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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6

16. 감꽃은 먹을 수 있는 꽃

청년단원이나 경찰을 앞세운 토벌대원들이 입산자들의 집을 일시에 덮친 것은 아직 어둠이 머뭇거리고 있는 새벽녘이었다. 그들은 담을 타 넘거나 사립문을 조심스럽게 밀치거나 해서 전혀 인기척을 내지 않고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기민한 동작으로 헛간이며 변소, 집뒤깐이나 짚더미 같은 데부터 조사했다. 그런 다음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며 마루로 뛰어올라 방문을 열어젖혔고, 안으로 걸려 있는 방문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여자의 놀란 비명과 아이들의 겁에 질린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토벌대장 임만수의 명령에 따른 이 기습작전은 읍내 모든 마을을 공포분위기로 뒤덮기에 충분했다.

세 명이 한 조를 이룬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끝내 남자를 찾아내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총을 집 안 사람들에게 겨누었다. 겁에 질려 한사코 방구석으로만 몰려 바들바들 떨고 있던 사람들은 빤히 뚫린 총구멍 앞에서 하얗게 굳어졌다.

"빨갱이 XXX 놈 언제 떠났어!"

"니년 남편 어젯밤에 왔었지!"

총구멍만큼 살벌한 외침이 새벽공기를 흔들었다.

"아닌디요, 안 왔는디요."

"온 일 없어라, 난 몰라라."

이런 대답을 미처 끝내지도 못하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토방으로 곤두박히거나 마당으로 끌려 나왔다. 외서댁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아이를 안은 채 머리채를 잡혀 마당으로 질질 끌려 나오면서,

"안 왔당께 왜 이러시요. 안 왔당께요."

연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속으로는 정반대의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경찰이 이렇게 들이닥친 것은 남편이 잡히지 않고 무사하게 돌아갔다는 뜻이었다.

"언제, 어느 때고 경찰에서 따지고 들먼 백분 천분 몰른다고만 혀. 고것이 상수 중에 상순께로. 알아묵겄어?"

어젯밤에 떠나면서 했던 남편의 다짐이 그녀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 외서댁은 마당 가운데 내동댕이쳐졌다. 나둥그러지며 그녀는 머리 껍질이 쭉 늘어나는 것 같으면서 정신이 아뜩해지는 아픔에 떨었다. 그러나 아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은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바른대로 말해! 니년 남편이 어젯밤에 왔었지?"

토벌대원이 소리쳤다.

"아니어라, 안 왔어라."

아이를 품에 안고 땅바닥에 엎드린 외서댁의 떨리는 목소리는 가늘었다.

"쌍년이 더 족쳐야 바른 말을 할래나 ……"

토벌대원이 혀를 차며 왼손에 들고 있던 총을 어깨에 멨다. 그러고 두 손바닥을 맞비벼 털었다. 오른쪽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였던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덩이를 이루어 냉랭한 새벽공기 속을 느릿느릿 날아 내렸다.

"명령대로 일단 연행합시다."

경찰관이 토벌대원에게 말했다.

"그럽시다. 여기서 족칠 수도 없는 일이니까."

토벌대원은 잇새로 침을 찍 뱉고는,

", 빨리 일어나. 걷어차기 전에 빨리 일어나!"

곧 걷어차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소리쳤다. 재빨리 위를 한번 올려다 본 외서댁은 부리나케 일어났다.

"가자!"

토벌대원이 외서댁의 어깨를 움켜잡아 돌렸다.

", 워디로 가라?"

"워디긴 워디여, 경찰서지."

토벌대원이 사투리를 흉내 내며 눈을 치떴다.

"가긴 가는디, 애기업고 가게 포대기 잠 갖고 나올라요. 날이 요리 추운디 애기 얼어죽겄소."

"알았소. 얼렁 가지고 나오시오."

토벌대원의 제지를 의식해서인지 경찰관이 재빨리 허락했다. 방으로 내달은 외서댁은 안고 있던 딸아이를 옆으로 돌려 등에 업고, 포대기가 아이의 어깨까지 덮여지도록 높게 치올려 광목 끈을 질끈 동여맸다. 그리고 고리짝에서 아이 옷을 잡히는 대로 들고 방을 나왔다.

, 무신 험헌 꼴을 당할라는고,’

외서댁은 찬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무섬증을 느꼈다.

아이를 추슬러 올리며 깍지 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외서댁은 그들을 앞장서 사립문을 나섰다. 기왕 잡혀갈 걸음 괜히 미적거리다가 사나운 욕을 먹거나 거친 손찌검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고샅의 새벽바람은 찼다. 보는 눈이 없는 때 끌려가는 것이 그래도 낫다 싶었다. 그녀는 땅만 내려다보고 걸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무섭고 서러운 마음에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외서댁 아니라고?"

귀에 익은 소리에 외서댁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왕주댁이 물동이를 이고 서 있었다. 눈물이 왈칵 솟구치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빨리 가!"

큰 손이 어깻죽지를 사정없이 쳤다. 외서댁의 몸이 비틀했고,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참말로, 젊디나 젊은 것이 아그할라 델고 저 무신 못헐 고상이다냐. 문딩이 콧구녕 겉은 빌어묵을 시상이다."

왕주댁의 거침없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외서댁은 가슴 찡 울리는 고마움을 느꼈다. 왕주댁이 아니고서는 감히 경찰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왕주댁을 보자 잇따라 샘골댁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왜 왕주댁을 거기서 만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잇따랐다. 어쩌면 왕주댁은 물을 길러 나온 것이 아니라 동정을 살피러 나왔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물동이가 빈 것이 분명했고, 왕주댁의 집은 이쪽 고샅과는 반대편이었다. 샘골댁도 또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남편이 새롭게 원망스러워졌다. 공산당을 하려면 혼자서나 할 일이지 샘골댁 남편은 왜 끌어들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샘골댁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을 것 같았고, 앞으로 더 심해질 샘골댁의 눈총을 받을 일을 생각하면 겁부터 났다. 샘골댁의 남편 유 서방을 어젯밤에 함께 데려오지 않은 남편이 야속했다. 잠시나마 부부를 만나게 해주고 나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면 그래도 낯이 설 것 같았다. 그러나 외서댁은 자신의 이런 얼빠진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만약 유 서방이 왔었더라면 …… 생각만으로도 외서댁의 가슴은 쿵쿵 울리고 있었다. 남편을 속인 사실이 그대로 밝혀지게 될 것이었다. 샘골댁은 분하고 서러워서라도 몰매질당한 일을 남편한테 털어놓을 것이고, 그 말이 시작되면 필경 자신만이 몰매질을 면했다는 말도 나올 것이 뻔했다. 그 사실이 유 서방의 입을 거쳐 남편에게 전해지기는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끝내는 몸을 더럽힌 사실까지 들춰지고 말 것이었다. 그것도 어디 한 번뿐인가. 그 독사눈 염가놈은 그것이 무슨 홍시감 맛이라고 쩝쩝 입맛을 다시며 벌써 서너 차례 찾아들지 않았던가. 외서댁은 아이를 추슬러 올리며 몸을 떨었다.

 

처음 인기척을 느꼈을 때는 또 염가놈이 왔겠거니 생각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인기척이 나는데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방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때였다.

", 누구요!"

외서댁은 아이부터 품으며 더듬거렸다.

"나시, . 놀래지 말소."

지게문을 가득 채우다시피 하고 들어선 남자가 남편인 것을 알아본 순간 외서댁은 반가움보다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불두덩 아래로 찌릿찌릿 결리는 아픔이 퍼지면서 거기가 자꾸만 오무라드는 것 같았다.

"워쩐 일이다요?"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부정한 사실을 다 알고 온 것 같은 불안감에 쫓겨 목소리가 떨렸다.

"자네 몸 상헌디 웂는가?"

남편이 총을 든 채로 아이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그녀의 가슴은 또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할 수 있었다. 방안은 어두워서 우선 표정을 감출 수 있었고, 남편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지레 겁부터 먹어선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그냥 그만허구만요."

그녀는 애매한 대답을 어물거렸다.

"몰매 맞어 크게 상헌 디 웂어?"

그녀는 그때서야 남편의 말뜻을 확실하게 잡았다. 남편은 자신이 몰매를 맞은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염가 놈과의 그 짓은 말끔하게 덮여진 셈이었다.

"몰매를 맞은 지가 언젠디 이적지 아파라."

그녀는 한숨까지 섞어가며 말했다.

"허기사 그려. 같은 매럴 맞아도 자네야 젊은 삭신잉께 ……"

남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 한숨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워쩐 한숨이다요? 무신 근심 있소?"

"금메 말이시, 자네가 요리 성헌 줄 알았음사 나가 머 헐라고 왔을 것인가. 하늘 겉은 대장님 명령 어김스로 말이시."

"허먼, 딴 볼일은 웂이고 순전히 나 하나 보자고 오셨단 말이요?"

", 요 미친 눔이 지눔 각씨 맞어죽어뿐 줄 알고 안 왔능가."

남편은 허하게 웃었다. 그 허한 웃음이 전신을 뜨겁게 감싸오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그녀는 몰매도 맞지 않았다고, 그 대신 청년단 염가 놈에게 몸을 내줬다고 말해버리고 싶은 죄의식에 떨었다.

"자네 고상이 말이 아니시."

남편이 손을 더듬어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몸이 더럽혀진 것을 금세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남편이 제발 딴 생각을 먹지 말기를 빌었다. 염가 놈이 다녀갈 때마다 똥 묻은 옷을 빨 듯 몸을 씻었지만 차마 남편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무리 흔적을 지웠다고는 하나 남편이 모를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어두운 곳에서도 제 신발이 아니면 금방 알아차리는 법인데, 눈치 빠르고 영리한 남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었다.

"밤마동 자네 꿈을 꾸고 사네."

남편이 몸을 끌어당기는가 싶더니 젖가슴을 덥석 잡았다. 우악스러운 힘이었고, 숨결이 뜨거웠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울음 같은 신음소리를 가늘게 흘렸다. 결국 남편은 그냥 돌아갈 심산이 아닌 것이었다.

"워째 이리 떤가. 저짝 담 밑에서 둘이 망보고 있응께 암시랑토 않네."

남편의 손이 마침내 치마를 헤집고 들었다.

엄니, 이 일을 워째야 쓸께라. 나 잠 살려주씨요.’

그녀는 부르짖었다. 남편한테 부정을 들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고 있을 때 만약 염가 놈이 나타나면 어찌 될 것인가. 그녀는 이중으로 애가 탔다. 염가 놈은 언제나 권총을 옷 속에다 놓아두고는 했다. 그것이 남편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 사람 죽이는 쇳덩이를 곁눈질해가면서, 염가 놈이 있는 동안만은 제발 남편이 오지 말기를 얼마나 애타게 빌었던가. 부정의 현장을 들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다가는 남편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것이었다. 남편의 거칠고 뜨거운 손이 불두덩을 쓸어내려 거웃 부분을 만지고 있었다.

"강동무, 강동무!"

바로 방문 가까이서 들린 다급한 소리였다.

"워째 그려!"

남편이 후다닥 일어났다.

"총소리가 막 나는디요."

"워디서?"

남편은 어느새 방문을 밀치며 묻고 있었다.

"읍내 쪽인디요. 무신 일일께라?"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귀에도 멀리서 울리는 총소리가 들렸다. 꼭 남편을 쫓아오고 있는 총소리만 같아 그녀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싸게 떠야겄다. 준비혀."

남편은 어둠 속에 대고 말하고는 이쪽으로 얼굴을 돌려,

"나 가야겄네. 밤마동 문단속허고 자야 써"

하고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부산한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신작로까지 넘쳐 오른 안개를 밟으며 외서댁은 걷기에만 열중했다. 신작로에 박힌 돌에나 길가의 마른 풀잎에는 서릿발이 하얗게 돋아 있었다.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다. 안개는 신작로와 방죽에 갇힌 듯이 중도 들판에 가득 차 있었다. 아슴하게 넓은 안개밭 속에서 금을 그어놓은 듯 철로가 드러나 보였다. 하루에 두 차례씩 바닷물을 실었다가 부리곤 하는 포구를 끼고 있어서인지 중도들판의 늦가을 안개는 유난히 짙은 젖빛이었다. 포구에 끼는 안개는 햇솜 밭처럼 뭉클거리며 풀풀 날리는 기분인데, 들판에 끼는 안개는 떡고물처럼 바실거리면서도 겹겹이 쌓이는 묵직한 기분이었다.

읍사무소 뒷마당에는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대부분 여자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주눅이 들거나 겁먹은 얼굴들이었다. 그 속에는 하대치의 아내 들몰댁, 염상진의 아내 죽산댁, 그리고 안창민의 어머니도 섞여 있었다. 읍사무소의 왼쪽 사무실, 경찰서 안에서는 높은 언성이 오가고 있었다.

"아무 대책도 없이 이렇게 잡아들이기만 하면 어쩌자는 거요?"

경찰서장 남인태였다.

"이거 왜 이리 말이 많으쇼. 여기가 좁으면 당장 학교 하나 비우면 될 거 아뇨."

토벌대장 임만수가 푹 꺼진 콧잔등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맞섰다.

"두 학교 다 공부를 시작했소."

"그래서, 못 비운다 그런 말이쇼? 이거 보쇼, 서장나리, 계엄령 하에서 빨갱이 소탕작전이 중요하오, 아니면, 까짓 코흘리개들 공부가 중요하오?"

난 잘 모르겠소, 하는 말이 혀끝까지 밀려나왔지만 남인태는 애써 참아냈다. 계엄령이나 빨갱이를 들고 나오는 판에 스스로에게 돌을 던지는 말을 한 마디라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빨갱이들을 은신시키지 않았으면 됐지, 도주의 우려가 없는 사람들을 저렇게 한꺼번에 잡아들여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다 이거요."

입산 빨갱이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는 보고를 이미 받은 남인태는 느긋한 마음으로 토벌대장을 공략하는 셈이었다.

"이거 왜 이러쇼. 앞으로 작전은 내 권한 하에 있으니 당신은 이렇다 저렇다 말을 말고, 내가 요구하는 대로 작전협조만 하시오. 그게 현지 경찰로서 수행할 임무요. 자아, 빨리 아무 학교나 비우도록 하시오."

토벌대장 임만수의 기세도 만만찮았다. 남인태는 창자가 비비꼬이는 것을 느꼈지만 더 이상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서장의 체면에 부하들 앞에서 기를 꺾일 수는 없었다.

"학교를 비우고 안 비우고는 읍장과 상의할 문제요."

남인태는 슬쩍 피해 섰다.

"이런 제길헐, 이봐 염 단장, 읍장님한테 당장 전화 거시오."

토벌대장은 성질을 돋우며 염상구에게 손짓했다.

"안직 지무실지 모른디 요리 일찍 전화혀서 쓸란지 몰르겄소?"

염상구는 서장과 토벌대장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어물쩍거렸다. 서장은 천장을 바라본 채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고, 토벌대장은 두 팔을 허리춤에 올려 버티고 선채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됐어, 아직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으니 조금 더 있다가 걸도록 합시다."

토벌대장이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염상구는 상체를 건들거리며 창가로 걸어갔다. 그지없이 경박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의 속에서는 열심히 주판알이 튕겨지고 있었다. 경찰서장과 토벌대장을 놓고 시작한 저울질이었고 계산이었다. 누가 더 근수가 나갈 것이며, 어느 쪽으로 붙어야 더 잇속이 있을 것인지를 따지는, 염상구로서는 그야말로 중대한 시점에 처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저울 눈금이 두 마리 돼지를 달 때나, 두 가마니 쌀을 달 때처럼 속시원하게 딱 정해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경찰서장이 무거운 듯해서 그쪽으로 쏠리면 다음 순간 토벌대장이 무거운 것 같고, 저울눈금이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당장 판세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서는 토벌대장이 근수가 더 나가는 것이 분명하고, 그러나 서장이 당장은 식은 보리밥 신세지만 벌교바닥에 오래 남아 있기로 치자면 서장의 근수가 더 나가는 것은 분명했다.

"염 단장, 서장 정도는 내 보고 한마디면 끝장이오. 앞으로 모든 작전권은 내 손에 달렸으니 염 단장도 나와 손잡고 앗싸리하게 일해 봅시다."

어젯밤에 청년단으로 걸려온 토벌대장의 전화였다. 토벌대장의 언행에 대해 빠짐없이 보고하겠다고 서장과 이미 약속을 했으면서도 전화내용을 서장에게 '앗싸리하게' 보고할 수는 없었다. 자기 보고 한마디면 서장도 끝장내게 할 수 있다는 대목은, 바람 묵은 깨구락지맹키로 헛방구 뀌고 자빠졌네, 하며 전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저울질을 시작하고 보니 그 대목도 영 허풍 같지만은 않았다. 사람 하나 잘되게 하기는 어렵지만 못되게 하기는 쉬운 것이 세상판세였다. 토벌대를 파견해야 할 만큼 서장은 이미 상부로부터 허깨비 취급을 받고 있는 판에 토벌대장이 보고라고 하는 소리마다 나쁜 소리만 지껄여대면 그 모가지도 온전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토벌대장이 설쳐대는 꼬락서니도 달가울 것은 없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는다고, 아무리 계엄령이 무섭고, 토벌대장이라는 것이 바로 계엄령을 ''으로 삼는 직책이라고는 하지만 안하무인으로 설쳐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배알이 뒤틀려 올랐다.

저것이 벌교바닥이 어디라고 주먹자랑헐라고 저러까?’

염상구의 그런 느낌은 남인태 서장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건 토박이로서의 오기였고, 주먹패 왕초로서의 자존심이었다. 토벌대장이 빨갱이 토벌에만 권력을 행사해야지 만약 그 권력을 이용해서 딴 데까지 손을 뻗치려 든다면, 그때는 벌교바닥의 본때를 보여주고 말리라는 것이 염상구의 굳은 생각이었다.

"아침밥은 우리 본부에서 나하고 함께 합시다. 염단장하고 긴히 논할 일이 있으니까."

토벌대장이 은밀히 한 말이었다. 그는 서장과는 달리 꼭 '염 단장'이라고 불렀다. 들을수록 기분 나쁘지 않은 호칭이었다.

토벌대장하고 아침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염상구는 창밖을 내다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고 …… 저울 눈금이 확실하게 정해질 때까지는 양다리를 걸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염상구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토벌대장이 보이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으려고 앞서 간 눈치였다.

"토벌대장인가 원생인(원숭이)가는 워디 갔다요?"

염상구는 서장 앞으로 다가가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원생이는 또 뭐요?"

서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염상구를 올려다봤다.

", 그 쌍판때기가 원생이 낯짝 아닙디여? 첨에 딱 봉께로, 워따메 고놈에 낯짝 징상시럽게 못났다 싶고, 그런디 고 못생겨묵은 쌍판얼 워디서 꼭 본 듯 본 듯 헌디 영 생각이 나야 말이제라. 생각허고 또 생각허다 못혀서 그 부하를 잡고 물었제라. 느그 대장얼 워디서 꼭 본 얼굴인디 생각이 안 나서 그런다, 워디서 멀 허던 사람이냐. 그렁께 그 부하 허는 말이, 보기는 워디서 봐라, 싸카쓰단에서 봤겄지요, 허드랑께요. 나는 그 말을 얼렁 못 알아묵고, 어느 싸카쓰단 출신이냐고 물응께 그눔이 점잖게 웃음시로, 싸카쓰단 원생이 못봤냐고 허드랑께요. 그러고 본께 나가 워디서 그 사람을 따로 본 것이 아니드랑께요."

"그렇구만, 원생이, 그렇구만."

서장은 연상 키들키들 웃었다.

"부하눔덜이 안 듣는 디서는 원생이, 원생이 허드랑께요."

"재수 없는 놈, 아주 잘 붙인 별명이오."

서장은 어느새 웃음이 걷힌 얼굴로 냉정하게 말하고는, "염 단장!" 나직하게 염상구를 불렀다.

"예에, 서장님."

염상구도 분위기가 바뀐 것을 재빨리 눈치 채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했다.

"이쪽으로 잠시 앉으시오."

염상구는 서장이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서장이 담배를 권했다. 염상구는 담배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담배가 아니라 은밀한 이야기를 꺼내고자 하는 마음의 표시였으므로 사양 같은 것은 예의가 아니라 오히려 오해를 살 염려가 있었다. 염상구는 재빨리 성냥을 그어 서장 앞으로 디밀었다. 서장은 담배를 깊이 빨았다가 푸우 소리를 내며 연기를 뿜고는 입을 열었다.

"토벌대장 말인데, 그 사람이 무슨 말 한 것 없소?"

짐작하고 있었던 말이었다. 염상구는 침착하게 그러나 서장이 호감을 느끼게 대꾸했다.

"별말 웂었는디요."

"나 염 단장한테 긴 말 하지 않겠소. 그 사람이 앞으로는 이런저런 요구를 해올 것이오. 그런 것이 사사로운 게 아니고 공적인 사항이면 그때그때 나한테 알려주길 바라겠소. 나나 염 단장은 쓰나 다나 벌교 물을 함께 먹고 산 처지고, 그 사람은 어디까지나 외지 사람일 뿐이오. 나하고 염 단장은 그동안 아무 탈 없이 협조가 잘되지 않았소? 어찌, 내가 염 단장을 믿어도 되겠소?"

서장의 말은 간곡했다. 사실 서장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유식한 말로 하자면 협조가 잘된 것이었고, 막말로 하자면 똥창을 서로 맞춘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누가 누구를 특별히 봐준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염상구는 자칫 서장에게로 쏠려가려는 마음을 냉정하게 다잡았다.

"하먼이라, 그래야제라."

염상구는 고개까지 힘주어 끄덕거리며 흔쾌하게 대답했다.

"고맙소, 염 단장만 믿겠소."

서장은 염상구의 손을 잡았다. 염상구도 서장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서장 남인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코흘리개 적부터 경찰서 공기를 마시고 살아온 그는 생리적으로 단순할 수가 없었다. 염상구에게 먼저 식사를 하고 오라고 내보내고는 잇따라 미행을 붙였던 것이다. 염상구를 믿는다고 한 것은 정말 믿어서가 아니었다. 청년단에 박아놓고 있는 끄나풀의 제보에 의하면 염상구는 이미 어젯밤에 토벌대장과 내통을 하고서도 시침을 떼고 있었다. 염상구를 믿는다고 한 것은 전혀 믿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첫째는 이쪽을 경계하지 않고 마음 놓고 행동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이중스파이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변화 앞에선 세상인심처럼 조석변인 것 없지만 주먹패의 생리는 유독 심했다. 염상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유리창을 통해 맑은 하늘 쳐다보기처럼 환했다.

남인태는 서장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아침을 먹기 전에 김범우에 대한 조서를 손수 정리할 참이었다. 유리할 것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김범우의 건이나 빨리 마무리지어야 했다. 그가 유일하게 기대를 걸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김사용 영감을 국회의원 최익숭 앞에까지 가게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치장에 가두는 것으로는 실패했다. 그럼 더 강력한 방법, 김사용 영감이 최익승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게 더 강력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순천경찰서로 이첩하는 것이었다. 일단 순천으로 넘어가면 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건은 심각하게 돌변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도 김사용 영감이 최익승을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버티지는 못할 터였다. 김사용이 최익숭을 찾아가고, 둘 사이에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지고, 김범우는 풀려나오고, 그 공로로 자신은 …… 남인태는 조서를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오전 중으로 김범우를 넘겨 버릴 작정이었다.

염상구는 토벌대장과 겸상을 하고 마주앉아 있었다.

"대장님이 허신 말씸 따악 알아묵어뿌렀고, 고런 일 맘묵고 허자먼 보리밥 찬물에 몰아 묵긴디, 딱 한 가지 맘에 걸리는 것이 있구만이라."

"맘에 걸리다니?"

습관인 듯 토벌대장이 푹 꺼진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고것이 무엇인고 허니 …… 니기럴, 요 말을 혀야 쓸랑가?"

염상구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새삼스럽게 숟가락을 들어 김칫국물을 떠 홀짝 마셨다.

",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빨랑빨랑 말하라니까."

, 니눔 속타라고 역부러(일부러) 비비트는 것인디 나가 미쳤다고 싸게싸게 주딩이 놀리겄냐?’

염상구는 또 느린 동작으로 담배를 빼서 불을 붙였다.

"고것이 무엇인고 허니, 바로 남 서장이구만이라."

"까짓 남 서장이 어쨌단 말이오?"

토벌대장이 금방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염상구가 바라는 바였다.

"대장님헌테야 남 서장이 고까짓 것인지 몰라도 나 겉은 눔헌테야 워디 그렇간디요?" "

그 병신 같은 작자는 무시해도 돼."

토벌대장은 짜증스럽게 말을 뱉았다.

"대장님이 씨다는 것이야 시상이 다 아는 일이제만, 남 서장이 자꼬 나보고 자기 편이 돼 도라고 해싼께로 내 입장이 곤란허다 그런 말이제라."

토벌대장은 사투리가 듣기 싫어 환장할 지경이었다. 염상구가 고분고분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삐딱하게 나가자 울화가 치밀기 시작해서 엉뚱하게 사투리까지 듣기 싫은 쪽으로 번져갔다. 사실 전라도 땅을 처음 밟은 임만수로서는 사투리를 알아듣기가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았다. 억양은 전라도 것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서울말을 흉내 내고 있는 서장이나 읍장의 말은 듣기에 부담이 없었는데 토박이 사투리를 그대로 써대는 염상구의 말에는 몇 배 신경을 써야 했다.

"염 단장, 당신은 서울말은 한마디도 모르오?"

"아니, 워째 그러시오? 그 무신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다요?"

염상구의 얼굴은 금방 험하게 변하고 말았다.

"다른 뜻이 아니라, 염 단장 사투리가 너무 심해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하는 말이오."

염상구의 돌변하는 표정을 보자 괜한 소리를 지껄였구나 싶어 임만수는 재빨리 다정한 어조를 꾸며내며 짐짓 우호적인 웃음까지 지어보였다.

"지길, 나는 또 무신 소린가 혔소. 촌눔이라고 시피보는(무시하는) 줄 알고 속이 불끈혔지라. 쪼깐 들어 봇씨요. 나도 일본놈 뱃때지에 칼질허고 내빼갖고 뜬구름맹키로 사방천지 떠돔시로 서울물도 쪼깐 묵어봤구만이라. 헌디, 서울말 고것이 워디 붕알 단 남자덜이 헐 말입디여? 밑구녕 째진 것덜이나 헐 말이제. 밥 먹었니이? 잘 잤니이? 고 간사시럽고 방정맞고 촐싹거리는 말이 워디가 좋다고 배우것습디여. 서울말에 비허먼 전라도말이 을매나 좋소, 묵직허고 듬직허고 심지고. 대장님도 전라도에 온 짐에 전라도 말 싸게 배우씨요. 남자가 헐 만헌 말잉께요."

"이거, 이거 야단났군."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인 격이 되자 임만수는 과장되게 두 팔을 내저었다.

"말 나온 짐에 한마디 더 혀야 쓰겄는디, 대장님이 몰라서 허는 소리제, 전라도말맹키로 유식허고 찰지고 맛나고 한시럽고 헌 말이 팔도에 워디 있습디여. 맞어, 어지께밤에 술자리서 소리 들었제라? 그 소리 고런 것들이 다 들었는디, 워쩝디여? 알아묵겄습디여?"

소리라니?"

임만수는 무슨 소리를 지껄여대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채로 떫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어허, 이 양반이 '소리'럴 듣고도 소리가 먼지도 몰르는갑네?"

대장님이란 말은 어느새 '이 양반'으로 바뀌어 있었고, 염상구는 어이없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창가는 아니고,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소리는 소리였지."

임만수는 또 떫은 입맛을 다셨다.

"긍께 고것이 먼고 허니 ……"

", , 그만하면 됐소. 그 얘기는 다음에 또 듣기로 하고 우리 얘기나 끝냅시다."

임만수는 염상구의 태도로 보아 그대로 두었다가는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았던 것이다.

전라도, 참 이상스럽고 묘한 땅이었다. 딱히 꼬집어낼 수는 없는데, 사투리고 사람들이고 많이 색달랐다. 순천에 이삼 일 머물면서 그런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는데 염상구한테서 그 느낌은 좀 더 확실해졌다. 무식한 주먹패의 '오야붕'으로만 취급했던 염상구 입에서 무언가 아는 것 같은 소리가 그렇게 줄줄이 흘러나올 줄은 몰랐다. 어딘가 질기고 끈끈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 ……

경찰에서 뼈가 굵은 임만수의 감각은 앞으로의 행동방향을 잡기 위해 나름대로 예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긍께, 대장님이 헌 말얼 놓고 가타부타 딱 뿌러지게 말을 허라 그것인디, 좋구만이라, 대장님이 시키는 대로 허긴 허겄소. 근디, 한 가지 조건이 있구만이라."

염상구는 표정과 자세를 고치며 다부지게 말했다. 임만수는 염상구의 눈만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딴 것이 아니라, 우리 청년단 권리에 속허는 일에는 토벌대가 무신 일이 있어도 손대지 않겄다고 먼첨 약조를 허시오."

말을 듣고 있는 임만수의 입 언저리에는 엷은 웃음이 번졌다.

"월권을 하지 말라 그 말인데, 좋소, 약속을 지키겠소."

청년단이라는 것이 하는 짓을 환히 알고 있는 임만수로서는 애당초 관심 밖의 일이었고, 그들의 힘을 이용하려면 오히려 이쪽에서 그들의 행위를 비호해야 할 판이었다.

"부하들헌테도 명령을 내려줏씨요."

"물론이오."

"고맙구만이라."

"앞으로 잘해봅시다."

두 사람은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악수를 나누었다.

 

"이 해당분자!"

염상진은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강동식을 후려쳤다. 강동식은 비척비척하다가 곧 똑바로 섰다. 그런데,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윗입술의 둔덕을 넘은 피는 꽉 다물린 두 입술 사이로 번지느라고 잠시 그 흐름을 낮추었다가 이내 아래로 흘러내려서 뚝뚝 방울짓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아서 그런지 피는 눈이 부시도록 진하게 붉었다.

"하 동무, 이자를 끌어다가 저 나무에 묶으시오!"

염상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보자 더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를 닦아주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대치가 강동식을 대열의 뒤로 끌고 가며 수건으로 코를 막아주고 있었다. 염상진은 하늘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감정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손찌검은 하지 말아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그건 나이의 고하간에 낮춤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과 함께 엄연한 당의 규율이었다. 그래서 강동식을 숯막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것이다. 모두를 집합시켜놓은 앞에서 냉정하게 처벌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강동식을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감정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그 감정은 명령불복종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생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안창민에 대한 초조와 염려가 뒤바뀌어 표출된 것이었다. 피를 보자 염상진의 감정은 일순간에 싸늘하게 식어들었다. 동지의 피는 한 방울이라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건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굶주리며 핍박받으며 생성시킨 생명의 원천이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동지에게 또 손찌검을 해서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할 권리는 자신에게 없었다. 이미 피를 흘리게 한 것도 반혁명적 행위였다.

산중의 정적은 깊었다. 하늘빛만큼 맑고 투명한 새소리가 가끔 울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정적을 깨는 것이 아니라 정적의 순도를 알리려는 것 같았다. 잎을 다 떨군 나목들은 하나같이 정물로 서서 정적의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열도 나무들처럼 정물이었다. 다만 하대치 혼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참나무에다 강동식을 세우고 새끼줄로 묶고 있는 참이었다.

염상진은 안창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나약한 체구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를 노출시켰던 것이 또 후회로 씹혀졌다. 그것이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지만, 그 후회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이번에 일으킨 혁명 사업에 대한 미심쩍음과 연관된 문제였다. 아무리 당 중앙이 지하로 잠적해야 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번 사업의 허망한 실패에 대해서는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일 납득이 안 되는 것이 당 조직의 분열현상이었다. 각 도마다 지방 당 조직이 엄연한데 어찌하여 일제 봉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 조직에 이상이 없다면, 그럼 이번사업은 당 중앙의 계획거사가 아니고 지엽적인 것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치밀하고 구체적인 사전계획 없이 충동적이고 순간적으로 일으킨 사업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반혁명적인 행위인가. 공산주의를 적으로 삼는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마당에 부분적이고 산발적으로 일으키는 사업은 힘의 소모만 자초하고 상대적으로 적의 힘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었다. 그런데, 사업 확대 지령은 엄연히 당으로부터 하달되지 않았던가. 다시 혼란의 미궁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은 금물이었지만, 사태 전반을 놓고 가정을 한다면, 당의 그 지령은 여수, 순천 지구에서 사업을 일으킨 다음 뒤늦게 내려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극히 반당적인 회의적 추리를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실패를 의식할 때마다 머리를 드는 생각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작업을 다 마친 하대치가 침통한 얼굴로 대열의 앞에 와 섰다. 다른 때 같았으면 우렁찬 목소리로 보고를 하며 힘찬 거수경례를 붙였을 것이다.

"동무들, 다 같이 들으시오. 강동식 동무는 우리의 규율을 어기고 반혁명적 반당적 행위를 저질렀소. 그래서 강 동무는 처벌을 받게 되었소. 강 동무는 앞으로 만 이틀 동안 저렇게 묶여 있어야 하오. 물론 밥도 굶어야 하고 밤에도 풀어주지 않소. 끼니때마다 물만 한 사발씩 주겠소. 만약 그 누구든지 밥을 갖다 주거나, 저 사내를 풀어주면 그 사람도 강 동무와 똑같은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리고 강동식 동무는!"

염상진의 어조가 갑자기 높아졌다. 강동식이 떨구고 있던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틀 동안에 걸쳐 자신의 반혁명적이며 반당적인 행위에 대해서 냉정하고 철저하게 자아비판 하도록 하시오. 알겠소!"

"알겄습니다, 대장님."

강동식은 있는 힘을 다해서 대답했다. 그는 대장의 처벌에 대해서 추호도 섭섭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 정도인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읍내가 뒤집힌 것이 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쫓기며 오금재를 넘었고, 하대치에게 사건전말을 듣고 나서는 죽기를 각오했던 것이다.

"그만 해산시키고, 하 동무는 내 방으로 오시오."

염상진은 대열을 등지고 돌아섰다.

쩌엉- 산 우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리며 긴 여운을 남겼다. 염상진은 그 소리를 따라 무심코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 , 겹겹이 이어져나가고 있는 산의 행렬, 그 끝이 아슴푸레하게 먼 하늘에 닿아있었다. 이상한 우수가 뭉클 가슴에 괴어왔다. 나무에 묶인 강동식 탓이고 총상을 입고 혼자 버려진 안창민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가슴에 괸 우수가 설명되지 않았다. 아내의 안부가 염려스러워 조직의 명령도 어기고, 위험도 불사하고 행동한 강동식이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인가 하는 자문이 무슨 앙금처럼 우수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부모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배우자에 대해서 마음이 쏠려가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만으로 인간의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기본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었다. 인간의 삶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만든 악조건들을 척결해야 하는 마당에 그 기본조건에 대한 충족은 당분간 유보시켜야 한다. 그런 인내의 고통 없이 혁명의 성취는 얻을 수 없고, 혁명의 성취 없이는 그 기본조건마저 파괴되는 것이다.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예적 삶속에서 부모나, 자식이나, 배우자나 모두 하나같이 노예일 뿐인 것이다. 염상진도 어머니를, 두 아이를, 아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두 아이는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다. 여덟 살 먹은 딸 덕순이의 깜찍함이나 여섯 살 먹은 아들 광조의 능청스러움은 언제나 그리움이었다. 그러나 당장의 그리움을 좇아 혁명을 지연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아이들한테서 노예적인 삶의 굴레를 하루라도 빨리 벗기기 위해서라도 혁명의 수행은 우선순위에 놓여야만 했다. 이 당위성을 실천으로 옮기는데 갈등이 따르게 되었다.

"하 동무 생각은 어떻소?"

염상진이 신중하게 물었고, 하대치는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안 동무 말이오."

"야아, 무사허니 병원꺼지 당도혔기만 빌제 ……"

염상진은 눈을 내리감았다가 한참 만에 떴다. 자신은 우문을 한 것이고, 하대치는 현답을 한 셈이었다.

"하 동무, 내가 읍내를 다녀오는 동안 여기를 잘 지키시오."

"대장님 혼자서라?"

하대치가 금방 고개를 저었다.

"염려 마시오. 병원까지만 가는 것이니 혼자 가는 게 제일 안전할 것이오."

"그려도 지가 항꾼에 갔으면 싶은디요."

염상진은 벌떡 일어섰다. 하대치를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을 떼치기 위함이었다. 그런 염상진의 서슬에 하대치는 더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읍내에 간 것은 일체 비밀로 해두시오."

"알겄구만이라."

"먼저 나가시오. 난 준비를 해서 슬쩍 빠져나갈 테니까."

"조심혀서 댕겨오시씨요."

하대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서 나갔다. 염상진은 권총의 탄창을 빼서 총알을 확인했다. 그리고 배낭에서 단검을 꺼냈다.

 

김사용이 아들 범우가 순천경찰서로 넘겨진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점심을 가지고 나서였다.

"영감님 말씀대로 법대로 처리한 것이지요."

남인태는 김사용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해버렸다. 깊은 주름이 팬 김사용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꼿꼿하게 서서 남인태를 직시하고 있던 김사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조용한 몸놀림이었다.

"기분 나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

유리문을 옆으로 밀고 나가는 김사용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남인태는 거칠게 내뱉았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스쳐가며 기분이 확 상했다. 예상했던 순서가 완전히 빗나가버렸던 것이다. 계산착오였단 말인가? 자력으로 빼낼 자신이 있단 말인가? 만약 그렇게 되면 이 일을 어쩌지? 최 의원한테 연락을 취해야 하나? 남인태의 머리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당돌한 녀석, 그나마 경찰질도 못해먹을라고 누굴 상대로 장난질이야, 장난질이. 최익승만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그래서 그 자를 찾아가라고? 그 동안 참을 만큼 참아냈다만 이제 더는 안 되겠다. 어디보자.’

김사용은 바쁜 걸음을 옮겨놓으며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사태는 좌시할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재판을 받고 안 받고는 차후의 문제고 당장 큰일은 아들이 순천경찰서에 갇힌 것이었다. 지방법원이 있는 순천경찰서는 사람 거칠게 다루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반란사건이 일어나 그 도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고, 아들은 빨갱이로 지목되었을 것이니 사태는 시간을 다투도록 급박하게 되어 있었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억울한 매질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김사용은 밥보자기를 들고 경찰서로 가면서, 오늘이나 내일쯤이면 풀려나겠지, 생각했던 것이다.

아들 범우가 했다는 용공적 발언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는 없으나, 시국이 시끌시끌한데 옳은 소리라고 주장을 세우니까 겁을 주려고 며칠 가둬두는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처음에 서장이 최익승 운운했을 때도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지만, 그 말이 어떤 계산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악의로 해석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사태의 돌변을 당하고보니 모든 것이 계략적이었던 것이다.

"천 서방, 어디 있는가, 천 서방."

김사용은 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목청을 돋우었다.

"아니, 머가 그리 다급허시오."

부인이 먼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천 서방은 워디 있는가?"

", 여그 있구만요, 어르신."

천 서방이 고무신을 끌며 뒤켠에서 황급하게 뛰어왔다.

"문중회의를 열 것이니 싸게싸게 연락해라. 바로바로 모이라고들 혀."

", , 핑 돌아오겄구만요."

천 서방이 부리나케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남편한테서 밥보자기를 받아든 순간 이씨 부인은 아들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밥보자기의 무게와 문중회의를 소집하는 것과, 더 묻지 않아도 큰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범우를 순천으로 넘게뿌렀네."

김사용은 마당을 가로질러 가며 흘리듯 말했다.

워메, 으짤끄나, 하는 소리가 금방 터져 나오려는 것을 이씨는 간신히 참아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사 자식이 아니었다. 막둥이로 세상에 나오긴 했지만 어쩌면 장자 노릇을 맡아야 될지 모를 김씨 집안의 대들보였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 험한 순천경찰서로 넘겼단 말인가. 이씨는 남편을 믿으면서도 가슴의 두근거림은 진정되지 않았다.

"교환, 여그 봉림이다. 그려, 인사 그만허고, 아조 급허고 급헌 일인께 딴 일 허지 말고 순천재판소 바꿔라. 그려, 지급으로 혀."

남편의 목소리가 어느 때 없이 크고 급했다. 재판소로 직접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크고 급한 목소리 때문에 이씨의 가슴은 더욱 심하게 두근거렸다.

"어무님, 그것 이리 주시씨요."

언제 옆에 왔는지 며느리가 밥보자기를 받으려 하고 있었다.

"아니다, 아녀. 요것은 나가 치울 것잉께 니넌, 니넌 ……"

이씨는 밥보자기를 감추듯 하며 뒷말을 잇지 못하다가 문득 문중회의를 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그려, 곧 문중회의럴 열 것잉께 니넌 단출허니 술상이나 봐라"

하고 얼버무려 넘겼다.

"갑작스럽게 무신 문중회의럴 ……"

며느리는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럴 일이 있능갑다. 천 서방이 한참 발바닥에 불나게 돌고 있을 것잉께 싸게싸게 채비혀라."

며느리는 더 이상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돌아섰다. 이씨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지만 지금 당장 며느리에게 알려서는 안 될 것 같았던 것이다. 태중의 며느리에게 좋을 리 없는 일이었다.

이씨는 밥보자기를 든 채 마당 가운데 화단 옆을 서성이고 있었다. 키 작은 가을 꽃 몇 송이가 춥게 피어 있었다. 이씨는 언제부터인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연달아 염송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입술 밖으로는 새나오지 않았다.

", 여보시오, 그려, 순천 나왔어?"

이씨는 반사적으로 방 쪽으로 돌아섰다. 남편은 야속하게도 이런 중대한 일이 생겼을 때 옆에 있는 것을 딱 싫어했다. 별나고 묘한 성미였다. 그래서 무슨 큰일이 생기면 이씨는 가슴이 더 두근거리는지 몰랐다.

"여보시오, 순천재판소요? 정재남 판사 좀 바꿔주시오. 여기, 벌교 김사용이라는 사람이요. 예에, 기둘리지요."

이씨는 탄식처럼 "나무관세음보살" 하고 뇌었다. 찾는 사람이 없을까봐서 조마조마하던 참이었다.

", 정 판사신가? 그저 그만허게 지내네. 공무에 바쁜디 요약해서 말허겄네. 그런께, 우리 범우가 이번 사태에 대해서 어떤 높은 양반헌테 몇 마디 헌 모양인디, 그 말이 용공적이다 해서 여기 유치장에 며칠을 가뒀는디, 그것으로 풀릴 줄 알고 기다리다봉께 오늘 오전에 순천으로 이첩을 해부렀단 말이시. 보나마나 조서에는 빨갱이라고 썼을 것인디, 우리 범우가 어디 빨갱이질헐 놈인가. 우선 그놈이 몸상허지 않게 조처해주시고, 나가 내일 순천으로 넘어갈라네. 아녀, 아녀, 가봐야제. 그 내용을 전화로 다 말헐 수가 없네. 어이, 부탁허네."

이씨는 그제서야 다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저렇게 전화로 될 일인데 문중회의는 왜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이 하는 일은 항상 먼저 알려고 하지 말고 일이 되어가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댕겨왔구만이라."

천 서방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다들 기시든가?"

"야아, 두 분 어르신네만 못 뵙고 네 분은 뵈었구만요."

"애썼네. 가서 술 잠 받아오소."

"야아, 받아와야제라."

천 서방이 벙긋 웃고 돌아섰다. 제 몫이 생기게 마련이므로 신바람이 나는 것이었다. 이씨는 밥보자기를 부엌으로 가지고 갈 수가 없어서 마루로 올라섰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남편은 긴 담뱃대만 빨고 있을 뿐 이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경철이 어멈헌테는 알리는 것이 덜 좋을 성불러 안직 말얼 안혔구만이라."

밥보자기를 방으로 가지고 들어온 이유 설명인 셈이었다.

"잘했네."

이씨는 남편이 더 말을 하지 않을 것을 아는 탓에 곧 방을 나왔다. 술상 끝손질을 해야 했다. 문중회의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쁜 걸음으로 모여들었다. 그런 그들의 태도를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이씨는 자신이 대접을 받는 것처럼 기분이 흐뭇해졌다. 남편이 종손이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싶었다. 남편이 지니고 있는 한결같은 엄격함과 위엄이 그들을 다스리는 힘인 듯싶었다. 이씨는 술상을 들여놓고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마루에 지키고 앉아 회의내용을 엿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문중회의 때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루 끝에 앉아 있는다 해도 엿들을 수도 없었다. 마루가 넓은데다가 문중회의 때 주고받는 말은 그저 조용조용한 목소리들이었다. 어느 때 한 번이라도 문중회의 내용을 엿들으려고 한 적이 없으면서도 오늘따라 불현듯 그런 마음이 고개를 드는 것은, 오늘 회의가 십중팔구 아들 문제로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평생을 길들여져온 대로, 미리 알려고 하지 말고 일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알자고 마음을 다독이며 부엌으로 발길을 옮겨놓았다.

 

토방에 내리는 햇살은 미지근했다. 그러나 토방은 불기 없는 방보다도 더 따스했다. 길남이와 종남이는 옹송거리고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길남이는 나무 실가지로 토방에다 무언가를 자꾸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도 글씨도 아니었다. 무수하게 엇갈리기도 하고 뒤엉키기도 하는 의미 모를 선들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료해서 하는 손장난도 아니었다. 길남이의 가슴에는 슬픔이 가득 괴어 있었다. 그 슬픔이 금방이라도 눈물로 줄줄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동생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입술을 물었고, 그래도 자꾸만 목이 메어 언제부턴가 땅바닥에 줄을 그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서엉, 나 배고픈디……"

종남이가 입술까지 길게 흘러내린 누런 코를 훌쩍 들이마시며 형을 흔들었다.

길남이는 동생에게로 더디게 고개를 돌렸다.

"코 풀어."

종남이의 윗입술 중간쯤에 코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배고프당께."

종남이의 지저분한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마른버짐이 핀 깡마른 얼굴이 몹시도 추워보였다.

"더러운께 코부텀 풀어."

길남이의 목소리가 조금 억세졌다.

"코 풀먼 밥 줄랑가?"

종남이가 한 가닥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밥은 밥이고, 코 푸는 것은 코 푸는 것이여, 하는 말이 곧 튀어나오려는 것을 길남이는 꾹 참았다. 그 말을 하면 동생이 그만 아앙 울고 말 것 같아서였다. 동생이 불쌍했고, 불쌍한 동생을 울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 코 풀 것잉께 밥 줘야 써."

종남이는 이렇게 다짐을 하고는 토방을 내려서 팅 코를 풀어 던졌다. 누런 콧덩이가 조만치 떨어졌다. 종남이는 소매 끝으로 코를 썩썩 문질러 닦았다. 소매 끝부분은 말라붙은 콧물로 번들번들 윤이 났다.

"나 쿠 풀었응께 얼렁 밥 주소."

길남이는 앞에 선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기도 속이 쓰리도록 배가 고픈데 동생은 말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집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함지박에 남아있던 고구마 세 개는 아침에 삶아서 똑같이 한 개 반씩 나눠 먹어버렸다.

"종남아, 엄니는 아칙밥도 안 묵었다."

길남이는 힘들게 이 말을 했다. 그러자 동생의 코끝이 벌름거리고 입술이 씰룩이더니 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동생은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우는 것이 아니라 배를 채울 수 없게 되어 우는 것이었다. 길남이는 동생을 달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체 내버려두면 울다가 제풀에 지쳐 그칠 것이다. 그리고 찬물이나 한 바가지 마시고 기둥에 기대 졸음졸음 졸 것이다. 끼니를 굶을 때는 언제나 그래왔다.

", 외갓집에 가자."

어느새 울음을 그친 종남이가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눈물 흘러내린 자국이 두 볼에 그어진 동생의 얼굴은 화가 난 것같이 보였다.

"외갓집은 머 헐라고 가."

길남이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외갓집도 자주 갈 데가 못되었다. 외할머니 말고는 반가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외사촌 동생들은, 왜 우리 밥 뺏어먹으러 왔느냐고 대들기도 했다.

"아칙에 엄니가 잽혀감스로 외갓집에 가라고 안 그러등가."

종남이는 빽빽 소리치며 대들듯했다. 길남이는 하마터면 동생의 따귀를 후려칠 뻔했다. 어머니가 '잡혀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주먹이 불끈 쥐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동상 잘 델고 있어야 써,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디선지 들려와 스르르 주먹을 풀고 말았다.

"그려, 엄니가 금세 올란지도 모른께 쪼깐 더 있다가 가자."

길남이는 동생을 달랬다.

"글먼 그려, 그려."

종남이는 금방 밝은 얼굴이 되어 새끼손가락을 길남이의 코앞에다 디밀었다. 길남이는 더디게 손을 올려 새끼손가락으로 동생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동생은 신나게 손을 흔들어댔다. 길남이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과 함께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꿀떡꿀떡 삼키고 있었다.

왜 우리는 가난하고, 왜 아버지는 도망을 다니고, 왜 어머니는 잡혀가고 두들겨 맞고 해야 하는지,’

눈치하는 외갓집에 갈 약속을 하자 그런 슬픈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던 것이다. 길남이는 눈물을 참아내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은 하늘 귀퉁이로 똘감나무 잔가지들이 박혀 있었다. 가지에는 잎이 하나도 붙어 있지 않았다. 물론 감이 달려 있을 리 없다. 풋감 때 다 따먹어버렸던 것이다.

지금이 봄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

얼른 스쳐간 생각이었다. 길남이는 쓸쓸하게 웃었다.

뚤감나무는 봄부터 여름까지 동생과 자기에게 심심찮은 요깃거리를 대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똘감나무 아래는 종 모양 같기도 하고 도라지꽃 모양 같기도 한 작은 감꽃들이 촘촘히 떨어져 있고는 했다. 그 감꽃들을 하나하나 주워 대바구니에 담았다. 대바구니에 수북이 담긴 감꽃은 언제 보아도 좋았다. 어쩌면 먹을 수 있는 것이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초록빛 꼭지를 따내고 감꽃을 입에 넣어 씹으면 처음에는 약간 떫은맛이 나다가 차츰 달착지근한 맛이 입안을 채웠다. 감꽃은 하나하나 먹는 것보다 한꺼번에 입안 가득 넣고 씹어야 제 맛이 났다. 부잣집 가시네들은 감꽃을 실에 꿰어 두 번 세 번 감기는 목걸이를 만들고, 사내애들은 그까짓 것을 무슨 맛으로 먹느냐고 핀잔이지만 그건 다 부잣집 애들이 하는 수작이고, 가난한 애들은 너나없이 감꽃을 맛있는 꽃으로 여기고 있었다. 감꽃만이 먹는 꽃이 아니었다. 진달래꽃도 먹었고, 아카시아 꽃도 먹었다.

"서엉, 나 배고파 죽겄어. 얼렁 외갓집 가자."

종남이가 졸음이 찬 듯한 눈을 반나마 뜨곤 칭얼대듯이 말했다.

"엄니가 올란지 모른께 찬물 한 그럭 떠다 묵고 우리 쪼깐만 더 기둘리자."

길남이는 더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말할 기운도 없었다. 외갓집에는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머니 때문에 갈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해가 기웃할 때까지는 기다려봐야 될 것 같았다. 어머니는 지금쯤 어쩌고 있는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공산당을 하는 아버지가 더없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뒷집 칠성이 아버지처럼 가난해도 공산당을 안 하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다. 그러면 아버지와 함께 살 수도 있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고, 어머니도 자꾸 잡혀가지 않아도 되고, 자기와 동생이 이렇게 배가 고프지도 않을 것이었다. 칠성이네는 가난하긴 해도 밥때를 굶고 넘기지는 않았다. 죽을 먹어도 먹었다. 칠성이네는 아버지가 함께 살아서 그러는 것이었다. 칠성이와 동갑이면서 팔씨름이나 달리기에 지는 것도 다 그 탓이었다.

아침에 학교를 갔다가 교문 앞에서 되돌아왔다. 지난번처럼 경찰들이 쓴다는 것이었다. 행여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오랫동안 담을 따라 맴돌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키며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엄니는 을매나 무섭고 겁날까 ……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자신은 끌려간 것도 아니고 매를 맞는 것도 아닌데 총구멍만 보고도 얼마나 무서웠던가. 총구멍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은 몰랐었다. 아침에 놀라 잠이 깼을 때 총구멍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동그란 구멍에서 금방 총알이 튀어나와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너무 무서워 어머니가 잡혀가는데도 꼼짝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앉아 있기만 했었다. 사람들은 다 가버렸는데도 총구멍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눈을 감아도 총구멍은 보였고, 변소를 가도 총구멍은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 참말로 배고파 죽겄어. 얼렁 외갓집에 가자."

"그려, 가야제."

길남이는 천천히 일어났다. 다시 주저앉고 싶도록 기운이 없었다. 동생은 더 기운이 없을 것이다. 동생이니까. 길남이는 동생이 가엾고 불쌍했다.

"기운채려야 써, 외갓집이 먼께."

길남이는 동생의 손을 잡았다.

둘이의 키보다 두 배쯤 긴 그림자가 그들보다 먼저 사립문을 나서고 있었다.

 

 

17. 배고픔과 동물과 인간

"계란 사씨요오, 계란."

대로 얽어 짠 상자 모양의 커다란 망태기를 짊어진 사내가 큰 목청을 뽑았다. 그러나 담이 허리 높이밖에 안 되는 집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집을 보듬듯이 반원을 이루고 있는 대숲에서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집 안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사내는 큼큼 목을 다듬었다.

"여보시오, 아무도 없소? 계란 사씨요오, 계란."

사내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한결 쿠렁쿠렁하게 울렸다.

"계란 있소. 딴 디 가봇씨요."

집 안에서 여린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내가 대문도 사랍문도 달리지 않은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마당이 좁아 보폭이 큰 사내의 걸음걸이로는 금방 댓돌 앞에 이르렀다.

"계란을 안 사도 좋으니까 방문이나 열고 거절하시지요."

사내가 방에다 대고 한 말이었다. 그 목소리가 계란을 사라고 외칠 때와는 딴판으로 점잖고 무게가 있었다. 이내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워메 ……" 하는 여자의 놀라움이 담긴 음성이 짧고 나직하게 뒤를 이었다.

"나요."

엷은 웃음을 얼굴에 담고 있는 남자는 정하섭이었다. 소화는 벌떡 일어서긴 했지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정하섭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하섭은 영락없는 계란 장수였다. 광목으로 지은 한복 바지저고리에 검정물 들인 조끼를 받쳐 입은 입성이며, 검정 고무신에 다 헐어빠진 일본군 모자며, 수염이 더부룩한데다가 며칠을 씻지 않았는지 땟국물이 흐르는 얼굴이며 흠잡을 데 없는 계란 장수였다. 소화는 그가 불현듯 나타난 데 놀라고, 그가 계란장수로 변해 있는데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소화만 놀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소복을 보고 정하섭도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얼렁 드시씨요."

소화는 서둘러 마루로 나서며 말했다. 놀라움을 일순간에 몰아내는 어떤 깨달음이 스치고 갔던 것이다.

"천천히 해도 괜찮소. 나는 계란장수니까."

정하섭은 빙긋 웃기가지 하며 태평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대망태기를 마루에 내려놓으려 했다. 소화는 그것을 거들려고 대망태기를 받쳐 잡다가 주춤 놀랐다. 대망태기는 의외로 무거웠던 것이다.

"계란이 있다 했지만 억지로 팔아야겠소."

정하섭은 정말 계란을 팔아먹어야겠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짚을 엮어 만든 덮개를 걷었다. 대망태기에는 짚꾸러미에 열 개씩 넣은 계란이 반 이상 차 있었다.

"요 계란으로 말헐 것 같으면, 암놈 혼자서 깐 빙신계란이 아니고 암놈 숫놈이 항꾼에 일혀서 깐 진짜 계란이요. 그라고 개량종이 아니라 순 토종이요. 요 색깔이럴 봇씨요. 노르족족허고 볼그족족혼 것이 바로 토종계란이란 표식이요. 많이도 말고 두 줄만 팔아?씨요."

행색뿐만이 아니라 사투리에 가락을 넣어 말하는 것까지 갈 데 없는 계란장수였다. 정말 계란장사를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에 익은 행동거지였다. 지난번과는 너무나 다른 정하섭의 면모였다. 소화는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를 몰라 그저 머뭇거리기만 했다. 달라진 그 모습이 한결 실해보이고 남자다워 보이고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지난번 그 방에 머물러야겠소."

정하섭이 계란꾸러미를 소화 앞으로 밀어놓으며 낮게 말했다.

"예에 ……"

소화는 들릴락 말락 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가슴이 편안해지는 안도감과 빛살처럼 퍼지는 기쁨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솟는 그런 기분이 부끄러워 그녀는 얼굴을 더 숙였다.

"지금 그리 가면 좋겠소."

"알것구만이라."

소화는 치마 귀를 잡아 올리며 마루를 내려섰다.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고 나서 제각 안에 정하섭을 맞을 준비를 그 정도나마 해놓은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 싶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떠나버린 허망과 슬픔에 빠져 있으면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머잖아 다시 오게 될 것이오.' 정하섭이 떠나면서 남긴 말이었다. '머잖아' 오겠다는 말도 그지없이 막연한 것이었지만, 만약 온다고 해도 아무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날 사람이었다. 그때를 위해 최소한의 준비를 해두고 싶었다. 홑이불을 뜯어 빨았고, 간단한 취사도구를 장만했다. 특히 신경을 쓴 것이 땔감이었다. 싸리나무를 다섯 짐 사들였는데, 한 짐마다 다른 사람을 택했다. 싸리나무는 연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옛날부터 산도적들은 싸리나무로 밥을 해먹었고, 관가에서는 싸리나무가 잘린 곳을 찾아다니며 산도적의 뒤를 쫓았다는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준비를 해가며 그녀는 어머니를 잃은 허망과 슬픔에서 스스로를 조금씩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아니 ……"

방으로 들어서던 정하섭은 한쪽 구석에 이불과 요가 단정하게 개켜진 위에 베개 하나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머뭇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거기에 머물러 있는 소화의 기다림을 보았다. 문득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의 향기가 코끝을 스쳐갔다. 그는 코를 벌름했다. 그러나 그 향기는 이미 흔적도 없었다.

"저녁밥은 완전히 어두워진 다음에 가져오는 것이 좋겠소."

정하섭은 벽에 등을 부리고 앉았다. 먼 길을 걸어온 피곤이 바위의 무게로 몸을 눌러왔다.

"밥은 여그서도 헐 수 있구만요."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선 소화의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정하섭은 말을 물어놓고 곧 이어, ", 알았소."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는 조용히 돌아섰다.

"그런데 ……"

정하섭의 말에 문고리를 잡았던 소화는 다시 소리 없이 돌아섰다.

"지금 밥을 하지 마시오. 여긴 사람이 살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내가 안 나라고 싸리나무를 구해놨는디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소?"

정하섭은 윗몸을 벌떡 일으켰다. 연기를 안 나게 하기 위해서 싸리나무나 맹감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라는 것은 빨치산 교육에 나오는 것이었다.

"전에 엄니헌테 들었구만요."

정하섭은 소화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복을 입어 키가 더 커 보이는 그녀가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한 떨기 흰 꽃으로 보이고 있었다.

"방이 차구만요."

소화는 쏟아져오는 남자의 눈길을 더 견딜 수가 없어서 돌아섰다. 정하섭은 눈길을 방바닥으로 떨구며 담배를 꺼냈다. 이상스런 감정의 출렁임이었다. 그녀가 한 떨기 흰 꽃으로 보이면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기도 했고, 가슴에 거센 물결이 일어나는 것 같기도 했고, 전신이 뜨거운 열로 달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확실하지 않은 느낌들이 따로따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동시에 일어났고, 그건 어떤 강한 폭발이나 충격 같은 것이라고 해야 옳았다. 전에 경험한 일이 없는 감정이었고 그리고 성적 충동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정하섭은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담배는 피곤을 더 농도 짙게 만들었다. 피곤이 액체처럼 느껴지고, 몸이 거기에 차츰차츰 빠져드는 것 같았다. 또 담배를 빨았다. 피곤은 더 끈끈해지고, 몸은 점점 더 깊이 잠겨들었다.

소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소화가 혼자서 장례를 치렀다 앞으로 외롭겠다 무당 노릇은 할래나 할래나 할래

정하섭의 손가락에 끼워졌던 담배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구르다가 멈춘 담배에서는 파아란 연기가 긴 꼬리를 늘이며 피어올랐다.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푹 떨군 정하섭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소화는 쌀을 안치고 불을 지핀 다음 안심을 할 수가 없어서 밖으로 뛰어나와 굴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싶었다. 소화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을 때 정하섭은 옆으로 웅크리고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밥상을 놓은 소화는 정하섭 옆으로 다가갔다. 입에서 흘러내린 침이 방바닥에 괴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소화는 가슴이 찡 울렸다. 자신도 모르게 밥상을 돌아보았다. 두 가지 김치와 계란찜, , 콩나물 무침, 뜨물을 받아 멸치를 넣고 끓인 무국,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반찬의 전부였다. 저런 밥상을 받게 하려고 이리도 곤히 자는 사람을 깨워야 하나 하는 망설임으로 소화는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러나 밥때가 된데다가 음식은 식으면 제맛을 잃었다. 잠은 11월 긴 밤이 새도록 자면 될 것이었다. 소화는 정하섭을 깨우려다가 주춤했다. 말을 하려는데 호칭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라 불러야 좋을지 모를 사람, 그러면서 마음의 문, 몸의 문을 열어준 사람, 저 사람은 나와 무엇이어야 하는가.’

소화는 당혹감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욕심이 불길처럼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신령님은 나한테서 어머니를 데려가고 그 대신 저 사람을 보내신 것이다.’

욕심이 하는 말이었다. 그럼 저 사람은 나와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하는가. 소화는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관계는 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런 관계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서로는 구름이고 바람이고 철새였다. 시작을 달리하여 흐르다가 합쳐진 물줄기였다. 그래서 인연은 있어도 현생의 집은 장만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소화는 눈물을 훔쳤다.

"진지 드시씨요, 진지 드시씨요."

소화는 아무 호칭도 붙이지 않았다. '예 말이요' '봇씨요' 같은 말은 앞에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은 생판 모르는 사람을 부를 때나 쓰는 것이었다. 그분은 절대로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지 드시씨요, 진지 드시랑께요."

소화는 목소리를 높였다. 정하섭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 무거운 눈꺼풀이 다시 내리감길 것만 같았다.

"밥 다 됐는디, 진지 드시씨요."

내리감길 눈꺼풀에 막대기라도 받치듯 소화는 또렷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으응, , 벌써 밥이 ……"

정하섭은 그때서야 정신이 드는지 허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갑작시러서 찬이 웂는디 ……"

소화는 밥상을 정하섭의 앞으로 옮겨놓았다.

"아니요, 이만하면 계란장수 밥상으로는 성찬이오."

정하섭은 밥상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 서두르는 몸짓이 꽤나 시장했던 모양이었다. 잠은 다 깼는지 …… 소화는 염려가 되면서도 천천히 드시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 소화 당신 밥은 왜 없소?"

국을 막 입에 떠 넣으려던 정하섭이 고개를 들었다.

"지는 이따가 ……"

소화는 황급히 눈길을 떨구었다. 처음으로 맞부딪힌 눈길에 가슴이 찡 저렸고, '소화 당신'이라는 호칭이 너무나 뜻밖이었던 것이다.

"그럴 것 없소. 먹을 때 함께 먹어치웁시다."

정하섭은 소화가 이제 혼자라는 것을 생각하며 말했다. 소화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감히 겸상을 하다니 …… 상상만으로도 죄가 될 일이었고, 꿈에서라도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지체가 같은 부부 사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무당의 몸으로. 그런데 그분은 분명 겸상을 하자고 한 것이 아닌가. 서울에서 공부를 한 신식주의를 해서 그런가. 소화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뭘 하고 있소. 어서 밥을 가져오시오."

소화는 그만 일어서고 말았다. 그대로 밖에 나갈 기세였다.

"됐소, 됐소. 불편하다면 이따가 혼자 들도록 하고, 거기에 앉으시오."

정하섭은 손까지 흔들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소화는 정하섭의 정면으로부터 반쯤 옆으로 돌아앉았다.

"상을 당한 모양인데,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 …… "

소화는 정하섭 쪽으로 고개를 약간 돌려 숙임으로써 예에 대한 답례를 했다. 언제 숟가락을 놓았는지 정하섭은 다시 들 것 같지 않게 무슨 생각엔지 골똘히 잠겨 있었다.

"국 다 식는디 어서 ……"

", 알았소."

정하섭은 자세를 바꾸더니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말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는 한동안 밥먹는 데만 열중했다. 소화는 그의 무 씹는 소리까지 새겨들으며 그지없이 마음이 아늑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계란장수가 됐는지 왜 묻지 않소?"

정하섭이 불쑥 말했다.

"그런 것은 여자가 물을 말이 아니라서 ……"

사실이 그랬다. 묻고 싶은 겉마음이었고, 속마음으로는 무슨 연유가 있겠지 하고 헤아렸던 것이다. 정하섭의 눈에는 소화가 또 한 떨기 흰 꽃으로 보이려 하고 있었다.

"계란장수가 됐으니 대낮에도 소화를 찾아올 수 있게 되잖았소."

소화에게는 이 정도의 말로도 설명이 충분할 것 같았다.

"읍내에 토벌대가 새로 왔구만요."

소화는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그가 변장을 너무 믿을까봐 염려가 되어서였다.

"알고 있소."

정하섭은 소화의 말뜻일 헤아리며 고개를 보이듯 말듯 끄덕이고 있었다. 깊고, 영리하고, 기특하고, 따스한 여자 …… 정하섭은 담배를 빼들었다. 소화가 숭늉을 떠가지고 왔다.

"미안하지만 뜨신 물을 좀 데워줬으면 좋겠소. 너무 오래 몸을 씻지 못해서 ……"

정하섭이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그 목간통이 있는디요."

"목욕탕이? …… "

이곳이 바로 현부자네 첩들의 거처였다는 사실을 정하섭은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청년단 아래층에 있는 공동목욕탕은 거의 일본인들 전용이다시피 했다. 읍민들의 사용을 통제해서가 아니라 돈을 내고 목욕을 할 사람들이 많지 않아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일본인 주인이 쫓겨가게 되자 목욕탕은 일군으로 있던 나씨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목욕탕은 운영이 되지 않아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사람들 사는 형편이 그런 지경인데 현 부자는 첩들을 위해 개인 목욕탕까지 만든 것이었다. 부르주아 계급다운 짓이었다.

정하섭은 김범우 선생과 염상진 위원장을 함께 생각했다. 아니, 함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한 사람을 생각하면 다른 한 사람은 연상적으로 떠오른다고 해야 옳았다. 김 선생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염 위원장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염 위원장은 사전 지령대로 조계산 속 어딘가에 묻혀 있겠지만, 김 선생은 학교가 아직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는데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염 위원장으로서는 당연히 '위대한 혁명사업'이겠지만, 김 선생은 이번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쩌면 민족분열을 가속화시키는 미친 짓이라고 가혹하게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분은 어떤 경우에나 민족 우선주의자였다. 선민족, 후주의였다. 그래서 그분은 이남의 체제도 이북의 체제도 민족을 분열시키는 거대한 무기로밖에는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분은 남북협상론을 내세운 백범김구의 추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백범이 그러하듯 김 선생도 외로운 분노만을 끓이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염 위원장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완전한 실패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일시적인 후퇴라고 생각할까. 자신도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이번 사업은 실패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았다. 이승만 정권은 날이 갈수록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전개하는 동시에 군내부의 공산세력과 지하공산세력의 색출작업을 어느 때 없이 강력하게 실시하고 있었다. 이번 사업은 이승만 정권으로 하여금 공산세력을 일소하게 하는 필연적 계기만 마련해준 것 같았다. 대충 눈치로 짐작하는 것이지만 당중앙으로서도 이승만의 강경정책에 대처할 만한 효과적인 방안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사실을 알면 염 위원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목간물 다 디워졌는디요."

문밖에서 조심스런 소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하섭은 생각을 떨치고 일어섰다. 그런 복잡한 생각보다는 우선 뜨거운 물속에 목까지 푹 잠기고 싶었다. 목욕을 하고 나오던 정하섭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둠 속에 희끄무레하게 서 있는 것, 그만 질겁을 했던 것이다. 그건 소화였다.

"방에 있지 않고 왜 이러고 서 있소?"

말을 하면서도 정하섭의 가슴은 벌떡거리고 있었다. 희미한 둥잔불이 밝혀진 방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그때서야 정하섭은 왜 그녀가 밖에 서 있는지를 깨달았다. 방으로 들어선 그는 소화가 따라 들어오는 기척이 없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댓돌 아래 그대로 서 있었다.

"들어오시오."

그녀는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게 서 있었다.

"할 얘기가 있으니 들어오시오."

그때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엄니 49제가 안직 지나지 않아서 ……"

그녀가 힘들여 한 말이었다. 정하섭은 금방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정하섭은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소복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 그녀가 흰 꽃이 아니라 붉은 꽃이 되게 해서 그 꽃 깊이깊이 잠겨 꿀을 빠는 나비이고 싶었음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볼 때 그녀의 생각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건 무가치한 미신이거나 무의미한 관습일 뿐이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을 하면 그녀는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강제성을 띤 그 행동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짐승으로서의 배설 행위밖에 더 되는가. 49제 안에 남자와 동침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그녀의 신서이고 믿음인 것이다. 그는 그녀의 믿음을 지켜주고 싶었고,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은 사람이고 싶었다.

"알겠소. 할 얘기는 내일 아침에 하도록 합시다."

정하섭은 툇마루로 나서며 말했다.

"고맙구만이라. 편히 주무시씨요."

소화는 깊은 절을 하고는 쫓기듯이 어둠 속을 걸어서 멀어져갔다. 정하섭은 어둠 속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고맙구만이라.' 그녀의 말이 긴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무엇이 고맙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결정이 잘된 것임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당신이 바로 염상진이 마누란가?"

토벌대장 임만수가 고약스런 얼굴을 해가지고 물었다.

"그러요."

몸피가 큰 여자는 그에 어울리게 대답하는 태도도 불퉁스러웠다. 여자의 왼쪽볼에는 푸르뎅뎅한 멍이 들어 있었다.

"당신 이름이 뭐야?"

"지집이 무신 이름이 있겄소. 그냥 죽산댁이라 허요."

"어허, 그따위 촌 이름 말고 시집오기 전에 부르던 이름 있을 것 아닌가."

임만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못생긴 얼굴이 더욱 못나 보였다.

"넘 처녀 적 이름 머 할라고 물으요?"

"이봐! 개소리치지 말고 고분고분 대답 못하겠어!"

임만수가 버럭 소리치며 책상을 내리쳤다. 말마다 투덜거리는 것 같은 이 여자의 사투리는 한층 듣기가 싫었다.

"성은 임이요. 이름은 끝순이었소."

죽산댁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중얼 했다.

"이봐, 이봐, 지금 무슨 소릴 씨부리고 있는 거야!"

임만수는 곧 내려칠 것처럼 주먹을 치켜 올렸다.

"워메, 왜 그래쌓소. 조사헐 일이나 조사헐 것이제 넘이 속으로 허는 말꺼정 간섭이요, 간섭이."

죽산댁은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전혀 기가 죽어 있지 않았다.

"뭐야! 간섭?"

마침내 임만수의 주먹이 죽산댁의 볼에서 퍽 소리를 냈다.

"워메, 사람 잡네. 사람얼 때릴 대목에서 때레야제 지금 워째 때리요. 넘 서럽고 눈물나라고 처녀 적 이름은 왜 묻느냐고 속말 혔는디, 고것이 머시가 잘못이라고 사람을 복날 개 패대끼 패요."

죽산댁은 한 대 얻어맞고 나더니 오히려 기가 더 펄펄 살아 올랐다.

"죽이기 전에 아가리 닥쳐!"

임만수는 고함을 치며 책상위에 놓아둔 몽둥이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좋소, 죽이씨요. 빨갱이 예펜네로 이리 끌려댕김서 매타작당허고, 저리 끌려댕김서 매타작당허고, 인자 나도 그리 살기는 징상시럽고 징상시런 년잉께, 죽이씨요, 쥑여! 고 몽댕이로 이년 대갈통얼 팍 깨 쥑여줏씨요."

죽산댁은 자기 저고리를 와득와득 잡아 뜯으며 임만수 앞으로 한사코 머리를 디밀었다. 임만수는, 이것이 예삿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빨갱이물을 먹었다면 일부러 음흉을 떠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성깔머리가 억센 여자일 것이었다. 이런 부류들은 몰려면 반죽음이 되도록 세게 몰아쳐야 하고, 그러지 않으려면 인간적인 체하며 부드럽게 다루어야 했다. 어설프게 하다가는 개망신당하기 일쑤였다.

"이봐, 내 낯짝을 똑똑히 봐. 네까짓 것들 대갈통 박살내기는 식은 죽 먹듯 하는 사람이야. 허나, 여자상대로 곤조통 부리고 싶지 않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고분고분 들어."

임만수는 있는 대로 얼굴을 험악하게 해가지고 이빨로 질겅질겅 씹다가 뱉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되얐소. 그쪽서 존 말로 험사 나도 그리 허겄소."

죽산댁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어젯밤에 염상진이 왔었지?"

"그 웬수 얼굴 못 본 지가 오래요."

"거짓말하지 말어. 본 사람이 있어."

", 참말로. 존 말로 헌다등만 두 마디째에 험헌 소리 혀뿌네. 그리 넘게 짚는다고 웂은 일 있다고 헐 사람 아닝께 그리 허덜 마씨요."

죽산댁은 헛웃음을 쳤다. 임만수는 다시 이것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을 했다.

"어젯밤 총소리가 날 때 어디서 뭘 했지?"

"지름값도 아깝고 혀서 새끼덜 허고 일찍허니 자빠져 잘라고 허는디 총소리가 납디다. 그려서 꼼지락 않고 새끼덜 품고 눠 있었제 뭘혔겄소."

"그게 누구라고 생각했었나?"

"밤중에 서로 총질 험시로 지랄발광허는 것이 순사들허고 빨갱이들 말고 머시가 또 더 있겄소."

"그게 남편일 거라고 생각 안했나?"

"물으나마나헌 소리 아니요. 그리 총질이 심혔는디 대장이 웂을 리가 있었겄소?"

"남편이 숨어들었으면 어쩔려고 했지?"

"워쩌기는 워째라. 내빌나도야제라."

"내빌나도야제라?"

임만수는 떠듬떠듬 되풀이했다.

"으짤 것이요, 명색이 냄편인디."

임만수는 그때서야 그 말이 '내버려 둬야지요'라는 것을 알았다. 임만수가 되풀이한 것은 말을 못 알아들어서였고, 죽산댁은 임만수의 되풀이를 되물음으로 알고 대답을 한 것이었다.

"이봐! 그러면 어떡해."

임만수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음마, 음마, 존 말로 헌다등마 또 번해뿌네."

죽산댁은 째지게 눈을 흘겨댔다. 임만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배짱이 좋은 것인지 모자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빨갱이를 숨겨주면 죄가 된다는 걸 몰라서 숨겨줘?"

"아까 대답 안혔소. 냄편잉께 으짤 수가 웂다고."

"글쎄, 남편이라도 숨겨주면 안 돼. 경찰에 알려야지."

"나넌 그리 못혀라. 빨갱이질허는 것이사 징글징글허제만, 하나뿐인 아그덜 애비럴 워치케 나 손으로 죽게 맹글 것이요."

"죽긴 왜 죽어. 마음만 돌리면 얼마든지 살려줘."

"그 남정네가 사람덜얼 을매나 쥑였는디, 경찰이 무신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랍디여? 고런 사람꺼정 살려주게. 허고, 그 남정네 맘 돌릴 남정네가 아니요."

"이것 참, 그럼, 그런 독종을 숨겨주면 당신 죄가 얼마나 커지는지 알기나 해?"

"그렁께 시시때때로 잽혀와 갖고 매타작당허는 것 아니요."

임만수는 그만 맥이 빠지고 있었다. 도대체 말이 먹혀들지 않는 여자였다.

"당신은 매타작 정도로는 안 되겠어. 빨갱이를 그리 감싸고도는 정신상태가 바로 빨갱인데, 콩밥을 좀 먹어야겠어."

"좋을 대로 허시오. 콩밥 공짜로 얻어묵겄다, 거그 들앉아 있으먼 매타작 안 당허겄다, 나는 훨씬 이문이요."

이것을 생똥 좀 깔기게 독한 맛을 보여? 임만수의 성질이 곤두섰다. 그러나 청년단장 염상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질대로 할 일이 아니었다.

"청년단장과는 어떤 사이지?"

"말허는 투가 다 아는갑는디 멀 헐라고 물으요?"

"고분고분 대답하겠다는 것 잊었나?"

"내 참, 시동상이요."

죽산댁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임만수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시동생 얘기가 나오니까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형 따라서 빨갱이질 안하고, 빨갱이 때려잡는 일 해서 그런가?"

죽산댁은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임만수를 노려보았다.

"순사라고 아무 말이나 씀벅씀벅 허먼 다 말인지 아시요? 그눔은 시동상이 아니라 내 웬수요. 지눔이 나가 빨갱이럴 을매나 싫어허고 치럴 떤지 암스롱도 지눔 낯내고 처신 편허게 허고 살라고 나럴 요 고상시키는 징헌 눔이요. 나야 냄편 하나 잘못 만낸 죄로 으짤 수 웂다쳐도, 지눔이 사람이라먼 어린 조카들헌테꺼정 그리 매정허게 헐라디여, 애비가 빨갱이제 새끼덜이 빨갱이가 아닌디. 지눔은 사시사철 쌀밥만 묵음시로 조카덜이 굶는디도 쌀 한 톨 안 보내는 눔이 바로 그 눔이요."

생전 울지 않을 것 같던 죽산댁이 눈물을 훔쳤다.

"그러니까 염상진이가 공산당을 하지 말았어야지. 자식들 굶겨가며 공산당을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마음만 돌리면 틀림없이 살려줘. 그건 내 목숨을 걸고 보장해. 그러니까 당신이 마음을 돌리게 해."

"말도 마씨요. 쎄가 닳아지는 물건이었으먼 내 쎄는 진작 없어졌을 것이요. 울어도 보고, 빌어도 보고, 싸와도 보고, 벼라별 짓 다 혔어도 소양이 웂었다요. 그 남정네는 공산당에 홀딱 미쳐 뿐 사람이요. 아그덜 애비니께 경찰에는 못 알려주는 것이제만, 냄편으로 정은 다 띤지 오래요."

"당신은 당신 남편이 바라는 공산당 세상이 올 거라고 믿나?"

"지끔 말허고 있는 순사양반언 허깨비시요? 요리 두 눈 똑똑허니 뜨고 막아대는디 워찌 고런 꿈 겉은 시상이 오겄소?"

"아니, 꿈같은 세상이라니! 그럼 당신은 빨갱이 세상이 되길 바라는 빨갱이가 아닌가!"

임만수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말 꼬랑댕이 잡고 사람 왈기지 마씨요. 공산당은 너나 웂이 공평하게 사는 시상 맹근다는 말얼 두고 허는 소리요. 그런 시상이 꿈속에서나 있고, 말로나 있는 것이제 사람이 사는 시상에 워디 있을랍디여. 우리 냄편 따라 공산당 허는 농꾼들도 다 그 말만 믿고 나선 것이제라. 대대로 물리허는 가난에 한이 맺히고, 배운 것 웂이 무식헌 농꾼덜이 고런 조청맹키로 달디단 말에 워찌 귀 솔깃혀지지 않겄소. 우리 남편맹키로 식자깨나 들었다는 사람덜이 가난허고 불쌍헌 사람덜헌테 죄 많이 짓고 있는 것이제라. 그라고 워디 빨갱이 된 사람덜만 귀 솔깃혔을랍디여. 쌔고쌘 가난헌 사람덜언 나라가 금허고 순사가 겁난께 표식 안내서 그렇제 다 귀 솔깃해 있구"

"시끄러, 시끄러!"

임만수가 책상을 쾅쾅 내리쳤다.

"워째 그러시요? 나가 못헐 소리 혔간디요? 순사양반도 시상 속인심얼 형편 그대로 알아야 쓸 것이요. 서럼 중에 배곯는 서럼이 질로 큰 것인디, 풀대죽도 못 묵고 팅팅 부황든 사람덜이 허천나게 많은디, 있는 사람덜언 헛간에 쌀가마니 채곡채곡 쟁게 놓고 떡 해묵고 유과 맹글어 묵고, 요런 시상이 워찌 ……"

"시끄러! 나가, 나가."

임만수는 소리치며 손까지 내저었다. 듣고 있으면 끝도 없이 잔소리가 계속될 것 같았고,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어서 자신이 점점 할 말이 없어질 것 같았던 것이다. 죽산댁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임만수는 그녀의 뒷모습에 눈을 박고 앉아서, 고정감시원을 배치할 것을 결정내리고 있었다.

"대장님, 혹시 손 안 물리셨는게라!"

죽산댁을 심문했다는 말을 들은 염상구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안 물렸으먼 대장님 운수가 좋은 줄이나 아시요. 그 여자 별명이 진돗개요. 경찰이 한 대 갈기기만 허먼 맞물고 뎀비는 여자요. 허 순경은 손꾸락 두 개가 짤릴 뿐혔고, 장 부장은 살점이 한 입 떨어져나갈 뿐 혔응께요."

임만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염상구는 형수를 계속 '그 여자'라고 불렀다. 임만수는 귀에 거슬렸지만 탓하지는 않았다.

"사상은 어떻소?"

"머 사상이랄 것이 있간디요. 냄편이 공산당 허는 바람에 마음고상, 몸고상, 안허는 고상이 웂다본께 빨갱이라먼 치를 떨제라."

"대단한 여잡니다."

"말도 마씨요. 염상진이도 빨갱이 대장 노릇은 요러타께 잘해묵음시롱도 그 여자헌테만은 못 이기요."

"생활은 어떻게 하오?"

"원체 싸납고 억씬께 닥치는 대로 일혀서 묵고 살제라."

"그래 가지고 먹고 살아지겠소?"

"그냥저냥 살겄제라."

"그냥저냥이 아니라 조카들이 굶기도 하는 모양이오. 염 단장의 투철한 반공정신이면 빨갱이집 도와줬다고 안할 테니 조카들 굶기지는 마시오.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

", 무신 소리다요?"

"이따 봅시다."

임만수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재판소에서 경찰서로 연락을 취했을 때는 이미 김범우가 한바탕 매타작을 당한 다음이었다. 몽둥이찜질을 당한 엉덩이의 통증이 심해 주저앉지 못하고 김범우는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두 평 남짓한 방에는 열댓 명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췌하고 두려운 얼굴로 앉아 있었고, 더러는 가늘게 떨리는 앓는 소리를 끊임없이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혐의는 물으나마나 모두 공산주의에 연결되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들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경찰서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유치장은 유치장대로, 사무실은 사무실대로 잡혀온 사람들로 들끓었다. 취조를 하는 형사나 경찰들의 고함소리가 살벌하게 뒤엉켰고 어디선가는 곧 숨 자지러지는 비명이 연속적으로 울렸다. 김범우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경찰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고, 경찰서가 살벌한 폭행의 장소가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싶었다. 어떤 주의의 정치적 실현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기 전에 순천경찰서는 이번 사건으로 기존 경찰의 절반 이상을 잃어야 하는 현실적 피해를 입은 형편이었다. 자신이 학도병으로 끌려가 대일본제국의 승리나 천황폐하의 영광을 위해 총을 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총질을 했듯이, 경찰들도 팽배한 보복감정이 앞서 횡포해지고 잔인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수단이야 어찌되었든 결과는 거창한 명분을 실현시키는데 공헌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봐, 김범우!"

김범우는 소리 나는 쪽으로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불렀으면 대답을 혀얄것 아냐."

한창길의 독기 흐르는 얼굴이 쇠창살에 서너 조각으로 갈라져 소리쳤다.

"왜 그러시오."

김범우는 등을 기대고 선 채 말했다. 꼴도 보기 싫은 작자였다.

"그러먼 그렇제. 지눔이 뽈갱이 사상을 가졌응게 그 좋은 군정청 통역자리럴 마다혔제 무담시 그렸을 리가 있었겄어? 아조 자알 만냈구만. 요 한창길이 매질맛 잠 보드라고잉?"

그 작자는 다짜고짜 매타작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 시건방진 태도 보소? 요리 싸게 나와."

한창길의 태도는 어딘지 아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을 풍겼다. 김범우는 느릿느릿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창살 가까이 갔다.

"김범우, 재판소 정 판사영감허고는 워떤 사이여?"

한창길이 대뜸 물은 말이었다. 정 판사 영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직감적으로 아버지를 떠올렸다.

"모르는 사람이오."

"어허, 워째 뻔헌 거짓말을 허능겨?"

한창길은 어울리지 않게도 눈을 흘겼다. 아까 몽둥이질을 할 때와는 너무나 판이한 얼굴이었다.

"모르니까 모른다고 하는 거요."

"알겄어, 알겄어. 당신은 키도 훤칠허고 인물도 잘나고 다 존디, 사람을 눈 아래로 깔아보는대끼 허는 거만시럽고 잣지받지헌 태도가 글러묵었어. 지끔도 알먼 안다고 앗싸리허게 헐 것이제, 워째 그러냐 그거여."

"도대체 왜 불렀소?"

그의 표변하는 촉각에 비위가 상한 김범우는 쓴웃음을 물었다.

"여그는 방이 너무 좁은께 일로 나와."

한창길은 자물쇠를 땄다. 김범우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방을 나왔다. 방이 비좁은 것은 사실이었고, 그러나 불법적 특혜를 누리는 것 같아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까는 미안허게 되었소. 나는 뽈갱이다 허먼 우리 아부지도 외상 웂은 사람이요. 이해허씨요."

한창길은 복도를 걸어가며 말했다. 어느새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유난스럽게 '뽈갱이'라고 발음하는 말과 '아버지도 외상 웂다'는 말이 잔인스럽게 어울리는 것 같았다. 빨갱이가 왜 그리 싫으냐고 물으려다가 허튼소리가 될 것 같아 김범우는 그만두었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한창길 앞에서는 표나지 않게 걸으려고 했지만 통증과 결림 때문에 다리가 절룩여졌다. 김범우는 얼핏 처남 신석주를 떠올렸다.

"혹시 신석주란 사람을 아시오?"

"신석주? 그런 악질 뽈갱이럴 워찌 아시오?"

복도를 돌아가려던 한창길은 우뚝 멈춰서며 되물었다.

"아는 사람이오."

"워처케 아는 사이요?"

"뭐 그냥 아는 사이요."

김범우는 굳이 처남이라고까지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런 김범우의 태도가 또 못마땅한지 한창길의 입술이 씰그러졌다.

"광주 고법으로 넘어갔소."

한창길은 걸음을 떼어놓으며,

"고런 눔은 딱 총살감인디 처가 덕에 목심 구해 고법꺼정 올라간 거요. 당신허고 워처케 아는 사인지는 몰르지만 고런 눔 가차이 혔다가는 당신도 이문 볼 일 하나또 웂을 것이요."

무척 증오스런 감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 내 처남이오."

김범우는 불쑥 말했다.

"워쩌?"

한창길은 또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김범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이 짙은 의혹을 달고 있었다.

"나도 뽈갱이일 것 같소?"

김범우는 한창길의 눈을 맞쏘아보며 '뽈갱이'에 힘을 주어 말했다.

"허 참, 열 질 물속은 알아도 한 질 사람 속을 몰르는 법잉께. 어서 갑시다."

한창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서류가 될 때꺼정 여그서 있으씨요."

김범우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묵묵히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보다 넓은 방은 아니었다. 사람이 적을 뿐이었다. 김범우는 의식적으로 시야를 좁게 차단시키며 벽 쪽으로 붙어 섰다. 어찌됐든 제각기 죄목을 가지고 갇혀 있는 사람들의 불안스럽고 두려움에 찬 눈길과 마주치는 어색스러운 순간을 겪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범우는 어깻죽지를 벽에 기대고 팔짱을 끼면서 눈을 감았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엉덩이는 화끈거리는 열과 함께 욱신거렸다. 살이 터지지나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동안은 잠도 엎드려서 자야 할 것 같았다.

전에 그랬던 경험이 있었다. 학병훈련을 받는데 추위도 혹독했지만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격심한 훈련에 정량의 식사는 모든 훈련병들을 허기로 몰아넣었다. 어느 날 마구간 청소당번이 되었다. 청소를 하다 보니 한쪽 구석에 붙어 있는 창고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 냄새는 배고픈 속을 동하게 만들었고, 금방 입안에 군침이 괴게 했다. 도대체 무엇일까 싶어 살며시 문을 열어보았다. 둥근 모양의 깻묵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영양식으로 쓰이는 말먹이였던 것이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깨어져 있는 덩어리 중에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에 감추고 태연하게 청소를 마쳤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려보았지만 그것을 먹어치울 장소가 마땅찮았다. 막사로 가지고 갈 수는 없고 ……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변소였다. 변소로 뛰어가긴 했는데, 차마 변소 안에서 깻묵덩어리를 씹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배고픔 앞에서 어줍잖은 인간적 체면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차피 말먹이를 훔치면서 인간은 포기했으면서도. 변소 뒤로 돌아가 깻묵덩어리를 눈물겹도록 맛있게 먹고 있다가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하사관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자꾸 깻묵이 축이 나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네놈이 범인이었다면서 가혹한 매질은 계속되었다. 그 매질 앞에서 처음 한 일이라는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벌써 다른 학병들도 깻묵을 훔쳐 먹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죄까지 다 뒤집어쓰고 매타작을 당했던 것이다. 그 상처로 열흘 이상을 엎드려서 자야만 했다.

그때 많은 생각을 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동물이란 무엇인가. 굶주림 앞에서는 인간은 어디까지 인간일 수 있는가. 동물과 다름은 무엇인가. 시한부적 배고픔도 이리 견디기 어려운데 영속적인 굶주림은 얼마나 큰 형벌인가. 가난한 사람들,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짜여진 사회구조에 얽매여 있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인내심이 강한 것이 아니다. 사회구조룰 장악하고 있는 소수 부류들이 그만큼 철두철미하게 잔인한 것이다. 그런 사회구조는 기필코 바뀌어야 한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염상진을 그리워했었다.

김범우는 다리가 저려와 눈을 떴다. 자세를 바꾸면서 무심코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흠칫 놀랐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그 사람이었다. 언제인가 학교에 초빙되어 와 불교강연을 감명 깊게 했던 송 선생. 그 사람은 참선자세로 앉아 눈을 반쯤 내리감고 있었으므로 이쪽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왼쪽 어깨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미간은 잔뜩 찡그러져 있었다. 그건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표정이었다. 왼쪽 어깨에 무슨 이상이 있는 모양이었다. 김범우는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얼굴이 약간 초췌해졌을 뿐 전에 느꼈던 기품은 그대로 담겨 있었다. 넓은 이마에 굴곡이 유연한 검은 고수머리, 높은 콧날에 얇으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입술, 양쪽 볼의 선이 급하게 이어져 내리면서 합쳐진 매끈한 턱, 지금으로서는 볼 수가 없지만 예리함과 지혜로움이 함께 느껴졌던 눈이었다. 단상에 서 있던 그는 깡마른 체구에 키가 컸었다. 그는 조용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불교를 이야기했다.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불교를, 인생을, 우주의 섭리를 충분히 말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참으로 오랜만에 경이로운 사람을 만나는 신선감을 맛볼 수 있었다.

"선생님, 참으로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 언제 다시 기회를 마련해서 더 들었으면 합니다."

김범우는 굳이 가까이 가서 말했던 것이다.

"좋은 귀를 가져주셔서 고맙군요.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요."

그렇게 헤어졌는데 무슨 '인연'이어서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나게 되는가. 김범우는 반가우면서도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분의 기울어진 어깨와 여기저기 피 얼룩이 묻어있는 옷이 그분이 무슨 연유로 여기에 와 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이 학교를 떠난 다음에 들은 짤막한 이력이 머리를 스쳐갔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고, 선암사의 부주지까지 지낸 대처승으로 나이가 마흔서넛이라고 했다. 대처승이라는 사실과 긴 고수머리와 잘 어울리던 양복차림이 새삼스럽게 살아 올랐다. 김범우는 그 분이 대처승이라는 말을 듣고도 처음 느꼈던 경이로운 신선감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일본 것들이 나라를 골고로도 망칠라고 든다. 인자 스님들꺼정 일본식으로 결혼을 허라고 잡친다는디, 참말로 요 일을 워째야 쓸랑가 모르겄다."

부처님 믿음이 지극하고 스님을 대하는데 정성을 다하는 어머니가 장탄식을 하며 되풀이했던 말을 일찍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범우는 조심스럽게 그분 앞으로 다가갔다. 방안에는 자신까지 여섯 사람이었다. 그분 앞에서 김범우는 잠시 망설였다. 서서 알은 체를 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쪼그리고 앉자니 엉덩이가 당겨 아프기도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세가 어른 앞에서 취할 바도 못 되었다. 차라리 기는 자세를 취하는 게 아픔도 없을 것이고 그분에게 볼기짝을 맞아서 그런다는 무언의 표현도 될 것 같았다. 김범우는 천천히 무릎을 꺾어서 바닥에 대고 두 손으로도 바닥을 짚었다. 그 동작을 취하는데도 결리는 통증이 입을 벌어지게 했다. 김범우는 그분을 바라보았다. 전혀 미동도 없었다. 완전히 시간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범우는 이제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해 주저하고 있었다. 스님인 줄을 몰랐을 때는 자연스럽게 '선생님'이었는데, 스님인 것을 안 지금에 와서는 호칭이 난처해졌다. 그 난처함은 순전히 자신한테서 비롯된 것이었다. 왠지 그분은 '스님'이라고 부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한 종교의 수도자라기보다 그분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고 있고, 가르쳐줄 '선생'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불렀던 대로 '선생님'으로 하자고 김범우는 마음을 정해버렸다. 그래야 그분이 자신을 떠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싶었던 것이다.

"선생님 …… 선생님 ……"

그분의 반쯤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그에 따라 찡그러졌던 미간도 차츰차츰 펴졌다. 그분이 완전히 눈을 떴을 때, 김범우는 예리함과 지혜로움이 함께 느껴졌던 기억 속의 눈이 바로 앞에 있음을 보았다.

"선생님, 저 김범우라고 합니다. , 몇 달 전에 선생님을 순중(순천중학)에서 ……"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이 말했다. 그분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감돌았다.

'좋은 귀를 가져 주셔서 고맙군요' 하던 말의 기묘한 느낌이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는 말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일상적인 냄새가 완전히 제거되어 있는 그분만의 독특한 말이었다.

"선생님 어쩐 일이십니까?"

" …… "

그분은 왼쪽 어깨를 약간 움직이다가 다시 미간이 찡그려지더니,

"업보요."

하고는 아까보다 조금 확실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업보 …… 김범우는 속으로 뇌어보았지만 모를 소리였다.

"선생님, 어깨가 많이 불편하신 모양인데요?"

"성불고행하라는 기회인 모양이오. 선생은 볼기를 상했나 보지요?"

", 약간 불편합니다."

"선생도 성불고행을 하시지요. 육신의 아픔이나 고통은 피하려고 하면 점점 커지는 법이지요. 그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한 고비만 참아 넘기면 그 사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선생도 관세음보살을 계속 염하면서 저처럼 앉아보세요. 순간의 고통은 크겠지만 그 고비를 넘기면 평안이 옵니다."

김범우는 전혀 자신 없는 일이었다. 그분의 어감으로는 자신도 볼기를 맞았는데 그렇게 앉아있다는 뜻이었다. 김범우는 고통을 참아낼 자신이 없으면서도 그분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질러도 흉보진 마십시오."

"관세음보살을 염하십시오. 아픔의 소리가 삭습니다."

", 아픔의 소리가 삭게 해보지요."

김범우는 참 희한한 말도 다 있다 싶어 일부러 되씹어보았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

김범우는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뇌며 조심조심 엉덩이를 바닥에다 대었다.

"으웃, 으음 ……"

김범우는 입을 딱 벌리며 신음을 토했다.

"계속 관세음보살을 염하시라니까요."

속이 화끈거리고, 눈앞에서 별똥이 오락가락하게 아픔이 전신을 뒤흔드는데 그분은 변함없는 차분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관세으음보오살, 관세에음보오살 ……"

김범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신음의 변형이지 염불이 아니었다. 김범우는 이를 앙 다물고 있었다. 한 번 시작한 일이었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허약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어린애 장난은 아니었던 것이다.

"과안세음보오사알, 관세으음보사알 ……"

일단 앉기는 했는데 체중이 가중되자 통증은 더 격화되었다. 김범우의 이마에서는 땀이 삐질삐질 배나고 있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그분의 모습이 흐려 보일 정도로 통증은 격렬했다. 그런데 김범우는 자신이 내뱉는 소리가 아닌, 율조를 띤 관세음보살의 염송을 들었다. 그분이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분이 자신을 부축하고 있음을 김범우는 알았다. 김범우는 그분을 따라 염송을 해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김범우는 그야말로 고통이 가라 앉아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땀 닦으시오."

그분이 수건을 내밀었다. 김범우는 그때서야 땀이 목까지 적시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건 단순한 땀이 아니라 육신의 아픔과 고통이 육신을 빠져나간 흔적이오."

김범우는 그분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가슴을 뿌듯하게 채우고 있는 알 수 없는 충족감의 표현이었다. 그분도 미소지었다.

"선생님, 어깨를 어떻게 다치셨는지요?"

김범우는 남은 죽을 고생시켜가며 주저앉혀놓고는 정작 자기는 삐딱하게 앉아 있는 것은 뭐냐는 짓궂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딘가 많이 이상한 것 같아 염려가 되어 다시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하신 모양인데, 빗장뼈가 부러진 게지요."

"아니! ……"

김범우는 입을 딱 벌렸다. 너무 놀라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바람에 통증이 치뻗어 오른 것이다. 뼈가 부러진 몸으로 저렇게 앉아 있을 수 있다니 …… 김범우는 그분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놈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매질을 했으면 빗장뼈까지 부러뜨렸을까. 아니, 저분은 무슨 잘못을 얼마나 저질렀기에 그다지 심한 구타를 당해야 했을까. 스님의 신분과 공산주의와 ……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선생님, 치료부터 하셔야지요. 제가 여기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선생님이 밖으로 나가실 수는 없더라도 의사를 불러들일 수는 있을 겁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생명 있는 만상은 상처를 입으면, 그것이 치명적이지만 않으면 다 저절로 낫게 되어 있어요. 그런 힘이 생명 속에는 들어있는 것이고, 그게 자연의 오묘한 섭리요."

"그렇지만 잘못 치료되어 불구 ……"

김범우는 그만 말을 중단했다.

"상관없어요. 불구로 나아도 낫긴 나은 거니까요. 촌각을 머물다 가는 게 목숨인데 아무려면 어떻겠소."

옷 속에다 부러진 빗장뼈를 감추고 앉아서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살이 다친 것만으로도 비명과 신음을 참을 수가 없는데 살을 지나쳐 뼈까지 부러진 아픔과 고통은 얼마일까. 그러나 치료받기를 더 권해도 그분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김범우는 알았다.

"선생님,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만, 선생님이 여기에 오신 연유를 들을 수는 없을지요."

"다 부질없는 바람소리 아니겠소?"

그분의 얼굴을 얼핏 스쳐가는 웃음은 정말 쓸쓸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유가 있는 어떤 행동을 하신 것 같은데요."

그때 그분의 눈이 이상한 빛을 쏘아내는 것을 김범우는 느꼈다.

"내 죄목은 빨갱이오."

여태까지의 말이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면 이 말은 현실감이 물씬 풍기는 말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로서는 그분의 죄목에서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지요."

"글쎄올시다. 오해라고 한다면 내 쪽의 입장을 내세우려는 것일 게고, 반대쪽의 입장에서 보면 내 행동은 분명 빨갱이였을 것이오."

"그게 바로 오해 아닙니까."

"그렇지가 않소. 무릇 정치라는 것은 명분이나 합법으로 가장된 인간의 탐욕과 이기의 절정의 표현이지요. 하므로, 그 탐욕이나 이기를 채우는 데 반하는 모든 요소는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시키는 것이 정치생리지요."

"그럼, 선생님께서 정치생리에 반하는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 …… 죄송합니다. 이건 단순한 호기심이나 궁금증이 아닙니다."

"알고 있소. 선생의 진심을."

그분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온화한 것도 같았고 적막한 것도 같았다.

"줄여 말을 하자면 …… 사답(寺沓)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자는 주장을 했던 것이지요."

"……"

김범우는 그분의 눈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거기에 공산주의자일 수가 없는 진실한 한 인간이 있었던 것이다.

"방금 내가 주장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건 잘못된 말이오. 그건 일찍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요. 중생고를 조금이나마 덜어줘야 할 비구 입장에서 지주 노릇을 하고 앉았다는 사실은 죄업 중에 죄업이지요."

"그런데, 경찰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단 말입니까?"

"그 답은 피하겠소. 선생께선 정치의식이라는 게 국가개념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실 분이 아니니까요."

김범우는 아차 싶었다. 우문 중에 우문을 한 셈이었다. 절이라는 또 다른 조직형태가 있을 것이었다. 그때 그의 머리를 스치는 사실이 있었다. 처음 그분의 이력을 들었을 때 '부주지까지 지낸'이라고 했던 말이었다. 그럼, 그분은 현직승려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차마 그 사실까지 물을 수는 없었다.

"절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선생님의 말씀대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개혁 없이는 사람 사는 세상이 될 수 없지요."

김범우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선생도 그런 생각을 지녔으니 여기 오실 밖에요."

그분은 나직한 소리로 웃는 듯하더니,

"세존께서 일찍이 인생 사고를 생, , , 사라 설파하셨는데, 내 주제넘은 소견으로는 '주릴 아' 아고(餓苦)를 하나 더 첨가시키고 싶습니다. 굶주리는 고통,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부처님께서도 인간의 몸을 타고나시어 판단을 하시는 데 환경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인도는 열대에 속하는 땅이라서 최소의 노동을 바치면 절대적 아()는 벗어날 수가 있지요. 땅도 무한히 넓고. 그 대신 기후에 따른 병마는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병고는 있으나 아고는 없는 게 아닌가 합니다. 똑같은 사람끼리 짧은 한평생 살다가면서 누구는 기름지게 먹고 누구는 굶주림에 허덕여야 합니까. 배부른 자에게 이승은 극락일지 몰라도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이승은 지옥입니다. 그리고 굶주리는 자들이 절대다수를 이룰 때 그 세상은 바로 지옥인 것이지요. 이건 인간사의 끝없는 숙제일 것입니다."

김범우는 더 이상 물을 말이 없었다. 마룻바닥을 내려다본 채 그분은 이런 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골똘히 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다음날 오전에 풀려나왔다.

"선생님, 저는 나가게 되는 모양입니다. 건강 살피시고, 꼭 또 뵙게 될 것입니다."

김범우는 '뵙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않았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요."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웃음이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 그 웃음의 밝음이 순전히 자신이 풀려나는 것을 위해 보내는 그 분의 마음인 것을 김범우는 알고 있었다.

 

 

18. 수혈

정현동 사장은 잠이 멀어지는 밤을 연거푸 보내고 있었다. 먹구름처럼 밀려드는 칙칙하고 무거운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언가 흉조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함도 함께 섞여 있었다. 원인 모를 찬바람이 섬뜩하게 가슴을 훑고 지나가 부르르 몸서리치며 걸음을 멈추는가 하면, 설핏 잠이 들었다가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거나 빽빽한 탱자나무 사이에 끼여 수없이 많은 가시에 전신을 찢기는 가위에 눌려 벌떡 일어나 앉고는 했다. 어떻게 간추릴 수 없도록 산란한 마음이었다. 그 원인을 찾자면 너무나 자명한 것인지도 몰랐다. 모든 일의 발단은 큰아들 하섭의 좌익활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일로 야기되는 여파는 결코 간단할 수가 없었다. 경찰서에서 풀려나려고 얼떨결에 양조장의 재산권 반을 최익승에게 빼앗겼고, 그 억울함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강압적으로 토벌대 후원회장이란 같잖은 감투를 쓰게 되어 어처구니없는 돈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아리고 쓰린 속은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는 지경이지만 그래도 그 선에서 일단락 되어준다면 그 정도의 재산손실쯤 깨끗하게 잊을 수도 있었다. 목숨과 바꾸었다고 크게 생각하면 그다지 억울할 것도 없는 재산이었다. 그러나 형편은 그렇지가 못했다. 큰아들이 생각을 바꾸지 않고 좌익에 계속 미쳐있는 한 앞으로도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정 사장의 불안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당장 공산당을 때려치우면 그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 소원은 하면 할수록 허망하고 공허할 뿐이었다. 자취를 감추어버린 큰아들을 어디서 잡을 수도 없는 일이고, 설령 잡는다 해도 큰아들은 이미 애비의 호통도 애원도 듣지 않을 것이 뻔했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로다, 웬수.

정 사장은 다 팔자소관이라고 체념을 씹으며 한 가지 방안을 강구했다. 또 닥칠지 모를 신변의 위험이나 재산상의 손실을 피해 벌교를 뜨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방안을 세우고 나자 불안감은 한층 심해졌다.

어느 지방으로 가야 할 것인지,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 ……

이런 구체적인 생각과 함께 그의 가슴으로 밀려든 것은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과 정든 땅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운 우수였다. 이런 감정들이 뒤섞여 그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가기만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잠을 설쳐가며 미적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미적거릴수록 축나는 것은 재산뿐이었다. 토벌대라는 것이 가당찮게도 본부를 여관에다 정해놓고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 비용을 다 도맡다시피 해야 할 판이니 토벌대가 앞으로 얼마동안이나 머무르게 될지 막연한 형편에 재산피해가 엄청날 것은 자명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정 사장이 생각해낸 곳은 순천과 광주였다. 이것저것 비교를 하다가 먼저 순천을 지워버렸다. 두 자식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 말고도 순천은 광주보다 익숙한 땅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이 영 마음에 걸렸다. 첫째는 빨갱이문제로 피해가는 입장에서 이번 사건의 중심지가 바로 그곳이라는 점이었고, 둘째는 순천에는 타관 사람들이 돈푼깨나 들고 들어와서 꼭 맨주먹으로 떠나야 하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원래 '순천'이란 이름은 그 지세가 억센 탓에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고 '하늘의 힘으로나 순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붙여진 것이라 했다. 정 사장이 마음에서 순천을 지운 것은 첫번째 사실보다는 두 번째 사실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 있는 판에 굳이 그런 재수 없는 땅으로 찾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 것은 다 실없는 말이고 미신이라고 묵살할 만한 힘이 정 사장에게는 없었다. 그는 점이나 굿을 믿는 편이었다. 그래서 사업번창을 비는 재수굿을 일 년에 두 차례씩 꼭 치르고는 했다. 순천을 지우고 나니 더 고려할 것도 없이 광주가 남았다. 광주, 광주 …… 정 사장은 몇 번이고 뇌어보았다. 순천에 비해 너무 낯설고 먼 땅이었다.

빌어먹을, 기왕 타관살이를 시작할 바에야 서울로 가버릴까?’

얼핏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 사장은 이내 기가 죽고 말았다. 천리 밖이라는 거리감과 함께 오갈들던 서울 거리가 떠오르며 겁부터 밀려들었다. 서울은 어쩌다가 구경이나 갈 곳이지 처자식 끌고 찾아갈 땅이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아무리 돈을 가졌다 한들 말부터 생판 틀린 그 정신없는 도회지에서 생활의 기틀을 잡을 자신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광주에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지만 친동생이 살고 있고, 광주 정도라면 그런대로 자리 잡고 살아질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벌교만한 데가 있으랴. 정 사장은 광주를 마음속으로 정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반석처럼 튼튼하게 잡혀있는 기반, 어디를 가나 당당하게 받던 사람대접, 그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몹쓸 놈이 어쩌자고 공산당물은 들어가지고 …… 초장에 뿌리를 뽑았어야 하는 건데 …… 대학을 서울로만 보내지 않았더라도 ……

수십 번 되풀이한 후회와 회한이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 그놈이 아니었더라면 염상진이란 놈 손에 죽지 않았으리란 법이 없지.’

정 사장은 큰아들 하섭에게 쏟아지려는 원망과 미움을 애써서 막아냈다. 사실 큰아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죽인 염상진의 손아귀에서 무사하게 빠져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죽은 사람들 중에는 재력으로나 읍내 영향력으로나 자신만 못하지 않은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끼여 있음을 상기하면 정 사장의 등골에는 새삼스러운 냉기가 서리는 것이었다. 세상에 제아무리 귀하고 소중한 것이 있다 한들 목숨보다 더한 것이 있으랴 싶어지면서, 큰아들 하섭이가 효도를 해도 큰 효도를 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기도 했다.

"정 동무만 아님사 당신 피도 이 대통에 담았을 것이여. 아들 덕 톡톡허게 본 줄이나 알고 앞으로 회개허고 우리 혁명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얄 것이요."

스물네댓이나 되었을까, 낯이 익으면서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 젊은이는 방금 대밭에서 쳐가지고 나온 것처럼 진초록빛이 선명한 대창을 꼬나들고 잔인스럽게 말했던 것이다. 그 청년의 증오에 찬 눈빛과 진초록빛 대창은 무서운 살기를 띠고 있었다,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장애로 인해 대통에 피를 담지 못하게 된 것을 그 젊은이는 억울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간담이 얼어붙는 끔찍한 기억이었다.

봉황의 꼬리보다는 닭 볏이 낫고, 용의 꼬리보다는 뱀 대가리가 낫다고 했다. 그건 분명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태평세월일 때 맞는 말이었지 요새 같은 난세나 뒤숭숭한 세월에는 맞는 말이 아니었다. 봉황의 꼬리요, 용의 꼬리가 되는 것이 난세를 무사히 살아내는 방법이라 싶었다. 벌교에서 닭 볏이고 뱀 대가리로 주목받고 위험을 당할 것이 아니라, 광주에 가서 봉황이나 용의 꼬리가 되어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한 것임을 정 사장은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 결론으로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은 시작되는 것이었다. 재산 처리문제가 그것이었다. 정 사장의 고심은 현실감을 띠고 심각해졌다. 양조장과 농토를 제 값을 받으면서도 신속하게 처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던 까닭이다. 농토는 몰라도 양조장만은 눈독 들이고 군침 흘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수두룩했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이번에 황천길로 가버린 것이다. 그래도 은밀하게 사람을 찾아보면 양조장 처분은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워낙 돈 찍어내듯 하는 독점 장사가 아닌가. 문제는 농토였다. 토지개혁이다 뭐다 해서 날이 갈수록 흉흉한 소문이 무성해져 땅 많이 가진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판에 느닷없이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빨갱이들의 적으로 몰린 것이다. 상황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어 있었다. 농토를 제 값 받고 처분하기는 어렵게 된 형편이었다. 세상이 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러나 형편이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소작을 부쳐먹고 있는 것들은 가당찮고도 버르장머리 없게도 남의 농토를 공짜로 삼키려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빨갱이 추종세력을 막고 절대다수 국민들의 불만요소를 없애기 위해 농지개혁을 서두르게 되리라는 새로운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거기다가 타관살이를 떠나는 입장에서 믿을 것도 돈이요, 힘이 되는 것도 돈뿐이었다. 양조장만을 처분한 돈으로는 아무래도 자신감이 서지 않았다. 최익승에게 양조장의 재산권 반을 빼앗긴 것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하게 정리해버렸다.

"양조장 공동소유권에 대한 서류는 다음에 내려와 작성하도록 합시다. 지금은 내가 너무 바쁘니까. 허허허허 ……"

본 사람도 들은 사람도 없이 그때 방안에는 단 둘뿐이었다. 최익승 제놈이 국회의원이란 권한 가지고 남의 생떼같은 재산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먹어치우려고 하는데 어림없는 수작이다. 벌교바닥에 “?살면 또 모를까 벌교바닥을 떠나는 마당에 팔아치우면 그만이지 제놈이 어찌할 것인가. 새 주인한테 권리주장을 해? 무슨 근거가 있는가. 나한테 따지러 와? 잡아떼면 그만이다. 제놈의 권한이 미치는 선거구를 벗어났는데 제놈이 어찌할 것인가. 정 사장은 통쾌하게 속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어이 보소. 어디 있능가아!"

정 사장은 목청을 돋우어 아내를 불렀다.

"예에, 여그 있구만이라."

황급한 목소리와 함께 대청마루를 콩콩 울리는 귀익은 아내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 사장은 느리게 일어섰다.

"나 광주 좀 댕겨올라니께 양복 꺼내소."

정 사장은 방으로 들어서는 아내에게 일렀다.

"세상할라 시끌시끌헌디 무신 일 있으신게라?"

낙안댁은 의아스런 눈빛으로 그러나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 것 웂네. 놀로 댕기는 것 아닝께."

정 사장은 무뚝뚝하게 내뱉았다. 그건 대답이 아니라 아내의 귀찮은 물음을 막으려는 태도였다. 평소에도 아내에게 재산이나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성미가 아닌 정 사장이었지만 이번 일은 더구나 비밀리에 처리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낙안댁도 더 입을 열지 않고 장롱에서 서둘러 양복을 꺼냈다. 남편이 요즘 잠을 설치는 것과 광주엘 가는 것이 서로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로만 눈치로 짐작하고 있었다.

"오래 걸리실랑가요?"

"내일 오정이면 내려올 것이네."

정 사장은 여전히 무뚝뚝했고, 낙안댁은 더 물을 말이 없었다.

"저어 …… 실례허겄는디요, 아짐씨 기신가요?"

밖에서 조심스럽고 낮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낙안댁은 무심코 방문을 열었다. 댓돌 아래 마당에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은 소화가 소복차림으로 부끄러운 듯 서 있었다. 낙안댁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하섭이가 왔구나, 하는 반가움과 함께, 남편이 알아서는 안 되는데 하는 염려가 교차했던 것이다. 반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슨 눈짓을 보내 피하라고 할 수도 없어서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남편이 헛기침을 하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어서 올라오시게."

낙안댁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소화를 부른 것처럼 꾸미기로 했다.

"아니, 워쩐 일이신가?"

마루로 나서던 남편이 금방 소화를 알아보고 한 말이었다. 소화는 옆으로 얼굴을 돌리며 표나게 당황한 몸짓을 지었다.

"멋 잠 의논헐 것이 있어서 지가 불렀구만이라."

낙안댁은 재빨리 말했다. 정 사장은 알겠다는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마루를 내려섰다. 낙안댁은 남편을 뒤따라 댓돌 위의 고무신에 발을 꿰며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가슴을 눌렀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지숙은 창밖을 망연히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텅 빈 교실의 고요와 그녀의 하염없는 앉음새는 하나로 어우러진 침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은 조용한 앉음새와는 달리 어지러울 정도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엉키고 있었다. 앓는 중에 끌려간 안 선생의 모친,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안창민, 처음 맞대면한 염상진, 사회주의의 실천, 인민해방을 위한 정열, '부를 때까지 깊이 잠적하라!' 서상철 선생의 냉엄한 명령 ……

이지숙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많은 생각 중에 하나만을 추려냈다. 안창민의 모친을 위해 경찰서장이나 토벌대장을 찾아가야 할지 어떨지를 결정해야 했다. 병자라는 이유를 내세워 석방을 사정하면 그들이 들어줄 것인가. 어제는 면회를 갔다가 퇴짜를 맞았다. 그건 충성스런 부하들이 한 짓이었다. 경찰서장이나 토벌대장이면 명색이 ''자리를 지키고 앉은 자들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지숙의 뇌리에는 안창민 모친의 가녀린 체구가 괴롭게 박혀 있었다. 몰매를 맞아 다친 몸으로 끌려가 또 무슨 고초를 당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별일이 없다고 해도 그분의 건강으로는 찬 마룻바닥에서 이틀 밤을 새운 것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되는 셈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지숙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안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된다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교실 문을 옆으로 밀고나오는 이지숙의 눈앞에는 혼수상태에 빠진 안창민의 모습이 어릿거리고 있었다. 안타까운 아픔이 온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전명환 원장한테서 학교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저께 아침이었다.

"급히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곧 좀 병원으로 와주셨으면 하는데요."

이쪽을 확인하고 나자 전 원장은 이 한마디만을 하고는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 상투적인 인사말인 '전화 끊겠습니다' 하는 말조차 없었다. 안창민의 모친 치료와 간호를 하느라고 이미 구면이고 연장자라고 하더라도 그런 식의 전화는 분명 결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 원장의 어조는 평소와 다름없이 점잖고 유연했다. 서두르는 기색은 전혀 없었고, 이쪽을 무시하는 느낌은 더구나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전화가 끊어졌는데 어디로부터인지 모르게 음산하고도 차가운 바람이 전신을 휩싸면서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순간에 고막을 울려온 것은 지난밤의 총성이었다.

안창민이 사고를 당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러나 너무나 명확하게 뇌리에 박혀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그 길로 병원으로 내달았다. 예감은 적중하고 말았다.

"혼수상태는 과다한 출혈이 원인입니다. 수혈을 하자 해도 병원에 보관중인 피가 없고, 이 선생님과는 어떤 사이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 선생 모친을 간호하시는 것만 보고 다급해서 전화를 드린 것입니다. 결례가 아닐지 ……"

이지숙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꼭 맞잡고 앉아 있었다. 까닭 모르게 전신이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창민의 모친을 간호하자고 작정했을 때도 그를 마음이 끌리는 이성으로 생각했었는지 아니면 이념의 동지로 생각했었는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에 쫓기며 병원으로 달려올 때도 그 구분은 모호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의 부상과 수술, 열 시간이 넘는 혼수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지는 자신의 마음을 비로소 느끼고 있었다. 허물어지는 마음의 그 깊은 곳에 색채를 알 수 없는 투명한 구슬이 들어 있었다. 그 구슬은 이념과는 별개의 생명이었다.

"연락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피를 수혈해주십시오."

이지숙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했다. 의사에게 눈물을 보이는 부끄러움을 견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혈액형이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혈액형 검사부터 하시지요. 안선생은 A형이던데 ……"

전 원장은 말끝을 흐리며 일어났다. 이지숙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치듯 했다.

"선생님, 저도 A형인데요!"

"? 그러세요?"

전 원장이 반색을 하며 돌아섰고, 이지숙의 눈에서는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잘됐습니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검사는 다시 해보도록 하지요. 금방 끝나니까요."

전 원장은 어색하면서도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 뒤를 이지숙은 천천히 따라 걸으며 생각하고 있었다.

소문대로 훌륭한 의사로구나.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환히 알면서도 환자로 받아들이다니. 그러면서도 불안하거나 초조한 기색 하나 없이 어쩌면 저렇게도 편안할 수가 있을까. 더없이 고맙고, 그리고 훌륭한 분이다.’

피를 뽑는 동안 이지숙은, 원장님 저는 건강합니다. 하는 말을 두 번이나 되풀이했다. 전 원장은 아무 대꾸 없이 온화한 웃음만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잠시 안정을 취하라고 했지만 이지숙은 그대로 전 원장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여린 현기증이 얼핏 스치는 것도 같았고, 비릿한 내음이 코끝에 감도는 것도 같았다. 그까짓 피 좀 뽑구선 …… 그녀는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안창민은 흡사 죽은 것처럼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출혈을 심하게 해서 그런지 얼굴은 창백했고, 안경이 벗겨진 두 눈은 슬프도록 움푹 꺼져 보였다. 이지숙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짚고 앉아 안창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안쓰러움과 슬픔으로 차츰차츰 젖어들고 있었다.

어디서 총을 맞고 어떻게 병원까지 왔을까. 부상을 입고 헤매다가 만약 잡혔더라면 …… 아아 ……

이지숙은 그만 입술을 물며 시선을 방바닥으로 옮겼다. 가슴 한복판으로 싸늘한 전율이 흐르며 방바닥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는 병약한 것 같은 모습으로 전혀 말이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붉은 완장을 찼던 그 용맹스러움으로 총상을 입고도 고통을 이겨내며 병원을 찾아와 이렇게 엄연히 내 앞에 있지 않느냐. 이지숙은 감상으로 치우치는 자신을 꾸짖고 있었다.

'혁명은 피다.' '혁명은 피를 흘리는 희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상철 선생의 쟁쟁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지숙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안창민의 모습이 점점 크게 확대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진정한 혁명전사, 참다운 혁명전사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벽에라도 좀 기대앉으시지요. 이 피를 수혈시키고 나면 효과가 빠를 겁니다."

전 원장의 말에 이지숙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거꾸로 매달린 병에 담긴 피는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핏빛은 탁하게 검붉었다. 손가락 같은 데를 살짝 베었을 때 나오는 그 고운 선홍빛이 아니었다. 끈적거리는 느낌의 그 검붉은 색깔, 생명을 담은 액체답게 다량의 피는 색깔마저 진하고 무겁고 엄숙했다. 이지숙은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피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의 일부가 안창민의 생명과 섞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건 위급한 생명을 구하기 위한 단순한 헌혈과 수혈일 수가 없었다. 그의 몸속에서 하나가 되리라. 내 생명으로 그의 생명을 깨우고,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와 하나로 있으리라. 그녀는 냉엄한 마음으로 스스로의 가슴에다 정질을 하고 있었다.

염상진을 만난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일단 학교로 돌아갔다가 퇴근을 하는 길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안창민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도저히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전 원장에게 병실을 지키게 해달라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러시지요. 환자를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전 원장은 선선하게 허락했다. 어려워하는 이쪽 입장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뿐 중환자 옆에 사람이 붙어 있어서 도움 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아홉시가 가까워서였다. 원장이 부른다는 전갈을 받고 간호원을 따라 갔다. 간호원이 안내한 방은 자신이 오전 중에 피를 뽑았던 바로 그 방이었다.

"들어오시지요."

발소리를 들었는지 전 원장이 먼저 문을 열고 맞이했다.

무심코 안으로 들어서던 이지숙은 주춤 멈춰 섰다. 아까 자신이 누웠던 진찰대 위에 한 남자가 누워 피를 뽑고 있었다.

"두 분 서로 인사하시지요."

전 원장이 나직하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 선생님. 저는 염상진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누운 채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지숙은 그가 분명 염상진인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미 먼발치로나마 익히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가슴속에 쌓여있던 의혹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부상자를 버리고 도망을 갔단 말인가?’

그런 의혹에 하루 종일 시달렸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이지숙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을 뿐 눈길은 그대로 염상진에게 보내고 있었다.

"이 선생께서 하신 일 원장님 통해서 다 들었습니다. 안 동지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염상진은 전 원장을 의식해서 '동무' 대신 '동지' 라는 말을 썼다.

"……"

이지숙은 또 아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염상진은 위원장의 입장으로 감사를 표하는지 모르지만 그녀 자신이 한 일은 조직과는 아무 상관없이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염 선생이 O형이라서 수혈이 가능하게 되었지요."

전 원장은 혼잣말 하듯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이지숙은 얼른 대꾸할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

"이 선생께서는 그렇게 빨갱이들을 돕다가 혹시 발각될지도 모르는데, 두렵지 않습니까?"

이지숙은 염상진이 질문하고 있는 외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간파하고 있었다. 행동의 동기를 알고 싶어함과 동시에 정체를 파악하려 하고 있었다. 이지숙은 굳이 이 기회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안창민과는 하나이기를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까닭이었다.

"혹시 서상철 선생님을 아시는지요?"

"아니, 광주서중의?"

염상진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지금 피를 뽑는 중인데 충격이 가해지면 곤란할지도 모릅니다. 그대로 눠 계시지요."

이지숙의 음성은 침착하고도 냉정했다. 냉기가 흐르는 얼굴도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럽시다. 헌데 그분과는?"

이지숙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염상진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고, 눈에는 이상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조직의 일원입니다."

"……"

염상진과 이지숙의 거센 눈길은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감이오. 그 동안 협조가 없었다니."

"저는 서상철 동무의 지시만 받습니다."

어느덧 '선생님''동무'로 바뀌어 있었다.

"그럼, 최근에 보이고 있는 협조도 그 지시에 따른 것이오?"

"그렇진 않습니다. 그 정도는 자의로도 할 수 있는 협좁니다."

"좋소. 어쨌든 반갑소."

염상진은 고개를 돌렸다. 광주지역에 살면서 서상철 선생한테 이념교육을 받았다면 정신무장은 제대로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서상철은 이미 교직을 떠나 지하로 잠적한 상태였다. 해외 어딘가에 피신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던 박헌영 동지가 해방과 함께 광주 벽돌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은신투쟁을 계속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사실은 모든 동지들에게 경이였고 충격이었고 활력이었다. 서상철은 바로 그때에 부각된 존재였다. 조직만 바꾸게 한다면 이지숙은 쓸 만한 일꾼이 되리라 싶었다. 서두르지 말고 안창민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염상진은 허전하게 비어 있던 가슴 한구석이 비로소 뿌듯하게 채워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끝까지 꺾이지 않을 듯한 그 매서운 눈빛과 거의 여자를 느낄 수 없도록 냉정한 태도가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문기수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딸 정님이를 입산시킬까 했던 그 내키지 않는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 그는 무엇보다 마음 개운했다.

"맥박이 많이 안정되어 갑니다."

그동안 병실을 다녀오는지 전 원장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혼수상태가 끝나고 나면 앞으로 얼마나 걸리게 될까요?"

염상진은 천장을 올려다본 채로 물었다.

"다행히 관통상이 아니고 뼈를 상하지도 않았으니 회복은 빠를 겁니다. 그러나 상처가 아무는데 최소한 열흘, 자유로운 기동까지는 한 달 가까이 걸릴 겁니다."

염상진은 한숨이 터지려는 것을 얼른 억제했다. 열흘, 토벌대까지 진을 치게 된 적지의 위기상황에서 열흘은 너무나 긴 기간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안 동지의 입원 사실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는지요?"

염상진이 전 원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여기 계신 두 분과 저와 간호원이지요."

"저어 …… 간호원은 믿을 만한지요?"

"그 점 염려 안하셔도 좋을 겁니다. 자기 나름의 직업의식이 있는데다 자기 보호 본능도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염상진은 더 말이 없었다.

 

이지숙은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장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이지숙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말허리를 잘랐다.

"그 문제라면 토벌대장을 찾아가시오. 나하고는 상관없는 문제요."

이지숙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북국민학교로 토벌대장을 찾아갔다. 토벌대장을 만나기까지는 경찰서장을 만나는 것보다 몇 갑절 힘이 들었다. 교문에 선 보초들이 막무가내로 떼밀어냈던 것이다. 토벌대장이 있는 교실 문을 밀고 들어서던 이지숙은 감정이 멈칫하는 것을 느꼈다. 먼저 눈이 마주친 남자, 그는 청년단장 염상구였던 것이다. 만약 나를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일었다. 그러나 이지숙은 전혀 동요됨이 없이 다소곳한 몸짓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어느 분이 토벌대장이신지요?"

이지숙은 일부러 그렇게 물었다. 염상구라는 존재를 전혀 모른 체함으로써 혹시 그가 가지고 있을지 모를 자신에 대한 기억을 흐려놓기 위함이었다.

"나요, 왜 그러쇼."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지숙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허리가 반으로 접히도록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 얌전한 태도와 어울리게 목소리도 나긋하고 고왔다.

"거 뭐 …… 무슨 일이쇼?"

뜻하지 않은 절을 받은 탓인지 토벌대장은 약간 당황스런 기색을 드러냈다.

"저어 …… 대장님께 긴히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 ……"

이지숙은 더 여린 목소리로 주저하며 염상구 쪽을 힐끗힐끗 곁눈질했다. 몸짓까지 곁들인 그 곁눈질은 염상구를 물리쳐 달라는 의사를 상대방에게 여실히 전하고 있었다. 토벌대장은 자신도 모르게 염상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만 찔끔해지고 말았다. 염상구는 잔뜩 의혹에 찬 얼굴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느낌이 이상해진 토벌대장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며 불쑥 말했다.

"상관없소. 용건을 말하시오."

이지숙은 낭패감을 느꼈다. 한껏 연약한 여자냄새를 풍겼는데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염상구가 무슨 눈짓이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염상구 쪽을 돌아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까부터 염상구의 시선이 닿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몸의 왼쪽부분이 전부 스멀거리는 것 같았는데, 다시 염상구를 의식하게 되자 그 스멀거림은 짜릿짜릿한 자극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 망설이거나 주저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의심을 받거나 수상하게 여길 염려가 있었다.

", 안창민은 저의 이종사촌 오빱니다. 오빠의 죄는 알고 있습니다만, 늙으신 이모님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모님은 며칠 전에 젊은이들한테 폭행을 당해 앓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병환이 심하신 데다 다시 이곳에 오셨으니, 너무 걱정이 되어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대장님께서 선처하시어 이모님을 모셔가게 해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이지숙은 미리 준비했던 말을 침착하게 마쳤다.

"빨갱이 오빠를 둬서 그런가 말이 아주 청산유수로군."

토벌대장은 피식 비웃음을 날리고는,

"그런 건이라면 당장 돌아가시오. 조사가 끝나기 전에는 내 어머니라도 풀어줄 수 없는 일이니까."

언성을 높인 말을 끝내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지숙은 머뭇거렸다.

"가요! 돌아가 기댜려요."

토벌대장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이지숙은 그때야 돌아섰다. 염상구는 이지숙의 뒷모습에 고약스런 눈길을 보낸 채 계속 기억 속을 더듬고 있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어디서 보았을까. 분명히 기억에 있는 얼굴인데, 도대체 누굴까.’

알 듯 알 듯 하면서도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여자를 보자마자 시작된 고심이었다.

 

보리밥에 고구마가 듬성듬성 섞인 저녁밥을 구산댁은 반 정도밖에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았다. 다시 잡혀 들어간 딸 걱정에 밥맛을 잃은데다가, 기가 죽어 눈칫밥을 얻어먹고 있는 두 외손자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 싶었던 것이다. 구산댁은 옆에 앉은 아들의 눈치를 흘깃 살피고는 게걸스럽게 밥을 퍼 넣고 있는 친손자와 외손자 셋의 밥그릇에 밥을 똑같이 나눠주었다.

"끼니때마동 그러다가 엄니 병나겄소."

아들이 쳐다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통 입맛이 웂응께 워쩌겄냐."

구산댁은 궁색스럽게 대꾸했다. 아들이 더 말없이 무김치만 와삭와삭 씹어대는 소리가 말보다도 더 눈치가 보였다. 핏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외손자는 위해봤자 디딜방아 절구공이라는 말이 있지만, 제놈들이 커서 외할머니를 디딜방아 절구공이처럼 인정사정없이 대한다 하더라도 당장 아프고 쓰린 마음이 질정없이 쏠려가는 것이야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지 미처 두 달이 못되었는데도 흰쌀밥은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보리에다 고구마까지 섞어야 했다. 그런 밥이나마 배불리 먹일 수 없는 것이 구산댁으로서는 마음 아플 뿐이었다. 눈칫밥이라는 것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배가 고픈 법이었다.

"워째, 길남이 에미 소식 잠 들었냐?"

구산댁은 아들이 숟가락을 놓기를 기다려 어렵게 물었다.

"미친 눔덜이 무담씨 되잖을 쌈얼 먼첨 걸어왔는디 토벌대가 쉽게 풀어주겄소? 처자석덜 녹아나는지 몰르는 넋나간 미친 눔덜이 그눔덜이요."

구산댁은 괜히 말을 물었다 싶었다. 아들이 하는 욕은 바로 제 매형에게 하는 욕이었던 것이다.

"잊어뿔고 기둘리씨여."

아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다 어두웠는디 워디 갈라고?"

"오서방이 보자니께 가봐야제라."

구산댁은 가슴이 섬뜩해지는 걸 느꼈다.

"무슨 일 있간디?"

구산댁은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심심헌께 불르는갑소."

"댕게오니라. 영 늦으먼 아조 자고 와뿔고."

한동네라고는 하지만 밤늦게 다니다가 무슨 변을 당할지 몰라 구산댁은 그렇게 말했다.

아들이 방을 나가자 구산댁은 가느다란 한숨을 쉬며 담뱃대를 끌어당겼다.

'오 서방'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죄어드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그가 주인도 아니고 마름일 뿐인데도 그렇게 살아오기를 평생을 한 것이었다. 마름이라는 것이 도움을 줄 순 없어도 해코지를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오 서방이 아들을 부른 것은 보나마나 뻔한 것이었다. 제가 이기게 되어 있는 화투판을 벌여놓고 술잔이나 뺏어 먹으려는 수작일 것이다. 작인은 뼈 빠지게 농사지어 지주한테 바치고, 마름한테 뜯기고, 평생 그 꼴을 면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집은 나선 서인출은 무거운 마음으로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빨갱이질을 하는 매형이야 진작부터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누님의 일이 걱정이었다. 빨갱이를 한 집안에는 새해부터 소작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두 조카들을 데리고 누님이 살아갈 길은 막막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매형은 모두 공평하게 잘사는 세상 만들겠다고 십년 세월을 허송하더니, 결국 자기 아버지 잡아먹고 처자식까지 굶어죽을 길로 몰아넣은 셈이었다.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자라면서 오손도손 주고받은 정을 생각하면 누님이 그렇게 가엾을 수가 없었고, 매형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서인출은 오 서방네 집 앞에 이르러 담뱃불을 껐다. 그리고 누님의 생각도 털어버렸다. 형편이 되어가는 대로 두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동평 아재 ……"

"누구당가?"

"인출이구만요."

"어이, 왔능가. 종연이도 왔응께 아랫방으로 들소. 나 얼렁 밥 묵고 나갈 팅께."

"알겄구만요."

서인출이 돌아서는데 마구간 옆에 달려 있는 방문이 열렸다. 희미한 등잔 불빛과 함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동상 오는가?"

불빛을 등지고 앉아 얼굴이 보이지 않는 김종연이 먼저 말을 던져왔다.

"어이, 예의바르시. 동상이 먼첨 와서 그러크름 성님을 기둘려야 허는 법이시."

서인출은 맞받아서 농담을 던졌다. 두 사람은 동년배였다.

"점잖찮게 멀 그리 묵어싼가? 밥상 물린지 을매나 됐다고."

서인출은 방으로 들어서며 무언가를 우적우적 씹고 있는 김종연의 엉덩이를 가볍게 찼다.

"묵고 잡아 묵는 것이 아니시. 약 되라고 묵는 것이제."

김종연의 손에는 반 가까이 먹어치운 무가 들려 있었다.

"무시가 약은 무슨 약."

서인출은 구들이 울릴 정도로 아랫목에 몸을 던져 앉으며 김종연을 치떠보았다.

"어허, 동상은 역시 무식허네그려. 요 무시가 속 답답허고 소화 안되는 디는 질이시. 요것얼 묵고 트름 서너 분만 혀불먼 속이 씨원해져뿌네. 동상도 묵어볼랑가?"

김종연이 무를 내밀었다.

"와따, 부잣집이라서 그런지 겨울이 당아 멀었는디 방이 쩔쩔 끓네. , 저 고구마도 굉장허시."

서인출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진심이었다. 마름의 집답게 아랫목은 따끈따끈했고, 윗목에는 싸릿대를 엮어 갈무리 해둔 고구마가 방을 거의 반이나 차지하다시피 한 채 천장 가까이까지 쌓여 있었다. 고구마의 눌리는 무게로 중간쯤이 불룩 튀어나온 싸리대울을 멍하니 건너다보며 인출은, 저것이 도대체 몇 가마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정도면 매일 세 끼를 고구마만 먹어도 내년 삼월까지는 넉넉하겠구나 싶었고, 겨우 방구석을 채우고 있을 뿐인 자기네 집의 고구마가 얼핏 떠올랐다.

"멀 그리 보는감? 고구마 첨 보는 것이여?"

김종연이가 서인출의 어깨를 툭 쳤다.

"에라 몰르겄다. 담배나 꼬실리자."

서인출은 아까 불을 꺼서 귀에 꽂아두었던 꽁초를 빼들었다.

두 사람보다 서너살 위인 유동수가 나타나고, 끝으로 중년나이의 장칠복이가 구부정한 허리로 방을 들어서서, 모인 사람은 모두 다섯이 되었다.

"다 저녁들 자셨는가?"

마음 오동평이 끄윽, 트림을 하며 말했다. 네 사람은 제각기 어물어물하며 대답을 대신했다.

"머 특별난 일이 있어서 만내잔 것이 아니고 추수 다 끝내불고 난께 영판 짭짭혀서(심심해서) 워디 살겄드라고? 집구석에 있어봤자 그렇고, 지름값 애낄라고 일찍 이불 피먼 마누래 속곳만 더럽히고. 아니, 마누래 속곳 더럽히는 것으로만 끝나먼 좋게? 재수웂으먼 믹여 키우기 심든 새끼가 불거지제. 그려서어, 시국도 시끌시끌허고, 우리찌리 이약이나 허자고 모이잔 것이네."

그 말에 장단이나 맞추듯 김종연이가 끄으윽, 요란스러운 트림을 해댔다. 옆에 앉은 서인출은 그만 코를 감싸고 말았다. 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트림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두 번을 더 거푸 터뜨렸다.

"워따메, 사람 숨맥혀 죽겄네."

서인출은 김종연의 엉덩이를 퍽 내질렀다.

"참말로 냄새 고약허시. 저 사람 산삼 묵었는갑구마."

장칠복이가 뚜벅 말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시가 인삼 다음가는 삼은 삼잉께."

유동수가 주머니에서 화투를 꺼내며 말했다.

"와따, 성님언 워찌 그리 예의가 없으시오? 동평아재 말씸이 이약이나 허자 혔는디 성님언 화투판을 벌레뿔라 허요?"

김종연은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유동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밤이야 질고 진디 화투는 밥이나 꺼진 담에 시작혀야 안 쓰겄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오동평이 배를 슬슬 쓸며 말했다.

"거 봇씨요, 성님."

김종연이 눈을 찡긋했고, 유동수는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그날 밤 그 사람덜이 참말로 토벌대하고 싸울라고 혔을까?"

장칠복이 혼잣말처럼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먼, 원족나왔을 것인가?"

오동평이 비꼬는 투로 말했다.

"원족이사 아니겄지만, 요상시런 소문이 딛긴께 허는 말이제라."

"무신 소문인디?"

오동평은 계속 배를 쓸어대며 물었다.

"그 사람덜 수가 을매 안되慧鳴?허는디, 토벌대허고 싸울라면야 그리 왔을 것이요?"

"그 말이 맞구만이라. 맘묵고 싸우로 왔음사 총소리가 그리 금방 끄쳐 뿔 리가 웂었제라."

유동수가 비로소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님 말도 맞긴 헌디, 싸와본께 영 힘이 딸려 내뺀 것 아닐께라?"

서인출의 말이었다.

"어허 저 사람, 고 말이야 그 사람덜이 전부 싸우로 왔을 적에나 해당허는 말 아닌가. 시방 허는 말언 그 사람덜이 쪼깐 왔드라 고런 말이시."

장칠복은 구부정한 허리를 약간 펴는 것 같았다. 그건 그가 감정변화를 겪을 때 나타내는 몸짓이었다.

"지가 말을 잘못 혔구만이라."

서인출은 얼른 자신의 실수를 시인하고 말았다. 그의 급한 성질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허먼 머 헐라고 왔답디여?"

김종연이 화투짝을 소리가 나게 빨리 쳐대며 물었다.

"그걸 알먼 나가 염상진이게?"

장칠복의 허리가 다시 제 모습으로 구부정해졌다.

"인자 빨갱이 시상은 끝나뿌렀다."

오동평이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 사람덜보고 물어봇씨요, 끝났다고 허는가."

유동수가 고개를 저었다.

"즈그덜 맴이야 하루아칙에 이 시상얼 즈그 뜻대로 엎어뿔고 싶겄제. 근디 나라가 금허는 일이란 걸 알아야 써."

"니미럴, 나라도 틀려묵었소. 빨갱이 금헐라고 허지 말고 토지개혁인지 농지개혁인지럴 싸게싸게 해치워뿔먼 빨갱이덜이 내세울 것이 웂어진께 지절로 깨지고 말 것 아니요. 누님 좋고 매부 좋고가 머 딴 것이다요."

김종연이가 목청을 돋우었다.

"자네 말 맞네."

장칠복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디, 토벌대라는 것들이 아조 틀려묵었습디다."

유동수가 얼굴을 찡그려 붙였다.

"토벌대가 워째서?"

오동평이 덤덤한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숨은 빨갱이 잡아낸다고 어지께 칠동얼 발칵 뒤집었다는디, 젊은 눔이 아무나 잡고 주먹질을 안허나, 시악씨들헌테는 내놓고 히야까시럴 허질 않나, 구장 집서 점심밥얼 해냈는디 찬이 나쁘다고 상얼 엎어뿔지 않나, 개가 짖어댄께 총질얼 혀서 죽이지럴 않나, 행패가 말도 못허는갑습디다."

"어허, 그눔덜이 환장을 혔는갑네."

오동평은 그제야 낯빛이 달라졌다.

"빨갱이 뿌랑구럴 뽑는다고 동네마동 이 잡디끼 뒤진다니께 우리 동네에도 기어코 오긴 올 것인디, 판이 워찌 될랑가 몰르겄소."

"나도 그 말 들었네. 토벌대눔덜언 애시당초 글러묵은 것들이네. 잿밥에 정신 쓰는 중맹키로 빨갱이 잡겄다는 것들이 여관생활을 벌였다 이거시여."

장칠복의 구부정한 허리가 다시 약간 펴지는 것 같았다.

"빨갱이 잡는 것은 뒷전치고 그눔덜부텀 잡아야 쓰겄구만."

서인출은 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는 서늘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매형 때문에 그들에게 무슨 궂은일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고것더리 똑 청년단 날치대끼 허는갑구만."

오동평이 마땅찮은 표정으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맞구만이라. 글안해도 그것들이 청년단허고 합동작전인가 먼가를 헌답디다."

유동수가 어처구니없는 듯 코웃음 쳤다.

"참말로 염병헐 눔에 시상이다!"

장칠복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요란한 소리로 방귀를 뀌어댔다. 그는 한쪽 엉덩이까지 약간 들고 있었다.

"와따매, 구들장 내레앉겄소."

유동수가 옆으로 조금 피해 앉으며 쏴질렀다.

"워메, 산삼이 아니라 해삼을 묵었는갑소이. 그눔에 냄새 콧구녕 썩어뿔겄소."

김종연이 코를 막으며 돌아앉았다.

"그려도 니눔 트림 냄새보담이야 훨썩 낫다. 방구야 삭아서 아래로 빠지는 것이고 트름이야 설삭아서 우로 솟는 것인디, 워떤 것이 더 몸에 존 냄새겄냐."

"둘 다 몸에 존 보약잉께 몸보신덜 잘해봇씨요."

유동수가 마땅찮은 눈길로 장칠복과 김종연을 번갈아 보았다.

"동평 아재, 저어 …… 빨갱이 헌 집언 내년부텀 소작을 안 준다는 말이 있는디, 참말일께라?"

서인출은 아까부터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오동평은 금방 거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고것이사 당연지사 아니라고? 요번에 빨갱이눔덜 손에 절딴 안난 지주가 없는 판인디, 그 웬수눔에 집구석들이 머시가 이뻐서 소작얼 주겄는가. 고런 것덜 아니고라도 소작 더 얻어 부칠라고 눈에 불 킨 사람덜이 쌔고쌨는디, 빨갱이눔덜 새끼 싸게싸게 믹여 키워 또 우리 자식덜 죽여주씨요 험스로 소작얼 줄 지주가 워디 있겄어. 우리 쥔 아짐씨만 혀도 그렇제, 좋다는 한약얼 내리 묵어도 몸이 안 낫고 시름시름 앓는디, 워째 그러겄는가. 밤마동 빨갱이덜 꿈에 시달린다는 것이여. 냄편 그리 숭악허게 죽는 꼴 보고 얻은 마음병잉께 아무리 존 약을 써도 소양이 웂은 것이제. 우리 아짐씨가 그리 앓음서 빨갱이럴 워찌 생각허겄는가. 치가 떨릴 것 아니겄어. 근디 소작얼 주겄는가?"

희끄무레한 등잔 불빛이 서린 방안에는 침묵이 차고 있었다. 오동평을 제외한 네 사람은 우울한 낯빛으로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윤 부자네 땅을 부치고 있는 작인들이었다. 윤 부자가 소화다리에서 대창에 난도질을 당해 죽어갔을 때 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것이고, 염상진이야말로 '영웅'인 줄 알았었다.

"여그 앉은 사람덜이야 빨갱이 덕 볼지 누가 아는가? 밥이 꺼졌응께 화투나 한판 놀아보드라고."

오동평이 방안의 침묵을 휘저어버리듯 말했다. 네 사람은 제각기의 생각에서 깨어나며 앉음새들을 고쳤다. 자리를 좁혀 앉기는 했지만 전혀 흥나는 표정들이 아니었다. 호령하는 양반보다 덩달아 꺼떡대는 마당쇠가 더 얄밉더라고 작인들에게 마름이란 존재는 지주들보다 더 역정나고 아니꼬웠다. 마름들은 어디까지나 지주의 편이어서, 양쪽에서 잇속을 챙기는 속 뻔히 들여다보이는 짓을 서슴없이 해대는 것들이었다. 마름은 한마디로 메마른 작인들의 등에 붙어 피를 빠는 진딧물이었다. 작인들은 지주에게 빨리고 남은 피를 다시 마름에게 빨렸다. 마름들이 저지르고 있는 작태를 다 알면서도 지주들은 굳이 탓하거나 막으려 하지 않았다. 자기네들에게 아무 손해가 없는 일인데다, 그런 잇속을 묵인함으로써 마름들은 자기네들의 손발 노릇을 더욱 열성으로 해냈던 것이다. 마름이 가진 권한 중에 제일 큰 것이 소작을 떼고 붙이는 것이었다. 그건 지주가 갖는 절대권이면서도 그 결정과정에서 마름의 영향력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 인종이 게을러빠져서'라거나, '말이 많아 다른 작인들까지 ……' 하는 말을 끼워 넣게 되면 그 작인에게 더 소작을 내줄 지주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마름은 지주의 절대권 중에서 삼분의 일 정도는 차지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권한 앞에서 작인들은 오금을 펼 수가 없었다. 언제 자기한테 그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위험이 마름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 그 암탉이 살이 통통허니 올랐네그랴"

하며 마름이 닭장 앞을 지나치기라도 하면 그날 밤으로 지체 없이 닭을 잡아다가 바쳐야 했고,

"어이 김 서방, 낼 일이 어쩐가? 우리 집에 손볼 디가 잠 있는디."

이 한마디를 들었다 하면 열 일 젖혀놓고 마름 집일부터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정시대부터 소작쟁의를 벌일 때마다 사음을 없애라, 마름을 없애라, 부르짖었지만 일본 놈들도 사음을 없애지 않았고, 조선 지주들도 마름을 없애지 않았다. 마름들은 작인들에게 미움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작인들이 들고일어나는 사건이 생길 때마다 마름들은 지주들과 똑같이 표적이 되었지만, 그 사건이 억압으로 끝나고 말면 지주들이 그렇듯이 마름들도 예전의 버릇을 그대로 저질러댔다.

그들 다섯 사람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토벌대로 잡혀간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그들은 빨갱이 찬양과 토벌대 비방이라는 죄목으로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다음날 아침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들 다섯은 서로서로 따지고 들었지만 토벌대나 청년단에 고자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들 다섯 중에 고자질한 사람은 분명 들어 있었다. 똑같이 잡혀가고, 똑같이 조사하고, 똑같이 풀어놓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위장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건 염상구의 솜씨였다. 토벌대장과의 약속에 따라 염상구는 동네마다 그런 조직을 새로 만들었던 것이다.

 

염상구의 일방적인 명령에 따라 멸공단의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게 된 윤태주는 매일매일이 무료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물론 염상구가 그들의 활동을 중지시키려 할 때 반발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아니, 지끔 나헌테 뎀비는 것이여? 요런 좆대가리가 지대로 여물지도 않은 새끼가 누구 앞에다가 턱쪼가리 치께들고 아가리 놀려. , 나가 누군지 몰르냐? 요 염상구 칼침 맛 홍어회 묵디끼 쌈빡허니 보고잡으냐?"

염상구의 눈이 점점 옆으로 가늘게 째지며 서늘한 빛을 내쏘는 앞에서는 더 이상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더 맞섰다가는 염상구의 몸 어딘가에 감춰져 있는 칼이 금방 이마빼기에 꽂힐 것만 같았던 것이다. 윤태주는 마지못해 활동을 중지하긴 했지만 스스로 이름붙인 멸공단까지 해체한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도 해체하고 싶지 않았고, 단원들도 해체를 반대했다. 그러나 이름뿐인 멸공단이 윤태주의 무료를 달래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야 할 대학공부가 엄연히 남아있는데도 광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인자 니가 바로 가장이여. 솥공장이고 정미소고 니가 야물딱지게 단도리럴 험스로 채럴 잡아나가야 느그 아부지도 저시상에서 편히 눈을 감을겨. 어이 와, 태주야, 이 에미는 여잔께 니가 정신 똑똑허니 채리고 두 눈에 호랭이불 켜야 쓴다. 느그 아부지 밑에서도 이눔이고 저눔이고 언뜻 허먼 돌라묵을 궁리만 혔다. 이 세상 사람새끼라는 것덜언 다 도적눔들잉께 정신 바짝 차려야 써. 니가 인자 이 집안 가장잉께."

그의 어머니는 그를 붙들고 이렇듯 간곡하게 말하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공부에 별 뜻이 없는 그는 솥공장 사장에 정미소 주인 자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가 그의 무료를 달래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자리를 지키지 않아도 솥 공장의 용광로에서는 시퍼런 불길이 잘만 타올랐고, 정미소의 피댓줄은 언제나 무서운 기세로 잘만 돌아갔던 것이다. 건성으로 솥 공장과 정미소를 거쳐 온 윤태주는 막상 갈 만한 곳이 마땅찮아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갈 만한 데가 없었다. 윤태주는 그만 짜증이 솟아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너무하다 싶도록 해맑게 푸른 하늘이 높디높았고, 아직도 해는 그 가운데 작은 동그라미로 박혀 있었다.

"니기, 책방이나 가보자."

윤태주는 칙 침을 뱉고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물론 책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 집 딸 정님이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책방집 딸이 예쁘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어느 날 공설시장 앞을 지나다가 눈이 번쩍 띄게 잘생긴 처녀와 마주친 것이다. 그 처녀가 바로 책방집 딸이었다. 그 처녀를 보는 순간 윤태주는 저건 내 것이라고 점을 찍었던 것이다. 그리고 벌써 서너 차례 책방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안녕허세요."

윤태주는 책방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며 주인에게 꾸벅 절을 했다.

"어이, 어서 오시게."

문기수는 윤태주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냥 손님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좀 과한 데가 있는 친절이었다. 윤태주는 책을 고를 생각은 하지 않고 안쪽을 기웃기웃하고 있었다. 그런 윤태주를 문기수는 의미 있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곁눈질로 보고 있었다.

"무신 책이 필요허신가?"

문기수는 털이개를 건성으로 놀려 먼지 터는 시늉을 하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 아무 책이나, 아니 재미난 소설책이나 한 권 골라주시오."

윤태주는 당황하거나 멋쩍어하는 기색도 없이 말을 던지고는 또 안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재미진 소설책이라아, 재미진 소설책이면 연애허는 것이 재미지제에."

문기수는 말에 멋대로 가락을 넣어가며 두툼한 책 한 권을 뽑아냈다.

니눔이 내 딸헌테 홀려도 단단허니 홀렸구나. 하먼, 하먼, 잘허는 일이여. 니눔 사람됨됨이야 정하섭이헌테 당허겄냐만 인자 정하섭이는 틀려묵었다. 아무리 봐도 공산당 시상 되기는 어려울 성불른디 정하섭얼 사우 삼아 되겄냐. 니눔이 쪼깐 기울린다마는 그 대신 무지막지헌 재산얼 물려받았응께. 허긴 여자가 편허게 살자먼 똑똑헌 정하섭이보담도 덜렁덜렁헌 니눔이 더 나슬란지도 몰른다. 워쨌거나 우리 딸 정님이가 재산복은 타고난 모양이다. 이눔이나 저눔이나 다 부잣집 자석덜이 아닌감. 하먼, 그래야제. 그래야 이 애비도 나이 들어감스로 덕보고 살제. 방정 떨지 말고 진득허니 기둘려. 사우가 될 때 되드라도 지끔이야 남남잉께 책이라도 한 권 폴아묵고 정님이럴 불러내도 불러내줄 것잉께.’

문기수는 진득한 웃음이 밴 얼굴로 책을 포장하고 있었다. 문기수는 책값을 챙겨 넣고 나서야 안쪽에다 대고 소리쳤다.

"어야, 정님아, 책방 잠 봐라. 나 워디 댕겨올 디가 있다."

쪽문으로 황급하게 나오던 정님이는 윤태주를 보고 주춤 멈춰 섰다. 복숭아빛 얼굴이 금방 굳어졌다. 문기수는 그런 딸에게 빠르게 눈을 껌벅였다.

"나 금융조합에 댕겨올란께 점방 잘 봐라."

문기수는 총총히 책방을 나갔다. 윤태주는 정님이를 빤히 쳐다보고 서 있었다. 정님이는 그 눈길을 어떻게 받아낼 수가 없어 여기저기로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긴 해야 되겠는데 윤태주는 꺼낼 말이 없었다.

고것 참 맛나게 생겼다. 저걸 그냥 확 빠구리를 터야 속이 시원하겠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못 먹을 고기 보기만 하고 군침을 흘리는 개처럼 윤태주는 음흉한 눈길만 보내다가 돌아서야 했다.

"나 갈라요."

", 또 책 사로 오시씨요."

정님이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이 집 책 다 살 때까지 오겠소."

윤태주가 문을 나서며 화가 난 목소리로 한 말이었다.

"그러씨요. 잘 가십시다."

정님이는 건성으로 인사를 던지며, 요런 멍청아, 니 평생 책을 사내봐라, 우리 집 책이 떨어지나. 팔리기만 하면 책은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다.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고 있는 윤태주는 과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책방 주인의 태도가 아주 그럴듯했던 것이다. 슬쩍 자리를 피해주는 게 분명했는데, 아버지 되는 자가 그렇게 나간다면 칵 씹어도 비린내 하나 안 나게 생긴 그 예쁜 가시내는 손에 쥔 떡이나 다름없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윤태주는 야무지게 입술을 훔쳤다.

서두를 것 없는 걸음걸이로 역전까지 나온 윤태주는 또 갈 데가 막연해져 걸음을 멈추었다. 차부나 역은 아직도 한산했다. 역전의 넓은 마당에는 썰렁한 늦가을 바람만 지푸라기와 종이 조각들을 날리고 있었다. 공장장이 솥이 팔리지 않는다고 울상을 지을 만했다. 사람들의 내왕도 거의 끊기다시피 한 것이 벌써 달포 가까이 되었고, 그동안 장도 제대로 서지 않은 것이다. 윤태주는 그런 골치 아픈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솥이 덜 팔린다고 해서 망할 장사도 아니었던 것이다. 윤태주는 멸공단 단원들을 다방으로 불러낼까 생각했다. 만난 지도 며칠이 지나 있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정님이 때문에 마음이 꿈틀거리고 불두덩이 뻑적지근해졌는데, 다방 레지 화자하고 오늘은 끝장을 봐야 되겠다 싶었다. 윤태주는 벌써 화자하고 일이 되도록 이야기를 터놓았던 것이다. 그는 다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낮이어서 그런지 다방에는 손님이 없었다. 그런데도 노랫소리는 귀가 아프도록 크게 울리고 있었다.

"어머, 어서 오세요."

화자가 반색을 했다.

"느그 집구석은 사시장철 저놈에 '울고 넘는 박달재'?"

윤태주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판을 바꿀 테니까 어서 앉으세요."

윤태주가 앉자 화자도 마주보고 앉았다.

"그게 뭐예요? 책 같은데."

"귀신이네. 재미있는 연애소설인데 화자 줄려고 샀지."

윤태주는 마침 잘됐다 싶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화자에게 내밀었다.

"어머, 정말이세요?"

화자는 두 손으로 책을 받아들며 더 없이 밝은 표정이 되었다.

"오늘 나 맘먹은 날이야. 여기 몇 시에 문 닫지?"

윤태주는 화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눅진한 음성으로 말했다. 화자의 얼굴이 어색하게 변했다.

", 맘에 없어?"

윤태주의 사각진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이까짓 책은 필요없다구요."

화자는 책을 탁자에 던지듯 하고는 발딱 일어섰다. 윤태주가 그녀의 팔을 낚아챈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게 사람을 뭘로 보고 이래. 내가 그까짓 책으로 입 닦을 놈으로 보이냐? 이게 어디서 공짜만 뜯기고 다녔나, 사람 우습게 보네?"

윤태주는 금방 후려칠 것 같은 기세였다.

"아녜요, 잘못했어요. 그런 게 아니라 ……"

"잘못은 이따가 밤에 빌어. 나도 곤조통이 있으니까."

윤태주는 화자의 팔을 놓고 전화기가 걸려 있는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토벌대 때문에 좋은 방이 없어요? 상관없어요, 방이면 되니까. 됐어요."

윤태주가 전화하는 걸 들으며 화자는 주방에다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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