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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노트(Les Thanatonautes) 2

 42. 범죄의 미궁으로 차츰 빠져들다

 약 두 주일 동안, 나의 친구였으나 이제는 친구로 여기고 싶지 않은 라조르박 교수에게서 타나톤인가 뭔가 하는 것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고백하건대, 라울에 대한 나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우상이었던 라울은 자기의 환상을 현실화하기에 이르렀고 나는 그것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를 경찰에 고발할 생각까지 했다. 만일 그가 인간 마르모트들을 상대로 (살인적인) 실험들을 실행한다면, 그를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옛정을 생각해서 참았다. 라울이 주장하는 것처럼 국가 원수의 지원을 받아 냈다면 그것은 그가 성공을 장담할 만한 무엇인가를 대통령에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젊은 간호사가 했던 (우리에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라는 말도 줄곧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데 무엇 때문에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시안화물이나 쥐약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이미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몸이고 내 직업윤리의 기본은 사람을 살리는 데 있지 사람을 죽이는 데 있지는 않았다.

 라울이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왔을 때 나는 더 이상 그와 그의 실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뭔가가 나를 만류하였다. 우리의 오랜 우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아직도 내 귓전을 맴도는 그 간호사의 말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라울이 나의 단실(短室) 아파트로 찾아왔다. 그는 더 늙어 보였고 눈길에는 신경과민의 기색이 역력했다. 며칠 전부터 잠을 못 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유카리 향이 나는 (비디)라는 가느다란 담배를 몇 모금 만에 한 개비씩 잇달아 피우고 나더니 말문을 열었다.

 "미카엘, 지금은 나를 심판하지 말게."

 "나는 자네를 심판하지 않아. 자네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이해를 못 하고 있을 뿐이야."

 "개인 라조르박은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그 사업이야. 그 일은 우리 인류를 한 단계 끌어올릴 거야. 우리 세대가 감당할 만한 도전이지. 내가 자네에게 충격을 준 건 사실이야. 하지만 모든 선구자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충격적인 사람들로 받아들여졌어. 작가이자 의사인 라블레를 생각해 봐. 그 쾌활한 작가 라블레가 밤마다 공동묘지에 가서 시체를 파내고 인체 해부를 연구해서 의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지. 당시로 보면 그런 행위는 중죄감이지. 그렇지만 그 양반 덕분에 우리는 혈액 순환을 이해하게 되었고 수혈을 통해서 많은 목숨을 구해 냈잖아. 미카엘 자네가 그때에 살았다 치고, 라블레가 자기 야간 작업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면 자네는 뭐라고 대답했겠나?"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신중히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나는 좋다고 했을거야. 왜냐하면 그가 연구한 사람들은 이미 죽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자네가 말하는 타나토노트들은 마르모트일 뿐이야. 그들은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자네의 모든 실험은 그들을 저승으로 보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그래, 안 그래?"

 라울은 떨리는 긴 손가락으로 자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불꽃이 일어나지 않았다. 손이 너무 떨려 라이터를 켤 수 없었던 것이거나 라이터돌이 다 닳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라울은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말했다.

 "자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야. 처음엔 우리에게 타나토노트가 다섯 명이 있었어. 그런데 둘은 벌써 죽었지. 내가 의사가 아니라서 그들을 소생시킬 수 없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죽었어. 나는 마르모트를 동면에 빠뜨리고 그것들을 살려낼 수는 있어. 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마취제를 정확하게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지. 그래서 다시는 그렇게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아서 자네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를 했던 거라네. 상상력도 풍부하고 재주도 있는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나는 그에게 내 성냥을 내밀었다.

 "사람들을 마취시키는 것은 분명히 내 일이야. 그러나 사람들을 코마에 빠뜨리는 건 전혀 다른 일이지."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방안을 성큼성큼 돌아다녔다.

 "다시 생각해 보게. 생각을 혁신적으로 바꿔 보란 말일세! 미카엘, 나에겐 자네가 필요해. 자네,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자네를 믿으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래, 그날이 온 거야. 미카엘, 자네가 필요해. 자네의 도움을 부탁하네."

 물론 나는 둘이서 어리석은 자들을 물리치던 옛날의 그 좋은 시절처럼 그를 돕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리석은 자들과 맞서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싸늘하고 막연한 어떤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말을 꺼내기만 해도 사람들은 성호를 긋는 판이었다. 그런데 라울은 자기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있는 가련한 사람들을 저승으로 보내고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아버지 때문에 비롯된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겠다는 자기의 오만한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런 엄청난 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내 친구 라울)이라고 부르던 그 사람이 자기에게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있었다. 그는 과학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미친 놈!) 하고 소리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라울은 맏형이 막내를 바라보듯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 이런 중국 격언 아나? (질문을 하는 사람은 잠깐 동안 바보처럼 보이지만,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 바보로 남게 된다)는 거 말일세."

 나는 물러서지 않고 되받았다.

 "히브리어로 된 경구 중에는 그보다 더 유명한 게 있지. (네 이웃을 죽이지 말라)는 게 그거야. 십게명 중의 하나지. 성서에 나와 있어."

 라울은 서성거림을 멈추고 내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거미 같은 손은 미지근하고 축축했다. 나를 더 잘 설득해 볼 양으로 라울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십계명에 하나를 첨가하여 열한 번째 계명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너희는 무지한 채 죽지 말라)가 됐을 거야. 다섯 명, 열 명, 아니 쉰 명이 저승으로 가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 정도라면 걸어 볼 만한 내기 아니야? 만일 우리가 성공한다면 마침내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겠지. 자네가 우리 실험실에서 보았던 그 보온복을 입은 사람들은 자네도 알다시피, 죄수들이야. 그들은 모두 지원자들이지. 지원자들 중에서 내가 추려낸 사람들이야. 그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그들은 무기 징역을 선고받은 사람들이고, 감방에서 썩기보다는 차라리 사형 선고를 받게 해달라고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낸 사람들일세. 나는 수형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을 한 오십 명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네. 그중에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운명이 너무나 혐오스러워 삶을 포기하려는 의지가 강해 보이는 사람들을 뽑은 거지. 그들에게 (천국)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금방 열띤 반응을 보이더군."

 나는 전혀 대수로울 게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건 자네가 그들을 속였기 때문일세. 그들은 과학자가 아니야. 그들은 실험 과정에서 죽을 가능성이 99.999%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 그들 역시 말은 반대로 하고 있지만 죽음을 두려워 해. 최후의 순간에는 누구나 두려운 법이야."

 라울은 내 손목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내가 손을 빼내려고 애쓰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들을 속이지 않았네. 그런 적은 전혀 없어. 그들은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어. 자발적으로 코마에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오는 일에 누군가가 성공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네. 그 일에 성공하는 사람은 진짜 선구자가 될 걸세. 그 사람은 사자들의 세계를 탐험하는 일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건 복권 같은 걸세. 단 한 사람이 따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잃을 수밖에 없네."

 라울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내가 앉은뱅이 탁자 위에 잔과 함께 갖다 놓은 위스키병을 잡더니 한 잔을 따라 마셨다. 그런 다음 가느다란 (비디) 담배에 내 성냥으로 다시 불을 붙였다.

 "미카엘, 자네와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우리는 살아생전에 무엇을 했는가 하고 자문하게 될 걸세. 그때를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길을 가야 해. 우리, 길 하나를 개척해 보세. 우리가 실패하면 다른 사람들이 뒤를 잇겠지. 영계 탐사는 이제 겨우 요람기에 있을 뿐일세."

 그의 집착이 여간 완강한 게 아님을 알고 나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는 불가능한 사명에 집착하고 있어."

 "불가능하다고? 콜롬부스가 달걀을 똑바로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했던 말이 바로 그거였지."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교할 게 따로 있지,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어. 달걀 끝을 깨뜨리기만 하면 되었거든."

 "그래. 하지만 콜럼버스가 그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걸세. 자, 내가 자네에게 문제를 하나 내지. 아마 콜럼버스 시대의 달걀 문제만큼이나 자네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일 걸세."

 라울은 저고리 주머니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냈다.

 "자네, 원과 원의 중심점을 연필을 떼지 않고 그릴 수 있겠나?"

 그는 손수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점을 찍음으로써, 내가 그려내야 할 도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이거하고 똑같은 것을 만들되, 연필을 들면 안 되는 거야."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자네도 잘 알면서 그래!"

 "달걀을 똑바로 세우는 문제도 이와 다를 게 없고 사자들의 대륙을 정복하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지."

 동그라미와 그 가운데에 있는 점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못 믿겠다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답이 있는 거야?"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답을 보여 줄 수 있어."

 바로 그때, 하필이면 그런 순간을 골라서 콩라드 형이 느닷없이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는 노크를 할 생각조차 안 했던 모양이다.

 "여러분 안녕!"

 형이 쾌활하게 인사말을 던졌다.

 바보 같은 형 앞에서 그런 대화를 계속하기는 싫었다. 그런 위험천만한 토론은 당장 끝내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울, 미안하네만 자네가 제안한 일은 관심이 없네. 그리고 자네가 낸 문제는 속임수를 쓰지 않으면 어떤 해결책도 없는 것 같네."

 "아니 이 친구 속고만 살았나!"

 라울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탁자 위에 명함 하나를 내려놓으면서 그가 덧붙였다.

 "생각이 바뀌거든 이 전화번호로 나를 찾아 주게."

 마지막으로 그렇게 언질을 남기고 그는 작별 인사도 없이 슬그머니 가 버렸다.

 "저 친구,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형이 그렇게 말하기에, 화제를 바꾸는 게 좋겠다 싶어서 나는 형을 만난 게 무척 기쁘다는 듯이 짐짓 명랑하게 물었다.

 "그런데 콩라드 형,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형이 곧 장광설을 늘어놓을 기미를 보이자 지레 짜증이 났다. 나는 콩라드 형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어머니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컨테이너에 들어갈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무역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부자가 되었고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두고 있었다. 한국에서 수입한 멋진 스포츠카를 소유하고 있었고, 테니스를 즐겼으며, 사교계에 자주 나가 쑥덕거리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부하 직원을 정부로 두고 있었다.

 콩라드는 행복한 삶을 자랑하려고 최근에 있었던 일화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는 거장들의 명화를 헐값에 사들였고 브르타뉴 해안에 있는 저택을 구입했다면서, 그 저택에 도배를 새로 해야 되는데 도울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오라고 했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썩 잘하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용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종류의 소식을 두세 가지 더 듣고 나니 콩라드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행복을 과시하는 사람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더 비위 상하는 일은 없다. 하물며 그 사람 때문에 나의 실패가 두드러져 보일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나에게 전화를 걸곤 하였다.

 "얘야, 너는 내게 알려 줄 뭐 좋은 소식 없니? 더 늦기 전에 장가갈 생각을 해야지. 콩라드 형을 봐라.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사니."

 어머니는 나에게 결혼을 재촉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기도 하셨다. 언젠가 어머니는 신문에 낼 구혼 광고의 문안을 작성하고 계시다가 나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 재력과 지력 겸비, 미남이고 재기발랄함. 비슷한 수준의 여자를 찾고 있음.) 어머니가 쓴 광고 문안의 골자는 대충 그런 식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라울이 내놓고 간, 원과 중심점의 수수께끼를 생각하느라고 심란해 있는 동안에도 콩라드는 시시콜콜한 것을 다 들먹이며 자기 행복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브르타뉴에 있는 자기 저택의 방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묘사했고, 그 고장 토박이를 구슬러서 4분의 1밖에 안 되는 가격으로 그 저택을 손에 넣은 내력을 설명했다.

 아, 우월감에 젖은 저 미소! 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그의 목소리에서는 나에 대한 연민이 더 짙게 배어 나는 듯했다. (이 불쌍한 아우야,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해서 얻은 게 겨우 이런 고독하고 처량하고 초라한 삶이란 말이냐)라고 그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 당시에 나의 삶이 변변치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레아뮈르 가(거리 가)에 있는 자그마한 단실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독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고, 내 일에서도 더 이상 아무런 만족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병원에 출근해서 수술 대기자 카드를 검토한 다음, 마취제를 준비해서 주사기를 꽂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게 나의 일과였다.

 다행히 마취과 전문의로서는 단 한 차례도 사고를 내지 않았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대사제로서의 삶은 옛날 생 루이 병원에 잠깐 들어갔을 때 가졌던 기대와는 너무 거리가 있었다. 간호사들이 가운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여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여자들이 몸을 허락하는 것은 의사와 결혼해서 자기들의 지겨운 일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나의 직업은 결국 나에게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윗사람들로부터 도타운 신임을 받고 있지도 않았고, 아랫사람에게서 존경을 받는 편도 아니었으며, 동료들과도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나는 병원의 일개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고, 특정한 기능을 지닌 톱니바퀴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환자를 데려와서 이 사람을 재워 주시오 하면 재워 주고, 그러고 나면 또 다른 환자가 오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늘 똑같은 일의 연속이었다.

 콩라드는 지칠 줄 모르고 여전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현재의 내 삶과도 다르고 콩라드가 말하는 행복과도 다른 어떤 것이 없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분명히 어딘가에 다른 삶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원과 원의 중심점을 어떻게 펜을 들지 않고 그릴 수 있을까? 불가능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말이 되지 않아.)

 나의 삶은 불행했고 라울은 떠났다. 나를 고독과 권태 속에 버려두고 그는 자기의 광기와 열정과 모험을 가지고 가버렸다.

 앉은뱅이 탁자 위에서 라울이 남기고 간 명함이 환영처럼 빛나고 있었다.

 (원과 원의 중심점... 불가능한 일이야!)

 

 43. 불교 철학

 제자들이여, 새롭게 태어났다가 죽음에 떨어지기를 거듭하면서, 미워하는 자와는 만나고 사랑하는 자와는 헤어지는 이 지리한 나그넷길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그대들이 흘린 눈물이 무릇 얼마인가? 광활한 대해의 물이라도 그만은 못 하리.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그렇게 괴로움과 악운을 겪으며 묘지에 흙을 보탰다. 삶에 싫증이 날 만큼 오랜 세월이었고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할 만큼 아주 긴 시간이었다.

 - 부처의 법륜 중에서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44. 라울에게로 마음이 쏠리다

 자질구레한 울분과 추레한 굴욕과 끝 모를 권태 속에서 다시 몇 주를 보낸 뒤에야, 내 마음이 라울과 그의 광기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로부터 줄기차게 걸려 오는 전화와 형의 예기치 않은 잇단 내방도 내 심경 변화에 한몫을 톡톡히 했다. 거기에다 그리 심각한 건 아니지만, 어떤 여자에게 버림을 받은 것(내 데이트 요구를 거절한 직장 동료가 결국 멍청한 치과 의사 친구와 가까운 사이가 된 일)과 위안이 될 만한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는 것도 적게나마 영향을 끼쳤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플뢰리 메로지로 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씁쓸한 일들이 누적된 것만으로 내 결심이 굳어졌던 것은 아니고, 정작 중요한 계기는 다른 데에 있었다.

 내가 플뢰리 메로지에 가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중대한 수술을 기다리던 중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버린 어떤 노파 때문이었다.

 마취제 주사기를 손에 들고 있는데, 간호사가 와서 외과 의사가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얼간이가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이야기는, 긴장을 푼다는 명목으로 탈의실에서 제 간호사와 엉켜서 한바탕 다리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의 신나는 기분 풀이가 끝나야, 나는 수술받을 할머니를 마취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외과 의사가 할머니의 방광에 난 종양을 제거할 것이고, 그 수술을 받다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우리네 사람살이가 그렇게 엉터리였다. 5 천 년을 가꾸어 온 인류의 문명이 도달한 수준이 겨우 그 정도였다. 5 분 후에 있을, 한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수술을 위해, 외과 의사가 정액을 사출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하다니...

 "의사 양반, 왜 웃어요?"

 그 노파가 나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할머니 신경이 예민하시군요."

 "의사 선생 웃는 모습을 보니 우리 영감 죽기 전 모습이 생각나는구먼. 나는 그 양반 웃음소리 듣는 걸 무척 좋아했지. 그이는 동맥혹 파열로 세상을 떠났지. 그래도 그 양반은 운이 좋았어. 자기가 늙는 모습을 볼 겨를이 없었으니까. 그 양반은 건장할 때 죽었지."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불길한 요령 소리처럼 울렸다.

 "이 수술을 받다가 나도 드디어 그 양반 곁으로 가게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르보 박사는 뛰어난 의사예요."

 안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영감 곁으로 갈 생각이야. 혼자 사는 게 이제 지긋지긋해. 영감을 다시 만나고 싶어. 저 위, 천국에서."

 "할머니는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물론이지. 이 삶이 끝나면서 모든 게 끝나는 거라면 너무 무서워. 틀림없이 어딘가에 (다음의 삶)이 있을 거야. 거기에서 나는 우리 영감을 다시 만나게 될 거고. 천국이든 내생이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영감과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를 극진히 사랑했지."

 "자꾸 죽는다는 말씀 마세요. 르보 박사가 할머니 아픈 데를 잘 고쳐 드릴 거예요."

 나는 르보의 무능함을 몇 차례 경험했기 때문에, 정작 나 자신도 확신을 못 가진 채 애써 힘주어 말했다.

 할머니는, 착하고 말 잘 듣는 개가 주인을 바라보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되면 나는 휑뎅그렁한 아파트에서 추억이나 되새기며 혼자 사는 삶으로 되돌아가야 해. 그건 너무 끔찍해."

 "그래도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말이 있잖아요."

 "인생은 처량한 나그넷길이야. 안 그러우? 사랑이 없으면, 인생은 그야말로 눈물 계곡이지."

 "그렇지만 사랑 말고 다른 것도 있잖아요."

 "다른 게 뭐가 있겠수? 꽃? 작은 새? 그런 건 다 부질없어. 내 살아생전엔 우리 영감 앙드레밖에 없었고, 나는 오직 그이를 위해 살았어. 그러니 내 방광에 종양이 난 건 아주 잘된 일이지."

 "자녀분은 없으세요?"

 "있지. 있으면 뭘 해. 우리 애들은 유산이 탐나서 내가 죽을 날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지. 수술 끝나면 틀림없이 전화를 할 거야. 내 안부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새 차를 당장 주문할 수 있는지 아니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서 말이야."

 할머니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이런 질문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할머니, 원과 원의 중심점을 펜을 들지 않고 그릴 줄 아세요?"

 할머니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뭘 그런 걸 문제라고 내나? 그런 건 유치원 애들도 다 알지."

 할머니는 다 쓴 종이 수건 위에다 그리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내 입에서 경탄이 저절로 나왔다. 내가 그것을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흐뭇해하면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할머니는 그런 하찮은 일을 내가 얼마나 종요롭게 여기는지를 아는 사람 같았다.

 "요것만 생각해 내면 되지."

 할머니가 말하는 (요것)을 이해하고 나니, 라울이 정말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과 원의 중심점을 펜을 떼지 않고 그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죽음의 세계도 항행(航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안틸 제도 출신의 건장한 남자 간호조무사 두 사람이 수술 도구 운반차를 밀며 들어왔다. 원기 왕성한 외과 의사도 그 뒤를 이어 나타났다.

 다섯 시간 후에 할머니는 저승객이 되었다. 르보 박사는 투명한 고무장갑을 얄망궂게 내던지며 투덜거렸다. 그는 노후한 시설과, 병을 너무 오래도록 방치한 환자에게 잘못을 돌렸고, 운이 없었음을 탓했다. 그가 나에게 제안했다.

 "우리 맥주 한잔하러 갈까?"

 전화벨이 울렸다. 할머니가 예상했던 대로 그이의 자녀들이었다. 나는 다짜고짜 전화를 끊었다. 내 손은 어느새 호주머니를 뒤져 라울이 주고 간 명함을 찾고 있었다.

 

 45. 역사 교과서

 영계 탐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전대미문의 실험을 시도하려는 몇몇 친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태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최초의 영계 탐사는 단순히 경제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서 쉽게 부자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기초 강의용 영계 탐사의 역사"

 

 46. 라울에게 가다

 나는 라울이 내게 제안한 것이 장차 그가 저지를 범죄의 공범이 되자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라울이 하려는 일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또는 영계 탐사라는 허황된 꿈을 위해 저지르는 범죄였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사람을 저승으로 보낸다는 생각은 나에게 여전히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서는 삶에 활력을 불어넣을 만한 것을 갈망하고 있기도 했다.

 나는 라울에게 전화하기로 결심하기에 앞서 2프랑짜리 백동전 세 개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라울이 내게 가르쳐 준 방법은 주화를 하나만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세 개를 사용함으로써 라울의 방법을 개선했다. 그렇게 하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는 두 가지 대답보다 더 뉘앙스가 많은 의견을 얻어낼 수 있었다. 뒷면-뒷면-뒷면이 나오면 (절대적으로 찬성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뒷면-뒷면-앞면이 나오면 (찬성하는 편), 앞면-앞면-뒷면이 나오면 (반대하는 편), 앞면-앞면-앞면이 나오면 "절대 반대"를 의미했다. 백동전 세 개가 하늘에 날아 올라가 의견을 묻고, 차례차례 땅으로 내려왔다.

 뒷면-뒷면-앞면, 즉 (찬성하는 편)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나는 송수화기를 들었다. 그날 밤 라울은 대단히 만족해하면서 그 사업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내 단실 아파트 안에서 그의 손은 두 마리의 행복한 비둘기처럼 그의 머리 위에서 파닥거렸다.

 그는 자기 말에 도취해 있었다.

 "우리는 그 (경이로운 대륙)을 가장 먼저 정복하게 될 거야."

 내 마음속에서 아직도 (경이로운 대륙)과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싸우고 있었다. 나는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명분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싸움을 벌였다. 그래야 나중에 혹시 일이 잘못되더라도, 나는 라울의 손에 강제로 이끌려 그 일을 했노라고 자위할 수가 있을 테니까.

 라울은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갈릴레이도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어."

 저번엔 콜럼버스를 들먹이더니 이번에는 갈릴레이였다. 불쌍한 갈릴레이, 이제 넋 나간 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기들의 상상력을 변호하는 수단으로 그를 이용할 판이었다. 약방의 감초 신세가 된 갈릴레이...

 "그래, 갈릴레이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어. 하지만 그는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지. 하지만 갈릴레이처럼 부당하게 비난을 받은 사람도 있지만, 진짜 미치광이도 무수히 많았어."

 "죽음은..."

 그가 다시 입을 열기가 무섭게 나는 그의 이야기를 가로챘다.

 "죽음을 나는 병원에서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어. 사람들은 그냥 죽는 거야. 그들에게서 영계 탐사를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 몇 시간 지나면 그들은 악취를 풍기기 시작하고 사지가 뻣뻣해지지. 죽음이란 그렇게 악취를 풍기는 거야. 그것은 썩어가는 고깃덩어리일 뿐이야."

 "육체는 썩지만 영혼은 떠나가지."

 라울이 달관한 사람처럼 말했다.

 "자네도 말했듯이 나는 코마를 경험했어. 하지만 내 영혼은 떠나가지 않았어."

 라울이 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보게, 미카엘. 자넨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던 거야."

 나는 (자네가 왜 죽음에 그토록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아주 잘 알아.)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아버지의 자살이 여전히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라울에게는 (천국) 사업보다 정신 분석을 받는 일이 더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백동전은 뒷면-뒷면-앞면이 나왔고 나는 이미 선택을 한 마당이었다.

 "좋아, 일 이야기로 돌아가세. 자네는 마취제의 용량 조절을 잘못해서 처음 두 차례의 비행을 망쳤다고 했지. 그러면 코마를 일으키기 위해서 사용한 게 뭐야?"

 라울은 환하게 벙싯 웃으며 예전처럼 나를 껴안았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기가 이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47. 유교 철학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22)

 - 공자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연구"에서 발췌

 

 48. 아망딘이 하도 예뻐서

 예쁜 간호사의 짙푸른 눈 위로 눈꺼풀이 사르르 내려왔다. 그녀의 침묵이 이번에는 은근한 축하로 느껴졌다.

 그녀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왜 들었는가 했더니, 그 간호사는 히치콕의 영화 "뜰로 난 창문"에 나오는 그레이스 켈리와 비슷했다. 물론 간호사 쪽이 훨씬 더 아름답긴 했지만 말이다.

 플뢰리 메로지 창고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나를 반기는 기색이었다. 의사 한 사람이, 그것도 마취과 의사가 있다는 사실이 연구팀에게나 자살 지원자에게나 다 같이 힘이 되는 모양이었다.

 라울이 그들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간호사 이름은 아망딘이었고, 장차 영계 탐사에 나설 타나토노트들은 클레망과 마르셀랭과 위그였다.

 "이미 말했듯이, 처음에 우리에겐 타나토노트가 다섯 명이 있었네. 그중에 둘은 약을 잘못 써서 희생되었지. 마취과 의사 노릇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군. 이제 자네가 왔으니 기쁘기 그지없네."

 보온복을 입은 세 명의 죄수들은, 아직 못 믿겠다는 듯 내 눈치를 살피면서 인사를 했다.

 라울은 나를 플라스크가 놓인 실험대 쪽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서로 배우면서 일을 해야 하네. 누구에게나 미지의 영역이긴 마찬가지니까. 우리는 아메리카 대륙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첫발을 디딘 사람들과 같아. 우리의 (새로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고 거기에 깃발을 꽂는 것이 우리의 일일세."

 라조르박 교수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단순한 광기가 아니라 일에 대한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팽송 박사에게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코마를 일으키는지 보여주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원자들 중에서 가장 키가 작은 마르셀랭이 낡은 치과용 의자에 앉았다. 간호사는 그의 가슴과 이마에 전극을 장착하고, 온도계, 습도계, 맥박계와 같은 갖가지 탐지 장치들을 연결했다. 그의 몸에 부착된 전선들은 모두 모니터에 연결되었고 화면에 초록색 선들이 잇달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현장을 점검했다.

 "이 잡동사니들 다 치워 버리세요!"

 그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그들의 환상을 받아들인 셈이 되었다. 나는 실험대와 그 위쪽의 선반에 있는 유리병들의 내용물을 조사하고, 코마를 가장 쉽게 일으킬 수 있는 배합에 대해 생각하면서 유리병에 붙어 있는 라벨들을 확인했다.

 혈관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소금 용액을 쓰고, 마취시키기 위해서는 티오펜탈을, 그리고 심장 박동을 늦추기 위해서는 염화칼륨을 쓰면 될 듯했다. 옛날에 아메리카의 어떤 나라에서는 사형수를 처형하는 데 시안화물이나 전기의자 쪽을 선호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염화칼륨을 더 희석시켜서 심장 박동을 차츰차츰 줄여나가는 방법이 나을 듯했다. 그런 방법을 쓰면 어느 정도까지는 뇌의 통제를 받아 가면서, 그리고 나의 통제를 받아 가면서 코마 상태로 천천히 빠져들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울과 세 타나토노트 지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나는 상당히 정교한 장치를 하나 만들었다. 먼저, 20센티미터 높이로 T자 꼴 플라스틱 지주를 세운 다음, 거기에 소금 용액이 담긴 커다란 플라스크와 티오펜탈이 담긴 좀 더 작은 플라스크를 걸고 마지막으로 염화칼륨 플라스크를 걸었다. 각 플라스크에서 나온 대롱 꼭지에 전기 시한장치를 연결했다. 각 플라스크의 내용물이 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투여되도록 되어 있었고, 염화칼륨은 3분 후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세 대롱의 말단은 하나의 대롱에 이어지고, 그 대롱은 다시 하나의 주삿바늘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 화학적인 장치 전체에 로켓 보조 추진 장치인 (부스터 booster)라는 이름을 붙였다. 타나토노트는 서양 배(배나무 이)처럼 생긴 전기 스위치를 눌러 시한장치를 작동시킴으로써 부스터에 직접 시동을 걸 수 있게 되었다.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영계를 탐사한다는 명목으로 (자살 기계)를 발명한 셈이었다(내가 만든 그 기계는 현재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협회 박물관에 있다).

 실험실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나의 솜씨와 자신감 있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라울의 생각대로, 기술적인 문제에는 기술적인 해결책밖에 없었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만든 전기 스위치가 마음에 들었다. 그것 덕분에 나는 직접 스위치를 누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나에겐 직접적인 책임이 없었다. 사형 집행인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로서는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당사자 스스로가 출발 시간을 결정하게 될 것이고, 그가 만일 실패한다면 그건 자살일 뿐 그 이상의 것은 아닐 터였다.

 나는 아망딘에게 마르셀랭의 팔 정맥에 주삿바늘을 꽂으라고 부탁했다. 아망딘은 자신에 찬 동작으로 타나토노트의 팔오금을 찔러 굵은 주삿바늘을 밀어 넣었다. 핏방울이 거의 비치지 않을 만큼 노련한 솜씨였다. 마르셀랭은 조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그 일이 끝나자, 나는 서양 배처럼 생긴 전기 스위치를 마르셀랭의 축축한 손에 쥐어주고 이제부터 그에게 닥칠 일을 설명했다.

 "이 단추를 누르면, 전기 펌프가 작동하기 시작할 겁니다."

 하마터면 나는 (단추를 누르면 당신의 죽임이 가동되기 시작할 겁니다)라고 말할 뻔했다.

 마르셀랭은 마치 자동차 엔진의 작동 원리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처럼 잘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괜찮소?"

 라울이 마르셀랭에게 물었다.

 "아주 좋습니다. 의사 선생을 철석같이 믿으니까요."

 라울은 열렬한 기대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나는 그런 열광이 내게 옮겨오지 않도록 하려고 애썼다.

 "그다음에는요?"

 마르셀랭이 그렇게 물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나, 눈에 모래를 뿌려 잠이 오게 한다는 모래 장수의 존재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연승식 경마에서 우승마를 알아 맞출 가능성에 절대적으로 집착하는 순진한 어린아이의 눈길 같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니까, 에..."

 "걱정마십시오, 의사 선생님. 그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지요."

 마르셀랭은 내 마음을 알겠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해주려고 했다. 그는 자기가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맞닥뜨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그걸 내 책임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했다. 문득 그에게, (더 늦기 전에,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라울은 내가 난처해하는 것을 보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잘 해보게, 건투를 비네, 마르셀랭."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나도 손뼉을 쳤다.

 우리는 무엇에 갈채를 보냈던 것일까? 아마도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는 (부스터)라는 장치에, 그리고 마르셀랭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곳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아망딘의 미모에 박수를 보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아망딘처럼 예쁜 여자는 모델이 되는 게 나을 뻔했다. (살인 공모자)가 그녀의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제 우리는 한 영혼을 발사하게 될 것입니다."

 라울은 그렇게 선언하고 담뱃불을 껐다.

 마르셀랭은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러 가는 아마추어 등반가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만 그는 등산화대신 새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는 처형대에 앉은 사람의 인사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간단한 인사를 했다. 우리는 모두 미소로 답하면서 그를 격려했다.

 "자, 잘 다녀오게!"

 아망딘은 우리의 여행자에게 냉각용 담요를 덮어 주었고 그동안에 나는 컴퓨터를 마지막으로 조정하였다.

 "준비됐습니까?"

 "준비됐습니다."

 아망딘은 그 장면을 찍을 비디오카메라를 작동시켰다. 마르셀랭은 성호를 그은 다음 눈을 감고 천천히 초읽기에 들어갔다.

 "여섯... 다섯... 넷... 셋... 둘... 하나... 발진!"

 마르셀랭은 스위치를 아주 세게 눌렀다.

 

 49. 마야 신화

 마야 사람들은, 죽음은 곧 지옥을 향한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옥을 (미트날)이라고 불렀다. 거기에서 영혼은 추위, 배고픔, 질병 따위로 악마들에게 고통을 받는다.

 마야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지배하는 아홉 신이 있었는데 그 아홉 신은 아마도 아즈텍 사람들이 생각했던 9층의 지하 세계에 해당할 것이다.

 죽은이의 영혼은 피와 먼지와 가시가 흐르는 다섯 줄기 강물을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 네 거리에 다다르면 여러 집을 거치며 심판을 받는다. 그 집이란 호박의 집, 칼의 집, 추위의 집, 표범의 집, 흡혈박쥐의 집들이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50. 인간 기니피그 마르셀랭, 여신 아망딘

 우리는 모두 제어 컴퓨터의 모니터들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마르셀랭의 심장은 박동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뛰고 있었다. 맥박은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의 것보다 횟수가 적어졌고, 체온은 4도 가까이 떨어졌다.

 "마르셀랭이 떠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수감자 한 사람이 물었다.

 아망딘은 자기 시계를 보았다. 나는 마르셀랭이 죽음을 향해 대도약을 한 지 30분이 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20분 넘게 깊은 코마에 들어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영락없이 잠자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 친구가 성공해야 할 텐데, 이 친구가 해내야 할 텐데."

 장차 타나토노트로 나서게 될 두 사람, 위그와 클레망이 중얼거렸다.

 나는 마르셀랭의 기관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더 잘 알기 위해 그의 몸을 만져 보고 싶었다. 그러나 라울이 나를 말렸다.

 "아직 건드리지 말게. 너무 일찍 깨어나면 안 되니까."

 "그러면 이 사람이 성공했는지 어떻게 알게 되지?"

 "눈을 뜨면 성공한 걸세."

 (천국) 사업의 책임자인 라울이 짧게 대답했다.

 심전계에서 10초마다 삐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핵잠수함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해저로 내려갈 때 음파 탐지기가 내는 소리 같았다.

 마르셀랭의 육신이 저렇게 치과용 의자에 널브러져 있는데, 그의 영혼은 정말 어디 다른 곳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51. 한 사람이 떠나고...

 나는 한 시간 넘게 심장 마사지에 몰두해 있었다. 심전계에서 규칙적으로 들려 오던 삐 소리가 멈추자 다들 불안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라울이 마르셀랭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우는 동안, 아망딘은 마르셀랭의 팔과 다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다 같이 (하나, 둘, 셋)을 외치고, 나는 두 손을 심장 부위에 대고 흉곽을 압박했다. 그런 다음, 라울은 폐의 기능을 소생시키려고 마르셀랭의 콧구멍에 숨을 불어넣었다.

 전기 충격을 시행하자, 대번 눈이 뜨이고 입이 벌어지더니 그다음부터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눈에는 전혀 초점이 없고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꼼짝도 않는 마르셀랭의 몸뚱이를 붙들고 애면글면하는 통에 우리는 모두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나는 머릿속에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하는 물음이 떠오르는 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시체로밖에 볼 수 없는 마르셀랭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질문이 더욱 끈질기게 솟아올랐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했어야 하는 건데. 이 실험에 끼어들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마르셀랭을 살려내기엔 너무 늦어 있었다. 우리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특히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겪는 (살인)이었는 데다, 건장하게 살아 있던 어떤 사람이 방금 나에게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넸는데 조금 후에 그가 마른 나무처럼 뻣뻣해진 것을 보게 되었으니, 마음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는 건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라울은 시체에서 손을 떼고, 성을 내며 중얼거렸다.

 "이 친구 너무 멀리 가 버렸어. 너무 멀리 떠나서 이젠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된 거야."

 아망딘은 마르셀랭을 문지르느라고 기진맥진해 있었다. 매끈한 이마에서 방울진 땀이, 주근깨가 점점이 박힌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다가, 이윽고 너무 정숙한 느낌을 주는 블라우스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비장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극적인 장면에서 나는 아마도 내 생애에서 가장 색정적인 순간을 경험했던 듯하다. 그토록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오로지 보드라온 두 손만으로 죽음에 맞서 싸우고 있는 광경이라니! 사랑의 신 에로스가 죽음의 신 타나토스와 그렇게 가까이 있는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때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는 느낌을 갖게 된 이유를 다시금 깨달았다. 아망딘은 그레이스 켈리를 닮았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교통 사고를 당한 뒤로 꿈에서 만나곤 하던 간호원과도 닮았다. 천사 같은 모습도 닮았고, 살결과 살구 냄새까지도 비슷했다.

 한 사람이 금방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젊은 여인을 욕망 어린 눈으로 곁눈질하고 있었다.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이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지?"

 내가 그렇게 소리쳤으나 라울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실낱같은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된 마르셀랭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간을 끌다가, 이윽고 초연한 태도로 말했다.

 "대통령이 우리를 비호 해줄 걸세. 어느 교도소나 자살률이 40%는 되니까, 마르셀랭도 자살자에 포함시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이건 사악하고 무분별한 짓이야. 내가 어쩌다 이런 음흉한 사건에 말려들었지? 자네가 날 속인거야, 라울. 자네가 날 속였어. 자넨 우리 우정을 저버리고 미친 짓에 날 끌어들였어. 당신들 모두가 이렇게 태평하게 구는 것도 혐오스러워요. 당신들의 무관심 때문에 한 사람이 죽은 거예요. 라울, 자네는 나를 속이고, 죽은 이 사람을 속인 거야."

 라울은 아주 당당하게 일어서더니 갑자기 내 멱살을 쥐었다. 그 눈초리가 사납게 이글거렸다. 그는 내 얼굴에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난 자네를 속이지 않았어. 우리 일이 엄청난 내기라는 건 분명해. 성공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실패를 겪는 건 당연하지.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야. 자네, 왜 이래? 우리가 애들이야?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라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당연하잖아. 모든 일엔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야. 그런 게 없으면 그 일은 너무 쉬운 일이겠지. 우리 일이 더 간단한 일이었다면, 우리에 앞서 벌써 다른 사람들이 해냈을 거야. 그만큼 힘겨운 일이니까 성공할 가치도 있는 거지."

 나는 무기력하게 스스로를 변호했다.

 "언젠가는 성공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갈수록 어려워질 것 같네."

 라울은 내 멱살을 놓아주고, 여전히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마르셀랭을 살펴보았다. 벌어진 입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지 라울은 마르셀랭의 두 턱에 걸쳐 나사가 달린 집게를 물리고 입이 닫힐 때까지 나사를 돌렸다. 우리를 비난하고 있는 듯한 마르셀랭의 입이 마침내 다물어지자, 라울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러분들도 미카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말씀하십시오. 아직도 때는 늦지 않았습니다."

 라울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둘러보며 반응을 기다렸다. 우리는 마르셀랭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턱을 조이고 있는 집게 때문에 볼이 움푹 들어가서 그의 입은 마치 새의 부리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우리에게 아주 선연한 인상을 심어 주고 있었다.

 클레망이 먼저 큰 소리로 의견을 말했다.

 "난 그만두겠어요! 의사가 있길래 모든 일이 더 확실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 의사도 죽음에 맞서 싸울 만큼 능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1만 명의 불쌍한 목숨을 희생시켜야 성공할 일이라면, 난 희생자들 속에 끼고 싶지 않아요. 함께하기로 동의했던 것을 다시 들먹일 필요는 없어요. 당신들의 (천국) 사업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요. 난 너무 두려워서 당신들의 사업을 감당할 수 없어요."

 "그럼, 위그는?"

 라울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남겠어요."

 위그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우리의 다음 타나토노트가 되겠단 말이오?"

 "그렇소. 감방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그래도 죽는 게 나아요."

 그렇게 말하며 위그는 턱으로 마르셀랭의 시체를 가리켰다.

 "비참한 감방에 더 이상 갇혀 있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저 친구는 행복하지요."

 "그럼 아망딘은?"

 "나도 남겠어요."

 아망딘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허, 당신들 다 미쳤군요! 클레망이 옳아요. 1만 명 정도를 희생시키지 않고는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할 거예요."

 나는 하얀 가운을 벗어 실험대 위로 집어 던졌다. 그 서슬에 플라스크 몇 개가 깨지고 이내 에테르 냄새가 피어올랐다.

 나는 요란한 문소리를 남기며 그곳을 떠났다.

 

 52. 행정 업무 보고

 보고: 브누아 메르카시에

 결재: 대통령 뤼생데르

 각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실험에 착수했습니다. 연구팀은 설치류의 인공 동면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생물학자 라울 라조르박 교수, 마취과 전문의 미카엘 팽송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망딘 발뤼스라는 간호사가 보조하고 있습니다.

 다섯 명의 수감자가 실험 대상이 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천국) 사업이 본궤도에 오른 것입니다.

 

 53. 울적한 심사

 나는 자못 어수선한 마음으로 아파트에 돌아왔다. 집에 혼자 있게 되자, 나는 보름달 뜬 밤에 코요테가 울부짖듯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다고 마르셀랭의 죽음 때문에 생긴 압박감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지? 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음 타나토노트를 방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퇴 유곡에 빠져 나는 울부짖었다. 이웃집 사람들이 내 아파트의 벽을 걸레 자루로 두드렸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입은 다물었지만, 마음이 영 가라앉지를 않았다.

 내 속에서 두 마음이 싸우고 있었다. 아망딘을 다시 만나고는 싶었지만 사람들을 다시 코마 속으로 보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또, 라울의 생각에 매력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다른 희생자들이 더 생기는 것은 양심에 꺼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영원한 고독에 묻혀 혼자 살고 싶지는 않았다. 틀에 박힌 병원 일로 돌아가기도 싫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점에서는 라울이 옳았다. 즉, 그의 사업은 무시무시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주 웅대한 모험임에는 틀림없었다.

 라울은 아버지의 자살에 너무 오래 집착한 나머지 미쳐 버렸다고 치부하면 그만일 터이지만, 아망딘의 태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매력적인 여인이 도대체 무엇에 홀려서 그런 험한 일에 가담한 것일까? 그 여자 역시 새로운 세계의 개척자가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울의 입심에 넘어가지 않기가 쉽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작은 잔에 포르투갈 산(낳을 산) 백포도주를 따라 취할 때까지 연거푸 털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 소설 한 권을 뒤적거리며 잠을 청해보려고 했다. 침대에 홀로 있다는 느낌과 함께 시체가 되어 버린 마르셀랭에 대한 죄책감이 다시 밀려왔다. 내 침대의 시트가 마르셀랭에게 덮어씌웠던 냉각용 담요만큼이나 싸늘하게 느껴졌다.

 이튿날 아침, 동네 모퉁이에 있는 카페에 앉아 리쾨르를 마시면서, 나는 마르셀랭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죽음을 야기한 것은 어쩌면 염화칼륨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약품은 독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용량을 줄였어야 했다.

 나는 내가 사용한 마취제에 문제가 없었는지 곰곰이 따져 보았다.

 우리는 보통 세 종류의 마취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전신 마취제, 국소 마취제, 큐라리23)들이 그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전신 마취제를 더 자주 사용하곤 했었다. 그러나 사람을 (진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는 큐라리를 사용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큐라리를 사용하는 게 어떨까? 아니야. 역시 전신 마취제를 계속 사용하는 게 나을 거야.

 양심의 가책은 조금씩 조금씩 스러지고, 내 마음속은 오로지 기술적인 문제에 관한 생각들로 어수선해 졌다. 직업적인 반사 작용이 저절로 발동한 것이었다. 화학 강의 시간에 배운 내용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그래, 프로포폴을 사용했어야 했는지도 몰라. 프로포폴은 새로운 전신 마취제로서 마취에서 깨어날 때의 상태가 가장 좋은 약이다. 깨어나는 데 보통 5분이 걸리며 깨어나면 몽롱한 느낌이 없이 아주 또렷한 의식을 되찾게 된다... 아니야, 프로포폴은 틀림없이 염화물과 상호 작용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화학 변화를 일으킬거야. 그것보단 티오펜탈을 계속 사용하는 편이 낫다. 그러면 용량은 어떻게 해야 하나? 체중 1킬로그램당 5밀리그램씩 계산하는 것이 보통이다. 5 밀리그램이 최소 분량이고 10밀리그램이 최대 분량이다. 마르셀랭의 몸무게는 85킬로그램이었고 나는 850밀리그램을 투여했다. 어쩌면 투여량을 줄였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오후 2시에 나는 라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후 4시에 우리는 모두 플뢰리 메로지의 타나토드롬에 다시 모였다. 여느 때처럼 수감자들은 우리가 지나갈 때 욕설을 있는 대로 퍼부었다. 마르셀랭이 자기의 의지에 따라 자살한 것이라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교도소 소장은 우리와 마주쳐 지나가면서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인사는커녕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위그는 우리를 상냥하게 맞아 주었다.

 "걱정마십시오. 선생님. 우리는 해낼 겁니다."

 나는 내 한 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위그였다.

 나는 티오펜탈의 분량을 줄였다. 몸무게가 80킬로그램인 위그에게 600밀리그램을 사용키로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라울은 내가 약품을 다루는 방식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그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할 경우에 대비해서 내 일을 익혀 두려는 것 같았다.

 아망딘은 위그에게 냉수 한 잔을 내밀었다.

 "사형수에게 주는 최후의 선물이오?"

 사형 집행 전에 사형수에게 주는 담배로 생각했는지, 위그가 비꼬아 말했다.

 "아니에요."

 아망딘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새 타나토노트인 위그가 치과용 의자에 앉았다. 우리는 이미 틀을 갖추기 시작한 절차를 따라 그를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모니터들을 작동시키고 맥박과 체온을 재고 냉각용 담요를 덮어 주었다.

 "준비됐습니까?"

 "준비됐습니다."

 "준비 완료!"

 아망딘이 비디오카메라를 작동시키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위그는 어떤 기도문을 알릴락말락하게 외고 나서, 커다란 동작으로 성호를 긋고는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듯 빠른 속도로 초읽기를 했다.

 "여섯, 다섯, 넷, 셋, 둘, 하나, 발진!"

 위그는 마치 쓴 알약을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스위치를 눌렀다.

 

 54. 일본 신화

 일본인들은 죽은 이들의 나라를 요미(黃泉)라고 부른다. 옛날 이자나기(伊邪那岐) 신이 누이이자 아내인 이자나미(伊邪那美)를 다시 데려오려고 요미 나라(黃泉國)에 갔다. 이자나기는 아내를 찾아내어 산자들의 세계로 돌아가자고 청했다. 그러자 여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요? 저는 요미 나라 신들의 가마에서 구운 음식에 입을 댔기 때문에 이젠 요미 나라에 속해 있어요. 그렇지만 신들에게 나를 놓아 달라고 부탁해 볼 생각이에요. 그동안 기도를 해주세요.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를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하지만 이자나기는 누이이자 아내인 이자나미를 다시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결국 그는 약속을 어기고 자기의 빗을 꺼내어 그것으로 이 하나를 부러뜨린 다음 그 이에 불을 붙여 횃불처럼 만들었다. 그러자 이자나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발견한 것은 구더기가 들끓는 송장이었다. 그 구더기들은 팔뢰신(八雷神)의 화생(化生)이었다. 이자나기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자기는 실수로 공포와 부패의 나라에 잘못 들어왔노라고 소리치면서 도망을 쳤다. 이자나기가 자기를 기다려 주지 않고 줄행랑을 친 것에 격분한 이자나미는 자신이 모욕을 당했다고 요미 나라 신들에게 일러바쳤다. 이자나미는 요미 나라의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보내어 이자나기를 뒤쫓게 했다. 그러나 이자나기는 괴물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자나미가 손수 그를 잡으러 나섰다. 이자나기는 속임수를 써서 여신을 동굴에 가둬 버렸다. 마침내 두 신이 이혼을 공표하게 되었을 때, 이자나미는, (나는 당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하기 위해서 매일 당신 나라 백성을 천 명씩 목 졸라 죽일 거예요)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이자나기는, (그럼 나는 매일 천오백 명씩 태어나게 할 테다)라고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24)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55. 열 사람이 떠나가고...

 위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저승과 이승의 중도에 머물러 있었다. 죽은 건 아니었지만, 절망적인 코마 상태에서 겨우 빠져나와, 동공은 경직되고 뇌파도는 거의 평탄한 상태였으며 심전도는 간격이 아주 뜸하였다. 한마디로 위그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뇌와 심장의 기능이 살아 있는 건 확실했지만,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위그를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빈사 환자 위호과에 입원시켰다. 병원 측에서 그에게 특실을 마련해 주었다. 몇 년 후에 위그는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협회에 딸린 죽음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럼으로써 거기에 가면 누구나 저승과 이승 사이에 갇혀 있는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영계를 향해 위그를 떠나보낸 그 두 번째 시도는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그 경험은 아주 값진 것이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티오펜탈과 염화칼륨의 용량을 적절한 범위 내에서 조절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위그가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실험 대상으로 뽑은 다섯 사람을 다 잃게 되었다. 세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은 탈락했고, 한 사람은 식물인간이 되었다. 정말이지 형편없는 성과였다.

 라울은 메르카시에 장관에게 새로운 실험 대상을 마련해 달라고 곧바로 교섭을 벌였다. 장관은 뤼생데르 대통령으로부터 두 번째 재가를 얻어냈다. 그리하여 또 한 차례의 엄정한 선발 작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감옥을 벗어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무기수들을 원했다. 자살하고 싶은 욕구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괜찮았지만, 그 욕구가 너무 강한 사람도 곤란하였다. 우리에겐 정신이 온전하고 마약이나 알코올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염화칼륨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요건이었다. 심신이 건강해야만 제대로 죽을 수 있다는 묘한 역설이 성립하고 있었다.

 사람 팔자 정말 알 수 없다더니, 옛날 하굣길에서 라울과 나를 공격했던 불량배의 우두머리 뚱보 마르티네스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는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문득 노자(늙을 노, 아들 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올랐다. (누가 너를 모욕하더라도 앙갚음하려 들지 말라. 강가에 앉아 있노라면 머지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게 되리니).

 마르티네스는 끔찍한 은행 강도 사건을 저지르고 감옥에 와 있었다. 그는 거의 비만증 환자로 보일 만큼 뚱뚱해져서, 공범들만큼 빨리 도망치지를 못했다. 주먹질에는 능했지만 달리기에는 젬병이었던 것이다. 숨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헐떡거리고 있는 그를 그보다 더 동작이 민첩한 경찰관이 체포했던 모양이다. 그 처참한 사건의 와중에서 무고한 사람 둘이 목숨을 잃었다. 배심원들은 정상을 참작할 만한 여지가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마르티네스는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타나토노트 선발 시험을 훌륭하게 치러 냈다. 자기를 유명 인사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 실험에 참가하는 것에 대단한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자기가 좋은 운수를 타고났기 때문에, 실험이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자기는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박사님들 말입니다. 이 마르티네스가 두려워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르티네스는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사실 예전에 그가 똘마니들과 함께 5 대 2로 우리에게 덤벼들었을 때, 그는 나의 자그마한 주먹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었다.

 라울은 마르티네스에 대해 아무런 원한도 품고 있지 않았고, 그는 아주 훌륭한 실험 대상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후보자 명단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에게 두들겨 맞은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아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용량 결정을 두려움 없이 대충해버리지나 않을까 저어했던 것이다. 마르티네스에게 당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생각이 남아 있는 한, 냉정함을 잃고 그를 없애 버리려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행 강도 마르티네스는 후보에서 탈락하자, 우리가 연줄이 있는 사람들만 발탁하고 있고, 자기에게 부자와 유명 인사가 될 기회를 주지 않았다며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그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리를 알아보았더라면 그는 더 미친 듯이 날뛰면서, 선발 과정에 정실이 개입되었고 자의적인 기준이 적용되었다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결국 마르티네스는 우리의 다음 실험 대상이 된 다섯 명의 인간 기니피그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다섯 명이 다 저승객이 되었으니 우리의 다음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다섯 목숨을 연거푸 희생시키고 나니, 사람이 죽어도 이제 그다지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았다. 내 감수성이 무디어지고 있었다.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고 있는데도, 마치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켓이 이륙하다 폭발하면, 다음 발사가 성공할 수 있도록 필요한 수정을 가하면 그뿐이었다.

 다시 다섯 명의 인간 기니피그가 선발되었다. 그중에 마르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탐지 장치들을 작동시키고, 맥박과 체온을 잰 다음, 냉각용 담요를 덮었다. 라울이 소리쳤다.

 "준비됐습니까?"

 "준비됐습니다."

 나는 마르크가 무서워서 도저히 못 죽겠다고 도로 일어나기를 바랐다. 마르크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그는 자꾸자꾸 성호를 그어댔다.

 "여섯, 다섯, 넷, 셋, 둘, 하나 반, 하나 반의 반... 하나... 발... 발진입니까? 좋아요, 발... 발진!"

 마르크는 자신감 없이 말을 더듬더니, 땀에 젖은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두 번 만에 스위치를 눌렀다.

 

 56. 메소포타미아 신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저승을 (불귀의 나라)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노래하되,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빛을 받지 못한다.

 티끌과 흙이 그들의 유일한 양식이 되고

 새들처럼 옷을 입으며

 문도 빗장도 모두 먼지에 덮히리라.

 어느 날, 사랑의 여신인 아름다운 이슈타르25)가 지옥에 내려갔다. 이슈타르의 언니이자 저승의 대왕인 에레슈키갈은 문지기에게 전부터 해오던 대로 여신을 대우하라고 명령했다. 즉, 이슈타르 여신이 지옥의 일곱 문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겉옷과 관을 시작으로 귀고리, 목걸이, 가슴 장식, 허리띠, 팔찌, 발찌, 마지막으로 속옷까지 차례로 벗기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슈타르는 벌거벗은 채로 에레슈키갈 여왕 앞에 섰다. 여왕은 여신의 몸 여러 곳에 60차례에 걸쳐 고통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슈타르 여신이 그렇게 지옥에 잡혀 있게 됨으로써, 정작 고통을 받는 것은 사람들이었다. 이슈타르 여신이 사라지자 대지가 그 비옥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이슈타르가 불귀의 나라로 내려간 다음부터

 황소는 더 이상 암소와 흘레붙지 않고,

 남자는 더 이상 여자와 구합(媾合)하지 않네.

 사람들은 고자가 되어 버린 남자 한 사람을 에레슈키갈에게 보냈다. 그가 지옥의 여왕에게 부탁하기를, 이슈타르로 하여금 가죽 부대에 담긴 생명수를 마실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자, 여왕이 그를 저주하며 노래로 이르되,

 도시 하수도의 음식 찌꺼기가 네 양식이 될 것이고

 성벽 변두리의 응달이 네 거처가 되리라.

 너는 남의 집 문간에 살면서

 주정뱅이와 비렁뱅이에게 뺨을 맞으리라.

 사람들이 지옥에 고자를 보낸 것은, 그와 풍요의 여신인 이슈타르를 바꾸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럼으로써 메마름을 비옥함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과연 얼마 후에 에레슈키갈은 이슈타르에게 생명수를 주고 지옥문까지 호위해 주라고 명령했다. 이슈타르가 일곱 문을 반대쪽으로 건너옴에 따라 여신의 모든 옷과 장신구가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이승에서는 만물이 본래의 정상적인 흐름을 되찾았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57. 서툰 손놀림

 우리는 마르크의 팔다리를 문지르고, 몸을 다시 덥혀 주고, 전기 충격을 주었다.

 마르크가 눈을 떴다. 우리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마침내 성공한 것인가?

 우리가 어마지두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사이에 우리의 영웅은 벌떡 일어나더니, 주위에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부수면서 괴성을 질러댔다.

 "난 그들을 보았어. 그들이 거기에 있어. 어디에나 있어.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어. 그들은 어디에나 있어."

 "누가? 도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라울은 떨림이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악마들을 보았어! 어디에나 악마들이 있어. 그자들이 나를 커다란 솥에 집어넣고 삶으려고 해. 난 죽고 싶지 않아. 다시는 그자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그들은 너무 끔찍해."

 마르크는 멀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다가 울부짖었다.

 "너, 너도 악마야. 악마가 어디에나 있어."

 그는 내 얼굴을 향해 플라스크 하나를 집어 던지더니, 주사기 몇 개를 들고 아망딘을 쫓아가서 주사기 하나를 그녀의 엉덩이에 꽂았다. 내가 그를 말리려고 끼어들자 메스로 내 이마에 칼자국을 냈다(내 이마엔 아직도 그때 생긴 상처가 남아 있다).

 마르크의 행동은 잠깐 동안 찾아온 우리의 열광에 찬물을 끼얹었다. 저번에는 식물인간이더니 이번엔 정신 이상자였다. 라울조차도 마르크의 난폭한 행동에 마음의 타격을 입은 듯했다. 라울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는 성공한 걸까? 마르크는 정말 저승을 보고 온 것일까? 그가 오로지 두렵다는 말을 하는 것이 그의 탓은 아니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마르크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필름을 폐기하고 그를 정신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렇지만 마르크는 임사 체험을 실제로 해본 최초의 실험 대상이었다. 비록 빛으로 가득 찬 터널 따위를 보았노라는 멋진 기억을 가지고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정신은 좀 이상해졌어도 육신은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으니 말이다.

 그날 저녁에 나는 아망딘을 내 차로 집에 데려다주었다. 차 안에서 아망딘은 날씬한 다리를 연방 꼬았다 풀었다 했다. 주사기에 찔린 그녀의 엉덩이 상처는 경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 이마의 상처는 스물다섯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아망딘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검은 원피스- 아망딘은 늘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에서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자못 육감적이었다.

 아망딘은 마르크 때문에 한바탕의 소동을 겪고 난 탓인지, 평소처럼 교외 고속 전철을 타고 귀가할 생각이 안 들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소동의 뒤끝이 개운치 않아 그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혼자서 밤을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 중얼거리듯 물었다.

 "이쯤 해서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망딘은 말이 없었다. 늘 침묵을 지키는 그녀. 그토록 아름다운 그녀가 말을 아끼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그녀가 뭔가 경이로운 것을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녀의 침묵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망딘은 한낱 소도구가 아니었다.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무모한 실험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거나 미쳐 버리는 것을 보아 왔다.

 나는 그녀의 침묵을 깨뜨리고 싶어서 계속 지껄였다.

 "인명 손실이 너무 많아요. 그에 비해 성과는 너무 보잘것없고요.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만난 지도 꽤 됐는데, 난 아망딘이 세 마디 넘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함께 일하고 있어요. 서로 터놓고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가 힘을 합쳐서 라울이 일을 그만두게 만들어야 해요. 이제 해볼 만큼 해보았잖아요? 아망딘말고는 그 친구를 설득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그녀가 마침내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한참 동안 시선을 내게 붙박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아망딘이 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었다.

 "그 반대예요."

 "뭐라고요? 그 반대라고요?"

 "네. 일을 계속하는 게 우리의 의무예요. 바로 우리 일 때문에 죽은 모든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예요. 우리의 타나토노트들은 모두 자기들이 얼마나 큰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지 알고 있었어요.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죽음이 다음 사람에게 성공할 기회를 좀 더 많이 주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요."

 "그건 마치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돈을 거는 포커판 같군요. 그러다가 완전히 거덜나는 수가 있지요. 벌써 열다섯 명을 뽑아 열 명을 희생시켰어요. 이건 연구 사업이 아니라 일종의 살인 게임이오. 안 그렇소?"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아망딘의 대꾸는 여전히 냉랭했다.

 "우리는 개척자예요."

 "개척자가 별건 줄 아시오? 미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소. (진짜 개척자를 알아내기는 쉬운 일이다. 그는 등에 화살을 맞고 극서부 평원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다.)"

 그 말이 아망딘의 화를 돋우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서 나 역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 보죠? 우리 타나토노트들은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었어요. 용기가 다들 대단했지요..."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두 문장이 넘게 잇달아 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는 그녀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자살 행위였소."

 "자살 행위라고요? 그렇기로 말하면,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로 나갔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자살 행위를 했던 게 아닌가요? 또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어떻고요! 로켓 안에 있는 금속 통에 몸을 싣고 지구 밖으로 날아갔으니 그거야말로 자살 행위가 아니었을까요? 자살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세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또 그 소리다! 갈릴레이, 콜럼버스도 모자라 이제 가가린까지 들고나왔다. 라울과 아망딘은 대량 학살을 정당화할 만한 선례를 잘도 끌어다 대고 있었다.

 아망딘은 이제 자기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말투는 여전했다.

 "팽송 박사님, 박사님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우리가 지원자들을 그토록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으세요? 수감자들은 모두 우리의 실패를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이 왜 우리에게 올까요? 모르시겠어요? 제가 말씀드리지요. 그건 우리 타나토드롬에 들어오면, 사회의 쓰레기라고 천대받던 그들이 갑자기 영웅으로 탈바꿈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왜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다른 수감자들이 위에서 우리에게 욕설을 퍼붓는 겁니까?"

 "역설적인 태도에 그들 내면의 진실이 담겨 있어요. 그들은 동료들을 죽인 것에 대해 우리를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 역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언젠가는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일을 성공시킬 거예요. 저는 그것을 확신해요."

 아망딘의 모든 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처음엔 그녀의 냉담과 침묵과 신비로움이 나를 사로잡더니, 이젠 그녀의 열정이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금발의 여인이 무슨 불덩이라도 되는 양 내 오감이 달아올랐다. 어쩌면 죽음을 너무 자주 접한 탓에 삶을 향한 나의 욕구가 더욱 강렬해진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망딘과 내가 단둘이 있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감정이 격해져 있는 아망딘의 모습에 내 마음이 파도처럼 술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모든 걸 잃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내 손이 변속 지렛대를 벗어나 차가 덜컹거리는 틈을 타서 그녀의 무릎 위에 닿았다. 그녀의 살결은 사탱 천처럼 반드르르하고 믿기지 않을 만큼 보들보들했다.

 아망딘은 위험한 물건을 내치듯 내 손바닥을 밀어냈다.

 "미안해요, 미카엘. 하지만 당신은 전혀 내 취향에 맞는 남자가 아니에요."

 그럼, 그녀의 취향에 맞는 남자란 도대체 어떤 남자일까?

 

 58. 여전히 아무런 성과가 없다

 8월 25일 목요일, 과학부 장관이 비밀리에 플뢰리 메로지의 타나토드롬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메르카시에 장관은 영계 탐사를 위해 (이륙)하는 광경을 직접 참관하고 싶어 했다. 장관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자기가 세기적인 우행(愚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과, 그런 경우라면 국회에 불려나가 곤욕을 치르기 전에 당장이라도 발을 빼야겠다는 약삭빠른 속셈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장관은 악수와 함께 치하의 말을 건네고, 특히 새로 선발된 다섯 타나토노트의 사기를 복돋워 주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의 말속에는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관은 라울을 따로 불러 우리가 실패한 횟수를 조심스럽게 물어보고는 라울이 그 수를 귀엣말로 알려 주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장관은 내 쪽으로 오더니 나를 방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자네가 만든 부스터가 너무 독성이 강한 게 아닌가?"

 "아닙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 어디에 문제가 있지?"

 "여러 차례 실험을 해본 결과, 일단 코마 상태에 들어가고 나면 타나토노트들은, 말하자면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떠날 것인가 아니면 돌아갈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 둘을 놓고 저울질을 하다가 그들은 모두 떠나는 쪽을 선택하는 듯합니다."

 메르카시에 장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강제로 그들을 돌아오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더욱 강력한 전기 충격을 준다든지 해서 말일세. 자네도 아다시피, 대통령 각하를 이승으로 다시 모셔올 때도 의사들이 과감하게 전기 충격을 가했네. 그들은 심장에 전극을 바로 갖다 댔지."

 장관이 과학자라는 점을 감안하여, 나는 대답에 신중을 기하였다.

 "그게 그리 간단치는 않습니다. 타나토노트들이 영계로 (충분히 들어갔다)고 생각되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일찍 깨우면 아무 소용이 없고, 너무 깊이 들어간 뒤에 깨우면 소생시키기가 불가능해집니다. 결국 타이밍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대통령을 소생시킨 의사들은 운이 좋았던 것입니다. 아주 적절한 순간에 그분을 다시 모셔올 수 있었으니까요. 그건 순전히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관은 뭔가 과학자다운 면모를 과시하고 싶어했지만 사실은 별로 아는 게 없는 듯했다.

 "그래도 전압을 높이고, 마취제의 양을 줄이고 염화칼륨의 용량을 줄여 보게. 그러면 아마 그들이 더 일찍 깨어날 수 있을 거야."

 이미 우리가 다 시행해 본 바였지만, 나는 마치 드디어 기적 같은 비법을 깨닫기라도 한 사람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고 장관을 속일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돌아올 가능성이 남아 있을 때 타나토노트들이 자발적으로 귀환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들이 저승길로 계속 나아가는지 그걸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저 위에 그들을 끌어당기는 뭔가 매력적인 것이 있는 듯한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그걸 안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을 제안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자네 말을 들으니 옛날의 어떤 뱃사람들 얘기가 떠오르는군. 16세기 유럽의 뱃사람들이 태평양에 있는 어떤 섬들에 표착한 일이 있었다네. 그 섬엔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들과 향기 그윽한 열매들이 있었지. 그 뱃사람들은 힘겹게 고향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거기에 남는 쪽을 선택했다네."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였다. 예컨대 (바운티) 호의 반도(叛徒)와 우리 타나토노트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의 뱃사람처럼 우리 타나토노트들도 전과자들이었고 새로운 땅으로 도망치고 싶은 욕구도 그들 못지 않을 터였다.

 "사람들이 저승으로 달아나지 않게 붙잡을 방법이 없을까?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에 저항하게 하고 환자들로 하여금 낫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메르카시에 장관이 물었다.

 "행복에 대한 의욕이겠지요."

 그런 막연한 대답을 내놓으며 나는 한숨을 지었다.

 "그렇겠지. 그럼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 타나토노트들이 (떠날 것인가 아니면 돌아갈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될 때,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들이 돌아오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걸세."

 나는 병원에 있을 때, 자연 치유가 이루어진 증례에서는 환자의 의지가 커다란 몫을 차지한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었다. 애오라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한 열망을 지닌 덕분에 목숨을 보전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에 관한 어떤 연구 논문에서, 설날에는 그곳 주민들의 사망률이 거의 0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노인들과 위독한 병자들이 그 명절을 다시 즐기기 위해 하루라도 더 목숨을 부지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다음날이 되면 사망률은 정상적인 수준으로 되돌아온다고 했다.

 사람의 생각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자명종의 도움 없이 아침 몇 시에 눈을 뜨겠다고 뇌에 프로그램을 짜 넣으면 어김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런 것을 통해 뇌의 잠재력이 조금이나마 개발되었다며 즐거워했던 일이 기억난다. 우리 뇌의 주름 속에는 많은 정보들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머릿속에 있는 서랍을 열기만 하면 우리는 그 정보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신경 체계의 자동 프로그래밍에 관한 연구가 분명히 실행되고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 실험에 활용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타나토노트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코마에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장관이 왔던 그 날의 실험에서 타나토노트는 귀환을 선택하지 않았다. 남아 있던 그의 네 동료는, 그가 죽음의 문턱을 완전히 넘어가던 순간에 보여 준 발작적인 몸짓에 겁을 집어먹고는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이제 타나토노트들끼리 서로 먼저 영웅이 되겠다고 나서는 상황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는 동료들을 참관시키지 않고 우리 연구팀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사람씩 따로 떠나보내야 할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어려워질 것 같았다. 플뢰리 메로지에서조차 지원자를 모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59. 티벳 신화

 티벳 사람들에 따르면, 티벳 불교의 신(귀신 신) 가운데는 다음과 같이 아홉 무리의 귀신이 있다고 한다.

 1. 스비인 신: 사찰의 수호신이자 돌림병을 널리 퍼뜨리는 귀신

 2. 브두드: 천계의 상층부에 있는 귀신. 물고기나 새, 풀, 돌로 변신할 수

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아홉층으로 된 높은 흑루(黑樓)에 살고 있다.

 3. 스린포: 사람을 잡아먹는 거구의 두억시니

 4. 클루: 뱀의 형상을 한 지옥의 신

 5. 브찬: 하늘과 숲과 빙하에 사는 신

 6. 라: 백색의 천신(天神).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이로운 신들로서 누구의 어깨 위에나 머문다고 한다.

 7. 드무: 악귀의 무리

 8. 드레: 저승사자. 종종 치명적인 질병을 퍼뜨리는 귀신으로 여겨짐.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은 모두 이 귀신들이 일으키는 것이다.

 9. 간드레: 악신의 무리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60. 펠릭스26) 케르보스

 엄밀히 말해서 펙릭스 케르보스는 우리가 이웃으로 삼고 싶어 할만한 사람이 못 되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기막힌 내력을 알고 나면, 얼마간은 그에게 정상 참작의 은전을 베풀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의 삶은 태어나는 과정부터 기구하였다. 부모가 피임에 실패함으로써 세상에 나온 그는 원하지 않은 아이로 세상에 태어났다. 소비자 보호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모든 상품을 시험합니다)라는 잡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펠릭스의 아버지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상표의 콘돔은 신뢰도가 96%에 불과했다. 그 콘돔을 써서 실패하는 4%의 경우에 펠릭스가 포함된 것은 전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도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콘돔이 자기의 기대를 저버린 것을 알았을 때, 펠릭스의 아버지가 느낀 낭패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가 서른다섯이 되어 뒤늦게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만 보아도 그 사실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펠릭스의 어머니 쉬제트는 아이가 들어선 것을 알자마자 유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태아기 때부터 이미 개털에 낀 진드기처럼 검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낙태 전문가들이 되풀이해서 애를 썼지만 태중에 있는 아기의 얼굴에 상처를 냈을 뿐이었다.

 펠릭스가 태어난 뒤로, 그의 어머니는 두 차례에 걸쳐 그를 익사시키려고 했다. 처음에 펠릭스의 어머니는 머리를 감긴다는 핑계로 아이의 머리를 욕조의 물속에 처박았다. 쉬제트는 충분히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펠릭스의 머리를 들어 올렸으나 아이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뒤에 쉬제트는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강물 속으로 떠밀어 버렸다. 하지만 펠릭스는 어떠한 역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지나가던 배의 나선 추진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뺨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그런 다음에 아이는 어머니가 내민 우산대를 잡고 강둑으로 다시 기어오를 수 있었다. 애초에 어머니는 우산으로 아이의 머리를 때리려고 했던 것인데, 동작이 서툴렀던 탓에 아이가 그걸 잡고 살아난 것이었다.

 어린 시절 내내 펠릭스 케르보스는 왜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지 의아해했다. 아이는 그 이유를 자기가 못생겼기 때문이거나 자기 어머니가 너무 아름다운 것을 시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그의 울분이 마침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터져 나왔다. 어머니가 죽자, 그는 세상에서 자기가 사랑하던 단 하나뿐인 사람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증오뿐이었다.

 펠릭스의 증오심은 처음에 자동차 타이어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펠릭스는 칼을 들고 다니며 애먼 자동차의 타이어에 구멍을 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그의 성이 풀리지 않았다. 펠릭스는 불량배와 어울려 다니면서, 살아 있는 엄마 밑에서 자라는 부유하고 운 좋은 아이들을 협박해서 돈을 뜯어냈다. 그는 그런 아이들 중에서 돈 내놓기를 꺼려하는 아이 셋을 죽였고, 그런 잔혹성을 인정받아 그 패거리의 살인 전담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열여덟 살 무렵이 되자 그의 친구들이 이성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성폭행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를 열광시켰던 것은, 부유한 사람들의 집에 쳐들어가 그들의 가슴에 칼을 꽂는 일이었다. 그것이 세상에 대해 그가 앙갚음을 하는 방식이었다. 자기를 키우느라고 그토록 고되게 살다 간 사랑하는 자기 어머니의 원한을 그는 그런 식으로 풀고 싶어 했다.

 펠릭스는 스물다섯 나던 해에 중죄 재판정에 섰다. 그는 배심원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날이 선 길고 뾰족한 칼을 남의 물렁물렁한 배에 쑤셔 넣으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는 그의 이야기를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은빛 흉기로 사람을 찌를 때의 산득산득한 기분에 집착하는 그를 누가 이해할 수 있었으랴. 검사의 구형대로 펠릭스에게는 284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행형 성적이 좋을 경우, 형기가 256년으로 단축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었다. 펠릭스의 변호사는, (의술이 진보해서 평균 수명이 현재의 90세보다 더 연장되지 않는 한), 그것은 무기 징역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펠릭스는 감옥에 갇혀, 멧돼지 털로 칫솔을 만드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일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일만으로 그의 삶이 행복할 리 만무였다. 그는 합법적으로 출옥을 하리라고 다짐했다. 이미 모범적인 수형 생활을 한 덕에 형기가 256년으로 단축되어있는 마당이었다. 펠릭스는 잔여 형기를 더 신속하게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골몰했다.

 그러던 차에 교도소장이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소장의 얘기는, 오늘날엔 뭐든지 팔 수 있다, 그게 바로 현대 사회의 특징이 아니냐, 그러니 케르보스의 잔여 형기도 (거래)를 통해 줄여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돈이 있어서 거래를 합니까?"

 가련한 펠릭스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누가 지금 돈 얘기를 하고 있는 겐가? 자네 같은 장부들이야 몸이 건강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굉장한 재산을 가진 거나 다름없지."

 그리하여 하나의 끔찍한 거래가 시작되었다.

 펠릭스는 세월을 벌기 위해, 아직 시판이 허용되지 않은 의약품의 효능과 안전성을 직접 시험하였다. 그 의약품들의 부작용은 물론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짐승을 친구로 여기는 자들의 압력 때문에 동물을 상대로 한 실험이 금지된 뒤로, 의약업자들은 죄수들말고는 달리 도움을 청해 볼 데가 없었다.

 펠릭스는 어떤 항(막을 항)부정맥제를 시험 복용함으로써 3년의 감형을 얻어냈다. 그 약 때문에 그에게는 부정맥과 불면증이 생겼다. 불소의 함량이 너무 많은 치약을 시험 사용하다가 간이 나빠지기도 했고(5년 감형), 세척력이 너무 강한 비누 때문에 살갗이 거덜나기도 했다(3년 감형). 어떤 초(超)활성 아스피린은 궤양을 일으켰고(2년 감형), 어떤 지독한 헤어로션은 그의 머리를 반은 대머리로 만들어 버렸다(4년 감형).

 펠릭스 케르보스는 사기를 잃지 않았고, 어떤 때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상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경이로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교도소 내에 소요가 일어났을 때, 펠릭스는 교도관들 편에 서서 주먹을 휘둘렀고, 그 공로로 2년을 감형받았다. 뿐만 아니라 교도소 내에 만연해 있던 마약 밀거래를 고발함으로써 동료 수감자들의 원성이 자자한 가운데 3년의 감형을 얻어냈다.

 "이봐, 펠릭스. 그렇게 잘 보이려고 애써서 뭐 하겠다는 거야?"

 "남이야 뭘 하든 자네들이 무슨 상관이야. 난 눈에 잘 들려고 애쓰는 사람도 아니고 고자쟁이도 아니야. 내겐 야심이 있어. 네까짓 것들이 내 마음을 알겠어? 난 여기서 당당하게 나갈 거야."

 "누가 말려? 그 싸구려 약품들 갖고 계속 씨름해 보라고. 두 다리로 걸어 나가기가 쉽지 않을걸."

 펠릭스는 토요일마다 헌혈을 했고(0.25리터당 1주일씩 감형), 목요일마다 흡연의 폐해에 관한 보건부의 연구를 돕기 위해 필터 없는 궐련을 열 갑씩 피워댔다(담배 한 갑을 피울 때마다 하루씩 감형). 또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감각 차단 실험의 피험자 노릇을 했다. 그 실험을 할 때는 방음이 되어 있는 하얀 방에서 온종을 먹지도 않고 가만히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러면 저녁에 하얀 가운 입은 사람들이 와서 그 실험이 그에게 준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했다.

 갖은 고난을 다 겪은 끝에 펠릭스는 마침내 그의 잔여 형기를 148년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하였다. 콩팥은 한쪽밖에 못 쓰게 되었고, 부작용의 폐해가 너무 심한 어떤 소염제 때문에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또한 시험적으로 착용한 콘택트렌즈 때문에 계속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는데, 그 콘택트렌즈는 너무 유연하고 부착력이 강해서 일단 각막에 붙어 버리면 다시 떼어 내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펠릭스는 자기가 언젠가는 출감하게 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소장이 그에게 (천국) 사업 얘기를 꺼내며 80 년 감형을 약속했을 때, 펠릭스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자시고가 없다며 당장 하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좋은 일을 왜 진작에 제안하지 않았느냐는 투였다.

 물론 교도소 안에 뜬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지하에 있는 어떤 방에서 실험을 벌이고 있는데, 수백 명의 수감자가 목숨을 잃었을 거라는 소문이었다. 펠릭스는 그런 소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겨 온 그인지라 자기 명줄이 질기다는 것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운이 없었던 것이고 자기는 그들과 다르리라고 생각했다. 뭐니 뭐니 해도 80년 감형이라는 대가를 놓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게 어디 있던가. 80년 세월을 벌려면 그에 걸맞는 노력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펠릭스는 기꺼이 치과용 의자에 앉았다. 그는 가슴을 내밀어 전극을 쉽게 장착할 수 있게 해주었고 냉각용 담요를 손수 끌어당겨 덮었다.

 "준비됐습니까?"

 "네, 시키신 대로 했습니다."

 케르보스가 대답했다.

 "준비 완료."

 "준비 완료!"

 펠릭스는 기도를 올리지 않았다. 성호도 긋지 않았고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지도 않았다. 그저 오른쪽 볼 안에 늘 넣고 다니며 씹는 담배를 단단히 고르잡았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는 과학적으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것은 아예 무시하고, 그의 관심은 오로지 일이 끝난 뒤에 찾아올 보상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80년의 감형이라니!

 우리가 일러준 대로, 펠릭스가 천천히 초읽기에 들어갔다.

 "여섯... 다섯... 넷... 셋... 둘... 하나... 발진!"

 그런 다음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스위치를 눌렀다.

 

 61. 치피와 인디언 신화

 치피와 인디언은 슈피리어 호에서 아주 가까운 미국 위스콘신주에 사는 원주민이다. 죽은 다음에도 그들은 삶이 예전과 똑같이 계속된다고 생각한다. 삶에는 끝도 없고,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떤 변화도 없다. 삶은 어떤 목적, 어떤 도덕, 어떤 의미도 없이 똑같은 필름을 한없이 되돌리는 것과 같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62. 경찰 기록

 관계 부서에 보내는 보고

 라울 라조르박이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연구팀의 협조를 얻어 현재 죽음에 관한 실험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 실험 과정에서 이미 10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듯합니다.

 관계 부서의 회신

 시기상조임.

 

 63. 새로운 시도

 라울과 아망딘과 나는 늘 하던 대로 코마에 빠진 뒤에 깨어나게 하는 일련의 조처들을 실시했다. 가망이 별로 없어 보였다. 라울만이 이미 물건처럼 되어 버린 펠릭스의 몸뚱이를 응시하며 기도를 외듯 되뇌었다.

 "깨어나게, 제발. 깨어나게."

 우리는 심전도와 뇌파도가 어렴풋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소생술을 시행했다.

 "깨어나게, 깨어나게."

 라울이 중얼거렸다.

 나는 기계적으로 상용적인 조처를 다 취했다.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탈감에 젖어 들지 않기 위해서 크게 비명이라도 한바탕 지르고 싶었다. 그때 라울이 울부짖는 소리로 외쳤다.

 "손가락을 움직였어! 물러나게. 모두 물러나! 이 친구가 움직였어."

 나는 잘못 본 것이려니 생각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심전계에서 삐 소리가 났다. 처음엔 들릴락말락하게 삐 하고 한 차례 소리를 내더니, 다음엔 삐, 삐 하고 잇달아 소리를 냈고 마침내 삐, 삐, 삐 하면서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하나가 다시 움직이더니 이어 모든 손가락들이 움직였다.

 움직임이 손에서 팔로, 다시 어깨로 이어졌다. 또다시 정신 이상자를 마주하게 되는 게 아니어야 할 텐데 하면서 나는 주머니에 있는 작은 고무 곤봉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종류의 불상사를 예방하는 뜻으로 늘 지니고 다니는 일종의 부적이었다.

 펠릭스가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눈을 떴다. 입가에 주름이 잡혀 찡그린 표정이 생기더니 곧 벙긋거리는 웃음으로 바뀌었다. 삐, 삐, 삐 소리와 함께 뇌와 심장의 리듬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인간 기니피그는 식물인간으로도 정신 이상자로도 보이지 않았다. 몸도 성하고 정신도 멀쩡했다. 마침내 타나토노트가 무사히 타나토드롬으로 귀환한 것이었다.

 "와아아아아 야호! 해냈어!"

 환호성이 실험실 안에 울려 퍼졌다. 아망딘과 라울과 나는 격렬하게 서로 부둥켜안았다.

 라울이 가장 먼저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펠릭스에게 몸을 구부리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든가?"

 우리는 신비의 세계를 다녀온 특별한 여행자 입에서 맨 처음 나올 말이 무엇일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 말이 어떤 것이든 그는 십중팔구 영계를 다녀오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간으로서 역사 교과서의 한 구절을 차지하게 될 터였다.

 방안에 갑자기 깊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제껏 실패만 되풀이했었는데, 인류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꿈꾸어 오던 해답을 피테칸트로푸스처럼 생긴 그 무뢰한이 쥐고 있었다.

 펠릭스의 입술이 옴지락거렸다. 말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도로 닫혔다. 그는 눈을 지긋이 감고 다시 말문을 떼어 보려고 입을 움직였다. 쉰 목소리가 힘겹게 토막 져 나왔다.

 "에이... 빌어먹을!"

 우리는 깜짝 놀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펠릭스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아이고, 빌어먹을, 저 거시기..."

 그러고 나서 그는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우리가 자기에게 그토록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게 놀랍다는 투였다.

 "그런데, 내가 80년 감형을 받긴 받는 거요?"

 당장이라도 그를 잡고 흔들며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그가 제정신을 차리도록 틈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라울은 참지 못하고 다그쳐 물었다.

 "어땠나?"

 펠릭스는 두 손목을 서로 문지르며 눈을 깜박였다.

 "음, 뭐랄까... 이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내 몸뚱이에서 빠져나갔소. 처음엔 되게 겁나더구먼. 작은 새가 된 기분이었소. 빌어먹을! 몸 밖에서 날아다녔단 말이오... 오늘 갓 죽은 송장들하고 다 같이 높이 올라갔소. 여기에서 보던 얼굴도 있더구먼요. 그렇게 잠시 날다가 빛으로 된 커다란 고리 앞에 다다랐소. 그 고리는 테두리에 불을 붙여 놓은 굴렁쇠 같았소. 텔레비전에서 서커스할 때 보면 호랑이들을 불길 속으로 지나가게 하는 곡예가 있지요? 바로 그럴 때 쓰는 불 굴렁쇠 같은 거였소."

 펠릭스는 숨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듣고 있었다. 자기 이야기에 우리가 그토록 열띤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에 흐뭇해하며 펠릭스가 말을 이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소. 그 한가운데에서는 손전등 불빛 같은 것이 있었소. 그러니까 네온 불빛이 테를 두르고 있고 가운데에 빛이 한 줄기 있는 거요. 그 빛이 마치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소. 빛이 나에게 어서 오라고, 가까이 오라고 말하고 있었소. 그래서 갔지요. 곡마단의 호랑이처럼 불길이 넘실거리는 굴렁쇠를 넘어, 손전등 불빛 쪽으로 다가갔소..."

 라울이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불로 된 동그라미가 있고 중앙에 빛이 있더란 밀이지요?"

 "그렇소. 과녁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면 될 거요.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소? 빛이 내 뇌에 대고 직접 얘기했다는 걸 말했는지 모르겠네. 하여튼, 빛은 나보고 더 다가오라고 말했소. 안심하라면서 말이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갔나요?"

 아망딘이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요. 앞으로 나아갔더니, 원뿔이나 깔대기 같은 것이 나타났어요. 거기에서 뭔가가 빙빙 돌고 있더군요."

 "그게 뭔데요?"

 "글쎄요, 거시기... 별떼나 증기 알갱이 같은 것들이 소용돌이를 치며 깔대기 모양을 이루고 있었어요. 집을 한 백 채쯤 포개 놓은 것 같은 커다란 깔대기였지요."

 라울은 제 오른 주먹으로 왼쪽 손바닥을 때리며 소리쳤다.

 "영계야! 펠릭스는 영계를 본 거야!"

 "계속하게, 펠릭스."

 나는 라울 때문에 중단된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부탁했다.

 "그러지요. 나는 계속 나아갔소. 나아갈수록 빛이 자꾸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소. 이러다간 끝내 못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소. 잘못하면 십 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되겠다 싶더군요. 80년 감형이 물거품이 될 뻔했지요. 그 빛이 내 머릿속에서 자꾸 속삭였어요. 감형이고 뭐고 다 부질없는 것이다. 아래 세상에 있는 건 다 헛되고 어리석은 것을 뿐이다라고 말이오. 생각해 보니 솔깃한 얘기였소. 게다가 그곳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보물이 가득한 알리바바의 동굴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소. 금과 은이 가득한 동굴이 아니라 유쾌한 느낌으로 가득한 동굴이었지요. 아늑하고 따뜻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웠소. 마치 어머니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소... 물 좀 없어요? 입안이 너무 깔깔해서 물 좀 마셔야겠소."

 아망딘이 컵에 물을 따라왔다. 펠릭스는 물 한 잔을 단숨에 비우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결국 계속 나아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소. 빌어먹을! 그렇게 나아가는데 앞에 투명한 벽이 나타났소. 벽돌로 지은 벽이라기보다는 엉덩이 살가죽 같은 것으로 된 벽이라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젤라틴으로 만든 벽이라고 생각해도 될 거요. 그 벽을 보니 내가 창자 끝의 똥구멍 바로 앞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먼요. 위험이 닥치리라는 것을 직감했지요. 그 벽을 넘으면 마치 똥구멍을 빠져나가듯이 다시는 못 돌아올 것 같았소. 그럼 모든 게 끝나는 거고 80 년 감형도 날아가는 거요. 난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었소."

 결국 펠릭스는 내가 고민하던 (선택)의 문제를 해결한 셈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자기가 살아 남아야 할 이유를 생각해 냈던 것이다. 해답은 놀라울 만큼 간단한 것이었다.

 펠릭스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소. 나 혼자 힘으로 영혼이 가던 길을 되돌리느라고 엄청나게 애를 먹었소. 그렇게 한동안 애를 썼더니 기다란 은색 줄 같은 것이 단번에 나를 여기로 데려왔소. 그런 다음 나는 다시 눈을 떴지요."

 우리 셋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제7 천국을 갔다 온 기분이 아마 그런 것일 것 같았다. 펠릭스의 쾌거로 그간의 모든 희생이 헛되지 않게 되었다. 우리 노력이 마침내 열매를 맺은 것이다. 한 사람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다 돌아와서 저승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펠릭스가 냉수에 이어서 이번에는 럼을 한 잔 달라고 했다. 아망딘은 서둘러 달려가 그것을 갖다주었다.

 "기자 회견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사람들도 알아야지..."

 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는데, 라울이 재빨리 쐐기를 박았다.

 "너무 일러, 당분간 우리 사업은 1급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하네."

 

 64. 뤼생데르

 대통령 뤼생데르는 흐뭇한 마음으로 애견 베르생제토릭스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들이 성공했단 말이지요, 메르카시에 장관!"

 "그렇습니다. 제가 봤습니다. 그 타... 타나토노트가 떠났다가 돌아오는 장면을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제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습니다."

 "타나토노트라고 했소?"

 "실험 대상자들을 지칭해서 그들이 지어낸 말입니다. "죽음의 세계를 항해하는 자"나 그 비슷한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대통령은 눈꺼풀에 실주름을 잡으며 싱긋 웃었다.

 "아주 그럴듯한데. 아주 시적인 이름이오. 여하튼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다소 학술적인 분위기를 풍기긴 하지만 그런 진지한 태도는 우리 실험에 전혀 나쁠 게 없지요."

 뤼생데르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이름이 어떤 것이든 그는 만족했을 것이다. 죽음의 벗들이면 어떻고, 사계(死界) 비행사면 어떻고, 천국 탐사자면 어떠랴...

 메르카시에 장관은 대통령의 관심이 자기에게 쏠리게 하려고 애썼다. 따지고 보면 그 사업의 틀을 잡은 사람은 그였다. 따라서 그가 사업의 성공에 우쭐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는 아내가 그려 주는 행동 노선을 그대로 따라 일대 모험을 감행했던 거였다.

 "결국, 그들은 (새로운 오스트레일리아)를 탐험한 선구자들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요, 메르카시에 장관. 장관이 결국 내 생각을 이해한 것 같군요."

 장관은 그 발견의 공로를 스스로에게 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웅대한 전망을 지닌 뤼생데르 대통령일 거였다. 뤼생데르는 자기가 불멸의 업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들어설 것이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생겨나리라... 실로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일을 해냈다. 그 일을 위해 치른 대가도 적지 않았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어쩌면 100명 가까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해내고야 말았다. 영광 가득한 꿈이 한창 무르익어 가는데, 메르카시에 장관이 끼dj들어 김을 뺐다.

 "대통령 각하, 이제부턴 무엇을 해야 할지요?"

 

 65. 역사 교과서

 영계 탐사는 처음 타나토노트들을 파견하자마자 바로 성과가 나타났다. 그렇게 빨리 성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최초의 지원자인 펠릭스 케르보스가 대번에 영계로 떠났다가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영계 탐사의 개척자들은 일이 그렇게 빨리 성사된 것을 오히려 놀라워했다.

   "기초 강의용 영계 탐사의 역사"

 

 66. 켈트 신화

 켈트 신화에 따르면 저승은 죽음도 노동도 겨울도 없는 신비로운 세계이다. 거기에는 신들과 정령들과 영원히 늙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웨일스 사람들은 그 나라를 (아눈)이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소생의 솥과 풍요의 솥이 있다. 소생의 솥은 죽은 전사들에게 목숨을 되돌려 주고 풍요의 솥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마련해 준다.

 웨일스 사람들과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눈), 즉 저승이 물질세계와 똑같이 실재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몇 가지 마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67. 축제가 끝나고

 "펠릭스는 얼마나 좋을까. 나도 그렇게 해보았으면."

 늘 차분하던 아망딘이 평소와 다르게 들떠 있었다. 회합이 끝난 뒤에 종종 그랬듯이 그날도 내 차로 그녀를 바래다주던 길이었다. 그날 밤에 우리는 약간 취해 있었다. 타나토드롬에는 거품 이는 포도주밖에 없어서, 그걸 플라스틱 잔에 따라 마시며 우리의 성공을 은밀하게 자축했던 것이다.

 "정말 환상적인 순간이었어요! 내가 펠릭스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최후의 대륙에 발을 디디고 돌아온 최초의 인간, 최초의 타나토노트가 바로 나라면 말이에요! 아, 정말. 펠릭스가 부러워요!"

 나는 구름 속을 헤매고 있는 그녀를 지상으로 끌어내리려고 애썼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귀환할 만한 동기가 확실해야 해요. 그 친구 이야기하는 거 들었잖아요. 빛에 유혹을 당해 돌아올까 말까 하고 망설였다고요. 결국 이승에서 감형을 얻어내야 한다는 강한 동기가 있어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요."

 나는 가속기를 밟았다. 어슴푸레한 차창 밖으로 교외의 우중충한 풍경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 쪽으로 슬쩍 눈길을 돌려보니, 아망딘은 차가 흔들리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에 정성스럽게 분을 바르고 있었다.

 이제 조금씩 그녀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울에게서 그녀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토록 어여쁜 그 여자는 아주 성실한 간호사였다고 했다. 그녀의 성실함은 오히려 지나칠 정도였다. 아망딘은 병원에서 자기가 맡은 환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우리 일에 참여한 여자였다. 학창 시절에도 성적이 나쁘게 나오면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이 낙심을 하던 그녀였다. 병원에서 환자가 죽는 것이 그녀에겐 학교에서 영점을 받는 것만큼이나 절망스런 일이었다. 자기 환자가 수술대 위에서 죽으면, 아망딘은 그것을 자기 책임으로 느꼈다.

 동료들이 아무리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도, 아망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망딘은 사망자가 생길 때마다 그것을 자기가 무능한 소치라고 확신했다.

 아망딘은 환자들이 죽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엔, 죽음은 환자의 선택이었다. 암이 전신에 퍼진 말기 환자조차도 사랑을 통해 죽음을 선택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 환자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그가 삶을 선택하도록 도와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졌기에, 아망딘은 자기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더욱 열심히 사랑하려고 애썼다. 그래도 환자들이 죽으면, 아망딘은 그들에게 충분한 애정을 쏟지 못한 자신을 나무랐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아망딘으로서는 차라리 직업을 바꾸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실패는 언제나 완벽함을 향한 새로운 시작으로 그녀를 내몰았다. 그런 게 아니었더라면 그녀의 끝없는 자책감은 결국 자기 파괴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 아망딘은 우연히 작은 광고를 읽게 되었다. 빈사 환자를 관련해서 돌보는 어떤 사업과 관련해서, 의욕적으로 일할 간호사 한 사람을 찾고 있다는 광고였다. 아망딘은 그 광고를 읽고 바로 지원을 했다. 라울에게서 (천국)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일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죽은 이들을 산 사람의 세계로 데려올 수 있는 일이라면 자기의 열과 성을 다 바쳐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아망딘이 사업 초기에 그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타났는데도 그걸 전혀 개의치 않고 견디어 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망딘은 기이한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즉, 아망딘은 막연한 미래에 많은 사람들을 구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지금 몇 사람쯤은 희생시켜도 좋다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내가 펠릭스라면 좋겠어요. 그는 참 용기 있고 멋있는 남자예요."

 그녀가 그렇게 같은 소리를 되풀이했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과장까지 할 필요는 없잖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가 있다는 건 그럭저럭 들어줄 만했지만, 세상에 그 피테칸트로푸스를 보고 멋있다고?

 "그는 틀림없이 저 위에서 엄청난 시련을 견디어 냈을 거예요."

 아름다운 그녀는 그저 펠릭스 얘기만을 하고 있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하죠?"

 나는 화제를 바꿀 양으로 그렇게 물었다.

 "영계로 보낼 사람들을 늘려야지요. 라울이 이미 메르카시에 장관에게 희소식을 전했어요. 대통령께서 친히 우리를 치하하고 싶어 한다는군요. 그분이 직접 교도소장에게 연락을 취해서 새로운 타나토노트 지원자들을 백 명쯤 선발하라고 지시했대요."

 아망딘은 무척 즐거워했다. 친구들끼리 모여 기습 파티라도 한바탕 벌이려고 준비하는 사람 같았다.

 "우린 해냈어요."

 터져 나오려는 기쁨을 억누르면서 그녀가 조용히 읊조렸다.

 

 68. 경찰 기록

 기초 신원 조회

 성명: 펠릭스 케르보스

 모발: 금발이 듬성듬성 나 있음

 신장: 1m 95cm

 외모의 특징: 거구, 흉터투성이의 얼굴

 특기 사항: 이승으로 되돌아온 최초의 타나토노트

 약점: 지능 지수가 낮음

 

 69. 신문 기사

 "뤼생데르 대통령 독직(도랑 독, 벼슬 직) 과학 실험 명목으로 일반 형사범 다수 희생"

 오랜 조사 과정을 거쳐 우리는 뤼생데르 대통령이 우리 시대의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과 전혀 다를 게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 국민 대다수의 손으로 뽑은 국가 원수가 랑드뤼27)나 프티오28)보다 더 사악한 범죄자라는 사실에 우리는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대통령은 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의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은 일반법을 어기고 복역 중인 수감자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죄갚음을 하여 평온하게 지낼 수 있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이었다. 대통령의 명분, 아니 범죄 동기는 소위 죽음에 대한 연구라고 한다. 우리 공화국 대통령이 아주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의 취미는 골프나 버터 요리나 옛날 돈 수집이 아니라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의 명분에 동조하는 몇몇 공모자들이 그의 범죄를 도왔다. 과학부 장관 메르카시에, 광인이나 다름없는 생물학자 라울 라조르박 교수, 본분을 저버린 마취과 전문의 미카엘 팽송, 출세욕에 사로잡힌 간호사 아망딘 발뤼스들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은 마음껏 자기의 뜻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추산으로는, 그 (죽음 연구팀)의 실험 과정에서 사망한 수감자가 무려 123명에 이른다고 한다. 전제적인 한 국가 원수의 병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인명이 희생된 것이다.

 로마 황제들이 힘없는 노예들에게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던 야만의 시대로 회귀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떤 황제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키러 오는지 안 오는지 알아보겠다고 무고한 사람들을 무작위로 골라 차례차례 처형한 적이 있었다. 우리 시대가 고작 그런 시대였단 말인가.

 그건 언어도단이다. 뤼생데르가 이따금 스스로를 카이사르로 착각하는 줄 알지만, 오늘날엔 황제도 없고 노예도 없다. 적어도 우리는 이제껏 그렇게 생각해 왔다. 우리는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대통령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고 확신해 왔다. 대통령의 첫 번째 임무가 무엇인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것이지 국민을 죽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사건은 플뢰리 메로지 교도소장의 제보를 본사가 독점으로 얻어냄으로써 진상이 밝혀질 수 있었다. 그는 교도소 지하실에 매일 같이 시체가 쌓여 가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사건을 폭로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사건이 알려지자마자 야당은 서둘러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를 요구하였다. 국회는 곧바로 진상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고 사실 조사에 들어갔다.

 국회의 조사에 응한 대부분의 국무위원들은 사실 확인을 거부했다. 그러나 몇몇 장관들은 위원회가 그 살인 사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경우에 즉각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한편 메르카시에 장관은 조사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탄핵 소추를 피하여 부인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도주한 것으로 밝혀졌다.

 

 70. 사면초가

 행복감에 젖어 있을 사이도 없이 엄청난 고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르보스의 쾌거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랐던 우리는 욕설의 진창으로 굴러 떨어져 오욕의 진창말이가 되었다.

 플뢰리 메로지 교도소장의 폭로는 그의 의도대로 성공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의 파장은 연일 증폭되고 언론의 공세도 갈수록 격해지고 있었다. 우리를 우리 자신의 실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자고 제안하는 사설들이 나오고, 국민의 78%가 가능한 한 빨리 우리를 철창 안에 가두기를 바라고 있다는 여론 조사 결과도 나왔다.

 예심 판사가 심문을 벌였다. 그는 우리를 차례차례 소환하였다. 내가 소환되어 갔을 때, 그는 내 공범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면 나를 선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약속을 했을 것이다. 의심스러울 때는 가만히 있으라는 격언대로 나는 침묵을 지켰다.

 판사가 가택 수색을 명령하여, 수사관들이 내 아파트를 뒤졌다. 그들의 바닥의 장판까지 일일이 들춰보았다. 내가 장판 밑에 시체를 감추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리 건물의 입주자들이 회의를 한 뒤, 석 달 내로 이사를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나에게 상냥하게 권고해 왔다. 수위 아주머니는 내가 건물에 남아 있으면 건물의 평당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귀띔해 주었다.

 여간 큰맘을 먹지 않으면 집 밖으로 나가기도 어려웠다. 길에 나서면 아이들이 따라오며, (플뢰리 메로지의 살인마! 플뢰리 메로지의 살인마!)하고 악악거렸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힘을 얻기 위하여 아망딘과 함께 라울의 집에서 자주 만났다. 라울은 그 시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일시적인 역풍이 역사의 항로를 가로막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닥친 수난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그렇게 태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라울은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국립 과학 연구소의 연구원 자리에서 해직되었고, 접는 식 지붕을 갖춘 그의 로노20 승용차는 테러를 받고 폭파당한 바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하던 (생존 수감자 위원회)라는 단체가 그 테러가 자기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가 살고 있는 건물의 정문에는, (여기에 123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살인마가 살고 있다)라는 낙서가 굵고 빨간 글씨로 씌어 있었다.

 우리가 케르보스의 성공을 되새기며 서로의 사기를 북돋우고 있던 참에, 중절모를 눈까지 푹 눌러쓴 남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뤼생데르 대통령이 친히 우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대통령을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끝내고, 그는 우리 사건에 관한 최근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힘을 얻을 만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회의를 주재하듯 탁자 앞에 자리를 잡고, 대통령이 거창한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분, 폭풍에 맞설 준비를 합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겪은 수난은 앞으로 우리가 겪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내 동지와 정적들이 한통속이 되어 나를 제거하려고 하오. 그들은 죄수 몇 사람을 저승으로 보냈다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니오. 그들 대부분은 일인자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대신 앉고 싶어 하는 자들이오. 특히 내 친구들을 믿을 수 없소. 그들은 나를 쓰러뜨릴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여러분들을 이런 고난 속으로 끌어들여서 미안하오. 하지만 위험이 따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시작한 일이오. 그 배은 망덕한 메르카시에와 머저리같은 플뢰리 메로지 교도소장이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대통령이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포석(鋪石) 하나가 거실 창문을 부수고 날아들었다. 그래도 라울은 눈도 끔쩍하지 않았다.

 라울은 한 사람씩 돌아가며 위스키를 따라 주고 힘있게 말했다.

 "여러분 모두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지금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입니다. 이 뜻하지 않은 누설이 없었으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감옥의 지하에서 수공업적인 작업을 되풀이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일을 해나갈 수 있을 겁니다. 각하, 전 세계가 각하의 대담함과 천재성 앞에 고개를 숙일 날이 올 것입니다."

 뤼생데르는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됐네, 됐어. 난 이제 아무것도 아닐세. 더 이상 나를 추켜세울 필요가 없어."

 "그런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미카엘이 우리의 성과를 되도록 빨리 언론에 공표하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생각이 옳았습니다. 펠릭스는 영웅입니다. 그는 마땅히 유명해 져야 하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대통령의 라조르박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 뜻을 헤아리고 라조르박을 대신하여 말했다.

 "국으로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게 아니라 당당하게 맞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바보들과 싸우자는 것입니다!"

 처음엔 우리가 함정에 빠지기 일보 직전에 있는 한 무리의 음모자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조금씩 조금씩 힘을 얻어 갔다. 우리는 소수였지만 대담성을 지니고 있었다. 특별히 재능이 많은 사람들은 아니었어도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포기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망딘, 라울, 펠릭스, 뤼생데르. 그들에게서 느끼는 은밀한 유대감을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71. 그리스 신화

 소아시아 남부의 팜풀리아 사람인 에르가 전사자로 싸움터에 버려졌을 때의 일이다. 에르는 구멍이 네 군데 나 있는 어떤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네 구멍 가운데 둘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고 둘은 땅을 향하고 있었다. 고결한 넋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다른 망령들은 땅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죄 많은 영혼들은 갈라진 틈새를 통해 땅으로 내려가고, 다른 틈새로는 먼지를 뒤집어쓴 영혼들이 되올라왔다.

 에르는 사악한 영혼들에게 벌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 기둥이 서 있는 신비로운 장소에 다다랐다. 그 기둥이 세계의 축이었다. 에르는 다른 영혼들과 함께 세테로 갔다. 거기에는 아멜레스 강이 흐르는데 그 물을 마시면 앞선 생애의 모든 것을 잊게 되었다.

 천둥소리가 한바탕 일었다. 에르는 자기 주위에 포개져 있던 많은 사람들 덕에 불에 타지 않고 화장 장작더미 위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저승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왔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72. 정면 돌파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기자들이 (살인 실험실)이라고 명명한 타나토드롬을 찍은 사진들이 모든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플래시의 강렬한 빛을 받으며 찍힌 사진이라, 방이 을씨년스러운 고문실처럼 보였다. 악의에 찬 기자들은 사진 전경에 피 묻은 메스와 털들이 잔뜩 들러붙어 있는 핀셋을 곁들여 놓기까지 했다.

 실험실 사진 다음에는 소위 (시체 유기장)을 찾아냈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사실 그것은 플뢰리 메로지 교도소의 화장터일 뿐이었다. 우리 타나토노트들의 시체를 찾아낼 수 없게 되자, 기자들은 마네킹에 붉은색을 칠해 산더미처럼 쌓아 놓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렇게 해놓고 그들은 한층 더 극적이고 사실적인 효과를 내려고, 일부러 초점을 흐리게 해서 사진을 찍었다. 마치 우리가 작업을 하는 동안에 어떤 염탐꾼이 잠입해서 찍은 사진처럼 보이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어떤 사진 기자는 플뢰리 메로지에서 진짜로 자살한 수감자의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그걸 횡재라고 생각하고 우리를 공격하는 데 이용했다. 그 자살자는 분명히 우리에게 타나토드롬의 출입이 금지된 이후에 목을 매고 죽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퉁퉁 부어 오른 채 혀가 쑥 빠지고 눈이 툭 불거져 나온 그의 얼굴이 재빨리 모든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우리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 가련한 사내의 사진 밑에는 짤막하게, "어찌 이런 일이!"라고 씌어 있었다. 사진 바로 위에는 살인자인 우리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우리는 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위험을 알아차린 쥐들이 배에서 빠져나가듯이, 장관들은 속속 사임을 발표했다. 비상 내각이 구성되고 뤼생데르 대통령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국가 원수로서의 권한이 정지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도피한 메르카시에는 그곳에서 뤼생데르 대통령을 비난했다. 자기가 그토록 거부했음에도 그 일을 강요했다는 것이 비난의 요지였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 실험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뤼생데르는 여기저기서 쏟아져 들어오는 비난에 일일이 반박하는 것을 삼갔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어떤 인기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는 선구자들은 누구나 당대에는 비난을 받아 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진보에 대해서, 영계 탐사에 대해서, 아직 탐험 되지 않은 대륙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에게 질문을 하는 여기자는 시종 냉랭했다. 그녀는 일반법을 어긴 수형자들은 인간이지 기니피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어떻게 대통령이 살인적인 실험을 허가해서 인권을 유린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했다.

 장 뤼생데르는 그녀의 지적을 무시했다. 그러고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결론을 대신해서 다짜고짜 이렇게 선언했다.

 "친애하는 시청자 여러분,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기 위하여 과학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우리 지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저승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펠릭스 케르보스입니다. 그는 일종의 비행사이며, 영계의 여행잡니다. 우리는 그를 타나토노트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생중계로 그와 함께 그 실험을 다시 해 보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 실험이 실패로 끝난다면, 저는 기꺼이 여러분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그 심판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일, 내일 당장 우리 연구팀과 함께 저승을 향해 발진하는 실험을 다시 해 보이겠다고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우리나라와 세계의 모든 텔레비전이 중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 16시에 국회 의사당에서 그 일을 하겠습니다."

 

 73. 아마조니아 인디언 신화

 옛날에 사람들은 죽음을 모르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처녀가 노쇠의 신을 만났다.

 신은 검버섯이 핀 쭈글쭈글한 살갗을 처녀의 매끄럽고 보드라운 살갗과 바꾸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늙고 죽기 시작했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74. 건곤 일척

 16시. 파리 국회 의사당. 운집한 인파.

 구경꾼들은 신문을 서로 바꿔 보면서 새롭게 제기된 명명백백한 증언들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 증언들은 지칠 줄 모르는 메르카시에와 바야흐로 하나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는 집요한 교도소장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첫 줄에 앉아 있는 두 의원은 자기들의 생각을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련한 뤼생데르, 그는 이제 끝난 거야. 사자들의 나라를 가보고 싶어 하더니, 그 맛을 톡톡히 보게 되겠군. 어쨌든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난 거야."

 다른 의원이 의심의 빛을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이런 연극을 연출해 내는 거 보면... 그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네. 그는 구미호 같은 늙은이야."

 "천만에! 이건 최후의 발악이야.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은 이제 0.5%밖에 안 돼. 당연한 얘기지. 0.5%는 틀림없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임사 체험 따위를 믿는 정신 이상자들일 게야."

 그들은 그 0.5%의 인구가 한심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두 대의 투광기(던질 투, 빛 광, 그릇 기)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빛을 받으며, 카메라를 마주한 채 적갈색 머리의 예쁜 여기자가 말하고 있었다.

 "전문가 여덟 명이 이곳에 참석해 있습니다. 실험의 전과정을 일일이 감시하고 속임수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몇몇 전문가들은 뤼생데르 대통령이 쌍둥이 형제를 이용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즉, 쌍둥이 형제 중 한 사람을 데리고 실험을 하다가 그가 죽으면 얼른 다른 사람으로 바꿔쳐서 죽은 사람이 소생한 것처럼 꾸밀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옛날에 사용되던 마술의 속임수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시선과 카메라 렌즈가 현장에 쏠려 있는 가운데에서 그런 야바위판을 벌이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일국의 국가 원수가 그런 야바위짓을 시도하리라고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 대한 여론이 얼마나 혹돌한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관객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볼거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축도 있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축도 있었다.

 "(르마탱)에 난 기사 보셨어요? 어떤 과학자가 죽었다가 살아날 수 없는 이유를 아주 잘 설명해 놨던데요. (뇌에 혈액 공급이 중단되면, 괴저(壞疽)가 생긴다. 신경 세포가 죽으면 생리적 기능을 잃게 되므로 표상 작용과 기억 작용도 상실하게 된다)라고요."

 "죽음이 임박하면 내분비액이 과다하게 분비되어 임사 체험의 환각을 불러일으킨다던데, 그런 얘기를 믿으세요?"

 그 물음에 상대방은 코웃음을 쳤다.

 "생각해 보세요. 단말마의 고통을 겪는 육체가 뭐 하자고 마지막 에너지를 환각을 만드는 데 쓰겠어요?"

 또 사람이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맨 앞줄에는 예의 두 의원이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뤼생데르는 역사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싶어 하던 사람인데,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역사 교과서에 실리는 건 문제 없을 거야. 그것도 아주 큼직하게 실리겠는걸. 123 명을 죽인 살인 사건의 장본인이라! 한 나라의 국가 원수가 그런 죄를 짓는 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거야."

 각광이 켜졌다. 무대 한가운데에 조촐한 치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대형 모니터에 연결된 전선들도 보였다. 모니터들은 마치 거대한 외눈처럼 깜박거리고 있었다.

 60개국에서 그 공개 실험을 다원 방송으로 내보낼 예정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생방송에 나와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겠다니, 대중음악 콘서트나 축구 경기에 못지않은 볼거리가 아닐 수 없을 터였다.

 무대 장치 담당자들이 치과용 의자 주위에 의자 여덟 개를 갖다 놓았다. 국회 조사 위원회에서 임명한 전문가들이 앉을 자리였다. 전문가는 의사 넷에 생물학자 셋, 거기에 마술사 한 사람까지 끼어 도합 여덟이었다.

 박수갈채를 받으며 전문가들이 등장했다. 장내가 금세 술렁거렸다. 관객들은 턱수염을 기른 그 노학자들이 투우장에 함께 내려온 투우사들이기라도 한 양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이제 투우사들은 덩치 크고 음흉한 황소 한 마리를 끝장낼 참이었다. 그들은 약간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토록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아 보는 것은 생전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몇 사람은 분위기에 도취되어 관중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대통령의 꼬리를 자르겠다는 약속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들은 리본이 달린 짧은 창 대신에 펜을 빼어 들고 눈앞에 설치된 장비에 대해 관찰한 내용을 빳빳한 메모장에 꼼꼼히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머리털에 포마드를 바른 유명한 텔레비전 아나운서가 카메라맨과 녹음 기사를 대동하고 투우장에 나타났다. 몇 차례의 음성 시험과 영상 시험이 끝나자,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RTV 1)에 변함없는 사랑을 보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희 방송에서는 이 사건에 관해 더욱 많은 것을 여러분께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여기는 국회 의사당의 실험 현장입니다. 지금 이곳의 분위기는 대단히 흥분되어 있습니다. 뤼생데르 대통령이 곧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고 어마어마한 한판 승부를 벌일 것입니다. 멀리 떨어진 대륙을 다녀오듯 저승을 왕래할 수 있다는 것을 전세계에 증명해 보이겠다는 실로 엄청난 도박입니다. 장내는 지금 긴장감이 절정에 달해 있습니다. 새로운 살인 사건이 우리 눈앞에 펼쳐 질 것인가? 아니면 세기적인 대실험이 이루어질 것인가? 정말 숨 막히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75. 그린린드 신화

 그린린드 사람들 생각에 천국은 큰 바다 깊은 곳에 있다. 그곳은 백야의 태양이 항상 비치는 영원한 여름의 나라다. 이승에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마침내 그곳에서 쉴 수 있고 수고의 대가를 즐길 수 있다. 그곳은 풍요의 왕국이어서 개, 순록, 물고기, 곰이 지천이며, 잘 익힌 바다표범 고기를 언제나 먹을 수 있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76. 가족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온 이는 어머니였다.

 "얘야, 거기 가지 마라!"

 콩라드 형은 아르헨티나로 당장 달아나라고 나를 꼬드겼다.

 다들 나의 행복을 바라기에 하는 소리겠지만, 자기나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히려 역겨움을 느끼게 했고, 한계 상황에 뛰어들려는 내 의지를 더욱 강화시킬 뿐이었다.

 나는 어려움에 빠진 친구들을 저버리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나도 내 몫의 책임을 질 거라고 분명히 대답해 주었다.

 "좋아, 네가 간다면 나도 가마.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난 내 아들 편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지켜 줄 거야."

 어머니는 그 말씀대로 실행하셨다.

 역사적인 결판의 순간을 기다리는 동안 방송에 흥미를 더해 줄 만한 게 없을까 하고 부심하던 RTV 1의 사회자가 나의 어머니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수백만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생방송에서 속마음을 있는 대로 드러내셨다.

 "정말이지 미카엘은 너무 착한 게 탈이었어요. 그래서 누가 무슨 부탁을 하면 안 들어주고는 못 배기는 애였어요. 물론 사소한 결점은 있지만 결코 범죄자가 될 애는 아니에요. 우리나라 대통령마저도 그 미치광이들의 꾐에 넘어가는데 우리 아들이 오죽했겠어요? 우리 애가 그 사건에 연루된 건 고독했기 때문이에요. 늘 혼자 지낸다는 게 어떤 건지는 여러분도 잘 아실 거예요! 미카엘이 내 말대로 결혼을 했더라면, 우리가 이런 지경에 빠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우리 미카엘은 그 일에 참여할 의사가 별로 없었어요. 그 애는 늘 귀가 너무 여려서 입심 좋은 사람들한테 잘 넘어갔어요. 그 라조르박 같은 사람들한테 말이에요."

 그런 다음 어머니는 목소리를 낮추어 아나운서에게 물었다.

 "아 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미카엘이 감방에 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머리털에 포마드를 바른 아나운서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자기는 아는 바가 없다면서 어머니에게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77. 성서의 신화

 성서에 따르면 아담의 일생은 다음과 같이 열두 시기로 요약된다.

 제1기: 티끌이 모였다.

 제2기: 먼지가 형태를 갖추지 않은 덩어리로 변했다.

 제3기: 팔다리가 만들어졌다.

 제4기: 영혼이 불어넣어졌다.

 제5기: 직립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제6기: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이름을 붙일 줄 알게 되었다.

 제7기: 하와를 짝으로 맞이하였다.

 제8기: 둘이서 침대에 올라갔다가 넷이서 침대를 내려왔다.

 제9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다.

 제10기: 잘못을 저질렀다.

 제11기: 심판을 받았다.

 제12기: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78. 생사의 기로에 서서

 맨 먼저 투우장, 아니 실험장에 올라서려니 내 마음이 뜨악하였다. 전문가들은 내가 손을 내밀었으나 악수에 응해 주지 않았다. 내 뒤를 따라 아망딘이 들어섰다. 그녀의 표정에 겁에 질린 기색이 뚜렷했다.

 구경꾼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캡을 쓴 잠바 차림의 남자가 뛰쳐나오면서 악을 썼다.

 "나쁜 놈! 네가 내 아들을 죽였어!"

 나는 힘껏 마이크에 달라붙어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소리쳤다.

 "우리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요! "천국" 사업에 참여한 수감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실험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실험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고, 매번 그들이 직접 스위치를 누르고 비행에 들어갔습니다."

 "비행이라고? 비행이 아니라 죽음이겠지! 세상에 자발적으로 죽음에 뛰어들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누군가가 울부짖었다.

 "하얀 가운 입은 자가 살인이 웬말이야! 살인마를 처단하라!"

 흥분한 구경꾼들이 박자에 맞추어 구호를 외쳤다.

 이번에는 뤼생데르 대통령이 마이크 앞으로 나섰다. 관중의 야유가 더욱 거세어졌다. 토마토들이 그의 발께까지 날아들었다. 경찰관들이 긴급히 증원되어 무대 앞 경비가 강화되었다.

 대통령은 청중의 고양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한 동작을 취했다. 소란한 정치 집회를 많이 해본 덕에 흥분한 청중을 다루는 데는 미립이 난 사람이었다.

 "친애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조용히 해주십시오! 우리가 여러분 앞에서 해보이려는 실험을 우리는 이미 성공시킨 적이 있습니다. 다만 그 사실을 증언할 만한 공식적인 전문가가 없을 따름입니다. 이제 저는 국민과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심판을 받고자 합니다. 여러분 앞에서 우리가 저승으로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만일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저는 실패에 상응하는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욕설 몇 마디가 다시 울려 퍼지기는 했지만, 금세 소란이 가라앉고 무거운 침묵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펠릭스 케르보스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조명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턱시도 차림이었다. 그것이 타나토노트의 새 비행복이 된 셈이었다. 신사의 복장이 그의 험상궂은 용모를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우리가 들어올 때와는 달리 그는 앞뒤에서 두 경관의 경계를 받으며 등장했다. 그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텔레비전의 사회자가 펠릭스 쪽으로 달려갔다.

 "이 사람이 펠릭스 케르보스입니다. 대통령의 얘기대로라면, 산자들의 세계와 죽은 이들의 세계 사이를 왕래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전 세계의 카메라 앞에서 그가 다시 시도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저희 RTV 1이 독점으로 이 현장을 생중계하고 있습니다. 저희 방송은 언제나 여러분께 더욱 많은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안한 눈짓을 서로 주고받았다. 펠릭스의 마음에 동요가 일고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군중 앞이라 주눅이 든 걸까?

 대통령이 펠릭스의 어깨를 탁 치며 물었다.

 "펠릭스, 괜찮은가?"

 찡그린 표정 때문에 펠릭스의 얼굴이 더욱 험상궂게 보였다. 방송을 죽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자기들이 리모컨을 잘못 눌러 공포 영화가 나오는 방송으로 채널이 바뀐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네, 좋아질 거예요."

 우리의 타나토노트가 중얼거렸다.

 "두려운가?"

 "아니오. 그런 게 아닙니다. 발톱 하나가 살을 파고들어왔는데, 그것 때문에 성가셔 죽겠어요. 빌어먹을, 간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뤼생데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발톱이 살을 파고들었다고? 그걸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지?"

 뤼생데르는 펠릭스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계제가 여의치 않았다.

 "발톱이 살을 파고들어오는 게 어떤 건지는 내가 잘 아네. 아주 고통스럽지. 하지만 쉽게 나을 수 있어."

 "아스피린을 먹었는데도 여전히 아파요. 에이, 거지같애!"

 나는 나중에 수술을 하자고 제안했다. 펠릭스가 고통을 겪고 있다면 큰일이었다. 그런 상태로 코마에 들어갔다간, 고통에 찬 육신으로 돌아오기보다 빛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염려가 있었다.

 대통령이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펠릭스, 삶에로 돌아와야 해. 약속하지? 벌써 자네를 사면하라는 명령에 서명을 해놓았네. 성공하면 자네는 자유인이 되는거야. 완전한 자유를 얻는 거지. 알겠나, 펠릭스? 자넨 이제 존경받는 시민이 되는 걸세."

 펠릭스는 못 믿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구경꾼들은 다시 욕설을 퍼부을까 박수 갈채를 보낼까 망설이면서 여전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사회자는 대통령의 권투 경기를 앞둔 트레이너처럼 자기 선수를 격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어두운 표정으로 기구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뤼생데르는 숫제 펠릭스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자넨 자유인이 될 거야! 케르보스 선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부자와 유명 인사가 될 거야. 자네가 무지개차를 타고 지나가면 사람들이 갈채를 보내고 색종이 조각을 뿌려 줄 거야.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디디고 돌아왔을 때 해준 것처럼 말이야."

 "그건 다 좋은데, 살을 파고들어 온 이 빌어먹을 발톱 때문에 미치겠어요."

 "힘내게. 자네 옛날에 독한 약들을 시험하다가 궤양이 생기고 살갗이 갈라진 적도 있었잖아. 그것에 비하면 발가락 아픈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것 때문에 더 행복한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하지만 저 위에 가면 참 좋아요. 기분이 그렇게 가뿐할 수가 없고, 안달복달할 일도 없는 걸요..."

 뤼생데르가 성을 냈다.

 "펠릭스, 그래도 산다는 건 좋은 거야."

 "이승의 삶에서 좋은 일이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문제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다는 거지요."

 "돈, 여자, 향기로운 냄새, 바닷가의 일몰, 자동차, 호화 주택"

 뤼생데르는 그렇게 열거하다가, 일종의 정치적인 의도로 펠릭스의 입장에 서서 덧붙였다.

 "게다가 자네가 원한다면 술, 마약, 폭력, 과속 운전 따위도 즐길 수 있지. 힘내게, 펠릭스. 우리에겐 자네가 필요해. 자네에겐 이제 친구가 있어. 대통령과 뛰어난 학자들, 게다가 간호사들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여자가 자네 친구란 말일세! 자네만 한 행운을 누리는 사람도 많지 않아. 우리 모두 자네를 믿고 있네."

 펠릭스는 눈을 내리깔고 죄 지은 아이처럼 낯을 붉혔다.

 "그래요. 저도 그 모든 걸 알아요. 하지만 저 위에서도 그들은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저는 이 세상에선 그다지 행운을 누리지 못했어요. 게다가 살을 파고든 이 발톱하며 저 앞에서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하며... 이 세상에는 내 마음에 드는 것이 별로 없었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만족을 느껴 본 기억이 없어요."

 뤼생데르는 당돌한 표정으로 그 거인을 쳐다보았다.

 "만족이 없었다고? 펠릭스, 정말 전혀 없었단 말인가?"

 우리 거인의 얼굴이 더욱 발개졌다.

 "그래요. 제 어머니 말고는 아무도 날 사랑한 적이 없어요. 게다가 그 어머니마저도 저 하늘 나라에 계셔요."

 군중은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저 못생긴 놈 없애 버려라!"

 누군가가 장난기 섞인 소리로 외쳤다.

 사회자는 그럭저럭 시간의 공백을 채워 가고 있었다.

 "펠릭스 케르보스는 키가 1미터 95에 몸무게가 100 킬로그램입니다. 그 나이에 비해선 제법 균형이 잡힌 축에 드는 체격입니다. 이 실험과 관련한 언론의 제법 균형이 잡힌 축에 드는 체격입니다. 이 실험과 관련한 언론의 조사에 따르면, 신장과 체중은 피실험자가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피실험자가 신체적으로 건강한 편이 바람직한 건 사실인 모양입니다."

 아망딘은 펠릭스와 대통령이 주고받는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듣고 있다가 펠릭스에게 다가갔다.

 "펠릭스, 당신 숫총각이죠? 그렇죠?"

 펠릭스는 보르도 포도주처럼 얼굴이 벌개졌다.

 금발의 간호사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자기 환자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소곤거렸다. 펠릭스의 얼굴에 무지개의 몇 가지 빛깔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그는 미소를 과장한 캐리커처처럼 헤벌죽하게 입을 벌리며 웃었다. 마치 "노트르담의 곱추"에 나오는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가 나란히 있는 것 같았다. 펠릭스는 처형장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는 콰지모도였다.

 그는 이제 당당하게 아망딘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게 분명했다.

 "좋습니다. 해봅시다. 그 빌어먹을 발톱이 이제 성가시게 굴지 않는군요."

 뤼생데르는 펠릭스가 더 이상 발가락의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내 처방에 진통제를 첨가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중차대한 순간에 새로운 배합을 시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티오펜탈 800밀리그램이 내가 정한 용량이었고, 늘 쓰던 것 외에 다른 약품을 추가할 생각이 없었다.

 뤼생데르 대통령은 턱시도 차림의 케르보스가 메고 있는 나비넥타이를 끌러 주었다. 그러더니 소매를 걷어붙이고 펠릭스의 몸에 전극을 장착했다. 대통령은 마치 평생 그런 일을 해온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뤼생데르, 집어치워라, 넌 살인자일 뿐이다!"

 관객 중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나는 대통령을 도우러 갔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었다.

 아망딘은 자기가 맡은 일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야유가 들려올 때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비수가 되어 꽂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모든 걸 걸고 해보자는 독한 마음이 새록새록 커져 갔다. 아망딘은 심전계와 뇌파계를 조정하고 나서, 은근한 연대감이 담긴 알릴락 말락 한 미소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관중의 욕설은 계속 빗발쳤다.

 "살인마! 살인마!"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관중들이 박자를 맞추어 일제히 소리를 질러댔다.

 펠릭스 케르보스는 천천히 숨을 쉬었다. 라울이 가르쳐 준 대로 숨 쉬는 속도를 점점 더 줄여 가면서,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었다. 그 호흡법은 여자들의 무통 분만을 돕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라고 했다.

 "내 쪽은 준비가 다 됐네!"

 대통령은 털이 많이 난 타나토노트의 가슴에 마지막으로 전극을 부착하고 나서 말했다.

 "저도 다 됐습니다."

 라울이 맥박계를 쥐면서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나와 아망딘도 합세했다.

 위원회의 과학자들이 우리 장치를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다가왔다. 그들은 전극이 표준 규격에 맞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펠릭스의 맥박을 재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술사는 현장의 바닥을 구두 뒤축으로 두드리면서 허방다리나 어떤 시소 장치 같은 것이 없나하고 찾아보았다. 마술사는 바늘로 치과용 의자의 푹신푹신한 곳을 찔렀다. 그러는 모습을 보고, 구경꾼들은 우리 의자 속에서 비밀 통로라도 발견해 내기를 고대하는 듯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마술사는 그 일을 마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자기들이 조사한 온갖 정보를 바삐 기록했다. 그들은 현재로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뜻을 나타내며 다시 자리에 앉더니, 우리에게 계속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관객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다음 일을 기다렸다. 홀연 괴괴한 정적이 감돌았다. 영혼이 날아다니는 소리라도 들릴 정도였다.

 "시작합시다!"

 라울이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군중의 적대적인 태도에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좋아요. 그럼, 또 봅시다, 여러분!"

 펠릭스가 굵고 뭉툭한 손가락들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망딘은 숱이 많이 빠진 그의 머리털을 쓰다듬고 그의 입술 언저리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펠릭스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꼭 돌아와요!"

 아망딘이 속삭이자 펠릭스는 싱긋 웃으며 초읽기에 들어갔다.

 "여섯... 다섯... 넷... 셋... 둘... 하나... 발진!"

 펠릭스는 재빨리 스위치를 누르고 이승을 벗어나 영계로 나아갔다.

 

 79. 역사 교과서

 20세기 말엽의 사전(詞典)과 사전(事典)에는 죽음에 관한 정의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죽음: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 원형대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

 * 일반적인 정의: 어떤 사람의 심장 고동이 끊기고 호흡 운동이 정지했을 때, 우리는 그가 죽었다고 말한다.

 * 미국에서 1981년에 채택한 정의: 뇌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래 기능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때를 죽음으로 판정한다.

 * 의학적인 정의: 심장의 수축 운동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정지되고, 호흡 운동은 인공호흡기로만 유지될 수 있으며, 반사 작용이 완전히 사라지고, 뇌파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뇌의 구조가 완전히 파괴된 상태.

 * 사람이 죽었을 때 밟아야 할 절차: 가장 가까운 읍, 면, 동사무소에 사망 사실을 신고한다. 그러면, 관할 구역의 법의학자가 사망을 확인하고 공중 문서를 작성하여 고인의 가족에게 주거나 장의사에게 넘긴다. 사망자의 호적 등본을 첨부하여 그 공중문서를 읍, 면, 동사무소의 호적계에 제출하면 매장 허가와 폐구(閉口) 허가서를 내준다. 변사(變死)나 의문사인 경우에, 법의학자는 검사에게 보고하여 부검을 실시할 수 있다. 사망자의 가족은 사망 원인을 반드시 공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장례는 적어도 24시간이 경과한 다음에 치러야 한다.

 * 묘지 불하 비용: 묘지 사용 기간, 묘지의 유명도, 토지 가격 등에 따라 다양하다. 제곱미터당 단가는 물론 시골보다 도시가 비싸다.

 장례에 필요한 그 밖의 비용은 대개 다음과 같다.

 관: 흰 나무로 짠 보통의 관일 경우 3,000프랑. 흑단이나 마호가니 재목을 사용할 경우나 완충물을 속에 넣을 경우에는 비용이 추가된다.

 장의사: 1,800프랑. 일꾼을 많이 쓰는 경우에는 비용이 더 들 수도 있다.

 영구차 임대: 3,000프랑

 장례 물품, 꽃, 기타 장식물: 4,800프랑

 비석: 700 프랑

 묘소 청소 및 보수: 매년 1,000프랑

 부고 비용과 우편 요금: 200프랑

 지방세: 1,300프랑

 부가가치세: 1,000프랑

 종교의식: 200프랑. 미사, 성가대 등을 원하는 경우에는 비용이 추가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가장 적게 잡을 경우에, 묘지 불하 비용을 제하고도 총 17,000프랑의 장례비용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기초 강의용 영계 탐사의 역사"

 

 80. 기다림

 벌써 10분 전부터 심전계에는 파동이 없는 직선만 나타나고 있었고, 삐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늘 해오던 대로 라울 라조르박은 코마의 지속 시간, 체온, 심전도, 뇌파도, 개인적인 인상 등 상황 판단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수첩에 적고 있었다.

 라울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어때?"

 불길한 생각을 내가 그렇게 물었으나 라울은 어깨만 한 번 들썩해 보였다.

 군중은 입을 다문 채, 조명을 한 몸에 받으며 누워 있는 펠릭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송장에 몰려든 파리떼처럼 의자 주위를 돌면서 뭔가를 열심히 끄적거리고 있었다. 모눈종이를 긁어대는 펜들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들은 연방 시계를 들여다보고 계기의 눈금을 살폈다. 십중팔구 가만히 앉아 있기가 멋쩍어서 그러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곧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리라는 예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마술사의 연기가 일품이었다. 그는 무언극의 광대처럼 갖가지 몸짓을 동원하여 의혹의 뜻을 나타내고 있었다.

 RTV 1의 사회자는 시간의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날씨가 그런 실험을 하기에 제격이라는 둥,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회 의사당 안에서 그동안 충격적인 대사건들이 많이도 일어났었다는 둥 하면서.

 아망딘은 두 손을 모은 채 성모 마리아 같은 얼굴을 하고 묵묵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도 그녀처럼 기도를 올렸다.

 

 81. 스칸디나비아 신화

 발드르29)는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나오는 착한 신이다. 주신 오딘이 사랑의 여신 프리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동정심이 많고 아름답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어느 날 밤 발드르는 자기가 죽는 꿈을 꾸었다. 그 불길한 꿈 때문에 신들은 심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의 어머니인 프리그 여신은 세상의 어떤 신도, 어떤 사물도 자기 아들을 해치지 못하게 단속했다. 여신은 흙, 돌, 쇠, 나무, 질병과 새, 물고기, 뱀 등 모두 동물에게서 발드르를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 냈다.

 그제서야 신들은 발드르가 절대로 다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면서, 발드르에게 갖가지 위험한 물건을 던지는 놀이까지 하였다. 신들은 위험한 것을 던져도 발드르에게 아무 탈이 없음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발드르의 그런 능력을 시샘하는 신이 있었다. 악(악할 악, 귀신 신)신의 로키였다. 그는 발드르의 숨겨진 약점을 찾아내려고 여자로 변장하고 프리그 여신의 궁정에 들어갔다. 로키는 마침내 여신이 미처 서약을 받아 내지 않은 식물이 있음을 알아냈다. 미스틸테인30)이라는 식물이었다. 프리그 여신은 그 식물이 너무 가냘퍼서 자기 아들을 전혀 해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맹세를 받아 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낸 로키는 호드르라는 신을 꾀었다. 호드르는 신들 가운데 유일하게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신들처럼 발드르에게 물건을 던지는 놀이에 참여하지 못하고 외따로 떨어져 지내던 처지였다. 로키는 그 식물을 발드르에게 던져 보라고 권했다. 로키가 이끄는 대로 호드르가 그 식물을 던지자 그것이 표창으로 변하면서 발드르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그 일을 통해서 로키는 누구도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것, 신의 은총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죽음을 비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 준 셈이었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82. 국회 의사당에서

 그 사건을 맡은 예심 판사의 요청에 따라 실내에 들어와 있던 사복 경찰관들이 조금씩 조금씩 무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실험이 실패한 뒤에 우리가 달아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5분 넘게 펠릭스의 몸을 문지르고 전기 충격을 주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침묵을 지키던 구경꾼들 사이에 술렁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전기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득의양양하게 다가와 펠릭스의 손목을 쓰다듬으며 맥박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맥박이 전혀 느껴지지 않자 대단히 흡족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흰 가운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땀방울을 뚝뚝 떨구어 가며 심장 마사지를 계속했다. 다 같이 (하나, 둘, 셋)을 외치고, 나는 두 손을 평평하게 해서 흉곽의 심장 부위를 눌렀다. 그리고 라울은 호흡 운동을 재개시키려고 휴대용 펌프로 콧구멍에 공기를 불어넣었다.

 경찰관들이 더 바싹 다가들었다.

 "하나, 둘, 셋! 자, 꼭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집시다. 믿고 계속해봅시다."

 라울이 격려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의 말대로 꼭 될 거라는 신념을 가져야 했다. 다치지 않으리라는 믿음만 있으면 불 속에 손을 집어넣고도 그대로 있을 수 있었다. 라울이 옛날에 그것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우리 작업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 싶으면 우리는 전문가들을 마구 밀어냈다. 절망감이 강하게 밀려오면 올수록 그들을 떠미는 우리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소가 쓰러지기 전에 투우사들을 다치게 하려고 발악하는 건 당연하다는 식이었다.

 조금씩 술렁거리던 장내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비웃음 소리도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조금 더 있으면 황소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함성이 터져 나올 판이었다.

 다른 경찰관들이 우리 뒤에 늘어섰다. 우리가 무대 뒤로 달아나는 것을 막으려는 모양이었다.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는데, 어찌하여 우리 믿음은 피와 내장으로 채워진 이 커다란 가죽 부대에 생명이 돌아오게 하는 작은 기적조차도 이루어 내지 못하는가?

 "아직 소생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어이! 어이! 어서 돌아오게!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라울은 그렇게 외치며 펠릭스의 흉곽을 눌러댔다.

 "이봐, 펠릭스, 깨어나게. 바보짓 하지 말고 돌아오게!"

 나도 라울을 거들었다.

 경찰관 하나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우리의 실험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에겐 우리가 시체 하나를 놓고 미쳐 날뛰는 위험한 미치광이로 비쳤을 게 틀림없었다.

 "하나, 둘, 셋! 펠릭스, 깨어나! 오라질!"

 경찰관이 수갑을 꺼냈다.

 "하나, 둘, 셋! 이봐! 펠릭스, 우리를 저버리지 말게!"

 여덟 전문가가 득의에 찬 기색을 보이며 사망을 확인하러 왔다. 으깨어진 과일에 몰려드는 파리떼 같았다.

 경찰관이 내 손목을 잡았다. (법에 따라 당신을 독살 혐의로 체포합니다)라는 음성과 함께 수갑이 채워지는 메마른 금속성이 들렸다.

 라울과 아망딘의 손목에도 이미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뤼생데르만은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이라는 신분이 아직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기에, 경찰관들이 감히 손댈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죽여라! 타나토노트들을 죽여라!"

 구경꾼들은 자기들의 지도자가 궁지에 몰렸음에도, 그것을 너무 기뻐하며 악악거렸다. 백성들에겐 자기들 주인이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통쾌한 모양이었다.

 "타나토노트들을 사형시켜라!"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나의 형은, (내가 그렇게 일렀는데, 왜 말을 안 들었어!)라고 외쳤다. 어머니만이 관중을 진정시키려고 고군분투하고 계셨다. 처음에는 바로 옆 사람들을 달래시더니, 이윽고 관중 전체를 향해 소리치셨다.

 "내 아들은 잡혀갈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만 하세요. 여러분이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내 아들은 죄가 없어요. 그 애는 마지못해 가담한 거예요."

 어머니는 이미 그 모든 일을 예상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재판이 열리면 내가 착한 아이였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내 우등상장까지 내놓을 생각이셨고, 재판정의 방청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옷 한 벌도 미리 마련해 놓으신 바 있었다.

 경찰관들은 성난 관중 사이를 헤쳐나가려고 우리의 팔을 잡았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욕을 퍼붓고 침을 뱉었다. 수갑을 찬 채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받고 있는 동안의 그 참담한 기분이란! 어떤 자가 던진 곯은 달걀이 내 이마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아망딘에게는 토마토가 날아왔다. 라울도 달걀로 얻어맞았는데, 그 달걀은 내게 날아온 것보다 한층 더 곯은 것이라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뤼생데르 대통령은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를 돕거나 펠릭스를 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망상에 사로잡혀 저지른 모든 일을 후회할 뿐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고 싶었는데, 이젠 만사휴의(萬事休矣)였다. 카이사르는 알레지아31)라는 갈리아인 최후의 요새를 함락시켰지만, 뤼생데르는 마지막 승부에서 이기지 못했다. 결국 죽음이라는 마지막 요새는 공략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잘 가게, 펠릭스) 하고 속으로 작별 인사를 하는데, 경찰관이 수갑을 잡아당겼다.

 바로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아이고, 아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우리는 어마지두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낸 사람이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 목소리, 바로 그의 목소리였다...

 조명 기사는 몸을 떨면서 펠릭스의 눈 위로 불빛을 비추었다.

 텔레비전 사회자가 재빨리 눈치를 채고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사람을 (공식적으로 저승을 다녀온 최초의 인간)이라 불러도 될 듯합니다. 펠릭스 케르보스가 살아 있습니다!"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던 경찰관들이 전문가들의 지시에 따라 우리 손목의 수갑을 풀어 주었다. 장내는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오로지 지칠 줄 모르는 텔레비젼 사회자만이 자기 쇼에 마침내 볼 만한 게 생겼다는 것에 너무 들떠서 약장수처럼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중요성을 갖는 대사건의 한복판에 있다는 의식하고,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자기 역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역사책까지는 아니더라도 언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은 틀림없었다.

 "시청자 여러분이나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지금 이 순간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심전계에서 처음으로 삐 소리가 나기 시작했을 때는 한순간 다들 설마 하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장내에 함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그 함성에는 공포가 담겨 있었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산 사람들의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엄청난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께 항상 더 많은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저희 RTV 1 방송에서 펠릭스 케르보스가 처음으로 눈을 뜨던 장면을 느린 동작 화면으로 곧 다시 보여 드리겠습니다. 심장 고동이 멎은 뒤 한참 만에 일어나 눈꺼풀의 움직임입니다. 바로 저희 RTV 1이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그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저희 텔레비젼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까지 기여를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곧이어서 저희 방송사 단독으로 펠릭스와 인터뷰를 해보겠습니다. 그것이 끝나면 바로 광고 방송을 보내 드립니다. 아울러 오늘의 이 프로그램은 (흑룡 구두약)의 협찬을 받아 이루어진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흑룡(黑龍) 구두약)은 콜타르를 이용하여 만든 유일한 제품입니다."

 우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우리는 실험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달음박질쳤다. 승부는 이제부터였다.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쭈뼛거렸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과 귀와 더듬 감각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달려들어 펠릭스를 계속 더듬어 보고 모니터를 확인했다. 의자 밑을 조사하는 과학자들도 있었다. 우리가 쌍둥이 형제 중 한 사람을 시체와 바꿔치기했을 가능성에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다.

 나는 펠릭스의 맥박을 재고 심장 고동을 들어 본 다음 망막과 치아를 검사했다.

 우리가 이긴 게 분명했다. 모두가 보았으니, 이제 명백한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울, 펠릭스, 아망딘, 뤼생데르, 그리고 내가 물리친 바보들을 물리친 것이었다.

 펠릭스가 동에 닿지 않게 더듬거렸다.

 "빌어먹을, 여행도... 빌어먹을, 이렇게... 이런 건 생전 처음이야. 그... 그건 그렇고, 내가 사면을 받긴 받는 거요?"

 아망딘은 재빨리 그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눈에 (옳거니!)하는 기색이 담겼다.

 펠릭스는 RTV 1의 사회자가 내밀고 있는 마이크 쪽으로 몸을 기울여 나무랄 데 없이 똑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 영혼에겐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겐 위대한 도약입니다.32)"

 숨을 죽이고 있던 관중이 일제히 일어나 큰 박수를 보냈다. 아무리 멋진 슬로건이라도 펠릭스의 그 말만큼 감동적인 의미를 담기는 어려울 터였다.

사람들은 모두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RTV 1를 아껴 주시는 시청자 여러분,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우리의 타나토노트가 방금 역사에 길이 남을 말을 남겼습니다. (제 영혼에겐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겐 위대한 도약입니다.) 역사를 향한 은근한 눈짓이 훌륭한 멋을 풍깁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NDE 즉, 임사 체험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그는 이 세상 밖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가 다녀왔다기보다는 다른 무엇이 다녀왔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펠릭스 자신은 달리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아서 그것을 (영혼)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시 시)적인 느낌을 주는 말이긴 합니다만, 과학적인 설명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설명은 위대한..."

 우리는 펠릭스 케르보스를 힘껏 껴안았다.

 "다들 걱정 많이 하셨죠? 그런데, 저... 제 사면은 확실한 겁니까?"

 "그럼, 자넨 사면을 얻었네. 이제부턴 자유의 몸일세."

 대통령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참 오래도 걸렸군요. 오늘날에도 자유 시민이 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로군요."

 아망딘은 펠릭스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돌아왔군요! 돌아왔어요, 이렇게 살아서."

 "그렇소. 보다시피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렇게 돌아왔소, 친구들. 이번엔 제대로 보아 두었소. 모든 걸 보았소. 여러분이 원하면 그림을 그려서 그곳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 줄 수도 있소. 빌어먹을, 믿을 수가 없어요. 정말, 믿기지 않아요."

 라울 라조르박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가왔다.

 "지도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영계 지도를 대략적으로 그린 다음, 우리가 한 걸음씩 더 나아갈 때마다 그 지도를 세부적으로 수정해 나가기로 합시다."

 라울의 흥분이 관중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RTV 1의 사회자가 우리 뒤를 따라오면서 소리쳤다.

 "여기 좀 보세요! 케르보스 씨. RTV 1입니다. 하늘나라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우리 시청자들도 알아야 합니다. 케르보스 씨, 당신은 금세기의 영웅입니다."

 펠릭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말을 고른 다음, 또박또박 말했다.

 "좋아요... 죽음은 정말 엄청납니다.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가지가지 빛깔이 어우러져 있고 장식이 가득합니다. 뭐라고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아, 정말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굉장합니다."

 RTV 1의 아나운서는 우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광고주와 약속한 시간을 아직 다 채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애원을 하다시피 했다.

 라울이 내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자, 미카엘. 연설 한마디 하게!"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연단 위로 올라갔다. 플래시 불빛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여러분, 우리는 가장 훌륭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타나토노트 한 사람을 보냈다가 다시 데려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장내가 아주 조용해 졌다. 어떤 기자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팽송 박사님, 박사께서는 오늘의 승리를 이루어 낸 주인공들 가운데 한 분입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할 생각이신지요?"

 나는 마이크로 좀 더 다가갔다. 모두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은 위대한 날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정복했습니다. 오늘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 사실이 잘 믿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방금 그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런데, 도대체 내가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지?)하는 불길한 생각이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우리는 방금 증명을..."

 역사에 길이 남을 어떤 일을 이루어 내고 지금 여기에 서 있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갑자기 마음속을 휘저었다. 그 엉뚱한 생각 때문에 더 이상 내 이야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팽송 박사님?"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자는 아주 난처해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끌어내려고 애썼다.

 "저... 그럼,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는 각하의 신념을 입증하시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이 일을 계기로 각하의 정책에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뤼생데르 대통령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우리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자, 여보게들, 이 친구를 돌보지 않고 이렇게 내버려 둘 거야? 이제 어려운 고비를 넘겼으니 우리 일을 계속하세. 가서 영계의 개략적인 지도를 만들기로 하세."

 "어디로 가실 겁니까?"

 "플뢰리 메로지의 타나토드롬으로 가세. 우리가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 거기 말고 더 있겠나."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우리 작은 동아리의 단결력은 더욱더 굳건해 졌다.

 

 83. 페르시아 신화

 냄비 속에 있는 오리에게 물고기가 물었다.

 "자네는 조만간 물이 불어서 강물이 넘쳐 나리라고 생각하나?"

 오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삶아지고 나면 세상이 바다가 되든 허깨비가 되든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구에서 토성까지

 나는 모든 문제를 풀었고,

 어떤 허방다리, 어떤 덫도 피해 왔는데,

 오로지 죽음의 매듭만은 풀지 못했노라.

 - 오마르 카이얌33), "4행 시집"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84. 영계 지도

 감방 여기저기에서 축하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수감자들도 RTV 1의 생중계를 통해 펠릭스의 (여행)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우리의 타나토노트는 감방을 돌며 옛 동료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연신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는데, 그 눈짓에는 (나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네. 내가 전에 자네들에게 말한 대로일세)라는 뜻이 담긴 듯했다.

 우리는 격리 감방을 개조한 타나토드롬에 모였다. 라울이 두툼한 종이와 컬러 펜을 꺼내 들자 우리는 그의 주위에 빙 둘러섰다. 그동안에 펠릭스는 자기가 본 저승의 광경을 정확하게 설명할 채비를 했다.

 펠릭스는 정확한 표현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짐승처럼 아둔하게 생긴 그 사내가, 처음으로 자기의 친구가 되어 준 우리를 만족시키려고 머리를 쥐어짜 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펠릭스는 이마를 문지르다가는 등을 긁적이고, 그러다가 다시 겨드랑이를 긁어대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도 그릴 준비를 하고 있던 라울이 재촉했다.

 "그래, 그곳이 어땠소?"

 "음, 먼저 커다란 깔대기가 있습니다. 거품이나 솜 같은 것으로 둘러싸인 깔대깁니다."

 라울은 펠릭스가 이야기하는 것을 그림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림을 보면서 펠릭스가 덧붙였다.

 "아니, 더 크게요. 깔대기를 더 크게 그려야 돼요."

 펠릭스는 자기가 보았던 신비스런 광경을 떠올리려고 눈을 감았다.

 "그것은 푸르스름한 수은등이 레이스처럼 별 가루들이 큰 물결을 지어 너울거리는 모습, 아니면 빛이 마치 물처럼 솟아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꼭 빛과 불꽃으로 테를 두른 채 빙빙 돌고 있는 바다 한가운데서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페테칸트로푸스가 어느덧 시인이 되어 있었다. 아망딘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뚜렷했다.

 라울은 처음 그렸던 것을 지우고, 잎을 조금 따낸 상추와 비슷하게 다시 그렸다.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더 낫겠어요. 내 느낌을 여러분이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아시겠습니까? 불이 젤리처럼 되어 있고 나는 그 속에 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기분은 참 좋았습니다. 바다의 상쾌한 느낌을 맛보았지요.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기분과 똑같았습니다."

 "그 깔대기는 정확히 무슨 색깔이지요?"

 "음, 연한 하늘색입니다. 하지만 보통 하늘색보다 한층 더 산뜻한 색이지요. 그것은 회전 목마처럼 빙빙 돌면서 내 주위에 있던 많은 망자들을 빨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망자들은 모두 탯줄 같은 하얀 줄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 줄이 끊어지면서 깔대기 안으로 멀리 들어가 버리더군요."

 "줄이 탁 끊어지더란 말인가?"

 뤼생데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래쪽과 연결되어 있던 줄에서 풀려나자 한층 더 빠른 속도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였어요?"

 아망딘이 물었다.

 "모든 나라 모든 인종의 망자들이었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지요."

 라울은 우리에게 입을 다물라는 시늉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의 잦은 질문은 펠릭스의 집중력을 흩뜨릴 염려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상세한 지도를 만들려는 우리의 작업이 더디어질 수도 있었다.

 "깔때기 이야기를 계속해 봐요."

 "네 그 깔대기는 조금씩 오므라들면서 거대한 튜브로 바뀝니다. 거기에 이르면 내벽의 빛깔이 차츰 진해지다가 마침내 청록색을 띠게 돼요. 그 청록색이 있는 곳까지는 가보지 못했지만 그 빛깔은 분명히 보았소."

 "깔대기가 계속 돌고 있던가요?"

 "그래요. 가장자리 쪽은 아주 천천히 돌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빨리 돌아요. 그러다가 깔대기가 오므라들고 빛이 더욱 환해져요. 망자들은 모두 그 청록색 터널 속으로 들어가요. 그때는 사람들의 모습도 바뀌지요. 나도 내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어요."

 "어떻게 달라지는데요?"

 펠릭스는 스스로가 대견스럽다는 듯 몸을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내 몸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는 했는데, 그 몸이 투명해졌어요. 하도 투명해서 나 자신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지요. 아주 근사했어요. 나는 내 육신을 완전히 잊었어요. 살을 파고들어 온 발톱 때문에 생긴 고통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어요. 나는 마치..."

 "하나의 깃털 같았겠군요?"

 나는 라울이 예전에 들려준, 고대 이집트의 "사자(死者)의 서(書)"를 떠올리며, 펠릭스를 거들었다.

 "그래요. 깃털 같기도 했고, 바람 한 줄기가 조금 단단해져서 아주 가벼운 고체가 된 것 같기도 했소."

 라울은 종이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이 서서히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깔대기, 터널, 기다란 탯줄을 늘어뜨린 투명한 사람들... 마침내 죽음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라울의 그림은 멀리서 보면 머리털이 헝클어진 커다란 머리와 비슷했다.

 "깔대기가 거대했다고 했지요?"

 "아주 컸어요. 내 생각엔, 가장 좁은 곳의 지름이 몇십 킬로미터는 족히 될 것 같았어요. 지구의 모든 망자들이 그곳에 모여들어 한 시간에 백 명씩은 그 안으로 몰려 들어가야 할 테니 그렇게 큰 게 당연해요. 그리고, 아 그래요! 그 곳에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어요. 맘만 먹으면 내벽 위로 걸어 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물론 날아다니니까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에요."

 "동물들도 있던가요?"

 아망딘이 물었다.

 "없었소. 동물은 없고 사람들뿐이었소. 그런데 어디에서 전쟁이 일어났는지 죽은 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왔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터널 안으로 아주 빠르게 몰려 들어가는데도 서로 부딪치는 일 없이 아주 평온했어요. 빛이 이끄는 대로 다들 나비처럼 날아갔지요."

 라울이 펜을 놓자, 나는 펠릭스의 이야기에 내 생각을 덧붙였다.

 "사자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날아가다 보면, 어떤 순간에는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자네가 멈추었던 곳이 정확히 어디지?"

 뤼생데르가 묻자, 펠릭스는 하늘색 깔대기의 넓은 쪽 가장자리에 있는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깁니다."

 대뜸 한 지점을 정확히 가리키는 통에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펠릭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더 멀리는 나아갈 수가 없었어요. 1센티미터만 더 나아갔으면 내 생명 줄도 끊어졌을 것이고, 그러면 다시는 여러분을 못 만났겠지요."

 "은색 줄이 무한히 늘어날 수 있을 만큼 탄력적인 건 아닌 모양이지?"

 대통령이 물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럴 것 같지만, 빛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갈수록 팽팽해지고 끊어지기 쉽게 됩니다. 빌어먹을, 1센티미터만 더 갔으면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을 거예요. 이 지점이 바로 저의 한계였어요."

 펠릭스가 그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라울은 거기에 검은 펜으로 긴 점선을 그린 다음, 그 위에 (코마 장벽)이라고 썼다.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물었다.

 "예전에 음속의 장벽을 뛰어넘어 초음속기를 만드는 일이 큰 과제로 되었던 적이 있었지. 나는 팰릭스가 말하는 이 지점을 음속의 장벽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네. 현재로서는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넘을 수 없는 한계일세. 아직 불완전하기 짝이 없지만 이렇게 영계의 초입 부분을 지도로 만들어 놓고 보니까, 우리의 목표도 분명해지고 있네. 이 선을 넘는 것, 그것이 다음 단계의 목표일세."

 그렇게 말하고 나서 라울은 (코마 장벽)을 나타낸 점선 뒤에 굵은 글씨로 (테라 인코그니타 Terra Incognita)라고 썼다. (알려지지 않은 땅)이라는 뜻의 라틴어였다.

 우리는 마음의 옷깃을 여미며 그 지도를 바라보았다. 바야흐로 신대륙 탐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엔 신대륙의 기슭에 겨우 닿았을 뿐이지만, 개척자들이 대륙 안으로 깊이 들어감에 따라서 산과 초원과 호수의 위치가 지도에 표시될 것이고, (테라 인코그니타)는 종이의 가장자리 쪽으로 자꾸 밀려나게 될 것이었다. 옛날에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사람들은 무지의 표시인 그 두 단어를 조금씩 조금씩 지워나가지 않았던가.

 국회 의사당에서 행한 실험을 목격한 사람들은 정치적이고 과학적인 의미를 지닌 하나의 사업이 결말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끝아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늘색에서 청록색으로 바뀐다는 그 터널을 탐사해야 했다. 그리하여 영계 지도를 보완하고 (테라 인코그니타)라는 두 단어를 뒤로 물려야 했다.

 라울이 두 손을 모으더니, 득의 양양한 미소를 감추지 않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알려지지 않은 세계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그곳을 향해 언제까지라도 곧장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를 자극하는 새로운 슬로건이었다. 우리는 서로 반짝이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모험엔 오로지 시작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리라는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22) 미지생(未知生) 언지사(焉知死). "논어" 선진 편

23) 마전(馬錢) 속의 여러 식물에서 채취한 거무스름한 독. 남아메리카 인디언이 화살에 바르던 것인데, 오늘날에는 외과 수술의 마취 보조약으로 쓰인다.

24) 이상은 "고사기(古事記)" 상권에 나오는 신화이다. "고사기"는 7세기 말 천무(天武)왕 때 기획되어 712년에 간행된 신화 중심의 사서(史書)임.

25) 수메르 신화의 이난나 여신이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신화에서 이슈타르로 이름이 바뀌었다. 샛별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사랑의 여신이자 풍요의 여신, 전쟁의 여신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숭배를 받았으며, 남편인 풍요의 신 타무주에 대한 이슈타르의 사랑과 질투는 "길가메슈 신화"와 "이슈타르 저승 하림(아래 하, 임할 림)" 등의 모티프가 되었다.

26) 미국의 만화가 팻 서리번의 만화 주인공인 고양이 펠릭스를 연산시키는 이름이다. 고양이 펠릭스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검은 고양이다.

27) 프랑스의 범죄자. 1919 년 처음엔 사기와 배임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곧 소년 하나와 열 명의 여자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끝까지 범죄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결국 기요틴으로 처형되었다.

28) 프랑스의 범죄자. 1942~44년 사이에 27건의 살인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29) 발데르, 발두르라고도 한다.

30) Mistilteinn. 겨우살이. 영어의 미슬토우 mistletoe와 어원이 같음.

31) 옛날 갈리아 지방에 있던 요새. 기원전 52 년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 군대에 맞서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곳. 갈리아 인들은 결국 기아를 견디지 못하고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다.

32)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의 선장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첫발을 디디며 지구에 보낸 유명한 말, (저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겐 위대한 도약입니다)를 흉내 낸 것이다.

33) 오마르 카이얌(1050~1123)은 페르시아의 시인이며, 수학자, 천문학자. 2차, 3차 방정식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해법을 밝힌 "대수학"이라는 저서와 페르시아력을 개량하여 5,000년 동안 하루의 오차밖에 생기지 않을 만큼 정확하게 만든 (잘라드 력)으로 유명하며, 페르시아 고유의 4행시 "루바이 야트"의 작자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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