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헤스터의 또 다른 모습
얼마 전 기묘한 상황에서 딤스데일 목사를 만나게 되었던 헤스터 프린은 목사의 상태가 말이 아님을 알고 깜짝 놀랐다. 목사의 신경은 극도로 지쳐 있는 듯하였고, 그의 정신력은 아이들보다도 더 약해져 있었다. 지능만이 본디의 힘을 유지하고 있었고 병적인 활력을 몸에 지니고 있었으나, 그의 정신은 극도로 무기력해져 거의 땅 위를 기어다닐 정도였다. 헤스터는 남들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련의 사정을 환히 알고 있었으므로 목사 자신이 당연히 느껴아 할 양심의 가책 이외에 어떤 무서운 음모가 딤스데일 목사의 평온과 휴식을 헤하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이 불쌍한 목사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느니만큼, 목사가 직감적으로 발견한 적을 막아 달라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기에게 애원하면서 부들무들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감동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에게 모든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헤스터는 생각하였다. 오랫동안 세상과 격리된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자기이외의 기준으로 선악 관념을 재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헤스터는 이 목사에 대해서, 이 세상 누구에 대해서나 진배없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헤스터를 다른 사람과 연결 짓고 잇는 사슬은 모두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목사와 헤스터, 두 사람 다 죄인이라는 유대의 사슬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또한 다른 모든 인연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의무를 수반하고 있었다.
현재의 헤스터 프린은 치욕의 생활을 시작했던 무렵과는 처지가 달라져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펄도 이제 7살이 되었다. 수놓은 주홍 글씨를 가슴에 달고 있는 헤스터의 모습이 이미 오래 전부터 보스턴 사람들에게 낯익은 존재가 되었다. 남의 눈에 띄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공사양면에 걸쳐 이익이나 편의에 아랑곳하지 않을 때에 흔히 그렇듯이, 헤스터 프린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호의 같은 것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기심이 작용하지 않은 한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빨리 우러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한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빨리 우러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다행한 일이다. 미움이란 본디의 적의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받지 않는 한 여유 있고 조용한 과정을 거쳐서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게 마련이다. 헤스터 프린의 경우는 새로운 자극도, 성가신 일도 전혀 없었다. 대중과는 싸우는 일이 없었고, 아무리 심한 처사에 불평 없이 순종했다. 사회에 대해 자신의 고통의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동정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세상의 따돌림을 받고 살아 온 몇 년 동안 나쁜 소문 없이 순결한 생활을 해 온 것이 그녀에 대한 주민들의 호감을 싹트게 했다. 인간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데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 희망이나 꿈도 없었으니, 이 불쌍한 방황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을 덕행에 대한 순수한 열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헤스터는 남처럼 자유로이 공기를 마시고 착실히 삯바느질로 펄과 자기를 위한 생계비를 버는 것 말고는 세상의 권리를 조금도 탐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남을 위해 도움을 베풀 때면 자기도 그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전심전력하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자신의 곤궁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을 쪼개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는데, 이런 일에 그녀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 여자의 선행은 순탄치 않아, 날마다 그들이 문 앞에 갖다 놓아 주는 음식이나 왕후귀족의 옷에 수를 놓을 만한 솜씨로 만든 옷가지를 받고서도, 일부 배은망덕한 빈민들은 그녀에게 악담을 퍼붓기가 예사였다. 이 거리에 질병이 만연했을 때에도 헤스터만큼 헌신적인 사람은 없었다. 사실 사회 전체의 경우이건 개인의 경우이건, 참변이 있을 때는 언제나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 여인은 그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을 곧바로 찾아내는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일로 침울해 있는 집을 찾아갈 때는 손님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권리를 가진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행동했으며, 마치 그 집의 침울한 빛으로 말미암아 같은 인간으로서 교제할 자격이 생기는 것 같았다. 거기서는 수놓은 글씨가 빛났으며, 이 세상의 빛 같지 않은 그 빛에 위안이 담겨 있었다. 다른 곳에선 죄의 표시였던 그 글씨가 여기서는 병자의 방을 환히 비쳐 주는 촛불이 되기도 하였고, 병가가 숨을 거두려고 할 때 현세의 경계를 넘어 저승까지 그 빛을 보내 주기도 했다. 이 세상의 빛은 점차 흐려져 가고, 내세의 빛은 아직 비치지 않는 때에 병자에게 발을 내대딜 곳을 비춰 주는 등불이기도 했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는 헤스터의 따뜻하고 포용력 있는 성격이 발휘되었다. 모든 절실한 요구를 일일이 들어줄 뿐 아니라, 아무리 큰 요구도 무궁무진하게 받아들여 주는 인정의 샘처럼 행동하였다. 치욕의 표시가 붙은 가슴이 베개를 찾는 사람에게는 더할 수 없이 폭신한 베개가 되었다. 헤스터는 사회나 본인이 다 이런 결과가 되리라고는 예상치도 않았건만 자진해서 자선의 수도녀가 되었다. 아니, 어느 틈엔지 사회의 근심어린 손길이 그녀를 이런 직분에 임명하였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주홍 글씨는 그녀의 천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헤스터는 필요한 존재였고,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따뜻한 동정심을 발휘했던지, 사람들은 주홍글씨의 A자를 본디의 뜻으로 해석하길 거부했다. 그들은 그것을 유능(Able)'의 뜻이라고 했다. 헤스터 프린의 여인으로서의 힘은 이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그녀가 드나드는 집은 근심 걱정이 가득한, 햇빛이 들지 않는 집뿐이었다. 그러나 근심이 사라지고 햇빛이 찾아들면, 이미 헤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자는 문지방을 넘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녀가 한 식구처럼 정성어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비록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감사의 표시를 받기 위하여 뒤돌아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 삶들과 거리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맞대고 가리키면 지나쳐 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자칫 거만하게 보일 수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겸손에 가까웠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대중의 마음은 변덕쟁이 군조와 같다. 하찮은 정의라도 너무 집요하게 요구하고 나서면 당연한 공평까지도 거부하나, 관용을 바라고 애원하면, 그 폭군은 공평 이상의 것을 내주는 것이었다. 헤스터 프린의 태도를 이런 류의 애원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에 세상은 과거의 희생자인 그녀에 대하여 본인이 희망하고 있지도 않은, 때에 따라서는 그녀가 받을 자격이 있는 이상으로 친절한 표정을 보여 주었던 것인가.
헤스터의 이런 선행이 세상에 주는 감화력을 보스턴 통치자나 학자와 현인들이 인정한 것은 일반 대중에 비해 훨씬 더디었다. 모든 인간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편견이 이들의 경우에는 논리라는 쇠틀 속에 갇혀 있었으므로, 그것을 탈피하기가 일반 사람보다 훨씬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들의 찌푸린 주름살은 자비로운 표정으로 바뀔 것도 같았다. 높은 지위 때문에 공중도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의 동태는 대개 그러했다. 한편 일반 개개인들은 헤스터 프린의 여자로서의 과오를 깨끗이 용서하고 있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그들은 주홍 글씨를 헤스터가 오랫동안 괴로운 마음으로 감수한 죄의 상징이 아니라 그 이후로 그녀가 쌓아온 수많은 선행의 상징으로 보게 되었다.
“저 수놓은 표시를 단 여자가 보이잖아요?” 사람들은 다른 고장에서 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바로 우리 헤스터, 이 거리의 헤스터랍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하고, 병든 사람에겐 힘이 되어 주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겐 위안을 주는 헤스터랍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남의 불행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지껄이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으므로 지나간 옛날의 추문을 속삭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눈에도 주홍 글씨가 수녀의 가슴에 걸려 있는 십자가와 같은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주홍 글씨는 그것을 달고 있는 이 여인에게 일종의 신성함을 주어 그녀로 하여금 어떤 위험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였다. 설사 도둑 무리가 에워쌌다 하더라도 주홍 글씨가 그녀를 지켜 주었을 것이다. 언젠가 인디언이 그녀의 표적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었다.
이 상징, 아니 이 상징에 의해 제시되는 헤스터의 사회적 위치가 그녀 자신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강력사고도 기묘한 것이었다. 헤스터의 명랑하고도 품위 있는 성품의 나뭇잎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이 낙인 때문에 이미 시들어 떨어진 지 오래였으므로 남은 것이라고는 거칠고 앙상하게 드러나 윤곽뿐이었다. 가령 친한 친구가 있었다 해도 혐오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웠던 자태도 똑같은 변화를 겪었다. 옷차림을 일부러 검소하게 한 탓도 있었고, 그녀의 동작이 남의 눈을 끌려 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였다. 말할 수 없이 탐스럽던 머리는 잘라 버렸는지 모자 속에 완전히 감췄는지, 윤기 있는 머리채를 한 번도 햇빛에 드러내 놓은 적이 없는 일도 슬픈 변화의 하나였다. 이러한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위엄에 찬 조상과도 같은 몸에는 열정이 끓어오를 만한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또한 애정의 여신이 베개로 삼았을 풍만한 가슴이 없어진 것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여성으로서 지녀야 할 어떤 특징이 헤스터에게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것은 특히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고 난 여자의 성격이나 자태에서 나타나는 운명적인 것이며, 또 준엄한 발전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헤스터가 부드러운 마음씨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살아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그 부드러운 마음씨를 짓밟아 없애거나 아니면 가슴속 깊이 묻어 버려야 했던 것이다. 아마 후자의 경우가 더 전실에 가까운 이론일 것이다. 본디 여자다웠으나, 지금은 여자다움을 잃은 사람도 그녀를 변모시킬 마술의 손길을 만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시 여자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헤스터 프린이 앞으로 그와 같은 마술의 손길에 닿아 변모하게 될는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대리석같이 찬 헤스터의 인상은 그녀의 생활이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부터 사색적인 것으로 바뀐 때문이었다. 이 넓은 세상에 오직 혼자인 헤스터는 사회와 자신을 연결지어 주던 끊어진 사슬의 파편을 팽개쳐 버렸다. 세상의 법칙은 이제 헤스터의 마음의 법칙이 될 수는 없었다. 당시는 인간의 지성이 새로이 해방되어 수세기 이전에 비하면 한층 자유롭고 폭넓은 활동을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무인들은 왕후와 귀족을 쓰러뜨렸고, 그보다 더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고대 원칙과 연결되어 있는 묵은 편견에 찬 사회 조직 전체를 허물고 재편성하고 있었다. 헤스터 프린은 이런 정신을 흡수하고 있었다. 헤스터가 몸에 지니고 있던 사색의 자유는 그즈음 대서양 저쪽에스는 보편적인 사상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이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주홍 글씨로 표시된 죄보다 감히 찾아들지 못할 새로운 사상이 바닷가에 자리 잡은 헤스터의 오두막에 찾아들었던 것이다. 그림자와 같은 이 방문객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서도 그들을 맞이하는 헤스터는 악마의 방문과 다름없는 위험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극히 대담한 사상의 소유자일수록 사회의 외부적인 규칙에는 아주 온손하게 복종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들은 사상만으로 충분하며, 사상이 행동이라는 혈육을 수반할 필요는 없다. 헤스터 프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일 펄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더라면 앤 허친슨과 같은 사람과 손을 잡을 어느 종파의 창설자가 되어 청사에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헤스터에게는 예언자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청교도 사회를 뿌리째 뽑아 버리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그 무렵의 엄격한 재판관들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일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상적인 정열은 아이의 교육에서 그 발산처를 발견한 것이다. 이 소녀의 형태를 빌어 하느님이 헤스터에게 안겨 준 여성의 싹과 꽃을 그녀는 어떤 난관을 뚫고라도 소중히 키워야만 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외시 당한 그녀에게 이 세상은 여전히 악의를 품고 있었다. 아이 자신의 성격에도 뭔가 이상한 데가 있어 어머니의 무궤도한 정열의 소산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불쌍한 작은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일은 과연 잘된 일인가 아니면 잘못된 일인가 하고 헤스터는 쓰라린 마음으로 자신에게 묻는 것이었다.
사실상 여성 전체의 삶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의문이 헤스터의 마음속에 곧잘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아무리 행복한 여자라 할지라도 산다는 것은 받아들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일까?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에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고, 이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도외시해 버렸다. 사색하는 습관은 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자를 침착하게 만들기는 하나, 동시에 마음을 슬프게 하기도 한다. 헤스터는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려면 우선 첫째로 사회 조직 전체를 부수고 새로 건설해야만 한다. 둘째로는 남성의 성질이라든가 혹은 본성으로 굳어 버린 오랫동안의 유전적인 습성 등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여자는 정당하고 적절한 지위를 획득할 수 없다. 또 마지막으로 다른 모든 곤란이 제거된다 하더라도 여성이 첫째와 두 번째의 개혁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시 강대한 변화를 여성 자신이 경험해야만 한다. 그런 큰 변화를 겅험하게 되면 그 결과 여성에게 가장 여성다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본질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여성이 두뇌를 써서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절대로 없다. 이 문제는 단 한 가지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즉 여성의 감정이 그녀들의 이성보다 우세를 보이게 되면 문제는 깨끗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이 그 규칙적이고도 건강한 고동을 잃고 있는 헤스터 프린은 아무런 의탁할 곳도 없이 마음속의 어두컴컴한 미로를 방황하고 있었다. 넘을 수 없는 절벽에 부딪혀 방향을 바꾸는 일도 있으며, 깊은 구렁텅이에서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일도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온통 쓸쓸하고 황량한 풍경뿐이어서, 취안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따금 차라리 펄을 천국으로 보내 버리고, 자기 자신도 정의의 여신이 정해 주는 바에 따라 내세로 가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무서운 의문이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할 때도 있었다.
주홍 글씨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광장에서 밤을 새우던 딤스데일 목사를 만난 뒤로 헤스터에게는 새로운 사색이 생겨났고, 어떠한 노력과 희생을 바쳐서라도 달성하여야 할 목적이 생기게 되었다. 그녀는 목사가 몸부림치고 있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더 이상 몸부림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한 처참한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정신이 아직 광적인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직전에 놓여 있음을 보았었다.
남모르게 회한의 바늘에 얼마나 무서운 고통을 주는 효력이 있는지 모르지만, 구원받아야 할 손길에 의해 더 무서운 독물이 그 주사바늘에 채워지고 있음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원조를 아끼지 않는 친구의 모습을 가장한 적이 늘 그의 곁에 붙어서 손 안에 넣은 기회를 이용하여 딤스데일 목사의 부서지기 쉬운 성질의 나사를 가지고 장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혹독한 불행을 예감케 하고 행복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곤경 속으로 목사가 빠져 들어가는 것을 잠자코 방관했었다. 본디 자기에게 진실이나 용기가 부족했던 탓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로저 칠링워드의 계획에 동의하는 일마니, 자기가 당한 파멸 이상의 참혹한 파멸로부터 목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변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두 가지 길 중에서 더 처참한 길을 선택한 셈이었다. 그녀는 할 수 잇는 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실책을 보장하리라 결심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혹심한 시련을 겪는 동안, 그녀는 보다 강인해져 이제 로저 칠링워드와 대항하지 못할 일은 없을 듯하였다. 감옥에서 로저 칠링워드와 첫 대면을 하던 날,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되었고, 생생한 치욕으로 반미치광이가 되어 있었으므로 감히 그와 맞서 싸우는 일은 생각조차 항 수 없었다. 그때 이후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녀는 훨씬 높은 위치에 다다라 있었다. 반면 노인은 복수를 위해 스스로 비천한 인간이 되었으므로 헤스터와 동등한 지위, 아니 그 이하로 타락했던 것이다.
요컨대, 헤스터 프린은 전 남편을 만나 그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희생자를 구하기 위해 힘써 보리라 결심했다. 얼마 안 되어 그런 기회는 닥쳐왔다. 어느 날 오후 펄을 데리고 이 반도의 호젓한 곳을 거닐고 있을 때에 한쪽 팔에 바구니를 걸치고 다른 쪽 손엔 지팡이를 짚은 노의사가 꾸부정한 모습으로 약재가 되는 나무뿌리며 약초를 찾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14. 헤스터와 의사
헤스터는 펄에게 저쪽에서 약초를 캐고 있는 사람과 애기가 끝날 때까지 바닷가에 가서 조가비나 엉킨 해초를 가지고 놀고 있으라고 일렀다. 아이는 새처럼 날아가더니 작고 흰 발을 벗고 물에 젖은 바닷가를 철벅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이따금 우뚝 멈추어 서서 썰물이 남기고 간 웅덩이를 거울삼아 들여다보았다. 웅덩이 속에서는 반짝이는 곱슬머리에 눈에는 요정같은 미소를 담은 어린 여자아이가 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함께 놀아 줄 친구가 없는 펄은 그 여자아이에게 손을 잡고 달음박질하자고 불러 보았다. 그러나 물속의 여자아이도 똑같이 손짓을 하며 “여기가 더 재미있어! 네가 웅덩이 속으로 들어와!”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펄이 무릎까지 물속으로 들어갔을 때 웅덩이 속에 있는 자신의 하얀 발이 보였다. 그때 더 깊은 것에서는 조각조각 부서진 미소가 수면 위로 떠올라 반짝반짝 빛나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의사에게 가까이 가서 말을 건넸다.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이늙은 로저 칠링워드에게 얘기를 하자는 분은 헤스터이신가?” 하고 대답하며 의사는 구부렸던 몸을 일으켰다. “기꺼이 듣겠소! 그런데 헤스터, 요즘 어딜 가나 당신의 평판이 좋은 것 같더군요! 바로 어젯저녁에도 어느 훌륭한 관리 양반이 당신 가슴에서 떼어 버리면 사회의 안녕 질서에 지장이 없을까를 의논했던 모양이오. 헤스터, 나는 그분에게 당장 그렇게 해도 괜찮을 거라고 얘기했소, 그게 사실이니까!”
“이 표시는 그분들이 마음대로 뗄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헤스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내가 이것을 떼어도 좋을 때가 오면 저절로 떨어져 버리든가, 아니면 다른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변하든가 하겠지요.“
“그렇다면 좋도록 달고 있구료.” 의사는 대답했다. “여자들이란 몸에 다는 장식품에 있어선 자기 고집대로 하는 모양이니까. 그 글씨의 수가 꽤 화려해서 당신 가슴에 잘 어울린단 말이야.”
이러는 동안에 헤스터는 노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지난 7년 동안에 너무나 변한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한편 큰 충격을 받았다. 생각했던 만큼 놁어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모습에는 늙어가는 흔적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근력 있고 민첩해 보였다. 그러나 헤스터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조용하고 지적인 학자다운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열심히 뭔가를 찾고 있는 듯한, 그리고 거의 사납다고 할 정도의 경계의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런 표정을 미소로써 감추려고 애썼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치 자신의 그런 의도를 스스로 비웃는 듯한 조소가 얼굴에 어른거려 그것이 오히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음흉한 배포를 한층 뚜렷하게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이따금 그의 눈에서는 붉은 빛이 번득였는데 그것은 마치 노인의 영혼에 우연히 일시적인 정열의 바람을 타고 붙은 불이 가슴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이 불꽃을 서둘러 누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을 꾸미고 있었다.
한 마디고 로저 칠링워드 노인을 인간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 악마의 일을 행하면 바로 그 자신이 악마로 화해 버릴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뚜렷한 표본이었다. 이 불행한 노인은 7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고뇌에 가득 찬 한 인간의 마음을 끊임없이 분석하며 희열을 느끼고, 또한 그 사람의 불과 같은 고뇌에 기름을 끼얹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이와 같이 변모하게 된 것이다.
주홍 글씨가 헤스터 프린의 가슴 위에서 불타는 것 같았다. 여기 또 한 사람이 파멸하고 있었고 그 책임의 한 부분이 그녀 자신에게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 얼굴을 너무 열심히 쳐다보는데 뭐가 묻었소?”
의사는 물었다.
“나에게 눈물이 남아 있다면 울어도 시원치 않은 것이 보여요.” 헤스터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 얘기는 그만두기로 하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또 한 사람의 처참한 분의 이야기니까요.”
“그 사람이 어떻다는 거요?” 로저 칠링워드는 그것이 대단히 관심 있는 화제이고, 비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응수했다. “헤스터, 솔직히 말해 나는 방금 그 사람 생각을 이것저것 하고 있던 참이오. 그러니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보오. 대답해 줄 테니까.”
“우리가 마지막 이야기를 나눈 것은 7년 전의 일인데, 그때 당신은 우리의 옛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비밀에 붙여 달라는 강제 약속을 내게서 받았습니다. 그분의 생명이나 명예가 당신의 수중에 달려 있었기에 당신의 명령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약속을 하면서도 불안한 구석이 없지는 않았죠. 왜냐하면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한 의무는 일체 포기한 나였지만, 그분에 대한 의무만은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과의 약속은 그 의무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무엇인가가 내게 속삭였기 때문이에요. 그 이후부터 당신만큼 그분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은 그분 뒤를 늘 따라다니며 자나 깨나 그분 곁에 붙어서 그의 생각을 살피고, 그의 영혼까지 파고들어 헤치고 있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움켜쥐고 매일매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그분은 아직 당신의 정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했던 약속으로 인해 나는 한 사람의 진실된 분을 배신한 결과가 된 셈이에요.”
“당신한테야 그밖에 별 도리가 없지 않았소?” 로저 칠링워드는 물었다. “내가 손가락 하나만 놀리면, 그 사람을 설교단에서 감옥으로, 감옥에서 교수대로 쫓아낼 수도 있었단 말이오!”
“차라리 그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죠!” 헤스터 프린이 말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무슨 짓을 했단 말이오?” 하고 로저 칠링워드는 거듭 물었다. “이것만은 알아야 하오, 헤스터 프린. 제왕이 의사에게 아무리 최고의 치료비를 지불한다 해도 내가 그 불쌍한 목사를 위해 베푼 만큼 정성어린 치료는 받을 수 없을 것이오. 나의 간호가 없었더라면 그 사람의 생명은 당신네가 죄를 범한 지 2년도 되기 전에 이미 고뇌의 불길에 타버리고 말았을 것이오. 그 사람의 정신력은 헤스터, 당신과는 달라. 주홍 글씨와 같은 무거운 짐을 견뎌내는 힘이 없단 말이오. 난 기막힌 비밀을 폭로할 수도 있소! 그러나 그 얘긴 그만해 두지! 아무튼 난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소. 그 사람이 지금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땅 위를 기어 다닐 수 있는 것도 다 내 덕이란 말이오!”
“그분은 차라리 돌아가시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몰라요!”
헤스터 프린이 말했다.
“그렇고. 당신의 말이 옳소!” 로저 칠링워드는 무시무시한 가슴 속의 불꽃을 헤스터 앞에 내보이며 외쳤다. “단숨에 죽는 편이 나았을 것이오! 그 사람만큼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오. 더구나 철천지한 원수가 보는 앞에서 말이오! 그 사람도 어떤 눈치를 채고는 있소. 어떤 저주와 같은 힘이 자기 곁을 늘 따라 다니는 것을 느끼고 있소. 일종의 영감으로 악의를 품은 자의 손이 마음의 끈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다만 그 눈과 손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은 알지 못하오! 목사들 사이에 흔히 있는 미신이지만, 자신에서 귀신이 들려서 무서운 꿈이나, 절망적인 생각이나, 회한의 바늘이나, 구원에 대한 절망 등으로 인해 무덤 저편에서 겪을 고통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요. 그러나 사실 그것은 끊임없이 따라 다니는 나의 그림자였소! 그자 때문에 무참히도 상처를 입고 무서운 복수라는 맹독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된 한 사나이가 사시사철 따라다닌 것이오! 자신이 악마에게 붙들렸다고 생각한 그의 예감은 옳았소. 악마가 그의 코앞에 있었으니까! 본디는 인간다운 마음을 지녔던 사람이었지만, 고통과 상처 때문에 결국은 악마가 되어 버린 사나이가 말이오!”
이와 같은 말을 지껄이면서 불행한 의사는 두 손을 번쩍 쳐들었는데, 마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갑자기 정체불명의 괴물처럼 변한 것을 보고 공포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일생동안 몇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한, 인간의 정신이 숨김없이 심안에 비친다는 그런 순간이었다. 아마도 그에게 지금처럼 자기 자신의 모습이 똑똑히 보인 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만하면 그분에게 충분히 복수를 한 게 아닐까요? 헤스터는 노인의 표정을 살피면서 물었다. 그도 당신에게 진 빚을 다 갚은 셈이 아닐까요?”
“천만의 말씀이오! 빚이 오히려 늘었을 뿐이오!” 하고 의사는 대답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의사의 태도는 사나운 기색이 수그러들고 점차 침울한 빛을 띠었다. “헤스터, 9년 전의 나를 기억하고 있소? 그때도 이미 나의 인생의 가을이었고, 그것도 겨울이 다 된 형편이었지. 그러나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성실하고, 학문적이고, 사색에 잠긴 조용한 나날이었소. 그런 나의 생활을 나의 지식을 증진시키는데,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데 충실히 바쳤었소. 나의 생활만큼 평온하고 청렴한 것은 없었을 것이오. 그 무렵의 나를 기억하고 있소? 나라는 인간이 당신이 보기에는 냉담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남에게 인정을 베풀 줄도 알고 자기를 위한 일에는 조금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친절하고 성실하며 정직하고, 그리고 비록 정열적이라고 할순 없으나 변함없는 애정을 지녔던 사람이었다고 생각되지 않소? 그렇지 않소?”
“당신은 그 이상이었죠.” 헤스터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의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이오?” 의사는 헤스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음속의 모든 악을 얼굴에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지금의 내가 뭐냐 하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요! 악마란 말이오! 도대체 누가 나를 이런 악마로 만들었단 말이오?”
“바로 나예요!” 헤스터는 몸을 떨면서 소리쳤다. “나 때문이에요. 나도 그분이나 다름없는 죄인인데, 왜 나에겐 복수를 하지 않으셨어요?”
“당신은 그 주홍 글씨에 맡겨 뒀던 거지.” 로저 칠링워드는 대답했다. “그 주홍 글씨가 할 수 없는 복수라면, 난들 어쩌겠소!”
노인은 주홍 글씨를 가리키며 빙긋이 웃었다.
“분명히 복수를 했어요!” 헤스터 프린은 대답했다.
“나의 판단에 잘못은 없었소.” 의사는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란 뭐요?”
“나는 이제 그 비밀을 밝혀야겠습니다.” 헤스터는 잘라 말했다. “그분에게 당신의 본성을 일러 줘야겠어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온 까닭에, 그것이 도리어 그분의 파멸의 원인이 되었으니, 더 이상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분의 명성, 지위, 나아가서는 목숨까지도 죽이거나 살리거나 모두 당신 손에 달렸습니다. 주홍 글씨로 인해서 진실을, 영혼 속까지 타들어오는 시뻘겋게 달군 무쇠와 같은 진실을 알게 된 나로선 그분이 처참할 만큼 공허한 인생을 계속 살아 보았댔자, 아무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에, 당신 앞에 비루하게 무릎을 꿇고서 자비를 구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분에 대해선 마음대로 하세요! 그분이나 나나 당신이나 구원될 가망은 없으니까요! 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이 어두운 미로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을 테니까요!”
“당신을 가엾게 생각지 않는 바는 아니오!” 로저 칠링워드는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말했다. 헤스터의 말에 담긴 절망감에는 뭔가 숭고한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훌륭한 바탕을 가진 여자요.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났더라면 이렇게 불행한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당신이 불쌍하오. 그 훌륭한 천품을 헛되이 낭비했으니 말이오!”
“나도 당신이 가엾게 생각돼요.” 헤스터 프린이 말했다. “증오심 때문에 참으로 현명하고 올바른 학자이던 당신이 악마로 변했으니 말예요! 이제라도 그 미움을 쫓아내고 다시 한 번 인간다운 사람이 되실 순 없나요? 그 분을 위해서라기보다 두 배나 더 당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분을 용서하고, 그분에 대한 응보는 그 권리를 지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맡겨두세요! 방금 말씀드렸듯이 이 어두운 미로를 서로 얽혀 방황하며, 제각기 뿌려 놓는 죄악 때문에 발부리가 걸려 넘어지는 우리들에게 무슨 이로운 일이 있을 리 만무하잖아요? 아니! 당신은, 당신만은 구원될 길이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억울한 일을 당하셨으니 그분을 용서하는 것은 당신 마음에 달려 있어요. 그 유일한 권리를 그대로 버리실 작정인가요? 그 소중한 특권을 거절하시려는 건가요?”
“그만해 두오, 헤스터!” 노인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게는 용서할 권리가 없소. 당신이 말하는 그런 힘이 내게는 없소. 오래 전에 잊었던 예전의 내 믿음이 되살아나 우리의 행동과 고민을 전부 해명해 주는구려. 당신이 첫발을 잘못 디딘 탓으로 악의 씨를 뿌려 놓은 것이오. 그러나 그 뒤로부터는 모두가 필연적인 운명이었소. 나에게 상처를 준 당신들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일종의 전형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악마의 일을 악마에게서 빼앗아 왔을 뿐 나도 악마는 아니오. 모든 게 다 운명이오. 검은 꽃이 피면 피는 대로 내벼려 둘 수밖에 없소! 이제 가 봐요. 그 사람의 일도 당신 마음대로 하구려.”
의사는 손을 한 번 흔들더니 다시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15. 헤스터와 펄
노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헤스터 프린은 중얼거렸다.
“죄받을 소린진 몰라도 저 사람이 밉구나!”
헤스터는 이런 감정이 드는 자기를 꾸짖어 보았지만, 그 감정을 억누를 수도, 지워 버릴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런 마음을 억제하려 노력하면서, 먼 나라에서 있었던 아주 오래 전 일을 회상했다. 그때 그 사람은 저녁이 되면 온종일 틀어박혀 있던 서재로부터 나와 가정적이고 따뜻한 난로 곁에 젊은 아내의 미소를 마주하며 앉는 것이었다. 책 속에 파묻혀 있던 오랜 시간의 냉기를 학자의 마음에서 없애자면 이 미소로 몸을 녹이는 게 제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러한 장면이 그때는 행복으로만 여겨졌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그 뒤에 겪은 어두운 생활을 통하여 바라보니 그것은 어느 사이에 가장 추악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어찌 그런 장면이 있을 수 있었는지 그녀는 의아스러웠다. 어떻게 저런 남자와 결혼할 마음이 생겼을까! 그 남자가 미지근한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을 참았을 뿐 아니라 자기도 맞잡았으며, 자신의 입술과 눈을 그 남자의 것에 합치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이 가장 후회되는 죄악으로 느껴졌다. 아직 철부지이던 자신을 설득하여 그의 곁에 있는 것을 행복하다고 믿게끔 한 것은 뒷날 그가 입은 피해와는 비교도 안 되는 훨씬 더 비열한 죄악이라고 생각되었다.
“역시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어!” 헤스터는 아까보다도 더 격심해져 되뇌었다. “그 사람은 나를 속였어! 내가 그 사람에게 한 것보다 그는 내게 더한 몹쓸 짓을 했던 거야! 남성들은 명심할지어다. 결혼 승낙의 표시로 상대 여성의 손만 얻었을 뿐 마음속에 넘쳐흐르는 정열까지 얻지 못한 남성은, 조심할지어다. 그 여성이 보다 강한 남성의 손에 닿아 여성으로서의 모든 감수성이 눈뜨게 되면 로저 칠링워드의 경우처럼 비참한 운명을 걷게 되리라. 또한 남성들이 그녀들에게 만족스런 현실로서 안겨 준 조용한 행복이라든가, 평온한 생활은 오히려 차디찬 대리석의 영상 같은 것으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7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그녀의 가슴에 고통의 화인으로 아로새겨진 주홍 글씨도 그녀에게 회환과 참회의 마음을 주지는 못했단 말인가?”
그녀가 로저 칠링워드 노인의 불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섰던 짧은 시간에 떠오른 갖가지 감회는 그녀의 마음에 어두운 빛을 던졌다. 이와 같은 일이 없었다면 헤스터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노인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헤스터는 아이를 불렀다.
“펄! 펄! 어딜 갔니?”
정신 활동이 잠시도 쉬는 일이 없는 펄은 어머니가 약초를 채집하는 노인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심심하지는 않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웅덩이에 비친 제 그림자를 벗하여 놀았다. 손짓해 불러도 물속의 아이가 나오지 않자, 제가 직접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마침내 자기나 그림자 중 어느 하나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더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 다른 곳으로 갔다. 자작나무 껍질로 배를 만들고 조가비를 잔뜩 실어 물 위에 띄웠다. 그 배는 뉴잉글랜드의 상인보다 더 먼 바다를 향해 출범했다. 그러나 배는 겨우 바닷가 근처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펄은 살아 있는 아주 작은 참게, 여러 마리의 불가사리를, 따뜻한 양지쪽에 해파리를 끌어올려 녹여 버리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밀물의 물결에 줄무늬를 이루고 있는 흰 거품을 잡아서 바람에 날리고는 눈송이 같은 큰 물거품이 땅위에 떨어지기 전에 잡으려고 급히 쫓아가기도 했다. 또한 바닷가에서 먹이를 쪼며 날아다니는 물새 떼를 발견한 이 장난꾸러기 아니는 앞치마에 수북하게 조약들을 주워 모아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숨어서 쫓아다니며 작은 물새에게 훌륭한 팔매질 솜씨를 보였다. 그러나 앞가슴이 하얀 잿빛 물새 한마리가 조약돌에 맞아 부러진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날아갔다. 그러자 이 요정 같은 소녀는 한숨을 쉬며 그 장난을 집어 치우고 말았다. 바닷바람과 같이 싱싱하고, 그녀 자신처럼 길들지 않은 그 어린 새를 해친 것이 마음 아팠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펄이 한 장난은 여러 가지 해초를 뜯어 모아 목도리, 망토, 머리 장식 등을 만들어 작은 인어로 분장하는 일이었다. 이 아이는 여러 가지 장식물이나 의상을 만드는 일에 어머니의 뛰어난 재능을 물려 받고 있었다. 인어 의 옷차림의 마지막 치장을 하기 위해 펄은 미끈미끈한 수초를 얼만큼 긁어 와서 어머니 가슴에 달려 있는 것 같은 장식을 만들어 자기 가슴에 달았다.
그것은 A자였다. 그러나 주홍색이 아니라 싱싱한 초록색이었다! 아이는 턱을 가슴에 대고 그 글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목적은 그 글씨 뒤에 숨겨진 뜻을 알아내는 일이기라도 한 듯 이상한 흥미를 나타내고 있었다.
‘엄마에게 이 뜻을 물어볼까?’ 펄은 생각했다. 마침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펄은 어린 바닷새처럼 가볍게 뛰어서 엄마 앞에 가서는 춤을 추며, 웃는 얼굴로 자기의 가슴에 단 장식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헤스터는 잠시 말없이 펄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녹색 글씨는 아이들 가슴에 달아도 아무 뜻도 없어요. 하지만 엄마가 달고 있어야 하는 이 글씨의 뜻을 펄, 너 알고 있니?”
“알아요, 엄마.” 아이는 말했다. “대문자 A자죠. 엄마가 책에서 가르쳐 줬잖아요.”
헤스터는 물끄러미 펄의 작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눈동자 속에는 전에도 곧잘 나타나던 기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지만, 펄이 과연 이 글씨에 대해 어떤 의미를 느끼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확인해 보고 싶은 병적인 욕망을 느꼈다.
“엄마가 왜 이 글씨를 달고 있는지 아니?”
“알고말고요!” 펄은 어머니의 얼굴을 명랑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목사님이 가슴에 손을 얹고 다니는 거나 같은 이유지 뭐!”
“그 이유란 뭐지?” 헤스터는 뚱딴지같은 아이의 말에 웃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고 얼굴빛이 달라졌다. “이 글씨가 엄마 말고 딴 사람의 가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몰라요, 엄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야.” 펄은 여느 때보다도 심각한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엄마와 이야기하던 저 할아버지에게 물어 봐요! 가르쳐 줄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엄마, 그 주홍 글씨의 뜻은 뭐예요? 왜 엄마는 그것을 가슴에 달고 다니죠? 왜 목사님은 가슴에 손을 얹고 다니고?”
펄은 어머니 손을 자기의 두 손으로 잡더니, 여느 때의 변덕스럽고 난폭한 성격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심각한 눈길로 말끄러미 어머니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헤스터는 이 아이는 지금 어린아이다운 본심을 털어놓고 자기에게 가까워지려는 게 아닌가, 모녀의 기분이 일치되는 세계를 찾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선지 여느 때의 펄과는 달라 보였다. 지금까지 헤스터는 자신의 가슴속에 깃든 모든 애정을 쏟아 펄을 키워 왔으나, 그녀로부터는 4월에 부는 산들바람은 변덕스러워 가볍고 상쾌하게 불다가도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정열적인 돌풍으로 변한다. 기분이 퍽 좋다가도 갑자기 발끈 성을 내기도 하고 가슴에 끌어안아도 쌀쌀맞게 모르는 체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알 수 없는 부드러움으로 볼에 키스를 하고,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사람의 마음에 꿈 같은 쾌감을 남겨 놓고는 딴청을 피우며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이 아이의 성질에 대한 어머니의 평가였다. 다른 사람들이 이 아이를 관찰했다면 귀염성 없는 성질만이 눈에 띄어 실제보다도 훨씬 더 음울한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펄은 놀라울 만큼 조숙하고 예민한 아이여서 엄마의 친구가 되어도 좋을 만한 나이가 된 게 아닌가 싶었으며, 엄마의 슬픔을 있는 대로 다 털어놓아도 모녀가 서로 거북하게 느끼는 일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펄의 조그만 혼돈된 성격 속에는 굽힐 줄 모르는 용기라든가, 지기 싫어하는 강한 의지, 자존심으로 발전하게 될 굳건하고 자랑스러운 태도, 허위로 보이는 숱한 일에 대해 나타내는 맹렬한 경멸심 등을 포함한 어엿한 주의 주장이 싹트기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싹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록 지금까지는 아직 덜 익은 과일처럼 씁쓸하고 맛없는 것이긴 했지만, 더없이 풍부하고 향긋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훌륭한 성격을 고루 갖춘 이 요정과 같은 아이가 장차 고귀한 여성으로 자라지 못한다면 아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너무도 크기 때문일 거라고 헤스터는 생각했다.
펄이 집요하리만큼 수수께끼 같은 주홍 글씨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의 일부로 지니고 나온 성질 탓인 것 같았다. 세상 물정을 조금씩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치 자신의 사명이나 되는 것처럼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었다. 하느님이 이 아이에게 이러한 특별한 성격을 주신 것은 정의와 보복의 계획을 이행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헤스터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 하느님의 계획 속에는 자비와 은혜의 계획은 함께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펄이 이 세상의 아이로서뿐 아니라 정의와 신앙을 지닌 하느님의 사자로서 나타난 것이라면, 어머니 마음속에 차디차게 자리 잡고 그 가슴을 무덤처럼 만들었던 슬픔을 잊게 해 주려는 사명을 지닌 게 아닌가?
지금 헤스터의 마음에 떠오른 이 같은 생각은 마치 누가 귓속말을 해준 것처럼 뚜렷한 인상을 남겨 놓았다. 그 동안에 펄은 엄마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고개를 쳐든 채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엄마, 그 글씨의 뜻이 뭐예요? 왜 엄마는 그걸 가슴에 달고 있지? 왜 목사님은 손을 얹지?”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헤스터는 생각했다. ‘안 될 일이다! 가령 이 아이의 동정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은 말할 수 없다!’
이윽고 헤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펄은 참 바보 같구나.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세상에는 아이들이 물으면 안 되는 일이 많이 있단다! 엄마가 목사님의 가슴에 대해서 알 리가 있겠니? 그리고 이 주홍 글씨를 가슴에 달고 있는 것은 금실이 좋기 때문이야!”
지금까지 7년 동안 헤스터 프린은 자신의 가슴에 단 상징에 대해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일이 없었다. 이 상징은 엄격하고 가혹하면서도 한편으론 수호천사와 같은 역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헤스터를 저버리고 말았다. 엄격하게 헤스터의 마음을 감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운 악이 스며들었거나, 아니면 오래된 악이 추방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음을 알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펄의 얼굴에는 이제 조금 전과 같은 진지한 표정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아이는 이 문제를 그대로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모녀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는 두세 번, 저녁을 먹을 때도, 잠을 재우고 있을 때도 몇 번이고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이젠 곤히 잠든 줄 알았는데, 검은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반짝이면서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묻는 것이었다.
“엄마, 그 주홍 글씨의 뜻이 뭐야?”
다음날 아침, 펄이 잠을 깨자마자 베개에서 머리를 들면서 물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늘 주홍 글씨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뒤따라 나오는 또 하나의 질문이었다.
“엄마, 목사님은 왜 늘 가슴에 손을 얹고 계셔?”
“입 닥치지 못해, 못 되게시리!” 어머니는 지금까지 보인 일이 없는 엄격한 말투로 대답했다. “엄마를 놀리면 못 써. 정 그러면 깜깜한 광 속에 가둘 테야!”
16. 숲속의 산책
어쩌면 더욱 극심한 고통에 직면하게 되거나 또 장래에 어떤 궁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모를 일이나, 딤스데일 목사의 우정과 신뢰를 얻고 있는 한 남자의 정체를 그에게 알려 주어야겠다는 헤스터 프린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목사가 반도의 바닷가나 부근 숲 속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음을 알고 있는 그녀는 그를 만날 기회를 얻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며칠 동안은 허탕치고 말았다. 설령 그의 서재로 찾아간다 해도 나쁜 소문이 날 리는 없었으며, 목사의 청렴결백한 명성에 영향을 끼칠 염려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주홍 글씨가 나타내는 죄에 못지않은 죄악을 고백하기 위해 그 서재를 찾아가곤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남 몰래, 아니 어쩌면 공공연히 간섭하고 나서지나 않을까 걱정되었고, 아무도 그들의 비밀을 알 턱이 없었으나 지레 의심받는 것이 두려웠으며 또 그와 이야기하는 동안보다 넓은 세계에서 호흡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헤스터는 비좁은 서재보다 탁 트인 하늘 아리서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헤스터는 어느 병자의 집으로 간호를 하러 갔을 때 목사가 그 전날 인디언 개종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 엘리어트 전도사를 만나러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오후쯤이면 돌아오리라는 것이었다. 이튿날 헤스터는 그가 올 무렵에 펄을 데리고 나섰다. 펄이 곁에 있다는 것이 간혹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외출할 땐 으레 동행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반도에서 본토 쪽으로 들어가니 길은 오솔길이나 다름없었다. 그 길은 신비스러운 원시림 속으로 꼬불꼬불 휘어들고 있었다. 길 양쪽에는 하늘이 가려질 정도로 숲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헤스터는 그녀가 오랫동안 방황해 오던 정신의 황야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씨는 쌀쌀하고 음산했다. 머리 위에는 잿빛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지만 바람이 조금씩 살랑대고 있었다. 그로 인해 흔들리는 한 줄기 빛이 가끔씩 오솔길 위를 희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흔들리는 밝은 빛은 숲 속 저쪽 끝에만 비치고 있었다.
이 장난스러운 햇빛은 모녀가 가까이 다가가면, 저만큼 멀어져 버려 아까까지 햇빛이 뛰놀던 자리는 한층 음울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녀가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걸었기 때문이다.
“엄마.” 펄이 말을 걸었다. “해님은 엄마가 싫은가 봐. 엄마 가슴에 단 것이 무서워서 도망쳐 숨어 버리나 봐. 자! 저기 봐! 저쪽에서 졸고 있잖아. 엄마는 여기서 좀 기다려 봐요. 내가 뛰어가서 잡아 볼 테니. 나는 어린 아이니까, 나한테서는 도망치지 않을 거야. 내 가슴에는 아직 아무것도 달지 않았으니까!”
“나중에라도 달아나서는 안 돼.”
헤스터는 말했다.
“왜 안 돼?” 펄은 막 뛰어가려다 말고 우뚝 멈춰서며 물었다. “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게 아냐?”
“자 빨리 뛰어가기나 해!” 어머니가 말했다. “해님을 잡는 거야, 또 금방 없어지겠다.”
펄은 재빠르게 달려가더니 정말 햇빛을 붙잡아 그 가운데 서서 환하게 웃었다. 온몸에 햇빛을 받고 선 펄은 달음박질 때무에 생긴 활기로 빛나고 있었다. 햇빛은 마치 동무가 생겨서 기쁘다는 듯이 혼자 서 있는 어린아이 둘레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그 햇빛의 마술적인 원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도망간단 말야!”
펄은 고개를 내저었다.
“봐라!” 헤스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엄마도 손을 뻗치면 조금은 잡을 수 있어.”
헤스터가 손을 내밀자 햇빛은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라져 버렸다기보다 펄의 얼굴 위에서 춤추고 있는 밝은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이 아이가 햇빛을 몽땅 흡수하였다가, 자신들이 더 어두운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그 햇빛을 발산하여 길을 밝혀 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펄의 특성 가운데서 헤스터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자신에게서 물려받았다고는 이들은 거의 조상들로부터 선병과 함께 슬픔이라는 병을 유전 받는 법인데, 펄은 전혀 그런 질병과는 인연이 멀었다. 아니, 어쩌면 도리어 그것이 일종의 병인지도 모른다. 펄이 태어나기 전에 온갖 슬픔과 싸워야 했던 헤스터의 투쟁에 대한 반동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것이 이 아이의 성격에 굳은 금속과 같은 광택을 주는 기묘한 매력임에는 틀림없었다. 이 아이에게는 사람을 깊이 감동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다운 동정심을 갖게 하는 그런 비애의 마음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펄에게는 충분한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이리 와!” 헤스터는 아까 펄이 햇빛에 싸여 서 있던 곳을 둘러보며 말했다. “숲속으로 좀 들어가서 쉬기로 하자.”
“엄마, 난 피곤하지 않은걸.” 하고 펄은 말했다. “하지만 엄마가 이야기를 해 준다면 그렇게 할게.”
“이야기라니! 무슨 이야기 말야?”
“그야 악마 이야기지, 뭐!” 펄은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으며 반은 정색을 하고 반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숲 속에 사는 악마 얘기 말야. 무쇠 장식이 달린, 크고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다는 악마 이야기. . . . . 무서운 악마는 숲 속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책과 펜을 내밀고 모두 자기 피로 이름을 쓰게 한대나 봐. 그러면 악마가 가슴에 표시를
달아준대! 엄마는 악마를 만난 일이 있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지. 펄?”
헤스터는 그 무렵에 유행하던 미신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 물어 보았다.
“엄마가 어젯밤 병간호하러 간 집이 있잖아, 나로 옆 구석에 앉았던 할머니가 해 줬어.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할 떄 할머니는 내가 자고 있는 줄 알았나봐. 이 숲 속으로 악마를 만나러 와서 책에 이름을 쓰고 가슴에 표시를 단 사람은 몇 천 명이나 된대요. 그 기분 나쁜 히빈스 아줌마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래요. 그리고 엄마, 그 할머니가 그러는데 이 주홍 글씨는 악마가 달아 준 표시래. 밤중에 이 어두운 숲에서 엄마가 악마를 만날 때는 빨간 불꽃처럼 빛난다고 그러던데? 정말야, 엄마? 밤중에 악마를 만나러 가?”
“네가 잠이 깨었을 때 엄마가 없었던 일이 있니?”
헤스터는 물었다.
“잘 모르겠어. 나를 집어 두고 가는 게 걱정이 되거든 데리고 가도 돼. 기꺼이 따라갈 텐데! 하지만 엄마, 이것만은 지금 가르쳐 줘. 악마라는 게 있어요? 엄마는 만난 일이 있어? 이게 정말 그 표시야, 엄마?”
“한 번만 말해 주면 엄마를 귀찮게 굴지 않지?”
하고 헤스터가 물었다.
“응, 모두 말해 주면.”
펄은 대답했다.
“지금까지 꼭 한 번 악마를 만난 일이 있단다! 이 주홍 글씨가 그 표시야!”
그들은 이런 얘기를 나누며, 오솔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숲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이끼가 수북하게 낀 바위 앞에 이르자 그들은 그 위에 걸터앉았다. 아마 전세기 어느 시기에는 어두운 숲 그늘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갔을 거대한 노송이 있던 자리인지도 모른다. 둘이 않은 곳은 작은 골짜기였는데, 나뭇잎이 깔린 둑이 양쪽으로 봉곳이 솟아 있고, 그 둑 사이로 시냇물이 나뭇잎이 가라앉은 바닥 위를 흐르고 있었다. 냇물 위로 휘늘어진 큰 나뭇가지들이 군데군데 흐르는 물을 막고 있어 여기저기에 소용돌이와 깊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물살이 센 곳에서는 조약돌과 누렇게 빛나는 모랫바닥이 드러나 보였다. 시냇물의 흐름을 눈으로 쫓으면 숲 속으로 조금 들어간 부분에서 수면에 반사되는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수풀과 잿빛 이끼가 덮인 바위들이 들쭉날쭉한 곳까지 오면 이미 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거목이나 화강암 등은 모두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자취를 숨기는 데 열중해 있는 것같이 보였다. 시냇물의 끊임없는 수다가 원류가 있는 태고적 숲 속의 얘기를 재잘거리거나, 못의 매끄러운 표면이 숲 속의 은밀한 신비를 모조리 반사시키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시냇물의 물줄기는 쉴 새 없이 부드럽고 조용하게, 마음을 어루만져 주듯 정답게 재잘거렸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슬픈 사람들과 침울한 사건들 사이에서 아무런 재미도 없이 지냈기 때문에 도통 명랑해질 줄 모르는 아이의 목소리처럼 우울하였다.
“시냇물아! 어쩜 그렇게 바보 같고 기운이 없니! 펄은 시냇물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외쳤다. 어째서 그렇게 슬프니? 기운을 내! 언제나 그렇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지만 말고!”
그러나 시냇물은 숲 속의 나무들 사이에서 지낸 짧은 일생을 통해서 몹시 엄숙한 경험을 해 왔으므로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같았고, 그밖에 할말은 아무것도 없는 성싶었다. 이 시냇물은 신비로운 원천에서 솟아났고, 답답하고 침울하게 그늘진 광경 속을 흘러온 점으로 봐선 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냇물과 달리 펄은 춤추고 반짝거리며, 즐겁게 지껄이면서 제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시냇물은 왜 슬퍼하는 거지, 엄마?”
“네게 슬픈 일이 있으면 시냇물이 그것을 가르쳐 줄 거야.” 어머니는 대답했다. “지금 엄마에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그런데 펄, 엄마에게는 누군가 산길을 걸어오는 발소리와 나뭇가지를 헤치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너는 저만큼 가서 놀고 있거라. 엄마는 저기 오는 분과 이야기를 좀 할 테니.”
“그 사람은 악마예요?”
펄은 물었다.
“저기 가서 놀라니까.” 어머니는 되풀이했다. “하지만 너무 숲 속으로 들어가면 안 돼요. 엄마가 부르면 곧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야 해.”
“그래요, 엄마.” 펄은 대답했다.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악마라면 좀 더 이곳에 있게 해 줘요. 그 큰 책을 끼고 있는 것이 보고 싶으니까.”
“자, 어서 가요, 바보 같은 소린 하지 말고.” 어머니는 초조한 듯이 말했다. “악마가 아니야. 벌써 나무 사이로 보이잖니. 목사님이시잖아!”
“정말! 저것 봐, 엄마, 가슴에 손을 얹고 계시잖아! 목사님이 악마의 책에 이름을 썼을 때 저곳에 표시를 달았기 때문인가? 그런데 왜 엄마처럼 가슴 위에 달지 않으실까?”
“자, 어서 가요. 나중에 네 이야길 다 들어 줄게!” 헤스터 프린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멀리 가면 안 돼.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어야 한다.”
아이는 노래를 부르면서 시냇물 쪽으로 걸어갔다. 우울한 시냇물의 속삭임에 좀 더 밝은 노랫소리를 혼합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시냇물은 위안 받기를 싫어하듯 이 쓸쓸한 숲 속에서 일어난 구슬픈 사연의 비밀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껄이고 있었다. 아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언의 애가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의 짧은 인생 속에 지나칠 만큼 어두운 그림자를 간직한 펄은 이렇게 불평만 하고 있는 시냇물과는 친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오랑캐꽃, 홀아비 바람꽃, 그리고 높은 바위틈에 나 있는 빨간 미나리풀꽃 따위를 모으기 시작했다.
요정 같은 딸아이가 가버렸으므로 헤스터 프린은 숲으로 빠지는 오솔길 쪽으로 한두 발짝 걸어가다가 그대로 울창한 나무그늘에 서 있었다. 오솔길을 걸어오는 목사가 보였다. 그는 혼자였고, 도중에서 나무로 만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의 수척한 모습은 몹시 초췌해 보였고, 절망의 빛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보스턴 거리를 걷고 있을 때나, 남의 눈에 띌 우려가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처럼 한적한 숲 속에서 혼자일 때 그것은 보기에 딱할 정도로 눈에 띄었다. 아마도 혼자 있다는 그 자체가 그에게는 큰 정신적 시련이었는지도 모른다. 걸음걸이조차도 모든 일이 귀찮은 듯. 마치 더 이상 발을 옮겨 놓을 이유도 의욕도 없고 그대로 가까이 있는 나무뿌리 곁에 몸을 내던지고 일생 동안 꼼짝없건, 나뭇잎이 그 위에 덮이고, 그대로 흙이 쌓여 작은 무덤을 만들 것이다. 그러면 죽음은 스스로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확정적이었다.
헤스터의 눈에는 딤스데일 목사가 뚜렷하고 생생한 고뇌에 잠겨 있는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펄이 말판 것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17. 목사와 교회 신자
목사는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거의 지나쳐갈 때까지 헤스터 프린은 목사를 불러 세울 수가 없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헤스터는 입을 열었다.
“아더 딤스데일!”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였다. 다음에는 좀 더 큰 목소리였지만 쉰 목소리였다. “아더 딤스데일!”
“누구십니까?”
목사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치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기분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습격을 당한 사람처럼, 불안한 듯이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무그늘 밑에 희미하게 사람 모습이 보였다. 침침한 옷차림에다 흐린 하늘과 무성한 나뭇잎 때문에 대낮인데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으므로 거기 서 있는 것이 사람인지 무슨 그림자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목사가 더듬는 인생행로에는 이처럼 그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살짝 빠져나온 망령이 따라다녔는지도 모른다.
목사가 한 발짝 다가서니 주홍 글씨가 눈에 띄었다.
“헤스터! 당신이오, 헤스터 프린? 살아 있는 당신이오?”
“그럼요, 살아 있고말고요!” 헤스터는 대답했다. “지난 7년 동안 살아 있던 것처럼! 아더 딤스데일, 당신이야말로 살아 계신 건가요?”
두 사람이 이렇게 서로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가를 확인하고 자신의 생존에마저 의심을 품어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렇게 으슥한 숲속에서의 만남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마치 이승에서 친밀하게 지내던 두 영혼이 저승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어색하고 두려웠다. 둘 다 망령이면서 상대편 망령을 보고 겁을 먹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절박한 마남이 그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서로의 마음속에 과거의 경험과 이력을 생생하게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위기의 순간이 아니고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그들의 영혼이 흘러가는 순산의 거울 속에 각자 자신의 모습을 비쳐 보았던 것이다. 아더 딤스데일은 두려움에 떨면서 마지못해 하는 태도로 천천히, 송장과 같이 차디찬 손을 내밀어 헤스터 프린의 싸늘한 손을 잡았다. 비록 차디찬 악수였으나, 두 사람이 이처럼 손을 잡음으로써, 처음 만난 순간의 어색함은 사라졌다. 적어도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기분이 든 것이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두 사람은 헤스터가 모습을 나타냈었던 숲 속 나무 그늘로 걸어갔다. 그리고 헤스터와 펄이 좀전에 앉아 있던 이끼더미 위에 걸터앉았다. 이윽고 말문이 트이자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으레 하는 인사말로 음산한 날씨에 대한 아야기, 폭풍우가 올 우려가 있다는 이야기, 다음엔 서로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와 질문을 이것저것 나누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문제에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해 갔다. 운명과 주위 사정으로 인해,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온 두 사람은 우선 하찮은 얘기를 나눔으로써 단절되었던 자신들의 친교를 회복하고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있도록 해야만 했다.
잠시 뒤 목사는 헤스터 프린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헤스터,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찾았소?”
헤스터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당신은 어떠세요?”
“어림없는 일이오! 절망뿐이오! 나 같은 인간이 현재와 같은 생활을 하며 절망 이외에 또 무엇을 바랄 수 있겠소. 내가 무신론자였거나, 양심이 없는 인간이었거나, 거칠고 동물적인 본능으로 살아가는 야비한 인간이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것이오. 아니, 안정을 잃는 일도 없었겠지! 지금 내 영혼의 상태가 이꼴이니 하느님이 내게 주셨던 모든 훌륭한 능력이 본디는 선한 힘이었던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나의 정신을 괴롭히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소. 헤스터, 나만큼 비참한 사람은 없소!”
“이곳 사람들은 당신을 존경하고 있고, 당신도 훌륭하게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안정을 얻을 수 없으신가요?”
“더욱 비참하오, 헤스터! 그 때문에 더 비참해질 뿐이오!” 목사는 쓰디쓰게 웃었다. “내가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은 아무런 신념 없이 일하고 있을 따름이오. 그런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나처럼 타락한 영혼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소? 더렵혀진 영혼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깨끗이 할 수 있단 말이오. 사람들이 나를 존경한다지만, 차라리 경멸과 증오를 퍼부어 주었으면 좋겠소. 내가 설교단 위에 서면, 마치 내 얼굴에서 천국의 빛이라도 비쳐 나오는 것처럼 올려다보는 많은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아야만 하오! 그것이 대체 무슨 위안이오? 또 교인들이 진리를 갈망하여 마치 오순절의 하느님 말씀이나 되는 것처럼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하오! 그러나 사람들이 그토록 신망하고 있는 나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정작 검은 실체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소. 당신은 이것을 위안이라고 할 수 있겠소, 헤스터? 표면적인 나와 내면적인 나가 전혀 딴판인 나 자신의 모습에 난 차라리 웃음이 났소! 그것을 본 악마도 비웃고 있다오!”
“당신은 너무 자학하고 계신 거예요.” 헤스터는 상냥하게 말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뼈저리게 뉘우치시지 않으셨어요? 당신의 조는 벌써 오래전에 없어졌고, 지난 과거의 것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현재 생활은 남들이 보는 것처럼 신성한 것이에요. 이처럼 훌륭하게 일을 함으로 해서 입증되는 회한이 어찌 실체가 아니겠습니까?”
“그게 아니오,” 헤스터. 목사는 대답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오! 차디차게 죽은 것이어서 나에겐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거요! 하기야 그 동안 고행은 많이 해 왔지만, 회개는 한 번도 한 일이 없소! 만일 그랬다면 이런 위선적인 법복을 벌써 오래 전에 벗어던지고 최후의 심판 날에 있을 그대로의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냈을 것이오. 헤스터, 당신은 행복한 사랑이오. 가슴에 떳떳하게 주홍 글씨를 달고 있으니 말이오! 나의 주홍 글씨는 남모르게 불타고 있소! 7년간이나 거짓된 삶의 고통에 시달려 온 끝에 참 모습을 알고 있는 당신과 이렇게 마주하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위안을 주는 일인지 당신은 아마 모를 것이오! 나에게 친구라도 있어 사람들의 나에 대한 칭송으로 괴로울 떄 매일같이 그를 찾아가 나의 정체가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 죄인인가를 들려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의 영혼은 살아갈 수 있을 것이오. 그 정도의 진실만으로도 나는 구원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이 거짓이오! 공허요! 죽음뿐이란 말이오!”
헤스터 프린은 목사의 얼굴을 처다 보았으나, 차마 입을 열지는 못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을 이렇게 열렬하게 토로한 그의 말은, 헤스터가 별러 온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었다. 헤스터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라고 계신 친구, 당신의 죄를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친구로서 그 죄의 공범자였던
제가 있습니다!"
목사는 숨을 몰아쉬며 벌떡 일어서더니 마치 심장이라도 후벼낼 듯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목사는 외쳤다. "원수라고! '더구나 한 지붕 밑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헤스터 프린은 비로소 이 불행한 사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했다. 오랜 세월 동안 아니, 단 한 순간이었다 하더라도 악의에 찬 목적만을 지닌, 그런 사람의 수중에 그를 내맡겨 놓음으로써 원수가 바로 그 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딤스데일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의 마음의 자장을 혼란시키기에 충분했다. 헤스터는 이 일에 대해 지금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아니, 자기가 당한 운명에 비하면 훤씬 견디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었기에 그에게 무관심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목사의 고통을 목격한 뒤로 그에 대한 동정심이 부드러운 물결처럼 그녀의 마음에 일어났다. 이제는 그의 심정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로저 칠링워드는 언제나 목사 곁을 맴돌며, 악의에 찬 비밀의 독을 뿌려 목사의 주변 공기를 더럽히고, 목사의 정신적 내지는 육체적인 병에 의사로서 공공연히 간섭하는 일 등의 이런 접촉의 기회를 지금까지 잔혹한 목적을 위해 사용해 왔다는 것을 헤스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로 인해 고뇌에 찬 목사의 양심은 늘 흥분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건전한 고통으로 병을 고치기는커녕 그의 정신을 혼란케 하고 타락케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이 세상에서는 정신 이상이 될 수밖에 없고, 저 세상에 가서는 선과 진리로부터 영원히 소외되는 길밖에 없다. 저 세상에서의 소외가 이 세상에서는 정신이상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양이다.
헤스터는 전에 사랑했던, 아니 이제 숨김없이 말해도 되겠지만, 아직도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자신이 이런 파멸 상태로 몰아넣은 것이다. 전날 로저 칠링워드에게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목사의 명예나 지위, 또는 생명이라도 희생하는 편이 차라리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느니, 그의 발치 아래 낙엽 위에 쓰러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 아더. " 헤스터는 소리쳤다. "나를 용서해 줘요!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진실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진실이야말로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었고, 아무리 괴로울 때도 굳세게 지켜 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행복이, 당신의 생명이, 당신의 명예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는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진실을 기만하는 일에 동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닥치는 일이 있을지라도 진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역시 잘못이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시겠는지요? 그 노인! 그 의사! 로저 칠링워드라 불리는 그 남자! 그는 나의 남편이었습니다!"
한동안 목사는 무서운 눈으로 헤스터를 쏘아보았다. 그의 분노는 그의 숭고하고 부드러운 성질과 한데 섞여 있기는 했으나, 사실상은 그의 성품 중에 악마가 당연한 자기 몫으로써 요구하고, 다시 목사의 다른 부분까지 정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부분이었다. 이토록 험악하고 분노에 찬 목사의 얼굴을 헤스터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 표정은 불과 얼마 안되는 시간 동안에 갑자기 무섭게 변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고뇌로 인해 크게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정력조차도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마침내 땅바닥에 힘없이 쓰러지더니 목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알만도 한 일이었건만!" 목사는 중얼거렸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던 거요!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이 까닭 없이 떨렸던 것은 그 비밀을 알려 준 게 아니었을까? 외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오, 헤스터, 당신은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오! 죄로 인하여 병든 마음을 -바로 그 꼴을 보고 쾌재를 부르고 있는 그 사람 앞에 드러내 놓다니! 이건 너무 참혹한 일이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추악한 일이란 말이오! 헤스터, 당신은. . . . 이건 당신 탓이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소!"
"그러나 전 당신에게 용서를 받아야만 합니다!" 헤스터는 울면서 그의 곁 낙엽 위에 몸을 내던졌다. "벌은 하느님께 받겠습니다! 당신에겐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헤스터는 갑자기 격정에 사로잡혀 두 팔을 내던지 듯하며 목사의 머리를 가슴에 힘껏 끌어안았다. 목사의 볼이 주홍 글씨에 닿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목사는 뿌리치려고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헤스터는 놓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무서운 눈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7년이란 세월 동안 세상은 이 고독한 여인을 눈에 가시처럼 여겨 왔건만 그녀는 꿋꿋하게 참고 견디어 냈다. 뿐만 아니라 그 냉혹하고 슬픈 시선을 한 번도 외면해 본 일이 없없다. 하느님도 역시 그녀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헤스터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창백하고 허약하고 죄로 인해 슬픔에 짓눌린 이 사나이가 짓는 무서운 얼굴만은 헤스터로서 참을 수 없었고 견디며 살아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용서해 주시겠지요?" 그녀는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무서운 얼굴 하시지 않겠죠?
용서해 주시는 거죠?"
"용서하겠소, 헤스터!" 목사는 간신히 그렇게 대답했다.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울려오는 듯한 괴로운 목소리였으나 노기는 없었다. "이젠 진심으로 용서하겠소. 하느님이 우리 둘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어야 하오! 헤스터,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인은 아니오. 타락한 목사보다도 더 괘씸한 사람이 하나 있으니 말이오! 그 늙은이의 복수는 나의 죄보다도 더 흉측하오. 그 사람은 잔인무도하게 인간 마음의 신성함을 짓밟은 것이오. 그러나 당신과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소, 헤스터!"
"절대로 하지 않았죠!" 헤스터는 속삭였다. "우리가 한 행동은 그 나름대로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느끼기도 했었고, 둘이서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소. 잊을 리가 있겠소!"
그들은 다시 이끼 낀 나무등걸에 나란히 앉아 손과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의 인생에 이토록 우울한 때가 있었던 일은 없었다. 이 순간은 그들이 겅어 온 인생길의 끝장이었으며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점점 암담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함께 하는 이 순간의 매력에 끌려 좀 더 오래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었다. 그들 둘레의 숲은 어둠침침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슬픈 소리를 냈다. 나뭇가지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휘늘어졌고 노목이 신음하듯 삐걱거리는 소리는, 그 밑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슬픈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앞으로의 재난을 예언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그곳을 뜰 수가 없었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은 얼마나 쓸쓸해 보이는지 몰랐다! 헤스터 프린은 다시 치욕의 업고를 짊어져야 하고, 목사에게는 허무한 명예의 껍데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금빛처럼 찬란한 햇빛도 이 음산한 숲속의 어둠보다는 소중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목사 이외에 누구도 보는 이가 없으므로 주홍 글씨도 타락한 여인의 가슴에서 불탈 필요는 없었다! 헤스터 이외에 누구의 시선도 없는 이곳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배반한 아더 딤스데일도 잠시나마 진실할 수 있었다.
목사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놀라 큰 소리로 외쳤다.
"헤스터, 큰일이오! 로저 칠링워드는 그의 정체를 폭로하려는 당신의 의도를 알고 있소, 그렇다면 우리 비밀을 잠자코 숨겨 두겠소? 이번엔 어떤 형태로 복수를 해 올까?"
"그 사람의 성격에는 이상하게 비밀을 좋아하는 데가 있습니다." 헤스터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또 여태껏 숨어서 복수해 오는 동안에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어요. 그 사람이 비밀을 폭로하는 일은 없으리라 봅니다. 틀림없이 다른 방법으로 흉측한 격정을 만족시킬 것입니다!"
"그럼 나는. . . . . 그 무서운 원수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계속 살아야 한단 말이오?" 아더 딤스데일은 몸을 움츠리면서 어느 사이에 버릇이 된 행위로 걱정스러운 듯 손을 가슴에 대었다. "생각 좀 보오, 헤스터! 당신은 강한 여자요, 나대신 결단을 내려 주오!"
"앞으로 그 사람과 함께 살아서는 안 돼요." 헤스터는 천천히 힘주어 말했다. "당신의 마음을 더 이상 그의 사악한 눈앞에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죽는 것만 못 한 일이오!" 목사는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피하겠소? 어떤 길이 나에게 남아 있단 말이오? 당신이 그 사람의 정체를 말했을 때 내가 몸을 던졌던 이 낙엽 위에 다시 한 번 쓰러지기라도 하란 말이오? 이곳에 쓰러진 채 죽어야만 한단 말이오?"
"슬프군요, 당신이 그렇게 약해지셨다니!" 그녀의 눈에 눈물이 솟았다. "약해졌다는 것만으로 죽겠단 말씀이신가요? 그 이외에는 이유가 없잖습니까!"
"하느님의 심판이 내린 것이오."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목사의 대답이었다. "내가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힘에 겨운 심판이오!"
"하느님께서는 자비심이 있습니다." 헤스터는 대답했다. "다만 당신에게 그것을 잡을 만한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나를 위해 굳센 사람이 되어 주오, 헤스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러주오!"
"세상이 그렇게 좁은 것인가요?" 헤스터 프린은 목사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외쳤다. 그녀는 혼자 서지도 못 할 정도로 초주검 된 남자의 정신에 본능적으로 자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저 마을 이외에는 세계가 없는가요? 저 거리 역시 불과 얼머 전까지만 해도 나뭇잎이 쌓인 황야였고,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숲과 마찬가지로 쓸쓸한 곳이 아니었습니까? 이 숲 속의 오솔길은 어디로 계속될까요? 당신은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시겠죠!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더 계속되고 있습니다. 황야 속으로 깊숙이 이어지며 들어갈수록 인적이 없어집니다. 여기서 몇 마일만 가면 노란 낙엽 위엔 백인의 발자국이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을 겁니다. 거기까지 가면 당신도 자유로운 몸이 됩니다. 그렇게도 비참했던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 넓은 숲 속에 로저 칠링워드의 눈을 피하여 당신의 마음을 숨길만한 나무 그늘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있기야 있지, 헤스터. 하지만 그것은 낙엽 밑뿐이오." 목사는 슬픈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러시면 넓고 넓은 바다의 길도 열려 있습니다!" 헤스터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은 바다를 건너서 이곳에 오셨습니다. 당신이 바라시기만 하면 오신 길을 되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 이름 모를 벽촌이나 대도시 런던에, 또는 독일이나 프랑스에 아니면 즐거운 이탈리아에 가면 그 사람의 힘도 미치지 못하고 알아차리지도 못 할 것입니다! 무쇠처럼 냉혹한 이곳 사람들의 의견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 때문에 당신은 지금껏 속박돼 있었습니다!"
"그런 짓은 할 수 없소!" 마치 꿈을 실현시키라는 말이라도 들은 듯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갈 힘이 없소. 죄를 지어 비참한 몸이 되었을지라도 하느님이 정해 주신 이곳에서 속세의 생활을 마칠 생각밖에 아무 생각도 없소.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내 영혼이지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더 하고 싶소! 나는 영혼의 파수꾼으로서는 부적당한 사람이지만, 그리고 이 어려운 영혼의 파수꾼 역할이 끝날 때면 죽음과 불명예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지만, 그렇다 하여 이곳을 떠날 생각은 없소!"
"당신은 7년 동안이나 비참한 짐에 눌려 기가 죽어 버린 거예요." 헤스터는 그에게 용기를 주려는 강렬한 의욕을 갖고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무거운 짐을 내동댕이치고 가야만 합니다! 숲 속의 오솔길을 걸어갈 때 그것들이 거추장스러우면 안 됩니다. 바다를 건널 생각이시면 그런 것으로 뱃길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비참한 잔해는 그것이 생겨난 이 장소에 다 버리고 가시면 됩니다. 더 이상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하시는 겁니다! 한 번 실패한 것으로써 꿈을 잊었다는 말씀인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미래에는 아직도 숱한 기회와 성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행복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선행을 더할 수도 있습니다! 이 위선적인 생활을 진실된 생활로 바꿔 보는 거예요. 인디언의 스승이 되고, 전도가사 되는 것도 좋겠죠. 당신의 마음이 그런 사명을 느끼신다면, 아니면 당신의 성격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문명사회에서 현자나 명사라 불리는 사람들처럼 학자나 현인이 되면 어떠실까요. 설교를 하세요! 글을 쓰세요! 행동을 하세요! 이곳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일 말고 무엇이든지 하세요! 아더 딤스데일의 이름을 버리고 다른 훌륭한 이름, 공포도 치욕도 느끼지 않고 불릴 수 있는 이름을 쓰세요. 당신의 목숨을 좀먹는 고통 속에서 왜 하루라도 더 머뭇거리고 있어야 합니까! 당신의 의지나 행동을 이렇게 무기력하게 하고 있잖습니까! 회개하는 힘조차 없을 정도가 아닙니까! 자, 용기를 내어 힘을 발휘하세요!"
"오오, 헤스터!" 아더 딤스데일은 외쳤다. 그의 눈에서는 헤스터의 열성에 의한 약하디 약한 빛이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듯했으나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무릎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에게 달음박질을 하라는 거요! 나는 여기서 죽을 수 밖에 없소! 넓고 낯설고 험난한 세계로 돌진할 기력도 용기도 없소. 혼자서는 말이오!"
그것은 극도로 쇠잔한 그의 정신을 나타내 주는 마지막 말이었다. 목사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행운조차 잡을 힘이 없었다.
목사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혼자선 말이오, 헤스터!"
"혼자서 가시라는 게 아닙니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듯한 대답이었다.
이리하여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한 셈이었다.
18. 빛의 홍수
아더 딤스데일은 헤스터의 얼굴을 희망과 환희에 빛나는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불안한 빛은 감출 길이 없었다. 자기는 막연하게 암시만 한 것을 결단성 있게 딱 잘라 말해 버린 헤스터의 대담성에 일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헤스터 프린은 본디 용감하고 동적인 정신을 지닌데다 오랜 세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고립된 생활을 해 온 탓으로, 딤스데일 목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유로운 생각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가 길잡이도 안내인도 없이 방황해 온 정신의 황야는 지금 두 사람이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결정 짓기 위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울창하고 인적 없는 숲 속과 같이 광대하고 복잡하며 그림자가 짙은 것이었다. 헤스터의 지성과 감정은 사막을 고향으로 삼으며, 마치 숲 속의 인디언처럼 자유로이 방황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줄곧 소외당한 입장에서 그녀는 위정자들이 설정해 놓은 모든 인간 사회의 제도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단지 그것들을 비판하고 관찰하며 살아왔으며 목사의 늘어진 칼라. 법복. 처형대. 교수대. 난롯가. 교회 등에 대해서도 인디언이 느낄 정도의 존경심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운명은 그녀를 자유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주홍 글씨는 다른 여자들이 감히 발을 들여 놓지 못하는 영역에도 드나들 수 있는 통행증이나 다름없었다. 치욕과 절망, 고독 같은 것들이 스승 중에서도 가장 엄하고 과격한 스승으로서 헤스터를 굳세게 만들어 주었으나, 한편 그릇된 것도 많이 가르쳐 주었다.
이에 반해 목사는 일반적인 법칙 세계에서 벗어난 인생 체험은 해 본 일이 없었다. 가장 신성한 법칙의 하나를 벌벌 떨면서 단 한 번 범한 일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열로 인해 범한 죄였지 결코 주의 주장에서 범한 죄는 아니었다. 그 불행한 시기 이래로 목사가 병적이라 할 만큼 세심한 열의를 가지고 지켜 온 것은 행위가 아니라 모든 감정의 움직임이었고, 자신의 온갖 생각이었다. 그즈음의 목사들은 사회 조직의 지도계층에 속하였으므로 그는 그 사회의 규범이나 주의나 심지어는 편견에 의해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목사이기 때문에 더욱 그가 소속한 사회 질서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죄를 지은 뒤 아물지 않은 상처로 인해 늘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처참하리만큼 신경이 예민한 인간이었으므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보다 오히려 도독심이 굳세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헤스터 프린에게 있어 7년 동안의 고립된 생활과 치욕의 세월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준비 기간에 불과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더 딤스데일은 어떠한가? 이런 사람이 또 한 번 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그 죄의 정상 참작을 위하여 어떤 구실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구실이 있을 리는 없었다. 기껏해야 그가 오랜 고뇌로 녹초가 되었다든가, 마음을 괴롭히는 가책 떄문에 암담하게 혼란해졌다든가-스스로 죄인이란 것을 자인하고 도망치든가, 아니면 위선자로서 그대로 버틸 것인가로 양심이 갈팡질팡했다든가- 죽음이나 치욕의 위험을 피하고, 적의 헤아릴 수 없는 책략을 모면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든가 -병들고 약한, 비참한 모습으로 쓸쓸한 사막과 같은 길을 방황하고 있는 이 불쌍한 순례자의 눈에, 지금 치르고 있는 무거운 숙명 대신에 인간적인 애정과 동정, 새로운 생활이 한순간 비쳤던 일 등을 정당한 이유로 손꼽을 수가 있을까. 여기서 죄악이 인간의 영혼 속에 만들어 놓은 상처는 이 인간 세계에서는 절대로 회복될 수 없다는 엄격하고도 슬픈 진리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상처는 파수꾼을 두어 지킬 수는 있다. 적은 영혼의 성 안으로 무리하게 a들어오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고, 또 다음에 쳐들어올 때는 전에 성공했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은 아직도 남아 있고, 적은 잊을 수 없는 승리감을 다시 한 번 맛보기 위해 살금살금 다가올 것이다.
목사의 마음속에 이러한 갈등이 있었다 할지라도 여기서는 상세히 서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목사가 도망갈 결심을 했다는 것, 더구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목사는 생각했다.
'지난 7년 동안, 잠시라도 마음에 평화와 희망을 안겨 주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을 천국의 구원에 대한 보증으로 믿고 더 참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몸이라면, 처형 전의 사형수에게 허용되는 위안을 붙잡아도 되지 않겠는가? 또는 헤스터가 설득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길이 보다 나은 생활로 통하는 길이라면, 이 길을 택했다 해서 더 훌륭한 장래를 버리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 여인 없이는 이제 살아나갈 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힘 있게 나를 격려해 주고, 이렇게 부드럽게 나를 위로해 주지 않는가! 오 하느님, 눈을 쳐들 용기조차 없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가시는 거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헤스터는 조용히 말했다.
일단 결심하고 나니, 기묘한 기쁨의 빛이 목사의 괴로운 가슴에 환한 빛을 던져 주었다. 자기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방금 도망쳐 나온 죄수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무법지대에서 거칠다고 할 정도의 자유로운 공기를 들이 마실 때와 같은 들뜬 기분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정신은 껑충 뛰어, 비참하게 땅 위를 기어 다닐 때보다 훨씬 가깝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본디 타고난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이러한 기분에 뭔가 경건한 구석이 있었다 하더라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목사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다시 이런 기쁨을 맛볼 수 있다니! 기쁨의 싹은 모두 죽어버렸는 줄 알았는데! 오, 헤스터, 당신은 나를 구해 준 천사요! 나는 병들고, 죄에 더럽혀지고, 슬픔에 잠긴 이 몸을 숲 속의 낙엽 위에 내던졌는데, 네 속의 모든 것이 다시 소생하여 자비로운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새로운 힘이 가득 차 일어선 듯한 기분이오! 이것만으로도 벌써 행복한 생활이오! 왜 이런 것을 좀 더 일찍 발견하지 못했을까?"
"과거는 돌아다보지 않기로 해요. " 헤스터 프린은 대답했다. "과거는 가버린 거예요, 이제 와서 과거를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보세요! 이 가슴의 표시와 함께 나는 과거를 모두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습니다. "
이렇게 말하면서 헤스터는 주홍 글씨를 떼어 멀리 낙엽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 신비스러운 표시는 시냇가에 떨어졌다. 한 뼘만 더 멀리 날아갔더라면 물속에 떨어져 시냇물이 지금 속삭이고 있는 술픈 사연 외에 또 하나의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 흘러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놓은 주홍 글씨는 냇물 바로 옆에 떨어져, 마치 잃어버린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누군가 재수 없는 사람이 지나가다 줍기라도 한다면, 불가사의한 죄악의 환영으로 인해 까닭 모를
불안에 떨며 괴로워하였을 것이다.
오욕의 낙인이 없어지자 헤스터는 긴 한숨을 쉬었다. 치욕과 고뇌의 무거운 짐이 그녀의 정신으로부터 싹 사라져 버렸다. 아아! 이 얼마나 홀가분한 해방감이냐! 자유를 맛보니 비로소 지금까지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새로운 충동으로 헤스터는 머리를 감싸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모자를 벗어 버렸다. 순간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그 풍성한 머리칼이 명암을 던지어 그 얼굴 모습에 부드러운 매력을 주었다. 여성의 본성으로 부터 샘솟는 듯한 부드럽고 환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넘쳐흘렀으며, 그녀의 눈매에도 빛난다. 오랫동안 창백하기만 했던 볼은 볼연지를 바른 듯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여자로서의 개성과 젊음에 넘친 모든 아름다움이, 오래 전 잊혀진 과거로부터 되살아나 처녀 시절 같은 희망과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행복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마술의 굴레 속에서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하늘과 땅의 어두움은 마치 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슬픔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하늘이 미소라도 터뜨린 것처럼 햇빛이 나타나 어두컴컴하던 숲 속을 폭포수처럼 내리비쳤다. 그리하여 푸른 나뭇잎 하나하나까지 기쁘게 빛나고, 누렇게 떨어진 낙엽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잿빛 고목나무 줄기까지 새롭게 반짝였다. 여태껏 그늘을 이루고 있던 것이 모두 환히 빛났다. 시냇물의 흐름은 밝은 광선으로 숲 속 깊이까지 더듬어 올라갈 수 있었으며, 그 음울한 신비로움도 이제는 기쁨에 넘친 신비로움으로 변했다.
이리하여 대자연은 - 인간의 법칙에 지배당한 일도 없고, 보다 높은 진리의 광명을 받아 본 일도 없는 방자하고 이교도적인 대자연은 두 영혼의 축복에 공명한 것이다. 사랑이란 새로이 생겨난 것이든 죽음 같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든 간에 언제나 햇빛같이 밝은 빛을 만들어 낸다. 그 빛은 사람의 마음속에 넘쳐흐를 뿐 아니라, 외부 세계에까지 넘쳐흐르게 된다. 이를테면 숲이 전과 다름없이 침침한 그늘을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헤스터의 눈에는 빛나 보였을 것이고, 아더 딤스데일의 눈에도 휘황하게 보였을 것이다!
헤스터는 새로운 기쁨에 몸을 떨며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펄과 사귀셔야죠! 우리들의 펄이에요! 전에 만나 보셨지요? 정말 그랬었죠! 하지만 이젠 다른 눈으로 보셔야 해요. 그 애는 참 이상한 아이예요! 나도 잘 모를 지경이에요. 그러나 나 못지않게 그 아이를 귀여워해 주시겠죠. 그 애를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도 가르쳐 주셔야 해요. "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할까?" 목사는 불안한 듯이 물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아이들을 멀리 해 왔소. 아이들이 나를 못 믿어하는 눈치고, 나와 사귀기를 꺼려하기 때문이오. 펄이 두렵기까지 하오. "
"어머나, 가엾게시리!" 헤스터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 애는 당신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당신도 그 애를 사랑하게 될 거고요. 어딘가 가까운 곳에 있을 거예요. 제가 불러 보죠! 펄! 펄!"
"저기 있군." 목사가 말했다. "저기 시냇물 건너편 햇빛이 비치고 있는 곳에 서 있소. 그래 당신은 정말 저 아이가 나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소?"
헤스터는 생긋 웃고, 또 펄을 불렀다. 펄은 목사가 말한 대로 좀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아치 모양이 큰 가지 사이로 내려쬐는 햇빛을 받아 마치 빛의 옷을 걸친 환영처럼 보였다. 광선이 흔들리는 데에 따라 펄의 모습도 때로는 흐리게, 때로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때마다 현실 세계에 있는 어린아이로 보이기도 했고, 요정같이 보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므로 펄은 천천히 숲 속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펄은 어머니와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심심하지 않았었다. 크고 어두운 이 숲 속은 속세의 죄악과 고통을 숲 속으로 끌어들인 사람에게는 엄숙하게 보였을지 모르나. 이 외로운 아이에게는 가장 훌륭한 놀이 상대가 되어 주었다. 침울한 숲이기는 했지만, 더없이 친절한 표정으로 펄을 맞이해 주었다. 지난 가을에 열려서 새해 봄에야 무르익은 덩굴호자 딸기를 펄에게 선사했는데, 그 열매는 다 시든 잎 위에서 핏방울처럼 빨갛게 맺혀 있었다. 펄은 이것을 따 먹으며 갓 딴 열매의 싱싱한 맛을 즐겼다. 이 숲 속의 작은 들짐승들은 펄을 위해 일부러 길을 피해 주지는 않았다. 열 마리쯤의 새끼를 거느린 뇌조가 펄을 위협하듯 달려 나왔다가 자기의 난폭한 행동을 뉘우치고 새끼들에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꾸꾸 울어 대었다. 나지막한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비둘기 한 마리는 펄이 가까이 가자 환영인지 경고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울었다. 높은 나뭇가지에서 둥우리를 틀고 있는 다람쥐가 성이 난 것인지 장난 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무튼 펄을 보고 울음소리를 내더니 나무 열매를 하나 머리 위에 내던졌다. 그것은 지난해의 나무 열매로 벌써 다람쥐가 날카로운 이빨로 갉아 먹은 것이었다. 낙엽 위를 걷는 가벼운 발소리에 잠이 깬 여우 한 마리가 펄을 수상쩍은 듯이 바라보더니, 어디로 도망갈 것인지 그 자리에서 한잠 더 잘 것인지를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리 한 마리가 나타나서 펄의 옷 냄새를 맡자 펄이 사나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건 좀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대자연의 숲과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야생 동물들이 이 아이에게 뭔가 공통된 야생미를 발견했다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더욱이 펄은 양쪽에 푸른 잔디가 있는 마을의 거리나, 어머니의 오두막집에 있을 때보다도 이 숲 속에 있을 때가 더 얌전했다.
이 숲 속의 꽃들도 그 점을 알고 있는지 펄이 지나가자 ‘나를 꺾어서 장식해 주세요, 어여쁜 아가씨. 나를 꺾어서 당신을 치장해 주세요!’ 하고 속삭이는 듯했다.
펄도 꽃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제비꽃이며 아네모네며 미나리풀꽃이며 또 고목에 돋아난 새파란 가지들을 꺾었다. 펄은 이것들로 머리와 허리를 장식하여, 숲 속의 어린 요정이라고 할까, 태고적 숲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펄이 이런 모습으로 몸치장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천천히 돌아왔다. 목사의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19. 시냇가의 어린 요정
"저애가 정말 귀여워질 거예요." 헤스터 프린은 목사와 나란히 펄을 쳐다보며 되풀이하였다. "예쁜 아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이름도 없는 꽃으로 저렇게 멋지게 치장한 걸 보세요! 숲 속에서 진주며 다이아몬드며 루비를 모았다 해도 저렇게 어울리진 않을 거예요. 참 귀여운 아이죠! 그런데 저 아이늬 이마가 누구를 닮았는지 나는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말이오, 헤스터." 아더 딤스데일은 불안한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언제나 당신 곁을 따라 다니는 저 귀여운 아이가 얼마나 나를 놀라게 했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나는 생각했었소. 아아, 헤스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으며 그 일을 두려워했다니 참으로 가혹한 일이었소. 저 아이가 나를 꼭 닮아 세상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을까 걱정했었소. 하지만 저 아이는 당신을 더 많이 닮았소!"
"그렇지 않아요! 나를 많이 닮았다니요!" 헤스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만 더 세월이 흘러보세요. 저 아이가 누구 아이라는 것이 알려져도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아무튼 저 아이는 놀라우리만큼 아름답군요. 저렇게 머리에다 꽃을 꽂고! 마치 그리운 영국에 두고 온 요정이 곱게 치장하고 우리를 마중 나온 것 같아요."
두 사람은 펄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기분에 잠겨 있었다. 이 아이한테서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정리가 엿보였던 것이다. 지난 7년 동안 이 아이는 산 주홍 글씨로 세상에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는 그들이 그렇게도 숨기려고 애쓴 비밀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이 화염의 글씨를 해독할 능력이 있는 예언자나 마술사가 있었다면 이 아이의 모습에 씌어진 모든 것을 확실히 읽을 수 있었을 게다. 더구나 펄은 두 사람의 생명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과거의 죄야 어찌 되었든 간에 두 사람이 함께 영원무궁토록 같이 살게 될 육체적인 결합인 동시에 정신의 표현이기도 한 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그들의 지상에서의 운명과 내세에서의 운명이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이곳으로 다가오는 아이에게 일종의 숭고한 느낌마저 갖게 하였다.
"저 아이에게 말할 때는 정열이나, 열성이나 아무튼 보통과 다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돼요." 헤스터는 속삭였다. "우리 펄은 가끔 작은 요정처럼 변덕스럽고, 엉뚱한 짓을 잘 하는 아이니까요. 특히 충분한 이유를 알기 전에는 남의 정을 받으려 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 아이에게는 강한 애정이 있어요! 나를 사랑하듯이 당신도 사랑하게 될 거예요!"
"당신은 짐작도 못 한 일이겠지만." 목사는 옆에 있는 헤스터 프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만나기를 한편 두려워하면서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하지만 사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아이들은 여간해서 날 잘 따르지 않소. 내 무릎에 기어오르거나 귀에 대고 조잘대거나 하지도 않고, 나의 미소에도 응답해 주지 않는단 말이오. 먼발치에 서서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볼 뿐이오. 심지어는 갓난아이들까지도 내가 안으면 꼬집는 것처럼 울어 댄단 말이오. 그러나 펄은 두 번씩이나 나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소. 첫 번째 일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두 번째는 당신이 저 아이와 함께 그 엄격한 총독 집에 왔을 때요."
"그때는 당신이 저애와 나를 위해 참으로 용감하게 변호를 해 주셨지요!" 헤스터는 대답했다. "저는 잊지 않고 있답니다. 아마 펄도 잊지 않을 거예요. 조금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처음에는 저 아이도 서먹서먹하고 낯설어 하겠지만 곧 당신을 따르게 될 거예요!"
이때 펄은 건너편 시냇가에까지 와서, 이끼 낀 나무등걸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헤스터와 목사를 말없이 쳐다보고 서 있었다. 펄이 서 있는 곳은 마침 시냇물이 깊은 웅덩이를 이룬 곳이라 잔잔한 수면에는 작은 아이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꽃과 풀을 엮어 치장한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수면에 비친 아이의 그림자는 형체 없는 그림자의 느낌을 아이 자신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펄은 어떤 공감의 힘에 이끌린 듯 그곳을 비추는 햇빛 속에서 환히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두컴컴한 숲 속을 통하여 꼼짝도 않고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발치에 보이는 시냇물 속에는 또 한 아이가 -아주 똑같은 한 아이가 황금빛에 둘러싸여 서 있었다. 헤스터는 뭔가 개운치 않은 초조한 듯한 기분이 들며 펄과 자신이 멀어져 감을 느꼈다. 숲 속을 돌아다니는 동안 모녀와 단둘이 살아오던 세계로부터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려고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헤스터의 이런 느낌은 옳은 것이기도 했고 잘못된 것이기도 했다. 모녀사이가 멀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머니 탓이지 펄의 탓은 아니었다. 펄이 어머니 곁을 떠나 산책을 하는 동안 어머니의 애정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게 되어, 그 애정의 양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어정어정 돌아온 펄은 늘 있었던 제자리를 발견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이 처한 입장에 어리둥절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망상인진 모르지만." 예민한 목사는 두 모녀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저 시냇물은 두 세계의 경계선으로 당신은 다시는 펄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아니면 저 아이는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요정 같아서 냇물을 건너지 못하도록 금지를 당한지도 모르겠구려. 저 아이를 빨리 오라고 해요. 저 아이가 저렇게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왠지 초조하구려."
"착하지, 어서 온! 헤스터는 재촉하듯 말하며 두 팔을 벌렸다. 왜 그렇게 꾸물대지! 그렇게 늑장을 부린 일은 없었지 않니? 여기 계신 분은 엄마 친구야. 너에게도 친구가 될 거야. 앞으로는 엄마 혼자일 때보다 두 배나 더 귀여워해 주실 거다! 어서 냇물을 뛰어넘어와. 넌 아기사슴처럼 잘 뛰지 않니!"
펄은 이런 달콤한 말에 아무 반응도 없이, 냇물 건너편에 버티고 서 있었다.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어머니의 목사를 번갈아 바라보기도 하고, 두 사람을 함께 쳐다보기도 하며 그들의 관계를 알아내어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더 딤스데일은 아이의 시선을 느끼자, 습관이 되다시피 한 무의식적인 몸짓으로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마침내 펄은 기묘하고도 위엄 있는 태도로 손을 내밀더니 조그만 손가락으로 어머니 가슴을 가리켰다. 수면 위에 비친 꽃으로 치장한 아이의 그림자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참 이상하구나. 왜 엄마한테 안 오니?"
헤스터는 외쳤다.
펄은 얼굴을 찌푸리고 줄곧 엄마의 가슴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아직 갓난아이같이 해맑은 얼굴이었으므로 그 찌푸린 표정이 한층 인상적이었다. 계속 손짓해 부르는 어머니가 전에 없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고 있었으므로 아이는 점점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냇물 속에도 인상을 찌푸리고 거만하고 화난 듯한 몸짓으로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그림자가 비쳐, 펄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빨리 오지 못하니, 펄. 엄마가 화낼 테야!" 헤스터는 고함을 질렀다. 다른 때 같으면 이 아이의 이런 행동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좀 더 얌전해 줬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냇물을 건너 이리 뛰어온! 참, 속 썩이는구나. 안 오면 엄마가 간다!"
그러나 펄은 아무리 엄마가 달래고 위협해도 막무가내더니 갑자기 울화통을 터뜨린 돗 손발을 마구 휘저으며 몸부림을 쳤다. 이 심한 발작과 함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숲 전체에 메아리쳐, 이유도 없이 떼쓰고 심술을 부리는 이 아이에게 수많은 아이들이 동정과 격려를 보내는 것 같았다. 또한 냇물 속에도 화관을 쓰고 띠를 두른 펄이 발을 구르며 미친 듯 몸부림치는 모습이 비쳐 보였으나, 그러는 동안에도 작은 손가락은 여전히 헤스터의 가슴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애가 왜 저러는지 알겠어요." 헤스터는 목사에게 속삭였다. 곤혹을 감추려고 몹시 애를 썼으나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이들이란 날마다 눈앞에 익히 보아 오던 것이 조금 달라지기만 해도 가만치 있지 않는 법이에요. 펄은 내가 늘 달고 있던 것을 떼어버렸다고 저러는 거예요!"
"헤스터, 부탁이오." 목사는 말했다. "저 아이를 달래는 방법이 있으면 곧 달래 줘요. 히빈스 부인처럼 늙은 마녀가 성내는 거라면 또 몰라도." 그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으며 덧붙였다. "아이들이 저렇게 성을 내는 것은 딱 질색이요. 펄처럼 귀여운 아이의 분도도 주름투성이의 마녀와 다름없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으니 말이오.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 아이를 빨리 달래 줘요!"
헤스터는 불을 빨갛게 붉히고 옆에 있는 목사를 한 번 쳐다보더니, 급힌 한숨을 쉬며 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볼의 홍조는 사라지고 죽은 사람처럼 파리해졌다.
"펄!" 그녀는 슬프게 말했다. "네 발 밑을 좀 봐! 그래, 거기야! 네 바로 앞 말이야! 냇물 이쪽!"
아이는 엄마가 말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주홍 글씨는 하마터면 물속으로 빠질 듯한 아슬아슬한 곳에 떨어져 있었으므로 금빛 수가 물속에 비치고 있었다.
"그걸 이리 가져온!"
헤스터는 말했다.
"엄마가 와서 가져가요!"
펄은 대답했다.
"무슨 애가 저렇죠!" 헤스터는 목사에게 말했다. "저 아이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얘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랍니다. 하지만 사실 저 지겨운 표시에 대한 저 아이의 생각이 옳아요. 나는 당분간 저 괴로움을 참아야만 하겠어요. 며칠만 지나면 되겠죠. 이 고장을 버리고 희생의 나라로 갈 수 있을 때까지! 넓은 바다라면 저 표시를 내 가슴에서 빼앗아 영원히 삼켜 버릴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며 냇가로 걸어가서 주홍 글씨를 집더니 다시 가슴에 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헤스터는 주홍 글씨를 깊은 바다 속에 버려야겠다고 희망에 찬 말을 하고 있었으나, 운명의 손으로부터 이 치명적인 표적을 다시 받아든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숙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한한 공간 속에 이것을 내팽개치고, 모처럼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했건만 이제 또 주홍 글씨의 비참함이 원래의 자리에서 번쩍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죄악이란 이렇게 뚜렷한 형태로 나타난 경우이든, 그렇지 않은 경우이든 숙명적인 셩격을 띠게 마련인가 보다. 헤스터는 윤기 있는 머리를 틀어 올려 모자 속으로 쑤셔 넣었다. 이 슬픈 글자 속에는 생명을 시들게 하는 마술이라도 숨어 있는지 헤스터의 포근한 여성미는 스러져 가는 햇빛처럼 금방 사라져 버리고 잿빛 그림자가 내리덮였다.
이렇게 쓸쓸한 모습으로 변한 헤스터는 펄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젠 엄마를 알아보겠니, 펄?" 나무라는 듯한 투였으나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냇물을 건너와서 엄마라고 불러 주겠지, 이 수치의 표시를 달았으니! 다시 슬픈 엄마가 되었으니!"
"응, 그럴게!" 아이는 대답을 하자 단숨에 냇물을 뛰어 넘어 헤스터를 두 팔로 얼싸안았다. "이젠 우리 엄마야! 난 엄마의 펄이고!"
여느 때에는 볼 수 없는 상냥한 태도로 펄은 어머니의 얼굴을 끌어당기더니 이마와 양쪽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어쩌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면서도 마음 아프게 해 주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듯이 펄은 입을 내밀어 주홍 글씨에도 키스를 했다.
"이상한 짓을 하는구나!" 헤스터는 말했다. "엄마를 좀 사랑해 주는가했더니 이젠 조롱하고 있구나!"
"왜 목사님이 저기 앉아 있지?"
펄이 물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거야." 어머니는 대답했다. "자, 축도를 부탁하자! 목사님은 펄이 아주 좋으시대, 엄마도 좋고. 너도 목사님이 좋아질걸? 가자, 너와 이야기하고 싶으시다는구나!"
"목사님이 우리가 좋으시대?" 펄은 영리한 눈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우리와 함께 손을 잡고 셋이서 마을로 돌아가는 거야?"
"지금은 안 돼, 펄." 헤스터는 대답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우리와 함께 손을 잡고 걷게 되실 거야. 우리 세 사람의 따뜻한 집이 생길 거다. 목사님의 무릎 위에 앉아도 되고, 너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시면서 귀여워해 주실 거야. 너도 목사님이 좋아지겠지?"
"언제나 가슴에 손을 대고 계실 건가?"
펄이 물었다.
"바보 같으니, 그런 말이 어디 있니!" 어머니는 외쳤다. "자, 어서 가서 축도를 해 주십사고 해!"
그러나 귀여움을 받는 아이가 자기 입장을 위태롭게 하는 경쟁자가 나타나면 본능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질투심 탓인지, 아니면 변덕스러운 성격 탓인지 펄은 목사에게 매정한 태도를 보였다. 어머니는 억지로 펄을 목사 앞으로 데리고 갔는데. 펄은 뒷걸음질 치며 아주 싫다는 표정을 갖가지 찡그린 얼굴로 나타냈다. 펄은 태어났을 때부터 여러 가지 찡그린 얼굴을 보여서 자기 마음먹은 대로 표정을 바꿀 수 있었으며, 그 표정 하나하나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목사는 몹시 당황하여, 혹시 키스라도 해 주면 어린아이의 환심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몸을 굽혀 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펄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냇가로 달려가, 기분 나쁜 키스가 몸에서 씻겨 내려가도록 이마를 물에 담그고 있었다. 그 동안 두 사람은 사태의 변화로 필요하게 된 준비며 곧 이행해야 할 목적 등에 대하여 의논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끝을 맺게 되었다. 조그만 골짜기는 다시 침침한 고목들 틈에 쓸쓸한 장소로 남게 되었다. 그 고목들은 수많은 혀로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속삭이게 되겠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울한 시냇물은 작은 가슴에 벅차게 안겨진 이야깃거리에다가 이 새로운 것을 하나 더 얻은 셈이 되었다. 구슬픈 이야기를 속삭이며 흐르고 있는 시냇물의 흐름은 오랜 세월에 비하여 조금도 명랑해지지 않았다.
20. 미로에 서 있는 목사
헤스터 프린과 펄보다 한 발 앞서 그곳을 떠난 목사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모녀의 흐릿해지는 얼굴 모습이며 윤곽만이 어슴푸레한 숲 속에 남아 있었다. 그는 생활 속에 일어난 이토록 큰 인생의 변화를 단번에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잿빛 옷을 입은 헤스터는 아직도 그 고목 옆에 서 있었다. 아주 옛날 돌풍에 쓰러져 오랜 이끼에 덮인 그 고목위에,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진 숙명의 두 사람이 걸터앉아 잠깐의 휴식과 위안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펄이 - 방해가 되던 훼방자가 없어졌으므로 시냇가에서 사뿐사뿐 춤을 추며 다가와서 여느 때처럼 어머니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 목사는 지금까지 잠이 들어 꿈을 꾼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마음을 기묘한 불안으로 괴롭히며 흐릿하게 이중으로 번져 보이는 인상을 뿌리치기 위하여 목사는 헤스터와 함께 세운 출발 계획을 돌이켜 생각하며 다시 세밀히 검토해 보았다. 사람이 많고 큰 도시가 있는 구대륙이, 인디언의 오두막들이나, 유럽 사람들의 개척지가 해안을 따라 드문드문 늘어서 있을 뿐인 뉴잉글랜드나 미국 각지의 황야보다도 더 적절한 은신처가 될 것이라고 두 사람은 결정 지었던 것이다. 목사의 건강이 숲 속 생활의 괴로움을 견디어 나가는 데 적당치 않을뿐더러 그의 타고난 재능, 교양, 성격 면으로 봐서도 문명과 진보 속에서밖에 정착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문명과 진보의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이 사람은 더 그 사회에 잘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단을 부추기듯 때마침 배 한 척이 항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배는 그 무렵 자주 볼 수 있었던 수상쩍은 순항선으로 반드시 해적선이라고 할 수 없으나 제멋대로 바다 위를 횡행하고 있었다. 이 배는 카리브 해의 연안 부근에서 최근에 입항했는데, 사흘 뒤엔 브리스톨을 향해 출항하기로 되어 있었다. 헤스터 프린은 자칭 자선 부인회원이란 직함을 내세워 선장이며 승무원들과 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른 둘과 아이 한 명의 배편을 헤스터 프린이 마련하기로 했는데, 주위의 사정으로 봐서 비밀은 지켜야만 했다.
목사는 적잖은 관심을 가지고 배가 출항하는 날짜를 헤스터에게 물었다. 나흘 뒷면 떠날 것이라는 대답을 듣고 목사는 ‘잘 되었군!’ 하고 혼자 생각했다. 그러나 사흘 뒤에 목사는 총독 취임식에 축하 설교를 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기회는 뉴잉글랜드의 목사로서는 평생의 명예라고 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성직을 떠나려는 이 마당에 이보다 더 적절한 방법과 시기를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목사로서의 의무를 이행치 않았다거나 적당히 해치웠다는 말은 안하겠지! 하는 것이 이 모범적인 목사의 생각이었다. 이 불쌍한 목사만큼 심오하고 예리한 자기반성을 갖는 사람이 이처럼 비참하게 기만당해야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이처럼 서투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그 성격의 근본이 미묘한 병균의 침식을 받아 온 사실이, 이처럼 사소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뚜렷한 증거로 나타난 일은 없을 것이다.
꽤 오랜 시일을 두고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얼굴과 타인에게 보이는 얼굴이 다른 이중인격적인 인간은 어느 얼굴이 진정한 자기 얼굴인지 혼돈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헤스터와 헤어져 돌아올 때 딤스데일 목사의 감정은 흥분하여 여느 때엔 볼 수 없는 기력이 솟아났다. 숲 속의 길은 갈 때 보았던 것보다 훨씬 황량하고, 울퉁불퉁한 자연의 방해물이 많은데다 사람의 발자취도 드물었다. 그러나 목사는 물웅덩이를 건너뛰고, 몸에 얽혀드는 덤불을 헤치며 언덕길을 올라가고, 움푹 패인 데로 뛰어내렸다. 자기 자신도 놀랄 만큼 지칠 줄 모르는 원기로 험한 길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겨우 이틀 전만 해도 바로 이 길을 숨이 차서 몇 번이나 쉬어 가며 힘없이 걷던 것을 생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눈앞에 나타난 낯익은 풍경들이 완전히 달라진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풍경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하루이틀 전의 일이 아니라 여러 날, 아니 여러 해 전의 일인 것 같았다. 확실히 낯익은 길거리의 모습은 그대로였고, 집집마다 특징 있는 처마의 모양도 그대로였으며, 아마 이쯤이었지 하고 생각나는 곳에는 반드시 바람개비도 달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달라진 듯한 느낌이 집요하게 머리를 쳐들었다. 도중에서 만나는 아는 사람들이며 이 작은 거리에 낯익은 인간 생활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나이를 더 먹은 것도 아니고 젊어진 것도 아니었다. 노인들의 턱수염이 더 희어진 것도 아니고 어제까지 기어 다니던 갓난아이가 오늘은 걸어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엊그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목사의 뿌리 깊은 느낌은 사람들이 달라졌다고 알려 주는 것이었다. 자기 교회의 담벼락 옆을 지나갈 때도 같은 인상을 받게 되어 놀라고 말았다. 건물 그 자체가 낯설어 보이는 동시에 낯익어 보이기도 했으므로 딤스데일 목사의 마음은 두 갈래 생각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꿈속에서만 교회를 보아온 것인가, 아니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갖가지 형태로 나타난 이런 현상은 외면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낯익은 장면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에 중대한 변화가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그 사이의 하루가 마치 몇 년이나 된 것 같은 작용을 그의 의식에 일으켰던 것이다. 즉 목사의 의지와 헤스터의 의지, 그리고 그 두 의지 사이에서 태어난 운명이 이와 같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전과 다름없는 거리였지만 숲에서 돌아온 목사는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친구들을 만났으면
이렇게 말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자네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아닐세! 그 사람은 숲 속 깊숙한 골짜기에 두고 왔다네! 이끼 낀 고목나무가 쓰러져 있는 음침한 냇가 옆일세. 자네들이 생각하고 있는 목사를 찾으려면 그곳에 가 보게. 그녀석의 수척한 몸, 여윈 볼, 창백하고 우울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이마 등이 벗어던진 옷처럼 그곳에 팽개쳐져 있을 걸세! 물론 친구들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가!" 하고 말하겠지만, 틀린 것은 그들이지 목사는 아니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딤스데일 목사의 정신은, 그의 사고와 감정의 영역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마음속의 왕국에서, 왕조와 도덕률이 완전히 변해 버렸다는 것 이외에는, 이 불운과 놀라움에 허둥대고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모든 충동을 적절히 설명해 주는 것은 없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목사는 무엇인가 기묘한 장난을 해 보고 싶은 충동에 사러잡혔다. 그것은 또 발작적인 동시에 의도적이었고 무의식적이면서도 그런 충동을 억제하려는 자아와는 다른, 좀 더 깊은 곳에 자리잡은 자아로부터 생겨났다는 느낌이었다. 예를 들면 교회 장로 한 사람을 만났을 때였다. 정직한 노인은 아버지와 같은 애정과 장로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목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이로 보나 교회 안에서의 지위로 보나 그건 마땅한 일이었다. 그 태도에는 목사의 지위와 또 목사 자신에 대해서, 당연히 요구되는 정중한 존경심이 섞여 있었다. 사회적 지위나 재능이 뒤떨어진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을 대할 경우와 같이, 이것은 노령의 예지와 위엄이 복종과 존경에 잘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훌륭한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딤스데일 목사는 이 흰 수염의 장로와 몇 마디 말은 나누는 동안 성찬에 대해 마음속에 떠오른 불경스러운 생각을 입 밖에 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혀가 이런 무서운 말들을 지껄이지는 않을까? 본심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일을 혀가 멋대로 찬성한다고 지껄이지나 않나 하고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떨렸으며,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두려움에 떨면서도 눈앞에 있는, 믿음이 깊고 선량한 이 노인이 목사의 불경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을 듣고 얼마나 대경실색할까 하는 생각을 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밖에도 또 하나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부지런히 걷고 있던 딤스데일 목사는 교회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여신도를 만났다. 참으로 신앙심이 깊고 모범적인 노파로 가난하고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과부였다. 마치 비문을 새긴 비석이 잔뜩 들어선 묘지처럼 죽은 남편이나 아이들, 그리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 버린 친구들에 대한 추억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러한 추억은 다른 사람의 경우라면 침울한 슬픔이 되었겠지만, 30년 이상이나 계속 마음의 양식으로 삼아 온 종교적인 위안과 성서의 진리에 의해, 신앙심이 두터워진 이 노파에게는 그것은 일종의 엄숙한 기쁨이 되었다. 더구나 딤스데일 목사가 그녀를 신도로 맞은 뒤부터는 이 노파가 속세에서 받는 유일한 위안은 목사를 우연히 만났거나, 일부러 만나러 갔거나 하였을 때, 잘 들리지 않는 귀로 정신을 집중하고 이 경건한 사람의 입술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천국의 입김이 서려 있는 복음의 진리를 듣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딤스데일 목사는 노파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는 순간까지도 성서의 구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인간의 영혼 불멸설에 이의를 주장하는, 짧고도 신랄하고 반론의 여지조차 없을 듯한 몇 마디 말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것은 영혼의 큰 적인 악마의 소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말이 노파의 마음에 주입되었더라면, 그녀는 맹독이 온몸에 퍼지기라도 한 듯이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져 버렸을 것이다. 사실상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목사는 그 뒤에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목사의 말이 지리멸렬하여 선량한 미망인이 확실한 뜻을 이해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독특한 방법으로 적절한 설명이 가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목사가 돌아보았을 때 주름투성이의 파리한 노파의 얼굴에는 하늘나라의 빛이라고 생각되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희열의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이어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연로한 교인과 헤어진 다음 목사는 이번에는 교회에서 가장 나이 어린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처녀는 철야 기도가 있은 다음날인 안식일에 딤스데일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입교한 여자였다. 그날 설교의 내용은 속세의 덧없는 쾌락을 버리라. 우리의 인생이 어두워질수록 더욱 빛을 발할 뿐 아니라, 마침내 영광스러운 최후의 날, 이 세상의 모든 암흑을 몰아낼 천국의 희망을 마음속에 간직하라 라는 것이었다. 처녀는 천국에 핀 백합꽃처럼 아름답고 청순했다. 목사는 이 처녀의 순결성을 부여해주고 있음을 목사는 잘 알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이 처녀가 그날 오후 어머니의 겉을 떠나, 이 사나이가 지나가는 길목에 나타나게 한 것은 악마의 소행임에 틀림없다. 처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악마는 목사에게 검은 꽃을 피게 하고, 때가 되면 검은 열매를 맺을 악의 씨를 조그맣게 뭉쳐서 소녀의 부드러운 가슴에 내던지라고 속삭였다. 진심으로 자신을 믿고 있는 이 청순한 처녀의 영혼에 대하여 목사는 강대한 지배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악으로 흐려진 눈으로 한 번만 쏘아보면 더없이 깨끗한 영혼을 말려 죽이고, 단 한마디의 말로써 사악한 영혼을 조장시킬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목사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더 강한 자게력을 가지고 설교용의 긴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상대방을 못 알아본 체하고 재빨리 지나갔으므로 그 나이 어린 처녀는 목사의 무례한 태도에 얼굴이 파리해졌다. 처녀는 자신의 양심을 -포켓이나 바느질 주머니처럼 자질구레하면서도, 고운 물건이 잔뜩 들어 있는 양심의 주머니 속을 뒤적였다. 가엾게도 이것저것 자기가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잘못을 들춰내어 자신을 책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퉁퉁 부은 눈으로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다.
이 마지막 유혹을 이겨 낸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목사는 또 다른 충동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더 허황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그것은 길 한가운데 서서 거기서 놀고 있는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한 청교도 아이들을 붙잡고 아주 불순한 말은 몇 마디 가르쳐 주고 싶은 충동이었다.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목사복 때문에라도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자제하고 있을 때, 그 카리브 해 근처에서 온 술 취한 선원 한 사람을 만났다. 지금까지의 다른 유혹은 모두 잘 참아왔으므로 타르투성이의 취한과 악수를 나누고, 건달 같은 선원들이 즐겨하는 음란한 농담을 지껄이거나 노골적이고 위세 있게 가슴이 후련해질 만큼 하느님에 대한 욕설을 연발하여 기분전환을 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위기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도덕심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타고난 고상한 취미와, 평소의 엄격한 목사로서의 습관 때문이었다.
이렇게 나를 성가시게 유혹하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목사는 길거리에 멈춰 서서 손으로 이마를 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완전히 악마의 손에 넘어간 것일까? 숲 속에서 악마와 계약하고 피로 서명을 했단 말인가? 그래서 악마의 비열한 상상력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사악한 일들이 차례차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 계약의 실행을 독촉 받고 있기 때문일까?
딤스데일 목사가 이처럼 이마를 치면서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 그 유명한 마녀 히빈스 노부인이 그의 곁은 지나갔다. 높은 머리장식과 호화로운 비로드의 옷차림에다, 친구 앤 터너가 토머스 오버베리 살해 사건으로 교수형이 되기 전에 그 비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노란 풀을 먹인 칼라를 달고 있었다. 목사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았는지는 모르나, 이 마녀는 우뚝 멈춰 서더니 상대방의 얼굴을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간교한 웃음을 띠며 여느 때에는 목사와 인사를 나누는 일조차 없던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목사님, 숲 속에 갔다 오셨군요." 마녀는 높게 장식한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다음에는 미리 알려 주십시오. 기꺼이 동반해 드릴 테니까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말만 하면 아무리 처음 가는 분이라도 목사님이 잘 아시는 대왕님의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부인." 목사는 대답했다. 그 진지하고 예의바른 태도는 부인의 신분에도 합당하고, 목사가 지닌 교양으로 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양심과 인격을 걸고 고백합니다, 부인 말씀의 뜻을 전혀 모르겠습니다! 내가 숲 속에 간 것은 대왕을 찾으러 간 게 아니며, 앞으로도 그런 분의 융숭한 대우를 받기 위해 숲 속을 찾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곳에 간 것은 나의 친구인 엘리어트 전도사를 마나, 그분이 이교도로부터 기독교로 개종시킨 귀중한 여러 영혼을 함께 축복하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하하하!" 늙은 마녀는 높게 장식한 머리를 까딱거리면서 깔깔 웃었다. "그렇겠지요. 대낮에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그러나 한밤중 숲 속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합시다!"
그녀는 노부인다운 위엄을 가지고 걸어갔지만, 가끔 돌아다보며 비밀의 연고 관계를 알고 있다는 듯 목사는 향해 웃음을 지었다.
목사는 생각했다.
‘결국 악마에게 내 몸을 팔아 버린 셈인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칼라에 노란 풀을 먹이고, 비로드 옷을 입은 저 노파가 대왕을 모신다는 그 악마에게!’
가엾은 목사여! 목사는 영혼을 팔아넘기는 것과 같은 거래를 한 셈이다! 행복한 꿈에 눈이 어두워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스스로 몸을 맡겼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그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죄의 전염성 독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이 정신 전역에 퍼져나간 것이다. 이 독은 깨끗한 일체의 충동을 마비시키고, 온갖 더럽혀진 충동을 살아 움직이게 했다. 경멸이나 독설, 이유 없는 악의, 이유 없이 악을 구하는 충동, 선향하고 신성한 것에 대한 조소 - 이러한 것들이 모두 눈을 떴고, 목사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유혹된 것이다. 이 히빈스 노부인과의 만남이 환상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면, 목사가 악한 인간들이나 사악한 영혼들의 세계에 공감과 동료의식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 목사는 이미 묘지 근처에 있는 자기 집에 다다라 있었다. 그는 이층으로 올라가서 서재에 틀어박혔다. 집으로 오는 동안 쉴 새 없이 자기를 사로잡으려 했던 괴상하고 사악한 충동으로 인해 남 앞에서 정체를 폭로당하는 일 없이 무사히 집에까지 당도한 것을 그는 다행으로 생각했다. 낯익은 서재로 들어간 그는 책이며 창문이며 난로며 벽걸이로 장식한 벽 등을 둘러보았으나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숲에서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줄곧 따라다니던 낯선 감정을 여기서도 느꼈던 것이다. 이 방에서 그는 연구도 하고 글을 썼을뿐더러 단식이나 철야 기도로 초주검되기도 했었다. 또한 기도를 올리며 수천 수백의 고뇌를 견딘 곳도 바로 이 방이었다! 의미심장한 고대 헤브라이 어로 쓰인 성서에서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으며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잉크가 묻은 펜과 쓰다 만 설교문 원고가 놓여 있었다. 이틀 전에 그의 생각이 중도에서 막혀 문장이 중단된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갖가지 괴로움을 겪고, 또 총독 취임 축하 설교문을 여기까지 써온 것은 바로 여위고 창백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한 발 물러서서 과거의 자기 자신을 조소하고 동정하고 부러워하는 듯한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과거의 그는 사라져 버렸다! 숲에서 돌아온 사람은 딴 사람이었고, 좀 더 현명한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단순하고 소박한 과거의 자기로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관한 지식을 지닌 현명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쓰디쓴 지식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사는 "들어오시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혹 악마가 찾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과연 그 예감은 들어맞았다! 들어온 사람은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한 손은 헤브라이어 성서 위에 놓고, 또 한 손은 가슴 위에 얹은 채 파랗게 질려 있었다.
"다녀오셨군요!" 의사는 말했다. "그 훌륭하신 엘리어트 전도사는 안녕하시던가요? 그런데 목사님, 얼굴빛이 좋지 않군요. 황야를 여행하신 것이 너무 고되었던 모양입니다. 축하 설교를
하시려면 기운을 차리셔야 할 텐데, 도와 드릴까요?"
"아뇨, 문제없습니다." 딤스데일 목사는 대답했다. "서재에 틀어박혀만 있다가 여행을 하고, 또 그곳에서 성인 같은 전도사님을 만나 뵙고, 전에 없이 자유로운 공기를 쐬었더니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제 선생이 지어 주시는 약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 약인 줄은 압니다만."
이러는 동안에도 로저 칠링워드는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신중하고도 세심한 눈길로 목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목사는 겉으로는 이렇게 태연한 체하면서도 헤스터 프린과 만난 일에 대하여 노인이 이미 알고 있든가, 아니면 적어도 눈치를 챘으리라고 확신했다. 의사 또한 목사의 눈에 자신이 이미 전처럼 신뢰하던 친구가 아니라, 증오하는 원수로 보인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기묘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로 어떤 사물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면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며, 어떤 문제를 회피하려 드는 두 사람은 바로 그 코앞까지 가까이 가면서도 전혀 그 문제를 건드리는 일 없이 무사히 물러서는 법이다. 따라서 목사는 로저 칠링워드가 자기들의 비밀에 대하여 확실한 말로 거론하리라는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는 독특하고 음흉한 방법으로 보다 가까이, 무서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오늘 밤만은 제 변변치 못한 의술을 이용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사실 말이지 축하 설교라는 큰일을 앞두고 건강하셔야 한다고 있는 힘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이 고장 사람들도 목사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답니다. 내년에는 목사님이 이곳에 안 계시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모양이니까요."
"그렇죠. 저 세상으로 가 버리면." 목사는 경건한 체념조의 말투였다. "하느님이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보내 주시면 좋으련만, 정말은 앞으로 1년을 더 교회의 여러분과 함께 지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치료는 현재의 제 건강 상태로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의사는 대답했다. "상당히 오랫동안 아무 효험도 없던 제 약이 이제야 효험을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지요. 목사님을 건강하게만 해 드릴 수 있다면 나는 정말 기쁠 것이고, 뉴잉글랜드 전체의 감사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손색없는 친구인 선생께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딤스데일 목사의 미소는 엄숙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의 친절에는 기도로 보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훌륭한 분의 기도는 황금의 사례입니다!" 로저 칠링워드 노인은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옳습니다. 그것은 천제의 조폐국 도장이 찍힌,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금화입니다!"
혼자 남은 목사는 하숙집 심부름꾼을 불러 식사를 가져오라고 한 다음 왕성한 식욕으로 먹어치웠다. 그러고 난 다음 쓰다 만 축하 설교 원고를 불 속에 집어 던지고 곧 새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무슨 영감이라도 받은 듯이 사상과 정감이 충동적으로 흘러나와 단숨에 써 내려갔다. 자기와 같은 더렵혀진 오르간의 음관을 통해 숭고하고 장엄한 신탁의 음악을 세상에 전달하는 것을 어찌 하느님이 허용하시는지 다만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 위문은 자연히 해결되도록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영원히 미해결로 놔두기로 하고, 목사는 열심히 기쁨에 넘쳐 원고 쓰는 일에 몰두했다. 이리하여 그날 밤은 날개 돋친 말처럼 달렸고, 목사 자신도 그 말을 타고 질주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아침이 되어 커튼 틈으로 황금빛 햇살이 비쳐들어 목사의 눈을 부시게 했다. 그는 여전히 펜을 든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헤아리기 힘들 만큼의 원고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21. 뉴잉글랜드 경축일
선임 총독이 임명되는 날 아침 헤스터 프린은 펄은 데리고 마을의 광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벌써 장인들과 시민들이 많이 나와 붐비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험악한 인상을 지닌 사람들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이 걸친 사슴가죽 옷은 이곳 식민지의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는 숲 속 개척지의 주민들임을 말하여 주고 있었다.
과거 7년 동안 다른 행사 때에도 늘 그러했지만, 이런 경축일에도 헤스터는 거친 회색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의 빛깔보다도 뭔가 형언할 수 없이 기묘한 옷 모양이 그녀의 여자로서의 매력을 완전히 가려 버려 전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희미한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에 달인 주홍 글씨 때문에 헤스터의 모습은 이 희미한 상태에서 되살아나 그 글자가 지니고 있는 도덕적인 빛 속에 뚜렷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다. 이 거리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낯익어 온 헤스터의 얼굴은 여전히 대리석처럼 침착함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가면과도 같았다. 아니, 차라리 죽은 여자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얼어붙은 듯한 싸늘한 표정이 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이런 불쾌한 연상을 하게 되는 것은, 헤스터가 남의 동정을 살 수 없다는 점에서는 죽은 거나 다름없고, 아직도 그 속에 섞여 살고 있는 것 같은 현실 세계에서도 실은 이미 오래 전에 떠나 버렸다는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이날만은 지금까지 볼 수 없던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눈에나 띌 정도로 뚜렷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 심안을 가진 관찰자가 있었다면 7년이란 비참한 세월 동안 군중의 시선을 종교적 의무로서, 회오로서, 인내에 인내를 거듭해 온 헤스터가 지금 마지막으로 자진해서 군중의 시선과 맞섰으며, 오랫동안 고통 받아 오던 것을 이제 승리와 흡사한 것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주홍 글씨와 주홍 글씨를 단 여인을 마지막으로 보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희생물이기도 하고, 종신 노예처럼 여겨지던 헤스터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얼마 안 있으면 당신네들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릴 것입지다! 앞으로 몇 시간 뒷면 깊고 신비스러운 바다가 당신네들이 내 가슴에 불타게 했던 표시를 영원히 흔적도 없이 삼켜 버릴 것입니다!’
동시에 또 이처럼 가슴에 깊이 뿌리박고 이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에 헤스터의 마음속에 서운해 하는 마음이 생겨났으리라고 상상한다 해도 인간의 심리에 비추어 볼 때 과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며, 모순된 것만도 아닐 것이다. 여인으로서 한창 나이의 태반을 통해 맛보아야 했던 쑥이나 알로에의 쓴 잔을 마지막으로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마셔 버리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있었던 게 아닐까? 앞으로 그녀의 입술에 닿을 인생의 술은 황금으로 조각한 잔에 부은 진하고 향기롭고 달콤한 술일 것이다. 아니면 지금까지 마셔온 쓰디쓴 술 찌꺼기를 먹은 탓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나른한 권태감을 남기게 될 것이다.
펄은 화려하고 산뜻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이 태양처럼 눈부신 환상적인 소녀가 우중충한 회색 옷을 걸친 여인에게서 태어났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며, 이 아이의 옷을 치장해 주는 데 발휘됐을 호화롭고 섬세한 상상력이 헤스터의 검소한 옷에 뚜렷한 특이성을 주었던 -한층 힘드는 일이었던 상상력과 같은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옷은 펄에게 너무나 잘 어울려 마치 그 아이의 성품이 저절로 유출되어 형상화 된 듯하였다. 나비의 날개나 꽃잎으로부터 그 아름다운 색채를 분리할 수 없듯이 이 아이의 복장과 성격은 표리일체가 된 것이다. 게다가 떠들썩한 경축일인 이날, 펄의 모습에는 기묘하게 침착성을 잃은 흥분이 엿보였으며, 그것은 마치 가슴에 장식된 다이아몬드가 가슴의 고동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빛나는 것과 흡사했다. 아이들이란 언제나 가까운 사람들의 동요에 공명하는 법이어서, 특히 집안에 근심거리가 있다든가 또는 큰일이 닥쳤다든가 할 때에는 어떤 종류의 일이든 반드시 알아채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어머니의 불안한 가슴 위에 장식된 보석이라 할 수 있는 펄이었으므로, 이 아이의 설렘 그 자체는 헤스터의 대리석 같은 이마에서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동요를 무언중에 말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흥분 때문에 어머니 곁을 얌전히 따라갈 수만은 없었던 펄은 새처럼 그 둘레를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끊임없이 재작거리며, 때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귀 아프게 불렀다. 그들이 광장에 이르러, 사람들이 와글대고 활기에 넘쳐 있는 것을 보자 펄은 점점 더 침착성을 잃었다. 왜냐하면 평소에 이 일대는 도시의 상업 중심지라기보다 마을의 교회당 앞에 있는 쓸쓸한 풀밭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는 장쇼였기 때문이다.
"엄마, 이게 웬일이야?" 펄은 큰 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왜 다들 일을 안 하지? 온 세상이 다 노는 날인가? 저것 봐, 대장장이가 있어요! 검정투성이의 얼굴을 깨끗이 씻고, 새 양복을 입었어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지만, 누군가 친절한 사람이 흥겹게 이끌어 줘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저쪽에 간수 브랫킷 할아버지도 계셨어. 나를 보고 끄덕이며 웃고 계시던데. 왜 그러지, 엄마?"
"갓난아기 때의 너를 알고 있어서 그러는 거야."
헤스터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나를 보고 웃는 건 기분 나빠요. 불쾌하고 침울한 얼굴에 눈처리가 무서운 할아버지니까!" 펄은 말했다. "엄마는 회색 옷에 주홍 글씨를 달고 있으니까 끄덕이면서 대꾸해도 될 거야. 그런데 엄마, 저기 보세요, 낯선 사람들이 얼굴이 굉장히 많아요. 인디언도 있고 뱃사람도 있어요! 저들이 이 광장에 뭣하러 왔죠?"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헤스터는 말했다. "총독님과 판사님들이 지나가시는 거야. 또 목사님이며, 높고 훌륭한 분들도 가시지. 악대와 군인들을 앞장세우고 행진하는 거란다."
"그럼 그 목사님도 계시겠네?" 펄이 물었다. "엄마가 나를 시냇가에 데리고 갔을 때처럼, 목사님이 나한테 두 손을 내밀어 주실까?"
"그야 목사님도 계시지." 어머니는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는 체도 안하실 거고, 너도 인사를 하면 안 된다."
"참으로 이상하고 슬픈 목사님이시네!" 아이는 이렇게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두운 밤에는 우리를 불러 엄마와 내 손을 잡아 주겠지! 오전에 저 처형대 위에 섰을 때처럼, 또 숲 속에서 고목만이 귀를 기울이고 좁은 하늘만이 보고 있을 때는 엄마와 이끼더미 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셨는데! 내 이마에도 입을 맞춰 주었지만 시냇물로는 여간해서 씻어낼 수 없었어! 하지만 지금처럼 환한 대낮이거나 여러 사람 앞에서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체 해야 하거든! 언제나 가슴에 손을 얹는 이상하고 슬픈 목사님이야!"
"조용히 해요, 펄! 그런 일은 아직 너는 몰라도 돼요." 어머니는 말했다. "이젠 목사님 생각은 하지 말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나 보란 말이야. 오늘은 모두들 얼굴이 얼마나 평안해 보이니, 아이들은 학교가 파했고, 어른들은 일터나 밭에서 일을 끝내고 와서 즐겁게 지내려는 거야. 오늘은 새로운 분이 총독님이 되시는 날이야. 그러니까 다들 명랑하고 즐겁게 사람들이 모여 나라가 처음 세워진 이후로 줄곧 이렇게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단다. 가난하고 낡은 세계가 없어지고, 살기 좋은 훌륭한 시대가 닥쳐오기라고 하듯이 말야!"
사람들의 얼굴을 밝게 하고 있는 진기한 명랑함에 대해서는 헤스터가 설명한 바 그대로였다. 이렇게 북적대는 연중행사에 청교도들은 약한 인간성에 대해서 허용해 주어도 좋다고 인정되는 즐거움과 공적인 기쁨을 모두 한데 몰아서 압축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평소에 쌓였던 우울한 구름을 완전히 몰라내려 했던 것이다. 단 하루의 경축일인 이날만큼은 그 침울한 얼굴 표정도 누그러지는 법이지만, 다른 사회에서라면 범사회적인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보일 정도의 심각한 표정은 역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시대의 기풍이나 풍 속의 특징이었던 회색 내지 검은 색의 음색을 너무 지나치게 과장하여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 보스턴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날 때부터 청교도적인 침울성을 타고나 것은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본디 영국인이었고, 그들의 아버지 대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밝고 풍족한 시대에 살았던 것이다. 이 시대야말로 영국민의 생활을 전체적으로 개관할 때, 지금까지 세계에 알려진 어느 시대보다 장려하고 웅대하고 기쁨에 넘친 시대였다. 이러한 전통적 취미를 좇았다면 뉴잉글랜드의 이주민들은 공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열리는 날에는 불꽃놀이. 연회. 가장행렬 등으로 장식했을 것이다. 장엄한 의식을 거행함에 있어서도 장엄한 기분과 즐거운 오락을 결부시켜 국민의 몸에 걸치는 예복에다 괴상하리만큼 화려한 수를 놓는 것쯤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곳 식민지에서 정치상의 새해가 시작되는 이날을 축하하는 자세에도 이런 종류의 시도가 다소나마 그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총독의 임명이란 연중행사에 관련하여 뉴잉글랜드의 선조가 시작한 관습에는 화려한 수도 런던의 대관식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시장 취임식 떄 보았던 화려했던 기억을 어설프게나마 반영하고 있었다. 비록 훨씬 동떨어진 경향은 있었지만, 그대로 하나의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 공화국의 선조이며 창건자인 정치가나 목사나 군인들은 위풍당당한 외관상의 의식이나 의례를 갖추는 일을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관은 옛 관습에 따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합당한 옷차림과 같은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위 인사들이 대중 앞에서 행진을 함으로써 구성된 지 얼마 안 되는 정부의 단순한 기구에 필요한 위엄을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종교와 동일시되던 각종 노동에 대해서도 이날만은 그에 따르는 규정을 완화해 준다기보다 대체로 묵인하는 형편이었다. 물론 엘리자베스 여황 시대나 제임스 왕 시대의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반 대중을 위한 오락 시설도 없었고, 하프를 타며 전설적인 가요를 노래하는 음유 시인도 없었고,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원숭이를 구경시키는 광대도 없었으며, 마술을 흉내내는 마술사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 몇 백 연도 더 묵은 이야기일 테지만 여전히 재미있는, 일반 대중을 웃기는 점에서는 아직도 다를 바 없는 재담을 늘어놓는 익살꾼도 없었다. 이렇게 사람을 즐겁게 하는 여러 분야의 재주꾼들은 엄격한 법적 제재를 받을 뿐 아니라, 그 법률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반 대중에 의해서도 엄격히 억제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그런대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주민들이 아주 옛날 영국에 살았을 때 시골의 축제일이나 마을 잔디밭에서 구경하거나 직접 참가한 일이 있는 운동 경기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필요 불거결의 용기나 담력을 위해서도 신천지에 보존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레슬링 시합은 콘훨 지방과 데본셔 지방의 방식이 저마다 다르기는 했지만, 광장의 여기저기서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육척 봉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사람들의 흥미를 끈 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쳐형대 위에서 두 검술 사범이 방패와 칼을 들고 시작한 모범 시합이었다. 이 시합은 관리가 제지하여 중단되는 바람에 관중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 관리는 처형대와 같은 시성한 장소가 이렇게 모독당하여 법의 위엄이 손상되는 것을 묵인할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그 무렵의 대중들은 경축일을 즐긴다는 점에선, 우리들처럼 시대적으로 훨씬 차이가 있는 후대 자손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2세, 즉 초기 이주민들의 다음 세대야말로 청교도주의가 가장 어두운 색채를 때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국민의 얼굴빛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그 뒤 수십 년이 지나도 그 그림자를 완전히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잊혀진 놀이의 방법을 다시 한 번 배워야 할 것이다.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인생은 대체로 영국에서 이민해 온 이주민들이 지닌 슬픈 회색이나 갈색, 또는 흑백의 빛깔을 띠고 있었지만, 그 중에는 색다른 빛깔이 섞여 있어 약간의 활기를 띠고 있었다.
군중과 좀 떨어진 곳에 한 떼의 인디언들이 서 있었는데 그 엄숙하고 굳은 표정은 청교도들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이처럼 물감을 더덕더덕 칠한 야만인의 모습은 세련되지는 못하였을망정 이 광장 안에서 가장 거칠어 보인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가장 난폭해 보이는 모습은 총독 취임의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상륙한 선원들 -카리브 해에서 온 한 무리의 선원들이었다. 얼굴은 까맣게 타고, 수염이 터부룩한 난폭자인 이들은 짧은 나팔바지의 허리를 혁대로 졸라맸는데, 세공을 하지 않은 금장식을 단 이도 있고, 장검이나 단검을 매달고 있기도 했다.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챙 넓은 모자 밑으로는 기분 좋게 장난치고 있을 때도 짐승처럼 잔인한 눈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묶어 놓고 있는 행동의 규범을 아무런 불안이나 걱정도 없이 마구 짓밟고 있었다. 관리들의 코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웠다. 이곳 주민들이 그런 짓을 했다면 한 모금에 1실링의 벌금을 치르게 되었을 것이다. 또 그들은 호주머니에서 술병을 꺼내어 포도주나 화주를 병째 들이키고는 놀라서 바라보는 군중들에게도 호기롭게 병을 내밀어 권했다. 선원들이 육지에서 이처럼 무법자와 같이 행동하는 것뿐 아니라, 본디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해상에서 저지르는 불합리한 행위에 관해서도 자유가 허용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도독이 아무리 엄격했다고는 하나 역시 불완전했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 무렵의 뱃사람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해적으로 처벌받을 존재였다. 이를테면 지금 화제로 삼고 있는 선원들도 당시의 뱃사람치고는 그다지 흉악한 표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스페인의 무역선을 약탈한 죄를 범했으니만큼 현대 법정에 나간다면 전원이 다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아득한 옛날 그 무렵의 바다는 제 마음대로 출렁거리며 파도치고 거품을 일게 했으며, 미쳐 날뛰는 폭풍에 지배될 뿐이었으므로 인간의 법률로는 달랠 도리가 없었다. 바다의 무법자들도 직업을 버리고 일단 결심만 하면 당장에라도 육지로 올라와 성실하고 믿음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일생 동안 불합리한 일을 계속하고 있는 그들과 거래를 하거나 간간이 교제하는 일도 그다지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검은 망토에 풀을 먹인 칼라, 거기다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청교도의 장로들도 선원들의 떠들어 대는 무례한 꼴을 보아도 그저 너그럽게 웃어넘기는 것이었다. 또한 의사인 로저 칠링워드 노인과 같은 점잖은 시민이 수상한 선장과 함께 다정하게 속삭이며 광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하더라도 특별히 놀라거나 비난을 하는 일은 없었다.
선장은 참으로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군중들 틈에서도 유별나게 눈에 띄었다. 양복에는 수없이 리본을 달았으며 모자에는 금테를 둘렀을 뿐 아니라 그 둘레에도 금사슬을 감았고, 끝에는 깃털을 꽂고 있었다. 허리에는 칼을 찼고 이마에는 칼자국이 나 있었는데, 머리카락을 내려 이러한 상처를 가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삼아 드러내 놓으려는 것 같았다. 육지에 사는 사람이 이런 옷차림이나 얼굴을 버젓이 내놓고 거리를 활보했다간 당장 재판관 앞에 불려가 단단히 심문을 받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벌금형이나 금고형, 혹은 수갑을 차고 갇히든지, 아니면 군중 앞에 거경거리가 되는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선장의 경우는 마치 물고기에 번쩍이는 비늘이 달려 있듯이 모든 것이 선자의 신분에 합당한 차림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의사와 헤어진 다음 브리스톨 행 배의 선장은 광장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가, 이윽고 헤스터 프린이 서 있는 곳까지 오자 상대방을 알아본 듯 서슴지 않고 말을 걸었다. 헤스터가 서 있는 곳은 언제나 그러했지만, 그녀의 둘레에는 마술의 원처럼 동그란 공간이 나 있었다. 그 둘레에서 사람들은 서로 밀리고 밀치고 하면서도 그 속으로는 아무도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았고, 감히 그런 마음을 먹는 이도 없었다. 그것은 주홍 글씨가 운명의 여인을 가두어 놓고 있는 강한 정신적인 고립 같은 것은 나타낸 것이었다. 헤스터 자신이 사양하는 탓도 있었지만, 이곳 사람들이 전처럼 불친절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역시 본능적으로 멀리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이 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즉 헤스터와 선장은 남이 엿 들을까 봐 걱정할 필요 없이 말을 나눌 수 있었다. 헤스터 프린에 대한 세상의 평판이 일변하여 있었기 때문에, 이 거리에서 가장 정조 관념이 굳기로 이름난 부인일지라도 이 선장과 이야기를 했다면 좋지 못한 소문거리가 되었을 일이지만, 헤스터의 경우엔 그다지 뒷공론을 자아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인." 선장은 말했다. "부인이 부탁한 것보다도 침대를 하나 더 마련하도록 급사 놈에게 일러 둬야겠어요! 이번 항해에선 괴혈병이나 발진티푸스 같은 병이 발생할 염려는 절대로 없습니다! 선의 외에 또 한 사람의 의사가 더 타게 되었으니까요. 걱정되는 것은 약품과 환약뿐이에요. 스페인 배와 거래할 약품이 잔뜩 쌓여 있으니까요."
"뭐라고요?" 헤스터는 표정에 나타난 이상으로 깜짝 놀라면 물었다. "누가 또 탈 사람이 있단 말인가요?"
"아니, 모르고 계십니까?"
선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이곳에 사는 의사로, 칠링워드라고 하던가요! 당신네들과 함께 우리 배의 식사를 하고 싶다더군요. 당신도 아실 텐데요. 당신네들과 동행이 되고, 당신이 말씀하시던 그분하고도 친구가 된다고 했으니까요. 그분은 고약한 이곳의 청교도 통치자들에게서 쫓겨나는 몸이라던 가요!"
"물론 두 분은 친한 사이입니다." 헤스터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으나 내심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 왔으니까요."
선장과 헤스터 프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광장 반대쪽 구석에 서서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군중의 말소리나 웃음소리, 갑자기 기분이나 관심거리 등으로 떠들썩한 광장을 가로질러 전달되는 그 미소는 무섭고도 은밀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22. 행렬
헤스터 프린이 정신을 가다듬어 이 새롭고 놀라운 사태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웃 거리에서 군악 소리가 가까이 들려오기 시직했다. 관리들이나 시민들의 행렬이 공회당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음을 알리는 음악이었다. 공회당에서는 관례에 따라 딤스데일 목사가 총독 취임 축하의 설교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윽고 행렬의 선두가 천천히 위풍당당한 모습을 나타냈고, 길모퉁이를 돌아서 광장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우선 군악대가 앞장서 왔다. 악대는 여러 종류의 악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가락도 잘 맞지 않았으며 솜씨도 대단치 않았다. 그러나 드럼과 클라리온의 조화가 군중에게 호소하려는 큰 목적, 즉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다 높고 보다 웅장하게 보이려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었다. 펄은 처음에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으나 아침부터 줄곧 어찌할 바를 모르던 흥분이 잠시 가라앉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잠자코 악대를 바라보았다. 마치 파도 사이에 뜨는 해조처럼 여유 있게 굽이치는 음악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아득히 먼 곳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악대 뒤를 이어 행렬의 친위대 구실을 하고 있는 보병 중대의 병기와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이 햇빛에 반사되자 다시 흥분된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 군대는 금전에 팔린 용병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전원이 애국적인 정신에 고무된 사람들로서, 성당 기사단을 본떠서, 군사학을 배우고, 평시에는 가능한 한도 내의 무술과 전략을 습득하는 일종의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 군대의 품격에 대한 높은 평가는 중대 각 개인의 당당한 태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실 대원 중에는 북해 연안 지대를 비롯해 유럽 각지로 종군하여 용사의 이름과 명예를 받을 만한 자격을 훌륭하게 얻은 자도 있었다. 더구나 빛나는 강철로 몸을 단장하고, 번쩍이는 투구 위에 깃털을 휘날리고 있는 모습은 현대인이 아무리 차려 입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위대 바로 뒤에 따라온 상급 문관들 쪽이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외모에 나타난 위엄 있는 태도만 보더라도 군인들의 거만한 걸음걸이는 우습기 짝이 없다고 할 것까지는 없어도 좀 저속하게 보였다. 이 당시에는 이른바 재능이라는 것이 현재 만큼 중요시되지 않았고, 인간에게 착실하고 위엄 있는 성격을 갖추게 하는 육중한 요소들이 훨씬 중요시되던 시대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선조들로부터 존경심이란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자손들에게 이르러서는 그 정도가 훨씬 미약해졌고, 공직자를 선출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그 힘은 뚜렷하게 약해졌다. 이런 변화는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아마 서로 비슷한 정도일 것이다. 당시 이 황량한 해안지대에 이주해 온 영국인들은 노인의 백발이나 위엄 있는 이마, 오랜 시련을 겪은 고결함, 견실한 지식이나 충실한 경험, 언제나 변함없는 느낌을 주며 일반적으로 관록이란 정의에 속하는 무게 있고 침착한 성질에 대해서 존경심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초기 정치인 브래드스트릿, 엔디콧, 더들리, 벨링햄 등은 대중에게 선출되어 권좌에 올랐으나 반드시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뛰어난 두뇌와 지성에 의해서보다는 근엄하고 중후한 인품에 의해 돋보였었다.
용기와 독립의 정신을 지닌 그들은 곤란한 위기에 처하면, 노도를 막아내는 안벽처럼 단호히 국민의 안녕을 위해 봉기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질은 새 식미지 관리들의 네모난 얼굴과 잘 발달한 육중한 체격 등에 여실히 나타나 있었다. 이 타고난 위엄 있는 태도에 관한 한, 이들 실제적 민주주의 선구자들이 귀족원에 참가하거나, 국왕의 추밀 고문관으로 임명된다 하여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이 관리들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바로 그 고명한 청년 목사였으며, 이 사람으로부터 경축일을 축하하는 설교를 듣게 되어 있었다. 그 당시는 정치가라는 직업보다도 목사라는 직업이 훨씬 더 지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성직에 대한 고매한 동기는 접어 두더라도 사회에서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는 직업이었던 만큼 격렬한 야심을 품은 사람도 이 목사라는 직업에 강한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력까지도 인크리스 메이더의 경우처럼 훌륭하게 목사의 수중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딤스데일 목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그가 뉴잉글랜드의 해안에 발을 붙인 이래 행렬에 끼어 행진하고 있는 이때처럼 힘찬 걸음걸이도 아니었고, 자세도 구부러지지 않았으며, 손을 힘없이 가슴 위에 올려놓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 목사를 보다 정확한 눈으로 보았다면 그 힘은 육체적인 것인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힘이었고, 천사가 그에게 북돋아 준 것이었는지는 모른다. 오랜 시간에 걸쳐 몰두한 사고의 용광로, 그 백열 속에서만 증류될 수 있는 강렬한 영혼의 술이 그에게 원기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목사의 민감한 기질이 하늘 위로 치솟아 올라가듯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에 자극되어 활력을 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표정은 넋 나간 사람 같았으므로 음악 소리가 딤스데일 목사의 귀에 들렸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확실히 육체는 여느 때와 다른 기세로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정신은 그 영역의 깊숙한 곳에서 이윽고 그곳에서 출발하려는 당당한 사상의 흐름을 정리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기에 목사는 주변의 것이라고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정신력이 허물어져 가는 육체에 힘을 주어 그 무거운 짐을 의식하지 못한 채 걷게 하여 그 자체보다 나은 정신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비범한 지성을 지닌 사람의 경우, 몹시 병약해져 있을 때에도 이러한 위대한 노력의 힘을 때때로 갖게 되며, 이 힘을 얻기 위해 며칠분의 생명을 투입한 나머지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죽은 사람처럼 생기를 잃게 된다.
목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헤스터 프린은 뭔가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 또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목사가 이젠 자신의 세계와는 전혀 동떨어진, 손이 닿을 수 없는 속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헤스터는 서로 한 번쯤은 눈길을 나눌 수 있으리라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두운 숲 속의 광경을 돌이켜보았다. 애정과 고뇌에 찬 작은 골짜기와 이끼 낀 통나무에 손을 마주 잡고 앉아서 슬프고 정열적인 이야기를 우울한 시냇물 소리에 실려 보내던 일을 생각했다. 그때는 서로가 얼마나 깊이 이해했던가! 그런데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란 말인가? 지금은 전혀 낯선 사람 같기만 했다! 그는 지금 위엄 있고 덕망 있는 장로들의 행렬에 끼어 화려한 음악에 휩싸여서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지나갔다. 사회적 지위로 보더라도 그녀의 손길이 닿을 수 없었고 그의 정신세계에는 더욱 그녀의 손이 미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환영이었나 보다. 그토록 선명하게 꾼 꿈이었는데도 목사와 자기 사이에는 어떠한 현실적인 인연도 맺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헤스터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아무리 강인한 헤스터라 할지라도 그녀 또한 여자였다. 두 운명의 무거운 발길이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이런 판국에 목사가 이렇게 두 사람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빠져나가 버리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두 손을 내밀어 더듬어도 그는 잡히지 않았다.
펄은 어머니의 심적 동요를 이내 알아차렸다. 아니면 목사에게 손닿을 수 없는 서먹서먹한 기분을 스스로 느꼈는지도 모른다.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펄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참새처럼 이리저리 퍼득거리며 불안해하였다. 행렬이 모두 지나가자 펄은 헤스터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마, 저분이 시냇가에서 나에게 입 맞춰 주던 그 목사님이야?"
"펄, 제발 잠자코 있어요!" 어머니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숲 속에서 있었던 일은 광장에서 이야기하면 안 돼요."
"저분은 같은 목사님 같지 않은데. 얼굴이 이상한 걸 뭐." 아이는 계속 말했다. "그런 얼굴이 아니었으면 쫓아가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키스해 달라고 부탁해 보려고 했는데, 어두운 숲 속에서 해 주신 것처럼 말이야. 그럼 목사님은 뭐라고 하셨을까, 엄마? 가슴을 손으로 누르고 나를 흘겨보며 저리 가라고 하셨을까?"
"뭐라고 말하고 말고가 없잖니, 펄." 헤스터는 대답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키스는 광장에서 하면 안 돼요, 하고 말씀하셨겠지. 바보 같으니라고, 네가 목사님께 말을 걸지 않기가 천만다행이다!"
딤스데일 목사에 대한 이와 비슷한 기분을 달리 표명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이 고장 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그녀는 해치웠다. 즉,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주홍 글씨의 여인과 말을 나눈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히빈스 노부인이었다. 그녀는 3단 주름깃에 수를 놓은 흉의, 게다가 황금 손잡이가 달린 단장을 짚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행렬 구경을 나왔던 것이다. 이 노부인은 당시 빈번히 일어나던 마술 행각의 장본인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므로 군중들은 길을 비켜났다. 그 호화로운 주름 속에 역병이라도 숨어 있는 것처럼 부인의 옷자락이 닿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헤스터 프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것을 보자 히빈스 노부인에 대한 공포감은 곱절로 늘었고,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두 여자가 서 있는 곳에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더라도 여느 사람은 납득이 안 갈 거예요!" 노부인은 헤스터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 목사 말이오! 세상에서는 살아 있는 성인이라고 떠받들고 있고, 사실상 그런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군요! 하지만 저 사람이 행렬 속에 끼어 걸어가는 것을 본다면, 바로 며칠 전에 서재를 빠져나와 숲 속에서 쉬고 있었다고 누가 알겠어요! 아무리 입으로는 헤브라이 어의 성서 문구를 외고 있었다고 해도 말이오. 하하하, 우리는 그 뜻을 알고 있지 않소, 헤스터 프린! 하지만 정말 저 사람이 그 목사라니 아무래도 믿을 수 없어요. 지금 악대 뒤를 따라가고 있는 교회 사람들은 어떤 분이 바이올린을 켜고 있을 때 나와 함께 장단 맞춰 춤을 추던 사람들이요. 우리와 손을 잡고 춤을 추던 사람 중엔 인디언의 기도사나 랩란드의 마술사도 있었다오. 그러나 세상 물정을 아는 여자가 보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러나 말이오, 저 목사는 어떻소! 당신과 숲 속 오솔길에서 만난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소, 헤스터?"
"부인, 부인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헤스터 프린은 히빈스 노부인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대답했으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악마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자신 있게 단언하는 데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으며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딤스데일 목사님처럼 학식 있고 신앙심이 두터운 분을 저는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흥, 바보 같은 여자로군!" 노부인은 헤스터의 코끝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내가 그토록 자주 숲 속을 드나드는데, 누구누구가 거길 갔는지 모른단 말이오? 춤출 때 머리에 썼던 화환의 잎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더라도 다 알아요! 헤스터, 당신 일도 알아요. 그 표시가 보이니까. 환한 곳에서야 물론이고, 어두운 곳에서도 불속처럼 타고 있으니 말이오, 당신은 그것을 공공연히 달고 다니니까 전혀 문제가 안 되지만, 저 목사는 말이오. 잠깐 귀를 빌립시다! 마왕님은 서명 날인한 자기 부하들 가운데서 딤스데일처럼 계약을 세상에 공표하기를 꺼려하는 자가 있으면, 그 표시를 대낮에 세상 사람들 앞에 폭로하도록 하는 방법을 쓰신단 말이오. 저 목사가 늘 가슴에 손을 엊고 감추려 하는 것은 뭐겠소? 헤스터 프린!"
"뭐죠, 그게, 히빈스 아줌마?" 빨리 재촉하듯이 물었다. "보셨어요?"
"아무것도 아녜요, 아가씨!" 히빈스 노부인은 정중히 절을 하면서 말했다. " 언젠가는 네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거야. 떠도는 말로는 너는 하늘의 제왕인 마왕님의 직계라는 말이 있던데! 언제든 날씨가 맑은 밤에 나와 함께 하늘로 날아가 아버지를 만나 뵙지 않겠니? 그러면 왜 목사님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지 알게 될 거다!"
광장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릴 만큼 높은 소리로 웃으며 그 기분 나쁜 노부인은 사라져 버렸다.
이때 교회당에서는 예식이 시작되기 전의 기도도 끝나서 설교를 시작한 딤스데일 목사의 목사리가 들려 나왔다. 헤스터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교회당 근처로 가까이 갔다. 신성한 건물 안은 초만원이 되어 들어설 틈도 없었으므로 처형대 바로 옆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곳은 목사의 설교가 전부 들릴 만큼 가까운 위치여서 분명치는 않으나 그의 특징 있는 목소리가 갖가지 억양을 타고 물결처럼 흘러 나왔다.
목사의 음성은 그 자체가 천부의 자질을 타고난 것이어서 그의 설교 내용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어조와 억양만으로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모든 음악과 마찬가지로 그의 목소리는 인간의 마음의 언어인 정열과 비애, 그리고 고귀한 정서와 부드러운 감동을 전해 주고 있었다. 교회당 벽을 통해 들려오는 그의 말소리는 확실치가 않았으나 온몸으로 귀 기울여 듣고 있는 헤스터는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알아듣기 힘든 말 자체와는 관계없이 그녀에게는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좀 더 분명히 들렸더라면 그의 목소리가 오히려 성가신 매개물이 되어 정신적 의미를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차차 가라앉는 듯한 저음이 들리는가 하면, 이윽고 부드럽고 힘차게 조금씩 고조되어 가는 그의 목소리는 마침내 그 풍부한 음량의 두렵고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으로 헤스터를 휘감아 버렸다. 그러한 목사의 음성은 때로 장중하면소도 비애에 찬 기조음이 언제나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높게 또는 낮게 울리는 고뇌의 표현 - 괴로움에 허덕이는 인류의 속삭임 같기도 하고, 울부짖음 같기도 한 이 음조는 사람들의 슬픔을 일깨웠다! 때로는 이 깊은 비애의 음조조차 들리지 않고 황량한 침에 한숨 소리만이 가냘프게 들렸다. 목사의 음성이 높아져 경쾌하고 낭랑하게 울릴 때에도, 억누를 수 없이 치솟는 힘으로 우렁차게 쏟아져 나올 때에도, 한없는 폴과 힘에 차서 교회당 벽을 뚫고 밖으로 넘쳐 나와 세상 각지로 펴져 나가지 않나 싶을 만큼 교회당 안을 가득 메울 때에도,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여전히 그 저변을 흐르는 나직한 기조음을 - 고통의 절규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죄를 범한 인간의 슬픔에 짓눌린 심정이 그 죄와 슬픔의 비밀을 인류의 위대한 마음에다 호소함으로써 모든 순간에 온갖 말로 동정과 용서를 구하는 하소연의 소리였다. 그것은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목사에게 독특한 힘을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깊고 나직하게 계속되는 저음이었다.
설교를 듣는 동안 내내 헤스터는 처형대 밑에 동상처럼 서 있었다. 목사의 음성이 그녀를 이곳에 붙들어 놓지 않았다 하더라도 역시 그녀의 생애에 치욕의 첫 장면을 아로새겨 놓은 이곳에는 피할 수 없는 흡인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돈된 생각이라고 하기엔 좀 막연한 것이었으나,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하나의 예감이 언제부턴가 그녀의 뇌리에 떠오르곤 하였다. 즉, 그때 이전이나 이후의 그녀의 생애가 모두 이 장소와 결부되어 있고, 그녀의 생활에
통일성을 준 일종의 거점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 동안 펄은 어머니 곁을 떠나 혼자서 제멋대로 광장을 쏘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 환한 빛으로 침울한 군중의 기분을 자극하고 있는 모양은 마치 빛나는 깃털을 가진 새가 우거진 풀숲 사이를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침침한 우거진 숲 전체를 밝게 해 주는 것과 같았다. 이 아이의 동작은 마치 파도가 굽이치듯 했지만 가끔 날카롭고 불규칙적인 데가 있었다. 이것은 그 아이의 활발한 정신 작용을 말해 주는 것이다. 특히 오늘은 어머니의 심적 동요에 힘입어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발끝으로 서서 춤추고 돌아다녔는데도 여느 때보다 힘든 줄을 몰랐다. 언제나 지칠 줄 모르는 그녀의 호기심을 끄는 것이 있으면 펄은 곧장 그리고 뛰어가서,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기 것인 양 차지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써 자신이 조금이라고 억제당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청교도들이 가령 미소를 지었단 하더라도, 그 조그만 몸과 그 움직임 속에 반짝이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이한 매력을 바라볼 때에 이 아이를 악마의 소생이라고 생각치 않을 수가 없었다. 펄이 인디언 역시 자기보다 훨씬 야생적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것 같으면, 인디언 역시 자기보다 훨씬 야생적인 주인공이 눈앞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다음에 펄은 독특한 조심성을 보이면서도 역시 타고난 대담성으로 선원들이 서 있는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갔다. 인디언이 육지의 야만인이라면, 이들은 검푸른 바다의 야만인이었다. 그들은 펄의 모습을 보자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면서, 이는 바다의 물거품이 소녀로 바뀌어 밤에 뱃머리에서 번쩍이는 반딧불의 넋을 타고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들 선원 중 헤스터와 말을 주고받던 선장은 이 같은 펄의 모습에 완전히 매혹된 나머지 그녀에게 살짝 입 맞추기 위해 손을 내밀어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펄을 잡는다는 것은 하늘을 나는 새를 잡는 거나 마찬가지임을 알자, 그는 모자에 감았던 금사슬을 끌러 아이가 있는 쪽으로 던져 주었는데, 그것을 금방 목으로부터 허리로 감은 펄의 솜씨가 어찌나 능숙했던지 그것은 이미 신체의 일부가 되다시피 하여 금사슬을 감고 있지 않은 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기 주홍 글씨를 단 여자가 네 엄마지?" 선장은 물었다. "네 엄마한테 가서 내 말 좀 전해 줄래?"
"내 맘에 드는 얘기라면 전해 드리죠."
펄은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전해 다오. 얼굴이 검고 들이 굽은 의사와 다시 한 번 의논한 결과 너의 엄마도 잘 아시는 치구를 의사가 배까지 모시고 가겠단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네 엄마는 너와 엄마 두 사람 준비만 하시면 된다고, 알겠니? 요 마녀 아가씨야."
"우리 아빠는 하늘의 제왕인 마왕님이라고 히빈스 아줌마가 말해 주셨어요!" 펄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외쳤다. "나를 욕하면 아빠한테 일러 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저씨 배는 폭풍으로 혼날 거예요."
광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어머니 있는 데로 돌아온 펄은 선장의 말을 전했다. 헤스터의 꿋꿋하고 침착한, 꾸준히 견뎌 오던 정신도 눈앞에 닥치는 암담하고 냉혹한 운명 앞에 맥이 풀리고 말았다. 목사와 자신이 비참한 미궁으로부터 빠져날 수 있는 길이 막 열리려는 순간에 운명이 잔혹한 조소를 띠며 두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고 나섰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장의 말을 전해 듣고 마음이 혼란해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헤스터는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광장에 모인 근처에서 온 많은 사람들은 진작부터 주홍 글씨에 관한 소문 –밑도 끝도 없는 과장된 소문을 듣고 두려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다른 놀이에 싫증이 난 이들은 시골 사람 특유의 무례하고 뻔뻔스러운 태도로 헤스터 프린의 주변으로 둘러섰을 뿐, 더 가까이 접근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신비스러운 상징이 자아내는 혐오감의 원심력으로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게다가 구경꾼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주홍 글씨의 뜻을 알게 된 선원들도 햇볕에 탄 무법자다운 얼굴을 사람들 틈으로 들이 밀었고, 심지어 인디언들까지 백인의 호기심이 던지는 싸늘한 그림자의 여세를 몰아 사람들 틈을 헤치고 들어와선 뱀 같은 까만 눈으로 헤스터의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찬란하게 수놓을 표적을 가슴에 단 이 여인을 가운데서도 아주 고귀한 신분의 사람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거리의 주민들까지도, 그 장소를 어슬렁거리면서 이젠 그다지 이상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을 그 치욕의 표시를 냉담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낯익은 그들의 시선을 다른 고장 사람들의 그것보다 한층 더 헤스터 프린을 괴롭혔다. 7년 전 감옥에서 나오는 자신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여인들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 단 한 사람, 가장 젊고 동정심 많던 여자만이 눈에 띄지 않았다. 헤스터가 그 여자의 수의를 직접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타들어가는 듯한 주홍 글씨를 얼마 안 있으면 내던지게 될 이 마지막 고비에, 그것을 처음으로 가슴에 달던 날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과 주목의 초점이 되었고, 그 때문에 그녀의 가슴을 한층 더 아프게 태우게 되었음은 얄궂은 운명이었다.
헤스터가 이 치욕에 찬 마술의 원 안에 서 있을 동안 목사는 성단 위에서 청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중은 송두리째 목사의 정신세계에 휘어 잡혀 있었다. 교회에 서 있는 덕망 높은 목사! 광장에 서 있는 주홍 글씨의 여인! 이 두 사람의 가슴에 똑같은 치욕의 낙인이 불타고 있으리라는 무엄한 추축을 누가 감히 할 수 있었으랴!
23. 주홍 글씨의 나타남
마치 굽이치는 파도처럼 청중들의 영혼을 드높은 곳으로 떠밀어 가던 설교도 마침내 끝났다. 하느님의 계시를 듣고 난 직후인 양 엄숙한 침묵이 한순간 흘렀다. 이어서 소곤대는 소리와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력한 주술에라도 걸린 듯 타인의 정신세계로 이끌려 갔던 청중들이 이제 막 주술에서 깨어나 두려움과 경탄에 가득 차서 제정신으로 돌아가는 듯싶었다. 그리고 잠시 뒤 청중들은 교회 입구로 쏟아져 나왔다. 이제 설교가 끝났으니 그들이 지금 막 풀려 나온 속세의 생활을 유지해 가는 데 알맞은 공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교회 안의 공기는 설교자의 불꽃같은 연설과 그의 사상이 풍기는 짙은 향기가 숨 막히도록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오자 청중의 감격은 말로 변했다. 거리에서도 광장에서도 목사에 대한 찬사가 사방에서 물 끓듯 일어났다.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자신들의 느낌을 서로 토론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들의 일치된 말에 의하면, 오늘 설교를 한 목사만큼 성스럽고 고귀하고 열렬한 정신으로 설교한 사람은 여지껏 없었다는 것이다. 또 이 목사의 경우처럼 의심할 나위가 없는 하나님의 영감이 사람의 입술을 통해 밝혀진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영감이 목사에게 강림하여 눈앞에 놓인 설교문 원고로부터 보다 높은 영감의 세계로 그를 끌어올려 청중뿐 아니라 본인 자신에게도 놀라운 사상과 감동으로 충만하게 하였던 것이다. 설교의 주제는 하느님과 인간 사회의 관계에 대한, 특히 지금 황야에 건설되고 있는 뉴잉글랜드와 연관된 것이었다. 설교가 끝날 무렵 예언자와 같은 정신이 목사에게 강림하여서 이스라엘의 옛 예언자들이 모국에 가해질 심판과 멸망을 예고한 데 반하여, 목사는 새로 모인 선민들을 위해 고원하고 영광에 넘친 운명을 예언한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 전체를 통해 볼 때 그것은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의 비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어떤 침통한 비애감이 밑바닥 깊이 깔려 있었다. 그렇다!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있는 목사, 또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숨 없이는 천당으로 갈 수 없는 목사는 자기의 요절을 예감하고 있었다. 마침내 슬퍼하는 사람들을 뒤에 두고 그는 떠나야 할 것이다. 지상에 오랫동안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이 생각이 설교자가 집어낸 인상을 더 한층 강조해 주었다. 그것은 마치 천사가 하늘로 날아가며 사람들 머리 위에서 아름다운 날개를 한순간 퍼덕여 그것은 그늘인 동시에 눈부신 광채였다. 황금의 진리를 우박처럼 쏟아 놓은 것 같았다. 세상의 각 분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휘황하게 빛나는 전무후무한 인행의 한 시기를 맞이하는 법인데, 이 시기가 지나간 다음이 아니고서는 흔히 깨닫지 못한다.
딤스데일 목사에게도 이처럼 찬란하고도 승리에 넘친 인생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 순간, 목사는 가장 우월하고 자랑스러운 최절정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은 성직 자체가 하나의 높은 지위였던 초기의 뉴잉글랜드에 있어서도, 타고난 재능과 풍부한 학식과 설득력 있는 웅변과 청렴결백한 명성에 의해서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위였다. 선거 축하 설교가 끝나고 강단위에 머리를 숙였을 때 목사가 획득한 지위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 동안 헤스터 프린은 가슴에 주홍 글씨를 단 채 여전히 처형대 옆에 서 있었다!
또다시 교회 입구에서 울려 나오는 악대의 금속음과 친위대의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행렬은 교회당으로부터 공회당으로 향하기로 되어 있었다. 공회당에서 연회가 있은 다음 이날의 의식은 끝날 예정이었다.
이리하여 다시금 덕망 있고 위엄 있는 장로들의 행렬이 군중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총독과 관리들, 노인들과 목사들, 각계의 저명한 사람들의 행렬이 다가오자 군중은 양쪽으로 공손히 길을 비켰다. 행렬이 광장에 이르렀을 때 군중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 환호성은 아직도 귀에 쟁쟁한 설교의 강렬한 음조로 인해 흥분된 청중의 열정이 저절로 폭발한 것이었다. 누구나가 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러한 충동을 느꼈으며, 동시에 옆 사람에게서도 똑같은 충동을 느꼈다.
교회 안에서는 억제되었던 감동이 푸른 하늘 밑에서는 그 감격이 하늘 꼭대기까지 울려 퍼질 듯한 환호성이 되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은 돌풍이나 우뢰소리, 또는 바다의 포효 소리보다도 한층 더 인상적인 음향을 만들어 냈다. 동일한 감동으로 충만한 가운데 그들의 목소리는 거대한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울려 퍼졌고 또한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하나로 묶어 놓았다.
뉴잉글랜드 땅에서 일찍이 이런 환호성이 일어난 일은 없었다. 뉴잉글랜드 땅에 이 설교자만큼 동포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인물은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목사 자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눈부신 후광이 그의 머리둘레에 비치지나 않았을까? 정신의 힘으로 영화되고, 열렬한 숭배자들에 의해서 성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행렬 속에 끼어 걸어가는 그의 발길이 정말 땅의 먼지를 밟고 있었을까?
군인들과 관리들의 대열이 다가오자 그들 중에 끼어 있는 목사에게로 모든 사람의 눈길이 집중되었다. 목사의 모습이 보다 뚜렷이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오자 환호성은 속삭이는 소리로 바뀌어졌다. 승리와 영광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그가 어째서 저토록 창백해 보인단 말인가? 그의 기력은. . . . 천국에서 내린 힘으로 하느님의 계시를 전달할 때까지 그의 기력을 북돋아 주던 영감은 그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고 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조금 전까지 목사의 볼을 이글거리게 했던 홍조도 타다 남은 장작개비 속에서 스러져 가는 불길처럼 꺼져 버렸다. 이처럼 핏기 없는 그의 얼굴은 도저히 산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은 도저히 생명력을 지닌 사람으로는 볼 수 없었다!
동료 목사 한 사람이 - 존 윌슨 목사였다 - 지력과 감각을 잃어 가는 딤스데일 목사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재빨리 다가와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목사는 와들와들 떨면서도 단호히 이 노인의 팔을 뿌리쳤다. 그는 여전히 걷고 있긴 했으나, 그러한 동작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면 모르되, 그 모양은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의 뒤뚱거리는 걸음마와 같았다. 이렇게 비틀거리며 당도한 곳은 바로 처형대 맞은편이었다. 이미 비바람에 낡아 버린 이 처형대는 오래 전 헤스터가 펄의 손목을 잡고 서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또한 주홍 글씨가 달려 있었다! 목사는 여기서 우뚝 멈춰 섰다. 악대는 아직도 장엄하고 즐거운 행진곡을 연주하며 목사를 축하연 장소로 재촉하고 있었으나 목사는 그 자리에 발을 멈춰 버린 것이다.
벨링햄은 조금 전부터 근심스러운 듯이 목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행렬을 빠져나와 목사를 부축하려 했다. 아무래도 곧 쓰러질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벨링햄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막연한 암시 따위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는 위인이었지만, 목사의 표정에는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한편 군중들도 놀라운 기색으로 목사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목사의 몸이 이렇게 지상에서 약해지는 것은 정말은 하늘나라에서의 그의 정신력이 그만큼 강해지는 것을 위미하는 데 불과한 것이었다. 가령 목사가 그들의 눈앞에서 승천하여 하늘나라의 빛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해도 이처럼 신성한 사람에게는 있음직한 기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목사는 처형대 쪽을 향해 두 팔을 내밀었다.
"헤스터, 이리 오구려! 펄, 너도 이리 오너라!"
두 모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소름이 끼칠 듯하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워 보였고, 이상하게 의기야야한 데가 있었다. 펄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새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목사에게 달려가더니 그의 무릎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헤스터 프린 또한 천천히 다가갔으나, 목사가 있는 곳까지 못미처 발을 멈췄다. 이때 목사의 의도를 방해하려는 듯이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군중들을 헤치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어둡고 침착성을 잃은 데다 사악해 보였으므로 지옥에서 솟아난 듯하였다. 그것은 어떻든 간에 노인은 군중 속에서 뛰쳐나와 목사의 팔을 잡았다.
"이 미친 사람아!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노인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저 여자를 물리쳐요! 이 아이도 내버려두고! 그러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오!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고, 불명예 속에 죽을 거야 없지 않소! 나는 아직도 당신을 구해 줄 수 있소! 당신은 성직에 똥칠을 할 참이오?"
"이 악마 같은 사람! 이미 때는 늦었소!" 목사는 이렇게 대답하며 두려우면서도 단호한 눈길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당신의 힘은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됐소, 하느님의 도움으로 나는 이제 당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단 말이오!"
목사는 다시 주홍 글씨의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헤스터 프린." 가슴을 찌르는 듯한 열렬한 목소리로 그는 외쳤다. "7년 전 나의 막중한 죄와 비참한 번미에 대해 내가 하지 못한 일을 이 마지막 순간에 행하도록 도와주시는 두렵고도 자비로운 하느님의 이름에 의하여 어서 이리 와주오! 당신 힘으로 나를 감싸 주오! 당신 힘으로 말이오, 헤스터. 그러나 당신의 힘을 하느님이 나에게 허락해 주신 의지대로 따르게 해주오! 이 비참하게 배신당한 노인은 온 힘을 다하여 자기의 힘과 악마의 힘까지 동원하여 반대하려고 하오. 자, 헤스터, 이리 오시오! 저 처형대까지 따라와 주오!"
군중들은 야단법석이었다. 목사 둘레에 서 있던 고위고관들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영문을 몰라 하느님이 행하려는 듯한 심판을 그저 말없이 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목사가 헤스터의 어깨에 기대어 허리를 그녀의 팔에 의지하며 처형대로 다가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불의의 자식인 펄의 작은 손은 여전히 목사의 손에 꽉 잡혀 있었다.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그 뒤를 따랐다. 마치 이 세 사람이 주연으로 되어 있는 죄악과 슬픔의 연극에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할 자격이 있다는 것 같았다.
노인은 험악한 눈초리로 목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세상 어느 구석을 찾아보아도 당신이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비밀 장소는 없었을 거요. 하늘과 땅 어딜 뒤져보나 이 처형대밖엔 없었을 테지!"
"이곳으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오!" 목사는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떨고 있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헤스터 쪽을 돌아다보았으나 그의 눈에는 의혹과 불안의 표정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이러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소, 헤스터?" 목사는 속삭였다. "우리가 숲속에서 꿈꾸던 일보다는."
"모르겠어요! 전 모르겠어요!" 헤스터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 낫다고요? 글쎄요, 이대로 우리도 죽고, 펄도 우리와 함께 죽는 것이 더 나을 거예요!"
"당신과 펄은 하느님이 명하시는 대로 따라야 하오." 목사는 말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오! 그러나 나에겐 지금 내 눈앞에 하느님이 뚜렷이 보여 주신 뜻을 실행하도록 해 주오. 헤스터, 나는 얼마 살지 못할 사람이오. 그러니. 빨리 내 죄를 고백하고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치욕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오."
헤스터 프린에게 몸을 의지하고, 펄의 손목을 잡은 채 딤스데일 목사는 점잖은 관리들과 동직자인 목사들과 군중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군중들은 깜짝 놀랐지만, 눈물겨운 동정심이 넘쳐흘렀다. 뭔가 중대한 일대 사건이 - 죄악에 가득 차 있을망정 고뇌와 후회에 넘친 인생의 일대 사건이 - 지금 눈앞에 전개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오를 조금 넘어선 태양은 목사를 내리쬐어 정의의 여신이 주관하는 법정에서 자신의 유죄를 아뢰기 위해 대지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뚜렷이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뉴잉글랜드의 주민 여러분!" 목사는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의 머리위로 울려 퍼진 그 목소리는 높고 엄숙하고 위엄이 있었으나 한없이 떨렸으며, 양심의 가책과 고뇌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듯 절규에 가까운 쉰 목소리였다. "나를 사랑해 주셨던 여러분! 나를 성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해 주셨던 여러분! 보십시오! 이 세상의 큰 죄인이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겨우! 이제야 겨우! 7년 전에 이 여인과 함께 섰어야 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여인의 굳센 팔은 여기까지 내가 겨우 기어온 힘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이 무서운 순간에도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해 주고 있습니다. 헤스터가 달고 있는 주홍 글씨를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누구나가 다 이것을 보고 몸을 떨었습니다! 이 여인이 어디 있든지, 비참한 업고를 짊어진 이 여인이 안식처를 구하기 위해 어디엘 가든지 이 글씨는 그 둘레에 공포와 소름끼치는 혐오를 자아내는 기분 나쁜 빛을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또 한 사람의 죄악과 치욕의 낙인에는 몸을 떠는 일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목사의 비밀은 모든 것을 고백하지 못한 채 끝나 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를 넘어뜨리려는 육신의 쇠약, 특히 정신의 쇠약을 그는 안간힘을 다하여 극복했다. 그는 부축했던 손을 뿌리치더니 두 모녀보다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낙인은 그 사나이에게도 찍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말해 버리려고 결심한 듯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하느님께선 그것을 보셨습니다! 천사들은 쉴 새 없이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악마도 그 모든 것을 알고, 불타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짐으로써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묘하게도 사람들 눈을 속이고 죄 많은 속세에서 자기만이 순결하여 슬프다는 듯이, 천국에 있는 동료를 만나지 못하여 외롭다는 듯이, 여러분들 사이를 걸어 다녔던 것입니다! 이제 죽음을 앞두고 그 남자는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다시 한 번 헤스터의 주홍 글씨를 봐 주십시오! 이 불가사의하고 무서운 주홍 글씨도 그 남자의 가슴에 찍혀 있는 표적에 비하면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며, 그 남자 자신의 빨간 낙인도 그의 깊은 가슴속이 타고 있는 상징에 불과한 것입니다!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의심하는 분이 이곳에 계십니까? 보십시오! 그 심판의 무서운 증거를 보십시오!"
목사는 발작적인 태도로 자신의 가슴에서 성직자가 다는 늘어진 밴드를 잡아 뜯었다. 표적은 마침내 나타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일 것이다. 한순간 공포에 질린 군중의 눈길은 이 무서운 기적 위에 집중되었다. 목사는 격심한 고통의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승리를 거둔 사람처럼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서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처형대 위에 털썩 쓰러져 버렸다! 헤스터는 그의 몸을 안아 일으켜 그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기대게 했다. 로저 칠링워드 노인은 생기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게서 도망쳤구나!" 노인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기어코 내게서 도망쳤구나!"
"하느님이 당신을 용서하시기를 바라오!" 목사는 말했다. "당신도 큰 죄를 지은 셈이니까!"
목사는 가물거리는 시선을 노인으로부터 헤스터와 펄 쪽으로 옮겨갔다.
"사랑스런 나의 펄. . . . . ." 그는 힘없이 말했다. 영혼이 깊은 잠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목사의 얼굴에는 부드럽고 평화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무거운 업고를 벗어나서 이제 이 어린아이와 장난이라도 치고 싶을 만큼 상쾌한 기분이었다. "착하지, 펄, 이제 내게 키스해 주겠니? 숲 속에서는 싫다고 그랬지! 이젠 해 주겠지?"
펄은 목사의 입술에 키스했다. 주문은 풀려 버렸다. 이 야성적인 아이도 크나큰 비극의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인간적인 동정심이 움트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버지의 볼에 떨군 눈물은 인간 세상의 기쁨과 슬픔 속에서 성장하여 언제나 세상과 싸우는 일 없이 훌륭한 여성이 되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제 어머니에 대해서도 고뇌의 사자로서의 역할을 이제 완전히 끝낸 것이다.
"잘 있어요, 헤스터!"
목사는 말했다.
"이젠 영영 못 뵙는 것입니까?" 헤스터는 얼굴을 목사 얼굴 가까이 갖다 대며 속삭였다. "함께 영생을 누릴 수는 없을까요? 우리는 이 모든 고통과 슬픔으로 우리의 죗값을 다 치른 셈입니다. 당신은 그 밝은 임종의 눈으로 저 세상을 보고 계시는군요! 무엇이 보이는지 말씀해 주세요."
"조용히 해요. 헤스터, 조용히!" 목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엄숙히 말했다. "우리가 깨뜨린 율법! 지금 이렇게 무참하게 폭로된 죄악! 이것만은 당신도 언제나 염두에 둬 주오! 나는 두렵소! 두렵소. 헤스터! 우리가 하느님을 잊어버렸을 때, 서로의 영혼에 대한 존경을 깨뜨려 버린 그때 이미 우리가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 영원하고도 순결하게 결합되고자 하는 희망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소!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실뿐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고 계시오! 특히 내가 고뇌에 허덕일 때 그 자비심을 보여 주셨소. 나의 가슴에 이 타들어가는 듯한 책고를 주신 것도 그러하오! 여기 있는 음흉하고 무서운 노인을 시켜 그 책고를 언제나 빨갛게 타오르게 하신 것도 그러하오! 나를 이곳에 오게 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승리와 치욕을 짊어지고 죽게 하신 것도 그러하오. 이런 고통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나는 영원히 파멸해 버렸을 것이오!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 할지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지어다! 잘 있소."
이 마지막 말은 목사의 마지막 숨결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때까지 조용하던 군중은 두려움과 놀라움이 담신 이상하리만큼 나직한 소리를 터뜨렸다. 그들의 기묘한 감정은 사자의 영혼을 뒤따라 무겁게 흐르고 있는 이 웅성거림으로 겨우 표현될 뿐이었다.
24. 뒷이야기
며칠이 지난 뒤, 앞서 이야기한 광경에 대하여 작가의 의견을 정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처형대에서 목격한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 광경을 목격했던 군중 사람들의 대부분은 불행한 목사의 가슴에 주홍 글씨가, 헤스터 프린이 달고 있던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주홍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축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상상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헤스터 프린이 처음으로 치욕의 표시를 달던 그날, 딤스데일 목사도 자기 몸에 심한 책고를 가하러 고행을 시작했으며, 그 뒤 온갖 방법으로 그 고행을 부질없이 실행해 왔다고 단언하는 이도 있었다. 아니, 그 목사의 낙인은 훨씬 뒤에 나타난 것이라고도 했다. 즉 지력과 힘이 풍부한 마술사인 로저 칠링워드 노인의 마술과 약물 힘이 작용하여 비로소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목사의 그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과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놀라운 작용을 정말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 무서운 상징은 한시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을 나타낸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견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택하든 그것은 독자의 마음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목격했고, 잠시도 딤스데일 목사로부터 눈을 뗀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목사의 가슴에는 갓난아기의 가슴처럼 아무 표적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묘한 얘기다. 이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목사는 임종 시에, 헤스터 프린이 오랫동안 주홍 글씨를 가슴에 달게 된 그 죄악과 목사와의 사이에 어떠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았거니와 막연하게나마 암시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았거니와 막연하게나마 암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 훌륭한 목격자들에 의하면 목사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또한 군중들이 자신을 성자나 천사처럼 숭앙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타락한 여인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둠으로써, 아무리 훌륭한 인간도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실은 한낱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평생을 인간의 영적인 행복을 위해 바친 목사는 자신의 죽음을 하나의 우화로 만들었다. 하느님의 무한의 순결성에 비한다면 인간은 모두 똑같은 죄인이라는 슬프고도 위대한 교훈을 자신의 숭배자들의 가슴속에 명기시키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주로 의지해 온 근거는 지금까지 작자가 취급해 온 견해를 뚜렷이 확인해 주고 있다. 여기서 불쌍한 목사의 비참한 경험이 남긴 수많은 교훈 가운데서 한 가지만 적어 두기로 하자.
‘진실하라! 진실하라! 진실하라! 비록 최악의 죄가 아닐지라도 최악의 죄를 예상케 하는 성질을 숨기지 말고 세상에 제시하라!’
딤스데일 목사가 죽은 뒤 로저 칠링워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노인의 모습에 나타난 변화만큼 놀라운 것은 없었다. 그의 모든 기력이 지상에서 행할 악마의 작업이 없어지게 되자 이 인간성을 잃은 사나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인인 악마가 일거리를 장만해 주고 그만큼의 보수를 지불해 주는 곳으로 옮겨가는 일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랫동안 친근하게 접촉해 온 이들 인물들에 대해서 자비를 베풀어 주고 싶다.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죽었을 때 벨링햄 총독과 윌슨 목사가 집행인 되었던 유언장에서, 노인은 영국과 미국에 있는 막대한 재산을 헤스터 프린의 딸인 펄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이리하여 그때까지도 악마의 소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던 어린 요정 펄은 대륙에서 그 무렵 으뜸가는 유산 상속자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이 세상 사람들의 두 모녀에 대한 판단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 그리고 이 모녀가 뉴잉글랜드에 머물러 있었다면 결혼 적령기가 된 펄을 그 자유분방한 피를, 매우 돈독한 청교도의 혈통을 지닌 사나이와 섞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사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주홍 글씨의 여인은 펄과 함께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 뒤 가끔 막연한 뜬소문이 바다를 건너 전해지기는 했지만 두 사람에 대하여 믿을 만한 소식은 전혀 없었다. 주홍 글씨의 전말은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마력은 여전히 남아 있어 불쌍한 목사가 숨진 처형대며 헤스터 프린이 살던 바닷가의 오두막 등은 무서운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느 날 오후 이 오두막 입구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요 몇 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일이 없는 문이었는데 여인이 자물쇠를 열었는지, 또는 썩은 나무와 쇠붙이가 잡기만 해도 부서졌는지, 아니면 여인이 그림자처럼 그러한 방해물을 뚫고 들어갔는지, 아무튼 그 여인은 오두막 속으로 들어갔다. 문턱에서 여인은 멈춰 서더니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이렇듯 혼자서, 더구나 예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지난날 그처럼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못 견디게 쓸쓸하고 처량하게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망설임은 겨우 한순간이었지만, 가슴에 주홍 글씨를 다는 데는 그 한순간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헤스터 프린은 본디의 옛집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저버렸던 치욕의 표시를 몸에 달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펄은 어디로 갔을까? 살아 있다면 탐스럽게 피어난 꽃 같은 처녀가 되었을 것이다. 그 요정과 같았던 아이가 요절하여 숫처녀로 묻혔는지, 또는 현란하고 야성적이던 성질이 온순해져 여자다운 조용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여인으로 자라났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확실한 소식을 들은 이도 없었다. 다만, 이 주홍 글씨의 여인이 홀로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동안 어딘가 타국에 살고 있는 사람의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문의 봉인이 찍힌 편지가 가끔 왔었는데, 영국의 계보 기록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문장이었다.
요컨대 펄은 살아 있을 뿐 아니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며, 늘 어머니를 염려하며, 이 슬프고 외로운 어머니를 자기 집 난롯가에 모시고 위로해 드리고 싶어 했다고 그즈음 수다쟁이들은 믿고 있었다. 그 뒤 100년 쯤 지나서 이 이야기를 조사했던 세관 검사관 퓨 씨도 그렇게 믿고 있었고, 또 최근에 부임한 퓨 씨의 후임자도 역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헤스터 프린에게는 펄이 가정을 이루고 있는 미지의 나라보다도 이 뉴잉글랜드에 보다 더 진정한 생활이 있었다. 이곳에는 그녀의 죄와 슬픔이 있었고, 아직도 그녀가 바쳐야 할 참회도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헤스터는 이 땅에 되돌아온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 온 이 암담한 이야기의 상징을 다시 가슴에 단 것이다. 그 이후로 그것은 다시는 그녀의 가슴에서 떠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괴롭고 근심에 잠긴, 그리고 헌신적인 헤스터의 일생이 흐르는 동안 주홍 글씨는 세상 사람들의 모욕과 비난을 자아내는 낙인이 아니라, 함께 슬퍼하고 위안을 주는 그 어떤 상징, 또한 두려움과 존경 섞인 눈으로 쳐다보는 상징이 되었다. 젊은 시절 한 때 헤스터는 혹 자신이 예언자로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상상을 한 일도 있었지만, 신성하고 신비로운 진리의 사명이, 죄악과 수치로 머리를 못 드는 여인, 일생을 슬픔 속에 지내야만 할 여인에게 맡겨질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다. 장차 계시를 지니고 올 천사나 사도는 고상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라야 할 것이다. 그것도 어두운 슬픔이 아닌, 영혼의 기쁨을 통하여 슬기로워진 여인. 인생의 참다운 시련을 통해 얻어진 신성한 사람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아는 여인이라야만 한다.
헤스터 프린은 이렇게 말을 맺자 슬픔이 찬 눈으로 주홍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뒤 새로운 무덤 하나가 낡고 움푹 팬 무덤 옆에 생겼다. 이곳은 뒤에 킹스 교회 공동묘지가 된 곳이다. 그 무덤은 헐고 움푹 팬 무덤 바로 옆이기는 했지만, 무덤과 무덤 사이에는 조금의 간격이 있어서 그곳에 잠들고 있는 두 유해는 교제할 권리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의 비석이 두 무덤에 같이 쓰이고 있었다. 그 주위 일대에는 가문을 새긴 비석들이 많이 서 있었으나 간소한 판석 하나로 되어 있는 이 비석에는 방패 모양의 가문 같은 것이 새겨져 있어, 지금도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면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그 가문의 디자인을 문장용어로 표현하면 이제 끝난 이야기의 간단한 제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음침하여, 그림자보다도 더 어둡게 불타는 한 점의 빛으로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검은 가문 바탕에 주홍 글씨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