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념 이전의 인간
벌교에 비해 순천은 한결 살벌한 분위기였다.
역에서는 집총한 군인들이 통행증을 조사하고 있었다. 역사(驛舍)의 바깥 유리창은 말할 것도 없고 안쪽 유리창들까지도 성한 게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미처 유리를 갈아 끼우지 못해 깨진 위에 종이를 덧붙여 바람막이를 해놓고 있었다. 어떤 유리창 중앙에는 총탄이 꿰뚫고 지나간 구멍이 빠금하게 나있기도 했다. 총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역사(驛舍)를 벗어난 김범우는 속보로 걷기 시작했다. 경찰서로 가서 처남 신석주를 면회하고 곧바로 벌교로 돌아가자면 시간이 촉박했다. 김범우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다투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생각들은 하나 같이 암울한 색조의 것들이었다.
철로 건널목에 이르러 김범우는 걸음을 늦추었다. 길가의 마른 풀섶에 떨어져 있는 것들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탄피가 분명했다. 그 탄피들은 건널목을 지나 시내로 이어지는 다릿목 가까이까지 연이어 떨어져 있었다. 김범우는 그때서야 그 길이 둔덕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 경사를 은폐삼아 역 쪽을 향해 총격전을 벌였음을 알 수 있었다. 박살이 난 역사의 유리창들과 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유일한 길목에 떨어져 있는 탄피들과, 혹시 사건 경위를 미리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여수의 주둔군이 기차를 이용해서 순천으로 밀려 들어왔음을 추리하기에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범우는 경찰서 정문에서 제지를 당했다. 경찰서는 예전의 경찰서가 아니었다. 삼엄한 경비 아래 경찰들은 전투복 차림을 하고 있는데다가 군인들마저 오락가락해서 살벌하기가 전보다 몇 갑절 더했다. 그래서 김범우는 처음부터 경찰서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그는 좌익학생 문제로 자주 만나서 안면이 두터운 사이였던 것이다.
"어떤 서장님 말이오?"
보초순경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불친절하게 말했다.
"어떤 서장님이라니요?"
김범우는 반문을 하며,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전 서장님을 만나러 왔으면 돌아가시오. 그분은 이번에 전사하셨소."
보초순경은 집총자세에 어울리도록 딱딱한 어조로 말했고, 김범우는 멍한 눈길을 순경의 얼굴에 던지고 서 있었다.
경찰서장의 전사, 그건 단순한 충격만이 아니었다. 그건 곧 이번 사건의 심각성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비켜서시오, 공무집행 방해요."
보초순경이 눈을 치뜨며 내쏘았다. 그 서슬에 김범우는 두어 발짝 물러섰다. 난감했다. 분위기로 보아 좌익혐의로 체포된 자의 면회가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았고,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범우는 면회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단면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여러 얼굴들이 떠올랐지만 모두 신통치가 않았다. 이렇게도 아는 사람이 없나, 다급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한 생각이 들며, 경찰서 앞에서 이런 궁색스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그때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재판소의 이 판사였다. 그러나 김범우는 이내 그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아니 찢어버렸다고 해야 옳았다.
그는 중학교 선배였는데, 김범우가 경멸하고 비판하는 인물들 중의 전형이었다. 일제치하에서 고등고시라는 것을 거쳐 판검사가 된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그도 철저한 일제의 주구노릇을 감행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친일한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러했듯 그도 아무런 속죄의 표현도 없이 군정과 함께 다시 그 뻔뻔스러운 얼굴을 들고 판사 노릇을 해먹고 있었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지난 오월에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애국을 부르짖은 것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자신이 소작인의 권익옹호를 위해 분투한 것이 얼마며, 피해 받는 동포의 인권옹호를 위해 헌신한 것이 얼마인지 아느냐고 목청을 돋우었다. 그건, 친일 지주계급들이 자위책으로 한민당을 결성하여 신속하게 미군정을 등에 업었고, 그것도 불안하여 민중의 지지를 쉽게 받을 수 있는 인물로 이승만을 골라 당수에 앉히고자 했고, 민족개념이나 통일조국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집권욕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이승만은 굴러들어온 떡을 마다할 리가 없었고, 그리하여 그 힘이 전국적인 정치세력으로 확장되면서 그들의 정치형태는 시궁창보다 더 더럽게 변해갔고, 마침내 이 판사 같은 인물이 애국자로 둔갑해 국회의원에 출마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그나마 서글픈 다행은, 이 판사의 그 열렬한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낙선이 된 점이라고 해야 할까.
한순간이나마 그런 인물을 도움 받을 대상으로 떠올리며 경찰서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자신이 김범우는 한심스럽기만 했다.
"아아니, 요게 누구신가?"
경찰서에서 나오던 한 남자가 김범우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아는 체를 했다. 그 말투며 손짓이 이쪽을 아예 무시하고 대하는 태도였다. 김범우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사람을 잘못 보았겠거니 했다. 잠바차림의 그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아니, 훌륭하신 김 선생님, 날 모르겄소?"
그 남자는 바로 김범우의 코앞에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야우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이쪽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는데, 김범우로서는 자만에 찬 비웃음을 담고 있는 그 얼굴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 누구요?"
사복을 입긴 했지만 경찰 관계자라는 것쯤은 이미 눈치 챘으면서도 김범우는 불쾌한 기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핫하, 이적지 도도허신 것은 못 버리셨구만이라? 웬수는 외나무다리서 만낸다드만 우리가 똑 그 짝이구만."
그 남자는 하늘을 쳐다보고 헛웃음을 쳤고, 김범우는 신경줄을 튕겨온 '원수'라는 말에 자극되어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려고 묵은 기억을 파헤쳐내고 있었다.
"나가 바로 한창길이오."
남자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자신을 가리키며 무엇을 증언이라도 하듯이 가다듬은 목소리를 냈다.
"한창길 ……?"
전혀 기억이 없는 이름이었다. 김범우는 이제 불쾌감보다는 당혹감에 몰리는 형편이었다.
"하, 그때 날 얼마나 무시했으면 얼굴도 모른다. 이름도 모른다, 이 꼴인가 그래. 요런 영어 잘해서 하늘같이 높으신 젊은 친구야."
화가 치미는 얼굴로 돌변한 한창길이란 남자는 사투리를 쓰지 않고 말했고, 그때 김범우의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김범우는 신음이 솟는 걸 느꼈다.
"이제 알겠어요, 군정청에 근무하는 ……"
김범우는 말을 하면서도 그때 자기를 데리러 왔던 남자와 지금 자기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남자가 동일인으로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때 한정 없는 잠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가 가까스로 깨어나서 건성으로 스친 그 남자가 시각기억으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청각기억 하나가 되살아났다. 그때 그 남자는 처음에 표준말을 흉내 내다가 형편이 다급해지니까 사투리를 쓰기 시작했고, 지금은 처음에 사투리를 쓰다가 화가 치미니까 표준말을 흉내 낸, 뭔가 반대현상을 보인 것이었다.
"알아묵어서 고마워해야것구만?"
한창길은 무슨 보복이라도 하고 싶은 듯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불쾌하셨던 모양인데 이해하십시오. 난 학병에서 돌아와 몸이 좋지 않았고, 아다시피 군정청에서 일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한선생한테 결례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김범우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한창길의 인간됨이나 인상이 어떠하든 간에 자신이 범했을지도 모를 실수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나 선생이 아니라 형사부장이오, 형사부장."
한창길은 당당하게도 '형사부장'을 두 번이나 되풀이했다. 김범우는 이미 짐작하고 있긴 했었지만 그냥 '형사'가 아니라 '부장'까지 덧붙여진 데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놀라움은 분명 경이로움이 아니라 실망스러움이었다. 그러나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형사부장이 아니라 경찰서장을 해먹는대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김범우는 실망스러움을 지워버렸다.
"언제 이리로 옮겼습니까?"
한창길의 과시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라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해 보인다거나, 축하한다고 악수를 청하며 굽신거리는 체를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무덤덤하게 한마디 던졌을 뿐이다. 김범우는 그만 경찰서 앞을 떠나고 싶었다.
"언제라니, 군정이 끝나고 바로요."
한창길은 마땅찮은 얼굴로 내던지듯 말했다. 군정청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김범우는 남북협상이 파탄에 이른 다음부터 좌익학생들 문제에 관심을 돌렸던 탓으로 전처럼 군정청이나 경찰서를 드나들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5개월이 넘었으니, 2개월밖에 안된 한창길의 거취를 알 까닭이 없었다.
"워찌 여기 서 있소?"
마침내 한창길의 직업의식이 발동하고 있었다.
"서장님을 좀 만나러 왔더니 ……"
"왜 일가 중에 누가 빨갱이 했소?"
한창길은, 네놈의 급소가 어디인지 다 안다는 눈초리로 살벌하게 말했다.
"아니오, 다른 일인데 전사하셨다기에 돌아가려는 참이었지요."
"무슨 일인지 나헌테 말허시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사적인 일이라서요."
김범우는 그야말로 고마운 둣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무리 형편이 암담하다 해도 한창길 같은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았다. 그자의 과시욕을 만족시켜줄 수가 없었고, 권력행사의 쾌락을 맛보게 할 기회 제공을 할 수도 없었다. 그자는 늑대처럼 처남을 돕기는커녕 먹이로 삼을 것이 십중팔구일 것이다.
"거 참, 앞으로 무슨 일 있으먼 날 찾아오씨오."
한창길은 매운 눈길을 던지고는 휑하니 길을 건너갔다. 김범우는 떫은 웃음을 입가에 문 채 한창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경찰서 앞을 떠났다.
김범우는 막연한 기분으로 재판소 쪽으로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처남 신석주와 좌익과 …… 그건 아무래도 걸맞지 않았다. 좌익을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만큼 체질적인 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의'나 '사상'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한 그건 이미 '감상'이나 '환상'이 아닌 것이다. 그 어떤 주의나 사상이든 그 최종목표는 실천에 있었다. 첫째가 의식의 실천인 것이며, 둘째가 행동의 실천인 것이다. 특히 사회주의라는 것은 그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처남은 그런 조건에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범우는 재판소가 건너다보이는 광장에 이르러 금융조합을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처남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금융조합의 붉은 벽돌건물에 찍혀 있는 수많은 탄흔을 보고 있었다. 붉은 벽돌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그 탄흔들은 전체적으로 먼지가 낀 벽면 위에서 갓 피어난 꽃들처럼 선명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거기에는 사회주의 건설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것도 있을 것이고, 그것을 억제하려는 사람들의 것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똑같은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듯이 탄흔들도 이쪽저쪽의 구분이 없이 벽면 위에다 추상적 무늬를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런 상태의 공존이어야 했다. 민족단위의 한 국가를 이룩한 다음에 자기가 이상하는 바를 따라 어느 주의든 선택하고 주장하면서도 조화가 깨지지 않게 삶의 추상적 무늬를 그리며 함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같은 민족 위에 두 개의 나라를 만들고 제각기 하나씩의 주의를 선택함으로써 반대되는 주의를 서로의 심장을 겨누어 총질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 선생, 왜 이리 넋을 놓고 서 계시오?"
김범우는 잠에서 깨듯 생각에서 깨어났다. 영어선생 선우진이 서 있었다.
"아니, 선우 선생 ……"
김범우는 얼른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왜 이리 넋을 놓고 서 계시오?"
선우진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만큼 김범우의 태도가 기이하게 보였던 것이다.
"아니오, 뭘 좀 생각하느라고 ……"
김범우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멋쩍게 웃었다.
"금융조합 벽을 바라보고 뭘 그리 생각할 게 있으시오?"
선우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금융조합 건물을 쳐다보았다.
"학교엔 나가 보셨나요?"
김범우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김 선생도 학교에 나오는 길이었소? 가실 필요 없어요, 아직 수업이 안 되니까."
선우진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도 되는지 자신 있게 말했다.
"노상에서 이리 서 있지 말고 어디 다방에라도 좀 들어갑시다. 이렇게 얼굴 대하게 된 것만도 천행 아닙니까."
선우진이 김범우의 팔을 끌었다. 그의 예사로운 것 같은 말이 김범우의 가슴에 찡한 파문을 일구었다.
그는 1946년 상반기에 황해도에서 월남한 사람이었다. 토지개혁 실시로 지주였던 그의 집안은 파탄을 맞아야 했고, 그는 삼팔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토지는 말할 것도 없고 값나가는 살림살이까지 몰수를 당하는 바람에 대학졸업장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 졸업앨범 하나만을 달랑 가지고 내려온 그의 일화는 선생들의 우스갯감이 되고는 했다. 감정 같아서는 다른 월남민들처럼 경찰에 투신해서 남한에 박힌 빨갱이들을 잡아내는 족족 쏴죽이고 싶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는 총구멍만 보면 사지가 오그라붙는 것 같아 경찰에 투신을 못하고 졸업앨범을 졸업장 대신 내밀어 선생이 된 것이다. 토지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는 총구멍에 어지간히 혼쭐이 난 모양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봉건적 사회체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극복되어야 하고, 친일반민족세력을 냉정하고 엄정하게 처벌해서 민족단위의 국가를 만든 다음 모든 일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농민이 8할을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농지개혁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김범우와는 논리적 대화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타향살이의 외로움 탓인지 김범우에게 계속적인 호감을 표시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김범우는 다방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계제가 아닌데도 그를 뿌리칠 수가 없어 미적미적 끌려가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 김 선생이 무슨 일 당한 줄 알았소."
선우진이 자리에 앉자마자 한 말이었다.
"나야 그렇지만 선우 선생은 용케 무사하셨군요."
김범우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그런 대화를 하기가 싫어 약간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 마침 어느 학부형이 피신처를 마련해줘서 살아났지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죽었겠지요. 내가 피하고 몇 시간 안돼서 죽창을 든 학생 놈들이 하숙집으로 쳐들어왔다니까요. 빌어먹을 놈들, 빨갱이새끼들은 선생도 잡아다 죽이는 놈들이오."
선우진은 어느새 벌겋게 흥분해 있었다. 김범우는 그의 흥분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감정의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어쩌겠습니까, 그게 우리의 현실이 돼버렸으니."
김범우는 쓰게 웃으며 담배를 빼들었다. 아가씨가 차를 놓고 갔다.
"김 선생, 아직 모르고 있지요? 우리 학교에서 네 선생이 어제 총살을 당했습니다."
"네에? 그게 누구누굽니까?"
김범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놀란 얼굴을 바라보며 선우진은 만족스러운 것인지 통쾌한 것인지 모를 묘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놈들은 의당 죽어야 할 놈들이었습니다. 국어과 강원봉, 수학과 김두식과 유인철, 체육과 한일호, 그놈들은 빨갱이 완장을 차고 학생들을 지휘하며 날뛰었으니까요."
김두식과 한일호는 그럴 수 있었겠지만 강원봉과 유인철은 전혀 의외였다.
김범우로서는 선생들의 의식 동향을 그 나름으로 신중하고 세심하게 파악하려고 애써 왔었다. 그건 곧 학생의 움직임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강원봉과 유인철은 무색무취의 교육자로만 파악되었던 것이다.
"김 선생, 강원봉과 유인철이 땜에 놀랐지요?"
선우진이 김범우의 심중을 꿰뚫듯이 느긋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범우는 엉뚱하게도 처남을 생각하고 있었다. 처남도 그들 두 사람처럼 철저한 연막을 친 것은 아니었을까.
"글쎄요, 그게 사람이라는 동물의 특성일 수도 있으니까요."
"김 선생, 그건 좀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특성이라면 좋은 점이어야 하는데, 살인을 불사하는 빨갱이 사상을 감쪽같이 감추고 교육자의 탈을 쓰고 있었던 그것이 어찌 특성이 될 수 있습니까?"
선우진은 다시 흥분되고 있었다.
"선우 선생, 난 국어 전공이 아니니 말뜻은 잘 모릅니다만, 좋은 점이라면 장점이라는 말이 따로 있을 것이고, 특성이라고 한 것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가지는 특이한 점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강원봉과 유인철이 숨기고 있던 의외성에 놀라지 않구요. 선우 선생이 사회주의 사상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것이나, 그들이 자본주의 사상을 적대시하는 것이나 결국 획일주의이기는 마찬가지니까요. 내가 놀라는 건 그들이 총살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봐요, 주의를 앞세워 서로가 서로를 원수삼아야 하는 이 땅의 비극이 무엇을 위하는 것인지 말이오."
살인을 불사하는 것은 좌익만이 아니고 우익도 마찬가지며, 정확하게 순서를 잡아 따지자면 살인적은 폭력을 자행한 것은 우익이 먼저라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그럼, 김 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뭐요? 현시점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래요, 난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않아요. 그것도 엄연한 생존의 한 방법으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건 국법에 위배되는 아주 위험한 사상입니다."
선우진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정색을 하고 들었다.
"그럼, 위험하지 않고 안전한 건 뭐요? 선우 선생처럼 투철한 반공주의자가 되는 거요?"
김범우는 코웃음이 쳐지려는 것을 지그시 눌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공산주의 체제를 꺾고 이기려면 모두가 서북청년단처럼 돼야 해요. 이번에 보니까 경찰은 그래도 좀 나은데 군인들은 틀려먹었어요. 빨갱이들을 뿌리 뽑기는 이번 기회처럼 좋은 기회가 없는데, 군인들은 일단 잡아들인 놈들을 혹독하게 다루지 않고 슬슬 조사해서 풀어주고 있어요. 빨갱이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고 근절시키는 데는 결국 서청밖에 믿을 수가 없어요."
말을 하는 동안 선우진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올랐고, 김범우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런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선우 선생, 난 지금까지 선우 선생의 처지를 생각해가며 선우 선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온 사람이오. 그러나, 선우 선생이 지금 한 말은 그냥 들어 넘길 수가 없소. 선우 선생은 서청의 행위가 전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데 과연 그게 그럴까요? 선우 선생은 같은 월남민으로 서청에 무조건 신뢰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선우 선생이 그냥 평범한 직업인이 아니고 '선생'인 한 그건 좀 곤란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선생은 더 말할 것 없이 학생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최소한 객관적 판단을 견지하면서, 정치적 견해도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런데 선우 선생은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교육자 입장에서, 그리고 객관적 판단력을 가진 지식인 입장에서 서청을 보아야 하고, 이번 사태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서청의 행위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비난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제주도에서 사삼사건이 발생한 금년부텁니다. 반공을 앞세운 그들의 잔혹행위가 사회적 말썽을 일으킨 것은 그들이 확실한 공산주의자만을 처단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한 개인적 감정에 휩쓸려 무고한 양민들까지 무분별하게 살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다 아는 그런 잘못을 저지른 서청을 선우 선생이 무조건 지지하고 두둔한다면 학생들이 선우 선생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건 선우 선생의 사상문제 이전에 인격 자체를 불신당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서청에 대한 그런 비난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의 모함이고 마타도업니다. 그런데 그걸 김 선생 같은 분이 다 믿고 오히려 나한테 역선전을 하다니,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목소리가 높아진 선우진은 볼까지 씰룩거렸다.
김범우는 너무 한심한 생각이 들어 더 말할 의욕을 잃었다. 그러나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어느 선까지 분명한 매듭을 짓고 싶었다. 선우진의 앞뒤 분간이 없는 감정적 언동도 역겨웠고, 자신을 '역선전자'의 인상으로 남겨두고 싶지도 않았다.
"선우 선생, 선우 선생은 50만이 넘는 월남자들 중에서 교직을 선택한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선우 선생이 다른 수많은 월남자들이 선택한 경찰이나 군인, 서청에 몸담지 않고 교육자가 된 이상 최소한의 역사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선우 선생은 역사 앞에서 최소한이나마 냉정을 회복한 다음,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월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를, 왜 그들이 경찰, 군인이 되고 또 서청 같은 단체를 조직했는가를, 그리고, 왜 그들에 대해서 사회의 일반적 인식이 나쁜가를 따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모두 너무 자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선우선생이 찾아내지 못하면 선우 선생은 계속 불행할 겁니다. 내가 끝으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해방이 되고, 그게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었더라도 선우 선생은 지금과 똑같은 형편에 처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지주계급의 몰락, 그것은 올바른 역사의 흐름입니다. 친일반역세력의 척결, 그것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입니다. 선생으로서 그 사실을 납득해야만 합니다."
"그건 바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 그대로요. 김 선생, 도대체 당신 정체는 뭐요!"
선우진이 느닷없이 소리 지르는 바람에 김범우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그만 성냥을 도로 놓았다.
"알겠소, 그만 일어납시다. 난 아직 바쁜 일이 남아 있소."
김범우는 체념적인 얼굴로 담뱃갑을 챙겨들었다. 선우진은 의혹스러운 눈으로 김범우를 쳐다보며 무겁게 따라 일어섰다. 선우진과 헤어진 김범우는 행동에 있는 처남네 집으로 발길을 잡았다. 선우진을 만난 것으로 학교에 들를 필요는 없게 된 셈이었다.
처남네 집 가까이에 있는 공터에서 몇몇 아이들이 소리를 외치며 공차기를 즐기고 있었다. 김범우는 무심결에 걸음을 멈추고 섰다. 공터에 담뿍 쏟아져 내리고 있는 가을햇살과, 공보다 먼저 햇살을 차내며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질러대는 해맑은 외침이 생명의 약동을 느끼게 했다. 벌교를 떠나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 중에서 그 풍경만이 유일하게 살육의 음산한 분위기를 벗어나 있었다. 앙증스럽게 빨리 움직이고 있는 아이들의 다리를 따라가고 있던 김범우의 눈길은 아이들의 발 사이에서 수난을 겪고 있는 공에 머물렀다. 김범우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공을 쫓아 눈을 굴렸다. 어딘지 쿨렁거리는 것 같은 느낌의 그것, 그건 공이 아니라 돼지 오줌보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언젠가 아이들이 돼지 오줌보에다가 물을 채워 양끝을 묶고 차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 그것이 구르는 느낌과 지금의 것이 흡사했던 것이다. 김범우는 적막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런 지혜나마 발휘해서 놀이갯감을 장만하는 아이들이 대견하기도 했고, 저런 공은 아프리카 원주민 아이들이나 차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슬프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일인지 저도 통 모르는 일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제가 꼭 그런 기분입니다. 어쩌자고 공금을 축내가면서 그 짓을 했는지, 머를 잘못 생각해도 많이 잘못 생각헌 것이지요. 친정 쪽에서 손을 쓴다고는 쓰고 있지만, 지은 죄가 죄라 재판을 받아야 할 모양입니다."
처남댁은 중학교까지 마친 여자답게 침착하고 냉정했다. 그 여자의 어감에는, 부부의 애정과는 별개로, 남편의 행위에 대해 어떤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는 듯한 기분이 담겨 있었다. 그런 기분이 들기는 김범우도 마찬가지였다. 처남은 좌익 지하신문을 발간하는 데 공금까지 유용한 것이었다. 아내에게서 전해 들었던 말은 몇 입을 건너면서 벌써 자기네 쪽에 유리하도록 변조된 것이었던 셈이다. 김범우의 눈길은 한사코 처남이 애지중지했던 미제 '제니스' 축음기로 쏠렸다. 사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평소의 생활태도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처남이 죽음을 면하고 재판을 받게 된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형편이 잘 풀리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김범우는 위로인사차 들른 것으로 해두고 자리를 일어섰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경찰서 방문에 대해서는 입을 떼지 않았다.
처남의 문제는 그의 처가의 능력에 맡겨두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의 장인은 일제 때부터 세무서에 근무해왔으므로 그 나름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처남을 죽음에서 건져 현재의 상황에다 놓아둔 것도 장인의 힘이 아닐까 싶었다.
벌교로 돌아가는 기차 속에서 김범우는 줄곧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의 의식은 여러 갈래로 혼선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갈래는 해방에서부터 이번 사건까지를 정리하고자 했고, 다른 갈래는 이번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려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갈래는 이번 사건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예상하고자 하는 식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뒤엉켜 머릿속은 혼란하기만 할 뿐 어느 것도 명료해지지 않았다. 김범우는 국어과 강원봉 선생이 죽었다는 사실에 줄곧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선우진은 꽤나 만족스러운 듯이 '그놈들 의당 죽어야 할 놈들이었다.'고 했다. 강원봉 선생의 죽음과 선우진의 감정일변도의 반공주의는 오늘의 현실을 사진 찍듯이 드러내고 있는 모순이고 갈등이었다. 그리고 그건 남쪽 사회가 안고 있는 중대한 문제점의 상징이기도 했다. 강원봉 선생은 일제의 국어말살정책 함께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런데 그분은 교직을 박탈당하고 나서도 국어 지키기를 계속하는 바람에 구속이 되었다. 학교 밖에서 학생들을 모아 독서회를 이끄는 한편 야학을 열어 국어를 가르쳤던 것이다. 그분이 체포된 이유는 국어를 가르쳤다는 것만이 아니라 적색사상을 주입했다는 혐의였다. 그 진부를 알 수 없다는 채로 그분은 해방이 될 때까지 자그마치 5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그분의 얼굴을 본 바도 없는 학생들 사이에서 그분의 존재는 존경심을 넘어서 신화와 전설로 살아 있었다. 선배들의 주의 깊고 은밀한 이야기는 지하수가 되어 후배들에게 흘러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모든 조선인 학생들이 황국신민의 정신에 투철할수록 강원봉 선생의 존재는 학생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빛이었다. 조선인 선생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황국신민의 정신을 부르짖은 것이 영어선생 박해일이었다. 그는 자기가 영어를 전공한 것은 적국을 알아야만 적을 무찌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는 한편 학생들에게도 영어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열을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영어를 전공했을 때는 미국이 일본의 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너무나 쉽게 알아버렸다. '대동아전쟁' 발발로 미국이 적국이 되자 영어선생은 자신의 옹색한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그런 낯 뜨겁고 치졸스런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는 것쯤 학생들은 훤히 알고 있었다. 영어선생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일본족의 우월함과 조선족의 열등함을 비교 대조하며 수업시간을 낭비하는가 하면, 신사참배에 누구보다 열성을 보였고, 성전의 승리를 위한 군사교육의 필요성을 훈육주임이 무색할 지경으로 역설해댔다. 그리고, 일본은 앞으로 200년 이상 조선은 물론 아시아의 종주국이 될 거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200년이란 근거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학생들은 파묻지도 못한 채 그 까마득한 세월에 암담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영어선생 박해일을 증오하면서 국어선생 강원봉에 대한 존경심을 더 키워갔다.
그러데 해방이 되었다. 경찰서가 학생들에게 점거되는 상황 속에서 영어선생 박일이 무사할 리 없었다. 그는 잽싸게도 그날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학생들이 집으로 몰려갔을 때는 그는 이미 집을 떠나고 없었다. 그의 경우와는 반대로 목포 형무소에서 풀려난 국어선생 강원봉은 조선인 학생들이게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읍마다 면마다 인민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새 나라 세울 준비가 바쁘게 진행되는 사회적 물결에 따라 학교도 새롭게 태어나는 분위기여서 학생들은 박해일 따위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내 순천지역에도 미군정 중대가 진입하기에 이르렀다. 10월말의 일이었다. 아직도 인력거가 굴러다니는 길에 미군 지프차가 경적을 요란하게 울려대며 달려대기 시작한 지 보름쯤 지났을까.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박해일이 미군 지프차의 뒷자리에 달랑 올라앉은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가 통역관이 되었다는 것을 누구나 금방 알아차렸다. 학생들이 놀라움은 컸고, 그 놀라움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박해일이 탄 지프차를 마주치게 되면 학생들은 "저 간나구 겉은 새끼!" "저 백여시 겉은 새끼!" 하며 거침없이 욕을 내쏘았고, 침을 내뱉었으며, 일삼아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학생들의 그런 노골적인 모욕 앞에서도 정작 박해일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태연했고, 턱을 끌어당기고 앉아 거드름을 피웠다. 그리고 그는 통역관이란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옷 속에 권총을 휴대하고 다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혀 반성할 줄을 모르는 그의 태도에 분개한 몇 학생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그를 에워싸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대뜸 옷 속에서 군총을 꺼내 겨냥하며,
"요런 빨갱이새끼들, 당장 쏴죽이기 전에 썩 물러서!"
하며 곧 방아쇠를 당길 태세였다. 학생들은 혼비백산했고, 그 소문은 금방 퍼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혀를 내두르며 기가 막혀했다. 그가 왜 전혀 기죽지 않고 거만을 부릴 수 있었는지를 사람들은 그때서야 깨닫기도 했다. 자신의 신변 위험을 막기 위해서 권총을 감추고 다니는 박해일이나, 자기네들이 필요한 사람이면 그게 민간인이든 경찰이든 가리지 않고 총을 차게 하는 미군이나 다 똑같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미군의 그러한 처사는 또 하나의 불신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순천을 점령한 미군이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일정시대 경찰 근무자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미리 알아 어딘가로 도망을 간 그들을 찾아내려고 미군들은 소란을 피워댔다. 삐라를 뿌리고, 다른 지방으로 피한 사람을 지프차로 실어오고, 산속에 숨어 있는 사람을 찾으려고 미군들이 산을 뒤지고 하는 소란들이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채용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런 미군의 처사에 반발하는 한편 심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김범우가 학교에 부임했을 즈음 박해일은 통역관으로서 한창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때 이미 '통역정치'라는 말이 유행되고 있을 정도로 군정의 행정 전반에 걸쳐 통역이 행사하는 영향력은 막대했다. 통역관들은 주어진 앵무새의 역할을 넘어서 새로운 권력층을 형성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통하면 안 되는 일 없고, 그들을 안 통하면 되는 일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도억의 그 많은 토지를 비롯해서 일체의 적산을 장악한 군정의 주위에는 그 재산을 노리는 자들이 맴돌았고, 통역관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이권을 취득하는 양수겸장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남쪽 단독선거로 정부가 세워지면서 형식적이나마 군정이 끝나게 되자 박해일의 호시절도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도 장학관으로 모습을 바꾸어 또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출세한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는 순천에 교육시찰을 내려왔다. 그는 교감과 교무주임을 대동하고 교실마다 수업참관을 하러 다녔다. 그런데 강원봉의 국어시간에 들어갔다가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그가 교실 뒷문을 들어서자마자 강원봉은 수업을 중단하고 교실을 나가버렸던 것이다. 물론 선생들 중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강원봉 한 사람뿐이었다. 김범우는 강원봉 선생의 그 속 후련한 행동에 갈채를 보냈다. 자신의 수업시간이 없었던 것을 아쉬워하면서.
박해일이 장학관이고 강원봉 선생이 평교사라는 것도 당치 않은 일인데, 거기다가 감독이 목적인 수업참관까지 한다는 것은 고등계 형사 출신이 독립투사를 새로운 사상범으로 몰아 고문 취조하는 것이나 똑같은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강원봉 선생에게 전근발령이 떨어졌다. 전교생들은 즉각적으로 동맹휴학을 벌였다. 강원봉 선생도 전혀 동요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 싸움은 결국 박해일의 패배로 끝났다. 강원봉 선생은 그저 묵묵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학교생활을 해나갔다. 나이가 좀 많은 탓도 있었지만, 선생들 사이에서도 어떤 의견 충돌 같은 것도 전혀 빚지 않았다. 몇몇씩 모여 앉으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고, 그러다 보면 정치이야기로 변해 말다툼이 생기고는 했지만 강원봉 선생은 아예 그런 자리에 끼지를 않았다. 그런데 그분이 이번에 총살을 당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김범우가 충격을 받은 것은 강원봉 선생이 그동안 완전히 은폐된 존재로 사상활동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아무런 성취도 하지 못한 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분이 사상적으로 좌익이었다는 것은 삶의 궤적을 통해서 얼마든지 감지할 수 있었고, 그 누구의 눈에도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그분이 죽어버린 것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공산당이 미군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싸움의 방법적 실패가 낳은 무모한 희생으로 여겨졌다. 선우진의 말에 따르면 강원봉 선생은 여지껏 감추어왔던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킨 모양이었다. 김범우는, 그분은 이번을 그렇게도 결정적 시기로 생각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대답처럼 떠오르는 염상진의 말이 있었다. "마침내 혁명의 날이 왔네. 이번엔 먼젓번 같은 것이 아니라 군인들과 힘이 합쳐진 결정적인 것이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인가. 또다시 미군들의 힘에 밀려 강원봉 같은 사람까지 죽어야 하는 수많은 희생만 낸 것이 아닌가.
전체적으로 7일, 염상진은 5일 만에 물러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무슨 근거로 이번에 '결정적'이라고 그렇게 단언할 수 있었을까.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을 불법시하면서 폭력탄압을 감행하기 시작하자 그에 맞서게 된 공산당의 사상정치투쟁은 번번이 좌절을 거듭했다. 대구 십일항쟁, 제주도 사삼사건, 오십선거 저지투쟁, 이번 사태까지 좌절은 연속적이었다. 그때마다 공산당의 조직이 파괴 와해되어 약해지는 것이야 자기네 사정이니까 말할 것 없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정치적 기대를 걸고 호응한 민중들의 수많은 희생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묻고 싶었다. 군정은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경찰과 군인을 앞세워 가차 없는 폭력진압을 감행했던 것이다. 공산당과 그 지지 세력을 하루라도 빨리 뿌리 뽑기 위해 미군정은 그런 정면도전을 오히려 고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건조작, 폭력유도, 분열책동은 일찍이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 구라파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의 저항세력들을 분쇄 제거하는데 즐겨 사용한 지배방법이었다. 남로당이 지금까지 군정에 대응해온 것을 보면 꼭 군정이 파놓고 기다리는 함정에 빠지는 식으로 결과가 뻔한 정면도전을 시도했고, 그 답답한 무모성은 마치 불나방이 무작정 불로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남로당은 어쩌면 남쪽 전역에 걸친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열렬한 지지였지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미군정의 경제정책에 대한 생존보호와 불만표현이 먼저였다. 그러니까 남로당은 군정과 정치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고, 민중들은 군정과 경제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로당은 민중들의 경제투쟁을 조직화하여 정치투쟁으로 확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교활할 만큼 영리한 군정이 그것을 좌시할 리 없었다. 미리 준비해둔 무력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박살을 내고는 한 것이다.
그동안 거듭된 좌절이 사건마다 그 나름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번 사건은 왜 일으켜야 했는지 김범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민족을 죽이러 갈 수 없다'는 것이 14연대의 제주도 출동 거부인 동시에 이번 사건을 일으킨 이유인 모양이었다. 그 이유는 얼마나 선명하고도 감동적인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행동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전투력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지방당들이 호응했을 뿐 그 이상의 지원도 호응도 없는 채 '반란'이란 봉건사회적 이름으로 규정되어 고작 일주일 만에 막을 내린 것이다.
염상진은 앞으로 투쟁이 계속될 테니까 좌절도 일순간이라 했다. 그러나 미군들이 보인 무자비한 무력행사와, 이번에 보인 기동성과 무력동원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그런 말은 공염불일 뿐이다. 남로당이 그들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전략 전술이 같은 사람들은 계속 죽어갈 것이고, 박해일 같은 사람들은 계속 건재해서 결국은 그런 부류들의 세상을 만들어주는데 이용되고, 협력한 결과가 될 뿐이었다.
신문들은 이번 사건을 '여순 반란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지난 4월 3일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사삼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에서 소수의 빨갱이들이 지휘관을 총살하고 부대의 지휘권을 장악함으로써 일어난 군부 내의 반란이라고 경위를 밝히고 있었다. 소위 김지희가 주동이 된 반란은 여수. 순천 지구에서 일주일 만에 '완전 진압'되었으며, 군부 내에서는 본 반란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광범위하게 수사하는 한편 군부 내에 침투해 있는 공산세력의 완전 소탕을 위해 본격적인 수사를 전개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신문들의 보도는 이번 사건을 '군부 내의 사건'으로 그 범위를 축소시키고 있었고, 일주일 만에 '완전 진압' 되었음을 강조하는 인상이 짙었다. 여수. 순천 지역에서 다수의 민간인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강조했을 뿐, 기타 지역의 상황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좌익계 신문들은 오래 전에 다 폐간되었고, 남아 있는 신문들은 모두 우익계였다.
김범우가 무거운 머리로 벌교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경이었다. 그 길로 바로 손승호를 만나러 갔다.
"어서 오게."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으로, 마루로 나온 손승호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앉게. 순천에 갔던 일은 잘되었나?"
손승호는 책 중간쯤에 끼워 넣었던 검지손가락을 빼고 그 페이지를 접으며 물었다. 그 물음에는, 김범우가 순천을 갔던 것이 예삿일이 아니었으리라는 염려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저 ……독서에 방해가 되지 않았나?"
김범우는 방바닥에 놓인 책에다 눈길을 주었다. 일어판 셰익스피어였다.
"방해는 무슨, 자넬 기다리면서 시간을 때운 건데."
손승호는 책을 책상 쪽으로 더 밀었다. 사범학교 시절부터 드러냄 없이 문학을 지망해온 그가 아직 셰익스피어를 못 읽었을 리 없었다. 그가 읽은 그 책이 일어판이라는 데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그 책은 일찍이 학생시절에 샀던 것일 게고, 해방 삼 년을 거쳐 오는 동안 외국서적의 신뢰할 만한 번역본이 출판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고작 발간되는 신간이라고 해야 이광수식의 삼각관계 연애사건을 다루고 있는 삼류 통속소설이 주류를 이루는 형편이었다. 김범우의 관심은, 사회적 사건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현재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한때 좌익 사상에 경도되었던 문학 지망생인 손승호가 다시 읽고 있었을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어떤 작품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역시 인도하고도 안 바꿀 만큼 위대한 모양이네, 자네의 시간 때움을 해줄 수 있으니 말야. 그 작품이 어떤 것이었나?"
김범우는 친근한 웃음을 띠어 보였다.
"햄릿을 그냥 뒤적이던 중이네."
손승호는 무언가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라도 있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그런 자신의 태도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일지 또 신경에 거슬리기라고 한 듯,
"셰익스피어가 위대한지는 몰라도 그런 비유법을 쓴 영국인들은 한심한 종자들이야. 그 과장의 정도야 아무래도 상관할 게 없지만 비유의 대상을 한 나라로 잡았다는 건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야. 셰익스피어가 제아무리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한들 어찌 인도보다 더 위대할 수가 있느냐 말야. 인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는 차치하고라도 거기엔 4억을 헤아리는 인간들이 엄연히 생존하고 있어. 그 생명들의 존엄성보다 셰익스피어가 더 위대하다니, 그 따위 발상법을 가진 영국인들은 일본 놈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식민주의자들이야. 물론, 어떤 유식한 자가 무심코 쓴 비유법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무심코'에 있어, 영국인들은 자기네 자존심을 세워주는 그 비유에 '무심코' 만족을 느낀 것이고, 자기네 민족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한 방법으로 셰익스피어를 세계화시키면서 또 그 비유를 '무심코' 써먹은 거야. 셰익스피어가 분명 봉건 왕조시대의 작가지만 자기의 작가정신이 원하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그 반대였겠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그런 좋은 작품들을 써내지 못했을 테니까. 셰익스피어는 후대를 잘 못 둔 셈이지."
손승호는 경멸적인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김범우는 놀라운 눈으로 손승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그야말로 무심코 던진, 그 예사가 된 한마디를 붙들고 그처럼 긴 이야기를 하는데 놀랐고, 자신으로서는 미치지 못했던 그 논리추출의 예리한 시각과 논리개진의 완벽한 방법에 놀랐다. 손승호의 그런 논리는 그가 왜 좌익의 테러화와 함께 사상적 전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건 문학적 인도주의를 사고의 바탕으로 마련하고 있는 손승호의 필연적 귀결인지도 몰랐다.
"우연찮게 참 좋은 말을 들었네. 난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네."
김범우는 숨김없이 자신의 심증을 토로했다.
"좋은 말은 무슨, 지금 후회하고 있는 중이네."
"그건 무슨 말인가?"
"말이 많으면 못 쓸 말이 많은 법 아닌가. 다 부질없는 소리야."
어떤 허망감에 몰리는지 손승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한 무게의 우울로 덮였다. 김범우는 그의 감정 상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사실의 모순이나 왜곡에 대해서 아무리 논리적 비판을 가하고 이론적 규명을 한다 한들 현실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을 때 허망감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었다. 그 논리가 명징하면 할수록, 그 이론이 명확하면 할수록 그 정도는 심해질 터였다. 더구나 손승호의 경우 문학적 허무주의까지 감안한다면, 그는 그런 논리적인 말을 하는 도중에 벌써 부질없음을 느껴버리는 감정적 굴절을 겪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질없기는 이 사람아, 자네의 말을 듣고 나 같은 우생은 깨달음을 갖게 되지 않았나. 물론 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생만큼 허무한 것이 또 어디 있겠나. 그런다고 우리의 삶 전체가 종교적일 수는 없잖은가. 남들에게 인생의 허무를 깨우쳐주고, 그러니까 죄 짓지 말고 좋은 일 하며 살라고 가르치는 종교인에게도 현실적 삶은 있는 법이네.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이야 말해 뭘 해. 그 누가 감히 그 현실적 삶을 거부하거나 기피할 수 있겠는가. 역사 비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겠나. 다 지나가버린 세월, 아무리 열 올리며 비판한다고 해봤자 이미 그르쳐진 일이 바로잡힐 리가 있겠나. 그런데도 그게 계속이거든. 왜 그러겠는가. 인간은 현실을 살 수밖에 없는 동물이고, 그 과거의 삶 속에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자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소릴 나야말로 부질없이 지껄여대고 있구먼."
김범우는 담배를 빼들었다.
"사람 참, 별소릴 ……"
손승호는 김범우 앞으로 통성냥을 밀어놓으며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고 있었다. 김범우는 담배에 불을 붙여 깊게깊게 빨아들였다. 그러면서 손승호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넬 만나려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네. 아까 자네도 얼핏 스친 염상구가 하는 말로는 지금까지 확인된 피살자가 백 명을 넘는다는데, 그게 사실일까?"
"아마 ……과장은 아닐 거네."
손승호는 시선을 방바닥에 떨군 채 대답했다.
"도대체 염 선배는 뭘 어떻게 하려고 ……"
김범우는 약간 격하게 터져 나온 말을 여기서 중단했다. 지금까지 염상구의 말이 과장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과장이길 바라고 있었는데 막상 손승호의 말을 듣게 되자 감정이 솟구친 것이었다. 그건 염상진에 대한 안타까운 원망이었다.
"그래도 염 선배는 그건 읍민의 1/200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네."
손승호는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참 야단났군. 그래서, 염상구의 말로는 좌익이나 그 용의자들을 북국민학교가 다 찰 만큼 잡아들였고, 어젯밤에 벌써 한 차례 처형을 했다더구만."
"어쩌겠는가, 당연한 순서 아니겠나."
손승호는 계속 냉소를 머금은 채 담배를 빼들었다. 그는 평소에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자넬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그 당연한 순서에서 저질러질지도 모를 실수를 막아보자는 것이네."
그때 비로소 손승호는 방바닥에 떨구고 있던 눈길을 들어 김범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눈빛은 김범우의 말에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의아함을 품고 있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핵심 좌익들은 벌써 다 도망을 쳐버렸네. 물론 붙들려 온 사람들 중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자들도 있긴 있을 것이고, 세포들도 끼여 있겠지. 그런 것을 가려내는 거야 경찰의 업무니까 말할 바 못되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 등의 감정이 개입돼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 염려가 있네. 그 피해를 최소한 막아보자는 거네."
"범우 자네의 뜻은 좋지만 그건 짚단 짊어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일세."
손승호는 그만 고개를 저어버렸다.
"이 사람아, 용이한 일이 아니란 걸 난들 왜 모르겠나. 그러니까 자네한테 협조를 구하는 거고, 여러 친구들을 모아 수습위원회 같은 걸 임시로 만들면 효과를 나타낼 수 있지 않겠느냐 말야."
"수습위원회는 이미 어제 만들어졌네."
손승호는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김범우는 무슨 수습위원회냐고 묻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상치된 모임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범우, 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네. 허나, 자네가 그런 제안을 했으니 내 생각을 말하겠네. 이건 내 겸손이 아니라, 자네의 전공(前功)을 보더라도 자네는 나보다 사회나 역사를 보는 눈이 밝고 넓을 것이네. 그래 하는 말인데,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역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좀 더 좁혀서 얘기하세. 자네나 나나 염상진 선배가 애초에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것은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는 아니잖은가.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것도 변질되기 시작했네. 금년에 남북 양쪽에서 서로 다른 주의를 앞세워 서로 다른 이름의 나라를 세우면서 우리 모두는 인간적으로 민족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살해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죄를 저질렀네. 그리고 나타난 현상이 뭐였나. 서로의 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인간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극단적 충돌이었네. 그런 야만적 행위가 또 어디 있겠나. 난 완전히 환멸하고 절망했네. 물론 좌익이나 염 선배의 입장에서는 자기네들이 먼저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겠지. 군정이 폭력을 사용하니까 맞서는 것뿐이라고 할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네. 범우 자네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행동적 동의를 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경직된 상황 속에서 자네와 같은 뜻이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고, 자칫 잘못하다간 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실수를 범할 것이기 때문이네. 날 비겁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네. 난 모든 것에 선행해 인간이고 싶네. 난 그걸 지키기 위해서 사회주의를 버렸고, 총을 들이댄 염상진의 위협에도 굽히지 않았네. 자네의 뜻이 바로 순수한 인간적인 것임을 아네만 현실은 그걸 순수하게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네. 자네가 좌익 학생들을 위해 분투했던 때와는 상황이 너무나 다르네. 협조를 할 수 없어 미안하네."
김범우는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손승호가 명백히 거절을 함으로써 대화의 통로에다 붉은 차단기가 내려진 것이다. 토론을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설득을 하는 것도 아니므로 이야기는 더 진전될 수가 없었다. 김범우는 손승호의 거절을 아무런 감정의 서운함 없이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거절할 수도 있었는데, 자신의 생각을 긴 말로 피력해 준 손승호의 노력에 오히려 고마움을 느꼈다.
"자네 생각 잘 알겠네. 내 생각에도 도움이 됐어."
김범우는 손승호가 거북해할까 봐 그의 손 위에다 손을 포갰다.
"범우, 참으로 미안하네. 우리가 ……"
손승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우울한 얼굴과 그가 삼켜버린 말이 김범우의 가슴을 울려왔다.
"나 그만 가봐야겠네."
김범우는 일어서며 방을 둘러보았다. 천장이 낮은 좁은 방에는 예전 그대로 책들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그 책들을 보자 한 줄기 슬픔 같은 감회와 함께 웃음이 떠올랐다. 책탐 많던 손승호의 기억 탓이었다. 그가 책을 모으는 노력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거기 자네 책도 몇 권 있을 걸세."
김범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손승호가 말했다. 그 목소리가 한결 탄력 있게 느껴졌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내 책일 리가 있나."
김범우는 허리를 굽히고 방문을 나서며 말했다. 처음에는 엄연히 빌려주었고 결국에는 받기를 포기해버린 책들이었다.
"범우, 날 이해해주게."
사립까지 따라 나온 손승호가 말했다.
"전혀 마음 쓰지 말게. 나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네."
손승호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김범우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손승호는 염상진만큼이나 어려운 형편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재래식 무쇠솥 공장 노동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순전히 그를 사범학교에 보낼 욕심으로 생선 행상을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어찌나 억척스러웠던지 하루에 백리 길을 걷는다는 소문이었다. 읍을 동서로 나눠 이틀 걸러 한 차례씩 돈 것을 보면 발 빠르기가 예사는 아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 열심히 행상을 해 그의 뒷바라지를 하는 한편으로 이 년 만에 남국민학교 건너편에 있는 공설시장 구석에 전을 차릴 만큼 돈을 모으기도 했다. 그 이년 동안에 그의 어머니의 정수리 머리칼은 거의 다 빠져 맨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손승호는 어머니의 그 훤한 정수리를 대할 때마다 죄스럽고 목이 메어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책상 서랍에는 어머니에 대해 쓴 시만도 수십 편을 헤아렸다.
그는 책벌레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책을 모으는 방법으로 심심찮은 화제를 뿌렸다. 선배나 친구들의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생의 책마저도 일단 빌리기만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돌려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몰염치한 방법이 처음에는 통했을 리가 없었다. 말썽이 생기고, 오해를 받고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끈덕진 책탐은 '타고난 팔자' '죽어야 고칠 병'으로 주위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가 탐한 책은 문학 서적만이 아니었다. 역사. 철학. 사회에 걸친 소장할 가치가 있는 모든 책이 대상이었다. 그가 돈을 내고 책을 구입하는 방법이라는 것도 희한했다. 그 자신이 책값의 반을 내고, 나머지 반값은 오등분으로 나눠 주주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그 다섯 명의 주주는 이틀 동안에 1회 완독의 기회를 갖고, 그 다음부터는 필요한 경우에 당일 대출로 그 권리를 영원히 누린다는 조건이었다. 물론 책 소유권은 그가 갖는 것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 그런 일방적 조건의 단골주주 노릇을 해준 것은 부자 친구들이었다. 그는 전혀 비굴함이 없이 부자 친구들에게 주주가 될 것을 권유했고, 부자 친구들은 반 장난삼아 주주가 되고는 했다. 그렇게 구입된 책의 뒷표지 안쪽에는 주주들의 이름과 구입날짜가 명시된 별지가 붙었다. 그런 다음 이틀씩의 돌려읽기가 시작되는데, 완독을 하지 않는 주주는 뒷표지 안쪽에 붙은 별지에 자필사인을 할 자격이 없었다.
"책 앞에서 양심을 속이는 자는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바라보며 양심을 속이는 자보다 더 추악하다. 아직 다 못 읽었으면 언제라도 다 읽고 나서 사인을 하라."
그의 되풀이하는 이 말 앞에서 미처 다 읽지 못한 주주는 사인을 할 도리가 없었다.
그가 행하고 있는 방법은 책을 싸게 구입함과 동시에 동료들에게 책을 읽히고자 하는 독서운동이었던 것이다. 이 소문이 차츰 퍼지자 그는 굳이 주주 모집을 권유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돈 없는 하급생들이 읽고자 하는 책 중에는 이미 그가 읽어버린 것들이 있었다. 그럴 때는 그들은 해당 책의 주주로 추가시키고, 그들이 모아온 돈으로는 다름 책을 구입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 권의 주주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절대로 책을 빌려주는 일이 없었고, 집으로 찾아가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는 아무 책이나 읽게 해주었다. 그는 사범학교 졸업 무렵에는 이천 권을 헤아리는 장서가가 되어 있었다.
"육당 최남선이 친일만 한 건 아니거든. 나한테 책 모으는 방법을 깨우쳐줬어."
친구들 앞에서 그가 능청스럽게 한 말이었다.
염상진도 그의 앞에서는 사회주의 이론이 딸릴 지경이었다. 그는 인간다운 삶의 길을 위하여 사회주의를 택했었다. 그런데 결국 그가 만난 것은 인간부재의 현실일 뿐이었다.
"너를 죽이기는 아깝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염상진이 총을 거두며 한 말이었다.
그 순간에도 손승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니고 있는 비인간성에 환멸과 혐오를 느꼈을 뿐 살아나게 되었다는 기쁨을 느끼지는 않았다.
저물어가는 시월의 한기 속을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어스름의 부유는 바람의 흔적과도 다르고 안개의 자취와도 다르다. 바람은 일정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단조로운 질서를 지키고, 안개는 잠긴 듯한 무거운 꿈틀거림 속에서 농도가 다른 층을 이룬다. 그런데 어스름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땅 넓이만큼 내리는 것이며, 농도가 다른 층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서서히 변색해 가는 것이었다.
벌교의 어스름은 언제나 두 곳의 하늘로부터 내려 하나로 어우러졌다. 제석산. 징광산. 금산이 있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과 긴 포구를 끼고 있는 바다 쪽 하늘에서 내려오는 어스름이 땅과 물의 경계 그 어디쯤에서 포옹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벌교의 어스름녘은 환상적인지도 몰랐다.
김범우는 그 어스름 속을 걸어가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손승호의 말이 새로울 것은 없었다. 주의가 정치적 대결장의 무기로 변한 것도, 그 속에서 한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가 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오해를 야기시킬 위험성도, 김범우는 이미 생각했던 바였다. 그러나 김범우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주의가 정치폭력화 했다는 점이었다.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의 불법화 조치를 취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폭력대결은 정부수립을 기점으로 남쪽에서 공산주의라는 것은 절대 용납이 안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북쪽에서의 자본주의라는 것은 절대 용납불가가 된 것이다. 그 결과의 표현이 바로 이번 사건이었다. 염상진이 겨우 오 일 동안에 백 명 이상의 인명 살상을 자행할 줄 상상이나 했던가. 그건 염상진이라는 개인의 뜻이 아니라 정치폭력화한 주의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염상진은 이미 주의를 지배하는 이성적 인간이 아니라 주의의 정치적 실현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변신한 것이었다. 정치라는 것만큼 본질을 전도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염상진은 그 전도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백 명쯤은 의당 죽일 수 있는 타당성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염상진이 그러했다면, 그 상대적인 힘은 두 배 이상의 가격을 할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정치폭력의 역학이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닌 것이다. 일본교사들이 조선인 학생들에게 즐겨 써먹었던 '서로 따귀 갈기기'의 처벌법이 갖는 가해성과 마찬가지였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상대방을 세게 갈길 수밖에 없는 가해성, 그때 내가 때리고 있는 것이 내 친구라는 사실은 이미 망각해버린다. 상대는 오직 나를 아프게 하는 적일뿐이고,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격성만 가속화하는 것이다. 김범우는 그 정치적 가해성은 외면하고 있었다. 그건 비탈길을 굴러내리기 시작한 수레바퀴의 불가항력적인 힘이었기 때문이다. 김범우의 관심은 그 수레바퀴 아래 멋모르고 깔려 압사해야 하는 민중들의 억울에만 쏠려 있었던 것이다.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 찜질 당헐 소리지만 서방님 앞이니께 허는디, 사람들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오?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한다고 말로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 허지, 가난허고 무식헌 것덜이 믿고 의지헐 디 웂는 판에 빨갱이 시상되먼 지주 다 쳐웂에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헐 사람 워디 있겄는가요. 못할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들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문 서방의 말이 더할 수 없는 웅변으로 김범우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 말은 민중으로서 위선적 정치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고, 왜곡되어가고 있는 사회현실에 대한 정확한 증언이었고,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고 있는 정당한 발언이었다.
김범우는 경찰서로 갔다. 염상구는 없었다. 하나뿐인 경찰도, 급사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어버렸다. 다방으로 가보았다. 그는 거기에도 없었다.
"어마, 낮에 오셨던 분이군요. 그이 요새 바빠 밤에는 볼 수도 없어요. 청년단에 갔나, 학교에 갔나. 그래요, 청년단으로 한번 가보세요."
아가씨는 생글거리며 친절하게 말했다.
"청년단이 어디던가 ……"
김범우는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들을 넣어 머리를 잡으며 혼잣말을 했다.
"어쩜, 벌교 사시면서 청년단을 모르세요? 나같이 타향살이하는 사람도 아는데, 공원 아래 목욕탕 이층이잖아요."
아가씨는 타향살이의 풍파를 재주껏 넘을 수 있을 만큼 계속 친절했고, 김범우는 그때서야 청년단의 위치가 선명하게 잡혔다. 정치활동과 무관하게 사회를 바라보는 생각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김범우도 청년단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발길을 한 일이 없었다.
"고맙소."
김범우는 바삐 다방을 나왔다.
염상구는 청년단에도 없었다.
"누구럴 찾는다고라?"
안에 있던 세 명 중의 한 사내가 불량스러운 눈으로 김범우의 위아래를 훑었다.
"염상구를 찾는다니까!"
김범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상했던 대로 세 사내가 벌떡 일어서며 긴장했다.
"혹시 누, 누구신가요?"
태도가 돌변한 아까의 사내가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뭘해. 염상구가 지금 어디 있는지 그것만 대라니까."
김범우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몰아쳤다. 난세일수록 직효를 나타내는 사람 다루는 익명술이었다.
"부, 북국민학교에 기실 거구만요."
"알았어!"
김범우는 곧 염상구를 체포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청년단을 나왔다. 김범우는 북국민학교로 발길을 서두르면서 자꾸만 서글픈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북국민학교 정문에는 두 명의 보초가 집총을 하고 서 있었다. 김범우가 가까이 가자 그쪽에서 먼저 소리쳤다.
"정지, 누구냐!"
"염상구를 만나러 왔다."
김범우는 맞서 소리치며 접근했다.
"당신 누군디 건방지게 우리 감찰부장님 맨이름을 부르는겨?"
사복을 입은 사내가 총을 겨누었고, 전투복을 입은 사내가 따라서 총구를 돌렸다.
"혼나기 전에 총들 치워. 자네, 염상구한테 가서 김범우란 사람이 왔다고 전해."
김범우는 호통치듯 하며 사복 입은 사내를 손가락으로 겨냥했다.
"워메, 범우 서방님이라고라?"
사내가 겨누고 있던 총을 빠른 동작으로 세워 들었다.
"안녕허셨어요. 지는 들몰 방찬돌이 아들 방만복이구만요. 지는 서방님을 알제만 서방님이사 지를 모를 것이구만이라. 날이 침침혀서 얼렁 서방님을 몰라뵙고 총 딜이댄 거 죄송시럽구만요."
바로 앞으로 다가와 꾸벅 인사까지 하는 두툼한 얼굴의 방만복이란 사내를 김범우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들몰에 사는 작인 방찬돌은 알고 있었다.
"그래, 자네가 바로 방찬돌 영감님 아들이구먼. 그러고 보니 아버님을 많이 닮았네. 밤에도 수고가 많구먼."
김범우는 자상한 관심을 표하면서 방만복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수고는 무신 수고라. 지가 얼렁 가서 감찰부장님 모시고 올것잉께 쬐끔만 기둘리시씨요."
방만복은 총을 거추장스럽게 흔들어대며 어둠 속을 뛰어갔다.
교사 왼쪽으로부터 사람들이 줄지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잠시 후였다. 그 사람들의 행렬은 짙어져가는 어둠 속에서 흐린 형체로 어릿거렸다. 그들이 이번 사건으로 잡혀와 있는 사람들임을 김범우는 직감했다.
"저 사람들이 왜 운동장으로 나오고 있소?"
김범우는 보초에게 물었다.
"심사를 받어야 헝께요."
김범우의 음성에 비해 보초의 목소리는 한결 느긋했다.
"이 어두운데 무슨 심사를?"
"불이야 키면 될 일이고, 헌디, 누구신지 모르겄지만 워찌 그리 꼬치꼬치 물어싼다요? 여그 요러고 있는 것이 위법이란 말이오."
보초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지 태도를 바꾸었다. 운동장 가운데를 가로질러 이쪽으로 똑바로 뛰어오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성님, 여그꺼지 워쩐 일이시오?"
염상구가 숨을 몰아쉬었다.
"자네한테 급히 알아볼 게 있어서 왔네."
"을매나 급헌 일인디 여그꺼지 오시고 그러요. 싸게 뜨십시다. 여그넌 성님 기실 디가 못된께."
염상구가 김범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리를 옮길 것까지 없네. 간단한 이야기니까."
김범우는 운동장 쪽으로 신경을 쓰며 자리를 뜨지 않으려 했다. 먼저 나온 사람들은 도열을 하고 있었고, 행렬은 계속 뒤를 이었다.
"성님, 이 시간에 민간인이 여그 잇는 것은 위법이랑께요. 요건 경찰서장 명령도, 도지사 명령도 아니고 장관님 명령이란 말이요. 싸게 갑시다."
염상구가 아까와는 강도가 다른 힘으로 김범우를 끌었다. 김범우는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정신 똑똑허니 채리고 근무혀!"
염상구가 두 보초를 향해 바락 소리쳤다.
"쩌그 남국민핵교 길목꺼지 바래다디릴 것잉께 싸게 집으로 가시씨요. 25일부텀 여순 지구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얏는디, 밤중에 댕기다가 큰탈난게요. 암호 못 대먼 무조건 발포해뿌요. 요새 죽으면 개값만도 못헌께요."
염상구는 겁을 주자는 것인지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을 지껄여대고 있었다.
"수습위원회가 생겼다는데, 대표가 누군가?"
"워째 그러시오? 성님도 들어가시게라?"
염상구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반색을 했다.
"대표가 누군가!"
김범우의 음성에 짜증이 섞였다.
"최익승 의원님이구만요."
"최익승, 그자가 왜 대표를 해. 서울에 앉어서 무슨 놈의 대표야."
김범우는 치솟는 화를 그대로 내뱉고 있었다.
국회의원 최익승, 그는 한민당 계열의 전형적인 모리배였다.
"의원님은 오늘 도착하셨구만요."
염상구는 김범우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면 복배하듯 말마다 의원님이었다. 염상구가 지난 선거 때 최익승의 행동대원으로 설쳤던 것은 김범우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기호는 둘, 최익승. 작대기는 둘, 최익승. 눈도 둘이요, 귀도 둘이요, 콧구녕도 둘이요, 팔도 둘이요, 다리도 둘이라. 기호는 둘, 작대기는 둘, 둘 밑에 꾹 눌러, 눌러놓고 봐. 고것이 누구냐, 바로 바로 최익승, 우리 일꾼 최익승, 애국지사 최익승.
이승만은 남한 단독선거를 유리하게 치르기 위해 경찰력을 보조할 수 있는 향보단을 전국적으로 조직화했고, 그 단원으로 둔갑한 염상구와 그의 졸개들은 장타령도 아니고 육자배기도 아닌 가락이 쉬워서 그랬는지 어느 틈에 아이들까지 그것을 익혀 골목골목에서 소리쳐댈 정도였다. 입후보자의 이름조차 읽을 수 없도록 문맹이 태반인 유권자들을 위해 기호라는 것이 마련된 것이고, 선거운동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기호를 유권자들의 머릿속에 주입시켜야 했으므로 벌어진 현상이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시작되는 그 어설픈 모습을 바라보며 김범우는 형용할 수 없는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최익승이 굳이 벌교에 내려왔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김범우는 갑자기 말할 기운마저 다 빠져나가버리는 것 같은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최익승이 오늘 몇 시에 도착했지? 그자가 한 일은 뭐 없었나?"
김범우는 최익승에 대한 역겨움을 애써 누르려고 했지만 흔들리고 있는 감정은 두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하게 했다.
"긍께, 의원님은 오정 때가 지내서, 오후 한시 가차이 도착허셨는디 ……"
국회의원 최익승을 마중하기 위해서 십여 명의 사람들은 광주발 기차 시간에 맞추어 노천 플랫폼에 한 줄로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읍내에서 몇 개 안되는 장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거나, 읍 행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지급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응당 있어야 할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무서장, 금융조합장, 청년단장 그리고 유지급으로는 술도가 정현동 사장, 윤 부자 등이었다. 경찰서에 갇혀 있는 정 사장을 제외한 그들 모두는 이번 사건으로 저승객이 된 사람들이었다.
한 줄로 늘어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침울하고 기죽은 모습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경찰서장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경찰서를 빼앗기고 도망을 쳤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해서 돌아와 보니 불타버린 경찰서는 콘크리트 뼈대만 흉측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궁여지책으로 읍사무소 구석에 경찰서를 차려놓고 있는 그는 마침내 국회의원 앞에 자신의 무능과 죄상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줄의 맨 끝자리에 서 있는 염상구의 마음도 편치가 않았다. 청년단의 책임이야 경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그래도 '의원각하'를 대할 면목이 없기는 매일반이었다. 최 의원이 도착해서, 난리통에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염상구는 그런 찜찜한 생각은 떨쳐버리고 최 의원 앞에서 당당했던 기억만을 머리에 담으려고 애썼다.
"자네공은 내 잊지 않음세. 우선 이거나 받아두게."
국회의원 당선이 확정되던 날 최 의원은 염상구를 따로 불러 돈 봉투를 쥐여 주며 감격적인 어조로 말했던 것이다. 염상구는 굽신거리며 돈 봉투를 받기는 했지만 내심으로는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바로 최익승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킨 것이라는 자만이 차 있었다. 경찰이 체면 때문에 차마 내놓고 할 수 없는 일을 염상구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맡아 처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익승은 국회의원이 되어 서울로 올라간 뒤로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변심을 해버렸나 싶어 은근히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나랏법을 새로 만들고 어쩌고 하느라고 국회의원은 몸을 열로 쪼개서 써야 할 만큼 바쁘다는 소문을 듣고 상면의 적당한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최의원으로서는 결코 기분 좋은 고향걸음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 청년단장 자리가 비어 있었다. 빨갱이 소탕과 치안유지가 시급한 마당에 이번에야말로 그 자리를 차고앉을 절호의 기회일 수가 있었다. 염상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고 작정하고 있었다.
"자네 공은 내 잊지 않음세."
최 의원 한마디면 단장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고, 국회의원을 한번만 해먹고 그만두지 않는 한 최 의원은 청년단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염상구는 내말한 웃음을 흘리고 서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기차에서 내린 최 의원은 도열해 있는 그 누구와도 악수를 하지 않았다.
"갑시다."
도열한 사람들을 한 눈길로 싸잡아 노려보고 있던 최 의원이 내뱉은 말이었다. 앞서 걷기 시작한 최 의원한테서 사람들은 살벌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아무 일이 없을 때라도 국회의원 앞에서 읍장이나 경찰서장의 직함은 날파리 같은 목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빨갱이들에게 읍 전체를 오 일 동안이나 빼앗긴 죄인들이었다. 그들은 한층 주눅들고 후줄근해진 몰골로 최 의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미리 점심 준비를 시켜둔 남원장에 자리를 잡았다.
"썩 물러 나거라.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시뻘건 대낮부터 기집들이 술잔을 들고 설쳐!"
최 의원은 눈을 치뜨며 호통을 쳤다. 모처럼 큰손님을 맞기 위해 진솔 한복을 받쳐 입고 나선 서너 명의 아가씨들은 혼비백산 자취를 감추었고, 좌석은 얼음덩이처럼 얼어붙어버렸다. 최 의원의 호통이 아가씨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을 향해 떨어지고 있음을 모르는 좌중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밥상머리에는 공포스런 침묵만이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다들 들으시오!"
최 의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떨구고 앉았던 좌중들은 하나같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다망한 국사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왕림했는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오. 나는 현시점에서 국록을 먹고 일하는 관리가 자기 책무를 다 완수하지 못하고 저지른 과오를 문책하진 않겠소. 그러나, 그 대신 다른 책무 하나를 시달하겠소.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공산당 좌익 빨갱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소탕하는 일인 것이오. 만약 이 일을 철두철미 완수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때 가서는 지금 덮어둔 죄까지 합쳐서 처벌받게 된다는 사실을 골수에 명심해야만 할 것이오."
정견발표 단상에서처럼 목청을 돋우어 말을 해나가던 최 의원이 잠시 말을 중단하고 물컵을 들어 입을 축였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방안은 조용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헌법을 만방에 공포하고 그 양양한 앞길을 향하여 출발하고 있는 참이오. 그런데 좌익 빨갱이들이 그 앞길을 가로 막으려 하다니, 이것을 어찌 좌시할 수 있으며 방관할 수 있는 일이겠소. 빨갱이는 우리의 적이오. 국법으로 다스리도록 되어 있는 우리의 적이오. 이번 기회에 남로당 빨갱이들의 뿌리를 도려내고, 씨를 말려야 할 것이오. 이건 국가의 시책임과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 각하의 엄중한 지시인 것이오. 이번 기회에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국가 백년대계에 우환을 남기게 되는 것이오. 군부는 군부대로 색출작업을 단행하기 시작했으니 경찰도 이에 발맞추어 추호도 실수가 없도록 전력투구하여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오.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소. 이번 기회에 공을 세우면 포상을 받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고 또 실수를 저지르면 민족반역자로 처벌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이오."
상기된 얼굴로 말을 마친 최 의원은 술주전자를 번쩍 치켜들었다.
"자아, 읍장! 내 술을 받으시오."
최 의원이 말했고 이 느닷없는 말에 읍장은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나서도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최 의원은 좌중 모두에게 한 잔씩의 술을 따라주었다.
"자아, 앞으로의 일에 매진하는 뜻으로 다 함께 술을 듭시다."
최 의원의 말에 따라 좌중은 모두 옆으로 고개를 돌려 최 의원에 대한 예를 차려가며 술로 입술만을 축였다. 밥을 먹으면서 오간 이야기는 대부분 거물 피살자들에 대해서였다. 읍장이나 경찰서장이 번갈아가며 보고하듯 말하고 있었고, 최 의원은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듣는 쪽이었다.
"워쨌거나 빨갱이눔덜언 소탕허게 되야 있는디가가 최 의원님꺼정 그리 야단잉께 빨갱이 뿌랑구럴 뽑자면 야물딱지게 일을 혀야지라. 안그러요, 성님?"
"알았네. 그만 돌아가 보게."
"딴 것은 또 머 웂으시오?"
"다 됐네."
"차암, 성님도 엔간히 싱겁소. 낼 아칙에 알아도 될 고런 시시헌 일로 핵교꺼정 걸음허실 필요 머 있소. 난 무신 큰일 터져뿐지 알았소. 조심혀서 핑허니 집으로 가시씨요이."
"잘 가게."
김범우는 맥을 놓고 천천히 걸었다. 현직 국회의원이 수습위원장, 그건 자신의 적수일 수가 없었다. 거대한 산이었다. 상대가 최익승이어서 산은 한층 더 거대해지는 것이었다. 운동장으로 끌어낸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심사를 하는지 물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최익승의 출현을 알게 된 순간 그 생각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최익승은 낙안벌의 지주 최씨 문증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경성제대 법학부를 나온 그는 고등고시를 네 번인가 떨어진 다음에 마음을 고쳐먹고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자본이야 물론 작인들의 타작마당까지 눈 부릅뜨고 지켜 모은 집안 돈을 끌어간 것이었다. 동업이란 이름으로 일본인을 앞세운 그의 사업은 안정된 번창을 누렸다. 사업을 해서 번 돈으로 그는 고향의 땅을 사들였다. 최씨네가 다른 성씨의 지주들을 누르고 낙안벌의 제일가는 지주가 된 것은 최익승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땅에 대한 집착은 해방이 되기까지 거의 15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김사용이 처분해야 했던 상당한 땅도 바로 최익승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해방의 소식이 전해진 그날 그는 사무실의 책상을 치며 통곡했다는 소문이 벌교에까지 퍼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해방이 되고서도 망하지 않았고, 사업을 계속하는 한편으로 정치에 관심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한민당의 공천을 받아 보성. 벌교 지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기에 이르렀다. 그 어떤 입후보자든 가릴 것 없이 공통적으로 부르짖는 두 가지 사항이 있었다. 첫째가 자신들이 얼마나 애국자인가 하는 것이었고, 둘째가 자신들이 국회의원이 되면 그날로 농지개혁법을 만들어 농지개혁을 조속히 실시함으로써 유권자 절대다수의 숙원을 풀겠다는 것이었다. 최익승도 선거 막바지에 목이 거의 잠겨버릴 정도로 그 두 가지를 남들보다 큰 목소리로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쪽으로는 경찰과 향보단을 이용해서 반공갈 반협박의 회유책을 썼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리 단위로 술판을 돌아가며 벌였다. 유사 이래 최초로 실시된 투표라는 것에서 남한 전역의 유권자는 95퍼센트의 참여율을 보였고, 최익승은 그야말로 민의에 의한, 민의를 위한,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 뽑힌 것이었다.
그 투표에서 기권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김범우는 먼발치에서 선거운동 기간을 지켜보며 어이없는 헛웃음을 물고는 했을 뿐이다. 그리고, 최익승을 뽑은 유권자들을 결코 어리석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들의 선택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후보자들은 하나같이 때묻은 걸레였고, 선거를 감시한 유엔 한국위원회는 '관권이 개입된 강압적 부정선거'였다는 보고서를 유엔에 보낼 정도였으므로 한민당의 공천자 최익승의 당선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유권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농민들은 그저 두 번째의 공약이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국회가 열리고 오 개월이 지나도록 농지개혁 실시는커녕 농지개혁법조차 상정이 안 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최익승은 당선이 되어 떠난 후로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다가 이번에 나타난 것이었다.
김범우는 제재소를 지나 병원 앞에 이르렀다. 자애병원이라는 세모꼴의 입간판이 동구 앞의 비석처럼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한지를 접어 네모나 마름모의 연속무늬가 되도록 오려내어 붙인 유리창에는 전등불빛이 밝게 배어 있었다. 불투명유리는 구하기가 어렵고, 투명유리의 불편스런 노출을 막기 위해 한지를 붙인 것이었다. 그런데 네모나 마름모의 그 단조로운 무늬가 한지를 붙인 차단감을 용케도 없애주고 있었다.
김범우의 마음은 전명환 원장을 잠깐 만나고 갈까 말까 하는 생각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자니 무언가 서운하고, 만나자니 용건이 없었다. 소화다리를 건너가기가 싫어 길을 잡다보니 병원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전부터 전원장을 만나오면서 용건이 없을 때가 태반이었다.
김범우는 내심으로 전명환 원장을 존경하고 있는 터였다. 자애병원이라는 이름의 뜻과 전명환 원장의 의료행위와는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는 돈을 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람으로서 가장 하기 어렵다는 그 일을 그는 한결같은 태도로 지켜왔고, 김범우는 그 변함없는 인품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김범우는 전 원장을 대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푸근하고 넉넉해지는 것이었다.
김범우는 어느덧 병원 유리문을 옆으로 밀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김 선생님."
낯익은 간호원이 허리를 깊이 굽혀 인사를 했다. 그녀의 깊은 허리 굽힘을 따라오기라도 한 것처럼 병원 특유의 소독 냄새가 끼쳐왔다. 그 크레졸 냄새를 김범우는 아침 공기만큼이나 좋아했다. 그건 곧 전 원장의 냄새이기도 했던 탓이었다.
"선생님 계신가요?"
"네, 올라오셔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간호원이 날렵한 동작으로 슬리퍼를 놓고 돌아섰다.
김범우는 원장실을 겸한 진찰실로 들어서서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무런 치장이라고는 없는 방은 항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왼쪽 벽에 붙은 히포크라테스 선서, 그 아래로 의사자격증, 원장의 것으로는 너무 작다 싶은 낡은 책상, 다소 초라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전 원장의 욕심 없는 생활태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장소여서 오히려 숙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무의자에 앉은 김범우의 눈길은 문득 한 곳에 고정되었다. 기본 진찰을 위한 의료기구나 간단한 치료에 쓰이는 약품들을 넣어둔다는 유리문 달린 삼층장은 분명히 창가의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바로 그 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 있었던 것이다. 유백색의 둥근 항아리에 연보랏빛 들국화가 항아리보다 큰 머리를 하고 탐스럽게 꽂혀 있었다. 아까는 건성으로 지나쳤던 것이다.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치장인데다가, 젖빛으로 흰 둥근 항아리와 넘치게 꽂은 연보랏빛 들국화의 예사롭지 않은 조화미에 김범우의 눈은 놀라고 있었다. 이 양반이 마음이 변해가나, 생각하며 김범우는 미간을 좁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항아리를 유심히 살폈다. 꼭 덩달이 같은 그 생김새며 희뿌연 색깔이며가 예사 항아리 같지는 않았다. 김범우는 도자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것이 값비싼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쪽으로 다가갔다. 김범우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항아리는 흰 몸체에 두 개의 가늘고 긴 금을 머리카락처럼 박고 있었다.
"김 선생, 어서 오시오."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김범우는 흠칫 놀랐다. 잠시나마 의심스러워했던 자신의 생각을 들킨 것만 같아 죄스럽고 민망했다.
"안녕하십니까, 원장님."
"앉읍시다. 못 보던 항아리가 갑자기 나타나 김 선생 눈도 놀란 모양이죠?"
전 원장의 안경 낀 얼굴이 언제나처럼 안온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십년 이상 연상이면서도 존대를 썼다.
"예, 항아리하고 꽃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
김범우는 갑자기 심미주의자라도 된 것처럼 감상 쪽으로 말머리를 어물거려 돌렸다.
"저 항아리가 금이 가긴 했지만 여기에 놓인 사연이 있어요. 장암리 어떤 사람이 발목에 고질이 된 종기를 앓고 있어 수술을 해줬는데, 그 사람이 치료비가 없다면서 쌀 한 말하고 저 항아리를 가져오지 않았겠소. 저 항아리가 금이 가긴 했지만 대대로 소중하게 물려오던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귀한 것이라면 쌀만 받을 테니 그냥 가져가라 해도 말을 들어야지요. 어찌는 수가 없어 받아두긴 했는데 마땅히 쓸모가 있어야 말이지요. 그런데 마침 강양이 꽃병으로 이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산에서 국화꽃을 꺾어다가 꽂은 게 아니겠소. 저리 놓고 보니 없는 것보다 낫소, 진찰실이 팔자에 없는 치장을 한 셈이 됐소."
"또 그러셨군요."
김범우는 전 원장의 눈을 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전 원장의 치료비가 순천에 있는 도립병원보다 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그 치료비마저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한두 번, 한두 해에 걸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난 농부들보다는 호의호식하며 살지 않소. 약이나 기구 사고 남은 돈으로 세끼 밥 굶지 않고 먹고, 자식들 가르치는데 뭔가 이문은 남아야 하는 거고, 김 선생같이 생활 어렵지 않은 사람들한테 많이 받아 손해를 채우고 있단 말이오. 내 요령이 어떻소."
전 원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보성. 조성. 고흥까지 그의 후덕함은 알려져 있었고, 그는 난데없는 고구마 가마니나 참기름 병을 받기도 했다. 그가 이미 잊어버리고 있는 보은이고, 빚갚음이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 그가 치른 고역은 그가 살아온 삶의 보람을 입증한 것이었다. '국회의원 할 사람은 전 원장밖에 없다'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후보자 등록마감을 며칠 앞두고 본인에게 직접 출마 종용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어 서울로 가버리면 여러분은 어쩔 겁니까?"
그는 난처한 얼굴로 이 말을 되풀이해야 했다.
사람들은 국회의 기능을 따지기보다 먼저 국사에 참여해야 할 사람의 제일의 조건으로써 청렴결백을 꼽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어쨌든 무사하게 만나게 되어 반갑구료."
전 원장이 스산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담배 태우시겠어요?"
별로 즐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범우는 담뱃갑을 내밀었다. 무언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은 전 원장의 음울한 표정을 보자 김범우는 불현듯 흡연욕구를 느꼈던 것이다.
"한 대 피워볼까요."
전 원장이 담배를 빼들었다.
"저는 멀찍하게 피해있는 동안 지루한 것밖에는 느낀 게 없지만 원장님께서는 난리 한가운데서 어려운 일이나 겪지 않으셨는지 궁금하군요."
"원래 의사라는 직업이 그런 일이 벌어질수록 필요한 것이 돼놔서 달리 어려운 일이야 겪지 않았지요."
전 원장은 담배연기를 삼키지 않고 입 안에 머금었다가 천천히 뿜어내며 염상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김 선생하고 염상진이란 사람하고는 친구 사이지요?"
"학교는 이 년이 선밴데, 그런 셈이지요."
김범우는 전 원장의 얼굴을 주시했다. 전 원장은 반들반들 손질이 잘 된 진찰실의 마룻바닥 그 어딘가에 시선을 던진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사람, 어딘가 좀 다른 데가 있는 사람이더군요."
전 원장은 독백을 하듯 말했다. 김범우는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 순경이라고,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소화다리 위에서 총을 맞고 도주해서 우리 집으로 뛰어들었어요. 온몸이 피투성이였는데, 옷을 벗기고 보니 복부에 총을 세 방이나 맞았어요. 그 사람이 몸집이 크고 건강하긴 했지만, 어떻게 총을 세 방씩이나 맞고 소화다리서부터 우리 집까지 도망쳐올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어요. 밤도 아닌 대낮이었으니까 곧 사람들이 뒤쫓아 올 것을 알면서도 난 수술준비를 서둘렀어요. 그게 의사가 할 일이었으니까요. 막 수술실로 들어가려는 참이었어요. 세 사람이 병원으로 뛰어들더군요. 그들은 순경을 찾았고, 나는 혼수상태에 빠진 장 순경을 그들 앞에 내보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들은 장 순경이 총을 세 방 맞은 것을 확인했고, 그중 한 사람이 나더러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묻더군요. 그 사람이 염상진이었어요. 나는 수술을 할 참이었다고 솔직히 말했지요. 그랬더니 염상진 그 사람 하는 말이, 어서 수술을 해서 살려내라는 것이었어요. 왜 그러는지 이유를 말하지도 않고 그 사람은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섰는데,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었어요. 나는 그 사람이 장 순경을 향해 총질을 해버릴 줄 알았었지요. 그리고 나도 어떤 보복을 당하게 되리라고 각오하고 있었거든요."
"그래, 장 순경은 어찌 됐습니까?"
김범우는 염치불구하고 결론부터 알고 싶은 마음에 불쑥 물었다.
"마치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습니다. 지금 회복단계에 있지요."
"원장님 의술이 워낙 뛰어나셔서 …… 참으로 좋은 일 하셨습니다."
김범우는 전 원장의 인품에 진정으로 외경심을 느꼈다. 총을 맞고 뛰어든 사람이 누구였건 간에 전 원장은 똑같은 행위를 했으리라 싶었다.
"나야 병 고치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다뿐이지 세상 보는 눈이 영 어두운데, 김 선생이 보시기에는 앞으로 어찌 될 것 같은가요?"
"전들 뭘 알겠습니까마는, 끝없이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범우의 머리에는 운동장의 어둠 속에서 어릿거리던 사람들의 행렬이 떠올랐다.
그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참으로 큰일입니다. 같은 민족끼리 이리 살아서 되겠습니까. 해방이 되면 모든 게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
"답답한 일이지요."
김범우의 가슴은 정말 돌덩이에라도 눌리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건 심리적인 압박감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여실하게 느껴지는 통증이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김범우는 담배를 비벼 껐다.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잘 쉬었습니다."
김범우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부하들을 이끌고 말없이 병원을 나가는 염상진의 모습이 보이는 듯싶었다. 그는 손승호에게 들이댄 권총의 방아쇠도 당기지 않았다.
"찬은 없지만 저와 함께 저녁이나 들고 가시지요. 밥 때가 다 되었는데."
"아닙니다. 곧 통금도 될 것이고, 집에서 나온 지도 너무 오래됐습니다."
전 원장은 문 밖까지 전송을 나왔다. 두 사람은 어설픈 웃음을 나누고 헤어졌다. 예기치 않게 염상진의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김범우의 마음은 더욱 어둡게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극장도 어둠 속에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항시 확성기의 팽창된 소음과 구경꾼들의 들뜬 소란으로 출렁거리던 그 시끌벅적함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약간쯤 유치하고 약간쯤 짜증스러웠던 그 북적거림이 김범우는 불현듯 그리워짐을 느꼈다. 그건 그나마 안정된 삶의 생기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장터거리 상점들도 거의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장터의 넓은 마당에 드높은 천막을 치고 하던 서커스도 당분간 볼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김범우는 홍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북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드넓은 낙안벌은 어둠 속에 그 자취를 숨기고 있었다. 장광산도 금산도 그리고 조계산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산줄기들도 농밀한 어둠의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무수하게 뻗은 산줄기들은 모두 북으로 북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조계산 줄기는 무등산 줄기와 손을 맞잡으며 섬진강에 이르고, 그 지맥은 섬진강을 뛰어넘어 지리산으로 이어졌다. 산속에 산을 품은 지리산의 준령들은 북으로 치달아 오르다가 덕유산을 만나고, 덕유산은 가쁜 숨을 몰아 추풍령에 다다라선 속리산으로 건너뛰는 것이다. 그 줄기가 소백산에 이르러, 원줄기인 태백산맥이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낙안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진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 끝까지에 붙어있는 하나씩의 잎사귀인 셈이었다.
산맥을 중심으로 한 지형 구조를 손금을 들여다보듯 샅샅이 익혔던 것은 산타카탈리나에서 첩보훈련을 받으면서였다. 자신의 활동무대는 전라남도 일원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산과 강. 시. 읍. 면. 리의 위치와 도로망을 백지도 위에 빈틈없이 적어 넣을 수 있도록 숙달을 마친 다음에 교관은 활동거점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지리산을 본부로 삼아 부챗살처럼 무등산. 조계산. 백운산을 중간거점으로 잡고, 전초기지는 그 산줄기들을 따라 산재해 있는 작은 산들을 이용하되 상황의 변동에 따라 거점을 이동하도록 계획서를 작성했다.
지리산을 본부로 삼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지리산은 커다란 우산처럼 그 줄기가 전남. 전북. 경남에 걸쳐져 있어서 인접 요원들과 접선이나 협조가 용이했다. 둘째, 산의 높이에 비해 해안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사령부와 송수신이 편리했다. 셋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산의 규모와 험난도가 피신에 절대적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발점이었다. 이런 이유 설명이 붙은 계획서를 받아 든 교관은 너무나 놀라워했다. 자기들이 미리 세워둔 작전도와 거의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북 일대를 활동무대로 삼을 박두병의 계획서도 마찬가지로 교관을 놀라게 만들었다. 교관은 크게 만족을 표시하며,
"역시 한국인은 아시아에서 제일 두뇌가 우수한 민족입니다."
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농담하기를 즐기는 박두병이,
"교관님, 그건 잘못된 것 같은데요. 아시아가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우수할 텐데요."
하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글쎄요. 세계에서요? 한민족이 유태민족보다 더 우수하단 말인가요? 그런 통계가 어디 있지요?"
교관은 정색이 지나쳐 당황기마저 보이고 있었다. 박두병은 거침없이 웃어젖혔다.
"교관님이 바로 유태민족이죠? 그렇지요?"
박두병이 웃음을 추스르며 야무지게 물었다. 교관은 그때서야 웃는 이유를 알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민족끼리 잘 만났소. 우리 악수합시다."
박두병이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미스터 박, 이건 하늘이 내리는 일시적 시련이오. 유태민족이나 한민족은 반드시 잃은 나라를 찾게 될 겁니다. 그리고 영광의 빛을 창조하게 될 겁니다. 그건 신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음도 그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섭니다. 우리 믿도록 합시다. 하늘이 허락하는 그날이 온다는 것을."
교관은 사뭇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로 말했고, 김범우 앞에 그는 왼손을 내밀었다. 김범우는 그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고, 세 사람은 손을 포개어 예기치 못했던 동일감정의 숙연함에 젖어야 했다.
일본의 항복이 육 개월, 아니 삼 개월만 늦어졌더라도 자신들은 미군의 지휘를 받는 OSS요원으로 전국 각지에 침투했을 것이다. 자살용 극약까지 상비하고 벌이기로 되어 있었던 첩보활동에서 요행히 살아남았다면 해방은 조국 땅에서 맞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하룻밤 사이에 동지에서 포로로 취급당하는 배신은 겪지 않은 자신의 의식이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았을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활동계획서를 작성하기 오래 전에 벌써 자신은 염상진을 포섭 제1호로 꼽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사상, 그 달콤한 논리.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 자극적 최면. 무산자 혁명의 영웅, 그 충동적 칭호. 이런 것에 이끌려 첩보활동의 경험을 십분 활용해가며 지금쯤 염상진과 함께 저 어둠에 묻힌 어느 산줄기에 박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이란 예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은 그 사건을 계기로 완전한 의식변화를 일으켰고, 연합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불신은 물론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국제성의 허구와 그 속에 도사린 위험스런 덫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점을 염상진에게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신념화된 의식이 변화를 일으키려면 그만한 강도의 체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의식변화를 염상진에게 설명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염상진은 학병 나가기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김범우는 북쪽의 어둠에서 눈길을 거두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이 독립을 위한 첩보활동 무대로 삼으려 했던 산악지대를 이제 염상진은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은신처로 삼고 있었다. 김범우는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밤이 깊어가는 데도 김범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를 지낸 일이 길고긴 터널을 지나온 것 같기도 했고, 무릎이 넘게 푹푹 빠지는 뻘밭을 한정도 없이 걸어온 것 같기도 한, 어둡고 끈끈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잠을 거부하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웠을 무렵이었다. 예리한 금속성이 밤공기를 찢고 있었다. 김범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금속성은 잇달아 울려왔다. 총소리였다. 김범우는 벌컥 방문을 열려고 마루를 나섰다.
"여보, 위험한디 어딜 나가시오?"
자는 줄 알았던 아내의 다급한 음성이 망연히 서 있는 김범우의 뒷덜미를 잡았다.
총성은 소화다리 쪽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김범우의 눈앞에는 운동장으로 끌려나오던 사람들의 모습과 국회의원 최익승의 얼굴이 뒤범벅이 되고 있었다. 김범우는 신음을 씹으며, 날이 밝는 대로 최익승을 찾아 가리라고 마음 굳히고 있었다.
9. 문딩이 가시내, 팔자도 참 험하게 변했다
들몰댁은 사흘 만에 풀려났다.
어떻게 해서 학교 운동장을 벗어나고, 샛길을 빠져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원 아랫길, 사진관 앞에 이르러 있었다. 거기는 칠동의 집과는 반대방향인 친정이 있는 들몰로 가는 길목이었다. 들몰댁은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학교가 있는 뒤쪽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뒤따라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까지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금방 뒷덜미를 낚아채서 다시 학교로 끌고 들어갈 것만 같은 공포감에 쫓기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헌디, 아부님은 워찌 됐을꼬.’
들몰댁은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겨우 시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안부를 알아보기 위해서 다시 학교로 가볼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죄 될 일이지만 다시 학교로 갈 용기를 도저히 낼 수가 없었고, 시아버지의 안부보다는 친정에 가 있을 두 자식에게로 마음은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어느덧 들몰쪽 길로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들몰댁은 자신이 살아났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시아버지와 함께 잡혀가면서 그 길로 이승의 명줄이 끊어지는 줄 알았었다. 남편 쪽 사람들이 한 일이 경찰들의 눈으로 볼 때는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들몰댁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읍내에서 한다 하는 사람들을 골라 거침없이 죽였으니 그 마누라 된 몸으로 살아날 가망이란 바늘구멍보다도 작았다.
"내 새끼덜이 불쌍혀서 워쩔끄나와."
시아버지가 사립 밖으로 등을 떠밀려 나가며 통곡하듯 했다. 시아버지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아버지의 말을 듣자 들몰댁은 더욱 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구룡댁, 우리 새끼덜 들몰 친정으로 잠 델다주씨요. 구룡대액, 알겄제라?"
들몰댁은 등을 떠밀리며 애타게 소리쳐댔다. 작은아들의 겁 질린 울부짖음이 칡덩굴처럼 그녀의 발목을 감아왔다. 허정거리는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처음으로 남편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하늘보다 높은 지체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래서 남정네가 하는 일은 다 옳고 바른 것이라고 믿었다. 시집와서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태반을 홀로 지내면서도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려왔던 것은 다 그런 믿음이 있어서였다.
"냄편이 무신 뜻인고 허니, 고것이 한문으로는 지애비 부 자여. 지애비 부자가 무신 뜻이냐 허면, 하늘 천자 우에 꼭지가 하나 더 붙은 글자다 고런 말이다. 그렁께로 냄편이란 것은 하늘보담도 더 높은 사람이다 허는 뜻인 것이다. 애비가 무식허다만 요것만은 영축웂는 말잉께 니 평상 마목 깊이 새기고 살아야 쓸 것이다. 무신 말인지 알겄제?"
시집오기 전날 친정아버지가 힘 꽁꽁 쓰며 훈계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하는 일이 아무리 옳고 바르다 한들 그 일로 철없는 자식들의 앞날이 캄캄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찌 옳고 바른 일일 수 있는가. 그런 옳고 바른 일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내가 죽어 없어지면 어린 새끼들은 어찌 될 것인가.
그녀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자꾸만 발을 헛디뎠던 것이다.
"음마, 요것이 뉘기여? 순심이 아니다냐?"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잰걸음을 치고 있는 들몰댁의 어깨를 툭 치며 한 여자가 알은 체했다.
"워메!"
들몰댁은 두 팔을 치켜들 정도로 질겁을 하며 소리쳤다.
"음마, 뻘건 대낮에 사람을 보고 워째 요리 놀래분당가? 순심아, 나여, 나."
여자가 들몰댁 앞에 얼굴을 디밀며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토닥였다. 그때서야 들몰댁의 희게 질린 얼굴에서는 공포의 빛이 걷혀 갔고, 눈도 제대로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아, 니 점례구나."
들몰댁이 탈진한 것처럼 겨우 말했다. 얼굴에는 힘겹게 만들어낸 웃음이 조화처럼 어색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요 무정한 가시내야, 우리가 못 만낸 것이 폴세 멫년인디 니는 반갑지도 않냐? 워째 요리 사람을 뜨광허니 대허냐?"
점례가 불만스런 얼굴로 들몰댁의 몰골을 훑었다.
"뜨광허기는, 딴 디 정신 폴다봉께 그리된 것이제."
들몰댁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웃어보였다. 그러나 웃음도 반가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니 집안에 무신 속썩는 일 생겼는갑구나? 니 요런 꼴로 읍내꺼정 나온 거 봉께로 무신 큰일인 모양이제?"
점례는 염려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하게 드러난 표정으로 물었다.
친정 나들이를 한 탓이겠지만 점례의 주황색 모본단 치마저고리 차림은 화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광목 저고리에다 검정 몸빼를 입은 자신은 사흘 동안 낯도 한 번 씻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런 자신의 몰골이 점례의 눈에 얼마나 가난하고 초라하게 보일 것인가. 그러나 들몰댁은 그런 것에는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다만 점례를 몇 년 만에 만나게 되자 반가움보다는 자신이 확실히 살아났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건 참으로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 없는 감동이요 고마움이었다.
"순심아, 무신 일 났냐니께."
점례가 다시 물었을 때 들몰댁은 빗나가 있는 정신을 수습했다.
"아녀, 벨일 아녀."
들몰댁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듯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날도 썰렁허고, 오랜만에 만나기도 혔응께 젠사이에 모찌떡 묵음시로 이야기 잠 헐끄나?"
"아녀, 나 배불러. 싸게 친정에 갈 일이 있응께 담에 만내."
들몰댁은 벌써 돌아서고 있었다.
"문딩이 가시내, 팔자도 참 험허게 변했다."
점례는 멀어져가는 옛 친구 순심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차마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순심이가 저리 경황이 없는 것은 남편 탓일 거라고 점례는 짐작하고 있었다. 순심이 남편이 좌익에 미쳐서 순심이의 시집살이 고생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친정을 통해서 진작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다.
무정하리만큼 점례를 떼치고 돌아서긴 했지만 들몰댁의 눈앞에는 점례의 모습이 어릿거리고 있었다. 점례와는 동갑내기였고, 시집을 가기 전까지는 그림자처럼 붙어 지낸 사이였다. 감정의 어느 굽이에서는 동기간보다 더 가깝고 따스한 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부모에게 감추고 싶고 동기간에게 말할 수 없는 처녀의 은밀한 감정을 서로 마음 놓고 털어 놓았고, 그런 비밀을 서로 덮고 지킨 사이였다. 그런데 시집을 가고부터 두 사람의 신세는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차이는 모본단 저고리와 광목 저고리 바로 그것이었다.
점례는 화순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자동차 운전수였다. 일정 때부터 조수 노릇을 시작해서 해방이 되자 운전수가 되었는데, 위험한 것을 빼면 세상 소문대로 운전수의 벌이는 톡톡한 모양이었다. 시집을 가자 동네사람들이 점례를 '벌교댁' 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런데 점례는 친정 동네 들몰을 잊을 수가 없고 벌교보다는 들몰이란 이름이 더 좋아서 자신을 '들몰댁'이라 불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점례나 순심이는 똑같이 '들몰댁'이란 호칭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사는 형편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다 지 타고난 팔자소관이제 ……’
더욱 기운을 까라지게 하는 그 부질없는 생각을 들목댁은 떨치려고 했다. 그건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듯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 앞에서는 그까짓 잘살고 못살고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잇장 두께도 못되는 것이었다. 가슴을 겨누는 빤히 뚫린 총구멍이 그리도 무서운 것인 줄은 몰랐었다. 그 구멍 앞에서는 발가락 하나 꼼지락할 수 없게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갑자기 멍청이가 되는 것처럼 머릿속도 텅 비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었다. 텅 빈 머릿속에는 살고 싶다는 생각만이, 고름 질질 흘리는 문둥이로든, 똥통의 구더기로든 살고 싶다는 생각만이 피가 마르게 절절했다.
들몰댁은 풀려나는 그 순간까지 사흘 동안 오로지 살고 싶다는 생각만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한겨울에 거적을 쓰고 토담 아래 앉아 동냥해 온 밥을 자식에게 먹이고 있던 문둥이 여자, 눈썹도 없고 코는 씰그러지고 손가락은 오그라붙은 그 문둥이 여자가 그렇게도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여자처럼 문둥이가 되더라도 두 자식을 데리고 살아 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심사를 받기 위해 이틀 밤을 운동장으로 끌려 나가면서 문둥이로, 그것도 안 된다면 똥통의 구더기로라도 살아날 수 있게 해달라고 얼마나 빌었던가. 손을 뒤로 묶인 채 땅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심사를 받는 그 시간, 손전등 불빛이 얼굴에 쏟아지는 그 순간, 생사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피해자 가족과 경찰과 청년단, 세 손가락이 똑같이 겨누어지는 얼굴은 죽음을 면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손가락이 바로 총구멍이었다. 저벅거리는 발소리, 이동하는 불빛 …… 다시 교실로 끌려 들어오면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남편이 나타났다 허먼 지체웂이 알려야 써. 알겄어?"
"하먼이라, 하먼이라."
"다른 빨갱이눔들이 틀림웂이 무신 연락을 취헐라고 나타날 것잉께 고때도 지체없이 알려야 써!"
"하먼이라, 하먼이라."
"우리가 밤낮 웂이 감시허고 있응께, 속인 거 발각났다 허먼 워찌 되는지 알겄지? 총살이여 총살!"
"하먼이라, 하먼이라."
"당신이 이뻐서 살려 보내는 것이 아닝께 똑똑허니 처신혀!"
"하먼이라, 하먼이라."
무슨 내용이 적힌 지도 모르는 종이에 시키는 대로 손도장을 찍고 풀려나오면서도 들몰댁은 실성한 것처럼 '하먼이라'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살아났다는 사실 앞에서 경찰이 그보다 더한 명령을 했더라도 '하먼이라'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쇠머리를 지나 홍태거리에 이르자 질펀하게 트인 고읍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친정 들몰은 그 첫머리에 금방 잡힐 듯이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었다.
"엄니이 ……"
소리치며 뛰어오는 것은 길남이었다. 들몰댁은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엄니, 워디 갔다 인자 와. 할아부지가 오셨는디."
"머시여?"
그녀는 왈칵 소리치며 아들을 붙들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참말이여? 은제여?"
그녀는 목멘 소리로 외쳤다.
"아까 점심때 지내서."
"워메, 내년이 넋 빠진 년이다, 넋 빠진 년."
들몰댁은 아들을 제치고 집으로 뛰고 있었다. 그건 예사 기운이 아니었다.
"아부님, 아부님."
들몰댁은 쪽마루로 오르며 숨이 턱에 닿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들몰댁은 다급함 속에서도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시아버지는 아랫목에 반듯이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꿈만 같았다. 광대 솟아 보일 만큼 시아버지는 수척해져 있었지만 살아서 숨을 쉬고 있었다. 들몰댁은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한 손으로 막으며 다른 손으로는 이불 밑의 방바닥을 짚어보았다. 온기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들몰댁은 서둘러 보리쌀을 안치고 불을 지피면서야 맘 놓고 눈물을 흘렸다. 누구에겐지 모를 고마움과 감격이 눈물을 쏟게 했다. 자신을 안고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들몰댁도 신령님과 산신님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아가, 을매나 고상혔냐. 나야 명색이 남잔디 까짓 고상 암것도 아니다. 워쨌거나 고상은 혔어도 요리 살아서 상면혔으니 멀 더 바라겄냐. 아가, 참말로 고상혔다."
시아버지가 목이 메어 한 말이었다. 시아버지의 생각도 자신의 생각과 같았다.
설거지를 끝낸 들몰댁은 일찌감치 잠자리를 폈다. 전신이 가눌 수가 없도록 무겁고 아팠다. 두 아들을 양옆에 끼고 누웠다. 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뿌듯하고 흡족했다. 며칠 만에 되찾은 잠자리였다. 들몰댁은 이내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처음 그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을 때는 꿈인가 했다. 그러나 두 번째 그 소리를 듣고 들몰댁은 번쩍 잠이 깼다.
"이봐, 문 열어, 문!"
거친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심하게 흔들렸다. 몸을 바짝 오그려붙인 들몰댁은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이까짓 지게문 발로 걷어차 버려."
밖에서 들리는 소리였고, 들몰댁은 더욱 몸을 오그리며 벽 쪽으로 붙었다.
"이봐, 문 열라니까!"
목소리가 더 거칠어지며 방문을 걷어찼다. 대오리를 엮어 창호지 한 장을 발랐을 뿐인 지게문 망가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누, 누구요, 누구 ……"
마침내 아랫방에서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
"빨리 문 열어!"
"누군지 알고 싶으면 문 열어 봐!"
각기 다른 목소리가 소리쳤다.
"아가, 자냐?"
"아, 아니요, 아부님."
들몰댁은 어둠 속에서 몸빼를 더듬어 찾으며 대답했다.
"아가, 문 열어라."
시아버지의 말이었다. 순간, 이제 정말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야아, 아부님."
들몰댁은 대답하며 그때까지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두 아이를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푸들푸들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벗겼다. 문이 벌컥 열림과 동시에 사람이 뛰어들었다. 그때 아이들이 엄마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고, 아랫방에서는 '아이고메' 하는 시아버지의 비명이 터졌다.
"시끄럿! 죽이기 전에 울지 마!"
어둠 속에서 남자가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들몰댁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들몰댁은 끄는 대로 끌려 마루로 나왔고, 토방으로 굴러 떨어졌다. 눈에서 불꽃이 번쩍 하며 가슴이 컥 막혔다.
"경찰에서 풀려났다고 너희 죄가 다 끝난 줄 알았다간 천만의 말씀이야. 우리가 누군줄 알어? 하대치, 바로 그 악질 빨갱이새끼한테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이다. 지금부턴 우리가 내리는 벌을 받아야 된다 그런 말씀이야. 알아들어?"
마당에 버티고 섰던 다섯 그림자가 몽둥이를 치켜들며 일제히 몰려왔다. 들몰댁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려 박았다. 몽둥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들몰댁은 이빨을 뿌득뿌득 갈다가 결국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애들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를 아슴푸레하게 들으며 끝내 까무러치고 말았다.
들몰댁이 깨어났을 때는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엄니, 엄니, 할아부지가 죽었어."
아직도 시야가 뿌옇게 흐려 있는 들몰댁을 흔들며 큰아들 길남이가 울먹였다.
"머 머여? 머시여?"
들몰댁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건 생각뿐이었다. 옆구리가 결리고 허리가 아파 신음을 물며 땅바닥을 기었다. 시아버지는 댓돌 옆에 머리를 박은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머리가 닿은 토방에는 검붉은 피가 떡칠이 되어 있었다.
"아부님, 아부님 ……"
들몰댁은 넋 나간 얼굴로 시아버지를 흔들었다.
"집집마다 댕김서 우리 할아부지 엄니 잠 살려도라고 했는디도 아무도 안 왔어."
길남이가 울음을 추스르며 말했고, 비로소 들몰댁은 '아부님'을 섧게 부르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밤참으로 잘 고아진 닭을 한 마리씩 뜯고는 상을 물렸다.
"오늘도 수고들 많이 했어. 뜻이 맞으니까 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구만."
제일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가 끄윽 트림을 섞어 말하고는 담배를 뽑아 들었다. 미간이 좁고 양쪽의 턱뼈가 유난히 불거져서 얼굴이 네모 나 보이는 사내는 완력깨나 쓸 것 같은데다가 잔인한 인상을 풍겼다. 솥공장과 정미소를 가지고 있는 윤영춘의 아들 윤태주였다. 그는 광주에 있는 대학 2학년인데 염상진네가 후퇴한 이후 벌교에 머물러 있었다.
"니기미 헐 것, 고것들을 싹 죽이지 못허고 몽둥이 찜질만 허잔께 영 간에 안 차 못 살겄네."
거무튀튀한 얼굴에 불량기가 는적이는 사내가 팔을 휘두르며 내뱉었다. 남국민학교 앞의 제일 번화가에 있는 포목상 '광주상회'의 아들 양효석이었다. 순천 매산 중학교 졸업반인 그는 통학열차를 주름잡는 주먹을 가지고 있었다.
"저 새낀 또 죽이는 타령이군."
길쭉한 얼굴에 유난히 눈빛이 날카로워 보이는 사내가 픽 웃음을 흘렸다. 세무서장 최익현의 아들 최서학이었다. 최익현은 국회의원 최익승의 사촌동생이었고, 최씨 문중의 중심을 이루는 장년 세대들이었다. 최서학은 양효석과는 달리 주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양효석은 최서학한테 꼼짝을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양효석은 시험을 치를 때마다 최서학의 시험지를 보고 베꼈던 것이다. 그 열등감과 우월감 속에는 세금을 내야 하는 포목상 주인과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무서의 장이라는 부모들의 사회적 지위까지 암암리에 작용되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효석이 형 말도 영 틀린 건 아니네. 나는 생각할수록 분해서 밤마다 잠을 잘 수가 없네."
펑퍼짐한 얼굴에 주먹코를 한 사내가 말했다. 읍내에 하나뿐인 '남도여관' 주인 현준배의 아들 현오봉이었다. 무개성한 생김처럼 성격도 모난 데 없이 무덤덤한 편이었지만 한번 화를 냈다 하면 그의 황소기운은 꼭 일을 벌이고야 말았다. 양효석의 주먹도 정작 현오봉의 기운과 맞붙고 보면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그의 뚝심은 대단했다. 그는 공부도 어지간히 해서 순천 중학교 4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성일이 니는 멀 그리 생각허고 있냐? 숙자하고 빠구리틀 생각허고 있냐?"
양효석의 말에 쿡쿡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성일이라고 불린 사내는 그 놀림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그 노인네가 죽었을 것만 같단 말야."
사내는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금융조합장 송기묵의 아들 송성일이었다. 흰 바탕의 얼굴에 먹물 묻은 붓을 붙여놓은 듯 눈썹이 짙었고, 쪽 곧은 코에 입술 윤곽이 뚜렷했다. 다섯 중에 제일 돋보이는 인물이었는데, 꿈틀거리는 짙은 눈썹이나 꽉 다물린 입슬은 한 가닥 성깔이 있어보였다. 그는 현오봉과 동창이었고, 잘하는 공부에 인물이 그만하여 통학열차의 여학생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빠구리'란 은어가 무슨 훈장처럼 붙어 다녔다.
"그런 영감탱이 하나쯤 죽어도 상관없다. 우리 아부지는 마흔세 살인데 그놈들 손에 돌아가셨으니까."
현오봉이 부르르 떨며 말했다. 송성일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시선을 방바닥으로 옮겼다. 현오봉의 아버지만 죽기에 너무 억울한 나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도 마흔일곱, 팔씨름을 하면 열여덟 살 자신의 기운이 달릴 정도로 건장한 분이었다. 금융조합장 송기묵, 세무서장 최익현, 솥공장 사장 윤영춘, 남도여관 주인 현준배, 포목점 광주상회 주인 양병갑, 이들 모두는 염상진네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금융조합장 송기묵은 세무서장 최익현과 함께 서울 말씨를 쓰는 나긋나긋한 아가씨들을 끌어안고 흔쾌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 자리를 마련한 것은 최익현이었다. 최익현은 언젠가는 실시하게 될 농지개혁에 대비해서 미리미리 농토를 처분해 다른 사업을 벌일 계획을 세워왔었다. 사업이란 뭐니뭐니해도 수익성의 보장과 튼튼한 안전성의 유지가 절대조건이었다. 오랜 세무공무원 생활의 경험으로 보아 그런 조건을 갖춘 것은 양조장뿐이었다. 그런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가 달리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허가가 문제였다. 최익현은 동업이란 명목으로 국회의원인 사촌형 최익승을 끌어들였다. 최익승도 농지개혁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기는 사촌동생 익현과 매일반이었고, 양조장 사업이 또 얼마나 꿀맛인지는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여지없이 손바닥을 맞췄고, 국회의원의 힘이 그까짓 양조장 허가 하나 내는 것쯤 선 하품하기였다. 양조장 허가를 받아 놓고 보니 최익현은 슬그머니 욕심이 동했다. 나날이 인플레는 극심해져가고 물가는 뛰는데 농지를 처분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돈 가치가 없는 때일수록 남의 돈을 빌려 쓰는 것이 돈을 버는 첩경이었다. 그래서 금융조합장을 만났다. 최익현의 한마디에 송기묵은 흔쾌하게 융자 약속을 했고, 최익현도 흔쾌한 술자리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술이 만취한 상태로 각자의 대문 앞에서 끌려갔다.
송기묵은 일정 때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해온 사람이었다. 인물이 준수한 편인데다가 호사가였다. 앞 가리마를 탄 머리에는 언제가 반지르르하게 기름이 발라져 있었고, 검정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그의 단정한 멋은 읍내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세련되게 멋을 부릴 줄 아는 것만큼 그는 이재에도 능란한 솜씨를 발휘했다. 금융조합이라는 것이 결국은 돈장사이고 보면 그의 이재 솜씨는 멋 부리는 것보다 한 수가 더 앞질러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금융인답게 토지소유욕은 갖지 않았다. 그 대신 현찰 신봉자였다. 그는 현찰을 가지고 은밀하게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다. 돈이라면 마누라도 팔아먹을 놈이라고 소문이 난 윤 부자의 공공연한 고리대금업의 일부 돈줄이 송기묵과 연결되어 있었고, 처남을 앞세워 순천과 여수 지역에서 돈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그런 은밀한 방법도 언제까지나 비밀로 감춰져 있지는 않았다. 알 만한 사람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큰딸을 서울의 이화여대에 유학시킬 정도로 탄탄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아들도 중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로 보낼 작정이었다. 아들 송성일은 아버지의 권유대로 상과대학을 지망하고 있었다. 송성일은 사상운동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빈부의 차이란 인간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세무서장 최익현은 최씨 문중 사람답게 토지소유욕이 강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가 적잖은데다 치부욕이 치열해서 계속 재산을 늘려갔다. 그는 벌교에 살 땅이 없으면 인접한 조성면의 땅을 사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송기묵과 대조적이어서 몸치장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성격이 날카롭고 머리가 뛰어난 그는 세무서장의 자리를 치부의 수단으로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촌형 최익승이 국회의원이 되자 그는 날개 하나를 더 단 셈이 되었다. 최익승의 선거운동에 그가 발 벗고 나선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다소의 자금도 기부했던 것이다. 최씨 문중에서는 최익현말고도 상한 사람이 다섯이나 더 있었다. 최익승이 굳이 귀향을 한 것도, 강력한 소탕을 지시하는 것도 결코 예사로운 일만은 아니었다. 아들 최서학은 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좋았다. 그는 법관이 되거나 정치가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오촌 당숙 최익승을 부러워해서 생긴 꿈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회주의라는 것을 아예 정나미 떨어져 했다. 어렸을 때부터 많은 작인을 눈 아래로 대해온 그는 지주와 작인이 평등해져야 한다는 그 맹랑한 논리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솥 공장 사장 윤영춘은 윤 부자로 불리는 윤영부와 친형제였다. 그는 정미소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해방과 함께 소유한 적산이었다. 땅을 탐내는 형과는 달리 그는 사업에 열을 올렸다. 형제가 닮은 것이 있다면, 내놓고 고리대금업을 하는 것과 체면 불구하고 여색을 밝히는 것이었다. 형 윤영부는 돈을 갚을 수 없게 된 소작인들의 딸을 예사로 범했고, 동생 윤영춘은 공장 직공 중에서 반반한 여자는 두고 보지 못했다. 아들 윤태주도 상과대학을 다닌다고는 했으나 공부보다도 운동과 여자에 더 정신을 팔고 있었다. 사업이란 공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수완이 좋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터였고, 운동과 여자가 바로 그 수완을 기르는 방법이라는 좀 황당한 이론을 펴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번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의 보복심에 불타고 있었다. 왜냐하면 큰아버지 윤영부의 몫까지 스스로 떠맡은 것이었다.
윤영부는 첫아들을 갖지 못했다. 아들 갖기를 소망하여 자식을 낳아댔지만 줄줄이 나오느니 딸이었다. 딸 여섯을 낳고 일곱 번째에야 기적적으로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이제 겨우 국민학교 삼학년이었다.
"니미럴, 내 좆대가리가 녹아내릴 때꺼정 새끼를 깔 것잉께, 워디 누가 이기나 보자."
딸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윤영부가 놋재떨이를 마당에 패대기치며 외쳤다는 이 말은 읍내에 널리 퍼진 우스갯소리였다. 누가 이기나 보자는 그 창창한 오기가 마누라의 조갑지를 보고 하는 소린지 아니면 삼신 할메를 보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고 여자들은 우물가에서 킥킥거리고는 했다. 그가 일곱 번째로 아들을 낳아버렸을 때 실망하고 분해 한 것은 바로 킥킥거리던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윤 부자의 씨가 아닐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윤 부자의 씨는 아예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씨고, 그 마누라가 불공을 빙자해서 절을 드나들며 어느 중과 배를 맞춘 것이라고 했다. 사실 윤 부자는 소실을 보았는데 거기서도 딸만 둘을 낳자 쌀을 열 가마닌가 줘서 멀리 쫓아버린 일이 있었고, 윤 부자 마누라는 아들 점지를 빌기 위해서 절을 뻔질나게 오갔던 것이다.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윤 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만큼 인심을 잃고 있었다.
남도여관 주인 현준배는 바로 무당 월녀네가 살고 있는 그 크고도 멋진 별장을 지은 현 부자의 집안이었다. 거드름피우기를 좋아하는 그는 대한청년단 단장 직함을 손써가며 따냈고, 헛기침하며 유지 행세를 하다가 염상진의 표적이 된 것이다. 그의 아들 현오봉은 한때 좌익사상에 솔깃해서 학생지하운동에 발을 넣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눈치 챈 현준배가 아들을 묶어놓고 몽둥이찜질을 가했던 것이다. 사실 대한청년단 단장 아드님이 빨갱이라면 날아가던 새도 웃을 일이었다. 말끝마다 체면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몸집 큰 현준배의 매질은 가혹했고, 아들 현오봉은 죽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실감을 하고나서 좌익으로부터 깨끗하게 발을 끊고 말았다. 그런데 그 좌익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좀체로 화를 안 내는 그였지만 한번 성질이 돋았다 하면 끝장을 내고 마는 성미에 마침내 불이 붙은 것이다. 그는 아직 양효석처럼 빨갱이의 원수를 두고두고 갚기 위해 사관학교를 갈 결심은 굳히지 않았지만,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수긍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읍내에서 제일 큰 포목상을 경영해온 양병갑은 원래 대를 물린 보부상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돈을 모으는 데는 땅벌처럼 악착스러운 사람이었다. 포목장수 자 눈금 속여 돈 벌고, 쌀장수 됫박 속여 돈 번다는 말은 바로 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포목상만이 아니라 싸전도 크게 벌이고 있었는데, 포목상의 야박스런 자질이나 싸전의 속 뻔히 들여다보이는 되질은 수많은 사람들의 입질에 오르내렸다. 세끼 밥을 근근이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포목상은 일단 관심 밖이었다. 포목상의 호화롭고 값비싼 비단이란 자식 혼사나 치를 때 필요한 것이어서 자질이 야박하다 해도 별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농사꾼에게, 특히 소작인에게 쌀이란 생활의 모든 수단이었다. 쌀은 생명을 지키는 주식일 뿐만 아니라 돈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물이었다. 그래서 '돈 산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농사꾼들은 쌀을 장에 내가면서 '팔러 간다'고 하지 않고 '돈 사러 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돈만 모든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쌀이 주체가 되어 '돈 사들이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쌀인 것이다. 그런 쌀을 사들이면서 양병갑은 내놓고 되질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말에다가 쌀을 퍼 담을 때부터 재빠른 손놀림으로 눌러댔고, 뉘었던 말을 세울 때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쿵쿵 소리가 나도록 말을 들었다 놓는 것이다. 그때 농사꾼들의 가슴에서는 말 다지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쿵쿵 울렸다. 쌀을 팔 때는 양병갑의 되질 장난이 반대가 된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쌀을 퍼담는 손놀림이 재빠르기는 마찬가지인데, 검불이 날아가듯 손놀림이 가벼워 쌀알을 세우는 묘술을 부렸고, 뉘었던 말을 세울 때도 나비가 꽃에 앉듯 살포시 하여 소리라고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양병갑에게 쌀을 내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세상살이라는 것이 꼭 그렇게만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일장까지 기다릴 수없이 급전이 필요한 때가 허다했고, 다른 싸전을 찾아가보면 자본이 짧아 쌀을 사들이지 못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양병갑은 언제 어느 때나 쌀을 사들였다.
그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윤 부자 찜쪄먹을 만큼 높은 이자놀이를 했다. 그는 의심이 많고 배짱이 없어서 많은 돈을 풀지는 않았지만 그의 돈을 쓴 사람은 하나같이 담보물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고,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데, 아무리 이자가 높다 하나 도저히 피할 수 없이 급전이 필요한 경우 사람들은 양병갑을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병갑은 현준배처럼 헛기침하는 유지 노릇 같은 것은 아예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돈, 돈, 돈만을 움켜쥐기 위해서 항상 허기진 눈초리를 번뜩였다. 그의 아들 양효석은 일찍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불량한 짓을 일삼았다. 그는 돈에 정신이 팔려 그러는지 그런 아들을 별로 개의하지도 않았다. 양효석은 아버지가 변을 당한 것을 계기로 공산당에게 두고두고 원한을 갚기 위해 사관학교에 진학하기로 작심을 했다.
"워메, 워메 내 새끼 장허고 또 장허다. 열분 백분 사관핵교고 군대핵교고 가서 아부지 웬수럴 갚아야 써. 하먼, 웬수를 갚아야 쓰고말고."
그의 어머니마저 그를 응원하고 나서서 그의 기분을 벌써 장교가 다 된 것처럼 들떠 있었다.
대장격인 윤태주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아직 스무 살을 한두 해씩 남겨놓고 있는 나이들이었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좌익의 공포 속에서 며칠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좌익이 패주를 하고 다시 경찰이 돌아왔다. 때를 같이해서 그들이 품고 있었던 슬픔과 공포는 정반대의 증오와 원한으로 바뀌었다. 각자가 동일한 감정의 고통을 앓고 있을 때 윤태주가 손을 뻗쳤던 것이다. 그들은 윤태주를 중심으로 쉽게 뭉쳐졌다. 윤태주는 그들에게만 손을 뻗친 것이 아니었다. 서너 명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보복을 가한다는 것마저 겁이 났는지 가담을 기피했다. 그들의 보복행위는 벌써 사흘 밤째 감행된 것이었다. 처형을 당한 집들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이 보복대상이었다. 그 정보는 쉽게 그들의 손에 들어왔다. 윤태주가 청년단장 아들 현오봉을 앞세워 염상구를 만났던 것이다.
"죽이지는 않겄다 그 말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염상구가 다짐하듯이 물었다. 옆으로 째진 작은 눈이, 거짓말 하면 재미없어, 하는 듯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구만요."
윤태주가 분명하게 대답했다.
"고것들이 이뻐서가 아니고 다 쓸 디가 있어서 그냥 내보낸 것잉께 만약 죽으면 느그덜이 당혀. 그 약속만 지킨다면 나가 도와줄껴."
염상구는 독기 서린 찬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저어 …… 염상진은 감찰부장님 형님 아니십니까."
윤태주가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근디?"
염상구는 치뜬 눈길로 윤태주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윤태주가 난색이 되며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싸게 말혀봐! 좆 달린 사내새끼가 워찌 그려."
염상구가 코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그 집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
윤태주는 말끝은 흐리고 말았다.
"헌디, 나 땀새 곤란허다 고런 말이여, 시방?"
"그런 셈이지요."
"요것 잠 보드라고 대학상 양반, 워째 하나는 알고 둘은 몰르는가 그래.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고런 말씀이시. 알아들으시겄는가?"
염상구는 윤태주를 마치 어린애 다루듯 하고 있었다.
"잘 알겠습니다."
윤태주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는 염상구의 냉정한 태도에 한편으로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 감격하고 있었다.
"나 바쁜게 그만들 가봐. 죽이지만 말고."
염상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염상진의 집부터 시작해서 오늘밤 하대치의 집까지, 사흘 밤 동안 일곱 집을 쓸었다. 밤마다 일을 마치고는 윤태주의 집에 모여 밤참을 먹고 다음날 일을 계획하고는 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들의 젊은 핏속에는 쾌락적인 승리감과 함께 보복감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성일은 오늘밤의 일이 신경에 걸려 방안의 분위기를 밖으로 떨어져 나와 있었다.
‘만약 그 노인이 죽었으면 ……’
그의 의식은 한사코 불길한 쪽으로만 기울어지고 있었다.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완강하게 부정을 하는 것이었지만 그 불길한 생각은 떨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노인이 죽었으면 …… 내가 사람을 죽인 것이 된다.……’
그는 전신에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 노인은 다른 집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저항을 못하고 몽둥이질을 당하고 있었다. 고통을 못 견뎌하는 신음만 토했을 뿐 엄살 섞인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바짝 오그려 붙었던 몸이 풀려가기 시작했다. 몽둥이질을 그만할 때가 된 것이었다. 그때였다. 노인이 무슨 소린가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송성일은 너무 놀란 나머지 노인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떠다밀었다. 노인은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때 몸 어느 부분이 무엇인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퍽 하며 둔하게 들렸다. 그런데 넘어진 노인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사정없이 나가떨어진 사람이 위장을 하기 위해 꼼짝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넘어진 아픔을 못 견뎌 몸을 꿈틀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토방에 박혀 있는 댓돌이 들어왔다.
"가자, 그만."
여자 쪽에 가세해 있던 윤태주의 말에 따라 그는 서둘러 마당을 벗어났다.
그때 여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야, 성일아, 너 어디 아프냐?"
최서학이 나직하게 물었다.
"글쎄, 아까부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노인네가 죽은 것만 같아서 ……"
"저 새끼 저건 재수 없게 아직까지 그 생각이야. 그까짓 영감탱이 죽어도 상관없다니까."
현오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 내가 밀었는데 만약 그 영감이 죽게 되면 내가 죽인 거지 뭐냐. 그런데 어째서 상관이 없냐? 상관이 없는 건 너고, 난 살인자가 되는 거야."
송성일이 짙은 눈썹을 세우며 매섭게 내쏘았다.
"살인자? 하, 저 새끼 배부른 문자 쓰네. 그게 바로 느네 아부지를 죽인 원수놈의 애비다. 그 따위 늙은이 하나쯤 죽었다고 치자. 넌 살인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그런 말이냐? 그게 아니면, 살인자로 체포될까봐 겁이 나서 그러냐? 요런 못난 새끼야!"
현오봉이 펑퍼짐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었다.
"저 새끼가 ……"
송성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됐어. 그만들 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내일 알게 될 거고, 만일 죽었다 하더라도 성일이 넌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넌 지금처럼 미련하게 굴지 말고 입 봉하고 있기만 해. 자아, 그만들 자기로 하자."
윤태주가 주도인물답게 장내정리를 해치웠다. 송성일도 현오봉도 더 할 말이 없었다.
10. 암약
솔가리 나뭇짐을 높게 진 하대치는 쌍암 장터로 들어서고 있었다. 물빛 냉기가 싸늘하게 깔린 이른 장터에는 벌써 전자리를 펴는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부산스런 움직임과는 달리 장터는 조용하기만 했다. 손님 맞을 채비에 바쁜 그들은 잠시도 입을 놀릴 짬이 없는 것이리라.
"여그다가 지게 받쳐."
하대치는 무거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나무전은 저짝 끝인디요?"
뒤따라오던 남자가 등짐의 무게 때문에 목을 앞으로 뻣뻣하게 빼낸 채 대꾸했다. 그 목소리가 숨이 가빴다.
"장 스자먼 당아 멀었응께 여그서 담배나 한 대씩 꼬실리세."
하대치는 벌써 지게작대기를 받치고 있었다.
"염병허고, 아칙을 안 묵어서 그런가 워찌 요리 쎄가 빠질 것 맹키로 심드는지 몰르겄네."
지겟다리를 땅에 붙이며 앞으로 쏠리는 짐의 무게를 지게작대기로 버팅긴 남자가 혼잣말을 씨부렁거렸다.
"아칙을 안 묵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시. 등짐 이십 리 길이먼 쎄가 빠질 만도 허네."
하대치가 담배쌈지를 꺼내며 말을 받았다.
"하 동무, 아니, 저어 ……"
남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는 당황함과 두려움이 엇갈리는 얼굴이 되었다.
"워째, 참말로 그눔에 쎄가 빠지고 잡아 그러능감?"
하대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는 독이 서려 있었고, 남자를 노려보고 있는 눈초리에서는 불꽃이 튕겨나고 있었다.
"명심허겄구만이라 ……"
남자가 고개를 떨구며 얼버무렸다.
"실수할 말이 따로 있제, 고 말 한 마디는 목심허고 맞바꾸는 것잉께 알아서 혀!"
하대치가 남자 앞으로 담배쌈지를 던져주며 차갑게 말했다.
남자는 담배쌈지로 손을 뻗치며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간절하던 담배맛이 싹 가셔지고 없었다. 동무라는 한 마디와 하나뿐인 목숨과 맞바꿔야 한다는 하대치의 말을 되씹고 있었다. 그건 틀린 말도 아니었고 심한 말도 아니었다. 사람 많은 장터거리에서 만약 그 말이 튀어나왔더라면, 나는 빨갱이요, 하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 속에 사복형사나 순경이 섞여 있지 말라는 법이 없었고, 그래서 잡히는 날에는 살아나지 못할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형사나 순경이 섞여 있지 않다 하더라도 사람들 중에 그 누가 경찰에 연락을 취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 일로 공산당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어느 골에나 있을 것이었다. 그는 대장의 다짐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마음 야무지지 못함이 한심스러웠고, 부대장격인 하대치의 미움을 산 것만 같아 사지에 맥이 빠졌다.
그는 진트재 고개 아랫마을 장양리에 사는 지필구였다. 장양리는 논보다 밭이 더 많은 야산 마을이었다. 그나마의 농지도 다른 마을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가구 수도 자연히 농지에 맞게 조절되어 30여 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에서 배곯지 않고 사는 집은 서너 가구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서너 집의 소작을 얻어 부치거나 품팔이로 근근이 살아갔다. 지필구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아이들 셋을 달고 소작으로 다섯 목구멍이 살아가자니 일 년의 반을 죽을 끓이고도 견뎌내기가 어려운 살림이었다. 밥이란 명절이나 부모님 제사 때 겨우 맛보게 되는 소중한 음식이었다. 지필구는 부모가 살아 있던 총각 때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면해보겠다고 여수로 나가 배를 탄 일도 있었다. 그러나 풍랑에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는 반년이 조금 넘어 빈손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는 무학이었다. 한글로 이름 석 자를 겨우 읽고 쓸 수 있을 뿐인 그가 사회주의의 물을 먹기 시작한 것은 해방이 된 뒤부터였다. 인접한 회정리의 총책이며, 염상진으로부터는 중간책인 강동식에 의해 포섭된 것이다. 강동식은 별의별 말을 다 했지만 지필구의 귀를 활짝 열리게 하고 마음을 동하게 만든 건 딱 한마디였다. 지주나 부자들을 다 쳐없애고 누구나 똑같이 잘살게 된다. - 이 한마디는 행동을 결정하기에 너무나 충분한 이유였다. 그런 세상에 대한 소망은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가졌던 것이고, 나이 들면서는 잘사는 자들에 대한 앙심과 함께 절망 속에서 그리던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만 와준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지필구는 마음을 정하자 맹렬세포로 변해갔다.
지금은 비록 쫓기는 형편에 있지만 지필구는 좌익이 된 것을 내심으로 만족스럽고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꼭 꿈을 꾼 것처럼 지나간 읍내의 며칠 동안을 생각하면 손끝, 발끝, 아니 자지 끝까지 짜릿짜릿해 오는 것이었다. 좌익이 되지 않았던들 어찌 감히 경찰들하고 맞대거리로 싸울 생각을 했을 것이며, 또 어찌 경찰을 물리치고 읍내의 주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인가. 그건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가슴 벌떡이는 기억이 될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라, 좌익은 모두가 차등 없이 잘살게 만든다는 주장대로 서로를 부르는 데도 똑같이 '동무'였다. 지필구는 그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국민학교 선생님을 지낸 안창민 같은 사람을 맞대놓고 '안 동무'라고 부를 수 있고, 그 사람도 자신을 '지 동무'라고 부르며 상대해 줄 때는 도무지 생시 같지가 않았다. 선생님과 맞먹다니 …… 좌익을 하지 않았더라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인가. 그래서 그는 '동무'라는 호칭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쓰려고 했고, 그 말을 할 때마다 위원장 염상진도, 선생님 안창민도 다 자신의 동무라는 사실에 황홀해지고는 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나 입에 붙어버려 장터에서는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불쑥 내뱉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필구 자네, 내 말이 버시게 딛긴가?"
"아, 아, 아니구만요, 아니어라."
지필구는 당황한 몸짓으로 일어나며 고개까지 세차게 저었다.
"헌디, 먼 생각얼 그리 허는겨."
"쎗바닥 방정맞게 놀린 지 잘못을 생각허고 있었구만요."
"참말이여?"
"하먼이라. 죽을 죄럴 졌당께라."
"잘못 알았으먼 되얏네. 가세, 가서 자리 잡아놓구 아칙 묵세."
지게작대기를 빼낸 하대치가 날랜 동작으로 지게를 받치며 한쪽 팔을 멜빵에 끼웠다.
나무전 구석에 지게를 받쳐놓은 두 사람은 밥집으로 들어섰다.
"웜메, 홀애비 붕알 얼어붙게 춥네웨."
하대치가 부르르 떠는 시늉까지 하며 목청을 돋우었다.
"음마, 아칙부텀 걸직하니 나오요이. 여그가 홀엄씨 집인지 워찌 알고 홀애비가 딱 찾아들께라?"
삼십줄의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주모가 넉살좋게 받아넘겼다.
"금메 말이시, 홀엄씨 암내야 원래 홀애비가 맡는 것 아니드라고? 자네가 풍기는 암내가 십리 밖에서도 내 코럴 찔르드란 말이시. 그래 코 킁킁거림스로 와봉께, 와따메, 성춘향이 뺨치게 생긴 자네였든 것이여."
"음마, 음마, 키는 쪼깐허고 젊디나 젊은 양반이 입심 한분 칡넝쿨이시. 늙기도 전에 양기가 다 입으로 올라붙어뿐 모양인디, 참 안되얐소이."
주모가 살살 녹아내리는 웃음을 눈꼬리에 담으며 눙치고 들었다.
"마른 장작이 불땀 씨대끼 키 작은 사람이 물건 크다는 말 알제?"
"아이고메 시장시러라. 고 키에 크먼 을매나 크겄소."
주모가 킥킥거리고 웃었다.
"허, 옛말에 남대문 본 눔허고 안 본 눔이 우김질혀서 안 본 눔이 이겼다는 말이 꼭 자네 두고 허는 말이시. 자아, 자네가 묵을 만헌가 안헌가 속 씨언허게 봐뿔드라고."
하대치가 벌떡 일어서더니 곧 바지를 까내릴 것처럼 했고,
"워메, 크요. 커. 늦여름 늙은 가지맹키로 크요."
주모가 팔을 내저으며 솥이 걸린 쪽으로 내달았다.
"국밥 두 그럭 시키소."
표정이 돌변한 하대치가 지필구에게 말했다.
하대치는 일부러 손님이 없는 밥집을 찾아들었던 것이고, 계획적으로 던진 농담에 주모는 의외로 쉽게 감겨들었던 것이다. 소문을 얻어 듣기로는 밥집이나 술집만큼 손쉬운 데도 없었다.
"무땀씨 아칙부터 사람 맘 요상허게 맹글지 말고 싸게 밥이나 묵으씨요. 헌디, 첨 보는 얼굴인디 무신 장사다요?"
주모가 두 사람 앞에 국밥그릇을 옮겨놓으며 물었다. 지필구가 약간 긴장된 얼굴로 하대치를 건너다보았고, 하대치는 그릇에 숟가락을 푹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빨갱이눔덜 땀세 시상은 시끌시끌허지, 남의 땅만 파묵고 살자니께 황천이 눈앞이제. 그려서 나무 한 짐썩 해갖고 나와보긴 혔는디, 고것이 돈이 될라는지 시장시럽구만."
지필구는 하대치의 그 태연한 태도와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술술 풀어대는 거짓말에 그만 기가 질리고 있었다. 진작부터 다부진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사람 흘리는 것까지 이렇게 빈틈이 없을 줄은 몰았다. 지필구는 그때서야 하대치가 왜 상스러운 객소리를 늘어 놓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무먼 무신 나무다요?"
주모가 허리를 굽히며 관심을 나타냈다.
"참나무 장작 한 지게허고, 솔가리가 한 지게구만."
하대치는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밥만 퍼 넣으며 대꾸했다.
"참나무 장작이먼 마침 잘되얏소. 우리 집에 넘기먼 되겄소."
"장작만 사고 솔가리는 안사겄다, 고런 말이당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하대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필구는 가슴이 덜컥 했다. 장작만이라도 빨리 팔아치워야 하는데 하대치는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솔가리야 불쏘시개로만 쓴께 한 지게 사먼 오래 안 쓰요."
주모의 말에 지필구는 또 놀라고 있었다. 하대치의 하는 품으로 보아 장작마저 안사겠다고 돌아서버릴 줄 알았는데 주모는 의외로 나긋거리는 목소리로 사정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둘이 항꾼에 와서 혼자만 먼첨 갈 수도 웂는 일이고, 싸게 줄 팅께 들여놓소. 미리 사둔다고 썩어질 물건 아니겄고, 뽀짝 몰르먼 불땀이사 더 좋아질 것잉께."
"싸게만 준담사 못 살 것도 웂는디. 을마에 줄라요?"
"아까 말혔디끼 우리가 이골난 나무장시도 아니겄고, 시세야 장바닥에 붙어사는 자네가 더 훤헐 것잉께 양심껏 줘보소."
지필구는 다시 안도의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나뭇금이 얼마인지 전혀 모르는데 엉뚱한 값을 말했다가 신분이 들통날까봐 불안했던 참이었다. 너무 비싸도 의심받고 너무 싸도 의심을 받을 일이었다. 어쨌든 하대치는 눈썹 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구렁이 담 넘듯 슬슬 잘도 넘어가고 있었다.
"어지께 밤에 존 꿈도 안 꿨는디, 워쨌거나 서로 존 일잉께 사고팔고 혀봅시다."
그때서야 하대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네 큰 횡재 혔네."
주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하대치는 엉뚱하게 점잖은 어조로 말했다.
"워메, 나무 두 짐 쪼께 싸게 사는 것이 머가 그리 횡재요, 횡재는. 열 짐 싸게 줬다가는 집 한 채 사줬다고 소문내겄네웨."
주모가 입을 삐죽하며 눈을 흘겼다.
"어허, 사람 말귀 어둡기는. 겨울은 닥치제, 국밥장시 지 철 만내제, 나무는 더 많이 써야제, 우리가 겨울 한 철 내내 싼값으로 나무 대주먼 고것이 횡재가 아니고 머시여. 워째, 요래도 내 말을 못 알아묵겄어?"
"아니 그라먼 올겨울 내내 오늘 금으로 나무럴 대주겄다 고런 말이다요?"
주모가 반색을 하고 들었다.
"안직도 무신 말인지 못 알아묵어 그 말 묻는 것이당가?"
"워메, 워메, 고마운거. 그리만 됨사 횡재란 말 혀도 되제라. 아니여, 요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술 한 잔씩 드시씨요. 술값은 안 받을팅께."
주모가 황급하게 돌아섰다.
"가서 지게럴 하나씩 지고 오소."
하대치가 담배쌈지를 꺼내며 지필구에게 말했다. 그 얼굴에 의미를 해독하기 어려운 웃음이 엷게 번져나고 있었다.
"나 하점생이라고 허는디, 거그넌 워체케 불러야 쓸랑가?"
하대치는 비릿한 눈길을 주모에게 보내며 통성명을 하자고 했다.
"무신 똑별난 이름 있간디요. 넘덜이 불르는 대로 장터댁이라고 허씨요."
주모가 하대치의 그런 눈길을 싫지 않은 눈치로 끈적하게 받아내며 말했다.
"장터댁이라, 얼렁 알아묵기 편해 존 이름이시. 근디, 장터댁언 참말로 혼자몸이당가?"
하대치는 한결 진한 남자냄새를 풍겨내며 나긋하게 물었다.
"음마, 아칙부텀 참말로 요상허요이."
술 사발 두 개를 나무쟁반에 받쳐 들고 오던 주모가 눈을 희게 흘겼다. 그러나 눈흘김과는 달리 얼굴에는 발그스름한 웃음이 피어났다.
"요상허기는 머시가 요상혀. 나비가 꽃 보고 내려 앉을라고 허는 것이사 하늘이 정헌 이친디."
하대치는 아주 태연하고도 점잖게 말했다.
"음마, 문자 쓰지 마씨요. 나비도 나비 같애야 허고, 꽃도 꽃 같애야 고런 문자가 어울리제라. 인자 다 시장시럽소."
술사발을 상으로 옮겨놓으며 주모가 폭 한숨을 쉬었다. 다소 과장기가 섞인 한숨이었다.
"장터댁, 아 장난으로라도 고런 소리 허덜 말어. 장터댁이사 시든 꽃인지 몰라도 내사 안직 기운 펄펄헌 나빈께. 육십에도 새 장개럴 가는 시상인디, 내 나이먼 처녀장게 열 분도 가제. 하먼, 열 분도 가고말고."
"워메, 누구 복장 긁니라고 고런 소리 골라서 허요, 시방?"
주모가 눈꼬리에 파르르 화를 돋우었다.
"어허, 먼첨 복장 긁은 사람이 누군디?"
하대치가 벌컥 화를 내듯이 하며 목청을 돋우었고, 주모가 지는 척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근디 ……참말로 홀애비는 홀애빈께라?"
주모가 주저하는 목소리로 그러나 넌지시 물었다.
"머 묵자고 고런 거짓말얼 혀. 못 믿겄으면 아까 그 사람이 나뭇짐 지고 오는 대로 물어보먼 될 일이겄구만."
하대치는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워메 남세시러라."
주모는 낯을 붉히며 밥상머리에서 돌아섰다.
"나뭇짐 워디다 부릴께라?"
때마침 지필구의 목소리가 밖에서 울렸다.
"나가요, 나가."
주모가 필요 이상으로 허둥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런 주모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하대치는 입꼬리가 돌아가는 묘한 웃음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하대치는 막걸리를 들이켤까 하다가 지필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두 지게의 나뭇짐을 혼자 옮기고 있는 수고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고, 윗사람으로서의 체신도 지킬 필요가 있었다.
하대치는 다시 담배쌈지를 꺼냈다. 손으로 알맞게 찢어낸 종이 위에 한 대 분량이 되도록 담뱃가루 어림해서 옮겨놓았다. 그것을 유연한 손놀림으로 도르르 말았다. 혀를 쑥 빼 종이 끝에 침을 발랐다. 배가 약간 불룩한 담배 한 개비가 만들어졌다. 그 담배가 입 속으로 쑥 들어갔다가 나왔다. 담배에는 침이 촉촉하게 묻어 있었다. 쩝쩝 입맛을 다신 하대치는 비로소 담배를 입꼬리에 물고 성냥을 득 그었다. 담배를 말면서 하대치는 대장 염상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 동무, 주력부대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눈치껏 수소문해오시오. 순천서 불리하게 밀리기 시작했으니 일차로 백운산, 거기서도 버티기 어려워지면 이차로 지리산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이오. 도당의 선과는 별도로 우리가 직접 파악해둘 필요가 있소. 그래야 우리 행동이 더 기민해질 테니까."
염상진은 눈앞에 지도라도 펼쳐놓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부대이동을 점쳤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할 뿐 주력부대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당이 선을 통해서 내리는 지시는 앞으로의 활동지침일 뿐이어서 염상진은 나름대로 전체적인 상황파악이 필요했던 것이다.
"쌍암 장터에서 알아낸다고 멀 을매나 알아내겄는가요? 이왕 나선 질인디 순천꺼정 가보는 것이 워쩔께라?"
하대치는 갑갑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하 동무 마음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그건 안 되오. 지금 순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어리석음이오. 현재로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적과 맞서 싸우는 일이 아니라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피하는 것이오. 주력부대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 것은 주력부대와 합쳐 적을 무찌르려는 것이 아니고 판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는 것뿐이오. 우리에겐 앞으로 전개해야 할 투쟁이 따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되오."
대장 염상진은 엄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안창민은 옆에 앉아 흘러내리지도 않은 안경만 밀어올리고 있었다.
"나뭇짐이 실혀서 좋소."
손바닥을 탁탁 털며 들어오는 주모의 얼굴이 만족스러웠다.
"이골난 장사꾼 나뭇짐이 아닝께 당연지사 아니라고? 나뭇짐 실헌디다가 싸게 샀응께 장터댁 운이 틘 것이구만."
"금메, 운이 틘 것인지 아닌지는 쪼깨 더 두고 봐야 안 쓰겄소?"
"거 무신 소리당가?"
하대치는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
"아, 두고두고 나뭇짐이 실해야 요 박복헌 년 운이 바늘구녕맨치라도 틔든지 뚫리든지 헐 것인디, 사람 맘 워찌크름 알 것이요."
"옛끼 순 못된 사람!"
하대치가 느닷없이 소리치며 밥상을 내리쳤다. 그때 막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던 지필구의 입에서 '하' 소리가 나왔고, 그는 황급히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하마터면 '동무' 소리가 튀어나올 뻔한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워메, 사람 간 떨어지겄소. 워쨌다고 기차 화통 삶아묵은 소리럴 질르요."
주모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고,
지필구한테서 눈길을 돌리고 있는 하대치는, 간 떨어질 사람언 니년이 아니고 저 지필구 눔이여, 속말을 십고 있었다.
"장터댁, 말이라고 다 허먼 말이 되는 법이 아니시. 험한 시상 살다봉께 사람 못 믿게 된 것이사 장터댁 죄가 아니지만, 사람이 워찌 다 도적눔이고 사기꾼이간디. 장터댁이 나꺼정 한통속으로 몰아때러 뿐께 소리 안 질르고 워쩔 것이여."
하대치는 착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그러셨구만이라. 나가 사람 잘못 보고 저질른 실순께 용서허씨요. 음마, 여적지 술도 안 드셨구만이라. 얼렁 쭈욱 드시고 그럭 비우시씨요. 사람 잘못 본 내 실수 씻어내는 턱으로 한 사발씩 더 디릴팅께요."
주모는 몸짓도 살랑살랑,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오냐 요런 촌 것들아, 닥치는 겨울 한 철만이라도 나뭇짐 실허게 져내라, 어디 촌놈들 덕이나 좀 보자,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고상혔네. 술 드소."
새끼손가락을 사발에 담가 막걸리를 저으며 하대치가 말했다. 주눅 든 표정으로 말없이 앉은 지필구도 손가락으로 술을 천천히 저었다.
"켜어어, 술맛 쪼오타."
단숨에 술을 비운 하대치가 사발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기분을 돋우었다.
"한 사발썩 더 허시씨요."
"아니시, 아녀. 술 잘 못헌께 애꼈다가 담에 헐라네."
하대치가 손을 저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입에 밀어 넣었다. 그 손가락을 바지에 썩썩 문질러 닦았다.
"워메, 워메, 김칫국물 묻은 손꾸락을 워디다 딲는다요. 참말로 누가 홀애비 아니라고 헐성불러 티내는 갑소이."
주모는 말을 하면서 '홀애비'라는 자신의 목소리가 야릇한 느낌으로 가슴을 감아오는 것을 느꼈다. 다부지게 생긴 작달막한 키에 아무리 흠을 잡아도 못생겼다고 할 수가 없는 얼굴, 마음씨도 나쁜 것 같지 않은데다 술도 한 사발이면 족한 홀아비.
주모는 불두덩이 짜릿 당기는 걸 느끼며,
‘미친년아 넋빼지 말어, 사내눔덜언 다 화적떼니께,’
자신을 나무라고 있었다.
"밥값 제허고 싸게 돈 주소."
하대치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지필수가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장이 어울러지자먼 당아 멀었는디, 워디 갈 디가 마땅찮으먼 여그서 그냥 더 쉬시지 그러요."
주모가 돈을 내밀며 말했다.
"요 돈으로 소금 말이나 사질란지 몰르겄다."
하대치는 돈을 대충 세어 넘기며 중얼거리듯 했다.
"그나저나 시상은 시끌시끌헌디 국밥 장시넌 해묵을 만헌가?"
하대치는 돈을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말도 마씨요. 시상 시끌시끌혀서 되야묵는 장시 웂지만 그중에서도 밥 장시, 술 장시가 질로 고랑탕 묵는 것 아니겄소."
"다 빨갤이눔덜이 웬수여. 근디, 우리야 촌구석에 처백혔응께 통 소식얼 몰르겄는디, 난리럴 일으킨 빨개이덜이 쫓긴다는 소문이든디, 워째 돼가는 판굿인지 아는가?"
"금메말이요, 입 달린 사람이먼 다 그 이야그 해쌓는디, 말이 다 지 각각잉께 누구 말이 옳은지 모르겄습니다. 워쨌거나 빨갱이가 백운산으로 지리산으로 뽕빠지게 달아나고 있다는 말은 참말인 것 같드만요. 쌍암 순사덜도 반은 그 빨갱 뒤쫓으로 나갔응께요."
"여그 면에도 빨갱이질헌 사람이 많다든디, 그 사람덜언 워쩔라고 순사덜 반이 떠났으까?"
"여그서 빨갱이질헌 사람덜언 폴세 끝장나부렀소. 눈치 싸게 도망간 사람덜이야 목심 부지혔지만 밍기적이다 잽힌 사람덜언 다 총살당해부렀소."
떠돌이 장꾼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몸을 웅숭거리고 들어섰다.
"가세."
하대치가 일어났다. 지필구가 재빨리 따라 일어섰다.
"가시게라?"
손님을 맞다 말고 주모가 말했다.
"담 장날 또 보세."
하대치는 나직하게 말을 해주고 돌아섰다. 주모가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흙벽에 기대놓은 빈 지게를 제각기 짊어졌다. 장터의 전자리는 거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장판이 어우러지기는 아직도 이른 시간이었다.
하대치는 옷깃에 스며드는 냉기를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맑고 푸른 하늘이 끝이 없었다. 하늘은 어느새 높을 대로 높고 깊을 대로 깊어져 있었다. 하늘에서는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른한 식구 ……
대장 염상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장은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장정 서른한 명이 겨울을 날 것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앞으로의 형편이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함께 그건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는 것, 어느 것 하나 걱정 아닌 것이 없었다.
하대치는 엄지손가락으로 콧구멍을 번갈아 막으며 코를 탱탱 풀었다.
‘니미럴, 누가 이기나 끝꺼정 혀볼 것이여. 무산자혁명의 날이 오먼 나도 이름맹키로 깃발을 날릴 것잉께.’
하대치는 큰 대에 다스릴 치자인 자신의 이름을 혁명완수의 신념과 함께 또 가슴에 심었다.
"저짝에 가서 소금 한 말 사서 져. 나는 이짝으로 한 바쿠 돌아볼 것잉께."
하대치는 지필구에게 돈을 꺼내주었다.
"자네는 입 딱 봉허고 사람덜이 허는 소리만 귀담아듣도록 혀. 무신 요긴헌 소식이 있을란지도 몰릉께."
하대치는 지필구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지시했다.
"명심허겄구만요."
지필구가 돌아서자 하대치는 지게작대기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팔짱을 끼고는 어슬렁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목에 두른 때에 전 광목 수건이며, 팔짱을 낀 웅숭그린 작은 체구며가 천상 구질스러운 농사꾼이었다.
하대치는 끄윽 트림을 했다. 시금털털한 막걸리냄새가 솟아올랐다. 입맛만 버린 한 사발의 막걸리가 되잖게 냄새만 요란하다 싶었다. 거저인 두 번째의 술잔을 사양하기란 하대치로서는 여자의 젖만 만지다가 정작 그 일을 참아내야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말술도 마다하지 않는 주량이었다. 그러나 중대한 임무를 띠고 행동하면서 더 이상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혼자였다면 또 모른다. 주량을 알 수 없는 지필구가 막걸리 두 사발에 정신이 알큰해져 '동무, 동무"를 연발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공짜 술이라고 초면인 여자한테 넙죽넙죽 받아 마신다는 것도 남자 체신으로 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내심으로 주모 장터댁을 벼르게 된 입장으로서는 남자 체면 깎는 일은 추호도 해서는 안 되었다. 나무 흥정이 이루어졌을 때 하대치는 국밥집에 터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감지했다.
장터의 국밥집과 주모, 하대치는 가슴이 뻐근하도록 기분이 좋았다. 장터댁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된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무를 단골로 대기로 한 것으로 반은 성사된 일이었고, 나머지는 남자 행세를 얼마나 야무지게 해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일도 이미 반은 이루어져 있었다. 홀아비라고 착 밑자락을 깔아놓은 것이다. 밥집 주모의 입장에서 통정을 하는 데 마누라 있는 남자보다 홀아비가 한결 편한 깔개인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머지 반이 바로 연장이 얼마나 실허냐 하는 것이었다. 연장에 관한 한 하대치는 주량보다 더 자신이 있었다. 키가 작은 사람이라고 해서 얼굴까지 작은 법은 아니듯이 하대치의 연장의 크기도 보통 사람의 것보다 컸으면 컸지 결코 작지가 않았다. 거기다가 씨름판을 누볐던 타고난 기운이 연장에까지 뻗쳐 한바탕 샘을 팠다 하면 하룻밤에 대여섯 차례의 공사를 치러야 했다. 그것도 한 차례씩의 시간이 길고 길어 대여섯 차례의 공사를 마치고 나면 부옇게 먼동이 터오기 일쑤였다.
밉지 않은 생김에 눈자위가 가무스름하고 입술이 붉은데다가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얼굴이 불그레한 기운으로 덮여 있는 것으로 보아 장터댁은 색깨나 밝힐 것이 분명했다. 그놈의 구멍파기에 미치면 녹아내리지 않을 삭신 없다고 했지만, 하대치는 그 지경이 되도록 그 구멍을 파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대치의 첫 번째 소원은 누가 뭐래도 무산자혁명 완수였고, 두 번째 소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기운이 남다른데다가 자식을 둘이나 두었지만 사실은 집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다. 결혼을 하자마자 징용을 끌려가 5년을 보냈고, 해방이 되자 공산당에 가담해 일 년을 징역살이를 했고, 풀려나고서도 숨어 다니는 생활의 연속이었으니 그런 소원이 생길 만도 했다.
그러나 하대치는 장터댁을 포섭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정이 오가서 통정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어떤 도움을 받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조직의 확대란 신중해야 했고, 자신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편법이었다.
‘워디, 한분 붙기만 혀봐라. 지년이 쌕을 을매나 찰지게 쓸지는 몰라도, 지년 두 눈깔이 핑핑 돌게, 방구 뽕뽕 뀌게, 숨 꼴딱꼴딱 넘어가게 맹글고 말 팅께. 누님 좋고 매부 좋고, 꽁묵고 알 묵고가 먼디.’
하대치는 입 안에 괸 침을 소리가 나게 삼켰다. 그리고 오늘의 암행은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를 올린 것이라고 자평하고 있었다.
"인자 반란군은 끝장나뿐 것이시."
"구례꺼정 밀려갔음사 볼장 다 본 것이구마. 지리산 꼴짝으로 들어가 무신 심얼 쓰겄는가."
하대치는 소리 나는 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팥죽과 순대를 파는 차일 밑에서 두 남자가 목청 높여 말하고 있었다.
"심언 무신 심얼 써. 산중에서 공산당 허먼 참말로 꼴 좋을 것이네."
"그나저나 담 구례 장 보기넌 또 글러묵었제?"
"허나마나헌 소리 아닌가."
"참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시. 그눔에 빨갱이 땀세 워디 장사 해묵고 살겄능가? 장마동 망쳐놓고 댕기니."
"빨갱이는 인자 두 손 번쩍 들어야 써. 애시당초 안될 싸움이었응께 인자 살고 보는 것이 상책이제. 반란군이란 것들도 억씨게 미련헌 종자들이여. 아, 서울도 아닌 전라도 끝 여수. 순천서 나라 전부럴 차지혀보겄다고 총질해댐서 반란얼 일으켰으니 말이시."
"긍께 조금 못 가 그 꼬라지 되얐제. 헌디, 이승만 대통령이 무작허니 화가 났담시로?"
"거야 당연지사 아니겄어? 반란군이 때레잡을라고 헌 것이 바로 자긴께."
"화도 나게 생겨뿌렀네."
"긍께 빨갱이 뿌랑구를 뽑겄다고 그리 무작시럽게 총살시키고 난리판굿이제."
"죽이고 죽고 안허고 편헌 시상 될라먼 빨갱이 뿌랑구를 싹싹 도리긴 도려야 헐 것이네."
하대치는, 요런 반동새끼들아, 외쳐대며 당장 땅바닥에다 개구리 패대기치듯 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주력부대가 구례까지 밀린 모양이었다.
장터댁이나 이 사람들의 말을 합해보면 대장 염상진의 예상이 그대로 들어맞고 있는 셈이었다. 하대치는 사지에 맥이 빠졌다. 느리게 걸음을 옮겨놓았다.
"소금 샀구만이라."
지필구가 옆으로 붙어서며 낮게 말했다. 하대치는 모슨 정보가 없느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별로 색다른 사실이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남들의 눈에 표가 나게 수군대는 것도 좋을 것 같지가 않았다. 장터에는 제법 사람들이 불어나 있었다.
"근디 말이요 ……"
"헐 이야그 있으먼 이따가 혀."
하대치는 지필구의 말을 매정스럽다 싶게 막았다. 지필구가 찔끔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하대치는 사람들의 말에 온 신경을 쓰면서 전자리는 그저 건성으로 보아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곳에 눈길이 머물렀다. 놋그릇을 파는 전 한쪽에 바리때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적갈색의 칠을 입힌 바리때는 햇빛을 받아 반달 모양의 생김이 유별나게 예쁘게 보였다. 나무로 깍은 그릇 같지가 않았다. 대장은 사기그릇이 무겁고 깨지기 쉬우니 참나무를 깎아 밥그릇을 만들자고 했던 것이다. 그 말이 백번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슨 재주로 참나무를 깎을 것인지 난감했었다. 머리 잘 돌아가는 대장도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요 바리때 팔 것이제라?"
뻗지르는 지겟다리 때문에 하대치는 거북살스럽게 전 앞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하먼이라. 전에 내논 것이먼 마누래고 딸이고 다 팔아묵을 물건잉께요."
주인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징글맞게 웃었다.
하대치는 바리때를 두 손으로 받쳐 집어 들었다.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까지 층층이 포개져 있는 그것은 보기보다 훨씬 가벼웠다. 꼭 사야겠구나, 하대치는 순간적으로 결정했다.
"절에 시주헐랑갑제라?"
주인이 아는 체를 하고 들었다.
"그러요. 죽은 우리 엄니 극락 보내도라꼬."
하대치는 층을 이루고 있는 바리때 수를 세며 대꾸했다.
"참말로 효자요이. 고런 축원이사 바리때 시주가 젤이요. 시님네덜이 그 바리때에 밥 담아 묵을 때마동 빌어줄 것잉께."
‘짜석, 누가 물건 안 살랑가 싶어 둘러 붙이기는,’
하대치는 속으로 욕질을 해댔다.
"을매요?"
"쌀 닷 되 값만 내씨요."
"값 톡톡허니 불름시로 말은 영 싸게 주는 디끼 허는구만?"
하대치는 안 살 것처럼 바리때를 놓아버렸다.
"워째 그요? 아, 불전에 시주헐 물건값을 깎을라고 허요, 시방?"
"비싼 물건 깎는다고 부처님이 나무래기라도 허고, 줄 복을 안 준다고 그럽디여? 흥정은 흥정이고 시주는 시주제."
하대치는 이렇게 내지르고 돌아섰다.
"봇씨요, 봇씨요. 넉 되 반 값만 내씨요. 워째 그리 성미가 불 같으요."
주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내 없이 사는 살림이제만 워찌 바리때 한 축만 달랑 시주럴 험시로 우리 엄니 극락에 보내도라꼬 허겄소. 다섯 축을 살 것잉께 한 축에 석 되 반 값썩만 헙씨다."
"어허, 머리도 안 까진 양반이 워째 넘 물건값얼 저리 몰악시럽게 휘려때린당가. 많이 산당께로 한 축에 넉 되 값만 내씨요."
"바리때가 여그만 있는 것이 아니겄고, 딴 사람헌테 많이 팟씨요."
하대치는 다시 돌아섰다.
"봇씨요, 갖고 가씨요, 갖고 가."
주인의 목소리가 한결 다급했다.
"마수걸이만 아님사 그 값에 못 파는 물건이요. 팔아봤자 남는 것이 있어야 말이제."
주인 남자는 바리때를 싸면서 투덜거렸다. 그러나 하대치의 귀에는 그런 투덜거림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바리때 한 축에 네 개, 서른 한 식구니까 열 한 개가 모자라지만 수중에 든 돈이 넉넉하지 못하니까 ……’
머리로는 그릇 수를 계산하고, 주머니에 넣은 손가락으로는 대장한테 받은 돈을 필요한 만큼 세어 넘기고 있었다. 돈뭉치를 그대로 꺼냈다가는 의심받기가 십상일 것이었다.
이제 장터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 시끌거림과 부산스러움이 장날 맛을 제대로 나게 했다. 하대치는 바쁠 것 없이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걸어 장터 끝머리에 있는 대장간을 찾아갔다. 지필구는 먼발치에서 기다리게 했다. 도끼와 낫을 두 개씩 샀다.
다시 장터로 들어와 전을 기웃거리고 다녔다. 귀를 열어놓고 있었지만 신통한 소식은 잡히지 않았다. 시끌거리는 소리만 왁자하게 정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저놈 잡아라! 빨갱이다, 저놈 잡아!"
어디선가 터져 나온 소리였다. 갑자기 장터의 시끌거림이 뚝 멎는 것 같았다. 하대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충격을 느꼈다. 재빨리 지필구를 살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지필구는 허둥대고 있었다.
"서라! 쏜다!"
또 외침이 들렸고, 장터 저쪽으로 한 남자가 날쌔게 도망치고 있었다. 하대치는 지필구의 팔을 꼭 붙잡았다. 지필구의 몸이 떨리고 있는 파장을 하대치는 역력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대치는 빠르게 손아귀를 놀려 지필구의 팔을 잡았다 놓았다 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사복을 한 남자가 '빨갱이'라는 말을 외쳐대며 뒤쫓아 갔다. 뒤쫓는 남자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장터에는 한참 동안이나 서늘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하대치는 그만 기분이 싹 잡쳐버렸다. 더 이상 얻을 정보도 없는데다가 그 꼴을 목격하고 나니 한시도 장터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벌교 장터에 숨어들었다가 자신이 당하는 꼴인 것만 같았다. 지필구도 마찬가지 심정일 터였다.
"싸게 가세."
하대치가 지필구를 툭 쳤다.
"고맙구만이라."
지필구가 한 말이었다. 하대치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 김빠지는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반면에 그 겁 질린 꼴이 역겨워 볼때기를 한 대 쥐어지르고 싶은 역정이 솟았다.
‘니눔도 몸집만 컸지 간이 그리 콩알만 해갖고 빨갱이질 해묵기 심들겄다.’
하대치는 앞서 걸으며 카악 가래를 돋궈 올렸다.
염상진과 안창민의 의견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염상진은 당장 읍내 조직을 재구성하자는 것이었고, 안창민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읍내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쪽이었다. 읍내에 잠입해 들어갔다 온 강동식의 보고만으로도 그 상황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군당들도 이번에 조직이 다 노출되어버렸소. 그리고 당에서 군당을 야산대로 개편하라는 지시오. 그건 곧 군당의 전투병력화인 동시에 투쟁의 장기화를 의미하는 거요. 그런 급박한 상황을 놓고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오. 물론 안 동무의 생각도 옳소. 첫째 조직을 재구성할 만한 능력자가 마땅찮고, 둘째 위험부담이 너무 크고, 셋째 검거의 공포 때문에 미온적인 세포의 결속도 어려운데 새로운 세포의 포섭은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점 나도 동감이오. 그러나 ……"
염상진은 담배꽁초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안창민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숯막의 조그만 창에 색종이를 발라놓은 것처럼 파아란 하늘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디서든지 그 하늘빛처럼 맑은 새소리가 일직선을 긋듯이 예리한 단음을 뿌렸다. 염상진은 느리게 담배를 빨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진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 어려운 조건들을 역으로 생각해볼 필요도 있소. 첫째, 흥분된 검거 분위기 속에는 허점이 있고 우리가 활동을 못하리라는 방심이 있소. 둘째, 미온적인 세포들을 검거공포 속에 방치해둔다면 그들은 더욱 공포감에 빠지고 우리한테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오. 셋째, 상당기간 동안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오. 적군의 손아귀에 승세가 잡혀있는 한 우리는 계속 쫓기는 형편을 면하지 못하게 될 거요. 우리의 상황이 더 악화되면 읍내 조직에 손을 쓸 기회마저 상실하게 되오. 넷째, 이상의 일을 수행하는 데 위험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오. 어차피 혁명투쟁은 위험의 연속 속에서 전개되는 일이고, 그 위험을 극복하고 성취하는데 더 큰 보람과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소."
안창민은 위압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의논의 단계를 지나 결정의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의논을 하는 것 같으면서 결정을 내리고 마는 염상진 특유의 방법이었다. 어감이나 말 마디마디의 맺음은 분명 의논 같은데 말의 내용을 따져보면 결정을 내리고 있고는 했다. 그런데 그 결정이 독단적이거나 일방적인 것이 아니어서 안창민으로서도 더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지금도 네 번째의, 모든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그런 속에서 얻어지는 투쟁의 결과가 더 빛난다는 내용의 명분 앞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 것인가.
"대장님 의견에 찬동합니다."
안창민은 선선하게 동의를 표했다. 자신은 참모일 수는 있어도 지휘관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고맙소, 안 동무, 그럼 다음 문제를 의논합시다."
염상진이 담배를 비벼 껐다.
"조직 재구성을 목표로 할 때 부족한 대로 누구한테 임무를 맡겼으면 좋겠소."
"글쎄요 ……"
이런 모호한 반응을 염상진이 싫어할 것임을 알면서도 안창민은 마땅한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책방의 문기수는 어떻소?"
"글쎄요 ……"
무심코 말을 흘리고 나서 이번의 '글쎄요'는 실수라는 것을 안창민은 깨달았다.
"문기수에 대해서는 나보다 안 동무가 더 잘 알거 아뇨."
그런데 왜 모호하고 애매하게 '글쎄요'라고 하느냐고 제때에 가해져 오는 염상진의 공박이었다. 그 재빠름에 안창민은 속으로 웃었다.
"아시다시피 조직적인 머리가 없는데다가 또 사상적인 바탕도 빈약해서 ……"
말이 좋아 사상적 바탕의 빈약이었지 그걸 솔직하게 말해버리면 문기수가 가지고 있는 인간성의 회색적인 면을 신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기회주의적인 성격은 장사에는 어울릴 수 있어도 혁명적 사상무장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기수의 그 점은 나도 알고 있소. 그런데, 그 사람의 딸은 어떻소?"
"무슨 말씀인지 ……"
염상진의 물음이 너무 갑작스럽고 엉뚱해서 안창민은 결코 내키지 않는 어정쩡한 말을 어물거렸다.
"정하섭 동무와 어떤 관계가 있는 모양인데, 사상적 영향은 어느 정도 미쳤느냐 하는 걸 알고 싶은 거요."
"정하섭 동무와 이성적 관계를 맺어온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정 동무가 사상적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선 저로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만약 정 동무가 그런 영향을 끼쳤다면 저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우리 조직에 가담시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안창민은 염상진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 분명하게 말했다.
"정 동무가 청춘사업에만 열을 올렸었군."
염상진은 쩝쩝 입맛을 다시고는,
"근래에 두 사람 관계는 어떻소?"
떫은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처음에는 정 동무가 먼저 접근을 했었는데 서울로 대학을 가고부터는 입장이 반대가 된 모양이더군요."
"그럼, 정 동무가 시들해지고 정님이 쪽이 적극적이 되었단 말이오?"
"그런 셈이지요."
대답을 하며 안창민은 놀라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염상진은 여자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여자의 이름이 정님이라고 하니까 '그렇지' 할 정도였을 뿐이지 막상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선뜻 '정님이'라고 대답할 수 있게끔 자신의 기억 속에 박혀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안창민은 그때서야 염상진이 노골적으로 표시하고 있는 언짢은 기색이 정하섭한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읍내의 조직운영과 확장을 책임지고 있었으면서 정하섭의 애인인 문정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했다는 것은 실책 중의 실책이었다.
"입장이 바뀌었다니 차라리 잘됐소."
안창민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를 몰라 염상진의 얼굴만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이번 기회에 문기수를 열성분자로 변신시키는 거요."
염상진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고, 안창민은 더욱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정님이를 입산시키도록 하시오. 정 동무가 원하고 있다는 미끼를 던지시오."
염상진의 말은 어느새 명령으로 바뀌어 있었다. 서슴없이 사용한 '미끼'라는 말이 차가운 쇠붙이로 가슴에 와 박히는 것을 안창민은 명령의 싸늘함과 함께 느꼈다. 정하섭을 미끼로 문정님을 입산시키고, 문정님을 미끼로 문기수를 열성분자로 활동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조직 재구성이 시급한 형편에 해볼 만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염상진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점이 있었다. 정님이라는 여자가 좋아한 것은 서울서 대학을 다니는 부잣집 아들 정하섭이지 빨갱이로 쫓겨 산속에 박혀 있는 정하섭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안창민은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생각도 예측에 불과한 것이었고, 일단 명령대로 시행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 입산 유도가 실패할 위험성도 없지가 않소."
염상진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안창민은 아무 대꾸 없이 속으로 웃었다.
"아무런 사상무장 없이 사랑만으론 입산 유도에 걸려들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오. 정하섭이 직접 유도하는 것도 아니니까."
"저도 그 점을 생각했습니다만, 일단 계획대로 시행해보는 것이 어떨는지요."
"물론 시행은 하겠소만 만약 문기수가 적극행동을 기피하고, 딸의 입산 유도도 실패하게 되는 경우에 대비해서 그 다음 방안을 강구해야 되지 않겠소?"
안창민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염상진의 눈길을 피할 수도 없었고 그대로 견디기도 곤혹스러웠다. 그 눈길은 분명 그 다음 방안은 네가 알고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안창민으로서는 뾰족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안 동무, 이지숙 선생과는 어떤 사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안창민은 가슴이 쿵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 큰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안창민은 염상진의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씨익 웃어 보였다.
"좀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사입니다."
"그냥 남녀관계로만 말이오?"
염상진이 물음을 서둘렀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 선생의 의식이 꽤 사회주의적인 면이 있어서 대화가 열리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저의 신분을 노출시켜서는 안 되는 형편이었고, 이 선생의 의식 전체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사귐이 깊어지지 못했던 탓으로 사상적인 면은 거의 침투가 안 된 상탭니다. 사귄 시간이 짧았던 것이 결정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염상진은 안창민의 눈에서 시선을 거두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심각하고도 침울했다.
안창민은 그때까지도 가슴이 쿵 울렸던 여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지숙과의 관계를 염상진이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 놀라움은 이지숙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데서 생긴 것이 아니라, 염상진은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 샅샅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긴 것이었다. 안창민은 '조직'의 주도면밀성과 투시성에 이상한 한기를 느꼈다. 염상진은 계속 어디론가 피해 다니면서도 사적인 움직임까지 살피는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 사랑의 농도라는 건 꼭 사귀는 시간과 비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어떻소, 좀 뭐한 질문이긴 하지만, 이 선생이 안 동무를 대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
염상진은 그답지 않게 어눌한 느낌이 들도록 느리게 말을 했다. 안창민은 염상진의 심중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하고 있는 이지숙의 마음을 헤아리기란 난감한 일이었다.
"글쎄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
"알겠소. 그럼, 이번엔 안 동무가 신분을 노출시켰을 때 이 선생의 반응은 어땠소?"
그때 안창민의 머리에 확실히 잡히는 것이 있었다.
"참 놀랍네요. 아녜요, 그럴 가능성이 있었어요."
붉은 완장을 찬 자신을 보고 이지숙은 분명히 놀라워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놀라움이 아니라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는 놀라움이었다.
"멋있군요. 안 선생한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붉은 완장이 안 선생 팔에 끼워져 있다는 것이 멋있어요."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이지숙이 한 말이었다.
"그 정도였다면 됐소."
염상진은 그런대로 만족을 표시했다.
"일차는 문기수를 목표로 정해 행동을 개시합시다. 강동식 동무를 부르시오."
염상진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안창민은 밖으로 나왔다. 햇빛으로 눈이 부셨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더 눈이 부셨다. 빛이 아닌 색깔이, 그것도 빨강색이 아닌 파란색이 눈이 부시다는 사실은 모처럼의 경험이었다. 야릇한 경이감이 일어났다.
안창민은 이마에 손차양을 만들어 대고 햇빛 속 여기저기를 살폈다.
강동식은 바위 옆 헤성한 나무 그늘에 앉아 무슨 일엔가 골몰해 있었다. 안창민은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건강한 강동식은 어디서 구했는지 끌을 가지고 통나무를 파내느라고 숨소리까지 씩씩거리며 열중해 있었다.
"강 동무, 뭘 그리 열심이시오?"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린 강동식은 안창민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아, 예, 여물통을 깎니라고 …… 일로 앉으시씨요."
강동식은 꾸밈없는 웃음에 어울리게 밥그릇을 여물통이라고 했다.
"대장님이 부르십니다."
"무신 일인디요?"
"빨리 갑시다."
"알겄구만이라. 싸게 가십시다."
강동식은 벌떡 일어나 옷에 묻은 나무 부스러기들을 털어내며,
"하 동모는 당아 안 왔능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강 동무, 책방 하는 문 동무 집을 아시오?"
"아느만요."
"읍내 중심인데, 오늘 밤에 침투할 수 있겠소?"
"쪼깐 위험시럽긴 혀도, 헐 일이 있음사 침투혀야제라."
강동식은 마른침까지 삼키며 말에 힘을 주었다. 염상진은 그런 강동식을 신뢰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좋소, 가서 내 명령을 전하시오."
염상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문 동무에게 앞으로 읍내 지하조직을 새로 꾸미고 세포확장의 임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라는 명령을 전하시오. 이게 강 동무가 수행할 임무요."
"알겄습니다."
"오금재를 넘어야 하니까 곧 출발해야 할 거요."
"하먼이라, 댕겨오겄습니다."
"혼자서 위험하니 동행을 ……"
"하먼이라, 누구 하나 데꼬가야제라."
강동식은 대장 염상진에게 거수경계를 올려붙였다. 긴장된 그 얼굴은 섬뜩할 만큼 사나워 보였다. 안창민은 밥그릇을 여물통이라고 하며 사람 좋게 웃던 강동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강동식을 보고 있었다. 그건 흡사 가면을 쓴 것 같은 변모였다. 평이한 감정상태의 얼굴과 사상적 감정상태의 얼굴은 그렇게도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딸 정님이 문제는 더 두고 생각합시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돼 있습니까?"
"아까도 잠깐 말했다시피 당의 지시에 따라 야산대를 편성하고 무력투쟁으로 전환하게 되어 있소. 이건 전에 했던 지하투쟁과는 달리 본격적인 야산무력투쟁이고 공개투쟁이며 장기화투쟁이오. 우린 거기에 맞춰 군당을 전투병력화 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이오. 사상무장과 전투훈련을 병행해서 실시해야 하는데, 안 동무가 미리 알고 있겠지만, 기초적인 사상학습과 한글학습이 동시에 실시되어야 할 것이오. 혁명과 투쟁의 필요성이 자각되지 않고서는 전투력이 발생될 수 없고, 한글을 깨치지 않고서는 사상학습이 무용할 뿐만 아니라 혁명적 정신력도 신장되지 않는 것 아니겠소. 그리고 당규에 따라 한글을 깨쳐야만 당원이 될 수 있으니, 전 동지의 당원화를 목표로 교육을 실시했으면 좋겠소. 모든 동지들이 당원이 되었을 때 우리의 투쟁력이 그만큼 배가된다는 사실을 안 동무도 잘 알 거요."
"알겠습니다. 곧 계획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
안창민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이러한 투쟁의 전환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 현재와 같은 무장상태로 야산대 결성과 공개투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효과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 신중한 검토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무장이라는 것은 소총이 겨우 3할 정도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전부 대창이나 농기구에 의존한 원시무장 아닙니까? 소총도 탄알 확보가 문제고요."
그는 어느새 염상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염상진은 안창민다운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답하기가 곤혹스러웠지만, 한번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인 것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지적했소. 적에 비해 우리의 무장상태는 형편없이 빈약한 게 사실이오. 무장상태로만 따지자면 우리의 투쟁은 전혀 가망이 없소. 그러나 투쟁은 무기로만 하는 게 아닌 것 또한 사실이오. 무기에 앞서 정신력, 여건, 환경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투쟁결과는 나타나게 되어 있소. 그 좋은 예가 바로 제주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투쟁이오. 그들은 독립된 섬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7개월째 투쟁을 계속하고 있소. 양키들이 발악적으로 비행기며 군함을 동원해 최신무기를 사용하고, 서청이고 군. 경을 그렇게 투입해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해도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 말이오. 왜 그렇겠소? 그건 알다시피 한라산이라는 자연적 환경 때문이오. 여건과 환경의 무기화에 정신력까지 뒷받침되면 무기의 강약에 따른 투쟁의 산술적 계산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거요. 제주도의 투쟁이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 답을 낼 수가 없소. 상황이 불리한 것은 틀림없지만 적들이 동원하고 있는 최신 무기만으로 그 투쟁을 단기간에 끝장내게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오.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자연적 환경과 여건은 너무나 좋소. 적이 우릴 절대로 고립시킬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투쟁은 얼마든지 효과를 거두면서 장기화를 꾀할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리고, 우리가 처한 상황으로 보아 야산대 투쟁은 불가피하게 되어 있소."
염상진은 이번 일에 대해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몇 가지 의문을 뭉개면서 신념에 찬 태도로 말했다.
"예, 그 점에 대해서는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이번의 투쟁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위원장님은 분명 '결정적'이라고 말씀하셨고, 저까지 노출시켰습니다. 그 결과 읍내의 모든 조직은 노출되었고, 야산투쟁이 불가피한 상황까지 왔습니다. 위원장님의 그런 판단은 물론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도당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고, 그래서 조직의 노출은 우리 군당만이 아니라 이번에 투쟁을 전개한 다른 군당들도 마찬가지 형편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투쟁에서 다른 도당에서는 연대투쟁을 전혀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볼 때 이번 투쟁은 전남 도당만의 것이고 당 중앙과의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도당만의 독자투쟁이었다면 이런 식의 투쟁이 현 상황에서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또 생깁니다. 미군과 이승만 정권이 지하화 된 우리 당조직을 캐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 마당에 이번 투쟁으로 도당 거의 전부의 조직을 노출시킨 것은 바로 그자들이 바라는 대로 해준 결과로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도당이 그 어떤 도당보다 조직세가 크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번에 입은 타격과 앞으로 피하기 어려운 타격이 당 중앙에까지 미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이런 제 의문이나 우려가 잘못된 것입니까?"
안창민은 핏기 가신 얼굴로 염상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염상진은 무거운 얼굴로 담배를 빼들었다.
"안 동무는 정곡을 찌른 것이오, 나도 안 동무와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소. 곧 도당에서 간부회의를 소집해봐야 자세한 걸 알게 되고, 어떤 문제 제기도 될 것 같소. 그러나 지금까지의 상황만으로 볼 때는 안 동무가 지적한 점들이 문제가 아닐 수 없소."
"십일항쟁의 손실과 사삼투쟁의 고립화를 통해 모험주의가 반성되고, 지양되어야 한다는 건 당의 결론 아니었습니까? 그런 견지에서 보더라도 이번 투쟁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미 제국주의에 대응한다는 것은 똑같은 손실의 되풀이일 뿐입니다."
"그렇소, 당의 손실일 뿐 아니라 지지기반의 손실이기도 하오. 그러나 도당이 이번에 연대투쟁을 지시한 건 그 나름의 상황적 이유와 근거에 입각한 것이라고 생각하오. 우리가 알다시피 14연대 주력이 뱃길로 조성을 장악한 것이 20일이고, 육로로 진트재를 넘어 벌교로 들어온 것도 20일이 아니었소? 뿐만 아니라 같은 날 광양을, 또 학구와 구례를 장악해나가는 비호같은 기동성을 발휘하지 않았소? 그 3개 방향으로 펼쳐진 기민한 분진은 바로 전남 일대의 장악을 뜻하는 것이었소. 그런 상황전개 앞에서 나나 안 동무가 도당 위원장이나 간부였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 것 같소? 그냥 좌시할 수 있었겠소? 연대투쟁은 필연적이고도 불가피하게 되어 있었소.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 행동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적 요인 또한 간과할 수 없을 것이오. 그리고,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이 안 된 이상 도당의 지령이 독자적인 것이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금물이오. 정하섭 동무의 출현이 그 증거요. 어쨌거나 이번 일의 문제점은 14연대의 투쟁 시발에 있고, 우리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을 거라는 판단은 부정하기 어렵게 된 게 사실이오."
염상진은 괴로운 마음으로 또 김범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미군들의 화력은 막강했고, 그들은 또한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철저했고 잔인했다.
안창민은 더 할 말이 없음을 느꼈다. 염상진의 마음속에 끓고 있을 여러 가지 괴로움을 생각하면 할 말이 더 있더라도 입을 다물어야 할 형편이었다. 자신에 비해 염상진의 마음이 얼마나 더 괴로울 것인지는 어려운 짐작이 아니었다.
"저는 바람 좀 쐬겠습니다."
"그러시오."
안창민은 숯막을 벗어났다. 천지에 가을이 진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키며 눈을 내리감았다.
해방에서 오늘이 이르기까지, 감추어진 신분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주시하고 분석하면서 쌓았던 수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유난히 생생하게 들리는 소리들과 또렷하게 다가드는 모습들이 있었다. 그건 흰 무명옷을 입은 사람들의 기쁨의 소리를 지르며 떼 지어 읍내로 몰려드는 생기 펄펄한 광경이었다.
그날 8월 15일은 얼떨결에 지나갔다. 16일도 어수선한 소문과 미심쩍은 눈치들이 오가는 속에 저물었다. 그런데 농악소리가 걸고도 치렁치렁하면서 신바람 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은 17일 아침나절부터였다. 어느 마을에선가 일어나기 시작한 농악소리는 늦가을 산에 붙은 산불처럼 마을마다 무서운 기세로 퍼져갔다. 당산나무 아래서 농악대를 겹겹으로 에워싸고 휘돌고 맴돌고 뒤엉켜 아름 돌던 사람들은 마침내 읍내로 읍내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읍내의 큰길마다 여러 마을에서 몰려든 농악대와 사람들로 출렁거렸고, 읍내 안통의 사람들까지 그 신바람에 휩쓸려들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어허덜싸 기쁨의 소리를 맞추었다. 상쇠의 꽹과리는 한사코 잦은몰이로만 치달아 올랐고, 그에 질세라 징이며 장구며 북이며 소고도 숨길을 다잡으며 뒤쫓고 있었다. 농악대의 그 숨 가쁘고 빠른 신명에 수많은 사람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지칠 줄 모르고 신바람을 일으켰다. 그런 그들의 얼굴은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으며 땀으로 번들거렸다. 낡은 무명옷들도 척척하게 젖어버렸다.
무엇에 들린 것 같은 사람들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안창민은 가슴 먹먹해오는 서러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읍내 전체가 그런 기쁨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어느 해 어떤 명절에도 본 일이 없었던, 실로 자신의 생전에 처음으로 대하는 눈물겨운 광경이었다. 그건 해방의 얼굴이었다. 꾸밈없는 얼굴이었다. 가식 없는 얼굴이었다. 그 누구의 지시도 받은 바 없이 한 무리를 이루고, 그 누구의 명령도 받은 바 없이 한 덩어리를 이룬 그 기쁨에 겨운 얼굴얼굴들은 그동안 얼마나 목 타게 해방을 기다렸으며, 얼마나 애태우며 해방을 고대했던가를 저마다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었다. 땅 빼앗기며 산 기나긴 세월, 공출을 당하며 굶고 산 기나긴 세월, 견디다 못해 목숨을 내걸고 소작쟁의를 일으켜 열병 들며 산 기나긴 세월, 일정 치하의 줄기찬 착취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견뎌야 했던 가난한 민중들은 해방을 그리도 뜨겁고 사무치게 맞고 있었던 것이다.
저리도 뜨겁게 타오르고, 저리도 거세게 신바람을 일으킬 줄 아는 사람들이 그저께는 그렇다 하더라도 어제까지도 주의 깊은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을 안창민은 새삼스럽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건 탐색이었고, 확인이었고, 자제된 이성이었다. 그들은 핍박의 긴 세월을 사는 동안 끝없이 상처받고 피해당하면서 그만큼 방어적이고 냉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 확인 앞에서 안창민은 섬뜩한 긴장을 느꼈다.
그런데 안창민은 자신의 그런 느낌을 다음날부터 구체적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해방을 하루 동안 농악의 장단에 맞추어 춤추고 눈물겨워한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마을마다 이장을 갈아치우는 일부터 벌이면서 사람들은 그 영향력을 읍내 안통에까지 뻗쳐왔다. 경찰서는 물론이고 모든 관공서에서 친일반역자들을 몰아내고 깨끗한 새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는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친일행위자와 악질지주들이 봉변을 당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한 덩어리가 되어 해방의 기쁨을 나누웠던 힘을 그냥 사장시키지 않고 새 세상 만들기와 새나라 만들기의 힘으로 바꾼 것이었다. 안창민은 그 정확한 판단과 통일된 자발성과 신속한 실천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에 놀라고 있는 자신에게 그는 경멸을 보냈다. 그 놀라움은 분명 민중들은 그런 사고력과 행동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대상으로 간주해왔던 잠재의식의 발로에 지나지 않았던 때문이다. 민중들은 압제 속에 살면서 이미 그런 준비를 해왔음을 깨달아야 했다.
사람들의 그런 자발성에 따라 건준지부와 치안대가 탄생했다. 그리고 건준지부는 곧 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민위원회의 여러 기구에 친일반역자들이 얼씬도 하지 못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5만을 헤아리는 읍민들 중엔 9할이 농민이고, 그 농민들 중에서 8할이 넘게 소작인인 그들이 인민위원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했다. 신속한 토지문제의 해결이었다. 그 요구와 공산주의 혁명과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아 떨어졌다. 해방된 땅의 전체 분위기는 똑같았고, 그건 곧 혁명으로 치달아가는 길이었다.
인민은 곧 혁명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연료로서 불꽃이 당겨지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팔선 이남을 미군들이 점령했고, 그들은 군정을 선포하면서 마침내 시월 십일 조선 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나섰다. 그때부터 인민들의 욕구는 깨져나가기 시작했고, 공산당은 피나는 투쟁 속에서 세력의 약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안창민은 먼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그 억센 모습이 헤아릴 길 없는 무게와 함께 가슴을 눌러왔다. 그는 그 무게를 이겨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다시 숨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길이 저 산줄기처럼 험난하다 하더라도 남자의 의지로 선택한 길을 저 산줄기 같은 억센 힘으로 이겨나가야 하리라고 마음 다지고 있었다.
강동식이 칠동리 과수원집 둘째 아들 배성오와 함께 오금재를 넘고 고읍들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도달한 것은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여그서 꼴딱 어두워질 때꺼정 푹 쉬세. 주먹밥도 한 뎅이씩 묵음시로."
강동식이 바위 사이에 자리를 잡으면서 말했다.
"글안해도 붕알이 땡길라고 허요. 강 동무는 워찌 그리 나이 묵은 티도 안 내고 고러크름 날래게 걷는다요?"
배성오가 돌아서서 오줌을 갈겨대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아, 그 나이에 붕알이 땡기먼 장개 가기넌 다 글른 것이네. 하룻밤에 대여섯 분썩 올라타는 기운이 백 리럴 한걸음에 걷는 기운보담 더 쓰는 기운인디, 오십 리 걷고 땡기는 붕알로 워찌 신방얼 채리겄능가."
강동식이 허물허물 웃으며 종이에 담배를 말고 있었다.
"워따, 붕알이 땡길라고 헌다고 그랬제 땡게뿐다고 혔으면 참말로 큰일나겄소이. 들어봇씨요, 요 오짐발 뻗치는 소리가 워떤가."
배성오는 일부러 오줌줄기를 바위로 옮기며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어허, 지리산 폭포 쏟아지는 소리시. 씨언허네, 씨언혀."
두 사람은 허허거리며 웃었다.
"오늘 저녁은 무신 일이다요?"
배성오가 강동식 옆에 앉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강동식이 약간 옆으로 옮겨 앉아 자리를 내주며 담배에 침을 발랐다.
"책방 허는 문기수헌테 읍내 지하조직을 새로 짜고 세포도 늘리는 적극 활동을 허라는 대장님 명령이시."
"하먼, 문기수가 책임자가 된다 고런 말이다요?"
"그럴 것이네."
"택도 웂소. 문기수가 을매나 여시라고, 대장님이 워째 요상시런 명령얼 다 허요이!"
배성오의 언성이 높아졌다.
"대장님이 고것을 모르실 리가 웂네, 우리가 헐 일언 명령만 전허는 것이시."
강동식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조금 전에 농담을 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알겄구만이라."
배성오의 기가 금방 꺾였다.
"밥 묵어두소."
강동식이 주먹밥이 든 삼베보자기를 배성오에게 건넸다.
"문기수는 딸년 하나 이쁘게 뽑아논 것말고는 볼 것이 웂응께 ……"
배성오는 보자기를 풀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배성오를 강동식은 빙그레 웃으며 건너다보고 있었다.
‘니도 문기수 딸년 이쁜 것은 욕 못허는구만. 당연허제, 니도 다 큰 붕알 달았응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강동식은 배성오한테서 믿음직스러움과 함께 남다른 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동행이 필요할 때는 꼭 배성오를 뽑고는 했다.
"강 동무도 드시씨요."
배성오가 주먹밥을 내밀었다.
"자네나 얼렁 묵소. 나는 담배가 더 급허네."
강동식은 주먹밥을 받아들며 말했다.
"글먼 나 먼첨 묵을라요."
"어이, 얹힌디 꼭꼭 씹어서 묵소."
"야아."
벌써 입이 찢어지도록 밥을 베어 문 배성오가 씽긋 웃었고, 강동식도 맞받아 웃음 지었다.
강동식은 하대치와 함께 그 투쟁경력이 화려한, 염상진 휘하조직의 중추이며 골수분자였다. 그는 벌교 토박이로 회정리에서만 대대로 살아온 소작인 집안의 자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대치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중도의 간척논 소작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소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논에서 발을 찔렸는데 그것이 덧나기 시작해서 반년이 넘게 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변변히 치료를 하지도 못했으면서도 워낙 없는 살림이어서 아버지가 눈을 감고 나니 당장 끼니 끓일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5학년에서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일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꿈을 버릴 수가 없어서 혼자 힘으로 나머지 소학교 과정의 공부를 마쳤다. 하대치보다 두 살이 많은 그는 하대치와 같은 시기에 염상진과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징용을 끌려갔다 왔고, 바로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그가 하대치에 비해 경력이 모자라는 것은 일 년 징역살이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홀로 살아온 어머니가 중환을 앓고 있어서 적극적인 활동에 가담을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혼이기도 했다. 단 한 마직의 논이라도 자작농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장가를 들지 않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있었던 그는 징용을 끌려가는 바람에 정말 적령기를 놓치고 말았다. 징용에서 돌아와 결국 논 한 마지기도 갖지 못한 신세로 늦장가를 가게 되었다. 그나마 장가갈 마음이 생겼던 것은 색시감을 보고 나서였다. 드물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며느리가 임신 중인 것을 보고 눈을 감았고, 그는 딸을 낳았다. 그 딸이 이제 두 살이었다. 강동식은 보통 키에 근육질의 단단한 체구를 갖추고 있었다. 하대치가 뜨거운 기질이라면 그는 끈질긴 기질이었다. 그는 대장 염상진에 대해 절대적 존경심 가지고 있었고, 그건 곧 절대적 복종심으로 나타났다.
"강동무, 밥 안 잡숫고 멀 그리 생각하시오?"
주먹밥을 먹어치운 배성오가 무슨 생각엔가 빠져 있는 강동식을 일깨우듯이 말했다.
"어? 으응, 암것도 아니네."
강동식은 아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표를 내지 않은 채 그는 무시로 아내 생각에 빠져들고는 했다. 용맹스러운 투쟁을 위해, 불굴의 투지를 가진 혁명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 약하게 하고 정신 혼란스럽게 만드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 젊고 고운 아내가 자꾸만 눈앞에 밟히는 것이다.
"먹물맹키로 어두어져야 움직일 것잉께 한숨 자소."
강동식은 주먹밥 먹을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그럴께라?"
배성오는 반색을 하고는 그대로 벌렁 누웠다.
‘친형제간맹키로 맘이 따순 존 사람이여,’
배성오는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해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등판에 냉기가 느껴져 왔다.
‘허기는 십일월이 되었응께 ……’
배성오는 다리를 쭉 뻗으며 잠을 청하려고 했다. 배성오는 칠동리에 부자 축에 드는 과수원집 아들이었다. 그는 순천농업학교 출신이었다. 순천농업은 순천에 있는 학교들 중에서 좌익세가 제일 강한 학교였다. 공부가 별로 마음에 없었던 그는 운동에 열중하는 한편으로 좌익에 기울어졌다. 타고난 뼈대가 굵은 그는 유도에 남다른 솜씨를 보이면서 좌익 학생세력의 중심부에서 움직였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 나자 자연스럽게 염상진의 조직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정하섭의 소학교 1년 후배였다. 그리고 같은 좌익 활동을 할 뿐 아니라 염상진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별다른 친교가 없었다. 순천중학교와 농업학교 사이에 작용되고 있는 미묘한 감정적 마찰이 그들 두 사람에게도 암암리에 연막을 치고 있었다. 그 마찰의 원인이란 어느 지역에서나 공통적인 것으로, 인문학교와 실업학교의 각기 다른 특성이 학생들 사이에서 지적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변질되면서 나타난 고질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원한 관계의 원인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정하섭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배성오는 정하섭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책방집 딸 문정님 때문이었다. 그는 문정님에게 눈독을 들인 채 기회만 엿보며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는데 정하섭과 그 여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정하섭을 기운으로 해치울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의 피해의식은 적대감으로 바뀌어갔다. 그는 좌익을 하면서 경찰로부터 받은 수난보다 아버지나 형에게 받은 수난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신세 망칠 짓이라며 반대했고, 공무원인 형은 자신에게 끼칠 영향을 두려워해서 그를 대하기만 하면 눈에 불을 켰다. 그러나 그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은 열성분자였다. 유도로 단련된 그는 뚝심도 좋았고 몸 빠르기가 대단했다. 강동식과 배성오는 어둠이 완전히 내려서야 행동을 시작했다. 어둡다고는 했지만 고읍들을 가로지를 수는 없었다. 들녘 여기저기에는 마을이 흩어져 있었다. 민가들을 피해 산자락을 타고 읍내까지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면 지동리와 낙성리를 돌아 고읍리 뒤편 산비탈을 타고 부용산에 이르러 읍내로 파고드는 길을 택해야 했다. 고읍들을 가로지르는 것보다 몇 배 힘이 드는 험로였고, 거리도 멀었다.
두 사람이 부용산 용연사 아랫마을 가까이에 접근한 것은 열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들의 몸은 땀으로 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또 붕알이 땡길라고 헌가?"
강동식이 낮게 말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참말로, 붕알도 체면이 있제 아무 때나 땡긴다요. 강 동무는 속도 편허요, 요런 때 농담이 다 나오고."
"농담은 요런 때 허라고 있는 것이여. 여그서 숨 잠 돌리세."
말을 하면서도 강동식의 눈길은 읍내 쪽으로 쏠려 있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몇 개 안되는 불빛이 유난히 또렷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야간근무를 하고 있는 관공서의 불빛일 것이었다. 강동식은 어금니를 꾹 맞물었다. 여기서부터 문기수의 집까지 침투하는 것이 지금까지보다 몇 갑절 힘들리라 생각했다. 총구멍의 감시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었다.
강동식은 몹시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 담뱃불은 십 리 밖에서도 보인다고 했다.
"숨 돌렸제? 가세."
강동식은 부르르 몸서리를 치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동안 땀이 식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집들의 담과 담을 타고 어둠 속을 헤쳐 나갔다. 남국민학교 옆 마을을 거의 벗어나고 있을 즈음이었다. 갑자기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지고, 남자들의 외침이 뒤를 이었다.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려 박으며 소리 나는 쪽을 응시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비명도 외침도 아무런 거침없이 어둠을 흔들고 있었다. 어떤 여자가 몰매질을 당하고 있음을 강동식은 직감했다. 그의 뇌리에는 퍼뜩 아내가 떠올랐다. 그 여자가 아내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꼭 아내가 당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경비가 삼엄한 이 밤중에 맘 놓고 소리 지르며 매질을 할 수 있는 것이 누구며, 그 매질을 당해야 하는 것이 누구인지 판단하는 데는 촌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자의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강동식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피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대장 염상진의 명령처럼 그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남자들의 웅얼거림과 함께 그 형체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어릿거리는 형체는 한둘이 아니었다.
강동식은 부득 이빨을 갈았다.
"해치웁시다.!"
배성오의 다급한 목소리가 강동식의 귓속에 뜨겁게 울렸다. 강동식은 반사적으로 배성오의 옷을 틀어잡았다. 어릿거리던 형체들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묻혀버렸다. 그리고 어둠만 가득 찬 천지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누구 집일께라?"
배성오가 물었다. 그도 벌써 강동식과 똑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보세."
강동식은 형체들이 나타났던 지점을 응시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나 어둠 때문에 그 거리감이 정확할 수가 없었다. 어느 집인지 찾아 낼 수가 없었다.
"가만 있어봇씨요."
배성오가 강동식의 팔을 잡아끌었다.
"워째, 짚이는 디가 있는가?"
"맞소, 안창민 선상, 아니 안 동무 집이 여그 어딜 것이요."
배성오는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그럴란지도 모르네. 싸게 찾아보소."
강동식은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불길함을 느꼈다.
배성오는 두어 번 와봤던 기억을 더듬으며 어둠에 묻힌 집들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한 집, 한 집 살펴나갔다.
"보소, 먼 소리가 안 딛낀가?"
먼저 걸음을 멈춘 것은 강동식이었다.
"금메, 먼 소리가 나제라?"
배성오도 동의를 표해왔다. 두 사람은 귀를 모았다. 그건 분명 가느다란 신음소리였다. 두 사람은 소리를 따라 접근했다.
"맞소, 안 동무 집이요."
배성오가 말했다.
"경계 잘허소!"
강동식이 명령하며 담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신음소리가 한결 분명하게 들렸다. 강동식은 안으로 몸을 디밀었다. 마당에 희끄무레한 형체가 드러나 보였다. 신음소리가 나지 않았다 해도 그것이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안 동무 엄닐 것이요."
배성오가 다급하게 말했다.
"알었네, 자네 경계 잘혀!"
강동식이 그쪽으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으으으응 ……창민아 ……으으응 ……차앙민아이 ……"
여자 노인네는 신음 속에 안창민을 부르고 있었다.
"아짐씨, 정신채리씨요, 아짐씨 ……"
강동식은 노인네를 흔들었다.
"워메, 누가 듣겄소. 싸게 방으로 옮겨야제라."
배성오가 강동식을 일깨웠다.
"그려, 나가 방으로 뫼실 것잉께 자넨 경계혀."
강동식은 노인네를 안아 올렸다. 두어 발짝 비척거렸다. 기운을 쓴 것에 비해 노인네가 너무 가벼워 몸의 중심이 흔들린 것이었다. 발에 밟히는 요 위에다 노인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잡히는 대로 이불을 끌어내렸다.
"아짐씨, 정신 채리씨요. 워디가 아프시오, 아짐씨?"
이불을 덮으며 강동식은 애가 탔다. 그러나 노인네는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불을 켤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 동무, 인자 싸게 떠야제라. 더 워쩔수 웂는 일인디."
배성오의 숨죽인 말이 툇마루에서 들려왔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들의 처지로서는 더는 어떤 방법이 없었다. 강동식은 또 아내를 생각했다. 가슴이 펑 소리를 내며 터질 것만 같았다.
‘아, 내가 왜 좌익을 해가지고 ……’
아내에 대한 염려와 죄책감이 일순간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아짐씨, 지발 무사허시씨요."
강동식은 이불을 좀 더 끌어올리고는 방을 나섰다. 두 사람은 고샅의 어둠에 몸을 숨겼다. 남국민학교 정문으로 이어지는 큰길 가까이에서 일단 멈추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공설시장 옆에 문기수네 책방이 있었다. 그 길은 읍내의 중심부로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그리 생난리를 쳤으먼 앞뒷집 사람덜도 다 들었을 것인디 워찌 얼씬도 안혔을께라. 누가 얼씬댔어도 성가시렀을 것잉만도."
배성오는 아까부터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꺼냈다.
"고것이 다 시상 인심인 것이네. 자아, 준비허소. 마지막 고비네."
강동식은 말을 마치자마자 큰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두 사람은 별다른 위험에 부딪히지 않고 문기수네 담을 타넘을 수 있었다. 일단 집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거침없이 안방 문을 흔들었다.
"뉘여, 누구여!"
문기수의 겁 질린 목소리가 이내 반응을 나타냈다.
"나 강동식이오. 얼렁 문 여씨요."
"누구여? 워메 이 밤중에. 쪼깐 기둘리소, 쪼깐."
"불 키지 마씨요."
강동식이 주의를 시켰다. 두 사람은 신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문기수의 아내를 밖으로 내보내고 방문에 이부자리를 치게 한 다음 불을 켜게 했다. 등잔불이 켜졌다. 읍내 중심부에 있는 집이면서도 초저녁이 지나면 등잔불을 켤 수밖에 없었다. 남북협상이 결렬된 다음 남한 송전이 중단됨으로써 전기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특선과 일반선의 구분이 생겼고, 특선은 공공기관에 한해서만 허용되었다.
"이 밤중에 워쩐 일이당가?"
문기수는 완연히 불안에 떨고 있었다.
"또 갈 길이 급헌께 간단허게 전허겄소. 대장님 명령이신디, 문 동무가 앞으로 읍내 지하조직을 새로 꾸미고 세포확장의 임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라는 대장님 명령이오."
강동식은 일부러 '대장님 명령'을 앞뒤로 배치하여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머시여? 지끔이 워떤 땐디 고런 소리여? 아, 뻔히 알잖여?"
문기수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얼굴이 구겨지고 목소리가 메었다.
"대장님 명령이오!"
강동식이 냉정하게 말했다.
"명령이먼 다여? 헐 때가 따로 있제."
"말 조심혀!"
존대였던 말이 금방 하대로 바뀌며 강동식의 팔이 쭉 뻗쳤다. 곧게 뻗는 팔 그 끝에 붙은 빳빳한 검지손가락은 문기수의 눈을 겨냥하고 있었다.
"나 잠 살려주소. 지끔이 워떤 땐가."
문기수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장님헌테 그리 전허겄소."
강동식은 증오에 찬 눈으로 문기수를 노려보며 느리게 팔을 내렸다.
"참, 아까 옴시로 봤는디, 안창민 동무 엄니럴 네댓 눔이 테러혔소. 그눔덜이 안 동무 집만 그렸을 리가 웂는디, 고것덜이 누구요, 문 동무!"
"긍께 고것이 ……"
"싸게싸게 멀허씨요, 갈 길이 급헌께."
"긍께, 요번에 죽은 금융조합. 세무서장. 솥공장. 포목점. 남도여관 그 아들들이 애비 원수럴 갚는다고 ……"
"우리 동무덜 집얼 테러헌단 말이오?"
강동식은 부르르 떨며 이빨을 갈았고, 고개를 떨군 문기수는 말이 없었다.
"배 동무, 가세."
강동식은 벌떡 일어섰다.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가며 강동식의 마음은 한사코 집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아내가 꼭 변을 당했을 것만 같았다.
강동식의 보고에 염상진은 전혀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말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