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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스트 2

5

줄리아는 뿌연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굵은 빗발, 어두컴컴한 하늘, 달도 별도 없는 밤,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드는 우울한 분위기...

그녀는 미끄러운 커브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그래, 지난주 내내 정상이 아니었어. 심한 우울증, 광적인 작업에의 몰두, 그리고 이상하게 들뜬 기분. 그래, 조울증이라고 해야 옳겠지. 의학적으로 말기 증세지.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냉철하고 활달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녀는 급한 커브 길로 접어들면서 전신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옴을 느꼈다. 오늘은 설마 여우가 없겠지. 정확히 일주일 전에 그녀가 반대 방향에서 접근했던 바로 그 커브 길이었다.

세바스찬은 지난 일요일 이후로는 발걸음도 비치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레타와 새끼염소는 둘 다 아주 건강했으니까. 하지만 혹시 왕진이 필요했더라도 그는 다른 사람을 대신 보냈을지도 모른다. 줄리아는 핍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는데도 핍은 모든 걸 다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눈치 챈 걸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줄리아는 입술을 꼭 다문 채 핸들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엉겁결에 엑셀을 밟자 차가 앞쪽으로 덜컹 하고 쏠렸다.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만한 일에 정신이 팔려 위험천만한 운전을 하다니...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내내 그 일이 떠나질 않았다. 그는 도대체 무슨 게임을 즐기고 있는 걸까? 나를 이용해서 한바탕 즐기려고 했던 것뿐일까? 더 이상 승산이 없어 보이자 교활하게 물러선 걸까?

무사히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다른 차 한 대가 막 떠나고 있었다.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보니 그것이 맬콤의 차임을 알 수 있었다. 놀랄 것도 없지. 열렬한 사랑에 빠진 그가 팁과 단둘이 저녁을 보낼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까.

그는 줄리아 옆을 지나면서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면서 그녀는 짜증스런 절망감을 느꼈다. 핍은 분명 자신의 삶을 바꾸려 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 생활도 변하겠지. 나 자신 이외에는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주방에서 그릇을 닦고 있던 핍이 줄리아가 들어서자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핍의 얼굴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강습은 어땠니?"

"좋았어."

가방을 내던지면서 줄리아는 피곤한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번 주에는 한 번 더 있었으면 좋겠어. 난 정말 일을 많이 했거든."

그건 사실이었다. 이번 주 내내 그녀는 마치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두 마리 짐승 같았다. 울적함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이제는 지쳐서 기진맥진한 상태다. 그런 감정은 그녀로서는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 그녀는 빨리 이 울적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 잔 하러 가지 않았니?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네."

핍은 계속 기름진 그릇들을 닦으며 말했다.

"가볍게 한 잔 하긴 했지. 하지만 오늘밤엔 빨리 집에 돌아오고 싶었어."

줄리아는 하품을 했다.

"무척 피곤했거든."

"그럼 팀도 만나 보지 않은 거니?"

"아니, 만났어."

줄리아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팀은 늘 거기 있었다.

"그에게 새끼염소 얘기를 해주었더니 축하한다고 그러더라."

"난 축하받을 자격이 없어. 축하는 그레타와 네가 받아야지."

그녀는 어깨너머로 줄리아를 흘끔 쳐다보았다.

", 실은 네 염소 모형을 슬쩍 훔쳐봤거든. 정말 근사하더라."

줄리아는 다소 마음이 누그러졌다.

"잘된 것 같기는 해."

그 혼란스런 일주일 동안 염소만이 유일하게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그레타와 그 새끼를 보고 있노라면 창작의욕이 마구 솟아올랐으니까.

", 이제야 생각나는데, . 제스퍼가 우리 작품을 좀 더 갖다 달래. 우리 중 한 명이 가능한 한 빨리 거기 갔다와야 할 것 같아. 넌 작품을 꽤 많이 만들어 놓았지? 글래스톤베리에 다녀올 생각 없니?"

"왜 없겠니? 잘됐어. 실은 여행을 좀 하고 싶었거든. 쇼핑할 것도 좀 있고. 팀과 제스퍼를 안 본 지도 왜 오래됐어."

그녀는 접시를 닦으며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래, 내일 가야겠다."

"좋아."

줄리아는 핍이 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당분간은 팀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 괜찮다면 난 이제...."

"잠깐만, 줄리아."

돌아서는 핍의 얼굴은 이상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자러 가기 전에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핍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며 줄리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털어놔 보시죠, 귀는 다 열어 놓았으니까."

내심 긴장되었지만 밝게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맬콤과 나에 대한 얘기야."

핍은 수세미를 만지작거리며 줄리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걱정으로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짐작하고 있었어."

줄리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가 오늘밤 여기 왔었는데 우린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 있잖아, 사실은...."

핍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줄리아도 눈치 채지 못하게 엷은 한숨을 토했다.

"실은 말야, 우린 결혼하기로 했어."

어렵사리 그 말을 털어놓고서 핍은 한시름 놓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폭탄선언에 친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염려스러운 듯 그녀를 조심스레 쳐다본다.

"결혼이라구?"

줄리아는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핍의 예상대로였다. 그녀의 복숭아빛 얼굴이 진홍색으로 물들었다. 두 눈에 하나 가득 충격의 빛이 떠오르고 입술이 꼭 다물렸다. 그녀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다소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까진 줄은 미처 몰랐어. 그렇다면 이번에는 네가 축하를 받을 순서로구나."

제일 큰 파도가 지나갔다고 생각했는지 핍이 맞은편에 앉았다.

"네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잘 알아, 줄리아."

그녀는 이제 마음이 좀 놓이는지 다정하게 말을 걸어 왔다.

"하지만 너도 대충은 짐작했을 거야. 맬콤과 난... 우리는 지난 몇 주 사이에 점점 가까와졌어. 요즘 들어선 열렬해졌고...."

그녀는 더 이상 행복을 감출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줄리아는 핍을 위해 비참한 느낌을 감추려 애썼다.

"사랑에 빠진 거니?"

핍은 생각에 잠기더니 살짝 웃어 보였다.

"아마 그런 것 같아."

", 그런 일은 늘 있게 마련이지."

줄리아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태도가 혐오스러웠다. 모름지기 이런 느낌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 사랑에 빠지는 건 좋은 일이다. 그렇더라도 결혼이라니? 두 사람이 함께 이룩한 모든 것을 저버리고 말이다! 서로의 야망과 맹세를 그토록 쉽게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인가?

"왜 진작 그런 얘길 안한 거지?"

줄리아는 탁자 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비난하는 투로 물었다.

"미안해, 그럴 수밖에 없었어."

핍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줄리아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불현듯 핍도 역시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힘들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정말 미안해, 줄리아. 그 동안 나도 역시... 갈등이 많았거든. 네가 우리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드는 남자에 대해, 그리고 그런 감정에 빠지는 것에 대해 네가 늘 어떤 얘기를 해왔는지도 잘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난 너와 똑같을 수는 없잖아!"

진정 어린 울먹임에 줄리아의 마음이 다소 흔들렸다. 하지만 눈길을 핍의 얼굴에 고정시킨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난 그를 사랑해, 줄리아."

핍은 눈물을 머금은 채 미소를 지었다.

"난 결국 사랑에 눈이 먼 바보가 되고 말았어. 너를 실망시킨 건 알아.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맬콤은 함께 집을 사고 모든 것을 같이하기를 원해.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애인을 떠올리자 용기가 솟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도 역시 그러고 싶어, 줄리아. 그게 문제야, 나도 역시 그걸 원한다는 바로 그 점이 말야."

그녀는 멋쩍은 듯 피식 웃었다.

"난 관습을 따르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한가 봐."

내성적인 성격의 핍으로서는 꽤 많은 얘기를 털어놓은 셈이다. 얘기를 계속 들으면서 줄리아는 점점 친구의 입장에서 정말로 잘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을 뻗어 핍의 팔 위에 살며시 얹었다.

"넌 사랑을 올바르게 가꿀 줄 아는구나. 그런 네가 부럽다. 물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은 알았어. 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지."

그녀는 목이 메어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웃는 얼굴로 핍을 바라보았다.

"물론 네가 정말로 행복하기를 바래. 아니 너는 분명 행복할 거야."

그녀는 핍의 팔을 꼬옥 붙잡았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조그맣게 들려오는 저항의 목소리를 여지없이 눌러 버렸다. 난 앞으로 어떡하지? 우리들의 계획은? 그리고 이곳은?

하지만 핍은 이제 긴장이 풀렸는지 새로운 기분으로 바로 그 문제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있잖아, 줄리아. 내가 그 동안 쭉 생각해 봤는데 난 더 이상 여기서 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게 끝난 건 아냐. 넌 나 없이도 해나갈 수가 있어, 다른 동료를 구할 수도 있고."

"그래, 난 혼자서도 잘 해나갈 거야. 다른 사람을 구할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어."

"실은 맬콤에게 애슈덴 근처에 우리가 살 만한 집을 찾아보자고 했어. 그도 아주 좋아하더라. 그는 내가 계속 일하기를 바라거든."

"나도 그러길 바래."

줄리아가 숨돌릴 틈도 없이 맞장구를 쳤다. 핍은 미소를 머금고 약혼자의 세심한 배려에 대해 얘기를 계속하면서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는 스튜디오를 꾸밀 수 있는 집을 사자고 그랬어. 그래서 내가 애기를 갖더라도."

그녀의 얼굴이 더욱 발갛게 달아올랐다.

"일은 계속할 수 있도록 말야."

줄리아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공감이라든지 분노 같은 게 아니라 일종의 질투 섞인 부러움이라는 데 있었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니라!

겉으로는 이 문제를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다루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네가 한 말을 정리해 보면 우리가 같은 집에 갈진 않더라도 관계는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니?"

"그래. 바로 그거야. 맬콤은 경리적인 측면에서도 별 어려움이 없다고 그랬어. 그리고 우린 이미 믿을 만한 단골들을 확보해 놓고 있잖니."

핍은 이제 열성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스튜디오는 이제 좀 비좁은 것 같아. 각자 스튜디오를 갖고 일하면 더 좋을 거야."

"...."

그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못할 것도 없겠지."

줄리아는 다 좋게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천성이 낙천적인 편이니까.

"아니, 그게 더 편리할 것 같구나."

", 줄리아."

핍은 감격한 듯 활짝 웃었다.

"나는 네가 그걸 배신으로 받아들일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다구."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줄리아는 사뭇 가벼운 어투로 얘기했다. 이렇게 되는 게 불가피한 일이라면 두 사람 모두를 위해 가능한 한 부드럽게 해결하고 싶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 난 항상 네게 자립심을 강조했잖니. 이제 그걸 증명할 기회가 은 건데 뭐."

그녀는 다소 슬픈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린 너를 그리워할 거야. 마틸다와 암탉들과 나 말야."

갑자기 무슨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럼 염소들을 데려갈 거니?"

", 그래."

줄리아의 찡그린 얼굴을 보더니 핍이 다시 걱정스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두고 갈 수는 없어. 맬콤도 좋아하거든. 그는 그 염소들을 위해 땅과 헛간이 있는 집을 사자고 그러던 걸. 그리고 난 염소젖이 필요하잖니. 물론 너도 항상 갖다 먹을 수 있고 보고 싶을 땐 언제든지 보러 와도 좋아."

그녀는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 사소한 일이 핍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줄리아는 또다시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맬콤이 얼마나 그들을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사랑에 견줄 수 있을까. 그녀는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그들이 곁에 있는 걸 행복해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그 말이 큰 타격이었고 슬픔이었다.

줄리아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래, 이건 인생이 내게 던진 시련이야. 눈물을 머금고 다시 일어서라는... 유일한 방법은 흔쾌히 그걸 받아들이는 것뿐이야.

"알았어."

줄리아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이제 그만 자러 가야겠어. 안 그러면 여기서 쓰러져 잘 것 같아."

"그래, 우리 모두 자는 게 좋겠다. 내 입장을 이해해 줘서 고마워, 줄리아."

핍은 정말로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줄리아는 자신이 정말로 잘 이해해 줬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어쨌든 미소로 답했다.

"봉변당한 기분이야. 그런데 그 원시적인 의식은 언제쯤 올릴 거니? 그리고 어디서? 꽃장식에 하얀 레이스가 가득한 성대한 예식이겠지? 내가 네 부케를 받게 될까? 그리고 잘생긴 신랑 들러리와 눈이 맞아 친해질 수 있을까?"

핍은 그녀의 장난기 섞인 농담을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너를 수석 신부 들러리로 임명해 줄게, 그리고 맬콤한테 얘기해서 멋지고 능력 있는 친구들로만 신랑 들러리 명단을 짜라고 할게."

줄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식으로 짝을 맞추는 건 싫어. 네가 조작할지도 모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만나고 싶어."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우린 크리스마스에 식을 올릴까해. 좀 빠른 것 같기는 하지만 일단 결정한 이상 미적거릴 것 없지 뭐. 그리고...."

줄리아가 그 사실을 미처 다 소화하기도 전에 그녀가 선언하듯 말했다.

"장소는 교회에서 성대하게 올릴까 해."

줄리아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다시 핍을 쳐다보았다.

"부모님께는 말씀드렸니?"

"아까 전화를 드렸어. 무척 기뻐하시더라. 그리고 그이의 가족은 다음 주말에 만나 볼 예정이야. 그들은 배스 근처에 살고 있거든."

줄리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게 착착 진행돼 가는군. 다 그런 거지 뭐, 일반적인 사람들한테는 그게 안전하다고 느껴지겠지.

하지만 줄리아는 아주 일찍부터 진정으로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삶은 그런 절대적인 구속과는 병행될 수 없다고 단정지어 버렸다. 특히 여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원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아마 핍도 줄리아의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가정에 안주해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안 그럴지도 모르지. 확률은 반반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 줄리아는 헛기침을 했다.

"그럼 내일 보자. 삶은 계속되는 거니까."

"그래, 네 말대로 삶은 계속되는 거야."

핍이 눈빛을 반짝이며 그 말에 동감했다.

"내일 아침을 먹자마자 글래스톤베리에 가야겠어."

줄리아는 10분 뒤에 침대로 올라갔지만 한참을 뒤척인 후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핍과 줄리아는 작품들이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상자에 넣어 차에 실었다. 10시쯤 핍은 글래스톤베리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지난밤에 나눴던 대화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지만.

<삶은 계속되는 것>

자신의 그 진부한 신조대로 줄리아는 스튜디오로 갔다. 하지만 심신이 피곤하면 성과도 없는 법이다. 아무리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도 마음과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아 진흙도 협조해 주지 않았다. 오늘 그녀의 마음은 울적하고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니 손가락도 당연히 무감각할밖에.

1030분쯤 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외양간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에 기대서서 귀를 쫑긋거리는 새끼와 반갑게 다가오는 어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끼는 어느덧 몰라보게 자라 있었고 그레타는 다시 우아한 자태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

둘 다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레타는 줄리아 쪽으로 다가오더니 긴 코를 그녀가 내민 손바닥에 다정하게 부벼댔다. 혼자 떨어져 있는 게 싫은지 새끼도 어미를 따라 그 옆으로 왔다.

그 염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눈물이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자 그레타와 새끼의 모습이 흐릿하게 안개에 싸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연약한 감상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줄리아는 우리에 더 바짝 다가서서 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다.

차가 문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줄리아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녀는 바로 뒤에서 멈춰서는 차 소리를 듣고서야 허겁지겁 손등으로 그 부끄러운 흔적을 닦아냈다. 하필 이때 나타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지? 자신이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순간에 소리도 없이 불쑥 나타나다니...

줄리아는 돌아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았다. 세바스찬의 존재가 강하게 느껴졌다. 오디 뒤칸에서 가방을 꺼내더니 돌아서서 그녀 쪽으로 걸어온다. 10월의 투명한 햇살이 그 위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다. 구릿빛 머리칼, 인상적인 콧수염, 얼굴에 드리워진 엷은 그림자가 그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그 햇살은 줄리아의 황갈색 머리 위에도 쏟아져 내렸다. 청바지에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녀의 산뜻한 모습은 희미한 헛간을 배경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세바스찬에게는 그녀의 얼굴 윤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몇 미터 밖에서 멈춰 섰다. 그녀인지 확인하려는 듯이, 아니면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듯이...

"줄리아, 잘 있었소?"

그녀는 아직까지도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흐느낌을 쫓아버리려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요, 세바스찬."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그녀는 지난번 그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감정을 시험해 보려고 일부러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지난 주 내내 그녀를 괴롭혔던 마음의 갈등이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그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녀 곁을 지나쳐 우리 안을 들여다보였다.

"우리 환자들은 좀 어떻소? , 좋아 보이는군."

"저도 방금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녀는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간신히 그렇게 대꾸했다. 또 시작이군. 이 긴장감... 그가 곁에 기대서서 팔 끝이 약간 스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짜릿한 쾌감이 느껴지다니...

그는 돌아서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염려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호기심으로?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괜찮다면 안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보는 게 좋겠소. 내일은 비번이기 때문에 오늘 검사하러 온 거요."

줄리아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열더니 염소들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즉시 능숙하게 손을 놀리며 염소들에게 마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 정말 회복이 빠르군."

그가 그레타의 옆구리를 기계적인 동작으로 쓸어내리는 동안 줄리아는 홀린 듯이 그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요 녀석은."

세바스찬이 싱긋 웃었다.

"아주 생기가 넘쳐 보이지 않소?"

"정말 사랑스러워요."

줄리아는 침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레타도 대견스럽구요."

"훌륭한 숙녀지."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친밀감을 띠었다.

"처음으로 새끼를 낳는 어미치고는 참 잘 해냈지. 더군다나 처음엔 그렇게 애를 먹였는데 말이오."

그는 가방을 열어 주사기를 꺼냈다.

"그런데도 이렇게 건강하다니... 안 그래, 아가씨? 이제 한 대만 더 맞으면 돼요."

줄리아의 눈길은 그의 손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주사기에 약물을 넣고는 그레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슬며시 바늘을 꽂고 있었다. 이 모든 장면을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바라보고 있던 줄리아는 그에게서 거역할 수 없는 힘 같은 걸 느꼈다.

"잘 먹소? 그레타 말이오."

세바스찬이 물건들을 챙기며 물었다.

"그리고 새끼는? 젖을 잘 빨고 있소?"

"탐욕스럽게 빨아대죠."

줄리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이군."

세바스찬이 우리를 뛰어 넘어왔다.

"박스터 양, 안에 있소? 결과보고를 해야겠는데...."

"없어요."

그녀가 말을 막았다.

"하지만 하실 말씀 있으시면 제게 하셔도 돼요. 제가 그녀와 책임을 함께 나누고 있으니까요. 여태 모르셨나 보죠?"

어쨌든 앞으로 몇 주 간은 더...

세바스찬은 의아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줄리아, 나도 그건 잘 알고 있소. 단지 실제 주인한테 얘기를 하는 게 당연한 것 같아서 그랬던 것뿐이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럼 그녀가 돌아오면 좀 더 일찍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주시오. 지난주 내내 병원에 일이 많았고,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그리고 저놈들 둘 다 이제 밖에 나가 풀을 뜯어도 좋다고 말해주시오."

"그렇게 전하겠어요. 고마워요."

줄리아는 좀전에 성깔을 부렸던 게 부끄러워 우물우물 대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가버릴 건가? 그렇다면 안도감을 느껴야지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한 것일까?

그녀는 도무지 자기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그를 붙들어 두고 싶기도 하고 가능한 한 빨리 보내 버리고 싶기도 했다. 두 개의 본능이 싸우다가 결국 감정이 이성을 눌렀다.

"... 커피 한 잔 드실 시간 있으세요?"

하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럴 시간 없는데... 어쨌든 고맙소."

그는 공손하게 거절했다. 줄리아는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지금 당장 5km를 달려가서 그 포악하기로 악명 높은 저지 종 황소를 검진해야 하오."

줄리아가 파르르 몸을 떨자 그가 씩 웃었다.

"걱정 말아요. 내가 그놈에게 코뚜레를 끼워서 누가 주인인지 가르쳐 줄 거요."

"걱정 같은 건 안해요."

그녀가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그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더 이상 이 만남을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녀 쪽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한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는 팔목을 붙들었다. 그건 거칠지도, 위협하는 손길도 아니었지만 줄리아는 수갑에 차인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줄리아, 난 염소만 보러 온 게 아니었소. 당신에게 부탁할 말이 있어서 온 거요."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면서 직업적인 딱딱한 표정에서 친근하고 다정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그래요?"

너무도 갑작스런 변화에 그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그는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가방을 땅에 내려놓더니 그 손으로 그녀의 윤기 나는 머리를 매만졌다. 움직임을 따라 옮겨가던 어두운 눈길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그녀의 얼굴 위로 돌아왔다.

"그 말을 하기 전에 줄리아, 무슨 일 있었소? 내가 들어설 때 당신은 울고 있던데...."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의 그런 연약한 감상을 그에게 털어놓고 싶진 않았다. 결국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강렬한 그 눈빛과 피부에 와 닿는 그의 손길의 감촉이 그녀의 경계심을 마구 헝클어뜨려 놓았다.

", 그랬어요."

"왜 그랬지?"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눈길을 피했지만 그는 계속 다그쳐 물었다.

", 내게 말해 봐요."

그는 달래듯 말했다.

"당신 말에 귀를 기울이겠소. 내가 병든 동물들을 돌보러 갈 때 사람들이 내게 어떤 말까지 털어놓는지 알면 놀랄 걸."

그녀는 살며시 웃었다. 그런 다음 그의 손길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는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 황소와의 약속은 어떻게 하시구요?"

"당신이 비록 초라한 염소치기이긴 하지만 그쪽보다는 훨씬 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 같소."

줄리아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 염소치기라는 그 말에 스스럼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를 신뢰하게 될 거라는 예감과 함께...

"실은 핍 때문이었어요."

"핍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소?"

그가 놀란 듯 물었다.

"아뇨, 정반대예요."

줄리아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녀는 아주 좋아요. 사랑에 빠졌죠. 결혼할 거래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슬픈 일이오?"

세바스찬은 사실을 알고 나자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염려스런 얼굴로 말했다.

"서운하겠구료. 그녀가 이곳을 떠나 결혼이라는 보금자리로 날아가 버릴 테니까. 당신을 여기 혼자 남겨 두고 말이오."

줄리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적어도 한 가지 이유는 알아맞힌 셈이다.

"물론 그녀를 위해서는 잘된 일이죠."

이제 마음이 푸근해져서 쉽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는 이제 장벽 대신 다리가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저만 더 괴로울 뿐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서야 그 얘기를 털어놓았고 전 아직도 그 사실에 대해 실감이 나질 않아요.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떨려 나왔고 곧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무슨 일이 있구나 하는 건 알았어요. 하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줄은 정말 몰랐어요. 지금까지 우리는... 그녀는 늘 자제를 잘하는 편이었거든요."

이 얘기를 계속 끌고 나갈 수는 없다. 지금까지만 해도 너무 털어놓은 것 같은데...

세바스찬은 땅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사뭇 동정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어떤 남자가 이런 말을 했다더군. 여자란 양철 그릇과 같아서 쉽게 달아올랐다가도 금세 식어 버린다. 핍의 경우도 아마 그런 거겠지."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자로군요."

줄리아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위로한답시고 이런저런 말을 조리 있게 늘어놓는 것보다 그 부드러운 재치가 훨씬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떤 재담가가 그런 말을 했죠?"

그녀는 이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재치로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 믿었고 사실 그 판단은 옳았다.

"기억이 잘 안나는데?"

그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짐짓 생각을 더듬는 척하더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다시 정색을 하고는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심정을 이해하오. 이곳에 둘만의 아늑한 공간을 이루어 놓았는데... 그런 일은 당신이 구상한 시나리오에는 없었겠지, 줄리아? 더군다나 한 남자의 품으로 들어가는 그런 일 따위는."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건 일종의 도전이었고 정곡을 찌른 말이기도 했다.

"전 곧 괜찮아질 거예요."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우선은 고통스러울 것 아니오. 그렇더라도 핍을 위해선 잘된 일인 것 같소. 그녀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지. 그 동반자가 좋은 남자이길 바라오."

"그 사람은 우리 세무사예요."

줄리아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친구이겠군."

그는 안심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꿰뚫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저 염소들도 데리고 가겠지?"

줄리아는 그녀의 속마음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그의 능력에 대해 감탄해야 될지 화를 내야 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요."

그녀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 가엾은 줄리아."

그의 동정 어린 눈길에 줄리아는 순간 당황했다. 그의 손길이 잠시 그녀의 어깨 위에 머물렀다가 살풋 떨리더니 다시 그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거기가 안전한 피신처라도 되는 듯이. 그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군."

그가 혼잣말처럼 불쑥 내뱉었다. 줄리아는 흥미로운 눈길로 그를 찬찬히 살폈다.

"난 지금껏 가정에 안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오. 물론 평생 그러진 않겠지만. 세계 각처를 돌아다니느라 바빴지. 그런데...."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순간은 끝난 것이다. 하지만 줄리아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비록 머릿속에서는 위험신호가 울려대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런데 뭔가요? 데보라 캐닝턴이 그 방황을 막아 주었나요? 그녀는 거의 그 말을 할 뻔했다. 그 말을 털어놓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지만... 하지만 그는 그런 얘기를 쉽게 털어놓을 만큼 미숙하지 않아. 자신의 동료와 병원뿐만 아니라 거주지. 욕실, 심지어는 침실까지도 함께 쓴다는 사실을 널리 알릴만큼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은 아냐. 비록 우연히 그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가 그 두 사람이 모종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걸 공공연히 알릴 필요는 없을 테니까.

이런 사실을 떠올리고는 줄리아는 더욱 뒤로 물러섰다. 문득 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게 후회가 됐다. 어째서 그에게 털어놓게 되었을까? 잠깐 정신이 어떻게 됐던 모양이야. 그래도 그가 그걸 이용해서 자신의 감정을 산산이 짓밟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는 모순투성이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어째서 그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 가시기 전에 제게 부탁할 말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아니면 이제 마음을 바꾸셨나요?"

"그랬지."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음을 바꾸지도 않았소. 오히려 그 반대요. 오늘 저녁에 당신, 시간이 있는지 모르겠군."

너무도 뜻밖의 말이라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조심스러웠다.

"왜요?"

"염소가 없는 곳에서 당신을 보고 싶기 때문이오. 물론 난 염소를, 특히 그레타를 깊이 사랑하고 있지만 동물세계 외에도 내 생활이 있는 거요. 당신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오. 그런데 지금껏 우리 둘 다 상대방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잖소."

"꼭 그래야만 하나요?"

줄리아는 점점 더 의아해했다.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난 그렇소. 그런데 그게 꼭 오늘 저녁이라야만 하오. 왜냐면 당신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오."

줄리아는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요?"

"그렇소."

줄리아의 미심쩍은 눈빛을 보곤 그는 눈썹을 움찔하며 긴 입술을 일그러뜨리더니 다짐하듯 말했다.

"걱정 말아요, 공공장소니까, 다른 사람들도 있을 거고."

"하지만...."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내게 뭘 보여 주겠다는 말인가? 그리고 데보라 캐닝턴도 그 다른 사람들 속에 포함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건데요?"

"말할 수 없소. 그게 바로 당신이 거기 오도록 하는 미끼니까."

줄리아의 이성은 사뭇 조심스러웠지만 다른 본능이 그의 도전을 받아들이라고 충동질을 해댔다. 그건 초대라기보다는 일종의 도전처럼 느껴졌다.

"모르겠어요."

줄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 세바스찬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러더니 시계를 쳐다보았다.

"난 이제 정말 가봐야겠소. 줄리아, 나올 생각이라면...."

"간다고 하진 않았어요."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여우와 거위>라는 내 단골 술집에서 기다리겠소. 8시부터 11시 사이에 아무 때든지."

그는 돌아서서 가방을 집어 들더니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을 한 번 바꿔 봐요, 줄리아. 후회는 안 될 테니."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변하다가 다시 딱딱해졌다.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어떻게 하진 않을 거 아니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그녀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돌아서더니 자기 차 있는 데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는 차에 올라탄 뒤 문을 쾅 닫고는 손을 흔들더니 가버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 서서 그의 차가 내뿜고 간 뿌연 연기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서 다시 방갈로로 돌아왔다. <여우와 거위>라고-얼마나 어울리는 이름인가! 핍을 기다렸다가 이 얘기를 하면서 한바탕 웃어야지. 레나르 선생께서 묘한 방법으로 나를 꼬셔서 여우 술집에서 은밀히 만나자고 했다고...

하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모험심이 동하기도 하고... 그가 바로 그걸 노렸겠지만. 그는 정말로 내게 뭔가를 보여 주고 싶은 걸까? 아니면 단지 계략에 불과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미스 캐닝턴은 그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일까?

일요일에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 얼마나 비정상인가 한 번 시험해 보자. 오늘밤에...

 

6

아홉 시간쯤 후에 줄리아는 자신의 푸른 눈빛에 어울리는 밝은 체크무늬 정장을 입고 세바스찬 단골집의 문 앞에 섰다.

희미한 불빛 아래 <여우와 거위>라는 간판이 보였다. 그 옆에는 두 짐승이 반대방향에서 서로를 적의의 눈빛으로 쏘아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줄리아는 전엔 그곳을 그냥 무심코 지나쳤는데 이제 세바스찬이 자주 가는 집이라는 걸 알고 나자 그곳이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다가서는 듯했다.

실내는 그다지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런 대로 아늑했다. 그리고 활기에 넘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줄리아는 문간에 서서 망설이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세바스찬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 버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턱을 치켜들고 안쪽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 재킷을 벗은 다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실내를 둘러보았다. 흐음, 따스한 분위기가 맘에 드는데? 어디선가 재즈 음악도 들려오구 말야.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그건 생음악이었다. 놀라와! 재즈 비트에 맞춰 발로 바닥을 톡톡 쳤다. 재즈 밴드가 있어서 세바스찬이 이 술집을 즐겨 찾나 보지! 그런데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녀는 짜증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8시부터 11시 사이에 있겠다고 해놓고서 지금 9시가 다 돼가는데... 문은 딱 하나밖에 없으니 그가 만약 들어왔다면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아직 여기 안온 게 분명해.

밴드가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줄리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건 <포기와 베스>아닌가! 생명력이 넘치는 연주였다. 색소폰 연주자의 솜씨도 훌륭했고 피아노 연주도 기가 막혔다. 줄리아는 재즈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한 번 들으면 그게 훌륭한지 그렇지 않은지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 저 키보드 연주자는 정말 뛰어난 솜씨야. 세바스찬이 계속 나타나지 않으면 저쪽으로 가서 자세히 봐야지.

920분쯤이 되자 그녀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웃기는 사람이야. 교묘하게 사람을 오라고 해놓고선 나타나지조차 않다니... 내가 어리석었지. 괜한 모험심과 어리석은 충동에 잠시 판단력을 잃었지 뭐야. 그는 순간적으로 내가 처량해 보이니까 부드러운 동정심으로 나에게 친절을 베풀고선 곧 후회하고 다른 곳에서 즐기고 있는지도 몰라. 모든 게 완전히 내 실수였어. 하지만 다행히 아직 도망갈 기회는 있어.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방 저쪽 끝에서 음악이 멎더니 사회자가 떠들썩한 손님들 틈에서 뭐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손님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자 그의 목소리가 줄리아에게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금요일마다 여러분은 와일드 웨스트의 자랑, 웰스 파고스의 감미로운 선율을 즐기고 계십니다."

줄리아는 다시 주저앉았다. 지금은 슬쩍 빠져나가기에 적합한 순간이 아니다.

"밴드의 멤버들을 잘 아시므로 일일이 소개해 드릴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다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줄리아는 자꾸만 문 쪽으로 신경이 갔다. 이젠 세바스찬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베이스에 데이브 프라이스. 드럼에 잭 랭포드. 테너 색소폰에 짐 콕스."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를 때마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나왔다. 잘 알려진 유명한 그룹임이 분명했다. 줄리아는 제발 소개는 그만두고 빨리 연주를 해서 자신이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키보드에는 우리의 다정한 이웃이자 뛰어난 수의사이신 바스 트렌트!"

줄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하느님 맙소사!"

너무 큰소리였으나 다행히 근처 탁자에서 깔깔거리고 웃는 바람에 그 소리는 묻혀 버렸다. 반쯤 넋이 나간 채 그녀는 그 목소리를 계속 따라가고 있었다.

"파고스는 이제 <포기와 베스>에서 선정한 곡을 계속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즐겨듣는 애창곡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 <서머타임>."

그들이 감미로운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줄리아는 그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있었다. 그녀와 세바스찬이 줄리아의 스튜디오에서 함께 들었던 바로 그 선율-그들의 공통 관심사를 발견하게 해주었던 바로 그 음악... 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어도 상념은 당시의 정경 속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바스 트렌트라고? 안될 것도 없지? 저기 피아노 앞에 동상처럼 앉아 있는 게 그이임에 틀림없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어. 그는 온힘과 정열을 그 음악에 쏟아부으면서 자신의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리듬과 조화의 선율을 그 부드러운 건반 위에 옮겨넣고 있었다. 마치 그녀와 그 영혼의 소리를 함께 하려는 듯이.

은은한 불빛이 그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검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눈은 지그시 내려뜬 채 음악에 심취한 듯 입을 약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긴 손가락은 가엾은 동물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악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마력의 선율을 뽑아내고 있었다.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

그 말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게 오늘 아침이던가. 정열적인 수의사로만 알고 있던 세바스찬 트렌트가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바뀌다니... 그녀는 여태껏 그 사람의 반쪽만 알고 있었던 거고 여기 이렇게 재즈 피아니스트 바스 트렌트로 변신한 또다른 반쪽이 있었다. 똑같이 완벽한 모습을 갖춘 양면성. 줄리아의 창조적 감성은 그 멋진 균형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연주가 끝나자 열렬한 박수가 터져나왔고 밴드 멤버들은 서로 만족한 듯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세바스찬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더니 그 검은 눈길로 두리번거리며 줄리아를 찾았다. 그녀는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자기는 가버렸을 것이고 결국 이 멋진 광경을 놓쳤을 것 아닌가! 그녀는 그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운명의 손길이 이렇게 멋지게 마련해 준 각본에 대해 감사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긴장과 불안으로 마음을 졸였던 처음 30분간에 대해 화가 났다.

그녀를 발견한 그가 활짝 웃으며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청바지에 격자무늬 티셔츠를 입은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결국 오기로 마음먹은 거요?"

그 짧은 한 마디 속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보시는 대로요."

그녀는 미소를 머금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그건 안면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기쁨으로 환히 빛나는 눈빛이 그녀의 눈 속으로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여기 온 지 오래 되었소?"

그는 밴드 근처의 빈 탁자로 그녀를 안내했다.

"꽤 됐어요. 당신을 기다리다 지쳐서 그만 포기하고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바로 여기 있는 걸 보게 되었죠."

그녀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흥분한 기색을 감출래야 감출 길이 없었던 것이다.

"미안하오."

그는 옆자리로 와 앉았다. 하지만 미안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고 왜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싱글거리기만 한다.

"이제 내가 왜 얘기해 주지 않았는지 알았지?"

", 확실히 알았어요."

줄리아도 쾌활하게 대꾸했다.

"마음에 드오?"

그녀는 고개만 끄덕였다. 말을 하면 그 소중한 기쁨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나의 <서머타임> 편곡도 마음에 들었소?"

줄리아는 웃으면서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 뭘 마시겠소? 휴식시간은 딱 30분뿐이오."

"저는 캄파리 소다수로 하겠어요."

"곧 돌아오겠소."

그는 바로 가서 몇 마디 인사를 주고 받더니 금세 주문한 술을 받아들었다. 그가 매혹적인 키보드 연주자기 때문일까? 아니면 명망 있는 지방 수의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그가 인기 있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일까?

그가 술잔을 들고 되돌아왔을 때 줄리아는 가슴을 저미는 실망감을 느꼈다. 세바스찬과 함께 온 사람 때문이었다. 30분밖에 시간이 없다면 다른 누구와 함께 있고 싶지 않은데... 게다가 그건 여자였고 둘은 무척 다정해 보였다. 그녀의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이럴 수가...

"줄리아, 내 친구이자 동료인 데보라 캐닝턴을 소개하겠소. 데브, 이쪽은 줄리아 웨이클링이오."

, 이렇게 잔인할 수가... 그는 온화하게 웃으면서 이 게임을 즐기고 있는 거야. 그 여자는 차가운 잿빛 눈으로 줄리아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만나서 반가와요, 줄리아."

그녀는 고개만 까딱해 보일 뿐 두 손은 자신의 스커트에 그대로 찔러넣고 있었다. 매력적이고 지적인 얼굴에 가식 없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줄리아가 상상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부드러운 타월을 머리에 두르고 거품 그득한 욕조 안으로 들어가는 늘씬하고 풍만한 요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줄리아는 자신의 조금은 치졸한 상상력이 부끄러웠지만 매정하고 다소 거만하며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 그 목소리만큼은 주인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데보라 캐닝턴은 30살쯤 돼보였고 아담한 체격에 크림색 블라우스와 갈색 스커트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데보라."

줄리아는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동료라고 말씀해 주시니 고맙군요, 바스."

하고 말하면서 데보라는 자리에 앉았고. 세바스찬은 줄리아 앞에 밝은 핑크빛 잔을 내려놓더니 그 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는 실은 부하직원에 불과하거든요."

그녀가 줄리아에게 말했다. 하지만 줄리아는 그녀가 그의 애칭을 부담 없이 말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아 대꾸할 기분이 안 났다.

"없어서는 안될 존재지. 유능한 수의사기도 하고."

세바스찬이 부추겨 주었다. 줄리아는 정신을 가다듬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세바스찬이 자기 앞에 이런 모습을 불쑥 들이밀자고 작정했다면-그가 보여 줄 게 있다는 게 바로 이거였다면-차분히 대처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데보라는 줄리아를 흥미롭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당신이 그 염소로군요!"

예상밖의 그 말에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래요, 바로 저예요. 아니 제 친구 핍이라고 해야 옳겠죠. 하지만 공포에 질려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한 건 바로 저였어요."

그녀는 그 점을 인정했다.

"목욕물이 식었다면 미안하게 됐어요."

그녀는 다소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땐 어쩔 수 없었잖아요."

데보라가 가볍게 응수했다. 세바스찬은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날 밤엔 영 기분이 안 좋았어. 송아지가 죽자 이어서 어미도 곧 죽어버렸지 뭐야."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 그 염소새끼에 대해서는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다구."

그의 얼굴이 다시 밝아지면서 매력적인 음악가로 되돌아왔다.

"결국 우린 해냈지. 그렇지, 줄리아?"

이번만은 그 소동 중에 자신도 무언가 보탬이 됐음을 얘기하고 싶었다.

"그래요, 그랬으니 그 새끼염소가 세상에 태어났죠."

"귀여운 녀석이지."

세바스찬은 잔을 높이 들더니 줄리아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레타 가르보를 위하여!"

"그레타를 위하여!"

그녀는 캄파리를 홀짝이며 얼굴을 붉혔다. 둘만이 아는 은밀한 이유로 잔을 부딪쳤다는 사실이 야릇한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화가 나기도 했다. 애인을 버젓이 앞에 앉혀 두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다니. 그에 대해 점차 환멸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실례한다고 말하고 이 자리를 떠나자. 그녀가 마악 얘기를 꺼내려고 하는데 손님들 가운데서 하나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남자였다. 세바스찬과 데보라가 동시에 그를 향해 반갑게 미소를 띠었다.

"앤디!"

반쯤 일어나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세바스찬이 말했다. 그리고 데보라 캐닝턴이 일어서더니 한 손을 뻗으며

"안녕, 달링."

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줄리아는 더욱더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져들었다. 미스 캐닝턴에게는 조금만 친하면 스스럼없이 달링이라고 부르는 그런 부류의 여자 같은 구석은 조금도 없는데... 게다가 그 남자는 그녀에게 팔을 둘러 자기 쪽으로 바짝 당기더니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소까지 짓고 있다.

"늦어서 미안해, 데브. 지금도 계속 회의 중이야, 내 생각엔 생전 가야 끝날 것 같지 않아. 학부형들이 어찌나 까다로운지...."

세바스찬이 줄리아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금세 알아차렸다.

"앤디 캐닝턴이오. 이곳 초등학교 교장이지. 그리고 이쪽은 이 지방 명사 줄리아 웨이클링이라네."

그는 앤디에게 말했다.

"재즈 열광자이기도 하지."

그 말을 하면서 세바스찬은 줄리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의 손가락의 감촉이 그녀의 얇은 옷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지자 그녀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세바스찬도 그 짜릿한 감촉을 느꼈는지 얼른 손을 거두고 어색하게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데보라의 남편이오."

세바스찬이 아직까지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캐닝턴 부부를 가리키며 줄리아에게 말했다.

"우리 모두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 같지 않소? 결혼한 지 10년에 애들이 둘이나 있는데도 저렇게 다정한 잉꼬들처럼 보일 수 있다니...."

줄리아는 충격의 파도 위를 넘나들고 있었다. 이제 조금씩 진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부에서 기쁨의 꽃봉오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데보라 캐닝턴은 그의 직업적인 동료일 뿐 세바스찬과 아무 관계도 없었구나!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한 거야.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건 마치 한편으론 고통을 느끼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한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심정을 저울질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데보라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섭섭한 듯이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우린 이제 집에 가봐야겠어요. 어머니가 아이들과 함께 계시긴 하지만 일찍 가겠다고 약속을 했거든요."

그녀는 책망하듯 앤디를 팔꿈치로 툭 쳤다.

"당신이 9시까지 오겠다고 그랬잖아요. 다 함께 술 좀 마시려고 했는데, 이제 곧장 집에 돌아가야만 하게 생겼어요."

"나도 알고 있소."

앤디가 미안한 듯 말했다.

"학부형 회의가 질질 끌며 안 끝나는 바람에... 나도 역시 그 음악을 듣고 싶었단 말이오."

그는 줄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근사했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좋았어요."

"그럼 갑시다. 장모님을 화나게 만들면 곤란하지. 그분은 미용을 위해 일찍 주무셔야 하니까."

"우리 어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데보라는 화가 난 듯이 소리쳤지만 눈빛은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 없이는 한시도 직장생활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시면서 그래요. 그분은 하늘이 보내 주신 사도라구요."

그녀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듣고 있는 줄리아에게 말했다.

"제가 근무하는 날이면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돌봐 줘요."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근무하는 날이면 주말과 공휴일마다 아이들을 돌보구. 이게 다 능력 있는 여자와 결혼한 탓이지 뭐."

그는 신음하듯 말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데보라는 줄리아에게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줄리아. 그레타와 새끼염소가 계속 건강하길 빌어요."

"안녕히 가세요!"

줄리아는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세바스찬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맥주잔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세바스찬, 이해가 안 가는 게 하나 있어요."

만약 지금 그 얘기를 꺼내지 않으면 영영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을 것만 같다. 이제 단둘이 남게 되자 세바스찬의 검은 눈길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게 뭔데, 줄리아?"

그의 목소리는 깊고도 풍부했으며 그레타의 이름을 부를 때처럼 다정하고 따뜻했다.

"한밤중에 당신에게 전화를 걸면 왜 그녀가 받는 거죠?"

그는 예상밖의 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브 말이오? 간단하지. 우린 각자 집에 있을 때는 서로서로 받아 줄 수 있도록 전화선을 연결해서 쓰고 있거든. 의사들은 대부분 다 그러는 걸? 낮에는 물론 병원으로 직접 통하게 되어 있소. 거기 늘 전화 받는 사람이 있으니까. 하지만 밤에는 서로서로의 전화를 받아 주어야만 하오. 그래서 그 교신장치를 쓰고 있는 거요. 당신이 전화 건 그날 밤에는 데브가 내 대신 전갈을 받아 준 거지. 때때로 내가 집에 있고 그녀가 당직일 때는 나도 같은 일을 해주고 있소. 다른 동료인 스티브나 조수인 베리를 위해서도 그렇고. 오늘밤은 스티브와 베리가 당직이오. 이제 이해 가오?"

그는 줄리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궁금증이 완전히 다 풀리셨습니까, 마담?"

그녀가 대답을 않자 그는 재차 물었다. 줄리아는 어리석었던 자신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간단하고 분명한 것을...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지난 일요일날 데보라가 당신에게 신호를 보냈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

"달콤한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그가 짓궂게 놀렸다.

"제 스튜디오에서 말예요. 그때 실은 물어 보려고 했었어요."

"데브가 집에 있던 날이지. 난 일요일이면 대부분 그녀, 그리고 앤디와 함께 저녁식사를 해요. 처량한 독신자라고 불쌍히 여겨서 영양보충을 시켜 준다오. 그리고 그들의 귀여운 딸들과도 친하게 지내도록 허락해 주지."

그는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이래봬도 난 인기 있는 아저씨라구."

하지만 줄리아는 그의 농담 섞인 말에 대해 웃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깔깔거리고 웃었을 텐데도... 그 모든 사실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긴 했지만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러니까 세바스찬은 혼자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놓고 가까이 해도 좋을까? 오히려 전보다 더 위험해진 게 아닐까?

지난 일주일 동안 줄리아는 그의 인생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데보라 캐닝턴이라는 존재 뒤에 숨을 수 있었다. 갈등은 많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 그 혼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그녀였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혹을 가졌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오히려 그녀에겐 마음 편했던 것 같다.

즉 정직한 감정과 차가운 이성 사이에서 아주 편리한 방패막이 구실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가 또다른 여자에게 묶여 있는 한 그녀는 그런 감정적 구속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수 있고, 그녀 표현대로 잠시 불장난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방패막이가 없어져 버렸다. 세바스찬도 줄리아와 마찬가지로 독신인 것이다.

", 이젠 잘 알겠어요."

그녀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땐 두 사람을 연관지어 생각했지 뭐예요."

세바스찬이 그녀 쪽으로 몸을 숙여 왔다. 다정한 눈빛에 웃음을 머금고...

"줄리아, 그럼 데보라가 내 욕조로 들어가려는 줄 알았단 말이오? 내 식탁에다 두 사람의 음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줄로?"

그녀가 또다시 대답을 않자 그는 좀 더 가까이 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랬던 거지?"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발갛게 달아오른 양볼이 모든 걸 시인하고 있었다.

", 줄리아. 나를 도대체 어떤 놈으로 생각한 거요? 날 그렇게 막된놈으로 보다니... 아니면 모든 남자에 대해서 그런 거요?"

마지막 질문은 자못 심각한 목소리다. 하지만 줄리아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쾌활해졌다. 동료 음악가들이 악기 있는 데로 되돌아와 조율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듣고 가겠소?"

그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감돌았던 분위기가 둘 사이의 감정을 한층 깊게 했다. 줄리아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 그러고 싶어요, 세바스찬. 당신 연주 솜씨는 정말 뛰어나더군요. 초대해 주셔서 정말 기뻐요. 고마워요."

이제 둘 사이의 장벽이 완전히 사라진 듯하다. 세바스찬은 뚫어질 듯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 눈길은 마치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서 그 두 사람을 공기 막처럼 푸근히 감싸주는 듯했다.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소."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다시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이번엔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더욱 가슴 벅차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손을 거두더니 다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정말 감사드려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도 당신이 와줘서 고맙소."

그러더니 피아노 쪽으로 걸어갔다. 피아노 건반은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채 그의 손가락이 자신을 어루만져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상당히 짧았다. 줄리아로서는 밤새도록 연주했으면 하는 심정이었는데...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꿈결처럼 그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세바스찬과 함께 한다는 황홀한 감정으로 감각이 아주 예민해지면서 음악과 혼연일체가 되어 갔다.

세바스찬의 솔로가 연주되는 동안엔 마치 자신이 그의 손가락 아래서 연주되는 악기인 양 온몸이 생기로 넘쳐흘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안전하게 세바스찬이 엮어내는 아름다운 선율에 빠져들 수 있다니... 이름 모를 군중의 한 사람으로 향연을 즐길 수 있다니...

그 연주는 너무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그녀는 몽롱한 상태에서 되돌아와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밴드 멤버들은 모두들 바로 달려가서 시원한 음료를 청했다. 세바스찬도 스카치 한 잔을 들고서는 다시 줄리아에게로 왔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푸른 눈빛만큼이나 이글거렸고 이마와 목줄기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벌어진 셔츠 사이로 땀에 젖은 시커먼 가슴털이 드러나 보였다. 방안의 뜨거운 열기보다 줄리아의 가슴이 더욱 후끈거렸다. 그가 위스키를 마시는 걸 그윽한 눈길로 지켜보던 그녀가 마침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듣지만 말고 저도 악기를 다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싱긋 웃었다.

"당신은 카세트를 다룰 수 있잖소."

"제 말뜻을 아시면서 그러세요."

그녀는 곱게 눈을 흘기며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물론 알지. 하지만 줄리아."

그가 바짝 다가앉았다.

"만약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진정으로 그걸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마력이 발휘될 수 없지. 마력이 발휘되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오."

그녀는 매료될 듯 그를 응시했다.

"한 사람은 주고 한 사람은 받는다는 말씀인가요?"

"아니, 둘 다 주고 둘 다 받는 거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이오. 내가 피아노를 침으로써 당신에게 준 것처럼 당신은 오늘밤 여기 와줌으로써 내게 준 거요."

"정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시다면...."

그가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보자 그녀는 우물우물 말했다.

"정말 그렇소."

그가 잔을 들이키다가 그녀의 잔이 빈 걸 알아차렸다.

"한 잔 더 하겠소?"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전 운전을 해야 되거든요."

"운전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나를 집까지 좀 태워다주지 않겠소? 우리 집은 여기서 10분밖에 안 걸리오. 보통 때는 걸어가지. 하지만 바텐더가 밖에 비가 온다고 하더라구."

"그래요?"

줄리아는 창문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제가 도착했을 땐 안 왔는데...."

그건 다소 경계하는 듯한 말투였다. 세바스찬은 나를 유혹하려는 걸까, 아니면 정말 집까지 태워다 주기를 바라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오고 있소. 방금 밖엘 나갔다 왔으니깐."

그녀는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솔직하게 말하는 것 같다.

", 물론 태워다 드리겠어요. 당신을 감기에 걸리게 하고 싶진 않아요."

그녀의 빈정대는 듯한 말투에 그가 씩 웃었다.

"난 그렇게 쉽게 감기에 걸리진 않소."

그러더니 하품을 했다.

"하지만 좀 피곤하오. 오늘 하루종일 일이 많았거든."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잔을 비웠다. 그때 바텐더가 문 닫을 시간이라고 소리쳤다. 줄리아는 가방과 재킷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끝나 버리는 걸까?

"매주 금요일마다 여기서 연주를 하시나요?"

"놓치지 않도록 하구료. 여기 오면 당신도 나만큼이나 그 주일의 피로가 싹 풀릴 테니까. 난 정말 그게 필요하오. 그래서 금요일 밤이면 다른 두 사람에게 근무를 맡기지. 덕택에 주말이면 대부분 내가 왕진을 나가게 되긴 하지만."

그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 점을 상기시켰다.

"저도 그건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그를 따라 문 쪽으로 나갔다. 그쪽으로 가는 동안 내내 사람들이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체를 했다.

"인기가 대단하시군요."

그녀가 짐짓 큰소리로 말했다.

"조그만 바다의 큰 물고기인 셈이지."

우스꽝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는 문을 나서면서 입구에 걸려 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옷을 입고는 깃을 세운다.

"당신 차는 어디 있소?"

그녀는 차가 세워진 곳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그곳을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차가운 바깥공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어왔다. 줄리아는 차에 먼저 올라탄 다음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세바스찬이 자리에 앉자 좁은 차 안이 꽉 들어차는 느낌이다.

"그 고물차는 아니구먼."

"그건 핍의 차였어요."

줄리아는 시동을 걸었다.

"안전벨트를 매세요."

자기 것을 매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는 잘 못 찾겠는지 두리번거린다. 빗방울이 보넷 위로 떨어지면서 후둑후둑 소리를 냈다. 차창이 그들의 입김과 체온으로 금세 뿌옇게 김이 서렸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요?"

그가 투덜거렸다. 줄리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안전 벨트를 푼 뒤 몸을 숙여 그의 버클을 찾았다. 세바스찬은 잠자코 앉아 있었지만 그녀는 규칙적인 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아니, 느낄 수-있었다. 그녀가 그의 몸을 지나쳐 손을 뻗어야 했으므로 불가피하게 몸이 부딪쳤다.

그는 무표정해 보였지만 줄리아의 가슴은 정신없이 설레었다.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그녀는 몇 차례 심호흡을 했다. 그가 눈치 채지 않기를 바라면서...

차를 주차장에서 빼내면서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희미한 불빛 아래 그의 무표정한 옆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안심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을 반짝이더니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무례한 남자 같으니라구! 결국 나를 놀린 거잖아!

"어디 사는지 말씀만 하세요."

그녀가 뽀로통해 가지고 말했다.

", 아가씨...."

그는 복종하듯 고개를 숙여 왔다. 줄리아는 미끄러운 밤길을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마침내 그가 말한 곳에 이르렀을 때 줄리아는 밖을 내다보았지만 거기가 어디쯤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당신 집이에요?"

조지아 풍의 낡고 거대한 건물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들을 맞이하는 듯 현관의 불빛은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나머지 창문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굉장한 정원이로군. 차가 들어서는 길 양옆으로 관상수들이 우거져 있었다. 줄리아는 문득 안에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소, 내 집이자 병원이지."

그는 그녀가 잘 볼 수 있도록 창문을 내려 주었다. 멋진 집이었다. 위엄이 넘쳐흐르면서도 우아한 그런 집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탄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쌀쌀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가 병원이고 어디가 집이죠?"

"일층이 병원이고, 난 이층에서 살고 있소. 뒤쪽에 부속건물과 땅이 좀 있지."

그는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들어가서 구경하겠소?"

그가 부드럽게 물었지만 줄리아는 온몸이 바짝 긴장됐다.

"아뇨, 전 집에 가봐야 해요. 핍에게 너무 늦지 않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리고 전 지금 피곤해요. 그리고 당신도 바쁜 하루를 보내셨으니...."

그녀는 숨쉴 틈도 없이 재잘거렸다. 세바스찬은 그녀가 재잘대도록 놔두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고 그녀 쪽으로 몸을 숙여 그녀 것도 풀어 주었다.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혀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이봐, 줄리아."

그의 목소리는 높고 긴장된 그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그가 입술을 그녀의 귀에 갖다 대더니 중얼거렸다.

"당신은 너무 많은 말을 했어."

그러더니 천천히 부드러운 그녀의 볼을 타고 내려와 턱에서 잠시 멈추더니 살며시 간지럽힌다. 그리고는 다시 위로...

마침내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입술을 포갰다. 그들의 입술이 부딪치는 순간 시간마저 멈추었다. 그들은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지난번 못다 이룬 열정을 불태웠다. 세바스찬의 팔이 그녀를 바짝 끌어안더니 서서히 의자에 눕혔다. 좁은 공간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두 육체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탐닉해 들어갔다.

세바스찬의 손길이 슬며시 그녀의 재킷 안으로 들어오더니 목덜미와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진 뒤 천천히 하늘하늘한 원피스의 지퍼를 내렸다.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지던 그 손가락이 이제는 줄리아의 육체를 어루만지며 그녀를 기쁨의 절정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줄리아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손길을 향해 몸을 활처럼 휘었다.

그의 손길은 마치 진흙덩어리에서 살아 있는 생명을 이끌어내듯 잠들어 있던 그녀의 원초적 생명력을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의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살결은 부드럽고 따스했으며, 탄탄한 그의 가슴 근육은 그녀의 열정을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

"줄리아, 줄리아."

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애무했다.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허리를 어루만지자 그녀는 신음을 토하며 그의 손길을 막았다. 줄리아는 정신을 가다듬고 이성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내가 지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욕망에 몸을 맡기려 하다니... 이 열정을 그대로 태워 버릴 경우 그걸 막아 줄 아무도 없는 이런 무방비 상태 속에서...

하지만 그녀의 육신은 원하고 있었다. 너무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전에는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새로운 갈증이었다. 자신의 그런 원초적인 욕구에 스스로도 놀랐다. 모든 걸 삼켜 버릴 듯 밀어닥치는 강렬한 본능이 냉정했던 자신의 지난날과 야망을 삼켜 버리는 듯했다.

"세바스찬, 저는...."

그녀는 저항했다. 하지만 저항하면 할수록 열정만 솟구칠 뿐이었다. 그는 더욱더 그녀를 세게 껴안고 유혹의 손길로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의 살결을 어루만졌다.

"줄리아, 지금 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는 간절하고도 절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을 너무나 간절히 원하오."

저도 당신을 원해요! 간절히! 하지만 그녀의 이성이 육신의 목마름을 단호히 눌러 버렸다.

"하지만 전 당신을 원치 않아요. 다른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예요. 전 혼자서도 충분하다구요. 이건 제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찬 모험이에요."

초인적인 의지력으로 그녀는 그를 밀어붙였다. 그 바람에 세바스찬은 문에 쾅 하고 부딪쳤다.

"세바스찬, 미안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고 단호했지만 다소 열에 들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평정을 되찾은 듯하다.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오."

"전 그런 일에 빠져들 수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지퍼를 올리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왜 안 되는 거지, 줄리아? 우리 둘 다 서로를 절실히 원하는데?"

그가 냉정한 어투로 물어 왔다.

"인생에는 원하는 걸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옳은 말이야, 줄리아. 하지만 난 당신을 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비겁자로 만들고 싶진 않소. 당신은 당신 자신이 인생에서 뭘 얻고자 하는지, 어떻게 느끼고, 주고, 받고자 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소? 어떻게 즐기는지도 잘 알고."

"그래요, 하지만 언제 <>라고 말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죠."

어두운 불빛 아래서 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었다.

"줄리아!"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부드럽고 달콤해서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녹아내리다니...

"줄리아, 당신은 한 번도 경험이 없는 거요?"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상관할 바 아녜요!"

하지만 세바스찬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 누가 상관할 일이지?"

줄리아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여자들이 전부 자신이 사랑을 느낀 첫 남자에게 얽매이는 건 아녜요."

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세바스찬도 기어코 자기 뜻을 관철하는 사람이니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핍처럼 말이오?"

그가 불쑥 물었다. 줄리아는 갑자기 기습당한 것 같아 숨을 훅 들이켰다.

"제 원칙은 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물론 그렇겠지. 그리고 당신이 위험한 관계에 빠져들지 않으려는 데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 그런 점에서 난 당신을 존경하오, 줄리아.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나도 역시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니까."

그는 매번 이유라는 말에다 힘을 주었다. 그녀는 대꾸하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한 마디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가 한쪽 손을 들어 그녀의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핍의 결정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고 있소. 그녀가 저버린 건 단순히 당신만이 아니겠지, 줄리아? 그건 속박 받지 않는 자유로운 여성으로 살고픈 소망을 저버린 것이겠지. 육체적으로 얽매이게 되면 마음을 굳게 먹지 않는 한 정신적으로도 얽매이게 되지. 그런데 당신도 마음이 흔들리게 된 거야. 그렇지, 줄리아?"

그의 다른 한 손이 그녀의 나머지 한쪽 볼로 올라오더니 그녀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당신은 따뜻하고 생기에 넘치고 당신 자신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어. 나는 당신과 함께 그 발견에 참여하고 싶은 거야. 당신도 그걸 원하지 않나?"

그러더니 문득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가 모든 걸 포기하고 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아니 그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려고 결심을 굳히려는 찰나에...

"당신을 이해해."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정말이야, 줄리아. 지난 10년 동안의 내 인생을 돌아보면 나도 비슷한 경로를 걸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너무 늦었어. 난 오래 전에 타락해 버린 불쌍한 영혼이지. 아마도 당신은 나를 구원해 주러 왔나 봐."

그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내 탐욕스런 욕망을 깨끗이 해주려고 말이야."

줄리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사람을 당혹케 하더니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어 이번엔 농담 식으로 나오고...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교묘한 기지를 발휘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도 그의 방식대로 응수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그 탐욕스런 욕망에 응할 만큼 전 타락하지 않았어요, 세바스찬. 제게 시간을 주세요. 당신이 만약...."

"알았소."

그가 웃으면서 말을 막았다.

"오늘밤 와줘서 정말 고맙소, 줄리아."

그녀도 웃으면서 말했다.

"저를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재즈 연주가 너무 좋았어요. ... ."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에 또 들으러 가도 되나요?"

"당신이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난 정말 섭섭할 거요."

그는 문을 열고 나가더니 여전히 웃으며 열린 차창에 기대 섰다.

"지금 있었던 일에 대해선 하나도 걱정할 것 없소, 줄리아. 난 내가 올바로 가고 있다는 걸 아니까. 그럼, 다음에 봅시다. 길 가다가 여우를 치지 않도록 조심하구료."

그녀는 현관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우를 조심하라구! 그런 충고를 받아들이기엔 이젠 너무 늦었어. 그리고 걱정 말라니, 도대체 뭘 걱정 말라는 거지?

그녀는 한동안 꼼짝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7

에슈덴의 토요일 점심식사. 줄리아는 그 음식들을 우울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뭐든 좀 먹어 두는 게 좋겠지."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샌드위치 한쪽을 집어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마틸다가 주방 한쪽 구석에서 황갈색 눈으로 줄리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어젯밤 나보다는 잘 잤겠지. 나는 마치 고문을 받는 것 같았어."

그녀는 샌드위치 끝을 만지작거렸다.

"고문대 위에 누워 있는 느낌 말야."

핍은 맬콤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아름답게 치장하고 나갔다. 그레타도 해산 후 처음으로 풀을 뜯어먹으러 마당으로 나갔고 새끼도 기분이 좋은지 깡총거리며 어미를 따라 나갔다.

그건 일종의 고문이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내내 줄리아는 갈팡질팡했다. 모든 게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핍의 폭탄선언에 대한 죄책감 어린 분노, 세바스찬의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로 함께 나누게 된 짜릿한 기쁨, 데보라 캐닝턴의 등장으로 인한 심한 내적 갈등,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설레던 안도감...

줄리아는 두 눈을 감고 그 모든 영상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세바스찬의 손길 아래 몸부림치던 욕망의 물결, 하지만 이내 밀려드는 두려움... 고통스런 밤이 지나고 이제 아침이 밝았는데도 그녀는 괜시리 스튜디오를 서성거리기만 했다.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한 채 그 모든 영상들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신이여! 도와주소서, 저는 성숙한 한 여자로서 한 남자를 원하고 있고 그 또한 저를 원합니다. 간단한 거야. 아냐, 그렇지 않아. 인생은 그처럼 간단한 게 아냐. 줄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세바스찬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지금 이중으로 시달리고 있다.

한편으론 두려운 모험을 감행하고 싶은 욕망으로, 다른 한편으론 지금까지처럼 안전하게 살고 싶은 바람으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나, 저절로 해결될 때까지 내버려둘까? 아니야. 그럴 순 없어. 그건 내 방식이 아냐. 줄리아는 불가피한 일이라면 맞서 대처해 나가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렇게 안 되었다. 이번 경우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빠른 속도로 진척이 돼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시간이여, 그대가 이 매듭을 풀어 주오.

내가 풀기에는 너무도 단단한 매듭이라네.

 

마틸다는 세익스피어의 심오한 시구를 읊조리는 줄리아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윽고 길게 드러누워 앞발을 가슴께로 모았다. 줄리아는 먹는 걸 포기하고는 고양이에게로 걸어가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어 보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투명한 가을 하늘이 어젯밤 비에 씻겨 더욱더 푸르르게 빛나고 있었다. 줄리아는 순간 자기가 할 일이 뭐라는 걸 퍼뜩 깨달았다.

저 풍요로운 들판을 거닐자! 핍의 말대로 저 탁 트인 공간에서 잡다한 생각을 모두 떨쳐 버리고 해결책을 찾아 봐야지. 그녀는 재킷을 걸치고 장화를 신은 다음 마당으로 내려섰다. 줄리아는 평화스럽게 풀을 뜯는 염소들을 지나 작은 언덕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핍과 함께 거닐던 주위의 땅들을 둘러보았다. 무엇엔가에 이끌려 나온 듯한 야릇한 느낌을 가지고.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 싱그러운 풀 냄새. 부드러운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히며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줄리아는 다시 힘이 솟는 듯했다. 미래는 그녀의 작은 계획과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몰고 갈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자신은 하느님도 운명의 여신도 아니다. 이제 줄리아는 서서히 그런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쁨에 가득 찬 푸른 눈으로 낯익은 나무들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경치는 여전히 변함없는 듯 보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계절의 빛깔을 달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아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 피상적인 변화 밑으로는 매일 조금씩 지각변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 그녀 자신의 내면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색다른 형태의 산과 계곡이 들어서면서 예상치 못했던 조경으로 바뀌어 갔다. 그건 4계절의 변화처럼 잔잔하고 조용한 진행이 아니라 화산 폭발이나 지진처럼 전격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지층이 느닷없이 솟아오르더니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있었다. 수세기 동안 지하에 죽은 듯이 묻혀 있다가 최초로 지상에 모습을 내민 처녀암처럼 바야흐로 그 변화의 양상이 극에 달했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핍과 세바스찬이 손을 들어 그녀에게 어떤 방향을 가리키려고 하는데 ...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숲 저쪽의 좁은 길을 바라보았다. 그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일단의 사람들과 동물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얼른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말과 개와 핑크색 코트 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냥꾼들이잖아. 이 달부터 사냥철이 시작된다더니 다들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모여 있군.

줄리아는 이제 거의 그들 근처까지 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조금씩 걸음을 늦추었다. 뭘 하느라고 저렇게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는 걸까? 지금쯤이면 벌써 출발해서 산과 들을 헤매고 다닐 시각인데...

코앞까지 바짝 다가가서 보니 그곳에는 어떤 위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6명 정도의 사냥꾼과 말들이 술렁거리고 있는 걸로 보아 대열에서 떨어져나온 그룹인 것 같았다. 그중 잘생긴 회색말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는데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였다. 그 말은 썩은 나뭇잎과 축축한 풀 사이에 처량하게 누워 있었다. 가엾어라!

그녀는 말이 무사하기를 속으로 빌었다. 만약 다리가 부러졌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 말은 미동도 않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고 어느 누구도 일으켜 세우지 않고 있었다. 그 옆에는 주인인 듯한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다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우울해 보였고 염려스러운 듯 말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거나 말을 토닥거려 주거나 했다. 무기력한 불안이 그곳을 감돌고 있었고, 그 침울한 분위기에 줄리아까지도 울적해져서 막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알 수 없는 힘이 그녀를 그 자리에 붙들어맸다. 더 가까이 갈 수도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게...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조용한 숲길을 달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눈으로 보지 않고도 그게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물론 푸른색 오디겠지. 이런 상황에서 사냥꾼들의 수의사 말고 누가 오겠는가? 그는 차에서 내려 다친 말에게로 달려갔다. 얼굴은 자세히 안 보였지만 그의 모습과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온몸이 떨려 왔다. 그녀는 두 팔로 몸을 감싸고는 애써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가 나타나자 불안하던 분위기가 씻은 듯이 가셨다. 그가 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줄리아는 그 다정한 목소리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의 혼란스런 감정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묘하게 비틀린 말의 앞다리를 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위로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부드럽게 그리고 능숙하고 경험 많은 의사답게. 오직 그만이 원인을 발견해서 치료할 수 있으리라!

줄리아의 가슴은 그에 대한 자부심으로 뿌듯하게 차올랐다. 이제 그는 일어서서 사냥꾼들과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말의 주인도 동료들의 부축으로 비틀비틀 일어섰다. 줄리아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문득 자신의 인생이 운명적으로 세바스찬과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가방을 가지러 차 있는 데로 갔다. 사람들은 그에게 압도되어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듯 꼼짝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바스찬이 낮은 소리로 몇 마디 중얼거리자 즉시 말 위에 올라타고는 조용히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오늘 사냥은 이걸로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사람이라곤 세바스찬과 그 부상당한 말과 그 말 주인뿐이었다. 세바스찬은 다시 말에게로 다가가더니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의 동작은 능숙하고 차분했다. 줄리아는 바짝 긴장했다. 지금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나려 한다는 걸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싶지 않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세바스찬은 천천히 말의 머리 쪽으로 가서 한 손으로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면서 다른 한 손으론 무엇인가를 꼭 쥐고 있다가 그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었다. 줄리아는 마침내 마비에서 풀려난 듯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세바스찬이 그 불쌍한 동물에게 총을 쏘기 전에 그녀는 집 속을 향해 정신없이 내닫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총성을 들을 수가 없었다. 소리없는 함성이 계속 그녀의 귓전을 울렸기 때문이다. 어쩜, 그 사람이 그럴 수가? 무서워. 언젠가 세바스찬이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현실은 잔인한 거요. 당신은 안 그럴지 몰라도...."

물론 그의 말이 옳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말처럼 그 냉혹한 현실의 일부였다. 그 당시에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걸 느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막 그를 신뢰하려던 참이었는데... 눈물이 솟구치더니 양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하지만 급히 달려가느라 눈물을 훔칠 겨를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그녀는 이제 기운을 잃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자기 집 정원에 도착할 무렵에는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움직일 기력조차 없었다. 염소도 본체만체하고 비틀비틀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돌 밑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재킷을 벗어던지고는 침실로 기어들어가 침대 위에 쓰러졌다. 고통에 찬 거친 숨결만이 공허한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호흡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서서히 땀이 마르고, 근육인 느슨하게 풀리면서 맥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줄리아는 평온한 잠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30분쯤 후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다소 마음이 진정된 것 같다. 그녀는 즉시 흙 묻은 바지와 땀에 젖은 셔츠, 속옷 등을 몽땅 벗어버리고 곧장 욕실로 갔다.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감쌌다. 거울에 뿌옇게 서린 김을 닦아내고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파리해 보였지만 그래도 많이 안정을 되찾은 모습이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줄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복도로 걸어 나가 창문으로 밖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차 옆에 낯익은 자동차가 서 있었다. 팀의 차였다. 그녀는 다시 침실로 뛰어 들어가 타월을 벗어던지고 부드러운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는 문을 열었다.

"안녕, 줄리아."

그는 멋쩍어 하는 듯이 보였다. 지저분한 얼굴, 검불이 달라붙어 있는 머리칼, 진흙투성이 바지에 찢긴 스웨터... 줄리아는 직감적으로 그가 뭘 하다 왔는지 알아차렸다.

"안녕, ."

"사냥꾼들을 쫓아다니다 보니 이 근처까지 오게 됐지 뭐요? 그래서 잠시 들러 그 새끼염소를 보고 가려고 왔소."

그녀는 풀기 없는 미소를 보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부담 없는 손님과 얘기를 나누는 것도 긴장을 푸는 데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안으로 들어오시죠."

그녀는 한쪽으로 비켜섰다.

"차 한 잔 드시겠어요?"

"좋지."

그의 온화한 잿빛 눈이 그녀의 젓은 머리칼과 가운에 머물더니 부끄러운 듯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주전자를 좀 얹어 주시겠어요? 그 동안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어요. 저도 실은 방금 산책을 나갔다가 진흙을 잔뜩 묻혀 왔지 뭐예요."

"그렇게 하지."

그는 주방 쪽으로 갔다.

"핍은 어디 간 거요?"

그의 질문에 그녀가 복도를 따라 들어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주말 동안 어디 좀 간다고 나갔어요."

줄리아는 차마 그녀가 약혼자의 가족을 만나러 갔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차차 말하지 뭐. 열린 방문을 통해 주방에서 주전자와 찻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아?"

그의 목소리가 주방 쪽에서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당신 괜찮소?"

염려스런 목소리였다.

"전 괜찮아요, . 곧 나갈게요. 잠시만...."

그녀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현관 벨이 다시 울렸다. 줄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부산하지?

"누군지 좀 나가 봐 주실래요, ?"

", 그러지."

그녀는 그가 현관문 여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우유 배달부인가 보다. 토요일 이 시간쯤에는 종종 찾아오곤 했으니까. 그러면 가방에서 돈을 좀 꺼내 주어야 하는데 ...

"줄리아!"

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이리 좀 와야겠어. 손님이 오셨어."

줄리아는 왠지 불안한 심정으로 벨트를 다시 묶었다. 맨발로 침실을 나서서 홀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못 박힌 듯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적의에 찬 눈길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샤워로 헝클어진 머리에 얇은 가운 하나만 걸친 채 침실에서 나타난 줄리아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불을 보듯 환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그 흔해빠진 삼각관계의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건 세바스찬이었다.

"줄리아!"

그 목소리가 너무도 거칠고 날카로와서 그녀는 눈을 들어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 근처에 왔다가 잠깐 들른 거요."

"안녕, 세바스찬."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길에 붙들린 채로... 팀이 이제야 정신이 드는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당신이 어째서 이 근처에 오게 됐는지 우리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소. 그렇지 않나, 줄리아?"

빈정거리는 투였다.

"이 사람이 여기 웬일이지?"

그는 갑자기 줄리아 쪽으로 홱 몸을 돌리더니 다그쳤다.

"그와 아는 사이라고 말한 적 없었잖아?"

세바스찬은 침착한 눈길로 상대편 남자를 살피더니 조용하고 다정한 어투로 물었다.

"우리가 전에 혹시 만난 적 없습니까? 어디선가 얼굴을 본 것 같은데...."

그는 다시 찬찬히 팀을 살피다가 줄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강한 눈길 앞에 그녀의 얇은 옷이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세바스찬, 이쪽은 제 친구 팀이에요."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 이쪽은...."

"누군지 알고 있어!"

팀은 분노의 화살을 줄리아에게 퍼부었다.

"당신도 이자가 누군지...."

그러더니 다시 세바스찬에게 돌아섰다. 세바스찬은 차가운 눈길을 줄리아에게 고정시킨 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직접 만난 적은 없소. 하지만 난 사냥터에서 당신을 보았지. 당신도 아마 나를 보았을지도 모르오. 그때 당신이 돌봐 주고 있던 그 가엾은 동물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을 때 말이오."

"사냥터라구?"

세바스찬은 양미간을 모으며 그때의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우려의 빛이 스치더니 그의 긴장된 얼굴 위로 살풋 미소가 번졌다.

"그 시위꾼들 중의 한 사람이로군! 오늘도 그 시위에 참여하고 오시는 길인가 보죠?"

이번엔 세바스찬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참여하구말구요! 오늘 당신이 한 일에 대해서도 얘길 들었소."

세바스찬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은 언제든 다리가 부러질 수 있는 거요. 그걸 사냥 탓으로만 돌리지는 마시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고통을 빨리 끝내 주어야만 했던 상황을 순전히 내 책임인 양 몰아붙이지도 말고."

세바스찬도 그 일을 하고 싶어했던 게 아니었구나.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어떤 말도 심하게 앞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거요. 더군다나 둘 다 부러졌을 때는...."

"둘이라구요?"

줄리아가 엉겁결에 소리쳤다.

"! 가엾어라, 멋진 말이었는데."

세바스찬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양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당신도 거기 있었소, 줄리아? 사냥을 반대하는 그 모임에 참여했다는 뜻이오?"

"아뇨, 그게 아니라... 저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했다.

"전 단지 산책을 나갔던 것뿐예요."

"흐음...."

세바스찬은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다시 팀에게로 돌아섰다.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게 해둡시다."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 상황에서도 줄리아는 그 붉은 머리칼을 보는 순간 여우를 떠올렸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벽에 기대선 채 세바스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생명을 구하거나 변호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생명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의 내 심정은 어떨 것 같소? 내가 사냥꾼들에게 고용되어 그들의 개나 말들을 돌봐 주고 있는 건 사실이오. 하지만 사냥에 대한 내 개인적인 견해는 그것과는 무관하오. 당신 두 사람이 오늘 목격한 사실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면 그럴 용의도 있소. 하지만 죽음은 생명과 마찬가지로 직업 생활의 일부요."

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걸 즐긴다든지, 그로 인해 고통받지 않는다고 생각진 마시오. 나도 인간이오. 기계가 아니란 말이오."

그의 검은 눈길이 갑자기 줄리아를 향했다.

"줄리아가 그걸 알아주면 좋겠소."

그의 강렬한 눈빛을 받으며 줄리아는 문득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했던 것인데... 그녀는 팀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뜻밖에도 이 모든 사실을 수긍하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다시 세바스찬에게 눈길을 올렸다. 그는 이제 그녀에게 직접 말을 했다.

"내가 지금 여기 온 건 줄리아 당신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소. 난 괴물이 아니오. 나도 남자란 말이오. 누군가를 간절히 보고 싶은 그런 욕망을 지닌 남자 말이오. 내가 보고 싶었던 사람은...."

그는 온갖 열의를 다해 그 말에 힘을 주었다.

"바로 당신이었소."

그는 이제 빨아들일 듯이 그녀를 응시했다.

<간절한 욕망>이라는 말에 줄리아를 둘러싸고 있던 장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는 지금 나를 필요로 한다고 낯선 사람-그것도 적의를 품고 있는 사람-앞에서 거리낌없이 말하고 있는 거야.

"세바스찬, 저는...."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푸른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팀을 쳐다보았다. 팀은 포기한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물론, 당신과 팀이 바쁘다면...."

세바스찬이 말했다.

"전 이제 가봐야 할 것 같군요."

팀이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팀은 막 가려던 참이에요."

줄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세바스찬이 줄리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미소로 답하는 줄리아의 얼굴이 은밀한 기쁨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동시에 팀에게 고개를 돌렸다. 팀은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좋소. 그렇다면 당신에게 맡기리다."

뭘 맡기겠다는 뜻일까? 그는 문을 열더니 머뭇머뭇 말했다.

"나가던 길에 그레타와 새끼를 보고 가도 될까, 줄리아?"

"물론이죠."

그런 일이 있고 난 직후에 그렇게 빨리 일상의 화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다소 놀라왔다.

"그들은 지금 풀밭에 있어요. 이제 그만 외양간에 들여놓을까 봐요. 오늘 너무 오랫동안 밖에 있었거든요."

"이렇게 합시다."

세바스찬이 끼어 들었다.

"나와 함께 나가시죠, . 그들을 한 번 더 검진해야 되니까요. 그런 다음 우리가 함께 그들을 우리 안에 들여놓읍시다. 괜찮겠지?

"5분이면 될 거요, 줄리아."

그는 가벼운 어투로 말하고는 어리둥절해하는 팀을 지나쳐 마당으로 나갔다.

팀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음에 봅시다."

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를 뒤쫓아갔다.

 

8

줄리아는 세바스찬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왜 팀을 낚아채듯 데리고 나가면서 정신적으로 혼란상태에 있는 그녀를 혼자 남겨 두었는지-그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팀과 줄리아가 어떤 관계이든 간에 팀을 그런 식으로 내몰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바스찬은 그런 배려를 할 만큼 지각 있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줄리아에게도 마음을 가다듬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5분이면 옷을 갈아입고 그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기에 아주 적당한 시간이다. 그건 참으로 자상한 배려였다. 그들의 만남이 어떤 식으로 진전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시작만큼은 어느 한쪽이 불리한 입장에 처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등하게 해야만 할 것이다. 특히 어젯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처음으로 대면하는 것인데...

줄리아는 다시 침실로 돌아가 어젯밤에 입었던 그 보드라운 푸른색 체크 무늬 옷을 입었다. 편안하고 실용적이라는 이유로 그 옷을 골랐지만 가슴 저 밑바닥에는 은밀한 이유가 도사리고 있었다.

화장할 시간은 없었다. 반쯤 마른 머리를 빗으로 대충 빗어 넘겼다. 주방에서는 주전자의 물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스위치를 올려 따뜻하게 데우며 지난번에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입가에 살풋 미소를 띄웠다.

한 잔의 차보다는 위스키가 어울리는 사람... 하지만 지금 줄리아는 한 잔의 차를 마시고 싶었다. 그에게도 차를 권해야지. 줄리아가 쟁반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5분이 10분으로 늘어나 있었다. 핍이 만든 찻잔 두 개, 밀크, 설탕, 비스킷 접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것들을 차리는 줄리아의 손길은 조용했다. 그녀의 태연한 모습만으로 볼 때는 그녀를 정신없이 뒤흔드는 격정의 파도나 앞으로 펼쳐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가슴 졸이는 고통의 불길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에는 흥분의 설렘이 깃들어 있고, 부드러운 입가는 미세하게 떨고 있으며 맥박의 진동이 점차 빨라지고 있는 것을...

그녀가 낮은 커피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는데 밖에서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팀의 차가 샛길을 들어서고 있었고 세바스찬은 외양간에서 방갈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줄리아는 그가 벨을 울리기 전에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세바스찬은 잠시 동안 문턱에 서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검은 눈길에 매료되어 한동안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좀 어때요?"

"염소 말이오? 아주 좋소. 내가 그들을 잠자리로 돌려보냈지."

세바스찬이 씩 웃었다.

"팀은 갔소. 그 아기염소를 보더니 탄성을 올리더군."

"그는 평소에도 그레타를 아주 좋아했어요."

팀 얘기를 하는데도 세바스찬은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관심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그녀는 거실로 돌아오다가 문득 세바스찬에게 팀이 왜 이곳에 와 있었던가를 설명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바스찬이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의심을 말끔히 씻어 주고 싶었다.

"팀은 우리들 친구예요. 핍과 저 말이에요. 그는 우리들의 도자기를 파는 상점에서 일하고 있죠.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줄리아."

세바스찬은 이제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서 있었다.

"당신 친구들에 대해서까지 내게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소. 당신은 산책 나갔다가 사냥터에서 있었던 일을 보았다고 했잖소. 그러니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됐다는 걸 알고 있소. 그리고 설사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그는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오."

"아녜요, 세바스찬. 당신하고도 상관 있어요. 어젯밤에 당신이 그러셨잖아요. 팀은 좋은 친구예요. 그렇다고 그 사람의 사상까지 좋아하진 않아요. 그는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라구요. 저는 산책하고 싶어서 나갔던 거고 그때 우연히 그 불쌍한 말과 당신을 본 거예요."

그녀는 시선을 떨구고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이 너무도 끔찍해서 저는 집으로 미친 듯이 달려왔어요. 그러다가 샤워를 하게 되었고 제가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팀이 도착한 거예요. 당신이 오시기 5분 전쯤에요. 그게 전부예요."

세바스찬은 주의 깊게 들으면서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마침내 미소를 지었다. 신뢰에 찬 애정 어린 미소였다.

"설명할 필요는 없었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줘서 기쁘오. 그리고 당신을 믿소."

그가 다시 활짝 웃었다.

"팀은 내가 보기에도 좋은 사람 같았소.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것도 그다지 나쁠 건 없지. 그리고 당신에게 빠져 있는 것 같던데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지."

줄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세바스찬은 더욱 쾌활하게 말을 했다.

"나는 반대편을 다루는 데 아주 능숙한 사람이오. 그리고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될 때도 마찬가지요."

"말이 그렇게 돼서 정말 안됐어요. 세바스찬, 당신 심정이 어떠신지 잘 알아요."

"당신이 그쪽 길로 산책을 나왔다니 유감이오. 꽤 충격을 받았을 거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올 만도 하지."

그가 다시 웃었다. 하지만 울적한 미소였다.

"난 곧장 이곳으로 와서 당신한테 내가 직접 그 얘기를 해주고 싶었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으면 당신이 당황할 것 같아서. 당신이 견딜 수 없이 보고 싶더군. 나 자신도 놀랐소. 하지만 그 끔찍한 일을 치르고 나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이곳을 향하는 것이었소, 당신에게로."

줄리아는 그에게로 다가가 두 팔을 벌렸다. 그가 그 팔에 안기더니 그녀를 자신의 두 팔로 꼬옥 껴안았다. 그건 마치 귀향의 순간 같았다. 거친 바다를 헤매다가 항구로 돌아온 배처럼...

그들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조용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이 서로의 체온 속으로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피가 뜨거워지면서 그 평화로운 느낌이 흔들리자 줄리아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의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손을 뻗어 관자놀이 근처의 그 흉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손가락 아래서 느껴지는 그 흉터의 감촉이 왠지 모르게 친밀한 느낌을 주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어요?"

그는 반쯤 눈을 감고는 자신의 피부에 와 닿는 그녀의 손길을 음미하고 있었다.

"짐바브웨의 소떼들은 무시무시한 뿔을 갖고 있는데 겁없이 그걸 내두르지. 나는 운동신경이 발달되어 있는 편이긴 하지만 투우 기술은 우리의 기본 훈련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오. 그래서 결국 그 중 한 놈에게 받혔지."

줄리아가 소스라치게 놀라자 그는 씩 웃었다.

"보기보다 그렇게 심하진 않았소. 엉망으로 찢기긴 했지만 몇 바늘 꿰매고 나니까 말짱하던 걸. 눈을 다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소. 감염될까 봐 병원에 며칠 동안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지. 하지만 우리는 곧... 아니."

그가 고개를 흔들자 줄리아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난 곧 회복되었지."

줄리아는 그 손을 주머니 속으로 숨겼다. 두 볼도 빨갛게 달아올랐고 목구멍도 따끔거린다. 자신의 대담한 행동 탓도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 감도는 그 무엇 때문이었다.

"저런, 가엾어라."

"말했잖소, 별거 아니라구. 이런 것보다는 마음의 상처가 더 심각한 거요."

그는 자못 힘을 주어 말하더니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 상처받은 마음에는 차 한 잔이 최고지, 당신은 그렇지 않소?"

줄리아는 다소 긴장을 풀면서 웃었다.

"참 재미있네요. 그렇지 않아도 준비해 두었는데... ."

그녀는 거실 쪽을 가리켰다.

"저도 차를 마시고 싶었어요."

"잘됐군. 괜찮다면 손을 씻은 다음 마셨으면 하오. , 신경 쓸 것 없어요. 욕실이 어디 있는지 아니까."

그는 복도로 걸어 들어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직까지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설탕은 넣지 말고 밀크만."

그는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줄리아는 소파에 앉아 양쪽 잔에 밀크를 부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세바스찬이 어깨에 재킷을 걸치고 나타났다. 그는 권하지도 않았는데 대뜸 그녀 옆에 앉더니 잔을 받아들고 접시에서 비스킷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가는가 했는데... 이런 행운이 내게 주어지다니."

그는 씩 웃더니 차를 몇 모금 마시고 편한 자세로 등을 기댔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바요. 당신, 그리고 향기 짙은 차 한 잔."

줄리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옆에서 그렇게 편안해하는 걸 보니 마음이 푸근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내심 불안했다.

"지쳤을 때는 차가 최고라고 핍이 늘 말했어요."

"그런데 핍은 오늘 어디 간 거요? 그녀의 차가 안 보이던데."

"맬콤의 가족을 만나러 갔어요."

"마치 장례식에라도 간 것 같은 말투로군."

그는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줄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당신의 심정을 이해하오."

깊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당신은 남의 약점을 찌르는 버릇이 있으신 것 같군요."

줄리아는 잔을 마저 비우고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핍의 일에 대해서는 정말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줄리아는 분명히 말했지만 목소리는 살풋이 떨렸다.

"물론 그렇겠지."

세바스찬은 가볍게 응수하면서 한쪽 손으로 살짝 줄리아의 손을 감쌌다. 줄리아는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인생은 수많은 갈등으로 가득 차 있지."

그는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양 허공을 응시하더니 다시 줄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 않소?"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어젯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느라 잠을 설쳤다오. 당신은 어땠소?"

줄리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알고 싶지 않소?"

세바스찬은 더욱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머지 한쪽 손으로 그녀의 손을 마저 잡았다. 줄리아는 덫에 걸린 한 마리 새였다. 이번에는 고개를 까딱할 수조차 없었다.

"당신에게 와서 함께 얘기를 나누기로 결정했지. 어정쩡하게 덮어두지 말고 끝장을 보자고 말이오."

그녀의 두 눈은 그의 강렬한 눈빛에 붙들려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태가 생각보다 빨리 나를 이곳으로 몰고 온 거요. 그것도 아주 비참한 방법으로."

그는 다소 자조하는 듯 하다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비참할 것도 없게 되었소. 그렇지, 줄리아?"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내부 깊숙한 곳에 감동의 파문을 일으켰다. 줄리아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

그는 잠긴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두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만약 이번에도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편안한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소."

그 슬픔이 깃든 유머러스한 애원에 줄리아의 마지막 장벽이 무너져내렸다. 아니 그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녀 스스로 그걸 허물어 버린 것이다. 오랫동안 충족되기를 갈망하며 그녀 내부 깊숙이 억제되어 있던 욕구가 세바스찬이라는 존재에 의해 눈을 뜬 것이다.그녀의 머리는 오늘 아침에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 그녀의 모든 감각이 그 의미를 생생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주저할 것도 없다. 줄리아는 세바스찬을 간절히 원했다. 오직 그만이 이 목마른 갈증을 풀어 줄 수 있으리라. 오직 그만이 이 달콤한 고통을 어루만져 줄 수 있으리라.

"저 때문에 당신을 불면증에 시달리게 할 수는 없죠."

그녀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면서 자기 쪽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그런 다음 두 눈을 감자 온 세상이 감각의 물결로 출렁이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서 서서히 목덜미 쪽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신음을 토하면서 그의 머리를 부여안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 옷의 지퍼를 천천히 끌어내렸다. 그런 다음 서서히 그녀의 내부를 탐닉해 들어갔다. 그녀도 그의 손길을 막지 않았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뜨거운 열정으로 맞아들였다.

어스름하던 황혼의 들판에 짙게 어둠이 깔려 왔다. 두 사람은 마침내 최고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주고 동시에 받는 그 영원한 순간을 맞으려는 찰나였다. 그러나 문득 저 바깥 현실세계로부터 줄리아의 귓전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운명의 소리는 겁에 질린 비명소리였고 저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 커튼이 젖혀진 창문을 통해 희미한 방안으로, 그리고 줄리아의 머릿속으로 기어 들어왔다.

", 내 암탉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어쩜, 이럴 수가! 닭장문 잠그는 걸 깜빡 잊어버렸네!"

그녀는 정신없이 옷을 걸치고는 방을 뛰쳐나갔다. 주방에서 플래시를 집어 들고 재킷을 걸친 다음 마당을 가로질러 닭장 쪽으로 달려갔다. 여우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달아났겠지. 그런 점에서는 아주 영리한 놈이니까. 내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저 어두운 숲속으로, 10월의 달빛 아래로 사라져 버렸겠지. 하지만 내가 너무 늦게 온 건 아닐까?

그녀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가가 플래시로 닭장 안을 비추어 보았다. 닭들은 겁에 질려 파닥거렸다. 다행히 다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닭털이 날아다니고, 닭장은 그야말로 수라장이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깨진 달걀들이 뒹굴고 있었다.

줄리아는 두 눈을 감고 심한 자기모멸감에 빠져들었다. 세바스찬에게 정신을 뺏긴 나머지 달걀을 거두는 것조차 잊다니... , 하느님!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뒤 그녀는 한 마리씩 차례대로 비추며 수를 세었다. 하나, , , , 다섯... 기적적으로 모두 상처는 입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어디 갔지?

그녀는 벽을 따라 쭉 플래시를 비춰 보았다. 저쪽 한 귀퉁이에 닭 한 마리가 가엾은 신음소리를 내며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줄리아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비추었다.

"겁내지마. , 가엾은 것."

그녀는 달래면서 안도와 죄책감으로 솟구치는 눈물을 꾹 눌러삼켰다. 다들 무사하구나! 운이 좋았던 거야.

그녀는 머리를 숙여 겁에 질려 있는 그 암탉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심한 건 아니지만 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 정말 미안해!"

줄리아는 신음을 토하며 그들 모두를 둘러보았다. 마치 그들에게서 무슨 대답이라도 들으려는 듯이.

"줄리아, 내게 맡겨요."

등뒤에서 세바스찬이 불쑥 나타났다. 너무 상심한 나머지 그가 오는 줄도 몰랐다.

", 얼른."

그녀가 그 암탉을 꼭 껴안고 머뭇거리자 그가 명령하듯 말했다.

"내가 한 번 봅시다. 상처가 심하오? 다른 닭들도 다쳤소?"

"아뇨, 피가 좀 흐르긴 하지만 제 생각엔 괜찮을 것 같아요."

세바스찬에게 닭을 넘겨주며 줄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는 전문가고, 어떻게 보면 그로 인해 이렇게 된 거니까 그에게 맡겨 버리자. 그는 플래시를 비추면서 찬찬히 그 암탉의 목을 살폈다.

"가벼운 찰과상이로군."

그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여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가 그의 즐거움을 방해한 거요."

그가 우리의 즐거움을 방해했듯이... 그의 어투는 분명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놈은 곧 괜찮아질 거요. 다른 닭들은 어떻소?"

"모두 괜찮은 것 같아요."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침울하게 땅바닥을 응시했다. 세바스찬은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어깨에 한쪽 손을 얹었다.

"자책하지 말아요, 줄리아.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것보다 더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오."

"그럼 누구한테 잘못을 돌리죠?"

자신도 놀랄 정도로 화가 솟구쳤다. 그녀는 어깨에 놓인 그의 손을 떨쳐 버렸다.

"누구한테요?"

그는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인생의 친구, 여우에게지. 아마 오늘 그 사냥꾼들에 대한 복수심에서 그랬나 보지? 사냥감이 갑자기 약탈자로 변하다니 말이오."

줄리아는 그에 대해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그래요. 레나르 씨. 모든 책임을 여우에게 돌리도록 하죠."

그녀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못다 태운 열정이 무력한 분노로 바뀌어 터져 나왔다.

"당신의 형제에게 말예요. 내 가엾은 암탉을 강탈하려 했던 그 여우에게. 제가 잠시 문 잠그는 걸 잊었기 때문에, 당신이...."

그녀는 말끝을 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신을 강탈한 건 아니잖소. 줄리아?"

그의 음성이 다소 날카로와졌다가 다시 누그러졌다.

"아니면 당신 마음의 울타리에도 자물쇠를 채우는 걸 잊었기 때문이오? 그건 일시적인 탈선이었단 말이오? 한밤중의 침입자에게 우연히 당신 자신을 열어 보였던 것뿐이었소?"

그는 더욱 바짝 다가왔다.

"그렇다면 내 형제가 아주 때 맞춰 잘 나타나 준 것 같군. 당신에게 이중으로 경고해 주려고 말이오."

줄리아는 여전히 화가 났지만 그게 그를 향한 건지 자신을 향한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면 여우에겐지, 모든 남자들에겐지...

"그래요, 그건 실수였어요! 그러니 이젠 돌아가 주세요, 세바스찬."

목이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녀는 무너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제발 돌아가 주세요!"

"진심으로 그러는 거요?"

세바스찬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그녀의 곱슬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고통의 빛이 서렸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지 않아요."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마음에 없는 행동은? 마치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세바스찬."

이제는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쓰라린 허탈감만이 가슴속을 맴돌았다.

"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요. 그 어떤 것두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절 혼자 있게 해주세요, 세바스찬. 부탁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가 그녀의 말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반박할 것인가? 그녀는 진정 어떤 것을 원하는 걸까?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줄리아, 그럼 당신이 진정으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 내가 아직 당신 곁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레나르는 무방비 상태의 가엾은 짐승에게 이빨을 들이밀고 싶어서 들이민 게 아니오. 하지만 저녁을 먹어야 하니까. 사실 그는 레나르 양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던 거요. 이 세상에서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바로 그거요. 한끼의 저녁거리가 아니란 말이오. 그런데 그녀가 응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그는 혼자서 이미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아다녔소.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면 영원히 혼자서 떠돌아다니는 데 만족하며 살아야겠지."

그가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그녀는 오디의 엔진 소리를 들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줄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오랫동안 비탄에 잠겨 있었다. 덫에 걸린 그녀 자신의 운명과 냉혹한 현실세계의 시련이 힘에 겨워 어느덧 두 볼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9

핍은 스파게티를 팬에 붓고는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핍은 줄리아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리아는 왠지 안절부절못하다가 넋나간 사람처럼 멍청히 앉아 있곤 했다. 물론 핍은 그걸 자신이 최근에 던진 폭탄선언 탓으로 돌렸다. 줄리아는 태연한 척했지만 아무래도 그 소식은 그녀에겐 충격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일까? 줄리아는 그런 일로 뿌루퉁할 성격이 아닌데... 아냐, 뭔가 다른 일이 있어. 틀림없이.

지난 일요일 즐거운 주말을 보내고 애슈덴에 돌아와서 핍은 줄리아에게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줄리아는 왠지 얘기를 피하는 것 같았다. 자꾸 다그쳐 묻자 그녀는 마지못해 몇 가지 큰 사건들만 간략하게 얘기했다

금요일 밤의 재즈 연주회. 토요일 날 사냥꾼들과의 우연한 만남과 부상당한 말 얘기, 팀의 방문과 닭장을 습격한 여우 얘기 등.

핍이 아무리 졸라대도 더 이상의 자세한 얘기는 들을 수 없었다. 분명 그녀는 그 동안 잠시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 같았는데 그 순간 다시 옛날 방식대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바꾼 모양이었다.

그 희미한 얘기 가운데서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윤곽이 잡혔다. 그 모든 사건들에는 한결같이 세바스찬 트렌트가 관련되어 있었다. 핍이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에 그 남자가 일찍이 다른 남자는 꿈도 못 꾼 그 일을 해낸 게 분명하다. 순식간에 줄리아의 마음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그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오늘은 벌써 금요일이고 핍이 저녁 당번을 맡은 날이다. 맬콤이 9시쯤 그녀를 데리러 올 것이고 그들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실 예정이었다.

핍은 줄리아에게 함께 가자고 청했지만 줄리아는 다른 볼일이 있다고 애매하게 둘러대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곤 더 이상 자세한 얘기는 안했지만 핍은 어쨌든 그녀가 외출할 마음이 들었다는 게 기쁘기만 했다.

줄리아는 이번 주 내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집에만 처박혀 있었다. 좀처럼 빠지지 않는 에어로빅 강습에조차 나가지 않았다.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뭔가 새로운 작업에 정신없이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핍이 들어서면 그걸 부둥켜안거나 보자기로 싸서 감추곤 했다. 그리고는 밤늦은 시각까지 그 작업을 계속했다. 핍이 침대에 누워 있노라면 스튜디오에서 줄리아가 즐겨 듣는 음악이 들려오곤 했다.

대부분 조용하고 감미로운 재즈곡이었다. 핍은 이것저것 캐물어서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 줄리아가 의논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 받아 줄 용의는 있었다. 이 모든 분위기가 핍의 궁금증을 자극했고, 개인적으로는 줄리아가 자신을 믿고 털어놓길 바랐지만 그걸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지금 줄리아는 핍과 함께 주방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둘이서 설거지를 끝낸 뒤 줄리아가 애수에 젖은 미소를 짓더니 이제 그만 준비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좋아, 줄리아."

핍은 줄리아의 반짝이는 눈빛과 발그레하게 상기된 뺨을 유심히 살폈다.

"그 작업은 다 돼가니? 다 끝났니?"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끝나 가. 이제 굽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황급히 자기 방으로 갔다. 10분 뒤 그녀는 작별인사를 하러 다시 핍에게 왔다.

"즐겁게 지내렴."

줄리아는 다소 파리해 보였지만 평온한 표정이었다.

"맬콤에게 안부 전해 줘. 아마 내일은 두 사람 다 볼 수 있겠지?"

"그래, 그는 가끔 이곳에서 주말을 보내고 싶어해."

핍은 관심 어린 눈길로 그녀를 살폈다. 오늘밤엔 유난히 아름다와 보인다.

"사랑스러워 보이는구나, 줄리아. 잘 다녀와."

핍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줄리아는 다소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가 살풋 내려뜬 속눈썹이 청아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핍은 그녀에게 뭔가 다른 분위기가 감도는 걸 느꼈지만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핍은 그녀의 차가 떠나는 소리를 들었다.

줄리아가 <여우와 거위> 안으로 들어섰을 때 웰스 파고스의 연주는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그녀는 북적대는 군중 속을 뚫고 밴드 근처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다음 스탠드 바 앞에 앉아서 기다렸다. 겉보기엔 침착해 보였지만 실은 무척 떨리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경쾌한 옛날 곡들을 메들리로 연주하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 비트에 맞춰 몸을 까닥였지만 정신은 온통 키보드의 세바스찬에게로 쏠려 있었다.

재즈 피아니스트 바스 트렌트는 음악에 푹 빠져 있었다. 줄리아는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놀림과 음악에 완전히 매료된 채...

그녀는 중간 휴식시간에 맞춰 이곳에 도착했고 밴드가 연주를 멈추자마자 벌떡 일어나 곧장 세바스찬에게로 갔다. 그는 그녀 쪽으로 등을 돌리고 드러머와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줄리아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는 아직 그녀를 못 봤지만 상대편이 먼저 그녀를 알아보고는 의미 있는 눈길로 그녀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여전히 껄껄 웃으면서 세바스찬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친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검은 눈길이 줄리아의 푸른 눈과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분명 무슨 소린가를 들었다.

"줄리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반가운 듯한 그러면서도 뭔가 조심스러운 그런 미소였다.

"안경, 세바스찬."

그가 바짝 긴장하고 있는 자신의 속마음을 알까? 아니면 태연을 가장한 얼굴 때문에 눈치 채지 못할까?

"당신의 음악을 저버릴 순 없었어요."

그 말은 세바스찬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바로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그 드러머 때문에 한 말이었다.

"좋은 음악을 식별할 줄 아는 숙녀라네."

세바스찬이 친구에게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그 드러머는 친구의 의중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실례하네, 바스. 한 바퀴 둘러봐야겠어."

줄리아에게 찡긋하더니 그는 스틱을 들고 다른 밴드 단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세바스찬은 그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고 줄리아는 피아노에 몸을 기댔다. 비교적 조용한 그곳에 단 둘이 남게 된 것이다.

"당신을 다시 보니 좋군. 내 음악만이라도 저버릴 수 없었다니 기쁘오."

"당신의 음악 때문만은 아니에요.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이게 유일한 방법이잖아요. 여기라면 틀림없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세바스찬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는 피아노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건반을 매만졌다.

"실은 나도 당신에게 전화하려 했었소. 당신이 이렇게 와줘서 기쁘오. 나도 역시 하고 싶은 말이 있소."

그의 심각한 어투에 줄리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다.

"세바스찬, 전화로는 안 돼요. 난 당신을 직접 보고 싶었다구요. 당신께 드릴 게 있어요."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드릴 수는 없어요 주말 내내 당직이세요? 내일이든지 일요일에 애슈덴에 오실 수 없나요? 한두 시간이면 되는데...."

그는 더욱더 눈썹을 치켜 떴다.

"매혹적으로 들리는군. 여기서는 줄 수 없다 이거지?"

"그래요."

그녀는 장난기 서린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실 수 있다면 오세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소."

그가 느닷없이 손을 뻗더니 그녀의 양쪽 팔목을 꽉 잡았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줄리아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숨이 가빠 오고 얼굴이 후끈거린다.

"이번엔 당신이 내게로 오는 게 어떻겠소? 일요일 점심식사에 정식으로 당신을 초대하는 바요."

그는 정중하게 절을 하더니 더욱 바짝 다가왔다.

"그 날은 비번이오. 급히 불려나가는 일도 없도록 조처해 두겠소."

갑작스런 사태 변화에 줄리아는 주춤했다. 세바스찬은 더욱 가깝게 다가섰으나 잡고 있던 팔목을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그렇게 미심쩍은 눈으로 보지 말구료, 줄리아. 나도 요리를 할 수 있다구. 혼자 살고 있긴 해도 요리솜씨는 기가 막히지, 당신도 보면 놀랄 걸."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설득했다.

"아뇨, 놀라지 않을 거예요."

그에 관한 한 이제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 줄리아는 손을 빼내서 방어하듯 팔짱을 꼈다.

"그럼 제가 가도록 하죠. 몇 시에 갈까요?"

그는 대답하면서 줄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12, 그때쯤이 좋겠소. 나도 당신에게 줄 게 있소. 그건 당신이 내게 와야만 하는 거요."

줄리아는 궁금했다. 하지만 세바스찬이 그녀의 선물에 대해 좀체 궁금해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녀도 냉담하게 반응했다.

"다행히도 제 건 가져갈 수 있는 거예요."

그는 그녀를 흘끔 쳐다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암탉들은 좀 어떻소?"

두 사람 다 그 질문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아는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좋아요. 상처 입은 닭은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하지만 그런 충격을 받고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는지 걱정이 돼요."

"당신 역시 그런 충격에서 곧 회복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군."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줄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술 한 잔 하시겠어요?"

화제를 바꿔 보려고 그녀가 불쑥 말했다.

"오늘밤엔 끝까지 듣고 가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럼 날 집까지 태워다 주지 않을 건가?"

그가 짓궂게 놀렸다.

"오늘밤은 안 되겠어요, 세바스찬."

그녀는 다시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전 제 자제력의 한계를 알아요, 그녀의 푸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술을 한 잔 사드릴 수는 있어요."

"한 잔 사주구료."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바 앞에 기대섰다. 줄리아가 그를 흘끔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 저녁엔 캐닝턴 부부가 안 왔나 보죠?"

"전 가족이 주말여행을 갔소."

", 그랬군요."

줄리아는 스카치와 토마토 주스를 주문했다.

"새끼염소는 어떻소?"

"하루에 2cm씩은 자라는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자라면 이제 새끼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아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그레타와 함께 떠날 거구요."

세바스찬의 얼굴 위로 동정 어린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핍은 어떻소? 결혼의 꿈에 잔뜩 부풀어 있나?"

"그 비슷한 거죠."

줄리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결혼식은 12월에 있을 거예요."

"크리스마스 신부라?"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검은 눈길은 계속 줄리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잔을 마저 비웠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소. 조금 더 듣고 갈 거요?"

"조금만요. 오늘밤엔 일찍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그럼 일요일 날 내 집에서 봅시다. 제대로 찾아올 수 있겠소? 그때 상당히 어두웠던 걸로 기억되는데...."

"어딘지 잘 알아요. 주소도 갖고 있구요."

"그럼 됐소."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다시 그녀 쪽으로 다가서더니 따뜻한 손바닥을 그녀의 부드러운 뺨 위에 갖다 댔다. 낯익은 몸짓인데도 줄리아의 가슴은 마구 두근거렸다.

"조심해서 가구료."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피아노 앞에 앉아 동료들과 다음 곡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연주하기 직전에 그는 관중을 둘러보며 줄리아를 찾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음악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이틀 뒤, 12시에 줄리아의 차가 세바스찬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줄리아는 빨간 체크무늬 바지에 풍성한 스웨터 차림으로 차에서 내려섰다. 어깨에 가방을 둘러메고 가슴엔 종이에 싼 작은 꾸러미를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다.

밝은 햇빛 아래서 보니 대단히 멋진 집이었다. 아마도 200년은 된 것 같은 기품 있는 집이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풍상에 시달리면서 어떻게 이런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 그저 감탄의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일종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이곳에 온 거고 잠시 후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세바스찬은 분명 어떤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고 그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의 결론이 서로 엇갈린다면 어찌할 것인가?

일단은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당당하게 현관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육중한 참나무 문에 달린 벨을 눌렀다. 세바스찬은 한참만에야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편안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어서 들어오구료."

그는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방어하듯 꾸러미를 꼭 껴안은 채.

"고마워요."

홀은 넓었고 전면이 탁 트인 창문 때문에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여느 병원과 마찬가지로 대기실에는 의자와 책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접수창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은 텅 비어 있지만 줄리아는 병든 애완동물들과 그들을 걱정 어린 눈길로 내려다보는 주인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세바스찬은 너무도 편안해 보여서 그게 오히려 더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폭풍 전의 고요일까?

"뒤쪽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한다는 걸 깜빡 잊었소. 내 전용 문은 그쪽에 있거든 하지만 지금은 이쪽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지 뭐."

그는 앞장서서 거대한 나선형 계단으로 올라갔다. 반쯤 올라가던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 내 병원 시설을 둘러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 보지? 수술도구들, 수술실, 회복실, 뭐 그 정도지."

그는 자신의 소중한 생계수단을 아주 가벼운 어투로 무시하듯 말했다.

"아직요."

줄리아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나중에 구경하도록 하죠."

그녀가 예의상 마지못해 대답하자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을 모시고 내 영토를 둘러본다면 무척 영광이겠습니다. 미스 웨이클링."

그러더니 다시 몸을 돌려 계단을 계속 올라갔다.

"그럼 먼저 나의 생활공간을 보도록 합시다."

줄리아는 여전히 꾸러미를 꼭 껴안은 채 그를 따라갔다. 조지아 풍의 창문이 달린 널찍한 거실은 아주 환한 느낌을 주었는데 아름답고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줄리아는 감탄의 눈길로 그곳을 둘러보았다.

정말 갖고 싶을 만큼 탐나는 곳이었다. 세련된 분위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탄성을 올리게 만들었다. 시간과 돈과 높은 안목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물론 세바스찬은 전자를 충분히 갖추었겠지. 그리고 후자를 위해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되었을 거야. 줄리아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높은 안목으로 볼 때 정말 나무랄 데 없이 잘 꾸며진 공간이었다.

식당에는 반들반들한 마호가니 탁자와 6개의 의자만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깔끔한 주방은 이 집의 다른 어떤 곳보다 설비가 잘 되어 있었다. 멋진 전자레인지와 육중한 냉장고가 눈길을 끌었다.

"온갖 현대적 설비를 다 갖추었지."

줄리아의 감탄 어린 눈길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세바스찬이 말했다.

"난 남자 요리사를 고용하고 있어. 그는 아주 훌륭해. 여성들이 들으면 눈을 흘기겠지만 그는 아주 맛깔스런 음식 솜씨를 갖고 있다구. 게다가 그는 자기 직업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해."

줄리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바스찬에 관한 한 이제 그런 사실조차도 별로 놀랄 게 없었다. 그는 엉뚱하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아주 재미있군요, 트렌트 씨."

그녀는 다소 빈정대며 덧붙였다.

"주방이 여성들의 전용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 시설을 갖춘 주방이라면 여자들은 이제 발붙일 곳이 없게 되겠어요."

"제임스 터버가 뭐라고 그런 줄 아시오?"

세바스찬은 이제 그녀를 데리고 제일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올라섰다.

"여자들만 있는 공간은 모든 게 엉망이 된다."

줄리아는 못 당하겠다는 듯 눈을 흘기며 큰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침실을 보는 순간 흥분되는 감정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위장이었다. 세바스찬의 침실을 둘러보는 동안 줄리아는 떨리는 가슴을 가눌 길이 없었다. 호화스런 카펫, 벽 한쪽 면을 다 차지한 옷장, 그리고 초대형 침대...

"제일 많이 신경 쓴 곳이지."

그는 그 옆에 딸린 화려한 욕실과 또 다른 침실 두 군데를 보여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세바스찬이 술을 따르는 동안 줄리아는 전면이 유리로 된 창문 앞으로 갔다.

"어디까지가 당신 땅이죠?"

주변의 정경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3천 평 정도지. 너무 넓으면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난 이 집만으로도 벅찬 사람이니까, 정원은 나중에 구경시켜 주겠소."

그는 이제 바로 뒤에 와 있었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머리칼 속으로 스며들어왔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따스한 열기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세리 주 드시겠습니까, 마담?"

그녀는 귓전을 간지럽히는 그 목소리에 놀라 급히 돌아서다가 하마터면 그가 내민 술잔을 후려칠 뻔했다. 얼굴을 붉히며 술잔을 받아들다가 그녀는 자기가 아직도 그 꾸러미를 들고 있음을 알았다.

"고마워요, ...."

그녀는 그걸 조심스럽게 그에게 내밀었다.

"당신에게 주려고 가져온 거예요."

"생일도 아닌데?"

그는 두 손으로 그걸 받더니 긴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만져 봤다. 줄리아는 그가 그걸 빨리 열어 보기를 두려운 심정으로 기다렸다.

"당신에게 드리려고 일주일 내내 거기에 매달려 있었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가 흘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겹겹이 싸인 갈색 종이를 뜯어냈다. 마침내 내용물이 드러났다.

그는 그녀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숨을 훅 들이켰다. 줄리아도 떨리는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이건... 줄리아, 너무 아름답소. 완벽하오!"

세바스찬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그 말은 줄리아의 가슴속으로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여우의 표면을 따라 내려가며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건 차가운 진흙으로 빛은 모형에 불과했지만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세바스찬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길로 홀린 듯 그 여우를 바라보았다.

세바스찬의 말대로 그 여우는 완벽했다. 줄리아도 그걸 인정했다. 그건 그녀의 작품 중 가장 훌륭했고 특별히 그를 위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레나르."

그녀는 자기가 지금 중얼거린 말이 두 사람 중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둘 다일까? 그때 세바스찬이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군, 줄리아. 어떻게 감사해야 될지... 지금껏 이렇게 뜻깊은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소."

"그렇게 감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그 작업이 즐거웠으니까요."

세바스찬이 자신의 선물을 기꺼이 받아 주자 그녀는 이상하게 새로운 힘이 솟는 듯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녀는 세리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당신을 위해 이걸 만드는 동안 생각을 정리해 보았어요. 그리고 결론에 도달했죠. 여기 온 건 바로 그 말을 하기 위해서예요. 지난 토요일날 그렇게 화를 내서 미안해요. 그 암탉 사건이 있고 나서 모든 게...."

그녀는 시선을 떨구며 잠시 머뭇거렸다.

"세바스찬, 당신이 이해해 주셔야만 해요. 모든 일이 너무 갑자기 일어나서 제겐 충격이었어요. 당신이 제게 접근한 거며 제 상아탑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 것... 그리고는 저의 모든 사상과 감정들을 송두리째 휘둘러 놓은 것, 전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는 불현듯 그에게서 등을 돌려 창 쪽으로 돌아섰다. 그 탁 트인 경치를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은 뒤 근처 탁자 위에 술잔을 내려놓고는 다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너무도 진지한 그녀의 표정에 세바스찬은 흠칫 놀라며 양눈썹을 모았다.

"전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세바스찬."

너무 조그만 목소리로 말해서 혹시 그가 듣지 못한 거나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얼굴 표정으로 그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제게 무얼 원하시든 이제 그런 건 문제되지 않아요. 왜냐면 저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제 기어 들어갈 듯 작아졌다.

"저 역시 당신을 원하기 때문이에요."

결국 그 말을 하고 말았다. 세바스찬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을 반갑게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부할지 그건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식으로라도 사태를 진전시키고 싶었고 일단 그런 말을 하고 나자 가슴이 후련했다. 그녀는 이제 떳떳이 고개를 들고 기다렸다.

", 이럴 수가! 줄리아."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더니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줄리아의 가슴이 두려움으로 바짝 죄어들었다. 그는 여우를 벽난로 선반 한가운데다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아왔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그 손을 맞잡았다. 세바스찬은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꼬옥 껴안았다. 다시 한번 귀향의 순간을 맞은 것이다.

"당신 선물을 받아들이겠소."

여우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방금 털어놓은 속 깊은 고백을 말하는 걸까, 아니, 둘 다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더듬느라 그 말은 속삭임 속으로 묻혀 버렸다. 잠시 후 뒤로 물러서는 그의 얼굴 위에는 그윽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더 확실한 대답을 들려주기 전에 나와 함께 잠시 밖으로 나가야겠소."

줄리아는 어리둥절해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번엔 내가 당신에게 뭔가를 줄 차례요."

그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뒷마당으로 나가 조그만 헛간으로 데려갔다. 어두운 실내에 어느 정도 눈이 익숙해질 무렵 줄리아는 애슈덴의 것과 거의 비슷한 울타리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아주 사랑스럽게.

그녀의 시야 안으로 연약한 갈색 동물 한 마리가 들어왔다. 매끄러운 귀를 늘어뜨리고 멋지게 생긴 코를 킁킁거리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앵글로 뉴비안 염소 한 마리.

이번엔 세바스찬이 옆으로 비켜 서서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근사해요! 사랑스럽구요! 정말 사랑스러워요, 세바스찬! 염소가 있다는 말은 한 번도 안했잖아요!"

"그랬었지, 이 염소는 불과 사흘 전에 들여왔으니까. 이름은 매웨스트요. 이제 겨우 한살이고 제 어미를 떠난 지 얼마 안 됐소. 그리고 한 가지, 이 염소는 내 것이 아니오, 줄리아."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 거요."

"뭐라구요? 제 거라구요?"

처음엔 놀라서 어리벙벙하다가 그 뜻을 깨닫고는 탄성을 올렸다.

"제 거란 말이죠, 세바스찬!"

"그래, 당신 거요. 줄리아."

그는 이제 그녀 곁으로 가까이 다가서서 그 귀여운 동물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을 위해 마련한 거요. 당분간 여기서 지내다가 그레타가 떠나고 나면 애슈덴에 가서 당신과 함께 사는 거지. 당신이 먹이도 주고, 짚단도 갈아주고 물도 주고, 상냥스레 보살펴줘야 해요, 줄리아. 그녀가 여기 있는 동안은...."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언제든 우리를 찾아와도 좋소. 당신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우리 둘 다 무척 섭섭할 거요."

줄리아는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벅찬 감동의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고마워요, 세바스찬."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당신은 제게... 제게 최고의 기쁨을 주셨어요."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솟구쳤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아직 실제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런 배려를 해줄 정도라면... 적어도 그는 나를 원하고 좋아하는 심정이리라.

줄리아는 흐느끼면서 억눌린 감정들-고통, 기쁨, 감사, 희망, 안도감-을 모두 털어내었다.

세바스찬은 여전히 그녀를 가슴에 안은 채 서 있었다. 그의 셔츠가 눈물로 흥건히 젖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땐 정말 미안했어요."

그녀가 훌쩍이며 말했다.

"전 좀처럼...."

그는 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치켜 올렸다.

"내 생각에 당신은 이제 좀처럼 하지 않던 일들을 시작하려는 것 같군. 그리고 그런 일들은, 나와 함께 하는 한 불가능할 것도 없지."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 이제 가서 씻어요. 고운 얼굴이 눈물에 흠뻑 젖었구료. 그리곤 점심식사를 한 다음 다시 매웨스트를 보러 갑시다. 하지만 난 아직 당신한테 볼일이 덜 끝났어. 중요한 얘기가 몇 가지 더 남아 있지."

줄리아는 찬물을 끼얹어 뜨거워진 볼을 식히면서 세바스찬의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슬픈 듯이 바라보았다. 아직도 보여 줄 게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게 뭘까?

그는 거실의 작은 탁자 위에다 점심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리요네즈 감자에 신선한 야채를 곁들인 베이컨 요리,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얹은 과일 칵테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차게 식힌 와인도 그 옆에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 같은 날 너무 기름진 음식은 줄리아에게 부담을 줄 거라고 생각하고 간소하게 마련한 듯했다. 그녀는 세바스찬의 자상한 배려에 마음이 푸근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막상 식사를 시작하자 의외로 식욕이 감돌았다. 그의 음식 솜씨는 그가 장담했던 대로 정말 훌륭했다. 세바스찬은 기분이 좋은지 여러 가지 잡담을 늘어놓았다. 그녀도 가능한 한 그 분위기에 어울려 보려 했지만 그가 그 말을 해주기 전까지는 내내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그녀는 스푼을 내려놓고 접시를 한쪽으로 밀어놓은 다음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세바스찬!"

"알고 있소, 줄리아."

그는 식탁 너머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다가 다시 손을 놓고 뒤로 기대앉더니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모았다.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 하지 말아요. 난 당신한테 그저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뿐이오. 당신을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오."

차라리 어떻게 되는 것이 숨 막히는 긴장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당신과 나 사이가 더욱 진전되기 전에 당신이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소."

그는 마음의 창문으로 과거를 들여다보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나는 한 번도 결혼한 적은 없소."

"그건 저도 짐작하고 있었어요."

"물론 교제한 여자는 몇 명 있었지. 난 수도승은 아니니까. 내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

그는 기억의 필름을 뒤로 돌리듯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줄리아는 가슴이 마구 두근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의 눈은 긴장으로 더욱 파래진 줄리아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떤 멋있는 여인과 함께 살았었소."

줄리아는 긴장했다. 하지만 이내 별거 아니라고 마음을 다졌다. 그는 미래를 펼치기 전에 과거를 함께 나누고 싶은 거야. 나에게 모두 털어놓고 싶은 거지. 그러니 그렇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해-그건 여우와 염소를 주고받은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그 지방의 젊은 처녀였소. 아주 총명한 아가씨였지, 내가 대학에서 연구하고 있을 때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소. 나는 첫 주에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고 셋째 주에는 이미 그녀와 침실을 함께 쓰게 되었소."

그는 그 점을 강조하려는 듯 줄리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줄리아는 왠지 그 눈길이 눈부셔서 마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시선은 아주 많은 표정을 담고 있었다.

"난 그런 식이오, 줄리아. 전격적으로 진행하지. 주저하지도, 대충 타협하지도 않소. 내가 무엇인가를 또는 누군가를 원한다고 생각하면 난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오. 그리고 결코 잘못되는 일도 없었소. 그 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소. 나는 그녀와 관계를 가졌고 그건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었소. 우린 서로가 서로를 원했으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더러 함께 가자고 했었소. 난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 역시 날 사랑한다고 확신했었으니까. 내가 가는 곳이면 그녀는 어디든 따라오리라고 자만했던 거지. 그녀는 그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에 빠졌었소. 결국엔 거절하더군."

그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얘기를 계속했다. 줄리아는 그가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괴로운지 어쩐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치만 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그 손에 말없이 힘을 주었다. 그는 그녀의 손길에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2년 동안 함께 살았소. 하지만 그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녀에겐 나보다는 그곳이 훨씬 더 중요했던 거요. 그녀는 거기에 속해 있었고 그곳은 그녀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이니까. 그녀는 그곳에 남기를 원했소. 가족과 친구와 그곳의 모든 것을 저버릴 수가 없었던 거지. 하지만 그 속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소."

그는 담담한 어투로 말을 계속했다.

"그게 바로 그녀가 살고 있는 생활방식이었고 나 때문에 그걸 포기할 순 없었던 거요. 나도 물론 중요했었지,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은. 하지만...."

그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었다.

"그들이 그녀에겐 나보다 더 좋은 안식처였고 현실이었소. 나는 결국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던 거지."

", 세바스찬."

줄리아의 온몸이 안쓰러운 마음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로 말했다.

"저라면 당신과 함께 갔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를 이해할 수는 있어요. 가족 역시 중요하고, 또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한다는 건 두려운 일일 테니까요."

"이젠 나도 이해할 수 있소. 하지만 그땐 쉽지가 않았소. 내겐 개인적인 신뢰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소. 아마 내가 그녀와 결혼했더라면...."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결혼하려 하지 않았을 거요."

"그녀는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어요. 고국을 떠나려면 너무 많은 걸 포기해야 했을 거예요."

줄리아는 이 미지의 아프리카 여인과 자기 자신의 삶을 비교해 보았다. 줄리아는 결혼은 고사하고 관계를 맺는 것조차 피했었다.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기가 두려워, 그리고 자신의 안식처를 잃을까 두려워서.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줄리아는 자신의 작은 야망에 이기적으로 집착한 것에 불과하다. 세바스찬의 과거의 여자와 비교해 볼 때 자신은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다. 세바스찬은 이제 현실로 돌아온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용서하기까진 일 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었소. 하지만 점차 그녀의 결정이 이해가 가더군. 그녀는 몇 차례 편지도 보내 왔지만 지금까진 답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소. 그런데 당신을 만나고 나서 불현듯 편지를 쓰고 싶어지더군. 그녀는 한때의 즐거운 추억이 돼버린 거요. 그 이상의 아무 의미가 없게 된 거지. 나는 내 개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고 싶어졌소. 그들은 그녀와 함께 있거든. 그녀도 나만큼이나 그 개들을 좋아했지."

"포기와 베스 말이군요."

"맞았소. 바로 그들이지."

세바스찬은 깊은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돌아가서 그들 전부를 한 번 봐야겠소. 당신도 함께 갔으면 좋겠군."

줄리아의 가슴이 희망과 야릇한 기쁨으로 바르르 떨렸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당신도 그곳이 마음에 들 거요. 당신에게 나에 관한 모든 걸 보여 주고 싶소. 하지만 그 추억의 장소에 가기 전에 먼저 당신에게 해두고 싶은 말이 있소. 내가 문득 그녀에게 다시 연락하고 싶다고 느꼈을 때 나는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소. 그리고 데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줄리아."

그는 그녀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소."

그 희망의 꽃봉오리가 눈부신 개화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세바스찬의 손길이 어깨를 어루만지자 그녀는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 줄리아."

그가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자 그의 콧수염이 살결을 간지럽혔고 그녀는 숨이 막혀 오는 듯했다.

"그리고 매웨스트 말인데."

"매웨스트요?"

줄리아는 반쯤 눈을 뜨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놈이 애슈덴으로 가서 당신과 함께 사는 것도 좋겠지만 더 좋은 생각이 있소."

줄리아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응시했다.

"당신이 이곳에 와서 그녀와 함께 사는 거요."

그가 씩 웃었다.

"그리고 물론 나도 함께. 우리는-매웨스트와 나 말이오-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지 모르는 공간을 이곳에 많이 갖고 있다오. 그래서 이곳을 좀 떠들썩하게 해줄 그 무엇이 필요한데... 고양이나 암탉 같은 것 말이오. 그리고 이곳엔 작업을 할 수 있는 스튜디오도 있다오."

"스튜디오요?"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아직 안 보여 줬던가? 나의 거대한 다락방을?"

그는 자신의 건망증을 탓하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더니 활짝 웃었다. 줄리아는 그가 잊었던 게 아니라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일부러 기다렸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대단히 멋진 공간이지. 천장에서 아름다운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오. 그냥 두기엔 너무 아까운 방이라고 늘 생각했었소. 그래서 예술가를 위한 완벽한 스튜디오를 만들 생각이오. 조금 있다 꼭 데려가 달라고 말하구료. 당신께 보여 줄 테니."

줄리아는 눈빛을 반짝이며 그의 미소에 답했다.

"세바스찬...."

"한 번 생각해 봐요, 줄리아."

그는 이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당장 확답을 들려달라는 건 아니오. 하지만 언제든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난 모든 걸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소."

그의 숨결이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이른 봄날 들판에서 빛나는 꽃바람처럼.

"언제든 정직한 당신의 심정을 들려주길 바라오."

줄리아가 그가 던진 모든 말의 의미를 곰곰이 되씹고 있는데 세바스찬이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껄껄 웃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어째서 그 자리에 못 박히듯 서 있었는지 아시오? 그 강렬한 핑크빛 발목 때문이었소. 아직까지도 그때 받은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오."

"라일락 빛이었어요."

그녀가 나직이 속삭였다. 하지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포개지면서 쓸데없는 언어의 파편들은 살며시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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