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
Herman Hesse
1.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입구는 이중의 기둥이 떠받치는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그 앞의 길가에는 밤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것은 옛날, 로마 순례자의 한 사람이 가지고 온 남국의 유일한 기념품으로 줄기가 시원스럽게 뻗은 밤나무였다. 휘영청한 가지를 길 위에 부드럽게 늘어뜨리고는 바람 속에서 가슴 가득히 숨을 쉬며, 수도원의 호두나무까지 벌써 불그스레한 어린 잎새를 달고 있고 주위의 모든 나무들이 파릇파릇하게 된 때에도, 이 나무만은 오랜 시간 잎이 돋기를 기다렸다가 밤이 가장 짧을 무렵이 되면 무성한 잎새 사이로 가냘프고 희끄무레한 푸른 이삭 같은 색다른 꽃을 내밀었다. 그 꽃은 사람에게 무엇인가 경고하듯이 가슴을 답답하게 죄는 듯한 짙고 역한 향기를 풍겼다. 그리고 10월이 되어 과일과 포도가 수확되고 나면 가을바람 속에 노랗게 물든 가지에서 밤송이가 떨어졌다. 그러나 해마다 완전히 익은 밤을 따본 적은 거의 없었다. 수도원의 학생들이 이 열매를 가지려고 서로 경쟁을 벌이기도 하거니와 이탈리아 사람인 그레고르 부원장이 자기 방의 난롯불에서 성급하게 열매를 구워먹는 탓도 있었다. 이 아름다운 나무는 수도원 현관 앞 가득히 이국적인 우아한 모습으로 가지를 하늘거리며 서 있었다. 산지가 다르므로 민감하고 추위에 약한 먼 곳에서 온 손님이었지만, 정문에 쌍을 이룬 화사한 사암석의 기둥과, 아치형 창문과, 처마 장식과, 기둥들의 석조 장식과는 은근히 조화되는 곳이 있어 보였다. 또한 이탈리아 사람이나 라틴 계통의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었으며 이 고장 사람들에게서는 진귀한 진품으로서 아낌을 받고 있었다.
이 외래종 밤나무 밑을, 이미 몇 세대의 수도원 학생들이 스쳐갔다. 석판을 옆에 끼고 지껄이고 웃으며 장난치며 다투거나 하면서, 계절에 따라 맨발이 되었다가 신을 신기도 했다가 또 꽃을 따서 입에 물기도 하고 호두를 까먹기도 하고 손에 눈덩어리를 들기도 하고서. 이렇듯 새로운 학생들이 끊임없이 오고갔다. 얼굴들은 이삼 년마다 변해 갔어도 대개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다만 금발이냐 고수머리냐 하는 차이뿐이었다. 대개는 이곳에서 남아서 수사가 되거나 아니면 보좌 신부가 된다. 모두들 머리를 빡빡 깎이운 채 법의에 노끈 띠를 매고는 책도 읽고 학생들도 가르친다. 그러면서 늙어 죽어간다. 나머지 학생들 중에서 학창시절이 지나면 그들 기사의 성이나 상인 집이나 직공 집이나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제각기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바로 세상에 나가 즐기거나 사업을 하면서 한 번쯤은 수도원을 찾아올 때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어른이 되어, 앳된 어린 아들을 학생이랍시고 데리고 와서 신부에게 맡기고는 잠시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에 잠긴 듯 밤나무를 쳐다보다가 이내 사라진다. 수도원의 기도실과 집회실 안에 둥근 아치형의 묵직한 창문과 석조로 된 두 겹의 단단한 기둥이 서 있는 사이에서, 생활은 물론이고 수업이나 연구가 이루어 졌고, 관리와 지배가 착실히 계속되어 갔다. 온갖 예술과 학문을 이곳에서 했고 세대에서 세대로 그것을 전해 주었다. 종교적인 것도, 세속적인 것도,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여러 종류의 책들이 저술되고 주석들이 가해졌다. 체계가 세워졌고 고인들의 문헌이 수집되었다. 장식 문자가 그려지고, 민족의 신앙이 보호되어지고, 또한 냉소를 받기도 했다. 지식과 신앙, 심원과 교활, 복음서의 지혜와 그리스 인들의 지혜, 이른바 상도의 정직한 마술과 요령을 부리는 정직하지 못한 마술, 아무튼 온갖 것들이 여기서는 번창해 갔다. 이 모든 것을 착실히 쌓아둘 자리도 있었으며 은둔 생활과 참회 생활은 물론이요, 사교 생활을 위한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느냐, 저것이 더 지배적이냐? 이 두 가지 중 결정의 초점은 그때그때 원장의 인간됨됨이나 지배적인 시대의 흐름에 따르고 있었다. 이 수도원은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나 혹은 악령 들린 사람 때문에 유명해질 때도 있었고 더러는 이름 있는 사람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뛰어난 음악가 때문에, 때로는 치료와 기적을 베푸는 신부님 때문에, 때로는 잡아온 잉어 스프 아니면 사슴의 간장으로 만든 만두 때문에 그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유명해져 갔다. 수사나 학생들 가운데는 믿음이 강한 사람, 태도가 그저 흐릿한 사람, 단식하는 사람, 살이 피둥피둥 찐 사람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여기 와서 생활하고 또한 죽어간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늘 한 명쯤은 고립된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중 누구는 사랑을 받고 누구는 미움을 받는다. 누구는 선택된 사람처럼 보이고 누구는 같은 시대 사람들의 기억에는 사라진지 오래더라도 그후 오래까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다.
마리아브론 수도원에는 이번에도 예외 없이 고립된 특별한 사람 둘이 있었다. 한 명은 늙었고, 한 명은 젊었다. 수많은 수도자의 무리들이 대침실이나 성당이나 교실 등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둘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으며 누구에게든지 주목을 받고 있었다. 늙은이는 원장 다니엘이요, 젊은이는 그의 제자 나르치스였다. 나르치스는 최근에 수습 수사가 되었지만 그의 특별한 재능으로 인해 모든 관례를 깨고 벌써 교사의 직무를 맡아 보고 있었다. 특히 그리스어에서. 한 사람은 원장으로 한 사람은 수사로, 이 두 사람은 수도원 안에서 세력도 가졌으며 주목도 받았고, 호기심도 일으켰으며 흠모도 받았다. 또한 부러움도 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뒤에서는 비방도 받았다.
원장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적이 없었다. 원장은 적선과 소박과 겸허가 하나로 뭉쳐진 사람이었다. 다만 수도원의 학자들만은 그 사랑 속에 어느 정도의 멸시감도 없지 않았다. 다니엘 원장은 성자였는지는 모르지만 학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혜라 해도 좋을 소박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라틴어는 그렇게 능하다고 할 수 없었고 그리스어는 전혀 못했다.
원장의 소박성에 간혹 비웃음마저 보내고 있는 몇몇 사람은 상대적으로 나르치스에게 매력을 느꼈다. 기품 있는 그리스어를 구사했으며 행동거지가 기사답게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고, 사색가와 같은 눈매는 조용하면서도 사물을 날카롭게 뚫어보는 듯하고, 엄숙하지만 아름답게 윤곽이 드러나 있고 가느스름한 입술을 다문 이 아름답고 젊은 신동에게. 이 젊은이는 그리스어를 놀랍도록 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매우 고귀하고 우아한 점에서 그는 거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청년에게 반했다. 반면 그의 조용한 태도나 그의 자제하는 능력이 너무나 지나쳤기 때문에, 또한 그의 예의범절이 너무나 궁중 풍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둘 모두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 선택된 자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어 제 분수에 따라 지배도 하고 또한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도원의 다른 어떤 사람을 대할 때보다도, 서로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으며 또한 서로 아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 친하지도 서로 열의를 가지지도 못했다. 원장은 이 청년을 그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염려와 관심을 가지고 대했으며 또한 형제로서 배려해 주었다. 즉 이 청년을 희귀하고 연약하고 아마 너무 이른 나이에 성숙한, 너무 일찍 위험에 자신을 드러낸 형제로서. 청년은 원장의 어떠한 명령이나 충고, 칭찬을 어디 하나 허점 없는 태도로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결코 거역하지도 않았고 또한 불쾌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만약 그 청년에게 내린 원장의 판단이 옳고, 또한 그의 유일한 결점이 거만이라면, 이 청년은 이 결점을 훌륭히 감출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이 청년에 대해서는 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고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그의 진실한 친구가 되는 사람은 드물었다. 오직 그의 고귀한 품성이 냉각시키는 공기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나르치스."
참회가 끝난 뒤에 원장은 그에게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한테 심한 판단을 내린 죄를 고백하겠네. 가끔 나는 자네가 거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을지도 모르네. 자네는 무척 외로워. 젊은 형제여! 자네는 고독하네. 흠모자는 많지만 친구는 없지. 자네에게 간혹 주의를 주기 위해 기회를 찾아볼 때도 없지 않은데 그런 기회는 없단 말일세. 으레 자네 나이 또래의 젊은 친구들이 빠지기 쉬운 것처럼, 간혹 자네도 좀 버릇없이 굴어 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단 말일세. 자네는 그런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나는 말일세, 가끔 자네가 조금 걱정스럽기도 하다네, 나르치스."
젊은이는 까만 두 눈을 노인에게 돌리며 말했다.
"원장 선생님, 저는 무엇보다도 심려를 끼치고 싶지가 않습니다. 선생님, 제가 거만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탁입니다. 그 점에는 벌을 내려 주십시오. 때로는 자신을 벌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저를 은둔자의 암자로 보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에게 천한 봉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자네는 아직 젊네, 형제여."
원장이 말했다.
"거기다 또 자네는 고도의 언어와 사색의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그런 자네에게 천한 봉사를 하게 한다면, 하느님의 은혜를 함부로 사용하는 결과가 될 걸세. 자네는 아마 교사나 학자가 될 테지. 자네는 그걸 원하지 않는가?"
"선생님, 죄송한 말씀이오나 저의 소망에는 그다지 자상한 분별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저는 언제나 학문을 기쁨으로 삼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거기에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학문이 저의 유일한 영역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운명이나 사명을 결정하는 것은 반드시 희망이 아니고, 오히려 미리 결정된 어떤 숙명은 아닐는지요."
원장은 귀를 기울이고 심각해 졌다. 그러나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우리네 인간은, 특히 젊은 시절에는 모두 약간씩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소망을 혼돈하기 쉽지. 그러나 자네는 자네의 천직을 미리 짐작하고 있는 것 같으니 그 점에 대해 한마디 말 좀 해줄 수 있겠나? 도대체 자네는 어떤 천직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나?"
나르치스가 까만 두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기 때문에 두 눈은 기다란 까만 속눈썹 밑에 감추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르치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르치스, 어서 말해 보게."
오래 기다린 뒤에 원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르치스는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누가 뭐라 해도 수도원 생활을 하도록 있는 것 같습니다. 수사가 되고, 주교가 되고, 부원장이 되고. 어쩌면 원장이 될지도 모르지요. 제 소망이라고 해서 이렇게 믿는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관직에 목표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게 맡겨지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왜 자네는 그런 것을 믿나?"
원장은 주저하며 물었다.
"학식을 제외하고 어떤 특성이 자네에게 있어서 그러한 신념이 나타난다는 말인가?"
나르치스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것은 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인간의 성질과 천직을 감지할 수 있는 특성입니다. 이런 특성이 제 자신을 강요해 다른 사람을 지배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수도원 생활을 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면 법관이나 정치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그 인간의 운명을 안다는 자네의 능력을 실제로 시험해 보았나?"
"네,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를 나에게 말해 줄 수가 있나?"
"있습니다."
"알겠네. 그렇다면 형제들이 없는 곳에서 그들의 비밀에 뛰어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자네의 원장 다니엘, 즉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말해 보게나."
나르치스는 속눈썹을 치켜뜨며 원자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원장 선생님, 그 말씀은 명령이십니까?"
"그렇다네. 명령일세."
"원장 선생님, 그렇다면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자네의 입을 강제로 열게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쉬운 일이 아닐세. 하지만 나는 지금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네. 어서 말을 해보게!"
나르치스는 머리를 숙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선생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단지 알고 있는 거라곤 선생님께서는 커다란 수도원을 지배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종으로 양을 지키거나 은둔자들 암자에서 종을 치거나 사람들의 참회를 들으시는 것을 즐기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특별한 사랑을 가지시고 성모께 간절히 기도드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때때로 이 수도원에서 장려되고 있는 그리스어나 그 밖의 다른 학문이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의 영혼에 혼란이나 위험을 가지고 오지 않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레고르 부원장에 대해서도 관용을 잃지 않으시길 가끔씩 기도드립니다. 또 때로는 고요한 죽음을 갖게 되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어 고요한 죽음을 내리시리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아늑한 원장의 응접실 안은 조용했다. 이윽고 원장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몽상가일세. 또한 기우심을 갖고 있네."
노원장이 다정하게 말했다.
"기우심이라는 것은 경건하고 악의가 없는 것일지라도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라네. 내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것처럼 자네도 그걸 믿지 않도록 하게. 몽상가인 형제여, 내가 방금 그것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자네는 아는가?"
"원장 선생님께서 매우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 젊은 제자는 약간 위험에 빠져 있다. 이놈이 기우심을 가지고 있다. 아마 명상이 지나친 탓이겠지. 이놈에게 참회를 시켜도 괜찮으리라, 그것이 이놈에게 해가 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놈에게 떠맡기는 참회를 나 자신도 짊어지자.' 이것이 지금 원장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원장은 일어섰다. 그러고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수습 수사에게 물러가라는 눈짓을 했다.
"좋아."
원장이 말했다.
"기우심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젊은 형제여, 하느님은 기우심을 갖는 것 이외에도 또 다른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다네. 자네가 노인에게 편한 죽음을 약속한 그것으로써 노인이 상냥하게 대했다고 해두세. 노인은 한때 이 약속을 즐겨 들었다고 해두세. 이것으로 충분하네. 자네는 내일 아침 미사를 드린 후 묵주를 헤아리며 기도드리게나. 형식적이 아니라 경건하게 몸을 맡기고 묵상해야 하네. 나도 하겠네. 자 돌아가 보게나, 나르치스. 이야기는 충분하게 했네."
또 어떤 때 다니엘 원장은, 가르치고 있는 신부 중 가장 젊은 로렌츠 신부와 나르치스가 어떤 교안에 대해서 의견이 맞지 않기 때문에 중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르치스는 열의를 가지고 수업에 일종의 변화를 시도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확신시킬 수 있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렌츠 신부는 일종의 질투심 때문에 거기에 동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새로운 문제를 내세울 때마다 무뚝뚝한 침묵과 오만상을 찌푸리며 지내는 날이 며칠간 계속 되었다. 나르치스는 이에 굽히지 않고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믿고 또 그 문제를 끄집어냈다.
마지막에 가서 로렌츠 신부는 기분이 상한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이봐, 나르치스. 말다툼은 그만두세. 자네도 알다시피 결정권은 내게 있지 자네에게 있는 게 아니잖은가. 자네는 내 동료가 아니라 조수야. 그러니 나를 따라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자네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고, 또 내가 자네의 약점을 잡고 있는 건 직권에서만이지 지식이나 재주에서는 아니니까, 내 자신이 독단적으로 결정짓는 것보다 원장님께 결정을 지어 달라고 말씀드려 보세."
두 사람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니엘 원장은 문법 수업의 해석에 대한 두 학자의 언쟁을 꾸준히 호의를 가지고 들었다. 이들 두 사람이 그네들 의견을 자상하게 진술하고 논증을 하고 나자 노원장은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 언짢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얀 머리카락을 약간 흔들어 보이며 원장은 말했다.
"형제들, 내가 이 건에 대해 자네들과 같은 이해를 갖고 있다고 믿지는 말게. 나르치스가 학교 일에 무척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교안을 고쳐보겠다는 노력은 칭찬받을 만한 일일세. 하지만 상관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나르치스는 그것에 대해서 말없이 복종해야 할 걸세. 만약 그로 인해 이 수도원의 질서와 복종이 흐트러진다면 학교를 개선하려는 어떤 노력도 그것을 보충하지는 못할 걸세. 양보를 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나는 나르치스를 나무라는 것일세. 자네들 젊은 두 학자를 위해서 나는 자네들보다 어리석은 상관이 언제든지 자네들 위에 있길 바라는 사람일세. 교만을 치료하는 데 그 이상 더 좋은 약은 없을 테니까."
이런 쾌활한 농담으로 원장은 두 사람을 내보냈다. 그러나 이 노인은 그 후 며칠 동안을, 두 교사가 서로 간에 다시 나무랄 데 없는 화목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떤지 주시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많은 얼굴들이 오가고 잊혀지던 수도원에 새 얼굴이 하나 나타났다. 이 새 얼굴은 주목도 받지 못하고 이내 잊혀지고 마는 그런 얼굴과는 달랐다. 벌써 오래전부터 그의 아버지한테 신청을 받고 있던 젊은이로 수도원내의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어느 봄날 도착했다. 아버지와 젊은이는 우리가 잘 아는 그 밤나무에 말을 맸다. 큰 현관에서 문지기가 마중을 나왔다.
소년은 앙상하게 치솟아 올라 아직도 겨울 모습을 아련하게 드러낸 한 그루 나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나무는 처음 보는걸. 희구하고 아름다운 나무로군! 무슨 나무일까?"
고생도 좀 한데다가 찌푸린 얼굴에 나이가 좀 들어 뵈는 아버지는 아들의 말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문지기는 소년이 마음에 들어 나무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소년은 어딘지 다정스러워 보였다. 소년은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골드문트라고 합니다. 이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죠."
문지기도 정답게 미소를 지으며 신입생보다 먼저 앞장서서 큰 현관을 지나 폭이 넓은 돌계단을 올라갔다. 골드문트는 이곳에서 벌써 두 개의 것, 즉 아까 그 나무와 문지기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무 거리낌 없이 수도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두 사람은 우선 교장을 맡고 있는 신부에게, 저녁에는 친히 원장과도 면담을 하였다. 그 두 곳에서 제국 관리인 아버지는 아들 골드문트를 소개했다. 수도원의 손님으로서 아버지는 얼마간 묵고 가도록 정중히 초대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룻밤만 묵고 내일은 꼭 떠나야 한다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두 마리 말 중에서 한 마리를 수도원에 선물로 드리고 싶다는 제의를 하자, 그 제의는 받아들여졌다. 성직에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내내 정중했지만 냉랭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원장도 신부도 말없이 앉아 있는 골드문트를 희열에 싸여 바라보고 있었다. 곱살하게 생긴 붙임성 있는 이 소년은 이내 그들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튿날 아무 미련도 없이 아버지를 보내고 그 아들을 기꺼이 맡았다. 골드문트는 선생들에게 소개되었고 학생들이 쓰는 넓은 침실에 침대 하나를 얻었다. 말을 타고 떠나는 아버지와 이별을 하는 골드문트의 모습은 정중하긴 했으나 얼굴에는 애수의 그림자가 역력히 드러났다. 그냥 제자리에 멍청하게 서서 아버지가 수도원 바깥마당의 좁다란 아치 정문을 돌아 곡물 차고와 물방앗간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렸을 때는 기다란 그의 금빛 속눈썹 끝에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때 문지기가 어루만지듯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를 위로해 주었다.
"여, 학생 친구. 그런 슬픈 표정을 짓는 게 아니야. 처음에는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그리워하지. 그러나 여기도 있을 만하고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곳이라는 걸 곧 알게 될 걸세."
"고마워요, 아저씨."
소년이 대답했다.
"나는 형제도 어머니도 없어요, 아버지뿐인걸요."
"그 대신 여기에는 친구나 학문, 음악, 그 밖에 학생이 아직 모르는 새로운 놀이도 있는걸. 이것저것 다 곧 배우게 돼. 만약 속 시원하게 털어 놓고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사람이 필요하거들랑 내게 오게."
골드문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 만약 절 기쁘게 해주시고 싶으시다면 아버지가 두고 가신 말을 빨리 보여 주세요. 그놈도 정말 잘 있는지 어떤지 보고 싶으니까요."
문지기는 그를 데리고 곡물 창고 옆의 마구간으로 갔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말과 말똥과 보리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골드문트는 쭉 이어 있는 칸막이 한 곳에서 갈색 말을 발견했다. 벌써 그를 알아차리고 머리를 쭉 뽑고 있는 말의 목을 두 손으로 부둥켜안고 흰색 반점이 있는 넓적한 이마빼기에다가 뺨을 비벼대면서 그는 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안녕, 블레스. 나의 용맹스런 블레스. 어때? 넌 아직도 날 좋아하니? 먹을 게 있어서? 집 생각도 나니? 블레스, 요녀석, 네가 여기에 남아서 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종종 널 보러 올게."
골드문트는 아침 식사 후 소맷부리 속에다 남겨둔 빵 한 조각을 끄집어내서는 그것을 잘게 떼어서 말에게 먹였다. 그러고 나서 문지기를 따라 안마당을 지나갔다. 안마당은 큰 도시의 장터처럼 넓고 한구석에 보리수가 심어져 있었다. 안쪽 입구에서 문지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악수를 했다. 그때 골드문트는 어제 알아두었는데도 벌써 교실로 가는 길을 잊어버린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져서 약간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문지기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문지기가 쾌히 인도해 주었다. 교실에는 약 열두 명의 소년들과 청년들이 긴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조교사인 나르치스가 얼굴을 돌렸다.
"신입생인 골드문트입니다."
나르치스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며 뒤에 있는 긴 의자에 자리를 지정해 주고는 수업을 계속했다. 골드문트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기보다 두세 살 나이가 많을까 말까한 무척 젊은 선생을 보고 그는 놀랐다. 이 젊은 선생이 어찌나 아름답고 고상하고 진실해 보이는지 그뿐 아니라 어찌나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상냥한지에 대해서 놀라기도 했거니와 또한 마음속에서 희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문지기는 그에게 상냥했으며 원장 또한 그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저쪽 마구간에는 한 토막 고향의 향취를 불러일으켜 주는 블레스가 있었다. 지금 여기에는 학자처럼 진실하고 왕자처럼 기품있는, 몹시도 젊은 선생이 있다. 냉정하고 자제력이 있는, 감탄하지 않을 수는 없는 저 목소리!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그는 경청했다. 마음이 흐뭇했다.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한테로 온 것이다. 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우애를 나눌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에는 마음이 답답했었다. 우선 기나긴 여행에 피로가 누적되었고, 아버지와 헤어졌을 때는 얼마간 울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만족해하고 있다. 오랫동안 자꾸 젊은 선생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날씬한 자태, 쌀쌀하게 반짝이는 눈, 또렷하고 앙칼지게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내뿜는 그의 야무진 입술 등을 바라보며, 하늘을 나는 듯한 피로를 모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수업 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이 떠들썩하게 자리에서 일어날 때 골드문트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오랜 시간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학생도 골드문트가 자고 있는걸 보고 있다가 귓속말로 친구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젊은 선생이 교실에서 나가자 학생들은 골드문트를 사방에서 잡아당기며 쿡쿡 찔러댔다.
"다 잤냐?"
한 녀석이 물어보더니 이를 내보이며 연방 킬킬거렸다.
"그 자식 보통이 아닌데!"
한 녀석이 놀려대기 시작했다.
"이 자식은 분명 훌륭한 선구자가 될 거야. 첫 시간부터 코를 골지 않나!"
"이 아기를 어서 침대에 데려다 눕혀라!"
한 녀석이 입을 열기가 무섭게 모두들 그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붙들고서는 호들갑을 떨며 그를 떠메려고 했다.
골드문트는 무척 놀람과 동시에 화가 났다. 그는 닥치는 대로 마구 후려치며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몇 대 얻어맞고서는 결국 바닥에 동댕이쳐지고 말았다. 한 녀석이 아직도 그의 발목을 꽉 쥐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호되게 걷어차고는 한 녀석에게 덤벼들었다. 대뜸 그 녀석과 심한 격투가 벌어졌다. 그와 상대한 학생은 힘깨나 쓰는 놈이었다. 모두가 이 두 녀석의 싸움을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고 있었다. 골드문트가 지지 않고 주먹을 몇 대 먹였을 때 그는 아직 어느 누구의 이름도 몰랐지만 학생들 간에 친한 친구가 생겼다. 그러자 별안간 다들 달아나 버렸다. 모두 이내 교장 마르틴 신부가 들어왔다. 그는 혼자 남아 있는 소년 앞에 와서 섰다. 교장은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이 파란 눈이 새빨갛게 되었다. 소년은 두들겨 맞아서 좀 부은 얼굴로 당황하여 마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는 물었다.
"넌 골드문트구나, 그렇지? 녀석들이 네게 무슨 짓을 한 모양이로구나?"
"아니에요, 아니에요."
소년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가 그 녀석을 때렸습니다."
"대관절 누굴 때렸다는 거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녀석이 저와 맞붙었습니다."
"그래? 그 녀석이 먼저 시작했니?"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시작한 것도 같습니다. 저를 보고 모들 놀려댔기 때문에 저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래, 그래 시작한 것은 좋아. 하지만 한 번만 더 이 교실에서 주먹다툼이 벌어지면 그때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럼 점심이나 하러 가! 자, 앞으로!"
골드문트가 부끄러운 듯 헝클어진 황금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부지런히 쓸어 올리며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교장은 미소를 지었다.
골드문트 자신도 수도원 생활의 처음을 장식하는 이 행동이 정말로 버릇없는 것이었고 또한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후회를 하면서 친구들을 찾아 헤매다가 점심을 먹고 있는 그들을 발견했다. 다행히 그들은 골드문트를 존경과 우애로써 맞아 주었다. 싸운 상대방과는 신사답게 화해를 했다. 그때부터 그는 이 분위기 속에 자신이 쾌히 받아 들여 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2.
그 동안 그는 다른 아이들과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진정한 친구는 아직 찾아낼 수가 없었다. 동급생들 가운데서는 특별히 친근하게 느껴지거나 혹은 마음이 끌리는 친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이 과감한 실력자를 밉지 않는 싸움패로 돌리고 싶었는데도 그가 오히려 모범 학생의 명성을 획득하려고 하는 듯한 극히 얌전한 동급생이라는 것을 알고 의외로 생각하였다.
수도원 안에는 골드문트가 마음을 끌리고, 호감을 갖고 있으며, 언제나 머릿속에 간직해 두고 경탄과 사랑, 존경심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원장 다니엘과 조교사 나르치스였다. 골드문트는 가끔씩 원장을 성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소박성과 친절, 맑고 자애가 넘치는 눈빛, 명령과 지배를 경건하게 봉사로써 실행하는 그의 태도, 조용하고 선량한 그의 행동 등, 이 모든 것들이 커다란 힘을 갖고 그를 끌어 당겼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경건한 사람의 유일한 종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이분 곁에 머물러서 시키는 일에 복종하고 또한 받들고 싶었다. 복종과 헌신에의 소년다운 그의 모든 소망을 끊임없는 희생의 재물로 받치고 싶었다. 그리고 맑고 고귀하며 또한 성자다운 생활을 이분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왜냐하면 골드문트는 수도원의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가능하다면 완전히, 그리고 언제까지나 수도원에 남아서 그의 일생을 하느님께 바칠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의 바람이기도 하거니와 아버지의 소망이며 분부이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과도 같았다. 아무도 이 아름답고 빛나는 소년을 보고 그런 생각을 갖지 않는 것 같았으며 어떤 무거운 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출생의 부담, 속죄와 희생의 보이지 않는 숙명이었다. 골드문트의 아버지가 원장에게 어느 정도의 암시적인 언질을 하면서 아들을 언제까지나 이곳 수도원에 남게 하고 싶다는 의사를 넌지시 밝혔는데도 원장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골드문트의 출생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오점으로 인해 그것이 속죄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원장은 아버지에게서 별 호감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아버지의 말투와 좀 대단하게 구는 태도 전체에 겸손한 냉담성을 가지고 대했을 뿐 그의 암시에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골드문트의 사랑을 눈뜨게 해준 또 한 사람은 원장보다 훨씬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황금새가 날아들어 왔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의 고귀한 성품 때문에 고립되어 있었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모든 점에 있어서 그와 반대인 것같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나르치스는 음울하고 야윈 반면에, 골드문트는 꽃처럼 눈부셨다. 나르치스가 사색가요 분석가라고 한다면, 골드문트는 몽상가이며 동심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 상반되는 사람들 사이를 이어 주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두 사람이 다 같이 고귀한 성품을 지녔다는 것, 특별한 재간과 특징에 의해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나 보인다는 점이었다.
나르치스는 곧 그 젊은 영혼의 성질과 운명을 꿰뚫어보고 열렬한 관심을 보냈으며, 골드문트는 누구보다 뛰어나고 아름다운 그의 선생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내성적이었으므로 조심성 있고 교양이 있는 동급생들이 하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 말고는 나르치스의 사랑을 얻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주저하게 한 것은 꼭 수줍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기에게서 나르치스의 존재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 그를 주저하게 만든 것이다. 골드문트는 겸손하고 선량한 원장과 지나치게 명석하고 학식이 많으며 슬기로운 나르치스를 동시에 이상과 모범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골드문트는 그 젊음의 모든 힘을 기울여서 결합하기 힘든 두 개의 이상을 향하여 노력했다. 이것이 종종 그를 괴롭혔다.
수도원에서 들어온 처음 몇 달 동안 골드문트는 가끔씩 머릿속이 마구 혼란스러워져서 거기서 도망치든가 아니면 친구들과 사귀고 있는 동안에 괴로움과 마음속의 분노를 발산시켜 버리자는 강한 유혹에 빠져들었다. 선량한 골드문트는 자주 하찮은 놀림을 당하거나 학생들 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심한 말을 듣기만 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애써 그것을 자제하느라고 눈을 감고, 창백해진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러다가는 마구간으로 블레스를 찾아가서 목에다 입을 맞추며 울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괴로움은 점점 깊어져서 급기야는 눈에 띌 정도까지 되었다. 그의 뺨은 수척해지고 눈은 생기를 잃고 움푹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던 미소조차 볼 수 없었다.
골드문트 자신은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지 못했다. 그는 선량한 학생이 되고, 이어 수사로 채용되었다가 신부들의 경건하고 조용한 형제가 되고 싶다는 성실한 소망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힘과 재능이 경건하고 순탄한 목표를 향해서 정진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을 뿐, 그 밖의 다른 노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그렇게 단순하면서도 멋진 그 목표에 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그로서는 그 얼마나 슬프고도 이해 할 수 없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에게서 자주 비난을 받아야 마땅할 경향이나 상태를 발견하고는 얼마나 낙담하고 당황했을까! 이를테면 나태한 상태와 학업에 대한 혐오감, 수업 중에 공상에 빠진다거나 졸고 있는 것, 라틴 어 선생에 대한 저항감과 반감, 동급생들에 대한 신경과민이라든가 화를 잘 내는 성질 등.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을 방황하게 한 것은 나르치스에 대한 사랑과 다니엘 원장에 대한 사랑이 서로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르치스도 자기를 사랑하고 그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대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나르치스는 소년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소년에게 갖고 있었다. 나르치스는 이 밝고 사랑스러운 소년을 친구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이 소년이 그의 성격과 반대되는 동시에 그의 모자라는 점을 지니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르치스는 이 소년을 이끌어 그를 발전시켜 꽃을 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의 감정을 애써 누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를 저지시킨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생들이나 수사들한테 반한 교사나 신부들에 대해 느끼는 골드문트의 혐오감이었다. 그 자신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그에게 쏟는 타는 듯한 호의나 애무에 무언의 방위로써 대항할 때도 있었다. 이제는 그 자신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자신도 골드문트를 사랑하고 귀여운 그의 웃음을 보고 싶고 애정이 깃든 손으로 밝은 황금색 머리칼을 만져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는 않으리라, 결코, 그 밖에도 그는 교사의 직권이나 권위까지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지만 교사의 계급에 있는 조교사로서 특별한 주의와 경계심을 갖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학생들보다 고작 두세 살 위인데도 마치 스무 살이나 더 나이를 먹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또 어느 한 학생만을 편애하는 행위를 절대 하지 않았으며, 밉살스럽고 보기 싫은 학생도 모두다 특별히 공평하게 돌보아 주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봉사는 정신에 대한 봉사였고, 그의 엄격함 생활은 정신에 대해 바쳐진 것이었다. 다만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방심한 순간에만 몰래 남보다 뛰어난 지식과 지혜에 대한 오만으로 만족해할 뿐이었다. 골드문트와의 우정은 대단히 매력적이기는 했으나 많은 위험이 따르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생활이 중심이 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의 생활의 중심과 의미는 정신에 대한 봉사, 언어에 대한 봉사였다. 자신의 이익을 단념하고 학생들의--아니, 학생들뿐만이 아니라--보다 높은 정신적인 목표를 향해 조용히 인도하는 것이었다.
골드문트가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학생이 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는 수백 번이나 안마당의 보리수와 아름다운 밤나무 밑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하고 놀았다. 달리기, 공차기, 술래잡기, 눈싸움 등. 지금 다시 봄이 되었지만 골드문트는 지쳐서 몸이 쇠약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때때로 머리가 아팠고 수업 시간에는 졸지 않도록 조심하느라고 애를 써야 했다.
그런 어느 날, 아돌프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 대뜸 주먹다짐을 한 그 학생이었다. 그해 겨울 그 두 사람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었다. 저녁 식사 후의 자유 시간이어서 그 시간에는 큰 침실에서 놀거나 자습실에서 잡담을 하거나 수도원 마당을 산보하는 것도 허락되었다.
골드문트를 끌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아돌프가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게. 하지만 넌 모범생이라는 것이 탈이야. 언젠가는 주교가 되겠지. 아무튼 친구와의 의리를 지켜 선생한테 고자질하지 않겠다는 약속부터 해줘."
골드문트는 그 자리에서 약속했다. 수도원에서 수도원 자체는 명예도 있었지만 학생들의 명예도 있어서 가끔 그 양자 사이의 충돌이 일어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불문율은 성문율보다 우위에 있는 법이어서 일단 학생이 된 이상 학생끼리 규율과 명예 관념에 배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돌프는 조심스럽게 현관을 빠져나와 그를 나무 밑으로 데리고 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했다. 아돌프도 가입되어 있는 대담한 몇 명의 친구들이 있는데 몇 세대 저부터 대물림해 오고 있는 이 학교의 관습대로 그들이 아직은 신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어울리도록 가끔 수도원을 빠져나와 마을로 나간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정상적인 남자라면 빠뜨릴 수 없는 즐거움이요, 모험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돌아올 때는 벌써 문이 잠겨 있을 걸"
하고 골드문트가 말했다.
"물론이지, 문은 분명히 잠겨져 있어. 그렇기 때문에 더 재미나는 거야.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비밀 통로로 들어올 수가 있거든. 뭐 별다르게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말야."
골드문트는 생각이 났다. '마을에 간다'는 소문은 벌써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들 모르게 여러 가지 재미나 모험을 즐긴다는 것은 밤나들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도원의 규칙에 위배되는 일로, 엄한 벌로써 금하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깜짝 놀랐다. 마을에 가는 것은 '정상적인 남자' 사이에서 학생의 명예로 간주된다는 것, 그런 모험을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명예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거절하고 돌아가 침대에 눕고 싶었다. 몹시 지치고 비참한 기분이어서 오후에는 자꾸 머리만 아팠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돌프에 대해서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나가 모험을 해보면 무언가 멋진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두통과 우울증 과 침울한 기분을 씻어 버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은 속세로 나가는 소풍이어서 무언가 음침하고 금지된 것이며 어쩌면 불명예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해방이고 체험이 될 수도 있었다. 아돌프가 설득하는 동안 골드문트는 망설이며 서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기도 동행하겠다고 승낙했다.
골드문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아돌프와 함께 이미 어둠이 드리워진 넓은 안마당의 보리수 아래로 몸을 숨겼다. 마당의 바깥문은 그 시간이면 벌써 닫혀져 있을 것이다. 아돌프는 그를 수도원의 물방앗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거리는 어두컴컴하고 물방아가 돌아가는 소음 때문에 몰래 빠져나가기는 아주 쉬웠다. 둘은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두꺼운 널빤지를 차곡차곡 쌓인 더미 위에 뛰어 내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널빤지를 한 장 빼내어 개울 위에 걸치고 개울을 건너갔다. 그런 다음 검은 숲속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한길로 들어섰다. 모든 것이 다 신비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해서 골드문트는 마음이 흡족해졌다. 근처 숲에는 이미 또 한 명의 친구인 콘라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기다리고 있으니까 또 한 명이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달려 왔다. 키가 큰 에버하르트였다. 네 명의 소년들은 숲을 빠져나갔다. 머리 위에서 밤새들이 파다닥 소리를 내고 조용한 구름 사이로 밝고 축축하게 빛나는 밤하늘에는 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콘라트는 호들갑을 떨며 익살을 부렸고 가끔씩 다른 친구들도 함께 따라 웃었다. 불안하면서도 축제 같은 밤의 느낌이 그들을 감쌌다. 가슴이 두근두근 고동치고 있었다.
약 한 시간쯤 지나자 숲 저쪽에 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 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모두 잠들어 있는 것 같았고 까만 용마루와 대들보 사이에서 조금씩 들이 내밀고 있는 나지막한 박공널이 어슴푸레 빛을 던지고 있을 뿐 아무 곳에도 불빛은 없었다. 아돌프가 앞장서 걸어갔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살금살금 몇 집을 돌아서 울타리를 넘고 정원으로 들어가 화단의 부드러운 흙을 밟고 어느 집의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돌프가 창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자 한참 기다리다가 다시 한 번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불빛이 환히 비치며 창문이 열렸다. 열린 창문을 통해 소년들은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검은 굴뚝이 있는 흙바닥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뚜막 위에 놓인 조그만 석유 등잔의 가냘픈 불이 바람에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거기에 한 처녀가 서 있었다. 농가의 하녀인 듯한 빼빼마른 그 처녀가 침입자들과 돌아가며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또 한 명의 처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까맣고 긴 머리를 땋은 앳되 보이는 처녀였다. 아돌프가 선물을 내밀었다. 수도원에서 가지고 온 흰 빵 반 조각과 무엇인가를 싼 종이 봉지였다. 골드문트는 그것이 몰래 가지고 온 향료거나 아니면 성당의 양초대거나 비슷한 종류의 물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를 땋은 처녀는 등잔도 들지 않고 더듬어서 문을 빠져나가더니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이윽고 푸른색 꽃무늬가 새겨진 항아리를 들고 와서 콘라트에게 내밀었다. 콘라트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시고 다음 사람에게로 넘겼다. 네 사람 모두 그것을 마셨다. 독한 사과주였다.
조그만 등잔불 밑에서 그들은 모두 자리를 잡았다. 두 명의 처녀는 딱딱하고 조그만 의자 위에 앉고 학생들은 처녀들을 삥 둘러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씩 사과주를 마셨다. 아돌프와 콘라트가 이야기를 계속 이끌어 나갔다. 가끔 한 친구가 일어서서 말라깽이 처녀의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귀에다 대고 무슨 말인가 속삭였다. 조그만 처녀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아마 키가 큰 처녀는 하녀이고, 예쁘장한 조그만 처녀가 이 집의 딸일 것이라고 골드문트는 짐작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곳엔 오지 않을 테니까.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와 숲속을 거닌다는 것은 멋있고 신기하고 자극적이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더구나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위험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것은 그다지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았다. 비록 금지된 일이었지만. 하지만 밤에 처녀들을 방문한다는 것은 단순히 규칙을 어기는 것을 넘어서 죄악이라고까지 느껴졌다. 물론 다른 친구들에게는 약간 샛길로 빠진 것에 불과 하지만, 신부의 생활은 금욕이 천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 처녀들과 희롱은 허용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이제 두 번 다시는 같이 오지 않으리라. 하잘것없이 초라한 부엌에 달린 등불 밑의 어둠 속에서 불안에 싸인 그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처녀의 앞에서 영웅이라도 된 듯이 젠체하고 틈틈이 라틴어 숙어를 인용해 가면서 신바람 난 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하녀에게 호감을 사고 있는 듯 가끔씩 하녀에게로 다가가 서투르고 짤막한 애무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심하다는 것은 수줍은 키스 정도였다. 그들은 어느 선까지의 행동이 허락되어 있는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이야기를 귓속말로 해야 했기 때문에 이 장면은 사실 어느 정도 익살스런 데가 있었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조그만 등장의 불빛을 바라보며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무엇을 바라는 듯한 곁눈질로 다른 사람들이 주고받는 애정 행위 한 토막을 잡아내곤 할 뿐이었다. 그는 가만히 앞만 쳐다보았다.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졌다. 긴 머리카락을 드리운 앳된 소녀를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으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가 일시에 풀려 그의 눈초리가 그윽하고 고요한 처녀의 얼굴을 향해 쏠려질 때마다 처녀의 까만 눈동자가 어김없이 그의 얼굴을 향해 있음을 알았다. 처녀는 매혹된 듯이 바라보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골드문트에게 이 한 시간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긴 시간이었다.- 그들의 대화도, 애정 행위도 다 지쳐서 고요해졌다. 모두들 얼마 동안 난처한 듯 앉아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하품을 하기 시작하자 하녀가 그만 가보라고 재촉했다. 모두들 일어나서 하녀와 악수를 나누었다. 골드문트는 맨 마지막으로 악수를 했다. 그 다음에는 앳된 처녀와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골드문트는 이번에도 맨 마지막으로 악수를 했다. 이어 제일 앞서 콘라트가 먼저 창에서 바깥으로 뛰어 내렸고 그 뒤를 에버하르트와 아돌프가 뒤따랐다. 골드문트가 뛰어내리려 할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바깥으로 뛰어내려서야 그는 비로소 주저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창문에서 앳된 소녀가 상반신을 내밀고 쳐다보고 있었다.
"골드문트."
소녀가 속삭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또 오실 거죠?"
소녀가 물었다. 수줍은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 입김에 지나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머리를 저었다. 소녀는 두 손을 뻗쳐 그의 머리를 잡았다. 관자놀이에 닿은 그녀의 조그만 두 손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소녀는 까만 그 눈이 눈 바로 앞에 닿을 때까지 허리를 굽혔다.
"또 오세요!"
소녀가 속삭였다. 소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
그는 재빨리 다른 친구들의 뒤를 따라 조그만 정원을 지났다. 그러다가 화단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축축한 흙냄새와 거름 냄새를 맡았다. 장미꽃 덩굴에 찔려 손가락에 상처가 났으나 울타리를 넘어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마을을 빠져나와 숲으로 향했다. '절대로 다시 오지 않으리라.' 그의 의지는 명령하듯 말했다. '내일 또 와요!' 그의 가슴은 흐느껴 울듯 애원했다.
밤놀이꾼들은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마리아브론으로 되돌아왔다. 개울을 건너고 물방앗간을 지나 보리수가 우거진 마당을 거친 다음 지붕을 넘어 조그만 기둥으로 이어져 있는 창문을 통해 침실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키다리 에버하르트는 몇 대 얻어맞고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큼 곤히 잠이 들었던 것이다. 아침 미사와 아침 식사, 수업에 그 누구도 늦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골드문트의 안색이 말이 아니었으므로 마르틴 신부는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아돌프가 경계하는 눈초리를 그에게 던졌기 때문에 골드문트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리스 어 시간에 나르치스는 그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병이 났을 거라고 짐작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불렀다. 다른 학생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심부름을 시켜 도서실에 보내고 그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골드문트"
그가 말했다.
"뭐든 널 도와줄 게 없을까? 너한테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긴 것 같구나. 너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니니? 그렇다면 널 침대에 눕게 하고 환자용 스프와 포도주 한 잔 보내 주지. 오늘은 그리스 어도 머리에 안 들어갔을 거야."
나르치스는 한참 동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창백해진 소년은 안절부절 못하는 시선으로 고개를 떨구었다가는 다시 들고, 입술을 실룩거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가는 다물어 버렸다. 그러고는 갑자기 옆으로 쓰러지더니 책상에 머리를 쳐박았다. 그가 갑자기 참나무로 된 두 개의 조그만 천사의 머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르치스는 당황하여 잠시 눈길을 딴 곳으로 돌려 버렸다. 그는 한참 후에야 겨우 흐느껴 울고 있는 소년을 안아 일으켰다.
"좋아, 좋아."
골드문트가 지금껏 들어 볼 수 없었던 다정스런 말로 나르치스가 말했다.
"좋아, 친구여, 실컷 울렴. 울고 나면 이내 좋아질 거야. 자, 앉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아. 너는 오전 내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느라 무진 애를 썼어. 너의 행동은 정말 용감했었다. 자, 이제는 울어라.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우는 것뿐이야. 안 울어? 벌써 다 울었니? 벌써 다 나은 거야? 자, 그럼 병실로 가자. 침대에 누워 있거라. 저녁이면 씻은 듯이 낳게 될 테니까. 자 어서!"
나르치스는 학생들 방을 피해 병실로 그를 데리고 갔다. 비어 있는 두 개의 침대 중에서 한 곳에 그는 누웠다. 골드문트가 옷을 벗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그는 골드문트가 아프다는 걸 교장에게 알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는 또한 약속대로 스프와 포도주 한 잔을 주문해 놓았다. 수도원의 오래된 관습인 이 두 가지 은혜는 가벼운 환자들에게 좋은 호응을 받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환자용 침대에 드러누워 어지러워진 머리를 정리해 보려고 애를 썼다. 한 시간 전쯤만 하더라도 오늘 그를 그다지도 피곤하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머리는 텅 비고 눈은 불타는 듯 고통스럽게 했던 영혼의 아픔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어젯밤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 잡시도 쉬지 않고 힘든 노력을 계속했다. 아니, 잊어버리려고 애를 쓴 것은 어젯밤의 일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닫혀진 수도원에서의 어리석고도 즐거운 소풍도, 숲속에서의 방랑도, 물방앗간에 이른 거무죽죽한 물이 흐르는 개울을 건너기 위해 만든 미끌미끌한 다리도, 울타리나 창문, 골목길 등을 건너뛰어 오가던 것도 모두 아니다. 그것은 소녀의 숨결을 느끼며 듣던 말과 소녀와의 악수, 그의 입술에 닿은 소녀의 입술 감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어떤 새로운 공포, 새로운 체험이 더해졌다. 그것은 나르치스가 자기를 돌보아 준 것이다. 그 곱고 고귀한 품위를 가진 나르치스가, 울 것만 같은 가느다란 입술을 한 그 영리한 나르치스가. 자신은 그 나르치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나르치스 앞에서 수줍어하다가, 머뭇거리다가 결국에는 울고 만 것이다. 그리스 어나 철학이나 정신적인 사나이다움과 품위 있는 스토아적 평정, 이같은 고귀한 무기로써 그 훌륭한 인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는커녕 보잘것없이, 그의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자신은 그것을 결코 용서치 못하리라. 그리고 나르치스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틀림없이 수치심을 느껴야만 하리라.
울고 나니 크나큰 긴장은 풀어졌다. 병실의 고요한 고독과 편한 잠자리는 썩 마음에 들었다. 절망은 반 이상이나 사라졌다. 한 시간쯤 지나자 수도자가 들어와서 밀가루 스프와 빵을 먹여 주었다. 거기다가 또 보통 때 같으면 명절날 이외에는 못 먹는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골드문트는 실컷 먹고 나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도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얼마 동안 시간이 흐른 뒤 문이 조용히 열리며 나르치스가 들어왔다. 그때 그는 잠이 들어 있었다. 뺨에는 벌써 생기가 돌았고, 나르치스는 한참 동안 사랑과 호기심과 약간의 선망의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골드문트는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다. 이제 내일부터 포도주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장막은 이제 사라지고 그들은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오늘은 골드문트가 그를 필요로 하고 그의 봉사를 받고 있지만, 그 자신이 약해져서 골드문트의 사랑과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일이 있다면, 나는 이 소년에게서 그것을 받을 수가 있으리라, 하고 그는 생각했다.
3.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사이에서 싹튼 이 새로운 우정은 실로 기묘한 것이었다. 그것에 호감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때로는 두 사람 스스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누구보다도 괴로워한 사람은 사색가인 나르치스였다.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은 -사랑까지도- 정신이었다. 때문에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고 끌려가는 대로 몸을 맡긴다는 것은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우정에 있어서 그의 역할을 어디까지나 이끌어 가는 정신이었다. 그리하여 이 우정의 운명과 그 넓이와 의미를 자각하고 있었던 사람은 처음 얼마 동안은 나르치스뿐이었다. 오랜 시간 그는 사랑을 하면서도 고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골드문트를 깨닫게 해주었을 때 비로소 참다운 친구로서 자신의 것이 되어 주리라고 믿었다.
골드문트는 열렬히 그 새로운 운명에 몸을 맡겼으며 나르치스는 책임 있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골드문트에게 있어 나르치스라는 인물은 구원자요 병을 고쳐준 사람이었다.
사랑에 대한 그의 청춘의 요구는 예쁜 처녀를 보았다는 것과 키스를 했다는 것에 의해 눈을 크게 떴으면서도 절망했던 것이다. 그가 여태까지 생각해 왔던 꿈도, 자신이 믿고 있었던 모든 것, 자신이 천명이요, 천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일체의 것들이 창가에서의 지난밤의 그 키스와 까만 눈동자에 의해서 밑뿌리서부터 위태로워진 것을 마음속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의해 수사 생활을 할 수밖에 없도록 정해지기도 했지만 스스로 자진해서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최초의 청춘의 정열로 타올라 경건하고 금욕적이면서 사나이다운 이상으로 향한 골드문트, 그는 최초의 보상받을 수 없는 봉변을 당해, 관능적인 것에의 최초의 호출을 당해, 또한 최초의 여성의 인사를 받고 이곳에 자신의 적과 악마가 있으며 여자라는 것은 자신에게 위험스런 존재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운명은 그에게 구원의 손을 뻗쳤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이 우정이 그를 맞아 주었다. 그의 소망에는 꽃이 만발한 꽃밭을, 그의 공경하는 마음에는 새로운 제단을 마련해 주었다.
거기서는 그가 사랑하는 것을 허락했다. 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몸을 바칠 수 있었다. 나이도 많을 뿐만 아니라 지혜로도 자기보다 월등한 흠모의 대상이 되어 있는 친구에게 그의 마음을 바칠 수 있었다. 관능적인 것을 향한 위험한 관능의 불길을 고귀한 희생의 불길로 바꾸고 영혼의 불길로 바꿀 수가 있으리라.
하지만 이 우정의 첫 번째부터 그는 예상치 못했던 장애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 친구를 자신과 모순되는 반대 인물로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개를 하나로 합쳐 차이를 없애고, 대립에 다리를 놓아주기 위해서는 사랑과 성실한 헌신만 있으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나르치스는 얼마나 딱딱하고 침착하며 또 얼마나 명백하고 빈틈없는 사람이었던가!
그는 무심히 몸을 바친다든가, 우정의 나라를 감사하면서 같이 걸어간다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않는 것 같았다. 목표가 없는 길이라든가 몽상적인 방랑 같은 것을 그는 모르는 것 같았고 또 참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는 골드문트가 병이 난 것처럼 보였을 때는 걱정을 하며 보살펴 주었고, 학교나 학문에 관한 것에는 모든 점에서 충실하게 도와주고 충고도 해주었다. 책에 나오는 어려운 부분을 설명해 주고, 문법이나 논리학이나 신학의 세계에 눈을 뜨게도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친구에게 진심으로 만족한 태도를 보인 적도, 융합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친구를 예사롭게 비웃거나 대수롭지 않게 상대해 버리는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히 교사로서의 근성이나 지혜로운 연장자로서의 태도가 아니고 그 배후에 더욱 중요한 그 무엇이 있는 것이라고 골드문트는 믿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우정은 그를 이따금 슬프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안절부절 못하게도 했다.
사실 나르치스는 그의 친구가 가지고 있는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의 꽃다운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자연 그대로의 생활력이나 꽃과 같은 충만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지 않는다.
그는 불타오르는 듯한 젊은 혼을 그리스 어로써만 살찌우려 하고, 천진한 사랑에 논리학적인 답변만 하려는 선생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 금발의 소년을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로서는 위험한 짓이었다.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자연의 순리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아름다운 눈을 흐뭇하게 바라보아서도, 이 밝은 금발의 꽃향기에 가까이에 있는 것에 만족해서도 안 되었다. 이 사랑 때문에 한순간이라도 감히 관능적인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골드문트가 수사가 되어 금욕자가 되고, 평생 신성한 것을 지향해서 노력을 하게 운명지어져 있다고 느낀다면, 나르치스에게는 물론 그런 생활이 정해져 있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 최고 형태의 사랑만이 허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욕자가 된다는 골드문트의 천명을 나르치스는 믿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인간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특히 사랑하고 있는 이런 경우에 나르치스는 한층 더 고도의 명백함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정반대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속까지 이해하고 있었던 골드문트의 성질이 그에게는 잘 보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르치스 자신이 잃어버렸던 성질의 다른 면이었기 때문이다. 나르치스는 그 성질이 공상이나 교육의 과오나 아버지의 훈계 등의 딱딱한 껍질에 싸여 있다는 것을 믿고, 복잡할 것 없는 이 젊은 생명의 비밀을 모두 다 훨씬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확실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 비밀을 그 당사자에게 알게 해주고, 그 껍질에서 빠져나오게 해 본래의 성질을 다시 찾아 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더 괴로운 것은 그 때문에 이 친구를 잃지나 않을까 하는 곳이었다.
아주 천천히 그는 목표를 향해 다가갔다. 수개월이 지났으나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도, 심오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우정에 금이 가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서로 떨어져서 그들의 포물선은 폭이 넓어졌다.
눈뜬 사람과 장님이 나란히 걸어갔다. 장님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은 차라리 그 자신을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먼저 타개책을 강구한 것은 나르치스였다. 그것은 그 당시 마음이 흔들리어 허덕이고 있었던 소년을 자기에게 몰아댄 것은 어떤 경험이었던가를 캐물으려고 했을 때였다.
캐내는 일은 생각한 것보다 쉬웠다. 골드문트는 벌써부터 그날 밤의 경험을 참회하고 싶은 기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놓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원장 이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원장은 그의 고해 신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르치스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때 두 사람이 맺어지게 되었던 시초의 사건을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상기시켜 몰래 그 비밀을 건드리자 상대는 솔직히 말했다.
"당신이 성직을 아직 갖지 않아서 참회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는 참회를 하고 나서 그 사건에서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그로 인해 벌을 받는 것도 사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고해 신부에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중하고 빈틈없이 나르치스는 파고들어갔다. 지나간 발자취는 발견되었다.
"네가 병이 난 것 같아 보이던 그날 아침을 말하고 있는 거니?"
나르치스가 신중하게 계속 파고 들어갔다.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그때 우리는 친구가 되었었지. 나는 가끔 그때 일을 생각한단 말이야. 아마 너는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그때 정말 당황했었어."
"당황했었다구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골드문트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저였어요. 뻣뻣이 선 채 훌쩍거리며 아무 말도 못하다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제 쪽이었으니까. 나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부끄러워하고 있어요. 나는 두 번 다시 당신의 눈앞에 나타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걸요. 당신 앞에서 불쌍하게 맥없이 쓰러졌다는 걸 생각하면요."
나르치스는 조금씩 다가섰다.
"네가 불쾌했다는 것은 알고 있어. 너처럼 야무지고 용감한 녀석이 낯선 사람 앞에서, 더구나 선생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는 사실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 아니, 나는 그때 네가 병이 들었다고 생각했지. 열이 심하면 아리스토텔레스라도 이상한 행동을 했을 거야. 그러나 너는 진짜로 병이 난 건 아니었어. 열도 전혀 없었거든. 그래서 넌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야. 열에 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없어. 안 그래? 너는 무슨 다른 일에 대한 패배감 때문에 부끄러워한 거야. 대관절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니?"
골드문트는 약간 주저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제 고해 신부라고 생각하게 해주십시오. 언젠가는 말해야만 되는 일이니까요."
고개를 숙인 채 그는 친구에게 그날 밤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나르치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마을에 간다'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하지만 금지되어 있는 것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고, 또 그것을 비웃을 수도 있는 거야. 안 그러면 참회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러면 그 일은 그것으로 모두 끝나. 아무런 관련이 없어지지. 대개의 학생들이 하는 것처럼 넌들 한 번쯤 그런 사소한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지? 그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
골드문트는 자제력을 잃고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정말 선생 같은 말씀만 하시는군요. 당신은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잘 알면서 말이에요. 물론 저도 수도원의 규칙을 어기고 학생들의 바보스런 장난에 가담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다지 커다란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수도원 생활의 한 가지 예행연습은 아니었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만둬!"
나르치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가로막았다.
"가정 경건하다고 하는 신부들조차도 그런 예행연습이 필요했다는 걸 너는 모른단 말인가! 성자의 생활에로 이로는 지름길 중 하나가 방탕한 생활이라는 사실은 너는 모른단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골드문트가 대들 듯이 말했다.
"저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그런 미약한 정도의 규칙을 어겼다는 사실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소녀입니다. 당신에게 설명할 수가 없군요. 이 유혹에 따르기 위해 소녀를 만져 보려고 한 손이라도 뻗치는 날에는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지옥이 저를 삼켜 버리고 끝끝내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기분이었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꿈이, 모든 성덕이, 하느님과 선에 대한 사랑이 끝나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나르치스는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하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반드시 선에 대한 사랑과 일치하지 않는 법이거든. 그 정도로 간단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무엇이 선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지. 그것은 계율에 쓰여 있거든. 그렇지만 하느님은 계율 속에만 있는 게 아니야. 계율이란 건 하느님이 극히 사소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아. 계율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더한층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어."
"제 기분을 이해해 주실 수 없습니까?"
하고 골드문트는 탄식했다.
"물론 이해해. 너는 네가 생각하는 '세속' 혹은 '죄악'에 대한 모든 것을 여자 속에, 성 속에 포함시키고 있어. 넌 그 외의 다른 죄는 범할 수가 없거나 혹 범했다 하더라도 참회를 통해 사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나 오직 한 가지의 죄악만은 그렇지가 않아."
"그렇습니다. 저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 봐. 나는 너를 이해하고 있단 말이야. 너의 생각이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야. 이브와 뱀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히 부질없는 우화는 아니거든. 하지만 네 생각은 바람직하지 못해. 네가 만일 다니엘 원장님이나 대부라든지 성자 크리소스토무스라든지 주교라든지 사체라든지 그것도 아닌 평범한 수도사이기라도 하다면 너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지. 그러나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 너는 겨우 학생이란 말이야. 설사 네가 평생 수도원에 있고 싶어하고, 너의 아버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너는 아직 맹세를 한 것도 아니고, 성직을 받은 것도 아니야. 그러니 네가 오늘이나 내일 어떤 아름다운 처녀의 유혹에 넘어갔다 할지라도 맹세를 어겼다거나 그 맹세에 상처를 준 것은 아니야."
"물론 글로 써둔 맹세는 없습니다,"
골드문트는 매우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
"그러나 쓰여지지 않은 맹세,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장 신성한 맹세에 상처를 준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통할지도 모르는 것이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당신 자신도 성직을 얻는 것도 맹세를 한 적도 없지만 당신이라면 여자를 가까이하는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겠지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요? 당신은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닌가요? 당신을 말로써 윗사람들에게 맹세를 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에서는 벌써 오래 전에 그런 맹세를 하고, 그 맹세에 의해서 영원히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저와 같은 인간이 아니십니까?"
"아니야. 골드문트. 내가 너와 같을 수는 없어.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야. 물론 나는 어떤 무언의 맹세를 지키고 있어. 그 점에 있어서는 네가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너와 같을 수는 없어. 이 말을 언젠가는 너도 꼭 생각해 내게 될 거야. 우리의 우정은 네가 완전히 나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네게 보여주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목적도 의미도 가지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골드문트는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청하게 서 있었다.
나르치스의 시선과 음성에는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나르치스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르치스의 무언의 맹세와 그 맹세는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나르치스는 그를 진심으로 대해 주는 건가, 아니면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건가? 이 기묘한 우정에서 혼란과 슬픔이 새삼스럽게 다시금 시작되었다.
나르치스는 이제 더 이상 골드문트의 비밀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 배후에 있는 것은 인류 최초의 어머니인 이브였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답고 건강하고 향기 어린 젊음 위에 눈뜨는 성이 왜 그렇게 괴로운 반항으로 다가와야만 한단 말인가? 어떤 악마가, 보이지 않는 반대자가 일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이 훌륭한 인간을 내부에서 분열시켜 그의 근본적인 본능과 싸우게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 그 악마를 발견하여 기도의 힘으로 본체를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악마를 물리칠 수가 있다.
그러는 동안 골드문트는 친구들에게서 차차 고립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친구들이 골드문트한테 버림을 받고 배반을 당했다고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그와 나르치스의 우정을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두 사람의 우정이 순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악평했는데 특히 두 사람에게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 우정이 비난받을 만한 언덕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 하나 이 두 사람의 인간관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의 결합에 의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들이 결합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동지적인 결합도, 수도원에서 흔히 있는 그런 류의 결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기독교적인 결합도 아니었다.
다니엘 원장의 귀에는 두 사람에 대한 온갖 소문과 비난과 중상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원장은 40여 년의 수도원 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의 우정을 보아왔다. 그것은 한 폭의 수도원의 그림이었으며 아름다운 경치요, 때로는 위안이었고 반면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원장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주시하고 있었으나 간섭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배타적이고 격렬한 우정은 드물었다. 위험하다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들의 순결함을 한순간도 의미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장은 그 예외적인 지위에 있지 않았더라면 원장은 주저하지 않고 그 두 사람을 떼어 놓을 어떤 조치를 취했으리라.
골드문트가 동급생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보다 연장자인 선생과 유독 친근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동등하게, 아니 오히려 더 뛰어 나간다고 간주되는 나르치스, 그가 특히 좋아하는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방해를 받아도 좋단 말인가? 그의 우정이 그를 태만과 불공평에 젖어 버리게 했고 그가 교사로서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면 당장에 불러들였으리라.
그러나 그에게 불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질투심에 의한 오해와 소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다가 원장은 나르치스의 두드러질 정도로 예리하고 다소간은 거만하다고까지 할 그 특별한 천성을 인간에 대한 지나친 통찰력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원장은 그런 천성을 과대하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나르치스에게 다른 천성이 있었다면 원장은 그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나르치스가 학생에게 골드문트에게 무슨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 자신보다도 혹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골드문트를 훨씬 더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원장은 의심하지 않았다.
원장 자신은 골드문트의 태도에 나타나 있는 애교 섞인 우아한 품위 이외에 그에 대해 달리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학생으로서, 수도원의 일원이며 좀 이른 감은 있지만 벌써부터 수도사의 일원인 것처럼 느끼고 있는 골드문트에 대해 다소 감동적이긴 하나 미숙한 열의를 나르치스가 두둔해서 더한층 격려해 주리라는 것은 걱정을 안 해도 된다고 믿었다.
골드문트를 위해 두려워할 것은 오히려 나르치스가 일종의 정신적인 자부와 학자적인 거만을 전염시켜 주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위험성은 바로 이 학생에게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았다. 무엇이든 그대로 보고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훌륭하고 강한 성품의 인간을 다스리는 것보다 평범한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 감독자에게는 얼마나 편안하고 단순하며 수월한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 할 때마다 원장은 탄식과 동시에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자신마저 불신에 감염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원장은 두 사람의 예외적인 인물을 자신에게 맡겨 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하리라 생각했다.
나르치스는 그의 친구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인간의 천성과 성격을 인지하는 데 특별한 재능을 지닌 그로서는 이미 오래 전에 골드문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었다.
그 젊은이가 갖고 있는 모든 생명력과 빛은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감각과 영혼에서 재능이 넘치는, 강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예술가로서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어쨌든 그런 위대한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이, 꽃의 향기나 아침의 햇빛이나 망아지나 나는 새나 음악을 이다지도 깊이 맛보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정신적인 것에 열중하고 있으며 또 금욕주의자가 되는 것에 열중하고 있을까?
나르치스는 그 점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았다. 골드문트의 아버지가 그러한 마음을 갖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떻게 그것을 드러내게 할 수 있었을까? 어떠한 마법을 사용해서 아들을 흘렸기에 아들은 이런 천명과 의무를 믿게 되었을까? 그리고 아버지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나르치스는 의도적으로 그 아버지에 대해 화제를 돌렸고 골드문트 자신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적지 않게 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르치스는 그의 아버지를 상상해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골드문트가 어릴 적에 잡은 송어나 나비에 대한 이야기, 친구 혹은 개나 거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새소리를 흉내낼 때 나르치스는 그 즉시 장면을 연상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아버지가 골드문트의 생활 속에서 그만큼 중대하고 강한 지배적인 인물이었다면 그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달리 묘사할 수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다른 모습을 그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아버지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진짜 골드문트의 친아버지인가 하는 의심도 가끔씩 해보았다. 그러나 대체 그 힘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그는 어떻게 골드문트의 영혼에 그 영혼의 핵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꿈을 불어넣을 수 있었을까?
골드문트는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친구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된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전과 다름없이 친구에게서는 하나도 진지한 대우를 받아보지 못하고 언제나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있다는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나르치스가 자기는 그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하지만 골드문트가 이런 생각으로만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그는 여러 가지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문지기 수사를 자주 찾아갔다. 그는 문지기에게 부탁을 해 한 두 시간씩 블레스를 탈 기회를 얻기도 했고, 때로는 수도원에 딸린 주민들 집에 들러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물방앗간집 주인과 무척 친하게 지냈다. 골드문트는 가끔 그 집 하인과 같이 물개를 데리고 놀기도 하고 골드문트가 눈을 감은 채 냄새만으로 여러 가지 종류의 밀가루 가운데서 알아 맞춘 상등품의 프랠라트 밀가루로 과자를 굽기도 했다. 나르치스와 함께 있을 때도 많았지만 그에게는 즐거움이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합창단에 들어가 함께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고 제단 앞에서 묵주를 헤며 기도를 드리는 것도 좋아했으며, 미사에서 사용하는 아름답고 엄숙한 라틴 어를 듣는 것도 좋아했다. 그리고 성향이 피어오르는 가운데서 성당의 온갖 성물들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는 것도 즐겼다. 가끔씩 기둥에 동물들을 데리고 있는 복음서의 저자들이나 모자를 쓰고 순례자의 주머니를 찬 야고보 등의 조용하고 거룩한 성자들의 상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는 성상을 보면서 황홀해했고 돌이나 나무의 모습들이 자신과 신비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 그 성상들은 저지 전능한 불멸의 대부이며 보호자요, 자기 생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선지자였다. 동시에 기둥이나 창문이나 출입문, 제단의 장식, 아름답게 측면을 보이고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부연 장식이나 기둥의 돌 속에서 퉁겨져 엉겨 붙은 잎새 모양의 장식에서도 자연을 모방해 돌이나 나무로 만든 제2의 동물이나 식물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귀중하고 거룩한 비밀로 다가왔다. 그는 종종 동물의 머리와 잎새의 다발을 묘사하면서 자유롭게 시간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는 찬송가 중에서도 마리아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그는 그런 노래들이 주는 빈틈없고 엄격한 구절, 자꾸 반복되는 애원과 찬송을 좋아했다. 기도드리면서 그 거룩한 의미를 쫓아가거나 아니면 그 의미는 잊은 채 그 시구에서 느낄 수 있는 장엄한 운율이나 그 반복을 좋아했다. 학문이나 문법이나 논리학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의 대상은 오히려 그림이나 음의 세계였다.
골드문트는 점점 동급생들로부터 소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배척당하고 냉대를 받고 있다는 것은 불쾌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하기도 했다. 그는 이따금씩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잔소리깨나 늘어놓을 듯한 동급생을 웃기기도 하고 옆 침대에 자고 있는 말없는 동급생에게 잡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리하여 한 시간 가량이나 애를 써서 몇 번의 관심과 시선을 끌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가까워진 우정은 '마을에 가자'는 권유를 두 번이나 받는 것으로 그 보상이 돌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마을에 가지 않았으며 긴 머리카락의 앳된 소녀도 기억에서 멀어져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4.
나르치스는 오랫동안 골드문트를 방치해 두었다. 그의 비밀을 캐내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허사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골드문트가 그의 내력이나 고향에 관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도무지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자 같이 형태가 없는 아버지 이야기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에 뛰어났던 나르치스는 점점 그의 친구가 생활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사람, 다른 어떤 괴로움이나 마력의 압박 밑에서 과거의 일부를 잊어버리기로 작정한 사람 중의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무엇을 묻거나 깨우친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또 자신이 이성의 힘을 과시한 나머지 잔소리만 늘어놓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친구로 결합시킨 사랑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같이 있는 습관도.... 두 사람의 본성이 서로 상충되는 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가 상대방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이성의 언어와 더불어 영혼과 상징의 언어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마치 두 개의 주택 사이에 마차나 말 탄 사람이 달릴 수 있는 한길이 있을지라도 그 옆에 놀기 위한 조그만 길이나 골목이나 사잇길이 수없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어린이들을 위한 조그만 길이나 애인들을 위한 오솔길, 거의 눈에도 띄지 않는 개나 고양이의 길이 생기는 것처럼-.
골드문트의 풍부한 상상력은 차츰 마술 같은 길을 지나서 친구의 생각과 두 사람의 말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의 친구는 또 골드문트의 마음과 여러 종류의 상태를 침묵으로써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빛 속에서 영혼과 영혼의 새로운 결합이 차츰 익어간 뒤에야 비로소 언어라는 사다리가 놓여졌다.
수업이 없는 어느 날이었다. 도서실에서 불시에 두 사람을 우정의 핵심과 의미의 한가운데에 갖다놓고 멀리까지 새로운 빛을 던지는 것과 같은 대화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수도원에서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던 점성술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나르치스는 점성술이란 인간의 운명과 천명에 질서와 조직을 부여해 주는 시도라고 말했다.
그러자 골드문트가 이의를 제시했다.
"당신은 언제나 차이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당신의 가장 특별한 성질이라는 것을 나는 차츰 깨달았습니다. 가령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커다란 차이에 대해서 당신이 말씀하실 때, 그 차이는 언제나 차이를 발견하려고 열중하고 계시는 그 묘한 태도 속에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확실히 자네는 핵심을 찔렀네. 사실 자네에겐 차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 하지만 내게는 중요한 일이야. 나의 본성은 학자이고, 나의 천직은 학문일세. 학문이라는 것은 자네 말을 인용한다면, '차이를 발견하려고 열중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란 말일세. 이보다 더 학문의 본질을 내세울 수 있는 말은 없을 거야. 학문적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차이의 확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단 말일세 학문이라는 것은 차이의 기술일세. 이를테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 짓는 특징을 발견하는 것, 즉 사람을 인식하는 것이지."
"그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농부의 신을 신고 있기 때문에 농부이고, 어떤 사람은 왕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왕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차이죠. 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와 왕이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다면 그때는 어린아이도 구별할 수가 없지 않겠나?"
"학문이라고 해서 그런 구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학문이 어린아이보다 현명하다고 말할 수 없겠지. 그것은 인정하겠네. 하지만 학문은 어린아이보다 끈질기단 말일세. 학문은 가장 단순한 특징에만 주의를 하진 않아."
"아니에요. 영리한 아이라면 그것도 가능하죠. 어린애는 눈짓이나 태도로 왕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당신네 학자들은 너무 거만하다는 겁니다. 당신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당신들보다 어리석다고 생각할 테죠. 하지만 지식은 없어도 지혜는 가질 수 있거든요."
"자네가 그걸 깨닫기 시작했다는 건 기쁜 일일세. 그래서 내가 우리 둘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현명하다는 것을 뜻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아. 다만 자네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특징의 차이에 관해서는 물론 천명의 차이에 대해서도 때때로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왜 나와 다른 천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나 나나 똑같이 크리스찬입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수도원 생활을 하실 결심을 하고 계십니다. 나와 똑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십니다. 우리 두 사람의 목표는 똑같습니다. 우리들의 천명은 똑같습니다. 즉, 하느님한테 돌아가는 겁니다."
"대단히 좋은 말이야. 교리학 책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똑같지. 그러나 모든 인생이 그런 건 아니야. 구세주를 가슴에 안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와 구세주를 배반한 다른 제자, 이 두 사람은 아마 같은 천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단 말일세."
"당신은 궤변가입니다, 나르치스. 계속 이런 길을 가는 한 우리는 서로 다가설 수가 없습니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는 다가설 수 없네."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그건 진심일세. 해와 달이, 바다와 육지가 서로 접근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서로 접근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란 말이네. 이봐, 우리 두 사람은 해와 달, 바다와 육지란 말이야. 우리의 목표는 서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식하고 상대방에게 그 사람이 무엇인가를, 즉 상대방인 반대자들과 그 보충을 보고 그것을 서로 존경하는 걸 배우는 것이지."
골드문트는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 슬픈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는 간신히 말했다.
"당신이 나의 생각을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주시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인가요?"
나르치스는 약간 주저하다가 잠시 후 딱딱하지만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 때문이야. 이봐 골드문트, 내가 너 자신만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에 너는 익숙해져야만 해. 네 목소리의 모든 음조, 네 모든 몸짓, 네 모든 미소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믿어 줘. 하지만 너의 생각을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아. 너의 본질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점을 나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너는 그토록 다른 많은 천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네 생각에만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것은 무엇 때문이지?"
골드문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었지요. 당신은 언제나 나를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있다구!"
나르치스는 그래도 변함이 없었다.
"나는 네 생각의 일부만을 어린아이의 생각이라고 본다. 아까 서로 이야기한 것 중에서 영리한 아이는 학자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바로 그 점을 생각해 봐. 어린아이가 학문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면 학자는 아마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
골드문트는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학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때도 당신은 나를 비웃었습니다! 가령 내 신앙 전체는, 학습에 있어서의 진보를 위한 내 노력은, 수사가 되기 위한 내 소망은 단지 어린아이의 소망에 불과 하다는 듯이 당신은 날마다 비웃고만 계셨습니다."
나르치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네가 골드문트라면 나는 너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겠어. 그러나 네가 늘상 골드문트라는 법은 없어. 나는 네가 완전한 골드문트가 되기를 원할 뿐이야. 너는 학자도 수사도 아니야. 학자나 수사는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도 될 수 있어. 너는 스스로가 나보다 학문도 모자라고 논리가도 아니고 경건한 마음 또한 모자란다고 믿고 있어. 당치 않은 생각이야. 내가 보기에 너는 너 자신이라는 생각이 모자란단 말이야."
이런 대화가 끝난 후 골드문트는 당황하고 자존심까지도 상해서 돌아갔으나 며칠 뒤에는 벌써 자신이 앞장서서 계속 대화할 의향을 보였다. 이번에는 나르치스가 두 사람의 성격의 차이에 관해서 구체적인 관념을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골드문트도 그것을 이전보다 더 잘 받아들였다.
나르치스는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그는 골드문트가 오늘은 전보다 더 많이 마을 털어놓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자신이 골드문트를 제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성공에 매혹되어서 자신이 의도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고, 또 스스로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버렸다.
"내 말을 좀 들어봐. 내가 너보다 우월한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어. 말하자면 네가 눈을 지그시 감고 졸고 있고 때로는 완전히 잠을 자고 있는데도, 나는 깨어 있다는 것 뿐이야. 내가 깨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성과 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이성적인 힘이나 충동이나 약점을 감지하고, 그것을 계산에 넣을 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그것을 배우는 것만이 네가 나를 만난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 골드문트, 너에게는 정신과 자연, 의식과 꿈의 세계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너는 너의 유년 시절을 잊어버리고 있어. 네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유년 시절이 너를 빼앗아 가지려고 해. 네가 그것을 들어 줄 때까지 너는 괴로워할 거야. 그것은 이 정도로 하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깨어 있다는 점에서만은 너보다 강해. 그 점은 너보다 우월하지.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는 네가 나보다 훨씬 우월해. 네가 네 자신을 발견하면 그 순간 너는 나보다 우월하게 되는 거야."
골드문트는 한편 놀라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너는 너의 유년 시절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말을 듣자 화살에 맞기라도 한 듯 전신을 움츠렸다. 나르치스는 그러나 그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동안, 그렇게 하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도 더 잘 이해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 동안 눈을 감거나 먼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골드문트의 얼굴에 별안간 경련을 일으키며 창백해진 것도 몰랐다.
"우월하다구요? 당신보다 내가!"
골드문트는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온몸이 굳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야."
나르치스는 말을 계속했다.
"너와 같은 종류의 사람, 강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 영감을 받은 사람, 몽상가, 시인, 연애하는 사람, 그와 같은 사람은 우리들 다른 인간, 즉 정신적 인간보다는 대개 우월해. 너희들의 본성은 모성적이지. 너희들은 충실한 것 속에서 생활하며, 너희들에게는 사랑과 힘과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이 제공되어 있어. 우리들 정신적인 인간은 가끔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충실한 것 속에 살고 있지 않고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어. 충실한 생활, 과실의 즙, 사랑의 뜰, 예술의 아름다운 나라는 너희들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은 대지이지만 우리들의 고향은 관념이야. 너희들의 위험은 감각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위험은 진공의 공간에서 질식하는 것이야. 너는 예술가지만 나는 사색일 뿐이야. 그리고 네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을 때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어. 나에게는 해가 비치고 있으나 네게는 달과 별이 비치고 있고 너의 꿈속에는 소녀가 나타나지만 나의 꿈속에는 소년이 나타난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웅변가처럼 자기 도취에 빠져서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말의 대부분이 송곳처럼 그를 찔렀고 마지막 말을 듣고서는 더욱 얼굴이 창백해져 눈을 감았다. 나르치스가 눈치를 채고 놀라서 물어 보자 몹시 창백해진 골드문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내가 당신 앞에 쓰러져서 울지 않을 수 없었던 때를 기억하시겠지요.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났다가는 큰일입니다. 그랬다가는 결코 내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테구요! 이젠 나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당신은 저를 두렵게 만드는 말을 하셨습니다."
나르치스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말에 이끌리어 다른 어떤 때보다 더 말을 잘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그 어떤 말이 친구를 이렇게도 깊이 감동시킨 것과 동시에 어딘지 아픈 데를 찌르기도 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이런 때 그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골드문트의 찡그리면서 괴로운 표정이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가 원하는 대로, 어지러운 생각을 간직하고 그를 혼자 놔두기 위해 얼른 그 자리에서 떠났다.
골드문트는 혼자 남았다. 전신이 떨려왔다. 이번에는 긴장된 마음을 눈물로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가 불시에 그의 가슴 한복판에 비수라도 꽂은 것처럼, 깊고 절망적인 상처를 받은 감정으로 숨을 간신히 내뿜으며 장승처럼 서 있었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멎을 것처럼 죄어들고 얼굴은 밀납같이 창백해지면서 두 손은 감각을 잃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난번의 비참한 상태의 재현이었으며 그것도 몇 배나 심한 것이었다. 마음속에서는 마치 목을 조르는 듯했고 무슨 흉악스러운 것을,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구원의 방편인 흐느낌조차 그 비참한 상태를 이기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 성모 마리아여, 어찌 된 일입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가 살해를 당한 것일까요? 내가 죽인 것일까요? 어떤 무서운 말을 한 것일까요?
그는 헐떡이며 숨을 내뿜었다. 자신의 내부 속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어떤 치명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감정에 가득 찬 채 마치 독약을 마신 사람처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듯한 몸짓으로 방에서 뛰쳐나가 수도원에서 제일 조용하면서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려갔다. 복도를 빠져나가 계단을 지나 지붕이 없는 곳으로,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그는 수도원의 제일 구석진 피난처, 즉 안마당을 둘러싸는 회랑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파랑색 화단에는 밝은 빛으로 하늘이 펼쳐져 있고 돌과 같이 서늘한 대기 속에는 감미롭고 수줍은 듯한 장미꽃 향기가 스며 있었다.
나르치스는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하고 벌써 오래 전부터 하려고 애태우고 있던 말을 한 것이었다. 즉 그의 친구에게 달라붙어 있는 마귀의 이름을 불러내어 때려눕히고 만 것이었다.
골드문트는 마음속 비밀은 이 말의 어떤 것에 의해서 혼란스러워지고 미칠 듯한 고통으로 뒤덮여 버렸다. 나르치스는 오랫동안 수도원 안을 헤매 다니면서 친구를 찾았으나 어느 곳에서도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골드문트는 회랑에서 마당으로 통하는 둥글고 묵직한 아치형 돌문 아래서 있었다. 그 아치를 받친 둥근 기둥에서 동물의 머리가 조각된 세 개의 석상이 그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로 만든 이 조각은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밝음으로 인도하는 길도, 이성으로 이르는 길도 없고 오직 고통만이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그의 목구멍과 가슴을 죄었다. 반사적으로 위를 쳐다보니 세 마리의 동물의 머리가 사나운 이빨을 내밀고 그의 내장을 물어뜯을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 그는 전율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짐승들이 나를 잡아먹을 거야.'
그는 벌벌 떨면서 기둥 아래에 주저앉고 말았다. 고통이 너무 심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곤 의식을 잃어 그가 그렇게도 소망하던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었다.
다니엘 원장은 그날 하루를 그리 유쾌하게 보내지 못했다. 나이깨나 먹은 수사 둘이 그를 찾아와 해묵은 질투 때문에 흥분해서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원장은 그들의 말을 한참 동안 듣고 나서 두 사람을 나무랐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에게 엄한 벌을 내린 다음 엄숙히 물러가라 일렀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을 했다 싶은 감정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원장은 힘없이 아래채 성당의 예배실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으나 마음이 개운치 못한 채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가물거리듯 풍겨 오는 장미꽃 향기에 이끌리어 회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실신해서 쓰러져 있는 골드문트를 발견했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아름답고 젊음에 넘친 얼굴이 창백해져서 까무러친 것에 놀라 원장은 슬픈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유쾌한 날도 아닌데 오늘 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원장은 소년을 안아 일으키려고 했으나 너무 무거워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한숨을 깊이 쉬면서 이 노인은 좀 더 젊은 수사 두 사람을 불러 소년을 옮기라고 이르고는 곧 의술에 능한 안젤름 신부를 그곳에 보냈으며 동시에 나르치스도 부르러 보냈다.
나르치스는 곧 원장에게로 왔다.
"자네는 이미 알고 있겠지?"
원장이 나르치스에게 물었다.
"골드문트 말씀입니까? 네, 원장 선생님. 지금 막 병이 났는지 다쳤는지 실신해 있는 것을 업어 왔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그렇다네. 회랑에 쓰러져 있는 걸 내가 발견했지. 그런 곳에서는 아무것도 못 찾을 텐데. 다치지는 않았어. 기절했지. 좋지 않은 일이야. 이 일에는 자네도 틀림없이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니면 뭔가를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되네만. 그는 자네와는 절친한 사이니까 말일세. 그래서 자네를 보자고 한 걸세. 무슨 말이든 좀 해보게나."
나르치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억제한 태도와 말로써 골드문트와의 오늘 있었던 대화 내용, 또 그것이 골드문트에게 예상 외로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쳐주는가에 대해서 간단히 들려주었다.
원장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이상한 대화였군."
원장은 말을 하면서도 억지로 진정하려고 애썼다.
"자네 설명을 들어보니 그것은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간섭이라고도 할 수 있네. 영혼의 구제에 대한 대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인 것 같네. 하지만 자네는 골드문트의 영혼 구제자가 아닐세. 아니, 무엇보다 자네는 영혼 구제자가 아니네. 아직 성직을 받고 있지 않단 말일세. 영혼 구제를 맡아 보는 성직자에게만 관계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조언자로 학생과 그런 대화를 할 수 있었는가? 결과는 보다시피 좋지 않았다는 것만은 사실이지 않는가?"
"원장 선생님."
나르치스는 부드러운 말씨로 그러나 명확하게 말했다.
"결과는 아직 모릅니다. 심한 충격을 일으켰다는 것에 대해서 저도 퍽 놀랐습니다. 우리들의 대화의 결과가 골드문트를 위해서 좋은 일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결과는 곧 알게 되겠지. 그러나 나는 지금 결과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네의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중일세. 어떤 이유로 자네는 골드문트와 그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지?"
"알고 계시겠지만 그는 제 친구입니다. 그에게 특별히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를 특히 잘 이해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선생님께서 그에 대한 저의 태도를 영혼 구제자라 하십니다. 저는 성직자의 권위를 넘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단지 그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제가 더 잘 그를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원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의 특별한 재능에 대해선 나도 잘 알고 있네만, 자네가 한 행동이 나쁜 결과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골드문트는 병이 난 건가? 혹시 어디가 아프다거나 허약한 게 아닌가 하는 거야.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가? 그것도 아니면 어디 특별한 통증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닙니다. 오늘까지 건강한 몸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병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지금 성욕과의 싸움을 시작할 그런 나이니까요."
"내가 알기로는 열일곱일 텐데?
"열여덟입니다."
"열여덟. 그렇군. 충분히 그럴 나이지.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연스런 싸움이야. 그러니 그의 영혼이 병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네."
"아닙니다, 선생님. 그것만이 아닙니다. 골드문트는 벌써 오랫동안 영혼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싸움은 다른 사람보다도 그에게 있어서는 훨씬 위험한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는 과거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래? 어떤 부분이란 말인가?"
"그의 어머니와 관계된 모든 것입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저도 아는 게 없습니다. 거기에 병의 원인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입니다.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골드문트 자신이 어머니를 일찍 잃었다는 것 외에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의 재능과 그 모든 것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도 아름답고 재간덩어리인 개성이 남다른 아들을 둘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저의 이런 일체의 것을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징조에서 추론한 데 불과합니다."
원장은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보다 좀 우월한 생각을 갖고 있구나, 하고 비웃으며 이 사건 전체를 귀찮게 여기고 있었으나 차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원장은 골드문트의 아버지, 어느 정도 허식이 심하고 신뢰감이 가지 않는 그 사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비로소 그 남자가 골드문트의 어머니에 대해서 암시한 몇 마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여자는 자신에게 치욕스런 행동을 하고 도망쳐 버렸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의 마음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어머니한테서 이어받았을지도 모르는 악덕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려고 애를 썼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해서 소년은 어머니가 저지른 죄악이 보상을 위해서 한평생을 하느님한테 바칠 결심을 한 것 같다. 그 사나이는 그런 말을 했었다.
원장은 오늘처럼 나르치스에게 혐오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생각 깊은 젊은이는 얼마나 훌륭한 추측을 내린 것일까! 사실 얼마나 자세하게 골드문트를 알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서 다시금 질문을 받자 나르치스는 말했다.
"오늘 골드문트가 빠져 들어간 걱정은 제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의 생각을 일깨우게 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자신의 유년 시절이며 자신의 어머니를 망각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한 어떤 말이 그의 마음에 충격을 주고 제가 벌서 오랫동안 싸움의 목표로 하고 있었던 암흑 속을 밀고 들어간 테 불과합니다. 그는 마치 방심한 사람처럼 저의 것은 인식하나 자기 자신이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듯이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자주, 너는 잠을 자고 있다, 정말로 깨어 있지 않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지금 그는 깨어났습니다. 저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훈계는 받지 않고 물러났으나 당분간 골드문트를 찾아가는 것은 금지 당했다.
그 동안 안젤름 신부는 정신을 잃은 소년을 침대에 눕히고 옆에서 지켜보았다. 무리한 방법을 써서 의식을 돌아오게 한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소년이 병세는 무척이나 좋지 못했다. 인정 많은 노인은 주름살투성이의 선량한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우선 맥을 짚어 보고 심장에 귀를 갖다 대었다. 이 소년은 확실히 무슨 뜻하지 않은 어떤 것, 이를테면 찬 것을 먹었거나 아니면 무슨 독초를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추측하면서도 혓바닥을 볼 수는 없었다. 안젤름 신부는 골드문트를 좋아했으나 그의 친구인, 너무나 젊고 조숙한 그 조교사 나르치스는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큰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나르치스가 이 어리석은 사건이 공범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이다지도 귀엽고 시원한 눈매를 한 소년이, 이다지도 귀여운 자연이 아들이, 하필이면 저 거만한 학자, 이 세상의 생명이 있는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 어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 공허한 문법학자와 친하게 되었단 말인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문이 열리면서 원장이 들어왔을 때에도 안젤름 신부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정신을 잃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귀엽고 앳되고 사심 없는 얼굴인가! 이렇게 옆에 앉아서 도와주어야만 하는데도 그럴 수가 없다니! 원인은 확실히 복통일 것이다. 향료가 든 포도주를 따뜻하게 데워 먹이고 아마 대황을 달여 먹여야 하리라.
그러나 유록색으로 창백해지고 찌푸린 얼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의 마음에는 의혹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안젤름 신부는 경험이 있었다. 오랜 생애를 통해서 그는 악마에 홀린 사람을 몇 번이나 본 일이 있었다. 그는 그 의심이 되는 증세를 입에 담기를 주저했다. 좀 더 참을성 있게 관찰해 보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이 가엾은 소년이 악마에 홀린 것이 사실이라면 그 범인을 찾아내어 가까이 할 수 없도록 막아야 한다고 신부는 생각하고 있었다.
원장은 한걸음 다가서서 환자를 들여다보다가 한쪽 눈꺼풀을 젖혀 보았다.
"깨워도 괜찮을까요?"
원장이 물었다.
"좀 기다려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심장은 거의 정상입니다만 아무도 가까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위험하지는 않겠죠?"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상처도 없고, 타박상을 입었거나 어디서 떨어진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정신을 잃었을 뿐입니다. 아마도 복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통증이 너무 심하면 의식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약물 중독이라면 열이 높을 것입니다. 아니, 다시 눈을 뜰 것입니다.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으니까요."
"혹시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될 병은 아닐는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혹시 아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심한 충격을 받았다든지 누가 죽었다는 통지를 받았거나, 심한 싸움을 했거나 모욕을 받았거나 한 것이 아닐까요? 그걸 알면 모든 것은 해결할 수 있을 텐데요."
"모르겠는걸요.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해야겠어요. 그애가 눈뜰 때까지 곁에 있어 주시오. 위험하거든 밤중에라도 상관없으니 나를 부르도록 하시오."
나가기 전에 원장은 한 번 더 환자에게로 몸을 굽혔다. 원장은 이 소년의 아버지와 이 예쁘장하고 밝은 금발의 소년이 수도원에 온 그날 그리고 모두가 얼마나 그를 금세 좋아하게 되었나 등 여러 가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원장도 이 소년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나르치스가 한 이야기도 사실은 옳았다. 이 소년의 어떤 면에서도 아버지를 머릿속에 그리게 할 수 없었다. 아, 근심 걱정이 없는 곳이 어딘가! 우리들의 행위는 얼마나 무력한가! 이 가엾은 소년에 대해 소홀한 점이 내게는 없었단 말인가! 그에게 적당한 고해 신부가 있었을까? 수도원 안에서 나르치스 외에는 아무도 이 학생에 대한 사정을 알고 있지 못했는데 그래도 괜찮단 말인가? 아직 수습 수사의 처지에 있는 사람이, 수사도 아니고 성직도 얻지 못한 사람이 그를 도울 수 있었단 말인가?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것에도 불쾌한 우월감이 아니, 적개심 같은 것까지도 가지고 있는 사나이가, 하지만 그 나르치스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잘못된 대접을 받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나르치스가 복종이란 가면의 배후에서 악의를 숨기고 있었는지 아닌지, 잘못 생각한 것이겠지만 혹 이교도가 아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 젊은 두 사람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되든 거기에도 원장 자신의 책임이 있었다.
밤이 되자 골드문트는 의식을 회복했다. 머리는 텅 비고 어지러웠다. 침대에 드러누워 있다는 것은 짐작이 갔지만 이곳이 어딘지는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대체 어딜 갔다 왔을까? 온갖 것을 보고 부딪쳐 보았던 그 낯선 나라는 어디였을까? 어딘지 무척 먼 곳에 있었다. 무엇을, 무슨 이상한 것을, 무슨 으리으리한 것을, 무슨 흉악스런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곳은 어디였을까? 거기서 그의 앞에 그토록 커다랗게, 안타깝도록 즐겁게 솟아났다가는 또 잠기어 버리고 만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늘 무언가가 찢어져서, 무언가가 발생한 곳을 향해 그는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었나? 아무렇게나 그저 혼돈된 온갖 형태가 솟아올랐다. 세 개의 머리가 보였다. 장미꽃 향기가 났다. 아, 얼마나 무서운 고통이었던가! 그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는 다시금 눈을 떴다. 그는 재빨리 미끄러지면 떠나가는 꿈나라가 소멸하는 그 순간에 그것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 모습을 재차 발견하고 끝없는 환희에 젖어 있기라도 한 듯 전신을 떨었다.
그는 보았다. 볼 수 있었다. 그 여인을 보았다. 커다랗고 눈부신 여인을, 꽃이 만발한 듯한 입술과 빛나는 듯한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을, 어머니를.
동시에 '너는 너의 유년 시절을 망각해 버렸어' 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그는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그것은 나르치스였다. 나르치스? 그 순간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 어머니, 어머니! 쓰레기의 산, 망각의 밝고 푸른 여왕 같은 시선으로 이미 죽어 버린 그 여인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운 여인이.
침대 곁의 안락의자에 기대 졸고 있던 안젤름 신부가 눈을 떴다. 소년이 움직이며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그는 일어섰다.
"누구세요?"
골드문트가 물었다.
"나야, 걱정하지 마. 불을 켤 테니."
그는 걸어 놓은 등잔에 불을 켰다. 주름살투성이의 그 인정 많은 얼굴이 불빛에 드러났다.
"제가 지금 앓아누운 건가요?"
소년이 물었다.
"정신을 잃었었단다, 골드문트, 손을 이리 다오. 맥을 좀 짚어 보자꾸나. 기분은 어때?"
"좋습니다. 안젤름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 친절을 어떻게 갚지요? 이젠 아무 데도 아프지 않습니다. 좀 피곤할 뿐입니다."
"물론 피곤할 테지. 하지만 곧 다시 잠이 들 게다. 그 전에 포도주나 한잔 마시렴. 여기 준비한 게 있어. 같이 마실까? 우정의 표시로 말이다."
그는 조심스레 포도주에다 향료를 넣은 다음 따뜻한 물을 컵에 따랐다.
"우리 둘은 실컷 한숨 잤단 말이야."
의사인 신부는 호쾌하게 웃었다.
"잠에 흠뻑 빠져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인간이라고, 큰 일 날 간호인이라고 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같은 인간이란 말이야. 안 그래? 자, 이 마법의 음료수를 좀 마시자꾸나. 에야, 밤중에 몰래 조금씩 마시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는 법이거든. 자 건배!"
골드문트는 미소를 지으며 서로 잔을 부딪치고 맛을 보았다. 따뜻한 포도주는 계피와 정향나무 향료가 들어 있고 설탕을 넣어서 달콤했다. 이런 술은 아직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 그가 앓아누워 있었을 때는 나르치스가 그를 보살펴 주었다. 그때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한밤중에 늙은 신부와 따뜻하고 달콤한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정말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도 배가 아프냐?"
노신부가 물었다.
"아뇨."
"그래? 나는 복통이라 생각했는데. 그럼 아무것도 아니군 그래. 혀를 좀 내밀어 봐. 그래 좋아, 이 늙은 안젤름이 또 잘못 짚었는걸. 내일도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한다. 내가 와서 봐 줄 테니. 포도주는 벌써 다 마셨지? 그래야지. 틀림없이 효과가 있을 거다. 어디 보자, 얼마나 남았나? 사이좋게 나누면 반 잔씩은 더 마실 수 있겠구나. 골드문트! 넌 정말 우릴 얼마나 놀라게 했는지 모른다. 어린 송장처럼 회랑에 쓰러져 있었으니 말이야. 정말 배는 아프지 않니?"
두 사람은 킬킬대고 웃으며 나머지 환자용 포도주를 사이좋게 나누어 마셨다. 신부는 농담을 늘어놓았고 골드문트는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맑아진 눈매로 신부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신부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자리를 떴다.
골드문트는 한참이나 눈을 뜬 채로 누워 있었다. 환영들이 다시금 그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걸어 나왔다. 친구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으며 영혼 속에서 금발로 반짝거리는 여인이, 어머니가 또 나타났다. 그 모습은 흡사 미풍과도 같이, 생명과 온기, 용기와 예감의 구름처럼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아, 어머니! 내가 어떻게 어머니를 잊은버릴 수 있었단 말입니까!
5.
지금까지 골드문트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것들을 조금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 가운데서 들은 것에 불과했다. 어머니의 모습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 있는 것이 없다. 어머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몇 개 있기는 했으나 그 대부분은 그를 나르치스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라는 것은, 그런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무엇이었다. 수치스런 일이었다.
어머니는 댄서였다. 품위는 있었으나 좋지 못한 이교도 출신의 아름답고 야성적인 여인이었다. 골드문트의 아버지는 그 여인을 가난과 굴욕 속에서 구출해 주었다고 늘 이야기했다. 그 여인이 이교도인지 아닌지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종교를 갖게 했다. 그러고는 결혼식을 하고 존경을 받을 만한 여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머니는 몇 년 동안 얌전하게 질서 있는 생활을 꾸려갔으나 지난날의 생활 습관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음인지 추문을 일으킨다. 남자들을 유혹한다, 며칠 혹은 몇 주일씩 집을 비운다, 무서운 여인이다, 하는 소문이 퍼지더니 몇 번이나 남편한테 붙들려 왔다가 끝내는 영영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어머니의 소문은 그 후에도 계속 사라질 줄을 몰랐다. 악평은 혜성의 꼬리와도 같이 하늘거리다가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 여인의 남편은 불안과 공포, 치욕과 놀라움으로 시달리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안정을 회복했다. 그러고는 배반한 여자를 대신해서 아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아들의 모습은 그 어머니를 무척이나 닮았다. 아버지는 슬픔으로 몸은 초췌했지만 마음은 이전보다 경건해졌다. 그는 아들 골드문트의 마음속에 어머니의 죄악을 보상하기 위해 일생을 하느님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골드문트의 아버지는 행방을 감춘 아내에 대해서 말하기를 싫어했지만 언제나 대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골드문트를 떠맡길 때 원장에게도 암시를 준 내용이었다. 아들은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런 이야기들은 아직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버지나 하인들의 이야기, 어둡고 욕된 소문에서 된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말하자면 그 자신의 어머니, 실제의 어머니, 체험한 어머니에의 추억을 그는 아주 잊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모습이, 그가 아주 어릴 때의 별이 다시 떠올랐다.
"어떻게 그 영상을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골드문트가 친구한테 말했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만큼 무조건적으로 열렬히 사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있어 태양이며 달이었습니다. 내 영혼 속에 빛나는 그 모습이 어떻게 점점 희미해져갔고 끝내는 형태 없는 매춘녀처럼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여러 해 전부 터 어머니는 나와 아버지에게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 후 얼마 안 되어 나르치스는 수습 수사 기간을 마치고 법의를 입게 되었다. 골드문트에 대한 그의 태도는 두드러지게 달라졌다.
골드문트는 전에는 나르치스의 주의나 조언에 대해 귀찮은 지식이나 행동의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부했으나, 요전의 커다란 체험 이래로 친구의 예지에 대해 흠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친구의 말 중에서 얼마나 많은 말이 예언과도 같이 실현되었던가! 이 통찰력 있는 인간은 얼마나 깊이 그의 생활의 비밀이나 그의 보이지 않는 상처를 정확하게 추측했던가! 얼마나 영리하게 그의 병을 고쳐 주었던가!
그 이후로 소년은 완쾌된 것처럼 보였다. 그때의 기절은 나쁜 결과를 남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골드문트의 태도 속에 있던 일종의 유희적이며 건방지고 또한 불순한 점과 어느 정도 조숙해 보이는 수사다운 태도, 아주 특별한 예배의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는 신념은 마치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소년은 자기 자신의 길을 깨닫고 난 뒤부터는 한층 더 젊어지는 동시에 점잖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 모든 것이 나르치스 덕택이었다.
그러나 나르치스는 며칠 전부터 그의 친구에 대해서 특별하게 신중한 태도를 갖기 시작했다. 골드문트는 그를 매우 흠모하고 있는데도 나르치스는 대단히 겸손하게 그전처럼 사람을 깔보는 듯하고 가르치는 듯한 태도를 친구에게 보이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자신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힘을 보이지 않는 원천에서 가져다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힘의 성장을 촉진시켜 줄 수는 있었으나 거기에 참견할 수는 없었다. 친구가 자기의 지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는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지만 한편으로는 슬펐다.
그는 어떤 단계를 뛰어넘는, 언젠가는 벗어버려야 할 껍질 같은 것을 느꼈다. 지금도 그는 골드문트에 대해서 골드문트 자신이 그 자신을 알고 있는 이상으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골드문트는 자신의 혼을 재차 발견하고 그의 부름에 따라갈 준비는 되어 있었어도 그것에 의해서 어디로 이끌려갈지 아직 예상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르치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힘이 없었다. 사랑하는 친구의 길은 나르치스 자신이 결코 밟고 들어가지 않을 나라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골드문트는 학문에 대해 전보다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논쟁을 하던 버릇도 없어졌다. 옛날에 나누던 대화에 대해 생각할 때면 그는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편 나르치스의 마음속은 최근 수습 수사로서의 수련기를 끝마쳤기 때문인지, 또는 골드문트와의 체험 탓인지, 은거나 금욕이나 종교적인 수련에의 욕구에 눈이 떠져 단식이나 기나긴 기도, 빈번한 참회와 자발적인 고행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나르치스의 행위에 대해 골드문트도 이해심을 가지고 동참하기도 했다. 기운을 회복하고 나서부터 그의 본능은 아주 예민해졌다. 자신의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고 있지 못했으나 그래도 그는 강한, 가끔 가슴이 답답할 만큼 분명하게 자신의 운명의 바탕이 이루어져 천진과 휴식의, 말하자면 일종의 금욕 생활은 지나가 버리고 그의 몸속에 있는 온갖 것들이 긴장해서 곧바로 튀어나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예감은 가끔씩 마음을 들뜨게 해서 연애하는 심정과도 같이 달콤하게 밤늦게까지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또한 그것이 가끔씩 그의 가슴을 짓누르기도 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어머니가 그를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은 흐뭇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유혹하는 목소리는 어디로 통하고 있었을까? 확실치 않은 것 속으로, 덫 속으로, 괴로움 속으로, 아마 죽음 속으로 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목소리는 고요함과 부드러움, 기도실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나 평생으로 이어질 수도원 생활로 돌아가게 하지는 않으리라.
어머니의 부름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소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골드문트의 신앙심은 격렬한 육체적 감정과도 같아서 더욱 경건하게 자라났다. 성모 마리아를 향한 기나긴 기도를 되풀이 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자신을 끌어당겨 주는 감정의 물결을 넘쳐흐르게 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가끔 그 기괴하고 장엄한 꿈속에서 끝나 버렸다. 그는 그것을 지금 마음껏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그시 눈을 감은 오관의 헛된 꿈이요, 온갖 감각이 달라붙어 있는 어머니의 꿈이었다. 그 속에서는 향기를 지닌 어머니의 세계가 그를 휘어감고 있었다. 때로는 수수께끼 같은 사랑의 눈매로 조용히 쳐다보기도 했고 바다나 천국처럼 웅성거렸으며, 감미롭고 씁쓸한 맛을 느끼게도 했고, 기갈에 허덕이는 입술과 눈매를 명주실 같은 머리카락으로 어루만졌다.
어머니는 고운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가졌고, 달콤하고 푸른 사랑의 눈매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행복을 약속하는 부드러운 미소, 애정이 넘치는 위안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내부에는 무언가 성스러운 베일 밑에 모든 공포, 암울, 욕망, 불안, 죄악. 출생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숙명이 있었다.
소년은 영혼의 눈을 뜨게 해준 몇 겹이나 되는 감각의 실에 감긴 꿈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이 눈부신 생명의 아침인 유년 시절이나 어머니의 사랑과도 같이 그리운 과거가 매혹적으로 되살아나는 곳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는 협박, 약속, 유혹, 위험, 이런 것들이 있는 미래도 함께 떠돌고 있었다. 이 꿈속에서는 어머니와 마돈나와 애인이 하나였으나 그것은 후에는 때때로 끔찍스런 범죄와 하느님에 대한 모독과도 같이, 또한 결코 보상할 수 없는 죄와도 같이 생각되었다. 또 다른 때는 그는 그 속에서 일체의 구원과 조화를 발견하기도 했다.
신비에 가득 찬 생명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둡고 측량할 수 없는 세계가, 동화적인 위험에 가득 찬,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가시덤불의 숲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의 신비였다. 어머니에게서 오고 어머니한테로 통해 있었다.
어머니의 맑은 눈 속에 있는 조그맣고 어두운 흑점, 조그마한...., 그러나 무서운 심연이었다.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유년 시절이 어머니의 꿈속에 자주 나타났다. 끝을 모르는 깊이와 망각 속에서 수많은 추억의 꽃들이 피어 황금빛 무늬를 그리며 풍부한 예감을 실은 향기를 풍겼다. 그것은 유년 시절에 대한 감정, 어쩌면 체험이나 꿈에 대한 추억들이었다.
그는 물고기의 꿈을 꿀 때가 많았다. 물고기들을 새까맣게, 무리를 이루어 그를 향해 헤엄쳐 왔다. 차갑고 매끄럽게 그의 내부로 헤엄쳐 와서는 재빨리 지나갔다. 그것들은 보다 아름다운 현실로부터 행운의 소식을 가지고 오는 심부름꾼처럼 왔다갔다 꼬리를 치다가는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소식 대신에 새로운 비밀을 남겨 주었다.
종종 그는 헤엄치는 물고기나 날아가는 새의 꿈을 꾸었다. 물고기와 새는 자신이 만든 창작물이었다. 자신의 호흡처럼 자신이 마음 내키는 대로 자신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였다. 자신의 눈초리나 생각처럼 그에게서 방사하고 그의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때때로 정원에 대한 꿈을 꿀 때도 있었다. 동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나무들과 엄청나게 큰 꽃들과 깊고 검푸른 동굴이 있는 기괴한 뜰이 나타났다. 풀 사이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짐승들이 눈초리가 검은 빛으로 빛나고 가지마다 커다란 뱀들이 매끄럽게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덩굴마다 이슬을 머금은 커다란 딸기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달려 있었다. 그 딸기는 꺾어들자 이내 손바닥에서 부풀어 올라 피같이 따뜻한 즙을 쏟았다. 혹은 눈을 지니고 있어 그 눈이 애타는 듯 빈틈없이 움직였다. 그는 더듬거리며 어느 한 나무에 기대어 가지를 하나 휘어잡았다. 그러자 줄기와 가지 사이에서 뒤얽힌 두툼하고 곱슬곱슬하게 달라붙어 있는 털이 보이기도 했고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날 그 는 자신에 대한 꿈을 꾸기도 하고 그와 같은 이름의 성자에 대한 꿈을 꾸기도 했다. 골드문트, 즉 크리소스토무스(둘다 '황금의 입'이라는 뜻)가 꿈속에 나타나서 황금으로 말을 하자 그 말들이 작은 새떼들처럼 무리지어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가 버렸다.
어떤 때는 이런 꿈도 꾸었다. 그는 커서 어른이 되었으나 어린아이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아 앞에다 흙을 쌓아 놓고, 어린애처럼 그것을 가지고 조그만 말이나 황소, 혹은 조그만 남자나 여인 같은 형상을 빚고 있었다. 그는 그런 행위가 재미있었다. 동물이나 사나이들에게는 우스꽝스럽도록 성기를 크게 만들었다. 꿈속에서는 그것이 매우 익살맞게 보였다.
마지막에는 그 장난도 싫증이 나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자기 뒤쪽에 어떤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소리도 나지 않는 큼직한 것이 가까이 오는 느낌을 받고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놀라움과 공포와 기쁨의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거기에는 조그만 점토 형상들이 커다랗게 변해 있었다. 그 커다란 거인들은 묵묵히 행렬을 지어 그의 곁을 지나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는 거대한 탑처럼 우뚝 솟더니 속세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보다도 꿈의 세계에서 더 많이 생활했다. 강당, 수도원의 뜰, 도서실, 침실, 예배당 등 현실의 세계는 껍질에 불과했다. 이 현실 세계는 꿈에 충만된 초현실적인 형태의 세계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얇은 껍질이나 다름없었다. 이 얇은 껍질에다 구멍 하나 뚫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분한 수업시간에 들려오는 그리스 어의 음향 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예감에 충만된 것, 식물 채집을 하는 안젤름 신부의 약초 주머니 속에서 풍기는 향내의 물결, 아치형 창문의 기둥 위로 불쑥 솟은 돌기둥의 담쟁이덩굴, 그런 보잘것없는 자극들이 현실 세계의 표피를 뚫고 평화롭고 메마른 현실이 뒤편에, 저 영혼의 사납게 날뛰는 형상 세계의 심연과 격류와 은하수를 풀어헤쳐 놓기에 충분했다.
라틴 어의 머리글자 하나가 어머니의 향기로운 얼굴이 되었다. 성모를 부르는 길게 끄는 기도 소리는 천당으로 가는 문이 되었다. 그리스 어의 자모는 달리는 말이 되고 똑바로 선 뱀이 되더니 그것은 몰래 꽃잎 밑으로 사라져 버리고 문법책의 두꺼운 표지가 나타났다.
그는 이러한 꿈에 대해서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지 몇 번 나르치스에게 이 꿈의 세계에 대한 암시를 했을 뿐이었다.
어느 날 그는 말했다.
"나는 꽃잎 한 개나 길 위의 조그만 벌레 한 마리가 도서실 전체의 모든 책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더 많은 내용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자나 말로써는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가끔 델타라든지 오메가라든지 하는 그리스 문자의 어떤 것을 씁니다. 펜을 약간 돌리기만 해도 문자는 꼬리를 치며 고기가 되어 대뜸 세상의 크고 작은 냇물의 온갖 시원한 것이나, 눅눅한 것이나, 호메로스의 대양이나, 베드로가 걸어다닌 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혹은 그 문자는 새가 되어 꼬리를 치기도 하며, 깃을 곧추세우기도 하고 몸을 부풀리는가 하면 웃으며 날아가 버리기도 합니다. 나르치스 선생님, 당신은 그런 문자를 그다지 별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런 문자로 하느님은 세계를 쓰셨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해."
나르치스는 슬픔에 잠겨 말했다.
"그것은 마법의 문자일세. 그 문자를 가지고 어떠한 악마라도 불러낼 수가 있단 말이야. 물론 학문을 하는 데만은 적합하지 않지. 정신은 고정된 것을, 형성된 것을 사랑하는 법이니 그 기호에 신뢰심을 갖기 바라네. 또 생성되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것을 사랑하고, 가능한 것이 아닌 현실의 것을 사랑하지. 오메가라는 글자는 뱀이나 새가 되기를 용납치 않아. 정신은 자연 속에서는 생존할 수 없는 까닭이지. 정신은 자연을 거역하고서야 자연의 반대물로 생존할 수가 있어. 골드문트, 이제 네가 결코 학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지?"
정말 그 말대로 골드문트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고 있었으면서 그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들의 정신으로 향하는 학문적인 노력을 좇아 공부를 하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빙긋 웃으며 골드문트는 계속 말했다.
"나의 정신이나 학문에 대한 태도는 아버지에 대한 태도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고,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은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시 나타나자 나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의 모습과 나란히 선 아버지의 모습은 갑자기 조그마하고 불쾌하게 보였으며 가엾게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나는 모든 정신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모성적이 아닌 것, 모성에 적대되는 것이라고 보며 또한 그것을 어느 정도 경시하는 영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농담 비슷하게 말했으나 친구의 슬픈 얼굴을 밝게 해줄 수는 없었다. 나르치스는 잠자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초리는 일종의 애무처럼 보였다.
드디어 그가 말했다.
"네가 하는 말을 잘 알겠어. 이제 논쟁이란 불필요한 거야. 너는 눈을 떴어. 지금은 너 자신도 너와 나이 차이를, 어미의 혈통과 아버지의 혈통 사이의 차이를, 영혼과 정신과의 차이를 인식했다. 결국 이제는 수도원에 있어서의 네 생활이나 수사의 생활을 지향하는 네 노력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너의 아버지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겠지? 너의 아버지는 그것에 의해서 너의 어머니를 기억을 씻게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어머니한테 복수만이라도 해보겠다는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평생 수도원에 있는 것이 너의 천명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지는 않겠지?"
골드문트는 친구의 우아하면서도 섬세하고 수척한 흰 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이 금욕주의자의 손, 학자의 손이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어조는 노래를 부르듯, 더듬거리며 하나하나의 음절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조금 전부터 그는 그런 투로 이야기했다.
"나는 정말 모릅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냉혹한 판단을 내리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큰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당신의 말이 정당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수도원에 온 지3년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나를 찾아 주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영원히 여기 있기를 아버지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마 최선책일 겁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내가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통 모르겠습니다. 전에는 독본 속에 있는 문자나 마찬가지로 모든 게 간단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것 하나 간단한 것이 없습니다. 문자조차도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온갖 것이 많은 의미와 얼굴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야."
나르치스가 말했다.
"너의 행로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 꼭 알게 될 거야. 너의 행로는 너를 어머니에게 데리고 가기 시작했어. 너를 어머니에게 더욱 가깝게 해줄 거야. 그러나 너의 아버지한테도 지나치게 냉혹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너는 아직도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은 거야?"
"아녜요. 나르치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학교를 마치자마자 곧 그렇게 할 겁니다. 혹은 지금 당장이라도. 왜냐하면 나는 학자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라틴 어나 그리스 어, 수학 같은 것은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생각에 잠겨 먼 곳을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는 소리쳤다.
"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자꾸 내 마음속을 비치고 나를 나 자신에게 분명하게 해주는 것과 같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까? 지금도 또 아버지에게 가고 싶으냐 안 가고 싶으냐 하는 당신의 질문이, 내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갑자기 내게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십니까? 당신은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과 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듣는 순간에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중에 가서 매우 중대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혈통은 어머니 쪽이라고 말씀하신 이는 당신이었습니다. 내가 어떤 마력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유년 시절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신 것도 당신이었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인간을 그다지도 잘 아십니까? 그것을 나도 배울 수는 없습니까?"
나르치스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너에겐 불가능한 일이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인간도 있으나 너는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이다. 너는 결코 학자는 될 수 없을 거야. 또 무엇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겠나? 너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단 말이야. 너에게는 다른 재능이 있어. 너는 나보다 풍부한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보다 약해. 너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때가 많았어. 가끔 너는 망아지처럼 거역했고, 너를 달래는 것은 확실히 쉽지 않았지만 나는 너에게 자주 고통을 주지 않으면 안 되었지. 나는 또 너를 깨우지 않으면 안 되었어. 너는 잠을 자고 있었으니 말이야. 너에게 어머니를 생각하게 한 것도 처음에는 심한 고통을 주었지. 너는 회랑에 시체처럼 쓰러졌었어. 너는 틀림없이 이랬을 거야. '아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지 마! 아니, 그만둬! 난 참을 수 없어'라고."
"그럼 나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자꾸 바보만 되어가고 어린아이로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너에게 가르쳐 줄만한 사람이 또 나타나겠지. 나한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제 이걸로 끝이야, 골드문트."
"아닙니다."
골드문트가 소리쳤다.
"그 때문에 우리가 친구가 된 건 아닙니다! 짧은 도정의 길을 지난 다음, 목표에 도달하자 간단하게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은 도대체 어떤 우정입니까? 당신은 벌써 나한테 싫증을 느끼셨나요? 당신은 내가 싫어졌단 말씀입니까?"
나르치스는 시선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격한 동작으로 왔다 갔다 했다. 그러고는 드디어 친구 앞에 걸음을 멈추어 섰다.
"이 정도로 그만해 줘."
나르치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네게 싫증이 안 났다는 것은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니."
이상하다는 듯이 나르치스는 친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계속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가 매섭고 여윈 얼굴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골드문트를 응시한 다음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야무지고 매정하게 말했다.
"이것 봐, 골드문트! 우리들의 우정은 좋았었어. 목표가 있었고, 네가 눈을 떴기 때문에 거기 도달했단 말이야. 이 우정이 끝나지 않길 바라네. 그것이 자꾸만 소생되고 새로운 목표에 도달하길 바라지. 그러나 지금은 목표가 없어. 너의 목표는 확실치 않아. 나는 너를 그곳으로 인도할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어. 네 어머니한테 물어 봐! 어머니의 모습에 물어 봐! 네 어머니에게 귀를 기울여 봐! 그러나 나의 목표는 확실해. 그것은 여기 수도원에 있고 매일 매시간 나를 요구하고 있단 말일세. 내가 너의 친구가 되는 것은 허락되어 있지만 반해도 좋다는 허락은 없어. 나는 수사야. 맹세를 했거든. 나는 성직을 얻기 전에 교직에서 물러나 단식과 예배로 몇 주일을 낼 거야. 그 동안 세속적인 것에 관해서는 일체 말해선 안 돼. 물론 너하고도."
골드문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슬픔에 잠겨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영원히 교단에 들었다고 한다면 내가 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당신이 하게 됩니다. 당신의 수업이 끝나고 기도도 철야도 완전히 끝맺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목표로 할 겁니까?"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나르치스가 말했다.
"아, 그렇군요. 당신은 이삼 년 안에 교무주임, 아니 어쩌면 교장이 될 테지요 수업을 개선하고 도서실을 확장하시겠군요. 아마 책도 쓰시겠지요. 그렇잖다구요? 그럼, 그렇다고 합시다. 그러나 목표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르치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목표? 나는 교장으로 죽을지도 모르고 안 그러면 수도원장 혹은 사교로서 죽을지도 모르지. 그것은 어쨌든 마찬가지야. 내가 제일 열심히 봉사드릴 수 있는 곳에, 내 성질이나 특성이나 천분이 최상의 지반과 최대의 활동 분야를 발견할 수 있는 곳에다 나를 갖다놓는 거야. 그 밖에 다른 목표는 없어."
"수사들에게 다른 목표는 없습니까?"
골드문트가 물었다.
"그래, 목표는 그걸로 충분해. 수사 신부한테는 헤브라이 어를 배우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석하는 것, 혹은 수도원의 성당을 꾸미는 것, 혹은 들어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생활의 목표일 수 있지. 내게 있어서는 그런 것들이 목표가 아니란 말이야. 나는 수도원의 재산을 늘리려 한다거나 교단과 교회를 개혁하려거나 하지는 않아. 나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내가 이해하려는 대로 정신에 봉사하려는 것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단다. 목표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골드문트는 오랫동안 그 대답을 음미해 보았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당신이 목표를 향하여 가는데 내가 방해라도 됐습니까?"
"방해가 되었느냐구? 아, 골드문트, 너보다 더 내 갈 길을 재촉해 준 사람은 없었단다. 너는 나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맛보게 했지만 나는 그런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냐. 나는 어려운 고비를 통해 배움을 얻고 때로는 그걸 정복했단 말이야."
골드문트는 상대의 말을 가로채어 반농담조로 말했다.
"당신은 아주 훌륭하게 어려움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를 돕고 인도하시고 해방시켜 주시고 또한 나의 정신을 건강하게 해주셨다고 해서 그것으로 당신은 정말 정신에 봉사하셨단 말입니까? 아마 당신은 그것으로 열의가 있고 선한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이 수사를 수도원에서 빼앗고 정신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적을, 당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행하고, 믿고, 노력하는 적을 하나 만들어 낸 셈이 될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가 있나?"
아주 심각하게 나르치스는 말했다.
"이봐, 너는 아무래도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해! 나는 장차 수사가 될 너를 망쳤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비범한 운명에의 길을 네 마음속에 터놓아 주었어. 가령 내일 네가 우리들의 아름다운 수도원을 송두리째 태워 없애 버린다 하더라도, 혹은 미치광이 같은 사교를 세상에 퍼뜨린다 하더라도, 너를 도와서 그 길을 향하게 한 것을 난 한순간이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는 다정스럽게 친구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이봐, 골드문트, 이것도 내 목표의 하나이거나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강하고 가치 있는 특별한 인간을 만나서 그 사람이 이해력을 터줄 수도, 발전시켜 줄 수도 없는 그런 상태에 빠지기는 싫단 말일세. 감히 나는 네게 말해 두겠어. 너와 내가 무엇이 되든, 우리가 어떻게 되든, 네가 나를 진지하게 필요로 생각하는 순간에 나는 결코 너를 향해 마음의 자물쇠를 채우지는 않겠어, 결코,"
그것은 고별의 소리처럼 들렸다. 사실 그것은 이별의 전주곡이었다. 골드문트는 친구 앞에 서서 친구의 확고한 얼굴을, 목표로 향한 눈을 보고 있으려니 두 사람은 이제 형제도 친구도 또는 그것과 유사한 아무것도 아니라 두 사람의 길이 벌써 갈라져 버렸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여기에 있는 그 사람, 그의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몽상가도, 운명의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수사였고, 맹세도 끝내 버린 사람, 굳은 질서와 의무에 얽매인 사람, 교단과 교회의 정신의 봉사자요, 병사였다.
이와 반대로 자신은 여기에 있어야 할 일원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에야 분명해졌다. 그에게는 고향도 없고 오직 미지의 세계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날의 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어머니는 가정을, 남편과 아들을, 공동생활과 질서를, 의무와 명예를 저버리고 정처 없는 세계로 뛰쳐나가 이미 오래 전에 그 속에 빠져 들어가고 말았으리라. 어머니도 그와 마찬가지로 목표를 가지지 않았다. 목표를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일 뿐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 나르치스는 이 모든 것을 벌써 아득한 옛날부터 얼마나 잘 통찰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가 말하는 소리는 얼마나 정당하였던가!
이런 일이 있고 난 며칠 뒤 나르치스는 사라져 버렸다. 대신 다른 선생이 수업에 들어왔다. 도서실에 있는 그의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아직 있기는 했다.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화랑을 지나가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으며 예배당의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중얼거리고 있는 소리를 들을 때도 간혹 있었다. 그가 커다란 수업을 시작했다는 것도, 단식을 하며 밤중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세 번 일어난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세계로 옮겨지고 있었다. 간혹 그를 볼 수가 있었지만 그에게 가까이 갈 수도, 무엇을 함께 할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나르치스가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 책상과 식당에 있는 의자를 다시 차지하고 다시 이야기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지나간 것은 두 번 다시 그의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골드문트는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니 수도원이나 수사의 신문, 문법이나 논리학, 연구나 정신 등이 그에게 중요하고 또한 흥미 있게 생각되었던 것은 오직 나르치스 덕분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르치스의 모방이 그를 유혹한 것이었다. 나르치스처럼 되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물론 원장도 있었다. 그는 원장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고귀한 모범으로도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나 교사, 학생, 침실, 식당, 학교, 수업, 예배 등 전 수도원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더 이상 여기에 남아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처마 끝이나 나무 밑에 걸음을 멈추어 비를 피하면서 가야 할 길도 모르는 나그네처럼, 그는 수도원의 처마 끝에 서 있었다. 다만 지금에야 절실히 다가오는 타향의 낯설음이 두렵기 때문에.
이 시기에 있어서의 골드문트의 생활은 망설임과 이별이 연속이었다. 그는 중요하게 생각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헤어지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스런 마음의 충격을 받았다.
나르치스와 다니엘 노원장과 선량하고 다정스런 안젤름 신부, 친절한 문지기와 쾌활한 이웃 제분업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이 현실과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들에게서보다도 예배당에 있는 커다란 돌로 만든 마돈나나 현관문에 그려진 사도들과 헤어지는 것이 훨씬 괴로우리라. 오랫동안 그는 그것들 앞에서, 회랑이 샘물 앞에서, 세 개의 동물의 머리를 가진 기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안마당 보리수에, 밤나무에 기대섰다.
어느 때는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한 번의 추억으로 그의 가슴속에 조그만 그림책이 되리라. 그 한복판에 있는 아직까지도 현재의 그것들이 그에게서 벗겨져 나가기 시작하며 현실성을 잃고 유령처럼 과거의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는 그를 가까이에 두기를 좋아하는 안젤름 신부와 약초를 캐기도 하고, 수도원의 물방앗간에서 하인들과 어울려 가끔씩 포도주나 구운 물고기를 먹으며 같이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서먹서먹하고 추억처럼 어슴푸레해져갔다. 황혼이 깔린 저쪽 성당의 기도실에서는 친구인 나르치스가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살아가고 있었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그림자가 되어버린 것처럼 주위의 일체가 현실성을 잃고 가을의 조락과 무상의 냄새일 뿐이었다.
현실에서 그의 내부에 있는 생명, 심장의 불안스런 고동, 그리움의 아픈 가시, 꿈의 기쁨과 불안만이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마치 그것들과 하나인 것처럼 거기에 몸을 맡겼다.
독서나 학습을 하는 도중에 그는 자신 속으로 가라앉아 모든 것을 망각하고, 그를 싣고 가는 내심이 흐름이나 소리에만 몸을 맡겼다. 아직도 어두운 멜로디에, 깊은 샘물에, 동화 같은 체험으로 충만한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 소리들은 모두 다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눈은 모두 어머니의 눈이었다.
6.
어느 날 안젤름 신부는 골드문트를 그의 약초실로 불러들였다.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이 좋은 향내가 풍기는 아담한 약초실이었다.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도 골드문트는 그 방을 잘 알고 있었다. 신부는 그에게 책장 사이에 깨끗이 보관되어 있는 바싹 마른 식물을 보여 주면서 이 식물을 아는지, 그리고 들판에 피어 있을 때는 어떤 형태로 보이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골드문트는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식물의 이름은 고추나물이라고 했다. 그는 그 특징을 하나도 남김없이 자세하게 설명했다. 늙은 신부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것이 많이 자라고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면서 오후에 그 약초를 한 아름 잔뜩 모아 오라고 부탁했다.
"그 대신 오후 수업을 쉬게 해주마. 거절하진 않겠지? 별다르게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미련하고 지루한 문법만 학문이 아니라, 자연의 지식도 학문이란 말이다."
골드문트는 수업을 받는 대신 두세 시간 식물을 모으라는 그 고마운 분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기쁨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그는 마구간지기에게 블레스를 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식사를 끝낸 그는 블레스에 올라타고 느긋한 마음으로 햇볕이 따스하게 비치고 있는 들판으로 달려 나갔다.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그는 이리저리 달리며 대기와 들판의 향내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마 그 자체를 즐겼다.
그런 다음 신부가 일러준 장소를 찾았다. 그는 그늘진 단풍나무 밑에 말을 맨 다음 말과 장난을 하다가 말 먹이를 주고 나서야 약초를 모으기 시작했다. 손이 가지 않은 탓인지 몇 뙈기의 밭두둑엔 갖가지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조그마하고 호리호리한 양귀비풀이 많은 양귀비씨 벙거지를 둘러쓴 채 바싹 마른 완두 덩굴과 하늘색의 꽃이 피어 있는 국화 상치와 색이 변한 여뀌 사이에 서 있었다. 두 개의 밭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진 경계석에는 도마뱀이 살고 있었다. 거기에는 벌써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한 무더기의 고추나물이 보였다. 골드문트는 그것을 뽑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 아름 잔뜩 모은 후 돌 위에 앉아 쉬었다.
무척 더운 날씨였다. 먼 숲 기슭의 어둡게 그림자 진 곳을 건너다보자 그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고추나물이나 말에서 멀리 떨어지기는 싫었다. 여기서라면 말도 잘 볼 수가 있었다. 햇빛에 달구어진 작은 둘 위에 앉은 채 가만히 숨을 들이키며 달아난 도마뱀이 또 나오지 않나 하고 살피고 있었다. 또 고추나물의 냄새를 맡으며 그 조그만 잎새들을 햇빛에 갖다 대고 바늘구멍처럼 송송 뚫린 조그만 점을 관찰하기도 했다. 무수하게 달린 작은 잎사귀 한 개 한 개에 좁쌀 만한 별 하늘이 수를 놓은 듯 정교하게 붙어 있었다. 골드문트는 신기한 눈으로 자세히 바라보았다. 도마뱀도, 약초도, 돌도 그 모두가 얼마나 신비로운가.
그를 사랑하는 안젤름 신부는 이제는 직접 약초를 캐러 나올 수가 없었다. 다리가 아파서 꼼짝할 수 없는 날이 많았고 자신의 의술로도 그것을 고칠 수가 없었다. 아마 머잖아 죽게 되겠지. 약초실의 약초는 계속 냄새를 풍기겠지만 노신부는 이제 거기에 없으리라. 아니 그 노신부는 더 오래 살는지도 모른다. 10년이나 20년쯤 여전히 그 성성한 백발과 눈가에 여전히 익살맞은 주름살을 지으며 살아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자신이 20년 뒤의 모습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모든 것이 불가사의하고 슬프기만 하구나!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인간은 그저 이 지상에서 뛰어다니며 생활하고 숲속으로 말을 타고 달릴 뿐이다.
약속하듯,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듯 쳐다보았다. 밤하늘을 별 하나, 초롱꽃, 갈대가 자라는 호수, 인간이나 황소의 눈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나 아득한 먼 옛날부터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 당장이라도 베일을 벗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수수께끼는 풀려지지 않으며 숨은 마력은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끝내는 늙어서 안젤름 신부처럼 꾀가 많아지거나 다니엘 원장처럼 현자가 되지만,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기다리며 자꾸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는 속이 텅 빈 달팽이 껍질을 주워들었다. 돌 사이에서 가느다랗게 소리가 났다. 내리쪼이는 햇빛으로 달팽이는 속까지 따뜻해져 있었다. 껍질의 굴곡, 잔금이 새겨진 나선형, 이상스럽게 꼬불꼬불한 벙거지, 진주처럼 반짝거리는 텅 빈 구멍 등을 관찰하는 것에 그는 온 정신이 팔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형태를 느껴 보려고 눈을 감았다. 그것은 오랜 습관이자 장난이었다. 느슨한 손가락 사이로 달팽이를 돌리면서 누르지 않고 굴려가며 어루만지듯 형태를 더듬으면서 그 모습의 기묘함과 매력에 행복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학교나 학문에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이라고 그는 꿈꾸듯 생각했다.
이를테면 모든 것을 수평적인 이차원의 세계를 보고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이성의 결함과 그 무가치처럼 여겨지기는 했으나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달팽이 껍질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는 몸이 피곤했고 잠시 후 졸음이 왔다. 시들자마자 진한 향내를 풍기기 시작한 약초 위에 고개를 숙이고 그는 햇빛을 받으며 잠이 들었다. 그의 신발 위를 도마뱀이 지나다녔고 무릎 위에서는 약초가 시들어갔으며 블레스는 단풍나무 밑에서 그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누군가가 저쪽 숲에서 걸어왔다. 색이 바랜 파란 치마와 검은 머리에 붉은 리본을 매고 햇볕에 그을은 얼굴의 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손에다 꽃다발을 들고 붉게 타는 듯한 조그만 카네이션을 입에 물고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여인은 멀리서부터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이상스런 눈으로 살펴보다가 그가 잠이 든 것을 알고 햇볕에 탄 맨발로 조심스레 가까이 가서 골드문트 바로 앞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의혹은 사라졌다. 자고 있는 예쁘장한 청년은 위험스럽게 보이지 않았고 그 여인의 마음에 썩 들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잡초가 무성한 곳에 찾아왔을까?' 반쯤 시든 꽃을 보고 여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골드문트는 눈을 떴다. 그의 고개는 부드럽게 옆으로 젖혀져 있었다. 여인의 무릎에 베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잠이 덜 깨어 어리둥절해하는 눈을 낯선 갈색의 눈이 바로 가까이에서 따스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위험은 없다. 따스한 갈색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놀라는 그의 눈길과 마주치자 생긋이 웃었다. 무척이나 정다운 미소였다. 그도 차차 입가에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생긋 웃는 그의 입술 위에 그 여인의 입술이 내려왔다. 둘은 살포시 키스를 하였다.
그때 골드문트는 문득 마을에서의 그날 저녁과 머리를 땋은 조그만 처녀를 생각했다. 그러나 키스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여인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떠나지 않고 자꾸 비벼대고 유혹하더니, 나중에는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그의 입술로 덤벼들었다. 그의 피에 달려들어 마음속 밑바닥까지 눈을 뜨게 했다. 길게 이어진 침묵의 유희 속에서 갈색의 여인은 소년에게 천천히 타이르듯 그가 찾아내고 발견하는 대로 몸을 맡겨버리고, 그를 불타오르게 하는가 하면 정열의 불을 식혀 주기도 했다. 매혹적이며 짧은 사랑의 행복은 뭉게뭉게 피어올라 황금빛으로 붉게 탔다가는 기울어지며 꺼져 버렸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여인의 가슴속에 얼굴을 묻고 누워 있었다. 한마디의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여인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어루만지며 그가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그는 눈을 떴다.
"이봐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예요?"
"나는 리제예요."
여인이 말했다.
"리제라고?"
그는 음미하듯 그 말을 되풀이했다.
"리제, 당신은 예쁘군요."
여인은 입술을 그의 귀에 갖다 대고 소곤거렸다.
"당신, 처음이었지요? 이전에 사랑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본 뒤 들판과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 벌써 해가 기울었어. 이젠 돌아가야지."
"어디로요?"
"수도원으로. 안젤름 신부한테로."
"마리아브론 수도원으로요? 당신 그곳에서 살아요? 내 곁에 더 있고 싶지 않아요?
"물론 그러고 싶어."
"그럼 가지 말아요!"
"아니, 그건 안 돼. 약초를 더 캐야 하는걸."
"당신은 수도원에 있나요?"
"응, 난 학생이야. 하지만 이젠 거기서 떠날 거야. 당신한테 가도 될까, 리제? 대체 당신 집이 어디야?"
"내 귀여운 사람, 집은 없어요. 나한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을래요? ... 그래, '골드문트'라구요? 키스해 줘요. 그럼 보내줄게요."
"정말 당신 집이 없어? 그럼 어디서 자지?"
"괜찮다면 숲이나 건초더미 위에서 나와 함께 지낼 수도 있어요. 오늘밤에 올 수 있어요?"
"오고 말고. 그런데 어디서 만나지?"
"부엉이 소리 낼 수 있어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걸."
"그럼 한번 해보세요."
그는 곧 부엉이 소리를 흉내 냈고 여인은 킬킬대며 흐뭇해했다.
"그럼, 오늘밤 수도원에서 나와 부엉이 소리를 내요. 난 근처에 있을 테니. 귀여운 아기, 골드문트. 내가 마음에 들어요?"
"응, 내 마음에 꼭 들어. 리제, 꼭 나올게. 안녕, 지금은 가봐야겠어."
재촉해서 말을 달려 골드문트는 해질 무렵에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안젤름 신부가 매우 분주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수사 한 사람이 맨발로 개울을 거닐다가 유리 조각에 발이 찔렸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나르치스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식당에서 일하는 수사 한 사람을 붙들고 나르치스가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는 금식하는 중이어서 식당에 오지 않거니와 밤에 예배를 보기 위해 지금쯤은 잠을 자고 있을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골드문트는 달려갔다. 기나긴 수양 기간 동안에 나르치스의 침실은 수도원 안쪽의 고해실 중 하나를 사용했다. 골드문트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문에 귀를 갖다대었다.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일이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좁다란 나무 침대에 나르치스가 누워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에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갠 채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모습은 마치 송장과도 같았다. 그는 눈을 뜬 채 아무 말도 없이 골드문트를 쳐다보았다. 비난도 하지 않고 명상에 잠겨 어떤 다른 시대와 세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친구를 알아내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나르치스!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을 방해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이 지금 나와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나르치스는 생각에 잠겼다가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는 사람처럼 눈을 깜박였다.
"그렇게 절실한 일인가?"
나르치스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저는 당신과 작별을 해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네가 온 것을 헛되이 할 수는 없지.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15분쯤은 시간이 있어. 밤기도가 시작될 시간이거든."
그는 수척한 몸을 일으켜 아무것도 깔지 않은 나무 침대 위에 앉았다. 골드문트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골드문트는 잘못을 자각하며 말했다. 그 골방, 아무것도 깔지 않은 나무 침대, 며칠 밤을 새워 야위고 지친 얼굴, 방심하고 있는 듯한 시선, 나르치스의 그 모든 표정이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가를 역력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럴 것까지는 없어. 나를 염려할 것은 없다. 나는 아무 곳도 아픈 데는 없으니까. 너는 방금 작별을 고하러 왔다고 했지? 그렇다면 여기를 떠나겠다는 말인가?"
"오늘 떠날 겁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순식간에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말았어요."
"아버지한테서 무슨 소식이라도 왔는가?"
"아니요. 아버지가 아니라 인생 그 자체가 내게 왔습니다. 아버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떠납니다. 당신에게 부끄러움을 끼쳐 죄송합니다만 나는 여기를 떠납니다."
나르치스는 그의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은 넓은 법의의 소맷자락에서 유령처럼 가느다랗게 내밀어져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필요한 것만 말해. 간단히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신상에 일어난 것을 내가 말해 볼까?"
이렇게 말했을 때 그의 준엄하고 지친 얼굴에서 전혀 느낄 수가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그의 목소리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말씀해 보십시오."
골드문트는 간청하듯 말했다.
"너는 사랑에 빠진 거야. 여자를 알았고."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네 표정에 나타나 있어. 너의 모습이 사람들이 사랑할 때 갖는 도취된 특징을 모두 풍기고 있어. 그러니 이제 말해 보렴."
골드문트는 망설이면서 친구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전에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나르치스, 하지만 이번만은 틀렸습니다. 이건 전혀 다릅니다. 나는 들판에 나가 따스한 햇살 아래서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내 머리는 아름다운 어느 여인의 무릎 위에 눕혀져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이제야 나를 데리고 왔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여인을 어머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짙은 갈색 눈에 검은 머리였으나 어머니는 나처럼 금발이었기 때문에 전혀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였고 어머니의 부름이었으며 어머니로부터 온 심부름꾼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꿈속에서 찾아온 것처럼 아름다운 한 여인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나의 머리를 그녀의 무릎 위에 얹고 꽃 같은 미소를 띠며 나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맨 처음 키스를 할 때, 나는 나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녹아내리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느꼈던 모든 그리움, 모든 꿈, 모든 달콤한 불안, 내 마음 속에 잠자고 있던 모든 비밀, 그 모든 것이 눈뜨고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마법에 걸려 모든 것이 의미를 얻었습니다. 그 여인이 나에게 여자의 본질과 비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여인은 불과 30분 동안에 몇 해 만큼이나 나를 성숙하게 했습니다. 이제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수도원에 단 하루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어두워지면 곧 떠나겠습니다."
나르치스는 조용히 끝까지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인 일이었군.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대로야. 나는 자주 너를 생각할 것이다. 너는 내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것이다. 친구여,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될 수 있으면 나를 완전히 못된 놈으로 단정해 버리지 않도록 원장님께 잘 말씀해 주십시오. 이 수도원에서 나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그래도 그분과 당신뿐이었습니다."
"알았네.... 또 다른 소원은?"
"네,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훗날 내 생각이 나거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무엇 때문에 골드문트?"
"당신의 우정, 당신의 인내, 그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서도 내 이야기를 들어 주신 것에 대해서도. 또 나를 만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어떻게 내가 자네를 붙잡겠는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너도 알 텐데.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갈 작정이지, 골드문트? 목적지가 있는 거야? 그 여인한테 갈 것인가?"
"네, 그 여인과 같이 가겠습니다. 목적지는 없습니다. 그 여인은 낯선 사람이며 유랑인입니다. 보기에도 집시인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나 골드문트, 그 여인과 동행하는 것은 극히 짧은 동안일는지 모른다. 너무 그 여인을 의지해서는 안 될 거야. 그 여자에게는 친척이나 남편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들이 너를 어떻게 맞이해 줄지 누가 알겠니?"
골드문트는 그에게 기댔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여태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압니다. 제겐 목표가 없다고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나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여자에게 가기는 합니다만 아닙니다.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무언가가 나를 부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말을 끊고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기대앉았다. 슬픔에 잠겼으나 변함 없는 우정을 가진 감정 속에서 행복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골드문트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눈이 멀어 아무것도 예견치 못한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세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오늘 실로 기이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기꺼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과 만족에 가득 차서 떠나는 건 아닙니다. 이 행로는 어려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름답기도 할 것입니다. 한 여인의 사람이 되고, 사랑을 준다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이야기가 어리석게 들리더라도 비웃진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한 여인을 사랑하고 그 여인에게 몸을 맡기고 그것을 완전히 껴안음과 동시에 그 여인에게서 포옹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이 약간 비웃는 듯한 말투로 '반했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은 결코 조롱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인생에의 행로, 인생 의미에의 행로입니다. 아, 나르치스, 나는 당신한테서 떠나야만 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르치스, 당신이 나를 위해 잠자는 것을 조금 희생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당신과 헤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나를 잊지는 않겠지요?"
"서로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말자!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겠다. 너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어. 나는 그걸 기다리고 있을 게. 형편이 안 좋을 때는 내게 오든가, 나를 부르든가 해. 잘 가거라, 골드문트. 하느님이 너와 함께 하기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골드문트는 그를 껴안았다. 그는 친구가 애무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키스는 하지 않고 다만 두 손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밤이 되었다. 나르치스는 골방을 나와서 문을 닫고 성당 쪽으로 걸어갔다. 포장된 돌 위에 신발이 덜그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골드문트는 다정스런 시선으로 수척해진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은 드디어 복도 끝에 이르러 어둠을 뚫고 그림자같이 성당 안으로 사라졌다. 수련과 의무와 덕성에 빨려들어 재촉을 받듯 사라졌다.
아, 모든 것이 얼마나 이상야릇하고, 끝없이 기묘하고, 혼란 속에 있는 것일까! 바로 명상에 잠겨 단식과 철야에 온몸이 초췌해진 친구가 청춘과 마음과 감각을 십자가에 걸고 희생으로 복종의 가장 엄격한 단련을 받아서 온 마음을 정신에 봉사 드려, 온전히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가 되어 있는 이 시간에, 용솟음쳐 흐르는 가슴을 안고 꽃봉오리 움트는 사랑에 취하여 그 친구를 찾아오다니, 이것은 또 얼마나 기묘하고 놀라운 사실인가!
친구는 여위어 지치고 창백한 얼굴에 앙상한 뼈마디만 남은 손을 하고 드러누워 있어 보기에도 시체 같았다. 그렇지만 이내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다정스레 친구의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여인의 체취를 몸에 지닌 연애하는 벗에게 귀를 기울이고 참회와 수양 사이의 얼마 안 되는 휴식 시간을 희생하여 주었다!
이런 종류의 사랑, 이런 자아를 버린 완전히 정신적인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햇볕이 내리쬐는 들판에서 맛본 사랑, 감각의 앞뒤를 분간하지 못했던 사랑의 유희, 흠뻑 취한 유희와는 얼마나 판이한 사랑이었을까! 그렇지만 둘 다 사랑이었다.
아, 나르치스는 이제 사라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거듭거듭 두 사람이 서로 닮지 않았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고 나서, 지금 나르치스는 제단 앞에서 지친 무릎을 꿇고 기도와 성찰의 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밤에는 두 시간 이상 쉬는 것도, 자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한편 골드문트는 리제를 만나 달콤하고 동물적인 행위를 반복하기 위해 그 여인과 달아나 버렸다! 나르치스라면 거기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말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아니었다. 이 아름답고도 소름이 끼치는 수수께끼와 혼란을 캐내고, 거기에 대해서 중대한 사실을 이야기할 의무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막연하고 어리석은 골드문트의 행로를 걸어 나가는 이외의 의무는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름답고 따뜻한 젊은 여인을 사랑하는 것과 밤의 성당에서 기도드리고 있는 친구를 사랑하는 것 이외의 의무는 없었다.
여러 가지로 혼란스런 감정으로 안마당의 보리수를 지나 물방앗간으로 이르는 출구를 찾았을 때, 그는 '마을에 가기' 위해 콘라트와 함께 똑같은 사잇길을 지나서 수도원을 빠져나온 그날 밤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그 당시 그는 얼마나 흥분된 가슴을 두근거리며 금지된 소풍에 나섰던가. 그런데 지금은 영원히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훨씬 더 엄격하게 금지되고, 위험한 길을 가면서도 두려움도 없이 문지기도 원장도 선생도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지금은 개울에 널빤지가 놓여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건너가야 했다. 그는 옷을 벗어서 건너편으로 던진 다음 가슴까지 차올라 깊숙하고도 세차게 흘러가는 차가운 개울을 건넜다.
둑을 건너 옷을 입는 동안 그의 사념은 다시 나르치스에게로 향했다. 지금 그는 나르치스가 예견하고 인도했던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자 수치스런 감정이 들었다. 지혜롭고 약간 조소 어린 나르치스의 모습이 똑똑히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아주 어리석은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것을 들어준 나르치스, 지나간 날 중요한 시간에 고통 가운데서 그의 눈을 뜨게 해준 나르치스, 그가 들려준 몇 마디 말이 분명하게 들렸다.
'너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잠을 자지만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어. 너는 소녀의 꿈을 꾸지만, 나는 소년의 꿈을 꾼다.'
그의 가슴은 잠시 얼어붙을 듯이 죄어들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홀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뒤에는 수도원이 있었다. 형식상의 고향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역시 오래 살아 정든 집이었다. 동시에 그는 또 다른 것을, 나르치스가 이제는 그를 충고하거나 우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인도자나 선각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그는 아무도 인도할 수 없는, 오직 혼자서 행로를 발견한 나라로 발을 들여 놓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 기뻤다. 독립하지 않았던 시절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부끄럽기도 했다. 이제 그는 어린 아이도, 학생도 아니었다. 이제야 그는 볼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별을 고하는 그 순간은 얼마나 어려운 고비였던가!
친구가 건너편 성당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줄 수가 없고, 도와줄 수도 없고,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그리고 이제부터 기나긴 세월을 어쩌면 영원히 그와 헤어져서 살고 그에 관한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그의 목소리도, 그의 고귀한 눈도 볼 수가 없다는 것은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그는 체념한 듯이 자갈길을 더듬어 나갔다. 수도원의 벽에서 백여 발짝쯤 걸어간 후 그는 멈추어 서서 숨을 가다듬고 부엉이 소리를 냈다. 이어 똑같은 소리가 저편 개울 밑에서 들렸다.
'짐승들처럼 소리를 지르는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사랑의 유희를 하던 오후의 한때를 더듬어 보았다.
그와 리제 사이에는 애무가 끝나는 마지막에야 겨우 몇 마디 오고 갔을 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와 반면에 나르치스와는 얼마나 기나긴 대화가 오고갔던가!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엉이 소리로 꾀어내는, 언어가 아무런 뜻을 갖지 않는 세계로 들어왔다. 그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오늘 언어와 사념에 대해서는 아무런 욕구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리제에 대해서, 언어는 필요 없는 맹목적인 감정과 탐색에 대해서, 한숨을 쉬며 서로가 녹아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에 대한 욕구를 가질 뿐이었다.
리제는 그곳에 있었다. 그 여자는 숲에서 그를 맞으러 나왔다. 그는 두 손을 벌렸다. 애정에 넘쳐 두 손을 더듬으며 여인의 머리와 머리카락, 목, 뺨, 날씬한 몸과 탄력 있는 허리를 안았다. 한 팔로 여자를 안은 채,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여자는 어두운 숲을 잘도 해치고 나갔다. 발걸음을 맞추어 나가는 데 진땀이 흘렀다. 여자는 여우나 담비처럼 밤눈이 밝은지 아무것에도 부딪치거나 걸리지 않고 걸어갔다. 그는 언어, 사고도 없이 어둠 속으로 숲속으로, 신비가 가득 찬 나라로 이끌리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그는 이미 생각이라는 것조차 망각해 버렸다. 떠나 온 수도원도, 나르치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때로는 쿠션처럼 부드러운 이끼 위를, 때로는 광대뼈같이 불거진 딱딱한 뿌리가 튀어나온 어두운 숲길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달려갔다. 아주 캄캄했다가 때로는 높다란 곳에 매달린 잎새 사이로 밝은 하늘이 보였다. 관목들에 얼굴을 부딪히기도 하고 나무딸기의 덩굴이 옷에 걸려 그를 붙잡아 놓기도 했다. 어디든 리제가 알고 있는 길이어서 어려움 없이 길이 열렸다. 멈추어 서거나 주춤거릴 때는 거의 없었다.
한참 후에 두 사람은 듬성듬성한 솔밭에 이르렀다. 희뿌연 밤하늘이 열리고 숲이 끝나며 초원으로 뒤덮인 골짜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달콤한 건초 냄새가 났다. 그들은 소리없이 흘러가는 개울을 건너갔다. 활짝 트인 이곳은 숲속보다 한층 더 고요했다. 관목들의 속삭임도, 짐승의 울음소리도, 고목들의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커다란 건초더미 옆에 리제는 멈추었다.
"여기서 쉬어요."
두 사람은 건초에 주저앉아서 우선 숨을 내쉬고 휴식을 즐겼다. 얼마간의 피곤이 몰려왔다. 두 사람은 팔과 다리를 마음껏 뻗고 이 밤의 정적에 귀를 기울였다. 차츰 이마의 땀이 마르고 얼굴이 식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골드문트는 흐뭇한 피로 속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을 끌어 당겼다 폈다했다. 그러면서 깊은 심호흡으로 밤과 건초 냄새를 들이마시곤 했다. 과거도 생각하지 않고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애인의 향기와 따스함에 서서히 이끌리고 매혹 당할 뿐이었다.
때때로 여자의 애무에 답하기도 하며, 그녀가 차츰 열이 오르기 시작하여 자꾸 몸을 밀어붙이자 그의 몸은 서서히 녹아 내렸다. 언어도 사고도 필요 없었다. 그는 중요하고 아름다운 온갖 것을, 여자의 싱싱하고 포동포동한 힘과 단순하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그 몸이 뜨거워져서 욕정으로 차오르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또 이번에는 그 여자가 첫 번째와는 다른 방법으로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있는 것을, 이번에는 그를 유혹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격과 욕망을 원하고 있다는 것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거센 물결이 흐르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소리도 없이 서서히 자라나는 불길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서, 두 사람의 아늑한 침상을 침묵의 온 밤이 호흡하고 타오르는 중심으로 만드는 것을 느끼곤 행복에 잠겼다.
리제의 얼굴 위에 허리를 굽히고 어둠 속에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자 갑자기 그녀의 눈매와 이마가 부드러운 빛 속에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 놀라움에 눈을 번쩍 뜨고, 그 빛이 보얗게 비치다가 급속도로 강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랗게 줄을 지어 있는 어두운 숲 기슭 위에 달이 떠 있었다. 하얗고 보드라운 빛이 리제의 이마와 볼 위에, 동그스름한 하얀 목 위에 흐르는 것을 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나지막이 꿈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리제는 듯 미소로 답했고 그는 여자의 몸을 반쯤 일으켜 조심스럽게 여자의 몸에서 옷을 벗겼다. 리제는 차디찬 달빛 속에 어깨와 가슴이 노출되어 빛날 때까지 옷을 벗었다. 그는 도취되어 눈과 입술로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여자는 마술에 걸린 듯 눈길을 아래로 향한 채 엄숙한 표정으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이 순간에 처음으로 발견되기라도 한 듯이.
7.
들판이 서늘해지고 달이 시시각각으로 중천을 향하는 동안, 두 연인은 사랑의 유희 속으로 빠져 들어가 함께 누워 달빛이 부드럽게 비치고 있는 침상에서 쉬고 있었다. 눈을 뜨면 또다시 마주 누웠다. 서로 불꽃을 튀기며 부둥켜안았다가는 다시 잠이 들었다.
마지막 포옹을 하고 나서는 두 사람 모두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리제는 건초에 깊이 몸을 파묻고 이따금 소리 내어 숨을 쉬었다. 골드문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똑바로 드러누워 희멀건 달과 하늘을 언제까지나 쳐다보았다. 그들은 크나큰 슬픔에 휩싸여 거기서 도망치려 다시 잠에 빠졌다. 깊은 잠을 탐욕스럽게 맞아들였다. 마치 그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리고 영원히 깨어 있어야만 하는 선고를 받고, 이 세상의 온갖 잠이란 잠을 모두 자신들의 내부로 끌어넣기라도 할 듯이 깊이 잠들었다.
골드문트가 눈을 떴을 때 리제는 그 검은 머리카락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는 멍청하게 겨우 반쯤 뜬 눈으로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벌써 일어났어?"
골드문트가 먼저 말했다.
여자는 깜짝 놀란 듯이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젠 가봐야겠어요."
하고 여자는 당황하고 속절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깨우기 싫었어요."
"벌써 일어났는걸. 우리는 이제 길을 나서야겠지? 하기야 우리는 갈 곳도 없는 처지니까."
"나야 그렇지만."
리제가 말했다.
"당신은 수도원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잖아요?"
"이제는 수도원 같은 곳에 가지 않아. 나도 당신과 같아. 아주 외로운 몸이고 목표도 없거든. 당신하고 같이 가고 싶어. 정말이야."
여인은 돌아보았다.
"골드문트, 당신은 나와 같이 갈 수가 없어요. 이제 난 남편에게 돌아가야 해요. 밤에 집을 비웠기 때문에 남편한테 두들겨 맞을지도 몰라요. 길을 잃었다고 말하겠지만 그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그 순간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이미 이런 예상을 하고 말했던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 계산이 틀렸어."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우리 둘이 함께 살게 되리라 믿었어. 그건 그렇고, 당신은 정말로 나를 깨우지도 않고 도망칠 작정이었나?"
"당신이 화를 내며 나를 때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남편에게 매맞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당신한테는 맞기가 싫었어요."
그는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리제, 나는 당신을 때리지 않아.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당신에게 매질하는 남편 대신 차라리 나와 같이 떠나는 게 어떻겠어?"
여자는 얼른 손을 뿌리쳤다.
"안 돼요, 안 돼!"
여자는 거의 울부짖든 소리를 질렀다. 여자가 그에게서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 그로부터의 다정스런 말을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남편에게 얻어맞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손을 놓아 주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떠나 버렸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베어 낸 풀밭 위로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부름을 받고 빨려 들어가듯 달아나는 리제가 가여웠다. 그 미지의 힘이 무엇인가 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가엾어 보이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측은해 보였다. 아무래도 그는 불운한 것 같았다. 이제 버림을 받아 이렇게 혼자 남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는 동안 그는 몸이 피곤한 탓인지 졸음이 왔다. 이렇게 피곤에 지쳐 보긴 처음이었다. 슬퍼할 날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는 다시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가 눈을 떴을 때, 해는 벌써 중천에 떠올라 따갑게 그를 내리쪼이고 있었다.
휴식은 이제 충분했다. 재빨리 일어나서 개울로 달려가 얼굴을 씻고 물을 마셨다. 수많은 추억이 되살아났다. 어제 저녁의 유희의 갖가지 장면과 귀엽고 애정에 넘친 감정이 마치 낯선 꽃향기와 같이 풍겨 왔다. 기운차게 걸어가면서 그는 그 생각을 되풀이하고 모든 것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모든 것을 되씹어 보고 그 향기를 느끼며 더듬어 보았다. 그 갈색의 여인은 얼마나 많은 꿈을 실현시켜 주었으며 얼마나 많은 봉오리를 꽃피우게 했고, 얼마나 많은 호기심과 그리움을 진정시켜 주고 또 새삼스레 일깨워 주었던가?
그의 눈앞에는 들판과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바싹 마른 휴간지와 어두컴컴한 숲이 있었으며, 그 뒤에는 농가나 물방앗간, 마을이나 도시가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 대하는 낯선 세계가 광범위하고 막막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맞이하여 그를 즐겁게 하고, 괴롭혀 줄 준비를 잔뜩 한 채....
그는 더 이상 세상을 창에서 내다보고 있는 학생이 아니었다. 이제 그의 방랑은 싫든 좋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전의 산책은 아니었다. 이 거대한 세계가 지금은 현실인 것이다. 그는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운명은 그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하늘은 그의 하늘이며, 그 날씨는 그의 날씨였다.
이 커다란 세계 안에서 그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토끼처럼, 하찮은 벌레처럼 작았으며 푸름과 무한의 세계를 향해 그는 달렸다. 여기서는 기상이나 미사나 수업이나 점심때를 알리는 종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그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보리빵과 한 잔의 밀크와 밀가루 스프, 그것은 얼마나 매혹적인 기억이었던가! 그의 배고픔은 늑대와 같이 눈떴다. 보리밭을 지나갔다. 이삭은 절반쯤 익어 있었다. 그는 껍질을 손과 이로 벗기고 그 미끌미끌한 보리 알맹이를 부지런히 비벼 가며, 호주머니에 가득 채웠다. 그러다가 개암을 발견하고 아직 새파랬지만 그것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숲이 다시 시작되었다. 떡갈나무와 물푸레나무가 섞인 전나무 숲이었다. 여기서는 월귤나무가 무수히 자라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가느다랗고 딱딱한 풀 사이로 푸른 초롱꽃이 피어 있고 반짝반짝 빛나는 갈색 나비가 이리저리 날다가는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성녀 게노베바는 이런 숲속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성녀의 이야기가 그는 언제나 좋았다. 아, 성녀 게노베바를 만날 수가 있다면! 어쩌면 숲속에 은둔자나 암자 같은 것에 있어 백발이 성성한 노신부가 동굴이나 나무껍질로 지은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숲속에는 숯 굽는 사람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나기만 한다면 반갑게 인사를 할 텐데. 혹 도둑이라도 아무 짓도 안 하겠지. 아니,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기나긴 동안을, 오늘도 내일도 며칠까지도 이 숲속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딱따구리 소리를 듣고 그놈을 잡아 보려고 했다. 딱따구리가 있는 곳을 찾아내느라고 오랫동안 애를 썼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둥지에 달라붙어서 나무를 쪼며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이는 것을 그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동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딱따구리를 불러내어 다정스런 말을 걸어서 나무속의 생활이나 그의 일이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볼 수가 있다면 좋을 텐데.
아, 변신을 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한가할 때 꽃이나 잎새, 나무, 사람의 머리 등 온갖 것을 스케치하며 그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하면서 자주 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때때로 그는 아기 하느님처럼,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생물을 만들었다. 꽃잎에는 눈이나 입을 그려 넣고 가지에서 봉오리를 내고 있는 잎새의 다발을 손가락 모양으로 만들고 나무 위에 머리를 만들어 놓았다. 자주 이런 장난을 하며 몇 시간 동안을 즐겁게 보내곤 했었다. 그는 요술을 부릴 줄도 알았다. 선을 긋고 시작된 형태가 나뭇잎이 될 것인지, 물고기의 주둥이가 될 것인지, 여우의 꼬리가 될 것인지, 사람의 눈썹이 될 것인지.... 결국 자신으로서도 알지 못할 뜻밖의 형태가 되곤 했었다. 그때 조그만 널빤지 위에 장난삼아 그어진 선이 여러 형태가 되었듯이 변신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지금 생각했다. 골드문트는 하루나 아니 한 달쯤 딱따구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살면서 미끌미끌한 줄기를 높이 기어 올라가 강한 주둥이로 나무껍질을 쪼며, 꽁지깃으로 전신을 곧추세우고, 딱따구리의 말을 하며 나무껍질 속에서 맛있는 것을 빼먹으며 살고 싶었다. 소리가 잘 울리는 나무속에서 달콤하고 날카로운 음향을 보내고 있었다.
숲속을 지나는 동안 골드문트는 갖가지 동물들을 만났다. 덤불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여러 마리의 토끼도 보았다. 그가 가까이 가자 토끼들은 그를 쳐다보다가는 쫑긋이 귀를 세워 반대쪽으로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조그만 빈터에서 기다란 뱀을 보았으나 뱀은 달아나지 않았다. 살아 있는 뱀이 아니라 허물만 남은 뱀이었다. 그는 그것을 손에 들고 살펴보았다. 회색과 갈색의 아름다운 무늬가 들판에 이어져서 거미줄처럼 보였다. 노란 부리를 한 까만 티티새도 보였다. 그 새들은 불안에 찬 까만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다가는 바닥에 닿을 듯 나직이 떠서 날아가 버렸다. 멧새와 피리새들도 많았다. 숲 한 곳에 구덩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시퍼런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위를 기다란 다리를 가진 거미가 이상한 장난에 도취되어 미친놈처럼 뒤엉키며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그 뒤를 진한 물색의 날개를 가진 잠자리가 몇 마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벌써 저녁때가 가까워졌다. 그때 그는 뭔가를 보았다. 아니, 이미 그것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발밑에는 흐트러진 나뭇잎뿐이었다. 나뭇가지가 꺾어지고 젖은 흙덩어리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뚜렷이 보이진 않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짐승이 맹렬한 기세로 덤불을 꺾으며 돌진해 갔다. 사슴이거나 멧돼지였을 테지만 그는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무서움에 떨며 장승처럼 서 있었다. 흥분한 탓에 그 짐승이 달려간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만물은 다시 고요해졌는데도 아직도 가슴을 두근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숲에서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이곳에서 밤을 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잠자리를 찾고 이끼로 침상을 만들고 있는 동안,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커다란 불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딸기 같은 열매로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이끼 위에서 자는 것도--그 밖에도 오두막을 짓는다거나 불을 피우는 것까지도 틀림없이 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고요한 잠에 빠진 나무들 사이에서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동물들 틈에서 언제까지나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건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볼 수 없고, 어느 누구와도 인사를 나눌 수가 없으며, 여자도 볼 수가 없고, 키스도, 입술과 손발이 주는 그 사랑의 유희도 즐길 수가 없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그런 신세가 될 몸이라면 차라리 곰이나 사슴 같은 짐승이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내세의 행복을 단념하는 한이 있더라도, 수곰이 되어 암곰을 사랑하는 것도 괜찮다. 이성이나 언어 등 온갖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혼자 쓸쓸히 사랑도 받지 못하고 목숨을 이어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낮겠지.
이끼로 만든 침상에 누워 잠들기 전에 그는 뜻도 모를 수수께끼 같은 숲속의 온갖 이야기를 호기심과 불안한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그의 친구였다.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습성에 따르고 그들과 내기를 하고 화합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간부터 그는 여우나 작은 사슴, 전나무, 그리고 노송나무와 하나가 되었다. 그들과 같이 살고 그들과 같이 대기와 태양을 나누고 그들과 함께 굶주려야 하고 그들의 손님이 되어야 했다.
이윽고 그는 잠이 들어 동물과 인간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자신이 곰이 되어 애무를 하다가 리제를 잡아먹었다.
한밤중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는 눈을 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으나 가슴은 한없는 불안감에 싸이고 어지러운 마음속에서 오랜 시간을 곰곰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어제도 오늘도 밤 기도를 드리지 않고 잠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어제와 오늘 못한 기도를 합해서 두 번 저녁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나서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 그는 이상한 생각에 잠겨 숲속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숲이 주는 불안감은 점차 가시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쁨으로 그는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가다가 이윽고 평평한 장소를 발견했다. 가지가 전혀 없는 굵고 곧은 전나무만 자라는 곳이었다. 그 나무들 사이로 잠시 걸어가고 있으려니 수도원 대성당 기둥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바로 얼마 전에 성당의 검은 현관문으로 그의 친구 나르치스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게 언제의 일이던가? 그게 정말 불과 이틀 전의 일이란 말인가?
3일째 되는 날에야 그는 겨우 숲속에서 빠져 나왔다. 반갑게도 가까운 곳에 사람이 있다는 흔적을 발견했다. 갈아 놓은 토지, 밀이나 귀리가 자라는 길다란 밭이랑, 초원, 그리고 멀리까지는 안 보이지만 여기저기에 사람이 지나다니는 좁다란 오솔길이 나 있었다. 골드문트는 밀 이삭을 훑어서 씹었다. 손질된 밭들이 정답게 그를 바라보았다. 황량한 숲속에서 오랫동안 지낸 그에게는 오솔길도, 귀리도, 시든 꽃이 하얗게 매달린 깜부기도 모두 다정하게 다가왔다.
이제 곧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겠지. 한참 후에야 밭이랑 옆을 지나갔다. 그곳에 십자가가 서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언덕에 불쑥 튀어나온 능선을 돌아 그늘이 많은 보리수 앞에 섰다. 그는 황홀한 마음으로 샘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물은 나무 틈으로 해서 기다란 나무통에 떨어지고 있었다. 차갑고 맛있는 물을 마셨다. 말오줌나무의 열매는 벌써 까맣게 익어 있었다. 말오줌나무 사이에서 두세 채의 초가지붕이 솟아 있는 것을 보자 한없이 기뻤다. 그리고 이런 그리운 정경보다도 한결 더 깊숙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암소의 울음소리였다. 그 암소는 반가운 환영의 인사라도 해주듯 흐뭇하고, 따스하고, 평화로이 그 울음소리를 바람에 실어 그의 귀에 들려주었다.
그는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오두막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빨간 머리와 담청색의 눈을 한 조그만 사내아이가 먼지투성이가 되어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사내아이는 물이 가득 든 옹기 항아리를 놓고 흙에 물을 섞어 반죽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맨발은 벌써 반죽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반죽을 한 손가락 사이에서 그 진흙이 불쑥 비어져 나와 있었다. 사내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공을 만들었다. 소년은 턱까지 동원하여 그 진흙을 주물렀다.
"꼬마야, 안녕."
골드문트는 정답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웬 낯선 사람을 발견한 꼬마는 입을 크게 벌리고 통통한 얼굴을 찌푸리고는 울상이 되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골드문트는 뒤를 쫓아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매우 어둠침침해서 한낮의 햇빛 아래 있다가 들어선 그로서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지만 만일을 위해 그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대답은 없고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연신 꼬마를 달래고 있는 노인의 가냘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키 작은 노파가 어둠 속에서 일어서더니 가까이 다가와 한 손을 눈에다 대고 손님을 올려다보았다.
"실례합니다, 할머니."
골드문트는 소리쳤다.
"성자들께서 당신의 선량한 얼굴에 축복을 내리시기를! 사흘 만에 처음으로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노파는 희미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시오?"
노파는 불안스레 물었다. 골드문트는 악수를 청하여 노파의 손을 조금 어루만져 주었다.
"쉴 자리를 얻어서 불을 피우는 심부름이나 해드리려고 생각했습니다. 빵 한 조각만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뭐 급할 것은 없지만요."
그는 벽에 붙여 놓은 긴 의자에 앉았다. 노파는 꼬마에게 줄 빵을 한 조각 잘랐다. 꼬마는 긴장과 호기심을 가지고, 그러나 금방이라도 울며 달아날 대세를 갖추고 낯선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파는 빵을 한 조각 더 잘라서 골드문트에게 가져갔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는 말했다.
"하느님이 은총이 있으시길!"
"배가 고프오?"
노파가 물었다.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딸기로 얼마간 요기를 했으니까요."
"우선 들어요! 어디서 왔나?"
"마리아브론의 수도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러면 수사인가?"
"아뇨, 학생입니다. 지금은 여행하는 중입니다."
노파는 반은 비웃고, 반은 넋나간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름살투성이가 된 말라빠진 목을 늘이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파는 그가 빵을 먹는 동안 꼬마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호기심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새 소식을 알고 있슈?"
"뭐 별로.... 안젤름 신부를 아시나요?"
"몰라. 그 사람은 왜?"
"앓고 있습니다."
"앓아? 죽게 됐나?"
"모르겠어요. 다리가 상했어요. 잘 걷지 못하시거든요."
"죽을까?"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럼,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래. 국을 끓여야겠는걸. 나무 쪼개는 걸 좀 도와주게."
노파는 아궁이 옆에서 꺼낸 바싹 마른 전나무 장작과 도끼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노파가 시키는 대로 땔나무를 쪼갰다. 노파는 장작을 타나 남은 불 속에 집어넣었다. 그 위에 허리를 구부리고 불이 붙을 때까지 연신 불어대는 노파를 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파는 반듯하면서도 독특한 배열로 전나무와 죽도화나무를 차곡차곡 쌓았다. 아궁이에서는 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을음으로 온통 까매진 삼발이 위에 매달아 놓은 까만 솥을 불꽃 위에서 빙빙 돌렸다.
골드문트는 노파가 시키는 대로 샘물에서 물을 길어 오기도 하고 우유 그릇에서 크림을 떠내기도 하며, 연기가 자욱한 어둠 속에 앉아서 현란한 불꽃과 그 위로 주름살투성이인 노파의 광대뼈 얼굴이 불빛을 받아서 나타났다가 또 사라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판자벽 저쪽에서 암소가 죽통을 파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마음은 평온해졌다. 보리수, 샘물, 가마솥 밑에서 넘실대는 불꽃, 암소의 되새김질, 죽통 소리, 테이블이며 긴 의자가 있는 어두컴컴한 방,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노파나 그 모든 것이 아름답고 선량했으며 평화, 인간의 온정, 고향 등의 냄새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 농부 할머니는 사내아이에게는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꼬마의 이름은 쿠노인데, 가끔씩 부엌으로 들어와서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겁먹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처음에처럼 울지는 않았다.
이윽고 아들과 그의 처가 들어왔다. 그들도 농부였다. 그들은 낯선 사람이 집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농부는 당장 달려들 기세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골드문트의 팔을 붙들고 문간으로 끌고 나가 한낮의 햇빛에서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웃음을 지으며 청년의 어깨를 정답게 툭툭 치고는 식사나 함께 하자고 했다. 그들은 곧 자리에 앉아서 자기 몫의 빵을 우유에 적셔 먹었는데 우유가 거의 바닥이 나자 농부가 나머지를 훌쩍 마셔버렸다.
골드문트가 하룻밤 묵어 갈 수 없겠느냐고 하자 농부는 방이 없어서 곤란하다며 바깥에 나가면 건초더미가 있을 거라며 괜찮다면 그곳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꼬마를 옆에 안은 농부의 아낙은 이야기에는 끼어들지 않았으나 식사를 하는 동안 호기심 가득 찬 눈초리는 젊은 나그네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그의 고수머리와 눈매는 처음부터 아낙의 마음을 끌었다. 그리고 깨끗한 그의 하얀 목과 품위 있어 보이는 매끈한 손, 그 손의 시원스럽고 아름다운 동작도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나그네이긴 하지만 훌륭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정말 젊었다. 무엇보다도 아낙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반하게 한 것은 나그네의 목소리였다. 그윽하게 사랑을 구하는 듯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는 애무와도 같이 감미롭게 들렸다. 좀 더 오래 동안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식사가 끝나자 농부는 외양간에 볼일이 있다며 나갔다. 골드문트는 집 밖으로 나가 우물에서 손을 씻고 나지막한 물통 위에 앉아서 몸을 식히며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벌써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은 서운한 일이었으나, 여기서는 이제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었다. 그때 농부의 아낙이 물통을 들고 나와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오늘 밤에 멀리 가지 않을 거면 내가 먹을 것을 갖다줄 게요. 저기 기다란 보리밭 뒤에 건초가 있어요. 그 건초는 내일에야 가져올 것인데 거기 있겠어요?"
그는 주근깨가 박힌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굵직한 여인의 팔이 물통을 들어올렸다. 여인이 맑고 커다란 눈에는 온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여인에게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여인은 물이 출렁출렁 넘치는 물통을 들고 대문 안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고마운 일이라 생각하고 만족한 마음으로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그는 안으로 들어가 농부와 노파를 찾아 악수를 나누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연기와 그을음과 우유 냄새가 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오두막은 밤이슬을 피하는 피난처이자 고향이었는데 지금은 서먹서먹한 타향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두막 건너편으로 교회가 보였다. 그 근처에는 아름다운 숲과 굵직굵직한 고목 참나무가 있었다. 밑에는 키가 작은 풀들이 나 있었다. 그는 그늘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굵직한 나무줄기 사이를 하릴없이 왔다 갔다 했다. 여인과의 사랑이란 묘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여인은 그에게 밀회의 장소를 가르쳐 줄 때만 언어를 사용했을 뿐 다른 일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로 말하나? 눈으로? 그렇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당황한 목소리의 음향으로, 또는 피부에서 미묘하게 발산되는 냄새로 말했다.
남녀가 서로를 갈구할 때는 그것만으로도 금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밀어처럼 야릇한 것이었다. 그는 오늘 밤을 흥분에 차서 기다렸다. 그 커다란 금발의 여인은 어떠할까? 어떤 눈매와 음향과 몸매와 동작과 키스를 가지고 있을까에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리제와는 다를 것이다. 지금쯤 리제는 어디 있을까? 단정하고 까만 머리와 갈색의 살결과 짤막한 한숨을 쉬는 리제, 남편한테 얼마나 얻어맞았을까? 지금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오늘 새로운 여인을 발견한 것 같이 리제도 지금쯤 새로운 애인을 발견했을까? 왜 모든 순간이 그다지도 빨리 지나갔을까? 왜 그리 아름답고 뜨겁고 기묘하게 변하고 말았나! 그것은 죄악이며 간음이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런 죄악을 저지르니 차라리 맞아죽기를 원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벌써 두 번째의 여인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의 양심은 정지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 양심이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양심이 간혹 침착성을 잃고 중압감을 갖는 것은 간음이나 환락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 저지르게 되는 죄의 감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오는 죄의 감정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신학에서 말하는 원죄라고 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살아 있는 그 자체가 죄와 같은 무엇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나르치스는 같은 순결하고 지혜로운 인간이 무엇 때문에 심판을 받는 인간처럼 참회의 수양에 따라야 했을까? 왜 골드문트 자신 역시 어딘지 마음속에 그 죄를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단 말인가? 젊고 튼튼치 못했단 말인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자유롭지 못했단 말인가? 여인들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가 느낀 은밀한 즐거움은 애인인 아낙에게 주어도 좋다는 것을 느끼는 것을 느끼는 것이 아름답지 못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완전히 행복하지 못했을까? 왜 그의 젊은 행복 속으로 때때로 그 기묘한 괴로움이나 가냘픈 불안이나 무상의 애통이 들어왔을까? 그는 사색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다지도 자주 명상에 잠기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지만 역시 산다는 것은 즐거웠다. 그는 풀밭에 앉아 보랏빛의 조그만 꽃을 따서는 눈 가까이에 갖다 대고 조그맣고 좁은 줄기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핏줄 같은 줄이 있고 모든 것이 섬세했다. 여인의 태속같이 혹은 생각하는 사람의 뇌 속과 같이 생명이 약동하고 있었고, 기쁨이 있었다.
아! 왜 인간이란 이다지 무지할까? 왜 이런 꽃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까? 인간끼리조차도 진실한 대화를 나누려면 거기에는 행운과 특별한 우정과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사랑이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만약 사랑이 언어를 필요로 했다면 오해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찼을 테지.
아, 리제의 눈, 지그시 감은 그녀의 눈, 넘쳐흐르는 환희 속에 왜 그리 애끓는 흐느낌이 있었던가! 학문이나 시의 언어로 갖가지를 표현한다 해도 그것을 표현해 수는 없었다. 도대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와 생각하려고 하는 영원의 충동을 마음속에 쉴 새 없이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그만 식물의 잎이 줄기 둘레에서 아름답고 기묘하게 줄을 지어 있는 것을 관찰했다. 버질의 시는 아름다우나 그 시구 속에는 나선형으로 가지런히 줄을 지은 이 줄기의 조그만 잎새의 반만큼의 분명함도 영리함도 없었고, 아름답거나 의미 없는 것들이 얼마든지 솟아나 있었다. 이런 꽃을 단지 한 개라도 만들어 낼 수가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고 매혹적이며 고귀하며 의미가 깊은 행위가 될까? 그러나 그런 짓은 아무도 할 수가 없다. 어떠한 영웅도, 황제도, 교황도, 성자도....
해가 기울자 그는 농부의 아낙이 일러준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이렇듯 한 사람의 여인이 오직 사랑만을 좇아서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기다린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었다.
여인은 빵과 베이컨 한 토막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와서 그에게 내밀었다.
"당신을 위해 가져왔어요. 먹어요."
여인이 말했다.
"나중에 먹겠어요. 내가 바라는 것은 빵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야. 당신이 얼마나 멋진 것을 가지고 왔는지 보여 줘요!"
여인은 멋진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허덕이는 입술, 반짝이는 이, 햇빛에 그을려서 붉지만 튼튼한 팔, 그리고 목 아래로 보이는 하얗고 보드라운 살결, 여자는 언어로 기쁨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간장을 녹이는 야릇한 가락을 토해 냈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보드랍고 애정과 감정이 담뿍 어린 두 손이 자기 몸에 닿자 여인의 살결은 소름이 돋으며 목젖으로는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녀의 성희는 리제보다는 서툴렀지만 힘차게 애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사랑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면서도 탐욕스러웠다. 골드문트는 만족스러웠다.
이윽고 여인은 한숨을 쉬면서 돌아갔다. 뿌리치고 떠나가는 것이 괴로웠지만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었다.
골드문트는 한동안 혼자 남았다. 행복에 도취되고 슬픔에 잠겨 있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빵과 베이컨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라 그것을 먹어치웠다. 벌써 밤은 이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