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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퀼트 1

타임 퀼트

James F. David

 

프롤로그 : 옥수수 우박

픽업 트럭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인디안 보호 구역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진 숲을 통과하고 있었다. 차에 타고 있던 어느 누구도 숲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울창하던 소나무 숲은 전나무들로 바뀌었고, 산은 언덕처럼 낮아졌으며, 굽이굽이 휘감기던 고속도로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트럭은 캐스캐이드 산맥 동쪽을 따라 내려와 고지대 사막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날은 사슴 사냥이 시작되는 날로 트럭은 새벽녘에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트럭에는 켄트와 슬리핑백, 낚시 도구, 프라이팬, 손전등, 장총 3자루, 그리고 맥주 2상자가 실려 있었다. 차에 타고 있는 세 명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은 스포츠와 여자 이야기 등을 주고 받으며 밀려오는 졸음을 쫓고 있었다. 차는 거의 다니지 않았고 이따금씩 카니타 리조트 광고판만 눈에 띄었다.

트럭이 숲을 벗어나 평원으로 나온 것은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였다. 세 명의 청년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록과 갈색 그리고 흐린 회색이 어우러진 평원은 산과 상록수 그리고 폭포들이 흔해 빠진 곳에서 온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평원을 바라보다가 지루함을 느낀 청년들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밤의 정취를 한껏 음미하기 위해 트럭의 헤드라이트를 끄고 달빛을 친구 삼아 길을 나아갔다. 오랜 운전에 지친 그들은 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폈다. 운전을 하던 청년은 조수석 쪽으로 다리를 뻗고 누웠다. 잠시 후 그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트럭 천장에 기대어 사막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가을 공기가 닿자 팔에 소름이 돋았지만 피로해진 몸과 마음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청년의 코앞에서 뭔가 떨어지고 있었다.

", 이게 뭐지?"

놀란 청년이 주워 든 것은 말린 옥수수 알이었다. 다른 두 사람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옥수수 알은 계속 떨어졌다. 그들은 옥수수 알이 어디에서 떨어지는지 보려고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별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떨어지는 옥수수 알에 맞아 살이 얼얼햇다. 옥수수 우박은 점점 세차게 내렸고, 그들은 자동차 안으로 몸을 피했다. 옥수수 알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트럭 천장을 두들겼고, 그들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우박이 그쳤다.

세 청년은 차에서 나와 주위를 조심스레 살폈으나 하늘에는 별만 반짝일 뿐 우박이 내린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운전을 하던 청년은 땅에 쌓인 옥수수 알들을 발로 걷어차고는 트럭 천장을 쓸어내리며 차의 상태를 살폈다.

"이렇게 이상한 일은 처음이야."

한 청년이 말했다.

", 이게 어디에서 떨어졌을까?"

"난들 알아? 이 근처에서는 옥수수를 기르지 않는 것 같던데. 그런데 케니는 어디 있지?"

", 여기 있어."

그들은 트럭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케니를 발견하였다. 케니는 트럭 뒤에 실린 쥐돔(생선의 종류 : 옮긴이)통을 비우고 있었다.

"케니, 뭐 하는 거야. 그건 내 거야!"

그러나 케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통을 비우더니 그 안에 옥수수 알을 담기 시작했다. 그 사건 이후 케니는 말수가 줄었고 다른 일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냥 캠프에 도착해서도 옥수수 통만 바라볼 뿐이었다.

토요일, 잭은 사슴을 잡았고 로비와 함께 가죽을 벗겼다. 로비가 다음 날 아침 송어를 여섯 마리나 잡았지만 케니는 얼마 먹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 그들이 캠프에서 철수할 때까지도 케니는 옥수수 알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돌아오는 동안에도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1. 기숙사

... 그리고 현재와 과거가 함께 존재하는 때가 오리라.

조라스트러스, 바빌론의 예언자

오레곤주 클라버스 폴즈시, 오레곤 공과대학 토요일, 새벽 2(태평양 표준시)

케니는 침대 위에 놓인 파일을 두고 망설였다. 더 이상 배낭에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몇 가지를 빼내고 나서야 노란색 배낭을 다 쌀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총을 넣었다. 배낭을 메자 등뼈에 총이 느껴졌다. 그는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총을 수건으로 쌌다.

케니는 시계를 잠깐 쳐다본 후 컴퓨터 앞에 앉아 다시 한번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그는 조라스트러스의 자료들을 더 추가시켜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십여 차례를 더 해본 뒤에야 포기했다. 케니는 앞으로 자신이 살아나갈 미래에 대해 예언을 한, 오래전에 죽은 그 예언자가 부러웠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바탕 어지러진 방을 둘러보았다. 전공 서적, 논문, 노트 그리고 필기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디스켓 상자, 마우스와 프린터가, 컴퓨터 옆에는 신문 스크랩이 놓여 있었다. 책장에는 <이상한 사건들>, <설명 할 수 없는 일들>과 같은 제목의 책들이 꽂혀 있었고 책장 한쪽에는 말린 옥수수가 담긴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방에는 특별히 신경 써야 할 물건들은 없었지만 두 번 다시 이 방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갈을 하자 케니는 묘한 슬픔을 느꼈다. 그는 다시 한번 배낭을 점검했고 총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방문을 잠갔다.

기숙사는 조용했고 방문을 모두 닫혀 있었다. 늦게까지 공부하던 학생들도 30분 전쯤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이런 일요일에는 아침 9시 또는 10까지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케니는 차라리 이 방법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케니는 자신의 이야기에 무관심한 사람들과 말하기가 두려웠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옥수수 우박 사건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말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이상하게만 바라볼 뿐이었다. 케니는 그들을 위해서는 그들의 생각이 맞기를 바랬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해야 했다.

엘리베이터는 텅 빈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숙사를 떠났다. 케니는 주차장에 세워 둔 그의 감청색 도요다 자동차를 찾아냈다. 계기반에는 45천 킬로미터를 달린 것으로 나와 있었지만 그 수치를 넘어선 것은 벌써 2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시트 커버는 다 헤졌고 조수석 쪽 창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차는 잘 굴러가는 편이었다. 그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고 늘 그랬던 것처럼 두 번째에서야 성공했다.

그가 필쳐 박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 팻과 콜터, 그리고 피트라는 이미 도착하여 RV(레크리에이션용 차 : 옮긴이)와 밴에 물건들을 싣고 있었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컴퓨터에는 팻과 그가 개발한 시뮬레이션이 떠 있었다. 컴퓨터 옆에는 낡은 고대 예언집이 놓여 있었다. 고대와 현재가 한자리에 있다는 것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밤새 시뮬레이션을 해보셨어요?"

케니가 물었다.

"물론이네."

필쳐 박사가 대답했다.

"나와 쿰 박사가 조라스트러스의 자료를 몇 가지 더 입력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야. 일은 벌어질 거야."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케니는 다른 사람들을 도우러 갔다. 그들이 짐을 꾸리는 동안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이 트럭에 생필품을 싣고 왔다. 필쳐 박사는 그들 모두에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었었다.

드디어 작별의 시간이 왔다. 쿰 박사는 아무 말없이 케니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나 필쳐 박사에게는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케니, 마음을 바꿀 수 없겠나? 우리와 함께 가지. 그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함께 있어야 하네. 자네에게는 우리 그룹이 필요할 거야."

케니는 필쳐 박사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케니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막바지에는 모임에도 좀처럼 참석하지 않았고, 팻조차도 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앴다. 케니는 그룹과 함께 하고자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을 수가 없었다. 그는 두려움을 떨치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두려움은 이제 그의 생활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친구가 아니라 가족이 필요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저 가족과 함께 있어야 돼요. 라고 말하기만 했다.

"꼭 그래야겠나?"

필쳐 박사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이걸 가지고 가게. 자네를 위해 조라스트러스의 비전을 복사해 두었네. 도움이 될 걸세."

케니는 친구이자 스승인 필쳐 박사로부터 원고 뭉치를 받아 배낭에 넣었다.

"조심하게. 케니. 그 일이 일어난 후에라도 자네를 찾겠네... 가능하다면 말이야."

"고맙습니다.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케니의 목소리가 갈라졌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와 필쳐 박사는 한참을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케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필쳐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일 먼저 케니와 악수를 했고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나 웨인 부인은 케니가 내민 손을 탁 쳐 버리더니 그를 껴안았다. 포옹을 푸는 순간 케니는 웨인 부인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케니는 자신의 눈에도 어리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몸을 돌려 도요다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면서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못할 거라고 직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케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2. 앙트르프르네호

1803년 운석이 떨어지기 전까지 과학자들은 하늘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을 전설 속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그 사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불가사의한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E. 스즈끼, ‘믿음과 행동

플로리다주 네이플즈시 토요일, 오전 93(서부 표준시)

앙트르프르네호는 파이버 글래스로 만든 105미터 짜리 범선으로 원행용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배에는 개조하여 넓힌 선실, 돛대와 조종간 그리고 이중으로 꼰 구명 밧줄이 갖추어져 있었다. 표면이 오톨도톨한 알루미늄으로 된 돛대는 그 두께가 1미터나 되었고, 지름 6센티미터짜리 스테인리스 밧줄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날씬한 자태와 눈부신 흰색을 뽐내며 떠 있는 앙트르프르네호는 론 텁먼이 항상 원해 오던 모든 것을, 아니 그 이상의 것을 갖춘 배로 마침내 그의 소유가 된 것이다.

카르멘과 그녀의 딸은 이미 배에 올라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있었다. 이미 18개월 전에 한 가족이 되었지만 론에게 로자는 아직도 카르멘의 딸로만 생각되었다. 식구 모두가 융화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고, 특히 크리스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카르멘에게 쉽게 호감을 가져 론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로자는 론에게 쉽게 친밀감을 보이지 않았다. 로자는 크리스와는 잘 지낼 정도가 아니라 친남매 이상으로 사이가 좋았다. 남매로서의 역할은 크리스와 로자 모두에게 낯선 것이었지만 그들은 쉽게 적응하고 유대감을 느꼈다. 론과 카르멘이 결혼하기 전 로자는 크리스와 놀기 위해-실은 론을 피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곤 했다. 론은 로자와 크리스가 그러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둘의 나이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로자가 크리스보다 여섯 살이 많았고, 둘의 관심사나 집안에서의 역할 모두가 달랐다. 부모의 재혼으로 혈연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 아이들은 부모들의 애정을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 그러나 로자는 일부러 더 론에게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대했다. 그녀는 격주로 친아버지를 방문했으며 자신에게는 친아버지 외에 아무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론은 친부모가 재결합할 수 있다는 희망을 로자가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카르멘의 재혼이 로자의 그런 기대를 갑자기 깨뜨린 것은 틀림없었다.

로자는 18개월 전보다 더 요트에 대해 무관심했다. 론은 이번 항해를 통해 로자와 가까워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항해의 즐거움이라도 누리고 싶었다.

론은 뱃머리에 기대어 물장구를 치고 있는 크리스를 향해 소리쳤다.

"배에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크리스는 잠시 어리둥절해 하더니 똑바로 서서 손을 이마에 대고 거수경례를 하며 말했다.

"승선을 허락합니다."

론 또한 거수 경레로 답례하며 베에 올랐다. 크리스는 론의 축소판이었다. 엷은 금발, 푸른 눈, 지금은 많이 탔지만 창백한 피부색이 론을 꼭 빼닮았다. 언젠가는 크리스도 아버지처럼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을 것이다. 그들 부자는 선원들처럼 휜색 티셔츠와 반바지, 갑판용 신발을 신고 있었다.

"1등 항해사, 항해 준비는 완료됐나?"

"1시간 전에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선장님."

"물품을 점검하겠다."

크리스는 론이 선실로 들어가자 뱃머리로 돌아갔다. 거주 공간이 8평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생필품들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가스스토브, 냉장고, 그리고 발로 펌프질ㅇ르 해야 물이 나오는 수도가 민물용과 바닷믈용으로 구분되어있는 싱크대가 앙트르프르네호의 선실을 채우고 있었다. 선실 중앙의 탁자는 2개의 원형 디젤 엔진을 가리기 위해 놓은 것이었다.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선실에는 2층 침대를 놓았고 배 선미로 머리를 두도록 했다. 벽에는 작은 해상 지도가 접힌 채 걸려 있고, 지도 위로는 앙트르프르네호의 속력계, 정밀 시계, 나침반이 있었다. 무선 방향 탐지기와 음향 측시 탐지기, 그리고 단파 라디오는 지도 아래에 놓여 있었다.

카르멘과 로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이야기하다가 론이 선실로 들어오자 입을 다물었다. 로자와 카르멘은 론과 크리스만큼이나 서로 매우 닮아 있었다. 갈색머리, 갈색 눈, 가는 팔 다리 등등. 그러나 카르멘이 살집이 있는 반면 사춘기에 접어든 로자는 아직 호리호리했다.

"숙녀 여러분, 준비됐습니까?"

로자는 무릎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카르멘은 기대하지 말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자는 가기 싫대요."

"하지만 모든 것이 준비됐고 단지 하룻밤이야."

"내 말은 그게 아니에요. 로자는 버뮤다에 가기 싫대요. 1개월 동안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있을 수는 없잖아요."

"친구가 아니에요."

로자가 말했다. 그녀는 반항하듯 고개를 꼿꼿이 들고 론을 쳐다보았다.

"우리 아빠 때문이에요. 난 오랫동안 아빠를 혼자 둘 수 없어요. 엄마에게는 론 아저씨와 크리스가 있지만 아빠한테는 나밖에 없어요. 내가 항해를 떠나면 아빠는 혼자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론은 카르멘이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아는 바로는 로자의 아버지는 전혀 쓸쓸해하지 않을 것이다. 론은 카르멘의 결혼이 전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파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카르멘이 이러한 사실을 로자에게는 숨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저씨와 엄마는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아빠는 한 달 동안 혼자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그럴 수는 없어요."

론은 한 달이 아니라 1주일만 바다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그는 항해를 갔다 돌아오는데 2주일, 바다에서 2주일간 정박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론은 카르멘의 표정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버뮤다 항해를 준비하기 위한 일종의 시험 항해였다. 그들은 네이플즈시를 떠나 바아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아이들은 건강해질 것이고 론은 아이들과 카르멘에게 그가 배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무선 방향 탐지기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은 보다 어려운 항해를 나갈 때 사용할 것이고, 그는 아직 버뮤다 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 이 문제에 대해 얘기 좀 할 수 있겠죠?"

카르멘이 말했다.

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에 자신이 그랬듯이 로자가 며칠 간의 항해로 바다를 좋아하게 되길 빌었다.

"그럼 바다에 나가 이야기를 하자꾸나.

론이 제안하였다.

"내 생각에는 푸른 바다와 하늘 외에는 볼 것이 없는 곳이라면 모든 것이 훨씬 명료해질 것 같은데. 로자, 밧줄을 풀어라. 여보, 당신은 가서 크리스를 도와주겠소? , 항해를 시작한다."

"명령하지 마세요. 선장님."

카르멘이 농담조로 경고했다.

"그럼 부탁드릴까요?"

카르멘은 웃으며 론을 포옹한 다음 갑판 위로 올라갔다. 론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고, 별빛을 길잡이 삼아 고요한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 다음 로자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로자야, 즐거운 항해가 되기를 빈다. 부탁해."

그런 다음 그는 갑판으로 올라와 시동을 걸었다.

 

3. 어둠 속의 총

그 순간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숲은 불타오르고 끔찍한 해충 떼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슈 왕, 야오 경전

오레곤 동굴 토요일, 오전 1025(태평양 표준시)

테리 로버츠 박사는 얼룩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는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 엘렌은 크래커 조각을 미끼 삼아 다람쥐들을 가까이 오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얼룩 다람쥐들은 엘렌이 잡아 먹을러라고 생각하는지 다가오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생각에 테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엘렌은 얼룩 다람쥐를 해칠 위인이 못 되었다. 테리는 그녀가 벌레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정원을 조심스럽게 파헤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었다.

엘렌은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얼룩 다라쥐를 쫓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곱슬거리는 금발이 어룰 옆을 가리곤 했다.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 갈색 눈동자, 코와 입매는 아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테리를 빼고는 엘렌을 만나는 모든 이들이 그려를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엘렌만큼은 아니지만 테리도 곱슬머리였다. 그는 보통 키에 보통 체격을 갖고 있었다. 지적인 면은 보통 이상이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어떤 지도 교수는 그를 특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공원 삼림 경비원 복장을 한 키가 작고 체격이 단단해 보이는 젊은 여자가 동굴 입구에 떼를 지어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다가왔다. 그녀는 사무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10여 명 정도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테리와 엘렌도 한 그룹에 포함되었고 가이드는 한쪽을 가리켰다.

"한 줄로 동굴에 들어가신 다음 입구 안쪽에서 저를 기다려 주세요. 입장권도 준비하시구요."

엘렌이 먼저 들어갔고 테리가 입장권을 가이드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반을 찢은 다음 나머지 반을 돌려주었다. 테리와 엘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동굴 안에서 가이드가 설명할 때를 기다렸다. 테리는 동굴 여행에 대한 기대로 설레기 시작했고, 엘렌의 귀에 대고 , 모험을 시작할 준비가 다 되었습니까?’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엘렌은 아무 말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케니는 그룹의 뒤쪽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나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누나가 자신을 본다면 경찰을 부를 것이다. 손에 입장권을 쥔 채 그는 누나에게 할 말을 되새겻다. 그는 전에도 누나를 납득시키려고 했었지만 방법이 너무 서툴렀었던 데다 자신 스스로도 확신이 부족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그는 필쳐 박사로부터 받은 조라스트러스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케니는 이제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결과에 대해, 이 모든 것이 조만간 벌어질 엄청난 재앙들을 예고하는 징조라는 것을 누나에게 말할 자신이 있었다. 반드시 그녀를 이해시켜야만 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두 번째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고 싶지 않았다.

케니는 배낭을 열고 총을 쌌던 수건을 옆으로 치워 총이 보이도록 했다. 그는 총을 만지며 이것을 실제로 사용할 것이지 고민했다. 그는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누나가 재앙을 혼자 겪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누나가 지금은 자신을 미워하겠지만 얼마 안 있어 이해하게 될 거라고 케니는 믿었다.

케니는 배낭을 메고 일행에 합류했다. 누나는 그가 입장권을 내밀 때에서야 그를 알아보았다.

"저리가, 케니"

"증거가 있어. 보여줄게."

케니가 말했다.

"듣고 싶지 않아."

"조라스트러스라는 예언자가 있었어. 모든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그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어."

"케니, 나는 동굴 안내를 해야 돼. 그런 건 목사한테나 가서 얘기해."

"누나, 제발."

"안돼."

그녀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누나, 나는 입장권을 가지고 있어."

"너는 관광을 하려는 게 아니야. 나를 괴롭히려는 거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게. 그저 누나랑 함께 있게만 해줘."

"내가 너를 말릴 수는 없겠지만 만약 그 말도 안되는 세상의 종말 따위에 대해 다시 설교를 시작한다면 경찰에 연락하겠어."

케니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사람들 틈에 섞였다.

테리는 엘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걸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부부처럼 보였다. 한 쌍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다니는 것이 갓 결혼한 부부 같았다. 다른 젊은 두 부부는 사내아이 둘을 데리고 왔는데 10, 8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수근거리며 킥킥대고 있었다. 부유해 보이는 노부부는 은퇴해 인생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 같았다.

다른 한 남자는 미키 마우스와 미니 마우스 그림이 그려진 모자를 쓴 아이를 배낭에 넣고 동굴 안에 들어왔다. 아이 엄마는 뒤따라오면서 연신 고개를 젓는 아이의 얼굴에서 침을 닦아 내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미키 마우스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남자는 노트 베리 농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종이 다른 중년의 부부가 들어왔다. 부인은 백인으로 금발 머리를 감싼 스카프에서부터 색상이 화려한 L.A. 기어 운동화에 이르기까지 꽤 모양에 신경을 쓴 차림이었다. 10년쯤 후면 조금 뚱뚱해지겠지만, 지금은 아주 육감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일행 중 유일한 흑인인 그녀의 남편은 키가 최소한 180센티미터는 될 것 같았다. 그는 이 관광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테리는 짧고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과 꼿꼿한 자세로 보아 그를 군인일 거라고 추측했다.

일행 중 마지막 참가자는 노란 배낭을 멘 남자로 대학생처럼 보였는데 유일하게 혼자 온 사람이라 눈에 띄었다. 테리는 불룩한 그의 배낭을 바라보며 중요한 물건을 차에 두지 마십시오라는 경고를 떠올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레곤 동굴 관광을 1시간 동안 안내하게 될 질입니다. 동굴 안 기온은 평균 섭씨 13도로 한기가 약간 느껴지지만 습도가 높아 쾌적하실 겁니다. 동굴 안의 전기 시설은 1965년 관광객들과 동굴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여러분께서는 따로 손전등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테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대용 손전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동굴 안에서는 금연이며 껌이나 쓰레기 등도 남기지 않도록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엘렌은 휴지를 꺼내 씹던 껌을 싼 다음 주머니 속에 넣었다.

"무리에서 이탈하지 말 것 등등의 몇 가지 주의를 준 뒤 질은 관광객들을 동굴 속으로 안내했다. 공기는 상쾌했고 사람들은 재킷을 벗어 허리에 둘렀다. 전깃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둘씩 손전등을 집어넣는 사람들이 늘었다. 가이드는 가끔씩 멈추고 동굴의 주요 특징을 설명했다.

"1967년 만들어진 이 입구를 들여다보시면 동굴 벽의 원래 색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동굴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길을 밝히기 위해 횃불을 사용했기 때문에 보시다시피 벽과 천장이 변색되었습니다. 원래 동굴은 입구에서 보셨듯이 눈처럼 흰색이었습니다... "

동굴 관광은 휴가나 다름없었던 로스엔젤레스에서의 세미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엘렌이 생각해낸 것이었다. 테리는 가족 관계의 역기능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지만 세미나 대부분을 듣지 않았다. 엘렌은 5번 도로를 타고 오는 동안 휴계소의 여행 안내소에서 집어 온 자료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엘렌은 한껏 기분이 들떠 있었고, 오레곤 동굴을 가본 지도 몇 년 지났고 해서 그들은 미드포드에서 방향을 바꾸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들은 아침에 동글을 둘러보고 저녁에 포틀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테리는 곧 있게 될 특이한 순간에 대해 생각했다. 가이드가 동굴 안의 불을 끌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완전한 어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테리는 주위 사물을 알아보기 위해 애쓰던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 당시에는 어둠이 별로 유쾌하지 않게 느껴졌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 순간을 기다기고 있었다.

관광이 진행되면서 일행들은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젊은 부부가 데려온 아기는 칭얼거리며 가이드의 주의를 흩뜨리곤 했다. 노부부는 앞줄에 서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었다. 사내아이들이 이리저리 휘젓고 다녀도 아이들 부모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노란 배낭을 멘 젊은이는 항상 끝에 서서 슬퍼 보이지만 결의에 찬 표정으로 가이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행은 여러 갈래로 길이 나뉘어지는 큰 동굴 입구에 도착했는데 이전에 방문한 수많은 방문객들에 의해 길은 잘 닦여져 있었다. 가이드는 작은 동굴 속에서 끝이 나 있는 한쪽 길로 사람들을 안내한 다음 입구에 서서 일행들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완전한 어둠을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

다음 순간 불이 꺼졌다. 몇 명은 눈이 갑자기 보이지 않자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다시 불이 켜지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꼼짝 말고 그대로 서 있어요."

"케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테리는 목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몰을 돌렸다. 배낭을 멘 청년이 총을 들고 입구에 서 있었다. 청년 옆에 서 있던 가이드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조금 전까지의 즐거운 분위기는 사라져 버렸다. 아이가 조그만 소리로 무섭다고 말했다 등에 업힌 갓난아이는 아버지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좋아하고 있었다. 테리는 흑인이 뒤쪽에 있다가 청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았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죠."

청년이 그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누며 말했다. 청년의 얼굴은 결의에 차 있었고 테리는 두려움을 느꼈다.

"모두 그 자리에 앉아요. 누나도 앉아."

가이드만 제외하고 모두 자리에 앉았다. 테리는 군인이 가장 늦게 앉았고 청년이 들고 있는 총을 계속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케니."

가이드는 부드럽게 애원했다.

"제발 총을 내려놔. 사람들이 겁먹고 있잖아. 여기에는 아이들도 있어. 아이들이 놀라겠어."

"다 누나 실수야. 나는 말해주려고 애썼어. 그 일은 일어날 거야... 그것도 곧. 난 재난이 닥쳤을 때 가족들과 같이 있고 싶어. 적어도 누나만이라도. 자 이제 앉아."

말을 마치자 그는 총으로 가이드의 얼굴을 밀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뒷걸음치다가 사람들 사이로 넘어졌다.

테리는 가이드가 보인 반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청년은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지만 가이드는 겁먹고 있었다. 그건 불길한 징조였다. 청년은 가이드에게 강한 애정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별다른 전문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테리는 케니가 불안정하고 아주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고 숨소리만 들렸다. 마침내 노부인이 말을 꺼냈다.

"젊은이. 나는 이제껏 동굴 관광객들을 인질로 잡았다는 사람은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요?"

"절 믿지 않으실 거예요! 아무도 나를 믿지 않았어요. 누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마음을 열고 젊은이의 얘기를 듣겠다고 약속할게요. 여기 행크한테 물어봐요."

노부인이 자신의 남편을 가리켰다.

"이 양반이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지 말해 줄 거요. 행크하고 40년을 산다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오."

노신사가 부인을 바라보며 미소지었으나 케니는 묻지 않았다.

"할머니도 저를 믿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알고 싶다면... 지금 저는 여러분들을 구해 주려는 거예요.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노부인은 그 소리들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한다는 거요?"

"그 앤 미쳤어요."

가이드가 말했다.

"하늘이 무너질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요."

케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가 금세 빨개졌다. 노부인에게서 누나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의 눈에 고통이 어려 있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나는 세상의 종말에서 여러분들을 구하려는 겁니다.“

 

4. 항해

우리가 사흘째 사막을 지나고 있을 때 홍수가 일어났다. 커다란 파도가 우리 일행을 덮쳤고 낙타 2마리와 세 사람이 실종됐다. 물이 빠져나갔을 때 우리 주위에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물은 소금기가 많아 전혀 마실 수가 없었다.

아부 알 아사드, 1413

플로리다주 네이플즈시를 떠나 토요일, 오후 135(서부 표준시)

로자를 즐겁게 해주려는 론의 노력은 크리스가 알아챌 정도로 눈에 띄었다.

"놀랄 일인데요. 아빠. 누나한테 뽀뽀라도 해주지 그러세요?"

론은 농담을 받아넘기면서도 로자가 항해에 관심을 갖도록 무진 애를 썼다. 그는 로자에게 키 잡는 방법과 돛을 내리고 올리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고, 각 돛대의 명칭과 나침반 보는 법 등을 설명해 주었다.

론은 로자에게 키를 잡게 한 뒤 자신의 삼촌과 함께 참가했었던 패스넷 요트 경주 대회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론은 다른 41개 팀의 참가자들과 함께 영국 와이트 제도의 카우스를 출발하여 아일랜드 해안의 패스넷 락을 거쳐 플리머스로 돌아오는 시합을 벌였었다. 32개 팀이 완주를 했으며 론과 그의 삼촌은 그 가운데 17등을 했다. 그러나 론에게는 17등도 우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거센 해류와 싸워 가며 안개 낀 해안을 따라 경주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해냈다. 론은 로자가 한번도 보지 못한 정열을 쏟아 열심히 경주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로자도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게 되었다. 수년 동안 이 이야기를 들어 온 크리스조차 이번에는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바다에서 듣는 이야기는 거실에서 들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오후가 되자 론은 육분의를 가지고 와 크리스와 로자에게 항해법을 설명해 주었다. 카르멘은 키 옆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려 주는 저 키를 항해용 삼각자라고 부른단다. 우리는 지구 표면의 세 꼭지점을 알아낸 다음 출발하는 거야. 우리는 지구의 극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 바로 저게 그중의 하나야."

"어느 극이요?"

크리스가 끼어들었다.

"저기에도 2개나 있잖아요."

"그래, 알고 있어.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데 있는 것이 북극이란다. 우리는 별과 다른 행성들의 위치를 알고 있고... 그건 바로 지구 표면 위에서 별이나 행성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얘기야."

"하지만 지구는 회전하고 있잖아요."

"맞아요."

크리스가 따라 했다.

"지구는 아주 빨리 돌고 있어요. 아마 시속 160만 킬로미터로 돌 걸요."

"그래. 지구는 회전하고 있어. 하지만 시속 160만 킬로미터는 아니란다. 아마 16백 킬로미터 정도일 거야. 그래서 우리는 아주 정밀한 시계가 필요한 거란다."

"선실에 있는 그 시계 말이죠?"

크리스가 물었다.

"맞아, 크리스. 선실에 있는 시계는 그리니치 천문대 표준시에 맞추기 때문에 아주 정확하지. 이제는 내 시계를 그 시계에 맞춰야겠구나."

"나는 아저씨가 라디오를 듣고 시계를 맞추는 줄 알았는데요."

로자가 말했다.

"내가 라디오를 듣는 건 우리 시계가 그리니치 천문대 표준시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야. 라디오에서는 항해 중인 사람들이 시간을 맞출 수 있도록 그리니치 표준시를 알려주고 있거든."

"그럼 시계가 고장 나면 항해도 할 수 없는 건가요?"

로자가 질문했다.

"맞아, 길을 잃고 유령선이 되어 영원히 떠돌 거야."

크리스가 대답했다.

"아니, 그럴 경우 시간이 얼마나 차이나는 지만 알아내서 수정하면 돼. 지구가 돌고 있다는 네 생각은 옳지만 우리는 언제 어디에 어떤 별이 뜨는지 알 수 있어. 우리는 별자리를 찾기 위해 항해력을 사용한단다."

론은 책을 들어 보여 주었다. 크리스가 책을 향해 손을 뻗자 론은 책을 위로 쳐들었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는 극점이 어디 있는지, 하루 중 어느 때 어떤 별이 지구 위에 있을지 알 수 있는 거야. 그런 다음 우리의 위치를 표시해서 삼각형을 완성시키는 거야."

그때 로자가 물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왜 이런 것들이 필요한 거죠?"

"맞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왜 이런 것들이 필요한 거죠?"

크리스가 새 누나를 따라 똑같이 물었다.

"우리는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단다. 우리는 지나온 지점에서의 방향과 속도로 현재 위치를 추측할 뿐이야. 대강의 위치만으로는 부족하고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만 해. 여기 육분의가 있어."

론이 육분의를 상자에서 꺼냈다. 크리스가 다시 그걸 만져 보려고 하자 론이 육분의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이건 내가 사용하는 거야. 만약 로자가 원한다면 사용법을 알려주지."

"저는요?"

크리스가 보챘다.

"글쎄. 봐서."

론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론은 도움을 청하느라 카르멘을 쳐다보았지만 아내는 궁지에 빠진 그를 보고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삼각형의 각 점을 알고 있고, 이미 어떤 시간에 어떤 별들이 지평선 위로 어느 정도 높이 올라와 있어야 하는지 알고 있어. 육분의를 가지고 지평선 위에 떠오른 별의 정확한 거도를 측정한 다음 관측 시간을 표시하는 거야. 이제 삼각형의 두 점을 알기 때문에 그다음에 별의 예측 고도와 실측 고도 사이의 차이를 계산해서 세 번째 점을 알아내는 거란다."

론은 얼마 안되는 청중을 둘러보았다. 카르멘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크리스는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로자는 화가 나 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론은 자신의 항해법 강의가 왜 로자를 화나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로자가 불쑥 말했다.

"이건 기하학이에요. 안 그래요? 저한테 숙제를 시키려고 꾸민 거예요. 그렇죠?"

"아냐, 이건 속임수가 아니야. 기하학이긴 하지만 나는 네가 관심 가질 거라 생각했는데... 항해를 나가려면 배워야 하는 거니까."

"제가 바다 위를 이리저리 떠다니면서 기하학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이런 계산을 얼마나 자주 하세요?"

"하루에 7번 내지 8번쯤. 해 뜨기 전에 한 번. 아침에 두어 번, 그리고 저녁에..."

론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는 자신이 로자의 화를 돋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루에 여덟 번이요? 하루에 여덟 번씩이나 계산을 해야 한다구요? 그리고 그걸 계산하러 그렇게 일찍 일어나야 하나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 대부분이 계산되어 있기 때문에 너는 그냥 산술표만 이용하거나, 선실의 전자 항법 장치를 사용하기만 하면 돼."

"만약 제가 다른 사람한테 기하학 숙제를 부탁했다면 아저씨는 저를 영원히 외출 금지시키셨을 거예요. 그런데 저보고 아저씨 숙제를 대신 하라구요? 항해에 필요해서 기하학을 배워야 한다면 그러기 싫어서라도 육지에 있어야겠어요. 표식들이나 지도를 판독하는 일은 아저씨가 할 일이에요."

"하지만 이런 바다 위에서는 별이 지도 구실을 한단다."

"맞아요."

크리스가 끼어들었다.

"별이 지도 구실을 해요. 각 점들을 연결하는 그런 지도에요."

론이 크리스를 노려보는 동안 로자는 일어나더니 갑판 아래로 내려가 이물 쪽으로 갔다. 론은 로자를 생각하다가 버뮤다 해협을 떠올렸다. 그러자 기분이 우울해졌다. 크리스는 아직도 론 옆에 앉아 육분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크리스가 관심을 갖게 된다면 로자가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크리스, 육분의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고 싶니?"

크리스의 얼굴이 크리스마스 아침의 아이처럼 빛났다.

"그럼요. 진짜 만져 볼 수 있어요?"

론은 크리스에게 육분의로 어떻게 태양과 지평선을 관측하는지 한참을 설명했다. 크리스가 육분의로 천체를 관측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마침내 론은 설명을 끝내고 아이를 보냈다. 로자는 오지 않았다. 대신 이물 쪽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론은 크리스에게 낚싯대를 쥐어 주고는 키를 잡고 있는 카르멘 옆으로 갔다.

오후에 앙트르프르네호는 남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론이 닻을 내렸고 모두 함께 카르멘이 준비한 게 요리와 샐러드, 그리고 부드러운 빵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점심을 먹고 나자 로자는 한결 마음이 풀려 론에게 다시 이야기를 걸었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크리스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카드놀이를 하자고 졸라댔다. 카르멘은 지금까지 한번도 그 카드 게임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크리스는 아주 능숙하게 방법을 설명했다. 크리스가 카르멘에게 속임수에 걸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얼마 안 가 그녀는 크리스의 속임수에 넘어갔다. 그들은 한참동안 게임을 하다가 카르멘의 제의에 따라 수영을 즐겼다.

그들은 따뜻하고 푸른 바닷물속에서 1시간쯤 수영을 즐겼다. 마침내 지쳐 버린 아이들은 뱃머리에 누워 몸을 말렸고, 론과 카르멘은 고물에 앉았다.

"너무 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어요."

카르멘이 말했다.

"로자한테 말이에요. 억지로 그 애가 버뮤다에 가고 싶어 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알고 있소. 항해법 강의가 실패로 돌아간 후 포기했다오."

"아주 재미있던데요. 기하학을 가르쳐 10대 소녀가 항해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하다니. 당신이 포기한 뒤에 오히려 상황이 나아졌다는 걸 알아요?"

"어쨌든 점심 식사 후에는 즐거웠잖소. 하지만 카드놀이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거였는데. 항해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거잖소."

"하지만 집에서는 카드놀이를 안 하잖아요. 아이들은 친구들과 TV에 매달려 있고 당신과 나는 일거리를 집까지 가져오기도 하구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카드놀이를 한 게 언제인지 알아요?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했던 때 말이에요."

카르멘이 옳았다. 항해로 인한 일종의 고립된 상황이 그들을 함께 있게 했다. 로자가 항해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번 여행이 가족의 유대를 강화시켜 줄 것이다. 론은 버뮤다 항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계속 다짐하면서도 버뮤다에 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고, 그건 상황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론은 몸을 뒤로 젖히며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끝나기를 빌었다.

 

5. 인질

오늘 아침 나는 뭔가 지붕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가로 가보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른 생선들이 하늘에서 거리와 집 위로 빗발치고 있었다. 생선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자 마을 주민들이 바구니를 들고 몰려들었다. 내 보죄관은 3천 마리 내지 4천 마리의 생선이 떨어진 것으로 추측했다.

위더스푼 대령, 인도, 1836

오레곤주 애쉬랜드시 토요일, 오후 340(태평양 표준시)

로빈 카일은 순찰차 앞좌석에 다리를 뻗고 쉬고 있었다. 자는 건 아니었지만 점점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돌발적인 범죄 사건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이런 비포장도로에서는 범죄가-자동차조차도-흔하지 않았다. 카일이 도로 순찰을 나오는 것ㅇ느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범죄자를 잡느라 이 아름다운 가을날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신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이런 휴식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할 뿐이었다. 잭슨 카운티에는 범죄라고 할 만한 사건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시간을 아주 효율적으로 보내는 거라고 믿었다.

이따금씩 스피커를 통해 호출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소리를 줄여 놓았기 때문에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10대 소녀 한 명이 말을 타고 순찰차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카일은 소녀와 말의 엉덩이가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카일은 총을 들어 그들을 겨누었다. 이런, 아까워라, 금지 구역 안이 아니군. 카일이 아직도 그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호출번호가 불리우고 있었다. 그는 못 들은 척하다가 두 번째에서야 마지못해 대답했다.

"카일, 바쁜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호출은 한 캐런은 마치 카일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안다는 듯 말햇다.

"하지만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생겼어요. 오레곤 동굴에서 인질극이 벌어진 것 같아요."

카일은 귀에 뭐라도 달라붙은 것처럼 머리를 옆으로 누이고 탁탁쳤다.

"오레곤 동굴이라고 했소? 무슨 인질극이 벌어졌다는 거요?"

"다른 것과 마찬가지의 인질극이요, 카일! 총을 가진 남자가 10여 명의 인질들을 동굴에 억류하고 있어요. 범인은 아무도 자신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인질들을 죽이지는 않겠대요."

카일은 하필이면 납치범이 동굴에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동굴을 확실히 공격하기 어려운 장소였고, 총알이 아무데로나 날아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에 총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일은 비행기를 납치한 것과는 달랐다. 비행기는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었다. 버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동굴을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 유별난 동굴은 도시 생활의 편의와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아주 이상한 일이군, 캐런."

카일이 말했다.

"동굴을 납치 장소로 고르다니! 나는 잡치범이 노동자의 천국이든 어디가 되든 간에 신변 보장과 교통편을 요구할 거라는데 내기를 걸겠어. 다른 요구 사항은 없소?"

"없어요. 카일. 특별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다 됐어요? 그자는 자신이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 주는 거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 일이 벌어진 후 혼자 있고 싶지 않다면서요."

"뭐가 벌어진 후라고 했소?"

"지구의 종말 이후요."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요?"

"공원 관리자들은 동굴 지형을 아는 경찰관을 찾고 있어요. 그들은 당신이 구조 훈련 과정을 이수했다는 것을 들었다는군요."

카일은 그 말에 기겁을 했다. 그는 2주일간 업무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위해 특별 훈련을 신청했었고, 훈련보다는 친구들과 한가로이 맥주나 마시고 별도의 수당이나 받는데 신경 썼던 것이다. 과정 이수 후 2년간 한 일이라고는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1구의 사체를 끌어내고, 8미터 높이의 언덕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진 사람 한 명을 구조한 것이 전부였다. 카일은 캐런에게 그가 받은 훈련은 구조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으려는 바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카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아요, 캐런. 그들에게 장비를 갖추고 가는 데 두어 시간 걸릴 거라고 말해요."

카일은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모든 상황이 끝나 있기를 바랬다.

"카일, 걱정 말아요. 그들도 서두를 필요 없다고 하던데요. 동굴 속의 인질범은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구요.

 

6. 총을 가진 청년

하나도 도망치거나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지하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도 내가 거기까지 가서 그들을 끄집어낼 것이다.

아모스서 912

오레곤 동굴 토요일, 오후 342(태평양 표준시)

엘렌과 테리는 등을 마주 댄 채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눕거나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공포심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청년이 다음 순서의 관광객들을 위협해 쫓아 버린 후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청년은 어떤 요구나 정치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한 사람도 내보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분명했다. 간간이 그의 누나가 사정하기도 하고 설득해 보려고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침내 그녀도 지쳐 다른 인질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테리는 인질극에 대해 아는 내용들을 떠올려 보았다. 만약 사람들이 꽤 오랫동안 인질로 잡혀 있는 경우, 그리고 상황이 점점 악화될 경우 어떤 사람들은 인질범에 대해 동정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번 사건 같은 경우 계속되는 불안, 상황에 대한 통제 불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불안의 원인이 뭔지 알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할 것이다. 테리는 은행 금고에서 3일간이나 계속되었던 납치 사건을 기억해냈다. 강도는 인질들을 억류하고 한 여자를 성폭행했으며, 경찰은 건물의 냉방을 중단시키는 동시에 음식에 독을 넣었고, 최소한이 물만 제공했었다. 그러나 인질극이 끝나자 풀려난 인질들의 대부분은 납치범들이 어떻게 될지에 관심을 보였었다.

두 사내아이들이 동굴 뒤쪽으로 돌을 던지고 있었다. 테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군인이 일행의 뒤쪽에서 중간 부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청년은 무릎을 세워 가슴 앞으로 끌어당기고 앉아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계속 총을 들고 있었지만 총부린느 땅끝을 향해 있었다. 테리는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포갠 다음,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하고 머리를 옆으로 돌려 군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테리는 무슨 일이 생기려는 건지 알았다. 군인은 가끔씩 다리나 팔을 뻗거나 허리를 쭉 펴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조금씩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마치 시계를 보는 것과 같았다. 인내심이 요구되지만 오랫동안 바라보면 시침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는 이치와 똑같았다.

테리는 그 군인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겁이 났다. 만약 청년이 알아차리면 어떻게 하지? 만약 저 남자가 돌발적인 행동이라고 한다면? 저 사람 때문에 청년이 사람들을 해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테리는 청년의 정신 상태가 위험하지 않다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테리는 예전에 래리라는 이름이 정신 분열증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그 환자는 막노동을 했고, 자신의 아파트에서 카트리나라는 이름의 흰색 페르시아 고양이를 기르며 살고 있었다. 만약 그가 텔레파시 능력을 가진 메이슨 단원(비밀결사 집회:옮긴이)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강하게 우기지만 않았더라도 테리는 그를 떠맡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이슨 핀을 꽂은 어떤 세일즈맨이 래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래리는 그의 사슴에 총을 쏘았고 그건 정당방위였노라고 주장했다. 래리는 결국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고, 카트리나는 동물 보호소에 보내졌다. 저 청년도 그런 사람일까?

테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젊은이, 이름이 뭡니까?"

그가 조그맣게 물었다. 잠시 후 테리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물었다.

"케니라고 한 것 같은데, 맞죠?"

머리를 드는 청년의 눈빛이 몽롱했다. 청년은 천천히 테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시선과 함께 총구도 같이 움직였다. 마침내 케니가 테리를 쳐다보았지만 테리는 청년이 자신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아무 말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청년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테리는 청년도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지쳤고, 어쩌면 더 겁에 질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케니에요. 바보 멍청이. 케니 랜덜."

그의 누나가 청년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청년은 누나를 쳐다보았지만 총부리는 여전히 테리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테리에요, 케니. 이쪽은 내 아내 엘렌이요."

테리는 자신이 심리학자라는 것을 밝혀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말에 안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정신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심리학자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다. 테리는 직업을 밝히는 것이 아직은 성급하다고 판단했다.

"케니, 나와 아내는 겁이 나는데 당신은 괜찮아요? 지금 겁나지 않아요?"

케니의 눈은 아직도 초점을 잃고 있었지만 사람들을 모두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테리는 그가 군인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뭘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거죠, 케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죠."

"케니, 난 그게 뭔지 알고 싶어요.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마침내 케니가 테리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초리와 손에 든 총을 보자 테리의 뱃속이 마구 뒤틀렸다.

"이미 말했잖아요, 세상에 종말이 올 거예요."

"어떤 식으로? 어떻게 지구에 종말이 온다는 거죠?"

"믿지 않을 걸요. 아무도 나를 믿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중거를 보여주려고도 했지만 누구도 보지 않았어요."

그는 누나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가족들조차도 그랬어요."

케니는 편집증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케니는 자신이 대단한 비밀을 알고 있으며 자신만이 그걸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케니가 편집증 환자라면 대단히 위험했다.

"케니, 내게는 말한 적이 없잖아요. 당신을 이해하도록 노력할게요. 약속해요."

"제가 말했잖아요. 하늘이 무너져 내릴 거래요."

케니의 누나가 말했다. 케니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가 싶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누나는 한 번도 내 말을 들은 적이 없어. 난 하늘이 무너진다고 말한 적 없어. 뭔가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했을 뿐이야. 그건 아주 다른 거야. 증거도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않았잖아. 안 그래"

테리는 케니가 화내는 것을 보고 그가 극단적인 행동을 할까 봐 우려했다. 테리는 케니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했다. 테리는 케니가 누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지만 그녀 때문에 화가 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케니, 난 진심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이론을 듣고 싶소."

케니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더니 테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신은 왜 마른 옥수수 알이 맑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사람들이 갑자기 화염에 쌓인 채 죽어 갔는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문명이 어떻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처음에는 우리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우리는 그 현상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고대의 인물을 알게 되었어요. 그는 당시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그는 그런 현상들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고, 우리도 마침내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아냈어요. 우리에게는 자료와 이론, 그리고 증거도 있었지만 아무도 우리를 믿지 않았어요."

케니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고 그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떠올랐다. 슬픈 표정으로 그는 계속했다.

"나는 신께 그 옥수수 알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떨어졌기를 기도했어요. 하지만 내가 선택되는 바람에 예기치 않게 그 일로 빠져든 거죠. 이젠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곧 끝날 테니까."

전문가로서 테리는 케니에게서 이끌어낼 것이 아직 많다는 걸 알아차렸다. 케니는 자유롭게 감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고, 이것이 만약 환자 치료의 한 과정이었다면 테리는 케니의 잠재 의식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을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질들과 사람들이 불에 타 죽은 사건, 그리고 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불타 죽는다는 걸까? 케니가 언급한 우리는 누구이고 오래전 그 일을 알고 있었다는 사람은 누굴까? 그러나 케니는 자신의 환자가 아니었고, 그는 틀림없이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테리는 현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간단하게 한다고 해도 여기에서는 치료가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가 불에 타 죽게 된다는 건가요, 케니? 그게 곧 일어날 일이에요?"

테리는 케니가 노란 배낭 속에 가솔린 통을 놓고 지구의 종말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 그걸로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뇨, 우리가 불탄다는 게 아니에요.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래요.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 "

말꼬리를 흐리는 케니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제기랄, 난 아인슈타인이 아니에요. 그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케니는 손목시계를 흘낏 바라보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케니, 핵폭발을 생각하고 있는 거요? 그래서 사람들이 불타는 건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케니가 입술을 씰룩이더니 피식 웃었다.

"어떤 면으로는 핵공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건 그 이상이에요. 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거구요."

"자연 상태의 핵공격이아, 설명해 줄 수 있겠소, 케니?"

케니의 미소가 금방 사라졌다.

"아뇨, 할 수 없어요. 하지도 않을 거구요. 만약 내가 틀렸다면 당신들은 모두 자유의 몸이 되는 거고, 만약 내가 옳다면 당신들은 나를 고맙게 생각하게 될 거예요.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어요."

케니는 배낭 속에서 그라놀라(귀리와 건포도를 섞은 건강 식품:옮긴이) 한 줌을 꺼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이거라도 먹어 두세요."

사람들은 천천히 다음 사람에게 그라놀라를 넘겨주었다. 오직 아이들만 그걸 먹고 있었다.

 

7. 두려움에 떤 잛은 여름

미야에서 발견된 기록들과 불교의 경전, 시빌의 책에는 7번의 태양 시대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태양들은 연속되는 시대들로서 기록에 따르면 각 시대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아주 끔찍할 정도로 파멸될 것이라고 한다.

임마누엘 벨리코프스키, 충돌하는 세계

오레곤 동굴 토요일, 오후 415(태평양 표준시)

케니는 동굴 입구를 등지고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노부인이나 어떤 남자가 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치지 않았어. 그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미치지 않았다구! 그는 필쳐 박사 일행이 이곳으로 와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들은 가설을 세웠고, 그것을 입증해냈다.

그들이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74일이 막 저물어 가는 무렵이었다. 케니와 팻은 6월 한 달 내내 예언된 사건이 일어날 장소와 시기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허탕만 치고 있었다. 낙하 현상 한 가지만 예측할 수 있어도 그들은 자신들의 모델을 수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낙하 현상을 예측하기 전에는 모델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을 알아낼 수 없었다. 따라서 매일 밤 다른 학생들과 자원자들은 야영지에 모여 신시한 사건들이 실리지는 않았는지 신문을 샅샅이 뒤졌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조라스트러스의 예언집과 다른 고대 문헌들을 연구하거나 모델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역사상의 기록들을 찾는데 온 노력을 기울였다. 팻과 케니는 필쳐 박사의 RV안에서 프로그램을 수정했다.

사람들은 보통 밤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웨인 부인은 11가 되기 전에 잠들었는데, 그건 그래야만 그녀의 신령인 손텔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니 파웰은 때로 웨인 부인 옆에 앉아 손텔의 메시지를 듣기도 했지만 대부부은 미니 밴의 라디오에서 그날의 야구 경기 결과를 들은 다음 잠을 자러 가곤 했다. 피트라젤레스키와 콜터 스윈슨은 가끔 슬리핑백을 가지고 산책을 나갔다. 피트라는 오레곤 공과대학의 학생이었으나 콜터는 남부 오레곤 주립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가 그 학교를 선택한 것은 플레이보이 지에 가장 파티가 많은 학교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룹에 합류하기 전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종종 밤늦게까지 토론을 벌이곤 했는데 한참 하다 보면 케니와 팻이 가진 지식은 바닥이 나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한 나날들이 몇 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며칠에 한 번씩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케니와 팻에게 가능성이 있는 지역과 날짜에 대해 물었다. 케니와 팻이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예측을 하면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들은 남부 다코리다에서 시작해 남쪽가 북쪽을 오가며 작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케니는 이번에 예측한 태평양쪽 해안이 틀릴 경우 이 모든 것이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회는 몬타나주 글라시어 국립공원 근처의 캠핑장에 머무르던 어느 날 찾아왔다. 그들은 모델을 설명할 만한 이상한 사건들이 나와 있는지 그 지역 신문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피트라가 신문에서 갑작스런 홍수에 한 소년의 세발 자전거가 물에 떠내려갔다는 이야기를 찾아낸 것은 밤 11시가 다 된 무렵이었다. 소년은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 기사에는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첫째, 갑작스런 홍수가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홍수가 일어날 만큼의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었다. 기사는 그것이 일시적인 지역성 강우였다는 기상 담당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이상한 것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그 소녀의 말에 따르면 물이 짰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필쳐 박사는 머리카락을 10번이나 손으로 빗어 넘겼다. 그건 그가 확신을 한다는 증거였다.

"바로 그거야."

그가 쿰 박사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머지 않아 사건이 일어날 거요, 박사."

쿰 박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랜덜 군, 니양 군."

필쳐 박사가 계속했다.

"이 사건을 모델에 추가하게."

케니와 팻은 자료를 입력하고 모델에 맞추려고 애썼다. 일이 잘 진척되지 않아 그들은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필쳐 박사와 쿰 박사가 부푼 기대를 안고 왔다.

"13일 남았습니다. 오차는 48시간입니다."

팻이 대답했다.

"그럼, 위치는?"

필쳐 박사가 물었다.

"전 항상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케니가 대답했다.

그들은 3일간 야영지에 더 머무르며 그 지역의 도서관과 신문 보관소 등을 다니며 다른 사건들은 없었는지 조사했다. 피트라와 웨인 부인은 신문에 난 소년과 그의 가족을 만나 그 사건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그들은 소년을 만났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쳐 박사는 확신을 가졌다.

그들은 며칠 동안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 밖에서 야영을 하며 자료를 수집했다.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은 그런 사건을 찾아내기에는 최악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울창한 숲, 험준한 산들과 함께 셀 수 없이 많은 목초지는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알아차린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제일 가능성이 높은 첫 번째 시기가 다가오자 관측자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고민했다. 마침내 그들은 고지대와 탁 트인 초원, 그리고 관광객 편의 시설이 있는 평지의 공터를 관측지로 결정했다.

관측 첫날 케니는 올드 피이스풀 근처에서 숙소 주변을 살피도록 지시 받았다. 피트라는 거지대 초원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에서, 웨인 부인은 그랜드캐넌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배정되었다. 팻은 워시번산 위 막다른 길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일행 중 등반 경험이 가장 풍부했고, 장비 또한 제일 잘 갖추고 있었다. 콜터 스윈슨은 초원을 살피기 위해 루즈벨트 호텔로 갔다. 필쳐 박사는 사건이 큰 호수 근처에서 일어날 경우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어니 파웰은 옐로우 스톤 호수가 옆 레이크 빌리지로 갔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숙소에 남아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교대되었고, 번갈아 가며 식사를 하고 잠을 잤다. 필쳐 박사는 그들 모두에게 임무 중에는 화장실도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냥 보기만 해서는 안 돼."

그는 쉴새 없이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계속 강조했다.

"주위의 관광객들이 하는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공원은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비디오 카메라로 주위 경치를 찍어 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도 있어."

필쳐 박사를 바라보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쉴새 없이 머리를 빗어 넘겼고 항상 땀을 뻘뻘 흘렸다. 정년 퇴직을 2년이나 넘긴, 작고 뚱뚱한 필쳐 박사를 보며 케니는 박사가 심장 마비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곤 했다.

케니가 필쳐 박사를 찾아간 것은 지난 11월로 옥수수 사건을 겪은 뒤였다. 필쳐 박사는 케니의 말에 귀기울인 유일한 사람이었다. 케니는 가족과 친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아버지는 그를 놀렸고 누나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케니의 목수수 우박에 대한 강박관념은 커져만 갔다.

케니는 그가 경험한 것과 같은 이상한 사건들에 대한 책을 찾기 위해 서점에서 대부분의 전ㄱ 시간과 주말을 보냈다. 그는 책에서뿐 아니라 오래된 신문기록에서도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고,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기록들을 찾아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기는커녕 자신이 겪은 일과 그 사건들과의 연결 고리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공원을 산책하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꽃더미에 파묻혀 버린 모녀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컴퓨터를 이용해 각 사건들을 입력하고, 유형을 분류하여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썼다. 그러나 필쳐 박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진척이 없었다. 그러다가 케니는 학생 회관 게시판에서 필쳐 박사가 다음 날 저녁 지각의 대변동과 그로 인한 문화적 진화 에 대한 강연을 한다는 공고문을 보게 되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필쳐 박사는 동전 수집가처럼 학위를 모으는 사람으로 악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이 대학 저 대학을 옮겨 다니며 서로 다른 과목을 가르치고 새로운 학위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예일 대학에서 지직학자로 출발했으나 미시간 대학에서는 동물학을, 브리검 영 대학에는 잠시 있다가 오레곤 주립대학으로 옮겨와 고생물학을 가르쳤다. 그는 그 외에도 컴퓨터 정보과학과 경영학 학위도 갖고 있었다.

필쳐 박사는 정년하기 전까지 8년을 오레곤 공과대학에서 시스템 사이언스를 가르쳤다. 학셍들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신기한 사건들에 대해 알아 오는 것이 전부였고, 필쳐 박사는 새로운 주제에 관심을 보이다가도 30분도 안되어 다른 주제로 빠져들기 일쑤였다. 수업에 지루해 하는 경영학과 학생들에게 시빌의 경전이나, 인디언 학자 익스틸조키틀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테즈쿠코의 왕의 연대기를 낭독할 때면 그의 정열은 빛을 발하곤 했다. 필쳐 박사는 호오소온 효과니, Y경영 이론이니 등을 말할 때에는 심드렁했지만, 불교의 경전인 비수디 마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열심이었다.

공고문에 씌여진 지각의 대변동 이라는 단어가 케니를 강연 장소로 이끌었다. 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 안에 30여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있었다. 대부분은 주변에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이었다. 몇 명은 나이가 지긋해 보였는데 무료 강의인데다 흥미로워 보이는 주제에 이끌려 온 것 같았다. 강의실에는 케니 외에도 몇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때는 피트라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그는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과 긴 갈색 머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들어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두드러져 보이던 날씬한 몸매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웨인 부인은 연한 금발에 통통한 체격을 가진 부인이로 역시 그 강의실에 있었는데 그녀는 피트라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쿰 박사가 필쳐 박사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케니는 쿰 박사를 모르고 있었다. 쿰 박사는 오레곤 공과대학의 교수가 아니었다. 쿰 박사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으며 오레곤 대학에서 몇 젼간 인류학을 가르쳤으나 논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사장되는 학계 풍토에 염증을 느끼고 교수직을 내놓았다는 것을 케니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쿰 박사는 필쳐 박사의 수많은 학위와 논문을 열거한 후에 고대사와 지질학 분야에서의 필쳐 박사의 연구 성과를 설명하며 강연의 주제를 소개했다. 소개가 끝나자 약한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웨인 부인이 제일 열성적으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필쳐 박사는 단상 위에 노란색 종이 뭉치를 내려놓은 뒤,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의는 해수면에서 440미터나 떨어진 영국 서부 요크셔에서 어떻게 하마 화석이 발견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필쳐 박사는 영국 북부의 하마들이 무덤을 만들기 위해 바다에서 그처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올라갔다는 주장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필쳐 박사는 지질학적 대이변만이 합리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에는 극에서 극까지 지구의 기추가 어느 정도 일정했었고 극의 기온은 현재보다 30도 정도 따듯했었다. 이렇게 가정해 본다면 극에서 적도까지 아열대성 식물들이 골고루 퍼져 있었을 것이다. 필쳐 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그 시기에는 지구가 기울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거대한 행성과 혜성들의 항로가 축을 변화시켜 극지방은 기온이 내려가고 적도 쪽은 더 기온이 높아져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계절의 구분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케니는 점점 강의에 빠져들었다. 옥수수 우박 사건 때 느꼈었던 감정들의 되살아나고 있었다. 강의에 이어 쿰 박사와 필쳐 박사간에 토론이 벌어졌다. 쿰 박사는 하마 화석은 북아프리카-나일강 근처라고 생각되는 곳을 떠나 이동한 하마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쿰 박사는 동물들이 이미 북쪽까지 헤엄쳐 간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겨울에는 이동을 멈추었다가 따뜻한 여름동안 북쪽으로 헤엄쳐 가다가 영국에 도착해서 화석이 발견된 곳까지 이르렀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필쳐 박사가 즉시 반박에 나섰다.

"그럼 하마들은 무엇 때문에 따뜻한 적도에서 추운 북극해로 이동했을까요?"

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마가 어떻게 그같은 정반대의 기후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죠?"

"하마는 살아 남지 못했어요."

쿰 박사가 대답했다.

"그게 요점이었나요? 하마들은 옮겨 간 곳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무엇이 동기였을까요? 어떤 본능들이 하마들을 북쪽으로 이동시켰을까요? 언제 북구에 도착했고 무엇 때문에 내륙으로 들어가 산과 언덕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을까요?"

"그렇다면 고래는 왜 해안가로 밀려와 죽는 거죠?"

쿰 박사가 질문을 제기했다.

"만약 고래한테 다리가 있었더라면 고래도 해안까지가 아니라 근처의 산 위로 올라갔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하마의 이동을 볼 수 없는 거죠?"

필쳐 박사가 말했다.

토론은 이후 20여 분 동안 계속되었다. 케니는 두 사람이 설전을 벌이면서도 신랄하게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두 사람의 토론은 조화로운 오케스트라의 연주 같았고, 둘 가운데 필쳐 박사의 역할이 좀 더 크게 부각 되어 있었다. 쿰 박사는 논리 정연하게 반론을 폈으나 필쳐 박사의 열성이나 지식에는 미치지 못했다.

몇 사람이 필쳐 박사와 쿰 박사와 함께 토론을 한 후에도 케니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쑥스러워 가만히 앉아 있었다. 웨인 부인과 피트라 그리고 쿰박사는 자리에 남아 필쳐 박사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가고 없었다. 케니는 필쳐 박사가 옆으로 지나가자 수줍음을 무릅쓰고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죠?"

필쳐 박사가 대꾸했다.

"제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데요옥수수 알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요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맑은 하늘에서 옥수수가 떨어진다는 게 이상해요. 꾸민 얘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저 혼자 이론을 만들어 보기도 했습니다만, 교수님이시라면 제가 그 현상을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케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지금 말하려는 문제에 대해 자신이 충분히 검토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너무 막연하고 불충분한 것 같았다. 케니는 입을 다문 채 필쳐 박사로부터 무사될 순간을, 아니 그 이상의 모욕이 가해질 순간을 기다렸다. 필쳐 박사는 무표정하거나 화를 낼 것으로, 필쳐 박사의 일행들은 웃음을 터뜨릴 것으로 그는 예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필쳐 박사를 포함하여 그들 모두는 케니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들어보고 싶군요. 하지만 자리를 옮깁시다. 커피 좀 마셨으면 해서요."

케니는 쿰 박사의 미니 밴을 따라 클라머스 폴즈 시외로 갔다. 한참 차를 몰고 가다 보니 수풀이 우거진 곳에 2층집이 있었다. 집안의 모든 벽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은 책꽂이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책이 빼곡이 채워져 있었다. 다른 책들과 논문 및 잡지들을 담은 상자가 마루 위에 쌓여 있어 때가 많이 탄 꽃무늬 양탄자를 거의 모두 가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겹겹이 늘어선 서가에서 많은 양의 책과 논문들을 익숙하게 뽑아 마루에 놓여 있는 자료들 옆에 놓았다. 그들은 케니에게 안락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웨인 부인과 필쳐 박사가 커피를 끓이기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 다른 사람들은 하마 화석에 대해 이야기했다.

케니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있었지만 불편함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웨인 부인과 필쳐 박사가 돌아왔고, 갑자기 필쳐 박사가 케니를 향해 몸을 돌렸다.

", 케니, 이제 자네에게 일어났었던 일을 우리에게 말해주겠나."

그가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케니는 차근차근 사냥 여행과 옥수수 우박 사건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그가 책과 신문 기사를 통해 그런 류의 사건들을 찾아냈는지 이야기했다. 넋을 잃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추호도 의심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케니는 사건 자체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까지도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옥수수 우박 사건이 일어났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를 그룹의 사람들과 공유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친구들로부터, 결국은 누나에게조차 무시당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케니는 사람들의 눈을 보고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으며,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케니가 이야기를 끝내자 정적이 감돌았다. 그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필쳐 박사만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필쳐 박사가 입을 뗐다.

"조지, 당신에게는 익숙한 일 아니오?"

쿰 박사는 양손을 머리 뒤로 돌려 깍지를 낀 채 흔들의자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쳐 박사보다 10살 정도 젊어 보였지만 머리가 벗겨진 쿰 박사는 한참동안 의자를 흔든 후에야 대답했다.

"그래요, 체스터."

"쉬운 것부터 시작해 볼까요?"

필쳐 박사가 제안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에 불타 버렸소. 도시 전체가 멸망할 운명이었지. 이제, 당신 차례요, 조지."

"성경과 미드라쉬에 따르면 이집트에서는 하늘에서 개구리들이 떨어졌어요."

쿰 박사가 천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성서에 나오는 전염병도 좋은 예요. 메뚜기와 해충떼가 어디에선가 나타났소."

아주 쉬운데! 멕시코의 쿠아티틀란 연보에 나온 뜨거운 돌 우박 사건은 어떻소?"

"그건 운석일지도 몰라요."

쿰 박사가 대꾸했다.

"말도 안돼. 수천 개의 뜨거운 돌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주위에 있는 것을 불태운다고? 운석은 대기 중에서 거의 연소하기 때문에 지표면 근처에서는 우박처럼 떨어질 수가 없어요. 당신 차례요, 조지."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

쿰 박사가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몸을 앞으로 숙여 사람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를 꿀맛이 나는 노란색 열매라고 표현했어요. 만나는 열매의 한 종류이겠지만 그게 왜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누구도 설명하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옥수수라고 해서 떨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죠."

쿰 박사가 몸을 돌리더니 창백한 눈을 반짝이며 똑바로 쳐다보았기 때문에 케니는 당황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옥수수로 빵을 만드는 것처럼 만나를 갈아서 빵을 구웠어요."

쿰 박사가 계속했다.

"아마 그들은 그 전에 옥수수를 본 적이 없을 거예요."

"그럴 듯해요."

필쳐 박사가 말했다.

"박사는 아직도 성경과 탈무드를 인용하기는 하지만 아주 창의적인 생각이오. 호머와 헤시오도스는 천상의 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어요."

"리그 베다 송가도 구름 사이로 떨어진 마드후에 대해 노래하고 있죠."

필쳐 박사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바로 그것들이 신이 내린 음식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들인 겁니다."

"그럴지도 몰라요. 만약 조금 전에 내가 말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 마야에 내린 붉은 먼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잠시 생각해 봅시다. 케니는 하늘에서 떨어진 물고기같은 것들에 대해 말했어요. 만약 더 큰 물체가 떨어진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오, 조지? 뭘 얘기할 수 있겠소?"

필쳐 박사가 말을 멈추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유럽에서 발견된 하마 화석에 대한 우리의 토론을 기억해 보십시오."

필쳐 박사는 처음에는 피트라를, 뒤이어 웨인 부인을 바라보았다.

"하마들이 영국까지 이동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웨인 부인이 목청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럼 하늘에서 떨어진 건가요?"

"가능한 일이죠. 옥수수가 떨어지고, 물고기가 떨어졌다면 하마라고 왜 떨어질 수 없겠소?"

케니는 놀랐다. 필쳐 박사는 지금 한 시간 전까지 그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정립하고 신봉해 온 지각 대변동에 관련된 이론을 과감히 포기하려는 것이다. 케니는 새로운 이론은 낡은 이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야 받아들여진다고 믿어 왔었다. 그러나 필쳐 박사는 과학자로서는 놀라우리만큼 유연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쿰 박사는 발을 쭉 뻗고 손가락으로 책을 톡톡 치며 흔들의자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다른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설명할 수 있겠군요. 미시간에서 고래 2마리의 화석이 발견된 것은 아시죠? 미시간이라니! 바다에서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쿰 박사가 케니를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고래 회석에 대해 필쳐 박사가 보충 설명을 했다.

"퀘백에서도 고래 화석이 발견됐어요. 해발 180미터나 되는 곳인데 자, 생각을 정리해 보죠.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고래와 하마, 코뿔소 그리고 코끼리가 발견됐어요. 심지어는 남극에서도 발견됐지. 북극과 남극에서 발견된 침엽수는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킬리만자로 산꼭대기의 표범이에요."

쿰 박사가 끼어들었다.

"조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돌팔매를 당했다던 그 바빌론 예언자의 이름이 뭐죠?"

"조라스트러스였던 것 같은데요."

"맞아요. 맞아. 그는 케니가 말해 준 것과 같은 사건들의 기록들을 모았어요. 물론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죠."

쿰 박사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잠시 후 말했다.

"조라스트러스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어요, 내 기억에는 그가 미래에 대해 많은 예언을 했었던 것 같아요."

"조지, 그건 다음에 하는 게 어때요?"

필쳐 박사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오늘밤에는 지구 축의 변화에 따른 지각의 대변동이나 이동 등으로 예상치 않은 장소에서 발견된 동물들을 찾아봅시다. 동물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해서 좋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해요."

필쳐 박사는 말을 멈추고 케니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케니를 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꽃더미에 파묻힌 모녀의 이야기와 자신이 세운 가설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환히 빛났다. 그들도 자유로이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그런 과정 속에 가설은 차차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케니는 그날 밤 그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을 두고 괴짜니 미치광이니 하고 수군거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케니 또한 몇 달 전까지는 그들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임의 구성원으로서 사물을 바라보았았다. 기묘한 모임이기는 했지만 모두가 감수성이 풍부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그날 이후 케니는 그룹과 함께 매주 토요일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는 웨인 부인이 손텔이라는 영혼과 교감을 나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피트라와도 친구가 되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만났다. 편의점을 운영하는 중년의 부부는 토요일 저녁이면 번갈아 가면서 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그들은 듣기만 할 뿐 토론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보니 스미스같은 사람은 가끔씩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리 열심이지는 않았다. 보니는 어느 날 다른 학생과 함께 나타났는데 콜터 스윈슨이라는 그 학생은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척했지만 눈은 피트라에게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주 토요일 혼자 나타난 콜터는 피트라 옆에 앉았다. 그 후부터 콜터는 계속해서 모임에 나왔다.

2주일 후 모임에 모습을 드러낸 쿰 박사는 매우 흥분되어 있었다. 조라스트러스가 쓴 저작물의 번역본 일부를 어렵사리 구한 것이다. 조라스트러스는 바빌론에 살았던 실제 인물로 예언자로 불렸으나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었다. 쿰 박사는 조라스트러스의 비전이라 불리는 저작물을 발견했다는데 특히 흥분하고 있었다. 케니가 경험한 옥수수 우박같은 사건들이 고대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케니에게 믿음을 갖게 했다. 그들은 조라스트러스 또한 가설을 세웠었고, 놀랍게도 그것이 케니의 것과 아주 비슷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조라스트러스의 비전을 발견한 이후 사람들은 더 자주 모였다. 사람들은 케니가 조사한 것과 조라스트러스가 기록해 놓은 사건들을 연구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 밤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손텔의 계시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지만 언제나 마지막에는 케니의 해석으로 되돌아왔다.

팻은 케니와 함께 컴퓨터로 이론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필쳐 박사가 채용한 사람이었다. 케니와 팻은 세밀하지는 않았지만 신빙성 있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람들은 그 모델들을 가지고 토론했고, 거기에서 나온 의견들을 수렴하여 다시 모델을 수정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케니는 자신이 올드 페이스풀의 저수지 근처를 벌써 열 바퀴째 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닝 글로리 저수지에서 2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잠시 후에 있을 교대 시간 전까지는 한바퀴 더 돌 수 있었다. 케니는 하루에 4차례씩 저수지에서 주변의 초원과 하늘을 살펴보았다. 엘크 몇 마리가 근처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케니는 그 모습을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엽서에는 저수지가 매우 푸르고 맑게 나와 있었지만 직접 와 보니 물빛이 흐릿했기 때문에 케니는 매우 실망했다. 안내원에 따르면 관광객들이 저수지에 던진 동전이 물의 온도를 변화시키면서 물색이 흐려졌다고 한다. 그때 케니는 혐오감과 상실감을 동시에 느꼈었다.

케니는 관측 지점을 향해 보도 위를 걷고 있었다. 앞족에서 자기 또래로 보이는 두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웅덩이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웃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케니가 가까이 가보니 한 사람이 웅덩이 속으로 씹던 껌을 던지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떠들썩하게 웃으며 껌과 동전을 던지고 있었다. 그 남자가 또 다시 동전을 던지려 하는 것을 보자 케니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케니는 동전을 쥔 손을 나무 울타리 위로 잡아챘다. 동전은 산책로 위로 굴러 떨어졌고, 남자는 고함을 질렀다.

"이봐, 뭐야?"

남자가 소리질렀다. 그러자 다른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당신들은 웅덩이를 오염시키고 있어요."

케니가 말했다.

"저 사람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동전 때문에 물빛이 달라지고 있어요. 웅덩이가 막힐 수도 있어요."

"그런 우리가 알아서 해."

덩치 큰 남자가 대꾸하며 케니의 배를 쳤다. 케니는 숨을 몰아쉬며 고꾸라졌다. 덩치 큰 남자가 케니의 머리를 움켜잡고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내 친구 말고, 알았어?"

그러면서 그는 케니를 울타리 위로 떠밀었다. 케니는 울타리 쪽으로 넘어졌고, 다시 날아오는 주먹 세례를 피하느라 얼굴을 가렸다.

"어서 꺼져버려!"

덩치 큰 남자가 소리지르며 케니의 머리를 후려쳤다. 케니는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두 남자가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떤 부부가 두 아이를 데리고 오고 있었기 때문에 케니는 얼굴을 가리느라 웅덩이 쪽으로 돌아섰다. 잠시 후 자신의 팔을 잡는 손길을 느끼고 그가 얼굴을 돌려보니 그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케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나는데 괜찮아요?"

", 괜찮습니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어요."

케니가 손을 이마로 가져가는데 피가 흘러내리며 눈썹을 적셨다. 그 부인이 건네준 휴지로 이마를 닦자 휴지는 곧 피로 물들었다. 상처를 닦는데 이마에 뭔가 박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케니는 휴지를 몇 장 더 얻은 뒤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상처가 꽤 심했다.

케니가 오두막을 향해 걸어가는데 삼림 경비대 복장을 한 매력적인 젊은 여인이 그를 자세히 바라보더니 옆으로 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상처를 한 번 봐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진짜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제정신이 아닌 거예요. 내 허락 없이는 갈 수 없어요."

그는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케니의 상처를 알코올 솜으로 닥아 내기 시작했다.

"상처 속에 뭐가 있어요."

"아마 나무 가시일 거예요."

"어쩌다 다쳤어요?"

그녀가 약장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넘어지면서 중심을 잡으려다가 머리를 울타리에 부딪혔어요."

"아하, 그래요. 자 이제 준비됐어요."

그녀가 핀셋을 들고 다가왔다. 처음에 가시를 뽑을 때는 별로 아프지 않았지만 나중에 뽑은 2개는 매우 아팠다.

"조금 아플 거예요."

케니가 질겁을 하자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세 번째 나무 가시를 뽑으려고 하는데 다른 대원들이 삼십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를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 뒤로 부상 당한 사람 또래의 두 여자가 따라 들어왔는데 그들은 모두 사이클 복장을 하고 있었다.

"레슬리, 여기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다른 손님을 모시고 왔거든."

레슬리라고 불린 그 경비 대원이 새로 도착한 환자 쪽으로 몸을 돌렸기 때문에 케니는 부상당한 여인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피에 젖은 손수건을 귓가에 꼭 대고 있었다. 레슬리는 놀란 것 같았다.

"하루에 두 명씩이나 머리를 다치다니? 평소에는 기껏해야 무릎이 까지거나 벌에 쏘인 사람들뿐이었는데."

"가끔씩은 물소에 찔린 사람들도 치료했었잖아."

한 대원이 덧붙였다.

"스티브,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금방 끝낼게요."

레슬리는 케니의 상차에서 마지막 가시를 빼낸 후 과산화수소수로 소독하고 붕대를 댔다. 케니는 나가다가 레슬 리가 부상당한 여인한테 묻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다치신 거예요?"

레슬리는 케니가 방금 앉았던 의자로 환자를 안내하며 물었다.

"갑자기 우박이 내린 것 같아요. 자전거를 타고 블랙 샌드 베이신을 넘어 이 길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거대한 우박 덩어리가 떨어졌어요."

"그건 우박이 아니었어요."

친구 중의 한 명이 말했다.

"아주 커다란 얼음 조각이었어요. 게일 위로 떨어진 얼음 조각은 15센티미터나 됐는데 그건 작은 편이에요. 웅덩이로 떨어진 건 최소한 60센티미터가 넘을 거예요."

케니는 나가려다가 말고 그 자리에 섰다. 그는 자신들이 또 놓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응급 센터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었고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관측 장소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자신들이 예측한 시기와 장소가 좀 더 정확해져 있었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것이다.

케니가 전한 소식에 모임의 모든 사람들은 흥분했다. 케니와 팻 그리고 필쳐 박사는 즉시 캠프로 돌아가 새로운 자료를 입력하고 모델을 수정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료를 펼쳐 놓고 응급 치료를 받던 여자가 말했던 것과 같은 사건에 대한 목격담이 있었는지 찾았다. 팻과 케니는 이틀 후 컴퓨터 모의실험을 했고 유타주의 프로보로 답사를 나갔다. 1주일이 지났지만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웨인 여사는 팻과 케니가 캠프에 도착하자 그들에게 린넨 서랍장이 갑자기 화염에 싸여 불타 버린 집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여주었다. 필쳐 박사는 그 사건을 하나의 징조로 받아들였다. 다시 만들어진 모델에 따라 그들은 뉴멕시코주의 라스 크루체스 시로 향했다. 그들은 거기에 캠프를 설치한 다음 사건들을 수집했는데 거기에서는 뒷마당의 수영장이 갑자기 범람한 바닷물에 잠기면서 개가 빠져 죽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그런 사건들을 찾아 여기저기 다녔고, 그들이 도착하기 전날 하늘에서 쏟아진 자갈이 깔려 있다는 아이다호의 한 캠핑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필쳐 박사는 여행을 중단했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며칠 동안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노트와 조라스트러스의 원고에 뭔가를 적으며 열심히 토론을 벌였다. 어느 날 저녁 그들이 RV로 케니와 팻을 찾아왔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잘못 생각한 게 있었어."

케니와 팻은 경청했다.

"이런 현상은 동적일 거야.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러한 사건들을 놓쳐왔어. 사건들은 우리가 도착하기 전이 아니면 다른 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발생했어. 우리가 역사상의 사실만 강조하다가 자네들에게 잘못된 방향을 일러준 것 같아. 조라스트러스의 예언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했어. 그 원고에는 시대적인 특수성이 결여되어 있어. 우리나 조라스트러스나 사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어난다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아. 과거에 발생한 사건들은 어떤 주기가 있네. 주기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점점 길어지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쫓고 있는 사건들은 주기가 계속 짧아지고 있어."

그 순간 그들은 모델이 암시하고 있는 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다가올 미래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케니의 걱정은 늘어갔고 걱정은 차츰 공포로 바뀌면서 그를 절망에 빠뜨렸다. 케니가 총을 사서 그것으로 누나를 납치할 생갈을 한 것도 바로 공포심 때문이었다.

케니는 떠돌아다니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빨리 만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케니는 기도했다.

 

8. 동굴 속의 위기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우박과 불이 내렸다.

잠언 1813

오레곤 동굴 토요일, 저녁 730(태평양 표준시)

카일이 오레곤 동굴에 도착한 것은 연락을 받은지 4시간이 지난 후였다. 2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지만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는 먼저 주유소에 들린 다음 등반 장비를 가지러 갔다. 그는 50미터 짜리 로프와 타원형 고리, 그리고 D자형 고리를 챙기고 기타 장비도 챙겼다. 그러고 났는데 핼멧과 등산화를 집에 두고 온 것이 기억났다. 그는 집에 가서 아예 등반 복장으로 갈아입기로 결정했다. 동굴에서는 갈아입기가 어렵기 때문에라고 카일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옷을 벗는 동안 그는 샤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그는 맥도널드에 들려 빅맥과 감자 튀김 큰 것, 콜라 큰 잔을 샀다. 동굴로 오라는 연락이 계속 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운전 중에는 절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동굴에 도착했들 때 카일은 아직도 상황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적잖이 실말했다. 공원 관리인이 공원 입구까지 몰려든 구경꾼들 사이를 헤치고 그를 안내했다. 카일은 동굴 입구 한쪽에 인질들의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카일이 가져온 장비들을 희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동굴 입구 근처에 있는 작은 건물에서는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략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3명은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카일은 그들이 삼림 경비 대원이거나 주경찰일 거라고 짐작했다. 다른 두 남자는 정장을 하고 있었다. 카일이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제 안심해도 되겠군요. 라고 말하자 카일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장을 입은 두 명의 남자는 FBI요원으로 젠킨스라는 사람이 책임자였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일 경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에 경험이 많으시다구요."

"할 수 있다면 어떤 임무라도 다하겠습니다."

카일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좋아요, 훈련 과정을 1등으로 수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젠킨스는 카일의 특수 훈련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카일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1등이 아닙니다."

", 그럼 몇 등을 했습니까?"

"2등이요."

카일이 마지못해 말했다. 젠킨스는 안심하는 표정이었고 다른 요원은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매우 겸손하군요. 카일 경관."

카일이 마지못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속으로는 두 번 다시 그런 과정은 밟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모두 잘 들으십시오."

젠킨스가 말했다.

"이제 카일 경관이 도착했으니 작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몇 명이 동굴 안에 들어갈 겁니다. 인질들이 잡혀 있는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는 단 2개월뿐입니다. 다행인 것ㅇ느 입구가 좁고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총을 쏜다면 목표를 맞추더라도 그 유탄에 인질들이 희생될 수 있습니다.

"공포탄을 사용한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주 경찰 중 한 사람이 질문했다.

"물론 피해를 줄일 수는 있겠죠. 하지만 없앨 수는 없습니다. 내가 신호하기 전까지는 절대 총을 쏘지 마십시오."

"실례합니다. 젠킨스 씨."

카일이 끼어들었다. 그는 이런 식의 회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훈련 과정에서 배운 바로는 인질극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협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시간을 버는 겁니다. 범죄자를 일단 진정시킨 다음 독을 넣은 음식을 보낼 수도 있어요. 인질들의 안전을 위해 이틀 정도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젠킨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일을 쳐다보았다.

"조언은 고맙습니다만, 이번 일은 몇 가지 면에서 다른 사건과 다릅니다. 첫째, 아무런 요구 사항이 없습니다. 협상을 시도해 보았지만 인질범은 계속 대화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질범이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정치적인 문제도 아닌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인질범이 나름대로 기한을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곧 끝날 거야 라거나 사건이 끝난 후에 사람들은 모두 내보내겠다 는 등의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면... 어쨌든 가만히 않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카일을 보았다. 그래서 카일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예상했던 대로 젠킨스 요원은 그걸 카일이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카일 경관."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겠소."

카일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 경비 대원들이 동굴로 들어가는 또 다른 입구가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 입구까지 접근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당신의 경험이 필요한 겁니다. 경비 대원들이 당신을 안내할 겁니다. 당신한테 4시간의 여유를 주겠소. 이후 우리가 불을 끄면 동굴 속에서는 당신이 알아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범인의 주의를 분산시킬 테니 당신이 뒤에서 그를 덮쳐요."

4시간이면 많은 시간이 아니었다. 함께 갈 사람들은 제이, 킴벌리, 셜리로 그들은 모두 삼림 경비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좋은 체격에 혈기왕성해 보였다. 나이는 세 사람 모두 20대 중반을 넘지 않아 보였다. 셜리와 킴벌리는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예쁜 편이었다. 그들은 가무잡잡한 피부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셜리가 킴벌리보다 더 활발해 보였다. 셜리가 인솔자였고 그녀는 카일에게 그가 준비해 온 장비들을 차에 갖다 두라고 말했다. 맨손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주 이용되지 않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나아갔다. 카일은 금방 숨이 차 올랐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1.5킬로미터 정도 올라가자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길이 나왔다. 험준한 산등성이를 1킬로미터쯤 오르자 문이 나타났다. 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었다. 셜리가 문을 열고 앞장섰다. 카일은 주저했다. 지하 세계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신비하면서도 믿어지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그 과정은 신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셜리를 비롯한 다른 대원들은 몸집이 작고 유연해서 동굴 속을 쉽게 지나갔지만 카일은 통로를 더 파낸 후에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도중 두 번이나 통로 중간에 몸이 끼이기도 했다. 셜리가 앞에서 그를 끌어당기고 킴벌리와 제이는 뒤에서 밀었다. 일행들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 주었지만 자갈이 수북한 통로를 엎드린 채 3시간이나 기었기 때문에, 피부는 다 까졌고 카일은 녹초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넓은 곳으로 빠져 나와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셜 리가 입술에 손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하더니 천장을 가리켰다. 카일은 천장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보았다. 카일이 구멍 속을 보기 위해 헬멧에 달린 전등을 켜자 셜리가 얼른 손으로 빛을 가리며 그를 한구석으로 밀었다.

"조심해요, 범인이 볼지도 몰라요."

그녀가 속삭였다.

"여기서부터는 당신이 앞장서야 돼요."

"하지만 난 길을 몰라요. 당신이 앞장서지 그래요?"

"당신이 총을 가지고 있잖아요. 일단 저 속으로 들어가면 각자가 알아서 해야 돼요. 만약 통로 사이에 끼이더라도 혼자 힘으로 빠져나가세요."

카일은 차라리 셜리에게 권총을 주고 싶었다.

"좋아요."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곧장 가면 됩니까?"

"5미터 정도 올라가면 수평 통로가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30미터쯤 더 가세요. 조용히 하셔야 돼요. 그곳이 인질들이 억류되어있는 장소 바로 위거든요. 동굴 안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동굴에서 나오는 빛으로 지형을 익혀 두세요."

"동굴로 떨어질 경우 어디로 가면 되죠?"

"오른쪽이 조금 가까워요."

셜 리가 말했다. 그녀는 카일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숨을 곳은 별로 없어요. 만약 떨어지면 아래쪽으로 길을 약간 내려오세요. 시간이 충분하다면 대신 왼쪽으로 가시구요. 거기에는 석순(石荀)이 많아 숨을 수 있을 거예요."

셜리는 카일을 보고 싱긋 웃더니 구멍을 가리켰다. 구멍 안쪽은 밋밋했기 때문에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했다. 그는 팔에 힘을 주어 위로 몸을 끌어올렸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팔꿈치를 삐죽이 나온 바위에 바짝 댔다. 몸을 끌어올리느라 다리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카일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셜리에게는 우스워 보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누군가 카일의 엉덩이를 힘껏 밀어 올리는 바람에 그는 간신히 다리를 통로 안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났는데 누군가 그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카일은 손의 임자가 제이가 아니라 셜리나 킴벌리이기를 바랬다.

그는 벽에 등을 붙이고 조금씩 걸어갔다. 대원들이 한 명씩 통로로 들어오면서 그들이 쓴 헬멧에서 나오는 빛도 약해졌다. 카일은 제일 중요한 감각이 쓸모없어지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완전하다라는 단어를 쓴다면 지금이야말로 완전한 어둠이라는 말이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로는 넓어졌고 카일은 다리를 잘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올라가고 싶었지만 혈기왕성한 대원들이 밑에서 기운차게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구멍을 거의 다 빠져 나오자 수평 통로가 나왔다. 그는 간신히 다리를 움직여 통로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카일은 몸을 겨우 돌려 통로를 조금씩 통과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에 불빛이 보였다. 그는 인질 억류 장소가 가까워지자 속력을 줄였다. 카일의 발에 뒷사람이 부딪쳤고, 그는 나머지 대원들이 도착한 것을 알았다. 그들은 예정했던 시간보다 15분이나 빨리 도착해 있었다.

누군가 카일의 바지를 잡아당기더니 그의 신발에 대고 속삭였다. 셜리였다.

"살펴보지 않을 거예요?"

카일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한동안 시치미를 떼다가 앞으로 기어가 목을 숙여 동굴 안을 살펴보았다. 그는 머리를 아래로 내밀고 구석구석을 살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잠시 후 그는 머리는 들어올리고 방금 본 것들을 되새겨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사람들은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는 동굴 구멍의 한쪽에는 손을, 그 반대편에는 발을 놓아 자신의 몸을 활모양으로 구부렸다. 이제 동굴 안으로 다리를 내리고 팔힘만으로 매달려 있다가 소리 없이 뛰어내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동굴 안의 불이 꺼졌다. 그가 아직 어둠 속에 매달려 있는데 손에 잡았던 바위가 부서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카일이 동굴 바닥에 거꾸로 떨어졌다. 바위 조각들이 그의 몸 위로 떨어지면서 제법 큰 돌이 카일의 얼굴을 쳤다. 카일의 콧날에서 피가 났다.

인질들이 비명을 질렀고, 범인은 사람들에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소리쳤다. 카일은 땅을 짚고 일어났지만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한쪽은 동굴 벽이었다. 두 길은 안전한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질범 쪽으로 가는 길이다. 그에게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면 꺼졌던 불이 켜질 터였다. 그때 옆에서 쾅하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캉일의 허리를 더듬으며 팔을 잡았기 때문에 카일은 몸을 움츠렀다. 그 손이 카일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드디어 동굴 안에 불이 다시 켜졌고 그는 발을 헛디디며 땅 위로 굴렀다. 누군가 그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약한 빛이 동굴 안을 채우고 있었다. 인질범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카일은 머리를 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는 석순 뒤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좌우를 살펴보다가 가까이에 셜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카일의 코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카일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져 말을 타고 지나가는 소녀의 뒷모습에 총을 겨누던 그 시골길로 되돌아가 있기를 소원했다. 셜리는 피를 다 닦아 낸 후 카일의 콧등에 입을 맞추었다. 카일은 어둠 때문에 셜리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랬다.

 

9. 마리엘 위더비

윔홀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 의해 예견된 4차원 세계의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4차원 세계에서 이 구멍들은 우주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연결하고 있으며 한 시간대와 다른 시간대를 연결하고 있다. 한 시간대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다른 시간대를 지나가야 한다. 만약 그런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4차원적인 현상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광홀한 우주를 떠돌라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로버트 이, 아인슈타인의 혁명

대서양 부근 어딘가에서 시간과 공간의 법칙이 갑자기 파괴되면서 이 여파가 동부와 서부로 확산됐다. 바다 속에서 갑자기 육지가 솟아났다. 그 땅들은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얼마 안 가 고대 아틀란티스 대륙이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파도 속으로 가라앉았다. 피해 지역에서는 군용기와 여객기들뿐 아니라 하늘을 날던 갈매기 무리까지 사라져 버렸다. 여행객들과 조종사, 유학생, 비행사, 그리고 비행기를 탔던 국회 의원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버렸다. 대기를 메우고 있던 공기의 성분의 바뀌면서 엄청난 기압차가 발생했다. 엄청난 굉음이 자주 들려 왔다.

그 여파가 동부 해안에 미치면서 내륙도 영향권에 들었다. 도로, 차량, 주택, 사무실 빌딩과 패스트푸드점들이 숲, 풀밭, 얼음, 호수, 그리고 바다로 변했다. 인간이 건설한 문명들은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다. 남녀노소, 빈부, 직업,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 함께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건의 영향력은 엄청났으나 모두가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지상에서는 그 영향력이 감소하였기 때문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도 있었다. 엄청난 굉음에 잠을 깬 사람들은 자신의 집은 멀쩡한데 이웃집은 파괴되어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도로 반대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다른 대도시의 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밤새 조용히 잠들어 있었고 깨어난 뒤 혼란에 빠져들었다.

뉴욕시 토요일, 오후 835(서부 표준시)

마리엘은 창가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가을 저녁이 내는 소리를 감상하며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없었다. 소리를 듣기에는 여름이 가장 좋은 계절이었지만 이제는 집집마다 에어컨이 달려있어서 문을 열면 모터 돌아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 아파트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이웃 사람들 모두가 여름이면 창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마리엘은 사람들이 틀어 놓은 라디오나 오디오 소리뿐 아니라 서로 다투는 소리까지 듣곤했다. 어떤 이야기들은 내용까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웃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 같아 그녀는 한 번도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싸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은 항상 결정해 두곤했다.

마리엘은 귀에 이바라 부부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던 말은 스페인어로 했기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리엘은 그들이 다투는 소리를 창가에 앉아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리듬에는 아주 익숙해져 있었다.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필요는 없었다. 싸우는 이유는 세가지 중의 하나이니까-, 가족, 아니면 아이들이었다. 마리엘이 1955년 여기에 이사온 이래 그것은 부부 싸움의 변함없는 주제였다. 마리엘은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는 맥그리거네 집에서 울려 나오는 스테레오 소리 또한 듣고 있었다. 랩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맥그리거의 아들이 음악을 틀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맥그리거 부부는 아들에게 랩을 들을 때면 이어폰을 끼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이 집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기가 차가웠지만 마리엘은 문을 닫지 않앗다.대신 찻주전자를 불에 올려놓은 다음 무릎에 덮을 담요를 가지고 왔다. 마리엘은 의자에 다시 앉아 뜨개질 거리를 집어 들었고, 말다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싸움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부엌에서 찻주전자 끓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컵을 받침에 얹어 창가로 돌아왔다. 이바라 부부가 화해했는지 소리가 없었다. 몇분 후 갑자기 음악 소리가 꺼졌고 마리엘은 캐시 맥그리거가 숙제하라며 아들을 야단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마리엘은 도시의 소음 속에 홀로 남았다.

마리엘은 아파트 안쪽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전에는 꽃과 채소를 심어 작은 정원을 꾸몄었다.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었고 보기 흉한 쓰레기통만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오직 마리엘이 가꾸는 정원만이 남아 있었다. 꽃들은 아름다웠고 우중충한 아스팔트와 쓰레기통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마리엘은 정원을 아꼈지만 고층 건문들이 안마당을 가로질러 들어서면서 꽃을 키우는 일은 점점 힘들어졌다. 고층 건물들은 모두 유리와 철강으로 뒤덮인 사무실 건물들이었다. 마리엘은 유리창으로 범벅이 된 그 건물들이 싫었다.

오래 전 마리엘에게는 지금은 고층 빌딩이 들어선 곳에 살던 친구가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후에 마리엘은 거티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여름이면 아이들은 마당에서 함께 뛰어 놀았고 마리엘과 거티는 서로의 집에 가거나 정원을 돌보았었다. 거티는 오래 전 플로리다로 이사갔고 거티가 살던 곳은 10년 전 빌딩이 들어섰는데 거티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에서의 마리엘의 삶은 아주 조용히 그녀와 남편 둘만으로 시작되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그들의 생활은 활력과 스트레슬 가득 찼다. 지금은 그런 스트레스가 오히려 그리웠다. 세 아아이들이 자라면서 마리엘은 많은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아이들 친구의 부모들이었다. 남편이 하는 사업과 관련된 친구도 사귀었다. 항상 사업상의 모임이나 파티가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의 학교 일로도 바빴다. 학습, 음악 실기 교육 그리고 다른 수많은 활동들이 그들을 항상 바쁘게 만들었다. 마리엘은 그 당시 자신만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고, 창가에 앉아 소리에 귁울이는 즐거움을 누리는 건 1주일에 고작 몇 시간뿐이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아이들은 다 자라 있었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다른 주에 살면서 가끔씩 안부 전화만 했다. 아이들이 떠나 버린 후에도 몇 년 동안은 그녀 곁에 남편이 있었고, 친구들 대부분도 아직 남편의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의 친구들과 파티도 사라져 버렸다. 얼마 후 마리엘에게는 얼굴을 아는 정도의 관계만 남아 있었다.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갔지만 교회는 환경이 더 나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지금은 TV로 교회 예배를 보고 있지만 TV를 통해 교회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의 삶은 그녀가 몇 년 동안 들어온 말다툼의 끝처럼 매우 조용했다. 마리엘은 활력소를 원했고 말다툼이라도 할 상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마리엘은 하늘에서 별을 찾아보왔다. 그러나 달빛과 도시의 불빛에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도시는 별을 보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마리엘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별을 잘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경 써야 할 다른 일이 생기기 전까지 그녀는 별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마리엘은 별과 달과 그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오하이오에 사는 큰아들은 그녀와 함께 살고 싶어했다. 거기에서도 별을 볼 수 있다고 아들은 어머니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이젠 기억 저편의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삶을 원했다. 그녀는 자신 또한 기억으로 남을 때까지 이 아파트에서 생을 보낼 것이다.

마리엘은 TV를 켜고 이리저리 채널을 바꿨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것은 없었다. 때로 그녀는 케이블 TV를 신청하려고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요금이 너무 비쌌다. 그녀는 무료로 보아야 할 것이 돈을 지불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시추에이션 코미디 프로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계속되는 웃음소리가 마리엘도 재미있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마리엘은 TV를 끄고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 방송도 시시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찾아보면 들을 만한 것이 아직 있었다. 오래 전에 방송된 라디오 쇼나 악단 연주가 나올 때가 있었다. 하지만 마리엘은 오늘 밤만큼은 토크쇼를 듣고 싶었고, 뉴욕시 라디오에서도 수많은 토크쇼가 방송되고 있었다. 마리엘은 그녀가 좋아하는 한 프로그램에 다이얼을 맞추었다.

오늘밤 사람들은 자신들리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나 영화에 관련된 쓸데없는 질문들을 하느라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대고 있었다. 마리엘은 자리를 잡고 듣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들은 영화의 마지막 대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마리엘은 그녀가 보았던 영화들을 떠올리며 그 영화응 어디에서 누구와 보았었는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누군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배우들로 화제를 바꾸었다. 마리엘은 남편과 함께 007영화를 몇 편 보기는 했지만 좋아하지는 않았었다. 그 영화는 폴력적이었고 주인공의 성적 매력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아직도 그녀는 숀 코넬리와 로저 무어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를 기억했다. 그녀는 창가에 놓은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며 라디오를 듣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마리엘은 마루에 머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잠을 깼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아픔이 가라않을 때를 기다렸다. 눈을 뜨자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그녀는 자신이 마루에 넘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창문사이로 달빛이 들어왔다. 또 정전이었다. 넘어지면서 부딪힌 데가 계속 아팠다.

그녀는 마루에 가만히 누워 아픔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귀가 멍멍했다. 창밖에서 들려야 할 도시의 소음을 들리지 않았다. 팔과 다리에 감각이 느껴졌다. 한동안 아프겠지만 부러진 데는 없었다. 그녀는 바박에 떨어진 안경을 찾아 썼다. 그런 다음 천천히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그녀는 촛불을 켜기 위해 거실 복도에 놓인 서랍장 쪽으로 걸어갔다. 발밑을 살피며 걸었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 발에 뭔가 채였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소파 옆 작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푸른 화병을 주워 들엇다. 마리엘을 쓰러뜨렸던 그 힘이 푸른 화병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마리엘은 조심스럽게 가다가 마루 위가 깨진 등 과, 베개, 장식용 자기들로 어질러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태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내동댕이쳐 있었다.

촛불이 조명등처럼 방안을 밝혔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접시와 음식 통조림들이 떨어져 마루와 조리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침대보와 마루 위에 유리 파편이 널려 있었다. 창문을 틀만 남아 있었고 유리는 모두 깨져 있었다. 마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녀는 청소할 생각에 한숨을 쉬다가 손전등과 라디오를 발견했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경우를 대비해 그것들을 챙겼다.

마리엘은 라디오를 켰다 대부분의 지역 방송들이 나오지 않았다. 방송이 나오는 경우에도 정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도 불통이었다. 전화까지 끊겼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보통 전기가 나가도 전화는 쓸 수 있었다. 그녀는 흔들의자를 바로 세운 뒤 창가에 앉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창 빡을 내다본 마리엘은 엄천난 충격을 받았다. 거티의 집터에 들어선 고층 사무실 빌딩과 그 주변에 있던 건물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풀밭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리엘은 창가에 서서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머리를 부딪쳤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얼굴과 머리를 만져 보니 혹도 나지 않았고 찢어진 데도 없었다.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건물들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도시는? 마리엘이 모레노 씨한테 가서 그의 집 쪽에서는 도시 모습이 제대로 보이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문밖에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리엘은 촛불을 들고 문으로 가서 구멍을 통해 밖을 살펴보았지만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루이스 이바라스의 목소리가 들렸고 마리엘은 문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위더비 부인?"

"그래요, 루이스. 와 줘서 고마워요. 지금 우리 집 창 밖을 봐 줄래요? 내 눈에는 도시가 전혀 보이질 않아서요."

"맞아요, 위더비 부인. 부인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제 눈에도 보이지 않아요. 건물을 모두 살펴보았는데 다른 거 그대로 있어요. 저희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대피할까 생각 중에요. 만약 나가게 되면 부인을 모시러 올게요."

"고맙지만 난 괜찮아요."

"머물러 계시면 위험합니다. 위더비 부인."

"난 남아 있을래요. 이제는 당신과 멜린다가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겠군요. 이제는 싸우지 말아요. 당신들은 잘 어울려요. 나는 내딸에게 그 애가 당신과 멜린다 같이만 지낸다면 바랄게 없다고 말했다오."

"그러셨어요. 저희는 모두 잊어버렸어요. 어쨌든 저희와 함께 가셔야 돼요. 위더비 부인."

"빨리 가족에게 돌아가요. 아니, 잔깐만 기다려요."

위더비 부인은 부엌으로 가서 과자를 종이 봉투에 넣은 다음 그걸 루이스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들에게 이 과자를 줘요. 애들이 겁먹고 있다면 달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루이스는 사양하지 못하고 종이 봉투를 받았다.

"만약 이곳을 떠나게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나는 집을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잘자요. 루이스."

마리엘은 다시 창가로 돌아와 새로 생긴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마리엘은 언젠가 토크쇼에서 사람들은 오직 두 가지, 죽음과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두려워한다고 말하던 걸 기억했다. 마리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 나이 정도의 사람들은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리엘에게는 미지의 것이 오히려 그리웠다. 그녀의 삶은 거의 십여 년 동안 잔인할 정도로 똑같은 일상들로 채워져 있었다.

건물 반대편에서는 도시의 소음이 들려 왔지만 풀밭은 아주 조용했다. 초원은 망망대해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건 단순한 초원이 아니었다. 마리엘은 침침한 눈과 어둠을 원망하여 눈을 크게 떴다.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닦았으나 소용없었다. 멀리 풀 속에서 뭔가 반짝거렸다. 물이었다. 초원 끄트머리에 늪이 있었다. 마리엘은 남편의 망원경이 집에 남아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초원에는 볼 것이 매우 많을 것이다.

마리엘은 라디오를 틀렸다. 그녀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진 다이아몬드 쇼를 틀렸다. 그는 상스럽고 천박해서 마리엘은 그가 진행하는 토크쇼를 거의 듣지 않았다. 그러나 쇼 진행 도중 자주 뉴스를 했기 때문에 마리엘은 진 다이아몬드 쇼에 주파소를 맞췄다. 그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 사는 한청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 우리는 절대로 핵에 관한 진실을 알지 못할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로 진실을 밝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면 너무 많은 것을 잃거든요."

"그들이 누구죠?"

"물론 대기업들이죠. 핵무기 제조 회사나 대형 정유사같은 대기업이 자신들의 종업원들이 권력에 접근하도록 허용할 것 같아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요. 그래서 정부가 발명가들의 명성을 파괴하는 데 열심인 거예요."

"그럼 이 땅의 정부, 대기업, 정유, 회사, 그리고 석유 회사를 소유한 사람들이 서로 결탁해서 핵을 개발한 사람들을 불신하도록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건가요?"

"그래요."

"그렇다면, 왜 아무도 핵융합 실험을 다시 하려고 하지 않죠?"

"그건 정부가 모든 과학자들을 매수해 버렸기 때문이죠."

"그럼, () 소련 과학자들까지도 말입니까?"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니까요."

"그렇군요, 만약 당신이 편집증 환자라면 말이 되는군요. 다른 전화를 연결합니다."

진 다이아몬드는 거의 매일 밤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그녀는 이처럼 끔찍한 프로그램에도 전화를 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시당한 사람이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오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마리엘은 라디오를 껐다. 지금 듣고 싶은 것은 뉴스였지 잡담이 아니었다.

마리엘은 밤새 창가에 앉아 초원을 바라보며 무슨 소리가 들리지는 않나 귀를 기울였다. 초원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리엘이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나직이 그르렁거리는 소리였다.

하늘은 막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초원도 훨씬 잘 보였다. 초원 끝에 생긴 늪과 나무들이 보였다. 마리엘은 새로운 것들을 보자 흥이 났다. 마리엘은 안경 위로 돋보기를 얹은 다음 신나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창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창문에 기대어 풀 사이로 10대 아이들 몇 명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옷차림을 보니 동네 불량배들이었다. 불량배들은 모두 남자아이들 같았지만 마리엘은 요즘 들어 남녀를 구별하는데 영 자신이 없었다. 그들은 초원을 지나 밖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초춴 쪽을 바라보며 뭔가 얘기하며 웃고 있었다. 마리엘은 풀이 무척 긴 것을 보고 놀랐다. 풀은 키 큰 소년의 허리에 닿을 정도였다. 그녀는 아이들이 풀밭에 들어가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아이들이 싫은 게 아니라 풀밭에 들어가 있는 것이 싫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었고 마리엘은 이 모든 것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왔지만 그다음에는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올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초원으로 몰려들 것이다. 그들은 초원을 나누어 길을 놓고, 건물을 지으려고 할 것이다. 얼마 안 있어 유리로 뒤덮인 건물들을 다시 볼지도 몰랐다. 안돼, 이 아이들이 여기에 있으면 안 돼. 마리엘이 아이들에게 초원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더니 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리엘은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흥분했는지 보려고 했다. 뭔가 있었고,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리엘은 신나서 손뼉을 쳤다. 그녀는 남편의 망원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물체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간신히 초점을 맞췄고,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지루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10. 그룹

누가 신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단어가 의미 없는 시간이 찾아오리라.

조라스트러스, 바빌론의 예언자

오레곤주 이스트 호수 토요일, 오후 735(태평양 표준시)

", 늦었네. 그만하고 오게."

필쳐 박사가 소리쳤다.

"잠깐이면 됩니다. 박사님, 잠시만요."

펫은 캠핑장 근처의 소나무 위에 올라가 단파 수신기용 안테나를 조금 더 높이 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들은 서머 호수에 있는 피트라와 콜터와는 연락을 취했지만 윔스프링즈에 있던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과는 교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테나 위치를 조정하느라 팻은 가족들에게 가야 하는데도 지금껏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어서 내려오게."

쿰 박사가 재촉했다.

"나머지는 내가 하겠네."

"박사님은 몸이 무거우셔서 안 돼요."

팻이 대답했다. 팻은 쿰 박사가 나무 위로 올라오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말할 정도로 무례하지 않았다.

"다 됐습니다."

팻이 조심스럽게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고맙네. . 이제 어서 출발하게! 가족 모두에게 안부 전해 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필쳐 박사님. 쿰 박사님."

팻이 손을 내밀어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필쳐 박사가 확인했다.

", 박사님."

팻이 자동차를 몰고 떠난 후 필쳐 박사는 팻의 안전을 걱정했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를 돕기 위해 남아 있었던 팻 외에 다른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전자자기파가 발생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파는 3일 후에 발생할 예정이었으나 지점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만약 일이 예상보다 일찍 발생한다면 팻은 위험에 처할 것이다. 필쳐 박사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팻이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기를 빌었다.

박사가 단파 수신기를 다시 작동시켰다. 콜터와 피트라는 바로 아무 일 없다고 알려 왔다. 그러나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은 세 번빼 시도에서야 경우 연결되었는데 전파 방해로 거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30분마다 상황을 점검하기로 했다.

저녁때까지 30분마다 상황을 점검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쿰 박사가 만든 스튜로 늦은 저녁을 먹은 뒤 그들은 RV밖으로 나와 잔디 위에 앉았다. 아주 맑은 밤이었다. 보름달이 떠 있었지만 그들은 은하수를 볼 수 있었다. 다른 여행자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시끌벅적하게 자신들의 텐트나 트레일러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직 필쳐 박사와 쿰 박사만이 침묵에 잠겨 있었다.

11시에 수신기가 울렸다. 피트라는 별다른 일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녀 뒤에서 콜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대는 것을 듣고 필쳐 박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글지글 끌리는 소리는 더 심했지만 어니 파웰로부터는 별일 없다는 연락이 왔다. 쿰 박사는 꼬챙이로 불 속을 쑤시고 있었다. 쿰 박사는 장작을 몇 번 뒤적이더니 필쳐 박사에게 말을 걸었다.

"체스터, 전파장애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쿰 박사가 다시 불 속을 쑤셨다.

"그것이 그 일과 관련 있는 게 아닐까 하구요."

필쳐 박사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조지,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소."

쿰 박사는 필쳐 박사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필쳐 박사는 다른사람이 독창적인 생각을 해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쿠 박사를 약간 짜증하게 했지만 쿰 박사는 이미 오래전에 남에게 인정받는 것에 대한 끝없는 추구를 포기했다. 그는 이제 진정한 과학자였고, 그가 원하는 것은 진리를 이해하는 것뿐이었다. 생각을 헤낸 것이 자신이든 필쳐 박사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는 다시 모닥불을 돋았다.

"물론 전파장애가 그 일 자체일 수도 있어요."

필쳐 박사의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그럴 리가. 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쿰 박사는 이해했다.

그들 모두 일어날 일에 대해 두려워하면서도 거기에 매달려 왔었다. 그들과 나머지 사람들은 뭔가 일어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라던가 직업적 유대 관계를 끊고 살아왔다. 그들은 수신기에 생긴 전파장애 이상의 중요한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파장애를 발생시키는 원인에 대해 좀 더 의견을 나누었다. 모닥불이 점점 달아오르는 가운데 그들은 가설을 세우고, 질문하고, 다시 이론을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토론을 거치면서 그들은 완벽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외로운 두 남자가 고대의 불가사의한 사건에 대해 공통의 애정을 가지게 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이 알고 지낸 7년 동안 대화의 주제가 바닥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신비한 일들이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밤중의 점검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프트라는 아주 철저하게 살피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프트라 목소리 뒤로 술에 취해 낄낄대는 콜터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필쳐 박사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콜터는 때때로 유능해 보였고 피트라는 그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콜터는 자제력이 없는 것 같았고, 더 나아가 -필쳐 박사의 관점에서는- 우둔해 보였다. 필쳐 박사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 중의 하나는 피트라같이 진지하고 총명한 젊은 여인이 콜터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었다.

웨인 부인이 잠시 후 아무 이상 없다는 연락을 해 왔다. 웨인 부인은 손텔이 자신에게 그들의 예측은 정확하며, 곧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다시 확인해 주었다고 말했다. 필쳐 박사는 손텔에게 감사의 듯을 전해 달라고 웨인 부인에게 말했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전파장애에 대한 토론으로 다시 돌아와 태양의 흑점이 전파장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이 피트라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태양의 흑점 주기에 대해 막 토론을 시작했을 때였다. 그들은 응답하기 위해 서둘러 RV로 돌아갔다.

"뭔가 일어났어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조금 전에 이상한 소리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지금 동쪽에서 불이 났어요. 꽤 큰 불같은데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모르겠어요."

필쳐 박사와 쿰 박사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쿰 박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좀 더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동감입니다."

필쳐 박사가 말했다. 그가 피트라에게 지시했다.

"오늘 밤 절대 그 근처에 있지 말게. 안전한 장소로 옮기고 아침에 다시 확인을 하는 것이 좋겠어. 우리는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에게 연락을 취해 알리겠네."

필쳐 박사는 피트라와의 통신을 끝내고 웨인 부인을 호출했다. 전파장애는 덜했으나 지지직거리는 마찬가지였다.

"웨인 부인, 웨인 부인. 들려요?"

잠시 후 그는 다시 수신기를 켜고 어니 파웰을 불렸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11. 구출 작전

거센 바람과 구름과 함께 엄청난 우박이 세상에 몰아쳤다. 폭풍이 그쳤을 때 땅 아래 숨어 있던 생물들이 땅 위로 올라와 번성하였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구전 역사

오레곤 동굴 토요일, 오후 115(태평양 표준시)

테리는 군인이 조금 더 앞으로 나와 이제는 앞쪽에 앉은 사람들 가까이에 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불이 정전된 동안 움직인 것이다. 청년이 배낭에서 손전등을 꺼내 불을 켰을 때 군인이 이미 앞줄에 와 있었다.

테리는 엄두도 나지 않았고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필요하다면 군인을 돕고 싶었다. 기회는 테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가 머리를 무릎에 기댄 채 졸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고, 사람들은 놀라 잠에서 깼다.

"동굴 속에 계신 여러분, 안녕하세요."

청년 또한 놀라 목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일어섰다. 그 순간 군인이 뛰어올라 청년을 덮쳤다. 청년이 그를 떠밀었지만 소용없었다. 군인은 청년을 쓰러뜨린 다음 팔을 뻗어 청년이 떨어뜨린 총을 잡으려고 했다.

테리는 주저하다가 자신 외에는 아무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군인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도 청년이 총을 쥐고 있고, 군인이 그 팔을 잡아끄는 것을 보았다. 청년은 발길질을 하며 군인을 떼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한 손으로는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텔는 엉켜 있는 두 사람 위로 몸을 날려 총을 잡았다. 테리의 무게에 군인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총을 쥔 청년의 팔을 놓쳤으나 테리가 대신 그 팔을 잡았다. 팔을 잡는 순간 테리는 그 청년이 힘에 부치는 상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테리는 청년의 눈에서 조증의 기미를 보았고 그의 힘은 증세에 비례해 생기는 것 같았다.

군인이 총을 잡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누군가 그들을 강하게 덮치면서 청년의 팔을 누르고 있던 테리를 쳤고, 군인은 청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새로 등장한 사람은 헬멧을 쓰고 등산복을 입고 있었는데 거의 청년의 얼굴 바로 앞까지 굴러 왔다. 테리는 등산복 차림의 젊은 여인이 무릎으로 청년의 배를 치면서 이 전쟁을 끝냈을 때에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경찰들과 삼림 경비 대원들이 곧 그들을 에워쌌고 수감을 찬 청년은 조금 전과 달리 조증에서 울증으로 바뀌어 있었다. 청년은 울면서 동굴 안에 남아 있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아직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가 되풀이해 말했다.

"제발, 여기 있게 해주세요. 누나! 누나! 사람들이 나를 끌어가지 못하게 해. 곧 일어날 거란 말이야. 부탁이야. 누나!"

질은 동생을 안심시키며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테리는 그가 누나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 청년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누군가 무전기로 들 것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렸고, 경찰이 인질들을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청년은 인질들이 모두 나간 후에도 훌쩍이며 애원하고 있었다. 경찰은 모든 사람들을 조사한 뒤 보고서를 작성했다. 몇 시간이 흘렀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테리와 엘렌은 겨우 해방됐다. 그들은 주차장으로 걸어가다가 군인 부부와 마주쳤다. 군인 부부가 테리와 엘렌을 향해 걸어오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콘래드라고 합니다. 빌 콘래드. 동굴 안에서 아주 잘하셨어요."

그가 테리에게 말했다.

"당신을 따라 했을 뿐인데요, . 저는 테리라고 하고 이쪽은 제 아내 엘렌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 엔지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그 청년이 생각하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더라구요."

주차장에서 그들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며 모여든 사람들과 마주쳤다. 테리의 귀에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죠?"

앤지가 물었다.

한 쌍의 남녀가 사람들 틈에서 빠져 나와 그들에게 기꺼이 소식을 알려주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여러 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사라져 버렸다니까요!"

"뭐가요? 산사태라도 일어났어요?"

테리가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여인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일 같지는 않아요. 5번 고속도로로 차를 몰고 가면 거기에서 길이 끝난 것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4차선 도로가 있던 곳에 지금은 풀하고 나무 그리고 산밖에 없어요. 믿을 수 있겠어요? 산이 생기다니.

 

12. 세 친구

주님의 날은 밤중에 도둑같이 오리라. 사람들이 평안하고 안전한 세상이라고 마음 놓고 있을 때 갑자기 멸망이 닥칠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52

오레곤주 뉴버그시 토요일, 오후 1120(태평양 표준시)

커비가 타코 벨 간판을 쳐다보는 동안 리프먼은 커비의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시간을 재고 있었다. 존은 뒷자리에 앉아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리 사이에 음료수 컵을 끼운 채 앉아 있었다. 리프먼은 계속 시간을 말하면서 엔진을 것었다.

"2분이야. 2분이나 걸렸어! 넌 절대로 이길 수 없어. 이제 파이 먹으러 가자."

"웃기지 마."

커비가 투덜댔다.

그들은 함께 음료수를 마셨다. 그건 그날 시합의 마지막 내기였고, 내기에서 지는 사람이 파이를 사기로 했었다. 이제는 커비와 존이 시함할 차례였다.

그들은 포틀랜드에서 320킬로미터 정오 떨어진 뉴버그시에 와 있었다. 뉴버그시는 너무 작아서 30년 전 주를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생겼어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동네였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생겨났던 모텔, 드라이브인 시설들(차를 탄 채 이용할 수 있는 영화관, 식당, 은행 등:옮긴이)과 음식점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고 이제 마을은 대형 제지소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앞으로 20여 년 이내에 뉴버그는 도시 확장 사업 계획에 따라 포틀랜드에 편입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24킬로미터나 이어지는 숲과 농장이 뉴버그를 도시와 구분 짓고 있었다.

, 커비 그리고 리프먼은 보통 포틀랜드 82번가나 122번가에서 길 이름 바꾸기 놀이를 했었는데 금방 지루해졌기 때문에 다른 지역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뉴버그를 발견하게 되었다. 뉴버르에는 작은 대학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동차를 몰고 한동안 대학 주위를 돌다가 여학생이 나타나면 창문을 내리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 장난에도 지쳤을 때 그들은 이름 바꾸기 놀잇거리가 도로변을 따라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참을 놀다가 자기 차례를 마쳤을 때 커비는 어떤 방법으로든 간에 친구들에게 집에 가자고 말해야 했다. 벌써 시간은 밤 1130분이 다 되어있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12시 이전에는 집에 들어가야 했다. 부모님은 지금쯤 여행에서 돌아와 계실 것이고 그는 자신이 매일 밤 귀가 시간을 지나 들어온 것으로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친구들에게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너희 부모님들은 너무 엄격하셔. 겁쟁이 같으니라구."

리프먼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커비는 별말 하지 않았지만 억지로 짓는 웃음과 표정이 리프먼의 말을 인정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존은 항상 집에 제일 먼저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심리학자였고 때로 육아교실에서 상담도 했다. 그는 자신들의 아이를 잘 키운 것으로 신용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육아 상담 분야에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이를 잘 키우는데 중요한 것은 일관성과 교육이란다."

항상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존이 도덕적으로 침범할 수 없는 명확한 규범을 갖고 있는 반면, 리프먼의 아버지는 자신의 눈앞에서만 아니라면 리프먼이 뭘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 리프먼은 아버지 눈앞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더 최악이었던 것은 커비의 아버지였다. 그는 오레곤주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목사로 케이블 TV를 통해서도 신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을 믿었다.

그는 아들에게 자동차를 사줄 만큼 믿었고, 한 가지 외에는 간섭하지 않을 정도로 아들을 믿었다. 커비는 매주 수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에는 교회에 가야 했다. 존이 아는 한 커비는 아버지의 믿음을 배신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몰랐다. 성령 이 아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커비는 키가 2미터나 됐고,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커비가 지나갈 때마다 미식축구팀 코치는 군침을 삼켰으나 커비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 가장 컸지만 동시에 가장 점잖았다. 만약 커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어린 아이 같은 엷은 푸른색 눈동자와 동그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커비는 누가 거칠게 나오면 자신도 똑같이 험상궂게 찡그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커비는 상대가 뭘하든지 겁내거나 외면하지 않고 흐릿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위협하듯 천천히, 그리고 아주 짧게 말했다. 그 방법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존이 아는 사람 가운데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고 말하지 않는데도 그처럼 무서워 보이는 사람은 커비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집에 가기 전 마지막 단어 바꾸기를 했고, 커비가 최고 점수를 받았다. 마지막 세임은 리프먼도 칭찬할 정도였다.

리프먼이 말했다.

"기본이 됐어. 아주 좋아. ----."

기본이 됐다 라는 말은 리프먼이 가장 좋아하는 최상급 표현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 이 표현을 사용했다. 존과 커비는 리프먼이 그 표현을 쓰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 셜록 홈즈가 왓슨 박사를 모욕 할 때 항상 쓰던 표현처럼 리프먼이 자신들을 아무것도 모른다고 놀리는 줄 알았었다. 그렇지만 리프먼은 그 의미를 분명히 밝혔고, 그 말은 인생 전반에 관련하여 기초가 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건 리프먼의 바램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들, 또는 사회에 의지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의 희망이었다.

리프먼은 자기 주장이 강했지만 그의 앞에서 생존주의자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다.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리프먼만큼 충분히 기본이 되어있지 않았다. 리프먼은 생존주의자들이 지나치게 과학 기술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냉동 건조 식품, 정수기, 태양열 교환기 그리고 자동화기 등이 그 예였다. 리프먼에게 기본이 되어 있는 사람은 칼만 가지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본이 됐어! 커비, 생각지 않게 승자가 되었구나."

다시 리프먼이 소리쳤고 존에게 낄낄대며 ", 어서 지갑 꺼내. 파이 먹을 시간이야."라고 말했다.

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존은 게임이 끝났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다. 그들은 세븐 일레븐에 우르르 몰려가 파이를 집어들었다. 항상 그랬듯이 커비는 사과 파이를 집었고, 존은 딸기 파이를, 리프먼은 레몬 파이를 골랏다. 존과 라프먼은 문 쪽으로 가고 있었고, 커비는 내셔널 인콰이어러 지(미국의 주간지:옮긴이)의 표지를 훑어 보고 있었다.

"세상에, , 이런 걸 왜 사?"

리프먼이 물었다.

"?"

"이 딸기 파이 말이야. 눈 씻고 찾아봐도 딸기는 안 보이는데."

존이 리프먼에게 파이를 먹어 보라고 말하려는 순간 자동차 한 대가 커비의 차 옆에 멈추는 것이 보였다. 차 뒷유리창에 달린 커다란 파이오니아 스피커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록 음악이 시끄럽게 나오고 있었다. 세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셋 중에서 키가 제일 작았는데, 키가 177센티미터인 존보다 조금 작아 보였지만 어깨가 떡 벌어져 있었다. 세 명 모두가 바랜 빛깔의 리바이스 청바지와 청재킷을 입고 있었고, 옆을 치켜 깎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덩치가 제일 큰 남자는 키가 185센티미터 정도 돼 보였고 다른 두 사람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흉할 정도로 못생겼고 여드름 난 얼굴은 앞머리로 덮여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제일 앞에 서서 걸어왔다.

"이 멍청이들이 우리 동네에서 뭐 하는 거지?"

존은 그들이 자신과 리프먼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그것이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리프먼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 우리보고 하는 말이에요?"

리프먼이 놀라우리만치 험악하게 대꾸했다.

존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리프먼을 알아 왔다. 그들의 홈룸 시간은 체육수업이었고 해병대 출신의 체육 선생은 라커룸을 같이 쓸 사람을 지정해주면서 그들의 이름을 소리질러 불렀다.

"리프먼, 로버츠는 238."

그렇게 리프먼을 안 이래 존은 리프먼이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리프먼은 자신의 키가 185센티미터라고 주장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고 몸도 마른 편이었다. 그의 신장은 학교의 불량배들을 기죽일 수는 있겠지만 지금 뉴버그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코방귀를 뀌며 껌을 몇 번 씹더니 리프먼을 위아래로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재빨리 리프먼이 들고 있던 파이를 낚아챘다. 그는 파이를 들고 의기양양해 했다. 여드름이 코웃음치며 동조하고 있었다.

제일 큰 덩치가 리프먼 쪽으로 돌아섰다.

"다시 찾고 싶지, 이 겁쟁아?"

리프먼은 대답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덩치가 껌을 소리 내어 씹으며 웃고 있었다. 덩치는 손을 뻗어 리프먼의 머리에 파이를 쑤셔 넣었고, 리프먼은 피하다가 땅 위로 넘어졌다.

"잘했어."

여드름이 낄낄댔다.

리프먼은 천천히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고 파이 조각을 떼내더니 그걸 덩치의 발밑에 던졌다. 파이 속에 들어 있던 레몬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 커비가 편의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평소에 불량배들에게 했던 것처럼 거칠게 행동했다.

"무슨 문제 있어?"

커비가 평소보다 2옥타브나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커비는 불량배들을 밀치고 지나가서 자동차 문을 열었다. 덩치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열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커비는 그들보다 더 세 보였다. 존은 뒷좌석에 올라탔으나 리프먼은 놀랍게도 조수석에 앉았다. 리프먼의 행동에 커비도 놀랐다. 커비는 자신의 차를 거의 운전하지 않았었다. 리프먼이 속력을 내며 거칠게 차를 모는 동안 커비는 조수석에 앉아 창문을 열고 소리지르기를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커비가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후진하는 동안 리프먼은 덩치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리프먼을 향해 씹던 껌을 뱉었고, 껌은 조수석 창문의 한가운데데 달라붙었다. 리프먼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보임으로써 그에게 앙갚음을 하자 덩치는 리프먼을 노려보았다. 커비가 없었더라면 또 다른 소란이 있었을 것이다. 커비가 북쪽으로 차를 모는 동안 리프먼은 뿌루퉁해져 창문에 붙어 있는 껌 덩어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존은 왜 리프먼이 괴로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덩치와의 사건을 혼자 해결하지 못하고 커비의 도움을 받은 것이 그의 기본적인 인 원칙과 위배되기 때문에 리프먼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커비는 포틀랜드로 가기 위해 99번 돌를 탔다. 뉴버그 계곡을 벗어나 브리드힐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존은 계곡 아래 작은 마을에서 반짝이는 빛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불이 꺼졌다. 존이 어 하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들리면서 차가 덜컹댔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돌풍이 몰아닥쳤다.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바람에 휩쓸려 보호대 역할을 하고 있는 큰 바위 근처까지 자동차가 밀려났다. 커비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자동차가 계곡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말을 잃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자동차 주위를 휘감았다. 존은 길 건너편에 전나무가 두 동강 난 채 나동그라진 것을 보고 무서움을 느꼈다. 뽑힌 나무들이 쓰러지면 여기까지 날아올까? 차가 불어오는 돌풍에 뒤뚱거리자 존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안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는 언덕 뒤에서 깔때기 구름이 서쪽으로 움직이며 나타나 순식간에 농지를 뒤덮고 곡식과 나무들을 뒤흔드는 광경을 보았다. 존은 17살이었고, 오레곤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왔다. 그는 지금까지 오레곤에 이런 폭풍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깔때기 구름이 일으킨 먼지와 파편들이 길을 메우고 있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존은 이 돌풍이 도로를 따라 직선으로 진행되면 고속도로는 끊어지고, 돌풍은 동쪽으로 범위를 넓혀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쪽에 자리한 농가들은 돌풍의 진로에서 약간 북쪽으로 비켜나 있었다. 돌풍은 뉴버그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돌풍은 마을 어귀의 가축 사육장을 휩쓸고 지나가며 세 채의 온실을 산산조각내더니 공중으로 솟구쳐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돌풍이 다시 땅 위로 몰려와 포드 자동차 전시장을 덮쳐 에어로스타와 머스탱을 날려 버렸다. 그런 다음 깔때기 구름이 다시 몰려와 소용돌이치더니 마침내 사라졌다.

존과 커비, 리프먼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바람이 잦아지며 주위가 조용해지자 그들은 차 밖으로 기어 나왔다.

"대단한데."

리프먼이 계곡의 피해를 살피면서 말했다.

"얘들아, 포드 전시장에 가보자."

"그만둬, 리프먼."

커비가 말을 막았다.

"길을 보라구."

존은 뉴버그로 가는 길을 돌아보았다. 길은 뽑힌 나무들과 파괴된 온실의 잔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파편들이 길 위에 많이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큰 나무들을 뽑히지 않고 서 있었다. 그들은 자동차에 다시 올라탔고, 모두 흥분되어 돌아오는 동안 계속해서 그들이 본 것에 대해 떠들었다.

드디어 그들이 언덕을 모두 올라와 비탈을 내려다보니 울창한 숲이 도로 중앙에 생기면서 길이 1차선 도로 2개로 변해 있었다. 마치 청록색 터널을 지나 차를 모는 것 같았다. 갑자기 커비가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췄다. 리프먼은 거의 자동차 앞유리에 머리를 부딪힐 뻔했고, 존은 손에 음료수를 들고 있다가 옆으로 굴렀다. 존은 불평을 하다가 밖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불과 3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길이 끝나 있었다.

아스팔트는 수평으로 깨끗하게 잘려있었다. 그리고 길이 있어야 할 곳에는 숲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것들은 뉴버그로 가는 길에 나 있던 나무들과는 달라 보였다. 2차림(원시림 파괴 후 심은 재생림:옮긴이)인 더글라스 전나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전나무보다 둘레가 서너 배는 더 되 보이는 거대한 나무들이 서 있었다. 존은 자동차 선 루프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머리 위로 뻗어 있는 나무의 거대한 밑둥치부터 꼭대기까지를 살폈다. 돌풍이 도로를 이렇게 바꿔 버린 건가? 전에도 이 나무들이 있었는데 전나무에 가려져 있었던 건가?

커비와 리프먼도 차 밖으로 빠져 나왔고, 리프먼은 근처에 서 있는 나무를 발로 툭툭 찼다.

"이건 진짜야, 하지만 믿을 수 없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된거지-?"

그가 중얼거렸다.

리프먼은 갑자기 커비가 큰 소리로 훌쩍거리는 바람에 말을 중단했다. 존은 커비가 무릎을 꿇고 양팔을 벌린 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하느님께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리프먼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며 커비의 손을 얼굴에서 떼내려고 하였다.

"가까이 오지마!"

커비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 보지 못했어? 예수의 재림이 임박한 거야. 선한 자는 하늘로 올라가게 되지만 나는 아직 부족해."

"그러지 마, 커비. 이건 산사태가 났던가 무시무시한 돌풍이 불어닥친 것뿐이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커비가 계속 훌쩍이자 리프먼이 커비를 향해 흙을 걷어찼다. 그러더니 숲 가장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어두운 숲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존은 커비에게 다가갔지만 한편으로는 망설여졌고, 무섭기까지 했다. 리프먼은 무신론자였으나 존은 기이한 일들을 통해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있었다. 짧은 순간 벌어진 기적의 어떤 힘이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을까? 잠시 후 되돌아온 리프먼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큰애기, 이제 그만 좀 울어. 난 이게 예수의 재림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어. , 내가 돌아올 때까지 커비를 잘 지켜봐."

존이 싫다고 말하기도 전에 리프먼은 뉴버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리프먼은 어둠이 내릴 무렵 숲-몇 시간 전만 해도 있지도 않았던 그 숲으로 모습을 감췄다.

"리프먼, 난 이번 일만큼은 네 말이 맞았으면 좋겠어. 네가 옳기를 신께 빌고 있어."

존이 속삭였다.

 

13. 비행기 연착

비행팀장은 그들이 항로를 벗어났으며, 자신의 비행기 나침반이 고장났다는 것을 무선으로 알렸다. 어뢰를 탑재한 다른 네 대의 비행기 조종사들도 계기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잠시 후 통신이 두절되었다. 비행기들이 사라진 후 그 지역을 수색하기 위해 13명의 승무원을 태운 마틴 마리너호가 급파되었다. 수색기 또한 두 번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로저 코크랜, 사라진 것들 : 버뮤다 삼각주의 비밀

하와이 호놀룰루 토요일, 오후 1011(알류산-하와이 시간대)

조교수인 에밋 퍼글리시는 도착 시간 안내 모니터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공항은 한적했으나 그는 늦을까봐 조바심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걸리적거렸다. 그는 재빨리 와 박사가 탄 비행기편을 모니터에서 검색했다. 에밋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가 도착하려면 아직 몇 분 더 있어야 했다.

출구 번호를 적은 에밋이 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았다. 캐롤리 첸-슬레이터 교수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캐롤리는 어떤 것에서나 절제되어 보이지 않았는데 웃는 것이나 성격, 옷 입는 취향 모두가 그러했다. 지금은 번쩍거리는 꽃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옷이 야하다고 생각할 텐데 그녀는 샌들과 머리 한쪽에도 커다란 꽃을 꽂고 있었다. 캐롤리의 의상에 대한 취향은 야한 것을 넘어서 서커스 단원 복장처럼 요란할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퍼글리시 박사."

그녀가 격식을 차려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캐롤리."

에밋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와 캐롤리는 학과가 다르기는 했지만 같은 대학에 재직하고 있었고, 그녀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배웅 온 거예요, 마중 나온 거예요, 아니면 어디 가는 거예요?"

에밋은 거짓말을 할까도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너무 심한 행동이었다.

"왕 박사를 마중 나왔어요. 본토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시거든요."

캐롤리는 즉시 에밋에게 아부한다며 야유를 보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에밋이 변명하듯 말했다.

"왕 박사가 차를 오랫동안 주차장에만 세워두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또 그녀는 가족이 없으니까-"

"친구도 없을 거구요."

"난 친구예요."

"종신 교수직을 얻으려고 비굴하게 구는군요."

캐롤리가 따끔하게 말했다. 에밋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웬일이세요?"

"오빠 배웅하러요. 오빠는 몇 주일 동안 본토에 가 있을 거예요. 저쪽에 있는 사람이에요."

캐롤리가 가리키는 쪽을 에밋이 바라보니 그녀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제복 차림의 남자가 발권대 앞에 서 있었다.

"오빠가 물건들을 PX에서 싸게 사 주기 때문에 이러고 있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캐롤리. 이젠 출구로 가 봐야겠어요."

"같이 가요."

에밋은 마지못해 종잡을 수 없는 첸-슬레이터 박사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왕 박사를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캐롤리를 떼놓을 방법이 달리 없었다.

"캐롤리, 저 혼자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요."

"은밀하게 아부하려구요?"

"난 그저 그녀를 돕는 것뿐이에요, 만약 우리 둘이 함께 있는 것을 왕 박사가 본다면 우리가 데이트나 하는 걸로 생각할지도 모르잖아요."

캐롤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여자 친구로는 적당하지 않나 보죠?"

에밋은 캐롤리가 농담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그녀에게 조금은 끌리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캐롤리는 키가 165센티미터 정도였고, 동그란 얼굴은 짧지만 숱이 많은 갈색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었다. 옷차림이 아니라면 그녀는 쉽게 눈에 띄는 형이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에밋이 변명하듯 말했다.

"왕 박사가 교수들끼리 개인적인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죠."

"섹스를 말하고 있군요."

"관계에요. 관계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죠-"

에밋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그 순간 아주 커다란 굉음이 터미널을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놀라 숨을 죽였고 아이들은 울기 시작했다.

"비행기 소리였어요?"

캐롤리가 창가로 갔다. 에밋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늘은 맑은데요."

그녀가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비행기도 보이지 않았다. 에밋은 더 이상 궁금해 하지않고 왕 박사가 나올 출구를 찾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도착 시간이 20분이나 지났을 때 도착 시간 안내 모니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에밋은 시간 대신 연착이라고 바뀐 모니터 앞에 모여든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30분 후 엄청난 재앙의 실체가 드러났다.

 

14. 해일

바다는 사막으로 변하고 물고기는 바닷속에서 죽어 갈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

플로리다주 네이플즈시 근해 일요일, 오전 312(서부 표준시)

엄청난 굉음에 카르멘과 론은 잠에서 깨어났다.

"저길 봐요!"

카르멘이 소리쳤다.

론은 카르멘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론은 놀라며 마음속으로 해도를 그려보았다. 그들이 있는 지점에서 수백 킬로미터 이내에는 섬이 없었다. 그가 항로를 잘못 잡았다고 하더라고 지도에 나온 섬 중의 하나에 이를 만큼 멀리 나왔을 리 없었다. 여러 생각이 교차되는 가운데 그는 눈앞의 섬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섬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니, 섬은 빠른 속도로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때 마침 아이들이 선실 밖으로 나왔다.

"저게 뭐에요?"

로자가 물었다.

", 섬이네. 저기에 가는 거예요?"

"저기에 가는 거예요?"

크리스가 따라 했다.

", 어떻게 된 거지?"

섬은 분명히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원래 크기의 반 정도만이 눈에 보였다.

"하늘을 봐요."

카르멘이 말했다.

구름이 무서운 속도로 섬을 뒤덮고 있었다. 구름만 아니라면 사방이 잘 보일 정도로 맑은 밤이었다. 갑자기 번개가 치더니 천둥이 울렸다. 구름이 배 쪽으로 몰려왔다. 천둥소리에 귀가 멍멍해졌고, 번개는 하늘을 찢을 듯한 기세로 번쩍이고 있었다.

", 꼭 레이저 쇼를 보는 것 같아."

크리스가 천둥 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너무 가까워요."

카르멘이 론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

갑자기 강풍이 불어닥쳤기 때문에 카르멘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그제서야 론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여보, 로자와 크리스에게 구명조끼를 입히고 당신도 얼른 입어. 그리고 선실로 들어가! 빨리!"

"왜 그래요?"

론은 망설였지만 다가오는 위험으로부터 숨을 곳은 없었다.

"해일이 배를 덮칠 것 같아."

로자와 크리스는 꼼짝하지 못했고, 카르멘은 재빨리 아이들을 선실로 내려보냈다. 바람은 점점 더 강해졌고 거세진 파도에 앙트르프르네호는 요동을 쳤다. 론은 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배에 시동을 걸었다. 한없이 길게 느껴지던 몇 초가 지나 시동은 걸렸지만 엔진은 이런 엄청난 해일 속에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론은 망설였다. 머리로는 해일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과 새로 얻은 가족의 생명이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마침내 그는 키를 오른쪽으로 돌려 섬으로 향했다.

카르멘이 구명조끼 2개를 가지고 왔다. 크리스와 로자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선실 밖을 조심스럽게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론도 많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카르멘은 잠깐 주위를 둘러본 다음 론을 바라보았다.

"틀린 항로를 가는 건 아니죠?"

"만약 해일이 밀려오면 그 속을 뚫고 나가야 해. 만약 해일을 피해 도망친다 해도 곧 파도에 휩쓸려 물속에 잠겨 버릴 거요. 파도가 우리를 덮친다면 배는 뒤집히게 될 거야."

"해일 속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어요"

"그 방법밖에는 없어."

론은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말할수록 목소리가 더 떨려 왔다.

"정말, 이게 최선의 선택이야."

카르멘은 론이 구명조끼를 입는 동안 키를 꽉 잡고 있었다. 론은 선실로 내려가 아이들이 구명조끼를 제대로 입었는지 확인한 다음 아이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다시 론이 키를 잡았고 카르멘은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난간을 힘주어 잡았다. 바람은 거세졌고 섬 위에 떠 있던 구름이 별을 가렸다. 이제 번개는 조금 뜸해지고 있었다. 계속되다가 간간이 들리는 천둥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론은 다음 천둥소리를 기다리며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고요한 별빛으로 가득 찼던 밤이 잠깐 사이에 폭풍우 속의 악몽으로 변해 있었다.

론이 두리번거리며 섬을 찾는데, 파도가 뱃머리에 몰아치면서 론과 카르멘은 물에 흠뻑 젖었다. 배는 계속되는 파도에 뒤뚱거렸고 론은 방향을 잡기 위해 애썼다.

"카르멘, 섬이 보이오?"

"저기 있는 것 같아요."

론이 고개를 들었지만 파도와 물방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론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 확신했다. 파도가 다시 뱃머리를 쳤고 론은 해일이 배를 침몰시키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카르멘이 소리쳤다.

"이럴 수가! , 저것 좀 봐요!"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론의 눈에 띄었다. 엄청난 파도가 그들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 모두 뭔가 잡아!"

배 안으로 물이 들어왔다. 배는 기우뚱거리기 시작했고, 론과 카르멘은 더 큰 파도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키를 더 세게 잡았다. 배가 파도와 엔진의 힘 사이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뱃속이 뒤틀리며 속이 울렁거렸다. 뱃머리는 점점 더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에 론은 배가 뒤집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는 파도 속을 뚫고 똑바로 나아가겨고 애썼지만 앙트르프르네호는 파도와 바람에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론이 겨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파도가 밀려 들었다.

파도가 그들 위로 덮치며 앙트르프르네호를 뒤흔들었다. 론이 키를 놓치고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론은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비명소리를 들었다. 공포에 질린 가운데 론은 그것이 금속성의 소리라는 걸 알았다. 앙트르프르네호의 돛이 부러지고 있었다.

론은 파도에 몸을 맡겼다. 헤엄치려고 할수록 물속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에 그는 구명조끼의 부력에 의지해 물 위에 떠 있기로 했다. 파도가 조금 잠잠해지자 그는 발장구를 치며 수면 위로 올라왔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폐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물에 잠겼고,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론은 자신의 폐에 물이 차서 잠시 후면 죽게 된다는 생각에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고래가 물 위로 솟는 것처럼 그는 바다 위로 떠 올랐다. 그가 공기를 들여 마시는 순간 다시 파도가 몰아치면서 바닷물이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장구를 쳤고, 기침을 하며 물을 토해냈다. 폐와 코가 화끈거렸다.

계속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도 그는 다른 식구들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찾지 못했들 뿐 가족이 가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절망스러웠다. 왼쪽에서 뭔가 하얗게 반짝였다. 그는 파도가 밀려오기를 기다렸다가 반짝이는 것이 뭔지 보기 위해 발을움직여 파도를 탔다. 앙트르프르네호의 선체가 저만치에서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배를 향해 헤엄쳐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크리스도, 카르멘도, 로자도 없었다.

론은 마침내 파도에 몸을 실어 배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배는 뒤집혀 있었지만 보기에는 멀쩡했다. 아직 식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살아 있어야만 해. 살아 있어야 해! 그는 이미 아내를 잃은 경험이 있었고, 다시 아내와 아이들까지 잃는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론이 고물에 올라가 키를 잡으려는데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이들이 아직도 선실 안에 있었다.

론은 물속으로 잠수하려고 했지만 구명조끼 때문에 물 위로 자꾸 떠올랐다. 그는 조끼를 채우고 있던 고리를 풀어 버렸다. 신발과 옷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는 신발과 티셔츠를 벗어버신 다음 물속으로 잠수하여 뒤집힌 배의 갑판으로 갔다. 선실 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문틈을 잡고 문 안쪽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는 바로 눈앞에서 다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려 밑으로 내려갔다. 론이 표면 장력을 뚫고 선실에 들어가 보니 오염됐지만 따뜻한 공기가 남아 있었다. 불빛도 보였다. 누군가 부표등을 켜 놓고 있었다. 로자가 거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자는 울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저씨, 크리스가 다쳤어요.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크리스를 여기에서 데리고 나갈 수가 없어요."

론은 크리스를 살펴보았다. 로자가 의식을 잃은 크리스의 머리를 물속에 빠지지 않게 받치고 있었다. 론은 물살을 가르고 다가갔다. 크리스의 이마 위에 상처가 크게 나 있었고,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상처로 들어가고 있었다. 론은 크리스의 손목을 잡았지만 맥박이 자신의 것인지 크리스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론은 크리스의 몸을 흔들고 말을 시키며 아들을 깨우려 했다. 그는 혼수상태가 계속될수록 크리스의 상태는 악화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를 살리려면 폭풍우가 심해도 배 밖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해야 했다. 눈에 눈물이 고였고, 론은 로자가 얼마나 난감했을지 충분히 짐작했다. 로자는 혼자 물 밖으로 헤엄쳐 나올 수도 있었지만 그러려면 크리스를 두고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크리스를 데리고 나오려고 했다면 크리스는 그 자리에서 익사했을 것이다.

공기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약간의 산소가 남아 있었지만 론과 로자는 점점 숨을 거칠게 쉬기 시작했다. 크리스가 물을 먹게 되더라도 데리고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아내가 크리스를 데리고 참가했던 유아 수영 강습에서 아기들이 물속에 잠길 경우 반사적으로 호흡을 멈춘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 반사작용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을까? 크리스의 뇌가 물속에서 견딜 수 있을까? 크리스가 30초만 호흡을 멈출 수만 있다면 론은 다들 밖으로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로자, 물속을 더듬어보면 테이프가 있을 거야. 만물장 속에 넓은 테이프가 들어있어."

"만물장은 그들이 어떤 물건을 둘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할 때 찾는 서랍장이었다. 론은 서랍장에 두세 가지의 테이프를 넣어 두었는데 대부분이 물에 젖어도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로자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가 구명조끼를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잠수하는 동안 론은 빨래 집게를 찾기 위해 크리스를 데리고 옷 건조대가 붙어 있는 선실 끝에 다녀왔다. 로자는 아직도 물속에 있었는데 물건을 가지고 올라왔다가는 불에 비추어보고 던져버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로자의 머리가 다시 물 위로 불쑥 올라왔고 그녀는 손에 은색 테이프 뭉치를 들고 있었다.

"찾았어요."

그녀는 론에게 테이프를 건넸다. 그녀는 크리스를 구하는데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로자가 크리스의 구명조끼를 벗기는 동안 론은 크리스를 간신히 받쳐 들고 있었다. 그런 다음 론은 간신히 테이프를 길게 잘라냈지만 접착 면이 서로 붙어버렸다. 론은 할 수 없이 다시 테리프를 잘랐다. 공기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산소는 아까보다 더 희박해져 있었다. 이제 산소는 얼마 가지 않을 것이다. 론이 테이프 때문에 애를 쓰는데 로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칼을 찾아가지고 왔다.

론은 로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칼로 테이프를 자른 다음 그걸 크리스의 입에 붙였다. 크리스는 코로 숨쉬기 시작했고,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렸다.

"됐어, 로자. 이제 가거라."

망설이는 로자의 눈빛에 근심이 가득했다.

"저도 도울게요."

로자가 말했다.

"밖에 나가서 기다리다가 크리스를 잡아끌어 올리렴."

로자는 공기를 들여 마신 다음 물속으로 들어갔다. 론은 그녀가 물 위로 나갔을 즈음해서 크리스를 입구로 데려갔다. 그는 크리스를 선실 문을 거쳐 키가 있는 쪽으로 해서 물 위로 내보내야 했다. 조금만 헤엄치면 됐지만 크리스가 의식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론은 한 번에 끝내기 위해 크리스의 코를 빨래집게로 집은 다음 자신도 여러 번 공기를 들여 마셨다. 크리스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려 숨을 쉬려고 버둥댔으나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이를 물속으로 밀어 넣고 그 뒤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크리스의 몸은 계속 물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는 한손으로는 문틀을 잡고 다른 손으로 크리스의 티셔츠를 잡아당길 수 있었다. 론은 크리스의 머리가 문틀에 부딪히지 않도록 주위를 치우고 크리스의 몸을 낮추어 잡아당겼다. 크리스는 처음에는 천천히 문가로 오더니. 점점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론은 문틀을 놓고 두 손으로 크리스를 밑으로 밀었다. 론이 너무 세게 미는 바람에 크리스의 몸이 입구에 끼었다. 론은 크리스가 움직일 수 있도록 방향을 바꾸려고 했다. 벽에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문틀에 크리스의 이마와 코가 부딪히면서 빨래집게가 떨어져 나갔고, 크리스는 발작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미친듯이 뭔가 잡으려고 버둥댔다. 론은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하다가 요동치는 아이의 발에 배를 걷어 채였고, 폐에 남아 있던 공기가 터져 나왔다. 숨을 쉬려면 수면 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시 선실로 내려가 오염된 공기나마 들여 마셨다. 크리스의 몸부림에 물살이 일렁였다. 공기가 더 필요했지만 그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크리스의 몸은 아직도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아이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때 갑자기 크리스가 빠른 속도로 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론은 놀랐지만 숨이 가빴기 때문에 물 위로 올라와 공기를 들여 마신 다음, 다시 잠수해서 크리스를 뒤쫓아갔다.

밖으로 나온 론의 폐에 바다 내음이 들어찼다. 론은 카르멘이 로자와 함께 크리스를 배 위로 끌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론은 물속에서 아들을 밀어 올린 뒤 조심스럽게 배 위로 올라왔다. 배는 해일의 영향으로 아직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바람은 잔잔해져 있었다. 론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어두웠고 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로자는 크리스를 옆으로 끌어당겼고, 카르멘이 크리스의 심장을 두 손으로 눌렀다. 잠시 후 크리스가 다리를 움직였다. 론의 몸에 안도감이 퍼져나갔다. 아이가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이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카르멘이 그녀의 구명조끼를 벗어 크리스에게 입혀 주눈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론은 몸서리를 쳤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했다.

론은 잠시 후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숨을 멈춘 채 물건 상자를 열었다. 비상식량과 물병이 상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는 물병 2개를 들어 한 병은 문 안쪽에 놓고, 다른 하나는 물 위로 끌어 올렸다.

"여보, 이걸 받아. 좀 더 가져와야겠어."

론은 두 번째 물병을 쉽게 찾아가지고 왔다.

", 구명보트는 있어요? 찾을 수 있겠어요?"

구명보트는 선실 앞 뱃머리에 매달려 있었다. 보트에는 비상 장비와 차양이 갖추어져 있었다. 론은 망설였다. 아직도 보트가 배에 남아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앙트르프르네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잠시나마 배 위에서 안전하게 있지만 가족들을 위해 음식물과 물을 가져와야만 했다. 구명보트를 풀어내려면 물속에서 거꾸로 매달려 작업을 해야 할 것이고, 잠수도 여러 번 해야 할 것이다. 선실로 가서 먼저 장비를 챙기기로 결정하과 론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데 카르멘이 그를 불렀다.

", 로자한테 줄 구명조끼도 있어요?"

론은 너무 부끄러웠다. 크리스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는 카르멘의 아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론은 다시 잠수했고 선실 안에서 물에 떠다니는 구명조끼를 찾아들고 나왔다. 구명조끼의 부력이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에 그는 몇번이나 밖에서 공기를 들여 마신 후에야 구명조끼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구명조끼를 건네 받는 카르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론은 자신을 용서했다.

기진맥진했지만 론은 구명보트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론은 숨을 들여 마신 다음 뱃머리 쪽으로 헤엄쳐 갔다. 구명보트가 아직 배에 매달린 채 근처에 있었다. 보트는 아직 배에 매달려 있었지만 줄이 느슨해져 있었고, 고정 장치는 이미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는 보트의 특징을 잘 살핀 다음 물 위로 나왔다. 그는 완전히 지쳐 있었기 때문에 실수를 연발하고 있었다. 쉬지 않으면 더 이상 잠수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카르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다시 해일이 밀려오고 있어요."

론은 있는 힘을 다해 배 고물로 가서 키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크리스는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었고 카르멘과 로자는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들었다. 처음 파도보다는 덜했지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위가 어두웠기 때문에 파도는 진한 초콜릿색으로 보였고 섬에서 날아 온 잡동사니들이 - 통째로 뽑힌 나무까지 - 파도에 섞여 날아왔다. 앙트르프네호가 파도에 밀려 위로 솟구치는 것 같더니 뒤집혔다. 그 순간 배에 뭔가 강하게 부딪치면서 선체가 심하게 흔들렸고, 잠시 후 배가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크리스의 몸이 미끄러지자 카르멘과 로자가 필사적으로 그의 구명조끼를 잡았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배가 산산조각이 났다. 엄청난 힘이 선체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그들 위로 진흙과 나뭇잎과 다른 파편 덩어리들이 쏟아졌다. 거대한 힘이 다시 배를 뒤흔들었고, 론은 역류되는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론은 물살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갑자기 파도에 밀려 온 나무가 앙트르프르네호 위로 떨어지면서 배가 두 동강이가 났다. 배의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다.

론은 부서졌지만 아직 구명보트를 달고 있는 앙트르프르네호로 헤엄쳐 갔다. 배는 아주 빠른 속도로 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배를 부숴 버린 나무가 론과 구명보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론은 물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물속에 잠긴 나무에는 아직도 많은 가지들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론은 더 깊이 감수해야 했다. 배가 물에 잠기면서 다시 뒤집어졌기 때문에 론은 배 고물까지 쉽게 갔지만 배가 빠른 속도로 가라앉으면서 그도 물살에 빨려들고 있었다. 그는 헐렁하게 풀여 있는 중에 매달려 고리를 풀었다. 구명보트가 서서히 펴지고 있었다. 론은 능숙하게 팽창 고리를 잡아당겼고, 압축 공기가 보트 속으로 퍼졌다. 공기가 다 차자 보트는 수면 위로 불쑥 튀어 올라왔다. 론은 물속에 드리워져 있는 줄을 잡으려고 했지만 손에 닿지 않았다. 겨우 줄을 잡은 그는 줄을 잡아당겨 물 위로 올라왔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멀리 밀려와 있었다. 폐는 심하게 아팠고, 그는 이리저리 몸을 버둥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트를 물 위로 끌고 올라올 수 있었다.

두려움이 가라앉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카르멘이 아이들을 데리고 구명보트 쪽으로 오고 있었다. 론은 탈진하여 물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아직 거칠었고 파편들이 섞인 파도가 그의 얼굴을 쉴새 없이 때렸다. 그는 몸을 돌려 보트 쪽으로 갔고 다른 식구들도 보트로 왔다.

"로자가 다쳤어요, ."

카르멘이 말했다.

"로자를 보트에 올리려고 하는데 도와줘요."

론은 카르멘 옆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로자에게 헤엄쳐 갔다.

"괜찮아? 어디를 다쳤니?"

"허리요, 나무에 부딪힌 것 같아요."

8각형으로 된 보트는 공기로 부풀린 4개의 기둥이 차양을 받치고 있었다. 론은 카르멘이 그랬던 것처럼 로자를 보트 위로 조심스럽게 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결국 론은 로자를 거칠게 밀어 올려야만 했다. 통증을 참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로자는 보트 안으로 털썩 나가떨어졌고, 그녀는 누운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보트 끄트머리에 매달려 잠시 쉬고 있던 론을 카르멘이 끌어 올렸다. 론의 무게 때문에 보트가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파편이 섞인 바닷물이 로자 위로 밀려 들어왔다. 카르멘이 론의 엉덩이를 잡고 그를 다시 끌어올렸다.

보트는 심하게 흔들렸지만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따금씩 파도가 보트 안으로 밀려 들어왔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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