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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8

22. 병원 사건

전명환 원장과 이지숙 선생이 체포되면서 사건의 전모는 드러났다. 경찰의 심문에 전 원장은 모든 것을 숨김없이 진술했던 것이다. 그 사건에 관한 소문은 다음날로 읍내에 속속들이 퍼졌다. 경찰에서 비밀에 부치지도 않았지만 자기네들의 공로를 내세우고 싶어 하는 청년단원들의 과장된 입놀림에 의해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그만큼 빨랐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그것은 놀랍고도 흥미로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부상당한 빨갱이가 읍내 한복판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청년단에서 급습을 했을 때는 이미 부상한 빨갱이가 자취를 감춘 뒤였다는 사실이 흥미를 유발시켰다. 아이들까지도 양지쪽에 모여 우김질을 하고 입씨름을 벌일 정도로 그 사건은 관심거리였다. 사람들은 제각기 아는 체를 하고, 사건처리에 관해 의견대립을 보이고는 했지만 전 원장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죄없음'으로 입이 모아졌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객관성이 결여된 인정론이고 전 원장이 얻고 있는 인심의 반응이었을 뿐, 그가 처한 입장은 그리 간단하거나 단순하지가않았다. 안창민을 치료한 사실에 대해서 전 원장은, 사상 이전에 한 인간을 치료해야 하는 의사의 직분에 충실한 것이라고 자신의 행위를 증언했다. 경찰이 그 행위의 타당성을 그대로 인정해준다 하더라도 전 원장은 또 다른 함정에 빠져 있었다. 첫째, 의사의 직분으로서 시술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국법으로 다스리는 범죄자의 도주를 돕거나 방관했으며, 둘째, 며칠 동안 염상진을 묵게 함으로써 범죄자 은닉행위를 자행한 것이었다. 이 범죄성립의 함정에서 전 원장은 빠져나올 도리가 없었다. 전 원장이 그나마 무사할 수 있었으려면 안창민과 염상진이 체포되었어야 했다. 유치장에 갇힌 뒤 전 원장은 자신의 문제가 아닌 이지숙의 문제로 계속적인 심문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전 원장이 처한 또 다른 국면이었다.

"의사 양반, 우리 신사적으로 합시다. 점잖은 처지에 있는 분한테 폭력을 쓸 수도 없고, 인간적 견지에서 솔직하게 불어버리고 빨리 끝내는 것이 서로 좋지 않겠소? 나도 살이 찢어지고 뼈 부러지는 소리 듣기 좋아하는 사람 아니오."

전 원장을 마주 대하고 앉자마자 토벌대장이 한 말이었다. 전 원장의 가슴에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섬뜩섬뜩 박혀왔다.

"이지숙이가 빨갱인 줄 알았지요?"

어제 형사부장이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몰랐습니다."

"그럼, 뭔지 알았소?"

"안 선생과 애인 사이로만 알았습니다."

"이거 보쇼, 의사 양반. 빨갱이새끼를 선생, 선생 하지 마쇼." "..."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지숙이한테 연락을 했을 때 벌써 그것들이 한패거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피를 뽑으라는 연락을 할 수 있느냔 말야."

토벌대장의 말은 '의사양반''당신'으로, '존대''해라'로 바뀌어 있었다.

"환자가 위급한 상태라서 다급한 김에 연락을 했던 것이지, 이 선생이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을 알아서 그랬거나, 연락을 한다고 꼭 수혈에 응하리라고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이봐, 선생, 선생 하지 말랬잖아!"

토벌대장이 눈을 치뜨며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전 원장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년이 피를 뽑겠다고 나섰을 때도, 아직 시집도 안 간 년이 지 피를 뽑아 사내놈 몸속에 넣겠다는데도 이상한 눈치 못 챘어?"

"그거야! 애인을 위해서..."

"시끄럿! 세상이 아무리 더럽게 망조가 들어가고 있어도 시집도 안 간 년이 어떻게 사내놈한테 피를 뽑아줄 수가 있어. 당신 정말 계속 거짓말할 거야?"

임만수의 가슴은 서서히 달구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찬물을 끼얹는 말이 스쳐갔다.

"절대 손을 대진 마시오. 그 사람을 심문하는 것은 혹시 이지숙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러는 것이오. 그 사람은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니 손을 대진 말아요. 그 사람이 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오히려 우리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서장이 한 말이었다. 임만수는 사지에 맥이 빠짐을 느꼈다. 심문이라는 건 그런 제약을 받아서는 할 맛이 나지 않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막 판을 벌여 놓은 상태에서 심문을 집어치울 수도 없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추슬러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안창민이나 염상진이하고 그년이 주둥아리를 놀렸을 텐데, 거기서도 아무 눈치를 못챘단 말이오?"

"염상진하고 이지숙은 초면인 것이 분명했지요. 그리고 더러 동석을 하긴 했지만 그들은 전혀 사상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전 원장은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을 해나갔다.

"그건 그렇다치고, 이지숙이년이 전화를 걸어왔을 때도 아무 눈치를 못 챘단 말인가?"

이건 어제 형사부장이 묻지 않았던 새로운 질문이었다. 전 원장은 그 때의 느낌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염상진을 바꿔달라고 했을 때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어요. 뭔가 위급한 사태가 벌어졌나보다 하는 느낌이었지요. 그렇지만 이지숙이 좌익일 거라는 의심은 갖지 못했어요."

전 원장은 현재로서도 이지숙이 좌익일 거라는 상상이 가능하지 않았다. 이지숙이 여자라는 선입관 때문이 아니라 그 동안 전혀 그럴 만한 낌새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신은 천상 고름이나 짜고 배나 째먹고 살 사람이구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빨갱이나 치료해 주고 앉았으니, . 이번에 세상살이 쓴맛이 어떤 것인지 단단히 보고나면 철이 들겠지."

토벌대장 임만수는 취조장을 탁 덮으며 일어섰다. 전 원장의 가슴을 찬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다소 불안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태가 이렇게까지 번질 줄은 몰랐었다. 염상진을 며칠씩이나 왜 은닉시켰으며, 그들이 도주한 다음 왜 사건을 은폐시키고 있었느냐는 대목에서는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빨갱이에게 동조했다는 죄목을 벗어날 길이 없었고, 더 나아가서는 바로 빨갱이로 몰아세운다 해도 고스란히 빨갱이가 될 수밖에 없는, 앞뒤가 막힌 상황이었다. 멀게만 느꼈던 사상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고 있는 절박감을 비로소 실감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이지숙은 불타버린 경찰서의 지하실에서 고문취조를 당하고 있었다. 그 지하실은 일정시대부터 고문취조실로 써왔던 것이다. 건물이 다 불타서 못 쓰게 되어버렸지만 지하실만은 불길이 닿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층에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에 철문이 달려 있고, 지하실 출입문이 또 철문이어서 그 어떤 비명이나 고함도 밖으로 새나갈 수가 없었다. 밖은 대낮인데도 지하실에는 촛불 두 개가 밝혀져 있었다. 그러나 지하실에는 희끄무레한 어둠이 차 있었다. 천장의 쇠고리에 연결된 밧줄에 두 팔을 위로 묶인 이지숙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홑저고리에 무릎을 약간 덮는 속곳 차림이었다. 잘 차비를 하고 이불 속에서 책을 읽고 있던 그녀는 병원을 거쳐 곧바로 그녀의 집으로 내달아온 염상구의 손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두 팔이 위로 묶이는 바람에 저고리가 따라 올라가 그녀의 상체는 거의 맨살 그대로 드러났다. 거기에는 매질이 가해진 검푸른 피멍들이 뜻 모를 문신처럼 쭉쭉 그어져 엇갈려 있었고, 저고리와 속곳의 여기저기에도 피 얼룩이 묻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헝클어진 머리를 깊게 떨군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으쩌요?"

염상구는 형사부장 장길춘에게 담배를 내밀며 한껏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밖에서 방금 돌아온 참이었다.

"아닌갑네."

장길춘이 담배를 뽑아들며 고개를 저었다.

"니기럴, 저것이 참말로 아닌께 아니라고 허는지, 독종이라 불지럴 않는 것인지, 고걸 몰르겄응께 사람이 환장을 허겄단 말이요."

"아매 아닐 것이네."

"허먼, 성님 이름으로 조서 쓰고 도장 찍을 자신 있소?"

"워따 사람 겁믹이지 말소."

"긍께 확실헌 증거가 웂이으면 쓰잘디웂은 소리 허덜 말란 말이요. 옆사람 맘꺼정 흔딜리는디."

"우리찌리 허는 말인디, 다루다보먼 맘에 잽히는 거 머 있지 않더라고?"

"헌디, 저것이 예삿것이 아니라, 빨갱이냐 아니냐럴 개리는 여자란걸 잊어뿔지 말어야 쓰요."

"빨갱이 첨 다루간디?"

"여자야 첨 아니요?"

"자네넌 두 번째여?"

"서로 첨잉께 정신 똑똑허니 채리잔 말이제라."

"자네 말도 틀린 말언 아니시."

장길춘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저것이 아직도 살이 덜 아픈 것 아닐께라?"

염상구가 가는 눈으로 이지숙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워따, 자네 매질이나 내 매질이 워디 솜방맹이간디?"

"허기는 그렇제라."

염상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것이 허는 간지러운 말맹키로 그냥 '사랑허는 사이'일 것이네. 니기럴, 사랑이라는 것이 먼디 빨갱이 눔헌테 피꺼정 빼줘감시로 저 꼴로 당허는지, ."

"내 맘은 성님 맘허고는 달부요. 나가 새로 한판 돌려볼 것잉께 성님언 숨 잠 돌리씨요."

"금메, 새로 한판 허는 것도존디, 저것이 남자도 아니고 주먹댕이만헌 여자라논께 비행기럴 태울 것이여, 꼬치가리 물얼 믹일 거이여, 그렇다고 손툽 밑얼 뜰 것이여. 참말로 지랄이랑께."

"암만 생각혀도 저년이 헌 짓거리럴 보먼 빨갱이냄새가 폴폴 난다니께요. 미행얼 눈치 챈 것도 그렇고, 번개 치대끼 도망시킨 것도 그렇고, 저것이 빨갱이라도 예사 빨갱이가 아닐 것이요."

"이 사람아, 빨갱이 쪽으로만 생각허덜 말어. 저것이 그래도 학교선생인디 그런 눈치나 머리럴 왜 못 쓰겄는가. 저것이 그냥 무식헌 여자가 아니란 말이시."

말을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았다. 염상구는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거그 간 일언 워찌 됐는가?"

장길춘이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로 방안은 더 침침해져 있었다.

"그 할망구 말도, 그냥 눈치로만 알들허고 그런저런 사인 모냥이다, 혔답디다."

"보소, 가택수색얼 혀도 말끔허고, 그리 매질얼 혀도 나온 말 웂고, 그 할망구 말도 그러먼 더 볼 것웂네, 저것 죄야 지금까지 헌 자백만 갖고도 콩밥 묵게 생겼응께 여그서 끝내세."

"..."

염상구는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책상 위를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시간이 갈수록 차츰차츰 목소리는 커져갔고, 두 사람의 이야기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이지숙의 귀에는 그들의 대화가 하나도 빠짐없이 잡히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 그녀의 감정은 명암을 바꿔가고 있었다. 현재 밝은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그녀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염상구의 침묵이 못 견딜 정도로 초조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제발 이 상태에서 끝나게 해달라고 그녀는 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자신의 기구를 하소연할 대상이 없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마르크시즘과 혁명뿐이었다. 그것은 기구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적 목표였다. 그 목표에 도달하는 데는 헌신과 희생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의지와 인내력을 신뢰할 수 없는 극한에 처해 있었다. 그 동안 견디어낸 고문도 사력을 다한 것이었다. 고문을 견디어내지 못하면 바로 죽음을 만나게 된다는 명백한 사실을 어금니에 맞물고 고통과 싸운 것이었다. 그런데 또 고문이 가해진다면... 그녀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고문을 당하면서 전혀 저항의 빛이나 대결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약한 여자의 모습만 보였다. 그것만이 수사의 올가미를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해서였다. 한 사람 만이라도 혐의를 갖지 않게 된 것은 그 방법이 효과를 나타낸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 멀 혀. 그만 끝내자니께."

장길춘은 답답하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성님 먼첨 가씨요. 나가 마지막으로 한판 더 혀봐야 쓰겄소."

염상구는 윗도리를 벗어젖혔다.

"허허 이 사람 참, 혀봐야 눈물 철철 흘림서 사랑인가 지랄인가 헌 것 뿐이라는 말밖에 더듣겄어?"

"다른 말이 더 나오게 혀야지라. 기분이 요리 찜찜하고 똥통에 빠진 것맨치로 드럽게 일얼끝낼 수는 없구만요. 나두 두찌 허라먼 서러운, 눈치가 있는 눔인디. 비행기럴 태우든, 꼬치가리물얼 믹이든, 손툽 밑얼 뜨든, 밑구녕에 뱀대가리럴 밀어넣든, 다 나가 알아서 헐 것잉께 성님은 가씨요."

"자네도 참, 다 존디 그눔에 고집이 탈이여. 허먼, 나 먼첨 갈라네, 애쓰소."

이지숙은 입술을 깨물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전신을 비비 틀리게 했다. 견딜 수 없었던 고통이 되살아나며 정신이 빙글빙글 돌았다. 목이 찢어져라 마구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고, 무엇이든 쥐어뜯고 물어뜯고 싶은 충동이 솟구쳐 올랐다. 철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지숙은 이빨을 앙다물며 전신의 힘을 모았다. 그 때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턱을 낚아챘다. 그녀의 고개는 뒤로 발딱 젖혀졌다. 바로 눈앞에는 청년단장의 살기 어린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저를 살려주세요. 저는, 저는 빨갱이가 아녜요. 그 사람을 좋아했을 뿐예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요런 썩을 년아, 니넌 틀림웂이 빨갱이여. 이 세상 사람 눈언 다 속혀도 내 눈만은 못 속혀. 니년은 지끔 속으로는 놀랠겨. 실토럴 안허먼 니넌 여그서 살아서 못 나가. 알겄어!"

'알겄어!' 하는 외침과 그녀가 '!' 소리를 토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염상구가 무릎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걷어찼던 것이었다.

"맛이 워띠어, 한 방 더 묵어보겄어?"

그녀의 귀에는 염상구의 말이 가물가물 흐려지고 있었다. 염상구는 그녀의 턱을 받쳐 올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은 흰자위로 거의 차고 입에서는 묽은 침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렸다.

"저는 아닙니다. 저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저를 살려주세요."

그녀는 아랫배가 비비 꼬이면서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무릅쓰며 애걸하고 있었다.

"오냐, 누가 이기나 혀보자. 니가 실토허게 허는 방법은 을매든지 남었응께."

염상구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잘못 짚고 있나 하는 의문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의문과 맞서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대개의 경우 그만큼 고문을 당하면 거짓말이나 헛소리라도 취조에 맞는 자백을 하게 마련이었다. 그리고나서 고통이 지나가거나 제 정신이 들면 다시 부인을 하곤 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데 이지숙은 전혀 그러지를 않았다. 바로 그 점이 염상구로서는 신경에 거슬리고 의심스러웠다. 염상구는 이지숙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그녀는 허물어지듯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다. 염상구는 한 가지 방법만 더 사용해보고 끝낼 작정이었다.

 

하늘은 암회색으로 두껍고 낮았다.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음인지 하늘은 아주 흐려졌다. 김범우는 소화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난간이 없는 다리는 건널 때마다 위태롭게 느껴졌다. 이런 시골의 다리 난간까지 뜯어다가 전쟁 물자를 만들어야 했던 일본의 마지막 궁핍이나, 그 때 뜯겨나간 난간을 몇 년이 지나도록 복구시키지 못 하고 있는 해방된 나라의 궁핍이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김범우는 쓰게 웃었다. 쑥빛보다 진한 색깔로 포구의 양쪽을 덮고 있던 갈숲도 누릿누릿하게 변하고 있엇다. 잎과 줄기가 억센 바다갈대는 꽃도 산갈대와는 다르게 피었다. 산갈대가 햇솜처럼 희고 나풀거리는 꽃을 피우는 데 비해 바다갈대는 푸른 빛 도는 숱 적은 흰꽃을 피워 올렸다. 김범우는 그 푸른 빛 도는 바다갈대의 흰꽃을 좋아했다. 흰꽃에 엷게 물들어 있는 그 푸른빛은 바닷물을 마시고 피워낸 꽃이라서 바다색깔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았고, 넓디넓게 펼쳐진 갈꽃의 무리를 보고 있노라면 또 하나의 바다가 물결치고 있는 듯했다. 갈꽃이 그렇게 마음에 담긴 것은 학병에 끌려가기 직전 매일이다시피 혼자 방죽을 걷게 되었을 때 였다. 푸른 빛 머금은 흰 갈꽃밭은 끝없는 우수였고, 우울이었고, 고적이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옆에 있어서 무심할 수밖에 없었던 갈밭은 그때부터 그에게 새로운 의미가 되었다. 버마의 정글 속이나 태평양상의 외로운 섬에서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문득문득 떠오른 것은 그 갈꽃밭이었다. 겨울철새의 무리가 철교 너머로 낮게 드리워진 암회색 하늘을 헤집으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 새들은 인적이 먼 선수머리의 무성한 갈밭에 깃을 쳤을 것이다. 김범우의 우울한 마음은 그 철새들의 꽁무니를 따라 가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담배를 꺼냈다. 바람결에 성냥불이 꺼졌다. 그는 다시 성냥을 켰다. 그러나 불은 다시 꺼졌다. 그는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며 몸을 돌렸다. 다시 성냥을 그었다. 그래도 바람을 타며 위태롭게 펄럭이는 불꽃에 재빨리 담뱃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게 마셨다가 천천히 뿜어냈다. 마음이 무겁도록 우울한 것은 전 원장 때문이었다. 그의 의료행위나 심중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사적인 입장일 뿐이었다. 이번 사건은 사적인 입장으로 설명되거나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 상황이 그러했고, 사건의 내용이 그러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갑작스럽다 싶게 전 원장이 정치, 사회적 상황의 맥을 알고자 했던 것도 돌이켜 생각하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처해 있었던 현실적 갈등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김범우의 우울은, 전 원장이 받게 될 법적 혐의에 대해서 자신이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는 데 있었다. 지금경찰서를 찾아가고 있는 것도 조사결과를 알아보는 것과 면회를 하는 것, 그 이상일 수가 없었다.

"제 입장도 정말 난처합니다만, 좌익의 은닉 사실과 도주 협조의 사실만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사건이 노출되지만 않았더라도 또 모르겠는데, 사건은 초반에 벌써 수습할 수 없도록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경찰서장은 신중하게 말했다.

"어려우신 입장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부탁드리는 것은 사건 자체를 없었던 걸로 덮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전 원장의 혐의에 대한 사건 조서만이라도 잘 꾸며주시기 바라는 겁니다."

"글쎄요, 전 원장이 읍민들한테 받고 있는 신망도 있고 해서 좋은 쪽으로 쓰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구체적 사실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경찰서장이 조심스럽게 말머리를 돌렸다. 김범우는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말을 차분하게 꺼냈다.

"그러니까, 은닉이나 도주에 관한 건을 전 원장이 자의나 능동으로 한 게 아니라 무기의 협박에 의한 불가항력적 행위였다는 것을 밝혀 주시면..."

"..."

책상 위에 시선을 떨군 서장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전 원장을 만나보시겠습니까?"

서장이 불쑥 한 말 이었다. 그 갑작스러움에 김범우는 서장을 주시했다. 서장의 눈을 보는 순간, 김범우는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퍼뜩 깨달았다.

"고맙습니다. 만나지요."

김범우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서장도 따라 일어섰다.

"뭐 하러 오셨습니까, 김 선생. 이것 참, 면목 없게 됐어요."

약간 수척해진 전 원장이 김범우를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그는 말처럼 쑥스럽고 미안한 느낌의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원장님도 혁명의 영웅이 될 욕심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김범우가 능청스럽게 한 말이었다. 전 원장은 더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장님, 중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김범우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전 원장은 김범우 쪽으로 고개를 쑥 뺐다.

 

염상진이 안창민을 조계산 숯막까지 옮기는 데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아직도 보행을 하기 어려운 안창민을 들쳐 업은 염상진으로서는 필사적인 탈주였다. 이지숙한테서 전화연락을 받은 염상진은 그 시간으로 피신을 감행했다. 이지숙의 말은 전혀 엉뚱한 소리 같았지만 암호의 사전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위기상황을 알리는 말로는 너무 완벽하고 훌륭했던 것이다. 염상진의 뇌리에 잡힌 것은 '위험' '오늘밤' '결정' 세 단어였다. 염상진은 전 원장에게 당장 피신할 필요가 있음을 알렸다. 긴장한 표정의 전 원장은 대청마루 구석의 마룻장을 들어올렸다. 일정시대에 만든 반공호가 그 아래 있었다. 안창민을 그 곳으로 옮겨 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기까지 별다른 이상은 생기지 않았다. 출발에 앞서 전 원장이 조금한 보퉁이 하나를 내밀었다. "약이오." 전화가 걸려오고 병원을 떠날 때까지 전 원장이 한 말은 그 짧은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나 염상진의 가슴을 쳐온 그 짧은 한마디는 오래도록 메아리로 울리고 있었다. 염상진으로서는 '가슴 저리게 고맙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안창민을 업고 오금재를 넘어 은신처에 당도했을 때는 희번하게 하늘이 열려오고 있었다. 안창민을 내려놓은 염상진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잠에 파묻혀버렸다. 염상진은 잠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며 한사코 잠이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의식을 놓치는 순간 이건 잠이 아니라 죽음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염상진이 잠을 깬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안창민은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 약 먹어야지!"

염상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많이 피곤하시지요."

안창민은 핏기 없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병원을 떠나온 이후 두 사람의 첫 대화였다. 염상진은 약 보퉁이를 끌렀다. 봉지를 집어든 염상진의 눈길이 그 위에 머물렀다. 봉지에는 잔 글씨가 씌어 있었다. 그건 세세하게 적은 약 복용법이었다. "약이오." 전 원장의 짧은 한마디가 다시 염상진의 가슴을 쳐와서는 긴 메아리로 울리고 있었다.

염상진은 안창민을 떼어놓은 채 숯막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앞으로 남은 길은 지금까지 지나온 길보다 훨씬 험하고 멀었다. 혼자의 힘으로 안창민을 업고 숯막까지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숯막에 가서 들 것을 준비하고 인력 동원을 하는 것이 오히려 신속한 방법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고, 환자의 안전을 도모해야 했으므로 발길은 더디고 느렸다. 여덟 명이 동원 된 그 일은 하루 반이 걸렸다. 거의 숯막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곳을 책임맡고 있던 하대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대장님, 대장님, 손님이 와 있구만요."

"손님?"

긴장과 함께 염상진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긍께 술..."

"대장님, 접니다."

하대치의 대답이 끝나기 전에 들려온 굵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염상진의고개가 소리 나는 쪽으로 휙 돌아갔다.

"아니, 자네!" 염상진의 목소리가 격하게 터졌다.

"대장님,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것은 계란장수 차림의 정하섭이었다.

 

순천 포교당에서 하룻밤을 신세진 운정은 아침공양을 마치자 곧 행장을 차렸다.

"스님, 며칠 더 계시다가 가시지 그러십니까. 큰절까지 하루걸음이면 되고, 여기도 집안 절인데 선암사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중년의 당주승이 살붙게 말하고 있었다. 사실 쌍암사부터 시작해서 순천과 승주군 일대의 대소 사찰은 모두 선암사의 관할 하에 들어 있는 말사들이었고, 말사승들은 언제나 본산승을 대하는 데 각별한 예를 차리는 것이었다. 당주승이 그리 살붙게 하는 것은 지난밤에 운정이 간략하게 한 말 때문일 것이었다. 운정은 그저 당주승의 말이 고맙고 푸근했다. 어느 때 한번 얼굴을 본 일도, 이름을 들은 일도 없으면서 본산 출신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을 가지고 그리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오고감은 그저 불연이고 불은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었다. 지난밤에 '조계산 선암사 순천포교당'이라고 쓴 한문 붓글씨의 긴 간판을 보는 순간 가슴을 적셔 내리던 그 형용할 수 없는 감정도 불연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음의 증거였고, 불은의 바다에서 서식하는 하잘것없는 목숨임의 확인이었다.

"본산에 들어 긴히 할 일은 없지만 기왕 시작한 걸음이니 멈추고 싶지가 않소이다. 몸은 여기 두고 마음은 거기 빼앗기고 있느니보담은 몸과 마음이 함께 있게 함이 순리가 아니겠소."

"스님 말씀이 그대로 설법이십니다."

"무슨 송구스러운 말씀을..."

운정은 주름진 얼굴에 부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저어... 어젯밤에는 스님께서 고단하신 듯해서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만..."

당주승이 손바닥으로 목을 쓸며 말을 망설였다.

"무슨 말씀이시길래... 어서 하시지요."

운정은 전혀 잡히는 것이 없는 채로 말 들을 마음을 비웠다. 승이 승에게 주저할 말이 없는 법이었고, 승이 승의 말을 듣지 못할 것이 없는 법이었다.

"예에, 다름이 아니옵고 스님께서 본산에 드시기 전에 본산의 형편을 대강 알려드리는 것이 어떨까 해서요. 전혀 모르고 가시는 것보다는 대강 알고 가시는 것이 거하시는 데도 도움이 될 듯 싶어 그럽니다."

운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본산에 무슨 변고가 있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마음에 구름이 끼어왔다.

"어서 말씀하시지요."

", 속가에서도 알 만큼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얼마 전에 본사에서 큰 사건이 생겼습니다. 중요한 줄기부터 말씀드리자면, 절 재산인 사답을 놓고 의견충돌이 생긴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사답을 소작인들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쪽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당주승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운정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아주 관심이 끌리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래 어찌 되었소?"

", 그 문제가 쉽게 해결이 나지 않고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사답을 소작인들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쪽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행해야 하는 승려들의 집단인 절집이 몇 백 년에 걸쳐서 지주 노릇을 해온 것만도 부끄러운 죄업을 쌓은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사답의 소유권을 소작인에게 넘겨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따르고 실행하자 했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절 대중들은 뭘 먹고 살라고 그런 소리냐고 맞선 것입니다. 그런데 두 주장이 이쪽이나 저쪽으로 기울지 않고 팽팽하게 맞섰던 것은 주지스님과 부주지스님이 그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어허, 그러면 넘겨주자는 쪽이 누구였소?"

"부주지스님이었습니다."

운정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주장은 싸움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치고받고 했다는 말이오?" 운정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닙니다, 그런 싸움이 아니라 대중들이 완전히 두 파로 갈라졌고, 넘겨주자는 쪽에서는 소유권이전 서류를 몇몇 소작인들에게 만들어 주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니 반대하는 쪽에서는 인장절취와 공문서 위조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어허, 저런 놈에 일이 있나."

"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대중들이 두 쪽이 나긴 했습니다만 그 수로 보자면 반대하는 쪽이 더 많았지요. 수가 많은 그 쪽에서 본산 대중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말사들까지 모이고보니 반대하는 쪽수는 더 많아졌습니다. 거기서 부주지스님의 해임을 결정함과 동시에 말사 주지로 임명을 했습니다. 말사 주지는 명색이고 본산에서 내쫓기게 된 것이지요."

"쯧쯧쯧... 그 스님의 법명이 어찌 되는지..."

"법 법에 한 일입니다."

"법일..."

운정은 낮게 외었다. 알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으로 막음을 하지 않았으면, 이제 법일스님이 들이댔단 말이오?"

운정은 환멸스러움을 느끼며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어조가 짜증스러워졌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

"이번 반란사건이 일어나고 일제히 좌익 색출이 시작되자 법일스님이 좌익으로 몰려 잡혀 들어갔습니다. 법일스님은 지금 광주 고법으로 넘어가 계십니다."

계속 말을 해오는 느낌으로 보아 당주승은 법일 쪽인 것이 거의 확실했다. 운정은 짐작만 했을 뿐 굳이 묻지는 않았다.

"법일... 그 스님의 주장이 옳고 뜻은 장하오만 앞길은 평탄치가 못하겠소. 그분은 어찌 공부를 했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리 바르게 터득하고 또 그렇게 실행할 뜻을 세울 수 있었는지 모르겠소."

운정은 눈을 내리감은 채 중얼거리듯 말하고 있었다.

"법일스님은 예사 스님이 아니십니다. 열여섯에 출가해서 스물 넷. 그러니까 법랍 팔년 만에 법사가 되셨고, 일본 유학까지 하셨습니다. 웬만해서야 만해선사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운정은 귀가 번쩍 띄었다.

"만해라니?"

"그 독립운동하셨던 만해선사 말입니다."

"만해의 총애를..."

운정은 중얼거리며 깊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승 법일의 됨됨이를 알 것 같았다. 까마득한 망각의 저편에 있던 기억이 이십오 년여의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뜻하지 아니하게 피섞음의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의 줄을 끊기 위해 자신은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었고, 만해는 옥고를 치르고 나서 건강회복을 겸한 정진수양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설악산 백담사와 큰승일 수밖에 없던 만해의 모습이 지금 대하고 있는 것처럼 선연했다. 그 분의 불교 유신론과 법일스님의 주장이 무관하지 않음을 운정은 느끼고 있었다.

"마음 편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들어둬야 할 이야기였소. 이야기해줘서 고맙소."

운정은 바랑을 들고 일어났다.

"가셨다가 편편찮으시면 언제라도 나오십시요."

"사람보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받들며 머무는 것이니 편코, 안 편코가 어디 있겠소. 말씀만이라도 고맙구료."

운정은 법당을 향해 합장을 하고는 포교당을 나섰다. 이내 큰 길에 이르렀다. 오리정 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그 길을 따라 오십여 리면 선암사였다. 기어이 여기까지 되돌아오고 말길을 그때는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몸만 가지 말고 마음도 말끔히 거두어가야 한다."

주지스님의 말이 먼 기억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운정은 걸음을 옮길 생각은 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길은 시내를 관통해서 순천만의 갯가를 감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 길 육십여 리 밖에 벌교가 있었다. 마음 한 가닥은 그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벌교를 거쳐 선암사로 갈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땅을 당장 밟아 무엇을 어찌하자는 것인가. 운정은 스스로를 꾸짖으며 결연히 오리정 쪽으로 돌아섰다. 먼 길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운정의 발걸음은 빨랐다.

사철 맑은 물이 촬촬 흘러내리던 개울, 물에 비치는 그림자까지 합치면 보름달 같은 원이 되던 두 개의 쌍둥이 다리 승선교, 햇살이 스밀 수가 없도록 울창하던 길고 긴 숲길,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짙게 퍼지던 대웅전 앞뜰의 수국꽃 향기,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본존불, 겨울 새벽의 냉기 속을 슬픈 울음이듯 끝없이 울려퍼지던 쇠북소리... 젊은 날의 기억들을 보듬고 있는 선암산의 모든 것들이 시간의 먼지를 털며 되살아나고 있었다.

오리정 앞 들녘을 가로지르고 있는 길은 예전보다 넓어져 있었다. 운정은 좌우의 들녘과 마을을 느린 눈길로 둘러보았다. 마을의 집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모두 초가들이었다. 인간의 이십오 년이면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기간인데 사람이 사는 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건 소작인의 생활 이십오 년이 한결같이 궁핍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계산의물줄기가 이어져 내리는 오리정의 들녘은 상답 중에 상답이었다. 그런데 그 기름진 땅 언저리로 초가를 짓고 사는 사람들은 그 땅을 한 뙈기도 갖지 못한 소작인들뿐이었다. 그 들녘의 절반가량이 선암사의 소유였다. 그래서 어떤 승들은 오리정 앞을 지나면서 헛기침을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선암사의 재산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대개의 본산이 그렇듯 선암사도 사하촌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쌍암면 일대에도 농토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고, 절 재산이라는 것은 주지를 중심으로 해서 재무담당승 몇몇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외의 승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승에게 재산에 대한 관심은 금기사항이었고, 깨달음의 세계를 향해 용맹 정진해야 할 승이 재산에 관심을 써서는 안 된다는 뚜렷한 이유가 전제되어 있었다. 추수철이 되면 쌀바구니를 실은 달구지 행렬이 일주문에서부터 십리를 이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달구지에는 쌀가마니만 실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감자반이며, 곶감이며, 잣이며, 유과며를 담은 소쿠리들이 따로 실려 있었다. 그것들은 이미 체결된 수확량과는 상관없이 소작인들이 마련한 선물이었다. 소작을 부치게 해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계속 소작을 부치게 해달라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속인들의 소작을 부치는 것이 절의 소작을 부치는 것보다 어느 모로나 낫다는 것이 일반적인 풍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재무소에는 가난해뵈는 사람들의 종종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어떤 승은 속가의 인연을 동해서 들어오는 간곡한 청을 받고 난감해하기도 했다.

운정은 얼굴을 모르는 법일스님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달구지의 행렬을 보면서 겨울을 배부르게 날 수 있음에 즐거워하지 않고 소작인들의 먹이를 빼앗는 것 같아 괴로웠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겼을 것이고, 탁발승의 바른 길을 되씹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장 큰 가르침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르침인 '탐욕을 버리라'함을 그는 절집에서부터 실행하려고 했을 것이다. 운정은 그 사람, 법일의 깨달음과 용기가 눈물겹게 느껴져 왔다. 그런 사람이 좌익으로 몰려 재판을 받고 있다니... 운정은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으로 몸이 죄어옴을 느꼈다.

 

"광조, 요 여시 겉은 눔에 새끼 싸게 나오니라. 가쟁이럴 짝 찢어놀 것잉께 싸게 나와!"

한 여자가 고래고래 악쓰며 죽산댁의 사립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 여자의 손에는 대여섯 살 나 보이는 사내애가 잡혀 있었다. 삐쩍 마른 사내애는 여자의 기세와는 반대로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징징 울고 있었다. 손에 묻었던 지저분한 것들이 눈물에 범범이 되어 사내애의 얼굴은 더없이 더러웠다.

"광조, 요 문딩이 겉은 눔, 싸게 안 나올래! 찾기만 허먼 다리몽뎅이럴 작씬 뿐질러놀 것잉께, 고런 일 당허기 전에 싸게 나와!"

여자는 아무도 없는 마당 가운데 서서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소리쳤다. 몸져 누워 있던 죽산댁은 퍼뜩 잠을 깼다.

"참말로 못 나오겄냐, 요런 찢어죽일 빨갱이 자석눔아. 오냐, 정 못 나오겄으먼 인자부텀 나가 찾어내겄다. 찾기만 허먼 아조 모강뎅이럴 삐틀어뿔 거이다."

꿈속에서 들은 소리가 아니었다. 죽산댁은 벌컥 화가 치밀었다. 어떤 년이 함부로 집 안에까지 뛰어들어 제멋대로 욕을 퍼질러대고 있단 말인가. 죽산댁의 성질을 자극한 것은 '빨갱이 자석눔아' 하는 욕이었다. 남편이 빨갱이질 하는 것만도 치가 떨리는 일인데 아들까지 싸잡아서 빨갱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둥이하고 화냥질을 해서 새끼를 낳아도 문둥이가 아닌 법인데, 애비가 빨갱이라고 어찌 새끼까지 빨갱이일 것인가. 그녀에겐 그건 욕 중에서도 흉한 욕이었다.

"오냐! 니년이 누구냐. 불쌍헌 우리 새끼를 빨갱이로 모는 니년 가쟁이럴 나가 먼첨 찢을란다아!"

죽산댁은 느닷없이 외쳐대며 지게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러잖아도 붙들려 들어갔다가 나와서 심기가 비꼬이던 참이었는데, 어떤 년이 화풀이감으로 잘 걸렸다 싶었던 것이다.

"오냐? 빨갱이 지집년이 바로 방구석에 처백혀 있었구나. 이년아아, 싸게 나오니라, 나다,!"

토방으로 뛰어내리는 죽산댁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쏟아지는 욕이었다. 시선을 바로잡은 죽산댁은 멈칫했다. 바로 눈앞에 독을 뿜고 서 있는 것은 민 순경의 마누라 보성댁이었던 것이다.

"나가 바로 니년 새끼럴 빨갱이로 몰았다. 워디, 내 가쟁이럴 니년이 먼첨 찢어봐라. 니년 냄편 손에 우리 냄편이 죽었디끼, 인자 니년 손에 내가 가쟁이 잠 찢어져 죽어보자."

방을 뛰쳐나올 때의 힘은 어디로 간 것일까. 죽산댁은 팔다리에 맥이 빠지고 눈길이 떨어질 정도로 기가 꺾이고 있었다. 보성댁의 남편 민 순경은 이번 난리 통에 총을 맞아 죽었다. 남편이 총질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하들이 한 짓이니 남편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보성댁은 남편이 죽고 나서 표가 나게 달라졌다. 눈에 살기가 돌고 걸핏하면 싸우려고 들었다. 죽산댁은 보성댁 앞에서는 그저 죄인이었다. 하늘 아래 둘일 수 없는 남편을 죽게 했으니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하랴. 보성댁이 무슨 욕을 하건 어떤 행패를 부리건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 어서 찢어, 호랭이라도 잡을 대끼 쫓아나오든 기운 다 워따 두고 요러고 섰어. , 얼렁 찢어보랑께!"

보성댁은 주먹을 부르쥐며 악을 써댔다.

"보성댁, 워째 이래쌓소. 조단조단 말얼 혀보씨요."

"워따, 요년 말허는 것 잠 보소? 사람 속에서 불뎅이가 끓는디 조단조단 말얼 허라고? 시방 니년 눈구녕으로 보먼 몰르냐. 느그 새끼, 고 쎄럴 뺄 광존가 빨갱이새낀가가 우리 세훈이럴 팬 것이여. 고눔에 손모가지럴 뚝뚝 뿐질러뿔라고 왔다!"

보성댁은 부드득 이빨을 갈아붙였다. 어떤 힘도 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독기가 흘렀다.

"참말로 그 자석이 못된 짓 혔소. 요 일얼 워째야 쓸께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말을 듣고 보니 죽산댁으로서는 정말 면목이 없었다. 차라리 보성댁 아들에게 맞고 오는 것이 속 편할 일이었다.

"워쩌기는 머럴 워째, 그눔에 새끼럴 내놔! 손모가지럴 뿐질러뿔 것잉께."

"지금 집에 웂소."

죽산댁은 안도하고 있었다. 만약 집에 있다면 말대로 손목이야 부러뜨릴까마는 볼이라도 두어 차례 얻어맞게 될 것이었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바로 눈앞에서 남의 손에 얻어맞는 꼴을 어찌 볼 것인가.

"무신 소리 허는 거여, 시방! 쥐새끼맹키로 집 안으로 도망치는 것얼 뒤쫓아옴시로 이 두눈으로 똑똑허니 봤는디, 고런 속 뻔헌 그짓말 헐 기여? 에미까지 지럴허먼 니년 죽고 나죽고 허는겨!"

보성댁은 당장 머리채라도 쥐어 잡을 것처럼 두 팔을 치켜들며 부르르 떨었다. 죽산댁은 분명 아들이 방에 없었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었다.

"나가 그짓말허는지 보성댁이 다 찾아봇씨요."

죽산댁은 옆으로 비켜섰다. 보성댁은 지체하지 않고 토방으로 올라섰다.

"워메 분허고 원통헌거. 염가눔이 생떼 겉은 내 서방 죽이등마 인자 그 새끼할라 내 자석얼 패내웨. 분허고 원통혀서 워찌 살끄나와."

보성댁은 방안을 뒤져대며 분을 살려올리기라도 하는 듯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워메, 요런 여시 겉은 새끼가 워디에 숨었당가. 산 잘 타고, 도망 잘 댕기는 즈그 애비 탁해서 딴 디 워디 숨었구만. 영축웂이 빨갱이 자석언 자석이다. 니가 아무리 숨어도 나가 기엉코 찾아서 그눔에 손모가지럴 뚝뚝 뿐질러뿔 것잉께."

보성댁은 마치 실성한 것처럼 중얼거리며 부엌문을 열어젖혔고, 다시 헛간으로 달려가고는 했다. 팔짱을 낀 채 토방에서 꼼짝을 않고 서 있는 죽산댁의 마음은 그때마다 조마조마했다.

"워메, 워메, 분혀서 으짤까나. 요런 여시 겉은 새끼가 워디에 숨었으까이. 사람 복통얼 허고 죽을 일이시웨."

헛간까지 다 뒤지고 나오면서 보성댁은 말을 쿵쿵 구르고 있었다. 진작 울음을 그친 그녀의 아들은 무료한 얼굴로 서 있었다.

"보성댁, 나가 내 새끼 잘못헌 것얼 대신 빌겄소. 그라고 그눔얼 찾으먼 내 손으로 보성댁 앞에 끌고 가겄소."

죽산댁은 다행스러움과 미안함이 섞인 마음으로 말했다.

"분 까라진 담에 그눔얼 보먼 머 허란 것이여. 여시 겉은 새끼, 지끔 눈앞에 있어야 그눔 귀싸대기럴 치든지 대강이럴 줘박든지 혀서 분풀이럴 허제."

보성댁의 화는 어느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참말로 미안시럽소. 다시는 이런 일 웂도록 단도리허겄소."

죽산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빨갱이집안 새끼허고 순사집안 새끼는 저승꺼지 가서도 상극잉께 다시는 우리 아들허고못 놀게 맹글어. 빨갱이넌 문딩이만도 못헌 종자들잉께."

보성댁은 금방 살기 돋는 모습으로말하고는, 퉤 침을 내뱉었다. 죽산댁은 그만 불길이 치받쳐올랐다. 그러나 속입술을 물며 그 불길에 찬물을 끼얹었다. 내 남편이 저 여자 남편을 죽였다...

"가자, 요 빙충이 새끼야. 인자 니넌 평생을 애비 웂이 살아야 헐 팔자여. 긍께 넘덜보담독허고 싸납고 야물딱져야 혀. 그래야 이 에미가 니럴 믿고 살제. 진도개맹키로 독허고 싸나와지란 말이여. 알아묵겄어?"

보성댁이 아들의 손을 잡고 사립을 나서며 나무라는 것인지 다짐을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게 큰 목청으로 말하고 있었다. 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죽산댁의 가슴에 그 말은 쇠꼬챙이가 되어 박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이 꼭 보성댁한테만 해당되는 말 같지가 않았다. 그 불길한 생각과 함께 전신에 소름이 끼쳐왔다. 아들 광조는 한참 만에야 뒤란 쪽에서 뛰어나오면서 헤헤거리고 있었다.

"워메, 니 워디 있었냐?"

죽산댁은 놀라며 빠르게 사립 쪽을 살폈다.

", 정재(부엌)에 숨어서 엄니허고 말허는 소리럴 가만히 듣고 있었는디, 엄니가 보성댁이다 찾아봇씨요, 안 혔는가. 정재에 그대로 있으먼 잽힐 것 겉애서 뒷문으로 살짝 나가 뒷집대밭으로 내뺐어. 긍께 나럴 찾을 수가 웂제. 엄니, 워쩐가! 나 똑똑허제?"

광조는 양쪽 손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으스댔다. 그렇게 눈치 빠르게 피한 아들이 대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잘했다고 칭찬을 할 수는 없었다. 보성댁에게 너무 양심 없는 짓이 될 것이었다.

"니 워째서 세훈이럴 때리냐?"

죽산댁은 엉뚱한 쪽으로 말을 돌렸다.

"때리고 잡아 때리간디?"

죽산댁의 서슬에 광조는 금방 기가 죽으며 곁눈질을 했다.

"때리고 잡은께 때리겄제, 때리기 싫은디도 때리어?"

"세훈이 그 새끼가 자꼬, 느그 아부지 빨갱이, 느그 아부지 빨갱이, 그럼시로 아무 놀이에도 못 끼게허는디 워째."

죽산댁은 짭게 한숨을 토하며 아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빨갱이는 문딩이만도 못헌 종자들잉께... 보성댁의 목소리가 쟁쟁히 울리고 있었다. 아들이 더없이 가엾고 안쓰러웠다.

"광조야, 이리 오니라."

죽산댁은 아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들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그녀는 아들을 무릎에 앉혀 꼭 끌어안았다. 까닭 모를 슬픔과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린것의 숨결과 체온이 느껴져 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가야만 한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새삼스럽게 다짐하고 있었다.

"광조야아."

"으응?"

"니 엄니허고 약속허자."

"앞으로는 세훈이허고 안 놀겄다는 약속."

"... 알겄어. 엄니가 허라면 헐껴."

"그려, 우리 광조 착허다. 그라고, 세훈이가 머시라고 놀려도 못 들은 디끼 혀라."

"아부지럴 욕허는디도?"

"그려, 못 들은 디끼 혀."

"..."

"대답혀. 요것도 약속잉께."

"... 알겄어."

광조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죽산댁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삼켜 넘기는 울음으로 부풀어 오르는 목젖이 맵게 당기는 것을 느끼며 죽산댁은 보성댁을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여자로서 아직 젊은 보성댁이 남편 없이 평생 살아가야 될 것을 생각하면 그 신세 기구함 앞에서 자신은 죄인일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건 사사로운 입장에서 따질 때만 그렇고, 민순경을 놓고 보자면 보성댁은 과부가 안 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사람들은 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민 순경이 죽은 것에 대해서는 하나도 안쓰럽게 여기지 않는 눈치들이었다. 사람들에게 인심 얻은 경찰이 백에 하나 있기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특히 민 순경은 인심을 잃을 대로 잃고 살았다. 그는 다시 경찰 노릇을 하게 되자마자 남의 집을 뺏는 일을 저질렀다. 동척 쌀창고 옆에서 정미소를 했던 일본 놈이 자기 밑에서 일했던 변 서방을 착실하게 보아 일본으로 쫓겨 가면서 집을 물려주었다. 그런데 그 집을 완전히 준 것이 아니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깨끗하게 간수하라' 고 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런 식의 말을 남기고 쫓겨 간 일본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이야 일본 놈들의 못된 오기거나 넋 빠진 소리로 코웃음당하는 흉거리일 뿐이었고, 어쨌거나 심덕 좋은 변 서방이 봉림 아래 터에서 좋기로 이름난 그 일본 놈의 왜식집을 차지하게 된 것을 사람들은 '고생 끝 보았다'고 좋아하기도 했고, 은근히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민 순경이 그 집을 탐내서 변 서방한테 엉뚱한 죄를 뒤집어씌워 빼앗은 것이다. 그 엉뚱한 죄라는 것이, 미군정을 욕하고 다녔다는 것 이었다. 술자리에서 그런 말 한두 마디 안한 사람이 없는 세상에 변 서방만 걸려든 것이다. 결국 변 서방의 집을 차지한 민 순경은 재산 모으는 손쉬운 맛이 들렸는지 그 뒤로도 인심을 잃을 짓만 골라서 했다. 좌익 단속을 한다며 걸핏하면 사람들을 끌고 가서 겁먹이고 얼리다가 뒤로 무엇인가를 받으면 슬그머니 풀어주었다. 미곡수매에도 누구보다 모질게 사람들을 몰아댔는데, 할당량을 못 채웠다고 닭을 손수 잡아가기가 예사였고, 손찌검도 거침없었다. 그가 잡아간 닭은 물론 그의 차지였고, 쌀에 손을 안대는 순경들이 거의 없지만 그가 특히 많이 빼돌리고 있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을 건너다녔다. 그리고 민 순경네는 세 끼 쌀밥만 먹고 산다는 말도 떠돌았다. 민 순경이 죽자 입바른 여자들은 그래도 말을 참지 못했다.

", 무신 걱정이여, 걱정이. 평상 묵고 살 재산 모타놓고 간 것인디. 그런 과부 노릇이람사 열분도 허겠네."

"아이고메, 웂은 과부는 수절허고 살아져도, 있는 과부는 수절허고 못 산다는 말 듣지도 못혔어?"

"이 사람이 시방 무신 촌시런 소리여? 자유연애 허는 개명천지가 시작된 것이 원제라고 고런 실답잖은 소리여. 재산 있겄다, 요러타께 팔자 고치제 멋났다고 수절이여, 수절이. 팔자 고칠 재산까지 다 모타놓고 가는 냄편 만냈이니 그팔자가 상팔자여. 나넌 똑 부러바 죽겄구마."

"워메 문딩이, 그눔에 창창헌 오기 시퍼런대창끝이다. 아서, 아서."

죽산댁은 그런 말들을 애써 못 들은 척 했고, 그런 자리는 서둘러 피했지만 민 순경의 죽음에 대해서는 역시 냉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하는 일과 상관없이 경찰들이나 관공서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 대해서는 죽산댁도 누구 못지않게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경희와 성일은 순천행 기차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기차는 진트재의 터널을 지나 구룡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창가의 경희는 움츠린 앉음새로 발치께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고, 성일은 창밖으로 먼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경희는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고, 성일은 기차를 갈아타는 순천역까지 누이를 전송하러 가는 길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고 나서 지금까지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경희는 역에까지 따라나온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놀랄 만큼 강해져 있었다. 눈물 같은 것은 비치지도 않았다. "건강허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 어머니는 아버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대신하고 있었다. 지난봄에 아버지는 그냥 '공부'라고 했고, 어머니는 '공부만' 이라고 한 것이 다를 뿐이었다. ''이라는 제한의 뜻에서 어머니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는 말이 그 속에는 담겨 있었다. 그건 앞으로의 삶을 향한 어머니의 의지였고 각오였다. 어머니는 이제 억지로라도 강해지고 억세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 첫 번째 표현이 바로 자신의 서울 유학을 계속하게 한 것이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어머니의 앞으로의 생애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앞으로의 어머니의 생애에는 여자로서의 삶은 없고 어머니로서의 삶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얼마나 삭막하고 불행한 삶인가. 벌써 어머니의 그런 삶은 시작되었다. 자신의 서울 유학을 지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송을 나와서도 눈물을 비치지 않은 것이다. 지난봄에 아버지 옆에 선 어머니의 모습은 어떠했던가. 아버지의 다독거림을 받아가며 연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가. 이번이 두 번째라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심정적으로는 처음보다 이번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는 이제여자로서의 권리주장은 할 수 없었고, 어머니로서의 의무이행만 해야 하는 생애가 남겨진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의무이행을 강요하는 결과임이 분명한 서울 유학은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이미 그 길을 떠나고 있으면서도, 경희는 마음 무거운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만 서울로 올라가그라."

잠자리를 펴고난 어머니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

"?"

경희는 어머니를 건너다보기만 했다. 물론 그 말뜻을 못 알아 들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의외였고 너무 반가운 감정이 뒤섞인 상태였다.

"가서, 허든 공부를 계속혀야지."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엄니이..."

형편이 그리 안되잖아요, 하는 말을 경희는 하지 못했다.

"다 에미가 알아서 헐 것이다." 어머니는 전혀 딴사람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엄숙함을 지니고 있었다.

"엄니가 혼자서 어떻게..."

"시끄럽다. 아부지가 정허신 일을 그리 쉽게 작파헐 수는 웂다. 내일당장 떠나."

경희는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그녀의 생각은 공부를 중단하게 되리라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 다소 얼마는 있겠지만 아래로 동생들이 넷이었고, 자신은 여자였던 것이었다. 학업을 중단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 다음가는 슬픔이었지만 집안에 어떤 변고가 생겨 경제적 곤란에 처하게 되면 그 영향을 여자가 먼저 받게 되는 상식적 현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 하니?"

경희는 동생 쪽으로 약간 돌아앉았다.

"머 별로..."

동생은 시선을 창밖에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 무심한 것 같은 모습이 경희는 신경에 거슬렸다. 어머니가 그렇듯 동생도 갑자기 어른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존재는 역시 그 만큼 컸던 것이고, 온 식구는 그 몫을 나눠 갖느라고 힘겨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너 나하고 약속했었잖니. 변하지 말고 그대로 있자고."

경희는 동생의 눈길을 옮기게 하려고 일부러 빤히 쳐다보며 말을 했다.

"그랬었지. 나 변하지 않았어."

성일은 비로로 눈길을 거둬들이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지..."

경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서울을 잘못 가고 있는 것 같다."

쫓기듯이 빨리 말했다.

"변하려고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누나군. 아무 말 말고 올라가. 그게 엄니가 바라는 거야."

"그렇지만 엄니 혼자 힘으로 앞으로 어떡하겠니. 내가 엄니한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너무 염려할 것 없어. 엄니는 혼자가 아니야. 엄니 옆에는 외삼촌이 계셔."

"그걸 누가 모르니. 그렇지만 외삼촌은 보조자나 충고자일 뿐이야. 외삼촌의 역할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어."

"그건 나도 알아. 내가 말하는 건 누나의 문제에 관해서야. 정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된다 싶으면 외삼촌의 판단에 따라 누나 문제는 결정된다는 말이지. 외삼촌은 계산이 정확하고 빠른 분이잖아. 누나는 아무 생각 말고 무슨 결정이 새로 내려질 때까지 공부만 하는 거야."

"그래, 외삼촌은 합리주의자니까."

"그렇군, 아주 외삼촌한테 어울리는 말이네. 그런데, 왜 그 말이 좋게 들리지가 않지?"

"왜애? 전혀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말뜻 자체에도 부정적인 요소는 전혀 없는 말이구."

"그래, 알았어. '합리'를 빼고 '주의자'라는 말 때문일 거야. 나는 무슨 '주의''주의자'라는 말은 딱 질색이니까."

경희는 가슴이 쿵 울리는 충격을 느꼈다. 그것은, 동생이 '공산주의'로부터 정신적인 피해를 얼마나 크게 입고 있는가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 사회주의자. 회의주의. 회의주의자. 배신주의. 배신주의자. 패배주의. 패배주의자. 혁명주의. 혁명주의자... 그들은 '주의''주의자'라는 말을 지겹고 넌덜머리나도록 지껄이고 부르짖고 내세우는 유치하고도 저열한 족속들이었다. 경희는, 네가 공산주의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경희는 '주의''주의자'라는 말에 대한 혐오감이 유발시키는 생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집안 문제와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자신의 의식세계와는 직결되는 문제였다. 경희는 아버지의 권유와 바람에 따라 가정과를 택했으면서도 소녀 적부터 가지고 있던 시인의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국문과의 강의를 도강하고는 했다. 그녀의 가방에는 가정과와 국문과의 강의시간을 함께 표시한 시간표가 상비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는 가정과 출신이 되면서 또한 시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그녀의 욕심이었다. 부지런을 떨어댄 결과 국문과 강의를 가정과 정규강의의 삼분의 이 가깝게 들을 수 있었다. 그 성취감의 만족은 이른 새벽 혼자서 바구니 가득 알밤을 줍는 것 같은 설레임이고 기쁨이었다. 그녀는 국문과의 한 학년 강의만 도강하지 않았다. 주로 시나 시론 강의를 ?아 학년에 구애받지 않고 도강을 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강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것도 있었고, 어떤 교수는 분명히 학년도 다르고 강의과목도 다른데 똑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웃지못할 사실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충격에 부딪힌 것은 자신처럼 시를 쓰고자 하는 학생들의 의식을 파악하기 시작하면서였다. 그녀는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자신의 시에 대한 개념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고, 시간이 갈수록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시인을 지망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계급의식에 젖어 있었다. 그건 바로 사회상황이나 정치의식으로 직결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목청 돋우어 읽어대는 시라는 것은 모두 시 같지 않은 시들뿐이었고, 그들이 써갈기는 시라는 것도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격문이나 구호 같은 것들뿐이었다.

팔월 십오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그러나 하루 아침 자고 깨니

이것은 너무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이었다

기쁘다는말

에이 소용도 없는 말이다

그저 울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나는 병원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어째서 날마다 뛰쳐나간 것이냐

큰 거리에는

네거리에는 누가 있느냐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다.

 

아 저마다 손에손에 깃발을 날리며

노래조차 없는 군중이 만세로 노래를 부르며

이것도 하루아침에 가벼운 흥분이라면...

병든 서울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눈물 없이 지날 수 없는 너의 거리마다

오늘은 더욱 짐승보다 더러운 심사에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나다니는 사람에게 호기 있게 먼지를 씌워주는 무슨 본부, 무슨 본부,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차

 

그렇다 병든 서울아

지난날의 내가, 이 잡놈 저 잡놈

모두 다 술 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아 다정한 서울아 나도 밑천을 털고 보면 그런 놈 중의 하나이다

나라 없는 원통함에

에이, 나라 없는 우리들

청춘의 반항은 이런 것이었다.

반항이여! 반항이여! 이 얼마나 눈물 나게 신명 하는 일이냐 아름다운 서울, 사랑하는 그리고 정든 나의 서울아

나는 조급히 병원 문에서 뛰어 나온다

포장 친 음식점 다 썩은 구루마에 차려놓은 술장수

사뭇 돼지구유같이 늘어선

끝끝내 더러운 거리일지라도

아 나의 뼈와 살은 이곳에서 굵어졌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랴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팔월 십오일, 구월 십오일

아니, 삼백예순 날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면서 울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가

시골구석에서 자식 땜에 아조 상해버린 홀어머니만을 위하여 우는 줄 아느냐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보고 싶으다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이...

그때는 맑게 개인 하늘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 구름처럼 떠도는 것을...

 

아름다운 서울, 사모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길거리에 자빠져 죽는 날, "그곳은 넓은 하늘과 푸른 솔밭이나 잔디 한 뼘도없는." 너의 가장 번화한 거리

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나는 선술집 문턱으로 알었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었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 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인 양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 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쓸개

내 눈깔을 뽑아버려라, 내 쓸개를 잡아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그들이 즐겨 읽는 시들 주의 하나인 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었다. 그녀로서는 그런 종류의 글들이 왜 시일 수 있는 것인지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병든 서울'은 나은 편이었다. 어떤 것들은 시문 하나하나가 날 시퍼런 칼 이었고, 살기 어린 대창이었으며, 어떤 것들은 시어 하나하나가 피에 주린 저주를 물고 있었고, 행간에서는 선지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그 얼마나 아름답고 고결한 이름인가. 영혼의 고독과 적막, 인생의 슬픔과 괴로움, 사랑의 아픔과 그리움을 위무하고 포옹하는 간절하고도 애절한 것이 시가 아니던가. 시인- 그 얼마나 청결하고도 드높으며 외로운 이름인가. 하이네, 릴케 그리고 소월... 그 영광스러운 이름들을 우러러 바친 영혼의 순결은 그 얼마나 진하고 순수했던가.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그녀는 자신의 순결이 짓밟히는 것 같은 혼란과 회의에 몰려야했다. 그녀는 홀로 어지럼증을 앓으며 새로 발간되는 시집들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어지럼증은 가중될 뿐이었다. 새로 간행되는 시집들 중에서 구호나 격문적인 것들이 육 할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을 덮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상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청록집에 속에 들어 있는 조지훈의 '승무'였다. 만약 이런 시편들을 만날 수 없었다면 그녀는 시인이 되기를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기름진 지주의 배꼽에 대창을 꽂아라. 그리하여, 굶주리고 굶주린 소작인의 배를 그 피로 채우자.' 이런 것을 시라고 써서, 낭독이 아니라 울부짖어대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조지훈 같은 시인은 자신을 부축해주는 크고 큰 힘이었다.

해방으로부터 비롯된 남과 북의 분단은 필연적으로 정치의 시대를 잉태시켰다. 그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시인들마저 정치를 하고자 나서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는 격문화되었고, 시인은 창조자가 아니라 시의 살해자로 둔갑해 있었다. 언젠가 정치적 안정이 오면 진정한 문학의 시대가 열리고, 그때에는 그 따위의 격문적 시들은 쓰레기로 불살라질 것임을 그녀는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그런 믿음은 물론 그녀 스스로의 능력으로 파악한 결론이 아니었다.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듯 문인들도 양쪽으로 편갈이를 해서 서로 반대되는 문학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독서를 통해서 순수문학론을 접했고, 그쪽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사람에게 목숨이 하나라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모든 사람이 인격이나 품격이나 지체가 동일해야 한다는 논리는 수긍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사회주의니 계급혁명이니 역사발전이니를 경원하고 배척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 내가 이 말 물어서 어떨지 모르겠는데..."

성일이는 난색을 표하며 주저하고 있었다. 어떤 말이 그리 하기 어려운 것인지, 경희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서 말해. 우리끼리 못 할 말이 뭐 있겠니."

경희는 일부러 밝게 웃어보였다. 기차는 순천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있었다.

"누나는... 가정과 공부보다 시인이 되는 것에 더 관심을 쓰는 것 아닌가?"

경희는 그만 뜨끔했다. 그러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양심에 부담됨이 없이 가정과 공부도 충실히 해왔기 때문이었다.

", 네 눈엔 그렇게 보이니?" 경희는 동생을 대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상당히."

", 내가 시인이 되는 게 마땅찮아?"

"내 물음을 젖혀놓고 자꾸 딴 것만 묻지 말고 빨리 정확한 대답을 했으면 좋겠어."

성일의 말은 갑자기 냉정해 졌다. 경희는 자신의 태도가 동생에게 오해받고 있음을 느꼈다. 동생은 아마 대답을 피하려는 의도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말이 난 김에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주자고 경희는 생각했다. 동생의 어투는 분명 '시인'이라는 것을 마땅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정과 공부도 충실히 하면서 시 습작도 열심히 하고 있어."

"둘 다 가질려고?"

"희망은 그렇지."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누나는 천재가 아니잖아."

경희는 멈칫 긴장했다. 대꾸할 수 없도록 허점을 찔린 것이었다.

"그래, 난 천재는 아니지."

경희는 자조적인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동생 앞에서 그 사실을 수긍해야 하는 기분은 참으로 쓰고도 떫었다.

"두 마리 다 놓칠지도 몰라."

두 마리 토끼를 쫓지 말라는 속담을 생략한 채 동생의 말은 비약하고 있었다. 그런 동생이 대견해 보이기도 했고, 시건방져 보이기도 했고, 어쨌든 동생에게 추궁당하고 있는 형편인 것은 분명해서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택일을 하라는 뜻이겠지?"

"그건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야. 앞으로의 형편을 봐서, 더욱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애."

"그건 또 무슨 소리니?"

경희는 동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글쎄, 잘은 모르겠는데, 시인보다는 가정과를 나오는 게 앞으로 더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만일의 경우 여학교 선생님을 할 수도 있고..." "성일아!" 경희는 동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충격이 왔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솟구쳤다. 동생은 이미 가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고, 외삼촌 같은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그보다 한 발 앞선 현실주의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희는 그 사실이 그렇게 슬프고 아플 수가 없었다. 가정과 공부만 하겠다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울음으로 목이 막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 왔어, 내려." 동생이 먼저 일어서고 있었다.

 

 

23. 계엄군 주둔

군인 일 개 중대 병력 이백 명이 네 줄로 질서정연한 대오를 이루며 소화다리를 건넌 것은 십이월 이십일 이었다. 그들은 읍사무소 쪽의 큰 길을 따라 행군해나갔다. 행인들이 걸음을 멈춰 섰고, 양쪽 길가의 상점들에서 사람들이 밀려나왔다. 그들의 절도 있는 행군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경찰이 아니라 군인이었으며, 하나같이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가 이백 명이나 되는 대병력 이었다. 일정시대부터 그때까지 읍내사람들은 무장을 갖춘 이백 명의 병력을 본 일이 없었다.

"저 것이 워찌 된 군대랑가?"

"아 보면 몰릉가?"

"몰르닝께 묻제 암스롱도 묻겄어?"

"워따 속 편허게 몰를 것도 쌨네. 아 빨갱이덜 잡자고 오는 것 아니겄는가."

"빨갱이 잡자고? 워메, 우리는 인자 망해분졌네."

"거 먼 소리여?"

"아니, 뭔 소리는 먼 소리겄어. 고 쪼깐헌 토벌대덜 등쌀을 견디기에도 몸서리가 나고 허리가 휘었는디 저 많은 군대 등쌀에 인자 워찌 살겄는가. 빨갱이덜 잡기 전에 우리가 먼첨 등가죽 벳게지고 말 것이네."

"금메 말이시, 수도 택웂이 많고, 걱정은 걱정이시."

"참말로 썩을 눈의 시상이시. 해방이 되먼 배불르고 활개 치는 시상이 올 줄 알았등마 갈수록 첩첩산중이랑께. 요리 험한 시상일 바에는 일정 때가 훨썩 나았제."

"참 내놓고 헐 말언아니네만 자네 말도 틀린 말은 아니시."

두 남자는 멀어져가는 군대의 행렬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서 모여 들었는지 행렬의 뒤로는 조무라기들이 떼를 지어 따라붙고 있었다. 군인의 대열은 역 앞을 지나 남국민학교로 들어갔다. 교문 양쪽으로는 경찰과 토벌대, 청년단원들이 도열해 있다가 군인의 대열이 들어서자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열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운동장 중앙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행군해 나아가고 있었다.

"발으 맞추어이 갓!"

행렬의 옆에서 걷고 있던 상사가 병사들의 신경을 모아잡기라도 하듯 힘찬 구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일제히 소리를 맞춰 하나, 두울, , ,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우렁차게 복창을 해댔다. 교문 앞에서 제지를 당한 수많은 조무래기들은 그 우렁찬 구령소리를 듣고는 안타깝게 발들을 동동 굴렀다. 군인들은 조회대 앞에 소대별로 도열했다.

"열주웅 쉬엇!"

상사의 구령에 맞춰 병사들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중대에-차려엇!"

구두 뒷굽 부딪는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몸이 일시에 빳빳해졌다. 그 절도 있는 동작에 따라 어깨에 맨 총 끝들이 햇빛에 반짝였다.

"중대에-세우어 총!"

개머리판이 땅을 치는 쇳소리가 둔중하고도 위압적으로 울려 퍼졌다.

"사령관님을 향하야 경례엣!"

병사들은 오른쪽 다리 옆에 바짝 세우고 있던 총을 들어 올려 받들어총을 했다. 상사가 조회대를 향해 돌아섰다. 조회대에는 키가 껑충하게 크고 깡마른 젊은 장교가 서 있었다. 그의 모자에는 중위계급장이 붙어 있었는데, 오른쪽 어깨에는 사병들과 마찬가지인 M1소총을 메고 있었다. 그의 허리에는 분명 권총이 없었다. 그의 큰 키에 M1소총이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장교가 칼빈도 아닌 M1소총을 메고 있다는 사실은 이색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병 여러분, 이동에 수고가 많았다. 우리는 마침내 작전 지구에 도착했다. 모두 각오를 새롭게 하기 바란다. 이상."

그의 음성은 깡마른 체구와는 달리 굵으면서도 우렁찼다. 그는 벌교. 보성지구 사령관 심재모였다. 심재모는 조회대를 내려와서 그때까지 엉거주춤한 자세로서 있던 기관장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벌교 보성지구 사령관 중위 심재몹니다."

그가 읍장과 경찰서장 등 대여섯 명을 향해 한말은 이 한마디뿐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차례로 악수를 나눠가면서는 상대방이 말하는 직함과 이름을 신중하게 듣기만 했다. 그의 거동에는 공적인 임무를 수행해나가는 엄격함이 갖춰져 있었다.

"오늘은 장병들이 고단할 것 같아 읍민 환영식은 내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읍장이 손을 모아 잡으며 말했다.

"그 말씀으로 환영을 받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런 형식적인 절차는 생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게 다 민폐를 끼치는 일이니까요."

심재모는 엷은 웃음기가 도는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어투는 명령적인 위압감을 띠고 있었다. 사실 계엄하의 지역사령관인 그의 말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기도 했다.

"우리 읍을 위해 이리 고생들을 하시는데 그게 무슨 민폐라고..."

"아니오, 내 말대로 하시오."

심재모는 읍장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건 분명한 명령이었다. 읍장은 심재모가 겸손을 부리는 건지 모른다 싶어 한마디 더 했던 것이고, 심재모는 읍장의 그런 심중을 꿰뚫어보고 보다 확실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읍사무소로 자릴 옮깁시다. 경찰서로 가야겠지만..."

심재모는, 불타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하는 뒷말은 생략했다. 그 정도만으로도 자신이 읍내에 관한 정보를 어느만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데는 충분했던 것이다.

"고단하실 텐데 우선 여장부터 푸시지요."

읍장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여장이라고요? 난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계엄하의 작전을 수행하고 있소. 계엄하의 군경은 근무에 밤낮이 없다는 것쯤 아실 텐데요."

심재모는 읍장을 향해 정색을 하고 있었다. 그 눈길이 매섭고도 차가웠다.

"강 상사, 강 상사!"

심재모는 뒤로 고개를 돌려 외쳤다. 아까 부대를 지휘하던 상사가 재빠른 동작으로 뛰어왔다.

"나 잠깐 읍사무소에 다녀올 테니깐 장병들 휴식 시키도록. 경계철저, 이탈방지, 기물손상예방, 잊지 말도록!"

"! 알겠습니다."

강 상사가 손끝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힘찬 거수경례를 붙였다. 그는 심재모 중위보다 일고여덟 살은 더 먹어보였다.

"갑시다."

심재모는 어깨의 M1소총을 고쳐 메며 경찰서장을 향해 말을 던졌다. 그런 그의 태도는 읍장이란 존재를 묵살하는 것이었다. 기관장 일행 대여섯 명은 마치 줄을 서듯이 해서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말없이 걷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주눅이든 것 같았다. 토벌대장 임만수는 그 직책으로나 지금까지의 기세로 보아 당연히 경찰서장 앞에 서야 됨에도 불구하고 염상구와 함께 맨 뒤에 처져 걷고 있었다.

"니기미, 사람 팍 겁믹여뿌네."

염상구는 오래 참았다는 듯 쌍소리와 함께 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결코 크지가 않았다.

"첫물이니까 괜히 용 써보는 게지. 제 놈이 가면 얼마나 가겠어, ."

임만수는 콧방귀를 날렸다. 그러나 염상구에게는 그 콧방귀가 그의 푹 꺼진 콧잔등처럼 볼품없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틀 전, 계엄군이 주둔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이미 임만수가 쉰밥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정작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계엄군이 나타나게 되자 염상구의 마음은 임만수한테서 씻은 듯이 떠나고 말았다. 기관장들은 읍장실로 모여 앉았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심재모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주둔 목적은 다 아시다시피 치안확보 때문입니다. 첫째 반란 세력의 소탕 제거, 둘째 민생보호와 민신수습이 그 이대 목표입니다. 그 목표를 효과적으로 수행 달성하기 위해서 지휘계통을 일원화해야만 합니다. 본관은 벌교. 보성지구 사령관으로서 벌교. 보성. 조성. 고흥 일원의 치안책임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시간부터 현지 경찰, 파견 토벌대, 청년단 등은 본관의 지휘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실내인데도 모자를 벗지 않고 있는 심재모는 견고하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을 마치고 사람들을 휘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얼어붙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토벌대 임만수 대장님!"

심재모가 느닷없이 호명하듯 했고,

"예에, 제가 임만숩니다."

임만수가 당황한 몸짓으로 반쯤 일어섰다.

"그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임 대장님. 그런데, 토벌대는 어디에 주둔하고 있습니까?"

"예에, 저어... 우선 남도여관에..."

"뭐요, 여관? 당장 짐을 꾸려 남국민학교 운동장에 집합시키시오!"

심재모는 의자 옆에 세워둔 M1소총을 불끈 들었다가 놓았다. 마룻장 울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임만수는 가슴 한복판에 뜨거운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저 새파란 자식이 어디다 대고... 따귀를 얻어맞는 것 같은 모욕감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임만수는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쳤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임만수에게로 쏠렸다. 그 눈들이 하나같이 당혹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심재모의 눈만은 싸늘한 빛을 쏘아내며 임만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언저리에는 눈빛만큼 싸늘한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쌓였다.

"뭔가, 항명하는가!"

마침내 심재모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는 않았지만 냉정하고 위압적이었다. 항명- 그 한 마디가 임만수의 뇌리를 쳤다. 명령으로 시작해서 명령으로 끝나는 군대나 경찰조직 속에서 항명이란 곧 목숨을 내거는 일이었다. 임만수는 난감해졌다. 항명을 시인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항명을 시인하면 불구덩이에 빠지는 것이었고, 부인하면 깨끗한 패배를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정면으로 대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일어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해서였지만, 전혀 계산이 없었던 겄은 아니었다. 그렇게 정면도전을 하면 풋내기 주제에 당황하고 흔들리리라 생각했던 것이고, 그 기회를 포착해서 더 몰아붙여 콧대를 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당황하거나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정면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대답이 없는 건 항명을 시인한다는 건가!"

심재모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약간 크게 울렸다. 아아... 임만수는 신음을 씹었다. 군인이 안 되고 경찰이 된 것이 또다시 뼈저리게 억울하고 분하고 후회스러웠다. 임만수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면서도 항명을 시인하거나 부인하지 않는 제삼의 방법을 택해야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항명이고 아니고를 따지기 전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까내놓고 뒤집어 보면 그저 그 타령인 처지에 군복 입고 경찰복 입었다는 차이로..."

! 느닷없는 총성이 사무실을 뒤흔들었다. 질겁을 한 좌중은 벌떡 일어서기도 했고, 머리를 책상 밑으로 처박기도 했고, 손바닥으로 두 귀를 막은 채 눈을 휘둥글하게 뜨고 있기도 했고, 각양각색이었다. 심재모만 흐트러짐이 없이 똑바로 앉아 있었다. 그는 M1을 세운 채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임만수, 똑똑히 들어! 모두 까내놓고 뒤집어놓고 보면 그저 그 타령이라고? 네놈의 그 한마디로, 네놈이 일정시대에 얼마나 개같이 더럽게 살았는지 환히 알 수가 있다. 개 눈엔 똥밖에 안 보인다고, 나도 네놈처럼 산 줄 아느냐. 네놈이 일본 말단순사질이나 형사 질을 해먹다가 해방이 되고나서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다시 복직되어 토벌대장 노릇을 해먹으니, 나도 네놈과 같은 과거를 가진 관동군 출신쯤으로 뵈는가? 정신 똑바로 차려. 난 독립군 출신은 못 되지만, 학병 출신이다. 글줄이나 쓴다는 놈들은 '영광스런 성전에서 기쁨으로 참전하자'고 선동해대고, 너 같은 놈들은 덩달아 한 명이라도 더 전쟁터로 내몰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었던 바로 그 학병 출신이야. 일년 남은 공부를 작파하고 내가 왜 군대에 투신한 줄 아는가! 바로 네놈들 같은 썩어빠진 종자들이 이 나라의 권력조직 속에 득실거리기 때문이었다. 위로는 친일 지주계급들이 뭉쳐지고, 아래로는 네놈 같은 민족반역자들이 모여 권력조직 칠팔 할을 장악했으니 이 나라 장래를 좌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은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 잠을 자고 여관 밥을 먹어?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입을 놀려대? 너 같은 놈들은 해방이 되자마자한 놈도 남김없이 감옥에 처넣었어야 돼. 그리고 엄정한 재판을 거쳐 형량을 정하고, 그 기간을 강제노동으로 채우게 했어야 돼. 그것만이 네놈들의 반역으로 더욱 피폐해진 조국 건설에 다소나마 봉사하게 하고, 민족 앞에 최소한의 사죄를 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네놈들은 그런 속죄의 기간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네놈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지 못했고, 더구나 다시 권력조직에 포함되고 말았으니 모두가 네놈처럼 안하무인의 짓을 하는 것이야. 여관 잠을 자고 여관 밥을 먹다니, 네 놈은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영창감이야!"

두 눈에 힘을 모아 임만수를 응시하고 있는 심재모는 언성을 높이는 법 없이 차분하게 말해나갔다. 한마디 한마디를 꼭꼭 깨무는 듯한 어조에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임만수는 물론이고 좌중의 모두는 하나같이 눈길을 떨구고 있었다. 심재모의 말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네놈들'이라는 복수지칭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청년단장 염상구만이 제외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나 주먹을 휘두르며 행패를 일삼고 살아온 과거가 괜히 켕기는데다가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그도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임만수, 즉시 명령을 수행하라!"

심재모의 목소리가 갑자기 크게 울렸다. 좌중의 눈길이 임만수에게 쏠림과 임만수가 벌떡 일어난 것과는 거의 동시였다.

"즉시 명령 수행하겠음."

복창과 함께 거수경례를 붙인 임만수는 쫓기듯 사무실을 나갔다.

"권 서장, 그 동안 토벌대의 작전실태와 읍내의 치안상황을 간단하게 요약 보고하시오."

심재모가 권 서장을 주시했다. 권 서장은 빠르게 대답하며 일어섰다. 심재모는, 앉아서 말하라는 손짓을 했다. 권 서장은 머뭇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예에... 토벌대는 그 동안 주로 각 동네 단위로 불순분자 색출에 주력해왔습니다. 그리고 읍내의 치안상황은, 통행증을 발급함과 동시에 교통을 통제하고 있으며, 야간 통행금지를 철저하게 시행함과 아울러 해변을 포함한 외곽지대의 봉쇄와 경계를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동네 단위의 불순분자 색출이라, 안전지대만 찾아다니며 민폐만 끼친 모양이군."

심재모는 혼잣말을 하듯 하고는,

"잠적한 반란세력 소탕작전은 전개하지 않았단 말이오?"

눈빛을 예리하게 빛냈다. 권 서장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됐소. 다음은 읍내의 치안상황인데, 교통통제, 야간통금 실시, 해변과 외곽지대 봉쇄, 모두 계엄 상황 하에서 취해야 할 조치들이오. 그러나 그런 조치가 벌써 한 달이 넘게 계속되고 있소. 그 동안 민생문제는 어떻게 됐는지, 읍장께서 말씀해보시오."

", 예예..."

갑자기 지적을 당한 읍장 이병주는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그래서 장도 서지 못하고 읍민들 불편이 다소 있기는 합니다만 시국이 시국이니만치 참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재모의 눈치를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참아야 한다, 좋은 말이오. 그럼, 도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한단 말이오?"

심재모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어렸다.

"그야 저어..."

자신의 말이 빗나갔음을 눈치 챈 읍장은 난색이 되며 슬쩍 말을 얼버무렸다.

"본관의 직권으로 야간 통행금지만 제외하고 나머지 조처는 내일부터 전면 해제하겠소."

심재모는 강한 어조로 말했고, 이 느닷없는 말에 좌중 모두는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권 서장, 읍내를 한 바퀴 돌아봐야겠소. 안내를 부탁하오."

심재모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M1을 어깨에 메는 것과를 한 동작으로 해치우며 말했다. 심재모와 서장이 큰길로 나서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기관장들의 가슴에는 까닭 모를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의 존재가 믿음직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불편한 것 같기도 했고, 쓸만한 사람 같기도 했고, 귀찮은 존재 같기도 했고, 서로 말이 없는 가운데 사람들은 제각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서로 감추고 있었지만 심재모에 대하여 달갑잖고 마땅찮게 여기는 감정은 공통되고 있었다.

심재모는 경기도 수원 태생이었다. 예로부터 중부이남 지역을 상대로 서울의 관문 역할을 했던 수원의 입지조건에 따라 그의 집안은 상업으로 대물림을 해왔다. 그의 아버지께서는 장사에 유용한 수치계산의 숙달을 우선으로 하여, 글을 익히는 데도 장사에 필요한 만큼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짐에 따라 심재모에 이르러 그 범위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신식공부의 최상인 대학에까지 진학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가업 승계를 전제로 한 엄격한 제한이 따랐다. 상업학교를 다녀야 했고, 상과대학에 진학한 것이 그것이었다. 환경의 탓이었는지, 별다른 개성이 없어서였는지 심재모는 그런 제한을 별로 제한으로 느끼지 않고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그가 식민지상황을 가슴으로 앓기 시작한 것은 대동아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부터였다. 전에 피상적으로만 느껴져 왔던 조국이라는 것이나 민족이라는 것이 구체적 실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학도병 지원이란 몰이를 당하면서였다. 조국이라는 개념과 민족이라는 형체가 잡혀가면서 그는 전에 별로 관심 쓴 일이 없었던 일군의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글줄이나 써먹고 살아가는, 문필가나 문학가로 불리는 내선일체만이 우리가 복되게 살 수 있는 최선최상의 길이라는 글을 써대는 한편으로. 성전에 나가 죽는 것만이 가장 영광된 젊은이의 일생이라는 요지의 글들을 뻔질나게 써서 선동을 일삼고 있었다. 그들은 글만 쓴 것이 아니었다. 떼 지어 몰려다니며, 청년 장정은 성전으로, 처녀들은 정신대로 솔선해서 나가자고 강연을 하고 다녔다. 심재모는 버마의 끝없는 정글 속을 헤매며 그 문필가라는 족속들을 얼마나 증오하고 저주했는지 모른다. 독립투사를 밀고 하는 밀정보다도, 독립투사를 고문하는 고등계의 말단 형사보다도 그들은 더 더럽고 흉악한 종자들이었다. 그의 그런 판단은, 그들 문필가라는 자들이 모두 배울 만큼 배운 지식층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정신대로 끌려 나온 여자들이 하루에 평균 이삼십 명의 남자들에게 짓밟히다가 임신을 하거나 성병에 걸리게 되면 가차 없이 정글 속에 버려지고, 성전이란 전쟁터에 끌려 나온 청년들은 표 나는 차별대우 속에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총질을 하다가 매일매일 죽어가고 있었다. 너희 놈들은 이 기막힌 꼴들을 아느냐. 너희 놈들은 그 짓을 한 대가로 얼마나 호의호식을 하고 사느냐. 도대체 너희 놈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더냐. 심재모는 동료의 시체를 정글에 묻으며,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치를 떨었다. 해방이 되었다. 해방은 새 나라 건설과 함께 모든 종류의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을 깨끗하게 처단한다는 뜻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의 물결은 그 기대를 완전히 뒤엎고 말았다. 경기지구 학도병 모임을 주도하고 있던 심재모는 이미 대학생 때의 심재모가 아니었다. 그의 의식은 가업을 이어 장사로 안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뜻을 함께 하는 다른 학병 출신들과 군대로 뛰어들었다. 그는 학병 시절부터 남다른 사격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버마 전선에서 M1소총을 다루었었다. 노획물인 M1소총은 저격용이었고, 자연히 사격술이 뛰어난 그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소총에 비해 M1소총의 성능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조준의 숙달을 거치고, 목표물의 거리와 탄알의 이동곡선이 직감적으로 계산되는 단계를 지나면 이동표적이라도 얼마든지 적중시킬 수 있도록 명중률이 높은 총이었다. 심재모는 M1소총을 통해서 미국이란 나라를 인식했고, 이런 총과 맞서 싸우다가는 일본은 언젠가 패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혼자 했던 것이다. 그는 단기 장교훈련 때 M1소총을 다시 만지게 되었다. 그의 사격솜씨는 단연 돋보였고, 그 덕에 보병병과를 받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M1소총의 성능을 믿었으므로 다른 총은 휴대할 수가 없었다. 칼빈은 그 방정맞은 생김새처럼 명중률이 형편없었고, 더구나 권총은 적과 싸우는 무기일 수가 없었다. 사병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M1'이었고, 아무리 키가 작거나 몸이 약한 사병이라도 M1소총이 무겁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다.

심재모와 권 서장은 횡계다리 위에 서서 낙안벌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저 앞에 보이는 것이 옥산이고, 그 너머에 조계산으로 빠지는 오금재가 있습니다. 좌측으로 멀리 보이는 저 큰 산이 징광산이고, 우측의 저 뾰족하게 솟은 것이 제석산입니다. 저 산줄기들은 모두 조계산으로 이어져 있는데, 앞으로 특히 문제가 될 것이 징광산입니다. 징광산은 높이보다는 몸집이 커 골짜기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위치가 묘하게도 조성과 보성에 근접해 있습니다. 미확인입니다만, 염상진이라는 자가 이끌고 있는 반란군은 조계산 속에 은거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권 서장이 손가락질을 해가며 설명했다.

"아마 그 추측이 맞을 거요. 지리산은 소탕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으니, 그쪽으로 빠졌더라도 다시 조계산으로 피해야 할 형편이오. 날씨가 본격적으로 추워지면 자연히 접근하게 될 게요. 빨갱이도 먹어야 사니까. 염상진의 인적 사항은 어떻소?"

심재모는 옥산 뒤로 굽이굽이 이어져나간 산맥을 먼 눈길로 바라본 채 물었다.

"남로당 보성군책, 벌교 출생, 이십구 세, 광주사범 졸업, 일정 때부터 적색농민운동 주도, 투옥된 경력을 가졌습니다."

"그만하면 영웅호칭을 받을 만한 인물이군."

심재모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끼룩, 끼룩, 끼룩... 심재모는 불현 듯 오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어깨의 총을 벗어 겨냥을 하고 있었다. 총끝이 향하고 있는 하늘에 기러기 수십 마리가 ㅅ자를 옆으로 누인 대형을 이루며 선수머리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심재모가 겨누고 있는 총끝은 기러기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권 서장은, 괜한 총질을 해선 안 될 텐데, 걱정을 하면서도심재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염상진, 그 자의 성품이 어떻소?"

총을 내리며 심재모가 불쑥 물었다. 권 서장은 그때서야 문득, 그가 기러기를 향해 총을 겨눈 것은 기러기를 잡자는 것이 아니라 염상진의 인적사항을 듣고 촉발된 어떤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나본 일이 없어서 확실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들은 바로는, 침착하고 냉정한 성격에 과묵한 편인 모양입니다."

"침착해서 그 동안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은 건가. 글쎄, 자체 정비가 아직 안 됐는지도 모르지."

심재모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본 채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권 서장은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아까 읍사무소를 나오며, 그 동안 빨갱이들의 말썽은 없었느냐고 심재모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고, 자신도 예사스럽게, 별일 없었다고 대꾸했던 것이다. 대답을 해놓고 나서 병원 사건이 생각났다. 그 사건은 며칠 전에 마무리가 되서 세 사람을 순천지법으로 넘겼던 것이다. 그 사건이 '별일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종결 시킨 사건을 다시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의무적인 보고사항이 아닌데다가 현지 서장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심재모는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잘못하다가는 그 사건을 은폐하거나 속이려 한 결과가 될지도 몰랐다. 만약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지금이라도 말을 해야 하나... 그러나 권 서장은 왠지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만 학교로 돌아갑시다."

심재모가 먼저 걸음을 떼어 놓았다. 제석산 등성이에는 아직 햇살이 남아 있는데, 부용산 그늘이 내려앉은 길거리에는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심재모와 읍내를 살펴본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었다. 역 쪽으로 나가 장좌리 일원의 해변을 보여주었고, 철로를 따라가다 건널목에서 칠동 일대와 고흥 가는 길을 설명했으며, 소화다리에서 회정리 쪽과 선수머리로 이어지는 포구를 살폈고, 마지막으로 횡계다리 위에 섰던 것이다. 심재모가 남국민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전 병력이 운동장에 집결되었다. 경찰토벌대도 군인들 옆으로 도열했다.

"지금부터 작전지구내에서의 준수사항을 하달한다. 첫째, 군기 철저 확립. 둘째, 근무 철저수행. 셋째, 민폐 철저 방지. 첫째와 둘째는 부언 생략하고, 셋째 사항에 대하여 첨가하겠다. 셋째 일, 어떤 장소 어느 경우에도 부녀자를 희롱하지 말 것. 셋째 이, 어떤 경우 어느 입장에서도 민간인을 구타하지 말 것. 셋째 삼, 어떠한 상황에서도 민간인의 재산에 대해서는 지푸라기 하나라도 손대지 말 것. 호의라고 해서 밥 한 그릇이라도 얻어먹는 경우에는, 첫째사항의 군기문란, 둘째 사항의 근무이탈, 셋째 사항의 민폐유발이 적용, 즉결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허용되는 것은 단 하나, 목이 말라 물을 얻어먹는 것과 배탈이 나서 변소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만약 이상의 사항을 어기는 자는 즉결처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상."

칼을 내려치듯 하는 심재모의 말이었다.

 

염상구는 농밀한 어둠을 헤치며 회정리 일구 도래등을 넘고 있었다. 속이 꼬인데다가 술 몇 잔을 급하게 마셔 그런지 명치께가 묵지근하고 기분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청년단장, 형이 염상진이라고? 사상이야 자유니까 아무래도 좋소. 중요한 건 청년단 문젠데, 청년단에 대해서 전국적으로 좋지 않은 평판이 많다는 건 염 단장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 좋지 않은 평을 듣는 데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민폐를 끼치기 때문일 것이오. 여기 청년단은 그럴 일이 없으리라고 믿지만, 앞으로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 앞으로 청년단의 활동에 관해선데, 그전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내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염 단장은 이 점을 잊지 말고 나한테 협조해야 할 것이오. 협조가 잘 이루어지는 것만이 서로에게 유익한 일일 것이오. 앞으로 독자적인 행동은 일체 삼가시오."

심재모가 그를 따로 불러 한 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심재모에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염상구로서는 자신을 따로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 뻐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심재모를 만나고 돌아선 기분은 떫고 쓰고 시고, 영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재모의 말은 나직하고 부드러운 것 같았지만 그 한마디, 한마디에는 가시가 돋치고 옹이가 박혀 있었다. 나직하고 부드러운 것은 목소리였을 뿐이지 말의 내용은 이쪽을 완전히 무시하는 명령이었다. 만약 협조를 못하겠다면? 그러나 그건 속에서만 끓어오르는 억지요 오기에 불과했다. 지구사령관이라는 직위 앞에서 청년단장이란 직책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엄연한 정규경찰 병력을 이끌고 있는 토벌대장이 그렇게 허망하게 꺾이고 마는 판에 임시 조직에 불과한 청년단의 일개 단장으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조직의 명령계통이라는 것은 강단과 배짱으로 끝장을 보는 주먹 판이 아니었던 것이다. 토벌 대장처럼 여러 사람 앞에서 병신을 만들지 않고 단독으로 부른 것만도 대접을 받은 것이라고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뒤틀리고 꼬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제 아무리 나이가 많아봐야 같은 또래밖에 안되었을 그의 얼굴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토벌대장 임만수와 마주친 것은 남국민학교를 나서자 마자였다. 임만수는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 염 단장, 내가 살 테니 술이나 한잔 하러 가지."

임만수는 다짜고짜 팔을 끌었다. 그는 자못 호기를 부리고 있었지만 몸에서는 초라한 냉기가 느껴졌다.

"나 지끔 술 묵을 기분 아니요."

염상구는 팔을 뿌리치듯 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세상인심이 아무리 조석변이라지만 자네까지 이러기야, 정말?"

임만수는 그 못생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네?' 염상구는 순간적으로 그 말이 가슴을 쳐오는 것을 느꼈다. 임만수가 자신을 그렇게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 말이 묘하게도 서글프게 느껴졌다.

"어허, 쌩사람 잡지 마씨요, 갑씨다!"

염상구는 임만수의 팔을 끌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가자고, 남원장으로 가! 내가 살 테니까 밤새도록 코가 비틀어지게 마시는 거야."

임만수는 땅이 울리도록 발을 내딛으며 부르짖듯 소리를 질렀다. 임만수는 정말 남원장으로 그를 끌고 갔다. 염상구는 짜증스럽고 난감했다. 심재모를 의식해서도 그렇고, 자신의 기분으로도 그렇고, 임만수가 처해 있는 입장을 보아서도 그렇고, 그와 함께 다른 곳도 아닌 남원장에서 계집들을 끼고 술을 마신다는 것은 곤란한 문제였다.

"이봐라,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라!"

임만수는 마루로 올라서며 소리치고 있었다.

"저녁밥이나 묵음시로 술은 반주로 쪼깐 허고 맙시다. 나가 시방 창새기가 비비꾀이고 틀리는 것이 영 술 묵을 기분이 아니요."

자리를 잡고 앉자 염상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 그 자식이 청년단을 해체시키기라도 했소?"

임만수는 거칠게 내뱉았다. 염상구는 옆에 앉은 경월이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임만수에게 입조심 하라는 주의를 보냈다.

"음마, 대장님언 술얼 걸게 잡수실라고 허는디 단장님이 워째 훼방놓으시요. 나가 춘향이허고 이도령이 만내는 대목얼 이적지 헌 것 중에서 질 이쁘게 뽑을 팅께 술 잠 걸게 드시씨요. 요새겉이 손님 욼음사 밥 굶어 죽겄소. 나도 술얼 워찌 묵는 물건인지 잊어뿌렀는디, 오랜만에 오셨응께 술얼 드셔야제라."

경월이가 염상구의 겨드랑이로 파고들며 아양을 떨었다.

"느그덜 밥 안 굶기자고 묵어주는 술 아닝께 주딩이 놀리지 말어. 싸게 가서 밥상에 반주내와."

염상구는 경월이를 밀치듯 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여자는 심심찮은 느낌을 가졌는지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나도 인자 존 시절 막음헌 모냥이요. 나야 지닌 것 똥배짱에 주먹댕이뿐잉께 으짤 수가 웂지만도, 대장님언 여그서 더 쉰밥 되지 말고 워디 존 디로 떠야 헐 것이요."

이것은 염상구의 진심이었다. 임만수는 방바닥을 내려다본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자라는 것은 권력이 약해지거나, 없어지면 순식간에 허수아비가 된다는 사실을 염상구는 다시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한 두 사람은 반주로 나온 술만을 빠르게 바닥내고는 일어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말은 거의 주고받지 않았다.

임만수와 헤어지고 난 염상구는 발길 닿는 대로 걷다보니 소화다리를 건너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내가 왜 이쪽으로 가고 있나, 그는 걸음을 멈칫하며 생각했고, 자신도 모르게 외서댁을 찾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염상구는 무심코 담뱃갑을 꺼냈다가 도로 넣으며 어둠을 휘둘러보았다. 드러나는 것은 가까운 산의 형체뿐인 어둠 속에서 물큰 풍겨오는 냄새가 있었다. 코에 익은 외서댁의 체취였다. 노리치근한 것 같기도 하고, 비리치근한 것 같기도 한 그 냄새는 언뜻 스치고 갔을 뿐 다시 맡으려고 해도 맡아지지 않았다. 외서댁의 몸 냄새는 쫄깃거리는 그녀의 그것을 닮았음인지 이상스럽게도 진하고 질긴 느낌을 주었다. 그 아까운 여자가 어찌 하필 빨갱이의 마누라가 되었을까... 염상구는 새삼스럽게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알몸을 떠올렸다. 큰 가슴과 탄력이 좋은 그녀의 알몸이 어둠 속에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뻣뻣한 나무둥치일 뿐이었던 그녀는 네댓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못 견디겠다는 듯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반신이 비비 틀렸고, 코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변화에 그녀의 그것도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냥 쫄깃거리는 것만이 아니라 옴죽거렸고, 쫄깃거림과 옴죽거림은 그 구멍의 깊이가 끝이 없는 것처럼 빨아들임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알몸은 꿈틀거리고, 신음소리도 역력하게 들려왔다. 그의 물건은 불끈 일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의식을 싸늘하게 식히는 소리가 느닷없이 들려왔다.

"이 바보 같은 놈아, 사람을 팰 줄만 알았지 여자가 사랑 때문에 그까짓 일쯤 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무슨 수사를 해! 차라리 날 죽여라! 죽여!"

눈을 부릅뜬 이지숙의 부르짖음이었다. 마지막 고문을 하기 위해 그녀의 잠옷을 다 찢어발겨 알몸을 만들었을 때 그녀는 갑자기 발악하듯 소리치며 비틀비틀 일어섰던 것이다. 뒤헝클어진 머리칼과 온몸에 피멍이 든 그녀의 모습은 그대로 섬뜩한 귀신 꼴이었다. 그는 그 순간 그녀가 빨갱이가 아니라고 단정을 내렸다. 그녀가 빨갱이가 아니고, 빨갱이인 애인을 도주시킨 죄목만이라면 너무 가혹하게 매질을 했다 싶어 염상구는 한순간 눈을 감았던 것이다. 이지숙이 순천 지법으로 넘겨지고 나서도 그 미안함은 꺼림칙하게 남아 있었다.

"니기럴, 사랑이라는 것이 먼지."

염상구는 침을 퉤 뱉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속 뒤틀리고 기분 까라질 때는 술 마시는 것보다 맛좋은 그것에 그것 꽂고 전신이 붕붕 떠올라 구름에 실리는 맛인지, 바람을 타는 맛인지, 하여튼 아릿아릿하고 짜릿짜릿하고 시큰시큰한 그 환장할 맛을 꼴깍 넘어가도록 보고나서, 찬물 한 사발 마시고 끝없이 깊은 잠 속으로 아슴아슴 빨려드는 것이 훨씬 낫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염상구는 권총을 빼들고 좁은 마당을 가로질렀다. 지게문에는 석유등잔 불빛이 흐릿하게 배어 있었다. 염상구는 토방으로 올라서며 큼큼 낮은 인기척을 냈다. 그 소리는 이미 외서댁도 알아듣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내 지게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누가 볼란지 무선디 싸게 들오씨요, 싸게."

언제나 똑같은 외서댁의 겁먹은 목소리였다. 염상구는 구두를 벗어 선반에 올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머 할라고 또 오셨소."

외서댁이 흩어진 바느질감을 방구석으로 밀치며 똑같은 말을 했다.

"자네가 보고 잡아 왔네."

염상구는 탄띠를 풀며 아랫목으로 내려앉았다. 어린 것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참말로, 부부맨치로 말얼 허고 그러요."

외서댁은 마땅찮은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자네'라는 말이 듣기 싫었던 것이다.

"하먼, 자네럴 처녀 적에 만내기만 했음사 틀림웂이 내 각시 삼았제. 지끔도 자네는 내 각시나 마찬가지가 아님감? 자아, 싸게싸게 옷 벗세."

염상구는 외서댁을 끌어당겼다.

"쪼깐 있으씨요, 나갔다 올 팅께."

외서댁은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마음에 없는 남자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뒷물은 해야 했다. 전혀 마음에 없는 남자이면서도 불결한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 그건 무슨 마음인지 모를 일이었다. 마음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일까. 처음 그 일을 당하고 나서는 그리도 더럽고 징그럽고 싫던 남자가 억지로라도 몸을 자꾸 섞게 되니 그 더러움과 징그러움과 싫음이 덜해지는 것 같은 마음은 또 무엇일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는데도 몸을 섞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뜨거워지는 마음은 또 무엇일까. 외서댁은 진저리를 쳐가며 찬물로 뒷물을 했다. 두 사람은 알몸으로 부딪치고 뒤엉키고 꿈틀거리며 불씨가 되고, 불꽃이 되고 불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외서대액- 집에 있는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두 사람의 동작은 뚝 멎었다.

"자는 대끼혀."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니여라, 싸게 나가서 방에 못 들어오게 막아야제라."

그녀가 그를 떼밀며 다급하게 말했다.

"워떤 씨부럴년이여. 통금시간에 싸돌아댕기는 저년얼 팡 쏴 쥑였으먼 속 씨언허겠네."

그는 떠밀려 상체를 일으키며 씨부려댔고,

"워메, 듣겄소."

그녀는 주먹질을 하며 엉덩이를 사정없이 뒤로 뺐다. 그 바람에 그의 물건이 쑥 빠져나갔고,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흐흑 하는 헛바람 새는 소리가 흘렀다.

"어이, 외서댁, 자는가?"

"아아함... 누구다요. 누구..."

외서댁은 정신없이 맨몸에 치마를 두르고 저고리를 꿰입고 하면서도 입으로는 하품하는 소리까지 내며 금방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안직 초저녁인데 먼 잠얼 폴세 자는가?'

"몸살이 나서 그렁마요. 근디, 요 밤중에 누구다요?"

"나 중천댁이시. 지사 떡얼 쪼깐 혔길래 입이나 다시라고 가져왔구마."

"워메, 통금을 엄허게 다스리는 판인디 머 할라고 그러실께라이. 잽히먼 큰일 난다든디요. 옷 다 걸쳤응께 쪼깐만 기둘리씨요."

외서댁은 능청스럽게 통금을 들먹여 상대에게 겁을 먹이고 있었다. 그녀는 문고리에 꽂았던 숟가락을 뽑았고, 염상구는 발가벗은 대로 방구석에 붙어 앉았다.

"나가 몸도 아프고, 통금시간은 짚어져 순찰을 돌란지 모른께 쉬었다 가시라고 허지도 못허겄고, 워쩔께라? 오늘 온 군인들이 동네 마동이잡대끼 순찰을 돌고, 잽히는 사람은 모다 빨갱이로 몬다고 안 그럽디여."

마루로 나선 외서댁은 자신도 모르게 잘도 꾸며대고 있었다.

"고런 말이 있었능가?"

중천댁이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하먼이라. 군인덜언 순사허고는 그 맵고 짜운 것이 저울질이 안된다고 그럽디다. 나 땀시 중천댁이 무신 일 당허먼 안된께, 나가 집꺼정 바래다디려야 되겄구만이라."

"아니시, 아니시. 자네 몸도 아픈디다가, 우리 집꺼정 갔다가 되짚어 오자면 자네가 또 위태로울 것잉께나 혼자 핑 갈라네."

중천댁은 벌써 토방을 내려서고 있었다. 외서댁은 사립까지 따라 나갔다.

"떡 잘 묵겄소. 미안시러서 워쩔께라."

겉으로 태연한 것과는 반대로 외서댁의 가슴은 계속 쿵쿵 울리고 있었다.

"아니시, 자네도 싸게 들어가소."

중천댁이 바삐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외서댁은 긴 숨을 내쉬고 있었다.

"워메, 사람 피 보타 죽겄네. 인자 싸게 가씨요."

외서댁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쏘아붙였다. 내던지듯 한 떡 사발이 기우뚱하다가 제자리를 잡았다.

"거 먼 소리여. 심들게 훼방꾼 쫓아뿌렀응께 지끔부터 맘 푹 놓고 시작허는 것이제. 원체 도둑씹 허는 맛은 요렇게 들킬라 말라 험시로 아실아실허게 피해가는 디에 지 맛이 있는 법이시."

염상구는 담배를 비벼 끄며 능글능글하게 웃고 있었다.

"워메, 사람 잡을 소리 고만 허씨요. 가심이 타들어 환장을 허겄구만은 워찌 그리 태평시럽다요."

외서댁은 그때까지도 벌떡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저고리 아래로 그녀의 큰 유방이 드러났다. 그것을 보자 염상구의 샅에 불끈 힘이 모아졌다. 상체를 굽히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그녀의 유방을 거머잡았다.

"워메, 참말로..."

그녀는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손이 나머지 유방을 덮었다.

"참말로 요 짓도 인자 그만 혀주씨요. 요러다가 애나 덜컥 들어앉아뿔먼 내 신세가 워찌될 것이요."

그녀는 목이 메어 있었다. 애를 배? 불붙어 오르는 감정에 찬물 한 줄기가 끼얹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픽 웃어버렸다. 애를 배든 새끼를 까든 내가 알 게 뭐냐. 애를 배면 그것 참 재미있겠다. 강동식이란 놈이 알면 어떻게 될까! 눈에 쌍심지를 켜고 펄펄 뛰겠지? 정신 못 차리고 집으로 뛰어들면, 그렇지, 그때 때려잡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성욕은 다시 거세게 불붙기 시작했다.

"애가 들앉으먼 머 걱정이여. 아조 내놓고 부부로 살아뿔먼 될 일이제."

그는 정겨운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의 양쪽 유방을 더 힘주어 잡았다. 얼랴, 요것이 무신 소리당가? 요것이 참말이여, 사탕발림 소리여. 지정신이 아닌께 나오는 대로 퍼질르는 소릴껴.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그녀는, 마음으로는 분명 헛소리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에서는 이 말이 흘러나왔다.

"애 배먼 부부로 살겄다는 말이 그리 알아묵기 심드는가?"

그의 혀가 귓불을 핥아대고 있었다. 비록 거짓말이고 헛소리일망정, 내가 알 게 뭐냐고 해버리는 것보다는 얼마나 더 듣기 좋은가. 그가 젖을 어루만지고 귓불을 핥는 감촉이 불두덩이 깊은 곳에서 찌릿찌릿한 불똥으로 튀기 시작하는 것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감정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며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까 니년이 번개치대끼 거짓말을 꾸며대는 것을 본께, 니년도 예삿 것이 아니여. 니년 그것에만 미치다가는 큰 코 다치겄어. 거짓말 둘러붙이는 솜씨가 빨갱이 마누래로 자격이 충분혀. 그는 그녀를 눕히며 한 손을 사타구니로 뻗었다. 그녀의 몸이 꿈틀 요동했다.

 

전 원장의 재판 날이었다. 김범우는 통학열차를 타고 순천으로 넘어가려고 일찍 집을 나섰다. 재판 날짜를 앞당긴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노력이었다. 전 원장의 고초를 하루라도 줄이고, 빠른 해결을 보려 함이었다.

"사람이 사는 경우나 이치가 사방, 팔방에 미쳐서도 안 되고 십육방, 더해서 삼십이방까지 미칠 수 있어야 그나마 원의 모양에 가까운 원만함을 득하게 되는 법인데, 이놈에 세상이 어찌해서 사방도 아니고 이방으로 토막이 나고, 그것도 또 반 토막을 내서 일방만 보라 하니 이것 참 큰일 날 세상이 되었다. 전 원장이 당하는 고초가 무어냐. 세상사 사람 사는 이치를 둥글게 보려 함인데 그걸 죄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냐. 세상만사가 양이 있어야 음이 있고, 음이 있으니 양이 있고,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순리로 풀리는 법인데, 양은 양만 옳다 하고, 음은 음만 옳다 하니 갈수록 꼬이고 얽힐 수밖에. 예로부터 이런 세상을 난세라 했고, 난세에는 깊고 넓은 뜻 가진 사람이 살기가 어려우니라. 내가 힘닿는 데꺼정 손을 쓰긴 했다만 결과가 어찌 될지는 두고 볼 일 아니겄냐."

김범우는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 유학적 논리이기는 했지만 현실비판의 예리함은 완벽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전 원장의 일을 솔선해서 수습하려고 하는 것은, 전 원장이 획일화된 체제의 희생물이나 피해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었다. 김범우는 아버지의 사려 깊음에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 때 문중이 중심이 되고 주위의 여러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아주 적극적으로 출마를 종용했었다.

"권력을 탐하는 자라면 모를까, 이 시기에 어찌 나더러 부화뇌동 하라는 것인가."

아버지는 이 한마디로 주위의 소란을 일소해버렸다. 김범우는 그때도 아버지의 단호함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그 단호함은 한 땅에 두 개의 이름을 내세운 나라가 서이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큰아들이 몸 던져 수행한 독립운동의 뜻이, 당신이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그 뒤를 살폈던 뜻이, 두 쪽의 나라로 갈라지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중이나 주위 사람들의 그런 움직임은 단순하게 권력만을 탐하거나 들뜬 사회분위기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김범우는 생각했다. 그런 움직임의 원인은 바로 아버지에게 있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가 해방 직후에 건국준비위원회 벌교지부위원장을 지낸 전력이었다. 자신이 귀국했을 때는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정에 의해 이미 해산되고 없었고, 아버지가 위원장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어머니의 귀뜸으로 알았던 것이다. 김범우는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가슴 저리는 아픔을 느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위원장 자리를 맡은 것은 그동안 독립을 열망해왔던 마음의 표시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인민공화국은 미군정의 조직화와 함께 와해되고 말았다. 이북에 소련군이, 이남에 미군이 진주한 상황 아래서 그건 곧 민족분단의 조짐이었고, 독립국가 건설 의지의 좌절이었다. 문중이나 주위 사람들은 아버지의 그 전력을 미루어 국회의원에 출마시키려고 했을 것이 거의 틀림없었다. 다만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은, 아버지가 그때 왜 위원장을 지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들은 그저'정치에 뜻이 있는 분' 정도로 간단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김범우는 소화다리 쪽으로 길을 잡았다. 포구를 채우고 넘쳐났을 안개가 엷게 흐르고 있었다. 기온이 떨어지게 되면 안개는 바닷물 속에 숨어왔다가는 포구를 가득 채우고, 동녘이 밝아오면 햇살에 쫓겨 다시 바닷물 속으로 숨어버리는지 자취가 없었다. 생솔가지가 타는 연기내음이 냉기 속에 섞여 싱그러웠다. 김범우는 한껏 심호흡을 했다. 그 매캐한 내음은 언제 맡아도 정겹고 싱싱했다. 김범우의 눈길은 왼쪽 두엄자리 쪽으로 옮겨졌다. 개 두 마리가 뒤로 맞붙어 있었다. 조물주가 부여한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김범우는 픽 웃음을 흘렸다. 이상하게도 개가 그러고 있는 것을 보면 언제나 우스웠다. 개는 왜 꼭 이른 아침을 골라 그 짓을 하는지, 어쩌자고 한사코 사람 눈에 잘 띄는 장소에서 그 짓을 하는지, 그러면서도 그 시간은 왜 또 그리도 긴지, 이런 풀릴 길 없는 의문이 매번 점잖치 못하게 스치기 때문에 싱겁게 웃게 되는지도 몰랐다.

김범우는 걸음을 빨리했다. 전 원장의 조서는 무기협박에 의한 강제 의료행위로 꾸며졌다. 조서대로 전 원장과 말을 맞추었고, 간호원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다. 조서를 그렇게 꾸미기까지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난 전혀 협박을 받은 사실이 없어요. 내가 유리하자고 그런 거짓말을 하면 염상진씨를 악질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거 아닙니까." 전 원장이 고개를 저으며 한 말이었다. 김범우는 하도 어이가 없어 전 원장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극히 사람다운 사람 하나가눈을 껌벅이며 앉아 있었다.

"자기 때문에 원장님이 이런 궁지에 몰려 있는 것을 알면 그보다 더한 거짓말을 해도 염상진은 이해를 할 겁니다."

"글쎄요, 그건 김 선생 생각이지요."

전 원장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원장님,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위험을 피하는 편법입니다."

"글쎄, 편법도 남을 해치지 말아야지요. 내가 한 치료는 의사의 의무이고 권한입니다."

", 당연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사실대로 재판에 넘겨지면 원장님은 빨갱이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금 상황에서 제일 무서운 죄가 빨갱이라는 걸 아시죠? 지금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땝니다. 종전 직전 패주하는 일본군이 버마 전선에서 무슨 짓을 한줄 압니까? 보급은 끊겼지, 적은 추격해오지, 정글 속으로 도망을 치는데 매일을 굶는 겁니다. 사람이 굶고 며칠을 살겠어요. 굶어죽자고 작정을 하면 이삼십 일을 버틸지 모르지만, 살아야겠다고 작정한 사람은 사흘 이상 굶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먹이를 사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인간사냥입니다. 자기생존을 위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데, 원장님은 그까짓 거짓말을 가지고 뭘 그리 망설입니까. 저는 더 이상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결정은 원장님 스스로 하십시오."

"그럼..."

전 원장은, 당신이 바로 사람고기를 먹었다는 말인가 하는 듯한 놀란 얼굴로 김범우를 바라보다가,

"다 김 선생 말대로 하겠어요."

더듬듯 말하고는 눈을 떨구었다.

변호사의 말은 실형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재판을 받아봐야 알 일'이라는 단서를 잊지 않았다. 사상문제에 대해서는 일벌백계주의로 방침이 정해져 있어서 결과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것 이었다.

김범우는 소화다리 중간쯤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눈길은 철교 쪽으로 가고 있었다. 통통거리는 소리는 분명히 그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동안 철교 아래 선창에 묶여만 있던 배들이 정말 운항에 나서는 모양이었다. 계엄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어제부터 통제가 풀린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그 소식을 어제 아침 일찍 알려댄 것은 극장의 스피커였다. 계엄군이 주둔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 동안 겪었던 민생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야간통금을제외한 모든 통제를 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노래 한 곡이 끝나면 그 내용을 알리고, 다시노래가 끝나면 알리고 해서 스피커는 오전 내내 왕왕거렸다. 김범우는 그 조치를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 동안 생활의 불편도 불편이었지만 사람들이 겪은 심리적 압박감은 일종의 고문이었다. 계엄군 지휘관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채로 막연한 호감이 갔다.

재판은 좋게 보자면 신속했고, 나쁘게 보자면 무성의했다.

"말 말아요, 재판 건수가 산더미요. 그놈의 반란사건 땜에 순천 광주 판. 검사들 골이 빠져요."

불평을 해야 할 변호사가 오히려 판. 검사 편을 들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전 원장은 실형 일 년을 선고받았다. 간호원과 이지숙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협박을 받았다고 하지만 관계기관에 제보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이 실형선고의 이유였다. 제보기피의 고의성이 문제가 된 것이다. 역시 법관은 그 나름의 예리함을 가지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것이 허점으로 찔리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 원장은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 실형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에도 무표정했다. 이지숙도 까딱을 하지 않았고, 간호원만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걱정할 것 없어요. 상고하면 됩니다. 재판은 상고하는 재미에 하는 것 아닙니까."

변호사는 아주 태평스럽고 수월하게 말해버렸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김범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의사가 그렇듯 변호사의 직업의식도 피고의 고통에는 철저하게 둔감했다.

"고법에서도 재판이나 빨리 받게 손을 써둬요. 나는 고법으로 빨리 넘어가게 손을 써볼 테니까 말이오."

변호사는 가방을 챙겨들며 말했다. 그의 분주한 모습이 김범우에게는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다. 한철 만난 무슨 장사치 같은 인상이었던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지요."

김범우는 뿌옇게 흐려진 마음으로 변호사 대기실을 나왔다. 경찰서나 마찬가지로 재판소도 사람들로 들끓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붐비는 장소는 으레 소란스럽기 마련인데 그곳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니, 그곳에서도 사람들의 소리가 엉키고 부딪치는 소란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들이 소란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침울한 모습들이었고, 그들 사이에서 나오는 소리는 목 메인 탄식이거나 울음 섞인 넋두리거나 절망적인 부르짖음이었다. 운동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운동장의 소란이 살아 있는 소란이라면 재판소의 혼란은 죽어 있는 소란이었다. 김범우는 얼음덩이 속을 걷는 것 같은 오한을 느끼며 그 죽어 있는 소란 속을 빠져나왔다. 변호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 많은 사람들 중의 거의가 이번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아야 하는 피고들의 가족이거나 친척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루 재판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면 피고는 도대체 얼마란 말인가. 그리고 재판은 오늘만이 아니라 그 사건 이후에 계속되어왔고, 앞으로도 얼마동안 계속될 것이었다.

재판소의 정문에 이르러 김범우는 무심코 건물을 돌아다보았다. 햇빛이 반짝 눈을 쏘아왔다. 그는 이마에 손차양을 만들었다. 고딕식인지 뭔지, 서양건물의 모양을 흉내 낸 벽돌건물은 화강암 장식을 부착한 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일정 때의 냄새가 물큰 풍겨왔다. 그 냄새는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일장기의 섬뜩함과 닛본도의 서늘함과 게다 소리의 싸늘함 같은 것이 뒤섞인 듯한 아주 잡치는 냄새였다. 높직하게 자리 잡은 재판소에는 비 오는 날만 빼고는 언제나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아이들마저도 그 앞을 지나갈 때는 옆걸음질을 쳤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는 일본사람이 주체가 되어 조선인을 재판했고, 이제는'대한민국' 사람이 주체가 되어 그 국민을 재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법관이란 사람들은 모조리 식민지시대 인물이었다. 재판소는 바로 해방 삼 년 동안의 사회적 갈등과 문제점이 응집 축소되어 있는 현장이었다. 김범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정문을 나서며 실형 일 년을 곱씹어 생각하고 있었다. 상고를 한다지만 형량이 줄어 들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고통을 겪으며 보내야 하는 일 년의 세월이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긴 것인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선량하기만 한 전 원장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릿거렸다. 그를 구해내는 방법이 뭐 없을까... 고개를 뒤로 젖힌 김범우는 방향도 없는 걸음을 무작정 옮겨놓고 있었다.

 

"엄니, 그냥 여그서 살제 워째 이사럴 가고 그런가!"

마지막으로 부엌살림을 싸고 있는 들몰댁 앞에서 작은아들 종남이가 뾰로통한 얼굴로 대들 듯 말했다. 들몰댁은 손만 재게 놀렸다. 곧 달구지가 올 것이었다.

"엄니이, 워째 이사럴 가냐니께에!"

종남이는 울상이 되어 목을 뽑아 늘이며 소리를 질렀다.

"이눔으새끼야, 엄시 귀청 떨어지겄다."

들몰댁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괴어 있었다. 마음이 찡해진 들몰댁은 그만 주먹을 힘없이 내렸다. 낯선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싫어하는 어린것의 마음이 짠하고 가여웠다.

"워째, 우리 종남이는 이사가는 것이 싫은가?"

들몰댁은 어리광을 받아주는 어조로 말하며 두 팔을 벌렸다. 작은아들은 품으로 왈칵 안겨왔다. 보드랍고 연약한 체구가 품안에서 서러웠다. 들몰댁은 작은아들의 머리에 얼굴을 비볐다. 아직도 아련하게 젖 냄새가 풍겨왔다. 다 느그 좋으라고 이사도 허고 고생도 허는 겨. 어린 느그가 무신 죄가 있냐. 애비넌 죄인이라혀도 느그넌 살아야제. 하먼, 살아야 허고말고. 들몰댁의 가슴은 눈물로 젖고 있었다.

"엄니, 이사가지 말어."

"워째 그러까?"

"무당이 싫은께 그러제."

들몰댁은 멈칫했다. 의외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그냥,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이 싫어 그런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 말 허는 것 아녀. 그 아짐씨가 을매나 맘씨가 좋고 이쁜디 그러냐."

"아녀, 난 무섭단 말이여."

작은아들은 더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고것이 무신 소리여. 그리 이쁘고 이쁜 아짐씨가 워째서 무섭단 말이여."

"귀신인께 무섭제."

작은아들이 몸서리치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예삿일이 아니다 싶었다. 호되게 야단을 칠까 하다가 들몰댁은 생각을 바꾸었다. 야단을 친다고 없어질 무섬증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어른이라 하더라도 무당한테 보통사람끼리 느끼는 정을 느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신춤을 추고, 주문을 외고, 신대 잡은 손을 마구 떨어대게 만드는 그 사람들이 보통사람들과 같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 벌였던 시아버지의 길 닦음 굿을 보고 어린 것은 그런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소화는 앞으로 함께 살아야 될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작은아들의 마음에서 무섬증을 몰아내줘야만 살아질 것이었다. 소화 무당과 함께 살게 된 것은 천행이 아닐 수 없었다. 내년부터 소작을 못 부치게 될 것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한 일이었다.

"종남아, 엄니 말 똑똑허니 들어."

들몰댁은 작은아들을 일으켜 앞에다가 세우고는 양쪽 팔을 꼬옥 잡았다.

"엄니가 종남이헌테 그짓말얼 허디야, 안허디야?"

작은아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안혀."

"그려, 엄니넌 성이나 니헌테 죽어도 그짓말언 안 허는 사람이여. 긍께, 엄니가 허는 말얼 믿어야 써. 알겄어?"

작은아들은 마지못한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몰댁은 혀끝으로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아짐씨넌 말이여, 귀신도 아니고 우리허고 똑겉은 그냥 사람이여."

작은아들은 입을 꾹 다물고 도리질을 했다. 들몰댁은 진땀이 났다.

"엄니 말 더 들어. 긍께, 그냥 사람인 것은 똑겉은디, 굿얼 헐 때만 무당이 되는 겨. 그때도 귀신이 아니라, 보통사람덜얼 해꼬지 헐라는 귀신얼 쫓아주는 존 일얼 허는 사람이여."

"근대워째서 아그덜이 다 귀신이라고 그려?"

작은아들은 계속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그덜이 니맹키로 몰라서 허는 소리제."

"아녀, 밤에는 머리 풀고 입에서는 피 흘림스로 나 겉은 아그덜 붕알도 따묵고, 피도 뽈아 묵고 헌다는디."

"금메, 고것이 다 그짓말이랑께. 그라먼, 이 엄씨가 니 붕알도 따묵고, 피도 뽈아묵고 그러라고 무당허고 항꾼에 살라고 허겄냐!"

들몰댁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종남이는 눈을 깜박거리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들몰댁은 얼핏 큰아들을 떠올렸다.

"성도 고런 말 허디야?"

작은아들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봐라. 엄니허고 성 말얼 믿을 것이냐, 안 그러면 아그덜 말얼 믿을 것이냐. 딱 부러지게 대답혀라."

작은아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만 껌벅거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미진한 데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생각이 돌려지기 시작했을 때 단단히 못을 쳐야 된다고 들몰댁은 마음먹었다.

"니가 엄니 말도, 성 말도 못 믿겄으면 니 혼자 여그서 살어라. 그 아짐씨허고 살먼 일 년내내 쌀밥만 묵고 살 것인께, 니 밥꺼정 성 혼자서 배가 터지게 묵게 생겼으니 잘되얐다."

"엄니! 쌀밥만 묵고 살아?"

작은아들의 눈이 금방 휘둥글해졌다.

"글타니께."

"엄니, 나도 이사갈라네."

작은아들이 불현듯 외치며 품으로 뛰어들었다. 들몰댁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아들을 끌어안았다.

"엄니, 나 하나또 안 무섭네, 하나또 안 무서바."

젖가슴에 얼굴을 묻은 작은아들이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작은 몸은 떨리고 있었다.

"그려, 그려, 우리 종남이 장허다."

작은아들을 꼭꼭 끌어안으며 들몰댁은 목젖이 아프도록 목이 메이고 있었다. 무당인 소화가 함께 살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낸 것은 시아버지의 굿을 마치고 나서였다.

"나도 엄니가 세상을 뜨고 나니 혼자 외로운 몸이고, 들몰댁도 형편을 보니 살기가 편편찮은 것 같은디, 나가 허는 일 옆에서 거들 사람도 있어야 허고 헝께, 서로 의지 삼아 항꾼에안 살아보실라요? 아그덜 밥 굶기는 일언 욼을 것잉께요."

소화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나가 굿허는 일얼 멀 알아야제라."

들몰댁은 소화의 말이 너무 갑작스럽고 믿어지지 않아 헛소리하듯 대꾸했다.

"굿이야 나가 허는 것잉께 들몰댁언 살림만 살아주먼 될 것이요."

"워치께 고런 시답잖은일 허고 세 입이 붙어묵고 살겄는게라. 짐만 되는 염치 웂은 짓이제라."

밥해 먹고 빨래하는 일만으로 세 입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일 년 내내 들일 밭일을 뼈끝이 닿도록 해도 하루 세끼를 제대로 찾아먹을 수가 없지 않았는가.

"짐은 무신 짐이어라. 나헌테는 살림 살아주는 일이 젤 큰일이요. 그라먼 결정된 일로 알고, 이삿날은 나가 택일을 혀서 알리겄소."

어차피 혼자 살 수 없는 형편에서 소화가 굳이 들몰댁을 택한 것은 그녀의 남편이 좌익이었던 까닭이다. 서로가 똑같은 입장, 정하섭을 보호하고 비밀을 지키는 데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을 고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엄니, 구루마 왔네, 구루마."

길남이가 마당으로 뛰어들며 숨찬 소리를 질렀다.

"워메, 숨 넘어가겄다. 살살 댕게라."

들몰댁은 치마를 거머쥐며 사립으로 나갔다. 소달구지가 이쪽으로 느리게 오고 있었다.

"길남아, 짐 들어내라."

달구지를 보자 마음이 바빠진 들몰댁은 큰아들부터 불러댔다. 이삿짐이라야 허술하고 보잘 것이 없었다. 이불보퉁이 하나, 옷가지가 든 헐어빠진 농 두 짝, 부엌살림 한 보퉁이가 전부였다. 필요 없게 된 농기구를 챙기지 않아서 짐이 더욱 단출해진 것이다.

"엄니, 우리 집언 워쩔 것인가?"

큰아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요까짓 오두막 누가 안 업어갈 것잉께 걱정허지 마라."

"근디 말이시... 우리가 요렇게 이사럴 가뿔먼... 혹시, 아부지가 오먼 워쩔 것인가."

큰아들은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려도 저것이 장손 값 허니라고, 핏줄은 으짤 수가 웂이 땡기는 것이여. 들몰댁은 콧등이 찡 울렸다.

"걱정헐 것 웂어. 느그 아부지넌 안 보고도 우리가 워디로 이사갔는지 다 아는 사람잉께."

들몰댁은 무심코 말을 해놓고는 놀랐다. 이상하게도 남편이 그런 것쯤 쉽게 알아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자." 들몰댁은 두 아들의 손을 양쪽으로 붙들었다. 그녀는 뒷집 구룡댁의 사립 앞을 지나며 퉤 침을 뱉았다. 그 여자의 감시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들몰댁의 이삿짐을 실은 달구지가 소화다리를 건너기도 전에 한 사내가 청년단으로 뛰어들었다.

"단장님, 보고헙니다. 하대치 마누래가 이사럴 합니다."

그 사내는 하대치네를 고정 감시 해온 끄나풀이었다.

"워디로?" 염상구가 가는 눈만을 옆으로 돌렸다.

"화정리 도래등 무당집으로 가느만요."

"?"

"처녀무당 엄니가 을매 전에 죽어서 살림 살아줌서 얻어묵고 산다는 디요."

"그려, 워치케든 살아야겄제. 수고혔다."

"단장님, 감시넌 워치케 헐께라?"

"도래등이먼 너무나 먼께 니헌테는 새 임무럴 줄 것이여. 가서 기둘려."

염상구는 그 예쁘고 나긋나긋하게 생긴 처녀무당을 떠올리고 있었다. 니년이 무당만 아니었음사 폴세 빵꾸럴 뚫고 말았을 거여. 참말로 아까운 괴기여. 염상구는 입 안에 괸 침을 꿀꺽 삼켰다.

 

 

24. 분노의 소작인

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주둔하고 처음 서는 오일장이었다. 차일이 잇대어 쳐진 장터에는 국밥거리를 장만하거나 팥죽을 끓이느라 지핀 생솔가지 연기가 자욱하게 땅바닥을 기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왁자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워따, 오늘은 장이 장맹키로 슬랑갑네."

여자가 팥죽에 넣을 새알심을 잰 손길로 만들며 싱글거렸다.

"금메 말이시. 장기분이 요래보기가 을매 만인가?"

건어물 전을 펴고 있던 여자가 손길을 멈추며 말을 받았다.

"꼬빡 한 달이 안 넘었다고."

"나 생각으로는 씨엄씨 죽고 삼 년 만인 것 겉으네."

"나도 그렁마. 요만 혀서 숨통이 티였응게다행이제, 더 발이 묵였드라먼 우리 집언 새끼덜 굶길 판이었구마."

"워디 자네 집뿐이여? 장바닥 훑고 사는 신세가 다 한타랑이제. 워쨌거나 그 군대 대장이 고마운 사람이여."

"긍께 말이시. 젊디나젊은 사람이 워찌 그리 사람 사는 에레움얼 알고 단속을 풀었는지, 속이짚은 사람이여."

"하먼, 보기 좋은 떡이 묵기도 좋드라고, 인물이 훤헌께 허는 일도 요리씨언허제."

"음마 쌍암댁언 원제 남정네 인물꺼정 다 봐놨드랑가? 영 쑹허네이?"

"워메, 말이 워째 고러크름 꼬랑댕이럴 튼닫가? 고 키 껀정허게 큰 사람이 자기 키맨치로 긴 총얼 미고 요 장터거리럴 아침저녁으로 오르락내리락허는디, 봉사가 아닌 담에야 워째 그 사람얼못 보겄어. 장흥댁 눈에넌 명씨가 백혔당가?"

"금메 말이시, 나 눈에 명씨가 백히긴 백힌 모냥이시, 자네맹키로 인물이 그리 훤허게 뵈덜 않는 것 봉께로."

"음마, 음마, 다 암스롱도 저 우뭉떠는것 잠 보소웨."

두 여자는 마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토벌대장허고 인물얼 비해보소. 그사람이 을매나 훤허게 잘생겼는가."

"워따, 비헐 디가 따로 있제. 그 원생이 낯짝허고 비혀서 이 읍내에 그만 못헌 인물이 워디 있겄는가. 소록도 문딩이도 그보담은 나슬 것잉께."

"자네 말이 공자님 말씸이시."

"인물로 친다면야 염상진이 당헐 인물이 웂제."

"워메, 장흥댁, 누가 듣겄네웨."

두 여자는 당황한 몸짓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굳어진 얼굴로 제각기 일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화제는 거의가 계엄조처의 해제에 관해서였다. 사람들은 서로 앞질러 말을 하려고 다투었고, 어느 대목에서는 다 함께 목청껏 웃어대고는 했다. 아침이 일러 거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장터에 생기가 도는 것은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술렁거리거나 부산스러운 활기는 명절 대목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장터를 감돌고 있는 밝은 기운은 장사 경기에 대한 기대라기보다 그 동안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 해방감의 표현일 것이었다. 장터거리 초입에 자리잡은 극장에서도 어느 때 없이 크게 노래를 틀어대고 있었다. 약간 쉰 듯하면서도 촉촉한 물기가 느껴지는 귀에 익은 변사의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미처 악극단을 불러들일 여유는 없었겠지만, 새 활동사진도 준비한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변사의 그 청산유수 같은 목소리가 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장날이면 으레 극장도 재미를 톡톡하게 보는 날이어서 새로 시작하는 악극단이나 활동사진 내용을 설명하는 변사의 감정 섞은 목소리가 안개가 걷히기 전부터 읍내에 울려 퍼지게 마련이었다. '마침내 그리하였던 거디었었다'로 이음 하는 변사의 고조된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도 벌써 한 달이 넘어 있었다. 그 동안 극장만 문을 닫아 걸었던 것이 아니었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면서부터 장터 옆 빈터에 드높은 천막을 치고 온갖 깃발을 나부끼며 신바람 나게 나팔을 불어대는 서커스단도 자취가 없었다. 읍내를 에워싸고 있는 산들은 이미 썰렁하게 잎들을 떨어뜨린 뒤였고, 어느덧 겨울은 옷깃 속에 한기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을을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들녘에 가득 찬 누른빛이 넘치고 넘쳐나서 산마저 물들이고 마는 그 좋은 계절을 쫓기고 억눌리는 기분 속에서 지나치고 만 것이다. 느긋하게 허리를 펴고 먼 눈길을 주면 어깨동무하듯 반원을 그리고 있는 징광산이며 옥산이며 제석산의 상봉으로부터 차츰차츰 물들어 내리는 단풍의 물결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아래 아래로 단풍져 내리는 산들의 변모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가슴을 적셔오는 가을을 느꼈고, 멀지 않은 겨울을 준비했다. 그리고 계모임을 한 이웃끼리 이삼일씩 틈을 내어 단풍놀이를 떠나기도 했다. 그들이 마련한 단풍놀이는 그냥 '놀이'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깝게는 선암사나 송광사를 찾아갔고, 멀리로는 화엄사나 대흥사를 찾아갔다. 그들은 보퉁이에 햅쌀을 싸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부처님 전에 햅쌀을 올리고, 남은일 년을 무사히 넘기고, 오는 일 년을 복되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깊은 절을 올렸다. 산 깊은 좋은 터에 자리 잡게 마련인 부처님 도량에는 온갖 색깔의 단풍이 사람들이 입고 있는 흰옷을 금방 색색으로 물들일 것처럼 온 산을 덮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가을에는 그런 길을 아무도 떠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가을이 없는 겨울을 맞게 된 셈이었다.

차츰 햇살이 두꺼워지면서 사람들이 입에서 내뿜던 허연 김도 스러지고, 장터거리의 북적거림과 소란스러움은 제대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아낙네의 머리에 인 쌀 보퉁이 위에 올라앉은 암탉은 동그란 눈을 두릿거리다가 날개를 퍼득이며 꼬꼬댁거렸고, 짧은 네 다리를 한 곳으로 끌어 모아 묶이는 바람에 등이 휘어진 돼지는 끈끈한 침을 질질 흘린 채 있는 껏 꽤애꽥 소리를 질러대며 지게에 실려 가고 있었고, 별로 볼품없는 좌판을 벌인 장돌뱅이들은 성질 급하게 제각기 호객타령을 뽑아대고 있었고, 장수들이 마수걸기나 하기를 기다리며 주린 배를 안고 늑장을 부린다고 부린 비렁뱅이들이 어느 가게 앞에서부터 장타령을 걸쭉하게 한바탕 뽑을까를 슬슬 눈치 보며 장터거리로 스며들고 있었다. 장터거리는 남쪽에서 극장으로부터 시작해서 북쪽으로 횡계다리 못 미쳐 삼거리 목까지였고, 장터는 그 중앙지점에 좌우로 자리 잡고 있었다. 벌교 오일장은 예로부터 보성의 오일장보다 그 규모가 배 이상 컸다. 인접한 고흥이나 조성의 인구 절반가량이 벌교장을 보려고 몰리는 탓이었고, 그에 따라 순천의 상인들은 물론이었고 멀리 여수에서도 물길을 따라 철교 아래 포구에 배를 묶었다. 벌교의 입지조건에 의해 형성된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런 현상 탓에 벌교사람들은 보성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우월감은 그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아주 노골적이고 구체적으로 일반화되어 있었다. '보성군 벌교읍'이아니라 '벌교군 보성읍'으로 행정단위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그것이었다. 벌교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행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읍 단위에 엄존하고 있는 '경찰서'였다. 군이 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보성보다 앞서 있으니 끝 글자만 바꿔 붙이면 간단하게 해결될 게 아니냐는 것이 벌교사람들의 주장이었다. 벌교의 그런 움직임을 보성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두 지방 사이의 그런 공방은 해방과 더불어 생겨난 불씨였다.

계엄군은 새벽녘부터 장터거리의 양쪽 길목에 네 사람씩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능하면 자신들의 존재가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하려는 듯 길가에 바짝 붙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길은 오가는 행인들을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길이 주로 쫓고 있는 것은 젊은 층의 남자들이었다. 어쩌다 검색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들은 거수경례를 붙임과 동시에 아울러 공손한 말씨로 검색에 협조해달라고 했고, 검색도 신속하게 끝낸 다음 처음과 마찬가지로 예의를 갖추었다. 장터 안에는 무장군인이 없었다. 장터 요소요소에는 사복경찰과 청년단원들이 경무장을 하고 배치되어 있었다. 공포분위기를 조성시키지 않으려고 심재모가 취한 조처였다. 무장군인들은 장터거리 양쪽에만 배치된 것이 아니었다. 소화다리, 역전과 차부, 칠동의 건널목, 낙안 길목, 쇠머리 길목 등 외곽의 요소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장터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두 차례씩의 검문을 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심재모는 경찰토벌대를 철교 아래 선창 옆에 줄지어 선 창고로 내몰았다. 그 창고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작인들에게서 거둬들인 쌀을 보관했던 장소였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그 큰 창고들은 텅텅 빈 채 수 년 동안 방치되어왔다. 심재모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오 개 소대 병력을, 보성지구 이 개 소대, 조성지구 일 개 소대, 고흥지구 일 개 소대, 벌교지구 이개 소대로 분산배치 시켰고, 지구사령부는 벌교에 두었다. 계엄군 이 개 소대 병력의 숙소도물론 창고였다. 심재모는 청년단 뒤쪽으로 높게 자리 잡고 있는 공원에 종합지휘초소를 꾸몄다. 그곳은 일정시대에 신사를 모셨던 자리였다. 그곳에서는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고, 특히 동쪽으로 넓게 열려나간 포구가 아스라이 멀었다. 포구 그 끝에서부터 붉은 해가 솟아오르면 일본인들은 그 해를 향해 무릎 꿇으며, 영원무궁한 황실의 번성과 황국의 번영을 기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의 손에 의해서 허물어졌는지 신사는 흔적도 없고, 얇은 일본식기와의 파편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일본인들이 신사를 얼마나 대단하게 떠받들었는지는 그 터를 잡은 것으로 알 수 있는데다가, 계단을 보면 더욱 실감이 갔다. 석 자짜리 화강암이 세 개씩 이어져 계단 하나를 이루었고, 공원까지 이어진 계단은 백오십 개가 넘었다. 심재모는 그 공원을 'M1고지'라고 명명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추위를 실은 바람이 나뭇잎을 쓸어가는 소리가 스산스럽고 차가웠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이따금 먼 메아리처럼 울렸다. 앙칼지거나 다급한 기운이 없는 그 소리는 겨울밤의 정적을 한층 더 깊게 만들고 있었다. 냉기가 가득한 바깥 기온과는 달리 방안은 훈훈했다. 그 훈훈한 기운은 군불을 잘 때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어슴푸레한 석유등잔 불빛 아래서 두 남녀가 한창 내뿜고 있는 열기가 방안에 출렁이고 있었다. 남자의 다부지고 격렬한 동작에 따라 여자는 뜨겁고 숨 가쁜 소리를 거리낌 없이 쏟아내고 있었고, 남자는 여자의 열기를 부추기기라도 하듯 뜨끈뜨끈한 원색적인 소리를 여자의 소리에 맞춰 토해내고 있었다. 박자를 맞추듯 하는 그들의 화답은 알몸뚱이로 뒤엉킨 어지러운 동작과 함께 좁은 방안을 가마솥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대치는 세 번째의 일을 치루고 있는 중이었다. 잎 떨군 가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맞아 우는 소리가 차갑고, 그을음을 긴 꼬리로 피워 올리고 있는 등잔불은 두 남녀의 열에 들뜬 행위를 무심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대치는 큰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격렬하게 떨었고, 장터댁도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전신을 비비 틀었다. 곧이어 하대치는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는데, 그 아래서 장터댁의 신음은 한동안 이어졌다.

"워따, 조청 찍어 찰떡 묵디끼 오지게도 맛나게 묵어쌓네그려."

두 팔을 받쳐 무겁게 상체를 일으키며 하대치가 맥이 빠진 소리로 말했다.

"음마, 숭보요, 시방?"

장터댁이 이마에 진득하게 밴 땀을 손등으로 썩 문지르며 눈을 흘겼다.

"숭은 무신 숭, 하도 맛나게 잘 묵응께 이뻐서 허는 소리제."

하대치는 옆으로 둥그러지며 긴 숨을 토해냈다.

"보돕시 물꼬 막고 사는 과부 요리 베레놓고 인자 워짤라요?"

장터댁이 속곳을 꿰입으며 투정하듯 말했다.

"워쩌긴 멀 워쩌. 배맞었응께, 맘꺼정 맞으먼 신랑 각시 삼아 살아뿔먼 그만이제."

하대치는 눈을 감고 반듯하게 누운 채 대꾸했다. 전신이 나른하게 가라앉아가면서 아른아른 잠이 번져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은 또렷하게 깨어 있었다.

"참말로, 몸집언 쪼깐헌 양반이 기운만 씬 게 아니라 뱃보꺼정 크요이?"

"키가 작은께 뱃보는 커야 안 쓰겄어? 키 작은디다가 뱃보할라 작아불먼 고것얼 워디다 써묵겄는가."

하대치는 몰려오는 잠을 밀어내며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허기넌 밤 방아찧기 놀음 재미지게 잘 험스로 남정네허고 뜻 맞춰 사는 것보담 더 존 지집 팔자가 워디 있을랍디여. 고것이 맘대로 뜻대로 안 된께 탈이제라."

장터댁이 하대치 쪽으로 물 사발을 옮겨놓으며 푹 한숨을 쉬었다. 하대치는 물 사발을 들어 올리며 옆 눈길로 빠르게 장터댁을 살폈다. 한숨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불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색정의 만족스러움에 취해 있는 모습이었다.

"자네넌 탈일 것도 많네. 사람 한시상 살다 가는 것, 다 맘묵기에 달린 것인디, 워쩐가, 나가 자네 서방이 되먼!"

하대치는 물 사발을 내려놓으며 장터댁 옆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음마, 또 생각이 동해서 이러요?"

장터댁은 눈을 흘겼다. 그러나 눈언저리에 환하게 피어나는 웃음은 새로운 색정을 부르고 있었다. 요런 징상시런 년아, 니년이 워째 과부가 되얐는지 알겄다. 그리 색얼 써대니 워떤 눔이 당해내겄냐. 하대치는 쓴 입맛을 다셨다.

"딴소리 허지 말고 얼렁 나가 헌 말에 대답허소."

하대치는 그녀의 눈치를 모르는 척하며 말머리를 둘러댔다.

"몰르겄소, 밤 금실 좋다고 낮 금실꺼정 존 것은 아닌께요. 사람 맴이라는 것이 천 층, 만 층,구만 층이라 밤 금실만 갖고 워찌 서방 각시, 부부지간이 되겄소. 밤 금실이 잘 맞는 우리넌인자 반 부부나 마찬가지니께, 더 욕심 내덜 맙시다."

장터댁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색정을 탐하는 기운이 말끔히 가셔져 있었다. 나가 누군디 색질에 넋빼고 앉아기둥서방 믹여살릴 것 같으냐. 색질도 꽁 묵고 알 묵는 셈으로 돈꺼정 생기니께 헐 만헌 것이제, 색질만 헌다면야 재미가 그리 오질 리가 있겄냐. 가운뎃다리 심 좋은 것허고, 장작 심실헌 것 보몬 서방삼아도 될 성부르다만, 아서라 사람 맴 변허기는 잠시 잠깐잉께, 내 장시믿고 손발 묶고 밍기적이먼 멱얼 딸 것이냐, 붕알얼 잡아챌 것이냐. 그가 돌아가고 나서 며칠이 지나면 슬그머니 기다려지고, 다시 만나면 샅부터 화끈거려지던 자신의 해묽은 마음을 장터댁은 부랴부랴 단속하고 있었다. 하대치는 장터댁의 약은 속셈을 금방 알아차렸다. '반 부부'라는 말이 아주 묘하게 이쪽저쪽으로 어울린다 싶었다. 그 말은 더 이상의 접근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앞으로도 이런 관계로만 지내자는 뜻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대치로서는 장터댁의 그런 약삭빠른 계산이 오히려 좋았다. 서로 부담이 안 되는 상태로 필요한 도움만 받으면 되는 입장이니까 마음이 홀가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대치의 입장에서 무엇보다 다급하고 답답한 것은 이 여자한테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 신뢰감이 전혀 저울질이 되지 않았다. 세 차례 째 잠자리를 하면서 그것을 저울질하는 것이 무리일지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꿰는 고리를 만들려고 하룻밤에 대여섯 번씩 그 일을 치러낸 것이었다. 이제, 그 동안 자신이 만들어온 고리에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걸려 있는지 줄을 당겨봐야 할 판이었다.

"니미럴 것, 장터댁 말 듣고 되작되작 생각혀본께 사내자석 배창시 비비틀리게 허는 영 느자구웂은 말이시잉?"

하대치는 잔뜩 찌푸린 얼굴에 화가 난 어조로 말을 내쏘았다.

"워째 그러요?"

장터댁은 저고리를 여미며 정색을 했다. 오냐, 니가 전자리럴 필라는 갑는디, 워디 혀보자.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있었다.

"워째 그러기넌?"

하대치는 눈을 고약하게 뜨며 궐련을 뽑아 불을 붙이고는,

"사람을 멀로보고 하는 소리여, 시방! 장터댁의 눈에는 나가 기둥서방질 해묵고 사는 잡놈으로 뵈는갑는디, 워찌 이려 이거. 몸 섞다본께 홀애비 정 표시로 헌 말인디, 장터댁언 등창 빼믹힐 백여시라도 만낸 거맨치로 그리 딱 짤라서 말허는 심뽀는 머시냐 이거여. 하로 밤얼 잠스로도만리장성얼 쌓는다는디, 아무리 오다가다 만낸 사이라고 워쩌 그랄 수가 있냐 이 말이여. 번개씹에도 정이 솟고, 도둑씹에도 정이 큰다는디, 우리넌 번개씹도 도둑씹도 아니고 요 처억깔아놓고 허고허고 또 헌 씹이 아니냐 이거시여. 근디도 장터댁언 정이라고는 터럭끝만치로 웂이 사람얼 기둥서방질이나 해묵을라는 잡놈으로 몰아때레야겄어? 그냥 팍 박치기혀서 면상 싹 잉끄레뿔기 전에 사람 무시허는 말 허덜 말어. 나가 밥얼 공짜로 묵었어, 씹얼 공씹얼혔어. 장작싸게 대주고, 낼 돈 다 내감서 무시는 무시대로 다 당허고, 에잇 빌어묵을 집구석, 내 다시 발길을 허먼 개자석이다!"

담배를 거칠게 비벼 끄고 벌떡 일어섰다.

"워째 일어나시요?"

하대치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장터댁의 음성이 당황스러웠다.

"몰라서 물어? 요런 빌어묵을 집구석은 당장 떠야제. 잠잘 국밥집은 을매든지 있응께."

알몸인 채인 하대치는 허리를 굽혀 저고리를 집어 들었다.

"워메, 참으씨요. 나가 잘못혔구만이라. 참말로 잘못혔구만이라."

장터댁은 하대치의 허벅지를 두 팔로 감았다.

"무신 잡소리여. 팍 걷어차뿔기 전에 다리 놔!"

하대치의 큰 목소리에 비해 다리를 빼내려는 움직임은 지극히 미온적이었다. 하대치의 허벅지를 붙들고 있는 장터댁의 바로 눈앞에서 하대치의 물건이 흔들리고 있었다. 워메, 저 기맥힌 것이 영영 떠나뿔먼 으쩔끄나!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텅 비는 것 같은 공허감과 함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이 경계심을 무너뜨리며 솟구쳐 올랐다.

"금메, 존 일 헌다고 앉어서 나 말 잠 들어봇씨요. 나도 지집인디 그리 몸 섞음스로 워찌 정이 안 생기겄소. 그런디도 워낙에 험헌 시상팔자 사납게 살다본께 안 속고, 안 둘리는 것이 상책이라 속맘 따로, 겉맘 따로 책기는 것이 몸에 배서 그리 됐구만이라. 지 맘 단도리 허니라고 넘 맘 지대로 못 알아묵고 주딩이 놀리는 이년얼 불쌍허니 생각허고 용서허씨요."

장터댁은 간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기둥서방으로 얹히지만 않는다면 장작을 시세보다 약간 싸게 사는 이익을 따지기 전에 마음을 주고 정을 키우기에 모자람이 없는 남자인 것이 분명했다.

"이보씨요, 맘 풀고 얼렁 앉으씨요."

"워떤 말얼 믿어야 좋을란지 몰르겄응께 슨 짐에 가야 쓰겄네!"

하대치는 매몰차게 말하며들고 있던 저고리를 꿰입었다.

"워메, 워째 이러시요. 정 갈라먼 요것 띠놓고 가씨요."

장터댁은 순식간에 하대치의 물건을 두 손으로 거머잡았다.

"머 허는 짓거리여!"

하대치는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버럭 소리쳤다. 여자는 얼굴을 박은 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런데, 하대치는 천천히 천천히 무릎을 꺾으며 앉아가고 있었다. 그 느린 동작은 그녀가 그의 물건을 아래로 당기는 만큼의 힘과 비례하고 있었다. 그려, 니년이 내 연장 맛에 환장얼 안허먼 워쩔 것이냐. 하대치는 넉넉한 승리감에 차 있었다. 그 것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자네 사람 앉히는 법 한분 기맥히네 그랴."

방바닥에 주저앉은 하대치는 담배를 빼들며 허허대고 웃었다. 얼굴을 숙인 채 그녀는 성냥불을 켰다. 하대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 일을 의논하기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보소, 자네 솜바지저구리 맹글 줄 아는가?"

하대치는 정다운 목소리로 물었다.

"맵씨있게야 못혀도 맹글 줄이야 알제라."

다급한 김에 물건을 잡고 늘어지긴 했지만 뒤늦게 일어난 부끄러움으로 장터댁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목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맵씨고 솜씨고 볼 것 웂고, 맹글 줄 알먼 되얐네."

하대치는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나가 돈 남는 장시럴 한판 혀야 쓰겄응께 자네가 심 잠 빌려줄란가?"

곧 큰돈이 생기는 것처럼 목소리를 과장했다.

"옷장시럴 헐라고라?"

장터댁이 놀란 듯한 음성으로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나 집에서 만들어 입고 마는 솜바지 저고리로 무슨 장사를 한다는 것이냐 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나 말 잠 들어보소. 나허고 잘 아는 사람이 목포서 연락얼 혀왔는디, 바다에 보럴 막아 농토를 맹그는 공사가 벌어졌다네. 겨울공사라 옷언 두툼허니 입어야제, 각지에서 몰리는 일꾼이란 것은 다 나맹키로 홀애비가 아니먼 총각이제, 솜바지저구리가 웂어서 못 폴아묵는 판잉께, 한 서른 벌 맹글 수 있으먼 얼렁 맹글어 갖고 오라는디, 워째 장시가 될 성부른가?"

"금메, 듣고본께 한바탕 장시가 될 만도 허겄구만요."

장터댁의 얼굴에는 어이없어 하던 표정은 간 곳이 없었다.

"워째, 수고비 톡톡허니 쳐줄 팅께 나 돈 잠 벌게 혀줄랑가?"

"근디 말이요, 한두 벌도 아니고 서른 벌이나 되는 그 많은 것얼 밥 장시해감스로 어느 세월에 다 맹글겄소."

"어허, 긍께 자네 혼자 맹글어서야 쓰겄는가. 시일이 촉박헌께 자네넌 한 벌만 맹글고, 시물아홉 벌은 시물아홉 집에 풀어서 와짝 맹글어뿔먼 될 일이 아니겄는가."

"맞소! 그리 허먼되겄소."

장터댁은 손바닥까지 맞때리며 신이 나 했다.

"솜 사고, 포목 끊고, 시물아홉 집 골라내고, 장터댁이 혀야 헐 일이 태산인디, 그 수고비 톡톡허니 쳐줄 것잉께."

"아까부텀 수고비, 수고비 해쌓는디 그 말 자꼬 들믹이먼, 나 일 안 맡겄소. 나가 돈에 환장헌 년도 아니겄고."

장터댁이 토라지는 시늉을 했다.

"고맙네, 고맙네."

하대치는 그녀의 엉덩이를 다독거리며,

"고것이 며칠이나 걸릴랑가?"

넌지시 물었다.

"넉넉 잡고 사흘이먼 되겄제라."

"이틀이먼 딱 좋겄는디."

"바느질이 쪼간 험해져서 그렇제 이틀에도 넉넉허요."

"일꾼눔덜이 입을 것인디 바느질이험하먼 어째. 낼 아칙부텀 일 시작이시."

"음마, 맨손으로 무신 일얼 시작혀라?"

"쩌그 저것 안 뵌가?"

윗목에 버려진 듯이 놓인 조그만 보퉁이를 하대치가 턱으로 가리켰다.

"쩌것언 점심 벤또라고 안혔소?"

"고것이 옷 맹글 돈이시."

"참말로, 야물딱지기도 허요이."

장터댁은 눈가에 끈적한 웃음을 피워내며 말꼬리에 진한콧소리를 묻혔다.

"한숨 붙여야 쓰겄네. 자네도 자세."

하대치는 요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바람이 달박음질치는 소리에 하대치는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겨울이 완연했다. 산 생활이 어려운 고비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하섭 동무가 다녀갔다. 그가 떠나고 난 다음부터 대장 염상진의 얼굴에서 근심기가 사라졌다. 그 내용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대장은 무언가 새로운 작전을 세우고 있는 눈치였다. 솜옷을 장만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겨울이 닥쳐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작전에 따른 계획인 것처럼 느껴졌다. 서른 벌의 옷을 만들 수 있게 솜과 포목이 상점에 비축되어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것이 마련된다 하더라도 갑자기 물건이 팔려나가는 데 의심을 살 염려가 있었고, 스물아홉 집에서 옷을 만드는 동안 의심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대장은, 닷새 안으로 장만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의심받기 쉽고 위험스러운 일을 닷새씩이나 끌 수는 없었다. 번개 치듯 해치우는 것이 상책이라 싶었던 것이다. 내일 아침에 솜을 사고, 포목을 끊는 것까지만 확인하면 일단 몸을 숨길 작정이었다. 일이 무사히 되고 안 되고는 이제 운수에 맡길 도리밖에 없었다. 하대치는 몸을 뒤척였다. 잠은 찬바람 결이 쓸어갔는지 멀어지고, 곤한 잠에 빠진 장터댁의 질긴 숨소리가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지주계급과 착취계급을 쳐 없애는 혁명, 소작인들이 공평하게 땅의 주인이 되는 혁명, 가난도 굶주림도 없는 세상을 일으키는 혁명, 아아 그날은 언제나 올 것이냐. 장마비에 봇물이 터지듯 그리 시원한 혁명의 날은 언제나 올 것이냐. 하대치는 주먹을 부르쥐며 다시 몸을 뒤척였다.

 

정현동 사장은 입맛 없는 아침밥을 서너 숟가락 째 떠올리고 있었다. 바깥에서 갑자기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왁자하게 울려왔다. 정 사장은 문득 숟가락을 멈추며 신경을 밖으로 모았다. 욕설까지 섞인 사람들의 목소리는 아주 거칠었다. 까닭 모를 찬바람이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걸 정 사장은 느꼈다.

"나가보소!"

정 사장은 밥상을 밀치며 아내에게 벌컥 화를 내듯 했다. 의아스러움과 불길한 느낌으로 밖에 귀를 모으고 있던 낙안댁은 지체 없이 일어섰다. 마루로 나선 낙안댁의 눈에 들어온 것은 대문을 사이에 두고, , 팔 명의 사람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쪽과 못 들어오게 막으려는 쪽이 서로 힘으로 맞서기보다는 입으로 대거리를 하고 있어 소란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생사가 걸린 문젠께 비켜나란 말시."

"쪼깐만 기둘리랑께 이려."

"니기미 좆도, 우리도 밥 안 묵었어."

"아 팍 밀치고 들어가뿌러."

"우리찌리 쌈 허잔 거시여?"

"긍께 비켜나!"

이렇듯 어지럽게 뒤엉키는 소리를 들으며 낙안댁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려고 매운 눈길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실랑이를 벌이느라고 가려졌다 나타났다 엇갈렸다 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간추려 살폈지만 아는 얼굴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방을 나서면서 첫눈에 그들이 작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 순간, 저것들이 그 일을 알았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우리 땅 우리 맘대로 하는데 저것들이 뭐야, 하는 역정과 함께 낙안댁의 마음은 냉정하고 단단하게 변했다. 그들을 들어오게 해야 할지, 남편을 불러내야 할지 판단을 못 내리고 있는 낙안댁의 눈에 얼핏 잡히는 얼굴이 있었다. 그건 틀림없이 마름 허 서방의 얼굴이었다.

"허 서방! 허 서방! 거그서 멀 허고 있소. 싸게 들오씨요!"

낙안댁의 음성은 카랑카랑하게 대문 쪽으로 날아갔다. 일순간 괴이쩍은 침묵이 집안 가득 끼쳐졌다. 그때 안방 문이 옆으로 밀쳐지며 정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인 소란이냐!"

정 사장이 마루 끝에 버티고 서며 호령했다. 그는 그새 양복을 차려 입고나온 것이었다. 불룩한 배, 조끼의 단추와 주머니 사이에 늘어진 샛노란 시곗줄이 햇빛에 반짝 빛났다.

"야아, 우리가 거렁뱅이 문딩이 떼가 아닌께 소란은 아니고라, 쪼깐 따지고 볼 일이 있어 왔구만이라."

한 젊은이가 마당을 가로지르며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 정 사장을 노려보며 목을 쑥 빼고 걷는 걸음걸이며 그 어투가 아예 시비조였다. 그 청년의 뒤를 따라 네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맨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 마름 허 서방이었다.

"허 서방, 요게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짓거리야!"

정 사장은 허 서방을 질타함으로써 다른 작인들을 묵살해버렸다.

"글쎄요... 중도들판 논얼 다 폴아 묵어뿌렀는지 워쨌는지 나도 통 몰르는 일인디, 요 사람덜이 나럴 막 왈김스로 욜로 끌고오는 바람에 요리 개새끼맹크로 끌려왔구만이라."

모로 돌아서서 먼 산 바래기를 한 채 말을 질질 늘여 빼는 어조며 힐끔힐끔 곁눈질 하는 태도는 노골적인 도전이었다. 그는 어제까지의 마름 허 서방이 아니었다. 저것들이 어떻게 그 일을 알았단 말인가, 허 서방 저놈 하는 짓은 또 뭐야, 정 사장의 머릿속은 한순간 갈팡질팡 이었다.

"이눔아, 감히 누구 앞에서 그 따우로 버르장머리없이 굴어!"

정 사장은 발로 마룻장을 내리 차며 고함을 질렀다.

"엇허어! 인자 이눔, 저눔 허덜 맙씨다. 나도 몰르게 땅을 싹 폴아치워 뿌고, 피차간에 관계깨끔허니 끊어뿐 것이 그쪽인디, 나가 인자 머묵자것 있다고 굽실굽실 허겄소. 나도 나이 묵을 만치 묵은 몸잉께 말조심허씨요."

허 서방은 허리춤에 두 손을 찌른 채 정 사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증오가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아니, , ..."

정 사장은 삿대질을 하며 말을 더듬거렸고,

"워메, 워메..."

낙안댁은너무 당황하고 분해 안절부절 못했다.

"허 서방! 말 다 혔어?"

한 남자가 거칠게 내쏘며 술도가 쪽에서 곧바로 허 서방을 향해 내달았다. 낙안댁의 친정동생 한갑수였다.

"그려, 워쩔껴?"

허 서방이 턱을 치켜들며 맞섰고, 한갑수가 내달아온 기세 그대로 허 서방의 멱살을 낚아챘다.

"쪼오타, 잡은 짐에 늙은 삭신 패대기럴 쳐뿌러라."

아까 앞장을 섰던 마삼수가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내깔기며 빈정거렸고,

"그려, 깨구락지 때기치대끼 한판 혀봐라. 못허는 것도 빙신잉께."

김복동이가 맞장구를 쳤고,

"워따, 돈 안 딜이고 존 구경 허게 생겼네웨. 술살이 붙어서 그런가 기운 잠 쓰게 생게묵었구마."

노덕보가 비실비실 웃으며, 화단가에 반쯤 눕혀진 모양새로 조르르 박힌 벽돌을 툭툭 치고 있었고, 강동기는 팔짱을 낀 채 눈을 찡그려 붙이며 말이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다. 그들은 회정리 삼구에 사는 작인들이었다. 마삼수와 강동기는 이십대 후반이었고, 김복동과 노덕보는 삼십대 후반이었다. 생김새와 몸피가 각기 다른 것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하나같이 찌들리고 가난해보였다. 아까 그들이 제지했던 술도가의 일꾼 셋은 자기들끼리 무슨 말인가를 열심히 수군거리고 있을 뿐 이쪽의 시비에는 별로 관심을 쓰지 않고 있었다. 정 사장이 땅을 전부 처분해버렸다는 소식은 그들에게도 놀라움일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정 사장네의 신상 변동을 깨달음과 동시에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 술도가의 행방을 유추할 것이었다.

"봐라, 갑수야! 그 손 놔라, 어서."

정 사장은 처남을 만류했다. 이쪽에서 먼저 힘을 쓸 계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정 사장은 서운상을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견딜 수가 없어 계속 이빨을 갈아붙였다. 잔금이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비밀에 부치자고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서는 배신을 해버린 것이었다. 허 서방은 끝까지 내 편에 서서 바람막이 노릇을 해줘야 하는 건데..., 판이 이리 될 줄 알았더라면 허 서방한테는 귀띔을 하는 것이었는데... 정 사장은 때늦은 후회를 씹고 있었다. 그러나 애당초 허 서방의 존재 같은 것은 염두에도두지 않았던 것이다. 타지로 떠나면서 그는 한 푼이라도 더 손아귀에 잡는 데 급급해 있었던 것이다. 정 사장은 내심으로 단단히 응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기왕 다 드러난 것, 강하게 밀어붙이자고 작정했다. 날파리 같은 것들, 제까짓 것들이 날뛰어봤자 어쩔 거야. 정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편케 마름질시켜준 은혜도 몰르는 배은망덕헌 눔 겉으니..."

허 서방의 멱살을 놓은 한갑수가 손바닥을 털며 돌아섰다.

", 가당찮다. 그리 은혜 베풀어서 마름 알기럴 쥐좇만치도 못허게 아는고나. 은혜 두 분만 베풀었다가는 나는 똥통에 구데기만치도 못될 뻔혔구만."

허 서방이 퉤 침을 내뱉었다. 저놈이 틀림없이 선동을 했구만, 정 사장은 그야말로 그의 배은망덕에 괘씸함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래, 내 땅 내가 알아서 처분했다. 건방지게 따지긴 뭘 따지겠다는 게야!"

정 사장은 아랫배에다 힘을 주며 목청을 돋우었다.

"말 한분 잘혔소. 허나, 술도가럴 폴아묵은 것은 당신 맘대로 혀도 될 일이겄제만, 농토는 당신 맘대로 못 폴아묵는다 고런 말이오."

마삼수가 삿대질을 하며 대들었다. 술도가를 팔아넘긴 사실까지 들통이 나고 있었다. 술도가의 일꾼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일제히 이쪽을 쳐다보았다. 정 사장은 또 서운상을 어금니 사이에 넣고 씹었다.

", 저 시건방진 놈, 내 땅 내가 처분하면서 네놈들 도장이라도 받아 허락을 맡을까?"

"어허, 듣기 꺼끄러운께 자꼬 내 땅, 내 땅 허덜 마씨요. 토지개혁인가, 농지개혁인가가 시작되먼 그 소유권이 우리헌테 우선적으로 있응께, 우리도 그 땅의 반임자다 그 말이요. 유식헌줄 알았등마 나보담도 무식허요이?"

김복동의 말이었다.

"건방지게, 누구 맘대로 우선적이야, 우선적이."

"나라에서 맹그는 법이 그렇소."

마삼수가 버럭 소리 질렀다.

"버업? 그래, 법 많이들 믿어라."

정 사장은 불룩한 배를 느릿느릿 쓸며 양쪽 입꼬리가 처지는 비웃음을 피워내고 있었다. 법이고 질서라는 것이야말로 돈과 힘의 편이라는 사실을 그는 확고부동하게 믿었다. 왜냐하면, 법이나 질서라는 것은 언제 어느 때나 돈과 힘이 있는 사람들이 만들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폐일언허고, 안직 잔금 전인께 계약얼 파허시요. 고런 값이라먼 예편네 고쟁이럴 폴아서라도 우리가 사겄소."

강동기가 팔짱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얼굴이 강단지게 생긴 그는 강동식의 사촌동생이었다. 가슴이 뜨끔해진 정 사장은 바짝 긴장했다. 서운상, 그놈은 비밀만 안 지킨 것이 아니라 거래가격까지 까발렸단 말인가. 그놈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자신을 이런 궁지에 몰아넣는 것인지, 정 사장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해약,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땅을 해약하면 양조장까지 해약이 되는 판이었다. 돈이 제대로 돌지 않게 된 서운상은 논을 사들인 값보다 조금 높여 서너 사람에게 줄을 대다보니 소문이 번졌고, 그 소문을 듣게 된 작인들은 자신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가 터졌음을 알고 서운상에게로 몰려갔던 것이다. 작인들의 서슬에 둘러싸인 서운상은 끝까지 부인을 못하고 사실대로 다 털어놓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내막을 정 사장이 알 리가 없었다.

", 논을 살 요량이면 서운상이한테 가서 사면 될 일이지 왜 나한테 해약을 하라는 게야."

"그새 논값이 올라뿌렀소!"

강동기가 힘주어 말했다.

", 그 사람, 잔금도 안 끝내고 돈벌 심산인가."

정 사장은 헛김 빠지는 소리를 했다.

"고것이 바로 부자라는 눔덜이 허는 베락맞을 짓거린 것이여."

노덕보가 툭툭 발길질을 하고 있던 화단가의 벽돌을 느닷없이 걷어차며 소리 질렀다. 벽돌 서너 개가 흙을 튕기며 뒤로 누웠다. 노덕보의 행동은 너무나 돌발적이었다. 화단이 망가지는 것을 보자 곧 사나운 말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낙안댁은 꾹 참아냈고, 정 사장은 먼 데 눈길을 보내며 못 본 체했다. 뭐라고 탓을 하면 금방 벽돌을 집어서 던질 것만 같은 위기감을 부부는 똑같이 느꼈던 것이다.

"해약얼 허씨요."

강동기가 다그쳤다.

"안돼."

"허머, 폴아넴긴 값에 우리가 살 수 있게 중간에 서주씨요."

"못해."

"허먼, 폴아넴긴 값허고 서운상이 내라는 값허고, 그 차액얼 정 사장이 책임지씨요."

"나가 미쳤간디?"

그때였다.

"야이 씨부랄 눔아, 니만 사람이고 우리넌 짐생이냐. 니 죽고 나 죽자아아!"

손아귀에 벽돌을 움켜쥔 노덕보가 앞으로 내닫고 있었다. 강동기가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성님, 워째 이러시오. 요런다고 일이 해결 안된께 쪼깐만 더 참으씨요."

강동기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밥줄 끊어놓고도 요것도 못허겄다. 저것도 못허겄다. 천불이 솟아 더 못 참겄다. 저눔 쥑이고 나 죽어뿔란다."

노덕보는 숨을 씩씩거리며 벽돌 움켜쥔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그의 흐릿한 시야에는 네 자식의 얼굴과 노모와 아내의 얼굴이 어릿거리고 있었다.

"말기지말고 냅둬."

"대갱이 팍 잉끄레뿔게 혀."

"하먼, 쓴맛뵈여."

마삼수와 김복동이는 몸에 잔뜩힘을 넣은 채 내뱉고 있었고, 낙안댁은 기둥 뒤에 바짝 웅크리고 있었으며, 정 사장은 태연한 척 큼큼 헛기침을 했고, 한갑수는 댓돌 아래서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술도가 일꾼들은 눈만 멀뚱거리면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허겄소. 세 가지 중에 하나럴 골르씨요."

강동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된다면 안 돼."

정 사장도 단호했다.

", 저 도적눔에 심뽀 잠 보소. 저런 도적눔덜 땀세 빨갱이가 되는 겨."

마삼수가 제 손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기가 막혀했다.

"참말로 저것이 도적눔에 중에 상 도적눔이시. 저눔이 저리 지독헌 도적눔 심뽀럴 가졌응께 즈그 아덜이 대신 죄닦음허니 빨갱이질얼 나섰겄제. 근디도 저눔은 도적눔 심뽀 못 고치고 저 지랄얼 허는 것본께 즈그 아덜 발샅에 땟국만도 못헌..."

느물느물 야유를 하고 있던 김복동이가 얼굴을 감싸며 비틀거렸다. 한갑수가 느닷없이 달려들어 김복동의 면상을 갈겼던 것이다. 김복동의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온냐, 니눔이 사람얼 쳤겄다아!"

작달만한 체구의 김복동이 이빨을 빠드득 갈아붙였다. 그는 코로 손을 옮기는가 싶더니 한갑수를 향해 팽 코를 풀었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바람에 한갑수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김복동이는 한갑수의 가슴을 치받고 들어갔다. 이미 눈빛이 이상하게 변해 있던 마삼수, 노덕보, 강동기도 맛좋은 먹이라도 다투듯이 일제히 한갑수에게 달라붙었다. 마당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 ! 저놈들이... 저놈들이..."

댓돌로 뛰어내린 정 사장은 무엇을 찾는 몸짓을 하며 허둥거렸고,

"사람 죽이네에, 사람 죽이네."

낙안댁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기둥을 부둥켜안은 채 목청을 다해 소리를 질러댔다. 어지럽게 몰매를 때리고 있던 속에서 한 사람이 빠져나왔다. 노덕보였다. 그는 화단가로 달려가더니 벽돌을 집어 들었다.

"니기미 시펄, 죽기 아니먼 살기다. 분허고 원통혀서 인자 더는 못참겄다."

그는 울부짖듯 하며 벽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마루의 유리창이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나 겉은 눔 새끼덜 많고 뱃보 웂어 빨갱이질언 못헌다만 니눔 하나는 죽일 수 있다."

노덕보는 연상 소리치며 벽돌을 뽑아 계속 내던졌다. 벽돌들은 마루에 떨어져 뒹굴기도 했고, 방문 창살을 부수고 방안으로 뛰어들기도 했고, 벽에 맞고 떨어지기도 했고, 제멋대로 날아갔다.

"어이 자알헌다, 씨언허게 자알헌다, 얼씨구, 씨언하다, 절씨구, 자알헌다..."

한쪽 구석으로 안전하게 피해 선 마름 허 서방은 히물히물 웃어대며 씨부리고 있었다. 그는 상체를 박자라도 맞추듯 꺼떡거렸다. 언제부턴가 대문 앞에는 사람들이 가득 몰려들어 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헤치고 군인 두 명이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순찰을 돌던 군인이었다.

"정지! 정지!"

군인이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군인의 출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정지하라니까! 쏜다!"

두 군인이 총을 벗어들며 고함쳤다. 그때서야 그들은 군인의 존재를 의식했고, 자신들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 총구 앞에 천천히 두 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 이거 어디서 집단폭행이야. 모두 다섯? 다들 이쪽으로 집합."

군인이 총끝으로 지시했다.

"나넌 아니요. 귀경만 혔소."

허 서방이 주춤주춤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팔을 들어 올리지 않았고, 군인이 팔을 들어 올리고 있는 네 명을 훑어보았지만 그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좋아, 모두 넷. 경찰서까지 그대로 팔을 들고 간다. 만약 팔을 내리거나 도주하면 발포한다. 앞으로이 갓!"

그들은 꼼짝없이 두 군인에게 끌려 나갔고, 허 서방은 운집한 구경꾼들 속으로 재빨리 몸을 감추어버렸다. 난폭하게 날아드는 벽돌을 피해 안방에 웅크리고 있던 정 사장과 낙안댁은 갑자기 바깥이 조용해진 이유를 몰라 더듬거리며 마루로 나서고 있었다. 난동을 부리던 작인들이 간 곳이 없는 집안은 온통 수라장이었고, 피투성이가 된 한갑수는 정신을 잃은 채 마당에 나둥그러 있었다.

"저걸 워쩔끄나..."

낙안댁은 울먹이며 버선발로 마루에서 뛰어내렸다.

"경남아, 동명아, 춘복아, 워디 있냐."

정 사장은 술도가 일꾼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 마뜩찮은 얼굴들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어찌 된 일이냐?"

"군인덜이 안 잡아갔는가요. 사장님이 전화로 군인덜 불른 것 아닌게라우?"

그 중 나이 많은 함경남이가 말했고, 그들은 의아스런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 멍허니 섰던 말고 상무님 싸게 병원으로 옮겨."

정 사장이 팔을 내저으며 역정을 냈다.

"저어... 참말로 술도가를 폴아넴기셨는게라?"

이춘복이가 슬슬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잔소리 말고 싸게 병원으로 옮겨."

정 사장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 의사가 잽혀가고 웂는디 병원으로 가봤자 무신 소양이 있겄소이."

김동명이가 불퉁스럽게 말했다. 정 사장은 그 말을 듣고서야 전 원장 사건을 상기했다.

"별 수 없다. 조심해서 방으로 옮기고 한의사라도 싸게 불러라."

정 사장은 휴우 한숨을 토했다. 처남을 방으로 옮긴 다음 정 사장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때까지도 웅성대고 있는 사람들을 쫓고 대문을 걸어 잠그게 했다. 그러나 수라장이 되어 있는 집안은 일체 치우지 못하게 했다. 경찰을 불러 집단폭행을 가하고 난동을 부린 현장을 확인시키려는 것이었다. 정 사장의 머릿속에는 반격을 가할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즈음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저 서장입니다. 방금 보고를 받았는데, 댁에서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한 모양이군요."

",, 그러잖아도 지금 금방 경찰서로 나갈려고 하던 참이었소. , 글쎄 그 죽일 놈들이..."

", 알았습니다. 사건전말은 경찰서에 나오셔서 말씀하시지요."

", 여보시오, 여보시오, 집단폭행당한 사람의 상태와 난동현장, 우리 집 피해상황을 알아야 할 것이니 경찰을 좀 보내주시오."

정 사장의 어조는 꽤나 거칠었다. 경찰서장이 자신의 말허리를 잘라버려 감정이 꼬였던 것이다.

"조금 전에 보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소."

전화를 끊고 나서도 정 사장의 기분은 언짢았다. 서장의 어투가 지극히 사무적인데다가, 자신을 그놈들과 동격으로 취급하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곧 경찰이 피해조사를 나온다 허니까 잘 보여주소. 나 경찰서에 나가네."

정 사장은 낙안댁에게 이르고 집을 나섰다. 집 앞에는 그때까지도 열 댓 명이 모여 무슨 말들인가를 하다가 정 사장이 나가자 우르르 한 옆으로 비켜섰다. 정 사장은 평소보다 더 거드름을 피우며 그들 옆을 지나쳤다. 모여선 사람들은 거만스런 정 사장의 뒷모습에다 불신에 찬 눈총들을 쏘고 있었다. 정 사장은 그 느닷없이 당한 행패와 난동이 꿈만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앓던 이빨 뽑아버린 것처럼 후련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더 마음 졸이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잔금 챙길 일만 남은 셈이었다. 처남이 얼마나 다쳤는지 걱정이었지만, 그놈들한테 치료비를 물리는 것은 물론 집단폭행죄로 콩밥을 먹여 상것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고, 훼손된 체면을 말끔히 회복하리라고 작심했다.

경찰서에서 정 사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서장이 아니라 계엄사령관이었다.

"본 사건을 중대시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본대가 주둔하고 첫 번째로 발생한 대형 집단사건이며, 둘째는, 단순한 개인감정으로 유발된 사건이 아니라 토지문제로 야기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움직일 줄 모르는 석고상처럼 책상에 똑바로 앉은 심재모의 첫마디였다. 정 사장은 자신이 앉아 있는 위치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책상 정면에 의자하나를 달랑 놓고 사람을 앉힌데다가, 새파랗게 젊은 것의 태도가 꼭 범인을 취조하듯 해서 심기가 비꼬이고 있었다. 벌교바닥에서 일정 때부터 여태까지 이런 불쾌한 취급은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날 취조하는 거요?"

정 사장의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컸다. 그 순간 심재모의 미간이 경직되며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경찰서장이 요약한 정현동의 인적 사항이 심재모의 비위를 건드렸다.

"사건경위를 조사하려 합니다."

심재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경위조사를 꼭 이런 식으로 해야 되겠소?"

"여기는 사석이 아니라 공무집행중인 자리입니다. 불필요한 말은 삼가십시오."

심재모는 정 사장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정 사장은 그 매서운 눈빛을 더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우리넌 죽기로 작정혔소. 굶어서 죽으나 그눔 쥑이고 깜빵에서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잉께. 지눔 살자고 수십 목심 쥑이는 눔얼 살려둘 수야 웂지요. 그들의 절망적인 분노와 정현동의 안하무인격인 우월감이 심재모의 의식 속에서 대비되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경솔하거나 편파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심재모는 다시 환기하고 있었다.

"그들 네 명이 저지른 집단폭행은 일단 사건접수를 시켰습니다.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해야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런 결과를 초래한 원인조사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재모는 만년필 뚜껑을 돌리며,

"담배를 피워도 좋습니다."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

"소작인들한테 일체 비밀로 하고 농토를 처분한 것이 사건발단의 원인인 모양인데, 비밀거래는 사실입니까?"

"그건 비밀거래가 아니오. 내 땅 내가 처분하는데 까짓 소작인 놈들한테 일일이 알릴 필요가 없어서 안 알린 것이오."

"좋습니다., 관련 소작인들한테 알리지 않고 농토를 매매한 것은 사실이군요. 그럼, 농지개혁이 될 경우 기존소작인들에게 농지분배가 우선할 거라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그걸 모를 바보가 어딨소."

정 사장은 심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 좋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관련 소작인들에게 농토매매를 사전에 알리지 않은 이유는 매매방해를 받을까봐 그랬군요."

정 사장은 아차 싶었다. 스스로 비밀거래를 시인한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 땅 내 맘대로 하는데 제깐 놈들이 방해는 무슨 방해를 해요. 나 그런 뜻 추호도 없었소."

"그럼, 기존소작인의 우선권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농토를 소작인들 모르게 매매하게 되면 소작인들이 갖고 있는 우선권이나 기득권, 즉 재산권의 침해가 된다는 사실은 알았겠지요."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소작인들의 우선권이란 소문일 뿐이고, 농지개혁법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무슨 재산권침해 운운하는 거요, 지금."

정 사장의 얼굴은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럼, 잠정적 재산권이라고 말을 고치지요."

"그것도 말이 안돼요. 법이 어떻게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형편에서 도대체 소작인이 지주의 땅에 무슨 권리가 있다는 게요."

"좋습니다. 그럼, 일방적으로 농토를 처분했을 때 기존소작인들의 소작권이 상실된다는 사실은 아셨겠지요."

"그까짓 걸 내가 알게 뭐요. 지눔들이 새 지주를 찾아가서 다시 소작을 부치든 말든. 나 한 가지 확실하게 해둘 말이 있는데, 거기서는 자꼬..."

"잠깐, '거기'라는 말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오?"

심재모의 얼굴이 쇠판처럼 딱딱하고 차가웠다. 정 사장은 가슴이 섬뜩해지는 걸 느꼈다. 아니꼽고 못마땅한 감정에서 일부러 '거기'라고 불렀던 것이다. 정 사장은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를 몰라 당황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긴 사석이 아니라 공무집행의 자리요. 내 직책은 계엄지구 사령관이오. 공적 직책은 곧 호칭과 지칭으로 병용되며, 직책은 계급에 우선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밝혀두는 바이오."

", , 죄송합니다. 계엄지구 사령관께서는..."

정 사장은 더욱 아니꼽고 더럽다는 생각이치밀어 일부러 그 직책을 또박또박 발음하고는, "자꼬 무슨 무슨 ''자 쓰기를 좋아하는데, 지주권은 있어도 소작권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오. 모르겄소, 억지로 말을 짜 맞추자면 소작권이란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 그런 권리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런 말이오. 지주가 소작을 주면 농사 짓는 거고, 소작을 거두면 그만인 것이지, 소작인한테 소작을 지을 권리라니, 그런 가당찮은 권리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오."

정 사장은 심재모에게 당한 분풀이라도 하듯 길게 코웃음을 쳤다. 어깨의 힘을 뺀 심재모는, 지주라는 것이 저런 존재들인가, 하는 새로운 인식으로 정 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작권이란 말이 성립이 안 된다면 그럼 생존권으로 말을 바꾸자고 하려다가 더 들어보았자 그 소리가 그 소리일 것 같아 심재모는 마음을 닫아버렸다.

"됐습니다. 돌아가도 좋습니다."

심재모는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섰다.

"아니, 왜 정작 그놈들이 집단폭행을 가하고 난동을 부려 집을 다 파괴한, 진짜 중요한 대목에 대해선 묻지 않는 거요?"

정 사장은 일어나며 눈을 부릅떴다. 심재모는 불쾌감을 꾹 눌렀다.

"공정한 수사를 위해 군경합동 조사요원을 댁으로 보냈으니 그 점은 염려 안 해도 됩니다."

"그래요오, 공정한 수사를 하는 거 좋지요. 그러나 계엄지구 사령관이라면 똑똑하게 알아둘 사실이 한 가지 있소. 바로 이 사건의 중대성에 관해선데, 그놈들의 짓은 간단한 폭력행사가아니라 공산주의 빨갱이 사상에 물들어 자행한 빨갱이식 집단폭력행위란 사실이오. 어찌 감히 소작인 놈들이 지주 집에 뛰어들어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냐 이거요. 이건 지주층을 중심으로 엄존하고 있는 사회기강의 파괴행위인 것이오. 만약 이번에 그놈들을 섣불리 다뤘다간 다른 소작인 놈들이 본을 받을 것이니, 이 점 명심 해얄 것이오. 소작인 놈들은 농지개혁이다 뭐다, 괜히 허파에 바람 들어 꺼떡대고 나대지만 이 나라는 아직까지도 지주층이 다스리고 있다, 그런 말이오."

"됐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심재모는 말을 중단시키며 오른팔을 문쪽으로 뻗쳐보였다. 정 사장은 마지못해 문을 나서며 오기스럽게 내뱉고 있었다.

"내 말 명심하시오!"

심재모는 책상 위로 눈길을 옮기며 자신이 무심결에 써놓은 '지주?' 라는 글씨를 보았다. 주둔하고 나서 첫 번째 대하는 사건이 반란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외로 농지분쟁이었고, 그때까지 지주에 대해서 어떤 구체적인 인식이 없었던 그로서는 '지주' 뒤에 의문표를 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재모가 가지고 있던 지주라는 개념은 그저 막연하고 상식적인 것이었다. 대대로 땅을 많이 가진 양반이란 사람들, 많은 소작인들을 거느리고 호의호식하는 사람들, 언제나 사회 권력층을 형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그런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문제 같은 것이 그의 의식의 표피를 스치고 지나가버린 것은 생활환경의 탓이었다. 상업에 종사한 그의 집안은 땅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다 끝내셨습니까?"

경찰서장이 들어오고 있었다.

"자아, 앉읍시다. 만나본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뭐랄까... 꽤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장님 판단은 어떻습니까?'

", 제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농지문제라는 것이, 저는 전문지식은 없고 직무상 파악하려고 하는 정돕니다만, 나라일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농지가 많은 여기 전라도 지방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장님도 함께 듣자고 일부러 문을 반쯤 열어놓았었는데, 들으셨어요?"

", 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정 사장 같은 지주가 특별난 지줍니까, 아니면 보편적인 지줍니까?"

"글쎄요... 보편적이라고 봐야겠지요."

"내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문제는...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지주들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앞으로 이런 사태는 계속 일어날 것이고, 또 공산주의자들의 지하책동은 그런 불만요인을 이용하고... 이건 사회 분열요인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셈이지요."

"이번 사건을 단순한 집단폭행이나 기물파손으로 처리할 수 없는 건, 이미 양쪽 증언을 들으셨다시피, 그 원인이 악질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권 박탈에서부터 기인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중요시해야 하지 않을까고 생각합니다. 서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건 공정한 판단입니다. 그러나..."

경찰서장은 심재모를 빤히 쳐다보다가 눈길을 잠시 내리 깔더니 다시 쳐다보면서,

"오해 없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아까 정 사장의 말에도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만, 이번 사건을 읍내 지주들이 아마 주시하게 될 겁니다. 절대로 그들을 의식하거나 편 들거나 하라는 뜻이 아니고, 공정을 기해 처리하되 그들과 마찰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라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현실 세력이고, 머리를 짜내면 마찰을 피하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서장님이 나를 좀 도와주십시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심재모는 서장에게 담뱃갑을 내밀며, 이번 기회에 농지문제 전반에 걸쳐 구체적인 파악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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