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장미여관으로!
겁(怯)
경복궁
교양
권태
기다리겠어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나는 위선에 맞서는 투사
나도 못생겼지만
낙원으로의 회귀
내가 쓸 자서전에는
내가 죽은 뒤에는
늙는 것의 서러움
늙어가는 노래
다시 비
당세풍(當世風)의 결혼(結婚)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
몰입(沒入)
배꼽에
벽
별
별것도 아닌 인생이
비밀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빨가벗기
사랑
사랑에 대하여
사랑이여
사치
삶에 지치다
삶의 슬픔
석가(釋迦)
소낙비
신(神)
알 수 없어요
야하디야하다
엄마와 시녀
업(業)
연극이 끝난 뒤
영구차와 개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가
외로운 우산
우리들은 포플러
우울한 날의 정사(情死)
원반던지기의 인상(印象)
유혹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이별
이 사랑
자살자(自殺者)를 위하여
자유(自由)에
자유를 잃어 차라리 늠름한 어느 노예에게
장자사(莊子死)
적(敵)
정액 아이스케이크
중년의 우울
첫 입맞춤
피아노
황제와 나
효도(孝道)에
7월 장마
가자, 장미여관으로!
마광수
만나서 이빨만 까기는 싫어
점잖은 척 뜸들이며 썰풀기는 더욱 싫어
러브 이스 터치
러브 이즈 휠링
가자, 장미여관으로!
화사한 레스토랑에서 어색하게 쌍칼 놀리긴 싫어
없는 돈에 콜택시, 의젓한 드라이브는 싫어
사랑은 순간으로 와서 영원이 되는 것
난 말 없는 보디 랭귀지가 제일 좋아
가자, 장미여관으로!
철학, 인생, 종교가 어쩌구저쩌구
세계의 운명이 자기 운명인 양 걱정하는 체 주절주절
커피는 초이스 심포니는 카라얀
나는 뽀뽀하고 싶어 죽겠는데, 오 그녀는 토론만 하자고 하네
가자, 장미여관으로!
블루스도 싫어 디스코는 더욱 싫어
난 네 발냄새를 맡고 싶어, 그 고린내에 취하고 싶어
네 치렁치렁 긴 머리를 빗질해 주고도 싶어
네 뾰족한 손톱마다 색색 가지 매니큐어를 발라 주고도 싶어
가자, 장미여관으로!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휠링
겁(怯)
마광수
일어나라 일어나라
이제 곧 시장터의 악다구니가 다가온다
잠시 조용해 보였던 도회의 새벽은 지나고
광기처럼 순수했던 철부지 청춘도 지나고
처세술이 둥둥 떠다니는 명절날의 하늘같은
도시의 시끄러운 정오가 달려든다
하루 24시간, 우리들은 지탱해 주는 것은
다름아닌 '생활'이다.
네 삼촌의 토정비결 같은
네 사촌의 토정비결 같은
네 사돈의 팔촌의 토정비결 같은, 그런 생활이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네 에미를 위해 네 애비를 위해 효도를 위해
마누라를 위해 자식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민족과 역사를 위해
도덕을 위해 윤리를 위해 상식을 위해
정신없이 일어나라 그리고 뛰어라
저녁의 한줌 안식을 위해, 평화를 위해
죽음을 잊어버리기 위해
너를 잃어버리기 위해
경복궁
마광수
경복궁 구석구석에는
얼마나 많은 정액과 애액이 묻어 있을까
왕들의 음탕한 욕정은
산삼, 용봉탕, 살모사, 녹용, 해구신 등
백성들의 피땀을 빨아
정성들여 키운 정력에서 나왔겠지
어린 궁녀들의 아랫도리를 물들이고도
백성들의 피는 넘쳐 흘러
아직도 경복궁 주춧돌 사이로 흘러내린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수없이 강산도 바뀌어
왕들은 죽어버려 백골조차 없지만
그 어린 궁녀들도 외로이 늙어죽어
불쌍한 모습조차 보기 어렵지만
경복궁 근정전에서는
아직도 정액 냄새가 난다 피 냄새가 난다
조선조 이씨 왕족 놈들의
그 탐욕의 냄새, 그 음흉한 냄새가 난다
교양
마광수
난 요즘 교양을 고양(高揚) 중이야
그래서 고상한 이문열 소설도 읽어보고
결벽증 작가 앙드레 지드의 소설도 보지
그래도 난 역시 야한 체질인가봐
도무지 교양이 고양되지 않고
내 성기만 신경질을 부리며
나를 들들 볶아대더군
이건 아니라고
그런 건 네게 안 맞는다고
그래도 난 역시 교양을 고양해야 돼
더 이상 천골(賤骨) 소릴 듣고 싶진 않으니까
이젠 베토벤의 교향곡도 들어봐야지
라파엘의 성화(聖畵)들도 쳐다봐야지
교양을 고양해야만
온통 내숭덩어리인 여자를 꼬실 수 있으니까
여자와 감질나는 섹스라도 나눌 수 있으니까
또 이 좆 같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권태
마광수
아프지 않으면 권태롭다
전쟁이 아니면 평화
가 아니라 권태다
고생 끝에 낙
이 아니라 권태다
사랑 끝에 결혼
이 아니라 권태다
오르가즘은 없다
기다리겠어요
마광수
기다리겠어요
제 마음 빈틈없이 언제나
낯설은 지붕 밑에서 아무 말 없이
기다리겠어요
불 꺼진 빌딩 앞에 언제나
남모르게 흘러 젖는 눈물을 씻으면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돌아오는 그날까지 나홀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마광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자처럼
적(敵)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
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 안고 싶다
현실적으로
진짜 현실적으로
나는 위선에 맞서는 투사
마광수
‘노동 해방’을 위한 투사
‘군사 독재’에 항거하는 투사 등
우리나라엔 많은 투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위선’에 맞서는 투사는
별로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몰랐다
나는 ‘위선’에 맞서는 투사
‘허위의식’과 ‘중성’에 맞서는 투사
비록 그것이 안 먹혀들 줄 알면서도
나도 못생겼지만
마광수
못생긴 여자가 여권(女權) 운동하는 것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그 여자가 남자에 대해 적개심을 표시할 땐
더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못생긴 남자가 윤리, 도덕 부르짖으며 퇴폐문화 척결 운동하는 것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그 남자가 성(性) 자체에 대해 적개심을 표시할 땐
더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못생긴 여자들과 못생긴 남자들을 한데 모아
자기네들끼리 남녀평등하고 도덕 재무장하고
고상한 정신적 사랑만 하고 퇴폐문화 없애고
야한 여자 야한 남자에 대해 실컷 성토하게 하면
그것 참 가관일 거야
그것 참 재미있을 거야
그것 참 슬픈 풍경일 거야
낙원으로의 회귀
마광수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성기를 가린
나무 잎사귀를 과감하게
떼어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시금 파라다이스로
되돌아갈 수 있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육체적 쾌락욕구로만 가득 찼던
어린아이 시절의 야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을 때
정직한 본능으로 헛된 도덕을
제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아름다워질 수 있어
행복해질 수 있어
내가 쓸 자서전에는
마광수
내가 쓸 자서전에는
누구의 자서전처럼 고생 끝의
성공 자랑으로 가득 차 있지도 않고
누구의 자서전처럼 똥 안 누고
섹스도 안 할 것 같은 사람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내 자서전에서 독자들은
너무나 고상한 지식인 사회에
섞여 살며 힘들어했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슬퍼하는 사람과
으리으리한 교회 앞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
가슴 먹먹해 하는 사람과
사람은 누구나 관능적으로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으로 너무나 불이익을 당했기에
과거의 집필 생활을 후회하는 사람도
독자들은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쓸 자서전에는
나의 글쓰기는 이랬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장면이 담겨 있을 것이다
우선 손톱 긴 여자가 좋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그리고 야한 여자들은
못 배운 여자들이거나 방탕 끝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여자여야 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라는 즐겁지 않았어야 했다고
권선징악으로 끝을 맺는
소설 속 여자여야 했다고
나이 고된 삶 속에서
그나마 한 줌 상상적 휴식이 되어주었던
그녀와 나의 잠자리가
타락이었다고 그래서 반성한다고
내가 죽은 뒤에는
마광수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되었지만
윤동주처럼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되긴 어렵겠고
아예 잊혀 버리고 말든지
아니면 조롱 섞인 비아냥 받으며
변태, 색마, 미친 말 등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칭송을 받든 욕을 얻어먹든
죽어 없어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저 나는 윤회하지 않고
꺼져버리기를 바랄 뿐
늙는 것의 서러움
마광수
어렸을 때 버스를 타면 길가의 집들이 지나가고
버스는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어렸을 때 물가에 서면 물은 가만히 있고
내가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 버스를 타면 집들은 가만히 있고
나만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물가에 서면 나는 가만히 있고
강물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늙어가는 노래
마광수
내 나이 아직 어렸을 때에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지
어른만 되면 모든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러나 나는 지금 꿈을 이룰 수 없네
나는 이미 어른이기에
한숨 푸른 싹으로 올라
한숨 푸른 빛으로 피어났던
애닲고 안쓰러운 나의 희망이여
어쨌든 내겐 아직 희망이 필요하지만
이 얄미운 목숨을 지탱하기 위한
멍텅구리 같은 희망이라도 필요하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을 이룰 수 없네
나는 이제 자라나는 나무가 아니라
점점 죽어가는 나무이기에
나는 벌써 어른이기에
뒤섞인 나날 속에 지쳐 누운 추억의 그림자
초라한 기억 속에 안간힘 쓰며 꿈틀대는
이 사랑, 이 욕망, 이 본능
그러나 나는 사랑을 이룰 수 없네
아, 나는 어른이기에
절망보다 오히려 더 두려운 그 희망을 믿기엔
이미 너무나 똑똑해져 버린
서글픈 어른이기에
다시 비
마광수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안 쓴 우리는
사랑 속에 흠뻑
젖어있다.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같이 쓴 우리는
권태 안에 흠뻑
갇혀있다.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따로 쓴 우리는
세월 속에 흠뻑
지쳐있다.
당세풍(當世風)의 결혼(結婚)
마광수
여러 해 동안 내 마음은 흔들려왔다
겁많은 희망(希望)도, 옹졸한 절망(絶望)도 만나왔다
한껏 명목(名目)뿐인 죽음과도 만나왔다
이젠 힘주어 시끄럽게 짖어도 보겠다
허우적 허우적 신나게 춤도 추어보겠다
오묘한 생활(生活)의 섭리(攝理)도, 밤의 진리(眞理)도 만나보겠다
안도(安堵)도 단란(團欒)도 만나보겠다
이젠 사치스런 반항(反抗)도 폭음(暴飮)도 없다
대견스런 사주팔자(四柱八字),
과로(過勞)한 아부(阿附)의 순간들만 있다
곧 쓰러지게 되리라
모든 습관(習慣)처럼, 본능(本能)처럼
잠깐은 신났던 저번(這番)의 사랑처럼
행복(幸福)으로 빛나던
짧은 예감(豫感)처럼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
마광수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은
이승만 때도
박정희 때도
전두환 때도
노태우 때도
김영삼 때도
김대중 때도
노무현 때도
언제나 출세한다
언제나 권력으로부터 환영 받는다
박정희의 ‘재건 국민 운동’
전두환의 ‘삼청 교육대’
김영삼의 ‘도덕 독재’ 등등
통치자들은 언제나 도덕을 곁에 끼고 정치를 한다.
내가 ‘즐거운 사라’가 야하다고 잡혀갈 때
「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늘어난다, 잘 잡아갔다 」
고 떠들어대던
어느 서울대학 교수는
전두환 때도
노태우 때도
김영삼 때도
김대중 때도
노무현 때도
언제나 여러 관변단체 장(長)을 지내며
출세했다
그는 지금 서울의 어느 대학
총장까지 하고 있다
몰입(沒入)
마광수
저는 당신의 페XX보다
긴 손가락이 더 좋아요
스멀스멀 간지럽게 기어들어오는
당신의 길디긴 손가락
그 손끝이 제 사타구니를 스쳐갈 때면
저는 황홀경 속으로 빠져들어요
어서 더 세게 손가락을 박아 넣어줘요
아프지만 그 쾌감이 저는 좋아요
보X 전체가 찢겨도 좋아요
피가 나와도 좋아요
저는 이미 당신의 것
저는 당신에게 섹스를 저당잡혔어요
아아아… 으으음… 정말 기분 좋아요
자궁 깊은 곳까지 손가락을 밀어 넣어줘요
아니 더 큰 걸로, 당신의 주먹으로
제 자궁 속을 마음껏 휘저어줘요
당신의 머리 전체를
당신의 몸 전체를 집어 넣어줘요
붉은 피가 낭자하게 흐르도록
그래서 제가 죽도록……
벽
마광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쌓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쌓는다
때로는 언어(言語)로, 때로는 의상(衣裳)으로
때로는 화장(化粧)으로, 때로는 윤리(倫理)로
때로는 사랑으로
튼튼한, 튼튼한 벽을 쌓는다
결국 허물 수 없는 튼튼한 벽이 생긴다
벽이 튼튼한 만큼 사람들의 마음은
허물어질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도 전에 다시 벽을 쌓는다
혹은 성욕(性慾)으로, 혹은 자유(自由)로
다시 한번 긴 여름철을 위하여 벽을 쌓는다
여름이 가기도 전에 가을의 벽이 보인다
…… 또 쌓는다
배꼽에
마광수
아담과 이브가 이루어 논 죄악(罪惡)의 자죽,
얼마나 넌 징그럽게 엉켜있느냐
사람의 혁명(革命)이냐 배암의 혁명(革命)이냐 하늘의 혁명(革命)이냐
사막같이 허허(虛虛)한 가슴 위에서
너는 재치 있게 솟아난 한줄기 샘물,
하기사 너로 하여 비이너스는 더욱 완전(完全)해졌으리라
네 속 깊숙이 새어 나오는 붉은 태아(胎兒)의 신음 소리,
지금껏 스미는 그 처절(悽絶)한 살내음,
아아 억만년(億萬年) 우리 업보(業報)를 이루게 한 것.
신비스런 저주(詛呪)의 샘, 생명(生命)의 샘, 고통(苦痛)의 샘,
에덴에서 아담을 탈출(脫出)시킨 자유(自由)의 자죽!
아름다운 속박(束縛)이냐 소란스런 희망(希望)이냐
푸른 핏줄 엉켜붙어 한층 슬프게 요요(夭夭)한
- 너 외로운 배꼽이여.
별
마광수
이 세상 모든
괴로워하는 이의 숨결까지
다 들리듯
고요한 하늘에선
밤마다
별들이 진다
들어보라
멀리 외진 곳에서 누군가
그대의 아픔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
지는 별들이 더욱
가볍게 느껴지고
오늘
그대의 수심(愁心)이
수많은 별들로 하여
더욱
빛난다.
별것도 아닌 인생이
마광수
별것도 아닌 인생이
이렇게 힘들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사랑이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결혼이
이렇게 스트레스를 줄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이혼이
이렇게 복잡할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시가
이렇게 수다스러울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똥이
이렇게 안 나올 수가 없네
비밀
마광수
엿보는 것은 아름답다
손톱을 아주 길게 기른 여인이 긴 대나무 젓가락을 불편하게 쥐고
음식물을 위태롭게 집어 올릴 때
젓가락 사이로 살짝살짝 엿보이는 비수처럼 뾰족한 핏빛 매니큐어,
카드놀이를 할 때 카드 사이로 스쳐가는 여인의 얼굴,
부채를 손에 쥐고 있는 여자,
(이때 부채가 투명한 것일수록, 즉 차폐물(遮蔽物)이 무력하면 무력할수록 여자는 더 섹시하게 보인다)
커다란 유리잔도 효과적인 차폐물,
핑크빛 조명 아래서 커다란 와인 글라스를 통해 엿보이는 여인의 흰 가슴은 아름답다
(투명한 유리잔은 깨지기 쉽다는, 또는 깨어지기를 원하는, 여인의 상징적 신호이다)
사람을 차폐물로 써도 모든 것을 훨씬 아름답게 한다
한 사람을 차폐물로 이용하면서
또 다른 한 사람과 다소 안쓰럽고 감질나는 교제를 할 때
즉 삼각관계 속에서 엿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한결 매력적으로 보인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여자도 아름답다
선글라스를 쓴 여자도 아름답다
선글라스를 쓴 여인은 다만 자기의 시선을 남들이 엿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오직 엿보여진다는 것만으로
스스로의 알몸뚱이조차 상상적으로 노출시킬 수 있는 쾌감이 있다
양복 깃을 올려 목과 얼굴을 살짝 가린 여자는 아름답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이마와 두 뺨을 가린 여자도 아름답다
(업 스타일의 숏커트로 얼굴을 온통 드러낸 여자는 징그럽다. 무섭다. 너무 비밀이 없다. 엿보이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당당해 보이긴 하지만 관능적이지는 않다)
나는 엿보이고 싶다
나는 엿보고도 싶다
비밀은 언제나 아름답다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
마광수
새가 한 마리 하늘로 올라간다.
저 새를 쏘자, 쏘자.
새는 땅으로 떨어진다.
새는 검은 빛.
총탄은 단 한 발의 소비.
육식성 동물들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나무들은 언제나 하늘로 오르려 하는 습성.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마광수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팬티도 브래지어도 필요 없다
겉옷은 더욱 더 필요 없다
조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제기랄 놈의 성씨(姓氏)
우라질 놈의 가문, 학벌, 직업
벌써 좆돼버린 너와 나의 과거
다 필요 없다 사랑 하나면
다 필요 없다 섹스 하나면
이 밤, 그대여 빨가벗고 뛰어서 오라
빨가벗기
마광수
빨가벗고 살고 싶군. 모든 것 훨훨훨 벗어 던지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군
자유도 싫군, 희망도 싫군, 입는 것은 다 싫군
언젠가 팔자에 없는 호텔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
무궁화가 다섯 개나 붙은 일류 호텔서 자게 되었을 때
난방장치가 너무 잘되어, 난 결국
홀딱 벗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영하 15도가 넘는 겨울인데도 춥지가 않았어
빨가벗고도 덥기만 했어
오들오들 떨면서 지나가는 거리의 사람들이
참 재미있었어
은근히 불쌍하게 보였어
참 그렇군, 옛날 궁중에선 궁녀들에게
목욕도 못 하게 했다지, 빨가벗으면 성욕이 일어난다고
평생 옷을 못 벗게 했다지
빨가벗고 목욕하는 것은
왕이 예뻐하는 여자들의 특권이었다지
그래그래, 빨가벗으면 확실히 본능이 꿈틀거려
부자연스럽지도 않아, 신비스럽게 자유로워
내 빈약한 육체조차도 대견스러워 보여 날아갈 것 같아
하지만 내 집은 너무 춥지
빨가벗고 살기엔 너무 추워
이불속에 들어가도 추워, 북향 한옥이라 외풍이 많아
혼자서라도 빨가벗고 있고 싶어도
벗을 수가 없어, 감기 걸리기 딱 맞아
아무튼 빨가벗고 싶군, 그래서 홀가분해지고 싶군
상식도 역사도 사랑도 벗어 버리고 싶군
그러려면 집이 좋아야 해 난방장치가 최고라야 해
돈이 있어야 해
돈을 벌어야겠군 빨가벗고 살고 싶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군
우선은 있는 옷 없는 옷 죄다 줏어 입고
평화도 윤리도 모두 줏어 입고
돈을 벌어야겠군
사랑
마광수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했는데도
내 가슴 속에는 네 몸뚱아리만이 남았다
내 빈약한 육체 속에서 울며 보채 대는 이 그리움의 정체는 뭐냐
네 영혼을 사랑한다고, 네 마음을 사랑한다고
하늘 향해 수만 번 맹세를 해도
네 곁에 앉으면 내 마음보다 고놈이 먼저 안달이다
수음과는 이제 자동적으로 친숙해진 나에게
너는 대체 무엇 때문에 내려왔느냐
어째서 모든 거리마다에서
너는 내게 고독으로 다가온단 말이냐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했는데도
내 가슴속에는 네 몸뚱아리만이 남았다
끊으려 해도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이 사랑, 이 욕정,
이 괴상한 설레임의 정체는 뭐냐
사랑에 대하여
마광수
사랑해서 섹스하게 되는 게 아니라
섹스해서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대여, 나랑 어서 섹스해줘요
그럼 냉정했던 당신도
나를 결국 사랑하게 될 거예요
딱 한 번만 해 보시라니까요
내가 당신의 결벽증을 고쳐드리겠어요
내 긴 혓바닥으로
내 긴 손가락으로
사랑은 섹스
그리움은 섹스에 배고플 때 나타나는 증상
정신적 사랑도 섹스 때문에 생겨나는 변태심리
님이여, 내 사랑이여
나랑 어서 섹스해줘요
그래서 우리 마음껏 사랑을 나누어 봐요
사랑이여
마광수
당신이 바닷가의 거센 파도(波濤)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저는 바닷가의 작은 바위. 당신은 사나우리만치 강한 사랑으로 저를 압도하여 옵니다. 그러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매일매일 당신의 사랑 속에 빠져들어 가 버려요. 당신은 언제나 웃으며 춤추며 저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휘감겨 와요. 저는 당신의 품속에 얼굴을 묻고 행복으로 흐느끼지요. 그러나 저는 그토록 큰 당신의 사랑에 내 작은 몸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 몸은 당신의 품 안에서 차츰 깎이어 작게 허물어져 가요.……그러면서 그러면서 저는 늙어요.
세월이 아주아주 흘러……제가 당신의 사랑을 감당 못하리만큼 몸이 깎이어 없어져 버린다면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제가 당신의 사랑을 마음껏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실거예요. 그리고 저보다 더 크고 더 억센 바위를 찾아,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실 거예요. 그러나 저는 이미 몸이 부서져 흩어져버려, 당신을 붙잡을 수가 없어요. 저는 단지 힘있게 출렁거렸던 당신의 사랑을 되새기며 바다 위를 떠다니겠지요. 그러다가……전 아예 죽어 물거품처럼 사라질 뿐이구요……잊혀져 버릴 뿐이구요.
사치
마광수
지난번, 집중 폭우가
쏟아지던 날
지붕이 새서 천장으로 빗물이
뚝 뚝
떨어졌다.
나는 떨어지는 비를
대야에 받았다.
그때 갑자기 어릴 때 기억이 떠올라
대야 위에 종이배를 띄우고 싶어졌다.
삶에 지치다
마광수
내 뱃속 창자를 뽑아내어
그것으로 긴 채찍을 만들고
그 채찍으로 나를 실컷 때리게 하고 싶다
또는 내가 아예 내 창자로
긴 밧줄을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싶다
밧줄을 달아맬 곳은
교회의 십자가가 좋겠지
예수의 바보 같은 신앙과 헛된 약속들
그의 무기력한 마조히즘과
허망한 내세來世 동경을 조롱하며
나는 천천히, 천천히 죽어가겠지
그래도 행복하게 죽어가겠지
삶의 슬픔
마광수
옛날에 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소년은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옛날에 한 청년이 살았습니다
청년은
내일이 오늘만큼은 되리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옛날에 한 중년 남자가 살았습니다
중년 남자는
내일이 오늘만큼 못 될까 봐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옛날에 한 노인이 살았습니다
노인은
오늘이 어제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석가(釋迦)
마광수
한껏 `말'밖에, 다른 무엇이 더 있겠느냐
내 차라리 한낱 벙어리였으면 좋을 것을.
인생(人生) 팔십(八十)은 너무도 짧아, 내 이제 허무(虛無)히 죽어가나니
뉘 있어 나를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리?
수만(數萬) 마디 설법(說法)들이 지금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미처 `중생(衆生)'을 죽이지 못하였다.
`말'도 죽이지를 못하였다.
선(善)도 악(惡)도 미(美)도 추(醜)도 죽이지를 못하였다.
늙고 지쳐 병(病)들은 이 몸, 껍질만 남은 더러운 몸뚱아리를
미처 죽이지 못하였다.
아아, 도(道)를 죽이지 못하였다.
그대들은 먼저 나를 죽여라,
시퍼런 비수로 내 가슴을 찌르라.
희망(希望)을 죽여라 해탈(解脫)을 죽여라
우리들은 새로운 자유(自由)를 만들어낼 순 없다.
다만 자유(自由)가 아닌 것들을 죽여야 할 뿐
보이는 대로 보이는 대로 죽여 없애야 할 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나한(羅漢)을 만나면 나한(羅漢)을 죽이라
보살(菩薩)을 만나면 보살(菩薩)를 죽이라
네 부모(父母)를 죽이라.
친척과 권속을 죽이라, 그리고
사랑을 죽이라,
너를 죽이라!
차라리 벙어리라면 얼마나 좋으랴
차라리 백치(白痴)라면 얼마나 좋으랴
날카로운 식칼 아래, 싱싱한 펄떡임으로
핏방울 흩뿌려, 힘있게 죽어가는 생선(生鮮) 토막이라면,
- 내 얼마나 좋으랴.
소낙비
마광수
소낙비 소리는
물이 자살하는 소리
나도 소낙비 속으로 뛰어들어
같이 자살하고 싶다
신(神)
마광수
1
신(神)이 드디어 나타났다는 소문(所聞)이 들렸다.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신(神)을 구경하고 있었다. 신(神)은 거리 한복판에 드러누워 있었다.
신(神)의 모습은 아주 괴상했다. 얼굴엔 눈이 다섯 개, 코가 세 개나 달려 있었다. 입은 사발만큼 크고, 손가락은 양쪽을 합쳐 스무 개나 되었다. 온몸엔 금빛나는 털이 덥혀 있었다.
빽빽히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의 여기저기에서 감탄하는 소리들이 새어나왔다. ꡒ어쩌면 저렇게 우람한 몸집을 하고 있을까?ꡓ '털이 저토록 금빛일 수가 있어?ꡓ ꡒ저 입을 봐, 얼마나 늠름해 보여?'
그때 신(神)이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여섯 개의 콧구멍과 커다란 입에서는 콧물과 더러운 가래가 한꺼번에 튀어나와 사람들에게 튀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에그머니, 이게 웬일이야?'하고 소리를 지르며 냅다 우르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알 수 없어요
마광수
만약 사랑이
슬픈 것이라면
왜 사랑의 고통은
달콤한 것입니까?
만약 사랑이
달콤한 것이라면
왜 사랑은 그토록
잔인한 것입니까?
만약 사랑이
잔인한 것이라면
왜 사람들은 그토록
사랑을 원하는 것입니까?
야하디야하다
마광수
양화진 나루터 위에 붉게 타는 저녁놀
- 야하디야하다
날개 벌린 숫공작의 깃털 빛깔, 그 섬뜩한 관능미
- 야하디야하다
요염 · 섹시 · 음탕한 그녀의 그로테스크하게 휘어진 긴 손톱
- 야하디야하다
마약처럼 우리의 고독 속으로 파고드는 아침 안개
- 야하디야하다
아라비아 여인들의 코걸리, 배찌, 발가락찌, 그리고 배꼽춤
- 야하디야하다
산 채로 저며져 있는 생선회, 또는 살아 있는 낙지
- 야하디야하다
달 뜨는 해운대의 여름밤, 별 뜨는 설악산의 겨울밤
- 야하디야하다
뽀족하게 기른 손톱 끝으로 체리를 찍어 먹는 여자 또는 그 여자의 긴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슬림 형 담배
- 야하디야하다
가운데가 터진 미니스커트 사이로 언뜻언뜻 엿보이는 그녀의 사타구니
- 야하디야하다
송곳같이 뾰족한 하이힐 굽에 정확하게 짓눌려 내장파열로 죽은 바퀴벌레
- 야하디야하다
인도에서 제일 야한 사람의 이름
- 야하디야하다
엄마와 시녀
마광수
나는 그녀가 음식을 입 안에 머금어
내게 입으로 먹여줄 때가 제일 기분 좋아
마치 어린애가 된 기분
물론 그녀는 나의 엄마가 되고…
꼭 자궁 속 같이 음습하게 생긴 그녀의 입
하지만 포근하고 편안한 그곳
나의 자궁 회귀본능을 충족시켜주는 그녀
나를 위해 그녀는 음식을 아예 씹어서 먹여주지
아니, 나는 황제가 될 수도 있어
시녀가 입으로 내게 음식을 먹여주는 거야
나는 어린애이자 황제
그녀는 엄마이자 시녀
업(業)
마광수
개를 한 마리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식 낳고 싶은 생각이 더 없어져 버렸다
기르고 싶어서 기르지도 않은 개
어쩌다 굴러들어온 개 한 마리를 향해 쏟는
이 정성, 이 사랑이 나는 싫다.
그러나 개는 더욱 예뻐만 보이고 그지없이 사랑스럽다
계속 솟구쳐 나오는 이 동정, 이 애착은 뭐냐
한 생명에 대한 이 집착은 뭐냐
개 한 마리에 쏟는 사랑이 이리도 큰데
내 피를 타고난 자식에겐 얼마나 더할까
그 관계, 그 인연에 대한 연연함으로 하여
한 목숨을 내질러 논 죄로 하여
나는 또 얼마나 평범하게 늙어갈 것인가
하루 종일 나만을 기다리며 권태롭게 지내던 개가
어쩌다 집 안의 쥐라도 잡는 스포츠를 벌이면 나는 기뻐진다
내 개가 심심함을 달랠 것 같아서 기뻐진다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불쌍한 쥐새끼보다도
나는 그 개가 내 개이기 때문에, 어쨌든
나와 인연을 맺은 생명이기 때문에
더 사랑스럽다
하긴 소가 제일 불쌍한 짐승이라지만
내 개에게 쇠고기라도 줄 수 있는 날은 참 기쁘다
그러니 이 사랑, 이 애착이 내 자식 새끼에겐 오죽 더해질까
자식은 낳지 말아야지, 자신 없는 다짐일지는 모르지만
정말 자식은 낳지 말아야지
모든 사랑, 모든 인연, 모든 관계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되도록
이를 악물어 봐야지
적어도, 나 때문에, 내 성욕 때문에
내 고독 때문에, 내 무료함 때문에
한 생명을 이 땅 위에 떨어뜨려 놓지는 말아야지
연극이 끝난 뒤
마광수
흐르고 있네요, 우리의 기억들이
강물처럼, 밀물처럼, 우리의 아픔들이.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 빛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아름다워요.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나요,
잊혀질 날들을 두려워하나요.
아, 어차피 인생은 연극인 것을.
우리의 그 마지막 대사를 다시 한번 외워 보아요
`그래, 정말 보람이 있었수?`*
웃음처럼 통곡할까요,
통곡처럼 웃어볼까요.
모든 것은 꿈, 모든 것은 안개 속 꼭두각시 놀이.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대사는 이걸로 하기로 해요.
`아무렴, 보람이 있었구말구.`
눈을 감으면
잠깐씩 빛나던 무대 위의 조명 속에서
지금도 꿈꿀 수 있어요.
지금도 사랑할 수 있어요.
모든 것이 흘러 가는 이 시간 속에서도
빛 바랜 언어들이 쌓여질 수 있다면
무대 위의 외로운 그림자들이
다시금 우리 가슴에 내려앉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할 수 있어요.
자, 웃어요
언제나처럼 술잔을 들며
아직은 즐거운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보아요.
* 제임스 리의 희곡 <The Career (배우 지망) >의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대사. 한 무명 연극배우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루는 내용이다. 홍익대 교수 시절 나는 홍익극연구회 지도교수로 연극부 학생들과 한데 어울려 이 작품을 했다.
영구차와 개
마광수
슬픈 유족과 조객들을 싣고 장지로 가던 영구차는
시골길에서 그만 개 한 마리를 치어 죽였다.
작은 삽살개는 그만 아픔에 못 이겨
깨개갱거리며 울다가 죽어 버렸다.
영구차는 잠시 주춤 섰다. 그러나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 장중하게 달렸다.
죽어가는 개를 측은히 여기던 차 안의 사람들도
차가 한참을 달려 개에게서 멀어지자
다시금 관 속에 누운 고인을 생각해 내곤
곧 개의 아픔을 잊어버렸다.
고인을 위한 슬픔의 무게는 개의 죽음의 무게보다 더 컸다.
내게도, 멀리서 점점 작아지며 들려오는 개의 깨갱소리가
마치 바이올린의 고음인 양 아름답게조차 들렸다.
내게도, 고인에 대한 사랑은 컸다.
며칠 전, 명동 뒷골목에서의 일이 생각난다.
웬 거지 한 사람이 기운 없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난 울컥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들었다가
아마 술에 취한 녀석일 거야 하고 애써 자위하며
슬쩍 눈길을 피해 지나가 버렸다.
사실 난 그의 더러운 몸이 내 새 옷에 묻을까 봐
겁이 났었다 난 귀찮았다.
경찰이 어련히 잘 돌봐주겠지 생각했다.
또 나에겐 급한 약속이 있었다.
확실히
한여름 대낮, 빌딩의 비좁은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는
지게꾼의 더러운 얼굴에서 난 시를 읽을 수가 없다.
한 마리 파리가 꾀죄죄 때묻은 그의 표정 속을 지나가고
헤벌어진 입술 사이론 청계천만큼이나 찐득거리는 침방울이 흘러 내린다.
아무리 내가 민주주의를 사랑한다고 해도
더러운 걸인의 몸뚱이를 껴안고 시를 욀 순 없다.
또 하찮은 개의 죽음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여유는 없다.
고인을 애도하기 위하여, 더 큰 슬픔을 위하여, 다만
그 차가 영구차이기 때문에
언젠가, 무겁게 내리누르는 일상의 무게에 짓눌리어
생활의 무게가, 고생의 무게가
내게 시를 쓰게 한다고 그래서
생활의 무게를 감수하겠다고
비겁하게 공헌하던 것을 부끄럽게 기억한다.
그런데도
내게는 개의 아픈 비명이 바이올린 소리처럼 들리고
그의 아픔이 실감되지 않았다.
지게꾼의 고통이 실감되지 않았다.
아아, 나는 모른다. 어떤 슬픔이 더 무거운 것인가를
생활의 무게와 시의 무게가 어떻게 다른가를 철학과 생활이, 사랑과 동정이, 신의 섭리와 생존 경쟁이, 귀골과 천골이 어떻게 다른가를
사람도 아닌 개를 위하여 슬퍼하는 것이 정당한가, 잊는 것이 장당한가를
그 차는 더 큰 슬픔을 싣고 가던 영구차였다.
그때 명동에서 나는 더 급한 약속이 있었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마광수
노예(奴隸)들을 방석 대신으로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국왕(國王)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同情)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快感)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그 내겐 유일(唯一)한 징그러운 자유(自由)인
죽음 같은 성욕(性慾)이 나를 짓눌렀다.
노예들이 겪어야 하는 원인 모를 고통에 분노하는 척해보다가도
은근히 왕(王)이 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역시 내 눈앞에는 왕(王)의 화려한 하아렘과
교태부리는 요염한 시녀(侍女)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 얄미운 욕정(欲情)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나는
온갖 비참한 사람들을 상상(想像)해 본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쾡한 눈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지 할머니,
그런데도 통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왕의 게슴츠레한 눈과
피둥피둥 살찐 쾌락(快樂)들이 머리속에 떠올라
오히려 비참(悲慘)과 환락(歡樂)의 대조가 나를 더 흥분시킨다.
아무리 애써보아도 그 흥분은 지워지지 않아
나는 그만 신경질적으로 수음(手淫)을 했다.
왜 나는 순수(純粹)한 민주주의(民主主義)에 몰두하지 못할까
다음날도 나는 다시 극장엘 갔다.
나의 쾌감(快感)을 분석해 보기 위해서, 지성적(知性的)으로
한데도 역시 왕(王)은 부럽다 반라(半裸)의 여인(女人)들은 섹시하다
노예(奴隸)들을 불쌍히 생각해 줄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그 동경(憧憬) 때문에 쾌감 때문에
그러나 왕(王)을 부러워하는 나는 지성인(知性人)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양심(良心)을, 윤리(倫理)를, 평등(平等)을, 자유(自由)를
부르짖는 지성인(知性人)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노예의 그 비참한 모습들이
무슨 이유로 내게 이상한 쾌감을 가져다주는 걸까
왜 내가 평민(平民)인 것이 서글퍼지는 걸까
왜 나도 한번 그런 왕(王)이 되고 싶어지는 걸까 아니
그럭저럭 적당히 출세(出世)라도 해서
불쌍한 거지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지는 걸까
왜 나는 순순한 민주주의자(民主主義者)가 되지 못할까
왜 진짜 민주주의(民主主義)에 몰두하지 못할까
외로운 우산
마광수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침에 비가 와서 우산을 들고 나갔다가
비가 그치면
돌아올 땐 어김없이 손이 허전합니다.
함께 나갔던 그 우산,
어디엔가 떨어져 있겠죠.
주인이 찾으러 올 때를 기다리며......
사랑도 그런 거라네요.
사랑은 잊혀진 우산처럼 남겨져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거라네요.
당신, 그래도 사랑할 수 있겠어요?
우리들은 포플러
마광수
포플러는 오늘도 몸부림쳐 날아오르고 싶어 한다.
놓쳐 버린 그 무엇도 없이
대지의 감미로움만으로는 아직 미흡하여
다만 솟구쳐 날아오르는 새가 부러워
끝 간 데 없이 뻗어나간 하늘이 부러워
바람이 부러워
포플러는 자유의 의미도 모르는 채
언제껏 손을 쳐들고
흔들고만 있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땅속에 묻어버린 꿈, 역사에 지친 생활의 빛에
체념, 권태로 하여 잊어버린
네 생명의 자존심 섞인 의지에!
아무리 흔들어보아도 손에 잡히지 않지만
아픔도 잊고 세월도 잊고 사랑도 잊고
포플러는 오늘도 안타깝게 손을 휘저어 본다.
명백히 놓쳐 버린
그 무엇이라도 있다는 듯이
우울한 날의 정사(情死)
마광수
그녀가 문득 창문을 연다.
비바람이 세차게 방안으로 몰아닥친다.
그녀는 온몸으로 비바람을 맞으며
마치 바닷가에서 파도의 포말 속을 소요하듯
창가를 이리저리 거닌다.
가끔씩 들려오는 가벼운 천둥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의 팀파니 소리처럼
아련한 느낌으로 전달돼 온다.
그녀의 멍한 시선이
검푸르게 보이는 먼 산을 쫓고 있다.
아니, 그녀의 눈은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라
흡사 바닷가의 드넓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드넓은 공허가 드넓은 공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곳.
아니, 부질없는 희망이
공허한 공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곳.
무섭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한 노스탤지어가
하릴없이 피어올라
사람의 마음을 과거 속에 붙들어 매두는 곳.
그는 그녀 곁으로 다가간다.
그녀의 눈의 초점이 점점 더 흐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잿빛 눈동자 속으로
하늘과 산과 우주 전체가 들어와 박혀있는 것 같다.
또한 그녀의 몸뚱어리 전체가
비바람 속에 파묻혀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는 그가 자살하기 전에 먼저
그녀의 목을 서서히 조르기 시작한다......
원반던지기의 인상(印象)
마광수
- 원반은 드디어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하늘 위에는 구름이 날았고, 파닥이는 의식(意識)으로 하여 하늘은 새의 울음을 울었다. 부풀어오르는 대기(大氣)는 스며드는 자유(自由)를 붙잡았다.
- 사람들은 계속되는 신(神)의 음성에 피곤하였었다. ……천년, 이천 년, 머언 개벽(開闢)의 아침부터 막혀있던 샘물은 이제금 다시 터져 우렁찬 목소리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하늘 그 너머로 떠들썩한 향상(向上)의 문(門)을 밀어 올리며, 새로운 내일을 가교(架橋)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원반(原盤)을 들어 올린 사람들의 팔뚝 사이로 고대(古代)에 에게해(海)의 기운이 다시금 솟아올랐다……뻗어가는 생명(生命)의 빛으로 하여 맥박은 펄떡였다.
- 계속 원반은 날아올랐다!……태양(太陽)에 가까와져 보려는 습성(習性)으로! 온갖 주위의 사물(事物)들도 날아올랐다. 제 자신에, 꿈, 역사(歷史)에 치인 생활(生活)의 빛에, 자존심(自尊心) 섞인 의지(意志)에! `열정(熱情)'은 숨 가쁘게 대지(大地) 사이로 퍼져간다. 온 세계의 광장(廣場)들, 빌딩들, 고목(古木)들은 서서히 움직거려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고독(孤獨)한 사람들의 눈은 대지이상(大地以上)의 감미로운 안도감(安堵感)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영겁(永劫)의 끝을 오가던 사람들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듯한 소리를 듣는다. ……생명(生命)은 사람들 사이에 눈부실 만큼의 무게로서 파고들었다.
유혹
마광수
가을 숲 검게 잠들고 저녁노을도 잠들고
배고파 울어대던 짐승 떼도 잠들었다.
그대여, 내게로 오라!
한 줄기 비수처럼 싸늘한 욕정의 빛이
헐떡이는 우리 젊음을 힘겹게 감싸고 있나니
이 순간은 영겁의 윤회조차 고요히 멈추고
안타까운 우리 야합(野合), 억만년 빙하도 녹이고
그대의 핏빛 입술, 성큼 죽음을 예감케 하네.
별빛도 월월월 소리 내어 포효(咆哮)하며
온 산천(山川) 무너져라 쏟아져만 내릴 때,
그대와 나는 이미 하나의 우주,
오오, 그대여 어서 내게로 오라!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마광수
엉거주춤 발가벗는 척하지만 말고
홀라당 시원하게 빨가벗고서
너희들 마음속 위선을 털어버려라
모든 사람들에게 가식적
시민 의식의 구성원이 되라고 강요하지 말아라
귀족적인 사치와 쾌락에의 욕구가 숨어있는
너희들 가슴 속 욕망을 활짝 펼쳐보여야 한다
지배계급에 대한 적의(敵意)와 투쟁은
그들이 누리는 쾌락에 대한 선망(羨望)일 뿐
숭고한 평등 의식의 소산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여인들의 거칠고 투박한 손만이
아름답다고 외치는 민중적 위선을 털어버려라
여인의 희고 가는 손과 길디긴 손톱이
네 가슴을 쓸어내릴 때 맛보는 쾌락을 숨기거나
손가락질하며 힐난하는 가식덩어리들이여
어서 가자, 야하고 솔직한 장미여관으로
이별
마광수
흐르고 있네요, 우리의 기억들이
강물처럼, 밀물처럼, 우리의 아픔들이.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 빛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아름다워요.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나요,
잊혀질 날들을 두려워하나요.
아, 어차피 인생은 한바탕 연극인 것을.
우리의 가슴과 가슴을
다시 한번 맞대 보아요.
웃음처럼 통곡할까요,
통곡처럼 웃어볼까요.
모든 것은 꿈,
모든 것은 안개 속 꼭두각시놀이.
당신은 저의 입술을 가지세요,
저는 당신의 마음을 먹겠어요.
눈을 감으면
잠깐씩 빛나는 무지개빛 추억 속에서
지금도 꿈꿀 수 있어요.
지금도 사랑할 수 있어요.
모든 것이 흘러가는 이 시간 속에서도
빛바랜 언어들이 쌓여질 수 있다면
기억 속의 외로운 그림자들이
다시금 우리 가슴에 내려 앉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할 수 있어요.
자, 웃어요.
언제나처럼 술잔을 들며
아직은 즐거운 목소리로
아직은 사랑스런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보아요.
이 사랑
마광수
이 사랑
그토록 음험하고
그토록 욕심 많고
그토록 잔학하고
그토록 변덕스러운
그러면서도 달콤한
그래서 우리를 옥죄는
그러다가 훌훌 떠나가 버리는.
자살자(自殺者)를 위하여
마광수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말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말라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말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말라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이 불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부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오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은 아니다
천둥, 벼락이 치는 것은 치고 싶기 때문
우리를 괴롭히려고 치는 것은 아니다
바다 속 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은 헤엄치고 싶기 때문
우리에게 잡아 먹히려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말라,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말라
그는 가장 용기 있는 자
그는 가장 자비로운 자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 자
자유(自由)에
마광수
우리들은 죽어가고 있는가, 우리들은 살아나고 있는가. 우리들의 목숨은 자라나는 돌덩이인가, 꺼져가는 꿈인가. 현실(現實)의 삶은 죽어가는 빛인가, 현실(現實)의 죽음은 뻗어가는 빛인가.
자유를 잃어 차라리 늠름한 어느 노예에게
마광수
차라리 노예라면 얼마나 좋으랴
혀 짤려져 입 막힌 벙어리 노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백치 노예라면 또 얼마나 좋으랴.
오히려 절망 못 하여 찐득이는 이 목숨,
제 미처 차마 못 죽는 겁많은 이 목숨,
쇠사슬 칭칭 감겨 희망, 자유, 잊을 수만 있다면!
피떡 앉은 알몸뚱인 적에게 맡겨 버려
훨훨훨 빨가벗겨 적에게 맡겨 버려
한 치 미움 없이 적에게 맡겨 버려
날 선 채찍 아래 저며진 살점들은
막 자른 생선 토막, 싱싱한 펄떡임으로
갈래갈래 허공 향해 우우우 포효를 하고,
사랑은 몰라, 죽음도 몰라, 세월도 몰라
다만, 두 눈 속 깊이 감추인 저주스런 생명의 빛 뿐!
억년 업보 두렵지 않은 저 생명의 빛뿐!
차라리 노예라면 얼마나 좋으랴
어느 때 내리쳐진 의미 없는 칼날 아래
핏덩이 콸콸콸 사방으로 솟구쳐
내 갑자기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장자사(莊子死)
마광수
한 번으로 끝내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꿈이 뭔지 죽음이 뭔지 나는 몰라
입담 속에 섞여 있는 그윽한 전율(戰慄)
생활(生活) 속의 다만 한 가닥 전율(戰慄)
그 설레이는 희극(喜劇)에의 충동이
나를 꿈속으로 이끌어 들였을 뿐.
철학(哲學)이 종교(宗敎)가 자연(自然)이 자유(自由)가
내게 새삼 무슨 힘이 돼?
자유(自由)도 욕심, 초월(超越)도 욕심
결국은 달관(達觀)도 욕심
체념(諦念)도 욕심,
그저 순간순간의 목숨만이
나를 이끌고 다녔을 뿐.
나는 불쌍해지고 싶지 않았어
평범(平凡)해지고 싶지 않았어
그저 안주(安住)하고 싶었지 여유(餘裕) 있고 싶었지
그러나 지금은 역시 모든 게 다 평범(平凡)하군,
나까지도 영원(永遠)까지도 명예(名譽)까지도.
한 번으로 끝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또 다른 삶이, 또 다른 죽음이
나를 기다려주지만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니
……얼마나 좋겠니.
적(敵)
마광수
해방 전에 살았던 윤동주는 참 행복했겠어
그때는 적이 분명했을 테니까.
일제(日帝)가 곧 적이고 적이 쓰러지면
곧장 희망이 달성되는 걸로 돼 있었으니까.
유신 시절에 살았던 청년들도 참 행복했겠어
그때도 적은 하나요, 적이 분명했을 테니까.
'군사독재'가 곧 적이고 그건 너무 간단한 적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적이 너무 많아 어지러워
아니 도대체 뭐가 적이고 뭐가 아군인지도 모르겠어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고
어제의 아군이 오늘이 적도 되니까.
적이 간단하다면, 그래서 그놈을 죽여 버리면
모든 게 다 잘되는 그런 적이 있다면
참 행복할 거야 나는.
정액 아이스케이크
마광수
나 당신을 그리워할 때마다
서글픈 마스터베이션을 하며
쏟아낸 정액들을
차곡차곡 한데 모아 두었다가
냉장고의 냉동고에 넣어
차디차게 얼려서
아이스케이크를 만들어
그대 돌아오는 날 재회의 선물로 주리라
중년의 우울
마광수
아, 불쌍한 내 정충들이여
맨날 감옥에 갇혀 지내고
통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홀아비 생활 어언 몇 해런가
그래도 난 곧 죽어도 돈 주고 여자는 안 사
이젠 치사해서 자위행위도 안 해
아, 너무 안 싸면 전립선염에 걸리기 쉽다는데...
그래도 돈 주고 사서 하는 섹스는 처량해
자위행위도 너무 궁상맞아
내 사랑하는 정충들아 조금만 더 참아주렴
그리고 늘 출정 준비를 하고 있어 주렴
언젠가는 도둑같이 님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모르니까
첫 입맞춤
마광수
그대의 입술은 언제나
잔잔히 흐르는 강물
가을 하늘 물빛을 튀기며
내 귀 먹먹히 그림을 그리게 해
눈감고 마음의 창문을 열어
강 건너 푸른 산과 마주 앉으면
어느새 어디메선가
풋풋풋 과일 떨어지는 소리
그 어느 날
내 사랑하는 빛깔들과
내 사랑하는 소리들과
내 사랑하는 동물들과
여행 떠나기 전
나 어린애이고 싶어
피아노
마광수
나의 님은 맨살 위에
바디 메이크업 하는 걸 좋아했지
그래서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더욱 현란하게 보였지
어느 날 그녀는 젖가슴 언저리에
피아노 건반을 그렸어
흙과 백의 콘트라스트가
그 어떤 브래지어보다 멋있었어
그래서 나는 열심히 피아노를 쳤지
내긴 손가락으로 내긴 혓바닥으로
내가 건반을 칠 때마다 내가 건반을 누를 때마다
피아노는 음울한 신음 소릴 냈어
딩동댕~~~~ 딩동댕~~~~~딩동댕~~~~딩동댕
왠지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로 덮어버렸지 영원히 덮어버렸지
황제(皇帝)와 나
마광수
나는 나의 아잇적 방을 생각합니다.
푸른빛 휘장 사이로는 매일을 꿈의 선녀들이
넘나들었고
나는 백합꽃, 튜울립꽃의 향내를 처음 맡아 보는 소녀처럼
언제나 동화(童話) 속에서 행복했습니다.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주던 동화(童話) 속의
왕자(王子)님과 공주(公主)님의 의미를 나는 그때는 몰랐습니다.
신데렐라를 찾아가던 왕자님, 그리고 백마(白馬)를 타고 백설 공주를 만나러 가던
왕자님의 늠름한 모습에
나는 매일 밤을 흥분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왕자(王子)님과 공주(公主)님같이 보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착한 왕자님과 공주님같이.
해가 바뀌어 갈수록 나는
동화(童話) 속의 세계, 꿈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왕자(王子)님이 되기에는
너무나 나라들이 많지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치는 나의 초라한 모습은,
정말 왕자(王子)님의 그것은 아니었구요.
요즈음, 다 자란 것 같은 요즘에도
나는 매일 밤 왕자님 꿈을 꿉니다.
그런데, 요즘 보이는 것은 어렸을 때 보았던
어린 왕자님들이 아니예요, 모두들 나이를 먹어
이미 진짜 왕(王)들이 되어 있는 왕자(王子)님들입니다.
아니, 그네들은 모두가 어쩌면
황제(皇帝)님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의 꿈에 보이는 황제들은, 영화에서나 본
진시황(秦始皇)이나 네로황제(皇帝)와 많이 닮았어요.
양손엔 벌거벗은 미녀들을 끼고 앉아, 호탕스럽게 웃으면서, 벌벌 떨고 있는 백성(百姓)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재미난 듯 보고 있습니다.
많은 시녀들은 갖은 아양을 떨어가며 황제(皇帝)님을 즐겁게 합니다.
꿈을 꾸고난 다음, 나는 야릇한 흥분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번 그런 폭군황제(暴君皇帝)가 되고 싶어집니다.
미녀(美女)들을 안고 싶어집니다.
갑자기, 어리고 싱싱하기만 하던 왕자님들,
동화 속에서나 보던 왕자님들이 우스워집니다.
정말, 이 세상엔 그런 착한 왕자님들은 없습니다.
매일 밤 황제의 꿈을 꾸면,
나는 내가 귀족(貴族)이라도 아닌, 초라한 평민(平民)인 것이 보기 싫습니다.
아아, 웬지 꿈속에서나마
나는 매일 매일 황제(皇帝)가 되고 싶습니다.
효도(孝道)에
마광수
어머니, 전 효도(孝道)라는 말이 싫어요
제가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나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시고 싶어서 낳으셨나요?
또 기르시고 싶어서 기르셨나요?
`낳아주신 은혜' `길러주신 은혜'
이런 이야기를 전 듣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와 전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거지요.
그저 무슨 인연(因緣)으로, 이상한 관계(關係)에서
우린 함께 살게 된 거지요. 이건
제가 어머니를 싫어한다는 말이 아니예요.
제 생(生)을 저주하여 당신에게 핑계대겠다는 말이 아니예요.
전 재미있게도, 또 슬프게도 살 수 있어요
다만 제 스스로의 운명(運命)으로 하여, 제 목숨 때문으로 하여
전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어요.
전 당신에게 빚은 없어요 은혜도 없어요.
우린 서로가 어쩌다 얽혀 들어간 사이일 뿐,
한쪽이 한쪽을 얽은 건 아니니까요.
아, 어머니, 섭섭히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난 널 기르느라 이렇게 늙었다, 고생했다'
이런 말씀일랑 말아주세요.
어차피 저도 또 늙어 자식을 낳아
서로가 서로에 얽혀 살아가게 마련일 테니까요
그러나 어머니, 전 어머니를 사랑해요.
모든 동정(同情)으로, 연민으로
이 세상 모든 살아가는 생명(生命)들에 대한 애정(愛情)으로
진정 어머닐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차피 우린
참 야릇한 인연으로 만났잖아요?
7월 장마
마광수
장마 가운데 내리고 싶다
내 가슴속 엉긴 핏덩이
좔좔좔 좔좔좔 씻어내리고 싶다
무엇이 두려우냐 무엇이 서러우냐
뒤섞여 흘러가는 저 물 속에
네 고독이 오히려 자유롭지 않으냐
아아, 못생긴 이 희망, 못생긴 이 절망
밤새워 뒤척이는 숨가쁜 꿈, 꿈들,
빗줄기 속으로 씻겨져 내렸으면!
긴긴밤 보채 대는 끈끈한 사랑,
제 미처 죽지 못해 미적이는 이 목숨,
우우우 우우우 부서져 흘렀으면!
장마 가운데 내리고 싶다
내 껍질 모두 다 훨훨훨 빨가벗겨
빗줄기에 알몸으로 녹아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