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어떻게 이야기해야 좋을까요, 던."
부자연스런 목소리로 펠리시아가 말을 꺼냈다.
펠리시아는 로드릭보다 며칠 일찍 미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없는 동안 모든 것이 변한 것 같았다. 던은 전보다도 젊고 활달해 보였다.
던은 소파에 앉아 방안을 왔다 갔다 하는 그녀를 눈길로 쫓고 있었다. 그는 복잡한 표정을 띤 펠리시아의 얼굴을 보고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펠리시아가 적당한 말을 찾으려 전전긍긍하는 동안 끈기 있게 조용히 기다렸다.
"던, 당신과는 앞으로도 계속 친구로 있고 싶어요. 지금까지도 훌륭한 친구였어요. 마치 형제처럼요."
"친구? 형제?"
실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던이 물었다.
"나란 사람을 그런 식으로밖엔 생각하지 않았소?"
"조금 설명하기 어렵지만…"
눈물을 글썽이며 펠리시아가 말했다.
"스페인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던이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말해 주지 않겠소?"
펠리시아는 소파에 앉아 있는 던을 바라보았다. 그의 금발과 준수한 용모는 분명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 매력에는 로드릭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강렬함은 없었다. 던은 마치 사랑스런 소년 같았다. 펠리시아가 점점 호감을 갖게 된 학급 남학생 중의 한 사람 같았다.
던에게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상 던을 속일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후면 이미 때는 늦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입 밖에 내야 한다는 것 또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숨을 죽였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좋을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어요. 시간을 좀 주세요, 던. 시간이 있으면 여유를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찬찬히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스페인에서 누군가를 만났소? 로맨틱한 스페인 남자라든가…"
던이 물었다.
"아니에요."
펠리시아는 쌀쌀맞게 부정했다.
"스페인의 과장스런 인사말에는 익숙해져 있는걸요. 그곳에서 자랐으니까요."
"그럼, 대체 무슨 일이?"
그의 시선이 펠리시아의 죄책감을 더욱 들쑤시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펠리시아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펠리시아는 얼른 손을 잡아 뺐다. 마음은 다른 남성의 것인데, 또 다른 남성에게― 비록 손뿐이라지만 잡힌다는 건 배반자나 할 행동 같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던에게는 많은 폐를 끼쳤었다. 그녀가 스페인에 갈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주일 후에 돌아와서는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났다고 말해야 하다니.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녀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것도 그다지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자신이 어떻게 로드릭 베어스턴에게 빠졌는지도 확실히 몰랐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확실하지 않은 것이었다. 단지 확실한 것은 우선 어머니를 가까운 시일 내에 입원시키고, 그 다음에 자신을 만나주기를 기다린다는 것뿐이었다.
"여하튼, 지금은 어머니 문제로 정신이 없어요."
마침내 펠리시아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던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거의 유일한, 의미 통하는 설명이었다.
"내 사진을 어머니에게 보냈어요. 사진을 보면 어머니는 나를 만나줄 기분이 되리라 생각했어요. 지금은 너무도 피곤해서 아무 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어요. 잠시 동안은 혼자 있고 싶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몹시 혼란을 겪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로드릭에 관한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미워해야 할 남자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만큼 절망적인 일인지, 아무도 알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말 내가 당신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당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더 이상 아무 말 않겠소. 앞으로 당신이 전화를 걸어오면 나를 필요로 하는 걸로 생각하겠소. 언제든 당신 전화를 기다리겠소."
"고마워요, 던."
펠리시아는 감사함이 담긴, 거짓이나 허풍이 아닌 애정으로 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이것으로 이제 던과의 관계가 청산됐으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펠리시아는 던을 배웅하러 문까지 나갔다. 던은 부드러운 키스로 작별을 고했다. 문이 닫히자 펠리시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가느다란 실망과 공허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처럼 비참한 기분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는 모두가 마지막에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걸로 끝났다. 인생은 동화와는 다른 것이라고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도 자신만은 동화의 주인공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만히 품어 왔었다.
햇빛에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가 그녀를 채어가서는 두 사람이 행복에 감싸여 말을 타고 황혼 속을 달려가는, 그녀가 상상했던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처음으로 자기의 가슴에 불을 당긴 남자를 만나고 보니, 사랑만큼이나 증오스러운 남자였던 것이다.
그 후, 며칠 동안이나 펠리시아는 아파트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후회와 우울함으로부터 오는 무기력함이 그녀를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으로 만든 것이다. 스스로가 자신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날 기력이 없었다. 식사도 거의 하지 않았다.
비탄과 슬픔으로 여름을 다 지낸다 해도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어느 날 겨우 깨달았다.
그리고 직업안내소라도 가서 일시적인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덜 신경 쓰고 돈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페인 대학에 다닐 때 그녀는 미국에서 교사직을 못 구할 경우에 대비해 비서직도 공부해 두었었다. 레이크워스 회사에서 받은 돈은 어머니의 치료비로 순식간에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아파트에서 빈둥거리며 마음의 상처나 되뇌이고 있을 여유는 없다고 그녀는 자신을 타일렀다.
다음 날, 펠리시아는 아침 일찍 자명종 소리에 잠을 깼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그대로 있으면 다시 또 하루를 침대 속에서 헛되이 보내게 될 것이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킨 뒤 이불을 젖히고 다리를 바닥으로 내렸다.
펠리시아는 아침 의식에 정성을 들였다. 이를 닦고 세수하고 빗질한 다음 정성들여 화장을 한 것이다.
그녀가 막 욕실에서 나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큰소리로 물으며 그녀는 옷장에서 옷을 꺼냈다. 이렇게 아침 일찍 누가 찾아온 것일까 생각하며 좀 허둥대고 있었다.
"로드릭 베어스턴이오."
놀란 듯한 음성이 되돌아왔다.
펠리시아는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옷을 머리로부터 뒤집어쓰면서 펠리시아는 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하러 온 것일까?'
펠리시아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회사에 가 급료를 받았을 때, 이젠 두번 다시 그를 만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다. 분명히 모델 일을 권유하기를 포기하진 않겠다고 그는 약속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만심에서 나온 내용없는 협박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단지 로드릭 베어스턴은 거절당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남자일 뿐이라고…
"무슨 용건이에요?"
문 너머로 그녀는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문을 열어 주면 이야기하겠소."
펠리시아는 충동적으로 문에서 도망쳐 어디론가 숨어 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로드릭이 두렵다기보다는 자신의 나약함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치욕스런 일을 당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나약함까지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그를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스페인에서의 단 한 번의 키스가 어떤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실밖에 안 된다. 차라리 문을 열고 차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도전하는 척하지 않으면…
그러나 그녀는 로드릭을 보았을 때, 자신이 어느 정도의 동요를 느끼게 될는지를 알 수 없었다.
무의식중에 머리를 가다듬고 어깨를 편 다음, 그녀는 문을 열었다. 그곳에 갈색 눈을 반짝이며 로드릭이 서 있었다. 펠리시아의 심장과 맥박이 점점 빨라졌다. 그가 옆을 지나쳐 문을 닫을 때까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에 펠리시아는 아찔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어떻게 이처럼 그에게 빠져 버리고 만 것일까?
"안녕, 펠리시아."
로드릭은 말하며 펠리시아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정말 상당히 아름답군. 앉아도 되겠소?"
"마음대로 하세요."
굳어진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구태여 마음의 경계를 느슨하게 풀 생각은 없었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펠리시아는 몹시 불안한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스페인에서 이 남자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로부터 다시 일어서려고 애쓰며 하는 일 없이 우울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이제 겨우 정리를 하려고 생각한 바로 이때 그가 다시 나타나다니…
"어떻게 이곳에 오셨죠?"
펠리시아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이오, 펠리시아."
로드릭은 그렇게 대답했다.
"당신도 나를 필요로 하고 있소."
"무슨 말이에요?"
로드릭의 입에서 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 당혹스런 말을 지금 그가 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같이 펠리시아의 눈앞이 흐려졌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로드릭이 계속했다.
"생각하지 않았소? 당신을 스페인에서 일찍 돌아오게 한 건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소. 서로가 양보할 수 있는 것들을 말이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펠리시아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펠리시아, 당신은 내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오."
"정말인가요?"
그녀는 한없는 행복함으로 곧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물론이오."
설득하듯이 그가 말했다.
"당신은 가치 있는 재산이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거요. 당신이 매직그로우 화장품의 부활에 적극적으로 나서준다면 광고업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될 것이오."
펠리시아의 눈에 글썽이던 눈물이 순간 분노와 굴욕의 눈물로 변해 버렸다. 잠깐 동안이나마 그녀는 로드릭이 지금 사랑을 고백해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필요하다는 로드릭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나요?"
야유 가득한 말투였다.
그녀는 로드릭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수치심으로 빨개진 얼굴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쉽사리 포기하진 않을 거요."
단호한 태도였다.
"이제 알아줄 때도 되지 않았소?"
"돌아가세요. 날 혼자 내버려 두시란 말이에요."
펠리시아는 크게 외치려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와 주지를 않았다.
"그렇게 할 수는 없소, 펠리시아."
강경한 태도로 그가 다시 말했다.
"두 사람에게는 큰 것이 걸려 있소. 당신 어머님의 치료비는 전부 다 대줄 생각이오. 당신의 시간에 대해선 다른 곳에서는 벌 수 없을 정도로 돈을 지불하겠소. 어때, 응낙해 주겠소?"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소파에 앉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떻겠소, 펠리시아. 당신이 대중에게 봉사하게 되는 거라고 말이오. 회사는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소. 우리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소개하는 거요. 완벽하게 화장시켜서 본받을 만한 모델로서 제공하는 거지요. 여성이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돈이 얼마쯤인가는 당신도 잘 알 거요. 예쁘게 보이는 데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인류에게 있어서는 건강한 일이오. 뭔가 할 말은 없소?"
"글쎄요―"
펠리시아는 말꼬리를 끌었다. 그녀는 로드릭의 논리를 잘 생각한 다음, 결점을 찾아내려고 했다.
"당신을 전 세계 여성의 화려한 심볼로 만들고 싶소."
로드릭은 계속했다.
"너무도 평범한 교사의 세계로부터 마법의 세계로 당신을 데려가고 싶소. 그곳에서는 당신의 모든 꿈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오. 모든 여성이 돌아보는, 그런 여성으로 당신을 변신시켜 보고 싶소. 잡지 광고나 TV 광고 등 모든 광고에서 당신을 보고 싶소. 당신 사진을 찍고 싶소. 그렇게 하면, 자신의 용모에 관심이 있는 여성이라면 당신을 보고 확신하게 될 거요. 우리 회사 제품이 자신을 가장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말이오."
로드릭이 빠른 말투로, 그것도 정열적으로 계속 떠들어댔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한순간 그의 말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매직그로우의 광고 모델이 되는 것이 어쩐지 소중한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현실의 파도가 밀려오면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는 것이었다.
"안 돼요!"
어색하게 그녀가 말했다. 자신의 결심이 흔들린다는 것을 끝까지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 일은 몇 번이나 거절한 것 같은데요, 미스터 베어스턴. 이제 그만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군요."
그녀는 애원하는 투로 얘기했다.
"그건 안 되오. 당신을 모델로 만들겠다는 내 결심을 바꿀 수는 없소. 꼭 모델로 만들 거요!"
로드릭의 말에 담긴 강한 의지에 펠리시아의 결심이 다시 흔들렸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그러나 동시에 로드릭의 말의 한계를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모델로 만들겠다는 의지는 굳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이야기에 응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비지니스이고, 개인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잘 알고 있소."
로드릭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 곁에서 일하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어머님의 치료비를 전부 벌 수 있소. 다른 일로는 그렇게 벌 수 없을 게요. 그 외의 부대조건을 달아도 좋소. 당신을 위해 고급 아파트를 찾아보겠소. 그리고 유명한 디자이너의 드레스도 함께 제공하겠소. 만약 당신이 여성의 화려한 심볼이 될 거라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분위기에 싸여 있어야만 하오."
"하지만 내겐 원래의 나로 있는 것도 중요해요."
펠리시아는 항의했다.
"그건 넌센스요. 물론 당신 그대로 있으면 되는 거요. 그러나 그대로 최고의 자신이 되는 것뿐이오. 인생행로의 갈림길에 있어서 당신의 운명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오. 당신에게는 무한한 잠재능력이 있소, 펠리시아. 교사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을 무의미하게 낭비하는 거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오만, 타인의 각본에 의해서 인생을 사는 것과도 같소."
"하지만 뉴욕이나 캘리포니아로 이사해야만 하잖아요?"
펠리시아는 그렇게 물었다. 내심으로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테스트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만날 것을 결심할 때를 위해서 어머니 가까이에서 살고 싶어요."
"그 정도의 편의를 제공할 수 있소."
자신만만한 어조였다.
"뉴멕시코가 당신의 고향이오. TV 광고방송을 제작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준비시키겠소. 사진 촬영 로케나 선전을 끝내고서도 비행기로 데려다 주겠소. 매직그로우는 세계적인 이미지를 필요로 하고 있소. 전 세계에 팔리고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계약사항에 당신이 이곳에서 지내도 좋다는 조건을 붙여 두겠소."
로드릭은 몸을 조금 앞으로 수그린 자세로 꼼짝 않고 펠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 외에 다른 질문 사항은 없소?"
"있어요. 난 어머니처럼 혹사당하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에겐 자신만의 생활이나 시간이 전혀 없었어요. 딸이 있다는 것조차 세상에 알릴 수 없었으니까요. 당신 아버진 우리 어머니를 회사의 노예로 만들고 말았어요."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약속하겠소."
그녀의 기운을 돋우듯이 로드릭은 시원스레 말했다.
펠리시아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스스로가 전혀 믿을 수 없었다. 로드릭이 이곳에 온 지 채 한 시간도 못되어서, 그녀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수백 번 다짐했던 모델이란 직업을 하겠다고, 그의 의견에 동의하려는 것이다. 그녀가 계속 거절해 온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 이유를 생각해 낼 수조 차 없었다. 그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또 논리적이었기 때문에 거절한다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로드릭이 일 년 동안에 그녀가 받게 될 보수를 말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글쎄요…"
그녀가 말하기 시작했다.
"일 년이란 조건이라면 모델을 해도 좋지만… 그 이상은 안 돼요. 어머니의 치료비는 일 년 동안의 보수로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을 거예요."
"뭐, 괜찮을 거요."
로드릭은 일단 응낙했다.
"지금은 말이오."
펠리시아는 조금 걱정이 됐다. 로드릭의 마지막 말에 악의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약을 하고 많은 돈을 벌게 되면 화려한 생활에 익숙해져 버려서 일 년이 지났을 때쯤에는 모델을 그만둘 마음이 없어지리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잊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녀는 톱 모델의 화려한 생활에 동요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만큼만 벌면 계약을 갱신해서까지 일할 이유가 없었다.
절망적인 표정을 띠우며 펠리시아는 로드릭을 보았다. 그녀는 몹시 난감해 하고 있었다. 로드릭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가 기대하는 말을 할 마음이 그녀에겐 생기지 않았다. '받아들이겠습니다'란 말을 입에 담으면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펠리시아는 아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의 결심을 후회하지 않도록 하겠소."
로드릭은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띠웠다.
"두고 보시오."
그는 펠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그에게 닿은 손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로드릭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결국 그와 함께 많은 시간을 지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멀리서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던 것이 가까이로 닥친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 갈등에 계속 휩싸인다면 자신은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모델이 된다는 것을 동의하자, 로드릭은 바로 돌아갔다. 그녀는 아파트 문에 기대어서 자신의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이 갑작스런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를 그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오싹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젠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드릭에게 동의한 이상 뒤로 뺄 수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펠리시아는 로드릭의 비서로부터 오후에 변호사 사무실로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가 이미 계약서를 작성해 두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사인만 하면 되었다. 그녀는 계약서를 신중하게 읽으려 했지만, 복잡한 법률 용어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로드릭이 계약서의 애매한 조항을 이용해서 자신의 말을 따르도록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펠리시아가 알 수 있었던 분명한 것은 회사와는 일 년 계약이라는 것뿐이었다. 또한 그것이 펠리시아가 마음 쓰고 있는 주된 조항이었다.
계약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펠리시아는 아찔할 정도의 화려함 속으로 이끌려 갔다. 우아한 매직그로우의 상징으로 24시간을 살아가야 한다던 로드릭이 비서에게 지시하여 펠리시아를 위한 고급 아파트를 찾아 놓도록 한 것이다.
이제부터 새로운 생활이 이루어질 공간을 둘러보았을 때, 펠리시아는 현기증을 느꼈다.
아파트는 두 개의 침실을 가진 넓은 공간이었다. 가구로는 큰 영사기가 딸린 컬러 TV와 거실 벽에 설치된 최신형의 스테레오 장치가 있었다. 방 전체에 담청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사우나가 있는 욕실까지도 같은 카펫을 깔아 놓았다. 열대식물과 사보텐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발코니에서는 정원에 있는 풀장이 내려다보였다. 상당한 부자가 아니면 빌릴 수 없는 이 고급 아파트에는 테니스코트와 자그마한 온수풀장이 둘, 용구가 완비된 헬스클럽과 라켓볼 경기를 할 수 있는 코트 등이 있었고, 지하에는 미용실과 칵테일라운지, 작은 레스토랑 등 여러 가게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화려한 생활의 매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펠리시아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 생활은 일시적인 것이고, 자신은 다시 뉴멕시코의 그 아파트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를 그대로 두도록 로드릭에게 부탁하고, 가구들과 학교에 입고 갈 수수한 옷들을 그대로 그곳에 남겨 놓았기 때문에, 일 년이 지날 때까지 그것들은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 두면 자신이 현실을 망각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현재의 상황을 옳게 파악하는 데 좋은 방법이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로드릭은 과거의 평범한 생활은 일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펠리시아는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는 타협해 주었다.
다음, 펠리시아는 매직그로우 화장품이 소유하고 있는 고급 의상실로 이끌려가서 일류 디자이너에게 맡겨졌다.
그날은 그것으로 해방되어 자신의 아파트로 자질구레한 것들을 가지러 갔다가, 새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는 담청색 시트가 깔려 있었고, 벨벳으로 된 파란 침대 커버가 잘 개켜져 있었다.
그녀는 옷장에서 발견한 핑크색 새 잠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는데, 침실의 서랍장에는 최고급의 속옷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비서가 보좌역에게 명령해 준비시켜 놓은 것이리라. 펠리시아는 안절부절 했다. 마치 자신이 남의 아파트에 무단으로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실내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냉장고에는 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고, 욕실에는 세면도구가, 거실에는 화분과 그림까지도 장식되어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그것들을 사용하기를 주저했다. 자신이 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자신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에 비치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요컨대 자신은 그저 마음편히, 느긋하게 지내면 되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비서가 다시 또 전화를 걸어 펠리시아를 고급스런 미용실로 데리고 갔다. 비서는 메이크업 담당에게 자신이 말한 대로 꾸며지도록 신신당부하고 있었다. 머리를 맡은 사람에게는 어떤 식으로 커트해야 하고, 어떤 색으로 염색해야 할지를 지시했다. 그녀는 내내 펠리시아의 옆에 서서 자신이 말한 대로 행해지고 있는지 두루두루 살피고 있었다.
미용실을 나왔을 때, 펠리시아의 머리는 부드러운 엷은 금발로 바뀌어 있었다. 속눈썹에 칠한 마스카라는 가운데를 짙게 해서 순진무구한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었으며, 반대로 눈커풀의 미묘한 아이새도우는 악의 없는, 그러나 도발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서 관능적인 우아함을 강조했다.
"어머님과 똑같군요."
운전하면서 비서가 말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펠리시아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손에 어머니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펠리시아에게 주어진 새 이미지의 원형으로써 비서가 사용한 것이었다.
펠리시아는 벌써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적잖이 질려 있었다. 로드릭은 순진함과 관능이 잘 이루어진 어머니의 분위기를 지향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것은 모든 여성의 동경이기도 하고, 어머니 흉내를 내며 남자에게 호소해서 '어머니'를 소유한 기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머니는 점점 그 이미지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딸을 희생해서까지 그런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했으니까. 모델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없는 일인가를 미리 알게 돼 서 다행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걸려든 올가미에 자신만은 빠져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그녀는 굳게 결심했다.
펠리시아는 생각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비서가 차에서 내리라고 하자 좀 당황했다.
"자, 여기서 이것을 입으세요."
탈의실을 가리키며 비서는 말했다.
"다리부터 끼어 입도록 하세요."
"다리부터요?"
펠리시아는 의미를 몰라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머리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예요."
비서가 설명했다.
"모델들은 언제나 그렇게 입어요. 다리부터 먼저요."
"그렇군요."
펠리시아는 멍청하게 대꾸했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비서가 그녀의 팔에 차가운 느낌의 파란 드레스를 걸쳐 주었다.
몇 분 후, 펠리시아는 몸에 꼭맞은 실크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드레스는 가슴의 굴곡이 보일 정도로 깊이 파였고, 허리와 다리의 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런 드레스는 입고 싶지 않아요."
펠리시아는 뺨을 붉히며 말했다.
"긴장 푸세요."
비서가 위로하듯 말했다.
"단순한 시험촬영이에요."
펠리시아는 의심쩍은 시선으로 비서를 쳐다보았다.
"시험촬영?"
"아시잖아요? 어느 각도에서 찍어야 좋은지라든가, 조명은 어떻게 해야 좋은지 하는 그런 것 말이에요. 예를 들면 스크린 테스트 같은 거죠."
안쪽 문이 열렸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그 이상 그녀에게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로드릭이 걸어왔다. 펠리시아는 갑자기 목에 뭔가 덩어리가 걸린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었다.
"야―!"
그는 탄성을 질렀다.
"정말 멋있군, 마리. 정말 훌륭해. 믿을 수 없을 정도야, 이렇게 닮았으리라곤…"
그는 뜨거운 시선으로 펠리시아를 주시했다.
'마리'라는 비서의 이름을 듣고, 펠리시아는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 자기 소개를 했었지만, 그녀는 마음에 새겨 두지 않았었다.
펠리시아는 감정을 억누르고, 감각을 잃은 듯이 들떠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로드릭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며 모든 감각이 자극을 받아 어머니와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만 생각하는 이 냉정한 남자를 자신이 미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고 외치고 말 것 같았다.
로드릭은 그녀를 정복하고 싶은 여자로도 봐 주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을 때,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펠리시아는 단지 화장품 회사를 빛낼 모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어머니를 보던 것과 똑같다고 생각하자, 펠리시아는 자신이 몹시도 비참해졌다.
그녀는 혼자 생각했다.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돈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야.'
"자, 이리 오시오."
로드릭이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시오."
그리고 그는 펠리시아를 스튜디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검은 바지를 입고, 셔츠를 풀어헤친 카메라맨이 구석에서 몸을 구부리고 새 필름을 카메라에 넣고 있었다.
"저 사람은 빌이오."
카메라맨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로드릭이 말했다.
"빌, 이쪽이 펠리시아 화!"
빌은 손을 들어 펠리시아에게 인사했다.
다음 두 시간은 펠리시아에게 불안과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광고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매직그로우의 화장품을 손에 들고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해야만 했다. 도중에, 그녀는 어떻게든 잘 보아 주었으면 싶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계약서에 사인한 이상, 그를 위해 모델 일을 하는 것이 아무리 괴로운 일일지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어느 일에든 천성적으로 성실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끊임없이 웃음을 띠우며, 반짝이는 눈을 갖기 위해서 즐거운 것을 생각하고, 로드릭이 말하는 대로 이리저리 몸을 돌리곤 했다.
얼마 안 있어 펠리시아는 로드릭의 목소리에 자신을 잊고 있었다. 그는 셰릴 때와 마찬가지로 말로써 사랑을 호소해 왔다. 자신이 얼마나 그를 경멸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은 모두 잊고 그의 말에 취해 있는 펠리시아의 머릿속에는 이제 스페인에서의 입맞춤과 그에게 안겼을 때 느꼈던 황홀한 기분밖에 없었다. 그녀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로드릭을 기쁘게 하려 했고, 그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요구하는 것을 분명히 해내려고 했다. 그녀의 마음이 욱신욱신 아프고 볼은 홍조를 띠며, 목이 바싹 탔다. 몸은 전혀 닿지 않았지만 닿은 것과 똑같았다.
마법의 음성이 현실 세계에서 환상의 세계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두 사람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가까이 하려고 손을 뻗으며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환상은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었다. 그가 귓전에서 관능적인 환희를 속삭이고 있는 한 현실 세계는 요원했고, 단지 환상의 세계를 계속 떠돌 수 있었다. 그녀의 귀엔 카메라 셔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오직 귀에 들려온 것은 사랑을 속삭이는 로드릭의 음성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촬영은 끝났다. 로드릭의 음성에서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태도가 사라지자, 주위는 갑자기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빌."
그렇게 말하며 로드릭은 펠리시아를 데리고 스튜디오에서 나왔다. 탈의실까지 오자 낮은 음성으로 그가 속삭였다.
"오늘은 정말 훌륭했소."
로드릭이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다시 한번 마법을 걸어왔다. 펠리시아는 아무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한 번 핥았다. 펠리시아는 모든 것을 잊고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슨 일에라도 몸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녀와 로드릭을 갈라놓는 카메라는 이제 없었다. 그와는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온기 덕분에 펠리시아는 떨지 않고 서 있을 수가 있었다.
빨아들일 듯한 시선으로 그가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머리가 띵해졌다. 이대로 그의 품에 뛰어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로드릭,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하고 펠리시아는 소리치고 싶었다. '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에요' 하고.
그때, 로드릭의 뒤에서 마리가 불쑥 나타났기 때문에 마법은 풀리고 말았다.
마리의 음성이 그 장소의 침묵을 깨뜨렸다.
"어땠어요?"
마리는 현실로부터 나타난 사자처럼 생각되었다. 펠리시아는 로드릭 앞에서 현실을 벗어나 있었던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로드릭과 헤어져 아파트에 혼자 있게 된 펠리시아는 오늘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바보같았다고 힐책하고, 또 후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의 진상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릭 베어스턴은 단지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놀라운 솜씨로.
쥬안 카로스가 그와 함께 짝이 되고 싶어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모델로부터 최고의 표정을 끌어내는 데 있어서 그는 천재였다. 스페인에서 펠리시아는 셰릴이 적극적으로 응하도록 작용시키던 그를 보았었다. 그리고 오늘, 자신은 로드릭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펠리시아는 수치심 때문에 눈물이 나왔다. 눈에 솟아 있던 눈물은 볼을 타고 떨어졌다. 비록 한때였다 하더라도 왜 로드릭의 말을 믿었던 것일까. 하지만 포즈를 취하도록 요구하면서 했던 말의 일부는 그의 진심이 아니었을까?
'좋아, 그렇게 하면 돼, 내 연인. 얼마나 나를 원하는지를 보여 봐. 난 지금 당신을 몹시도 원해. 아무에게도 당신을 양보할 수 없어. 예스라고 말해 줘. 그래, 그런 얼굴을 지어 보이는 거야―'
그의 말이 자신을 조롱하듯이 귓전에서 울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로드릭? 이런 밤늦게 웬일일까? 펠리시아는 전화에 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해도 결국은 아무 도움도 안 될 것이다. 로드릭은 펠리시아의 거처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정말 이야기가 하고 싶다면 그녀가 전화를 무시하는 것 같은 작은 저항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그런 로드릭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침대 테이블에 있는 전화를 들고 그녀는 가냘프게 말했다.
"여보세요, 미스 화입니까?"
수화기 속의 상대편은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그렇습니다만?"
"닥터 앤브루스터요."
"앤브루스터 선생님?"
흥분으로 펠리시아의 목이 메었다.
"그렇소. 이 5, 6일 동안 계속 당신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었지만 잘 안 되더군요. 전화를 걸어도 연결되지 않아서 어떻게 된 건가 생각했었소."
"최근에 이곳으로 이사해 왔어요."
펠리시아는 설명했다.
"그리고 저는 이틀 동안 계속 외출했었어요. 혹시 어머니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긴장으로 몸이 굳어지며 그녀가 물었다.
"그런 일은 없소."
닥터 앤브루스터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당신이 보내준 사진을 보고 어머님이 딸을 만나는 데 동의해 주셨어요."
"네?"
그녀는 한순간 숨이 막혔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정말 만나고 싶어 하시나요?"
"만나고 싶어 한다고는 하지 않았소."
닥터 앤브루스터가 정정했다.
"만나는 것에 몹시 신경을 쓰고 있어요, 펠리시아. 그러나 사진을 보고 당신이 너무 자신을 닮았다는 걸 알고는, 그 위에 한 번만이라도 찾아뵙고 싶다는 당신의 편지를 읽고, 한 번이라면 허락해도 좋다고 말했소. 그러나 이렇게 덧붙이더군요. 그 이상은 약속할 수 없다고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요. 그리고 돌아가 주었으면 싶을 때 얌전히 돌아가도록 하란 말도 함께였소."
"앤브루스터 선생님, 고맙습니다."
펠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나와 목소리가 갈라지고 말았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언제쯤 찾아가 뵈면 좋을까요?"
"형편만 괜찮다면 내일 아침이라도 좋소."
의사가 말했다.
"어머님이 전화해 달라고 한 건 월요일이었지만, 아까 말한 대로 당신에게 연락이 안 돼서… 일찍 오지 않으면 결심을 바꿀지도 몰라요."
"꼭 가겠어요."
펠리시아가 말했다.
"어머니에게 그렇게 전해 주시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말해 놓겠소."
닥터 앤브루스터가 기꺼이 응낙했다.
"그리고 펠리시아…"
"네?"
"행운을 빌겠소. 두 사람이 이 기회에 잘됐으면 좋겠군요."
"고마워요."
펠리시아는 큰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녀의 마음에는 기쁨으로 야기된 흥분과 묘한 두려움이 교차되고 있었다.
7
파란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가 명쾌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지나갔다. 병원의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분위기가 의사를 부르는 조심스런 원내 방송으로 깨어졌다.
펠리시아는 403호실 앞에 서 있었다. 이때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길고 쓰라린 날들을 보내온 그녀였지만, 막상 그때가 오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은 땀에 젖었고 맥박이 몹시 뛰며,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위가 죄이는 듯했다. 어머니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만…
403호실의 여성은 분명 펠리시아의 어머니였지만 또한 타인이기도 했다. 그 낯선 여성은 자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혼란을 느낀 펠리시아는 몸을 홱 돌려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두 번이나 문에 손을 갖다댔지만, 다시 인내심을 가지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찾고 있는, 버림받은 쓸쓸한 소녀가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경멸하는 차갑고 쌀쌀맞은 여성도 있었다. 또 자신의 아이보다는 일을 선택한, 지금 그 보상을 받고 있는 403호실의 어머니에게 동정을 느끼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 자신으로 되돌아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펠리시아는 자기 자신에게 부드럽게 타일렀다.
'이 기회를 오랫동안 기다렸었지, 펠리시아?'
그녀는 문을 힘껏 밀었다.
방은 커튼이 반쯤 내려져서 어둠침침했다. 펠리시아는 문을 밀고 들어선 그 자리에 서서 가지고 온 꽃다발을 꼭 쥐고 방안의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조금 위로 일으켜 놓은 침대에는 안색이 나쁘고 여윈 여성이 기대어 있었는데, 그녀는 얼굴을 비스듬히 하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개의 서글픈 추억이 펠리시아에게 밀려와서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 그러나 동시에 반짝이던 즐거운 추억도 마음속에 떠돌았다.
키가 크고 아름다운 모습의 여성이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서 펠리시아에게 입 맞추려고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여성을 눈앞에 대한 어린애는 수줍음으로 자신의 일만이 마음에 걸려서 말이 소리로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태산처럼 많았다― 쓸쓸한 밤에 계속 생각해 왔던 일들이. 수줍음도 사라지고 막상 이야기하려고 하면, 아름다운 여성은 다시 한번 그녀를 부둥켜안고 얼른 안녕을 말하며 다시 오마고 다음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몇 번이나 깨어지다가 만나는 기회가 적어지며 그나마 시간도 짧아지더니, 마침내는 찾아오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펠리시아는 외톨이가 되었다. 잡지에서 오려낸 아름다운 여성의 사진이 가득 들어찬 스크랩북만이 그녀의 친구였다. 그 여성은 어머니였지만, 낯선 타인이 되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춘기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어머니의 사진과 거울에 비친 조금 뚱뚱한 듯한 자신을 비교해 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 나이 때의 펠리시아는 아름다운 낯선 사람이 친어머니가 아니고, 자신이 양녀로 들어간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녀도 늘씬한 젊은 여성으로 성장하자, 착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어머니의 이미지를 자신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쯤에는 어머니가 잔혹하게도 자신을 버린 것을 간파하고, 괴로움이 더욱 깊어져서 그녀의 마음속에 딱딱한 응어리가 돼 있었다.
그러나 그런 괴로움조차도 어렸을 때의 추억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지금은 반은 잃어버린 스크랩북처럼 어렴풋하게 빛은 바래 있었지만, 다정한 손에 안겨 침대에 갔던 일이랑, 자장가를 불러 주던 달콤한 음성이랑, 옷을 입혀 주고 공원에서 놀았던 일 등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런 기억은 가슴을 두근거리고 눈물 흘리게 하는, 살을 에는 듯한 추억으로 펠리시아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이런 것들 때문에 그녀는 프란시스 화를 마음속으로부터 증오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해 준 적이 있었다고 이따금씩 생각하게 되면, 그녀는 거의 절망적이 되는 것이었다.
침대에 있는 안색 창백한 여성에게는 대체 어떤 추억이 있는 것일까? 10년 전에 보육원에서 자신을 부둥켜안고, 사랑해 주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스페인의 카톨릭계 사립학교로 내쫓은 10대의 딸을 찾아갔던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서먹서먹한, 아주 짧은 대면과 최후에는 그나마 방문하지 않게 된 일도.
침대의 여성은 시선을 천천히 창가에서 펠리시아에게로 옮겼다. 그녀의 얼굴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펠리시아가 긴장된 분위기의 침묵을 깼다.
"꽃을 갖고 왔어요. 국화꽃인데 좋아하세요?"
어머니는 펠리시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끄덕였다.
"좋아한단다. 국화는 아름답지. 고맙구나."
펠리시아는 겨우 '놓아둘 게요'라고 말하며 화장대 쪽으로 걸어갔다.
"간호사가 꽃병에 꽂아 줄 거예요."
펠리시아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대로 잠시 동안 화장대 근처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빙 돌아서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자기들은 서로 생판 모르는 남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넓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과 눈이 서로 부딪쳤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인 두 여성이.
"몸은 어떻습니까?"
펠리시아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한 것 같은 말투를 썼다.
"점점 좋아지고 있단다. 천천히 체력도 되찾고 있는 것 같고. 오늘 아침, 간호사가 뜰로 산책하러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단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져 갔다. 아름다운 억양을 가진 그 어조는 변함없었다. 매직그로우의 TV 광고에서 어머니가 말했던 것을 펠리시아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목소리는 가냘프고 피곤한 것처럼 들렸다.
펠리시아는 헛기침을 했다.
"의사는 회복이 빠르다고 기뻐하고 있었어요."
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서로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 하는 처지였다. 펠리시아는 마음 아프게 생각했다.
프란시스가 침대 커버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고맙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을 한번 둘러보는 척하더니 계속했다.
"내 치료비를 대주고 있지, 펠리시아. 이곳은 너무 비싸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목소리가 그곳에서 끊기고,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괜찮아요."
펠리시아는 갑자기 침대 위의 연약하고 가냘픈 손을 다정하게 토닥거려 주고 싶어졌다.
'왜 솔직하게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지?'
하고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곳은 비싸지 않니?"
어머니가 또다시 물었다.
"정신과의 치료비는 상당히 많이 든다던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괜찮으니까요."
다시 긴장된 침묵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시선을 침대 테이블 쪽으로 옮겼다. 펠리시아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액자에 넣은 펠리시아의 사진이 있었다. 로드릭 베어스턴이 스페인에서 그녀를 위해 찍어 준 것이었다.
"저걸 처음 보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단다."
어머니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네가 너무도 아름다운 아가씨로 자라 있었기 때문이지. 나는 내 자신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
그녀는 펠리시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게 너였다는 걸 곧 깨달았단다, 펠리시아."
이름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을 듣자, 펠리시아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솟아오르며 감정의 홍수를 막아 놓은 댐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그때, 간호원이 쟁반에 주사를 담아들고 와서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실례하겠어요. 낮잠 주무실 시간이라서요. 선생님도 오래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펠리시아는 끄덕이며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그녀에겐 어머니가 스페인에 와 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방문도 마음에 걸리는 쓰라린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면회가 끝나서 중요한 이야기를 할 시간은 전혀 없었다.
그녀가 돌아가려 하자 어머니가 몹시 주저하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
"펠리시아!"
그녀는 뒤돌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넓은 공간은 전과 다름없지만, 어머니가 그 넓은 공간을 사이로 팔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와 줄 수 있겠니?"
"물론이에요."
펠리시아가 재빨리 대답했다.
"내일 오겠니?"
"기꺼이 그럴게요."
병원을 나올 때, 펠리시아는 기묘한 흥분을 느꼈다. 어머니와의 해후는 몹시 긴장해서 정신마저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머리가 멍멍하게 울리며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극도로 피곤해져서 몸이 조금 떨리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에야말로 어머니가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위에, 내일 한 번 더 와 달라고까지 한 것이다. 펠리시아는 어머니가 의리상 그렇게 말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말의 이면에는 부탁하는 듯한 여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펠리시아는 병원으로 갔다. 다음 날도, 그리고 또 다음 날도 병원에 가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벽을 부수고 넓은 공간을 사랑으로 채운다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또 일시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지도 없이 복잡하고 캄캄한 길을 여행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오랫동안 소원했던 어머니와 딸이, 마음이 통하게까지 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닥터 마틴에게 불리어 펠리시아가 그의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닥터 마틴은 닥터 앤브루스터가 소개해 준 정신과 의사였다.
"그러나 당신이 계속 어머니를 만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너가 마음의 병을 일으킨 최대 원인은 당신과 관계를 끊었기 때문입니다. 이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완전히는 회복될 수 없을 겁니다."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하니, 펠리시아는 괴로웠다. 그녀는 마음의 억압에 굴복한 적은 없었지만, 병이 되기 일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어머니와 마음이 통하게 되기까지는 생생한 마음의 상처가 아물 것 같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마틴 선생님?"
물어보기는 했지만 펠리시아의 기분은 절망에 가까운 것이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라면 인간의 사고에 관해서 속속들이 알고 계시겠지요? 어머니를 몹시도 필요로 하고 있는 10대의 딸을 돌보지 않은 것은 왜지요?"
의사는 깊이 생각에 잠기더니,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어머니가 자식을 버리고 일을 선택하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닙니다. 단, 당신 어머님의 경우엔 그 외에도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소. 병이 치유돼 가면 자연히 어머니가 얘기하시리라고 생각하오만…"
펠리시아가 방문하는 회수를 거듭할수록 어머니의 안색은 훨씬 좋아져 갔다. 쇠잔한 용모 중에도 아직 우아한 아름다움의 잔영이 남아 있어서, 물을 받은 꽃처럼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체력도 점점 회복되었고, 펠리시아와 함께면 병원의 뜰까지 산책할 수 있게 되었다. 무미건조한 병실에서 벗어나 산책하는 동안, 모녀는 여러 가지 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서서히 마음의 허물을 벗기고, 두 사람은 아무런 스스럼없이 감정의 문제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믿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펠리시아. 난 너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단다."
"믿을 수 없군요."
펠리시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토록 사랑했다면 어째서 외국으로 내쫓은 거죠? 살아 있다는 것조차 잊은 척하면서요?"
두 사람은 뜰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펠리시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머니를 응시했다. 그녀는 칼로 에인 듯한 아프디 아픈 추억으로 어머니의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쳐 버린 것이 바로 나란다, 펠리시아."
어머니는 몹시 괴로운 듯이 고백했다.
"나와 같은 짓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엉망으로 할 때는 대부분 주위 사람을 상처입히기 마련이란다. 불행한 일이지. 내 경우에 가장 크게 상처받은 건 너였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느냐고? 그것은 내가 독했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야."
그녀는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시인했다.
"내 스스로가 인생을 견뎌낼 힘이나 끈기가 없었단다. 내 인생은 남이 정해 준 것이었지. 누군가가 이렇게 하라고 말해 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던 거야. 내 인생 같은 건 없는 것과 똑같았지. 네가 모르는 일이 잔뜩 있단다."
어머니는 계속했다.
"말해 주고 싶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구나. 이렇게 이야기하면 네가 용서해 주리란 걸 기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싶어서 이야기하는 거야. 어떻게 그런 짓을…"
도중에 그만둔 말을 듣고 있던 펠리시아는 쓰디쓴 추억과 동정심, 슬픔과 충격 등 여러 갈래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물론 너는 내 어린 시절을 모를 게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 관한 것 일체를 말이다."
어머니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린 몹시도 가난했었단다. 아버진 켄터키의 탄광부였었는데 몹시 냉혹했어. 술을 마시기만 하면 언제나 어머닐 때렸으니까."
어머니의 이야기는 쓰라렸던 어린 시절을 손 위에 놓고 들여다보듯 똑똑히 말해 주고 있었다.
"난 아버지에게 사랑을 느낀 적이 없었단다. 느낀 건 증오와 공포심뿐이었지. 아버진 어머니에게뿐 아니라 오빠와 언니 그리고 내게도 몹시 가혹하게 굴었어. 어머닌 아버지의 학대와 과대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서른다섯에 돌아가셨고, 언니가 장티푸스로 죽었을 때가 열다섯 살이었단다. 오빠는 집을 뛰쳐나갔고. 지금 생각 하면 오빠가 가장 현명했던 거야. 오빠로부터는 한 번도 소식이 없었어.
나는 열다섯 살 때 결혼을 했지. 사랑이 무엇인지 결혼이란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을 때였단다.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다정한 아버질 갖지 못한 소녀는 이성의 사랑에 굶주리며 성장하는 거란다. 하지만 사랑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모른단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랬었다."
어머니는 일단 말을 멈추고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서 잠시 쉬며 힘을 모았다.
"우리가 살던 곳은 작은 탄광촌이었어. 열다섯 살 때인데, 한 친구가 다운타운에서 미인선발대회가 열린다는 얘길 들려 주었어. 열여섯 살이 돼야만 참가할 수 있었지만, 나는 키가 컸기 때문에 충분히 열여섯 살로 통했었지. 내가 미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남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었지만, 친구가 대회에 나가보라고 조르다시피 해서 나갔다가, 뜻밖에도 최고의 미인으로 뽑혔단다. 마을에서는 성대한 축하연이 있었는데 춤을 출 수 있도록 밴드도 와 있었단다. 그 중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던 남성이 있었는데, 이름은 제프 파커였어."
그 이름을 말하는 어머니의 입술에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제프가 내게 결혼 신청을 하더구나. 나는 '예스'라고 대답했지. 어떻게든 집에서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야. 제프가 네 친아버지란다, 펠리시아."
펠리시아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과거의 문이 하나하나 열려감에 따라, 소원하고 아름답지만 남이었던 어머니가 이제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변해갔다. 그것도 비극을 짊어진…
"너는 네 진짜 아버지를 모르지? 제프는 좋은 남편이었다. 친절하고 상냥했어. 하시만 그의 아내였던 동안에 난 그를 진심으로 알지 못했었지.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돼 네가 태어났고, 그 뒤 일 주일쯤 지났을 때, 댄스파티에서 연주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제프는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말았단다. 난 열여섯 살의 어린 미망인이 돼서 아이를 키워야만 했단다.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단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단 한 가지, 길가에 있는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를 하는 거였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카페라 해서 웨이트리스가 주문한 것이나 나르면 되는 게 아니었단다. 난 어떻게든 누구에게든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과 교제했었지. 트럭 운전사, 세일즈맨, 일요일 밤만 카우보이로 변신하는 남자 등 날 유혹해 오는 사람과는 모두 사귀었단다. 그때까지 가질 수 없었던 것을 찾고 있었던 거야. 그래, 아버지의 사랑 같은 그런 거였지.
그곳에서 일 년쯤 일했을 때, 네 의붓아버지 에드먼드 화와 만나게 됐단다. 에드먼드는 그 때까지 내가 교제해 온 사람들과는 달랐어. 우리같은 시골뜨기가 아니었어. 뉴욕의 큰 광고회사에 근무하면서, 잠시 캘리포니아에 가던 도중이었다.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모델에 재능이 있다는 걸 곧 간파한 거야. 일 주일 정도 마을에 있으며 내게 자기와 결혼해서 함께 서해안으로 가자고 하더구나. 에드먼드는 그 동안 교제해 온 남자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지. 촌티를 벗은 세련된 사람이었어.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촌뜨기.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몰랐으니까. 단지 어떻게든 그를 기쁘게 하고 싶었어. 주위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는 일이 소중하다고 생각했었단다. 그것이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지. 되돌아보면 에드먼드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단지 침대를 함께 쓰는 사람으로서 나를 원했던 것 같구나. 좋지 않은 목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국경 너머로 데리고 나가면 법률에 저촉되므로 그것이 싫었던 거지. 더 중요한 일은 나를 모델로 내세워 큰돈을 벌려고 계획했던 거란다. 그의 노예 같은 거였어."
어머니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다지 좋은 이야기가 아니구나, 펠리시아. 하지만 모든 것을 네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어. 그가 가져온 최초의 모델 일은 남성전문 잡지에 사진을 파는 추잡스런 일이었단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나를 모델 학교에 보내주더구나. 그곳에서 난 서서히 일류 모델이 되어갔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게 됐단다.
에드먼드는 광고 업계에서 어떻게 굴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고, 또 천성적인 프로모터였어. 평범한 모델 일로는 좋은 돈벌이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톱 모델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 예를 들면 잡지 표지라든가. TV 광고 같은 것을 원했지. 그는 많은 계약을 따왔어. 그리고 최후로 매직그로우 캠페인으로 대성공을 한 거야. 그때 '매직그로우 걸, 프란시스!'가 탄생한 거란다."
그녀는 슬픈 듯이 웃었다.
"이제 나란 사람을 좀 알겠니? 누더기를 입던 시골뜨기가 성장해서 근사한 드레스를 입고, 돌연 돈과 명성을 얻었지. 하지만 모든 것이 두려웠어. 나는 에드먼드에게 완전히 의지하게 되었지.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어. 어떤 포즈가 좋은지, 대중 앞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지- 심지어는 생각하는 방법까지.
이런 것이 네 인생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 거지. 여하튼 처음부터 너를 데리고 온 것을 에드먼드는 후회하고 있었어. 아이가 따라온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내가 너와 같이 있으면 언제나 짜증을 냈었지. 24시간 모델로서 일하게 하고 싶었던 거야. 모델의 수명이 짧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 젊었을 때 겨우 5, 6년이란 걸 말이다.
일이 늘어남에 따라 내게 시간이 없게 되자, 그는 너를 기숙사 학교에 보내도록 주장하기 시작했어. 우선, 내 시간을 너를 위해 다 써버리게 돼서는 안 된다면서. 좋은 어머니라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그 말은 설득력이 있었고, 또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이란 것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뭔가를 실행하는 데는 대부분 그의 말을 따르게 됐단다. 그는 또 그러더구나. 젊은 아가씨는 유럽의 일류 아가씨들이 모이는 기숙사 학교에 입학시키는 게 제일 좋을 거라고. 집에 있는 것보다 때를 벗고 세련되어진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머니는 슬픈 표정으로 잠시 앉아 있더니 계속 말했다.
"매직그로우 걸, 프란시스에게 10대의 딸이 있음이 알려지고, 내 나이가 탄로 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여하튼 그의 말이었고, 긴 안목으로 본다면 그 편이 너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달랬었지."
"먼저 물어보았어도 좋았을 텐데요."
오랫동안 가슴속에 응어리진 쓰라린 아픔이 갑자기 넘쳐나온 듯, 펠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내가 얼마만큼 어머니를 필요로 하고 있었는지 아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눈물로 눈이 흐려졌다.
"나 역시 퍽 괴로웠단다."
어머니도 울면서 말했다.
"너와 만날 때마다 집에 데리고 오고 싶었단다. 너를 그대로 남겨 두고 돌아가야만 한다는 일이 내게 얼마나 가슴 쓰라린 일이었는지 너는 알 수 있겠니? 내 스케줄이 점점 바빠져서 전 세계를 비행기로 이동해 가며 TV 광고를 찍거나 카메라맨에게 포즈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정신이 불안정해져서 각성제와 커피를 마시며, 잠자기 위해서는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만 했지. 그때쯤이었을 거야. 에드먼드의 마음을 잃게 된 것이― 이전에는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 사라지고 말았지."
펠리시아는 눈물을 닦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엄마의 인생을 빼앗아 간 것은 매직그로우의 사장 존 베어스턴이라고 생각해 왔었어요. 의붓아버지도 베어스턴 씨도 공범자가 아니었나요? 자기 회사의 이익을 가져오기 위해 엄마를 이용했잖아요?"
어머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아니다. 존에게는 아무 죄도 없어. 그를 힐난해서는 안 된다. 죄는 내 자신의 나약함과 에드먼드의 차가운 성격과 무자비한 야심에 있었으니까. 존 베어스턴은 훌륭한 분이야. 나는 그를 존경했고… 사랑했었지."
"사랑했었다고요?"
놀란 펠리시아는 커다란 외침으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는 몰랐을 테니까. 그는 결혼한 사람이었고,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될 시련을 갖고 있었어― 부인 문제로 무척 고민하고 있었단다. 부인이 알코올중독으로 병원과 요양소를 들락날락했다더구나. 하지만 그는 부인에게 충실한 사람이었어. 나는 그를 진정 사랑했어. 내가 사랑이라고 느낀 건 그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한숨짓고는 다시 계속했다.
"네게는 관심없는 일이지? 그래, 내가 왜 너를 찾아갈 수 없게 됐는지를 말하다 말았지? 그때는 이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단다. 너를 만나면 마음의 갈등이 심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너로부터도 마음의 고통으로부터도 비겁하게 도망친 거지. 그것이 시작이었어. 그로부터 점점 여러 가지 일로부터 도피하게 돼서는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나오고 말았지. 에드먼드가 죽고 건강을 해친 나는 나이 때문에 모델 일도 해낼 수 없어지자 점점 은둔생활로 빠져들게 됐단다."
"내가 미국에 돌아온 뒤로도 만나기를 거절했었어요."
펠리시아는 어머니를 비난하듯이 말했다.
"주위에 쌓아 놓은 벽을 부수려 했었는데요. 내게 있어서 엄마를 만난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런데도 왜 계속 거절했나요, 친딸의 부탁인 데도요?"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어머니는 겨우 입을 떼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행을 숨기려 해서였지. 마음의 고통은 마침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렇게 되면 다시 혼자서 살아가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네가 병원 치료비를 지불한 걸 알고는 이전보다도 더 비참해졌단다. 네 사진이 도착해서 어떻게든 내 자신과 대결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지. 너는 이제 내 기억에 어슴푸레하게 남아 있는, 눈물을 줄줄 흘리던 꼬마가 아니었어. 이미 훌륭한 여성으로 성장했더구나. 널 보고 있으면 젊었을 때의 나를 다시 보는 것 같다. 네 얼굴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널 만나기로 결심했었다. 또 병원의 정신요법 덕분에 자신이 한 일을 똑바로 마주대할 수 있는 용기도 조금은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네게 부탁이 있단다."
"뭔데요?"
"그럴 자격은 없겠지만, 나를 진정으로 용서해 줄 수 있겠니, 펠리시아!"
어머니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엄마!"
감정에 목이 메어서 펠리시아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용서한다, 안한다, 그런 것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엄마를 만나고 싶었던 건 나 자신을 위해서였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그 위에 스페인으로 내쫓긴 뒤로 엄마에 관한 것을 거의 기억할 수 없었어요. 엄마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어요.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지, 어떤 목소리를 갖고 있을지―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엄마는 내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런 이상한 말씀 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끄덕였다.
"전혀 이상한 말은 아니지. 네 기분은 잘 안다… 나도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으니까."
펠리시아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품안으로 뛰어들며 그리웠던 그 육신을 꽉 껴안았다. 어머니의 포근함은 소녀 때 그대로였다. 그녀는 어머니가 지내온 가련하고 쓰라린 인생을 생각하며 울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아버지를 무서워한 시골 처녀를 위해서 울고 있었다. 그러나 더 크게는 어머니가 없었던 자신의 쓸쓸했던 어린 시절의 나날들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은 쓰라렸던 날들을 씻어 내리고 오랫동안 모녀 사이를 갈라놓았던 틈을 메꾸어 주었다.
일단 장해물이 제거되자 두 사람은 이제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모녀는 마음속에 있는 감정까지 이야기하며, 뿔뿔이 흩어져 살던 날들을 서로에게 되돌려 주었다. 어머니는 헤어져 살던 세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어했다. 그녀는 펠리시아에게 학교생활이랑 10대를 지낸 일, 그리고 어떻게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등을 소상히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
펠리시아는 스페인의 가톨릭계 학교의 수도원 같은 분위기를 어머니에게 들려주었다. 언제나 감시가 따라다녀서 미국처럼 자유로운 데이트도 할 수 없었고, 남성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던 것도 이야기했다. 교사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 스페인에서 대학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뉴멕시코 주에서 임시 교사자격증을 획득해서 고등학교에 직장을 가진 것 등.
그런 다음에 그녀는 뉴멕시코 주의 정식 교사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야간대학에 다녔던 것도 덧붙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필연적으로 로드릭 베어스턴과 매직그로우 화장품의 모델 일을 받아들인 것 등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펠리시아는 이 부분이 가장 말하기 힘들었다. 로드릭 베어스턴에 관해서 말하기는 더욱 망설여졌다 그 화제를 입에 올리자, 그녀의 마음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자신을 새로운 '매직그로우 걸'로 만들려는 로드의 계획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교사의 월급만으로는 비싼 치료비를 지불할 수 없다는 건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고, 잡지의 매직그로우 광고에 나온 펠리시아를 어머니가 보게 될 그런 때가 곧 오게 될 것이다. 펠리시아는 남김없이 털어놓아야만 했다. 모델 일을 승낙한 것을 말하면, 어머니는 깜짝 놀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더욱 곤란한 것은 그것이 어머니의 인생을 망친 매직그로우 화장품의 모델인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가 이야기를 다 마치자, 어머니는 기뻐하며 찬성했다.
"모델이라면 너도 잘해 낼 게다, 펠리시아. 내 인생을 망친 것은 모델이란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매직그로우 사람들은 더욱 아니다. 내가 나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란다. 만약 로드릭 베어스턴이 그의 아버님 같은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사람이겠구나."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펠리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너무 강인한 사람이고, 일에 관해서는 자신의 생각대로…"
"하지만 매력이 있는 사람이겠지?"
"그래요."
당황해 있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엉겹결에 시인하고 말았다.
"네 얘길 들으니 존과 똑같은 것 같구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로드릭을 사랑하고 있니, 펠리시아?"
뜻밖의 질문이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완전히 침착성을 잃었다.
"엄마, 무슨 말씀을! 잘 모르겠어요. 남성으로서 매력을 느낀다든가 하는 그런 게 아니고요, 사랑하지 않아요. 오히려 증오하고 있어요!"
"정말? 미워한다고?"
슬픈 듯한 미소를 띠우며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을 네가 물려받았다니 이처럼 행복한 일이 없구나, 펠리시아. 자신의 뜻대로 모델 일을 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분명하게 주장하는 거야. 만약 로드릭 베어스턴을 사랑하고 있는 거라면… 내가 존에게 품었던 애정과는 달리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펠리시아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엄마. 하지만 모델 일은 그다지 마음에 내키지를 않아요. 이런저런 요구가 너무 심해서요. 교사의 단순한 생활이 좋아요. 엄마가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매직그로우와는 일 년 계약으로 동의했어요. 로드릭과 나의 로맨스는… 글쎄요. 무엇보다도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가 사랑하고 있는 건 회사뿐이에요. 나란 존재를 이익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나도… 외면적으로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일생의 반려가 된다는 건… 엄마가 아버지에게 느꼈던 것과는 다른 거예요."
자신이 그렇게 말해 놓고, 펠리시아는 걱정하고 있었다.
다음 날, 펠리시아는 뉴욕에서 찍은 TV 필름을 보기로 돼 있었다. 로드릭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그곳에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잘돼 갔기 때문에 기분에 들떠, 그녀는 로드릭을 만나는 것조차 부담이 안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려는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안녕."
로드릭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녀는 즐거운 듯이 먼저 인사했다.
"센스있게 옷 입으셨네요."
당당한 체격을 감싼 어두운 색 양복을 칭찬했다.
"당신도 상당히 아름답군요."
로드릭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필름이나 실물이나 똑같소. 자, 들어갑시다."
"칭찬해 주셔서 고맙군요."
놀리듯이 말하고 그녀는 빌로드 카펫 위를 걸어 TV 스크린이 비스듬히 놓여 있는 의자로 다가갔다. TV 스크린은 방의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로드릭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 그녀는 위험할 정도로 장난기가 생기는 걸 느꼈다. 그것은 이 며칠 동안 어머니를 알게 된 것에서 야기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 그녀는 세계를 상대로 해도 경쟁에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로드릭 베어스턴과의 대면조차도 그런 것에 속해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가볍게 키스한 뒤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태연히 의자에 앉는, 그런 짓을 충동적으로 해보고 싶었다. 물론 자제는 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그가 너무 놀라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킥킥대고 웃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그녀는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감정적으로 그녀는 완전히 우위에 서 있었다. 로드릭일지라도 그녀를 당황하게 만드는 일은 아무 것도 못할 것이다. 이 일 주일 간 그녀는 강해졌고 자신감도 생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니 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것뿐인지도 모르지만.
"광고방송 프로는 성과가 아주 훌륭하오."
펠리시아의 꼬고 앉은 다리에 시선을 주면서 로드릭은 말했다.
"당연하지요."
빈정대는 투로 펠리시아가 말했다.
"단지 25커트였는걸요."
로드릭은 논평을 삼갔다.
"어떤 카메라맨이 좀 더 분명한 모습으로 광고 작품을 찍고 싶어 하오. 당신에게는 천성적인 재능이 있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보여줍시다."
로드릭이 손에 들고 있던 검고 작은 리모콘의 보턴을 눌렀다. 한순간 펠리시아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수백만이라는 TV 시청자들도 그녀의 최초의 광고방송을 보며 마찬가지로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매직그로우 화장품을 격찬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정신없이 압도당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미지가 멋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우려해서 압도당해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새로운 곳에 진입하려고 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수렁에 빠질지도 모른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거요?"
스크린의 영상이 사라지자, 로드릭이 물었다.
"어떻소? 근사하지요?"
"모, 모르겠어요."
펠리시아는 더듬거렸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렵군요. 나 자신과 완전히 동떨어진 타인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럼 내 판단에 맡기시오."
로드릭은 그 갈색 눈으로 꼼짝 않고 펠리시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안해진 그녀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로드릭은 그에 아랑곳없이 계속했다.
"이 예비적인 TV 광고 프로의 결과와 시장조사에 기인해서 가을에는 새로운 매직그로우 제품을 개발할 거요. 그것은 새 '매직그로우 걸' 중심이 되는 거요. 어떻소, 흥미 깊지요?"
펠리시아는 불쾌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군요. 그렇게 되면 일 년으로 끝낼 수 없잖아요?"
"다음 해에도, 당신은 반드시 나를 위해 일하게 될 거요."
무슨 일에도 동요되지 않을 듯한 목소리로 로드릭은 말했다.
"당신의 계약에 사인했을 때, 당신의 내년도 함께 샀소."
펠리시아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다.
"그런 말투를 쓰다니, 모욕을 주는 건가요?"
"그런 적은 없소."
그는 차갑게 대꾸했다.
"꿈꿔 볼 수도 없는 성공, 돈, 명성을 제공하니까."
"무엇을 희생으로 해서요? 내 일생?"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말투를 쓰고 싶다면 좋을 대로 하시오. 헌신적으로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거요. 희생은 언제나 따라다니게 마련이오."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거라면 그래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내 목적은 훌륭한 교사가 되는 거예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런 식으로 모델 일을 하게 됐지만, 이건 일시적인 거예요."
베어스턴은 화를 내려 해도 낼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당신의 고집에는 정말 놀랐소. 정말 안타깝소. 어린애처럼 엉덩이를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펠리시아는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런 말은 안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가 경고했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얘기요."
그는 투덜댔다.
그는 쉴새없이 사무실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 장소의 공기에는 그의 에너지가 뿜어내는 활력이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당신에겐 정말 완전히 손 들었소!"
그는 고함을 질렀다.
"당신 앞에는 굉장한 찬스가 기다리고 있소. 새로운 매직그로우의 선전에 참가해서 내년 계약에 사인해 준다면, TV 쇼와 할리우드 일을 보장하겠소!"
"신제품을 위해 포즈를 취하라고 명령한다면, 당신은 포즈를 취하게 될 거요. 새로운 매직그로우 걸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겠다고 내가 결정하면 당신은 협력해야 하오. 내가 당신의 지갑을 쥐고 있다는 걸 잊고 있는 것 같군요. 그 위에 당신의 실을 당기고 있는 것도 나란 말이오!"
"꼭두각시 인형처럼요?"
펠리시아는 신랄하게 대들었다.
"그래도 내가 거절하면요?"
"우선은 지불을 중단하는 거요."
로드릭은 말했다.
"다음엔 당신을 재판소로 끌고 가겠소. 당신은 법적으로도 단단히 묶여 있소. 변호사를 고용해서 나와 싸울 그런 돈이 있소?"
"정말 비열한 사람이군요, 벌써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요!"
격노해서 펠리시아가 외쳤다. 분노의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눈꺼풀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당신이 자신의 의지로 사인한 계약에 기인해서 내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뿐이오."
그렇게 말하며 로드릭은 심술궂은 웃음을 띠웠다.
"그래도 내가 악당이오?"
펠리시아는 지나치게 분노를 느꼈기 때문에 그에게 대꾸할 말이 목에 걸려 버리고 말았다.
"다음 일에 대한 대답을 언제까지 해 주면 되나요?"
펠리시아는 마지못해 하면서 톡 쏘아붙였다.
"목요일까지요."
만면에 득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로드릭이 말했다.
"당신은 뉴욕으로 가서 신제품의 광고를 위한 예비촬영을 하게 돼 있소."
그는 한숨을 내쉰 다음 계속했다.
"당신 어머님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돈이 들었는지 잊지 않도록 하시오."
펠리시아는 로드릭을 매섭게 노려보고는 테이블 위에서 백을 집어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아파트에 당도할 때까지 그녀는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대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펠리시아는 그의 의도대로 사인을 하고 만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과 로드릭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며 울음을 떠트리고 말았다. 그녀가 내동댕이친 핸드백이 침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열대 식물 화분 위로 날아가 얹히고 말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왜 이다지도 짜증이 나는 것일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벨벳 의자에 걸터앉아 구두를 벗고 두꺼운 카펫의 촉감을 즐기던 펠리시아는 방을 둘러보았다. 로드릭의 말이 아직도 그녀의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지금 사치스런 가구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는 것이었다. 대개의 어떠한 여성이라도, 지금 그녀가 당면하게 된 찬스에 기뻐 날뛸 것이다.
자신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바로 그것이었다. 언제나 그녀는 그런 미묘한 감정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어머니와는 이미 만났다. 이젠 피맺힌 아픈 상처도 웬만큼 가라앉았고, 그녀도 자신의 자기 증명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현재 상태에서는 해낼 수 있는 최고의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로드릭과는 항상 그런 식으로 충돌해 버리는 것일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런지도 모른다. 죄책감이 아니라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어머니처럼 될까 봐?
펠리시아는 기운없이 의자에서 일어서 잠시 동안 목적도 없이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들여다보았지만,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뭔가를 먹을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펠리시아는 옷장으로 다가가서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깜빡 잊고 있었던 포장꾸러미에 닿았다. 어머니의 생일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선물로써 양쪽에 사진을 끼울 수 있는 액자를 샀던 것이다. 그녀는 액자의 한쪽에 자신의 사진을, 또 한쪽에는 매직그로우 화일에서 뽑아낸 어머니의 사진을 넣을 계획이었다. 지금 사진을 넣어서 선물을 포장하는 게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뉴욕에서 돌아오는 대로 병원에 가지고 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풍만한 입술의 부드러운 곡선에 엷은 금발, 긴 속눈썹과 커다란 눈. 그녀는 어머니의 사진을 왼쪽에 넣은 다음, 자신의 사진을 오른쪽에 넣었다. 스페인에에서 로드릭이 찍어 주었던 그 사진이었다. 다시금 자신과 어머니가 너무도 닮았다는 데, 펠리시아는 가벼운 쇼크를 느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진 옆에 자기 사진을 넣는 순간,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안에 진저리를 쳤다.
'이것은 뭘까?'
가슴속에서 뭔가가 큰소리를 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무엇이 이처럼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일까?'
돌연, 마음속의 어둠을 밝혀 주는 빛처럼,
'당신의 운명이오.'
라고 말하던 로드릭에게 강력히 시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그녀의 뇌리에 떠올랐다.
어째서 자기는 좀 더 일찍 방법을 강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갑작스런 통찰은 그녀에게 현기증마저 느끼게 했다. 로드릭 베어스턴을 반드시 분개시킬, 어떤 계획을 실행할 용기마저 백배하고 있었다. 펠리시아 화로서의 개성을 완전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계획이었다. 프란시스 화의 복사판이 아닌…
8
뉴욕 특유의 무더운 날이었다.
로드릭과 카메라맨과 약속한 건물에 들어선 펠리시아는 에어컨이 내뿜고 있는 찬 공기에 휴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로드릭은 오늘 그의 일생에서 가장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내심 기쁨의 탄성을 올리고 있었다.
그날, 자그마한 자기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그녀는 머리를 갸웃하고 짧은, 갈색에 가까운 금발을 자유롭게 흔들어 보았다. 로드릭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엷은 금발의 긴 머리로 지금과는 전혀 달랐었다. 적어도 머리만은 원래의 펠리시아 화로 돌아온 것이다. 이것을 보았을 때, 로드릭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해서 그녀는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는 이제 프란시스 화가 탄생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을 크게 보이도록 그린 활 모양의 눈썹도 지워져 있었으며, 머리는 자연색으로 짧게 커트했다. 옷도 자신의 개성에 맞는 것을 입고 있었다. 로드릭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일정한 형식을 갖춘 의상과는 달리 라인이 단순한 것이었다.
'마침내 자유로워졌구나,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자유!'
하고 펠리시아는 생각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어머니를 만날 것을 애타게 그리며, 그렇게 하는 것으로 자기의 존재증명을 확립하려고 해왔다. 그때까지 자신의 존재란 어렴풋한 안개가 낀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나고 가까이서 얼굴을 보며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되자, 펠리시아는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자유를 획득했다.
자신을 속여야만 하는 모델은 그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로드릭은 펠리시아 본인의 사진을 찍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펠리시아를 그녀의 어머니로 변신시키려고 했다. 그녀는 잠재적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것으로 된다는 사실에 반항하고 있었다. 특히 어머니로 변신되어지는 것을.
어떤 희생을 치른다 해도 펠리시아는 펠리시아 자신이 돼야만 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로드릭의 요구에 복종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위에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며칠 간에 자신을 알고 인생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새 이미지의 어머니만은 될 수 없었다.
펠리시아는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비서가 로드릭의 사무실을 가르쳐 주었다.
또 한 명의 비서가 로드릭은 스튜디오 안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펠리시아의 맥박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로드릭이 어떤 반응을 할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이 변화를 보면 뭔가 말할 것은 틀림없었다. 그녀는 그것이 부정적인 의견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튜디오 입구에 다다를 때쯤에는 펠리시아의 호흡이 극도로 빨라져 있었다. 검은 머리를 앞으로 숙인 자세로, 그는 키 작은 창백한 남자와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아무래도 카메라맨 같았다.
빨강과 핑크의 커다란 소용돌이무늬가 그려진 큰 배경이 매직그로우 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운 테이블 위에는 신제품도 놓여져 있었고, 조명과 촬영장치의 준비도 완료되어 있었다.
펠리시아는 헛기침을 했다. 곧 두 사람의 머리가 떨어지고, 올리브색 얼굴의 갈색 눈이 펠리시아 쪽을 돌아보았다.
로드릭은 거만한 모습으로 그녀를 힐끗 보고는 다시 대화를 계속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이야기를 중단하고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펠리시아!"
그는 큰소리를 질렀다.
"대체 어찌된 일이오?"
펠리시아는 턱을 위로 쳐들었다. 로드릭과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데도 용기가 넘쳐 흐르는 것에 그녀 자신도 놀랐다.
"내 자신으로 돌아온 거예요!"
펠리시아는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떤 결심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 머리는 어떻게 된 거요? 그리고 그 화장은?"
로드릭은 마구 고함질렀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오?"
"천만에요, 이게 좋아요. 내게는 이 편이 더 어울려요. 프란시스 화의 2세가 되는 건 거절하겠어요. 당신에겐 마음에 안 들지 몰라도, 앞으로는 내 자신의 마음에 들 테니까요."
"그건 가발이오?"
로드릭이 물었다.
그는 두 사람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와 손을 뻗어서 짧게 커트한 머리를 만져보려고 했다.
"그만두세요!"
펠리시아는 날카로운 소리로 그의 손을 멈추게 했다.
"가발이 아니에요. 내 머리에요!"
방 끝에 서 있는 카메라맨은 카메라를 내버려 둔 채, 유쾌한 표정으로 귀추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 태도로 보아, 이전에도 모델과 사장의 하찮은 싸움을 몇 번 보았던 것 같았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요, 펠리시아!"
로드릭은 대단히 화를 냈다.
"벌써 얘기했을 텐데요?"
펠리시아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아무리 프란시스 화로 만들려 해도 나는 나일뿐이에요. 매직그로우 걸로서 고용할 거라면 내 자신의 사진을 찍어 주세요."
로드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머니의 그림자가 되는 것은 사양하겠어요!"
펠리시아는 완강하게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로드릭은 상을 찡그리고 냉정한 시선으로 펠리시아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는 카메라맨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도 모르는 새 카메라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몹시 놀랐다.
그녀는 로드릭의 지시에 따라 로보트처럼 매직그로우의 제품을 손에 들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이 충동적인 행동 때문에 자신이 치르게 될지도 모르는 대가가 무언지를 펠리시아는 곧 깨달았다. 어머니의 입원비는 아직 로드릭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계획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로드릭이 해고를 결정하면, 변호사는 틀림없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낼 것이다.
펠리시아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건네지 않고 로드릭은 스튜디오를 나갔다. 그런 태도로 보아 그가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졌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니 펠리시아는 몸이 떨렸다.
다음 날, 펠리시아는 로드릭의 비서로부터 급히 사무실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었다.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그녀는 어제보다 훨씬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비서가 곧 로드릭의 사무실로 안내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잠자코 의자에 앉아 사과할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고 싶다는 것을 강조하면 아무리 냉혹한 그일지라도 다시 한번 기회를 줄 것 같았다.
옆문이 열리고, 로드릭의 큰 체격이 나타났다. 그는 눈에 익은 서류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어제의 사진도 들어 있으리라고 펠리시아는 생각했다.
로드릭은 그녀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곤 책상 위로 봉투를 던졌다.
"보시오!"
펠리시아는 입안이 바싹 탔다.
"뭔가요?"
"사진이오. 보도록 하시오!"
펠리시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봉투에 손을 갖다 대고, 사진을 꺼내 한 장 한 장 보고 나서 말했다.
"그다지 나쁘지는 않군요."
로드릭은 일어서서 창가로 갔다.
"아니오."
그는 불분명한 소리로 말했다.
"나쁘기는커녕 훌륭하오."
그는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망설임도 없이 물었다.
그는 뒤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특유의 개성을 느꼈소. 당신이 모든 것을 바꾸고 왔을 때,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소. 무슨 말인지 알겠소?"
펠리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우선, 새로운 광고에 관해서는 계획을 완전히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겠소. 지금까지는 프란시스 화의 리바이블로 해왔소. 내 계획으로는 가능한 한 당신을 어머님과 닮게 할 생각이었소. 아무래도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던 것 같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당신의 승리요."
그는 사진을 가리켰다.
"증거는 거기 있소. 당신이 이처럼 잘 찍히리라곤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소."
"그럼…"
그는 손을 들었다.
"기다리시오, 아직 전면적으로 이야기가 진전된 건 아니오. 좀 더 시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니까. 여하튼 이 새 이미지의 당신을 TV로 방송해 보겠소. 그리고 스탭들과도 좀 더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고…"
그는 좀 흥분한 듯 떠들어대면서 사무실 안을 왔다갔다했다.
"당신의 화장 안한 얼굴은 건강해 보이고 친밀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도 있소. 그 위에 황홀해질 정도로 관능적이오. 그러고 바로 그것이 90년대의 얼굴이라고 난 생각하오. 매직그로우 화장품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런 아름다움, 이런 테마로 캠페인을 펴서 전 세계에 당신을 선전하겠소. 90년대다운 분위기를 구하고 있는 여성에게 바로 당신이 모델이 되는 거요. 새 매직그로우의 심볼은 펠리시아 화요! 어머니의 모방이 아닌, 90년대의 새로운 심볼이 되는 거요."
뒤돌아서는 그에게는 행동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펠리시아의 온몸에 전류가 흐른 듯했다.
"잘못은 솔직히 인정하겠소. 어쩌면 내가 계속 실수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오. 지금까지 난 어머님의 아름다움에 너무 구애를 받아온 것 같아요. 매직그로우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프란시스 화를 떠올려 버리게 되니까. 그래서 일종의 고집을 부리고 있었던 것 같소. 아니 강박관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당신을 완전히 한 개인으로서 보기에는 내게 일종의 쇼가 필요했던 거요. 당신의 개성은 모델로서의 잠재능력을 조금도 약하게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아무튼 당신이라면 충분히 새 매직그로우 걸이 될 수 있소. 그것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파악하면서 말이오. 매직그로우 걸이 되면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길이 열리는 거요… TV라든가, 헐리우드의 일 같은 것 말이오. 모두 당신의 것이 될 거요, 펠리시아!"
펠리시아는 로드릭의 말에 최면술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그가 마음속에서부터 뿜어내는 정열에 빠져들어 그것을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단지 그곳에 못박혀 서 있을 뿐이었다. 지금의 펠리시아에게 있어선 승리의 의미가 서서히 현실로 돼가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우쭐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곧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녀는 오랜 각고 끝에 자신이 땅에 발을 디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특별히 스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이미 말했다고 생각하지만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계약을 지키고, 그리고 나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거예요."
"하지만 난 적어도 내년까지는 당신을 확보하고 있소."
로드릭이 말했다.
"좋아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당신을 최대한 이용할 작정이오."
펠리시아는 아직도 자신이 새장 안의 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자기는 이렇게 무정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년이 되더라도 여러 번 그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치 자신은 바늘방석 위에라도 앉은 것 같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대로 포즈를 취하고, 그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되다니. 이것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항상 생각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는 사이에 어떻게든 일 년은 지나갈 것이고, 그와도 만나지 못하게 될 테니까.
주말에 펠리시아는 뉴멕시코의 고급 아파트로 돌아와 유명 디자이너의 우아한 파자마를 입고 화려한 가구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하며 짜증이 날 뿐이었다. 그 호화스러운 분위기를 마음편하게 완전히 즐길 수가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그녀는 발딱 일어섰다. 방문자가 누구든 그녀의 기분을 달래줄지도 몰랐다. 그녀가 문을 열자, 파란 눈동자를 가진 단정한 금발의 남성이 서 있었다.
"던!"
펠리시아는 반가움에 소리쳤다.
"야―"
어설프게 웃으며 그는 말했다.
"들어가도 괜찮겠소?"
"물론이에요."
펠리시아는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평범한 사람과 만나는 것이 정말 즐겁기 때문이었다.
던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대충 훑어본 뒤에 펠리시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굉장한데!"
던은 펠리시아의 시선 속에 있는 커다란 고독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고마워요."
호화로운 가구들로부터 던의 시선을 되돌리려고 펠리시아는 주저주저하며 말을 건네 보았다.
"앉으시겠어요?"
그녀는 던을 피하려는 자신을 깨달았다. 던이 벨벳 소파에 앉자 펠리시아도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전화한다고 약속했었잖소?"
던은 느닷없이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전화가 오랫동안 없어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소. 마침 이곳 주소를 알아내었기 때문에 당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들러본 거요."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요, 던."
펠리시아는 힘없이 대답했다.
"보면 알 수 있소. 어머님은 어떻소?"
"상당히 좋아졌어요."
펠리시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단했다.
"어머니와 만났어요. 벌써 화해했는걸요. 어제는 어머니 생신이라서 밖에 모시고 나왔었어요. 의사선생님이 허락해 주셨거든요."
"그랬었소?"
던은 맥풀린 듯이 말했다. 그의 어조로 판단하면, 두 사람의 사이가 이젠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제 이야기할 일도 별로 없는 것 같소."
"무슨 말이에요?"
"이미 알고 있소. 당신은 전화를 걸어 주지 않았었소. 그리고 이런 사치스런 아파트에 자리를 잡았소. 당신의 모든 것이 변해 버린 것 같군요. 이제는 나와 안 맞는 것 같소."
"그렇지 않아요."
펠리시아는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단지 바빴을 뿐이에요."
"오늘밤처럼?"
던이 물었다.
"오늘밤, 전화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빴소?"
"하지만…"
그녀는 망설였다.
"펠리시아, 당신은 변했소. 마치 딴사람 같아요. 이곳에도 잘 어울리는 것 같고."
던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들어서 아파트의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가리켰다.
"일시적인 거예요, 던."
펠리시아는 그를 비난하듯이 말했다.
"이것도 일의 일부일 뿐이에요. 하지만 일 년만 계약했어요. 끝나면 다시 내 낡은 아파트로 돌아갈 거고, 학교로 갈 거예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꼭 돌아갈 거예요."
펠리시아는 항의했다.
"이건 어머니를 위한 거예요. 사치스런 생활은 내게는 안 어울려요. 내 꿈은 언젠가는 안정되게 가정을 갖는 거예요. 아이도 키우고 싶어요. 야심 같은 건 전혀 없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에요."
"처음에 당신은 그랬소."
던은 한층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전과 틀려요.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확실하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전에는 당신에게 없었던 강인함이오. 그러려고 애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골 처녀 같은 분위기가 없어졌소. 지금은 너무도 세련돼 있단 뜻이오."
"던, 바보같은 소리 그만하세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건 내 옷이라든가, 아파트에 관한 이야기죠? 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아니오. 당신은 변했소, 펠리시아."
던은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미묘한 일이지만 기본적인 것부터가 변했소."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펠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소파를 박차고 일어섰다.
"여보세요?"
"미스 화군요."
수화기 저쪽에서 세련된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미스터 베어스턴이 촬영 계획을 세우셨어요. 이번에는 로케이션입니다."
"그래서요?"
"내일 아침 6시 반 비행기로 출발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알았어요."
펠리시아가 대답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게 되나요?"
"샌프란시스코라고 하더군요."
"재미있겠군요. 아직 가본 적이 없거든요."
그녀는 전화를 끊고 던이 앉아 있는 소파로 돌아왔다.
던은 의아스럽다는 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지금의 생활이 즐겁소?"
"즐거울 수가 있겠어요?"
펠리시아가 되받아 대답했다.
"말했죠. 이건 어머니를 위해서예요. 그것도 일시적인 거지요.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어조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소."
"던, 나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가요? 그런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단 말이에요."
펠리시아는 신경질적으로 주장했지만, 자신의 말이 점점 허무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일 년 간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렇겠지."
그의 어조로 보아 납득하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내일 카메라 앞에 서게 되겠죠? 이제 쉬는 편이 좋을 거요."
"하지만 아직 이르잖아요?"
조금 뾰로통해져서 펠리시아는 말했다.
"아니요, 펠리시아."
던은 몹시 괴로운 듯이 말했다.
"벌써 늦었소. 너무 늦었을 정도요. 그럼 잘 자요."
그런 뒤, 펠리시아는 혼자가 되어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자신은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활이라든가 모델 일 때문은 아니었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에 변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알게 되자 어떤 확신도 생겼고, 갑자기 어른이 돼서 이전보다도 훨씬 여러 가지 일에 자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던은 단지 세련됐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신상에 일어난 진정한 변화를 깨닫지는 못했다.
던을 진심으로 좋아했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그가 영영 멀어져 가는 걸 본다는 게 괴로웠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몰랐다.
던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이미 늦었소!'
라고.
그래, 이젠 너무 늦은 것이다.
돌연 전화가 울리며 그녀의 사고를 방해했다. 닥터 앤브루스터로부터 온 것이었다.
"펠리시아, 어머님이 심장발작을 일으켰소. 이 병원에 올 수 있겠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소."
"무슨 이야기인데요?"
펠리시아는 놀라움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떨어뜨리듯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겨우 가까워진 어머니와 그녀 사이가 영원히 더 가까워질 수 없게 되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며…
9
"수술이오?"
펠리시아는 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눈에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그녀는 병원의 닥터 앤브루스터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소."
심각한 얼굴로 의사가 말했다.
"당신에게 전하기에는 내가 적임이라고 생각해서요. 어머님의 정신상태는 상당히 안정돼 가고 있소. 당신 덕분에 말이오. 그러나 몸이 무척 약해져 있소. 심장은 내가 진찰해 왔기 때문에 잘 아는데, 위험한 상태요. 어떻소, 어머님은 심장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되오. 더 이상 연기할 수도 없을 것 같소."
"그처럼 급한 수술을 받아야만 한다면 굉장한 발작이었겠군요."
"일종의 경고요. 다시 한번 발작을 일으키면 이번에는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거요."
"생명까지요?"
펠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그렇소."
닥터 앤브루스터는 있는 그대로를 진술하고 끄덕였다.
"지금 필요로 하는 건 정밀한 수술이기 때문에 돈이 상당히 많이 들 거요. 치료비만으로도 힘들 텐데, 그 위에 수술비용이라면…"
"수술비용을 댈 수 없다면 그대로 돌아가신단 말인가요?"
펠리시아는 조바심으로 애가 탔다.
"물론 한순간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소. 그러나 나로서는 이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의에게 수술받게 하고 싶소. 그렇게 하려면 상당한 돈이 들게 돼요. 아는 바와 같이 어머님은 보험에 들지 않아서…"
"전문의요? 어느 분을 추천해 주시려는 거지요?"
"시카고에서 닥터 랜드럼을 부르고 싶소. 이런 종류의 수술에 있어서는 국제적으로도 드높은 평판을 얻고 있는 분이오."
"비용을 지불하면… 와 주실까요?"
"그럴 거요. 이미 전화를 해 두었으니까. 그의 비용에다가 병원 입원료를 더하면 꽤 많이 들 텐데…"
닥터 앤브루스터가 대강 얘기한 금액을 전해 들은 펠리시아는 가벼운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는 곧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정도의 액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알았습니다. 닥터 랜드럼에게 전화해서 약속을 받아 주세요. 돈은 어떻게든 마련할 테니까요."
닥터 앤브루스터는 안도감으로 미소를 띠웠다.
"당신에게 이야기하면 어떻게든 되리라고 생각했소."
"네."
그녀는 거의 단념한 상태에서 무표정하게 대답하곤, 무거운 기분으로 닥터 앤브루스터의 사무실을 나왔다.
그녀는 택시를 불러 타고 곧장 로드릭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늦어지면 마음이 약해져서 자신의 결심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펠리시아가 로드릭을 만나고 싶다고 알리자, 그에게 바로 연락해 주었다. 금세 로드릭이 문에 나타나 들어오도록 손짓을 했다.
"이것 참, 웬일이오?"
여느 때의 차가운 태도는 아니었다.
"이런 방문은 기쁘군요. 여하튼 앉으시오."
그녀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앉혔다. 여느 때와 같이 로드릭은 책상 끝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일 얘기요?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일?"
"엄밀하게 일 이야기예요."
그녀는 오만한 대도로 대답했다.
"그건 유감이군."
로드릭은 말하면서 뭔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그의 코멘트를 무시하고 말했다.
"나를 천재 매직그로우 걸로 생각하고 계시죠?"
"물론이오. 캠페인은 이미 시작되고 있소."
"내년에도 당신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면 어떻겠어요?"
"마침내 분별이 생긴 거요?"
로드릭은 기쁜 듯 웃었다.
"글쎄요…"
그녀는 말을 얼버무렸다.
"당신과 다시 한번 계약을 하겠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고 맑고 파란 눈으로 로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왜 사인할 마음이 생긴 거요?"
펠리시아는 당황함을 느끼며 얼굴을 숙여 무릎을 보고 있었다. 돈이 필요하다고 정직하게 말하면 로드릭이 오해한 것은 눈에 보이듯이 뻔했다. 그러나 진실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
"당장 선금이 필요해요."
"물론이오."
로드릭은 쉽사리 동의했다.
"아하― 급료로는 생활해 나갈 수 없게 된 거요? 곧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펠리시아는 화가 나서 뺨을 붉게 물들였다.
"아직 금액을 말하지 않았어요!"
"알았소. 그럼 어느 정도 필요하오?"
펠리시아는 자기가 액수를 말하면 분명히 로드릭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되겠소?"
그가 물었다.
"네,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내가 당신에게 계속 부담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에요."
"물론 그렇겠지."
로드릭이 응수했다. 그의 어조는 영원히 펠리시아를 붙들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해요."
펠리시아는 그에게 말했다.
"알았소. 변호사에게 계약서를 만들게 하겠소. 당신이 사인하면 2, 3일 사이로 수표를 보내주겠소."
"그건 안 돼요! 당장 필요해요… 내일 아침에요."
"그렇게는 할 수 없소."
융통성 없는 아이와 거래하고 있다는 태도로 로드릭이 웃었다.
"내일 아침이 아니면 절대 계약하지 않겠어요!"
펠리시아는 최후의 수단에 호소했다.
"왜 그처럼 정색하고 화내는 거요?"
로드릭은 의아스럽다는 듯 물었다.
"결심이 바뀔지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면 로드릭이 타협해 주리라고 짐작했었다.
"알았소."
로드릭은 응낙했다.
"즉시 변호사에게 계약서를 만들게 하겠소. 사인하면 선불로써 그 자리에서 내 수표를 끊어 주겠소. 이젠 됐소?"
"좋아요."
동요하는 자신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녀는 말했다.
"기간에 관한 건데, 매직그로우 걸로서 일 년 더 하게 되면, 당신도 만족하게 되지 않겠어요? 적어도 선불 정도 만큼은요."
"글쎄…"
로드릭은 또 웃었다.
"선불을 다 써버리면 어떻게 생활해 나갈 셈이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뭔가에 투자하는 거요?"
"일 년이에요, 로드릭."
펠리시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생활은 내가 꾸려나가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며 로드릭은 낮은 소리로 쿡쿡 웃었다. 그는 아무래도 앞으로 계속 펠리시아가 일 년마다 계약을 갱신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유야 어떻든 당신의 결론은 좋았소.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어머님처럼 인생을 포기할 필요는 없소. 이 세계는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좋아지게 될 거요. 곧 익숙하게 될 테니까."
"글쎄요…"
펠리시아는 무거운 마음으로 뇌까렸다.
이 세계가 사조에 물들기 쉽다는 세계라는 것은 이미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된 것도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결코 일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동기야 어떻든 이미 두 번이나 돈 때문에 마음을 판 것과 똑같았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이 일의 더러운 일면을 씻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로드릭의 사무실을 나올 때도 펠리시아는 마음이 무거웠다. 어머니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으므로 몹시 기뻐해도 좋을 것 같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차갑고 검은 구름을 완전히 물리칠 수는 없었다.
아파트에 돌아온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 손에 익은 번호를 돌렸다. 최근에는 전화하기를 피해 왔었던 것이다. 던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던?"
펠리시아는 되도록이면 목소리에 따뜻함을 띄우고자 노력했다.
"여보세요?"
던은 그녀의 목소리를 깨끗이 잊은 듯이 평범하게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펠리시아에게서 온 전화라는 걸 알고 있을 터였다.
"저, 펠리시아예요."
그녀는 가능한 한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알고 있소."
던이 대답했다.
"어쩐 일이오?"
"아무 일 아니에요."
펠리시아는 거짓말을 했다. 로드릭과의 사이에 맺고 온 계약에 관해 그에게 털어놓을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다난한 인생을 생각하는 어두운 마음이 그대로 목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던!"
펠리시아는 비참해졌다.
"당신에게 알려 주고 싶었어요. 어머니가 심장발작을 일으켜서 수술을 받아야만 된대요."
"그랬소? 그것 참 큰일이군요."
그는 진정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타인의 불행을 신문에서 읽었을 때같이 거리를 둔 동정 비슷한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있겠소?"
펠리시아는 던의 말을 속으로 되풀이해 보았다. 그것은 도움을 필요로 할 것 같지도 않은 사람에게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의리상의 말이었다. 던은 수술하는 동안 함께 있어 주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수술이 시작할 때까지 함께 아파트에 있어 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고 단지 질문을 했다.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있을 것 같소?"
"괜찮아요."
너무도 슬퍼져서 펠리시아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단지 알려 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수술이 무사히 끝나기를 빌겠소."
던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거기서 대화를 끝냈다.
그날 밤, 펠리시아는 울면서 잠들었다. 빼앗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울고,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잿더미가 되어 버린 던과의 우정 때문에 울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를 울린 것은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게 될 텐데도 결코 보답받을 수 없는 로드릭 베어스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의 고뇌였다.
이틀 후 아침, 펠리시아는 병원 대기실 밖 의자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눈앞의 밝은 녹색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펠리시아는 홀로였다. 정말 얄궂은 일이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또 슬퍼졌다. 이전의 어머니는 전 세계 사람들의 연인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위험한 수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단 한 사람 외동딸뿐! 프란시스를 그렇게 떠받들던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
펠리시아는 자신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리 인기가 높아진다 해도 이 순간을 잊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변덕스런 팬들의 애정은 긴 안목에서 보면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진정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가족이라든가 친구인 것이다.
그때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오는 장신의 남성이 눈에 띄어서 펠리시아는 몽상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갑자기 그녀의 고동이 빨라지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로드릭은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가 곧장 다가왔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더 이상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여기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은 어떻소?"
펠리시아 앞에 멈춰 선 로드릭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호흡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옥죄어서 펠리시아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멈추고 말았다. 로드릭의 손은 크고 따뜻했으며, 펠리시아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손은 차갑게 떨고 있었다.
"어떻게 어머니 일을 알았어요?"
펠리시아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은 방법이오."
로드릭은 태연했다.
"당신은 엄청난 돈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당신은 돈을 빌릴 사람도 아니고, 그런 것에 관해서는 분별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었지."
"로드릭 베어스턴!"
잡힌 손을 잡아 빼면서 펠리시아는 날카로운 어조로 몰아붙였다.
"내게 스파이를 붙여 사생활을 침해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군요. 내 일에 깊이 관여하지 마세요. 듣고 있어요?"
"펠리시아, 당신은 몹시 충격을 받고 있소."
로드릭은 온화한 태도로 말했다.
"분명히 놀라기는 했어요."
펠리시아는 계속 화나 있었다.
"이건 개인적인 일이에요. 당신이 내 사생활을 침해할 권리는 없어요. 결국 소중한 매직그로우 걸이 평판을 나쁘게 들을까 봐 걱정하고 있는 거지요?"
"그렇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펠리시아."
"거짓말하지 마세요!"
펠리시아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나를 인간으로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당신은 인간성 같은 것엔 전혀 관심 없는 매몰찬 사람이에요. 마음에 있는 건 오직 자신의 투자뿐이고요. 이번 새 모델이 신문의 제 1면에 실릴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걸 걱정해서 스파이에게 조사시킨 거겠죠?"
"그렇다면 왜 일부러 병원까지 올 필요가 있었겠소?"
로드릭은 날카롭게 되물었다.
"당신 어머님이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당신의 도움이 되고자 해서 여기 온 거요!"
펠리시아가 로드릭의 말에 놀라서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려는 찰나, 복도 끝의 수술실 문이 열렸다. 곧 수술용의 녹색 모자를 쓰고 녹색 가운에 마스크로 얼굴을 덮은 닥터 앤브루스터가 나왔다.
"지금 막 준비 단계에 들어갔소."
펠리시아가 달려가자, 닥터 앤브루스터가 말해 주었다.
"지금부터 닥터 랜드럼이 수술을 시작할 겁니다. 경과를 전해 주러 가끔 누군가를 보내겠소."
"고맙습니다."
펠리시아는 고마움을 담아서 인사했다.
"의사 선생님은…"
"당신 기분은 알겠소, 펠리시아."
닥터 앤브루스터가 그녀를 달랬다.
"어머님은 괜찮을 거요. 닥터 랜드럼은 현재 세계에서 제일가는 의사요. 수술이 끝날 때까지, 내가 옆에 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이제 수술실로 돌아가야겠소."
"앤브루스터 선생님, 고맙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펠리시아가 말했다. 그녀는 닥터를 꼭 부둥켜안고 다시 한번 애원하고 싶었지만, 곧 수술용 가운을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펠리시아는 대기 의자로 돌아왔다. 로드릭이 선 채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시작할 거래요."
한순간 화냈던 것도 잊고, 그녀는 로드릭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그녀는 로드릭이 돌아가지 않고 남아 준 것이 고마웠다. 지금의 그녀는 설령 상대가 로드릭 베어스턴일지라도 혼자 있고 싶지는 않았다.
"필요하다면 여기 있겠소."
그녀를 감싸듯이 온화하게 로드릭이 말했다.
"고마워요."
펠리시아의 전신에 기묘한 포근함이 와 닿았다. 로드릭이 갑자기 마음과 영혼을 가진 사람처럼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운명이란 참으로 이상하다고 그녀는 느꼈다. 지금까지는 프란시스 화의 리바이벌을 실현시키기 위해 로드릭이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자신이 로드릭을 필요로 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해 보았었다. 펠리시아는 확실히 그를 사랑하고는 있었지만,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새로운 경험이었다.
펠리시아가 로드릭을 바라보니, 그는 얼굴에 묘한 표정을 짓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과 눈이 맞부딪치며 캄캄한 바다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영혼처럼 얽혀졌다.
'무슨 일일까?'
로드릭의 시선으로부터 겨우 피해 나오며 펠리시아는 속으로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답을 알 수는 없었다. 단지 그의 심장의 고동과 떨리는 손이 동정 이상의 것이라고만 가르쳐 주고 있었다.
펠리시아와 로드릭은 내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눈앞의 큰 벽시계가 천천히 움직여 가고 있는 사이로 이따금 간호사가 수술실에서 얼굴을 내밀고, 어머니는 괜찮고 수술도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펠리시아는 가슴께에 손을 갖다 대고 복도를 왔다 갔다 하다가는 다시 잠깐 의자에 앉기도 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올려다보니, 로드릭이 커피를 내밀며 서 있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컵을 받아들고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펠리시아는 지쳐서 점점 더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로드릭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전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 그녀를 걱정해서 함께 있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매직그로우 걸에 대한 경제적인 염려를 해서 이곳에 있을 뿐이리라.
드디어 수술용 마스크를 벗으면서 앤브루스터와 닥터 랜드럼이 함께 문에 나타났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소, 펠리시아."
그녀의 손을 잡고 닥터 앤브루스터가 말했다.
"어머님은 이제 괜찮을 거요."
닥터 랜드럼이 끄덕였다.
"수술상태가 아주 좋았소. 완전히 회복되리라고 생각해요. 물론 잠시 동안은 무리해선 안 되겠지만 말이오."
"앤브루스터 선생님, 랜드럼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만큼이나 우리들도 몹시 기쁘오."
닥터 랜드럼이 말했다.
의사가 그곳을 떠나자마자 로드릭도 일어섰다.
"될 수 있는 한 일찍 내 사무실로 와 주었으면 싶소."
"물론 가겠어요."
펠리시아는 냉담하게 말했다. 이제 로드릭의 마음이 다시 사업으로 돌아가 있음을 알자, 그녀는 씁쓸해졌다. 한편으로는 친척처럼 환자 일을 걱정해 주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로드릭 베어스턴 같은 남자도 있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차가운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녀는 로드릭의 냉정함을 증오하고 있었다.
로드릭이 떠난 뒤에서 펠리시아는 계속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회복실에서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밤이 깊어져서야 어머니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 펠리시아가 창가에 서서 밑에 있는 주차장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기척이 났다.
"엄마?"
뒤돌아서서 침대를 보면서, 펠리시아는 낮은 음성으로 불러보았다.
"펠리시아니?"
가냘프고, 수줍어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요일이니?"
어머니가 힘없이 물었다.
"수요일이에요."
"뭘 생각하고 있었을까?"
갈팡질팡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어머니는 말했다.
"수술실로 옮겨져서…"
"아직도 진정제가 약효를 내고 있을 거예요."
애정을 담아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펠리시아가 말했다.
"모든 것이 잘돼 가고 있대요, 엄마. 수술은 대성공이었고, 곧 좋아질 거라더군요."
간호원이 와서 어머니에게 주사를 놓았다. 잠시 후 어머니가 다시 잠에 빠졌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병실을 살짝 빠져 나왔다.
간호원으로부터 전갈을 받은 펠리시아는 곧장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그 메모에는 로드릭이 사무실에서 전화가 와서 곧 회사까지 와 달란다고 적혀 있었다. 펠리시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택시를 타고 로드릭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사무실에 도착한 그녀는 비서를 무시하고 지나가서, 예고도 없이 로드릭의 방문을 열고는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책상에 걸터앉아 서류에 시선을 내리깔고 뭔가를 메모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얼굴을 쳐든 그는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펠리시아가 아니오? 이렇게 빨리 와 주리라곤 생각도 못했소."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녀는 화가 나서 그렇게 말했다.
"앉으시오."
로드릭은 일어서서 엄숙한 표정으로 명령하듯 말했다.
"당신에게 전해 줄 것이 있소."
"당신에게 받을 건 하나도 없어요."
냉랭하게 그녀가 말했다.
"이것은 필요할 거요."
그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저으기 의아해졌다.
그가 손을 뻗어 쓰고 있던 서류를 집어 들고 그녀의 손에 강제로 떠맡기며 말했다.
"자, 이것을 보시오."
"뭔가요?"
"보도록 하시오."
머뭇머뭇하며 펠리시아는 손에 든 서류에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아마 그녀가 회사와 체결한 계약서이리라.
"그런 다음엔요?"
그녀가 물었다.
"똑똑히 보도록 하시오."
"게임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요?"
펠리시아는 냉담하게 물었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내 말을 잘 듣도록 하시오."
분개한 듯 로드릭이 말했다. 그는 손을 들어 계약서를 펠리시아 앞에 내밀고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펠리시아는 팽팽하게 당기는 검은 상의에 감싸인 다부진 근육질의 그를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달려가서 팔을 두르고 자신이 뭔가 나쁜 짓을 한 건지 물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로드릭이 보이는 낭패를 보고 있으려니, 조금 전에 느꼈던 분노도 가라앉고 말았다.
그녀는 손에 든 서류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것은 펠리시아의 이름이 적힌 계약서로, 표지에는 크고 빨간 글씨로 <파기>라고 씌어 있었으며, 계약을 무효로 만든 대담한 글자 아래에는 오늘 날짜로 된 로드릭 베어스턴의 사인이 있었다. 두 번째의 계약서도 있었는데 그녀가 최근에 동의한 것으로, 마찬가지로 빨간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 어떻게 된 거예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펠리시아는 말을 더듬거렸다.
로드릭은 돌아보지 않았다.
"당신을 더 이상 계약에 묶어 둘 마음은 없소."
간결하게 말한 그의 음성은 깊이를 더했고 몹시 낮았다.
"하지만 왜?"
펠리시아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게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소."
그렇게 말하면서 로드릭이 돌아섰다. 눈에는 미묘한 빛을 띠우고 입가에는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돌연 로드릭에게서 해방된 기쁨이 그녀에게 복받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다른 어떤 감정이 그녀의 한쪽 가슴을 시려오게 하였다. 로드릭과 계약하고 있는 한은, 설령 만나는 것이 아무리 괴롭다 해도 계속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계약이 파기되면 로드릭과 만날 구실조차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날 때 느끼는 마음의 고통보다도 만날 수 없을 때의 고통이 훨씬 더 괴로우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항의했다.
"계약한 이상, 무엇을 해야 하는지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계약은 분명하게 지킬 작정이에요."
"그러나 이 계약은 강요받아서 사인한 거요."
로드릭은 지적했다.
"어머님의 치료비가 필요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나를 위해 일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런 상황에서 강요한 계약으로 당신을 속박해 둘 생각은 없소."
펠리시아는 입을 벙긋할 수도 없을 정도로 놀라서 그곳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그녀는 로드릭이 자신의 이익을 제쳐 놓고 타인에게 도움을 베풀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던 것이다. 그는 가면 속에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인간성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모르는, 알지 못하는 마음속에 감추어 둔 동기가 있는 것일까. 아마도 참을 수 없어서 이제는 더 이상 성가심을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녀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많은 액수의 대가를 치러도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알았어요."
펠리시아는 응낙했다.
"당신이 계약을 해제시켜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좋아요, 미스터 베어스턴."
그녀는 신랄하게 말했다.
"돈은 한 푼도 남김없이 갚아드리겠어요.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일평생 걸린다 해도 당신에게 빌린 것은 이자를 붙여서 갚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펠리시아는 계약서를 책상에 내던지고 사무실을 뛰어나갔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이런 식으로 그와의 관계가 끊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펠리시아이기에 더욱더 마음이 아팠다.
이제 자신의 주위에는 단 한 사람, 어머니밖에 남아 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멀어져 갔다고 생각하니, 펠리시아는 자신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커다란 외로움이 밀어닥쳤다.
10
"엄마, 나는 정말 바보였어요!"
펠리시아는 눈물을 참으려고 큰소리로 말했다. 병원의 밝은 노란색 실내가 펠리시아의 슬픔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엄마가 수술에 성공해서 몸이 좋아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뿐이에요."
펠리시아의 어조는 자조적이었다.
"로드릭의 일 같은 건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렇지가 않았을 게다."
어머니는 부드러운 어조로 펠리시아를 위로했다.
이제 어머니의 눈에는 광채가 있었고, 안색도 수술 이후로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로드릭을 만나 네 마음을 말해 보렴."
"그런 짓은 도저히 못하겠어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펠리시아는 대답했다.
"정말 난 바보였어요. 로드릭은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에게 나란 존재는 단지 광고 모델에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정말이냐? 네가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는 남성을 사랑하며 일생을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구나. 로드릭의 아버지와 나처럼 말이다."
갑자기 어머니가 가련해져서 펠리시아는 그녀의 손을 잡고 토닥거렸다.
"로드릭이 나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분명하게 알고 있어요. 확실하게 말했었으니까요."
펠리시아는 화제를 바꾸었다. 두 사람은 앞으로의 계획과 퇴원한 뒤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펠리시아는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위해서 좀 더 큰 아파트를 빌릴 생각이었다.
"난 교사자격증을 갖고 있어요."
그녀는 낙관적으로 말했다.
"교사 자리는 어디에 가든 있으니까―"
그때 병실 문이 열렸기 때문에 그녀는 이야기를 중단했다. 돌아보니 남자 두 명이 방안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두 사람 모두 턱의 선이 각졌고, 갈색 눈과 검은 머리, 올리브색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젊은 쪽은 물론 로드릭 베어스턴이었다.
펠리시아는 두 사람이 너무도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가 낮게 경탄의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려왔다. 또 한 사람은 로드릭의 아버지, 존 베어스턴임에 틀림없으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펠리시아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얼굴에 홍조를 띠고 활기마저 되찾고 있었다.
"존! 놀랐어요."
어머니가 먼저 말했다.
"펠리시아, 아버님을 소개하겠소. 아버지, 이쪽이 프란시스의 따님, 펠리시아입니다."
"처음 뵙겠소, 펠리시아. 당신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많이 들었소만, 하나도 거짓이 아니었군요. 당신은 어머님의 아름다움을 정말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소."
펠리시아는 대답하려 했지만, 말을 더듬거릴 뿐이었다. 그녀는 로드릭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로드릭이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기억하시지 못하시겠지만, 내가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은 미세스 화가 모델 생활을 막 청산하려 할 때쯤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부터 계속 저는 당신의 팬이었죠."
"고마워요."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어머니는 다시 로드릭의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들었소, 프란시스."
존 베어스턴이 말했다. 그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큰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좀 더 일찍 면회를 왔었으면 좋았겠지만, 당신이 면회를 허락하지 않아서 못 왔소."
"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존."
어머니가 대답했다.
"아래층으로 가서 커피라도 마십시다. 이곳은 두 분들만 있도록 해야 되지 않겠소?"
아연해진 펠리시아는 멍청해 있는 채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에 그녀가 되돌아보니, 존 베어스턴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낮은 음성으로 뭔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아버님과는 사이가 좋군요?"
로드릭이 엘리베이터로 데려가려 할 때, 펠리시아가 말했다.
"그렇소, 사이가 좋지요. 나는 아버지를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아버진 나를 믿어 주시지요. 항상 좋은 친구지만 골프장에 가서는…"
로드릭은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가 봐줄 수 없는 적이 되니까요."
"어머니를 만나러 와 주셔서 기뻐요. 어머니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거예요."
"그건 아버지로서도 마찬가지요. 어머님의 수술 이야기를 알렸더니 몹시 놀라셨소. 이 몇 개월 동안 몇 번이나 만나려 시도했었지만 당신 어머님은 아무도 만나주지를 않았소."
펠리시아는 로드릭을 쳐다보았다.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 있어서 당신 아버님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단순히 옛날에 친하게 지냈던 사람 이상으로요."
"그것 참 잘됐군. 실연한 노인이 가까이 있으면 더할 수 없이 좋을 테니까요. 만약 아버지가 결혼하지 않았고, 당신 어머님도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필히 멋진 커플이 돼 있었을 거라고 난 계속 생각해 왔었소."
기쁨의 눈물이 그녀의 눈을 흐리게 했다. 그것은 행복한 이야기였다. 정말 근사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슬픔에 짓눌려만 있었던 어머니의 인생이 바야흐로 해피엔딩을 맞으려 하는 것이다.
"자, 엘리베이터에 다 왔소."
로드릭의 말에 펠리시아는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요."
그녀가 그의 행동을 제지시켰다.
"커피를 안 마셔도 괜찮아요. 어머니와 아버님 두 분만 계시도록 하기 위해 날 데리고 나온 거니까, 당신만 커피숍에 가면 돼요.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로드릭은 화난 모습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그렇게 쉽사리 쫓아낼 수 없을 거요. 자, 얼른 타시오. 빨리!"
그는 펠리시아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로드릭이 빨간 보턴을 눌러서 층과 층 사이에 엘리베이터를 정지시켰다.
"무슨 짓이에요?"
펠리시아는 놀라서 그에게 물었다.
"몇 년 전에, 당신 어머님이 아버지에게서 떠나간 것처럼 내 곁에서 당신을 떠나게 할 수는 없소."
"뭐라고요?"
"아버지와 어머님 일은 잠시 잊도록 합시다."
로드릭은 계속 말했다.
"지금은 우리 두 사람 문제에만 집중하도록 해요."
"두 사람의 문제요?"
펠리시아는 숨을 삼켰다.
"그렇소."
갈색 눈을 반짝이며 로드릭은 말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알고 있소."
펠리시아는 현기증을 느끼며 뺨을 붉혔다.
"알고 있다고요?"
"나를 증오하고 있고, 잔혹한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소. 내게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하, 하지만…"
그녀는 말을 더듬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펠리시아가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은 실수를 범하고 싶지는 않소, 펠리시아.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오, 결혼해 주시오! 안 된다고는 하지 마오. 그 계약을 파기했을 때, 하마터면 난 당신을 잃을 뻔했소. 당신 의지에 반해서까지 당신을 속박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당신이 떠나고 보니, 비참한 기분이 된 거요. 어떻게 해야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소. 나 자신에 관한 일, 내 인생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나의 어리석은 정도를 깨닫게 된 거요. 처음부터 당신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었소. 당신을 사랑하게 됐단 말이오."
그는 펠리시아의 손을 꼭 잡고, 그 아름다운 파란 눈을 응시했다. 펠리시아는 그 시선의 강렬함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당신을 단념할 마음은 조금도 없소. 내 아내가 돼 주시오. 내 아내가 되어 달란 말이오.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손에 넣는다는 걸 알고 있겠죠? 당신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상관없이 펠리시아 화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겠소."
"정말인가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정말이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당신과의 일은 크게 잘못돼 있었소. 당신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러나 지금은 솔직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겠소. 이젠 절대 당신을 놓치지 않겠소."
펠리시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커다란 환희가 요동치며 노래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바싹 다가섰다.
"내게 뭔가를 말해 주지 않겠소?"
"모르겠어요…"
저절로 눈에 떠오르는 행복감을 감추려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로드릭은 그녀를 껴안고 정열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이제는 뭔가 말해 주겠소?"
"모르겠어요…"
그녀는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시도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