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스 오버스트릿.
죽은 시인 사회 회원들이 동굴에 있을 때였다. 오버스트릿은 자전거에 올라타고 힘껏 페달을 밟았다. 교정을 빠져나가 그 길로 던베리의 저택까지 직행했다. 한껏 차려입은 양복을 다시 손질한 그는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현관의 벨을 눌렀다. 집안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밖에까지 훤히 들려 오는 중이었다. 소음 때문에 초인종 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두 번째로 응답이 없자 오버스트릿은 문을 앞으로 당겨 보았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긴장된 마음에서 안으로 들어서던 그는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의 광경에 깜짝 놀랐다. 상상을 초월하도록 대담하면서도 놀라운 파티가 한창 고조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 맨 먼저 들어온 광경이 있었다. 현관과 가까운 소파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은, 한 쌍의 남녀가 애정 영화의 한 장면처럼 뜨겁게 포옹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에로틱한 광경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집안에 있는 의자나 소파 심지어 홀에 양탄자 위에서까지 온통 뒤엉킨 남녀의 다 드러난 몸뚱이가 뒹굴고 여기저기서 이상야릇한 특히 여자들의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한결 같이 주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을 뿐이고, 현재의 행위가 중요할 뿐이라는 듯한 난잡한 분위기였다. 어떤 여자는 거의 알몸인 채 사내의 품에 안겨 노골적인 애무에 허리를 뒤로 꺾으며 기묘한 소리를 토해 내기도 했다.
오버스트릿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눈앞이 캄캄했다. 당연히 그 자리에 서서 어느 광경도 똑똑히 바라보지 못했다. 눈길은 마음놓고 보낼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크리스가 부엌으로부터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된 일인지 전날에 곱게 다듬어졌던 머리카락이 몹시 헝크러진 모습이었다.
"크리스!"
오버스트릿은 앞뒤 가릴 것없이 구원의 여신을 만난 듯이 소리쳤다. 다행히 크리스는 그를 금방 알아보았다.
"어머, 어서 와. 언제 왔어?"
"방금..."
"와 줘서 반가워, 오버스트릿. 누구하고 함께야?"
"나 혼자야."
"그럼 버지니아가 어디 있을 테니 찾아봐."
"그게 아니고, 난 너한테...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오버스트릿은 더듬거리면서도 집안이 떠나갈 듯이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난 체트에게 가 봐야 돼. 그럼 즐겨 봐. 맘껏."
크리스는 더 듣지도 않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순간 오버스트릿은 맥이 탁 풀렸다. 그런 꼴이 되려고 찾아간 그가 아니었다. 전화 통화를 했을 때만 해도 크리스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완전히 패배자가 됐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게 했다. 쉽게 떨쳐 버릴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버지니아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차라리 오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넋빠진 사람처럼 어슬렁거리던 그는 어느 곳에선가 몇 명의 젊은이가 서서 얘기하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곁에서는 또 한쌍의 남녀가 농도 깊은 키스신을 연출하고 있었다. 남자는 연거푸 여자의 스커트 자락을 들추고 들어가려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의 속살이 엉덩이까지 드러났으나 한사코 여자에 의해 거절당하고 있었다. 그때 오버스트릿을 발견한 덩치 큰 놈이 술취한 눈으로 바라보며 불쑥 말을 걸어왔다.
"매트 샌더슨의 동생이냐?"
"아니..."
오버스트릿을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이, 보브!"
상대는 친구인 듯한 사내한테 엉뚱한 말을 건넸다.
"이 자식 좀 봐. 매트 샌더슨 닮았지?"
"동생이야?"
보브라는 사내가 묻자 오버스트릿은 다시 아니라고 얼른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커다란 수난이 시작된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상황은 기괴하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오버스트릿을 무조건 매트 샌더스라는 정체불명의 사내 동생으로 인정해 놓은 다음 곁으로 불러 이상한 의식을 시작했다. 술 마시기 위한 곤드레 의식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세 명의 덩치 큰 사내들은 무조건 술잔 세 개를 준비한 다음 거기에 술을 부었다.
"매트를 위해서 건배!"
오버스크릿은 그곳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빠져나갈 용기가 없었다. 원래 공부만을 알고 있는 그였다. 덩치크고 우악스러운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크리스로 인해 충격받은 그는 될대로 되라, 식으로 술잔을 들며 맞장구를 쳤다.
"매트를 위해서!"
그들이 술을 단숨에 들이키자 오버스트릿은 얼떨결에 똑같이 행동했다. 순간 숨이 막히고 입안에 불길이 당겨진 듯했다. 그가 마신 술은 독한 위스키였던 것이다.
"요즘 매트는 어떻게 지내나?"
한 사내가 다시 물었다.
"정, 정말이지 난 모르는 사람...정말 몰라."
상대는 완전히 매트의 동생으로 결정지어 놓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잔에 술을 채웠다.
"천하장사 매트를 위해 건배!"
일제히 술잔을 쳐들며 오버스트릿을 재촉했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래도 따라 할 수밖에 없는 오버스트릿은 딱한 입장이었다.
"처, 천하장사 매, 매트를 위하여..."
심하게 기침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두 번째 잔을 단숨에 들이키자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으며 더욱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런 식으로 잇달아서 세 잔이나 되는 독한 술을 들이킨 오버스트릿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 빠져 휘청거렸다. 필사적인 노력 때문에 정신은 겨우 유지했지만 몸이 자신의 의지를 무시한 채 멋대로 흔들거렸다.
"매트한테 안부 전해, 알았지?"
"아, 알았어어..."
건장한 운동선수들은 거뜬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은 오버스트릿뿐이었다. 그는 겨우 몸의 중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방향도 없이 집안을 돌아다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위기도 변했다. 대낮보다 밝던 불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대부분 술 취한 남녀가 나름대로 구석진 곳에, 혹은 되는 대로 뒤엉켜 그야말로 에로 영화의 그룹 섹스 장면 같은 광경이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집안을 돌아다니던 오버스트릿의 발길에 채이는 게 있었다.
"누구얏!"
거의 동시에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깜짝 놀라며 내려다보았다. 발밑에 한 쌍의 남녀가 뒤엉켜 있는 것을 비로소 발견했다. 그가 본 장면 중에 가장 난잡한 모습이었다.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에 오버스트릿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은 완전히 드러난 채였고, 그 위에 엎드린 사내가 이번에는 여자의 팬티를 거의 다 끌어내리기 직전이었다. 언뜻 그 여자의 하반신의 중요한 부위에 짙은 숲이 오버스트릿의 눈에 들어왔고, 그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내의 한쪽 다리를 걷어 찬 셈이었던 것이다.
"미, 미안해."
급히 사과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말이 제대로 되어 입밖으로 나와 주지 않았다. 머리 속이 현란해졌다. 확실히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듯이 눈에 보이는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손에는 위스키 잔이 들려 있었다. 그는 털썩 주저앉은 다음 그 위스키를 또 들이켰다. 그동안 벌써 술에 익숙해진 탓일까. 처음처럼 목구멍이 따갑거나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짜릿하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맛이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또 마신 탓인지 어느덧 매우 대담해진 마음이었다. 바로 곁의 왼쪽에 있는 뒤엉킨 덩어리 쪽에서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괴상한 소리였다. 짐승이 어떤 상태에서 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오른쪽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대담하게 바라보았다. 좀 특이한 광경이었다. 거기서는 여자가 남자의 위에 웅크리듯 이상하게 하고 있었다.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뭐라고 중얼거리거나 아니면 괴상한 신음소리 같은 것을 내면서 몸을 뒤틀었다. 그녀의 손은 남자의 혁대를 풀고 그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더 자세히 보면 남자의 손은 앉은 듯이 웅크린 여자의 하반신 밑에 들어가 이상하게 움직이고 거기에 따라 그녀가 몸을 괴로운 듯이 뒤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음악소리도 이젠 거의 잦아들고 있었다. 드디어 음악이 멈추었을 때, 놀랍게도 넓은 집안은 온통 남녀의 신음소리로 가득 찼다. 믿을 수 없었다. 오버스트릿은 얼른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돌연 무엇이 다리를 눌러 왔기 때문에 쉽게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내려가 보았다. 한 남녀가 뒤엉킨 채 굴러 와 거기에 있었다. 주위를 완전히 망각한 채 타오르는 욕정에 정신을 못차리는 광경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정확치 않았지만, 밑에 깔린 여자가 허리를 묘하게 마치 훌라춤이라도 추는 하와이 여자처럼 돌며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오버스트릿은 점차로 대담해지고 있었다. 당황과 초조, 놀라움에서부터 벗어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그런 광경을 여유 있게 둘러보았다. 비로소 완전한 알몸으로 남자한테 애무 받는 여자도 있음을 깨달았다. 너무 격정적이었다. 그 사내는 알몸의 여자를 무릎 위에 엉거주춤 앉힌 자세로 괴상한 몸짓을 했고, 여자는 때로 자지러질 듯이 등을 활처럼 휘어지게 하며 심하게 헐떡거렸다. 머리를 보아도 타오르는 욕정에 꿈틀대는 광경뿐이었다. 오버스트릿은 어느 틈에 자기만 파트너가 없다는 사실에 분했다. 파트너가 있었다면 그들처럼 멋진 섹스 게임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아쉬움에 어금니를 물던 그는 다시 오른쪽에 있는 남녀 쪽으로 천천히 눈길을 옮겨갔다. 그곳 남자는 여자의 몸을 먹어버리려는 듯했다. 입술에서 목으로 다시 풍만한 젖가슴을 멋대로 헤치며 정신 없이 빨아 댔다. 아이가 젖 먹는 듯한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뜻밖에, 오버스트릿 옆에 그대로 쓰러지는 게 있었다. 술에 취한 탓인지, 어떤 환각 상태에 순간적으로 빠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사람, 그것도 여자가 느닷없이 앉아 있는 오버스트릿의 무릎 위로 쓰러져 온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한 여자가 그의 무릎을 베고 소파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상태였다. 처음 어리둥절했던 오버스트릿은 다음 순간 그게 여자임을 알아차리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자세히 들여다보던 순간 그는 더욱 커다랗게 놀라고 말았다. 술 취해 잠자는 듯이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여자는 금발이었다. 그것뿐이 아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이 오버스트릿으로 하여금 순간적인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하게 위험 직전까지 몰고 같다.
크리스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가 얌전히 두눈을 감은 채 마치 키스를 기다리는 듯이,
아니면 더 적극적인 자극을 애타게 기다리는 듯이 무릎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한 것도 순간적이었다. 분명히 크리스였다. 다만 그녀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기다리기 위해 그렇게 자신의 무릎을 벤 채 눈감고 있는지 통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오버스트릿의 머리 속은 빙글빙글 돌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어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와 함께 다시 눈에 들어온 광경은 오버스트릿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타는 듯이 빨간 크리스의 입술뿐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어떤 입술이 닿으면 정열적으로 반응할 것 같은 입술이 있고 또 다른 것도 있었다. 술 탓인지 고의적인지 알 수 없지만, 크리스의 윗옷섬이 많이 헝클어진 상태였다. 부풀어오른 두 개의 젖가슴이 거기에 있었는데, 봉오리만이 옷으로 가려졌을 뿐 탄력 있는 젖가슴 거의 전부가 드러난 상태였다. 여자들이 그토록 신기하고 관능적이며 누르면 터질 듯한 젖가슴을 가졌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은 신비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희미한 불빛에 보이는 그 살갗은 매우 자극적이었다. 다시 얼굴을 보았다. 분명히 무엇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르르 감은 두 눈과 약간 열린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비쳤다. 그것은 황홀하면서도 외설적인 광경이었다. 몸보다 가슴이 더욱 걷잡을 수없이 떨렸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그런 기회는 평생에 한 번 뿐이다. 크리스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해 줄 때만을 기다리는 게 분명해. 수많은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그때 문득 키팅의 확신에 찬 말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놓치고 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보라. 지금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를..."
오버스트릿은 다시 크리스의 젖가슴을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누완다의 용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보다 자신도 모르는 강렬한 마력 같은 게 오버스트릿의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때 크리스의 입에서 탄식하는 듯한, 애타게 기다리는 게 분명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또한 그 소리는 오버스트릿의 어떤 감정을 극도로 자극했다. 순간 오버스트릿은 천천히 상체를 굽혔다.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해 왔다. 향기 좋은 술 냄새와 크리스의 신비로운 체취가 섞여 의식이 몽롱하도록 향긋한 냄새이었다. 조금 더 허리를 굽혔다. 서로의 입술이 막 닿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두 입술은 분명히 포개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서둘러 허리를 펴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목덜미를 뒤로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때 다시 크리스의 입에서 묘한 더할 수 없이 에로틱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주위를 둘러 살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크리스의 입술과 무릎에 느껴지는 감각과, 그녀의 거의 드러난 젖가슴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오버스트릿의 몽롱해진 의식은 어느덧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그는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며, 천천히 팔을 뻗고 있었다. 무엇을 하려는지 자신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 손길은 크리스의 목덜미에 이르기 전에 잠깐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만졌다. 순간 세찬 흡인력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어 목덜미를 도둑처럼 쓰다듬은 다음 탄력 있는 가슴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크리스의 입에서 낮게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깊이 잠든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의 가슴에 닿는 손길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손길이 볼록한 가슴에 닿는 순간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 게 그 증거였다.
뒤에 가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녀는 그 손길이 애인 체트의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반응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오버스트릿이었다. 잠시 손길이 그 황홀한 주위를 맴돌았다. 옷 위로 감싸듯 쥐어 보려고 하는가하면 손끝으로 조금씩 눌러보기도 했다. 어디든 조금만 힘을 주어 누르면 금방 튕겨오를 듯한 탄력이 있었다. 크리스의 입에서 다시 연하게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더욱 적극적인 접촉이나 자극을 애타게 기다리는 듯했다. 오버스트릿의 가슴속 어느 깊은 곳으로부터 소리 없이 표효하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의 손끝도 몹시 떨렸다. 금방 덥석 움켜쥐고 싶은 욕망과 함께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그것들을 몰아내려는 관능적이고도 동물적인 욕정이 한꺼번에 뒤엉켜 머리 속을 윙윙거렸다.
어느 순간이었다. 오버스트릿은 다시 크리스의 얼굴 위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훨씬 대담해져 있었다. 어떤 행위에도 겁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어느 지점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순간 오버스트릿은 몸서리를 쳤다. 전기에 감전된 듯이 흠칫 놀랐다. 하지만 처음처럼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담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크리스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어느덧 조금씩 열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버스트릿은 거기서 용기를 얻은 듯이 힘껏 밀어붙이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이, 저길 좀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오버스트릿이 미처 확실히 알아듣지 못했을 때, 두 번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런 체트 애인이잖아?"
오버스트릿이 드디어 알아차리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세 번째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남의 애인을 가로채는 저 녀석을 뭐야!"
크리스 역시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튕겨오르듯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와 오버스트릿의 눈이 마주쳤다.
"어머나, 넌..."
오버스트릿은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돌리자 또 다른 광경이 보였다. 덩치 큰 체트가 식식거리며 다가드는 모습이었다. 안돼, 도망쳐야 돼, 아니면 넌 맞아 죽게 돼. 돌아서 도망쳐... 소용이 없었다. 오버스트릿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체트의 우악스러운 손에 의해 멱살이 잡혔다.
"이런 나쁜 자식 같으니! 감히 어디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버스트릿은 체트의 성난 주먹 한 방에 저만치 뒤로 떠올라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시 달려든 체트는 동댕이쳐진 오버스트릿의 위에 타고 앉아 마구 주먹을 날렸다.
"체트!"
크리스가 비명을 지르며 뜯어말리려고 쩔쩔맸다. 오버스트릿은 한마디 변명도 못한 채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되고 말았다.
"그만해!"
크리스도 결사적이었다.
"사람을 그렇게 때리면 어떡해! 아주 죽일 작정이야?"
"놔 둬, 크리스. 이런 자식은 패죽여야 해!"
체트는 성난 야수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글쎄 그만 좀 해애!"
크리스는 커다랗게 소리치더니 드디어 두 사람의 사리로 끼어들며 양편으로 떼어놓았다. 오버스트릿은 흠뻑 얻어맞은 상태에서 비틀비틀 겨우 몸을 일으켰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을 입장도 되지 못했다.
"미, 미안해...나도 모르게 그만..."
그는 겨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닥쳐!"
체트였다.
"아직 덜 맞았냐? 더 맞아야 알겠어?"
"제발 그만좀 해. 얘가 뭘 어쨌다는 거야?"
체트는 크리스의 말을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크리스에게도 잔뜩 화가 난 그였다. 오버스트릿의 애무와 키스를 고스란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체트는 그 분풀이까지 오버스트릿한테 퍼붓고 있었다.
"야! 더 터지고 싶잖다면 썩 꺼져 버려!"
체트는 금방이라도 표범처럼 덤벼들 기세였다. 크리스가 재빨리 중간에 끼어 들어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피해 비틀비틀 문 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또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면 죽여버릴 테다."
그의 뒤에 대고 체트가 사납게 소리쳤다.
이 날은 웰튼 아카데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전교생을 강당에 집합하라는 지시가 노란 교장으로부터 내려졌는데, 니일 등 죽은 시인의 사회 그룹들은 아직 그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학교신문의 내용에 열중할 뿐이었다. 거기에는 저에 없던 특별 광고 기사가 실렸다. 그 문제 때문에 학교측이 크게 당황한 나머지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전교생을 강당에 집합시킨 것이다.
니일, 앤더슨, 믹스, 카멜론, 랄튼 그리고 잔뜩 얻어맞아서 퉁퉁붓고 멍든 얼굴을 감추려는 오버스트릿은 학교신문을 펼쳐 놓고 저희들끼리 무엇인가 수군거렸다. 간밤 동굴에서 여자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랄튼은 누구보다 피로한 기색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글로리아라는 여자를 안아 보려 했으나 곡절 끝에 실패하다 보니 심신이 극도로 피로했던 것이다.
노란 교장이 나타나자 학생들은 얼른 학교 신문을 감추며 다른 학생들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란 교장은 매우 성난 걸음으로 강단에 오른 다음 손짓으로 학생들이 다시 자리에 앉도록 했다.
"금주 웰튼 신문에..."
노란 교장은 헛기침을 하면서 장중하게 말했다.
"웰튼에도 여학생이 필요하다는 독단적이고도 모독적이라고 할 기사가 실렸다...."
일제히 긴장하는 가운데 학교 신문을 만드는 주역 멤버인 니일 등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러한 일은 시간 낭비라고 해서 그냥 덮어둘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다. 맹세코 어떤 일이 있어도 범인을 색출, 규칙에 따라 처벌할 작정이다..."
분위기는 더욱 긴장되었다. 학교 신문과는 무관한 학생들조차 노란 교장의 단호한 말에 긴장된 얼굴이었다. 니일 등은 이크 싶은 표정으로 숨을 죽였다. 노란 교장은 하지만 이 기회에 문제의 기사가 실리게 된 자초지종을 알고 있는 학생이 자수하면 선처할 것임을 밝혔다. 그 학생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순간이 웰튼 아카데미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밝힌다는 선언을 강력하게 했다.
조용했다. 물을 끼얹은 듯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반응을 기다리는 노란 교장의 시선이 학생들에게로 곧장 향하더니 이윽고 파고들 듯이 느릿느릿 휘저어 갔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누구 하나 손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종의 준비를 해 두고 있는 니일의 그룹도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자신이 해 놓은 일에 대해 나름대로 어떤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한 강당 안의 침묵이 갑자기 깨어졌다. 돌연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침묵 때문인지 강당 안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커다랗게 들렸다. 강당 안에 그것도 학생들 사이에 전화기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노란 교장은 이내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어떤 일은 그의 생각을 뛰어넘고 말았다. 그 안에 전화기가 있었다.
찰리 랄튼이었다. 그는 미리 준비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뜻밖에도 전화기가 있었다. 주위에 있던 다른 학생들이 깜짝 놀라며 웅성거렸다.
"웰튼 아카데미입니다. 아, 계십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의 귀에 들리도록 일부러 큰소리로 말한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노란 교장을 향해 곧바로 말했다.
"교장선생님, 전화가 왔습니다."
정중한 랄튼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노란 교장의 얼굴은 격심한 노여움 때문에 시뻘겋게 된 상태였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랄튼은 씩씩거리는 노란 교장을 향해 다시 커다랗게 말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전화입니다. 그 분께서는 웰튼에도 여학생이 들어와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금방 강당 안이 폭소로 가득 찼다. 맙소사! 하며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듯 하는 니일 등과 달리 영문을 모르는 학생들은 기상 천외의 코미디를 보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랄튼은 끝까지 침착했다. 그는 보라는 듯이 다시 수화기에 대고 몇 마디 더하는 듯하더니 침착하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찰리 랄튼이 교장실로 직행하도록 벼락같은 명령이 떨어진 것은 매우 당연한 귀결이었다.
노란 교장은 아직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치 못해 랄튼의 주위를 서성거렸다. 랄튼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얼굴에 미소까지 나타내고 있었다. 솔직히 두려운 상태였지만,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도록 무서웠지만 그렇게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노란 교장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아무리 퇴학 처분이라는 흉기를 들이대고 협박해도 굳세게 버틸 작정이었다.
"너말고 또 누가 있지?"
몇 번째 반복되는 질문이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노란 교장이 노려보았다.
"저 혼자서 계획한 일입니다."
"어떻게 너 혼자서 그런 기사를 학교 신문에 냈지?"
"교정을 보다가 다른 기사를 배고 거기에 제가 쓴 기사를 바꿔 넣은 겁니다."
"이봐, 랄튼."
지나치게 화난 노란 교장은 오히려 침착해져 보였다. 는 빈정거리려는 듯이 보였다.
"혹시 말야, 이 학교에서 퇴학당할 목적으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다면 그건 오산이야."
"?..."
"그런 생각 때문에 일을 저지른 학생은 너뿐이 아냐. 지금까지 여러 명이나 나타났단 말야. 하지만 모두 실패했지. 너 역시 다를 바 없다는 걸 명심해라."
거기까지 말한 노란 교장은 돌연 태도를 바꾸더니 랄튼으로 하여금 책상에 두 팔을 짚고 엎드릴 것을 매섭게 명령했다. 늙었지만 아직 기력이 왕성한 노란 교장은 저고리를 벗어 젖혔다. 교장실에는 특수한 학생들을 떡 패듯 두들겨 패는데 아주 적합한 물건이 있었다.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마치 밥주걱을 몇 배로 확대해 놓은 모양이어서 가히 그 충격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큰소리로 수를 세도록 한다."
매질이 시작되었다. 두툼한 나무판대기 같은 게 철썩 내려치는 순간 랄튼은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비굴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 물었다.
"하나."
"철썩!"
"두울."
첫 번째보다 두 번째는 더욱 아팠다. 노란 교장은 팔을 휘둘러 치는 횟수가 더해감에 따라 팔에 힘이 용솟음치는 모양이었다. 넷까지 세었다. 랄튼의 목소리는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가려 했다.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매질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무도 몰랐다. 맞는 랄튼도 때리는 노란 교장도 몰랐다. 어느 한편이 굴복하기 전까지는 강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일곱 번째 세었을 때였다. 랄튼의 엎드린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일곱,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헤아려!"
겨우 모기 소리만 하게 일곱, 여덟에서 열까지 갔을 때였다. 랄튼의 엉덩이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랄튼군."
교장의 목소리가 믿을 수 없게 부드러워졌다.
"..."
"그래, 아직도 그 일을 너 혼자 했다고 고집할 테냐?"
랄튼은 이제 화가 나 있었다. 맘대로 때려 보라지, 내가 이 걸로 죽진 않을 테니까, 하는 반항심으로 아픈 엉덩이 못지 않게 분노가 들끓었다. 그는 단호히 대답했다.
"혼자서 했습니다."
"그래? 좋다. 그렇다면 이건 알겠지. 죽은 시인의 사회란게 뭐지? 그 멤버가 누구누군지 밝혀라."
랄튼은 문제가 거기까지 왔구나 싶어 은근히 놀랐다. 어떤 녀석이 고자질 한 게 분명하다고 느껴지자 친구들의 얼굴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한편 교장실 밖의 다른 곳에 있는 니일 등은 친구의 아픔에 대해 잔득 겁에 질린 상태였다. 랄튼의 비명 섞인 소리가 들려 올 때마다 등골에 소름이 오싹했다. 필사적인, 그보다 안간힘을 다해서 버티고 있는 랄튼은 의식이 혼미해지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서 대답해!"
"맹세합니다."
"뭘 말이지?"
"저 혼자서 한 일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것도 제가 만들어 낸 저만의 서클입니다."
노란 얼굴 표정이 순간적으로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어 다시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 자신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최후의 통첩처럼 똑똑히 말했다.
"분명히 말해 두겠다."
랄튼은 그쯤에서 매질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너 외에 또 다른 멤버가 있는 사실이 밟혀질 경우, 그 때는 모두 퇴학 처분을 내릴 것이다. 아울러 너 혼자만 이 웰튼에 남게 될 텐데, 그래도 상관없지?"
"..."
"일어섯!"
랄튼은 태연히 보이려고 노력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느껴진 지독한 아픔과 치욕 대문에 와락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끝으로 노란 교장은 한가지 특별한 아량을 베풀겠다는 듯이 랄튼에게 말했다. 랄튼은 귓등으로 들은 후 교장실을 나왔다. 무지무지한 아픔 때문에 제대로 일어서기조차 힘들었지만, 그 정도에서 끝났다는 안도감에 다소는 위로가 되었다. 그가 교장실을 나왔을 때였다. 언제 왔는지 니일, 앤더슨, 피츠, 믹스 등이 기다리고 있다가 조용히 다가오며 뒤따랐다.
"어떻게 됐니?"
니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친구가 받은 고통과 치욕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또한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심리적인 부담을 가장 크게 안고 있었다. 랄튼은 대답없이 절룩거리며 자기의 방으로 향했다.
"많이 아프지?"
"..."
"혹시 퇴학..."
"아니."
랄튼은 짧게 퇴학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럼 어떻게 됐니?"
니일은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친구의 고통과 치욕은 물론 또 다른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다. 랄튼은 자기방 앞에까지 가서야 돌아서며 친구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관계자 전원의 이름을 밝힌 다음 전교생에 대한 반성문을 쓰면 용서해 준다는 거야."
노란 교장이 특별히 배려하는 듯이 제시한 조건이 그것이었다. 랄튼은 이어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니일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니. 그러기로 했니?"
"그만해 둬."
"?..."
"누가 뭐래도 난 누완다란 말야, 니일. 알겠니?"
랄튼은 친구들의 얼굴을 휘익 둘러보더니 방으로 들어가 거칠게 방문을 닫아 버렸다. 니일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친구의 아픔을, 치욕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랄튼의 용기에 대해 진심으로 찬사를 보냈다. 그가 모든 비밀을, 매맞는 게 두려운 나머지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 굳건한 의지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집중력을 길러라
진실한 마음과 마음이 맺어지는데
무거운 짐이라느니 하는 말은 삼가해 주오
사랑은 형편에 따라서
바뀌는 게 아니고
지우려 해도 지우기가
어려운 것이니
그래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 같아서
태풍이 몰아쳐도 미동조차 않는
사랑은 거대한 바다에 떠 있는
배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별
그 고상함은 알려져 있어도
그 무한한 가치는
측정하기 어려우니...
랄튼이 열 대의 지독한 매질을 당했던 그 밤이었다. 키팅 선생이 예고도 없이 기숙사로 랄튼을 찾아왔다.
"랄튼, 나좀 보자."
"키팅 선생님."
랄튼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이 휘둥그래졌다. 키팅은 대뜸 심상치 않은 말을 꺼냈다.
"어리석은 연극이었어, 그건."
"네에?"
"강당에서 말야."
키팅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엄숙하게 들렸다. 이미 그 뜻을 알아차린 랄튼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키팅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말씀을...교장선생님 편을 드시는 건가요?"
키팅이 대답하기 전에 랄튼이 계속해서 물었다.
"선생님은 카르페 디엠, 그리고 생의 정수를 마음 속 깊이 느껴 보라고 하셨죠?"
"그랬지."
"그럼 그게 무슨 뜻이죠?"
"그것과는 달라."
"어떻게요?"
"생의 정수를 진정으로 느끼게 되는 것과 자기 자신이 좋다고 우겨대는 것하고는 달라..."
대담성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신중함이 요구될 대도 있다는 것이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구별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키팅의 말이었다.
"그렇지만..."
랄튼은 더듬거렸다.
"그렇지만 전...선생님, 전..."
키팅이 어물거리는 랄튼의 다음 말을 무시하듯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랄튼."
"?..."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는 일은 현명한 행동이 아냐. 용기 있는 행동도 물론 아니고 말야."
즉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웰튼 아카데미에서는 다른 학교에서 누릴 수 없는 특전이 아직 남았다는 키팅의 말을 랄튼은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이죠?"
은근히 약이 오른 랄튼은 예를 들어보도록 키팅을 다그쳤다.
"말해줄까?"
"물론이죠."
"다른 건 놔두고라도 나한테 강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게 특전이 아니겠니?"
"그럼요."
랄튼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를 나타났다. 키팅의 얼굴에서도 엄숙함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학생들의 다정한 형님 같은 표정이 자리잡았다. 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는 니일 등의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제군들."
일제히 키팅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뜻을 드높이게, 알겠지?"
"예!"
일제히 대답했다. 키팅은 이번에는 짖궂은 친구와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곧장 돌아서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다음날 국어 시간에도 키팅은 또 새로운 수업 방식을 동원해서 학생들을 열광시켰다.
'대학'
키팅의 백묵으로 칠판에 커다랗게 휘갈긴 글자였다.
"제군들."
그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대학교에서의 생활을 풍요롭게 결실 맺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이 과연 필요한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읽어보지 않은 책을 분석하는 방법'이라는 테마에서 학생들의 호기심은 한껏 곤두섰다.
"대학이란 시에 대한 너희들의 애정을 파괴할 수도 있다. 다분한 분석이나, 해부, 비평 등등으로 비추어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은 너희들한테 다양한 문학의 장르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 많은 문학 작품 중에는 반드시 읽어야 할 뛰어난 작품도 있지만 인간을 병들게 하는 나쁜 작품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키팅은 이야기하면서 칠판 앞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다녔다.
"만일, 현대의 소설이라는 주제의 강의를 듣고 있다고 치자. 너희들은 학기 동안 계속 감명 깊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등의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명작들을 읽어야 할 게 분명하다. 그렇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된 표정으로 계속했다. 학생들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한없이 빛나고 있었다.
"만일 어떤 책을 불과 한 페이지밖에 읽지 않았는데, 그 책의 추잡함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머릿속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아예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편이 좋다는 판단이 내려졌다고 하자."
여기서 키팅은 두 가지 의문을 제시했다.
"세상이 온통 끝나 버린 듯이 절망할 것인가?"
"F 학점이라도 기꺼이 받을 수 있을까?"
그 의문점을 미리 연습해 두자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눈빛은 더욱 빛났다. 커다란 기대에 가득 찬 가슴도 한없이 부풀었다. 그만큼 어떤 강의에 열중했던 시간이 언제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학기말 최종 리포트인 '의심스러운 얼굴'을 꺼내 그 표지에 인쇄된 문구를 읽어보도록 하자. 거기서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강렬한 여자 크리스틴과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사교계로의 데뷔에 대한 꿈을 이룩시켜 주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는 농기구 외판원 프랭크와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리포트를 쓰게 되는데..."
먼저 내용을 레포트에 반복해서 적을 필요는 없다고 기록하는 한편, 실제로 통독했다는 점을 교수가 알도록 해야 되는 만큼 표지에 소개된 줄거리의 요약을 적당히 섞어서 기록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놓은 다음에는 잔뜩 허풍을 떨어대면 되는 거야."
"어떻게요?"
한 학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예를 들겠다. 그러니까..."
키팅은 실제로 다음과 같은 리포트 내용을 예로 들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지은이의 박진감 넘치는 필력으로 묘사된 부모의 사랑과 현대 프로이트 학파의 이론 사이에서 발견하게 되는 유사성이다. 크리스틴은 마치 엘렉트라이고 아버지는 타락한 외디프스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으로 쓰면 된다는 키팅의 설명은 학생들의 가슴에 쉽게 전달되었다. 그 책 내용의 밑바닥에 흐르는 아베슈 라테슈난의 사상과 기이하게도 일치된다는 사실인 것이다. 라테슈난이 고행 끝에 얻은 엄청난 결과를 상세히 기술해 놓은 것을 검토해 보면, 부모를 버리게 되는 원인은 머리가 세 개 달린 괴물, 다시 말해서 돈과 야심 그리고 사회적 성공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는 것을 특히 강조했다. 키팅은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그런 다음으로는 어떤 게 그 괴물을 살찌도록 만드는지, 어떻게 해야 괴물의 머리를 잘라 버릴 수 있을까 등등의 여러 문제에 대하서는 라테슈난의 주장을 음미해 보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맨 끝에 이르러서는 교수의 뛰어난 문장과 함께 의심스러운 세 얼굴을 소개해 준 교수의 용기를 칭찬해 주면 된다는 결론이었다.
"응, 선장님!"
믹스가 최초로 질문하기 위해 손을 번쩍 쳐들었다.
"뭐지?"
"라테슈난이라 하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에는 어떡해야 되죠?"
"라테슈난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다, 믹스, 필요할 경우 그 대신으로 다른 인물을 꾸며내면 된다. 잘난 척하는 교수들 가운데는 그런 위대한 인물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말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래 놓으면 믹스 너 역시 나하고 똑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키팅은 이어 교탁에 있던 종이를 쳐들고 다음과 같은 평점 내용을 큰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라테슈난의 간접적인 언급은 풍부한 통찰력으로 매우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위대하면서도 망각되어 가는 이 동양의 거인을 본인 외에도 기억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다."
'평점 A 플러스.'
키팅은 그 종이를 다시 교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계속했다.
"자아, 수준에 미달하는 책을 읽지 않고서도 분석하는 것은 학년 말 시험으로 돌리기로 하겠다. 그러니 각자 연습을 충분히 해두도록, 또한 그 외에도 대학의 시험에는 몇 군데나 되는 함정이 있다."
"그게 어떤 겁니까?"
니일이었다.
"그걸 지금 당장에 시험을 치르도록 하겠다. 각자 답을 쓸 용지와 연필을 준비하도록."
이어서 키팅은 각자한테 문제지를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그런 후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자신은 학생들의 뒤로 갔다. 슬라이드 영사기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다시 말했다.
"맘모스 대학이라고 하는 곳은 말이다. 웰튼에서 도저히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생물이 자라고 있는 악덕의 도시이다. 그 생물의 이름은 바로 여자이다."
키팅은 잠깐 웃은 다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여자라는 이름의 생물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우리들의 정신 집중을 방해하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잘 들어라..."
여자라는 생물 이야기가 학생들의 호기심에 더욱 부채질을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시험에서는 너희들이 그런 점에 있어서도 익숙해 질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해 두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시험의 결과는 성적에 반영되는 것이니만큼 이 점 특별히 명심하도록 해라."
시험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답안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키팅은 그들의 뒤에서 영사기에 슬라이드를 기운 다음 스위치를 넣었다. 핀트 조정이 끝나자 스크린에 나타난 것은 아름답고도 매력적인 어느 여대생의 팬티가 살짝 드러났다. 아슬아슬하게 중심부분만을 겨우 가린 손바닥만한 천 조각의 일부가 보인 것이다. 답안지를 작성하던 학생들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집중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차 하면 재빨리 답안지로 되돌아 왔다. 키팅은 벌써 알아차리며 넌지시 충고했다.
"정신 집중, 집중! 그래야 문제를 풀 수 있다. 이제 남은 시간은 20분뿐이다."
그는 슬라이드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넣었다. 이번의 광경은 더욱 흥미를 끌만한 것이었다. 잡지의 광고 같은 데서 흔히 보게 되는 광경이다. 즉 전신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속옷으로 겨우 가리고 있는 미녀였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노브라였기 때문에 유방이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만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답안지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두 눈은 자꾸자꾸 스크린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키팅의 얼굴에 유쾌해 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심한 갈등에 사로잡힌 학생들의 내부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슬라이드를 바꾸어 넣었다. 거의 알몸으로 드러낸 채 도발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동굴 속에서 보았던 그것보다 더욱 대담한 포즈였다. 유방의 매력을 최대한의 관능미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반신까지 신비로운 곳이 살짝 비치는 광경이었다. 그리스 조각상의 나체의 여자도 등장했다. 조각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실물보다 오히려 더욱 생동감이 넘쳤다. 특히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양쪽 유방뿐만 아니라 여성의 성기는 마치 살아있는 여성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키팅은 물론 고의적이었다. 학생들의 집중을 길러 주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아예 벌거벗은 여자의 장면이 등장했을 때는 가벼운 탄성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물론 그와 같이 외설스러운 광경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마디로 스크린에 나타나는 광경은 미녀들의 홍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색다른 여성의 모습도 나타났다. 육체의 노출은 전혀 없고 얼굴 표정만 클로즈업되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 섹시했다. 학생들은 그와 같은 악조건 하에서도,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단 한 사람만이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다른 학생들처럼 열중하고 있지 않는 모습이었다. 스크린에 나타난 미녀의 홍수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녹스 오버스트릿이다.
"크리스...크리스, 크리스..."
오버스트릿은 계속해서 답안지에 그 이름만을 쓰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느껴본 이성에의 그리움과 크리스의 영상이 사춘기의 녹스 오버스트릿의 마음을 혼란 속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그리운 자유
니일은 열심이었다. 지나칠 정도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스스로 결정한 일에 대해 열중하다 보니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웰튼 아카데미의 캠퍼스는 버몬크의 추운 겨울에 둘러싸인 채 찬바람에 시달렸다. 가을철이면 장관을 이루는 주변의 나무들도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채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휘파람을 불었다. 연극의 공연이 눈앞에 다가온 니일의 마음은 시시각각 들뜨고 흥분되었다. 그의 인생 모두를 거기에 걸고 있는 모습이었다. 학과 시간 외에는 모든 시간을 연극 연습에 할애하며 전력을 경주했다.
추위 때문에 죽은 시인의 사회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 학교측의 날카로운 경계에도 영향을 받긴 했다. 찰리 랄튼이 대표로 매질을 당한 이후 그들은 특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니일의 곁에는 언제나 룸메이트인 앤더슨이 있었다. 연극 '한여름밤의 꿈' 중에서 요정 팩의 역할을 맡은 니일은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전대미문의 배역을 해낼 결심이었다. 또한 호랑이보다 무서운 아버지를 피한다는 스릴이 그를 더욱 흥분시켰다. 세상에 태어나 16년 동안 복종만 해 왔다. 시키지 않는 일은 감히 엄두도 못냈던 게 지금까지 니일이 살아야 했던 억압받는 삶이었다. 니일은 지금도 앤더슨과 함께 한 곳을 걸으면서 신들린 사람처럼 연극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여기다, 이 악당 같으니. 난 검을 뽑아 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에잇, 곧 가겠다!"
같이 있던 앤더슨이 그 다음 대사를 읽어 주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더 넓은 곳으로."
니일은 바람 소리에 대항하듯 커다랗게 소리쳤다.
"이 얼마나 멋지냐구!"
"...."
앤더슨은 니일과 달리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어딘가 불안해하는 표정을 완전히 씻어 버리지 못했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일 거야. 분명히 말야!"
"..."
"인간들 각자의 인생이, 이것이 반정도 만이라도 가슴 뛰게 만들 수 있다면 좋은 편이겠지."
앤더슨은 여전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난 말야, 많은 역할을 맡기만 하면 멋진 인생을 수십가지도 더되게 살아갈 수 있다구!"
니일은 활기찬 동작과 함께 돌담벽 위로 날렵하게 뛰어올랐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렇게 진실하게 생존해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정말이지 태어난 후로 처음이야. 앤더슨, 너도 연극을 해보면 깨닫게 될 거야."
니일은 다시 날렵한 동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참, 앤더슨."
"?..."
"너 리허설에 오지 않겠니?"
"아니."
"왜?"
"그냥..."
"와보면 재미있는 일도 생기게 될 거야."
"뭐라구?"
"여자애들도 많거든."
"..."
"그중에도 하미어역을 하는 여자는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지 몰라."
니일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짖궂은 미소를 얼굴 가득히 떠올렸다. 앤더슨은 처음과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공연은 보러 가겠어. 그건 약속하지."
"이봐, 앤더슨. 넌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니일은 앤더슨을 놀리는 듯이 싱겁게 웃었다.
"참, 내가 어느 대목까지 하다 그만 뒀지?"
앤더슨은 그 대목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었다.
"여기야. 음. 거기 있느냐?"
갑자기 니일이 연출가라도 된 듯이 앤더슨을 향해 소리쳤다.
"힘을 더 줘서 해!"
"음, 거기 있느냐?"
"좋았어. 바로 그거야."
앤더슨은 얼떨결에 그 대사를 억지로 커다랗게 외운 다음 스스로 당황하고 있었다. 니일은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날아갈 것 같았다. 그의 모든 생각은 오직 하루밖에 남지 않은 연극 공연에 집중된 상태였다. 연극이 끝난 다음의 일에 대해서는 아예 냉각의 심연 속으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이 순간의 그로서는 그 다음에 인류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만 같은 상태였다. 뜻밖의 사실이 이 순간 어디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조차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그와 같이 들뜬 행동이 이미 어떤 불행한 상태를 잉태하게 되었는지 그 여파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며 들떠 있었다.
앤더슨과 헤어진 니일이 기숙사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여전히 무대에 서 있는 기분으로 온갖 몸짓과 대사를 섞어 가며 커다랗게 소리치거나 혹은 춤추듯 방으로 들어서던 니일은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아버지...!"
니일은 겨우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른 생각은 해볼 겨를도 없었다. 눈앞에 잔뜩 성난 아버지가 버티고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이미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넌 도대체 어떻게 된 아이냐?"
"..."
"너한테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는 애비를 이렇게 실망시키다니!"
"아버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을 당장 집어치워라."
"네에?"
"연극놀이 말야."
아버지 역시 분노로 인해서 몸을 떨고 있었다. 니일이 하려는 연극에 대한 편견이 시시한 연극놀이로 생각하는 그로서는 더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분노는 니일의 또 다른 분노를 자아내도록 만들었지만, 그러나 니일의 분노는 오히려 복종을 재촉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그렇지만 전...아버지, 전..."
아버지가 갑자기 더욱 화를 냈기 때문에 니일의 더듬거리던 말이 그나마 끊기고 말았다.
"내 말에 대꾸하지 마라!"
그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태어나서 지금껏 자신의 주장을 한번도 피력하지 못했다. 자기의 뜻이나 주장 등을 말하는 것은 바로 반항이고 말대꾸였기 때문이다. 이미 16세가 되어 인생과 삶의 가치를 논하게 된 지금에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품속에 안긴 어린양과 같이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니일, 너 들어 봐라. 도대체 그런 짓이나 하며 시간을 낭비해서 어쩔 셈이냐?"
이어 아버지는 아들의 자백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누구냐?"
"네에?"
"너한테 그런 장난을 가르친 사람말야."
"그런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어서 대답이나 해."
그는 질문에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으며 몰아붙였다.
"키팅 선생이냐?"
"아녜요, 아버지."
"키팅이라는 그 선생이지?"
"아무도 아무도 아닙니다. 전 다만 학점도 모두 A이고 해서..."
니일의 대답은 다시 거친 아버지의 말에 끊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가를 화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맥스 부인한테서 들었다고 했다. 자기의 조카딸이 니일과 연극을 하게 됐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즉석에서 잘못 안 모양이라고, 자기네 아들은 연극 같은 것 하지 않는다고 점잖게 대답했다. 즉 아들 덕분에 아버지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았다고 화난 음성으로 털어놓았다. 니일조차 아버지의 그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그만 두도록 해라!"
아버지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너무 근엄해서 감히 거역할 수 없는 통첩이었다. 니일은 전 같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굴복하고 말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희망을 거기에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
니일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전 그 연극에서 주연 자리를 맡고 있어요. 제가 나가지 않으면 그 연극은...그리고 공연도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지금에 와서 어떻게 그럴수..."
"네가 맘대로 했던 일 아니냐!"
아버지는 더욱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 그 바람에 니일은 들고 있던 것을 떨어뜨릴 뻔했다.
"너 끝까지 반항할 생각은 아닐 테지?"
"제가 어떻게...하지만 아버지, 이번 한번만..."
"안돼!"
"..."
"지금 당장 연극을 그만두는 거다, 알았지?"
"..."
"대답해! 알았지?"
아버지가 벌컥 고함치는 바람에 니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있었다.
"여기서 더 이상 애비를 실망시키지 마라!"
"알겠습니다."
니일은 아버지가 방에서 나가버린 다음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무엇이, 무슨 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윙윙대며 지나가는 게 있을 뿐이었다. 온몸에 진땀이 배어났고, 두 눈에서 굵은 물방울 같은 것이 한두 방울 구르듯 발등으로 떨어져 내렸다.
헤이거 박사가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이 거기에 모여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연극연습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 때문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 니일을 제외한 전원이었다. 헤이거 박사는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에서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랄튼?"
"네?'
"식사하는 모습이 이상하군. 뭐가 잘못됐나?"
"아뇨."
"그럼 자네들 모두는 원래부터 왼손으로 식사를 했나?"
"아뇨."
멤버들은 전과 달리 왼손을 사용해서 기묘하고 힘들어 보이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아, 그거요.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헤이거 박사님."
녹스 오버스트릿이 모두를 대표하듯 정중하게 말했다.
"충분한 이유란 뭘 말하고 있는 거지?'
"오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서죠."
"그 습관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단 뜻인가?"
"생활이 기계화되어 정신적인 성장을 억제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헤이거 박사는 그들이 원래와 같은 방법으로 식사하도록 말했다. 오랜 습관에서 벗어나려 들지 말고, 그보다 습관이나 올바로 기르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오버스트릿은 즉시 대답했다. 하지만 헤이거 박사가 식당을 나가자 잠깐 사용하는 척했던 오른손에서 재빨리 왼쪽 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니일이 몹시 괴롭고 슬픈 표정으로 식당에 들어온 게 그때였다.
"왜 그래?"
랄튼이 먼저 알아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질 만났어."
"학교에서?"
"기숙사에서, 조금 전에."
랄튼은 이미 뭔가 짐작하며 연극을 단념할 것이냐고 물었다. 니일은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랄튼이 한가지 제안을 했다.
"내 생각엔 말야, 키팅 선생님한테 의논해 보는 게 좋겠다."
"뭘 어쩌겠다고?"
"최소한 조언은 해줄거야."
"어떤 조언을?"
"또 아니, 네 아버지한테 대신 얘기해 줄지."
"필요 없어."
"어째서?"
"소용없을 테니까."
"그래도 일단 한번 의논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니?"
니일은 자신의 마음을 결정지을 수 없어 어두운 얼굴로 묵묵히 식사를 했다. 그런 니일의 모습을 본 친구들은 한없이 우울했다. 니일은 친구들과 함께 꼭 한번 키팅 선생이 사용하는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짖궂은 친구들, 특히 랄튼의 호기심 대문에 거의 강제로 끌려가다 시피 했었다. 니일은 남의 방에 몰래 들어가는 따위의 일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몰래 남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는 니일의 충고에도 랄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마치 사냥개가 무엇인가 찾아낼 때 코를 킁킁거리는 것과 비슷한 동작을 보이며 방안의 이것저것을 두루 살폈다. 문 앞에는 푸른 색깔의 작은 가방이 놓여 있었다. 몇 권인가 되는 책이 침대 위에 되는 대로 널려져 있었다. 방을 나가기 전까지 그 책들을 보았던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책상으로 다가간 랄튼이 거기에 놓여 있던 사진첩을 집어들었다. 20대 정도로
생각된 아름답게 생긴 여인의 사진이 유리 속에 곱게 간직되어 있었다. 랄튼은 신기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이걸 좀 봐!"
그는 사진 옆에 쓰다가 중단한 편지가 놓여 있는 것을 가리켰다. 니일의 계속된 충고에도 불구하고 랄튼이 작게 소리내어 그 편지를 읽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키팅의 이미지를 새롭게 느끼도록 해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사랑하는 제시카.'
네가 없을 때는 가끔 외롭게 느껴진다. 이런 기분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네 모습이 담긴 사진을 조용히 들여다본다거나 아니면 눈을 감은 상태에서...타는 듯이 빛나는 너의 미소를 눈앞에 그려 볼 수밖에...그렇지만 나의 상상력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다만 희미한 영상을 떠올릴 수 있을 뿐... 아아, 네 모습이 그립다. 그리고 뜻대로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너 제시카한테...
랄튼은 매우 재미있어하면서 계속 읽어나갔다. 처음 적극적으로 만류했던 니일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 내용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그와 함께 제시카라는 미지의 여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떤 여자일까, 키팅과 어떤 관계일까, 서로 사랑하는 사이겠지, 그들은 언제부터 알게 됐을까 등등...
"야, 니일."
랄튼이 불쑥 말을 걸어왔을 때 니일은 깜짝 놀랐다.
"낭만적이지?"
랄튼은 신기한 사실을 발견한 탐험가 같은 얼굴을 한 채 니일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글쎄..."
"그럼 아니란 말이니?"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닌데 그리 관심이 많니?"
"그래도 신기하잖아, 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 키팅 같은 사람한테 이렇게 잘 생긴 애인이 있다니 믿을 수 없거든."
"이제 그만 나가자."
니일은 역시 궁금했다. 그렇지만 다른 아이들 앞에서 내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머뭇거리는 랄튼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키팅 선생님의 방을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와 아들
존 키팅의 방은 지붕 밑의 다락방 같은 곳이었다. 좀처럼 마음을 결정할 수 없는 니일이었지만, 시간적으로 너무 촉박했기 때문에 언제까지 망설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키팅 선생으로부터 확실한 대답을 듣거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아버지의 완고하고 사나운 성격으로 보아 연극에 출연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니일로 하여금 그토록 주저하게 만들었다. 마음은 그럴수록 더욱 다급하고 초조해졌다. 가만히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해야만 되었다. 아버지한테 직접 부딪친다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거나 같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니일이었다. 아무리 용기백배 한다 해도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하고 무모한 일이었다. 달리 묘안이 없고보니 낭떠러지 위에 선 기분에 빠진 니일이었다. 그는 랄튼의 충고를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궁여지책이기도 했지만 그 역시 키팅 선생에 대한 남다른 신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니일은 생각을 그 방향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막상 생각을 그렇게 정해 놓았을 때 니일은 새삼 키팅 선생이라면 좋은 방법을 제시해 줄 수도, 그보다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는 기대감과 함께 서둘러 그의 방으로 향했다. 니일이 갔을 때 키팅은 방에 혼자 있었다. 방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그의 독특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문은 열려 있습니다."
니일은 조용히 들어섰다. 방안은 밝지 않았다. 책상 위의 스탠드만을 켜 놓은 채 그 앞에 앉아 무엇을 하고 있는 키팅의 뒷모습을 니일은 잠시 바라보았다.
"누구..."
키팅이 돌아보았다.
"접니다. 선생님."
"자네로군, 니일."
"네."
"어떻게?"
니일은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난번 랄튼으로 인해 몰래 들어왔던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키팅 같은 선생한테는 그런 방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이 너무 좁군요. 선생님."
"그래?"
키팅은 그의 특유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바보스럽게, 그러면서도 막상 접하다 보면 한없이 친근감을 느끼도록 해 주는 미소였다.
"왜 이렇게 좁은 방밖에 받지 못하셨죠?"
"학교에서?"
"네. 선생님한테는 방이 너무 좁은 것 같아요."
키팅은 다시 미소 지었다.
"학교 당국이 알아서 하겠지."
"네?"
"세간살이를 너무 많이 들여놓고 있으면 내가 교육에 집중할 수 없게 되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니?"
"전 이해할 수 없어요."
"뭘 말이지?"
"왜 이렇게 좁은 곳에 계셔야 되는 지요."
니일은 우선 자신의 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넓고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아버지의 서재 하나만 해도 키팅 선생의 방보다 세 배는 됨직 했다. 수많은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선생이 그토록 협소한 공간에서 지내야 된다는 사실을 니일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니일은 자기의 느낌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선생님."
"뭐지?"
"오늘을 즐겨라, 하는 목표를 가지고 계시다면서요..."
"그래서?"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 이런 곳에서부터 바깥으로 뛰쳐나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키팅은 뜻밖이라는 듯이 니일을 응시했다. 그 역시 다른 학생보다 니일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그랬지만 특히 티없이 맑은 정신과 매사에 적극성을 보이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니일."
"..."
"네가 말하는 그 세계라면 난 분명히 보고 있다. 아주 새로운 세계를 말야."
니일은 가만히 있었다.
"또한 이 학교와 같은 곳이라면 설령 저질이라고 해도 나와 같은 선생이 한 사람 정도는 필요하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그것은 농담이었다. 니일도 키팅도 그렇게 생각했다. 키팅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 것은 스스로의 농담에 대한 자신의 웃음이었다.
"그런데 니일군."
키팅이 거기서 방담을 끝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 예고도 없이?"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으음, 혹시 내 교육 방법에 대한 내용이니?"
니일은 이미 정색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 방에 들어와 있는지, 키팅에게 어떤 말을 하고 그로부터 어떤 대답을 들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심각해진 것이다.
"교육방침에 대한 건 아닙니다."
"그럼 개인적인?"
"네. 중요한 문제입니다."
"너한테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가. 니일?"
"저요..."
니일은 한숨을 길게 몰아쉰 다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헨리 홀에서 하는 연극에 제가 출연한다는 건 아시죠?"
"들은 것 같군."
"그걸 아버지께서 당장 그만두라고 하셨습니다."
"으음!..."
키팅은 이미 문제가 어느 정도 심각한가를 짐작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카르페 디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이건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키팅의 표정 역시 니일만큼 긴장된 상태였다. 그가 평소 보고 느꼈던 니일의 이미지가 지금은 전혀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 연극은 지금의 저의 모든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 연극을 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그 연극을 하고 싶습니다. 키팅 선생님! 물론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뜻도 알고 있지만..."
어느덧 니일은 몹시 슬픈 표정을 바뀌며 말끝을 흐렸다. 키팅은 니일의 두 눈에서 불빛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희 가정은 찰리 랄튼네처럼 부유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버지께서는 장래의 제 인생을 이미 모두 결정해 놓고..."
니일은 목이 메었다. 두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다. 새삼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의 같은 비관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왜 그런 상담을 할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비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 놓고 저한테는...저한테는 어떻게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묻지도 않으십니다."
니일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니일."
키팅은 가장 침착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이미 니일의 가슴속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그런 내용을 아버님께 말씀드렸니?"
니일은 너무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연극에 대한 너의 그 정열 말이다."
"아뇨."
"어째서?"
"그건 농담으로 하는 말씀이시죠?"
"..."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직 모르시는 겁니다.“
"뭘 말이지?"
"제가 만일 그런 말을 할 경우 전 즉석에서 살해당하고 말게 될 겁니다."
"설마!..."
키팅은 깜짝 놀랐다. 그런 정도로 심각한가 싶어 다시 한번 니일을 바라보았다. 니일은 분명히 살해당할 거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누가 누구를, 아버지가 아들을 연극한다고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싶어 등골에 오싹 전율을 느끼기까지 했다. 키팅은 자신의 그러한 내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래서는 안된다는 판단과 함께 조금도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니일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침착하게 만들기 위해 가볍게 말을 던졌다.
"니일."
"..."
"듣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구나. 너 역시 네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연극하는 결과라고 말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니일은 조용히 눈물 글썽한 채 앉아 있었다. 키팅은 앞의 제자를, 그보다 이제 한창 긍지를 펴야만 될 희망찬 청소년을 자신의 혈육처럼 애정이 담긴 눈으로 응시해 주었다.
"니일, 내 생각을 말해 주마."
"..."
니일은 측은하도록 간절한 눈빛으로 키팅을 마주보았다.
"너한테 너무 과중한 짐이 주어져 있다는 건 알았다. 확실히 감당키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충분히 고려해 보렴"
"어떤..."
"오해는 하지 마라,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
키팅은 그런 전제와 함께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런 일을 일단 진지하고 분명하게 아버지한테 털어놓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죠?"
"네 자신의 가장 솔직하고 진실한 면모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아버지께서 이해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렇지만..."
니일은 그것으로 키팅의 뜻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고 아는 아버지와 키팅이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아버지하고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전 분명히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대답하실지..."
"그래?"
"연극에 대한 너의 정열을 따위는 일시적인 변덕이며 홍역과 다름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말끔히 잊어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실 겁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니일은 자조하듯 그러나 더욱 비탄에 빠져서 말을 계속했다.
"우리 모두 너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다. 네가 연극을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네 자신을 위해서란다 하고 말씀하실 게 분명합니다. 의심의 여지조차 없습니다."
키팅은 나름대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니일의 그와 같은 말은 하소연도 넋두리도 아닌 가장 순수한 진실이며, 실제로 그 말대로 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만큼 거기에 가장 합당하고 정당한 방법의 제시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알겠다, 니일, 네 말대로 그게 정말 변덕이나 홍역같은게 아니라고 확신한다면..."
니일이 재빨리 말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난 널 믿고 있다. 그러니까 그 사실을 아버지께 증명해 보이는 거야."
"아버지께요?"
"정열과 노력을 기울여서 말야."
"그렇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렇지, 이번의 그 연극이야말로 네가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것임을 아버지가 깨달으시도록 보여드리는 거야."
"그런 다음에는 요?"
"만일, 이건 어디까지나 만일이다.
"네에."
"그래도 네 뜻처럼 일이 잘 안된다고 할 경우에는..."
"경우에는?"
"그래, 니일. 너도 이제 머지 않아 18세가 된다. 무슨 뜻인지 알겠니? 그 나이가 되면 좋아하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18세요?"
키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요, 도대체 연극은 어떻게 되는 거죠?"
니일은 이제 슬픈 눈물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격정이 스치고 지나간 얼굴에 눈물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고, 이번에는 더욱 강한 의지로 번뜩이고 있는 것이다.
"키팅 선생님. 연극은 바로 내일 밤에 공연합니다. 그런데 18세 얘길 하시다뇨!"
"그런 게 아냐."
"네?"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거야."
"키팅 선생님!"
니일은 낮은 소리로 마치 절규하듯 물었다.
"방법이 그거 하나 뿐입니까? 다른 방법은, 그보다 더욱 간단한 방법이 없겠습니까?"
키팅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다는 표현의 안타까운 방법이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말에 대한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터질 듯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내 질문에 대답해라."
"..."
"넌 자기 자신한테 정직해지고 싶지?"
"하지만 그건..."
"대답해 봐."
"그렇습니다."
"됐어. 그렇다면 방법은 그거 하나 뿐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기 또한 하나뿐이다, 니일. 이해 할 수 있겠니?"
침묵이 찾아왔다. 예상도 생각도 안했던 그 침묵은 비교적 오래 두 사람을 붙잡아 놓고 있었다. 침묵하는 동안 니일은 나름대로 어떤 생각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윽고 니일이 가라앉고 있는 침묵을 깨뜨렸다.
"알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키팅 선생님."
키팅은 갑자기 확신감으로 가득 찬 니일의 얼굴을 천천히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겨우 마음을 정했습니다."
"결심이 섰니?"
"네, 선생님."
"됐다. 됐어, 니일."
키팅은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니일의 뒷모습을 향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같은 시간의 일이었다.
니일의 멤버들인 랄튼, 오버스트릿, 피츠, 앤더슨, 카멜론 등은 또 다른 곳에 모여 나름대로의 자기 일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오버스트릿은 혼자 구석진 곳에 쭈그리고 앉은 채 입 속으로 무엇인가 열심히 중얼거렸다.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였다. 던베리의 집에서 체트한테 흠씬 얻어터진 게 오히려 크리스에 대한 기폭제가 되었다. 지금도 그는 혼자 쭈그리고 앉아 그녀한테 보내 그녀를 감동시켜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시구를 안간힘을 써 엮어 나갔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시만큼은 필연적으로 완성시킬 결심이었던 것이다.
앤더슨 역시 떨어져 앉아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쓰고 있었다. 각양 각색이었다. 카멜론은 교과서를 펼쳐 놓고 공부하는 중이었고, 피츠는 책에 있는 내용을 선별해서 벽에다 열심히 낙서하는 중이었다. 오버스트릿은 자신이 쓰고 있던 것을 제쳐놓으며 한쪽에 있는 앤더슨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쓰고 있는 게 뭐지?"
"나도 모르겠어."
앤더슨의 대답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쓰고 있는 것도 모르다니?"
"아마 시 같은 걸 거야."
"수업을 준비하는 거니?"
"글쎄..."
"또 모르겠다 이거야?"
"모르겠어."
"졌다, 졌어. 하긴 나도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애."
앤더슨은 오버스트릿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크리스 때문이겠지 하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일동 중에 카멜론이 먼저 기숙사로 돌아갔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어딘가 다른 점이 있는 그였다. 그는 소등시간 전에 기숙사로 들어가지 않았다가 만일 들통났을 경우를 겁내고 있는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해서도 특히 항상 조바심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일도 불사할 수 있는 비교적 이기주의적인 성격이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오버스트릿은 갑자기 투덜거리며 지금껏 끙끙대며 지어낸 시가 적힌 종이를 펼쳐 들고 있었다.
"이걸 크리스에게 보여 주고 그녀가 읽게만 만들어도 좋겠는데 말야!"
곁에서 그 광경을 본 피츠가 끼여들었다.
"뭐가 걱정이니, 네가 직접 읽어 주면 되지."
"뭐라구?"
"누완다를 봐. 그 방법으로 성공했다니깐."
"전날 동굴에서 그랬잖니. 글로리아한테 누완다가 시를 읽어 줬거든."
"그랬더니?"
"말도 마. 당장 글로리아가 누완다에게 안겨들더라니까."
"그래애?"
"그렇다니깐."
오버스트릿은 갑자기 굳은 표정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어떤 느낌 때문이었다.
"정말 그랬단 말이지?"
오버스트릿은 재확인하기 위해 피츠에게 물었다.
"다른 애들도 다 봤어."
"그렇구나!..."
그때 모두들 서둘러 기숙사를 향하기 시작했다. 카멜론처럼 조심성이 지나치지는 않았지만 역시 규칙을 위반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것은 오버스트릿 뿐이었다. 그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숙사나 어떤 규칙이 아니었다. 오직 크리스 뿐이었다. 누완다가 시를 읽어 주어 그 매력적인 글로리아를 홀딱 반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날카로운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곰곰히 생각했다. 누완다에 비해 뒤질게 하나도 없다고 확신했다. 그가 글로리아라는 여자를 그런 방법으로 끌어들였다는 데 나라고 못할 게 있느냐 싶어 괘씸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윽고 커다랗게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누완다 녀석이 정말로 그 일을 했다는 데 내가 왜 못해. 좋다. 나도 해내고 말겠어. 두고봐. 크리스는 내 것이 될 테니깐!..."
확신으로 가득 찬 음성이었다. 사실 겪을 만큼의 시련을 이미 겪는 오버스트릿이었다. 크게 잘못한 것도 없다는 자신의 생각으로서는, 그런데 묵사발이 되도록 체트한테 터졌다는 그것이 모두 크리스 때문이라는 생각은 오버스트릿을 하여금 중단할 수 없는 애착심을 갖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반항의 이유
결심한 이상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오버스트릿이었다. 그는 결행의 순간을 그 이튿날로 당장 정했다. 망설이며 시간을 글면 그만큼 손해라고 생각했다. 크리스가 체트와의 관계를 그만큼 더 계속 시킬 수 있고, 그것은 두 사람의 친밀도를 가중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체트녀석 벌써 크리스를 건드린 건 아닐까, 설마 그럴까, 아냐, 어쩌면 그게 사실일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애가 그렇게 농도 짙은 키스는 할 순 없을 텐데... 그런 오버스트릿의 불안한 의문이 결행을 독려했다. 그의 유일한 교통 수단을 애용하는 자전거였다.
웰튼 아카데미에서 크리스가 다니는 릿지웨이 하이스쿨까지는 삽시간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단단한 결심한 오버스트릿은 두 가지 선물을 준비했다. 그동안 끙끙거리며 머리를 자낸 자작시와 한 송이 장미꽃이었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다음 그것들과 가슴속의 크리스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채 힘껏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마음 때문인지 웰튼 아카데미의 교문을 막 벗어났는가 싶었는데 벌써 릿지웨이 하이스쿨의 교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결심이 식기 전에 라는 목표와 함께 녹스 오버스트릿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주위 풍경은 웰튼 아카데미와 확실히 다른 점이 많았다. 거의 전학생이 자신보다는 부모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엄격한 규율 속에서 신음하며 꿈도 이상도 체념할 수밖에 없는 웰튼 아카데미에는 남학생뿐이었지만 여기는 남녀공학이었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남녀공학이라는 사실이 그랬고, 그래서인지 막 등교하고 있는 학생, 특히 여학생들의 자유분방한 광경이 이방지대처럼 느껴졌다.
오버스트릿은 망설이지 않고 현관을 지나 목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기저기서 재잘거리는 여학생들, 바삐 걷는 날씬한 다리, 유난히 젖가슴이 커서 움직임에 따라 부담스럽게 흔들리는 여학생, 개인 사물함에 무엇인가를 넣기 위해 깊숙이 허리 굽힌 여학생의 스커트 속으로 드러난 삼각팬티 등등 그야말로 완전한 이방지대를 방불케 했다.
오버스트릿은 바쁜 시선으로 복도를 휘둘러보았다. 일층에 있는 많은 여학생가운데서 크리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어..."
그는 마침 다가오는 여학생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지?"
상대편 여학생은 진한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 눈매나 입술 등의 이미지가 어쩐지 크리스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사람을 찾는데..."
"누군데?"
"크리스 노엘이라고..."
"아아, 걔."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어떤 사인데? 애인? 아님 그냥 엔조이나 하는 거야? 걔한텐 이미 애인이 있는 것 같던데?"
그 여학생은 몹시 수다스러운 성격임이 분명했다. 그뿐 아니라 공연히 오버스트릿을 향해 노골적인 유혹의 눈길까지 보냈다. 이쪽에서 한 마디만 던지면 당장 키스에 응해줄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오버스트릿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지?"
그 여학생은 입술을 잠깐 내밀더니 이내 쌀쌀맞게 대답했다.
"이층으로 가 봐."
"고마와."
"난 리즈라고 해."
"리즈..."
오버스트릿은 앞뒤볼 것없이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크리스는 자기의 사물한 앞에 서서 어떤 여학생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크리스!"
오버스트릿이 소리치자 이쪽을 돌아보는 크리스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다가오더니 오버스트릿을 복도의 구석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녹스!..."
그녀는 몹시 당황해서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금 제정신이야?"
"크리스."
크리스는 다시 누가 볼까 두려운 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과하려고 왔어."
"뭐라구?"
"전날 밤에 있었던 그 일 말야."
"무슨 소리야?"
"사과하는 뜻에서 이걸 가지고 왔어. 받아 줘."
오버스트릿은 가지고 갔던 꽃송이를 내밀었다. 하지만 받지를 않았다. 확실히 무엇인가 크게 두려워하는 표정일 뿐이었다.
"뭘 모르는구나."
"?..."
"체트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해?"
크리스의 표정과 말투는 전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별개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질린 듯이 말했다.
"체트가 여기 있는 널 보면 죽여버릴 거야. 그래도 모르겠어?"
오버스트릿 역시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가슴을 온통 채웠기 때문에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크리스, 내 말을 들어 줘."
"뭐라구?"
"난, 난 말야..."
"어서 돌아가."
"아냐. 난 널, 그래, 널 사랑하고 있어.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체트같은 사내가 아냐. 바로 나라구. 알겠어? 그러니 이 꽃다발하고 시를 받아줘..."
"녹스!"
크리스가 오버스트릿의 다음 말을 가로챘다.
"너 혹시 어떻게 된 거 아니니? 제정신으로 이러는 거야?"
공교롭게도 그때 요란한 종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주위에 있던 여학생들이 종소리와 함께 교실을 향해 급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녹스, 제발 부탁야."
"!..."
"크리스, 나도 알고 있어.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거 말야."
"나 시간 없어. 빨리 교실로 들어가야 해."
"정말 이거 받아 주지 않을 거야?"
크리스의 시선이 꽃송이로 향했다.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이내 거칠게 거절했다.
"돌아가, 어서!"
크리스는 오버스트릿을 그 자리에 놔둔 채 교실을 향해 뛰어갔다. 순간 오버스트릿은 눈앞이 캄캄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바져 버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거절당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실 안으로 사라진 크리스의 뒷모습이 아직 그대로 선명했다. 그 순간 오버스트릿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 번개같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방금 크리스가 들어가 버린 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어디서 그와 같은 용기가 생겼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가 닫힌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섰을 때 학생들은 모두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 아직 교사는 들어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남학생의 도깨비 같은 출현은 어느덧 여학생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비로소 오버스트릿을 발견한 크리스의 두 눈이 커다랗게 치켜 떠졌다. 그와 동시에 소리쳤다.
"녹스으! 오오, 세상에. 난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니?"
크리스는 분노에 못이겨 얼굴빛까지 창백해졌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친구들의 모습에 그만 울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닌 오버스트릿이었다. 그는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탁이야, 크리스. 이걸 받아 주기만 하면 돼. 그래서 이렇게 온거야. 모르겠어?"
"노옥스!..."
크리스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상한 역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크리스가 그렇게 화낼수록 오버스트릿은 더욱 대담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모두가 알아듣도록 말했고 준비해 가지고 간 종이를 펴들고 역시 커다란 목소리로 읽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이 만든 소녀,
그 이름은 크리스 노엘.
황금의 살갗과 황금의 머리칼
손가락 끝이
닿을 뿐만으로도 그것은 낙원
입술이 맞닿으면
그 기쁨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모든 학생들은 그와 같은 뜻밖의 광경에 한결 같이 멍해지거나 눈가에 미소를 나타내기도 했다. 견딜 수 없는 수치감에 크리스는 홍당무가 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말았다. 드디어 수군대거나 소리 죽여 웃는 여학생들의 반응이 크리스의 귀에도 들렸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아직 그와 같은 망신을 당해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본 앞에서 느닷없이 발가벗겨져 가장 부끄러운 곳을 드러낸 것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오버스트릿은 용기를 내어 자작시를 계속 커다란 목소리로 낭독했다.
하늘은 여신을 만들었고,
그 이름은 크리스 노엘.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건 모른다.
하지만,
내 영혼이 비록 무지해도
나의 사랑은 오직 커 간다.
사랑스러움이 더도는 그대의 미소에
눈가에 가득찬 눈부신 빛남,
하지만 내 삶은 충만해 있다.
다만 그 사람이,
살아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노골적으로 한숨소리를 내는 여학생이 있었다. 탄성 비슷한 소리도 어디서 들려왔다. 크리스는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오버스트릿을 바라보았다. 노려보는 것 같았다. 읽기를 끝낸 오버스트릿은 침착하게 그 종이를 접었다. 철면피라도 된 듯한 행동이었다. 그는 접은 종이와 꽃다발을 크리스의 책상 위에 천천히 올려놓으며 다시 한번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이윽고 뒤돌아서서 교실을 나오기 직전 그는 매우 중요한 한 마디를 뒤에 남겼다.
"널 사랑한다. 크리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크리스의 눈빛에 또 다른 이미지가 스쳤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녀의 반응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녹스 오버스트릿의 경우 그것은 사랑앓이 병이었다. 하지만 니일은 그렇지 않았다. 가치나 수준을 논할 수는 없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두 학생의 당면한 문제를 경중을 다질 수가 없었다. 키팅으로부터 충고와 권유를 받은 니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니일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버지는 키팅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아들이 열성을 가지고 진심으로 털어놓았을 때, 그걸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니일이었다. 즉 키팅같은 사람일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와 같은 자신의 내면적인 갈등을 털어놓거나 공개할 수도 없는 게 니일의 입장이었다.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할 수는 있었고 그럴 용기도 있었다. 다만 듣는 키팅이 문제였다. 그로서는 니일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거나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어떤 위험이, 그 어떤 시련이 닥친다 해도 감수할 각오가 된 니일이었다. 연극에 기필코 출연해야 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아버지를 거역하는, 그보다 더욱 나쁘게 속이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는 니일이었다. 그를 다시 갈등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그 생각이었다. 아버지를 속여서, 속인 대가를 어떤 방법으로 치른다 해도 연극을 꼭 하기로 결심한 니일의 마음은 그래서 또 다른 갈등과 함께 급기야 키팅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수업이 끝났을 때였다. 니일은 텅 빈 교실에 외롭게 혼자 남아 있었다. 키팅이 오는 것도 모르고 생각의 심연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은 상태로 묵상하는 듯했다.
"니일."
묵상하는 듯하던 니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괜찮니?"
키팅은 책상을 돌아 니일의 앞쪽으로 갔다.
"네, 선생님."
"아버지께 말씀드렸니?"
니일은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해서 듣고 있는 키팅을 의심케 했다. 그렇게 쉽게 네, 하는 대답소리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니?"
"네."
"어떻게, 어제 나한테 얘기했던 그대로?"
"네."
"으음...그랬구나."
"정말이예요."
"아버지한테 네 진실을 말씀드렸단 말이지?"
"네."
"연극에 대한 네 정열을?"
"그랬어요."
키팅은 마음 속으로부터 의혹이 커다랗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니일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니일 역시 한번 시작한 거짓말에 자신도 모르게 그럴듯하게 말했다. 시작이 잘못되거나 빗나갔을 경우 계속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니일이 말했다.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눈치였어요."
"!..."
"그런데 나중에는 연극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만은 승락해 주셨어요."
"아주 잘된 일이구나."
키팅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네 연극에 직접 와 주시겠다던?"
"아, 아뇨. 그건 아녜요."
"..."
"공연장에는 못 오십니다."
"그래?"
"네. 사업 때문에 출장을 가시기 때문이에요."
"어디로?"
"시카고요. 그래서 공연에는 오시지 못합니다."
이 순간 키팅은 니일 보다도 더욱 심한 갈등을 느꼈다. 그가 니일 또래의 소년이라면 또 모른다. 곧이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니일의 마음 속을 거의 모두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당장 니일의 말을 중단시키고, 거짓말을 꾸짖고, 니일의 비겁한 생각이 얼마나 옳지 않은 것인가를 이해시키고, 그래서 안될 경우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을 충동을 겨우 웃음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니일은 다시 더듬거리지 않고 말했다.
"어쨌든...네, 맞아요. 하여튼 제가 앞으로 연극을 계속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주 획기적이구나."
"정말예요, 선생님. 물론 조건이 전제되지만요."
"조건?"
"제가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공부를 잘 한다면요."
"그렇구나."
"네, 선생님."
거기까지 오자 키팅은 니일의 거짓말을 나무라거나 꾸짖을 용기가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 가혹한 형벌을 니일한테 가하는 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길을 피하는 니일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동정심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선생님"
니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정리하며 말했다.
"전 그만 방으로 가야겠어요. 공연이 내일이라 최종적으로 읽어야 할 것도 있고 해서요."
"그러렴."
키팅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끼고 기대한 제자의 그런 모습을 대하게 되는 교사의 마음이 그토록 아픈 것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니일."
키팅은 전혀 새로운 기분으로 평소처럼 불렀다.
"네, 선생님."
"내가 가도 될지 모르겠구나."
"네에?"
"공연에 말야."
"아, 네에...물론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았어. 갈께."
"제 친구들도 올 거예요."
"그렇겠지."
돌아서서 교실을 나가고 있는 니일의 뒷모습을 키팅은 애써서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마지막 기회
리지웨이 하이스쿨로부터 웰튼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길에도 역시 자전거를 이용한 오버스트릿이었다. 갈 때하고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그곳에서의 상황이 어땠거나, 아무리 크리스로부터 모욕을 당했거나, 그것으로 크리스가 영원히 토라진다 해도 그의 기분은 개운했다. 간절히 하고 싶었던 일을 드디어 해치우고 난 기분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이 승리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자전거를 학교건물 뒤쪽에 붙어 있는 조리실 옆에 세웠다. 상당히 추운 날씨였지만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그는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며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에는 잘 드나들지 않는 조리실이었지만 이 날은 상관없었다.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는 방금 오븐에서 나온 빵을 한 개 슬쩍 집어들고 곧장 복도로 나왔다. 방금 전에 수업을 끝낸 친구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다. 그 중에 랄튼이 오버스트릿을 보자마자 큰소리로 물었다.
"야아, 녹스! 어떻게 됐니?"
"뭐 말야?"
"정말 크리스에게 네가 지은 시를 읽어 줬니?"
"말씀이라고!"
"야, 크리스를 만나긴 만난 거니? 만나지도 못하고 겉돌다가 돌아온 거 아냐?"
"사람을 뭘로 보고하는 소리냐?"
"아냐, 농담이었어. 사실은 궁금해서 말야."
오버스트릿은 조리실에서 슬쩍해온 빵의 나머지 한 쪽을 입에 쓰윽 집어넣었다. 그는 어떠냐는 듯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말해 주라, 녹스. 정말 읽어 줬단 말이지?"
"그렇다니까."
"반응은?"
그 질문에 오버스트릿은 마치 남의 일처럼 건성으로 대답했다.
"모르겠어."
"뭐라구?"
"그냥."
"무슨 소리냐, 대체?"
"그렇다니깐."
오버스트릿은 대답이 궁색해지자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너네들 오늘 갈 거지?"
"어딜?"
"연극 구경 말야."
"그거야 물론이지. 우리가 안 간대서야 말이 안 되지."
"알았어. 같이 가자."
니일의 연극관계로 오버스트릿은 일단 궁지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문제는 모든 학생들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웰튼 아카데미의 학생이 공부 아닌 연극을 한다는 사실이 마치 기적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오후 늦게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은 수선스럽게 외출준비를 했다. 키팅 선생을 선두로 해서 모두 연극을 관람하러 갈 참이었다.
"니일이 정말 잘 해낼까?"
누군가가 먼저 물었다.
"그럴 거야."
"어떻게 알아, 난생 처음 하는 연극일 텐데."
"걔라면 믿을 수 있어. 요즘 연극에 완전히 미쳐버린 모습 너희들도 보았지 않니."
"대단한 정열이야. 그만큼 노력을 기울였으니 결과는 당연히 멋지게 나타날 거야."
"그나저나 니일 아버지가 어떻게 승락해줬지?"
"글쎄...나도 실은 그게 궁금하던 참이었어."
그때 피츠가 나서며 모두를 향해 말했다.
"할 얘기가 그렇게들 없니? 어서 갈 준비나 해."
"맞는 말이다."
맞장구치며 둘러보던 믹스가 갑자기 말했다.
"누완다는 어떻게 된 거야?"
"랄튼 말야?"
"그래.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거지, 너무 늦으면 니일이 나오는 걸 못 볼지도 모르는데?"
"뭔가 할 일이 있다고 했어. 빨갛게 칠한다던가 뭐라고 하더군."
"빨갛게 칠해?"
"그랬어."
"어딜?"
"나도 몰라."
가만히 있던 카멜론도 몹시 궁금한 눈빛이었다.
"랄튼 걔는 너무 엉뚱한 친구라서 도무지 알 수 없다니까."
문 쪽에 찰리 랄튼의 모습이 불쑥 나타난 게 그때였다. 그는 마치 연극배우가 무대에 등장하듯 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랄튼. 우리 모두 기다렸잖아."
"준비 좀 하느라고 늦었어."
"무슨 준비?"
"볼래?"
"..."
랄튼은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가부터 확인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셔츠 앞단추를 재빨리 풀어헤쳤다. 순간 모두들 눈을 크게 뜨거나 놀라는 소리를 냈다.
"그게 대체 뭐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랄튼의 맨살 가슴에는 피빛으로 번개그림이 그려 넣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섬찟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확실히 랄튼이 아닌 다른 사람은 누구도 생각못할 일이었다. 일동 중에 가장 놀란 것은 앤더슨이었다. 자기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랄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왜 이따위 그림을 가슴에다 그려 넣은 거지 흉칙하게?"
"이건 말야..."
랄튼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인디언의 심볼이야."
"인디언?"
"그래. 남자의 정력을 상징하는 그림이야."
"그걸 어디에 쓰지?"
"아직 모르는구나. 이걸 가지고 말야, 여자아이들을 뿅가게 만들어버리는 거야. 이제 알겠니?"
가만히 듣고 있던 피츠가 재빨리 물었다.
"하지만 말야, 랄튼."
"뭐야?"
"어쩌다 실수로 상대가 그걸 보면 어쩌지?"
"금상첨화지."
"뭐라구?"
"효과가 배가 된다아, 이거야. 이제 알겠니?"
"야, 랄튼."
카멜론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끼어 들었다.
"너 이렇게 된 거 아니니?"
카멜론은 손가락 하나를 펴 머리 위쪽에 동그라미를 두세 번 그리며 낯을 찡그렸다.
"두고 보면 알게 돼. 그보다 모두 모였으면 이제 출발하자. 키팅 선생님은 어떻게 됐지?"
"밖에서 만나게 되겠지."
그들은 우루루 몰려가기 시작했다. 키팅의 인솔로 가는 연극 구경이며, 죽은 시인의 사회 리더인 니일을 보러 간다는 것은 확실히 이들에게 기대가 큰 것이었다. 뜻밖의 일이 발생한 것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일동이 막 복도를 지나 문으로 향할 때였다. 한 학생이 갑자기 소리쳤다.
"야, 저기!..."
"뭔데?"
모두 걸음을 멈추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제일 먼저 놀라며 소리친 것은 녹스 오버스트릿이었다.
"크리스!"
사실이었다. 크리스가 거기에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크리스?"
오버스트릿은 그녀한테로 다가가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웰튼 아카데미에 크리스 같은 여학생이 찾아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노란 교장에게 발각당할 경우 풍기문란 운운하는 불벼락이 떨어질 일이었다. 크리스는 의외로 차가운 표정을 지시고 오버스트릿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왜, 내가 오면 안 돼?"
"그게 아니고, 크리스. 너무 뜻밖이라서..."
"넌 맘대로 우리 학교에 들어와도 상관없고, 난 이 학교에 오면 안 된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니까."
"듣기 싫어.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 알아?"
"아무래도 안 되겠군."
오버스트릿은 주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한 쪽에서 두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친구들의 감시로부터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빨리 크리스의 팔을 붙잡아 복도를 나갔다. 멤버 중의 한 학생은 크리스의 미모에 넋이 빠진 것처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가 랄튼에 의해 끌려가면서도 크리스의 모습을 보았다. 준비를 끝낸 키팅의 모습이 그때 나타났다. 오버스트릿은 밖으로 나오기 직전 키팅을 향해 소리쳤다.
"저도 금방 뒤따라 갈께요. 먼저 가세요, 선생님!"
돌아본 키팅은 씩 웃어 준 다음 먼저 밖으로 나갔다.
눈이 내리는 밤풍경은 매우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크리스는 자기의 자동차를 타고 왔다. 현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그녀의 자동차가 눈을 맞으며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오버스트릿은 뭐라고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방문에 대해 불안의 그림자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크리스는 기분이 몹시 나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버스트릿 역시 나름대로 커다란 문제를 이미 안고 있었다. 그녀의 등장이 원인이었다.
"크리스, 네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은 보통 문제가 아냐. 웰튼 아카데미는 아주 특별난 학교거든."
"그래서?"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 너나 할 것 없이 엄청난 말썽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게 겁나니, 넌?"
크리스의 말은 처음부터 가시가 돋힌 것이었다.
"겁난다기 보다는, 그게...골치 아픈 게 좋을 리 없잖아."
"잘 들어, 녹스."
"..."
"넌 우리 학교에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날 웃음거리로 만들어도 상관없고, 난 여기에 오면 곤란케 된다는 거야?"
크리스는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따지려고 온 그녀였다. 거기다 오버스트릿의 그런 말까지 듣게 되자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오버스트릿은 깜짝 놀라 크리스로 하여금 조용히 말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흥!"
크리스는 그렇게 자신의 불만을 토해 내었다. 오버스트릿은 더욱 난처해진 입장에서 어떡하든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보려 했다.
"오해하지마, 크리스."
"오해?"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야. 정말이야. 절대로 널 웃음거리로 만들 생각은 없었어. 생각해 봐. 그것 말고 달리 너한테 내 마음을 전달할 길이 없잖아."
그는 우울해지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천천히 말했다.
"어쨌든...그 일 때문에 너한테 지장이 있었다면 사과하겠어. 진심으로. 정말 미안하다."
"일이 어떻게 됐는지 알기나 해?"
"?..."
"체트한테 그 일이 알려졌어."
"체트라구?"
"그래. 넌 아직 모를 거야. 그의 성격을."
"그렇지만..."
"말 마. 당장 이리로 달려오겠다는 거야."
"..."
오버스트릿은 체트가 웰튼 아카데미로 씩씩대며 들이닥치는 광경을 상상했다.
"널 당장 작살내겠다는 거야."
"그랬구나..."
"내가 그걸 막느라고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기나 해? 온갖 수난과 방법을 총동원했단 말야. 그래서 겨우 진정시킨 거야."
"..."
"하지만 또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라. 앞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때는 나로서도 막을 수 없는 일이 터질 테니 명심해."
오버스트릿은 재빨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의 방문 목적은 이미 알았다. 하지만 그걸 다시 생각해 보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크리스는 오버스트릿을 동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랑은 경우에 따라 동정하는 마음으로부터 생겨나게 될 수도 있다. 그녀가 오버스트릿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그렇게 달려왔다는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오버스트릿은 걱정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녀의 교실에서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던 크리스의 모습이 떠올렸다. 그 교실을 나올 때에는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등에 닿는 듯했던 오버스트릿이었다.
"크리스."
오버스트릿은 그것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건 장난이 아냐. 절대로."
"..."
"난 널 사랑하고 있어."
"처음부터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는데, 넌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게 말이나 돼?"
오버스트릿은 그녀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몰랐다. 비관적인 말이 아니라는 것만 분명할 뿐이다. 실상 크리스 쪽에서는 자신이 순진한 남자의 사랑을 받기에는 이미 틀린 대담한 여자라는 뜻의 말을 오버스트릿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버스트릿은 저쪽에서 부르는 친구들에게 먼저 가도록 했다. 그들은 자동차로 가지만 걸어서라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크리스와의, 문제가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 내가 널 모른다구?"
"그래."
"틀렸어."
"뭐라구?"
"난 널 분명하게 알고 있단 말야. 크리스."
크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오버스트릿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버스트릿은 더욱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너를 던베리 저택에서 처음 봤을 때 이미 알았어. 너야말로 훌륭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말야."
"그게 다야?"
"더 무슨 말이 필요해?"
진심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만 알면 된다는 오버스트릿 나름대로의 결론이었다.
"어떻게 그것만 옳다고 주장하지?"
"..."
"그게 만일 잘못된 거라면 어쩔 테야? 그리고 또 내가 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다고 한다면 어쩔 셈이지?"
"그건 틀렸어."
"내가?"
"그래. 가장 정확한 증거가 있어."
"증거?"
"네가 모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나를 찾아와 나의 위험을 알려준 게 바로 그거야. 나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증거야."
"기가 막혀서, 정말이지..."
크리스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은 듯했다. 그보다는 오버스트릿의 말에 정곡이 찔린 기분이었다. 사실상 오버스트릿한테 어떤 위험이 닥치든 일부러 찾아와서 경고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말문이 막히자 화제를 바꾸었다.
"어쨌든 난 그만 가야겠어. 갈 데가 있으니까."
"어딜 가는데?"
"연극 구경."
"그래? 나도 가는데. 체트와 같이 가는 거야?"
"체트라구?"
"으응."
"농담하지 마. 체트가 연극을 본다면 아마 내일 아침해가 서쪽에서 떠오를 거다."
"그럼 잘됐구나."
오버스트릿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말했다.
"나하고 같이 가자."
순간적으로 크리스의 얼굴에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너라는 사람은 오버스트릿. 정말이지 체면도 없구나."
"그게 아냐, 크리스."
"뭐라구?"
"들어봐 진심이니까."
오버스트릿은 어느새 애원하듯 간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꼭 한번이라도 좋아. 욕심도 부리지 않겠어."
"무슨 뜻이지!"
"나한테 기회를 달라는 거야. 그냥 얌전히 앉아서 연극만 감상하기로 약속하겠어."
크리스는 더욱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오버스트릿은 단숨에 말해버렸다.
"만일, 만일 말야. 오늘밤 함께 연극을 보고 난 다음에도 날 좋아할 수 없다면 그 때는 단념하겠어. 진심이야. 그러니까 기회를 줘봐. 그건 할 수 있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지?"
"그렇다니까."
"정말?"
"약속하겠어. 죽은 시인의 사회 명예를 걸고 말야. 그러니 오늘밤만 나와 같이 있어 줘. 그런 후에 그래도 날 만나는 게 싫어진다면 좋아. 네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께. 맹세하지."
"하지만...그 사실을 체트가 알게 된다면?"
오버스트릿은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확인했다. 어떡하든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께."
"어떻게?"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할 수 있어."
맨 뒤에 앉았다가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나오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크리스는 다시 생각해 보는 표정이더니 이내 지금까지에 비해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정말 약속하는 거지?"
"물론 죽은 시인의 사회 명예를 걸고 맹세해."
"죽은 시인의 사회?"
"응."
"그게 뭐지? 죽은 시인의 사회 말야."
"그건 내가 맹세할 때에만 사용하는 말이야."
크리스는 피식 웃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울러 그녀는 오버스트릿에 대해서 확실히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 듯이 입가에 미소를 나타내며 바라보았다.
"됐지?"
오버스트릿이 최종적으로 대답을 요구했다.
"으응."
크리스는 더 밝은 미소를 그에게 던졌다.
"됐어!"
오버스트릿은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었다. 그보다 야호! 커다랗게 외쳐대고 싶었다. 함께 니일의 연극을 보러가기 이해 크리스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오르는 오버스트릿의 발걸음은 구름을 밟는 듯했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천천히 눈발이 조금씩 춤추며 대지 위에 사뿐사뿐 내려앉았다. 크리스가 처음 왔을 때보다 약간 많아진 눈발이었다. 그것은 마치 오버스트릿에 대한 크리스의 마음이 훨씬 호의적으로 바뀐 것을 증명해주는 것처럼 점점 많아지며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아버지, 아버지
헨리 홀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맨 앞에서 몇 번째 되지 않는 의자에 멤버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키팅도 함께였다. 그들은 크리스와 함께 들어와 뒷자리에 앉는 오버스트릿을 향해 승리의 V자를 그어 보이며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두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연극을 시작되었다. 극중 팩으로 분장한 니일이 괴상한 차림에 꽃과 가시같은 것으로 만든 관을 머리에 쓰고 무대에 등장한 것이 그때였다. 객석에 앉아있던 믹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영하려는 것을 곁의 친구가 급히 잡아당겨 다시 자리에 앉혔다. 팩은 어두운 무대 위에서 주위를 살피다가 요정을 발견하자 서서히 다가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니일의 대사의 시작이었다.
"오오, 넌 요정이지? 대체 어딜 가고 있는 거지?"
"들을 넘고 산을 건너 또 계곡을 지나 수풀도 가시덤불도 헤치고..."
"나는 분부대로 야음을 틈타 소란을 피우는 자. 오베론 양에 대해 까불어서, 웃음을 달라고 조르는 게 내역할...어린 숫말로 분장하고 콩을 너무 많이 먹어 뚱보가 된 말을 감쪽같이 속일 수만 있다면..."
확실히 니일은 역할을 충분히 소화시키고 있었다. 니일은 한마디로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고 있었다. 즐거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증명인 듯했다. 상당히 긴 대사가 거침없이 술술 나오고 있는 그 모습은 기성배우보다 오히려 신선하고 활력이 넘쳤다. 멤버들은 자신도 모르게 니일의 연기에 몰입되어 갔다. 그가 그토록 훌륭하게 해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대단해!"
"누가 아니래, 멋져!"
"소질을 타고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멋지게 해낼 수가 없지!"
멤버들은 저마다 감탄하며 그게 마치 자기의 일인 양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열중했다. 두 번째로 등장한 남녀가 던베리의 딸인 버지니아였다.
"쉿! 누가 오고 있다."
팩의 말이었다.
"어디요?"
"금방 들이닥칠 거야."
"그럼 어쩌죠?"
"바로 여기를 피해야만 해. 자, 어서..."
팩과 그의 상대역인 요정이 재빨리 무대 뒤쪽으로 나가는 곳까지 몸을 피했다. 팩은 거기 숨은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에 새로 등장한 것은 라이산다였다. 숨어서 보는 팩의 모습이 관객들에게 보이는 가운데 라이산다와 하미아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무대 중앙에 나오자 나란히 드러눕는 데서부터 대사가 있었다.
"하나의 잔디 위에 두 개의 베개면 충분하다. 마음은 하나, 침상도 하나, 두 사람의 가슴 속 진실된 사랑도 오직 하나뿐..."
라이산다는 하미아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 누우려 했다. 멤버들의 시선은 숨어 있는 팩의 모습을 더욱 열심히 응시했다. 길지 않지만 니일의 해낸 팩의 연기가 너무나 감동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안 됩니다. 라이산다."
하미아역의 버지니아도 깜찍하게 연기를 하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제게서 조금만 떨어져 주세요."
"무슨 소리지?"
"그렇게 제 몸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눕지 마세요. 그러시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소원이에요, 라이산다. 사랑과 우정 모두를 소중히 하고 싶으니까 조금만 떨어져 누워 주세요."
니일의 팩의 연기 때부터 관객들은 완전히 무대에 사로잡혔다. 아마추어들의 연극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게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신중함이라는 겁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녀답게 이 몸의 순결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 대목에서는 라이산다의 대사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좀 떨어져서 누우세요. 그럼 이만, 안녕히 주무세요. 소중한 분 그 상냥하신 생명이 존재하는 한 당신께서 마음이 변하시지 한 분 그 상냥하신 생명이 존재하는 한 당신께서 마음이 변하시지 않게 하기 위한 기도를 드리겠어요..."
니일은 그동안 무대와 객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과연 어떻게 역할을 소화시켰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관객들의 호응으로 실패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는 열광하는 관객들의 반응을 분명히 보았다. 연기에 열중할 때는 전혀 그럴 겨를이 없었지만, 무대 뒤쪽으로 퇴장할 때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는 객석 앞쪽에 있는 멤버들이 똑똑히 보였다. 키팅 선생의 모습도 보였다. 또한 그들이 한결 같이 얼굴 가득히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도, 무엇인가 자기들끼리 지껄이며 웃어대는 모습도 보였다.
그때였다.
흐뭇한 마음으로 객석을 바라보고 있던 니일의 얼굴 표정이 돌연 딱딱하게 굳었다. 그와 함께 경악에 가깝도록 놀라는 눈동자가 객석의 통로 저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미 그의 가슴속에서는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두려움의 소용돌이였다. 그럴 수가 없었다. 감쪽같이 지나칠 것으로 믿었던 기대가 이 순간 커다랗게 소리없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거기 객석 맨 뒤에 우뚝 서있는 사람이 있었다. 코트를 한쪽 팔에 걸친 채 돌부처처럼 굳은 표정으로, 그보다 성난 모습으로 서서 무대를 노려보는 것은 바로 니일의 아버지였다. 분명히 비밀로 했던 니일이었다. 그 비밀은 니일의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어쩌면 살해당할지도 모를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이 깨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모습이 헨리 홀에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산산조각이 나며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아울러 그 상황은 니일로 하여금 비장한 각오를 하게 만들었다. 이번만큼은 어떤 극한적인 상황이 닥친다 해도 과감히 거기에 맞서겠다는 각오였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도록 두려운 게 사실이었지만, 안간힘을 써 그러한 각오를 되새기며 이를 악무는 것이다.
라이산다와 하미아의 연극이 막 끝나기 직전이었다. 라이산다가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따르겠다."
"고맙기도 하셔라. 라이산다."
"난 여기서 자도록 하겠소. 부디 당신에게 잔뜩 쌓인 피로가 지금부터의 잠으로 인해 말끔히 씻겨 주기를 바라겠소."
"알겠어요, 라이산다. 그 소리의 반은 기도 드리고 있는 당신께 바치도록 하겠어요."
그런 다음 라이산다와 하미아는 약간 떨어져 누운 채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무대 위에는 어울리는 음악이 울려나오고 그 다음 팩이 다시 등장하게 되어 있었다.
"나갈 차례여, 니일."
마음 속의 혼란 때문에 깜빡 망각하고 있던 니일을 함께 하는 동료가 일깨워 주었다. 니일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비탄에 빠진 모습이 되었다. 거기서 그리고 무대에 나가지 않는다면 다소라도 문제가 쉽게 풀릴 수도 있을지 몰랐다.
"나갈 차례야, 니일."
마음 속의 혼란 때문에 깜빡 망각하고 있던 니일을 함께 하는 동료가 일깨워 주었다. 니일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비탄에 빠진 모습이 되었다. 거기서 그리고 무대에 나가지 않는다면 다소라도 문제가 쉽게 풀릴 수도 있을지 몰랐다.
"뭐하고 있어, 니일."
아직 니일은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객석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니일! 뭐하는 거야. 빨리 나오지 않고!"
그와 함께 일제히 합창하는듯 니일을 외쳐댔다. 니일은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어졌다. 아버지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눈이 불을 켠다 해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엎질러진 물이라는 체념과 함께 다시 비장한 각오로 무대에 나갔다. 이번에는 대사가 없는 장면이었다. 서정적이면서도 여유 있는 축하연의 분위기 연출이었다. 춤을 추거나 혹은 여러 가지의 동작을 요정의 분위기를 내는 것이었다. 일단 무대에 등장한 니일은 다시 팩으로 돌아갔다. 이미 니일 페리가 아니었다. 객석에서 노려보는 아버지도, 열광하는 키팅과 멤버들도 느껴지지 않았다. 날렵하면서도 시종일관 한없이 기뻐하는 표정으로 오직 연기만을 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객석에서 멤버들과 떨어져 앉아 있던 녹스 오버스트릿은 넌지시 곁에 앉은 크리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 역시 무대에서의 연기에 몹시 흥분된 표정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결코 어떤 탐욕적인 고의가 있지는 않았다. 진심이었다. 그의 한쪽 손이 조용히 무릎 위에 얹힌 크리스의 속으로 접근했다. 약간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그 동작으로 연결된 것으로 나타났다. 오버스트릿으로서는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오버스트리스이 손이 닿았을 때였다.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 대담해졌다. 이번에는 크리스의 손등을 덮듯이 하며 포갰다. 마찬가지였다.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크리스는 연극에 몰두한 채 시선을 무대에 둔 채 손으로 응답해왔다. 적극적인 반응이었다. 그녀 쪽에서 먼저 오버스트릿의 손을 꼬옥 힘주어 잡아온 것이다. 오버스트릿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신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격렬하게 조여오는 감각이 곧장 가슴을 뚫고 들어왔다. 살갖과 피부의 접촉보다는 그 이미지가 더 없이 황홀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때 니일의 무대에서의 춤 장면이 끝났다. 니일과 함께 넓은 무대를 돌면서 춤추던 요정 역의 무희들이 모두 퇴장했다. 무대에 남은 것은 팩 역의 니일 뿐이었다. 니일의 가슴은 새삼스럽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 홀로 서게 되자 전혀 새로운 사실인 듯이 아버지의 존재가 마음 속에서 되살아났다. 충격적이었다. 모든 관객이 일제히 숨죽이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니일의 눈에 커다랗게 들어온 것은 그들 관객이 아니었다. 단 한사람, 바로 아버지였다. 그 존재가 자신을 짓눌러 압사시킬 듯이 클로즈업되면서 무대를 향해 넘쳐오는 듯했다. 순간 니일은 무엇이나 대항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또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진심을 아버지에게 알려서 그가 깨닫도록 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윽고 니일이, 팩이 입을 열자 강당 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들 그림자의 이 여흥...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이렇게 생각해 주세요...지금까지는 선잠을 자다가 어렴풋이 보았다...다만 꿈이었다고 생각한다면 마음도 투명하게 하시죠..."
실상 맨 뒤에서 소름끼치도록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를 향한 니일의 가슴 저미는 독백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오늘밤에 보인 것은
완성 안된 꿈 얘기이며
사리분별이 없는 일장춘몽에 불과합니다.
부디 너무 꾸짖지 마시고 용서해 주신다면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정직한 자 팩에게 뱀과 같은 독설을 퍼붓지 않고 끝내 주신 다면
더할 수도 없는 행복입니다.
니일의 가슴 깊은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아버지에 대한 슬프고 간절한 하소연이었다.
"...그렇다면 이에 부응해 더 한층 노력하겠습니다...팩은 두 마디 하지 않습니다...그러면 여러분,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괜찮으시다면 손을 벌려서 응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니일은 관객들을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려 인사했다. 잠깐 동안 니일의 인사말 때문에 조용했던 관객들이 어느 틈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특히 멤버들의 열광은 불같이 뜨거운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막이 내렸다. 관객들은 더욱 우렁찬 박수갈채로 찬사를 보냈다. 멤버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 찰리 랄튼이었다. 뒤를 이어 누구의 권유도 필요 없이 멤버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팅도 함께였다. 그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기립박수를 보내기 시작한 직후였다.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다른 관객들이 일어났다. 이윽고 전체 관객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열광하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막 내린 무대 안에서의 감명도 그에 못지 않았다. 막 뒤에 선 채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니일을 연극동료들이 재촉했다. 관객들이 배우들이 다시 나타나 주기를 소리쳐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특히 팩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니일을 보기 원했다. 출연했던 배우들이 중간에 서있는 니일을 선두로 다시 무대에 나타나 깊숙이 허리 굽혀 인사하자 강당 안은 떠나갈 듯했다. 특히 멤버들은 미친 듯한 환성과 함께 손바닥이 아프도록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환호와 박수갈채는 그칠 줄 모르며 계속되었다. 이윽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을 때에도 아직 열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배우들 중에는 무대에서 객석으로 뛰어내려가기도 했다. 열광적인 관객들은 무대위로 뛰어올라 격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성공이야! 대성공이야! 이럴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무대 뒤에서 니일을 비롯한 배우들이 기뻐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연출을 맡은 사람이 들어오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니일, 이걸 어쩌지 네 아버지가 오셨어."
이미 알고 있으면서 잠깐 잊고 있었던 니일이었다. 그는 체념한 듯이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겠니?"
연출자는 니일의 실제 사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각오한 니일이 가방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누구보다도 멤버들이었다.
"여어, 니일!"
하지만 니일의 곁에는 이미 얼음장보다 더욱 몸서리쳐지게 차가운 표정의 아버지가 있었다. 멤버들은 아랑 곳 없다는 듯이 힘차게 말했다.
"최고였다, 니일!"
"정말 잘했어!"
"넌 천재야, 니일."
그들은 진심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부담이 없는 개인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그래서 가치 있는 자신의 감명을 고백하고 있었다. 니일의 귀에는 어느덧 그런 말들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바위에 짓눌린 듯이 무겁게 입다물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 표정, 눈동자 만이 모든 것을 채우며 다가올 뿐이었다. 오버스트릿이 축하파티를 열겠다고 소리쳤을 때 니일은 쓸쓸하게 돌아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 소용없는 일인 걸..."
그때 키팅은 다른 멤버들과 함께 강당 밖에서 니일이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주위에 계속 격려하고 격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니일의 아버지는 방법을 바꾸었다. 그는 강력계 수사관이 범인을 연행하듯 거의 강제로 아들의 팔을 잡아끌며 밖으로 향했다. 니일이 강당문을 나섰을 때였다. 처음 키팅과 멤버들은 영문몰라 어리둥절했다. 아버지한테 죄인처럼 끌려가고 있는 니일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일은 아버지한테 팔이 끌려 한 쪽에 세워둔 자동차로 향했다. 값비싼 승용차였다. 아들을 자동차 옆에 세워둔 아버지가 차의 문을 열기 위해 자동차 저쪽으로 갔을 때였다. 이를 지켜보던 키팅이 니일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진심에서 니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니일, 훌륭했다!..."
니일은 입도 열지 못했다.
"훌륭했다. 감동 받았어. 내가 오늘과 같은 감동을 계속 받을 수 있는 보장이 선다면 여기서 쓰러져 죽어도 오히려 행복하겠구나..."
그때였다. 자동차 운전석의 문을 열어놓고 일어선 니일의 아버지는 갑자기 험악한 얼굴이 되었다. 그 광경은 문 쪽에 있는 멤버들이 예의주시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키팅 선생!"
키팅은 뜻밖의 상황에 잠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장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지시오!"
"..."
"당장"
명령이었다. 노란 교장이라 해도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인격 이하의 언동이었다. 키팅은 울컥 솟아오르는 분노를 느끼자 반대로 니일의 아버지가 측은해졌다. 그 광경을 현장에서 목격한 멤버들은 경악하며 가장 좋은 친구이며 지기였던 니일을 향해 가슴 아픈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니일과 그 아버지의 관계를 수평선상에 놓고 싶었던 키팅이었다. 그러나 학생들, 그곳도 자기 아들의 선생이자 아들과 동급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언동을 서슴지 않는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폭군 네로도 그럴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가장 비참해진 키팅이 고민에 휩싸였을 때 니일의 아버지는 강제로 아들을 자동차 안에 우겨 넣었다. 그 광경을 본 랄튼이 참다못해 소리쳤다.
"페리 아저씨! 왜 그러시죠?"
"너희들은 상관할 일이 아니다."
페리, 즉 니일의 아버지는 히틀러나 나폴레옹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가장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곧장 아들을 태운 차를 출발시켰다. 지금껏 가장 소극적이고 가장 망설임 많던 앤더슨조차 단두대로 끌려가는 사형수 같은 니일의 모습에 울분을 터뜨렸다.
"니이일!"
소용없었다. 들릴 리 없었다. 자동차의 뒷 쪽 유리를 통해 니일의 얼굴이 언뜻 비쳤다.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은 소리 없는 절규와 눈물 없는 슬픔으로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와 같은 니일의 모습은 자동차에 가려서, 그런 다음에는
멀어져 가는 거리 때문에 소리 없이 울분을 터뜨리는 키팅과 멤버들의 시야에서 멀어져갈 뿐이었다.
영원을 향하여
아버지의 횡포였다. 네 어머니를 위해서라는 이야기는 아들을 미끼로 자신의 명예를 낚으려는 아버지의 지극히 비인간적인 위선이었다. 니일의 어머니는 좀처럼 안정되지 않는 불안 속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잡아오겠다며 마치 불량배처럼 성내며 나가버린 남편보다는 사랑하는 아들을 더 많이 생각했다. 그녀 자신도 하나 뿐인 아들 니일에 대해 지나치도록 욕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모든 모습을, 여자보다도 더욱 자신의 틀 속에 아들을 집어넣고 족쇄를 채우려는, 자신이 아버지인 이상, 아들을 죽으라면 기꺼이 죽어야 된다는 식으로 의식구조가 바뀐 남편의 곁에 있는다는 것조차 등골이 오싹한 그녀였다. 그녀는 초조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줄곧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니일을 데리러 가던 남편의 성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들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 쪽이 더욱 강하든가 그런 의미에서는 아니었다. 남편이 아들 니일을 지나칠 정도로 사랑한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아들을 낳아 주었고, 사랑하고 길러 준만큼 아들은 아버지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아버지의 희망대로만 되어 주어야 된다는 사고 방식이 문제였다. 아들은 스스로 희망이나 이상을 가질 수 없었다.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미 짜놓은 틀에 맞추어 살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대들거나 반항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니일의 어머니는 급히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 속에 비벼서 끈 다음 거실로 나왔다. 창문을 통해 자동차가 멎고 거기서 내려 들어오는 남편과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단히 화가 난 남편이었고, 끌리다시피 걸어오는 아들의 모습은 가엾게도 잔뜩 겁을 먹었거나 혹은 반항심으로 불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한마디도 없이 거실로 들어섰다. 곧장 서재로 향했다. 니일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남편과 아들의 뒤를 따라 서재로 들어가 다른 쪽 의자에 앉았다. 니일은 얼른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과 자세였다. 이윽고 아버지와 아들이 전에 없이 굳은 표정으로 마주보고 섰다. 그들은 자리에 앉지도 않은 것이다.
"니일."
아버지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니일은 묵묵히 서 있었다.
"네가 이래도 되는 거냐?"
"...!"
"이런 식으로 부모를 배반해도 되는 거냔 말이다."
"!..."
"좋다, 니일. 내 생각을 말해 주마. 난 곰곰히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이해도 해보려 했다, 네가 과연 이런 식으로 부모를 배반해도 되는 가에 대해서 말이다."
니일은 꼼짝도 않고 입도 열지 않았다.
"네가 연극 따위를 해? 그리고, 그게 대체 무슨 꼴이냐? 강당이 온통 불량배들의 소굴처럼 들끓고, 거기서 너라는 녀석은 자랑스러운 듯이 기뻐하고 말야!"
아버지는 스스로의 말에 참을 수 없이 분노를 느끼며 소리쳤다. 열광하는 관객들을 불량배라고 몰아붙이고, 연극을 가장 저속한 행위로 매도하는 아버지에게 니일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진심을 다시 한번 호소할 생각이었었다.
"그건 네 스스로 너의 인생을 파괴하는 행위란 걸 모르니?"
갑자기 니일의 마음 속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괴라니요, 내 인생을 파괴하다뇨, 그게 어째서 파괴라는 겁니까, 그러는 아버지가 바로 아들의 인생을 파괴하는 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내가 분명히 경고했었지?"
어머니는 슬픈 얼굴에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운 표정까지 곁들여 가만히 지켜보며 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아들 앞에서, 네 어머니를 위해서, 라고 말할 때가 자주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마음을 미화시키거나 정당화시키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상 그 남편은 자식문제에 대해 아내와 상의하는 일조차 지금껏 한번도 없었다. 모든 결정은 그가 내렸다. 어디까지나 일방적이고 편견적이었다. 아내에 대해서조차 남편은 거의 폭군처럼 위압적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가정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자상한 남편이고 다정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평범한 가정 일이나 여타 상식적인 가족관계만을 떼어놓고 본다면 평범한 남편이었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아버지였다. 그가 폭군처럼 군림하려는 분야는 바로 아들의 장래에 대한 문제였다. 적어도 아들은 아버지의 희망대로 살아야 된다는, 성인이 되기까지는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순종 내지는 맹종해야 된다는 주관의 소유자였다. 그럴 때는 언제 자상한 남편이었던가, 언제 아들을 사랑하는 인자한 아버지였던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다만 무섭도록 강압적이고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독재자로 완전히 변하고 마는 것이다. 지금의 그의 모습이 바로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고 무섭게 변해있는 모습이었다.
"여러 말 않겠다. 네가 애비를 배신했고, 어머니까지 배신한 이상 내게도 생각이 있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무서운 말이, 니일에게는 사형선고 보다도 무서운 말이 떨어지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니일 더 이상 웰튼 아카데미에 놔두지 않겠다."
"..."
니일은 아버지의 얼굴을 재빨리 바라보았다. 하지만 질문조차 건넬 수 없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위압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널 당장 브레이든 군사학교로 보내겠다. 넌 그곳에서 하버드로 진학해서 의사가 되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버지!"
니일은 자신도 모르는 순간 낮게 소리쳐 아버지를 불렀다. 너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웰튼 아카데미를 떠난다는 것은 그에게는 물을 떠나는 물고기와 같은 일이었다. 그것만큼은 아무리 아버지의 명령이라고 해도 복종할 수 없다는 강력한 반발심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니일은 어느덧 애원하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뭐냐, 니일?"
"의사가 되라시는 말씀은 저도 알아요."
"그래서?"
"하지만 그건 당장 시급한 일이 아닙니다."
"뭐라구?"
"앞으로 10년이나 더 뒤의 일이지 않습니까."
네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듯이 노려보는 아버지에게 니일은 더욱 간곡히 덧붙였다.
"그리고 그건...그건 제가 평생 동안 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전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는 말이 니일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무엇 때문에 아들의 인생을 독차지하려는 겁니까, 아들은 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라는 등등의 과격한 저항심이 연이어 소리 없이 소용돌이쳤다.
"니일!"
아버지가 갑자기 소리치는 바람에 니일은 깜짝 놀랐다.
"내 말 심각하게 들어라!"
"?..."
"너, 넌 말야, 내가 평생 동안 꿈조차 꾸지 못했던 멋진 기회를 잡고 있는 거다!"
기회라뇨, 하는 외침소리가 니일의 목구멍 속으로 잦아들며 경련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난 네가 그런 훌륭한 기회를 연극 따위의 보잘것없는 일에 열중해서 놓치고 말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다."
"아버지!"
니일의 입에서 처음보다 훨씬 분명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입안에서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오려 했다. 그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말을 하지 않고는, 그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는 심장이 파열될 것만 같았다.
"뭐냐?"
"..."
"말해!"
"전, 전..."
매우 흥분된 상태여서 때문에 할 말이 많던 니일은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있느냐?"
"...!"
"좋다. 들어보자, 네가 하고 싶은 변명이 뭔지."
니일은 아직도 입 속으로 우물거릴 뿐이었다. 아버지는 기다렸다. 똑바로 아들을 바라보며 그로부터의 어떤 변명을 잔뜩 기다렸다. 순간 매우 기묘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는데, 어떤 표정이 아버지의 얼굴을 스쳤다. 네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가 아니었다. 너도 말을 할 수 있느냐, 네 생각이 옳다고 판단한다면 확신을 가지고 주장해 보아라 하는 것이었다. 아들한테 소신을 밝히도록 기회를 주고 싶어진 변화가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스친 것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애비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다는 거냐?"
기막힌 일이었다. 그보다 참혹한 심정이었다. 니일은 진짜로 좋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평생에 한번 있기도 어려운 기회를, 아버지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소신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내던진 것이다.
"전, 전..."
그는 다시 우물거렸다.
"어서 말해 봐."
"아닙니다. 제가..."
"할 말이 없느냐?"
"네, 아버지."
서 있던 니일은 뒤에 있는 소파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고개도 들지 못했다. 푹 숙인 니일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때 아버지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히 스치고 지나갔다.
"됐다."
"?..."
"할 말 없으면 그만 네 방에 가서 자거라!"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던진 다음 곧장 서재를 나가버렸다. 소파에 처박힌 니일의 눈에서는 더욱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덧 어깨가 들먹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조용히, 그리고 슬픔을 감추지 못하며 지켜보던 어머니가 급히 아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옆에 무릎 꿇듯이 앉으며 입을 열었다.
"진정해라, 얘야."
어머니의 따뜻한 말에 니일은 더욱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다 잘될 거다."
어머니의 목소리에도 눈물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만 가서 자거라, 응? 자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질 거다. 자, 어서 네 방으로 가거라."
니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할말이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의 모든 생각과 모든 마음은 암흑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어떤 것도 어떤 일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랫만에 들어와 보는 자기의 침실이었다.
니일은 침대 곁에 정성껏 접혀져 있는 자신의 잠옷을 바라보았다. 그것 역시 오래 전에 입었던 것이었다. 다른 방안의 것들은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불을 켜지 않고 침대 곁의 스탠드만을 켰다. 주변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속에 있는 니일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일제히 압박을 가해 오고 있어서였다. 웰튼 아카데미를 그만둔다는 것은 사형선고 그것이었다. 거기에는 죽은 시인의 사회가 있다. 모임장소인 동굴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친구들이 있다. 신선한 충격과 함께 인간의 긍지를 깨닫게 해 준 키팅 선생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 인생의 탐구와 함께 자기 각자의 인간적인 개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가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런 모든 것들은 바로 니일 자신이다. 자신의 살아있는 생명이다. 그것들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그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바로 귀중한 생명을 버리는 일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생명을 버린 후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혼이 남게 된다는 종교적인 신념은 또 별개의 것이다. 아버지는 그에게 있어서 이미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그것도 미련하기 짝이 없이 남편의 독선으로부터 아들을 보호조차 못해 주는 어머니가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였고, 그 멤버였고, 키팅 선생이었고, 시였고, 웰튼 아카데미였고, 기숙사의 자기 방이었고 룸메이트인 앤더슨이었다. 그것들이 없어진다면 그것들로부터 떠나게 된다면,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니일 역시 존재도 흔적도 없이 산화되어 영원히 사라지고 말게 될 16세 영혼이 어디에선가 방황하게 될 뿐이다. 현실적으로 아버지는 실천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선포한 이상 그는 반드시 실행에 옮길 것이다. 이튿날 날이 밝으면 웰튼 아카데미에 전화를, 어쩌면 직접 찾아가서 노란 교장한테 니일의 전학을 실현시킬 것이다. 그럴 때의 주위의 엄청난 반응들... 안돼, 그럴 수는 없어, 난 웰튼 아카데미를 떠날 수 없고 떠나서도 안돼, 군사학교엔 못 가, 난 지금의 누구로부터도 떠날 수 없어, 없어, 없어...내가 니일이라면, 내가 살아있다면 난 웰튼 아카데미와 죽은 시인의 사회에 있어야만 해...
니일은 갑자기 앉았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한 여름밤의 꿈에서의 팩의 꽃관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한없이 길고 깊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무대에서의 팩이 다시 살아나는데, 가련하게도 그 팩한테는 정열이 식었다. 모두 말라버렸다. 그의 몸 안에는 이미 한 방울의 정열도 남지 않고 몽땅 고갈되었다. 그는 팩의 꽃관을 머리에 쓴 다음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 때문에 드넓은 바깥의 밤 풍경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창문 하나를 위로 밀어 올렸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시 하나의 창문을 밀어 올려 열어놓자 비로소 밤하늘이 환히 내다보였다. 그와 함께 차가운 밤바람이 휘익 몰아쳐 들이닥치며 방안에 있던 것들이 잔뜩 목을 움츠리며 떨게 만들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서 어둠의 적막 속으로 가라앉는 겨울의 밤 풍경을 내다보았다. 윗옷을 벗은 맨몸에 팩의 꽃관을 쓴 채였다. 깊은 밤중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서 있는 니일의 모습은 이미 현실 속의 그가 아니었다.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겨울 밤바람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그의 맨살도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무감각해진 상태였다. 아버지로부터 웰튼 아카데미를 떠나라고 듣는 순간에 시작된 그의 체념은 거센 저
항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렬하게 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삶과 그 의미에서의 존재가치의 상실은 차라리 극단적인 선택만 못하다고 결론지어진 것이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는 모습 역시 평소의, 지금까지의 니일은 아니었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움직일 뿐인 육체였다. 아직 호흡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껍데기일 뿐 그에게는 모든 것이 공허하게 뚫려 있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듯한, 죽은 듯한 발걸음이 침실을 떠나 계단을 향했다. 느릿느릿, 유령처럼 아주 가볍게 그러면서도 바위처럼 무겁게 계단을 밟아 아래층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같은 시간 니일의 어머니는 침실에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곁에 누운 채 잠을 이루지 못하며 흐느꼈다. 하나 뿐인 아들의 애처롭던 모습이 그럴수록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사납고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 앞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이었다. 그 시절의 꿈과 낭만을 무참히 짓밟히며 눈물이 가득히 고였던 눈망울이 애타게 구원을 요청해오는 듯했다.
"진정하구료."
어느새 자상한 남편으로 돌아와 있는 니일의 아버지였다. 그럴 때는 상대의 마음을 넓게 헤아렸다. 그는 아내가 아들 때문에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이 위로해 주어야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극단적이고도 치밀한 야누스적인 양면이었다.
"다 잘될 테니 어서 진정하고 자도록 해."
니일의 어머니는 희미한 소리로 여전히 흐느꼈다. 그 소리가 문득 니일 아버지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것은 확실히 이상한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내의 곁에 모로 누웠다. 고민에 휩싸인 아버지의 얼굴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아직 어린 그 애에게, 그보다 그 아이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다는 자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또한 자신이 아들에게 내렸던 결정을 재고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얼굴 같기도 했다. 비로소 니일이 웰튼 아카데미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같은 시간.
니일은 어떤 방에 있었다. 그는 스탠드의 불빛을 약하게 해서 겨울 앞에만 볼 수 있도록 한 상태에서 무엇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작은 물건인데, 그것은 한 개의 열쇠였다. 열쇠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무엇 때문인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니일 자신도 확연하게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손은 계속 떨렸다. 주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니일은 분명히 살아있는데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극도의 비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숨을 죽이는 게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사실상 없는데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윽고 떨리는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열쇠를 책상서랍의 자물쇠에 꽂았다. 조용히, 아주 신중하게 옆으로 돌렸다. 어떤 금속성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찰칵, 하는 아주 미미한 소리가 살짝 책상을 진동시켰을 뿐이다. 니일의 두 손에 의해 서랍이 천천히 열렸다. 그와 동시에 나타난 것은 천으로 감싸 놓은 어떤 물건이었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약간 길쭉한 형태로 손아귀에 적당히 잡힐만한 것이었다. 잠시도 그것을 내려다보던 니일이 한 쪽 손을 그리로 가져갔다. 천으로 술술 말아 놓은 것은 감촉이 섬찟하게 딱딱한 쇳덩어리였다. 그게 무엇인지 니일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주위가 캄캄했기 때문에 니일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어둠 속에 묻힌 채 음침한 괴물처럼 조금씩 움직일 뿐이었다. 희미한 불빛에 보이고 있는 것은 쇳덩이를 움켜잡은 니일의 손이었고, 그 손이 파랗게 떨리고 있는 광경이었다.
니일의 죽음
우리는
내일을 꿈꾸는 자
하지만
내일은 와주지 않는다.
우리는
영광을 꿈꾸는 자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본심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자
하지만
새로운 날은 이미 와 있고
우리는
싸움터로부터 도망치려는 자
하지만
그 싸움은 우리의 의무...
우리는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진심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간절히 기다리지만
미래는 아직 사상의 누각에 불과하며
예지를 꿈꾸며
그 예지를 매일 피하기만 한다.
도움을 바라지만
그 도움은 이미 우리의 수중에 있으니...
그럼에도 우리들은 잠잔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잠잔다...
니일의 부모는 아직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의 흐느낌 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있었지만, 그 곁에서 눈감은 채 모로 누워있는 아버지 역시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토록 깊고 심각한 심리적 갈등을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었다. 그들은 침실 밖으로부터의 어떤 소리도 알아듣지 못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밤 바람소리, 조용히 계단을 내려 밟는 소리, 살아있는 존재가 움직이는 소리 등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적막한 시간이 숨죽일 듯이 지나가고 있을 때. 니일의 아버지는 겨우겨우 조금씩 잠이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흐느낌 소리도 침대 속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더니 끝내는 아주 조그맣고, 그런 다음에는 사라져 버린 채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들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그 바람은 흔적도 없이 나타나더니 고요에 휩싸인 집안을 소름끼치게 떠돌아다녔다. 불길한 예감이 만연했다. 금방이라도 뇌성벽력이 대지 위의 생물을 짓눌러버리며 작열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하늘과 땅의 자리다툼이라도 시작되려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그렇게 형태 없이 집안을 휘감으며 떠돌고 있을 때였다.막 잠이 들었던 니일의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퍼뜩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비몽사몽간에 들은 소리가 아니었다. 분명히 고막을 찢을 듯이 날카롭게 집안 어디에서나 울려 퍼진 소리였다. 불길한 예감이 니일 아버지의 뇌리를 관통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지?"
그 바람에 역시 막 잠들었던 어머니가 어렴풋이 깨어났다.
"왜 그러세요?"
"무슨 소리가 났어."
"어디서요?"
"집안 어디에서야."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 당신은..."
니일의 어머니도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남편은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불길하게 관통했던 예감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침대에서 내려서며 벗어놓았던 가운을 걸쳤다.
"무슨 일이에요?"
그의 아내 역시 새삼 어떤 커다란 불안에 사로잡히자 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실을 나온 그는 복도에서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죽음에 휩싸인 듯이 고요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니일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니일."
낮게 부르며 다가간 그는 방문이 열려있음을 발견하고 갑자기 큰소리로 불렀다.
"니일!"
대답이 없었다. 방문을 활짝 열고 휘둘러보았다. 니일의 모습은 거기에 없었다. 문득 열어 젖혀진 창문에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그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니일!"
다시 커다랗게 소리쳤지만 역시 응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여보. 니일이 어떻게 됐나요?"
니일의 어머니도 이미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남편은 이미 급한 걸음을 아래층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불길한 예감 전과 아닌, 그보다 몇 백, 몇 천 배나 더 두려운 어떤 생각이 그의 맥박을 정신 없이 뛰도록 만들었다.
"니일!"
다시 소리쳐 불렀다. 이번에는 사방을 향해 소리질렀다. 어디든 있으면 대답하리라는, 그보다 니일이 이미 집안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는 극도의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것은 조바심이라기보다 공포심이었다.
"니일!"
역시 대답은 없었다. 순간 그의 뇌에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는 급히 자기의 서재로 향했다. 거기에 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로 하여금 새삼스러운 조바심과 두려움으로 가슴이 걷잡을 수없이 뛰도록 만들었다. 불안감에 쓰러질 것 같았다. 역시 문이 열려 있었다. 누군가 안에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 들어갔기 때문에 문이 열렸다는 생각은 들어
간 사람이 니일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으로 바뀌려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책상 위의 스탠드가 켜져 있는 게 보였다. 그 불빛은 책상 뒤쪽의 바닥 한 곳을 밝게 비치고 있었다. 유난히 그곳을 밝게 비치고 있었다. 다른 곳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스며든 달빛 속에 희미한 그림자만 보였다.
바로 그 순간.
니일 아버지의 시선이 한 곳으로 곧장 달려갔다. 책상 저쪽 불빛이 유일하게 밝혀주고 있는 바닥이었다. 거기서 무엇인가 또 보였다.
"니일..."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겁먹은 몸짓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 형태가 분명해졌다. 드디어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 있게 된 순간.
"니일, 니일!"
갑자기 그의 입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은 분명해졌다. 거기 바닥에 길게 뻗은 채 꼼짝도 않는 것은 사람의 손이었다.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몹시 가녀리게 보이는 소년의 손이었다.
"니이일! 내 아들아!"
그의 입에서는 드디어 커다란 절규가 터져 나왔다. 달려간 그의 눈에 쓰러져 있는 니일의 전신과 함께 권총도 보였다. 그의 아내가 정신 없이 달려오며 울부짖었다.
"오오, 하느님! 니일, 내 아들아!"
이들 부부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는 니일의 시체 옆에서 짐승처럼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내 아들아! 안돼! 이럴수는 없어. 네가 죽다니, 죽다니이..."
반응이 있을 리 없었다. 한 방의 총소리와 함께 16세의 젊음을 산화시킨 니일은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한밤중 때아닌 통곡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며 허공을 날아갔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날아갔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비통함이 너무도 처절하게 터져 나왔다. 죽은 시인의 사회멤버인 니일은 실제로 죽은 시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른 새벽.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니일이 없는 방에서 룸메이트 앤더슨이 혼자 잠들어 있었다. 지난 밤 니일의 성공적인 연극 때문에 동굴에 모여 늦도록 축하하는 분위기를 가졌기 때문에 세상모르며 잠든 것이다. 그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알아듣지 못했다. 잠겨있지 않은 문이 열리고 거기에 나타난 것은 랄튼을 선두로 해서 오버스트릿과 믹스 세 사람이 있었다.
"앤더슨."
오버스트릿이 조용히 앤더슨의 어깨를 흔들었다. 반응이 없자, 그는 다시 반복했다.
"앤더슨, 일어나 봐."
잠결에 그 소리를 알아들은 앤더슨이 부시시 눈을 떴다. 그는 침대 곁에 서있는 오버스트릿을 보자 이상한 생각이 들어 퍼뜩 눈을 크게 떴다.
"무슨...일..."
그가 더듬거릴 때였다.
"불행한 소식이 있어."
"뭐라구?"
울먹이는 게 분명한 오버스트릿의 말에 앤더슨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오버스트릿의 뒤에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다시 오버스트릿의 얼굴을 쳐다보던 앤더슨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버스트릿이 울먹이며 말해 주었다. 그의 두 눈에도, 뒤에 있는 친구들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히 고여 있었다.
"니일이 죽었어..."
"니일이!"
앤더슨은 숨이 콱 막혀 아무소리도 낼 수 없었다.
"자살했대, 권총으로..."
앤더슨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몸도 마음도 한꺼번에 침대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서있는 그대로, 침대에 앉은 그대로 친구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밖에는 여명의 빛이 밝아오기 직전의 하늘 동쪽 저쪽이 희끄무레하게 보이고 있었다.
앤더슨, 오버스트릿, 믹스, 랄튼 등은 겨울 모자를 뒤집어 쓴 채 눈 쌓인 채 드넓게 펼쳐진 캠퍼스 저쪽을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앤더슨은 아직 울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성격이 예민한 그는 필사적으로 치미는 슬픔을 억제하고 있었다. 비할 데 없이 맑은 새벽공기와 함께 눈 쌓인 경치는 한 폭의 예술작품 그것이었다.
갑자기 앤더슨이 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르던 친구들도 멈추었다. 모두들 니일과 가장 친했던 앤더슨의 일거일동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들의 눈에는 니일과 앤더슨의 다정했던 한 때가 선명하게 보였다. 걸음을 멈춘 앤더슨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참 아름답지, 새벽경치가?"
그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너무도 조용하고, 지나치게 침착한 앤더슨의 표현은 진심으로 새벽 경치에 탄복한 감탄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난 아직 새벽 경치가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몰랐어...이건 바로 장관이야, 장관..."
친구들이 의아해하며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볼 때였다. 갑자기 앤더슨의 몸이 기우뚱했다. 계속해서 허리를 꺾는가 싶었는데 벌써 엎드리듯 웅크려 앉고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심하게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앤더슨!"
"토오드으!"
친구들이 달려들어 부축했다.
"진정해!"
앤더슨은 계속 심한 구역질을 하며 쩔쩔맸다. 그가 겨우 어느 정도 진정한 것은 잠시 후였다.
"니일이 죽다니 말도 안돼! 그가 왜 죽어야 해!"
앤더슨은 주먹으로 쌓인 눈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니일은 죽임을 당했어! 그래, 니일을 죽인 건 그의 아버지야. 아버지가 죽였다안마알야아!"
"앤더슨, 진정해."
친구들은 정신 없이 앤더슨을 붙들어 일으키려 했다. 갑자기 앤더슨이 친구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이어 그는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몇 걸음 뛰더니 이내 걸음이 느려지며 엉거주춤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소리쳤다.
"니이일! 니일!"
앤더슨의 처절한 절규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멀리 알 수 없는 곳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친구들 가운데 누군가 먼저 후 하고 흐느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친구의 어깨가 갑자기 격렬하게 들먹였다. 꿈이 있고, 존재가치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벅찬 가슴으로 내일을 바라보던 한 친구의 죽음은 이들 세 명의 친구들을 끝내 엉엉 소리 내어 울게 만들어 놓고야 말았다. 랄튼, 믹스, 오버스트릿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커다랗게 소리 내어 울었다.
니일의 홀연한 죽음은 그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키팅 선생의 가슴속은 형언할 수 없었다. 연극이 끝난 후 아버지에게 끌려가던 그게 마지막 모습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텅 빈 교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책상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운데쯤에 있는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내려다보는 키팅의 두 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회와 고민과 고통이 뒤섞이고 있었다.
니일이 앉았던 자리였다. 금방이라도 니일이 그 특유의 귀여운 미소를 지으면서, 선생님, 하고 부를 것만 같았다. 언젠가 캠퍼스에서, 오오 선장님, 우리 선장님(Oh Captain, my Captain)하고 부르던 낭랑한 목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키팅은 자꾸만 격해지는 자신의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제했다. 그는 니일의 책상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한 권의 손때묻고 두터운 책이 있었다. 그것을 천천히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표지를 펼치자 지난날 자신의 웰튼 아카데미 시절 직접 했던 사인이 나타났다. <죽은 시인들>이라는 글자는 숱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선명하게 보였다.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사랑한 제자 니일이 언제나 앉았던 바로 그 의자였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이 한 줄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니일! 니이일...!"
그는 마음속으로 누구보다도 더욱 처절하게 절규했다. 니일의 불행한 종말은 키팅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졌다. 모처럼 큰 뜻을 품었던 웰튼 아카데미하고의 인연도 끝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날.
듣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와 끝내 울어버리게 만들 것만 같은 백파이프 연주와 함게 니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니일의 부모는 완전히 넋 나간 상태에서 아들의 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란 교장을 비롯한 전 교직원과 학생들이 침통한 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니일의 장례식이 끝났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멤버들은 장례식 낸 오열을 감추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난 직후였다.
노란 교장은 학생들에게 엄숙함 표정으로 학교의 방침을 전달했다. 그들은 니일의 죽음을 다른 곳에서 정당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니일군의 죽음은 너무나 가슴아픈 비극인 바..."
노란 교장은 일단 니일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에게 웰튼 아카데미의 명예졸업장을 수여할 것이며, 가장 우수하고 모범생이던 그의 죽음을 가슴 깊이 애석하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노란 교장은 더욱 엄중한 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이미 제군들의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 전후 사정을 상세히 설명드렸습니다. 부모님들은 한결같이 진심으로 애도해 주셨습니다. 또한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니일 가족의 요구대로 우리는 이번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할 것인 바, 여러분의 협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아들의 죽음에 대해 상세히 조사해 달라는 니일의 부모의 요구가 있었다는 말이 그것을 의미했고, 그 말은 특히 앤더슨으로 하여금 심한 반항심을 느끼게 했다. 누구보다도 니일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니일을 아버지가 죽였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집회가 끝난 다음이었다.
랄튼, 앤더슨, 오버스트릿, 피츠, 믹스 등 멤버들은 기숙사 건물의 지하실에 있는 창고 안에 모였다. 노란 교장의 경고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앤더슨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통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어떡하면 좋지?"
누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할 거야."
"그러니 걱정이지. 노란의 말 들었지? 이번엔 쉽게 끝나지 않을 게 분명해."
"어떻게 될까?"
"노란은 니일의 불행을 우리한테 씌우려 하고 있어."
"말도 안돼!"
"어쩌면 우리 멤버들은 몽땅 퇴학처분을 받을지도 몰라."
"어째서?"
"학교에서 바라는 게 그거거든."
"그거?"
"희생자 말야. 이런 사건이 생기면 학교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나빠지거든."
"그래서 희생자를 내고 얼버무린단 말야?"
"그런 셈이지."
"희생당하는 우린 어쩌구?"
"그건 우리 사정이지 학교 사정이 아냐."
"기가 막히군, 교활한 늙은 망아지 같으니!"
이들은 한결 같이 학교측의 처사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니일이 자살한 것은 기정 사실이고, 그가 죽게 된 동기 역시 명명백백했다.앤더슨의 주장은 바로 그것이었다. 자라나는 꿈나무를 강제로 다스리던 아버지가 그만 꺾어버린 것이다. 사실을 밝힐 뜻이라면 그게 먼저 규명되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판이 두려워서, 니일 아버지의 비인간적인 요구가 두려워 학생들을 또다시 희생시키려 드는 처사가 젊은 피를 끓게 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불쑥 말했다.
"누군가 교장한테 고자질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무엇을?"
"우리의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해서 말야."
"하긴..."
또 다른 학생이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맞았어. 바로 그 녀석이야."
"그 녀석?"
"카멜론!"
이들의 마음은 일제히 그 방향으로 쏠렸다. 그동안 카멜론의 태도에 의심이 가는 점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놈이야! 놈이 교장실에 달려가서 이미 다 고해바쳤을 거야."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놈을 붙잡아서 족쳐볼까?"
"그런 녀석은 친구의 의리가 뭔지도 몰라.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잡종이라니깐!"
"모두들 신중히 생각해 보자. 녀석은 혼자고 우린 여럿이잖아."
"숫자로 꺾어보자는 말인데, 그게 어려울 거야."
"어째서?"
"놈에게는 교장이 있거든."
"야, 그럼 결국은 키팅 선생님도 당하게 되지 않을까?"
"무사하지 못할 거야."
"되게 심각하게 생겼군."
여럿 중에 앤더슨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니일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생각 같아서는 니일의 아버지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애당초 가지고 있지 못한 앤더슨이었다.
"나쁜 자식 같으니!..."
누군가 다시 카멜론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다. 카멜론이 더욱 의심받는 이유도 있었다. 그들의 모임을 알려 주었지만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믹스가 두 번이나 말했지만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것은 충분히 의심받을만한 일이었다.
"이제 차례로 우릴 불러들이겠지..."
그때 문 쪽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학생들은 깜짝 놀라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비교육적 현실
비밀회합이었다.
그것 역시 노란 교장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얼른 담배를 비벼 끄던 학생들은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불쑥 창고 안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카멜론이었던 것이다. 학교측의 누구인가 싶어 긴장했던 학생들은 순간적인 실망과 함께 또 다른 상태에 도달했다. 앤더슨을 제외한 모두가 들어서는 카멜론을 일제히 노려보았다. 멋모르고 들어서던 카멜론이 주춤했다.
"왜들 그래?"
"너 솔직히 말해."
"무슨 소리야?"
"시치미 뗄 작정이야? 우린 다 알고 있단 말야."
"도대체 뭘?"
"네가 교장한테 고자질했지?"
카멜론은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리며 별안간 화를 냈다.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그러나 다른 학생들의 눈에는 그러는 카멜론의 모습이 비열하고 치사하게만 보였다. 그들은 카멜론이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해 노란 교장한테 고자질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랄튼이 가장 흥분하고 있었다.
"치사한 짜식 같으니!"
그는 대뜸 달려들어 카멜론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도대체! 니들 미쳤어?"
친구들이 허겁지겁 랄튼을 떼어놓았다. 멱살이 잡혔던 카멜론은 분함을 참지 못하며 씩씩거렸다. 그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옷매무새를 고치며 모두를 노려보았다.
"너 똑똑히 들어둬. 랄튼!"
"?..."
"일을 분명히 하기 위해 가르쳐 주지. 이 학교에는 윤리 규정이 있단 말야. 만일 교사한테..."
어떤 질문을 받았을 경우 진실대로 대답해야 되는 의무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 의무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누구나 퇴학을 맞게 된다는 카멜론의 말에 랄튼이 또 다시 덤비려 했다.
"이러지 마, 랄튼."
믹스와 오버스트릿이 얼른 랄튼을 끌어당겼다.
"쟤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절대 안돼. 그건 곧바로 퇴학당하는 걸 의미한단 말야!"
"다 소용 없어. 어차피 여기 있는 우리들은 퇴학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랄튼은 분해서 못견디겠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는 계속해서 카멜론을 노려보았다. 카멜론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가소롭다는 듯이, 그렇지만 친구이기 때문에 조언해 준다는 듯이 기묘한 표정을 둘러보았다.
"잘 알고 있구나."
"뭐야!"
"똑똑히 들어둬. 바보가 아니라면 너네들도 애당초 교장선생한테 협력하는 게 좋을 거야."
"너 말 다했냐?"
카멜론은 이제 무서울 것도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했다.
"학교가 노리는 것은 우리들이 아니란 말야. 우리들은 모두가 희생자일 뿐이야. 그것도 모르니? 니일과 우린 희생자란 말야!"
"카멜론."
녹스 오버스트릿이 따져물었다.
"희생자라니, 그리고 학교가 노리는 건 누구지?"
"키팅."
"뭐라구?"
"선장이란 말야."
"그래서?"
"그 사람 설마 이번 일에서 책임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지."
"키팅 선생이 니일의 자살에 책임이 있다구?"
"그래."
"어떤 놈들이 그래?"
어찌된 영문인지 카멜론은 더욱 용기백배 하는 듯했다. 그런 모습이 친구들을 더욱 배신감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었지만, 카멜론은 마치 학교측으로부터 비밀 카드라도 받은 듯이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도 잘 알 거야. 학교에서 요구하는 게 누굴 것 같아? 그리고 또 있어. 우리들이 이런 짓을 하게 된 동기가 어디 있지? 키팅 때문이었지?"
만일 키팅이 없었다면 지금쯤 자신의 방에 얌전히 앉아 공부나 하며 <의사선생님>이라고 불려질 날을 꿈꾸었을 거라고 했다. 니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거짓말이야!"
뜻밖에도 앤더슨이 소리쳤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해서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그건 키팅 선생 때문이 아냐! 아니라구! 니일은 자신이 선택해서 연극을 했던 거야!"
"내 생각은 니들하고 달라."
카멜론은 무언가 흥미 있는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이 기회에 키팅이 학교로부터 벌칙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래야만 자신들의 장래를 망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막 끝나기 직전이었다.
"나쁜놈!"
소리친 랄튼이 번개 같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어디서 그런 스피드가 나왔는지 순식간에 그의 주먹이 카멜론의 얼굴에 강타를 먹였다. 졸지에 일격을 받은 카멜론은 저만큼이나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코에서는 벌써 시뻘건 피가 터지며 범벅이 되었다. 랄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덤벼들 기세였다. 하지만 믹스가 피츠가 재빨리 그를 붙들고 뒤로 끌어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 얻어터진 카멜론은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일어서며 씩 웃었다. 가소롭다는 표정과 함께 랄튼을 똑바로 노려보며 정확한 반응으로 말했다.
"랄튼, 분명히 알아 둬."
"?..."
"넌 이미 자신의 퇴학명령서에 서명했어. 넌 이제 끝장났어. 바보 같으니."
랄튼이 다시 카멜론을 향해 돌진할 기세였다. 카멜론은 겁나지 않는다는 듯이 피가 터져 흐르는 얼굴을 쓱 문지르며 큰소리로 말했다.
"잘못 알아도 크게 잘못 알았어. 너네들."
"저놈이!..."
"공연히 욕지거리나 한다고 다 되는 줄 알아?"
"닥쳐!"
"똑똑히 들어. 니들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나하고 같이 행동하는 거야!"
그는 언성까지 높여가며 학교측을 대변하듯 계속했다.
"학교에서는 이미 모든 사실을 다 알고있어."
"네놈 때문이야!"
"맘대로 생각해.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야.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된 지금 키팅은 구할 수 없어. 하지만 너네들 자신의 목은 그렇지 않아. 지금부터라도 내가 하는 대로 따르면 퇴학을 면할 수 있단 말야!"
카멜론은 그 말을 끝으로 휙 돌아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뚜벅뚜벅 떨어지는 그의 구둣발 소리가 이상하게 학생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 중에 니일은 이미 죽었고, 카멜론을 제외한 전원에게 퇴학명령서가 곧 날아올 것 같은 긴박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묵묵히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누구도 어떤 묘책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란 교장의 개인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참여한 멤버들을 중점적으로 찍어 놓고 한 명씩 교장실로 불러들였다. 멤버들은 카멜론 한 명만 제외한 전원이 예측 불허의 긴박감과 함께 초조와 불안이 연속되는 순간이었다. 니일이 없는 방에 혼자 남게 된 앤더슨은 누구보다도 불안한 상태에서 숨조차 죽였다. 카멜론 말대로 웰튼 아카데미에서 퇴학 처분을 받으면 그것은 인생의 끝이나 다름없었다. 니일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앤더슨의 입장이 누구보다도 절박했다. 그렇지 않아도 모범생인 형의 그늘에 묻혀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그였다. 앤더슨은 문을 반쯤 열어놓고 복도에서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때 헤이거 박사의 모습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따라오는 것은 믹스였다. 믹스는 잔뜩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또한 그럴 수가 없도록 얌전해서 마치 순한 양과 같아 보였다. 앤더슨으로 하여금 믹스가 노란 교장한테 어떻게 당했는지 짐작케하는 광경이었단 것이다. 헤이거 박사는 믹스의 방문 앞에까지 걸어왔다. 믹스로 하여금 다른 학생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지켜서있었다. 그는 믹스가 방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방문을 약간 열어놓고 지켜보던 앤더슨은 분명히 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층으로부터 내려와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믹스의 얼굴이었다.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는 앤더슨의 마음속에서는 또 새로운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다음은 오버스트릿 차례였다. 믹스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가지 감시하던 헤이거 박사가 큰소리로 부르자 오버스트릿의 방문이 열렸다. 그 역시 모든 것을 각오한 표정이었다. 그는 얌전히 헤이거 박사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앤더슨의 가슴이 요란하게 소리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는 헤이거 박사와 오버스트릿의 모습이 이층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려 조용히 문을 열고 믹스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조심조심 문을 두드렸다.
"믹스."
대답이 없었다.
"나 앤더슨이야. 좀 물어보고 싶은데 괜찮겠어?"
방 안에서 들려오는 믹스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다른 것이었다.
"돌아가 줘."
"믹스."
"나 공부해야 돼.
"궁금한 게 있어. 누완다 말야. 어떻게 됐지?"
"뻔하지 퇴학이야."
앤더슨의 가슴이 또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그대로 돌아설 수 없었다. 극한 상황에 몰린 그로서는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뭐래?"
"말도 마."
"어째서?"
"다 알고 있어. 모든 걸."
"정말야?"
"그렇다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 줘, 앤더슨."
"..."
"너도 알아서 해."
앤더슨은 믹스의 충고 아닌 충고를 등뒤로 들으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으로는 분명히 자기차례일 것 같아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랄튼은 퇴학처분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랄튼 하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비굴하게 웰튼 아카데미에 남아 있느냐, 정당하고 용기 있게 퇴학을 당하느냐의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수난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앤더슨은 어쩔 수 없이 또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며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버스트릿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아직은 복도가 죽은 듯이 조용했다.
복도의 구석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린 것이 그때였다. 이윽고 헤이거 박사와 오버스트릿의 모습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앤더슨은 믹스때보다도 더욱 긴장하며 똑똑히 보려고 두 눈을 문틈으로 가져갔다. 금방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오버스트릿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무엇인가 누구를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더 이상 용기가 없었다. 앤더슨은 소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방문을 닫았다. 문 옆벽에 등을 대고 기대서며 두 눈을 감았다. 머리 속에서 무엇이나 윙윙 거렸다. 태풍이 불어닥치는 것만 같았다. 오버스트릿 역시 굴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그 표정이 그런 생각을 하도록 해 주었다. 자신의 비겁했던 굴복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토드 앤더슨!"
헤이거 박사가 커다란 목소리로 불렀다. 앤더슨은 심호흡을 가슴 속 깊이 했다. 주목을 불끈 쥐어 보았다. 이어 두 번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빨리 나가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헤이거 박사는 복도 계단 아래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설령 헤이거 박사가 말을 걸어온다 해도 앤더슨은 대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가지, 앤더슨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노란 교장만이 아니 다른 사람이 기다린다는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사형장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형수 같은 마음으로 앤더슨이 교장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두려운 마음으로 안을 둘러보던 앤더슨은 의외의 광경에 깜짝 놀랐다. 뜻밖에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장과 같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아버지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의 그는 부모의 출현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은 물론, 해가 되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부모의 출현이 불안함을 더욱 증폭시켜 줄뿐이었다. 학교측에서 교활한 교장이 이미 완전하게 각본을 짜놓은 다음 통보하는 형식을 불러들인 게 분명하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리 와서 앉도록. 앤더슨군."
부모님 앞이기 때문인지 노란 교장은 엄숙하면서도 나름대로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앤더슨은 주춤주춤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사나운 맹수 우리에 들어선 기분에 등골이 오싹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어쩔 수 없이 약간 떨어진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싸늘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감히 부모를 거역하고, 감히 학교당국의 규칙을 위반하고 감히 옳지 못한 서클에 가담한 아들을 엄하게 단죄하기 위한 목적으로 노란 교장과 합작하고 있는 듯했던 것이다.
"앤더슨군."
노란 교장은 그의 부모 쪽을 힐끗 바라본 다음 그 눈길을 앤더슨에게로 곧장 던져왔다.
"우리는 이미 모든 사실을 상세히 파악해 놓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
"부모님들도 이렇게 와 계신 만큼 모든 것을 진실되게 대답해주면 좋겠다. 학교로서도 선량한 학생은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앤더슨은 교장의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그 다음으로 튀어나올 질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면 질문하겠다. 토드 앤더슨, 너도 그 죽은 시인의 사회에 한 조직원인가?"
앤더슨은 얼른 대답할 수 없었다. 입에서 말이 되어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와 어머니 쪽을 바라보았다. 다시 노란 교장 쪽을 바라보았다. 이때 그의 머리 속에서는 어떤 단호한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느 동료 다도 소극적이던 그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소극적인 점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용감하게 대응할 결심이었다. 앤더슨은 노란 교장의 질문에 대해 사실대로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서 대답해라, 앤더슨!"
무뚝뚝한 아버지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예기치 못했던 일에 앤더슨은 흠칫 놀랐다. 아버지의 목소리 속에는 무서운 협박이 담겨 있었다. 이 수난 앤더슨으로 하여금 가장 두려운 존재로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노란 교장이 아닌 그 아버지였다. 세상에 태어나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한번도 사랑을 베풀어 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성적이 우수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큰아들만을 편애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독촉으로 갑자기 더욱 움츠러든 앤더슨은 알아들을 수도 없게 작은 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 너무 적은 소리라 목구멍으로 기어들어 갔기 때문에 앞에 앉은 교장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좀 더 큰소리로 대답해라. 들리지 않았다."
"..."
"좋다. 반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와 같은 사실은 이미 밝혀졌으니까."
노란 교장은 다시 앤더슨의 부모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전적으로 교장만을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울러 앤더슨에 대해서는 굴복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위압적이고도 무서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노란 교장은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는 더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책상 위에 있던 서류 같은 것을 집어들었다. 앤더슨의 두려운 눈빛이 노라 교장의 손에 들려진 서류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이것은..."
노란 교장은 다시 한번 앤더슨의 부모 쪽을 바라본 다음 계속해서 말했다, 그와 같은 그의 행동은 모든 일이 네 부모님과 합의된 것이니 알아서 해, 라는 협박이 담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너희들의 모임인 불법 조직 내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에 대해 세부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앤더슨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카멜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모든 사실을 상세히 고해바쳤으리라는 확신과 함께 있다면 자신도 랄튼처럼 때려 주고 싶어 잠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희들을 가르치는 키팅 선생이 어떤 방법으로 너희들을 유혹했고, 그리하여 불법적인 비밀클럽을 조직하게 된 경위는 물론..."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클럽이 과연 얼마나 엄청나고 타락적인 행동을 유발시키게 되었는가, 그 원인 및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교장의 말이었다.
"더구나 키팅이라는 선생이, 제자를 선도해야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선생이 본분을 망각하고 그와 같은 일이 학부모님의 엄하신 명령에 위반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노란 교장은 곁에 키팅 선생이 있기라도 한 듯이 점차 과격해지는 말투로 계속했다.
"교실 안팎을 구별하지 않으며 니일 페리를 유혹, 그로 하여금 연극에 집착하도록 만든 사실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말은 극단적인 내용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키팅 선생이 현직교사라는 직책을 남용, 니일 페리로 하여금 귀중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이 엄청난 말이 계속되는 동안 앤더슨은 여러 차례나 심한 반발심을 느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모두 꾸며낸 모함입니다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무섭게 노려보는 아버지, 니일의 경우와는 달리 어머니까지 합세해서 쏘아보는 눈초리 때문에 꾹꾹 눌러 참았다. 설명을 끝낸 노란 교장은 들고 있던 서류를 앤더슨에게 건네 주며 다시 말했다.
"이게 바로 그 서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어라. 그런 후에 고쳐야 될 부분이나 달리 보태고 싶은 내용이 없으면 서명해라. 그것으로 네 일은 끝이다."
서류를 받아든 앤더슨의 손이 파랗게 떨렸다. 노란 교장의 말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한자한자 빼놓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교장의 모함이 그대로 기록된 서류에 맨 먼저 서명한 것은 카멜론이었다. 퇴학처분이 내려졌다는 누완다의 서명은 없었고, 후회로 눈물을 흘렸던 믹스와 오버스트릿의 사인이 앤더슨의 눈에 들어왔다. 그 자신은 네 번째로 서명해야 되는 입장이었는데, 비록 아버지와 어머니가 감시한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누완다처럼 용기 있고 의지력이 강해지고 싶었다.
"저어..."
앤더슨은 마지막으로 하나지 물을 결심이었다. 그가 몹시 더듬거리며 질문한 것은 자신이 서명하면 키팅 선생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었다. 순간 이미 예고된 일이 발생했다.
"닥쳐라, 토드!"
소리내며 벌떡 일어선 것은 앤더슨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섭게 두 눈을 뜨고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매질을 할 듯이 노려보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다시 소리쳤다.
"물론입니다. 앤더슨씨.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만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물론 앤더슨군도 알아야만 합니다. 지금까지는 미처 진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키팅 같은 자의 선동에 넘어갔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앤더슨은 눈앞이 혼란해졌다. 수난적으로 의식까지 혼미해지며 정확한 사리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런 때 니일이 곁에 있어주었다면, 하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더욱 혼돈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수업
노란 교장은 자못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키팅이 어떻게 법률에 위반되는 행위를 범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법률까지 들먹이는 바람에 앤더슨은 더욱 당황했다.
"만일 그와 같은 사실이 확실히 나타나게 될 경우 키팅은 기소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 제군이나 다른 학생들에 의해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키팅 같은 자는 다시 우리 학교에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앤더슨은 그 충격적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니일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비극이 바로 키팅 선생이 강의를 할 수 없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이제 됐으니 어서 서명이나 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 것은 앤더슨의 아버지였다. 순간 앤더슨의 눈빛이 번쩍했다. 비록 과격하게 맞대고 소리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으로 이의를 제기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교육은...그건 키팅 선생님의 인생입니다...그분께는 교육만이 전부가 됩니다."
비록 더듬거렸지만 그 음성은 날카로운 것이었다. 다시 아버지가 주먹을 휘두를 듯이 하며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냐! 하고 소리쳤을 때였다. 앤더슨은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아버지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버지는 언제 나한테 신경 같은 걸 써 주셨나요? 그렇지만 키팅 선생님은 달라요. 나한테 매우 신경 써 주셨습니다! 아버진 항상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형만을 생각했죠. 그런데 지금 와서 나한테 이런..."
"닥쳐!"
그의 아버지는 장소가 교장실이며, 교장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무시했다. 그는 폭군보다도 더욱 거칠게 앤더슨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펜을 집어들었다.
"어서 사인해!"
"싫어요."
"뭐야!"
"그런 건 못하겠어요."
그때 지금껏 조용히 앉아있던 어머니조차 남편에게 동조했다. 그래도 앤더슨은 버텼다. 사실과 다른 내용에 서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노란 교장이 설득 겸 위협적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앤더슨, 네가 그런다고 키팅을 구할 수 있다고 보나? 지금 형편이 어떤지 알겠지? 다른 학생들이 이미 그 사실을 시인하고 모두 사인했다. 아울러 기정사실을 놓고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지 마라. 너만 손해 볼 테니까."
거기까지 버텼던 앤더슨은 다시 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교장보다 더욱 위협적으로 서명을 강요하는 눈빛이었다. 앤더슨은 완전히 기로에 서게 되었다. 서명을 하지 않을 경우 누완다처럼 퇴학처분을 받음은 물론 집과 부모로부터 쫓겨날 게 분명했다. 반대로 서명하면 키팅 선생은 형사처벌을 받는 동시에 교사로서의 신분을 영원히 빼앗길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웰튼 아카데미의 총수인 노란 교장을 비롯, 집안의 총수이자 공포의 대상인 아버지까지 합세한 분위기에서 나약한 앤더슨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퇴학 결정이 내려진 학생들에게 아직은 학교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다. 애당초부터 몰아내기 위해 온갖 비열한 수단까지 동원했던 존 키팅에게만 명령이 내려졌다. 키팅 역시 저항하거나 하지 않았다. 니일의 죽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비탄에 빠진 그는 스스로도 강단을 떠날 결심을 하고 있었다.
존 키팅이 자기의 방에서 묵묵히 짐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국어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키팅의 교실에 있었다. 앤더슨은 첫날 첫 수업 때처럼 조심스럽게 앉은 채 책상만을 들여다보았다. 키팅의 축출과 함께 태풍에 휘말린 낙엽이 된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은 있는 대로 잔뜩 풀이 죽은 상태였다. 멤버 중에 조금도 변함 없이 태연자약한 것은 카멜론 뿐이었다. 그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즐거운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노란 교장이 그때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학생들은 놀란 토끼처럼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의 사건으로 교장의 위치는 훨씬 더 강력해진 상황이었다.
"오늘부터 당분간은 내가 국어 시간을 맡기로 했다. 새로운 국어선생을 부탁해 놨으니까 곧 훌륭한 분이 오시게 될 거다."
교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번에도 카멜론만이 눈빛을 빛내며 교장을 바라보았다. 교장은 교과서를 교탁 위에 펼쳤다.
"지금까지 이 프리차드판 교과서로 수업을 받아왔을 텐데 어디까지 진행됐지?"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분 중에 누가 대답해 주지 않겠나?"
교장은 새로운 진리를 학생들에게 심어주려는 듯이 자못 친절한 말투를 사용했다.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자 그는 한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학부모로부터 특별히 부탁을 받은 토드 앤더슨이었다. 앤더슨은 시종일관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토드 앤더슨."
앤더슨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와 함께 더할 수 없이 당황하며 더듬거렸다.
"네, 네...저어...프리차드판 교과서가...그게..."
"알아들을 수 없다. 앤더슨. 좋아. 그럼 카멜론이 대답하도록."
노란 교장은 마치 약속이라도 되어있는 듯이 그를 지명했다. 카멜론이 대답했다. 은근히 초조해진 것 역시 사실이기도 했다.
"상당한 부분을 건너뛰었습니다."
학생들이 특히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다행히 노란 교장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노란 교장은 계속해서 카멜론을 시켰다. 카멜론은 반에서 자신이 가장 모범생이 된 듯이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지시에 따랐다.
어딘가 텅 빈 듯한 수업이 계속되어 있을 때였다. 교실 뒤쪽의 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개인적인 물건을 가져가려고 왔습니다."
키팅 선생이었다. 코트를 걸친 그는 떠나기에 앞서서 사물을 가져가려고 왔던 것이다. 노란 교장은 학생들의 표정을 재빨리 살폈고 학생들 역시 재빨리 키팅 선생과 교장 선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까?"
키팅이 묻자 교장은 도망치듯 얼른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지금 당장 가져가시오."
"그럼..."
키팅이 교실 앞쪽의 탈의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카멜론은 애써서 그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했고, 다른 멤버들은 갑작스러운 긴장으로 떨리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했다. 노란 교장은 키팅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인한 분위기를 재빨리 잡으려는 듯이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교과서 12페이지를 펴고 서문을 읽도록, 카멜론. 시를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프리차드 박사의 훌륭한 기록을 읽어보도록 해."
학생들이 다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키팅의 첫 수업시간에 그 페이지를 전원이 찢어 버리지 않았던가. 카멜론은 탈의실 쪽을 잠깐 바라본 다음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페이지는 찢어지고 없습니다."
"찢어져? 기막힌 일이군. 그럼 옆 사람의 교과서를 빌려서 읽어라."
"하지만 모두 없습니다."
"뭐라구?"
"이 교실 안의 모든 교과서에는 그 페이지가 없습니다."
그때 탈의실 안에서 알아들은 키팅이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 그가 입가에 나타낸 미소를 학생들 특히 앤더슨은 분명히 보았다. 카멜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실은 그 일이..."
노란 교장이 가로막지 않았으면 카멜론은 분명히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교장은 자신이 들고 있던 교과서를 카멜론에게 가져다주었다.
"이걸 읽도록 해."
카멜론은 키팅이 있는 곳을 다시 바라본 후에 읽기 시작했다.
"시를 읽기 위해서는, 문학박사 J.에반스 프리차드지음. 시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운율이나 음률 그리고 비유와 같은 시어를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귀에 익은 귀절이었다. 특히 키팅의 첫 수업 때의 일 때문에 학생들의 머리에 남아 있는 대목이었던 것이다. 노란 교장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둘러볼 뿐 이제 곧 일어나게 될 놀라운 일에 대해서는 꿈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멜론은 계속해서 읽었다. 교과서의 그 페이지가 없는 학생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죽은 시인의 사회의 멤버들은 키팅의 등장으로 인해 새로운 슬픔에 잡혔다. 언젠가 니일이 그 대목을 읽던 게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앤더슨은 말할 수 없이 불안해하며 키팅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키팅은 용기를 주려는 듯이 한번 미소지어 보인 다음 교실을 나가기 위해 탈의실을 나왔다. 그가 교실을 빠져나가는 길은 공교롭게도 가장자리에 앉은 앤더슨의 곁을 지나쳐야 했다. 카멜론은 계속해서 읽었다. 키팅은 앤더슨의 곁을 지나가며 다시 한번 미소 지어 주었다. 그러자 앤더슨은 노란 교장의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걸어가는 키팅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때였다.
"키팅 선생님! 모두들 거기 서명한 것은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교실 안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문 쪽으로 향하던 키팅이 돌아서서 앤더슨을 바라보았고, 학생들은 그와 앤더슨, 교장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앤더슨의 놀라운 용기에 피츠, 랄튼, 오버스트릿 등의 멤버는 깜짝 놀란 표정들이었다. 교장이 뭐라고 소리치는 것도 귀에 들리지 않는 듯이 앤더슨이 다시 말했다.
"이건 진심입니다. 믿어주세요. 선생님."
비로소 키팅이 만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 앤더슨. 난 너희들을 믿는다."
노란 교장이 다시 키팅에게 당장 나가도록 준엄하게 소리쳤다.
"그렇지만 키팅 선생님은...선생님은 나쁘지 않습니다..."
"자리에 앉아라. 앤더슨!"
노란 교장은 여유를 두지 않고 전체 학생을 향해 경고했다.
"모두들 정숙하도록! 이제부터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은 당장 퇴학시킬테다! 그리고 키팅, 당장 여기서 나가시오!"
노란 교장은 극도로 화가 나 있었다. 키팅은 학생들을 향해, 특히 앤더슨에게 의미 있는 미소를 던진 다음 돌아서서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때 또다시 노란 교장을 극도의 궁지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오 나의 선장님! 우리 선장님!"
예기치 못한 광경이었다. 어느 틈에 앤더슨이 책상 위로 올라가 두 발로 버티고 서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키팅이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노란 교장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앤더슨군!"
앤더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책상 위에 버티고 선 채 뜨거운 존경의 눈빛으로 키팅을 곧장 바라볼 뿐이었다.
"당장 내려와!"
노란 교장은 이성을 잃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소용없었다. 키팅과 앤더슨이 그렇게 마음의 교류와 더불어 감격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녹스 오버스트릿이 성큼 책상 위로 올라갔다. 더욱 당황한 노란 교장의 눈에 또 찰리 랄튼이 올라서는 게 보였다. 교장은 어쩔 줄을 모르며 고함만을 칠 뿐 어떤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 피츠에 이어 믹스가 책상 위로 올라갔고, 또 다른 학생들이 성큼성큼 앤더슨처럼 책상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한결같이 버티고 선 채 키팅 선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그들이 책상 위로 오를 때마다 키팅을 향해 소리친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부름이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의 대화였다. 새로운 이상과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대화였다.
"모두들 내려와서 자리에 앉아라! 내 말 안들리나? 당장 내려왓!"
소용없었다. 노란 교장이 불 같이 화를 내도 듣는 학생이 없었다. 거의 절반이나 되는 학생들의 그런 광경은 너무나 커다란 충격적 이변이었다. 교실 문 앞에서 돌아선 채 이미 제자가 아닌 지난날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키팅의 두 눈에 나타난 것은 미소도 눈물도 아니었다. 가슴이 시리도록 벅찬 감동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얼굴 그것이었다. 노란 교장조차 나중에는 넋 빠진 듯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고맙다, 너희들!"
키팅이 진한 감동으로 인해 흥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모두들 고맙다. 정말로 고맙다..."
앤더슨, 녹스, 오버스트릿, 랄튼, 믹스, 피츠 그리고 책상 위에 올라 서 있는 모두의 눈빛이 키팅의 그 말에 답례를 보내고 있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멤버 중에서는 카멜론만이 아직 자리에 앉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오 선장님! 우리 선장님!..."
소리 없는 가운데 그 외침이 어딘가 먼 곳으로부터 바람결에 휩싸여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학생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영혼을 타고 우러나와 다시 하늘 저쪽의 니일의 영혼을 만나고 돌아오는 소리였다. 비록 니일도 죽고, 키팅도 떠났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 써클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떠나는 키팅의 뒷모습에서 그들은 요정 팩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니일의 모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