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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연가(The Inheritance)

초원의 연가(The Inheritance)

Kay Thorpe

 

1

"생각해 봐, 백만 달러야!" 후라는 그 마법과도 같은 숫자를 다시 한번 확인하듯 들여다보았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아! 오늘은 특별한 일이 생길 줄 알았어. 그런 예감이 들었어!"

이브 브로클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동생의 사랑스런 얼굴을 바라보자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으나 애써 진정하면서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제안에 지나지 않아. 아직 그 돈이 손에 들어온 것은 아니야. 법적인 절차를 밟는 데도 몇 달은 걸릴 거야. 이 편지만 해도, 여기까지 오는 데 10일이나 걸리지 않았어."

"하지만 언젠가는 손에 들어올 거야. 그것이 중요한 점이야." 후라의 갈색 눈동자가 빛났다. "내일 아침 제일 먼저 칼메라의 상점에 가서, 점찍어 두었던 그 드레스를 사겠어. 아아, 어서 이 일을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모두 부럽고 질투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될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말하지 말 것을, 하고 이브는 생각했다. 동생이 이 사실을 비밀로 부쳐 두게 하는 건 무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고 특별히 비밀에 부쳐 둬야 할 이유도 없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로라 크란네의 생존해 있는 유일한 근친인 자매는 로라가 소유한 땅 모두를 상속받은 것이다. 상속자가 21세가 되어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단서는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이브는 24세고, 후라도 2개월 전에 21세의 생일을 맞이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로라 이모의 얼굴을 낡은 사진에서 보았을 뿐이었기에 쉽게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교제라고는 1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카드를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두 사람의 어머니가 아직 어렸을 무렵, 어머니의 언니인 로라는 미국인 목장주와 결혼하여 플로리다에 갔었다. 2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로라도 병중이어서 먼 이곳까지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웃이자 친구인 핸슨이라는 사람이 로라를 대신하여 위로의 편지를 보내 왔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로라 이모와는 소식이 끊겼었던 것이다.

이브는 배달된 공식 서류를 집어 들고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보았다. 1천 에이커라면 대단한 땅이다. 목장 경영도 원만히 행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겠다는 사람이 백만 달러나 되는 돈을 내놓을 리 없다. 6년 전에 남편을 잃은 로라 이모가 혼자서 그 목장을 꾸려 나갔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아마 믿을 수 있는 목장감독이라도 채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부극에는 이런 목장감독이 자주 등장한다. 이브는 혼자 미소 지었다. 나는 이미 서부극의 세계에 빠져 들어가 있구나.

"무엇보다도, 우리 눈으로 직접, 상속받을 땅을 보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생각해. 그러니 플로리다에 같이 가지 않겠니?"

이브의 말에, 주방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3월의 햇살을 바라보고 있던 후라가 돌아섰다. 긴 금발이 어깨 위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마치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아, 언닌. 나도 지금 플로리다 해안의 흰 모래밭에서 뒹구는 모습을 상상하던 참이야. 주위에는 멋진 사나이들이 가득 모여 들고 있어. 물론 그들은 내가 막대한 유산을 상속한 사실은 모르고 있어.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은 싫으니까, 내가 말하지 않은 거야."

이브가 웃었다.

"단순히 재산 때문에만 너한테 접근하는 남자는 없을 거야. 너는 미드후프에서 제일가는 미인 아니니. 모두들 그렇게 말하고 있어."

"작은 마을이니까 그런 거야." 후라는 이렇게 말했으나, 언니의 칭찬이 결코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언니, 조금 전에 한 말 사실이야? 플로리다에 간다는 것 말이야. "

"가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니? " 이브는 되도록 실리적인 말을 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일이 빨리 행될 것이고. 우선 그 목장을 보고 싶어."

"팔기 전에, 여기가 내 땅이라는 만족감을 맛보고 싶다는 거지? 알았어. 그런데 수속이 모두 끝나면 컬프 쪽으로 가보지 않을래? 나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뉴올리언즈에 가보고 싶어." 후라가 갑자기 낯빛을 흐렸다. "하지만 직장은 어떡하지? 나는 4월말 이전에는 휴가를 얻을 수 없는데."

"이제부터 직장은 가질 필요가 없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과 같은 직장만은. 상황으로 보아 회사에서는 사직할 때까지 한 달의 여유도 주지 않을 거야. 우리는 2주일 후엔 출발할 수 있어."

후라는 처음 언니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자세히 쳐다보았다.

"우리는 겨우 30분전에 이 편지를 받았는데, 언니는 마치 몇 달 전부터 계획을 세워 둔 것 같아. 이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

"그렇지는 않아. 다만 나는 얼마 전부터, 생활을 바꾸어 보았으면 하고 생각해 왔을 뿐이야. 어디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는 속담처럼 이 편지가 온 거야. 돈뿐이 아니야, 우리는 이제부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할 기회를 얻은 거야."

"한정된 기한 내에서는 그래."

이브의 개암나무빛 눈이 빛났다.

"그래도 좋아. 하나의 발판은 되지 않겠니? 같은 장소에 살면서 생활방식만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언니의 말뜻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잔소리만 하는 아저씨 말을 듣지 않게 된다면 대찬성이야! 오늘이 토요일이라서 다행이야. 필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을 테니까."

그것은 이브도 마찬가지였다. 사태의 급속한 진전에 놀라고 있는 것은 동생만이 아니었다. 어젯밤에도 이브는 이렇다 할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장래를 생각하고 몇 시간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텔리와의 결혼도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은 지구를 반 바퀴나 도는 곳에 있는 먼 나라인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마음속깊이 동경하고 있던 모험과 흥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사무실의 지겨운 업무로부터 도망쳐 나오기 위해 안타깝게 오후 다섯 시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목장에서 지낸다 해도 누구 한 사람 잔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로맨틱한 일인가! 이브는 자신의 이런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현대의 목장 생활은 서부극에 나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말은 지프나 랜드로버로 대치되어 있을 것이고, 소의 운반은 철도가 대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소유의 1천 에이커의 땅은 꼭 한번 보고 싶다. 비록 팔기까지 잠시 동안만의 자기 소유라 해도 말이다. 일찍 가면 일찍 갈수록 그만큼 더 오래 그 토지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이브가 서두르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신중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좋을 때가 온 것이다.

"여비는 어떡하지?" 후라가 갑자기 물었다. "많이 들 거야. 센 변호사에게 계약금조로 돈을 좀 보내달랄 수 없을까?"

"그런 부탁은 할 수 없어. 하지만 괜찮아, 은행에 예금이 있으니까."

"두 사람의 것을? 나는 한 푼도 없어 - 그야 있기는 있지만, 얼마 안 되니......."

"어떻게 되겠지. 그러고 왕복까지는 필요 없고."

"돌아올 때는 주머니가 두둑할 거란 말이지! 얼마나 신나는지 모르겠어! 이제는 구차하게 생활비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게 됐어. 그런 생활을 상상할 수 있어!"

동생의 말처럼 두 번 다시 돈 걱정은 안하게 될 것이라고 이브는 생각했다. 지난 2년간의 생활은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이브는 후라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현실적인 문제, 예컨대 생활비의 분담 같은 것에 관해서는 다소 무책임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후라는 늘 나중에 갚겠다고 했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 때가 많다. 그러나 이브는 이 일로 동생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이브는 판매부장의 비서로, 후라는 같은 회사의 타이피스트로 둘 다 하찮은 급료를 받고 근무하고 있지만, 동생은 언니와는 달리 패션에 흥미를 갖고 있었고, 런던에 나가 자기 운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정도의 용모라면 하룻밤 사이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도 결코 꿈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브는 그런 경솔한 생각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후라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약간의 가외 지출은 눈감아 주기로 했다.

"분명한 것을 알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야. 월요일에 센씨에게 전화할 생각이야." 이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은, 이번 주에는 나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의미야?" 후라는 웃으면서 고개를가로저었다. "그건 무리야. 어째서 새삼스럽게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잘못되었을 리가 없잖아?" 후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일어섰다. "어쨌거나 난 서둘러야겠어. 폴 스트리클리가 열 시에 마중오기로 했어. 그는 이번에 차를 새로 바꿨어 - 물론 중고지만. 나는 앞으로 포르쉐를 샀으면 해."

이브는 같이 쓰는 침실로 들어가는 동생을 보면서 그 머리 회전이 빠른 데 감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운전해 본 것은 밖에 있는 미니카뿐이다. 그 차를 대번에 포르세로 바꾼다는 것은 이브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브는 당장에는 아침 식탁을 정리할 마음이 나지 않아 그 편지를 또다시 읽어보았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이브는 잠시 후에 일어나, 작지만 깨끗이 정리된 거실을 가로질러 장식장 서랍에서 네모진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것은 후라가 <추억의 오솔길>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자매를 찍은 사진과 그밖에 추억될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후라가 세 살 때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을 것이나, 오늘은 그것보다 좀 더 오래 된 사진을 찾아냈다.

그 사진은 오래 되어 뿌옇게 바랬고 가장자리가 떨어져 나갔으나, 거기 찍혀 있는 남녀의 얼굴만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로라 이모는, 키가 크고 어깨가 떡벌어진 남편 곁에 서 있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로라 이모는 매력적이었으나, 대단한 미인인 동생, 즉 이브의 어머니와 끊임없이 비교되는 운명에 처했었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브는 동생이 그림책에 나오는 천사처럼 예쁜 얼굴과 금발의 고수머리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다. 그래서 자신의 갈색 머리와 평범한 얼굴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자매는 역시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부스스 하던 갈색 머리도 다크골드의 윤기 있는 스트레이트헤어로 바뀌어 있다.

"로라 이모님, 나는 이모님이 실망하실 일은 하지 않겠어요." 이브는 빛바랜 낡은 사진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이모님은 우리가 목장을 계승할 것을 원하시겠죠? 팔아 버리기를 원하셨다면 그렇게 말씀하셨을 게 아니에요? , 그렇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지만, 이브의 가슴속 깊이에는 목장을 지키겠다는 결의가 뿌리를 내렸다. 새로운 생활이 나에게 손짓하고 있다. 최소한 나는 거기에 도전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비행기는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자매가 마이애미에 내렸을 때는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시 받은 대로 두 사람은 곧 공항 호텔에 체크인하고 가볍게 식사를 한 뒤, 피곤했기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룻밤을 푹 쉬고 나니 체력과 기력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후라는 룸서비스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만족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야. 밖은 상당히 덥지만 여기는 냉방이 잘 되어서 쾌적해. 이것이 바로 앞으로의 우리 생활이겠지."

"꿈을 꾸기에는 아직 일러. 이제부터 오키초비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 이름, 멋지다고 생각지 않아? 그런데 센씨는 몇 시에 만나기로 했지? "

"열 시에 로비에서.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어. 제한 내의 최고 시속으로 달린다 해도 상당히 오랜 드라이브가 될 것 같아. "

"그것은 운전하는 사람이 규칙을 지키는 경우잖아? 하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후라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언니는 무엇을 입을 거야?"

"편한 것으로 입겠어, 슬랙스에 셔츠."

"그럼 나도 그렇게 하겠어? 푸른색 새 옷이 좋을 것 같아."

이브는 웃음을 참았다. 그녀는 오히려 오래 입어 낡고 길이 든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후라에게는 그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오늘 후라의 여행 차림은 연한 핑크 원피스에 스카프였다. 활동적인 차림은 못 되었으나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기는 했다. 이브는 목장에서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될 의상을 주로 택했다. 거기에 도착 즉시 바쁘게 움직일 생각이었다.

출발하기 전의 2주일 동안은 머리가 돌 정도로 바빴다. 옛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 이브는 텔리한테 자기 계획을 말했으나 찬성하지 않았다. 이브의 기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후라의 장래까지 결정할 권리가 네게는 없다고 텔리는 말했던 것이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 후라가 굳이 목장을 팔자고 고집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러나 우리는 로라 이모를 위해서도 그녀가 남긴 집에 살 의무가 있다. 전화로 이 말을 했을 때 센 변호사는 틀림없이 놀랐겠지만, 그는 교묘히 이것을 숨기고 있었다. 마침내 미드호프 최대의 여행사가 특등석 항공표를 전해 주었고 호텔도 수배해 주었다. 돈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라고 이브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지난해에 단체여행으로 스페인에 갔을 때에 비하면 서비스 방법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두 사람은 열 시 10 분전에 로비에 내려갔다. 숙박료 등이 모두 선불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소파에 앉아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 사나이가 이브의 눈길을 끌었다. 신장은 180 센티쯤 되어 보였다. 떡벌어진 어깨와 늠름한 체격에 잿빛 슈트가 잘 어울렸다. 차양이 넓은 모자를 아무렇게나 쓰고 있고, 화강암으로 깎은 듯한 우뚝한 콧날이 돋보였다. 프런트에서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나이를 보자, 본능적인 그 무엇이 이브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야기를 끝낸 그는 곧 이쪽을 보았다. 날카로운 푸른 눈이었다.

"언니, 저 사람 좀 봐! 약간 멋지지 않아? " 사나이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후라가 속삭였다.

약간 정도가 아니었다. 엄청나게 체격이 좋고 사나이다우며 자신만만해 보였다. 이것은 그의 동작과 캐주얼한 복장,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도 나타나 있었다. 이브의 가슴속에서 강한 반감이 싹텄다. 그녀는 직감을 믿지는 않지만 지금은 이 직감을 믿고 있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브로클리씨죠?" 사나이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남부의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나는 다이아몬드 바의 브레드 핸슨입니다. 곧 출발할 수 있겠습니까?"

"같이 갈 분에 대해 좀 더 알고 나서 가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후라가 말하기 전에 이브가 대답했다. "앉으시죠, 핸슨씨. 영국에서는 다리를 쉰다는 말로 표현하죠. 커피를 주문하겠어요."

사나이의 푸른 눈이 천천히 이브를 관찰했다. 꿰뚫어 보려는 듯한 그의 시선에 이브가 더이상 참지 못하게 됐을 때야 비로소 그는 입을 열었다.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가 커피를 주문하죠. 좀 쉬었다 갑시다."

"당신이, 어머니 장례식 때 로라 이모님을 대신해서 위로의 편지를 보내신 분인가요?" 후라가 사나이 곁에 앉으며 물었다.

"아니, 우리 아버지예요. 이니셜이 같지요. 아버지는 버트라고 합니다. 바돌로뮤의 약칭이죠. 아버지는 자신의 본명을 아가씨들에게 가르쳐 준 것을 좋아하지 않을 테지만." 후라의 발랄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다정함이 깃들여 있었다. "우리는 이웃이죠. 다이아몬드 바는 서클스리와 인접해 있으니까요. 동쪽을 제외하고는 다이아몬드 바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좋죠. 우리는 그 땅을 팔라고 몇 번이나 제의했지만, 조스는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죠. 그가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로라 이모님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군요." 이브는 굽힘없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모님이 돌아가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군요. 센씨가 말한 원매자(願買者)가 바로 당신이군요?"

"그래요." 브레드 핸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적당한 값이라고 생각하는데......."

"값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네 태도를 말하는 거예요. 이모님이 돌아가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팔라는 이야기를 꺼내다니, 예의가 아니잖아요! "

푸른 눈이 험상스러워졌다.

"멋대로 상상하기 전에 확실한 것을 조사하는 것이 어때요? 로라는 1년도 더 전에 그 땅을 우리에게 팔라고 유언장을 다시 쓰기로 결심했던 거예요. 다만 원안을 고쳐 쓰지 못했을 뿐이에요. "

"증거가 있나요?"

"내 말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하는데요." 사나이의 턱이 굳어졌다.

"물론이에요." 후라가 난처하다는 듯이 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언니, 도대체 왜 그래?"

그것은 이브로서도 알 수 없었다. 무의식중에 말이 입 밖으로 나와 버린 것이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이미 말한 이상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나는 단지 핸슨씨 말씀대로 사정을 좀 더 소상히 알려고 했을 뿐......."

"브레드라 불러 줘요." 그는 여전히 굳어진 어조로 말했다. "가식적인 말은 필요치 않습니다. 왜 자신의 의중에 있는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없어요!" 후라가 얼른 말을 받았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요. 언니, 어서 그렇다고 말해!"

"그 이야기는 일단 보류하기로 하죠, 커피를 마시고 즉시 날아가야 점심 전에 도착할 테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브레드가 말했다.

"날아가요? 여기서도 비행기로 가야 하나요?" 그는 후라에게만 미소를 보냈다.

"그것이 제일 빠른 방법이니까요.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죠. 여기에 대해 불만이 있나요?" 이브에게 향해진 얼굴에서는 따스함이 사라져 있었다.

"좋아요." 이브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브의 신경은 활줄처럼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남 앞에서 이런 태도를 취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왜 그런지 이 사람의 태도 하나하나가 모두 비위에 거슬렸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깊은 도랑이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다. 이브는 그것을 뛰어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녹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세스나를 점검하는 브레드의 모습에 후라는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틈엔가 이 사나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원래가 감각적인 편이지만, 이국에서, 지금까지 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타입의 사나이를 만나자 그 경향이 더욱 조장된 모양이었다. 나 역시 이런 남자는 처음이다. 그렇다고 주눅이 들 것까지는 없다. 그는 우리의 소유물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보다 우위에 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후라는 쉬지 않고 브레드에게 말을 걸었다. 이브는 대화에 끼여드는 것을 단념하고 눈 아래 펼쳐지는 경치를 바라보았다. 오키초비 호수를 지나자 작은 숲과, 그리고 농가가 점재하는 평야가 나타났다. 비행기가 도착했을 때 처음 느꼈던 플로리다의 인상과 이 광대한 대지가 주는 느낌은 도저히 결부시킬 수 없었다.

강가를 따라 마지막 몇 킬로를 날자, 다이아몬드 바의 중심을 이루는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채에서 4백 미터쯤 떨어진 길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트레일러하우스는 목부들의 숙소라고 브레드가 설명해 주었다. 그 중에는 결혼하여 자식을 가진 사람도 있는데, 그 아이들은 버스로, 제일 가까운 마을의 학교에 다닌 다고 한다.

브레드는 세스나를 안전하게 작은 격납고 앞에 착륙시켰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지붕 없는 지프에 두 사람의 슈트케이스를 옮기고 나서 비행기를 돌리러 갔다.

머리 위에서 한낮의 태양이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브레드가 어째서 모자를 쓰고 있는지를 이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일단 머리에 쓰면, 그는 모자를 쓰고 있는 사실을 잊어버리는지 비행기 안에서도 그것을 벗으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이렇게 더운가요?" 후라가, 격납고에서 돌아와 지프의 운전석에 앉은 브레드에게 물었다.

"봄이니까 그렇지. 지금이 제일 좋은 계절이지. 조금 더 있으면 비가 많이 오지. 하기는 비가 더위를 약간 식혀 주기는 하지만, 모두들 주말이면 대개 바다로 나가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목장주들 뿐이겠죠? 누군가가 목장을 돌봐야 할 테니까요." 이브가 냉담하게 말했다.

"윤번제로 목장을 돌보지." 브레드가 지프를 출발시켰다. "꼭 붙들고 있어야 해요. 결코 길이 좋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브는 많은 짐과 함께 뒷좌석에서 흔들리면서, 1에이커에 1천 달러나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자기 집 앞의 도로 정도는 고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마음속으로 욕을 했다.

하늘에서 볼 때는 잘 몰랐으나, 다이아몬드 바의 중심을 이루는 건물은 수도 많고 외관도 가지각색이었다. 밖에 가솔린 탱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두 대의 소형 트럭이 급유를 위해 정거해 있었다. 두 사람의 운전사는 모두 데님 상하에 부츠, 차양이 넓은 모자 등 전형적인 카우보이 스타일이었다. 두 사람이 지나가는 지프를 향해 손을 흔들자, 브레드도 가볍게 손을 들어 그에 답했다.

안채는 길게 지은 단층으로, 넓은 포치에는 갖가지 꽃이 만발해 있었다. 잔디는 금방 손질하여 물을 뿌린 듯, 잎에 묻은 물방울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이제 다 왔어요." 브레드가 날렵하게 지프에서 내리며 말했다. "식사 전에 세수를 하겠다면, 마리아가 방으로 안내할 거요."

"서클스리는 너무 멀어서 오늘중으로 가지 못한다는 뜻인가요?" 이브가 되도록 침착을 유지하려 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당신에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어요......."

"폐가 될 것도 없어요, 방은 많으니까." 브레드는 이미 슈트케이스를 운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방의 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이브 쪽으로 향한 브레드의 표정은 돌처럼 굳었다. "30분이면 아가씨들을 그리 데려갈 수 있지. 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소."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

"훌륭한 이유가 있지. 알렉스 센이 와서 사정을 자세히 알릴 때까지 아가씨들은 그곳에 용 무가 없어요. 본인이라는 증거도 필요하고."

"필요한 서류를 가져왔어요, 우리는......"

"그런 것은 내가 알 바 아니오. 알렉스는 금요일에 오기로 되었으니까, 그때까지는 어떻게도 안 돼요!"

오늘은 화요일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사흘이나 이 사람과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말인가!

"집은 아직 그대로 있겠죠? 로라 이모님의 유지를 상당히 어긋나게 해석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브레드는 놀라서 항의하려는 후라를 무시하고 이브 쪽을 향해서 말했다.

"로라는 생애의 마지막 몇 달을 이 다이아몬드 바에서 지냈죠.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조카보다 우리가 로라의 생각을 더 잘 아는 것은 자연스런 일 아닐까요?"

"하지만 이모님은 유언장을 고치지 않았어요.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 있죠. 당신에 대한 나의 인내력이 한도에 달했다는 의미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 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현관 앞에서 말다툼을 하기는 싫군요. 나중에 그 생각을 정정해 주도록 하죠!" 이 말에는 분명히 위협의 뜻이 깃들여 있었다.

이때, 쿠바인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생각되는 나이든 여성이 집에서 나왔다. 그녀의 검은 옷은 이 계절에 너무 무더울 것같이 여겨졌으나, 갈색 살갗에는 땀 한방울 나 있지 않았다. 이브의 이마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님을 안내해줘요, 마리아. 슈트케이스는 내가 옮길 테니까."

이브는 그녀를 따라가는 데 약간 주저했다. 이브가 겨우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도 후라가 작은 소리로 탄원했기 때문이다. 입구의 홀은 넓은 거실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시원해 보이는 그린과 레몬빛의 실내장식이 잘 손질된 목재의 가구를 훌륭하게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차양이 달린 창문으로부터는 부드러운 햇살이 은은히 비쳐들고 있었다.

마리아는 거실을 가로질러, 양쪽에 문이 있는 복도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방은 이웃해 있었다. 킹사이즈의 침대도 욕실도 훌륭했다. 점심 식사는 15분 후라고 마리아가 말했다. 이것이 그녀가 입 밖에 낸 유일한 말이다. 마리아는 언제나 이렇게 말이 없는지, 아니면 초대하지 않은 손님에 대한 무언의 항의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굳이 추궁하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으므로.

"어째서 브레드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지? 언니답지 않아, 이브." 단둘이 남자 얼른 후라가 입을 열었다.

"나는 브레드를 믿지 않아." 이브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정말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우리를 만나기 전부터, 당연히 우리가 그 땅을 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그야 당연하지 않겠어? 그 이상 좋은 조건도 없다고 센도 말했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제안에 불과하지 않니? 우리는 아직 승낙한 것이 아니야."

"그건 억지야."

"어째서? 나는 우리 일을 남이 멋대로 결정하는 것은 싫어." 이브는 열려진 창문을 통해 넓은 목초지를 바라보았다. "이모님이 유언장을 다시 쓰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몇 달이나 여기서 지내시면서도 말이야. 나는 그것이 알고 싶어."

"이모님의 영혼이라도 부를 생각인가?" 빈정대는 목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왔다. 브레드가 들어서자 큰 방이 꽉 차는 것 같았다. "잠시 그 이야기는 덮어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할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

"미안해요, 브레드." 후라의 시선이 키 큰 플로리다인에게 향해졌다. "언니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당연히 당신의 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말이에요."

후라를 향한 푸른 눈의 표정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걱정할 것 없어요, 곧 분명해질 테니까. 어느 것이 누구 슈트케이스인지 말해 주면 각자의 방으로 옮기겠어."

미드호프에 남기고 온 후라의 보이프렌드들은 그녀의 미소를 자기 쪽으로 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는데, 이 남자는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 동생이 어떤 감정을 갖건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을 바꿀 뜻도 없었다. 혼자서 그 사나이와 대적해야 한다고 해도 나는 하고야 말 것이다. 로라 이모를 위해서라면 전 세계를 상대한다 해도 상관없다!

 

2

점심식사 전에 옷을 갈아입을 틈이 없었기 때문에, 이브는 세수를 하고 머리만 벗기로 했다. 욕실에서 나오자, 언니에 대한 반발심과 미안하다는 마음이 뒤섞인 듯한 얼굴을 한 후라가 서 있었다.

"언니는 내가 응원할 줄 알았겠지? 하지만 응원할 수가 없어. 언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이야."

"응원 같은 건 안 해줘도 좋아." 이브가 조용히 했다. "너는 이 일에 상관하지 않아도 돼."

"그럴 수는 없지 않아? 목장의 절반은 내 것이니까 - 법적인 문제가 해결된 뒤가 되겠지만. 나는 언니 생각에 찬성할 수 없어. 나에게도 언니와 대등한 발언권이 있다고 생각해!"

"그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목장을 보고 난 뒤에 내려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 그곳은 로라 이모님이 몇 십 년이나 산 곳 아니니? 그런데도 무언가 느끼는 것이 없어?"

"글쎄, 언니 정도로는......." 후라는 입술을 깨물고 언니를 노려보았다. "언니, 언니는 출발하기 전부터 이것을 계획했었지? 처음부터 목장을 팔 생각이 없었던 거야. 그러면서도 백만 달러가 손에 들어온다는 말을 했어. 어째서지?"

"팔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팔아야 할지 어떨지는 먼저 목장을 보고 나서 결정하자는 거야."

"그 값보다 더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글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선 이렇게 대답해 두기로 했다. "너도 말했듯이, 아직 그 땅은 정식으로 우리 것이 되지 않았어. 법적으로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해."

오랜 침묵 끝에 후라는 언짢다는 듯이 동의했다.

"알았어, 하지만 브레드를 사기꾼 대하듯 하지는 말아 줘. 그것뿐이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후라의 사랑스런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도 좋으니?"

"그렇게 멋진 사람을 난 아직 보지 못했어. 그도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부탁이야,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는 말아 줘." 후라는 눈을 빛냈다.

이브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브레드 핸슨과는 불과 두 시간 전에 만났을 뿐인데.

"그 사람은 적어도 너보다 열 살은 많아. 그리고 결혼했을지도 모르고."

"결혼하지 않았어. 내가 물어 보았는걸, 슈트케이스를 옮겨 줄 때. 점심은 부인과 같이 먹느냐고 슬쩍 물었지."

이브는 무척 교묘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후라는 지금까지 어떤 남자든 무릎을 꿇게 했으니까, 그런 기교는 몸에 익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레드 핸슨도 자신의 이성에 대한 영향력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눈앞에 있는 꽃을 꺾는 일도 마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에 그에게 이런 생각이 없다면? 그 생각이 불러일으킨 감정을 분석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이것은 보호자로서의 본능이라고 이브는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나는 후라의 행복을 마음으로부터 원하고 있으니까.

 

두 남자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버트 핸슨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자매는 충격을 받았다. 어째서 브레드는 미리 말하지 않았던 걸까?

두 사람이 부자 사이라는 것은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풍상을 겪은 흔적이 있을 뿐 얼굴 모습은 똑같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아버지의 얼굴에 깊이 팬 주름살은 나이 때문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 사람은 어떤 고뇌를 겪고, 아직도 거기서 완전히 탈각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쪽으로 돌려진 눈에는 감탄의 빛 이외의 어두운 그림자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출생 증명서를 보지 않아도 아가씨가 로라 크란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금세 알겠어. 몇 십 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로라와 아가씨는 똑같으니까 - 한 가지, 바지만은 제외하고. 그 무렵에는 여성이 바지를 입지 않았으니까."

"시대가 변했으니까요. 지금은 외모보다도 실용성을 우선하는 시대예요." 이브가 웃으며 말했다.

"말씨도 로라를 닮아서 논리가 정연하군." 버트는 이렇게 말하고 이번에는 후라를 바라보았다. "이쪽은 아직도 귀여운 소녀로군. 그래, 그 머리는 진짠가?"

"농담을 하시는 거야." 후라가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자, 브레드가 도와주었다. "아버지, 그만 하세요. 그녀는 방금 도착했어요."

"대환영이오." 버트는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손을 휠체어의 바퀴에 가져갔다. "자아, 점심이나 먹도록 하지."

식당은 널찍했다. 긴 테이블에는 네 사람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제일 구석에 아버지, 그 양쪽에 두 여자를 앉히고 브레드는 후라 곁에 자리 잡았다. 그의 옆에 앉게 되자 후라는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브레드가 모자를 벗었다. 윤기 있고 풍성한 머리 - 어디를 훑어봐도 활기가 넘쳤다. 어떤 집단에 가도 그는 눈길을 끌 것이다.

마리아는 말없이,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차례로 날라 왔다.

"그녀는 항상 말이 없지." 버트가 설명했다. "남편도 마찬가지야. 브레드의 어머니가 20년도 전에 두 사람을 고용했는데, 그녀가 죽은 뒤에도 계속 이 집 살림을 맡아 하고 있지. 둘째 번 아내는 살림에 전혀 흥미를 갖지 않았었으니까. 어차피 알게 될 테니, 내가 먼저 말하지. 4년 전에 나는 20세 연하인 여성과 재혼했는데, 그녀는 이 사고가 생긴 2주일 후 집을 나가 버렸다오." 버트는 휠체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노인은 바보라고 하는 말이 맞아."

"어떤 사고.......? "

"승마 중에 말이 심장발작을 일으킨 거지. 나는 말과 같이 둑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운수 사납게도 말에 깔렸지."

"어머나.......그럴 수가!"

노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3년 정도 되니 이런 상태에도 익숙해지더군, 다행히 자식이 뒤를 이에 주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전부터 그가 30세만 되면 은퇴하려 했었는데 그것이 좀 앞당겨졌을 뿐이지. 그건 그렇고, 브레드에게 들었는데 아가씨들은 서클스리에 살 생각이라면서?"

"잠시 동안일 뿐이에요." 후라가 얼른 대답했다. "언니는, 로라 이모님이 1, 2주간만이라도 우리가 거기 사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집은 몇 달 동안이나 폐쇄해 두었으니까 환기를 시켜야 할걸. 가끔 코너즈가 돌보기는 했을까?"

"안했을 겁니다. 그가 할 일이 아니니까요." 브레드가 대답했다.

"이모님은 어서 병이 나아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던가보군요?"

이브의 물음에 브레드의 무표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로라는 뇌종양에 걸렸었어. 의식을 잃기 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지."

이브는 충격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묵묵히 브레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이러한 그녀를 동정하듯 버트가 입을 열었다.

"로라는 아는 사람과 같이 있기를 원했었지.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는 대신에 이리로 왔던 거요. 마지막 두 달 동안은 간호원이 함께 설면서 돌봐주었지만, 진통제 덕분에 고통도 별로 모르고 잠들 듯이 숨을 거둔 거라오."

"가엾은 로라 이모님!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았었더라면......"

"비록 알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오. 자아,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두기로 하지. 집은 알렉스 센이 곧 사람을 사서 손질을 할거요. 이틀쯤 걸리겠지만 굳이 서두를 것은 없지. 아가씨들이 여기 있으면 우리도 즐거우니까."

이브가 미소 지었다.

"따뜻이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죄송해서......"

"천만에. 귀여운 아가씨들이 있으면 집안이 명랑해져서 우리가 되레 고맙지."

이 말을 듣고 브레드가 검은 눈썹을 빈정대듯 치켜 올렸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분명히 그는 후라만은 <귀여운 아가씨>로 생각할 것이다. 조롱하라면 하라지, 그렇다고 내가 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이브는 생각했다. 외모에 대해서라면 나는 자신을 잘 알 고 있다.

"제일 가까운 시가지는 어디 있죠?" 이브가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무엇을 가지고 시가지라 하는지는 모르지만, 서쪽으로 8킬로 정도 가면 리스빌이 있지. 잡화점과 술집, 식당 정도가 있을 뿐이지만."

"보안관도 있고 형무소도 있지. 작지만 깨끗하고 아담한 곳이지."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오늘 오후에 아가씨들을 안내하는 것이 어떻겠니, 브레드?"

'다음 기회에' 하고 이브가 말하려 했을 때 후라가 얼른 끼어 들었다.

"좋아요! 괜찮겠죠, 브레드?"

"좋아." 브레드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브에게 "만일 내키지 않는다면 여기서 아버지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도 좋아요." 하고 말했다.

"천만에. 늙은이와 상대하는 것은 지루한 일이야." 버트가 말했다.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이브가 생긋 웃으며 부탁했다.

"그렇다면 고맙겠지만." 버트는 즐거운 모양이었다.

브레드와 단둘이 외출하게 되자, 후라는 생선을 눈앞에 둔 고양이처럼 마음이 들떴다.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기다려 주세요. 괜찮겠죠?"

"기다린 보람이 있을 경우에는 전혀 관계없어." 브래드도 즐거운 듯이 대답했다.

이브는 평소의 습관대로 테이블을 정리하려 하다가, 마리아 나름의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우리는 지금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이다. 어서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져야지.

"포치로 나갈까? 이런 좋은 날에 집 안에 있기는 싫거든." 후라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뒤, 버트가 이브에게 말했다.

어째서 자동장치가 된 휠체어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하고 이브는 생각했으나, 버트의 발달된 어깨와 팔의 근육을 보자 그 의문이 풀렸다. 그는 아마 상반신만이라도 우람한 체형을 유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리의 근육이 빠져 있다는 것은 다크블루의 슬랙스 위로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넓은 포치 한쪽에 둥근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 앉으나 저택 주변의 땅 전체와 그 너머의 목가적인 풍경이 한눈에 바라보였다. 여러 모양의 건물에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는데, 그 동작에는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있어 보였다.

"목동들은 지금 거의 소를 몰고 나가 있지. 지금은 일 년 중에서 제일 바쁜 시기거든." 버트는 이브의 말 없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브는 난간에 기대고 서 있는 브레드에게 눈길을 돌렸다.

"당신은 그들과 같이 나가시지 않나요? "

"보통 때는 같이 가요. 그러나 오늘은 다른 용무가 있어서."

"우리 때문이군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대리로 보내도 좋았을 텐데요. 우리를 위해서 하루를 공쳤다면 너무 미안해요."

"미안해 할 필요 없어. 내가 있건 없건 일은 잘 진행되니까."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모두들 합심해서 잘 하지." 아버지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대부분이 몇 년 동안이나 여기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주말이면 소모는 일이 끝나니까, 혹시 흥미가 있다면 내일이나 모레 보러 가도 좋지. 당신은 말을 탈 수 있소?"

"약간은요. 어느 정도의 거리냐가 문제긴 하지만요." 사실은 지금까지 세 번밖에 말을 타지 못했으나, 그 사실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남부 목장까지 지프로 30분이지. 요즘에는 소 떼를 지킬 때밖에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 지프로 가면 안전하니까, 아마 당신이 보고 싶은 것은 뭐든지 다 볼 수 있을 거야."

"나는 모든 것을 다 보고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그렇게 원한다면 내일 데리고 가지." 브레드가 눈을 들었을 때 마침 후라가 집에서 나왔다, 그는 획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걸 눈요기라고 하겠군!"

후라는 여럿이 있는 곳에 오기 전에 잠시 멈춰 섰다. 날씬한 몸에 꼭 달라붙은 컬러풀한 원피스, 가느다란 가죽끈으로 묶은 샌들은 비록 가까운 곳에 간다 해도 좀 사치스러워 보였으나, 후라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래 기다렸죠? 신경질이 난 건 아니겠죠?" 후라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을 경우에는 괜찮다고 하지 않았어? 당신을 꼬집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 곧 차를 가져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

브레드가 가버리자 버트가 입을 열었다.

"그 신발로는 많이는 걷지 않는 편이 좋을걸. 위험하니까."

이것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차려입은 데 대한 은근한 비판이었으나, 후라는 못 들을 체 했다. 만일 그 말을 브레드가 했다면 귀를 기울였을 테지만, 브레드는 그런 경고 비슷한 말은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후라를 귀여운 응석받이 소녀로밖에 여기지 않고 있는 듯했다.

브레드가 몰고 온 것은 차체가 길고 딜럭스한 스테이션 왜건이었다. 후라는 기쁜 듯이 브레드 옆에 앉았다. 동반하는 남자도 차도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빨리 동생의 열이 식었으면 좋겠는데, 브레드도 그 열을 함부로 올리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의 양식은 그도 갖고 있을 테니까.

"당신들이 자매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군. 두 사람은 불과 물처럼 다르거든." 차가 사라지자 버트가 솔직하게 말했다.

"동생은 언제나 귀엽다는 말을 들어 왔지요."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오. 동생한테는 사려 분별이 좀 결여된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지."

이브는 얼른 반론을 폈다.

"그런 의자에 앉아 계신다고 해서 독단적인 말씀을 해도 좋다고 여기시는 모양이지만, 저는 그런 것을 용납할 수 없어요. 동생의 지능은 결코 남보다 뒤지지 않아요!"

침묵이 흘렀다. 이브는 차츰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이 집 손님인 것이다. 내가 한 말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이브가 입을 열자 버트가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신경 쓸 것 없어요. 이 의자를 이유로 내 바위를 맞추지 않은 사람은 아들 녀석을 제외하면 당신이 처음이요. 나는 기쁘게 생각해요." 그는 슬며시 웃기까지 했다. "그래도 나는 아까의 의견을 바꿀 생각이 없는걸. 좀 더 설명을 하면, 동생의 지능이 낮다는 것이 아니라, 지능의 작용에 대해서 말하는 거요."

"하지만, 제 동생과는 겨우 두 시간 전에 만나셨을 뿐이 아닌가요?"

"두 아가씨를 비교하는 데는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경제적으로 수고한 것은 바로 당신이 아닐까?" 이브가 당장 대답을 못하자 버트는 미소 지었다. "대답할 말이 준비되지 않는 모양이군."

"제가 더 많이 내기는 했어요. 그건 언니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전부 낼 필요는 없지."

"동생은 자기 몫은 내놓았어요." 극히 드문 일이었으나, 이브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을 보니 다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 것 같은데? "

"우리는 둘 다 직장을 그만두었어요."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하려고?"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토지의 소유자라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토지는 이용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지. 목장 경영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아들의 제안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 내켜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던데?"

"아들이라고요? 그렇다면 선생님은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점심때 이야기했듯이, 의사로부터 두 번 다시 걸을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날부터 나는 다이아몬드 바의 경영에서 손을 떼었다오. 내 자식이지만 제법 유능해서 이렇게 안심하고 있는 거요."

"그랬었군요."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로라의 유지에 대해서는 당신이 내 아들의 말을 전혀 믿으려고 들지 않는 것 같군. 아니, 좋아요, 이것은 당신과 아들 사이에 논의되어야 할 문제니까. 동생은 그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지?"

그것은 예기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이브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동생은 팔기를 원해요."

"동생에게도 동등한 권리가 있지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간에 우선 그 장소를 보고 나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통 이상으로 관심을 가졌다고는 브레드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을 테지. 그에게 당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해 보는 것이 어떨까? 어쩌면 타협점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예를 들면요?"

"예컨대........글쎄. 당신들이 서클스리의 집에 살기를 바란다면 아들도 쾌히 승낙할 것 같군. "

"세든 사람으로서 말인가요? 개인적인 감정은 차치하고라도 그것은 무리일 것 같아요, 핸슨씨."

"꽤 완고하군." 버트는 한참 동안 이브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개인적인 감정은 차치한다는 말이 자못 이상하게 들려요. 아들이 꽤나 당신을 화나게 만든 모양이지? 지금까지 그애가 남하고 다툰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자와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물론 그럴 테지, 그 커다란 갈색 손가락으로 신호만 보내면, 여자들은 황송해서 무릎을 꿇었을 것이 틀림없다. 후라가 그 좋은 예다. 이브는 어깨를 으쓱했다.

"서로 마찬가지예요. 저도 하고 싶은 말은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럴 테지. 아뭏든 그 문제는 나중에 둘이 의논해서 해결하도록 해요. 나로선 할 말은 다 했으니까."

후라와 브레드가 돌아온 것은 여섯 시가 지나서였다. 이브가 저녁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후라가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어디까지 갔었는지 알아? 우리는 리스빌에 갔다가 멀리 드라이브했어. 다이아몬드 바를 보여주었어, 물론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전부를 보려면 하루 종일 걸릴 테니까. 18만 에이커나 된대. 그러니 이모님 땅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서클스리와의 경계에 있는 울타리를 보았어. 브레드가 그 땅에 욕심을 내는 이유를 알았어. 자기 땅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1에이커당 천 달러면 괜찮은 값이야."

"그것이 시세야. 브레드가 우리한테 특별히 은혜를 베푸는 게 아니야. 그 값이라면 누구에게든지 팔 수 있어."

"남의 땅에 둘러싸인 목장을 사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란 사실을 제외하면 그렇지."

오늘 외출로 브레드는 완전히 후라를 편들게 된 모양이었다. 이브는 전술을 바꾸었다.

"브레드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게 돼. 그래도 괜찮니?"

"브레드는 우리가 서클스리에 얼마든지 있어도 괜찮다고 말했어. 집은 우리가 써도 된대."

"어마, 친절하구나!" 이브는 비꼬듯 말하고, 흰 코튼 드레스를 입고는 드레서 앞에 앉아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저녁식사는 일곱 시야. 너는 준비하지 않니?"

"언니는 질투하는 거지, 그렇지?" 갑자기 후라가 말했다. "브레드가 내가 아니고 언니에게 관심을 보였다면 언니도 그런 태도를 취하지는 않을 거야!"

"나는 브레드 핸슨에겐 전혀 흥미가 없어!" 그 말은 이브 자신의 귀에도 어리석게 들렸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네가 상처를 입지 않을까 하는 거야. 그는 미드호프에서 교제하던 남자들하곤 달라."

"일부러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는 남자아이가 아니라 사나이야. 그런 사람은 아직 본 일이 없어. 무어라 할까........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을 갖고 있어."

이브는 마음속으로 화를 냈다.

"그 사람과 만난 지도 얼마 안 되잖니? 너무 열을 올리지 않는 것이 좋아."

"언니는 역시 질투하고 있는 거야! 더 이상 간섭하지 말아 줘, 이브. 나도 이제 스물 한 살이야. 그도 이 사실을 분명히 인정해 주고 있어!"

이브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가는 동생을 바라보면서, 브레드와 한번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되도록 빨리.

 

3

식사 후에는 모두 한가한 시간을 가졌다. 버트는 로라 이모와 조스가 살아 있을 무렵의 바베큐 파티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모네와 버트가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보니, 양가 사이에 적의 같은 건 없었다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다. 건강한 두 다리로 서 있는 버트의 사진은 이브의 가슴을 찔렀다. 지금은 완전히 현재의 환경에 적응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지만, 잃어버린 것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최근 사진이 없어서 유감이군. 하지만 로라의 집에는 많이 있을걸. 그녀는 사진을 좋아했으니까. 자그마한 노스탤지어라며 웃곤 했지. 그녀는 정말 사람이 좋았어. 브레드의 어머니하고는 무척 친했었지."

첫 부인 사진을 보았으면 하고 생각했으나, 브레드의 존재에 신경이 쓰여 결국 말을 못하고 말았다. 브레드와 후라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후라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팔은 아무렇게나 등받이에 얹고 있었다. 때때로 후라의 목덜미가 그 팔에 닿았다. 브레드와 눈길이 마주쳤을 때 이브는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브레드는 단 하나의 목적 때문에 동생을 친절히 대하고 있다 - 그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녀가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만일에 내일 정말 나와 같이 가겠다면, 여섯 시에 출발하려 하는데, 가겠나?" 열 시에 마리아가 커피를 가져왔을 때 브레드가 무감정하게 말했다.

"가다뇨, 어디를?" 이브가 묻기에 앞서 후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부 목장이지. 언니는 우리 일을 보고 싶어할 테니까."

"나도요! 나도 데려가 줘요!"

"그러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브레드는 눈을 이브의 얼굴로 돌리고, "어떻게 하겠소?" 하고 물었다.

"좋아요, 준비하겠어요."

"나도요. 두 사람 모두 오케이예요." 후라가 얼른 말했다.

"모두들 여섯 시에 출발해야 하니까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겠군. 어쨌거나 나는 이제 쉬어야 하겠는걸. 열 두 시간이나 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감각이 없는 곳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럼, 내일은 돌아 온 뒤에 만나기로 하지."

버트가 가버린 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맨 먼저 침묵을 깨뜨린 것은 이브였다. 그녀는 하품을 참는 체 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도 실례하겠어요. 아직 여행의 피로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요. 후라, 너도 가서 쉬지 않겠니?"

"나는 전혀 피곤하지 않아. 자기 전에 산책을 좀 하고 싶어. 밖에 나가 산책을 한다 해도 길을 잃지는 않겠죠, 브레드?"

"하지만 예기치 않은 것에 부딪칠 가능성은 있지. 예를 들면 범 같은 것. 나라면 한칼에 베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야말로 후라가 기대했던 말일 것이다. 이번의 유혹 방법은 그다지 교묘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구태여 교묘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브레드는 기꺼이 그녀의 리드에 따를 것이다. 어쩌면 그는 정말 후라에게 이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얼굴과 애교 있는 태도에는 어떤 남자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브는 얼른 이 생각을 지워 버렸다. 브레드 핸슨은 여자의 리드에 이끌려 갈 사람이 아니다. 그는 후라의 희망에 기꺼이 응할 것이지만, 그때뿐이지 장차 어떻게 할 것인지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을 것이다. 아아, 어서 후라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침대에 들어가 30분쯤 지났을 때 옆방에서, 후라가 돌아온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안심해도 좋을 텐데 이브는 전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고향에서 수천 킬로나 떨어진 이 낯선 곳에서,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모든 일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로라 이모도 처음에 여기 왔을 때는 이처럼 허전한 마음이 들었을까? 그러나 로라 이모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에게 의지할 수도, 또 그 사람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시 영국에 그대로 있으면서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겼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만일 그랬다면, 그때 플로리다에 갈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며 일생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여기에 오기를 잘했다. 비록 일이 잘 되지 않는다 해도. 그리고 막 여기에 도착했을 뿐인 것이다. 일찍부터 패배를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이브는 그 후에도 30분가량은 더 몸을 뒤치다가, 자는 것을 단념하고 일어나 실내복을 입었다. 어디에 갈 예정은 없었으나, 어쨌든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집안은 캄캄하고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브는 가만히 현관문을 열었다. 후텁지근한 밤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그래도 이것이 좋았다. 잠시 포치의 의자에 앉아 있으면 머리가 조금은 맑아질 것이다.

이브는 포치의 난간에 의지하고 넓은 앞뜰을 바라보았다. 어디선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으나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거기 응답하듯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오지 않나?" 포치 한구석에서 브레드의 음성이 들렸다. "장소가 바뀌면 누구나 하룻밤쯤은 잠을 못 이루는 법이지."

천천히 돌아본 이브의 눈에,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브레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 말고도 일어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어요."

"마침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당신이 나오는군." 브레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방해를 해서 미안하군요."

"천만에.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

순간 이브의 가슴이 심하게 물결쳤다.

"특별히 나눌 이야긴 별로 없잖아요. 내게는 내 견해가 있고, 당신에겐 나름의 생각이 있을 테니까."

"당신과 나의 생각은 영원히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 이 말인가?" 브레드가 빈정거렸다.

"당신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어. 동생이 언니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을 모르는 줄 아세요? 후라가 찬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보고 양보하라는 것인가요?" "그녀에게는 권리가 있어."

"내게도 있어요, 후라하고 동등한 권리가 말예요."

"적어도 동생의 생각은 아주 현실적이야." 브레드는 공격적으로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어."

이브는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어둠을 향해 미소 지었다.

"나는 목장을 직접 경영하려고는 생각지 않고 있어요. 누군가 우리........우리를 대신해서 운영해 줄 사람을 찾을 생각이에요. 아버님이 말씀하신 코너즈란 사람, 그는 목장감독인가요?"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명령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은 그지만 실제 책임자는 아니지."

"그럼, 이모님이 병든 뒤 서클스리를 돌본 사람은 누구죠?"

"나였지." 브레드가 조용히 말했다.

이브는 순간 말이 막혔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당신에게는 아주 유리한 이야기로군요."

"어째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토지뿐이야. 다른 것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어."

"그렇다면 왜 서클스리의 운영을 계속했죠?"

"왜냐고? 서클스리가 잘 운영되면 로라가 기뻐할 것이기 때문이었지. 로라는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목장을 팔지 않겠다고 조스와 약속했거든, 하기는 이 말을 들었다고 해서 당신이 생각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당신은 아직도 내 의도를 의심하고 있지? 후라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내가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했다거나 하면서?"

"글쎄요. 나를 설득하기 위해 당신이 지금 후라에게 접근하듯이 말이죠."

"아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 그 이외에는 후라에게 나의 관심을 끌 만한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나?"

"물론 그녀는 매력적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덤이에요. 후라는 무방비 상태예요. 당신은 그런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나요?"

브레드는 조롱하듯 나직한 소리로 웃었다.

"후라의 미모와 싸우기는 용이하지 않았겠지, 허니?"

"그것은 내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에요." 이브는 지지 않고 말했다.

"대답할 필요가 없지. 그녀는 이미 어른이니까."

"동생은 당신 같은 사람과 교제한 경험이 없어요!"

"당신은 있나?" 브래드가 입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남자로서 어떤 범주에 들어가는지 지금부터 말할 생각이겠지?"

"달콤한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당신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이용 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나?"

"그래요." 이브는 기대고 있던 난간에서 갑자기 몸을 일으켜 꼿꼿이 섰다. "이런 이야기는 계속할 필요도 없겠어요."

"동감이야." 브레드도 일어섰다. 그리고 한두 걸음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더니 이브를 끌어안았다. 이어서 그의 얼굴이 내려왔다.

1, 2초 동안 몸부림을 쳤을 뿐 이브는 저항을 단념했다. 이쪽에서 무감각하게 있으면 그도 싱거워져 손을 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상하게도 그녀의 의사에 반해서 움직였다. 자기 혐오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브는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렇다. 나는 일시적으로 약해졌을 뿐이다. 그는 이것을 이용하여 나를 꼼짝 못하게 할 공세를 펴겠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나는 지금까지 자매 중 엉뚱한 쪽에 시간을 쏟은 것 같군. 언니 쪽에 숨겨져 있는 이 불꽃을 몰랐으니까! 점잖은 영국 부인같이 굴기에 감쪽같이 속았어."

이브는 있는 힘을 다해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 일을 가지고 멋대로 생각지 마세요. 갑작스런 일이라서 - 그것뿐이에요."

"나는 당신이 탐나." 소프트한, 그러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목소리였다. "지금 여기서는 그것 밖에 생각할 수 없어. 이렇게 빨리 내 마음을 부추긴 여자는 처음이야. 어때, 우리 사이의 의견 차이를 특별한 곳에서 조정하는 것이?"

이브는 홱 고개를 들었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하게 만든 원인은 내게 있다. 브레드는 결코 이것을 잊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거절하겠어요. 나는 그런 취미는 없어요. 미안하지만, 비켜 주시겠어요?"

브레드는 움직이려 하지 않고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 내면에는 표면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군. 혹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온 게 아닌가?"

"당치도 않아요! 도대체 어떤 목적이 숨어 있다는 거예요?"

"글쎄, 잘 알지는 못하겠어. 알고 있는 것은 당신이 고의적으로 나를 도발시켰다는 것뿐이지." 브레드는 이브의 턱에 손을 대고 고개를 자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당신은 만나는 순간부터 내게 반감을 표했어. 어째서지?"

"알고 있을 텐데요. 당신은 호텔 로비에 들어올 때 안하무인의 태도로 거드름을 피우며 들어왔었어요."

"내가 기어들어 갔다면 환영해 주었겠나?"

"사람을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 그때부터 나는 당신이 싫었고, 지금도 좋아하지 않아요. 아까 그 일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순간적인 반사작용에 지나지 않아요, 누구든 그런 상황에 처하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거예요."

"그 반응의 도는 여간이 아니었어!" 그는 조롱하듯 말하고 갑자기 이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아직도 계속 나타나고 있어. 당신을 융해점까지 가져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너무나 오래 걸려서 아마 당신은 기다리지 못할 거예요. 다른 사람한테나 가보시지 그래요."

"당신 동생한테?"

"안 돼요!" 이브는 입술을 깨물고, 어깨에 얹힌 그의 손길을 무시하려 했다. "후라에게 손을 대면 안 돼요! 듣고 있나요? 그녀를 건드리지 말고 내버려두세요!"

브레드는 이브를 내려다보며 엄한 목소리로 명령조로 말했다.

"서클스리의 일로 나를 방해하지 말아 줘. 그 땅을 손에 넣을 날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어."

이브는 몸속에서 치솟는 덩어리에 저항하고 가슴의 뜨거운 뭉치를 삼켜 버리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만 항복해 버리고 싶었다.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그럼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세요."

"오케이. 이제야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군." 브레드가 손을 움츠렸다. 조롱하듯 입가에 냉소를 떠올렸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줄 알았지. 당신과 후라는 대조적이군. 그녀는 어쩌면 그렇게 순진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사권 사람들이 그녀를 존중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당신과 달라서."

"나는 순진하다고 했지, 무경험이라고는 하지 않았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즉, 후라는 자기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그 손안에 들어오리라 생각한다는 점이지. 그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점이야."

"지금까지는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손에 넣었어요."

"그렇다면 언젠가는 눈을 뜰 필요가 있겠군."

"당신이 그렇게 할 생각이세요? 그녀를 우선 이용하고, 그리고 나서 사실을 말할 생각인가요?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당신은 말할 테죠, 그것이 진짜 친절이라고요. 아니면, 당신은 일부러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당신은 토지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겁한 수단이라도 쓸 사람이에요!"

"내가 당신이라면 그 정도로 입을 다물 텐데." 부드럽지만 위험한 어투로 그가 말했다.

"당신을 응징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어!"

"나는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에요!"

"좋아. 오늘은 이만 하기로 하는 것이 어때?" 브레드는 강철과 같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내일, 다시 올 생각이 있나?"

싫다고 하면 그를 무서워하는 것이 된다. 이브는 얼른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여섯 시 정각에 이리로 오겠어요, 후라와 같이."

"글세, 어떨까. 실제로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면 믿겠어."

리빙룸을 지나 복도를 걷던 두 사람은 잘 자라는 인사도 없이 좌우로 헤어졌다. 자기 방에 들어서서야 이브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에 기대어 흐트러진 침대를 보면서, 여기서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했다.

마음을 태우는 불꽃은 아직 꺼지지 않고 있었다. 이브는 목덜미에 손을 얹고 종전의 자신의 행동을 되새겨 보았다, 마치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이유를 찾아내려는 듯. 내가 나빴던 것이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휴대용 자명종 벨이 다섯 시 반을 알렸다. 깊이 잠들었던 것은 불과 두 시간이었다. 피곤했다. 이브는, 처음부터 이런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인데 하고 후회하면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진즈에 체크무늬 코튼 블라우스, 그리고 싸늘한 아침 공기를 생각해 그 위에 스웨터를 걸쳤다. 이런 경우에는 부츠가 좋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워킹슈즈를 신었다.

정말 말을 타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정직하게 말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랬으면 브레드의 태도도 달라졌을 텐데.

어젯저녁의 기억이 그녀를 전율케 했다. 브래드를 만나기 전에 그 일에 대해 좀 정리해 놓아야지. 나는 불과 1, 2초 동안 자제심을 잃었을 뿐이다 - 그것밖에 없다. 그는 자신에 대해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알 리가 없고, 또 알았다 해도 상관없다. 몸과 마음은 별개의 것이니까. 반사작용 - 그렇다, 단순한 반사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후라는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다. 깨우기가 미안했으나 깨우지 않으면 나중에 원망을 들을 것 같아, 이브는 후라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후라! 여섯 시 10 분 전이야! 일어나! 가려면 서둘러야 해!"

후라는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흩어진 금발 위로 담요를 끌어올렸다.

"후라!"

"알았어, 이제 곧 일어날께!" 후라의 눈은 아직 꼭 감겨 있었다.

영국에서도 후라를 여덟 시 전에 깨우기가 용이치 않았던 것을 이브는 상기했다.

"브레드는 기다리지 않을 거야!"

"일어나겠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옷을 갈아입는 중이라고 그에게 말해 줘.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후라는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고 말만했다.

이브는 단념했다.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다음 일은 후라의 의지에 맡길 수밖에 없다.

브레드는 포치 앞에 세워 둔 지프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빛바랜 진즈와 매치된 셔츠, 오래 써서 흙빛이 된 모자 차림이었다. 그의 푸른 눈과 자신의 눈길이 마주쳤을 때, 이브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잊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이다.

"일찍 일어났군. 후라는?"

"곧 올 거예요."

이브는 그의 곁을 빠져나가 넓은 계단의 맨 위에 섰다. 아침 햇살은 눈부시고 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태양은 이미 지평선 위로 떠올라 한낮의 더위를 예고하고 있었다. 목장은 이미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목동이 젖소 떼를 우리 안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여기서는 육우만 취급하는 줄 알았는데요?" 하고 이브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가용의 젖소는 기르고 있지. 우유를 마셔야 할 인원이 많으니까." 브레드는 어조를 바꾸지 않고 말했다. "앞으로 3분만 더 기다리겠어."

"가서 무얼 하고 있는지 보고 오겠어요."

이브가 얼른 말했으나 브레드는 고개를 저었다.

"깨웠겠지?"

", 하지만........"

"내버려 둬. 후라가 오건 말건 여섯 시에는 출발할 테니까."

끝내 후라는 나오지 않았다. 이브는 동생을 위해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다.

"다시 한번 보고 오겠어요. 아직 자리에 있으면 그것은 동생의 잘못이에요."

"어쨌든 그녀 잘못이야." 브레드는 얼른 운전석에 오르더니 이브를 바라보며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당신도 갈 생각이 없어졌나?"

사실 그랬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이브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넓은 어깨가 자기 어깨에 닿을 만큼 가까이 있다는 것과, 클러치를 밟는, 꼭 맞는 데님 바지에 감싸인 다리를 의식하고 이브는 몸을 긴장시켰다.

"몸을 편히 가져도 좋아. 운전하는 동안에는 어떻게 하지 않을 테니까. 드라이브를 즐기면 되는 거야."

이브도 차차 마음이 안정되어 드라이브를 즐겼다. 도로는 활주로에서 올 때보다도 넓고 땅도 잘 다져져 있었다. 지프는 군데군데 있는 소나무 숲 사이로, 강에 가까와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달려갔다. 철망으로 된 펜스가 한없이 계속되고 그 너머로 보이는 목초는 푸르고 탐스러웠다. 소 떼가 여기저기서 풀을 뜯고 있었다. 모두가 육우라고 브레드가 설명해 주었다. 이미 살 사람이 정해졌지만, 봄의 맛있는 풀을 먹여 살을 찌운 뒤 식품공장에 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브레드의 말에 감상은 섞여 있지 않았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안 되니까.

남쪽 게이트를 지나자, 길은 초원을 둘로 가르는 꼴이 되었다. 몇 백 미터 앞으로 달려가자 작은 숲이 있었는데, 그곳은 캠프 에어리어였다. 트럭이 석 대 서있고, 시냇가 언덕의 떡갈나무에 몇 마리의 말이 매여 있었다.

트럭 옆에 있는 휴대용 풍로 위의 커피포트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가 주위에 서려 있었다. 이브는 갑자기 시장기를 느꼈다.

트럭 위에서 키가 자그마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얼굴 피부는 마치 낡은 부츠와 같았다. 나이는 50에서 70사이로 보였다.

"오늘 나올 줄은 몰랐는데." 사나이가 브래드에게 말했다. "그래, 이 아가씨가 영국에서 온 사람인가?"

"말을 삼가세요, 아저씨. 훌륭한 가문의 아가씨니까." 브레드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처음 뵙습니다." 이브가 태연히 손을 내밀었다.

"이거 원 황송해서!" 사나이는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뱀이라도 보듯 바라보다가 자기 손을 내밀었으나, 이브의 손에는 약간 닿았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얼른 손을 움츠리며 말했다. "여자와 악수하는 것은 평생 처음인걸!"

"이 아가씨가 진짜 카우보이하고 악수하는 것도 난생 처음일 겁니다. 그런데, 뭐든지 먹을 것 좀 없어요? 아침을 아직 안 먹어서."

"물론 많이 있지. 햄에그가 어떨까?"

"콩은요?" 이브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우보이는 늘 콩을 먹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가씨는 콩이 먹고 싶은 모양이로군요. 물론 콩도 많이 있지." 사나이는 노래하듯 말했다. "프라이팬을 달구는 동안 마음대로 커피를 마셔도 좋아요."

브레드는 나무 테이블에서 잘 닦여지고 깨끗한 잔 두 개를 가져와 각각 커피를 따라, 그 하나를 이브에게 건네 주었다.

"잭을 조롱하면 안 돼. 그는 진짜 카우보이니까."

"아까 한 말은 조크예요. 상관없겠죠?" 이브는 커피를 마셨다. "정말 맛있어요!"

"그럴 테지. 당신은 모닝커피는 실컷 마시지 못했을 테니까."

"별로 마시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죠." 이브는 햄을 굽는 냄새에 입맛을 다셨다. "평소에는 아침을 별로 안 먹는데, 오늘 아침엔 배가 고프군요."

"이렇게 일찍 일어나 본 적이 없겠지?" 브레드는 한 발을 트럭 뒤에 걸치고 그 무릎에 팔을 괴었다. "오늘 아침에는 안색이 좋군. 어제 호텔에서 봤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어제는 피곤해서 그랬어요, 시차 때문에. 하지만 후라는 언제나 싱싱해요. 당신은 그 말이 하고 싶었겠죠? 그녀는 미인인걸요."

브레드가 푸른 눈을 이브에게 돌렸다. 예상과는 달리 그 눈에는 조롱의 빛은 떠올라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주 닮았어."

이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바위를 맞추려고 애쓸 것 없어요."

"그렇게는 하지 않아. 그럴 의무가 없으니까. 물론 당신은 그녀처럼 금방 남의 눈에 띄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말을 계속했다. "스타일은 후라보다 당신이 더 좋아, 물론 사람에 따라 달리 볼 테지만. 보이시한 허리와 작은 가슴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볼륨 있는 것이 좋거든."

이브는 얼굴을 붉혔다.

"당신은 어젯저녁에 그것을 확인했다는 말이군요." 브레드가 천천히 웃었다.

"나는 어젯저녁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 자아, 식사나 하지. 오늘 하루를 보내려면 스태미너를 저축해야 하니까!"

 

4

야외에서 먹는 햄에그는 무척 맛있었다. 이브는 두 잔의 커피와 함께 햄에그를 깨끗이 먹어 치웠다.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서 제일 맛있는 햄에그였어요." 그녀는 빈 접시를 가지러 온 잭에게 칭찬과 감사를 섞어 말했다.

"그가 만든 아이리시 스튜를 맛보기 전에는 평가를 삼가는 것이 좋을걸." 브레드도 자기 접시를 내밀면서 말했다. "이제부터는 말로 가야 해. 아파루사에게 안장을 얹어 주겠소, ? 나는 핀트를 타겠어."

이브는 동요를 감추느라 애썼다. 지금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있다. 말을 탄 경험이 별로 없다고 자백하거나 허세를 부려 그대로 타거나 둘 중의 하나다. 여기서 사용하는 안장은 내가 알고 있는 안장과는 상당히 다르다. 버트 핸슨이 낙마했다는 사실을 이브는 마음에서 몰아내려 애썼다.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아무리 브레드라도 익숙지 않은 곳에서 말을 달리라고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이 준비되는 데는 2,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이브는 혼자서 겨우 말에 오를 수 있었다.

"고삐를 잘 잡아요." 브레드가 다가와 고삐를 바로 해주며 말했다. "그리고 발을 똑바로 뻗어. 그랜드 내셔널에 출장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의 지시대로 했더니 확실히 안정감이 있었다. 브레드가 진실을 알아차렸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는 아무것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이브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내 마음을 읽게 해서는 안 된다!

브레드는 부러울 정도로 날렵하게 핀트에 올라타더니, 고삐를 가볍게 잡아당기는 정도로 말머리를 돌려놓았다. 이브는 두 손으로 고삐를 잡고, 처음 말을 탈 때 배운 것처럼 그것을 손가락 사이로 넣었다.

말이 걷기 시작하고 몇 분이 지나자, 이브는 예상과는 달려 쉽게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암말인 아파루사는 스무스하게 걸었으나, 때로는 고개를 흔들며 갑작스럽게 고삐를 당기는 이브에게 저항했다. 이브는 고삐를 쥔 손을 늦추고 한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문제없다, 이 정도라면 떨어질 염려는 없다.

브레드를 선두로 두 사람은 시내를 건너고 숲을 달려 넓은 평지로 나왔다. 브레드의 말이 천천히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아파루사도 곧 그 뒤를 따랐다. 이브는 순간 깜짝 놀라 기우뚱하였으나 곧 균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를 골방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지 몰라도 어림없는 일이다.

목장에 도착하자마자 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발굽에 챈 지면에서는 먼지가 일고 있었다. 이브는 모자를 쓴 브레드가 부럽게 생각되었다. 모자를 쓰고 있으면 입과 눈으로 들어오는 먼지를 조금은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야 그는 이런 먼지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지만. 이미 그는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송아지의 울음소리와 격한 움직임과는 달리 일은 제법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말에 탄 사람이 송아지 목에 로프를 걸어 소떼에서 떼어놓으면, 땅에 서있는 다른 사람이 송아지를 받았다. 낙인이 재빨리 찍혀지고 송아지는 지면에 내려지자 어미소 있는 데로 다시 돌아가곤 했다. 털이 타는 냄새가 주위에 가득 찼다.

"나도 돕겠어!" 브레드는 이렇게 외치고 나서,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을까 봐 이브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30분만 기다려 주겠나?"

"좋아요.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보고 있는 것이 재미있으니까요."

반드시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었으나, 이쪽에서 부탁하여 따라온 것이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좀 더 나은 다른 방법으로 송아지에게 낙인을 찍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반영구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염료를 사용하는 등. 벌겋게 단 쇠로 도장을 찍는다는 것이 이브에게는 잔인하게 여겨졌다. 물론 소들은 화상으로 아파하는 기색도 없이 의외로 곧 태연한 낯을 지어버리지만. 서클스리에서도 아마 같은 방법을 쓰고 있을 것이다. 전통이라는 것은 좀처럼 떨쳐 버리기가 힘든 모양이다. 지금 목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나이들은 자기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낙인을 찍는 것에 긍지를 느끼고 있나보다. 나은 방법을 고안해 내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특히 말이 하는 일은 어떤 자동차로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브레드는 다리가 긴 말로 바꾸어 탔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송아지 목에 로프를 걸어 기다리고 있는 목동에게 넘겨주고, 다시 로프를 거두어 가지고 소떼 속으로 달려갔다. 말과 사람이 완전히 일치되어 움직였다. 브레드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긴 넓적다리의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광경을 이브의 몸속에서 소용돌이 같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어젯밤에도 이와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재빨리 거기에 응해 버렸다. 너무 빠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는 도리가 없었다. 단순한 육체의 반응이라는 것은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어제 내가 느낀 것은 육체의 단순한 반응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어젯밤에 느낀 것을 지금도 느끼고 있었다. 이브는 브레드가 자기한테 주의를 기울여 주었으면 했고, 그의 억센 육체의 존재를 바로 곁에서 느끼고 싶었다. 거기에는 순간적인 기쁨만으로는 충족되지 못할 깊은 욕구가 있었다.

아파루사가 얌전히 있었기 때문에 이브는 안장 뒤쪽에 기대듯이 하여 몸을 릴랙스시켰다. 내일은 온몸이 쑤실 것이다. 지금도 운동에 익숙지 않은 근육이 사방에서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고 있다.

브레드는 앞으로 얼마나 더 여기에 있을 생각일까? 관객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신기함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나도 저 속에 끼여 같이 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이 있다. 후라가 생각을 고쳐먹지 않는 한 꿈은 꿈으로 그칠 것이다. 돈 이상의 것을 바란다는 것이 그렇게 불합리한 일일까?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다는 것을 후라는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서클스리에 살면 우리는 진짜 홈을 가질 수 있다. 아파트는 단순히 먹고 자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틀림없이 내 생각에 찬성했을 것이다. 하기야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어머니가 상속인이 될 테니까 이런 문제는 처음부터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을 돌이켜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간은 미래에 눈을 돌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생각에 역행하듯, 이브는 미드호프에 남기고 온 친구들을 생각해 보았다. 목장에 영주할 생각이라는 말을 했을 때의 텔리의 얼굴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틀림없이 이 일을 극복할 것이다. 아직 26세니까. 그에게 알맞은 여성이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날 테니까.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소 울음소리가 귀에 들리자 깜짝 놀라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고 머리를 들었다. 성난 소 한 마리가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아파루사는 명령도 받지 않고 갑자기 방향을 올리더니, 머리를 흔들어 소를 쫓으려 했다.

그 후 몇 초 동안 이브는 어떻게 자기가 안장에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도와준 것이 말이 아니란 것만은 명백했다. 말은 오직 소를 쫓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이브는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몸을 세게 흔들리면서 필사적으로 말머리에 매달려 있었다. 겨우, 말을 탄 카우보이 한 사람이 나타나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소를 쫓아보내 주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브레드도 빙글빙글 웃으면서, 이제는 얌전해진 아파루사 옆으로 돌아와 콧등을 쓸어 주고 있었다.

"한 가지 가르쳐 주지. 당신이 타고 있는 것은 카우보이용 말이야. 그러니까 난폭한 소의 공격에는 익숙해 있어."

"일이 생긴 뒤에 가르쳐 주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해요! 내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아 유감이겠군요? 좋은 웃음거리가 되었을 텐데!"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아? 승마에 능숙하지 못하면, 여기 올 때 진작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이브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브레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말에서 떨어져 죽어도 모르는 체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별로 위험한 일이 없었기에," 브레드는 이브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주의했어야 했는데, 생각이 미처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었군. 이 근처에 아마추어가 온 것은 처음이니까."

"저 일은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되나요?" 이브는 송아지 한 마리 한 마리마다 낙인을 찍는, 열광적이랄 수 있는 장면을 가리켰다.

브레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지. 지루하다면 미안하군. 하지만 따라오겠다고 한 것은 당신이요."

이브가 대답도 하기 전에 브레드는 돌아가 버렸다. 이브는 그러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황송하게 당신이 자비를 베풀 때까지 내가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줄 아세요? 그런 생각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암말은 이브의 명령에 따라 가만히 달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마음대로 말하고 즐기세요, 나는 먼저 돌아갈 테니까!

게이트에 도착할 무렵에는 화가 좀 가라앉았으나, 그대로 전진할 만큼의 여운은 남아 있었다. 잭이 놀람과 호기심이 섞인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브레드와 같아 오는 게 아니군?"

", 일이 끝나면 올 테죠. 지프를 좀 빌려 주시겠어요?"

"알았어요." 잭은 사람보다 말에 더 신경이 쓰이는 듯 곧 안장을 푸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키는 꽂혀 있는 채였다. 이브는 엔진을 걸고 리버스 기어로 생각되는 것을 돌렸다. 끼익 하는 금속성이 났으나 무시하기로 했다. 이제까지 이런 종류의 차를 운전해 본 일은 없지만, 지금 같아서는 무엇이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운전석이 넓기 때문에 이브는 쉽게 차를 돌릴 수 있었다. 잭이 손을 흔드는 것에 답하며 바퀴 자국이 난 길로 차를 몰았다. 철망으로 된 펜스를 따라가다가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꼬라지면 되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겨우 아홉 시가 지났을 뿐이었다. 이제부터 집에 돌아가도 후라는 아직껏 자고 있을 것이다.

돌아가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는 아직 생각 해 보지 않았다. 집에 가면서 생각해도 된다. 지금은 오직 브레드에게서 멀어지고 싶을 뿐이었다. 이브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의 얼굴을 상상만 해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그는 내가 어디서 길을 잃었을 것이라 여기고 찾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는 말이다! 어쨌건 그와 다시 얼굴을 대해야 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화를 낼 테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얼마 동안 가는 사이에 흥분이 차차 가라앉았다. 그녀는 약간 부끄러워졌다.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브레드는 전혀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그가 매우 걱정한다면? 내 행동은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떳떳한 것이었을까?

이브는 지프를 길가에 세우고 우울한 기분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브레드에게 돌아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프라이드가 용서치 않는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내게 면박을 주는 일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일단 결정한 일이니, 옳건 그르건 간에 이대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교차로에 이르렀을 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꼬부라지지 않고 이대로 곧장 가면 차가 북쪽으로 향하게 된다. 서클스리가 있는 방향이다. 변호사가 아무리 난색을 표명한다고 해도 잠시 둘러보는 것쯤은 괜찮지 않겠는가.

지금까지의 울퉁불퉁한 길과는 달리 이번에는 평탄해서 운전하기가 쉬웠다. 다이아몬드 바의 안채는 왼쪽에 보이는 작은 숲 너머에 있을 것이다. 만일 후라가 이미 일어났다면 아마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일찍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의 하나다 - 하고 이브는 자기에게 말했다.

태양이 드러난 얼굴을 마구 내려 비쳤다. 모자를 사야지. 남성용 모자라면, 쓰는 방법 여하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직사광선을 피할 수도 있고, 목덜미가 타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그렇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서클스리에서 리스빌까지 나가 여성용 모자를 사도록 하자. 주머니에는 30달러가 들어 있다. 이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강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자 오른쪽에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좁은 길 맞은쪽에 원목인 채인 통나무로 만든 아치가 있고, '서클스리'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브는 지프를 세우고 가슴 설레는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내가 이곳의 소유자인 것이다. 브레드건 누구건 이곳을 내 손에서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 쉽게는.

목장 규모는 훨씬 작았으나 전체의 구조는 다이아몬드 바와 아주 비슷했다. 이브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프를 세우고 엔진을 끄자, 가까이 있는 창고 비슷한 건물에서 데님 팬츠를 입은 한 남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코너즈씨를 찾고 있는데요. 그분이 이곳 목장감독이시죠?"

사나이는 시선을 이브에게 고정시킨 채 큰 소리로 외쳤다.

"웨이드! 손님이 오셨어!"

6, 7 미터 떨어져 있는 다른 건물에서 우마용 고삐를 든 사나이가 나왔다. 키가 크고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머리칼이 핸섬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쯤 되었을 것이다. 이브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이미지와는 정 반대의 사나이였다,

"여어! 내게 무슨 용무라도 있습니까?" 그가 가벼운 투로 물었다.

"?" 일단 그렇게 대답은 했으나, 자기가 무슨 일을 하러 왔는지 이브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브 브로클리라고 해요."

웨이드 코너즈의 표정이 재빨리 변했다. 그는 고삐를 창고의 문 앞에 놓자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다가왔다.

"오신다는 말은 들었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브레드가 당신을 혼자 여기에?"

"그는 지금 남부 목장에 있지만......" 이브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렀을 뿐이에요. 법적인 문제가 완결되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 보면 안 되겠죠?"

"잘 모르겠어요, 변호사가 브레드와 같이 집을 점검 한 뒤 문을 잠그고 열쇠를 가져갔으니까요. 그가 오케 이하기 전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겠죠."

"변호사와 브레드는 특별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나요?" 이브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물었다.

"글세, 잘모르겠군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옅은 블루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당신은 자매 중 어느 쪽이죠?"

"언니예요. 동생은 후라라고 해요." 이브는 잠시 망설였다. "나는 여기 올 예정이 아니었어요........그저 문득 생각이 나서."

웨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바퀴 돌아보시겠어요?"

", 고마워요." 이브는 지프에서 내려 웨이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왠지 그는 믿을 만한 사람같이 여겨졌다. "여기까지 온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예요. 로라 이모님이 살아 계실 때 왔으면 좋았을 텐데. 당신은 이모님에 대해 잘 알고 있겠죠?"

"좋은 분이었죠. 많은 신세를 졌어요."

"이 일을 하게 된 것도?"

". 그녀는 나이가 아니라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했죠. 여러 가지 간섭하는 사람도 없진 않았지만."

"브레드 핸슨도 그중의 한 사람인가요?"

웨이드가 곁눈질로 흘끔 이브를 바라보았다. "로라가 세상을 떠난 뒤론 브레드가 총지휘를 하게 되었죠. 그가 이 땅을 사게 되면 아마 나는 실직할 겁니다."

"나한테 이곳을 팔 생각이냐고 묻는다면, 되도록이면 난 안 팔겠다고 하겠어요. 하지만 고통스런 싸움이 될 거예요. 브레드뿐만 아니라 내 동생하고도 싸워야만 하니까요."

"동지가 한 사람 있습니다. 로라는 서클스라가 다이아몬드 바에 병합되는 것을 싫어했어요."

"그게 확실한가요?"

"물론이죠.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파는 데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겠습니까?"

두 사람은 창고에 도착했다. 이브는 웨이드 옆에 서서 어두컴컴한 안을 들여다보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이모님은 자기가 죽으면 서클스리를 브레드에게 팔아도 좋다고 그에게 약속했다던데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웨이드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만일 로라가 그런 약속을 했다면,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겠죠."

이브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이곳을 상속하기 위해서는, 여기 살면서 일해야 한다는 조항을 이모님이 덧붙이지 않은 점이 유감이에요. 그랬으면 문제는 모두 쉽게 해결될 텐대 말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하리라고 예감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당신은 로라와 닮은 점이 많으니까."

"그래요. 모든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예요."

목장을 한 바퀴 도는 데는 두 시간 정도 걸렸다. 이브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운영되고 있는 듯싶었다. 이곳 소몰이는 일주일 전에 끝나, 소와 새로 태어난 송아지들은 이미 목초지에 돌아와 있다는 것이었다. 시장에 팔 소의 구매자를 구하는 것은 목장주가 할 일이라고 했다. 지금은 브레드가 대신하고 있으므로 그가 구매자를 찾아야 하는데, 현재까지는 어떤 구매자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브는 틀림없이 브레드가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를 팔지 않으면 현금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면 서클스리의 경영은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소유권이 분명해지면 내가 구매자를 찾아야 하겠다. 웨이드가 그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웨이드 코너즈의 힘을 빌어 어떻게든지 서클스리를 유지해 나가야지. 1, 그렇다, 1년이면 된다.

서클스리는 다이아몬드 바의 안채와 같이 긴 단층에 길게 프런트포치가 달려 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봤을 뿐, 이브는 집 가까이에 가보 지는 않았다.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말에는 이사하겠어요. 청소는 그때 우리가 하겠어요." 헤어지면서 이브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기꺼이 도와 드릴 거예요. 그럼, 토요일을 기대하겠어요, 보스!"

이브는 올 때보다는 훨씬 안정된 마음으로 지프를 운전했다. 후라도, 일단 다이아몬드 바에서 떠나 브레드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면 설득하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꼭 설득해야지!

 

리스빌은 버트의 말대로 작고 아담한 곳이었다. 메인로드 양쪽에는 야자나무와 갖가지 화초가 심어져 있었다. 깨끗하고 아담한 작은 레스토랑에서 시푸드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영국에서 오셨군요?" 금발의 젊은 웨이트레스가 말을 걸어왔다. "유럽은 좋죠? 한번 가보고 싶어요. 여기는 여행으로?"

"가능하다면 터를 잡고 계속 살고싶어요. 혹 서클스리를 아시나요?"

"물론이에요. 영국인 자매가 상속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하지만 곧 다이아몬드 바에 판다고 하더군요. 사실이 아닌가요?"

"사실이 아니에요." 이브는 짧게 대답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질 것이다. 그러는 편이 유리하다. "지금 웨이드 코너즈를 만나고 왔는데, 그 사람이라면 서클스리를 잘 운영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해요."

"웨이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웨이트레스는 잠시 이브의 얼굴을 관찰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웨이드는 브레드에게 은혜를 느낄 필요는 없어요."

"이봐 수 앤! 거기에 뿌리라도 박았나?" 카운터 저쪽에서 소리가 났다.

", 지금 가요." 웨이트레스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그럼, 안녕히."

이브는 그 웨이트레스의 묘한 말의 뜻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이드도, 서클스리가 브레드의 것이 되면 자기는 실직하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나이가 적대 관계에 있다해도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 후라와 내가 여기 있게 되면 웨이드에게 협력을 구해야 할 텐데, 로라 이모가 택한 사람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져 있는 잡화점에는 뜻밖에도 갖가지 물건이 다 구비되어 있었다. 이브는 선반에 주욱 진열되어 있는 모자 가운데서 젊은 베이지색에 갈색 리본이 달련 심플한 디자인의 것을 골랐다. 그것을 써 보니 진짜 카우걸 같았다. 서클스리에는 10여 마리의 말이 있다고 하니 그중에서 한 마리를 고르면 된다.

가죽 부츠도 사고 싶었으나 가진 돈이 없어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앞으로 말을 탈 기회가 많을 것이므로 부츠는 필수품이라 할 수 있다. 약 한 시간쯤밖에 말을 타지 않았는데도 안장에 닿은 사타구니가 쓰렸다.

이브는 지프에 돌아와 모자를 고쳐 쓰고 엔진을 걸었다. 아직 한 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하루 종일 꼬박 일을 한 기분이었다.

브레드는 이미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이브는 억지로 그런 마음을 억제했다. 소비한 만큼의 가솔린 값은 갚으면 그만이다.

이브는 돌아오는 길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주위의 경치를 즐기며 독립된 기분에 젖어 드라이브했다. 이곳 기후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햇볕에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오후에는 두어 시간쯤 일광욕을 해야지. 서서히 피부를 햇볕에 적응시켜야 한다.

문에서 안채까지는 족히 3킬로나 되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역시 집에 들어가기가 어색했다. 이브는 몇 그루의 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연못가에 지프를 세웠다.

반쯤 풀밭에 묻힌 통나무가 있어서 이브는 거기에 걸터앉아 풀줄기를 씹으며, 연못에 사는 생물들의 활발한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조용하고 햇볕도 적당히 차단되어 아늑했다. 30분 더 늦게 돌아간다고 해서 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브는 멍청히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차 한 대가 가까이 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깨달았다 해도 별도리가 없었을 테지만. 갑자기 억센 손에 의해 거칠게 돌려 세워졌을 때는 놀란 나머지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브는 키가 큰 풀이 무성한 풀밭에 뉘어졌다. 건장한 사나이가 노려보고 있었다.

 

5

브레드는 말로써 비난하는 따위의 시간 낭비는 하지 않았다. 눈을 다이아몬드처럼 빛내면서 얼굴을 접근시켜 왔다.

이브는 냉정을 잃지 않으려고 숨을 몰아쉰 다음 그를 향해 내뱉듯이 말했다.

"당신이 생각해낸 방법은 고작 이것인가요? "

이에 대한 브레드의 대답은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위기일발의 상태였다. 갑자기 그의 턱이 긴장되고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는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숨 막히는 듯한 몇 초가 지난 뒤, 브레드는 몸을 일으키자 무릎을 꿇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당신이 나빴어. 좀 더 심한 꼴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거야!"

이브도 일어나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어째서죠? 당신이 일하는 모습만 바라보며 얌전히 있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당신이 여러 사람 앞에 약간 위신을 잃었다면 죄송한 일이지만, 우상으로서의 당신 이미지를 유지하는 일에 협력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에요."

브레드의 입이 꼭 다물어지고 턱이 다시 긴장되었다.

"제법 위세가 당당하군. 좀 더 공격을 계속해 보시지 그래?"

사실은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함으로써 브레드의 분노를 사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그녀는 침착한 체하고 가까이 있는 풀을 뜯었다. 분명히 자신이 경솔하게 행동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난폭하고도 무례한 일을 당해야 할 까닭은 없다고 생각했다.

"서클스리에 갔었지?" 잠시 후 브레드가 이브의 행동을 책하듯이 말했다.

"간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군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억지로 집 안에 들어가거나 하진 않았어요. 웨이드와 주위를 한 바퀴 돌아봤을 뿐이에요."

"벌써 웨이드라 부르게 되었나?"

"이 사회에서는 격식이 필요치 않다고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 아닌가요?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는 나를 <보스>라고 불렀어요."

"잘들 하는군."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이브였다.

"지프를 멋대로 빌어서 죄송해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왔죠."

"잭의 트럭으로 왔지. 젊은 친구들은 일이 끝나면 어서 점심을 먹고 싶어하거든. 당신은 후라에게 할 변명도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걸.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양이더군."

"용케 혼자 나왔군요?"

"데려가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겠지. 도저히 그런 무드가 아니었으니까." 브레드는 시무룩한 얼굴로 이브를 훑어보았다. "만일 당신이 곧바로 집에 돌아왔다면 그래도 용서할 수 있었어. 행방을 찾아 반나절이나 헤매던 끝에, 여기 아무 염려 없다는 듯이 태연히 앉아있는 당신을 발견했을 때 머리로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어. 피가 솟구친다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당신이 여기 온 후로는 줄곧 그랬어. 당신은 내 인생의 한도를 시험할 생각인가?"

"내가 서클스리에 간 것은, 문득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었어요. 당신의 화를 돋우려고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에요." 이브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웨이드 코너즈의 일하는 태도에 무슨 하자라도 있나요?"

브레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그런 것을 묻지?"

"당신이 스트레이트로 대답하지 않는 것도 이유의 하나예요. 나는 바보가 아니에요, 브레드.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당신이 불쾌해 하는 것을 내가 모르는 줄 아세요?"

"그는 맡은 바 일을 훌륭히 해내고 있어."

"그럼 개인적인 일이 있군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해도 좋아. 하지만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틀림없이 개인적인 일일 것이다. 여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레스토랑의 웨이트레스도 그런 말을 한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지 않겠어요? 모두 걱정하겠어요."

브레드는 일어서려는 이브의 손을 끌어 다시 앉혔다.

"아직 안 돼. 분명히 해두어야만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

갑자기 이브의 가슴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무엇이죠?"

"당신은 아까, 이 방법밖에 없느냐고 물었어. 그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내게는 있어."

"하지만 나는........"

"나도 바보가 아니야. 당신, 페로몬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

이브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브레드, 나는........"

"그것은 동물, 특히 곤충이 분비하는, 동류 (同類)에게 어떤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물질이야. 지금 당신의 분위기는.......어쨌든 간에 나는 그 유혹을 뿌리칠 생각이 없어, 이번만은."

브레드의 빈정거림에 이브는 반발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그는 잘 알고 있다. 어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에게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모호한 힘을 느꼈다. 그래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브레드를 자극시켜 역효과를 나타낸 결과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째서 나쁘다는 것인가? 끌리고 있음을 나도 솔직하게 시인해도 좋을까? 그러나 브레드는 나의 마음을 알게 되면 더욱 함부로 대할 것이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손이 닿자, 약간 남아있던 망설임이 어느 틈에 사라졌다. 이브는 브레드의 가슴에 가만히 얼굴을 대고 있었다.

브레드가 갑자기 숨을 날카롭게 들이마셨을 때, 이브는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몸을 돌려 벌렁 드러누우며 눈을 감았을 때, 진실이 이브를 꿰뚫었다. 침묵과 떨리는 듯한 긴장감이 주위에 퍼져 나갔다. 이브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녀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얼마 후에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을 가지고 미국 남자 전체를 판단하면 안 돼. 나는 전형적이 아니니까."

"나는 상관없어요, 브레드 정말......."

"내가 상관있는 거야! " 그는 일어나서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남자를 사귀었으리라 생각하세요?"

이브가 쏘아붙이자 브레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 같군."

"그것을 정상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은 본능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나요?"

"물론이지. 당신은 자신이 버진이라고 말할 생각인가?"

"헤픈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좌우간 그런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자아, 그만 집으로 돌아갈까?"

이브는 일어나면서, 그의 마음을 풀기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프라이드가 실추하는 것을 나는 본 것이다. 이것으로도 그는 당분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집 가까이 오자, 브레드는 가솔린 탱크에 들렀다 갈 테니 이브더러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이브가 포치의 계단을 올라갈 때, 버트와 같이 앉아 있던 후라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왔다.

"서클스리에 갔었다면서? 나를 따돌리고 혼자서 갈 권리는 없어!"

"미안해. 너하고 같이 가는 건데 그랬어." 이브는 솔직히 사과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게 빨리 가지 않았으면 나도 같이 갈 수 있었어. 나를 데려갈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지? 언니는 브레드에게 내가 아침잠이 많아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면서?"

"나는 브레드에게, 너를 깨웠다는 말만 했어." 이브는 포치 저쪽에 있는 버트 핸슨의 존재를 의식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브레드는 여섯 시가 지나자 단 1분도 더 기다리려 하지 않았어."

"언니가 잘 부탁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내가 일어났는지 어떤지 확인하려고 와 보지도 않았어."

이브는 약간 눈썹을 치켜세우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래, 너는 일어나 있었다는 말이니?"

후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일어나지 않았어, 언니가 나간 뒤 곧 다시 잠이 들어 버렸어. 그렇더라도......"

"깨웠더라도 너는 시간에 맞춰 일어날 수 없었어."

이브는 더 이상 말다툼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그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해."

후라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떼를 썼다.

"다시 이야기할 것도 없어. 나는 서클스리를 파는 데 대한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으니까. 언니가 꼭 가져야 하겠다면 내 몫으로 50만 달러를 줘. 그러면 가만히 있겠어."

이브는 당장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후라는 화가 났기 때문에 다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낸 것은 그녀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결국 원인은 브레드에게 있다.

"금요일에 센 변호사를 만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어. 땅을 판다고 해도 절차를 밟으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거야. 어쨌거나 나는 샤워부터 해야겠어."

방에 돌아올 이브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나갔던 것이 불과 아홉 시간 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하루 동안에 상당히 햇볕에 탔으나 다행히 피부에 이상은 없는 모양이다. 내일은 하루 종일 이 근처에서 산책하면서 돌아오는 금요일에 대비해야지. 현재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서클스리 문제이니까.

샤워를 하면서, 사실은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이브는 생각했다. 사실을 말한다면 서클스리 문제는 뒷전에 미루어지고 있었다. 다음에 브레드를 만났을 때 어떤 얼굴을 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만난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서 몸을 던진 나를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머리를 감고 있을 때 샤워룸의 문이 열렸고, 뒤돌아볼 사이도 없이, 이브는 브레드에게 허리를 붙들려 몸이 돌려세워졌다.

이브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이것이 진심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비록 그의 품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어디에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브레드는 그녀와 문 사이에 섰다. 샤워가 검은머리를 적셨다.

지금은 허리를 붙들려 있지 않았으므로 몸을 뿌리치려면 못 할 것도 없었으나, 이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 꼼짝할 수도 없었다.

브레드가 샤워를 잠그고 샤워룸의 문을 열었다. 이브는 선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싱긋이 웃었다.

"생각했던 대로 아름답군."

"나는 당신이 이미 일하러 나간 줄 알았어요. 나는......"

"그랬을 테지. 처음에는 나갈 생각이었지만, 이브를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결정이 흐려졌어. 앞으로 두 시간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어."

이브의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다.

이브는 마리아에게 발견되기 전에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두서 없이 말했다.

"문은? 후라가 들어올지도......."

"들어오면서 걸었어."

두 사람은 침실로 나와 상당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이브는, 브레드와 마주 서 있으니 인생에서 이보다 만족스런 시간은 없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성이 되살아나기 시작함에 따라, 이것이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틀 전만 해도 나는 이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조차 몰랐었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그와 한자리에 있다. 이브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가면 안 돼." 브레드가 다정하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 이브와 함께 있으니 기분이 좋군. 이브의 모든 것이 다 좋아. 이브를 보는 순간, 이브가 내 트러블의 원인이 되리라 예감은 했어. 하지만 이런 정도일 좋은 몰랐어. 덕택에 내 평안이 유린되고 말았어. 그 보상은 받고야 말겠어!"

"나는 가야 해요. 가게 해주세요, 브레드."

브레드는 한숨을 쉬었다.

"가야 한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빨리 돌아와."

이브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자 생각을 정리해 보려했다. 몸에 남아있는 나른한 피곤은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새삼스럽게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이 상황에 대처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브레드는 지금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육체적인 면에 한해서 말한다면 그 추측은 옳다. 그러나 마음의 문제에 이르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어제부터 브레드에게 대들고만 있는 것은 그에게 끌렸기 때문임을 솔직히 인정한다. 좀 전에 내가 한 말들은 그의 마음을 끌기 위해 계산된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브레드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떻건 간에, 서클스리 문제가 두 사람 사이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브레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손에 넣으려 할 것이다. 만일 내가 양보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브레드가 우리 관계를 일시적인 것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나는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게 되는 것이다. 브레드가 아무리 멋진 연인이라 해도, 그렇게 되면 잃는 것이 너무 많다.

이브는 침실로 돌아갔다. 브레드는 침대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쉬고 있을 때조차도 그의 몸은 이완되어 있지 않았다. 갈색의 근육은 탄력이 있었다. 두 다리도 오랜 승마로 단련되어 억세고 튼튼했다. 한쪽 손이 침대 밖으로 늘어져 있었다.

"장승처럼 서서 노려보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지?" 브레드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유감스럽게 되었군요. 나는 당신이 여기서 나가기를 바라고 있는데."

브레드는 천천히 몸을 돌려 이브에게로 향했다.

"어째서? 이브도 기분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여기 왔겠죠? 그것이 증명되었으니 이제 됐잖아요? 내가 당신을 거절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그러고 싶지 않아서였지만."

"그렇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 않아? 우리 두 사람은 어른이야. 다정한 말이나 로맨택한 고백을 기대했다면, 상대가 나빴다고 단념해 줘. 나는 그런 것에는 서투르니까."

"서클스리는 어떻게 되죠? 아직도, 그것을 사겠다는 생각은 있겠죠?"

그는 한잠 동안 이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관계가 없어."

"약간은 관계가 있어요. 한편에서는 당신과 싸우고, 다른 한편에서는 당신과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혹시 당신은 내 생각을 바꾸기 위해 나를 유혹한 게 아닌가요?"

브레드가 쉰 목소리로 웃었다.

"이브는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 허니, 나는 서클스리에 대한 것은 전혀 염두에 없었어. 그것만은 믿어 줘."

이브는 믿을 수 있었다.

"알았어요. 지나간 일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할 생각은 없어요. 한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가벼운 기분으로는 결코 당신과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에요."

브레드는 당장 대답하지 않았다. 이브를 바라보는 그 눈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도 없었다.

"이브에게는 영국에 아주 친한 보이프렌드가 있다고 후라가 말하더군. 그 친구와는 어느 정도의 사이지?"

이브는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어요. 아니, 사랑한다고 생각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몰라요. 어쨌건 마찬가지지만."

그의 입술 끝이 치켜 올라갔다.

"이브는 자신과 나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어떤 감정을 무시하려 하는 것 같군. 나의.....별로 좋지 않은 점은 무엇이지?"

"어째서 일부러 묻죠? 그런 데는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요."

브레드가 재미있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좋아, 지금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야 나를 좀 더 잘 알게 되려면.......아마 시간이 걸리겠지. 교제해 보지 않고서는 모를 거야."

"당신이 말하는 그 교제란 특별한 목적을 위한, 극히 일시적인 교제일 테죠?"

"누가 그런 말을 했어?" 브레드는 경쾌한 동작으로 이브에게 다가섰다. "이브는 이상한 사람이군. 조금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주저하며 부인하고 있거든. 나는 이브를 바꾸어 놓겠어. 이브의 마음속에 있는 자제심을 모두 없애 버리겠어. 견해차이를 조정하는 일은 며칠이면 될 거야."

나는 바보야. 그의 참 목적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목적을 알고 있다 해도, 그를 향한 뜨거운 마음은 어찌할 수 없다.

 

6

변호사인 알렉스 센이 도착한 것은 금요일 오후 네 시가 지나서였다. 그는 60이 넘은 점잖은 신사였다. 수수한 다크슈트와 테 없는 안경이 변호사라는 직업과 잘 어울렸다. 버트는 친절하게 그를 맞이하고 브로클리 자매를 그에게 소개했다.

"브레드는 지금 목장에 나가 있는데, 한 시간쯤 있으면 돌아올 걸세."

", 시간은 얼마든지 있네. 잠시 신세를 지기로 할까." 알렉스는 길게 숨을 내쉬고 등의자에 편안히 앉았다. "일터에서 떠나면 마음이 홀가분해, 특히 이곳에 올 때는. 자네하고도 한두 가지 상의할 것이 있네, 버트. 그것을 먼저 해결하고 나면 저녁 후에는 서클스리의 일에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겠지. 부탁한 서류는 가져왔겠죠, 아가씨들?" 알렉스가 자매에게 말했다.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져왔다고 대답했으나, 후라는 시무룩하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에 자매 사이에 답답한 공기가 흐르게 된 것을 이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동생이 자기와 브레드의 관계를 깨닫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브레드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내 태도는 어떠한가. 수요일 밤에도 어젯밤에도 그는 내 방에 왔었다. 그는 옆방에 후라가 있다는 것을 무시했고, 나한테도 그것을 무시하도록 했다. 이번이 끝이라고 번번이 마음속으로 맹세했지만, 브레드가 나타나면 모든 결심이 무너져 버린다. 두 번 다시 지난 날로 되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감정을 가지게 되고 말았다. 지금은, 자기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조차 모르게 되어 버렸다. 서클스리에 대한 것은 두 번 다시 화제에 오르지 않았으나, 브레드가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니란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다. 지금은 브레드가 나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달에는......아니, 다음주의 일조차 확실히 알 수 없다. 브레드는 후라에게, 있고 싶을 만큼 서클스리에 있어도 좋다고 했지만, 이제 와서는 후라 자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혼자 남을까? 그렇게 되면 브레드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비참한 일이다. 혹시 내가 너무 비판적으로 된 것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브레드도 진실로 나를 좋아하게 될까?

끝까지 서클스리를 팔지 않겠다고 고집한다면 브레드는 화를 낼 것이다. 후라 역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동시에 그 두 사람을 잃게 된다. 그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알렉스도 함께 했는데도 저녁식사는 언제나처럼 홀가분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세 남자는 슬랙스에 셔츠 차림의 간소한 복장이었다. 이브는 아무 걱정도 없다는 듯이 명랑하게 행동했으나, 그래도 브레드의 눈은 한시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빈정대는 듯한 웃음을 띠었다, 이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저녁식사를 끝낸 얼마 후, 알렉스 센과 브로클리 자매는 버트의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브는 가죽 의자에 앉아 맞은쪽에 앉은 후라에게 미소를 보냈으나, 후라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남남 사이 같았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나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후라에게 현금을 쥐여 주고 위안하는 것뿐이다.

알렉스 센은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를 꺼내 데스크에 정연히 늘어놓았다.

"우선 간단하게 전체적인 줄거리를 설명하죠. 그러고 나서 질문 받기로 하겠어요. 서클스리 목장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물론 토지입니다. 소와 기계류도 경매에 부치면 어느 정도 돈이 되겠지만, 1에이커당 1천 달러라는 브레드의 제시액은 아주 높은 값이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서클스리는 다이아몬드 바에 거의 에워싸여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죠. 만일 제 삼자가 관심을 가진다고 하면 그것은 목장에서 올리는 수익에 대해서일 텐데, 유감스럽게도 서클스리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아요."

"말씀하시는 뜻을 잘 모르겠군요. 서클스리는 수익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인가요?"

"유감이지만 그렇습니다. 최근......." 변호사는 서류를 조사하기 위해 안경을 위로 올렸다. "7, 8년 동안은 적자입니다. 소 값이 의외로 비쌌던 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당신네 이모부는 이 목장에 대해 애착을 가졌기 때문에 이익을 유지해 나왔던 거죠. 토지 소유자라는 사실에 만족해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좀 더 화려한 생활도 가능했겠지만, 이모부는 그걸 바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모님도 마찬가지였고요. 두 분은 아주 이상적인 부부였죠. 이모 남편의 죽음이 준 충격을 최후까지 극복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녀는 주인을 위해, 핸슨 부자의 힘을 빌어 서클스리를 유지해 왔던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병이 심해졌을 때도 매달 한 번은 브레드와 함께 장부를 검토하곤 했어요 - 더 적자를 보게 될 뿐이다, 헛되이 돈을 소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로라의 자산을 관리하는 어드바이저들은 목장을 팔라고 여러 번 권했지만, 버트가 내버려두라고 했던 거죠, 그 무렵에는 이미 로라가 여기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에 대해서는 버트가 제일 이해를 많이 하고 있었죠."

잠자코 있던 후라가 이 방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모님은 이 목장말고도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었나요?" 그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 자산은 여러 곳에 투자되어 있죠. 일람표가 여기 있는데, 상속세를 제하고도 아가씨들에게 돌아올 몫은.......그러니까.......1년에 48만 달러나 됩니다. 각각 24만 달러씩이죠. 토지 값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입니다. 어쨌든 아가씨들은 큰 부자가 된 겁니다."

잠시 동안 침묵이 주위를 지배했다. 이 엄청난 사실에 이브는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어째서 우리에게? 로라 이모님은 우리를 보신 일도 없는데!" 잠시 후 이브가 말했다.

"아가씨들은 로라의 유일한 친척이기 때문이죠. 그녀는 언제나, 자기 친척들과 좀 더 가까이 지낼 것을, 하고 후회하고 있었어요. '젊은 사람들은 돈을 쓸 곳을 알고 있지.' 하고 말한 적도 있어요. 그 의견에는 반드시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이모님이 하신 말씀을 잘 알겠어요." 후라는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눈을 빛냈다. "서클스리 목장은 언니 마음대로 해도 좋아. 나는 나머지 재산들만으로도 훌륭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마지막 말은 알렉스 센에게 한 말이었다.

"돈을 실제로 쓸 수 있게 될 때 말인가요?" 변호사의 말에는 약간 빈정대는 투가 섞여 있었다. "시간은 전혀 걸리지 않아요. 두 아가씨 사인을 받고 출생증명서를 공증인에게 인정받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당좌수표를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리스빌 은행에 구좌를 트도록 수배했으나, 그 다음에는 아가씨들이 직접 은행에 가서 절차를 밟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편지에는 그런 말씀을 전혀 하지 않았잖아요? 우리가 상속한 것은 목장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브는 아직 처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유산을 상속했다는 사실만 알리려고 그랬죠. 목장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한 것은, 그것이 내 생각으로는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아가씨들이 온다는 연락을 받자, 나머지는 만나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요." 알렉스가 자세히 설명했다.

"이제 와서 아무러면 어때!" 후라가 입을 열었다. "이제 생각하니 모든 것이 뜻대로 되었어!"

브레드와의 일도 말인가? 이브는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동생의 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약간은 안심이다. 이것으로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은 브레드와의 일만이 아니었다.

"서클스리말인가요?" 알렉스가 이브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땅을 파는 데 대해서는 두 분의 의견이 다르다는 말을 들었는데."

"언니는 서클스리에 살면서 자기가 직접 목장을 경영할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후라가 말했다. "나는 그 생각에 반대했어요, 목장 이외의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 언니의 변덕을 조롱하듯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제는 언니가 목장을 하고 싶다면 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안경 너머의 눈이 이브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목장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자기 돈을 얼마씩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내 설명으로 어느 정도 이해가 됐을 테지요?"

"......., 알고 있어요."

"그래도 생각이 변하지 않았나요?"

"." 이번에는 먼저보다 더 분명한 목소리가 나왔다. "적어도 당분간........미쳤다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별로 놀랍지는 않습니다. 아가씨에게는 그만한 재력이 있으니까 하면 되지 않습니까?" 변호사는 다시 진지한 태도로 돌아왔다. "아직 한두 가지 사소한 것을 확인해야 할 일이 있는데, 예컨대......."

이브는 그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브레드가 그토록 원하고 있는 땅을 안 팔겠다는 뜻을 그에게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 것인가. 그는 화가 나서 두 번 다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브레드가 없는 인생을 나는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조만간 그와의 관계는 끝날 운명인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나는 생활의 기반을 뿌리내릴 장소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후라는 틀림없이 미국의 곳곳을 여행하고 다닐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때때로 돌아올 장소가 필요할 것이다. 서클스리는 그런 장소로는 안성맞춤이 아닌가.

세 사람이 거실에 돌아오니 버트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는 스위치를 끄고 돌아앉자, 후라의 상기된 표정과 이브의 창백한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브레드는 병든 소가 있다고 해서 나갔지. 누구 음료수라도 필요한 사람은?"

이브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브랜디를 부탁했다.

"서클스리에는 언제 옮겨 갈 수 있을까요?" 잠시 후 그녀가 알렉스에게 물었다.

"언제든 편리할 대로하세요. 다만 집은 손질을 좀 해야 할 겁니다."

"웨이드 코너즈가 도와줄 여자들을 구해 주겠다고 했어요." 이브는 버트에게 죄송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무어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저희를 편안히 묵도록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천만에. 덕택에 우리도 즐거웠어요. 앞으로도 가끔 놀러 와요."

"물론이에요. 불과 3, 4 킬로 떨어진 곳에서 사는 거니까요."

"나는 그렇지 않아요." 후라가 만면에 희색을 띠고 말했다. "나는 우선 마이애미에 가서 멋진 옷을 많이 사겠어요. 그런 뒤에 카리브 해를 여행할 계획이에요, 우선은 말이죠! 앞으로는, 책에서밖에 읽지 못한 생활을 시작하겠어요. 얼마나 멋질까요!"

이브와 버트는 얼굴을 마주 보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되삼켰다. 물론 버트의 생각이 옳다. 후라는 이미 성인이니까 자기 행동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잘못을 빨려 깨닫게 되도록 기도하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열 한 시가 넘어 브레드는 피곤한 얼굴로 돌아왔다. 송아지는 죽고, 전염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내일은 모든 소에게 예방 주사를 놓아야하겠다고 그는 말했다. 무척 바쁜 하루가 될 것이어서 브레드는 일찌감치 침실로 갔다. 다른 사람들도 각각 자기 침실로 갔다.

이브는 샤워를 하고 엷은 코튼 나이트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침실의 창을 열었다. 조금 전에 내린 비에 씻긴 나무와 풀이 내뿜는 냄새가 상쾌했다. 서늘한 바람도 런던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현명한 여자는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야." 브레드의 음성이 들렸다, 평소와 같이 짧고 검은 실크 실내복을 입고 있었으나 맨발이었다.

"이미 자는 줄 알았어요. 올 줄은 몰랐어요."

브레드가 가만히 웃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이브 탓이야!" 그는 두 손으로 이브의 얼굴을 감싸 볼에 살짝 입맞춤했다.

"브레드, 할 말이 있어요. 당신은 이미........"

"서클스리를 팔지 않겠다는 이야기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어. 아까 돌아왔을 때, 이브의 얼굴에 분명히 씌어 있더군.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브는 망설이며 브레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그야 마음에 걸리지. 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어. 상황의 변화도 있을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이란 변하게 마련이니까."

변하게 하겠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설득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이브는 브레드의 손을 꼭 쥐었다.

"그렇게는 안될 거예요, 브레드.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서클스리를 유지해 나갈 거예요. 로라 이모님이 당신에게 헛된 희망을 품게 했다면 죄송하지만, 사실 이모님도 진심으로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귀찮게 굴었기 때문에 할 수없이 승낙하신 걸로 생각하나?"

"." 이브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얼마 후 브레드는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거짓말쟁이로 인식되었던 것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큰 진전이지. 그런데, 가장 긴급한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나?"

이브는 안도감이 번지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것으로 우리 사이는 끝이라 생각했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브는 돌진하려고 했어. 지난 이틀 동안의 일은 이브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군."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겠죠?" 이틀 동안의 일을 생각하니 이브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요."

"그 증거를 보여주지 않겠나? 이브가 어떻게 느끼는지 보여줘."

그 대담한 도발에 응하기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결국은 그 뜻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브는 씁쓸한 생각을 짓씹고 있었다. 지금 나는 브레드에게 너무 깊이 빠져 있다. 냉정을 회복하려면 상당한 고통이 따를 것이다. 가능하다면 브레드에게도 나와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고 싶다.

 

은행 지점장의 대응은 매우 친절했다. 거액의 예금주가 이 지방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리라. 곧 두 사람 명의로 된 수표책과 신용카드가 교부되었다. 미국에서는 현금 거래가 거의 없다는 것을 자매는 비로소 알았다. 대부분의 회사는 신용할 수 있는 금융기관의 수표와 크레딧 카드를 좋아하는 것이다.

은행에서 나왔을 때, 알렉스 센은 서쪽 하늘을 덮고 있는 먹구름을 보자 비가 오기까지는 앞으로 두 시간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서클스리의 집을 보러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이브가 한 번 가 본 적이 있다고 말해도 알렉스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안 될 이유는 없어요. 법률이 그렇게까지 모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브레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후라가 스테이션왜건에 타면서 말했다. "변호사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알렉스가 백미러에 비친 자매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때 브레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까? 그의 입장이 되어 봐요. 그는 로라의 약속은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이모님이 유언장에 그 말을 적어 넣으려고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이브가 조용히 물었다.

"그런 말 비슷한 걸 한 것은 사실이죠. 다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못한 것뿐이에요. 병이 무거워 지면서는 법적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겠죠. 하지만 로라는 평안히 눈을 감았어요. 핸슨 부자와 같이 살게 된 것이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어요. 로라는 그 두 사람을 신용하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이브가 미소 지었다.

"굳이 그것을 강조하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분명히 처음에는 적지 않게 의심을 품었지만, 그때는 전혀 상황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브레드에 대한 언니의 생각이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는 뜻이에요.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 응 이브?" 후라가 뒷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이브는 알렉스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것을 의식하면서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 그래요. 지금은 그의 말을 믿어요. 그렇게 의심을 해서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이브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는 법이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일이죠." 변호사가 말했다.

서클스리에 가는 동안 후라는 다시 침묵을 지키고 대화에 끼어 들려 하지 않았다. 이브는 그녀가 브레드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어제는 막대한 유산 때문에 황홀해 있었지만, 그 흥분이 좀 가라앉았을 오늘 아침부터는 또 다른 욕구가 고개를 쳐들었는지 모른다.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동생과 솔직히 대화할 기회를 갖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브는 동생에게조차도 자신의 내심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가벼운 교제였다고 동생에게는 이야기해야지.

알렉스의 예고보다도 빨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집 앞에 차를 세우자! 놀랄 정도로 재빠르게 넓은 계단을 달려 올라가 프런트도어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비가 멎을 때까지 무작정 거기 앉아 있고 싶지 않거든 이리 달려오는 것이 좋을 거요. 그동안 집안이라도 구경하게."

자매는 차에서 내리자 문을 탕 하고 닫은 뒤 웃으면서 뛰어갔다.

"찬비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후라는 숨을 헐떡이며 머리에 묻은 빗방울을 털었다.

"오래 내릴 비가 아니에요. 곧 태양이 얼굴을 내밀 거예요." 알렉스가 옆에서 말했다.

후라가 앞장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두 사람이 따랐다. 홀을 지나자 큰 리빙룸이 나왔다. 가구에는 덮개가 씌워져 있고 커튼도 내려져 있었다. 방은 조용하기만 하여 시간의 무게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내가 알지 못하는 한 여성이 여기 살면서 사람을 사랑하고 웃고, 또 때로는 울기도 했던 것이다. 이브는 그녀의 존재를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결코 기분 나쁜 이미지가 아니라, 따뜻하고 친밀한 존재로서.

"다시 쓸 수 있도록 꾸미는 데는 그리 힘이 들지 않을 겁니다. 빈집인 채로 습기 많은 여름을 보내지 않게 되어 다행이군요." 알렉스는 테라스 창의 실키골드 커튼을 열었다.

가까이 다가와 창 밖의 잔디 정원을 내다보고 있던 후라가 소리쳤다.

"풀이 있어. 그런 말은 해주지 않았지, 언니?"

"집 뒤로는 돌아가 보지 못했었어. 언제나 마음 내킬 때 헤엄칠 수 있어서 좋겠어!"

"로라도 그런 말을 했었죠. 우리는 더위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로라는 무척 고생스러웠던 모양이에요. 다른 방도 한바퀴 둘러봅시다. 핸슨네처럼 크지는 않지만, 집을 다시 지을 때 조스가 직접 설계에 참가 했었죠. 그는 건축가로서도 상당한 솜씨가 있었어요."

그것은 실제로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욕실과 대형 클로젯이 딸린 침실이 네 개, 최고의 설비가 갖추어진 넓은 키친, 풀과 화단이 내다보이는 다이닝과 리빙 에어리어. 집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분위기가 매우 좋다는 것은 후라도 인정했다. 여기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인생의 태반을 행복하게 지냈으리란 것을 쉽사리 상상할 수 있었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언제쯤이면 이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당신들 생각에 달려 있지요. 도와줄 사람을 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로라는 음식 만들기를 좋아했지만, 아가씨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저도 음식 만들기를 좋아해요." 이브가 대답했다. "하지만 청소는 남의 힘을 빌려고 생각해요. 나는......." 열린 문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깨닫고 이브는 입을 다물었으나, 키가 크고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진 사나이의 모습을 확인하자 그녀의 입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마, 안녕하세요?

웨이드 코너즈도 미소 지었다.

"차가 보이기에, 무언가 도울 일이라도 없나 싶어서 왔죠. 모든 일이 잘 되어가나요?"

"." 이브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후라가 대답했다. 그녀의 눈은 웨이드의 핸섬한 얼굴에 못박혀 있었다. "당신이 웨이드씨죠? 나는 후라 브로클리라고 해요."

웨이드의 얼굴에도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처음 뵙습니다, 마드므와젤. 도움을 청할 것이 있으면 무엇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웨이드가 어떤 영화 배우의 흉내를 내며 말했다.

"비가 그친 것 같으니 목장을 구경시켜 주시지 않겠어요? 언니는 벌써 보았으니까."

"좋습니다." 웨이드가 이브 쪽으로 향하였다. "도와줄 사람을 두 사람 구했는데, 원하신다면 앞으로 정기적으로 와도 좋다고 하더군요."

"다행이군요." 웨이드에 대한 후라의 반응에 대해서도 이브는 안심하고 있었다. 후라가 브레드에 대해 약간의 미련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웨이드 코너즈가 그것을 깨끗이 씻어 줄 테니까. 그것도 물론 다른 때같이 오래 계속되지는 않겠지만, 당분간이나마 마이애미나 카리브 해 여행을 잊게 해준다면 얼마나 고마울지 모른다. 혼자서 그런 곳에 가면 나쁜 사나이에게 걸려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이브와 알렉스 센은 따로 집을 돌아보았다. 창고 근처에서 일하는 사나이들에게는, 서클스리가 존속될 것임을 알려서 안심시켰다.

"당신의 수입만으로도 목장의 적자를 충분히 메울 수 있을 테니까 마음대로 해요. 다만, 정말 그것을 원하는 경우에만 말입니다." 알렉스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정말 원한다고 이브는 자신 있게 말했다. 일말의 불안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언젠가 브레드가 두 사람의 관계보다도 오래 전부터 소망하던 것을 중요시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이었다. 브레드를 잃지 않으려면 깨끗이 단념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이브는 생각했다. 가까운 장래에 그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으므로.

 

7

차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브한테로 웨이드가 후라를 데리고 온 것은 한 시간쯤 지내서였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늦어져서."

"정말 즐거웠어." 후라가 말을 이었다. "여기 사는 것이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무 멋진 곳이어서!"

웨이드가 미소 짓고 있었다.

"언제 오겠어요?"

"내일이면 어떨까요? 정리 정돈은 우리가 할 일이고," 이브가 말했다.

"그것은 언니의 경우일 테지. 내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저 풀에 뛰어드는 일이야. 풀사이드에서 파티를 열면 어떨까? 마침 주말이기도 하니까. 모두 초대해서 거기서 바베큐 파티를 열면 돼."

"오늘 오후 시내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죠. 식품 저장고가 텅 비었으니까요. 바베큐 파티라, 고대하고 있겠어요, 아가씨."

"후라예요. 후라라 불러 달라고 했잖아요?"

"그러죠. 그럼, 내일 아침을 기대하겠어요. 곧 청소를 하도록 시키죠."

"그 사람, 멋져. 그 정도로 핸섬하면 영화 스타라도 될 수 있을 텐데!" 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후라가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 정도는 할리우드에 쓸어버릴 만큼 많지." 알렉스가 무감각하게 말했다. "어쨌든 그의 생활은 여기서 서클스리를 운영하는 데 있어요."

"브레드가 사게 되면 그것도 어렵게 될 거예요. 그는 전체를 - 물론 집까지 포함해서 - 방목장으로 만들 거라고 웨이드가 말했어요."

'웨이드가 말했어요.' 라는 말은 아마 놀라움이 사라질 때까지 노상 듣게 될 것이다.

"그런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불과 수십 킬로 정도 방목장을 넓히기 위해 그렇게 멋진 곳을 모두 헐어 버리다니, 브레드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어떤 일이든 해낼 거라고 하지 않았어?" 후라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어쩌면 언니가 본 첫인상이 정확한지도 몰라."

이브가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그 말에 무슨 특별한 뜻이라도 있니?"

"그건 언니의 해석 여하에 달렸어. 나는 오늘 아침에, 우리들의 친애하는 벗 브레드에 대해 몇 가지 새 사실을 발견했어."

"코너즈는 절대 <편견 없는 증인>은 아니니까요." 알렉스가 불쾌하다는 듯이 참견했다. "그와 브레드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다면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래요." 후라는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브레드가 숨기려 하는 그 무엇을 웨이드가 알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그 이유예요."

"말을 삼가라, 후라야.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그들의 문제지 우리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잖니."

후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언니도 생각이 바뀔 거야."

"나는 듣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만 입을 다물어, 알겠지?"

후라는 부은 얼굴을 하고 잠자코 있었다. 동생한테 그런 말을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투였다. 이브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지금까지 둘러본 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고, 알렉스도 거기에 박자를 맞춰 주었다.

그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이브는 동생이 한 말을 전적으로 무시할 순 없었다. 웨이드 코너즈가 동생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준 것만은 분명하다. 동생은 그것을 과장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브레드가 자기 기분에 응하지 않은 것을 아직 용서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니까. 아마 제일 좋은 방법은, 웨이드의 이야기란 것을 동생에게 하도록 하여 사실을 분명히 하는 일 일 것이다.

세 사람은 마침 점심식사 때 도착했다. 브레드는 자리에 없었지만, 걱정했던 병의 전염 염려는 없다고 버트가 말해 주었다. 자매가 내일 서클스리로 옮겨가겠다고 하자 그는 마음으로부터 섭섭해했다.

"3, 4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걸요. 적당한 말이 생기면 그것을 타고 매일이라도 찾아뵙겠어요."

"로라가 타던 밤색 말이 아직 마구간에 있을 텐데. 초보자로서는 약간 다루기 힘들지 모르지만 한번 살펴보도록 해요."

", 그러겠어요."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가 사랑하던 말을 탄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알렉스가 말한 대로 비가 갠 뒤의 햇살은 여느 때 보다 더 강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이브는 잡지 한 권을 가지고 집 뒤에 있는 테라스로 걸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후라도 15분쯤 후에 언니 뒤를 따라와 등의자에 편안히 기대앉았다.

"이런 생활엔 아무 저항 없이 녹아들 것 같아. 접시를 씻을 필요도 없고, 침상 정돈도 할 필요 없고!"

사실 런던에서도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러는 군. 이브는 마음속으로 씁쓸히 웃었다. 물론 내가 나빴던 것이다. 남한테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것보다는 자기가 하는 편이 나아서 그렇게 하고 만 것이니까.

"무언가 할 말이 있으면 하지 그러니? 그렇지 않으면 속이 답답할 텐데."

"은혜를 베푸는 체하는 말은 하지 말아 줘, 언니."

"미안해. 그렇게 중요한 일이니?"

". 이야기를 들으면 언니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언니가 소중히 여기는 브레드는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사실이야!"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는 너의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니? 혹 질투 때문에 그런 말하는 건 아니니?"

"언니한테 그를 빼앗겼다고? , 그게 아니야. 그 전부터 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어. 그는 빛 좋은 개살구야. 자기만이 소중한 거야.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람이야."

", 소리가 너무 커." 이브는 열린 창에 신경을 쓰며 말했다. "너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브레드를 비난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지나친 말로. 알겠니?"

"웨이드는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억지로 말하게 한 거야."

하지만 처음 그 말을 꺼낸 것은 누구일까 하고 이브는 생각했다.

"어쨌든 이야기해 봐. 사실을 분명히 하고 나서 생각하기로 해. 되도록 편견을 갖지 말고!"

"언니는 자기 계모와 관계를 갖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 후라가 천천히 말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나직한 새 울음소리가 들렸으나, 이브에게는 그것이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 싶었다. 잠시 후 이브는, "믿을 수 없어. 그런 것." 하고 말했으나, 그것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음성이었다.

후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웨이드는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목격했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지? 두 사람 사이가 좋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뿐 아니니?"

"언니는 일부러 둔감한 체하는군. 웨이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어. 껴안고 있었다는 말이야, 이해를 못 하겠다면 더 설명해 줄께."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어." 이브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자그마한 마음의 상처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웨이드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웨이드가 잘못 보진 않았어. 두 사람은 강가의 풀숲에 있었대. 웨이드는 하마터면 그 곁을 모르고 지나칠 뻔했대. 브레드는 그 후 늘 이것을 마음속에 두고 후라 이모에게 그를 헐뜯었대. 다행히도 로라 이모는 그 말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대. 웨이드는 이모한테는 자식과 같은 존재였대."

"그것은 웨이드의 의견이니, 아니면 이모의 의견이니?" 이브는 반문했으나 동생의 표정을 보자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어, 웨이드가 신임 받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겠어. 나도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런 인상을 받았으니까."

"웨이드가 일부러 나쁜 뜻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란 것도 인정하지?"

"그건 모르겠어. 그런 타입이 아닌 것 같지는 하지만, 그가 잘못 보았는지도 몰라. 두 사람은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었는지도 몰라."

"두둔은 그만 해. 두 사람은 거의 벌거벗은 채로 있었대. 브레드가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웨이드는 말했어, 다이언은 도망치려 했고."

"그런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아!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본인에게 물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어. 아니면 웨이드가 직접 다이언에게 물어 봤대?"

"물어 보지는 않았을 거야. 다이언을 매우 싫어했다고 했으니까."

"웨이드 자신이 다이언에게 접근했다 실패한 건지도 몰라."

"그만둬!" 후라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언니에게는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없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 이야기는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을 중상하고 있을 뿐이라는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니?"

"브레드가 부인한다면 그렇게도 되겠지. 그에게 물어봐 주겠어?"

"어째서 내가 그렇게 해야 하지?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야."

"언니가 관계없으면 다른 누가 관계가 있다는 거지? 그는 언니의 애인이잖아?" 후라는 언니의 날카로운 시선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받아넘겼다. "내가 모르는 줄 알아? 그가 매일 밤 언니 방으로 가는 것을 다 알고 있었어."

이브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야기를 엿들었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벽이 두꺼워서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밤 두 시쯤에, 보통 대화가 아니란 것만은 확실한 이야기가 들렸어. 그렇다고 이것을 가지고 언니를 나무라는 것은 아니야. 약간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 그는 굉장하겠지?"

이브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야!"

"다이언과의 문제에 대해서도 나는 관계없어. 그것은 언니의 문제야. 하긴 언니를 만나기 전에 그가 무슨 일을 했든지 상관없다면 문제는 다르지만. 실제로 이미 집을 나가고 없는 계모 정도는 신경 쓰이지 않겠지. 그녀는 브레드보다 불과 한두 살 위였을 것이고, 남자는 연상의 여자에게는 약하니까." 후라가 갑자기 말을 중단했다. 갈색 눈에 부끄러운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미안해, 언니. 이런 말은 안해야 했을지도 몰라. 다만, 언니가 알아뒀으면 하는 생각에서 말한 것 뿐이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는 물론 언니의 자유지만."

"고마와, 생각해 보겠어." 이브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나는 짐을 꾸리고 오겠어. 네 말대로 바베큐 파티를 열려면 아침식사 후 곧 떠나야 할 테니까 말이야."

그 이야기는 사실일까? 이브는 슈트케이스에 옷을 집어넣으면서 생각했다. 브레드는 아버지 그늘에 숨어 계모에게 손을 대는 그런 남자일까?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직감이란 그리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다.

후라의 말처럼 그에게 직접 물어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그는 정직하게 대답해 줄까? 만일 그가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에 대해서 지금까지와 같은 감정을 계속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브레드와 얼굴을 마주 대한 것은 저녁때였다. 테이블 너머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받으니,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후라는 그러한 두 사람을 짓궂게 바라보았다.

자매가 내일 아침 서클스리로 옮겨간다는 말을 듣고도 브레드는 거의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브의 마음은 의외로 침울해졌다. 그가 지금 여기서 두 사람의 관계를 끝내려 한다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어제 한 말과 모순된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이제 여기서 없어진다고 해도 브레드는 별로 타격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와 계속 만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그의 선택에 달려있다.

알렉스 센이 아직 손님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저녁 후에도 브레드와 단둘이 있을 기회가 없었다. 일동은 베란다로 옮겨 서늘한 밤 공기 속에서 대화를 즐겼다. 조금 떨어져 있는 트레일러 하우스에서 무슨 집회가 있는 듯 기타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우리도 무언가 해야겠군, 다이아몬드 바의 바비큐 파티라면 이 지역의 전통적 행사가 되고있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니, 브레드?" 버트가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죠. 언제가 좋을까요?"

"다음 주말이 어떨까? 자네도 올 수 있지, 알렉스?"

", 기꺼이 초대에 응하겠어. 이마 3년이나 되었지, 그때부터.......?" 알렉스는 무슨 나쁜 말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거나 무척 오랜만이군."

버트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보충설명을 했다.

"마지막으로 연 것은 사고 직전이었지. 그 후 사교적인 모임을 갖고 싶지 않아 중단했었지만, 이제는 다시 시작해도 좋을 시기가 됐어. 여느 때처럼 마리아와 초대가 만반의 준비를 해줄 테지."

"우리도 초대받을 수 있을까요?" 후라가 물었다.

"그럼. 두 아가씨는 주빈이야.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가 모두 초대되니까 그 위에 군림해 줘요."

"26세부터 30세까지로 해주세요. 그러면 흥미를 가질 테니까요." 후라가 스마트하게 대꾸했다.

틀림없이 웨이드 코너즈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가 초청될 것이라는 보증도 없는데.

열 시 반이 되자 알렉스와 버트가 방으로 돌아갔다 후라도 의미 있는 시선을 언니한테 던지자 천천히 일어섰다.

"짐꾸리기가 아직 조금 남아서 나도 실례하겠어요.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브레드?"

"그야, 몇 만 킬로나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니까." 브레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전송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요?" 후라가 대꾸했다. "아뭏든 우리를 돌봐줘서 고마워요!"

"천만에." 그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후라의 힐 소리가 두꺼운 카펫에 흡수되어 들리지 않게 되자,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이브는 두 줄로 이어선 트레일러하우스 사이에서 깜박거리는 모닥불에 시선을 보냈다.

"무척 즐거워 보이는군요. 오늘은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나요?" 침묵을 참지 못하고 이브가 말했다.

"토요일 밤은 언제나 저러지. 가보겠나?"

이브는 주저했다. 의심을 벗기고 싶은 심정과, 그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이대로 있고 싶다는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이브가 말을 돌렸다.

"물론이지. 누구든지 환영하니까." 브레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해.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그럼 가요." 이브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브레드는 이브의 손도 잡으려 하지 않고, 옆에서 묵묵히 걷기만 했다. 검은 셔츠와 슬랙스 차림의 그는 마치 키가 큰 검은 그림자와 같았다.

"서클스리의 집에 풀이 있다는 말은 왜 안하셨어요? 후라는 너무나 좋아하고 있어요."

"풀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었지. 그 집을 이브에게 떠맡길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랬을 테죠." 이브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해보지 그래?" 브레드는 보조도 늦추지 않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이브는 대답할 말을 몰랐다.

"왜 그런 말을 하세요?"

", , 그 밖의 육감으로 느꼈지. 냄새도 맡을 수 있고. 말해 버리는 편이 후련할 텐데." 브레드가 이브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벌써 다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추측이야. 두 사람은 오늘 코너즈를 만났지? 그 사람의 이야기로, 이브에게 이런 반응을 일으키게 할 말은 하나밖에 없거든."

"내가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에요. 그가 후라에게 목장을 안내하면서....."

"그래서 후라는 얼른 이브에게 보고한 것이로군. 상상할 수 있어." 브레드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족히 몇 분이 지나서야 이브는 의문을 입 밖에 내어 물었다.

"웨이드가 거짓말을 한 걸까요, 아니면 자기가 본 것을 확대 해석한 걸까요?"

"웨이드가 무슨 말을 했느냐에 달려 있지."

"웨이드는 당신과 당신 계모가 강가의 풀밭에 있는 것을 보았대요. 그런데, 계모는 당신에게서 도망치려 하고 있더래요."

브레드가 대답하기까지 몇 초, 아니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 말은 옳은 이야기야."

이브는 걸음을 멈추고 주먹을 쥐었다.

"그럼, 사실이었군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목이 메어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브는 홱 돌아섰다. ", 돌아가겠어요!"

서너 걸음도 걷기 전에 브레드는 거칠게 이브의 어깨를 붙들자 방향을 돌려놓았다.

"돌아가더라도 내 말을 들어 본 뒤에 돌아가는 것이 어때?"

"듣고 싶지 않아요! 변명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그녀는 당신의 계모예요. 아버지의 부인이란 말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브레드가 여기에 대답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이브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을 호주머니에 깊숙하니 찔러 넣었다.

"같이 있은 건 사실이야. 부인하고 싶지 않아. 어서 뛰어가. 이브에게는 그것이 안전할 거야."

그 말을 듣자 이브는 왠지 망설여졌다.

"브레드, 나는........"

"우리는 아직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어, 그렇지?" 브레드는 비꼬는 투로 말하고는 힘껏 이브를 껴안았다. 이브는 저항할 수 없었다.

브레드가 갑자기 손을 놓는 바람에 이브는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했다. 그는 순간 그녀를 받쳐 주었으나 곧 손을 떼었다.

"지난 이틀 동안 - 이틀 밤이라고 해야 정확하겠군 - 의 사례야. 즐거웠어."

브레드가 사라진 뒤에도 이브는 멍청히 서 있었다. 내가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그의 변명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브레드의 뒤를 쫓아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이브는 겨우 이것을 참았다. 그는 지금 무척 화가 나 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도 벼락이 내릴 것이 뻔하다.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의 기분이 좀 가라앉은 다음이 좋을 것이다.

방에 돌아왔으나 잠자리에 들 생각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따진다면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지만, 이런 경우 상식 따위는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 밤 안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이브는 생각했다. 앞으로 얼마 후에 그가 돌아올지도 예상할 수 없었다.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은 그의 방에 가서 기다리는 일이다 - 그럴 용기가 있다면 말이지만.

하지만 용기를 따지고 있을 마당이 아니다. 나한테는 그의 설명을 들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브는 방에서 나와 안채로 가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방의 장식은 남성적이었다. 나무와 가죽을 많이 사용했고 빛깔도 갈색과 베이지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침대는 칸막이가 되어 있는 워드 로브 저쪽에 있는 것 같았다. 욕실의 문은 열린 채였다. 이브는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았다. 불은 켜지 않았다. 기다린다는 것은 큰 고역이었다. 브레드가 밤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있으려 애를 썼으나 이브는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스탠드를 켜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브레드는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켜 똑바로 이브를 보았다.

"여긴 왜 왔지?"

이브도 몸을 일으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의 태도는 용지를 주는 것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시도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의 설명도 듣기 전에 멋대로 결론을 내려서 미안해요. 사과하러 왔어요."

브레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런데 지금이 몇 신지나 알고 있어?"

"시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요." 이브는 두 손을 모아 쥐었다. "브레드, 부탁이에요. 더 이상 문제를 어렵게 만들지 마세요!"

브레드는 무관심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무엇이 어려운지 모르겠군. 이브는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말했어. 그럼 됐잖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자기 의견도 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내가 여기 왔어요. 그것을 듣고 싶어요."

"그건 무리야. 이브에게는 한번 기회를 주었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어."

이브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브레드를 쳐다보았다.

"내가 실수했어요.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금방 후회한 경험이 없나요?"

"있지. 하지만 이번은 문제가 달라."

"어째서죠?"

"이것은 내 인생에서 이브와 관계없는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지. 우리는 그동안 사이좋게 지냈어. 즐거운 경험이었어.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아. 하지만 모든 권리를 다 준 것은 아니야.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해. 과거에 일어났던 것,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것은 나의, 나만의 문제야. 알아듣겠나?"

"잘 알았어요." 이브는 창백해져서 일어났다. "상대해 준 데 대해 인사를 드려야 하겠군요. 여성이라면 누구든지 그런 은혜를 입은 데 대해 감사할 거예요!"

그의 턱이 갑자기 긴장했다.

"나가 줘! 아니면 재미없는 골을 보게 될걸."

"말하지 않아도 나가겠어요. 내일 아침이면 당신 앞에서 모습을 감출 테니까요. 정말 타이밍이 맞는 군요."

브레드는 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브가 문을 닫았을 때도 그는 등을 보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8

이튿날 아침, 자매는 아침식사를 하자 곧 다이아몬드 바에서 떠났다. 버트는 두 사람이 떠나는 것을 섭섭해 했으나, 가끔 놀러 오겠다는 이브의 말을 듣자 그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겠다고 말했다. 브레드와의 문제로 아무리 마음이 무겁다 해도 약속은 지켜야만 할 것 같았다. 만일 브레드가 조금이라도 델리케이트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면, 내가 찾아왔을 때 모습을 감추는 정도의 배려는 해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있고 해서 억지로 웃는 낯을 짓는 것이 오늘 아침 이브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웨이드에게 마중오라고 부탁할 것을 잘못했다고 후회하면서, 이브는 브레드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후라가 얼른 뒷좌석에 앉았기 때문에 이브는 할 수없이 조수석에 자리 잡았다. 그의 곁에 앉으니 저절로 몸이 떨렸다. 이 찌르는 듯한 마음의 아픔을 느끼지 않고 그를 생각할 날이 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가 무슨 일을 했건 혹은 하지 않았건 간에, 나는 아직 그를 절망적일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차를 운전하고 있는 동안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후라만이 두 사람의 분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이애미에 가겠다는 계획은 당분간 뒤로 미룬 듯했다. 그것이 웨이드 코너즈 때문인지, 또 그것이 좋은 일인지 이브로서는 알 수 없었다. 후라를 처음 만나 그런 말을 하다니, 웨이드란 사람도 믿을 만한 남자가 못 되는 것 같다. 물론 후라가 말한 것처럼은 하지 않고, 은근히 그런 뜻만을 내비쳤을 것이다. 앞서 자신의 프라이드를 손상시킨 사람이니 만큼, 후라도 곧 여기에 솔깃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 이야기에 대한 나의 반응이 두 사람 사이에 간격을 만든 것이다. 어젯밤 이후, 브레드는 전혀 태도를 누그러뜨리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마 끝난 것이다. 그리고 이일에 브레드는 마음의 아픔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는 듯했다. 그도 앞으로, 내가 지금 맛보고 있는 고통을 느끼는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을 것인가. 아무래도 그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웨이드는 도와주려고 온 두 주부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덮개는 치워지고 카핏에는 청소기가 놓여 있었다. 창문을 완전히 열어젖혀 놓았기 때문에 빈집 특유의 퀴퀴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브레드는 커피라도 마시고 가지 않겠느냐는 웨이드의 권고를 거절했다. 알렉스 센이 저녁식사 전에 돌아갈 것이고, 그와 천천히 이야기할 기회가 좀처럼 없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그럼, 오늘 바베큐 파티에 초대한다면 부담이 되겠군요?" 이브가 부드럽게 말했다.

푸른 시선이 순간 이브의 눈과 마주쳤다. 그것은 냉정하고도 어색한 눈길이었다.

"그럼 나중에."

"바베큐 파티 준비는 완전히 끝났어요?" 지프가 달려가 버린 뒤 웨이드가 말했다. "아이들이 기대하고 있어요. 로라는 주말이나 휴가중엔 아이들에게 풀을 개방했어요.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기로 하죠. 풀이 저렇게 넓으니 재미있게 놀 수 있을 테니."

"돌아가신 크란네씨는 텍사스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크란네씨는 아버지한테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해요."

"당신은 이모부를 아시나요?"

"아뇨, 내가 여기 왔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안계셨어요. 당시의 목장감독이 2년 전에 그만두어서 이모님께선 나에게 일을 맡기셨죠. 나를 믿어 주세요, 로라의 기대를 배반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물론 신용해요." 이브는 진심으로 말했다. 신뢰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더 참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바베큐 파티는 대성공이었다. 이브는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이브는 이제 자기네 사용인이 된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면서, 적자를 커버할 수 있는 한 서클스리를 존속시키겠다고 새삼스럽게 결심했다.

배워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이브는 열심히 매달렸다. 처음 이틀 동안 그녀는, 웨이드와 목장을 둘러보며 매일의 일과를 기억하는 데 전념했다. 너무 열중했기 때문에, 사흘째 되는 날 아침 후라는 드디어 불평을 말했다.

"이번에는 웨이드까지 가로채려는 거야? 그렇게는 안 돼. 언니, 듣고 있어?"

"?" 이브는 살피고 있던 장부에서 시선을 들었다. "미안해, 듣지 못했어."

후라가 흥, 하고 코를 울렸다.

"그럴 줄 알았어. 나는 지금, 웨이드에게는 손대지 말라고 했어. 알겠어?"

"웨이드? 그게 무슨 말이니?"

"알고 있을 텐데. 그와 먼저 만난 사람은 언니일지 모르지만, 그가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야. 그것도, 브레드가 언니한테 느끼고 있는 흥미와는 종류가 달라!"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잠시 동안의 시간이 필요했다. 후라가 곧 후회하리란 것은 알고 있었다.

"네 말이 맞아. 어느 편이냐 하면, 웨이드는 네게 대한 걸 화제에 올리고 싶어 하니까." 이브가 말했다.

후라가 얼굴을 붉혔다.

"내가 어떻게 됐나 봐.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신경 쓸 것 없어." 이브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 우리는 늘 사이좋은 자매였는데." 후라는 입을 다물었으나 못 참겠다는 듯 이윽고 호기심을 드러내어 말했다." 언니와 브레드는 요즘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브레드의 이름을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뛰지만 이브는 태연하게 말했다.

"별로. 그저 그래. 나는 너무 일찍 간단하게 결론을 내린 것 같아. 하지만 좋은 경험이 되었어.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배워야 해."

"저런, 훌륭하군. 하지만 언니가 상당히 상처를 입은 건 분명하지?"

허세를 부려도 소용없다. 이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침울하게 말했다.

"그래, 분명히 상처를 입었어. 하지만 자업자득이니까 할 수 없지."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일어섰다. "나는 이제 가봐야겠어. 오늘 아침에는 로라 이모의 애마에 안장을 얹어 보기로 했어. 풀 사이드에서 멍청히 있지 말고 같이 가보련? 그렇게 하면 웨이드를 감시할 수도 있고."

"승마를 배워도 좋을까?"

"하지만 그 암말은 안 돼, 나의 애마로 삼을 결심을 했으니까. 괜찮겠지?"

"좋아. 나는 말에 대해선 모르니까. 웨이드가 누구 소속인가만 분명히 알고 있으면 돼."

"그건 웨이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 참고로 말해 두겠는데, 나는 그런 타입은 싫다."

두 주일만 지나고 나면 후라도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녀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끈기가 없으니까.

이모가 아끼던 밤색 말은, 다른 몇 마리와 함께 풀을 뜯고 있었다.

"이 말에는 1년 이상이나 안장을 얹지 않았죠." 웨이드가 설명했다. "고삐를 매어 보아서 난폭하게 굴면, 익숙해질 때까지 좀 기다리셨다가 안장을 얹어야 할 겁니다."

"싫어하면 아예 안장을 얹지 말고 지금까지처럼 들판에서 자유롭게 뛰놀게 하고 싶어요." 돌아본 웨이드에게 이브가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 영국인은 동물에 대해서는 감상적이거든요."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에요." 후라가 모자를 벗어 크게 흔들었다. "해보세요, 카우보이!"

웨이드가 암말에 다가가서 다른 말에서 떼어놓았다. 재빠르고 익숙한 솜씨였다. 목에 밧줄이 둘리자 암말은 미친 듯이 날뛰며 익숙지 않은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정말 아름다운 말이었다. 키는 15핸드쯤 되고 갈기와 꼬리가 미풍에 보기 좋게 날렸다. 웨이드는 두 사람이 서 있는 펜스 가까이까지 말을 끌고 왔다.

"안장을 얹는 게 싫은 모양이군." 그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말의 옆구리를 두드렸다. "로라는 두서너 달밖에 이 말을 타지 않았어요. 당신이 승마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문제가........"

"일단 해보겠어요." 이브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선이 말을 내게 인사시켜 주세요."

목장감독이 어깨를 으쓱했다.

"좋도록 하세요. 목뼈가 부러지는 사람은 당신일 테니까. 로라는 이 말을 카프리스라고 불렀죠. 소녀취향 적인 이름이죠. 같은 영국인이니 당신의 마음에도 들겠군요."

이브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가 이름을 부르자 말은 귀를 쭝긋 세웠다. 가만히 목에 손을 얹으니 순간 꿈틀했으나, 이브가 달래듯 목덜미를 애무하기 시작하자 저항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얼굴의 흰 점을 만져보고 코에 숨을 불어넣었다. 이것은, 말한테 자기 냄새를 맡게 하기 위한 것으로, 영국의 조련사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었다. 카프리스는 머리를 숙이고, 이브가 내민 손가락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거 놀랐는데! 당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로라를 닮은 모양이군요." 웨이드가 안장을 가지고 가까이 왔다. "어디, 안장을 한번 얹어 봅시다."

등에 안장을 올려놓자 암말은 겁을 먹은 듯,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이브는 웨이드를 비키게 하고 말의 배 밑으로 손을 돌려 복대 끝을 잡았다. 저항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됐으나, 다행히도 말은 점잖게 있었다. 복대의 버클을 잠가도 몸 하나 움직이지 않고, 다만 무엇을 하느냐는 듯이 뒤를 돌아볼 뿐이었다. 이가 가지런히 난 입에 재갈을 물릴 때는 긴장했지만, 순순히 입을 벌렸다.

"당장 타다니요?" 이브가 고삐를 쥐고 등자에 오르는 것을 보자 웨이드가 놀라서 물었다.

"해보지 않고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내가 영국에서 온 지 오래 되었다면 당신도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겠죠?"

"글쎄, 좋아요, 힘껏 도와드리죠."

이브가 기대어도 암말은 저항하지 않았다. 이브는 안장에 가만히 앉아 몸을 앞으로 굽히고 말의 귀와 귀 사이의 연골을 쓰다듬었다.

"로프를 풀어 주세요."

말을 약간 걸려 보니 그 걸음걸이가 안정되어 있어서 이브는 곧 릴랙스 할 수 있었다. 트로트 (tort)로 몇 바퀴 돈 뒤, 이브는 두 사람이 서 있는 반대쪽에 말을 세웠다.

"카프리스는 멋져요. 아주 상태가 좋아요. 게이트(gate)를 열어 주지 않겠어요, 웨이드? 잠시 카프리스와 산책을 하고 싶어요."

"겨우 걷는 것을 배웠구나 싶은데 벌써 달릴 생각이요?" 웨이드는 놀렸으나, 이미 걱정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돌아오거든 데려오세요. 샘에게 발굽을 살피게 할 테니."

이브는 후라에게 손을 흔들자 밖으로 나와, 처음 이곳으로 올 때와 같은 길을 더듬어 나갔다. 지프가 우측통행을 할 것이라 여기고 왼쪽으로 치우쳐 갔는데, 말이 지시대로 움직여 주어 기분이 좋았다. 다섯 번 째의 승마치고는 의외로 능숙했다. 동물과 금세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지 모른다.

약간 넓은 길로 나오자 먼 지평선 위에 리스빌의 높은 빌딩 두 채가 보였다. 이대로 가서, 지난주에 보고 돌아온 부츠를 살까 하고 생각했다. 어차피 앞으로 매일 말을 타려면 꼭 필요할 것 같았다.

"우리는 언제나 한 몸이야, 카프리스." 이브는 윤기 나는 말머리를 다정히 두드려 주었다. "오늘부터 우리들의 멋진 관계가 시작된 거야."

리스빌까지는 약 20분이 걸렸다. 이브는 마음 느긋하게 메인스트리트로 갔다. 여기 온 지 며칠밖에 되지 않다니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영국에서의 생활은 먼 옛날의 추억같이 느껴졌다.

이브는 길가의 말뚝에 카프리스를 매고, 전에 모자를 샀던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차분하게 생각한 끝에 모자 색과 같은 베이지색 부츠를 샀다. 새신을 신고 가기로 하고 헌신을 포장했다.

상점 밖에 나와 보니 길 건너편에 지프가 세워져 있고 운전석엔 브레드가 앉아 있었다. 뒤를 말아 올린 모자를 앞으로 깊숙이 눌러 쓴 그 모습이 너무나 눈에 익어, 이브는 가슴이 아팠다.

"카프리스가 여기 서 있기에 기다리고 있었지. 초심자용 말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브레드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카프리스는 어린 양처럼 양순해요."

"때로는 그렇겠지.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로라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지만."

"하지만 그로부터 1년이나 지났어요. 인간과 마찬가지로 말도 조금은 현명해지는 거예요."

브레드의 입술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아마 그 말이 옳겠지. 그래, 곧바로 돌아갈 생각인가?"

"." 이브는 더 이상 이런 대화를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버님께, 내일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직접 전화하는 것이 어떨까? 이브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참지 못할 지경인 것 같아. 그리고, 바베큐 파티 날짜를 확실히 정했어. 이브네 집에 들러 메시지를 전하고 왔지. 꼭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어."

틀림없이 브레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서겠지.

"꼭 가겠어요. 그럼 안녕, 브레드."

"만나서 영광이야." 비꼬는 말투였다. "그 말에는 조심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한테 충고를 받을 정도는 아니에요."

브레드는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해. 그럼 주말에."

이브는 지프를 전송하고 나서 말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목에 결려 있는 응어리 같은 것을 꿀꺽 삼켰다. 언젠가는 이 마음의 아픔이 사라질 날이 올 테지. 그때는 나도 웃으며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거리에서 9킬로쯤 벗어났을 때, 이브는 뒤에서 따라 오는 차 소리를 들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브레드임을 알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일부러 뒤를 따라온 것인가, 아니면 그저 시내에서 볼일을 다 봤기 때문에 다이아몬드 바로 돌아가는 길인가 하는 것이었다. 커브길까지는 아직 1킬로 반이나 남아 있었다. 이브는 충동적으로 속력을 내어 말을 몰았다. 지프도 지지 않으려는 듯이 쫓아왔다.

"멈춰, 바보같이! 말을 세워!" 브레드가 따라오면서 소리쳤다.

"내가 세우고 싶을 때 세우겠어요. 당신이나 조심하세요!" 이브도 따라서 소리쳤다.

브레드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으나, 입의 움직임으로 보아 그것은 상당히 격한 말인 듯싶었다. 그는 액셀레이터를 밟아 말을 추월했다. 이브는 지프가 몇 백 미터 앞지른 것을 보고서야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려 했다.

말이 그 명령을 무시했을 때 이브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말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허공을 차는 말발굽 밑이 편편한 길이어서 상관없지만, 말이 무릎을 꿇기라도 하면 내동댕이쳐질 것이 분명했다. 이브는 있는 힘을 다해 고삐를 당겼으나, 자기 체중으론 말을 세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된 이상 말이 숨이 차서 스스로 설 때까지 등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다.

길 양쪽은 넓은 초원이라, 카프리스는 제멋대로 왼쪽으로 꼬부라져 한 줄기 빛처럼 초원으로 달려갔다, 이브는 쫓아오는 지프 소리를 희미하게 들은 것 같았으나, 돌아다볼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하면 말 등에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지프는 요란하게 엔진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말의 진로를 막았다. 결국 말은 원형을 그리듯이 초원을 빙빙 돌았다. 드디어 고삐가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하여 차차 속력이 떨어졌다. 마침내 말이 완전히 정지하게 되었을 때, 이브의 손바닥은 가죽에 마찰되어 새빨갛게 되어 있었다.

지프가 멈췄다고 생각되는 순간, 브레드가 번개같이 지프에서 뛰어내려 이브를 안아 내렸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이 바보! 목뼈가 부러질 뻔했잖아!"

이브는 머리가 빙빙 돌고 손바닥이 쑤셨으나 기세만은 당당했다.

"무슨 상관이에요, 내 목인데!"

순간 그는 입을 꽉 다물었다. 두 사람은 나무 밑에 서 있었다.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라곤 눈에 뜨이지 않았다. 브레드가 이브를 풀 위에 쓰러뜨렸을 때, 그녀는 버둥거리며 손톱을 세웠으나 쉽게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 며칠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브레드의 입술이 거칠게 내려왔다. 갑자기 이브는 어떻게 돼도 좋다는 생각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브레드는 스톱을 걸었다. 그는 드러누운 채 팔을 쳐들어 햇빛을 가렸다.

"안 돼, 허니. 되돌아갈 수는 없어."

이브는 가만히 있었다. 자신의 약함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이미 끝난 사이다. 브레드는 분명히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다.

카프리스는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이브는 맥빠진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말고삐를 잡으러 갔다.

"설마 다시 그 말을 타려는 건 아니겠지?"

"왜 안 되죠? 말에서 떨어지면 얼른 다시 탄다고 말한 것은 당신이 아니었던가요?"

"타는 방법을 알 경우에는 그렇지. 하지만 이브의 승마 지식은, 내가 피아노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같을 정도야." 브레드는 일어서며 옷에 묻은 검불을 떨었다. "말은 차 뒤에 매고 이브는 차에 타. 태워다 주겠어."

이브는 저항했으나, 강제로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브레드의 말에 겁을 먹고 할 수없이 지프에 올랐다.

카프리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브레드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차가 서클스리의 안뜰에 닿자 웨이드가 마구간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초보자가 겁없이 말을 탔을 때 당연히 발생하는 일이 일어났지. 만일 이브가 상처라도 입었다면 그것은 자네 탓이야."

웨이드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이브가 분연히 외쳤다.

"그렇지 않아요, 웨이드는 몇 번이나 못하게 말렸어요."

"그렇다면 이브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바보로군. 다음번에는 그 유명한 영국인의 양식을 조금이라도 동원시키도록 해!"

지프가 달려간 뒤, 웨이드는 동정 어린 표정으로 이브를 보았다.

"그는 빈틈없는 사람이에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말이 달리기 시작하더니 멈추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브레드가 지프로 말을 세워 주었어요."

"큰일 날 뻔했군요. 이젠 지긋지긋하겠군요?"

"천만에요. 또 탈 거예요. 다만 이번에는 좀 더 조심을 해야겠지만."

웨이드가 감탄했다는 듯이 이브를 바라보았다.

"당신에겐 배짱이 있군요, 분명히!"

"고마워요." 지금의 이브로서는 어떤 칭찬의 말이라도 기뻤다. "그런데 후라는 어디 있죠?"

"풀에 있을 겁니다. 정말 물을 좋아하는 아기 같아요, 당신 동생은! 여기에 오래 있을 생각일까요?"

이브는 일부러 가볍게 대답했다.

"있고 싶을 때까지 있겠죠. 어쨌거나 이곳은 동생의 집이기도 하니까요."

"그럼, 영국에는 이미......."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웨이드는 기쁜 모양이었다. 후라가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 말았으면, 하고 이브는 생각했다.

이브는 집 안에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브레드는 아직 집에 돌아가지 않았을 테니까, 그의 아버지와 이야기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버트는 곧 전화를 받았다. 서재에서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중이라고 했다. 어딘지 모르게 원기가 없어 보였으나, 그 이유를 물을 수는 없었다.

"바베큐 파티 날짜를 확실히 정하신 모양이죠? 시내에서 브레드를 만났어요"

", 정했지. 그런데 그전에 미리 한번 만날 수 없을까?"

"내일 오전중에 찾아뵙겠어요. 커피라도 대접해 주시겠어요?"

"무엇이든지 대접하지. 아가씨들이 없으니까 집안이 쓸쓸해요. 텅 빈 것 같아."

그 넓은 집에 단 두 사람이 살고 있으니까 쓸쓸할 테지. 게다가 마리아와 조제도 말수가 적은 사람이니. 버트는 지난 3년 동안 독서에서 위안을 찾아 왔으며 전쟁과 평화도 통독했다고 한다. 그러나 책만 읽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시간이 있으니까 버트 핸슨의 이야기 상대가 돼주는 것이 힘들 것은 없다. 그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그의 아들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당분간 바뀔 것 같지 않았다.

 

9

이튿날 아침 웨이드가 끌고 온 카프리스는 매우 얌전했다. 햇살을 받아 털이 윤기 있는 실크처럼 빛났다.

"그 말을 다시 타다니, 아무래도 언니는 제정신이 아니야. 다음번에도 브레드가 쫓아와 구해 주리라 생각해!" 후라가 말했다.

"다음 번이라는 것은 없어. 조심에 조심을 거듭할 테니까."

"자만이 불행의 원인이라는 말도 있어. 물론 언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야.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이것은 너무도 진실에 가까운 추측이었기 때문에, 이브로서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브는 이것을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가겠어. 점심때까지는 돌아올 예정이야."

다이아몬드 바까지의 길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카프리스는 이브의 지시에 따라 얌전히 걸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은 것은,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브레드의 지프 소리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브레드가 내 목숨을 구해 주었는지 모르지만, 트러블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버트가 베란다에 나와 가다리고 있었다. 한 목동이 카프리스를 울타리 쪽으로 데려갔다. 카프리스는 거기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된 셈이다.

"어제 일로 화가 난 것은 아닌 모양이군, 브레드가 말한 그대로." 버트는 한 손으로 커피 잔을 들고 맞은 쪽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브레드가 어떻게 말했나요?" 이브는 무관심한 체하면서 물었다.

"말이 난폭하게 달렸다고 하더군. 그밖에도 무슨 다른 일이 있었나?"

"아니에요. 요약하면 그것뿐이에요.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스무스 했어요."

"그런 것 같더군. 아가씨는 무척 차분해 보였어.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로라가 아닌가하고 잠시 눈을 의심했을 정도니까. 나는 로라에게 반했던 때가 있었어. 알고 있겠지?"

이브는 놀랐다.

"저는 몰랐어요. 언제......."

"조스가 죽고 1년이 지난 뒤,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했지. 그가 차지했던 자리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어. 단지 우리는 뜻이 맞았고 두 사람 모두 적적했기 때문에 좋은 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지. 그런데 로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요. 조스의 추억에 대해 불성실해질 것 같다면서 거절하더군."

"그건........참 유감이군요." 이브는 진심으로 말했다. 버트의 깊은 생각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모는 서클스리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이모부와의 약속을 지켜야만 했기 때문일 테죠."

"그런 모양이야. 브레드가 조스가 살아 있을 때부터 몇 번이나 합병을 제의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지. 브레드로서는 선의에서 나온 제안이었어. 조스가 적자를 보며 운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들이 아직 그것을 단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겠지?"

".......하지만 저 역시 완고하니까."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나도 그것을 깨달았지. 아들과 당신 사이에 가로놓였던 대립의 벽은 무너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잘못 보았기 때문인가?"

"브레드는 까다로운 사람이에요, 핸슨씨."

"버트. 버트라고 불러요. 사실 아들은 의지가 강한 편이지. 만일에 그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일 거야."

"사람은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어요." 이브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럴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희망을 갖고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가질 것이고."

"저는 여기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됐어요. 비록......."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이라면 그를 조종할 수 있어요. 아들녀석도 이젠 결혼할 시기가 됐는데.......뒤를 이어 줄 손자가 생기면 나도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겠는데."

"아직 정정하신데,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시간은 충분히 있어요. 브레드는 32세에 불과해요."

"나는 25세에 결혼해서 26세에 그의 아비가 되었소. 아이들이 많았으면 했는데 브레드 하나로 그치고 말았거든."

"그 일로 부인을 원망하시는 건가요?"

"천만에!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 아내는 정말 착한 여자였지."

"미안합니다. 저는 오해하고 있었어요."

"세상의 트러블은 그 절반이 오해 때문에 생긴다고 하는 말이 있지. 나도 잘못을 많이 저질렀지. 다이언과의 재혼도 그 중의 하나지. 늙은........"

"알고 있어요. '늙은 바보보다 더 큰 바보는 없다' 는 말씀이겠죠? 하지만 선생님은 늙은이가 아니고, 그때는 더욱 그랬어요. 만일 사고 때문에 그녀가 나갔다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들도 같은 말을 하더군. 그 앤 처음부터 그 결혼을 반대했었거든. 재산이 목적인 여자라고 하면서. 아마 그 말이 맞았던 것 같아. 지난 3년 동안 나는 그녀에게 잘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위자료를 붙여 이혼하자는 거야. 그 액수가 무려 2백만 달러야."

"그렇게 많이? 그런 것을 요구할 권리가 그녀에게 있나요?"

"수완 있는 변호사가 뒤에 있는 모양이야. 지불하지 못할 액수도 아니었는데, 그 시기가 문제였지. 우리의 네 번째 결혼기념일 날 아침에 그 편지가 도착했던 거야."

얼마나 몹쓸 사람인가 하고 이브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브레드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변명은 되지 않는다. 웨이드의 말에 따르면 다이언은 그를 거절했다고 하니.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버트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브레드는 싸워야 한다고 하지만........아아, 마침 돌아오는군."

낯익은 지프가 집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브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브레드는 점심 전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지금 내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아니,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는 내가 태연한 마음으로는 만날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이다.

"저는 이제 돌아가야 하겠어요. 점심 전에 돌아가겠다고 후라와 약속했으니까요." 이브는 어물어물 하며 일어섰다.

"아직 열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요."

"브레드와의 의견대립에 대해서인가요?"

"그래요. 나는 두 번 다시 다이언을 만나기 싫으므로 재판을 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요. 그런데 브레드는 내일이라도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를 타겠다는 거예요. 여기 남아서 내게 가세해 줘요."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브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힘 자라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어요."

"여전히 충고를 무시했군." 브레드는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코너즈에게 말하면 당장 다른 말로 바꾸어 주었을 텐데."

"나는 그 말이 좋은걸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런 일은 두 번 다시없게 할 테니까........."

"자신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버트가 끼어 들었다. "그런데 브레드, 오늘 일은 벌써 끝났니, 아니면 도중에 돌아온 거니?"

"끝났어요. 시내에 나가 아버님께 식사 대접을 할까 해서요. 벌써 한 달 이상 외출을 안하셨잖아요?"

순간 버트는 거절하려는 것 같았으나 곧 생각을 바꾼 모양이었다.

"좋아. 이브, 당신도 같이 가지 않겠소?"

이브는 브레드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전화를 하면 될 텐데." 뜻밖에도 브레드가 참견을 했다. "후라는 어린아이가 아니야. 자기가 먹을 것은 직접 만들 수 있어.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말아 줘."

"그건 이브가 결정할 일이야. 억지로 그러면 못써."

이브는 버트에게 - 버트에게만 - 미소를 보냈다.

"그러면 같이 가겠어요. 카프리스는 돌아올 때까지 여기 둬도 괜찮겠죠?"

브레드가 기대고 있던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오겠어. 시간은 그리 걸리지 않을 거야."

이브는 그동안에 전화를 걸려고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다이얼을 돌리는 손이 떨렸다. 눈을 감기만 해도 햇볕에 그을은 얼굴이 떠올랐다. 브레드에 대한 사랑은 병과 같은 것이어서, 완치가 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뜻밖에도 후라는 가볍게 그러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의외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 브레드의 말대로 후라는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그녀 나름의 생활이 있다. 사고방식을 바꿔야 할 사람은 나인지도 모른다.

브레드가 거실로 나오며 말했다.

"준비가 됐나?"

"........하지만 아버님은 아직 준비중인 것 같아요."

"서두를 것 없어. 차를 바꾸어야 하니까. 지금의 차는 휠체어를 실을 수가 없어."

이브는 첫날 아침같이 난간에 기대서서 기다렸다. 그것이 불과 8일 전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많은 것이 변했다.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가 아니라.

바꿔 놓은 차는 앞의 것과 외형은 비슷했으나 승강 장치가 되어 있어서 휠체어가 쉽게 운전석 옆에 들어갔다.

"나도 같은 장치가 된 소형차를 가지고 있지, 내가 직접 운전할 수 있는." 버트가 말했다. "그러나 별로 사용하지 않아요. 가고 싶은 곳도 없고 해서."

"서클스리에 오세요. 언제든지 대환영이에요. 아마 기분 전환은 되실 거예요."

"그렇군, 용기를 내어 가볼까."

리스빌의 메인로드는 전과 달리 많은 사람들로 붐비었다.

"장날이군." 버트는 길 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제너럴에 테이블이 있을까?"

"아까 봅에게 전화해서 예약해 놓았어요."

"내가 승낙하리란 걸 예상했었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모실 생각이었거든요. 문제는 어프로치 방법이었지만요."

브레드는 벽돌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휠체어를 탄 버트가 차에서 내렸을 때 지나가던 여성이 말을 걸었다.

"버트, 외출하셨군요. 반가와요."

"오지 않을 수가 없었죠. 그럼, 토요일에 기다리겠어요. 이브가 전에 만났던 은행 지점장의 부인이야." 버트가 설명했다.

"토요일에 초대한 손님은 몇 명 정도나 돼요?"

"글쎄, 자세히는 모르겠는걸. 집과 뜰을 모두 개방할 생각이지. 내가 이제부터 활동을 시작한다는 공고를 하는 거지."

레스토랑의 로비로 들어가자 버트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지배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테이블을 준비해 주었다면서? 손님 한 분을 데리고 왔네."

"만나서 영광입니다." 지배인이 이브에게 미소를 보냈다. "이 작은 고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작은 고장에서 왔어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에요." 이브도 미소를 되돌렸다.

"그렇다면, 자극을 찾아 사흘 만에 마이애미로 가시거나 하진 않겠군요?"

"어떤 일이 있어도 서클스리는 떠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여기에서 눌러 살기 위해 왔어요." 이브가 힘주어 대답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런 정신입니다! 창가에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곧 자리 하나를 더 만들게 하죠."

음식은 특별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주 맛있었다. 이브는 메인 코스로 벽 가에 마련된 미국식 샐러드바에서 구미가 당기는 것을 골랐다. 큰 접시에 여러 종류의 샐러드를 담자 위에다 블루 치즈를 듬뿍 뿌렸다.

"이것을 다 합쳐도 2백 칼로리도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우울해질 뻔했어요." 이브는 웃으면서, 두 남자가 스테이크를 담고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칼로리에 신경쓸 것 없어요. 당신은 여성의 이상적인 체격을 하고 있으니까 - 아무도 당신을 남자로 착각하지는 않을 거요. 그렇지, 브레드?"

"그렇군요." 푸른 눈의 사나이가 조롱하듯 말했다. "전 가는 허리와 납작한 가슴엔 관심이 없죠."

아마 다이언은 글래머였을 것이라고, 이브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버트는 그러한 두 사람을 흥미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희망을 갖고 있다고 버트는 아까 말했다. 나 역시 희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망쳐 놓고 말았다. 만일 시계를 과거로 되돌릴 수 있다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행동할 텐데.

커피가 나왔을 때, 버트는 비로소 이혼 문제를 꺼냈다. 브레드는 곧 반론을 폈다.

"법정 밖에서 해결하겠다뇨, 안 될 말입니다! 아버지가 지난 3년 동안 준 것만으로도 그녀는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겁니다! "

"이번에 깨끗이 정리해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날 텐데." 버트가 조용히 말했다. "분명히 그녀의 요구액은 좀 많아. 하지만 분명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알렉스가 알아서 잘 처리해 주겠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어떻게? "

"제 나름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버트는 조용히 웃자 어깨를 으쓱했다.

"위협은 효과가 없어. 그녀에게도 단단한 기반이 있으니까."

"아버지를 버리고 간 여자를 동정할 여지는 없잖아요."

"글쎄, 어떨까?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무력하고 늙은 불구자에게 붙들어 매둔다는 것은 가혹하다고 할 수도 있어. 그럴 경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소, 이브?"

침묵이 흘렀다. 브레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브는 그의 눈을 되쏘아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사랑의 정도에 달렸다고 생각해요. 떠나느냐 머무르느냐에 집착할 정도로 밖에 당신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감싸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정의 여지가 없다고 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란 말 같군." 브레드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이브는 정직하게 대답해 주었어." 버트가 중재하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브는 법정 밖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는 말인가?" 브레드는 얼굴을 잔뜩 긴장시키고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아버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마음이 안정될지 알고 있는 분은 아버님뿐이니까요."

"그것이 결론인 것 같군, 커피를 한 잔 더 하겠소?"

이브는 고개를 흔들었다. 브레드의 얼굴에서 싸늘한 표정을 지워버리고 싶다. 하지만 부탁을 받은 이상 버트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브레드는 지금까지 자기 판단이 옳다고 늘 확신하고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해왔을 것이다. 그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 결점까지 맹목일 필요는 없었다.

암암리의 양해로 다이아몬드 바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이혼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이브는 자기 의견이 전적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데 대해 의심을 품었다. 만일 브레드가 문제 해결에 발 벗고 나선다면, 당연히 다이언과 개인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가 어리석은 행동을 할까 걱정하는 것이라며 자기 변명을 했다. 결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집에 도착한 것은 두 시 반이었다. 잠시 들렀다 가라는 버트의 청을 거절했다.

"그대로 앉아 있어, 말을 매놓은 곳까지 바래다 줄 테니," 브레드가 말했다.

이브는 걸어서 가고 싶었으나 말다툼을 하기 싫어 잠자코 있었다. 브레드는 휠체어가 무사히 베란다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버트는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마구간 옆의 울타리에는 한 마리 말밖에 없었다. 이브는 그 자랑스런 황금빛 동체와 풍성한 크림빛 갈기와 꼬리를 바라보고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운 말이군요! 이름이 뭐죠?"

"미스티." 브레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덧붙였다. "앞으로는 카프리스 대신 이 말을 타도록 해."

"안 돼요!" 이브는 홱 등을 돌려 분노에 타는 눈으로 브레드를 노려보았다. 당신에겐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없어요."

"하지만 이미 그렇게 되고 말았어. 시내에 가기 전에, 교환해 두라고 했어. 이놈은 발도 빠르고 무엇보다도 안전성이 있어, 이브의 목을 부러뜨릴 염려가 없거든."

"카프리스가 이모를 죽이지는 않았어요!"

"그것은 이모의 승마 솜씨가 뛰어 났기 때문이지. 그래도 몇 번인가 위험한 일을 당할 뻔했어. 이브는 로코가 뭔지 알고 있나?"

"로코모티브(locomotive, 기관차)의 약어 아니에요?" 이브는 일부러 가볍게 받아넘겼으나, 자기 생각에도 그것이 어리석게 여겨졌다.

"농담을 하는 게 아니야. 말이 로고(loco)초를 먹으면 신경성 병에 걸리게 돼. 한번은 카프리스의 어미가 그 풀을 먹고, 이유도 없이 서클스리의 한 카우보이를 짓밟으려 한 적이 있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카프리스는 그 피를 이어받고 있어."

"하지만 카프리스는 위험하지 않아요." 이브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가끔 이상할 때가 있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횟수는 더 잦아져. 그것이 패턴이야."

"그런 말은 믿을 수 없어요! 카프리스는 어디 있죠? 마구간 안에 있나요?"

이브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마구간의 문을 열었다. 칸막이가 일렬로 되어 있고, 세 마리 말이 각각 한 간씩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 어느 말도 이브가 찾고 있는 말은 아니었다. 단념하고 되돌아섰다. 브레드는 기둥에 손을 대고 서 있었다.

"이제 만족했나?"

"전혀!" 분노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옛날 같으면 말도둑은 교수형이에요! 현대에는 보안관이 어떻게 하겠죠!"

"직접 조사해 보지 그래? 아니면 보안관을 여기에 데려 올까?"

순간 이브의 얼굴에서는 분노의 불길은 사라지고, 탄원의 빛이 떠올랐다.

"브레드, 나를 어린이 취급하지 마세요. 당신에겐 그렇게 할 권리가 없어요. 알고 있겠죠?"

"이브의 목뼈에 대해서 걱정할 권리는 있지. 이브가 그토록 완고하지만 않다면 내 말이 이치에 닿는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나한테 무언가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면, 일부러 그런 위험을 강행할 필요가 없어!"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은 분명히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방법이 나쁜 거예요. 당신은 무슨 일이나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니까요. 처음부터 유전에 대한 말을 해주었다면......."

"만일 그랬다 해도 마찬가지야. 이브는 본능이 명하는 대로 충동적으로 행동하잖아?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해야겠어."

"만일 당신이 요전날 밤의 일을 이야기하려는 거라면, 지금은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있어요."

"유감이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 그의 얼굴에 그늘이 져서 눈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 기반 위에 서서 떠나거나 남거나 해줘."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만일 우리가 다시 전으로 돌아간다면, 어디까지나 그 기반에 서서 하자는 말이야."

이브는 키가 크고 억센 그의 모습에서 눈을 돌리지 뭇하고,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당신은 그러고 싶어요? .........다시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말인데........"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어. 이브 역시 마찬가지겠지?" 브레드가 뻔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택권은 이브에게 있어."

"좋아요." 이브가 한마디로 대답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건초 냄새와 말의 냄새가 이브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이브는 마음이 무거워져 가는 것을 깨달았다. 브레드와는 다시 친구 - 그 말이 적당한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 가 되었다. 하지만 그 밖의 것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죠?" 이브가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브레드는 무책임하게 내뱉었다.

"될 대로 되라지."

이브는 재빨리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가 자신이 바라는 인간이 아닌 것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에게서 다정한 말이 나오지 않으리란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연락만을 멍청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브레드는 일어서자 자신의 셔츠 자락을 손으로 만지면서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이브를 내려다보았다. "우리의 장래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잖아?"

"예컨대 서클스리 건 말인가요? 당신은 내가 거기서 손을 떼기를 원하죠?"

"맞았어." 그는 서슴없이 말했다. "이브가 거기 있으면 곤란한 문제가 많아."

"만일 내가 파는 데 동의하면?"

"그러면 우리는 새로이 출발할 수 있지."

"그럴 경우 나는 매력을 반 이상 잃게 되겠죠."

브레드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만일 이브가 날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지."

이브는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은, 당신의 진실을 믿을 수 없어요."

브레드는 이브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목적으로 당신에게 대해 내가 그토록 열을 올린 줄 아나? 날 그런 남자로 생각하나?"

"아뇨.......물론 그렇게는 생각지 않아요." 갑자기 말이 더듬거려졌다.

"이브는 자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어."

"당신은 전에도 그런 말을 했어요." 이브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반대보다는 낫잖아요?"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데. 자아, 여기서 나가도록 하지."

브레드가 벽에 걸린 안장하나를 벗겼을 때에야 비로소 이브는, 자기가 왜 여기에 들어왔는지를 생각했다. 브레드는 어깨로 문을 열면서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이브를 보았다.

"당신의 애마에 대한 의견 조정은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이브는 브레드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나왔기 때문인지 눈이 부셔서 눈을 깜박거렸다.

"카프리스는 어떻게 되죠?" 이브가 물었다.

"비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아니야. 이브가 원하면 서부 목장을 마음대로 달리게 해주겠어. 자아, 이제 새 말과 인사를 나누어야지?"

또다시 브레드의 뜻대로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 왈가왈부할 순 없었다. 내 안전을 생각해 준다는 것 자체가, 그의 마음이 내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10

토요일은 잔뜩 흐리고 찌는 듯이 더웠다. 멀리서 우뢰 소리가 들려왔으나 비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정대로 바베큐 파티가 개최되었다. 웨이드가 두 사람을 다이아몬드 바까지 데려다 주었다. 웨이드는 사양했지만 후라가 꼭 가야 한다고 졸랐던 것이다.

"우리는 버트와 브레드밖에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 두 사람은 호스트니까 바쁠 것이고, 어쨌든 나는 당신이 가기를 바라요." 후라의 미소는 아무리 굳은 결심도 바꾸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브는 두 사람이 즐겁게 하는 이야기를 뒷좌석에서 들으면서, 그들의 관계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를 생각했다. 과거의 예로 보면 일주일도 긴 편이다. 그 무렵이 되면 어떤 남자든지 최초의 충격적인 매력이 사라지고 평범하고 따분한 존재로 보인다. 일단 흥미를 잃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빠르다. 지금으로서는 가만히 그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브에게도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지난 이틀 동안 브레드한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오늘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하지만 오늘은 몇 십 명의 손님들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이다. 만난다 해도 단둘이 만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저택 뒤쪽에는 바베큐용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그것을 두 사람의 목동이 지키고 있었다. 긴 테이블에는 스테이크와 버거용 재료, 바베큐에 곁들일 야채가 놓여 있었다. 이미 찐 감자 냄새가 주위에 풍기고 있었다. 집 근처 서 있는 몇 사람의 그룹 속에 브레드가 있었다. 잿빛 바짓부리는 부츠 속에 찔러 넣고 오픈 셔츠에는 아무렇게나 네커치프를 두르고 있었다. 브레드는 곧 세 사람의 도착을 깨닫고 손짓으로 불렀다. 웨이드에게는 약간 머리를 숙여 알은 체했다.

정식으로 소개하는 따위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기 이름을 말하고 사는 곳을 덧붙였다. 브레드는 두 자매가 사람들 틈에 섞인 것을 확인하자 다른 그룹 쪽으로 가 살찐 부인을 포옹했다.

이브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에 신경을 집중시키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했다. 어느 틈에 브레드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와 단둘이 될 기회가 없을 것은 분명했다. 호스트인 그는 할 일이 많은 것이다.

버트는 매우 즐거운 모양이었다. 가볍게 휠체어를 굴리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파티를 열지 않았나 하는 후회스런 생각이 드는군." 버트가 이브에게 말했다. "무척 오랜만이지. 그런데, 동생은?"

"저쪽에 젊은이 그룹이 있잖아요? 그 한가운데에 보이는 핑크빛 점이 후라예요."

버트는 껄껄 웃었다.

"물을 필요도 없었군. 그런데 목장감독은 별로 재미있어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웨이드는 무뚝뚝한 얼굴로 젊은이 그룹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벨트에 엄지손가락을 꽂고 있었다.

앞으로 그가 취해야 할 태도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 같았다. 전열에서 빠지든지 그룹 속에 들어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든지 하는. 이브는 웨이드가 전자를 취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후라에게는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그녀는 웨이드에게 질투심을 일으키기 위해 있는 매력을 모두 구사하고 있었다 - 지금까지 여러 사람에게 그렇게 해왔듯이. 누군가가 그녀의 테이블을 뒤엎을 때가 온 것이다.

"나는 벌써 배가 고파요. 바베큐는 언제부터 먹기 시작하죠?"

이브가 말한 순간, "식사가 나왔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버트가 빙그레 웃었다.

"저것이 대답이지. 나도 오늘은 말 한 마리 분만큼은 먹을 수 있을 것 같군. 당신도 분발해요."

어느새 줄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브는 버트와 함께 줄의 뒤에 가 섰다. 버트가 뒤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이브는 할 수없이 푸른 목면 스커트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줄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따라서 갔다. 브레드는 어디 갔을까? 만일 고의로 나를 피한 것이라면 그 시도는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다.

이브 앞에 서 있던 아가씨가 뒤를 돌아보며 누구를 찾다가 문득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나를 기억하시겠어요? 시내의 식당에서 만났잖아요?"

이브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 앤이죠?"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저는 남의 이름은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애써 태연한 체 말했다. "웨이드 코너즈와 같이 오셨다면서요? 그를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에요."

"바빠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소를 모으는 등........"

"소모으기는 일주일 전에 끝났을 거예요. 다른 일 때문에 바빴을 거예요. 동생은 정말 예쁘더군요."

이브는 눈앞에 있는 처녀의 앳된 얼굴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상대방을 거의 모르고 있어요."

그녀의 웃음소리에는 씁쓸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것은 웨이드 탓이 아닐 거예요! 웨이드는 나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자기가 앞으로 하려는 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동생을 주의시키는 것이 좋을 거예요. 댁의 이모님이 남기신 막대한 유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사람은 웨이드 한 사람뿐이 아니니까요."

이 여자는 질투를 하고 있어. 틀림없이 그렇다고 이브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후라도 사람을 보는 눈은 가지고 있어요. 남한테 들은 말을 함부로 전하면 안 돼요. 말이란 과장되게 전해지는 법이니까요."

"곧 알게 될 거예요. 웨이드 코너즈가 쉽게 단념할 사람이 아니란 걸 말이에요."

이브의 눈은 저절로 웨이드를 마지막 본 곳으로 돌려졌다. 그러나 거기에 그는 있지 않았다. 후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수 앤은 이브가 자기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 마땅치 않은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은 질투에서 발단한 것이겠지만, 그 가운데에 진실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브는 수 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감사해요."

어색한 웃음이 되돌아왔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당신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웨이드가 흥미를 가졌던 사람은 나예요. 당신의 이모님은, 웨이드가 목장 주인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고 있었어요.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지 할 거예요. 동생에게 실패하면 당신에게도 공격을 가해 올 거예요."

"유감이군요. 그는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적어도 당신은 브레드 핸슨이 돈을 노리는 게 아니라는 젓은 알고 있을 거예요."

이브는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별로........."

"나는 수요일에, 브레드가 당신 뒤를 쫓아가는 것을 보았어요. 그것을 본 사람은 나말고도 많이 있어요. 이 근처에서는 비밀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해요! 그리고 지난 이틀 동안 당신은 브레드의 팔로미노를 타셨죠? 그 말의 가치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어요. 지난 3년 동안 상을 독차지한 말이에요."

줄이 움직였기 때문에 수 앤은 일단 말을 끊고 접시를 집어 들었다. 이브도 접시를 집어 들었으나 마음은 다른 데 있었다. 상을 탄 말! 전혀 몰랐다. 그는 어째서 그렇게 귀중한 말을 내게 준 것일까? 답은 한 가지 밖에 생각할 수 없었으나, 이브의 가슴에 떠오른 감정은 감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음식을 먹은 뒤에도 후라와 웨이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브는 괜히 걱정스런 마음이 되어 두 사람을 찾으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도 사람이 들끓고 있었으나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후라는 성인이니까 자기 일은 자지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리고 이브 자신에게도 후라의 일에 간섭할 수 없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마디 경고만은 하고 싶었다. 그것이 이브가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서재 앞을 지날 때 문이 열리고 브레드가 나왔다.

"찾고 있었어." 그가 말했다.

이브는 미소도 띠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 데서 찾으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브레드는 지나쳐 가려는 이브의 앞을 가로막았다.

"왜 화를 내지?"

"상을 탄 말은 어떻게 된 거예요? 무엇 때문에 그 말을........내 서비스에 대한 보상인가요?"

브레드는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그는 이브의 팔을 붙들자 방금 나온 서재로 그녀를 끌고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다시 한번 말해 봐." 그가 윽박질렀다.

이브는 그가 꽉 붙잡았던 곳을 문질렀다. 마음은 욱신거리는 팔보다 더 아팠다.

"그런 뜻이 아니었던가요? 내가 기뻐하리라 생각했었죠? 또 당신이 인색하지 않다는 것을........"

"이브가 기뻐해야 할 건 나의 참을성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알고 있을 텐데요." 이브는 태풍과도 같은 기세로 응수했다. "그 말은 당신에게 돌려드리겠어요. 나는 내 말을 타겠어요!"

"이 바보 같은 것!" 브레드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지,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브는 감정을 폭발시키기 전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나?"

"무엇을 생각하라는 거에요? 당신은 요전 날 오후에도 일부러........방해받지 않을 시간까지 엄밀히 계산해서 행동했죠? 당신이 만족을 얻기 위해서!"

브레드는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것이 일방적이었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러기에 댓가로 말을 줄 필요가 없었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같은 행동을 했을 테니까." 이브는 머리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비켜 주세요."

", 그러지." 브레드는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이브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브는 나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겠어."

이브는 뒷걸음질 치다가 데스크에 부딪혔으나, 브레드는 멈춰 서지 않았다. 이브는 마음속으로부터 느꼈다.

"브레드, 안 돼요!" 이브는 외쳤다.

"'브레드, 어서요!' 일 테지?" 그는 이브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빈정거렸다. "이것은 이브 스스로 자초한 상황이야. 솔직해지는 것이 어떨까?"

"제발........"

이브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야 브레드는 약간의 냉정을 찾은 듯, 소파로 가 앉았다.

"부탁이야,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줘. 머리가 돌 것만 같아." 브레드가 거칠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의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그리고 소문이 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에요."

"남이 무어라 생각하건 그게 무슨 상관이지? 이것은 이브와 나와의 문제야. 이브는 나에게 서클스리를 양보할 생각은 없겠지?"

"물론이에요." 잠시 망설인 끝에 이브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는 진퇴양난이군." 그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께를 만지작거렸다.

"우리가 협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지."

브레드는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브는 '우리 사이는 진퇴양난' 이라고 한 브레드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내가 서클스리를 판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브래드가 그것을 목적으로 내게 접근한 것이라면, 그는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이 된다. 이브는, 브레드의 성공이 분명해지는 것이 무서웠다.

"팔로미노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요." 이브는 자신의 패배를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화제를 돌렸다. "나는 이제 그 말을 탈 수 없어요, 브레드. 카프리스도 안 된다면 다른 말을 골라 주세요."

브레드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이브에게 팔로미노의 경력을 말한 사람이 누군가는 모르겠지만, 그는 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야. 팔로미노는 일곱 살이야. 지난 3년 동안 여러 가지 상을 탔지만, 기간적으로 말해 너무 길었다고 할 정도지. 만일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그 말을 거세 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훌륭한 종마 역할을 하고 있을 거야.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어쩔 수 없지. 가장 좋은 차선책은 그에게 좋은 임자를 만나게 하는 거야. 늙은 말과 함께 목장에 방목하기에는 아직 젊으니까. 이브가 타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어. 이제 이해하겠어?"

이번에는 이브가 한숨을 쉴 차례였다.

"네 당신 말이 옳아요. 내가 지레 짐작하고 멋대로 투정을 부렸군요."

"만일 그것이 사과의 말이라면, 오케이. 이해하겠어." 브레드가 이브에게 가볍게 입맞춤했다. "이제 가봐야겠어. 호스트 역할을 해야 하니까" 이브의 얼굴과, 윤기 있는 머리칼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에는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의무라는 건 때때로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는 법이지. 내일 오후, 다리 있는 곳으로 오도록 해. 잠시 말이라도 타게."

"말과 같이요, 아니면 나 혼자?" 말해 버리고 나서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한 말은 어디까지나 농담이에요, 진담이 아니에요."

"아니, 부인하지 못할 진실일걸." 브레드는 일어나자 천천히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사이는 진퇴양난이야. 이브만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어. 만일에 먼저 보장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은 안 되는 일이야."

부풀었던 기대감이 대번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브는 소파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옷매무시를 고치고 머리도 매만졌다.

"내가 무슨 고충을 말할 때마다 마지막에 그런 말이 나오고 마는군요. 최저한의 모럴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우리는 연애를 즐기는 두 사람의 어른이니까. 단지 우리 사이엔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째서 일부러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죠?"

"왜냐하면, 직접적인 표현은 우리의 경우 적당치 않다고 여겨지니까." 브레드는 이브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나는 서클스리를 단념하지 않을 거야, 이브. 내게는 그곳이 매우 중요해. 만일 이브에게도 같은 정도로 중요하다면 도리가 없어. 우리 사이는 화해점을 찾지 못하고 영원히 평행선을 걷게 되겠지."

이브는 오랫동안 브레드를 바라보며 푸른 눈동자에 스친 그림자를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 의사에 거역하면서까지 앞으로 나가 브레드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알겠어요. 후라와 상의해 보겠어요." 이브가 중얼거렸다.

브레드가 반응을 보인 것은 잠시 뒤의 일이었다. 그는 다정히 말했다

"틀림없이 후회는 하지 않을 거야. 일단 장애물이 없어지면 우리의 장래 일을 예측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면서도 브레드는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다. 이브는 그 편이 좋았다. 토지의 댓가로서의 결혼 신청이란 너무하다. 이제부터 두 사람의 마음의 문을 천천히 열어 나가면 되는 것이니까.

브레드가 방에서 나간 뒤에야 겨우 이브는 자산이 이 방에 온 목적을 생각해냈다. 웨이드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으나, 후라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자 안심이 되었다. 안심하는 순간 또 하나의 일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토록 서클스리를 팔지 않겠다고 고집해 온 내가 생각을 180도 바꾼 것을 알면 후라는 무어라 말할 것인가? 웨이드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전과는 달리 영속적인 것이라면, 당연히 그녀는 파는 것을 반대할 것이다.

바깥은 여전히 찌는 듯이 덥고 음침한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다. 그러나 먹고 마시며 떠들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세브링에서 불려온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램프가 켜지고 댄스 무대가 넓게 마련되었다. 이브는 버트 곁에 가서 앉았다. 그의 눈이 생생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니 기뻤다.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군." 버트가 말했다.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났지 - 내가 손님을 맞을 기분이 나지 않았던 원인이 그것이지만. 브레드의 어머니는 이런 것을 아주 좋아했었다오."

"브레드는 어머니를 닮았나요?"

"어느 면으로는 닮았다고 할 수 있지. 내 아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관철시켰으니까. 그러나 양보할 때는 미련 없이 양보할 줄도 알았지.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귀가 아플 지경이군요." 이브가 미소 지었다.

"브레드하고 또 싸웠나?"

"아니에요." 이브는 버트에게서 시선을 돌려, 춤추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알게 된 지가 아직 2주도 채 되지 않은걸요. 긴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경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단 한 가지 분영한 것은, 내 아들이 지금까지 무슨 일에 대해서나 누구에 대해서나 그렇게 화를 낸 일이 없다는 거지."

"별로 반가운 이야기가 아니군요."

"하지만 분노라는 것은 플러스의 감정이지. 당신과 그는 얼굴만 마주치면 불꽃을 튀기거든."

"플러스와 플러스가 만나면 서로를 밀어버려는 것 아닐까요?"

"자꾸 받아넘기지만 말아요. 영리한 여성은 친밀감이 없어요. 브레드의 어머니는 양보할 건 양보한다고 조금 전에 말했을 텐데요. 그녀는 입을 다물어야 할 때도 알고 있었소, 다시 덧붙여 말한다면."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옳은 말씀이에요. 제 경우에는 일종의 자기 방어 의식이 너무 강해서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벽을 쌓을 필요는 없을 텐데."

문득 고개를 든 버트의 눈이,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흰 드레스의 여성에게 못박혔다.

"아니, 이럴 수가!"

그 여성은 휠체어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녀를 호위하듯, 바로 뒤에는 동반한 남자가 서 있었다. 허니블론드에 희고 균형잡힌 얼굴을 보자 이브는, 물어 볼 필요도 없이, 그 여성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풀밭에서 다투는 남녀의 모습이 생생히 눈에 떠올랐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서 도망치려 하고 있다. 브레드 자신도 안정했듯, 다이언은 저항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성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이상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싸늘하고 침착한 목소리는 외모와 꼭 어울렸다.

"안녕하세요, 버트? 법정 아닌 곳에서 결말을 내려면 이곳 이상 더 좋은 곳은 없을 것 같아서 내 발로 찾아왔어요."

버트는 곧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났다. 그의 눈초리는 놀라울 만큼 무표정했다.

"위자료를 더 달라는 말인가?"

다이언은 가만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보다 적은 액수는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찾아왔어요. 달링, 나는 돈이 필요해요, 상당히 많은 액수의."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사람은 이브뿐이었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녀가 둘째 번 핸슨 부인임을 눈치챈 듯 멀찌감치서 일이 돌아가는 것을 흘끔흘끔 지켜보고 있었다. 이브는 가만히 일어서서 자리를 뜨려 했으나, 힘껏 뻗친 버트의 손이 그녀를 원래 의 장소에 붙들어 놓았다.

"2백만 달러가 필요하다며?" 버트는 빈정대는 어조로 말했다.

다이언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관계하고 있는 사업이 많아요."

"이것도 그 중의 하나인가?" 버트는 뒤에 서 있는 사나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사나이가 앞으로 나와 다이언 옆에 섰다. 그녀보다 몇 살 연하인 것 같았다. 맵시 있게 차려입은 흰 슈트와 검정 실크 셔츠가, 이탈리아 계통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액센트의 영어도 대부분의 여성의 귀에는 아름답게 울릴 것이라고 이브는 생각했다.

"나는 미세스 핸슨의 법정 대리인입니다. 그녀는 여기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장 여기서 나가 주시오." 어디서 나타났는지, 브레드가 거친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여기 있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어마, 브레드." 다이언의 표정이 약간 달라졌다. "그것이 손님을 잘 대접하기로 유명한 남부인의 인산가요? 우리는 먼 곳에서 일부러 온 거예요, 허니. 물론 오늘 이런 바베큐 파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내일쯤 찾아왔을 거야."

"그렇다면 내일 이야기하기로 해." 아들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버트가 말했다. "내일 아침에 침착하게 이야기하기로 해."

"이야기라니, 합의이혼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사인해야 할 서류는 미카엘이 전부 만들어 왔어요." 다이언은 버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나는 법정에 서는 것도 좋아요, 버트. 하지만 당신은 그것이 싫겠죠? 법정에서는 미주알고주알 다 캐어물을 거예요. 우리들의 사사로운 생활이 모두......."

이브는 떨리는 다리를 전정 시키고 일어섰다.

"저는 먼저 실례하겠어요."

", 당신이 로라 클란네의 조카로군요. 이야기는 들었어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언닌가 동생이 있다면서요?"

"." 이브는 브레드 쪽을 볼 수 없었다. "동생을 찾으러 왔던 길이어서.......이만 실례하겠어요."

네 사람을 두고 떠나는 것은 마음에 걸렸으나, 그것은 집안 문제고 나는 그 가족이 아니니까 그냥 있을 수가 없다. 가족이 될 희망도 별로 없을 것 같다 - 다이언을 바라보는 브레드의 눈초리를 보면, 전에 브레드에게 있어서 다이언이 어떤 존재였든지 간에, 그는 아직 그때의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상처가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이 틀림없다.

 

11

후라를 찾으려 한다는 것은 물론 구실이었다. 결국 베란다 구석에 있는 이브를 발견한 것은 오히려 후라 편이었다.

"언니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먼저 간 줄만 알았어." 후라는 언니 곁의 등의자에 앉았다.

"그 유명한 다이언이 나타났다는 것 알지? 그런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몰라. 언니는 알고 있어? "

"잘 몰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이언의 출현이 우리와는 관계없다는 것 뿐이야."

"하긴 그래." 후라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 성대한 파티야,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

"그래, 성대하구나." 그만 빈정대는 투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그 핸섬한 목장감독은 어디 갔니?"

금발의 머리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들린 듯 번쩍 쳐들어졌다.

"짐을 꾸리러 갔어. 퇴직금으로 석 달치 급료를 주었어. 상관없지?"

이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아한 눈으로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너는 그를 해고했니?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당연한 보답이야." 후라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높아졌다. "처음에 나는 그의 편을 들었었어. 특히 그가 브레드의 험담을 할 때는 재미가 나서 그를 부추긴 적도 여러번 있어. 그 바보는 우쭐한 거야. 내가 그의 외모에 반해서 프로포즈를 하며 달려들 걸로 믿었던 것 같아. 나의 재산이 목표라는 걸 모르리라 여겼나 봐. 나를 바보 취급했던 거야."

"웨이드가 무슨 짓을 했어?" 이브는 조용히 물었다. 동생이 프라이드가 손상되어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야기해 봐, ?"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마음이 약해지며 슬퍼지는 모양이었다. 후라의 눈에 눈물이 빛났다.

"그는 나를 침대로 끌어들이려 했어, 남의 집에서! 아주 자신만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는 거야. 우리의 결혼을 언니가 좋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도 말했어. 언니가 나를 질투하기 때문이래. 그러니까, 언니더러 땅 값의 반을 달라고 해서 어디로 도망치자는 거야. 그는 세밀한 일까지 모두 계획해 놓았던 거야." 후라는 어린아이처럼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기 때문에 마스카라가 흘러내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우리는 서로 알게 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웨이드는 그전부터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이브는 동생의 어깨를 껴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종류의 동정을 동생은 가장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의 걸프렌드한테 들은 이야긴데, 그가 만일 너를 유혹하는 데 실패하면 나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어. 웨이드 코너즈는 엉뚱한 사람이야,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던 거야. 네가 정말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야."

후라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줄 알았어."

"아니, 사랑하지 않았어. 그리고, 너도 그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지 않았니? 오늘 파티에서 네 태도를 보고 알았어. 그래서 웨이드는 초조해 했을 거야."

"그래, 그럴지도 몰라." 후라는 이미 재기하고 있었다. 눈물로 젖은 눈에는 평소의 쾌활함이 돌아와 있었다. "그 사람은 자가 과신이 좀 심해. 내가 퇴직금을 주려고 수표를 쓸 때 지켜보고 있던 웨이드의 표정을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어. 지금까지 그에게 이런 일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

"그럴 거야. 3개월 분의 급료라면 많은 감이 들지만, 그래도 잘 처리한 것 같아. 그렇게 했으니 그도 달리 불평할 말은 없을 테지."

후라의 낯빛이 흐려졌다.

"단 한 가지 남은 문제는 다른 목장감독을 구해야 한다는 일이야."

두 시간쯤 전에는 그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다이언 핸슨이 여기에 머물러 있는 이상 이브는 장래의 일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번개가 하늘을 찢는 것 같더니 세찬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하늘에서 거대한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지붕이 있는 곳으로 뛰어들어 웃거나 떠들거나 하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이상하다 했더니," 누군가가 말했다. "결국 비가 오는군. 웨스트 코스트를 따라 돌풍이 불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는데, 그것이 내륙으로 향한 모양이군." 그 사나이는, 무서워서 눈을 크게 뜬 이브를 보자 껄껄 웃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해마다 이맘 때면 그런 바람이 불어오니까. 하지만 그 때문에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에요." 후라가 농담 비슷이 말했다. "오늘 밤 여기서 묵어 가지 않을래, 이브?"

이브는 당돌하게 일어섰다.

"너 나 그렇게 하려므나. 나는 집에 돌아가겠어."

"웨이드에게 차를 빌려 줬어, 짐을 꾸리러 집에 돌아간다기에. 브레드에게 바래다 달라면 어떨까?"

브레드는 지금 가장 부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알아보고 오겠어. 여기 있어, 후라. 또다시 너를 찾아다니기는 싫으니까."

집안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젖은 블라우스나 젖은 셔츠 대신 타월을 두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벌써 돌아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글라스를 채워 가지고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니 파티가 활기를 되찾은 모양이었다. 다이언과 대리인이 구석진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으나, 버트나 브레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이브는 서재에 있는 버트를 발견했다. 조금전의 일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웠다 "차를 빌고 싶어요." 이브는 천천히 말했다. "어떤 사정 있어서 웨이드 코너즈가 먼저 집에 돌아갔기 때문에."

"두 아가씨를 찾고 있던 중이요. 모두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여기 있기로 했는데, 당신들도 그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오래 걸릴까요?"

"글쎄, 폭풍이 지나가는 방향에 달려 있지만, 이대로 직진하면 최악의 상태는 면할 수 있을 거요."

"가능하면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되도록 아내와 만나고 싶지 않겠지?"

부정해야 소용없을 것 같아 이브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물었다.

"이미 결심을 하셨나요?"

버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을까?"

"싸울 수도 있어요."

"당신은 이혼 법정에 입회한 적이 있나? 법정에서는 별것을 다 묻지. 그처럼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낱낱이 공개할 바에는 차라리 2백만 달러를 내놓는 것이 나아."

"하지만 너무 많잖아요. 그런 거액의 위자료를 받을 만큼 다이언의 역할이 컸었나요?"

버트는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나에게 1년이란 세월을 주었지. 결코 나쁜 1년은 아니었소. 사고가 없었다면 그녀는 계속 여기에 머물렀을지도 모르고. 지금으로서는 무어라 말할 수가 없지. 아내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사이는 좋았지. 거기 대해서 나는 감사해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2백만 달러라니!"

"당신도 브레드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그러면 다이언에게 단 1페니도 주지 말라는 거지. 두 사람은 너무 과민해서."

'두 사람'이라니 이브는 두 사람을 같이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마음의 동요를 감추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끼여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니오, 당신은 우리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잖아요." 버트는 이브의 얼굴을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당신이 고집을 부리지 않으면 더 가까와질 수 있을 텐데."

이브는 기대고 있던 의자의 등에서 몸을 일으키자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별로......."

"괜찮아요. 나는 다이언이 브레드를 좋아하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브레드에게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더욱 열을 올렸지. 그런 타입의 여자는 도발하는 것을 좋아하는 법이거든."

그렇다면 성공을 손에 쥐기 직전에 도망친 걸까? 버트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브레드는 정말 후안무치한 사람이다. 계모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다니,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정말 아내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어." 버트는 이브를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소문은 분명히 났어. 작은 고장에서는 소문이 따르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소문은 소문에 지나지 않아요. 나는 내 아들을 잘 알고 있지. 사실이오, 이브."

이브는 긴장으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잘 알았어요. 그럼, 저는 후라에게 여기서 묵어가자는 말을 하고 오겠어요. 실례의 말이지만 그만 잠자리에 들어도 될까요? 머리가 아파서요."

"틀림없이 브레드와의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버트의 말에 이브는 부끄러웠다. 그의 말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두통이 난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푹 자면 머리가 깨끗해지겠지. 나는 여러 사람이 있는 데로 돌아가야지. 모든 것을 다 브레드에게 맡길 수도 없고. 얼마 후면 아내가 보러 올 테지."

브레드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와는 잠시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는.

비바람은 더욱 강해졌다. 베란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왔다. 넓은 리빙룸은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후라는 두 명의 젊은이와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다. 이브가 여기서 자게 되었다고 말했는데도, 돌아보지도 않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 대답할 뿐이었다.

방 한구석에 흰 슈트를 입은 다이언의 대리인이 보였다. 다이언도 함께 있을 테지, 브레드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이브는 전에 쓰던 방을 다시 써도 될 것이라고 멋대로 해석했다. 묵는 사람이 많으면 후라와 공동으로 사용하면 된다. 그 방의 문은 약간 열린 채로 있었다. 손잡이에 손을 대었을 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브는 그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조롱하는 듯하면서도 강한 집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당신은 나와 당신 아버지와의 프라이빗한 시간을 상상하는 게 참을 수 없겠죠, 달링? 사고가 있기 전까지 그는 건장한 남성이었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에요. 우리들의 부부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남들이 알아도 나는 상관없지만, 버트는 신경 쓸 거예요. 특히 그가 나를 얼마나 거칠게 다루었는지 이야기한다면 말이에요. 모두 그 말을 믿을 거예요.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말도 잘 해요. 아드님의 이야기를 해도 좋아요. 함께 나누어 갖자는 것이 그의 모토였다고요."

"제기랄!" 신음하는 듯한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소리높이 웃었다.

"나를 때리거나 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예요, 달링. 상처는 사진에도 분명히 나타날 테니까요. 당신은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 나를 여기 데려왔겠죠? 솔직히 말하는 것이 어때요? 2백만 달러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이브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몸을 떨면서,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도 생각지 않고 방을 가로질러 포치로 갔다. 바람이 스커트를 날렸다. 비는 그쳐 있었으나 하늘은 여전히 검은 구름에 덮여 있고 서쪽 하늘에서는 계속 번개가 치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 목장에서 쓰는 지프가 세워져 있었다, 키가 꽂힌 채로. 여기 있는 사람 가운데 그것을 사용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브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지프에 올라 핸들을 잡았다. 만일 다시 비가 내린다 해도 맞으면 그만이다. 그 여자와 한지붕 밑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났다.

이브는 머리를 흩날리며 문을 나와 천천히 지프를 운전해 갔다. 헤드라이트는 그다지 밝지 않아, 그 빛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어둠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트레일러 하우스에서 텔레비전 안테나가 날아와서 지프의 사이드보드에 부딪혔다. 큰길에 나오자 이브는 약간 스피드를 냈다. 이브는 무언가 불길한 것을 공기 속에서 느꼈다. 어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서클스리까지의 3, 4킬로를 가는 데 20분이나 걸렸다. 오늘 오후 다이아몬드 바에 올 때 타고 왔던 차가 목장감독의 숙사 앞에 세워져 있었다. 집에 불은 켜져 있지 않았고, 그의 푸른 스테이션왜건은 보이지 않았다. 급작스런 해고에 화를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웨이드 코너즈는 목장에서 떠난 모양이었다. 피곤도 하고 의기소침해 있었기 때문에, 이브는 그것이 앞으로 어떤 문제를 낳을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이 되면 좀 더 차분하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집의 문을 연 순간 이브는 묘한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희미해서 멀리서 들리는 소리 같았으나 갑자기 크게 들렸다. 넓은 초원에서 화물열차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며 내는 소리였다. 하늘은 어두웠으나 북 모양의 회오리가 분명하게 보였다. 얼핏 보았는데도, 그것이 이쪽을 향해 온다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피난할 곳은 집안밖에 없었다. 문을 닫고 본능적으로 빗장을 질렀으나, 그것으로 불어오는 장풍을 막지는 못했다. 주방의 지하실로 향하는 문으로 간 것도 자기 방위 본능 때문이었다. 지하실에 숨으면 안전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미국의 대개의 주택이 다 그렇듯이, 이 집도 지하실이 있었다. 조스 클란네는 이곳을 가정용 8밀리 필름의 영사실로 사용했던 듯, 벽에 까만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이브는 쿠션을 있는 대로 머리 위에 겹쳐 얹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갑자기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폭음이 고막을 뚫는 것 같더니, 이브의 머리 위에서 집이 날아갔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어둠 속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브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위는 캄캄하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브는 머리가 완전히 맑아질 때까지, 그후에도 얼마 동안 누워 있었다. 크고 무거운 서까래가 이브의 허리 위를 스칠 듯이 가로놓여 있었다. 부서진 콘크리트의 덩이가 겨우 서까래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서까래가 떨어져 용서 없이 이브의 몸을 짓누를 것이다. 이브는 움직이지 않으려고 몸을 긴장시키면서, 얼마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내가 행방불명된 걸 알아차렸을까? 희망은 없다. 버트는 내가 이미 잠들었을 걸로 알 것이다. 아침이 될 때까지, 내가 없어진 것을 아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미 때는 늦는 것이다.

위를 쳐다보니 뻥 뚫린 구멍으로 밤하늘이 내다보였다. 집이 거의 날아간 듯했다. 히스테릭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쨌든 이것으로 문제 하나는 해결된 것 같다.

이런 상태에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이 모두 하찮게 생각되었다. 몸이 위험에 처한 지금, 오히려 이성이 밝아지는 것 같아 이상하게 여겨졌다. 만일 브레드가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 현실적으로 그것은 사실이지만 - 지난날 그가 어떠했고 어떤 일을 했다고 해도 상관이 없지 않을까. 지금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지금과, 그리고 같이 만들어 나갈 미래가.

하기는 몸 바로 위에 서까래가 놓여 있으니 미래를 생각할 여유 같은 것은 없지만. 저 콘크리트가 무게를 지탱해 주지 못한다면 서까래는 내 척추를 부러뜨릴 것이다. 버트는 부자유에 익숙해지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하지만, 나는 그보다 젊으니 남겨진 세월이 너무나 길다.

여기 살고 있던 서클스리의 일꾼들은 모두 죽거나 심한 상처를 입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이브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음성이 들렸을 때는 충격으로 목이 탔다. 소리 쳐보았으나 속삭이는 듯한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 위에서 콘크리트 가루가 떨어지는 바람에 이브는 기침을 했다. 그 바람에 서까래가 조금씩 움직였다. 그녀는 공포로 얼어붙었다. 아아, 하느님!

회중전등이 조금 떨어져 있는 기왓장을 비쳤다. 이브는 있는 힘을 다해 구해 달라고 소리쳤다. 희미한 공기의 진동이 모든 것을 끝장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면서. 외친 말에 답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서, 이브는 안심한 나머지 눈물이 나왔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기에 온 이상 브레드는 틀림없이 나를 구해 줄 것이다.

브레드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한눈에 상황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지금 곧 가겠어. 정신을 똑똑히 차려."

브레드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지시하는 말이 들렸다. 이브는 머릿속에서 어떤 구출 방법이 있을까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서까래가 겨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로프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하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그밖에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인가. 조만간에 서까래는 떨어져 내릴 것이다. 약간의 가능성이나마 없는 것보다는 좋다.

브레드는 한 남자와 함께 무너진 계단을 내려왔다. 회중전등의 불빛이 비치자 이브는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빛 저쪽에 있는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곧 구출될 거야." 브레드는 이브를 안심시키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레이, 내가 신호하거든 자네가 그녀를 끌어내게."

"무리예요." 브레드가 하려는 일을 알고 이브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브레드, 그것은 무거워요, 당신 혼자 들기에는."

그는 이 말을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서까래에 다가갔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서까래 밑으로 어깨를 들이밀었다. 레이가 이브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잘 받쳤다.

"지금이야!" 브레드가 외쳤다.

숨 쉴 사이도 없이 그 일이 끝났다. 거대한 서까래가 금세 이브가 있던 장소에 떨어진 것은, 이브의 발이 빠져나온 직후였다. 브레드는 곧 이브에게로 달려와 두 팔로 끌어안고 뺨에 얼굴을 밀어붙였다. 그 동작은 모든 컷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기서 어서 나가지."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밖에 나와서야 비로소 이브는 그에게 꼭 달라붙어 있던 손을 늦추었다. 그는 이브를 안은 채로, 부서진 집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스테이션왜건으로 가서 프런트시트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우리 집으로 데려가겠어." 브레드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는 이브를 재워 줄 곳이 이미 없어졌어."

"그래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브도 조용히 수긍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조용히 말했다. "사랑해요, 브레드.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늘 곁에 있었어요. 그 밖의 것은 이제 아무래도 좋아요."

브레드가 이브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눈의 표정은 바로 이브가 원하던 것이었다.

"우리는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이 있어."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태풍이 파괴한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이브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귀에 갖다댔다. 그것이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실에도 놀랐으나, 자정까지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놀랐다.

"남아서 구출 작업을 돕지 않아도 될까요?" 이브가 속삭였다. "몇 사람이나 다쳤어요?"

"이브와 집과 창고가 한 채. 피해는 그것 뿐이야. 회오리바람은 상대를 선택할 줄 안다니까." 브레드는 엔진을 켜고 웃으며 이브를 돌아보았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오늘 밤에 일어난 일의 배경에는 큰 뜻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집도 없어지고 목장감독도 없어진 지금, 이브는 서클스리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야. 조스도 틀림없이 용서해 줄 거야."

"웨이드에 대해서는 누구한테 들었어요?"

"후라가 말하더군. 이브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태도도 그것을 암시했고. 이브는 내가 다이언과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지?"

", 약간은 들었어요."

"그래서 성급한 결론을 내렸나?"

이브는 잠시 주저했다.

"내가 들을 이야기로는 한 가지 결론밖에 얻을 수 없었어요. 나는 몇 년이나 전에 일어난 일로 당신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 사람은 무척 미인이었으니까요."

"이브는 아직도 나를 외모만 보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군." 브레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아."

브레도가 차를 출발시키고 있는 동안 이브는 잠자코 있었다. 마음이 침울해졌다.

"당신은 언젠가, 웨이드 코너즈가 다이언과 당신이 같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데 대해서 설명하려 했었죠? 그때 나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듣고 싶어요, 브레드. 그리고 당신 말을 믿겠어요."

윤곽이 뚜렷한 강인한 얼굴을 보았다.

"믿는다고?"

", 믿겠어요." 이브가 간원했다.

브레드가 대답을 하는 데는 2, 3초 걸렸다. 그는 차를 길가 쪽으로 향하게 하고 두 손을 핸들에 얹은 채 헤드라이트 너머의 어둠을 응시했다.

"별로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야. 그리고 내게도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나는 스스로에게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했어. 그 뒤에 아버지한테 사실을 말했는지 어떤지는 영원한 수수께끼지. 코너즈가 우리를 본 그 이틀 후에 아버지는 말에서 떨어졌어. 그 뒤의 일은 이브도 알고 있을 거야."

이브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때 다이언은 당신에게서 도망치려 했다고 하던데요?"

"사실이야. 나는 다이언에게 그녀가 어떤 인간인지 분명히 말해 주었지. 그리고 내가 왜 그녀를 유혹하는가 하는 이유도." 브레드의 입 가장자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

무척 점잖은 표정이었다. 다이언은 매우 통렬하게 대답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미 의심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잘 부합되었다.

"내가 바보였어요. 처음부터 당신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브레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브가 내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지. 이브는 아마 아직도 나를 잘 모를 테지."

"차츰 알아 나가도록 하겠어요." 이브는 그의 팔에 손을 얹자 부드러운 그의 셔츠에 뺨을 비볐다. "열심히 노력하겠어요, 브레드."

브레드는 이브를 꼭 껴안고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

"호텔 로비에서 영국인 특유의 완고한 모습을 보인 이래, 이브는 내게 한치의 평안도 주지 않았어. 앞으로 이브는 미국식 부부관계에 대해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거야."

이브는 웃었다, 그의 애정 어린 충고를 받으면서.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미국인 아내의 전형은 나와 같은 타입인 것 같은데요. 당신은 얌전하고 순종만 하는 아내는 싫죠?"

이번에는 브레드가 웃었다.

"도전은 좋은 일이지." 그는 한순간 가만히 이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미소 지으며 이브의 손을 잡고 다정히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자아,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지."

이브가 대답할 말을 생각해 내고 있는 동안에 브레드는 다시 차를 움직였다. 잠시 후 그녀는 또 하나의 질문을 생각했다.

"다이언은 어떻게 되었어요?"

"돌아갔어. 몇 분만 더 기다렸더라면 그녀가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녀와 그녀의 지골로가."

"변호사하고 말이군요." 이브가 정정했다. "그렇다면 결국 그녀가 이긴 것이군요?"

"아니, 그렇지 않아." 브레드는 이브를 흘끗 보고 웃었다, "궁금해서 좀이 쑤시겠지?"

"그래요. 약올리지 마세요, 브레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그 사람에게 분명한 증거를 두서너 가지 들이댔지."

"모르겠군요......" 이브가 말하자 브레드가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면 알 수 있을 거야. 지난 이틀 동안 나는 어떤 조사를 했어. 다이언이 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전에는 거기에 대해 신경을 별로 쓰지 않고 있었어. 어쨌든 당시 다이언은 몹시 서두르고 있었던 것 같았어. 아마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결론을 말하면, 두 사람의 결혼은 유효하지 못했어."

"다이언과 당신 아버지가 정식으로는 결혼하지 않았었다는 것인가요? "

"그런 셈이지." 브레드는 자기가 한 말의 효과를 즐기고 있었다.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어. 다이언은 아버지한테 위자료를 한푼도 청구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혼죄로 법정에 서게 돼도 할 말이 없게 되었어. 아버지는 혼인 무효 신청만 하면 되는 거야."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아버지한테 말씀드릴 생각이세요?" 이브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벌써 이야기했어." 브레드가 빙긋 웃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큰 소리로 웃은 것은 실로 몇 년 만에 처음이었어.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시원했던 모양이야."

"다행이에요!" 이브는 황홀한 눈으로 자신의 결혼 상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대단해요. 알고 있겠지요?"

"너무 칭찬하지 말아, 또 이브를 화나게 할지도 모르니까." 브레드는 입을 다물었다가 약간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틀려요."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어? "

"지금은 알 수 있어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으니까 우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싶죠, ?"

"같이 하기로 해. 아직도 사흘이 더 지나야 우리가 알게 된 지 겨우 3주가 되는군. 급스피드야."

"정말이에요?" 이브는 잠시 행복감에 젖어 있다가, 이윽고 전부터 생각했던 것을 말했다. "브레드, 서클스리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그 문제는 이미 생각해 두었어. 서클스리를 하룻밤 사이에 해산하지는 않겠어. 가축이나 기계를 경매에 부치는 데는 며칠은 걸리지. 그동안에 천천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로 해. 목동 서너 명은 남도록 하고, 나머지 사람은 적당한 직업을 찾아 주겠어. 그밖에 할 말은?"

"꼭 한 가지 더 있어요. 당신이 후라에게 땅값 50만 달러를 지불하세요. 나머지는 결혼 기념 선물로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천만에." 브레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브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나는 땅값을 반드시 치르겠어. 알겠나?"

때로는 고집보다 양보가 더 중요한 법이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양보할 때인 것이다. 대체 50만 달러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지금 돈보다도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