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의 바르셀로나
D. Backman
1
"출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펠리시아 화는 교실에 모인 학부형들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아이들은 이 일 년 동안 열심히 잘해 주었어요. 이곳에 전시한 것은 모든 분들의 마음에 흡족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롭게 편히 앉으세요. 그리고 질문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그렇게 말하며 펠리시아는 스페인어를 배운 지 4년째인 학급 학생들이 쓴 에세이, 수기, 그림 등을 몸짓으로 가리켰다.
그녀는 금발인 긴 머리를 얌전하게 뒤로 묶고 교단 옆에 서 있었다. 그녀를 보면, 우연히 마주친 사람일지라도 그녀가 매우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학부형들 중에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사람이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그녀의 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은 건강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긴 속눈썹은 짙은 블론드였다. 마스카라를 칠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란색 눈동자의 눈매가 뚜렷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펠리시아가 바라던 바였다. 그녀는 일부러 수수한 복장을 골라 입고 이 자리에 나와 있었다.
그녀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에겐 접근하기 어려운, 그러면서도 사람을 유혹하는 듯한 미묘한 우아함이 풍겨지고 있었다.
그날 교실에는 학부형이 아닌 사람이 한 사람 출석하고 있었다. 그는 펠리시아 화의 잠재적인 아름다움과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알아보았다.
펠리시아는 학부형들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노트를 펄럭펄럭 넘기며 일어서서는 자기 아이의 작품에 대해서 몇 마디 짧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미 학년말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대부분의 학부형을 알고 있었고, 그 중 몇 사람과는 전에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학교에 오지 않은 사람은 성적이 매우 좋지 않거나 말썽꾸러기인 학생의 부모들뿐이었다. 펠리시아는 실상 그런 학부형들과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 행사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뉴멕시코 주의 인구 구성과 마찬가지로 라틴계, 인디언, 유럽계의 미국인들이 섞여 있는 중에서, 펠리시아의 눈은 교단 반대쪽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는 다른 학부형들과는 달리 전시물을 보지도 않고 팔짱을 낀 채 녹색 벽에 기대어 갈색의 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펠리시아의 혈관에 번개처럼 예리하게 스치는 것이 있었다. 학부형에게 그런 반응을 일으킨 것은 자신이 침착하지 못한 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이처럼 어떤 남성에게 끌린 적은 아직 없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펠리시아는 왠지 모르게 친밀감이 느껴졌다.
숱 많은 검은 머리에 높은 광대뼈, 야무져 보이는 턱선과 콧날, 결코 희다고는 할 수 없는 엷은 갈색의 피부.
마침내 펠리시아는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자신에게 폐만 끼쳤던 학생의 학부형일까? 이전에는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분위기에는 옛날부터 알아왔던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아이의 문제를 상의하는데, 최후의 사친회까지 기다렸던 것은 왜일까? 금년은 벌써 끝날 때가 되었으므로 이제 새삼스럽게 상의한다고 해도 속수무책이리라.
펠리시아는 스스로가 행동을 먼저 하려고 결심하고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 남자는 아직도 선 채로 뻔뻔스럽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행동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교단에서 발을 내디뎌 그가 있는 쪽으로 가려 할 때 한 학부형이 먼저 그녀를 불렀다.
"화 선생님, 필립이 그러는데 선생님은 지금까지의 선생님들 중에서 최고라더군요."
펠리시아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미스터 산체스가 말했다.
"내년에도 스페인어를 가르치실 겁니까?"
"내년 담임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걸요. 하지만 필립이라면 어느 선생님에게 배워도 잘할 거예요."
미스터 산체스가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물러섰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그의 곁을 지나갈 수 있었다. 교실 뒤에 서 있던 온화한 표정의 남성을 한 번 더 보려고 뒤돌아서며, 그녀는 심장의 고동이 몹시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가슴에는 작은 실망의 아픔이 스쳤다. 좀전까지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펠리시아는 재빠르게 교실을 둘러보았다. 복도로 이어지는 문으로 막 나가는 키 큰 남자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언뜻 보였다. 펠리시아는 서둘러 남자를 뒤쫓아가서 복도를 들여다보았지만, 남자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의아해 하며 펠리시아는 교실로 돌아왔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펠리시아는 학부형들과 앞으로의 진도가 어느 만큼 나갈 수 있는지 등을 겨우겨우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녀는 거의 기계적으로 떠들어대고는 있었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곳을 떠돌고 있었다. 조금 전 그 남자의 강렬한 인상이 가슴에 남아, 자신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그녀의 머릿속에 침입해서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그 인상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학기 말 사친회가 있던 그 다음 주, 펠리시아는 대체 그 남자가 누군가를 몰래 조사해 보았다. 학생들도 교장도 모른다고 했다. 그녀는 결국 그 남자가 교실을 잘못 찾아온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이치에 맞는 결론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런 기묘한,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으로 자기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펠리시아는 또 한 가지 고민되는 일이 있었다. 던 해밀턴에게 이 일을 털어놓을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이었다.
그녀는 거의 대부분의 일을 그에게 털어놓았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꼭 감춰 두었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 자기의 어머니 일도 던에게는 이야기했다.
낯선 남자에게 품었던 감정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하며, 던에게조차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교실을 잘못 찾아들어서 아주 잠깐 동안 아무 것도 모르고 자신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고 펠리시아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일의 모든 핵심은 거기에 있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때의 그 남자의 눈길 속에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을 위협하는 듯한 광채가 있었다.
그 남자의 시각적인 포옹에 저도 모르게 몸을 맡겨 버린 것에 화를 내면서도 펠리시아는 반복해서 그를 생각했다. 그 남자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넋이 빠져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평상시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들을 경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보여진 것에 펠리시아는 기뻐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학년말의 마지막 주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바빠서, 펠리시아는 그 남자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그 남자의 일을 마음 한구석으로 몰아내었다.
펠리시아와 던은 둘 다 학급 담임을 맡고 있어서 학생들을 수학여행에 데리고 가기 전에 해 두어야만 할 번잡한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던은 또한 야구부의 코치였다.
"이번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했어요."
어느 날 아침, 교무실에서 펠리시아는 던에게 말했다.
"하지만 서해안 여행에 필요한 돈은 못 모았어요."
던은 펠리시아 바로 맞은편에 있는 긴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곱슬곱슬한 금발에 파란 눈동자, 준수한 그의 용모는 싱싱하고 건강한 인상을 주었고, 그런 그에게 펠리시아도 끌리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떠들썩하는 학생들과 섞여 있으면 그를 시야에서 놓치는 일이 있는 것도, 던이 젊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펠리시아는 그의 그런 모습에 편안한 분위기를 느꼈다.
펠리시아는 미국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펴 놓았다.
"아무래도 멀리까진 갈 수 없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학생들이 몹시 실망할까요?"
"실망하겠지요."
던은 그렇게 말하며 펠리시아를 보았다.
"그 애들도 경제관념은 있을 거요. 서해안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정도는 알아줄 테죠. 회계장부에는 돈이 얼마 정도 남아 있소?"
"많지는 않아요. 물가가 올랐기 때문에."
"나도 지도 좀 볼까요?"
던은 뉴멕시코 주를 보기 쉽게 지도를 돌려놓았다.
"그렇군, 가장 알맞은 곳은 칼즈배드 동굴이 아닐까?"
"하지만 벌써 학생들이 그곳에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는데요."
"학생들은 서해안 쪽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그곳에 안 가기로 결정한 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집 뒤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죠.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곳에 간 적이 없다는 걸 난 단언할 수 있소."
"칼즈배드를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임무를 내게 시키는 건 아니겠죠?"
낙담한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내게 맡겨 둬요."
던이 안심시키려는 듯이 시원하게 말했다.
그날 오후, 던은 학생들을 모아서 여행을 실행할 정도의 돈이 남아 있지 않다고 발표했다. 그 순간, 2층으로 세워진 학교 건물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의 불만의 소리가 학생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던은 서둘러서 아주 약간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절망은 던의 말로 인해서 잠깐 동안에 희망으로 바뀌었다. 주 밖으로 나가는 분에 넘치는 여행만 아니라면, 1박 2일 정도의 여행은 가능하리라고 던은 계속 얘기했다.
칼즈배드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던이 말하자, 단 세 사람만이 손을 들었다. 결국, 칼즈배드든 어디든 간에 여행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는 의견에 학생들은 일치했다.
"능숙하신데요."
나중에 펠리시아가 놀려댔다.
"학생들을 속이는 데 말이에요."
"속인 게 아니오."
던은 싱글거리며 자기를 변호하듯이 말했다.
"이익을 위해서 인간의 기묘한 습성을 이용했을 뿐이오. 이것을 기대 하의 법칙이라고 하죠."
"당신이 학생들과 잘 지내고 있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군요."
그렇게 말하며 펠리시아가 웃었다.
"완전히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요."
던은 남학생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있었고, 존경까지 받고 있었다. 하지만 여학생들에게는 좀 달랐다. 여학생들에게 있어서 던은 남성다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산 페트로 고등학교의 여학생 대부분은 축구팀 주장과의 데이트를 동경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매력적인 야구부 코치, 그 위에 수학교사이기도 한 던의 주목을 끌려고 부끄러움도 없이 서로가 경쟁하고 있었다. 던은 여학생들 사이에 질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남학생들에게처럼 신경 쓰지 않고 여학생들을 한 데 모으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2주일 후, 노란색의 대형 스쿨버스는 학교를 출발해서 곧장 남쪽으로 달려 화이트시티로 향했다. 그곳이 동굴 입구가 있는 마을이었다. 던도 펠리시아도 학생들의 대단스러운 합창을 따라부르는 동안, 버스는 속력을 내고 있었다.
"자, 내 말을 잘 듣도록 한다!"
동굴 입구에 거의 다 와서 던은 학생들을 진정시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종유석은 천장에서부터 늘어져 있고, 석순은 바닥에서 올라와 있다. 뭔가 공부가 될 만한 것을 내게서 듣고 싶어해도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다."
웃으며 그가 계속 말했다.
"나도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처음 여행온 것이다. 다들 즐겁게 보내도록. 저녁 무렵에는 모두 동굴 입구로 돌아와야 한다. 다 함께 박쥐가 날아다니는 걸 보아야 하겠지?"
학생들은 모두들 기뻐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펠리시아는 거대한 동굴 입구에 던을 남겨 놓고 혼자 엘리베이터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엘리베이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상에서 250미터 아래로 그녀를 옮겨 놓았다. 그녀는 침침하고 습한 동굴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지하동굴은 190l년에 제임스 화이트가 발견한 것으로, 영하 13도의 냉냉함에 펠리시아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돌연 그녀는 어떤 아련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대로 지난 13년간이나 그녀가 지냈던 스페인 해안에 대한 향수였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온 해에 괴롭게 느껴졌다. 뉴멕시코의 건조하고 뜨거운 기후에 이젠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펠리시아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려고 가지고 온 얇은 스웨터를 입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인기척을 내었다. 그러나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누구든지간에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밝은 노랑으로 칠해진 매점 쪽으로 걸어갔다. 이런 깊은 동굴 속에까지 매점이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려 그녀는 얼른 뒤돌아보았다. 자신에게 향해진 카메라가 얼핏 펠리시아의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를 든 손은 거무스름했고, 카메라에 반쯤 가려진 남자의 얼굴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기묘하게 거만한 그 미소는 펠리시아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카메라 셔터가 다시 한번 소리를 냈다. 플래시에 눈이 부셔 펠리시아는 얼른 눈을 감았다.
남자가 재빨리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에 오른 남자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펠리시아는 남자의 뒤를 쫓았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옆의 게시판에 <엘리베이터는 5분마다 운행되고 있습니다>라고 씌어 있었던 것이다.
"대체 누구지?"
펠리시아는 혼자 뇌까렸다. 그녀의 머리는 동굴 천장에 부딪혀 뒤쪽에서 울렸다. 처음에는 수업참관, 다음에는 이곳,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왠지 그녀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 정체를 밝혀내지 않으면…
펠리시아는 초조해 하면서 엘리베이터 앞을 서성거렸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와 닿아 몇 분 후 그녀도 지상으로 나왔지만, 생각했던 대로 남자의 모습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펠리시아는 동굴을 둘러싼 산들을 바라보며 그곳에 내내 서 있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뜨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던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를 생각하면, 누군가에게 그 남자의 일을 알려서 나중에라도 경찰에 통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쨌든 그 남자의 행동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펠리시아는 그 이후로 계속 자신이 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모텔에 도착해서 학생들이 모두 잠들고 난 뒤 던에게 털어놓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지금 얘기했다간 모처럼의 여행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오후에는 던을 따라서 동굴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던이 설명을 했지만, 그녀는 모두 건성으로 들으며 대강대강 훑어보았다. 그 남자가 없을까 하고 다른 관광객들에게로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두려운 남자, 그녀가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마음속에 일으키는 남자.
계획대로 학생들은 해지기 전에 동굴 입구에 모였다. 학생 전부가 모인 것을 확인하자, 던은 동굴 입구를 반달형으로 둘러싼 벤치가 있는 곳으로 학생들을 인솔해 갔다. 작은 홀 옆에는 경비원이 서 있었다.
멕시칸 박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펠리시아가 마지막 여학생을 에스코트해 간 지 얼마 안 되어 박쥐 떼들이 수천 마리의 무리를 이루며 동굴에서 날아 나왔다. 그때, 펠리시아는 어떤 따뜻한 손에 팔꿈치를 잡혔다. 오싹 하는 한기를 느끼며, 그녀는 심장이 몹시 뛰어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다시 또 왔군요."
그녀는 목에 무엇이 걸린 듯했다.
"당신은 누구죠?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시는 건가요?"
그 남자는 그녀의 손을 놓고, 갈색의 큰 눈으로 쓰다듬듯이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펠리시아는 후유 하고 숨을 내쉬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짙은 갈색 눈에 응시된 그녀는 자신이 마치 최면술에라도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눈에는 호기심과 장난스러운 빛이 있었지만, 그 깊숙한 곳에는 알지 못할 위엄이 도사리고 있었다.
학생들의 마지막 줄 바로 뒤에서, 펠리시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학생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남자는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펠리시아는 이번에야말로 그를 놓칠 수가 없었다. 대체 누구인지, 목적은 무엇인지를 밝혀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남자의 뒤를 쫓았다. 남자가 큰 버스와 화물차 사이로 막 사라지기 전에 펠리시아는 남자의 팔을 잡았다.
"기다리세요!"
남자의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왜 이런 짓을…"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돌연 그녀는 꼼짝 못할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고 두려워졌다. 남자는 일부러 이곳까지 그녀를 따라오게 한 것 같았다.
그들은 두 대의 커다란 차 사이에 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보아도 남자는 그녀보다 훨씬 힘이 세어 보였다. 그라면 펠리시아를 이 두 대의 차 뒤로 얼마든지 끌고 갈 수가 있으리라. 그녀를 사냥감으로 선택한 정신이상자인 것일까? 공포 때문에 무릎이 덜덜 떨렸다.
"괜찮으니까 마음 놓으시오."
남자는 말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당신을 위협할 마음은 없으니까."
남자는 펠리시아의 눈 속에 담긴 공포를 읽어내고 있다는 어조였다.
"단지,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오."
"뭐라고요?"
의혹 짙은 어조로 물으면서,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 하고 싶었소."
허스키한 음성으로 말한 남자는 손을 뻗어 펠리시아의 손목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남자의 얼굴이 펠리시아에게로 접근했다. 그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힘으로, 뿌리치는 펠리시아의 턱을 위로 들어 자신에게 향하게 했다. 천천히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겹쳐졌다.
다시 공포가 펠리시아를 떨게 했다. 너무 심한 충격에 그녀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강한 남자의 팔이 펠리시아가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바짝 껴안았다.
펠리시아는 버둥거려 보았다. 근육질의 단단한 남자의 가슴을 밀어내며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철책에 갇혀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상대편의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펠리시아는 극도로 피곤해져서 저항하기를 단념했다. 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남자의 강한 팔에 안겨 있는 것이 차츰 기분 좋게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의 기분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생활 속에 잠입해 들어온 남자, 단호하게 그녀의 감정을 뒤엎으려는 남자. 아직도 공포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낯선 남자에게 끌리고 있는 자신을 펠리시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펠리시아가 남자의 팔에서 해방된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포옹에서 몸을 떼고 재빠르게 차 뒤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펠리시아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연해져서 그 장소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산산이 흩어진 정신을 모을 수가 없었다. 펠리시아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자기 자신을 잃고 있었다.
2
펠리시아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병원 사무실에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감정이 흐트러져서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칼즈배드에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생활에 침입해 들어온 낯선 남자의 행동에 고심하며, 학년말 이 끝날 때까지 내내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지니고 있었다.
학기가 거의 다 끝나 버리고, 던도 대학의 여름 강좌로 출발해 버렸다.
펠리시아는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든 자신이 콘트롤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어머니를 만나야만 했다. 펠리시아는 어머니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받을 수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불안감에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행동을 개시하자고 마음먹고 우선 모든 기억을 더듬어서, 옛날에 어머니를 진찰했었던 주치의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펠리시아는 전화를 걸어보았다. 닥터 앤브루스터가 아직도 어머니를 진찰하고 있다는 걸 알고 기뻐하며, 그녀는 어머니에게 연락을 취하고 싶다는 걸 의사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내 사무실에서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군요."
의사가 말했다.
닥터 앤브루스터의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펠리시아는 불안과 걱정으로 가슴이 곧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깊이 숨을 들이쉬고 의사의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자기는 어떻게 해서든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 자신의 앞에서 어머니가 마음의 문을 꽉 닫았을 때의 좌절감과 씁쓸함 등, 그것들을 설명하기에 어떤 말을 써야 좋을 것인가. 닥터 앤브루스터가 친절하고 아버지 같은 자상한 남성이란 걸 알고, 펠리시아는 한숨 놓았다.
"앤브루스터 선생님, 어머니와 제 관계를 아실지 모르겠지만…"
펠리시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열 살 때, 어머니는 스페인의 기숙사 학교로 저를 내쫓았어요. 두세 번 찾아오신 적은 있지만, 언젠가 갑자기 절 만나주지 않으셨어요. 제가 미국으로 돌아온 것은 어머니와 연락을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어머니는 계속 만나주지 않더군요. 편지를 보내도 답장을 주시지 않았고요."
펠리시아는 눈물을 닦고 의사를 쳐다보았다.
"왜 이처럼 미움을 받게 됐는지 가르쳐 주실 수 없을까요? 어머니가 그처럼 싫어할 짓을 제가 했기 때문인가요?"
눈물이 가득 고인 펠리시아의 눈을 보며 의사는 동정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과 어머님의 일을 잘 알고 있소, 미스 화. 어머님이 당신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는 건 내가 확연히 보증할 수 있소. 오히려 끔찍이 사랑하고 계시지요."
"설마 그럴 리가?"
펠리시아는 비통에 젖어 소리를 질렀다.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어째서 스페인으로 나를 쫓아 버렸지요?"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때때로 인간은 아픈 결론을 내려야 할 경우가 있소. 어머님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잃는 기분으로 당신을 스페인으로 보냈을 것이오."
"열 살짜리 꼬마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미국에서 최고인 모델에게 그런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이 싫었던 거예요."
"당신 기분은 잘 알고 있소."
닥터 앤브루스터는 연민 섞인 어투로 덧붙였다.
"쓰라린 기억이었던 것도 당연하겠지요. 당신 어머님은 의지가 약한 여성이었소. 당신의 의붓아버지가 그녀에게 이상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거지요. 그는 야심 있는 남성이었소. 어머님에 관한 일은 모두 그가 혼자 도맡아서 관리하고 있었지요. 당신이 어머님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도 그였소. 그가 어머님을 설득해서 당신을 기숙사 학교에 보냈던 거요."
"이따금 만나러 오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거예요."
펠리시아는 반발조로 말했다.
"스페인에 찾아왔던 것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예요. 그리고 지금 어머닌 현역에서 물러나 있어요. 지금이라면 기꺼이 절 만나주어도 좋지 않을까요?"
돌연 그녀의 눈에서는 솟아나는 샘처럼 눈물이 넘쳐흘렀다. 쓸쓸한 어린 시절의 괴로웠던 일들은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펠리시아의 의식 속에 새겨져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격정에 목이 막혀서 그녀는 외쳤다.
"제가 미국에 돌아온 것은 지금까지 가진 적이 없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빼앗겨 버린 이런 감정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한 사람의 어른이 됐다는 것을 느낄 수 없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만나는 것 외에 아무 방법이 없어요. 난 따뜻한 사랑에 굶주려 있어요. 앤브르스터 선생님, 어머니의 애정이라든가 배려 같은 걸 스물셋이나 된 여자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리석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요, 그렇지만, 그게 사실이에요!"
그녀는 따뜻하고 두꺼운 손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펠리시아!"
닥터 앤브루스터가 말했다.
"어머님은 지금 신경이 몹시 나약해져 있소. 지금 상태로는 아무도 만날 수 없을 거요.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된 것도 당신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 것 같소. 당신을 가혹한 처지로 만들어 버렸다는 죄책감 말이오. 어머니는 당신 의붓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당신을 미국으로 불러들여야 할지 어떨지 내게 물었었소. 나는 꼭 그렇게 하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당신을 그런 처지로 만든 것을 부끄러워하며 당신과 얼굴을 마주 대할 용기가 없다고 했소."
"처음엔 일에 방해가 되고, 다음엔 헤어진 것에 대한 죄책감…"
펠리시아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미국에 돌아왔을 때의 어머니의 변명은 뭐였지요? 나는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분명히 말했었어요. 하지만 어머닌 이유도 말하지 않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어요!"
"공교롭게도 그간의 사정을 나는 잘 모릅니다, 펠리시아. 잘 아시겠지만, 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오. 지금 그녀는 친했던 사람들과도 안 만나고 있소.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신경쇠약증에 고통당하고 있다는 거요. 아마도 당신이 용서해 주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믿어 버려서 몇 년이나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점점 더 심해진 것 같소."
"이건 용서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펠리시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내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에요. 양자로 들어간 아이가 어떻게든 절 낳아 준 친부모를 찾으려 하거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그런 기분과 비슷한 거지요. 어머니의 사진은 잔뜩 갖고 있어요. 프란시스 화에 관해서 쓴 잡지로부터 여러 가지 일도 알게 됐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한들, 진짜로 내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그렇겠지요."
닥터 앤브루스터는 끄덕여 보였다.
"어머니의 병은 어떻습니까? 위험할 정도인가요?"
"나는 오랫동안 그녀의 심장병을 진찰해 왔소. 그러나 현재 문제되는 것은 마음이오. 오랫동안 다이어트를 계속하면서 팬들이나 스폰서, 당신의 의붓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만 생각해서 피로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일했었어요. 그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을 잃게 되는 처지가 됐소. 그에 더해서 당신에 대한 심한 죄책감 등… 그렇게 간단하게는 회복될 것 같지가 않군요."
"내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예요!"
"펠리시아, 좋은 정신과 의사에게 보이면 그녀의 병을 확실히 진단할 수 있을 거요. 만나게 될 상태가 되면 곧 당신을 만나줄 거요."
"희박한 희망이군요."
펠리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어머닌 어떤 경우에 처해도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사람이에요. 이전의 유명인 프란시스 화, 그 사실을 이용해서 정신과 의사조차 자신의 마음대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 나와 만나고 싶지 않다고 결심하면 아무리 내가 부탁해도 그 결심을 바꾸지 않을 거예요."
"지금의 상태라면 꼭 나을 거요. 어머님도 당신만큼이나 당신의 일을 알고 싶어 하고 있소. 단지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오."
펠리시아는 잠자코 끄덕였다.
"그런데 의논할 게 있소."
의사는 계속했다.
"좋은 의사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사립 요양소에 입원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치료비가 엄청나게 들 거고, 어머님에겐 그런 여유가 없고, 보험조차도 들지 않았더군요. 그녀는 현재 무일푼이오."
"무일푼이라고요!"
펠리시아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닌 대단히 많은 재산을…"
"그렇소. 전에는 그런 적도 있었소. 불행하게도 당신 의붓아버지가 거의 다 써 버렸소. 이 수년 동안 어머님은 지니치리만큼 검소하게 살아왔지요. 그녀가 지금 필요로 하고 있는 특별치료는 많은 비용이 들 거요. 6개월 정도만 해도 당신의 일 년치 월급 정도가 들게 될 거요."
"일 년치의 월급이나요?"
그녀는 숨이 막혔다.
"그래, 저축해 놓은 건 있습니까?"
"아니에요. 미국에 돌아오는 여비도 겨우 마련했어요."
"주립 병원도 있긴 하지만, 그곳은 인원부족으로 당신 어머니가 필요로 하는 집중치료는 받을 수 없을 거요. 오래 걸릴 것 같소만, 다른 방법이 없다면…"
"안 돼요!"
펠리시아는 엉겁결에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좀 기다려 주세요. 주립 병원에 입원시킬 수는 없어요. 돈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어요."
"과연!"
웃으면서 닥터 앤브루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몇 년간, 어머니로부터의 송금이 점점 적어진 이유를 그녀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펠리시아가 처음에 스페인에 갔을 때는 상류계급만이 모인 기숙사 학교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예쁘고 값비싼 옷들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동안에 점점 학교의 급수가 떨어져 갔다. 그래도 대학까지는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수표를 보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희생을 치르고 있었는지, 펠리시아는 처음으로 알았다. 마지막 수년 동안, 어머니가 끼니 걱정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돈을 보내준 것은 죄책감이나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열 살의 나이로 내쫓기다시피 한 파란 눈의 소녀를 상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스페인에 보낸 딸을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던이 떠나 버렸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대부를 받아야 할지, 조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펠리시아는 미국에 돌아온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미국의 모든 수속이 복잡하다는 걸 이제 겨우 깨닫기 시작한 때였던 것이다.
우선 펠리시아는 교직원 신용조합에 가보았으나, 그곳에서는 간단하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담보물을 갖고 있지 않은데다가, 필요한 금액은 사인만으로 해결되기에는 너무 큰 액수였다. 은행을 세 곳이나 다녔지만, 오 분도 되지 않아서 내쫓겼다.
계속 거절당하기만 한 긴 하루가 끝나서, 극도로 피곤하고 의기소침해진 펠리시아는 자신의 아파트에 앉아 절망감에 기가 죽어 있었다.
펠리시아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저녁 먹을 시간은 훨씬 전에 지나가 버렸다. 대부받을 수도 없다는 걸 알자 식욕도 사라져 버렸지만, 그래도 그녀는 건강을 위해 간단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 펠리시아는 무시하려 했다. 사람과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노크소리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밖에 있는 고집스러운 인간에게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외판원이리라. 마지막 한 건을 잡으려고 자기가 돌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온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펠리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불평을 뇌까렸다.
문을 열자, 펠리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는 체격 당당한 인물은 예의 그 수수께끼 같은 남자였다. 칼즈배드의 여행 이후, 펠리시아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그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에야 비로소 그를 자신의 머리 밖으로 내몰 수 있었다. 좀 더 절박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말이 목에 턱 걸렸다.
"어떻게 이곳을? 당신은 누구죠? 목적은 뭔가요?"
"들어가도 괜찮소?"
남자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방을 들여다보았다.
펠리시아는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문을 닫아야 할지, 고함을 질러야 할지, 아니면 전화 있는 곳까지 뛰어가 경찰에 연락해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소리치면 뛰어올 사람은 없을까 하고 그녀는 남자의 옆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폭한 짓을 할 생각은 없소."
남자는 조용히 말했다. 너무도 자신감이 넘쳐흘렀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오히려 그것을 의심했다. 너무 침착했고 또 예의바르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을 굳히고 있는 힘을 다해서 재빨리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어느 틈에 문 가운데로 어깨를 밀어 넣고 꿋꿋이 서 있었다.
"내쫓기 전에 일 분 간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오."
남자는 온화하게 말했다.
"난폭한 짓을 하려면 칼즈배드에서도 기회가 있있소. 주차장에는 당신과 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오. 내가 뺏은 것은 키스밖에 없지 않았소. 물론 앞으로는 그런 짓은 않겠소. 단지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오."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낯선 그 남자의 얼굴에 꼿꼿이 향해졌다. 아무리 보아도 그 남자의 표정에서는 진의를 짐작해 낼 수가 없었다. 그의 갈색 눈, 머리, 피부에서는 뭔가를 암시하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의 단호한 말투는 진실처럼 울렸다. 그가 누구인지, 목적은 무엇인지 펠리시아는 알고 싶었다.
펠리시아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문을 누르고 있던 힘을 느슨하게 빼었다. 그녀는 남자를 응시하면서 조심성 있게 한 걸음 물러섰다.
"고맙소."
싱긋 웃어 보이며 그가 말했다.
"그러는 편이 좋을 거요."
그는 양복 상의의 주름을 펴면서 들고 있던 큰 서류봉투를 다른 손으로 옮겨 들었다.
펠리시아는 '강제적인 키스'를 떠올리고는 갑자기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때, 자신이 어느 사이엔가 입술의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일까? 그에게 안겼을 때, 몸의 온기를 기분 좋게 느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일까? 펠리시아는 그의 자극을 받고 작은 쾌감을 맛보았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부끄러워서 시선을 돌렸다.
"펠리시아!"
남자가 말을 꺼냈다.
"내 이름을 알고 있나요?"
그녀는 놀라움에 빠른 말투로 물었다.
"물론이오."
이름을 알고 있는 게 당연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그래서 이곳에 온 거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오."
웃으며 그는 동의했다.
"앉아도 되겠소? 그렇게 한다면 설명할 수 있겠지요."
이 남자가 아파트까지 온 것은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펠리시아는 계속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호기심이 머리를 쳐들어 떨떠름하게 그의 말에 동의했다.
펠리시아는 낮에는 소파로 변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자기 앞에 있는 파란 의자를 그에게 권했다. 남자는 가만히 펠리시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펠리시아의 몸 여기저기에 시선을 멈추었다.
펠리시아도 역시 자신의 생활에 예고없이 뛰어든 남자를 차분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용모에 매력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뭔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짙은 검은 머리와 아주 조금 녹색을 띤 갈색의 큰 눈, 야무져 보이는 턱과 코 등과 조화를 잘 이룬 광대뼈 때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의 몸집은 젊은 여성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밝은 하늘색의 양복 차림은 더할 수 없이 스마트했다. 자신을 이런 기분으로, 이렇게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의 무엇 때문일까?
"그래서요?"
마침내 펠리시아는 입을 열었다.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셨죠?"
"분명히 그랬었지요."
테이블 끝에 서류봉투를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우선 칼즈배드에서의 일을 사과하고 싶소."
펠리시아는 갑자기 불안해져서 몸을 움찔거렸다.
"당신에게 제안이 있어서 왔소."
"제안?"
펠리시아는 다시 몸을 사렸다.
"당신을 계속 찾고 있었소, 펠리시아 화."
감정이 담긴 그의 말에 그녀는 놀랐다.
"무엇 때문에요?"
그녀는 물으며 무릎 위에서 손을 꼭 잡고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이것 때문이오."
그는 갖고 온 봉투를 테이블에서 집어 펠리시아에게 내밀었다.
펠리시아는 주저했다. 두 사람을 연결하는 봉투 위에서 펠리시아와 남자의 시선이 얽혔다. 그때 다시 그녀의 뇌리에 칼즈배드의 사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남자가 가버린 뒤, 그 따뜻했던 입술의 감촉을 진하게 느끼며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펠리시아는 봉투를 받아 그 안에 손을 넣었다. 무엇인가 딱딱한 종이에 손이 닿았다. 그것이 사진 뭉치라는 것을 안 순간, 그녀는 스페인에서 본 서스펜스 영화가 떠올랐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협박을 하러 온 것일까? 무엇을? 과거에도 현재도 그녀는 남에게 위협받을 짓은 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위협받는다 해도 지불할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펠리시아는 사진을 살짝 꺼냈다. 그녀는 뒤집혀진 사진을 손에 들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길쭉한 흰 종이를 바라보며 그녀는 과연 그것을 보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였다.
"자, 보시오."
남자는 재촉했다.
불안감이 점점 심해졌지만, 펠리시아는 사진을 뒤집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그래요. 프란시스 화의 사진이오. 광고 역사상 가장 많은 사진이 찍힌 모델이오. 그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소."
펠리시아는 사진들을 대강 훑어보았다. 광택이 있는 그 사진엔 그녀의 어머니 프란시스 화가 수줍어하며 미소짓고 있었다. 생긋이 웃는 입술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이, 엷은 금발의 긴 머리, 짙은 속눈썹으로 둘러싸인 빨아들일 것 같은 파란 눈동자에 오똑 선 콧날. 그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아름다움이었다.
그 사진들은 모델을 하기 시작하던 때의 것들이었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은 광고와 잡지 그리고 전국에 네트워크를 가진 TV로 인해서,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친밀감을 느낄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의 일은 대부분이 매직그로우 화장품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 덕분에 매직그로우 화장품이 갑자기 부상되어 일약 유명해졌다. 몇 년 동안이나 그녀는 매직그로우의 전속 모델로, 아름다워지고 싶은 전 세계 수많은 여성들의 상징이었고 희망이기도 했다.
펠리시아는 사진을 테이블 위에 놓고 그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 이름은요?"
"베어스턴."
남자가 대답했다.
"베어스턴?"
"그렇소. 로드릭 베어스턴이오. 성은 인디안의 이름이오."
"그렇군요."
그 남자의 피부가 왜 거무스름한지, 광대뼈가 높이 솟아 있는지를 그녀는 이제야 이해할 수가 있었다. 드문 이름을 천천히 반복하면서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베어스턴― 들은 적이 있는 이름 같아요."
돌연 그녀는 숨을 삼켰다.
"그래요! 어머니가 모델을 하던 때의 매직그로우 회사 사장이 존 베어스턴이었어요!"
그녀의 눈앞에서 남자가 끄덕거렸다.
"아버지요. 아버지가 회사를 설립하셨소. 그리고 많은 재산을 남기…"
"어머니 덕분에 재산을 모은 게 아니던가요?"
펠리시아는 냉담하게 내뱉았다. 몹시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뺨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당신 아버지랑 내 의붓아버지가 어머니를 이용해서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상품을 위해서 어머니를 이용한 거지요. 어머닌 지금 병을 앓고 있고, 나는 어머니의 애정을 빼앗겼어요!"
로드릭 베어스턴은 펠리시아의 격정에 찬 분노에 놀라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회사 방침에 대해서 내가 설명할 수는 없소. 나는 이 일에 관련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말이오."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으셨나요?"
"어느 의미에선 그런 셈이오. 나는 큰 주식회사의 대표 이사직을 맡고 있소. 여러 회사를 소유한 복합 기업이지요. 그 중의 하나가 매직그로우 화장품 계열이오. 아버지는 5년 전에 은퇴하셨소."
눈앞의 남자에게 그의 부친에 대한 증오심을 보내는 건 정당한 일이 아니라고 펠리시아는 생각했다. 그러나 수년 동안 베어스턴이라는 이름을 증오해 왔기 때문에 냉정해지기가 힘이 들었다. 스페인에 있을 때 그녀는 어머니를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었지만 그와 더불어서 의붓아버지와 존 베어스턴에 대한 증오까지 함께 자라났던 것이다.
그녀가 오랫동안 의심해 왔던 일들을 닥터 앤브루스터가 증명해 주었고 그들에 대한 증오심은 확고해졌다.
"어떻게 이곳에 오셨나요? 무엇이 목적이죠, 미스터 베어스턴?"
그녀는 냉랭한 태도로 물었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교실에 들어오고는, 칼즈배드 동굴에서도 내 뒤를 쫓아다니며 사진까지 찍더니, 이번에는 어머니의 사진을 갖고 오다니. 이젠 모두 설명을 해도 좋을 때가 아닌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손을 펼치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거리낌도 없이 말했다.
"당신 어머니의 이미지를 되살리고 싶소."
"무슨 말이죠? 어머니의 이미지를 되살리다니 낡은 사진을 재생한단 말인가요?"
"아니오, 전혀 맞지 않아요. 다시 한번 대중에게 프란시스 화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찬미할 기회를 주는 거요. 당신을 이용해서 말이오."
펠리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미스터 베어스턴, 당신의 말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요."
"펠리시아!"
그는 인내심 강하게 계속 말했다.
"당신은 자신이 어머니와 얼마나 닮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소. 돌아볼 때의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 아니 오히려 교만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등을 죽 뻗은 우아한 행동 등 모두가 어머니를 쏙 빼닮았소. 그 위에다 그럴싸하게 보이는 순진함. 남자는 모두 당신에게 빠질 것이오. 그런 당신을 이용해서 다시 한번 프란시스 화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싶소. 선전으로 명성을 얻게 되는 걸 상상해 보시오. 프란시스 화의 친딸. 유명했던 어머니가 젊고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거요. 매직그로우 화장품의 아름다운 상징으로 말이오."
펠리시아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은 미친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미스터 베어스턴, 당신은 시간 낭비를 하고 있을 뿐이에요."
단호한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요, 이 세상에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면, 그건 모델이 되는 거예요. 모델 일 때문에 어머니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똑똑히 보고 있으니까요. 아름다움의 노예가 될 뿐이에요. 평범한 생활을 보낼 시간이 없어지고, 가족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계속 말했다.
"화장품을 팔기 위한 것이라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그럴 필요는 없소."
그는 반대했다.
"확실히 아버지는 당신 어머니에게 비인간적인 것을 요구했소. 그런 면에서는 아버지를 비난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당신 어머니의 포기는 너무 빨랐는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무리한 짓을 당신에게 요구할 생각은…"
"설득하려 해도 소용없어요!"
격렬한 어조의 펠리시아였다.
"기회를 주시오."
"거절하겠어요!"
펠리시아는 냉담하게 잘라 말했다.
"돌아가 주시지 않겠어요? 당신과 이야기할 건 이제 아무 것도 없어요."
"당신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거절했는지 모르고 있군요."
베어스턴이 말했다.
"당신과의 계약에, 교사 월급의 열 배를 주겠소. 그것도 처음 계약으로써 말이오."
펠리시아가 몹시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섰기 때문에 사진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무엇을 거절하는지 난 분명히 알고 있어요. 어머닌 내 능력으로써는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돈이 들어갈 치료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 만약 다른 일의 보수가 그 정도 된다면 기꺼이 달려들겠어요. 그렇지만 모델이 되는 것만은 절대 거절하겠습니다! 모델은 돈 버는 일을 모독하는 일이니까요. 여성으로부터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박탈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그러했지요. 그래서 내 신상에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에요!"
펠리시아의 파란 눈은 분노로 반짝거렸다. 화가 났기 때문인지 그녀는 몸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가는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며 지탱할 뭔가를 원하고 있었다.
베어스턴은 천천히 몸을 구부려 바닥의 사진들을 모았다.
그의 갈색 눈과 펠리시아의 파란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펠리시아는 그의 눈동자에서 자신을 차분하게 만드는 미묘한 빛을 보았다.
"잘 생각하시오."
사진을 펠리시아에게 떠맡기며 그가 말했다.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거예요!"
손을 빼면서 그녀는 신랄하게 말을 끊었다.
"나는 단념하지 않을 거요, 펠리시아. 난 한 번 마음먹은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소. 손에 넣고 싶은 것은 언제나 가졌었소. 지금은 당신을 원하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마음을 바꾸게 될 거요. 잘 기억해 두시오."
"당신에게 위협 같은 건 안 받아요!"
"위협이나 협박이 아니오, 펠리시아. 약속이오."
말을 마친 로드릭 베어스턴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큰 몸집이 문을 빠져 나가다 뒤돌아서며 다시 덧붙였다.
"당신은 이제 내 것이오, 펠리시아 화! 결국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요."
3
"미스 화?"
귀에 익은 남자의 음성이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만…"
펠리시아는 대답하면서 목소리의 주인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나, 헌 볼트요."
"아, 네, 교장선생님!"
펠리시아는 얼굴에 웃음을 띠웠다.
"아마… 당신도 흥미를 느낄 얘기 같은데, 스페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어떤 회사로부터 내게 전화가 걸려왔소. 그 회사는 당신 조건과 딱 맞는, 여름방학 동안만 할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고 있다더군요."
"교장선생님에게요?"
조금 놀랐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그렇게 물었다.
"고등학교라면 스페인어 교사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걸 게요. 내가 당신 이력을 이야기했더니 몹시 기뻐하더군요."
"추천해 주신 겁니까?"
펠리시아는 다시 물어보았다. 그녀의 가슴은 흥분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아직이오. 부랴부랴 당신에게 연락해서 흥미가 있는지를 확인해 보겠다고 말해 두었소. 세일즈맨과 함께 스페인으로 가서 통역을 해 주는 일이오. 농업기계라든가 아마 그런 일일 게요."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교장선생님. 벌써 흥미를 느끼고 있는 걸요!"
파란 눈을 반짝이며 펠리시아는 대답했다.
그녀는 중요한 사항을 적기 시작했다. 이 여름 아르바이트는 그녀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지도 몰랐다. 교사의 월급은 12개월 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므로, 그녀는 여름방학 동안의 생활비는 그것으로 조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르바이트로 받는 급료는 모두 어머니의 치료비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신문의 구인 광고난에서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력서도 여러 통 보냈다. 신문 구직 안내에도 광고를 냈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뜻밖에도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한 것이다. 주소를 쓴 종이를 손에 쥔 펠리시아는 금발을 휘날리며 온 방안을 뛰어다녔다.
"됐어!
그녀는 뜻밖의 일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내 기도가 통했구나!"
겨우 흥분을 누르며 그녀는 교장이 가르쳐 준 전화번호를 돌렸다.
"네, 레이크워스 회사입니다."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미스 베버리 하리스를 부탁합니다."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펠리시아는 이야기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몇 년 동안이나 그 말을 되풀이해 온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딸칵 하고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그녀는 의자 위에서 등을 죽 폈다.
"베버리 하리스입니다."
곧 한 여성의 음성이 자신의 이름을 대며 전화기에 나왔다. 사무적인 어조였지만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화, 저는 펠리시아 화라고 합니다."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말해야 할 것을 왜 미리 연습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말할 내용도 생각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다이얼을 돌렸던 것이다.
"산 페트로 고등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는 사람인데요, 헌 볼트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여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할 사람을 찾는다는 전화를 받아서요."
"아르바이트?"
미스 하리스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통역 일이라고 하더군요.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해서…"
"아아, 그 일 말씀인가요? 미스 화라고 하셨던가요? 오셔서 이력서를 써 주셨으면 해요. 미스터 보너도 면접하고 싶다는군요."
"알았습니다."
일단 흥미는 있지만 열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그렇게 생각하게끔 가장된 목소리로 펠리시아는 말했다.
"언제 찾아뵈면 좋을까요?"
"오늘 오후는 어떠세요? 3시경으로 할까요?"
"네, 그럼 그때 가기로 하겠습니다."
"잘됐어요. 그럼 그때 만나도록 하죠."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그마한 주방에 앉아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는 거북이 걸음처럼 천천히 돌아가며 그녀를 놀리는 듯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녀는 면접에 어울리는 옷을 고르려고 옷장을 뒤적거렸다. 수업을 위해 산 옷들은 그만두기로 작정했다. 모두가 면접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그녀는 엷은 크림색 슈트와 밝은 파란색의 블라우스로 결정했다. 머리를 한 가닥으로 묶고 엷은 화장을 한 다음, 마스카라를 조금 칠했다. 사무적인 차림으로 보이긴 했으나 꽤 매력적이었다.
세 시 정각에 펠리시아는 안내가 가르쳐 준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깔끔한 책상 맞은편에 30세 정도의 몸차림이 단정한 여성이 앉아 있었는데, 책상의 명패에는 베버리 하리스라고 적혀 있었다.
"와 주셔서 반갑습니다, 미스 화."
미스 하리스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리로 앉으세요."
"고맙습니다."
미소를 보내며 펠리시아가 말했다. 그리고는 스커트를 정리하며 베버리 하리스의 맞은편에 놓인 좁은 의자에 앉았다. 앉자마자 그녀는 방의 화려한 인테리어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두꺼운 카펫, 벽에 걸린 값비싼 유화, 열정적인 효과를 노려서 상담에 유리해지도록 계산되어 배치해 놓은 듯한 이국적인 식물 등.
"적임자를 찾게 되어 정말 운이 좋군요."
미스 하리스가 서두를 꺼냈다.
"우리 회사는 지금 스페인에서 농업용 중기계의 새 담당구역을 넓히려고 해요. 세일즈맨은 모두 스페인어를 조금씩 하지만, 이곳 라틴계 주민이나 멕시코 여행 때 익힌 것이라 남미 쪽의 스페인어를 써요. 스페인의 유망한 바이어와의 첫 계약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양해할 사항은 세부에 걸쳐서 엄격하게 해결해 두지 않으면 안 돼요. 그래서 당연하게도 스페인어에 능숙한 사람이 필요해진 거예요."
"그런 일이라면 걱정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펠리시아는 겸허하게 말했다.
"저는 스페인에서 자랐거든요."
"아, 그렇군요!"
미스 하리스가 감탄했다.
"이 이력서를 다 쓰시고 난 뒤에 인사과장인 미스터 보너가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단지 형식일 뿐이에요. 최종적인 결정은 내가 하는 거니까요."
'두 사람만의 비밀이에요' 하고 말하는 듯 미스 하리스는 윙크를 했다.
펠리시아는 간단한 서류의 이력난을 메꾸고 기대에 부풀어 미스 하리스를 쳐다보며 서류를 되돌려 주었다.
"미스터 보너를 만나기 전에 일에 관해서 뭔가 알아두고 싶은 일은 없습니까?"
회전의자에 등을 기대고 펠리시아에게 웃음을 띠운 미스 하리스가 물었다.
"네, 우선은 급료에 관한 것을 알고 싶어요. 그리고 또 일은 언제까지 하게 되는지도. 언제 스페인으로 가서 어느 정도…"
펠리시아는 도중에서 말을 끊었다.
"그렇겠지요."
미스 하리스는 호의적으로 말했다. 그녀는 펠리시아에게 급료 액수를 알려 주었다. 그 액수를 듣고 펠리시아는 무척 놀랐다. 그녀의 평상시 급료의 두 배가 넘는 것이었다.
"글쎄요, 기간은 여름이 끝날 때까지가 될까요? 하지만 잘되면 정사원이 될지도 모르지요. 물론 당신이 교사직을 그만두었을 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요. 일 주일 후에 스페인으로 떠날 준비를 해 두세요. 다른 지사의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필요한 경비는 전부 회사가 지불할 거니까 서둘러 돌아올 필요도 없어요. 물론 연인이 없을 경우의 일이겠지요."
미스 하리스가 펠리시아에게 던진 시선은 '나 정도의 나이가 되면 애정 문제에 경험이 풍부하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서둘러 올 필요는 없어요. 여름 동안 회사를 위해서 힘쓰겠습니다."
"좋아요!"
미스 하리스가 만면에 웃음을 띠웠다.
"미스터 보너도 당신 경력에 아주 만족하리라 생각해요."
그녀는 일어서서 명쾌한 걸음걸이로 문을 나갔다.
미스 하리스의 말대로 미스터 보너와의 면접은 완전히 형식적인 것이었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펠리시아는 집을 향해 길을 달리듯 걷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레이크워스 회사의 사원이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펠리시아는 닥터 앤브루스터에게 전화를 걸어 이 멋진 소식을 전했다. 최초의 수표가 도착하는 즉시 적당한 시설로 어머니를 옮길 수 있으리라. 사원이 되지 못했을 경우 펠리시아는 내내 치료비 걱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정사원이 될 수 있다면 1, 2년 교사직을 그만두고 돈을 벌어 어머니가 건강을 되 찾도록 한 다음 다시 교사직으로 돌아가면 된다. 중요한 것은 스페인에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어머니를 위해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로 펠리시아를 만날 수 있을 만큼 어머니의 몸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 3일 간 펠리시아는 스페인에 가기 위한 준비로 매우 바빴다. 새로 손질해야 할 옷들이 잔뜩 있었으며, 몇 벌은 이미 너무 낡아서 해진 것도 있었다.
그녀는 슬퍼졌다. 미국에 돌아온 이후로 옷을 거의 살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빠듯한 예산으로 생활해 왔기 때문이었다. 이번 아르바이트의 충분한 보수를 생각하면 유행하는 옷 두세 벌쯤 사서 옷장을 채워도 될 것같이 생각되었다. 레이크워스 회사의 이미지에는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춘 의상이 필요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펠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다음에 그녀는 대학에 가 있는 던에게 편지를 보내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 주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금요일 아침에 편지를 부쳤다. 그런데 그날 저녁 문을 노크하는 사람이 있었다. 놀랍게도 문 바깥에 선 사람은 던이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녀는 웃음을 띠웠다.
"내 편지 아직 못 받아보셨죠?"
"편지?"
문에 기대어 싱글벙글하면서 던이 물었다.
그는 손을 뻗어 펠리시아를 끌어당겼다. 던의 파란 눈동자 꼬리에 주름이 잡히며, 그의 입술이 펠리시아의 입술을 찾아 마음 흐뭇한 정다운 키스를 보냈다.
펠리시아의 고동이 빨라졌다. 그러나 그것이 던의 입맞춤 때문은 아니었다. 예의 그 남자의 입맞춤으로 자신이 마음의 평정을 잃었던 때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칼즈배드 동굴의 주차장에서 그녀의 입술을 뺏은 남자, 이런 때 로드릭 베어스턴을 떠올리다니, 펠리시아는 부끄러워져 뺨을 붉혔다.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펠리시아는 던으로부터 떨어져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펠리시아는 잠시 던을 바라보았다. 그의 금발과 파란 눈은 소년 같은 표정과 더불어 청결하고 매력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 밉살스런 남자에게 반응했던 것처럼 던에게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하고 펠리시아는 생각했다. 꿈꾸는 듯한 황홀한 기분으로 던을 볼 수 있다면, 그 편이 얼마나 현명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던은 호감을 가질 수 있는 남성인 동시에 그녀의 배경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그녀 자체를 좋아해 주는 남성인 것이다.
"찾고 있던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어요."
그녀가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그것 참 잘됐군!"
던이 환성을 올렸다.
"그럼 나가서 축배를 들어야겠는데?"
"하지만 그럴 틈이 없어요."
펠리시아는 말했다.
"짐을 챙겨야만 하고…"
"짐?"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던이 되물었다.
"그래요. 어떤 회사에 통역관으로 고용이 됐어요. 그래서 스페인에 가야만 하거든요."
던은 놀라다 못해 완전히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스페인? 얼마나?"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아마 여름방학 동안만일 거예요. 급료도 상당해요.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서 돈이 몹시 필요하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죠? 그래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군."
던은 양보하기 시작했다. 그는 손으로 턱을 쓸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우리 집에 다녀올 시간은 있겠소?"
던이 물었다.
"부모님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 이번 주말에 갈 생각이오만…"
펠리시아는 파란 눈을 던에게서 카펫의 한 점으로 옮겼다.
"미안해요, 던. 그 전에 떠나게 될 거예요. 당신 부모님은 나도 만나고 싶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당신도 잘 아시죠? 두 분이 당신 반만큼만 좋은 분이라 해도 난 두 분에게 빠질 거예요. 하지만 이 일은 내게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일이에요, 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서예요."
그녀는 자기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면서 던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이 일을 어렵게 하는군."
그는 체념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돈이 필요한 걸 알면서 이 일을 포기하라고 우겨댈 수가 없으니 말이오."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했어요."
펠리시아는 진정 고마움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던에 대한 사랑이 펠리시아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어머니와의 사이에는 큰 갈등이 있었어요.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거든요. 그걸 해결하기까지는 다른 일에도 마음이 자유로워질 수 없어요."
펠리시아는 뻔뻔스러워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던이 그녀의 일을 점점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약혼에 이르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직 서로에게 의향을 떠보고 있는 단계일 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던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손등을 두드렸다.
"쓸쓸해지겠군. 편지는 보내주겠소?"
"그럼요. 보내고말고요. 하기 강좌에 전력을 쏟고 있으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성가신 일에 휘말리지 않아도 되겠죠?"
그녀의 눈은 익살스럽게 반짝거렸다.
"글쎄…"
던은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펠리시아는 던의 실망을 모르는 척했다. 여름 내내 그와 헤어져 있는 건 괴롭지만, 스페인행에 가슴이 설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스페인에서 지내던 때는 마치 자신이 망명자 같은 기분이 들어서 스페인을 경멸하고 있었다. 미국에 돌아와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스페인 생활에 얼마나 정이 들어 있었는지 깨달았다. 미국생활의 빠른 속도에는 문명 쇼크까지 느끼고 있었다. 밤깊도록 긴 시간을 들여 느긋하게 먹는 스페인에서의 저녁식사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조금 긴장은 했지만 던과 지낸 저녁은 즐거웠다. 던과의 관계는 암묵의 양해 위에서 성립된 것이라고 펠리시아는 생각했다. 펠리시아는 다음 날 던의 부모님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이 주말에 방문하게 될 수 없는 것을 사과하고 스페인에서 돌아올 때까지 방문을 연기했으면 한다고 마음을 밝혔다.
비행기가 마드리드의 교외까지 오자, 펠리시아의 마음은 들뜨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내린 순간, 그녀는 가슴이 찡해 왔다.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의 건조한 공기는 펠리시아를 감동시켰다. 스페인의 일부 지방은 황폐하고 몹시 건조해서 생명력이 끈질긴 것들밖엔 살아 남을 수 없는 장소도 있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와는 다른 나라에서 자란 자신을 생각하자, 그 끈질긴 생명체들처럼 그녀의 몸 안에 새로운 힘이 끌어올랐다.
제복을 입은 남성이 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세관의 통과를 도와주었다. 그는 검은 리무진으로 그녀를 안내해서 익숙한 운전 솜씨로 거리를 달려갔다. 샛길인 셀라노 거리 122번가에는 라살로 가르디아노 미술관이 서 있었다. 그곳에는 그림, 도기, 보석, 그 외의 예술 작품들이 서른 개의 방에 전시되어 있다. 펠리시아는 그 미술관에 여러 번 다녔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고는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차의 백미러를 통해 제 2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장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펠리시아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차가 국립도서관 앞을 지나갈 때는 어떤 향수가 그녀의 콧등을 시큰하게 했다. 그녀는 슬프거나 괴로운 일이 있을 때면 이곳에 와서 몇 시간이고 스페인의 고전문학을 읽으며 기분을 달래곤 했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지나친 것 중에서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역사적인 것은 레일로 공원이었다. 그곳은 만 사천 아르의 넓은 공원으로, 그녀는 시원한 산책로나 아름다운 샘가를 유유자적하게 걸어 다니다가는 당당한 스페인 황제의 동상 밑에 앉아 자주 생각에 잠기곤 했었다.
이 일을 받아들이길 잘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 한번 스페인에서 생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지금은 미국이 진정한 고향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어머니를 그리워했는지를 상기하기 위해서도 여태까지의 인생 중 대부분을 보낸 이 나라에 다시 한번 돌아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펠리시아는 던을 내버려 두고 온 것에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지금은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 2, 3일 계속 고민해 온 죄책감도 스페인에 도착하자 곧 사라져 버렸다.
얼마 후에 펠리시아는 심신을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은 호텔에 자리 잡았다. 차가운 타일바닥, 크고 푹신해 보이는 침대, 계속된 시차가 피곤한 머리를 띵하게 해서 그녀는 녹색의 벨벳 시트 위에 몸을 뻗고 엎드려 잠시 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그날 오후 늦게 펠리시아는 톰 언더메이어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는 레이크워스 회사의 스페인 지구 판매부장이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10시에 사무실로 나오라고 했다. 그날 밤, 그녀는 근황을 알고 싶던 몇 명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대학 시절의 추억을 얘기하며 저녁을 함께 했다.
펠리시아는 톰 언더메이어를 도우며 그 주를 보냈다. 최신의 농업용 중기계를 수입하고 싶어 하는 스페인 회사와 레이크워스 공업 사이의 복잡한 계약에 있어서, 그녀는 레이크워스에 유리한 조건으로 그 계약을 성립시켰다. 그녀가 동역으로서도 중개인으로서도 부족함이 없다는 걸 알고 톰은 그녀를 위해 보너스를 추천해 주겠다고 말했다.
다음 일을 위해 그녀는 바르셀로나로 가게 됐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공업 중심지로 지중해에 면해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카탈로니아 지방의 중심지로, 이 지방 사람들은 스페인에서도 뛰어난 전통을 자랑하는 주민이란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사이에는 수 세대에 걸쳐 서로 강한 라이벌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펠리시아는 비행기를 내려 조금 습기 띤 온화한 기후 속으로 나왔다.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흩날리게 했다. 호텔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서 그녀는 친숙한 광장을 보았다. 길가에서 노는 아이들, 상복 차림의 여성들.
택시는 라스램블라스로 나갔다. 그곳은 2차선의 휑뎅그렁한 대로로, 중앙은 보행자를 위한 보도로 하나의 거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거리 양쪽에는 행상인들이 자리 잡고 앉아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신문, 잡지에서부터 꽃과 새까지.
펠리시아는 눈에 익은 '라하'를 보았다. 그것은 아파트와 상점의 1층 창가를 덮은 검은 철책의 세공품이다. 그녀가 택시를 내리자마자 행상이 신선한 포도를 한 송이 내밀었다. 그녀는 페세다(스페인 화폐)로 포도를 샀다.
뜨겁고 자극 강한 냄새의 음식, 해안의 바닷바람, 스페인 꽃의 향기, 분명 그것들이 뒤섞인 곳이 바르셀로나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해안도시에서 여름을 보낸 적이 펠리시아에겐 여러 번 있었다. 그녀는 스페인의 도시 중에서는 마드리드 다음으로 이곳이 좋았다.
여름의 햇살이 밝게 빛나며 그녀의 피부에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니 프런트에 그녀 앞으로 온 메시지가 있었다. 저기엔 통역 일을 계속하기 위해 다음 날 아침 출두해야 할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날 밤,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라스램블라스를 거닐기로 했다. 그곳은 현대적인 미국의 쇼핑센터와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보도의 머리 위로는 새들이 춤추고, 차가 달리는 길 옆으로는 모든 종류의 건물이 다 보였다. 유리와 철책으로 된 당당한 마천루로부터 수 세기 동안 옛날의 향기가 떠도는 무어식과 그리스식 건물까지, 보도를 따라 늘어선 건물은 모두 바르셀로나의 무구한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펠리시아가 가장 사랑하고 미국에 돌아가서도 몹시 그리워했던 것은 라스램블라스 양측에 늘어서서 흡사 꽃밭으로 바뀌어버린 듯한 느낌을 주는 꽃들의 환상이었다. 검은 눈동자의 여성이, 목이 긴 꽃병 옆에 앉아 꽃줄기를 가는 철사로 조심스럽게 묶어서 아취가 있는 부케를 만들고 있었다. 감동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펠리시아는 그 꽃 파는 아가씨 앞에 멈춰 서서 수수한 꽃다발을 가리켰다. 그것들은 꿈결 같은 향기로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그녀는 감격했다.
'아, 바르셀로나! 스페인, 너의 일부분이라도 좋으니 미국으로 가지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꽃의 향기를 맡으며 펠리시아는 생긋 웃었다. 요구받은 페세타를 건네주고 그녀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은 스페인 잡지, 사진을 찍는 곳, 보석, 여러 가지 도자기 등등을 더듬고 있었다.
펠리시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니, 하늘이 어두워지며 석양빛이 거의 다 사그라들고 있었다. 공복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녀는 거리를 조금 벗어난 작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 식당 메뉴에 '가스 파쵸'가 있는 것이 반가웠다. 그것은 토마토와 피망, 오이로 만든 찬 스프로, 위에 마늘로 맛을 낸 빵 조각을 얹은 것이다. 잔뜩 담아온 스프를 다 비우자, 웨이터가 스페인풍의 납작한 옥수수 빵과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오믈렛을 들고 왔다. 오믈렛은 오래되지 않은 신선한 달걀을 사용해서 안에 소세지, 토마토, 양파를 넣어 말은 것이다. 스페인 풍의 달콤한 음식을 거절하고 디저트로 이 지방 특산의 복숭아를 부탁한 그녀는 부드러운 과일을 한 입 베어물었다. 달콤한 과즙이 곧 입 안에 가득 찼다.
다음날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호텔로 돌아온 펠리시아는 침대의 차가운 시트 속으로 마음 편하게 들어가서 곧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펠리시아는 상업지역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유리로 된 빌딩 입구에서 택시를 내려 뜨겁고 눈부신 햇빛 속으로 나섰다. 빌딩 유리창이 햇빛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몇 세기를 거쳐 온 오래된 스페인 건축물과는 주는 느낌이 엄청나게 달랐다. 훨씬 비인간적이고 사무적인 냄새만을 풍기는 것이었다.
건물 안에서는 산뜻한 옷의 샐러리맨밖엔 볼 수가 없었다. 펠리시아는 목적지까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올라가서는 입구의 안내에게 통역 일 때문에 온 것을 알렸다. 5분 정도 기다리자 사무실 문이 열렸다. 그곳은 사진을 찍는 스튜디오였다.
펠리시아는 큰 책상 옆의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책상 맞은편에는 큰 캐비닛이 여러 개나 늘어서 있었다. 그녀의 왼쪽은 칸막이로 되어 있고, 큰 카메라와 엷은 핑크빛 배경이 조금 보였다.
펠리시아는 소파에 앉아 이상한 초조감에 당황해 하며 손톱을 튕기고 있었다. 프로가 찍는 사진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펠리시아는 짜증이 났다. 이런 종류의 것들이 그녀로부터 어머니와의 유대를 빼앗았던 것이다. 그녀는 이런 곳에서 통역을 한다는 것이 싫었다. 꼭 짧은 기간에 해결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아마도 기계의 팜플렛에 사용할 사진을 이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것이리라.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고개를 들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순간,
'이럴 리가!'
하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니, 당신은… 당신은…"
펠리시아는 숨이 막혔다.
"유령은 아니오."
그는 또렷이 말했다. 갈색 눈이 웃음을 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드릭 베어스턴은 스스럼없는 태도로 책상 앞으로 걸어와서는 모서리에 걸터앉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펠리시아는 온몸에 놀라움이라고도 환희라고도 할 수 없는 전율이 스치며 몹시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내 것이라고 말했었지요, 펠리시아 화."
로드릭은 자신의 말을 펠리시아에게 상기시켰다. 그의 눈이 심술궂게 빛났다.
"드디어는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요."
"무슨 교활한 속임수를 쓰려는 거예요?"
펠리시아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분노로 전신이 굳어져 왔다.
"어떤 식으로 레이크워스 회사를 매수해서 나를 이곳으로 오게 했지요?"
로드릭은 유쾌한 듯 웃었다.
"아무도 매수하지 않았소. 아마도 당신 이외에는 매수할 수 없을 거요. 레이크워스는 내 회사요."
"뭐라고요?"
펠리시아는 숨을 삼켰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난 큰 주식회사의 회장이오. 여러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복합 기업이오. 그 중에 농업기계회사도 있고, 매직그로우 화장품도 포함되어 있을 뿐이오."
"하지만…"
그녀는 항의했다. 아직도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고용되어 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갖고 있는 회사의 일을 내가 받아들였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우연이 너무 많군요."
"우연이 아니오."
담담한 표정으로 그가 되받았다.
"우리 회사가 당신에게 연락을 취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군요. 단 간접적으로 말이오."
"내막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펠리시아는 중얼거렸다.
"그렇소."
로드릭은 동의했다.
"당신은 한 치의 의심도 갖지 않았소. 자신이 자란 곳으로 돌아가서 내 품에 뛰어들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소?"
펠리시아는 그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마음속으로 그런 모습을 떠올리는 자신에게 화를 내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 일은 농업용 기계의 거래에 관한 통역이에요. 당신 통역을 하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쌀쌀맞게 말했다.
"과―연!"
로드릭은 그녀를 놀리듯 말을 길게 뽑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쉰 다음 계속했다.
"회사의 지사를 위한 통역도 함께 하도록 말했을 텐데요."
"자못 은혜 베푸는 척하지 마세요!"
펠리시아가 내뱉았다.
"이곳은 스튜디오잖아요. 당신 마음은 손에 잡힐 듯이 아주 잘 들여다보여요. 날 속이고 자신을 위해서 포즈를 취하게 하려고 아주 열심이군요!"
"그런 적은 없소."
로드릭이 말했다. 겉으로 상처받은 것처럼 꾸미는 그의 목소리는 펠리시아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할 뿐이었다.
"매직그로우 화장품의 새 캠페인 광고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에서 로케이션을 하고 있소. 이따금 나는 그 감독을 하고 있어요. 때문에 통역을 필요로 하지요."
"나를 악착스럽게 쫓아다닌 다음에, 그저 통역을 하라고요?"
펠리시아는 신랄하게 쏘아댔다.
"그것보다도 당신은 날 어떻게 찾아냈죠?"
로드릭은 펠리시아의 공격에 어깨를 움츠렸다.
"당신 어머닌 뛰어난 여성이었소. 그녀는 대중의 상상력을 북돋우는 분위기를 갖고 있었어요. 앞으로 오랫동안 그런 모델은 나타나지 않을 거요."
"알고 있어요!"
펠리시아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전번에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요?"
"일 년 전쯤 낡은 잡지를 뒤적이다가 당신 어머니가 매직그로우 화장품의 광고에 나온 걸 보았소. 헤어스타일이나 화장이 조금 시대에 뒤떨어져 있긴 하지만 매력은 아직도 생생하더군요."
"알아요."
펠리시아는 씁쓸한 기분으로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당신 어머님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모델을 찾으면 어떨까 하고 건의했지요. 그때 아버진, 프란시스 화의 딸을 스페인에 보낸 것이 난처하게 됐다고 하시더군요. 바로 그때 난 왕위 계승자를 발견한 거요. 그러나 당신 행방은 아무도 몰랐소."
"어머니에게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펠리시아는 따지고 들었다.
"그녀는 나를 만나려 하지 않았소. 이 일에 관해서는 아무와도 만나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난 사립탐정을 고용했소. 그날 당신 교실에 들어간 건 당신이 어머니의 분위기를 물려받았는지 어떤지를 보기 위해서였소."
펠리시아는 자신의 매력을 인정하는 건 싫었지만, 로드릭 베어스턴이 자신을 어떻게 보았는지 호기심으로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래서, 결과는요?"
대답을 들어도 따분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오만한 태도로 그녀가 물었다.
"지금의 결과가 되었소."
자신의 마음에 당황하며 펠리시아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침묵을 지키자 로드릭은 캐비닛 앞으로 걸어가 하나의 서류철을 끄집어냈다.
"이것이오."
책상 위에 서류철을 던지며 그가 말했다.
펠리시아는 그 소리에 놀라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이것을 보시오."
그는 명령투로 말했다.
"벌써 봤어요."
냉냉한 펠리시아의 대답이었다.
"아직 못 봤을 텐데…"
로드릭이 정정했다.
"이전에 본 사진과는 다른 것이오. 자, 보시오."
서류철을 펼친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내 사진을 찍었군요!"
그녀는 화난 목소리로 외치듯 말하고는 사진들을 넘겨보았다. 아파트를 나오는 것, 학교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 슈퍼마켓에서 나오는 것 등 여러 가지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이럴 권리가 없을 텐데요?"
그녀는 사진을 테이블 위에 놓고 벌떡 일어섰다.
"앉으시오."
달래듯이 그가 말했다.
"법률상의 죄는 짓지 않았소. 단지 당신에게 알리지 않고 장래 유망한 모델의 사진을 찍었을 뿐이오. 그것도 아니고 대중의 눈에 띄게 할 것도 아니오."
"하지만 프라이버시 침해예요!"
"아니오, 그렇지 않소."
그는 펠리시아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를 가만히 눌러앉혔다. 그의 몸이 다가오거나 닿기만 해도 펠리시아의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그녀 스스로도 화가 나 있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타일렀지만, 또 하나의 자신이 귓가에서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혼란을 느끼며 앉아 있었다.
"당신에게 접근하기 전에 두세 번 당신을 찍어 카메라가 받는지, 알아 둘 필요가 있었소."
"만약 내가 테스트에 떨어졌다고 한다면요?"
"밝히지 않고 몰래 찍도록 했더니, 사진은 아주 좋았소."
로드릭은 계속했다.
"내가 찍은 것이 아니고 카메라맨을 고용했었지요. 그래서 당신이 어떤 매력의 소유자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당신을 만나 내 스스로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었소."
"그래서 우리 교실에 몰래 들어왔군요?"
"몰래 들어갔다, 그건 무슨 말이오?"
펠리시아를 몹시도 안절부절하게 하는 여느 때의 태도로 그가 웃었다.
"주제넘게 마음대로 남의 교실에 들어와 놓고는 무슨 말인가요?"
펠리시아는 계속 항의했다.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았소."
로드릭은 자기를 변호했다.
"나는 신경이 쓰였지요."
"그랬소?"
로드릭은 히죽 웃었다.
"나란 사람에게 말이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녀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때 다시 또 귓전에서 작은 목소리가 속삭이며 그녀를 혼란시켰다.
'그만둬!'
하고 그녀는 그 목소리를 향해 중얼거렸다.
펠리시아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나를 보고 만족했다면 왜 칼즈배드까지 따라온 거죠?"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오."
로드릭이 설명했다.
"당신은 학교라는 수수한 세트 안에만 있었소. 얌전한 헤어스타일에 선생다운 옷을 입고 평범한 화장을 하고 말이오."
"그 경우에 어울리는 옷을 입었을 뿐이에요."
펠리시아는 변명하듯 말했다. 왠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솟아나올 것 같았다.
"학교로부터 벗어난 당신을 보고 싶었소."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로드릭은 계속했다.
"탐정에게 확인시켰더니 학교에서 칼즈배드에 간다는 걸 알았지요. 다른 환경에 있는 당신을 가까이서 보고자 했을 뿐이오. 다시 한번 마음에 들었지요. 그래서 어떻게든 당신에게 모델 일을 시키고자 결심한 거요."
펠리시아는 로드릭에게 빼앗긴 입맞춤에 관한 화제를 조심스럽게 피했다. 그러나 자신을 감싸던 그의 손과 피부와 입술의 기억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이미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녀는 날카롭게 잘라 말했다.
로드릭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이 펠리시아의 눈동자를 찌르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펠리시아는 눈을 돌렸다. 로드릭 베어스턴을 미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면 온몸이 달아올랐다.
"분명히 들었소."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펠리시아는 다시 한번 로드릭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게 내 진심이에요."
그녀는 되풀이했다.
로드릭이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당신이 거부하고 있는 것은 모델로서 희생물이 되는 걸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오. 당신 어머닌 불합리한 일이란 걸 알아도 거절하지 못하는 의지박약한 사람이었소. 어머닌 당신을 자기 곁에 두기를 주장할 수도 있었을 거요. 그러나 남편에게 대항하기에는 너무 나약했지요. 그녀는 다른 직업을 가졌다 해도 이용되거나 희생당했을 것이오. 당신 인생을 망치는 건 모델이란 일, 그것이 아니오, 펠리시아! 그것은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거짓말이에요!"
펠리시아는 발끈해서 내뱉았다.
"그럼 내가 틀렸다는 거요?"
로드릭은 거만한 태도로 도전했다.
"아무렇게나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아져 있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럼 당신은 어머니보다 더 나약해지게 돼!"
힐책하는 어조로 로드릭이 말했다.
"모델의 진상을 알면 모델을 하고 싶어질까 그걸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오. 그렇게 되면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사라져 버릴 것이고, 자신을 한탄하는 일도 그만두어야만 할 거고 말이오. 비참한 자신을 즐기고 있기 때문에 모델 일에 혐오를 느끼는 거요. 그뿐이오!"
"아니에요!"
펠리시아는 격노했다.
"거짓말이에요. 본심도 아니면서 끝내 나를 속이려 하는군요."
"잘 생각하도록 하시오."
로드릭은 고압적인 자세로 계속했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로드릭의 명령조는 펠리시아의 반항심을 더욱 부채질했고, 두 사람 사이의 공간에서 시선이 맞부딪쳤다.
떨고 있는 파란 눈을 감싸잡은 그의 시선을 그대로 영혼 깊숙한 곳까지 찌르는 것 같았다. 스스로도 존재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의 일부가 지금, 억지로 끌려나가려 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평상시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펠리시아의 비밀스런 생활을 모두 파헤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군요."
펠리시아는 숨을 죽였다.
"그래서 시도해 보는 게 두렵단 말이오?"
로드릭은 계속 이야기를 접근시켰다.
"내가 당신 마음을 똑바로 읽고 있다는 건 곧 알 수 있소. 회사에서 시장조사를 해보았소. 프란시스 화란 이름은 그녀의 전성기 때와 똑같이 알려져 있더군요."
로드릭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전설적인 이름, 프란시스 화가 되살아나는 거요. 친딸 펠리시아 화에 의해서 말이오. 성공은 틀림없소!"
로드릭은 의기양양게 말했다. 방에는 자신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주위에 있는 유령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하고 그는 다시 펠리시아에게 관심을 옮겼다.
"모델의 진정한 모습을 곧 알게 될 거요."
이번에는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당신은 어머님과 똑같은 평판을 받을 거요. 그렇게 되면 모델로서의 출세는 로케트를 탄 것과 같소. 내 자신이 당신 매니저를 맡겠소. 내가 소유한 회사 중에서 화장품 회사가 제일 맘에 들기 때문이오."
로드릭은 펠리시아에게 시선을 못 박았다. 펠리시아는 분노로 뺨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아직도 거절할 생각이라면요."
펠리시아는 계속 되풀이했다.
"어머니의 후광을 이용할 마음은 없어요."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군."
로드릭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명랑한 어조로 말했디
"당신은 어머니와 비교되는 걸 두려워하는 거요. 모델을 함으로써 변해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오. 어머님의 매혹적인 이미지에 부응할 수 없으리라 생각해서 계속 거절하고 있는 거요. 비교돼서 그녀보다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되는 게 불안한 것이겠죠."
"아니에요, 아니란 말이에요!"
돌연 넘쳐흐르는 눈물로 시야가 흐려지면서 펠리시아는 반항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뺨이라도 때릴 듯이 로드릭을 노려보았다.
"당신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우선 당신 자신을 심리학으로 분석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녀는 소리질렀다.
"나를 알 리가 없어요. 스파이를 이용하지 않는 한은요. 몰래 그런 짓을 한 걸 생각하면, 네! 하고 대답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쏘아붙인 그녀는 휙 돌아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잠깐 기다리시오, 펠리시아."
명령조였다.
"당신은 아직 내게 고용되어 있소."
"아니요, 고용되지 않았어요."
그녀는 즉시 대꾸했다.
"일은 그만두겠어요."
"어떻게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오?"
로드릭은 부드럽게 물었다.
펠리시아는 상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죠?"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미국에서 올 때는 여비를 내가 부담했소. 돌아갈 때도 내가 부담하겠소. 단 이곳의 일이 끝났을 때 이야기지만 말이오. 나는 통역으로서 당신을 고용했으니까 내게 대한 책임과 의무는 다해 주어야 하지 않겠소?"
"속이기만 하는 주제에요?"
환멸을 느낀다는 듯이 그녀는 내뱉았다.
"당신이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지만, 어쨌든 여름 동안은 통역으로 일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 이상 이곳에 있어야만 하오."
끓어오르는 분노가 펠리시아의 숨을 막히게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를 그녀였지만 사정은 뻔했다. 적어도 최초의 월급을 받을 때까지 그녀는 무일푼인 것이다. 스페인에서의 필요경비는 레이크워스 회사에서 지불하고 있다.
"내일 아침에 만납시다."
펠리시아가 굴복한 것에 만족하며 그는 차갑게 내뱉았다. 아무 말없이 펠리시아는 문을 나섰다.
"로드릭 베어스턴, 이 보복은 꼭 할 거야."
그녀는 이를 같았다.
4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것일까?"
까타르냐 광장 북쪽에서 전차를 내리며 펠리시아는 혼잣말을 뇌까렸다. 그곳은 바르셀로나에서 제일 큰 공원이었다. 광장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당당한 은행 건물 앞을 지나, 그녀는 키 큰 나무 밑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산들바람이 흐트러진 머리를 흩날리며 불어왔다.
"생각해 봐. 내가 로드릭 베어스턴을 위해 일하다니, 참 어처구니없구나.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한 것처럼 그가 이용하는 모델의 통역을 하다니 말야."
펠리시아는 자신의 기분을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지나가던 스페인 사람이 중얼거리며 길을 건너는 펠리시아에게 기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펠리시아는 그 시선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어서 아름다운 공원과의 재회를 기뻐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 공원은 항구가 가깝고 주위에 난립하는 고층빌딩들로부터 벗어나 있어서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훌륭한 장소였다.
어제 펠리시아가 호텔로 돌아오자, 로드릭이 전화를 걸어 오늘 아침 촬영 장소로 오라고 말했었다. 그는 신인 모델을 데뷔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셰릴 싱거라고 하는 모델은 스페인 이름의 이미지를 가진 향수의 광고 선전에 출연하고 있었다. 그 최초의 스케줄은 수많은 조각, 아치, 즐거운 듯이 뿜어나오고 있는 두 줄기의 좁은 길로 둘러싸인 잔디 한가운데서 공원을 배경으로 촬영하게 되어 있었다.
"기대하진 마세요. 내가 이곳을 나가리라는 것을요."
펠리시아는 갑자기 화가 나서 그렇게 말했었다.
"당신은 반드시 올 거요."
로드릭은 예의 그 자신있는 태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펠리시아는 더 이상 그 남자를 위해 일할 거라면 굶어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만약 자신이 직무를 완수하지 않으면 로드릭은 지불을 중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헛되이 보내게 된다. 이런 생각에 그녀는 휴지통에 내던졌던 주소를 적은 종이를 마지못해 집어 들었었다.
공원 한가운데의 원형 광장은 여러 가지 색깔의 타일이 깔려 있었다. 노인 대여섯 명이 꿈꾸듯이 하늘을 보며 앉아 있었다. 펠리시아는 말 탄 남자의 동상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 촬영반이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큰 나무를 돌아서자 받침대가 설치된 검은 카메라가 보였다. 카메라는 대부분이 동상을 향해서 서 있었는데 반짝이는 검은 눈과 턱수염을 가진 작은 몸집의 남자가 렌즈를 조정하고 있었다.
"펠리시아!"
그녀를 발견한 로드릭이 반갑게 소리쳤다.
"약속을 지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갈색 눈 속의 자신감이 다시 펠리시아를 발끈하게 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펠리시아는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쥬안 카로스를 만났으면 싶소."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로드릭이 말했다. 그는 작은 몸집의 사내에게 펠리시아를 데리고 갔다. 그녀를 보자 남자는 카메라에서 떨어지며 만면에 미소를 띠웠다.
"쥬안 카로스, 이쪽은 미스 펠리시아 화라고 하오."
"처음 뵙겠습니다."
스페인 말로 펠리시아가 인사를 건넸다.
"와 줘서 정말 살 것 같소. 나는 영어를 할 수 없고, 저 사람은 스페인어를 못하기 때문에 손짓 발짓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로드릭은 미소를 머금고 두 사람을 보고 있다가 펠리시아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지더니 눈을 크게 떴다.
"셰릴!"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그가 소리 질렀다. 펠리시아는 무의식중에 돌아보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길 건너 고층빌딩의 유리에 반사된 눈부신 햇빛이 그녀를 쏘았던 것이다.
팬들에 둘러싸여 전속 화장 담당 비서와 스타일리스트 등을 동반한, 짙은 갈색 머리의 날씬한 아가씨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긴 웨이브의 헤어스타일은 우윳빛의 어깨 부분에서 금빛의 가는 끈을 살짝살짝 가리며 찰랑거렸다. 어깨끈은 더할 나위없이 화려한 금빛 드레스를 지탱하고 있었고, 드레스 자락은 쪽 곧은 종아리 부근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녀의 파란색 커다란 눈은 대조적인 색깔의 아이섀도우로 교묘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으며, 부드러운 입술은 장미빛 립스틱으로 또렷하게 선을 이루었다.
그녀는 과연 모델다웠다. 드레스를 입은 옷맵시는 마치 여왕과도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셰릴 싱거에 비해 자신이 몹시 초라하게 보이는 것에도 펠리시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밍크코트를 위해 카메라 앞에 서서 영혼을 파는 일 따위엔 흥미가 없었다. 로드릭 베어스턴이 뭐라고 하든, 어머니의 발자취를 쫓을 생각은 없다고 그녀는 다시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로드릭!"
셰릴이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그를 불렀다.
"오늘 아침엔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촬영을 연기할 순 없을까요? 지금 눈이 충혈되어 있어요. 처음이니까, 흉해 보이는 사진은 찍고 싶지 않아요. 어젯밤 그렇게 늦게까지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아니었는데…"
장난기 가득한 간드러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로드릭에게 다가가서는 슬픈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디 볼까?"
여기저기를 살펴보면서 로드릭이 말했다.
"정말 그렇군. 당신 기분은 나도 알아."
그녀를 위로하는 체하는 어조로 그가 동의했다.
그녀는 로드릭의 말 속에 숨겨져 있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로드릭이 검사를 마칠 때까지,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는 나중에 수정을 할 수 있어."
"정말이지요?"
셰릴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물론이지."
로드릭은 그녀의 기력을 북돋아 주었다.
"변함없이 아름다워, 셰릴. 당신에겐 일류 모델이 될 수 있는 잠재능력이 있어."
셰릴에게 말하면서, 로드릭은 오만한 표정으로 펠리시아를 힐끗 쳐다봤다.
"괜찮아, 당신을 돋보이게 촬영할 수 있으니까."
"고마워요, 로드릭."
세릴이 응석부리듯이 속삭였다.
펠리시아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셰릴은 손으로 로드릭에게 키스를 보내더니, 숨을 가다듬었다.
"자, 시작할까요?"
그렇게 말한 셰릴은 어깨의 머리를 뒤로 넘겼다.
촬영반은 각자의 위치에 서서 쥬안 카로스의 등 뒤로 반원을 만들었다. 로드릭이 지시하기 시작했다. 팬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두 사람이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화장을 담당하는 비서는 카메라 바로 옆에서 셰릴의 화장이 지워질까 봐 걱정하고 있었으며, 조수 두 사람이 조명 위치를 정하고 셰릴의 실루엣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움직이고 있었다.
"로드릭, 너무 더워요."
로드릭이 동상 왼편에 있는 촬영지점으로 셰릴을 데려가자, 그녀는 불평했다.
"곧 끝날 거야."
그는 계속 셰릴을 독려했다.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고, 이 배경에 당신의 이미지를 겹치는 거야. 빛과 배경의 절묘한 조화를 찾아내야만 해. 쥬안 카로스가 촬영하게 할 테니까, 내 말을 잘 듣고 그대로 하는 거야. 오케이?"
셰릴은 희미하게 골난 표정을 보이며 끄덕였다.
"펠리시아."
완전히 사무적인 어조로 로드릭이 불렀다.
"셰릴의 화난 표정을 찍도록 쥬안 카로스에게 말해 주시오. 그녀의 가장 훌륭한 표정은 턱을 조금 내리고 카메라를 쳐다볼 때라고 말이오."
펠리시아가 통역하자, 쥬안 카로스가 웃음을 띠우며 끄덕였다.
"통역을 통해서 지시를 내리면 좀 귀찮지 않아요?"
펠리시아는 로드릭에게 말했다.
"스스로 사진을 찍는 편이 마음편하지 않냐고요?"
"평범한 사진가라면 그럴 거요."
로드릭이 말을 꺼냈다.
"난 그의 작품을 여러 번 보았소. 카메라 앞에 누굴 데리고 가든 그처럼 훌륭히 찍을 수 있는 작가는 아마 없을 거요. 그에게 당신 어머니 같은 모델을 부탁하면, 광고 사진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리라 생각하오."
"자, 됐어, 셰릴? 남자를 탐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봐. 나를 원한다고 말하는 거야!"
셰릴은 일단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다시 앞으로 숙여 긴 머리를 어깨에 흩어지게 했다. 그녀는 입술을 약간 뾰로통하게 내밀고, 몸을 휘며 과장된 연기를 해보였다. 로드릭은 그녀를 향해 관능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듯한 말들을 외쳐대고 있었다. 필름이 계속 돌아가고, 그에 맞춰 셰릴은 점점 더 신이 나서 연기를 해냈다. 로드릭은 어떻게든 최고의 표정을 끌어내기 위해서 열심이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셰릴의 순진소박한 표정을 필름에 담아 두고 싶다고 했다. 펠리시아는 쥬안 카로스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로드릭과 셰릴은 계속 말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영위하고 있었다.
펠리시아는 외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탁이에요, 로드릭! 너무 더워요. 사진은 이제 충분하잖아요?"
화장을 맡은 여성이 뛰어가서 큰 파후로 셰릴의 콧등을 두드렸다.
"이제 한 장만!"
로드릭이 약속했다.
"나머지는 스튜디오에서 끝낼게."
셰릴은 아랫입술을 쑥 내밀고 불쾌한 듯이 이마를 찡그렸지만 촬영 장소로부터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로드릭은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여러 각도에서 셰릴을 주시했다.
"쥬안 카로스에게 조금 다른 각도에서 찍도록 말해 주시오."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로드릭이 말했다.
쥬안 카로스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말을 따랐다. 그는 파인더를 들여다보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이 각도에선 모델의 표정이 안 좋게 보여요."
펠리시아는 로드릭에게 전했다. 그는 카메라에 다가가 직접 들여다보더니, 좌우간 찍어 달라고 말했다.
쥬안 카로스는 그런 사진은 자신의 작품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반항했다. 펠리시아가 통역하려 했지만, 말하는 기세로 그 내용을 알아들은 듯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로드릭이 대꾸했다.
두 남자의 감정이 서로 부딪치는 데 놀란 펠리시아는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모욕의 말들을 전달하기를 일단 멈추었다. 두 사람의 음성이 점점 커지며 한층 더 위협을 띠게 되어서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틀림없이 큰 싸움이 되리라고 생각한 순간, 로드릭과 쥬안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웃기 시작했다. 펠리시아의 감정은 몹시 동요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축축해져 있었고 목이 칼칼했다.
그녀는 당당한 남성으로부터 작은 예술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 태도는 싸움 직전의 정정당당한 모습이리라고 걱정했지만, 쥬안 카로스가 카메라 뒤로 몸을 숙이며 촬영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두 사람의 대립이 끝난 것을 알았다. 결국 그뿐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 다 정말 남자답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일단 촬영이 끝나자, 로드릭은 오후의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스페인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하자고 말했다.
"멋있어요!"
셰릴은 들떠서 떠들어댔다.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 데요."
"단, 무엇을 먹을지를 잘 지켜보겠어. 더 이상 살찌는 건 안 되니까."
로드릭이 충고했다.
로드릭의 충고를 듣고 있으려니, 펠리시아의 목에서 씁쓸한 것이 복받쳐 올랐다. 어머니가 매직그로우 화장품의 모델을 하던 때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셰릴은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가련하게도 그녀는 로드릭 베어스턴에 의해 인형 조종하듯이 움직이려 하고 있다. 그녀야말로 꼭두각시 인형인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로드릭의 말에 따라서, 그의 스케줄에 맞춰 살아갈 것이다. 먹으라고 하는 것을 먹고, 그가 고른 옷을 입고, 그의 일에 도움 될 파티에 참석하게 되리라. 만약 그가 원한다면, 정부까지도 되리라. 지시하는 방법으로 미루어 판단한다면, 로드릭이 원하고 있는 것은 셰릴을 정부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함께 가겠소?"
로드릭은 펠리시아와 쥬안 카로스에게 물었다.
셰릴은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로드릭의 팔을 끌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아니, 전 안 가겠어요."
펠리시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난 가겠어."
펠리시아가 통역하자, 쥬안 카로스가 응낙했다.
"카메라를 좀 정리한 다음에 가겠소."
로드릭과 쥬안 카로스가 시간과 장소를 정하자, 커플은 그 장소를 떠났다.
"당신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오후에 스튜디오에서 만나요."
"그래요."
펠리시아가 대답하자, 그가 말했다.
"세뇨르(Mr) 베어스턴의 일을 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오."
"그를 좋아한단 말인가요?"
놀라는 목소리로 펠리시아가 물었다.
"그런 지독한 싸움을 한 뒤에도요?"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오."
쥬안 카로스는 싱글벙글하며 큰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검은 케이스를 들고 왔다.
"프로로서의 자존심 문제였을 뿐이오. 이 일을 위탁받고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소. 카메라맨 전부가 나와 같은 의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오."
"무슨 뜻이에요?"
펠리시아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쥬안 카로스는 케이스를 열어 애정을 담은 조심스런 모습으로 카메라를 넣고 있었다.
"로드릭 베어스턴은 일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죠."
쥬안 카로스는 웃었다.
"시드니 스베인골드는 유럽에서도 일류 카메라맨이지만, 로드릭과 일하는 것보다는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시드니는 멍청이요."
호기심이 로드릭에 대한 펠리시아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렸다. 그녀는 일부러 그에 관한 것을 물어볼 정도로 관심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를 알고 싶어 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무슨 근거가 있나요?"
펠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묻고 말았다.
"로드릭 베어스턴은 천재요. 내 동료들은 그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로드릭은 독재자처럼 횡포하고, 사진은 카메라맨에게 맡기면서도 일의 방해만 한다면서 말이오."
"오늘 일하는 태도를 보면, 오히려 그 사람들 쪽이 옳잖아요. 왜 당신만이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지 모르겠군요?"
"그건 내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쥬안 카로스는 카메라 케이스를 닫고 160cm 정도밖에 안 되는 단신을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저쪽 건물을 보시오."
그는 근대식 건물에 가려져 겨우 들여다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진 건물을 가리켰다.
"보여요."
"아마 단 한 사람이 그 건물을 계획했을 거요. 그래서 설계도 한 영혼의, 한 이미지네이션의 산물이오. 그러나 그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쌓인 복잡함을 꿈꾸지 않았더라면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정교한 장식의 아름다운 건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우리들이 멋진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시대 최고의 예술의 융합을 즐기는 건 한 인간의 에고가 지배하지 않기 때문이오."
"자신의 사진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군요."
펠리시아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그대로요."
쥬안 카로스가 말했다.
"그렇소, 아름다운 여성을 사진으로 찍는다는 건 목적이 무엇이든 하나의 예술이오. 나는 나 자신의 견해를 갖고 있고, 그 견해는 뛰어난 것이라고 믿고 있소. 그러나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건,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기꺼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오."
"말을 바꾸자면, 타인의 지혜도 이용한다는 거군요?"
"그렇소. 안 될까요? 로드릭에게는 모델에게서 최고의 것을 뽑아내는 이상한 능력이 있소. 나 혼자서도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로드릭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면 같은 사진이 걸작으로 불리울만큼 최고의 경지까지 도달하는 거요. 왜 그와 일하는 걸 싫어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소."
비판하는 자, 칭찬하는 자, 각각이 어떻게 생각하든 로드릭 베어스턴은 자신의 사업에서는 분명히 꼭대기 자리에 있었다. 마지못한 일이지만, 펠리시아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좋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펠리시아는 쥬안 카로스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펠리시아는 작은 카페를 발견하고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걸 기뻐하며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좋은 향기가 나는 '파엘리야'였다. 파엘리야는 쌀과 사프란, 콩, 피망 등에 닭고기와 해산물을 섞은 요리였다. 정식 스페인 요리를 다시 한번 맛볼 수 있다는 건 근사한 일이었다.
오후 촬영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여러 상점들을 구경하며 길가를 걸어다녔다. 그녀는 이젠 시인해도 좋으리라고 호소하고 있는 로드릭 베어스턴과 머릿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오래 전에 그를 인정사정없는 남자라고 판단을 내렸었다. 좀 전까지도 차가운 심장을 가진, 그러면서 계산에 밝은 남자로밖에 생각되지 않았었는데, 쥬안 카로스가 그녀가 몰랐던 일면을 일깨워 준 것이었다. 로드릭 같은 남자를 칭찬하는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남자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작용하는 것이 두려웠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에게 반항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후의 촬영도 아침과 똑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실내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었다. 셰릴은 로드릭에게 매달려 때로는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때로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응석부리곤 했다. 그런 천한 모습에 펠리시아는 눈을 돌리고, 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그 동안 펠리시아는 간단한 지시를 두세 가지 통역했지만, 두 남자 사이에는 이미 작업상의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져 있어서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쥬안 카로스는 카메라를 교묘하게 조종하고 있었다.
펠리시아는 로드릭이 그처럼 행동하는 것도 일의 일부란 걸 알았다. 그가 알고 있는 셰릴의 분위기와 표정, 자세 등을 끌어내려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셰릴이 펠리시아를 힐끗 바라볼 때 나타나는 뽐내는 듯한 표정이나, 로드릭의 지시에 따라 관능적으로 움직이는 태도 등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펠리시아의 마음속엔 지워 버리고 싶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지 단순한 직업상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일이 끝난 뒤 로드릭과 셰릴만이 있게 되면…
'안 돼!'
펠리시아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 신경 쓰는 건지를 자신에게 묻고 그녀는 당황해 했다. 결국 그녀는 로드릭 베어스턴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건방지고 잘난 체하며 독단적이고, 그 위에 교활한 것은 더 말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남자에게 여자가 접근할 리가 없다. 그렇지만 이 남자의 동물적인 강한 흡인력, 접근할 때 느끼는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매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가 와 닿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떨렸었던 것이다.
촬영이 끝나자 셰릴은 펠리시아를 무시하고 다시 한번 교묘한 말로 로드릭을 유혹하고 있었다.
"내일 한 번 더 촬영할 거야. 장소는 이 스튜디오야."
로드릭이 말했다. 셰릴은 로드릭의 품으로 뛰어들 듯 바싹 다가서서 말했다.
"이제 난 녹초가 됐어요."
셰일이 볼멘 소리로 투덜댔다.
"뜨거운 욕조에 오랫동안 있다가 마사지라도 받고 싶을 지경이에요."
그녀는 펠리시아를 보며 거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얼굴에는 '로드릭은 내 것이야!'라고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등을 쓰다듬는 건 당신이 제일 뛰어나요, 로드릭!"
일부러 수줍은 듯 말하고 셰릴은 파란 눈을 그에게 집중시켰다.
펠리시아는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곧 끝나."
펠리시아와 말하던 때의 사무적인 어조는 사라지고, 들뜬 로드릭의 목소리였다.
로드릭은 펠리시아와 쥬안 카로스에게 내일의 스케줄을 알리고는 모델과 함께 사라져 갔다.
펠리시아는 구실을 만들어 두 사람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장소에 남아 있었다.
다음 날도 결코 좋은 하루였다고 할 수 없었다. 펠리시아는 얼른 이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로드릭 베어스턴이라 해도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리라. 그녀는 모델이 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톱 모델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준다 해도 그녀의 결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치료비는 몹시도 간절하게 필요했지만 모델 일로 그 돈을 벌 생각은 없었다.
그날 오후, 촬영이 끝나자, 로드릭은 촬영반 전원을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뛰어난 레스토랑으로 초대한다고 발표했다.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참석해 주시오."
의미심장한 빛을 띤 시선으로 펠리시아를 주시하면서 그는 말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한껏 비웃고 있었다. 이것은 무시해도 상관없는 명령이리라. 낮에는 통역으로서 그의 말을 따라야 하지만 자유 시간인 밤중까지도 로드릭과 지내야 한다는 조건은 회사와의 계약에도 없는 것이다. 오만한 미스터 베어스턴에게 반항할 절호의 찬스가 찾아오자, 펠리시아는 내심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부주의하게도 펠리시아는 적의 집요함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날 밤, 펠리시아는 저녁식사 전에 한두 시간 책이나 읽으며 차분히 지내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그녀는 스페인어로 물었다.
두 번째 노크소리는 더욱 강하고 보다 더 집요해졌다.
"펠리시아!"
귀에 익은 목소리가 외쳐댔다.
"문을 열어요."
펠리시아는 로드릭 베어스턴의 음성을 듣자 투명한 손에 심장을 꽉 잡힌 것 같았다. 갑작스런 긴장으로 숨이 막혀 왔다.
그녀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문으로 다가갔다. 잠긴 문고리를 벗기려고 뻗은 손이 몹시 떨렸다.
"생각했던 대로군."
복도의 희미한 불빛이 그녀의 가운을 비치자, 로드릭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오늘밤 참석하지 않으려고 한 거요?"
"나는…"
펠리시아는 더듬거렸다. 심장이 마구 뛰며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고,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로드릭은 그녀의 옆을 지나쳐 방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침대 옆의 푹신푹신한 의자로 걸어가 앉더니 팔짱을 꼈다. 펠리시아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본 그는 허리를 끈으로 묶은 그녀의 느슨한 가운 차림에 얼굴을 찡그렸다.
"옷을 입도록 하시오."
그가 명령조로 말했다.
"그럴 생각 없어요."
용기를 되찾고 그녀가 응수했다.
"당신 초대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초대가 아니라 명령이오. 나를 위해서 일하는 한, 내 말을 들어야만 하오."
"지금은 내 시간이니까, 그럴 필요는 없어요."
"미스 펠리시아 화!"
화가 난 로드릭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이 일을 하는 동안은 내가 주지 않은 한 자유 시간은 없소. 많은 보수를 지불하고 있으니까 말이오. 만약 내가 결정하면 디너파티도 당신의 일에 포함되는 거요, 설사 하룻밤을 지새운다 해도. 당신이 함께 나가기 전에 나는 이 방을 나가지 않겠소."
사람을 압도하는 로드릭의 태도에 부딪히자, 펠리시아는 마법에라도 걸린 듯이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은, 필요하면 한밤중에라도 있겠다고 위협할 때, 그의 눈에서 번쩍이던 미묘한 빛이었다.
"이런 짓 하기를 좋아하세요?"
펠리시아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런 짓을 하는 건 당신이 비열하기 때문이에요."
"나라면 비열이란 말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요."
그는 만족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자신이 이긴 것을 알고 있구나.'
하고 펠리시아는 생각했다.
"의지가 강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겠소?"
"좋을 대로 하세요, 결과는 똑같으니까. 당신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할 테니까요."
펠리시아의 야유 가득한 말투였다.
"당신 말 그대로요."
로드릭은 별스럽게도 부드럽게 긍정했다.
"그것이 가장 좋아하는 방법이니까."
용암같이 뜨거운 분노가 펠리시아의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좋든 싫든 그녀의 의사에는 상관없이 스페인에 있는 동안은 로드릭의 인질인 셈이었다. 그런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옷장으로 가서 드레스를 꺼내들고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소리 내어 닫았다.
그곳은 멋진 레스토랑이었다. 어떤 사정이 있건 이런 곳에서 식사할 수 있다면 이내 즐거워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로드릭의 오른쪽에 앉으며, 그의 왼쪽에 있는 셰릴을 보게 되자, 모처럼의 기분도 망쳐지고 말았다. 펠리시아는 투우사 복장을 한 웨이터가 날라오는 음식에서 나는 마늘과 양파의 냄새조차 깨닫지 못했고, 촬영반이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디자인이 정교한 방 한가운데 있는 큰 테이블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요리가 다 나올 때까지 춤이나 추겠소?"
로드릭이 촬영반에게 말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편히 테이블에 앉아 있던 동료들은 각각의 커플을 만들기 시작했다.
셰릴은 로드릭에게로 몸을 기대고는 눈을 깜박깜박했다. 춤추자고 유혹하는 것이라고 펠리시아는 생각했다. 그때 쥬안 카로스가 셰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고는 몸을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춤추러 가도록 해."
로드릭은 그녀에게 재촉했다.
"쥬안이 당신과 춤추고 싶어 하잖아."
"하지만 로드릭!"
셰릴은 로드릭의 팔을 잡고 항의하고 있었다.
"자, 얼른 나가도록 해."
로드릭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남자에게 수치를 느끼게 해서는 안 돼."
셰릴은 아랫입술을 내밀고 펠리시아에게 음험한 시선을 힐끗 보낸 뒤에 쥬안을 따라 플로어로 나갔다.
안절부절 해진 펠리시아가 헛기침을 했기 때문에, 테이블에 남겨진 것은 두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알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와 둘이서만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건 즐겁지 않았다. 어쩌면 같이 춤추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강한 팔에 몸을 맡기고는 능숙한 포옹을 받고, 뺨에 닿는 그의 뜨거운 숨결을 느낀다… 그것은 안 돼!
"실례하겠어요."
펠리시아는 온화한 태도로 말하고 백을 들고 일어섰다.
"화장실은 어딘가요?"
그러자 그의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펠리시아는 처음으로 그에게 응시되던 때와 같은 자신의 반응에 흠칫 놀랐다.
"그런 것은 뒷전으로 미뤄도 될 것이오."
로드릭은 쌀쌀맞게 말하면서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백을 뺏었다.
"화장할 필요는 없소.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하지만…"
그녀는 항의했지만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자, 춤춥시다."
그는 거의 강요했다.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소. 그러기에는 댄스플로어가 제일 좋을 거요."
어떻게 거절할까 하고 그녀가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동안 로드릭은 이미 춤추고 있는 커플들 사이로 펠리시아를 안다시피 데리고 나갔다.
로드릭이 자기의 머리에 얼굴을 갖다댔기 때문에,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머리를 가볍게 스치며 노출된 어깨에 닿자 전율이 펠리시아의 온몸을 뚫고 지나갔다. 가슴이 몹시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펠리시아의 손은 점점 땀에 젖었다. 로드릭이 한층 더 몸을 가까이 했다. 드디어 두 사람은 일체가 되어 플로어를 미끄러져 갔다.
펠리시아는 로드릭과 그를 상징하는 모든 것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든 원치 않든 끌려들어가는 매력을 로드릭은 자아내고 있었다. 그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부터 그녀는 도망갈 수 없었다. 그뿐인가, 이미 로드릭의 매력에 포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기는 지금 그런 남성과 마주서서 눈을 감고, 아련한 꿈의 세계에서 춤추고 있다. 그런 일을 허락하다니, 이것은 아마도 위험한 게임이 될 것이다. 그 꿈의 세계에서는 로드릭이 만들어내는 관능적인 분위기에 빠지는 것마저도 허락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까지 그녀는 남성에게로부터 이런 절망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가슴속에 이런 욕망의 불꽃을 일으키는 남성이 없었던 것이다. 이 순간을 즐겨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건 이 장소에서만의 도취일 뿐이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동물적인 매력을 가진 남자에게 안기는 것을 한 번쯤은 꿈꾸지 않는가.
펠리시아는 퍼뜩 놀라서 눈을 떴다. 수줍음으로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로드릭 베어스턴의 팔에 안겨, 마치 10대 소녀가 스타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듯한 기분이 되어 있다니. 펠리시아는 로드릭 베어스턴이 다시 밉살스러워졌다.
"음악이 끝났어요."
주의를 환기시키고 로드릭의 팔에서 빠져 나오려 했다. 자신이 이 남자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을 느끼고 말았다는 사실에 뺨을 붉혔다.
그녀는 테이블로 돌아가려 했지만, 로드릭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을 아직 말하지 않았소. 한 번 더 춤춥시다."
"한 곡이 흐르는 동안에 그 찬스가 있었을 텐데요. 셰릴이 쥬안 카로스와 이쪽으로 와요.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군요."
"셰릴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소."
셰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로드릭이 말했다. 오케스트라가 다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로드릭과 펠리시아는 화나 있는 셰릴의 옆을 지나쳤다. 셰릴은 불타듯이 이글거리는 증오의 눈길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내가 말하지 않은 건 당신이 춤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서였소.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거요? 대부분의 여성이 나란 사람을 매력있다고 했지만 말이오."
자신만만한 듯 웃음을 띠우며 그가 말했다.
펠리시아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자신만만해 하는 것은 어지간히 해 두세요. 자신의 매력없음은 젖혀 놓고, 그런 것은 내게 말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텐데요, 미스터 베어스턴!"
"고맙군. 하지만 당신을 내게 빠지게 하는 것쯤은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오."
그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펠리시아는 말했다.
"그런데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요?"
"당신을 위해 자그만한 편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계획이 있소."
"편의라고요?"
펠리시아는 의아스럽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그녀가 지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이 일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렇소."
진지한 얼굴로 로드릭이 말했다.
"당신 어머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조사해 보았소. 그리고 왜 당신과 만나는 것을 거절하는지 알았소. 그래서 당신을 돕고 싶은 거요."
"어떻게요?"
펠리시아는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때 그녀는 로드릭의 지위나, 그가 어떤 남자인가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에 대한 불신감이 커다란 기대 때문에 빛바래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성공할 방법으로 그녀의 주의를 끌어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게 만드는 거요."
"어떤 방법인데요?"
펠리시아는 그에 매달리다시피 열심히 물었다.
다시 음악이 끝났다. 마지막 음악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져 가는 동안에도 로드릭은 펠리시아를 계속 안고 있었다. 이번에는 펠리시아도 로드릭으로부터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파란 눈이 로드릭의 시선을 붙들었다. 그 눈은 그녀에게 욕망과 동정심을 말해 주고 있었다. 펠리시아의 심장의 고동소리가 그녀의 모든 감각에 울리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 격렬했기 때문에 그녀는 오케스트라가 다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도 듣지 못했다. 펠리시아는 자신이 마치 꿈 속에라도 있는 것 같았다. 로드릭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도 움직였다.
"당신 어머님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에는 당신 사진을 보내는 방법이 제일 좋을 거요. 내일 쥬안 카로스에게 촬영을 부탁하겠소."
처음에는 로드릭의 말이 펠리시아의 꿈의 세계에 침입해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곰곰이 음미해 본 그녀에겐 지금까지 느끼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사랑과 로맨스를 속삭이던 어슴푸레한 조명은 그녀를 향한 사악한 계획을 말해 주고 있는 듯했으며, 로드릭의 시선 속에 있던 연민 가득한 표정은 내면에 음모를 감추고 있는 음침한 거짓인 것 같았다.
그녀는 단박에 표정을 굳히고 그 자리에 못 박혀 서 있었다.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요. 어머니의 문제에까지 관심 있는 척해서 카메라 앞으로 날 끌고 가려고 하다니!"
"척하는 게 아니오, 펠리시아."
로드릭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에 신경 거슬릴 이유가 있소? 어머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려는 것인데, 어떻게 하든 큰 차이는 없지 않겠소?"
"어머니에 관한 것을 왜 그렇게 못 박는 거죠?"
강한 어조로 그녀가 반문했다.
"어머닌 나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또 스파이를 이용했나요?"
"어려운 일은 아니지."
로드릭이 어깨를 움츠렸다.
"탐정이 어느 간호원에게 돈을 주었더니 기꺼이 대답해 주더라고 합디다. 그런 것은 보통 비밀이지만, 매수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는 것이오."
"그래서 당신은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겠군요? 나를 속여서 당신을 위해 일하게 하더니, 이번에는 모델이 될 마음이 없는 경우에 대비해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거로군요. 그렇죠?"
펠리시아는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로드릭 베어스턴, 당신은 수치란 걸 모르는 사람 같군요."
"당신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펠리시아."
조금 씁쓸함이 담긴 로드릭의 말투였다.
"그러나 당신에게 분별력이 있다면 내가 당신을 위해 하려는 일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게요. 당신 자신의 분명한 사진을 찍은 적이 있소? 어머님이 외동딸의 사진을 받고 어떻게 느낄지를 생각해 본 적은 있소? 사진에서 미소를 띠우며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하는 당신을 안 만나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 바로 모정이오."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어요."
펠리시아는 완고하게 고집을 피웠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칠 작정이오? 어머님은 일평생 마음을 바꾸지 않을지도 모르오, 펠리시아. 일단 한 번 당신 사진을 보면, 어머닌 자신이 쌓아 놓은 고립의 담 안에서 뛰어나올 거요. 그녀에게 있어 당신은 현실이 되는 거요. 당신이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확실한 형체를 이루고 뚜렷이 나타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그녀도 당신을 만나고 싶어질 것이오. 꼭 그렇게 될 거요, 펠리시아. 나를 믿어요."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겠어요?"
펠리시아는 어금니를 꽉 문 뒤에 계속 말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내게 무엇 하나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데요."
"그렇지만 당신은 내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로드릭은 자신을 갖고 말했다.
그 말은 펠리시아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당신이 사진을 보내려 하지 않는 건 내가 옳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오."
"뭐라고요?"
"금방 말한 대로요."
로드릭은 단정하듯 말했다.
"사실 당신은 어머님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고, 그녀에게 관한 것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소. 만나게 되면 진실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을 한탄하기를 그만두어야만 하기 때문이오."
그녀는 커다란 몽둥이로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순간적으로 오싹하는 것이 그녀의 전신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러면서 그의 말에 진실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펠리시아는 이 문제를 너무 감정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냉정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서 해결해야만 할 문제였던 것이다.
어머니가 만나기를 거절했을 때, 그녀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를 기필코 만나고자 했다면, 일단 찾아가서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그렇게 했다면 거절당했다, 아니다는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리라. 어머니의 병을 생각해서 자제하고 있는 거라고 그녀는 늘 자신에게 타일렀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이유였을까? 실제로는 어머니와 외면하는 것을 오히려 어머니보다 더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펠리시아의 생각은 갈피를 못 잡고 왔다 갔다 하면서 혼란의 미로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펠리시아에게 극심한 피로가 밀려왔다.
"내일 사진을 찍겠소?"
로드릭이 물었다.
비열한 방법이라고 펠리시아는 생각했다. 자신이 의지할 곳 없다는 걸 알고 치명적인 순간에 공격을 가해 오다니…
"싫어요!"
커다랗게 소릴 지르고 그녀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 말은 허무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5
"이쪽이에요, 미스 화."
화려한 색깔의 립스틱을 바른 메이크업 담당자가 소리 질렀다.
펠리시아는 이른 시간에 일단 스튜디오로 나갔다. 그러나 그때에도 굳이 이 모험에 나서야 하는가에 대해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마음을 바꾸고 택시를 잡아 호텔 근처까지 가서는 다시 운전사에게 부탁해서 스튜디오로 돌아오고 말았다.
로드릭이 자신을 조종하려 한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르는 체하며 이 거래에 응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펠리시아를 카메라 앞에 세우기 위해서라면 어떤 속임수도 기꺼이 해낼 것이었다. 펠리시아는 그의 손 안에 잡히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말은 옳았다. 그녀는 그로부터 도망갈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사진이 어머니 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꺼운 문을 열어 줄지도 몰랐다. 그 문을 열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일단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펠리시아는 사무실 왼쪽에 있는 분장실로 거의 끌려가다시피 들어가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였다. 그녀는 처음에 놀라서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지만, 점점 어떻게 되는가는 건지를 알 수 있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그녀는 항의했다.
"화장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건 아니에요. 단지 사진을 찍기 위해서 온 거란 말이에요."
"어차피 촬영을 할 거라면 예쁜 편이 훨씬 좋겠지요."
비교적 나이 든 여성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렇긴 하지만요."
펠리시아는 한걸음 양보했다. 그녀는 곧 의자에 앉혀져 세면대에로 몸을 숙이도록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항의할 수도 없었다. 따뜻한 물이 머리카락을 적시며 머릿속 깊숙이까지 스며들었다.
화장을 담당한 아가씨의 손이 뺨에 닿았기 때문에 가늘게 뜨고 있던 펠리시아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뭘 하는 거예요?"
예기치 못한 일에 놀라서 그녀는 강경한 어조로 물었다.
"기초화장을 하는 거예요."
여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미스터 베어스턴의 명령이라서…"
"그래요? 그가 이렇게 하라고 했단 말이죠?"
무슨 영문인지 알겠다는 얼굴로 펠리시아는 말했다. 역시 그는 자기를 속이려는 속셈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짓을 한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허가 없이는 로드릭이 사진을 발표할 수도 팔 수도 없다는 것을 펠리시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승낙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로드릭이 자신의 생각대로 펠리시아를 꾸며서 원하는 사진을 찍는다 해도 사진은 쓸모없게 되고 말 것이리라. 만약 그가 어머니에게 사진 보내기를 거절한다면, 미국에 돌아가서 다시 한번 찍으면 되는 것이다.
"좋아요. 하지만 간단하게 해 주세요. 짙은 화장은 별로 안 좋아하니까요."
그녀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화장을 담당한 아가씨는 미소를 띠우고는 펠리시아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화운데이션을 펴바르기 시작했다. 나이 든 여자는 펠리시아의 머리를 말리고 있었으며, 동시에 또 한 여성이 펠리시아의 긴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칠했다. 펠리시아의 손은 조심스럽게 들어올려져 물이 든 용기에 넣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손톱에 메니큐어가 칠해지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최후로 작은 브러쉬로 볼연지를 바르고 난 화장 담당 아가씨가 숨을 포옥 내쉬었다. 나이 든 여성은 부드럽게 머리를 손질해서는 어깨에서 너풀거리게 했으며, 그녀가 머리 뒤와 옆에 헤어스프레이를 뿌리고 나서 의자를 돌려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펠리시아는 겨우 일어설 수가 있었다.
다음, 그녀는 빨간 실크드레스를 건네받았다. 그 실크드레스는 피부에 차가운 감촉을 주었다. 한 아가씨가 옷 입는 걸 도와 주었기 때문에 화장을 망치지 않아도 좋았다. 시중드는 아가씨는 펠리시아의 가는 허리에 벨트를 매고, 드레스 자락을 펴서 예쁜 종아리 주위를 우아하게 감쌌다.
"자, 한번 보세요."
나이 든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펠리시아의 손을 끌고 방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거울 앞에까지 데리고 갔다.
펠리시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 같네요. 저 낡은 사진과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마스카라 칠하는 걸 여러 가지로 연구해 보았어요."
화장을 맡은 아가씨가 말했다.
"깨끗하게 보이도록, 속눈썹을 바깥쪽으로 흐르게 했어요. 순진스런 눈매와 매치가 잘된 것 같지요?"
"미스터 베어스턴도 굉장히 기뻐할 거예요."
거울에 비친 펠리시아를 보면서 나이 든 여성이 다시 말했다.
펠리시아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낡은 사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머니와 자신이 너무도 닮은 것에 일종의 쇼크를 느꼈던 것이다.
그때, 낮게 꼬리를 길게 끄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로드릭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말 훌륭하군."
그렇게 말하며 로드릭은 거울에 비친 펠리시아의 전신을 훑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펠리시아는 몸을 돌려서 그와 얼굴을 마주 대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 틈에 뜨거운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대체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어제 말한 것처럼, 사진을 찍을 뿐이오."
그는 기운을 돋구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잖아요? 어머니를 위해 사진을 찍을 뿐이라면 화장이 너무 지나쳐요. 당신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되살리는 일에만 골몰해서, 내가 협력하지 않으니까 태연스럽게도 나를 속여서까지 당신 뜻대로 만들려 하는군요."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요, 펠리시아?"
로드릭은 그녀의 손을 잡고 분장실을 나섰다.
로드릭의 손이 닿자 펠리시아는 금세 온몸이 달아올라서 어떻게든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로드릭은 놓아 주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일은 없어요!"
그녀는 큰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이대로 갑시다."
그렇게 명령한 로드릭은 펠리시아를 스튜디오의 엷은 핑크색 배경 앞으로 데리고 갔다.
"싫어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쥬안 카로스를 무시하고 펠리시아는 반항했다. 그녀의 온 신경은 로드릭에게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카메라의 소리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모처럼 이곳까지 왔소."
강요하듯이 로드릭이 말했다.
"어머니의 벽을 허물어 버릴 수 있는 찬스를 허사로 만들고 싶소?"
"나와 어머니의 문제가 어떻게 당신과 관계가 있죠?"
"큰 관계가 있죠."
감정을 누른 듯한 로드릭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한순간 당황했다.
그때 펠리시아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그렇군요."
그녀는 냉담하게 말했다.
"어머니를 만나면, 프란시스 화의 부활이라는 당신 제안에 내가 찬성하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자, 촬영을 시작해 주시오, 쥬안."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로드릭은 지시했다.
"협력해 줄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냥 이대로 할 수 있는 만큼만 촬영합시다."
펠리시아는 그의 말에 돌연 몸을 굳혔다. 거의 일 분 간쯤 그녀는 카메라 앞에 노출된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사이 그녀의 얼굴에는 여러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이 사태에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귀는 주인을 속이지 않았다. 그것은 확실했다. 지금 로드릭이 쥬안 카로스에게 거침없이 말하고 있는 건 유창한 스페인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 것이었다.
"로드릭 베어스턴, 당신의 별 볼일 없는 게임도 이것으로 끝이에요!"
펠리시아는 화가 나서 날카로운 어조로 몰아댔다.
"처음부터 구실을 만들어 거짓말하고 속여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다니, 그 위에 어머니에 대한 내 마음까지 농락하면서 말이에요. 당신에겐 통역이 필요없었던 거예요. 당신은 금방 완벽한 스페인어를 해냈잖아요!"
"물론이오."
로드릭은 거북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만약 내가 스페인어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당신이 도착할 때까지 스페인에서 어떻게 일을 해낼 수가 있었다고 생각하오? 그 정도의 일은 당신도 눈치 챘어야 했소. 그렇게 고함쳐도 본심은 나를 위해 일하고 싶어 하고 있으면서… 당신은 양보할 수가 있을 것이고, 그 위에 양심의 상처를 받지 않도록 내가 배려한 거요."
"심리학 박사학위는 어느 대학에서 땄나요?"
펠리시아는 비웃음을 섞어 내뱉았다.
"나는 내 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당신은 그런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아요?"
"물론 마음에 걸리오."
로드릭은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정직했소. 단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을 말이오. 나는 많은 여성을 알고 있소, 펠리시아."
갈색 눈동자를 기묘하게 반짝이며 그가 말했다.
"어쩌면 당신에 관해서는 당신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오. 당신은 지금 혼란을 느낄 뿐이오. 모델을 하기 싫다고 하는 것은 모델이란 일이 어머니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오. 당신은 어머니를 증오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머니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면서, 또한 그녀를 알고 싶어 하고 있소. 분명히 사랑과 증오의 양면성을 경험하고 있는 거요. 그래서 자주 화가 나는 거요. 당신은 자신이 정말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모르고 있소."
로드릭과 시선을 부딪친 펠리시아는 온몸에 불꽃이 일어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 됐어요."
펠리시아는 로드릭을 노려보다가 스튜디오를 뛰쳐나왔다. 로드릭에게 결단코 속마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분장실로 돌아온 펠리시아는 클린싱크림을 뺨과 턱에 마구 찍어 바르고는 티슈로 북북 문질러 닦아냈다. 있는 힘껏 문질렀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며 얼얼해져 왔다.
'내게는 아픔이 잘 어울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너무도 자신이 비참했다. 로드릭 베어스턴에게 속기나 하고… 어리석은 자신을 한탄할 수밖에. 지금 그녀가 할 일은 없었다. 그는 스페인어를 못하는 척하며 펠리시아를 조종했던 것이다.
펠리시아는 빨간 실크드레스를 벗고 자기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스튜디오에서 뛰쳐나올 때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곧장 호텔로 돌아가 슈트케이스를 꺼내놓고 옷을 마구 담았다. 그리고는 쾅 하고 뚜껑을 닫고 잠근 다음 문 쪽으로 팽개쳤다. 펠리시아는 그것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 그녀는 로드릭 베어스턴이 여비를 주지 않으면 자신이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다. 펠리시아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분노와 좌절의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펠리시아는 늦게 눈을 떴다. 어젯밤엔 잠도 깊이 못 들고 자주 깨었었다. 그녀는 자신이 휩쓸리게 된 소용돌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펠리시아가 커피숍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려고 방을 나서려는 바로 그때, 전화벨이 기세 좋게 울렸다. 아마도 로드릭이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또 기분이 나빠졌다.
그대로 내버려 두고 나가려는데 다시 벨이 울리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그가 로비에서 전화를 걸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로비로 나선 순간 그와 맞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이대로 전화벨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적당한 때를 보아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로드릭은 머리 회전이 빨라서, 그녀가 호텔에서밖엔 식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펠리시아는 드디어 전화벨 소리가 그쳤기 때문에 잠시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해 하고 있었다. 돌연, 커다란 노크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깜짝 놀랐다.
"펠리시아!"
로드릭은 밖에서 큰소리를 질렀다. 펠리시아의 심장이 급격히 뛰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펠리시아?"
로드릭의 음성이 그 분위기를 깨뜨렸다.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지만 아무 반응이 없자 조용해졌다.
펠리시아는 살금살금 걸어서 문 앞으로 다가가 매끄러운 나무 문에 귀를 갖다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로드릭이 진짜로 가버렸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자신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문을 열고 나오려는 찰나에 붙잡으려는 심사이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가능한 한 조용히 침대 옆의 의자로 걸어간 펠리시아는 거기에 조용히 걸터앉았다. 이따금 복도를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때마다 펠리시아의 고동은 빨라졌다. 그러나 다시 노크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펠리시아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열 시가 지나 있었다. 그녀는 허기를 느꼈다. 시간이 여지없이 지나가자,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부질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잠시 뒤에 펠리시아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방문을 열었다. 복도를 둘러보았지만, 종업원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커피숍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그녀는 내내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드릭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때문에 오히려 불안감이 더해졌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서, 그녀는 로드릭이 다시 찾아오면 방으로 들어오게 해야 할지 어떨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만날 마음이 되었다가 곧 결심이 흔들리곤 했다. 몇 번이나 동요를 느끼다가 결국에는 로드릭이 왔을 때에 방황은 깨끗이 처리되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차라리 로드릭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편이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스트레스가 덜 쌓일 것이다.
오후가 되었을 때 노크소리가 났다. 로드릭은 문을 몹시 두드렸다.
"펠리시아, 문 좀 여시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세게 문을 두드렸다.
펠리시아는 땀에 젖은 손을 스커트에 닦은 다음 군침을 한번 삼키고는 문고리를 벗기고, 급히 문에서 떨어졌다.
"열려 있어요!"
펠리시아는 신경절적이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로드릭의 머리는 안개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거리에 안개가 낀 것을 펠리시아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작은 물방울들이 로드릭의 눈썹과 속눈썹에 달라붙어서, 마치 벼랑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바다의 사나이처럼 보였다. 그의 눈이 뭔가를 예기하는 듯한 기묘한 표정을 띠우며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것이 펠리시아를 당황하게 했다.
그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펠리시아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로드릭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마음과 모순된 충동을 느끼고 마는 자신을 증오했다. 그것이 설령 무엇이었든 간에 자신이 미웠다.
"사진을 갖고 왔소."
로드릭이 먼저 말을 꺼내며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걸 보내면 어머님이 반드시 당신을 만나주리라고 생각하오."
"당신 말대로 하지 않았는데요?"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되오."
로드릭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신과 내가 말다툼하고 있는 동안 쥬안 카로스가 서둘러 촬영해 주었소.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순간을 포착해서 당신의 멋진 표정을 끌어낼 수 있었소. 어머님이 본다 해도 어떤 상태에서 촬영됐는지는 판단할 수 없을 거요. 아름답기도 하고 표정도 싱싱하니까요."
펠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뺨을 붉히고 말았다. 로드릭의 말투는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애정이 담겨 있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펠리시아는 그런 목소리의 여운을 좋아하고 있는 자신이 다시 부끄러워졌다. 로드릭이 그 사진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자신에겐 굴욕감조차 느꼈다. 그러나 그는 사진을 보고 아름답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로드릭은 의자에 앉아 봉투를 열었다.
"보시오. 내가 말한 대로가 아니오?"
그는 펠리시아에게 사진 몇 장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사진에 정신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갑자기 우르르 몰려온 자극들을 일시에 흡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증오하는 남자 옆에 있다는 것이, 그녀의 의식에 도달한 메시지였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매료시키려는 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철면피한 남자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로드릭의 옆에 있게 되자, 펠리시아의 몸은 화끈거렸다. 여하튼 그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경고의 벨이 머릿속에서 울렸기 때문에, 그녀는 의자에서 떨어져 창가로 걸어가 사진을 보는 척했다.
"어떻소?"
로드릭은 기대를 가진 목소리로 물었다.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멍청했던 시선을 똑바로 하기 위해 머리를 흔든 뒤 펠리시아는 다시 사진을 찬찬히 보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펠리시아의 사진이라면 무엇을 보든 어머니는 그녀를 만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이라면 틀림없이 그런 기분으로 만들 것이었다. 사진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본 펠리시아는 어머니와 자신이 놀랄 정도로 닮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전성기 때 찍은 프란시스 화와 쏙 빼닮은 것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로드릭은 확실히 자신에게 맞는 옷을 골라서 사진에 매력을 더 불어넣고 있었다.
자신을 꽤 닮은 딸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어머니가 있겠는가? 호기심이 죄책감과 후회를 뿌리치고 딸을 보고 싶게 만들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기를 펠리시아는 갈망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로드릭에게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야 좋을 것인가? 그녀는 자신을 속였다고 로드릭을 힐책해 왔다.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면 자신이 항복하는 거라고 그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모델 계약에 사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엇인가 부탁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를 위해 일할 마음이 없다는데도 왜 로드릭은 이런 일을 해 주는 것일까? '고맙다'는 말이 반쯤 목에 걸려서 좀체 펠리시아의 입 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나를 위해서 왜 이런 일을 해 주는 거죠?"
머뭇머뭇하며 그녀는 물어보았다.
로드릭의 반짝이던 눈이 조금 흐릿해진 듯싶더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는 아무 말없이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오더니 펠리시아 곁에 나란히 섰다.
그녀의 심장이 몹시 크게 뛰었다. 펠리시아는 문득 방이 푹푹 찌도록 덥다는 걸 깨달았다. 창을 통해 습기가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진주 같은 물방울이 창 표면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로드릭은 그런 유리창 너머로 바르셀로나의 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당신 마음을 알기 때문이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도움이 되고 싶었던 거요."
"무슨 뜻인가요?"
펠리시아가 울었다. 그녀는 화를 풀고, 로드릭에 대한 공감을 느키기 시작했다. 그에 의해서 그녀의 마음은 감정의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육감적으로 그의 마음속에도 같은 반응이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처음으로 그가 거짓과 위장이 아닌 마음을 표시한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그녀는 로드릭이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도 당신과 같은 경우요."
로드릭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감정으로 가슴을 억누른 듯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펠리시아는 손을 뻗어 로드릭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로드릭이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눈을 들어 펠리시아의 시선을 정면으로 붙잡았다. 로드릭의 돌처럼 차갑던 평소의 표정이 맥없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얘기해 보세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순간, 로드릭은 기묘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겨우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고개를 갸웃하며 머뭇머뭇 물었다.
"흥미를 가져준다는 말이오?"
"물론이에요."
펠리시아는 어떻게든 남의 일처럼 대답하려 했지만, 그 말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 일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소."
로드릭이 천천히 말했다.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어요."
펠리시아는 그의 기운을 북돋았다.
"결국, 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다는 건가요?"
로드릭은 뭔가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오랫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에게 이해해 줄 수 있는 면이 있는지 어떤지를 살피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아마도 그는 아무에게도 그런 이해심은 없으리라고 느끼는 것이리라. 그가 마음속 깊숙이 비밀을 간직해 온 것은 분명했다. 그러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생긴 것이리라. 그렇지만 아직도 그는 몹시 신중한 모습이었다.
"나도 내 어머니를 모르오."
로드릭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의 고통스러워하는 어조는 펠리시아에게 말하는 일로 해서 그가 얼마나 깊이 상처받고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에 관해서 자신이 뇌까리던 바로 그 말이었던 것이다.
"내 경우는 당신과는 조금 다르오."
그는 계속했다.
"나와 어머니는 함께 살았었소. 내겐 어머니가 외국에 나가 있는 편이 더 나았을 게요. 어머닌 항상 술만 마시고 있었으니까 말이오.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부터 알코올중독에 걸려 있었던 거지요. 물론 아버지는 몰랐어요. 결혼할 때까지 열심히 숨겼으니까요. 아버지는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어머니는 협력해 주지 않았소. 언제나 꼭 고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비싼 선물을 졸라대기 위해서였지요. 그렇지 않으면 치료받으러 가기 위해서 새 드레스가 필요하다며 옷을 사들이곤 했지만, 약속은 언제나 하루밖에 계속되지 않았어요."
"아직도 계속 술을 마시나요?"
깊은 동정을 보이며 펠리시아가 물었다.
"이젠 그만두었소."
로드릭은 슬픈 듯이 말했다.
"돌아가셨소. 항시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난 어머니의 참모습을 알 기회가 없었소. 술을 끊게 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지만, 나에게 전혀 무관심했었지요. 어머니는 오직 술만 생각했었소. 처음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도 존경도 사라지고 만 거요. 그 후, 다른 여성과 사랑을 했지만, 아버지는 결혼제도에 경의를 표시하는 보수적인 분이었기 때문에 그 여성과의 사랑은 결실을 못 보고 끝내고 말았지요."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에는요?"
"나도 모르오. 아버진 그 여성에 관한 것을 그다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더군요. 단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셨을 뿐이지요. 그 사람의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어머니를 가질 기회를 잃었다고 느끼는 거군요?"
펠리시아는 자신의 아픈 마음과 로드릭이 경험한 고통을 생각하자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렇소."
로드릭은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당신 마음을 알 수 있었던 거요. 그냥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이오. 어머니를 알 기회는 내 경우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요. 그러나 당신은 다르오. 이 사진을 보여 드리면 어머님도 당신을 생각하게 될 거요."
"그럴까요?"
펠리시아는 희망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 사진이라면 괜찮아요. 고마워요, 로드릭."
그녀는 얼굴을 들어 로드릭의 눈을 응시했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교차되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에게 걸린 마법의 주술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한 마음으로 묶어졌다.
아무 말없이 로드릭이 팔을 뻗어 펠리시아를 안았다.
사진이 그녀의 손에서 바닥으로 흩어졌다. 창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가 꼭 껴안은 남녀의 주위를 떠돌면서 그들을 꿈의 세계로 유혹했다. 그들은 둘만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서로 비슷한 과거의 고통을 이해하며 서로가 서로를 단단하게 묶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음 깊이 느끼던 것은 이제 융합하고, 시간과 공간을 함께 떠도는 일체가 되었다.
펠리시아는 최면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멍청해졌다. 로드릭은 관능적인 포옹을 계속하며,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어떤 커다란 욕망이 일어나고 있었다. 펠리시아는 아무 말 없이 실눈을 뜨고 마음속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는 좀 더 높은 경지로 자신을 데리고 가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경험한 적도 없는 정상까지 올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욕망을 만족시키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흡족하지 못한 것이 남아 욕망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었다.
펠리시아는 그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입맞춤이라는 달콤한 꿀만이 이 욕망을 채워 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펠리시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당황하는 듯한, 그리고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숨이 몹시도 거칠었다.
"왜 그러세요?"
걱정이 돼서 그녀가 물었다.
"당신의 나약함을 이용할 뻔했소."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의 말을 듣자, 펠리시아는 느닷없이 자신의 머리 위로 찬물이 끼얹어진 것 같아서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자신을 뜨겁게 하는 욕망의 불꽃을 진압하려고 무척 애쓰고 있었다.
"신사라서 안 된다는 건가요?"
그녀의 어조는 신랄했다. 부끄러운 수치심 때문에 그녀의 말은 불쾌하게 울렸다.
"돌아가는 게 좋겠소. 스스로가 나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동안에…"
로드릭은 천천히 말하고,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인 듯 검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리고 있었다.
"그래요. 아침이 돼서 후회할 바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좋겠죠."
펠리시아는 빈정거렸다. 맥박이 뛸 때마다 꿈틀거리던 흥분은 이제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이 쇼크를 치료하기에는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로드릭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그녀는 거듭 생각했다. 자신이 얼마만큼 펠리시아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타진해 보기 위해서였을까? 스페인에 있는 동안 그녀는 경제적으로 로드릭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계수단은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이 당연하므로, 다른 것으로도 그의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펠리시아!"
진정되지 않은 태도로 문으로 걸어가며 그가 말했다.
"당신을 모델로 내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니오.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소."
"이전보다요?"
그녀가 물었다.
"왜죠?"
그녀는 아직도 머리가 빙빙 돌았지만, 그의 말투에서 전의 완강함과는 다른 숨겨진 강인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멈춰 서서 재빨리 창을 둘러보더니 다시 창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사진들을 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것 때문이오. 이 사진을 주의깊게 보시오, 펠리시아. 이렇게 우아한 분위기가 넘치는 당신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펠리시아의 가슴속에서 다시금 커다란 분노가 폭발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런 식으로 키스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는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를 친근하게 느끼며,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맡기고 싶다고까지 생각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녀 스스로가 자진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다지 대단치 않은데요, 로드릭."
그녀는 냉랭하게 말했다.
"전에는 조금 불확실했었지만, 이젠 확실해요. 당신을 위해 모델을 할 생각은 결코 없어요. 온 세계가 발칵 뒤집힌다 해도 거절하겠어요."
"미안하오, 펠리시아."
로드릭은 사과했다.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펠리시아는 즉시 응수했다.
"덕분에 당신이 어떤 남자인지를 잘 알게 됐으니까요. 생각보다 훨씬 지독한 사람이군요."
"곧 생각을 바꿀 거요, 펠리시아."
짐작했었다는 어조로 로드릭이 말했다.
"그렇게 간단히 포기할 생각은 없소. 이제는 알 때가 된 것 같은데."
"협박해도 두렵지 않아요."
격한 감정에 목소리를 떨며 펠리시아가 말했다.
"협박이 아니오, 펠리시아."
로드릭의 어조는 극도로 감정을 억누른 듯한 단조로운 투였다.
"이건 약속일뿐이오."
그는 눈을 감고 복도로 사라졌다.
펠리시아는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고 한껏 밀었다. 쾅 하고 문이 닫히자, 조금은 화가 가라앉는 듯도 했다. 그녀는 침대로 달려가서 그대로 쓰러졌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며 아무리 닦아도 멈춰지지 않았다.
펠리시아는 로드릭을 증오했다. 던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던은 친절하고 호감을 주며, 사람을 편하게 하는 남성이다. 또 한편 어린애처럼 순진한 사람, 모두가 그를 좋아한다. 그에 비해 로드릭은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하는 타입이다. 쥬안 카로스도 그렇게 말했었다.
펠리시아는 던과 데이트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는 두 사람 모두 마음이 편해지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반면에 함께 있을 때도 불꽃이 타오른 적은 없었다. 둘이 함께 있던 밤마저도 전혀 자극이 없는 극히 일상적인 것이었다. 펠리시아는 진정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에 관해 말하던 때의, 로드릭의 시선에 떠오른 고통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철면피함 속에는 감수성 예민한 이면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가 끌리는 것은 그런 면이었다. 결국 그 외는 같은 경험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후 쓰라린 날들을 지내왔었다. 로드릭도 비슷한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산산조각이 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펠리시아는 다시 던을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만약 그와 결혼하면 어떤 생활을 하게 될 것인지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그 생각 사이로 자꾸만 로드릭이 침입해 들어왔다.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여운을 남긴 남자의 검은 머리와 갈색 눈은 그녀가 어떤 시도를 해도 결코 걸러 버릴 수가 없었다.
펠리시아는 초대하지 않은 로드릭의 이미지와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마음속의 작은 음성이 듣고 싶지도 않은 진실을 계속 소곤거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그녀는 몸부림을 쳤지만, 그것은 고집스럽게 달라붙어 소근대고 있었다. 마침내 펠리시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야!'
하고 그녀는 그 목소리를 향해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깊은 의식 속에서 훨씬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천천히, 천천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솔직히 던 같은 남성과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침실이 세 개 있는 교외의 주택에서 살며, 아이 둘과 개 한 마리가 있고, 매일 5시면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그런 생활에 만족할 여성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생활 속에 싱싱하게 살아 있는 활력이 필요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남성은 이 세상에 한 사람밖에 없다. 그녀가 증오하고 경멸하기 시작한, 바로 그 남자인 것이다.
펠리시아는 흐느껴 울면서 그 사람을 아프도록 깨달았다. 로드릭은 그녀의 증오심을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으로 바꾸고 만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몇 년을 살든, 아무리 많은 남성을 만난다 해도 자신은 로드릭 베어스턴 외에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