."
호산댁은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니, 할메가 쌀허고 고구마허고 사탕얼 가져오셨구만요."
덕순이가 제 어머니에게 알렸다.
"어무니………"
죽산댁은 시어머니를 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려, 몸조리나 잘혀. 나 갈란다."
"점심 잡숩고 가시제라."
죽산댁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니다. 밥 한그럭이라도 축낼 것 웂다. 나 핑 갈란께 나오지 말고 눠 있거라."
호산댁은 어느새 방을 나서고 있었다.
‘그려, 나가 내 부모 속 몰랐데끼 느그덜이 내 속얼 워찌 알 것이여. 맴이라는 것이 부부지간 다르고, 부모 자석지간 다르고, 형제지간 다른 법인디, 그저 나가 하로라도 더 오래 살어야제………’
호산댁은 스산스럽고 허한 마음으로 고샅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길바닥에 박힌 꼬막껍질들이 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가슴에 박힌 수많은 근심만 같았다.
‘인자 지팽이럴 짚어야 될랑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고, 뒤따라 밀려드는 서글픔에 호산댁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집오던 날의 향기가 일순 스쳐갔다. 허리가 예사스럽지 않게 뻣뻣하고 무거웠다.
술청에서 술꾼들이 마음 놓고 떠드는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사투리에 술기운이 섞인데다가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범벅되어 심재모로서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흥겨운 왁자함 속에 자신의 존재는 이미 잊혀지고 있음을 느끼며 심재모는 빙긋이 웃었다. 조금 전 자신이 술집을 들어섰을 때 술청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긴장하거나 쭈뼛거렸던 것이다. 그는 민망한 기분으로 술청을 지나 방으로 안내를 받으며 술집에 의외로 사람이 많음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리를 잡고 앉아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싶었다. 차라고는 타볼 수가 없는 정글전투를 하며 병사들은 어쩌다 생기는 술을 서로가 다투었고, 나눠 마신 한 모금의 술에 거짓말처럼 다들 취했다. 그리고 저녁밥도 굶고 밤새도록 싸우다가 새벽녘에 설핀 든 잠 속에서 몽정을 한 일도 있었다. 이쪽저쪽에서 번차례로 사람을 죽여대고,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하는 속에서 사람들은 더 술이 끌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이 뒤숭숭해도 생리화된 생활은 계속 이어지게 마련인 것이었다.
심재모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약속시간 5분 전이었다. 겨우 5분 남짓 지났는데 꽤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정직한 사람이지. 대신에 성질이 풀먹인 광목이야. 꺾일망정 휘이진 않아."
손승호에 대한 서민영 선생의 말이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만나는 것을 피해 이런 장소를 택했고, 전화를 걸지 않고 편지를 써 보내 오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장님, 손님 오셨구만이라."
주인 여자가 격자문을 열어젖히며 투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심재모는 재떨이를 옆으로 밀치며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손 선생님."
심재모는 손을 내밀었다. 손승호는 약간 주춤하는 듯 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심재모는 손승호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손승호는 자신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서로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한 채 손승호는 그저 손을 잡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손을 놓으며 심재모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손승호가 외투를 벗어 걸고 앉자 심재모는 말했다. 손승호는 대꾸가 없었다. 그는 검정 물들인 광목에 솜을 놓은 한복차림이었다. 그건 농민들이 흔히 입는, 방한을 위주로 한 작업복이었다. 빛바랜 한복과 핼쑥할 정도로 살이 없는 얼굴, 지금까지 그가 취하고 있는 행동에서 꺾일망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그의 성격을 심재모는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곧 술상이 들어왔다.
"이건 일본 놈들이 좋아하던 술 같잖은 술입니다. 소주로 바꾸면 어떨까요?"
언제까지고 말을 하지 않을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손승호가 불쑥 한 말이었다.
"그러시죠."
심재모는 얼른 동의하며 웃음 지었다. 술이 소주로 바뀌어 오자 심재모가 먼저 술을 따랐다. 손승호가 따르는 술잔을 받은 심재모가 입을 열었다.
"저어……… 뵙자고 한건 다름이 아니라, 이지숙 선생에 대해 좀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재판 결과를 안 믿는다는 뜻입니까?"
손승호한테서 대뜸 날아온 말이었다.
"아, 그건 아닙니다. 그냥 알아보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섭니다."
"저를 상대로 탐문수사를 하겠다는 겁니까?"
손승호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냈다.
"손 선생님, 오해하시거나 불쾌하게 생각진 말아주십시오. 저는 지금 공무를 수행하는 게 아닙니다. 직책상 몇 가지 의문이 있긴 한데 공적 처리를 하긴 어렵고 해서, 생각 끝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뿐입니다. 수사는 아니니까 말씀하기 싫으면 안하셔도 좋습니다."
"왜 하필 저를 택했습니까?"
소주잔을 단숨에 비운 손승호가 물었다. 그의 눈빛은 매서웠다.
"함께 근무했기 때문이지요."
"또 한 가지가 있을 텐데요? 제 과거도 고려됐거나, 의문시된 거겠지요?"
"그래요? 저를 일본헌병 취급하시는군요. 그럼 저도 불쾌해지려 합니다."
심재모는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조는 변해 있었다. 손승호는 고개를 젖혀 소주잔을 비웠다. 심재모는 그제서야 좀 지나치지 않나 싶었던 손승호의 태도를 이해할 것 같았다. 손승호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글쎄요………제가 과민한 모양이군요."
손승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는,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자면 병원 사건이 일어나고 세상에 알려진 것 외에는 제가 이 선생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지숙과 안창민의 관계를 봐서는 이지숙의 사상 면을 의심해 볼 수도 있겠는데, 글쎄요, 그것이야말로 누가 알겠습니까? "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예, 제가 이지숙을 의심할래서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서민영 선생 때문이지요. 이지숙이 서민영 선생이 운영하시는 야학 선생이 됐는데, 사표를 냈으면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이지숙이 혹시 사상이 불온해서 서 선생님이 피해 입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 손 선생님을 만나보고 싶어진 겁니다."
손승호는 수긍이 된다는 듯한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가 남 일에 워낙 무관심해서………"
"아니, 좋습니다. 꼭 그 용건만으로 뵙자고 한 건 아닙니다. 손 선생님하고 한잔 할 겸, 겸사 겸사였지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손승호가 심재모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입에 발린 소리로 들립니까? 서민영 선생께서, 김범우 선생과 손 선생을 사귈 만한 사람들이라고 권하십디다."
손승호는 천천히 눈길을 내리깔았다.
"요런 오살육시혀서 뼉다구를 잘근잘근 씹어뱉을 눔아, 외상술도 하로이틀이제 나넌 밑구녕 폴아서 술장시 헐끄나? 폴래도 살 눔이 웂은 밑구녕이여."
주인여자의 악다구니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왔다. 마시던 술잔을 입에서 뗀 심재모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심재모를 건너다보고 있는 손승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욕이 듣기 거북합니까?"
"아휴, 하고 싶은 말보다도 욕이 더 많으니 저게 어찌 된 일입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왜 이곳 사람들은 욕을 그렇게 많이 합니까?"
"그게 전라도라는 뎁니다. 전라도 사람들 욕 많이 하는 걸 탓하면, 욕도 못하면 무슨 수로 사느냐고 맞섭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글쎄요. 뼈 빠지게 농사지어 지주한테 다 뺏기고 배곯고 헐벗고 사는 억울함과 분함을 욕으로라도 풀어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이겠지요."
"아, 네에. 그런데, 문둥이라는 욕은 경상도 욕인 줄 알았는데 이곳 사람들은 걸핏하면 '문딩이, 문딩이' 하는데, 어쩐 일입니까."
"아직 모르고 계신가요. 소록도 때문이겠죠. 소록도는 일정 때부터 나환자 집단수용소였습니다. 그러니 문둥이가 전라도 일대의 욕이 된 것이겠지요."
"경기도에도 소작인들은 있지만. 여기같이 심한 욕은 없습니다."
"글쎄요…… 물론 농토 있는 곳에 지주와 소작인은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지역에 따라 그 관계가 다르겠지요."
"어떻게 말씀인가요?"
"글쎄요, 그게 좀………"
말하기를 꺼리는 듯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인 손승호는 잠시 침묵했다가,
"그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반만년이라는데, 그 세월이 계속 농경사회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에 따라 경제구조가 다른 점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주된 세금징수 대상은 쌀 생산이 많은 평야지대일 수밖에 없지요. 강원도나 함경도에 비해 전라도나 경상도가 관의 표적이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지요. 다음이 지역적 경제구조의 문제인데, 농업 중심의 경제냐 상업중심의 경제냐에 따라 소작인의 환경이 달라지겠지요. 평양을 중심으로 상업경제를 형성한 평안도나, 수원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같은 데서는 농업은 제2의 치부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농업경제가 중심이 되는 평야지대에서는 치부의 절대수단이 땅입니다. 필연적으로 인정사정없는 지주의 착취와 수탈이 행해지고, 지주는 고리대금업까지 겸하게 됩니다. 평야지대의 소작인들은 옛날부터 관과 지주에게 이중적으로 고통을 당해왔습니다."
"그렇겠군요. 저어, 전라도에 자가용 비행기를 가진 지주가 있다던데요?"
"알고 계시는군요. 해방이 되고 없앤다는 말도 있는데 그게 착취지주의 표본입니다. 자동차 한 대를 갖기도 어려운 세상에 상상이나 되는 일입니까? 그 지주는 배꼽이 간질간질한 기분으로 만경평야 위를 날아다녔겠지만, 무논에서 땀 뻘뻘 흘리고 있는 소작인들이 그 비행기를 올려다보며 욕이라도 퍼붓지 않으면 어찌 살겠습니까."
손승호는 심재모에게 잔을 권했다. 그의 음성이 약간 격해진 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얼굴에는 불그레하게 술기가 감돌았다. 심재모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그런지 전라도 사람들은, 이거 경솔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딘지 억센 것도 같고, 거친 것도 같고, 그러면서도 주눅 든 것 같고, 경계하는 것 같고, 그런 인상입니다."
"그렇게 보이던가요? 그렇다면 상당히 정확하게 보신 거군요. 그게 다 대대로 이중적인 착취를 당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관찰이지요. 그 사람들 가슴에는 끝없는 회한과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한이 맺혀있는 거지요. 전라도나 경상도 땅은 옛날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한이 깊게 서린 땅입니다. 동학란이 전라도에서 일어나고 경상도로 번져간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겁니다. 욕으로 화풀이 하며 견디고, 육자배기로 신세 한탄하며 견디고, 그러다가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어 폭발한 것이었지요."
"손 선생님도 욕을 잘하십니까?"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까? 숨 안 쉬고 쉰 가지는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그리고 서로 술을 권했다.
"잘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라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 고마운 일입니다. 실은…… 양조장 사건을 그리 처리한 일이 없었더라면 오늘 약속에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뭐랄까, 전라도를 다소나마 이해하는 것은 우리 땅 전체의 민중이 겪고 있는 수난을 이해하는 것이 될 겁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지난번에 유지들한테 끌려 어쩔 수 없이 남원장엘 갔었습니다. 거기서 전라도 고유의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글쎄요, 잘 모르겠더군요."
"그랬군요. 전라도 사람들 욕만 심하게 하는 게 아니라, 속에 맺힌 한을 그런 가락으로 나타내고, 풀었지요. 그게 전라도를 깊은 속까지 알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거기에는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뼈가 굵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건 설명이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닐 겁니다. 심 사령관님이 끔찍해 하는 욕이 여기서는 친숙한 보통 호칭으로도 쓰이는, 그런 간격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군요, 야 씨발놈아, 야 좆같은 새끼야 같은 욕을 친구 사이에 웃어가며 예사로 하더군요."
"그래 조선시대부터 욕의 본향이 순천이라 평이 났었던 거겠죠."
"대장님, 대장님은 대장인께 통금이 지내도 암시랑 않제라?"
기척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주인여자가 말했다. 심재모는 얼른 시계를 보았다.
"그만 일어나시죠."
"아닙니다. 기왕 늦었으니 채워진 잔이나 비우고 일어나도록 하지요. 댁에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심재모를 따라 손승호는 잔을 들었다. 자기 동네를 외지인의 보호를 받으며 가야 한다는 사실이 손승호의 가슴에 야릇한 비애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31. 읍내를 에워싼 불길
그날은 눈이라도 퍼부을 것처럼 암회색 구름이 두껍게 덮이고 바람 끝이 매웠다. 북쪽으로 금산, 남쪽으로 첨산, 서쪽으로 진광산, 동쪽으로 제석산이 모두 구름 속에 묻혀 있었다. 실가지들이 바람을 타고 우는 소리만 스산한 칠동 과수원에서 연달아 총성이 진동한 것은 오후 두 시께였다. 그 총격전에서 배성오가 다른 한 명과 함께 죽었다. 뒤늦게 신원이 밝혀진 다른 한 명은, 같은 동네에서 입산한 고두일이었다. 읍내 병력 중에서는 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심재모의 계엄군이 한 명이었고, 임만수의 경찰토벌대가 세 명이었다. 읍내 병력이 갑절이나 사상자를 낸 것은, 창고 안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 위치의 불리함이 있었는데다가, 심재모의 명령을 무시한 임만수가 무모하리만큼 경찰병력을 전진시켰던 것이다. 배성오와 고두일의 피로 물든 시체는 네 명의 군인, 경찰들의 시체와 함께 군인들이 옮겨갔다.
"이눔덜아, 이눔덜아, 내 아들 쥑였으먼 죽은 몸띵이나 놓고 가그라아아. 워쩔라고 느그가갖고 가냐. 살았을 때 빨갱이고 공산당이제 죽어서도 빨갱이고 공산당이다냐, 이눔덜아아!"
사람들에게 양쪽 팔을 붙들린 과수원댁은 눈이 뒤집혀 발악하고 있었다. 과수원댁은 총격전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군인들에게 붙들려 있다가 이제는 동네사람들에게 붙들린 것이다. 몸부림을 치다가 치다가 과수원댁은 끝내 혼절하고 말았다. 동네사람들은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고들 있었다. 아직 그대로 남은 공포감과 총성의 여음이 그들을 흩어지지 못하게 묶어놓고 있었다.
"시상에나, 형제간이 아니라 웬수로 태였는갑구만."
"형제간은 남남이란 옛말이 그른 디가 하나또 웂네."
"근디, 좋은 일에 넘이고, 궂은 일에 형제간이란 옛말도 안 있읍디여."
"글씨 말이시, 넘도 못헐 일얼 형제간에 혔으니 기가 맥히제."
"그것도 동상이 헌 짓이라먼 또 몰르겄소. 어찌 성이 그럴 수가 있는지, 귀신도 놀랠 일이요."
"그 말 웂이고 얌전턴 사람 워디에 그리 모진 맘이 있었는지 몰르겄소."
"참말로 무서운 사람이여."
"그나저나 부모 가심얼 저리 한맺히게 해놓고 워찌 한지붕밑에서 낯 대허고 살랑고?"
"그까징거 걱정혔음사 동상 죽일 일 꾸몄겄어?"
"워찌 그리 모진 짓얼 혔으까이?"
"음마, 이사람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 허고 앉었네에. 아, 동상이 허느 빨갱이질 땀세 자기 전정이 망쳐진께 그랬제 워째."
"참말로 징허디 징헌 눔이시. 동상죽이고 지눔이 벼슬 허먼 군수럴 해묵겄어, 도지사럴 해묵겄어. 아니, 군수고 도지사고 다해묵는다고 쳐. 그 맛에진간히 꼬시겄다, 문딩이."
"워따, 자그만치 열 내소. 목구녕에서 피속겄네."
"근디 말이여, 성오 총각이 잘못 생각혔는지도 몰를 일이랑게. 죽기럴 작정허고 뎀비지 말고 그 대장 말 믿고 자수혔드라먼 죽는 것은 면했을란지도 몰르는디."
"금메 말이시,그 군인대장이, 자수혀서 살아났느먼 즈그 엄니 가심에 못 안 박어서 좋고, 즈그 성 죄인 안맹글고 전정 열려 좋고, 지 숨어댕심서 사는 고상 안혀서 좋고, 이리저리 다 존 일이었는디."
"그것이야 다 존 쪽으로만 생각허니께 그렇고, 자수혔다가 팡 쏴죽여뿔면 워쩔 것인가."
"설마러니 그렇기야 허겄는가."
"설마가 사람 잡네. 염상진네가 쬧겨간 담에 설마 그리몰악시럽게 사람덜얼 떼로 죽일 지 누가 알았드랑가?"
"그것이야 경찰이 헌 짓거리제 군인이 헌 일이 아니시."
"경찰이고 군인이고, 빨갱이 잡자고 눈에다 시퍼런 불 키기로는 매일반이시. 초록은 동색잉께."
보성책 이해룡을 접선하고 온 하대치와 조성책 오판돌을 접선하고 온 강동식이 배성오네 과수원네 끝머리 둔덕 아래서 합류한 것은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강동식이 먼저 도착해서 보니 집 쪽에서 곡성이 들리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 보아도 초상집 분위기가 분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동식은 배성오와 고두일이가 변을 당했으리라고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누구 초상을 당했는지, 저렇게 눈이 많아서는 배성오네에서 하룻밤은신하기로 한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배성오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고흥의 과약면 장을 보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보성이나 조성 장날에는 벌교 사람들이 꽤나 모여들기 때문이었다. 강동식은 하룻밤을 어디서 은신해야 할지 걱정스러워하며, 누구 초상인지 탐지하려고 집 쪽으로 접근해갔다.
"성오야, 불쌍헌 내 새끼야, 장개도 못 가고 니가 죽다니, 워쩔끄나아아, 그 생때 겉은 나이에 아까와서 워쩔끄나아아..."
"요런 무정허고 모진 눔아, 니 좋다고 군인 경찰 내보내서 동상 죽이는 법 어디서 배왔드라냐. 이눔아, 윤오 이눔아, 동상 잡아묵고 워디 처백혀 있냐. 싸게 와서 에미 죽는 꼴 니 눈으로 똑똑허니 봐라. 나넌인자 더 못 산다. 요런 숭악허고 기맥힌 꼴 당허고 내가 워찌 더살겄냐, 이눔아, 워디 있냐, 싸게 오니라."
과수원댁의 목이 쉰 통곡은 끊어지는 듯하다가 다시 이어지고, 멈추는 듯하다가 또 계속되고는 했다.
"워쩌?"
강동식의 간추린 말을 듣는 순간 하대치는 자신들이 처한 입장도 잊은 듯 버럭 소리쳤다. 하대치는 자신의 목소리에 훔칠 놀랐고, 강동식은 하대치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참말로 뱃대지럴 터쳐 쥑여 배창시럴 나뭇가지에 널어 까마구가 뜯어묵게 혀야 헐 눔이다. 배성오고 고두일이고 아깝고 불쌍혀서 워째야 헐끄나." 하대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느라 주먹을 부르쥐며 떨었다.
"우리가 여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시, 남은 일은 워쩔 것인지 정허고 얼렁 여그를 뜨세."
강동식이 초조하게 말했다.
"근디, 배성오가 그 임무나 끝냈는지 몰르겄네?"
하대치가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멀 말이여?"
"그 이 선상님허고 접선허는 일 말이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말이 없었다. 배성오의 어머니를 통해 이지숙과 접선하기로 된 일이 완료되었는지 어떤지 두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초의 계획은, 내일 과약면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이지숙과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디서 알아볼 길도 웂고, 오늘 일로 경비가 더 심해졌을 것잉께 낼 과약 장 보는 것도 위험허시. 그렁께 이 길로 그냥 부대로 돌아가 보고부텀 허세."
강동식이 신중을 기해 말했다. 그러나 하대치는 고개부터 저었다.
"고것은 안 될 말이여.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우리가 짊어진 임무는 임무여. 우리가부대로 돌아간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날 것도 아니고, 계획만 다 허물어지는 것이여. 그라고 배성오가 임무럴 완수허고 죽었는지도 우리가 그냥 돌아가불먼 이선상님은 낼 워처께 되겄는가."
"고런 것을 나도 안 생각헌 것이 아니시. 근디, 임무가 완수되얐는지 안되얐는지 요런 헹편에 워찌 알겄냐그것이여."
"고것이야 간딴허시. 이 선상님얼 찾아가보먼 된께."
하대치는 무슨 단단한 물건을 콱 씹듯이 말했다.
"자네 미쳤는가? 읍내는 시방 호랭이굴이여."
"호랭이굴 아니라 불바다라도 상관웂네. 빨갱이질험스로 늑대굴 호랭이굴 개릴 판이었으먼애당초 시작도 안혔을 것인네."
하대치는 안창민 동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도 다섯 동지들의 안전을 위해서 끝내 등에 업히지 않았었다. 그째 그 사람은 말했었다. '빨갱이는 이 정도로 죽지 않소.' 그리고, 꼭 살아서 본부로 돌아갈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 약골로 생긴 사람은 결국은 살아서 돌아왔다. 전부터 안창민을 대하면, 사람이 힘만으로는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는 했는데,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그 사람을 염상진 대장과 똑같이 우러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혼자 갈 것잉께 이따 만내세. 만낼 장소를 정허세."
"자네 참말로 미쳤네이. 위험헌 디럴 혼자 워처께 가, 항꾼에 가야제."
"경비가 심헐소록 각개행동 허라는 대장님 가르침을 자네 잊어뿌렀는가!"
강동식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배성오의 형 배윤오는 읍사무소에 앉아 호적부를 들추게 될 때마다 자신의 앞에 탱자울타리가 막아서곤 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탱자나무 가지마다 촘촘히 박힌 그 억센 가시들을 뚫고 나갈 수도, 뛰어넘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호적부의 기록을 남몰래 지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무덤을 차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눈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생이 죽어 없어졌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그놈 때문에 결국 내 인생은 망쳐지고 말 것이다. 날이 갈수록 그 강박감은 심해져갈 뿐이었다. 여느 날과 마친가지로 그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점심을 먹으로 갔다. 그런데, 대문을 들어서던 그는 함지박을 들고 무엇에 쫓기듯 허둥지둥 창고로 들어가는 어머니를 목격했다. 함지박에 든 것이 음식과 어머니의 행동, 그는 사태를 짐작했다. 창고로 접근했다. 직감은 틀림이 없었다. 그는 자전거를 되집어타고 읍내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점심 손승호가 심재모의 사무실로 뛰어들 듯이 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짓이오! 나는 당신이 저 정도밖에 안 되는 줄을 몰랐소."
손승호의 마른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손 선생님, 진정하시고 잠깐 앉으세요."
심재모가 괴로운 듯한 얼굴을 숙이며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당장, 당장 조처하시오!"
손승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난 군인의 몸이오."
심재모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는 손승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을 맞쳐다보고 있던 손승호의 어깨가 처져 내렸다. 고개가 떨구어졌다. 손승호는 들어올 때의 기세와는 정반대의 무거운 걸음걸이로 사무실을 나갔다.
역전 마당 한옆으로 두 구의 시체가 거적 위에 누워 있었다. 그 양쪽 옆에 총을 멘 경찰이서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상을 찌푸리거나 혀를 차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고,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드물었다. 조무래기들만이 쭈뼛거리고 멈칫거리는 몸짓들을 지으며 멀찍이 배돌 뿐이었다.
구름 낀 겨울밤의 어둠은 먹물이었다. 세 개의 어둠덩어리가 오금재를 넘어가고 있었다. 사람의 형체를 갖춘 것은 가운데 어둠덩어리였고, 앞뒤의 것은 거의 사람의 형체가 아니었다. 커다란 등짐들을 지고 있어서였다.
다음날 새벽 해가 솟을 즈음 과수원집에서는 소란이 벌어졌다. 안방 아랫목에 누워 있어야 할 과수원댁이 자취가 없었던 것이다. 옆에 붙어 앉아 지키고 있었던 세 사람, 두 자식과 그 아이들의 이모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과수원댁은 창고에 목을 매달아 죽어 있었다. 이틀 밤낮을 지키느라고 지칠 만큼 옆 사람들이 깜빡 잠에 빠진 사이에 과수원댁은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새끼 시체나 찾아다가 묻어주고나 갈 일이제, 머시가 그리 급혀 이사람아."
뻣뻣하게 굳어진 아내의 시체를 받아 안으며 배성오의 아버지 배근우의 목은 잠겨들고 있었다. 열아홉 살 난 배성오의 여동생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발버둥질을 쳤고, 중학생인 남동생은 소 울음을 토해내며 창고의 판자벽에 머리를 짓찧고 있었다.
옆걸음질을 하는 몸이 겨우 들어갈 수 있도록 신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들몰댁의 몸은 한사코 죄어들고 있었다. 신당 안은 어둠침침했다. 향이 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짙은 향 내음이 코를 자극했다. 오랜 세월 동안 방안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냄새였다. 호랑이를 데리고 서 있는 신령님 화상과 울긋불긋한 종이꽃들과 색색의 폭이 넓은 무복과 굿에 쓰이는 가지가지 도구들... 들몰댁은 으스스 무섬증이 들고, 무슨 몹쓸 짓을 하러 들어온 것처럼 두려움에 눌렸다. 들몰댁은 신령님 앞에 절부터 네 번을 올렸다. 그때마다, 신령님 지는 심바람 허로 들어왔구만이라를 되풀이했다. 소화의 심부름이라는 말을 확실하게 해야 마음이 놓이겠는데, 신령님 앞에서 소화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몰라 안타까왔다. 절을 마친 들몰댁은 신령님을 모신 단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단에 쳐진 진홍색 천에 눈이 부셔 들몰댁은 눈을 껌벅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 때 한번 감히 만져볼 생각조차 못했던 신단 옷이었다. 들몰댁은 주저하며 진홍천을 잡았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렸다. 제기함이 드러났다. 그것을 싸안듯이 해서 끌어냈다. 나무상자에는 제기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나씩 조심해서 들어냈다. 바닥에 한지가 깔려 있었다. 그 한지를 들추었다. 소화가 일러준 대로 돈은 거기에 있었다. 돈은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어림잡아도 쌀 예닐곱 가마니 값은 되었다.
"나 걱정은 말고 그 돈으로 아그덜허고 삼동 나도록 허씨요."
순천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소화가 한 말이었다.
"나가 들몰댁헌테 똑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나가 없다고 이사허지 마씨요. 그라고 밤잠 깊이 자지 말고, 아무것도 몰르는 그분이 맘놓고 왔다가는 큰일난께, 들몰댁이 밤낮으로 지키다가 그분이 오먼 그 길로 뜨게 허란 말이오."
소화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들몰댁은 돈을 확인만 하고 제기들을 다시 넣었다. 제기함을 제자리에 옮겨놓고 신당을 나왔다. 소화는 삼동 추위에 감방 고생을 하는데 그 돈으로 쌀밥 끓여대며 앉았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번 일로 소화의 깊은 속을 헤아리게 된 들몰댁은 소화가 혈육처럼 느껴졌고, 자기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소화의 팔자 기구함에 가슴 메고 있었다. 들몰댁은 소화 뒷바라지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점심은 으례껏 굶을 것이고, 아침저녁 두 끼를 오만 잡동사니를 섞어가며 밥을 하면 세 입이 삼동 나기에는 한 가마니 쌀로 견딜 것이었다. 면회부터 가보아야 할 일이었다. 핏기 없이 부석부석하던 얼굴이 한시도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들몰댁은 술도가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길도 서투르고 한데 낙안댁과 면회를 함께 간다면 여러 모로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덜 외삼촌이 다 일을 맡어 헌께 나는 모르겄소. 허고, 그 무당일로 앞으로는 날 찾아오지 마씨요. 당자허고 다 헌 말이 있은께."
술도가집 안주인은 그대로 얼음덩이였다. 들몰댁은 말 한마디 더 건네 보지 못하고 물러났다. 당자인 소화와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외삼촌이라는 사람이 소화의 일도 함께 도와주는 것일까? 다 물어서 대답을 듣고 싶은 말이었지만 그 범접할 수 없도록 냉담한 태도에 눌려 입을 열지 못하고 말았다. 무슨 까닭인지 소화가 더욱 불쌍하고 딱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가슴에 서려들었고, 낳아서 서럽고 키우면서 더 깊어질 서러움인데 어차피 지워지기 잘한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려, 애시당초 맺어질 인연이 아니었제. 그리 애가 지워진 것도 다 신령님 뜨일 것이여.‘
들몰댁은 속으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몰댁은 돈을 꺼내다가 한약방부터 찾아갔다. 소화의 보신을 위해 환약을 지어야 했다. 면회 때 건네 줄 사식에 슬쩍 끼워 넣을 작정이었다. 발각될 것을 생각해서 돈도 미리 준비해둘 예정이었다. 남편이 일 년 옥살이할 때, 감옥에서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한약방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들몰댁은 두 여자가 수군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회정리 삼구 외서댁?"
"그렇탕께."
"참말로 청년단장 애기까?"
"장본인이 헌 말이라는디?"
"썩을 눔, 빨갱이 마누래라고 지멋대로 혔으먼 아가리나 닥칠 일이제."
"그 눔이 지 명에 못 죽을라고 환장얼 헌 것이제. 그 냄편 강동식이란 사람이 마누래럴 끔찍허니 생각허는디다가, 사람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디, 지 마누래 배에 씨뿌린 것 알먼 그눔얼 가만 두겄는가?"
"고것이야 남정네덜찌리 죽으라 사나 헐 일이고, 소문이 요리 아침안개 퍼지대끼 허는 판이니 외서댁이란 여자가 큰탈났네."
"금메 말이시. 죽도 사도 못허게 생겼네."
"참말로 빨갱이 예편네 된 것도 서러울 것인디, 그런 꼴할라 당허고, 소문꺼정 나부렀으니, 복쪼가리는잔생이(지리리) 웂은 예펜네시."
들몰댁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꼭 자신이 당한 일만 같았던 것이다. 외서댁과는 서로 아는 사이였다. 몇 차례씩 함께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다 보니 얼굴들이 익었고, 눈으로 말을 나누는 사이들이 되었던 것이다. 표 나게 곱지는 않지만 젖가슴이 유별나게 큰 실한 몸을 가진 여자였다. 인자 어찌 살라는고... 들몰댁은 가슴에 바위덩이가 얹힌 것만 같았다.
들몰댁은 한약방을 나와 포목점으로 갔다. 광목을 끊고 솜을 샀다. 소화는 솜 둔 옷을 입고가기는 했지만 그건 몸맵시를 생각해서 지은 옷이라 솜이 종잇장처럼 얇았다. 성치도 않은 몸에 그 옷으로 삼동 감방생활을 하다가는 지레 얼어 죽을 것이었다.
환약을 찾기로 한 이틀 동안 들몰댁은 사람 하나를 사서 소화의 몸에 맞게 남자한복 두 벌을 만들었다.
"들몰댁 여그 온 새에 그분이 오먼 워쩔러고 이리 왔소. 나가 그리 당부혔는디."
들몰댁을 대하자마자 소화가 원망스러워하며 한 말이었다.
"워찌 해필 오늘 오시겄소. 기자님 고상허실 것 뻔히 암스로 발 묶고 앉었을 수가 웂었구만요."
"들몰댁 맘이야 고맙지만, 내 당허는 고상은 암시랑 않소. 내 고상 막을라다가 그분헌테 화 돌아가먼 그 후회, 그 한스러움을 어찌 허란 것이오. 그분만 건강허고 무사허먼 나넌 무신 고상을 당혀도 아무 상관이 웂소. 몸이 당허는 고상을 마음이 못 이기먼 고상이 되는 것이고, 몸이 당허는 고상을 마음이 이기먼 고상이 아닌 법이요. 나가 고상을 당해 그분이 무사헐 수만 있다먼 요런 고상이야 평생도 당허겄소."
소화는 헛것을 보는 것 같은 몽롱한 눈으로 마치 주문을 외듯이 느리고 낮은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부기는 더 심했고, 눈동자에는 핏발이 성했다. 들몰댁은 그런 소화를 겁나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신이 내리는 것이 아닐랑가 몰라. 여그서 신이 내려뿔먼 워째야 쓸고.’
사실 소화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의 정하섭을 다시 만나고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일까. 갈수록 내 마음에 크게 번져오는 사람... 당신은 달이다. 그래, 달이다."
젖가슴에 얼굴을 묻은 정하섭의 읊조림이었다.
‘달이길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의 작은 별만이라도 황감합니다. 아닙니다, 별이기도 욕심하지 않겠습니다. 제 욕심이 행여 당신의 괴로움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일순 스쳐 지나는 구름이고 바람이어도 족했던 것을, 당신은 제게 빗방울까지 만들어주셨습니다.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달이길 감히 바라지 않지만 당신은 정녕 제 해입니다.’
소화는 소리 없는 대꾸를 했었다.
"시간 다 됐습니다."
간수가 메마른 소리를 냈다.
"들몰댁, 다시는 오지 마씨요. 나 일은 정 사장댁에서 다 손써주고 있응께. 집만 장 지키것다고 약속허씨요."
소화는 황급하게 말했다. 그때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명심허겄구만이라. 끼니때마동 약 드시는 것 걸르지 마씨요. 열 알썩이요."
들몰댁은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다짐했다.
"고맙소, 들몰댁."
눈물이 크렁한 눈으로 소화가 돌아섰다. 소화의 모습이 문 밖으로 없어져버린 다음에도 들몰댁은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들몰댁은 역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겨놓으며, 술도가 집 찾아갔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하섭을 향한 소화의 마음에 대해서는 춘향이 넋이로시! 그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마삼수, 노덕보, 김복동은 이른 저녁들을 마치고 강동기네 아랫방으로 모여들었다. 정 사장네 집을 때려 부순 손해배상금 장만을 위해서였다. 정 사장 처남의 치료비는 일차로 장만해서 전했던 것이다. 네 몫으로 분담하기로 한 그 돈도 꼼짝없이 빚을 낸 것이었다. 쌀 닷 가마니 값을 빚내 고스란히 갖다 바치며 그들의 속은 하나같이 쓰리고 아렸다. 한 사람 앞에 한가마니 두 말 닷 되의 쌀- 이런저런 잡곡을 섞어 고구마 밥, 무밥, 콩나물밥 등속으로 꾸리면 그건 새끼들하고 반 겨울을 날 수 있는 양이었고, 시래기죽만 끓인다면 온 겨울도 날 수 있는 양이었던 것이다. 살점 베어내는 것 같은 돈을 당당하지도 못하게 넘겨주고 돌아선 그들은 횟김에 소 잡아먹는 후회를 씹고 씹으며 참담한 심정으로 도래등을 넘어섰던 것이다. 그때까지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그들은 동네 어귀에 이르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주막으로 줄줄이 들어갔다. 그 빚돈도 쉽게 낸 것이 아니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다 낡고 헌 오두막집이 한 채씩일 뿐 땅 한 뙈기 없는 그들에게 돈 가진 사람 그 누구도 빚을 주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돈이 지주한테 횡포를 저지르고 그 배상금으로 쓰일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돈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지주인 형편에 그들은 이미 '상전을 몰라보고 나댄 싸가지 없는 것들'로 돈푼 쥔 사람들의 눈 밖에 나 있었던 것이다. 배상금을 내야 할 날짜는 바득바득 다가오고, 그들은 어찌 할 방도가 없어 마름 허출세를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출세는 초장부터 기고만장하게 거드름을 피우고 콧대를 세웠다. 네까짓 것들이 뛰어봐야 기고만장하게 거드름을 피우고 콧대를 세웠다. 네까짓 것들이 뛰어봐야 벼룩이지 하는 태도로그들을 발밑에 깔았고, 그러면서도 돈은 빌려줄 수 없다고 고개를 틀었다. 그들은 그의 속셈을 환히 알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을 알고 이자를 높이려는 수작이었던 것이다. 그의 그런 교활한 성정을 평소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앞에 머리 숙이지 않으려고 여기저기 줄을 대다가 실패만 거듭했던 것이다. 허출세는 칠부 이자를 내라고 했다. 오부로 내려달라고 네 사람은 돌아가며 사정하고, 간청하고, 애걸했다. 그래서 일부를 깎고, 육부 빚돈을 내었던 것이다. 침울한 얼굴을 맞대고 앉은 네 사람은 말이 없었다. 다시 허출세를 찾아가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더 필요한 말이 있지도 않았다. 집을 파손한 배상금은 쌀 세 가마니 값이 다되었다. 정확하게 계산하면 세 가마니에서 한말이 빠지는 돈이었다. 심 사령관은, 치료비와 수리비를 한꺼번에 배상한다는 것은 무리이므로 일주일 간격으로 나눠서 한다는 합의서에 정 사장이 도장을 누르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이자가 불어나는 것을 생각하면 하루가 지내는 것이 무서운 그들에게 일주일의 여유란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이 침울한 것은 또 돈을 빌러 가야 된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은근히 기대했던 일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치료비를 배상하고 난 그들은 속이 쓰리고 아려 견딜 수가 없는데 또 며칠 후에 수리비 줄 생각을 하면 밤잠이 안 오고 배창자가 비비꼬일 지경이었다. 그런데다가 마누라들까지 고시랑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유치장에 갇혔을 때 고기반찬의 사식들을 고시랑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유치장에 갇혔을 때 고기반찬의 사식들을 날라 오던 마누라들은 아니었다. 남편들이 유치장에 갇혔을 때는 때 묻은 속옷까지 팔아서라도 징역살이 시키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졌고, 진정서에 도장을 받을 때는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는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동네마다 쏘다녔고, 합의가 이루어져 풀려나게 되자 그 조건에 그저 감지덕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차츰 마음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정하섭의 사건이 발생하고, 정 사장이 잡혀 들어가고, 마침내 재판소로 넘어가고 말았다. 정 사장이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만 해도 그들은 그저 속시원해하고, 고소해한 정도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재판소로 넘겨지자 그들의 마음은 돌변하게 되었다. 어떻게 우물쭈물해서 수리비를 물어주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들 넷의 생각은 한 치의 틈도 없이 일치했다. 아니, 마누라들까지 합쳐서 여덟 사람의 마음은 떡판으로 찍어낸 떡이었다. 그리하여 그들 내외들은 수리비 배상을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내기 위해 머리들을 싸맸다. 이러저러한 말들이 수다히 오갔지만 이거다 싶은 묘책은 쉽사리 찾아가지 않았다. 이, 삼 일 궁리 끝에 한 가지 방법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낙안댁을 찾아가 잘못을 빌고, 수리비를 면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자는 것이었다. 낙안댁은 남편 정 사장보다야 심성이 낫고, 남편이 재판소로 넘어가 겁먹고 기죽어 있는 형편이니 의외로 쉽게 말이 먹혀들지도 모른다는 계산속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래서 안 되면 괜히 빈 것만 손해고, 더 속이 뒤집혀 어찌 살겠느냐, 하는 반대의사가 안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는 판에,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뱃심을 부리게 되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허는 것인가! 그 꼬라지 덜 꿈에라도 보기 싫은께 썩 물러나!" 남편이 재판소로 넘어가 낙안댁은 겁먹고 기죽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독 오르고 심해져 있었다. 그들은 그것만으로 끝날 수는 없었다. 또 머리를 맞댄 끝에 젊은 군인대장을 생각해냈다. 큰 키에 깡마른 얼굴이 엄하고 차게 보였지만 작인들의 편을 들어준 것을 보면 인정이 깊고 마음씨가 좋은 것이 분명했다. 육부 빚을 내서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하소연하면 그 젊은 대장은 틀림없이 어려움을 해결해줄 것이 분명했다. 육부 빚을 내서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하소연하면 그 젊은 대장은 틀림없이 어려움을 해결해 줄 것이다. 그 대장이 명령을 한마디만 내리기만 하면 빨갱이아들 문제에 걸려 있는 낙안댁은 찍소리 한번 못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낙안댁을 찾아갈 때와는 다르게 약간씩 더듬거리고 머뭇거려지는 걸음걸이로 군인대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여러분들의 어려운 사정과 여러분들이 잘못을 저질러 합의서에 도장을 찍은 것과는 별개의 문젭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합의서 내용대로 책임완수를 하지 않는 경우 여러분들은 원점으로 돌아가 여러분의 죄를 재판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손해배상금은 합의서에 적힌 날짜를 하루도 어김없이 지불해야 합니다."
군인대장은 인상대로 엄하고 차가왔다. 두 번을 실패한 그들에게 수리비를 모면할 길은 더는 없었다. 다시 허출세를 찾아갈 일만 남아 있었다.
"또 허출세 그눔 부자로 출세시키게 슬슬 일어들 나세."
담배를 잉끄려 끈 마삼수가 기지개를 켜며 목소리를 길게 늘였다.
"지기미 헐 것, 나가 그때 워째 참지럴 모허고 대가리럴 치받고 들었는지, 이눔에 모강댕이럴 작두에 대고 챡 쳐뿔고 잡은 생각이 하로에도 열두 분도 더 든단 말이여."
김복동이 휴우우 한숨을 토해냈다.
"와따, 구둘장 무너지겄네."
노덕보가 마땅찮은 얼굴로 내질렀다.
"허허, 그려도 쌈밧이야 성님이 질 옹골지게 봤음스로 멀 그러요. 하, 코피 탱 풀어 던짐스로 번개치대끼 박치기허고 들어가는 것이 지끔도 눈에 선허요. 그 꼬신 맛 생각험스로 죽은 자석 붕알은 고만 만지작이씨요."
마삼수가 그동안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되씹으며 느물거렸다.
"씨발눔에 것, 하늘허고 땅이 딱 맞붙어 맷돌질이나 다글다글 해뿌렀으먼 속이 씨언허겄다."
김복동이가 성깔을 부렸다.
"어허, 오기부리지 마씨요. 나사 안직도 시퍼런 청춘인디 요대로 죽어뿔기는 억울허요. 우리 겉은 눔덜도 활개치고 살 시상이 올란지도 몰른께 당장은 도상시럽고 숨 맥혀도 나는 쪼깐 더 살아봐야 쓰겄당께요."
마삼수의 옹이 박힌 느물거림이었다.
"근디 말이여, 염상진이가 쬧겨가기 직전에, 지주덜 땅을 다 뺏어갖고 농지분배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허지 않었등감? 그 사람이 ?겨가지 않었으먼 참말로 지주 땅 다 뺏어 우리 겉은 것들헌테 농토를 골고로 갈라 줬을랑가?"
노덕보가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청승스럽게 하고 있었다.
"참말로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 엔간히 허씨요."
마삼수가 핀잔을 주며 담배쌈지를 끌어당겼다.
"고것이 무신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여? 쬧겨가지만 않었음사 그 사람은 영축웂이 그리혔을 사람이시."
김복동이 앉음새를 고치며 이야깃거리를 잡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아, 그리 허고, 안 허고는 쬧겨가지 않을 담에 따져볼 문제고, 쬧겨가분 마당에 고런 소리 허는 것이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가 아니고머요?"
마삼수는 한심스럽다는 듯 혀를 차댔다.
"정작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넌 지끔들 허고 있는 말이 전부 다여. 징역살이 허고 잡지 않으먼 염상진이 말은 꺼내덜 말어야 써."
여지껏 한마디도 없이 앉아 있던 강동기가 화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말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세 사람도 따라 일어났다. 그들 앞에는 또 허출세를 찾아가야 하는 현실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침울하게 문지방을 차례로 넘어섰다.
남원장 큰방에는 걸직한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읍장 이병주를 중심으로 최익달, 윤삼걸이가 앉았고, 맞은편에는 신임 세무서장 최익도와 신임 금융조합장 유주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술상에는 가지가지 음식들이 자리다툼을 벌임 상머리까지 그득하게 차 있었고, 손님들 옆에는 제각기 색깔과 무늬가 다른 한복을 입은 기생들이 맵시다툼을 하듯 분내음들을 진하게 풍기고 있었고, 웃목 쪽으로는 술맛 돋우는 데어서 쓰이기를 고대하며 소리 북과 가야금, 장고가 나란히 숨죽이고 있었다. 그런 술자리의 완비에 비해 술상에 둘러앉은 다섯 사람의 기분은 썩 좋아보이지가 않았다. 특히 최익달과 윤삼걸의 얼굴은 화난 기색이 역연했다. 술자리를 마련한 두 사람의 기분이 그러하므로 나머지 세 사람도 자리가 옹색했고, 자연히 술상머리 분위기는 어색스럽고 꺼끌꺼끌했다. 흥겨웁고 흐드러져야 할 술자리가 그리 된 데에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었다. 그건 다름 아닌, 주빈 격인 심재모가 술자리를 채우지 않은 때문이었다. 심재모는 초청을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예정된 공무집행 관계로 초청에 응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고, 초청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인사까지 정중하게 했다. 그리고 예하부대 정기순시를 위해 조성으로 떠났다. 읍장을 통해 그런 연유를 상세히 들었고, 심재모가 읍내에 없다는 것까지 확인했으면서도 최익달이나 윤삼걸은 그가 일부러 초청을 거절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최익달과 윤삼걸은 심재모가 정 사장을 재판소로 송치시켜버리는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저것이 아무래도 예사 것이 아니로구나, 저것이 필시 세상물정 모르고 나대는 젊은 혈기거나, 지방유지들 우습게 볼 만큼 서울 빽줄이 든든하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의견을 모으고 나자, 앞서 정 사장 편을 들어 전화로 욕질을 해대고 막보기로 나간 것이 슬그머니 켕기는 것이었다. 앞 뒤 안 가리는 젊은 혈기라 해도 그 손에 읍장이고 서장이 꼼짝 못하는 권력이 들렸으니 문제였고, 서울에 빽줄이 든든하게 이어져있다면 그건 더욱 문제였던 것이다. 자기네가 그렇게 윽박지르고 몰아쳤으면 어느 정도 기가 꺾이고 주눅이 들어, 정 사장과 적당히 잘해서 어물어물 내보낼 줄만 알았던 것이다. 정 사장을 그 지경 만드는 걸 보면 어느 유지라고 안정에 있을 리 없을 터였다. 칼 든 놈 앞에 목 디미는 어리석은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자연스러운 술자리를 꾸밀 것인지 살피고 있는데 마침 과수원집 사건이 터졌다. 빨갱이를 둘이나 사살한 전과와 노고를 축하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술자리를 자연스럽게 벌이기에는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가 신임 세무서장과 금융조합장의 친목도모까지 덧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심재모는 당장 빨갱이가 몰아닥치는 것도 아닌데 공무를 빙자해서 초청을 거절해버렸던 것이다. 두 사람은 치솟는 성질대로 하자면 술자리 약속을 열 번이라도 걷어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중간에서 수고한 읍장을 보나, 외지에서 부임해온 금융조합장의 체면을 보나 이미 정해놓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님, 그만 기분 푸십시다. 그 사람이 고의로 술자리를 피헌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쪽도 실수가 있었어요. 며칠 전에 미리 통고해서 시간을 맞추게 혔어야지요. 어찌 보먼 젊은 사람이 신통허지 않습니까? 기생 끼고 앉는 고급 술자리에 정신없이 뎀비지 않고 빨갱이 막겄다고 근무에 충실허는 것이. 오늘만 날이 아닌께 오늘은 오늘대로 기분 좋게 놀고, 담에는 미리미리 통고해서 다시 술자리를 만들면 되지 않겄는가요. 그래 드리는 말씀인데, 주제넘기고 야단하지 마시고 좀 들어보십시오. 그게 다른 말이 아니라, 연고가 그러 허니 형님은 그때 가서 술을 시시고, 오늘 술은 제가 내는 것으로 해주십사 하는 말씀입니다."
신임 세무서장 최익도가 둥글둥글한 생김대로 구변 좋게 엮어 내렸다. 그는 최익달과 사촌이었고, 전임자 최익현의 자리를 이어받는데 국회의원 최익승이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거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리 허락하시지요."
신임 금융조합장 유주상이 거들었다. 그는 안씨 문중에서 차지하려던 자리를 용케도 광주에서부터 차고 내려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도청에 굵은 줄이 닿아 있다는 소문이 부임하기 전에 이미 퍼졌었다.
"동상 체면 봐서라도 그것이 좋겄소."
술값을 반타작하기로 한 윤삼걸이는 거드는 척하며 발뺌을 하고 있었다.
"술이야 누가 내거나... 동상 말 듣고 봉께 그럴 법도 허시."
최익달은 어물쩍거리며 술값을 동생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자아, 새 기분으로 흥나게 술들 드십시다. 이년들아, 흥 안 돋구고 멀 혀?"
세무서장 최익도가 술판을 맡고 나섰다. 좌중이 헛기침들을 하며 자리를 고쳐 앉았고, 기생들이 생기를 띠며 제 짝을 찾아 눈웃음쳤고, 바삐 술을 권하며 술판은 어우러져갔다.
"근디 말입니다. 시뻘건 대낮에 빨갱이가 칠동꺼지 잠입해 있었다는 것은 문제 아니겄는가요? 다행허게 잡아죽이기는 혔는디, 만약에 잠입헌 것을 알려준 사람이 웂었더라먼 고것덜얼 못 죽였을 것 아니요? 그랬으먼 그날 밤에 고것들이 읍내 안총으로 숨어들어 무신일얼 저질렀을지 알 것이요, 그것만 생각하먼 자다가도 벌떡 잠이 깨는 판이오. 정 사장 아들이 도래등에 나타나고, 죽은 두 눔은 정반대 쪽 칠동에 잠입허고, 그러거 보먼 다른 빨갱이들이라고 봉림이고, 쇠머리고, 안통이고, 지멋대로 싸돌아 댕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웂이다 이 말이요. 이 문제를 워찌들 생각허시오?"
윤삼걸이 자못 심각하게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저도 이번에 아주 놀랬습니다."
최익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덜 웬수가 바로 빨갱인디, 고것덜 씨럴 말라자먼 더 강력헌 방법을 쓰는 도리밖에 웂은 것이요. 자네 요번에 서울 가서 봉께 거그 기운은 워처등가?"
최익달은 동생 최익도를 쳐다보았다. 최익도는 자신을 세무서장 자리에 앉게 해준 재종형님 최익승에게 인사를 올리러 서울걸음을 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각하의 멸공 북진통일이야 변하기 않고 여일하지요."
최익도는 새로울 것 하나도 없는 말을, 그러나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형의 물음이 너무 갑작스럽고 엉뚱한데다가, 자신은 서울에 가서 여자구경과 시내구경만 실컷 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체면상 대답을 어물거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글씨, 무변영일헌 것은 존디, 온 나라 군대럴 여그로 싹 몰아다가 지리산이고, 백운산이고, 조재산이고, 빨갱이라고 백힌 것은 아잡디끼 혀불기 않고 머 허고 있냐 그것이여."
최익달은 열이 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이승만 대통령 각하께서 국부로 계시니 이만한 겁니다."
유주상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은덕이야 누가 모르겄습니까. 빨갱이덜이 새로 꼼지락이는 눈치가 뵌께 답답혀서 허는소리제."
최익달이 변명하듯 말했다.
"최사장 말도 맞소. 도적눔 하나 열 포교가 못 당허드라고, 빨갱이 덜 어설프게 다투다가는 언제 또 당헐란지 몰를 일이요."
윤삼걸이 최익달을 두둔하고 나섰다.
"아마 빨갱이들도 이번 겨울을 못 넘기고 끝장이 날 겁니다. 날은 춥지, 군, 경은 조여들지, 제까짓 것들이 산 속에서 별수 있겠어요?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어 죽고, 뭐가 남겠어요?"
유주상은 여유만만 했다.
"그리 되기가 쉽지요."
읍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만 됨사 머럴 더 바라겄소. 그라고 참, 칠동 빨갱이 잡는 디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읍사무소 댕긴다면서요? 읍장님, 그 사람 공을 치하혀서 표창을 허거나, 승진을 시키거나 허는 것이 어쩔랑가요?"
윤삼걸이 새로운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읍장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 삶이 그 일 이후 매일 술에 취해 출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그 사람의 처지를 고려해서 다른 곳으로 전근을 시켜줄까 하고 있는 생각도 입에 올리기가 싫었던 것이다.
"표창허는 것, 그것 아조 존 생각이오. 그 사람헌테만 표창헐 일이 아니고, 앞으로도 그런 공을 세운 읍민이먼 누구헌테나 표창을 허는 것이오. 그것도 그냥 표창장만 달랑 주지 말고 상품이든 쪼깐 후허게 주는 것이오. 그리 되먼 워찌 될 것이냐! 사람덜얼 상금 따 묵을라고 눈에 불키고 빨갱이덜얼 찾아낼라 헐 것이고, 군, 경은 요분겉이 쉽게 빨갱이럴 잡을 것 아니겄냐 그것이오. 읍사무소에 상금 낼 돈이 따로 없으면, 우리 돈 가진 사람들이 염출허먼 간딴허요. 내 생각이 어떠시요들?"
최익달의 열기 오른 말에 좌중은 좋소, 좋소를 연발했다. 읍장만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최익달의 생각이 아주 그럴싸하다고 여기면서도 배윤오가 표창장을 받을 것 같지 않아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읍장님언 마땅찮으시오?"
모두의 찬동에 힘을 얻은 최익달이 읍장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멀 좀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그렇겄지요. 우리보담도 읍장님이 먼첨 나서서 추진해야 헐 일인께요. 어허, 술맛 쪼오타. 싸게 여그 술 치고 한 가락 근사허니 뽑아봐라."
최익달은 기분이 달떠 올라서 옆에 앉은 아가씨의 엉덩짝을 철썩 갈겼다.
"그려, 경월이가 그 틉진 목소리로 우리 속얼 씨언허게 맹글어라."
윤삼걸이가 맞장구를 쳤다.
"장허지 못허는 소리제만 청허시니 불러 올리겄습니다."
최익도 옆에 앉은 경월이가 제 빛을 발할 때가 왔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나붓이 절하고는,
"춘향전 중에서 이도령과 춘향이가 이별 후 상면허는 대목을 허겄습니다."
반허리걸음으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가만 있거라, 가만 있거라."
유주상이 팔까지 저으며 다급하게 말했고, 그 갑작스러움에 좌중의 눈길이 그에게로 쏠렸다.
"분명 이몽룡이 어사또 되어 동헌에서 춘향이 만나는 대목이겄다?"
유주상은 굳이 고개를 뒤로 돌려 엉거주춤 서 있는 경월이게게 확인했다.
"예에, 그렁마요."
손님의 기색에서 무언가 심상찮음을 느낀 경월이의 음성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별하는 장면이 아니고 어찌 하필 상봉하는 장면이냐?"
"그냥 그 대목이 춘향전 중에서도 질 좋아서..."
"그것 맹랑허다. 자리에 앉거라."
유주상의 명령에 경월이와 고수 노릇을 하려고 나앉았던 기생은 황급히 제 자리를 찾아들었다.
"제가 왜 이러는고 하면, 춘향전이라는 것이 가만히 따져놓고 보면 아주 맹랑하고 기분 나쁜 이야깁니다. 그 줄거리야 다 아는 거니까 다시 말할 것 없고, 문제는 양반 자제가 천기의 딸을 첩이 아니라 정실로 맞아들이게 이야기를 억지로 꾸민데 있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한 번씩 생각해본 일들이 있으십니까?"
유주상은 좌중을 훑어보았다. 모두는 멀뚱한 표정일 뿐이었다. 유주상은 정종 잔을 꼴깍 비우고 말을 이었다.
"당초에 그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필경 상놈일 것인데, 그놈이 아주 음흉하고 고약한 놈입니다. 세상에는 있을 수도 없는 그런 억지 이야기를 꾸며, 양반은 별것이냐, 상것을 정실로 맞아들이지 않느냐, 상것이라고 뭐가 다르냐, 양반 정실이 될 수 있다, 양반을 낮추고 상것을 올려서 양반이나 상놈은 다 똑같은 사람이다, 하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겁니다. 요런 싸가지 없는 생각이 어디 또 있겠어요. 춘향전이 제대로 됐을라면 이별하는 장면에서 끝났어야합니다. 이몽룡은 과거급제하고 양반집 새악씨를 정실로 맞고, 춘향이는 고분고분 변사또 수청을 드는 것이 되어야 옳은 것입니다. 제 말이 어떻습니가?"
유주상은 득의에 찬 얼굴로 좌중을 훑어보았고, 고개를 약간씩 수그린 아가씨들은 표 나지 않게 입술들을 삐죽이고 있었다.
"그거 참 듣고 봉께 그러시."
"상것들 버르장머리 웂이 맹근 것이 바로 춘향전일쎄그랴."
"천하에 고약헌 것. 다시는 춘향전 안 들어야겠다."
그들은 진정으로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들로 한마디씩 했다.
"니도 고런 맘 품고 맨날 춘향전만 불러댔냐?"
윤삼걸이가 느닷없이 소리 질렀다.
"아니어라, 아니구만요, 그냥, 아는 것이 그것뿐이라..."
경월이는 말을 더듬거렸다.
"춘향전 말고, 적벽부 중에서 조조 병사 패하는 대목을 불러라. 조조병사 패하는 것을 빨갱이 패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듣자."
유주상이 말했고, 좌중은 그 희한한 생각에 유쾌한 동의를 표했다.
"그것은 부를지 모르는디요..."
경월이는 죄진 몸짓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나가 알드라도 안 불렀을 것잉만, 반항하고 있었다.
"누구 부를 사람 없냐?"
유주상의 말에 아가씨들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알겠다. 아무도 할 만한 애들이 없는 모양인데, 그저 시늉소리지만 제가 한번 불러보면 어떨까요?"
유주상이 자청하고 나섰다. 좌중은 흥이 돋아 박수를 쳐댔다.
서민영에게 며칠간 집에 다녀오겠다고 양해를 받고 벌교를 떠난 이지숙은 사흘 만에 돌아왔다. 기차를 타고 떠난 그녀는 기차로 돌아왔다. 그녀가 역을 떠날 때 마당 한쪽에 누워 얼고 있던 두 구의 시체는 그녀가 돌아왔을 때는 어디로인지 치워지고 없었다. 하숙집에 당도한 그녀가 지극히 무심한 듯, 그러나 제일 먼저 꺼낸 말은 그것에 대해서 였다.
"가족한테 줘서 장사지내게 혔답디다. 그려도 그 대장이 영판 맘씨가 존 사람입디다. 원체는 닷새럴 뉘어놔야 헌다는디 사흘 만에 그 벌을 면하게 혀줬응께요. 젊은 사람이 넘 가심 아픈 것도 다 알고, 고마운 일이제라."
아주머니는 콧물까지 찍어내고 있었다.
"그렇네요. 고마운 일이군요."
그녀는 건성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이지숙은 손발을 씻고 이부자리를 폈다. 몸의 피로와는 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산들이 줄기를 이루며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 어떤 힘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굳건함과 완강함으로 산들은 어깨동무하며 끝없이 이어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굳센 힘이었고 강한 의지의 표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난과 승리의 상징이었다. 산들의 끝없는 어깨동무는 높은 봉우리, 더 높은 봉우리를 향하여 이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높을 수 없는 마지막 봉우리를 이루기 무수한 산들이 어깨동무하며 견디어내는 고난의 인내, 그것은 바로 혁명의 승리가 어떻게 얻어지는 가를 보여주는 일깨움이었다. 그 산 속에 산의 의미를 깨달은 인간의 산들이 있었다. 그 산들과 어깨동무하기를 주저할 까닭이 없었다. 이지숙은 우람한 산들을 가슴에 담아왔고, 다시 그 힘과 의지를 감동으로 음미하고 있었다.
이지숙은 안창민이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반갑고 기뻤다.
"따로 고맙다는 말 하지 않겠소."
자신의 손을 잡고 안창민이 조용하게 말했다. 이지숙은 왈칵 부끄러움을 느꼈다. 안창민의 눈빛이나 어조는 염상진과 악수를 마치고 두 번째로 손을 맞잡았던 때의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지숙은 자신도 모르게 염상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소. 얼마나 축하할 일이오."
염상진이 잔잔하게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도 아까 '이 동무' 하며 손을 잡았을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지숙은 고개를 떨구었다. 걷잡을 수 없이 뜨거운 감정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뜨거운 서러움이었고, 뜨거운 아픔이었고, 뜨거운 외로움이었다. 스스로에게 감추어오고, 속여 왔던 그런 감정들이 마침내 분출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