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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 3

10. 영정, 친정(親政)을 시작하다

 

여불위는 주희가 영정의 관례를 허용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그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영정이 병을 핑계로 조회에도 나오지 않고 관례도 미루면서 아예 칩거에 들어가자 직접 영정을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복룡전에는 어느 누구도 허락없이 출입할 수 없었다.

도총관은 며칠 사이에 여불위의 심기가 불편하고 안색이 초췌해지자 직접 이사를 찾아갔다. 이사는 도총관에게 영정이 친정을 하더라도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아 계속 국정을 맡기려 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날도 여불위는 피로하다며 탕약을 마시고 곧바로 실내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였다. 도총관이 조용히 여불위 곁을 물러나 중당에 이르렀을 때 여불위를 만나러 온 우승상 창평군과 맞닥뜨렸다. 도총관은 그에게 지금 여불위가 몸이 불편하여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창평군은 하는 수 없이 도총관에게 자신이 온 이유를 말했다.

"방금 마마의 성지를 받고 궁으로 들어갔는데 머지않아 여승상 대인을 수행하고 옹성으로 들어가 관례를 치르겠다고 하시었소. 그리고 이 몸을 유수국도(留守國都) 겸 함양유수령(咸陽留守令)으로 임명하셨소. 빨리 여승상 대인께 이 사실을 전해주기 바라오."

도총관은 창평군의 말에 깜짝 놀랐다. 조만간 커다란 변화의 폭풍이 불어올 듯한 예감이 퍼뜩 들었다. 창평군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중대부 안설이 급히 여불위를 찾아왔다. 안설은 도총관에게 급한 소식을 전했다.

"오늘 장신후 대인께서 함양성으로 잠입했는데 나에게 밀보(密報)를 건네주며 여승상 대인께 전달하라고 하였소. 그런데 도총관, 이번 나의 행동은 결코 장신후 대인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오. 내 마음은 여승상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시오."

도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설을 배웅했다. 중당으로 돌아오는 그의 머릿속에는 20년에 걸친 시대의 변화가 두루마리에 그린 그림처럼 연이어 떠올랐다.

도총관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는 열 살 때 부모를 잃었다. 벼락이 치고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밤 대추나무가 부러지면서 집을 덮쳤다. 이때 그의 부모는 비명에 갔다. 이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장사꾼으로 나쁜 짓을 많이 해서 하늘의 재앙이 미쳤다'고 좋아했다. 마침 이때 여불위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걸인이 되었을 것이다. 여불위를 따르면서 그는 많은 어려움과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승상부의 총관이 되었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은 이제부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당에 이르러 그날 있었던 일을 정리하는데 이사가 찾아왔다. 그는 갈삼에 마로 엮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7, 8년 전 진나라에 처음 들어와 도총관을 만났을 때에도 그런 복장이었다. 이사는 계단에 오르지도 않고 중당 앞뜰에 선 채로 도총관을 불렀다. 도총관은 그런 이사의 건방진 태도에 기분이 나빴지만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뜰을 거닐었다.

"승상 대인께서는 쉬고 계신다고요? 내일 마마께서는 옹성으로 가셔서 관례를 치르십니다. 승상 대인께서 수행하셨으면 좋겠다는 마마의 분부이시니 번거롭지만 승상 대인께 전해주십시오.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으니 서둘러 주시도록 꼭 말씀드리십시오."

"내일이라고요?"

도총관은 시일이 너무 급박하다는 뜻을 비쳤다.

"장신후 일당이 모두 함양에 들어와 있는데 마마께서는 여전히 옹성으로 가신다는 말이오?"

도총관은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사는 도총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도총관, 그 소식은 어디에서 들었소? 만일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면 도총관은 감라의 말로처럼 될 것이오."

"감라의 말로?"

이번에는 도총관이 깜짝 놀랐다. 감라의 말로라는 한마디 말이 그의 뇌리에 천둥번개처럼 내리쳤다. 일 년 전 신동 감라는 어느 주연에서 영정이 공자 성교를 핍박하여 전장에서 교활하게 죽였다는 말을 한 일이 있고 난 후 머지않아 자신의 열네번째 생일날 저녁에 비하각에서 폭사하였다. 조정에서 그 진상을 조사했지만 끝내 폭사한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여승상의 지휘 아래 어사대부가 샅샅히 진상을 파헤쳤지만 원인을 도저히 알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여승상은 감라를 잃는 것이 가슴 아파 한동안 한숨으로 나날을 보냈었다.

그런데 조금 전 이사는 감라가 영정에게 살해되었음을 암시하였다. 이사는 눈동자를 굴리는 도총관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런 여유작작한 이사의 모습이 도총관에게는 마치 염라대왕의 사자처럼 비쳐졌다. 도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결국 이사는 도총관을 몰아붙인 끝에 노애의 서신을 가로챌 수 있었다. 의외의 수확을 거둔 그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승상부를 떠났다.

영정은 길일을 택한 다음 옹성에서 관례를 치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수많은 수레가 서북풍을 맞으며 함양의 서문을 빠져나가고 있을 무렵 노애는 감천궁에 잠입해 있었다. 노애는 이날 왠지 기분이 우울하고 짜증이 났다. 그는 목욕물을 준비시키고 의자에 깊이 몸을 뉘였다. 실내의 은은한 향내가 코를 간지럽혔다.

"마마, 더운 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이 말에 노애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실로 들어갔다. 탕 속으로 들어가 몸을 담그니 마치 주희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목욕을 마친 노애는 의사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의사당의 존좌에 앉아 내전을 굽어보았다. 노애는 영정이 옹성에 왔을 때 잡아들이지 못한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좀더 치밀한 준비를 했다면 이처럼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터였다. 그는 의자에 조용히 앉아 측근이 오기를 기다렸다.

곧 내사 사대인과 좌익 원대인이 숨을 헐떡거리며 의사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얼굴이 그리 죽어가는 모습들이오?"

노애의 물음에 사대인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마침 제강이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오면서 이들을 다그쳤다.

"이번에 일이 심히 꼬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보시오."

그러자 사대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일이 묘하게 되었습니다. 함양성의 실권은 이미 제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뜻밖에도 어제 대왕마마께서 우승상 창평군과 장군 왕전에게 함양성의 문무 실권을 넘겼습니다. 이제 소인은 그저 실권없는 내사일 뿐입니다."

그 말에 노애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일이 발생했으면 빨리 나에게 통보했어야 착오가 없지 않소?"

"문신후 여승상은?"

제강이 급히 물었다.

"그는 마마를 수행하고 옹성으로 떠났소."

제강과 함께 온 갈대인이 대신 대답했다. 조정의 대신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갈대인은 자신의 재간을 자랑하기 위해 가슴을 활짝 펴고 말했다.

"여승상은 기분이 썩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습니다."

", 그 늙은이가 기분이 좋을 리 있겠소? 어린마마가 관례를 치르고 친정을 시작하면 거들떠나 보겠소?"

노애는 답답한 마음에 여불위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신후 대인?"

사대인이 침울하게 물었다.

노애가 아무 말도 못한 채 우울한 표정을 짓자 제강이 앞으로 나섰다.

"대인, 너무 걱정마십시오. 지금 이 상황이 오히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백성들에게 덕망을 얻고 있는 여승상이 현재 함양을 떠난 것이 우리에게는 첫째로 좋은 일입니다. 두번째로 여기 있는 사대인은 여전히 함양성의 내사로서 행동 반경이 넓고 안에서 활동하는 데 불편이 없으며, 세번째로 지금 도성이 텅텅 비어 있는데다 금위군을 지휘하는 왕전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시골뜨기 장군에 불과하니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또한 네번째로 어린마마는 왕제를 핍박하여 죽게 했으니 인륜을 저버렸다는 지탄을 면치 못하고, 왕태후마마께서 중부와 더불어 친정을 견제하시니 어린마마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며, 다섯째로 장신후마마의 무예가 출중하고 게다가 사문(師門)의 어르신 사숙 세 분이 이번 거사에 참여하시니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다 '진나라는 진나라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이 백성들의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분위기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무엇이 그리 두렵겠습니까?"

노애는 제강의 말에 걱정이 모두 달아나는 듯했다.

"하하하. 제대인, 과연 정확한 분석이오."

내사 사대인도 활짝 웃었다.

"하하하, 예전에도 삼가분진(三家分晉)이 있었는데, 우리라고 양가분진(兩家分秦)을 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제강이 그렇게 말하는 사대인을 힐끗 보았다.

"동방의 6국은 모두 우리의 거사가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천시(天時), 지리, 인화, 이 세 가지를 두루 갖추었습니다. 이보다 더한 기회가 또다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노애도 제강의 말을 듣고 흥분에 들떠 소리쳤다.

"하하하, 먼저 제대인께 경의를 표하오. 우리의 거사가 성공하면 모두 제대인의 공인 줄 알겠소."

제강은 노애의 칭찬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대인, 옛말에 '갈대씨도 바람을 타면 천리를 날아가 뿌리를 내린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대인의 세력이 미미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마의 관례가 시작되는 그 순간에 대인의 거사는 틀림없이 성공할 것입니다."

제강은 자신이 미천한 출신의 노애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는 생각에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노애는 연신 제강을 추켜세우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계속 침묵만 지키던 안설이 말을 꺼냈다.

"대인, 소인이 몇 마디 올리겠습니다. 이런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안설은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안설에게 쏠렸다.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판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위험에 빠졌을 때 피할 수가 있지요. 지금 우리의 거사는 더욱 치밀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나라 안에는 상비 병력이 30만이며 외곽 지역에 수비병이 30만이 있습니다. 어린마마는 그들을 움직이는 병부(兵符)와 병권으로 적어도 20만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데 비해 우리는 겨우 사병 2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사 대인께서 일부의 병력을 끌어들일 수 있다 해도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이런 급조된 병력으로 어떻게 20만 정병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필요하다면 마마는 마음대로 백성을 병사로 소집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교 공자도 단 한 번에 패하지 않았습니까? 여승상이 수차례 치욕을 당하고도 섣불리 거사를 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신의 말을 삼가 귀담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방금 전까지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했던 노애는 안설의 말을 들으면서 갑자기 모든 것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중대부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반드시 패한다 그거요?"

제강이 냉소적으로 물었다.

"안대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오. 어린마마가 비록 교활하고 영리하다지만 민심은 그에게서 떠나 있습니다. 장신후께서 태후마마를 모시고 거사를 하면 천하의 민심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들에게 20, 30만이 있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는 적은 수이지만 하늘과 땅의 흐름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조나라에서 평원군의 식객으로 있던 모수(毛遂)도 단신으로 초나라에 가서 병력을 움직인 예가 있지 않습니까. 장신후마마의 무공과 담력이 모수보다 못한 데가 어디 있습니까. 하늘의 운세를 보건대 우리 진나라는 사직을 연 지 3백 년이 지나 이제 노쇠한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여씨와 노씨가 나누어 다스려야 합니다. 어린마마가 어찌 이런 천명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안대부는 우리의 기세를 꺾는 말은 삼가도록 하시오!"

제강의 주장에 노애의 얼굴이 다시금 밝아졌다. 그는 안설을 흘겨보며 소리쳤다.

"이제 화살은 시위를 떠났소. 다시 돌이킬 수가 없소이다. 제대인의 말처럼 천명은 이제 우리에게 돌아와 있소."

노애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나는 마음을 결정했소. 더 이상 왈가왈부는 하지 마오."

제강이 얼른 노애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몇 마디 속삭이자 노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설에게 말했다.

"안대부의 말씀은 나에게 소중한 충고가 되었소. 지금 여승상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으니 우리가 도와줍시다. 지난번 여승상에게 귀부하러 조나라에서 왔다는 사마공이라는 이를 데리고 오시오. 안대부께서는 그를 여승상에게 보내 화해를 청하고 함께 힘을 합쳐 마마를 물리칠 수 있도록 일을 꾸며주시오."

", 곧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안설은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떨구어 내지는 못했다. 노애는 그런 안설의 모습에 화를 냈다.

"모두들 똑똑히 들으시오. 태후마마의 옥쇄는 이미 내 손 안에 있소. 이제 병부만 손에 쥐면 끝이오."

"정말입니까, 대인?"

안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안설의 반응에 제강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때 밖에서 군관 한 명이 뛰어들어 왔다.

"대인, 성 내에 검열이 시작되었습니다. 집 안을 뒤져 호패(戶牌)를 지니고 있지 않은 외지인은 모두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갑자기 실내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제강이 노애에게 다시 몇 마디 속삭이자 노애는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며 측근들에게 다음 행동을 지시하였다.

함양성에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자 내사 사대인은 사람들에게 통행증을 발급하고 몸조심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노애는 감천궁을 빠져나와 성 밖의 어느 한적한 장원에 몸을 숨겼다.

한편 중대부 안설은 노애의 명령에 따라 사마공을 찾아나섰으나 좀처럼 그의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춥고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 안설은 아무 데도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마공을 찾는 일을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그는 성을 나가 위수 쪽으로 말을 달렸다. 날은 더욱 어두컴컴해져 갔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고 가는 눈발이 갈대꽃처럼 펄럭였다. 위수의 북쪽은 안설이 아직 발을 들이지 않은 지역으로 그곳에서도 사마공을 만나지 못하면 찾는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안설은 눈 앞에 나타난 장원으로 말을 몰았다. 장원 안에는 네댓 명의 무사들이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는데 안설이 그들 앞에 노애가 친히 발급한 증명서를 보이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장원으로 들어간 안설은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지며 사마공을 찾았다. 그러나 장원의 무사들은 사마공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모두들 머리를 가로저었다. 어느덧 안설은 장원의 서북쪽 끝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쪽으로 약간 높은 언덕이 나타났는데 그곳에서 호통소리와 신음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안설은 언덕 위로 말을 몰았다.

언덕 뒤에서는 백부장 한 사람이 눈밭에 쓰러져 있는 수졸(囚卒)에게 채찍으로 가혹하게 매질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채찍은 하늘 높이 뱀처럼 춤을 추다가 내려지면서 수졸의 몸에 모기처럼 달라붙었다.

"이런 죽일 놈, 빨리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백부장은 더욱 심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피투성이가 된 수졸은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며 겨우 땅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람에도 금방 날아갈 듯 비쩍 말랐고 얼굴은 가죽만 남아 있었다. 가까스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서 있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노부마저도 이제는 안중에 없군!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 썩어빠진 돼지 같은 놈, 시마공(尸馬空)!"

수졸은 눈을 부릅뜨고 백부장을 노려보았는데 비록 몸은 허약했지만 눈빛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안설의 귀에 시마공이라는 이름이 언뜻 들려왔다.

'사마공이라는 이름과 비슷하군.'

이런 생각이 들자 안설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며 혹시 자신이 찾고 있는 사마공이 아닐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백부장, 잠깐 손을 내려놓으시오! 장신후 대인의 명을 가지고 왔소이다."

안설의 모습을 본 백부장이 들어올렸던 채찍을 내렸다.

안설은 그 수졸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조금 뒤 수졸의 대답에 얼굴이 밝아진 안설은 곧바로 백부장에게 그를 치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라고 지시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백부장은 장신후 노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안설이 짐작한 대로 그 수졸은 역시 사마공이었다. 잠시 후 사마공이 목욕을 마치고 깨끗한 관복으로 갈아입자 안설은 그제서야 두 달 전에 보았던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검었던 머리는 어느덧 반백이 되었고 보기 좋았던 체구는 비쩍 말라 추위에 덜덜 떠는 미류나무 가지 같았다. 하지만 눈초리만은 그전과 마찬가지로 예리했다.

백부장은 사마공이 바로 노애가 긴급히 찾고 있는 중요 인물이란 사실을 알고 안절부절하며 안설의 눈치를 살폈다. 안설은 내당에 간단한 주연을 준비하게 한 후 사마공에게 대접하였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사마공은 한참을 멍하니 안설을 바라보다가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평소 늑대 같았던 백부장은 조용히 곁에 앉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시자 사마공은 안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흰 얼굴에 가느다란 눈매가 인상적인 안설은 우아한 관모와 화려한 관복을 걸치고 있어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정오가 지나자 먹구름이 걷히고 눈이 그쳤다. 그제야 안설은 술에 약간 취한 사마공을 수레에 태우고 장원을 빠져나왔다. 백부장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사마공과 안설을 배웅하였다.

그다음 날 사마공은 아침을 배불리 먹고 다시 잠을 청했다. 쇠약해진 몸도 몸이려니와 무엇보다 잠이 부족했던 것이다. 안대부는 몇 차례나 사마공이 제대로 쉬고 있는지를 살펴보다가 사시가 되자 그를 깨웠다. 사마공을 내당으로 불러낸 안설은 그에게 몇 마디 당부의 말과 함께 노애의 뜻을 전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마공은 노애라는 말을 듣자 안색을 붉히며 마구 화를 냈다.

"저는 여승상을 위해 일을 하고자 진나라에 들어왔지 노대인을 위해 온 게 아닙니다. 대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려거든 소생을 다시 장원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사마공이 이를 갈며 안설에게 말했다.

"장원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노대인의 수졸인데 어디에서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마공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함양성에 처음 들어온 날 자신이 당했던 수모를 떠올리며 울부짖었다.

"대부, <시경>'약삭빠른 토끼도 개를 만나면 잡히고 만다'는 말이 있습니다. 노대인의 모반은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지금 그는 왕태후를 끼고 병사들을 움직이려 하지만 그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며, 병사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그를 위해 사사로이 목숨을 바치려 들지 않을 겁니다. 개천에서 놀던 물고기가 어찌 황하에서 노니는 잉어가 될 수 있겠습니가?"

이 말에 안설은 벌컥 화를 냈지만 속으로는 그의 말이 지당하다고 생각했다.

"백부장은 자네를 심히 못 살게 굴고 있던데, 그도 노대인의 일을 알고 있는가?"

", 백부장!"

사마공은 주먹으로 힘껏 탁상을 내리쳤다.

"만일 그 자의 입에서 노대인을 위해 역모를 하자는 말이 나온다면 병사들 대부분이 달아날 것입니다. 누가 그런 자를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치려 들겠습니까?"

사마공의 말에 안설은 식은땀을 흘렸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의 말은 너무도 옳았다. 안설은 재빨리 자신이 어떤 길로 나서야 할지 생각해 보면서 그렇게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사마공이 존경스러웠다. 그는 사마공을 그대로 풀어주기로 결심했다. 이에 사마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설에게 큰절을 올리며 은혜에 감사했다.

한편 여불위는 창평군만이 함양에 남고 자신과 조정의 대신들 모두 옹성으로 가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틀림없이 거기에는 영정의 음흉한 속셈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헤아릴 수가 없었다. 옹성으로 떠나는 날 영정은 여불위에게 매우 공손하였다. 영정과 여불위,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마음을 품고 함께 옹성으로 떠났다.

"과인이 관례를 치르면 승상께서 권력을 잃는다는 소문이 함양성에 자자한데 승상께서는 그런 말에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이처럼 크고 많은 천하의 백성으로 요순 시대를 만들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를 남에게 주기는 쉬워도 천하를 위하여 사람을 얻기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과인에게는 지금 현사가 매우 부족합니다. 묵자께서도 '보물을 받는 것이 어진 선비를 추천하는 일보다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어찌 승상과 같은 중신들을 박껍데기로 여겨 홀대할 수 있겠습니까?"

여불위는 영정의 말뜻을 모두 알아들었다. 그는 영정의 날카롭고 교활한 언사에 내심 놀랐다.

여불위의 표정을 살피며 영정은 계속 미소를 지었다. 영정은 옹성으로 가는 길에 몇 차례나 여불위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했지만 여불위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처럼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틀림없이 이 늙은이는 노애와 연합하여 나에게 대항할거야. 내가 친정을 하게 되면 반드시 수를 쓸테지.'

결국 영정은 이사가 도총관에게서 가로챈 서신을 여불위에게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서신을 받아본 여불위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이 함께 영정에게 대항하자는 노애의 제안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대왕마마, 신은 억울할 뿐이옵니다. 진상을 밝혀 주시옵소서."

여불위는 당황하여 일단 발뺌부터 하였다.

"이 서신이 노애의 측근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과인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승상께서는 십여 년이 넘도록 국사에 매진하셨습니다. 결코 두 마음을 품고 이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지요. 하지만 과인이 일찍이 승상께 노애의 죄상을 밝히라고 부탁드렸는데 승상께서는 어찌 그리 머뭇거리시기만 합니까. 혹시 어려운 점이 있으시면 과인에게 말씀을 해주십시오."

여불위는 영정의 이런 여유있는 태도에 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영정은 오늘 매우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미 내 계획을 꿰뚫어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잘못하다가는 큰일나겠군.'

이렇게 생각한 여불위는 얼른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신이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장신후 노애의 죄상은 이미 낱낱이 드러나 있지만 왕태후마마의 비호를 받고 있어 잘못 공격하면 국난이 일어날까 두려워 손을 쓰지 못하였사옵니다. 노신은 마마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고 걱정만 끼쳐드리고 있으니 승상직과 병부를 반납하고 조용히 산림에 은거하고 싶사옵니다."

여불위는 이렇게 말하면서 관대와 금인(金印)을 영정에게 건넸다. 그러자 영정은 그것들을 뿌리치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승상에 대한 의심은 이미 풀어졌소. 과인은 이제 승상을 더욱 가까이 두어 중요한 임무를 맡길 생각인데 물러나다니 그 어인 말씀이오? 병부와 금인은 승상에게 돌려드리니 어서 노애를 잡아들일 방법이나 강구해 보시오. 그래야 과인이 편안하게 관례를 치를 수가 있겠습니다."

여불위는 어쩔 수 없이 관대와 금인을 다시 받았다. 그는 노애의 경거망동에 울화통이 터졌다.

이날 밤 여불위는 영정의 명에 따라 다시 함양성의 승상부로 돌아왔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실 줄 몰랐다.

'어떻게든 노애를 잡아들여야 내가 산다. 노애만 제거하면 이 강산은 나와 영정이 양분할 수가 있지 않은가?'

여불위가 고심하고 있는 사이 왕관이 급히 승상부에 도착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무슨 중대한 사태가 발생한 게 틀림없었다. 눈 내리는 깊은 밤 승상부에 도착한 왕관은 과연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지금 노대인이 함양성 서쪽 근교에 잠입해 있습니다. 그리고 대왕마마께서는 금위군을 옹성으로 파견하시고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수비병을 이동시키셨습니다."

승상부에 있던 여불위는 이날의 사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마마의 심계는 대단하십니다. 겉으로는 승상 대인을 중용하시겠다고 말씀하지만 속마음은 다를 것입니다. 승상 대인께서는 지금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물러나시면 어느 때 다시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여불위는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다시 기회를 봅시다."

여불위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왕관은 답답한 듯 탄식을 하며 승상부를 물러갔다.

옹성에서는 영정의 관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엄동설한인데도 엄청난 인파가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영정이 위험을 무릅쓰고 함양성을 떠나 옹성에서 관례를 치르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옹성에는 당시 진나라의 거의 모든 사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양공(秦襄公)이 기원전 771년부터 옹성에 신전을 건립하기 시작한 지 4백여 년의 역사가 흘렀다. 그 기간 동안 진문공은 부치(부치)를 중수했고, 진목공(秦穆公)은 오양상(吳陽上)과 하치에서 각각 황제(黃帝)와 염제(炎帝)를 제사지낸 바 있었다. 그리고 진덕공(秦德公)은 기원전 677년에 국도를 옹성으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이곳은 진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신전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 후 진나라는 도성을 함양으로 옮겼지만 옹성은 여전히 진나라의 가장 중요한 구역이었다. 역대로 진나라의 왕들은 친히 옹성에 들러 신전과 사묘에 예를 올리고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했는데, 특히 매년 임금이 직접 옹성의 조상 사당에서 제례를 올리는 풍습은 왕실의 연례 행사가 되었다. 영정이 관례를 치르기 위해 옹성에 왔던 기원전 238년에는 이미 사묘가 백여 채가 넘었으며 성 내에는 일신(日神), 월신(月神), 토지신(土地神), 풍백(風伯), 우사(雨師), 삼수(參宿), 진수(辰宿), 북두칠성에 제례를 올리는 신전도 있었다. 진나라 사람들이 섬기는 신령들은 옹성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고 향불은 일 년 내내 꺼지지 않았다.

진나라의 종묘에 위치한 덕공대묘(德公大廟)는 영정이 관례를 치르게 될 장소였다. 덕공대묘는 일찍이 진목공, 진환공(秦桓公), 진효공(秦孝公), 혜문왕(惠文王), 소양왕이 관례를 치렀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덕공대묘는 언제부터인가 관례를 치르는 명소로 자리잡았으며 거기에는 조상의 보우를 기원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영정이 이곳에 다다랐을 즈음 덕공대묘는 이미 소부(少府;진대 황실의 수공업을 관리하는 벼슬)에 의해 깨끗하고 기품있게 꾸며져 있었다. 관례의 길일은 무사(巫師)가 춘분으로 정해 주었다. 사람들은 이날을 전후해 속속들이 옹성으로 모여들어 일시에 객잔(客棧), 사묘(寺廟), 거리에는 인파로 넘실댔다. 이에 따라 성 내의 주요 건물 요소요소마다 창을 든 위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춘분일 바로 전날에 영정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옹성에 들어와 성의 서쪽에 위치한 참년궁(年宮)에 여장을 풀었다. 이곳은 왕태후가 머물고 있는 대정궁과 백여 리 정도 떨어졌고, 관례를 치를 덕공대묘는 참년궁과 대정궁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다.

진왕 영정 9(BC 238) 춘분일의 아침이 밝아오자 사람들은 모두 일찍 일어나 목욕 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였다. 오경이 되자 모든 문무대신들이 참년궁의 상방(廂房)에서 영정을 기다렸다.

마침내 진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성 내에 울려 퍼지면서 관례 의식이 시작되었다. 이 시각이 되자 참년궁에서는 봉상(奉常;종묘 제례를 담당하는 벼슬)의 인도 아래 문무백관들이 작위와 품계에 따라 덕공의 사당 앞에 줄지어 섰다. 또한 참년궁에서 덕공대묘에 이르는 길목에는 금의 무사들이 양쪽으로 극()을 높이 들고 나란히 서 있었다.

영정의 관례 의식은 고례(古禮)를 약간 변경하여 진나라의 습속에 맞도록 치러졌다. 관례는 통상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첫 번째는 서일(筮日)과 서빈(筮賓)으로 이미 봉상과 옹성달재(雍城達宰), 대축령승(大祝令丞)이 주재하여 종결되었다. 그들은 여강(廬江)에서 잡아온 자라의 껍데기와 톱풀로 복서(卜筮)를 하고 길일과 주요한 빈객(賓客)을 선정하였다.

두 번째 부분이 바로 관례로 가장 중요한 예식이었다. 진왕의 어가가 덕공대묘에 들어가자 참년궁에서 이곳까지 이르는 길목의 통행 금지가 비로소 해제되었다.

"저 안에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백성들은 덕공대묘에서의 관례 의식을 직접 볼 수 없자 무척 안타까워 했다.

"갓을 쓰고 제례악을 들을 수 있는 건 군왕의 특권이야. 또한 녹피(鹿皮)를 걸치고 구슬로 만든 고깔을 덧쓰면 곧바로 수자리에 나가지만 대왕마마는 면제가 되지. 마지막으로 관면을 쓰면 관례는 끝이 난다네."

한 노인이 덕공대묘를 기웃거리는 젊은이에게 말했다.

"대왕마마의 관면은 매우 아름답고 귀하겠지요?"

"그렇지. 마마께서 쓰시는 면은 금관인데, 마마께서는 그것을 쓰시고 사람들에게 선포를 하시지. 관례를 마치면 선비는 제사를 주관할 수가 있고 마마는 병권을 쥐실 수가 있어."

노인은 관례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 선비였다. 곁에 있던 청년이 다시 물었다.

"귀족의 자제는 보통 스무 살에 관례를 치르는데 마마께서는 어째서 스물두 살이 되어서야 관례를 치르십니까?"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르신, 어째서 마마의 관례는 이렇게도 시끌벅적합니까?"

노인은 자꾸 물어오는 청년이 답답한지 한숨을 쉬었다.

"봉상 대인이 보검을 마마께 올리고 친정을 선포한 다음 곧 이어서 문무백관들이 마마께 경하를 드린다네. 마지막으로 대왕마마께서 경하주를 세 번 받아마시면 덕공대묘에서의 관례는 끝을 맺지."

"마마께서는 대정궁의 왕태후마마를 찾아뵈어야 하고 저녁에는 주연에도 참석하셔야 한다던데요?"

"그래, 그렇다네."

노인이 좀더 설명을 하려는데 덕공대묘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병사들이 극(), (), (), ()를 쥐고 위풍당당하게 양쪽으로 도열하자 그 사이를 뚫고 여섯 필의 말이 이끄는 수레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여섯 필의 말은 모두 비단자락을 몸에 걸쳤고, 수레의 사방에는 용기(龍旗)가 꽂혔으며 비단실로 주렴을 드리우고 옥이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수레의 가운데에는 머리에 아홉 갈래의 가지가 있는 금관을 쓰고 허리에는 태아보검(太阿寶劍)을 찬 영정이 앉아 있었다.

영정은 덕공대묘에서 관례를 막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영정이 타고 있는 수레 뒤로 120여 필의 백마가 대열을 짓고 따랐으며 수레를 호위하는 무사들은 세 명에 하나씩 검은 깃발을 높이 들었고, 창과 검을 쥔 보갑병이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문무백관의 수레는 호위병의 뒤를 따랐다.

영정의 수레는 곧바로 대정궁으로 향했다. 대정궁에 들어서던 영정은 모후와 노애를 상대로 싸웠던 지난 일이 떠올랐다. 궁 내의 제단에서 영정을 기다리고 있던 주희는 영정이 다가오자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오로지 영정의 허리에 있는 병부를 어떻게 빼앗아 노애를 살리는 구명부(救命符)로 만들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영정은 주희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먼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주희가 다시 한 번 영정의 눈치를 살폈다.

"마마, 마침내 병권을 장악하고 친정을 하게 되셨으니 감개무량하시겠네요. 우리 모자는 한단에 있을 때부터 이런 날이 언제 오나 학수고대했는데 드디어 그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주희가 한단의 일을 들먹이며 영정의 심사를 자극했지만 영정은 무표정할 뿐이었다.

"어마마마, 물이 맑기를 기다리다 늙어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과인은 친정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옵니다. 과인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다리십시오. 과인은 반드시 천하를 평정하고 원수를 쳐부수겠습니다."

"대왕마마,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사유(四維)를 갖추는 데 있다고 들었어요. <관자>에 이르기를 예(), (), (), ()를 갖추어야 올바르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살육과 정벌을 그토록 좋아하시나요? 그건 군주의 바른 도리가 아니에요."

주희가 영정을 힐난했다.

"어마마마, 천하가 소란하면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평정할 수 없습니다. 난리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독에는 독, 이에는 이, 전쟁에는 전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왕마마는 자중하세요. 힘을 쓰는 자는 망하고, 덕을 품는 자는 흥한다는 말도 모르세요? 한 가지 생각의 잘못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병부를 잠시 저에게 맡기시는 게 어때요?"

주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정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눈에서 붉은빛이 마구 쏟아졌다.

'열 달이나 나를 뱃속에 품어 기른 어머니가 어찌하여 나를 사지로 몰아넣으려 하는가?'

주희는 영정의 눈빛에 가슴이 섬짓했다.

"어찌하여 웃기만 합니까?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세요."

웃음을 멈춘 영정이 이를 갈며 말했다.

"어마마마는 이전에 수렴청정을 하시면서도 정사에 관심이 없으시더니 오늘은 어째서 병부에 그토록 관심이 많으십니까? 입으로는 연신 과인에게 예의염치를 갖추라고 하시는데 과인이 보기에는 우선 대정궁에서 사유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과인에게 덕을 품으라고 하시는데 그러시는 어마마마께서는 얼마나 덕을 쌓으셨습니까? 우리 진나라는 역대 이래로 여자가 정치에 간섭하는 걸 금지했습니다. 어마마마께서도 이 일을 아실 테니 이후로 자중하십시오. 과인이 관례를 마쳤으니 이제 어마마마의 옥쇄로는 병졸 한 명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향후 과인은 진율을 좀더 보강하여 여자가 정치에 간섭하는 일은 왕후에서부터 여염집 여자에 이르기까지 일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영정의 말에 주희는 더욱 충격을 받았다. 영정은 곧 옥쇄를 내놓으라고 할 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나 노애에게 가 있었다. 주희는 영정이 다른 말을 더 못하게 머리가 어지러운 척하면서 궁아의 품에 쓰러졌다. 할 말을 마친 영정은 주희가 어떻게 되든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궁문을 빠져나가며 크게 웃었다.

'나는 오늘을 위하여 그동안 숨을 죽이며 살아왔다. 얼마나 많은 위험과 고비를 넘겼던가. 이제 무엇이 나의 앞길을 막을 수 있겠느냐? 이제는 더 이상 태후나 중부의 이름 아래 통제를 받지 않는다. 하하하.'

대정궁 문을 나서자 바로 옆에 덕공 시대에 심어놓은 동백나무가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동백나무의 푸른 나뭇잎이 추위를 이기며 꿋꿋한 생기를 뿜어냈다.

"하하하, 좋은 나무야. 낙락장송에 부끄럽지 않은 나무로군!"

그때였다. 영정의 머리 위에서 세 줄기 은빛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영정은 본능적으로 몸을 엎드려 그것을 피하였다. 영정에게 쏟아져 내린 빛줄기는 자객이 던진 단도였다. 영정의 비명소리에 놀란 등승이 재빨리 달려와 그를 호위하였다. 등승이 고개를 들어보니 동백나무 위에서 양가죽을 뒤집어쓴 사내가 웅크리고 앉아 영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등승이 검을 뽑아 자객을 겨냥하자 그제서야 영정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기습이 실패하자 자객은 크게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등승은 영정을 호위하며 시위병을 불렀다. 시위병이 몰려들자 자객은 불안한지 마구 단도를 내던졌다. 달려오던 일곱 명의 시위 중 세 명이 그 칼에 맞고 쓰러졌다.

'보통 솜씨가 아니군.'

자객의 기예에 등승은 혀를 내둘렀다. 잘못하다가는 시위병들이 모두 당할 판국이었다. 등승은 직접 자객을 처지하고 싶었지만 영정이 걱정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영정이 머뭇거리는 등승에게 소리쳤다.

"등와, 빨리 저 놈을 잡아! 나는 여기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

영정이 허리에 차고 있던 태아보검을 등승에게 건네주었다. 등승은 그즈음에 영정으로부터 등와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게다가 태아보검까지 건네주니 힘과 용기가 치솟았다. 등승의 손에 쥐어진 태아보검의 날이 햇빛을 받아 푸른 빛을 발하였다. 등승이 보검을 앞으로 쭈욱 뻗으며 자객을 향해 뛰어가자 나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시위병들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이를 본 자객은 음험하게 웃으며 나무에서 뛰어내리더니 등승에게 대항했다.

영정이 등승에게 준 태아보검은 진나라 왕실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검 중의 보검이었다. 등승이 휘두르는 태아보검에 자신의 검이 그대로 두 동강 나자 자객은 당황하여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때 기회를 엿보던 시위병들이 몰려와 순식간에 그 주변을 둘러싸자 자객은 눈알을 굴리며 달아날 궁리를 하였다. 납작하게 웅크렸던 그가 갑자기 몸을 뻗더니 동백나무 기둥에 매달려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영정이 바닥에 떨어진 등승의 검을 주워 자객에게 힘차게 내던졌지만 자객은 재빨리 몸을 비틀어 이를 피했다. 이 틈을 타 등승이 나무 위로 뛰어올라 가며 가지를 내리쳤다. 자객이 이리저리 나뭇가지로 몸을 옮기며 공격을 피하는 것을 본 등승은 기회다 싶어 품에서 철환(鐵丸)을 꺼내 자객에게 던졌다.

"네 놈만 검에 뛰어난 줄 아는가 본데, 어림없지."

등승은 철환에 이어 검을 내던졌다. 위기일발의 순간, 자객은 비명을 지르며 바위 위로 몸을 내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하고 만 것이었다. 시체 앞으로 다가간 영정이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마, 이제 더욱 조심하셔야겠사옵니다."

등승의 염려에 영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수레에 올랐다.

영정이 참년궁에 이르자 함양으로부터 긴급한 전령이 날아왔다. 서신에는 붉은 글씨로 '()'자가 적혀 있었다. 영정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밀봉된 서신을 뜯었다.

 

 

11. 노애의 반란

 

노애는 함양성 서쪽 근교에 위치한 이궁(離宮)에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며칠 동안 그는 눈코뜰새없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점검하였다. 하지만 주희에게서 오기로 한 영정의 병부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노애는 원래 영정이 관례를 치르기 이틀 전에 거사하기로 계획했지만 병부로 인해 거사일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노애의 사병들은 무장을 갖추고 거사 6일 전에 집결지를 떠나 서쪽 근교의 눈밭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거사가 성공할 경우 자신들에게 돌아올 전공을 생각하며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다. 노애 일당은 이곳으로 떠나올 때 마초와 식량은 물론, 가축까지도 군량으로 가지고 왔었다.

춘분일 전날 늦은 밤에 거사의 주모자들이 이궁의 의사청으로 모였다. 위위 갈이 좌익 원이와 함께 야영지에서 의사청으로 들어오며 노애에게 소리쳤다.

"대인께 보고합니다. 밖의 상황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병사들은 이제 추위를 이겨내기가 정말 어려운 형편입니다. 군마도 상당량이 얼어죽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 또한 갈수록 떨어져 가기만 합니다. 이번 싸움은 힘들게 생겼습니다."

노애는 믿었던 심복이 불평을 늘어놓자 화를 벌컥 냈다.

"감히 군심(軍心)을 동요시키다니, 당장 이 자의 목을 베거라!"

노애와 곡예단에 같이 있던 도제들이 달려들어 갈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노애는 애당초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원이와 다른 문객들이 갈의 구명을 애원하자 노애는 마지못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그대들의 청을 들어주리다. 여봐라, 그 자에게 곤장 백 대를 때려 군율의 엄격함을 보여주어라!"

노애의 명령에 사람들은 겨우 안도했지만 얼굴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때 제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노애에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노애는 제강의 말에 힘없이 머리를 떨구었다.

"그 약삭빠른 영정, 쥐새끼 같은 놈! 죽일 놈!"

노애가 영정을 저주하자 제강이 그의 마음을 부추겼다.

"옛날 오자서는 홀로 몸을 피해 달아났다가 끝내는 초왕의 시체에 채찍을 가하는 복수를 하였습니다. 대인의 병력은 무려 수만에 이르는데 무엇을 그리 두려워 하십니까? 아직 우리는 깃발을 들지도 않았습니다. 때문에 사기가 조금 쳐져 있을 뿐입니다."

그 말에 노애는 겨우 힘을 얻은 듯 자세를 바로 했다. 이때 내사 사대인이 다급하게 의사청으로 들어왔다.

"대인, 마침내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바로 공격하십시오!"

사대인의 한마디는 의사청의 분위기를 단번에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사대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젯밤 성을 지키고 있던 창평군과 왕전이 마마의 관례를 축하한답시고 밤새워 술을 마신 뒤 지금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방금 전에도 그들의 침소에 들렀는데 아직도 코를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었습니다."

이 말에 노애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사대인에게 말했다.

"사대인, 내 그대의 공을 기억하고 있다가 거사가 끝나면 후로 봉하겠소."

"감사합니다, 대인!"

사대인은 당장 후작을 받기라도 한 양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밖에서 급한 첩보가 또 들어왔다.

"장신후마마, () 좌경(左卿;13급의 작위 벼슬)께서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5만이라, 주 좌경을 안으로 모셔라."

노애는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는 것 같아 기쁘기 한량없었다.

"장신후마마, 이 도위(都尉)께서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셨습니다."

지원 병력이 속속 들어오자 노애는 왕태후 옥쇄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13만이라,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다는 증거다, 하하하."

노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모두 출전 준비를 하라! 조상과 하늘에 이를 고하고 날이 밝기 전에 공격한다!"

제강이 노애의 곁으로 다가가 몇 가지 책략을 말하자 노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제시한 하책, 중책, 상책을 모두 받아들였다. 노애는 잠시 들뜬 기분을 가라앉힌 후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현재 13만 대군이지만 함양성의 조정군은 10만도 못 되오. 게다가 장수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니 일격에 함양성을 점령해야 할 것이오. 성공하면 그곳의 재화와 미녀는 마음껏 골라가지시오."

말을 마친 노애가 안설에게 물었다.

"사마공은 어떻게 되었소?"

"대인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안설이 짐짓 자신있게 대답했다.

"잘 하였소. 중대부는 그를 도와 후한 예물을 가지고 승상을 찾아가도록 하시오."

안설이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제강이 그를 붙잡았다.

"여 승상부 쪽은 안대부께서 늘 따라다니시며 여승상이 병마를 움직이지 못하도록만 해 주시면 되오. 대부께서는 '의심스런 행동으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의심스러운 일로는 공을 쌓을 수 없다'는 말을 명심하시고 부끄럼없이 처리해 주시오."

자신을 의심하는 듯한 제강의 말에 안설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례 의식의 마지막 행사는 이날 저녁 참년궁에서 열리는 연회였다. 저녁이 되자 문무백관과 초청된 귀빈들이 눈발을 헤치며 연회에 참석하였다. 참년궁은 휘황찬란한 등불로 대낮처럼 밝아 멀리서 보면 마치 하얀 눈밭에 떠오르는 달덩이 같았다. 여러 전각들이 나무처럼 뾰족뾰족 솟아올라 위용을 자랑하고 건물의 처마마다 붉은 구슬이 주렁주렁 달려 불빛에 아롱거렸다. 궁중 곳곳에는 청룡, 주작, 현무, 백호의 사신도가 그려진 깃발이 싸늘한 북풍에 휘날리고 있었다.

태감들과 궁녀들도 자기 자리를 찾아 서서 연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유시가 되어 조천락(釣天樂)이 울리자 주빈 자리에 앉아 있던 영정이 주연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곧이어 연회장 앞에 마련된 조그마한 무대에서 무희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영정은 잔을 높이 들어 올리고 건배를 외쳤다.

용 무늬, 산 무늬, 화충 무늬 아홉 개가 수놓아진 관포를 걸친 여불위는 은빛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여유있는 표정으로 앉아 무희들의 춤과 노래를 감상하였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영정, 정말 교활하구나. 나에게 병권을 그대로 위임한다 해놓고는 제 마음대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노애를 잡을 방안을 올리라고 하면서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군.'

여불위는 대부장 왕관이 소리치던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결단을 내릴 때에는 바로 내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후회를 하게 됩니다!"

왕관의 말이 옳았다. 노련한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여불위가 한낱 어린아이라고 깔보았던 영정에게 보기좋게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불위는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

여불위는 바닥에 침을 뱉고 영정을 바라보았다. 영정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연신 술을 마셨다. 여불위는 더 이상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측간에 가는 척 하면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저녁 무렵에 내리던 눈이 멈춘 지는 이미 오래 전이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어둠 속에서도 간간이 달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간 멀리서 유성 하나가 떨어졌다. 여불위는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는 왕손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징조이다. 무슨 일일까?'

그가 밖으로 나서려는데 궁 밖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은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야겠군."

여불위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궁문 앞으로 가려는데 위사 한 명이 나타나 그를 가로막았다.

"승상 대인, 마마의 명령입니다. 어느 누구도 연회장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여불위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온 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무표정했던 얼굴을 지우고 이따금씩 미소를 흘렸다. 사람들은 실로 오랜만에 여불위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조금 뒤 여불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여러분, 이 궁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참년궁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대답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참년궁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여불위는 빙긋 웃었다.

"참년의 뜻은 풍년을 기원한다는 의미이지요. 이 궁은 진혜공께서 지으셨는데 이미 4백 년이 넘은 건물입니다. 사실 진혜공께서도 왜 이곳을 참년궁이라 명명했는지 본인도 모르셨으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야 천명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승상 대인,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궁전은 하늘의 상()과 성도(星圖)에 따라 지은 건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이 의미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들 입을 다물자 여불위는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 궁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거야. 있다면......"

여불위는 신동 감라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여우가 자기 무덤을 파지."

여불위는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계속 중얼거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불위의 존재를 금방 잊고 다시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여불위는 좀전에 본 유성을 떠올리며 영정의 운명을 생각했다.

참년궁에서 연회가 한창 열리고 있을 무렵 도총관은 옹성 남쪽의 한 사묘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온몸을 파고드는 추위가 더욱 기승을 부렸지만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함양에서 오는 중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도총관은 잠시 사묘에서 나와 거리의 가게를 둘러보다 음식점에 들러 술을 한잔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거리의 가게는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제는 싫어도 바람과 추위를 피할 곳은 사묘뿐이었다. 거리에는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붙잡는 점장이들만이 나와 있었다.

도총관은 커다란 사묘에서 나와 남쪽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사묘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우두커니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지난 일들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특히 노애가 여불위에게 전달하라고 준 서신을 이사에게 빼앗긴 일은 그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잘해 주기만 한 여불위에게 양심을 속였다는 자책감 때문에 도총관은 괴로웠다.

조그만 사묘에는 그 말고도 몇 사람이 바람과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도총관은 곁에 서 있는 노인에게 사묘의 이름을 물었다.

"옹성에 처음 오신 모양이군요. 이 사묘는 비록 작지만 그 이름만큼은 널리 알려졌다오. 이 사묘의 신주(神主)는 두백(杜伯)이라고 주나라 선왕 때의 유명한 장군이었는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사람들이 그의 충절과 용맹을 기리기 위해서 이 사묘를 세웠다오."

노인의 말이 끝났을 때 두 사람이 또 안으로 들어왔다.

사묘 안은 함께 있는 열대여섯 명의 어깨가 서로 닿을 정도로 비좁았다. 향로에는 몇 대의 향이 타고 있어 은은한 향내가 실내를 진동시켰다. 벽면에 그려진 신주를 보니 검붉은 책()을 쓰고 새빨간 포()를 걸친 사람이 활을 손에 쥐고 어깨에 검을 찬 채 흉흉하게 서 있었다.

잠깐 사이에 사묘는 사람들로 꽉 들어차 발디딜 틈이 없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비좁은 공간에서도 점장이 하나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복을 구하고 있었다. 누런 포를 걸친 점장이 도사는 수염이 길었고 얼굴은 어린애처럼 맑고 순진해 보였다. 도총관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도사 앞에 섰다. 도총관이 몸에 지니고 있던 5백 냥의 원폐(圓幣;당시의 화폐 모양)를 바가지 위에 던지자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늙은 도사가 도총관을 힐끗 보며 물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내고 무엇을 보시려우?"

도총관이 대답했다.

"우리 은상의 미래를 보고 싶소이다. 사주팔자는 모르지만 그것은 도사께서 알아서 보아주시오."

도사는 빙그레 웃으며 건()으로 죽통을 가렸다. 죽통을 한참 흔들어대던 도사가 건 속으로 손을 넣더니 이상한 쪽지 한 장을 꺼내 도총관에게 보여 주었다. 쪽지에는 알 수 없는 전자(篆字)가 쓰여져 있었다. 조금 뒤 도사가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천기현묘(天機玄妙)하여 빈도는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지만, 위의 그림에서 입 두 개가 무엇을 구하는지 벌리고 있으니 점복을 구하는 사람은 여()이고, 아래 그림의 뜻은 어려움은 있지만 자리는 지킨다라고 풀이할 수 있겠소."

그 말에 도총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는 도사가 점복을 구하는 사람이 여라고 하는 말에 그의 실력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도총관이 사묘의 입구로 나가려는데 마침 낯선 선비 하나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자루를 메었는데 오른손으로 자루의 끝을 쥐고 있었다. 도총관은 얼른 그 앞으로 걸어나가 자신의 오른쪽 소매를 쥐었다. 이 표시는 두 사람이 약속한 암호로 도총관은 함양에서 온 밀사와 서로 신분을 확인하였다. 함양에서 온 사람은 자루의 끝을 잡고 옹성의 도총관은 소매의 끝을 잡아 서로를 확인하기로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로 옮겨 인사를 나누었다.

"하하하, 저는 도선이라고 합니다."

"저는 조나라 사람으로 사마공이라고 합니다."

도총관은 사마공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바로 그가 여불위에게 의탁하고자 찾아왔다가 노애에게 욕을 당한 선비임을 알았다.

옹성에서 영정의 관례가 준비되고 있을 즈음에 노애는 반군을 세 부대로 나누어 함양의 동, , 북쪽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반군의 주력군은 그동안 각지의 산장과 숲에 숨어 있느라 지치고 고생이 심했지만 마침내 함양성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의기양양하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 앞에는 함양성의 재물과 아름다운 미녀들이 어른거렸다. 그들에게 함양성은 널따란 사냥터였다.

드디어 춘분일의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반군들은 어둠에 묻힌 야산처럼 아주 고요한 함양성으로 살금살금 접근했다. 간간이 개들이 짖어대곤 했지만 매서운 바람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빠른 속도로 함양성에 접근하던 반군의 주력 부대가 어느덧 공격 지점에 도달했다. 반군의 우두머리 노애는 서문을 공격하는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함양성의 내사를 맡고 있는 사대인이 성문 앞으로 걸어나가 자신이 심어놓은 측근을 불렀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노애는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고 성 안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부 날렵한 반군 병사들이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사방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수많은 금위군들이 성루(城樓)에서 반군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나타나자 빗발 같은 화살이 쉴 새 없이 날렸다. 아무런 방비없이 성으로 접근하던 반군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순식간에 수백 명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렇게 해서 손쉽게 성을 공략하리라는 노애의 꿈은 일거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성을 사이에 두고 반군과 금위군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성을 수비하는 금위군이 방어를 철저히 준비한 데 비해 반군은 급조된 병력에다 승리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던 터라 승패가 금방 결정날 수밖에 없었다.

도발적인 사태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노애는 선두에 서서 반군을 지휘하였다. 그는 친히 과거 자신의 도제였던 35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노애의 측근들이 그를 붙잡고 말렸지만 그는 오히려 호통을 치면서 갑옷을 걸친 채 반군을 독려하며 성으로 달려갔다. 이를 본 반군의 많은 병사들이 용기를 얻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노애는 다른 병사들과 함께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 올라갔다. 그러나 금위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갈쿠리로 사다리를 걷어내고 뜨거운 물과 화살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노애와 함께 공격에 나선 반군 병사들이 쏟아지는 화살에 비명을 지르며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를 본 노애의 눈에서 불똥이 뚝뚝 떨어졌다.

마침내 성에 올라간 노애가 성가퀴에서 화살을 날리던 금위군 한 명을 단칼에 베어버리자 반군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벌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함양성의 서문은 위기일발의 상황으로 몰렸다. 노애가 날렵한 칼솜씨로 금위군들의 목을 베었고 성벽을 무사히 오른 그의 부하들도 사기 충천하여 금위군과 싸웠다. 서문의 상황이 위급해지자 금위군의 병력이 모두 서문에 집중되었다. 양군의 전력은 백중세였다. 일단 성문을 장악하는 편에 전세가 기울어질 것은 뻔한 이치였다.

이때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서문에 수천의 병력이 일시에 나타나 반군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금위군의 사기가 하늘에 치솟는 듯했다.

"대장군이시다!"

함양성의 수비 대장 왕전이 나타난 것이다. 왕전의 등장과 함께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왕전을 본 노애가 이를 갈며 달려들었지만 수백 명의 금위군이 창과 극을 세우며 오히려 노애 쪽으로 몰려왔다. 왕전이 지휘하는 금위군은 정예 중의 정예로 노애의 부하 십여 명이 눈깜짝할 사이에 이들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런 광경에 노애는 눈에서 불꽃이 튀었지만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함양성의 전투는 오경에 시작해서 정오에 끝났다. 반군은 세 방향에서 함양성을 공격했지만 어느 한 곳도 점거하지 못했다. 가장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하던 서문의 반군도 왕전의 치밀한 수비에 막혀 겨우 뚫리는가 싶었던 성문을 포기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반군은 공격 실패로 그 기세가 한풀 꺾이고 노애는 오른쪽 어깨를 부상당했다. 이궁으로 돌아온 제강은 몇몇 부장들을 불러 병력의 재배치를 지시하였다.

한편 왕태후의 병부를 받고 반군에 합류하는 병력들이 각지에서 속속 모여들었다.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함양성 전투에도 불구하고 병사의 숫자가 17만여 명에 이르자 반군의 사기가 다시 올라갔다.

함양성 전투를 분석하던 제강이 내사 사대인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꼴이오? 하마터면 첫판에 크게 당할 뻔 하지 않았소?"

그러자 노애가 그런 제강을 만류했다.

"이미 사태는 벌어졌으니 그만하시오. 하지만 그 놈의 왕전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뜻밖에 노애는 그다지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기회를 놓친 것이 아까워 혀를 찰 뿐이었다.

"어찌하여 후퇴를 명령했소? 이번 싸움은 전체의 승패를 가늠하는 열쇠였는데. 실제로 금위군은 그다지 많지 않았소. 끝까지 밀어붙였으면 뒤집기를 할 수도 있었단 말이오."

제강이 다시 사대인을 책망했다. 이번 함양성의 서문 공격 작전은 사대인이 지휘했기 때문이었다.

"재차 전열을 정비해서 기습적으로 공격하면 좀더 쉽게 성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사대인이 다급하게 변명하자 노애는 어깨의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조용히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안설이 입을 열었다.

"기습 공격은 성을 무너뜨리는 데 상책입니다만 이제 우리의 계획이 드러났으니 영정은 틀림없이 옹성에 있는 대군을 이끌고 협공을 시도할 것입니다. 20만 대군이 그의 손아귀에 있으므로 차라리 진용을 새로 갖춰 참년궁을 치는 게 어떻습니까?"

"그건 안 됩니다."

제강이 앞으로 나서며 반대했다.

"천하의 명장도 백 리를 달리면 피로에 지치는 법이오. 지금 우리는 함양성을 공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소. 이 기회를 놓치면 패배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몫이 될 거요. 현재 함양성은 왕전 혼자서 지키고 있으니 이곳을 함락시켜 우리의 기반으로 삼아야 하오."

그러자 사람들의 의견이 안설과 제강, 두 편으로 갈라졌다. 노애는 안설의 의견에 찬동했다. 함양성은 공격하기가 쉽지 않지만 옹성은 어렵지 않게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제강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고 나섰다. 노애는 갑자기 오만스러운 제강의 언사가 불쾌했다. 이미 대장인 자신이 결정한 바가 아닌가.

"여러분, 안대부의 의견에 따라 옹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소!"

그러자 제강이 고함을 치며 반대했다.

"안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옹성을 공격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노애가 함양성을 공격하고 있을 즈음, 이사는 북문을 빠져나와 옹성으로 내달렸다. 옹성의 동문에 도착했을 때 참년궁에서는 연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사는 관례를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흥취를 깨지 않으려 등승을 조용히 불러내 함양성 사태를 설명했다. 잠시 후 등승에게 보고를 받은 영정이 이사를 급히 오도록 일렀다.

영정의 명을 받아 연회장으로 들어서던 이사는 상석에 앉아 있는 영정의 모습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관례를 치른 영정에게는 품위와 위엄과 범접할 수 없는 기()가 물씬 풍겨졌다. 영정 앞에 선 이사는 노애에게 공격받고 있는 함양성의 상황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사의 보고를 듣고 난 영정이 침착하게 말했다.

"이장사는 내전으로 가서 상황 설명을 준비하시오."

이사가 내전으로 들어가자 영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불위 곁으로 다가갔다.

"여승상, 함께 상의할 일이 있으니 내전으로 드시지요."

내전에 먼저 도착한 대신들은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듯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영정은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여불위에게 말했다.

"승상, 경이 이전에 '관례를 치르는 동안에 발호하는 악은 모두 제거하겠습니다'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노애가 지금 감히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여불위는 영정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그는 영정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애의 10만 병력은 오합지졸로 어찌 정병을 당해낼 수 있겠사옵니까? 반군이 피로에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제압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노신은 비록 늙었지만 노적()을 잡는 데 앞장서겠사옵니다."

"승상께서는 몸이 불편하여 말을 탈 수가 없지 않소? 과인은 노적을 잡아들이는 방법만이 알고 싶을 뿐이오."

영정의 말은 또다시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여불위의 가슴을 찔렀다.

"지난번 노신이 노애를 잡아들일 계책을 올렸을 때 마마께서는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으셨사옵니다. 게다가 이 몸은 사실 옹성에 병력이 얼마나 배치되었는지도 모르는 형편이옵니다."

여불위가 은근히 불평을 털어놓자 영정은 속으로 웃었다.

"아무려면 어떻소? 지금은 노애가 역모를 일으켰으니 그를 잡는 게 우선이지요. 다행히도 이곳 옹성에는 20만 병력이 있소이다."

"반군은 적고 정병이 많다면 충천한 사기를 바탕으로 반군을 정면에서 치는 게 상책일 것으로 생각하옵니다."

하지만 영정은 여불위의 제안에는 아무런 대꾸없이 고개를 돌려 이사의 의견을 물었다.

"병가에 이르기를 숫자가 두 배면 병력을 둘로 나누라고 하였사옵니다. 금위군은 반군보다 두 배가 많으니 10만은 정면에서 치고 나머지 10만은 우회하여 후방을 치도록 하면 반군은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이옵니다. 만일 20만 전부가 반군의 정면을 치면 그들에게 퇴로를 열어주게 되옵니다. 이 점 승상께서도 납득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사가 한마디로 자신의 계책을 부정하자 여불위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는 영정을 감시하기 위해 이사를 궁중으로 보낸 것이 후회스러웠다. 여불위는 이사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며 다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노애의 군대는 오합지졸이니 일거에 몰아붙여야 하옵니다. 함양성에 있는 금위군과 협공을 하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 말에 영정은 못마땅한 얼굴로 여불위를 쳐다보았다.

"함양성은 나라의 국도입니다. 어찌 왕장군이 성을 비우고 반군을 추격하겠소? 만일 반군의 일부가 우회하여 성을 공격한다면 국도는 반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전세는 다시 뒤집히게 될 것이오."

영정이 고개를 돌려 창문군과 몽염에게 눈길을 주었다.

"창문군과 몽염 장군은 각각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옹성의 북쪽 20리 지점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노애의 반군이 도착하면 몽염 장군이 우회하여 반군의 후미를 공격하시오."

명을 받고 떠나려는 두 사람을 영정이 다시 불렀다.

"두 분 장군은 기억해 두시오. 노애의 반군들은 대부분 억지로 끌려온 자들이니 노애의 진영에서 이탈하는 자는 모두 용서한다는 과인의 성지를 전하시오. 그리고 투항하는 자는 죄과를 묻지 말고 모두 풀어주도록 하시오."

두 사람이 물러가자 영정은 등승에게 옹성의 치안을 맡기고 몽의와 풍거병에게는 장수들의 공적을 맡아 상벌을 집행하도록 일렀다.

여불위는 영정이 모든 일을 정확하게 집행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태의 긴박함을 깨달은 그가 급히 영정에게 말했다.

"노신이 생각하기에 반군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두 장군에게 북쪽의 퇴로를 막게 하고 아울러 동방의 여러 나라들과 교통하는 효산의 길목을 장악해야 하옵니다. 또한 만일을 위해 함곡관만은 반드시 막아야 하옵니오. 그러면 반군은 자루 안에 든 쥐새끼에 불과할 것이옵니다."

"좋은 계책이오, 승상!"

영정은 곧바로 근강(近强;특급 문서를 전달하는 관리)에게 조서를 내려 효산과 함곡관으로 보냈다.

참년궁에서 영정이 반군의 토벌 작전을 세우고 있을 즈음 함양성에서 연락이 왔다. 노애의 첫번째 공격을 막아냈다는 보고와 함께 노애가 사대인을 통해 창평군과 왕전에게 보낸 격문이 전해졌다. 격문은 영정을 비방하는 문장과 만약 항복하면 최고의 대우를 보장하겠다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다. 격문을 받아본 영정이 치를 떨며 소리쳤다.

"노애를 생포하고 삼족을 멸하리라!"

노애는 안설의 계책을 받아들여 옹성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제강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제강이 그저 뒷짐만 지고 있자 병력을 조절하고 군량을 비축하며 무기를 점검하는 일이 엉망이 되어갔다. 노애는 그때야 비로소 제강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가 관여할 때에는 모든 일이 질서가 잡히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손을 놓은 이후에는 매사가 삐걱거렸다.

제강의 입장에서도 이제는 노애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할 공동 운명체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옹성을 공격하는 계책은 잘못된 선택으로 그것은 모든 사람을 사지(死地)로 이끄는 지름길이었다.

반군의 옹성 공격 작전이 마무리되고 있을 무렵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창문군과 몽염이 이끄는 20만 병력이 옹성을 출발했다고 합니다!"

제강은 그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노애는 제강을 힐끗 쳐다보았다.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제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잠시 후 입가에 웃음을 띠며 머리를 들었다. 조용히 제강을 훔쳐보던 노애는 그가 무슨 계책을 세웠음을 알았다. 제강이 다시 예전의 말투로 입을 열었다.

"<손자>에 이르기를 '물은 높은 곳을 피하고 흐르는 대로 따라간다. 싸움도 이와 마찬가지로 실()을 피하고 허()를 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노애는 제강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제강이 일어나 노애의 귀에 무어라 속닥거리자 비로소 노애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몽염은 농서의 산지에 매복하고 반군을 기다렸으나 사흘이 지나도 반군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급히 첩보병을 사방으로 보내 상황을 알아보도록 지시한 결과 오후가 되어서야 몽염은 겨우 반군의 진격 방향을 알 수 있었다.

"장군, 반군은 공격로를 급히 바꾸어 옹성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아뿔싸!"

몽염은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눈 앞이 아찔했다. 옹성에는 금위군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성을 지키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는 급히 병력을 이동시켰다.

그로부터 사흘 후 반군은 옹성 북쪽 20리 지점에서 매복하고 있던 창문군의 진영에 이르자 진격을 멈추고 군영을 설치했다. 창문군은 반군의 군영이 질서있고 배치가 엄정한 것을 보고는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일단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정오 무렵 옹성으로부터 급보가 날아왔다. 10만 병력을 이끌고 옹성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었다.

"어떻게 하죠?"

부장들이 난처한 얼굴로 창문군에게 물었다.

"10만 병력을 갑자기 돌리면 큰 혼란이 일어날테니 먼저 내가 일부 병력을 이끌고 옹성으로 가겠다."

이날 오후 창문군은 일부 정예병을 이끌고 옹성으로 회군하였다. 이들 병력이 옹성에서 10여 리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노애의 반군이 기습을 해 왔다. 노애는 사전에 이미 3만의 병력을 이곳에 매복시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 양군은 협곡과 소로에서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을 벌였다. 창문군은 출로를 뚫고 어서 빨리 전진하라고 명령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갑자기 요란한 북소리가 울리더니 반군들이 공격을 멈추고 협곡으로 물러났다. 협곡을 장악하여 창문군의 병력과 옹성의 연결을 끊겠다는 심사였다. 그런 상태에서는 도저히 혈로를 뚫기 어렵다고 판단한 창문군은 다시 본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옹성 참년궁에 있던 영정은 자신의 계책이 빈틈없다고 생각했지만 다음날 일어나 보니 옹성의 민심이 갑자기 흉흉해져 있었다. 성 안팎에서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애가 보낸 난민들이 성 내에서 난동을 일으키고 성 밖에는 반군이 몰려들어 고함을 치며 민심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 내의 난민은 현재 잡아들이고 있는 중이오며, 성문에는 정예병을 배치하여 어느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심려를 놓으십시오."

영정에게 그 시각까지의 사태를 보고한 등승은 급히 동문으로 달려왔다. 반군들이 곳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민심을 교란하고 있었다.

등승이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반군은 그 숫자가 많아 보이지만 실은 모두 허수아비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섣불리 성을 공격할 수도 없으니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응하라. 성 내에는 금위군이 5만으로 모두 진나라의 정예병들이다. 또한 반군의 후방에는 몽염 장군과 창문군의 20만 병력이 있다!"

등승의 말에 옹성의 금위군들은 용기백배하여 고함을 질렀다.

노애가 옹성을 포위하자 여불위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노애가 만일 옹성을 무너뜨리고 반란에 성공하면 자신은 곧바로 죽임을 당할 터였다. 그는 서둘러 문무대신들을 불러들여 성 내의 상황을 점검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동요하지 말고 방어에 치중하도록 지시하였다.

등승의 지휘 아래 백성들이 동요함 없이 질서를 잡아가자 노애는 곧바로 공격을 명령했다. 17만 반군은 5만의 금위군을 상대로 절대 우세한 수만를 믿고 집중적으로 동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양군은 치열한 전투를 하루에도 수번 반복하였다.

왕태후 주희는 반군이 몰려오면 대정궁이 쑥밭이 될까 두려워 영정에게 급히 사절을 보내 대정궁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정의 곁에 있던 이사는 대정궁이라는 말에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이사가 급히 영정에게 자신의 계책을 설명하자 영정은 곧바로 그를 대정궁으로 보냈다.

이사는 일천여 명의 금위군을 이끌고 대정궁으로 내달렸다. 주희는 대정궁을 호위하러 병마가 온다는 보고에 입궁은 허락하지 않고 궁 밖에서 호위하도록 명령했지만 이사는 그 명령을 거부하고 곧바로 궁으로 들어갔다. 이에 주희는 노발대발하며 내전을 뛰어나왔다.

이사가 궁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왕태후 주희가 내전 앞에 버티고 서서 이사를 노려보았다. 이사는 팔짱을 낀 채 주희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이사의 무례한 태도에 주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네 놈이 누구인데 감히 태후에게 이렇게도 무례하냐?"

이사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태후마마, 건망증이 심하시옵니다. 이 사람을 몰라보시옵니까? 지난해 한 번 이곳을 찾은 적이 있는 분갑파는 장사꾼이올습니다."

주희는 깜짝 놀랐다. 어디선가 낯이 익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사였던 것이다. 그녀는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 이장사였구려. , 이장사는 귀인이시니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하하하,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태후마마께 감사를 드리옵니다."

이사는 주희를 따라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음부! 얼굴 표정을 바꾼다고 성품도 바뀌더냐?'

이사는 내전으로 들어가자 주희에게 공손하게 허리 굽혀 절을 하였다.

"신은 태후마마께 죄를 범하러 왔사옵니다. 대왕마마의 명을 받들어 이곳을 수색해야겠사옵니다."

"무어라고, 수색?"

이 말에 주희의 얼굴이 다시 시뻘겋게 변했다. 태후의 궁전을 수색하다니 너무도 무엄한 짓이었다.

"감히 태후의 궁전을 수색해? 이 어미를 능욕하고 가문을 더럽히고, 이런 짐승 같은 놈!"

이사는 주희의 호통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임금을 욕하는 말씀은 삼가십시오! 오늘 신이 이곳을 수색하는 까닭은 모두 노애라는 놈 때문입니다. 그 놈은 지금 장신후라는 지위를 이용해 함양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옹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소신은 이곳 대정궁에서 그의 죄상을 밝히는 물증을 찾고자 왔습니다. 태후마마께서는 은연자중하시어 대왕마마의 효경스런 마음을 더럽히지 마시옵소서."

말을 마친 이사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문 밖에 있던 금위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 어서 궁 안을 수색하라! 특히 어린아이가 있으면 가차없이 체포하라!"

금위군들은 시퍼런 칼날을 앞세우고 궁전의 곳곳을 뒤졌다. 이사는 금위군 몇 명을 불러 특별히 밀실의 벽장을 수색하라고 일렀다. 아니나다를까 금위군들은 밀실의 벽장에서 사내아이 두 명을 잡아들였다. 아이들이 잡혀오자 주희는 그만 혼절을 하고 말았다. 그 아이들은 주희와 노애가 음사를 자행하여 낳은 아들들이었다.

한편 노애는 제강의 계책을 받아들여 정병은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하고, 노병과 소년병은 깃발을 휘날리며 위력시위를 시켰다. 또한 병력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시간별로 공격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성 내의 금위군들은 하루종일 방어에 지쳐 있었지만 반군들은 돌아가며 휴식을 취해 사기가 높아 있었다. 노애는 동문을 지키는 금위군들의 기세가 수그러들기 시작하자 총공세를 명령했다. 이때 이사의 전언이 노애의 군영에 도착했다.

"하하하, 이사라고? 추아라는 계집의 사내였던 놈. 할 말이 있으면 영정과 함께 나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해!"

"말을 전하면서 도련님의 생명 운운하였습니다."

"뭐라고? 도련님?"

노애는 그제서야 대정궁에 있는 두 아이가 생각났다.

"제기랄, 깜빡했구나!"

노애는 공격을 일단 멈추게 하고 동문을 바라보았다. 이사가 성가퀴에서 포승줄에 묶인 두 아이를 노애에게 내보였다. 바로 주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이었다.

"반란군의 수괴, 장신후! 용서를 빌고 군사를 돌린다면 대왕마마께서 봉읍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성지를 내리셨다. 어서 빨리 병력을 10리 밖으로 후퇴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두 아이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도다!"

노애가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하하하, 누구를 속이려고. 내게 어디 아이가 있다고 그러느냐?"

"무엇 때문에 당신을 속이겠느냐. 여기 태후마마의 친서가 있으니 보내겠다."

이사의 곁에 있던 금위병이 화살에 서신을 끼워 노애에게 날렸다. 서신에는 주희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장신후 전,

우리 모자 세 사람의 목숨은 후의 결정에 달려 있으니 심사숙고해 주십시오.

왕태후 서.'

 

노애는 주희의 서신을 받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곁에 있던 제강이 속삭였다.

"마마, 적의 간계에 속아서는 아니 되옵니다. 공격 명령을 내리십시오."

"하지만, 저 아이들은......"

"마마, 정말 필요한 보물을 버리고 쓸모없는 나뭇가지만 주워오면 세상 사람들이 웃습니다. 지금은 오로지 공격만이 상책입니다."

제강은 계속 노애를 재촉했다. 결국 노애는 눈물을 머금고 소리쳤다.

"공성하라!"

노애의 명령이 떨어지자 반군들은 서서히 공격할 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를 본 이사가 검으로 두 아이의 엉덩이를 세게 찔렀다.

"아악!"

아이들의 참혹한 비명소리에 노애가 다시 소리쳤다.

"공격을 중단하라! 중단하라!."

이 소리에 앞으로 나아가려던 반군이 멈칫했다.

"장신후! 이제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 결정하라. 뒤로 물러나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성지가 내렸다."

노애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혈육의 정이냐, 야망의 실현이냐, 두 가지 길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노애는 근본부터 야망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우연히 왕태후의 눈에 들어 그의 정부가 되었고 점점 지위가 올라 장신후에 오르면서 권력에 눈이 떴을 뿐이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노애는 결국 곡예단의 도제를 특사로 삼아 이사에게 파견하였다. 그런 노애의 모습에 제강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 이번 거사는 여자 때문에 실패하는구나!"

노애의 특사는 옹성의 동문을 지나 이사와 마주했다. 이사는 성루에 마련된 회담용 탁자에 앉아 특사에게 술을 권했다. 그리고 노애는 약정에 따라 병력을 뒤로 물리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제강은 도저히 노애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위위 갈과 함께 성 내로 간자를 잠입시켜 혼란을 조성하고 곧바로 공격하는 방안을 숙의하였다. 그때 성루에 있던 이사가 돌연 특사의 목을 베더니 노애에게 소리쳤다.

"더불어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약속을 어기느냐? 그대는 도대체 어찌하여 우리를 속이느냐?"

이사는 위사에게 특사의 머리를 성 밖으로 내던지도록 명했다. 이를 본 노애가 측근들을 크게 꾸짖었다.

"어째서 나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거요?"

그러자 제강이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기회를 잃으면 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성을 공격해야 할 시점입니다."

노애의 마음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사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약속을 어기는 자가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하라!"

어쩔 수 없이 노애는 입술을 깨물며 결심을 굳혔다.

"모든 병력을 뒤로 물리시오!"

노애의 명령에 반군은 옹성에서부터 10여 리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노애의 병력이 후퇴하는 것을 지켜보던 이사와 등승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노애의 병력이 10여 리 뒤로 물러나는 데에는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이사는 눈을 들어 그들이 물러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작은 구름이 산 너머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반군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사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등승의 손을 잡았다.

옹성에서 물러나 아이들이 풀려나기를 기다리던 노애는 후미에서 영정의 원병이 몰려온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애는 곧바로 공격을 명령했다.

이때 다시 성루에 오른 이사가 노애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역적 노애를 잡아 오는 사람에게는 은전 백만 냥을, 죽이는 자에게는 50만 냥을 내리겠다!"

 

 

12. 한겨울에 피는 국화

 

몽염과 창문군이 이끄는 금위군은 반군이 지키는 길목을 우회하여 옹성으로 내달렸다. 노애의 반군은 후방에서 금위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자 가을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일순간에 쓰러져 갔다. 17만에 이르는 반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노애와 그 측근들은 병사들을 버리고 함곡관 방향으로 달아났다.

서쪽의 동진(潼津)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효산에서 끝나는 함곡관의 산세는 무척 험했는데, 수많은 산들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이곳을 에워쌌기 때문에 함곡관을 통과하려면 작은 협곡을 따라 한 사람씩 지나가야 할 정도였다. 때문에 진나라는 중원으로 통하는 이곳에 관문을 설치하여 경계를 철저히 하였다. 후세에 황정견(黃庭堅)'모래는 황하에 실려 흐르지만, 먼지는 함곡에 걸려 가라앉는다'는 시를 지어 함곡관의 험한 지세를 노래한 바 있었다. 풍진(風塵)을 주유한 장군들도 이곳을 두고 '사나이 대장부 혼자 일 만의 군대를 막을 수 있다'고 할 만큼 천혜의 요새였다.

가까스로 옹성을 빠져나온 노애 일행은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당시 북연(北燕), 동제(東濟), , , 한나라 땅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는 함곡관뿐이기 때문이었다. 노애 일행은 백여 필의 말과 십여 대의 수레를 이끌고 함곡관으로 길을 재촉했다. 울퉁불퉁한 길바닥 때문에 수레는 마구 덜컹거리고 말이 숨차 씩씩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은 하늘에 걸린 절벽뿐이었다. 더 이상 많은 짐을 가지고 길을 걸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어쩌지?"

노애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마의 땀을 훔치던 제강이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이곳은 옛날 진의 대부였던 건숙(蹇叔)이 눈물로써 진()의 매복을 조심하라고 외치던 험지입니다. 남쪽 산마루에는 하왕(夏王) ()가 묻힌 곳이 있고 북쪽 산록에는 주무왕이 비를 피하던 곳이 있습니다. 대인, 망명을 하는 판에 말과 수레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두 버리고 빨리 산길로 피해야 합니다."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한다고?"

노애가 길게 탄식했다.

"할 수 없습니다. 옛말에도 복()과 화()는 눈이 없어 스스로 끌고들어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수레와 말을 버리고 빨리 이곳을 벗어납시다."

제강이 제일 먼저 수레에서 내렸다. 노애가 머뭇거리자 제강이 다시 말했다.

"멀지 않은 곳에 함곡관이 있습니다. 그곳만 벗어나면 우리는 권토중래(捲土重來)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권토중래라!"

노애는 그 말에 힘이 났다. 노애가 수레에서 내리려 하자 사대인이 이를 제지하며 제강의 말에 반박했다.

"장신후마마, 함곡관을 벗어나려면 반 년의 식량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대인은 제강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제대인, 그렇게 박학다식한 분이 '설사 들이 아니더라도 수레와 말은 버리지 마라'고 한 관자의 말은 어찌 모르시오?"

그러자 제강이 사대인의 말을 맞받아쳤다.

"사대인, 이곳은 함양 내사의 관할이 아니오. 잠자코 있으시오."

제강은 그동안 사사건건 자신의 계획을 어그러뜨려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사대인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왕전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니 빨리 함양성을 공격하자고 사대인이 말했소. 그리고 유리했던 함양성 전투에서 후퇴를 지시한 사람도 그대, 사대인이요. 또한 안대인이 옹성으로 공격의 방향을 바꾸자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찬동한 사람이 누구요? , 동종(銅鐘)이 부서지니 기와가 울리는 꼴이 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제강의 질책과 한탄에 사대인은 할 말을 잃고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노애는 그의 말이 바로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제강의 말만 따랐어도 이처럼 처참하게 당하지는 않았을텐데......"

노애는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하지만 막상 제강의 말을 쫓아 수레와 말을 버리고 산을 오른다고 생각하자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노애가 다시 제강에게 의견을 구했다.

"우리는 태후마마의 옥쇄를 가지고 있으니 이를 이용해 함곡관을 벗어납시다. 함곡관은 함양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아마 우리 소식이 아직 들어가지 않았을거요."

그러자 제강이 한심하다는 듯 노애를 바라보았다.

"답답합니다, 대인. 영정이 바보입니까? 관문을 뚫고간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십시오."

그래도 노애는 여전히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제대인, 이렇게 의견이 분분하니 이를 어쩌면 좋겠소?"

"정 그렇다면 두 갈래로 나누어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뭐라 해도 산을 타고 이곳을 벗어나겠습니다."

좌익 원이와 위위 갈이 제강의 뜻에 찬동했다. 사대인은 눈치를 보다 노애를 따르기로 하였다. 제강이 노애에게 작별을 고하고 산길로 걸음을 옮기자 뒤에 남은 노애는 처참한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강을 따르는 사람은 60여 명이 넘었다. 그들이 산 속으로 사라진 후 노애는 수레를 끌고 관문으로 향했다.

관문을 지키는 장수는 이신(李信)이라는 청년 군관이었다. 그는 문루에서 급히 내려와 공손하게 노애를 맞이하였다. 수십 명의 병사들도 관문의 좌우에 기립하고 정중하게 노애를 반겼다.

이들의 태도에 노애는 아무런 의심없이 유유히 관문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노애의 일행이 관문을 벗어날 즈음에 갑자기 이신이 소리쳤다.

"역적을 모두 잡아들여라!"

노애가 깜짝 놀라 내달리기 시작하자 병사들 수십 명이 길 양쪽에서 나와 앞길을 막아섰다. 노애는 대항 한 번 못해 보고 꼼짝없이 체포당해 함곡관 산 속에 있는 지하 뇌옥에 갇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감옥문이 열리더니 수십 명의 병사들이 잡혀들어 왔다. 그들은 산길로 도망치던 제강 일행이었다. 이신은 이들을 죄수용 수레에 싣고 수백 명의 호위병을 딸려 함양성으로 압송시켰다.

한편 영정과 함께 함양성으로 돌아온 여불위는 영정이 무사히 관례를 치르고 반란을 일사천리로 평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꼈다. 특히 옹성에서 함양으로 오는 길목에서 백성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모습에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심어놓은 싹이 이제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마침내 열매를 맺으려 하자 여불위는 시기심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가을로 접어든 어느 날 영정은 노애와 그의 삼족을 수레에 묶어 찢어죽이는 거열(車裂)이라는 형벌로 처형하고 위위 갈, 내사 진, 중대부 제강, 좌익 원이와 대정궁에서 체포한 노애의 두 아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아울러 반란에 가담한 노애의 일당 중에서 죄과가 무거운 4천 명은 촉지(蜀地)에 유배시키고, 왕태후 주희는 대정궁에 유폐시켜 일체의 출입을 금하였다. 영정은 여불위에게도 죄를 물으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이번 일로 영정은 구신의 세력을 누르고 친정을 더 한층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럴 즈음 여불위는 하루 날을 잡아 승상부로 측근들 몇 명을 불러들였다. 승상부는 옛날과 같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여불위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이들과 조용히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앞으로의 사태를 논의하면서 가볍게 담소를 나누었다.

왕관이 얼굴을 씰룩거리며 입을 열었다.

"소신이 걱정하는 바는 버러지 같은 놈들이 우리 진나라의 국정을 좀먹는다는 데 있습니다."

"'소인은 물에 빠져 죽고 군자는 입에 빠져 죽는다'고 했습니다."

여불위는 이렇게 말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마의 친정을 조용히 지켜만 보아주시오. 다음부터는 결코 조정의 일을 입에 올리지 마십시다. 옛날의 우의를 생각하며 가벼운 이야기나 바둑을 두는 시간을 갖든지 아니면 밖에 나가 투호나 활쏘기를 해서 술내는 놀이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여불위의 마음을 읽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 도총관이 분위기를 파악하고 밖에 나가 술단지 네 개와 화살 한 묶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사람들은 넓은 대청에 앉아 즐겁게 술을 마시며 투호를 하기 위해 조를 짰다. 여불위는 창평군, 왕관, 연태자 단, 상장군 장당과 한 조를 이루어 투호를 겨루었다. 그 가운데 연태자 단과 장당은 함양에서 소문난 투호의 명인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여불위와 창평군이 세 개를 던져서 세 개를 모두 넣었고 왕관은 두 개, 단과 장당은 겨우 하나씩만 넣었을 뿐이었다. 여불위는 기분이 좋은지 연거푸 축주를 마시며 즐겁게 웃었다.

이날 저녁 모두들 물러가자 여불위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침묵에 빠져들었다. 영정을 생각하자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배를 삼킬 수 있는 물고기도 육지에서는 사마귀를 당하지 못하는 법이야. 십여 년에 걸친 나의 대업이 오늘에서야 끝을 맺다니......"

여불위는 <여씨춘추>를 손에 들고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글자 하나하나가 힘이 넘치고 아름다웠다.

"유법(儒法)의 도()를 널리 펼치고 인군(人君)의 다스림을 바르게 하려는 나의 길은 진정 여기에서 멈추려는가?"

여불위는 갑자기 며칠 전에 도총관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옹성에서 함양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불위의 표정이 어둡자 도총관은 그 며칠 전 사마공을 만나기 위해 사묘에 들렀을 때 그곳에서 늙은 도사가 말한 점괘를 얘기해 주었다. 비록 만족스러운 점괘는 아니었지만 제 자리는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후후후, 세월이 무상하구나. 겨우 자리 하나 지키려고 내가 이렇게 수십 년을 뛰어다녔던가. 참으로 인생에서 진정으로 남는 게 무엇이더냐!"

여불위는 지난날의 기개와 야망을 생각하며 도총관을 불러 내실에 숨겨놓은 금갑(錦匣)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도총관이 공손히 바치는 금갑을 받아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제치자 그 속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금갑에서 나오는 빛을 보던 여불위가 그 안에서 금과(金戈)를 끄집어냈다. 금과의 수(;날 부분을 말함) 앞쪽은 달모양으로 굽어져 삼각형을 이루었고 수의 가운데에 자루를 꽂는 척()이 있었으며, 뒤에 호랑이 머리가 달려 있었다. 자루를 꽂는 내()에는 몇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오년상방여불위조(五年相幇呂不偉造)'......"

순금으로 만들어진 금과는 수에서 내까지 7촌의 길이였다. 도총관은 금과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참으로 훌륭한 금과입니다."

여불위가 빙그레 웃었다.

"이 금과는 마마께서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해 내가 만든 거라네."

"대인, 저는 결코 지난 시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마께서 왕위에 오르시던 해 승상께서는 중부의 자격으로 국정을 맡아 다스리셨고, 후에 문신후에 봉해져 하남의 십만 호를 식읍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때는 얼마나 길상이셨습니까? 마치 달처럼 영원하고 해처럼 떠올랐던 승상이셨습니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탄식하던 도총관은 무슨 이유로 여불위가 갑자기 금과를 가져오라고 했는지 궁금했다.

"이 금과를 만들 때 사용된 금괴는 연 태자가 보내주었지. 그런데 이제는 이 물건을 바라보며 옛일을 그리워 하게 되었으니......"

여불위는 마음이 아픈지 말을 맺지 못했다.

"승상께서 보내신 선물도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중에는 내가 가장 아끼던 물건도 있었다네."

"위나라의 여희(如姬)께 보내신 구슬옷 아닙니까?"

"아니네."

여불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후익()이 해를 쏘았다는 이야기가 새겨진 상아로 만든 둥근 공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네."

"그럼 지금쯤 조나라 서부인의 손에서 놀고 있을 비수(匕首)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자네는 기억력도 좋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모두 귀한 물건들이었어."

여불위는 한숨을 푹 내리쉬었다. 옛날의 영화를 그리워 하는 눈치였다. 도총관은 자신의 은인이기도 한 여불위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대인께서는 하늘이 보살피시는 귀인이십니다. 그런데......"

"달도 차면 기울 듯이 사람에게도 때가 있는 법이야. 하늘이 시키는 일을 어찌 인간이 거역할 수 있겠는가?"

여불위가 시무룩하게 대꾸하자 도총관이 얼른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대인, 때가 아니라면 새로운 기회를 찾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나라의 오자서도 일단 몸을 피하고서 후에 뜻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도총관, 나는 당당한 진나라의 좌승상이야. 죄도 없는데 어디로 도망을 간다는 말인가? 그건 내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야."

"아닙니다, 대인. 다른 곳으로 가셔서 다시 기회를 엿보십시오."

"복과 화는 항상 함께 따르는 법, 나는 더 이상 화를 피하고 복만 구하러 다니지는 아니할 거야. 도총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늘의 뜻이 미칠 것이네. 억지로 구한다고 모두 이루어지지는 않아. 혹여 나를 두고 너 혼자 떠나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여불위의 말에 도총관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대인, 저는 대인을 떠날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함께 초나라로 떠나는 게 어떠십니까?"

"초나라로?"

뜻밖의 제안에 여불위는 깜짝 놀랐다.

"네가 미리 대비책을 세워 놓았다는 말이냐?"

여불위는 숨을 크게 내쉬며 도총관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는 고향으로 떠나거라. 나는 이곳에 남겠다."

"대인, 소인의 목숨은 대인께서 내려주셨습니다. 저 홀로 대인의 곁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이장사도 소인이 초나라 땅으로 가면 현승(縣丞)으로 천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몇 년 이름을 숨기고 사시면서 힘을 키우시는 게 어떻습니까?"

도총관의 입에서 이사의 이름이 나오자 여불위는 더 이상 대꾸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너마저도 이사에게 넘어갔더냐?"

여불위의 마음을 읽은 도총관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었다. 여불위는 한동안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사가 너에게 무엇을 주었기에...... 내가 바보였구나. , 내가 바보였어. 십여 년에 걸친 꿈이 바로 내 자신의 실수로 하루아침에 무너지다니......"

도총관은 여불위의 발 아래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여불위는 도총관을 일으켜 세우고 물러가라 지시했다. 도총관이 나가자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지난 수십 년의 삶을 되돌아 보았다.

", 감라를 잃지만 않았어도, 아니 이사를 내 수하로만 두었다면......"

여불위는 눈을 감고 비통한 심정으로 시를 한 수 읊었다.

 

둥실둥실 잣나무배, 하염없이 떠내려 가네.

밤새도록 잠못 이룸은 뼈저린 시름 때문인가.

술 마시며 나가 노닐지 못하는 신세도 아닐진대.

 

내 마음 거울 아니어서 누가 알아줄 리 없고.

형제가 있다고 한들 아무도 믿을 수가 없구나.

가서 하소연해 보았자 그의 노여움만 살 터이고.

 

내 마음 돌이 아니어서 굴릴 수도 없고.

내 마음 돗자리 아니어서 말 수도 없네.

의젓한 그의 용모, 아무것도 아닌 것을.

 

시름은 그지없이 뭇사람의 미움을 사고.

근심 걱정에 시달리니 수모도 적지 않구나.

가만히 생각하면 가슴만 두드리는 일.

 

해야 달아, 어째서 번갈아 이지러지냐.

마음의 시름은 빨지 않은 옷을 입은 듯.

가만히 생각하니 훨훨 날고만 싶어.

 

그다음 날 여불위는 매일 그랬던 것처럼 도총관이 가져다주는 삼탕(蔘湯)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도총관은 오지 않았다. 여불위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급히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잠시 후 그는 도총관이 오경쯤에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불위는 얼마 전부터 승상부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마공을 불렀다. 사마공은 옹성에서 도총관과 만난 이후 줄곧 여불위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여불위는 사마공이 교활하거나 약삭빠름이 없이 중후하고 충실하여 마음에 들었다. 그는 사마공을 승상부의 소리(小吏)로 삼고 내부(內府)의 살림을 맡게 하였다. 사마공은 그동안 너무 많은 고생을 해서인지 여불위의 환대에 충성을 다해 보답했다. 도선이 떠나자 여불위는 곧바로 총관의 자리를 사마공에게 주었다.

이날도 사마공은 여불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레를 준비하고 조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조회를 마치고 돌아온 여불위가 몹시 피곤해하자 사마공은 그를 얼른 침소로 인도해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잠시 후 창평군과 창문군이 여불위를 찾아왔다.

"오늘 마마께서 발표하신 조정의 인사는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니 대인께서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신하로서의 충성심을 드러내어 마마의 노여움을 푸십시오."

창평군이 여불위에게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날 조회에서 영정은 창평군을 좌승상에, 왕관을 우승상에 임명하고 거기다가 문무백관을 대표하여 여불위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글을 올리라고 지시하였다.

", 십 년의 공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나는군!"

여불위의 한탄에 창문군은 오히려 속으로 욕을 했다.

', 지난날 내가 노애에게 욕을 당할 때 그냥 지켜만 보았지. 하지만 마마께서는 옹성의 전투가 치열할 때 나를 도위에 임명하시고 병권을 주셨어.'

창문군이 곱지 않은 눈으로 여불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승상, 소신의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노애의 입궁을 천거한 사람은 바로 대인이십니다. 게다가 노애가 반역을 일으켰을 때 승상께서는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왕마마께서는 이를 문제삼지 않으시고 여전히 문신후의 작위와 식읍 십만 호를 유지시켜 드렸습니다. 이보다 더한 은혜와 관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승상께서 신하들의 충성을 서약하는 글을 올리시면 마마께서는 더욱 승상을 아끼실 겁니다."

"지나치구나. 조용히 있거라!"

창문군의 직설적인 언사에 창평군이 소리치며 나무랐다. 그러자 여불위가 냉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충성을 맹세하는 글월을 내가 대표로 올리라고? 나는 한평생을 진나라에 살면서 두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이 오로지 나라에 충성을 다했는데 내가 어찌 그런 글을 올릴 수 있겠소?"

여불위의 말에 두 사람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때 우승상이 된 왕관이 뛰어들어 왔다.

"승상 대인, 저는 아무런 공도 없이 우승상이 되어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사나 왕전 같은 젊은 아이들이 저만 보면 눈을 흘기며 아는 체도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창문군이 왕관에게 호통을 쳤다.

"대부장, 그걸 일컬어 임금의 은총이라는 거요. 마마께서는 가슴을 열어놓고 대부장을 우승상으로 제수하시었는데 소인처럼 그게 무슨 행동입니까? 이사는 초나라 하채에서 창고지기를 한 시골뜨기이고, 왕전은 들판에서 씨를 뿌리던 농사꾼에 불과하거늘 대부장이 그들에게 꿀릴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겁을 집어먹고 있습니까? 대부장은 명문대가의 후예이시고 경륜 또한 깊어 대왕마마께서 국정의 부흥이라는 대임을 맡기신 게 아닙니까."

그러자 창평군이 창문군의 말을 다시 제지했다.

"중요한 일을 상의하는데 나서지 마라."

형인 창평군의 말에 창문군은 입을 삐죽이며 불만 섞인 표정을 지었다. 창평군이 여불위와 왕관에게 말했다.

"마마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의 힘을 필요로 하시어 대임을 맡기셨으니 그 영명함에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이오. 그런데 어찌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 충성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소?"

왕관은 마음 속으로 그런 말을 하는 창평군을 욕했다.

'초나라의 오랑캐들 같으니라구. 배알도 자존심도 없는 놈들이야. , 있는 힘을 다해 충성을 바치자고?'

왕관과 여불위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창문군과 창평군을 노려보았다.

"승상 대인, 오늘 마마께서 갑자기 소신이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시고 국화 두 그루를 바치라고 하셨는데 이는 어떤 의미일까요?"

왕관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여불위에게 물었다.

"대부장, 너무 걱정하지 마오. 그대는 오랫동안 나라에 충성을 바쳤고, 또한 명문가의 후손이니 대왕마마께서 중용하셨습니다. 또한 국화 두 그루를 바치라고 하신 일은......"

이때 창문군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대부장은 공이 없는데도 대임을 맡았다고 하시는데 바로 국화를 바치는 일도 공을 쌓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마의 뜻을 곡해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창문군의 말에 왕관은 언짢음을 감출 수 없었다.

"국화가 피지도 않는 계절에 어디에서 그걸 구한단 말이오. 봄에 피는 도화꽃을 가을에 보고 싶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오?"

그때 곁에서 조용히 시중을 들고 있던 사마공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제 방에 있는 국화가 오늘 아침에 꽃망울을 맺었습니다."

이 말에 왕관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사마공은 사람들을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과연 방 안에는 노란 국화 몇 그루가 꽃망울을 틔우고 만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문군이 왕관을 향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대부장! 참으로 운이 좋으십니다. 어디에서 이런 멋진 국화를 이 계절에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신하된 도리로서 군주의 기쁨을 보면 마땅히 즐거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걱정했던 일이 의외로 잘 풀리자 왕관은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여불위는 이 모든 일에 심사가 무거웠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마공에게 국화를 옮기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화분을 들고 나가던 사마공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걸음을 멈추고 여불위에게 소리쳤다.

"이건 절대로 안 됩니다!"

난데없는 사마공의 외침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대인, 국화는 원래 9월의 꽃입니다. 지금은 추위가 몰아쳐 오는 계절인데 귀한 국화를 놓고 감상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임금을 속인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사마공의 말에 여불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관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여불위를 바라보자 사마공이 얼른 나서서 여불위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제서야 여불위는 왕관에게 국화의 출처를 절대로 말하지 말라는 조건을 달아 궁으로 옮길 것을 허락하였다.

영정은 노애를 제거한 뒤 곧바로 국정을 장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진왕 영정1010(BC 237)에 그는 여불위의 승상직을 폐하고 그 자리에 창평군을, 우승상에 왕관을 임명했다. 또한 자신의 측근들을 주요 직책에 앉혀놓아 친정을 강화해 나갔다. 특히 이사는 단번에 몇 계단을 뛰어넘어 벼슬이 객경(客卿)에 이르고 작위는 18급 대서장(大庶長)에 제수되었다. 이사는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이상을 향해 더욱 한 걸음 다가선 셈이었다. 그의 출신을 거론하며 거만을 떨던 왕공제후나 고관대작의 자제들도 그의 앞에서는 예의를 지켰다.

이날 아침 이사는 함양성의 소남문으로 나아가 그 옛날 자신이 묵었던 광현객사를 찾았다. 이곳에서 그는 여불위의 천거로 함양궁의 시위가 되었던 것이다. 소남문에 이르니 처음 도총관을 만났던 그릇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며칠 전 이곳에서 이사는 도선에게 형초지방으로 갈 수 있는 신분증을 건네주었다.

이사는 소남문을 둘러보고 곧바로 궁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궁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화려한 수레가 그의 앞을 지나갔다.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허리를 굽히고 수레에 탄 사람에게 예를 올렸다. 이사는 걸음을 멈추고 수레 안을 살펴보았다.

"함양성에서 저렇게 화려한 수레를 타고 다니는 자가 누구일까?"

이사는 중얼거리며 주렴 사이로 드러난 얼굴을 보았다. 여불위였다.

"여불위로군. 호랑이는 쓰러져도 위엄을 잃지 않고 지네는 죽어도 엎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니, 역시......"

이사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수레가 갑자기 멈춰섰다. 이사를 발견한 여불위가 주렴을 걷고 그에게 인사를 하였다.

"잘 지냈소?"

이사가 깊이 허리를 굽히고 대답했다.

"문신후 대인,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조금 전 소신은 광현객사에 들렀다가 도총관마저 떠났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신을 놀리는 듯한 이사의 말에 여불위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본인은 그저 거리를 구경하고 있소만, 성에는 온통 여우와 들쥐가 나라의 곳간에 구멍을 뚫고 있구려. 이객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비아냥거리는 여불위의 말에 이사는 순간 얼굴이 벌개졌지만 지지 않고 대답했다.

"문신후 대인, 나랏일에 손을 떼시고도 곳간의 쌀을 걱정하시니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하지만 곳간은 튼튼하니 걱정을 놓으십시오."

여불위는 이사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가 십만 호의 식읍을 가지고 있는 문신후라지만 실상은 조정의 실권을 잃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말을 해서 화를 입기보다 조용히 물러나는 게 상책이었다. 여불위가 떠나자 이사는 관부에 들러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심복들을 불렀다.

"그래, 문신후 대인의 집에서 알아낸 게 무엇이더냐?"

얼굴이 예쁘장하고 똑똑해 보이는 심복이 대답했다.

"어젯밤 세 사람이 문신후 댁을 방문했습니다."

"그래, 누구더냐?"

"창평군, 창문군 대인과 왕관 나으리입니다."

", 끼리끼리 모여드는군!"

그 심복의 보고는 별로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이사가 실망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별로 뛰어난 인물이 보이지 않는군."

이때 그 곁에 있던 다른 심복이 나섰다.

"어젯밤 창평군 형제분이 돌아가고 나서 한참 후에 왕관 나으리가 나오셨는데 수레에 노란 국화 두 그루를 싣고 있었습니다. 제 철도 아닌데 웬 국화인가 이상했습니다."

그제서야 이사는 만족한 웃음을 흘리며 그 심복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심복들을 물리친 이사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한 뒤 저녁 늦게 함양궁으로 들어갔다. 위위가 이사를 보더니 상림원에 영정이 머물고 있다고 전했다. 이사는 상림원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날 아침부터 영정은 상림원에서 온갖 꽃들과 풀의 향기를 맡으며 유쾌하게 지냈다. 그는 등승과 측근 몇 명만 대동하고 뜰의 곳곳을 거닐며 하늘을 보기도 하고 호수에 손을 담그기도 하면서 쾌활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사가 상림원에 이르렀을 때 영정은 영춘관(迎春館)에 있었다. 그는 호수에 노닐고 있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젓가락으로 물고기밥을 떼어 던졌다. 고기밥을 향해 달려드는 물고기떼를 보던 영정이 중얼거렸다.

"천하가 밝고 아름다워도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달려드는구나. 또한 천하가 어둡고 추하더라도 역시 모두들 이익만을 위해 달려들겠지."

영춘각에 도착한 이사가 누각으로 뛰어올라 갔다. 그 발자국 소리에 놀란 영정이 손을 내저었다.

"멈추어라. 과인은 오늘 강태공보다 백 배는 멋진 낚시를 하고 있단 말이다."

영정의 몸에서는 군왕의 기세보다는 천진난만한 귀공자의 냄새가 풍겼다. 등승도 영정이 이렇게 즐겁고 온화하고 담백하게 지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등승이 얼른 이사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자 이사는 마구 화를 냈다.

"이런, 일의 가벼움과 무거움도 모르다니. 돌기둥도 등시위장 같지는 않을거요."

이사가 춘각에 올라오자 영정이 빙그레 웃으며 소리쳤다.

"왜 그리 떠드오? 이리 와서 고기들이 다투는 모습이나 봅시다."

이사는 물고기가 먹이를 찾아 몰려드는 모습을 신기해 하는 영정이 어처구니없는지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영정이 등승과 이사에게 말했다.

"고기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모습이 마치 들판에 뛰놀고 있는 말과 같소. 고기밥을 달라고 입을 쩍 벌리는 소리는 오나라의 부차(夫差)가 들었던 서시(西施)의 발자국 소리 같구려."

"서시의 발자국 소리라는 게 무엇이오?"

등승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이사에게 물었다.

"얘기하면 길어지지만, 간단히 말하겠소. 옛날 월나라에서 서시라는 미녀를 오왕 부차에게 헌상했는데, 그녀에게 홀딱 반한 부차는 서시를 위해 커다란 건물을 지어 주었소. 그런데 서시가 건물의 긴 회랑을 걸을 때마다 정말로 아름다운 발자국 소리를 냈다고 하오. 오왕 부차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좋아했는데, 마마께서는 물고기가 밥을 달라고 입을 뻥긋하는 소리가 서시의 발자국 소리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오."

등승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영정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속뜻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사만큼은 영정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영정은 그 말을 통해 서시를 위해 건물을 짓고, 그녀의 발자국 소리에 빠져 나라까지 망친 오왕 부차와 같은 군주를 경계하고, 물고기처럼 이익만을 쫓아 달려드는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했던 것이다. 영정은 자신의 생각을 금세 이해하는 이사를 보자 마음이 흡족했다. 비로소 영정은 이사가 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경은 이 시각에 어인 일로 왔소?"

"마마, 은주는 주지육림에 빠져 나라를 망치게 만들었사옵니다. 황음(荒淫)을 미로 삼고 주악(酒樂)을 덕으로 삼아 흥한 나라는 하나도 없사옵니다. 이는 모두 간언하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이옵니다."

이사는 영정의 표정을 힐끗 살펴보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초나라 소왕(昭王) 28년 겨울에 동화(桐花)가 일찍 피었다 하옵니다. 군신들은 모두 길조라고 하면서 임금의 성명을 흐렸지만 오직 신포서(申包胥)만이 불길한 징조이니 따르지 말라고 간언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이를 따르지 않은 소왕은 오나라의 침략을 받아 곤경에 빠지고 말았사옵니다. 대왕마마, 혹시 이 이야기를 들어보시었는지요?"

영정은 순간 흠칫했다.

이틀 전 영정은 꿈속에서 활짝 핀 노란 국화 두 그루를 보았다. 신하들은 이 얘기를 들으며 길조라고 말했고, 그는 왕관에게 당장 구해 오라고 일렀다. 그러자 시절이 한겨울인데도 불과하고 뜻밖에 왕관이 노란 국화 두 그루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영정은 이사가 그 일을 두고 비난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영정의 마음을 간파한 이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마, 국화는 9월의 꽃이온대 어째서 이런 추위에 필 수가 있겠사옵니까? 이는 바로 반상(反常)의 징조이옵니다. 다른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천리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옵니다. 소신이 알아본 바로는 노란 국화의 출처는 여 승상부라고 하옵니다."

"뭐라고? 여 승상부?"

영정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제거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사는 아직도 그 세력이 남아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영정이 그 자세한 내막을 캐묻자 이사는 두 시간에 걸쳐 함양성과 옹성의 분위기를 보고했다.

"지금 당장 옛 승상부를 수색하여 노란 국화를 찾으셔야 하옵니다."

이사는 영정이 동요하는 빛을 보이자 더욱 다그쳤다.

"마마, 우승상 왕관은 그다지 경계해야 할 인물이 못 되지만 문신후 대인은 지금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 세력을 키우고 틈틈이 기회를 엿보고 있사옵니다. 미리 방비하지 않으시면 그 화가 대왕마마께 미치게 될 것이옵니다."

그래도 영정은 여전히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경의 주청은 과인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었소. 경의 충성심을 기억하고 있겠소."

이사는 영정이 이 말을 들으면 대노하여 당장에 여불위를 잡아들일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정은 매우 침착하고 사려깊게 그 결정을 뒤로 미루었다. 이사가 영춘관을 떠나자 영정은 무엇이 그리도 통쾌한지 등승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날 밤 영정은 여불위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밤새워 고민했다.

이튿날 영정은 임금을 기만한 죄명으로 여불위를 함양성에서 축출하고 식읍으로 내려준 낙양에서 노년을 보내라고 명을 내렸다. 아울러 등승을 그에게 딸려보내 감시케 했다.

영정은 이렇게 여불위를 제거한 후 친정을 더욱 강화하고 모든 국정을 총괄하였다.

 

 

13. 여불위의 최후

 

영정은 친정(親政)을 시작한 이래 국정의 전반을 총괄하면서도 결코 여불위의 동정을 놓치지 않았다. 비록 여불위가 낙양의 식읍으로 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존재에 대해 무심해도 좋을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영정은 등승을 낙양으로 보내 여불위를 감시케 한 후, 그 자신은 두어 달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문서 더미에 묻혀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중졸(中卒) 한 명이 원군을 청하는 환흘()의 급서(急書)를 들고 대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즈음 환흘은 영정의 명을 받고 위나라의 포양(蒲陽)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진군은 위군에 비해 수적으로 상당히 열세인 상황이었다. 급서를 읽은 영정은 즉시 왕전에게 십만의 증원군을 환흘에게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마침 궁궐에 들어와 있던 우승상 왕관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영정에게 주청했다.

"대왕마마, 환흘 장군에게 새로운 작전 지시를 내리시면 그만이옵니다. 증원군을 보내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왕관의 뜻밖의 주장에 영정은 아무런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기(吳起)의 병법에 이르기를 '평지를 피하고 험지로 적군을 끌어들여야 승리한다'고 하였사옵니다. 따라서 위군의 수가 많고 우리 진군은 적기 때문에 평지에 늘어서서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그들을 험지로 끌어들여 일거에 몰아쳐야 하옵니다. 그러므로 환흘 장군에게는 마땅히 험지에 의거하여 위군을 유인하는 계책이 필요한 것이지 증원군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옵니다. 게다가 포양성은 십만 대군을 증파하여 탈취할 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곳이 아니옵니다. 대왕마마, 깊이 생각하시어 결정하소서."

그러자 곁에 있던 장군 왕전도 왕관의 주청을 거들었다.

"그러하옵니다. 조그만 성을 빼앗는데 대군을 보낼 필요는 없사옵니다. 허락하신다면 소신이 부장 몇 명을 이끌고 포양성을 점령하는 데 힘을 보태겠사옵니다."

왕전의 말에 영정은 흡족한 미소를 띠며 그의 출사를 허락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영정은 포양성이 함락되었다는 승전보를 받았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영정은 학문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 뒤로 영정은 한 달 중 거의 반달 이상을 서고 더미에 파묻혀 선현의 지혜를 습득하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몇 달을 보낸 이후에도 하루에 두 시간 이상은 반드시 독서를 하며 학문을 닦았다. 어느덧 영정의 학문은 나날이 발전하여 조정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학식 높은 대신들과 경전을 인용하여 토론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식견이 풍부해졌다.

그는 지난날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사냥을 즐겼듯이 그즈음에는 독서 삼매경에 흠뻑 빠져들었다. 처음에 영정은 병가(兵家)와 법가(法家)의 책을 즐겨 읽었는데, 그 중에서 그의 마음을 움직인 책은 <육도()>, <손자병법>, <이리법경(李俚法經)> 등이었다. 병서와 법서를 어느 정도 섭렵한 영정은 그 다음으로 공자와 맹자의 유가, 겸애비공(兼愛非攻;서로 사랑하고 공격하지 마라)을 주장하는 묵자, 노자와 장자의 도가와 철저한 이기주의를 표방한 양주(楊朱)에 이르기까지 독서의 폭을 넓혔다. <시경>이나 <국어>, <좌전>과 같은 경전류는 읽은 지 이미 오래된 서적들이었다.

영정은 제자백가의 서적을 거의 탐독하였는데 특히 순황의 학설이 마음을 끌었다. 순황은 일찍이 입국예의(立國禮儀)에 대하여, 하늘의 이치는 인간사에 간여하지 않고 늘 그러하다는 '천도유상(天道有常)'과 형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형법치세(刑法治世)'를 주장한 바 있었다. 이렇게 영정이 순황의 학설을 좋아하면 할수록 이사에 대한 신임도 그만큼 깊어졌다. 뒤이어 읽은 한비의 글도 영정을 매료시켰는데, 특히 한비의 치국에 관한 사상은 영정이 태자 적부터 고민하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이 때문에 영정은 천금을 아끼지 않고 한비의 저작을 구입하였다.

하루는 한비가 쓴 <심도(心度)>를 구하여 밤새워 읽던 영정이 그 다음날 새벽같이 이사를 불러들였다. 영문도 모른 채 급히 영정의 서재에 도착한 이사에게 영정이 부시시한 얼굴로 물었다.

"'성인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근본을 본받아 하지 욕심을 따라서는 안 된다. 오로지 백성들에게 유익함이 있어야 할 따름이다.' 이 객경은 이 글을 누가 쓴 것인지 아오?"

영정의 질문에 이사는 순간적으로 사형인 한비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임금께서는 늘 한비의 말을 인용하여 치국의 도리를 말씀하신다.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대답을 고대하는 영정의 모습에 이사가 말했다.

"그것은 소신의 사부이신 순황 선생의 글이옵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단정하오?"

영정이 되물었다.

이사는 잠시 머리를 떨군 채 생각을 하고 난 후 영정에게 대답했다.

"일찍이 사부께서는 소신에게 훈계를 하시면서 명철하신 군주를 도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에는 반드시 백성에 대한 사랑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사옵니다. 그렇다면 애민(愛民)이 무엇인가 아뢰오면, '그 하고자 하는 바를 쫓으면 곧 해가 되고, 나아가는 바를 다스려야 유익하다(縱其欲則害之策其進則利之)'는 뜻이옵니다. 그러므로 형벌로 백성을 바르게 다스려 못된 백성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현명한 군주라고 하였사옵니다. 이것이 바로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愛民)의 근본이옵니다."

이사의 설명에 영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훌륭한 사부 밑에 뛰어난 제자가 있다는 말이 과연 틀리지 않소. 이 경! 그런데 그대의 사형이라는 한비 선생은 순황 선생보다 더욱 뛰어나고 철저한 학설을 가졌더이다. 그가 말하기를 '형벌이 엄하면 백성이 조용하고, 상장이 지나치면 못된 언행이 살아난다. 그러므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형벌의 엄격함이 다스림의 으뜸이며 상장의 지나침은 어지러움의 뿌리이다'라고 하였소. 과인이 생각하기에 이와 같이 좋은 말은 치세(治世)의 금언(金言)이라 할 만하오."

한비에 대한 영정의 찬사는 이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호승심(好勝心)이 강한 이사는 한비의 학설이 영정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사실에 왠지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영정은 아무런 의심없이 한비의 학설을 받아들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일국의 군주가 자신의 야망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선철(先哲)의 학설에 심취하여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며 정치에 적용하는 경우는 영정을 전후로 보기드문 일이었다. 이렇게 영정은 거대한 사업을 성취하기 위한 자질과 소양을 높여갔으며, 학문과 재능이 점점 커짐에 따라 그의 목표는 더욱 뚜렷해지고 방향도 확실해졌다.

한편 일 년여 넘게 낙양에 머물며 여불위의 동태를 감시하던 등승은 그 이듬해 춘분 즈음에 영정의 부름을 받고 급히 함양으로 돌아왔다. 등승이 낙양에 머문 일 년 동안 함양성은 참으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등승은 저잣거리를 감상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함양궁으로 달려가 뛰다시피 큰 걸음으로 영정이 머물고 있는 서재로 향했다. 마침 서재에서 죽간을 뒤적이던 영정은 등승의 발자국 소리에 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과인은 발소리만 듣고도 그대인 줄 알았소. 그대 말고는 그 누가 감히 임금이 있는 곳에서 그렇게 방자한 발소리를 낼 수 있겠소?"

영정은 등승이 예를 올리기도 전에 그의 손을 잡으며 크게 웃었다. 영정의 웃음 속에는 지난날 고락을 함께 한 등승에 대한 깊은 애정이 스며 있었다. 서재로 들어온 영정이 여불위의 동태를 묻자 등승은 그동안 관찰한 그의 행적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등승의 보고를 들은 영정이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문득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

"여 대인이 그렇게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확실하오?"

"틀림없사옵니다. 소신이 여러 차례 직접 확인한 바이옵니다."

"식읍이 낙양의 10만 호라면 적어도 호당(戶當) 2백만 잡아도 일 년에 수입이 2천만 금이야. 3천 금만 주면 적국의 대신도 매수할 수 있으니 2천만 금이면 얼마나 큰 돈인가."

영정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며칠 전 이사와 풍거질(馮去疾)이 올린 상서를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상서에서 여불위가 비록 세력을 잃고 낙양으로 물러나 있지만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소신이 알기로 2천만 금을 모두 거두어들이지는 않고 있사옵니다. 여 대인은 세액의 반을 감면해 주고 있으며, 또한 거두어들인 금액의 반은 대부분 도로의 보수나 제방을 쌓는 데 쓰고 있었사옵니다."

"뭐라고? 과연 그 자의 죄가 적지 않구나! 아직도 음흉한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니!"

"마마!"

영정이 뜻밖의 반응을 보이자 등승은 어쩔 바를 몰랐다.

"좋은 일이 아니옵니까?"

"쯧쯧쯧!"

영정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풍관()이 신릉군을 대신하여 설()의 채권을 없애주고 민심을 얻은 일을 벌써 잊었소?"

"그때 마마께서는 '교활한 토끼는 도망갈 굴을 미리 세 개나 파놓는다(狡兎三窟)'고 말씀하셨지요."

그제서야 등승은 영정이 염려하는 바를 눈치챘다.

"여 대인이 세를 감면해 주고 또 도로와 제방을 보수하는 것은 민심을 얻으려는 계책일 뿐이오. 재기를 노리고 있는 거지. 과인이 이 사실을 알진대 어찌 작은 쥐가 제방을 무너뜨리도록 가만 놔둘 수 있겠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옵니까?"

예상 밖으로 사태가 복잡해진 것을 안 등승이 난감한 얼굴로 영정을 바라보았다.

"여 대인이 만나는 사람은 주로 어떤 이들이오?"

"없사옵니다. 그는 거의 바깥을 나가지 않고 있으며, 다만 각국의 사신들이 그의 명성을 흠모하여 찾아오는 정도입니다."

"! 그게 바로 본색을 숨기고 모반을 준비한다는 징조요."

"하오나 모반을 계획하고 있다면 병마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준비는 일체 없었사옵니다. 각국의 사신들도 인사만 하고 그냥 돌아가는 모양이옵니다."

"허허허."

영정이 등승을 보며 웃었다.

"등 시위장은 너무 순진한 게 탈이야. 일찍부터 한과 위는 여 대인을 극진히 대우하고 있소. 그런 상황에 그 자가 모반을 작심하면 그만이지 무슨 병마가 필요하겠소?"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영정이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나무를 자를 때 그 뿌리를 살려두면 다시 싹이 돋아나는 법이고, 물을 막을 때 그 원천을 메꾸지 않으면 쉬임없이 물이 솟아나는 게 자연의 이치이듯, 여불위의 기반을 부수지 않으면 반드시 모반을 일으킬 것이야!"

영정의 외침에 등승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낙양은 주나라의 왕성이었고, 또한 용과 호랑이가 숨어 있기에 아주 좋은 곳이오. 그런데 과인이 이대로 그냥 앉아 화근을 키워서야 되겠소?"

말을 마친 영정이 곧바로 붓을 들었다.

"무엇을 쓰려는지 궁금하지 않소?"

등승이 고개를 가로젓자 영정은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가리키며 웃었다.

"과인은 여 대인에게 열흘 이내에 촉지(蜀地)로 떠나라고 할 작정이오."

"촉 땅이라면 너무나 멀고 궁벽한 곳이라 늙은 여 대인이 제대로 갈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사옵니다."

"늙은이라고? 등 시위장, 강태공은 나이 칠십에 주문왕에게 발탁되어 천하사를 이루었다오. 그걸 알고 있소?"

등승이 영정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마마께서는 이전에 소신에게 '예예' 하는 천 명의 신하보다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한 명의 신하를 원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사옵니까?"

그 말에 영정이 단호히 말했다.

"여 대인은 아니오!"

등승은 영정의 태도에 자신이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나설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명령을 받들어 여 대인이 십일 이내에 촉지로 떠나도록 이르겠사옵니다."

여불위에게 보내는 백서(帛書)를 등승에게 건네주며 영정이 말했다.

"등 시위장, 과인이 여 대인을 촉지로 보내는 진정한 뜻은 그가 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기를 바라는 데 있소. 이 점 염두에 두시오."

"그렇다면 차라리 독배를 내리시는 게 좋지 않사옵니까?"

"그렇게 과인의 말을 못 알아 듣겠소? 여 대인은 지금 이웃 여섯 나라와 결탁하여 모반을 꿈꾸고 있는데 그런 그에게 독배를 내리는 것은 그의 지위를 높여주는 처사일 뿐이오. 등 시위장은 천하를 통일하여 백성에게 하늘의 빛을 내려주겠다고 맹세한 지난 일을 벌써 잊었단 말이오? 여 대인은 통일을 막는 원흉이오. 그를 제거해야만 하늘의 빛을 백성에게 줄 수가 있소."

이때 궁녀가 급히 들어와 영정 앞에 엎드렸다.

"왕태후마마께서 대왕마마의 알현을 요청하셨사옵니다."

영정은 여불위를 낙양으로 축출하고 난 뒤에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 왕태후 주희를 함양성의 감천궁으로 다시 불러와 살게 하였다.

"무슨 일로 과인을 만나겠다는 거냐! 태후께 가서 아뢰어라. 과인은 처리할 일이 많아 사흘 안에는 그 누구도 접견할 수 없다고."

궁녀를 내보낸 영정이 등승에게 물었다.

"그대도 과인에게 여 대인의 구명을 호소하려는가? 하지만 그와 같은 적신(賊臣)을 살려두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런데 태후는 이 사실을 알고 과인에게 선처를 구하는 거지."

등승은 영정의 판단력에 그만 감탄하였다.

"사내대장부가 작은 일에 연연하면 큰일을 이룰 수 없소. 등 시위장은 어서 과인의 뜻을 받들어 일을 처리하시오."

등승이 급히 궁을 빠져나가자 영정이 멀리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부드러우면 삼키고 딱딱하면 뱉으라고 했지."

이때 후궁(後宮) 쪽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전 조나라 왕이 가기들을 진나라로 보내왔는데 그동안 영정은 독서를 하느라 그녀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가기들의 노랫소리에 마음이 흔들린 영정이 후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문신후 여불위는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이름이 다른 나라에 널리 알려지고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몹시 걱정이 되었다. 때문에 그는 나무가 크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매사에 행동거지를 더욱 조심했다. 여불위는 독서를 하거나 국화를 가꾸거나 아니면 연못가에 앉아 물고기가 노니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밖에 나가더라도 들에 나가 뽕나무를 심고 낚시를 하면서 세상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또한 세금을 거두면 아낌없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는데,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이 후에 자신을 옭아매는 오랏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날 여불위는 후원에 앉아 따스한 봄 햇살을 쬐고 있었다. 중천에 뜬 태양은 겨우내 얼어붙었던 낙양의 너른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멀리 푸른 산이 흰 구름을 뚫고 밝게 빛났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호수의 물결이 흔들리자 나무 그루터기에 매어져 있던 조각배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호수 가에는 봄을 맞은 나뭇가지에 새싹이 푸릇푸릇 돋아났고 버드나무 가지가 물을 쫓아 늘어졌으며, 모란꽃이 터질 듯한 처녀의 가슴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붉고, 노란 복숭아꽃 또한 앙증맞게 봉오리를 맺어 아지랑이 사이를 날아다니던 나비들이 그 꽃잎 위에서 날개를 접곤 하였다. 온갖 꽃들과 한창 물이 오른 나무들이 푸른 하늘과 푸른 호수와 함께 온 세상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이런 자연의 생명력은 마치 들판을 달리는 어린아이들처럼 힘이 넘쳤다.

"과연 한 폭의 그림이군!"

여불위는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란꽃 앞에서 감탄어린 비명을 질렀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날렵하게 호수 수면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물가에 노니는 저 새, 열 걸음에 날개짓, 백 걸음에 물 한 모금...... 이 얼마나 멋진 생활인가. 더 이상 부귀영화를 쫓아서 무엇하랴?"

여불위는 지난날의 치열했던 삶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은공, 어디에 계십니까?"

총관 사마공이 여불위를 찾고 있었다. 마침내 호수 가에 서 있는 여불위를 발견한 사마공이 소리쳤다.

"대왕마마의 성지가 내렸습니다!"

"성지?"

여불위는 가슴이 섬짓했다.

'오랫동안 잠잠하더니 갑자기 무슨 성지를?'

여불위는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후원의 경관을 죽 훑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네, 곧 가지."

등승은 대청에서 여불위를 기다리며 또 한번 대청 안팎을 훑어보았다. 실내는 그리 넓지 않았으나 매우 밝고 깨끗했으며, 은은한 향내가 가슴까지 시원하게 만들었다.

이때 여불위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대청으로 들어왔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등승을 한 번 힐끗 보았을 뿐 아무 말 없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그를 애써 외면했다.

그런 모습에 등승이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문신후 나으리께서는 아직 두 어깨가 든든하신가 봅니다! 대왕마마의 성지가 내렸는데 예를 올릴 생각도 않으시니."

씨근덕거리는 등승의 얼굴을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던 여불위가 천천히 대청 가운데로 나오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그러자 등승은 영정이 내린 백서를 여불위에게 던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세히 읽어보시지요."

여불위가 천천히 백서를 펼쳤다.

 

'() 여불위는 조()를 받으시오.

과인은 선제(先帝)의 유지를 계승하고 사직(社稷)의 영령을 받들어, 친정 이래 백성은 생업에 즐거워 하고 교화가 널리 퍼지고 풍속이 순화되었으며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이 매우 두터웁게 세워졌소.

하지만 과인은 낙양의 소식에 이르러 걱정이 태산 같소. 소인배들이 그대의 처소를 드나들며 국정을 농락하고 잡설(雜說)을 퍼뜨려 망령되이 민심을 흐리고 법령을 그르치고 있으며, 더욱이 근래에는 제후와 결탁한 세력이 하도(河洛;황하와 낙양)의 길에 들끓는다고 하오. 이러한 어지러운 행동을 과인이 어떻게 용납할 수가 있겠소?

묻노니, 그대는 어찌된 연유로 진왕의 중부라는 이름을 얻고 감히 선왕과 동렬에 놓이었단 말이오.

또한 묻노니, 그대는 과연 어떤 공을 세웠기에 십 수년 간 집정(執政)을 하고 식읍을 10만 호나 받았으며 문신후라는 봉호를 가질 수 있었단 말이오.

상벌(賞罰)이 공평치 못하면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 못하는 법, 그대는 과인의 성지를 받는 즉시 10일 이내에 촉으로 떠나기 바라오......'

 

성지를 읽어가던 여불위의 뺨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의 뇌리에는 불현듯 한단성에서 영정의 이름을 지어주던 그날 광경이 떠올랐다. 그 뒤를 이어 이인이 왕위에 오르던 모습, 왕태후 주희의 부름을 받고 감천궁에 잠입하던 일이 생각났다. 어린 나이에 요절한 감라의 얼굴과 눈물을 흘리며 그 곁을 떠나던 도 총관의 얼굴이 눈 앞에 나타났다.

주렴 뒤쪽에서 부복하고 있던 사마공은 여불위가 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떨구자 헛기침을 하며 앞쪽으로 걸어나왔다. 그 소리에 여불위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사마공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등승은 여불위가 힘없이 주저앉아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자 측은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보아하니 여불위는 이미 영정의 속마음을 헤아린 듯한 표정이었다. 여불위가 알아서 스스로 결단을 내린다면 굳이 험악한 수단을 쓸 필요없이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마무리될 터였다. 하지만 진나라를 위해서 십여 년간 국정을 맡아 성심을 다한 여불위의 최후를 생각하니 일말의 동정심이 솟아나는 건 등승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일세를 풍미한 여승상이 죽음으로 가는 길을 어찌 저리도 태연하게 받아들일까? 마치 자신의 앞날을 미리 내다보고 때가 되어 떠나는 사람 같다.'

여불위에 대한 동정심에 가슴 한쪽이 아려오던 등승은 문득 떠나기 전 영정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사내대장부가 작은 일에 연연하면 큰일을 이룰 수가 없다."

얼른 감정을 수습한 등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을 나오려는데 여불위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그를 붙잡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여불위는 사마공의 부축을 받으며 떨리는 손으로 비단폭에 글을 써 내려갔다.

"이 글을 대왕께 건네주시오. 노신이 마지막으로 간언하는 글이 될 것이오."

잠시 후 여불위가 그것을 등승에게 건네주었다. 등승은 글이 적힌 비단을 두르르 말면서 그 내용을 힐끗 엿보았다.

 

'......옛말에 '불을 가지고 놀면 불에 타 죽고, 힘을 믿는 자는 반드시 힘으로 망한다'고 하였으며, <노자>에도 이르기를 '비록 귀한 자리에 있다 해도 천한 백성을 본받아야 하며, 높은 벼슬아치는 반드시 낮은 벼슬아치를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사옵니다. 이는 지극히 옳고 바른 성현의 말씀이옵니다. 백성과 신하는 나라의 주춧돌로써 가벼이 여기거나 능멸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깜짝 놀란 등승은 비단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왕께서는 스스로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노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 이런 조치를 취하신다는 말씀이옵니까? 노신이 진율(秦律)의 어느 조항을 위반했사옵니까? 일국의 군주가 자신의 희노애락에 따라 백성을 다스린다면 누가 복종을 하겠사옵니까. 노신이 진에 공이 있는지의 여부는 위로 하늘이 알고 아래로 백성이 알고 있사옵니다. 공리(公理)는 결코 대왕의 입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옵니다.'

 

등승은 마지막 구절에 더욱 놀랐다. 그는 여불위가 군주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면 '공리는 대왕의 입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영정에 대한 여불위의 안하무인에 등승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이런 글을 어떻게 대왕마마께 전할 수 있단 말입니까?"

"허허허, 고깃배를 삼킬 수 있는 물고기도 육지에 나가면 힘없는 개미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 겨우 12급 작위에 불과한 애송이가 대들어도 어쩌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군."

여불위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등승의 머릿속에 문득 십여 년 전 영정의 처소에서 여불위와 다투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의 세도당당했던 여불위와 지금은 늙어 힘없는 그 앞에 서 있는 등승 자신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등승은 화를 억누르고 여불위를 바라보았다.

'저 늙은이는 작위가 무려 20급이니 아직은 내가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는 노릇이지.'

등승은 몸가짐을 다시한 후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이 몸은 대왕마마의 뜻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을 뿐입니다. 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등승의 말에 여불위는 처참하게 웃으며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허허허, 노부(老夫)는 양적의 상인에서 시작하여 일국의 왕을 세웠고 상국의 지위에 올랐으며, 더욱이 저서까지 후대에 남기니 더 이상 무엇을 구하리.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다만 군주를 위하여 정인법관(政仁法寬;정치는 어질게, 형법은 관대하게 하다)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로다. 이제 이곳의 이름을 낙수(洛水)의 북쪽이라는 뜻의 낙양(洛陽)이 아니라 태양이 떨어졌다는 의미의 낙양(落陽)으로 바꾸어야겠다. 이보게, 양치기 꼬마, 그대에게 충고 하나 하겠네. 옛말에 '교활한 토끼를 잡은 다음에는 곧바로 날렵한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라고 했지. 이 말을 명심하게. 자네에게도 해당될 말일 테니...... 허허허."

여불위는 등승을 돌려보낸 후 다시 방안으로 돌아와 의관을 정제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여불위는 잠시 후 독주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가 영정 12(BC 235), 효문왕 원년(BC 249)에 상국이 되어 영정 10(BC 237)에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여불위는 무려 12년 간 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 기간 동안 여불위는 동주(東周)를 무너뜨리고 삼천군(三川郡 ; 지금의 사천성), 태원군, 상당군, 동군(東郡)을 개척했으며, 거대한 수리 시설인 정국거(鄭國渠)를 세우고, 초나라를 압박하여 수춘(壽春)으로 천도하게 만들었다. 또한 <여씨춘추>를 저술하여 치국의 도리를 역설하였다.

여불위가 자살하자 영정은 등승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를 함양성을 관리하는 함양 내사에 임명하였다.

여불위가 세상을 떠나자 총관 사마공은 비통한 심정을 억누를 수 없어 장례를 치른 후에도 홀로 남아 여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낙양현의 현존(縣尊)이 병력을 이끌고 여부를 봉쇄하기 위해 나타나자 사마공은 상서를 올리며 이를 막으려 애썼다. 이런 모습에 평소 여불위를 존경하고 있던 현존이 사마공에게 충고의 말을 건넸다.

"영리한 새는 큰 나뭇가지에 둥지를 튼다고 하였소.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미련스럽게 이곳에 남아 있단 말이오. 혹 함양에서 다른 명령을 내리기라도 하면 그대는 적어도 성단육세(城旦六歲;6년 동안 변방의 성을 쌓아야 하는 노역)의 형벌을 받을지 모르오. 그러니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사마공은 현존의 말에 그날 밤을 꼬박 새우며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마침내 이튿날 새벽, 사마공은 여불위의 복수를 위해 마음에 칼을 품고 낙양을 떠나 남쪽으로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그로부터 이레 정도 지나서 황혼이 질 무렵, 사마공은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마침 장날이었던 그 마을은 저녁이 되자 파장이 되어 사람들이 흩어지는 중이었다.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나즈막한 언덕 위에 오른 사마공은 그곳에서 짐을 실은 말을 나무기둥에 매어놓고 한가롭게 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아마도 장에 물건을 내다팔고 필요한 물품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모양이었다. 사마공은 그들에게 물 한 모금을 얻어마시고 쉬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태양은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붉은 노을도 점점 검푸르게 변해갔다. 사마공은 하루빨리 진나라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밤길을 마다 않고 힘차게 달려갔다.

어느덧 사방이 어두워지고 태양이 사라진 자리에 달이 떠올라 길을 비추고 있었다. 띄엄띄엄 마주쳤던 사람들의 모습도 이제는 전혀 볼 수 없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말을 타고 달리던 사마공의 가슴에 쓸쓸한 기운이 사무쳐 왔다. 그런 기분을 떨쳐버리려는 듯 사마공이 손에 쥔 말고삐를 더욱 세게 틀어쥐며 산허리를 돌 즈음 뜻밖에도 멀리 달빛 아래 사람 그림자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 뒤를 개 한 마리가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이 아주 낯익어 사마공은 지난날을 더듬어 보았다.

", 복우산에서 나를 구해준 노인!"

사마공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어르신! 뜻밖에 이런 곳에서 만나는군요!"

"할아버지, 그 사람이에요. 진나라의 여승상을 찾아가겠다던 그 사람!"

사마공을 알아본 능매가 이대퇴의 팔을 끌며 소리쳤다. 그제서야 이대퇴는 초립을 벗고 사마공을 보며 웃었다.

"누구신가 했더니 사마 선생이시군. 진나라는 지금 한창 봄이지요?"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어르신, 며칠을 굶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사마공이 힘겹게 말에서 내렸다. 이대퇴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훤칠한 키와 희디흰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지만 남루한 행색이 그간의 고생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마공이 탄 말도 오랜 여행에 지쳤는지 갈빗대가 나올 만큼 비쩍 마르고 먼지를 뒤집어써 제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짐이라고는 말 등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해진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사마공의 행색을 보다 못한 능매가 대나무 광주리에서 만두를 몇 개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다음날 먹을 양식이었다. 먹을 것을 본 사마공은 체면 불구하고 허겁지겁 눈 깜짝할 틈도 없이 만두를 먹어치웠다. 간신히 허기를 메운 사마공이 서둘러 다시 떠날 채비를 하자 이대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엇이 그리 바쁘시오? 날이 어두우니 잠시 쉬었다 떠나도록 하시오. 국화주도 있으니 목도 축이고......"

"어르신, 말씀은 고맙지만 중요한 일이 있어 잠시도 머물 시간이 없습니다."

사마공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들어 달빛을 가리고 있는 검은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런 사마공의 모습에 이대퇴는 그를 말릴 상황이 아님을 알았다. 초조하고 불안한 사마공의 표정에 능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급하다고 그러세요?"

"진나라의 훌륭한 대신이, 아니 위대한 별 하나가 떨어졌소."

독주를 마시고 쓰러져 가는 여불위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자 사마공은 그만 목이 메었다. 그 순간 사마공은 여불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등승이 바로 능매가 꿈에도 그리워 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자 더 이상 이대퇴의 집에 머물 수가 없었다. 은인을 죽게 한 사람의 혈육과 함께 밤을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남쪽으로 가시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마공을 보며 이대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번에는 초나라로 갑니다."

사마공이 짧게 답하고 말에 오르자 능매가 말 앞으로 뛰어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제가 찾는 사람을 알아보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이렇게 말하고는 능매는 속마음을 내비친 자신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그의 이름은 등승이라고 하며, 유명한 장군이 되었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한 사마공이 말에 채찍을 가했다. 그러자 능매가 다시 물었다.

"등 오라버니는 아직도 저를 기억하고 있던가요?"

사마공은 능매를 힐끗 바라보며 뭐라 말을 꺼내려다 그만 입을 다물고는 말을 몰기 시작했다. 능매는 멀리 사라지는 사마공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었다.

"사마 선생은 어찌 그렇게도 고생이 심할까. 어제는 위나라로, 오늘은 진나라로, 그리고 내일은 초나라로 또다시 떠나는 몸이 되다니. 대나무 바구니로 물을 긷는 격이야, 쯧쯧쯧."

이대퇴가 사마공이 떠나버린 숲길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사마공이 가버리자 능매는 몸으로라도 그의 앞길을 막고 등승에 관한 일을 자세히 묻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등 오빠는 진정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눈물을 글썽이며 우두커니 서 있는 능매의 모습을 이대퇴는 한숨을 내쉬며 바라보았다.

여불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함양성 내에 빠르게 퍼졌다. 여불위와 교분이 깊었던 우승상 왕관은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난날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뜻이 통하던 벗이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에 왕관의 기분은 매우 착잡했다. 왕관은 비록 우승상이라는 최고 지위에 올라 있었지만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사나 몽염의 위세에도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 때문에 여불위에 대한 왕관의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가을로 접어들자 산야(山野)는 바야흐로 붉은 물결이 춤추고 있었다. 위수 북쪽에 있는 차아산(嵯峨山)과 동쪽의 요산도 황금색으로 단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왕관은 울적한 심사를 달랠 겸해서 영정에게 주청하여 정국거를 시찰하기로 하였다. 왕관은 어깨를 짓누르는 궁성의 위압감에서 벗어나 탁 트인 자연에서 마음껏 울분을 토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날, 경수(涇水)를 따라 북상하면서 정국거를 시찰하던 왕관은 갑자기 행렬을 멈추게 하고는 수레에서 내려 강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왕관에게는 정국거의 수로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며, 실제로 이번 시찰의 목적도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공무를 수행하고 싶지 않았다. 왕관에게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경수로 진입하는 세 개의 배수구 암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변에 홀로 선 왕관은 강을 따라 늘어선 고목들이 붉고 노랗게 물든 잎들을 바람에 우수수 떨어뜨리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황혼을 생각했다. 또한 잔잔한 물결에 몸을 내맡긴 이끼낀 바위가 풍상을 이겨낸 삶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했다.

왕관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인생은 바로 저 낙엽과 같은 것인가.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세월의 흐름처럼 덧없는 것인가.'

갑자기 처연한 마음이 든 왕관이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지혜가 있다한들 승세를 타느니 못하고, 보습을 만들어도 계절의 변화보다 못하구나."

이때 왕관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던 중대부 안설이 근심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승상 대인,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푸르른 초목을 불태우는 가을의 숙살지기(肅殺之氣)에 마음이 아프십니까, 아니면 경수에 흐르는 도도한 물결이 수심(愁心)을 일으키는 겁니까?"

지난날 장신후 노애나 문신후 여불위와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고,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면직으로 죽은 듯이 살고 있었다. 안설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왕관의 적극적인 변호로 8백 석의 봉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안설은 왕관을 친부모처럼 여기며 충성을 다했다.

"승상의 생각은 다른 데 있소이다."

곁에 있던 장당이 안설에게 말했다. 장당의 수염은 거의 반백에 가까웠다.

"다른 데 있다니요?"

안설이 놀라며 물었다.

"이 앞에 있는 정국거는 누가 만들었소이까?"

장당의 물음에 안설이 고개를 돌려 도도히 흐르는 경수를 바라보았다.

"그야 문신후 여공이지요. 대왕께서 등극하셨을 때 여공은 정성을 다하여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켰지 않았습니까."

"그만하시오. 이제 더 이상 문신후 대감을 거론하지 마십시다. 그의 영령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그냥 놔두십시다."

갑자기 입을 열어 두 사람의 대화를 막던 왕관이 슬픈 표정으로 정국거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이 정국거가 완성되었을 때 백성들이 좋아하며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지금 문신후 대감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소."

그제서야 안설은 왕관의 마음을 헤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정국거가 천하에 통하니 온 땅이 비옥하도다. 이제 흉년은 영원히 끝났으니 백성들의 환호가 쉴 줄을 모른다(鄭國渠通沃野關中凶年長絶萬衆歡呼)'는 노래는 남아 있지 않습니까?"

"산은 있어도 님이 없고, 들은 풍요로워도 객이 없도다."

왕관이 아주 상심한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리자, 안설과 장당 또한 서로 눈짓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마음을 헤아려 앞서가고, 누가 생각이 깊어서 조심하겠는가."

"승상 대인의 말이 옳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군왕의 마음입니다. 옛말에도 '그 말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희노애락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주군이......"

안설이 갑자기 말을 뚝 끊더니 왕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기회를 엿보던 장당이 끼어들었다.

"우리 진나라는 객경 몇 명이 버려놓고 있습니다."

장당은 안설이 이사와 같은 객경에게 불만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나라는 진나라 사람이 다스려야 합니다. 어찌 객()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까. 특히 이사와 같은 애송이가......"

"목소리를 낮추시오!"

안설이 장당에게 주의를 주었다.

"모든 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때가 있는 법이고, 영고고락(榮枯苦樂)은 명()이 정해져 있소. 왕 승상께서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이사는 대왕의 신임을 잃어가고 있소. 노애와 여 승상이 없어진 뒤에도 이사는 교만하게 날뛰어 지금 주군의 미움을 받고 있는데도 그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지요. '의롭지 못하면 반드시 죽게 된다'고 하는데 바로 이사 그 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소?"

장당의 말에 왕관은 속으로 감탄했다.

'장 대인은 늙은 생강이군. 나도 눈치채지 못한 것을 알아내다니.'

왕관의 머릿속에 영정의 위세를 믿고 날뛰는 이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이사의 직권 남용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공손앙, 공손앙이여!"

진나라 효공왕 6(BC 356)에 위나라의 공손앙은 좌서장(左庶長)이 되어 변법(變法)을 실시하여 진나라의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공손앙은 그 공으로 상(;지금의 섬서성 상현)에 봉해졌는데, 뒤에 효공이 죽은 후 그가 세운 법령은 그대로 존속되었지만 공손앙 개인의 운명은 비참하게 마감되었다. 이 때문에 '공손앙'이라는 세 자는 진나라 귀족들에게 '죄악이 극심하다'는 뜻으로 통용되곤 하였다.

왕관의 입에서 공손앙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안설과 장당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세 사람의 대화는 이들을 인도하는 정국거의 공정부(工程部) 부총관 사록(史祿)의 귀에도 들렸다. 사록은 '공손앙'이라는 말을 듣자 곧바로 왕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승상 대인, 소신은 대대로 진나라에 살았기 때문에 진나라 사람들의 답답한 심정을 그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습니다. 오늘 중대한 일이 있어 승상 대인께 아뢰고 싶습니다."

왕관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사록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사록은 눈매가 또렷한 것이 무척 총명해 보였다. 왕관이 사록에게 마음이 끌리는 듯 싶자 안설은 그에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무슨 일인지 어서 승상 대인께 아뢰게나."

사록은 사방을 둘러보고 세 사람 이외에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제 수로를 순찰하다 간자 한 명을 잡았는데 심문한 결과 한나라에서 보낸 간자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간자가 밀서 한 통을 지니고 있어 살펴 보니 한나라에서 우리 측의 총관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소신은 그 자리에서 당장 그를 처단하고 싶었지만 중대한 일이라 생각하고 승상 대인께 아뢸 때를 기다렸습니다."

말을 마친 사록이 품에서 밀서를 꺼내 왕관에게 건넸다.

"그래, 간자는 어디에 있는가?"

왕관이 물었다.

"염려 놓으십시오. 소신은 이 일이 워낙 중대한 일이라 여기고, 소리 하나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는 밀실에 그를 가두었습니다."

"아주 잘했네."

그런데 미소를 띠며 사록을 칭찬하던 왕관이 갑자기 배가 아픈 듯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 으윽!"

왕관은 고통을 참지 못해 얼굴을 찡그렸다. 멀리서 쉬고 있던 그의 심복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재빨리 다가와 그를 부축하여 마차에 뉘었다. 장당이 급히 수행하고 있던 태의 하무(夏無)를 부르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와 왕관의 손을 들어 진맥을 하기 시작했다. 오척 단신의 하무는 서른 정도의 나이로 허리에는 약초 바구니를 찼는데 그 손놀림이 매우 빨랐다. 하무가 작은 함에서 침을 꺼내 왕관의 손등과 발등에 꽂고 가슴을 몇 차례 쓰다듬자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왕관은 정신을 되찾았다. 신음을 멈춘 왕관이 손짓으로 장당을 부르더니 귀엣말을 속삭였다.

"이보게, 시찰을 멈추고 빨리 함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내가 거짓 행동을 한 걸세. 어서 사록과 간자를 데리고 함양 쪽으로 수레를 돌리게나."

왕관의 말에 장당은 이런 사실을 안설에게 전하고 급히 수레에 올랐다.

이사는 노애와 여불위를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그 대가로 영정으로부터 새로운 저택을 하사받았다. 함양성 남쪽에 위치한 경치 좋은 언덕 위에 세워진 그 집은 원래 여불위의 소유로써 매우 넓고 아름다웠다. 초나라 출신으로 창고지기에 불과했던 이사는 영정의 신임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관직이 올라가자 기고만장해서 아침 저녁으로 영정을 알현하고 각종 계책과 밀서를 올렸다. 그러나 이사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이상적이며 황당하기까지 한 계책에 조정 대신들은 점차 반기를 들며 조직적으로 그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영정 또한 처음에는 이사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나 점차 그를 멀리하게 되었다. 이사는 좌승상과 우승상에게 계속 견제를 당하고 그들의 측근들에게 질시를 받자 얼마 전부터는 아예 병을 핑계로 조회조차 나오지 않았다.

조정의 모든 사람들이 이사의 독단적이고 안하무인한 태도에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의리있고 선량한 등승만큼은 이사의 건강을 매우 걱정하며 그를 기다렸다. 함양 내사의 요직에 오른 등승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너무나 바빠 정신이 없을 정도였지만 그 와중에서도 시간을 내 이사의 집으로 문병을 갔다.

등승은 측근 몇 명만 대동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말을 타고 함양성의 서문을 빠져나가 필원(畢原)을 거쳐 몽룡거(蒙龍渠)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 위수에 이르자 다시 사석로(沙石路)를 따라 관도를 힘차게 달렸다.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등승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잠시 후 등승 일행은 단풍이 물든 알록달록한 산이 병풍처럼 감싼 이사의 저택에 도착하였다. 듣던 대로 그곳은 경치가 정말로 빼어났다. 언덕 위에 오르자 멀리 하천이 뱀처럼 구불구불 저택을 휘감아 흐르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고, 비록 왕궁의 위엄이나 크기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해도 어지간한 고관대작의 저택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이사의 집이 나타났다.

저택의 정문에 이르자 문지기가 얼른 밖으로 나오며 등승 일행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말에서 내린 등승은 총관에게 방문의 목적을 전달한 후, 널따란 정원 한가운데로 푸른 돌을 깎아 만든 길을 천천히 거닐며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였다. 조금 뒤 월문(月門)을 지나자 아주 아담하고 소박해 보이는 작은 정원이 나타났는데 울창한 상록수림 한가운데에 꾸며진 작은 연못이 앙징맞았다. 연못가에 죽 늘어서 있는 기암괴석의 틈새에는 한여름 무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던 들풀들이 차가운 가을 바람에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진한 국화 향기가 흘러나와 코를 자극하자 등승은 그 향기에 취한 듯 자신도 모르게 향을 따라 정원을 지나 중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걸음을 옮기던 등승의 귀에 이번에는 가느다란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까르르하는 여인의 웃음소리가 노랫가락에 실려 그의 마음을 혼란하게 했다. 오랜만에 여유있는 마음으로 정원을 감상하던 등승은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의아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옛말에 '여자는 예쁘든 밉든 궁에 들어가면 질투가 생기고, 선비는 어질든 용렬하든 조정에 있으면 음흉해진다'고 하더니...... 이사, 이사, 그대도 결국 호랑이 꼬리를 잡고 미끄럼을 타려는 소인배에 불과한가."

등승은 불길한 마음에 이렇게 중얼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중당에서는 화려한 병풍이 둘러쳐진 앞에서 이사가 좌우에 아름다운 가희(歌姬)를 거느리고, 그 주위로 십여 명의 시첩(侍妾)들이 자리를 함께 한 손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어여쁜 여인들이 따르는 술을 연신 받아마시며 히히덕거렸다. 잠시 후 이사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가희가 일어나 요염하게 몸을 비틀며 초나라 지방의 민가를 간드러지게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사는 그녀의 노래를 감상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등승은 그런 이사의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중당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난데없이 그가 등장하자 노래를 부르던 가희가 깜짝 놀라 몸을 도사렸으며 이사는 등승의 심상치 않은 눈빛을 느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승은 오랜 세월을 궁중에서 살면서 온갖 음사와 짐승 같은 짓거리를 보아왔지만 그저 외면하고 지나갔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지금까지 그는 왕전, 몽염, 몽의, 이사와 벗처럼 어울리면서 이들을 광명정대한 군자라고 여겨왔었다. 그런데 믿었던 이사가 병을 빙자하여 집안에 틀어박혀 이런 문란한 생활을 하는 것을 목격하자 등승은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이 객경, 이처럼 환락에 탐닉하고 있었다니 주군의 얼굴을 어떻게 뵈올 작정이오?"

등승의 목소리는 벼락과도 같았다. 이사의 시중을 들던 여인들은 오금을 저리며 부들부들 떨었고, 한자리에 있던 손님들은 이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강직하고 불 같은 등승에 대한 소문이 함양성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영정이 노애와 여불위를 제거하고 왕태후를 제압하는 데 가장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이 바로 등승이라는 사실 또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사는 갑자기 등승이 나타나 흥을 깨뜨리자 매우 언짢은 듯 고개를 획 돌렸다.

'무식한 목동 같으니, 작위를 보아도 내가 높고 공을 따져도 내가 많은데 감히 내사 주제에 뭘 믿고 저렇게 날치는가?'

손님 중에 눈치빠른 한 사람이 눈짓을 보내자 이사와 등승만을 남겨두고 모두들 중당을 빠져나갔다. 주위가 갑자기 너무도 고요해졌다.

잠시 화를 누그러뜨린 이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등승에게 말했다.

"등 내사, 우리가 어디 한두 해 사귄 사람이오? 화를 풀고 내 말 좀 들어보오. 요즈음 내 심사가 하도 답답하여 술을 빌려 잠시 잊으려던 참이었소. 결코 주군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려는 게 아니었으니 오늘 일은 못 본 것으로 해주시오."

등승은 이사의 구차한 변명에 더욱 부아가 끓었다. 그러나 이사가 계속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며 그에게 이해를 구하자 등승은 점차 화가 풀어졌다.

"마마께 내가 고할 것도 없이 이미 이 객경의 행동은 마마께 낱낱이 알려졌소. 이 객경은 대왕마마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단 말이오."

"그게 정말이오?"

이사는 깜짝 놀랐다. 그간 그는 많은 대신들이 한순간의 잘못으로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다. 이사가 너무나 놀라 몸을 덜덜 떨자 등승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큰일을 이루려면 배부름을 얻으려 하지 말고 편안을 구하지 말며,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말은 늘 조심하라고 선인들께서 말씀하셨소. 그런데 이 객경은 그 말을 벌써 잊었단 말이오? 얼마 전 왕 승상께서 오랫동안 진나라에 숨어 있던 간자를 잡았는데 그 사실을 보고받은 대왕마마의 진노가 대단하다오. 때가 이러하니 특히 행동에 조심하기를 당부드리오."

머리가 비상한 이사는 사태가 매우 심각함을 깨닫고 등승의 손목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등 내사, 정말 고맙소. 그대가 나를 구해주는구려."

이때 밖에서 관병이 뛰어들어오며 등승에게 급히 궁으로 돌아오라는 영정의 명을 전달했다.

"내사 대인, 축객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말에 등승은 이사에게 황급히 인사를 하고 궁으로 향했다.

축객령이 내려졌다는 관병의 말은 이사의 가슴을 내리쳤다. 이사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았다.

 

 

14. 축객령

 

진왕 영정 10(BC 237), 우승상 왕관은 정국거에서 체포한 간자를 통해 밝혀낸 사실을 밀서에 적어 영정에게 보고하였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침략에 시달리다 못해 정국(鄭國)을 파견하여 관개수로 작업을 돕게 했는데, 명분은 진나라의 농본 정책을 지원한다는 것이었지만 속셈은 수로 공사에 진나라의 힘을 쏟게 하여 국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영정은 밀서의 내용에 크게 분노했다. 그러자 왕관과 그의 측근들은 이때를 노려 곧바로 이사와 대부 요가(姚賈)를 탄핵하는 상서를 영정에게 올렸다.

"객경 이사는 대왕마마의 신임을 믿고 법을 자주 어기며 그 행동이 교만하고 거침없어 많은 대신들의 원성을 사고 있사옵니다. 또한 대부 요가는 탐욕에 눈이 멀어 뇌물을 수수하고 사치와 향략에 빠져 있사옵니다. 게다가 외국에서 진나라로 들어온 인사들은 대부분 법규에 어긋난 공사(工事)와 법률을 주청하여 쓸데없이 국력을 탕진하였사옵니다. 부디 이들을 쫓아내고 진율의 엄정함을 보여주옵소서."

이에 영정은 왕관 일행의 상서가 옳다고 판단하고 곧 조서를 내려 '축객령'을 선포하였다.

"진나라에 입국한 지 15년이 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내쫓는다!"

축객령이 내려지자 함양성은 온통 벌집 쑤셔놓은 듯 들끓기 시작했다. 거리마다, 집집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모두들 축객령에 대해 떠들었고, 특히 이웃 나라에서 진나라로 투항한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이사 등 객경들의 집에 몰려가 욕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왕관은 이들을 뒤에서 조종하며 '진인치국'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영정 또한 진나라 백성들의 애국적인 환호와 열정에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고 축객령을 강경하게 시행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등승과 몽염, 몽의, 왕전은 여러 차례 상서를 올려 축객령의 부당함을 간언했지만 영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삼줄기 한 가닥도 옷을 만드는 데 소중하고, 처첩 한 명도 군왕을 즐겁게 하는데, 하물며 진나라에 공을 세운 외국인을 축객하면 앞으로 어느 누가 진을 위해 힘을 쏟겠사옵니까? 축객령은 부당하오니 부디 철회하여 주옵소서.'

 

이런 상서문이 계속 들어오자 영정은 오히려 그것을 바닥에 내던지며 화를 냈다.

축객령이 내려진 지 열흘이 지나자 함양성은 마치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축객의 범위가 진나라에 들어온 지 15년이 채 안 된 관리들로만 생각했던 것이 뜻밖에도 상인과 평민에게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자 함양성은 말 그대로 폭풍우가 밀려드는 듯했다. 거리마다 병사들이 쏟아져 나와 백성들을 붙잡고 진나라 사람인지 아닌지를 하나하나 가려내자 마침내 이에 반발하는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따라 함양성은 치안이 마비되고 엄격한 법치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등승은 함양성을 관리하는 내사로서 치안 유지에 온 힘을 기울였으나 하루하루 날이 지날수록 사태는 악화되기만 했다. 등승 밑에 있는 병사들 중에서도 군공을 세운 수많은 외국 병사들이 강력하게 축객령을 반발하고 나섰다. 진나라 병사들 또한 두 패로 갈라져 한 패는 적극적으로 축객령을 시행하였고, 한 패는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이날 함양성 서문을 둘러보던 등승은 비단 파는 저잣거리에서 진나라 백성들이 어떤 사람을 에워싸고 모욕을 주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곳은 제나라에서 들어온 몇몇 상인들이 포목점을 열고 있었는데 진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그 중 한 사람을 붙잡아 모욕을 주며 나라 밖으로 당장 쫓아내야 한다고 악을 써댔다. 등승은 간곡한 말로 이들을 설득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제나라 사람 편을 드는 등승을 의심하고 욕했다. 진나라 사람들의 행태에 분노를 참지 못한 등승은 병사들에게 무력을 써서라도 이들을 모두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등승에게 소리쳤다.

"등 내사도 진나라 사람이 아니다!"

병사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흩어지지 않은 채 등승에게 야유를 보냈다. 하는 수 없이 등승은 검을 빼어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흩어지지 않으면 모두 법에 의거하여 처단하겠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멈칫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등승이 무릎을 꿇은 채 두려움에 떠는 제나라 상인을 일으켜 세워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자, 그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등승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한편 이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축객령이 선포되자 집안에 틀어박혀 그 대책에 골몰하였다. 어렵사리 진나라로 들어와 국왕의 총애를 받는 객경이 되었는데 그 모든 노력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분노와 허탈감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축객령 때문인지 며칠째 이사의 집에는 그토록 뻔질나게 드나들던 사람들의 발길이 일시에 뚝 끊겼다. 이사는 처음 진나라에 들어왔을 때처럼 외톨이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이사는 진나라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후 여불위의 식객으로 2년을 소리없이 살았던 일, 동궁의 시위가 되어 영정을 만났던 장면을 떠올리며 움츠렸던 가슴을 폈다.

"그래, <열자>에서 말하기를 '천하에는 완전한 공()이 없고, 성인에게도 완전한 능력이 없으며, 만물에는 완전한 쓰임새가 없다'고 하였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어떻게 그냥 앉아서 당할 수 있겠는가."

이사는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무리들을 떠올리면서 일대 반격을 계획하였다. 그는 부리나케 영정에게 올릴 상서를 준비한 후 어둠을 틈타 조용히 집을 빠져나가 함양성 내의 작은 상점에 몸을 숨기고는 등승을 만날 기회를 엿보았다.

이날도 등승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함양성을 순찰하기 위해 남문에 이르렀다. 이때 길 모퉁이 상점에서 한 사내가 쏜살같이 달려와 등승에게 종이 조각 하나를 건네고는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등승이 사내가 뛰어간 쪽을 힐끗 바라보니 바로 이사가 변장을 한 채 그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주위를 잠시 살펴보던 등승이 급히 뛰어오자 이사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사태가 이런 식으로 진전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소. 함양성의 백성들이 나를 그냥 놔두려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꾸미고 나왔소이다. 지금 난 바로 옆 상점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요 대부와 함께 잠시 이 바람을 피할 생각이니 등 내사가 이 상서를 대왕마마께서 친히 보실 수 있도록 은밀하게 건네주시오. 은혜는 잊지 않겠소이다."

등승은 이사가 건네주는 비단 두루마리를 소매 속에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등승은 이사와 요가의 피신을 위해 말 두 필 내어준 다음 그들을 함양성 십 리 밖까지 전송해 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전송하고 돌아오던 등승은 남문으로 되돌아오던 중 진나라 백성들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이사를 어디로 빼돌렸소? 어서 그를 내놓으시오!"

"당신 혹 조나라 첩자 아니오?"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은 등승을 둘러싸고 이사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이들은 온갖 협박과 조롱을 보내며 등승의 비위를 건드렸다. 하지만 이사를 잡으려는 이 사람들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자칫 사태가 커질 것 같아 등승은 끓어오르는 분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등승이 자신을 호위하고 있던 수십 명의 병사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병사들은 칼과 창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재빨리 이들 사이를 헤쳐나갔다. 엉겁결에 등승에게 길을 내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왔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등승 일행을 잡을 수는 없었다.

무사히 부중(府中)으로 돌아온 등승은 그즈음 성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축객령은 잘못된 조치였다. 등승은 소맷자락에서 이사가 건네준 비단 두루마리를 꺼내 가만히 훑어보았다. 뛰어난 문장력이 돋보이는 이사의 상서문은 그때까지도 혼란스럽기 짝이없던 등승의 머리 속을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등승은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궁으로 내달렸다.

등승이 함양궁 앞에 다다라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시위들이 왕명을 들먹이며 그의 앞길을 막았다.

"이 놈들,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러는 것이냐?"

"왕명이라 저희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만 물러가 주십시오."

시위들이 난처한 얼굴로 등승을 바라보았다. 시위들 대부분이 등승이 오랜 세월 데리고 있던 부하들인 탓에 그들은 막상 왕명을 내세우며 등승을 가로막고는 있지만 직속 상관인 그의 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 그들의 심정을 익히 알고 있는 등승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희들의 충성심은 갸륵하구나. 하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이 시점에서 작은 맹서에 연연할 수는 없는 일, 굳이 내 길을 막는다면 후에 커다란 불충의 씨앗을 낳게 될 것이다!"

등승이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 안으로 들어가자 시위들은 더 이상 막지 못하고 길을 비켜주고 말았다. 시위들은 등승의 강직하고 불 같은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등승은 아무것도 거칠 게 없다는 듯 성큼성큼 영정의 침소로 향했다. 그러나 침소의 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등승이 나타나자 황문령이 급히 달려왔다.

"내사 대인, 돌아가십시오. 대왕마마께서는 침전에 드셨습니다."

"알았으니 그대는 돌아가시오."

황문령을 보낸 등승은 침소 앞에 앉아 호방하면서도 거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양을 치던 어린 시절, 처음 영정을 만났을 때 불렀던 바로 그 노래였다. 그러나 노래가 끝났는데도 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등승은 다시 노래의 한 구절을 힘차게 불렀다.

"백성들은 언제 하늘의 빛을 볼 수 있을까요?"

등승의 노랫소리 때문인지 침소의 문이 덜컹 열리더니 영정이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경은 아직도 양 치던 어린 시절의 치기를 버리지 못했소? 조정 대신의 신분으로 뜰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저의가 도대체 무엇이오?"

영정의 호통에 등승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소신은 다만 대왕마마께 주청할 일이 있어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왔사옵니다."

영정이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 닫고 들어가자, 잠시 후 황문령이 나와 등승을 데리고 침소로 들어갔다. 비단금침에 비스듬히 누운 채 영정은 등승의 예가 끝나자마자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그렇게도 급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신은 대왕마마께 축객령의 철회를 주청하고자 하옵니다."

"!"

안색이 갑자기 변한 영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등승이 재빨리 물었다.

"마마, 감히 여쭙겠사옵니다. 대왕마마께서는 천하의 주인을 원하시옵니까, 아니면 일국의 주인을 원하시옵니까?"

"쓸데없는 질문일랑 그만하시오.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과인의 생각을 등 내사는 아직도 모른단 말이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여쭙겠사옵니다. 대왕마마께서는 제나라의 비단과 초나라의 구슬로 만든 옷에 연나라의 신발을 신고 싶으시옵니까, 아니면 오로지 진나라의 땅에서 나는 물건만이 필요하시옵니까?"

"천하를 통일하면 이 세상 모든 물건을 과인이 향유할 수 있지 않겠소?"

"대왕마마, 마마께서는 천하의 모든 물건을 가지고 싶다고 하시면서 어찌 사람은 진나라 출신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고 하시옵니까?"

등승의 물음에 영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불쑥 입을 열었다.

"등 내사는 하루아침에 어떻게 그리 말을 잘하게 되었소? 누군가 뒤에서 그대를 부추긴 것 아니오?"

등승은 영정의 기세가 상당히 누그러졌다고 판단하고 이사의 상서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영정이 가만히 두루마리를 펼치자 소전체(小篆體)로 쓰여진 이사의 상서 첫머리에 '축객령을 간언함(諫逐客令)'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신이 들으니, 관리들이 축객을 건의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실로 지나친 일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옛날 진목공께서는 어진 선비를 찾는 중에 서쪽 융()의 땅에서 유여(由余)를 구하였고, 동쪽 완()의 땅에서 백리해(百里奚)를 얻었으며, ()에서 건숙(蹇叔)을 맞이했고, ()에서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支)를 받아들였사옵니다. 이들 다섯 명의 공자 모두가 진나라 출신이 아니었지만 목공께서는 그들을 중용하시어 20국을 아우르시고 서융(西戎)을 관()에서 추방하셨사옵니다.

또한 진효공(秦孝公)께서는 상앙(商央;공손앙을 의미)의 법을 받아들여 문란한 진의 풍속을 가다듬고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했으며 나라를 부강한 길로 이끄셨사옵니다. 그에 따라 백성들은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지냈고 제후들은 군주께 복종했으며 초와 위를 물리쳐 국토를 천 리나 확장하셨사옵니다.

한편 진혜왕(秦惠王)께서는 장의(張儀)의 계책으로 삼천(三川;지금의 사천)의 땅을 얻었고, 서쪽으로 파()와 촉()을 아우르고, 북쪽으로 상당(上黨)을 수복하였으며, 남쪽으로는 한중(漢中)을 빼앗아 구이(九夷;주변 여러 민족)를 포용하고 언()과 정()의 땅을 제압하셨사옵니다. 또한 동쪽으로 성고(城皐)의 험지를 정벌하여 비옥한 땅을 지킬 수 있었고, 마침내 육국합종(六國合縱)을 쳐부수어 진을 섬기도록 만드셨사옵니다.

그리고 진소왕(秦昭王)께서는 범수(范雎)를 중용하여 세도당당했던 양후(穰侯)와 화양(華陽)을 물리치고 왕실을 굳건하게 하였으며, 권문세족의 발호를 누르고 제후를 제압한 결과 오늘의 진나라에 이르게 되었사옵니다.

이들은 모두가 진나라의 빈객(賓客)으로 커다란 공을 세운 인물들이옵니다. 이렇게 볼 때 객경인 이 몸이 과연 진나라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보시옵니까? 만일 이들 빈객을 받아들이지 않고 중용하지 않았다면 진나라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부()와 이()를 쌓을 수 있었으며, 강대한 병력과 명성을 얻을 수 있었겠사옵니까.'

 

영정은 잠시 숨을 돌린 다음 심각한 표정으로 상서문을 계속 읽어나갔다.

 

'지금 폐하께서는 곤산(昆山)의 옥()을 걸치시고, 수화(隨和)의 보()를 지니셨으며, 명월(明月)의 주()를 늘어뜨리고, 태가(太柯)의 검()을 허리에 차시고, 천리()의 마()를 타시며, 취풍(翠風)의 기()를 꽂고, 영효()의 고()를 두드리고 계신온대 이는 모두가 진나라에서 나지 않는 물건들이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런 것에 기뻐하시니 이는 어찌된 일이옵니까?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는 것이어야만 된다면 야광(夜光)의 벽()으로 조정을 장식할 수 없으며, 소상(;무소와 코끼리)의 뿔로 만든 완구를 갖고 놀 수 없고, (), ()의 여자를 후궁으로 둘 수 없고, 준마부제(駿馬부제)를 마구간에 매어둘 수 없으며, 강남의 황금을 써서도 아니 되고, ()의 단청을 칠해서도 아니 되옵니다. 또한 후궁의 귀와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들도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는 것만 취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완주(宛珠)의 비녀, 전기(傳璣)의 귀고리, 아호(阿縞)의 옷을 궁중에 들일 수 없으며, 아무리 아름답고 얌전한 여자라 하더라도 조나라의 여자를 곁에 둘 수 없고,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도 진나라의 음률이 아니면 연주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을 치고 쟁()을 켜고 어깨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만이 진나라의 음악이고 정(), (), 상한(桑閑), (), (), (), ()은 모두 진나라의 음악이 아니니 들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지금 폐하께서 옹을 치는 걸 버리고 정()과 위()를 들으시며, ()을 켜는 걸 버리고 소()나 우()를 들으시는 까닭은 무엇이옵니까? 뜻에 맞고 보기에 좋으면 그만인 것을, 지금 폐하께서는 오로지 사람에게만 그렇게 하지 않사옵니다. ()한지 그렇지 않은지 일체 묻지도 않으시고 무조건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모두 축객을 하고 계시옵니다. 그러한즉 폐하께서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구슬이나 물건이고 나라의 근본인 백성은 가볍게 보시는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일개 제후조차 제압하실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이사는 통렬하게 영정을 비난했다. 상서문을 읽는 영정의 얼굴색이 점점 창백하게 변해갔다.

 

'신이 듣자 하니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이 나고, 나라가 크면 백성이 늘고, 국력이 강하면 병사가 용맹하다고 하옵니다.

태산(泰山)은 흙먼지 하나 마다하지 않아 그렇게 높을 수 있었고, 황하는 작은 물줄기 하나 거부하지 않아 그토록 넓을 수 있었으며, 패업을 이룬 왕은 백성을 내치지 않았기에 그 덕()을 밝힐 수 있었사옵니다.

땅에는 끝이 없고 백성에게는 이국(異國)이 없으며 사시사철이 풍요로운 것은 하늘의 보살핌이 있어서 그러하옵니다. 지금 백성을 내쫓는 건 적국에게 도움이 되고, 빈객을 버리는 것은 제후에게 힘을 보태주는 결과를 낳게 되며, 천하의 선비들이 진나라로 오는 것을 막는 일은 도적에게 양식을 주어 그들을 살찌게 만드는 지름길이옵니다.

진나라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면서도 귀한 물건이 많듯, 진나라 출신이 아니더라도 충성스러운 선비들은 많사옵니다. 지금 축객령을 내리시어 객을 적국에게 내주고 백성을 제후에게 넘기시면, 진나라는 텅텅 비고 모두들 제후에게 붙어 진을 원망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된다면 백성들은 나라가 위급해도 구하지 않을 것이고, 막상 선비와 병사가 필요해도 그때는 얻을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영정은 상서문이 적힌 비단 두루마리를 둘둘 말아 탁자에 올려놓고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어둠에 싸인 하늘을 내다보았다. 영정의 등 뒤에서 등승은 함양성의 치안이 엉망이 되어 통제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영정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등승에게 소리쳤다.

"물러가시오!"

등승이 예를 올린 뒤 밖으로 나가려 하자 머리를 떨구고 있던 영정이 중얼거렸다.

"이 객경과 요 대부를 찾아오시오."

왕관은 한나라의 간자인 정국을 잡아 이사와 수많은 빈객을 단숨에 진나라에서 내쫓을 수 있게 되자 득의만만해졌다. 축객령이 내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50번째 생일을 맞이한 왕관은 왕부(王府 ; 왕 대인의 저택)의 백화정(百花庭)에서 주연을 크게 베풀었다.

이날 아침 일찍 왕부에 도착한 중대부 안설은 주위를 둘러보며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승상께서 생신을 맞이하시니 문 앞에 빛이 가득하구나."

총관이 안설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중대부 어른,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허허허, 참으로 좋은 날이오."

안설은 품에서 지전을 꺼내 총관과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며 호탕하게 웃었다. 안설의 마차에서 홍포(紅包;귀한 선물)와 갖가지 꽃으로 장식한 화분을 내리던 총관이 화분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쩐지 승상 대인께서 중대부 어른을 무척 아끼신다 했더니 다 곡절이 있었군요. 승상 대인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꽃입니다."

이 말에 안설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총관의 뒤를 따라 내정(內庭)으로 발길을 옮겼다.

백화정은 왕부의 후원에 있는 방형(方形;네모난 건물)의 건물로 반듯한 돌로 벽을 쌓고 육각형의 나무를 기둥으로 세웠다. 그 주변에는 흰 국화, 노란 국화, 붉은 국화, 작약, 두견화, 홍모란이 가득하고,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들풀도 소담스럽게 자라고 있어 백화정이라는 이름이 아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안설은 백화정의 풍치에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감탄했다.

"안 대부, 어서 오시오. 혼자서 일찍도 오시었구료."

꽃을 감상하고 있던 왕관이 안설을 반갑게 맞았다.

안설이 왕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그 곁으로 다가갔다. 왕관은 노란 국화 앞에서 코를 벌름거리며 향기를 맡고 있었다.

"대인, 참으로 좋은 꽃입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꽃에도 벌레가 끼는 법이오."

왕관의 말에 안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벌레는 마치 우리 진나라에 들어와 있는 빈객과 같은 존재들이오."

"승상 대인, 어떻게 하면 그 벌레들을 모두 죽일 수 있을까요?"

안설이 왕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안 대부는 꽃 가꾸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오. 꽃도 학문과 마찬가지로 정성을 들여야 한다오. 이 국화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도 서너 달 이상의 정성을 쏟아야만 하지요."

안설은 그제서야 눈 앞에 피어 있는 국화가 귀하디 귀하다는 금사국(金絲菊)임을 알았다.

"누릇누릇한 꽃대가 마치 금실처럼 생겼군요. 맑고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가 국화 가운데 으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설이 금사국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그렇소이다. <시경>에서 노래한 '저 못의 언덕, 부들과 연꽃이 가득하다(彼澤之陂有蒲有荷)'는 구절은 모두 꽃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이지요. 꽃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실로 무궁무진하다오."

"왕 승상의 말씀이 옳습니다."

왕관의 말에 안설이 맞장구를 쳤다.

"정성을 들여야 가지 하나하나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듯, 정사(政事)도 온 정성을 쏟아야 하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승상께서 축객을 건의하자 진나라 백성들이 모두들 기뻐하며 찬동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 승상의 생신을 맞이하여 대왕마마께서 친히 축하의 뜻을 보내오셨습니다."

안설의 말에 왕관은 환하게 웃으며 만족해 했다.

"군왕이 뛰어나니 신하도 이를 따른다고 하였소. 이 모든 공로는 영명하신 주군께 돌려야겠지요."

"대왕마마께서 영명하시다면, 대인께서는 목민(牧民;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의 인재이십니다."

왕관은 안설의 찬사가 싫지 않은 듯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재주를 믿으면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신념을 지니면 평생을 지킨다고 하였소. 나는 신념을 따르는 사람이오."

"역시 대인이십니다."

안설이 감탄하는 눈빛으로 왕관을 바라보았다.

"어느 누가 대인의 강렬한 신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꽃밭을 나오는데 멀리 장당이 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장 대인, 무슨 급한 일이라도?"

안설이 물었다.

"오늘 아침에 공자(公子 ; 왕의 자제) 부소(扶蘇)께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대왕마마께서 이사를 다시 찾는다고 합니다."

"정말이오?"

왕관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이사의 목을 쳐야겠군."

안설이 당혹스러워 하는 왕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말에 이번에는 장당이 놀라 안설을 바라보았다.

"그만두게나."

왕관이 손을 내저으며 안설을 말렸다.

"생일 잔치 흥이 모두 달아나는군."

"그렇지만 대인?"

왕관이 한숨을 푹 내쉬자 안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무슨 대책이라도 내리셔야지요."

"여우를 죽이자 늑대가 나타나는 꼴이 바로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니겠소. 이번 축객령은 실패한 듯싶소."

왕관의 체념 어린 말에 안설과 장당은 설마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때 백화정에 들어오던 태의 하무차가 왕관을 발견하고는 급히 다가왔다.

"승상 대인,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왕관은 하무의 말에 눈을 감았다.

이미 축객령을 철회하고 대전에서 등승과 이사, 그리고 요가를 기다리고 있던 영정은 심사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자신이 한 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것은 특히 군주로서 무척 자존심 상하는 처사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앞으로 과인이 내린 결정을 어느 백성이 쉽게 따라 주겠는가?"

영정이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등승이 이사와 요가를 데리고 대전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은 옷이 다 해어지고 온몸은 흙투성이인 채였다. 영정이 세 사람의 행색이 궁금하여 그 까닭을 묻자, 등승이 낭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희 세 사람이 함곡관을 지나는데 난데없이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려와 마차가 엎어지고 부서졌사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이오?"

영정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소신이 산 위에 올라가 조사해 보니 누군가 고의로 돌무더기를 굴린 듯하였사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오?"

"그 주변에 작은 돌이 널려 있었고, 또한 사람들의 발자국도 발견하였사옵니다."

"허어, 이번 일은 과인과 등 내사만이 알고 있는데 참으로 괴이하군."

영정은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을 가장 꺼려했다.

"소신이 산 위에서 요패(腰牌) 하나를 발견하여 수습해 왔는데 대왕마마께서 한번 살펴보옵소서."

등승이 허리춤에서 요패를 꺼내 영정에게 건네주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것은 승상부의 하인들이 사용하는 요패임을 알 수 있었다. 영정은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는 영정을 만나면 강력하게 읍소할 생각이었으나 영정이 등승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등승이 보고를 마치자 그제서야 영정은 이사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객경이 과인을 일깨워 주었소. 상서를 읽고서야 축객령이 잘못되었음을 확실히 알았소. 이 객경은 앞으로 과인과 진나라를 위해 더 한층 힘써 주시고 널리 인재를 구하는 일에도 도움을 주도록 하시오."

영정의 말에 이사는 그만 감격하여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요가가 목이 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왕마마께서 축객령을 폐기하시었으니 이제 수많은 인재가 진나라로 몰려올 것이옵니다."

"어찌 다른 이들을 그대들과 비교할 수 있겠소. 화씨(和氏)의 벽()과 같은 인재는 진정 찾기가 쉽지 않은 법이오."

"대왕마마, 신들은 인재가 아니옵니다. 이번 여행길에 우연히 현사를 만났사온대, 그는 경사(經史;경전과 역사)에 밝고 역리(易理)에 뛰어나며 병략(兵略)에도 조예가 깊었사옵니다. 실로 진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사람이었사옵니다."

"그래요?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요가의 말에 영정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의 성은 왕()이고 이름은 료()라 하오며 위나라 포양인으로 지금 대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사옵니다. 대왕마마께서 한번 만나주옵소서."

"이 객경과 비교하면 어떻소?"

영정이 묻자 요가는 이사를 힐끗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적어도 그는 소신보다는 열 배, 아니 백 배는 뛰어난 사람일 것이옵니다."

요가의 말에 이사는 심사가 뒤틀렸지만 어쩔 수 없이 꾹 눌러 참았다.

영정의 명에 따라 등승이 대전을 나가 왕료를 데리고 들어왔다. 왕료는 갈색 베옷 차림이었지만 키가 훤칠하고 중후한 체격이 돋보이는 인물로 나이는 이제 불혹(不惑)을 넘긴 것 같았다. 다만 기침이 심한 것이 얼굴에 병색이 드러나 보였는데 오랫동안 고생한 흔적인 듯했다.

대전으로 들어온 왕료는 무릎을 꿇고 영정에게 가볍게 목례를 올렸다. 영정은 그가 제대로 예를 갖추지 않자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말했다.

"선생 같은 인재께서 어찌하여 축객령이 내려진 이 시점에 진나라로 들어오셨습니까?"

"축객령은 대왕의 손과 발을 묶어 놓는 잘못된 법령이라 생각했사옵니다. 소신은 비록 재주가 없사오나 축객령이 옳지 않음을 역설하고자 진에 들어왔사옵니다."

"하하하."

왕료의 말에 영정이 크게 웃었다.

"축객령이 나의 손과 발을 묶어 놓는 잘못된 법령이라구요. 그런데 과인은 선생께서 주청을 하시기도 전에 먼저 그것을 폐지하였으니 선생은 너무 늦게 오신 게로군요."

영정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왕료는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신이 진나라로 들어올 때에는 축객령이 폐지되기 이전이었사옵니다. 지금 비록 그것이 폐지되기는 하였지만 대왕마마의 뜻은 그리 굳세지를 않사옵니다. 다시 말씀드리오면 마마의 진정한 뜻은 축객령 폐지에 있지 않사옵니다. 늘 마음 속으로 주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재를 구하는 데 있어 현우(賢愚)를 가리지 않는다면 바로 오랑캐의 임금과 다를 바 없을 것이옵니다."

왕료의 직설적인 언사에 영정은 매우 화가 났다. 대전에 함께 자리한 몇몇 대신들은 영정의 일그러진 표정에 모두들 가슴을 졸였다. 더욱이 왕료를 추천한 요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어쩔 바를 몰랐다. 영정의 성격을 알고 있는 이사만이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모름지기 군자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경구를 어느 누구보다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왕료를 노려보던 영정이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저 미친 자를 당장 밖으로 끌어내 효수하라!"

그러자 왕료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엽공호룡(葉公好龍)을 다시 보니 이제 진나라의 멸망을 손꼽을 날도 멀지 않았도다."

효수의 명령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은 채 오히려 당당한 왕료의 태도에 영정은 매우 놀랐다. 군왕의 지존(至尊)으로 베옷 입은 일개 선비의 기개를 조금도 누르지 못하자 영정은 문득 순황의 말이 떠올랐다.

'군왕이 자신의 희노애락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면 충신과 간신을 판별하는 기준을 잃게 된다.'

시위들이 들어와 왕료를 끌고 나가려 하자 영정이 손을 저으며 소리쳤다.

"잠깐, 엽공호룡은 무슨 뜻이오? 그리고 진나라의 멸망을 손꼽는다는 말은 어떤 의미요?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영정의 말에 왕료는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몸을 바쳐 의로움을 얻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죽음을 면하고 면치 않고는 소신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사옵니다."

일단 소신을 밝힌 왕료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힘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대왕께서는 내사에게 명하여 쫓아낸 신하를 다시 불러들이셨사온대 이들은 돌아오던 길에 바위가 머리 위에 떨어지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공격한 사람들은 누구겠사옵니까? 그들은 분명 대왕을 해칠 사람들은 아니지만 쫓아낸 신하들을 다시 불러들이시자 위기를 느끼고 해치려 했사옵니다. 이는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라 안에 현사를 싫어하는 세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이옵니다. 현사들이 사라지면 간적(奸賊)들은 대왕의 좌우에 독버섯처럼 자라게 될 것이며, 죄가 없는데도 위협을 받으면 현사들은 다시 불러도 오지 않을 것이옵니다. ()을 좋아하던 초나라 엽공이 막상 용이 나타나자 두려워 했다는 엽공호룡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옵니다. 진나라가 강해지면 제후들은 일개 군현의 관리자에 불과하지만, 빈객들이 진을 떠나 그들과 연합하면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게 되옵니다. 지백(智伯), 부차(夫差)가 망한 까닭도 이와 같사옵니다. 따라서 신이 망국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옵니다."

영정은 그제서야 왕료의 충고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선견지명이 있는 선생께서 어찌하여 과인이 축객령을 철회할 것을 예측하지 못하셨습니까?"

"대왕마마, 제가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애를 태우며 사태를 지켜보던 요가가 영정이 왕료를 받아들이자 비로소 안도를 하고 입을 열었다.

"소신과 이 객경이 성을 빠져 나가 몸을 피하던 중 우연히 왕료 선생을 만났는데 말이 조리 있고 사리가 명확해 줄곧 그 말을 경청했사옵니다. 선생은 우리에게 축객령이 곧 철회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과연 며칠 후 등 내사가 저희들을 찾아와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었사옵니다."

그 말에 이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정은 왕료의 식견에 다시 한 번 감탄하고 더욱 공손한 태도를 갖추었다.

"과인이 잠깐 눈이 어두워 현사를 몰라보고 해를 끼치려 했습니다."

영정은 왕료에게 무례를 사과한 후, 진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통일의 방략을 구하였다. 그러자 왕료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냇물에 갖가지 오물이 모여들 듯 사람도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사옵니다. 대왕께서 지난날 시행하신 정책의 잘못됨을 솔직히 인정하시니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많은 사람들이 대왕을 우러러 볼 것이옵니다."

왕료가 처음으로 찬사를 보내자 영정은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왕료는 영정의 명에 따라 천하의 대세를 분석하고 진국의 내정과 병력의 운용, 농상 정책에 관하여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였으며, 특히 토지, 백성, 정사(政事)의 관리와 운용에 깊이 있는 철학을 제시하였다. 영정은 그의 언변과 학식에 깊이 탄복하고 그를 상빈(上賓)으로 받들어 궁중에 머물도록 하였다.

등승은 함양성의 치안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정의 밀명을 받아 함곡관에서의 낙석 사건을 조사하였다. 축객령이 철회된 지 열흘이 못 되어 함양성은 질서를 되찾았으며 낙석 사건의 진범 또한 쉽게 밝혀졌다. 요패를 단서로 탐문한 끝에 우승상부의 총관이 모든 것을 지시했음이 드러나자 우승상 왕관은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왕관은 자리에 누워 '해가 뜨면 움직이고 달이 차면 기운다(日中則移月滿則仄)'는 이치를 생각했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면 오히려 미치지 못하는 법이지."

그는 울화병으로 속을 썩히면서 태의 하무차를 기다렸다.

한편 하무차는 일을 마친 후 궁궐을 나오면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일이 끝나면 곧장 승상부로 달려가곤 했는데 이제는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하무차의 조상은 본래 제나라 상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고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어깨 너머로 배운 의술로 사람들의 맥을 짚어주고 푼돈을 벌었다. 하무차는 열네 살 때 부친으로부터 약초의 배합과 침술을 배웠는데, 그 후 열여덟 나이로 군대에 들어간 그는 의관(醫官)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4년 동안 군의로서 많은 공을 세운 하무차는 병역을 마친 후 태의부(太醫府)의 의승(醫丞)으로 선발되었고 2년 후에는 태의로, 더 나아가 태의령(太醫令)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제나라가 점점 쇠퇴해 가자 태의령의 관할 하에 있는 의사들도 겨우 백여 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가슴 속에 야심을 키우고 있던 하무차는 더 이상 쇠락해 가는 제나라에서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어 마음을 굳게 먹고 강대국인 진나라로 들어왔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하무차는 어느 날 우연히 우승상 왕관을 수행하고 정국거를 시찰하는 행렬에 동참하면서 진나라의 태의가 되는 행운을 잡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축객령이 내려지면서 제나라 사람인 그의 지위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만일 영정이 축객령을 철회하지 않았다면 하무차의 말로는 매우 비참했을 것이었다.

이전에 하무차는 왕관에 의해 발탁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에게 궁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보를 건네주고 건강도 극진히 보살폈다. 침식을 잊을 정도로 왕관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막상 축객령이 내려지자 왕관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하무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설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중대부 안설의 집은 매우 아담하고 깔끔했다. 그간 여러 차례 들락거렸던 하무차는 쉽사리 대문을 통과하여 중당에 이르렀다. 주변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고, 다만 대청에서 도란도란 속삭이는 소리만이 하무차의 귀에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왕부의 총관과 안설이 머리를 맞대고 은밀히 무슨 일인가 상의하고 있었다.

하무차가 중당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두 사람은 흠칫 놀라며 하던 말을 중단했다. 하무차가 안설에게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왕부의 총관은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

'무슨 다급한 일이 있기에 저렇게 당황해 하며 도망갈까? 등에는 보따리를 짊어지고, 틀림없이 멀리 떠나는 차림이야.'

하무차는 갑자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안설 또한 하무차에게 두 사람의 만남을 들켜서 그런지 심히 당혹스러운 태도였다. 하무차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안설에게 간단한 안부를 묻고는 얼른 자리를 떴다.

난데없이 나타나 훌쩍 떠나가 버리는 하무차의 행동이 왠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한 안설은 그가 사라지자 곧바로 왕관에게 달려갔다.

몸이 좋지 않은 왕관은 그날따라 하무차가 오지 않자 매우 갑갑하던 터였다. 이때 안설이 급히 뛰어와 하무차의 이상한 행동을 고해 바치자 왕관은 씁쓰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뭇잎도 무성하면 반드시 지는 법,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왕관은 무슨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조복을 입고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전으로 들어간 왕관은 영정에게 예를 올리고 낙석 사건을 염두에 둔 채 먼저 말을 꺼냈다.

"소신이 용렬하여 간자인 정국의 말을 무조건 믿고 많은 물의를 일으켰사옵니다. 비록 그것이 소신의 본뜻은 아니었지만, 모든 책임을 지고 삼가 인수(印綬;임명장과 같은 기능의 도장)를 마마께 바치오니 부디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영정은 왕관이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고 벌을 받겠다고 나서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보내신다니 참으로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천명을 알고 조용히 물러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왕 승상은 인망이 두텁고 아직 할 일도 많은데 어찌 늙음을 핑계로 그만 물러나실 수 있겠소?"

"대왕마마께서는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기강이 바로 선다고 하셨사옵니다. 하온대 소신이 법을 어겼으며 시()와 세()가 물러나기를 종용하니 마땅히 어진 이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게 도리라 사료되옵니다."

영정은 완곡하게 자리를 사양하는 왕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승상은 정말 잽싸게 제 꼬리를 감추는군. 총관이 이미 몸을 빼내 달아났다 그거지. 당장 이 자에게 벌을 내릴 수도 있지만 아직 그는 '진인치국'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중심 인물이고 조정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이 남아 있어. 그러나 그 무리들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 굳이 승상을 내칠 필요가 없겠지.'

영정은 왕관이 물러나는 이유로 시와 세를 언급하자 내심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만일 영정이 왕관을 강력하게 응징한다면 많은 신하들이 일단은 영정에게 복종하겠지만 언제든지 시와 세가 바뀌면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영정은 마음의 결심을 굳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왕관에게 말했다.

"천명을 알고 욕심을 그치면 걱정이 없다고 하였소. 승상께서 이미 어진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는 결심을 내리셨다면 과인도 굳이 말리지는 않겠소. 다만 경은 대대로 진의 세족(世族)으로 신망이 두텁고 경사에 밝으니 공자 부소의 태부(太傅;태자의 사부를 일컬음)를 맡아주시면 어떻겠소?"

왕관은 뜻밖에 영정이 자신에게 태부의 자리를 권하자 매우 놀랐다. 그는 공자 부소를 잘 알고 있었다. 부소는 어린 나이였지만 매우 총명하고 의젓하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침착하고 의연하여 많은 대신들이 진나라의 다음 번 군주로 손꼽고 있었다.

'그래, 군자는 위기를 맞았을 때 더욱 의연하게 대처하는 법, 동쪽 땅을 잃으니 오히려 서쪽의 땅이 굴러오는구나.'

왕관은 솟아오르는 기쁨을 감추며 조용히 대답했다.

"소신의 허물을 마다 않고 태부로 삼으시니 성은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왕관이 예를 올리고 물러나자, 잠시 후 상빈 왕료가 영정 뒤에 걸린 주렴을 걷어올리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왔다.

"물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는 법이옵니다. 이는 매사를 너무나 정확히 하면 무리가 따르지 않는 이치와 같사옵니다. 적이라 할지라도 그를 쳐서 대세를 바꿀 수 없다면 살려두어 훗날 이용하는 게 좋사옵니다. 너무나 강하게 내치면 반발을 사 대사를 그르칠 수 있지요."

그 말에 영정이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윽박지르거나 심하게 힐난하지 말라는 뜻 아니오?"

"그렇사옵니다. 가장 슬기로운 사람은 바보처럼 행동하는 것이옵니다."

영정은 왕료가 기쁜 얼굴을 하며 다가오자 그 연유를 물었다.

"무엇이 그리 즐겁소?"

"대왕께서는 작은 선심으로 큰 이득을 얻으셨고, 내치(內治)를 공고히 하셔서 걱정을 덜으셨사옵니다. 이제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적국의 대신들을 매수하여 그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십시오. 대왕께서는 30만 금으로 제후들을 모두 멸하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영정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작은 선심으로 큰 이득을 얻고, 내치를 다져서 걱정을 덜었다는 게 무슨 뜻이오?"

왕료가 대답했다.

"왕 승상은 축객령을 주도한 중심 인물이옵니다. 그는 방금 전 대왕의 질책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태부에 임명되자 아주 감동한 듯했사옵니다. 아마 마음 속으로 대왕께 진심으로 충성하겠노라 맹서했을 것이옵니다. 이것이 바로 칼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부의 불만 세력을 다스리는 고도의 심리 전술이옵니다. 즉 작은 자비심으로 커다란 이익을 얻은 셈이지요."

그제서야 영정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렇다면 수천 금으로 제후를 얻는다는 건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병가의 심리전이겠구려."

그 말에 왕료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영정의 슬기로움에 감탄하였다.

그 다음날 진시 무렵 영정은 왕료, 등승, 이사와 몇몇 대신을 대동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적색 준마를 타고서 함양성 북쪽 교외에 위치한 왕전의 군영을 시찰하러 나갔다. 지난밤에 눈이 내려서인지 산과 들은 온통 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북풍은 쉴틈없이 대지의 눈발을 흩날려 사람들의 가슴까지 차갑게 쓸어갔다. 모진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힘차게 말을 몰아 몇 차례 산구비를 돌고 돈 영정은 마침내 군영이 한눈에 보이는 산마루에 다다랐다. 멀리 삭풍에 찢어지기라도 할 듯 펄럭이는 군기(軍旗) 아래 왕전의 군영은 질서있게 줄지어 자리잡고 있었다.

영정 일행이 군영 가까이에 이르자 갑자기 커다란 호각소리가 벌판에 울려퍼졌다. 대영(大營)의 백 보(百步; 60-70장으로 현재 척도로는 180미터 정도) 앞에는 대장군 왕전이 부장 양단화(楊端和), 번기(), 몽염을 이끌고 도열하였으며, 그 뒤로 백여 명의 도위(都尉), 교위(校尉)가 줄지어 서서 영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영에 도착한 영정 일행이 말에서 내려 군례(軍禮;왕을 맞이하는 예식)를 치르자 왕전이 앞장서서 이들에게 군영을 안내하였다.

군영은 매우 질서정연했으며 그 방어망이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일차 방어선은 가시나무와 싸리나무를 단단히 엮어 일장(一丈;3미터) 높이로 총총히 박아 담장을 쳤고, 거기에서 세 걸음 뒤로 이차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흙으로 판축하여 담을 쌓고 그 위에 사람의 두 배 높이 정도 되는 목책이 서 있었다. 그리고 담장 아래를 깊게 파서 물이 흐르는 해자를 만들었으며 담장의 사방에는 망루를 세워 전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군영의 도로 또한 가로와 세로로 질서있게 닦여졌고, 각 막사마다 오(;다섯 명의 병사) 혹은 십(;열 명의 병사)의 단위로 배치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막사 앞에 나란히 서서 영정의 시찰을 받았다. 북소리가 크게 세 번 울리자 수만 명이 들어 있는 군영은 쥐새끼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각 개의 군영을 지휘하는 중군장(中軍帳)들이 막사 앞에서 자신의 군영을 표시하는 깃발을 가슴 앞으로 늘어뜨리고 있다가 영정이 다가오면 하늘 높이 치켜올리곤 했다. 병사들은 군기가 확실히 잡혀 있었고 사기 충천한 모습이었다.

영정을 동행한 조정 대신들은 입을 모아 왕전의 군대를 칭찬하였다.

"대왕마마, 진군의 위풍은 북풍과 같이 당당하고 철마처럼 든든하옵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감탄과는 달리 왕료는 매우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별다른 게 하나도 없군."

영정은 왕료의 말에 기분이 언짢아 왕전을 불렀다.

"왕 장군, 과인이 오늘 특별히 현사 왕 선생을 모시고 왔으니 연무(演武)하는 모습을 시범보여 그의 마음에 들도록 해보시오."

왕전은 힐끗 왕료를 바라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갑병(甲兵) 백 만을 움직일 만한 웅지를 품고 있는 왕전 앞에서 일개 서생에 불과한 그가 군영에 대해 가타부타하는 것이 아니꼬울 뿐이었다. 그러나 영정의 명이 내려지자 왕전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시범을 지시하였다. 영 내에 북이 둥둥둥 크게 울리기 시작하자 왕전이 양단화와 여러 부장, 그리고 백여 명에 이르는 도위와 교위들을 이끌고 연무장으로 이동하였다.

연무장은 아주 넓은 초지에 마련되었는데 마침 햇볕이 내리쬐는 바람에 눈이 녹아 땅은 상당히 질퍽거렸다. 연무하기에는 아주 좋지 않은 상태였다.

영정 일행은 열병단(閱兵壇)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열병단은 언덕이 끝나는 지점에 마른 흙을 쌓아 만들었는데 대략 일 장 정도의 높이였다. 영정은 단상 위에 놓인 풀로 엮은 방석 위에 앉아 왕전에게 연무를 지시했다.

명이 떨어지자 다시 깃발이 펄럭이고 북이 요란하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대규모의 병력이 사방에서 깃발을 흔들며 중앙으로 달려나오는 것이 마치 검은 구름이 초원에 밀려드는 듯한 형상이었다. 질풍노도와 같은 그들의 기세에 영정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으며, 이사 또한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상기된 얼굴로 군사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단지 한 사람, 왕료만은 냉정한 모습을 잃지 않고 면밀하게 군사들의 연무를 관전했다. 영정은 그런 왕료의 오만한 옆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 자기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런 위세에도 꿈쩍않는 거지?'

한편 왕료는 왕료대로 남몰래 영정의 모습과 행동을 주시하면서 생각했다.

'작은 일에 쉽게 감격하고, 심계가 독랄한 위인이군. 결코 오래 사귈 만한 사람이 아니야.'

영정과 왕료는 제각기 서로의 인물됨을 평가하며 연무를 관전하였다.

왕전은 신속하고 과감하게 군사들을 지휘했다. 번기는 푸른 깃발에 푸른 깃, 푸른 갑옷을 입은 일만의 좌군을, 양단화는 누런 깃발, 누런 깃, 누런 갑옷을 입은 일만의 중군을, 그리고 흰 깃발, 흰 깃, 흰 갑옷을 입은 일만의 우군은 몽염이 통솔하였다. 지휘관의 명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소리 높이 외치는 삼군의 우렁찬 함성은 마치 천지를 진동하는 듯했다.

"진왕 만세! 만세! 만만세!"

호각과 북소리, 깃발에 따라 삼군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모였다 흩어지고, 대오를 변형하며 공격진과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처음에는 방진(方陣), 그 다음은 원진(圓陣), 다음은 학날개진, 물고기떼진, 기러기진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그러더니 북소리가 다시 세 번 울리자 우군이 선봉에 서고 좌군과 중군이 날개 대형으로 진을 구성하다가, 갑자기 대형이 바뀌어 중군이 앞장서고 그 뒤를 좌우군이 따르는 일자형이 되었다. 넓은 초지에서 누런 색, 흰 색, 푸른 색의 대형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풀숲을 헤치며 전진하는 뱀처럼 날렵하고 교묘했다. 깃발이 천지를 덮고 함성이 사방에 울리자 영정은 아주 만족스런 표정이 되었다.

이윽고 북소리가 여섯 번 울리자 삼군의 대열이 영정을 중심으로 담을 쌓으며 뒤로 물러나더니 곧이어 60명의 사수(射手)가 걸어나왔다. 그들의 백 보 앞에는 가로, 세로 3척 정도의 청, , 백색의 표적이 세워져 있었다. 각각 두 대의 화살을 가지고 사선 앞에 선 사수들은 북이 울리자 과녁에 화살을 한 대씩 날렸다. 60대의 화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중을 갈랐다.

"퍼퍼퍽!"

황색 표적에는 20대가, 백색 표적에는 19대가, 청색 표적에는 18대가 적중되었다.

"신전수(神箭手;활을 잘 쏘는 사람)가 많군!"

등승이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어서 다시 북소리가 울리자 60명의 사수들이 일제히 두번째 화살을 날렸다. 황색, 백색 표적은 모두 20대가, 청색 표적에는 19대가 적중되자 청색의 좌군 대장 번기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왕전이 다시 깃발을 펄럭이며 다른 시범을 지시하였다. 이어진 시범은 깃발 뺏기 시합으로, 삼군에서 각기 건장한 병사 백여 명이 나와 30여 명은 자기 군의 상징 깃발이 펄럭이는 통나무를 붙잡고, 나머지 60여 명은 두 패로 나뉘어 상대방의 깃발을 탈취하는 경기였다. 북소리가 울리자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상대방의 깃발을 뺏기 위해 성난 말처럼 초원을 뛰어다녔다. 빼앗으려는 무리와 뺏기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치열하게 몸싸움을 벌였다. 활쏘기에서 꼴찌를 한 좌군의 번기는 고함을 지르며 부하들을 독려했지만 결과는 활쏘기 때와 마찬가지로 중군이 제일 먼저 좌군의 깃발을 빼앗고, 곧이어 우군의 깃발마저 탈취했다. 이에 번기는 매우 분개하면서도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어서 기마군의 깃발 뺏기 시합이 벌어졌는데, 삼군에서 각기 네 명씩 출전하는 경기로 아주 거칠고 위험했다. 계속 수세에 몰리던 좌군의 번기가 직접 시합에 참가할 뜻을 밝혔다. 이 경기는 북소리가 울리면 출전한 열두 명의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6백 보 앞에 펄럭이는 적색 깃발을 먼저 빼앗아 되돌아오는 시합이었다.

"둥둥둥!"

마침내 북소리가 울리자 열두 필의 말이 쏜살같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제일 앞서 나아가던 백색 기병의 뒤를 바싹 쫓아가던 황색 기병이 말에서 몸을 일으켜 발을 살짝 걸자 백색 기병은 그만 말과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황색 기병의 묘기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번기가 이 틈을 타고 황색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린 뒤 선두로 나서서는 두 필의 말을 번갈아 타면서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는 기병들이 오른쪽에서 공격하면 번기는 얼른 왼쪽 말로 자리를 옮기고, 왼쪽으로 공격하면 오른쪽 말로 옮기며 줄곧 선두를 지켰다. 그렇게 해서 번기가 적색 깃발 앞에 십여 보 정도 다가갔을 때 갑자기 뒤에서 황색 기병이 채찍을 꺼내 깃발을 빼앗았다. 하지만 번기의 손이 더욱 빨랐다. 채찍 끝이 깃발을 낚아채는 순간 번기는 재빨리 그것을 가로채 말머리를 돌렸다. 이런 광경에 좌군 병사들이 열광하며 소리쳤다.

"번표자(樊豹子;번씨 성을 가진 표범)! 번표자!"

영정도 번기의 묘기에 혀를 내둘렀다.

"번 장군, 아주 장해! 정말 멋지군!"

번기는 좌군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했다는 우쭐함에 어깨를 들썩거렸다. 왕전이 그런 번기를 묵묵히 바라보았고, 왕료는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영정에게 말했다.

"일군의 대장이 자존심에 좌우되다니, 질서를 문란케 한 죄를 물어 마땅히 처형하심이 옳사옵니다."

왕료의 주청에 영정과 대신들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영정은 갈수록 자신의 기분과 어긋난 말만 하는 왕료가 괘씸해 크게 화를 냈다.

"용맹하기로 삼군의 으뜸인 맹장을 어찌하여 처형하라는 것이오?"

왕료 또한 비분강개하여 영정 못지않게 큰소리를 쳤다.

"틈이 크면 높은 담도 쉽게 무너지는 법이옵니다. 실제로 전투에서는 한 명의 맹장이 필요한 게 아니옵니다. 전군이 일치단결하여 한 마음이 되었을 때 승리가 보장되는 법, 병사 한 명이 군령을 어기면 나아가 하나의 오가 군령을 어기고 이어서 십, (;백 명의 대오)이 군령을 어기게 될 것이옵니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수만의 군사를 통솔하는 장수가 군령을 위반했을 때 전군의 패망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옵니다. 소신이 주청하는 징벌의 요체는 군기를 엄정히 수립하고, 후일 전투에서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서일 뿐이옵니다. 좌군의 장수는 자존심에 얽매어 필부의 용기를 선보였으니 마땅히 질서를 어지럽힌 죄를 물어 일벌백계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번기는 왕료의 가혹한 비판에 아무 소리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영정이 손을 내저으며 번기를 물러나게 하였다. 곁에서 왕료의 말을 듣던 대장군 왕전은 그의 배포와 식견에 경외심이 들었다. 중군의 몽염과 우군의 양단화도 왕료의 말에 탄복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영정은 여러 장수들이 왕료의 말에 수긍하는 자세를 보이자 왕료에게 어떻게 병사를 훈련시켜야 하는지 자문했다. 왕료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 장군들이 연습을 실전처럼 하고 있지만 천하의 수많은 정예병과 비교하면 세 가지 부족함이 있사옵니다. 첫째는 행오(行伍)의 표식이 불분명하여 지휘와 전투의 투입에 어려움이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몽염이 다급하게 물었다.

"폐하, 제일 먼저 25명을 1졸로 하는 군제를 펴시옵소서. 1오는 머리에 청색 두건을, 2오는 이마에 적색 띠를, 3오는 가슴에 황색 표식을, 4오는 복부에 백색 표식을, 5오는 허리에 흑색 표식을 하고 병사에게 각각 고유 번호를 붙여 누가 어떤 임무를 맡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하옵니다. 같은 병사라 할지라도 명확하게 식별을 해야 뒤에 상벌을 분명히 가릴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훌륭합니다! 병사들 개개인마다 표식을 하면 감히 누가 질서를 어지럽히겠습니까?"

몽염이 감탄하여 소리쳤다.

"두번째는 주둔시 군영의 군기가 엄정해야 합니다. 막사와 막사 사이에 순찰 도는 병사가 있기는 하지만 서로를 알아보는 아무런 명패(名牌)도 없고, 또한 영 내를 돌아다니는 병사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군영은 사람의 심장과도 같고 나라의 도성과도 같은 곳입니다. 군령(軍令)이나 명패가 없으면 누가 어느 대오에 속하는지 알 수 없고, 적의 간자가 들어와도 판별할 수가 없습니다."

왕전은 군영에 대한 왕료의 식견에 탄복했다.

"야전에서 생활해 온 우리도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하시니 과연 대단하십니다."

장군들의 감탄에 왕료는 계속 말을 이었다.

"셋째,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에는 마땅히 오, , 졸을 단위로 시작하여, 마지막에 군 전체의 훈련에 이르러야 합니다. 즉 오의 훈련이 끝나면 십, 졸로 확대하고 이를 백부장에게 넘겨 직접 지휘하도록 조치하십시오. , , 졸의 지휘 능력이 발휘되어야 군의 전력이 상승할 것입니다. 아울러 모든 막사 앞에 막대기를 세워 병사들이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시간을 잘못 판단했다가는 전군이 몰살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지요."

왕전은 왕료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는 이제까지 보아온 어떤 병서에서도 왕료의 견해와 같은 내용을 본 적이 없었다. 왕료를 만나서야 비로소 왕전은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왕전은 곧바로 영정에게 주청을 하였다.

"대왕마마, 소신은 용렬하여 진군을 조련하는 데 역부족이오니 현사에게 이 일을 맡기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영정의 곁에서 넋이 나간 듯 왕료의 말을 듣고 있던 등승은 왕전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난날 할아버지 이대퇴에게 들었던 대오의 방법과 포진(布陣)에 관한 이야기가 그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왕료의 말을 들으니 그 모든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그 후 등승은 왕료를 자주 찾아가 병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구하곤 하였다.

영정은 감탄 어린 대신들의 표정과 왕전의 간곡한 주청에 아주 흡족한 마음이 되었다.

"왕 장군, 그렇게 겸양하실 필요가 없소이다. 여기 왕 선생은 이미 과인이 마음 속으로 국위(國尉)로 삼기로 결정하였소. 길일을 택하여 임명식을 거행하겠으니 모두들 유념하도록 하시오."

영정의 말에 왕전은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했고 왕료 또한 뜻밖의 임명에 허리를 굽히고 예를 올렸다.

"대왕마마의 은혜를 받아 대임을 맡았으니 있는 힘을 다하여 보필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이사는 왕료가 영정의 신임을 크게 얻자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왕료는 진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삼공(三公)의 관직을 받았는데 나는 도대체 무언가? 대왕께서 한비 사형의 학설에 빠져 있으니 차라리 그를 불러와 왕료를 견제하는 게 낫겠다.'

이렇게 마음먹은 이사는 기회를 봐서 영정에게 한비의 초청을 거론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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