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아침을
Sandra Brown
<1>
그를 본 순간, 그녀는 알리시아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이 실수라는 걸 깨달았다.
그 남자가 페어차일드 하우스 현관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휴대용 타자기를 든 채, 머리 위에 좁은 테의 거북껍질 같은 안경을 꽂아 넣은 모습으로,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낸 것이 못내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와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그 건물의 주인이자 경영주인 슬론 페어차일드가 아치형의 현관문 바로 안쪽에 서 있었다. 손가락 관절이 드러날 정도로 목의 로브 깃을 꽉 움켜쥐고 맨발을 양쪽으로 번갈아 옮기면서.
카터 매디슨의 얼굴을 처음 보자마자, 그녀의 배에서는 경련이 일어나며 죄어들었다가 그 다음 순간 상반신의 폭신한 뱃가죽으로 구르듯이 내달아치고 있었다. 로브 안에 잠옷 말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독히도 또렷이 인식함과 동시에 허벅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러우면서도 엄청난 아른거림에 불현듯 섹스에 대한 욕구가 일어났다.
"슬론? 아, 페어차일드 양이죠?"
그가 물었고, 그녀의 머리는 멍청하게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카터 매디슨입니다. 이런, 제가 잠을 깨웠나보군요?"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헝클어진 머리와 로브 차림, 그녀의 맨발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여자의 드러난 맨발을 보고 피식 웃었다.
"네. 아, 죄송해요……."
손을 몸 아래쪽으로 내리려다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녀는
얼른 로브의 목깃을 다시 움켜쥐었다.
"전…… 전 오늘 일찍 도착하실 줄 알았거든요. 어쨌든 들어오세요."
그녀가 무거운 참나무 문을 좀 더 넓게 열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의 몸과 손에 든 물건들이 그 통로를 비집고 들어섰다.
"원래는 아침 첫 비행기를 탈 계획이었지요. 그런데 데이비드가 자기 축구시합에 오지 않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면서 곤봉을 휘둘러댔답니다. 전 공항에 전화해서 비행기 시간을 변경해야만 했고요. 방과 후에 열리는 시합이었기 때문에, 시합이 끝나고 햄버거와 셰이크로 축하파티를 마치고 나니까 마지막 비행기 시간에도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답니다. 알리시아가 전화하지 않았나요?"
"네."
"미안합니다, 그녀가 전화해 주기로 했었는데."
그가 한숨을 내쉬며 가방들을 마룻바닥에 내려놓았다.
"사실은 상관없어요."
그녀가 대꾸했다.
그는 어깨를 구부렸다가 몸을 쭉 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주 특이한 눈동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복도에 켜놓은 전등이 발산하는 약한 불빛 속에서도 그 밝은 갈색의 셰리주(남부 스페인 원산의 백포도주)색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눈동자는 반짝반짝 밝은 금발이 섞인 풍성한 마호가니색(적갈색) 머리와 똑같은 숱 많은 속눈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당신을 침대에서 끌어내는 불편까지 끼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처음에 내가 여기 머무는 것을 망설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한쪽으로 기울어진 그의 미소는 어느 정도 너무 자신만만하다 할만 했다. 아니, 약간 거만하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아주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슬론은 고집스레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몸 아래쪽에서 일어나는 전례 없는 이상한 소란을 떨쳐내려는 몸짓이었다.
"특별히 당신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매디슨 씨."
제발 유능한 여사장 같은 목소리로 들리길 바라며 그녀가 대꾸했다.
"침대와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집들은 대부분 부부가 운영을 하지요. 하지만 전 독신이기 때문에, 되도록 손님들을 부부나 여성들로 제한하고 있어요."
그의 눈이 평가하듯 그녀의 몸을 훑어 내려갔다.
"나쁜 아이디어는 아닌 것 같군요. 당신으로서는 페어차일드 하우스의 평판을 생각해야 했을 테니까요."
"바로 그렇답니다."
그녀는 대답하며 로브를 더 바싹 끌어당겼다. 그 눈의 탐험을 그녀의 몸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자제력을 잃을 것만 같았다. 거의 30년 동안을 조용히 편안하게 살아왔는데, 불과 2분 만에 그녀의 자제력이란 것이 엉망으로 뒤얽히며 낯선 단어가 되어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 정책으로 인해 운영상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까요?"
그녀는 과히 기분나빠하지 않으며 살풋이 미소를 지었다.
"거의 파산할 지경이긴 하죠. 사실 유료 고객이라면 누구든 모두 받아들여야 할 판이랍니다."
"내가 바로 유료 고객이지요."
그가 말했다. 그 부드러운 단언이 다소 은밀한 예언처럼 들렸다.
그녀가 도전적으로 몸을 곧추세웠다.
"전 당신이 저의 가장 친한 친구와 약혼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리고 결혼식 전에 소설의 마지막 장을 끝낼 수 있도록 한 달간만 숙소를 제공해 달라고 제 친구가 부탁했기 때문에, 당신이 머무는 것에 동의한 겁니다."
"잠자는 연인이죠."
"뭐, 뭐라고요?"
"잠자는 연인, 그게 책 제목이라구요."
"아."
"내 책들을 읽어봤습니까?"
"네."
"마음에 들던 가요?"
"어느 정도는. 전……."
"어떤 책들이 마음에 들었죠?"
"거의 대부분이오."
그의 호기심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대답이 그를 기쁘게 한 모양이지만, 그의 미소는 이미 동요하고 있는 그녀의 감각들에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따뜻하고, 약간 너무 개인적이랄 수 있었다.
"알리시아와의 일은 아주 잘됐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좋은 여자지요."
그가 대답했다.
"그래요. 전 사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말해보세요."
"전 사실, 짐이 죽고 나서 그 애가 절대 회복되지 못할 줄 알았어요. 그 애와 아이들은 짐의 죽음을 너무 크게 받아들였지요.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런데 언젠가 통화했을 때, 그 애의 목소리가 아주 행복하게 들리더군요.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당신이 법적인 자질구레한 일들을 모두 처리해 주셨다는 거 알고 있어요."
"사고가 났을 때 난 중국에 있었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가능한 한 빨리 돌아왔지요. 짐 러셀은 내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요. 그의 미망인을 돌보는 것은 잡일이 아니라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녀와 결혼할 정도로까지?
슬론은 왠지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침묵을 지켰다. 알리시아에게 그 얘기를 꺼내는 실수를 이미 저지른 바 있었던 것이다.
"이 결혼은 나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어, 슬론."
알리시아가 말했었다.
"짐이…… 하여튼 그 후로 글쎄,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이들이 나에게 얼마나 벅찼는지 너도 알지? 카터는 정말 대단해, 아이들과 나에게 너무도 잘 참아주었어. 하지만 그이도 이제 곧 한계에 다다를 것 같아. 그래서 마지막으로 돌진하기 전에 좀 쉬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알리시아."
슬론이 잠시 머뭇거렸다.
"너, 카터를 사랑하니?"
한참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짤막한 대꾸가 전해져왔다.
"물론이지, 난 항상 카터를 숭배해 왔어. 그와 짐은 제일 친한 친구였어. 그이는 나와 아이들을 돌봐주고 싶어 해. 그이는 우리를 사랑하고 있고 우리는 그이를 숭배하고 있어."
"알아, 알아."
자신이 말하려는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슬론은 약간 화가 났다.
"그 사람과 짐이 어떻게 함께 자랐으며, 어떻게 함께 학교를 다녔고, 형제와 다름없다는 내용이라면 수백 번도 더 들었어. 하지만 그게 그와 결혼하는 이유로 충분한 거야? 그는 짐이 아니라구, 알리시아."
"너무 잔인해, 슬론, 너무 잔인해! 짐을 사랑했던 것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절대 없다구. 하지만 난 카터를 다른 방법으로 사랑해. 제이슨이 한 짓 때문에 넌 남녀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회의적인 거야. 그 나쁜 자식한테 채이고 나서, 그 낡은 집에 꼭 틀어박힌 채 2년 동안이나 남자라는 존재 자체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이유가 그거잖아?"
친구의 말이 고통스럽게도 정확했기 때문에, 슬론은 사과하는 것으로 그 주제를 마무리지었다. 카터와 알리시아는 결혼 조건들에 이미 합의를 본 것 같았다. 또한 마음속 문제에 대해 누구와 상의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모양이었다.
회상에서 깨어나며 그녀가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이렇게 홀에 세워두다니. 방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당신의 친절한 대접에 불만은 없답니다. 침대에서 끌어낸 장본인이 어차피 나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다 자고 있습니까?"
"여섯 개 중에서 세 군데 침실에 손님이 들어 계세요.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모두 올라갔으니까 그렇겠죠?"
그 말은 사뭇 어두운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이 둘뿐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잠옷과 로브와 맨발 차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고운 핑크빛 혀가 불안하게 밖으로 나와 입술을 축였다.
"욕실 딸린 커다란 방을 원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녀가 허둥대는 손으로 계단 위를 가리켰다.
"복도 끝에 있는 마지막 문이에요."
그는 아직 올라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늦은 밤에 남자에게 문을 열어주는 게 겁나지 않았습니까?"
"알리시아에게 대충 설명을 들었어요. 그리고 책 뒤표지에 실린 사진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지요."
그의 눈썹이 화난 듯 찌푸려졌다. 눈썹 두 개가 마치 별개의 개체처럼 제각기 움직였다. 하나는 설득력 있게 위로 올라갔고, 다른 하나는 들쭉날쭉한 굴곡을 형성하며 눈 위에 곧게 직선으로 남아 있었다.
"맙소사, 그러지 않길 바랐는데. 내 에이전시가 그 브룩스 브라더스 정장을 고집했소. 사진 찍기 전에 내 머리까지 빗겼는걸요."
지금은 얌전하게 빗겨진 머리가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안개가 그 위에 반짝이는 베일처럼 내려앉아, 이마와 옷깃과 귀 위까지 스치고 있는 짙은 적갈색 머리카락에 간혹 이슬처럼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그는 예상외로 숱이 많았다. 그리고 군대식의 초록빛 낡은 재킷은 브룩스 브라더스에서 결코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사실, 그 옷은 1812년 전쟁 이래로 전쟁이란 전쟁은 모조리 겪은 듯이 보였다. 낡아빠진 청바지와 흠집 난 아디다스 운동화도 고급스런 가게에서 산 것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페르시아에서의 탈선’이란 책표지에서 슬론을 쳐다보던 윤기나는 흑백사진은, 지금 그녀에게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을 2차원으로 개작한 것만 같았다. 그녀는 손님에 대해 미리 알아두기 위해 어제 정신없이 어질러진 선반에서 그 책을 찾아낸 바 있었다. 알리시아였다면 이보다 더 심할 수도 있어, 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일단 그 책이 다시 선반 위로 자리를 잡고 나자, 그녀는 카터 매디슨의 외모에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그 간소한 사진은 살아 있는 그의 얼굴을 대할 준비를 하는 데 있어 전혀 충분하지 못하였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34년을 즐기며 살아온 주름진 얼굴이었다. 그의 나이는 알리시아에게 이미 들은 바 있었다.
웃어서 생긴 주름이 입가에 그려졌고 눈 양쪽에도 주름살이 자리 잡았다. 사진 속에서 상냥하게 미소 짓던 입술은 현실에선 나른하리만치 관능적이었고, 아래쪽으로 약간 구부러진 입술 사이에서는 하얀 이가 눈부시게 드러나 있었다. 사진 속에서 거만한 정중함을 나타내던 코가 현실 속에서는 길고 똑바르며, 거드름이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브룩스 브라더스 정장으로 감싸였던 그의 몸은 전혀 인상적일 것 같지 않았었다. 그런데 실제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여자에게 만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매력 그 자체였다. 단단하고 날씬하며, 강인함과 우아함을 겸비한 몸매. 키가 크고 넓은 체격이지만 어색한 기색이라곤 한 군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몸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처럼, 동작을 낭비하지 않는 것에 익숙한 듯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어디로 가죠?"
그녀가 퍼뜩 현실 속으로 정신을 되돌렸다.
"아, 방은 이미 준비되었어요. 피곤하실 테니 열쇠를 가져올게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아도 될 구실이 생긴 것에 감사하며, 그녀는 계단 뒤에 있는 사무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행동을 중지시켰다.
"당신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진 않지만, 전 사실 아주 배가 고프답니다. 비행기에서는 땅콩밖에 주지 않더군요. 유료 고객에게 자비로운 여주인께서 콘플레이크 한 그릇이라도 주실 수 있을까요? 다른 아무 거라도? 난 식성이 까다롭지 않거든요."
"저녁 식사는 소고기찜이었어요. 소고기 샌드위치면 괜찮을까요?"
"앞에 있는 남자는 콘플레이크로도 감지덕지할 사람인 걸요."
그가 가슴 위로 한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감탄할 만큼 매력적인지 신경쓰지 않으려 애쓰며, 슬론이 말했다.
"식당에 앉아 계시면 제가 금방 갖다 드릴게요."
그녀는 왼쪽 방을 가리켜 보였다.
스위치를 켜자 크리스털 샹들리에에서 스며 나오는 미묘한 불빛이 식당 전체에 그대로 쏟아졌다. 식탁은 아침 식사를 위해 벌써 준비된 상태였다. 그녀는 항상 저녁 식사 접시들을 씻은 다음에 아침 식탁을 차려놓는 습관이 있었다.
크리스털이 부드러운 불빛을 반사하는 가운데 은식기들이 빳빳한 리넨 천 위에서 반짝거렸다. 중간중간에는 차이나 접시에 담긴 냅킨들이 보초병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신선한 꽃들이 공식적인 분위기에 마음 편한 색채를 가미하며, 중앙 장식으로서 옛스러운 수프 그릇에 꽂혀 있었다.
"이걸 모두 나 혼자서?"
뒤로 돌아서니 그가 너무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그는 슬론의 자부심과 기쁨인 그 우아한 장식의 방을 감상하듯 찬찬히 살펴보았다. 코끝으로 안경을 내려뜨린 모습, 그녀는 그의 바라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전……."
"음, 분명 아침 식탁을 차려놓은 거로군요. 내가 부엌에서 샌드위치를 먹는다면 덜 힘들지 않겠소? 일회용 접시면 더 좋고?"
"별로 힘들 거 없어요."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보다 훨씬 큰 사람이 가까이 붙어서 있으니 그를 보기 위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만 했다. 그녀의 손이 옷감을 거머쥐며 로브 앞자락을 더듬어 올라갔다, 목 밑에서 땀에 젖은 축축한 손이 느껴질 때까지. 그곳에서 불규칙하게 고동치는 맥박이 부디 숨겨지길 기대하면서.
그의 눈이 한참 동안이나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오랫동안 로브를 움켜쥔 가냘픈 손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부엌은 어디 있소?"
"이쪽이에요."
그 말을 하면서도, 슬론은 지금의 행동이 대단히 규칙에 어긋난다는 걸 알았다. 손님 중 어느 누구도 부엌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남자 혼자인 손님을 그곳에 들이다니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잠자리 옷밖에 걸치지 않은 상태로, 식당에 앉아 있으라고 고집을 피우면서 어두운 홀에 서 있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일 터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의 요청에 굴복하면 안되는 거였다. 그녀가 주인이고 또한 경영자가 아닌가? 그녀의 권위가 어느새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터를 복도로 인도하는 일이 지극히 합당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계단 밑에 타자기와 가방을 남겨둔 채, 부엌에 들어설 때는 재킷도 벗어 들고 있었다.
슬론은 불을 켜고 그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에 몰두했다. 달랑 샌드위치 하나만이 아니라, 남아 있던 과일 샐러드, 초콜릿 케이크 한쪽과 커다란 컵에 담은 우유 한 잔도 첨가되었다. 우유는 그가 커피보다 그쪽이 더 좋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부엌을 돌아다니며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며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저주를 퍼붓는 중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그의 시선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이건 쓸데없는 짓이야.'
그가 누구인지 왜 여기 왔는지를 자신에게 일깨워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리시아는 데이비드가 축구 한다는 말을 하지 않던데요."
그래, 이게 안전한 주제이다.
방 안에 알리시아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녀의 부엌, 그녀의 작은 식탁에서 그가 한밤중에, 그녀가 그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먹고 있다는 은밀한 느낌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가운 아래로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걸 그가 알아챘을지 궁금해하며 그녀가 건너편에 앉아 있다는 사실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멍청하구나, 슬론. 누구나 옷 속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구.'
그는 한입 베어문 샌드위치를 삼키고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서 냅킨으로 입을 닦은 다음에야 대답했다.
"보통 애들 어렸을 때부터 시키잖소. 조그만 녀석들도 달릴 수는 있으니까."
"당신이 시합을 봐주는 게 데이비드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만해요."
그녀는 식탁 가운데 있는 설탕 그릇을 만지작거렸다. 방 안의 공기가 쌀쌀했다. 밤에 할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늘상 히터를 꺼버리기 때문이었다.
'제발 젖꼭지가 팽팽해진 것을 그가 눈치 채지 못했으면 좋겠어, 그 이유 또한 오해하지 않는다면 다행인데.'
그 단단한 팽창은 그녀에게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명백했다. 빨간 형광색 화살이 '날 좀 봐, 나 흥분했다구, 나 흥분해 있어.'라고 말하는 듯 그것들을 가리키고 있다 해도 이처럼 더 확실히 의식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데이비드와 아담이 둘 다 귀엽긴 하지만 남자의 손길이 필요한 건 분명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너무 귀여워해 주기만 하고 알리시아는 단호해지기 어렵지요. 그녀는 짐이 죽은 후로 늘, 엄격하게 굴면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나 다른 면에 상처를 주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답니다."
"그 사고는 정말 끔찍한 비극이었어요. 그 애들이 아버지의 죽음뿐 아니라 그로 인한 소문들 때문에 충격을 받았을 것은 확실해요."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그가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제기랄, 애초부터 그 레이스에 참가를 하다니 짐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소. 자기 생명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명까지 도박을 걸다니 어리석고 이기적이었던 거요. 그 녀석이 그 빌어먹을 차를 자랑스레 보여주었을 때, 난 당장 치워 없애라고 충고했었소. 그걸로 경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애원도 했소."
슬론도 그와 동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이런 말이 듣기 좋지 않다는 거 알고 있소. 하지만 알리시아와 아이들에게 그런 무책임하고 몹쓸 짓을 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라오."
그가 우유를 다시 한 모금 마신 다음 잔 너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난 짐의 제일 친한 친구이고 당신은 알리시아의 제일 친한 친구인데, 우리가 아직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니 우습군요. 결혼식에 왜 참석하지 않았었소?"
그녀는 그의 입술 끝에서 겨우 시선을 잡아떼었다. 그곳이 계속해서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음…… 전 이집트에 있었더랬어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이집트를 방문한 거요?"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제 부모님이 이집트 학자세요. 그분들이 3개월간의 여행을 같이 해야 한다고 억지로 끌고 가셨어요. 알리시아가 협박도 하고 울기도 하고 애원도 했지만, 저로선 어쩔 수가 없었어요. 부모님에게는 같이 가겠다고 약속을 했고, 결혼식을 위해 돌아오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거든요."
이 남자가 내 앞자락을 보고 있는 건가? 그래, 바로 그랬다. 오, 맙소사.
그녀는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가슴 위로 팔짱을 꼈다.
"음…… 이집트가 마음에 들었소?"
목에 무엇이라도 걸린 듯,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들렸다.
"괜찮았어요."
사실은 거기 있었던 순간순간이 지긋지긋했다. 그것은 오로지 부모님의 여행일 뿐이었다. UCLA 역사과 교수인 아버지와 부인이 되기 전에 연구 보조원이었던 어머니가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슬론을 설득했던 것이었다.
걱정했던 대로, 그녀는 집을 떠난 부모님에게 있어 집에서 했던 대로 급료를 주지 않아도 되는 하녀에 불과했다. 여행에 관련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짐을 싸고 옷가지를 챙기며 두 분의 약속시간까지 챙겨야 했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부모님은 일에 전념하지 않을 때면,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서로에게만 전적으로 전념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선 딸도 예외가 되지는 못했다.
"페어차일드 하우스를 운영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소?"
그녀는 그의 질문을 작가로서의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의 개인적인 성장과정 따위는 그에게 지루한 이야기일 테고 그녀에게도 또한 고통스러운 것이었기에, 그녀는 정중하고 일반적인 대답을 유지하기로 했다.
"사무용품을 제조 판매하는 회사에서 일했어요, 버뱅크에 있는."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의 이 아름답고 낡은 집을 위해 그 모든 걸 내던졌단 말이오?"
놀리고 있는 그의 눈이 호박색 불빛과 함께 춤추고 있었다.
"그건 정말 엄청난 희생이었어요."
그녀가 슬픈 표정으로 장단을 맞췄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이 집은 어떻게 얻게 되었소?"
"할아버지의 유언에 의한 거의 부수적인 소득이었죠. 부모님은 여기에 관심도 없었고, 난 이걸 보러 왔다가 단번에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깨닫게 되었어요."
그녀는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서 사직서를 내고 부모님께 자기 인생의 변화를 알린 다음, 몇 주일도 되기 전에 모든 이사까지 완벽하게 끝마쳤었다.
"이곳을 다시 만드는 데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돈을 모조리 써버렸어요. 그 전만 해도 이곳은 정말 한숨이 나올 정도였거든요."
"하지만 유니언 가 바로 옆이라? 맙소사, 그건 행운인 걸."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창고 바로 옆이었다구요. 그렇지만 않았다면 분명 누군가 이 건물을 사려고 시도했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서른쯤부터 이곳을 소유하시긴 했어도 몇 년간이나 비어 있었거든요. 창고는 그 후로 무너졌어요. 그래서 내가 진짜 요충지에 서게 된 거죠, 세금상의 표시가 있다면요. 하지만 실제로 세금은 전혀 내지 않았답니다."
그는 슬론이 기초부터 다시 세워야 했던 현대식 부엌을 둘러보았다.
"대단한 일을 해냈군요. 정말이지 이 집은 아주 멋집니다."
"감사해요. 이제 이익이 생길 때까지 견딜 수만 있다면……."
그 말을 매듭 짓는 대신, 그녀는 두 손으로 십자가를 그리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카터가 껄껄 웃었다.
"난 당신이 알리시아와 비슷할 줄 알았소.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군."
비참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슬론도 그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와 친구가 되었을 때, 알리시아는 UCLA 캠퍼스에서 미의 여왕이었다. 금발머리에 파란 눈동자, 동그란 얼굴에 보조개. 그런 알리시아 때문에 슬론은 가끔 퇴색한 실패자 같은 느낌에 젖곤 했었다.
슬론의 머리는 짙은 금발이었고 여러 가지 색으로 중간중간 밝은 줄들이 나타났다. 눈동자는 김이 서린 유리를 통해 보는 하늘색과도 같았다. 슬론의 몸매가 친구처럼 날씬하긴 해도, 모든 초과되는 부분을 잘라내고서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녀는 직업적인 또 다른 관심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카터의 철저한 시선을 뿌리치려고 애쓰며 가볍게 대꾸했다.
'작가들은 끊임없이 소재를 모으잖아, 그렇지 않니?'
"알리시아는 아름다워요."
"당신도 그렇소."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다가 식탁에 허벅지를 부딪히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좀 더 드시겠어요?"
접시를 향해 내미는 손이 떨리지 않길 기도하며 그녀가 불안하게 물었다. 그녀는 일회용 접시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됐습니다.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녀는 싱크대로 접시를 가져가서 그 위로 수돗물을 틀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그녀가 그를 지나쳐갔다. 어깨 위에 재킷을 걸치는 그의 상반신에 셔츠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아니면 허벅지 근육과 심볼의 형태가 청바지에 얼마나 멋지게 드러나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나님, 전 이제 한 가지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욕구불만의 노처녀가 되어가는가봐요.'
"방이 만족스러우셨으면 좋겠어요."
슬론은 왔던 길로 다시 그를 안내하면서 어깨 너머로 말했다. 그리고 나서 계단 아래 사무실까지 향했다. 열쇠들이 고리에 깔끔하게 걸린 캐비닛을 연 다음, 그 중의 하나를 집어 그의 손에 똑 떨어뜨렸다. 감히 그의 손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타자기를 놓을 만한 책상이 있을까요?"
"이미 하나 옮겨놨어요, 의자하고."
"고맙소. 방해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말할 수 없을 정도랍니다."
"전 사실 LA에서는 왜 끝낼 수 없는지 이해가 안돼요. 거기서 살게 될 거라고 알리시아에게 들었어요. 거기에도 공간이 있을 텐데요?"
"그렇지요. 해변 바로 가까이에 위치한 사랑스러운 곳이오, 모든 게 갖춰져 있고."
"그렇다면……."
"전화기를 포함해서. 그리고 모두가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랍니다. 알리시아의 어머니는 전화해서 내 어머니가 결혼식 때 어떤 색 옷을 입을 건지 물어보시겠지. 어머니께 직접 전화하시라고 말하면, 이렇게 대답하시지요. '오, 그분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그 다음에는 알리시아의 아버지가 전화해서 친구들과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는데 나오지 않겠냐고 물으시지요. 그리고 내가 일하는 중이라고 하면 이렇게 말씀하시지. '하지만 언젠가 먹기는 해야 되잖아.' 그 다음에는 알리시아가 전화하고, 그 다음에는 데이비드, 그 다음에는 아담 그 다음에는……."
"꼬마 아담이?"
그가 즐겁지 않은 상황을 그려내는 동안 슬론이 웃으며 물었다.
"그 애는 세 살밖에 안 됐는걸요."
"하지만 내 집에 전화 거는 방법은 알고 있다오."
그가 머리를 내저었다.
"난 그들 중 누구에게도 고함을 칠 수가 없소. 그들은 그 하나하나의 전화가 내 사고의 흐름을 얼마나 분산시키는지 알지 못한다구."
"결혼한 후에는 어쩌죠? 지금보다 더 쉬워지지는 않을 텐데요?"
"그렇소, 하지만 그때는 고함을 칠 수가 있지."
그들은 잠시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이 잦아들었을 무렵, 그들 사이에는 다시 한번 친밀감이 흐르며 서로를 또렷이 의식하게 되었다.
"글쎄요, 이곳의 방에는 전화가 한 대도 없답니다."
슬론이 얼른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이 훨씬 이상적으로 들리는군요."
"알리시아는 당신이 거의 하루종일 일할 거라고 말했어요."
지금의 목소리에 담긴 흥분된 울림을 그가 눈치 채지 못해야 할 텐데.
"마지막 장만 끝내면 된다면서요."
그들은 이제 계단 발치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방이나 타자기 그 어느 것도 들려고 하지 않았다. 음식을 먹는 동안 머리 위에 올라갔던 그의 안경이 다시 눈으로 내려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야를 더 잘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머리를 긁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더 헝클어졌을 뿐이었지만.
"그렇소, 하지만 그게 사람 잡는 거지요."
"그 책을 어떻게 끝낼지 모른다는 건가요?"
그녀의 한 손은 몇 시간이나 공을 들인 끝에야 고색창연한 빛을 낸 참나무 난간에 기대고, 다른 한 손은 허리춤의 로브끈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그들의 목소리도 주위의 침묵에 눌리는 듯 나지막했다.
일부 단추를 잠그지 않은 셔츠 아래로 보이는 그의 짙은 가슴털을 보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걸 만지고 싶은 욕망이 마음에 불을 당기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
"알긴 알지요. 하지만 남자 주인공이 악한을 물리치는 장면하고 두 주인공 사이의 마지막 러브신 장면이 남아 있다오."
"집중할 수만 있다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요. 당신은 그런 아슬아슬한 장면을 잘 쓰시잖아요. 그리고 잠자는 연인 같은 제목의 러브신이 문제될 것 같지는 않네요."
그의 미소가 큰 원을 그리듯 번졌다.
"하지만 잠자는 연인은 여자가 아니라오."
"그럼 남자란 말이에요?"
그녀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에게서 고개를 저으며 놀리는 웃음이 터졌다가, 미안한 듯 조용한 낄낄거림으로 그것이 잦아들었다.
"카터 매디슨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는 애써 화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연인이란 그가 맡은 임무에 대한 표현이오. 그것은 그의 정열이고, 그를 충동질하고 그를 열나게 만드는 것이오. 그런데 여주인공을 만났을 때, 그 중요성이 희미해지면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결정을 지배할 수 없게 되지.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시 언급되지는 않소."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뒤통수가 벽에 닿을 때까지 자신이 그와 벽 사이에 갇혀버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여자를 포기해야만 하나요?"
그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더듬어 찾았다. 피부에 닿는 그의 숨결, 따뜻하고 향긋한 그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어이없게도 그걸 맛보고 싶었다.
"그 결정은 남자 주인공에게 남겨둬야겠는 걸. 또 여주인공에 따라서도 달라질 거요. 강적에 맞서야 하고 그것으로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 여자가 남자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슬론은 갑작스레 부풀어오르며 아파오는 가슴을 가리고 싶은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자유롭게 사랑하지 못하겠죠. 남자도 강요하지 않을 테구요."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도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시켰다.
"아니, 그가 영웅이라는 걸 기억하시오. 영웅들은 결코 강간이란 수단에 의지하지 않지. 게다가, 그는 그녀가 자기와 똑같은 망설임을 느낀다는 걸 알고 있소."
"정말 여자가 그렇게 느끼나요?"
"거의 확실하오."
"그럼 결과가 슬퍼지겠군요?"
"최대한으로 달콤 씁쓸하지."
"읽고 싶은 생각이 안 나는 걸요."
"당신이 날 도와줘야 할 거요."
이제 그는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열기를 느낄 정도까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는 그의 안경 속에서 놀라면서도 미심쩍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입술이 환영하듯 반쯤 열리고, 막 키스 받으려는 여자의 달뜬 표정을 담으며 속눈썹이 내려지는 모습도 보았다.
잔인하게도, 양심이란 것이 그들을 감싸고 있던 관능적인 대화의 거미줄에서 그녀를 낚아올렸다. 그녀는 그에게 닿지 않으면서 첫번째 계단에 올라서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며 그와 벽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안내해 드려야죠."
그녀의 숨결이 헐떡이고 있었다.
"슬론."
그의 강한 손가락이 손목을 잡아오지 않았더라면, 처음으로 극히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불리워졌다는 사실이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그녀의 이름은 마치 시처럼 들렸다. 그녀는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을 내려다본 다음 그의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복도 끝 마지막 방을 찾을 능력쯤은 충분히 있다오."
심장이 멎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서로 바라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굳이 안내할 필요는 없소."
"그럼 아침 식사 때 뵙기로 하죠."
엄지손가락 밑으로 미친 듯이 날뛰는 맥박을 그가 느꼈을까?
"7시 30분에서 9시 30분 사이에 제공됩니다."
"침대로?"
조금도 힘을 늦추지 않은 손목 위의 손가락과 똑같이 그의 목이 단단하게 죄어들었다. 그녀는 그 손가락들이 두근거리는 가슴 위로 올라와 편안함을 주는 장면을 상상했다. 허벅지의 근육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감미로운 감각이었다. 그 위로 버터가 똑똑 녹아떨어지듯이.
"무슨 뜻이죠?"
"침대로 아침 식사를 날라주는 거요?"
"만약…… 만약에 손님이 식당에 내려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분…… 여자분, 아니 그분들 방으로 음식 쟁반을 날라드릴 수 있지요."
"난 그쪽이 더 마음에 드는군."
2
카터는 방의 창문 앞에 서서 샌프란시스코라는 멋진 도시 위로 번지는 아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최신 유행의 양장점들, 화랑들, 보도를 따라 레스토랑들이 쭈욱 늘어선 유니언 가의 구석까지 볼 수 있었다. 오늘은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연한 회색보다 약간 밝은 기류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 풍경을 차츰 또렷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날씨는 그의 기분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평생에 이보다 더 햇살 가득한 기분을 느낀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가슴에 부글부글 일어나는 지극한 행복감에 대하여 지독히도 죄책감이 일었다. 가장 형편없는 소설에 등장하는 최고로 비열한 불량배보다도 더 경멸스러울 것 같았다.
그는 벗은 어깨 너머로 파스텔톤의 시트 위에 아직까지 몸뚱이의 자국이 남아 있는 침대를 흘깃 뒤돌아 보았다. 그는 아무 죄의식도 갖지 않은 사람처럼 끄떡도 않는 바위처럼, 그렇게 잠을 잤다. 잠을 자본 것이 대단히 오랜만이어서일까. 바로 그랬다.
하지만 그 여자의 얼굴이 전혀 희미해지지 않고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고서야, 그의 눈은 평화롭게 감겼고 그리고는 통나무처럼 곯아 떨어졌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즉시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그의 꿈은 알리시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일. 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힘들고 짜증이 나면서도 영혼의 흥미를 자아내고, 마음을 비틀어 짜며, 감정을 고갈시키는 그 일. 마지못해 창문가를 떠나, 그는 타자기가 올려져 있는 방 한가운데의 작은 사각 탁자로 다가갔다. 타자기의 덮개를 벗기고, 그 옆에 깨끗한 종이 뭉치를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게 정리해 놓았다. 400페이지 이상의 아직 끝나지 않은 원고가 든 상자는 필요할 때마다 들춰보기 편하도록 오른쪽에 놓고서, 코 위로 안경을 올려 쓴 다음에야, 그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34년 동안 어젯밤의 그 여자만큼 그를 완전히 넘어뜨린 여자가 있었던가? 아니. 하나도 없었다는 점은 확실했다. 절대 틀림없는 정확한 기억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맨발 차림으로 현관문에 서 있던 그 여자는 무척이나 귀엽게 보였다. 수수한 연한 파란색에 보푸라기가 일어난 로브는 쌀쌀맞은 할머니나 입음직한 것이었다. 그 아래로 그는 연노랑색의 잠옷 테두리를 볼 수 있었다. 육체적인 갈망을 불러일으킬 만한 차림새가 아닌 것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그의 사타구니에서는 이상한 혼란이 일어났었다.
그녀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간 후에는 그 귀여움이 사라져 버렸다. 서랍에서 리넨 냅킨을 꺼내려고 몸을 굽혔을 때, 그곳에 팬티선을 경계 짓는 아무 갈라짐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는 귀엽다는 생각을 그만두고 공격적인 파란 가리개 아래 담긴 나긋나긋하고 날씬한 여성적인 몸매를 상상하기 시작했었다.
목에 샌드위치를 넘기기가 지독히도 힘에 겨웠다. 로브 앞자락을 구멍이라도 낼 듯 열심히 솟아오른 두 개의 까만 점을 보았을 때는 특히나. 맙소사, 그는 입에 문 샌드위치 때문에 하마터면 질식할 뻔했다.
물론 그녀의 젖꼭지가 왜 그렇게 긴장되었는지에 대한 착각은 하지 않았다. 여자에 대한 그의 강렬한 영향력 때문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단순히, 방이 추웠기 때문이었다.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결과는 똑같았고 원인이 다르다고 해서, 손은 물론이고 그의 눈을 그 봉긋한 가슴에서 떼어내기가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매력적이긴 하였지만, 그를 가장 매혹시킨 것은 바로 그녀의 눈동자였다. 그 눈은 아름다웠다, 회색빛으로 덮인 미묘한 파란색.
그 눈동자가 드러내고 있는 것들에 대해 그녀 자신은 모를 것이었다. 그 눈 속에는 슬픔이 숨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갈무리된 고통과 아픔과 신중함이. 그녀는 너무나 많이 얻어맞아서 다시는 모험할 용기조차 없는 작은 동물과도 같았다.
그가 위층으로 올라오기 직전, 그 작은 동물의 두려움에 찬 경계심은 최고조에 다달았었다. 그 두려운 듯한 표정이 그녀에게 키스하는 것을 막은 한 가지 이유였을 것이었다.
키스하다니, 이런 제길. 그가 기꺼이 자신에게 허락하려던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은 유일한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녀의 표정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알리시아란 여자가 누구인지 거의 존재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를 만지지 않으면 폭발해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뜨겁고 사나운 갈망이 가득 차오르며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의 심장이 귓가에서 퍼덕이며 양심에서 외쳐대는 따가운 훈계들은 모조리 사라져갔다. 양심, 의무, 책임감, 도덕적인 생각 따위, 그런 것들은 죄다 지옥에나 가라고 해. 그순간 그는 온통 육체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녀 눈 속에 담긴 두려움만이 그 행동을 가로막은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이런 제길.
이제 그는 의자를 밀어내고 우리에 갇힌 고양이처럼 탁자 주위를 뱅뱅 돌았다. 바짓자락에 힘껏 두 손을 닦아냈다, 그녀를 얼마나 만지고 싶었는지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땀이 솟았기 때문이었다.
"이 음탕한 개자식아."
그는 자신에게 호통을 쳐댔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해도, 슬론 페어차일드가 정숙한 여자이며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안다면 틀림없이 굴욕감으로 죽어버릴 것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넌 그 여자의 제일 친한 친구와 약혼한 몸이다, 제발 그걸 생각해."
그는 역겨움을 느끼며 그 사실을 자신에게 일깨워주었다.
"넌 죄를 짓는 거야, 이 놈아."
슬론의 지붕 밑에서 한 달간을 보낸다면 완전히 다른 의미의 죄를 저지르게 될 거라 그는 생각했다.
책상 위의 원고가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맞아."
그는 호되게 매를 맞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저것 때문에 여기 온 거야. 일하려고."
그는 두 손을 엮어 안팎으로 돌린 다음 쭉 뻗고 나서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새하얀 종이를 노려보다가 타자기 자판 위로 두 손을 가만히 내렸다. 갑작스런 영감이 떠올랐다. 책 속의 주인공이 한밤중에 대충만 걸쳐 입은 아름다운 여인의 현관 앞에 도착했다면 어땠을까?
"바보 같은 질문이군."
카터는 스스로를 경멸하듯 중얼거렸다.
"이건 소설이라구. 내가 쓰려고만 하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어."
그는 이윽고 마음의 고삐를 자유로이 풀어놓았다. 그가 그레고리라면, 보통 양심에 복종하는 점잖은 카터 매디슨이 아니라 이 책 속의 영웅이라면, 매력적인 페어차일드 양을 부엌까지 따라갔을 것이다. 로브 앞자락에 솟아 있는 젖꼭지를 본 순간 식탁으로 손을 뻗어 그걸 만졌을 것이다, 천천히 의도적인 동작으로 어루만지면서 그것이 진주처럼 동그랗고 딱딱해질 때까지.
'이건 미친 짓이야, 카터.'
그의 양심이 경고해왔다.
'상관없어. 상상일 뿐인데, 그것뿐인 걸.'
그의 리비도(성적 충동)가 되받아쳤다.
'게다가 생각이 겉으로 드러날 일도 없잖니.'
그레고리는 한 손을 휙 휘둘러 식탁 위를 깨끗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를 홱 안아 올려서…….
아니, 아니, 아니야. 그건 전혀 기교적이지가 않아. 세련되지도 않고.
식당 바닥이라면? 거긴 너무 차갑다. 이것 역시 세련된 방법이 못돼.
잠깐, 바로 그거야!
그는 천천히 그녀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녀는 수줍어하면서 머뭇거리겠지, 일시적으로 저항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술이 키스하는 순간, 그녀는 모든 걸 잊고 그에게 딱 달라붙는 거다. 그의 팔은 그녀를 꽉 감아 안을 것이다. 더욱 진하게 키스하면서, 칼집 속의 칼처럼 그녀의 입 속으로 매끄러운 혀가 들어가겠지, 그는 그녀를 눕힐 싱크대까지 뒤로 밀어갈 것이다. 로브의 끈을 풀면 그녀가 싫다는 듯 몇마디 중얼거리겠지, 하지만 결국 그녀는 허락할 것이다. 그 다음에 그의 두 손이 천천히 로브를 벌리고 그는…… 아마 그 로브처럼 정숙하면서도 볼품없는 노란색 잠옷을 발견하겠지.
"빌어먹을."
카터는 큰 소리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고 말았다. 손등으로 눈두덩을 누르면서 그레고리라는 주인공에게 닥친 문제들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아보았다. 하지만 꽉 죄인 청바지 아래서 퍼덕이는 카터 자신의 문제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건 너의 환상이라구, 바보 같으니. 잠옷이 없는 것으로 해야지, 그녀가 아무것도 입지 않아야…….'
그의 두 손이 천천히 로브를 벌리면 그는…… 그녀의 젖가슴을 볼 것이다, 가장 최소한의 자극으로도 반응할 산호빛 젖꼭지가 솟아 있고, 갈망으로 심하게 들먹이는 젖가슴. 그는 키스를 계속하면서 그것을 만지겠지. 쓰다듬겠지. 희롱도 해가며. 그런 다음 머리를 숙여 입 속으로 그 한 개를 넣어 부드럽게 빠는 거야. 그녀는 이제 거칠어지면서 낮은 신음소리를 내겠지. 그리고 그에게 두 다리를 감을 것이다. 그가 약간 물러나 혀끝으로 젖꼭지의 형태를 그리면, 그녀는…….
"매디슨 씨?"
"뭐야?"
그가 의자에서 총알처럼 튕겨 일어서며 소리를 쳤다. 홱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종이뭉치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의자가 뒤로 쓰러졌다. 안경을 낚아채는 순간 안경다리까지 부러지고 말았다.
슬론은 한 손에 천으로 덮인 커다란 은쟁반을 든 채, 다른 손으로는 그의 난폭한 반응으로 달라붙은 듯이 문고리를 쥐고서 문 바로 안쪽에 서 있었다.
그가 다가오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축였다.
그는 상상 속의 정열에서 정신을 차려 초점을 잡으려고 열심히 눈을 깜박였고, 아직까지 거칠게 남아 있는 숨결을 다잡으려고 애를 썼으며, 사타구니에서 불길이 일지 않은 척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는 또한 슬론 페어차일드 같은 숙녀를 지저분하고 음탕한 환상에 끌어들일 만큼 비열하지 않은 인간인 척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노력 중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전…… 전 노크를 했어요."
그녀가 높은 목소리로 겁을 내며 말했다.
"미안해요, 슬론. 난…… 음……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소. 이리 줘요, 내가 받지요."
그는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서다가 경계하듯 움츠리는 그녀를 본 순간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는 상황을 가볍게 만들어 보려고 시도했다.
"그런 식으로 고함을 쳐서 놀랐군요. 다시 한번 사과하겠소. 미안하오."
"노크해도 대답이 없길래, 전 걱정이 돼서……."
그는 그녀에게서 쟁반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대신 문틀에서 석상처럼 선 채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신중함이 여전히 그녀의 눈 속에 남아 있었고, 햇살 가득하던 그의 기분은 이제 그 날의 날씨처럼 우울하게 구름이 덮였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지만, 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를 필요로 하는 한 여자와 두 소년들이 있다. 그가 비록 알리시아에 대해 한 번도 정열적인 환상을 가져본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아마 가장 안전한 종류일 것이다. 한순간에 행복의 절정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사랑?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냐?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게로군. 사랑은 이렇게 빨리 일어나지 않아. 두 사람 간에 사랑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때로 몇 년이 걸리기도 하는 거라구.
하지만 슬론의 뿌연 심연 같은 눈 속에 소용돌이치는 당혹감을 보면서, 그는 그녀가 또다시 심하게 상처받고 말았다는 걸 알았다. 그 모습에 그는 가슴이 아려왔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뜨거울 때 드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가 고갯짓으로 쟁반을 가리켰다. 노크에 대답이 없을 때, 왜 아래층으로 돌아갔다가 나중에 다시 오지 않았단 말인가? 그때쯤이면 이 남자도 셔츠를 입고 있었을 텐데. 지금 그가 걸치고 있는 거라곤 달랑 청바지 하나뿐이었다. 그의 벗은 가슴을 보는 것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껏 그녀에게 일어나는 현기증을 전혀 소멸시키지 못하였다.
그는 돌아섰고 그녀는 참고 있던 숨을 겨우 토해내었다. 곱슬거리는 짙은 색의 털로 덮인 넓은 가슴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다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영상만은 눈앞에서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단련된 근육 위로 가슴털이 소용돌이치며 평평한 배까지 매끈하고 윤기 나게 자리 잡혀 있었다. 그리고 바지 속으로 멋진 선을 그리며 좁아들었다.
"같이 들겠소?"
"아뇨."
너무 빨리 너무 큰 소리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는 셔츠를 입는 중이었다.
'감사한 일이야.'
그의 등은 매끄러웠고, 검게 그을린 피부 아래서 근육이 잔물결처럼 일렁였다. 그것이 그의 가슴만큼이나 만지고 싶은 유혹을 불러 일으켰다.
놀란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그녀는 대답을 더 부드럽게 바꾸었다.
"아뇨, 사양하겠어요. 다른 손님들이 식당에서 식사하고 계세요. 전 거기 있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도와드려야 해요."
"난 똑같은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인가?"
분위기가 얼마나 즐거움으로 춤추고 있든지에 상관없이 그의 휘어진 눈썹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는 그녀를 놀리면서 고의적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너덜너덜해진 신경조직은 그걸 받아낼 여력이 없었다.
"물론 아니죠."
그녀가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가 없답니다. 그분들은 여섯이고 당신은 하나이니 과반수 법칙에 의해 생각해 본다면 명백해지겠죠. 당신은 방으로 음식을 갖다달라고 요구했어요. 그 생각은 다시 한번 고려하시는 게 나을 것 같군요. 그리고 혼자 오신 남자 손님과 내가 한 방에 있는 걸 다른 손님들이 좋아할 것 같지는 않군요. 나중에 쟁반을 찾으러 오겠습니다."
그녀는 문을 쾅 닫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창문이 덜거덕거리는 걸 보면 생각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건 모두 알리시아 잘못이야."
그녀는 침착을 되찾으려는 불안한 여자처럼 한 손으로 단정하게 쪽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서면서 다음에 친구를 만나면 목을 졸라버리겠다고 맹세하였다.
알리시아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아둔하다는 것? 카터 같은 남자를 여자에게, 어떤 여자에게라도 보내는 것은 미친 짓이다. 미끼에 달려드는 물고기처럼 여자들이 그에게 미혹될 것을 그녀는 몰랐던 것일까? 그리고 슬론이 얼마나 좋은 친구이든지간에, 얼마나 둔하고 믿을 만하고 충실한지와는 상관없이, 그녀 또한 죽은 여자가 아니라는 걸 몰랐던 것일까? 카터 매디슨의 매력에 견딜 수 있는 여자는 아마 죽은 여자뿐일 것이었다.
식당 바로 앞에서, 슬론은 몇 번이나 숨을 가다듬고 상냥한 여주인으로서의 미소를 얼굴에 띄운 다음에야 안으로 들어섰다.
"오렌지 머핀 더 드시겠어요?"
"네."
모두가 합창으로 대답을 했다.
그녀는 부엌에서 머핀 바구니를 하나 더 들고 와서, 오늘 아침 출발하는 손님에게 건넸다.
"이따 차에서 드세요."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페어차일드 양. 고마워요."
그 부부는 메인에서 출발하여 서부 해안까지 차로 횡단하는 계획을 세운 사람들로, 그날은 그 긴 여정을 다시 돌아가는 첫날이었다.
"어니스트와 나는 당신 같은 주인이 있는 이곳에 묵을 수 있어서 아주 즐거웠답니다."
슬론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려는 친구들에게 페어차일드 하우스를 꼭 권해 주세요."
"물론이지요."
어니스트가 오렌지 머핀을 입에 가득 문 채 대답하였다.
두 명의 은퇴한 여교사들은 이번 주 말까지 머물 계획이었고, 은행가와 그의 부인은 내일 모레 아침에 출발할 것이었다. 슬론은 그들의 계산서를 머릿속으로 합산해 보며 세금 영수증을 지불할 정도만이라도 되기를 기도했다.
모든 사람들의 커피잔을 다시 채워주고 나서, 그녀는 부엌으로 돌아와 자신도 커피를 한잔 마시기 위해 자리 잡았다.
페어차일드 하우스를 연지 9개월. 그동안 그녀는 말 그대로 간신히 살아나가고 있었다.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이전 고객의 추천을 받았다는 누군가가 예약을 하곤 했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침대와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집으로 유명한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슬론의 집이 그 중 가장 새 것이었다. 슬론은 내년 봄쯤, 여행 잡지와 대도시 신문의 일요일자에 이 집의 광고를 실을 수 있길 바라고 있었다. 그 때까지는 아주 빠듯하게 생활해야 했다. 거의 파산할 지경이지만, 어쨌든 살아남고 있긴 하였다.
지긋지긋한 직장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사 왔을 때, 그것이 그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살아남는 것.
제이슨 하버드와의 약혼은 잔인하고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고하며 끝이 났다. 부모님은 사랑에 실패한 딸의 실망감을 애석해한 다음 곧바로 자신들의 지저분한 책과 도표로 돌아갔었다. 딸의 비통한 인생에서 흥미로운 파라오로 관심을 돌려버린 것이다.
그녀는 애초부터 받기를 포기한 채 부모님을 사랑했고, 그분들께 딸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분명 사랑한다고 말하시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 주위에 있으면 그녀는 인생의 기초적인 일들을 처리해주는 편리한 하녀 정도밖에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다른 주제의 대화를 시도하려 하면 고대 역사에 대한 그들의 정열을 이해하지 못하는 귀찮은 존재가 되든지. 그분들의 애정은 우연히 눈을 들어 그녀를 보고 딸아이가 존재하고 있었구나를 기억했을 때만 진실하였다.
요컨대 결론은, 그녀가 나머지 인생동안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부모님도. 제이슨도 - 호탕하게 웃곤 하던 잘생긴 제이슨 - 그녀의 마음을 빼앗고, 처녀성을 빼앗은 다음 어느 날 밤 너무 따분해서 더 정력과 흥분을 느낄 만한 다른 여자가 필요하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던 남자.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으며,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며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아는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모든 게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유언으로 남겨주신 돈과 UCLA에서 따낸 경영학 학위, 요리를 좋아한다는 점을 모두어 소망과 기원을 갖고서, 그녀는 페어차일드를 그럴 듯하게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밤마다 수많은 책들을 뒤지며 골동품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부동산 판매 정보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페인트 붓이나 벽지를 바르지 않은 상태에서도 예쁘고 실용적인 장소가 되리라는 희망에 사로잡혔었다.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그 집의 방들은 장식이 되어갔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다 해도, 그녀는 자신이 성취한 일에 은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인생을 쏟아부을 만한 남자와 아이들이 있다. 그 여자들은 로맨틱하고 비실용적이면서 때로는 무책임할 만한 여유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남자가 돌보아줄 것임을 알기 때문에.
하지만 슬론은 형편이 달랐다. 현실적이고 독립적이며 검소해야만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이 병원에서 데려온 그 순간 부모로서의 의무를 포기했다는 걸 맨 처음 알아차렸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배웠다.
자신에게 운명지워진 메마른 노처녀의 운명이 닥치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으리라는 소망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꿈꾸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왜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지 따위를 고민하면서 귀중한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오늘 아침 낭만에 대한 그녀의 관점은 평소보다 더 메마른 것 같았다. 이런 실망스러움이 날씨와 관련 있는 걸까? 아니면 위층의 그 남자 때문일까?
아니다, 그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제일 친한 친구의 남자였고, 그렇지 않다 해도 그 정도의 수완에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남자가 그녀처럼 평범한 여자에게 끌릴 리가 없다. 절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침 식사 쟁반을 찾으러 갈 정도의 용기를 모으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녀는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며, 반쯤은 대답이 없거나 바쁘다는 호통소리가 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냥 떠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대신 들어오라는 그의 대답이 문 사이로 명료하게 들려왔다.
"일하고 계신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녀가 들어서며 말했다.
"방해받는 걸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
그는 작업 중이 아니었다. 두 손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끼운 채 창문가에 서 있었다.
'자기 살처럼 탱탱하군, 불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그는 옷을 다 차려 입은 모습이었다. 셔츠의 단추는 잠겼고 - 거의 다 잠겼다고 해야겠지, 어젯밤 신었던 것과 똑같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샤워도 끝낸 모양이었다. 방 안에서 남성적인 비누 내음과 상쾌한 오 드 콜로뉴 내음이 났다. 턱도 금방 면도한 듯 보였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에 불안한 손으로 빗어 넘긴 듯한 흔적이 역력했다.
"일하지 않소."
아까 산산이 흩어졌던 종이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그가 조롱하듯 말했다.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들이 여러 장 던져졌고, 그의 안경은 텅 빈 타자기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나자빠졌던 의자는 바로 세워졌지만 책상 앞 똑바로가 아닌 비스듬히였다.
"이번에는 무장이라도 하고 오셨나, 위험한 상태인가?"
그의 한쪽 눈썹이 익살스레 이마로 올라갔다.
그녀의 톡 쏘는 어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비꼬는 걸로 들렸다면 용서하세요. 하지만 매디슨 씨, 사실 전……."
"슬론, 매디슨 씨 따위로 부르는 건 그만두시오. 난 카터요, 알겠소?"
그는 대단히 화가 난 듯이 한 손바닥에 다른 손의 주먹을 쾅 내리쳤다.
그녀의 마음에 처음으로 짜증스런 신호가 피어올랐다.
"그럼 좋아요, 카터. 쟁반을 가져가도록 허락하신다면, 당신을 조용히 남겨두고 다시 일하도록 해드리겠어요. 그게 제가 온 목적이었죠."
그녀는 꼿꼿이 몸을 세우고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로 테이블을 향했다. 리넨 천으로 덮인 접시들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 앞으로 감아오는 그의 팔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크고 강한 손이 그녀의 손을 만류했다.
"미안하오."
그 말이 낮고 우르릉거리는 떨림으로 그녀의 귓가를 채웠다. 그와 동시에 팔에 전류가 치닫더니, 견딜 수 없는 열기가 온몸으로 뒤따랐다.
"특별대우를 기대한 건 아니었소. 아침 식사는 아주 맛있었소."
그의 손이 물러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방도 매력적이오."
"감사합니다."
"몇 주 만에 아주 달게 잤소."
"다행이군요."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정말 굉장하구나, 슬론. 이런 식으로 해. 그러면 그가 금방 나가라고 쫓아버릴 거야.'
그녀의 머리와 입은 서로간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더 이상의 조리 있는 반응을 만들 수가 없었다. 머리 하나 사이로 그가 서 있으니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심하게 군 점은 용서하시오. 그렇다고 매디슨 씨로 계속 부르는 게 좋다는 건 아니오. 이름을 부르시오. 글을 쓰려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면 난 완전히 괴팍해져 버린다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말이오."
그가 허락한 조그만 공간 속에서, 그녀는 몸을 돌려 그의 셰리주 빛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왜 그러죠? 힘든 부분인가요?"
얄팍한 정신을 가누기 위해, 그는 한걸음 물러났다. 그것이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그렇소. 꽉 막혔어. 머리는 왜 그런 식으로 틀어 올렸소?"
두 문장이 너무나 다른 내용이었기에 그녀가 의미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이윽고 말뜻을 이해하자, 목덜미의 쪽진 머리로 손이 올라갔다.
"어디가 잘못됐나요?"
여성적인 허영이 담긴 질문이었다. 핀이 보이는 걸까?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나?
"아니, 아니오. 잘못된 건 없소. 그냥, 음, 단지 난 어젯밤의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들어서 그랬소. 느슨하게 풀은 것이…… 야성적이고…… 섹시해서."
그녀는 힘겹게 침을 삼킨 다음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그의 눈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냈다.
"글쎄요, 야성적이고 섹시한 건 침대와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이런 집의 주인에게 손님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니지요."
"남자 손님들의 여론을 조사한 건 아니겠지."
그의 눈동자가 다시 놀리는 듯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처럼 활활 타오를 때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소년 같은 장난스런 눈동자일 때인지. 하지만 둘 다 그녀의 균형감각을 쳐부수는 효과를 충분히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똑바로 세우며 테이블로 돌아섰다. 그리고 서둘러 말했다.
"전 일하러 가야 해요……."
"잠깐!"
그의 날카로운 외침에 그녀가 놀라며 몸을 돌렸다.
"잠시 날 도와주시오."
"무슨 일을요?"
"내 책에 대해서."
"전 글쓰기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걸요."
"글쓰기가 아니오. 난 시험해볼 여자의 몸이 필요하거든."
어쩌면 모욕당한 표정으로 얼른 쟁반을 들어 올리며 호통을 쳐야 마땅했으리라. 그런데 그녀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말씀하시는 그런 의미는 물론 아니시겠죠."
그도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내 표현을 고쳐야겠군요. 그레고리는 여주인공에게 정보를 얻어내려고 애쓰는 중이오, 알겠소?"
"그레고리가 누구죠?"
"남자 주인공. 그리고……."
"여자 이름은 뭐예요?"
"리사. 남자는 계속해서 추궁하고 여자는 열심히 반항을 하지. 하지만 남자는 이 소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난 어느 정도로 거칠게 굴어야 남자가 자신의 말을 이해시키면서도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은 거요. 그것을 위한 여자의 몸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소. 알겠소?"
"그건 여자에 따라 다르지 않겠어요? 제 말은, 그녀가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 혹은 여자 레슬링 선수나 싸우는 기술에 능숙하다면, 분명 쉽게 상처받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아니. 리사는 부드럽고 여성적이오. 가냘프지. 당신처럼."
그녀의 손이 목으로 올라가 수줍게 옷깃을 매만졌다.
"무슨……."
목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무슨 행동을 하고 싶으신데요?"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테이블에서 떼어냈다.
"좀 더 여유 있는 곳에서 합시다. 당신의 고풍스런 도자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소."
그가 그녀의 앞에 마주선 다음 손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이제 막 시합을 시작하려고 링에 올라선 권투선수처럼 근육을 풀어댔다.
"좋아요. 난 방금 당신을 가격만 적당하면 어느 편에게도 몸을 파는 창녀라고 불렀소 - 사실 창녀보다는 약간 더 심한 말이었지."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구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믿을 수 없어하며, 그녀가 얼른 고개를 저어 정정했다.
"제 말은, 그 사람이 여자를 사랑하느냐구요?"
"그렇소. 하지만 그녀가 나쁜 녀석들을 잡을 수 있는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길러준 삼촌이 그 녀석들한테 협박받고 있다는 이유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라오."
그가 깊이 있게 흥분된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것이고, 당신은 나와 여러 번 같이 잤었기 때문에 이중으로 모욕을 받은 셈이지."
슬론은 '당신과 나'라는 식으로 불리우는 것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레고리와 리사로 불렸다면 불필요한 상상없이 더 편했을 텐데.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 때리려고 접근해 보시오."
그녀는 그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일부러 한동안 바닥만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손을 쳐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다음에 깨달은 것은 몸이 홱 돌려지며 그의 가슴에 등이 부딪혔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들어 올린 손은 어깨 사이로 뒤틀린 채 잡혔고 다른 손은 두 사람의 상반신 사이에 끼워졌으며, 쇳덩이 같은 남자의 팔이 그녀의 목에 둘러지며 어깨 위로 옥죄어왔다. 그녀의 머리를 어깨로 누르는 사이 그의 딱딱한 볼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 쪽 지었던 그녀의 머리는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카터."
그녀는 빠져나오려 애쓰며 분노에 찬 숨을 들이켰다.
"놔주세요."
"내가 아프게 했소?"
그녀가 몇 번이나 큰 숨을 들이쉬었다.
"이건 공평치 않아요.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미리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미안하오, 하지만 그게 리사가 느꼈을 법한 감정이지. 난 당신에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반응을 끌어내야 했소. 내가 당신을 아프게 했나?"
그가 다시 물었고 그녀는 침착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아뇨."
그리고 성실하게 대답했다. 어느 곳도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또한 도망갈 방법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엾은 리사! 만약 그레고리가 카터처럼 행동했다면, 그녀는 몸을 누르고 있는 억압만큼이나 그의 매력적인 몸을 가까이 느낀다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떤 느낌이 들지?"
'엉덩이에 바지 앞자락 문대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기절할 것 같은 느낌이에요.'
"무서웠어요."
그녀로서 할 수 있는 진실한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내부에 일으킨 감각들이 두려웠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또 상처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데도?"
"그래요."
그녀는 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정열과 폭력은 때때로 동반되는 것 아닌가요?"
맙소사, 그는 왜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벌을 주는 걸까? 몸에 닿은 그의 두 다리가 나무통만큼이나 단단하고 길었다. 귓가에 느껴지는 그의 숨결은 젖가슴과 허벅지 사이의 어느 곳인가에 즐거운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사랑에 상처받은 여자에게 있어, 그것은 눈앞에 펼쳐진 미식가의 잔치를 빤히 보면서도 정작 즐길 수는 없는 그런 느낌, 절박한 굶주림이었다.
슬론의 양심과 친구에 대한 우정은 쉽게 깨어질 수 없는 강한 사슬과 같았다. 하지만 그 사슬도 굶주림을 약화시키지는 못하였다.
"당신이 리사라면, 어떻게 하겠소?"
만약 그녀가 리사라면, 아마도 그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모조리 말하면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이 아닐 터. 그래서 그녀는 감각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엄격히 현실적인 것에만 집중해보려고 노력했다.
"모르겠어요. 아마 몸부림치겠죠, 자존심이 상한 것 이상의 다른 이유가 없다면."
"좋소, 몸부림을 치시오."
우선은 시험 삼아 움직여 보았다. 그런 다음 움직임이 더 강해졌다. 하지만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고, 그것은 절묘하면서도 놀라웁게 두 사람의 몸을 비비는 결과밖에 초래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블라우스가 허리춤에서 빠져나왔다. 치마는 다리에 휘휘 감겼고, 머리채도 또한 목덜미까지 흘러내렸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던 손은 우연히, 하지만 명백하게 그의 바지 앞부분이 지퍼가 아니라 단추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소용없어요."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하소연했다. 몸부림친 것만으로 헐떡이는 건 아니었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내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말해주겠소?"
그녀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고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그의 팔이 풀려 나가면서 몸이 자유로워졌다. 그 순간 그녀는 몸을 홱 돌려 총알처럼 그의 발등을 뒤꿈치로 찍어 내렸다.
고통과 경악이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그녀가 미처 빠져 나가기도 전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몸으로 다이빙하듯 침대로 밀어붙이자 두 사람의 몸은 그대로 맞붙어 버렸다. 이제 슬론은 진심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가 그들의 심볼을 만족시킬 만한 자세로 그녀의 위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또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연달아 내치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힘겨운 헐떡임이 조용한 방 안에 꽉 들어찼다. 머리를 그녀의 옆에 대고 숨을 가다듬으면서도 그녀의 손목을 쥔 그의 주먹은 결코 헐거워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그녀의 바로 몇센티 위에 얼굴을 들었다.
"아주 좋았어."
그가 뒤틀린 미소로 인정했다.
"거의 성공할 뻔했지."
그의 몸무게가 그녀를 매트리스에 내리누르고 있는 느낌은 좋았다, 아주 좋았다. 그녀가 떨리는 숨을 쉴 때마다, 그의 가슴팍에 닿은 젖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싸우는 동안 열심히 발길질하던 두 다리는 이제 수치스러운 자세로 약간 벌어진 채 뻗어 있었으며, 허벅지 사이에 그의 단단하고 풍성한 압박이 닿은 것을 완벽하게 느꼈다. 마치 완성되지 않은 전기 결합처럼, 그 지점에서 불꽃이 튀기면서 따끔거리는 쾌감이 두 사람을 뒤덮어 버렸다.
"당신이 나를 제압한 후에, 원하던 정보를 듣게 되나요?"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 위로 흐르는 불길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렇소, 결국은."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죠?"
그녀의 목소리도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불안정하고 낮게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그녀의 목으로, 더 아래로 미끄러졌다. 격렬한 몸싸움 와중에 블라우스의 윗단추 두 개가 풀려진 그곳. 레이스로 엮은 브래지어 위로 우윳빛 젖가슴이 봉긋 솟아 있었다. 그는 질끈 두 눈을 감으며 그 매끈한 계곡으로 입술을 내리는 환상을 지워버리려 애썼다. 레이스의 곡선을 따라, 아니면 그 경계선을 지나 자신의 혀가 젖꼭지를 찾아내는 상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이윽고 눈을 뜨며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을 때, 그는 그녀의 눈 속에 서린 아련한 빛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도 그와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사랑을 나누지."
그가 속삭였다.
두 사람의 눈동자는 더 말하지 않은 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흐느낌이 목에서 새어나왔지만, 고통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 부정을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들어 올리자 그녀는 침대에서 튕기듯이 일어났다.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옷매무새를 고치고 머리에 달랑달랑 매달린 핀들을 뽑아 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마치 증거를 은닉하는 범죄자처럼.
떨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가능한 한 열심히 매만졌다. 어느 순간 의자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금세 타자기에 종이 한 장을 끼워 넣고 리듬감 있게 타자기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그녀도 못할 이유가 없다.
그녀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 리넨을 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자국이 남아 있는 베개를 만지는 것치고 대단한 대가를 지불했군.'
침대가 다 정리되자, 그녀는 조심스레 테이블로 걸어가서 쟁반을 들어 올렸다.
"도와줘서 고맙소."
그가 조용히 말했다. 다시 안경을 쓴 모습이었다.
"별 말씀을요. 도움이 되셨나요?"
"그런 것 같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어."
"어떻게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시오."
그의 입술은 긴장되어 있었다.
"전 잠시 외출할 거예요. 점심 식사는 원래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하지만 만약……."
"어디 가는데?"
"음…… 부두에 가서 저녁 식사 때 쓸 게를 좀 사려고 해요."
그가 기운차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도 같이 가겠소."
3
"안돼요."
그녀의 지나치게 격렬한 반대에 둘 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안 되지?"
재미있다는 표정을 성공적으로 숨기지 못한 그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그럴 듯한 변명을 만들어내려고 머리를 굴렸다. 뭔가 확실하고 명료한 이유가 되어야만 했다.
"일하셔야 되잖아요. 그래서 여기 오신 거구요,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하기 위해서."
"하지만 베스트셀러 작가들이라도,"
그가 의례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절했다.
"하루쯤은 쉬어야지."
그의 미소가 너무나 다정해서, 그녀는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난 아직 이 장소에 대한 감각을 찾지 못했소, 내 말뜻 알겠소?"
그가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낯선 환경이오. 그렇다고 사랑스럽지 않다는 건 아니오."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아주 멋진 방이오. 아직 집처럼 편안하지 않을 뿐이지. 낯선 환경을 무시하고 이곳에 적응해서 집중한다는 것이 좀 어렵군."
모두 쓸데없는 변명일 뿐이다, 그녀는 그걸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더 신뢰감 있게 들리도록 다른 방법을 모색하며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내 다리에도 운동이 좀 필요하지. 어젯밤에는 늦도록 비행기와 택시 안에 있었잖소. 하여튼 거의 그런 식이었소. 그 거미줄을 쓸어내기 위해 상쾌한 부두의 공기를 마셔야 해. 게다가, 난 항상 부두 같은 곳을 좋아했지. 그곳이 날 자극시켜 줄 거요."
그에게 가장 필요치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자극일 터였지만 슬론은 그런 생각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에 대한 그의 욕망을 안다고 인정해 버리는 것이 될 테니까.
그의 욕망에 보답해 준다는 것은 그의 욕망을 아는 것만큼이나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무사히 무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글쎄요…… 카터, 정 가시고 싶다면 혼자 가셔야 할 거예요. 전 잡다한 일 몇 가지 처리할 게 있는 데다가……."
"그럼 도와줄 사람이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시오."
그가 그녀의 말을 자기 마음대로 끝마쳤다.
"재킷을 가져오겠소."
그녀가 평소 지니고 있던 치밀함은 이 순간 엉망이 되고 말았다. 같이 가지 못하게 할 만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적당한 이유가 먹혀들지 않는데 다른 이유가 대체 무슨 소용이람.
명백하게 한 사람이 불을 당겼을 때 상대편이라도 그 불길과 장난치지 말았어야만 했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그가 벌써 옷장에 걸린 재킷을 낚아채고 방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문을 잠궈야 할까?"
"그러세요. 물론 출발할 때 현관문은 잠글 거예요. 오늘 아침에 모두에게 몇 시간 외출한다고 알렸으니까 문이 잠겨 있을 동안 돌아오는 사람도 없을 거구요. 하지만 예방조치를 취한다고 해서 나쁜 건 없겠지요."
"사람을 한 명 고용해야 해요. 그래야 당신이 하루종일 집에 붙어 있지 않아도 되잖소."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가 말했다.
"그러면 좋겠죠, 훨씬 편리하구요. 하지만 불행히도 전 그 급료를 지불한 여력이 없답니다."
계단 밑에 닿았을 때, 그녀가 말했다.
"잠깐 기다리세요."
방에 들어가, 그녀는 서둘러 화장을 고쳤다. 머리를 빗고 주머니에서 핀들을 꺼내긴 했는데, 머리채 속으로 들어가길 한사코 거부하는 숱 많은 머리카락들을 어쩌지 못하였다.
"미치겠군."
낮게 중얼거리다가, 마침내는 그냥 풀어둘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부두에서 부는 바람에 어차피 엉망이 될 텐데 뭘. 그것으로 머리를 내려뜨리는 걸 스스로 정당화하였다. 치마와 블라우스가 약간 구겨져 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는 황혼녘 바다에서 해안으로 굴러드는 푸르름 섞인 회색 안개빛 포플린 재킷을 입고, 지갑을 움켜쥔 다음 쇼핑 리스트를 챙겼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카터는 발목과 두 팔을 교차시킨 채 난간에 기대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되셨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를 문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그는 중에도 자신의 머리를 훑어보는 그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집 옆으로 붙어 있는 작은 차고 안에 그녀의 화장품 상자보다도 더 크지 않을 듯한 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올라타세요."
"농담이 심하군. 올라 타는 게 아니라 비집고 들어가는 거겠지."
그가 조수석에 자신의 몸을 들여보냈다. 긴 다리를 먼저 끌어당기고 그 다음에 의자와 앞의 보드 사이로 다른 다리를 집어넣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저절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위험할 정도로 가파른 거리와, 신호등을 필요한 경우에는 무시해도 좋을 반짝이는 장식쯤으로 생각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운전 습관에 충분히 익숙해 있었다. 하지만 피셔맨즈 부두 근처의 빈 곳에 주차를 시키고 나서 카터를 바라보니, 그는 다소 창백해진 얼굴에 볼에 있는 세 개의 주근깨가 눈에 띄게 도드라진 모습이었다.
"다 온 거요? 그랬으면 좋겠군."
슬론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자구요. 당신이 따라오겠다고 한 거니까, 쓸모 있게 구셔야죠."
그는 신선하고 하얀 게 고르는 걸 도와주었다. 장사꾼이 방금 잡은 거라고 맹세까지 한 것이었다.
부두를 따라 걸으면서 그녀는 필요한 물건들 앞에서 잠깐잠깐 멈추었지만 가끔씩은 주의를 분산시켜야만 했다.
'이것 좀 봐요, 슬론.' 아니면 '잠깐만, 여기 좀 가봅시다. 전에 이런 화랑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여기도 굉장하군.' 이런 식의 부름을 받은 탓이었다.
순전히 시장을 보기 위해 외출한 척하고 있지만, 그녀는 카터가 이 외출을 가능한 한 소풍으로 만들려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기다렐리 초콜릿을 한입 깨물면서 그 점을 비난했을 때 그는 오히려 이렇게 되물어왔다.
"얼마나 자주 외출하지, 당신은? 페어차일드 하우스 일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당신 자신의 휴식과 오락을 위해서 말이오."
그들은 아이스크림 가게 안뜰의 작은 둥근 탁자에 앉아 있었고, 그는 끈적끈적한 선데를 소리 내어 홀짝였다.
"그렇게 자주는 아니죠."
그녀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어느 정도로 자주?"
그의 고집스런 물음에 그녀는 초콜릿 껍질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페어차일드 하우스의 유일한 소유주이자 경영자라구요. 가정부, 주인, 경리, 요리사와 허드렛 일꾼역까지 모두 맡아요. 당신이 말한 것 같은 휴식이나 오락을 즐길 시간은 별로 남지 않는다구요."
"하루도 쉬지 않는다는 말이오? 밤에도? 영화보러 나간 적도 없소? 아무것도 없단 말이오?"
"골치 아프게 만들지 마세요."
그녀는 그 주제에서 그의 관심을 떼어내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녀의 생활은 즐거움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생활이 얼마나 따분한지 그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슬론, 말도 안돼."
그는 스푼을 옆으로 내려놓고 당혹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게 그녀를 살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말도 안되는 게 아니에요."
"일할 사람을 고용해."
"그럴 여유가 없어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그녀가 톡 쏘아붙였다.
"집에 틀어박혀 전혀 외출하지 않을 정도는 아니겠지."
그도 되받아쳤다. 하지만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목소리를 다소 낮췄다.
"미안하오. 물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겠지. 난 그저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왜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거요."
그는 스푼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들기다가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조용히 물었다.
"남자와 같이 외출한 적 없소?"
"거의요."
거짓말쟁이, 그녀는 속으로 욕을 해주었다. '한 번도 없다'는 것이 맞는 대답이었다.
그가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그가 그날 아침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여자의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남자를 사귄 적은 있소?"
"그럼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는 걸까? 분명 그녀의 비참한 사생활을 죄다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인 거야.'
"우린 L.A.에서 같은 회사에 다녔었죠. 그는 판매를 담당하는 부사장이었는데 대단한 세일즈맨이었어요. 결점을 찾을 수 없는 패션 취향에다가 완벽한 매너, 재미있게 말하는 재능에 반짝이는 하얀 이를 자주 드러낼 줄 알았지요."
그녀가 얼음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난 UCLA를 막 졸업한 후 혼자만의 아파트를 갖게 되었고, 독립감과 일에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에 전념했을 때였죠. 그는 나를 하나의 도전으로 생각한 모양이에요. 우울한 경향의 소유자인 나를. 그는 날 웃게 만들었고, 편하게 해주었어요.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줬죠. 그 대신 난 그에게 쓸모가 있었어요. 대중이 원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갖고 있었으니까요. 특별한 상품 판매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을 때 난 그의 말을 듣고 여러가지 제안을 하곤 했어요. 자랑이 아니라 실제로 내 아이디어들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랬겠지."
"얼마 후에, 그는……."
그녀는 잠시 멈춰 입술을 축였다.
"자기 집보다 내 집에 물건들을 더 많이 갖다 놓게 되었죠. 어차피 결혼할 건데 한 아파트를 같이 쓰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였어요."
열성적인 청취자에게, 제이슨이 자신의 표현대로 그녀의 중류층적인 불편한 사고방식에 점점 진력이 났다는 말을 할 수도 있었으리라. UCLA를 나왔든지 어느 별 볼 일 없는 대학을 나왔든지 여전히 처녀성에 집착하는 여자가 얼마나 희귀한 존재였겠는가?
그는 그녀의 눈물을 뽑아냈다. 그녀의 고루한 사고방식 때문에, 그녀가 육체를 가치 있게 생각하고 그걸 헐값에 넘기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다. 타고난 세일즈맨인 그는 마침내 그가 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건 이기적이라는 걸 그녀에게 납득시키고 말았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요구하는 정열적인 연인이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랑을 나눌 때면 그는 자기가 어떤지, 기준 이상인지 알고 싶어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지만, 그녀의 소극적인 대답이 그의 자만심에 만족스럽지 못했던 건 분명했고 그는 그녀에게서 사나운 절규를 뽑아내려고 더욱더 성급하게 굴었다. 하지만 매번 하늘이 열리고 천국을 경험했다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뭔가 그녀 자신에게 잘못된 것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제이슨은 떠나갔다. 그녀의 왼손에 끼워주었던 다이아몬드 반지와 자기의 햄스터를 갖고 떠났다. 그에게 있어 반지보다 햄스터가 더 의미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왜일까?
그녀는 망가지고 말았다. 제이슨을 잃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처럼 또다시 실패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왜 다른 사람에게 그녀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게 이다지도 힘든 것일까? 부모님도? 제이슨도 왜 안 된단 말인가?
대학에 다닐 때 물론 데이트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항상 우정에 근거해서였다. 낭만적인 약속 같은 건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다.
가끔은 알리시아에게 만나자고 했다가 이미 약속이 있기 때문에 거절당한 남자들과 함께인 적도 많았었다. 그들은 자신의 스케줄표에 텅빈 밤을 채우기 위해서 알리시아의 룸메이트를 대신 택한 것일 뿐이었다. 처녀성을 지키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지 못할 기회조차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깊은 생각에서 끌어낸 카터의 목소리에, 그녀는 너무 놀라 튕겨 일어날 뻔했다.
"어느 날 그는 떠났어요. 모든 물건을 싸가지고. 아마 더 나은 사람을 찾았을 거예요."
"그럴 리 없어."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재빨리 그를 쳐다보았을 때, 그가 화난 듯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당신은 아직…… 아직까지 그를……."
소리 없이 웃으며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를 사랑하느냐구요? 아뇨. 사실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는 좀 더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상대를 찾았을……."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요?"
성마른 그의 질문에 그녀는 말하던 것을 멈췄다. 그는 진짜로 화가 난 듯했고, 그것이 약간 재미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잘못된 동작을 하면 덤벼들 준비가 된 훈련된 하운드 개처럼 작은 탁자에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최근에 거울 본 적 있소? 당신의 머리가 네 가지 금빛과 갈색을 띄고 있다는 것 모르겠소? 아니, 네 가지 정도가 아니야. 그 빛깔이 열 가지일까 아니면 더 많겠지. 남자라면 그 하나하나의 색을 알고 싶어 미칠 거야. 당신의 눈동자는 절대 잊을 수 없는 희귀한 색깔이야. 책 속에서 그 색을 묘사하는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면 힘깨나 들여야 할 거요. 그 눈은 어떤 여자라도 원할 만한 짙고 길다란 속눈썹에 휩싸여 있지. 그리고 당신의 몸매는 감미로워, 비록 그 잠옷이 방해가 되긴 하지만. 당신은 그 초라한 옷가지들로 매력적인 몸매를 숨기려 하고 있어. 그게 당신의 잘못된 점이오. 당신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모두에게서 자신을 숨기려 하고 있어. 왜지, 제기랄? 왜냐구?"
그의 사나운 맹공격에 상처받은 듯 창백한 얼굴로 그녀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공격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걸 깨닫자, 그의 긴장된 자세가 풀어지며 그는 녹슨 철제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더 퍼부어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보다 더 신랄한 말들이 입술에서 맴을 돌았지만 애써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이윽고 온화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내 정강이를 걷어차도 돼. 아니면 더 좋은 방법이 있겠군. 아까처럼 다시 내 발등을 내리찍는 거요. 그곳은 아직까지 지독히 아프거든."
그 말이 그녀의 눈에서 고통을 몰아내고 메마른 입술에 미소를 띠우는데 성공했다.
"아까 그랬던 것처럼 지금 나한테 덤벼들어야 했어, 슬론. 당신은 자신을 자유롭게 놔주지 않는다니까. 자신의 감정에 숨 쉴 공간을 주라구, 제발."
"열심히 노력할게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여기 있는 한 달 동안 성질내는 법을 강의해 주면 되겠네요."
"요구만 하면 언제든지."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둘 다 그가 그녀의 집안에 들어온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앞으로 얼마나 잘 견딜 수 있을지 그리고 알리시아에 대한 성실성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힘겹게 저항해야 할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선데를 다 먹지 않았군요."
그 마력적인 침묵을 깨기 위해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며칠 전 그 일 때문에 아이스크림에 질렸나봐. 알리시아가 쇼핑하는 동안 아이들을 내가 데리고 있었거든. 핫도그를 먹었는데 아담이 셔츠에 겨자를 흘렸어. 그 다음에는 데이비드의 아이스크림 일부가 입으로 들어가지 않고 무릎이나 소매에 다 흘러내렸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알리시아에게 우리 모두 혼쭐이 났었소."
"이유를 알 만하군요."
슬론도 그의 웃음에 동참했지만, 그 웃음은 공허하게 들렸다.
"결혼한 후에 아이들을 깨끗하게 간수해야 한다는 걸 아셨을 거예요."
"그렇소, 아마도."
그는 선데 컵 바닥에 녹아 있는 액체를 쓸쓸하게 쳐다보았다.
슬론은 탁자 옆의 넓은 창문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당신 책들은 자전적인 경험에 의한 건가요, 아니면 순수한 창작인가요, 매디슨 씨?"
카터는 자신의 와인잔을 내려놓고 슬론에게 슬쩍 윙크를 보냈다.
"레멘 양, 내가 쓴 게 모조리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지금까지 살아 있었을지 의문인 걸요."
테이블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기분 좋게 웃어젖혔다.
게 그라탕은 아주 맛이 좋았다. 디저트로는 꽃상치 샐러드와 레몬조각을 곁들인 아스파라거스와 오렌지 샤벳이 곁들여졌다.
페어차일드 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그녀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하자, 카터는 위층으로 올라갔었다. 하지만 아침에 들은 것 같은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는 오후 내내 들리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내놓기 전에 잠깐 샤워를 하고, 그녀는 부드러운 까만 모직 치마와 주름 잡힌 조끼 왼쪽 어깨에 진주 단추가 박힌 하얀 조젯 블라우스를 차려 입었다.
평소에 입었던 것보다 더 여성적이거나 부드러운 것은 아니라고 자신에게 수없이 되뇌이면서였다. 하지만 와인이나 칵테일을 마시고 있던 손님들을 식당으로 부르기 위해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손님 두 명에게서 너무나 예쁘다는 찬사가 터져 나온 것으로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긴 했지만, 카터의 눈을 감히 바라보지는 못했다.
그는 아이보리 실크 셔츠 위에 하늘색 스포츠 재킷을 걸치고 회색 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내려와 있었다. 숱 많은 마호가니색 머리를 숨기기 위해 시도한 것 같았지만, 그 노력은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슬론은 첫 번째 음식을 서빙하면서 몰래 그를 훔쳐보았다. 그의 머리는 곱슬머리가 아닌데도, 제멋대로 그의 두개골에 뻗치기도 하고 내려앉기도 한 채 매달려 있었다. 잘생긴 두상에 자기가 자라고 싶은 대로 자라서 그걸 바꾸려 하는 헤어 드라이기의 바람과 머리빗에는 영원히 반항하기로 오래 전부터 결정한 듯했다.
만지고 싶은 머리야, 슬론은 샐러드를 내려놓기 위해 그의 위로 몸을 굽히며 생각했다. 칼라의 V형 목선에서 풍겨나는 그의 향내가 그녀의 코를 애무하였다. 그에게서 깨끗하고 남성적인 내음이 맡아졌다, 샤워로 촉촉히 젖은 나신을 생각하게 만드는.
그의 앞에 샐러드 접시를 내려놓는 그녀의 손이 사뭇 떨고 있었다. 그의 눈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가냘픈 손을 따라와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고맙소, 페어차일드 양.'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나도 당신의 벗은 모습을 상상했다오.'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친근하게 들리는 말은 세상에 없을 수도 있었겠지.
그를 본 은퇴교사 한 명이 혈관이 튀어나온 손을 빈약한 가슴에 펴며 소리쳤다.
"카터 매디슨! 당신을 투데이 쇼에서 본 적이 있어요. 오, 세상에, 믿을 수가 없어요. 전 당신 책을 모두 읽었답니다."
사실 그녀의 방에 그의 책이 한권 있는 걸 보긴 했지만 그의 신상을 파악하기 위해 재빨리 가져온 것인 듯했다. 아무튼 다른 손님들도 자기들과 같이 유명한 인물이 합석했다는 점에 똑같이 감격스러워했고, 원래 나이보다 40년은 더 어린 소녀에게나 어울릴 듯한 들뜬 목소리로 그의 저서가 자전적인 것인지 물어본 사람이 바로 그 학교 선생이었다.
그는 그들의 호기심과 영웅적인 숭배 분위기를 침착하면서도 겸손하게 다루어냈다. 그것이 또한 모두를 기쁘게 만들었다. 그는 세상 모든 곳에서 습득한 이야기들로 사람들을 다시 한번 기쁘게 하였다.
슬론은 항상 하던 대로 능숙하게 또한 예의바르게 저녁 식사를 계속해서 내놓았다. 그의 목소리가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부엌에서 방으로 들어설 때마다 카터의 눈이 그녀의 뒤를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접실 불가에서 커피와 브랜디 드시는 게 어때요?"
그들이 마침내 식사를 마쳤을 때 슬론이 상냥하게 제안했고, 모든 사람들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열성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리로 쟁반을 가져갈게요. 편안하게 마음껏 즐기세요."
그녀는 쟁반에 담을 것 중에서 잊은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뒤로 문이 활짝 열렸다. 카터가 저녁 식사가 끝난 지저분한 접시들을 산더미처럼 쌓아서 쟁반 하나에 들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카터!"
그녀가 깜짝 놀라 외쳤다.
"뭐하시는 거예요?"
그가 싱크대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좀 도와주려고."
"그러지 마세요."
"왜?"
"왜라뇨? 당신은 손님이니까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입가 주름이 팽팽해지며 그는 두 손을 엉덩이에 걸쳤다.
"다른 사람의 생각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소."
"전 신경 쓰여요. 신경 써야만 하고요."
"언제부터 남자가 여자를 위해 무거운 쟁반을 날라주는 게 죄가 됐지? 그 점을 대답해 보시지."
"당신은 레스토랑에서 직접 그릇을 치우시나요?"
"아……."
그는 자신의 영웅이 즐겨 사용하는 욕설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난 진력이 났소, 당신이 맡은 이런 하인 같은 역에는 정말 짜증이 난다구. 그게 화가 나. 나까지 당신처럼 겁쟁이가 되는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구."
그가 응접실 쪽으로 머리를 홱 가리켰다.
"나도 그들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아. 그들은 그냥 손님일 뿐이니까."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그녀가 불쑥 내뱉었다. 갖고 있는 속옷 중에서 가장 투명하고 우아한 란제리 밑으로 젖가슴이 떨려났다. 오늘밤 그 옷을 입으라고 스스로 부추겼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가 되었다. 카터의 시선이 마치 태워버릴 듯 블라우스를 뚫고 들어와 천이 흔들릴 정도로 동요된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아름다운 가슴을 가졌소. 그런데 그게 떨고 있군. 왜지, 슬론?"
"아."
그녀는 보호하듯 가슴 위로 팔짱을 끼며, 침착이라는 마지막 끈을 찾아 마음 속의 혼돈을 더듬어갔다.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남자 손님이 있으면 즉시 페어차일드 하우스를 떠나달라고 요구해야 할 거예요……."
"손님이라! 그거 자기 방어적인 단어로군. 이런 남자에 대해서는 어떤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한 것을 원한다고 말하는 남자는, 그녀가 아름다운……."
"그만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지 않는다면 떠나주셔야겠어요!"
그의 눈 속에 담긴 분노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기에, 그녀는 등을 돌린 채 딱딱한 자세를 유지했다.
"당신은 제 사업 장소에 오신 손님이에요. 그게 전부예요, 카터."
그녀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손님이라구요."
그가 아까 한 말보다 더 저속한 욕설을 중얼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무거운 쟁반을 들고 응접실로 옮길 수 있을 정도의 침착을 되찾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떠나달라는 요구가 거짓 위협이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지만, 카터에게는 그 말이 진심으로 들렸기를 바랐다.
그들은 그들을 빠뜨리려고 위협해대는 아슬아슬한 물 위를 걷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얘기, 눈에 보이는 암시와 초대의 눈짓들은 모든 사람에게 재앙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에게, 카터에게, 알리시아와 그 아이들에게도. 카터에게 자신이 지금 정확히 어떤 입장에 있는지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를 전혀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지 않는다는 느낌을 전달해야 했다. 특별하지 않아, 그녀는 복도를 걸어가며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오늘밤 이 옷을 벗는 순간, 가장 고급스런 란제리가 옷장 속으로 들어가 다시 입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는 것. 이 옷은 너무 지나치게 여성적이고, 지나치게 상처받기 쉬운 듯이, 바보같이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감정을 갖게 하였다.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벽난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무토막을 던져 넣고 있었다. 샤워하기 전에 그녀가 손님들의 식사시간 동안 불이 붙도록 피워 놓았던 것이었다. 그녀는 긴장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매디슨 씨, 그렇게 수고하실 필요 없어요."
이 말은 슬론이 직접 구해서 천을 씌운 소파와 안락의자에 편히 앉아 있는 다른 네 명의 손님들을 위한 것이었다.
"괜찮소, 페어차일드 양. 집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수고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오."
그의 말 속에는 그녀만이 알 수 있을 만한 빈정거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가 지혜의 보석에서 탄생한 예언자라도 되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녀는 더 마시고 싶을 경우를 대비해서 포트에 커피를 끓여놔야겠다는 핑계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븐에 따뜻하게 데워진 자신의 저녁을 먹는 사이사이, 소형 설거지 기계에 접시들을 넣고, 식당을 정리하고, 아침 식사를 위해 식탁을 준비했다. 내일 아침상에 내놓을 신선한 오렌지 즙을 짜낸 후, 플라스틱 밀폐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벌꿀과 버터를 저어 팬케이크 반죽을 갠 다음 그것도 냉장고에 넣었다.
응접실로 돌아가기 전에 간신히 억지웃음을 꾸며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텅 비어 있는 걸 보니 내심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커다란 쟁반을 들고서 그녀는 부엌으로 되돌아왔다. 열 가리개가 제자리에 있는지, 불이 안전하게 꺼졌는지 확인하는 등 마지막으로 벽난로를 점검했다. 문을 다 확실히 잠그고 불도 끈 다음에야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퇴장할 수 있었다.
겉옷을 벗고 슬립도 벗으려던 찰나, 문에서 약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녀를 찾으러 방까지 오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필요한 경우에 손님은 방에 있는 전등 스위치 위의 작은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었고 그 부저소리는 그녀의 방과 부엌과 사무실 전체에 들리도록 연결되어 있었다.
"네? 누구세요?"
사실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요."
그녀는 손으로 입술을 막았다.
"가세요, 카터."
"당신과 얘기를 해야겠소."
"제 방에 들어오실 수 없어요!"
그녀가 낮은 소리로 외쳤다.
"누가 보거나 듣는 일이 생기기 전에 어서 가세요, 제발."
"그럼 응접실에서 봅시다."
잠시 후에 그가 덧붙였다.
"5분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내가 다시 오겠소."
몸의 떨림이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의 호출에 응하는 것이 무모하다는 건 알았지만, 만약에 가지 않으면 그가 위협을 실행에 옮길까봐 더욱 두려웠다.
어젯밤 입었던 그 볼품없는 로브의 허리띠를 단단히 묶고 슬리퍼를 신은 다음, 그녀는 신중하게 문을 열고 어두운 집안을 가로질러 소리 없이 응접실로 향했다.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카터는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그녀를 벽까지 밀어젖혔고 자신의 몸으로 꼼짝 못하게 고정을 시켰다.
"슬론, 슬론."
입과 코를 그녀의 머릿속으로 비벼대며 그가 신음했다.
"안돼요, 카터."
희미한 불빛이 그의 머리 위에서 춤추며 짙은 적갈색 머리카락을 구릿빛으로 반짝이게 하였다. 그녀는 그 헝클어진 머릿속으로 손을 넣고 자신의 목덜미에 그의 얼굴을 힘껏 끌어안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그의 머리가 갑자기 난폭하게 들렸고, 그녀의 머릿속에 손을 넣어 힘껏 끌어안았던 것이다. 그가 소용돌이치는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난 하루종일 착한 아이였소. 부끄러울 만한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소. 주어와 동사로 뭔가 설득력 있는 문장을 만들어 보려고 오후 내내 타자기 앞에 앉아 있었소. 그런데 빌어먹을, 잘 되지가 않았소. 당신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소……."
"안돼요……."
"돼!"
거친 속삭임이 그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의 숨결은 향긋했다. 커피보다 브랜디를 더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얼굴이 이렇게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그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 아니면 그가 이러는 것에 브랜디가 무슨 영향을 미친 걸까?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에게 자신의 아랫부분을 문질러댔고,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으며 달콤한 고통으로 신음했다.
"당신이 어젯밤 문을 열어준 이후로 당신밖에 생각나지 않았소. 내 밑에 당신을 눕히고 사랑하는 상상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소."
"그만하세요."
그녀는 애원을 했다.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제발. 모두를 위해서요. 카터, 생각해 보세요. 알리시아와 데이비드와 아담을 생각하세요. 그들은 당신의 사랑에 의지하고 있다구요. 그들에게는 당신이 필요해요."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하오."
그는 그녀를 더 힘껏 누르며 귓가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
이로 완강하게 깨물고 있던 그녀의 아랫입술에서 피내음이 났다. 질끈 감은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 모두 원하는 것에 굴복하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 의지력으로 그를 밀어내었다.
"당신은 날 가질 수 없어요."
여전히 손을 내밀면 닿을 곳에 있는 그를 두고서 이렇게 숨을 헐떡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니.
"알고 계시잖아요, 나도 알구요. 그러니 제발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세요."
그런 다음 그녀는 삭막하고 쓸쓸하지만 안전한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듯 달려 나갔다.
그는 식당에서 다른 손님들과 같이 식사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동안 그 시간 말고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나갔다는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대 리넨을 갈아 끼우고 욕실에 깨끗한 수건을 들여놓았다. 그가 사용하는 방에 들어갈 때, 그녀는 그의 개인 용품들을 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욕실 세면대 위 선반에 있는 면도용품이라든가, 여러 가지 가구에 걸려 있는 그의 옷가지들.
어느 날인가 한 번은 옷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옷을 걸며 자신의 욕구를 조금이나마 만족시켜 주었다. 표면상으로는 방을 정돈한 것뿐이지만, 그녀가 정작 한 일은 그에게 닿은 물건, 그가 소유한 물건을 만질 핑계를 만든 것이었다.
그는 예의바르면서도 대단히 무관심했다. 은행가와 그의 부인, 그리고 두 명의 교사가 떠나고 나자, 그 자리는 아이오와에서부터 함께 여행한 두 부부로 대치되었다. 그들도 또한 즉시 그를 알아보았고, 그는 청중을 위해 전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말해주었다. 전처럼 자세하게는 아니었지만.
저녁이 되면 그는 실례를 구하고 자신의 방으로 물러나거나, 완전히 페어차일드 하우스를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되돌아오곤 했다.
페어차일드 하우스로 데이비드가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봉투에 큼직하게 그려진 서툰 글씨체가 보낸 이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슬론은 그 편지를 저녁 식탁 그의 자리에 놓아두었다.
"고맙소, 페어차일드 양."
그가 편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별 말씀을요, 매디슨 씨."
어느 날인가는 카터의 에이전트라고 밝힌 한 남자가 그와 통화하고 싶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슬론은 두려움 속에 계단을 올라가 방문을 두드렸다. 두들겨대던 타자기 소리가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누구요?"
그의 어투는 화난 사람이 억지로 쾌활한 척하는 경고의 울림을 담고 있었다.
"당신 에이전트에서 장거리 전화를 걸어왔어요. 통화하시겠어요?"
"아니."
다시 타자기 치는 소리가 났고, 슬론은 그의 짤막한 대답을 분노한 에이전트에게 정중하게 전달했다.
"매디슨 씨."
어느 날 오후 현관을 들어서는 그의 육중한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부엌에서 그를 불러 세웠다. 그는 이미 몇 계단 올라선 채 부엌에서 달려 나오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산더미처럼 쌓인 냅킨과 테이블보, 시트와 베갯잇을 다림질하던 중이었다. 그걸 세탁소에 보내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직접 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다리미의 열기로 두 볼에는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머리를 위로 틀어 올렸지만, 테트라찌니에 쓸 스파게티를 끓이는 동안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그를 올려다보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가정적이고 사랑스러운지 전혀 깨닫지 못한 채였다.
"알리시아에게 전화가 왔었어요. 연락해 달라고 했어요."
그가 계단을 내려왔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아뇨."
그녀는 숨 가쁘게 대꾸했다.
그의 눈을 마주본 것은 며칠 만에 처음이었다. 바람에 나부낀 듯한 모습, 그에게서 멋진 비내음이 맡아졌다. 빗물이 머리와 재킷의 어깨 위에서 대롱거렸다. 어디 갔던 걸까? 그녀는 궁금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제 사무실 전화를 쓰세요."
작은 사무실로 그를 안내한 다음 그녀가 돌아섰다.
"있어도 괜찮소."
"약혼녀와 조용히 하고 싶은 말씀이 있겠지요."
그는 수화기를 들고 알리시아의 번호를 과격하게 눌러댔다. '전화기가 불쌍하군.'
그녀는 위층의 리넨 서랍에 깨끗한 시트 한 무더기를 가져다 넣고 내려오던 중에 계단을 올라오는 그와 마주쳤다.
"통화하셨어요?"
"그렇소. 책이 어떻게 돼가는지 묻더군."
"어떻게 돼가나요?"
"쓰레기 더미요."
걸음을 늦추지도 않고 계단을 올라서며 그가 으르렁거렸다.
슬론은 착실한 행동을 유지하였다. 다른 손님들에게 긴장되어 있다거나 마음이 혼란스럽다는 힌트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밤 방에 들어갔을 때는, 이불 밑에 몸을 공처럼 말고 팔딱이는 육체의 욕구를 진정시키려 노력해야 했다. 몸의 모든 부분에서 카터의 손길을 느끼게 해달라고 비명 지르는 것 같았다.
도망칠 수 없게 꼭 끌어안았던 그의 손이 단호하면서도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잊을 수 없었다. 침대에서 그녀를 안았던 날, 그의 눈이 어떻게 그녀의 몸을 더듬었는지도 너무나 잘 기억했다. 그녀의 귓가에 '당신이 필요해'라고 속삭이던 그 밤, 살갗에 닿던 그의 숨결은 뜨겁고도 다급했었다.
굳이 필요하단 말을 소리내어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그의 욕구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나긋나긋한 몸에 닿는 그의 단단하고 뚜렷한 욕구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다음 며칠간을 기계적으로 보냈다. 능숙하게 음식을 준비하긴 했지만, 어떤 기쁨도 느껴지지 않는 나날이었다.
응접실에서 그런 일이 있고나서 일주일 후, 밤늦게 부엌을 정리하는 것 또한 그녀의 기계적인 일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손님들은 벌써 위층으로 올라간 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뒤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카터가 문 바로 안쪽에 서 있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소."
"전…… 당신이 위층에 계신 줄 알았어요."
저녁 식사 시간이면 항상 입던 스포츠 재킷을 그는 지금 벗은 채였다. 셔츠 자락은 엉덩이에 걸쳐지고 반쯤만 단추가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걸쳐 입은 것처럼.
"그랬었지. 두통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방법이 없었소. 당신한테 아스피린이 있는지 모르겠군. 아무 거라도 좀 쓸 만한 게 있을까?"
"네, 네, 그럼요."
자신의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급하게 숨넘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경멸스러웠다. 왜 침착하면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걸까, 그 빌어먹을 아스피린을 어색하지 않게 주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제 욕실에 있어요."
그녀는 아주 잠깐 만에 진통제 몇 병을 들고 돌아왔다.
"당신은 두통 때문에 자주 고생하는 모양이군."
그녀가 찬탄해 마지 않는 그 별나게 생긴 눈썹이 유머스럽게 올라갔다.
"당신이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위에 무리가 가는 것도 있어요."
맙소사, 광고에 나오는 멍청이 중 하나처럼 얘기하는구나.
"이게 좋겠소."
그가 일반적인 아스피린 한 병을 집어 두 알을 털어냈다.
"물은?"
그녀는 캐비닛으로 달려가, 손님들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컵을 하나 내렸다. 버니 토끼와 엘머 퍼드 그림이 그려진 컵에 물을 담아 그에게 건넬 때 떨리는 손 위로 물방울이 튀겼다.
그 잔을 받아들며 그의 눈썹이 다시 한번 휘어졌다. 그는 아스피린 두 알을 입에 넣고 물을 길게 들이켰다.
"고맙소."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두통에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너무 늦은 시간 아니오?"
"젤라틴 반죽을 만들었어요. ……재료를 많이 썰어야 했거든요."
"아. 다 했소?"
"네, 막 정리하던 중이었어요."
"이건 저 위로 올리면 되나?"
두 개의 무거운 유리그릇과 열린 캐비닛의 세 번째 선반을 그가 가리켜 보였다.
"네."
그릇에 손을 뻗는 그녀를 막고, 그가 대신 집어 들었다.
"당신 등에 무리가 있을 거요."
높은 선반 위에 그릇을 쉽사리 올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발판이나 그런 게 필요하겠어."
"그럴 거예요."
"슬론."
그가 몸을 빙그르르 돌려 그녀를 마주보았다. 모든 태연한 무관심과 정중함 따위는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의 두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슬론."
눈으로는 그녀의 얼굴을 굶주린 듯 더듬으며, 전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우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소."
"심각한 문제요?"
그녀의 목소리가 째질 듯이 높게 울렸다.
"그렇소."
"당신 방에요? 두통이요? 아니면……."
"우리 문제가 무언지 모른단 말이오?"
그 낮고 매끈한 목소리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으며 뜨겁게 달구어댔다.
눈물이 구름처럼 눈앞을 가려왔고, 그녀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슬픈 듯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아니, 당신은 알아."
그의 입술이 강하게 그리고 따듯하게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4
그의 두 팔이 그녀를 감싸 꼼짝 못하게 만들었을 때, 그녀의 유일한 저항은 일시적인 근육의 긴장 정도였다.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작은 경악의 외침이 그의 입술에 틀어 막혔다. 그들은 둘 다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오로지 소유하고픈 갈망뿐. 서로의 육체에 대한 갈증과 굶주림만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슬론은 몸이 흔들거리자 아득해진 정신으로 그의 두 팔뚝을 움켜쥐었다. 등을 어루만지는 동작에 따라 그의 단단한 팔뚝 근육들이 뭉쳤다가 펴지는 느낌이 전해졌다.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정교하게 움직이는 그 느낌이 기적과도 같아 그녀는 부드럽게 신음을 흘렸다.
"슬론."
목덜미에 그녀의 얼굴을 내리누르며, 그의 입에서 다시 그녀의 이름이 새어나왔다. 그녀를 감싸 안은 그의 두 팔이 모피 망토처럼 안전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이 그녀를 어루만지며 완벽하면서도 놀라웁게 들어맞도록 달라붙는 방법이 어떤 건지를 가르쳐주었다.
그 시간이 영원히라도 지속될 듯이 그는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들의 심장소리가 같이 어우러졌고 정열은 점점 증폭되어갔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난폭하게 입술을 덮쳐왔다. 두 사람의 머리는 방향을 잃은 듯 양쪽으로 흔들렸고 코를 부비며 입술을 서로에게 비틀어댔다. 그들을 관통하는 에너지의 출구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매 다녔다. 그리고 갑자기 그는 참을 수 없는 듯 그녀의 입술을 눌러 모든 움직임을 잠재웠다.
정복을 원하는 강력한 혀가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오며 그의 가슴에서는 깊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 달콤한 구덩이의 가장 깊은 곳으로 깊이 탐닉해 들어가며 더욱 달콤하게 약탈을 감행했다. 격렬하게, 느릿하게, 잔인하게, 달래듯이 그녀의 입술을 애무하였다. 그의 혀끝이 자신에게 응하라는 도전을 담아 그녀의 입술을 비볐고, 반갑게도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녀의 혀가 마음껏 자신의 맛으로 그의 입술을 적시기 위해 밖으로 나왔고 그는 그 아랫입술을 이로 가볍게 깨물었다. 그녀는 그 감미로운 유혹에 다시 한번 그의 혀가 침몰할 때까지 그의 입술을 장난치듯 교묘하게 빨아댔다. 그것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찰싹임이, 그 다음에는 더 강하고 느리고 깊은 찰싹임이.
슬론은 시간이나 공간, 선과 악의 구별 따위를 모조리 잊어버렸다. 이걸 원했다. 현관에 서 있던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입술이 닿기를 원했다. 거부하지 못할 대담한 호기심으로 몸을 더듬는 그의 손길을 원해왔었다. 그가 속삭이는 사랑의 단어와 희열의 신음소리는 귓가에 들리길 바랐던 바로 그 음악이었다. 욕망의 촉수가 그녀를 옭아매며 양심이란 것의 숨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 정열의 파도를 멈추게 하거나 저지할 만한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서로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건 필연적이며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달아나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불가능하기에 그녀는 이제 그것이 마력적으로 자신을 삼키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녀의 온 몸은 완전히 새 것이었으며, 외로움은 씻겨 내려가고, 욕망으로 충만해졌다.
그의 손이 등에서 양쪽 엉덩이까지 미끄러져가자 그녀의 입술에서 떨리는 한숨소리가 새나왔다. 그의 엄지가 오똑 솟은 봉우리를 찾아 최면을 걸듯 배회하였고, 손가락들은 그녀를 더 단단히 안기 위해 그곳에 정착했다. 그는 약간 무릎을 굽혀 그녀의 여성이 자리잡은 곳에 자신의 남성적인 것이 닿을 수 있도록 몸을 움직였다. 천천히 회전을 하며 짓이기는 그 움직임에 그곳에서부터 가슴속으로 풍성한 열기가 콸콸 쏟아졌다.
그녀는 기대감으로 녹아들며, 활짝 문을 열어놓은 채 촉촉해져 있었다.
"카터, 카터."
광적인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며 그녀가 흐느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수천 개의 종들이 즐겁게 딸랑거렸고 가슴에서는 사랑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래, 사랑이었다!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열렬한 키스를 퍼붓는 그 입술이 그도 똑같은 느낌이라는 걸 말해주었다.
"믿을 수가 없어."
"난 알고 있었어, 내 사랑, 알고 있었어. 너무나 좋아. 이럴 줄 알았다구."
그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찾아 능란하게 풀어냈다. 그 다음 그것을 양쪽으로 벌리며 그녀를 살펴보기 위해 떼어냈다.
투명하고 반짝이는 브래지어가 유혹하기 위해 디자인된 제2의 살결처럼 그녀를 감싸고, 수줍은 핑크빛 젖꼭지는 자극적으로 오똑 솟아올라 갑갑함을 견디지 못하겠는 듯이 반항적으로 밀어대고 있었다. 그가 그 요구에 대답을 해주었다. 손가락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부드러운 애무로 그것들을 쓰다듬었다.
"제발."
그녀는 흐트러진 목소리로 애원했다.
"날 만져줘요, 날 만져요."
"아름다워."
그는 양손으로 가슴을 감싸 약간 들어 올렸다. 자기의 환상 속에서보다 더 우아하고 달콤한 봉우리, 하지만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완숙한 봉우리를 찾아냈다. 그것이 열망으로 단단해질 때까지 그의 엄지가 그 위를 반복적으로 굴러다녔다.
그녀의 풍성한 곡선에 뺨을 대보았다. 먼저 따뜻하고 축축한 그의 숨결이 닿았고, 그 다음에 섬세한 브래지어 컵 사이로 그의 혀가 젖꼭지를 찔러왔다. 다시 또 다시. 그녀는 거칠 것 없이 열에 들떠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것을 물어 입 안으로 넣었을 때, 그녀의 몸은 반사적으로 휘어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셔츠를 찢을 듯이 열어 가슴의 복실복실한 털을 열렬히 긁어댔다. 그의 입술은 자신의 달콤한 행로를 계속하면서도 억제할 수 없는 환희의 한숨들이 그녀의 한숨과 어우러졌다.
그녀의 손은 가슴의 남성적인 근육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새로운 감각의 잔치를 펼쳐갔다. 단단한 근육의 윤곽, 갈비뼈의 흔적으로 일어난 물결, 평평하고 딱딱한 젖꼭지가 모두 쾌락주의자의 손길로 검사되었다. 점점 대담하게 밑으로 내려가는 손길 아래서 가슴의 털들이 가늘어지며 부드러워져갔다.
그는 그녀의 가슴 계곡에 코를 부비며 그녀의 향기를 흠뻑 들이켰다. 그리고 속삭였다.
"슬론."
그녀의 한 손을 잡아 서서히 움직여갔다. 그녀에게 저항할 시간을 주면서, 밑으로 내려 바지의 부푼 곳에 갖다 대었다.
"당신을 원하기 때문이야, 슬론. 당신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야."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올라오고 이번에는 난폭함이 기교로 대치되었다. 그녀가 그에 대한 욕구로 어지러움을 느낄 때까지 그녀의 입속에서 혀를 마음껏 움직여댔다. 한 손은 가슴에 남아 부드럽게 만지작거렸고 다른 손은 치마의 허리춤을 지나 밑으로 밑으로 여성적인 둔덕 위를 감쌌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까. 저도 당신을 원해요."
그녀가 흐느꼈다.
그가 약간 움직였을 뿐인데도 그녀는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에서 쏘아대는 전류를 느낄 수 있었으며, 그의 손에서 생명력 있게 파도치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불타는 열망으로 백만 개의 세포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다시 움직여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그의 이름을 수도 없이 중얼거렸다.
그가 벼락 맞은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그녀의 소중한 곳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몇 걸음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제기랄."
그의 잇사이로 그보다 더 원색적인 말들이 몇 개쯤 더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버림받은 듯한 표정을 알아채자, 그가 재빨리 다가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미안해, 슬론, 이런 식으로 멈추다니. 하지만 할 수가 없었어."
그녀는 굴욕의 비명을 막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그에게 벗어나려 했다. 그가 놓아주지 않자, 그녀는 더 사납게 몸부림치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다시는 나한테 손대지 말아요."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이를 갈며 내뱉었다. 두 손을 뻗어 그가 앞으로 다가서는 것을 저지했다.
"날 혼자 내버려 두세요."
그녀의 반응에 그는 멍해졌다.
"슬론, 난……."
"설명은 필요 없어요. 당신이 멈추지 않았다면, 내가 그만두었겠죠."
블라우스의 단추를 꽉 움켜쥐었지만, 제대로 잠기지 않았다.
"당신이 전적으로 옳아요. 우린 그럴 수 없어요. 내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난……."
말끝이 흐릿해지며 그녀는 여전히 피가 팔딱거려 폭발할 것 같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당신…… 알리시아…… 당신에게 절대 키스하게 놔두면 안 되는 거였어요."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요?"
그가 화를 터뜨렸다.
"내가 멈춘 것은 알리시아와 아무 상관도 없소."
당혹감으로 흐릿하게 팽창된 눈으로, 그녀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내 환상 때문에 그럴 수 없었던 거요, 내 자신의 뒤틀린 상상 때문에."
"뭐라구요? 환상?"
"오, 빌어먹을."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슬론이 미동도 없이 서서 그를 쳐다보는 동안 그는 한참을 그런 낙심천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 자리에서 돌로 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요구받지 않기를 바랐다. 절대 그 자리에서 움직일 필요가 없기를, 영원히 감정이 죽어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앉아요, 슬론. 그래야 얘길 하지."
"싫어요. 난……."
"한 번만 내 말을 따라줘. 그냥 앉아서 들으라구."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그가 간결하게 덧붙였다.
"부탁이오."
그녀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새침하게 몸을 굳히고 앉았다. 좀 전에 방종했던 여자에 대한 처벌을 가하기라도 하듯.
"내가 도착한 다음날 아침, 난 방에서 상상에 빠져들었었소."
그가 얘기를 시작했다.
"웃기는 일이지, 나도 아오. 하지만 작가로서 난 많은 시간을 상상 속에 보낸다오, 나의 주인공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면서. 어쨌든, 이번에는 내가 주인공이었고 이 방 안에 우리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았소. 우리가 방금 하려던 일을 하면서 말이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테이블 가에 하얗고 차가운 채로 모아 쥐고 있는 두 손만을 쳐다보았다.
그가 수줍게 피식 웃었다.
"아주 대단한 공상이었소. 하지만 하여튼 난 그걸 현실에 적용시킬 수 없었소. 당신과 처음으로 사랑을 나눌 때, 그게 은밀한 습격이 되길 원하지 않소. 우리 둘 다 벌거벗은 채 느긋하게 서로를 즐길 수 있길 바라오. 우리의 사랑이 싸구려가 되는 건 원치 않는단 말이오."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아니에요, 카터.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세요. 어떤 상황에서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슬론, 내가 잘못 안 거요?"
그의 목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렸다.
"날 사랑하지 않소?"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물 반짝이는 눈으로 그의 근심어린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두 개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요, 맞아요, 맞다구요."
그는 대단히 진정으로 안도한 것처럼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 안에 힘없이 놓여 있는 그 손을 들여다보았다.
"당신 옆에 있을 때마다, 난 섹스광처럼 행동했었소. 벽으로 밀어붙이고, 침대에 내던져서 안고. 하지만 오늘밤 여기 내려왔을 때는 진정코 아무 것도 계획하지 않았었소. 혼자 있는 당신을 붙잡아 부엌 싱크대로 밀어붙이자, 억지로 어떻게 해보자는 심산으로 두통을 만들어낸 게 아니오. 그건 신께 맹세할 수 있소."
"나한테 억지로 강요한 건 아무 것도 없는 걸요."
그가 다시 미소를 짓고 그녀의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았다.
"난 남자요, 슬론. 거절도 많이 당했소, 솔직하게 그걸 인정하겠소. 하지만 세상의 여자들을 많이 갖기도 했었지. 그들을 내 만족만을 위해 무정하게 재빨리 가졌었소. 그들을 다시 보게 될 지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지."
그가 그녀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이번에는 그런 게 아니오. 이번에는 욕정 때문만이 아니오. 그 점을 믿어줘요. 당신의 지붕 밑에 있으면서 당신마저 빌린 것처럼 한동안의 침대 상대로서 편리한 육체로 당신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외면했다.
"그런 생각은 안했어요. 내가 세들어 있는 남자와 일시적인 관계를 즐기는 여자인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알죠?"
미소 짓는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왜냐하면 당신은 귀중하고 멋지니까. 내가 이런 지저분한 얘기를 할 때 여전히 얼굴을 붉힐 수 있는 여자니까."
그들은 같이 웃었다. 그 소리가 적막한 방안 구석구석을 풍성한 소리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들을 둘만의 세계로 밀어 넣었다.
"이번 주는 정말 지독히도 글쓰기가 어려웠소."
그가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난 몇 년간이나 아무 것도 모르는 것에 대해 글을 쓰고 있었던 거요. 그리고 가장 최악은, 내가 모른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사실이오."
그는 일어서서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 창문너머 처마에서 단조롭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응시했다.
"내 책 속에는 어김없이 사랑이란 게 등장했었소, 가끔은 삼각관계도 있었지만 항상 로맨스의 형태였지. 책 속의 영웅이 소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독자들과 내 자신에게 확신시키려 했소. 이제야 난 알았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을 얘기했다는 걸 말이오."
그가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이젠 알았소. 당신을 만난 지금,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이 죄다 불만스러워 미치겠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여자에게 갖는 완전한 몰입을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난 이 책에 그 어찌할 수 없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소. 그레고리는 진정으로 이 소녀를 사랑해, 그는 죽을지도 모르오. 만약에 그녀를…… 그녀를……."
"그녀를 떠나보내야 한다면."
그녀가 멍하니 말끝을 대신 맺었다.
"그런 일을 생각한 게 아니오."
카터가 버럭 화를 냈다.
슬론도 벌떡 일어섰다.
"우린 그래야 해요, 카터. 당신은 내 가장 친한 친구와 약혼을 했어요. 세상에서 나를 걱정해주는 유일한 사람하고요. 우린 친구로서 서로 사랑해요. 오늘밤 난 그 우정을 배신할 뻔했지요. 다시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어요. 그녀는 내 친구니까요."
"제기랄, 그녀는 내 친구이기도 하오."
그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불안하게 천정을 바라보자, 그가 소리를 낮춰 힘주어 되풀이했다.
"그녀는 내 친구이기도 하오. 그리고 그게 내가 그녀를 사랑한 방법이오, 슬론."
그녀는 두 귀를 틀어 막았다.
"아뇨. 당신은 나한테 그런 말하면 안돼요."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그 두 손을 걷어치웠다.
"안되겠지. 하지만 들어야 할 거요. 난 알리시아를 좋은 여자라고 생각하오. 약간 변덕스럽고 무책임하긴 하지만 한편으론 매력적이오. 그녀는 짐의 부인이었고 내 가장 소중한 친구를 행복하게 해주었소. 그것만으로도 그녀를 사랑할 충분한 이유가 되오.
"하지만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한 건 우리 두 사람에게 편리할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소, 슬론. 그녀와 아이들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해. 난 그들을 보살펴 주는 것이 짐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했고, 내 인생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소. 난 그녀가 여전히 짐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 그녀에 대해서 낭만적인 상상을 즐긴 적은 한 번도 없었소."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은 일단 결혼하면 그녀와 잠을 잘 거예요."
그가 대답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그녀의 조각난 가슴의 파편이 하나씩하나씩 영혼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 아이 하나는 있었으면 좋겠소."
마침내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난 매일 밤 아내와 같이 잠을 잘 생각이오."
슬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순간 귀를 틀어 막을 수만 있다면.
"네, 물론 그럴 거예요. 물어본 내가 바보겠죠."
"하지만 나와 매일 밤 같이 잘 아내는 알리시아가 아닐 거요."
그녀가 몸을 홱 돌렸다.
"물론 당신 아내는 그녀가 될 거예요."
그는 완고하게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꼭 그렇지는 않아."
"아뇨, 꼭이에요."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슬론? 이제 와서 내가 알리시아와 결혼할 수 있다고 어떻게 생각조차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럼 당신은 어떻게 그 이외의 생각을 할 수 있지요?"
그녀는 흥분하여 다그쳤다.
"카터, 그녀는 당신을 여기 보낼 정도로 날 믿었어요. 당신을 내 보호 아래 놓을 정도로."
"그녀가 어리석었던 거요."
그녀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결혼하기로 약속한 남자를 맡길 만큼 그녀는 날 충분히 믿을 이유가 있었어요. 우리는 친구고 지금까지 둘 중 누구도 우정을 배신하지 않았거든요. 상황이 반대였다면 어땠을까요? 알리시아가 죽고 내가 짐과 약혼했다면요? 당신은 날 그에게 떼어놓을 수 있었겠어요?"
그는 그녀가 절대 큰 소리로 내뱉지 않는 말들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건 똑같지 않아."
"물론 아주 똑같아요. 당신도 그걸 알고 있구요. 모르겠어요, 카터? 우리가 같은 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매인 상태에서 상상력을 그대로 풀어둔 것뿐이라구요. 당신은 소설을 쓸 정도의 로맨틱한 성격의 소유자예요. 당신은 그걸 연장시켰을 뿐이고, 난 몇 년간이나 혼자 살아왔기 때문에 외로웠던 거예요. 당신이 일단 알리시아와 아이들에게 돌아가면……."
"말도 안 돼, 슬론.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 날 자신이 원하는 게 무언지도 모르는 남자로 생각하오? 수퍼마켓의 카트를 끌다가 부딪치면서 당신을 만날 수도 있었겠지, 아니면 엘리베이터 안에서나 아니면 그 이외의 다른 곳에서라도 만날 수 있었을 거요. 그리고 어디에서든 당신이 문을 열어준 그날 밤과 똑같은 친밀감을 난 당신에게 느꼈을 거요."
"알리시아는 좋은 아내가 될 거예요."
그녀는 두 손을 비틀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듣기 좋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안 되는 거였다,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에 새기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거였다.
"그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소, 하지만 과연 나에게 맞는 아내가 될까? 그녀는 내가 일할 때 혼자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존중하지 않소. 그녀가 여기 있다면, 10분마다 방문을 두들기려고 계단을 달려왔을 거요……."
"그만해요!"
"아니. 당신은 들어야 해."
그가 어깨를 잡아 흔들어대자 그녀의 머리가 뒤로 흔들거렸다. 억지로라도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맞는 좋은 남편이 될 것 같소? 나에겐 모든 다른 작가들처럼 편집증이 있소, 슬론. 대화할 필요가 있어.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 가끔씩은 들어주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듣는 사람을 말하는 거요. 당신이 바로 그래. 내가 도착했던 날 밤처럼 말이오, 당신은 식탁에 앉아서 내 말을 들어주었소. 딴 데로 관심을 돌리지 않고 온전히 집중해 주었소. 당신은 하루종일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떠들어대지 않았소. 빌어먹을 도깨비 상자처럼 들락날락하지도 않았고……."
"그만해요, 카터!"
그녀가 몸을 빼내며 그에게 등을 돌렸다.
"감히 나에게 이제 곧 결혼할 여자를 비난하지 마세요. 술집에서 여자를 골라낼 때 남자들이 하는 짓이 그렇지 않은가요, 자기들과 관계 맺도록 동정심을 얻는 것 말이에요. '내 아내는 날 이해하지 못해.' 당신처럼 뛰어난 사람은, 그보다는 좀 더 독창적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난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요. 불결한 느낌만 들 뿐이에요. 당신과 알리시아에게 문제가 있다면 둘이 알아서 푸세요. 난 그걸 알고 싶지도 않고 거기에 관련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구요."
"당신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구, 슬론."
그가 다시 그녀를 끌어당겼다. 빠져나오려 몸부림쳐도 놓아주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머리끝에서 열 발가락 끝까지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부분까지 당신은 관련되어 있어."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으며 그가 달콤하게 빨아댔다. 그녀의 턱을 움켜쥔 채 무자비한 혀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감싸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욕망의 정도를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고갈되어버린 도덕심을 모조리 끌어모아, 그녀는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에로틱한 충동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죽어지냈던 것이다.
새로운 삶이 제공되었을 때, 그 부활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묵묵히 따르는 것을 알아챈 그는 포옹을 차츰 느슨하게 풀고 둘 사이로 손을 넣어 가슴을 사랑스럽게 애무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가지를 통하여, 그의 관절이 욕망으로 이미 단단해진 젖꼭지를 스쳤다.
"누군가 내 아이를 낳는 사람이 있다면 난 그게 당신이길 원하오, 슬론. 난 당신의 달콤한 가슴으로 젖을 먹이는 내 아이를 갖고 싶소."
그가 내보인 그림은 바로 그녀가 원해왔던 꿈이었다. 감히 상상해 보았던 환상이었다.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자. 두 사람의 사랑으로 탄생한 아기.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 가치 있다는 느낌. 그 보답으로 사랑받는다는 것.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꿈인 것처럼, 절대 현실로 될 수 없다는 것을. 그의 키스와 애무는 그녀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가슴을 잡아 찢으며 피를 흘리는 가학적인 자기 학대일 뿐이다.
그가 정신을 차리면 알리시아에게 돌아가겠지. 그리고 슬론은 상처만을 안고 홀로 남을 것이다. 과연 다시 자신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키스에 너무나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밀쳐내었을 때 그는 멍청하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박깜박거렸다.
"나에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고 차가운 가면과 같았다. 조심스레 유지하지 않으면 구겨질 것 같은.
"다시는 이런 식으로 나에게 접근하지 말아요. 그렇지 않으면 페어차일드 하우스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부글거리는 분노가 그의 눈 속에 피어 있던 정열의 흐릿한 안개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명료한 이해력으로 밝아졌다.
"제기랄, 슬론……."
"진심이에요. 당신은 곧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요. 그 점을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의 지글거리는 눈이 괜한 천정에 낙인을 찍었고, 그녀는 그 둔탁한 포악스러움에 몸을 움츠렸다.
"당신의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 난 알지."
그의 입술이 난폭하게 뒤틀렸다.
"당신은 이 집에 자신을 가둬두었어. 맞서는 게 두렵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겨버리는 거야."
"두렵다구요?"
그녀는 모욕을 당한 느낌이었다. 또한 자신의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자아를 들여다보고 방어기제들을 벗겨내는 그의 능력이 두려웠다.
"그래, 두려운 거야. 당신은 먼지 낀 무덤 같은 지독한 집에서 자랐지. 내가 알리시아에게 들은 바를 종합해 볼 때, 당신 부모는 당신을 철저하게 무시했더군. 당신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신을 내던졌던 거야. 당신을 차버린 그 멍청한 녀석에게."
"닥쳐요. 당신이 뭘 안다는 거예요?"
"내가 모른다고? 당신은 숨어 있는 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자신을 포기한 거야, 슬론. 당신은 유리처럼 환히 들여다보이거든. 당신 부모가 부모로서 부적당했다고 해서 그게 어떻다는 거야? 그 자기밖에 모르는 자식이 당신에게 변덕을 부린 게 뭐 어떻다는 거야? 그게 당신 둘레에 원을 그려놓고 남은 인생동안 그 안에 아무도 들여놓지 않을 이유가 되나?"
"지옥에나 가버려."
그녀가 홱 돌아섰다.
그녀의 예민한 반응에 대담해진 그는 그녀를 쫓아와 방에서 나가기 전에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뒤에서 그녀를 단단히 껴안았다.
"당신은 그런 생활을 할 만한 가치밖에 없다고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자신을 고독한 생활로 몰아넣어 버렸어. 제길, 슬론, 우리 중 아무도 가치가 없거나 절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인간은 없다구. 인생이란 잘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천사겠지…… 아니면 악마거나."
"이거 놔요."
그녀는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당신은 자기 부정이라는 싸구려 제단에 자신을 던져버렸어. 그리고 어느 누가, 특히 어떤 남자가 당신을 건드릴까봐 두려워해. 당신 자신을 바쳐버린 순교라는 신은 가진 걸 빼앗기지 않으려고 경계를 하지. 그건 사랑과 행복으로 손상되는 희생 같은 게 아닐 텐데 말이야."
그가 진실과 너무나 근접해왔기 때문에 그녀는 야생의 짐승처럼 손톱을 세우고서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 보았다.
"당신은 어떻죠, 카터? 당신은 딱 그 반대에요. 당신을 필요로 하는 한 여자와 두 아이들에게 자신을 내주었어요. 그런데 그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 약속을 한쪽으로 던져버리는군요. 그 약속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요. 그것은 연결되어 있고 머지않아 당신은 그걸 기억하게 될 거예요. 짐에 대해 생각하게 될 거고 친구로서 그에 대한 의무를 생각하겠죠. 알리시아와 아이들에게 돌아가서 나에게 베풀었던 모든 사랑을 그들에게 베풀게 되겠죠. 난 사양할래요. 당신은 결국 제 정신을 찾게 될 텐데 그 동안에 놀이상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숨을 들이마시는 그녀의 몸이 팽팽하게 들려 올라갔다.
"당신이 떠나는 게 최선일 것 같아요."
그는 끓어오르는 성질로 곤두서서 뜨겁게 눈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두 팔을 확 벌려 그녀를 놓아버렸다. 마치 더 이상 그녀를 만지는 것이 역겹다는 듯이.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입술로, 그가 내뱉었다.
"당신의 침대는 신성불가침의 장소로 남아 있을 거요, 페어차일드 양. 하지만 날 여기서 걷어차 낼 순 없을 걸."
그가 밀치고 지나간 회전문이 몇 번이나 앞뒤로 흔들거렸다. 그리고 나서 고요히 정지했다. 그제서야 슬론은 자신이 얼마나 지쳐버렸는지 깨달았다. 정신없이 방으로 달려들어가 침대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베개를 끌어당겨 그 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비난으로 그녀의 마음은 한참을 두들겨 맞은 듯 난타당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녀의 영혼이 그의 목표물이었고 분노를 담은 미사일이 거기에 집중포화 되었다. 가장 다치기 쉬운 곳을 내리치고 말았다. 그의 말 속에 담긴 진실은 매번의 공격에 넣었던 탄약이었다.
왜 카터는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난 자신을 보호하는 것 말고,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다시는 사랑에 상처받지 않겠다는 걸!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랑을 했고 그것으로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에게 얼마나 혹평을 퍼부었든지 간에, 그녀는 고통에 가까울 정도로 카터를 사랑하고 있었다.
제이슨의 거절에 대한 상처는 준비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멍청하게 그 관계로 빠져들었고 아무 경험이나 주의도 없는 상태였다. 이번에는 그런 순진함이 핑계가 되지 않는다. 가슴에서 부르짖는 말을 따른다면, 그 길은 후회와 회한으로 포장될 것이다. 빠져나갈 곳도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가능할 때 지금 돌아서는 편이 낫다.
하지만 이 집에서 그와 함께 있는 걸 어떻게 견뎌낼까? 낮 동안 그가 방 안에서 일만 한다면, 아마 저녁을 먹으러 오는 식당에서나 그를 만나겠지. 더 이상 그에게 쟁반을 들고 올라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침 식사를 위해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다음 몇 주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 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이 집에 다른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에는 해안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는 엄청난 비와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슬론은 사실 험악한 날씨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다른 곳에 너무나 신경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카터에게. 그래서 도시를 둘러싼 산의 진흙사태와 그 저지대의 홍수에 대한 소식을 읽고 다소 놀랐다. 그 상황은 다음 며칠간 텔레비전 뉴스거리가 될 정도로 충분한 재앙이었다.
"일정을 줄여서 집에 가야 할까 봐요."
아이오와에서 온 여자 한 명이 저녁 식사 때 말했다.
"아니."
그녀의 남편이 천천히 대꾸를 했다.
"우리는 이 여행을 몇 개월 전부터 계획했다구. 약간의 비로 그걸 망칠 수는 없어, 그렇잖아?"
그 여자는 걱정스레 다른 여행 동료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있자구요."
슬론이 내온 접시에서 구운 스테이크 한 조각을 덜어내며 남자가 대답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여자가 동조를 한 후에 그녀를 놀려댔다.
"게다가 도로시, 가게에는 어디에도 비가 오지 않잖아요."
남편들은 신음소리를 냈고 슬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집에 있는 다른 손님이라고는 이틀 더 머물 계획인 나이든 부부 한 쌍뿐이었다. 감히 카터를 쳐다보지 못했다 해도, 그녀는 그의 비꼬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떠날 건지는 묻지 마십시오."
그가 버건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책 진도가 잘 나가고 있으니까요. 아참, 페어차일드 양, 이 감자튀김 좀 더 주시겠습니까?"
그 화사한 미소가 거짓이라는 건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물론이죠, 매디슨 씨."
그와 똑같은 거짓된 상냥함으로 대꾸하면서 그녀는 그의 무릎에 접시를 쏟아버리고 싶은 악마적인 충동에 휩싸였다.
날씨의 변화를 조심스레 주시하며, 슬론은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것에 우울해졌다. 금문교는 거센 바람과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위험해져서 몇 시간동안 교통이 통제되기도 했다.
슬론은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이오와에서 온 부부들의 일정은 다 끝나버렸고, 노부부도 내일이면 떠날 것이다. 주말에 두 개의 방이 예약되어 있었지만, 여행객들이 이런 심상찮은 일기예보를 들었을 것 같아 걱정이었다. 뉴스 기자들은 가능한 한 최악의 상황을 그리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들이 계획을 취소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것은 심각하게 그녀의 재정 상태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카터와 그녀 단둘이만 남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를 떠나도록 설득할 수 없다면 말이다 - 그렇게만 된다면 비가 곧 멈춘다는 것만큼이나 좋은 소식일 텐데.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주말에 예약했던 두 쌍에게 취소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계단 아래의 작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계산기를 두들겨 보았다, 이전에 나온 결과가 잘못된 것이길 기대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달 세금은 어떻게 지불한다지? 적어도 돈에 대한 걱정이 카터에 대한 걱정을 잠시 물러가게 했다. 내일 밤이면 이 집에 둘만 남게 될 것이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녀는 수화기를 집어드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다.
"페어차일드 하우스입니다."
그것이 빚쟁이의 전화일 것임을 아는 사람처럼 체념한 목소리로 그녀가 응답했다.
"목소리가 거기 날씨처럼이나 아주 우울하게 들린다, 얘."
"알리시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고 애써 자신에게 설명했다. 그 남자와 키스만 했을 뿐이야. 음, 그리고 약간의 접촉도 있긴 했지…….
"넌 어떠니?"
"좋아. 아이들도 잘 있고. 나쁜 일은 없어. 그냥 전화하고 싶었던 거야."
"카터를 불러올게. 그는 평소처럼 일하고 있어. 거의 그를 보지도 못해. 항상 방 안에 틀어박혀 있거든. 탁탁거리는 타자기 소리가 계속 들려."
침착해, 침착해. 너무 떠벌이지 마. 알리시아가 의심할 거야.
"사실은 너와 통화하고 싶었어."
알리시아가 조용히 말했다.
"카터는 어떤 것 같니?"
슬론은 벌어진 입술을 혀로 핥았다.
"어떤 것 같다니?"
손가락으로 전화코드를 비틀어댔다.
"무슨 뜻이야?"
"잘 있냐구? 행복한 것 같아?"
"잘? 행복?"
"슬론, 내가 하는 말 다 따라할 작정이니? 그가 괜찮은지만 말해줘."
알리시아의 성마른 대꾸에 슬론은 깊은 숨을 몇 번이나 들이쉬었다.
"물론 괜찮지. 어쨌든 건강은 좋은 것 같아. 매일밤 식사를 잘 하거든."
그 얄팍한 웃음소리가 알리시아에게 진실하게 들리길 바랐다.
"난…… 그를 위해서…… 항상 커피를 준비해 놓고 있어. 그는…… 음…… 일하는 동안 커피 마시는 걸 좋아한다고 했거든."
"적어도 먹고는 있구나. 책이 끝날 때까지 호텔에 있겠다는 걸, 내가 반대했어. 그는 감자칩과 자판기 커피만 마시면서 살았을 거야. 난 지금도 페어차일드 하우스가 그를 위해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해, 다만……."
"다만?"
알리시아의 말이 멈추자 슬론의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심장이 목뒤까지 벌떡거리고 있었다.
"다만 나와 통화할 때 그이 목소리가 이상해.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고, 멀게 느껴져. 그가 일하는 중이고, 책을 쓸 동안은 항상 다른 세계에 몰두해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이의 무관심에 섭섭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구."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해, 알리시아."
슬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결혼식 준비 때문에 정신없겠지. 하지만 그런 경우에 여자들 할 일이 남자들보다 더 많잖니. 그는 아주 엄청나게 바빠. 책에 정신집중을 하고 있어서일 거야. 무관심한 듯 보이는 게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구."
양심의 소리 때문에 그 말이 뻔뻔스럽게 느껴졌다.
"네 말이 맞겠지."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약간 밝아졌다.
"아마 난 소설에 빠져 있을 때의 그 암흑기에 익숙해져야 할 거야."
"맞아, 그래야 돼. 네 약혼자에 대해 한 가지 안 게 있다면, 그가 글 쓰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거기서 돈이 나오는데."
슬론은 설명할 수 없지만 하여튼 화가 났다. 큰돈이 되지 않더라도 카터는 글을 쓸 것이었다, 돈 한푼 들어오지 않더라도.
"……그래서 말인데, 난 내일밤 거기 가서 주말을 두 사람과 같이 지낼까 생각중이야."
알리시아의 말 중간쯤의 그 대화로 슬론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뭐라고? 여기 온다고? 내일? 그거 정말 잘됐다!"
이건 진심이었다. 알리시아의 존재가 모든 걸 제대로 정리해줄 것이다.
"엄마가 애들을 봐준다고 했어. 남는 침대 있니?"
"너무 많아서 걱정이야."
슬론이 씁쓸하게 웃었다.
"제발 오기나 해."
"거기 날씨가 별로라면서."
"그럼 어때? 우린 카터가 일하는 동안 불가에 앉아 얘기할 거잖니."
"그이더러 주말엔 쉬라고 할 테야."
"카터를 불러올게. 틀림없이……."
"아냐. 그냥 내가 간다고만 전해줘. 주말 내내 일을 방해할 거면, 오늘 하루는 평화롭게 놔두어야지."
그녀는 비행기 예약시간과 예상 도착시간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공항에서 택시를 탈 테니 마중 나오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난 네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기다리고 있는 게 더 좋아."
"알았어.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어."
"나도 그래. 안녕."
슬론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느낌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보다 훨씬 더 열성적으로 저녁 식사 시간에 나설 수 있었다. 노부부만이 식당에 내려왔을 때는 다소 시들해지는 기분이었다.
"계단에서 신사분을 만났는데 외출할 거라고 하더군요."
남자가 정중하게 전해주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는 자정이 넘을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그녀는 응접실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가 코트를 벗으며 비를 털어내다가 문가에 선 그녀를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지, 사감 양반? 내가 통행금지를 어긴 건가?"
그녀의 입술이 분노로 다물어지며 등은 쇠지렛대처럼 똑바로 세워졌다.
"당신이 몇 시에 들어오든 상관없습니다, 매디슨 씨. 당신의 약혼녀에게 온 메시지를 전하려고 기다린 것뿐이에요."
오만하게 비틀어졌던 입술이 밑으로 처지며 그의 어깨도 가라앉았다. 그는 비로 젖은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하오, 슬론. 내가 못된 망나니처럼 행동하고 있군. 사과하겠소."
차라리 잘난척하는 조롱이 이런 힘없는 사과보다는 더 받아들이기 쉬울 것 같았다. 옷에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 채로 비참하게 서 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상처받을 듯 위로가 필요한 듯 보였다. 그녀만큼이나 비참한 그 모습이 작은 보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를 더욱 사랑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공허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다 잘 있다던가? 아이들도?"
"네, 모두 잘 있대요. 그녀는…… 당신과 같이 주말을 보내려고 내일 저녁에 올 거예요."
하마터면 우리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당신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개인적이고 그와 알리시아의 관계를 굳건하게 만들 것 같았다.
"아."
그는 무표정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잘됐군. 혼자만?"
그는 억지로라도 관심을 보이려 했다.
"데이비드와 아담은 부모님께서 봐주신대요. 그녀는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도착할 거예요."
며칠 만에 처음으로 그들은 단둘이 남았다. 정열과 분노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서로 이 쓸데없는 대화를 가능한 한 늘이고자 했다.
그녀가 볼품없는 파란 로브를 입지 않았다는 걸 그가 눈치 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지금 입은 옷은 살구빛 벨루어였다. 그 색깔이 머리의 금빛 갈색의 다양한 색채를 돋보이게 했고 옷감은 가슴과 엉덩이의 섬세한 곡선을 드러내며 다리 사이로 부드럽게 떨어졌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 자극적인 윤곽의 삼각지에서 눈을 떼어내는 것 정도였다.
자신의 사타구니에 일어나는 반응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에 대항하며 애써 목을 가다듬었다.
"다른 말은 없었소?"
그녀의 시선은 그의 목 아래서 뛰는 맥박에 고정되었다. 입술로 그 리듬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이 어떠냐고 묻더군요. 잘 있는지 그리고…… 그리고 행복한지."
"뭐라고 말했소?"
"식사를 잘 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문득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
"저녁은 드셨어요?"
"차이나타운에 있는 칸에서 먹었소."
"맛있었나요?"
"아주 맛있었지. 하지만 한 사람 먹기엔 양이 너무 많더군."
그의 입술이 약간 미소 짓는 것 같더니 견딜 수 없는 슬픔의 곡선으로 잦아들었다.
그녀는 그걸 만져 그 위에 담긴 비극적인 표정을 달래주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은 미소 짓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인 걸. 아니면 키스를 하든가. 그녀는 눈을 떼어내며 숨가쁘게 입을 열었다.
"그것뿐인 것 같네요. 안녕히 주무세요."
어둠 속에서 그녀가 그를 지나쳐갔다.
"슬론?"
"네?"
재빨리 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너무 가까이에 다가서 있었다. 그의 숨결로 인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가 저녁 식사 후에 마셨음직한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소?"
"다른 부분이라뇨?"
"내가 행복한지에 대해서."
그의 마력적인 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말을 전했다.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했어요. 책에 집중하고 있다고."
"내가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는 무수한 감정으로 인해 번득이는 하늘색 잿빛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당혹스레 커진 채 갈망으로 흐릿해진 눈동자를.
휴우, 그녀가 이런 식으로 쳐다볼 때면 그녀를 안고 싶은 욕구를 어떻게 조절할 수 있단 말인가? 혀로 그녀의 입술과 가슴을 맛보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그 공단 같은 살결을 느끼지 못한 채, 그녀를 만질 때 목 깊이에서 울려대는 에로틱한 소리를 듣지 못한 채, 몇 시간 몇날 며칠 밤을 보냈는데 그녀가 어떻게 그에게 금지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맛보고 싶었다. 그 옷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걸 만지고, 절정에 도달했을 때 지르는 황홀한 비명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게 어떨지는 상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의 고요함 속에 애정에 관대한 정열적인 연인의 심장이 고동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지 말라는 이성에 대항하여, 그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놓아주자 몸이 고통스러워졌다. 자신의 몸 아래 벌거벗은 그녀의 육체가 그가 주는 모든 사랑을 받아들이는 걸 상상하니 혈관을 통하여 피가 솟구쳤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일생을 보내야 한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편안하고 따뜻하게 감싸는 그녀의 달콤한 신비에 대한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이 파도치는 굶주림을 받아들일 것이다, 가끔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면 그걸 달래줄 것이다. 그러면 그의 미칠 듯한 가슴이 진정될 것이다. 하지만 영혼은 더 높이 하늘을 날 것이었다.
그 때가 오기 전까지는 무자비한 정열이 그의 기력을 앗아가겠지. 그는 글을 쓸 수도 잠들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상상만으로도 다른 여자와 실지로 자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걸 어쩌랴. 그는 그 환상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포기한다면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그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그녀의 우아하고 날렵한 팔다리가 그 아닌 다른 남자의 몸을 안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는 거의 제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그녀가 그에게 이렇게 정열적이라면, 당연히…… 그는 물어보아야만 했다, 알아야만 했다.
"그 세일즈맨, 제이슨이던가?"
"네?"
"같이 살았다고 했지."
"그래요."
그녀가 거칠게 대꾸했다.
"물론 그와 잠도 잤겠지."
"그래요."
"그가 처음이었나?"
"단 한명이었죠."
"그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었나?"
"아뇨."
큰 소리로 말한 것 같은데, 그 소리는 떨리는 입술을 지나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그가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았고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그의 손바닥에 기대어 보았다.
그의 손길이 움직일 의지를 빼앗아가는 마약처럼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거기 그대로 서서 그로부터 발산되는 열기를 흡수했다. 태양의 치유력 있는 햇살에 흠뻑 젖는 것처럼. 그것은 이상한 약이었다. 몸의 나머지는 최면에 걸려 있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극적으로 깨어나는 것이. 젖가슴이 사랑으로 가득 차며 그 봉우리가 싹트는 욕망으로 얼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미로우면서도 노곤한 온기가 가슴에서 울려대는 고동과 같이 여성이 자리 잡은 곳으로 기어들었다. 그의 가슴에도.
"그 남자는 바보요."
카터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그녀의 촉촉이 부어오른 아랫입술에 엄지를 달려보다가 그는 자기를 억제하는 한숨을 들먹이며 떨어져갔다. 그녀의 심장 고동이 실망감으로 느릿해지며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발걸음과 똑같이 터벅거렸다.
5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요, 카터."
알리시아의 입이 아름답게 뾰로퉁해졌다.
"무슨 차이가 있냐구요?"
"다 쓰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 원고를 읽을 수 없소.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내 에이전트도, 편집자도, 내…… 약혼녀라도. 아무도 안 돼."
그들은 식당에서 슬론이 그날 대부분의 시간을 들여 준비한 음식을 먹는 중이었다. 음식은 맛이 좋았고, 한 세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식당의 분위기는 따듯하고 안락했다. 특히나 유리창에 은빛 물방울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에도 더욱 그러했다.
이번에는 슬론도 그 방에서 같이 식사하였다. 카터가 처음으로 같이 식사하던 날 밤 입었던 까만 치마와 조젯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머리는 위로 느슨하게 틀어올렸고, 귀에는 진주 귀걸이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녀가 그 방에 꼭 어울려 보이는 반면 알리시아는 완전히 그 반대였다. 무척이나 도드라진다고 할까.
그녀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청동 문고리의 똑똑 소리가 친구의 도착을 알렸을 때 슬론은 응접실에서 불을 지피는 중이었다. 알리시아는 슬론의 품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성격처럼 열성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녀의 쾌활한 환성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왔을 때 카터도 그 억제되지 않은 애정을 듬뿍 선사받았다.
그는 생동감 있는 알리시아를 따뜻하게 안으며, 뺨에 입을 맞추었고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슬론은 어벙하게 벽난로를 점검하기 위해 응접실로 되돌아갔었다.
알리시아의 금발머리는 비행기 여행과 비바람, 열렬한 포옹을 거쳤음에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즐거움으로 춤을 추었고, 이틀만이라도 아이들을 할머니에게 맡긴다는 걸 믿을 수 없다고 떠들어대는 입술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슬론이 방으로 안내해준 후 - 편리하도록 카터의 옆방으로 정했다 - 저녁 식사를 위해 내려온 그녀는 빨간 모직바지와 그에 어울리는 가죽재킷을 이제 새파란 실크 바지 정장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 속상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예술가적인 감수성이겠죠. 원고를 나한테조차도 보여주지 않는 이유를 넌 이해하겠니, 슬론?"
알리시아가 카터에 관한 견해를 물어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슬론은 접시에 남은 음식을 포크로 뒤적거렸다.
"응, 알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이 만족할 만큼 완벽하게 만들고 싶은 걸 거야. 그리고 아직 완벽하다는 느낌도 없는데 너에게 미리 읽어보게 한다면 너와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게 될지도 몰라."
알리시아는 모르는 외국어를 듣기라도 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겠지. 하지만 난 이제 곧 그의 아내가 될 거란 말이야."
카터도 또한 슬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 속에 불타는 빛이 단지 식탁 위의 양초불빛일 뿐이라면 좋을 것이었다.
"미안해, 알리시아. 하지만 난 확고하오. 다 마칠 때까지는 아무도 그 책을 읽지 못하오."
"얼마나 남았죠? 원래 예상보다 더 일찍 끝낼 수 있나요?"
그가 의자에서 불안하게 몸을 움직이며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럴 것 같진 않아. 마지막 한 장이 아주 골치를 썩인다구."
"아마 굉장히 재미있을 거예요."
알리시아가 감탄스럽다는 듯 테이블 너머로 그의 손을 잡았다.
부러움이 슬론의 가장 예민한 곳을 찔러왔다. 알리시아는 그의 손을 잡을 권리가 있다. 그녀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빗어넘길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사뭇 다르게 생긴 두 눈썹의 곡선을 쓰다듬을 권리도 있으며, 그 사이에 걱정으로 일그러진 주름을 사랑의 손길로 펴줄 권리가 있다. 알리시아가 과연 그 근심의 신호를 알아차리기나 했을까?
"여기는 소음이나 방해할 만한 게 없잖아요."
알리시아가 웃음 지었다.
"가을 여행객 상황은 어때, 슬론?"
그녀가 약혼자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물어왔다.
"날씨가 그들을 집에 묶어놓을까봐 걱정이야. 텔레비전 보도가 겁을 주고 있어. 어제 예약되어 있던 방 두 개가 취소됐어. 다음 주에 도착하려던 네 명의 여자들도 계획을 다시 세우겠다고 오늘 전화했다구."
"걱정되니? 내가 알기로는 겨우겨우 맞춰나가고 있는 것 같던데."
악의가 있어서 한 말은 아니었지만, 카터 앞에서 위태로운 재정 상태에 대해 말하다니 친구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것은 그녀의 또 다른 결점을 지적한 것과도 같았다.
알리시아의 가족은 언제나 풍족했다. 짐도 마찬가지였고. 그녀는 궁핍한 생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슬론은 마음을 다스리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지만 어쨌든 활발하게 대꾸해 주었다.
"아, 괜찮을 거야. 푸짐한 저녁 식사 대신 핫도그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해나갈 거야."
"물론 그래야지."
알리시아가 말했다.
"내가 너의 그런 능력과 상식을 조금이라도 가졌다면 좋을 텐데."
'나도 네가 그랬으면 좋겠다.' 슬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연약한 여자 같은 인상도 지워버렸으면 좋겠어.'
"하여튼, 오늘밤은 그 결정을 시작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햄이 아주 맛있다, 얘."
알리시아는 접시 옆으로 냅킨을 접어놓고 몸을 쭉 뻗었다.
"이젠 불가에 웅크리고 앉을 준비가 됐어."
슬론이 일어섰다.
"넌 카터와 같이 편하게 있어. 내가 접시를 치울 테니까."
"아냐, 아냐, 내가 도와줄게."
"어서 가."
슬론이 응접실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지금은 너의 휴가 기간이라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나도 금방 따라갈게."
"네가 고집부린 거다."
알리시아는 카터의 손을 잡아 식당에서 끌고 나갔다.
방을 나서는 그의 눈이 그녀에게 향한 걸 느낄 수 있었지만, 슬론은 접시를 쌓는 쟁반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고 아침 식탁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다.
마침내 할 일이 끝나자, 그녀는 앞치마를 벗고 머뭇거리며 응접실 쪽으로 향했다. 카터의 웃음소리와 알리시아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그곳으로.
그들은 2인용 의자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카터는 구석에 몸을 기댔고, 알리시아는 반쯤 앉은 자세로 반쯤은 그에게 기대어 신발을 벗어놓은 채 허벅지 아래로 두 발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벌써 재킷을 벗은 상태였다.
"왔구나. 기다리는 걸 포기할까 생각 중이었다구."
알리시아가 말했다.
"유치원에서 아담이 쥐를 본 사건에 대해 얘기하던 참이었어."
"너무 충격받은 게 아니라면 좋겠다."
슬론은 카터의 수수께끼 같은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의자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아담보다는 불쌍한 선생님이 더했어."
알리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카터의 가슴에 볼을 기대고 또한 한 손을 그의 목으로 올렸다.
"아, 너무 좋다. 편안하고 평화로워. 두 남자아이들이 날 얼마나 지치게 했는지 말할 수 없을 정도야."
그녀가 고개를 들어 카터를 쳐다보았다.
"애들한테 벗어나서 당신을 꼭 만나고 싶었어요."
그는 미소를 보이며 그녀의 완벽한 코끝에 키스해 주었다. 그리고 머리를 애정 어린 손길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슬론이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정말 미안하지만, 오늘밤 난 너무 지쳐버렸어. 비 때문에 그런지 더 졸려."
"슬론……."
"우리 얘기는 내일 하자, 알리시아. 너도 오늘밤은 카터와 둘만 있는 게 더 나을 거야. 위층에 올라갈 때 불을 끄고 전등도 다 꺼주길 부탁해요. 두 사람 모두 내일 아침에 보자구요."
그녀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 나왔다. 무례한 짓이라는 건 안다. 자신이 겁쟁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만약 거기 계속 앉아서 두 사람이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죽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정말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알리시아의 방문을 노려보았다. 그 방문을 열어 알리시아가 잠자지 않은 걸 발견한다면, 그걸 확인하라고 충동질한 자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리시아가 어디서 밤을 보냈는지 알고 싶은 걸 그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놋쇠 문고리가 그녀의 손 아래서 돌아가고 문이 활짝 열렸다. 구겨진 시트와 움푹 패인 베개가 눈에 들어왔다. 한 개의 베개만.
문턱에 선 그녀의 몸에서 기운이 쫙 빠졌다. 그리고 당장에 이렇게 엿본 자신이 경멸스러워졌다. 하지만 꼭 알아야만 했었다. 물론 손님의 침실에 들어가 침대를 정리하는 것이 그녀의 할 일이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가장 친한 친구를 엿보았다는 걸 부인하지 못했다.
어젯밤 그들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소리는 들었지만, 같은 방으로 들어갔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끔찍한 밤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알리시아의 나신이 카터의 손과 입술로 애무되는 광경을 상상하며 침대에서 수없이 뒤척여야 했다. 알리시아의 기꺼운 육체에 그의 열뜬 정열이 몰아치는 모습도 보였다, 그 짜릿한 삽입과정을 상상할 때는 자신이 그 황홀한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고작 고통의 비명을 밖으로 내지르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함께 아침 식사를 위해 내려왔다. 알리시아는 행복하고 활기차며 아름다웠고, 카터는 한잠도 자지 못한 듯이 헝클어지고 수척하며 뚱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 방에서 자긴 했다구."
슬론은 알리시아의 침대를 정리하며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방의 나머지 부분은 깔끔했다. 알리시아가 정돈해 놓은 모양이었다.
슬론이 준비한 푸짐한 아침 식사를 먹은 후, 알리시아는 카터에게 쇼핑을 가자고 졸라댔다. 슬론에게도 애원을 해왔지만, 그녀는 같이 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장부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 그 핑계였다.
물론 장부정리를 해야 하긴 했다. 하지만 연기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30분 안에 끝내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노처녀처럼 그들의 꼬리를 따라다니는 형벌을 자신에게 허락할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슬론은 이제 카터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폭풍을 겪은 참상을 보는 듯했다. 미처 휴지통으로 들어가지 못한 종이 뭉치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마련해준 책상에는 원고더미들로 수북했고 그 위에 빨간 잉크자국들이 핏자국처럼 사방으로 그려져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세탁소에 옷을 맡기긴 했지만, 그의 셔츠와 청바지와 재킷과 스웨터들이 상처 입은 육체의 형상처럼 가구 위에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침대를 정리하는 일에 딸린 부가적인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이처럼 감사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옷걸이 위에 스웨터 하나를 걸고 있을 때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몸이 홱 돌아갔다. 현관을 들어오는 소리도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그가 항상 뿌리는 스킨과 체취가 배어 있는 옷가지를 거는 일에 너무 몰두해 있었던 탓이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그녀가 놀라 속삭였다. 가슴에 그의 스웨터를 무심코 움켜쥐었다. 마치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던 중에 현행범으로 붙잡힌 느낌이었다.
"여기가 내 방이잖소."
그의 입술 한구석이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로 기울어졌다.
"알리시아는 어디 있어요?"
그는 재킷을 벗어 의자 등 뒤에 깔끔하게 걸었다.
"삭스에 있는 양장점에서 옷을 입어보는 중이지. 난 견딜 만큼 견뎠소. 그래서 볼일 다 보고 오라고 말하고 와버렸어.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슬론은 알리시아가 만들었던 쇼핑계획을 기억해내고 몇 시간은 족히 걸리리라는 걸 알았다.
"즐겁게 보내겠죠."
스웨터를 옷장 속에 걸려고 돌아서며 그녀가 말했다.
"이 방에 대해서는 미안하오. 내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옷장 문을 닫으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전혀요. 매일 아침 침대와 방을 정돈하는 건 하루 일과일 뿐이에요. 당신은 제일 큰 방에서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고 계시니, 옷 몇 개쯤 거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고맙군."
"천만에요."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사이 바깥 세상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우주의 이 작은 공간과 단둘이 있을 약간의 시간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슬론의 아픈 가슴에 너무 위험한 짓이 될 것이었다. 잠시라도 더 그와 같이 있으면 가슴이 산산조각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다 한 것 같군요."
문으로 향하며 그녀가 말했다.
"일하실 수 있도록 나가드릴게요."
아무 저지도 없이 문고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막 문을 열려는 순간, 그녀의 손 위로 그의 손이 펼쳐지며 열지 못하게 내리눌렀다.
"바지 입은 모습이 보기 좋군."
그녀는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 문을 닫아버린 그의 손등을 노려볼 뿐이었다. 손가락 관절의 갈색 털들, 그리고 점점이 찍힌 밝은 색의 주근깨들. 그곳에 입을 맞추고 싶다. 하지만 그대신 그녀는 자신의 일에 몰두한 척 평범한 대화를 지속시켜야 했다.
"청소할 게 많은 토요일 아침에만 입는 거예요."
"청소한 사람의 냄새가 아닌 걸. 당신한테서 방금 빵을 구운 듯한 냄새가 나."
그가 더 가까이 움직여, 몸을 그녀의 엉덩이에 갖다댔다.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어 간신히 말을 이었다.
"빵도 구웠거든요."
"한입 맛보고 싶군."
그가 고개를 숙여 코를 그녀의 머릿속으로 넣었다. 한쪽 목덜미에 그의 입술이 닿으며 가볍게 깨무는 걸 느꼈다. 그의 이가 살갗을 살짝 긁었고, 그 위로 입이 열리며 그 지점을 혀로 씻어 내렸다.
"카터……."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여성의 은밀한 곳에서부터 혈관을 통해 감미롭고 느슨하게 넘쳐나는 욕망의 용해된 용암에 의해 부끄럽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했다.
"당신의 귀엽고 앙징맞은 엉덩이가 이런 바지 속에 있으면 얼마나 멋진지 알고나 있소?"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며 그의 혀가 그 투명한 테두리의 윤곽을 그렸다.
"아니 모르겠지, 안다면 입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말하면 안 돼요……."
"그런 말하면 안 된다느니 무슨 행동을 하면 안된다는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야. 그리고 당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당신도 그걸 원해. 그렇지 않나? 말해봐, 슬론."
"그래요."
그녀는 흐느꼈다.
"오, 우리는 죄를 짓게 되겠죠. 하지만 나에게 키스해 주세요."
그녀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감미로운 키스였다. 그는 그녀의 뺨을 감싸 얼굴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그들의 입술이 어깨 너머로 마주쳤다. 그의 입술이 벌어지고 그는 한동안 그녀의 맛을 흠뻑 들이킨 다음 혀를 그 깊이 있는 곳으로 파묻었다. 천천히 물러나는 그에게 그녀는 싫다는 듯 중얼거렸다.
"쉬이, 서둘지 말아요."
그녀의 입술에 대고 말하면서 그의 혀끝이 그 둘레를 핥았다.
나른한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뺨과 턱 아래쪽을 쓰다듬었고 그는 다시 혀를 갖다대었다. 서둘지 않고 느릿한 동작으로 그녀의 입술을 탐하며 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팔을 내 목에 감아봐."
입술이 그녀의 목을 따라 뜨거운 키스를 퍼부어갔다.
그녀는 그가 요구한 대로 그의 옷깃을 스치고 있는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엮었다. 그녀의 몸이 그를 따라 기울어지는 것, 그에게 몸을 쭉 펴고 머리를 그의 가슴에 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의 두 손이 갈비뼈를 천천히 둥글게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온몸을 관통하는 이 신비로운 리듬에 반응하여, 그녀는 약간 몸을 흔들며 그의 바지 앞자락에 비벼댔다.
"아, 슬론. 그래, 내 사랑. 계속해."
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녀의 어깨 위로 고개를 숙여, 그는 코를 비비며 블라우스의 단추들을 한 번에 풀어버렸다. 서둘지 않고 천천히 그 옷을 벗겨가다가 브래지어의 끈에 매혹되었다. 그는 여러번 깨물어 그 감촉과 그녀의 체취를 맛보았다. 그가 뺨을 비벼대자, 턱수염의 까칠한 부분이 온몸으로 기쁨의 전율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머리를 더 바짝 잡아당기며 등이 뒤로 휘자, 그녀의 가슴은 한껏 들려 올라갔다.
"부드러워."
브라 위로 부풀어 오른 젖가슴을 찾아 그의 손이 움직였다. 가슴을 손 안에 가득 잡아 손가락 끝으로는 유혹적인 젖꼭지를 쓸어보았다. 그것이 그의 손길로 인해 딱딱해지자 그의 눈동자가 남성적인 자부심으로 반짝거리며 핑크빛 동그란 그 주위를 다시 한번 쓰다듬었다.
"첫날밤 이게 거의 날 바보로 만들 뻔했지. 이러고 싶었소."
손가락 사이에 그 봉우리를 굴리자 그것이 갈망을 더욱더 외쳐댔다.
"그 다음에는 혀로 만져보고 싶었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흥분된 신음보다 약간 더 크다고나 할까.
"지금도 그러고 싶어."
자신의 남성다움을 주장하며 길고 강인한 손이 그녀를 뒤쪽으로 밀어대자, 슬론은 주체할 수 없는 정열로 몸을 떨었다. 몸 전체가 젤라틴으로 된 것처럼 나른하게 기운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관능에 사로잡힌 포로였고 카터는 그 교도관이었다. 그녀를 여자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열쇠를 그가 갖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여성적인 근원을 우물을 찾듯 두들겼고, 그것이 터져 온몸으로 흐르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각들 속에 그녀를 온통 빠뜨려 버렸다.
"당신을 원해, 슬론."
"저도 그래요."
그의 팔 속으로 몸을 돌리며 그녀도 흐트러진 숨결로 고백했다. 그녀의 두 팔이 그를 더욱 단단히 껴안으려고 허리를 돌아 감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체취를 깊이 들이쉬었다. 얼마 안 있어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가 그녀를 원하고 있으며, 그녀는 그의 것인 척할 수 있다.
입술을 그녀의 머릿속에서 움직여가며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바지 위로 감탄해마지 않는 탱탱하고 앙증맞은 엉덩이도 애무하였다.
"이런 지옥 같은 고통을 겪게 했으니, 이제 날 사랑해줄 거지, 그렇지 슬론?"
"당신을 사랑해요."
그의 칼라 바로 아랫부분의 살결을 입술로 쓰다듬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떼어내고 나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 말뜻 알잖소."
"난…… 당신과 사랑을 나누지 않을 거예요, 안 돼요."
조용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갑자기 그가 그녀의 몸을 놓고 한손바닥에 주먹을 쾅 내리쳤다.
"빌어먹을."
그가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왜?"
성난 손가락으로 머리에 깊은 고랑을 만들어내며 다시 다그쳤다.
"왜냐구?"
그녀는 천천히 옷을 바로잡고서 신중하게 그를 마주보았다.
"이유를 알잖아요, 카터. 다시는 이러지 않도록 해요. 우리가 만약…… 같이 자게 된다면, 우리 둘 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요."
"그걸 원하는 것으로는 상처가 덜하단 말인가?"
"아니겠죠. 하지만 그 후에 지독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거예요."
"당신에게 내 사랑을 준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을 거요. 그리고 당신을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일도 절대 없을 거요."
"당신은 그렇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될 거라는 걸 난 안다구요."
그가 거만한 자세로 허리띠에 엄지를 걸었다.
"장담은 하지 마시오. 난 당신처럼 자기를 벌주는 그런 뒤틀린 성향을 갖지 않았으니까, 슬론. 난 순교자가 되는 일에 흥미 없다구."
방금 전에 정열이 넘쳐나던 그 혈관에 분노가 용솟음쳤다.
"당신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보다 내가 더 신뢰를 준 모양이군요."
"그건 무슨 의미지?"
"난 당신이 남자의 본능에 좌우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거절했다는 이유로 날 학대하는 게 남성적인 에고를 달래준다면, 마음대로 하시죠. 그게 내 마음을 바꾸지는 못할 테니까. 난 당신과 자지 않을 거예요."
"학대라고?"
그가 코웃음을 쳤다.
"아가씨, 학대가 무언지 내가 말해줄게. 여자가 남자를 정신없게 만들고 나서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게 바로 학대라구."
그의 말이 사나운 주먹처럼 그녀의 배를 내질렀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녀는 뜨거운 울화를 억지로 삼켰다.
"날 아가씨 따위로 부르지 말아요."
두 손 만큼이나 팽팽하게 이를 악문 채로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 당신이 한 말은 조잡하고 저속하다구요."
그의 자세도 싸움을 자극하는 것 중 하나였다.
"아직 조잡이나 저속 근처에도 가지 않았어."
"그럼 당신 책을 위해서나 남겨두시죠."
그녀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 다음 마지막 공격을 내던졌다.
"거기에는 딱 어울릴 거예요."
그리고 그의 대답이 들리기 전에 문을 쾅 닫아버렸다.
한참에 알리시아가 유니언 스퀘어의 가게 딱지가 붙은 짐꾸러미와 상자들을 한아름 들고 들어왔다.
"슬론, 슬론."
택시요금을 지불하고 나서 그녀가 소란스레 소리를 쳤다.
슬론은 계산기가 뱉아내는 한심한 결과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사무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가게에 물건은 남겨놓은 거니?"
그녀의 약혼자에게 키스 받은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날까 봐 겁났다. 그리고 알리시아의 밝고 천진한 얼굴은 자신에게 느끼는 역겨움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했다. 알리시아의 머리는 비에 젖어 바람에 나부꼈고, 까만 가죽 부츠와 그에 어울리는 비닐 우비 차림이었다.
"내가 산 이 멋진 물건들을 볼 때까지 기다리라구. 카터는 어디 있어?"
"위층에서 일하고 있어."
슬론은 애써 알리시아의 눈을 피했다.
"타자기 소리를 들었거든."
"위로 올라와. 내가 산 것들을 보여줄게."
"금방 올라갈게. 뜨거운 음료수를 가져갈 테니 그때 패션쇼를 보여달라구."
좀 더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밀려드는 죄책감을 지우기에는 세상의 모든 시간이라도 부족할 것이었다.
"좋았어."
알리시아는 행복하게 위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잠시 후 슬론이 쟁반을 들고 올라갔을 때 카터의 타자기 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문은 닫혀 있었다. 알리시아가 들어가면서 슬론이 발로 밀어도 좋을 만큼 살짝 열어놓았을 텐데.
문지방 안에 들어선 그녀는 관절이 하얗게 되도록 쟁반을 움켜쥔 채 그대로 멈추어 섰다.
꾸러미와 상자들이 침대와 마루 위에 정신없이 널려 있었다. 카터와 알리시아는 방 한가운데 서서 껴안은 채였다. 슬론의 심장이 고통스럽게 뒤틀렸다.
알리시아의 재킷은 마치 다 벗기도 전에 낚아채인 듯이 한 팔과 어깨에 걸쳐진 모양새였다. 카터의 손이 그녀의 숱 많은 금발머리에 박혀 있었고, 그의 입술은 알리시아의 입술 위에서 야만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슬론은 바닥에 못박혀버린 느낌이었다. 영혼은 버려진 풍선처럼 허둥대는데 몸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허한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카터의 입이 정열적으로 알리시아를 탐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입술이 벌어지며 죽기 직전에 내는 그르렁 소리 같은 것이 그 사이로 새어나왔다.
만족스럽지 못하고 아프기만 한 키스에서 머리를 떼어냈을 때 그것이 카터가 본 모습이었다. 그는 역겨움으로 온몸을 떨며 알리시아에게서 두 팔을 내려뜨렸다. 이렇게 비열한 느낌이 들어보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슬론의 얼굴에서 본 그 끔찍한 표정 때문에, 또한 자신이 알리시아를 그렇게 하찮게 다루었다는 이유 때문에. 알리시아는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가 독약 속에 빠진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키스는 한가지, 단 한가지 목적에서였고, 욕망으로 기인한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알리시아는 손으로 떨리는 입술을 누르며 당혹스레 몸을 돌렸다.
"아, 슬론. 우린…… 카터는…… 이이도 내가 산 것들을 보고 싶대. 그리고…… 여기, 무거운 쟁반은 내려놔. 음료수를 내올 필요는 없었는데, 하여튼 넌 정말 착하다니까."
카터와 슬론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모든 광경은 리허설이었으며 그들 모두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고 다음에 외울 구절이 무언지 아는 듯이 대답하는 동안, 알리시아만이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그들이 저녁 식사하러 외출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슬론은 진심으로 안도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같이 가자고 청해왔지만, 그녀가 거절했다. 알리시아는 끈질기게 애원을 했고, 카터는 알리시아의 초대를 정중하게 지지한 후에 돌처럼 침묵하였다. 슬론의 결심이 하도 단호했기 때문에 알리시아도 결국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알리시아는 새로 산 드레스 중 하나를 입었고, 스포츠 코트와 타이를 맨 카터는 잘생긴 성공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완벽한 한쌍.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들이었다.
슬론은 미소와 함께 즐겁게 보내라는 말을 전하며, 택시에 타는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페어차일드 하우스의 문을 닫은 다음 그 딱딱하고 차가운 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 이상의 다른 느낌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길 기원하였다.
카터가 말한 건 모조리 거짓말이었다. 그는 편리한 침대 파트너를 원했던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 탈선을 원했던 것이다. 그녀가 약혼녀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이 더 자극적이었겠지. 그 약혼녀는 음모를 위해서만 잠시 희생된 것 뿐이다. 그의 소설에서나 나오는 신선한 일이었겠지. 슬론이 그의 제의를 일축해버리자, 그는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알리시아의 애정 어린 품속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맙소사, 스스로 바보를 만들었군. 두 번이나. 처음에는 제이슨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 다음에는 카터를 믿었었다. 이처럼 비참하지 않다면, 아마 자신의 과실을 웃어넘길 수도 있었을 것을. 완고한 입술과 음울한 체념으로 견뎌냈던 제이슨의 거절이 다시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왜 훨씬 더 아픈 거지?"
그녀는 방의 벽에다 대고 질문을 던져보았다.
잠들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잠드는 것이 두려웠다. 눈을 감으면, 텅 빈 집안에서 절망으로 죽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신과 같이 로스 앤젤레스로 돌아갈까 해."
카터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슬론은 어젯밤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었다. 그들이 같은 방을 썼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 십중팔구는 그랬을 것이다. 카터의 욕구가 그녀의 적절치 못한 출현으로 한 번 방해를 받았으니, 그가 다시 방해받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알리시아는 아침 겸 점심을 먹은 접시들을 같이 정리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이제 그들은 이른 오후 시간을 응접실 불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보내는 중이었다.
카터의 매력 뒤에 교묘히 위장하고 있던 진짜 모습을 경멸하며 모든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의 선언은 슬론의 평정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다.
"진심이에요, 카터?"
알리시아의 흥분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손이 그의 허벅지를 친근하게 쥐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와, 굉장해요! 데이비드와 아담이……."
그녀가 갑자기 말을 자르며 다시 의자 등에 몸을 기댔다.
"안 돼요. 당신은 갈 수 없어요. 지금은 안 돼요."
슬론이 카터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놀란 눈 속에서 자신의 똑같은 모습을 보고는 얼른 알리시아의 뿌루퉁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왜 집에 갈 수 없다는 거야? 당신도 원할 줄 알았는데."
"그럼요, 원하고말고요, 카터."
알리시아가 열심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책을 아직 못 끝냈잖아요. 방문을 걸어 잠근다 해도 결혼식 전에 다 끝낼 수 없을 거예요. 우리가 전처럼 당신을 귀찮게 굴기 시작할 테니까요."
그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결혼식 때까지 끝내지 않을 생각이오. 마감시간을 맞추는 일은 중요하지 않아. 연기할 수 있소."
"오, 안 돼요."
알리시아는 더 꼿꼿이 일어나 앉으며 열심히 금발의 갈기를 흔들어댔다.
"우리 사이에 문학적인 걸작같이 중대한 것을 끼워 넣고 결혼생활을 시작하지는 않을래요. 당신이 날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문학적인 걸작이 아니오. 그러니 용서할 것은 하나도 없지."
그녀가 솔직하게 회의적인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난 당신을 알아요, 카터 매디슨. 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당신은 비참해지겠죠. 그리고 난 우울한 신랑을 맞이하기 싫다구요. 네가 좀 말해봐, 슬론. 이이는 책을 끝낼 때까지 페어차일드 하우스에 있어야 한다구. 그렇지?"
슬론의 눈동자가 알리시아에게서 카터에게 돌아갔다. 그는 신중하게 그녀의 대답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알리시아를 보는 게 더 안전해.'
"카터는 내 충고 없이도 자기가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일을 할 거야."
"이곳이 마음에 들겠죠, 카터? 슬론이 푸대접을 하는 건 아니겠죠, 그렇죠?"
알리시아가 농담식으로 물었다.
슬론은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카터가 재빨리 대답을 했다.
"아니오, 아냐. 그런 이유가 아니오. 단지 책을 쓰는 게 당신과 아이들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뿐이지."
"당신은 그 일을 어떻게든 끝내야만 해요, 달링. 그때까지는 행복한 기분이 들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그의 눈이 슬론쪽으로 슬쩍 향했다가 돌아왔다.
"그렇겠지."
그가 마침내 인정을 했다.
"그리고 이곳은 지금 당신이 일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장소예요. 그러니까 당신은 여기 있으세요. 그렇게 애타적인 제안을 해준 것은 진심으로 고맙지만요."
알리시아가 몸을 기대어 그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대었고, 그는 잠깐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젠 짐을 챙겨야겠어요. 택시 도착시간이 한 시간도 안 남았다구요."
슬론은 떠나가는 택시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뒷좌석에서 열심히 손을 흔드는 알리시아의 모습을 싣고 택시는 금세 어둠과 빗속으로 삼켜 없어졌다.
카터는 슬론보다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 응접실의 벽난로 앞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난 노력했소."
자신만의 장소로 서둘러 물러나려던 슬론의 발길을 그의 말이 중지시켰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페어차일드 하우스에 다음 손님들이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 지내야만 한단 말인가, 그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그가 불길에서 검고 날렵한 실루엣을 돌아 세웠다. 램프는 하나도 켜지 않은 상태. 방과 홀이 그 빨간 불길을 위해서 어둡게 남아 있었다.
"난 노력했다고 했소. 우아하게 떠나기 위해서."
그녀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자 그가 설명했다.
"네, 음…… 그게 최선이었겠죠. 이번은 아마 알리시아가 가슴이 아닌 머리로 결정을 내린 최초의 순간일 거예요."
그녀의 말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고 카터도 그 유머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다소 긴장감을 완화시켰다.
그가 부드럽게 낄낄거렸다.
"타이밍이 문제지."
그는 발치의 카펫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오. 의심을 하지 않아. 다른 손님들도 없이 우리 둘만 있는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소."
슬론은 시선을 피하며 앞으로 팔짱을 꼈다. 갑자기 아주 추운 느낌이 들었다.
"우리 두 사람을 못 믿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가 무겁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면 안 되었던 거야."
그가 양탄자에 관심있는 척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녀에게 시선을 들자 다시 온기가 돌아왔다. 그의 눈동자가 어두운 방 건너편에서 그녀에게 쏟아졌다.
"당신은 날 믿을 수 있소, 슬론?"
"무슨 뜻이지요?"
목에 일어나는 경련으로 인하여 소리가 부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어제. 난 당신을 침대로 데려가고 싶었고 당신은 싫다고 했어. 난 비열하고 무례했소. 맙소사!"
그가 허벅지에 두 주먹을 내리쳤다.
"내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소. 한 번도 여자를 그런 식으로 매도한 적은 없었어. 싫다고 하면, 그냥 인사하고 내 갈 길을 갔었소.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는 무기력한 표정으로 애원하듯 두 팔을 올렸다.
"싫다는 대답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화가 났어, 몸도 흥분돼 있었고, 약간 실망한 정도가 아니라…… 미안해. 날 용서해 줘."
그녀는 허리께에서 두 손을 비틀었다.
"나한테도 잘못이 있는 걸요. 당신은 화날 만했어요. 나도 원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던 거예요."
"슬론, 내가 절대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지, 그렇지?"
그의 고통스런 어조에 그녀는 머리를 치켜들고, 다급하게 확신을 시켰다.
"물론이에요."
"내가 절대 당신을 억지로……."
"그럼요!"
그는 의자로 가서 털썩 주저앉으며, 넓게 벌린 무릎 사이로 두 손을 깍지 끼었다.
"알리시아에게 키스하는 것 보았겠지."
그건 질문이 아니라, 단순히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다시 가슴속에 창이 박히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게 남자들이 약혼녀에게 하는 방식이지요. 키스하는 거."
"하지만 마음 속에서 다른 여자를 몰아내려고 그렇게 하지는 않소."
그는 앉은 자리에서 그녀에게 고개를 들었다. 주름진 이마 위로 무심하게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 남자들은 다른 여자의 감미로운 맛을 잊어보기 위해 키스하지는 않소."
"오, 카터, 제발 그만하세요."
슬론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그 가엾고 놀란 알리시아에게 키스한 이유는 그것뿐이었소. 그녀는 그런 어쩔 수 없는 욕망을 절대 알지 못할 거요. 적어도 나로 인해서는 아니지. 난 당신이 준 그 키스의 기쁨의 흔적이라도, 조그만 흔적만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알아야만 했소. 어리석은 일이었지. 당연히 아무 기쁨도 없었소. 그녀는 당신이 아니었으니까."
"내게 그런 말하지 마세요."
그녀는 울부짖었다.
"결혼한 후에 어떻게 그녀를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눈물 젖은 얼굴에서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그녀를 당신이라고 상상해야 할 거요."
"안 돼요!"
그녀는 홱 돌아서 버렸다. 며칠동안 억지로 참아왔던 눈물이 이제 뺨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가 다시 그녀를 돌려세웠지만, 연인으로서가 아닌 친구로서였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울어줘, 슬론."
그는 속삭였다. 셔츠 앞자락으로 그녀의 젖은 얼굴을 묻으며 위로했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목을 만져주며 두 손으로 등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그냥 그대로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위로해준 적이 언제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쏟아내는 대상이었지, 한 번도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는 사치는 누려보지 못했던 그녀였다. 카터의 애정 어린 손길과 노래 같은 언어 속에서, 그녀는 모든 상처 난 가슴을 토해내었다.
"이제 더 이상은 이런 얘기 하지 않을 거요, 슬론. 당신 말이 줄곧 옳았던 거요. 난 내가 해야할 일, 내 의무를 알고 있소. 그리고 이런 식으로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옳지 않아. 우리는 연인이 되지 않을 거요. 하지만 난 진심으로 당신의 친구가 되고 싶소. 친구로서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
그녀는 황량한 두 눈을 들어 올렸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에 반짝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무슨 부탁이죠?"
"내 원고를 읽어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