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여름이 아직 완전히 다 가기도 전에 오두막집 생활은 그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형태로 종말을 고했다.
어느 날 골드문트는 새를 잡는 돌화살을 가지고 소쩍새나 그 밖의 다른 짐승을 잡으려고 그 근방을 어슬렁거렸다. 먹을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레네는 가까이에서 딸기를 따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레네 곁을 지나치며 레네 속옷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목덜미 위로 레네의 빨개진 얼굴을 보기도 하며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때로는 레네가 갖고 있는 딸기를 조금씩 훔쳐 먹으며,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그냥 앞으로 가기도 했다.
그는 그리움과 권태의 감정을 번갈아 느끼며 레네를 생각하고 있었다. 레네가 장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이었다. 임신한 것 같다고도 했고 그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도 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어.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는 로베르트도 남겨두고 혼자 떠나겠어. 겨울쯤에는 니콜라우스 스승한테 가기로 하고 겨울을 거기서 보내자. 이듬해 봄에는 좋은 신발이나 사서 뛰쳐나와 고생을 하더라도 마리아브론 수도원으로 가서 나르치스한테 인사라도 하자. 아마 그를 보지 못한 것이 10년쯤 되었을까? 하루만이라도 좋아. 그를 만나야겠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그를 명상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별안간 그는 온갖 생각과 희망을 가지고 멀리 떠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귀를 곤두세우고 그 소리를 들었다. 불안에 가득 찬 소리가 되풀이되었다. 분명 레네의 목소리였다. 레네는 크나큰 곤경에 빠져 있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얼마간 짜증을 내며 발걸음을 다급히 옮겼다. 레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반복되자 그의 마음속에서 동정과 연민이 우러나왔다. 겨우 레네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갈기갈기 찢어진 속옷 바람으로 그녀를 정복하려는 사나이와 격투를 하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단숨에 달려갔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화와 불안, 슬픔이 알지 못하는 이 폭한에 대한 미칠 듯한 분노로써 폭발하고 말았다. 사나이가 레네를 완전히 땅바닥에 눌러 덮치려는 순간 골드문트는 놈을 불시에 습격했다. 드러난 레네의 젖가슴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무뢰한 강한 욕정을 참을 길 없어 레네를 끌어안았던 모양이었다. 골드문트는 그를 잡아 눌러 분노에 찬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졸랐다. 그의 목은 말라빠졌고 염소같이 털만 자라 있었다. 골드문트는 희열을 느끼며 계속 졸라댔고 결국 그는 레네를 놓고 힘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힘없이 기절한 사나이를 땅바닥 위로 솟아나와 있는 바위까지 끌고 갔다. 거기서 그는 굴복한 사나이를 두세 번 일으켜 세워서, 그 사나이의 머리를 칼날 같은 바위에다 쥐어박았다. 마침내 그는 목이 부러진 몸을 들어 던졌다. 그래도 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레네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젖가슴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아직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괴로운 듯 할딱거리고 있었으나 이내 일어나서 기쁨과 경탄에 찬 황홀한 눈빛으로 믿음직한 애인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긴 수염과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을 가진 창백한 얼굴이 비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레네는 환호성을 지르며 일어서서 골드문트의 가슴에 안겨 왔으나 별안간 얼굴빛이 변하고 말았다. 공포가 아직도 레네의 가슴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레네는 풀밭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레네는 곧 정신을 차리고 골드문트와 함께 오두막으로 갔다. 골드문트는 상처투성이가 된 레네의 젖가슴을 씻어주었다. 한쪽 젖가슴에는 침입자의 이에 물린 상처도 있었다.
로베르트는 그 사건에 매우 흥분을 하고는 격투에 관해서 자세하게 이것저것 열심히 물었다.
"죽었다구? 굉장한데 골드문트! 모두 당신을 두려워할 거예요."
하지만 골드문트는 그 이야기를 더 이상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도 어느 정도 진정되어 있었다. 시체에서 떠나올 때 그는 가엾은 빅토르를 생각했고 이것으로 자기가 죽인 사람이 둘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베르트한테서 물러나기 위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너도 뭘 좀 해보지 그래. 가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어때. 구덩이를 파는 것이 힘들거든 갈대 숲에 갖다 버리든지 돌이나 흙을 잘 덮어 주든지 해라."
하지만 그런 부당한 주문은 거절당했다. 로베르트는 시체를 만지는 것을 싫어했다. 어떤 시체든지 페스트균이 묻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레네는 방안에서 뒹굴고 있었다. 젖가슴에 물린 상처가 욱신거렸으나 마음은 이내 가뿐해져서 일어나 불을 피우고 저녁 식사로 우유를 끓였다. 레네는 몹시 기분이 좋았으나 일찍 침실에 들어가야 했다. 레네는 골드문트한테 아주 탄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양과도 같이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말을 들었다. 골드문트는 말도 하지 않고 음울한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이 증상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골드문트는 밤이 깊어진 다음 잠자리에 들려다가 레네 쪽으로 허리를 굽히고 귀를 기울였다. 레네는 잠들어 있었다. 그의 마음은 침착함을 잃고 빅토르를 생각하며 불안과 방랑의 충동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자꾸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것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한 가지의 사실이 특히 그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그가 죽은 사나이를 흔들어서 밀쳐 버렸을 때 그를 쳐다보고 있던 레네의 눈초리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기묘한 눈초리였으며 결코 잊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동그랗게 뜬 놀란, 황홀한 눈에는 긍지와 개가가 빛나고 있었다. 복수를 여자의 얼굴에서 본 적도 없거니와 예상한 적도 없었다. 그 눈초리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레네의 얼굴은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잊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눈초리가 농부의 딸 같은 그녀의 얼굴을 크고 아름답고 무섭게 했다. 수개월 이래로 그의 눈이 '이걸 그려야지!' 하는 소망에 물결쳐 흘러내린 적은 전혀 없었다. 그 눈초리를 보았을 때, 그는 일종의 공포와 함께 그 소망이 다시 넘쳐나는 것을 느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몸을 일으켜 오두막에서 나왔다. 바깥은 시원했다. 바람이 약하게 자작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어둠 속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그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냥 명상에 잠겨 깊은 비탄 속으로 젖어 들어갔다. 빅토르가 가엾게 여겨졌다. 오늘 때려죽인 그 사나이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진함과 동정심을 잃은 것을 원망스러워 했다. 수도원을 도망치고 나르치스를 버리고, 니콜라우스 스승을 화나게 하고, 아름다운 리스벳을 단념한 것이, 이렇게 황무지에서 잠을 자고, 길 잃은 가축을 기웃거리고, 불쌍한 사나이를 때려죽이기 위해서인가? 그러한 것에 의미가 있었던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골드문트는 무의미와 자기 경멸 때문에 가슴이 미어질 듯했다.
그는 반듯이 누워 다리를 길게 뻗고 희뿌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골드문트는 가만히 있었다. 나중에는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고 있는 건지, 자신이 마음속에 있는 구름 낀 세계를 보고 있는 건지 구별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러다가 돌 위에서 잠이 든 순간, 갑자기 달음박질치는 구름 속에서 번갯불처럼 커다랗고 희뿌연 얼굴이 나타났다. 이브의 얼굴, 깊숙하게 베일을 뒤집어쓰고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육욕과 살인의 쾌감에 찬 눈빛이었다. 골드문트는 이슬이 내릴 때까지 잤다. 이튿날, 레네는 병이 들었다. 두 사람은 레네를 가만히 눕혔다.
할 일이 많았다. 로베르트는 아침에 숲에서 두 마리의 양을 보았으나 곧 놓치고 말았다. 그는 골드문트를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은 반나절이나 쫓아가서 한 마리를 붙잡았다. 저녁 무렵에 양을 끌고 왔을 때 그들은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다.
레네의 상태는 몹시 나빴다. 골드문트가 자세히 살펴보니 페스트의 종기가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숨겼으나 로베르트는 레네가 아직까지도 앓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의심을 해 오두막에 더 이상 그대로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밖에서 잠자리를 찾겠다, 염소를 데리고 가겠다, 염소라고 옮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며 법석을 떨었다.
"그렇다면 나가 버려."
골드문트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너하곤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그는 염소를 붙들어 측백나무 뒤로 끌고 갔다. 로베르트는 염소를 두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로베르트는 페스트에 대한 공포, 골드문트에 대한 공포, 외로움과 밤에 대한 공포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는 오두막 부근에서 드러누웠다.
골드문트는 레네에게 말했다.
"난 네 옆에 있을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시 꼭 건강하게 될 거야."
레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 이제 내 옆에 와서는 안 돼요. 날 위로해 주려고도 애쓰지 말아요. 나는 죽어야 해요. 언젠가 당신한테서 버림을 받는 것보다는 죽는 게 차리라 나아요. 아침마다 당신이 떠나시자 않았나 하고 애를 태웠어요. 그래요, 저는 죽는 게 차리리 나은 걸요."
이튿날 아침 레네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골드문트가 간혹 레네한테 물을 먹여 주면서 틈틈이 눈을 붙인 것은 겨우 한 시간 정도였다. 날이 훤히 밝은 그는 레네의 얼굴에 확실히 죽음이 드리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시들고 마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바깥으로 나와 잠시 동안 숨을 들이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부정한 몇 그루의 소나무 줄기가 벌써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공기는 맑고 감미로운 향기를 실어다 주었다. 멀리 보이는 고개는 아직도 아침 구름에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 지친 팔다리를 뻗으며 심호흡을 했다. 이 슬픈 아침에도 세계는 아름다웠다. 곧 방랑은 다시 시작되리라. 이별을 고할 때가 된 것이다.
숲속에서 로베르트가 소리치고 있었다.
"좀 나았나? 페스트가 아니면 나도 그냥 있겠다, 골드문트, 화내지 마라. 나는 그 동안 양을 지키고 싶어."
"양과 함께 지옥이나 가버려!"
하고 골드문트가 소리쳤다.
"레네는 다 죽어가고 있다. 나도 전염되었어."
마지막 말은 물론 거짓이었다. 로베르트를 멀리 떨쳐 버리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설령 이 로베르트가 마음이 상냥한 사나이였다더라도 골드문트는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이 친구는 너무나 겁이 많고 소심했다. 이렇게 숙명적인 동요가 격심한 시기에는 너무 부적합한 사나이였다. 로베르트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해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레네 있는 곳으로 다시 왔을 때 그녀는 잠을 자고 있었다. 그도 다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지난날 그의 말 블레스와 수도원의 탐스런 밤나무가 나타났다. 그는 끝도 없는 먼 나라의 황무지에서 잃어버린 고향을 되돌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떠보니 갈색의 수염이 나 있는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희미한 소리로 레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로 믿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레네는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애욕의 말, 저주스러운 말을 혼자서 입 속에 담아 주워섬기고 있을 뿐이었다. 혼자 웃다가는 또 하늘이라도 꺼질 듯 한숨을 쉬고, 흐느껴 울다가는 다시 잠잠해졌다.
골드문트는 벌떡 일어나서 찌푸리고 있는 레네의 얼굴 위로 허리를 굽혔다. 타는 듯한 죽음의 입김 아래 비참하게 흩어진 선을 씁쓸한 호기심으로 지켜보았다. 사랑하는 레네여! 귀여운 아가씨여! 너도 나를 버리는구나! 그의 가슴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너도 벌써 나한테 싫증이 났느냐?
도망치고 싶었다. 헤매고 헤매며,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새로운 형상을 볼 수만 있다면 그러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고 깊은 우울증도 가라앉을 테지.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못한다. 여기 이 아가씨를 혼자 죽게 한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두세 시간마다 잠시 동안 바깥에도 나갈 수가 없었다. 실컷 마실 수 있는 것은 우유뿐, 그밖에 달리 먹을 것은 없었다. 염소를 몇 번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풀을 뜯게 하고, 물을 먹이고, 운동을 하게 했다.
그러고는 다시 레네의 잠자리 곁에 와서 섰다. 정답게 이야기도 해주고 아무 두려움도 없이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침착하게 레네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레네의 의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간혹 잠들었다가 어렴풋이 눈을 뜨곤 하였다. 눈꺼풀이 지쳐서 맥이 없어 보였다. 야들야들하던 그녀도 눈과 코의 주변이 차츰차츰 쇠퇴해가는 듯했다. 물이 방울져 떨어질 듯 윤이 나던 목덜미 위에 자꾸만 시들어가는 얼굴이 얹혀지고 있었다. 레네는 어쩌다가 '골드문트,' '사랑스러운 이' 라고 지껄이거나 창백해진 입술을 혓바닥으로 간신히 축이려고 들었다. 그럴 때는 레네의 입술에다 물방울을 적셔 주었다.
그날 밤, 레네는 죽었다. 울거나 슬퍼하는 기색도 없었다. 약간 몸을 움찔했을 뿐 호흡은 멎고 말았다. 피부 위를 숨결이 흘러갔다. 그의 가슴은 파도쳤다. 생선 시장에서 몇 번이나 보면서 불쌍하다고 생각한 빈사상태에 빠진 물고기 생각이 났다. 물고기가 죽어가는 모양도 바로 이러했다. 움찔했다가는 파닥거리는 고통의 소름이 살갗 위를 달려들면 광택도 생명도 쓸려가고 마는 것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레네의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염소 생각이 나서 다시 한 번 들어가 염소를 데리고 나왔다. 염소는 풀을 찾아내자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염소 옆구리에 머리를 기대고 날이 밝을 때까지 잤다. 마지막으로 오두막에 들어가 엮어 놓은 뒤 벽 뒤에 가서 불쌍한 레네의 얼굴을 보았다. 시신을 그대로 거기에 둘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바깥으로 나가 한 아름의 마른 장작과 시든 잔가지를 긁어모아 그것을 오두막에 집어던지고 불을 붙였다. 오두막 속에서 그는 불붙일 도구 이외에는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바싹 마른 칡덩굴 벽은 순식간에 빨갛게 타올랐다. 그는 멍하니 서서 용마루가 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염소는 겁을 집어먹고 울면서 날뛰었다. 염소를 잡아서 그 한 조각을 구워 먹으면 힘이 솟구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염소를 들로 내쫓고 떠났다. 숲속에까지 죽음을 삼킨 연기가 따라왔다. 이렇게 비참한 마음을 가지고 방랑길에 오르기는 처음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빴다. 맨 처음에 당도한 농가나 마을마다 갈수록 악화된 상황뿐이었다. 그 지방 어디에고 죽음의 구름, 전율과 불안과 영혼의 암흑에 싸여 있었다. 죽음으로 폐허가 된 집들, 사슬에 매인 채 굶어죽어 썩어 버린 개, 묻히지도 못하고 뒹굴고 있는 송장들, 거지 행각에 나선 어린애들, 교외에 있는 수많은 무덤들, 그러나 더욱 지독한 것은 무서움과 죽음의 불안을 안고 눈도 영혼도 상실해 버린 채 살아 있는 산 사람들이었다. 아이들이나 아내가 병들면 부모는 아들을, 남편은 아내를 버렸다.
시체 치우는 인부들이나 병원지기들은 사형 집행인처럼 날뛰었다. 그들은 사람이 죽어 텅 빈 집에서 강도질을 하고, 제멋대로 시체를 묻지도 않고 두거나 빈사 상태에 빠진 병자를 숨도 거두기 전에 침대에서 끌어내려 마차에 싣기도 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혼자서 겁을 집어먹고 인간과의 접촉을 피해 가며 죽음의 촉수에 내쫓기며 헤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한데 휩쓸려서 어이없는 향락에 빠져 주연을 벌여 놓고 죽음의 귀신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반주로 춤과 애욕의 향연을 베풀고 있었다. 또 무덤 앞이나 사람이 다 죽어버린 빈 집에서 광란의 눈초리로 웅크리고 앉아서 거들떠 보는 이하나 없이 통곡하다가 막 호통 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독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이 불행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 모두 다 이 전염병에 책임이 있고 마음씨가 나쁜 장본인이 극악무도한 자는 누구누구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악마와 같은 페스트의 시체에서 병균을 받아서 문이 손잡이에 발라 놓거나 또 우물에 독을 넣거나 가축들에게 독을 먹여 죽음의 잔치를 위해 애쓰면서 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 기쁨에 젖어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잔인한 짓을 했다고 의심을 받는 사람은 재판소나 폭도들에 의해 사형 당했다. 또 부자는 가난뱅이한테 죄를 뒤집어씌웠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또 유태인이나 남쪽 나라 사람, 혹은 의사의 소행이라고도 했다.
어느 도시에서 골드문트는 유태인 거리에 집집마다 화재가 난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 주위를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울부짖으며 달아나는 사람이 있으면 무기를 이용해 화염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불안과 분노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에 의해, 도처에서 죄 없는 사람이 살해되고 추방되고 고문당했다. 골드문트는 화가 나서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계가 파괴되고 몰살되었다. 환희도 순수도 사랑도 이 땅위에는 전혀 존재하질 않는 것 같았다. 이따금 그는 향락가의 과격한 향연으로 몸을 피했다. 저승 사자의 바이올린이 울려 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내 그도 소리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그는 자주 자포 자기에 빠진 연회에 참석하여 기타를 치거나 관솔불 밑에서 무더운 밤을 같이 춤추고 노래하며 지새우기도 했다.
그는 두려움을 몰랐다. 한때 죽음의 공포를 맛본 적은 있었다. 언제이던가, 겨울 밤 전나무 아래에서 빅토르의 손가락이 그의 목을 죄어 왔을 때, 또 살을 에는 방랑 시절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하지만 그것은 그것을 상대로 하여 싸울 수 있는 죽음이요, 그것을 상대로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떨리는 손발과 지친 사지로 싸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페스트의 죽음과는 싸울 방도가 없었다. 마음대로 날뛰는 대로 내버려 두고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골드문트는 벌써부터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타오르는 통나무집에 레네를 남겨두고 온 이래, 죽음으로 온통 짓밟힌 도시와 이곳저곳을 매일 헤매 다닌 이래, 이제 생명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그를 내몰아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는 무수한 죽음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어떠한 곳에서도 걸음을 멈추어 눈을 뜨고 지옥을 빠져나간다는 고요한 정열에 사로잡혔다. 죽음으로 폐가가 되어 버린 집에서 곰팡이가 슨 빵을 뜯어 먹었다. 미치광이들의 집합소 같은 술자리에서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셨다. 쾌락으로 시들어지기 쉬운 꽃을 땄다. 여인들의 취한 듯 응시하는 눈길을 보았다. 주정뱅이들의 퀭한 눈길을 보았다. 숨이 끊어져가는 사람들의 가물거리는 눈길도 보았다. 열에 들뜬 절망에 빠진 여인을 사랑했다. 한 접시의 스프를 받고 시체를 나르기도 했고 한두 푼의 돈을 받고 시체 위에 흙을 덮어 주는 일도 했다. 세상은 암흑과 공포의 세계로 변했다. 저승사자가 울부짖으며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골드문트는 정열을 불사르며 그 노래를 들었다.
그가 가야 할 곳은 니콜라우스 스승이 사는 마을이었다. 그의 가슴속의 목소리가 그를 그곳으로 끌고 갔다. 길은 멀었다. 죽음과 쇠약과 세상의 곳곳에 충만하고 있었다. 슬프게 끌려갔다. 죽음의 노래에 취하고, 세상의 울부짖는 고뇌에 자신을 내맡기고, 슬프면서도 행복하다는 듯 오관을 활짝 열어젖혀 놓고서.
그는 어느 수도원에서 새로 제작된 벽화를 구경했다. 오랫동안 관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의 춤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 그림에서는 희멀겋고 피골이 상접한 저승사자가 왕, 사교, 수도원장, 백작, 기사, 의사, 농사꾼, 용병 등 온갖 인간 군상을,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이승 밖으로 끌고 나갔다. 뼈다귀만 남아 있는 악사들이 뼈다귀를 악기 삼아 연주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찬 골드문트의 눈길은 그 그림을 깊숙이 빨아 당기고 있었다. 이름 모를 예술가 중의 하나가 페스트에서 본 것 중에서 얻은 것이리라.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가차 없는 설교를 사람들의 귀에 쨍쨍 울리도록 외치고 있었다. 훌륭한 그림이었고, 좋은 설교였다.
이 낯선 동료의 안목이나 채색법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 과격한 그림에서는 처참한 음향이 울려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골드문트 자신이 겪고 체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준엄하고 용서의 여지가 없는 불가피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골드문트라면 다른 그림을 그렸으리라. 저승사자의 광포한 노래는 그의 가슴속에서는 완전히 다른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마르지도 준엄하지도 않고, 오히려 달콤하고 유혹적이고 고향으로 데려가듯, 어머니와 같은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죽음의 손아귀가 생명을 향해 뻗쳐올 때 매섭게 도전적으로 가락을 연주할 뿐만 아니라 애정에 푹 젖고 결실의 가을처럼 기름지게 가락을 울리는 것이었다. 죽음은 다른 사람에게는 병사요, 판관이요, 죽음과의 접촉은 사랑의 몸부림이었다.
골드문트가 벽화에 그려진 죽음의 무도를 다 보고 나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무언가 새로운 힘이 스승이 있는 데로, 창작이 기다리는 곳으로 자신을 몰고 갔다. 하지만 곳곳에서 새로운 광경과 체험에 부딪혀 자꾸 늦어졌다. 열린 콧구멍으로 죽음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도처에서 동정과 호기심이 한 시간 혹은 한나절을 지체하라고 그에게 요구했다. 울어대는 농사꾼의 조그만 사내아이를 사흘씩이나 돌봐 주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대여섯 살 되는 아이 때문에 진땀을 흘리다가 간신히 숯 굽는 여인에게 아이를 맡기기도 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어린애를 가까이에 두고 싶어 했던 것이다. 또 며칠 동안 주인 없는 개 한 마리가 그를 따라와서 그에게서 뭔가를 얻어먹었다. 잠잘 때는 그의 몸을 따스하게 해주었으나 어느 날 아침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서운했다. 그는 개와 이야기하는 버릇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곧잘 그 개한테 명상적인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인간이 나쁜 점에 대해서, 신의 존재에 대해서, 예술에 대해서, 그가 젊은 시절에 한때 알고 지냈던 율리에라는, 기사의 아름다운 딸의 유방과 엉덩이에 대해서.
물론 골드문트도 죽음의 방랑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마음이 약해졌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지방의 인간은 모두 어느 정도 정신 상태가 이상하게 되어 있었다. 완전히 미친 사람도 많았다. 그 가운데 유태계의 젊은 처녀 레베카도 아마 정신이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을 갖고 있는 까만 머리의 아름다운 이 처녀와 그는 이틀 동안이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레베카를 발견한 곳은 어느 소읍의 교외 들판이었다. 까맣게 숯이 된 불탄 자리에 그녀는 웅크리고 앉아 구슬프게 통곡하고 있었다. 제 얼굴을 때리며 머리를 쥐어 쥐어뜯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을 보고 그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다. 그는 그 여자의 부들부들 떠는 손을 꽉 쥐었다. 이야기를 건네 본 후에 얼굴도 몸매도 대단히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가엾게 여기면서 통곡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른 14명의 유태인들과 함께 관청의 명령에 의해서 화형 당했던 것이다. 그녀는 간신히 도망쳐 나갈 수가 있었으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자기도 함께 타죽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심하게 떨리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쥐고 온화하게 타일렀다. 동정과 보호의 말들도 속삭였다. 마지막엔 무엇이든 도와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묻는 것을 도와 달라고 했다. 두 사람은 아직 후끈후끈한 잿더미 속에서 뼈를 모두 주워 모아 들판 저쪽,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운반해서 흙을 덮어 주었다.
밤이 되었다. 골드문트는 잠자리를 찾았다. 처녀를 위해 어느 참나무 우거진 숲속에다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보초를 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귀를 곤두세우고 있으려니 그 여자는 드러누워서도 한참을 흐느끼더니 나중에야 잠을 잤다. 그도 좀 잤다.
아침이 되자 그는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넌 혼자서 지낼 수가 없는 처지이다. 유태인이라는 것이 발각되면 맞아 죽을 것이다. 거칠고 사나운 유랑자들은 널 납치해 갈 거고, 숲속에는 집시나 늑대가 있다. 그러기에 나는 너를 데리고 가주겠다. 늑대나 인간으로부터 지켜준다. 나는 너를 매우 가엾게 여기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귀여워도 해준다. 나는 정상적인 평범한 인간이고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여쁘고 영리한 눈꺼풀이나 홀딱 반할 것 같은 이 어깨가 짐승한테 잡아먹히거나 차곡차곡 쌓인 장작개비 위에서 태워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녀는 음울한 얼굴로 듣고 있었으나 별안간 일어나더니 내쳐 달아나 버렸다. 그는 쫓아가서 그녀를 잡았다.
"레베카, 내가 너한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 것은 알지? 너는 슬퍼하고 있어. 아버지만을 머릿속에 그리고, 사랑 같은 건 도무지 엄두도 내지 않으려 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내일이나 모레, 아니면 훨씬 나중에 너에게 의사를 물어볼 거야. 그때까지 나는 널 지키고 먹을 것도 갖다 주기는 하겠지만 네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않을 거야.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실컷 울어라. 내 옆에 있을 때는 슬퍼하든 기꺼워하든 난 상관 않겠다만 내 마음은 언제든 널 기쁘게 하는 데만 힘쓸 거야."
하지만 아무리 달래며 되풀이해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미친 사람처럼 이렇게 말했다.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것은 무엇이든 싫다, 무엇이든 괴로움을 갖다 주는 것이 좋다, 즐거움 같은 것은 이제 절대 생각하지도 않으리라, 늑대한테 물리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고마운 일이다, 이제 가다오, 소용없는 일이다,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귀가 따가울 정도다.' 라고.
"이것 봐."
그는 말했다.
"네가 어디를 가도 죽음이 도사리고 앉아 있다는 것을, 집집마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만인이 비탄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네 아버지를 태워 죽인 어리석은 자들의 울분도 괴로움도 비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야. 다들 고통이 너무 큰 탓이야, 알겠나. 우린들 별수 있어? 머잖아 저승사자에게 붙잡혀 들판에서 썩어갈 운명에 놓여 있어. 그 다음에는 우리들 뼈다귀를 가지고 두더지가 장난을 칠 거란 말이야. 그렇게 되기 전에 인생을 즐기고 서로 사랑을 하자구. 아, 하얀 네 목덜미와 예쁘장한 발이 애처로워 못 견디겠어! 귀엽고 고운 레베카, 나하고 같이 가. 난 네 얼굴이나 쳐다보면서 너의 시중을 들어 주고 싶을 뿐이라구."
그는 오랫동안 애원을 했으나 말로써 설득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순간 깨달았다. 그는 입을 꼭 다물고 슬픈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긍지와 교양미에 가득 찬 그녀의 얼굴은 거절 때문에 얼음장같이 싸늘했다.
"당신들은 그런 사람이에요."
그녀는 드디어 증오와 멸시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 크리스찬들은 모두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구요! 아버지를 장사 지내는 처녀를 도와준다지만 그 아버지도 결국 당신들 종족이 살해한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은 우리 아버지의 손톱만큼의 가치도 없어요. 장례를 치른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그 처녀에게 자기와 같이 지내자느니 해요. 처음에 말예요, 난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뭐가 좋은 사람이에요! 아, 당신네들은 짐승만도 못해요."
그녀가 정신없이 지껄이고 있는 동안, 골드문트는 그녀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증오심의 한쪽 구석에 그를 감동시키고 참회하게 하고, 가슴속 깊이 파고들어오는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체념이 아니고 죽고 싶다, 죽음을 불사한다는 의지였으며 대지의 어머니의 부름에 조용히 따라가고자 하는 헌신이었다.
"레베카."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말하는 것이 맞을지도 몰라. 나는 너에 대해 선의를 가지고 있지만 결코 좋은 인간은 아니야. 용서해 줘. 나는 지금 그것을 깨달았어."
그는 모자를 벗고 여왕에게라도 하듯 깊숙이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한 다음 무거운 가슴을 안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여자를 자멸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그의 슬픈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어느 누구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 닮은 점도 조금도 없었으니 기질에 세고 불쌍한 유태계의 처녀는 어딘지 모르게 기사의 딸 리디아를 생각나게 했다. 이런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괴로움을 동반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리디아와 이 유태계의 처녀 이외의 여자를 사랑한 적은 전혀 없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의 생각은 그 후에도 며칠 동안이나 그 까만 머리카락의 뜨겁게 타는 듯한 처녀를 찾아가고 있었다. 며칠 밤이나 꿈속에서 늘씬한 몸매와 불타는 듯한 그 모습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 아름다움은 행복과 꽃다움에 운명 지워져 있었던 것 같은데도 벌써 죽음에 손이 닿아 있었다.
아, 저 입술과 젖가슴이 '짐승들'의 밥이 되고 들판에서 썩어가지 않으면 안 되다니! 저 소중한 꽃을 구경할 힘과 마력은 없는 것일까? 아니, 마법은 있다. 즉 그 여자가 그의 영혼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그에 의해서 형성되고 간직되어진다면 그만이다. 그의 영혼이 얼마나 많은 형상으로 채워져 있는가, 죽음의 언덕을 기나긴 시간 헤매 다닐 동안 얼마나 많은 형상이 그의 마음속에 그려졌는가를 느끼고 놀라움과 환희를 감출 길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의 충만은 얼마나 긴장을 느끼게 하였는가! 그것을 조용히 생각하고 잘라내어 영속적인 형태로 변화시키기를 그는 얼마나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던가! 그런 마음은 연달아 불꽃을 튀기는 듯 자꾸만 강렬해져갔다. 그는 아직도 사방으로 흩어진 눈길과 호기심에 찬 감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종이와 연필과 점토와 통나무와 일터와 제작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름이 지나갔다. 가을이나 적어도 초겨울쯤에는 페스트도 가라앉으리라고 많은 사람들은 예측했다. 즐거움이 없는 가을이었다. 골드문트의 흔적이 지나간 지방에서는 과실을 거둬들일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과실들은 나무에서 바로 떨어져 풀밭에서 썩고 있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다른 마을에서 밀려온 험상궂은 부랑자들이 과실들을 제 마음대로 노략질하고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골드문트는 서서히 그의 목적지를 향해 접근해갔다. 간혹 그는 거의 막바지에 가서 도착하기 전에 페스트에 걸릴지도 모르고, 어딘가 낯선 외양간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싸여 있었다. 지금은 죽기가 싫었다. 한 번 더 일터에 서서 작업에 온 마음과 몸을 바치는 행복을 맛보기 전에는. 이제야 비로소 그는 세계가 너무나 넓고 이치가 너무도 큰 것을 깨달았다. 어떤 아름다운 도시도 그를 휴식으로 유혹하는 힘을 가지지 않았다. 아무리 예쁜 농사꾼의 딸도 하룻밤 이상 그를 붙들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느 낯선 성당 앞을 지나갔다. 그 현관 옆, 조그맣게 장식한 기둥으로 괴어 있는 벽감 속에 고대의 수많은 석상들이 서 있었다. 천사, 사도, 순교자 등 자주 본 적이 있는 것과 똑같은 석상들이었다. 마리아브론의 수도원에도 이런 종류의 석상은 얼마든지 있었다. 젊은 시절,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즐겨 본 것들이었다. 언뜻 보기에 그것들은 아름답고 품위 있어 보였으나 다소 지나치게 정중하고 얼마간 뻣뻣한 데다 곰팡이 냄새도 났다.
맨 처음 기나긴 유랑생활의 종말에, 그 감미롭고 슬픔에 찬 니콜라우스 스승의 마리아 상에 큰 충격을 받고 매혹된 이후로, 그는 그것들을 일종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으로 보곤 했다. 스승의 새로운 기법에서 훨씬 더 약동적이고 내면적이고 영감적인 예를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 새로운 갖가지 형상들로 마음이 충만되어 격심한 모험과 체험의 상흔이 자취를 영혼에 새겨 두고, 명상과 새로운 작업에의 끝없는 그리움을 가지고 돌아와 보니, 이 원시적이며 동시에 준엄한 석상들이 별안간 과격한 힘으로 그의 가슴을 휘저었다.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신성한 석상들 앞에 섰다. 그 석상들 속에는 오래 전에 없어진 종족들의 불안과 도취가 몇 세기 뒤에 돌에 엉겨 붙어 굳어졌어도 아직 인생이 덧없다는 데 대한 반항을 드러내고 있었다. 즉 그 옛날의 삶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말라빠진 그의 가슴속에 외경의 감정과 낭비하고 헛되이 보내고 만 생활에 대한 불안이 몸부림치며 끓어올랐다. 그는 그가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고해를 하기 위해 고해석을 찾았다.
성당 안에 고해석이 있기는 했으나 어디에도 신부는 없었다. 신부들은 죽었거나, 병원에 드러누었거나, 전염병을 겁내어 도망을 쳤을 것이다. 성당은 텅 비어 있었고, 골드문트의 발소리가 돌로 만든 아치형 천장에 부딪쳐서 메아리쳤다. 그는 텅 빈 고해석에 끓어 엎드려 눈을 감은 채 창살에다 대고 속삭였다.
"거룩하신 하느님. 제가 지금 어떤 모습인가를 보십시오. 저는 속세에서 돌아왔습니다. 흉악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을 방탕자처럼 헛되이 지냈고, 이 청춘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살인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간음을 하고, 되는 대로 살았으며, 다른 사람의 빵을 빼앗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당신은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으며 이와 같은 행로를 걷게 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우리를 인도해 줄 성자와 천사는 없습니까? 아니면 그런 것은 모두 적당히 꿰어 맞춘 거짓이었고 어린아이들한테 얘깃거리로 들려줄 그런 것이며 신부들은 사람들 자신이 웃음거리로 여기는 장난에 불과 하옵니까? 저는 당신을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세상을 흉악하게 만드시고 광포한 질서 속에 두고 계십니다. 저는 집집마다 골목길마다 시체가 깔려 있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부자들이 자기네들 집에다 담을 쌓거나 도망치거나 하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 형제들을 묻어 주지 않고 그냥 팽개쳐 두는 것을, 그들이 서로 의심을 해서 유태 사람들을 짐승처럼 때려 죽이는 것을, 아무 죄도 없는 수많은 사람이 괴로워하고 파멸해가는 것을, 수많은 악인들이 안락에 젖어 있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들을 모두 잊으시고 버리셨습니까? 당신께서 만드신 우주에 완전히 싫증을 느꼈나요? 우리들 모두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작정이십니까?"
가라앉을 듯한 깊은 한숨을 쉬며 그는 높다란 입구로 걸어 나갔다. 천사나 성자의 석상들이 꼼짝하지 않고 줄이 간 법의를 걸치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도달하기 어렵고 초인간적으로. 하지만 인간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 인간의 정신으로 만들어져서 준엄하고 동시에 무감각하게 어떤 원망이나 물음에도 꼼짝하지 않고 그들 석상들은 좁디좁은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품위와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서서 차례차례로 죽어가는 인간에게 그들의 초연한 모습은 끝없는 위로요, 죽음과 절망에 대해 개가를 올리는 승리였다.
아, 여기에 불쌍하고 아름다운 유태계 처녀 레베카나 통나무집과 함께 타죽은 불쌍한 레네나 정다운 리디아나 니콜라우스 스승도 나란히 같이 설 수가 있다면! 언젠가 그네들도 한번쯤은 여기 이곳에 나란히 서게 되리라. 그에게 있어서 오늘의 애정과 고뇌와 불안과 저열을 의미하는 그들의 모습은 후세 사람들 앞에, 비록 이름이나 사연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요하고 말없는 상징으로 서 있게 되리라.
15.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골드문트는 지난날 스승을 찾기 위해 들어간 문을 지나서 동경하던 도시에 발을 들여놓았다. 주교가 사는 이 도시에서 떠도는 수많은 소식은 이곳으로 오는 길목에서 벌써 들었다. 거기서도 페스트가 만연하고 있었던 것을, 아마 아직도 창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는 백성들의 소요로 도시가 황폐해졌고, 그 때문에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 질서 회복을 위해 파견되고 긴급 명령을 내려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조처를 취했다는 것도 전해 들었다. 페스트가 발생하자 주교는 즉시 도시를 버리고 먼 지방에 있는 그의 성으로 옮겨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고 한다.
그런 소식을 이 나그네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을과 그가 작업할 수 있는 일터만 남아 있다면! 다른 것은 어느 것도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당도했을 때는 페스트도 고개를 숙인 때였다. 사람들은 주교의 귀환을 기다리며 총독의 퇴거와 평화로운 일상 생활이 다시 오기를 꿈에서조차 그리고 있었다.
이 마을을 다시 보았을 때, 재회의 기쁨이 고향의 그리운 정을 지금껏 맛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격심하게 골드문트의 가슴에 파도쳤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기 위해 평소와는 다른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 하나도 변한 것이 없구나! 성문도, 그리웠던 우물도, 대사원의 우스꽝스러운 낡은 탑도, 마리아 성당의 높다란 탑도, 성로렌츠의 맑은 종소리도, 햇빛이 내리쬐는 시장도! 그 모든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여기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 부서졌거나 새로운 건물이나 반갑지도 않은 묘한 표지 때문에 모든 것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게 변했으리라고 상상했었는데, 한 집 한 집을 추억 속에서 끄집어내면서 골목길을 돌아가니 저절로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아담하고 안전한 집에, 불만 없는 소시민의 생활 속에 고향을 가지고 안방과 일터에 주저앉아 아내와 아이들, 하인, 이웃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하고 있다는 믿음직한 안정감 속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부러운 존재가 아닐까?
오후도 한고비 지난 때였다. 골목길 남쪽에 위치한 집, 음식점, 조합의 간판과 조각한 대문, 화분들이 따스한 볕을 받고 있었다. 이 도시의 어디에도 광란에 떠는 죽음이나 제정신을 잃은 인간들의 공포가 한때 뒤덮였었다는 것을 회상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메아리가 곧잘 울리는 아치형의 다리 밑을 맑은 강물이 유록의 빛을 띠며 흘러가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잠시 둑 위에 앉았다. 여전히 유록색의 수정과 같은 물속에서 환상적인 까만 고기들이 재빠르게 달려가거나 물결을 거슬러 가거나 가만히 있기도 했다. 지금도 변함없이 어슴푸레한 밑바닥 이쪽저쪽에서 그 가냘픈 황금빛을 번쩍거리며 온갖 것을 암시하며 자꾸만 환상을 북돋운다. 그것은 다른 시냇가에도 있었거니와 보기에도 말쑥한 다리와 도시는 딴 곳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벌써 기나긴 시간 이런 것을 본 일도 없고 똑 같은 감정을 가진 적도 없는 듯했다.
푸줏간의 두 사내가 연방 킬킬대며 송아지를 몰고 갔다. 그들은 2층 발코니에서 빨래를 걷고 있는 하녀와 눈짓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왜 그리 빨리 만사는 지나가고 마는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스트의 불이 붙어 별것도 아닌 병원의 급사들이 뽐내고 있었을 것인데, 지금은 생활의 흐름이 제 길을 찾아 사람들은 농담을 하며 킬킬댔다. 그 자신도 그 길을 따라갔다. 그도 거기에 앉아 재회에 마음을 빼앗기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마치 불행도 죽음도 없었던 것같이, 레네도, 유태계의 처녀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서 곧장 걸어갔다. 니콜라우스 스승이 사는 골목길로 접어들며 몇 년간 매일같이 일하러 다니던 그 길을 다시 걷자니 그의 가슴은 감회에 젖어 두근거리기만 했다. 그는 걸음을 재촉해 당장이라도 스승을 찾아뵙고 사정을 듣고자 했다. 내일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기라도 한 듯, 한시의 지체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승은 아직도 그에게 화를 내고 계실까?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으니까 뭐 대단치는 않을 테지. 스승이 화를 낸다손 치더라도 참을 수 있을 테지. 스승만 계시고 그리고 일터만 무사하다면 만사는 뜻대로인 것이다.
거의 다 왔을 무렵이 되자 그는 마치 무엇을 놓칠 염려라도 있기나 한 듯 정든 집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그때 그의 가슴은 한없이 울렁거렸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옛날에는 대낮에 이 문이 잠겨 있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세차게 문을 두드리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별안간 가슴은 불안에 싸였다.
나이 먹은 하녀가 나왔다. 옛날에 그가 처음 이 집에 들어섰을 때 맞이해 준 하녀였다. 나이도 더 들었으며 추하고 인정미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골드문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불안한 목소리로 스승의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스승이라뇨? 여긴 그런 사람 없어요. 어서 가요, 아무도 들여놓지 않으니까."
그녀는 그를 문 앞에서 밀어내려고 했다. 그는 노파의 팔을 잡고 귀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마르그리트, 제발 말 좀 해줘! 나 골드문트야! 모르겠어? 니콜라우스 스승을 만나러 왔단 말이야."
그녀의 눈망울엔 여전히 반가운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여기는 이제 니콜라우스 선생은 없어요."
여자는 내뱉듯이 말했다.
"니콜라우스 선생은 이미 죽었어요. 가세요. 여기 서서 당신하고 이야기만 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요."
골드문트는 마음속에서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는 노파를 밀쳐 버리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서 작업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녀는 덤빌 듯이 뒤따라왔다. 작업장에는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욕을 퍼붓고 있는 노파에게 쫓기면서도 그는 계단을 뛰어올라가 좀 어두컴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눈에 익은 장소에 니콜라우스가 모아 놓은 목상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큰 소리로 니콜라우스의 딸 리스벳을 불렀다. 방문이 조용히 열리며 리스벳이 나타났다. 자세히 들여다본 뒤에야 그녀라는 것을 겨우 알아낼 수가 있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그는 가슴이 미어졌다. 문에 자물쇠가 채워진 것을 알고 놀란 순간부터 이 집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도깨비라도 나올 듯 심상치가 않았고, 답답한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리스벳의 모습을 보니 정말 전신이 오싹해졌다. 아름답고 기품이 있던 그녀는 무슨 일에도 공포에 떨고 지친 듯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얼굴은 창백하고 아무 장식도 없는 까만 옷차림으로 눈초리는 불안정했으며 불안에 차 있었다.
"실례합니다."
그는 말했다.
"하녀가 들여보내 주질 않았어요. 날 알아보지 못하겠소? 골드문트입니다. 아, 말 좀 해봐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정말인가요?"
그녀의 시선으로 보아 그를 겨우 알아보는 듯했고, 또한 그가 이 집에 좋은 인상을 남겨두고 떠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는 듯했다.
"골드문트라구요?"
그녀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예전의 그 오만한 티를 엿볼 수 있었다.
"애써 오셨는데 안됐군요. 아버님은 돌아가셨어요."
"그럼 작업장은 어떻게 되었죠?"
그는 안타깝게 말했다.
"작업장이라뇨? 잠궜어요. 일자리를 찾으려거든 딴 데 가서 알아봐요."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그는 정이 듬뿍 담긴 소리로 말했다.
"리스벳, 난 일자리를 찾고 있는 게 아니에요. 스승과 당신의 안부를 묻고 싶었을 뿐이라구요. 이런 소식을 들어야 하다니 정말 슬픕니다! 무척 고생하셨겠군요. 당신 아버지의 은혜를 고맙게 여기는 제자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주세요. 기쁘게 생각하겠습니다. 아, 리스벳! 당신이 이렇게 지독한 고생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제 가슴은 미어질 듯합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며,
"고마워요."
하고 짧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아버님이나 저에게 아무것도 도와줄 일이 없어요. 하녀가 당신을 바깥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노여움과 불안이 섞여 있었다. 만약 그녀에게 용기가 있었더라면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쫓아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벌써 아래층에 내려가 있었다. 노파는 그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문을 소리 나게 닫고 빗장을 질렀다. 빗장 두 개가 닫히는 거센 소리가 아직도 그의 귓전에 울렸다. 마치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소리처럼.
그는 어슬렁어슬렁 둑 있는 쪽으로 돌아와서 강가의 아까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갔다. 물결을 타고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가 앉아 있는 돌은 차가웠다. 강가의 오솔길에는 인적이 끊어지고 교각에 부딪치는 물소리만 들렸다. 물 밑바닥은 어둡고 황금빛 미광조차도 빛나지 않았다. '아, 내가 지금 곧 넘어져서 강물에 빠져 버리고 만다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세계는 죽음으로 차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밤이 되었다. 눈물이 흘렀다. 주저앉아 그냥 울었다. 그의 손과 무릎 위에 미더운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고인이 된 스승을 위해, 아름다움을 잃고 만 리스벳을 위해, 레네를 위해, 로베르트를 위해, 유태계 처녀를 위해, 공연히 낭비하고 시들어 버린 그의 청춘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늦게야 그는 이전에 그가 친구들과 자주 술을 마셨던 목로주점으로 들어갔다. 그 집 주인 여자는 골드문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한 덩이의 빵을 청했다. 그녀는 그것을 내다준 접시에다 친절하게 한 잔의 포도주까지 서비스해 주었다. 그는 빵도 포도주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그 가게의 의자에서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이튿날 아침, 주인 여자가 그를 깨웠다. 그는 일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빵을 먹었다.
생선 시장에 가보니 그 전에 하숙을 했던 집이 있었다. 우물 옆에서 몇 명의 생선 파는 여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 물고기를 팔고 있었다. 그는 통 속의 반짝거리는 싱싱한 물고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지난날에도 가끔 본 일이 있었다. 물고기한테 곧잘 동정을 해서 파는 여인들이나 사는 사람에게 화를 냈던 것이 생각났다. 어느 땐가 역시 아침이었는데 여기를 이렇게 걸으며 물고기를 아주 멋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몹시 서러워했던 때를 생각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많은 물이 강을 흘러 내려갔다. 그때 서러웠던 것은 잘 기억하고 있으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러워했던가를 이제는 기억하지 못한다. 슬픔도 사라져갔다. 고통도 절망도 사라져갔다.
환희와 함께 그것들도 지나가고 퇴색하고 깊이와 가치를 잃고 말았다. 결국에는 한때 그의 가슴을 그토록 쓰리게 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이젠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었다. 아, 고통도 시들어 말라버리는 것이다. 오늘의 그의 고통도 언젠가는 시들고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말 테지. 스승은 고인이 되었다. 그에 대한 원망을 품은 채 죽은 것이다. 이제는 그를 맞아줄 일터가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창작의 기쁨도 맛볼 수도, 가슴 가득 쌓여 있는 형상들을 재창조할 수도 없게 될 것인가? 그렇다. 이 고통, 이 쓰디쓴 괴로움도 언젠가는 낡고 시들고 말 것이다. 그것들도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아무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괴로움까지도.
물고기를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 그의 이름을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정답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골드문트."
새침한 소리였다.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니 다소 부석부석하고 핼쑥한, 그러나 까맣고 고운 눈을 한 나이 어린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그 소녀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골드문트! 당신 골드문트죠?"
그녀는 새침한 소리로 물었다.
"언제 다시 마을로 돌아왔나요? 날 모르겠어요? 나 마리예요."
하지만 그는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전에 하숙하던 집의 딸이라는 것, 그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나던 날 아침 일찍, 부엌에서 우유를 끓여 주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다 하고 난 후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 마리였다. 허리를 제대로 못 쓰는 연약한 아이였는데 그때는 정말 따뜻하게 그를 돌봐 주었다. 그는 이제서야 모든 것이 다시 생각났다. 그녀는 어느 추운 날 아침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떠나는 것을 몹시 서운하게 생각하고 우유를 끓여 주었던 것이다. 그가 키스를 해주자, 그녀는 성례라도 받는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정중하게 받아들였다. 그 후 그는 그녀를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때 그녀는 어린애였으나 지금은 커서 시원한 눈매를 지닌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리를 절며 걸어 다니는 게 가엾게 보였다. 그는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 마을에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마리는 그를 데리고 갔다. 그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이 아직도 걸려 있고 그의 빨간 루비 술잔이 난로 위 서가에 얹혀져 있는 방, 그는 그녀 부모의 방에서 점심을 먹고 며칠 묵어가기를 권유받았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쁘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스승의 집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니콜라우스는 페스트로 인해 죽은 것이 아니었다. 페스트에 걸린 것은 리스벳이었다. 그녀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리스벳의 아버지인 니콜라우스는 죽음을 각오하고 간호했으나 딸이 다 낫기도 전에 죽어 버렸다. 리스벳은 목숨은 건졌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터는 비어 있어요."
하고 하숙집 주인이 말했다.
"솜씨 있는 조각가한테는 좋은 보금자리가 될 거야, 돈도 넉넉히 있을 테고. 잘 생각해 보세요, 골드문트! 그녀는 싫다고는 하지 않을 거예요. 이 사람 저 사람 가릴 처지가 못 되니까요."
그는 다시 페스트가 유행했던 때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폭도들이 우선 병원에 불을 놓고, 다음에 부잣집 몇 채를 습격해서 약탈했다는 것, 주교가 도망치고 없었기 때문에 잠시 동안 동시는 질서와 안정을 잃고 말았다는 것 등을. 그때 마침 가까이에 계셨던 황제가 하인리히 백작을 총독으로 파견했다. 이 사람은 매우 과감한 사람이어서 몇 사람의 기사와 군인만으로도 도시의 질서를 회복했다. 하지만 이제는 총독의 통치가 끝나고 모두들 주교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총독은 시민들에게 너무나 많은 부담을 강요했다. 총독의 애첩 아그네스도 이제 질색이다. 그 계집은 정말 요녀다. 하지만 그들은 곧 물러갈 테지. 시의 참사회는 온정 많은 주교 대신에 저런 궁정 출신의 군인을 떠받들어야 하는 일에 벌써부터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총독은 황제의 총아요, 매일같이 공사다, 사절이다 해서 마치 왕후장상을 맞이하듯 하고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이번에는 골드문트에게도 그의 체험담을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씁쓸한 듯 말했다.
"이야기할게 별로 없어요. 나는 너무도 많은 길을 걷고 또 걸어다녔죠. 하지만 어느 곳엘 가도 페스트예요, 시체가 아무 데나 뒹굴고 있었지요.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공포 때문에 제정신을 잃고 흉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어요. 나는
요행히 살아남았죠. 언젠가는 모두 잊혀질 테죠. 돌아와 보니 스승도 이미 돌아가셨군요! 한 이틀 묵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떠나겠습니다."
그는 쉬기 위해 묵는 것은 아니었다. 실망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기 때문이요,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과 불쌍한 마리의 사랑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 보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겨우 우정과 동정뿐이었다. 하지만 조용하고 차근차근한 그녀의 사모의 정은 그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이곳에 단단히 붙들어 매어 둔 것은 일터는 없을지라도, 그리고 이것저것 아쉬운 것이 많을지라도, 다시
예술가가 되고 싶은 타는 듯한 욕구였다.
며칠을 두고 골드문트가 한 일이라고는 겨우 스케치가 고작이었다. 마리가 종이와 펜을 주선해 주었다. 그는 방안에 틀어박혀 스케치만 했다. 아무렇게나 회칠을 한 형상이나 기가 막힐 듯한 섬세한 형상 등으로 큼직한 종이에 하나 가득 채웠다. 충만된 마음속의 그림책을 종이 위에 옮겨 놓은 셈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레네의 얼굴을 스케치했다. 그 부랑자가 맞아 죽은 후, 만족과 사랑과 살인의 환희에 젖어 방긋 미소 짓던 레네의 얼굴을. 마지막 밤, 벌써 무형의 것으로 녹아버리고 말아 대지에 돌아가려 하던 레네의 얼굴을 스케치했다. 부모가 있는 데로 가까이 가려고 문턱 위에 주먹을 불끈 쥔 채 숨이 끊어진 농부의 아들을 스케치했다.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마차, 그것을 무거운 듯 끌고 가는 세 마리의 비쩍 마른 말, 그 옆에 페스트 예방용 까만 마스크의 틈새에서 음울한 눈알을 굴리며 기다란 막대기로 시체를 처리하던 인부들을, 그리고 레베카도. 까만 눈을 가진 늘씬한 유태계의 처녀, 그 뾰족하고 고집 센 입을, 고통과 분노에 찬 얼굴을, 사랑스럽고 곱상하고 부드러운 자태를, 거만하고 신랄한 입을. 그는 또한 자기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방랑자로서, 애인으로서, 생명을 앗아가는 저승사자에게 도망친 사람으로서, 생명의 기갈에 허덕이는 자들의 뒷 그늘에서 춤추는 자로서. 옛날에 본 리스벳의 거만하고 단단한 얼굴을, 늙은 하녀의 찌푸린 얼굴을, 니콜라우스 스승의 정답지만 무섭게 보이던 얼굴을, 온 정신을 다해서 백지 위에 그려 나갔다.
그리고 또 간혹 가느다랗고 어렴풋한 선으로 커다란 여인의 자태를 그렸다. 두 손을 무릎에다 공손히 얹고 우수에 잠긴 눈 아래 미소를 짓고 있는 대지의 어머니를 그는 윤곽만 그렸다. 스케치를 하는 동안 그의 마음은 물결을 타는 듯 했고, 손에는 감정이 넘쳐흘렀으며, 얼굴에는 자제의 기쁨이 번뜩였다. 며칠 사이에 그는 마리가 마련해 준 종이를 한 장도 남기지 않고 써버렸다. 마지막 종이의 한 조각을 잘라서 그는 거기에다 간략하고 가벼운 선으로, 고운 눈매와 체념한 입을 가진 마리의 얼굴을 스케치하여 그녀에게 선물했다.
이런 작업을 함으로써 울적함으로 꽉 막혀 넘쳐 버릴 듯한 그의 마음속 감정은 풀어지고 홀가분해질 수 있었다. 스케치를 하고 있는 동안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그의 세계는 책상과 하얀 종이뿐이었으며 밤이며 촛불이 더해졌다. 겨우 눈을 뜨고 근래에 체험한 것들을 기억 속에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는 예외 없이 새로운 방랑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을 보고, 재회와 이별이 반반씩 뒤섞인 기묘한 분열을 일으킨 감정으로 시내를 거닐기 시작했다.
그러는 도중 그는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를 보는 순간 혼란된 그의 모든 감정에 새로운 중심이 잡히게 되었다. 말을 탄 여인은 무언가를 탐내는 듯한 쌀쌀하고 푸른 눈,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몸매, 자만심과 관능의 호기심에
찬 화려한 얼굴, 키는 후리후리하고 밝은 금발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갈색 말을 타고 거만한 모습으로 남을 부리는데 익숙한 쌀쌀한 눈빛으로 온 세계의 냄새를 향해서 탐욕스럽게 코를 벌름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큼직한 입은 받는 것도 주는 것도 무한히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골드문트가 처음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여자를 가까이해 보고 싶다는 욕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여자를 정복한다는 것은 고상한 목표처럼 여겨졌다. 이 미녀 때문에 자유를 잃는 것도 아름답다. 이 여자 때문에 그의 생명도 아름답고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아그네스는 시종을 데리고 성문에서 나왔다. 그녀의 눈초리는 호전적인 동시에 얼마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뒤를 밟는 사나이를 찾았다. 그는 이미 거기에 와 있었다. 그녀는 시종을 보내 버렸다. 혼자서
터덕터덕 말을 몰고 천천히 다리를 건넜다.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낯선 이가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순례 사원인 성파이토로 가는 길 위에서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근방은 그때쯤 매우 한적했다. 여자는 얼마 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낯선 사나이는 천천히 걸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가기는 싫었던 것이다. 얼굴에는 싱싱한 미소를 지으면서 진홍색 들장미의 열매가 달린 작은 가지를 입에 물고 그는 다가왔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말을 붙들어 매고 거치 돌담의 담쟁이덩굴에 기대서서 뒤에서 다가오는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그녀와 마주치자 그는 모자를 벗었다.
"왜 내 뒤를 밟는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오."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 자신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부인이여, 그런 다음에 당신 뜻대로 날 처분해 주십시오."
"좋아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 하지만 이런 바깥에서 아무런 위험도 없이 꽃을 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가는 큰 오산이에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만일의 경우 생명까지도 내걸 수 있는 사나이뿐이니까요."
"당신은 날 지배할 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목에서 황금 목걸이를 풀어 그에게 내밀었다.
"당신의 이름은 대관절 무엇이죠?"
"골드문트."
"좋아요. '황금의 입술!' 당신의 입술이 얼마나 달콤한지 맛보겠어요. 이 목걸이를 저녁때 성에 가져와서 당신이 찾은 거라고 말하세요. 이걸 손에서 놓치면 안 돼요. 내가 당신 손에서 건네받을 테니까요! 사람들이 당신을 거지라고 생각하더라도 지금 입고 있는 그대로 와야 해요. 하인들 가운데 누가 당신에게 고함을 질러도 그대로 있어야 하구요. 내가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 부하는 성 안에 단지 둘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마부 막스와 시녀 베르타 둘 중에 하나를 붙들어야만 내가 있는 데로 안내를 받을 수 있어요.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백작도 포함해서 경계해야 해요. 모두 적이니까 말이에요. 당신의 생명이 안전하기를 바라겠어요."
그녀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가볍게 입 맞추고 그의 뺨에 대고 살짝 문질렀다. 그러고는 그 목걸이를 집어넣고 언덕을 내려가 마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포도밭은 벌써 잎의 색깔이 변해가고 있었다. 나무들에서 누런 잎사귀들이 하나씩 하나씩 바람에 밀려왔다.
골드문트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그립고 사랑스런 도시라는 생각이 들자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렇게 고통과 괴로움조차 무상하다는 생각으로 서러워했는데, 지금은 마치 황금빛 잎사귀가 가지에게 떨어지는
것처럼 그때의 감정은 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 여자에게서 비쳐 나오는 사랑만큼 강하게 그에게 다가온 사랑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 고귀한 자태와 황금색의 화려하고 충만된 생명은 어릴 적 마리아브론에서 가슴에 지니고 있었던 그의 어머니의 형상을 생각나게 했다. 세계가 다시 한 번 기쁨으로 그의 눈에 비쳤으며, 생명과 기쁨과 청춘의 물결이 넘쳐흐를 듯 밀어닥치며 그의 핏속을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까지 살아있다는 것, 흉측스런 이 수개월 동안에 죽음을 피할 수가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저녁때, 그는 성으로 들어갔다. 성의 안마당에는 갖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말에서 안장을 내리기도 하고 심부름꾼들이 바쁘게 오가기도 했다. 신부들이나 고위 성직자들의 조그만 행렬이 하인들의 인도로 이쪽 문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갔다. 골드문트는 그 뒤를 따라가려고 했으나 곧 문지기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는 황금 목걸이를 꺼내서 이것을 부인 자신과 시녀 이외의 사람한테는 내주지 말 것을 분부받고 왔다고 했다. 문지기는 하인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지키게 하고 현관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하녀 한 명이 나타나 옆을 지나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당신이 골드문트인가요?" 하고 묻더니 그에게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그녀는 문 하나를 지나서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는 조그만 방에 안내되었다.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옷과 망토가 잔뜩 걸려 있었다. 갖가지 구두가 활짝 열어 놓은 장롱 속에 줄을 지어 있었다. 그는 여기서 잠시 동안을 서서 기다렸다. 향수를 뿌린 옷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손으로 털가죽을 만져 보기도 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거기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쪽 문이 열렸다. 아그네스였다. 그녀는 흰 모피 깃을 단 엷은 하늘색 옷을 입고 골드문트에게로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걸어와서는 차디찬 눈매를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기다리게 했군요."
아그네스는 나지막히 말했다.
"하지만 안심해도 돼요. 교구의 사신이 백작한테 와 있거든요. 백작은 그와 식사도 하고 또 오래오래 이야기도 할 거예요. 신부들과의 이야기는 언제나 오래 걸리지요. 그 동안 당신과 나의 시간이에요. 자, 이리 오세요, 골드문트."
그녀는 그에게 허리를 굽히며 다가왔다. 애틋하게 목말라 하는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 가까이에 왔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최초의 키스를 나누었다. 잠깐 동안 주저하다가 그는 아그네스의 목덜미에 손을 휘감았다. 그녀는 문을 지나서 그녀의 침실로 그를 안내했다. 거기는 높은 곳에 밝게 양초가 밝혀져 있었다. 식탁에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익숙하게 빵과 버터와 약간의 고기를 그의 앞에다 갖다놓고 아름답고 푸른색이 감도는 술잔에다 백포도주를 따랐다. 그들은 똑같이 푸른 잔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
두 사람의 손은 서로를 더듬으며 애무했다.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날아온 거죠?"
그녀는 물었다.
"아름다운 나의 새여, 당신은 군인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노름꾼인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불쌍한 떠돌이인가요?"
"나는 당신이 원한다면 모든 것이지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완전히 당신 것이요. 원하신다면 나는 노름꾼이 되겠소. 당신은 나의 달콤한 기타예요. 내가 손가락을 당신 목덜미에 놓고 당신을 악기로 켜면 천사의 노랫소리가 들린답니다. 자, 그리운 이여, 나는 당신의 맛있는 과자를
먹고, 당신의 백포도주를 마시기 위해 온 것은 아니오, 나는 단지 당신 때문에 온 거라오."
그는 그녀의 목에서 모피 깃을 풀고 옷을 천천히 벗겼다. 바깥에서 수도사들이 의논을 하고 있든, 하인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가든, 가느다란 초승달이 숲 그늘로 온통 사라지든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낙원 동산이 그들의 위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서로 끌어당기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향내나는 낙원 동산의 어둠 속으로 헤매어 들어갔다. 하얀 꽃의 비밀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애정과 감사의 정이 얽힌 손으로 목말라 애태우는
낙원 동산의 과실을 땄다. 이 노름꾼은 이런 기타를 여태껏 켜본 적이 없었다. 기타는 기타대로 이처럼 강하고 익숙한 손가락 밑에서 올려 본 적이 없었다.
"골드문트."
아그네스는 숨을 내쉬며 타오르듯 그의 귀에 대고 소곤댔다.
"아, 당신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를 마술사 같아요! 달콤한 금붕어, 난 당신이 아이를 갖고 싶어요. 아니 그보다도 차라리 당신 옆에서 죽고 싶어요. 날 삼켜 버리세요. 그리운 내 님이여, 아니, 날 죽여 줘요!"
차디찬 그녀의 눈 속에 있는 오만이 눈 녹듯 없어져가는 것을 보자 그의 목구멍 한복판에서 행복의 가락이 웅얼대고 있었다. 애욕을 이기지 못하는 몸부림과 죽음, 바로 그것처럼 그 여자의 두 눈동자 속에서 떨림이 스쳐 지나갔다. 숨이 끊어져가는 물고기의 비늘 위에서 은빛 떨림이 꺼져가듯, 물 밑바닥이 이상야릇한 그 미광이 노란 금빛으로 깜박이듯, 무릇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행복이 이 한순간에 응결되고 만 것 같았다.
아그네스가 아직도 눈을 감은 채 몸을 사시나무 떨듯 누워 있을 동안, 그는 살짝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그리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여자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아름다운 내 사랑이여, 나는 널 버릴 것이다. 난 죽고 싶지 않아. 당신의 백작에게 맞아 죽기는 싫어. 그보다 나는 오늘 한 것처럼 한 번 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한 번 더, 아니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그가 옷을 다 입을 때까지 아그네스는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누어있었다. 그는 그녀 위에 이불을 살짝 덮어 주고 그녀의 눈에 키스해 주었다.
"골드문트."
그녀는 말했다.
"오, 당신은 꼭 떠나야만 하나요! 내일 또 와요! 위험하면 미리 내가 알려 줄게요. 또 와요! 내일 또 와야 해요!"
그녀는 방울끈을 당겼다. 의상실 문에서 아까 그 시녀가 그를 맞이해 성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시녀에게 금화 한 잎을 건네주고 싶었으나 그는 자기의 빈곤을 느끼고 부끄럽게 여겼다.
자정이 될 무렵에야 그는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밤이 깊어서 모두들 자고 있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바깥문이 열려져 있었다. 조심스레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그의 방은 부엌을 통해야만 갈 수 있었다. 거기에 불이 켜져 있었다. 희미한 석유 등잔불에 비치어 마리가 조리대 옆에 앉아 있었다. 오랜 동안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든 것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그녀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아."
그는 말했다.
"마리, 아직 안 잤니?"
"자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안 그러면 당신이 돌아왔을 때 문이 잠겨져 있었을 테니까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한걸, 마리. 너무 늦었어. 화내지 마, 응?"
"난 당신한테 화내지 않아요, 골드문트, 좀 서운할 뿐인 걸요."
"서운할 것 없어."
"아, 골드문트. 내가 몸도 튼튼하고 아름답고 다리를 절지 않는다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밤에 다른 집에 가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내 곁에서 조금은 사랑도 해주실 테니까요."
그녀의 부드러운 음성에는 희망의 느낌이 없었다. 슬픔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며 그는 그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가 한없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뭐라 말할 수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선 채 몸을 바르르 떨더니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수줍은 듯 말했다.
"자리로 들어가요, 골드문트.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군요. 이제 졸려서요. 안녕히 주무세요."
16.
행복하고 초조한 하루를 골드문트는 언덕 위에서 보냈다. 말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스승이 만든 아름다운 마리아 상이 있는 수도원에 당장이라도 찾아갔을 텐데. 그것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난밤에는 니콜라우스 스승을 꿈속에서 본 것 같았다. 그 꿈을 재현시킬 수는 없을까? 아그네스와의 사랑이 아무리 짧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오늘은 아무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기 싫었다. 따스한 가을날을 나무와 구름 밑에서 보내고 싶었다. 그는 마리에게 시골길을 한없이 걷고 싶다며 빵을 많이 부탁했다. 그리고 늦을 거라며 그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낡은 그이 가방에다 빵과 사과를 잔뜩 채워 주며 낡은 그의 웃옷을 손질해 주었다. 그것은 그가 돌아온 첫날 꿰매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그를 보냈다.
그는 개울을 건너고 빈 포도밭을 지나 경사진 높은 계단을 올라갔다. 높은 숲속에 들어가고 말았으나 산머리에 올라설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산머리에 올라서 보니 앙상하게 서 있는 나무가지들의 사이에서 햇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발소리에 놀란 티티새가 수풀 속으로 날아가 겁을 먹은 듯 웅크리고 앉아 눈을 반짝이고 있었고 발아래 쪽으로는 푸른 활 모양으로 강이 흘러가고 집들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깔려 있었다. 그곳에서는 기도 시간의 종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 산머리에는 옛날 이교도 시대의 적운 성벽과 보루가 잡초에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성 같기도 하고 무덤 같기도 했다. 그는 보루 위에 걸터앉았다. 말라서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는 가을 풀밭에 앉아 널찍한 골짜기 전체와 강 저쪽의 언덕과 산들을 건너다보았다. 산마루들이 굽이쳐 흘러 마지막에는 산맥과 하늘의 푸른색을 띤 색깔 속에 융합되어 산인지 하늘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는 한때 이 넓은 강산을 하나 남기지 않고, 눈이 가 닿지 않는 아득한 저쪽까지 그의 발자국을 남겼던 것이다. 이제는 멀리 떨어져 있고 추억 속에 잠겨 있는 이 강산 전부가 한때는 현실로서 그의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숲속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잠을 잤고, 굶주리고 헐벗었던 것이다. 이들 산들의 중턱과 황무지의 벌판을 떠돌며 슬퍼하기도 하고 기운을 얻기도 했던 것이다. 머나먼 저곳 어디에, 선량한 레네의 불에 탄 뼈다귀가 놓여 있을 것이다. 저쪽 어딘가에 그의 길동무였던 로베르트가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다면 여전히 배낭을 둘러메고 떠돌아다니고 있을 테지. 저쪽 어딘가에 죽은 빅토르가 누워 있을 것이다. 저쪽 어딘가 머나먼 곳에는 요술에 걸린 것 같았던 그의 소년 시절의 수도원이 있었다. 아름다운 딸들이 있던 기사의 성이 있었고, 불쌍한 레베카는 애처롭게 쫓겨 달아나다가 죽었을 것이다.
멀리 흩어져 있는 그 수많은 곳, 이들 황무지의 들판이나 숲, 도시들이나 여러 마을들, 산성이나 수도원, 모든 사람들, 그것들이 모두 살았든 죽었든 그의 마음속에, 그의 추억 속에, 그의 사랑 속에, 그의 회한 속에 그의 동경 속에 존재하고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죽음의 사자에게 잡혀간다면 여자도 사랑도 여름철 아침과 방랑의 밤으로 가득 찬 그림책 전체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 테지. 아, 지금 무엇인가를, 나 자신보다도 더 오래갈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둘 시기라는 것을 느꼈다.
오늘까지의 이런 생활 가운데서 이런 방랑을 통해서, 이 세상을 두루 편력하기 시작한 긴 세월 동안 결과로 남아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겨우 남아 있다는 것이란 그가 지난날 일터에서 만들었던 한두 개의 조각품, 특히 요한 상과 그 그림책, 그의 머릿속에 있는 비현실적인 세계, 아름다우면서도 고통스런 추억만 그려진 세계뿐이었다.
이 마음속의 세계에서 몇 개를 밖으로 표현해 낼 수가 있을까? 항상 새로운 도시, 새로운 경치, 새로운 여자, 새로운 체험, 새로운 형상 등이 차례차례로 쌓여갈 뿐, 그 사이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불안정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움과 괴로움에 넘쳐흐르는 마음뿐일까? 일생 동안 바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모멸적인 것이다!
그는 웃고 싶었고, 그리고 울고도 싶었다. 생활을 즐기거나 감각을 만족시키기도 하고, 옛 어머니 이브의 젖가슴을 애무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물론 더할 나위 없는 향락은 얻을 수 있겠으나 인생의 덧없음을 막을 재주는 없었다. 그런 경우에는 숲속에 있는 버섯과 마찬가지로 오늘은 아름다운 색깔로 뽐낼 수는 있으나 내일은 썩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 세속으로 나와서 일터에 틀어박혀 덧없는 생명을 위해 기념비를 세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생활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할 경우 인간은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 물론 영구적인 것에 봉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감각은 바싹 말라 버리고 생활의 자유와 충실과 즐거움을 잃고 만다. 니콜라우스 스승의 생활 방식이 바로 그러하지 않았는가?
아, 이 전체적인 생활은 그 두 가지를 다 같이 얻을 수 있고 그런 멋없는 양자택일에 의해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생활을 희생시키지 않는 창작! 창조의 고귀함을 버리지 않는 생활! 그것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것인 가능한 인간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테지. 충실하면서도 관능의 향락을 잃어버리지 않는 남편, 그런 가장이 있었을까. 안정된 사람으로서 자유와 위험의 결여 때문에 마음을 메마르게 만들어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을까? 필경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을 그는 아직 보지 못했다. 무릇 생존은 이원과 대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와 남자, 떠돌이와 평범한 시민, 이성과 감정, 끌어당기는 입김과 토해내는 입김, 남자인 것과 여자인 것, 자유와 질서, 충동과 정신, 그 양자를 동시에 체험할 수는 도저히 없다. 항상 어느 한 쪽을 메우기 위해서는 다른 쪽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욱이 그 어느 것이나 동시에 중요하고 열망할 가치가 있었다. 여자 편이 그 점에 있어서는 훨씬 쉬운 것 같았다. 여자에게는 천성, 즉 쾌락이 자연히 결실을 맺고, 사랑의 행복에서 어린애가 태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남자의 경우를 보면 이 단순한 잉태 대신에 영원한 동경이 있었다. 모든 것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하느님은 대관절 어떤 적개심에 불타고 있는 것일까? 자기 자신이 창조한 것에 대해서 돌아서서 심술궂게 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하느님이 새끼사슴이나 수사슴, 물고기나 새, 숲과 꽃, 사계절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심술궂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하느님이 만드신 것에도 결점이 있었다. 그것이 실패를 했든, 불완전하든, 또 인간이라는 존재의 틈바구니와 동경에 대해서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있든, 혹은 이것이 악마의 싹, 즉 원죄이든. 하지만 도대체 왜 이 동경과 불만을 원죄라고 하는 것일까? 인간이 만들고 감사의 제물로서 하느님에게 돌려 준 모든 아름다운 것과 신성한 것은 그 동경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서 발생했단 말인가?
그런 생가에 머리가 어지러워져 그는 눈길을 시내로 돌려 생선 가게며 다리, 성당 등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성도 있었다. 지금 하인리히 백작이 통치하고 있지만 당당한 주교의 본부였다. 그 탑과 길쭉한 지붕 밑에 아그네스가 살고 있다. 아름다운 여왕 같은 그의 애인이 살고 있다. 그녀는 몹시 거만해 보였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그런 여자였다. 그 여자 생각이 떠오르자 기쁨이 솟았다.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뒤섞여 그는 지난 밤의 일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그 밤의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그 굉장한 여자를 그처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그의 생활 전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자들한테서 얻은 모든 경험, 모든 방랑의 괴로움, 날마다 밤을 새우며 헤매이던 눈 덮인 허허벌판의 밤, 짐승, 꽃, 나무, 물, 물고기, 나비들과의 우정 어린 교제 등, 그런 모든 것이 필요했다. 거기다가 또 쾌감과 위험 속에서 예민해진 감각, 고향을 잃은 생활, 마음속에 다녀간 쌓여진 그림의 세계 전체가 필요했다. 그가 아그네스처럼 마법의 꽃이 피는 정원에서 생활할 동안에는 그는 탄식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가을이 짙은 언덕 위에서 방랑과 휴식과 굶주림과 아그네스와의 저녁 등을 생각하거나 혼자 중얼거리며 하루 종일을 보냈다. 땅거미가 질 무렵 그는 다시 시내로 내려와서 성 가까이로 갔다. 밤은 싸늘했다. 집집마다 고요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며 가는 소년들의 작은 행렬과 마주쳤다. 그들은 홍당무를 막대기에 끼워서 메고 갔다. 홍당무에는 얼굴들이 새겨져 있고 불이 켜진 양초가 꽂혀져 있었다. 그 작은 가장 행렬은 겨울의 냄새를 싣고 왔다. 골드문트는 눈가에 웃음을 띠면서 그들을 바래다주었다.
오랜 시간을 그는 성 앞에서 서성거렸다. 교구의 사신은 아직 머물고 있었다. 그 근처 어느 창문 앞에 신부인 듯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그는 성안으로 기어 들어가서 시녀 베르타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의상실에 숨어서 아그네스를 기다렸다. 아그네스가 와서 그를 방안으로 안내했다. 그 여자는 애정 어린 눈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애정은 있었지만 조금도 기쁨은 없었다. 그녀는 어쩐지 슬픈 표정이었다. 상심한 것 같기도 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골드문트는 진땀을 빼야만 했다. 그의 키스와 사랑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 가운데 그녀는 서서히 힘을 얻고 자신을 회복하게 되었다.
"당신은 정말 친절하신 분이군요."
그녀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말했다.
"나의 아름다운 새여. 당신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그윽해요. 골드문트, 당신을 사랑해요. 여기서 멀리 도망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여기 있기가 견딜 수 없이 싫어요. 그렇잖아도 어차피 끝난 거예요. 백작은 불려갈 테니까요. 이제 곧 주교가 돌아올 거예요. 백작은 오늘 신부들한테 시달렸기 때문에 화가 나 있어요. 아, 당신이 백작에게 발각되지 않으면 좋겠어요! 만약 발각되는 날이면 한 시간도 더 살 수가 없겠지요. 난 무엇보다 당신이 걱정이에요."
그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졌던 목소리가 솟아올랐다. 리디아가 사랑과 불안에 휩싸여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랑과 불안과 근심에 휩싸여 공포의 흉악스런 정경을 머리에 그리면서도 리디아는 밤에 그의 방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그런 말을, 애정과 불안에 들뜬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비밀이 없는 사랑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위험이 없는 사랑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아그네스를 그의 가슴에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머리를 어루만지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다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걱정해 주는 것을 보니 마음이 울렁거리고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그의 애무를 받아들이고, 사랑에 몸부림치며 그에게 안겼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의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가까이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 발자국 소리가 방 쪽으로 가까워졌다.
"아, 그 사람이에요."
아그네스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백작이에요. 빨리요. 의상실을 나가면 도망칠 수 있어요. 얼른 들키지 않도록 해줘요!"
그녀는 다급히 그를 의상실로 밀어넣었다. 그는 혼자서 머뭇거리면서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었다.
백작이 아그네스와 큰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옷 사이로 손을 더듬어 출입문을 향해 소리를 죽여 걸음을 옮겼다. 겨우 복도로 통하는 문 옆에 와서 살짝 열려고 했을 때 바로 그 순간 바깥에서 자물쇠를 채운 것을 알고 그의 가슴은 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가 여기에 들어오고 나서 누가 문에 자물쇠로 채워 버렸다는 것은 나쁜 우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제는 마지막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남몰래 들어왔을 때 누가 그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그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러자 '들키지 않도록 해줘요!'라고 한 아그네스의 작별 인사가 생각났다. 그렇다, 그녀가 봉변당해서는 안 된다. 그의 심장은 쉴 새 없이 고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은 결심이 그의 마음을 단단하게 했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것은 모두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윽고 저쪽에서 문이 열렸다. 아그네스의 방으로부터 백작이 들어왔다. 왼손에는 촛대를, 오른손에 칼을 빼어 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골드문트 가까이에 걸려 있는 옷가지와 외투 따위를 재빨리 걷어내려 팔에 걸었다. 도둑이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보면 그게 유일한 해결책인지도 모른다.
백작은 곧 그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누구냐? 여기서 대체 무얼 하느냐? 대답을 해. 안 그러면 찌르겠다."
"용서해 주십시오."
골드문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가난뱅이입니다. 나리께서는 이렇게 부자가 아니십니까? 제가 훔친 것은 몽땅 돌려드리겠습니다. 나리! 자,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 옷가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래, 도둑놈이란 말이야. 이런 것에 생명을 내걸다니 영리하지 못한 자식이구나. 네 이놈, 이 도시에 사는 놈이냐?"
"아닙니다. 저는 집도 갈 곳도 없는 놈입니다요. 가난뱅이입죠.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닥쳐라! 네놈이 귀부인을 욕보이려고 할 만큼 대단한 놈인지 어떤지를 난 알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네놈은 아무튼 죽은 몸이니 그런 건 조사할 필요도 없다. 도둑놈인 것만으로 충분해."
그는 잠겨져 있는 문을 세게 두들기며 문을 열라고 소리 질렀다. 밖으로부터 문이 열리고 부하 세 사람이 칼을 빼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놈을 잘 묶어라."
백작은 조롱과 거만에 섞인 거친 소리로 고함쳤다.
"여기서 도둑질을 한 부랑배다. 이놈을 감금해 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교수대에 매달아라."
골드문트는 저항도 하지 않고 두 손을 밧줄에 묶였다. 그는 그렇게 묶인 채 긴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서 안마당을 지나갔다. 하인 하나가 등불을 들고 앞서갔다. 그들은 쇠창살을 두른 지하실의 둥그런 문 앞에서 멈췄다. 말이
오가고 야단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문의 열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부하 하나가 등불을 받아들었다. 하인이 열쇠를 가지러 달려갔다. 이렇게 하여 무장한 세 사람과 묶인 그는 함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때 이 성에
손님으로 와 있던 많은 사제들 가운데서 두 사람이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성 안의 성당 쪽에서 온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부하와 묶인 사나이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골드문트는 사제도, 그를 지키고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불을 얼굴 바로 앞에 갖다 대어서 그의 두 눈이 타오를 듯했기 때문에 가물거리는 불빛 외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어둠 한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불빛 뒤에서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와들와들 떨면서 죽음을 본 것이다. 그는 두 눈을 한곳에 집중시킨 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고 서 있었다. 사제 중에서 한 사람이 열심히 부하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놈은 죽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도둑놈입니다."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사제는 이 사람이 고해 신부한테 고해를 했느냐고 물었다.
"아뇨, 현행범으로 지금 곧 잡혀왔습니다."
"그렇다면,"
하고 사제는 말했다.
"내일 아침 미사 전에 성병을 가지고 이 사람한테 와서 고해를 들어 주겠다. 너희들은 그 전에 이 사람을 데리고 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돼. 백작하고는 오늘 중으로 이야기를 하겠다. 이 사람은 도둑질을 했을지 모르지만 모든 그리스도 교도나 마찬가지로 고해 신부에게 고해를 하고 성병을 받을 권리가 있다."
부하들은 감히 반대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들이 이 신부들을 알고 있었다. 백작한테 오는 사신들 중의 하나로, 백작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본 일이 있었다. 가난한 도둑놈이라고 해서 고해를 받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사제들은 물러갔다. 골드문트는 여전히 서서 두 눈을 한 곳에 모으고 있었다. 이윽고 하인이 열쇠를 가지고 와서 문을 열었다. 그는 아치형 천장의 지하실 안으로 끌려갔다. 그는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몇 개의 계단을 미끄러져 내렸다. 등받이 없는 의자 몇 개와 테이블이 있었다. 그곳은 포도주 저장 창고 앞에 있는 방이었다. 그들은 조그만 의자를 테이블 옆으로 가지고 와서 거기에 앉으라고 명령했다.
"내일 아침 일찌감치 신부님이 올 거다. 그러면 고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부하 중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그런 뒤 그들은 문 밖으로 나가서 육중한 문에 조심스레 자물쇠를 채웠다.
"이봐요, 불은 놓고 가줘요."
골드문트가 부탁했다.
"안 돼, 이런 게 있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몰라. 얌전하게 벌을 받도록 마음이나 단단히 먹고 있어. 이 불을 준대도 한 시간도 채 못 돼서 다 타버리고 말걸. 자, 그러니 잠이나 푹 자도록 해."
그는 어둠 속에 혼자 남겨졌다. 조그만 의자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이런 식으로 앉아 있다는 것은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너무 꽉 졸라매 손목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앉아서 머리를 테이블 위에 얹어 놓고 있었다. 이제는 운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영원처럼 기나긴 시간을 그렇게 앉은 채 비통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채우려고 했다. 곧 밤이 시작된다. 이 밤의 종말은 곧 그의 종말이기도 했다. 그는 내일이면 살이 있는 목숨이 아닐 것이다. 그는 목이 매달려 새들이 와서 앉거나 주둥이로 쪼아 먹는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도 죽은 니콜라우스 스승처럼, 통나무집에서 불에 타죽은 레네처럼, 그리고 마차 위에 실려간 수많은 송장들처럼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가 아직 헤어지지 못한 것이, 이별을 고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고작 몇 시간의 밤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아그네스와 이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탄력 있는 몸집을,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차갑고 푸른 두 눈을, 향기로운 살갗의 달콤한 황금빛 잔털을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잘 있거라, 그 푸른 두 눈이여! 잘 있거라, 이슬에 촉촉이 젖은 가냘프게 떠는 입술이여! 아직도 몇 번이나 더 그 입술에 키스하리라고 믿었는데. 아, 오늘도 언덕 위의 늦가을의 햇볕에서 그는 얼마나 그녀 생각을 하고 그 여자를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했던가. 그리고 그는 언덕에게, 나무에게, 숲에게, 흰 구름이 떠도는 푸른 하늘에게, 사계절에게 이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리는 지금도 자지 않고 있을까? 선량한 사랑의 눈길을 가진 마리,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는 불쌍한 마리. 그녀는 앉아서 기다리다 부엌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이따금 눈을 뜰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골드문트는 집에 돌아갈 수가 없다.
아, 종이와 연필이, 지금부터 만들 예정이었던 수많은 형상에의 희망이 그 모두가 저 멀리 가고 말았다! 나르치스와 그리운 사도 요한과의 재회의 희망도 포기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의 두 손에게, 자신의 두 눈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에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게도, 사랑과 슬픔에게도, 기타를 치는 것에도, 잠에도, 눈이 떠 있는 것에도, 모든 것으로부터 이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일은 새가 하늘을 날더라도 볼 수가 없으리라. 창가에 기대어 소녀가 노래를 불러도 이제 그는 그 노래를 들을 수가 없으리라.
시냇물은 흐르고 물고기는 묵묵히 헤엄쳐간다. 바람이 불어 땅바닥의 노란 잎사귀를 쓸어간다. 태양이 빛나고 하늘은 맑다. 젊은 사람들은 춤추는 곳을 찾아가고, 첫눈이 먼 산에 쌓인다. 모든 것이 그렇게 계속된다. 나무들은 모두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람들은 모두 생기에 가득 찬 눈으로 즐겁거나 슬프게 쳐다본다. 개들은 짖어대고, 암소들은 이 마을 저 마을의 외양간에서 음매 하고 운다. 모든 것이 그대로 인데 그만 없다. 이제 모든 것은 그의 것이 아니고 모든 것에서 그는 떨려나고 말았다.
그는 황야의 아침 냄새를 맡았다. 달콤하고 신선한 포도주와 고소하고 단단한 호두 맛도 보았다. 하나의 기억과 다채로운 세계 전체의 눈부신 반사가 가위눌린 그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아름다우면서도 뒤엉킨 생활 전체가 가라앉을 듯, 이별을 고하듯 하며 그의 마음 전체를 한 번 더 뚫고 비쳤다.
치밀어 오르는 고통에 그는 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는 두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흐느껴 울면서 격동에 자신을 맡겼다.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쓰러질 듯 그는 끊임없이 고통에 몸을 맡겼다.
아, 골짜기여, 수풀에 뒤덮인 산이여, 푸른 오리나무 숲속을 흘러내리는 개울이여, 소녀들이여, 다리 위의 달밤이여, 아, 빛에 춤추는 아름다운 그림의 세계여, 어쩌면 너를 잃어버릴 수가 있단 말이냐! 그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어린아이와도 같이 테이블 위에 쓰러졌다. 고뇌하는 가슴 밑바닥에서 한숨과 애원에 비명이 치밀어 올라왔다.
"아아, 어머니, 어머니!"
그가 이 마법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기억의 한구석에서 하나의 형상, 즉 어머니의 형상이 그에게 대답을 해왔다. 그것은 이제껏 그의 사상이나 예술가의 꿈으로 그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그 자신의 어머니 형상이었다. 수도원
생활 이후에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자신에 찬 아름다운 어머니의 형상이었다.
그는 그 어머니한테 그의 애달픔을 호소하고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는 그 어머니한테 몸을 맡겼다. 숲과 태양과 두 눈, 그리고 그의 두 손과 그의 전 존재와 생활을 그 어머니의 두 손에 모두 돌려줬다.
흐느끼면서 그는 어느덧 잠이 들었다. 극도의 피로와 졸음이 어머니처럼 그를 팔에 안아들였다. 한두 시간 잠을 자고 나면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심한 고통을 느꼈다. 묶인 손목이 무척이나 쓰리고 아팠다. 등과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듯한 고통이 스쳐갔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처지를 다시 인식했다. 그의 주변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그가 얼마나 잠을 잤는지 자신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이 순간에 백작의 부하들이 달려와서 그를 죽음의 장소로 데리고 가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는 문득 신부가 그를 찾아온다는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완전한 석방과 죄악의 용서도 그를 천국으로 이끌고 갈 수는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런 것에는 벌써 오래 전부터 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영원이라는 것이 있든 없든 - 그는 그러한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 불안하고 무상한 이 생명, 이 호흡이 피부 속을 내 집으로 삼고 있다는 것,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는 바라지 않았다. 산다는 것 이외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미친 듯 그는 일어나 어둠 속을 비틀거리며 벽에까지 더듬어가서 벽에 똑바로 기대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구원의 손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신부가 구원의 손길이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신부한테 그의 무죄를 믿게 할 수가 있을까? 그를 위해 말이라도 좀 해줄까? 연명이나 혹은 도망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 주지 않을까? 그는 열심히 생각에 몰두했다.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손 치더라도 그는 단념하고 싶지 않았다. 승부에서 졌다고만 단정할 수 없었다. 우선 신부를 내 편에 끌어넣는 데 애를 써본 후 그 다음은 그를 매혹시켜 놓고, 그를 납득시키고. 신부만이 그의 유일한 숨겨진 카드 였다. 다른 가능성은 모두가 다 허황된 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우연이.... 형리가 심한 복통을 일으킨다든가, 교수대가 망가진다든가, 미리 생각지도 않던 도망칠 가능성이 생길수도 있었다.
골드문트는 죽음을 거부했다.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솟구쳐 오르는 삶의 욕망은 소용없었다. 그는 방위에 저력을 다해 마지막 고비까지 싸울 결심을 했다. 문지기의 발을 걷어차거나, 형리를 넘어뜨리거나, 최후의 순간까지 모든 힘을 다하여 생명을 보전해 나갈 것이다.
아, 신부를 움직여서 두 손의 포승을 끄를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 동안에도 그는 고통을 무릅쓰고 이로 포승을 풀려고 애를 썼다. 사나운 개와도 같이 필사적인 노력으로 기나긴 시간을 들여 포승이 어느 정도 늦추어졌다고 생각될 때까지 계속했다.
그는 습기찬 지하실의 벽을 더듬으며 한 발 두 발 옮기면서 튀어나온 모서리는 없는가 하고 자세히 찾아보았다. 그때 이 지하실 감옥에 들어왔을 때 헛디딘 계단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쉽게 발견되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돌계단의 모서리에다 온힘을 다해 포승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려웠다. 포승 대신에 손의 관절이 모서리에 닿아 불덩이같이 달아올랐다. 그는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문틈으로 아침의 햇살이 희미하게 비칠 때쯤 드디어 그는 목적에 달성했다. 포승이 끊어진 것이다. 그는 포승을 풀어 버렸다. 그러나 두 손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손가락을 제대로 놀릴 수가 없었다. 두 손은 부르텄고 감각이 없었다. 팔은 어깨까지 뻣뻣이 굳어져 있었다. 그는 손과 팔을 움직이며 피가 다시 제대로 돌도록 무리를 해서 눌러 보았다. 방금 그는 썩 훌륭하게 계획을 짰다. 신부에게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할 때에는 잠시라도 단 둘이 있게 될 때 신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의자 하나만 가지고서라도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테지. 목을 졸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팔의 힘이 모자랐으니까. 어쨌든 신부를 죽여서 얼른 신부의 옷을 바꾸어 입고 탈출하는 것이다. 신부가 맞아 죽은 것을 다른 사람이 발견하기 전에 그는 성에서 빠져나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다음에는 쉬지 않고 달아나는 것이다. 마리가 집안에 숨겨 줄 테지. 그렇게 하도록 애써야만 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골드문트는 그의 생전에 지금처럼 날이 새는 것을 애타게 기다리며, 더구나 이 시간만큼 무서워 전신을 떤 적은 없었다. 긴장과 기대로 이를 달달 떨었다. 그는 사냥을 하는 포수의 눈초리로 문의 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가냘픈 빛줄기가 차츰차츰 밝아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테이블 있는 데로 돌아갔다.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조그만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시늉을 해보려고 했다. 포승이 풀어져 있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었다. 두 손을 마음대로 놀릴 수 있게 되고부터 그는 죽음을 믿지 않았다. 탈출할 생각이었다.
설령 그 때문에 전 세계가 산산조각이 난다거나 또다른 어떤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의 몸은 자유와 생명에의 염원에 떨고 있었다.
바깥에서 도와주러 오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다. 아그네스는 여자요, 그 여자의 힘은 별 것 아니다. 아마 그녀의 용기도 그럴 것이다. 그녀가 그를 저버린다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좀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 바깥에 시녀 베르트가 살며시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또한 아그네스가 심복같이 부리고 있다던 마부가 있지 않은가?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아무 신호도 없을 때에는 그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된다. 실패한다면 의자를 가지고 보초서는 놈을 때려죽인다. 둘, 셋, 아니, 몇이라도 오는 대로 죽일 것이다. 확실히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즉, 그의 눈은 어두운 데 익숙해져 깜깜한 속에서도 어떤 형태나 크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지만 다른 자들이 여기 처음 들어오면 얼마쯤 더듬거릴 것이다.
들뜬 사람처럼 그는 테이블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는 신부를 구원자로 만들기 위해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것이 제일 첫단계일 테니까. 동시에 그는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조금씩 밝아 오는 것을 집어먹으면서 무서워했던 순간을 그는 이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랐다. 무시무시한 긴장으로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체력도 주의력도 결단력도 기력도 차츰 쇠퇴해졌다. 긴장된 이 준비 태세와 살아보자는 결의가 왕성하게 용솟음치고 있을 동안에 문지기가 어서 신부를 데리고 와야만 했다.
바깥 세계도 이윽고 눈을 떴다. 드디어 발소리가 들렸다. 안마당의 발자국 위에서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쳐 왔다. 열쇠가 구멍에 넣어지고 비틀어졌다. 그 소리는 천둥과 같이 크게 울려 왔다.
이윽고 육중한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돌쩌귀가 삐거덕 소리를 냈다. 신부는 문지기조차 앞세우지 않고 혼자 들어왔다. 혼자서 양초가 두 개 꽂혀 있는 촛대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가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이 얼마나 이상하고 감동적인 광경이 되고 말았는가! 들어온 신부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다시 문을 닫았는데, 사제가 입고 있는 옷은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교단복으로, 옛날 다니엘 원장이나 안젤름 신부, 마르틴 신부가 입고 있었던 눈에 익은 그리운 차림이었다. 그 신부의 옷차림은 골드문트의 가슴속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눈에 익은 수도복의 출현은 뜻밖에 일이 순조로이 된다는 것을 약속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좋은 징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신부를 때려죽이는 방법 이외엔 도망칠 길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교단의 신부를 때려죽인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무척이나 힘 드는 일일 것이다.
17.
"찬미 예수!"
신부는 이렇게 말하며 촛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골드문트는 눈을 내리깐 채 입안에서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사제는 가만히 있었다. 골드문트가 불안해져서 무엇을 더듬듯이 두 눈을 치켜올릴 때까지 사제는 그 자리에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이 사람은 마리아브론 수도원 신부들의 복장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장 직위의 표지를 달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원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윤곽이 뚜렷하고 수척한 얼굴에 가느다란 입술을 하고 있었다. 알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골드문트는 홀린 듯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과 의지에 의해서 형성된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손으로 촛대를 움켜쥐고 쳐들어서 그 얼굴을 보기 위해 신부의 얼굴 가까이에 그것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을 보았다. 촛대를 도로 내려놓았을 때, 그것은 그의 손 안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나르치스."
그는 거의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했다.
"그래, 골드문트, 나는 한때 나르치스였었지. 하지만 그 이름은 벌써 오래 전에 쓰지 않는다. 자네는 기억할지 모르지만, 나는 성직을 받은 이래 요한이라 부른다네."
골드문트는 마음속까지 흔들렸다. 갑자기 전 세계가 변화하고 말았다. 그의 초인적인 긴장이 별안간 뒤집혀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어지러운 감정이 그의 머리를 텅 빈 기포와 같은 느낌으로 만들었다. 가슴은 오므라들었다. 눈에서는 치밀어 오르는 흐느낌과 같은 것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이 그 순간 정신을 잃고 눈물과 혼수상태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르치스를 다시 봄으로써 불러일으켜진 소년 시절의 깊은 추억에서 하나의 경고가 끓어올랐다. 소년 시절 한때 그는 이 아름답고도 엄숙한 눈앞에서,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는 이 까만 눈앞에서 소리치며 크게 운 적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그의 일생을 통해서 가장 절박한 순간에 이 나르치스가 홀연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데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시 나르치스 앞에서 울거나 실신 상태에 빠져 버리는 것이 좋단 말인가? 아니, 안 된다. 그는 억지로 버티었다. 마음을 억제하고, 가슴을 움켜잡고 현기증을 쫓아 버렸다. 이제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골드문트는 억지로 자제한 목소리로,
"당신을 여전히 나르치스라고 부르는 것을 용서해 주지 않겠나?"
하고 겨우 말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부르게. 악수를 해주지 않겠는가?"
골드문트는 다시 자신을 억제했다. 소년답게 고집 세고 약간 조롱이 섞인 어조로 학생 시절에 자주 한 것처럼 대답을 했다.
"용서해 주게, 나르치스."
그는 싸늘하면서 다소 무뚝뚝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자넨 원장이 됐나 보군.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방랑자일세. 게다가 내가 아무리 바랐던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들의 대화는 섭섭하지만 오래 끌수가 없네. 나르치스, 아무튼 나는 교수대에 목을 매달 처지가 되었으니 말일세. 한 시간 뒤에, 혹은 그보다 전에 목이 매달려 있을 걸세.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다만 상황을 명백히 해두기 위해서야."
나르치스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친구의 몸짓 가운데 약간의 소년다운 건방진 말투와 허풍이 그를 우습게도 했고 동시에 감동시켜 주었다. 그 배후에 있는 자존심이 골드문트를 억제시켜 울면서 그의 가슴에 뛰어드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 것을 나르치스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도 이처럼 뜻밖의 재회를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지만 이 조그만 희극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아니, 좋아."
하고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교수형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자네는 특사를 받았네. 자네한테 그것을 알리고 자네를 데리고 갈 책임을 내가 맡았네. 자네가 이 도시에 머무르지 못할 형편이 됐으니 말일세. 지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넉넉히 있을 거야. 그러니 어때, 이번에는 악수해 주겠나?"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고 한동안 감회 깊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로 깊은 감동을 느꼈으나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는 아직도 어느 정도의 장난기가 계속되었다.
"좋아, 나르치스, 그럼 이 기분 나쁜 숙소를 나가세. 나는 자네 일행에 한몫 끼겠어. 마리아브론에 돌아갈 건가 응? 그것은 좋은 일이지. 어떻게 말을 타고 가나? 그럼 내가 타고 갈 말을 어떻게 구하느냐가 문제로군."
"말쯤이야 손에 넣을 수 있지. 우리는 두 시간 안에 출발하게 되네. 아, 그런데 자네 두 손은 왜 그런가? 저것 보아, 온통 벗겨지고 부르트고 피투성이군! 아, 골드문트, 자네는 도대체 어떤 대접을 받았길래!"
"나르치스, 그만두게. 두 손을 내 스스로 이렇게 한 거라네. 나는 묶여져 있었다네. 그것을 푸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어. 그건 그렇고 자네는 혼자서 나한테 들어오다니 이만저만한 용기가 아니었는데."
"무슨 뜻이야, 용감하다니? 위험할 게 뭐가 있나?"
"아, 나한테 맞아 죽는다는 조그만 위험 말이야. 나는 그런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네. 사제가 나한테 온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자를 때려죽여서 그의 의복을 바꾸어 입고 도망치려고 했었지. 썩 좋은 계획 아닌가?"
"그럼, 자네는 죽고 싶지 않았군? 죽음에 반항할 작정이었나?"
"확실히 그렇게 할 작정이었지. 자네가 그 사제일 것이라고는 물론 생각지도 못했지만."
"아무튼,"
망설이듯 나르치스는 말했다.
"그것은 정말 몹쓸 계획이었군 그래. 고해 신부로서 자네한테 오는 사제를 자네는 정말 때려죽일 수 있었을까?"
"나르치스, 자네라면 물론 죽일 수가 없겠지. 그가 마리아브론의 법의를 입고 있었더라면 자네의 신부를 꼭 죽일 수야 있었겠나. 하지만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다른 사제였더라면 꼭 해냈을걸."
갑자기 그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겼다.
"그랬다 해도 그것이 내가 한 최초의 살인은 아니야."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두 사람 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지."
하고 나르치스는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언제든지 나한테 그것을 고해할 수가 있어. 혹은 그 밖의 자네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좋아. 나도 자네한테 이것저것 이야기할 것이 있어. 즐거움을 가지고 기대하겠네. 갈까?"
"잠깐만, 나르치스!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데, 내가 자네를 요한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군."
"물론 그럴 테지. 자네는 아직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벌써 몇 년 전에 나는 자네한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인 적이 있었어. 그것은 언제까지나 변치 않을 거야. 말하자면 나는 전에 조각가 노릇을 한 적이 있는데, 또 그렇게 되려고 생각했구. 그때 내가 만든 제일 좋은 형상은 실제 인물이 크기와 똑같은 목조로 그것은 자네의 형상이었어. 하지만 그것은 나르치스라는 이름이 아니고 요한이라는 이름이었지. 십자가 아래의 요한 사도란 말일세."
그는 일어서서 문 있는 쪽으로 갔다.
"그럼, 자네는 아직도 나를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르치스가 나지막이 물었다. 골드문트도 똑같이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나르치스, 나는 언제나 자네를 잊지 않고 있었다네."
그는 육중한 문을 요란스레 밀고 나섰다. 희뿌연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두 사람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그를 그의 객실로 데리고 갔다. 그를 수행하는 젊은 수사가 거기서 부지런히 짐을 꾸리고 있었다. 골드문트가 요기를 한 뒤 두 손을 닦고 약간의 붕대를 얻어 상처가 난 부위에 감았다. 벌써 말이 끌려나왔다.
그들이 말에 올랐을 때. 골드문트가 말했다.
"또 하나 소원이 있네. 생선 시장으로 해서 길을 잡아 주지 않겠나? 거기에 좀 볼일이 있어."
그들은 출발했다. 골드문트는 성 안의 창문을 살펴보았다. 혹시나 아그네스가 어딘가에 보이지 않을까 해서. 그는 이제 그녀를 볼 수 없으리라.
그들은 말을 타고 생선 시장을 향해 갔다. 마리는 골드문트 걱정을 무척 많이 하고 있었다. 그는 마리와 그녀의 양친에게 이별을 고하고 감사의 인사를 수없이 하며,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말에 올라탔다. 골드문트 일행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마리는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집 안으로 절룩거리며 들어갔다.
일행은 모두 넷이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리고 젊은 수사와 무장한 마부 한 사람이었다.
"내 말 블레스를 아직 기억하고 있나?"
하고 골드문트가 물었다.
"수도원의 마구간에 있던 말 말이야."
"기억하고말고. 하지만 그 말은 이제 없어. 자네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 테지. 블레스가 죽은 지 아마 칠팔 년은 됐을걸."
"자네가 블레스를 잊지 않고 있었다니!"
"물론 기억하고 있지."
골드문트는 블레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동물 같은 것을 염두에 두어 본 적이 없는 나르치스가 블레스만은 잊지 않고 있어 준 것이 골드문트한테는 반가웠다.
"자네는 나를 비웃을 테지."
골드문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수도원에 대해서 내가 제일 먼저 알고 싶은 것이 그 불쌍한 말이었다니. 실은 아주 다른 것을, 특히 다니엘 원장 안부를 물어 보고 싶었지만, 그분이 죽었다는 것은 벌써 알았어. 자네가 후계자가 돼 있으니 말일세.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처음에는 피하고 싶었다네. 나는 사실 죽음을 빼놓곤 할 말이 없어. 싫증이 나도록 본 페스트 때문이지. 하지만 한 번은 이야기해야 되지 않겠는가? 언제 어떻게 다니엘 원장이 돌아가셨는지 말 좀 해주게나. 나는 그분을 아주 존경했었지. 안젤름 신부와 마틴 신부도 아직 생존해 계신가? 아니, 아무리 끔찍한 말이라도 들을 각오가 돼 있네. 아아, 자네가 페스트를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야. 물론 나는 자네가 죽었으리라고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재회를 굳게 믿고 있었지. 그러나 섭섭하게도 기대가 어그러진다는 것을 나는 체험했어. 니콜라우스 스승, 그 조각가가 죽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었지. 하지만 막상 가보니 그 사람은 이미 죽어 버렸더군."
"대강 말하자면."
나르치스가 말했다.
"다니엘 원장은 이미 8년 전에 병도 괴로움도 없이 돌아가셨다네. 나는 그의 후계자가 아냐. 내가 원장이 된 것은 겨우 1년 남짓이지. 다니엘 원장의 후계자는 마르틴 신부였어. 전에 교장 하던 사람 말이야. 그는 지난해 일흔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어. 안젤름 신부도 이제는 없네. 그분은 자네를 좋아해서 가끔 자네 이야기를 했다네. 결국에는 전혀 걸을 수도 없게 되어 누워있는 것조차 매우 괴로워했었지. 그는 수종으로 돌아가셨어. 그래, 페스트가 우리 수도원에 번져와서 많이들 죽었지.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아 있나?"
"물론 잔뜩 있지. 그중에서도 어떻게 자네가 주교의 도시이며 총독이 다스리는 그곳으로 오게 됐는가 궁금하군."
"거기에는 긴 설명이 필요하네. 자네는 싫증만 날 테지, 정치에 관한 것이니 말이야. 백작은 황제가 무척 신임하고 있어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전권을 맡기고 있지. 현재 황제와 우리들 교단 사이에 조정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 교단에서 백작과 교섭할 사신의 역할을 나한테 맡겨 버렸어. 그러나 성과는 없었지."
그는 입을 다물었다. 골드문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젯밤 나르치스가 백작에게 골드문트를 구해 내기 위해 협상에서 얼마나 양보를 했을까 하는 것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계속 말을 몰았다. 골드문트는 이내 피로를 느껴 안장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게 되었다.
한참 후에 나르치스가 물었다.
"자네가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다는 것이 사실인가? 백작은 자네가 거기서 도둑질을 했다고 주장하던데."
골드문트는 말 위에서 웃어댔다.
"물론 도둑놈처럼 보였을 테지만 실은 백작의 애인과 같이 있었다네. 백작도 틀림없이 그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나를 석방시켜 주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야."
"그야, 그도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니까."
그들은 계획한 하루의 여정을 끝낼 수가 없었다. 골드문트는 너무나 피로해서 두 손으로 고삐조차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느 마을에서 숙박했다. 골드문트는 잠자리에 눕자 약간 열이 났다. 그래서 이튿날도 거기서 그냥 드러누워 있었다. 마침내 하루가 지나고 두 손이 회복되자 그는 말을 타고 하는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말을 타보지 못했던가. 그가 생기가 돌고 젊어지고 명랑해졌다. 간혹 마부와 달리기를 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면 친구 나르치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연달아 퍼부었다. 나르치스는 차근차근히, 그러나 흐뭇한 마음으로 질문에 응해 주었다. 그는 또다시 골드문트한테 반하여 그 과민하고 어린애 같은 질문을 좋아했다.
그 질문들은 친구들의 정신과 총명에의 무한한 신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 물어 보겠네, 나르치스. 자네들도 유태인을 태워 죽인 일이 있나?"
"유태인을 태워 죽인다구? 어째서 우리가 그런 짓을 하겠나? 그리고 우리 있는 곳엔 유태인이 없다네."
"하지만, 자네는 유태인을 태워 죽일 수가 있을까? 그런 경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냔 말일세."
"아니, 왜 우리가 그런 짓을 하지! 자네는 나를 광신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해 줘, 나르치스! 자네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 유태인을 죽이라는 명령을,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 승인을 내린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느냐고 나는 묻고 있는 거야. 그런 명령을 내린 후작이나 시장이나 주교나 또는 다른 관헌들이 얼마든지 있는 걸."
"나는 그런 종류의 명령은 내리지 않았어. 그것에 반해서 그런 잔인성을 방관하고 참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는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럼 자네는 그것을 참을 수가 있나?"
"확실히. 만약 그것을 막을 권리가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자네는 유태인을 태워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나, 골드문트?"
"응, 있고말고."
"그래, 자네는 그것을 막았는가?....그렇지 않았단 말인가? 그것 보게."
골드문트는 레베카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그는 흥분해 버렸다.
"그래."
그는 과격하게 결론을 맺었다.
"우리가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는 어떤 종류의 세계일까? 지옥이 아닐까? 화도 나고 흉측스럽기도 하단 말이야."
"그래, 세상은 확실히 흉측스럽게 변해 버렸지."
"변했다구?"
골드문트는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자네는 예전에 세상은 거룩하다, 세상은 여러 개의 크나큰 원의 조화다, 그 중앙에 조물주가 군림하고 있다. 존재하는 것은 좋다 등등을 몇 번이나 주장했었지! 아리스토텔레스에 그렇게 씌어 있다느니, 성토마스에도 씌어 있다느니 하면서 자네는 말했어. 그 모순이 설명을 무척 듣고 싶군."
나르치스는 크게 웃었다.
"자네 기억력은 정말이지 놀랍군. 하지만 자네는 좀 오해를 했네. 나는 조물주를 항상 완전한 것으로 떠받들었으나 창조된 것을 떠받든 적은 결코 없네. 나는 세상의 악을 부정한 적이 없어. 지상의 생활이 조화적이고 옳다, 또는 인간은 선량하다, 진실한 사색가라면 결코 그런 주장은 하지 않을 걸세. 도리어 인간의 마음이 지향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은 성서에 뚜렷하게 씌어 있지. 우리는 날마다 그 실증을 보고 있네."
"대단히 좋은 말이야. 이제야 겨우 자네들 학자들의 생각이 어떤가를 알았네. 말하자면 인간은 나쁘단 말이지. 지상의 생활은 평범과 더러움에 꽉 차 있다는 것을 자네들은 인정한다는 얘기군. 자네들 사상의 배후 어느 한구석에는 정의와 완전함이 존재해 있어. 그것은 존재해 있을 뿐 아니라 증명할 수도 있다네. 하지만 단지 소용없는 것들만 있다네."
"자네는 우리 신학자에 대해서 증오심만 가지고 있는 것 같군! 하지만 자네는 여전히 사색가가 되지 못했어. 자네는 무엇이든 한데 모아 얽어 놓기만 했네. 자네는 무엇이든 좋으니 좀 배워서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될 걸세. 하지만 자네는 왜 우리가 정의의 사상을 선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가?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네. 이를테면 나는 원장으로서 수도원을 관리해야 하네. 그 수도원은 바깥 세계와 마찬가지로 완전하지도 않고 죄악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네. 하지만 우리는 정의의 관념에 의해 원죄와 싸우며, 불완전한 우리네 생활을 정의로 측정하고 악을 시정하며, 우리네의 생활을 자꾸만 하느님과 결부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네."
"그거야 그럴 테지, 나르치스. 나는 자네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자네가 좋은 원장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레베카라든가, 불에 타죽은 유태인이라든가, 공동 묘지라든가, 무수한 주검이라든가, 페스트의 시체가 너저분하게 깔려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던 골목이라든가, 방이라든가, 허물어진 지방이라든가,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라든가, 사슬에 매인 채 굶어죽은 개라든가, 이런 온갖 것들을 생각하고 그 광경을 눈앞에 그려 보면 내 가슴은 아프다네. 그리고 우리들의 어머니는 우리들의 절망과 공포와 악마로 가득 찬 세계 속에 풀어 놓고 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일세. 어머니들이 우리를 낳지 말고, 하느님이 이 무서운 세상을 만들지 말고, 구세주가 이 세상을 위해 무익하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지 않았더라면 더 나으리라 생각했네."
나르치스는 친구를 향해 정답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모두 옳아."
나르치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제발 말 좀 해보게. 빠짐없이 죄다 털어놓고 이야기해 주세. 하지만 자네는 한 가지 점에 있어서 대단한 곡해를 하고 있네. 즉 자네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자네는 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은 사상이 아니라 감정이라네. 생존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의 감정 말일세. 그 슬픔과 절망에 찬 감정에 완전히 다른 감정이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게나. 자네가 말을 타고 기분 좋게 아름다운 지방을 돌아다닐 때라든가, 혹은 경솔하게 백작의 애인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땅거미가 질 무렵 성 안에 숨어들어 갔을 그런 때는 세상은 자네에게 완전히 다른 형상을 제시해 주었을 걸세. 페스트의 집도, 불에 타죽은 유태인도 모두다 자네가 쾌락을 얻는 것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을 거야. 안 그런가?"
"확실히 그렇긴 해. 세상이 죽음과 공포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마음을 위로시켜 주고 이 지옥의 한가운데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을 꺾으려고 했던 거야. 나는 쾌락을 발견하게 되면 잠시 동안은 두려움도 잊어버리지. 그렇다고 해서 공포가 감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야."
"계속 그럴 듯한 말을 하는군. 말하자면 자네는 이 세상이 죽음과 공포로 뒤덮여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리고 거기서 도망치기 위해 쾌락 속에 뛰어들지만 쾌락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네를 다시 황무지로 쫓아 버린다, 이런 말이지?"
"그렇지, 사실이 그렇다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럴 거야. 단지 자네만큼 그것을 지나치게 강하게 느끼는 사람은 드물지. 그 감정을 의식하려고 하는 욕구를 가진 사람은 적단 말일세. 하지만 이봐, 자네는 쾌락과 공포 사이의 절망적인 방황이나 생의 쾌락과 죽음의 감정 사이의 엇갈림 이외에 또 다른 어떤 행로를 시도해 본 일은 없나?"
"음, 물론 있었지. 나는 그것을 예술로써 시도해 보았다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조각을 했었지. 바깥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아마 3년쯤 됐을까? 그 동안에는 줄곧 방랑자로서만 떠돌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느 수도원의 성당에서 나무로 새긴 마리아 상을 보았다네.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첫눈에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겠나. 그래서 그것을 만든 스승을 찾아냈지. 나는 그분을 만나 보았어. 유명한 분이었네. 나는 그분의 제자가 되어 몇 년을 그분 밑에서 일했어."
"그 이야기는 나중에 좀더 자세히 들려주게나. 그런데 예술이 자네에게 가져다 준 것, 다시 말해 자네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그것은 무상의 극복이었다네. 인간 생활의 기만성과 죽음의 유희에서 무엇인가가 살아남는지를 알게 됐지. 그것은 말하자면 예술품이었어. 그것도 언젠가 한번은 없어지고 말겠지. 타서 없어지거나 망가지거나 부서지거나 할 거야. 하지만 어쨌든 예술품은 몇 세대의 인간 생활보다는 영속적이고 순간의 피안에 형상과 거룩하고 고요한 나라를 만든다네. 거기에 협력하는 것은 나한테는 귀중하고 위안이 되리라고 생각했지. 왜냐하면 그것은 무상한 것을 영원화시키는 데 가깝기 때문이야."
"내 마음에 드는군, 골드문트. 자네가 더욱더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만들기를 바라네. 자네 역량에 대해 나는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있네. 자네가 마리아브론에서 오랫동안 나의 손님이 되고, 자네를 위해 일터를 장만해주는 것을 동의해 주게나. 우리 수도원이 예술가를 가져 보지 못한 지도 퍽 오래 됐네. 하지만 예술의 기적에 대한 자네의 정의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군. 예술의 본질은 돌이나 나무나 색채에 의해서 현존하는 것, 사멸하고 마는 것에서 죽음을 빼앗아 보다 더 오래 존속시킨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네, 여러 가지 예술품, 즉 성자나 마돈나 상을 보아 오기는 했지만 그것들이 단순히 한때 생을 가지고 있었던 한 개인의 충실한 초상화라고는 생각지 않아. 개인의 형태나 색채를 예술가가 전달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단 말일세. "
"자네 말이 옳아."
골드문트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자네가 예술에 대해서 그토록 조예가 깊은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네! 훌륭한 예술품의 원형은 실존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원형은 살과 피가 아니고 정신이야. 그것은 예술가의 영혼 속에 깃든 하나의 형상이지. 나르치스, 내 영혼 속에서도 그와 같은 형상이 꿈틀거리고 있어. 나는 그것을 언젠가 한번 표현해서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어."
"훌륭해! 골드문트, 방금 자네는 자신도 모르게 철학의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가 그 비밀의 하나를 이야기한 거야."
"자네는 나를 놀리는군."
"아니, 진심이네. 자네는 '원형'에 대해 이야기했어. 말하자면 창조적인 정신 분야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물질 안에 실현되고 구체화될 수 있는 형상에 대해서 언급한 거야. 예술의 형태는 구체화되고, 현실성을 갖기 전에 벌써 예술가들의 영혼 속의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지! 그 형상, 즉 '원형'은 옛날 철학자들이 '이데아'라고 명명한 것과 꼭 일치하고 있어."
"그래. 그렇게 말하니 이젠 완전히 믿을 수 있을 것처럼 들리는군."
"그런데, 자네가 이데아와 원형을 신봉한다는 것을 공언하는 걸 보니 정신적인 세계, 즉 우리네와 같은 철학자와 신학자의 세계에 들어와 있기도 하고 혼란과 괴로움이 심한 생활, 즉 육체적 존재의 무한정하고 무의미한 죽음의 한복판에 창조적인 정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는 걸세. 골드문트, 자네가 어렸을 적에 내게 왔을 때부터 나는 자꾸만 자네 내부에 있는 그 정신을 호소해 왔었네. 자네 같은 경우로 생각해 볼 때 그 정신은 사색가의 정신이 아니라 예술가의 정신일세. 하지만 그 정신이야말로 감각 세계의 미묘한 뒤얽힘, 즉 쾌락과 절망 사이에 있는 영원한 딜레마에서 탈출하는 길을 자네에게 제시하는 걸세. 이보게, 골드문트. 자네한테서 그 고백을 들으니 나는 정말 기쁘네. 나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네. 그때부터 말이야. 자네가 선생이었던 나르치스와 작별하고 자네 자신이 되는 용기를 발견하게 되기를 말이야. 이제 우리는 다시금 새롭게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네."
골드문트의 생각은 이 순간에 마치 그의 생활이 의미를 얻은 것 같기도 했고, 높은 곳에서 그의 생활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생활의 커다란 세 세계, 즉 나르치스에의 의존 생활과 거기에서의 이탈--자유와 방랑 생활--귀환과 성숙과 수확의 시초가 확실히 보이는 듯도 했다.
환상은 다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지금부터 나르치스에게 일방적인 의존적인 관계가 아닌 자유와 상호 대등한 관계를 발견하게 됐다. 그는 이제 나르치스가 그를 대등한 자, 예술가로서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비굴해지지 않고 월등한 정신을 지닌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는 이 여행 중에 조각을 나타낼 수 있는 그 무엇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근심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르치스, 자네가 진실로 어떤 귀찮은 녀석을 수도원에 데리고 가는가를 모르고 있지 않나 염려되는군. 나는 수사도 아니요, 그렇다고 또 수사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네. 물론 나야 크나큰 세 가지 맹세를 잘 알고 하는 말일세. 빈곤이야 충분히 알고 있지. 하지만 순결과 복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이 두 가지 덕은 정말 사나이답다고 생각되지 않거든. 이제 나에게는 신앙심이라는 것은 전혀 없네. 벌써 몇 년 전부터 고해한 일도, 기도드린 일도, 성찬을 받은 적도 없으니까."
나르치스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보아하니 자네는 이도교가 된 것 같군. 하지만 그 문제는 조금도 염려 할 것 없어. 자네는 수많은 자신의 죄악을 더 이상 뽐낼 필요는 없네. 자네는 이 허무한 세상의 생활을 그럭저럭 해왔어. 이제 자네는 규율이 무엇이며 질서가 무엇인가를 전혀 모를 걸세. 자네는 확실히 제멋대로의 수사가 될 테지. 하지만 자네를 교단에 집어넣기 위해 초대하는 것은 아닐세. 단지 우리들의 손님이 되어 우리가 자네를 위해 일터를 만들어주는 영광을 갖기 위해 초대하는 것뿐일세.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네. 우리들의 청년 시절, 자네를 눈뜨게 해주고 세속적인 생활을 하도록 내보낸 장본인은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일세. 자네가 좋은 사람이 됐든 나쁜 사람이 됐든 이점에 대해서, 본인인 자네 다음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는 거야. 나는 자네가 무엇이 되어 있는가를 보고 싶었네. 자네는 그것을 나한테 글과 생활과 작품 등으로 보여 줄 테지. 만약 자네가 그것을 보여주는 날에는, 그리고 이 수도원이 자네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에는 내가 먼저 자네에게 다시 수도원을 떠나 달라고 부탁할 걸세."
골드문트는 자신의 친구가 원장으로서 행동하고, 세속적인 사람들과 세속적인 생활을 대하는 태도에, 침착하게 자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마다 경탄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왜냐하면 그럴 때는 나르치스가 사나이답다는 것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두 손과 학자의 얼굴, 정신과 확신과 용기에 가득 찬 사람, 지도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나르치스는 이제 그때의 청년도, 부드럽고 열의 있는 사도 요한도 아니었다. 이 새로운 나르치스, 사나이답고 기사다운 나르치스, 그는 이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조각하고 싶었다. 수많은 형상들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르치스, 다니엘 원장, 안젤름 신부, 니콜라우스 스승, 미모의 레베카와 아그네스, 그밖에도 많은 친구와 적들, 살아 있는 사람이며 이미 죽은 사람들.... 하지만 그는 교단의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경건한 일원에도, 학식 있는 일원에도 포함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한때 청년 시절의 고향이 그들 작품의 고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은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들은 서늘한 늦가을의 대기를 가르며 말을 몰았다. 낙엽이 다 떨어져버린 나무들 위에서 하얀 된서리가 내린 어느 날 아침, 그들은 인적이라곤 없는 늪지대의 굽이진 넓은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기나긴 능선이 야릇한 감정으로 눈에 익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들판이었다. 높다란 물푸레나무 수풀과 시냇물의 흐름과 낡은 곡식 창고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 골드문트의 마음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때 기사의 딸 리디아와 말을 달렸던 고개라는 것을 이내 알게 됐다. 이 벌판은 그때 기사에게 쫓겨 나와 하염없는 슬픔 속에서 방랑하던 벌판이었다. 오리나무 숲속, 물방앗간, 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형언키 어려운 슬픔으로 서재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기서 기사의 순례 행각을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그 기사의 라틴 어 수기를 고쳐 주었었다.
일행은 그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그들 여행의 일정에 있었던 숙박소였다. 골드문트는 여기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또한 마부와 같이 하인들이 있는 곳에서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나르치스에게 부탁했다.
지금은 노기사도 리디아도 없었지만 사냥꾼들과 하인은 몇 사람 그대로 있었다. 집안은 미모와 기품 있고 화려한 귀부인 율리에가 남편과 함께 생활하고 또한 집안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에는 얼마간 심술이 있어 보였다. 그 여자도 하인들도 골드문트를 알아보지 못했다. 식사 후, 어두워진 정원을 빠져나와 벌써 겨울 빛이 완연한 울타리 너머 화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마구간에 가만히 들어가 말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마부와 함께 짚단 위에서 잤다.
무거운 추억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에 자다가 몇 번이나 눈을 떴다. 아, 그의 생활은 왜 이다지도 산산이 흩어져서 열매를 맺지도 못한 것일까! 훌륭한 추억은 산더미처럼 많은 것 같았으나, 어느새 산산이 부서지고 가치도 사랑도 보잘 것 없었다.
아침에 출발할 때 그는 행여나 율리에를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창문을 쳐다보았다. 며칠 전 주교의 성 안마당에서 아그네스의 모습을 기대하던 때와 같은 심정으로. 아그네스는 나오지 않았다. 율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일생은 그런 것 같았다. 이별을 고하는 것, 도망치는 것, 잊어버리는 것, 빈주먹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는 온종일 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음산한 얼굴을 하고 안장에 기대 있었다. 나르치스도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일행은 며칠 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수도원의 탑과 지붕이 보이기 바로 전에, 일행은 바로 그 자갈투성이의 황폐하고 오래된 밭을 지나갔다. 아, 얼마나 오래 전의 일이었던가! 그곳에서 한때 안젤름 신부를 위해 약초를 찾고, 집시 여인 리제에 의해서 성년이 되었던 그때가! 이윽고 일행은 마리아브론의 정문을 지나 이탈리아산 밤나무 밑에서 말을 내렸다. 골드문트는 그 나무줄기를 추억 어린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고 나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갈색의 밤송이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18.
골드문트는 처음 며칠 동안은 수도원 안에 있는 외빈실에서 지냈다. 그 다음 그의 간청대로 커다란 마당을 빙 둘러싸고 있는 부속 건물의 대장간 건너편에 숙소가 마련됐다.
재회는 그 자신도 놀랄 만큼 격렬한 마력으로 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원장을 빼놓고 여기서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수사건 속인이건 엄격한 질서 속에서 분주하게 생활했으므로 어느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원의 나무들과 정문과 창문, 물방앗간과 보도에 깔린 포속이나, 회랑에 있는 시든 장미꽃 덤불, 곡물 창고와 식당 위에 있는 황새의 둥지는 그를 알고 있었다.
어느 구석에서든 그의 과거와 청년 시절의 추억이 꿈과 감동의 향기를 싣고 풍겨 왔다. 사랑이 모든 것을 다시 보게 하고 모든 소리를 다시 듣도록 재촉했다. 저녁 기도의 종소리와 일요일의 종소리를, 비좁고 이끼가 잔뜩 낀 돌담 속의 컴컴한 물레방아가 돌아가면서 내는 물소리를, 문지기 수사가 저녁때 정문을 닫으러 갈 때의 철렁대는 열쇠꾸러미 소리를.
식당의 낙숫물이 떨어지는 돌 홈 곁에는 질경이 같은 잡초들이 여전히 무성했다. 대장간 뜰의 오래된 사과나무는 길게 늘어뜨린 가지를 여전히 뒤틀고 있었다. 하지만 종이 울리고 쉬는 시간에도 수도원의 학생들이 계단을 내려서며 안마당으로 떼 지어 나올 때마다, 골드문트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소년들의 얼굴은 왜 그리 한결같이 앳되고 순진하고 귀여운지, 그도 한때는 저들처럼 순진하고 귀여운 어린애 같았을까?
하지만 그는 이 정든 수도원의 온갖 낯익은 것들 외에 전혀 미지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처음 며칠 동안에 벌써 그의 시선을 끌었는데, 그 이후 점차 중요함을 더해 갔고 이미 알고 있었던 것과 천천히 결합되어갔다. 사실 수도원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더해진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그의 학창 시절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그 시절의 눈이 아니었다. 그는 이 건축의 규모, 성당의 아치형 천장, 옛날 그림, 제단이나 정문의 석상이나 목상 등을 보고 다시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위층에 있는 예배당의 낡은 석조 마리아 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년 시절에 벌써 그것을 즐겨 스케치도 했었으나, 이제야 그는 그것을 올바른 두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제일 성공적이요, 제일 잘된 그의 작품일지라도 그것을 능가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런 훌륭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그 각각이 그것들만의 우연이 아니고 어느 것이나 똑같은 정신에서 출발하여 벽이나 기둥이나 아치형 천장 사이에서 자연스럽고 고향 속에 있는 것처럼 서 있었다. 여기에서 수백 년 동안 세워지고 새겨지고 그려지고 살고 생각하고 가르쳐진 것은 하나의 계통이며 하나의 정신이었다. 한 그루의 나무에 가지들이 서로 얽혀 있듯 그것들은 서로 얽혀 있었다.
골드문트는 이토록 조용하고 힘찬 통일이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은 너무나 작은 존재라고 느꼈다. 그의 친구 나르치스가 원장 요한으로 힘차면서도 조용하고 다정하게 수도원 내부에 질서를 세워 나가고 있는 것을 볼 때는 더욱 그랬다.
입술이 얇은 학자풍의 요한 원장과 단순하고 인심 좋고 소박한 다니엘 원장 사이에는 개인적으로 크나큰 차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똑같은 통일과 똑같은 사상과 똑같은 질서에 봉사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것에 의해서 지위를 얻고 거기에 자신의 전부를 던지고 있었다. 수도원의 복장이 꼭 그러하듯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나르치스가 이 수도원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새삼 지각하고 난 후 골드문트의 눈에는 그가 엄청날 만큼 크게 보였다. 물론 나르치스는 그에게는 다정한 친구요, 주인으로서의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그는 다정히 '자네'라든가 '나르치스'라든가 하는 식으로 그를 부르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서먹서먹해졌다.
하루는 그가 나르치스에게 말했다.
"요한 원장, 나는 서서히 자네의 이름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될 거야. 여기가 정말 있기에 편하다는 걸 자네한테 일러두고 싶네. 자네에게 모든 것을 참회하고 회개한 다음에 속계의 수도자로서 수도원에 넣어 주었으면 하는 희망도 가지고 있다네. 하지만 그렇게 우리들 우정도 끝나고 말 테지. 자네는 원장이고 나는 속계의 수도자니까 말일세. 하지만 이렇게 자네 있는데서 무위식도하고 자네가 일하는 것을 구경만 할뿐,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일이야. 나도 일을 해서 나 자신과 나의 능력을 자네에게 보여줌으로써 교수형에서 구제받은 것이 보람이 있는지를 시험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일세."
"그것은 반가운 말이군."
하고 나르치스가 어느 때보다 더 정확하고 간명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언제든지 작업을 시작해도 되네. 곧 대장장이와 목수에게 자네 일을 돕도록 이르지. 여기 있는 재료 중에서 쓸 만한 것이 보이거든 무엇이든지 갖다 쓰게나! 바깥에서 운반해 와야 할 것은 목록을 만들어 주게. 그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자네와 자네의 의도에 대한 것들을 들어주게!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다 이야기하는데 시간을 내달라는 걸세. 말하자면 나는 학자이니 내 사상의 세계에서 사실적인 표현을 시도해 보겠다는 말일세. 그밖에 달리 할 말은 없어. 그러니 전에도 꾸준히 참아준 대로 한 번 더 나를 따라와 주게."
"자네를 따라가도록 노력해 봄세. 말해 주게나."
"내가 자네를 예술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학생 시절에 이따금 자네에게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겠나? 그때 나는 자네가 어쩌면 시인이 될지도 모른 거라고 생각했었네. 자네는 공부를 할 때 개념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 일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 말 가운데서도 특히 감각적이며 시적인 성질이 갖추어져 있는 말과 음향을, 말하자면 그것에 의해 무언가 머릿속에 그려질 수 있는 말을 자네는 즐겼었지."
골드문트는 말을 가로챘다.
"미안하네만 자네가 특히 즐기는 개념과 추상도 따지고 보면 심상이나 형상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자네는 정말 사색을 하기 위해서 머릿속에 그릴 수가 없는 어휘만을 사용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을 머리 속에 그리지 않고 생각할 수가 있단 말이야?"
"자네가 그걸 물어 주다니 고맙군! 하지만 확실히 사람들은 심상을 가지지 않고서도 생각할 수가 있어! 사색은 심상과 아무 관계도 없지. 사색은 형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념과 공식에 의해서 행해지지. 즉 형상이 끝나는 데서 철학이 시작되는 거야. 이것은 우리들이 전에 간혹 논쟁했었던 걸세. 다시 말해 세계란 자네한테서는 형상에서 생겼고, 나한테는 개념에서 생겼지. 나는 자네한테 자네는 언제든지 사색가로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말했었네. 물론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고도 말했지. 그 대신 형상의 영역의 지배자라고 했었지. 알아듣겠나? 나는 그것을 자네한테 명백히 해두겠네. 자네가 그 당신 속세로 뛰쳐나가는 대신 사색가가 되었더라면 불행을 초래했을지도 모르지. 간단히 말해서 자네는 신비주의자가 됐을 거야. 신비주의자는 심상의 세계에서 떠날 수 없는 사색가이므로 결국은 사색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네. 신비주의자는 표면으로 나타내지 않는 예술가, 즉 시를 쓰지 않는 시인, 화필을 가지지 않는 화가, 소리를 내지 않는 음악가인 셈이야. 그네들 가운데는 더할 수 없는 천성을 타고난 고귀한 정신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불행한 인간들이지. 자네도 그중 한사람이 됐을지 누가 알겠나. 다행히도 자네는 예술가가 되어 형상의 세계를 다루게 되었네. 그래서 자네는 창조자가 되고 지배자가 될 수 있지. 사색가로서 불충분한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 대신에 말일세."
"심상의 작용 없이 생각하는 자네의 사색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네."
하고 골드문트는 말했다.
"그렇지 않네. 곧 될 수 있을 거야. 들어 보게. 사색가는 세계의 본질을 논리에 의해서 인식하고 표현하려고 드네. 사색가는 우리들 지성과 그 도구인 논리학이 불완전한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어. 마찬가지로 현명한 예술가는 그의 화필이나 끌이 천사나 성인의 눈부신 본질을 결코 완전하게 표현해 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더욱이 사색가도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방법으로 그것을 시도하고 있네. 그들은 그렇게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을 테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천성을 가지고 자신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데 따라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과 비할 데 없이 의미 깊은 것을 이루기 때문일세.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전에 자주 자네한테 말했었지. 사색가나 혹은 금욕주의자를 선망하지 말고 자네 자신이 되라, 자신을 실현시키도록 노력하라고 말이네."
"자네가 하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자신을 실현시킨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것은 철학적인 개념이므로 달리 표현할 수가 없는 거야. 우리들 아리스토텔레스와 성토마스의 제자들에는 모든 개념의 최고는 완전한 존재가 되는 거야. 완전한 존재는 신일뿐, 그 밖의 존재하는 일체는 반 정도의 존재에 불과하거나 부분적인 존재에 불과해. 그것은 변화 과정에 있고 혼합되어 있고 여러 가지 가능성에서 생겼어. 그러나 신은 혼합되어 있지 않고 하나야. 가능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현실이지. 그러나 우리는 덧없는 존재요, 변화 과정에 있는 존재라네. 우리에게는 완전이라든가 완전한 존재라든가 하는 것은 불가능해. 우리들이 힘에서 행위로, 가능성에서 실현을 항해 나아갈 때 진실과 가까워지고, 완전한 것, 신성한 것을 한 단계쯤 닮게 되는 거지. 즉 자신을 실현하는 거야. 자네는 그 과정을 자신의 경험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 자네는 사실 예술가로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었네. 그런 형상이 정말로 잘 됐다면, 인간의 초상을 우연적인 것에서 해방시키고 순수한 형상으로 표현해 낼 수 있었다면, 자네는 예술가로서 그 인간상을 실현한 셈이지."
"잘 알겠네."
"골드문트, 보다시피 나는 스스로를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다소 용이하게 되어 있는 장소와 직위에 놓여 있어. 즉 나는 나에게 알맞으며 나를 도와줄 단체와 전통 속에서 살고 있지. 수도원은 천당이 아니야. 불완전으로 가득 차 있지. 하지만 수도원 생활은 나 같은 종류의 인간에게는 세속적인 생활보다 훨씬 유익하다네. 나는 도덕적인 설교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순수한 사색은 실제로도 속세에 대해서 어느 정도 보호될 것을 필요로 하네. 그 순수한 사색을 행하고 가르치는 것이 나의 과제이기 때문에 나는 이 수도원 안에서 자신을 실현시키는 것이 자네보다 훨씬 수월하게 된 걸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길을 찾아 예술가가 된 것은 나는 크게 기뻐하네. 왜냐하면 자네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려운 일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지."
골드문트는 칭찬을 받고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기쁘기도 했다.
골드문트는 이야기를 돌리기 위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자네가 나한테 말하려는 것을 대강 짐작하겠어. 단 한 가지 이해되지 않은 것이 있네. 그것은 자네가 '순수한 사색'이라고 표현한 말일세. 말하자면 형상을 가지지 않은 사색과 아무것도 머릿속에 그릴 수 없는 어휘의 조작 말이야."
"그건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네. 수학을 생각해 봐! 숫자는 어떤 심상을 내포하고 있을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부호는?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네. 자네가 산수나 대수 문제를 풀 때, 자네는 심상이 도움 없이 사고 형식의 내부에서 문제를 완성시키는 걸세."
"옳아, 나르치스. 자네가 한 줄의 숫자와 부호를 써준다면 나는 심상을 쓰지 않고 계산을 해낼 수 있지. 플러스와 마이너스, 곱하기, 괄호 등에 의해서 문제를 풀 수가 있네. 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문제를 푼다는 것이 학생들을 위한 지력의 수련이라는 가치 이전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네. 수학을 배운다는 것은 정말 좋은 거야. 하지만 한 사람의 인간이 일생 동안 그런 계산 문제에만 파고들어 언제까지나 숫자의 줄을 종이에 잔뜩 써둔다면 무의미하고 어린애 같은 짓이라고 나는 생각할 걸세."
"그것은 자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골드문트. 그 근면한 학생은 선생이 그에게 내주는 과제만 풀 거라고 자네는 가정하고 있네. 문제는 그 학생이 스스로 어떤 과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점이야. 그런 것은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그의 내부에서 생길 수도 있지. 사람들은 사색가로서 공간의 문제에 부딪혀 나갈 수 있는 힘이 있기 전에는 실제의 공간과 가설의 공간을 자주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측정하지 않으면 안 될 걸세."
"그거야 그럴 테지. 하지만 순수한 사색의 문제로서 공간의 문제는 한 사람의 인간이 그이 일생을 바쳐서 노력할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 '공간'이라고 하는 말은 실제의 공간을 머릿속에 그리지 않는 한, 나에게는 무요, 사색의 가치조차 없어. 실제의 공간을 관찰하고 측정하는 것이 보다 가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네."
나르치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사색을 별로 대수롭게 생각지는 않지만, 그것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세계에 응용시키는 것은 상관없다고 말하려고 하고 있네. 우리들이 사색을 응용하고 또 그렇게 말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은 아니라고 자네에게 말할 수가 있네. 이를테면 사색가 나르치스는 그의 사색의 결과를 그의 친구 골드문트한테도, 수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수백 번이나 응용했네. 또한 매시간 그렇게 하고 있지. 하지만 미리 배우고 연마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렇게 응용할 수가 있을까. 예술가도 그의 눈과 공상을 부단히 연마하고 있네. 가령 그것이 실제의 작품에는 아주 작은 효과를 내고 있다고 해도 우리들은 예술가의 훈련을 높이 평가하네. 자네는 사색 그 자체를 배척할 수는 있지만 그 '응용'만은 시인해야 하지 않을까? 그 모순은 명백해. 그럼 곰곰이 생각해 보게. 그리고 그 성과에 따라서 나의 사색을 판단해 주게. 즉 내가 자네의 예술가로서의 존재를 자네의 작품에 의해서 평가하는 것처럼 말일세. 자네와 자네의 작품 사이에는 아직도 장애가 있기 때문에 자네는 지금 집착하지 못하고 흥분해 있네. 그 장애를 제거시키고 일터를 꾸미도록 하게! 그리고 자네의 작품에 열성을 기울이게! 그렇게 하면 자연히 많은 문제가 해결될 걸세."
골드문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는 지금 비어 있어서 일터를 만들기에 적합한 장소를 안마당 문 옆에서 발견했다. 그는 이젤이며 그 밖의 도구를 세밀하게 제도해서 목수한테 주문했다. 또한 인접한 도시에서 차차 운반해야 될 물품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상당한 물량이었다. 그는 목수들이 숲속에서 잘라다가 저장하고 있는 목재를 그의 일터 뒤 잔디밭으로 운반하여 거기서 건조시켰다. 그는 목재 위에 덮어씌울 지붕을 손수 만들었다. 대장간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는 그 집 아들인 몽상가인 듯한 청년을 설득시켜서 동료로 만들었다. 그 청년과 함께 반나절 동안, 대장간의 모루나 물통, 숫돌 옆에서 목재를 다듬는 데 필요한 둥근 조각칼이며 구부러진 조각칼, 끌, 송곳, 깎아내는 칼 등을 만들었다.
대장장이 아들 에리히는 스무 살쯤 돼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곧 골드문트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무엇이든 도와주었고, 끓어오르는 흥미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젊은이였다. 골드문트는 그에게 기타 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마고 약속했다. 청년은 그것을 애타게 기다렸다. 골드문트는 간혹 수도원이나 나르치스에게서 그 자신이 정말 필요도 없고 귀찮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때면, 수줍어하면서도 그를 사랑하고 한량없이 존경하는 에리히에게서 원기를 회복했다. 간혹 에리히는 니콜라우스 스승이나 주교의 도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골드문트를 졸랐다. 골드문트는 몇 번이고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럴 때면 언뜻, 여기 앉아서 노인처럼 과거의 여행이나 추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자신이 야릇하게 느껴졌다. 그의 생활은 이제 비로소 시작되려고 하는데도 말이다.
이 몇 년 동안에 그의 용모가 몹시 달라진 것, 나이에 비해 겉늙어 버린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전에는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랑과 불안정한 생활의 고초가 그를 나이보다 늙어 보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공포스러웠던 저 페스트의 시대와 마지막으로 백작의 성에서 붙잡혀 지하실에서 더할 수 없는 공포의 밤을 지새웠던 일이 그를 이다지도 마음속 밑바닥까지 뒤흔들고 말았다. 그 여파가 여러 곳에 그대로 남았다.
황금색의 수염 속의 새치, 얼굴의 잔주름, 불면의 밤, 때때로 느끼는 피로감, 쇠퇴한 쾌감과 호기심, 만족과 포만 상태의 미적지근한 감정 등. 일할 준비를 하거나 에리히와 이야기를 하거나 바쁘게 일하고 있으면 마음도 가라앉고 생기가 나고 젊어졌다. 모두들 그를 흠모하고 그를 좋아했지만, 그 사이에도 종종 몇 시간 동안 기진맥진하여 엷게 미소를 짓기도 하고 꿈꾸기도 하면서 무감각과 무관심의 상태에 놓여질 때가 많았다.
정확하게 어디서부터 일을 착수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그는 여기서 만들게 될 첫 작품으로 수도원의 후한 대우에 보답을 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것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곳에 비치해 두는 것 같은 막연한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수도원 안에 있는 옛날 작품들처럼 그 건물과 생활에 파고들어가 그 일부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제단이나 설교단을 만들고 싶었지만 그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발견했다. 신부들의 식당 벽 좀 높은 곳에는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다. 거기서 식사하는 동안 젊은 수사들은 언제나 성인들의 전설을 낭독했다. 거기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그래서 골드문트는 낭독대 계단과 낭독대에 목각 장식을 입혀 설교단과 똑같은 반쯤 부각된 형상 하나와 외부에 모양을 드러낸 몇 개의 목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계획을 나르치스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은 그것을 칭찬하고 또한 환영했다. 일에 착수하려고 할 때는 눈이 제법 쌓였다.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다.
골드문트의 생활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의 존재는 수도원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 것 같았다. 아무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이제 수업을 끝난 후에 학생들의 무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숲속을 거닐지도 않았고 회랑을 걷지도 않았다. 식사는 방앗간에서 했다. 그곳은 그 옛날 그가 자주 드나들던 그곳이 아니었다. 그는 일터에 조수 에리히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에리히도 하루 종일 골드문트로부터 한 마디 말도 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첫 작품인 낭독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구상한 끝에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즉 작품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하나는 속세를, 또 다른 하나는 신성한 언어의 세계를 표현할 계획이었다. 아랫부분, 즉 계단 은 두툼한 참나무 둥치에서 성장해서 둥치 둘레를 돌고, 피조물, 즉 자연과 족장들의 단순한 생활과 여러 가지 형상을 나타낼 작정이었다. 윗부분, 즉 흉란은 네 분의 복음서 저자의 상을 받치게 될 것이다. 복음서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은 고 다니엘 원장의 모습을, 다른 한 사람은 그 후계자인 고 마틴 신부의 모습을 상징하고, 누가 상에는 스승 니콜라우스를 형상화시키고자 했다.
일을 시작하자,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의 사랑을 구하듯 자신을 잃어버리고 절망적인 감정 속에서 작품을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어부가 커다란 준치와 싸우듯, 성난 사자처럼 그는 작품과 싸웠다. 온갖 난관이 그를 가르치고 동시에 예민하게 해주었다. 그는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렸다. 수도원도, 나르치스도. 나르치스는 몇 번 방문했으나 스케치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골드문트가 자기의 고해를 들어 달라고 청했으므로 나르치스는 놀랐다.
"지금까지 여러 번 결심했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네."
하고 그는 고백했다.
"내 자신이 너무나 하잘것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나는 자네 앞에 고개를 똑바로 들 수 없는 심정이었어.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나는 이제 일거리를 손에 들고 있거니와 무위 도식하고 있는 자도 아니야. 나는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규율에 따르고 싶단 말일세."
그는 이제야 고해를 할 시기가 됐다고 느꼈고 더 이상 기다릴 수도 없는 심정이었다. 최초의 몇 주일 동안은 은자다운 생활을 하면서 재회와 청춘의 회상에 젖었었다. 그리고 에리히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사이에 그의 회고는 그의 생활에 일종의 질서와 밝음을 가져다 준 것 같았다.
나르치스는 담담하게 골드문트의 고해를 받아들였다. 고해는 두 시간 가량 걸렸다. 그는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친구의 모험과 고생과 죄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는 계속해서 골드문트가 하느님의 정의와 선의를 믿는 마음으로 소멸을 고백하는 부분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는 고해하는 친구의 여러 가지 고백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그는 상대가 얼마나 마음이 흔들리고 놀라고 때로는 파멸에 가까이 갔는가를 알았다. 그러다가 다시 그는 친구의 사심 없는 순진성에 감동되어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의혹과 사색의 심연과 비교해 봐서 어처구니없는 불성실한 신앙으로 인해 친구가 걱정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골드문트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 실망한 것은 고해 신부가 그의 죄악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가 기도와 고해와 성례를 게을리한 것에 대해 가차 없이 경고하고 벌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친구에게 성례를 받기 전 4주일 동안 절제와 금욕의 생활을 보내고 매일 아침 미사를 드리고, 매일 밤마다 세 번씩 주의 기도와 마리아의 찬송을 부르게 하여 속죄를 하게 했다. 그런 다음 원장은 그에게 다시 말했다.
"이 고해를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자네에게 경고하고 또한 바라네. 난 자네가 미사 문구를 아직도 정확하게 외우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네. 자네는 그 문구 한 마디 한 마디의 뜻을 새겨 그 말의 정신에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되네. 오늘이라도 둘이서 주의 기도와 찬송가를 같이 부르세. 그중에서 자네가 어떤 말과 의미에 특히 주의력을 집중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겠네. 성스러운 말을 속세의 말과 같이 이야기하고 들어서는 안 되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자주 일어날 걸세만, 만약에 성스러운 문구를 중얼거리다가 그냥 흘려 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내가 가르쳐 준대로 문구를 읊고 마음속에 새겨두기 바라네."
이 고해와 속죄 덕분인지 골드문트에게는 한 동안 충만된 평화의 시기가 와서 그를 행복에 가득 차게 했다. 긴장과 근심과 만족에 가득 찬 제작이 한창일 때 그는 매일 가볍기는 하지만 그래도 양심적으로 행하는 종교적인 수련에 의해서 한낮의 흥분에서 구출되고, 그의 인생 전체가 보다 높은 질서를 향해서 끌어올려져 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됐다.
그 질서는 그를 예술가의 위험한 고독으로부터 끌어내린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성을 부여해 주고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주었다. 그는 작품을 위한 싸움에는 끝까지 고독한 인간으로 견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감각과 영혼의 모든 정열을 거기에 쏟아 넣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기도하는 시간만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성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일하는 동안에는 간혹 격정과 초조에 가슴을 죄거나 육체적인 쾌감을 느낄 정도로 도취됐지만, 경건한 수련 시간에는 깊고 차디찬 물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감격의 경지에서와 똑같이 절망의 경지에서 되벗어났다.
그러나 매사가 그렇듯 잘 되어 나가지는 않았다. 불붙는 듯한 제작의 몇 시간을 보낸 저녁때면 마음이 산란해지고 안절부절 못할 때도 있었다. 기도의 수련도 몇 번이나 잊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 때로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해도, 그의 기도는 결국 존재하지도, 또 자기를 도울 수도 없는 하느님을 찾는 부질없는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그것을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계속해야 해."
나르치스는 말했다.
"자네는 약속했으니 지켜야만 하네. 하느님이 자네 기도를 들어줄지 어떨지, 자네가 상상하는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어떤지 그런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되네. 자네의 노력이 허망된 것인지 어떤지 그런 것도 생각하면 안 되네. 우리들의 기도가 향해질 수 있는 것에 비교한다면 우리들의 행위는 모두가 허망된 것이야. 자네가 기도할 동안에는 그런 어리석고 허황된 생각을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되네. 주의 기도와 마리아의 찬송을 부르고, 그 문구에 몰두하고, 그리고 그것들로 충만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일세. 마치 자네가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를 칠 때, 어떤 현명한 생각이라든가 사색을 쫓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순수하고 또한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고 손가락을 놀리듯이 말일세. 사람이란 노래를 부를 동안에는 그것을 부르는 것이 유익한가 아닌가를 생각지도 않고 노래를 부르지. 그것과 똑같이 자네는 기도를 올려야 되네."
모든 것이 다시 잘 진행되었다. 긴장하고 열중한 그의 자아는 다시 넓은 아치형 천장의 질서 속으로 스며들었다. 신성한 말은 별처럼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골드문트가 참회의 기간을 넘기고 성례를 받은 후에도 날마다 수련을 계속하여 수주일을 넘어 수개월에 이른 것을 보고, 나르치스는 크게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 동안 그의 작품은 잘 진척되었다. 두꺼운 나선형의 계단 축에 동식물과 인간들의 갖가지 형태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중앙에는 여러 민족의 조상인 노아가 포도 잎사귀와 포도송이 사이에 서 있었으며 그림책과 창조주의 찬가와 그 아름다움이 자유로우면서도 즐거움을 그치지 않고 숨은 질서와 규율에 인도되어 있었다.
이 수개월을 통해 에리히 이외에는 아무도 그 작품을 보지 못했다. 물론 그도 때때로 시중드는 것을 허락받고 한결같이 예술가가 된다는 생각에 다른 생각은 갖지 않았다. 일터에 들어서지 못하는 날이 있었지만. 그는 그런가 하면 또 골드문트는 자신도 한 사람의 제자를 가졌다는 것을 기뻐하며 에리히를 그의 아버지께 부탁드려 영구적인 조수로 삼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네 복음서 저자 상의 제작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동시에 의혹의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가장 좋은 날을 택했다. 다니엘 원장의 모습을 새긴 목상이 제일 잘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그것에 대단한 애착을 가졌다. 그 얼굴에서는 순수함과 선의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스승의 목상에는 그리 만족하지 못했다. 에리히는 그것을 보고 제일 탄복했으나 그 목상은 분열과 비애를 나타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창조자의 계획에 충만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창조의 허무감에 대한 절망적인 지식과 잃어버린 통일과 순진성에 대한 비애로 가득 찬 그런 상이었다.
다니엘 원장의 목상이 완성되자, 그는 에리히를 시켜 작업장을 깨끗하게 청소하게 했다. 그는 다른 작품에는 천을 둘러씌웠으나 그 목상만은 밝은 빛에 내놓았다. 그러고는 나르치스에게로 갔으나 그가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을성 있게 그 이튿날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점심때 나르치스를 작업실로 데리고 와서 그 목상 앞으로 안내했다.
나르치스는 가만히 선 채 바라보았다. 그대로 서서 몇 분이고 학자답게 조심조심 그 목상을 관찰했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 뒤에 서서 묵묵히 마음속의 폭풍우를 가라앉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오!' 하고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만약 여기에서 우리 두 사람 중의 어느 한쪽이라도 이해를 못한다면 큰일인데.... 내 작품의 솜씨가 좋지 못하거나 나르치스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 때에는 여기서 나의 제작은 모두가 가치를 잃고 마는 것이다. 내가 좀 더 기다려야 했을까?
골드문트에게는 이 몇 분간이 몇 시간이나 된 것처럼 길었다. 그는 니콜라우스 스승이 그의 최초의 스케치를 손에 들었을 때를 생각하고 땀에 촉촉이 젖은 두 손을 긴장한 나머지 힘있게 눌렀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골드문트는 맥이 탁 풀리는 듯했다.
그는 친구의 수척한 얼굴 속에서 소년 시절 이래 그에게 한 번도 그처럼 눈부시게 빛나본 적이 없는 무엇을 발견했다. 그것은 미소였다. 정신과 의지로 가득 찬 얼굴에 나타난 그의 수줍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은 미소, 사랑과 헌신의 미소였다. 그 얼굴에는 고독과 긍지가 한순간 깨어져서 사랑에 가득 찬 마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듯했다.
"골드문트."
나르치스는 아주 나지막한 소리고 음미하듯 말했다.
"자네는 내가 단번에 예술에 통달한 사람이 되리라고는 기대하고 있지 않을 테지. 내가 예술에는 안목이 없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나는 자네의 이 작품에 대해서 자네가 우습게 여길 정도밖에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가 없다네. 하지만 나에게 한 가지만 말하도록 허락해 주게. 단번에 나는 이 사도 상이 다니엘 원장이라는 걸 알았지. 아니, 원장 그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가 당시 우리들에게 의미한 모든 것, 즉 품위와 선의와 단순성 등도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았네. 지금은 고인이 되고 없지만 우리 청년들에게 존경받던 모습으로, 다시 여기 내 앞에 서 있네. 그분과 함께 우리들에게 잊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네. 자네는 이것을 내 눈앞에 보여줌으로써 부족함이 없는 선물을 해주었네. 우리들의 다니엘 원장을 다시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네는 처음으로 흉금을 터놓고 자네 자신을 완전히 나에게 보여준 걸세. 이제는 자네가 누구라는 걸 나는 분명히 알았네. 이제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아니, 이야기할 필요도 없네. 아, 골드문트, 이런 때가 오다니!"
넓은 작업장 안이 고요해졌다. 골드문트는 그의 친구가 진정으로 감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워서 이 순간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정말,"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나도 기쁘다네. 하지만 자네, 이제는 식사하러 갈 시간이 되었지?"
19.
골드문트가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는 2년이 걸렸다. 그 후부터는 에리히를 완전히 제자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계단의 나무에다 그는 조그만 낙원을 만들었다. 그는 아늑한 기분 속에서 나무라든가 무성한 잎사귀라든가 잡초 같은 것이 자라고 나뭇가지에는 들새들이 노는 평화로운 들을 새겼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동물들의 몸체나 머리 등이 보이도록 했다. 평화롭게 움트는 이 낙원의 한복판에 그는 족장의 생활 중 몇 가지 단면을 표현했다.
부지런한 이 작업이 중단되는 때는 드물었다. 제작을 할 수가 없는 날은 거의 드물었다. 괜히 안절부절 못하거나 싫증이 나든가 해서 작품에 염증을 느끼는 날도 드물었다. 그러한 날이면 그는 제자에게 일을 맡겨 버리고 시골에 가 있는다든가, 말을 탄다든가 해서 숲속에서 자유와 생활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았다. 또한 이곳저곳 농사꾼의 딸을 찾아가거나 푸른 풀밭에 몇 시간이고 드러누워 아치형 천장 같은 나뭇가지나 양치식물, 금잔화들로 뒤덮인 들판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루나 이틀 이상 작업장을 비운 적은 없었다.
그런 순간이 지나면 그는 새로운 정열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 잡초처럼 무성하게 뒤덮인 식물을 황홀한 감정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은 물론이요, 사람의 머리를 애정을 기울여 조각하기도 하고 손에 힘을 주어 입이나 눈이나 엉킨 수염 등을 새기기도 했다.
이 작품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에리히와 나르치스뿐이었다. 그는 자주 찾아왔다. 나르치스에게는 골드문트의 작업장이 간혹 수도원 안에서 제일 좋은 장소가 되었다.
기쁨과 놀라움으로 그는 구경했다. 거기에서는 그의 친구가 불안과 긍지와 순진성으로 피워 내는 꽃이 자라고 있었다. 거기에는 하나의 창조물, 아늑하고 샘솟는 하나의 세계가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생각에 잠겨 이같이 말했다.
"골드문트, 나는 자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네.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 같아. 전에는 예술이라는 것은 사색이나 학문과 비교해 봐서 정말 진정으로 받아들일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네. 인간이란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불안정한 혼합물이며, 정신이 영원한 것에의 인식을 열어 주는 것에 반해 물질은 인간을 끌어내려 무상한 것으로 묶어 놓는 것이기에, 생활을 높이고 생활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 인간은 감각으로부터 떠나 정신적인 것을 향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말이네. 내가 예술을 존중한다고 했었지만 그것은 습관에서 그런 것이지 진짜 속으로는 예술을 경시하고 있었다네. 지금에야 비로소 나는 인식으로 향해 가는 길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정신의 길은 유일의 길이 아니며 또한 최상의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됐네. 물론 나는 그 길에 남게 되겠지만 자네는 그 반대의 길, 즉 감각을 통해서 대다수의 사색가들이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비밀을 더 깊이 파악하고, 훨씬 더 생생하게 표현해 낼 수가 있단 말일세."
"그렇다면 심상을 가지지 않는 사색이란 대관절 무엇인지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자네도 이제 알게 되었군?"
하고 골드문트가 말했다.
"나는 벌써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네. 우리의 사색은 끊임없이 추상이요, 감각적인 것에의 무시오, 동시에 순수한 정신적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시도라네. 하지만 자네는 바로 그 반대로 가장 변하기 쉬운 것과 가장 속된 것을 가슴에 받아들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거기다 심신을 바치고 있다네. 자네의 헌신에 의해서 그것이 최고의 것이 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영혼의 비유로도 될 수가 있네. 우리들 사색가는 세계를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지. 자네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사랑하고 재창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워지려고 해. 사색이나 예술이나 인간인 만든 것으로서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예술 쪽이 더 사심이 없네."
"나는 모르겠네, 나르치스. 하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결말을 짓거나 절망을 방지하는 데는 자네들 사색가나 신학자들이 그래도 더 잘 성공할 것 같은데. 나는 오래 전부터 자네의 학문을 부러워하지 않았다네, 나르치스. 그렇지만 나는 자네의 그 침착성이라든가 평정이라든가 평화 같은 것들을 무척 부러워하고 있네."
"골드문트, 자네가 나를 부러워할 것까지는 없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평화는 존재하지 않아. 평화라는 것이 확실히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 내부에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언제까지나 우리들을 떠나지 않는 그런 평화는 존재하지 않아. 항상 계속되는 부단한 투쟁에 의해서 획득되고 매일 매일의 투쟁에 의해 새로이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평화가 있을 뿐이야. 자네는 내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해. 자네는 내가 연구하고 있을 때의 그 싸움을 모르네. 기도실에서의 나의 싸움도 모르지. 자네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아. 자네는 내가 자네만큼 혼자서 방황하지 않는 것을 봤을 뿐인걸. 그걸 자네는 평화라고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그것은 싸움일세. 올바른 모든 생활이 그러하듯이, 자네 생활도 그러하듯이 싸움과 희생일 뿐이지."
"우리가 그것으로 논쟁을 하려는 것은 아니야. 자네도 나의 싸움이 전부를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일세. 이 작품이 곧 완성될 때 내 마음이 어떨지를 자네가 이해할지 모르겠군. 되기만 하면 어딘가에 놓여지겠지. 다들 나에게 얼마간의 칭찬의 말을 할 거야. 그리고 나는 나의 작품 속에서 잘 되지 못한 여러 가지 점, 더욱이 자네들한테 전혀 보이지도 않는 여러 가지 점, 그런 모든 점에 대해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텅 빈 일터로 다시 돌아갈 거야. 나의 마음속은 일터나 마찬가지로 텅 비고 껍질만 남아 있겠지."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
나르치스가 말했다.
"그 점에선 서로 완전히 상대방을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하지만 선의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것은, 결국 우리들의 작품을 부끄럽게 여기고, 계속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 항상 새로운 희생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
몇 주일 후 골드문트의 대작은 완성되어 저마다의 자리에 놓여졌다. 그가 벌써 몇 해 전에 경험한 적이 있었던 일들이 반복되었다. 그의 작품을 다른 사람의 소유로 옮겨져서 관찰되고 비평받고 칭찬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일터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작품이 그 희생과 똑같은 무게였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제막하던 날, 그는 신부들의 식탁에 초대되었다. 그날 여러 가지 음식과 수도원에서 제일 오래 묵은 포도주가 나왔다. 골드문트는 맛있는 생선과 고기를 마음껏 먹었다. 오래 묵은 포도주 이상으로 나르치스가 그의 작품을 경의로 맞이해 준 열의와 기쁨이 그이 마음을 더 포근하게 해주었다.
원장의 희망과 주문에 의한 새로운 일거리가 벌써 마련되었다. 이 수도원에 소속되어 있는 마리아브론의 신부 한 사람이 사제로 일하고 있는 노이첼 마리아 성당에 제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골드문트는 이 제단을 위해 잊을 수 없는 그의 청년 시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 아름답고 겁 많은 기사의 딸 리디아로 마리아 상을 만들어 영원화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 주문은 그에게 그리 중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에리히에게 수습공 졸업 기념작으로 만들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리히가 그 일을 잘해 내기만 한다면 그는 에리히를 언제까지나 좋은 협력자로 곁에 두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에리히는 그를 보좌해 주고, 그가 염원하고 있는 제작을 위해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리라. 이윽고 그는 제단을 만들기 위해 에리히와 함께 통나무들을 골라 놓고 그것을 에리히한테 정돈시켰다. 골드문트는 자주 에리히를 혼자 있게 했다.
다시 방랑이 시작되어 그는 숲속을 멀리까지 돌아다녔다. 어느 날 골드문트가 며칠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에리히는 그것을 원장한테 알렸다. 원장은 이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골드문트는 돌아와서 일주일 동안 마리아 상을 제작했다.
그러나 다시 방랑이 시작됐다. 그는 걱정이 있었다. 대작을 완성시키고 나서 그의 생활은 무질서해졌다. 그는 아침 미사를 게을리 하고 심한 초조와 불안 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그는 니콜라우스 스승을 머릿속에 몇 번이나 그려 보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이내 니콜라우스처럼 성실하고 충실하고 또한 교묘하지만 자유와 젊음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최근의 조그마한 체험이 그를 명상에 잠기게 했다.
그는 방랑 생활을 하는 도중에 프란치스카라는 귀염성 있는 어느 농사꾼의 딸을 만났다. 마음에 썩 들어서 그 여자를 가까이하려고 애썼다. 물론 사랑을 구하는 지난날의 구애의 기술을 모두 발휘했다. 처녀는 그의 잡담을 즐겨듣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익살에도 싫지 않은 듯 깔깔 웃었으나 구애는 거절했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젊은 여인들한테는 늙은이로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제 그곳에 가지는 않았지만 잊지는 않았다. 프란치스카가 옳았다. 그는 변해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흰머리나 눈가에 잡힌 몇 줄의 주름살보다는 오히려 태도나 심정 속에 있는 그 무엇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고 니콜라우스 스승을 매우 닮았다고도 느꼈다. 그는 불쾌감을 갖고 자기 자신을 관찰했고 자신에 대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이제 자유스러운 몸이 아니고 정주한 몸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독수리도 토끼도 아니고 가축이 되고 말았다. 그는 밖으로 떠도는 날에도 새로운 방랑과 새로운 자유보다는 과거의 향수나 지난날의 유랑의 회상을 더듬는 때가 많았다. 그는 그러한 것을 사라진 먹이의 냄새를 더듬는 개처럼 무기력한 애달픔으로 추적했다.
하루나 이틀, 바깥에서 날을 보내고 좀 거닐면서 일을 잠시 쉬려다가도 할 수 없이 무엇엔가 끌려 돌아오고 말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요, 일터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고, 일하기 시작한 제단이나 준비한 통나무가 조수 에리히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꼈다.
그는 이제 자유로운 신세가 아니었다. 이젠 젊지도 않았다. 마리아 상이 완성되면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자. 그는 한 번 더 방랑의 생활을 해보자고 굳은 결심을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남자만이 사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신부들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좋지 못했다. 사나이들 하고는 마음을 터놓고 같이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예술가의 일에 대한 이해심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유희나, 사랑, 애무 등 그밖의 그가 원하는 것을 그들에게선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여인이라든가 방랑, 혹은 항상 새로운 풍경들이 필요했다. 여기서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약간은 회색을 띠고 있었으며 무겁고 남성적이었다. 그는 거기에 전염되었다. 그것이 그의 핏속에 스며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다시 유랑을 떠난다는 계획이 그를 위로했다. 그는 하루바삐 자유로운 신세가 되기 위해 기운차게 일을 시작했다. 통나무 속에서 리디아의 모습이 차츰 그를 향해 다가옴에 따라서, 고귀한 그녀의 무릎에 엄숙한 차림의 주름을 밑으로 새겨감에 따라 깊고 하염없는 기쁨, 즉 그 목상의 수줍은 미모의 주인공인 처녀의 몸집이나 그 당시 첫사랑이며 첫 여행이었던 청춘에의 슬프고도 가엾은 애착심이 그를 황홀하게 했다.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 목상의 제작을 계속했다. 그것이 그의 최상의 것과 그의 청춘과 더없이 아늑한 추억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갸우뚱한 목과 다정다감하고 애수가 깃든 입과 얌전한 두 손과 길쭉한 손가락과 아름다운 반월형 손톱 등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다. 에리히도 찬탄과 공경에 찬 애착심을 가지고 될 수 있는 한 자주 그 목상을 관찰했다.
작품이 거의 다 되어갈 때 골드문트는 그것을 원장한테 보였다. 나르치스는 말했다.
"여보게, 이것이 자네의 제일 아름다운 작품일세. 온 수도원 안에 이것과 비교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단 말일세. 나는 이 몇 개월 동안 자네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는 초조와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듯했지. 자네가 자취를 감추어서 하루라도 돌아오지 않을 때면 나는 걱정이 돼서 이제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자네는 지금 이렇게 훌륭한 목상을 만들었네! 나는 자네를 기쁨으로 여기는 동시에 자랑으로 여기고 있네!"
"그렇군"
골드문트가 말했다.
"이 목상은 썩 잘됐어. 하지만 나르치스, 내 말을 들어보게! 이 목상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내 모든 청년 시절과 나의 방랑과 연애와 수많은 여인에의 사랑, 그런 것이 필요했었다네. 이것은 그 우물에서 퍼 올린 것이라네. 하지만 우물은 이제 텅 비게 될 테지. 나의 마음속은 허물어진 성터같이 될 걸세. 나는 이 마리아 상을 완성시킬 거야. 하지만 이 작업이 끝나면 잠시 휴식을 취하겠네. 얼마나 오랜 시일이 걸릴지 나도 모르겠네. 나는 나의 청춘과 한때 내가 애착을 기울이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시 찾아 나서겠어. 자네는 그것을 이해하겠는가? 아니, 좋아. 나는 자네의 손님이었지. 그리고 여기서 한 나의 일에 대해서 보수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나는 여러 번 자네에게 보수를 받으라고 요구했었네."
나르치스는 항의했다.
"그랬지. 그것을 지금 받겠네. 새로운 의복을 주문하겠어. 옷이 다 되면 말과 몇 푼의 돈을 얻어서 세상에 나갈 작정이야. 아무 말도 하지 말게, 나르치스. 슬퍼하지 말게. 이곳이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닐세. 어디를 간들 여기보다 더 편한 곳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네. 하지만 내가 떠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네. 내 소원을 들어주겠지?"
둘 사이에 그것에 대한 말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단촐한 승마복과 장화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여름이 가까워오기 전에 그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라도 하듯 마리아 상을 만들어 갔다. 모든 애정을 다 기울여 두 손과 얼굴과 머리에 마지막 손질을 서둘렀다. 그는 출발을 망설여 연기하고 있는 듯, 또한 이 미묘한 마지막 일 때문에 떠나는 것이 자꾸만 조금씩 미루어지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났다. 여전히 이것저것 정리할 것이 있었다. 나르치스는 다가온 이별을 쓰디쓰게 느끼고 있었으나 골드문트가 마리아 상에 애착심을 기울여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가끔 희미하게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골드문트는 갑자기 나르치스를 방문했다. 새로운 옷을 입고, 새 비로드 모자를 쓰고 나르치스에게 작별하러 왔다.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결정한 것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벌써 고해도 하고 성례도 받았다. 지금은 잘 있으라는 인사말을 하고 여행의 축복을 얻기 위해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의 이별은 서글펐다. 골드문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한 용기와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자네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르치스가 물었다.
"그거야 멋진 자네 말이 내 목을 비틀지 않는다면 분명히 다시 만나게 될 걸세. 나만 없다면 이곳에서는 아무도 자네를 나르치스라고 부르고 걱정을 끼치지는 않겠지. 그 점은 믿어도 좋아. 에리히를 돌보아 주길 바라네. 그리고 내 목상에 아무도 손을 대지 않도록 그것은 전에도 말했듯이 내방에 그냥 두어 주게. 열쇠를 잃어버리지 않길 부탁하네."
"여행을 기뻐하고 있나?"
골드문트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응, 그래. 확실히 그래. 하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즐겁지 않은 것 같네.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자네는 비웃을 테지. 하지만 이별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일세. 이 집착이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들어. 이것은 병과 같은 것이어서, 젊고 튼튼한 사람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네. 니콜라우스 스승도 그랬었어. 아, 쓸데없는 말을 지껄여서 무엇하나! 여보게, 날 축복해 주게. 나는 떠나겠어."
그는 인사를 마치자 말을 타고 가버렸다.
나르치스는 자꾸만 친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를 걱정도 하고 그에 대한 그리움도 가졌다. 골드문트는 다시 돌아올까? 달아난 그 새가? 귀여운 그가? 기묘하고 사랑스런 그 사나이는 또 제멋대로 분방한 궤도에 몸을 던졌다. 그는 다시 싫증도 모르고 탐욕스럽고 신기한 듯이 어둡고 강한 충동에 따라 폭풍우와도 같이, 커다란 아이와 같이 세상을 떠돌아다닐 것이다.
하느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를!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지금 그는 범나비처럼 날아다니며 여자를 유혹하고 욕정 때문에 감옥 속에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 이 금발이 소년은 나이 먹는 것을 슬퍼하면서도 왜 이렇게 남의 애를 태우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그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될까!
하지만 나르치스는 진정으로 그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짓궂은 어린아이는 정말로 제어하기가 어려웠던 것, 굉장히 외곬이었던 것, 이제 다시 세상으로 뛰쳐나가서 울분을 풀어 버릴 것, 그런 것을 나르치스는 마음속으로 유쾌히 받아들였다.
어느 시간이고 매일 원장의 생각은 친구에게로 되돌아갔다. 사랑과 그리움과 감사와 걱정 속에서, 때로는 자책 속에서. 그가 얼마나 친구를 사랑하고 있으며 친구가 변하지 않길 바라고 있었던 가를, 그가 친구와 친구의 예술을 통해서 얼마나 윤택해졌는가를 고백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는 친구에게 그것에 대해서 별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아마 지나칠 정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만약에 그 말을 했더라면 친구를 붙잡아 둘 수도 있었을 것을.
그는 골드문트에 의해서 풍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빈약해지기도 했다. 그것을 친구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은 확실히 다행한 일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 고향, 그의 세계, 그의 수도원 생활, 그의 직함, 그의 학식, 훌륭하게 조직된 사상의 구성, 이런 것이 모두 친구에 의해서 이따금 크게 동요를 받고 또한 의심을 받았었다.
틀림없이 수도원, 즉 이성과 도덕면에서 본다면 그 자신의 생활은 보다 좋고 옳으며, 보다 안정되고, 보다 규율이 있었으며, 보다 모범적이었다. 그것은 질서와 준엄한 봉사의 생활과 부단한 희생, 밝음과 옳음에의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예술가나 유랑자나 바람둥이들의 생활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나았었다.
하지만 위에서, 즉 하느님의 세계에서 본다면, 과연 모범적인 생활이 질서와 규율, 속세와 감각적 행복에의 단념, 더러움과 피부로부터의 이탈, 철학과 신에 대한 공경에의 침잠 등은 골드문트의 생활보다 과연 나을까? 인간은 과연 기도의 종소리가 시간이나 행사 등을 알려 주는 것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단 말인가?
인간은 과연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하고, 그리스 어에 정통하고, 관능을 억제하고, 속세에서 달아나도록 만들어져 있단 말인가?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졌을 때 그는 관능의 충동, 죄악이나 향락이나 절망으로 치닫는 능력 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르치스의 생각이 친구에게 달려가고 있을 때, 그는 이런 의문점에서 끊임없이 맴돌곤 하였다.
그렇다, 골드문트와 같은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보다 용감하고 활기찬 생활일는지도 모른다. 속세를 떠나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상의 화원을 설계하고 안전한 화단 사이를 몸에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다니는 대신 무자비한 격류와 혼돈 속에 몸을 맡겨서 죄악을 범하고 그 쓰디쓴 결과를 받아들이는 편이 보다 용감하고 위대한 것이었으리라. 낡아서 닳아빠진 신발을 신고 숲속이나 시골길을 헤매기도 하고, 관능의 향락에 빠지기도 하며 살아나간다는 것이 더 많은 용기와 더 고귀한 희생이 강요되리라.
아무튼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즉 고귀한 위치에 서도록 정해진 인간은, 정열적이고 도취적인 생활이 혼란 속에 깊숙이 잠겨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비겁해지거나 혼란 속에 빠지지 않으며 동시에 내부의 신성한 것을 죽이지 않으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거룩한 그의 영혼 속에서는 신성한 빛과 창조력이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르치스는 친구의 복잡한 생활 속을 깊숙이 들여다보았으나 친구에 대한 그의 사랑이나 존경은 줄어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골드문트의 때묻은 두 손에서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게 살아가는 내면의 형식과 질서에 의해서 빛을 발하는 목상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두 눈으로 본 이래, 영혼에서부터 빛을 발하는 얼굴, 또는 정갈한 식물이나 꽃이, 애원을 하는 손이나 은혜를 받는 두 손, 대담하고 온화한 동시에 자랑스럽고 거룩한 자태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본 이래, 나르치스는 이 불안정한 예술가인 동시에 유혹자의 마음속에서 넘쳐흐를 듯한 빛과 신의 은총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화로써 그의 규율과 사상의 질서를 친구의 정열에 대비시킴으로써 친구에 대해 우월감을 갖기는 용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골드문트가 만든 목상의 조그만 자태 하나하나, 눈, 입, 곱슬곱슬한 수염, 의복이 주름살 하나하나는 사색가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현실적이고 약동적이었으며 동시에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음은 언제나 저항과 고난에 차 있는 그 예술가가 현재와 장래의 무수한 인간들을 위해 그네들의 고난과 노력의 상징을 높이 들지 않았던가! 무수한 사람들의 기도와 외경과 마음의 고뇌와 그리움의 표적이 되고 위안과 신뢰와 격려를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목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나르치스는 감회에 젖어서 청년 시절의 처음부터 친구를 인도하고 가르친 장면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회상해 냈다. 친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친구는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언제나 그의 우월성과 지도성을 인정했었다.
그런 다음에 친구는 한없는 정적 속에서, 채찍질 받는 그의 생활의 폭풍우와 고뇌 속에서 태어난 작품을 높이 쳐들었다. 말도 가르침도 설명도 경고도 하지 않은, 높이 쳐들어진 참다운 생활이었다. 거기에 비한다면 그의 지식과 규율과 변증법은 그 얼마나 빈약한 것이란 말인가!
그가 곰곰이 생각하는 문제들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가 지난날 골드문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경고해 주어 그의 청춘에 관여하고 그의 생활을 새로운 세계로 옮기게 해주었듯이, 이제 그 친구는 수도원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놓고 말았다. 친구는 그와 똑같이 되고 말았다. 나르치스가 친구에게 주었던 것들이 모두 그 몇 배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길을 떠난 친구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몇 주일이 흘러갔다. 밤나무꽃은 벌써 오래 전에 까맣고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황새는 어느덧 정문의 탑 위에서 알을 까 새끼를 데리고 다니면서 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골드문트가 떠나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나르치스는 자기에게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았다. 그는 수도원 안에 박식한 몇 분의 신부를 모시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분은 플라톤의 정통자, 한 분은 훌륭한 문법 학자, 그리고 두세 분의 주도 면밀한 신학자였다. 수사들 가운데도 진지하고 언제나 변치 않는 성실한 사람이 몇 있었다. 하지만 자기와 대등할 수 없는 사람, 성실하게 대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골드문트뿐이었다.
그 친구를 이제 또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생각은 자꾸만 멀리 떠나간 친구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그는 자주 작업장으로 가서 조수 에리히를 걱정했다. 에리히는 제단을 만드는 일을 계속하며 스승이 돌아올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때때로 나르치스는 마리아 상이 있는 골드문트의 방문을 열고 목상을 덮은 천을 조심조심 걷어내고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는 이 목상의 유래를 알지 못했다. 골드문트는 그에게 리디아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르치스는 모든 것을 감각으로 느껴서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자태가 오랫동안 친구의 가슴속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친구는 그녀를 유혹하고, 기만하고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는 그녀를 그의 영혼을 속에 숨겨 두고 가장 훌륭한 남편보다도 더 충실하게 지켜나가 이후 그녀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고 기나긴 세월을 보낸 다음, 이윽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그녀의 목상을 만들어 그 얼굴과 모습에 두 손목에 사랑하던 사나이의 모든 애정과 흠모와 그리움을 쏟아넣은 것이리라.
식당의 낭독대에 새겨진 목상에서도 그는 친구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읽었다. 그것은 충동적인 한 인간의 생애였다. 그것은 고향 없는 사나이, 정처 없는 사나이의 생애였다. 충실하고 생명에 가득 차고 사랑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생명은 왜 그다지도 신비에 가득 차고, 그의 물결은 왜 그다지도 흐리고 거세었던가! 그리고 여기에 서 있는 그의 작품은 왜 이다지도 고귀하고 아름다운가!
나르치스는 싸웠고, 그는 그것을 이겼다. 그는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의 엄격한 봉사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친구를 잃고 슬퍼했다. 그의 마음은 하느님과 그의 직무에만 바쳐야 하는 것인데도 친구에게 너무나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괴로워했다.
20.
여름이 지나갔다 양귀비꽃, 도깨비부채꽃, 선옹초, 과꽃 등은 시들어 없어지고 말았다. 연못의 개구리도 조용해지고, 황새는 높이 날아 떠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골드문트가 다시 돌아왔다. 보슬비가 내리는 어느 날 오후, 그는 돌아와서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문에서 곧장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도착한 것이다.
에리히는 골드문트가 들어왔을 때 깜짝 놀랐다. 단번에 그가 골드문트라는 것을 알고, 그의 가슴은 스승을 향해 심하게 고동쳤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골드문트가 아닌, 무척 나이가 든 반쯤 사라져 없어진 듯한 먼지투성이의 회색 얼굴, 움푹 들어간, 또 병으로 시달리고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인자해 보이는 늙은이의 지긋한 미소였다. 그는 간신히 두 다리를 끌다시피 하여 걸음을 옮겼다. 병들고 몹시 지친 것 같았다.
이처럼 달라지고 모습이 말이 아닌 골드문트는 이상하다는 듯 젊은 조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마치 옆방에서 나온 듯, 그리고 여전히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악수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인사도 질문도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자야지' 했을 뿐이었다. 극도로 지친 것 같았다.
그는 에리히를 내보내고 작업장 옆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모자와 신발을 벗고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방 한구석에 마리아 상이 여전히 천을 쓰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쪽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가서 천을 벗기려고도, 살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그만 창가에 서서 에리히가 바깥에서 당황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에리히, 내가 돌아온 것을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마라. 나는 너무 지쳤어. 시간은 내일도 있으니 말이야."
그러고는 입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누워 있어도 여전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괴로운 듯 조그만 거울이 걸려 있는 벽 쪽으로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기진맥진한 골드문트, 하얗게 센 수염을 가진 사나이, 지치고 나이 먹고 시들어 버린 사나이였다. 작고 흐릿한 거울의 표면에서 그를 향해 바라보고 있는 사나이는 얼마간 제정신을 잃은 듯한 노인이었다. 눈에 익은 얼굴 같기도 하지만 서먹서먹하기도 한 얼굴이었다. 그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 같았다. 그것을 그가 알고 있는 이 얼굴 저 얼굴을 기억하게 했다. 어느 정도는 니콜라우스 스승을, 어느 정도는 지난날 그를 위해 시동옷을 만들게 한 노기사를, 또 어느 정도는 성당에 있는 성야곱 - 순례 모자를 쓰고 지독한 노령에다 회색빛이기는 하지만 명랑하고 친절하게 보이는 그 늙은 털보의 야곱을 회상케 했다.
이 낯선 사람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 두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처럼, 그는 거울 속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가 그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감정과 딱 들어맞았다. 몹시 지친데다 어느 정도 둔해진 노인이 여행에서 돌아왔던 것이다. 보기에도 허름한, 어디 하나 뽐낼 것이 없는 사나이. 하지만 그는 그 사나이에게 아무런 반감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호감을 가진 듯했다.
그 사나이는 예전의 아름답던 골드문트가 가지지 못했던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 지쳐서 기력과 정력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만족감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조용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아무 뜻 없이 빙긋이 웃었을 때 거울 속에 있는 모습이 같이 웃었다.
정말로 멋진 사나이를 여행에서 데리고 온 것이다. 누더기 옷을 걸치고 돈 한푼 없이 돌아왔다. 말과 짐과 돈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잃고 말았다. 청춘, 건강, 자신, 얼굴의 홍조, 눈초리의 힘 등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 모습만은 마음에 들었다. 거울 속의 이 나이 먹고 쇠약해진 사나이가 오히려 그가 오랫동안 지니고 다녔던 골드문트보다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 사나이는 나이 들고 쇠약하고 애처로웠지만 그럴수록 더 악의도 불만도 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그는 웃다가 주름 잡힌 눈꺼풀을 내리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튿날, 그가 방안에 놓인 책상에 기대어 스케치를 하고 있는데 나르치스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문앞에 서서 말했다.
"자네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네. 고맙네. 정말 기뻐. 자네가 나에게 찾아와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자네한테 왔지. 자네 일에 방해라도 되는가?"
그는 가까이 왔다. 골드문트는 이젤에서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다. 에리히가 귀띔을 해주었는데도 그는 친구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친구는 정답게 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음, 돌아왔네. 잘 있었나, 나르치스? 오랜만일세그려. 진작 찾아보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게."
나르치스는 친구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친구의 얼굴이 빛을 잃고 애처로울 정도로 시들어 버린 것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 즉 평정과 무관심, 노인들의 얼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체념의 표정도 보았다.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 경험을 쌓고 있는 그는 친구가 낯설게 변해 버린 것을 느꼈고, 이제는 그가 알고 있던 골드문트는 이 세상에선 완전히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영혼이 현실에서 까마득히 먼 곳으로 떠나서, 꿈길을 걷고 있거나 혹은 벌써 피안의 세계로 통하는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 아픈가?"
그는 신중하게 물었다.
"응, 아프기도 해. 나는 여행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벌써 앓기 시작했네. 하지만 내가 금세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심정은 짐작할 테지. 내가 그렇게도 빨리 나타나서 승마화를 다시 벗어던졌으면 자네들은 나를 웃음거리로 삼았을 거야. 그렇지, 나는 그게 싫었단 말이야. 나는 곧장 길을 재촉해 떠돌아다녔지. 여행에 실패했기 때문에 부끄러웠던 거야. 내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네. 좋아, 말하자면 나는 부끄러웠지. 그거야 자네는 벌써 알고 있을 테지. 자네는 매우 현명한 사람이니 말일세. 실례지만, 무슨 말을 물었나? 아무래도 도깨비한테 홀린 것 같군. 나는 언제나 무엇이 문제의 초점인지를 잊어버리고 만단 말이야. 하지만 내 어머니 말인데, 그건 자네가 말한 것이 맞았어. 정말 슬펐지만, 그래도...."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는 미소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자네를 다시 건강하게 해주겠네, 골드문트. 자네를 부자유스럽게 하지는 않겠어. 그런데 왜 몸이 불편해졌을 때 얼른 돌아오지 않았나. 자네가 우리를 부끄러워할 게 뭐 있어? 좀더 빨리 돌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골드문트는 웃었다.
"응, 이제 겨우 알겠어. 정말이지 깨끗이 돌아올 용기가 없었던 거야. 정말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돌아왔잖나. 건강도 다시 좋아질 걸세."
"몹시 앓았었나?"
"앓았느냐구? 응, 지독하게 앓았었네. 하지만 앓는다는 것은 아주 좋은 거야. 그것이 내 본심으로 돌아가게 한걸. 이젠 부끄러워하지 않네. 자네한테도 자네가 내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감옥으로 나를 찾아왔을 땐 어찌나 부끄러운지 입술을 깨물지 않을 수 없었단 말이야. 지금은 그것도 지나가고 말았지만."
나르치스는 친구의 팔을 잡았다. 친구는 이내 입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원장은 깜짝 놀라 줄달음쳐 수도원의 의사인 안톤 신부를 부르러 갔다. 의사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골드문트가 화가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그를 침대로 눕혔다.
의사는 그의 병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병실로 옮겨졌다. 에리히가 시중을 들기 위해 옆에 남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여행의 우여 곡절은 결국 하나도 명백해지지 않았다. 토막토막은 그가 이야기했으나 많은 것을 추측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멍하게 누워 있을 때가 많았다. 때로는 열이 오르고 헛소리까지 했지만 의식은 분명했다.
그럴 때마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를 불렀다. 나르치스에게는 골드문트와의 마지막 대화가 매우 중요했다.
"내가 언제부터 앓기 시작했는가 하면, 떠나던 첫날부터였어. 나는 숲속으로 말을 몰고 있었지. 나는 말과 함께 넘어져서 냇물에 빠져 하룻밤을 차디찬 물 속에 자빠져 있었네. 거기서 갈빗대가 부러지고서부터는 고통이 시작되었어. 그때 나는 아직도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었지만 돌아오기가 싫었지. 유치한 생각 같겠지만 비웃음을 살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는 자꾸 말을 몰고 갔지. 너무나 아파서 더 이상 말을 탈 힘도 없어지자 말을 팔고 말았네. 그런 다음에 어떤 병원에서 기나긴 시간 누워 있었지. 나는 거기서 그냥 주저앉았네, 나르치스. 이젠 말을 탈 수도, 방랑 생활을 할 수도 없었어. 춤도, 여자도 마지막이야.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더 오래, 아마 몇 년이고 바깥 세계에 있었을 거야. 하지만 이젠 바깥 세계가 더 이상 나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목숨이 다하기 전에 스케치나 더 하고 목상이나 몇 개 더 만들어서 무슨 기쁨이라도 갖고 싶다고 생각했지."
나르치스는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돌아와 주어서 무엇보다도 기쁘네. 자네가 없는 것이 얼마나 서운한지. 나는 날마다 자네를 생각하고 있었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마 자네는 모를 거야."
골드문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없어졌다고 해도 별로 대수로운 것은 없었을 테지, 안 그런가?"
나르치스는 슬픔과 애처로움에 가슴을 태우며 천천히 골드문트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우정이 계속되던 기나긴 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지금 하고 있었다. 그는 골드문트의 머리와 이마에 그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처음에는 미심쩍은 듯, 그 다음은 갈망하는 듯, 골드문트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차렸다.
"골드문트."
친구는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좀 더 일찍이 자네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을 용서해 주게. 주교의 성에 있는 감옥으로 자네를 찾아갔을 때, 아니, 자네가 만든 최초의 목상을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자네에게 이 이야기를 했어야 했네. 오늘 자네한테, 내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주게. 말하자면 내가 자네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자네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자네가 내 생활을 얼마나 윤택하게 해주었는가 하는 것 등을 말일세. 하지만 자네에게는 별다른 의미도 없을는지 모르지. 자네는 사랑에 익숙해 있으니 말이야. 자네는 수많은 여인들한테서 사랑도 받고 좋은 대우도 받았어. 그러나 나는 달랐어. 내 생활은 사랑에 굶주리고 있었네. 나는 항상 그 최상의 것에 굶주리고 있었지. 다니엘 원장은 나에게 거만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 아마 그분 말씀이 옳았을 거야. 나는 사람들에게 부당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어. 사람들에게 정당하게 대하려고 무척 애를 썼지. 하지만 사람을 사랑한 적은 없다네. 수도원 안에 박식한 학자와 약한 학자가 있다면 나는 박식한 쪽을 좋아하지. 그런데도 사랑이 무엇인가를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두 자네 덕분일세.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유독 자네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네는 짐작할 수 없을 걸세. 그것은 사막 속에 있는 오아시스를 의미하는 동시에 황량한 들판에서 꽃이 피는 나무를 의미하는 걸일세. 내 가슴이 메마르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찾아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나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오직 자네 덕분이네."
골드문트는 기쁜 듯, 그러나 다소 당황한 듯 빙그레 웃었다. 의식이 또렷했을 때 나지막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내가 교수대에서 구출되어 같이 귀로에 접어들었을 때 내가 블레스의 안부를 묻자 자네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지. 그때 나는 보통 말을 분별도 잘 할 줄 모르는 블레스를 염려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네.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었다는 것을 알고 이만저만 기쁘지 않았다네. 그리고 지금, 난 자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네. 나도 자네를 언제나 사랑하고 있어, 나르치스. 내 생활의 절반은 자네의 사랑을 구하는 일이기도 했다네. 자네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네와 같이 자아가 강한 사람이 그것을 나에게 말할 때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었네. 그것을 지금 자네는 나에게 말했네. 내가 이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이 순간에, 방랑과 자유와 속세의 여인들이 나를 버리고 만 지금 자네의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네에게 감사를 전하네."
마리아 상이 방 한가운데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네는 언제나 죽는다는 것을 머리에 새기고 있구먼."
나르치스가 말했다.
"응, 생각하고 있지. 그리고 내 일생이 어떻게 됐는가를 생각했네. 내가 아직도 희망을 가졌었지. 자네는 그것이 나의 천직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 주었어. 그래서 나는 그 생활의 반대편, 즉 관능의 세계로 몸을 던졌네. 여인들은 내가 쾌락을 발견하는 것을 쉽게 해주었지. 여자들은 전혀 싫은 내색 없이 기꺼이 응해 주었네. 하지만 나는 지금에 와서 여인들이나 관능의 향락을 경멸하는 것 같은 그런 언사는 쓰고 싶지 않아. 나는 때로 매우 행복했었지. 관능적인 것을 정화시키는 일에서 행복을 맛볼 수 있었으니까. 거기에서 예술이 생기는 거야. 하지만 이제는 관능의 불꽃도 예술의 불꽃도 꺼져 버리고 말았네. 이제는 여자들이 나를 향해 줄달음질쳐 온대도 나는 그 행복을 가지지 않을 거야. 예술품을 만드는 것도 이젠 나의 소망이 아니야. 형상은 이제 싫증나도록 만들었어. 목숨은 문제도 되지 않아. 그러니 나는 이제 죽어야 할 시기지. 나는 기꺼이 죽겠네. 왠지 죽는다는 것에 대해 흥미가 생기는군."
"흥미가 생기다니 무슨 뜻이지?"
나르치스가 물었다.
"그런 말이 어리석게 들리겠지. 하지만 나는 진짜 흥미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피안에 대해서가 아니야, 나르치스. 그것은 거의 생각지도 않아. 고백해도 좋다면 나는 피안 같은 것을 믿고 있지도 않네. 피안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단 말일세. 말라 버린 나무는 영원히 죽고, 얼어 죽은 새는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아. 사람도 죽으면 마찬가지일 테지. 없어지고 나면 잠시 동안은 그 사람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않겠지. 아니, 내가 죽음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 어머니를 향해 가는 길목에 있다는 것이 언제나 변치 않는 나의 신앙 혹은 나의 꿈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지. 죽음은 크나큰 행복이리라. 맨 처음 사랑이 이루어졌을 때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크나큰 행복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단 말일세. 나를 다시 받아들여서 허무와 순결 속으로 인도해 주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어머니일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뿌리칠 수가 없단 말일세."
그날 이후 골드문트는 며칠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 나르치스가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생기가 돌아온 듯 말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르치스는 이렇게 물었다.
"안톤 신부에게 자네가 자주 무서운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게 틀림없을 거라고 하더군. 골드문트, 자네는 어쩌면 그렇게 조용히 참아 나갈 수가 있나? 자네는 이제 평화를 되찾은 것인가?"
"하느님과의 평온 말인가? 아니, 나는 그 평온은 발견하지 못했네. 그리고 난 하느님과의 평온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단 말일세. 하느님은 세상을 지독하게 만들었어.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필요도 없어. 내가 하느님을 찬양하든 하지 않든 하느님에게는 그다지 문제도 되지 않을 거야. 하느님은 세상을 지독하게 만들었네. 하지만 내 가슴의 고통은 평화로이 가라앉았어. 그것은 옳아. 나는 전에는 고통을 그다지 잘 견디어 내지 못했어. 죽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종종 생각했었지만 아무튼 그것은 과오였단 말일세. 그날 저녁 하인리히 백작의 감옥에서, 죽는다는 것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됐을 때 그것을 알았네. 나는 쉽사리 죽을 수만은 없었단 말이야. 그러기에는 나는 너무나 강하고 과격했었지. 그놈들은 나의 손발을 하나씩 잘라내어 죽이지 않으면 안 됐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네."
누워서 말하는 것이 그를 피로하게 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츰 기력을 잃어갔다. 나르치스는 그가 무리하지 않도록 타일렀다.
"아니."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것을 자네한테 얘기해 주겠어. 예전 같았으면 자네한테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했을 거야. 자네는 분명 웃을 걸세. 말하자면 내가 말을 얻어 타고 여기에서 나섰을 그 당시 무턱대고 간 것만은 아니었네. 하인리히 백작이 귀국해서 그의 애인 아그네스가 곁에 있다는 소문을 나는 들었단 말일세. 아니 좋아, 자네한테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겠지. 지금에 와선 나한테도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때 그 소식은 나를 가만히 있게 하질 못했단 말이야. 내 머릿속은 아그네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었는걸. 그 여자는 내가 알고 있는 여자 중에서, 그리고 또 내가 사랑한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어.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서 한 번 더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어. 나는 말을 타고 갔지. 일주일 후에 나는 그녀를 찾아냈네. 거기서, 바로 그때 나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어. 나는 그 여자를 찾아냈네.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했지. 나는 그녀를 찾아내고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녀와 이야기할 기회를 노렸지. 하지만 나르치스, 그녀는 나 같은 인간은 상종도 하지 않으려 들었어! 나는 그녀에게는 이미 쓸모가 없었던 거지. 나이가 든데다 무기력해 보였던 거야. 그녀는 이미 나 같은 존재한테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았던 걸세. 그래서 나의 여행도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말았지. 하지만 나는 자꾸 앞만 보고 말을 몰았네. 그처럼 실망하고 초췌한 몰골로 자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는 정말 싫었지. 그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말에 몸을 싣고 있을 때, 힘도 젊음도 영리한 재주도 벌써 나를 떠나가고 말았네. 아무튼 말과 함께 낭떠러지에서 굴러 개울 속에 떨어졌고 갈빗대가 부러진 채 물 속에 처박혀 있었으니 말일세.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어. 떨어질 때 나는 내 가슴속에서 무엇이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지. 그런데 그렇게 뚝 끊어지는 그것이 나한테는 기뻤다네. 즐거이 그 소리를 듣고 거기에 만족했지. 물속에 나자빠져서 나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감옥 안과는 모든 게 달랐어. 나는 조금도 거역하지 않았네. 죽는다는 것은 이제 당연하다고 생각되었지. 나는 심한 고통을 느꼈네. 나는 그 뒤에도 그 고통을 가끔 겪고 있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꿈이나 환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나는 가지고 있었던 셈이지. 나는 쓰러져 있었어. 불이 붙은 것처럼 가슴속이 아팠네. 나는 저항해서 고함을 쳤지. 하지만 거기서 깔깔대는 한 여인의 웃음소리를 들었네. 유년 시절부터 통 듣지 못했던 소리였어. 그것은 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네. 육체적인 쾌락과 사랑에 가득 찬 그윽한 여자의 목소리였어. 그래서 나는 그것이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네. 어머니가 내 옆에 와서 나를 무릎에 앉히고는 내 가슴을 풀어헤쳐 손가락을 갈빗대 사이에다 넣고 내 심장을 끄집어내려는 것을 알았네. 그것을 이해했을 때는 벌써 아픈 것도 사라진 뒤였네. 지금 그 고통이 다시 찾아온다 해도 그것은 고통의 원수도 아닐 걸세. 그것은 내 심장을 끄집어내는 어머니의 손가락이야. 어머니는 부지런히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어. 어머니는 때때로 와서는 쾌감을 맛보듯이 신음하기도 하지. 때때로 어머니는 웃으면서 애정에 담뿍 젖은 속삭임을 던지기도 한다네. 때로는 내 옆에 있지 않고 높은 하늘에 계셔. 구름 사이에서 그녀의 얼굴이 구름처럼 크게 보이지. 그곳을 떠돌면서 슬픈 미소를 띠고 있네. 그 슬픈 미소가 나를 끌어당기고 심장을 가슴속에서 끄집어내지."
계속해서 그는 그 여자, 즉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직도 자네는 기억하고 있나?"
그는 마지막 날 물었다.
"내가 나의 어머니를 잊고 있었을 때 자네가 이상한 힘을 가지고 불러내 주었지. 그때도 사나운 짐승의 이빨이 내 심장을 물고 늘어진 것처럼 무섭게 아팠어. 그때 우리는 아직 소년이었지. 그러나 그때 어머니는 나에게 소리치고 있었어. 나는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네. 어머니는 어디든지 있었어. 그녀는 집시의 여인 리제였고, 니콜라우스 스승의 아름다운 마리아 상이었네. 그녀는 생명이요, 사랑이요, 쾌감이었지. 그녀는 불안이요, 굶주림이요, 충동이었네. 그녀는 이제는 죽음이어서, 손가락을 내 가슴속에 쑤셔 넣고 있네."
"너무 많이 말하지 말게, 이 사람아."
나르치스는 말했다.
"내일 또 하면 되잖나."
골드문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나르치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여행에서 가지고 돌아온 새로운 미소였다. 지독하게 늙어서 볼품없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좀 멍청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선의와 지혜가 가득 찬 듯한 그런 미소였다.
"여보게 이 사람."
그는 소곤댔다.
"나는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네. 나는 자네하고 작별을 고해야만 해. 작별을 위해 나는 자네에게 모두 다 이야기해야만 하네. 조금만 더 들어주게. 나는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해.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내 심장을 꼭 누르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단 말일세. 어머니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몇 해 전부터 나의 가장 소중하고 가장 신비한 꿈이었지. 그것이 내겐 모든 형상 가운데서도 가장 신성한 것이었어. 언제나 나는 그것을 내 가슴속에 품고 있었네. 얼마 전까지만 어머니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고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도무지 견딜 수가 없더군. 나의 일생 전체가 무익한 것같이만 생각됐네. 어머니와의 관계는 실로 이상하지 않은가? 나의 손이 어머니를 만들어 내는 대신에, 나를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어머니란 말일세. 그녀가 그 두 손을 내 심장 둘레에 대고 심장을 끄집어내어 나를 텅텅 비게 해버렸네. 그녀는 나를 유혹해서 죽음에의 길로 인도했네. 나와 함께 나의 꿈도 아름다운 형상도, 위대한 인류의 어머니 이브의 상도 죽어 버리고 말았다네. 또 그것이 보이는군. 만약 손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단 말일세. 오히려 그녀는 내가 죽는 것을 바라고 있어. 나는 기꺼이 죽겠네. 그녀가 그것을 나에게 용이하게 해줄 걸세."
나르치스는 두려움 속에서 친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잘 알아듣기 위해 그는 친구의 얼굴 위에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세히 들리지 않는 말도 많았다. 그리고 또 어떤 말은 잘 들렸다. 하지만 그 비밀은 그냥 감추어진 대로였다.
병자는 다시 한 번 눈을 뜨고 친구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는 눈짓으로 친구와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애써 고개를 흔들려는 듯한 동작을 하며 그는 소곤거렸다.
"나르치스, 자네가 만약 어머니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언젠가 한 번은 죽을 텐데, 자네는 대관절 어떻게 죽을 작정인가? 어머니가 없어서야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고, 어머니가 없어서야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느냐 말일세."
그러고 나서 다시 무어라고 중얼거렸으나 그것은 이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마지막 이틀 동안 나르치스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친구의 침대 옆에 앉아 숨이 끊어져가는 친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골드문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그의 가슴속에서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