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내게로 당신이
나 여기 있어...
아이 방 꾸미는 일이 다 끝났다. 커튼을 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작은 방은 화사한 꿈의 궁전이 되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이나 인희는 그 방을 들여다보았다. 빨래를 하다가도 물 묻은 손으로 달려와 아이 방을 열어보았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베개를 들고 아이 방으로 건너왔다. 그 방에 있으면 나른하고 아늑한 잠이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곤 했다. 까닭 없이 마음이 불안해도 인희는 아이 방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있다 나오곤 했다. 그러면 이윽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이 방 꾸미기를 끝냄과 거의 동시에 태동이 시작되었다. 화창한 어느 여름 아침의 일이었다. 무릎을 꿇고 정성 들여 아이 방을 닦고 있는데 아이가 배를 툭툭 차고 있는 것이었다. 인희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아이는 다시 신호를 보냈다. 툭툭툭. 이번에는 제법 오래 발길질을 했다.
나 여기 있어, 엄마.
아이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인희는 알아들었다.
나 여기 있어. 엄마는 혼자가 아니야.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가 전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 앞에 섰다. 아이를 보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볼 수 없다. 그녀는 눈에 보일 듯 말 듯 부풀어 오른 자신의 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5개월인데 너무 표시가 안 난다고 걱정하던 혜영이의 말이 생각났다. 혜영이 말고 누군가에게, 뱃속에서 아이가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지만, 그러나 그럴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희는 처음으로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슬픈 일이라는 것도 시인한다. 인희는 거울 속에 비치는 창백한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보며 중얼거린다.
어쨌든,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야. 지금부터는 내 아이와 둘이야.
망설임 다음에...
정말이지 망설이다 망설이다 맞닥뜨린 사건이었다. 하기야 오늘 마주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 또 찾아올 사람이긴 했지만.
간신히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아침이었다. 침대에 누워 출근하거나 등교하는 이들의 부산한 바깥 기척을 듣고 있는데 또 툭툭 신호가 왔다. 엄마, 나 여기 있어, 하는 아이의 발길질. 그런데 문득 그녀는 아이의 발길질이 어제나 그제에 비해 몹시 힘이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해서 이마를 짚어보니 따끈할 정도로 또 열이 솟고 있었다. 맞잡아 보는 손도 뜨겁고 옷 위로까지 뜨거운 체온이 전해지는 듯해서 몹시 기분이 상했다. 알 수 없는 이 열이 자신의 몸만 상하게 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지만 아이의 몸까지 다치게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병원에 가봐야 해. 이제는 나 혼자만의 몸이 아닌걸. 설마 별일이야 있을까. 혈압이 조금 낮다고 했었지. 다른 검사를 해보자는 것도 혈압이 낮은 이유를 찾기 위한 것이었으니 두려워할 것은 없어. 보호자와 함께 오라는 말에 불편해할 것도 아니야. 나의 보호자는 바로 나니까. 별일이야 아니겠지만 우리 아기의 힘을 약하게 하고 있는 이 발열의 원인은 꼭 알아야겠어. 그래, 다른 병원에 가서 무조건 열이 난다고 말해보는 거야. 꼭 그 병원에 다시 가란 법은 없지.
마음이 변하기 전에 행동에 옮겼어야 했는데 오전에는 정말로 기운이 없어서 움직이질 못했다. 저 뜨거운 뙤약볕 속으로 뛰어들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오후나 되어서 햇살이 누그러지면, 약간이나마 서늘한 바람이 불기만 하면 그때 가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고 망설이다가 결국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마친 시간이 오후 4시. 옷까지 다 입었어도 막상 바깥을 내다보니 여전히 불볕이었다. 멀리 갈 것도 아니고 동네만 벗어날 정도의 거리에서 아무 병원이나 찾아가면 될 일이므로 조금 더 있다 나간다 해도 오늘 진료를 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터였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도 그녀는 병원에 가는 일이 싫었다.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혼자 살면서 자신의 몸을 건사하는 일에 전혀 망설임이 없었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도저히 단호하게 처신할 수가 없었다. 무언지 알 수 없는 불행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느낌, 서둘러 불행을 마중하기는 싫다는 그 이상한 느낌을 그녀는 애써 지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몇 번씩 나가려다 주저앉기를 되풀이하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경비실에서였다. 잔뜩 술이 취한 사내가 찾아왔는데 올려보낼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술이 취한 사내, 라는 경비원의 설명에 인희는 당장 그 사람의 남편을 떠올렸다. 지난여름에도 그녀 없는 사이 찾아와 난동을 부리고 갔던 술주정뱅이.
"알았어요. 제가 내려갈게요."
인희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다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고서 그렇게 병원 가는 일을 미루었나 싶으니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어머니하고 함께 살고 있다는 남자를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휠씬 폐인의 분위기를 풍기는 주정뱅이였다. 헝클어진 머리와 되는 대로 걸쳐 입은 옷이 흡사 집 없이 떠도는 걸인 같았다. 보아하니 술에 빠져있느라 며칠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눈치였다. 예순도 넘어 보이는 주름진 얼굴, 술에 찌들어 까맣게 탄 얼굴을 보면서 인희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불행을 새삼 확인하고 목 안이 깔깔해졌다. 어머니의 삶은 그토록이나 새로워질 수 없었던가. 자식을 버리고서까지 갈구했던 행복은 그처럼이나 야멸차게 어머니를 피해갔어야만 했던가...
"네가 인희라는 애지? 그렇지? 네 어미가 늘상 가슴에 품고 사는 인간이 바로 너렸다! 그러면, 너는 내 딸이다!"
그녀를 본 사내의 혀 꼬부라진 첫마디는 마치 불로 새기는 도장처럼 확고한 것이었다. 너는 내 딸이다! 인희는 사내의 주문 같은 단언에 휘청 몸이 기우는 것을 간신히 바로잡고 서서 메마른 입술을 축인다. 나는 당신의 딸이 절대 아닙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사내의 흉칙한 몰골이 그녀의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네 에미가 월급 타서 몽땅 너 갖다줬지? 지 서방한테는 단돈 백 원도 아까워서 벌벌 떠는 년이 옛 서방 못 잊어서 너한테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싸서 갖다줬을걸. 그렇지? 왜 대답을 못 하냐? 왜 대답을 못 해?"
사내가 삿대질을 해대기 시작하자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경비실에 틀어박혀 있던 경비원이 뛰어나왔다.
"아가씨, 대체 이 사람하고 뭐가 돼요? 보세요, 완전히 갔어요. 대낮부터 무슨 술을 이렇게 먹었는지, 천지 분간을 못 한다니까요."
"이 새끼가, 야! 넌 뭐 하는 놈이야? 이 처녀가 내 딸이라는데 왜 못 믿어? 내가 아버지 된다 이 말씀이야!"
"정말 아버지 되는 양반입니까?"
경비원은 못 믿겠다는 듯이 인희를 쳐다본다. 그녀는 얼어붙은 입술을 뗄 수 없어 간신히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아니라는 뜻을 표현한다.
"그럼, 올라가세요. 이런 양반은 상대하면 더 날뛰니까 아예 내쫓아버립시다."
경비원은 당장에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고 함부로 다루기 시작한다. 술에 취해서 자신의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사내는 고래고래 소리만 지를 뿐 완력으로는 경비원에 당할 재주가 없다.
"이 새꺄! 대학까지 나와서 돈 잘 버는 딸년한테 애비가 용돈 좀 달라고 온 것도 잘못이냐?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이렇게 상놈의 세상이 되어버렸어, 응? 저도 사람이면 애비 술값 좀 보태야 될 것 아냐! 내가 여태 지 에미 뼈골 빠지게 벌어먹였는데 에미 대신 은공을 갚으라는 것도 잘못이냐구. 야, 이것 놓아. 난 저년 애비야! 내 딸이라니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경비원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잠깐만요."
그리곤 단숨에 집으로 올라와서 허겁지겁 서랍 속에서 봉투를 꺼냈다. 어머니라는 그 여자가 몰래 놓고 간 그 삼백만 원, 인희는 그 돈을 고스란히 보관해두고 있었다. 돌려주어야 할 돈이라면 이렇게 돌려주는 곳도 한 방법일 것이었다.
"난, 절대 당신 딸이 아니에요."
돈이 들어있는 봉투를 사내의 손에 건네주면서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겨우 그 말 한마디를 던졌다. 사내는 봉투 속을 들여다보더니 낄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야, 임마. 그래도 그런 게 아냐. 넌 내 딸이라니까."
사내는 흡족한 얼굴로 건들건들 돌아갔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런 거머리 같은 인간한테 돈을 줘 버릇하면 안 돼요. 처음부터 버릇을 들여야지 안 그러면 사흘도 못 가서 또 찾아온다니까요. 두고 보세요. 내 말이 틀리나..."
경비원은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섰다. 인희는 눈부시게 밝은 햇볕 속으로 고꾸라질 듯이 걸어가는 사내의 초라한 뒷모습을 오래도록 쳐다보며 오늘 병원에 가기는 이미 틀린 일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다시 타인으로
"미안하다..."
어머니라는 여자는, 아니 어머니임이 분명한 여자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슬그머니 보퉁이를 풀기 시작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서..."
인희는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어머니 또한 감히 들어올 생각은 하지 못하고 현관에서 신도 벗지 않은 채로 찬합들을 꺼낸다.
"열무김치 조금하고... 밑반찬 몇 가지... 맛은 없겠지만, 그래도 입맛 없는 여름에는 이런 것이라도 있으면 밥 넘기기가 수월하니까."
빈 보자기를 접어 손에 들고 여자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녀를 더듬는다. 인희는 고개를 숙여 그 시선을 피한다.
"... 그럼, 나는 갈 테니까... 그리고 이것은, 지난번에 그 인간이 뺏아간 돈인데... 조금 모자라지만."
여자는 거실 바닥에 조심스레 봉투를 내려놓는다.
"이 돈은, 정히 그러시다면 이 돈은, 받아두겠어요. 이 돈이라도 주어야 마음이 편하다면 그러지요. 하지만, 이제 여기 오지 마세요. 날 못 만난 것으로 하세요."
인희는 여자를 보지 않고 미리 준비한 말을 빠르게 뱉아내고 만다. 이 어색한 만남은 정말 너무 싫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싫은 것보다 둘 사이에 모래가 낀 듯한 이 껄그러운 만남이 너무나 피곤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라는 존재에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다. 그럴 바에야 만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휠씬 낫다.
인희의 야속한 말에도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다. 여전히 안타까운 눈길로 낯선 딸의 모습을 훔쳐보듯 살피다가 힘없이 돌아선다. 복도를 걷는 그이의 발자국 소리를 하나둘 세어보다 인희는 그만 핑그르 눈물이 도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마음의 기둥을 뽑아가 버린 사람, 상상 속의 어머니로 남지 못하고 현실의 누추한 어머니로 나타나 그나마 하나 남아있던 마음의 기둥까지 뽑아버린 사람. 원하지 않은 삶을 살기는 어머니나 나나 마찬가지인 것을...
편지 9
오세요. 당신.
오셔야 합니다. 당신은.
지금도 당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슴푸레한 안개에 싸여 갸우뚱하게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을 나는 봅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웁니다. 당신한테는 이곳이, 여기의 정결한 공기와 맑은 물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정말 오셔야 합니다. 오셔서 쉬어야 합니다.
당신이 내 편지에 응답을 보내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즐거우나, 그러나 응답하는 당신의 초췌한 얼굴은 나를 슬프게 합니다. 그렇게나 상하고 다친 뒤에야 당신은 나를 떠올립니다. 그래요, 당신을 원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무는 일은 당신의 상처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새벽 산책을 나가면 제일 먼저 당신이 계신 쪽을 향해 세 번 합장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원합니다. 그 상처가 독이 되어 당신을 쓰러뜨리기 전에 우리의 사랑이 시작되도록 해주십시오, 너무 늦지 않게 당신을 이 쉼터로 데려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새벽 찬 공기에 떨고 있는 이슬들을 보십니까. 이슬에 바짓가랑이가 흠씬 젖는 날의 태양은 너무나 눈부십니다. 눈물 같은 이슬의 배웅을 받으며 둥근 해가 떠오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풀섶에 맺힌 이슬 한 방울에서도 당신을 봅니다.
당신은 지금, 상심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갇혀 있습니다. 내 말이 틀리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십시오. 당신이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나는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향해 어떤 말을 하든 나는 전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무어라고 말을 하세요. 무슨 말이든, 한마디만 하세요. 이제 당신의 말이 있어야 할 때입니다. 기도 시간에 당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언제라도 대답하는 사랑
그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열에 들떠서 거의 정신을 잃고 있던 그녀의 귀에 소리가 닿은 것은 벨이 울리기 시작한지 십여 분이 지난 뒤였다. 인희는 간신히 몸을 추스려서 침대 머리맡에 있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많이 아파요? 괜찮은 거지요?"
성하상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주르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봐요, 내가 부르면 당신이 대답해줄 줄 믿었지요...
"말해봐요.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건가요?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트럭 기사를 깨워왔어요. 이제 전속력으로 당신한테 달려갈 테니까 제발 조금만 기다려 줘요. 아니, 우선 지난번에 내가 보내준 약을 먹어요. 뜨거운 물에, 아니 뜨거운 물이 없으면 그냥 찬물에라도 그 환약을 개서 삼켜요. 그러면 내가 갈 때까지 푹 잠들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들려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쏟아져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는 말없이도 그녀의 마음을 읽어냈다.
"그래요. 됐어요. 어서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는 끊겠다는 말도 없이 전화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인희는 힘을 내 그가 만들어준 약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트럭 기사를 재촉해서 고속도로를 달려올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고, 거짓말처럼 그녀는 잠이 들었다.
나는 나무에 묶여 있었다. 숲은 검고 짐승의 울음 뜨거웠다. 마을은 불빛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 몸을 뒤틀며 나무를 밀어댔지만 세상모르고 잠들었던 새 떨어져 내려 어쩔 줄 몰라 퍼드득인다.
발 등에 깃털이 떨어진다. 오, 놀라워라. 보드랍고 따뜻해. 가여워라. 내가 그랬구나. 어서 다시 잠들거라. 착한 아기. 나는 나를 나무에 묶어놓은 자가 누구인지 생각지 않으련다. 작은 새 놀란 숨소리 가라앉는 것 지키며 나도 그만 잠들고 싶구나.
누구였을까. 낮고도 느린 목소리. 은은한 향내에 싸여. 고요하게 사라지는 흰 옷자락. 부드러운 노래 남기는. 누구였을까. 이 한밤중에.
새는 잠들었구나. 나는 방금 어디에서 놓여난 듯하다. 어디를 갔다 온 것일까. 한기까지 더해 이렇게 묶여 있는데, 꿈을 꿨을까. 그 눈동자 맑은 샘물은. 샘물에 엎드려서 막 한 모금 떠 마셨을 때, 그 이상한 전언. 용서.
아, 그럼 내가 그 말을 선명히 기억해 내는 순간 나는 나무 기둥에서 천천히 풀려지고 있었다. 새들이 잠에서 깨며 깃을 치기 시작했다. 숲은 새벽빛을 깨닫고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얼굴 없던 분노여. 사자처럼 포효하던 분노여. 산맥을 넘어 질주하던 증오여.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을 한 공포여. 강물도 목을 죄던 어둠이여.
허옇고 허옇다던 절망이여. 내 너에게로 가노라. 질기고도 억센 밧줄을 풀고. 발 등에 깃털을 얹고 꽃을 들고. 돌아가거라. 부드러이 가라앉거라.
풀밭을 눕히는 순결한 바람이 되어. 바람을 물들이는 하늘빛 오랜 영혼이 되어.
이진명의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그날 아침
트럭 기사는 만삭의 여자를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애나 낳고 이사를 하든가 하시지, 이 지경을 해가지고 산꼴짜기로 들어가서 어쩔려고 그러시오."
어지간히 나이가 들어 보이는 기사는 삶의 풍파를 수다하게 겪은 사람답게 찬찬하고 심지가 깊어 보였다. 기사의 말에 성하상은 빙긋이 웃고, 그 웃음을 흉내 내어 인희도 그냥 싱긋 웃고 만다.
"서두릅시다요. 여름 마냥 해가 긴 것도 아니고, 산골짜기에서 짐 옮기다가 달 구경하기 십상이겠수."
"괜찮습니다. 마을까지만 가면 거기서부턴 또 일해 줄 분들을 구해놓았으니까요. 이 사람, 몸도 성치 않은 데 가실 때는 조심해서 운전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걱정마쇼. 나도 운전이라면 삼십 년을 넘게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거야 그렇고, 여기 이렇게 자리를 잡고 살아버리지 뭐하러 그 험한 산골짜기로 들어가는 거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젊은이들이구먼."
이 말에 성하상은 다시 인희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인희도 그를 향해 마주 웃는다. 간밤의 격렬한 고통이 지나가고 난 아침, 인희는 날아갈 듯이 몸이 가볍다고 느낀다.
성하상은 날렵한 동작으로 짐들을 옮겼다. 그녀가 이미 차근차근 짐을 꾸린 까닭에 일은 아주 간단했다. 혼자 살아온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의 흔적들도 묶어놓으니 별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살림이 훨씬 더 많았다. 그것에 대해 인희는 그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일일이 사러 다니려면 힘들 것 같아서 미리미리 마련해놓았어요. 그래도 갑작스레 필요한 물건들이 많이 생길걸요."
남자의 눈은 말한다. 얼마든지, 무엇이라고 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이런 사랑도 훼손되는가. 세상의 무엇이라도 다 내놓을 수 있다고 믿는 이런 사랑도 나중에는 더럽혀지고 변질되는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다치고 상처 입는가. 이 사랑도 나중에 흉기가 되어 나를 찌를 것인가.
인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 사랑은 무엇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떠나가는 배
"자, 여기 넓어요. 편하게 앉아도 된다니까요."
"이만하면 특석인걸요. 트럭이 이렇게 편한 줄 처음 알았어요."
"장거리를 가야하는 데 만만찮을 겁니다. 인희씨가 비스듬히 누울 수 있게 나중에 난 짐칸으로 갈게요."
"말도 안 돼요. 여기도 넓은데 짐칸에는 왜..."
"난 아무래도 좋아요. 무사히 인희씨를 데려가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으니까 제발 내 말대로만 해요."
시내를 빠져나가는 동안 하염없이 계속되는 두 사람의 실랑이 비집고 트럭 기사가 한마디 참견을 한다.
"하여간 보기 드문 젊은이들이구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내내 그렇게만 사쇼. 세상에 그만한 복도 없으니까."
두 사람은 또 하얗게 웃어버린다. 웃다가 갑자기 닿은 남자의 어깨에 인희는 얼른 몸을 안쪽으로 잡아당긴다. 곧 익숙해지겠지. 아직은 정신이 친숙한 만큼 몸도 친숙해지기는 이르니까.
트럭은 복잡한 시내를 빠져나오자마자 이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는 평일이어서 그리 붐비지 않았다. 차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서 차체의 진동도 거세어졌다. 그녀는 남자가 불편할까 봐 자꾸만 자세를 반듯이하고 성하상은 여자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어 자꾸만 몸을 움츠린다. 서로가 서로를 염려한다는 결국은 불편을 낳는다는 것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남자였다.
"자, 여기에 기대요. 온몸을 다 기대요."
남자는 조심스럽게 여자의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놓았다.
"이대로 한숨 자요. 휴게소에 닿으면 깨워줄 테니까."
인희는 남자에게 기대어 눈을 감는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그리로 가야 하는지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는 자신을 오히려 의아해하면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두고 온 도시에 이다지도 애착이 없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만큼. 그 도시에서 태어나 그 도시의 역광장에 버려졌다. 한때 다른 곳으로 넘겨져 목숨을 연명했다가 철이 들자 이내 되돌아온 도시. 어느 하루도 긴장 없이 넘어갔던 날이 있었을까. 남들은 자연적으로 주어졌던 가정이, 부모가, 형제가 없다는 것을 견디는 일은 말만큼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결핍투성이였고 그 엉성한 현실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일은 혈투였다. 이제 현실과의 싸움은 끝난 것일까. 너무도 길고 지루했던 혼자와의 대결은 이것으로 마지막일까. 인희는 감은 눈 속에서 흘러가는 과거를 본다.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오게 만든 과거를 보며 그녀는 진저리를 친다.
지나치게 많이 살았다는 생각,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겹으로 그녀를 둘러싸고 그런 시간 속으로 트럭은 쉴새 없이 달린다. 이윽고 그녀는 잠이 든다. 그녀에게 어깨를 빌려준 남자의 고른 숨소리를 헤아리다가 아무 근심 없이 편한 잠속으로 툭, 떨어진다.
내가 닿은 기슭
얼마나 군불을 지폈으면 이렇게도 바닥이 뜨거울까. 인희는 몸을 뒤척이며 바깥으로 귀를 모은다. 창호지 문밖으로는 벌써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마당을 오가는 낯선 이들의 기척을 가려들으며 안희는 또 몸을 뒤척인다.
성하상은 노루봉 아래 마을에 도착하자 곧 그녀를 이 집으로 데려왔다. 미리 부탁을 해놓았다면서 자기가 다시 올 때까지 아무 걱정 말고 누워 있으라고 했다. 산 아래 마을에서 노루봉 산장까지 짐을 옮기는 일에 그녀가 도움을 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어둠을 뚫고 산행을 할 수도 없어서 막상 그녀는 그곳에서 하루 묵고 내일 아침에나 쉬엄쉬엄 산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어떤 것보다 더 안전하고 조심스럽게 옮겨야 할 것은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 그런 내 마음, 알지요?"
그가 이 방에 그녀를 뉘어놓고 나가면서 남긴 말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이런 몸을 하고 여기까지 온 자신의 무모함을 한 번쯤 되돌아볼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숲 내음 가득한 이 마을에 발을 딛으면서부터 인희는 곧바로 이곳 사람이 되었다. 두고 온 도시는 순식간에 까맣게 잊었다. 그녀에게는 여기 이곳만이 현실이었다.
트럭에서 내려 마을에 첫발을 디딜 때부터 그랬다. 푸른 어둠에 휩싸인 먼 곳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다간, 아, 하고 절로 탄성을 쏟았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그 사람 성하상처럼 모두들 그녀를 소중하게 다루어 주었다. 먼 길을 달려왔지만 피곤도 생각만큼 깊지 않았다. 뱃속의 아이도 기쁘다는 듯, 연달아, 나 여기 있어, 하고 신호를 보내왔다. 그녀는 깊은 호흡으로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아이에게 말했다. 그래. 다 잘 됐어. 이젠 평화의 시간만 남은 것 같아...
뜨거운 구들에 잦아드는 몸의 휴식을 즐기며 인희는 다시 귀를 기울인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마당을 울리는지, 저만큼 토방에서 울어대고 있는 저 풀벌레의 이름은 무엇인지, 뒤안에서 싸그락거리는 나뭇잎은 또 어떤 이름을 하고 있는 목숨인지...
과분한 사랑
아름다운 방이었다. 낮은 천장, 동쪽의 난 창문, 한자를 겹쳐 발라서 한없이 부드럽고 편안해 보이는 사방의 벽들, 그리고 거기 창가의 휴식을 위한 흔들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한눈에도 그 의자는 몇 달을 손때 묻혀 만든 그의 작품임이 분명했다. 나무 옹이 하나를 다듬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수고를 들였을는지, 윤기가 흐르는 나무의 결을 어루만져 보면서 인희는 그만 할 말을 잊는다.
콩기름을 먹여 반들반들하게 윤을 내놓은 장판 위에 정갈하게 깔려있는 이불 한 채, 낮으나 편안하게 보이는 베개 하나. 성하상은 그 베갯속에 담을 약초를 구하기 위해 여름 내내 노루봉을 헤매고 다녔다고 했다. 또 그 약초들을 말리는데 가을 햇볕이 얼마나 요긴하게 쓰였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것들을 띄엄띄엄 설명하면서 그는 빛나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날마다 휘파람을 불면서 다닌걸요."
그 밖에도 그가 휘파람을 불면서 신나게 했을 만한 일들이 산장 곳곳에 숨길 수 없이 드러나 있었다. 뒷곁 가득 쌓여있는 땔감들, 계곡의 물을 산장 안으로 끌어들이느라 벌였을 대공사, 이만한 높이의 산장에서는 좀체로 보기 어려운 훌륭한 시설의 부엌, 제대로 연기를 뽑아내고 불길을 살릴 수 있기까지 열 번도 넘게 실패했다가 간신히 성공했다는 벽난로, 흙을 밟지 않고도 산장 바깥을 드나들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박아놓은 디딤돌들...
산장에 도착한 첫날에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읽으며 무수히 감동하느라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도대체가 끝이 없었다. 천장을 열어보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세간들, 그 속에 그녀와 아이를 위한 너무나 예쁜 숟가락까지 빈틈없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었다. 마루방 입구에 놓인 신발장을 열어보면 아담하지만 튼튼하게 보이는 여자 등산화가 놓여있고, 마루방 천정에 주렁주렁 매달린 약초 봉지들은 모두가 그녀를 위한 그의 노고 어린 채집물들이었다. 문의 손잡이 위치 하나에도 그녀를 맞아하는 그의 정성이 넘치도록 담겨져 있는 아름다운 산장을 둘러보며 인희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어떻게 이런 마음이 나를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질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이 마음을 이토록이나 한 치의 의혹도 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것일까.
그의 마음을 눈으로 보는 일은 가슴 저리게 기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문득문득 이 벅찬 사랑이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한 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었다. 조금 부족한 것이 나에겐 어울리는데, 이건 너무 과분해, 라는 생각이 수시로 솟구쳤다. 산장에서의 한순간은 다 황금처럼 빛나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누려도 좋은지 불안해하는 심정만큼은 불길한 조짐처럼 천제나 그녀의 마음 한켠을 놓아주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난 한 번도 이런 넘치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지금의 이 기분은 불안이 아니라 불편일 것이야, 익숙하지 못한 자의 서툴음일 거야.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자한테는 시간이 필요해. 곧 익숙해질 거야. 걱정할 것은 없어. 이렇게 불편해하는 것조차 그한테 미안한 일인 것을...
첫 아침
그 방에서의 첫 밤. 인희는 향기로운 베개를 베고 햇솜으로 부풀린 이불을 덮은 채 아득한 행복감에 젖어 눈을 감았다. 바깥의 마루방에 아직 그가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편안했다. 무어라고 말을 해도 그는 듣지 않을 것이었다. 성하상은 그녀가 깊이깊이 잠들 때까지 거기서 마냥 지키고 있을 작정이었다. 이제 그녀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행복인 것을 조금쯤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것이 그를 기쁘게 하는 것임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인희는 즐겁게 그의 보호를 받아들였다.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가 기뻐하는 일이면 자신에게도 행복이라는 사실, 그 사랑의 첫걸음은 이토록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푹신하고 달콤했던 잠이었다. 베개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보석 같은 빛을 발하는 아침 햇볕이 동쪽 창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는 시각이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 인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버릇처럼 잠자리 위를 더듬다가 여기가 서울이 아님을 깨닫고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여기는 서울의 아파트가 아니었다. 공중 위에 떠 있는, 그 허공의 거처가 아니었다. 화학약품으로 소독시킨 수돗물로 목을 축이고, 아황산가스가 가득 찬 아침 공기로 심호흡을 하며, 밤새 쌓인 먼지가 철철 날리는 도시의 아침이 아니었다. 여기는 노루봉 정상 바로 밑, 사방이 빼꼭한 숲으로 병풍을 이루는 깊은 산 속이었다. 그리고 이 방에는 시계 따위는 아예 없었다. 방에 시계를 놓아두지 않은 것은 성하상의 뜻이었다. 그는 말했다.
여기의 방에서는 당신의 움직임 자체가 시간입니다.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라는 사실까지도 그냥 잊어버리세요. 잠들고 싶을 때 잠들고, 깨어나고 싶을 때 깨어나세요. 그동안 도시에서 충분하게 시간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이제는 자연의 시간대로 사세요. 머지않아 인위적인 시간 감각은 스러질 것이고 당신과 자연이 화합해서 만들어내는 당신만의 시간 감각이 생길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시간에 구속당하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맞았다. 7시, 혹은 12시, 오후 3시, 이런 시간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숲과 바람고 물소리에 어울려 살아야 할 이 자연 속에서 그런 구속은 얼마나 무의미한 행위일 것인가. 인희는 산장에서의 첫 아침에 당장 성하상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잠시만 더 베개 속의 향기에 취해있다가 일어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낯선 곳에서의 첫잠이었지만 놀라울 만큼 숙면이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잠시 후, 인희는 창밖으로 미루의 끙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지만 그녀는 금방 미루의 숨소리인 것을 알아차렸다.
미루야.
인희는 마음으로만 그렇게 나직이 개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루의 노란 털이 햇살 아래 반짝반짝 빛나고 있겠지. 인희는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가만히 창문을 열었다. 그러다 인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창밖에는 미루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거기 미루와 함께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성하상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그렇게 서 있었는지 이미 겨울 기운이 완연한 산속의 차가운 기온에 그의 얼굴은 파랗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 얼어붙은 얼굴은 그녀의 모습 앞에서 단박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잘 잤어요?"
"추운데, 여기는 왜..."
"아침 산책을 나왔다가 당신이 여기 잠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여기 서서 이 닫혀있는 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이렇게 당신 잠든 창을 바라보며 서 있을 수만 있어도 있어도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을 것이라는 생각만 줄곧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성하상의 눈에 성에처럼 어리는 것은 눈물이었을까. 인희 또한 남자의 그 맑고 깨끗한 얼굴 앞에서 그만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처럼 넘치는 사랑을 내게 주려고 삶은 그토록이나 인색했던 것이었을까. 이제까지의 시련은 그를 내게 보내려는 신의 단련이었을까.
그대, 나의 물푸레나무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숲으로 간다. 마치 정성 들여 가꾸어 놓은 자신의 정원을 보여주려는 신실한 정원사처럼 여자를 안내해서 숲으로 간다. 여기 솟는 샘은 하늘 아래 첫 샘입니다, 라고 말하며 물 한 모금을 권하는 남자. 저기 저곳은 산꼭대기 근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산갈나무 숲입니다. 산갈나무 숲에서는 표고버섯이 잘 자란답니다, 라고 말해주는 남자. 표고버섯을 딸 때마다 나는 숲에서 고맙다고 말하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신비의 명약을 주는 이 숲에서 정말 고맙다고 인사하지요, 라고 말하는 남자.
여자는 이런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 고 생각하며 가만가만 남자의 뒤를 따른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어찌 상상할 수 있었으랴. 여자는 남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잊지 않으려고 마음 깊이 새겨놓는다. 그리고 여자는 다짐한다. 먼 훗날, 내 아이를 데리고 여기 이 숲에 와서 나도 저 사람처럼 말해주리라...
남자는 잎사귀를 거의 다 떨군 채 황금빛 낙엽 몇 장만 드문드문 매달려 있는 숲에서 걸음을 멈춘다. 애잔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잎들을 올려다보다가 여자는 그 나무의 둥치에 몸을 기대고 쉰다.
"이것은 어떤 이름을 가진 나무인가요?"
그녀가 묻는다.
"물푸레, 물푸레나무지요."
"물푸레,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그 이름은 바로 당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지요?"
"이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물에 담그면 잉크빛 푸른 물로 변합니다. 그래서 물푸레나무지요. 당신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면 나는 그대로 푸르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물푸레나무입니다."
나의 물푸레나무. 내 마음을 푸른 잉크빛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바로 여기, 손만 뻗으면 얼굴을 만질 수 있는 이곳에 그 사람이 있다. 남자는 새삼 마음이 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여자는 남자의 변화를 눈치챈다. 격해 있는 그 사람을 위해 여자는 손을 내민다. 그리고 말한다.
"조금 힘들어요. 내려갈 땐 손 잡고 갈 거예요."
여자는 남자의 손을 꼭 쥐고 물푸레나무 숲을 벗어난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잊기 위해서 다시 물푸레나무를 이야기한다. 여자는 역시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등 뒤에서 겨울을 기다리는 물푸레나무들이 마른 가지를 부비며 두 사람을 전송한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몇 개의 잎사귀를 흔들며...
먼먼 옛날, 아주 커다란 물푸레나무 한 그루가 이 우주를 받치고 있었습니다. 우주를 떠받치는 물푸레나무의 가지는 셋이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가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장하는 운명의 샘에 닿아 있었습니다. 두 번째 가지는 어리석음과 욕망을 물리칠 수 있는 지혜의 샘을 향해 뻗어 있었습니다. 세 번째 가지는 또 어둠과 고통과 추위의 샘에 자신의 몸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물푸레나무는 이 세 가지 샘물을 마시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물푸레나무 가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져 있습니다.
북부유럽에 전해오는 신화 중에서
아름다운 일상
산장은 중앙의 상당히 넓은 마루방과 부엌, 그리고 그녀의 몫으로 꾸며진 남쪽의 작은 방과 그 반대편에 자리 잡은 그의 방이 내부 구조의 전부였다. 부엌 옆으로 창고처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 잇대어 처마를 달아내 바람 치는 북쪽을 스티로폼으로 막아놓은 곳이 바로 미루의 처소였다.
미루의 거처는 부엌의 창문을 열면 환히 잘 보였다. 부엌 창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면 현관 앞에 꼼짝도 않고 앉아있던 미루가 바람처럼 달려와 빤히 올려다보았다. 미루의 머루같이 까만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게 좋아서 인희는 가끔씩 오래도록 미루와 눈을 맞추고 앉아있곤 했다. 미루에게 밥을 주는 것 말고는 그녀가 할 일이라곤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루방의 식탁에는 김이 오르는 더운밥이 차려져 있곤 했다. 여름에 채취한 산나물들이 반찬의 전부이지만 식탁은 그의 정성으로 언제나 성대했다.
"밥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어요. 그래야 군식구 같은 생각이 안들지요."
그렇게 말해봐도 성하상은 허락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안 돼요. 예쁜 아이 낳고, 건강이 회복되면 그때 가서 당신이 지어주는 밥을 먹을 생각입니다. 그전에는 절대 안 돼요, 심심하면 미루 데리고 근처를 산책해봐요. 맑은 공기 속에서 걸어 다니면 훨씬 몸이 가벼워질 겁니다."
식탁 앞에 앉아서도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면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물 그릇 하나에 젓가락이 두 번만 가면 얼른 앞에다 옮겨주며 그 나물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이렇게
"그건 곰취 나물이에요. 일년내내 산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귀한 나물이지요. 봄에 여린 순을 따서 살짝 데쳤다가 바람 통하는 그늘에 말려놓으면 한겨울까지 곰취 향기를 맡을 수 있어요. 곰취는 맛과 향기도 좋지만 혈액순환에도 효과가 있는 약초입니다. 많이 말려놨으니까 걱정 없어요. 인희씨가 겨우 내내 질리도록 먹을 만큼 많아요."
뒷곁의 항아리에서 꺼내다 주는 홍시감을 세 개씩이나 먹어 치웠던 날 오후, 그는 그 길로 마을에 달려가서 지게 가득 과일을 사다 날랐다. 마을에 가면 아직도 따지 못한 감이 감나무에서 시큰하게 익어가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이미 겨울의 내음이 짙게 배어 있는 산장의 하루는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온전히 그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미루와 함께. 그밖에는 바람에 부스럭거리는 마른 나뭇잎 소리가 전부였고 가끔씩 표로롱 표로롱 날아다니는 산새의 지저귐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악처럼 여겨졌다. 그 고요 속에서 성하상은 잠시도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였다. 잠깐잠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그를 보면 어김없이 한 아름의 등짐이 지어져 있고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곤 했다.
"그건 뭐예요?"
"눈이 내리기 전에 뗄감을 주워오는 거예요. 산 아랜 아직 가을이지만 여긴 벌써 겨울이에요. 지금까지 마련한 것으로도 겨울나기에는 걱정이 없지만 아기가 태어날 테니까 충분히 준비해두는 것이 좋잖아요."
때로는 마을에 다녀왔다면서 그가 늘 지고 다니는 지게 가득 담아온 물건들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이건 밀가루, 이건 다진 쇠고기, 이건 고구마지요. 봐요. 여기 밤도 많이 구해왔어요. 이런 것은 시골이라 얼마든지 있습니다. 눈이 내리면 마을 다니기도 불편할 테니까 미리미리 저장해두는 것이에요. 인희씨가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하세요. 원주 나가면 구하지 못할 게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마을에 할머니 한 분한테도 부탁을 해두었습니다. 걱정말아요. 그것은 만약을 위한 것이고 택시를 부르면 언제라도 당신을 병원으로 옮길 수 있어요."
인희가 보기로 그는 매일같이 많은 지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산장에서 등산객 수발을 하며 버는 약간의 수입, 그리고 나무조각품을 만들어 가지는 약간의 수입을 다 합하여도 이만한 지출을 감당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하기야 그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몇 번의 실랑이가 있었다. 서울을 떠나는 트럭 안에서 이미 인희는 자기의 전 재산이 들어있는 통장을 그에게 맡기고자 했었다. 어차피 출산이다 뭐다해서 자신에게 소용될 비용들이 큰 부담이 될 산 생활이므로 그렇게 해주면 마음 놓고 지낼 수 있겠다고 설득을 했으나 성하상은 막무가내였다.
"당신을 데려오는 준비 속에 이만한 생각도 없었겠습니까. 제발 그런 말로 나를 슬프게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간직하고 있다가 당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가장 나를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전적으로 당신을 보호하고 싶다는 이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그는 한 번 하지 않겠다는 일에는 절대로 마음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인희에게 하는 부탁이라면 오직 한가지 뿐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받아만 달라는.
산장 생활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인희 역시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지만 그것 말고는 어떤 것으로도 그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셈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 그의 섬세한 배려를 의혹 없이 누리는 것, 바로 그것만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보답의 전부였다.
미루와의 산보
미루와 함께 산보를 나서는 것은 점심 식사 후가 좋았다. 그때는 성하상도 근처의 계곡 어딘가에 있을 시간이었다. 그는 산에서 구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인희의 식탁에 놓아줄 부식에서부터 이름 모를 산 열매의 달콤한 후식, 그리고 그녀의 건강을 지켜줄 약초와 땔감, 나무 조각에 필요한 재료까지 그는 모든 것을 산에서 구하고 산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그가 산자락을 헤매며 자신의 표현대로 '자연이 주는 혜택'을 거두어들이고 있을 때 인희도 가끔 미루와 함께 가파르지 않은 산줄기를 쉬엄쉬엄 걸으며 한없이 평안한 시간을 누렸다. 신발 아래서 사각사각 부서지는 마른 낙엽의 감촉이 간지러워 한참을 걸어도 질리지 않았다. 정말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평온의 시간들이었다.
미루는 영민하기 짝이 없는 개여서 인희가 온 날부터 완전히 그녀의 또 다른 보호자가 되었다. 두 사람이 다같이 밖에 나와도 성하상 쪽을 따라가지 않고 언제나 그녀의 옆에 남았다. 그토록이나 그림자같이 붙어 다니던 주인한테서 어떻게 하루아침에 떨어져 나와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하기 한이 없었지만 성하상은 아주 간단히 설명해주고 그만이었다.
"누가 더 자기를 필요로 하는지 미루가 모를 리 있겠어요? 미루의 눈에도 당신은 보호받을 사람으로 보이고 있는데 하물며 나는 어떠하겠습니까? 당신은 아직도 너무 쇠약해 보여요.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처럼 보여요. 당신은 웃고 있지만 내 눈에는 당신이 아픔을 참고 있는 것으로만 보여요. 산에 있다가도 당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지만, 한편으로는 그 파리한 얼굴이 나를 불안에 떨게 만들어요. 당신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미루가 나한테 알릴 거예요. 미루는 백 리 밖에서도 내 냄새를 맡지요. 마치 내가 당신한테 그러는 것처럼."
성하상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미루와 함께 있으면 인적 하나 없는 산중에서의 산보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녀가 길이 아닌 곳으로 걸음을 옮기면 당장 미루의 끙끙거림이 뒤쫓아왔다. 걷다가 숨이 가빠 주저앉기라도 하면 미루의 까만 눈이 쉴새 없이 인희의 얼굴을 더듬느라 분주하고, 멀리 산 까마귀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이 보이면 먼저 달려가 새 떼를 몰아내고 돌아와 자랑스레 그녀의 운동화에 코를 부비는 미루였다.
울창한 잎들은 낙엽으로 쌓이고, 마른 가지 사이로 거침없이 햇볕을 받아들이는 고요한 산길을 걸으며 그녀는 종종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를 자문하곤 했다. 자동차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사람들이 어깨를 툭툭 치며 걸어 다니는 도시의 거리에서 이렇게 감쪽같이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생각되었다. 한밤 자고 나면 깨어버릴 그런 꿈이 아닌가 싶어서 종종 등허리로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다. 행여 깨어버릴 꿈이 아닐까 근심하다 보면 어느새 미루가 옆에 다가와 가만히 그녀 얼굴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들의 저녁 시간
산속의 밤은 정말 빨리 찾아온다. 붉은 저녁놀을 보았는가 하면 어느새 까만 밤하늘의 제각각 자리로 작은 촛불 하나 밝혀 들고 나타나는 별들과 만난다. 하늘에 번지는 붉은 저녁놀은 성하상이라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갈 시간임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남자는 쌀부터 씻는다. 싸그락 싸그락 소리가 들려오면 오인희라는 여자, 부른 배를 내밀고 부엌문 앞에 놓인 작지만 편한 의자에 앉는다. 밥 짓는 것을 구경할 때 서 있지 말고 편히 앉아서 머무르라고 남자가 만들어준 작지만 편한 의자. 쌀을 씻은 다음에 성하상이란 남자, 도마질을 시작한다. 더덕의 둥그런 몸통을 칼등으로 두들겨 부드럽게 펴기도 하고, 파를 송송 썰기도 하며, 마늘을 콩콩 찧기도 한다. 때로 남자가 감자를 건네주면 여자는 숟가락으로 감자의 껍질을 벗기는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이번엔 남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여자가 감자 껍질 벗기는 모양을 구경한다. 여자가 껍질 벗긴 감자를 건네주면 남자는 그것을 숭덩숭덩 썰어 국을 끓이기도 하고 또각또각 썰어서 조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느 날은 또 강판에 썩썩 갈아서 들기름 두른 철판에 불을 지펴 동그란 부침을 부쳐준다. 감자 하나만 가지고도 남자는 열 가지쯤의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여자, 그런 남자에게 묻는다.
"굉장해요. 당신은 마술사예요."
그러면 남자,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화하게 웃는다.
"당신이 보고 있으면 요리가 마술이 돼요.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음식을 만들라고 해도 싫지 않을 것 같아요."
붉은 저녁놀이 사라지고 숱한 별들이 몸을 흔들며 빛을 뿌리는 시간에 두 사람은 마술사가 만든 밥과 반찬으로 저녁을 먹는다. 마루방 식탁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뜻한 음식들을 먹으면서 남자는 가끔씩 말한다.
"꼭꼭 씹어서 먹어요. 국물도 꼭꼭 씹어요."
자신을 위해 여자가 밥을 많이 먹으려고 애쓴다는 것을 남자는 안다. 그래서 자꾸 말한다. 꼭꼭 씹어야 해요. 체하면 안 돼요. 식탁을 치우고 그릇을 내놓는 일은 여자가 한다. 그러나 그릇을 씻는 일은 또 남자가 한다. 남자는 기름기는 밀가루로 씻어내고 눌어붙은 냄비는 흙을 묻혀 씻어낸다. 행주는 말갛게 헹구어서 줄에다 반듯하게 널고, 씻은 그릇은 눈보다 흰 마른행주로 물기 없이 닦아 천장에 차근차근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남자는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날마다 이름이 다른 잎차를 만든다. 그런 남자를 보며 여자는 또 말한다.
"당신, 설거지하는 발레리나 같아요. 정말 민첩하고 군더기가 없어요."
남자, 설거지하는 발레리나 같아요? 하다가 역시 환하게 웃는다.
잎차를 마시는 밤, 배가 불러 바닥에 자리를 잡는다. 남자는 여자의 무릎에 담요를 얹어주고 여자는 남자의 잔에 때때로 주전자의 차를 부어준다.
잎차를 마시는 밤, 그런 밤에 두 사람은 많은 말을 나누었다. 남자는 나직나직, 여자는 가만가만, 지나온 시간들을 서로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자는 자신의 열정적인 어머니에 대해서, 목석같은 아버지에 대해서, 스승 범서 선생에 대해서 주로 말했다. 남자의 말을 듣는 여자의 얼굴은 한없이 그윽했고 눈빛은 그지없이 고요했다.
처음에 여자는 자기는 말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말해버리곤 했다. 천사원 총무 할머니 때문에 조금 마음이 아팠지요, 하고 넘어가는 식으로 간단하게. 그러면 남자가 꼭 반문했다. 총무 할머니가 어떻게 했는데요? 그때, 당신은 몇 살이었지요? 키는 컸나요? 머리는 단발이었어요?
그러다가 점점 여자도 모든 것을 다 남자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총무 할머니한테 꼬집힌 팔뚝이 여기쯤이었다고 보여주기도 했다. 김진우라는 사람의 어머니가 어떻게 했었는지도 담담하게 다 말해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자는 문득 안타까웠다. 나한텐 왜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가 없을까. 이 사람에게 들려주면 콧등을 찡그리며 크게 웃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왜 내겐 이다지도 모자라는 것일까...
남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눈물로 들었다. 먼저 남자가 울고, 그다음에는 여자가 울었다. 소리도 없는 울음이었다. 눈가는 젖어 있지만 입가는 미소 짓고 있는, 아, 모두가 다 흐르는 물처럼 지나간 시간들에 바쳐지는 영롱한 눈물이었다. 이제는 절대 다시 침범하지 못할 그 시간들에게 고하는 작별 같은 것.
입안에 감도는 잎차 향기가 사라질 무렵이면 여자는 흔들의자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이제는 자야 할 시간이므로, 여자의 방은 언제나 훈훈했다. 남자는 그럼에도 그 시간이면 꼭 다시 군불을 지피러 뒤안으로 나간다. 여자는 그사이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이불속에 두 발을 넣어본다. 한참 뒤 남자가 마루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오인희라는 여자, 그렇게 가만히 그 사람이 곁에 있음을 마음으로 가득 느껴보다가 잠이 든다. 남자는 여자가 잠든 후에도 오랫동안 마루방에 머문다. 남자는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여자의 잠이 깊어질 때까지 방 밖에서 여자를 지킨다. 성하상이라는 남자, 하염없이 그렇게 밤을 지키다가 어느 날은 앉은 자리에서 새벽을 맞기도 한다...
첫눈이 오시던 날
영하의 날씨가 늦가을의 짱짱항 햇별에도 쭈그러들지 않던 어느 날, 성하상은 땅거미가 산 아래를 휘감고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부터 마루방 벽난로의 불씨를 일구기 시작하였다.
"고구마를 구워줄게요. 군밤도 만들 수 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부산하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인희는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였다. 뜨개질이라니, 이것 역시 결코 인희의 제안이 아니었다. 색색의 푹신한 털실과 대바늘 또한 성하상이 그녀를 맞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자상한 배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 산장의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뭔가 할 일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간은 어느 땐 쏜살같이 흐르지만 또 어떤 날은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한없이 더딘 걸음을 하면서 가슴에 상처를 남긴다고도 말했었다.
아직은 지루한 시간의 흐름으로 가슴에 상채기를 남긴 적은 없는 날들이었다. 그러기는커녕 이 산장의 생활은 나날이 새롭고 신선한 경험투성이였다. 날마다 변하는 산의 색깔, 밤과 낮이 다른 산의 소리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 그것들에 지루해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인희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뜨개질은 하고 싶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푹신한 스웨터 하나를 떠주고 싶다는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솟는 욕망이었다. 스웨터가 성공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아기의 외투, 양말, 모자, 이런 것들을 하나씩 뜨겠다고 인희는 다짐했다.
인희는 불쏘시개를 집어넣고 입으호 후후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스웨터의 품을 어림짐작하고, 밖으로 나가 굴뚝으로 연기가 잘 빠지는지 확인하고 돌아오는 남자의 앞모습을 훔쳐보며 어떤 모양의 스웨터가 어울릴 것인지 머릿속에서 상상해본다. 저 남자에겐 목둘레가 헐렁한 스타일보다는 사제의 로만컬러처럼 단정한 모양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블루 계통의 느슨한 가디간은 어떨까. 아니, 그에게 오렌지빛의 상큼한 조끼를 입혀보는 것은 어떨까...
하지만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그녀의 손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한없이 서툴기만 하다. 뜨개질이나 자수를 해본 기억이 언제인지, 아니, 있기나 한지 알 수가 없다. 천사원에서 살 때 교회의 크리스마스 선물 속에 벙어리 장갑이 있었다. 교회의 여신도들이 직접 떴다는 푹신한 털장갑이었다. 너무 커서 손을 아래로 늘어뜨리면 스르륵 미끄러져 벗겨지던 빨간 벙어리 장갑이 생각난다. 그래도 얼마나 기뻤던가. 장갑에 코를 묻으면 털실 냄새보다 아릿하게 여자의 화장품 냄새가 더 많이 풍겼다. 어린 그녀는 그 냄새가 어머니 냄새라고 믿었다. 어머니들의 향기는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염없이 코를 묻고 있었지...
야간학교를 다닐 때에도 재료비가 필요한 가사시간은 대충대충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뜨개질 실습도 있었겠지만 털실을 사려면 그 돈으로 라면 한 박스를 쟁여 두어야 입 걱정을 덜을 수 있었기에 모두, 최소한도의 지출만 남기곤 모두, 포기해야 했었다. 그 이후의 세월 속에도 누군가를 위해 뜨개질을 해본 기억은 전혀 없다. 직장의 여직원들이 짬짬이 시간을 내어 열심히 손을 놀리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구경한 기억만 더듬어서 해보는 시늉에 불과하니 서툴 수밖에 없다. 이래 가지곤 내년 겨울에도 느는 스웨터를 입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인희는 하도 한심해서 자신도 모르게 푹 웃음이 나온다. 그녀의 짧은 웃음소리를 들은 성하상이 놀란 얼굴로 돌아다 보았다.
"왜요? 벽난로가 시원찮게 보여요?"
"그게 아니구요, 내 솜씨가 하도 시원찮아서요."
"무얼 뜨는데요."
"날마다 바쁜 어떤 사람이 입을 스웨터."
"누구?"
반문하다 말고 성하상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본다.
"이 산장에서 가장 바쁜 사람."
인희는 뜨개질감을 내려놓고 이제 제법 열기를 보내고 있는 벽난로 앞에 앉는다.
"그 사람이 겨울에 춥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 솜씨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네요. 난 너무 거칠게 살았나 봐요. 이런 거,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거든요. 작은 것도 예쁘게 꾸밀 줄 알고, 며칠이면 기가 막히게 멋진 스웨터를 만들어내는 그런 여자를 부러워해 본 적도 없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좀 아쉽네요. 누군가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데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안타까운 일이거든요."
혼잣말처럼, 그렇게 인희는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을 향해 말을 이어나간다.
"그렇지만 괜찮아요. 언젠가는 스웨터를 완성할 수 있겠지요. 어쩌면 그것을 뜨고 있는 동안이 더욱 행복한 시간일 수도 있어요. 이미 난 그 기쁨을 맛보고 있는걸요..."
성하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난로 안의 장작들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나 불빛에 반사되어서, 라도 말해버리기엔 신비로울 정도로 환하고 밝은 그의 얼굴 표정은 무수히 많은 말을 그녀에게 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밖에서 미루의 낮게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하상이 먼저 몸을 일으켜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열었다. 인희는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려 바깥을 살폈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누가 왔을까...그 시간에 거기까지 달려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눈, 그것도 이 겨울의 첫눈이었다. 바깥에서 성하상의 탄성이 들려왔다.
"눈이 오시네요! 나와봐요. 첫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어요!"
그 옆에서 미루가 컹컹, 첫눈을 향해 짖어대고 있었다.
눈꽃
태어나서 스물여덟해, 눈을 본 적이 어디 이번이 처음이랴. 하지만 지금 보는 이 눈은 스물여덟의 겨울을 통해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그런 눈이었다. 색깔을 놓고 희다고 말할 수 있다면 저것이 온전한 흰색일 것이고 그 형용할 수 없는 가벼운 깃털이 모양새를 두고 말한다면 저것이 바로 태초의 설화일 것이었다.
화살이 하나 날라온 듯한 느낌이었다. 온몸으로 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화살이 관통해버린 듯한 기분. 인희는 초저녁의 푸른 어둠을 배경으로 쌓이는 흰 눈을 바라보다 말고 조금 몸을 떨었다. 도시의 눈과 숲속의 눈은 확실히 달랐다. 시멘트 건물의 누추함을 덮어주던 도시의 눈과 높이 솟은 아름드리 나무에 흰 잎을 달아주며 반짝이는 산의 눈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바람도 없이 내리는 눈은 금방 쌓였다. 산장 입구의 잎 떨어진 나뭇가지 위에 소복히,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는 흰 눈을 조금 집어서 성하상은 입에 넣었다. 바위 위에 피어 있는 눈꽃도 그렇게 한 송이 집어 입에 넣고, 손바닥을 벌려 떨어지는 눈꽃을 한참 받아내서 다시 그것을 먹었다.
"당신도 이렇게 해봐요. 첫눈을 세 번 집어 먹으면 그해 겨울 내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어요."
성하상의 재촉에 인희도 그렇게 했다. 그가 바라는 것이 그 자신의 건강이 아니라 바로 그녀의 건강임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부터 당신은 일 년 중에 가장 아름다운 노루봉을 보게 될 거예요. 눈꽃이 피어 있는 겨울 산보다 더 아름다운 노루봉을 나는 본 적이 없어요."
성하상은 말하다 말고 문득 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곤 그녀의 겉옷 하나를 들고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좀 오래 보려면 따뜻한 옷이 필요하다면서.
"한겨울에는 눈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산짐승들이 산장까지 내려오지요. 내가 나가도 꼼짝도 하지 않아요. 하루는 새끼노루가 내려왔길래 먹을 것을 좀 주었지요. 그랬더니 다음날 다시 왔어요. 그해 겨울 내내 새끼노루는 미루의 식량과 내 식량을 나눠 먹으며 추위를 이겨냈어요."
동화 같은 이야기. 인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너무나 세속적인 이야기들이 누추하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간직하고 있는 동화처럼 순결한 이야기들이 자신에겐 하나도 없다는 것이 쓸쓸하다.
"모르는 사이에 눈이 내려 단번에 흰 세계로 변해버린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경이롭지만, 그것보다는 이렇게 눈이 내리는 동안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훨씬 좋아요. 보세요. 오 분 전의 색깔과 지금의 색깔이 다르지요? 마치 위대한 화가가 하늘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붓을 휘둘러 자연에 오묘한 색깔을 칠하고 있는 것 같잖아요. 그렇지요? 매 순간 달라지는 숲과 계곡의 색깔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온갖 티끌이 사라지고 맑아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그 느낌이 나를 산에 있게 해요. 바로 그것이 나를 산에 잡아두는 것이지요."
성하상의 얼굴에 번지는 광채를 보면서 인희는 그의 정신을 시샘한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나도 그처럼 맑아지고 싶다. 그러나, 혹시, 맑아지기로는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눈은 몰려오는 어둠도 몰아낸다. 아니, 푸른 어둠과 푸르도록 흰 눈이 합해져서 전혀 다른 세상이 된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 여태 보아온 세상의 색깔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어둡지만 환한 밤. 환하지만 어둔 밤. 인희는 자꾸만 여기저기를 돌아보게 된다.
"티끌 없는 눈만이 사랑을 보게 합니다. 잡티 하나 없이 맑은 마음은 삶의 원천을 보게 합니다. 영혼의 휘장을 걷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너무 늦은 법은 없습니다. 너무 이른 깨달음은 의심스럽지만."
그는 또 인희의 마음을 읽어내고 말았다. 인희는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들여다보는 남자의 등에 얼굴을 묻는다. 남자에게선 흰 눈의 냄새가 났다. 남자는 팔을 벌려 여자를 받아 안고는 하늘을 보았다.
"뭐든 집착하지 마세요. 그것만 버리면 몸은 솜털처럼 가벼워지고 마음은 영혼의 저 깊은 곳에 닿는답니다. 내가 당신을 이렇게 곁에 두고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집착의 괴로움을 극복한 결과이지요. 하지만, 극복하고자 애를 썼지만, 그럼에도,너무나 힘들었어요..."
남자는 여자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흰 꽃이 쏟아져 내리고, 미루는 인적없는 산길에 수없이 많은 발자국을 찍으며 가끔씩 하늘을 향해 컹컹, 짖어댔다.
산국화 향기
눈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첫눈의 무게도 만만찮은가. 먼 곳에서 나뭇가지 분질러지는 소리가 메아리로 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오직 하나의 색깔만이 세상을 지배하던 며칠 동안 성하상은 모처럼 산장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는 마을에도 가지 않았고 나무를 하거나 산나물을 뜯으러 계곡을 누비고 다니지도 않았다. 이 겨울에도 북풍을 피해 양지바른 곳에 자라고 있는 산나물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었다. 지난여름에 씨앗이 떨어져 새로 잎을 피우다가 기온이 떨어지면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그대로 멈춰 있는 상태의 산나물들은 그의 손길에 정성스럽게 다듬어져서 종종 식탁에 오르곤 했었다. 그는 오염되지 않은 산의 풀과 열매, 그리고 싱싱한 공기만이 그녀의 병약한 몸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붙들려 있는 사람이었다.
"어지간히 눈이 녹아서 흙이 어슴프레 비칠 때 산에 가면 신비의 영약들을 구할 수 있어요. 첫눈의 정기를 빨아들인 산나물들을 캐서 즙을 만들면 그게 바로 신비의 영약이랍니다. 당신한테 빨리 그것을 먹이고 싶어요."
그는 벽난로 앞에서 목각에 쓰일 통나무들을 손질하면서도 틈틈이 바깥을 내다보았다. 햇볕은 있으나 기온이 급강하해서 눈들은 단단하게 굳어져 있다. 그 옆에서 인희는 말린 산국화를 우려낸 산국화 차를 마시며 그를 보고 있다. 뜨개질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 시시때때로 희귀한 차를 내오는 것도 남자의 일이었다.
나무를 다듬는 남자의 익숙한 손길에 비하면 그녀의 뜨개질 솜씨는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그나마 가끔씩 코를 빠뜨리는 바람에 지척대는 시간들이 더 많다. 그럴 때마다 인희는 홀로 웃어대고 그 웃음에 전염된 남자도 같이 웃는 순간들. 주위에 배어 있는 산국화 향기. 벽난로 앞의 이 그림 같은 평화, 그 속에서 인희는 너무나 아득하게 도시의 삶을 지워간다.
그래, 악몽인 듯싶은 세월이 있었지. 잠 안 오는 밤에는 스치는 바람 소리조차 불행의 신호로 들려왔었지. 사람들은 서로 할퀴고 상처 내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어. 사랑은 변덕의 한순간에 불과한 것이고, 배반당한 믿음이 뿜어내는 증오의 불길들은 살이 데일 정도로 뜨겁기만 했었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 온몸에 가시를 지니고 어떻게 그 겹겹의 세월을 살아냈을까...
바깥에서는 북풍이 비닐 커튼을 해놓은 산장의 창문들을 두들겨대지만 벽난로 앞의 따스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인희는 후르륵, 장작에 불 붙는 소리, 그리고 남자의 대패질 소리에 귀 기울이며 다시 한 코 한 코 정성 들여 실을 이어간다. 그때 남자가 대패질에 묻어나온 나무 껍데기를 난로에 밀어 넣으며 조용히 묻는다.
"내가 해주는 옛날이야기 하나 들어볼래요?"
남자는 거친 나무 표면을 다듬기 위해 사포질을 시작한다. 사포질에 소요되는 시간이 많다는 것을 잘 아는 인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겉면에 자를 윤기가 흐를 때까지 남자는 나무를 다듬을 것이다. 난로 속의 장작은 너무 세지도, 그렇다고 너무 졸아들지도 않으며 알맞게 타오르고 있고, 이제 남자는 옛날이야기를 해준다고 한다.
"어떤 이야기인가요?"
인희는 흔들의자를 난로 가까이, 남자 가까이 잡아당기며 묻는다. 들을 준비가 충분히 되었다는 뜻이었다.
"당신도 알고 있는 이야기, 하지만 당신의 기억 속에 영원히 묻혀버린 이야기랍니다."
"그게 뭐지요?"
"들어보세요. 그리고 가만히 마음으로 떠올려봐요. 어쩌면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기억해 낼지도 모르니까요."
성하상은 싸그락 싸그락 사포질을 하면서, 한 번씩 벽난로 속의 주홍 장작불을 살피면서, 가만가만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년 전의 사랑
그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어요.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 혹은 천오백 년 전인지도 모릅니다. 거기가 어디인지도 나는 확실히 당신에게 말해줄 수 없어요. 붉고 파란 비단옷들, 남녀노소 누구나 쓰고 있는 동그란 밀짚모자, 팔목에 늘어뜨리고 다니는 구슬 팔찌들로 추측해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아닌 것은 분명해요.
언제 어디서 있었던 일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내가 본 그 영상이 기록된 역사의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고 싶어서 여러 종류들의 책들을 뒤적여 봤었지요. 그러나 아직도 거기가 어디인지 짚어낼 수 없어요. 다만 짐작으로 남중 아시아 근방 어떤 유목민족의 거주지가 아니었나 생각할 뿐이에요. 지금의 파키스탄 부근, 혹은 히말라야 근처의 북인도 지방이나 네팔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가끔 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지금 몹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군요. 맞아요. 당신이 기대했던 옛날이야기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봐요. 정말 흥미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알 수 없는 먼 과거의 어느 땅에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답니다. 보세요. 이젠 제법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여자의 이름은 '수하치', 남자의 이름은 '아힘사'였지요.
수하치와 아힘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수하치는 권세 가문의 외동딸이었고 아힘사는 천민으로 태어나 수하치의 집에서 가축들을 기르며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처지였지만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극진히 아끼고 존중하였지요.
물론 수하치의 부모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수하치는 매우 아름다운 처녀였습니다. 푸른 비단옷에 붉은 조끼를 입은 수하치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청년들은 아주 많았습니다. 마을의 축제가 있는 날에는 수하치 앞에 깃털 달린 밀짚모자를 내밀며 춤을 추자고 청하는 남자들이 줄을 서곤 했었지요. 양 오십 마리 정도를 소유한 집안이라면 누구라도 수하치한테 춤을 청할 수 있었지만 아힘사는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한 번도 수하치에게 춤을 청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러나 만월이 둥실 떠오른 밤이면 두 사람은 잠든 마을을 빠져나와 넓은 들판에서 새벽 별이 뜰 때까지 실컷 춤을 추며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으므로 아힘사는 모든 것을 다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수하치의 사랑이 자기한테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아힘사는 있는 힘을 다해 수하치 가문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면서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요.
그러던 어느 해 봄이었습니다. 아힘사는 소와 양 떼들을 몰고 평원으로 떠나게 되었지요. 평원에서 천막생활을 시작하면 몇 달은 집에 돌아올 수 없었지요. 한여름이 되어서 비와 습기가 많은 때나 되어야 잠시 집에 머무를 뿐 겨울까지는 그렇게 떠돌아다녀야 하는 것이 아힘사의 맡은 일이었답니다.
그해 봄에 아힘사는 평원으로 떠나기 직전 수하치에게 놀라운 소식을 들었지요. 그녀는 말했어요. 아마도 아힘사의 아이를 가진 것 같다고, 이제는 부모님한테 말씀드려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당신이 평원에 나가 있는 동안 모든 것을 부모님한테 털어놓고 일을 잘 해결해놓겠노라고. 수하치의 얼굴은 비장한 각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짝이는 눈빛만은 사랑의 결실을 기뻐하는 환희로 부실만큼 아름다웠지요. 수하치는 또 말했습니다. 저 하늘의 붉은 해가 아침 세상을 비추는 날까지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아힘사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아마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겠지요. 양떼들은 지키는 낮에나, 모닥불 하나에 의지해 어둠을 견디는 깊은 밤에나 자신의 아이를 가진 수하치를 생각하면 온몸에 힘이 불끈불끈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그 황홀한 기쁨의 몇 달, 마침내 비가 시작되는 여름이 왔지요. 아힘사는 윤기 있는 털을 자랑하는 양 떼들을 몰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을의 일을 궁금해 하면서,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이미 엉뚱한 쪽으로 끝나 있었습니다. 아니, 엉뚱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주 최악의 상황이었지요. 수하치는 벌써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었고, 수하치의 남편은 어여쁜 아내가 곧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니는 중이었습니다.
아힘사는 이내 모든 것을 눈치챘습니다. 수하치의 부모가 임신 사실을 숨기고 딸을 강제로 결혼시켰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수하치를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수하치가 자신이 돌아온 것을 알고 얼마나 괴로워할지 그것을 걱정한 까닭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아힘사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보다 불행 속에 던져진 수하치를 더 근심했습니다. 수하치가 자신을 배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땅이 꺼지는 듯 절망했지만 그런 모습이 행여 수하치 눈에 뜨일까 곧 자신을 나무라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비극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아힘사는 수하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마을을 떠나 방랑 생활로 들어섰습니다. 자기가 없어지면, 눈에 안 보이면, 괴로움이 다소나마 덜할 것이라고 믿었지요.
하지만 수하치는 못 이룬 사랑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떠돌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아힘사를 생각하면 밥도 넘길 수 없었고 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수하치는 그해 겨울 딸을 낳은 뒤 사흘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힘사는 수하치의 죽음을 뒤늦게 알았지요. 수하치의 죽음이 자신에 대한 속죄임을 잘 아는 아힘사는 그 길로 식음을 전폐했지요. 물 한 모금도 입에 넘기지 않았답니다. 마침내 아힘사도 수하치를 따라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힘사가 마지막 숨을 거둔 자리는 수하치가 묻혀있는 바로 그 무덤가였구요...
그리고...
"기억이 나는 이야기인가요?"
성하상이 물었다. 인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숨도 쉬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러나 알고 있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다.
"수하치에 대해서, 당신은 정녕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나요?"
성하상은 다시 물었다.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슬프고 아름다운 연인의 전설을 말한 것이 아니던가요?"
이번에는 인희가 반문했다. 이 남자는 왜 자꾸 기억이 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일까. 대체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 혹은 천오백년 전의 소하치라는 여자에 대해서 그는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일까.
"만월의 푸른 빛이 가득한 들판에서 수하치가 부르던 노래를 당신은 기억할 수 없나요?"
성하상은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고 흔들의자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전에 없이 집요했고, 잠시 만에 거짓말처럼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인희는 당황했다. 눈앞의 성하상은 이제까지 조용하고 아늑하던 그 성하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뭐가, 어쩌면, 그 천년 전의 시간 속에서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말하지요. 다 말하겠어요. 당신이 모르는 것은 당연해요. 그러나 이젠 알아야 해요. 당신은 천년 전에 죽은 수하치예요. 천년 전에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힘사는 바로 나예요..."
천년 후의 사랑
당신은 지금 두려운 표정이군요. 그래요. 현실을 떠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내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의 수련을 허황한 신비주의의 산물들이 아닙니다. 나는 영혼 속에 가라앉은 삶의 근원을 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영혼의 뿌리를 만질 수 있으면 세상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자신의 온 정성을 하나의 대상에 기울이면 그 대상의 근원에 닿을 수 있다는 간단한 진리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내가 왜 이 노루봉에 들어와 있는지 이젠 다 아시지요. 나는 당신에게 내가 살아온 날들을 거의 다 말한 셈입니다. 그래요. 당신, 나는 스승 범서 선생을 처음 만나던 날의 기이한 경험을 말해주었을 때 당신이 보여주었던 그 끝없는 신뢰의 눈빛을 지금 기억합니다. 당신이야말로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그 경험을 믿어준 사람입니다. 내가 당신을 믿듯이 당신도 나를 믿지요.
그렇다면 당신, 수하치와 아힘사의 천년 전의 사랑도 믿으셔야 합니다. 나는 분명히 그들을 보았답니다. 내가 본 우리의 전생이 이토록 선명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천년 전의 나, 아힘사를 당신한테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천년 전, 푸른 비단옷을 입고 마을 축제에서 춤을 추던 수하치를, 아니 당신의 모습을 지금의 당신한테도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도 그 토굴을 보았지요. 그래요. 물푸레나무 숲을 지나서 계곡 왼쪽에 깊숙이 숨어 있던 그 토굴 말입니다. 내가 우리들의 전생을 본 곳이 바로 거기였습니다. 깊고 고요한 굴속에 앉아 천년 전의 한평생을 살아낸 시간은 정말 찰나였습니다. 전생의 삶에서 다시 이승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아직도 수하치를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수하치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그녀의 동그란 무덤가에서 들려오던 이름 모를 슬픈 새의 노래.
나는 전생의 시간에서 벗어난 뒤에도 끊임없이 천년 전의 수하치를 생각하고 있었지요. 밤에 자다가도 수하치를 부리며 흐느껴 울곤 했습니다. 그런 나를 나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명상에 정진해도, 아무리 스승의 가르침 속으로 복귀하려고 해도, 내가 나를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스승의 한 말씀을 얻었지요. 정히 피할 수 없다면 전생을 이어받아 금생에서 완성하라, 고 스승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던 수하치는 천년 전의 여자였을 뿐, 현실의 수하치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나처럼 다시 인간으로 환생해서 한평생을 살았으리라는 짐작을 했지만 어느 때 어느 땅에 살았는지 내 힘으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해 전 여름, 여기 이곳의 계곡에서, 마침내, 나는 현실 속의 수하치를 만났습니다. 당신도 생각나지요? 그 여름, 우리에게 닥쳤던 첫 만남을 다신도 어제 일인 양 떠 올릴 수 있지요? 그래요, 그랬지요. 운명은 결국 당신을 여기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나로 하여금 삶의 길을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 당신은 그때 여기로 온 것입니다.
바위에 앉아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계곡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기분이었습니다. 수하치,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내 심장이 그토록이나 빠르게 뛰었던 적이 있었을까요. 푸른 비단옷을 입었던 천년 전의 수하치와 흰 티셔츠를 입고 있는 현실의 당신 사이에 천년의 시간이 있었디만, 그러나 나는 단한순간에 당신을 알아보았습니다. 천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서 나는 빛처럼 빠르게 당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다음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요. 당신을 그대로 스쳐 보내지 않으려는 운명의 힘은 당신이 그 자리에 지갑을 놓아두고 가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지갑 속 당신의 신분증으로 나는 한 번 더 당신이 수하치임을 확인했지요. 당신의 얼굴이 내 명상 속에 처음으로 뚜렷하게 떠올랐던 그 날이 4월 20일이었습니다. 당신은 바로 그 날짜의 기운을 받아서 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당신은 몰랐겠지만, 지갑을 전해주고 함께 있던 몇십 분의 시간 동안 나는 줄곧 떨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한 마디 한 마디, 무심히 보여주는 몸짓 하나하나, 먼 데를 보는 당신의 그 서늘한 눈매, 이 모든 것이 내 명상 속의 수하치와 어떻게 그렇게 한 치의 다름도 없이 똑같을 수 있는 것인지, 나는 그저 전율하고 또 전율할 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의 시간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갈망했는지, 당신에게로 가는 이 가없는 사랑을 어떻게 참아내고 있었는지는 당신에게도 다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지금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충만해 있습니다.
이제야 내 곁으로 돌아온 당신. 이제 나는 당신을 두고 평원으로 떠나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을 두고 하염없는 방황의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로 당신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절망의 강을 건너도록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 울고 있군요. 울지 마세요. 여기, 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세요. 나를 가장 아프게 때리는 것은 당신의 눈물입니다. 제발, 울지 마세요. 천년 전에 못 이루었던 수하치와 아힘사의 사랑은 천년 후 여기서 다시 이룹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은 바로 그 일을 하고자 함입니다. 이제야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당신, 천년 전에 당신은 수하치였지요. 그리고 나는 아힘사였답니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의 천년의 바람
완전한 사랑
천년 전에 당신은 수하치였지요. 그리고 나는 아힘사였답니다...
인희는 성하상의 말을 있는 그대로, 한 점 의혹도 없이 받아들였다. 처음엔 두려웠지만 이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하상이란 남자를 믿기 시작했으므로 그가 하는 말 역시 의혹 없이 받아들였다. 그것 말고 무엇으로 두 사람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천년 전의 그 일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사랑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말이 있은 후로 인희는 너무도 편안했다. 이제는 감히 말하지만, 그녀에게 티끌만큼의 동요도 없었다. 스물여덟 해의 이 삶이 그토록이나 얽히고설켜서 가시밭길로만 치닫던 것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만 완성되도록 운명 지워진 사랑, 그 사랑을 매듭지으려고 내가 여태 숨 쉬어 왔구나, 생각하면 모든 갈등이 사라지고 삶이 선명해졌다.
몽상에 불과할 수도 있는 남자의 이야기를 눈곱만큼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스스로를 놀랍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마음 속에 남아 때때로 그녀를 불안하게 하던 모든 의문들이 일시에 걷혀 환하고 밝은 기분으로 자신의 현재를 다시 볼 수 있었으므로 산장에서의 나날이 훨씬 명랑해졌다. 이제야말로 그녀는 성하상이란 사람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란 예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예감 이상이었다. 인희는 이제 닥쳐올 앞날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세상과 싸워나갈 일이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그녀 혼자가 아닌 것이었다. 세상에 달랑 혼자만 던져진 것이 결코 아닌 것이었다. 그녀 옆에는 언제나 그가 있을 것이기에.
과거를 청소하다
그리고 때가 왔다.
그 아침, 인희는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작은 산새 한 마리가 날개를 푸득거리며 해 저무는 숲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도 선명한 영상이어서 눈을 뜨고도 그 시각이 석양이 아니고 이른 아침이라는 사실에 한참동안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지금도 그 날개가 환히 보여요. 아주 깨끗하고 조그마한 산새였어요."
벽난로를 지펴 마루를 따뜻하게 달구고 있던 성하상은 그녀의 말에 돌처럼 굳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인희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나오는 것에 약간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날개 치며 날아가던 산새라니, 그것은 조금 전의 명상 시간에 그도 보았던 환영이었다.
"몸은 어때요?"
"아직은요. 여태도 눈이 안 녹았는데 지금은 곤란하잖아요?"
인희는 남자의 굳어진 얼굴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환하게 웃어 보인다. 열이 좀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증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성하상은 여자의 얼굴이 다른 날과 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너무 일찍 일어났어요. 마루가 덥혀질 때까지 이불속에 들어가 나와요. 아침밥이 다 되면 내가 부를 테니까 꼼짝 말고 누워있도록 해요."
그에게 등을 밀려서 인희는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어둠은 가셨지만 해는 아직 산 위로 솟지 않은 시각이었다. 인희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시렁 위에 얹어놓은 여행 가방을 꺼냈다. 문득 그 가방을 정리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가방 속에 담겨져 있는 쓸쓸한 삶의 흔적들을 지워버리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자신이 천년 전의 수하치였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 그녀는 오인희로서 살아온 세월들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었다. 그렇다면 가방 속에 들어있는 몇 장의 기록들, 그리움이나 추억이 묻어 있는 몇 가지 물건들을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을 것인지 한 번쯤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추억을 정리하기, 그리움을 청소하기. 자신의 행위에 그런 이름을 붙여보면서 그녀는 한 시간쯤 시간을 보냈다. 몇 권의 일기장과 기억하고 싶어 남겨두었던 몇 장의 편지들은 벽난로 속에 던져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흔적이 필요하다면 지금부터 남기면 될 것이었다. 삶의 이유를 알게 된 지금부터 흔적을 남기는 일에 충실할 것, 인희는 스스로를 향해 그렇게 말하면서 사진들을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그 모든 것을 정리한 뒤에 남은 것은 단 세 가지였다. 하나는 오직 그녀의 노동만으로 만들어낸 약간의 돈이 담겨있는 저금통장이었고, 또 하나는 성하상이 그녀에게 보냈던 편지 묶음이었다. 다소 성가셔하며 버리고 말았던 처음의 편지들을 제외하고서도 그것은 제법 상당한 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하나는 아무 모양 없이 밋밋하게 만든 순금 반지였다. 그것은 겨우 한 돈쯤이나 될까 말까 한 작고 가벼운 반지였지만 한 번도 손가락에 끼워보지 않은 새것이어서 순금만이 발할 수 있는 묵직하면서도 은근한 광휘를 유감없이 발하고 있었다.
그 반지를 낄 사람은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아이와의 만남을 애타게 기다리던 서울에서의 어느 날, 인희는 불현듯 거리고 나가 이 반지를 샀었다. 아이가 태어나 이 반지를 낄 만큼 손가락에 살이 오르면 그때 이것을 주리라. 이 반지를 낄 수 있는 날이 오면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홀로 살아온 날들의 외로움과 너를 만날 수 있어 기뻤던 날들을 이야기해 주리라.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에 나날이 살이 오르는 것을 훔쳐보며 그날을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나머지의 고난을 이겨내리라.
아이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던 날들 중의 어느 하루에 산 그 반지는 그녀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었다. 이제 앞날에의 불안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다 자란 아이가 이 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자니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인희는 반지 곽에 반지를 다시 담다 말고 문득 깨끗한 종이 한 장을 마련했다. 그리고 거기 이렇게 썼다.
'순금처럼 아름답게 살아갈 내 아이에게.'
종이를 정성스럽게 접어 반지곽에 담아놓는 것으로 그녀의 추억 청소는 끝이 났다. 그녀는 태울 것들을 가슴에 안고 마루로 나왔다. 마침 성하상은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뜨거운 국을 푸고 있었다.
"된장국을 끓였어요. 냄새가 구수하지요? 그런데 그건 뭐하려구요?"
"짐 정리를 했거든요. 태울 것들이에요."
기세 좋게 타오르는 장작 사이에 던져진 종이 뭉치들은 단숨에 불꽃을 일으키며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드디어 첫 신호가 날아든 것은, 벽난로 앞에 앉아서 불꽃이 갉아 먹는 글자들, 불꽃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인화지 속의 얼굴들을 지켜보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아랫배를 스쳐 가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요? 불에 데었어요?"
비명과 거의 동시에 성하상이 뛰어왔다. 인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통증은 스쳐 갔을 뿐이고 그가 뛰어와 자신을 안았을 때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이 껴안은 여자의 몸이 너무나 뜨거운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장에서 같이 생활하는 동안 여태까지 여자한테 이만큼 열이 올랐던 적은 없었다.
"몸이 몹시 뜨거워요. 왜 그렇죠?"
남자는 여자의 작은 손을 쥐어보았다. 바삭바삭 타버릴 정도로 뜨거운 손이었다.
"괜찮아요. 난로 앞에 있어서 그럴 거예요."
"그런 것 같지 않아요. 봐요. 지금 오한이 나는군요. 떨고 있어요."
성하상은 여자를 더욱 감싸 안았다. 인희는 그제서야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두 번째의 통증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두 번째의 통증 앞에서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때는 그녀도 확연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 안에서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일이 자신이 그토록이나 간절하게 기다리던 새 생명과의 만남이라는 것도.
"오늘이야말로 우리 두 사람 모두 밥을 아주 많이 먹어 둬야 할 날 같은데요. 국이 식기 전에 얼른 식탁으로 가요."
인희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도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를 보는 남자의 얼굴이 탱탱하게 긴장해 있었다.
마침내 끝이 보인다...
그 아침의 고요함이 식탁에서의 몇 분을 마지막으로 끝이었다. 열이 솟구쳤고 통증의 간격은 짧아졌으며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인희는 사랑하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덜 괴롭힐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라는 듯이 기를 쓰고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밥그릇을 비운 여자가 남자한테는 눈물겹도록 고마울 뿐이었다. 실제로 그는 식탁에서 일어나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안으면서 기어이 눈물을 비치고야 말았다. 이제부터 그녀가 겪어야 할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뻐개지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리고 성하상은 바람처럼 달려 산을 내려갔다. 그녀를 산 아래까지 데려갈 청년 몇 사람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만삭의 그녀를 옮기기 위해 이미 들 것을 만들어 놓았으므로 사람만 구라면 별일 없이 병원에 데려갈 수 있을 것이었다. 조금도 그녀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벌써 열 번도 넘게 이런 일에 대한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해둔 바 있었다. 그럼에도 눈에 덮여 길이 감추어진 산을 내려가는 그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그가 마을에 내려간 사이 인희는 입원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고 있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으므로 두렵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예상했다고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옆에서 그가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태산에 기대고 있는 것만큼이나 든든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오한이 심해지는 것과 손끝으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은 그녀를 평정 속에 놓아두지 않았다.
그런 그녀 곁에는 미루가 있었다. 미루는 성하상이 마을 청년들을 데리고 돌아올 때까지 한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윽고 성하상이 돌아왔을 때는 산장이 울리도록 반갑게 짖어대던 미루였다.
다음부터는 실로 악전고투였다. 들것에 실려 영하의 산길을 내려가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미끄러질 때도 한사코 들 것을 놓지 않았던 성하상의 경우에는 거의 온몸에 다 멍이 들었다고 말해야 맞을 것이었다. 그것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이빨이 맞부딪칠 정도로 시시각각 더해가는 그녀의 오한이었으나 인희는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십 번도 더 물어온 성하상의 '괜찮아요?'라는 그 걱정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옮겨탄 뒤로는 더 이상 그에게 숨길 수가 없었다. 성하상도 당장에 여자가 극심한 오한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성하상이 마음의 평정을 잃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는 여자의 핏기없는 입술에 달라붙어있는 까만 피멍울을 보았다. 그것이 괴로움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다가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마음을 집중시킬 수 없어 다소 불안했던 그였다. 여자에게 무슨 일이 닥친다면, 이라고 생각하자마자 눈앞이 아득해져서 이젠 아예 허둥대는 그였다. 택시 안에서, 그리고 병원에 도착해 입원 수속을 하면서, 썰렁하기 짝이 없는 병실에 누워있는 여자를 보면서, 그가 얼마나 많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인희조차도 자신의 고통을 감당하느라 전혀 그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마치 땀인 것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면서 성하상은 한순간도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적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맥이 다 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겪고 있는 아픔의 십분 지 일, 아니 백분지 일이라도 덜어 줄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병실에서
병원에 도착해서 입원실의 침상에 들을 대는 순간 인희는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힘든 일은 다 끝났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부터는 성하상, 그 사람도 의사와 간호사한테 의지해서 조금은 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놓였다.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을 견디는 일보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애태우는 남자를 그저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어야 했던 것이 훨씬 힘들었던 그녀였다.
마음을 놓아서인가. 인희는 자신의 몸이 자꾸만 땅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에 시달려야만 했다. 진통은 점점 간격을 좁히고 있었고, 그녀가 알기로 이제부턴 없는 힘도 끌어모아서 새 생명의 탄생에 바쳐야 할 시각이었다. 그런 시간에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힘도 없이 그저 눈 감고 자버리고 싶은 욕망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은 아주 불길한 징조였다.
이래선 안 돼. 정신을 차려야지. 지난봄, 새 생명이 움트고 있다는 것을 안 이후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가. 난 잘할 수 있어. 멋지게 이 고비를 넘겨버릴 거야. 그래서 이 땅에 더운 숨 쉬는 내 핏줄 하나를 뿌리 내리게 하고 말 거야.
"조금만 기다려요. 의사가 지금 수술 중이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당신을 봐주러 올 거예요. 이 도시에서는 가장 유능한 의사라고 소문이 자자한 분이니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성하상은 바싹 마른 가랑잎처럼 야윈 여자의 손을 잡았다. 손은 여전히 뜨거웠고, 고열에 시달려 부풀어 오른 입술과 자구만 처지는 여자의 눈시울 아무래도 심상찮아서 그는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저런 상태로는, 도저히, 그토록이나 힘들다는 출산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온몸이 옥죄어 오는 이런 절박감은 오직 성하상 그 혼자의 몫일 뿐이었다. 환자를 침상에 눕힌 뒤 기초적인 검사 몇 가지를 하고 사라진 간호사는 거의 한 시간이 지나도록 병실에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물론 그 사이에 성하상은 몇 번씩이나 아래층 진료실로 내려갔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한 사람뿐이었고, 그나마도 진료를 기다리는 외래환자들 수발에 바빠서 그의 재촉에 잔뜩 성가신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아직 멀었어요. 초산이면 내일에나 낳을지도 몰라요. 병실에 기다리고 계세요."
"출산이 문제가 아닙니다. 저 사람, 지금 온몸이 불덩이인데다 원래도 정상적인 건강이 아니라서 이러는 것 아닙니까. 제발, 일 초가 급합니다."
"그럼, 얼음베개 하나 가져가세요. 해열제도 의사 선생님이 와야 처방을 할 수 있어요. 곧 끝나니까 기다리세요."
그가 보기에도 간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상 없을 것 같았다. 일 분이라도 빨리 의사에게 보이고 싶어서 미친 듯이 산을 내려왔던 것이나, 대절한 택시 안에서 그토록 조바심을 친 것이 그저 허망할 뿐이었지만, 그녀를 의사가 있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판단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찬 바람 부는 거리로 그녀를 다시 데리고 나간다는 것은 차마 못 할 짓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자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작은 손을 쥐어주고 갈라지는 입술에 물을 축여주는 것이 다였다.
"한숨 자봐요. 자고 일어나면 혹시 열이 내릴지도 모르잖아요."
자지 않으려고 애쓰는 여자에게 그는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영영 못 깨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한 번씩 배가 뒤틀리면 죽고 싶도록 아픈데도 잠이 오는 것 보세요. 아마 난, 잠꾸러기인가 봐요..."
그러면서 여자는 울 듯이 웃었다. 여자의 그 웃음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남자는 그 얼굴에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포개었다.
새, 날아가다
"저런 상태로는 자연분만을 기대할 수 없어요. 환자의 병력을 모르는 상태에선 수술도 위험합니다. 지금 몇 가지 검사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없어요. 시간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그러기로는 분만이 촉박해 있고 환자의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어서 자신할 수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하상은 의사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마치 비명을 지르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면, 도대체 저 여자를 그냥 죽입니까..."
"왜 진작에 손을 쓰지 않으셨어요? 원인 모를 고열이 일 년 이상 계속되고 있었다면 이미 체력이 한계에 달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열이 난다는 것은 어떤 균과 대항해서 몸이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임신을 지속시키는 것은 짚을 지고 불속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이제 와서 발열의 원인을 밝혀낸다 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맥박도 약하고, 자궁수축도 완전히 비정상입니다. 도리가 없어요."
의사는 냉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성하상은 그 순간 날개 치며 날아가는 한 마리의 작은 산새를 눈앞에 보았다. 그 환영은 아침에 두 사람이 똑같이 본 것이었다. 이것이었던가. 파드득거리며 날아가던 산새는 그럼 목숨보다 소중했던 저 사람이었던가. 발갛게 물든 노을 속으로 하염없이 빨려 들어가던 그 산새가 천년 만에 다시 만난 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그 불안감이 사실이었던가.
"위험하긴 하지만, 보호자가 동의한다면 수술을 할 수는 있습니다. 어차피 다른 병원에 가더라도 지금으로선 그것 이외의 최선책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태아를 살리기 위해선 그 길밖에 없구요."
"..."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런 상황에 제왕절개로 들어가면 수술 중에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칠지 자신할 수 없어요. 산모의 지금 상태로는 수술을 강행한다는 것도 사실 무리고."
"산모를 포기해야, 그래야 아이가 무사합니까?"
성하상은 간신히 그렇게 묻는다. 지금 의사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설마 싶어서 그렇게 묻는다.
"꼭 그렇다기보다, 자연분만을 기다리다간 아이까지 위험해서 문제라는 것이지요. 둘 다 위험 속에 방치하느니 하나라도 안전한 쪽을..."
"안 돼요. 그 사람도 살려야 합니다. 오늘 아침까지도 얼마나 씩씩했는데요. 이렇게 금방, 이렇게 금방..."
성하상은 말을 잇지 못한다. 의사는 다시 한번 꼼꼼하게 환자의 검사기록을 들여다본다. 작은 표정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의사의 얼굴을 주시하는 성하상, 그의 시선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기록만 읽는 의사. 한참 만에 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해 봅시다. 발열의 원인을 모르니까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칠지 예측불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만, 수술이야 어려운 것이 아니니까요. 여태도 저런 몸으로 견디었는데, 아마 잘 견딜 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의사의 마지막 말은 망연자실 굳어있는 그를 향한 위로의 소리처럼 들려왔다. 성하상은 그렇게밖에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의사 앞에서 물러 나왔다.
"수술을 하려면 보호자 서명이 들어있는 수술동의서가 필요합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의사의 말, 성하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수술을 결정할 사람이 있다면 오직 그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이미 결정해놓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다. 그녀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가슴을 찌르는 어떤 예감이 왔다. 그것은 분명히, 틀림없이, 병실에서 그녀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성하상은 바람처럼 복도를 달려갔다. 기다려, 내가 간다. 당신이 부를 때, 나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것이다...
남겨진 말
땅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정신이 가물가물하다. 어디 먼 데로 떠나가려고 하는 의식을 붙잡아 두기 위해 그녀는 온갖 힘을 다 동원했다. 이대로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릴 수는 없었다. 정녕 그럴 수밖에 없다면, 기어이 암흑 같은 지하의 수렁으로 떨어져 내려야 한다면, 그 전에 잠시라도 그를 한번 보고 싶었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뜨고 병실 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두렵지는 않았다. 산장에서 그와 함께했던 짧은 시간들을 보내며 가끔씩 너무 과분한 행복이라고 근심하지 않았던가. 이런 고통이 차라리 내겐 익숙해, 익숙하니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하고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곁에 없는 게 불안했다. 성하상, 그 사람을 곁에 두고 싶었다. 그래야 힘을 내 이 고통을 뿌리칠 것 같았다. 이젠, 그 사람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 나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렇게 정신을 놓아버리면 태어나려는 내 아이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아, 그런데 그는 어디에 있을까. 할 말이 있는데. 꼭 할 말이 있는데. 혹시 이대로 암흑이 날 덮친다면,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다면, 그러니까 꼭 지금 말해야 하는데...
그래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온 힘을 다해 그를 불렀다. 빨리 나에게 와주세요. 지금 당장, 지금 당장...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왔다. 숨이 턱에 차도록 헐떡거리며 들어선 그는 물어볼 것도 없이 여자를 품속에 안았다. 그의 가슴 안에서 여자가 말했다.
"아이를, 내 아이를,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여자의 더듬거리는 그 말을 남자는 가슴 깊이깊이 새겼다. 이것이 여자가 간직하고 있던 운명의 결정이라는 것을 그는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마지막 한마디가 여자의 메마른 입술을 비집고 간신히 새어 나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천년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믿어요..."
기어이 그녀를 보내다...
마침내, 침몰이 있었다. 물살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던 작은 배 하나는 스며든 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라앉아 버렸다. 그 침몰은 거짓말처럼 조용하게, 마치 한 자루의 촛불이 가느다란 바람 한 줄기에 스러지고 말 듯이 그렇게 소리도 없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차라리 가라앉기를 희구하던 작은 배의 큰 고통을.
아, 그리고 나는 느꼈다. 묵묵히 천년 전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있는 영원 속의 정적을. 울리던가, 나는. 가라앉아 버린 작은 배가 겨우겨우 남겨놓은 몇 방울의 물거품 앞에서 나는 울었던가.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의 영원한 침몰을 눈앞에 보면서 울지는 않았다. 눈물은, 마음과 육체가 빚어내는 무색무취의 그 즙은, 그때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이 아직 살아있는 자만이 흘릴 수 있는 분비물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그녀의 마음이 천년 전의 정적 속으로 사라져 버렸을 때, 내 마음도 동시에 그녀를 따라가고 말았던 것이다. 내게는 울 수 있는 축복도 없었다. 눈물 흘릴 수 있는 슬픔의 행복함. 나는 그것마저도 소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흰 시트가 덮였을 때에도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차디찬 몸이 바퀴 달린 침상에 실려 영안실로 내려갈 때에도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었다. 당신 옆에는 지금 내가 있어... 그래, 당신 옆에는 내가 있어. 당신이 저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곁에서 하늘거리는 가느다란 수초로 머무를 거야. 당신이 영원 속을 떠도는 한 점의 먼지라면 나는 당신을 영롱하게 빛내주는 한 줄기 햇빛으로 당신을 따라다닐거야. 아, 당신이 저 하늘 어딘가에서 흰 옷자락을 날리며 떠도는 영혼으로 존재한다면 나는 그 옆에서 한 줌의 구름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거야...
나는 지금,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날 것이라는 무서운 예감은 천년 전부터 있었다. 그날 아침, 그녀가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작은 산새 한 마리를 보았다고 말했을 때부터 나는 이 시각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또한 그것을 믿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나의 스승 범서 선생이 말씀하지 않았던가. 마음이 있는 그곳에 진실이 있으며, 진실이 있는 그곳에 바로 몸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그 말씀대로 이루었다고 믿었었다. 그녀와 함께 있기 위해 그 많은 시간들을 다 참고 견딘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마침내, 마음과 진실과 몸이 다 한자리에 있는 나날을 갖지 않았던가. 우리의 동행이 비록 두 달도 못 되는 짧은 시간이라고 해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내가 바친 시간은 그것의 열 배, 백 배, 천 배, 만 배나 되는 것이었다.
나의 숱한 인내와 기다림이 우리 사이의 불길한 운명을 결국은 돌려세우고 말았으리라는 내 믿음은 헛된 것이었다. 그것이 집착이 빚어낸 헛되고 헛된 믿음인 것을 진작에 알았다면 그녀를 좀 더 편하게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을. 그녀와 다시 산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내 욕심을 포기했더라면 그녀를 그 거친 수술실에서 죽게 하지는 않았을 것을.
그랬었다. 나는 도저히 그녀를 보낼 수 없었다. 그녀가 병실에서 의식을 잃었을 때, 그때 나는 그녀를 조용히 보내줄 준비를 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의식을 잃은 환자를 나는 무작정 수술실로 보냈다. 그리고 나는 외쳐댔다. 둘 다, 둘 다 살려내야만 한다고. 둘 중의 누구도 포기할 수 없다고.
수술은 네 시간이나 걸렸다. 의사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의사는 만약을 대비해서 종합병원의 내과 과장을 급히 불렀다. 다른 병원의 의사를 불러들인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라고 간호사는 나를 위로했다. 그녀의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병원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긴장 상태였다. 나는 수술실 밖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 기도의 힘은 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말이 아니었으면 나는 정신을 잃고 갈팡질팡 울부짖기만 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천년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믿어요... 마침내 그녀의 입을 통해 나의 사랑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오래 일구어서 밝혀낸 불씨였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운명이란 것이 그렇게 가혹한 것만이 아니라면, 내 기도를 들어줄 것이라고 나는 믿었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기도를 했다. 내 기도를 받아줄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뿐이었다. 그녀를 잠시만 내게 더 머무르게 해주십시오. 십 년만, 아니 일 년만, 그것도 안 된다면 단 한 달만이라도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을 보게 해주십시오. 이 욕심도 크다면, 그렇다면 열흘만, 일주일만, 하루만, 아니, 그저 단 한 시간만이라도 다시 그녀의 웃음과 목소리를 듣드록 도와주십시오.
내 기도는 결국 '단 한 시간만'에서 멈추었다. 그 이상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정 안된다면, 단 한 시간이라도 그녀를 평화 속에 머물게 하다가 보내고 싶다는 그 간절한 소원만은 도저히 양보할 수 없었다. 나는 쉴새 없이 '단 한 시간만'을 외우고 있었다. 내가 음흉했던가. 그때 나는 속임수를 부리고 있었던가. 그렇게 작은 소원을 빌어야만이 하늘이 내게 관용을 베풀 것이라고 은밀히 계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나는 진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웃음 지은 그녀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녀의 따뜻한 손을 꼭 쥐어보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부르는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모든 기도는, 그러나, 허사였다. 나는 아무 표정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만져보았을 뿐이었다. 이미 차디차게 굳어진 그녀의 손을 부여잡았을 뿐이었다. 어두운 침묵으로 꽉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에 떨리는 내 손가락을 대어 보았을 뿐이었다.
그것뿐이었다. 내가 그토록이나 원했던 것을 나는 단 한 가지도 갖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늘은 눈곱만한 소원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 내게 남은 것은 완벽한 절망뿐이었다. 너무나도 완벽한 절망이어서 나는 오히려 냉정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기도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우리의 행복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한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직접 내가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향해 다짐을 했다. 그녀를 지킬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녀를 이미 떠난 그녀지만, 이미 홀로 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 땅에서 그녀는 충분히 혼자였다. 홀로 뿌리를 내리고, 홀로 잎을 틔우고, 홀로 꽃을 피우고, 홀로 지는 꽃을 감당했었다. 저 영원 속의 어둠에서까지 그녀를 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아힘사를 이해했다. 천년 전의 그 아힘사, 죽은 수하치를 따라 영원 속으로 들어가 버린 아힘사를. 천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우리의 운명이 변하지 않았다면 나는 다시 아힘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는 대가 아힘사의 길을 그대로 다시 밟을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길이 내게 남은 유일한 위안이라는 것도 고스란히 수긍하였다.
나는 그것이 이 사랑의 완성인 줄 믿었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나는 그 길만이 내게 주어진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영혼으로 그녀 뒤를 따라가 우주 속의 다른 섭리에 영향받으며 또다른 미래를 기다리는 모습, 그것이 내가 극복해낸 이번 생의 결과라고 앞질러 결정해 버렸던 것이었다.
탄탄하기가 절벽의 바위 같았던 그 결정이 조금씩 바스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떠난 후 여덟 시간 만에 만난, 너무나 여리고 여린, 그러나 한없이 순결하고 이슬처럼 맑은 한 생명을 보고서였다.
살아있는 자의 희망
열 개의 손가락이 있었다. 열 개의 분홍 발가락도 있었다. 거의 푸른 빛이 나도록 깨끗한 눈망울이 있었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머리칼도 어엿하게 자라고 있었다. 피부는 아직 발갛게 익어 있었지만 오뚝하니 솟은 코와 꽃잎 같은 입술은 너무 아름다웠다.
유리창 너머로 처음 아이를 보면서 나는 후들후들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아, 이 아이가 있었지. 제발 이 아이를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그녀가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온 힘을 다해 내게 부탁했었지. 아, 어떻게 이 아이를 잊고 있었을까. 어떻게 그녀의 간절한 부탁을 잊고 있었을까.
나는 그녀를 보낸 후 여덟 시간 만에 비로소 울기 시작했다. 멀리로 달아나 버렸던 마음 한 자락이 나시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단단했던 결심의 한 귀퉁이가 흔들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유리창에 머리를 문대면서 한없이 흐느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눈물샘이 고장이나 난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의사는 말했다. 생각보다 아이는 건강한 편이라고. 그러나 심장 발육이 부진해서 호흡곤란 증상이 있다고. 그래서 당분간은 병원에서 돌봐줘야 할 것이라고.
의사의 말에 나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나한테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 대신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프지 않게, 고통스럽지 않게, 소중히 다뤄주십시오, 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나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아이를 면회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면, 유리 벽 저쪽 안에서 엄마를 잃은 줄도 모르는 가냘픈 생명은, 무심한 눈길로 내 뒤 어딘가를 보곤 했다. 그 아이의 말간 눈빛을 보고 있으면 헝클어진 나조차도 말갛게 개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있었으므로 산장으로 돌아가는 날짜를 며칠 뒤로 미루었다. 나는 병원 앞에 숙소를 정하고 시간 시간 아이를 보기 위해 병원으로 간다. 간호사가 그랬던가. 이 꼬마는 보통 아이하고 많이 다르다고. 전혀 울지도 않고, 아직은 뱃속에 있는 시늉으로 잠깐잠깐 웃기도 하는 법인데 전혀 웃지도 않는다고 했다.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 연약한 생명을 두고 산장으로 돌아가던 날, 나는 유리창으로 아이를 보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그렇게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직접 들어가서 아이를 한번 안아보고 싶다는 나의 욕구에 간호사는 푸른 가운과 커다란 마스크를 내주었다. 그 고약한 차림새가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아이는 깃털만큼이나 가벼웠다. 너무나 가벼워서 아이에게는 몸은 없고 정신만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내 품에서 아이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전혀 바둥거리지도 않고, 다른 어디로 시선을 옮기지도 않고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똑바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간호사는 아직 사물을 구별할 줄 모를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나는 아이가 내 모습을 가슴에 새겨두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틀림없었다. 까만 눈동자의 초점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내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서. 아이와 나는 시선을 맞추고 한참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런 어느 순간, 전혀 웃을 줄 모른다는 아이가, 한 번도, 배냇짓으로라도 웃지 않았다던 아이가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정말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아이는 그지없이 활짝 나를 보고 웃었다. 그 순간 내 가슴의 떨림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이의 심장과 내 심장이 맞닿도록 그렇게 그러자 아이의 심장에서 내 심장으로 무언가 질긴 끈 하나가 이어지는 느낌이 전신을 감싸 안는 것이었다.
다시 피어야 할 꽃
나는 그녀를 내 산장 가까이 묻었다. 산장의 창으로 보면 저만큼 바로 앞에 보이는 자리였다. 물론 햇볕도 종일 따뜻하게 드는 곳이었고, 아무리 큰비가 내려도 거짓말처럼 물이 빠져버리는 땅이었다. 그리고 나는 밤을 꼬박 새워서 바위를 갈아 그녀의 묘비를 만들었다. 거기에 나는 아무 글도 새기지 않았다. 새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기에 차라리 여백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나는 나의 길이 천년 전의 아힘사가 걷던 길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가 그것을 원하지 않고 있음을 나는 안다. 내가 그녀를 따라 영원 속으로 침몰하는 것은 그녀를 배신하는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는 천년 전의 아힘사와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천년 후에도 사랑의 비애만을 남기고 영원 속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녀가 깊은 물 속에 잠겨버린 작은 배로도 평화로울 수 있는 길은, 그녀가 어둠 속에서도 영원한 정적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그것은 그녀가 남긴 씨앗 하나를 잘 간직해서 차마 눈부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꽃으로 만개시키는 책임을 내가 엄숙하게 실행하는 길밖에 없다. 나는 그 길을 피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영혼이 편히 쉴 거처를 마련해놓자마자 서둘러 다시 산을 내려왔다. 아이가 병원에서 퇴원하기까지 보름 동안, 나는 그렇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 일찍 산을 내려가, 아이의 웃음 한 번 보고, 어두워진 산길을 걸어 산장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이를 보고 돌아오면 반드시 그녀에게 갔다. 내가 없는 동안 그녀를 지키고 있는 미루와 함께 나는 오래오래 그녀에게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점점 활기차게 움직인다고 간호사가 기뻐하더군요. 내가 보니 영락없이 당신을 닮았어요.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한 그 입술은 정말 당신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아요. 그 애의 발가락은 또 얼마나 귀여운지, 당신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설마, 당신도 어딘가에서 다 보고 있겠지요...
Ⅶ. 그 후...
오 년 후의 어느 날
노루봉 산장은 여름이 한철이다. 노루봉을 찾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그림처럼 꾸며놓은 산장 안에서 향기 좋은 차 한잔을 마시고 산을 내려간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 산장을 노루봉 카페라고도 불렀다.
여름에는 통나무로 만들어 놓은 의자가 모자랄 정도로 늘 사람이 붐볐다. 이 산장에서 파는 차는 모두 주인이 직접 노루봉에서 채취한 갖가지 산야초들로 만든 것이어서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독특한 향취가 있다는 소문이 등산객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산장의 주인은 등산객 하나하나를 위해서 매번 다른 차를 끓여내곤 했다. 향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마른 산국화 잎으로 우려낸 산국화 차를, 담백한 맛을 기다리는 노인에게는 구걸초 차를, 기운이 쇠한 사람에게는 어린 쑥을 그늘에서 말려 빻은 뒤 콩가루에 묻혀 살짝 쪄낸 콩쑥 차를 꿀과 함께 내놓았다. 녹차라 하더라도 노루봉 산장의 녹차는 직접 가꾸어서 갓 따낸 새순 외에는 절대 차로 우려내질 않았으므로 은은한 향내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특별한 것이었다.
차 한 잔 값을 치른 것치고는 너무나 소중한 대접을 받은 사람들은 두고두고 노루봉 산장을 잊지 못하곤 했다. 그들은 도시로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산장 안에 감도는 향기와 반들반들 윤이 나는 통나무 탁자를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다음 해 여름이 되면 다른 산을 갔다가도 일부러 노루봉까지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들르는 사람도 많이 생겨났다.
산장에 들어가기 전이거나 혹은 산장에 들어가 한 잔의 차를 마시고 나온 사람들 눈에 한 번씩은 꼭 띄게 마련인 곳이 한 군데 있었다. 한눈에도 누군가의 지극한 정성으로 가꾸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던져주는 그 무덤 앞에는 오묘한 모습으로 다듬어져 있는 바위 비석이 하나 서 있고, 역시 자연 그대로의 형상을 가능한 다 살린 넓적 바위가 비석 밑에서 상석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바위 비석이나 상석, 혹은 무덤 주변의 푹신한 풀밭이 아니었다. 그것뿐이라면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는 풍경이었으니까.
그러나 여름 한 철 노루봉에 들러 산장을 지나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무덤 앞에서 정답게 뛰놀고 있는 단발머리 계집아이 하나와 누런 털의 늙은 개를 한 마리 볼 수 있었다. 가끔씩 구슬이 굴러가는 듯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공중에 퍼뜨리면서 나비처럼 나풀나풀 뛰어다니는 계집아이, 그리고 흡사 근엄한 근위병처럼 꼬마의 곁에 바싹 붙어서 사방을 살피고 있는 늙은 개.
계집아이는 이제 다섯 살쯤이나 되었을까. 홀쭉하니 야윈 것 같은 체구이지만 자세히 보면 사과의 붉은 빛을 그대로 닮은 양 뺨의 홍조나 날렵한 몸 움직임이 아이의 탄탄한 건강을 증거해 주었다. 그리고 그 터질 듯한 웃음소리나 '미루야!' 하고 개 이름을 부를 때의 그 낭랑한 목소리 또한 정녕 산 아이다운 정기가 있는 것이었다.
어른도 오르기 힘든 높고 험한 산봉우리 산장에서 맞닥뜨리는 이 아름다운 정경은 누구의 발걸음이라도 멈추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나풀거리는 까만 머리와 동그란 얼굴, 빚은 듯이 매끄러운 예쁜 종아리, 어느 것 하나 사람들 시선을 끌지 않는 데가 없었다. 사람들이 더욱 호기심을 갖는 것은 계집아이가 한 번씩 봉분 위에 납작 엎드려 가만히 땅속에 귀 기울이는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 모습은 흡사 먼 곳에 있는 누구의 작은 목소리를 가려듣느라 애쓰는 듯이 보였다. 아이는 정말 땅속에서 무슨 소리를 듣는 것 같기도 했고 때로는 그 말에 화답해서 무언가를 무덤 안에 대고 말해주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한 등산객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직접 무덤가로 내려가 아이가 하는 양을 자세히 지켜보았는데 틀림없이 무덤 속의 누구와 대화를 나누더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누구와 이야기하느냐고 물었더니 땅속의 엄마랑 이야기한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때쯤이면 누군가 다시 산장 주인의 이야기를 꺼내기 마련이었다. 산장에 함께 사는 가족이 몇이냐고 물었더니 주인 대답이, 아내와 딸과 개 한 마리까지 모두 네 식구가 산다고 했다면서 이 산장에 뭔가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 짓곤 하는 것이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연, 아름답지만 슬픈 사연이 있는 산장. 사람들은 이렇게 가슴 속에 노루봉 산장에 대한 기억을 담고 산을 내려 각자의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곤 했다. 도시로 돌아간 그들은 또 오랫동안 향기로운 한 잔의 차와, 조용한 산장 주인과 단발머리 계집애와 그리고 충성스런 개 한 마리를 마음에 담아두고 삶에 지칠 때마다 가만히 떠올려 보곤 하는 것이었다.
노루봉 산장에 잠시 머물렀던 사람들이 산을 내려가는 시각은 대개 오후 서너 시 경이었다. 일몰의 시간쯤이면 너무 늦게 도착해서 미처 정상에 오르지 못한 등산객이나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계속 이웃 산으로 넘어갈 등산객 한두 명만 남았다. 저 멀리 짧은 석양의 황홀한 빛잔치마저 스러지는 그 시간에도, 숲 그림자가 저녁보다 먼저 사방을 어둡게 만드는 그 시간에도, 아이는 무덤가 풀밭에서 충실한 개와 뒹굴며 장난을 치고 있기 일쑤였다. 개의 목에 풀잎 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주기도 하고, 열 개의 꽃반지를 만들어 무덤 위에 줄줄이 늘어놓기도 하면서.
바로 그 시간이 되면 언제나 산장 굴뚝으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아이를 씻길 물을 데우기 위해 산장 주인이 바깥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때문이었다. 여름에도 산장 주인은 꼭 나무를 태워 아이를 목욕시킬 물을 데웠다. 물이 다 데워져도 주인은 금방 아이를 부르지 않았다. 뜨거워진 물에 띄워놓은 약초잎들이 품고 있는 약효를 다 물속으로 뱉어낼 때까지 주인은 침착하게 기다리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주인은 놀고 있는 아이와 개를 쳐다보며 가만히 서 있곤 했다. 그럴 때 그의 온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였다. 이윽고 약초가 다 우러난 듯싶으면 주인은 얼굴의 미소는 그대로 둔 채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인희야! 인희야!"
그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그 울림은 온 산을 메아리로 떠돌며 나뭇가지도 흔들고, 잎사귀도 매만지고, 작디 작은 산꽃 떨기들 위에도 앉았다가, 마침내 아이가 있는 무덤가로 되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오세요, 당신. 아니면 무슨 말이든 좋으니 나를 향해 단 한 마디라도 말해주세요. 당신, 어느 것도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마지막 부탁이니, 제발 당신 스스로를 아껴주세요. 어떤 불행도 범접할 수 없도록 당신이 먼저 스스로를 지켜주세요.
내게로 당신이 연달아서 몇 번씩 그녀는 편지를 읽는다. 읽고 또 읽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새롭다. 얼마나 그렇게 편지를 읽었을까, 그녀는 문득 무언가 한마디 그를 향해 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는 가만히 귀 기울여 자신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스스로의 음성을 듣는다. 그 음성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게, 갇혀 있는 나에게, 뚜벅뚜벅 당신이 와 주세요...
좋은 사람
토요일 오후, 정실장이 왔다.
정실장 뒤로 아파트 슈퍼마켓의 배달 청년의 무언가 가득 찬 노란 바구니를 들고 서 있다. 청년은 두 사람을 젖히고 현관에 짐을 부리기 시작했다. 비닐 꾸러미들이 한참 나오고도 이어서 과일들이 종류대로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과자며 우유 따위의 간식거리까지 연이어 청년의 손에 집어져 현관에 죽 늘어섰다. 마치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옮겨놓은 형국이다. 인희는 기가 막혀 웃고 만다.
"지금 어디서 오시는 길이에요?"
"어디서 오긴. 보면 몰라. 이 동네 슈퍼를 좀 털었지. 싹쓸이한 것은 아니니까 걱정일랑 말고."
정실장의 단정한 정장 차림이 예삿날은 아닌 듯싶어서 물었던 것인데 정실장은 또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정리를 좀 해. 고기나 생선은 상할 수도 있으니까 잘 간수하고."
"인희씨가 처치 못 할 게 어딨어?"
정실장쪽으로 선풍기를 돌려주며 인희는 또 기가 막힌 웃음을 짓고 만다.
못 당해. 그래도 반갑다. 정실장이라면 언제라도 반갑다.
"좀 많나 싶었는데 인희씨 얼굴 보니 슈퍼를 싹 털어올 걸 잘못했구나 싶어지는데? 대체 밥은 먹고 사나? 사직서 쓰고 들어앉았으면 뭔가 좀 신수가 훤해지려나 했더니 더 말이 아닌데."
"정실장님 잔소리 듣지 않으니까 허전해서 밥이 안 먹혀요. 어떡하죠?"
"그럴 줄 알고 내가 왔잖아. 그러니 있을 때 잘하라고 그랬잖아. 솔직히 말해서 인희씨가 내 상사였지, 내가 인희씨 상사였어? 하여간 난 사장보다, 아니 우리 마누라보다 인희씨가 가장 무서웠으니까. 이래 뵈도 사장 앞에선 할 말 다 한 사람이 나야. 그래도 인희씨 앞에선 한 번도 내 맘대로 말해보지 못했다고."
"인원 보강은 됐어요?"
"그럼. 남자 둘에 여자 하나. 그래도 인희씨 없으니까 완전 엉망이야. 이건 숟가락 잡는 법부터 일일이 다 가르쳐줘도 지 앞에 놓인 밥 하나 못 먹으니 말 다 했지 뭐."
"왠일로 셋이에요? 제자리 말고도 둘이나 더 발령을 내줬단 말에요?"
"아냐, 하나 더 추가된 거야. 김원희씨도 그만뒀거든."
"결혼했군요."
"그래. 오늘 거기 다녀왔어. 김원희씨가 자네 안부 묻더라. 고생을 안 해봐서 철부지긴 해도 마음은 착했잖아."
애써 명랑하게 진행되던 대화가 김원희의 결혼 소식에 이르러 두 사람 다 장애를 만난다. 오인희라는 여자 앞에선 결혼이나 사랑이나 행복이란 말은 금기다, 라고 정실장은 생각한다.
인희는 인희대로 생각한다. 김원희 결혼식장에서 저분이 얼마나 마음 상해했을까. 자기 실수라고 또 얼마나 마음을 다쳤을까. 난 괜찮은데, 정말 괜찮은데. 그러니까 결혼이나 사랑이나 행복 같은 말은 해선 안 돼...
선풍기만 돌아가고 잠시 침묵, 인희가 먼저 침묵을 가른다.
"구멍가게 차려도 좋을 만큼 사 오셨으면서 왜 술이 없지요? 시원한 맥주라도 좀 사 올까 봐요."
"그만둬. 지금 가면 그렇잖아도 술 약속 있어. 시간이 좀 남았길래. 냉수라도 한 잔 마실까 하고 이리로 온 거야."
굳이 고집을 부려서 냉수만 한 잔 마신 뒤 정실장은 일어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인희씨 퇴직금, 통장에 들어갔어. 확인해 봐. 그리고 또 하나 입금된 것 있을 거야. 우리 사무실에서 인희씨 송별금 만들었으니 그런 줄 알아. 송별금이니까 다른 오해는 말고. 늘 그래왔잖아."
그러나 다음날 그녀가 확인한 송별금은 늘 그래왔던 송별금의 액수가 아니었다. 인희는 송별금 속에 정실장의 이번 달 보너스가 다 담겨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정실장은, 그녀가 알고 있는 정실장이란 사람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자식이 품은 생명
정실장이 다녀간 다음 날, 이번에는 어머니가 왔다. 아니, 어머니가 왔다 간 흔적이 있었다. 벨이 울려서 나가보니 아무도 없고 커다란 보퉁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 푹신한 솜을 넣어 정성스럽게 꾸민 아기 이부자리 한 채, 그리고 열 번도 더 삶아서 볕에 바랬을 부드러운 기저귀. 보퉁이 속의 내용물이 다녀간 사람이 바로 어머니였음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인희는 그것들을 아기방에 잘 간수했다. 간수만 하지 않고 오며 가며 한 번씩 아기의 이불에 뺨을 대보기도 하고 기저귀감을 가슴에 품어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가 괜히 뜨거웠다.
끔찍한 대화
며칠 뒤 혜영이 왔다. 혜영도 또 한아름 무언가를 싸들고 그녀에게 왔다.
"왜들 그래. 내가 무슨 재난이라도 당했어? 다들 구호품 날라다 주느라고 정신이 없어. 그러지 마. 불편해."
"그러게. 냉장고가 미어질 지경이구나. 잘됐네. 오늘은 네 덕에 이것저것 실컷 좀 먹어보자."
그날 인희는 혜영과 즐거웠다. 모처럼 음식도 많이 먹었다. 툭툭툭, 뱃속의 아기도 여러 번 나 여기 있어, 하면서 신나 했다. 열도 오르지 않았다. 혜영은 자신의 등을 두들기며 크게 웃는 친구를 보고 조금 안심했다. 힘든 고개는 다 넘은 거겠지. 설마 더 이상 이 친구를 괴롭히는 일이 남아 있을라구.
그래서 혜영은 마음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가 석양의 노을이 붉었던 무렵이었다. 인희는 친구를 배웅하기 위해 아파트 앞 버스 정류소까지 나갔다. 한낮의 폭염이 식어서 거리에 부는 바람도 시원했다. 혜영이 떠나고 난 후 느릿느릿 거리를 걸어올 때도 괜찮았었다.
아직은 후끈후끈한 아파트 광장을 가로지를 때도 괜찮았다. 집으로 돌아와 텅 빈 거실과 부엌을 보면서 불현듯 친구가 떠난 빈자리를 느꼈을 때도 외롭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못 느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몹시 춥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추웠다. 침실로 달려가 거울로 보았다. 볼이 빨갛게 달아있었다. 체온계를 꺼내는 그녀의 손이 침착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은 정말 좋은 컨디션이었는데, 열이 오를 만한 어떤 조짐도 없었는데. 정확히 40도였다. 40에 멈춰 있는 막대를 보면서 인희는 너무나 화가 났다. 억울하기도 했다. 왜? 왜, 40도인가? 무엇때문에.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병에 대해, 자신의 육체에 대해 억제할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조금 전까지는 정녕 무엇이든 이겨나갈 만큼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막아낼 수 없는 무서운 일도 있겠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모든 일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그저 위로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나니 맥이 풀렸다. 열이 오를 때는 늘 그렇듯이 두통이 왔고 눈꺼풀을 밀어 올릴 힘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기진맥진했다. 내가 아무리 건강하고자 해도 무엇인가 나를 쓰러뜨리겠다고 작정하면 결국 쓰러지고 말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였으므로 공포도 극심했다. 살고 싶어. 내 아이와 함께 오래도록 살고 싶어. 인희는 처음으로 간절하게 삶을 희망했다. 내 아이와 함께 하는 건강한 삶을.
그러나 더욱 좋지 않은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인희는 혜영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전화일 것이라고 여겼다. 친구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혜영이라 한들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하지만 전화는 혜영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정말이었다. 나즈막하고 가시 돋친 그 목소리가 귀에 닿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별일 없어요?"
그 목소리가 던진 첫 질문이었다. 진우 어머니. 더러운 핏줄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 식구로 맞을 수 없다던 전직 여학교 교사 출신의 교양있는 부인의 음성이었다. 인희는 여보세요, 소리 한 번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네."
"진우, 여기 떠나 외국 나간 것 알겠지요? 빨라도 3년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요."
"잘됐네요."
비아냥거림이 아니었다. 서울에 있다면 만에 하나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그것조차 싫은 그녀였다.
"예정일이 언제지?"
그 물음에는 입을 꽉 다물었다.
"미혼모들을 보호해주고 출산 후에는 입양 알선도 해주는 기관이 있는데 알고 있어요?"
입양을 알선해주는 기관? 사각사각 얼음이 스며있는 듯한 저 말투. 인희는 또 진저리를 쳤다. 무엇을 알고 싶어 전화했는지 알 만했다.
"설마 처녀 몸으로 아이를 낳아 키울 생각은 아니겠지?"
본론이 나오면서 점잖고 은근하던 말투에 역정이 묻어 있다.
"당연히 제가 키워야지요.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지 말라고? 나중에 아이 들쳐 안고 내 자식 결혼식장에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평생 아이를 미끼로 내 자식 앞길 가로막을 텐데 날 보고 신경 쓰지 말라고?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런 일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으니 제발, 걱정마세요."
"아가씨 독종인 줄 나 알아. 걱정 안 하게 생겼나?"
독종이라고? 인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래요, 나 독종이에요. 독종이니까 혼자서도 얼마든지 아이 키울 수 있다구요. 아셨어요? 내 아이를 괴롭히는 인간이 나타나면 그 사람이 누구래도 나 가만있지 않아요. 당신 같은 사람, 정말 끔찍해요! 당신네들, 꿈에 볼까 두려운데 내가 당신들 앞에 나타날 것 같아요? 이젠 아셨어요? 당신네들, 그 끔찍한 얼굴 다시 보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어요. 끔찍하다구요!"
거기까지 정신없이 부르짖었던 것이 끝이었다. 그녀는 들고 있었던 전화기가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희미하게 느꼈다. 몹시 숨이 가빴고 심장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기분이었다. 눈앞도 캄캄해졌다. 그러나 의식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녀는 마음속으로 계속 '끔찍해!'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곤 이내 허물어지듯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 오인희가 쓰러졌다는 것을 김진우의 어머니는 전화기 저편에서 다 알고 있었다. 이 돌연한 사건이 김진우 어머니에게 끼친 영향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이는 놀라지도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김진우의 어머니는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아이구, 저 독종이 제 성깔에 겨워서 자물 쓰는구만. 그러게 내가 뭐랬어. 본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천한 인종들은 뻑하면 저런 식으로 사람 질리게 하니 절대로 가까이하면 안 된다고 그랬잖아. 흥, 네가 아무리 그래봐라. 나도 만만치가 않어. 내 자식 가로막는 독초가 있으면 뿌리까지 싹 뽑아버려야 마음을 놓는다구. 그래야 평생 저 독종 얼굴 안 보지. 그래야 두 발 쭉 뻗고 살지. 어디서 내 눈을 속일려구. 근본도 모르는 천한 것이 어디서 더런 수작 부릴려구 들어, 들기를."
사무치게 누군가가 그리워...
머리가 망치로 쪼는 것처럼 아프다. 귓속에 수백 마리의 풀벌레가 들어앉아서 윙윙 시끄럽게 노래를 불러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왜 여기 누워있을까. 왜 여기에. 인희는 가까스로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눈을 떠본다. 침대 밑에 널부러져 있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순간, 마음속으로 다시 그 울림이 치솟는다. 끔찍해!
그러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순식간에 환히 떠오른다. 아이를 입양시키라고? 아이를 미끼로 자기 자식 앞날을 망칠 것이라고? 날 보고 독종이라고? 겨우 가라앉았던 심장이 더 거세게 뛰기 시작한다. 차라리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맨정신으로 그 지독한 말들을 새김질하고 있었다면 필시 이보다 더 몸과 마음을 상했을것이다.
그녀는 일어나서 거울 속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다. 푸른 이마에 돋은 굵은 핏줄 두 개가 거슬린다. 두 손으로 양볼을 부벼본다. 그러다가 아직도 손이 뜨끈뜨끈하다는 것을 안다. 정신을 탁 쳐서 쓰러뜨릴 때 이 열도 가져가 버리지, 하고 그녀는 그 누군가를 향해 힘 없이 원망을 한다. 그리고 인희는 무작정 거실로 나온다. 또 주방으로 가보기도 한다. 침실로, 작은방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 밤, 인희는 하염없이 자신의 작은 아파트를 배회한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멍한 시선으로 어딘가를 주시하며, 휘청거리면서 몇 시간이고 그렇게 아파트를 맴돌고 있다. 마치 출구를 잃어버린 나방이 안타깝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듯이.
밤새 좁은 아파트를 헤맸었다. 먼동이 터 오를 때까지도 그녀는 허공을 노려보며 거실에서 주방으로, 침실에서 작은방으로, 빙빙 쳇바퀴를 돌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도 몰랐다. 왜 이렇게 끝없이 빙빙 돌아야 하는지 정녕 그녀 스스로도 몰랐다.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견딜 수 없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휘청거리는 걸음이라도 멈추기만 하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죽어서는 안 돼. 내가 죽으면 내 아이도 죽으니까. 온 집안을 밝혀놓았던 불빛이 기운을 잃고 스러질 무렵, 거실 창으로 눈부시게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할무렵, 인희는 마침내 주저앉았다. 푸른 이마에 땀 젖은 머리칼 몇 올이 달라붙어 있고 하얀 두 손은 으스러지도록 꽉 움켜쥔 채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주먹 쥔 손으로 거실 바닥을 두들겼다. 쾅쾅, 은 아니었다. 그럴 힘이 남아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저 탁탁, 일 뿐인 두들김이었다.
사무치게 그립다, 고 그녀는 생각했다. 누군가가, 누군지 확연하지도 않은 어떤 사람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라고 그녀는 한 번 더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뜻하지 않게 이런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내게, 갇혀 있는 내게, 제발, 당신이 좀 와주세요. 제발, 내게로 와주세요...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선문에 들 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노후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반골의 동지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임영조의 갈대는 배후가 없다
아침부터 비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어쩌면 지난 밤부터 시작된 비인지도 모른다. 인희는 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잿빛 하늘과 허공을 채우고 있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에 갇혀 있는 듯한 이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우산을 움켜쥐고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자동차가 튕기는 빗물에 옷을 적시고 난감하게 서 있는 비닐옷으로 중무장을 한 채 그래도 연신 손님을 부르고 있는 수박 장수.
바깥세상의 풍경을 하나하나 살피는 일은 지루한 시간의 갈피를 넘기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인희는 빗속에서 몹시 외롭다고 느꼈다. 무작정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리며 사는 지금의 삶이 옳은 것일까. 홀로 칩거해 있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 되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는 어떻게 비바람 치는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넉 달만 기다리면 아이와 만나게 된다는 것, 그 기다림이 없었다면 이 삶을 어떻게 견디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제 그녀에게도 핏줄로 묶인 가족이 하나 생기는 것이다. 절대 버리거나 버림당하지 않을 온전한 핏줄. 험한 세상 같이 위로하고 같이 기대가며 살 핏줄. 인희는 혼곤한 외로움의 항해 속에서 다시 희망의 돛을 하나 내건다.
빗줄기는 조금도 가늘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더 이상 굵어지지도 않으면서 여일한 기세로 허공을 가른다. 문득 저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른한 오수라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빨리 시간이 흘러 내 아이와 상면할 수 있는 그 날이 어서 왔으면, 인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소파로 옮겨 앉았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넉 달 뒤에 눈을 떴으면. 한숨 달게 자고 나면 넉 달이 훌쩍 지나버리는 시간의 요술 같은 것은 없을까. 이러다 넉 달을 지탱할 기운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때로 그녀의 목을 조르곤 했다.
"입원을 하시지요. 오늘 결과 나온 것으로는 발열의 원인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발열의 원인이 임신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임신으로 인해 체력이 달리다 보니 더 잦은 발열의 상태로 가는 것 같은데 입원해서 보다 정밀한 진단을 받아봅시다."
망설이다 결국 종합병원의 산부인과로 찾아갔던 것이 사흘 전의 일이었다. 의사는 내과 쪽의 정밀진단이 필요하다는 소견이었다. 내과와 산부인과의 협조 아래 발열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급선무라는 의사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몇 가지 검사를 하고 검사 결과를 놓고 다시 이야기하자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어제 병원에 들렀을 때 의사는 단호하게 입원을 권했다.
"기초적인 검사로는 원인이 나오지 않네요. 일단 입원부터 하십시다. 발열의 원인이 밝혀져도 결국은 입원 치료를 요하는 일입니다. 이만한 고열이 지속되고 있을 때는 반드시 신체에 커다란 위험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으로 보시면 정확합니다. 체중이나 혈압, 그리고 심전도 모두에 신체쇠약의 징후가 너무 뚜렷해서 내일 당장 서둘러 입원 수속을 밟는 것이 산모나 태아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밖에 보호자, 와있습니까? 잠깐 만나봤으면 하는데..."
"아닙니다. 혼자 왔습니다."
인희는 의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내일 수속 밟기 전에 보호자와 함께 들르십시오."
의사는 차트를 넘기며 다음 환자를 불러달라는 신호로 간호사를 쳐다본다.
"임신이란 아주 중대한 신체상의 변화입니다. 남들 다 하는 일이라고 쉽게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꼭 입원 준비해서 와야 합니다. 별일 없겠거니 했다간 나중에 크게 후회해요. 엄마 되는 게 쉬운 일 아닙니다. 남편분까지 단단히 협조해야 할 상황이에요."
다음 환자가 들어올 때까지의 짧은 틈을 이용해서 몇 마디 덧붙여 준 것만도 자상한 배려였다고 할까. 인희는 의사의 말이 나무람처럼 여겨져 민망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남편이라니. 인희는 저절로 가슴이 뜨끔했다. 의사는 이미 다음 환자 차트로 마음을 다 옮겨가 버린 후였지만 그녀 혼자 민망했다가, 가슴이 뜨끔했다가 했다. 어떤 경우에도 아이만은 무사한 것인지, 입원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지를 묻고 싶은 바음이 가득했지만 의사의 사무적인 태도 앞에서 그녀는 결국 진료실을 나오고 말았다.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들은 거의가 다 혼자가 아니었다. 남편이나 친정어머니, 혹은 언니로 보이는 보호자들의 지극한 보호를 받으며 자랑스럽게 배를 내밀고 있는 여자들 앞을 지나오면서 인희는 입원은 싫다고 생각했다. 병원 일 층의 혼잡한 수속 창구, 휠체어에 앉아 있는 환자복 차림의 환자와 휠체어를 밀어주는 보호자들을 보면서 그녀는 입원만은 결코 싫다고 다짐했다. 병원 뜨락에서 산보하는 환자들한테도 링겔 병을 들고 소족처럼 따라다니는 보호자가 있었다.
입원은 싫어. 중병이라면 지난 검사로도 이미 원인이 나왔을 것이다. 정밀검사를 받아 가면서까지 별문제 없는 신체 이상을 찾아내야 할 만큼 자신이 보호받고 있는 귀한 존재였던가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쓴웃음이 나왔다.
이태 전 해 겨울의 첫 발열의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었다. 불명열. 원인불명이라 해서 그녀의 차트에 기록된 병명은 '불명열'이었다. 그런 병명으로도 완쾌해서 퇴원했었고 별 이상 없이 잘 살아왔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따위 열로 쓰러질 이유가 뭐겠는가. 그녀는 두 번 다시 이따위 불명열에 의혹을 품고 겁을 집어먹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지며 병원을 빠져나왔었다.
입원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막연한 고집만은 아니었다. 지난번 입원에서도 할 만한 검사는 다 해봤었다. 이번에도 의사는 기초 검사라 했지만 수납창구에서 확인한 바로는 다섯 가지 검사였다. 그만하면 충분한 검토였지 않은가 말이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황이니 육체도 불안하지 않겠는가. 결국 병원이란 대개 병을 과장시키는 곳이라고 생각을 정리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소파에 기대앉아 빗소리와 함께 까무룩히 잦아들고 있다. 세상은 왜 이리 넘어도 넘어도 끝이 없는 험난한 봉우리의 연속인가. 앞으로 넘어야 할 봉우리는 몇 개인지 그것만 알 수 있다 해도 훨씬 견디기가 쉬울 텐데. 그런 생각의 갈피들을 넘기다가 인희는 깜박 잠이 들었다.
노루봉에서 달려온 남자
서늘하다.
서서히 열이 오르고 있는, 이제 막 달구어져 가는 그녀의 이마에 서늘한 손이 얹혀진다. 분명히 차갑고 정결한 어떤 손이 이마를 짚었다. 누구의 손인가를 가늠할 사이도 없이 눈을 번쩍 떴고, 그녀는 그것이 꿈이었다고 확신해버렸다.
그러나, 꿈이었을까. 바깥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많이 잡아도 잠 속에 빠져든 시간은 삼십분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아니, 이것은 잠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귓가에 옅은 빗소리를 매달고 있었던 삼십 분이었으니까. 설령 꿈이라고 쳐도 이마에 얹어지던 묵직한 손의 무게와 그 고요한 움직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희는 일어나 마루를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었다. 누군가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었던 사람이 지금 막 복도로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그랬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바닥은 흥건하게 젖어 있고 옆집의 문 앞에 내놓은 꼬마의 세발자전거도 몰아친 비로 푹 젖어 있다.
꿈속의 손을 찾아 복도로 나온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그만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것을 알리는 맑은 벨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현관문의 둥근 손잡이를 돌리려다 말고 인희는 무엇에 이끌리듯이 엘리베이터를 열린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오,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오는 성하상을 보았다. 투명한 비닐 우의, 우의의 겉면에 송알송알 맺혀있는 빗방울들, 역시 우의에 달린 비닐 모자를 쓴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인희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꿈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직도 꿈인 것을.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남자는 뒷걸음질 치는 그녀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남자의 푸르고 깊은 눈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 눈동자에 비쳐있는 자신의 모습까지 볼 수 있는 거리였다.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얼어붙었던 몸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부름을 들었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어떤..."
여자는 남자의 말을 얼른 해석하지 못하였다.
"그대가 말했습니다. 그대에게 와달라고."
여자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사실이었다. 내게, 갇혀 있는 나에게 당신이 뚜벅뚜벅 와주세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쯤, 혹은 세 번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입 밖으로 말한 적은 결코 없었다. 너무나 사무친 마음이 속으로만 그렇게 나즈막한 외침을 담았을 뿐이다.
"당신은, 당신은, 그 먼 노루봉에서 내 마음의 속삭임까지 듣나요?"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듣고자 하면 듣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내 영혼과 당신의 영혼은 이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이어져 있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나를 불렀습니다. 난 그 부름을 들은 즉시 범람하는 계곡을 헤엄으로 건너고 바위에 미끄러져 상처를 입어가면서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노래하는 듯이 맑고도 부드럽다.
"달려오면서 다시 당신의 한숨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람에 몸을 실어 찰나에 당신 곁으로 올 수 있도록 되기까지는 아직 배움이 먼 스스로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언젠가는 당신이 부르기만 하면 산과 강을 단숨에 건너 눈 깜짝할 사이에 당신 곁에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는 누구인가. 그때 다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그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산의 물을 뿌려가며 나타났다. 길을 비켜주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를 안으로 들여야 했다.
"들어오세요."
남자는 그녀가 열어준 현관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섰다. 남자가 비에 젖은 우의를 벗는 동안 그녀는 현관 구석에 서서 가만히 남자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우의를 벗어 신장위에 걸쳐놓으면서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스스로도 모르게 그를 향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미소였다.
기이한 만남, 그 세 번째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짧은 두 번의 만남에 이어지는 이 세 번째 만남이 그녀에게는 예정되어 있던 해후처럼 여겨졌다. 현관에서 저절로 새어 나온 그녀의 미소가 예고하듯이 인희는 그가 자신의 집 안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에 진우가 이 집을 드나들 때, 그 방문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었다. 그럼에도 성하상의 이 첫 번째 방문은 너무나 편안하다. 그는 누구인가.
"왜 소파에 앉지 않으세요?"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으면 몸의 기운이 바닥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수련의 오랜 버릇이지요."
그녀가 내온 차도 그는 바닥에 앉아서 마셨다. 그의 옷차림은 산에서 만났던 때와는 다소 다르다. 그는 흰 셔츠에 별 특징 없는 회색 바지를 입고 있다. 목이 긴 장화를 신고 있어서인지 우중을 달려왔어도 흰 양말은 눈부시게 깨끗하다. 땅위에 한 번도 내려와 보지 않은 사람의 양말이 저럴까.
"기도 속에 보이는 당신의 모습보다 훨씬 상해 있어요. 아까 내 마음의 손이 짚어본 당신의 이마도 한없이 뜨거웠습니다. 당신은, 너무 자신을 돌보지 않아요."
"마음의 손? 그럼 당신이 내 꿈 속에 찾아와 이마에 손을 얹었나요?"
인희는 놀라움에 외치듯이 묻는다.
"당신에게 내가 온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몸 전부는 당신한테 갈 수 없었지만 손이라도 몸보다 빨리 당신에게 달고 싶었지요."
"그럼 내가 복도에 나와 서성거리고 있을 줄 이미 알았단 말인가요?"
"물론이지요. 장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요. 잊었나요, 아까의 내 말. 우리의 영혼은 이어져 있습니다."
"모르겠어요..."
"애써 알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나 한가지, 어떤 사물이든 모두 겉과 안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에도 겉 질서와 속 질서가 있지요. 우리는 다만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현상만 보며 삽니다. 내부의 질서를 보는 깨우침에 대해 편지에서 자주 말했지요. 당신은 곧 삶의 두 겹 질서를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은 환상주의자인가. 그렇다고 해도 조금도 역겹지 않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이 모든 주장들이 다 환상이 아닌가 때때로 공부를 하면서도 그런 의심에 사로잡히면 견디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만난 뒤로 모든 의혹은 그 추한 옷을 벗어 던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우리가 방치해두었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금방 그녀의 마음을 읽어낸다. 그녀는 저절로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된다. 그것까지도 그는 금방 알아채고 만다.
"아녜요. 나한테 미안해할 것은 하나도 없어요. 당신의 고통을 어쩌지 못하는 나의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당신이야말로 나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당신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납니다. 떠나간 그 사람이 아니라..."
떠나간 그 사람? 그럼 이 사람은 김진우와 있었던 일도 모두 알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단지 마음의 힘으로?
"지난여름,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을 보고 나서 죽도록 괴로웠습니다. 그이가 당신에게 어떤 상처를 입힐 것인지 번연히 알면서도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 내겐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무엇을 알았지요? 그리고 왜 말해 줄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의 여자가 당신이 아니라는 것, 당신이 만나야 할 사랑 역시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러나 그 당시 당신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 당신의 앞날을 짚어준들 당신이 받아들였을까요. 모든 진실은 사실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의 태도지요. 우리, 작고도 작은 인간은 큰 섭리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성하상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고요히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 인간의 비애입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살아야 하는 목숨이듯이 진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림자라도 붙잡습니다."
인희는 남자의 말을 이해해보려고 애를 쓴다. 편지에서 거듭 읽었던 내용들이어서 낯설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모호하다는 느낌은 적지 않다. 이 사람은 어떻게 모호하지 않고 확실할 수 있을까. 나도 확실한 생의 주인이 되었으면. 그녀는 문득 그처럼 변화하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인희는 그제서야 자기가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배를 내밀고 그와 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을 '유일한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남자. 모든 생을 바쳐서라도 이 사랑을 완성하겠다는 남자. 그토록 헌신적인 남자 앞에서 부끄럼도 없이 내밀어진 배. 인희는 갑자기 현실의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되어 할 말을 잃는다.
"이 밤에 나는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 동쪽 방에서 잠을 자겠지요. 당신의 침상은 남쪽 창을 향해 길게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기도 속에서 보는 당신의 방은 그랬습니다. 나는 여기, 이 마루에서 하룻밤을 지새겠습니다. 제발 허락해 주기를 바랍니다. 비록 문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지만, 단 하루라도 잠들어 있는 당신을 지키며 밤을 새우는 일은 당신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내겐 행복입니다. 당신에게 여러 번 말했습니다만, 당신의 존재 자체가 나에겐 행복이니까요. 그리고."
"그리고?"
인희는 어떤 마술에 걸리기나 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좀 쉬십시오. 여기, 당신을 위한 몇 가지 약재를 가져왔으니 내가 그것을 달일 동안 당신은 누워서 쉬도록 하세요."
말을 마친 남자는 마치 몇 번이나 그녀의 집을 드나든 사람처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지그릇 하나를 찾아낸다. 그녀가 붙잡을 새도 없이.
보호자를 찾다
비가 그친 밤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몸을 감싸는 눅눅한 바람에는 내일의 비를 예고하는 습기가 잔뜩 배어 있지만, 그래도 비에 식은 여름밤의 산보는 상쾌하다. 얼마나 오랜만인가. 이렇게 한가롭게 밤거리를 걸어본 기억이 언제인지 기억도 해낼 수 없다. 도로의 패인 웅덩이를 지나야 할 때는 남자가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저만큼에서 자동차가 달려오면 그는 여자를 자기의 등 뒤에 숨겼다. 비틀거리는 취객이 옆을 지날 때도 남자는 여자의 앞을 가로막고 흡사 뺏기기 싫은 소중한 물건을 보호하듯이 넓게 팔을 벌렸다.
보호자를 데려오세요.
병원에 갈 때마다 듣던 그 보호자라는 말, 인희는 힐끗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나의 보호자처럼 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보호를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가끔씩 그녀의 인생을 스쳐 간 좋은 사람들이 있긴 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는 보호자는 없었지 않았는가.
두 사람은 지금 그녀의 제안에 따라 외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찬거리를 사다 분주하게 저녁을 준비하려는 그녀를 극구 만류하는 남자를 보다못해 그녀가 제안한 일이었다. 식당에서도 남자는 아주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식사보다 여자의 입에 한 숟갈이라도 더 넣어주기 위해 온 신경을 다 기울였다.
그는 별말이 없었다. 말은 없었지만 몸과 정신 전체가 그녀를 향해 열려 있다는 느낌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녀 또한 그를 향해 열려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인희는 그와 함께 밥을 먹고, 그와 함께 밤길을 걷는 일이 지극히 편안했다. 이렇게 둘이 걸어 함께 비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다.
"저쪽으로 한 바퀴 더 걷다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너무 집에만 있었거든요."
인희는 아파트 뒤로 뚫려 있는 오솔길을 가리킨다.
"안 됩니다. 돌아가서 약을 먹을 시간이거든요. 당신한테는 이 정도 산보가 적당합니다. 더 계속하면 무리가 옵니다."
남자는 부드럽게 여자의 팔을 잡아 끈다. 여자는 별수 없이 그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가는 길을 밟는다.
"미루는 잘 있나요?"
"내가 없을 때 맡아주는 집이 있습니다. 헤어질 때 그 녀석이 뭐라고 말했는 줄 아세요?"
"미루가 뭐랬는데요?"
"돌아올 때는 꼭 인희씨와 함께 오라고 그러더군요."
남자의 말을 듣고 인희는 하늘을 향해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깜짝 놀라 일순 몸을 움츠렸다. 이렇게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소리 내어 웃는 일을 아예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웃으면 몸속에 잠겨있던 기운이 깨어 활동을 합니다. 사람의 웃음은 에너지를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최대치로 발현되도록 지휘해줍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많이 웃어야 합니다. 당신은 그동안 너무 잠겨만 있었어요."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인희는 그 시선을 받고 있기가 힘들다. 이 사람 앞에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편안해해도 좋은가. 그녀는 문득 이 남자에게 몹시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듬더듬 진심을 말하기 시작한다.
"사실을 말하라면...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이해해 주세요. 하지만, 당신이 나한테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는 것은 말할 수 있어요. 뭐랄까, 설명할 순 없지만... 남이 아니라는 느낌 같은 것.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 이후 지금까지 쭈욱 그랬어요."
인희는 이제 이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스스럼없이 털어놓겠다고 다짐했다. 이 사람한테 숨길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한층 더 마음이 편안했다.
"당신이 와주셔서 아주 좋았어요. 이렇게 말해도 되나요?"
"나한테는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어요."
남자도 활짝 웃었다.
"이상해요. 당신은 처음부터 남같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나타났을 때도..."
어머니에 대해 말하다 말고 인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머니란 사람한테도 타인을 느꼈다고 말하려고 했었지만,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흐려지는 말끝에 이어 성하상이 불현듯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어머니를 만났군요. 그렇지요? 당신에게 나타난 또 한 사람이 어머니였지요?"
"네..."
인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어머니가 누추하고 불행해서 배신감을 느꼈군요."
"어떻게, 당신이 어떻게 알았지요?"
"그런 것 같았어요. 당신에겐 어머니가 있었거든요. 고아가 아니었어요. 난 그걸 알고 있었지요."
인희는 그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알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온몸이 굳어지는 두려움에 휩싸여 남자의 가슴으로 무너져 내렸다.
"무서워요..."
인희는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몸을 숨기기 위해 더욱 더 그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무서워요. 왜 이렇게 몸이 떨리지요..."
남자는 격렬하게 떨고 있는 여자의 몸을 품에 안고서 생각했다. 날개를 다친 가냘픈 새 한 마리가 마침내 날아와 안겼다고. 가로등 빛도 미처 닿지 않는, 아파트 담장 밑의 어느 어두움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날개들을 말리고 있었다.
편지 10
당신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스쳐 가는 차창 밖의 풍경은 눈물에 가리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뿌연 눈물 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당신의 얼굴뿐이었습니다. 당신이 보여준 웃음, 당신의 나즈막한 목소리, 당신의 옷깃에서 풍기는 옅은 비누 냄새, 이런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내 눈물은 홍수처럼 범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 제발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내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고 기쁨의 즙입니다. 달콤한 과즙처럼 향기까지 간직하고 있는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울어도 축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또 웁니다. 뺨으로 흘러내리는 이 눈물을 나는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말할 것이 있습니다. 제발 너무 이르다고 고개를 흔들지는 마십시오. 당신에 관한 한 나한테 너무 이른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나는 여태 죽을힘을 다해 기다렸습니다. 이 한 마디를 당신에게 전하기 위해서 내가 견딘 기다림의 세월을 당신은 아마 다는 모르실 것입니다.
이제 그 말을 합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이제 그 말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부디 받아주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당신, 당신을 맞을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신은 이제 거처를 옮기게 될 것입니다. 아수라장 같은 도시를 떠나 당신은 곧 산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푸르고 깊은 이 아름다운 산뿐입니다. 나의 사랑이 온전히 펼쳐질 곳도 여기 아니고서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여기를 떠나서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나를 당신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제 이곳으로 옮기게 될 것입니다.
어제는 당신이 묵을 방에 도배를 하였습니다. 오늘은 삐걱거리는 방의 창문을 고칠 생각입니다. 당신이 오기 전에 마쳐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지금 내 마음은 몹시도 바쁩니다. 마당에 내놓을 평상도 하나 그럴듯하게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비가 오면 신발을 버리게 만드는 산장 앞의 비탈길도 손을 좀 봐야 됩니다. 이미 디딤돌로 쓸 만한 돌들은 다 마련해두었습니다. 당신의 보폭에 맞게 그 돌들을 배열하고 다듬고 할 일들이 어찌 이리 즐겁게 기다려지는지요.
이 모든 일들을 끝내고 나면 내가 당신에게 가겠습니다. 내가 가서 당신을 데려오겠습니다. 여기가 아니고는 당신의 평안을 보장할 곳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을 쉴 만한 곳이 이 세상에는 도무지 없습니다.
오,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갑자기 범람하기 시작하는군요. 당신을 이곳에 데려올 생각을 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멈추지 않는 이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말하는 것으로 이 편지를 마쳐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오기 전에 할 일들을 생각하면 이렇게도 마음이
급하니까요.
당신을 기다리는 노루봉에서 성하상.
기이한 일들
성하상의 편지가 오고 나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아파트를 팔지 않겠느냐는 복덕방의 전화였다.
"아가씨 집이 마음에 든다는 걸 어떡합니까. 팔겠다고 내놓은 집이 아닌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 집을 살 수 없냐고 조르는 사람은 복덕방 열어놓고 생전 처음이라니까요."
"다 똑같은 아파트인데 하필 우리 집이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어딨어요. 이상한 사람이군요."
"몰라요. 끝종이어서 전망이 좋고 7층이어서 높이도 알맞고, 뭐라더라. 아, 7층에는 내놓은 집이 하나도 없으니까 이왕이면 가운데에 끼인 아가씨 집에다 졸라보기로 했대요. 요새 아파트 시세가 엉망이어서 사실 매물이 없어요. 팔 사람들도 조금 더 기다렸다 팔겠다는 식이거든요. 아무튼 일단 말은 전했으니 혹시 파실 생각이 있거들랑 연락을 주세요. 사나흘 있다가 다시 들르겠다고 하면서 갔으니까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필 이 시기에 집을 팔라고 조르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성하상의 편지가 아니더라도 인희는 아파트를 팔아 작은 가게라도 열어보는 것이 어떨까 가끔씩 미래를 설계해 본 적이 있기는 했다.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그녀의 자립을 도와줄 근거는 집밖에 없었으므로.
언제까지 아이와 함께 저축통장에 담긴 보잘것없는 퇴직금을 파먹으며 지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몸을 움직인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결단이었다. 언젠가는 팔아야 할 집, 임자가 나섰을 때 팔아버릴까, 인희는 복덕방의 전화를 받고 곰곰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두 번째 기이한 일이 또 있었다. 혜영이네가 갑자기 강원도 춘천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알리면서 혜영은 징징 울고 있었다.
"어떡하니. 자주 만나지 못해도 네 옆에는 내가 있어야 되는데. 동규씨가 좋은 직장으로 옮기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널 생각하면 도저히 마음이 안 놓여, 옆에 아무도 없이 어떻게 아이를 낳겠니. 하다 못 해 너 아이 낳을 때까지만이라도 서울에 있었으면 좋으련만, 사정이 그럴 수도 없고..."
"바보야, 애는 병원에 가서 낳지 혼자 낳니? 동규씨한테 그렇게 좋은 직장이라는데 뭐가 걱정이야? 네 잔소리 안 듣게 돼서 나는 신이 난다. 두고 보라구. 내가 얼마나 씩씩한 엄마가 되는지 넌 그저 구경이나 하면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혜영이 전화를 받고 나서는 연거푸 두 끼나 입맛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한 그녀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친구, 고아원에서부터 그토록이나 서로에게 기둥이 되었던 유일한 친구마저 멀리 떠나면 이 황량한 서울에서 어떻게 견딜까. 그런 마음은 혜영이도 똑같을 것이었다. 혜영은 다음날 다시 전화를 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밤새 생각해봤는데, 너, 내 말 농담으로 듣지 말고 똑똑히 들어야 돼. 이 기회에 네 아파트를 팔고 너도 춘천으로 옮기자. 거기서라면 그 돈으로 방이나 가게나 다 넉넉하게 구할 수 있지 않겠니? 그 방법밖에 없겠어. 가까운데 있어야 너 바쁠 때 아이라도 봐주고 그러지 않겠니? 꼭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잖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옛말 그른 것 하나도 없구나. 네 이사 준비나 잘해. 나 때문에 신경 쓰다가 이사 그르칠라."
"우리 사이라면 그럴 만도 하잖아. 난 그렇게 생각해. 세상천지에 너하고 나뿐이라는 마음으로 자라서 오늘까지 오지 않았니? 넌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그랬어. 아냐. 지금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여태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래도..."
혜영은 쓸쓸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인희는 알 수 있었다. 혜영은 지금 그 여자, 어머니를 떠올린 것이리라.
"네가 아무 스스럼없이 어머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마음 편한 이사를 갈 수도 있어. 그럴 수 있니?"
그럴 수 있냐고? 인희는 들고 있던 수화기로 이마를 비비며 쓰게 웃는다. 바로 어제만 해도 어머니 남편이라는 그 주정꾼을 상대하느라 진을 뺀 그녀였다. 어머니는 그 후 나타나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남편은 심심하면 그녀의 아파트로 쳐들어 왔다. 문을 열어주지 않은 적도 여러번, 언젠가는 두말도 하지 않고 돈 조금을 줘서 문을 닫아버린 일도 있었다. 어제는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니가 나타나서 그 작자의 등을 떠밀어 데려갔었다. 만약 어머니가 오지 않았다면 남자의 횡설수설을 막기 위해서 경찰이라도 불렀을 그녀였다. 그만큼 주정꾼의 시도 때도 없는 침입에 화가 나 있던 그녀였다. 비틀거리는 남편을 거의 사정하다시피 해서 집으로 데려가는 어머니의 초라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던 자신의 심정을 친구는 알 수 있을까.
"어머니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너를 따라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이것이 내 대답이야 알아듣겠니?"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수화기를 들고 가만히 있었다. 떠나는 사람은 떠나는 비애로, 남아있는 사람은 남아있는 비애로 이처럼 대책이 없는 현실을 원망하면서. 이윽고 혜영이 먼저 이 끝도 없는 비애에 마침표를 찍었다.
"주인이 전세금을 빼준대. 춘천에 있는 사택은 비어 있으니 내일이라도 짐 싣고 떠나면 끝이야. 하지만 내일은 아니야. 다음 주 수요일에 떠나. 난 네가 나랑 가까운 곳에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언제까지나 버리지 못할 거야. 원래 인희 네가 나보다 더 지독한 데가 있었잖니. 너는 견디겠지만, 나는 잘 못 견딜 거야. 떠나기 전에 한 번 갈게."
전화를 끊고 나서 인희는 진지하게 친구를 따라 춘천으로 옮길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친구보다 먼저 그녀에게 거처를 옮기라고 간절히 소망하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성하상. 거기라면 춘천하고도 과히 멀지 않은 거리였다. 아파트도 그렇고 혜영의 갑작스런 이사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그녀의 떠남을 부추기는 일들이 아닌가. 어째서 연달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일을 전부 우연으로 돌려버릴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떠나거라...
이상한 우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백화점 홍보실의 정실장이 한 번 봤으면 좋겠다는 전갈을 해왔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정실장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어두움이 마음에 걸려 인희는 지금이라도 당장 나갈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실장은 인희의 몸이 무거운 것을 염려해 자기가 퇴근 후에 들르겠다고 고집하는 것이었다.
"떠나라. 지긋지긋한 이 서울을 떠나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려라. 머리카락 하나 내놓지 말고 꼭꼭 숨어버려."
그녀가 내온 커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정실장은 단숨에 그렇게 말을 쏟아냈다. 그녀한테 오기 전에 이미 술집을 거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술김에 하는 말은 정녕 아니었다. 인희는 정실장이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한잔 술에 정신을 헹구고 용기를 내는 것이 마음 여린 정실장의 대화법이었다. 술 없이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사람한테라도 고함 한 번 치지 못할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말하세요. 그렇게 말허리를 자르지 마시고."
그가 못 할 말을 간직하고 왔다면 진우의 일일 것이었다.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버린 그 남자의 일이라면 겁낼 것이 없다고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까지도 내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겠다는 그 사람들. 결코지지 않겠다고 인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오인희씨를 위해서 말허리를 이어 보자구. 못 이을 것도 없지."
정실장은 다 식은 커피를 숭늉 마시듯 단숨에 넘겨버리고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인희씨, 아직도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는 그 생각에 변함이 없지? 그렇지?"
"물론이죠."
"그렇다면 떠나버려. 그 방법밖에 없어. 숨어버려. 상처뿐인 싸움일랑 더 이상 하지 말고."
"진우씨네 집에서 아이을 원하나요?"
짐작은 하면서도 인희는 짐짓 그렇게 물어본다. 진우 어머니의 마음은 이미 알고 있다. 그 간악한 마음 때문에 한 번 쓰러진 적도 있지 않은가.
"그 집에서 진심으로 아이를 원하면 이렇게 슬프지도 않아. 한 번 더 인희씨를 설득할 용의도 있어.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게 아냐. 행여 집안에 불씨가 될까 봐, 어차피 자식이 뿌린 씨앗이니까, 그저 후환이 두려워 거두어들이겠다는 기세야. 후환을 없앤다는 의미니까 더욱 철저하게 인희씨한테 아이를 빼앗으려 들 거야. 진우 어머니, 한번 마음먹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는 양반이니까."
"그럴 수는 없어요. 결코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강제로 아이를 데려가면 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어버리겠어요."
인희의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쳐다보다 말고 정실장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냅다 소리를 친다.
"그러니까 이 바보야, 숨어버리라니까. 이 더러운 세상이 찾지 못하도록 꽁꽁 숨어버리라고! 나도 인희씨 평생 찾지 않을 테니까."
목울대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큰소리를 치는 정실장 앞에서 인희는 말을 잃는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질긴 인연들, 대체 무엇이 이리도 끈질기게 내 발목을 묶고 있단 말인가.
"떠나버려. 어디로 숨어버리더라도 두고두고 날 원망하며 살아야 해. 꼭 그래 줘. 그래야 내가 인희씨한테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으니까. 나 같은 인간은 지옥 유황불에 떨어져서 실컷 죄 갚음을 해야 해. 그래야 돼. 난 꼭 그렇게 될 거야. 암, 그렇게 되고 말 거야..."
그런 다음 정실장은 잘 있으라는 말도 남기지 않고 가버렸다. 거대한 해일이 휩쓸고 간 듯한 기분, 인희는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이 세상이 역겨웠다. 너무나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꼭꼭 숨으라고? 날 보고? 왜 당신들이? 왜...
떠나야 할까...
필연코 당신을 데려오고 말겠다는 성하상의 편지와 함께 시작된 이 일련의 사건들은 어쩌면 운명의 힘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정실장이 주고 간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다음 날 오후였다.
성하상의 간절한 편지를 받고도 막상 이 도시를 떠나 그와 함께 노루봉에서 살아야 한다는 일에 어떤 현실감도 얻을 수 없었던 그녀였다. 그가 다녀간 뒤부터 어느 정도 운명적인 사랑의 관계에 대해 수긍할 수는 있었다 쳐도 그러나 그것을 현실에 적응시킬 만큼 구체적인 감정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노루봉으로 가야 한다면, 그것은 성하상을 사랑한다는 결론을 얻은 다음에라도 늦지는 않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사람은 서두르지만 나는 결코 서두르지 않겠다. 이것이 편지를 읽은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연달아 그녀의 떠남을 재촉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 모든 일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그 편지의 뒤를 이어 일제히 그녀에게 일어났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제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우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기어이 떠나야 한다면
가을이 찾아들고 있었다. 안정을 찾을 수 없는 사건들 속에서도 계절은 어김없이 자리를 바꾸고 있다. 인희는 아까부터 누런 무늬가 아롱지기 시작한 잎사귀들을 내다보며 창가에 서 있었다.
어제 혜영을 떠나보냈다. 그 애가 떠나는 것을 배웅해 주지도 못했다. 오지 마. 네가 오면 시어른들 앞에서 내 마음을 감출 수 없어 당황하게 될 거야. 혜영을 난처하게 만들까 봐 일부러 가지 않았다.
성하상한테서는 하루걸러 한 번씩 편지가 오고 있었다. 오늘 배달된 편지에는 부엌을 고치는 일이 예상외로 시간을 끌어서 자꾸 마음만 급해진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당신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산아래 마을까지 뛰어다니는 일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왜 이리 즐겁기만 한지 모르겠다고.
나는 정말 그에게로 갈 수 있을까. 이렇게 헝클어진 삶을 추스려 그에게 갈 수 있는 것일까. 인희는 이제 자신의 일도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무언가 불가피한 운명 같은 것이 자신의 등을 떠밀어서 결정을 내려주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실행에 옮길 수 없을 것이란 기분에 자꾸 사로잡힌다. 그렇다면 그 순간 그녀가 본 것은 바로 불가피한 그 운명의 손길이었을까.
인희는 문득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 오는 한 대의 택시를 보았다. 택시가 멈추고 한 부인이 내리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황금색의 원피스를 입은 그 부인이 택시의 문을 닫는 것도 보았다. 이마에 손을 얹고 해를 가리며 두리번거리는 그 자태가 눈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주저앉고 있는 중이었다. 틀림없었다. 품위와 교양으로 챠가운 마음을 감추고 있던 진우의 어머니. 인희는 무작정 현관으로 달려갔다. 고맙게도 문은 완고하게 잠겨있었다. 두 개나 달린 자물쇠가 철저하게 자신을 바깥과 차단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현관문만 노려보았다. 올 테면 오라지. 당신을 이 집에 들이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은 내 집에 발 디딜 자격이 없어.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 흘렀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어떤 기적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쓰기 얼마, 그녀는 마침내 엘리베이터의 멈춤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발자국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 인희는 숨을 가다듬었다. 교양과 품위로 치장한 부인은 결코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다.
딩동 딩동.
교양있는 부인은 초인종도 가볍게 누른다. 인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뚫어질 듯이 문을 노려본다. 얼마 후 다시 예의 바른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다. 딩동딩동. 인희는 계속해서 문 저쪽의 보이지 않는 진우 어머니를 노려보고만 있다. 시계의 초침 소리까지 또렷하게 귀에 잡히는 정적의 순간들을 그녀는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견디었다.
딩동 딩동 딩동.
이제는 제법 성마른 초인종 소리를 내고 있는 진우 어머니. 꼼짝도 하지 않고 문만 노려보는 그녀. 그리고는 끝이었다. 초인종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인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속지 않을 거야. 당신은 지금도 내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어. 날 할퀴려고 손톱을 곧추세운 채. 난 속지 않아. 그녀의 짐작은 옳았다. 삼십 분쯤 지나서였다. 갑자기 인터폰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경비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였다. 경비실로 내려가 인터폰을 부탁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난 안 속아. 인희는 자즈러지게 울어대는 인터폰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무릎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오인희의 편지
가겠습니다. 당신이 데려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진저리나는 도시를 떠나 어딘가에 숨어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겠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습니다. 그곳, 노루봉에 마련되어 있다는 나의 방으로 당장 내일이라도 가고 싶습니다. 거기에 나의 거처를 마련해 준 당신에게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곳을 생각하면 숨통이 트이는 기분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떠나고자 하면 떠날 수 있도록 모든 일이 이루어져 간다는 것을 이제 나는 믿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오욕과 상처뿐인 이 도시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을 아마도 나는 너무 늦게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Ⅷ. 천년의 사랑
다시 그때를 회상하며
그해 가을, 그녀가 보냈던 그 짧은 편지.
지금도 나는 그날을 어제 일인 양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짧은 편지를 여태도 외우고 있다. 가겠습니다, 로 시작해서 너무 늦게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 맺어지던 그 짧은 편지를. 그것은 그녀가 나에게 보냈건 첫 편지였으며 동시에 마지막 편지를 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녀와 태어날 아이, 새 식구를 맞이하기 위해서 산장 곳곳에 할 일이 태산 같았다. 나는 밥 먹는 것도 잊었고 자는 것도 잊은 채 일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가 편지에 쓴 대로 너무 늦어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야만 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나에게도 있었다. 그녀를 만난 이후 가장 나를 괴롭혔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가 내게로 오는 시기가 너무 늦어지면 내가 꿈꾸었던 사랑의 완성은 실패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스승 범서 선생이 말씀하지 않았던가.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반드시 유념해라. 시간이란 제 할 일을 마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리는 법, 한없는 기다림은 미덕이 아니고 자칫 악덕이 되니 늘 그것을 살펴라.'
스승의 이 말씀은 실패에 대한 강력한 암시였다. 떨쳐버리려 해도 이 암시로 인해 나는 줄곧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리고, 끝끝내는, 그것의 실체를 보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실패조차도 완성을 위해 예비된 순서였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지금, 그녀는 없지만 나 혼자 이렇게 사랑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시간이 예비한 섭리는 이다지도 간단치가 않은 것을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여기쯤에서, 이 기록이 거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자리에서, 이것 역시 너무 늦어져 당신들을 지치게 하기 전에, 하다가 말았던 나의 이야기를 계속해보고 싶다. 범서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산으로 들어가 수련의 길을 걷게 된 당시의 곡절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했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고 말았다. 수련이 진행되는 동안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일이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얼핏얼핏 비치기만 했지 마음 먹고 기록한 적은 없었다.
고백하자면, 당신들을 의심하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자꾸만 뒤로 미루라고 시켰다. 아직은 적절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의 사랑이었지만 당신들에겐 한 순간의 농담거리일 수도 있다고 상상하면 어김없이 손이 굳어지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부분을 봉합해놓은 채 열지 않았다. 당신들에게 더 많이 나를 설명한 다음에, 내가 행하고 있는 수련이 어떤 공부인지 윤곽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때 가서 봉합을 열리라 의도했었다.
지금, 내 기록은 마침내 오인희, 그녀가 전폭적으로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두 사람의 합일과 결별의 기록뿐이다. 나는 지금이 적당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그녀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는지, 그 운명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진술하기엔 지금이 가장 적당한 때라고 믿어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 시간의 테잎을 앞으로 앞으로 돌려 그 당시의 나를 눈앞에 떠올려 본다...
범서 선생은 전혀 혹독한 스승이 아니었다. 스승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전달을 배제하고 각성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처음 얼마간은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고 은근한 불만을 품기까지 했었다. 어떤 때는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해보기도 했지만 범서 선생은 거의 나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나는 주로 독서와 스승의 명상을 흉내 낸 얼치기 수련으로 시간을 소일하고 있었다. 가끔씩 스승이 추천해주는 책들을 사러 도시로 나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점점 하나씩 깨우쳐가기 시작했다. 깨우침으로 비롯된 질문에는 시간을 아끼지 않고 대답해주던 스승이었다.
나는 서서히 그동안 배우고 익혔던 현실의 과학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스승의 말씀을 통해서 나는 이 세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수행법에 따라 수많은 수련회가 있었고, 그 수련회들을 중심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놀라운 법칙들을 탐구하고 있었다. 내가 택한 길이 특별한 예외가 아니고 이미 여러 사람들에 의해 개척되어진 넓은 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후 나는 급속하게 공부에 매료되어 갔다. 나 홀로 광안을 뜨고, 수력을 발휘하고, 에너지를 조절하는 법을 터득하면 스승은 그것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단단한 받침목이 되어 주었다.
우리가 만난 지 이 년이 되어가던 어느 봄날, 범서 선생은 지리산으로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나 혼자만의 정진으로도 정신의 진보는 가능하다는 통고이기도 했다. 나는 스승의 도움으로 노루봉에 산장을 마련해 그곳을 내 거처로 정하기로 했다. 수행을 위해서는 숲이 울창한 산보다 더 적당한 장소는 없었다. 우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생명의 커다란 힘을 받아들일 때 거기에 속도를 붙여주는 것이 바로 수령 높은 숲의 정기였다.
하기야 나무는 물론이고 일년초 식물에도 에너지가 있어 세상과 교감한다는 이치는 이미 과학으로도 증명되고 있는 사실이다. 몇 년 전인가 도청소재지의 한 도시에서 열린 학생들의 과학발명 전시회에서 나는 감자의 에너지로 움직이는 시계를 본 적이 있었다. 건전지도 없고, 태엽도 물론 달지 않은 그것이 오로지 생감자가 뿜어내는 에너지로 똑딱똑딱 초침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은 감탄했지만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시계의 이치를 받아들였다. 길가의 작은 풀포기 하나에도 섭리가 지정한 만큼의 에너지가 있는 법이었다. 그것들도 모두 나름대로 우주에 에너지를 발산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노루봉 산장에서의 생활은 대단히 만족스러웠었다. 등산객들에게 산장을 빌려주고 받는 대가로 조금 위험하다 걱정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수행 외에 생계를 지탱할 수단까지 발견했다. 생명이 다해서 쓰러진 고목은 산의 어디에도 있었고 나는 처음에 심심풀이 삼아 그것들을 거두어다 무엇인가를 새겨보기 시작했다. 새로 만들기도 했고, 노루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때로는 내 어머니를 생각하며 여인의 모습을 새기기도 했다. 얼마가 지나자 등산객들이 산장에 진열된 나무 조각들을 팔 수 없는지 묻기 시작했다. 나는 더 주문을 받게 되면서는 생활에 한 염려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으로 큰돈은 벌 수 없었지만, 거의 모든 것을 산에서 자급자족하고 있는 나한테 큰돈이 필요한 이유도 없었으므로 나는 대만족이었다.
그러나 내게 찾아온 안정은 이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궁핍은 이미 말한 대로 자립의 수단을 찾은 뒤였으므로 문제가 없었다. 내 안정을 위협한 것은 아디선가 끊임없이 내게 들려오는 하나의 신호였다. 그랬다. 나는 그것을 신호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계곡의 양지바른 바위에 앉아 명상에 들 때나, 산장의 수련실에 정좌하고 앉아 기도에 들어가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귀에 이명 같은 것이 들리는 것이었다. 가느다랗지만 심이 들어있는 듯한 금속성의 가냘픈 울림이 일정한 간격으로 그치지 않고 내 귀를 파고드는 이상한 현상이 거의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 나는 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 약초 식물에 대한 공부가 있었기에 내 나름대로 진단하여 갖은 약초를 배합한 약을 먹어보기도 했지만 아무 차도가 없어 원주 시내의 이비인후과까지 찾아갔을 정도였다. 도무지 평화를 주지 않는 금속성의 그 가냘픈 신호가 체중을 몇 킬로그램이나 덜어내고 있었으니 당황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명상 중에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다. 광안을 뜨면 은빛 지평선 저쪽에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처음에는 그림자의 형상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형상이 드러났다. 하지만 무척이나 더딘 속도였다. 그림자가 가지고 있는 형상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않고는 광안으로 육체의 문을 열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나는 귓 속의 이명과 광안 속의 그림자에 시달려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져 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범서 선생께서 연락을 취해봤으나 하필 스승마저 거취가 불분명했다. 결국 나는 병을 얻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러나 귓 속의 이명은 여전했고 이제는 광안을 뜨지 않고 눈만 감고 있어도 그림자가 아른아른 비쳤다. 만약 정신착란이라는 것이 내게도 온다면, 바로 이렇게 오는 것이겠구나, 하고 절망에 휩싸였을 정도로 나는 심신이 모두 약해 있었다.
그리고 그해 4월 20일이 왔다. 그 전 해 봄에 스승과 헤어진 뒤 만 일 년만의 일이었다. 그날이 4월 20일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자각할 수 있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날 분명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달력을 보며 오늘이 4월 20일이구나, 하고 마음에 또렷이 새겨놓았다. 왜 그랬는지 날짜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뒤, 지쳐있는 중에도 아침 명상의 자세를 취했다. 귓속의 미명을 떼어내고 싶어 나는 연신 두 손으로는 귀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신을 모았다. 물론 눈을 감자마자 그림자가 달려들어서 마음속으로는 벌써 절망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아, 오늘도 전혀 차도가 없구나, 하면서...
그런데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그것을 느꼈다. 그림자가 마침내 제 형상을 갖춘 것이었다. 나는 감은 눈 속에서 그림자를 향해 온 정신을 모았다. 정신을 집중하는 동안에는 귓속의 금속성 신호도 더욱 가파른 호흡으로 울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야, 마침내 나는 그림자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자였다. 젊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여인의 얼굴에 자리 잡은 코와 눈과 입을 똑똑히 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줄 알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림자가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신기하게도 귓 속의 이명이 멈추었다. 그러자 그토록이나 고대하던 고요가 찾아들었고 여인의 얼굴은 여러 가지 표정을 지으며 명상 속에서 나를 지켜보았다.
그것이 내가 오인희, 라는 여자와의 진실한 첫 만남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지 넉 달쯤 흐른 뒤 노루봉 계곡에서 현실의 그녀와 첫 만남이 이루어졌지만 진실한 처음은 바로 그해 4월 20일이었다. 그리고 4월 20일이라는 날짜는 바로 그녀의 생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타난 여자 얼굴은 그날 이후 내 명상 속에 늘 함께 있었다. 나는 날마다 명상을 통해 그 얼굴을 익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처럼 홀연 스승이 노루봉 산장을 찾아왔다. 범서 선생은 나를 보자마자 '혼자서 잘 견뎌냈구나'라는 말을 내놓았다. 스승은 벌써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련이 어느 정도 이르면 가끔씩 있는 일이지. 전생의 업이 센 사람들은 자칫 그 업에 붙들려 주저앉기도 하고. 그게 병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 죽는 수행자도 보았다. 그래, 무엇이 보이더냐?"
나는 스승에게 숨김없이 지난 몇 달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병이 깊어져 죽는 줄 알았다는 고백도 바쳤다. 현재는 이명은 사라졌지만 명상 속의 영상이 늘 함께하고 있어서 이유를 깨치려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도 드렸다.
"오늘부터 나랑 토굴에 기거하며 단식수행에 들어가자. 며칠 지나면 네 눈으로 너의 전생을 보게 될 것이다."
처음에 나는 스승의 말에 반신반의했다. 내 눈으로 전생을 보게 된다고? 스승이 보아서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 눈으로? 스승은 그런 내 마음을 꿰뚫고 답을 주었다.
"섭리는 각자가 깨치는 것이지 깨우쳐서 주는 것이 아니다. 여태도 너는 혼자서 깨쳐오지 않았더냐?"
"그럼 왜 토굴엔 같이 들지요? 저 혼자 들게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들 공부가 세상에 에너지를 나누어주기 위함이 아니더냐. 이번엔 너에게 내 기운을 나누어 줘야 할 것 같다. 너 혼자만의 기운으로 볼 수 있다면 더 좋지만 꼭 그럴 필요도 없는 일. 옆에 있는 사람이 협력할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천년 전의 나를. 그리고 나는 또 보았다. 천년 전의 그녀를. 명상 속의 그림자는 바로 천년 전의 그녀였다. 그 뒤의 나는 사슴이었다가, 양이었다가, 풀이었다가, 하면서 이번 생에 비로소 '나'가 되었다. 나는 천년 만에 사람이 된 것이었다. 나와 이루어질 수 없는 비참한 사랑을 나누었던 그녀도 천년 만에 나와 동시대의 '그녀'로 태어났다.
"전생을 보았음에도 명상 속에서 그녀가 떨구어지지 않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토굴에서 나와 나는 스승에게 물었다.
"업이 세면 분신 에너지로 고정되는 경우가 있지."
"업이 세다니요?"
"전생의 삶에 맺힘이 많다는 뜻이다."
"어찌해야지요?"
나는 거푸 어찌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이번 생에 깊은 수행을 쌓아 극복하기만 하면 숱한 목숨들을 구제할 큰 도인 자리를 쳐다볼 수 있겠지. 아니면,"
"그 길이 아니면요?"
"정히 피할 수 없다면, 전생의 업을 이어받아 금생에 필히 완성하는 길로 전념하거나."
"저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또 그 소리! 길은 네가 만든다.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니까."
꾸중을 남기고 스승은 떠나버렸다. 스승의 말씀대로 결국 길은 내가 만들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천년 전의 그녀가 지금 이 생을 나랑 같이 살고 있다는 것. 바로 그 사실이 명상 중에 뚜렷한 길을 제시해준 것이다.
지금 이 생에서 어긋나면 어디서 다시 무엇이 되어 만날 것인가. 이 생에서 어긋나지 말라고 그토록이나 간절한 신호음이 울리지 않았던가. 이 생에서 어긋나면 안 된다고 그토록이나 슬픈 얼굴로 그녀가 내 명상 속을 함께 거닐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더욱 확실한 증거가 바로 넉 달 뒤에 내 눈앞에 나타났었다. 나는 노루봉 계곡에 앉아있는 천년 전의 그녀를 마침내 현실 속에서 정확하게 찾아내고 만 것이었다.
그 뒤로 나의 삶은 현저하게 바뀌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이번 생에서 이루어야 할 섭리가 무엇인지 더욱 확실해졌다. 명상에 들면 내가 가야 할 길이 하나씩 하나씩 보였다. 그때마다 주제는 단 하나였다. 천년 전의 사랑을 완성하라. 꼭 완성하라...
그리고, 지금, 나는 당신들에게 그녀, 오인희가 드디어 내곁으로 오기로 했다는 이야기까지를 들려주고 있다. 첫 만남이 있었던 후 꼬박 이년 이상 이 사랑에 전념한 결과 도달한 지점이 바로 거기까지였다. 그 무렵, 내가 얼마나 행복에 겨워 했을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무렵이 이 사랑의 정점이었다. 정점은 짧았고, 내리막은 가팔랐다. 그리고 내리막 다음은 암흑이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날들
아파트를 내놓았다.
기다렸던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계약은 금방 이루어졌다. 빠를수록 좋다는 그녀의 말에 아파트를 산 사람들도 금방 동의했다. 자기네 사정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었다. 모든 일은 그렇게 진행이 되었다.
한 번 마음을 정한 뒤로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일은 어떤 장애도 없이 진행되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일을 도모할 때 아무 난관없이 척척 이루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비비 꼬이는 법 없이 마치 누군가 위에서 줄을 내려주기나 하는 것처럼 일이 풀려나갔다. 누군가 위에서 목숨의 줄을 내려주는 것처럼.
인희는 도시에서의 마지막 며칠을 내내 그런 기분에 휩싸여 지냈다. 난처한 일이 생기려고 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줄을 타고 슬쩍 함정을 건너뛰면 그만이었다. 도무지 걱정할 일이 없었다. 자잘한 문제들이 있었으나 도시를 떠나고자 하는 일이라면 하늘이 다 거들어주었다. 일사천리였다. 마음을 정하고 나서 꼭 열흘 만에 그녀는 모든 준비를 끝냈다. 준비를 마치고 나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성하상의 전화가 왔다.
"괜찮아요?"
성하상은 전화로 그것부터 물었다.
"좋아요. 이젠 언제라도 그리고 갈 수 있어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흘 뒤 당신을 데리러 떠납니다."
사흘 뒤의 출발을 위해서 지금 원주에 나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그 사람의 목소리는 맑고 깨끗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함 뒤에 숨겨져 있는 기쁨은 그녀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요. 당신은 꼼짝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할 일이 있으면 내가 가서 다 할 테니까요. 무거운 짐 옮긴다고 무리하면 절대 안 됩니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조금도 서두를 것 없어요. 알았어요?"
성하상은 몇 번이고 당부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인희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이제는 그를 의지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그녀였다. 날짜에 대해서도 그랬다. 언제라도 그가 데리러 오면 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갈 준비가 다 되면 그가 오리라고 믿었다. 그 믿음을 의심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침대나 소파같이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기 버거운 가구들은 그냥 놓아두고 가기로 했다. 새로 이사 오는 부부가 알아서 처리해주마고 했다. 아기를 위해서 마련해놓은 것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았지만 그러나 인희는 스스로를 위한 물건들은 간단히 꾸리고자 애썼다. 가급적 황폐한 도시의 흔적을 없애고 새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지금부터가 이 오인희가 꾸리는 제2의 인생이라면, 그렇다면 정말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고별 의식
"사흘 후?"
혜영은 말을 잊고 한참을 가만있는다.
"그래. 그날 새벽에 원주에서 출발한대."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니..."
혜영은 말끝을 흐리며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삼켜버린다.
"춘천, 어때? 규영이는 잘 크지?"
혜영이 춘천으로 이사한 지 채 한 달이 못되었다. 서울을 떠나 노루봉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친구에게 전해준 것은 불과 닷새 전이었다. 그때 혜영은 반신반의했었다. 떠나면서 진지하게 춘천으로 같이 옮겨보자는 제안을 했건만 인희는 결국 마음을 정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불과 며칠 후에 갑자기 노루봉으로 거처를 옮기는 엄청난 결심을 한 것이 혜영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었다.
"도대체 눈이 핑글핑글 돌 지경이야. 너, 설마 밤 도망치는 것은 아니지? 몇 년을 준비해도 어려울 일을 어떻게 단 며칠 만에 해치운다는 것인지 정말 알 수가 없구나."
"그 사람은 몇 년에 걸쳐 준비를 했잖아. 나도 불가사의야. 떠나려고 마음먹고 나니까 모든 일이 저절로 풀려나가는걸. 하지만 전부 현실이야.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는가 봐."
"꼭 남의 일처럼 말하기는... 하긴 나도 이 일에 관해서는 뭐라 말하기가 어려워. 그게 내 진심이야. 어쩐지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뭐랄까, 손대지 말라고, 간섭하지 말라고, 누군가 자꾸 말하는 것 같아..."
혜영은 친구의 마음이 흔들림 없이 굳어졌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도 친구의 새 출발에 누가 될 뿐이다.
"걱정 마, 난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혜영이 그날 노루봉 밑에 있는 마을에서 기다린다고 고집부리는 것을 겨우 막아놓고 인희는 전화를 끊는다. 예정일이 가까워지면 그때나 혜영의 도움을 받았으면 해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도시에서 바쁠 친구를 공연히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혜영의 도움을 받아왔을 뿐 자신이 혜영을 도운 적은 별로 없다는 생각도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혜영에게 떠남을 알리는 것으로 이제 끝인가. 인희는 전화번호가 메모되어 있는 수첩의 페이지들을 무심히 넘겨본다. 혜영이 말고 알려야 할 사람이 있다면 정실장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러기를 정실장도 바랄 것이다.
끝끝내 위험을 피하다
은행에 갈 일이 있었다. 은행에서 볼일을 마친 뒤에는 그 옆의 출산 용구 전문점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할 것도 있었다. 쇼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출산 용구 전문점에서 보게 되는 유아복이나 모자, 목욕통, 작은 신발들을 구경하며 만지작거리는 기분은 정말 행복했다. 얼마나 작고 앙증맞은지, 얼마나 색깔들이 아름다운지 그곳에 가면 몇 시간이라도 금방 흘러가고 말았다.
성하상이 데리러 온다는 모레까지는 할 일도 없었다. 인희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빠트려서 막상 아이가 태어나면 깊은 산중에서 허둥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출산 경험이 없는 그녀였으므로 짚어낼 수 없었다. 가서, 일일이 확인하며, 더불어 그 행복한 기운도 쐬면서, 마지막 점검을 해보자, 라고 그녀는 마음먹었다. 그리고 느릿느릿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성하상이었다. 그랬구나, 이 전화를 받고 나가라는 뜻이었구나. 그래서 느릿느릿 옷을 입고, 느릿느릿 머리를 빗고 그랬구나.
"별일 없지요?"
성하상의 목소리가 급했다.
"네. 이젠 이틀 남았어요. 여긴 아무 일도 없어요. 걱정마세요."
"그래요. 고마워요. 내가 갈 때까지 꼼짝 말고 집에만 있어요. 알겠지요?"
그녀는 조금 웃었다. 성하상의 그 말이 언제나 그랬듯이 갖은 염려 속에서 비롯되는 말이라고 여겼으므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지금 막 외출하려던 참이었어요.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거든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소리쳤다.
"안 돼요!"
"네?"
"안 돼요. 절대 외출하면 안 돼요! 내 말 들어요. 오늘은 그냥 가만히 집에 있어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요. 내 말, 그냥 넘기지 마세요. 오늘은 거기 가면 안 돼요."
"거기, 어디요?"
"모르겠어요. 당신이 가려고 마음먹었던 거기, 거기를 가지 말라구요."
남자의 말이 떨리고 있었다. 인희도 그 떨림에 전염되었다. 이 사람의 말이라면 가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결정했다. 절대 가지 않겠다고 그에게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두 시간쯤 후, 요란한 소방차 싸이렌 소리와 구급대 소리가 들려왔다. 베란다에 나가 쳐다보니 아파트 앞 큰 도로가 빨간 소방차와 경광등을 번쩍이는 구급차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가 어디일까. 혹시. 그날 밤, 저녁 뉴스에서 그녀는 무너지고 불에 타 흉측하게 변해버린 동네의 출산용품 전문점을 보았다. 옆에 있는 숙녀복 매장과 아이스크림 집도 마찬가지였다. 가스가 폭발했다고 그랬다. 사망자는 다섯이고 부상자는 수무 명도 넘는 참사였다. 사고 시간 오후 2시 40분.
인희는 이미 사고 시간을 짐작하고 있었다. 싸이렌 소리도 들었지만 성하상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거기에 도착해 있을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인희는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그 사람, 성하상이라면 어떤 짓을 해서라도 그녀를 위험에서 구해줄 것이므로. 그 사람이라면 끝끝내 위험에서 그녀를 지켜줄 것이므로.
놀라지는 않았지만, 밤이 깊도록 가슴은 두근거렸다. 성하상, 그 사람에게 나는 누구일까. 내 앞에 닥친 미래는 어떤 것일까. 나는 다시 도시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
마지막 밤
인희는 이제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본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서 불을 끈다. 밝은 불빛이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을 꺼도 밖의 가로등 불빛은 새어 들어온다. 그녀는 일어나서 커튼을 친다. 불빛을 다 차단시켰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원가 일을 남겨두고 있다는 느낌,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다는 기분이 마음 편하게 잠을 기다리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남아있는 그 일이 무엇인지 그녀는 안다. 그 일에 대해서라면 떠나는 날짜가 정해지면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인희는 그 한 가지가 서울을 떠나는 마음에 앙금이 되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여기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을까. 떠난다는 기분의 감상일까. 이제 가면 그만이라는 심정이 이렇게 관대한 기분을 허용하는 것일까. 아니다. 꼭 그것만은 아니다. 말로는 확연히 설명할 수 없지만, 지금 그 앙금을 풀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그녀를 휩싸고 있는 것이다. 다시는 이 서울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또 하나의 설명할 수 없는 예감과 함께.
그녀는 자신의 예감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부턴 그 어떤 가시에도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자면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인희는 다시 거실로 나온다. 그리고 탁자 위에 접어둔 수첩을 연다. 거기 뒷장에 어머니의 전화번호가 또렷하게 적혀있다. 어머니는 말했었다.
그 인간이 귀찮게 굴거든 여기로 전화해라. 내가 아니고서는 그 인간을 끌어낼 사람이 없으니까.
어머니의 남편이라는 술주정뱅이는 여러 번 왔었지만, 그러나 인희는 한 번도 그 전화번호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한 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폭발하기 직전에 홀연 어머니가 나타나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그 사람을 끌고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그녀 혼자 견디었다. 어머니는 또 말했다.
내가 저 인간 때문에라도 더 면목이 없어 나한테 고개를 못들겠구나. 미안하다. 부끄럽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에미라도 나서지 않는건데...
그녀는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저녁 열시. 늦은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지금이 아니면 결국 전화를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망설임을 거두었다.
"여보세요."
어머니였다. 아무런 풀기도 없는, 기진맥진한 그 음성을 듣자 별안간 가슴이 아려온다.
"저예요."
어머니는 금방 딸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그리고는 이내 허겁지겁 묻는다.
"세상에, 또 거기에 갔니? 알았다, 내가 지금 달려가서 데려오마."
금방이라도 전화를 끊을 기세여서 인희는 황급히 "아니에요, 어머니."라고 말한다. 마침내 어머니, 라고 말한다. 마침내 어머니, 라고 말해버린 것이었다.
"안 왔다구?"
어머니는 우선 그렇게 되묻다 말고 갑자기 말을 잃어버린다. 자신의 귀로 들은 '어머니'라는 단어가 너무나 놀라워서 한참 동안을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자 이어지는 딸의 말에 희망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만다.
"별일 아니에요. 저, 내일 서울 떠나요. 알고나 계시라고."
"..."
"아마 서울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거예요. 굳이 어디로 옮기는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멀, 멀리 가니? 혹시 외국으로 가, 가버리는 것 아니니?"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인희는 기어이 목이 메인다.
"그리 멀지 않아요. 이 땅을 뜨는 것은 아니니까요."
"한 번만, 내일, 잠깐만이라도 네 얼굴을 보, 보면 안 될까? 싫으니?"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래? 그럼, 이제 끝이구나..."
이제 끝이구나, 할 때의 어머니 목소리에 묻어 있는 그 절망감을 감당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어서 인희는 한순간 전화한 것을 깊이 후회한다. 하지만 마음에 간직한 말만은 꼭 하고 싶었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 것이 아니던가. 인희는 진심을 다해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한다.
"어머니가 행복하게 사시는 것이 저한테 가장 큰 기쁨이 될 거예요. 그것 말고 어머니한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시겠어요?"
그녀는 어머니한테 주는 스스로의 당부가 그 사람, 성하상의 말투와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사람, 끝없는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점점 거세어진다. 인희는 자꾸만 "울지 마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너만 생각하면 길을 걷다가도 자꾸 눈물이 나서..."
그 말끝에 어머니는 또 오열을 터뜨린다. 인희는 그만 어머니가 딱해 견딜 수 없다.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생, 어째서 어머니는 나를 떨구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그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역 광장의 나무 의자에 어린 핏덩이를 떨구고 도망치던 때처럼 독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어머니는 끝내 울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 울음 사이사이로 그녀는 어머니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을 가려들었다. 인희야, 내 딸아... 불쌍한 인희야. 어떡하니...
어머니와의 전화는 그 밤 내내 그녀를 괴롭혔다. 전화를 끊으면서부터 치솟기 시작한 열이 근래에 드물게 오래 그녀의 육신을 마디마디 상하게 했다. 인희는 밤새 고열에 들떠 한숨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자신의 몸이 가랑잎처럼 바삭바삭 부서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바스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어느 순간에는 벌떡 일어나서 허공을 향해 그를 부르기도 했다.
제발, 빨리 와주세요. 이대로 혼자 죽을 것만 같아요. 죽음이 나 혼자의 것이 아닌 게 두려워요. 지금 내가 죽으면 내 아이도 죽어요. 제발 빨리 와주세요.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