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받지 않은 신부
Anne Hampson
1
누구나가, 빛나는 태양과 꽃들의 활짝 핀 개화를 기대하고 있는 지금, 때늦은 눈이 내렸다. 3월도 벌써 중순인데, 그러나 날씨가 맑아질 기미는 전혀 없었다. 돈 새턴은 올케가 경영하는 카페의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자기 기분과 꼭 맞는 날씨라고 생각했다.
우울한 날들이야! 왜 이런 가게에 관계되어 버렸지? 수없이 해온 의문이 또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그 당시 언니 그레타는 남편의 돌연한 죽음으로 상심해 있었고, 돈도 단 하나뿐인 육친을 잃었다. 대단한 충격이었지만 미망인이 된 올케를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게 벌써 2년, 지금까지 그레타와 생활하는 게 나날이 견디기 어려워졌다.
돈은 깊이 한숨을 내쉬고 창가에서 등을 돌려, 더러워진 테이블보를 벗기기 시작했다. 가게 일을 도와주는 걸 승낙한 것도 문제지만, 방을 팔고 가게 2층으로 옮겨오면 좋겠다는 그레타의 얘기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한 것은 진심으로 사랑하던 오빠의 갑작스런 죽음에 마음이 변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요." 돈이 중얼거렸다.
"답답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함께 살려고 생각했었으니 말야." 돈은 중얼거렸다.
돈이 혼자 있을 t 있는 건 오직 침실뿐이었다. 그것도 가게가 쉬는 일요일 오후를 제외하면 항상 일에 쫓겨 밤늦어져서였다.
"이쪽으로 안 와? 점심 먹어야지." 생기 없는 그레타의 목소리에 돈은 얼굴을 찡그렸다.
"먼저 테이블보를 갈아놓고서요."
런치타임이 끝나면 한 시간 정도 가게를 닫는데, 오후 티타임에 맞춰 3시 반 정도에는 다시 문을 열어야 했다. 그리고 6시부터 8시 반까지는 디너타임이고 그후는 다음날 아침을 위해 가게를 정돈하고 부엌청소도 해야 했다.
"그건 나중에 해도 돼. 스테이크파이와 매시포테이토가 남아 있어."
스테이크파이와 매시포테이토라고! 스테이크파이는 항상 남아 있었다. 간단한 이유로, 값싸기 때문에 매일같이 메뉴에 올라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따뜻하게 먹어야 하기 때문에 12시 반부터 오븐에 들어가 있어서 런치타임이 끝날 무렵에는 파이껍질은 돌처럼 딱딱하고 고기는 바짝 말라 있었다. 매시드 포테이토도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돈은 그레타의 가게 일을 도와주기 전까지 타이피스트로 일했을 무렵, 식욕을 돋구는 런치를 먹곤 했던 것을 문득문득 떠올렸다. 결국 모든 걸 잃어버린 거야. 집과 가구, 해마다 갖는 한 달간의 휴가, 대우 좋은 직장, 게다가 모습마저도 땀에 찌들었다. 일직이 모두에게 칭찬받던 황금빛 머리카락은 칙칙해지고 보랏빛 눈동자도 빛을 잃어버렸다. 도자기처럼 매끄럽던 피부도, 요리용 렌지를 매일같이 가까이 하는 동안에 벌겋게 거칠어졌다.
"어떻게 됐니?" 또다시 생기 없는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요, 가요." 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색이 좋질 않네." 겨우 두 사람이 마주 앉게 되자 그레타가 말했다. 돈은 올케언니의 얼굴을 힐끗 훔쳐보았다.
"솔직히, 도저히 명랑한 기분이 되질 않아요."
"슬픔에 잠겨 지내던 내게 온 걸 후회하고 있는 거야?"
돈은 고개를 저으며 바짝 말라버린 파이를 포크로 찍었다.
"그때 여기 온 걸 후회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여기서 이렇게 오래 살게 된다는 게 두려워요. 그래요. 나의 삶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그레타?"
"그러면 나야말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면 좋을까?" 그레타의 목소리는 비애감에 젖어있었다.
"예, 분명히 그래요. 그러니까 더욱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그레타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손은 기름으로 더러워져 있었고, 오븐에 데인 손등에는 반창고가 두 개나 붙어있었다.
"이 가게를 팔고 직장에 나가면 돼요."
"가게를 판다고! 이 가게는 좋아서 시작한 거야."
"예, 알아요. 취미로 시작한 거죠. 돈을 조금 벌어도 오엔의 급료에 보탬이 되었으니 좋았었죠. 그때는 일하는 시간도 짧았어요. 오후는 문을 닫았고요. 하지만 지금은 밤늦게까지 일해도 저축은 하기 힘들어요."
"어머! 잘도 아는구나."
"웨이트리스를 한 사람 더 써야 돼요, 그레타. 또 요리를 도와줄 사람도요. 우리들은 적어도 네 사람분의 일을 하고 있는데...... 카페 라운지에는 접시 닦기와 요리 준비를 담당할 사람도 필요해요."
"더 이상 사람을 쓸 여유는 없어, 돈."
그레타가 들어올린 파이를 보며, 돈은 진저리가 났다.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냉장고를 열면, 램초프(양고기)나 로스트 포크도 있을 텐데......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사람을 늘릴 수 없어."
돈은 단념했다. 가게 장부를 정리하기 때문에 가게 수입을 잘 알고 있었다. 돈에게 주는 급료도 직장에 나갈 때보다 적게 주기 때문에 그레타가 잘 꾸려가고 있는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돈의 어두운 생활에도, 단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 폴 오스틴. 2개월 전부터 가게에 들르는 젊은 남자손님이었다. 폴은 돈에게 호감을 가졌고, 돈도 그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교제한 지는 벌써 7주 정도 되었지만, 그레타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전에 가게를 팔도록 그레타를 설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레타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급료가 좋은 직장에 나가 폴에게 프로포즈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저금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밤도 돈은 폴과 데이트약속을 하고 있었는데, 좋은 구실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아서, 아홉시 넘어서나 만나기로 했다.
"너무 피곤한 거 아냐." 만나기로 한 <블루링>에서 얼굴을 마주 본 폴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힘든 하루였나?"
"매일 힘들어요."
돈의 목소리에는 가슴속의 비통함이 묻어 나왔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무심결에 나와버렸다.
두 사람은 폴의 차를 타고, 조용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스낵바로 갔다. 그와의 그런 짧은 드라이브가 돈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기쁨이었다. 권태로운 생활에, 단 한줄기 희망이었다.
"여길 떠나야 될 것 같아." 스낵바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으며 폴이 말했다.
"여길 떠난다 고요? 거짓말이죠, 폴?"
"유감스럽지만 사실이야. 6개월 정도 런던에 있어야 되는데 내게 있어서는 절호의 기회야." 폴은 맥주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런던 다음에는 해외 어디로 가게 될 것 같아."
폴의 마음이 자기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목에 뭔가 뜨거운 것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폴에게 있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잠깐 동안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을 간단하게 잊어버릴 것이다. 더욱이 바로 결혼 따위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구질구질한 변명을 하거나 자유로이 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돈은 한 손에 유리잔을 든 것도 잊고 포크로 토마토 조각을 쿡 찍었다.
"축하해요, 폴."
"고마워. 런던은 어렸을 때부터 동경하던 곳이야. 전에 사귀었던 여자가 지금 런던에서 일하고 있다는데, 잘하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외롭지도 않고 말이에요."
폴은 의자 등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주말 휴가를 얻어 놀러갈까? 둘이서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연극도 보러가고."
"그레타를 놔두고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돈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이라면 그런 곳에서 도망치겠어."
폴은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불면서 가만히 돈을 바라보았다.
"예쁘군, 돈. 하지만 지금 같은 일을 계속하면 그 모습은 변해버릴 거야."
돈은 토마토를 입에 넣고 포크를 접시에 올려놓았다.
"예, 나도 알아요."
"하지만, 가게를 나올 작정은 아니지? 의리 때문인가? 그레타에게 묶여 있을 이유가 없어. 오빠가 죽어버린 이상, 친척도 아니잖아."
"그레타를 버릴 순 없어요, 폴."
"그럼,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거야. 죽 이대로 갈 거야?"
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제 1년 반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이상 이 상태를 계속할 작정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폴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결혼에 대해서만은 잠자코 있었다. 그레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건 참된 의미의 결혼은 아니었다. 갑자기 얘기가 되어 5마일 떨어진 인근마을의 호적 등기소에서 수속을 마치는 데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참례자도 없었고, 피로연도 허니문도 없었다. 무뚝뚝한 등기소 직원과 구색을 맞춘 입회인 두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결혼으로 두 사람은 남아프리카의 거대한 농장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그녀의 변호사가 빈정대는 말투로 얘기했듯이 이미 그녀의 남편은 농장에서 우아하게 생활하고 있다는데, 돈 쪽에서는 아무런 이익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하고 일년 반, 돈은 남편 랄프 드발레의 얼굴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는 초기에 이민해온 네델란드인의 피를 이어받은, 오랜 가문의 남아프리카인이었다. 브론즈색으로 탄 피부, 장신으로 건장한 체격, 근접할 수 없는 엄격함과 기죽게 만드는 존대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 존대함은 딱딱한 얼굴표정에 잘 나타나 있는데 왜 그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지 돈은 이상했다.
그때는 분명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얼굴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이 인상적이었다. 단단해 보이는 넓은 어깨, 잘룩한 허리, 우아해 보이는 몸짓,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 눈동자는 광선이 내리쬐는 강철처럼 차가운 회색 빛으로 변하기도 했다. 유언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변호사가 눈을 뗐을 때 랄프 드발레의 눈동자는 강철처럼 빛나 보였다. 그리고 두 남자가 어려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았기 때문에 돈은 당황했다. 그리고 그때는 방금 만난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일 따위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변호사로부터 편지를 받아들었을 때 시작되었다. 그레타가 그 때 자주 외출 중이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아니면 돈의 일은 뭐든지 알고 싶어 하는 그레타에게 시끄럽게 탐색 당할 게 뻔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다음 수요일 오후, 돈은 변호사를 만나러 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로버트 브라이트 법률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가서 15분도 되지 않아서 돈과 랄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농장이라고요?"
분명히 뭔가 잘못 됐다고 생각하면서 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변호사는 드랜스벌 지방의 광대한 농장의 반을 그녀가 상속한다는 걸 역설하며 설득시켰다. 즉각 돈의 머릿속에 자신의 상속분을 떠올렸다. 또 그레타에게 어느 정도 나누어 줄 수도 있었다.
"여기 드발레씨와 제가......" 돈은 랄프의 불쾌한 표정을 보고 놀랐다.
"그 농장을 두 사람이 공유하는 건가요?"
"드발레씨는 크리블랜드씨를 알고 계십니다. 분명히 그분의 생명을 구하셨죠?" 변호사가 말했다.
당당한 체격의 남아프리카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런 보수를 받다니, 생각해 보지도 않았소."
그 목소리는 화내고 있는 것처럼 험악했다.
"크리블랜드씨가 바다에서 수영하고 있는데, 상어의 습격을 받는 순간, 당신이 구해줘서......"
"당연한 일이지 않소." 랄프 드발레는 변호사의 말을 날카롭게 가로막았다.
"얘기를 처음으로 돌아가서 해 주시오. 난 어제 여기 도착했는데, 오늘밤에 돌아가고 싶소."
"아, 실례했습니다. 그럼......"
변호사의 목소리는 힘이 없어 보였다.
마치 유언장 처리에 진절머리가 난 것 같았다. 그러나 돈은 그런 일엔 신경 쓰지 않고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유언자, 마이클 크리블랜드. 그는 83세로 타계했는데 주기 불과 3개월 전, 먼 친척 여자가 영국에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바로 변호사 사무소와 계약하여 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 알게 된 것은 그 여자는 죽고, 딸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 딸이 돈이었다.
"당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조사했습니다."
변호사 플레쳐는 특유의 눈짓으로 돈 쪽을 보며 얘기를 계속했다.
"실례지만, 매우 편안한 생활을 하고 계시다고는 할 수 없었어요. 그걸 알고 크리블랜드 씨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해주려고 결심하셨어요. 그러나 그 계획은 좌절됐어요. 크리블랜드 씨는 훨씬 이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생명을 구해준 분에게 전 재산을 남기기로 수속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변호사는 랄프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전보다도 더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과거에 용기 있는 행동이 거론되는 걸 달갑게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이 크리블랜드 씨의 유산 상속인이 된 사실을 전혀 모르셨습니까, 들발레씨?"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예감은 있었소. 그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가 있으니, 이곳에 오라는 편지를 받았을 때였소. 그러나 농장을 반이나 주다니 그건 도저히 믿을 수 없소."
랄프는 놀란 듯이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건 현실입니다."
변호사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얘기를 계속하면, 자신의 단 하나뿐인 혈육이 친척도 없는 여자라는 걸 알고 크리블랜드씨는 유언장을 수정하신 겁니다. 그분 입장에서 보면 새턴양에게 도움을 주는 동시에 농장의 경영은 드발레씨, 당신에게 맡기고 싶어 하셨어요. 당신들이라면 똑같이 농장을 아끼고 잘 해 가리라고 생각하신 거죠. 그래서 뜻밖의 일을 생각해 내셨어요."
변호사는 돈을 바라보고 다음에 드발레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 의미 깊은 표정을 보고, 돈은 깜짝 놀랐다. 랄프도 똑같은 일을 생각했을까. 두 사람은 한순간 말을 잃었지만, 돈이 침묵을 깼다.
"이 사람과 결혼하라고 하셨나요?"
뭔가 잘못 말했나 하고 랄프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며 돈은 얼굴을 붉혔다.
"상상하신 대로입니다, 새턴양. 크리블랜드씨는 당신에게 친척이 없기 때문에 드발레씨와 결혼하면 좋겠다는 거죠. 그렇게 하면 드발레씨에게 농장의 경영을 맡길 수도 있고요. 그분이 처음 생각하신 대로죠."
돈은 랄프의 무시하는 듯한 시선을 의식하고 손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조금 전에 했던 실언은 물론 자신의 외모도 신경 쓰였다. 윤기없는 머리카락, 피곤한 눈빛, 꺼칠한 얼굴. 가능하면 바로 그곳을 뛰쳐나오고 싶었다.
"나의 상속분은 자선사업에 기부해 주면 좋겠소."
랄프는 자신에 관한 일은 다 얘기했다는 듯이 일어났다.
"당신이 그렇게 하면 새턴양의 몫도 사라지게 됩니다." 변호사는 신중하게 말했다.
"이 사람 몫도 없어진다고 했소?" 랄프는 선 채로 돈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거요?"
"당신이 유산을 거절하면 새턴양은 유산을 상속할 수 없습니다. 유언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유감스럽지만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서는 두 분이 결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없었던 일로 해주세요, 플레쳐씨. 다른 용건이 없으시다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돈은 일어섰다. 방안 전체를 위압하듯이 서 있는 남자가 옆에 있어서인지,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따가운 시선에 화가 나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서 있었다. 분명히 그는 깔보고 있는 것 같았다.
변호사는 초조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두분 모두 앉으세요! 금액으로 치면 어느 정도의 재산인지 아시기나 합니까? 아신다면 그렇게 간단하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플레쳐는 두 사람의 얼굴을 교대로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새턴양, 당신에게 있어서 이 유산은, 바라지도 못했던 구원이 아니었습니까?"
돈은 얼굴이 붉어져서, 자신의 구차한 모습을 훨씬 절실하게 느꼈다. 기왕이면 새 코트라도 입고 왔다면 조금 더 나아 보였을 텐데.
"자, 의자에 앉으세요. 그리고 제 얘기를 들으세요."
돈은 말대로 의자에 앉았지만, 오만한 남아프리카인도 따라서 앉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그의 눈은 화난 듯이 반짝거렸다.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명령받은 적이, 적어도 어른이 된 후에는 한 번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변호사는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유언장에는 어느 정도의 타협안이 들어있는데, 아마 그게 두 사람에겐 도움이 될 겁니다."
플레쳐의 목소리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말투로 되돌아가 있었다. 돈은 왠지 마음을 집중시킬 수 없어서 산만했다. 아마 피로한 탓도 있겠지만,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랄프 드발레 쪽은 열심히 얘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간단하게 요약해달라고 할까? 돈은 자신이 없었다.
문득 3년간'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와서 돈은 주의를 기울였다. 젊은 남녀가 틀림없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리라고 믿을 만큼, 유언장을 쓴 그 노인은 낙천가가 아니라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추가조항을 덧붙였던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결혼해서 3년이 지나도 결혼생활을 잘 해나가지 못하면, 이혼해도 좋다는 것이다.
"왜 3년이오?" 랄프의 목소리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 생각에는 크리블랜드씨는 그때까지는 후계자가 탄생할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 애가 재산을 상속하면, 농장은 혈연을 따라 계승되니까요." 변호사는 화가 난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유언장 작성을 왜 유능한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는지, 크리브랜드씨의 마음을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혼자 만들면 나중에 일이 귀찮아질 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3년이란 규정에 따르면, 당신들은 지금 결혼해도, 3년 후에는 이혼할 수 있는 겁니다."
"후계자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말이오?" 랄프는 분명히 후계자일에 신경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3년간 호적상 같이 살면,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파트너들과 상의한 결과, 유언장에는 전혀 저촉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플레쳐씨는 돈에게 눈길을 주었다.
"당신은 행운의 여성입니다."
그가 다시 뭔가 얘기하려고 했지만, 돈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고 말을 멈췄다. 돈에게는 랄프 드발레와 결혼하는 게 행운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다시 플레쳐와 랄프 사이에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지만 돈은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결혼할 마음 같은 건 없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결혼하세요. 3년 정도 떨어져 살다가 농장을 팔아 나누면 됩니다."
돈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마음속은 완전히 결정되어 있었다.
결국 3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돈? 마치 먼 곳에 갔다온 것 같아."
폴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나자, 돈은 자신으로 돌아와 미안해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폴."
"뭘 생각했는데?"
폴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돈을 바라보며 그녀의 아름다움이 이대로 퇴색해버린다면 비극일 거라고 생각했다.
"1년 반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이제 1년 반만 지나면 이혼수속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게 완료되려면 몇 개월이 걸리겠지만 그때에는 경제상태가 호전될 거라고 기대했다.
"1년 반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폴은 웨이터에게 술을 더 부탁했다.
돈은 미소 지었다. 사실을 얘기하면 폴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그녀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내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남아프리카인을 만났어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어요. 그 사람과 나만의 개인적인 일이에요."
폴은 포기한 듯 어깨를 움찔했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가시질 않았다.
"남아프리카 어디 사람?"
"트렌스벌이에요. 그곳에 농장이 있어요."
"좋은 곳이야. 언젠가 남아프리카에도 가보고 싶어. 분명히 멋진 곳일 거야."
폴의 말은 돈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농장을 상속했다는 것. 돈은 그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볼일이 없을 것이다.
지금도 랄프 드발레가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 사실 자기 집에 있는 것보다도 빈틈이 없게 크리블랜드씨가 남긴 돈베야 롯지에 옮겨 살고 있었다. 랄프는 그 일을 변호사에게 편지로 알려왔는데, 변호사가 돈의 이해를 구했지만 그녀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너무 먼 곳의 일이었고 플레쳐씨의 말에 따르면 남아프리카에서는 기후 때문에 집을 너무 장기간 닫아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돈은 다른 변호사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 변호사는 랄프에게 뭐든 맡기는 것에 반대했다. 그의 말로는 돈이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남편 쪽은 우아하게 살고 있다는 게 불공평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웨이터가 술을 가져왔기 때문에 돈은 다시 생각에서 깨어났다.
"고마워요."
돈은 기계적으로 감사의 말을 하고 술값을 지불하려고 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폴을 쳐다보았다.
"남아프리카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요양하러 그곳에 가면 어때?" 이윽고 폴이 말했다.
"얼마 동안 그 가게에서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손을 떼기 전에, 휴식을 갖고 농장을 들러볼 수 있다면, 그것도 멋진 일일 것 같았다.
"아무래도 무리에요. 그레타 혼자서는 가게를 꾸려갈 수가 없어요."
"그럼 다른 사람을 고용하면 되잖아."
폴은 문제도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그는 차로 돈을 가게까지 데려다주었다. 감옥처럼 생각되는 가게로.
"그레타는 없어?" 폴은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2층 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불이 꺼졌는데."
"그래요?" 돈은 눈썹을 찌푸렸다.
"좀처럼 없는 일이지만, 영화라도 보러 갔나 봐요. 하지만 그런 때는 내게 미리 얘기하는데, 이상하네."
돈은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2층으로 가려면 가게를 가로질러 부엌계단으로 올라 가야했다. 아직까지도 음식냄새가 가시질 않고 가게 전체에 가득했다.
"우왓, 지독한 냄새로군."
"그 정도는 아니예요." 돈은 불을 켜면서 대꾸했다.
"항상 깨끗하게 해도 냄새는 없어지질 않아요."
돈은 왠지 안절부절 했다. 가게 안도, 2층도 조용한 게 그레타가 외출한 것 같았다.
"함께 2층에 가도 돼?" 폴은 계단 앞에서 돈과 나란히 서서 말했다.
"아니 함께 가지." 돈이 대답하기도 전에 멋대로 결정해 버렸다.
"그레타가 없다면, 당신을 혼자 둘 수 없지."
"그녀가 일찍 잠들어 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레타는 항상 일어나서 기다리곤 했다.
"어쨌든 심하군. 이런 곳에서 잘 견딜 수 있다니."
돈은 대답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폴도 뒤따라 왔다. 얇은 카펫을 밟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놀랄 정도로 크게 울렸다.
리빙룸은 평소 때처럼 잘 정리되어 있었는데, 소파 쪽으로 눈길이 갔다. 누군가가 누워 있었던 것처럼 쿠션이 납작해져 있었다. 그레타는 침실에 가기 전에 틀림없이 쿠션을 원상태로 만들어 놓고 들어가곤 했었다.
"뭔가 이상해요......." 돈은 두려운 듯이 폴의 얼굴은 쳐다보았다.
"그레타의 방은 어디야?"
폴이 날카롭게 물었다. 리빙 룸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통로 쪽이에요."
돈은 그레타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엔 조용히, 다음엔 크게,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돈은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어 불을 켰다. 그 순간 침대 옆에 쓰러져 있는 올케의 모습이 눈에 들어 들어와 그녀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어머! 무슨 일이지?"
그레타는 침대에 오르기 전에 쓰러진 것 같았다. 옷은 입은 채로 몸 위에 침대커버가 떨어져 있었는데, 쓰러질 때 잡아당긴 모습이었다.
"죽지는 않았죠?"
"응."
폴은 냉정하고 기민했다. 돈은 그때만큼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맙게 생각된 적이 없었다. 폴은 그레타의 옆에 꿇어앉아 심장 고동을 확인하고 있었다.
"전화 있어?"
"아뇨. 그레타가 끊어서 없어요. 내가 큰길에 있는 공중전화박스까지 뛰어갔다 올께요." 돈은 폴과 함께 그레타를 침대에 누이고 서둘러 문 쪽으로 갔다.
"그레타의 단골의사는 밤에 왕진을 와주지 않을 텐데."
"급하다고 말해!"
놀랍게도 의사는 바로 왕진을 오겠다고 했다.
"얼마 전에 새턴 부인이 전화를 했었어요. 가슴이 아프다고 했죠. 소화불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거운 체중 때문 같군요. 15분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수화기 저편에서 의사가 말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상상이 가는데." 돈이 돌아오자 폴이 말했다.
"그레타는 상태가 좋지 않으니까 소파에 누워있었어. 근데 점점 안 좋아져서 일어나 의사에게 전화하러 간 거야."
"그녀가 괴로워했을 거를 생각하니 견딜 수 없어요. 게다가 그녀는 혼자였으니까. 아, 그레타를 놔두고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자책하지 마. 그레타가 혼자된 후에 당신은 자신을 희생해서 도왔잖아!" 폴은 강경한 투로 말했다.
"그레타는 어쨌든 전화박스까지 다녀왔고 당신이 들은 얘기처럼, 의사는 소화제를 먹고 다음날 아침 진료소에 오라고 했다니까, 그레타는 반드시 약을 먹고 침대에 누우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그대로 쓰러져버렸어요."
돈은 피가 배어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레타의 입가엔 벌써 검은빛이 감돌았다.
"그레타의 상태를 알았다면 나가지 않았을 텐데."
"분명히 심장마비일 거야. 알다시피 혈색도 좋고 건강하던 사람이라도 한순간에 죽기도 하잖아."
"하지만 아직 숨쉬고 있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나 그레타는 돈과 폴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구급차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돈은 오빠의 비극적인 죽음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다.
가게를 정리하도록 좀더 강력하게 그레타를 설득했어야 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병원 문을 나서려는데 폴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
"자신을 책망하는 건 그만둬, 돈. 냉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신은 타이밍 좋게 해방된 거야."
"그만해요, 폴."
"당신은 딱 좋은 시기에 자유가 됐다구."
돈의 제지 따윈 무시하고 폴은 되풀이해서 얘기했다.
"그레타가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구. 그걸 명심해야 돼." 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레타보다, 내 쪽이라야 더 나았어요."
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안했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가게로 돌아왔다. 돈은 처음 느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허무하고 고독한 생각이 들어 폴의 얼굴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그날 밤 혼자서 지낸다는 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건물은 음침하고 어둠에 잠긴 듯이 보였다. 단지 끄지 않고 나간 그레타의 방에만 불이 켜져 밝았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군요."
"내 집에 가도 돼. 어머니는 벌써 잠드셨을 테니까. 여기 열쇠를 줘. 2층에 가서 불을 끄고 올 테니까."
돈은, 가게 앞에 세워진 폴의 차에 올라타서 길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떨면서 폴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마음은 완전히 무감각해졌다. 오빠 오엔과 똑같이 그레타도 너무 빨리 인생을 마친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내겐 아무도 없어. 남편 이외에는 아무도......
왜 그렇게 빨리 결심이 섰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돈은 얼른 행동으로 옮겼다. 그레타의 갑작스런 죽음과, 가게와 얼마 되지 않는 저금도 모두 자선사업으로 기중되게 되어 있다는 현실을 깨달은 충격이 그렇게 만든 게 분명했다.
돈은 특별히 바라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레타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했을 때 모든 걸 던져버렸기 때문에, 그레타가 돈의 처신조차 생각해주지 않을 것을 알고 슬펐던 것이다.
폴이 이제 휴가를 가는 게 어떠냐고 했을 때, 아프리카 행을 떠올렸지만 돈은 무시하려고 애썼다. 남편 앞에 모습을 나타내서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랄프에게 폐를 끼칠 권리는 없었다. 그러나 돈은 잠재의식 속에서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힘에 휩싸여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우선 처음에 돈은 돈베야 롯지에 편지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엔 전보를 치고 짐을 꾸렸다. 얼마 안 되는 가구들은 폴의 어머니에게 맡기기로 했다.
전보에는 휴가로 그곳을 방문하여 돈베야 롯지에 체재할 예정이라고만 썼다.
2
조용한 숲 지대는 아직도 어두웠지만, 하늘은 오팔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밤사이에 비가 내렸던 것 같았다. 대지는 빛나고 땅 속 깊이 물 향기가 사방에 그득했다.
돈은 창가에 서서 빛나는 일출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급하게 일을 진행했기 때문에 당혹하고 후회되는 곤란한 처지가 된 것이었다.
"돈이 필요하면 보내달라고 했으면 됐을 텐데."
돈이 도착한 날, 랄프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돈은 경제 상태를 해결하는 데 그런 간단한 방법을 생각지 못했던 자신에게 놀랐다.
보낸 편지는 랄프가 푸레토리아 친구들에게 갔기 때문에, 돌아올 때까지 받지 못했고, 나중에 친 전보를 받아봤다는 얘기였다.
랄프는 의리 있게 공항까지 나와 주었지만, 그 얼굴을 본 순간, 돈은 이대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표정은 화가 난 것같이, 처음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의 인상과 똑같은 오만한 모습이었다.
랄프는 농장의 권리를 자신에게 팔면 매달 돈을 보낼 테니 지금 얼마를 받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에 돈은 승낙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하얀 저택에 도착하자, 마음먹지 못한 생각이 돈에게 떠올랐다. 자신이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랄프는 우아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돈은 빈털털이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러나 랄프의 유복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재산의 반은, 그녀의 것이었다. 사실 랄프는 돈의 현 상태를 모르고 있었지만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여기 있을 작정이에요."
저택을 둘러보며 돈은 딱 부러지게 말했다. 전부 자기 것이라는 듯한 랄프의 태도에 화가 났다.
"당장 필요한 금액을 받으면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지 않소."
알프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자신이 있는 게 그에게는 괘씸하고 눈에 거슬릴 거라는 걸 깨달았다.
"예, 확실히 약속했어요. 하지만......"
돈은 태양 빛이 쏟아져 내리는 잘 손질된 아름다운 정원을 손으로 가리켰다. 4월이면 영국에서는 아직도 눈이 흩날리고 있을 테고, 여기서 뜨거운 태양 아래 오래 머무를 것을 생각하니 바로 영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졌다.
"정말 멋진 곳이 예요. 잠깐 동안이라도 이 아름다움을 만끽해 보고 싶어요." 돈은 미안한 듯이 랄프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바로 돌아가기로 약속했지만, 그때는 아직 이 집과 정원을 보지 못했을 때에요. 이곳에 있어도 괜찮겠죠?"
"안되오." 랄프는 강경하게 말했다.
"당신이 머무를 방이 없소."
그의 쌀쌀맞은 태도에 돈은 당황했지만, 냉정함을 되찾았다. 방이 없다고! 이런 큰집에서?
"방은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침실만 4개는 있을 거예요." 돈은 상냥하게 말했다.
돈은 다시 저택을 바라보며 그 우아한 모습에 매혹 당했다. 옆에 길고 하얀 발코니가 붙은 콜로니얼풍 저택으로 두 사람은 높은 철문을 돌아 저택 쪽으로 다가갔다. 문 뒤에는 집으로 이어지는 차도가 있고 양쪽에 큰 야자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뾰쪽하게 생긴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방이라도 돼요."
돈은 랄프의 승낙을 기대하며 말했지만, 랄프는 얼굴을 찡그리며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다가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결혼한 것, 가족에겐 얘기하지 않았소, 돈. 필요 없었기 때문이오. 당신도 잠자코 있어주겠소?"
돈은 끄덕였다. 그의 가족에게 결혼에 대해 일부러 알릴 필요는 없었다. 랄프의 가족......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같아. 하지만 문득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알 필요도 없지 않을까 하고 고쳐 생각했다.
"알리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겠어요. 참, 가족은 몇 명이고, 여기 함께 살아요?"
"그렇소. 가족 전부 여기 살고 있소. 지금은 다반에 가서 없지만, 돌아올 때까지는 당신이 떠나주면 좋겠소."
랄프가 쟈켓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려고 했는데, 그전에 먼저 문이 열리고 검은 피부의 여성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레쓰라고 불리 우는 하녀였다. 이 높은 현관 홀을 둘러보았다. 바닥은 잘 닦여져서 똑같은 모양은 중국제 수공 융단이 두 장 깔려 있었다. 가구는 모두 티크였다. 오직 예외인 것은 오래된 마차용 체스트로 떡갈나무로 만들어져 있어서, 깊은 광택이 나고 있었다. 돈은 오래된 나무가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매끌매끌한 표면을 어루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런 행동을 하면 랄프는 예외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게 틀림없었다.
돈은 그를 보지 않고 말했다.
"여기 가구...... 이건 전부 당신 것인가요? 아니면 이 저택에 있던 것?"
"여기 있었던 것도 있소." 랄프의 말투는 무뚝뚝했는데, 그보다도 다음 말에 돈은 아연해졌다.
"내가 옮겨오기 전에 재산목록은 모두 완성되었소. 당신 몫을 뺏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돈은 비참한 생각으로 고개를 저으며 레쓰에게 지시하고 있는 랄프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파울로를 찾아 차 트렁크에 있는 새턴 양의 짐을 방으로 옮기라고 해."
새턴 양......
랄프가 뭐라 불러도 상관없었다. 남편의 성을 따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따르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머지 않아, 두 사람은 바람대로 이혼할 테니까 말이다.
돈은 창가에서 현관 앞 계단을 생각 없이 바라보면서 저택에 도착한 날의 일을 생각하다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다. 랄프가 앞 계단을 올라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멋진 목조 건물로 걸어갔다. 그는 일찍 일어났다. 이 집에 와서 벌써 5일, 돈은 그것에 신경 쓰고 있었다.
돈은 몸을 돌려 자신이 쓰고 있는 방을 슬픈 듯이 둘러보았다. 레쓰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물건을 넣어두던 방이라고 했다.
"다른 방은 전부 차 있어요. 그래서 드발레 씨의 명령으로 저와 심부름꾼 소년이 이 방을 정리했어요. 마음에 드십니까?"라고 레쓰가 물었다.
돈은 예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순백의 침대커버가 씌어진 싱글침대. 작은 창 커튼도 똑같은 색이고 폭좁은 양복장, 화장대, 의자 그게 전부였다. 마음에 드냐고 묻다니! 돈은 그저 그런 방이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어린 레쓰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얘기했다.
지금 다시 방안을 둘러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저 그랬지만 랄프의 아내이며 저택을 포함한 농장의 공동소유자가 묶을 방은 아니었다.
이미 태양은 얼굴을 내밀고 하늘은 금빛으로 숨쉬고 있었다. 정원의 우거진 나무들은 따뜻한 오렌지빛을 받고 남으로 뻗어진 구름의 정상도 동족 하늘의 붉은 빛에 오렌지와 빨강, 연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돈은 다시 창가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국에 돌아가서의 생활을 여러모로 그려보았지만 즐거운 광경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곤해서 자립하는 게 힘들게만 느껴졌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럴만한 상대가 어디에도 없었다. '이대로 돈베야 롯지에 있으면 괴로운 일은 모두 잊고 조용한 생활을 보낼 수 있을 텐데......남편인 랄프의 냉정한 태도만 없더라도 말야.'
랄프는 자신의 방문을 환영하지 않고, 기분을 정리할 때까지 체재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불행했던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랄프는 다소의 동정을 나타냈지만 그건 그뿐이었다. 두 사람이 타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만사가 금전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상속분 중에서 정기적으로 건네주면 그것으로 나에게 살아갈 가치가 생긴다는 것일까?
"일할 필요는 없겠지만, 원한다면 일을 해도 좋소."
그때 랄프는 스스럼없이 말했지만, 돈은 말속에서 의미심장함을 느꼈다. 되풀이되는 설득을 무시하고 그녀가 오래 머물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어있었다.
예정대로라면 9일 후에 가족이 돌아온다. 랄프는 그때까지 돈이 머무는 건 아닐까 하고 신경 쓰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돈이 저택을 떠나면 바로 방에 원래대로 물건을 되돌려 놓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물론 고용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입을 막으면 되기 때문에 랄프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할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그도 돈이 떠난다고 약속하기까지는 여행준비를 할 수 없었다.
또한 돈 쪽은 무감동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아직 돌아간다는 약속은 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돈은 긴장된 식탁분위기를 생각하자 탐탁하지 않았다. 분명히 랄프는 그녀의 행동에 화를 낼 것이다. 돈은 고독감에 사로잡혀 뭔가 확실한 것에 매달리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있었지만 랄프에게 그 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남자는 왜 이렇게 여가의 마음에 무관심한 것일까. 자연의 법칙이 어디선가 결정적으로 어긋나버린 것이었다.
돈은 왜 여기 올 마음이 났는지 동기를 찾아 밝혀내려고 했다. 갑작스럽게 그레타가 이 세상을 뜨고 집도 남은 돈도 없다는 것을 알고 돈은 정처 없이 안개 속을 헤매 도는 동물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남편 랄프와 반은 자기 몫인 저택과 농장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라 그것이 위기적인 상황에서 구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 뒤 재지도 않고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던 것이다.
랄프가 머물 방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은 식구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어찌됐든, 이 일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고 랄프의 희망대로 조용히 영국으로 돌아가던지 랄프의 식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것 없이 이대로 머물 것인지 빨리 태도를 결정해야만 했다.
레쓰가 랄프의 모친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돈은 그때 그녀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걸 놓치지 않고 보았다. 또 여동생들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었다. 랄프에게는 여동생이 둘 있는데, 한 명은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또 한 명은 작년에 비행기 사고로 약혼자가 죽엇다고 했다.
"에이비스양의 마음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어요. 문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거든요." 레쓰는 슬픈 듯이 말했다.
랄프의 주위에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인물도 여자로 그에게는 사촌인 에스터였다. 랄프 어머니를 상대로 이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얘기할 때 레쓰의 얼굴은 찡그리고 잇었기 때문에 에스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쉽게 상상이 갔다.
랄프는 이런 여자들에 둘러싸여 생활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타협이 되고 있는지 돈은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랄프는 남자다운 남자로 보이기 때문에 온통 여자뿐인 집안에서 행복해할 타입으로는 볼 수 없었다.
돈이 아침식사를 위해 아래로 내려가 보니 랄프는 벌써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 나도 지금 막 앉았소. 그런데 언제 출발할지 결정은 했소?" 돈이 자리에 앉자마자 랄프가 말을 꺼냈다.
돈은 머리를 저었다. 그와 한곳에 있다고 해서 왜 이렇게 자신이 초라하고 작게 보이는 걸까? 그래도 조금은 강한데.
"아뇨. 아직이에요. 랄프. 오랫동안 여기 머물면서 태양과 이곳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어요. 영원히 제 손에서 떨어져버리기 전에요."
"당신의 상속분을 내게 판다고 결정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듯한 말투군., 계속해서 여기 있을 수는 없소."
"예.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팔 것도 아니잖아요? 전, 당신에게 팔기로 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어차피 누군가의 것이 된다면 당신에게 넘기고 싶어요." 돈은 애써 미소 지었지만 오히려 어색했다.
랄프의 예리한 시선에 돈은 얼굴이 붉어졌다.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는 거요?" 랄프는 흑갈색의 눈동자로 돈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그 표정은 불쾌해 보였다.
"뭐래도 여기 있겠다는 거요?"
"당신만 좋다면요."
갑자기 눈물이 복받쳐서 시야가 흐려졌다. 너무나 흥분되어 있는데다가 아직 권리가 반이나 남아있는 이 집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돈은 랄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반대했던 변호사의 말이 떠올랐다. 돈베야 롯지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경고의 편지라도 냈다면 랄프에게 쫓겨나지도 않고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돈은 아프리카에 올 예정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편지라도 쓰라는 변호사의 권유를 거절해버렸던 것이다.
"미안하지만 분명히 해두겠소. 그렇지 않아도 이 집은 식구가 많소." 돈은 가시가 돋친 그 목소리에 화가 났다.
돈은 포크 끝으로 그레이프후르츠를 집어들면서 랄프쪽을 바라보았다.
"동생들이라면 둘이서 한 방을 쓰면 안되나요?" 당연한 질문이었다.
"방을 사용할 권리는 당신 식구들보다는 내 쪽에 더 있어요. 당신, 그것을 잊지는 않았겠죠?"
대담한 말이었지만 상대방의 강한 성격에 꿀리지 않으려면 그 정도의 말은 해야만 했다. 흑갈색의 예리한 눈동자, 굵고 진한 눈썹,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날카로운 얼굴을 한층 더 날카롭게 보이게 하고, 안정된 말투에도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 그런 모든 것들이 돈을 압도당하게 만들었다. 마치 일개의 인간에게는 도저히 손이 미치지 않는 신 같았다. 돈은 그의 숱많은 갈색머리를 바라보았다. 31세...... 아내가 된 날, 남편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연령과 국적 정도였던 것이다.
"동생들이 한 방에서 잘 지내지 못할 거요. 안되오. 불가능하오. 아무리 생각해도 매월 지불금액을 받고 당신이 영국으로 돌아가는 게 제일 간단하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오." 랄프는 반론하려는 돈을 손으로 제지하며 계속해서 얘기했다.
"급할 건 없소. 천천히 생각해도 좋소. 결론을 낼 때까지 아직 며칠 더 있소."
며칠...... 랄프의 얘기 속에서 특히 그 말이 거슬려 벌컥 화가 났다. 결국 며칠 후에 결정하라는 건가? 돈의 눈에 도전적이 빛이 떠올랐다.
"최후통첩을 할 작정이에요?" 돈은 강경한 말투로 얘기했지만, 그 대담함에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좋을 대로 해석해도 좋소." 랄프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난 단지 분별 있는 답을 기대할 뿐이오."
돈은 보랏빛 눈동자로 똑바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지금 내게 있어서는, 지난 2년 동안의 사건에서 회복될 때까지 여기 있는 거야말로 분별 있는 답이라고 생각해요."
돈은 랄프가 다소 동정을 나타내지 않을까 말을 조심스레 했지만, 반대로 비난의 표정을 지어 보이자, 점점 당황해졌다.
"난 아직 이곳의 공동 소유자예요. 그래서 원하는 만큼 있을 수 있을 권리가 있어요. 만일 반대입장이라면, 난 절대로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랄프는 오만해 보이는 눈썹을 치켜뜨며 당혹한 듯이 돈 쪽을 바라보았다. 입장이 반대가 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약자 입장이 된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것이고, 동의하지도 않을 것이다. 랄프의 태도는 그걸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게 남자의 사고방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특히 명령을 해오기만 했던 사람에게는......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았소. 영국으로 돌아가는 걸 잘 생각해주시오."
랄프의 목소리에는 억양이 없고 자신을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돈은 벌써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돈베야 롯지에 있을 예정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전에 랄프가 끼어 들었다.
"4,5일 후에 대답해 주시오. 그때까지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소!"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게 돈은 놀라웠다. 아마도 주위에 있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일 것이다. 돈은 어렸을 때 승마를 배웠기 때문에 마굿간에 작고 얌전한 말이 있는 걸 보고 타도 괜찮냐고 랄프에게 물어보았다. 랄프는 분명히 기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마지못한 듯 오케이하고 대답해 주었다.
더 이상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은 걸까? 아니면 말을 탈 권리가 잇다는 걸 인정한 걸까? 돈은 어느 쪽으로도 판단할 수 없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마음은 결정한 후였기 때문이었다. 랄프가 제시한 기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돈은 매일 매일이 즐거웠다. 산책하는 걸 즐길 정도로 이곳에 강하게 이끌리고 있었다. 즐거움도 수없이 많아서, 이 돈베야 롯지에 있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다 즐길 작정이었다.
메아릴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말은 곧 돈과 친해져서 돈이 마구간 옆을 지나가면 달려와서 전부터 잘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게다가 샤이탄이란 개도 한눈에 새로운 손님이 동물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는지 돈이 어딜 가든 뒤쫓아 왔다. 하우스보이 카나미와 하녀 레쓰도 어렵지 않게 마음을 열어 주어 돈은 조금씩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특히 매니저격인 죠지와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는 그의 아내 테레사와는 사이가 좋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부드럽고, 큰 사건도 없어서 무겁게 내리누르는 불안에서 해방된 돈의 마음은 서서히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겪어온 여러 가지 괴로움, 사귀어왔던 폴을 잃어버렸을 때의 실망...... 상처는 너무나 많아서 완전하게 치유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안정되면서 즐거운 하루하루가 위안이 되어 돈은 날이 갈수록 명랑해졌고, 남편의 가족과 대결할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있었다. 랄프의 가족은 얼마 안 있으면 여행에서 돌아온다. 그러면 이 아름다운 집의 평안함도 깨질 것이다.
랄프가 결정될 때까지 대답을 기다린다고 말한 그날 이후, 돈과 그 사이에는 표면상 상당히 매끄러운 관계였다.
기후는 덥고 건조하여 폴에게 핀잔을 들을 만큼 창백했던 돈의 피부도, 햇빛에 그을려 매력적인 갈색으로 변했다.
아침나절에 돈은 때때로 메어릴을 타고 멀리까지 달려가곤 했다. 광대한 돈베야 농장에는 면과 옥수수, 콩 등 넓은 밭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돈의 눈길을 끈 것은 감귤 밭이었다. 열에 맞춰 늘어선 레몬나무가 한 방향으로 계속되어 있고 반대 측은 바람막이 대나무와 아카시아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 돈베야 농장에 온 후, 돈은 한눈으로 봐도 농장의 유복함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재산가치는 상상하고 있는 액수를 훨씬 넘을 것 같았다. 랄프를 믿고 이곳을 맡긴 건 잘한 일이었다. 랄프가 이 농장 일에 정열을 쏟고 있기 때문에 경작지도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매니저인 죠지의 얘기로는 랄프의 지시로 상당히 넓은 덤불 밭을 없애버리고 그곳에 감귤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랄프는 일에 몰두하고 있어서 농장의 권리를 사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돈은 잘 알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돈은 농장 안에 있는 들판에 서서 주위에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베나를 닮은 파란 예쁜 꽃과 세인트포리아, 야생백합, 진홍의 부켄빌리아. 얼굴에 와 닿는 햇빛도 기분 좋았다. 바로 그때 아직 개간되지 않은 숲 속으르 말을 타고 달리고 있는 랄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돈은 그 자리에 서서 이마에 손을 대고 햇빛을 가리며 랄프의 승마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말 멋있어! 건장한 사람과 말이 균형 잡힌 리듬으로 일체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돈은 숨이 멈춰질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기분이었다.
이 기분은 뭘까? 돈은 자기 마음속으로 분석하면서, 두 명의 정원사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 정원으로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손질하고 있는 잔디밭에는 스프링쿨러가 돌고 있었다. 돈은 정원을 빠져 나와 집안 쪽으로 돌아 그 앞에 있는 시냇물을 따라 산책하려고 안뜰을 걷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다시 랄프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엔 집 쪽으로 돌아오는 참이었다. 셔츠 위로도 약동하는 근육의 움직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남성의 육체 바로 그 견본이었고, 힘센 남자다움을 상징했다.
돈은 걸음을 늦췃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야...... 채워지지 않는 동경심......
랄프는 안뜰에서 말을 내리고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모습을 나타낸 소년에게 고삐를 건네주었다. 돈은 벌써 멈춰 서서 180센티 이상의 키에 균형 잡힌 몸매에 블루진과 오픈칼라 셔츠를 입은 남자가 당당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의 표정을 보고 주저하지 않고 말을 건넸다.
"차를 빌려줄 수 있어요? 오후에 마을에 나가보고 싶어요."
돈이 옆에 세워져 있는 차를 힐끗 쳐다보니, 랄프도 그쪽에 시선을 주었다.
"공교롭게도 이차는 내 것이오. 전부터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오." 랄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분명한 말투에 돈은 얼굴을 붉히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저걸 빌릴 작정은 아니었어요. 짚차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저쪽에 있는 스테이션 왜곤은 그전부터 있었던 거요."
랄프는 집유장 옆에 있는 낡은 차를 가리켰다. 돈은 형편없는 그 차를 보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전한가요?"
"걱정 없소. 뭔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사다줘도 되겠는데." 랄프는 돈이 마을에 가는 게 내키지 않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특별히 필요한 건 없어요. 마을을 둘러보고 싶을 뿐이에요."
돈은 이미 이 작은 마을, 홀츠브룩에 대해서 레쓰에게 얘기를 들었었다. 작은 교회와 작은 학교, 은행에 도서관, 몇 개의 상점과 미장원, 이발소, 사무소가 있다는 것과 잊어서는 안 될게 자카랜더 클럽이었다. 레쓰의 표현을 빌리면 이곳의 중요한 일은 모두 그 클럽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댄스파티, 각종 축하행사, 특히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디너 댄스파티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디너가 시작되기까지 꽃으로 장식된 라운지에서 술을 마시고 잡담하고 그후에 예약해둔 테이블에 앉는다는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마을에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소." 랄프가 솔직하게 말했다.
"좁은 마을이오. 낯선 얼굴이 나타나면 어차피, 이목을 끌어서......"
"어머, 당신을 난처하게 하는 일은 하지도 않고 얘기도 않겠어요. 만일 정체를 물으면 난 당신의 친구이고 얼마간 이 집에 체재할 작정이라고만 말하겠어요." 돈이 그의 말을 가로막고 이렇게 얘기했다.
돈은 랄프의 그을린 얼굴을 올려다보며 지금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님이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소."
이 말을 듣고 돈은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지만 랄프는 그녀를 무시한 채, 딱딱한 말투로 계속해서 얘기했다.
"아니 지금도 얘기할 마음은 없소. 그러니 당신은 마을로 가서는 안 되오."
돈은 어이가 없어서 자기가 듣기에도 불쾌할 만큼 난폭한 말투로 대꾸했다.
"결국 나는 포로의 몸과 같군요!"
"말도 안 되오." 랄프는 부정했지만 그 눈에는 경멸하는 듯한 냉정한 빛이 났다.
"당신이 포로의 몸이라니 말도 안되오."
"하지만 마을에 가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결국 감금된 것과 똑같아요."
"난 단지 이쪽 입장도 생각해 달라는 거요. 결혼했다는 사실은 내 주위 사람들 아무도 모르고......"
"지금도 알리지 않아도 돼요." 랄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돈은 화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이대로 이 집에 머물게 된다면 언젠가는 나도 마을에 가게 될 거예요, 그렇죠?"
식탁에서 언쟁한 후, 이 화제를 피하려고 했지만 결심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얼떨결에 말해버리고 말았다. 랄프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돈은 기다렸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들려온 랄프의 말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럼, 죽 있기로 결심했단 거요?"
"죽은 아니에요. 얼마동안이죠."
또다시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긴장되었다. 돈은 랄프에게서 눈을 돌려 화단 울타리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았다.
"이제 결심은 변하지 않는 거요?"
랄프의 날카로운 질문에 돈은 한순간 말이 나오질 않았다. 위엄 있는 태도, 천성적인 지배력, 강렬한 개성을 가진 남편 앞에서 말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대답했다.
"예, 랄프.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요. 얼마간 여기 있으면서 내가 양도받은 재산을 마음껏 음미하고 싶어요." 돈은 잠시 말을 끊고 랄프를 쳐다보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난 결혼에 대해서도, 이 집과 토지를 당신과 공유하고 있다는 것도 말하지 않겠어요. 약속은 지킬게요. 하지만 나중 일은 맘대로 하면 되잖아요?"
랄프는 돈의 도전적인 질문을 무시하고 신랄한 말투로 물었다.
"내 가족이 돌아왔을 때 어떻게 될지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봤소?"
"그 일은 모두 돌아오기 전에 얘기를 맞추면 될 거예요.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좋은 구실이 있을 거예요."
돈은 랄프의 분노의 눈빛을 보며 완전히 기가 죽었다. 영국을 떠날 때,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솔직하게 남편이란 사람이 반갑게 맞아주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은 다소 있었지만,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것도 몰랐고, 이렇게 복잡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내가 바로 돌아가면 문제될 게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상대가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돈은 계속해서 얘기했다.
"하지만 내게도 여기 있을 권리가 있고, 또 여기 있고 싶어요. 전 여기 있을 거예요, 랄프. 그러니 그만 포기하고 내가 여기 있을 좋은 구실을 생각해봐요."
랄프가 싸늘한 눈빛으로 돈을 내려다보자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이윽고 아무 말 없이 랄프는 등을 돌려 저택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3
그날의 점심은 무언의 식사였다. 랄프는 돈 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돈은 신경이 쓰였지만 어쨌든 식사하기로 했다. 건강을 되찾는 데 주저하지 않으려고 했다. 여기 돈베야 롯지에 와서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피부는 매끄러워지고 혈색도 좋아졌다. 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기름 냄새와 열기로 가득 찼던 그레타의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잃어버렸던 머리카락의 윤기도 되돌아와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갑자기 랄프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 마음은 정했소?"
"지금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곳의 멋진 풍경을 만끽하고 난 후가 되겠죠. 이곳의 한가로움과, 세상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분위기가 좋아요. 어쨌든 바로 이런 기분이 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돈은 말을 멈추고, 호소하듯이 상대를 보았지만 랄프는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여기 머무는 게 당신에게 폐가 된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가족들이 없기 때문에 구실을 생각할 시간이 있어요. 당신을 귀찮게 해서 미안하지만 전에 부탁했듯이 이쪽 주장도 타당하다는 걸 알아주세요. 내게도 잠깐 동안, 자기 땅에서 즐겁게 생활할 권리가 있지 않겠어요? 뭐래도 이제 1년 반밖에 없으니까요......"
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는데, 1년 반이라는 말을 한 순간, 랄프의 표정이 험악해져서 말끝이 흐려지고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 1년 반이나 있겠다는건 아니에요. 기껏해야 반 년 정도겠죠."
돈은 랄프의 등뒤에 있는 창밖에 펼쳐진 경치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것이다. 이 농장, 그녀는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이 땅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따뜻함, 별이 빛나는 밤의 찬 공기, 모든 것에 감동하고 있었다. 산책을 하면서도 넓고 조화를 이룬 주위 경치에서 평온함을 발견하고 뜨거운 기후로 우거진 숲속에서 자연의 압도적인 힘을 느꼈다.
"6개월......"
랄프의 낮은 목소리에 돈은 생각에서 깨어나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지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소?"
돈은 입술을 깨물며 뚫어지게 쳐다보는 랄프의 시선을 받았다.
"아뇨, 하지만 당연히 당신이 적당한 얘기를 만들어 주리라 믿고 있어요."
이말을 듣고 랄프는 비로소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은 즐거워서 웃는 거라고는 할 수 없었다. 돈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 그녀는 랄프의 마음속 갈등을 알고 있었다. 농장의 권리를 팔기로 약속을 한 이상 결혼한 것을 가족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랄프로서는 가능하다면 돈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돈은 여기 돈베야 롯지에 온 이후 몇번이나 해온 산책에 대해 생각했다. 먼 곳까지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이 농장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그 가치는 컸다. 이곳을 소유하는 자의 지위는 높고 존경심도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어느 사이엔가 돈은 랄프도 이런 대우에 조금은 자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랄프는 돈에 대해 저택에 있을 권리 따위 없는 침입자 같은 대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충분했다. 한 가지는 이 농장의 공동경영자이고, 또 하나는 그의 아내가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돈은 정신을 차렸다. 실내는 무겁게 내리누르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돈은 입술을 적시며, 말을 꺼냈다.
"도저히 좋은 구실이 떠오르지 않으면 가족에게 사실을 얘기하면 되잖아요."
"사실을!" 랄프는 마음속에 쌓여있던 화가 폭발하듯이 돈을 노려보았다.
"그럴 수는 없소."
돈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울한 대화였다.
"사실을 얘기해 버림?, 우리 두 사람에게는 모든 게 간단해요. 거짓말을 숨긴 채 지내는 건 힘든 일이에요."
랄프는 냉정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오. 그러나 내가 결혼했고, 이 농장의 권리도 반밖에 없다는 걸 지금 새삼스럽게 얘기할 수는 없소."
랄프는 말을 멈추고 돈의 반론을 기다렸지만, 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뻔뻔스럽게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 변호사의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았을 거요."
또다시 얼어붙는 듯한 고요함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돈은 랄프의 당치않은 말에 질려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 굴복하여 영국으로 돌아가는 약속은 하지 않겠다고 용기를 내고 있었다.
랄프의 등뒤에 펼쳐진 광대한 땅은 이미 모르는 땅이 아니었다. 감귤밭이 줄지어 있는 아름다움, 숲지대의 고요함, 그 매력이 막연하게나마 마음속에 자리작고 있었다.
그래, 아직 이곳을 떠날 순 없어! 돈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돈은 이 땅에서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고, 가능하다면 남은 1년 반을 여기서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후에 랄프에게서 돈을 받고 영국으로 돌아가면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다.
돈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랄프를 바라보았다. 일생에 한번 정도, 주위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더욱이 형식상의 남편이 도착한 날부터 괘씸한 태도로 일관해왔기 때문이다.
돈은 자신이 이곳에 있음으로써 랄프가 미묘한 입장에 있게 된다는 걸 알았기 떼문에 미안한 마음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뭔가 그럴듯한 구실이 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 랄프의 목소리는 거칠고 화가 난 듯했다.
"도대체 어떻게 당신의 존재를 합리화시킨단 말이오?"
"날 친구롤 말할 수도 잇고 방법은 있어요." 돈은 랄프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생각을 짜냈다.
"친구의 친구라고 하면 어때요?"
스스로도 형편없는 생각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랄프가 어리석다고 불평해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다. 그런데 갑자기 랄프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돈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몇 개월 전에 프레토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간 친구가 있었소. 그 남자는 원래 영국인으로, 20살된 아픈 딸이 있소. 이전에 온 편지에는 딸을 햇살 따뜻한 곳에서 요양시키고 싶다고 했는데, 그것이 여기라고 해도 이상할 것 없겠소. 다행스럽게도 어머니와 동생들은 그 친구글 만난적이 없소. 물론 딸의 얼굴도. 모친과 함께 죽 영국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오."
랄프는 말을 끊고 얘기 줄거리에 결함이 없는지 생각하는 듯 했지만, 달리 잘못된 점이 없었다.
"이거라면 잘될 거요. 나는 어머니에게, 친구로부터 딸을 묵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1,2개월 맡기로 했다고만 하면 되오"
1,2개월...... 돈은 조금 풀어진 랄프의 표정을 보며, 기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않기로 했다.
"말씀대로 잘되겠죠? 하지만 어머니와 동생들이 답변이 곤란한 질문 같은 건 안하겠죠?"
"그런 일은 없을 거요. 내가 모두 설명해 놓을 테니까. 당신 역할은 단 하나,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오. 내 친구의 딸로 이 집의 손님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단순한 충고일까? 아니면 경고......?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랄프가 진실해 보이는 구실을 찾아낸 것이었다. 또 만에 하나 문제가 일어났다고 해도 그때는 랄프가 알아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믿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차피 그게 최선의 방법 같군요.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도록 서로 확실히 해두어야겠네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돈은 상대의 눈동자 속에서 위협의 빛을 보았다
"서툰 짓은 하지 마시오. 알겠소? 후회하게 될 거요." 랄프는 잠시 후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어찌됐든 얘기는 끝났소. 뭐 바라는 게 있소?" 돈은 잠시 주저하다가 원하는 걸 얘기했다.
"더 나은 방으로 옮기고 싶어요. 1,2주라면 지금 방으로 괜찮지만, 반년 이상 살기에는 너무 좁아요."
"반 년 이상이라고! 반년이나 있으면 충분하지 않소."
"글쎄요."
돈으로서는 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반년 동안 맘이 바뀔지 알 수 없었고, 점점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 언제까지라도 있고 싶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당연히 농장의 권리를 팔겠다는 랄프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내가 더 나은 방을 원하는 건 무리가 아니에요. 사실 많은 방들을 전부 당신 가족이 점령하고 있잖아요."
랄프의 입이 일그러졌다. 마음속으로는 돈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몰상식한 대우를 하고 잇을지 알고 있을까?
"방을 바꾸는 건 할 수 없소. 참아주지 않겠소? 쾌적하게 보내도록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다면......"
"방만 바꿔주면 그걸로 충분해요.?
순간 손을 들어 올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랄프의 표정은 험악했다.
"그럴 수 없소."
"절대로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실 정도로 돈은 떨렸지만 당연한 요구를 관철시키고 싶었다.
"아, 절대 안되오!"
두 사람은 말이 없었고, 무겁고 긴장된 분위기가 방안에 가득 찼다. 이윽고 돈이 테이블에서 일어서며 정적을 깨뜨리고 말을 꺼냈다.
"그럼 랄프, 내가 모두에게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겠군요. 나는 이곳 공동 소유자니까, 좋은 방을 쓸 권리가 있다는 걸 설명하겠어요." 다시 한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계속해서 얘기했다.
"아마, 당신이 제일 좋은 방을 쓰고 있겠죠? 나는 두 번째라도 좋아요."
돈은 얘기를 다 하고 반론할 틈도 주지 않고 테이블을 떠나, 문 쪽으로 갔다. 랄프는 눈에 분노의 빛을 띠며,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 난 뒤의 불쾌한 기분을 떨쳐버리는 데 오래 걸렸지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상속받은 것을 조금은 누려보기로 결심하자 기분도 안정되어, 돈은 마을에 나갈 준비를 하기로 했다.
우선 샤워를 하고, 영국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만들었던 꽃무늬 면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그리고 머리를 빗고 립스틱을 바르자, 기분까지 밝아졋다. 거울에 비친 모습도 더할 나위 없었다. 풍성하게 잡은 스커트 주름을 하나하나 내려다보았다. 드레스를 만든 솜씨는 프로급 수준으로 상체는 꼭 맞게 해서 매력적인 가슴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돈은 하얀 핸드백을 들고 방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그때 계단 아래 있는 홀에 랄프의 모습이 눈에 띄어 돈은 말을 걸었다.
"저, 랄프. 전 방을 둘러보려고 해요. 어디로 옮길지 결정하고 싶어요."
랄프의 입가는 일그러지고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 뭐라 했소?" 목소리는 거칠고 흑갈색 눈동자에는 위험스런 빛이 떠올랐다. 돈이 대답하지 않자, 다시 물었다.
" 내가 질문하고 있지 않소?"
그렇게 말하고 랄프는 마치 나체라도 보듯이 돈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가 알아서 좋을지 모르지만, 돈은 목이 막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자신을 부추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약한 기색을 보이면, 틀림없이 지게 될 거야. 저 밑에 서 있있는 남자에게 압도당하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돈은 결심을 굳게 하고, 다시 말을 되풀이하여 말했다. 그가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돈은 무의식중에 복도손잡이를 꽉 잡았다. 무릎이 떨려 몸을 지탱해줄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방에 들어가는 건 절대 허락할 수 없소."
랄프의 인정사정없는 목소리와 태도, 돈은 몸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다시 강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질 것만 같았다. 돈은 다시 용기를 내었다.
"전, 꼭 방을 바꿔야겠어요. 지금 하든지, 나중에 하든 지는 당신 소관이에요. 좋은 방으로 못 옮겨주겠다고 했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난 요구할 수 있는 입장에 있어요. 이 집을 가지고 있던 내 친척을 당신은 잘 알겠죠? 그렇다면 그 사람이 내게도 똑같은 은혜를 베풀려고 했던 것도 알 거예요. 난 이렇게 고자세적인 태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정 그렇다면 변호사를 통해서 얘기해도 좋아요."
랄프는 또다시 이를 악물고, 얼굴도 울그락불그락 했지만, 돈이 말하는 바가 옳다는 건 인정하는 것 같았다.
유산을 남겨준 인물은, 두 사람이 균등하게 이익을 나누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알겠소. 어떡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겠소."
랄프는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은 지금 방을 써 주시오."
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 돌아올 때까지만요."
그리고 다시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아마, 랄프가 제일 좋은 방을 쓰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게 두 번째로 좋은 방이죠?"
돈은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어머니가 쓰는 방이오."
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방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럼 세 번째는요?"
랄프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고, 초조한 듯 크게 숨을 내쉬면 돈을 남겨두고 가버렸다.
돈은 당황하고 부끄럽기까지 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돈은 먼지가 많은 길을 스테이션 왜곤을 타고 달리며 홀츠부룩 마을로 향했다. 도로를 따라 희고 작은 집들이 점점이 늘어서 있고 때때로 어린이들이 길거리에서 놀고 있어서 그때마다 속도를 줄여야만 했다. 다 내린 차창으로 길가에 피어있는 병꽃나무의 강한 향기가 그윽했다. 햇빛은 따갑고 바람도 없었다. 랄프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에도 불구하고 왠지 마음은 들떠 잇어서 돈은 콧노래를 부르며 마을 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윽고 마을에 도착하여 차를 세우고 돈은 상점이 들어서 있는 큰길로 걸어갔다. 길 양측에는 타마리스크 나무가 죽 심어져서 서늘한 나무그늘 밑을 걸어 다니는 게 기분 좋았다.
길가에 빨간색 벽돌로 지은 도서관이 보였다. 돈은 무심코 그쪽으로 걸어가 안으로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다. 작은 마을에 비해서는 상당한 규모로, 책장에 꽂혀있는 책도 신기할 정도로 많았다. 돈은 책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사서를 보는 여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돈이 랄프 드발레 집에 온 손님이라고 하자, 바로 표정이 바뀌어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메어리. 나제인트에요. 물론 책을 빌려드리겠어요. 드발레 씨 댁에 언제까지 일으실 건가요?"
"글쎄요. 3,4개월쯤." 돈은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이곳이 좋으신가요?"
나이든 사서의 질문에 돈은 고개를 끄덕엿다.
"예, 매우 좋아요. 제가 살았던 잉글랜드 북부와는 많이 다르죠."
"북부?" 그 여자는 새로운 흥미가 생기는 것 같았다.
"어디쯤이죠?"
"체샤 주에요. 하지만 슈로프샤 주와의 경계에 가까운 곳이죠."
"어머, 우연이에요! 숙모와 사촌이 체샤 주에 살고 있어요...... " 사서는 말을 끊고 미안한 듯이 어깨를 움칫했다.
"잠깐, 미안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반대쪽 카운터로 가서 젊은 남자가 내민 책에 스탬프를 찍기 시작했다. 남자가 들고 온 책은 10권이 넘었다.
돈이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자, 남자가 미소를 지어 보엿다. 돈은 그 환한 표정이 마음에 들어서 미소 지어 답했다. 파랗고 투명한 큰 눈, 상냥해 보이는 입가, 반듯한 이마, 윤기 있는 금발, 키는 중간 정도로 살찌지 않은 적당한 몸에 체크셔츠와 진바지를 입고 있었다.
돈은 그 남자가 책을 더블백에 넣는 것을 보고 잇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책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벼운 책으로 할까, 조금 내용이 무거운 것으로 할까 망설이다 결국 손에 든 것은 시집이었다. 돈은 매우 행복했다. 이렇게 느긋하게 책을 고를 수 있고, 맘껏 책을 읽을 수 있는 게 한없이 기뻤다.
잠깐 동안 이렇게 변화가 일어나다니! 지난달까지, 그레타의 가게에 묵여 몸이 가루가 되도록 장시간 일했는데 그때는 하루 일이 끝나면 피곤해서 자기 전에 책을 들고 30분 정도도 읽을 수 없었다.
도서관을 나와 돈은 약국으로 갔다. 의외로 그 약국에는 돈이 사용했던 비누가 잇어서 그걸 하나 샀다. 그러나 그외에는 아무것도 살 수 없었다. 아프리카에 오기 위해 항공요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가진 돈은 얼마 남지 않았고, 또 랄프가 도움을 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껴야 했다. 만일 랄프가 얼마를 빌려준다면 받을 작정이었다.
그건 돈 자신의 재산이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그녀의 상속분에서 빼고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어쨌든 요 몇 달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은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를 잊고, 미래를 무시하며 현재만을 위해 살자고 무의식중에 마음먹었던 것이다.
잠시 후, 마을을 둘러보고 잇던 돈은 도서관에서 있었던 젊은 남자가 앞에 서 있는 걸 알아챘다.
"여, 또 만났군요. 당신 이름은? 어디서 살고 잇소? 난 쟈크 무어요. 만나서 반갑소." 그 남자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돈은 그의 솔직한 태도에 무심코 웃고 말았다.
"전 돈이라고 해요. 랄프 드발레 씨네 손님으로 돈베야 롯지에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악수를 했다.
"정말이오?" 쟈크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거 재미있군! 그 집에 살고 있는 질투 많고 색기 많은 숫여우가 당신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궁금하오."
돈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 채, 스스럼없이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처럼 다가오는 사람에게 흔들렸다.
"지금 랄프 가족들은 없어요......"
"그랫군. 잊었었소."
그렇게 말하고 쟈크는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는 영국인으로 25세이고, 마을을 사이에 두고 돈베야 롯지와는 반대쪽에 형과 둘이서 이에로 게이블스라는 작은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5개월 전에 그곳을 팔고 막 이사온 후로 아프리카 농업에 익숙하지 않아, 아직 일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햇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렸던 책, 그건 전부 농작업과 농업경영에 관한 책으로 지금 막 차에 실었소."
쟈크는 그렇게 설명을 하고 바로 자카랜더 클럽에서 오후 티타임을 갖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난......"
"좋잖소. 난 마을에 오면 꼭 클럽에서 차를 마시는데 동행이 잇는 게 즐겁기 때문이오."
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쟈크와 나란히 걷기 시작햇다. 남자와 함께 그것도 즐거운 동행으로 전보다 더 기분이 들떴다.
두 사람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정원이 보이는 자리로 안내되었다.
" 이 정원에서 바비큐를 먹을 수 있소."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치고 나자 쟈크가 말했다.
"당신에 대해 말해주시오." 그 파란 눈동자는 태이블 위로 보이는 돈의 상반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이 원해서 이곳에 왔소?"
"네 그래요."
"얼마나 있을거요?"
"몇 개월이에요." 돈은 더 이상 깊이 물어보지 않길 바랏다.
"랄프 드발레의 친척이 되오?"
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친척은 아니에요. 랄프는 아버지의 친구에요. 여기는 요양 차 왔어요." 마음을 굳게 먹고 거짓말을 했다. 지금같이 곤란한 질문을 받을 경우에 대비하여 마을로 오는 도중에 수차례 연습했는데, 그 대답이 진실하게 들렸는지 어떤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믿고 있다는 듯이, 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태양과 공기가 바로 건강을 되찾아줄 거요. 그런데 병이 있어 보이지 않소. 매우 아름답소."
"농담하지 마세요. 나는 다른 여성들처럼 빈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쟈크는 눈을 크게 떴다.
"칭찬받는 게 좋지 않소?
"그런말 들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혼란스러워요."
돈은 정직하게 말했다.
"처음이래도 왜 혼란스럽죠?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을 칭찬해준 남자가 없었다는 거요? 도대체 당신은 몇 살이오?"
"여성에게 나이를 묻는 건 실례에요."
"그렇지 않소. 그건 그 사람의 나이에 따라 다르오."
"맞아요. 그러니 스무 살이 넘은 여자에게는......"
"말도 안 되오. 그건 40세 때나 해당되오. 내가 알건데, 40세 생신을 경계로 우리 어머니가 갑자기 우울해졌기 때문이오. 하지만 50세가 되어 40정도로 보인다고 하면 바로 원기를 되찾지. 여자들은 묘한 생물이오." 쟈크는 숨도 쉬지 않고 얘기를 끝내더니 호흡을 가다듬는지 잠자코 있었다.
그때 주문한 것이 운반되어 왔다. 구워서 버터를 듬뿍 발라 나온 스콘과 홍차, 테이블 위에는 크림과 딸기잼이 놓여 있었다.
"매우 재미있었어요.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다 마시고 나서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아니, 나야말로 초대에 응해줘서 기뻤소. 이 마을에 젊고 예쁜 여성이 나오는 일은 좀처럼 없소." 쟈크는 웃으며 다시 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독신 여성은 그렇소. 당신은 인기가 있을 거요. 이곳에는 적령기의 고독한 남자가 몇 명이 있는데, 우리 형제도 그 중의 두 사람이오. 하지만 당신을 처음 만난 건 나라는 걸 잊지 마시오."
"기억하겠어요. 분명히 당신은 이 마을에서 제일가는 플레이보이일 거예요."
"심하군. 나는 진지하오. 게다가 이곳에 데리고 놀 여자 따위는 없소. 랄프 드발레의 친구라면 당신의 그의 가족에 대해 잘 아오?" 쟈크는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다.
"조금 밖에요. 그리고 랄프와 친구는 아버지에요. 난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났어요."
"그렇군."
쟈크는 묘한 눈길로 돈을 바라봤기 때문에 그녀는 다음엔 어떤 걸 물어올지 불안해졌다. 먼저 기선을 제압하려고 자기 쪽에서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영국 어디서 있었어요? 전 북쪽 같은데요."
"나의 액센트로 알았소?" 쟈크는 빙긋 웃었다. "당신과 똑같이 랭카셔요."
"나의 아름다운 고향은 이웃인 체샤에요."
"아름다운 곳이지만 사람은 음침하지."
돈의 눈이 반짝였다.
"모두 묵묵히 일하고 있어요. 당신은 모르겠지만요."
쟈크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돈, 아무개씨. 당신에게 졌소."
"새턴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돈은 웃었지만, 웨이츄리스가 청구서를 가져왔기 때문에 목소리를 낮췄다.
"급한 일 있소? 괜찮다면 잠깐 정원에 나가보지 않겠소?" 계산을 마치고 쟈크가 물었다.
돈은 잠시 주저했지만, 요구에 응했다.
쟈크에게는 강인한 면도 있었지만, 그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어서 함께 있는 게 즐거웠다.
쟈크는 맘대로 걸어갔다. 깨끗하게 깎여진 잔디를 가로질러 야자나무 숲속의 길을 빠져나오니,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멋있어요!"
주위 경치의 아름다움과 요 몇 년간 있었던 괴로운 일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뒤엉켜 가슴을 눌러와 돈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물론 때때로 갑자기 죽은 올케의 일이 떠올라 마음 아픈 적도 있지만, 아무리 과거를 돌이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추억을 뿌리칠 수 잇게 되었다.
"이제 알겠소. 당신에게는 즐거운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오. 몸이 아프다니 말이오." 두 사람이 나란히 벤치에 앉자, 쟈크가 고개를 돌리며 말을 꺼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돈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쟈크는 화제를 바꾸었다.
"돈베야 롯지의 여자들은 언제 온다고 하오?"
"3,4일 후에요."
돈은 무심코 한숨이 나왔다. 요 1년 반 동안 자기들만 생활해왔던 집에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을 반갑게 맞아줄까?
"여자가 다섯 명......" 쟈크는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 가운데 남자다운 남자 랄프 드발레가 있는데......"
"그래요, 뭔가 이상한가요?"
"랄프는 마일러를 맡지 않을 수 없소. 그녀의 남편이 마일러가 모르는 사이에 집을 팔아 다른 여자와 도망갔는데 소식도 없소. 있는 곳도 모르는 것 같소."
"안됐군요. 변변치 못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꼭 그렇게만 말할 수 없을 거요." 쟈크는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나쁜 쪽은 마일러로 그녀는 성질이 고약하고 계산적이라 하오. 당신이 그집 여자들과 잘 지내게 되길 빌겠소." 그 목소리는 의심쩍어했다.
"마일러의 어머니도 보통은 아니기 때문이오."
돈은 랄프의 어머니에 대해 얘기할 때, 레쓰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던 걸 기억했다.
"어떤 분인가요?"
돈은 호기심이 나서 노골적으로 물어보았다.
"독재자...... 아니, 더 심하오. 그렇게 비열한 사람은 본 적이 없소. 자식이 돈베야 농장을 양도받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소. 분명히 그 농장은 이곳에서 가장 크고 좋은 농장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잘난 게 아니지 않소!"
"친구는 없겠네요."
돈은 불안해졌다. 지금으로서는 실정을 모르기 때문에 억측을 하는 거겠지만. 그러나......
"나이는 어느정도 되셨나요?"
"55세정도일 거요."
"집안일을 어머니가 전부 맡아 하시나요?"
"아마 그럴 거요. 하지만 돈베야 롯지의 주부자리를 노리고 있는 에스터가 있소. 대단한 미인인데, 그녀 또한 빈틈이 없는 여자요. 명목상으로는 노부인의 간호역쯤 되지만 랄프 어머니에게 간호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소. 어찌 보면 어스터 랜스필드양은 미래의 남편을 붙잡기 위해 온 것이오. 게다가 착착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평판들이오.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기에 혼약이 됐다는데, 내가 보기에도 결혼은 멀지 않아 보이오."
돈은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랄프는 벌써 결혼했어요, 라고 말한다면 쟈크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30분 후쯤, 돈은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에는 이제 돌아올 랄프의 가족일로 꽉 차 있었지만, 특히 생각나는 건 막내동생 에이비스였다. 랄프 어머니에 대해 얘기하고 그녀에 대해 말할 때, 쟈크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떨리고 눈빛도 안절부절해 보였다. 실버 블론드의 머리카락에 사파이어 블루의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분명히 쟈크는 에이브스를 그렇게 표현했다.
"그녀는 그집 사람들과는 전혀 틀려요."
마지막에 그렇게 말하고, 쟈크는 돈과의 다음 데이트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럼, 일요일 밤에 봅시다." 헤어질 때,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얘기했다.
"쟈카랜더 클럽 라운지에서!"
4
돈이 집에 돌아왔을 때 랄프는 마침 정원에 있었다. 건장한 체구에 브라운색 반바지와 하얀 반소매셔츠를 입고 그늘에 서 잇었다. 표정은 굳은 채, 그녀가 차를 세우는 걸 보고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백을 메고 책을 들고 랄프 쪽으로 걸어가면서 돈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평소때와는 다른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얼굴에서 목으로, 그리고 아래로 시선이 옮겨졌다.
돈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멈춰 섰다. 가능하다면 이 자리를 도망쳐버리고 싶었고,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사과의 말도 혀가 굳어 나오지 않았다.
"도서관을 발견했어요. 폴그레이브의 <영시주옥집>......" 랄프는 돈이 고른 책의 제목을 보고 놀란 듯했지만, 다시 냉정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나도 마을에 있었소. 당신과 쟈크 무아가 함께 잇는 것을 보았소."
"그런데요?" 랄프의 말투에 가시가 있는 것 같아 돈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 사람이 색한이라는 걸 이제 알았소?"
"그런 사람 같지 않아요."
"결국, 그가 당신을 유혹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요?"
경멸하는 듯한 그 말투에 돈은 발끈했지만, 자신을 억눌렀다.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것 없어요. 당신이야말로 뭘 말하고 싶은 거죠?"
"그 사람과 더 친해지는 것은 생각할 문제요."
돈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의 지도는 받지 않겠어요. 누구와 얘기하든 내 자유 아닌가요?"
"난 충고하고 있는 거요. 그뿐이오." 순간, 적의에 찬 표정이 랄프의 얼굴에 나타났다.
"하지만, 충고에 따르는 게 좋을 거요."
돈은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감정을 누르며 랄프를 쳐다보았다. 그때 랄프도 다시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요한 시선으로 훑어보는데 묘한 기분을 느꼈다. 랄프의 마음속에도 겉으로는 추측할 수 없는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을까? 그의 마음속은 겉모습과는 전혀 다를까? 다시 돈의 얼굴로 시선이 돌아왔을 때 그의 얼굴 표정은 뭔가 다른 걸 생각하고 잇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어! 돈은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이 품었던 생각을 지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와는 가까이하지 마시오. 그러면 귀찮은 일은 없을 거요." 그의 말에 퍼뜩 놀라 정신을 차리고 있는 동안, 그는 벌써 등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발걸음은 점잖고, 보폭도 넓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돈은 화가 나서 그 뒤를 따라갔는데 벌써 놓쳐버려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시각은 벌써 저녁때가 되어,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잔디 위에는 야자나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슴에 와 닿는 아름다움이었다.
집안으로 들어가 돈은 발길을 멈추고 홀을 가득 채운 관엽식물을 바라보았다. 화분 밖에까지 뻗쳐 나온 잎이 무성한 나무기둥을 타고 올라간 나무, 천장에 묶여진 바구니 밖으로 잎이 쳐진 나무, 종류도 다양하고 수도 많았다. 초록잎이 흰 벽과 목재 가구와 잘 어울렸다. 정말 효과적인 장식이었다. 랄프 곁에 있는 4명의 여자 가운데 이렇게 멋진 센스를 가진 건 도대체 누굴까? 돈은 본능적으로 에이비스라고 생각했다. 약혼자를 잃은 랄프의 막내 동생. 4명의 여자들 가운데 그녀만이 마음을 터놓을 상대라는 걸 돈은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조용한 시간을 갖기 위해 현관 앞에 잠시 서 있다가 갑자기 놀라 뒤돌아보았다. 바로 뒤에 랄프가 서 있었는데, 실내 불빛을 뒤로하고 있어서인지, 그 건장한 몸이 한층 크게 보였다.
돈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의 큰 키, 냉정한 눈빛, 오만한 태도에 압도된 탓에 자신이 작고 의지할 곳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리라.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돈은 기분이 좋다든가, 밤공기가 따뜻하고 좋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별도 참 예뻐요."
돈은 그렇게 덧붙이고, 갑자기 목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랄프는 어딘가 평소 때와는 달랐다. 돈은 불안해져서 침을 삼키고 나자, 문득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왜 랄프에게 신경을 쓰는 거지?
"지금이 제일 좋은 계절이오. 우리들에겐 가을이지. 영국과는 반대로, 1년이 다 지나갈 때쯤되면 굉장히 더워지지."
"12월, 1월이 여름이란 말이에요? 그럼 무척 덥겠군요."
돈이 말을 끝냈는데도 랄프는 대답하지 않았고, 움직일 기미도 없었다. 그가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불안해져서 돈은 현관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는 저도 아마 이곳 기후에 익숙해지겠죠."
"정말 여기 잇을 작정이오?"
"예, 랄프. 그건 이미 얘기했잖아요."
돈은 등 뒤에서 랄프가 크게 한숨을 내쉬는 걸 알 수 있었다.
"뭘 하려는 거요!"
"왜 항상 그걸 막는 거죠? 내가 여기 있어도 괜찮을 만한 구실을 생각해뒀잖아요."
돈은 뒤돌아서서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랄프는 적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잠시 동안은 속일 수 있지만, 오래 있게 되면 탄로날 거요."
돈은 어깨를 움츠렸을 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지만 실제로는 불안했다.
"실례하겠어요. 자겠어요." 돈은 작게 말하고, 랄프가 나온 불란서 창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었소." 돈이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랄프가 말했다.
"적어도 1주일 정도 돌아올 예정을 연기하고 친구분 댁에 계시기로 했다고 하셨소."
"일 주일이나요? 동생들도요?"
"그렇소." 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마 어머니는 열흘에서 2주일 후에나 오실거요."
"제방은 어떻게 되죠?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요."
"그것도 죽 생각해 봤는데, 어쩔 도리가 없소. 동생들에게 타인인 당신에게 방을 비워주라고 설득할 만한 명분이 없소. 당신도 알겠지만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오."
돈은 랄프의 오만한 시선에 도전하듯이 쏘아보며 그의 말투에 화가 치밀었다. 더 이상 상의할 여지가 없어. 완전히 일방적인 얘기잖아. 돈은 용기를 내어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허무함이 배어있었다.
"난, 방을 골라서 내일 옮기겠어요, 랄프."
"그럴 수......!" 랄프는 이를 악물며, 그녀를 분노에 찬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럴 수는 없소!"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지금 알겠어요? 랄프가 반론할 틈도 주지 않고, 돈은 집안으로 들어가는 층계를 올라갔다. 호흡을 가다듬고 불빛이 밝은 복도를 바라보았다. 전보다도 더 화가 치밀어왔다.
현재 쓰고 있는 작은 방을 빼고 단 한 번도 옆에 있는 침실을 본 적이 없엇다.
"적어도 볼 권리 정도는 있겠지."
방으로 돌아와 중얼거리면서 옷을 벗고, 살이 훤히 비쳐 보이는 얇은 잠옷을 입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첫 번째로 산 것으로 잠옷과 세트로 된 가운을 입었지만,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고 더 쌓일 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본때를 보여주겠어!
돈은 결심하고, 우선 랄프가 아직도 현관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창가로 갓다. 그는 분명히 아래 있었다. 그래서 돈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처음 들어간 방은 천장이 높고 넓어서 보기에도 쾌적했다. 가구는 싱글침대와 양복장이 두 개, 옷 서랍, 침대 양쪽에 사이드테이블 2개, 그 위에는 각각 스탠드가 놓여 있었다. 카펫 색은 차분한 로즈핑크색으로, 커튼과 똑같았다. 돈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실내를 둘러보고 문을 닫고 다른 방으로 갔다.
그 방은 첫 번째 방과 똑같은 크기로 좀 사치스런 분위기였다. 가구는 전부 흰색 목재로 카펫과 침대커버, 커튼은 연한 블루로 통일되어 있었다. 세 번째 방은 한눈에 봐도 랄프 어머니의 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돈은 그 옆이 드발레 부인이 돌봐주고 있는 여자, 에스터의 방이라고 생각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추측이 빗나간 걸 알았다.
그곳은 랄프의 방이었다. 수공예로 된 아름다운 가구, 큰 침대, 엷은 그린색의 카펫에 같은 색의 커튼, 창밖에는 멀리 산들이 보이고 전망이 좋았다.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돈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이끌리듯이 창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커튼을 열려고 하는 순간, 랄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타오르듯이 뜨거웠다.
"도대체 이 방에서 뭘 하고 있었소."
"저, 방을 보고 싶었어요."
그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랄프는 똑바로 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맘대로 남의 방에 들어가는 거요?"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거칠지 않았다. 그러나 안심하기 전에, 그의 눈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돈은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가운끝을 여몄지만 훤히 내비치는 잠옷과 가운으로는 아무래도 소용없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다. 랄프는 하나하나 그녀의 몸을 훑어보다가, 매력적인 가슴께에 시선이 멈췄다.
오늘 밤 랄프는 평소 때와 다르다. 돈은 정확치는 않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혐오감과는 달리, 그는 욕망이 생긴 걸까? 하인을 빼면 며칠간 두 사람은 공동재산인 이 집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왔다. 게다가 두 사람은 어찌됐든 부부였던 것이다.
또한 랄프는 정력이 넘치는 남자라는 게 분명했다.
"왜 이런 시간에 방을 보고 싶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어요. 또...... 여기가 당신 방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생각 못했다고?" 랄프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비웃는 듯한 웃음을 떠올렸다.
"벌써 며칠 동안 같은 지붕아래 있었는데, 내가 어디서 자는지 몰랐다는 거요?"
그 빈정대는 말투에 돈은 발끈했다.
"당신이 어디서 자는지,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몰랐다는데 그게 이상한 일인가요?"
"그렇다면 왜 여기에 있는 거요?"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는데, 오히려 돈은 더 불안했다.
"말했잖아요. 당신들의 방을 보고 싶다고 말이에요."
랄프가 천천히 다가왔다. 돈은 긴장으로 몸이 굳어졌다.
"이런 시간에 둘러봐야 할 정도로 급한 문제도 아니잖소? 게다가 그런 차림으로......" 그 말투는 완전히 빈정대고 있었다.
"자, 이번엔 어떤 변명을 하겠소? 싫은 태도를 하면서도 그런 차림은?"
돈은 말의 의미를 모르는 척 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랄프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렇다면 당신은 매우 둔하군." 돈이 아무말도 하지 않자, 랄프는 덧붙여 얘기했다.
"이 방문을 열었을 때 당신이 있는 걸 보고 나는 먼저 화가 났소. 그리고 다소의 놀라움도 있었소. 하지만 당신의 모습을 보고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소. 그래서 화는 사그러지고......"
"대신에 욕망을 느꼈나요?"
돈은 얼떨결에 말해버렸지만, 바로 뺨을 붉혓다.
"맞소." 랄프는 다시 돈의 몸에 시선을 돌렸다.
"정직하게 말하겠소, 돈. 내게 당신은 매우 매력 있는 존재요. 나의 아내라는 것도 다소 영향을 주고 있소."
"아뇨. 당신의 아내이기 때문에 나를 원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소." 랄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중요한 건 지금의 분위기요.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원하고 있소."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분명히 그렇다는 말을 듣고 나니, 돈은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멋대로 결정내리지 말아요." 돈은 자신의 목소리가 의외로 침착한 것에 놀랐다. 무릎은 와들와들 떨리고 당장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당신들의 방을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당신 방이라는 걸 알았다면 들어오지 않았을 거예요." 돈은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그 사이에 랄프가 막고 서 있는 것 같았다.
"실례하겠어요." 그러나 랄프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다가왔다. 돈은 놀라며 뒷걸음쳤지만, 바로 뒤는 창이었다. 게다가 킹사이즈 침대가 싫든 좋든 눈에 띄였다. 돈은 온몸을 떨며 벌어진 가운을 앞으로 꽉 여미며 랄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랄프는 즐거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자, 돈은 몸을 비틀어 저항했지만, 그의 가슴에 안겨버렸다.
랄프는 소리를 내며 웃고 놀리듯이 말했다.
"마치 누가 뭐래도 도망치고 싶다고 하겠소."
"진짜 이 방을 나가고 싶어요. 놔주세요! 날 덮칠 거에요?"
"덮친다고?" 랄프는 눈썹을 찌푸리며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들은 부부요. 당신이 분명히 그걸 생각나게 했단 말이오."
"그런 적 없어요!"
"그럼 어쩔 작정이었소?"
돈은 랄프의 얼굴을 째려보았다. 그는 놀리는 게 즐거운 것 같았다.
"난 내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 방은 싫다고 했지 않소. 자, 오늘 밤은 내방에서...... 내 침대에서 함께 보냅시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시오." 손을 뿌리치려는 돈을 더 세게 붙잡으며 그는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난 거짓말이나 변명을 장황하게 들어줄 정도로 너그럽지 않소! 당신은 안기고 싶다고 생각하고, 나는 안고 싶다고 생각하니 간단하지 않소."
갑자기 랄프는 돈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의 행동에 돈은 불안과 기대감이 뒤엉킨 이상한 흥분을 온몸에 느꼈다.
랄프는 손끝으로 돈의 얼굴에서부터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져갔다. 그 순간 돈은 전율을 느끼며, 불안은 사라지고 욕망이 꿈틀거렸다.
돈은 자신을 알 수 없엇다. 왜 그의 포옹에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을까? 여기서 마음을 바꿔 진짜 아내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결국 돈은 그의 아내로서 자신을 본 적이 없었고 여기 오기까지 편지 한 통 쓴 적도 없고, 또 여기 온 것도 기분전환을 위해서였다. 법적으로 인정된 아내라는 걸 그에게 인정시킬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떨어지세요. 당신은 이런 행동을 할 권리가 없어요......." 그가 포옹을 풀길 기다리며 돈은 애원하듯이 얘기했다. 랄프의 눈동자는 재미있는 것처럼 반짝거리고 입가에는 빈정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돈을 원했다. 그러나 그 욕망을 육체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돈은 생각했다. 두 사람은 농장의 공동소유자일 뿐 공통되는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돈은 랄프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는 분명히 '내게 당신은 매력적인 존재요.'라고 했다. 결국 호기심으로 이방에 들어와서 약점을 잡히게 된다면? 아니, 결코 말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욕망의 희생양이 되어 버릴 수 없어!
돈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랄프의 놀란 모습을 뒤로 하고 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움직임은 그가 빨랐고, 다시 그에게 안겨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거칠게 그녀를 포옹했다. 돈은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침대에 눕혀졌다.
"싫어요, 놔줘요! 난 이런 걸 원하지 않아요......."
"조용하시오. 나이를 생각하오. 당신은 어른이 아니오."
그 말에 화가 나서, 돈은 반박하려고 했지만 그의 팔에 전해오는 힘과 그녀의 몸에 느끼는 전율로 저항할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오히려 그의 입맞춤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이윽고 랄프는 몸을 떼고 돈이 입고 있는 가운을 천천히 부드럽게 벗기기 시작했다. 돈은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있었고 랄프는 잠옷 속에 비치는 아름다운 여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불빛으로 생기는 미묘한 조명이 한층 더 욕망을 부채질하는 것 같았다.
돈은 랄프의 눈동자에서 정욕의 불꽃이 빛나는 걸 보고, 목안이 마르고 가슴의 고동소리도 빨라졋다. 랄프늬 손이 잠옷 위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돈은 잠자코 있는데 뺨은 타오르듯이 뜨거웠다. 단순히 형식적으로 결혼한 상대 앞에, 태어날 때의 모습으로 있다는 사실이 온몸을 전율케 했다.
"정말 예쁘오. 내 아내가 이렇게 아름다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 처음 당신을 봤을 때는......"
랄프는 도중에서 말을 끊고 얼굴을 찡그리며 침대로 들어가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돈은 아무렇지 않은 듯 했지만, 속으로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히 랄프는 '별 볼일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랄프도 바로 침대로 들어왔다. 돈은 그의 애무에 몸을 맡기고 흥분했지만, 머릿속은 자신을 경멸하는 어두운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아, 랄프. 내일이면 분명히 후회하고 나를 경멸할 거예요."
그 말은 그렇게 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기도였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 일이 무척 신경 쓰였다. 그 이유는 자신도 잘 몰랐다.
"지금은 오늘밤 일만 생각합시다." 랄프는 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어느 사이엔가 돈도 모든 걸 잊고, 관능적인 환희에 빠져들고 있었다.
5
당연히 예상했었어야 되는 바이지만,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자신이 랄프의 침대에 있다는 걸 깨닫고, 돈은 당혹스러웟다. 두려운 맘으로 남편 쪽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평화로운 얼굴인가! 랄프는 얼굴을 옆으로 하고 자고 있었으며 그 브론즈색의 피부는 하얀 침대보 때문에 더 눈에 띄었다.
지난 밤 일이 돈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게 계속된 부드러운 애무, 그리고 최후의 행위에 이르렀을 때 돈은 관능의 파도에 떠밀려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환희 속으로 빠져들었다.
물론 사랑이야말로 최상의 기쁨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어젯밤 체험 같은 자극적인 기쁨이 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랄프에게는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었을 것이다. 돈을 기쁘게 하는 기술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결과 돈은 자신의 모든 것을 준 기분이 되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준 기분....... 사랑? 하룻밤 관계로 사랑이 생기는 것일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지금 이 기분은 뭘까? 혼동이 있지만 마음은 부풀었고, 이유 없이 인생이 장밋빛으로 보이고 행복으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역시 사랑이야. 의심할 여지도 없어. 돈은 형식적으로 결혼 했던 상대를 사랑해버린 것이었다.
랄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떳다.
"안녕하세요."
돈은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랄프는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보고 있는데, 돈은 얼굴을 붉히다가 나중에 창백해지기까지 했다.
"안녕, 잘 잣소?"
돈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혼란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나온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예, 푹 잤어요."
돈의 대답에도 랄프는 시선을 떼지 않고 응시했기 때문에 돈은 당황하여 시트를 어깨까지 끌어 올렸는데, 그는 그 모습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돈은 침대에서 나오고 싶었지만, 랄프의 시선이 신경 쓰여 꼼짝 못하고 있었다.
"지금 몇 시에요?"
"8시 반이에요."
랄프는 놀라워했다.
"이렇게 늦잠 자본 게 몇 년 만이오. 어젯밤은 최고의 수면제가 있었던 덕택인가 보오. " 살짝 돈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랄프는 침대에서 나와 의자에 걸쳐놓았던 가운을 걸쳤다. 돈은 그가 욕실로 가길 기다렸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욕실예서 샤워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방에 목욕탕이 붙어 있어서 편하겠지. 바꿀 방도 그런 방으로 해달래야겠다고 돈은 생각했다.
평소 때와 같이 아침식사를 하면서, 돈은 내심 불안해서 랄프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그런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랄프가 말을 걸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우리들은 자연스런 일을 했을 뿐이오."
"그럼, 날 경멸하지 않나요?"
"물론이오. 왜 경멸한단 말이오?"
돈은 랄프 쪽을 바라보았다. 실망스러움이 가슴속에 밀려왔다. 랄프는 경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애정을 품은 모습도 아니었다. 마치 어제 일은 어젯밤 일로 끝난 것처럼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과거의 일로 보였다. 분명히 랄프는 돈이 혹시 후회하는 일이라면 그건 자업자득이며 멋대로 이집에 와서 눌러앉아서 무었을 기대했겠느냐?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을 거라고 돈은 추측했다.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돈은 그를 사랑한다는 걸 부정하며 어젯밤, 랄프의 애무를 받으며 몸을 허락하고, 관능의 환희에 취해버렸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돈은 이를 악물며 필사적으로 참았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봐도 랄프는 신경 쓰지도 않을뿐더러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식사가 끝나자, 랄프는 새로이 감귤나무를 심기 위해 개간중인 밭으로 나가고 돈은 메어릴을 타고 멀리까지 나갔다. 여느 때처럼 샤이탄도 함께였다.
메어릴을 타고 달리면서 돈은 새삼스럽게 돈베야 농장의 광활함에 감탄했다. 이것이 반이 돈의 것이었다. 그걸 랄프에게 팔면 일생동안 놀며 살아도 남을 금액이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돈은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평생 이 농장에 머물고만 싶었다.
어리석은 꿈이야! 돈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아름다운 눈동자는 슬픔에 젖어 있었다. 갑자기 쟈크의 말이 생각났다. 에스터는 대단한 미인으로 랄프와 결혼하여 돈베야 롯지의 주인마님 자리를 노리고 있다던가, 하지만 꿈을 현실화시키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될거야. 이혼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로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1년 반 정도 걸릴 테니 적어도 3년은 기다려야 할 거야. 돈은 왠지 심술궂은 생각을 하며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걸어가고 있던 길이 끝났기 때문에 되돌아가려고 방향을 돌리다보니 강 옆쪽으로 울창한 숲속으로 이어지는 다른 길이 눈에 띄었다. 빽빽한 나무 가지에 비추는 했빛이 반짝거리며 어딘가 들어가 보고 싶은 분위기가 그 길에는 있었다. 왠지 멋진 곳을 발견할 것 같았다.
돈은 이상한 흥분을 느끼며 그길로 천천히 메어릴을 몰았다. 언제부터인지 길은 풀로 덮여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돈은 신경 쓰지 않고 나무 사이를 달려 나갔다. 머리 위로는 높게 솟은 나무가 가지를 뻗쳐서 녹색 천장을 만들고 있었다.
갑자기 돈의 귀에 물소리가 들려왔다. 바위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소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자, 숲이 열리고 물이 떨어지는 연못이 보였다. 돈은 탄성을 질렀다. 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수면, 그 위에 연꽃이 떠 있었고,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닮은 나무가 연못에 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선명한 색깔의 나비도 있었고, 빨강, 파랑, 초록 등 색색깔의 난꽃이 피어있었다.
경쾌한 폭포소리를 빼면 정말 고요했다. 풀벌레 울음소리조차 없었다. 공기는 서늘해서 기분 좋았다. 돈은 메어릴을 나무에 묶어놓고 연못 쪽으로 걸어갔다. 손을 물속에 담가보았다. 그 감촉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동화의 나라 같은 분위기였다. 이 곳에 들어온 사람은 나뿐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돈은 그곳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돈은 연못가에 앉아 그곳의 경치를 만끽하고 있었다. 깊은 숲속에 열려진 공간, 현실세계에서 몇 천 킬로 떨어져 있는 장소 같았다. 돈은 이 장소가 지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녀의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랄프의 곁을 떠나 이곳에서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을 아는건 나뿐일까? 그런 생각이 다시 떠올랐지만, 그 순간 선인장 가시에 걸려있는 흰 천이 눈에 띄었다. 손수건이었다. 돈은 그 곁에 가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구석에'A'라는 자수가 놓여 있었다. 에이비스? 그래 분명히 에이비스일거야. 여기는 그녀의 비밀 장소였구나.
'에이비스는 지금도 혼자만 있으면 울고 있어요.'라고 레쓰가 말했지 않은가. 분명히 여기를 피난처로 만들어 놓고 와서 울다가 가곤 했을 것이다. 그리 최근에 이곳에 왔다가 손수건을 잊고 갔는데 그게 바람에 날려 선인장 가시에 걸렸던 게 틀림없었다.
손수건을 보고 있자니, 1년 전에 죽은 약혼자를 잊지 못하고 비탄에 젖어 있는 여자의 슬픈 눈물이 베어나는 것 같았다.
돈은 손수건을 잘 접어 주머니에 넣고 연못가에 앉았다. 가슴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남편, 울며 살아가고 있는 그의 여동생. 쟈크가 독재자라고 평했던 그의 어머니, 랄프의 아내가 될 날을 꿈꾸고 있는 에스터,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온 라일라, 랄프를 둘러싼 여자들은 에이비스를 빼고 모두 성격이 강한 것 같았다.
그 집에서 에이비스가 마음을 연 것은 랄프 한 사람뿐인 것 같은데, 어떤 식으로 마음이 통했을까? 랄프도 맘 놓고 얘기할 만한 상대로는 결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돈은 침대 속에서의 그를 잊지 않았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넓게 상대를 생각해 주는 배려, 어젯밤 그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오만하고 역겹게 보였던 것은 아마 조차 잊고 있었던 아내가 갑자기 모습을 보인 탓일 것이다.
돈은 랄프의 적대적인 태도도 무조건 탓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지금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고 조금 더 부드럽게 대해주길 바랐다. 랄프는 자신이 어느 정도 혜택 받은 운명인가, 그녀의 경우와 비교해봐야 된다고 생각했다.
돈베야 종장을 상속받지 않아도 랄프는 유복하게 생활할 수 있고, 그래서 돈에 대해서 훨씬 우위의 입장에 있었다. 한편 돈은 시기가 되면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지만, 근래 몇 년간 올케의 가게에서 계속 일하며 생활했다. 결국 올케가 죽고 집조차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런 경우, 형식적으로 결혼한 상대라도 남편을 의지하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돈은 한숨을 쉬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아까와는 달리 장소가 변해버린 듯했다. 역시 이곳은 에이비스의 비밀 장소였다. 흔적을 남기고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 마음이 쓰였다. 분명히 그녀는 여기 앉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혼자서 약혼자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결국 돈은 일어나서 메어릴을 어루만지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샤이탄도 뒤를 쫒아 얌전하게 걷기 시작했다.
돈의 머리에 쟈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에이비스를 연모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매우 아름답다고 말할 때, 쟈크의 눈동자는 타오르듯이 빛나고 있었다. 돈은 쟈크에 대한 랄프의 말을 기억해냈다. 색한...... 분명히, 쟈크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겉모습뿐이지 않을까? 재미있고 이상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진지한 성격을 감추려 하는 행동으로 과거에 슬픈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저녁 식사에서 돈이 다시 방에 대해 얘기를 꺼내자, 랄프는 즉각 얼굴을 찡그리며 화난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돈은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또다시 말다툼을 벌이게 되지 않을까 신경 쓰면서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랐다.
"그건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소. 당사자 몰래 당신에게 방을 건네줄 수는 없잖소."
돈이 잠자코 있자, 랄프는 뜻밖의 일을 물었다.
"어느 방으로 바꿀지 생각해뒀소?"
순간 돈은 말이 막혓다.
"그건 저...... 당신이 그 방을 쓰는 건 당연해요. 나 두 번째로 좋은 방을 쓸 권리가 있지만, 그곳은 어머니께서 쓰고 계시니 달라고 할 수 없고, 에이비스의 방을 쓰는 것도 싫고......"
랄프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왜 그렇소?"
"에이비스의 방을 달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럼 남은 건 라일라와 에스터의 방이오."
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라일라의 방도 내키지 않아요."
랄프는 돈을 예리하게 쏘아보았다.
"결국 에스터의 방이 좋다는 거요?"
"하지만...... 다른 방이 없잖아요?"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쓰고 있는 방에 에스터를 옮기란 말이겠군?"
돈은 화가 나는 걸 간신히 참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요, 랄프. 내게는 넓은 방을 쓸 권리가 있죠. 그리고 난, 목욕탕이 붙은 방이 좋아요. 에스터 방에는 그게 있어요. 잊으신 것 같은데, 난 당신 아내이고 다른 누구보다도 여기에 있을 권리가 있어요."
돈은, 랄프에게 어젯밤의 일을, 특히 그가 침대에서 보여준 그 자상함을 기억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의 아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랄프는 표정이 굳은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걸까? 랄프도 이 요구의 정당성을 알고 있을 텐데, 에스터를 설득하는 게 힘들어서일까?
'안 됐지만, 당신 방은 돈이 쓸테니, 당신은 다른 방으로 옮겨야겠소.' 분명히 그는 에스터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게 싫어서 마음을 못 정하는 걸 거야.
랄프의 난처한 입장을 돈도 이해했지만, 어쨌든 식탁의 긴장감은 높아져만 갔다. 그러나 그때 키마니가 다음 요리를 가져와서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고 돈은 다시 말을 꺼냈다.
"걱정 말아요, 랄프. 제가 이 방에서 그냥 지내겠어요.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랄프는 놀란 듯했다. 그리고 동시에 안심하는 듯했다.
"정말이오?"
"예, 지금으로서는요."
즉각 랄프의 표정이 밝아지고, 입가엔 미소마저 떠올랐다. 돈은 기뻤다 그러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 걸까. 이 마음을 그가 알아준다면...... 그러나 알려서는 안되었다.
"그 방에 뭐 필요한 건 없소?" 키마니가 나가자마자 랄프가 물었다.
"예, 카펫을 깔면 방이 좀 나아질 것 같아요. 그리고 샤워실이 있으면......"
"그 방 옆에 또 하나의 창고로 쓰고 있는 곳이 있소. 그곳을 욕실로 개조하면 되오." 돈은 눈을 반짝였다.
"잘됐군요."
어색하고 섭섭했던 감정은 싹 사라지고 우선 식사도 즐거웠다. 식사 후에는 두 사람이 현관 앞으로 나가 나란히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빛이 쏟아지는 곳에서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어디선가 멀리서 원주민이 두들기는 북소리가 들여왔다.
돈은 어둠속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며 랄프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돈을 훑어보면서 마지막으로 볼록 솟아나온 가슴께에 시선을 멈추었다. 돈은 그의 눈동자가 빛나고 뺨이 희미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손을 보니, 꽉 쥔 손가락을 천천히 펴서 하얀 린넨 쟈켓에 땀이 난 손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랄프가 말했다.
"오늘밤도 내 방에 오겠소?"
돈은 혼란스러웠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입밖에 낼수가 없어서 단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랄프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재촉했다.
"아오? 우리는 부부란 말이오."
돈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눈을 들어 그를 보면, 분명히 희롱하는 빛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랄프에겐 배려심도 없고,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능력도 없는 걸까?
"며칠이면 가족이 돌아오는데 어떡할 거예요?"
"어떡하다니 뭘?"
"모두 돌아와 계시면 우리들은 함께 잘 수 없어요."
"왜?"
돈은 무심코 눈을 들었다.
"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내 방으로 오면 되지 않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돈은 무슨 말인지 알고 싶었다.
"당신이 여기 머물러서 결혼사실을 퍼뜨리고 있는 동안은, 우리들이 부부로서 지내도 좋다는 거요."
돈은 확실히 거절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주저하고 말았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를 사랑하고 그를 원하고 그와 살을 맞대고 싶어서였다. 꼭 껴안고 누워서 그의 냄새를 맡고, 그를 느끼며 그의 부드러운 애무를 받고 싶어서였다. 너무나 자연스런 바람이지 않을까.
돈은 한숨을 내쉬었다. 랄프에게 있어서 그녀는 손쉬운 존재일지 몰라도 돈에게 있어서 그는 남편일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로서 둘도 없는 남자였다.
돈은 "좋아요." 하고 대답하고 다시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은 함께 일어섰다.
30여 분간 둘은 별빛이 비치는 정원을 산책했다. 어느 쪽도 말하지 않고 손을 꼭 잡은 채 걸어 다녔다.
돈은 일방 방으로 돌아가서 잠옷과 가운을 들고 행복한 발걸음으로 남편의 방으로 향했다.
6
대지는 천천히 눈뜨기 시작했다. 멀리서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야생동물의 울음소리도 들려오고, 돈은 랄프의 방 베란다에 서 있었다. 일찍 잠이 깨서 20분 이상 그곳에 그러고 서 있었다. 방 쪽으로 돌아보니 랄프가 팔을 괴고 침대 위에 일어나 있었다.
"일찍 일어났군."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고, 돈도 웃으며 대답했다.
"예, 원래 일찍 일어나요. 습관이에요."
"영국에 있었을 때도?"
"예, 잠꾸러기는 아니에요."
돈은 랄프가 뭐라고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그는 잠자코 바라볼 뿐이었다. 돈은 무심코 가운 앞을 잘 여몄으나, 그래도 비쳐 보이는 쉬폰천은 몸의 곡선을 감춰주지 못했다.
"오늘 예정은 뭐요?"
돈은 랄프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건 처음으로, 비로소 랄프는 돈의 행동에 관심을 나타낸 것이었다.
"말을 타고 나갔다가, 오후에는 마을에 갈 작정이에요."
"지루하지 않소?"
"물론, 지루할리가 없죠. 이곳이 좋아요."
랄프는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수는 없소. 당신도 잘 알고 있잖소?"
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랄프가 낭패스러워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랄프는 돈에게 손을 내밀어 곁에 오라고 했다. 아니, 명령하는 건지도 몰랐다. 돈은 잠깐 주저했지만, 결국 내키는 대로 가운을 벗고 그의 곁에 누웠다. 랄프는 굵은 팔로 돈을 껴안고, 입술과 뺨, 그리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손은 그녀의 매끄러운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돈은 바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에 짜릿한 전율이 퍼져가고 랄프의 능숙한 애무가 돈의 욕망을 부추기며 관능의 늪으로 이끌어갔다.
랄프의 팔이 다시 돈을 꽉 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은 밀착되고 돈은 말할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아, 랄프...... 난......"
그 순간,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자, 돈은 작게 비명을 질럿다. 욕망의 불꽃이 하얀 빛을 내며 전신을 태우듯이 타올랐다. 돈은 다시 희열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바로, 랄프의 강인하고 관능적인 입술로 입이 막아졌다. 돈은 행복에 겨워 랄프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몸을 맡겼다.
"행복하오?"
랄프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 없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울림 같은 게 있었다.
그건 사랑의 표현일까? 아니면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들리는 걸까? 돈은 랄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매우 행복해요. 랄프......당신은요?"
"나도 그렇소."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아까 같은 울림은 없었다. 랄프는 돈의 가슴위에 있던 손을 떼며 말했다.
"자, 일어날 시간이오. 일이 있소."
오후에, 돈은 마을에 나가서 다시 우연하게 쟈크를 만났다.
"여어, 또 만났군요. 오후의 티타임을 갖는 거 어때요?"
"예, 좋아요."
돈은 자크를 만나서 기뻤다. 특히 에이비스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마 그 화제를 어떻게 부드럽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은 작은 카페에 들어가 나무그늘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쟈크가 물어온 것은 그 집 여자들에 대해서였다.
"돈베야 롯지 여자들은 언제 돌아옵니까?"
"며칠 안에요. 전 에이비스를 만나는 게 기뻐요."
돈은 이 기회를 이용하려고 했다.
돈은 쟈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이 굳어지는 걸 눈치챘다.
"왜, 왜, 에이비스에게 그렇소?"
"그 집 여자들 중에 마음에 맞는 건 그녀뿐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에이비스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소."
"그런 비극이 있어서요?"
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때문이지. 1년이나 더 된 일인데."
"1년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에요, 쟈크."
"그런가?"
"여자가 사랑하던 남자를 잊는 데는 시간이 걸려요. 1년으로는 무리에요." 쟈크는 입술을 깨물었고, 그걸 보고 돈은 조용히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에이비스도 언젠가는 일어설 거예요. 지금 그녀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떤 마음의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는 거예요. 슬픔은 가슴에 남지만 슬퍼하고 있는 사람이 그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분명히 극복할 수 있어요."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에이비스에 대한 쟈크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위로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에이비스는 쟈카랜더 클럽의 댄스파티에 간 적이 있어요?"
쟈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건 무의식의 동작 같았다.
"가끔, 모습을 보이긴 해도 절대로 춤은 추지 않소. 나는 파티때 그녀를 발견하면 항상 곁에 있으려고 하죠. 에이비스도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지만, 내가 기뻐할 말도 걸어오지 않고, 그런 표정도 보이지 않소." 그 목소리는 낮고 괴로운 듯이 들렸다.
"댄스파티 외에도 그녀를 만난 적이 있어요?"
"마을에서 몇 번인가 있었소. 차를 마신적도 있고 거절당한 적도 있소. 그때마다 그녀의 기분에 따라서요."
"쟈크...... 에이비스를 사랑하고 있어요?" 돈은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싫지는 않소."
"그럼 내 추측이 밎았네요?"
"왜 이렇게 괴로운지 나 자신도 모르겠소." 쟈크의 목소리는 또다시 괴로운 듯했다.
"에이비스가 슬픔에 잠겨 있으면, 나는 그녀를 도와줄 수 없기 때문에 한숨만 나오게 돼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이젠 지겹소."
"매우 간단하게 포기하는군요!" 돈은 아직 만나본 일도 없는 그녀를 위해 대들었다.
"그녀가 중요한 사람이라면, 기다릴 가치가 있어요."
쟈크는 푸른 눈동자를 반빡거리며 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인즉슨 시간문제라는 거요?"
"예, 젊은 여자가 언제까지나 슬픔에 젖어 살 리가 없어요. 하지만 앞으로 1년 정도는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아요."
"그렇게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도 즐거울 수 있어요."
"나는 그 정도로 참을성이 많지 않소."
테이블 너머로 다시 돈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좋아질 거요, 돈. 그런 기분이 드오."
돈은 살짝 미소 지었다.
"참아주세요. 에이비스에 대한 마음이 당신의 진심이란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과 즐겁게 지내고 싶소."
"내쪽은 당신과 친구로 지내는데 만족해요. 지금 말은 취소하는 게 좋아요."
"누군가 있는 거요?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소?"
"영국에는 없어요."
그렇게 대답하고 돈은 폴 오스틴에 대해 잊어버린 것을 깨달으며 아연해졌다. 한때는 깊은 사이가 되는 것도 꿈꾸고 있었는데...... 결국, 폴에 대한 생각은 현실도피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여자들은 모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랄프 드발레에게 쉽게 빠지게 되오."
"에이비스에 대해서는......" 돈은 당황해서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왜 에이비스를 댄스파티에 초대하지 않나요?"
"와주지 않을 거요."
쟈크는 단언했지만, 돈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초대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결국 응하지 않을 거요. 알 수 있소." 쟈크는 스푼을 가지고 놀다가 접시 위에 놓으며 말했다.
"매주 토요일, 클럽에서 나와 데이트하지 않겠소?"
"매주는 안돼요. 하지만 이번 토요일은 괜찮을지......"
돈이 확실하게 말하지 않자, 쟈크는 얼른 물었다.
"확실하게 약속할 수 없겠소? 뭔가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소?"
돈은 정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랄프는 당신을 바람둥이라고 하던데요."
쟈크는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그 사람이 뭔데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지 모르겠소! 당신의 주인은 당신 자신 아니오! 그런데 그 사람은 당신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그러다니......"
"나는 그의 손님이에요. 그가 다소의 책임을 느끼는 건 당연해요." 돈은 당황해서 쟈크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린애가 아니라고 그에게 말해주시오. 내가 보기엔 그가 너무 멋대로이고 건방지오! 게다가 그가 나에 대해 한 말을 그대로 그에게 해주고 싶소!"
"부탁이니, 나 때문에 랄프와 싸우지 말아요." 돈은 말이 불쑥 튀어나온 걸 후회했다.
"클럽 댄스파티에도 갈 테니까 걱정 말아요."
쟈크는 그 말을 듣고 만족스러워하며, 오후의 티타임을 즐겼다. 그러나 쟈크가 묘한 눈빛으로 돈을 바라봤을 때부터 다시 불안해졌다.
"만일 에이비스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면......"
그 뒷말은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돈은 얼굴이 어두워졌고, 이어 똑바로 말했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는 없어요."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지 모르오."
"사랑이 없다면 질투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아요."
"그녀가 다른 남자들에게는 얼굴도 돌리지 않지만, 네게는 그래도 관심을 보여주고 있소."
"어느 정도의 관심인가요?"
"큰 관심이라고 할 수는 없소." 쟈크는 마지못해 그렇게 말하고,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완전히 무관심하다고 할 수도 없죠?"
"음," 쟈크는 인정했지만 그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낙천적으로 생각해도 되겠군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쟈크. 너무일을 서두르면 잘될 것도 안 되는 경우가 있어요."
"맞소. 당신이 말한대로요." 의외로 쟈크는 인정했다.
"당신의 주의에 따르겠소. 돈."
"그러면 에이비스에게 질투심을 유발시키기 위해 나를 이용하진 마세요."
쟈크는 얼굴을 붉히며 진심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러나 돈의 예리한 눈초리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쟈크와 클럽의 레스토랑 앞에서 헤어져, 차로 돌아왔다. 돈베야 롯지 여자들이 돌아올 날을 기다릴 마음은 없었지만, 에이비스만은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클럽에서 댄스파티가 있소."
랄프가 얘기했다. 돈은 가능하다면 쟈크와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숨기고 싶었지만, 랄프가 자신도 그 파티에 가기 때문에 혹시 원한다면 차로 태워다 주겠다고 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수 없이 쟈크와 데이트 약속이 되어 있다고 고백하자, 랄프는 즉각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소. 마을에 소문이 날 만한 짓은 그만두구려."
"어째서 소문이 나면 안 되나요? 쟈크는 단순한 친구에요. 꺼림칙한 일은 없어요."
생각과는 달리 발끈해서 그렇게 말했지만, 돈은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제일 바라는 것은 남편인 랄프와 마음을 맞추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럴지 몰라도, 이곳에 온지 5개월도 되지 않은 그에게는 이런저런 나쁜 소문들이 떠돌고 있소."
돈은 랄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쟈크가 에이비스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라프는 알고 있을까? 그러나 돈은 그 일에 대해서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쟈크는 겉모습과는 다른 사람이에요."
돈은 그렇게만 말했다. 랄프는 아직도 표정이 굳어 있었지만, 더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댄스파티를 위해 돈은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롱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소매에 레이스가 달린 딱 맞는 원피스로 아래는 넓은 플레어스커트로 되어 있고, 짧은 퍼프슬립에 선을 두고 하얀 리본이 핑크빛 드레스에 잘 어울렸다.
방을 나와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 돈을 랄프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호화로운 홀에 서 있는 그는 열대지방에 어울리는 크림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윤기나는 머리, 아랍인보다 덜 검은 건강한 피부, 잘생긴 얼굴은 기품이 있고 특이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돈은 손에 땀이 나고 뺨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긴장이 되고 심장 고동소리가 빨라졌다. 무슨 일일까! 겉으로라도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할 수 없을까? 신경 쓰지 않으면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눈치 빠른 랄프 드발레가 알아챌 것 같았다.
"준비됐소?"
"예...... 저, 코트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필요하지 않겠죠?"
"음, 클럽을 나오면 바로 차를 탈 테니 필요 없을 거요."
라프는 다시 돈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에 머문 것을 알아챈 돈은 다시 얼굴이 뜨거워졋다. 그 순간, 랄프가 시선을 돌리며 살짝 웃었다.
"부끄러운 거요?" 눈썹을 찡긋하며 놀리듯이 물었다.
"그렇지 않은 건가."
그는 다시 친밀한 관계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돈은 당황했지만 모르는 척 했다.
"무슨 소리에요?"
"레쓰가 빵을 만들고 있소. 자, 갑시다."
그렇게 말하고 랄프는 뜻밖에 손을 내밀었다.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손을 잡고 나란히 현관 앞에 세워져 있는 그의 스포츠카 쪽으로 걸어갔다.
차를 타고 몇 번이나 다녔던 길을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그 길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중앙에는 초승달도 떠 있었다.
돈은 왠지 안절부절 하며, 쿠션 좋은 시트에 몸을 움직이며 앉는 위치를 바꿨다. 곁눈질로 랄프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누구나 그의 결혼 상대라는 에스터에 대해 생각할까? 당사자인 에스터의 마음은 어떨까? 랄프가 이미 결혼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알게 되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런 생각까지 하자 돈은 마음속에 묘한 기쁨이 떠올랐다. 랄프는 내 남편이에요! 그러나 다음 순간 돈은 자신의 한심한 생각에 얼굴을 찡그렸다.
갑자기, 랄프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와서 정신을 차렸다.
"뭘 생각하오, 돈?"
"당신이 뭘 생각하나 하고 생각했어요." 돈은 무심코 그렇게 대답했다.
랄프는 소리 내며 웃었다.
"서로 상대가 생각하고 있는 걸 알고 싶어 하다니, 이상한 한 쌍이오."
차는 먼지 나는 길을 달리고, 광대한 공간에 무수히 있는 이국의 낯선 풍경이 헤드라이트 불빛 속으로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당신에 대해 얘기 좀 해주시오. 나는 너무 모르오."
"나도 당신에 대해 거의 몰라요."
돈이 되받아 말하자, 랄프는 또다시 소리내며 웃었다.
"그렇다면, 각각 자신에 대해 얘기합시다. 먼저 당신부터요."
"왜 당신부터 하지 않죠?"
돈은 왜 이런 태도로 말하는지 자신도 몰랐다.
"알겠소. 내가 먼저 얘기하지."
뜻밖에도 랄프는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백부로부터 농장을 이어받아 경영했던 것이다.
"돈베야보다는 훨씬 작지만 담배를 재배해서 괜찮은 농장이었소.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도 경지를 넓혔소. 하지만 말했듯이 돈베야와 비교되지 않는 작은 거였소."
"멋진 곳일 거 같아요."
"응, 좋은 곳이오."
"하지만 지금은 매니저에게 맡기고 있죠?"
"맞소." 랄프는 전방에서 시선을 잠시 떼고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거기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오?"
"무리라는 걸 알아요. 당신 집에는 매니저가 살고 있겠죠? 가족은 있나요?"
"부인과 애들이 셋이오."
"아버지에 대해 좀더 얘기해줘요."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피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돌아가셨을 때 몇 살이셨어요?"
"상당히 나이 드셨소. 70세가 넘으셨으니까. 어머니와는 스물두 살이나 나이차가 나오."
"그렇게나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몸이 많이 약해지셨지만, 혼자서 농장 일을 하셨소."
"당신은 없었어요?"
"집을 떠나 대학에 다녔소." 랄프는 다시 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자, 이제 내 얘기는 끝났소."
돈은 그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전 당신 가족에 대해 조금밖에 몰라요. 또...... 저 집에 함께 살고 있는 여자에 대해서도......"
"쟈크에게 들었소?"
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쟈크에게 들었어요. 그는 에이비스가 약혼자를 잃은 얘기를 해줬어요. 하지만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아서 당신에게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당신 가족얘기를 들어도 소용없죠. 우리들의 결혼은 속임수 같은 거니까요."
"속임수......" 랄프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임신할 가능성도 있소." 그는 눈썹을 찌푸리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은 생각해 본 적 있소?"
"솔직히 없어요."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혹시 그렇게 된다면 번거롭지 않겠소?"
"예 분명히요."
임신된 경우를 생각하자, 돈은 몸이 떨려왔다. 그게 현실이 되면 랄프도 막무가내로 영국으로 쫒아내지는 않을 것이다. 또...... 돌아가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어린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될대로 되겠지.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둡시다."
랄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잠자코 차를 달렸다. 돈도 아무말 하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목적지인 클럽에 도착했다. 돈은 차에서 내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아까 말한 건, 마치...... 어린애가 생겨도 그다지 난처하지 않다는 것 같은데,....."
랄프는 차문을 닫고 불안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돈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번거로워질 거요." 랄프는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해서 말했는데, 그 목소리는 냉담해서 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쟈크는 웃음을 띠우며 돈 곁으로 걸어왔다. 랄프는 즉각 표정이 굳어졌지만, 저녁식사 전에 한잔 하려고 바 쪽으로 돈을 에스코트해도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을에 나왔을 때, 돈은 쟈크가 아는 몇몇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의 형과는 그날 밤 처음으로 인사했다.
쟈크의 형 케네스는 키가 크고 성실해 보이는 인상으로 머리는 갈색이고 눈동자는 쟈크와 똑같은 블루였다.
소개를 받으면서, 케네스는 미소를 띄우며 먼저 돈의 날씬한 몸을 훑어보고 눈을 들어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에 대해서는 쟈크에게 들었소. 몇 개월 이곳에 체재할 거라고 하던데?"
"예." 돈은 랄프가 자신을 쳐다본다는 걸 눈치 챘다. 기분 탓인지 험악한 시선처럼 느껴졌다.
"꼭 우리 집에도 식사하러 와 주십시오."
"예, 하지만......"
"머물고 있는 집주인에게 어떤지 물어보지 않으면, 이분은 대답할 수가 없어서......"
"돈이 쟈크에게 섭섭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특별히 대답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한번 물어보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요."
"그렇겠군."
그때, 젊은 커플이 곁에 왔기 때문에 그 얘기는 끝나게 되었다.
"쟈크, 이쪽 분, 소개해주지 않을래요?"
"아, 쉬라, 돈이요. 랄프 드발레씨댁 손님이오."
"만나서 반가워요, 돈." 쉬라는 자신의 남편과 돈이 악수 나누길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 어때요?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예, 아주 맘에 들어요." 돈은 막 소개받은 갸냘픈 여자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25세 정도로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갈색이었다.
"여기서 농장을 하고 계시나요?"
"예, 랄프 것과 비교하면 하찮은 농장이죠." 쉬라의 남편 렌이 대신 대답했다.
"하지만 일은 힘들어도 즐겁게 하고 있어요."
"렌쪽도 우리와 똑같은 혼합농가로, 랄프네와 같은 큰 농장은 그렇지 않소. 이곳 농장과 돈베야 농장은 좀 틀리오."
돈은 랄프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 카운터 옆에서 남자들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농장 일에 대해선, 랄프 드발레는 마법을 쓰는 것 같소. 분명히 예지능력이 있어서 어떤 재난이 있어도 준비를 해놓으니 말이오." 렌이 말했다.
"재난이요?" 돈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물었다.
"항상 이런저런 나쁜 일이 일어나지." 쟈크가 대답했다.
"예를 들면 태풍이 오면 집도, 밭도 산산이 부서지게 되오. 2, 3개월 전에 집과 집유장 지붕이 다 날라 가버렸소."
그리고 한참동안 네 사람은 계속해서 얘기했다. 이윽고 디너준비가 다 되어서 테이블에 앉아, 춤도 추면서 저녁 식사를 즐겼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랄프가 두 사람의 테이블로 와서 돈에게 춤을 청했다. 여느 때 같은 오만한 태도, 게다가 춤을 추면서도 표정은 딱딱하고 말도 냉정했다.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돈은 마음먹고 물어보았다.
"랄프, 무슨 일 있어요?"
랄프는 냉담한 눈빛으로 돈을 바라보았다.
"별로."
"하지만 뭔가 기분 나쁜 것 같아요."
"쟈크 따위와의 데이트, 허락하지 않았소."
돈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질투하고 있는 듯한 말투가 아닌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돈은 겨우 그렇게만 얘기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당신은 내 아내요."
"하지만 그건 당신이 아무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잖아요."
"그 별 볼일 없는 색한과 더 이상 만나는 건 금지하겠소!"
"금지해요?" 화가 끓어올라 돈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요."
랄프는 춤을 멈추고, 돈의 양팔을 잡은 채, 똑바로 그 눈을 쏘아보았다. 돈은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역시 지고 말았다. 그 정도로 랄프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좋소. 나는 당신의 남편이오." 한참 후에 랄프가 말했다.
"그러니 남편으로서 쟈크와 만나는 걸 금지할 권리가 있소."
돈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랄프의 무례한 질투 때문일 거라고 자신을 위로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분명히 랄프는 자신의 이기주의를 위해 이처럼 오만하고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걸 거야. 그는 쟈크를 싫어하기 때문에 교재를 막는 거야.
음악이 끝나도 랄프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돈은 빨리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알았소! 이제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마시오!"
랄프는 냉엄한 목소리로 말하고 돈을 테이블까지 안내하고, 쉬라에게 인사한 다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동안에 파티도 끝나고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돈은 쟈크에게서 저녁식사 초대를 받고 난처해 있었다.
"다음 수요일, 우리 집에 오지 않겠소? 한턱 내겠소."
"안될 것 같아요."
"랄프 때문이군. 그가 이제 날 만나지 말라고 했겠지."
"눈치 빠르군요."
"당신들이 춤추고 있는 모습을 봣을 때 알았지. 그가 당신에게 뭐라고 했지 않소. 또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군." 쟈크는 말을 끊고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에이비스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나?"
돈은 쟈크의 얼굴을 재빨리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현관홀에 서 있었고,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그가 당신과의 만남을 금지시킨 것은 그 때문이란 거예요?"
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럴 수 있어요? 어떻게 그가 알았죠? 당신은 몇 번씩 에이비스를 만난 적도 없잖아요?"
"음." 쟈크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천천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에이비스가 때때로 들르는 비밀 장소가 있소. 분명히 그곳에서 약혼자를 생각했을 것이오..... 나는 가끔 연못 근처까지 차를 타고 가서 에이비스의 모습을 보곤 했소. 그녀가 끌 듯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는데, 무심코 나는 차를 세우고 그녀를 뒤따라가기 시작했소."
돈이 놀라움과 비난이 섞인 눈빛으로 그를 보자, 당황해서 설명했다.
"그때는 아직 그녀가 어디로 갈 작정인지 몰랐었소. 뒤를 밟는 것은 그녀 모습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었지만, 그때는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오."
쟈크는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곳에는 아카시아와 대나무가 무성하게 있어서 들키지 않고 뒤를 밟을 수 있었소. 전날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연못물이 불어 있어서 나의 불안함은 더해갔소. 하지만 에이비스가 가는 곳은 녹색의 낙원 같은 곳이었소. 돈, 당신도 보면 놀랄 거요. 바위 위에서 조그만 폭포가 떨어져 내리고, 그곳은 수련 연못으로 버드나무가 죽 늘어서서 수면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소. 난꽃도 피어 있었소."
돈은 자신도 우연찮게 가본 그곳을 에이비스의 비밀장소로 묘사하는 쟈크의 말이 인상 깊었다.
"에이비스는 연못가에서 멈춰서 있었소. 그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차서, 나는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다 나왔소......"
"당신이 눈물을!" 얼떨결에 돈의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미안해요."
"괜찮소." 쟈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플레이보이란 말을 자주 들었소. 여자에게 가볍게 말을 걸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보이나보오. 나 스스로도 반성하고 있소. 하지만 에이비스가 애인이 되어 준다면 반드시 나아질 거요. 믿어주시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평생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에이비스 한 사람뿐이오."
놀랍게도 쟈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고, 그의 진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말했지만, 반짝이는 연못가에 서 있던 에이비스의 얼굴은 정말 슬퍼 보였소. 나는 필사적으로 나 자신을 억누르며 나무 뒤에 숨어 있었소. 가능하다면 뛰어가서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나빠진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었소."
"맞아요, 쟈크." 돈은 진심으로 그에게 얘기하며 쟈크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
"그게 당신의 좋은 점이에요. 분명히 언젠가는 에이비스도 당신을 알아줄 거예요. 그리고......"
갑자기 돈은 불쾌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흑갈색의 눈동자를 눈치 채고, 쟈크를 잡고 있던 손을 얼른 떼었다.
"왜 그러오?" 돈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쟈크가 물었다.
돈은 고개를 저었다. 랄프는 아직도 그녀를 보고 있었는데, 그는 아는 사람과 인사를 하고 돈을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저, 이만 실례하겠어요."
"하지만, 아까 내가 한 제안에 대한 대답은? 이번 수요일에 우리 집에 와 주겠소?"
"다음 기회에 하죠. 하지만 화요일 오후, 마을에 나올 거예요. 그때 차라도 같이 할래요?"
"알겠소. 그렇게 합시다."
"에이비스에 대해 더 듣고 싶어요. " 돈은 미소 지었다.
"화요일에 또 얘기해요."
"에이비스는 며칠 안에 돌아옵니까?"
"예, 그럴 거예요." 돈은 랄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녕히 가세요, 쟈크."
"잘까요, 돈." 쟈크는 돈이 보고 있는 쪽을 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화요일에 봅시다."
7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긴장된 분위기로, 랄프는 핸들을 잡고 앞만 주시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이 먼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왜 그래요, 랄프?"
"알 것 아니오. 당신은 그 정도로 둔하지 않소." 딱딱한 말투로 그는 대답했다.
" 당신은 쟈크를 오해하고 있어요."
"그럼 이곳 사람들 모두가 오해하고 있는 거요?"
"큰어머니가 자주 말씀하셨는데, 좁은 마을에서는 있는 일, 없는 일, 모두가 소문이 된다는 거예요. 쟈크도 처음에 경솔한 행동을 한 것 같지만, 근본은 좋은 사람이에요. 사람 마음을 끄는 힘이 있어요."
바로 랄프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당신도 이끌린다는 거요?"
"그렇다면 어때요?"
돈은 왜 이렇게 도전적인 말을 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인데,
"당신은 결혼했소!"
"랄프." 돈은 혼란스러웠다.
"당신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왜 그런 말을 하죠? 혹시...... 당신......"
"당신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소."
"당신도 그래요. 왜 쟈크를 만나선 안 되죠?"
"내가 인정할 수 없소. 그걸로 충분치 않소?"
"충분하지 않아요. 갑자기 쟈크에게 등을 돌리라니 이유를 모르겠어요. 마을에서 만나면 괜찮잖아요?"
랄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똑바로 앞만 보고 있는 게 화가 난 것 같았다. 질투하는 걸까? 또다시 돈의 마음속에 그 물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추측이 맞아서 랄프가 내게 사랑을 느끼고 있다면 왜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고백 같은 건 할 수도 없다. 지금 돈을 아내라고 하면 일대 소동이 일어날 게 눈에 선했다. 랄프가 1년 반 동안 실체 없는 결혼생활을 해온 것도, 돈베야 롯지와 농장을 돈과 공유하고 있는 것도, 가족을 부양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돈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또 다른 문제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랄프는 질투 같은 건 느끼지도 않아! 그의 태도에는 사랑의 그림자도 없어. 사랑도 없는데 질투를 할 리가 없잖아!
"안녕히 주무세요."
집에 도착하자, 돈은 한마디만 차갑게 던지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은 홀스부룩에서 사람이 와서 옆 창고를 목욕탕으로 개조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랄프 가족이 쓰고 있는 방을 떠올리자, 돈은 자신이 방을 양보한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더 세게 주장했어야 했는데.
돌아오는 차 속에서의 언쟁 때문에 기분은 침울하고 잠도 올 것 같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 돈은 계단을 내려와 정원으로 나갔다. 공기는 달콤하고 서늘했다. 돈은 천천히 걸으면서, 원주민이 멀리서 두드리는 북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밤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정원은 자연미를 살려 편하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꽃향기도 그윽하게 바람에 실려 왔다.
갑자기,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와 동물이 달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돈이 공포에 휩싸여 뒤돌아보니 그건 샤이탄이었다. 혀를 내밀고 앞발을 들며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그건 샤이탄의 인사였다. 곤은 동행이 생긴 게 기뻐서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샤이탄은 좋아서 코를 킁킁대며 꼬리를 흔들면서 먼저 걷기 시작했다.
돈은 산책을 계속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나무잎이 빛나는 달빛을 받아 빛과 그림자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광대한 대지가 펼쳐져 있고, 지평선 끝까지 숲이 우거져 있었다.
완벽한 고요함. 아프리카밖에 없는 고요함이었다. 옆에서 걷고 있는 샤이탄이 하품을 했다. 잠자리를 벗어난 걸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은 왠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발길을 돌렸다. 가서는 안될 장소로 가려고 했다. 에이비스의 비밀장소. 그러나 그곳은 이미, 두 사람의 침입자로 더러워져 있었다. ....... 쟈크....... 그는 에이비스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갑자기 돈은 랄프의 막내 동생이 만나고 싶어졌다. 만나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고 싶었다.
"돈!"
갑작스런 외침소리에 돈은 심장이 얼어붙는 줄만 알았다. 화가 났지만, 오늘밤은 더 이상 남편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시간에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요!"
랄프가 무서운 얼굴로 다가왔다. 파티에 입고 갔던 크림색 정장을 아직도 벗지 않고 있었다.
"잠이 안 와서 산책 나왔어요."
"조심성이 없군."
"전에도 밤에 산책한 적이 있는데, 별일 없었어요. 조심성이 없다니, 무슨 말이에요? 이 주위에 이상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돈은 밤 산책이 위험하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내심 놀랐다.
" 이 주위뿐 아니라, 밤에 이 시간에 혼자서 어슬렁거리면 습격당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오."
"하지만, 샤이탄도 있어요."
"처음엔 혼자였지 않소. 조금 전까지 샤이탄은 내 곁에 있었소. 현관 앞에서 말이오."
돈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결국 당신도 잠들지 못했군요?"
"잠들려고 하지도 않았소."
"멋진 밤이에요. 잠들기엔 너무 아쉬워요."
랄프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작정이오?"
돈은 멀리 까맣게 보이는 숲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전, 매우 멋진 곳으로 가려던 참이에요."
"그 멋진 곳이란 도대체 어디요? 그곳에 뭔가 특별한 의미라도 있소?" 랄프는 대답하지 않을 걸 짐작했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이 밤에 가서 뭐가 보이겠소?"
"달빛이 밝아요." 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아까보다 더 밝아진 것 같았다.
"폭포가 있어요. 달빛에 보면 분명히 낮보다도 더 멋있을 거예요."
"나도 보고 싶소."
돈은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비밀장소에요." 그렇게 얘기해 버리고 나서 실수했다고 가볍게 혀를 찼다.
"지금 한 말은 잊으세요, 랄프. 당신이 돌아간다면 나도 바로 집으로 가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시오."
"하지만 혼자 걸어 다녀도 위험하지는 않죠?"
"혼자가 아니지 않소."
"밖에 있고 싶지 않겠죠?"
랄프는 주위의 고요함을 깨뜨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나를 쫒아내고 싶소, 돈?" 랄프가 손을 잡자, 돈은 자기 손가락에 느껴지는 따뜻하고 힘센 그의 손가락에 몸이 떨렸다.
"왜 당신은 혼자서 이런 곳에 올 마음이 생겻소?"
"말했잖아요. 잠이 안 와서 산책하러 나왔어요."
"보통, 잠들 수 없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요."
"결국, 고민이 있을 거라는 말인가요?" 돈은 랄프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그의 의도를 였볼 수 있었다.
"맞아요. 분명히 고민이 있어요."
"예를 들면?" 돈이 긍정을 하자, 랄프는 턱밑에 손을 대고 얼굴을 들어올려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자, 대답해 보시오."
"하나는 나의 입장이에요."
"그건 분명히 해두지 않았소. 가족에게 당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둘이서 생각해 뒀잖소."
랄프의 태도는 침착했다.
"에이비스를 만나는 게 기대돼요." 돈은 화제를 바꾸었다.
"왜, 특별히 에이비스에게 그렇소?"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길을 걸었다.
"에이비스의 슬픈 마음에 이끌려요. 하지만, 오해하지는 마세요. 그 흔한 호기심은 아니에요. 순수하게 흥미가 있을 뿐이에요."
"결국, 그 아이의 닫혀진 마음을 열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않소?"
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기까지 적극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에이비스에게 흥미를 가진 이유 중에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어 있었다.
"예, 친구가 되어 지금의 괴로운 시기를 넘기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착각이었을까? 돈은 랄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 변화가 없었다.
"너무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하지만 고맙소, 돈. 친구가 있으면 에이비스도 빨리 나아질 거라고 나도 생각하오. 지금 그 애에게는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기 때문이오."
"하지만, 당신에겐 다른 여동생, 마일라가 있잖아요."
"마일라는 이기적이오. 또 지금은 자기 상처를 치유하는데도 벅차고. 우리 가족이 돌아오면 당신은 놀랄 거요. 마일라는 이집에 더 이상 여자가 늘어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즉시 당신에게 반감을 가질 것이고......."
"왜 그렇죠? 여기에는 벌써 여자가 네 명이나 있잖아요. 한 사람 정도 늘어나도 별로 달라질 게 없을 텐데요."
"마일라는 이 집의 모든 일을 참견하고 싶어 하오. 그래서 자기 이외의 여자는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하오."
돈은 무심결에 한숨이 나왔다.
"어머니는 어떠세요? 역시 내게 반감을 가지실까요?"
"어머니는 거만한 편이시지만, 해는 없을 거요." 랄프는 심각한 표정으로 돈을 힐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항상 젊은 사람에게 질투하고 있소."
돈은 랄프의 얼굴을 요모조모로 살펴보았다.
"자기 어머니인데 거침없이 말하는군요."
"상관없소. 어머니의 성격은 당신도 곧 알수 있을 거요."
길이 U자형으로 구부러져 있어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돈은 제일 묻고 싶었던 질문, 에스터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를 돌봐 준다는 여자 말인데요. 그 분은 죽 이 집에 있을 예정인가요?"
"왜 그런 걸 묻는 거요, 돈?"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호기심이 있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물었으니 순서대로 그 여자에 대해 묻는 게 당연하잖아요?"
랄프는 멈춰 서서,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돈을 바라보았다.
"친구가 된 쟈크는 에스터에 대해선 얘기해주지 않았소?"
돈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예, 얘기해줬어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에스터에 대해 뭐라고 했소?"
돈은 화를 꾹 참았다. 쟈크가 에스터에 대해 한 말을 랄프에게 전해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말로 할 수 없는 얘기를 들었나?"
돈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 랄프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매우 예쁘다고 하더군요."
"진부한 표현이군. 에스터는 최고의 미인이오."
"당신은 에스터를 어떻게 생각하죠?"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오."
"나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당신......"
랄프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난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난 결혼했소."
"그래도 만일 결혼하지 않았다면요?"
돈은 악착같이 물어보았다. 에스터에 대한 랄프의 기분을 무척이나 알고 싶었다.
"독신이었다면, 에스터와 결혼하지 않았겠냐고 묻는 거요?"
"알면서 그래요?"
돈은 랄프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달빛속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랄프의 눈에는 에스터보다도, 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
갑자기 랄프가 말했다.
"집으로 갑시다, 돈. 밤이 깊었소. 얘기할 게 남았으면 내일 얘기하도록 합시다."
랄프가 걸어가자, 돈도 나란히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현관 불빛이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돌연, 돈의 가슴속에 아련한 생각이 떠올랐다. 안정된 가정을 갖고, 끝없이 사랑을 주는 남편과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거실에 들어서자, 랄프가 말을 꺼냈다.
"오늘 밤도 내방에 와 주겠소?"
돈은 얼떨결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랄프. 안돼요."
"왜?"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아요."
"우리들은 부부잖소. 왜 안 되오?"
"하지만 사랑 없는 부부예요."
"사랑은 없을지 몰라도 서로 상대방에게 이끌리고 있소." 랄프는 다정하게 말하고 돈의 팔을 살짝 잡았다.
사랑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돈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복받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뒤돌아섰다. 랄프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의 부드러운 손으로 애무받고, 정열적인 키스를 하고 싶었다. 돌아서 보니 랄프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돈은 자신의 마음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랄프의 매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몸속에 끓어오르는 욕망에 패배할 것만 같았다.
돈은 잠옷과 가운, 화장백을 들고 랄프의 방으로 갔다. 복도를 따라 걷다보니 랄프의 가족이 돌아오고 나서의 일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족이 돌아와도 신경 쓰지 말고 자기 방으로 오라고 랄프가 말했지만, 여자들 방 앞을 지나 그의 방으로 가는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자, 랄프는 이미 샤워를 하고 가운을 입고 있었다. 짙은 빨간색 가운의 끈은, 언제라도 벗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느슨하게 묶여져 있었다. 돈은 그 끈이 풀려질 때를 상상하고 얼굴을 붉히며 얼른 샤워룸으로 갔다.
이윽고 샤워를 끝내고 잠옷과 가운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오자, 랄프가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분명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원하는 듯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돈은 아이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느냐는 랄프의 말이 생각났고, 그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임신이 안 됐다면 이제 기회는 별로 없었다. 임신되기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했다.
랄프가 손을 내밀었기 때문에 돈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눈도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은 이 순간만을 생각하면 돼. 과거는 죽음으로 끝나고, 미래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현재만을 위해 살아야만 된다고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남편 가슴에 안겨서, 부드럽고 늠름한 육체에 닿으니, 돈은 뿌듯한 기쁨과 함께 자신이 더 몸을 밀착시켰다. 랄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돈이 그 입맞춤에 적극적으로 응하자, 그의 손은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돈은 몸속에서 뜨거운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 봉우리를 감싸고, 긴 손가락으로 유듀를 가지고 놀았다. 돈은 무심결에 몸을 떨며, 작게 소리를 질렀다.
랄프는 애무의 손길을 멈추지 않고 돈의 흥분을 감지한 듯, 그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돈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지만 어깨에서 가운이 미끄러져 내려갔을 때에 부끄러움은 사라졌다.
랄프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돈을 바라보았다. 돈은 랄프가 들어보지도 못했을 말을 속삭여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랄프는 살짝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도록 노력해 보겠소, 돈."
8
돈은 현관 의자에 앉아 정면에 앉아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 만지면 깨져버릴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에이비스 드발레. 19세. 그녀는 슬픔에 잠긴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볼 뿐, 바로 앞에 놓여있는 테이블 위의 차에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에이비스가, 어머니와 같이 집에 돌아온 지, 아직 1주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돈은 그녀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시험 삼아 이것저것 해보았다. 그러나 에이비스는 어느 것에도 흥미를 나타내지 않아서, 돈은 패배를 인정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에이비스는 영원히 이런 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 그녀는 아직 젊고 미래는 넓게 펼쳐져 있었다. 돈은 며칠 동안에 한두 번 정도, 변변찮은 자신의 노력도 허사라고 생각하며, 포기하려고 했지만, 간단하게 단념할 수 없어서 에이비스를 참고 견디며 보살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집에는 에이비스에게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도움의 손길을 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랄프는 특별했다. 그러나 그도 끈기있게 지켜봐주려는 마음이 없어져버린 것 같았다. 아니면, 마음의 병이라고 치료되기까지 시간에 맡겨두고 있는지도 몰랐다.
"에이비스에 대해 당신은 정말 잘해주는군." 집 식구들이 돌아오고 2,3일이 지나서 랄프가 말했다.
"그래도, 그 애한테서는 반응이 없을거요."
"하지만 슬픔에 젖어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
"에이비스가 테렌스를 사모하는 마음은 매우 깊었소. 본래의 그녀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거요."
그때 랄프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러나 어깨를 움찔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있는 돈을 남겨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감귤 밭으로 가버렸다.
돈은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떨쳐내고, 눈앞에 앉아있는 시누이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오늘 오후에 나하고 마을에 안 갈래요?"
에이비스는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일은 없어요. 기분전환이 될 거예요." 돈은 단념하지 않았다. 오늘은 화요일, 쟈크가 마을에 올 것이다.
"하루종일 이런 곳에 앉아 있으면 안돼요."
"당신과 관계없어요. 완전히 타인이잖아요. 아니, 오빠의 손님일 뿐이에요. 쓸데없는 참견은 그만두세요."
"알았어요. 하지만 내 참견을 고맙게 여길 때가 올 거예요." 돈은 말 끝에 날카로운 표현을 한게 자신도 놀라워서 얼른 상냥하게 말을 덧붙였다.
"에이비스 당신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알아요. 하지만 내 마음은 아무도 몰라요."
"그래도 이런 상태를 계속해 가는 건 불가능해요. 에이비스."
"왜요?"
"당신은 아직 열아홉이에요. 인생은 이런 게 아니에요."
"난, 그다지 오래 살고 싶지 않아요."
돈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산책하고 오겠어요."
에이비스는 입술을 깨물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일어나서 진심으로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같이 가요."
돈의 마음은 두근거렸다. 어느새 에이비스가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돈은 아주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어머, 잘됐어요. 동행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샤이탄이 항상 같이 있었잖아요." 에이비스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개를 힐끗 쳐다보았다.
"강아지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랄프도 잊었나 봐요."
"개를 좋아해요?" 돈은 흥분감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예, 나만의 애완동물이 있으면 좋겠어요."
돈의 뇌리에 쟈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집에 강아지가 태어났다고 한 것 같은데.......
"어느 쪽으로 갈래요?"
에이비스가 혹시 비밀장소로 갈지도 모른다고 돈은 물어봤지만 기대와는 달리 에이비스는 강 쪽으로 산책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곳에 난꽃이 볼만해요. 벌써 봤나요?"
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 이 주위를 몇 번이나 둘러봤어요."
"매우 멋진 곳이 몇 군데 있어요."
"예, 알고 있어요."
"하지만, 보통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아무도 못 가본 멋진 곳은 찾지 못했어요."
에이비스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돈은 아까보다 반응이 큰 것을 보고 기뻤다. 1년 이상이나 굳게 문을 닫고 있었던 시누이의 마음을 열수만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큰 명예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전, 아무도 모르는 장소를 발견했어요......"
입밖에 낸 것을 후회하듯이 에이비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돈은 이떼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좋은 결과를 바라기 때문에 신중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비밀 장소로 함께 가자고 에이비스 쪽에서 말할 날이 언젠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점심도 거북했다. 문제의 세 여자들은 변함없이 냉정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손님의 존재를 결코 반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언제까지 있을지도 모르는 손님에게 그녀들은 마음 놓기 어려운 존재였다. 돈은 드발레 부인에게서 몇 번이나 질문을 받았다.
"출발할 날은 결정했나?"
그때마다 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뇨,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여기 있으면 하루하루가 즐거워서 서둘러 떠나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랄프의 어머니는 입을 다물고 몸을 홱 돌려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에스터와 마일러에게 얘기하러 가는 것 같았다.
상상한 대로, 그런 세 사람과 에이비스는 어울리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 있는 게 마음 편해 보였다. 점심때나 저녁식사 때, 그때 에이비스는 산책을 나갔고, 돈은 그녀의 행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랄프는 가족이 돌아온 후, 자신의 서재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일이 많았다. 견고한 나무책상,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많은 책들, 카펫과 커튼, 소파는 밝은 회색으로 돈은 두 번밖에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그 방을 좋아했다. 랄프는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난과 하이비스커스, 칸나 등이 가득 피어있는 정원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거라고 돈은 상상했다.
이러저러한 가운데 식사가 끝나자, 돈은 안심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냉랭한 얼굴로 뻔한 대화를 하는 게 지겨워졌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점심식사를 할까 하고 돈은 생각했다. 저녁식사는 랄프가 대화를 잘 이끌어 가기 때문에 점심때만큼 고통스럽진 않았다.
"오후에 외출할 거예요?" 에스터는 무시하는 태도로 돈의 옷을 힐끔힐끔 보면서 물었다.
"네, 마을에 가보려고 해요."
"내가 스테이션왜곤을 쓰고 싶어요."
돈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적대감을 나타내온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나도 차가 없으면 곤란한데요." 돈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장원을 예약해 놨거든요."
"안됐네요, 하지만 나도 차가 필요해요." 에스터는 어깨를 움찔해 보였다.
"마을에 가요?"
갑작스런 상황에 돈은 차를 우선적으로 쓸 권리가 있었지만 이 여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그렇지는 않지만, 만일 마을에 간다면 당신을 태워주겠어요."
에스터의 눈빛은 건방지고, 태도도 공격적이었다. 돈은 입술을 물며 마음을 자제하려고 애썼다.
"내가 당신을 따라가면, 돌아올 때도 그곳에 들러주겠어요?"
곧 실내는 고요해졌다. 에스터와 드발레 부인은 아무 말 없이 눈짓을 주고받고 마일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돈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를 쓰는 건 단념해요." 뒤이어 드발레 부인이 돈에게 말했다.
"예약을 하지전에 우리에게 먼저 물어봤어야 해. 언제라도 차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잘못이지. " 그 목소리는 오싹할 정도로 냉정했다.
돈은 얼른 몸을 돌려 방을 나와서, 랄프의 서재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그 목소리를 듣고 돈은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빛나고 있었다.
랄프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식사는 벌써 끝나 있었고 커피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여, 돈."
랄프는 웃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난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친해졌어도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걸 돈은 느꼈다. 랄프에게 있어서 자신은 놀잇감밖에 안됐고, 지금도 집에서 없어질 날을 마음속에서 꼽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소?"
랄프는 돈의 모습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돈은 오전중에 입고 있던 진바지를 벗고 꽃무늬 면드레스로 갈아입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가 필요해요. 미장원에 예약해 놨거든요." 차분한 목소리였다.
쟈크와 약속이 있다는 걸 말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안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테이션 왜곤을 쓰면 되잖소."
"에스터가 쓰고 싶대요."
"그런가......"
"곤란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난, 그 차를 쓰겠어요. 그리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도록 차까지 같이 가주세요."
돈의 태도를 보고 랄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신은 감정적이오."
돈은 얼굴이 시뻘개졌다.
"내게는 차를 쓸 권리가 있어요!"
"나와 당신은 알고 있지만, 에스터는 모르잖소." 그 목소리는 냉담했다.
"내게는 차를 쓸 권리가 없다고 당신 어머니까지 분명하게 말하셨어요."
"어머니가?" 갑자기 랄프가 의아스러운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에스터의 얘기가 아니었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진정하오!" 당황한 모습으로 랄프가 딱 잘라 말했다.
"어떡하면 좋을지 생각해 봅시다. 차 쓰는 것 다른 날로 할 수 없소?"
"안돼요. 지금 당장 나가야 돼요."
목소리는 화가 나서 떨리고 있었다. 돈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랄프를 쳐다보았다.
"차를 쓸 권리가 내게 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지 말해볼까요?"
"그런 극단적인 말을 할 필요는 없소." 순간 말을 멈추고 천천히 얘기를 꺼냈다.
"내 차를 쓰도록 하시오. 단, 스포츠카니 속도에만 신경 쓰시오."
랄프는 커피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에게는 완전히 해결을 본 것이었다.
"대단히 쉬운 방법을 택하셨군요."
돈이 비난하듯이 얘기하자, 랄프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팽팽해졌다.
"그럼 이런 경우에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몰라요."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이 참을 수 없었어요. 그 사람들은 마치 날 침입자로 몰고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스터는 친척이래도 혈연관계가 없는 나와 같은 관계잖아요. 그런데 차, 그 일 한 가지로 어떻게 그런 지독한 태도로 그럴 수 있어요?"
"간단한 일이오. 그녀들에게 진상을 밝힐 수 없기 때문이오. 에스터가 평소 때처럼 차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당연하오."
"평소 때처럼요?"
"지금까지 그녀는 언제나 자기가 원할 때 그 차를 썼었소." 랄프도 화가 나 있었다.
"어머니나 동생들은 운전을 안하고 나는 딴 차가 있었으니 말이오."
"그럼 돈을 빌려주겠어요? 난, 내 차를 사겠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말하고 돈은 랄프가 붙잡기도 전에 방을 나와 버렸다. 몸이 떨렸다. 그건 지금까지의 사건 때문이기도 했지만, 랄프의 비싼 스포츠카를 운전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서재로 가서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방으로 가서 핸드백을 들고 그대로 차고로 갔다.
"자동차 키......"
순간 당황했지만, 마음먹고 서재 창가로 가서 유리창을 두드렸다.
"응?" 랄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창을 열었다.
"또 무슨 일이오?"
돈은 랄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가슴 벅참을 느꼈다. 그에 대한 사랑이 가슴 가득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늠름한 그의 가슴에 안겼던 꿈같은 시간, 그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돌아와도 돈은 그의 태도가 계속되길 빌었다. 그러나 랄프 쪽은 귀찮아질 걸 알았는지 자기 어머니에게 손님으로서 돈이 머물게 된 걸 얘기하자마자, 그녀는 자식 앞에서도 혐오감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랄프도 돈에 대해서 냉정해지고, 그녀를 침대로 불러들이지 않게 되었다.
"무슨 용건이 있는지 말해 보시오, 돈."
"차키를 빌리고 싶어요."
"좋소."
그렇게 말하고 랄프는 움직이지 않고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생각 외로 태도는 부드러웠다.
"마을까지 갈 거요?"
"그 차로 내가 운전 못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 차는......." 랄프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창을 사이에 두고 얘기하는 게 초조한 것 같았다.
"내가 데려다주겠소. 바로 나가야 되오?"
돈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미장원에는 2시에 가기로 되어 있어요."
"그럼 아직 조금 시간이 있군. 편지를 쓰고 있던 참이니, 그걸 끝내고 바로 우체국에 가야겠소."
"그럼 전, 현관에 있을게요."
그러나 돈은 난처했다. 랄프가 데려다 준다면 쟈크를 만나게 된다.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을 쟈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저, 랄프. 괜찮아요. 전 운전할 수 있을 거예요."
랄프는 주저했다. 솔직하게 돈을 데려다주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정말 괜찮겠소?"
"예, 핸들을 잡고 2분만 지나면 차에 익숙해질 거예요."
"그럼 좋소." 랄프는 잠시 모습을 감췄다가 1,2분 후에 돌아와서 키를 돈에게 건네 주었다.
"고마워요." 죄책감에 마음이 아팠다.
"조심해서 운전할게요."
"차고에서는 내가 빼겠소. 뒤로 나와야 하니까 그게 좋겠소."
랄프는 돈에게 건네준 키를 받아들고 방안으로 사라졌다.
돈이 차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랄프가 바로 다가와서 돈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차를 갖고 싶다고 했는데 진심은 아니겠지?"
"진심이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오래 이곳에 있을 게 아니겠지?"
"언제까지 있느냐는 당신도 나도 몰라요. 단지 분명한 건 이곳에 있는 게 한 달이 될지 1년이 될지 모르지만 차를 쓰는 데 일일이 허락을 받을 순 없어요. 어쨌든 그 스테이션 왜곤은 간섭하지 않을게요. 난 고급차를 갖고 싶어요."
돈은 그때까지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해서 울분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래서 앞 뒤 생각 없이 마구 얘기를 해댔는데, 랄프는 굳은 표정으로 차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고 돈은 자신이 대결해야 할 상대는 랄프가 아니라, 그 세 여자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실 창문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세 명의 그림자를 눈치 채고, 돈은 어느 정도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조금 있어 랄프가 차고에서 빼낸 스포츠카에 돈이 올라타자, 창가에 있던 세 사람의 놀라는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마을에 가서 기분이 내키면 차를 한번 둘러보고 오겠어요." 무심코 한 말이지만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심술을 부리고 있는 자신이 싫어졌다.
차를 신중하게 운전하며, 현관 앞을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에이비스가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랄프의 차로 마을에 가요?" 숨이 찬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래요."
"어머...... 저, 나도 함께 하고 싶은데요......"
"어서와요." 돈은 이번만큼은 속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자, 어서 타요. 속도가 늦은 건 신경 쓰지 말아요. 난 차를 고장 나게 할까봐 무섭거든요."
시크에 앉자마자 에이비스가 물었다. 돈은 거실에 있는 세 사람이 자기 눈을 의심하듯이 아직도 눈을 떼지 못하는 걸 알아채면서 차를 출발했다.
"미장원에 예약해서 마을에 가야하는데 스테이션왜곤은 에스터가 쓴다고 해서 난처해 있었는데, 당신 오빠가 친절하게도 빌려줬어요."
"믿을 수 없어요! 랄프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 차를 남에게 빌려준 적이 없어요."
"아마 날 동정했나 봐요."
에이비스는 이상한 눈길로 돈을 힐끗 보았다.
"왠지 설득력이 부족한데요."
돈은 당황해서 말을 끊었다. 에이비스도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은 에이비스가 다시 마음을 닫을까봐 뭔가 대화를 계속하려고 말을 꺼냈다.
"오빠가 내게 동정한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
"그게 아니에요. 제가 신경 쓰이는 건, 당신의 말투에요. 마치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말이에요.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들 모두 이상하게 여겨요."
"이상하게 여기다뇨?"
"당신이 여기 있는거요."
"당신들 모두에게 랄프가 설명 했을 텐데요?"
"랄프의 친구라는 당신 아버지에 대해서도 당신에 대해서도 우리들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게다가 완전히 눌러앉은 모습이라, 언제 떠날지도 정하지 않았는데 그런 얘길 믿을 수 있겠어요?"
"랄프에게 들었겠지만, 난 오랫동안 아팠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요양하라고 이곳에 보내신 거예요."
"어디가 나빴어요?"
"전신이 병약했어요...... 랄프가 어머니께 설명 드린 대로에요."
"너무 일했다든가?"
돈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렇게 끊임없이 질문을 받다가는 들통이 나버릴 것 같았다. 결국 랄프가 생각해낸 변명은 그다지 쓸모 있는 게 아니었다. 돈은 한참 생각한 끝에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대로 방법을 찾았다.
"마치 고문당하는 것 같아요, 에이비스. 왜 그렇게 많이 묻는 거죠? 무슨 말을 하고 싶어요?"
에이비스는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에이비스의 웃는 얼굴이었다.
"쓸데없는 참견은 말라고 하면 되는데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실례의 말은 하지 않아요."
그러자 놀랍게도 에이비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거짓말! 마일라와 특히 에스터에게는 몇 번이고 심한 말을 했잖아요."
"그녀들의 경우는 자업자득이에요. 그쪽이 먼저 실례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나도 보답해준 거예요."
"에스터는 확실히 당신을 못마땅하게 여겨요. 즉 질투하고 있는 거죠. 알죠?"
"질투요?"
"예, 당신은 무척 매력적이에요. 에스터는 오빠와의 결혼을 꿈꾸고 있는데, 랄프가 스스로 당신에게 차를 빌려준 걸 알면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만 해도 무서워요. 화가 치밀어서 당신 눈을 도려내고 싶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 사람은요."
돈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마침 급커브를 돌고 있었고, 앞에는 어린애 네 명이 길 한가운데 앉아 놀고 있었다.
차를 비키려고 하지 않아 돈은 클락션을 울렸다. 애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해해거리며 손을 흔들고 있어서 돈은 할 수 없이 차를 세웠다.
그런데 그 순간, 에스터가 탄 스테이션 왜곤이 백밀러에 보였다. 빠른 스피드로 커브를 돌려고 하는데, 차와 도로 양쪽 상태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게다가 에스터는 앞에 있는 애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돈은 깜짝 놀랐지만 너무 늦었다. 스테이션왜곤이 달려왔고 굉장한 충격과 함께 멈춰섰다. 다행스럽게도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랄프의 스포츠카 옆면은 뒤에서부터 옆까지 크게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차에서 뛰어내려와, 스포츠카 운전석에서 나온 돈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곳에 차를 세워놓다니, 어떻게 된 거예요!"
"어린애들이......" 돈이 앞을 가프켰지만 이미 애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 근처에 있는 자기 집들로 도망쳐버렸던 것이다.
"어린애 네 명이 놀고 있어서 서지 않을 수 없었어요. 길이 커브라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았죠. 그렇게 빨리 달리면......"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아요. 운전 실력이 변변찮으면 처음부터 이런 차를 타지 말았어야지." 에스터는 일방적으로 윽박질렀다.
랄프의 차를 망쳐놓은 것으로 돈을 질책하며, 자신은 책임지지 않으려고 했다.
"에이비스, 당신은 전부 봤죠?"
에이비스는 신경을 써서 그런지 이마에 주름을 잡고 랄프의 차를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해요. 당신이 나빠요. 돈에게 책임이 없어요."
"어머......" 에스터는 기막혀하며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증오에 찬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이 사람 편을 드는군요. 좋아요. 랄프가 누구 말을 믿는지 바로 알 수 있어요."
"랄프가 나보다는 당신 말을 믿는다는 건가요?" 에이비스는 침착했지만 보통 때의 그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태도였다.
"만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실망할 거예요, 에스터." 잠시 말을 끊고는 말했다.
"맘대로 해요. 랄프에게는 돈 쪽에서도 설명할 거예요."
"알았어요....."
에스터는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 또 무서운 게 틀림없었다. 랄프의 말을 듣는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차 수리하는데 몇 개월이나 걸린다는 거였다.
"어쨌든 여기서는 아무리 있어도 해결 방법이 없어요." 에이비스는 어깨를 움칠하며 말했다.
"집에 가서 얘기하죠." 에스터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시뻘개졌다.
"당신 둘이 뭐라고 말하든 내게는 책임이 없어요."
그 사건이 마을로 가는 즐거운 드라이브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차 속의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쓰는 건 에이비스 쪽이었다.
"기운을 내요, 돈. 아무튼 랄프는 당신을 잡아먹으려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차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잖아요."
"빌려줫을 때에 각오는 했을 거예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는데, 아, 왜 차를 그렇게 세웠을까 몰라."
"애들을 치어 죽이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에요."
에이비스는 오히려 돈보다도 침착해져서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강한 면이 있었는가 하고 돈은 믿을 수 없었다.
"랄프는 알아줄 거예요. 걱정 말아요. 에스터가 잘못한 게 분명하니까요." 마을에 도착해서 돈이 차를 세우자 에이비스가 말했다.
"그럴까요?"
"내가 당신편이에요, 돈. 저 부탁이니 어두운 얼굴은 하지 말아요."
돈은 한숨을 쉬었다. 걱정 말라고. 그 말은 간단했지만, 페인트가 벗겨진 차를 보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머리할 동안 당신은 뭘 할래요?" 차를 잠그고 키를 백에 넣으며 돈이 물었다.
"주위를 둘러볼게요. 만날 장소를 어디로 할까요?"
"쟈카랜더 클럽 카페는 어때요? 차를 같이 마시면 좋겠는데."
"좋은 생각이에요."
에이비스는 별로 기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얘기하고 차를 같이 마시겠다고 응해준 것만으로 돈의 작전은 일단 성공한 것이었다. 돈은 쟈크가 그곳에 있다는 건 숨기기로 했다.
"그럼 클럽 카페에서 3시 15분 정도에 만나요."
돈은 다시 한 번 차를 힐끗 쳐다보고 얼른 그 자리를 떴다. 사고에 대한 책임은 없을지 몰라도 운전하겠다고 떼쓰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간접적으로 역시 책임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돈은 그것을 마음에 새겼다.
약속보다 늦어져 카페에 도착하니, 에이비스와 쟈크는 같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옆에 파란 잎이 무성한 포도나무가 있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쟈크는 얼굴을 들어 돈과 시선이 마주치자, 의미 있는 눈빛을 보냈다. 분명히 이 만남을 돈이 꾸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머리, 잘 어울리는데요."
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쟈크가 빼준 의자에 앉고 쟈크도 다른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에이비스는 무표정했는데, 마치 쟈크가 온다는 걸 알았다면 클럽에 오지 않았을 거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주문한 게 나오자, 에이비스도 잼 바른 스콘과 케익을 맛있게 먹으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스스럼없는 대화가 계속되자, 쟈크도 용기를 내어 에이비스에게 말을 걸었다.
"토요일 날 댄스파티에 오지 않겠소?" 에이비스는 고개를 저었지만 돈이 옆에서 끼어들어 쟈크를 부추겼다.
"그렇게 해요, 에이비스. 파티장에 나도 있고, 랄프도 있고, 물론 마일라와 에스터도......"
"에스터?" 에이비스는 불쾌한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가 있으면 내가 파티에 올 마음이 나겠어요? 농담 아니에요."
돈은 대답하지 않았다. 때때로 에이비스의 태도가 화나게 만들었다. 침묵이 흘렀는데 쟈크가 말을 꺼냈다.
"에스터의 일 따위는 신경 쓸 일이 아니오. 에이비스, 파티에 와요. 그리고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요. 물론 형도 함께 말이에요."
에이비스는 쟈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괜찮지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쟈크 왜 내게 그러죠? 함께 있어도 즐거운 사람이 아닌데......"
"그렇지 않소." 쟈크는 진심으로 말했다.
"어쨌든 나는 당신과 있으면 즐겁소."
돈은 에이비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쟈크가 이 정도로 열심히 초대했기 때문에 에이비스는 거절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어 거절의 표시라고 단념하려는 순간, 문득 에이비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좋아요. 파티에 갈께요."
"그럼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을 거요?"
"랄프가 뭐라 할지 물어보지 않으면......"
"당신이 쟈크 옆에 앉는다면 랄프도 기꺼이 허락할 거예요." 돈이 끼어 들었다.
"파트너가 바뀌면, 기분도 바뀔 거예요."
에이비스는 잠자코 자기 컵에 홍차를 따랐다.
"더 마시겠어요. 돈?"
"그래요."
"쟈크는 어때요?"
"응, 가득 따라주시오."
쟈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려고 했으나 말과 태도에 에이비스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무슨 마법을 썼소?"
얼마 후에 에이비스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쟈크가 물었다.
"아무것도요. 갑자기 에이비스 쪽에서 같이 가겠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전에 당신이 권했죠?"
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거절했었어요. 물론 당신이 여기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말하면 안 올 거라고 생각해서요?"
"아마, 안 왔을 거예요. 하지만 단언할 수는 없어요. 오늘 에이비스는 평소 때와는 달라요. 명랑해요. 그래도 신중해야 해요, 쟈크. 약혼자가 있었던 곳에, 다른 남자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는 아직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알겠소. 나 자신도 실수하지 않길 기도하고 있소." 쟈크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초조해지지 말아요. 그것만 지키면 잘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돈은 쟈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보고 에이비스는 어땠어요.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놀란 얼굴이었소. 하지만 나는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마을에서 당신과 만나면 여기서 차를 마신다고 했소."
"오늘 함께 만난 것도 완전히 우연인 것처럼 느끼게 얘기했나요?"
"음, 약속한 것을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소."
돈은 마음속으로 만사가 순조롭게 되어간다고 말했다. 마을에 와서 쟈크와 만나도록 에이비스를 끌어낸 걸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잘 됐어요. 토요일 댄스파티에 에이비스가 온다고 했으니, 신중하게 진행하면 에이비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하면 좋겠소."
"가능한 한 모든 걸 응원할게요." 그렇게 말하고 돈은 에이비스가 강아지를 갖고 싶어한다고 얘기했다.
"그녀가?" 쟈크는 몸을 쑥 내밀었다.
"우리 집에 막 태어난 강아지가 있다고 벌써 얘기했소?"
돈은 고개를 저었다.
"강아지가 태어났다고 토요일 파티에서 말해 보겠소. 그러면 그녀 쪽에서 강아지를 갖고 싶다고 말해줄지도 모르잖소."
"그럼 당신이 한 마리 선물하면 되겠군요." 돈은 미소 지었다.
"그렇소. 문제는 그녀가 받아주느냐 않느냐 하는 거요."
"문제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 난 차를 사고 싶어요."
"차? 무었 때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내 차를 갖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여기 있을 게 아닐 텐데, 차같은 건 필요 없지 않소."
랄프가 한 말과 똑같았다.
"오늘 마을에 나오는데, 랄프의 차를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쟈크는 차를 사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눈을 크게 떴지만, 랄프의 고급차를 빌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 눈은 먼저보다도 두 배나 더 커졌다.
"그가, 자기차를 당신에게......"
"나는 미장원 예약이 되어 있었고, 에스터도 차를 써야한다고 해서 랄프에게 얘기했더니 자기 차를 빌려줬어요."
돈은 불안했다. 저편에 앉아 있는 쟈크가 의심스런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소."
'정말이에요. 랄프가 빌려줬어요."
순간 돈은 잠자코 있었다. 클럽을 나온 후, 쟈크는 두 사람을 전송하려고 차를 세워둔 장소까지 따라올 것이다.
"실은, 그 빌린 차가 망가졌어요." 돈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터가 바로 뒤에서 달려왔는데, 저는 그걸 몰랐어요. 길가에서 어린애들이 놀고 있어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뒤따라오던 에스터가 얼른 차를 세웠지만 스테이션 왜곤으로 랄프의 차 옆을 긁었어요." 다시 한숨이 새어나왔다.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두려웠다.
"분명히 랄프는 펄펄 뛸 거예요."
"긁힌 게 심하오?"
쟈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듣자 돈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상당해요. 주차장에 가면 알 수 있어요."
"불안해하는군요." 쟈크는 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당신 탓이 아니오. 어째서 에스터는 앞에서 차를 세울 수 없었을까?"
"길이 커브로 되어 있었고 이쪽 차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쪽 커브 길은 급해서 나는 항상 스피드를 줄이고 돌지만, 에스터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지나가려고 했었나 봐요. 그래서 커브를 돌고 있는 내 쪽을 발견했을 때는 벌써 늦었겠죠."
쟈크는 어깨를 움츠렸다.
"에이비스가 함께 있었으니, 증인도 있지 않소. 그런데 뭘 걱정하오?"
"차를 빌리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래서 차를 사려는 거요? 하지만 이 나라에서 차를 사려고 하면 상당히 시간이 걸리오. 그렇게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아깝잖소. 설령 몇 주일밖에 타지 못해도 팔 때는 값이 형편없소."
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에이비스가 돌아왔기 때문에 안심이 되었다.
이윽고 클럽을 나와, 주차장에 가서 차를 본 쟈크는 낮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말한대로군. 이걸 보면, 랄프는 펄펄 뛰겠소."
"돈에게 책임이 없어요." 바로 에이비스가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얘기는 돈에게 들었소. 원래 에스터는 너무 속도를 내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이상할 정도요."
쟈크는 차에 올라타는 에이비스를 바라보았다.
"토요일에 봅시다. 올 거죠?"
에이비스는 냉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돈은 고녀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9
돈과 메이비스가 돌아왔을 때, 에스터는 이미 집에 있었다. 아마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서둘러 집에 돌아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랄프는 두 사람이 돌아오는 걸 현관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돈이 천천히 차를 세우자, 옆에 와서 차가 긁힌 곳을 살펴보고 차에서 내린 돈을 노려보았다. 사고의 책임은 모두 돈에게 있다고 단정 짓는 비난 섞인 눈빛이었다.
"아무튼 안으로 들어갑시다. 당신의 설명을 듣고 싶소."
"나도 가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에이비스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돈은 있는 그대로를 얘기했다. 때때로 말이 막혔지만, 그때마다 시누이가 도와주었다. 시간이 걸려서 상세히 설명하고 나자, 실내는 고요함이 흐르고 조금 후에 랄프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당신 얘기는 에스터에게 들은 것과 상당히 다르오."
"그 사람 돈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고 해요." 에이비스가 그렇게 말하자, 랄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건 에스터에요. 그런 커브길을 그렇게 빨리 달리다니, 말도 안 되잖아요."
"어린애들을 길에서 비켜나도록 클락션을 울리지 않았소?"
"울렸어요. 하지만......."
"에스터는 당신이 클락션을 울리지 않아서 부딪혔다고 말했소. 만일 당신이 울렸다면 그 소리를 듣고, 에스터는 속도를 줄였을 거요."
"돈은 틀림없이 클락션을 울렸어요."
에이비스가 그렇게 말하자, 랄프는 험악한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당신들 두 사람, 공동전선을 펴고 있는 것 같소. 적어도 에스터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소."
두 사람의 놀란 얼굴을 보고, 랄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사고는 일어났소. 잘잘못을 따진다고 해도 차가 원상태로 되지는 않소."
랄프는 화나는 걸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돈이 스테이션 왜곤을 타지 않겠다고 하지만 않았다면, 자기차를 빌려주는 불상사는 없었고 또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역시 내가 데려다줘야 했소."
그말을 듣고 돈은 생각 없이 말대꾸를 했다.
"그랬다면 어떻다는 건가요? 당신이 운전했더라도, 이 사고는 피하지 못했어요."
그말에 즉시 랄프의 화가 폭발했다.
"완전히 똑같은 조건이라면 그럴 거요. 그러나 내가 운전하면, 아마 그런 사태로 몰고 가지 않았을 거요."
에이비스는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돈은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모두 당신이 왜 여기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마도 에이비스는 앞에 있는 두 사람의 관계에 점차 의혹을 가질 것이다.
그날 밤, 저녁식사 때, 돈과 에이비스는 세 사람의 여자에게 대화를 맡기고 잠자코 있었다. 라프는 대화에 끼이는 걸 지겨워하는 것 같았다. 돈은 그런 그에게 동정을 느꼈다. 그러나 가족을 집에 데리고 온 것은 그였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할 문제였다.
식사가 끝나자 랄프는 에스터에게 산책을 하자고 청했다. 에스터는 환한 얼굴이 되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돈은 현관에 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질투심이 가슴속 가득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모습이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리자, 돈의 머릿속에는 참기 어려운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랄프에 팔에, 에스터가.......
"그 두 사람, 잘 어울리는 커플이죠?"
돈이 돌아다보니, 현관 의자에 그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모두, 두 사람이 결혼할 날을 기다리고있죠."
마일라도 다가와서 어머니 옆 의자에 앉았다. 밝은 불빛이 두 사람의 들뜬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순간 돈은 랄프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있는 힘껏 참고 있었다. 다시 드발레 부인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을 것이다.
"여길 떠날 날은 결정했어?"
돈은 오랫동안 남편의 어머니를 아무 말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뇨. 아직이에요."
바로 부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나고 표정이 험악해졌다.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 이유를 모르겠어. 몸이 안좋다고 랄프에게 들었지만, 왜 이곳을 요양장소로 택했지?"
"이유는 아시는 그대로에요."
이때까지 돈은 이런 대결을 잘 피해왔다. 하루종일 메어릴을 타고 나가 집에는 안 있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여자들이 돌아온 이래, 집안은 돈에게 편안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의 정리가 될 때까지 도망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랄프가 설명했을 거라고 했지?" 드발레 부인은 의자등에 기대어 돈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얘기는 이상해. 지금까지 당신 아버지에 대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어. 기간도 정하지 않고, 당신을 우리집 애한테 맡길 정도로 친한 친구인데 그럴 수 있나?"
드발레 부인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돈은 결국 랄프가 생각한 구실은 신빙성이 희박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다시 설득력 있는 얘기가 생각나지 않아서, 잘되기만을 바랄 수 밖에 없었다.
또 자신의 존재로 랄프가 얼마나 곤란한 입장에 처했는지 돈은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을 이집에 묶어두고 있는 건 그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적대적인 세 여자들과 보내는 하루하루가 우울했다. 이 집에는 누구 한 사람 진심으로 맞아줄 사람이 없는 건 아닐까.
드발레 부인은 또다시 도전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돈은 화가 났지만,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말하겠습니다. 아마도 랄프에게는 당신이 모르는 친구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젊은 남자가 부모에게 모두 얘기하지 않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겠죠."
"그애가 내게 숨길 일이 있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 말을 듣고 돈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이상해요?" 마일라가 말했다.
"랄프에겐 비밀 따위가 없다고 당신어머니가 자신 있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돈은, 그 얘기를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드발레 부인이 놀라 격노하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틀림없이 당신 아드님은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즉각, 드발레 부인과 마일라가 눈짓을 주고받는 걸 보며 돈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아챘다.
"당신도 그 비밀을 알겠네?" 부인은 돈의 얼굴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몰래 자기에 대해 얘기하는 걸 알면 랄프는 기분 나쁠 거예요." 돈은 단호한 태도로 그렇게 말하고, 두 사람을 남겨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랄프에게 물어봐야겠어!" 현관에서 드발레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애보고 분명히 해명하라고 해야 돼!"
처음에 돈은 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을 작정이었으나 기분이 안정되질 않았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밤중에 정원에 있다는 사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여자는 그의 아내가 될 날을 꿈꾸고 있는 에스터였던 것이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돈은 두 사람이 모습을 감춘 앞뜰을 피해 집 안쪽으로 가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에 발은 에이비스의 비밀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밤에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랄프에게 들었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다정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귀에 들리는 건 풀벌레 소리와 가끔 들리는 새 울음소리, 바람타고 들려오는 북소리뿐이었다. 넓은 밤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먼 곳에 있는 산들이 검게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풀 밟는 소리가 들렸다. 돈은 너무 놀라 귀를 기울였다가 바로 낯익은 소리에 안심했다. 샤이탄이었다.
"와주었구나......"
돈은 몸을 숙여 샤이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문득 이집을 떠날 때는 괴로울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반발심이 생겻다. 나는 이 집에서 살 권리가 있다. 나갈 사람은 오히려 그 여자들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샤이탄이 마구 짖어대기 시작했다. 돈은 당황해서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으나, 사람그림자를 보고 샤이탄이 돌진해 갔다.
"샤이탄!"
그 목소리를 듣고 돈은 안심했지만, 바로 몸이 굳어졌다. 산책중인 랄프와 에스터를 우연히 만나게 된 건가?
"여기서 뭘 하오?"
돈은 랄프의 뒤를 살폈지만, 에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산책하러 왔어요. 산책하면 안 된다고 정해진 건 아니겠죠?"
돈은 랄프가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어두운 밤이라 그의 표정을 전혀 였볼 수 없었다.
"밤에 혼자서 걷는 건 지난번에도 주의 했을 텐데." 그 목소리는 조용해서 화내는 것 같지도 않고 비난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왜 산책나온 거요?"
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 보였던 그림자를 찾듯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저쪽에 누군가 있었어요......."
"나였소."
"하지만 샤이탄이 아직도 으르렁거려요."
"정말이오?" 랄프는 위를 돌아보았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밤에 혼자서 걷는 건 위험하다고 했는데 언제나 말을 듣겠소 돈?"
"미안해요."
"이제 두 번 다시 밤에는 나오지 마시오. 알겠소?"
"네, 알았어요." 사실 돈은 진짜로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남편의 다짐 따위는 필요 없었다.
"산책을 계속하고 싶소?"
"에스터는 어디 있어요? 함께 갔잖아요."
랄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갔소." 그 목소리에는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산책 계속하겠소?" 다시 똑같은 말을 물었다.
"예, 같이 가주실래요?"
"물론이오."
그리고 랄프가 손을 잡았기 때문에 돈은 놀랐다. 왜 에스터를 집으로 돌려보냈을까?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러나 그 대답을 알 수 없었다. 돈은 신경 쓰지 말고 남편과의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별빛이 쏟아지는 작은 길을 따라 걸어갔는데, 얼마 후에 돈은 남편에게 전해줘야 할 말을 꺼냈다.
"당신 어머니께서 내게 의문을 갖고 계세요."
"별로 놀랄 일이 아니지 않소?"
"그래요."
"하지만 어머니께선 언제 떠나느냐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당신은 뭐라 했소?"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대답했어요."
"솔직하게 말했군."
문득 랄프가 생각에 잠긴 듯하자, 돈은 그가 굉장히 먼 곳으로 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선, 당신에게는 비밀이 전혀 없다고 하시더군요."
랄프는 돈을 곁눈질로 힐끗 보았다.
"그래서 당신은 뭐라 했소?"
"무심결에 웃었어요. 어머니께서 의혹을 품고 계시지만, 당신가족은 처음부터 의심스런 눈으로 봤어요." 돈은 에이비스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내가 여기 있으면서, 언제 떠날지도 말하지 않으니까 기묘한 느낌을 주는 게 틀림없어요."
"분명히 당신은 번거로운 사태를 야기시켰소. 첫째로 이곳에 온 것, 다음으로 이곳에 있겠다고 떼쓴 것, 그게 원인이오." 랄프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잠자코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차를 살 작정이오?"
"여기 있으면 필요해요." 돈은 그렇게 말했지만, 이미 차를 살 결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어떡하면 좋을지, 확실히 모르겠어요."
그 목소리는 꺼림칙해 보였다.
"당신....... 에스터를 사랑하고 있죠?"
고요함. 한참후에 돈의 귓가에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생각하지만, 내게 여자를 사랑할 자격이 있겠소?"
"그럼, 에스터와의 결혼은 생각지 않나요?" 목소리가 들뜨고 심장 고동소리가 빨라졌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요?"
"결혼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오. 아무튼 나는 벌써 결혼했소."
"하지만 우리들은 헤어지게 되어 있잖아요."
그말에 대한 대답을 돈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으음, 나로서는 당신과 이대로 관계를 계속해도 상관은 없소. 물론 당신이 동의해야 가능한 얘기지만 말이오."
"계속해도 상관없다....... 그럼, 정말......."
몸속에 뜨거운 게 끓어 올라와서 돈은 도중에 말꼬리를 흐렸다.
"내게 연민을 느끼는 거예요?" 겨우 말할 수 있었다. 눈물이 쏟아져서 어두운 밤인 게 다행이었다.
"그렇소. 당신은 매력적이오." 랄프는 계속해서 걸었다.
"당신도 그렇지 않소? 그러니 헤어지지 말고 이대로 관계를 계속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오. 나는 내 애기가 생기면 좋고......"
"부탁이에요.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돈은 소리쳤다.
"왜 그렇게 냉정한 태도로 있었어요?"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오." 랄프는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좋소, 돈. 우리들은 결혼했소. 그건 형식상 그렇게 된 것이고 이혼도 전제로 한 것이요. 하지만 이렇게 가까워져서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는 걸 안 이상, 이대로 유지하는 게 도리가 아니겠소? 당신에게 친척도 없고 영국으로 돌아가도 일과 집을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하는데 나와 결혼한 상태로 있는 게 훨씬 간단하지 않소. 뭐라 해도 모든 게 해결되잖소?"
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건 부정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랄프가 말하는 만큼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에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이성적으로 빨리 영국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랄프처럼 사랑에 무감동한 남성과 이대로 헤어지지 않고 함께 있으면 지금보다 더 괴로울 게 눈에 보듯 뻔했다. 어린애가 생겨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이 집을 떠나는 게 좋을 듯싶었다.
랄프가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돈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답은 지금 하지 않아도 좋소. 잘 생각해 보고 말해주시오. 서둘지 마시오."
"우리들의 관계를 가족에게 말해야 되는데, 괜찮아요?"
"결혼생활을 계속하게 되면 어차피 얘기해야 되지 않겠소?"
"그럼 모두 함께 살 건가요?"
랄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이 그의 입장을 어렵게 한다는 걸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당신은 어머니와 언제까지라도 있고 싶지 않은가보오?"
"그렇지만 애가 생겼을 때 아지방도 없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가? 벌써 마음먹은 것처럼 얘기하고 있으니! 돈은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방 문제도 있군.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당신은 어머니와 잘 해나갈 자신이 없소."
"에이비스는 달라요. 우리들은 잘 지내고 있어요. 드디어 그녀가 마음을 열었어요."
"음, 나도 눈치 챘소. 당신에게 감사해야겠소."
돈은 잠시 주저했지만, 화제를 두 사람의 일에서 바꾸기 위해 에이비스와 쟈크의 데이트약속에 대한 것을 얘기했다.
"쟈크는 플레이보이가 아니에요. 당신이 오해한 거예요, 랄프. 쟈크는 에이비스를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에게 말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쟈크는 허락해 주길 바래요. 그는 진지하고, 진심으로 에이비스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 언젠가는 에이비스도 쟈크를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요."
"어쩐지 마음이 쓰였소. 그가 에이비스에게 마음이 있었군." 랄프는 재미있어 하는 말투였다.
"그럼 이제 에이비스도 살아갈 의욕을 찾은 건가?"
"상대가 쟈크라도 괜찮아요?"
"나는, 에이비스의 보호자가 아니오."
뜻밖이었다. 랄프는 그동안 쟈크와 만나지 말라고 화를 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쟈크와 여동생이 데이트를 한다는데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쟈크 집에 강아지가 태어났데요. 마침 에이비스가 개를 키우고 싶어 해서, 그가 선물한다는데 당신은 상관없나요?"
랄프는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상관없지만, 글쎄 샤이탄은 어떨까? 모두에게 귀염을 받고 있는데, 아마 새로 개가 집에 오면 질투하지 않을까?"
"강아지라 괜찮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군."
랄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잠자코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다시 입을 열였다.
"내방에 오지 않겠소, 돈?"
전신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반드시...... 들킬 거예요."
돈은 남편의 무리한 요구에 화가 나면서도 그의 방에 가고 싶은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주의하면, 오는 걸 눈치 채지 못할 거요."
"그러면, 아침은 어떡해요?"
들킬 게 두렵고, 떳떳치 못한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마저 느끼지만,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나서 돈은 안절부절 했다.
"괜찮을 거요. 무사히 방으로 돌아갈 수 있소. 예를 들면......" 랄프는 말을 멈추고 초조한 듯이 숨을 들이켰다.
"내게 오고 싶지 않소? 그렇게 들리는데."
돈은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입을 열면 후회할 말이 튀어나올까 봐서였다. 우울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품에 안기어 잠들고 싶었다.
10
침실 문이 나란히 있는 복도를 까치발로 걸어가면서 돈은 이런 위험한 짓을 하게 된 걸 후회하고 있었다. 혹시 여기서 문이 하나라도 열려, 랄프의 침실로 가는 걸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불안감에 휩싸여 발리 걸어갔지만,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랄프의 방 앞에까지 온 돈은 자신이 온 길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앞에 다크블루색 가운을 입은 랄프가 서 있었다. 벌써 샤워를 한 듯, 머리가 젖어 있었다. 돈은 깊게 숨을 들이키고 잠옷과 가운, 화장백을 들고 목욕탕으로 갔다. 심장의 고동이 이상하게 빨라졌다. 불안감에 가슴이 죄어오는 것 같았다.
"누가 발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라요."
돈이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자, 랄프는 아무 말 없이 목욕탕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돈은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돈은 기분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미소를 짓자, 랄프도 미소 지으며 팔을 벌려 그녀를 안으며 놀리듯이 말했다.
"바보군, 당신은. 모두 30분 전에 잠자리에 들었소."
"하지만 아직 잠들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이제 다른 사람들 일은 잊으시오."
그는 그녀의 날씬한 몸을 세게 껴안으며 오랫동안 입 맞추었다. 돈은 그의 목을 껴안고 환희가 온몸에 펴져가는 걸 느꼈다. 돈은 그의 요구에 따라 입을 열어, 그의 혀가 침입하도록 했다. 그 순간, 돈의 등줄기에 전류가 흘렀다.
커튼이 쳐지지 않은 창으로, 달빛이 실내에 쏟아져 들어왔다. 부드럽고 로맨틱한 빛이 하나가 되어버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방벽지에 비추고 있었다.
"당신은 죄를 짓는구려. 내 마음을 다짜고짜 흥분되게 만들어 버리다니......." 랄프의 목소리는 뜨겁고 다정했다.
"자, 키스해주오."
돈은 그의 말에 따라, 입을 맞추었다. 자신이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주인에게 구속된 노예, 혹은 정복자 앞에 선 패배자, 돈은 가는 팔로 그의 목을 껴안은 채, 손끝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랄프가 가는 어깨끈을 풀자 돈은 얼굴을 붉혔다. 그의 뜨거운 시선이 온몸을 지나갔다. 봉긋 솟아오른 탄력 있는 유방, 그 끝에 핑크빛 유두는 아직 애무를 받지 않았는데도 벌써 딱딱해지고 있었다. 랄프는 그것을 입 맞추며 혀끝으로 간지럽혔다. 손은 가슴을 어루만졌고, 돈은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몸속에 휘몰아치는 욕망의 태풍에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 순간, 전신이 떨리고 벌써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어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술에 취해버린 것 같은 도취감, 랄프는 승리를 과시하듯이 웃으며 돈을 들어올려, 바닥에 떨어진 잠옷을 밟고, 침대로 갔다. 태어날 때의 모습으로 누워있는 돈의 양쪽 가슴을 손에 움켜쥐고 천천히 어루만지며 아래로 내려갔다.
랄프는 가운을 벗어버리고 돈 옆에 누웠다. 달빛이 두 사람의 몸 위에 쏟아져 내리고 그 빛에 반짝이는 두 사람의 육체가 상대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두 사람은 격렬하게 정열을 불태우며, 몸 구석구석까지 세포 하나하나까지 뜨거워졌다. 그래서 마침내 두 사람은 폭발하고 천국에 들어선 것 같은 황홀함을 느꼈다.
이윽고 흥분이 가라앉자, 두 사람은 몸을 꼭 대고 누워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은 남편의 편안한 숨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잠이 들었다.
핑크빛 새벽하늘이 낮은 언덕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햇볕을 받아 금색으로 변하려는 때에 돈은 눈을 떴다.
6시 전에 자기 방으로 돌아갈 작정으로, 그때는 안전한 시간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돈은 아직 잠자고 있는 랄프를 흔들어 깨웠다.
"또 한 번, 당신을 안고 싶소."
"안돼요. 랄프! 늦잠 잤단 말이에요."
"늦잠? 도대체 몇시오?" 랄프는 팔을 빼서 침대 옆 테이블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7시 반이지 않소."
"전 방으로 가야해요......." 돈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진정해요, 돈.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소."
돈은 문 쪽으로 다가가 살짝 열어보고 빠져나갈 복도를 살펴보았다.
"저, 갈게요."
돈은 신중하게 걸어갔다. 마음은 불안함으로 두근거렸다. 드발레 부인의 방 앞을 지날 때, 그 불안함은 후회로 바뀌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과 정면으로 맞부닥치게 된 것이었다.
"안녕, 돈."
그 목소리는 험악했고, 그 시선도 그에 못지않게 날카롭게 그녀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돈은 잠옷과 가운을 랄프의 방에 놔두고 왔고 화장품백만 들고 있었는데, 그것도 놔두고 오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드발레 부인이 말했다.
"잘 잤어? 어젯밤 늦게 아들 침실로 가는 모습을 보았지...... 당신은 내가 잠들었을 거라 생각했을 테지만 말야."
돈은 입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지만 상대를 바라보고 아무 말 없이 지나쳤다. 그러나 방으로 돌아와서는 무릎의 힘이 빠지고 온몸이 떨렸다. 분노, 남편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방을 나와 남편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실내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욕실에 가보니, 샤워커튼 너머에 랄프의 건장한 몸이 보였다.
"우리들의 일, 어머니께 알리겠어요."
돈이 소리치자, 랄프가 커튼을 걷고 나왔다. 돈은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는데, 오히려 랄프 쪽은 그런 모습을 보고 웃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어젯밤, 내가 여기 온 걸 어머니께서 아세요. 조금 전에 내가 방 앞을 지나가길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아요."
랄프는 갈색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니는 뭐라 하셨소?"
"잘 잤냐고요."
"어머니다운 말투군!"
"신경 쓰이지 않아요?"
"물론, 신경 쓰이오. 하지만 알아버렸으니 할 수 없지......."
"거짓말! 신경 쓰지도 않으면서!" 돈은 랄프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소리 질렀다.
"난, 부끄러운 짓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부끄러웠어요. 굴욕적인 기분이라구요!" 그리고 등을 돌려 방을 뛰쳐나오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침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여자들과 얼굴을 마주칠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역시 지금은 그녀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돈은 메어릴을 타고 샤이탄을 데리고 숲속으로 달려갔다.
그때, 문득 에이비스의 비밀장소 근처에 와 있는 걸 깨달았다. 풀을 뜯어먹을 수 있는 곳에 말을 매어놓고, 걸어서 폭포 옆으로 가서 앉았다.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교차되고 있었다.
랄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결혼생활을 연장하자는 소리가 마음 한구석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이 부부가 된 것을 어머니에게 고백하고, 모든 걸 해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부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짝사랑만 존재하는 결혼생활은 잘 될 수가 없다. 여자를 사랑할 사람이 아니라고 랄프도 말했지 않은가. 육체적인 만족과 기쁨이외에는 결혼생활에서 원하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남자와의 결혼을 계속할 수는 없다고 돈은 결심했다. 그러나 그건 전보다도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이었다. 에이비스의 상처가 치유되듯이 돈도 자신의 고통은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다.
점심때가 되었을 때, 돈이 문득 고개를 드니 옆에 에이비스가 서 있었다. 놀라움과 노여움이 섞인 눈빛으로 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메어릴을 보고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어요." 에이비스는 중얼거렸다.
"어떻게 여길 알았어요?"
"우연이었어요. 당신의 경우와 똑같은 거예요." 돈은 쓸쓸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여기가 당신의 장소라는 걸 알았어요. 당신의 손수건을 발견했었죠."
"내거요? 어떻게 내 것이라는 걸 알았죠?"
에이비스가 다가와서, 폭포 쪽으로 걸어갔다. 물이 떨어지면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흘러내려갔다.
"A라는 이니셜이 수놓아져 있었어요."
에이비스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본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기분 탓일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돈은 무심결에 물었다.
"오늘 아침 어머니께서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셨나요?"
에이비스는 고개를 저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뇨, 그런 걸 왜 묻죠?"
돈은 에이비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드발레 부인이 오늘아침의 사건을 자기 혼자서 가슴 속에 담아둘 리가 없었다. 아마도 막내딸에게는 말하지 않은 듯하지만, 마일라와 에스터에게는 얘기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얘기했다면 마일라한테만 하고 에스터에게는 잠자코 있었을 것이다.
"별다른 의미는 없어요." 에이비스가 대답을 재촉하듯이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돈은 대답했다.
"마음 쓰지 말아요. 저...... 랄프는 어디있어요?"
"내가 나올 때는 서재에 있었어요. 그런데 랄프도 당신이 어디 있냐고 물어서 메어릴을 타고 나가는 걸 봤다고 대답했어요." 에이비스는 의혹을 나타냈는데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돈?"
"뭐요?" 돈은 모르는 척 했다.
"알겠어요." 에이비스는 다시 몇 걸음 폭포 쪽으로 다가갔다.
"당신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묻지 않을게요. 우리들, 친구가 된 것 같았는데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는 아직 되지 않았나 봐요. 할 수 없죠. 알게 된 지도 얼마 안됐으니까요." 눈동자는 슬픔에 젖었고 입가는 떨리고 있었다.
"당신에 대해 뭐든 알고 싶어요, 돈. 하지만 안 되겠죠. 이제 영국으로 돌아가 버리겠죠. 편지할 건가요? 정말 짧았지만 당신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을 내게 해줬어요."
에이비스는 몸을 숙여 연못가에 피어있는 꽃의 향기를 맡았다. 하늘은 파랗고, 하얀 구름은 모습을 바꾸며 흘러갔다.
"고향에 가면, 바로 편지 쓸게요......" 돈은 이곳을 영원히 떠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메었다.
"돈,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에이비스는 조용히 말했다.
"랄프는 지금도 당신을 찾고 있을 거예요.
"그가?" 돈은 놀랐다.
"왠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어요.
그 말만 하고 에이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돈이 머뭇거리며 드발레 부인이 있는 장소를 물으니, 세 사람이 함께 차를 타고 마을로 갔다고 말했다.
"그분들 밤에나 돌아올 거예요." 에이비스는 마지막에 그 말을 하고 가만히 돈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돈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말했다.
"난, 집에 돌아가 보겠어요."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 있었소?" 노크하고 돈이 서재로 들어가자, 랄프는 책상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당신은 몇 시간이나 없어졌었소."
돈은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들며 똑바로 쳐다보았다.
"뭘 하든 내맘대로에요!"
그 말에 랄프는 화가 난 듯했지만, 자신을 자제하고 있었다.
"당신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소. 그걸 알기 때문에......"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디 있었는지 묻는 거요." 당장이라도 화를 폭발시킬 듯한 모습이었다.
"대답하시오. 지금 당장!"
"상상에 맡기겠어요."
"도망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오."
"당신 방에서 나오는 걸 어머니가 보셨기에 모두에게 말하기 전에 집을 나가 있고 싶었어요."
"어머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소. 나만 빼고 말이오."
"당신만 빼고요?" 돈은 앵무새처럼 되받아 말했다.
"그러면 랄프, 어머니와 얘기했나요?"
"그렇소." 갈색 눈동자가 강철과 같이 차갑게 반짝였다.
"어머니는 대단히 화가 나셨소......."
"당연하잖아요! 달리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당신과 결혼한 사실을 얘기했소."
돈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랄프는 침착하게 얘기를 계속했다.
"나로서는......"
"어머니께 얘기했다......?" 돈은 당황해서 랄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약속한 시간이 지나면 이혼할 작정이에요.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어머니께 말해 버리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난 당신과의 결혼을 계속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전보다도 더 복잡하게 만들었어요."
기분 탓일까? 랄프의 얼굴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와의 결혼생활을 계속하고 싶지 않소? 진심이오?"
"예, 진심이에요. 사랑없는 결혼은 생각할 수도 없어요. 처음 결정한 대로 3년이란 기간이 지나면 헤어져요."
"결심은 변하지 않는 거요?"
"예, 변하지 않아요." 돈은 분명히 그렇게 대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알았소......" 그 말에도 불구하고 표정을 보면 돈은 그가 납득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 떠날 거요?"
"가능한 한 빨리요."
돈은 등줄기가 오싹했다. 실망감이 가슴속에 저려왔다. 울고 싶었다. 울면 조금은 나아지겠지만, 앞으로 오랜 세월을 추억과 갈망을 가슴에 품고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암담했다.
랄프가 지니고 있는 냉혹함을 어떻게 하면 이길까? 랄프는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면서 말했던 것이다.
"나는 당신과의 결혼을 이대로 계속해도 상관없소.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말이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그럼 이번 주말에 떠나도록 준비하겠소." 돈의 귓가에 랄프의 비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전에 당신이 생활하는데 곤란하지 않도록 금전문제를 얘기해야겠소. 입장에 어울릴 만한 집과 수입이 있어야 할거요."
돈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랄프를 바라보며, 감사의 말을 꺼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 주니 진심으로 고마워요."
그에 대해 랄프는 고개만 끄덕였기 때문에 돈은 놀랐다. 예의적인 말투에 화를 내고 대들 거라고 짐작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신의 존재조차 몰랐소."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당신은 생판 남으로 보지도 알지도 못한 사람이었소. 본래 내게는 처음에 주고받은 약속 이외의 책임은 아무것도 없었소. 그 약속은 순수한 비즈니스였고, 그래서 내쪽에서는 감정적인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지금은요?" 돈은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랄프는 어깨를 움찔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사정이 조금 변했소. 우리들이 만나, 서로를 알아버렸기 때문이오. 나는 당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아오. 그래서 당신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소. 혹시 금전적인 면에서 곤란한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알려주시오.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 보내겠소."
"당신에게 그런 걸 바란 적은 없었어요......."
돈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랄프의 약속이 기쁘지 않았다. 자신의 상속분 중에서 조금이라도 손에 넣으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다는 걸 그렇게 갈망했던 날도 있었는데......
"그렇군. 당신은 이미 내게 부탁 따위는 하지 않았지." 랄프는 책상의자에 앉아 있었다.
"바쁘니까 이제 혼자 있게 해주시오."
"랄프......"
"응?" 랄프는 손으로 잡으려던 서류에서 눈을 떼었다.
"무슨 일이오?" 랄프의 딱딱한 표정을 보고 돈은 입을 다물었다.
'일을 계속하세요. 전 이만 실례하겠어요."
돈은 눈물을 참으며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이런 결론을 내린 건 자신이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랄프가 나중에 보인 다정함은 뭘까? 그의 눈동자 속에 뭔가가...... 아니, 가겠다고 결정한 이상, 더 생각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 새삼스레, 그에게 무었을 바라는 걸까.
돈은 초조함과 비참함을 느끼며 최선의 길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 집을 떠나는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다시 서재로 돌아가 말을 걸었다.
"주말까지 기다릴 수 없어요. 가능한 한 빠른 것을 예약해 주지 않겠어요?"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그 목소리는 가시가 돋쳐서, 돈은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떠나겠다고 정했으니, 머뭇거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랄프는 한참 돈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소.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해 보겠소."
기분이 안정되지 않아, 돈은 메어릴을 타고 집을 나섰다. 강쪽으로 가면서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말을 세워놓고 꽃향기를 맡는 것도, 파란 숲도, 벌레울음소리와 이름 모를 새소리도 이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하늘엔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태풍이 지나갈 듯했지만, 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죽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에이비스의 비밀장소를 둘러볼 작정이었다.
메어릴은 자기 등에 타고 있는 사람의 슬픔을 아는 듯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말과 개는 예민한 동물로 주인의 기분을 잘 관찰했다. 평소 때처럼 옆에 따라오던 샤이탄도 지금은 얌전하게 쫓아왔다.
돈은 메어릴의 등에서 내려 나무에 묶어놓고 콧잔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자 샤이탄이 질투를 하는지, 옆에서 얼굴을 문질러댔다. 돈은 무릎을 꿇어 샤이탄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윽고 돈은 강의 제방 위를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떠오르고,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도 생각났다.
돈은 계속해서 걸었다. 하루해가 지기 시작했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또 주위의 풍경이 낯설은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길은 나무의 뿌리가 노출되어 있어서 걷기 어려웠다.
돈은, 그레타가 죽고 나서의 일을 생각했다. 아프리카에 올 결심을 하고, 폴에게 이별을 고했을 때, 그때가 인생의 두 번째 전환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충동적이고 무모한 결심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순간, 자신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도 타협을 해서, 체재할 구실을 생각해주었다......
그 후의 일을 기억하는 건 견딜수 없어서 돈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 남편에 대한 추억도 색이 바래서 설령 생각난다 해도 마음속에 아픔이 느끼지 않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리고 만난적도 없는 노인이 남겨준 막대한 재산을 자신을 위해 즐거이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천둥소리가 들리자 돈은 비로소 충격을 받고,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어느 사이엔가 주위는 깜깜해져 있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몰랐을까?
모든 게 어둠속에 파묻혀 샤이탄을 빼고,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범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 닥치고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하늘에는 지그재그 모양으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샤이탄이 격렬하게 직기 시작했다. 돈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랄프가 개간한 과수원이 있을 듯했지만, 주위는 한층 더 어두워져서 소용없었다. 멀리 보이는 구릉은 마치 원시시대의 괴물들 같았다.
또다시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귀를 찢는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주에 불과하고, 얼마 후에 열대풍이 파괴적인 맹위를 떨치며 몰아닥칠 것 같았다.
이렇게 멀리 오다니 어리석었어! 집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 걸까? 돈은 걸어온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그 순간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돈은 메어릴을 나무에 묶어놓고 온 걸 후회했다. 도망칠 수 없어서 분명히 허둥대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돈은 뛰기 시작했다. 샤이탄도 계속 짖으면서 달렸다. 바람이 세어지고, 나뭇가지에서 잎들이 마구 떨어졌다. 열대풍을 경험한 것은 처음이지만, 그 위력을 돈은 랄프와 에이비스한테서 들었었다. 그것을 이제부터 현실로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져 잠깐 사이에 돈은 홀딱 젖었다. 길은 진흙투성이였고, 양쪽에 서 있는 나무들은 강한 바람으로 부러질 것 같았다. 하늘은 검은 구름에 뒤덮이고, 번개와 천둥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돈은 있는 힘을 다해 뛰었지만 서서히 속도가 떨어졌고 피곤했다. 사정없이 부는 강풍 때문에, 호흡도 맘대로 하기 어려웠다. 갑자기 눈앞에 섬광이 번뜩이더니 나무가 소리를 내며 길 앞에 쓰러졌다.
그 순간, 돈은 완전히 공포상태로 메어릴 걱정을 하며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멀리 온 걸까? 2킬로 가까이 달려왔는데, 도대체 눈에 익은 경치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정도 달렸으면 집도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돈은 자신을 위로하며 서둘러 갔다. 그러나 15분이 지나도 메어릴을 묶어놓은 장소를 찾지 못했다. 다른 길로 와버린 걸까? 길을 잃지는 않았을 텐데.
"샤이탄." 돈은 중얼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실망, 공포, 피로. 세 가지가 뒤섞여 가슴을 죄어왔다.
"내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을까?"
샤이탄이 짖으면서 달려왔다. 비와 진흙투성이였지만, 괜찮아 보였다.
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대로 가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길은 틀림없다고 생각됐지만....... 그러나 아직도 강이 나오지 않는 건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었어."
돈은 무심코 소리를 질렀는데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태풍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태풍은 수그러들 기미도 없어서 돈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10걸음도 가지 못해서 나무뿌리에 발목이 끼여 진흙 속에 쓰러져버렸다. 돈은 몸을 일으켜 어떻게든 발을 빼서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는데 울음이 복받쳐왔다. 샤이탄이 커다란 눈으로 돈을 바라보며 슬픈 듯이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시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나뭇가지가 머리에 부딪혔다. 순간 별이 보이고, 주위가 빙글빙글 돌다가 눈앞이 깜깜해졌다. 돈은 자신이 신음소리를 내는 걸 의식했지만 그 뒤는 망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돈은 사람소리에 눈을 떠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어떻게.......?
"겨우 의식이 돌아왔군."
랄프의 목소리...... 긴장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 돈은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중상이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따뜻한 손으로 돈의 이마를 짚으며 다른 손으로는 돈의 손목을 잡았다.
"기분은?"
돈은 자신을 보고 있는 핼쓱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의사선생님? 메어릴은 구했어요?"
"무사하오."
돈은 시선을 돌려,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메어릴을 찾았나요?" 돈은 목을 축이고 싶었다. 입안이 말라서 말하기 어려웟다.
"응, 찾은 건 나요."
"저도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소." 의사가 끼어들었다.
"별로 나쁘진 않아요. 뭔가...... 머리에 부딪혔어요."
"그래서 상처가 심하오. 아직은 가끔 아플 것이오. 다른 점에서 당신은 운이 좋았소. 만일 개가 없었다면 죽었을 거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 쓰러져 있었으니까요. 도대체 왜......"
"이제 됐어요, 톰." 랄프가 의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다 됐으면 가보세요. 내일도 오시겠죠?"
"네, 붕대를 바꿔야 돼요." 의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돈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진통제를 놔두고 가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침대에서 꼼짝 마시고, 내일 진찰이 끝나면 일어나도 됩니다."
"지금 몇 시나 됐어요?"
"저녁이오." 랄프가 대답했다. 돈은 창쪽을 바라보았다.
"그럼 태풍은 지나갔나요?"
"맹렬했지만 이제 끝났소." 의사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럼 랄프, 내일 봅시다."
의사가 문 쪽으로 가자, 랄프도 함께 방을 나갔다. 그리고 에이비스가 들어왔다.
"우리들 정말 걱정했어요." 꾸짖는 듯한 말투였다.
"샤이탄이 돌아왔을 때, 랄프는 걱정하다 못해 거의 미칠 지경이었어요. 샤이탄이 끙끙대며 뒤를 쫒아오라는 시늉을 했어요. 랄프는 하인 두 사람을 데리고 뛰어갔어요. 그리고 한 사람이 메어릴을 발견해서 데리고 돌아왔어요. 랄프가 나무에 묶여있는 말을 발견했고, 그 후에 당신을 찾아낸 거예요."
"완전히 길을 잃었어요. 미안해요."
"난, 그렇게 정신없는 오빠를 처음 봤어요."
"당신 오빠가 데려와주었군요...... 모두 어떻게 해서 데려왔나요?"
"오빠가 혼자 안고 왔어요. 그후에 내가 옷을 벗기고 침대에 뉘었어요. 태풍 때문에 차가 부서져서 어머니는 마을에 묶기로 했나봐요."
"그럼 없어요?"
"예, 오늘 일은 아무도 몰라요."
"잘됐군요."
"그들이 싫죠, 돈?"
"그들이 나를 싫어해요."
에이비스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랄프가 들어왔다.
"에이비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니?"
"마실 거라도 만들어 오겠어요." 에이비스는 미소 지으며 사라졌다.
랄프는 문을 닫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페를 끼쳐서 미안해요, 랄프. 그렇게 멀리 갈 작정은 아니었는데, 부탁이니 믿어줘요. 멀리 갈 작정이었으면 메어릴을 놔두고 가지 않았을 거예요. 조금씩 걸어가다가......"
"그러나 태풍이 오리란 건 알았을 거요."
"신경 쓰지 못했어요. 생각에 잠겨서......." 목소리는 작아지고 떨렸다.
"고마워요...... 찾으러 와줘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오." 랄프의 목소리는 험악했다.
"샤이탄이 진흙투성이로 돌아왔기 때문에 누구나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았을 거요. 당신이 말을 타고 나가서, 처음엔 낙마했는 줄 알았소. 하지만 메어릴이 나무에 묶여 있는 걸 보고......"
돈은 랄프의 이마에 땀이 맺혀있는 걸 보고 놀랐다.
"돈, 기분은 어떻소?" 랄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프오?"
"아뇨, 지금은 괜찮아요."
돈은 잠자코 있었다.
"이번 일로, 우리들의 약속, 안되겠죠?"
"무슨 약속?"
돈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떠난다......"
"당신은 떠날 수 없소." 랄프는 단호한 말투로 돈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은 나의 아내요. 나와 함께 이집에서 살아야 하오!"
"하지만......."
"그만하오, 돈. 당신이 선택해서 여기 왔소. 당신의 일방적인 판단으로 말이오. 그러나 이번은 내가 정할 차례요. 당신은 내 아내로서 영원히 이집에서 살아야하오! 이 돈베야 롯지에 찾아와서 내가 당신 남편인 걸 상기시켜놓고, 태연하게 영국으로 돌아간다고? 당신 생각대로 행동하는 골빈 남자라고 생각하오? 공교롭게도 당신은 그 반대인 남자와 상대하고 있소."
돈은 에이비스의 말을 기억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걱정하는 오빠는 처음 봤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랄프가 애정을 느끼는 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화내고 있는 지금의 태도는 무서운 경험을 하고 난 상대에게 할수 있는게 아니었다. 돈은 자신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가슴에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에게 동정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상의 소용돌이를 한 몸에 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랄프는 똑바로 서서 쳐다볼 뿐이었다. 돈에게는 랄프가 이 정도로 강하고 상대하기 힘든 상대로 보인적은 없었다. 그의 그런 태도가 눈물을 더 쏟아지게 만들었다. 지금 돈은 비참함으로 온몸에 힘이 빠졌다. 상대를 힐책하는 말이,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 나와 버렸다.
".......건방지고, 냉정하고...... 당신 같은 사람 정말 싫은데, 왜 이런 사람을 사랑해 버렸지? 자신만 알고, 다정하지도 않은데......"
"잠깐, 기다리시오! 지금 당신 뭐라 했소? 나를 사랑한다고 했소?"
"아뇨 사랑 따윈 없어요. 누가 당신 같은......"
"당신이 붕대를 머리에 감고 누워있지 않았다면 이 손이 가만있지 않았을 거요. 나를 사랑한다면 왜 영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소?"
"난 사랑 따윈 하지 않아요." 돈은 얼른 대답했다.
"당신이야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잖아요."
랄프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돈의 얼굴을 오랫동안 가만히 쳐다보다가 조금 전까지 굳게 다물었던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은 바보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지성적이긴 하지만, 여자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직감은 갖고 있지 못하는 것 같소."
"직감?"
랄프는 손수건을 꺼내, 돈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당신이 건강해지면 설명해 주겠소."
"하지만 랄프......"
"남편이 야단치는데 방해하지 마오!"
랄프는 몸을 숙여 돈의 입술에 가만히 입 맞추었다.
"돈, 나를 사랑한다는 걸 왜 말하지 않았소?"
"나도 똑같은 말을 당신에게 묻고 싶어요."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 나는 내 자신의 진심을 알았소. 당신 쪽은 훨씬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있던 것 같소만....."
"하지만 내쪽에서 말할 수는 없잖아요? 당신이 똑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어요."
"그렇군. 아, 돈. 지금 여기서 당신을 껴안고 싶소! 하지만 참겠소. 빨리 건강해지시오."
돈은 눈을 반짝이며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랄프. 약속할게요."
두 사람은 어둠속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돈의 작은 손은, 남편의 다부지고 힘센 손 안에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기쁨에 행복해 하며 돈은 랄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꿈만 같아요."
그에 대한 사랑이 온몸에 퍼져갔다.
"당신이 와준 것 정말 고맙소." 랄프는 멈춰 서서 돈에게 입을 맞추었다.
"1년 반 동안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소!"
돈은 낮게 웃으며 가만히 얼굴을 들어 길고 격렬한 키스를 했다. 두 사람의 몸이 입술처럼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에이비스만 빼고, 모두 집을 나갈 거요."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원래 돈베야 롯지에 살 권리가 없었소. 또 내 아내가 있으니 어머니는 나가서 사신다고 했소."
"어디 계실 건가요?"
"에스터에게는 아버지가 남기신 집이 있소.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있는데, 지금은 비어 있소. 그곳에서 살 건데, 아마 얼마동안은 어머니와 에스터도 함께 있을 거요."
"때때로 놀러와 주실까요? 어머니와 마일라만이라도요."
"글세, 그 세사 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랄프가 생각에 잠긴 것 같아서 돈은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가족을 이곳에서 살게 했을 때 랄프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 시점에서 아내 되는 사람이 나타나는 일은 예정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게 변한 이상, 세 사람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집이 있는 게 다행이라고 돈은 생각했다.
얼마 후에, 돈은 입을 열었다.
"에이비스는 쟈크와 교제를 시작했나요?"
"그런 것 같소."
"토요일 댄스파티가 기다려져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놓칠 수 없잖아요."
"토요일 파티라니 말도 안되오. 태풍 속에서 살아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정원을 산책하는 것도 사실은 걱정된단 말이오."
그날 밤, 두 사람은 랄프의 방에서 두 사람만의 저녁식사를 하며 잠깐 동안이라는 조건하에 산책하러 나온 것이었다.
밤공기는 달콤했고, 해가 진 후, 보랏빛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은빛 달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은 정말 믿을 수 없어요, 랄프. 어제와 오늘 하루 만에 세상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 같아요."
"나도 똑같은 기분이오."
랄프는 돈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밝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간이 정지해 버린 것 같았다.
"자, 산책은 이제 그만 합시다." 신중한 목소리였다.
"안으로 들어갈 시간이오."
돈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랄프. 안으로 들어가요."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짙은 보랏빛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두 사람의 집을 은백색 빛으로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