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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1953~ )

가을 편지

개화

고사목(枯死木)

곡예사의 달

광화문(光化門)을 지나며

교사들을 위한 비나리

구로공단을 지나며

구름의 눈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구두를 닦는다

그 애의 백제 미륵반가사유

그 작은 붓꽃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집 뜨락의 수국

김관식(金冠植)

나는 너의 침묵을 노래한다

낙타

낙타, 동해에서

낙타, 수수꽃다리 핀 골목에서

난초기

내셔널 지오그래픽

내소사에서

누란의 사랑

눈물

달팽이

뒷길

등이 흰 낙타

말 무덤

말벌을 기리는 노래

매혹

모독

목련

무서운 시간

무지개

밀물 드는 강가에서

바람 사설

밥 끓이는 시간

백두산 사진을 보며

백자진사매국문병(白磁辰砂梅菊文甁)

별빛 속에서 잠을 잤다

보충수업

부처

분수

불쌍한 내면

비상(飛翔)

비 오는 거리에서

빈집

빗자루 쓰는 소리가 들린다

빙어

뿌리 내리지 못하는 나무

삼방산 밑에서 낙타를 보다

새순

새잎 돋는 나무 아래서

서산마애삼존불 들어가는 입구 언덕바지 혼자 앉아 있는 돌미륵

설일(雪日)

세상에는 너무 많은 스위치가 있고

세상의 불빛

소식

쇠똥구리

수묵으로 흐려져 가는 정물화처럼

수업

슬픔의 힘

시간 위의 집

쓸쓸한 연가

아무래도 나는

아이들에게

양수리에서

어떤 그리움을 타고 너에게로 갈까

얼음

연어의 길

염소

외로움은 물새들이 깨어나는 새벽강과 같다

우금치의 노래

은행나무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이별가

이팝나무 꽃 피었다

이화중선(이화중선(李花仲仙)

저 버드나무들의 섬에 가고 싶다

족제비

지구의 시간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지금 이 밤은

지상에서 내리는 눈

직소폭포

질문

철새 도래지에서

첫눈

첫사랑

치사량

칼춤

코스모스

키 작은 나무

파랑새

파랑새는 있다

편지

폭포

풀잎

풍뎅이

한 마리 짐승이 있어

황금 뿔

황금 뿔은 더운 숨을 뿜으며

횟감은 신선도가 값이다

E. T

1995, 봄, 인물화를 위한 메모

 

 

 

가을 편지

김진경

 

1

지상에 태어나 있는 것이 슬픔처럼 다가올 때 하늘을 봅니다. 파란 하늘에선 맑은 현들이 무수히 소리를 내고 소리의 끝을 따라가노라면 문득 그대에게 이릅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대여, 그대의 빈자리가 오늘따라 저리도 환한 것이 내 슬픔의 이유인지요. 환하게 빛나는 그대의 빈자리 위로 나는 내 슬픔의 새 떼를 날려 보냅니다. 소란스레 하늘로 퍼져가는 새 떼들이 멀리 잠들어 있는 그대를 깨울지도 모르겠습니다.

 

 

2

흔들리는 갈대 사이로 점점이 흩어지는 내 슬픔의 새 떼를 보는 것이 그대의 아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동터오는 노을 보며 엷은 미소라도 지으십시오. 소란스레 하늘로 퍼져가는 새 떼들은 이미 슬픔을 알지 못합니다. 새 떼들은 환하게 빛나는 그대의 빈자리를 지나며 뜨겁게 파고드는 파편과도 같습니다. 그것이 새 떼들이 날아가 박히는 하늘이 붉게 물드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터오는 노을을 보며 엷은 미소라도 지으십시오. 그것이 삶의 이유일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화

김진경

 

목련이 피는 날 어머니는 눈과 귀를 닫으셨다.

 

닫힌 눈과 귀를 내면의 먼 소실점에 향하고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서 문득 누에 냄새가 난다. 어머니는 전력을 다해 자신의 한 생애를 뽑아내고 있는 중이다. 집을 짓는 누에처럼 웅크리며 자꾸만 작아진다. 한치의 구멍도 없이 누에의 집이 완성되는 날, 어머니는 마침내 다른 한세상을 향해 개화할 것이다.

 

나뭇잎 하나 없는 가지에, 먼 세상으로부터 이켠으로 지금 막 목련이 피고 있다.

 

 

 

고사목(枯死木)

김진경

 

잎도 피지 않는 나무.

 

캄캄한 어둠 속

가지마다

별이

가득 돋아 있다.

 

그 별들 너무 무거워

거뭇거뭇한 가지

툭툭

부러져 떨어진다.

 

이 나무

다 기울어지면

별들은

어디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한 세계가

지상에서

조용히 소멸하고 있다.

 

 

 

곡예사의 달

김진경

 

달이 떠 있는 밤하늘은

곡마단의 거대한 천막과도 같다.

원뿔 천막의 꼭대기에 달린 작은 창처럼

달은 빛나고

 

어린 누이의 손톱처럼 파리한 달이

커오는 동안

나는 지상을 떠돌며

쓸쓸한 장난에 몰두하리라.

그리고, 언젠가 달이 둥그렇게 열릴 때

 

창밖으로 나가

거대한 천막 위에 서서

나만을 위한 장난을 하리라.

거기 신들이 있어 지켜본다 한들

또는 아니라 한들 어떠랴.

 

모든 것이 들숨처럼 내 안에 와 머무는

행위가 행위로서 응결되고 빛나는

그런 장난을 하리라.

 

가느다란 죽음의 줄 위에서 내가 장난을 할 때

지상에서의 내 삶은

깃털만 남은 새의 죽음처럼 가볍다.

 

 

 

광화문(光化門)을 지나며

김진경

 

국제극장의 입간판

지옥의 특공대라고 베레모를 쓴 거구의 사내들이

기관총을 들고 돌격해 나오는 밑에

너는 투구를 들고 서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서기 2054년 국제평화 시찰단들이

네가 서 있는 자리에서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거리를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중의 한 늙은 생물학자는

네가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린 자리에서 꿈틀거리는

바퀴벌레를 집어 들고 감격할 것이다.

우주 중계의 TV 카메라가 그것을 클로즈업하고

폭탄이 떨어진 지 60년 만에 드디어 새로운 생명체가 나타났다고

입에 게거품을 물 것이다.

 

그 중의 인류학자는 말할 것이다.

네가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린 자리에 떨어진 투구와 방패를 보며

이 민족은 특수한 민족으로 서로 증오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고

그 중의 역사학자는 이에 반박하여

이 민족의 멸망은 인류의 공동 범죄였다고

잠시 말다툼이 벌어지고

 

그들은 몇 송이 꽃을 재 위에 던지고 훌훌히 떠나갈 것이다.

혹은 서기 2054년 국제평화 시찰단은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네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바퀴벌레가 텅 빈 거리를 바라보며

네 방패의 그늘 속으로 기어들어 갈 것이다.

 

 

 

교사들을 위한 비나리

김진경

 

유세차 을축년(乙丑年) 삼월(三月) 초구일(初九日)

진달래들이 낮은 포복으로 높은 포복으로

포위해 올라오는 관악산 중턱

못난 교사는

몇 자 적어 하늘에 땅에 고합니다.

1960년 4월 19일 흰 이마에 손 얹어

멀리 인왕의 발치 아래로 행진해 가는 젊은 가슴들과

몇 발의 총성에 흩어지는 붉은 꽃잎 보았을

관악산 신령님

이 땅에 사랑은 얼마나 더디게 오는 것입니까.

참으로 기나긴 세월이었습니다.

1960년 모처럼 이 땅의 교사들 가슴에 살아났던

민주의 꽃이 무참히 짓밟힌 이래

우리들은 너무도 긴 세월을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이 땅의 슬픔과 함께

시름시름 살다가 숨져간 선배 교사님들,

무참히 짓밟힌 민주의 꽃과 함께

입 다문 돌멩이처럼 구르다가 외롭게 숨져간 선배 교사님들,

분단된 땅의 증오를 가르치는 교육의 제물이 되어

어린애답지 못한 말을 남기고 죽은 이승복 어린이

인간상품을 만드는 교육의 제물이 되어

점수라는 가격표시에 매달려 죽어 간 이땅의 아이들

이 땅의 한 맺힌 모든 귀신들이여,

우리들과 함께 하소서.

155마일 휴전선이 조용하더니

1마일이 철조망마다 1,550마일의 새끼를 쳐서

이 땅을 가시철조망으로 뒤덮고 있습니다.

아, 이 땅은 세계의 고난, 세계의 가시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가르치는 교과서는 우리들의 가시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배우는 교과서는 우리들의 가시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교과서의 글자들마다 철조망의 가시가 박히고

글자들마다 증오의 총구가 번득입니다.

교과서 속에 죽어 있는 우리들의 어머니

한반도에 가시철조망들이 뿌리를 박고 양분을 빱니다.

교과서를 잡는 교사들의 손에

교과서를 잡는 아이들의 손에

가시가 박혀 피가 흐릅니다.

가르치는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이 땅의 한 맺힌 모든 귀신들이여

우리들의 눈을 크게 뜨게 하소서.

가시철조망이 우리들의 눈을 찔러 피가 흐를지라도

눈을 크게 뜨고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철조망을 헤치고 거기 쓰러져 죽어 있는 우리들의 어머니 한반도를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의 손에 박힌 가시를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의 손에 흐르는 피를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아, 매일매일 우리들에게 하달되는 명령들이

이 땅을 칭칭 감고 있는 철조망의 실뿌리임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의 교과서가 증오를 가르치고 있음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증오에 길들지 못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있음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학교가 아이들을 늘 폭도로 대하고 있음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이 폭도를 진압하는 가시철조망의 하나임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이 가시철조망의 하나이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우리들의 밥그릇을 빼앗아 감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이 땅의 한 맺힌 귀신들이여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폭도들을 얽어매는 굵은 가시철조망임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우리들을 질타하소서

순한 양으로 길들여져 있는 우리를 질타하소서

홀로 외로운 뜻 밝히려다

입 다문 돌멩이처럼 시름시름 살아가는 교사들의

고달픈 삶이 우리들의 비겁에서 비롯됨을 질타하소서.

새벽부터 밤까지 사지선다의 물음 속에서

썩어 가는 아이들의 고통이 우리들의 비겁에서 비롯됨을 질타하소서

점수에 묶여 목매는 어린애의 죽음이

우리들의 거짓 때문임을 질타하소서

우리들의 묵인 아래

155마일의 휴전선이 1마일마다 1,550마일로 새끼쳐서

이 땅을 칭칭 감고 있음을 질타하소서

우리들의 묵인 아래

우리들의 어머니 한반도가 핵의 이빨 아래 죽어가고 있음을 질타하소서

우리들의 묵인 아래

가시철조망이 우리를 칭칭 감고 있음을 깨우치소서

이제는 페퍼포그와 사과탄으로 눈 못 뜨시는

관악산 신령님

그해 5월 멀리 남녘의 땅이 울릴 때

안타까와 두 뺨에 피눈물 진달래로 흘렸을

관악산 신령님

진달래 송이마다 두견새 울음으로 머무는

이땅의 한 맺힌 넋들이여

그리하여 우리를 일으키소서.

저 모든 철조망의 질곡 아래로부터

우리들을 일으키소서

일어나 이땅의 고난을 영광의 가시면류관으로 삼아

매일매일 싸울 용기를 주소서

이 땅에서 이제 민주 통일의 싸움을 향해

민족의 힘살이 꿈틀거리게 하소서

저 백두산 천지의 노란 꽃망울로

우리들과 아이들의 눈망울이 빛나게 하소서.

천년설 아래 꿈꾸는 노란 풀꽃들의 강인한 뿌리로 견디게 하소서.

진달래 송이마다 두견새 울음으로 머무는

이 땅의 한 맺힌 넋들이여

비겁한 저희들이 올리는 더러운 물건이라 욕하지 마시옵고

오랫동안 주린 배를 채우시고

노랗게 춤추는 꽃망울 곁 출렁이는 천지의 물결 속에

두견새 울음으로 잠기소서, 상향.

 

 

 

구로공단을 지나며

김진경

 

교직은 성직이니까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으면

자기를 희생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직원 조회 시간에 낭독하는 공문의 글줄이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반복되는 수업시간

이제는 안 보고도 외우는 수업내용을 주절거리며

창밖을 본다

길 잃은 매가 한 마리

잎 떨어진 미루나무 위에서 날고

아, 내가 새였으면

생각하는 사이에도 나는 쉴 새 없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누구일까

내가 한눈파는 사이에도

21페이지 5행에 줄을 거요

이거는 꼭 시험에 납니다

쉴 새 없이 주절거리는 나는 누구일까

차라리 여기 돌아가는 피댓줄이라도 있다면

한눈팔 때 잘려 나가는 팔이라도 있었으면

잘려 나가는 고통이라도 있었으면

정신이 잘려 나가는 데는 고통도 없다

정신이 잘려 나가는 데는 피도 없다

밤 10시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뒤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부른다

거기 낄낄거리며 나를 부르는 건

잘려 나간 나의 팔일까

가로등에 길게 끌리는 내 그림자엔 팔이 없다

내일은 다리가 없고

모레는 머리가 없겠지

우리들은 산업 전사이다

집에 가는 길 구로공단을 지나며

공장마다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본다

산업 전사이니까

입에 풀칠을 못 해도

목숨 바쳐 일해야 하나

피곤한 표정의 사내들이

하나둘 올라와 무거운 몸을 기댄다.

 

 

 

구름의 눈

김진경

 

요즈음은 참 사람들 얼굴 보기가 겁나

갑자기 수십 년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버린 것처럼

맨살의 얼굴이 많이 보여

남이 만들어준 얼굴이 갑자기 벗겨진

벗겨지다 만 허물처럼 군데군데 남아있는

그래서 아무 얼굴이 없는 그런 얼굴 말이야

지하도를 걷다 보면 그런 얼굴들이 내 얼굴을 잡아당겨

알 수 없는 구름 같은 게 뭉클뭉클 따라와

무수한 구름의 눈들이 나를 빤히 보고 있어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다

김진경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다

두려워하는 친구여

그것은 고약처럼 들러붙어

너의 삶을 가두어 온 작은 욕망의 끝일 뿐이다.

버려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삶이 시작되는 것

마을 밖에서

너는 네가 살아온 마을의 작음을 알 것이다.

갈라진 땅의 갈라짐이

얼마나 헛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갈라진 사람들이

갈라진 하늘들이

갈라지지 않은 것임을 알 것이다.

너는 이윽고 끝까지 움켜쥐려는 욕망이

우리 모두를 서로 버려 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이윽고

만날 수 없었던 우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두려워하는 친구여

그것은 삶의 끝이 아니다.

너는 그것이 구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그것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구두를 닦는다

김진경

 

여닫히는 휴게실 문이 찬바람을 쏟아놓고

마지막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떠나갔다.

그는 창에 붙어 어둠에 잠긴 철길을 보고 있다.

그는 자리로 돌아와 낡은 구두를 벗어 닦는다.

이제 새벽까지 꼭 휴게실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사람은 없다.

갈 곳이 없는 자나 새벽차를 기다리는 자나 잠시 안심한다.

그는 구두코를 열심히 문지른다.

그는 구두약을 라이터 불로 녹인다.

마른 나뭇잎처럼 사람들이 하나 둘 몸을 누이는 사이

그는 녹은 약을 구두코에 바른다.

나는 왠지 그가 벼랑 끝에 앉아 있다고 생각한다.

몸을 누인 사람들이 그가 있는 쪽이 불안한 듯 뒤척이며 투덜댄다.

그는 몸으로 구두를 감싸듯 웅크리고 솔질을 한다.

그는 천으로 광을 낸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구두를 닦는다.

 

 

 

그 애의 백제 미륵반가사유

김진경

 

이제 여중학교 짜리 애가

남자애와 살림을 차렸는지

찾아간 산동네

단칸방 앞에서 불러도 대답은 없고

방문을 여니

희미하게 비쳐드는 햇빛 속

옷 궤짝 위에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다

슬퍼하는 겐지

무슨 비밀스러운 걸 알았다는 겐지

빙긋이 웃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 애의 눈빛이 깊어

그냥 방문을 닫다

 

 

 

그 작은 붓꽃은 어떻게 되었을까

김진경

 

산길을 오르다 안개에 싸인다. 버려진 움막 짐승이 살다 간 둥지처럼 무너진 곳, 길섶에 작은 붓꽃은 피어 있다. 흐르다 멍울져 맺힌 안개의 눈처럼 파란 붓꽃. 막막한 안개 속에서 나는 작은 횃불처럼 너를 들고 가려 했다. 뿌리께를 파헤치고 파헤쳐도 끝은 보이지 않고, 연년이 피었다 시들어 덮인 누런 잎이 뿌리의 깊이를 말하고 있었지. 이 땅에 속한 것, 어찌 다른 곳에 필 수 있으랴. 상처 난 뿌리께에 흙을 모아 밟아주고 내려오는 길, 바람이 안개를 몰아 사납게 등을 때린다.

그 작은 붓꽃은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보면 삶의 굽이마다 안개에 덮인 산정과 계곡,그 많은 옛날의 붓꽃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막막한 안개 속에서 안타깝게 매달렸다가 어설프게 덮어준 그 작은 붓꽃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파란 안개의 눈들은.

 

 

 

그 집 뜨락의 수국

김진경

 

캄캄한 밤길을 걸어왔습니다. 무논에 내리는 가랑비가 사락사락 소리를 내고, 둑길 가에 하늘타리꽃 하얗게 피어 캄캄한 하늘을 우러르고 있습니다. 어머니, 나는 또 그 집 뜨락의 수국이 비에 젖는 걸 보고 있습니다. 성경 읽는 소리 웅얼웅얼 뜨락에 깔리고, 촛불이 흔들리는 대로 창호지 문에 흔들리는 그림자 끄덕끄덕 혼자서 잠 속의 금강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대문간에 서서 그렇게 흔들리는 그림자를 오래 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찾는 것이 어머니보다 더 멀리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지요. 어쩌면 나는 이미 어머니를 부르는 나를 뒤에 남겨두고 다시 먼 길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둑길 가에 하늘타리꽃 캄캄한 하늘을 두러르며 하얗게 피었습니다.

 

 

 

김진경

 

아무래도 이 길은 아니야

갈수록 목이 마르고

모래가 아프게 몸에 박혀

한때는 이 길뿐이라고 생각했어

거세게 밀려오는 물살을 거슬러 오르며 기뻤지

그게 잘못이야

이건 한도 끝도 없이 드러누워 있는 벽이야

스며들 데가 없어

스며들어 먹고 배설하고 쉴 집에 닿을 수가 없어

나도 스밀 곳을 찾아 흐르는 물처럼 흐르고 싶어

하지만 너무 멀리 왔어

물살은 이미 제 길을 찾아 가버렸어

왜 이런 벽이 생겼는지 알 수 없어

파랗게 물들지 못한 채 말라버린 잎들이

검은 바퀴들이, 검은 발굽들이 벽 위를 둥둥 떠다녀

이건 길이 아니야

한도 끝도 없이 드러누운 벽이야

아, 목이 말라

 

아스팔트 위에

지렁이 한 마리 말라붙어 있다

 

 

 

김관식(金冠植)

김진경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나는 그의 시를 변변히 읽은 것도 없어

하지만 그는 엄연히

내 시의 가장 큰 스승이야

내 젊은 시절

그와 강경상고 동창이라는 큰형은

나를 만류해보려고

늘 그를 들먹거리곤 했지

보릿고개를 넘는 시골에 시를 씁네 하고

하얀 양복에 백구두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미친 놈이라더군

만석꾼의 자식이었던 그는

그 많은 재산 다 털어먹고

막걸리 주전자를 원망하며 두드리다

서울의 어느 빈민가에서 죽었다더군

그는 그렇게 내 시의 가장 큰 스승이 됐어

말하자면 멸망의 스승인 셈이지

누구나 멸망을 싫어하는 요즘 같은 땐

가끔 그를 떠올려

시가 멸망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 수 있는 거지?

 

 

 

나는 너의 침묵을 노래한다

김진경

 

나는 너의 침묵을 노래한다.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간

너의 쓸쓸한 눈망울을

너를 쓰러뜨린 총성을

너의 피를

우금치나 휴전선이나 그 어느 언덕배기

침묵은 너의 주검으로 썩어 흙이 되고

너의 침묵 위에 핀 진달래를

엉겅퀴를 산수유를 그 모든 생명을

나는 노래한다.

노래한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말해질 수 없는 것들로 모여서

세상 위에 한세상을 이루는 것을

역사 위에 또 역사를 이루는 것을

노래한다.

침묵의 한 세상이 침묵하도록

우리의 가슴에 디밀어진 총칼을

노래한다.

그러나 말하는 침묵을

노래하는 침묵을

싸우는 침묵을

노래한다.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사라져 간

너의 쓸쓸한 눈망울을

너를 쓰러뜨린 총성을

너의 피를.

 

 

 

낙타

김진경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다거나

그런 상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네.

오히려 우리 앞에 펼쳐진

끝없는 사막을 묵묵히 가리키겠네.

섣부른 위로의 말은 하지 않겠네.

오히려 옛 문명의 폐허처럼

모래 구릉의 여기저기에

앙상히 남은 짐승의 유골을 보여주겠네.

 

때때로 만나는 오아시스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사막 건너의 푸른 들판을

이야기하진 않으리.

자네가 절망의 마지막 벼랑에서

스스로 등에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일어설 때까지

일어서 건조한 털을 부비며

뜨거운 햇빛 한가운데로 나설 때까지

묵묵히 자네가 절망하는 사막을 가리키겠네.

 

낙타는 사막을 떠나지 않는다네.

사막이 푸른 벌판으로 바뀔 때까지는

거대한 육봉 안에 푸른 벌판을 감추고

건조한 표정으로 사막을 걷는다네.

사막 건너의 들판을 성급히 찾는 자들은

사막을 사막으로 버리고 떠나는 자.

 

이제 자네 속의 사막을 거두어내고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일어서게나.

자네가 고개 숙인 낙타의 겸손을 배운다면

비로소 들릴걸세

여기저기 자네의 길을 걷고 있는 낙타의 방울 소리.

자네가 꿈도 꿀 줄 모른다고 단념한

낙타의 육봉 깊숙이 푸른 벌판으로부터 울려 나와

모래에 뒤섞이는 낙타의 방울 소리.

 

 

 

낙타, 동해에서

김진경

 

그대 팍팍한 사막을 걸어

더 갈 수 없는

그 끝을 서보아라.

거기 또하나의 사막처럼

막막한 바다.

사막을 헤치고 가듯

하얗게 뱃전에 파도 부서지며

수평선 끝으로 배가 가고

무엇을 건지려는가 사내는 그물을 던진다.

동해바다여, 이 봄 한낮에

거대한 신록의 해일로 상륙하려느냐.

더 갈 수 없는 끝

긴 고동 소리처럼 게으른 울음을 우며

우리도 너에게로 상륙하고 싶다.

그리하여 우리가

서로에게 등지느러미 반짝이는

해일일 수 있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지워지지 않는 의미가 될 수 있다면

 

 

 

낙타, 수수꽃다리 핀 골목에서

김진경

 

억지로 술을 마신 날

담벼락 밑에 헛구역질을 하다가

담장 위로 보랏빛 눈을 뜬 수수꽃다리,

오랜 감기 끝 내다본 가을 하늘처럼이나 싸--하게

보랏빛 향기며

내 심장의 한가운데로 낙하하는

눈처럼 차가운 보랏빛 꽃잎.

아, 그러면 나는 또 저 수수꽃다리의 보랏빛 눈을 뜨고

이물스럽게 구겨져 있는 나를 보아야 한단 말이냐.

낙타여, 낙타여

내 영혼에 비계라도 끼였으면 좋겠다.

게으른 낙타처럼 허옇게 눈고 낀 눈을 꿈벅이며

아직은 먼 길을 가야 하리니,

아니면 내가 뜨는 보랏빛 눈이

멀리 별빛으로 빛날 수 있게

높고 큰 육봉을 다오.

그리하여 저 보랏빛 향기를

축복처럼 밟고 가게 하라.

보안등 희미하게 켜진 골목의 끝에서 끝까지

떨어진 꽃잎들이 뜨는 보랏빛 눈.

아직 너무 가까이 있는 사랑처럼

발바닥이 아프다.

 

 

 

난초기

김진경

 

첫딸을 낳고 주먹만 한 얼굴에 이목구비며 고물고물한 손가락이 하도 신기해서 생명의 뜻을 알아보리라 난초를 기른 적이 있다. 목숨만큼이나 까다롭다는 난이 한 번 꽃을 피운 뒤로, 목숨이 어울리면서 무릎 깨지면서 무성해지는 것이지 싶어 나는 너를 잊었고 너는 나의 방에서 시들었다.

지난여름 이 땅의 어느 유배지에서 머리며 수염이 허옇게 자라고 얼굴이 그을린 채 김을 매고 있는 윤영규 선생을 만나 야생난을 한그루 받았다. 선생들이 무슨 거창한 얘기보다도 환갑 가깝게 살아온 이야기 왜 거 있잖아 왜 딸을 많이 낳았는지 그런 얘기 하니까 좋아하구 힘나하드만. 이윽한 눈길도 함께 담아 보낸 난초를 그러나 나는 다른 선생의 집에 놓아두었다.

무슨 조직이며 운동이며 그런 것들로 머리가 번잡한 밤에 어둠을 응시하노라면 문득 없는 듯이 진한 향기가 난다. 어울리며 무릎 깨지며 무성해지는 목숨의 깊이, 검게 그을린 얼굴과 허연 수염이며 머리칼, 굳은살 박인 손바닥 깊이, 딱딱하고 치열한 것 같은 일과 일들의 깊이, 사람과 사람이 자신의 생애를 걸고 걸어간 발자국이 있고 그 무수한 세월로부터 없는 듯이 진한 향기가 난다.

사람과 사람의 사상이여, 난초여.

 

 

 

내셔널 지오그래픽

김진경

 

사자 떼가 초원의 한 나무 아래서

얼룩말의 몸뚱이를 뜯고 있다

호숫가에서 홍학 한 마리가

제 깃털 속에 부리를 박은 채 쉬고 있다

 

그것을 카메라 렌즈로 잡아내는

한 환경주의자 사내가

블론드의 덥수룩한 턱수염을 붉게 물들이며

모닥불을 쬐고 있다

 

그는 제 몸속에 부리를 처박고

꿈틀거리는 제 내장을 골똘히 보고 있는 중이다

그가 모닥불을 쬐는 동안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수억의 인간들이 무언가를 삼키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부리를 제 몸속에 너무 깊이 집어넣어

몸의 안과 밖이 뒤집혀 있다

밖으로 나온 내면의 허기가 입이 되어

모든 것을 삼킨다

저 호수와 초원과 사자와 홍학들은

그들이 먹다 남긴 작은 빵조각이다

 

 

 

내소사에서

김진경

 

산 속의 밤은 차고, 그리운 것들은 별처럼 멀리 흩어져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계신지요. 그대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고 있든 잣나무 위에 사발만 하게 걸린 별처럼 여기선 모두 가깝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마음속엔 저 어두운 밤하늘처럼 감추어진 하늘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혼자 아파하거나 꿈꿀 때에도 저 별들처럼 서로에게 환히 빛나 보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하고 계신지요. 그대 지난날들을 아파한다는 소식, 꿈을 잃기도 했다는 소식 듣고 있습니다. 이런 밤에는 저 높은 잣나무를 타고 싶습니다. 그 어두운 하늘에서 그대의 아픔이 별로 돋는 걸 보고 싶습니다. 밤새 잣나무를 타며 별을 지키는 소년들의 전설이 저 어두운 하늘의 어디에선가 별자리로 돋고 있을 것 같은 밤입니다.

 

 

 

누란의 사랑

김진경

 

천오륙백 년 전 실크로드의 사막 가운데 번성했던 누란 왕국은 홀연히 소멸했다. 그리고 그 유적에서 한 여인의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그 머리칼에 신부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징표로 새의 깃털이 꽂혀 있었다.

 

누란의 위기란 말은

달걀을 쌓아놓은 것처럼 위태롭다는 뜻이지만

나는 이 말이

누란 왕국이 홀연히 사라지게 된 위기에서

유래되었다고 굳이 고집하고 싶네

누란 왕국이 어느 날 갑자기

사막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듯이

우리들은 어느 날 홀연히 소멸할 위기 속에서 살고 있지.

하지만 그대여,

말라붙은 미라의 허무 위에 꽂힌 이 깃털은

얼마나 오랜 인간의 습관이고 희망인가

아름답던 볼과 입술이

꺼멓게 벌린 입과 흰 이빨이 화한 뒤에도

새의 깃털은 저 입 벌린 허무를 넘어 날아와

우리의 가슴에 박히니

인간의 사랑은 인간의 위기를 넘어 역사를 이루네.

그대여,

슬퍼하지 말게

어떠한 정열도 영원하지 않고

어떠한 정열도 소멸하지 않으니

우리로부터 한 마리의 새가 날아

누군가의 가슴으로 날아가고

우리들의 하늘은 날아오르는 새의 깃털로 가득하여라.

 

 

 

김진경

 

겨울 하늘에 마른 가지가 박혀 있었다

나는 그 밑을 지나며 바람 소리를 들었다

가지에서 반짝이며 부서져 내리는 눈

이 저녁에 눈을 품고 바람은 하늘로 떠나가고

소리만이 마른 가지에 남아 울고 있었다

 

 

 

눈물

김진경

 

하루아침 추위에

은행나무가 후드득 잎을 떨어뜨린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황망히 흘리는

황금빛 눈물

 

 

 

달팽이

김진경

 

집 잃은 사람들,

집과 함께 무거운 관계의 끈을 다 끊어버리고

아이들이 버리고 간 풍선처럼

사람들 사이에 아무 무게 없이 떠 있다.

관계의 끈에 묶여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

자신을 입증할 아무런 주소도 없이,

하지만,다 잊은 상처처럼 남은 가려움

끊어져 나간 관계의 흔적을 긁적거린다.

거울을 앞에 둔 듯 머리를 빗기도 하고

옷매무새를 고치기도 하고

바람에 실려 가는 신문을 주워다 차곡차곡 접어 쌓기도 하고

달팽이처럼 잃어버린 집의 흔적을 등에 지고 있다.

뜨거워지는 아침 햇볕 속

길가 화단의 그늘과 그늘 사이로 달팽이가 기어간다

뜨거운 햇볕 속을 긴 자국을 남기며

 

 

 

뒷길

김진경

 

선운사가 좋다기에 찾아갔더니

절보다는 잔잔한 뒷길이 좋아

늦도록 숲속을 거닐다가

자갈 같은 별들을 밟으며 오다

 

 

 

등이 흰 낙타

김진경

 

등이 흰 낙타를 보았어

눈 덮인 윗세오름

발걸음은 자꾸 하늘 쪽으로 향하는데

먼 풍경 소리처럼

떨쳐 지지 않는 방울 소릴 들었어

둘러보면

수만의 눈 덮인 나무들이

희디흰 낙타를 육봉처럼 흔들리고

뿌 뿌

더 오를 수 없는 눈벌판의 끝을 향해 고개를 쳐든

낙타들의 울음 소릴 들었어

 

그리고 거기

낙타의 육봉 같은 나무들이 하나하나 남김없이 쓰러지고

다시 보았어

새파란 하늘을 향해 거대하게 솟은 희디흰 육봉

그렇게 솟아 있었어 백록담의 봉우리는

 

등이 흰 낙타를 보았어

 

 

 

말 무덤

김진경

 

낮은 산 구릉 꼭대기에

봉곳이 솟은 이 작은 언덕은

말무덤이라 한다

 

백제 부흥군의 장수들

저희들끼리 권력을 다투다

당나라 군사에 쫓겨

이 산 구릉 꼭대기에 몰렸다 한다

 

마지막 순간

영화에 대한 꿈도

권력에 대한 부질없는 욕심도 벗어나

말 목을 치고 싸우다

죽었다 한다

 

이 물러설 길 없는 싸움이

수백 수천 년

희망 없이 살아야 하는 무지렁이들

마음에 들었던지

오랜 세월 뒤

동네를 지키는 신으로 모셔졌다

 

어린 시절

이곳에 몸 부쳐 살던 나에게

그렇게 천년 세월 건너

말 무덤은 전해졌다.

 

 

 

말벌을 기리는 노래

김진경

 

쑥부쟁이며 산국도 시들해진

늦가을 한낮

갈 곳 없는 벌들이

떨어져 한 귀퉁이가 깨어진 배의 단내에 취해

닝닝거리더니

서리 내린 아침

한 귀퉁이가 깨어진 배 얼어붙어 있고

그 위에 말벌들이

배의 단물을 빨던 모습 그대로

여러 마리 죽어 있다.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단내를 좇아 꿀을 모으던 노동이 향기로운데

이제 그 향기마저 흩어져

껍질이 텅 빌 때쯤

바람이 그를 어디론가 데려가리라.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마지막 수고를 다한 손들이

텅 빈 껍질처럼 가벼워진 모습으로

모여 사는 곳이리라.

 

 

 

매혹

김진경

 

저기 조팝나무며 떡갈나무, 소나무며 산죽, 전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이팝나무, 산사나무 연록색 새순 돋아 그 위에 둔중한 무게로 서 있는 울산바위까지 물오른다. 파도친다.

옛날 전국의 바위 불러 금강산 짓는단 소리 뒤늦게 듣고 울산서 급히 떠난 큰 바위 하나. 금강산 일만이천 이미 찼단 전갈 받고 그만 중도에 멈추어 봉우리를 이뤘다는데 그건 그냥 후대에 지어낸 얘기고.

마침 지금 같은 늦은 봄 한낮, 바다로부터 아득히 밀려와 발부리로 무릎께로 차오르는 신록의 해일에 눈이 부셔 그만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게 된 건 아닐까.

 

 

 

모독

김진경

 

1

굽어 있는 산모퉁이 돌아서다

저기 개울가

굽은 소나무 하나

노랗게 송화가루 날린다.

모두 떠나고 없는 산 속

햇빛 가득한 한낮

 

 

2

비 그친 뒤

인도에 고인 물 가장자리

멀리 날아온 송화가루

노랗게 묻어 있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수면을 흔들면

차에서 튀긴 물방울

무지개빛 기름막으로 빠르게 번져간다.

수심 없는 물에

흐린 하늘이 떨어져 잠긴다.

 

 

 

목련

김진경

 

001 빠르게 잘 통합니다

더디게 오는 것도 있단다

멀리 소식 없이 떠돌아

그리움인 것도 있단다

 

001 시원하게 통합니다

말없음이 말을 하기도 한단다

옹송그리고 주저함이

가슴에 환한 빛일 때도 있단다

 

001 한국통신 언제나 당신 곁에 있습니다

길거리 화단에도 어김없이 목련은 지고

때로는 어김없이 기울어, 지는 것이

기울어 천지에 가득할 때도 있단다

 

 

 

무서운 시간

김진경

 

강변을 따라 걸어왔다

번잡한 거리를 지나

거슬러 오를수록 길은 고요하고

 

더 갈 수 없는 길의 끝

누군가 스치고 가는 옷자락처럼

하얀 구절초 꽃더미 피어 있다

 

벌들이 꽃더미 위를

바쁘게 닝닝거리며 오가고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물속에서

물풀들이 흔들린다

 

물풀 사이 깨진 병이며 알루미늄 맥주캔,

물결 따라 흔들리는 비닐 사이로

무언가를 쪼는 물고기들

잠자리 날개 같은 물고기의 비늘

한 생애 너머의 생애까지 다 들여다보일 듯 투명하다

 

강 건너에서

햇빛 좋은 일요일 오후를 졸고 있던 낚시꾼이

무어라고 소리친다 물속에서

한순간 지나가는 자신의 생애를

들여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지개

김진경

 

아이들이 돌아가 텅 빈 운동장

한구석 수돗가

오랜 휴식과 비어 있음이 녹으로 슬고

그 무게 견디지 못해

물방울 톡톡 떨어진다

 

그렇지, 저 오랜 휴식과

비어 있음의 무게 없다면

어떻게 손바닥으로 막아 쏘아 올릴 만큼

물 쏟아지랴

아이들이 쏘아올린 물안개 속에

어떻게 무지개 피어나랴

 

 

 

밀물 드는 강가에서

김진경

 

그대 마음이 다하여 폐허처럼 느껴질 때

여기 나와 강물을 보세요.

폐허는 폐허만을 낳을 뿐일까요

먼 세상을 돌아온 물들이

흐린 얼굴로 누울 때

싱싱한 갯내를 실어 나르는 물 한줄기

강심을 거슬러 오릅니다.

 

그대 바람 사나운 모퉁이에 서서

살아온 날들에 세워진 무수한 묘비명이 돌아보아질 때

아, 여기 나와 강물을 보세요.

먼 세상을 돌아온 물들이

오래 품고 온 슬픔을 가만히 내려놓고

말갛게 비어 가는 제 얼굴을 보고 있을 때

그리움도 지쳐 끝난

머언 퇴적층에서 새 움이 트는 듯

가득한 물 넘어

갈대들이 푸르게 흔들립니다.

 

 

 

바람 사설

김진경

 

문이 흔들리고 있지

들어봐

들어봐 빈 국기 게양대를

심심하게 밤새 두들기는

그래서 누군가는 생각하겠지

누가 밤에도 깃발을 달아논 게 아닌가?

그래 그런 나라도 있지

낮에 깃발을 거는 사람들이 다 거두어간 후

남 몰래 펄럭이는 마음으로

어둠 속에 깃발을 다는

그래 문을 열고 나와보아

네가 켜는 작은 불빛에도

오늘 전신으로 고개을 흔드는 풀잎들

아직도 어둠 속에서만

펄럭여야 할 것들이 이리도 많은 나라가 있군

들어보아

내 어둠 속에서 그것들의 벙어리 된 몸짓으로

너를 부르니

 

 

 

밥 끓이는 시간

김진경

 

이제 또 하루를 가득하게 살았다는 듯

순한 등허리로 제 어린 새끼들을 거느리고 돌아가는 산들과

아직도 아쉬운 듯 남은 햇볕에 몸을 적셔보는 구름과

호기심이 가득 찬 표정으로 팔을 잔뜩 벌리고

집안을 기웃기웃 들여다보는 나무들 저물어가고

 

망설이며 하늘 한구석에 나타나

살짝살짝 창백한 은빛을 뿌려보기도 하는 반달

저녁의 대기가 남은 햇빛과 달의 창백한 은빛을

마지막으로 저울질해보는 시간

나는 불을 지펴 밥을 얹습니다.

 

어두워질수록 밥을 끓이는 불은 환해지고

불빛에 발을 벌리고 좋아라 우쭐대는 나무들 곁에

산들과 어두워진 구름과 반달과

새로 희미하게 나타난 별들이

식구들처럼 어깨를 맞대고 둘러앉습니다.

아마도 먼 옛날부터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는 슬픔이 가슴을 가득 채울 때

사람들은 이렇게 불을 지펴 밥을 끓였겠지요.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대답이라서

둘러앉은 식구들과 따뜻하게 데워진 슬픔을

말없이 나누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분의 숙명처럼 슬픔을 나눈 것들이

어둠 속으로 돌아가는 저녁 어스름

나무들을 어루만지던 저녁연기의 흰 손

이제는 안심이라는 듯

슬그머니 숲 사이로 거두어지고

구구구구

잠꼬대처럼 울어대는 먼 산비둘기 소리

꿈속처럼 희미하게 들려옵니다.

 

 

 

백두산 사진을 보며

김진경

 

백두산 천지에 노란 망초꽃이 피었습니다.

망초꽃 덤불 곁으로

시퍼런 천지의 물이 출렁이고

당신은 검은 치마 흰 저고리로

노란 꽃들과 함께 춤추고 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누이여

당신은 그 꽃들이 하나하나

먼 남녘에 사는

어린 누이들의 눈망울인 걸 아십니까.

 

봄이었습니다.

온 산천에 진달래 지천으로 피어나는

그 봄에 저는 남녘의 시골 학교 선생이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교실 게시판에

백두산 천지 사진을 붙였었지요.

가끔씩 뻐꾸기 울음이 찾아와

천지의 푸른 물에 잠기는

양지바른 산 밑 시골 학교였습니다.

 

장학사가 찾아왔다고 바쁜 토요일 오후

저는 교장실에 혼자 앉아 있었지요.

구겨진 백두산 사진이 책상 위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백두산 사진을 걸었으니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시말서를 쓰고 있었지요

저는 시골 학교 선생을 그만두었습니다.

영문 모르는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먼 산길을 따라왔습니다.

 

글썽이는 아이들의 눈망울에

뻐꾸기 울음이 찾아와 잠기고

저는 천지에 피는 풀꽃이

꼭 글썽이는 아이들의 눈망울 같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누이여,

 

그곳에도 교실의 한구석에

한라산 백록담 사진을 거는 선생이 있겠지요.

걸다가 혹시는 혼구멍이 나는 선생이 있겠지요.

우리들의 그리움이 이 땅의 힘살로 일어나

모든 가시철조망을 부수는 날

맨 먼저 그이를 만나고 싶습니다.

손을 맞잡고 우리가

얼마나 바보 같은 세상을 살았던가 이야기할 것입니다.

 

 

 

백자진사매국문병(白磁辰砂梅菊文甁)

김진경

 

그대는 말이 없고, 나는 멀어지는 가을 빗소리를 듣습니다

그대는 모습이 없고, 나는 어른거리는 물그림자를 봅니다

그대는 소리가 없고, 나는 나뭇잎 바람에 수런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대는 향기가 없고, 나는 멀리 솔잎 향내를 맡습니다

그대는 내미는 손이 없고, 나는 바람에 날려온 단풍잎을 손바닥에 올려놓습니다

그대는 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고, 나는 늘 비어 있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별빛 속에서 잠을 잤다

김진경

 

늦은 귀가길에

바람이 앞산을 우우 한쪽으로 출렁이게 하고 있다.

앞산이라야 도시 한가운데

올라가면 운동시설도 있고

꼭대기서 나뭇가지 사이로 동네 집들이 삐죽삐죽 보이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붙어

겨우겨우 파헤쳐지기를 면한 야산

 

그래서 사람들이

사람에게 딸린 부속물 정도로 여기고 지나치는

야산의 숲이 우우 한쪽으로 출렁이고 있다.

어두운 숲의 한끝에서

바람이 덧씌워진 비닐을 벗겨내듯

답답한 무언가의 귀퉁이를 뜯어

도시의 빌딩들 위로

하늘의 한끝까지 부욱 찢어나간다.

 

뜯겨진 사이로

처음인 것처럼

환하게 빛나는 별 하나

별 하나로부터

하늘과 숲과 밤구름과 야산이

인간이 붙여준 이름과 모든 것을 거부하고

나는 바람이 일으키는 혼돈 속에 흔쾌히 몸을 맡겼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이신

별 하나여 밤하늘이여 구름이여 숲이여

당신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이 오랜 인간의 관습으로부터 과감히 퇴행하리라

나는 지붕을 허물고

쏟아지는 별빛 속에서 잠을 잤다.

 

 

 

보충수업

김진경

 

방학 때 보충수업은 하면 안 된다고 떠들었는데,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는데,

어쩔 수 없이 시작되는 첫날

아이들도 나도 외면한 채

창밖에 내리는 눈을 보았다.

이것은 분명히 타협이라고

혼잣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한 걸까

성식이도, 상훈이도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인다.

가르친다는 게

타협을 배우고 타협을 가르치는 걸까

아이들은 얼른 첫마디가 떨어져

어색한 침묵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어제 밤 늦게도, 새벽에도

피곤한 일이지만 어쩔 수 있겠냐고

늘 안스럽고 피곤한 표정의 교감이 전화를 하고

끈적거리는 동료들의 표정에 끌려 나서는 아침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눈이 내렸다.

어쩔 수 없지 않냐고

 

그렇게 우리들의 향그러운 흙 위에

불결한 발자국이 찍히고

어쩔 수 없지 않냐고

이 땅의 허리에 무거운 칼날이 내렸으리라

늘 익숙한 치욕 위에

치욕을 보태는 일이 사는 일이라면

아이들아, 구태여 너희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랴.

 

죽어 버린 글자들 속에

아이들아, 너희들과 나의 치욕을 묻는다.

죽어 버린 숫자들 속에

아이들아, 그리운 우리들의 얼굴을 묻는다.

죽어 버린 글자를 부수고 태어날

우리들의 살아 있는 분노를 위해

살아 있는 말들을 위해

이윽고 우리들을 값 매기는 자가

묻히리라.

 

 

 

부처

김진경

 

치자꽃 향기가 좋아

코를 댔더니

그 큰 꽃송이가 툭 떨어지다

귀한 꽃 다친 게 미안해서

손바닥 모아

꽃송일 감추었더니

합장 인산 줄 알았던가?

보는 이마다

합장한 채 고개를 숙이고 간다

어허, 여기선

치자꽃이 부처일세!

 

 

 

분수

김진경

 

지하도 계단을 걸어 오르다

벌에 쏘이듯 햇빛에 쏘인다.

여름 햇볕에 부푼 대기의 거대한 주머니가 내민 침.

기억의 화살이여,

나를 꿰뚫고 어디로 날아갔는가.

거리엔 별의 경계색처럼 소란스러운 삶이 흐르고

소란스런 삶에 지친 사람들은

위안을 찾아

지하도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신은 위안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기나긴 망각의 강을 흐르게 하고

하루와 하루 사이에

달콤한 잠의 강을 흐르게 하였다.

그리고 도시는

하루의 시간과 시간 사이에

길고 긴 망각의 레일을 놓는다.

 

그대 보았는가

황혼의 저녁 철교 위를 길게 지나가는 전철을.

사람들은 흐릿한 불빛 속에서 깊은 망각에 젖고

무덤처럼 닫혀진 방으로 돌아간다.

나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저승에서 걸어 나오는 바리데기처럼

지하도 입구에 서서 광장을 본다.

 

신호등 위에 앉아 차도를 내려다보는 비둘기들.

비둘기들의 눈 속으로

수많은 깃발과 환호와 슬픔이 솟았다 스러진다.

인간은 얼마나 많은 세기를 살아왔는가.

우리를 꿰뚫고 간 기억의 화살은 미래로 멀리 날아가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그대여, 이제 보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하리라,

서로를 발견하고 감싸는 시선을.

비둘기들 날아오르는 광장의 건너편

누군가 손을 흔들고

수많은 세기의 망각을 뚫고 솟아오르는 끝없는 손짓처럼

희디흰 햇살을 반짝이며 분수가 솟아오른다.

 

 

 

불쌍한 내면

김진경

 

검은 강물에 고수부지의 보안등이 길게 비친다. 강변 아파트의 불빛들이 흔들리며 쌓이고, 강변도로의 자동차 행렬. 이것이 강물의 유일한 내면이라는 듯 깊이 잠기는 밤하늘.

비쳐든 내면의 뒤에서 붕어가 천천히 바닥을 향해 헤엄친다.

 

 

 

비상(飛翔)

김진경

 

지구상의 생물들이 가장 크게 날아오른 것은

새들의 비상이나, 인간이 실현한 무엇 따위가 아니라는 거야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네 발처럼 어기적거리며

최초로 물 밖으로 기어 나왔을 때

느꼈을 어마어마한 중력을 생각해 보라는 거야

그 몇 센티미터의 간절한 비상!

 

 

 

비 오는 거리에서

김진경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마

비 오는 거리에서

빗속에 너는 뿌옇게 흐려져 가고

너의 이름마저

너의 머리칼마저

너의 떨리는 살갗의 접촉마저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라고 잊어버리라고

그들은 책갈피를 뒤지고

노트 위에 쓰여진 점 하나까지

전화통 속에서

눈 아프게 부신 백열등 너머에서

나의 귀를 눈을 찔러온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마

사랑하지 않는다고, 다 잊었노라고

너의 이름마저

너의 머리칼마저

너의 떨리는 살갗의 접촉마저 다 잊었노라고

그러나 사랑한다고

나는 책갈피에 노트 위에

매일 매일 점을 찍는다.

너의 표식으로 점을 찍는다. 비에 젖는 아스팔트 위에,

스레트 지붕 위에, 끌려가는 젊은이의 손목 위에

비에 젖는 포장마차의 불빛 위에, 일나가는 처녀애들의

파리한 얼굴 위에 그 모든 것은 너의 표식이라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사랑한다고

비 오는 거리에서

 

 

 

빈집

김진경

 

무너진 토담 한 귀퉁이, 햇빛이 빈 뜨락을 엿보는 사이 작고 흰 꽃을 흔들며 개망초 떼가 온 집안을 점령한다.

썩은 지붕 한구석이 무너진 외양간, 비쳐 드는 손바닥만 한 햇빛 속에도 개망초는 송아지처럼 순한 눈을 뜨고 있다.

개망초 떼들이 방심한 채 입 벌린 빈집을 상여처럼 떠메고 일어선다.

하얗게 개망초꽃 핀 묵정밭 쪽이 소란하다.

혹시 집 앞길로 사람들이 흘러가다가, 잠시 멈추어 내리기라도 한다면,

개망초들은 시치미를 떼고 서서, 햇빛 속에 흔들리리라.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빈집은 숲에 묻히겠지.

문득 개망초꽃 하나가 내 어깨에 햇빛의 따뜻한 손을 얹으려 한다.

나는 완곡히 이 위안을 사양한다.

내가 지금 귀 기울이는 건 다른 소리이다.

사람의 기운이 이제 아주 떠나려는 듯 사랑방에서 두런두런거리기도 하고, 쇠죽 끓이는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외양간에 쇠방울이 딸랑거리기도 하고, 누군가 쟁기며 삽날이 흙과 사람과 개망초꽃더미 사이에 내쉬고 들이쉬던 숨결을 가만히 어루만져 거두어들인다.

언뜻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뜨락을 스치고, 그의 헛기침 소릴 들었던가.

 

 

 

빗자루 쓰는 소리가 들린다

김진경

 

빗자루 쓰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비에 젖어 바닥에 붙은 낙엽을

공원 청소부가 쓸고 있다

빗자루 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내 마음의 바닥을 쓰는

불목하니로 살아왔다

가을비에 젖어 마음의 바닥에 붙은 낙엽을

쓸고 또 쓸었다

빗자루 쓰는 소리가 들린다

내 마음의 바닥

내 마음의 마음의 바닥

내 마음의 마음의 마음의 바닥

아무리 들어가도 보이지는 않고

빗자루 쓰는 소리가 들린다

 

 

 

빙어

김진경

 

1

하루종일 강 건너편 도시의 고층 건물들에 하얗게 가을 햇볕이 부서졌습니다. 나는 참 누누이 이 자리에 서 있었던 듯 싶습니다. 한 도시가 무너지고 일어서고, 무너지고 일어서는 동안 같은 시간의 언저리쯤에서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보았던 듯 싶습니다. 맑은 일요일 오후를 다정히 걷고 있는 젊은 남녀들과 뛰노는 아이들 덧없이 아름답고, 그 언저리쯤에서 까마득한 시간을 가로지르며 도시 위에 희디흰 운명의 옷자락을 드리워온 그대를 그리워했던 듯 싶습니다.

 

 

2

날이 저물고 빙어처럼 내장이 다 들여다보이는 유람선이 환하게 불을 켜고 지나갑니다. 한 도시가 무너지고 일어서는 까마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오래된 기억의 빙어 기억의 내장은 말이 없는 그림자극(劇)과도 같습니다. 영원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흔적처럼 사랑의 작은 몸짓들이 그림자로 어른댑니다. 누군가 하늘 높이 띄웠던 연을 내리고, 나는 또 누누이 이 자리에 서 있을 듯 싶습니다. 캄캄한 허공에서 빠져나오는 연줄은 끝이 없고, 연은 보이지 않습니다.

 

 

 

뿌리 내리지 못하는 나무

김진경

 

아버지는 나무를 심었다

향나무 가지를 잘라 둥그런 찰흙 덩어리에 꽂고

뿌리가 잘 내리도록 약을 넣고

묘판에다 줄을 맞춰 심었다

물은 더 줘도 덜 줘도 안 된다

아버지는 이르고는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뿌리가 내리면 몇만 원씩 나간다는 나무에

나는 때맞추어 힘들게 물을 주었다

 

기다려도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농약을 만지는 일에 물집 잡힌 어머니의 손처럼

썩기도 하고, 말라 죽기도 하고

돌아온 아버지의 피로한 모습은 어느덧 나무를 닮고 있었다

아버지는 불쑥 화를 내고

네가 물을 너무 많이 주었구나

나는 죄없이 줘 박히며 말했다

 

무슨 벌레가 있나 봐요, 나무의 뿌리를 갉아 먹는

아버지는 중얼거리는 나의 말에

거대한 벌레에게 뿌리를 잘린 듯 넘어져 울었다

'그래 무슨 벌레가 있는 모양이다'

나의 손을 잡고 나서는 아버지의 손은 따뜻했다

 

그게 무슨 벌레인지

아버지와 내가 무엇에 합의한 것인지

보리밭을 흔들고 오는 바람 속에서도 나는 알 수 없었다

뿌리 내리지 못하는 수천 그루 나무

아버지가 죽는 날

우연히 살아 자란 두 그루 향나무가 문밖에 흔들리고

어머니는 문득 나에게 말했다

보기 싫구나, 저 나무도 마저 뽑아 버려라

 

 

 

 

김진경

 

가슴 속에 있다

다 타버린

타버린

 

꿈꾸지 않는

꿈꾸지

않는

 

밟히다

분노하다

참다

외치다

고함치다

부르르 떨다

아-

 

타버린

 

꿈도 꾸지

않는

 

모든 것이

끝난

그곳에서

이글

이글

숯덩이로

타오르는

타오르는

 

 

 

삼방산 밑에서 낙타를 보다

김진경

 

저 낙타는 분명

바닷가 모래사장을 걷거나

한라산의 목초지를 걷기 위해

여기 온 것은 아닐 게다

혹시는 이곳이 사막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기 위해 온 건지도 모르지

 

몇 장의 지폐에 팔려

사막보다 더 아득한 바다를 건너야 했던

몇 장의 지폐에 팔려

거대한 육봉 위에 아이들을 태우고 카메라 앞에 서는

낙타는 무슨 곡마단의 몸집 큰 장사처럼

순한 눈을 꿈뻑거린다

 

낙타는 풀과 종이를 구분하지 않는다

음식을 타박하지 않는 사내처럼

메마른 신문지를 씹는다

시멘트처럼 말라붙은 지폐를 주랴

 

마실 물과 먹을 것

그 이외의 것은 갈수록 무거운 짐이 되는

낙타는 사막의 단순한 생존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한다

낙타는 무슨 성자처럼

겸손하게 큰 눈을 꿈뻑거린다

 

 

 

김진경

 

1

맑은 날

하늘과 땅의 경계선이 분명해지면

마음과 몸의 경계선도 분명해지는가

 

문득

고깃덩어리의 작은 창문으로부터

뒷걸음질 치며

답답한 몸을 벗어버리려 퍼덕이는 것

 

아, 너의 눈 속에서도

또 너의 눈 속에서도

납탄 알을 맞은 새처럼

피 흘리며

퍼덕이는 것

 

땀 흘려 못질을 하다가도

끝내 잊히지 않고 못내 서러운

혹시 못이 녹슬어 흩어지듯

몸이 폐허가 되고

그 위에 풀꽃 지천으로 핀다면

바람이 흐르는 하늘의 여울 어디쯤 지저귀랴

 

납탄 알을 맞은 새처럼

피 흘리며

퍼덕이는 것

 

 

 

김진경

 

1

한강 하구 철조망 너머

섬 하나 떠 있다.

예전에는 저 섬도 부르는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군사 지도상의 부호로만 남은 섬

지키는 이 없는 초소 하나

갈매기 똥에 하얗게 덮여가고 있다.

 

 

2

이제 나이가 들어 정신이 흐려진 어머니

잠긴 창고 문 앞에서

안타깝게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나는 저 잠긴 문 뒤에 떠 있는 섬 하나였다.

이름도 잊은 채

갈매기 똥에 하얗게 덮여 가는

 

 

3

잠긴 문밖에서 누군가 간절히 부르는데

들리지 않는다.

잠긴 문밖에서 간절히 부르는데

아무도 듣지 못한다.

아, 우리는 서로의 잠긴 문 뒤에서

또 어느 지도엔가 부호로만 남은 섬 하나이다.

문득 부호에 다 갇히지 않는 내가

다 나은 종기처럼 가렵다.

 

 

 

새순

김진경

 

(나뭇잎이 지고 있어요.)

(육탈하고 있군.)

 

눈이라도 올 듯 시커멓게 찌푸린 하늘가

마른 가지를 하늘로 드리우고 선 은행나무가

육탈하고 있다.

노랗게 바닥에 벗어 버린 육신을 바라보며

가슴 저미며 끼고 살았던 육신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깜짝 놀라

내려다보고 있다.

 

(저걸 왜 쓸어 버리려고 하는 거죠?)

(소모되고 버려지는 것들은

자신을 아름답게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겠지, 우리들 말야.)

 

은행잎이 가득 쌓여 넘친

물웅덩이를 본다.

저렇게 아름답게 돌아보지 않고서야

오는 봄에 어찌

새순을 틔울 수 있으랴!

 

 

 

새잎 돋는 나무 아래서

김진경

 

나무에 다 갇히지 않는 나무는 아프다.

나무 속에서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디다가

나무는 이윽고 나무 밖으로 비어져 나온다.

나무 밖으로 비어져 나온 나무는

지금 전력을 다해 일어서고 있는 중이다.

가지 끝마다 삐죽이 돋는 움 속에서

푸른 머리칼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고

오그려 쥔 어린아이의 조막손처럼

조금씩 가까스로 펼쳐지는 새 잎 속에

손가락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운다.

아, 굳은 나무 둥치 속에서

그가 굽은 등을 일으켜 세운다.

굽은 등으로

너무 무거운 하늘을 밀어 올린다.

나무를 가두는 나무에 금이 가고

나무에 다 갇히지 않는 나무는 아프다.

 

 

 

서산마애삼존불 들어가는 입구 언덕바지 혼자 앉아 있는 돌미륵

김진경

 

-내 어릴 적 혼자서 백제 누이를 좋아했었다. 어찌할 줄 몰라 읍내 장터에 연극 구경하러 갔다가, 빼곡히 까치발 하고 선 구경꾼들 사이, 슬그머니 손을 잡았었다. 누이는 큰 눈을 뜨고 돌아보다, 얼굴을 붉히며 구경꾼들 사이로 도망치고, 그 후론 다시 얼굴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놈처럼 끙끙거리다, 세상에 제일 못난 놈 같은 생각이 들어, 누이의 먼발치에서나마, 평생 자리를 지키고 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마음먹었었다.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나와 누이 사이의 빈 터. 쓰라림인지 행복함인지 알 수 없는 아린 것들로 나날이 채워보곤 하던 영역-

 

서산마애삼존불 들어가는 입구

언덕바지에 돌미륵 하나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이 돌미륵도 등 뒤 멀리에서 웃고만 있는

저 백제 누이들을 사랑했을 것이다.

어느 날 슬며시 손잡았다가

누이는 얼굴 붉히며 도망치고

다시 얼굴 볼 엄두도 못 낸 채

먼발치를 지키고만 있기로 한 것이다.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사이로

꽃 피고 새잎 돋고 눈 내리고

아린 미소도 비바람에 씻겨 지워지도록

언덕바지에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했던 누이도 쓰라림도 잊어버리고

그렇게 앉아 있는 자기 자신도 잊어버릴 때쯤

앉아 있는 돌미륵의 등 뒤

벽에 등 기대고 서 있는 누이들 사이

비어 있는 영역이

문득 거대한 꽃으로 벙글기 시작한 것이다.

벙글기 시작한 꽃이

누이의 얼굴에 미소로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설일(雪日)

김진경

 

큰 밤나무 건너 스님이

눈에 갇히는 걸 피해 내려간 뒤

혼자 짊어져야 하는 하늘이 너무 무겁습니다.

허리를 구부리고 온종일 눈을 치우는데

수돗가로, 텃밭 가운데로, 집 입구로

두더지 굴 같이 부푼 길을 냈을 뿐입니다.

무너져 내린 하늘을 어찌 다 치울 수야 있겠습니까.

흰눈을 떠서 흰눈 위에 뿌리면서

각혈처럼 가슴에 고여오는 뜨거운 것을

말없이 보고 있을 뿐입니다.

하늘은 무너진 뒤에도 다시 저렇게 높푸르고

그리운 것은 너무 멀리 또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키 큰 낙엽송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각혈처럼 흰 눈을 후두둑 떨어트립니다.

떨어진 흰 눈 위에 망개나무 열매 몇 개

빨갛게 얼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스위치가 있고

김진경

 

세상에는 너무 많은 스위치가 있고

나는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끊임없이 스위치가 눌러지고

너무 많은 것들이 강제로 내 살갗에 입력된다.

살갗으로부터 쌓여져 들어가는

너무 많은 것들이

내 안의 공간을 다 채우고

과식한 날처럼 숨이 가쁘다.

예컨대 영혼 같은 게 있다면

그건 저 안에 찌그러져 있는 깡통과도 같겠지.

아니, 그것도

또 하나의 스위치가 되어 있는지도 몰라.

편안한 습관으로 또 스위치를 누르고

강제로 입력된 것들이 강제로 입력된 것들을 밀어내며

내 안을 채우고

어느 날 나는 내 몸이

차곡차곡 쌓아놓은 플로피디스크가 아닐까 의심한다.

지문을 찍으면

강제로 입력된 화면들이

혼선을 일으키며 찍혀 나올 것만 같다.

나는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의 불빛

김진경

 

산 아래 펼쳐진 불빛 자욱하다

언젠가

저 불 켜진 골목 어딘가에

너와 함께 서 있었다

낮은 처마 밑으로 새 나오는 불빛

오래 바라보며

간절하게

그 작은 불빛 하나 이루고 싶었다

그때 첫 키스를 나누었던가

기억이 멀어 생각나지 않는데

그 오래 남은 간절함으로 따뜻한

세상의 불빛

 

 

 

소식

김진경

 

서늘해지는 바람에서 그대 소식 듣습니다. 거리를 떠도는 걸 보았다고도 하고, 서릿발 일어나는 들판의 후미진 구석에서 길 잃은 고라니 새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고도 하고. 바람은 늘 거대하게 날개 편 풍문의 새와도 같습니다. 무사하신지요. 한때는 치자꽃 향기에 휩싸이기도 했고, 한때는 그대가 서리 내린 들판을 걷고 있다 해서 칼날 같은 서릿발 위에 서는 것도 같았습니다.

참 많은 세월과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꽃 하얗게 핀 울타리를 따라 걷기도 했고, 맨발로 서릿발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수많은 내가 나일 뿐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또한 슬픔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렇듯이 당신에 관한 많은 풍문이 당신의 빈자리를 가리키고 있을 뿐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무한한 연민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덧없이 왔다 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란 말씀인 줄을 알겠습니다.

무사하신지요. 바람은 거대하게 날개 편 풍문의 새와도 같습니다. 저에게 치자꽃 향기를 한 번 더 보내주십시오. 이제 사랑하는 것들 위에 치자꽃 향기 하나 보탠들 어떻겠습니까.

 

 

 

쇠똥구리

김진경

 

쇠똥구리가 돌무덤을 넘는다

 

어느 부처가 온몸 던져 떨어트려 놓은

무른 사리 밭,

쇠똥구리가 한 덩이 차지했다

 

돌무덤 하나 넘어가는데

해도 중천에서 한참 멀어졌다

 

어디 한 군데 모난 데 없이

둥글게 굴려서

검은 달 띄우겠다고

 

온몸으로 던져놓은 운석을

밀고 있다.

 

 

 

수묵으로 흐펴져 가는 정물화처럼

김진경

 

다음 봄에는

부슬비라도 오시는 날 강변 집 마루에 앉아

눈처럼 날리는 벚꽃잎을 보며

그대가 막 걸러 온 국화술을 마시고 싶군

나이 먹는 일이 뭉텅뭉텅 살덩어리를 떨어트리듯

욕망을 하나씩 버려가는 일이라

육탈이라도 하는 듯 몸은 나날이 소슬해지고 있으나

아직 떨치지 못한 머러가

지는 꽃잎과 나무와 나뭇가지에 내리는 비와

나를 까탈스럽게 구분하여 귀찮게 하니

지는 꽃잎과 나무와 내리는 비와

내가 하나가 될 때까지 마셔야겠네

그리고 그대 무릎을 베고 누워

어스름 녘 강물 위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그 보는 것조차 잊혀질 때까지 바라보다

수묵으로 흐려져 가는 정물화처럼

빗속으로 스러져 간들 어떻겠는가

 

 

 

수업

김진경 

 

일요일 저녁

텅 빈 운동장 구석에

한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그렇지,

비어 있음이 늘

가장 많은 걸 가르치지

 

 

 

김진경

 

오늘 숲길을 걸었다. 간벌을 위해 닦아놓은 길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여기저기 흙이 무너진 곳, 새로이 흐르는 작은 개울물. 간혹 베어진 통나무를 만나곤 한다. 숲 깊이 들어가노라면 어느새 나무들의 향기에 싸이고, 이 향기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다시 베어진 통나무 더미를 만나 숨이 멎듯 발걸음을 멈춘다. 진한 향기는 베어진 나무의 생채기에서 퍼져 숲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의 상처에서도 저렇게 향기가 피어날 수 있을까? 가만히 땅에 눕는다. 옷을 벗듯 악취나는 몸을 벗어버리고 싶다. 생채기가 향기일 수 있는 것들의 실뿌리 파고들어 이윽고 향기일 수 있을 때까지 눕고 싶다. 붓꽃이며 복사꽃 또 노란 양지꽃 제 상처에 열심히 꽃을 피우고, 서로 다른 향기가 만드는 길을 따라 벌들이 붕붕대며 날고 있다.

 

 

 

슬픔의 힘

김진경

 

1

욕망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긴 하지만

욕망은 세상을 멸망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한 그릇의 밥을 끊이는 불이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듯이

그렇게 무언가 불길한 것이 지금 시작되고 있다.

 

세상의 끝까지 번져가는 불길이

사랑하는 이들의 잠자리를 불결한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

지금 숲가에 서 있는 나의 적막한 한순간까지도

불결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지금 저 밤나무 뒤편으로 우거진 숲이

나를 거부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불은 더 이상

우리를 감추면서 드러내는 빛이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 불은 위험이며 재난의 표지일 뿐

우리 사랑의 작은 불꽃에서조차

우리는 세상의 끝까지 번져가는 불길의 위험을 느낀다.

숲은 제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잠잠히 이 재난을 거부한다.

 

 

2

나는 숲가에 발을 멈춘다.

숲은 나를 거부하며 말하고 있다,

이제 전환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불꽃은 세상의 끝에 닿아 더 이상 태울 게 없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너무 늦기 전에는 전환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내 슬픔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나는 밤나무 숲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숲은 여전히 우리의 재난을 거부하지만

또한 우리의 슬픔을 받아들인다는 듯

내 이마에 물방울을 떨어뜨린다.

나는 밤나무 가지 사이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불길이 세상의 끝까지 태우는 것보다 더 큰 재난은

우리 작은 사랑의 불에서조차

세상을 태우는 불길을 보는 거라고

밤나무 가지 사이에서 누군가 나에게 속삭인다.

슬픔이 세상을 태우는 불길을 끄지는 못하지만

세상을 태우는 불길로부터

작은 사랑의 불을 지킬 수는 있을 거라고

그래서 때로 우리가 은은히 빛날 수도 있을 거라고.

 

 

 

시간 위의 집

김진경

 

기차는 이 간이역에서 서지 않는다

오직 지나쳐지기 위해 서 있는 낡은 역사

무언가 우리의 생에서 지워지고 있다는 표시

시간 위의 집

 

 

 

쓸쓸한 연가

김진경

 

1

삶이 벽에 부딪힐 때

사람들은 흔히 최후의 물음처럼

죽음에게 묻는다네

살 가치가 있는가고

그러면 죽음은 늘 어머니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 비석을 하나씩 세운다네.

사막의 여기저기 피라밋을 세운

왕국의 역사를 말하지 말게

우리들의 생애 가운데 세운 무수한 비석들이

춥게 소리 내는 달빛 밝은 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쓰라린 첫사랑이 남긴

유서 한장 없는 비석으로부터

70년대의 혹독한 젊음을 지나

뜨거운 80년대의 발자국

그리고 지금 여기의 삶을 지키기 위해 세우는

돌아서는 친구의 등처럼 쓸쓸한 비석들.

 

 

2

그대의 슬픔이 세월을 멈추게 할 수 없듯이

추운 소리들이 긴 여운을 남기면

아침이 오지.

그리고 우리의 생애 가운데 세운 비석들 사이로

물이 흐르고

강물을 따라 올라온 고기들이

비늘을 반짝이며 비석들 사이를 헤엄쳐가네.

고기를 쫓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햇빛에 희게 부서지고

그러면 우리는 알게 되지

삶과 죽음이 늘 함께 있다는 것을.

 

 

3

그대여,

그러나 사람은 끝까지 타인에게 어리석구나.

한 왕국의 역사가 사막의 추운 달빛 속에

무수한 피라밋을 남기듯이

한 사람의 생애에 얼마나 많은 비석이 세워지는가를

늘 잊어먹지.

그리고는 사람들이 자기 생애의 물가에 뛰노는

죽음도 모르는 어린아이이기를 바라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 죽음에 이르기까지.

 

 

4

오래전에 보았었네

임종하는 아버지의 동공 속에서

아버지의 생애에 세워진 비석들이

슬픈 음악처럼 소리 내는 것을

그리고 꺼지지 않는 노을처럼 남아있는 염원을 보았었네.

당신을 가장 닮은 내가

당신처럼 생애의 가운데 비석을 세우지 말기를 바라는

철모르는 어린애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염려의 말이 베개 밑에 남아있었지.

남자를 알아 버린 딸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에게서

순결에 대한 훈계를 듣듯이

나는 그걸 읽었지.

그리고 이미 생애의 가운데 비석을 세운 타인으로서

아버지의 쓸쓸한 염원에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네.

 

 

5

그대여,

어리석음을 용서하게나.

나 또한 그대가 내 생애의 물가에 뛰어노는

어린아이이기를 바랐지.

그대가 쓸쓸한 등으로 돌아앉아

비석을 세우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대가 한 왕국의 역사처럼

자기 생애의 가운데 비석을 세우는

타인이라는 걸 믿지 않으려 했지.

 

 

6

이제 그대의 생애 가운데 세워진 비석들이

슬픈 음악 소리를 내는

달빛 환한 밤을 나는 지키고 있네.

그대의 슬픔이 세월을 멈추게 할 수 없듯이

아침이 오고

그대의 생애 가운데로 물줄기 흘러

물고기들이 떼 지어 오르거든

그대 생애의 강물을 거슬러 오르게나.

거기 우리 생애의 강물이 시작되는 산이 있어

모든 죽음을 삭이어 푸른 숲을 일구고 있으니

강물이 시작되는 곳

마지막 서로의 비석을 세우고

우리 생애의 비석들이 풍화되어 흙을 이루게 하세.

풍화되는 비석들이

풍경소리처럼 흩어지는 음악 소리를 내거든

지워질 수 없는 붉은 노을로 걸어두지.

풍화된 죽음들이 생명을 일구는

깊은 산의

마지막 밤을 나는 지키겠네.

 

 

 

아무래도 나는

김진경

 

이곳의 철없는 시인들이

자네를 만나서

북어를 안주 삼아

가난한 소주라도 한잔

크- 한다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자네의 출현은

재앙일세

어느 날 갑자기

자네가 나타난다면

나는 어쩌면 좋겠나

만약에 자네와 크- 한다면

상기 피고인은 북괴가 반국가 단체이고 반국가 단체의 지령을 받는 자와 회합하는 것은 반국가 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넉넉히 알고 있는 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국가 단체의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하여……

소주(진로 2홉들이) 3병을

나발 불었을 뿐 아니라

북어 갈비를 씹는

무엄한 죄를 범하게 된다네

그러니 친구여

자네가 나타나지 않기를

오직 바랄 뿐이네

아니, 실은

어느 날 갑자기 자네가 나타날

가능성이 절대 없다는 걸 전제로

나는 자네를

마구 그리워하는 시를

대량 제작하여

민족시인이 되려고

음모를 꾸몄다네

여보게 어쩌면

우리의 시는

증오의 쓰레기더미 위에

피어난 한 무더기 독초일

뿐인지도 모르겠네

무성한 증오와

무성한 감격만이

길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이 시대에.

 

 

 

아이들에게

김진경

 

너희들이 들고 오는 답안지의 ○×표 속에서

너희들이 한사코 따지는 1, 2점 속에서

나는 죽는다.

나는 죽었다고 간주하고 마음 편해진다.

 

아이들아, 미안하구나 이것은 나의 습관이다.

넘을 수 없는 비무장지대에서의 삼 년

견디는 법은 죽었다고 간주하고 마음 편해지는 것

여기 있는 것은 이미 내가 아니라고

마음 편해지는 것

 

제대를 한 뒤에도

넘을 수 없는 선을 만날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마음 편해지고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마음 편해지고, 철조망을 보았다.

 

넘을 수 없는 절망의 선을 무수히

어디에서나

아, 너의 시험지 위에도

여기에도 여기에도 우리의 살을 파고드는 날선 가시

너와 나 사이에도, 또 너와 나 사이에도

 

아이야, 미안하구나

너를 때린 것은 너를 때린 게 아니라

나의 비겁을 때린 것이다.

언제나 넘을 수 없는 철망 앞에서

날선 가시를 두려워하는

나의 비겁을 때린 것이다.

 

답안지의 ○×표보다도 악착 같은 1, 2점보다도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아무도 상처받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아무도 가슴에 철망을 박고 녹여 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이땅의 만남을 모르는 것이다.

 

 

 

양수리에서

김진경

 

1

우연히 만난 오래전의 아이가 멀리서 오래도록 내게 의지하고 있었노라 했습니다. 그 말이 너무 무거워 여기 와서 강물을 봅니다. 누가 감히 한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겠습니까. 기댈 곳이 없는 나는 가을 강물처럼 홀로 깊어 갈 뿐입니다. 홀로 깊어 가다 보면 흐르지 않는 듯 흐르는 저 강물처럼 마음 한구석에 연을 키울 수도 있겠지요

 

 

2

강을 따라 서 있는 버드나무가 바람에 온통 머리칼을 흩날립니다. 누군가 나를 잊지 않고 있다는 건 괴로운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잊지 않고 있다는 건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가을 강은 홀로 깊어 가고, 연잎이 마음 한구석을 덮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보는 물빛이 그대 깊어 가는 강물에 닿을 듯싶습니다.

 

 

 

어떤 그리움을 타고 너에게로 갈까

김진경

 

어떤 그리움을 타고 너에게로 가야 하는 걸까

덕유산으로 통하는 영동에 다다라서야

칠월 마른장마에 타는 어린 벼들이

시퍼렇게 날을 세운 채 가문 하늘을 징그러워하며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삶의 궁벽진 터널을 여러 번 지나고

터널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뭉클한 깃털을 펼친

구름 무더기가 시선을 훔쳐간다

줄담배를 피워대며 고뇌했던 지난밤을

꼬박 보내고 나서도 나는 네게 도달할 수 있는

그리움의 통로를 찾지 못했다

폐교가 예정된 낡은 분교 옆으로 한때 영화로웠을

호사스러운 기억들을 덮쳐 담고 개울이 멈춰 서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멸망 직전에 더 섬뜩하게

각인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영동역을 완전히 빠져나가서도 힐끗 스치기만 했던

생강밭이 나를 따라온다 혹,

뻣뻣이 하늘을 찌르고 서 있는

생강줄기 사이, 잎새가 부딪치는 순간

너를 향한 공간이동의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닐까

 

 

 

얼음

김진경

 

얼음들이 하얗게 밀린다

작은 고래 떼처럼 엎드려

어디서 태어나는지도 모르는데

한강의 추운 바람 속을 울고 있다.

 

밤이면 듣는다.

새파란 수심 위에서 갈라지는 투명한 얼음들의 소리

바람에 밀리며 겹치고 겹치어

아침마다 하얗게 반짝이는 등허리로

우리의 머리맡에 자욱히 일어선다.

 

빛이란 빛은 모두 토해내는

결백한 슬픔

소금처럼 단단하게 웅크리다가

녹아서 이름 없이 흐르는 강물이 된다.

새파란 수심 위에서

투명한 얼음들이 갈라진다.

 

 

 

연어의 길

김진경

 

어떤 종족은

물길은 산에서 아래쪽으로 나 있는 게 아니라

산 아래에서 산 위를 향해

나 있다고 생각했다.

연어가 매년 그 길을 따라 돌아오기 때문이다.

 

거대한 버드나무 흩날리는 앞에서

연어는 태어나

먼바다로 내려갔다가

어머니인 버드나무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세계는 연어와 함께

매년 버드나무 앞에서 새로 태어났고

그들은 그 세계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이제

아무도 더 이상

물길이 산 아래에서

산 위쪽으로 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더 이상

세계를 창조하지도

거기에 거주하지도 않는다.

 

지상에서 연어의 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염소

김진경

 

누렇게 시든 칡덤불을 거두는데

메헤헤헤 염소 우는 소리 들린다

요란하게 웃는 듯한 소리가

개울 건너 혼자 살다 죽은 할아버지가 기르던 놈이다.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는

마당까지 겨우 나와 햇볕을 쬐면서

요란하게 웃는 듯한 소리가 듣기 싫다고

늘 염소 욕을 중얼중얼 해대곤 했다.

그래도 염소는 주인을 알아보는지

햇볕이 잘 드는 시간쯤엔

으레 마당가에 와 풀을 뜯었다.

염소는 문득 할아버지 생각이 나는지

서리에 시든 배춧잎을 뜯다

개울 건너를 바라다본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저 염소에 기대어

그 천천한 걸음으로 하늘까지 갔을지 모르겠다.

먼 옛날이야기에 염소는

뱃속 하늘의 돌로 비와 바람을 부를 수 있어

바람 중엔 염소의 바람도 따로 있었다 하니

염소는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기대어 걷는 동안

비와 바람을 불러

앞길을 말끔히 치웠을 게다.

그때 염소 바람이 아직 조금은 남았는지

목방울이 딸랑딸랑 희미한 소리를 낸다.

 

 

 

외로움은 물새들이 깨어나는 새벽강과 같다

김진경

 

아우야,

외롭다는 너의 푸념과 그리운 금강산과

소줏병을 목탁 삼아 두드리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뒤로 하고 새벽 강에 선다.

천지 창조의 어느 아침처럼

혼돈은 하늘과 땅으로 갈라지고,

아직 하늘로 오르기를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안개 사

이로

산들은 멀리 가까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도 구름 속에

얼굴을 파묻고 혼돈의 잠에 취한 거대한 산들,

그 발치에서 대지는 안개 속에 가라앉아

새벽잠에서 막 깨어나는 여인처럼 완강한 생산의 욕

망을 빛내고,

강물은 태초의 사색처럼

검게 가라앉은 빛으로 푸르스름한 대기 속을 흘러간다.

 

아우야,

수많은 새벽에 강가에 서보아라.

강 건너 숲들이 처음인 것처럼 물안개 속에 불쑥불쑥 솟아오르고

갈대들이 후두둑 이슬을 떨어뜨리며

머리를 들어갈 길을 막는다.

갈대숲이 끝나는 물가에서 끼룩끼룩 물새가 운다.

오늘 새벽에 태어나는 첫 생명이겠지.

그리고 갈대들은 이 첫 탄생을 방해하지 않으려 나의 발길을 막았으리라.

백로 한 쌍이 아직 검게 가라앉은 강물 위를 날아간다.

태초의 사색 위에 생명 있는 것의 숨을 보태려는 듯.

강 가운데서 갈대며 작은 버드나무 우거진 섬이 솟아오르고

소란스레 깨어나는 물새들.

 

아우야,

새로이 태어나는 것들을 껴안는 혼돈의 가슴이 없다면

어찌 이 지상에 매일 같이 사랑이 시작될 수 있겠느냐.

해는 하늘로 오르는 안개를 헤쳐

파란 하늘을 언뜻언뜻 드러내고

여기저기 아침의 첫 햇살이 쏟아진다.

꼬리를 세운 다람쥐가 기쁜 듯이 풀밭 위를 달려가고

작은 관목숲에서 아침의 대기를 놀라게 하며 튀어나와 뒤를 쫓는 고양이.

강 건너 여기저기 깨어나는 집과 사람들.

나는 바지를 적시며 갈대를 헤치고 물가로 나간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새벽에 첫 생명을 태어나게 한 손길이

여인의 자궁처럼 검고 축축하다는 것을.

강물은 검은빛으로 고요한데

갈대들과 흙 위를 기는 것들의 열기로 강변은 따뜻하다.

 

아우야, 듣고 있느냐.

외로움은 물새들이 깨어나는 새벽 강과 같다.

수많은 새벽이 지나며 우리 가슴속에도 안개가 하늘과 땅을 가르고

강물이 흐르고 섬이 솟고

물새들이 소란스레 깨어난다.

강물은 제 속에 푸르고 흰 물고기들을 노닐게 하며 충만할 뿐

아직 사람이 지닌 사색의 무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 배를 흔든다.

지금은 신들이 자신의 외로움 속에서 작업하는 창조의 시간이다.

저 배는 창조의 시간과 빛들을 지나

마침내 인간의 숙명에 가 닿으리라, 그 몰락과 결실의 빛나는 계절에.

 

 

 

우금치의 노래

김진경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무엇이 생긴 것은

그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죽은 몸 위에 가시덤불로 피어

넘을 수 없는 무엇을 넘기 시작한 것은

 

옛적에는 굶주린 사내들이 들어와

소도둑이 되었다는 좁은 고갯길

흰 옷 입은 동학군들이 죽어 산을 이루던

이곳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을 치던 것은

이곳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죽은 몸 위에 뿌리를 내려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을 넘기 시작한 것은

 

아, 그때부터였는지 몰라라

우리가 노예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 그때부터였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 속에 빛나는 하늘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우금치여, 휴전선이여, 모든 철조망이여

우리들의 절망은 우리들의 희망

노예의 노래는 빛나는 하늘

진달래 뿌옇게 핀 좁은 고갯길

지금도 소리쳐 오는 함성은 우리의 것.

 

아직도 피가 뜨거운 사내들은

죽음처럼 새파랗게 날 선 고개를 넘는다.

우리들의 새벽 출근길에, 책 위에, 식탁 위에

문득문득 막아서는 우금치여, 휴전선이여, 모든 철조망이여

너를 넘는다. 우리들의 죽은 몸 위에 뿌리를 내려

넘을 수 없는 너를 넘는다.

 

 

 

은행나무

김진경

 

가을이 와서

노랗게 물들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벽장에 노란 삼베 수의를 모셔두고

가끔씩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수줍은 웃음처럼

그것이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쓸쓸함인지 흐뭇함인지 알 수 없지만

가을이 와서

노랗게 물들 수 있다는 건 찬란한 일입니다.

 

얼굴만 한번 보고

시집갈 날을 기다리는 새색시가

신랑의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려보며

새 삶을 익히듯

어머니는

옛 추억을 맞춤법 틀리는 글씨로 적어

삼베 수의 밑에 묻어두기도 하다가

죽음이 신랑처럼 그리워지는 듯도 하는 저녁

노란 삼베 수의를 펼쳐

신부의 예복처럼 몸에 대어보기도 합니다.

 

가을이 와서 노랗게 물든다는 건

물들지도 못하고 비명처럼 떨어져 구르다

찾아와 누운 나에게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느냐는 준엄한 꾸짖음입니다.

 

가을이 와도

사람들에겐 그리움이 없습니다.

그리움이 없는 사람들이

비명처럼 도시의 빈 거리를 서성이다

이 저녁에 경악하는 얼굴로 잠이 듭니다.

 

아무도 만나지 못한 계절이

창밖 어둠 속에서

좀처럼 잠들지 못한 채 홀로 서성이고

가을이 와서

노랗게 물들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찬란한 일입니다.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김진경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갈라진 사람을 만나게 한다는 것이다.

갈라진 나를, 갈라진 우리를, 갈라진 하늘을, 갈라진 땅을

네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이 땅이 그렇게 숨 쉬고 있으므로

이 하늘이 그렇게 숨 쉬고 있으므로

우리들이 그렇게 숨 쉬고 있으므로

이 작은 하늘의 한 자락을 나누어 숨 쉬고 있는 너는

이 작은 땅의 한 자락을 나누어 숨 쉬고 있는 너는 보게 될 것이다.

네 삶을 바꾸어 놓고 말없이 사라져 가는 한 사람.

그렇다, 아이야

80년의 어느 봄날 내가 그를 보았듯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 속에서

벌거숭이로 피는 목련꽃 속에서

아, 두려워 숨죽여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한

한 사람을 너는 보게 될 것이다.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고, 우리들 모두이기도 하고

그 누구도 아닌 한 사람,

이 땅에 산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한 사람을 우리 모두로 사는 것이다.

네가 그리는 모든 선으로 그를 그리는 것이다.

노동하며 땀 흘리는

분노하며 피 흘리는

한 사람의 죽음이 모두의 죽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도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를 죽이고도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일매일 뽑고 낫질하는 땅에도

작은 풀꽃이 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별가

김진경

 

1

이제까진 도련님

밝음 속에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줄 알았어요

아시나요 도련님

작은 사랑이 끝난 뒤에 열리는 더 큰 사랑을

이제 어둠 속에서도 잘 보여요

헤어지고 있는 길과 헤어지고 있는 바람과

작은 풀들의 아픈 사랑까지 모두 보여요

사랑에 취한 이들은 알 수 없어요

작은 사랑이 끝난 뒤에

헤어지는 길과 헤어지는 바람과

헤어지는 풀들의 조용한 반짝임을

더 큰 만남을 예감하는 저 깊은 어둠의 소리를

 

 

 

이팝나무꽃 피었다

김진경

 

1

촛불 연기처럼 꺼져가던 어머니

"바-압?"

마지막 눈길을 주며

또 밥 차려주러

부스럭부스럭 윗몸을 일으키시다

 

마지막 밥 한 그릇

끝내 못 차려주고 떠나는 게

서운한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신다.

 

 

2

그 눈물

툭 떨어져 뿌리에 닿았는지

이팝나무 한 그루

먼 곳에서 몸 일으킨다.

 

먼 세상에서 이켠으로

가까스로 가지 뻗어

경계를 찢는지

 

밥알같이 하얀 꽃 가득 피었다.

 

 

 

이화중선(李花仲仙)

김진경

 

소리를 못 하는 날은

화투를 꺼내 재수를 떼고

딴전 피듯 먼 산 향해 담배를 피우지만

그래도 수은 먹은 듯

명치에 고이는 뜨거움은, 한 움큼 객혈로나 토해낼까

하릴없이 차려입은 진주 치마폭

진달래꽃 가득히 피워나 볼까

선무당 시나윗가락으로 살아온 년

나랏님이 누구님인지 알 수 없었지만

소리도 빼앗겨 가슴엔 듯 눈엔 듯

엉기는 핏덩이

누워도 일어서도 춤을 추어도

으쩌꺼나 으쩌꺼나 으찌할거나

흐르지 않는 폭포는 독이 되어 가슴을 뚫고

선잠 이룬 밤에는 희디흰 손에 이마를 스치우고

소스라쳐 일어나 흐르는 식은땀, 가야 하리

오. 가야 하리

몸은 다 버리고 새파랗게 날 선 소리로만 가야 하리

 

골골이 잠긴 어둠 속을 접동새 울음으로나 찾아가야 하리

어릴 적 바다 깊이로부터 달빛 속으로

헤엄쳐 오르는 갈치의 눈부신 퍼득임처럼

저 어둠 속을 찾아가야 하리.

 

 

 

저 버드나무들의 섬에 가고 싶다

김진경

 

더 갈 길이 없는데

한낮의 기차가 다리를 건넜다.

 

다리 아래쪽 자전거 도로에선

중년의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너무 무거운 일요일의 휴식을 굴리며 오고

시궁창 냄새 풍기는 강물엔

낚시를 드리운 노인네 하나

고기는 오지 않는다.

 

우리가 이룬 것이 다 폐허일까?

노인네는 얼굴을 찌푸리며

자전거 도로 쪽을 돌아본다.

땀 흘리는 중년 사내의 뒤쪽에서

어디 다른 공간에서 갑자기 나타난 듯

한 떼의 아이들이 가볍게 자전거를 타고 온다.

 

중년 사내를 추월해서 물가에 멈춘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물수제비를 뜨기도 하고

모래로 성을 쌓기도 하고

시궁창 냄새 나는 물을 퍼다 붓기도 하고

 

한낮의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리를 건넌다.

더 갈 길이 없는데

어디 다른 공간으로 진입하려는 모양이다.

강 가운데에는 섬 하나 떠 있다.

섬에는 갈대며 버드나무들이

문득 다른 공간을 향해 푸르게 자라고 있다.

 

 

 

족제비

김진경

 

할머니 시집오실 때

고개 넘어 따라왔다는

그래서 업이 달아난

친정집은 망하고

업이 들어온

시댁은 흥했다는

족제비는 겨우내

얼어붙은 계곡물 위

어지러운 발자국을 남기며

겨울잠 자는

개구리며 가재를 잡아먹고 살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골짜기

봄이 오는지

무너져 사라진 집터

들어선 낙엽송 사이로

조팝나무꽃 하얗게 피고

옛날의 산복숭아나무 붉게 물들고

쪽제비 혼자 조팝나무 가지 사이에서 기웃거린다.

손바닥만큼 남은 눈 위에

잃어버린 상형문자처럼 작은 발자국이 파랗다.

 

 

 

지구의 시간

김진경

 

날이 밝아 몇 신가 보려는데 시계가 죽었다.

해가 떴으니 시간이 꽤 되었으려니

배추밭에 나가본다.

며칠 전부터 칡을 먹으러 내려온 산토끼들이

어린 호박잎을 밟고 밭에 들어가

애기배추를 갉아 먹는다.

드문드문 갉아 먹힌 애기배추의 그루터기가

아이들 얼굴에 난 생채기 같아 속이 상한다.

올가미를 놓아버릴까?

어린 호박잎들이 밟혀 찢겨진 자리에 서서

배추밭을 건너다본다.

이고시 칡밭에서 배추밭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모양이다.

아니, 앞발을 들고 일어서서

괜찮을까 코를 벌름거려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망을 보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마리가 그러는지 어린 호박 줄기가 온통 뭉그러져 있다

 

해가 꽤 높이 솟아 가게에

토끼 퇴치법을 물어보러 가기로 한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태운 통학버스가 길가에 서 있다.

벌써 점심때가 되었나?

학교에 다녀오는 길이냐고 물었더니

가겟집 아이가 이제 학교에 가는 길이라 한다.

나는 아침밥을 먹는 가겟집 식구들 곁에 앉아

다른 별의 시간으로부터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처럼

하릴없이 아침 뉴스를 본다.

그곳에선 전쟁을 외치는 어느 나라 대통령의 연설과

어둠을 찢는 폭격이 시작되고 있다.

 

애기배추를 갉는 토끼와

갉아 먹힌 애기배추 그루터기에 속이 상하는 나와 통학버스와

이 아침밥의 시간들과

그 위에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시간들과......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김진경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벗이여, 형제여, 사랑하는 사람이여 어서 오게나

지금은 우리가 고통으로 서로를 아는 때

지금은 우리가 상처로 서로를 확인하는 때

지금은 우리가

가슴에 박힌 가시철조망으로 서로를 부르고

흐르는 피로 끈끈하게 하나가 되는 때

형제여, 그러니 어서 오게나

이제 밤은 너무도 깊어

우리 살아 있음의 표지조차 어둠 깊이 사라져가고

이제 고통만이 살아 있음의 유일한 척도이어라

오게나

이 밤엔 고통도 성스러워라

그것이 이 어둠을 건너

우리를 부활하게 하리니

첫 새벽에 그것이

우리의 빛나는 보석임을 알게 되리니

사랑하는 사람이여

형제여

어서 오게나

그대 움푹 패인 수갑 자국 그대로

그대 고통에 패인 주름살 그대로

우리 어떠한 것에도 고개 숙이지 않고

오직 서로에게 고개 숙여 서로의 상처에 입맞추느니

이 밤엔 고통만이 성스러워라

어서 오게나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그것이 이 어둠을 건너

우리를 부활하게 하리니

 

 

 

지금 이 밤은

김진경

 

지금 이 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신열에 들떠 뒤척이는 소년수의 희미한 신음이 어둠에 뒤섞이고

해남이라든가 형벌처럼 가난한 고향을 떠나오던 날의 기억이

신열 속에 죽음처럼 떠오르는 이 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떠돌던 서울의 낯선 골목과 골목들

주린 배와 충혈된 눈을 찌르는 기나긴 노동의 기억에

가위눌려 소스라치는 사람아

긴 한숨 속에 떠오르는 불꽃, 이 불꽃의 밤은

 

이 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머나먼 서울 길 잠깐 본 아들의 얼굴로는

차마 돌아설 수 없어 떠도는 타관의 밤

신기루처럼 찬란하게 솟은 빌딩 밑 가로등 아래

허리 굽은 어머니, 어머니의 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둠의 바닥 깊이 거대한 물고기처럼 가라앉은 서대문의 추운 이 밤은.

까마득한 칠흑의 높이에서는 헛된 신기루의 무리

화려한 매음과 음모가 들끓는 허공

밑, 어둠의 바닥 찢기고 버려진 확실한 고통과 사랑의 골고다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인가 그곳은

그 새벽어둠이 우리를 토해낼 언덕

뜨거운 불꽃이 우리를 단련하는 그때는 언제인가

우리의 절망과 버려짐, 상처와 고통들이 단단한 불꽃으로 타오를 그 언덕은 어디인가

깊은 고통의 성스러운 밤이여

 

 

 

지상에서 내리는 눈

김진경

 

1

나무들은 집시처럼 마음에 드는 주소를 정하고

덕수궁 돌담과 하늘 사이 푸른 머리칼을 날린다.

저 나무들처럼 예의 바른 허무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이 되는 것을 기피한다.

나를 지상에 못 박고 있는 슬픈 육체여,

지상에 발붙일 최소한의 주소만 있다면

파란 하늘가에 머리칼을 날리는 나무들처럼

아무 목적 없는 무상의 것에 취하다 떠나리라

 

시청 앞 지하도 입구에 서서

나는 문득 젊은 날의 시 구절을 떠올린다

눈이 많이 내린다.

지하도 입구에서 조선호텔까지 조선호텔 너머 인왕산까지

폭설의 주먹만 한 눈이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 쏟아져

세상을 덮고 시야를 뿌옇게 가린다.

이런 날 나무들은 자기가 못 박힌 지상을 응시하며 묵상에 잠겨 있다.

하늘이 무너져 지상에 내렸기 때문일까.

 

 

2

언제부턴가 이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은.

눈사람처럼 머리에 하얗게 눈을 얹은 사람들이

머리와 어깨에 얹힌 눈을 털며 호텔 커피숍을 들어선다.

"돌담이었지 아마?"

노 교수는 이제 이방인이 된 나를 돌아보며

희미한 기억의 연결 끈을 찾는다.

80년 초여름이었는데

왜 그 날 폭설이 내렸던 것처럼 기억되는 걸까.

늦은 저녁 와이셔츠 속에서 유인물을 꺼내

공중전화통에 얹으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 덥석 손을 잡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청계천을 헤매며 구했던 등가기와

눈물을 흘리며 가리방을 긁던 사람들의 얼굴이 빠르게 스치고

이게 끝인가? 눈 속으로 주먹만한 폭설의 눈이 내렸다.

"죽으려고 그러냐?"

노 교수의 걱정스러운 눈, 돌담이었던가? 술을 마셨던가?

 

 

3

이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70년대 말의 어느 겨울 광주 황금동

돈도 없이 우리는 술을 마셨다.

누가 술값 대신 인질로 잡힐 것인가를 놓고 화투를 쳤다.

절망이 우리들 사이에 스멀스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주먹만 한 눈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술 따르기에도 노래에도 지친 작부는

아랫도리를 허술하게 드러낸 채 졸고 있었다.

술을 가운데 둔 인질극?

이것도 절망의 한 방식일까?

나는 오줌을 털어 내면서 생각했다.

주먹만 한 눈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라디오에서 폭설에 장성 갈재가 막혔다고

갈재는 그만두고 황금동의 골목길도 막혀 있었다.

사람들이 무릎까지 빠지며 골목을 지나갔다.

고립된다는 건 절망을 참 아름답게 만드는군!

나는 생각했다. 화투는 끝나 있었다.

먹구름에 덮인 황금동의 새벽은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밤처럼 어둡고

흰 눈에 반사되는 불빛은 아름다웠다.

무릎까지 빠지며 걷다가 벌거벗은 나무 앞에 우리는 멈추었다.

나무는 하늘이 온통 쏟아져 덮인 지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묵상에 잠겨 있었다.

고립된다는 건 절망을 참 아름답게 만드는군!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지상으로의 귀의처럼 떨어져 내렸다.

눈물이 한두 방울 우리가 오래도록 머리에 이고 있었던 눈처럼

지상에 쌓인 눈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언젠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눈이 내릴 거야.

지상의 모든 것들을 눈에 덮일 거야.

모든 길은 끊어지고

거기서 너는 네가 못 박힌 지상의

한 생을 바라보아야 할거야."

 

 

4

80년 초여름

누군가 구석의 등나무 아래에서 속삭였다

"장성 갈재가 막혔어!."

드디어 큰 눈이 내렸구나! 나는 생각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주먹만 한 폭설의 눈이 매서운 바람에 쓸려 가는 소리가

전화통의 먼 저편에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눈은 참 오래도록 내렸다.

예감처럼 느껴졌던 큰 눈은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눈은 장성 갈재를 넘어 내가 서 있는 교실의 침묵 속으로도

하염없이 쏟아져 내려 책상과 아이들과 칠판이 눈 속에 파묻혔다.

눈에 파묻혀 우리는 등사기를 밀었다.

"큰 눈이 내리고 있어!

지상의 모든 것은 눈에 파묻히고

모든 길은 끊어질 거야.

거기서 너는 지상에 못 박힌

너의 한 생을 바라보아야 해!"

 

 

5

눈은 끝없이 내리고 있다.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신물로로 오는 사이에

머리칼 위에 눈이 수북히 쌓인다.

겨울 까마귀 떼가 저편 하늘의 끝에서 이쪽 하늘의 끝까지

까맣게 떼지어 날아가고 있다.

 

망월동 묘지에서 담양 벌판의 끝을 향해 우리는 걸었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벌판을 그 여자는 줄곧 따라 왔다.

돌아보면 그 여자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까마귀 떼가 날아올라 벌판의 끝

집들이 어두워 가는 하늘로 피워 올리는 저녁연기를 향해 날아간다.

"아이를 낳고 싶어요."

"그래, 이제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자유롭게 너를 이야기하겠지.

기다려.

우리는 아니야.

우리는 예의 바른 허무주의자일 뿐이지.

아니면 눈이 내리는 동안

자기가 못 박힌 지상을 응시하며 묵상하는 나무일뿐인지도 몰라."

까마귀 떼는 우리 앞에 내려앉았다.

까만빛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걸까.

흰 눈은 그 여자가 벗어놓은 하얀 삼베의 옷이었다.

"아이를 낳고 싶어요."

우리는 울었다.

"우리는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생의 한 변방일 뿐이야.

너는 생의 한가운데로 가야만 해.

우리는 아니야."

 

 

6

"돌담에 갈까? 아직도 있는지 몰라?"

노 교수의 권유를 뿌리치고 눈길을 걸었다.

서울은 눈에 파묻혀 흰 벌판이 되고

까마귀 떼가 벌판의 끝을 향해 날아간다.

그 여자는 한사코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

까마귀가 내가 걷는 길 앞에 내려앉는다.

까만빛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걸까?

그 여자가 벗은 흰 수의가 온 세상을 아름답게 덮는다.

"아이를 낳고 싶어요

버려진 생의 한 변방에서.

나를 판자들은 모두 생의 한가운데로 떠났어요.

무엇을 더 기다려야 하나요.

지상에 못 박힐 한 아이를 낳고 싶어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지상에 못 박히지 않나요?"

나는 내가 못 박힌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내 머리 위에 쌓인 한 생의 눈이

지상으로의 영원한 귀의처럼 떨어져 내렸다.

 

 

 

직소폭포

김진경

 

산다는 게

무심히 걷다가도

문득

시퍼런 낮달을

만나기도 하는 것인가

 

잔잔히 흐르던

그대 마음이

문득

흐르다 멈추어

허공에 하얗게 걸려 있구나

 

 

 

질문

김진경

 

이제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영어를 모르는 게 까막눈이라고

우리나라도 많이 발전한 셈이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

선생님이나 우리나 모두 까막눈이 아닌가요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2강이니 3강이니 4강이 모여

우리나라가 통일을 해야 된다는 둥

서로 머리를 맞대고 수군댄다는데

선생님이나 우리나 까맣게 모르잖아요

 

세상을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라고

타이르시는 선생님

우리는 모두 색안경을 낀 것이 아닌가요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일본이 어떻다는 둥 얘기하는데

중앙청에 펄럭이는 일장기의 붉은 태양

그것이 푸르른 평화의 빛깔이라고

길거리에 서서 일장기를 흔들었잖아요

 

이것은 사랑의 매라고

종아리를 때리시는 선생님

우리들은 얼마나 더 사랑을 받아야 되나요

20만 동학군이 죽었다는 우금치

한 마을이 몰살당했다는 제암리

어린애까지 학살당했다는 거창군

아, 이루 다 헬 수 없는 마을과 도시

온 땅이 푸른 멍이 들었는데

우리는 얼마나 더 사랑을 받아야 되나요

남의 자유와 남의 평등을 위해

얼마나 더 맞아야 하나요

 

대답해 주세요 선생님

침묵만이 오래오래 눈처럼 쌓여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는데

쓸데없는 귀는 잘라 버릴까요

쓸데없는 눈은 덮어 버릴까요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만이 오래오래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는데

위험한 입은 막아 버릴까요

시끄러운 세상이 너무나 조용해요

대답해 주세요 선생님

 

 

 

집이 비어 있는 동안

김진경

 

집이 비어 있는 동안

거기에 아무도 없었다거나

거기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문을 열면 어느 틈새로 들어왔는지

추운 겨울을 나보려는 무당벌레들이

바삐 천정을 기어가고

방바닥에 던져놓은 수건 밑에서

단잠에 빠져 있던 노린재들은

놀라 엎어져 가는 다리를 버둥댄다.

여름내 배춧잎을 갉아 먹어 속을 썩이던 놈들이다.

무당벌레와 노린재들은 내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게

대단히 불만인 모양인지

금방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그러고 보면 나를 불편해하는 것이

무당벌레와 노린재만은 아닌 것 같다.

밥그릇은 밥을 담고 있는 것보다

무당벌레의 잠자리가 되어 더 아늑해졌을지도 모르고

바람에 떨어진 배들은 썩어서 거름이 되는 것보다

다람쥐들이 자기 굴로 데려가는 것을 더 행복해했을지도 모르고

천덕꾸러기였던 마당의 잡초들은

박새들이 그 씨들을 쪼아 먹으며 살이 오르는 것에 뿌듯했을지도 모르고

봉지가 뜯겨 여기저기 흩어진 쓰레기들은

무슨 보물이라도 숨겨놓은 듯 산고양이가 들여다보는 것에

흐뭇해했을지도 모른다.

이 집에는 서로가 서로를 정해진 틀에 집어넣지 않으면서도

잘 어울려 살 줄 아는

작고 가벼운 영혼들이 많이도 있다.

그 작고 가벼운 영혼들에게는

모든 걸 함부로 규정하려 드는 내가

너무 무겁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랜만에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무언가 긴장하며 굳은 자세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담임 선생님이 들어올 때 재빠르게 자기 얼굴을 숨기고

전혀 다른 얼굴로 앉아 있는 개구쟁이들처럼

그 작고 가벼운 영혼들이…… 

 

 

 

철새 도래지에서

김진경

 

새가 날 수 있다는 것은

날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구만리 허공이 있기 때문이다.

구만리 허공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허공을 불어 가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을 가득 채우는 저 새잎의 푸르름이 있기 때문이다.

새잎의 푸르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새잎을 돋게 하는 흐린 강물이 있기 때문이다.

 

오, 먼 세상을 돌아와

여기 흐린 얼굴로 누운 강물아,

네 등허리엔 새의 날개가 꿈처럼 희미하게 새겨져 있구나.

그 날개가 새잎을 돋게도 하지만

그 날개를 몸 속에 품고 산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첫눈

김진경

 

길바닥에까지 전을 벌여놓은

마포 돼지껍데기집

빨갛게 달아오른 연탄 화덕을 끼고 앉아

눈을 맞는다

어허 눈이 오네

머리칼 위에 희끗희끗 눈을 얹은 윤가가 큰 눈을 뜬다

대장간에 말굽 갈아 끼러 왔다가

눈을 만난 짐말들처럼

술청 안의 사내들이 술렁댄다

푸르륵 푸르륵 김을 뿜어대기도 하고

갈기 위에 얹힌 눈을 털어내기도 하고

나는 화덕에 쇠를 달구는 대장장이처럼

묵묵히 화덕에 고기를 얹어 굽는다

길가의 플라타너스가 쇠의 녹슨 혓바닥처럼

남아있던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풀무질을 세게 해서 저것들을 달구어야겠다

말랑말랑해진 혓바닥을 두드려 쇠발굽을 만들어야겠다

저 갈기 푸른 말들에 새 발굽을 달아주어야겠다

오늘 밤 눈 쌓인 재를 넘어 다음 장으로 가기도 하고

딸랑딸랑 말방울을 울리며 사랑하는 이의 집 앞에 멈춰 서기도 하리라

붉게 단 쇠말굽을 물에 담금질할 때처럼

연탄 화덕에서 푸르게 연기가 솟는다

 

 

 

첫사랑

김진경

 

강물은 부풀어 있다, 밤의 어두움 속에.

강변의 불빛을 검게 반사하며

가득 차오른 강물은

강의 양쪽에 가득히 잠든 불빛을 위협한다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손길처럼.

그러나 어쨌단 말이냐.

내 가슴엔 불이 타오르고

불은 속삭인다

거대하게 부푼 죽음의 강물은

불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일 뿐이라고.

 

교각의 뒤로 검고 흰 물의 소용돌이가 길게 끌리고

사납게 일어나는 물안개가 가로등을 감싸 흐르며

외롭고 우울했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텅 빈 다리 위를 앰뷸런스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이제 사람과 사람을 잇는

모든 지상의 다리들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어쨌단 말이냐.

불빛에 반짝이는 물안개의 입자들마다

첫 키스의 추억이 더욱 또렷이 빛나고

물안개는 그대와 나의 가슴을 잇는 심장의 고동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불빛으로 번져간다.

 

사랑하는 이여,

큰물 진 강가에 나와 서라.

우리가 이 부풀은 망각의 강을 건너서도

그 많은 기억들을 잊지 않으리라 한다면,

죽음 뒤엔 아무것도 없노라고

어리석다고 사람들은 웃겠지.

그러나 어쨌단 말이냐.

나는 어리석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통의 기억이 길듯이 사랑의 기억도 길고

죽음은 늘 삶에

위기는 늘 사랑에 기름이 되어

불꽃은 꺼지지 않고 타오른다.

 

 

 

치사량

김진경

 

독극물만이 독은 아니야

독극물은 치사량이 작은 독일 뿐이지

예컨대 밥도 많이 먹으면 죽지

치사량이 큰 독인 셈이야

그가 설명하는 동안

나는 소유의 치사량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그것은 빈곤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이라고

 

 

 

칼춤

김진경

 

떠도는 풀들이 떠도는 풀을 만나고

떠도는 칼날이 떠도는 칼날을 만나고

네가 나의 가슴에 녹슬지 않는 칼날이 되고

내가 너의 가슴에 녹슬지 않는 칼날이 되고

저미는 살은 살대로 이승의 강가에 뿌리고

깎이는 뼈는 뼈대로 이승의 강가에 뿌리고

새파랗게 날 선 마음만 칼날이 되어 저승으로 돌아갈 제

아기네야 아기네야 무당 아기네야

춤을 추지 쟁쟁쟁 칼춤을 추지

풀잎 속엔 영롱한 이슬의 사랑

핏방울처럼 칼날에 져서 달이 돋는다

아기네야 아기네야 무당 아기네야

저승의 길가엔 풀잎마다 피에 젖은 달이 돋지

나를 불러다오 쟁쟁쟁 칼춤을 추어

갈라지는 달빛으로만 찾아가리

세상엔 버릴 수 없이 아픈 사랑

가득히 고여 반짝이는데

달 지는 풀잎마다 찾아가리

새파랗게 갈라지는 달빛으로만 찾아가리.

 

 

 

코스모스

김진경

 

코스모스 속엔

유랑곡마단의 천막과

나팔 소리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까맣게 높은 천장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는

곡마단의 소녀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얀 꽃송이

팽그르르 맴을 돌며 떨어지는

물맑은 우물이 있다

검은 물빛을 보며

나도 나팔 소리와 깃발 따라가는

떠돌이이고 싶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얗게 소름 마르는 길이 있다

 

 

 

키 작은 나무

김진경

 

시골 간이역

연착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철길 건너 들판이라도 볼까 해서

발돋움을 하는데

가지런히 잘라 놓은 전나무 울타리

너무 높아

잘 보이지 않는다

무슨 자갈밭이었던가

마침 울타리의 한 구석 잘 자라지 못한 전나무들이 있어

움푹 들어간 사이로 들판을 보다

들판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고

엷게 낀 아침 안개 속에

마을의 집들이 흐릿하다

참 사는 게 별 게 아니어서

이 작은 풍경들로 가득해지기도 하는 것을

나는 혹시 혼자 그득해지고자

키 큰 전나무 울타리처럼

남의 시선이나 가리고 살았던 건 아닌지

때로는 키 작은 나무들의 한 생애가

휠씬 커 보일 때가 있다.

 

 

 

파랑새

김진경

 

반 평짜리 독방

붉은 포승에 묶여 누우면

손목을 조이는 냉기

후- 수갑 위에 입김을 불면

하얀 입김의 끝에서 날아오르는, 날아오르는

 

아, 파랑새

파랑새, 벽 위를 푸득이며

부딪치다 파랗게 타올라 어둠을 사르는

거기 지울 수 없는 글자로

누군가, 아 손목을 파고드는

수갑의 고통으로 새겨 놓은

우리들의 노래여

 

뜨거운 남녘땅

가시덤불 위에 타오르다

서대문 구치소 붉은 벽 위에 칼바람으로 부서지다

법원 뒤뜰 반 평짜리 감방 벽에

푸득이며 타오르는 너를 새긴다

우리들의 입김 위에

피 흐르는 날개로 살아 있는 파랑새

우리들의 새벽이여

 

 

 

파랑새는 있다

김진경

 

붉은 벽돌의 옥사

내 방 창문의 한 귀퉁이는 늘 깨어져 있었다.

어느 겨울날 눈을 떠보면

머리맡에 흰 눈이 소복히 쌓여

손을 대면 온몸이 다 하얗게

새가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제는 구치소도 이사 가고

세상의 밖으로 물러난 노인네와 아이들

그리고 비둘기들 한낮을 소일하는 독립공원.

 

나도 모처럼 세상의 밖으로 나와

옛날의 내 방 창문 앞에 서 보니

깨어져 있던 창문의 모서리가

여전히 깨어져 있다.

아, 그랬었군.

눈은 여전히 내려

머리맡에 소복히 쌓이고 있었군.

 

여전히 손을 대면 온몸이 다 하얗게

새가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았군.

하얗게 서리 앉은 벼들은

세상에도, 세상의 밖에도, 세상의 밖의 밖에도

내 몸 밖에도, 내 몸 안에도, 내 몸 안의 안에도 있었군.

아, 여전히 서리낀 벽에 하얗게 입김으로 그리는

파랑새는 있었군.

 

 

 

편지

김진경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이제까지 쓰기는 많이 썼지만

봉투에 넣어 부치지는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 저녁을 못 먹고 잠드는 밤

어머니는 몇천 장 종이 뭉치를 이고 오셨습니다.

한 장 한 장 일일이 풀칠을 하고

접어 붙이고 우리들이 지쳐서 잠든 뒤에도

어머니는 밤새워 편지 봉투를 붙이셨습니다.

새벽에 만든 봉투를 이고 나가시고

한 됫박쌀을 사다 밥을 지었습니다.

밤을 새운 긴 노동 뒤에

상에 오른 한 그릇 밥을 보셨습니까.

밥알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보셨습니까.

세상은 못 견디게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나날의 생활이 이렇게 사랑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세상은 너무도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배움이 부끄러웠습니다.

손가락이 다 해지도록 풀칠을 하는 어머니 곁에서

읽어 가는 교과서의 페이지들이 부끄러웠습니다.

아, 어머니는 늘 나의 한계였습니다.

나의 말이 사랑이 되고 노동이 되어

한 장의 봉투에 배인 어머니의 눈물을 넘어설 수 없다면

나는 영원히 아무에게도 나의 말을 건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읍니다. 어머니는 늘 나의 결벽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노동을 넘어서지 못하는

나의 말들은 늘 나에겐 채찍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편지를 부칠까 말까 망설이며

몇 걸음 걷다가 깨달음처럼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너의 말을 너의 것으로 가두는 한

영원히 사랑과 노동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내리는 눈발은 서로 엉기며 떨어져 한세상을 덮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부칩니다.

이것은 사랑과 노동이 더이상 버림받지 않는

새날을 향한 나의 노래입니다.

내가 나에게 내민 최초의 악수입니다.

아내여, 창밖엔 눈이 내리고

이 밤은 당신이 처음으로

서러운 이 땅의 어머니가 되는 밤입니다.

 

 

 

폭포

김진경

 

내 살 속 수억분의 일 세포 하나까지

땅이 잡아당기고 있는 힘에

묶여있다는 게 못 견디겠다.

 

수억분의 일의

또 그 수억분의 일의 간격으로

촘촘히 얽어매고 있는 그물이 보인다.

 

그물의 저 깊이

줄을 당기고 있는 다족류의 발이 보인다

저 줄에 끌려

흙더미처럼

뭉그러지는 게 싫다.

 

차라리 맹렬하게

쏟아져 내리고 싶다.

맹렬하게 쏟아져 내려

일어서고 싶다.

 

몸을 벗어 던진 길들이

절벽을 거슬러 오르고

이윽고 절정에서 웅웅거리며

둘레도 깊이도 없는 허공을

하얗게 솟아오른다.

 

 

 

풀잎

김진경

 

풀잎 속엔 찰랑찰랑 강물 소리 들린다.

얼음 밑을 시리게 흘러가는 강물

이상하다. 쨍쨍한 햇볕 속에서도

풀잎 속엔 흰 눈을 밟고 오는 발자국 소리

엄니야, 네가 돌아오는 벌판의 어둠이 보인다.

돌아보면 세상은 언제나 흰 눈으로 등 뒤에 멈추어 있고

빨갛게 젖은 귀가 비인 바람 소릴 듣고 있을 뿐

세상 어디에 언 손을 녹일 한 뼘 지붕이라도 있었느냐.

 

엄니야, 풀잎 속엔 찰랑찰랑 강물 소리 들린다.

힘없는 글줄에 매달려

농약 공장 하루 일

물집 잡힌 네 손보다 못 한 것을 시라고 부끄러워질 때

흰 눈을 밟고 오는 발자국 소리

 

이상하다. 쨍쨍한 햇볕 속에서도

시린 강물 소리 들리고

매운바람에 쏠리는 따가운 불티

시리고 뜨거운 한 점 사랑.

무수히 쨍쨍한 햇볕 속을 흔들려 온다

 

 

 

풍뎅이

김진경

 

풍뎅이 한 마리가 유리창에 늘어 붙어 날고 있다.

보이지 않는 유리 벽,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안타까이 다리를 버둥거린다. 그렇다.

우리들의 만남은 늘 벽이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모르는 선생과

선생의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이 만나는 교실.

 

유리창에 늘어붙어 허우적거리는 풍뎅이처럼

우리들의 말은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안타깝게 더듬거리고

늘 그랬다. 추락해서 날개가 부러진 풍뎅이가 눈에 띄듯이

이미 피투성이가 된 마음으로 내 앞에 올 때

나는 비로소 너희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시험지를 훔쳤다는 둥

답안지 점수를 몰래 고쳤다는 둥

무거운 죄목들에 눌리운 날개를 늘어뜨릴 때

우리는 서로의 상처에 몇 마디 안 잊히는 말들을 새기고

헤어졌다. 너는 학교를 그만두고

나는 다시 지루한 일상에 빠져들고

 

그러나 늘 놀란 듯이 일어나

어둠 속에 떨어져 퍼득이는 우리들의 날개를 보고

결국엔 우리 모두가 너와 같았다.

살아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유리 벽, 닿을 수 없는 거리

버둥거리다가 땅에 떨어져 날개가 부러지고

모가지가 비틀린 채 빙빙 돌아가는……

그러나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날개는 유리 벽 위를 날아오르고

 

 

 

한 마리 짐승이 있어

김진경

 

가을볕이다

가슴속

한 마리 하얀 짐승이 있어

고개를 내밀고

막막한 가을 햇볕 속을 바라본다

 

 

 

황금 뿔

김진경

 

피와 살이 다 고갈될 때까지

한 그리움을 밀고 갈 수 있다면

그 마지막 더운 숨 흩어지는 끝에서

마침내 저런 빛깔일 수 있을까.

 

수만 년 대륙을 달려와

지금 막 그 마지막 더운 숨 몰아쉬는

먼 고대 동물의 황금 뿔처럼

은행나무 한 그루 물들어 있다.

 

 

 

황금 뿔은 더운 숨을 뿜으며

김진경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며 황금 뿔 같다는 생각을 한 지 두 해쯤 지났다. 그런데 어떤 동물의 뿔이지? 하는 대목에서 막혀 시로 옮기지 못했다. 이제야 신화의 공간에나 살았음 직한 동물이 까마득한 시대를 가로질러 더운 숨을 뿜으며 달려와 여기 마지막 더운 숨 뿜어내고 있다. 그 황금의 뿔이 곧 우리의 가슴 복판을 꿰뚫으리라. 그리하여 천지에 다시 가을이다.

 

 

 

횟감은 신선도가 값이다

김진경

 

여수에서 한밤중에

서울로 떠나는 자연산 도다리 수송차

물탱크에

상인들은 작은 상어를 집어넣는다.

 

도다리들은 상어 때문에 긴장하여

흐물흐물 늘어질 새가 없다.

새벽 노량진 수산시장에 나가보라.

도다리는 바다에서 건져 올릴 때처럼

펄펄 뛰고 있다.

 

북한 핵 문제로 전쟁 가능성이 있다고

공습경보 싸이렌이 울고

조용해진 거리의 건물 입구마다

우리는 적당한 공포로 숨죽였다

자연산 도다리처럼.

 

횟감은 신선도가 값이다.

 

 

 

E. T

김진경

 

어릴 때 나는 검은 타이야표 통고무신을 신은 채

까맣게 그을린 배가 툭 튀어 나와 있었고,

동네 논에 불시착한 헬리콥터에서

쑤알라거리면서 내리는 미군은

사랑이니 평화니 말하기에는 우주인처럼 생소해서

내 친구의 아버지는 망가진 벼값을 받을 수 없었다.

군에서 휴가 나왔을 때에 빌리 그레함이 왔고

여의도엔 300만 인가가 모였고, 어머니도 그 중에 하나였고

비가 오려고 했으므로 우산을 들고 어머니를 찾으러 갔고

300만은 기도하고 있었다.

사할린, 만주 등등에 있는 동포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때 가까이 서울에 있는 동포 중에는

밀린 임금을 받으려 단식하다 떨어져 죽기도 했으므로

나는 사람들이 갑자기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기 시작한 데 놀랐고

빌리 그레함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헬리콥터에 올라 여의도를 한 바퀴 돌았고,

사람들은 무슨 신음 소리를 냈으므로

나는 그가 대단한 우주인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빌리 그레함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어릴 때의 나처럼 배를 툭 내밀고

눈에서, 심장에서, 손끝에서 번갈아 불빛을 반짝이며

광화문에서, 종로에서, 영등포에서

사랑과 평화의 대군단을 이루었다.

더욱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라.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평화를 우주인에게

그때 서울에서는 모처럼의 봄이 지나갔고

사람들은 고개를 움츠리며 코트 깃을 세웠고

가까이 있는 것들은 무관심 속에 죽어가고 있었다.

 

 

 

1995, 봄, 인물화를 위한 메모

김진경

 

1

누이는 상한 허리로 누워서도 머리를 만지고 얼굴을 닦아낸다. 순등에 작은 검버섯처럼 앉은 반점들, 가만히 들여다보면 파리처럼 붕붕거리며 날아오른다. 병실이 금방 냄새에 찌들 듯이 사람의 삶에도 파리떼처럼 날아와 늘어 붙고 떨어지지 않는 얼룩이 있다. 누이는 파리떼 얼룩을 떼어내려는 듯 집요하게 손을 놀린다.

인간의 처녀성이란 무엇일까. 파리떼 얼룩을 끝까지 거부하는 집요함. 죽은 얼굴에까지 존엄을 지키는 이 누구일까. 그리하여 저 자연의 대지에 인간의 얼굴을 접붙일까.

 

 

2

병원복도, 파리떼 얼룩에 싸여 우울한 형체로 남은 얼굴들. 조그만 틈만 있어도 그놈들은 날아들어 끈끈이처럼 달라붙으며 사람의 얼굴을 지운다.

때로 뭉크처럼 이 파리떼 얼룩과 지워진 우울한 형체에 나는 매달렸다. 그 열정을 후회하진 않으리라. 모든 인간의 얼굴을 남김없이 되찾겠다는 무모함을 그러나, 나는 사랑했다.

 

 

3

벚꽃 축제에 어린 벚꽃나무들은 꽃을 무더기로 피워 달아오른 입김과 낙화에 대한 슬픔과 지치고 나른한 환멸을 먼저 가져온다. 자연의 처녀성을 늘 그러하리라. 감당할 수 없는 선물처럼 다가와서 감당할 수 없음으로 깊은 상처를 내고 지나간다.

그러나, 이 오래된 벚꽃나무. 달라붙는 파리떼 얼룩으로 굵어진 듯 검은 줄기며 가지로부터 끝까지 얼룩을 거부하는 손짓처럼 생각하듯이 드문드문 꽃을 피우고, 생각하듯이 드문드문 꽃이파리를 떨어뜨린다.

 

 

4

때로 뭉크처럼 파리떼 얼룩과 검게 지워진 얼굴의 형체들에 나는 매달렸다. 이제 그 위에 그리리라 얼룩을 거부하는 손짓과 손짓이 되찾는 눈이며, 입술이며, 뺨이며, 그 모든 것을 떠받치는 인간의 처녀성을.

이 밤에 얼룩을 거부하는 작은 손짓이 황홀히 세계를 떠받치고 있음을 누가 알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