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껍질의 플루트
Ruth Langan
1
비스듬히 몰아치는 강한 비바람이 차창을 심하게 때린다.
모건 앤더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살펴보았다. 순간 어둠속에서 파아란 번갯불이 번쩍했다. 모건은 이그니션 키를 다시 한번 작동했지만, 역시 엔진이 걸리지 않는다. 아마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다.
모건은 초조한 듯 한숨을 내쉬며 시트에 깊이 고쳐 앉았다. 이런 비바람 속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다니, 어떻게 한다? 역시 두 시간쯤 전에 지나온 그 도시에게 머물렀어야 하는 건데.
뉴욕에서 국경을 넘어 캐나다의 뉴브런즈윅까지 천 킬로에 이르는 긴 여행의 피로가 여기까지 오니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제까지 달려 온 샌트 로렌스만 해안 도로 연변의 경치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커브를 꺾어 돌 때마다 웅장한 자연이 눈앞에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갔다.
황토색 절벽이나 울퉁불퉁한 바퀴 터널, 색색의 집들이 늘어선 작은 고을도 몇 곳을 지나쳐 왔다. 어느 고을에나 고풍스런 교회가 있고, 집집마다 마당에는 하얀 빨래거리가 잔잔한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푸르름 짙은 공원에는 퀘벡 주의 깃발이 걸려 있고, 여름 햇살을 받은 정자가 한가롭게 눈에 들어왔다.
택시의 클랙션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고, 목판을 내놓은 장사치가 외쳐대고, 오가는 사람으로 북적대는 뉴욕의 큰길은 차를 돌아가는 데 따라서 자꾸만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전원 풍경도 지금은 비바람의 어둠속에 완전히 빨려들어 있었다.
모건은 회중전등으로 비춰가며 지도를 더듬었다. 조금 아까 눈에 띤 표지판으로 판단을 한다면 포트 엘긴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위치가 될 것이다. 거기서 페리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히든 섬으로 건너간다.
포트 엘긴까지 걸어갈까, 그보다는 여기서 차가 지나가는 걸 기다려 볼까. 그러나 벌써 30분 이상이나 차는 볼 수도 없었다.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한밤중이 되어 버리고 만다. 어서 빨리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
모건은 몸에 헐렁한 실크 드레스와 샌들을 신은 발끝으로 눈을 떨구었다. 뉴욕에서 점원이 억지로 권하는 바람에 사고 만 드레스였다.
"손님처럼 머리가 검은 분한테는 이런 짙은 장미빛이 제일 잘 어울리는 색이랍니다. 정말 멋져요. 남자 분들의 눈을 끌 게 틀림없습니다요."
가격표를 보고 주저하는 모건을 여자 점원은 추켜 세워가며 설득했다. 새 고용주에게 좀 더 좋은 인상을 보일 수만 있다면 가격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모건은 큰 맘 먹고 돈을 투자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되고 보니, 그것도 경솔한 낭비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힐의 화사한 샌들이나 얇은 실크 드레스로는 백 미터도 걷지 못한다. 모건은 뒷좌석에 놓여 있던 슈트케이스에서 플란넬 셔츠와 진즈와 스니커를 끌어내어 갈아입기 시작했다. 레인 코트를 대신할 수 있을 법한 것은 무명 자켓뿐이었다.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비 속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수트케이스는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나를 수가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놔두고 가기로 작정했다. 작은 백에다 자잘한 것들을 챙겼다. 지갑, 속옷, 갈아입을 셔츠와 스커트 이런 것으로 괜찮을까.
그리고 나서 몇 분 뒤, 모건은 자세하게 지도를 바라보며, 나아갈 길을 머릿속에 상세히 기억했다. 지도를 접어서 회중전등과 함께 백에다 넣었다. 차에서 내려서 도어 록을 확인한 뒤 키를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걷기 시작했다.
금세 빗물에 전신이 축축이 젖고 말았다. 긴 머리가 목과 얼굴에 달라붙고 진즈도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었다. 자케트나 셔츠도 빗물을 빨아들여서인지 한결 무거웠다.
갈림길까지 와서 모건은 표지판을 따라 왼편으로 꺾어갔다.
<포트 엘긴, 3킬로미터>
3킬로미터라니! 느닷없이 천둥과 번갯불이 치는 바람에 고인 물에 발을 헛딛고 말았다. 스니커는 철석철석 소리를 내고 백 손잡이는 미끌미끌했다.
정말 이게 무슨 꼴이람. 어쩌다 이런 데 빠져 들고 말았을까. 오래 동안 살아온 도시를 뒤에 두고 먼 딴 나라로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 건 뭐였단 말인가.
모건의 야무진 입언저리가 더욱 꽉 다물어졌다. 대답은 간단했다. 돈 때문이다. 버려둔 채 떠나온 그 털털이 차를 새 차로 바꾸기 위해서 한 몫의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오직 한 사람의 살붙이였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직 스무 살인데도 모건은 혼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득 할아버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눈에 눈물이 넘쳐흘러 빗물과 섞여서 볼을 타고 내렸다.
가엾은 할아버지, 자기가 죽더라도 손녀 딸이 어렵지 않도록 생각한 그는 얼마 되지 않은 은행예금과 유품을 모두 모건에게 남겨주기로 작정하고 각서를 써서 장례식이 끝난 뒤에 개봉하도록 말을 남기고 봉인을 했다.
모건은 철이 들고 나서 내내 할아버지와 둘이서 살아 왔지만, 그에게 자기 외에 살붙이가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사망 광고가 신문에 실려 나오니까, 그의 아우가 된다는 사람이 유언장을 손에 들고 느닷없이 모건 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이 갖고 온 유언장은 40년이나 전에 쓰여진 것으로서 둘 중 살아남는 사람에게 전 재산을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모건이 의논한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그 사람의 유언장은 입회인의 입회 아래 날짜와 싸인이 들어 있어서 법적으로 효력이 있지만 모건의 각서는 입회인이 없기 때문에 유서로서 인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남자의 신원도 조사했지만, 그는 틀림없이 할아버지의 동생이었다.
모건의 완패였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모건은 과거의 일을 깨끗이 잊고, 언제나 내일의 일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리라고 결심했다.
무일푼으로 세상에 내던져졌다고는 하지만, 모건은 젊음이 넘치고 건강하며 또한 총명해서 할아버지로부터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재산을 많이 물려받은 상태였다. 호기심, 탐구심, 독립심, 유머 정신 그리고 살아가는 정열 따위의 것이다. 이것만은 아무도 그녀로부터 뺏지 못할 소중한 유산이었다.
4월의 어느 날, 차를 수리하러 보낸 모건은 버스로 직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핏 보니까 좌석에 신문이 놓여져 있었다. 무심코 집어 들자 바람에 펄럭이는 광고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비서 구함. 여름 휴가 동안뿐, 캐나다의 로지(산에 있는 간이 숙박소)에서, 이력서 송부 요망>
급료는 대단히 고액이었다. 야학에 다니는 한편 사무 일을 보고 있는 페어필드 하이스쿨에서 받는 급료보다 훨씬 높았다. 최근 몇 해 동안 계속하고 있는 서머 캠프의 인솔자, 아르바이트에서 얻는 돈의 거의 배가 되는 금액이었다. 지금 타고 있는 차는 이제 거의 수명이 다 됐다. 급료가 높으면 높을수록 새 차를 마련하는 날이 당겨지는 것이다.
모건은 그 광고를 도려내어 지갑 속에 넣었다. 학교에 닿자 곧 이력서를 타이핑해서 광고에 적혀 있는 우체국 사서함 앞으로 우송했다.
한 달쯤 지나서 채용통지가 배달되었다. 히든 섬의 지도가 함께 들어 있었다. 이 뜻밖의 여름 일자리에 모건은 뛸 듯이 기뻤던 것이다.
불어 닥치는 비바람에 몸을 떨면서 모건은 쉬지 않고 걸었다. 멀리 불빛이 보였다. 3킬로의 길을 극복하고 겨우겨우 포트 엘긴에 닿은 것이다. 모건은 백을 고쳐 쥐고 걸음을 빨리 했다.
자그마한 식료품 가게 앞까지 와서 모건은 초라한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벌써 가게 문은 닫힌 듯 보였다. 다시 길을 걸어가니 주유소가 있었다.
"어머나! 아가씨, 이런 빗속을 어찌된 일이지요?" 프랑스 사투리의 말소리가 들렸다.
모건은 가게 입구에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아아 살았다, 이 사람한테 도움을 청해야지.
"아직 열려 있어서 잘 됐군요."
그 사람은 모건을 안으로 안내했다. 모건은 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벽 옆의 나무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 나 버렸어요. 여기서 3킬로쯤 되는 것인데 배터리가 다 된 것 같애요. 수리해주실 수 있겠어요?"
"해보지요. 이 고을에서는 주유소가 우리 집뿐이니까." 그 사람은 명랑하게 말했다. "솜씨 좋은 젊은이가 일을 도와주고 있답니다. 내일 아침 제일 먼저 가보도록 하겠어요. 그런데 아가씨는 어디로 가실 셈인가요?"
남자의 시선이 모건의 전신을 슬쩍 훑어보았다. 이 스마트한 진흙투성이의 아가씨는 이 고을에선 보지 못하던 얼굴이다. 저 말씨는 틀림없이 미국인일 거야.
"히든 섬에요. 아세요?"
"물론 알고말고요. 1,5킬로쯤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이지요. 그런데 아가씨, 마지막 페리는 벌써 한 시간 전에 떠나 버렸는걸."
"어머나 어쩐다지!"
받아 본 편지에는 분명히 페리의 여름철 운항표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모건은 채용이라는 글귀에 완전히 마음이 들떠버려서 그밖의 자잘한 것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고을에 머물 곳은 있나요?"
남자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글세, 작은 여인숙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 고을에는 관광객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건너가 버린다구요." 그는 다급하게 말을 곁들였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요. 틀림없이 조가 데려다 줄 거예요. 전화로 부탁해 드릴 게요."
그는 전화를 걸려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건은 무릎위에 올려놓은 양손을 꼬옥 쥐고 기다렸다.
조가 누군지 알 까닭이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오늘중에 섬으로 건너가고 싶었다. 돈은 은행에 얼마쯤은 남아 있지만 차를 수리하는 데 아마 거의 바닥나고 말겠지. 할 수 없이 숙박비라도 절약하는 수밖에.
한참 지난 뒤에 남자가 돌아왔다. 그는 방긋 웃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길을 똑바로 가서 막다른 곳에서 왼편으로 꺾어 가시오, 거기서 부두 쪽으로 가면 배가 보일 겁니다. 조가 불을 켜 놓고 기다릴테니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미안한 듯 그는 말을 이었다. "차로 태워다 드렸으면 좋겠는데 집이 비어 있어서, 가게는 비워둘 수 없거든요."
"괜찮아요. 벌써 흠뻑 젖어버렸으니까 이젠 아무렇지 않아요."
"키를 놔두고 가세요. 내일 차를 가져올 테니까요."
"그렇군요." 모건은 홀더에서 키를 풀어가지고 내밀었다. "이번에 언제 와질지 모르지만, 아무튼 부탁드리겠어요. 혹시 배터리를 손볼 수 있으시면 고쳐 놔 주세요. 섬에서 돌아갈 때까지 차는 필요 없어요. 필요하다면 배터리를 바꿔주셔도 돼요. 돈은 차를 찾을 때 드릴게요. 다른 데 잘못된 데가 있더라도 맘대로 손대지는 마세요." 쓴웃음 지으며 그녀는 덧붙였다. "사실은 차에다 돈을 쓸 여유가 없거든요."
남자는 모건의 팔을 안심하라는 듯이 가볍게 토닥거렸다.
"알았습니다, 아가씨. 말씀대로 해둘 테니까요. 여기다 이름을 적어 주시죠. 히든 섬에는 전화가 없으니 당신 쪽에서 연락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모건은 메모를 건네주고는 악수를 청했다.
"고마워요, 미스터……"
"캐논입니다. 알퐁스 캐논."
"대단히 감사합니다. 캐논 씨. 저는 모건 앤더슨이에요."
"네, 앤더슨 양. 당신은 미국인이군요. 어디서 오셨나요?"
"뉴욕에서요, 여름 동안 히든 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되어 있어요."
"그렇군요. 그럼 조심해서."
모건은 다시 억수 같은 빗속으로 발을 내딛고 캐논이 가르쳐 준 쪽으로 향했다.
비릿한 생선 냄새와 썩은 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부두가 가까워짐에 따라 디젤 엔진의 독한 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배의 불빛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엔진 소리가 울려왔다. 더 걸어 나가니 배의 키가 있는 곳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뱃전을 걸어서 모건의 짐을 받아들고 배에 싣고 나서, 다시 한번 손을 뻗어서 모건을 배에 태워주었다. 모건은 백발 섞인 이 사람의 머리와 주름잡힌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안녕하시오. 당신은 히든 삼으로 가시는 거죠?" 이 사람도 프랑스 사투리를 했다.
"그래요. 이토록 밤늦게 배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소 지으며 곁눈질로 배를 보았다. 바람은 다소 가라앉았지만 아직 억세게 내리 퍼붓고 있었다.
모건이 떨고 있는 걸 깨닫고 그 사람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트 밑에서 색 바랜 담요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이걸 두르고 계세요. 이런 날씨라면 바다 위는 꽤 추울 거요."
모건은 고맙게 담요를 받아들고 바람이 불어 닥치는 시트에 엎드렸다. 선실이 없기 때문에 이 이상은 쾌적하기를 바랄 수가 없었다. 되도록 편한 자세를 취하고 한시라도 빨리 섬에 닿도록 비는 수밖에 없었다. 이 고비만 무사히 넘기고 나면, 따뜻한 음식과 푹신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얼마간 마음이 밝아졌다.
배는 천천히 부두를 떠나서 앞바다로 나갔다. 엔진이 귀청을 뚫을 듯 큰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갑자기 속력이 빨라졌다. 커다란 파도가 자꾸만 밀려왔다.
모건은 머리를 숙이고, 담요를 둘둘 몸에 감아 말았다. 배가 크게 흔들릴 때마다 구역질이 입으로 튀어나올 거만 같았다. 저려 오는 손으로 시트 끝을 움켜쥐었다. 엔진 소리가 너무 커서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편이 더 나았다. 아무튼 어서 빨리 물에 올라서서 땅을 밟고만 싶었다.
그건 그렇고, 불빛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키를 잡고 있는 걸까. 작은 섬을 여러 개 스쳐 지난 것 같았지만, 모건에게는 가는 불빛도 전혀 안 보였다. 이윽고 엔진이 멈췄다. 그러나 한동안 귓속이 멍멍한 상태였다.
"이 섬에 집은 많이 있나요?"
"아뇨, 테일러 씨의 로지뿐이에요."
"저 불빛이 그건가요?" 모건은 작은 불빛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요. 그렇지만 당신이 오늘밤에 오리라고는 생각 못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군요. 설마 오늘밤에 닿을 거라고 생각 않으실지 모르지만 올 예정이란 건 알고 계실 거예요." 모건도 자신이 없어져서 중얼댔다.
그 사람은 백을 선착장에 내려놓고는 모건의 손을 잡았다.
"함께 가주시지 않을래요?" 기대하는 마음으로 미소 지어 보였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실례하겠습니다." 배의 방향을 돌리면서 그가 말했다. "불빛이 보이는 쪽으로 똑바로 걸어가세요. 어두우니까 발밑을 조심해서."
"배 삯을 얼마라도 드려야 하는데……" 모건은 그 사람 등에 대고 소리쳤다.
"아니, 아니 괜찮아요. 자아, 그럼."
"신세 많이 졌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모건은 백을 집어 들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 가지를 밀쳐 내며 불빛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억! 하고 놀란 순간, 진흙탕에 발이 미끌어져서 무릎까지 진흙에 빠져 있었다. 백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 진흙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앞으로 넘어지려 하는 몸을 닥치는 대로 손을 휘둘러 붙잡은 나무 가지에다 의지했다. 진흙탕에 머리를 처박는 것만은 겨우 모면한 것 같았다.
갑자기, 어린 시절 들은 적이 있는 무서운, 밑이 없는 늪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나오려는 자신을 나무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발밑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걸 확인하고 모건은 탈출을 시도했다.
조금쯤 보이는 백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커다란 나무기둥에 체중을 내맡기고 살짝 한쪽 발을 들어 올려서 단단한 땅으로 올라섰다. 늪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은 진흙이 고인 시궁창이었다.
모건은 한발 한발 발을 내딛듯 걸어 나갔다. 나무들의 실루엣은 마치 징그러운 생물 같았다. 머리털이 바람에 나부끼고 목에 휘감겨서 기분이 나빴다. 등골에 찬바람이 스쳤다.
백 미터쯤 가니까 불빛은 한결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안심이 되었다.
로지에서 장작을 피우는 내음이 흘러나왔다. 난로불이다. 아아 따뜻한 방, 마른 옷, 푹신한 베드, 그리고 평안함.
모건은 나무로 만든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두툼한 나무 도어를 노크했다. 한참 지난 뒤에 도어가 열리고 방안의 불빛을 등에 지고 우람한 사내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내는 말없이 모건의 흠뻑 비에 젖은 옷과 진흙물이 흘러내리는 무릎께를 힐끗 보았다.
"무슨 일이야?" 노여움이 담긴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저, 저는 일을 하러 왔습니다." 속으로 목소리가 토막토막 끊기는 걸 초조해 하며 모건은 겨우 말을 했다.
"나는 인기 스타를 남에게 소개하는 일은 하지 않아. 그건 그렇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헤엄쳐 왔나? 그보다는 흘러들어 온 거야?" 사내의 시선이 흙탕물 범벅이 된 전신을 훑었다.
모건은 입을 딱 벌린 채 반말 투로 말하는 이 당당한 체격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도어를 닫으려고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잠깐! 잠깐 기다려 주세요. 일하러 온 거예요. 지금 편지를 보여드릴게요."
백에서 편지와 지도를 꺼내들고 사내의 코 끝에 내밀었다.
"이걸 보세요."
사내는 편지를 낚아 채갔다. 사내가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 모건은 사내의 전신을 빈틈없이 살펴보았다. 키 165센티미터의 모건은 여성으로서는 결코 작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내는 쳐다봐야 할 만큼 키가 컸다. 185센티, 아니 190센티쯤은 될 것이다. 헝클어진 금발머리가 이마로 내려와 있고, 쭈글쭈글 구겨진 셔츠와 색 바랜 진즈를 입고 발은 맨발이었다. 한밤중의 방문객을 분명히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사내의 턱과 목덜미는 붉으스름한 수염으로 덮여 있었다.
사내는 의문스런 눈길을 보내왔다.
"정말, 당신이 모건 앤더슨이야?"
"그렇습니다." 모건은 얼굴을 들고 분명한 대답을 했다. 이것으로 겨우 집안으로 들여보내 주겠지.
그러나 사내는 편지를 모건에게 돌려주고는 쌀쌀한 말투로 물었다.
"이 밤중에 어떻게 해서 해협을 건너 온 거야?"
"조라는 사람이 배를 태워다 주었어요."
"조는 돌아갔나?"
"네, 왜 그걸 물으시는 거지요?"
사내는 딱딱하게 몸을 옆으로 비켜서며 씁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하룻밤 묵고 가게 할 수밖에 없겠군. 이제 와서는 돌아가지 못할 테니. 내일 아침 연락을 해서 페리를 멈추도록 해주지."
"돌아가라는 건가요?"
모건은 주저하면서 안으로 들어가서 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장작불 타는 소리가 바로 가까이서 들려왔다. 사내는 모건의 시선을 더듬어 흙탕물이 나오는 스니커에 눈을 돌렸다.
"젖은 걸 벗으라고. 짐은 겨우 그것뿐인가?"
"네, 그래요. 실은 차가 포트 엘긴 교외의 고속도로에서 고장이 나버렸어요. 슈트케이스는 차안에 놔둔 채로 하는 수없이 우선 필요한 것만 갖고 온 거예요."
모건에게 등을 돌리고 사내가 명령했다.
"따라오라구."
베드룸으로 들어가서 그는 욕실을 가리켰다.
"샤워는 저쪽이야. 나는 갈아 입을 걸 찾아오지." 이렇게 말을 남기고 사내는 도어를 향하다 말고 발길을 멈췄다. "식사는 했나?"
"오랜 시간 전에 점심을 들었을 뿐이에요."
모건은 쌀쌀한 사내의 태도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빳빳이 서 있었다.
"뭔가 만들어 줄까?"
쾅 하고 소리를 내며 도어가 닫혔다. 모건은 멍청하게 도어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저토록 화를 내고 있을까. 내가 눈에 거슬리는 일이라도 했다는 걸까. 아마 잠자고 있는 걸 깨웠기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걸까. 저 헝크러진 머리나 옷차림을 보면 오늘밤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게지. 저 사람은 이 집을 지키는 사람이며 주인 대신에 나를 대접하는 게 싫은 거야.
어깨를 움찔하며 생각을 떨쳐버리고 욕실로 향했다. 젖은 옷을 벗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싸늘해진 몸에 뜨거운 목욕물이 기분 좋았다.
욕실에서 나와 보니까, 베드 위에 큼직한 목욕용 로브가 놓여 있었다. 머리를 타월로 닦고, 로브를 몸에 걸치고 띠를 묶었다. 웨스트나 발밑에 생긴 헐렁한 것을 모건을 할 수 없군 하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커피 향기에 이끌려서 모건은 주방으로 향했다.
도어를 열자마자 뭔가 타고 있는 냄새가 났다. 사내가 뒤돌아서서 로브에 감싸인 모건의 날씬한 몸매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한마디도 묻지 않고, 토스터에서 토스트를 꺼냈다. 토스트는 새까맣게 타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걸로 참아 줘야겠군."
사내는 묵묵히 너무 타버린 스크램블 에그를 접시에 담았다.
모건은 거의 반사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어떤 것이 나와도 상관없었다. 맛 같은 걸 따질 수 없을 만큼 몹시 시장했기 때문이다. 나이프로 토스트가 탄 곳을 긁어냈다. 커피잔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바닥이 나도록 먹어치우고 나서 모건은 휴우 하고 한숨을 쉬면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내는 모건이 먹고 있는 동안 줄곧 프라이팬에 눌어붙어 있는 것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모건은 살짝 일어나서 사내 곁으로 다가갔다.
"잘 먹었습니다."
그는 타월로 손을 닦고는 빙글 등을 돌리고 주방에서 나갔다. 접시를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모건도 뒤따랐다.
리빙룸으로 들어가니, 그 사내는 불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늘밤, 제가 여기 온 일이 맘에 드시지 않은 것 같군요." 사내의 못마땅한 태도에 대한 노여움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모건을 말을 걸었다. "그렇지만 테일러씨가 돌아오시면 알아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사내는 얼굴을 들어서 모건을 노려보았다. 이상한 빛깔의 황갈색 눈동자 속에서 노여움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바로 내가 켄트 테일러야. 그리고 당신은 거짓말쟁이 사기꾼이야."
"뭐라구요!" 쇼크 때문에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내가 고용주라니!
"당신 이력서는 빈틈없이 읽었지만……" 켄트가 어름처럼 차갑게 말하기 시작했다. "설마 당신이 여자라곤 생각해 보지도 못했어."
모건은 가슴을 폈다. 그리고 헐렁한 로브 차림으로는 약간 박력이 모자랐으나 분명하게 켄트에게 말대꾸를 했다.
"제가 여자건 남자건, 일하는 데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오, 그럴까." 켄트의 눈동자가 한결 험하게 반짝거렸다. "그럼 묻겠는데, 어째서 당신은 성별을 감추고 응모했나? 나로서는 일부러 비서를 남자로 선택하려고 한 거야. 남자가 아니면 이 외딴 섬의 생활을 견디지 못할 것은 뻔하니까 말이야. 당신 이력서에는 당신이 여성이라고는 분명코 한마디도 적혀 있지 않았잖아."
모건은 한동안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켄트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창밖의 칠흙 같은 어둠을 내다보았다.
나를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재미있을 듯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힘이 솟아 있었는데, 그러나 여자로서는 모건이라는 희귀한 이름 탓으로 이제까지도 몇 차례인가 남자로 오인당한 일은 더러 있었다.
모건은 고개를 숙이고, 꺼져들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남자 비서를 모집하셨군요." 얼굴을 들어 뒤돌아보고 좀 큰 목소리로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을 속일 셈은 아니었습니다. 남성을 찾으시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광고를 보자마자 곧 응모했기 때문에요."
켄트의 눈빛이 노여움의 불길로 더욱더 불타올랐다.
"그런 변명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분명히 당신은 이력서에다 남자 학교인 페어필드 하이스쿨에서 일하며 소년을 상대로 하는 섬머 캠프에서 지도자를 맡고 있다고 적었을 텐데." 켄트는 모건을 노려보았다. "모두가 거짓말이었겠지?"
모건은 허리에 손을 갖다 대고 되받아 노려보았다.
"아뇨, 모두가 사실이에요. 정말로 페어필드에서 일하고 있고, 최근 3년쯤 캠핑을 돕는 일도 해왔습니다. 일부러 거짓말을 적은 건 아니에요. 당신이 착각하셨다 하더라도 그건 당신의 속단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몸이 지쳐 있어서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시거나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생각뿐이에요." 모건은 허세를 부리며 말을 계속했다. "어찌 됐든 내일이면 나갈 거예요. 그렇지만 여비는 주셔야 합니다. 차는 고장 나버렸는데 한 푼도 남지 않았으니까요. 있는 돈을 몽땅 다 털어서 여기까지 찾아 온 거예요." 마음을 놓으면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을 꾹 참았다.
켄트 테일러는 잠자코 모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모건은 발길을 돌려 방을 나왔다. 베드룸으로 뛰어 들어서 로브를 벗고 부드러운 담요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너무 하잖아! 올해는 이미 캠핑 일을 거절해 버렸는데, 이 일을 하지 못하면 차를 사지 못하게 된다. 한여름 동안 수입도 없이 지내라는 거야? 더욱 곤란한 것은 돌아갈 집도 없다. 채용 통지서를 받아 든 모건은 가까운 공립 고등학교에서 여름철 수업을 하기로 된 페어필드의 선생에게 방을 빌려 주기로 했다. 그때에는 이중으로 겹친 행운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 섬에서 높은 급료를 받고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방세를 물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뉴욕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차를 살 돈이 모이는 것이었다.
그런데……그 계획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모건은 옆방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에 갇혀 있는 사자처럼 바쁜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켄트의 발소리를 들었다.
2
목제 블라인드 사이로 아침 햇살이 새어들었다. 모건은 따뜻한 햇살에 이끌린 듯 몸을 뒤척이고 이윽고 눈을 깜박거리며 일어났다. 그 순간 어젯밤의 분한 일들이 머릿속에 뚜렷이 되살아났다.
어젯밤, 잠 들기 전에 지혜를 다 짜내 보았지만 좋은 해결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뉴욕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새 학기가 시작 되어 다시 일을 시작하기까지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돌아간들 집도 없는 신세였다. 친구는 몇 사람 있으니까 한 사람쯤 아파트가 빌 때까지 묵도록 해 주겠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기대를 걸 수밖에 도리가 없다.
베드의 아래에 쌓여 있는 옷 무덤을 넘어서 욕실로 들어갔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백 속에 쑤셔 넣어 갖고 온 셔츠와 스커트를 몸에 걸쳤다. 헝클어져서 어깨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브러시로 재빨리 빗고 옷을 들고 방을 나왔다.
세탁기는 뒷마당으로 향한 작은 방에 놓여 있었다. 모건은 옷을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건조기는 눈에 띄지 않았다. 마당에 널기로 하자.
탈수가 끝난 세탁물을 손에 들고 모건은 뒷문으로 해서 마당으로 나갔다. 포치의 난간이나 낮게 드리워진 나뭇가지에 진즈, 셔츠, 바지, 그리고 속옷을 걸쳤다. 아직 질퍽하게 젖어 있는 스니커도 눈부시게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포치의 계간에 놔두고 말리기로 했다.
맨발로 주방으로 들어간 모건은 냉장고를 열었다. 그 멍텅구리한테 당장 쫓겨나더라도 아침식사쯤 먹는 게 당연하다. 그는 도저히 인간의 식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날마다 먹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맛있는 아침식사를 만들 테니까.
모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오믈렛 재료를 조리대 위에 끌어내 놓고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렌지 밑 선반에 냄비나 프라이팬이 올려져 있었다. 프라이팬을 골라 들고 요리를 시작하는 것이다.
타버린 스크램블 에그에다 비하면 내 오믈렛은 최고의 요리지.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거야.
알맞게 구어지도록 조심하면서 토스터에서 토스트를 꺼냈다. 계란을 솜씨 있게 프라이팬에 떨어뜨리고 치즈를 넣었다. 치즈가 녹아가는 걸 바라보고 있으니 노래가 저절로 입에서 새어 나왔다.
여기까지 온 것은 허사였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다시 좋은 일도 있을 테지. 작년에는 좋지 않은 일들만 일어났지만 그래도 용케 뚫고 지나왔으니까. 요리하는 손이 문득 멈춰지고 갑자기 찌푸린 낯으로 변했다.
분명히 이럭저럭 겨우 살아왔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이 일은 꼭 하고 싶었다. 채용통지가 날아왔을 때, 됐다!고 생각했는데 절약 또 절약이라는 길로 괴로운 터널 저편에 밝은 희망의 빛이 비쳐진 듯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 밝은 빛도 어제 순식간에 꺼져 버리고 말다니…….
아무리 골똘히 생각한들 별 수가 없다. 마음이 밝아지는 일을 찾아내야지. 모건은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아침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드라이브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씨야. 돌아가는 길도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간들 갈 곳도 없긴 하지만……. 안 돼. 우울한 마음이면 아침식사마저 망쳐버리고 만다.
그렇다. 모두 테일러 씨에게 털어놓아 보자. 아무리 그렇지만 돌아갈 집도 없는 사람한테 천 킬로의 먼 길을 되돌아가라고는 말을 못할 거야. 남자가 아니면 비서를 할 수 없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 모건은 방끗 웃었다.
다 된 아침식사를 트레이에 올려놓고 리빙룸으로 날랐다. 창가에 떡갈나무 테이블이 있고, 이 섬과 본토를 가르고 있는 노드바렌츠 해협이 바라보였다. 모건은 경치를 즐기면서 아침을 들기로 했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란촌매트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앉아서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주방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건은 인스턴트 카피를 타려고 일어섰다. 어디를 찾아보아도 커피는 없었다. 선반이나 서랍을 닥치는 대로 열어 보았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끝내 단념해버리고 홍차를 타기로 했다.
김이 피어오르는 컵을 들고 돌아온 모건의 발걸음이 갑자기 멎었다. 켄트 테일러가 그녀의 자리에 앉아서 여유 있게 오믈렛을 먹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뭘 하는 거예요! 그건 내 것이에요!" 모건은 째지는 소리를 내질렀다..
켄트는 손을 멈추고 모건을 쳐다보더니 오믈렛을 다시 한입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는 걸." 이렇게 말하면서 잼을 바른 토스트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맛있는 게 당연하지요.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것은 내 것이니까." 모건은 컵을 테이블에 갖다 놓고 트레이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내 자리에 있었으니 먹어도 괜찮을 거야."
"당신 자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남의 아침을 만들어 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닌 걸요."
켄트의 포크가 다시 오믈렛 쪽으로 뻗어 갔다.
"그럼 교환조건으로 어때? 이 오믈렛은 벌써 손을 댔으니까 내가 먹는 거야. 그 대신에 당신한테는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어 줄게, 어때?" 모건은 눈을 깜빡거렸다.
"천만의 말씀이에요. 어젯밤 요리를 생각하기만 해도 식욕이 떨어지고 마는데."
켄트의 맞은편에 걸터앉아 그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아시겠어요, 테일러 씨? 당신의 요리는 분명히 말해서 돼지 먹이예요."
모건은 머리를 숙이고 오믈렛을 먹기 시작했다. 켄트의 시선이 아프도록 느껴졌다. 모건은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토스트를 입에 가져갔다. 힐끗 얼굴을 들어 보니 켄트는 물끄러미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제는 싫증이 났다. 토스트를 먹으며 모건은 다시 한번 켄트 쪽을 살폈다. 켄트의 시선을 징그럽게 느끼면서 태연하게 먹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단념한 듯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서 오믈렛을 절반으로 나눴다.
켄트는 빙긋 웃고는 접시와 포오크를 가지러 갔다. 그리고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먹었다.
이윽고, 모건은 식사를 끝내고 차를 들면서 창밖으로 눈길을 보냈다. 황금빛 햇살이 파도와 어울려 흰모래 기슭을 따라서 거품이 일었다간 꺼져갔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군요. 해마다 여름이 되면 이곳으로 오시나요?"
"아니야. 나는 경치를 바라보려고 와 있는 건 아니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일을 하기 위해서 와 있는 거야."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그렇군요." 쓸데없는 잔소리는 그만 두고 얼른 섬에서 나가라는 거로군.
모건은 트레이를 집어 들고 주방으로 설거지를 하러 갔다. 자신의 식기와 란촌매트를 손에 들고 켄트가 주방으로 왔다.
"어젯밤, 당신이 말한 걸 생각해 보았지. 내가 남자밖에 고용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것 말이야. 당신 말을 신용해 주기로 했어."
모건은 뒤돌아보며 켄트를 찬찬히 보았다.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켄트가 말을 있는다.
"남자 고등학교에서 있는 일, 소년들의 캠핑에 아르바이트하는 일, 남자처럼 생긴 이름 모두 사실일 테지? 다급하게 몰아붙인 건 미안해."
"내 바보 같은 변명을 믿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모건은 잔뜩 비꼬아서 되받았다. "저야말로, 급료 액수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하는 걸요. 세상에는 당신처럼 남자가 여자보다 뛰어나니까 급료도 많이 줘야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 많은걸요. 실제로 저도 그런 많은 급료를 받아 본 일이 없어요. 속으로 너무 과분하다고 마음에 걸리기는 했어요."
모건은 켄트한테 등을 돌리고 화가 난 김에 접시를 달그락거리며 씻기 시작했다.
켄트는 뭔가 중얼대며 방에서 나가려고 했으나 도중에서 발을 멈추고 뒤돌아 봤다.
"한 가지 말해 두지만, 그것은 내가 평소에 비서에게 지불하는 금액이야. 나는 주문이 많은 데다 비서를 마구 부리는 타입이니까, 일의 분량에 걸맞은 만큼의 급료를 지불하는 거야."
"그런 비서가 있는데 왜 광고 따윌 내신 거지요?"
"헬렌은 딸이 처음으로 아기를 낳기 때문에 시애틀에 갔지. 억지로 못 가게 말려서 스트라이크라도 일으키면 당할 수 없을 테니 휴가를 주었지."
"어머나. 헬렌이라니." 모건은 켄트를 무시하듯 곁눈질로 보면서 일부러 큰소리를 질렀다. "헬렌이라는 이름이 남자라니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군요."
"이런 식으로 말하지 마, 미스 앤더슨."
"나한테 명령하지는 마세요, 미스터 테일러. 아직 당신한테 고용된 것도 아닌데 뭘 어떻게 말을 하건 제 맘대로예요."
켄트는 성큼성큼 주방에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창가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모건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수치심으로 낯이 붉어졌다. 아까 빨래한 레이스와 브래지어가 나뭇가지에서 날려와 창틀에 매달려 펄럭펄럭 흔들리고 있었다.
켄트는 이상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볼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면서 모건은 당황해서 설명했다.
"아침 먹기 전에 빨래를 했는데 건조기가 없어서 마당에 널었습니다. 그것이 바람 때문에 날린 거예요."
"오오, 그래요. 앤더스 양." 켄트는 브래지어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빨리 치워 줄 수 없겠나? 저런 번쩍거리는 섹시한 속옷이 포트 엘긴까지 날아가거나 하면 쓸데없는 소문이 나서 내가 곤란해질 테니."
켄트는 손을 뒤로 해서 도어를 쾅 하고 닫고 나갔다. 그 뒤에 모건은 허둥지둥 빨래거리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얼마 뒤에 짐을 챙기려고 자기 방으로 향하던 모건은 도어가 열어젖혀진 켄트의 서재 앞에서 놀라 발을 멈췄다. 방안은 마치 태풍이 금방 지나간 듯한 모양으로 온통 종잇조각이 흐트러져 있었다. 꾸겨진 것도 있고, 베드 밑으로 처박혀 있는 것도 있었다. 발기발기 찢어진 것도 있었다.
켄트는 산더미 같은 원고용지를 데스크에 옮겨 가려고 했다. 그런데 바닥에 널려 있는 종이에 발이 미끌어져서 그 순간에 안고 있던 종이더미가 무너져 내려 발밑으로 흩어졌다. 웃음을 깨물며 모건은 치우는 걸 돕기 시작했다.
"이건 도대체 뭐예요?"
"내 작품, 아니 작품의 잔해야." 켄트는 화가 난 듯 중얼댔다.
모건은 종이를 두서너 장 집어올리곤 눈길을 보냈다. 갈겨 쓴 단어가 가득 늘어져 있고, 그 위에 줄이나 붉은 동그라미로 적어 넣은 것도 있었다. 네모로 둘러싼 문장도 더러 눈에 띠었으나 해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는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지 않군요, 테일러 씨."
켄트는 울컥 화가 난 듯 했지만 입 언저리를 뒤틀며 웃음 지었다.
"분명히 엉망진창이군." 긁어 모은 원고를 정리하면서 그가 말했다. "그래서 비서에게 높은 급료를 지불하지 않을 수 없다구. 나는 글씨가 서툴고, 타이프라이터는 맘에안 들고, 거기다 일단 신명이 나면 페이지 수 같은 건 상관없이 마구 써내려가니까 말이야."
"뭘 쓰시는 거죠?"
켄트는 한순간, 지금 질문한 뜻을 확인하려는 듯 모건을 뚫어지게 보았다. 이윽고 어깨를 움찔하며 그가 대답했다.
"레이놀스 스탄티슈가 감독하는 영화 시나리오야. 8월까지 완성시킬 예정이야."
모건은 움찔 숨을 들이마셨다. 레이놀스 스탄티슈라고 하면 허리우드에서도 손꼽히는 감독이다. 그는 그런 거물 감독을 위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건가. 켄트에게 필요한 건 유능한 프로의 비서인 것이다. 이건 내가 나설 곳이 못 된다. 모건은 생각에 잠기면서 원고 용지를 데스크 위에 올려놓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한 시간 뒤, 짐을 다 챙긴 모건은 백을 현관으로 나르고 뒤로 돌아가서 말려 두었던 스니커를 가져왔다. 강한 햇살 덕분에 스니커는 바싹 말라 있었다.
스니커를 신고 나서 모건은 몸을 일으켰다. 켄트가 지붕에 세워둔 폴에다 노란 기를 올리고 있었다. 이마에 손을 갖다 대고 모건은 큰소리로 물었다.
"뭘 하고 계셔요?"
"페리한테 여기 멈춰 달라고 할 때 이렇게 해서 알리는 거야."
과연, 이 섬은 분명히 고립되어 있다. 전화도 없으며 따로 사는 사람도 없다. 육지와의 연락수단은 깃발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만약 부상이라도 입었다면 어떻게 도움을 청할까. 모건은 어깨를 움찔했다. 그냐 내가 알 바 아니야. 나는 곧 이곳을 떠나서 먼지가 부석거리는데다 지독하게 무더운 뉴욕을 향해서 돌아가야 하니까.
모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해마다 여름이면 와나에이로 캠핑가고 있었다. 이 일과 비교한다면 급료는 참새 눈물만큼이지만 아름다운 호수나, 푸르른 오솔길이나, 신선한 공기나 햇볕을 만끽할 수 있는데 올해는 뉴욕에서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마의 주름살이 더욱 깊어졌다. 그것도 다행히 차가 말을 들어 주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모건은 허리께까지 풀이 자란 오솔길을 사뿐사뿐 걷기 시작했다. 들장미를 한 송이 꺾어서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그것을 머리에 이고 바닷가로 향해서 걸어 나갔다. 어젯밤, 퍽 무서워 보였던 나무들도 밝은 햇빛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섬 동쪽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포플러 숲이 있었고 훨씬 먼 곳에 단풍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파도가 햇볕에 드러나서 매끈매끈해진 이상한 모양의 조약돌이 물가를 따라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모건은 눈에 띤 조약돌이나 조개껍질을 주워서 호주머니에 넣으며 로지로 되돌아왔다. 이 섬의 평화스런 모습은 마음의 편안함을 가져다 주었다. 모건은 한숨을 쉬었다. 한 여름을 지내기에는 최상의 곳인데.
포치의 계단을 오르려고 했을 때 켄트가 도어에서 뛰어나왔다.
"페리가 왔어."
뒤돌아보니 커다란 배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켄트는 모건의 백을 들고 뒤도 안 보고 걸어 나갔다. 모건도 뒤따라서 물이 얕은 데 걸쳐져 있는 선착장으로 갔다.
페리가 멈추고 사닥다리가 내려졌다. 모건은 백을 받아들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켄트는 백을 건네주는 대신에 모건의 팔을 잡고 배에 올랐다.
"당신도 함께 가는 거예요?"
"좀 쇼핑할 게 있으니까." 켄트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모건은 난간에 기대서서 주위의 경치에 눈을 돌렸다. 바람이 머리를 흐트려 놓고 장미꽃이 날려갔다. 모건이 흠칫해서 고개를 쳐드니까, 바로 가까이서 켄트가 바람에 날려온 장미꽃을 잡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 향내를 맡고 팔을 뻗어서 장미꽃을 떨구었다. 장미꽃은 빙글빙글 맴돌며 멀리 바다로 떨어져 갔다.
모건은 어깨를 움찔해 보이고는 자꾸만 변해가는 주변 경치로 잠시 눈을 돌렸다.
머리 위에서는 갈매기가 바람결에 날고 쏜살같이 내려 꽂히는가 보았더니 먹이를 채가지고 다시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갔다. 로브스터를 잡는 어선인 게지. 갈매기가 수없이 갑판에 내려앉아 나래를 쉬고 있었다. 해협을 사이에 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해변은 험한 절벽이었다. 그 황토흙 탓으로 물마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배는 자연 그대로의 해변이 남아 있는 후미진 곳을 지나서 전진했다. 저 후미진 해변이나 바위굴을 탐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그렇지만 현실은……. 뉴욕까지 적어도 14시간은 운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행히 무사히 돌아간다 하더라도 갈 곳은 없다. 여름의 뉴욕에서의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너무 더운 탓으로 멈춰 버리고 마는 에어콘, 보도를 꽉 메워버리는 사람들, 일하는것도, 여름방학으로 학교에서 해방된 학생들이 거리에 넘쳐 있을테니 맘에 드는 일은 남아 있지도 않을 거야. 웨이트레스나 백화점 점원 자리라도 다행히 얻어지면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곳에 닿으면 우선 살 곳을 찾아야지. 한동안 호텔에 머물거나 하게 되면 소중한 저금을 축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안 되지.
씁쓸한 생각을 꼬옥 깨물며 모건은 아래쪽에서 소용돌이 치는 물을 내려다보고 난간을 거머쥐었다. 오는 도중에 내내 생각해 온 희망의 빛은 험한 절벽에 몰렸다가 부서지는 파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말았다.
문득 얼굴을 들어 보니 난간에 기대선 켄트가 열심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때 날카로운 고동을 울리며 배는 포트 엘긴에 닿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나 가까운 섬들에서 실려온 차들이 일제히 배에서 내려갔다. 이어서 승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위의 승객들은 한결같이 여행 기분을 즐기는 듯했다. 모건은 백을 들고 승객의 행렬에 늘어섰다. 훨씬 앞쪽에 켄트의 머리가 보였다. 켄트는 배를 내려서 큰길로 나오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는 어디 세워 놨나?"
"고속도로에 내버려 두고 왔지만, 캐논 씨한테 키를 맡기고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수리도 끝났을 거예요."
"전부 혼자서 수배한 거야?"
"그럴 수밖에 도리가 없잖아요? 누가 해준다는 거예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하는 사내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자신의 일은 자기가 해요."
켄트는 한동안 제법 의지가 강해 보이는 모건의 단단한 턱 언저리를 보고 있었다.
"미안해. 나쁜 뜻이 아니었어." 켄트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점잖게 주유소로 향했다. 차에다 휘발유를 넣고 있던 알퐁스 캐논은 모건을 보자 방긋 미소를 보냈다.
"이게 누구죠? 정말 앤더슨 양. 퍽 빨리 돌아오셨군요."
"네에.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됐어요." 모건은 켄트를 의식하며 대답했다. 켄트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차는 어때요?" 모건은 기대를 걸고 물어 보았다.
"글쎄……" 캐논이 빙긋 웃었다. "곧잘 있는 일이지만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있어요. 어느 쪽을 먼저 할까요?"
"배터리 말이군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무튼 그래요. 그밖에도 있지만."
"배터리뿐만이 아닌가요?" 기분이 자꾸만 우울해지고 있었다.
"아무튼 배터리는 바꾸지 않으면 안 되지요. 그렇지만 나쁜 뉴스가 아니지요. 결정적인 원인은 스타트가 망가진 것 같아요. 아마도 그 탓으로 엔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배터리의 수명이 다 된 것도 스타트가 원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스타트는 고칠 수 있나요?"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미국에서 파트를 주문해 오지 않으면."
"얼마쯤 걸릴까요?"
"글쎄, 주문해 보아야 알 테지만 1주일, 아니 좀 더 걸릴까."
"1주일이라구요……"
"좀 더 걸릴지 모르지." 켄트가 말에 끼어들었다. "저게 당신 차인가?" 그는 곁에 세워져 있는 모건의 차를 가리켰다.
"그래요." 모건은 완전히 낙심한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댔다.
"저런 털털이 차는 수리해도 헛일이지." 켄트는 차갑게 내뱉었다. "왜 새 차로 바꾸지 않는 거야?"
모건은 뒤돌아보며 켄트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이번 일로 돈을 벌어서 새 차와 바꾸려고 했던 거예요. 아무나 낡은 것은 척척 버려치우고 새 것을 살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구요."
"미안해.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 차에다 돈을 들이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데."
"전부 수리한다면 얼마쯤 들까요, 캐논 씨?" 모건은 켄트를 무시해 버리고 말을 걸었다.
"계산해볼 테니 가게로 들어갑시다."
모건은 캐논을 뒤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켄트도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갔다.
캐논이 내보인 견적서를 보고 모건은 이를 꽉 깨물었다.
"알겠어요, 캐논 씨. 그밖에 별 도리가 없으니 배터리는 바꿔 주세요. 그렇지만 스타트는 그대로 두세요. 뉴욕으로 돌아가서 수리하겠어요. 배터리 교환은 곧 할 수 있나요?"
"한두 시간이면 됩니다. 그렇지만 위태로운 스타트로 긴 여행은 하지 않는 것이 무난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젯밤처럼 인가도 없는 고속도로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수도 있으니까요."
"걱정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여기사 파트가 닿을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어요."
모건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와서 차 뒷좌석에 백을 던져 넣었다.
몇 분 뒤에 켄트가 가게에서 나왔다.
"앤더슨 양, 가까운 데 레스토랑이 있으니 커피라도 함께 마시지."
차와 긴 여행 때문에 머리가 무거워져 있는 모건은 멍청하게 켄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카운터 위에 서 있던 노부인이 사냥하게 미소를 보내왔다. 주방에서는 쉐프의 모자를 쓴 노인이 부지런히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켄트와 모건이 구석자리에 앉으니까, T 셔츠에 쇼트 팬츠 차림을 한 14,5세쯤 돼 보이는 소녀가 메뉴를 들고 왔다.
"커피 둘 부탁해."
"할아버지, 커피 둘이에요." 소녀가 소리쳤다. 그순간 모건의 표정이 갑자기 흐려지며 금방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몸이 떨리는 걸 겨우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켄트는 모건을 똑바로 보았다.
"왜 그러지, 앤더슨 양?" 걱정스런 듯 물었다.
"아무것도 아녜요." 모건은 침착을 되찾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저 아이가 ‘할아버지’하고 부르는 걸 듣고 좀 서러워졌을 뿐이에요. 저도 오랫동안 ‘할아버지’하고 불러왔으니까요."
"불러 왔으니까?"
"그래요. 할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을 보았다. "오직 한사람뿐인 육친이었어요. 저는 할아버지가 길러 주신 거예요."
"그랬군. 그래서 당신은 다루기 힘들 만큼 독립심이 왕성하군."
"뭐라구요." 순간적으로 노여움이 싹터서 슬픔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모건 앤더슨, 당신은 보통 여자들과는 달라. 내가 알고 있는 여자는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차가 고장 나거나 몇 백 킬로를 멀리 여행한 끝에 일이 허사가 되거나 했다면 어쩔 수 없이 울 수밖에 없는 타입뿐이야."
모건은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의 나무 무늬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와 말다툼할 기력이 어째선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소녀가 커피를 날라 오니 켄트는 기침을 하고 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켄트의 말씨는 퍼 따뜻했다. 모건은 한 대 얻어맞은 듯 켄트를 보았다.
"나는 지금 당장 비서가 필요해. 이제부터 다시 구하는 건 너무 늦다고 생각하고 있지. 광고를 내보내고, 이력서를 살펴보고, 그런 짓 하고 있다간 여름도 절반쯤 지나 버리겠지. 그렇지 않아도 나는 일에 쫓기고 있는 중이야. 그리고 당신은 차를 수리하는 데 몇일이 걸린다고 듣고 있어."
모건은 켄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아무래도 진지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젯밤 로지에 닿았을 때의 차가운 태도를 생각해 보면 맘을 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고용해 주실 셈인가요? 남자 비서밖에는 필요 없다고 해 놓고서." 모건은 초조한 듯 반발했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 일해 줄 비서가 필요하다구. 그리고 그 외딴섬에서 여자라면 견디지 못하고 짜증스러워 할 것 같아서 남자를 고용하려 했던 거야. 그 점 당신은 괜찮을 것 같군. 어떤 곳에서도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게 틀림없어."
"돈은 얼마쯤 주실 셈이지요?" 모건은 도전하듯 물었다. 이 켄트 테일러라는 사내는 하나부터 열까지 화나게 하는 녀석이야. 고용해 주겠다고 해도 금방 승낙할 수 없었다.
"광고에서 밝힌 금액을 지불할 께." 켄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자 켄트가 말했다.
"당신 대답을 듣기 전에 두어 마디 말해 둘게. 첫째로 내가 하는 일에는 똑바른 스케줄 같은 게 없어.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일을 하거나 아 낳거나 하지. 기분이 내키면 밤을 새는 수도 있어. 대개는 한밤중에 일을 하고 낮잠을 자지만 때로는 2,3일 동안 줄곧 글을 쓰고 그 뒤에는 죽은 듯 잠을 자는 수도 있지. 그리고 나는 일하는데 방해하는 건 질색이지. 히든 섬에 들어 앉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지. 그곳이라면 전화나 텔레비전이나, 손님 대문에 번거로울 걱정이 없기 때문이지. 글이 잘 쓰여지지 않을 때는, 나는 화를 잘내고 잔소리만 늘어 놓을지도 모른다. 상처받은 곰 같다고 당신은 생각할 거야."
켄트는 말을 끊고 모건을 찬찬히 보았다.
"당신이 하는 일은 내가 갈겨 쓴 것을 바로 읽고, 순서대로 깨끗하게 타자를 치는거야. 혹시 도중에 내 마음이 변하면 완성된 것을 모두 없애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쳐야 하는 거야. 다음 신으로 옮겨가기 전에 거기까지의 내용을 다시 읽고 싶으니까, 적어 낸 것은 빠짐없이 타자로 쳐줘야 돼."
모건은 노여움과 초조한 빛이 떠 있는 켄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켄트는 자신의 성격이나 일하는 방법을 정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켄트가 창밖으로 눈길을 돌린 짬을 틈타서 모건은 그 험상궂은 옆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콧구멍은 커다랗게 부풀고 이맛살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눈은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나, 어쩌다 한번씩 지나가는 차가 아니라 이 거리 저 너머로 펼쳐지는 바다고 향해져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앉아 있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시나리오 일로 가득해 있는 것이다.
켄트는 문득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고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모건이 시선을 붙잡았다. 켄트는 그대로 모건의 시선을 흘겨보았다. 모건은 허둥지둥 눈을 내리깔았다.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빤히 보았다고 해서 꼭 똑같이 할 게 뭐람. 마치 내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 같군. 정말 무례한 사람이야.
모건은 동요가 진정될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는 체했다. 한참 지난 뒤에 켄트 쪽으로 얼굴을 돌리니까, 그는 아직도 여전히 모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점잖 차리고 이야기할 시간은 없다구, 앤더슨 양. 단 1분이라도 헛되이 하기가 싫어. 나는 옷차람은 상관하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는 수가 있지. 당신이 잘못하면 변명을 듣지도 않고, 덮어놓고 나무랄 것이고, 밤새도록 자지 말고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있으라고 명령하는 수가 있을지도 모르지. 이 일이 끝날 때쯤이면 틀림없이 당신은 내 알굴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러나 그런 일에 나는 일일이 마음 쓰지 않는다. 내게 있어서 중요한 건 작품을 마감 전에 완성시키는 것뿐이야. 당신 일까지 상관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구. 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야. 자아 어떻게 하겠어? 일을 해보려고 생각하나, 어때?"
켄트의 도전한 듯한 말투를 듣고 나서, 모건은 마음속으로 갑자기 그의 콧대를 꺾어주고 싶은 마음이 치솟아 올랐다. 있는 만큼의 싫은 소리를 담아서 모건은 말했다.
"매우 재미있는 일 같군요. 이런 즐거운 이야기를 듣고서 거절할 수 없겠죠?" 라고 독살스런 말투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밖에 다른 좋은 방법은 없는 걸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당신을 고용하거나 비서 없이 지내거나 둘 중의 하나야."
뉴욕까지의 천 킬로의 먼 길은 너무나도 멀다. 모건은 마음이 흐트러져 머리를 쥐어뜯었다. 켄트는 정말 싫은 사내야. 여름 내내, 그 외딴섬에서 이 사내와 마주치면서 지내야 하다니 참아낼 수가 있을까. 그러나 또 한가지 남은 길은 더욱 어둡고 막막했다. 이 제의를 걷어차 버리고 뉴욕까지 차를 달리며 돌아가서 일자리도 없이 잠자리도 없이 한 여름을 지낸다…….
결론을 내리려고 고민하는 모건의 얼굴을 켄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모건은 점잖 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켄트는 한순간 그 손을 바라보고 커다란 손으로 힘 있게 잡았다. 두 사람은 정색을 하고 악수를 나눈다.
빈틈을 주지 않고 켄트는 벌떡 일어섰다.
"그럼 이것으로 결정한 거야. 당장 행동개시 하는거야. 우선 식료품을 사고, 주유소로 가서 당신 슈트케이스를 찾아 그리고는 곧 섬으로 돌아가자."
모건은 성급하게 걸어가는 켄트 뒤를 쫓아서 식료품점으로 갔다. 켄트는 모건의 발걸음 같은 건 상관하지 않고 항상 몇 미터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주유소 앞까지 와서 모건을 말을 걸었다.
"캐논 씨한테 파트를 주문해 달라고 부탁하고 올 게요."
"그럴 필요 없어. 아까 내가 주문해 두었으니까."
"뭐라구요!" 모건은 버럭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차주인인 내 의견도 묻지 않고 맘대로 주문해 버리다니! "테일러 씨, 어째서 제가 당신 제안을 받아들이고 섬에 머물게 될 거라고 생각하신 거지요."
"스스로 말했잖아? 달리 좋은 방법이 없다고. 저 털털이 차를 갖고서는 도저히 긴 여행은 무리야.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본들 모두 같은 대답을 할 게 뻔하잖아." 켄트는 빙긋 웃었다. "자아, 트렁크를 열고 짐을 꺼내는 거야. 서둘러 가면 아직 다음 페리를 탈 수 있어."
"이젠, 다신 제 일을 마음대로 정하지 말아 주세요, 테일러 씨.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할 테니까요." 모건은 노여움으로 얼굴이 비뚤어졌다.
성큼성큼 차로 걸어가는 모건은 째질 듯한 소리로 외쳤다. 모건을 바라보는 켄트의 입술에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몇 분 뒤, 두 사람은 슈트 케이스와 식료품을 손에 들고 페리를 탔다. 모건은 난간 옆 벤치에 걸터앉아서 주위를 바라보았다. 작은 히든 섬의 그림자가 수평선에 떠 있었다. 노드바렌츠 해협의 바닷물은 배로부터 멀어져 감에 따라 짙은 곤색에서 연한 초록색으로 변하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모건은 그 멋진 경치에 몸을 떨었다. 이 아름다운 캐나다의 리조트 지역에서 살기로 된 것이다. 일에 쫓긴다고는 하지만, 이따금 히든 섬을 탐험하거나 뉴브런즈윅의 해안변의 고을이나 프린스 에드워드 섬까지 발길을 뻗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모건은 난간에 기대 서 있는 켄트 쪽을 힐끗 훔쳐 보았다. 켄트는 한시라도 빨리 로지로 돌아가서 일을 시작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는 모양이다. 우람스런 어깨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모건의 마음속에 뉘우침이 싹튼다. 그토록 쉽사리 승낙해서 괜찮을까.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가 없다. 뉘우침은 더욱 커질지도 모른다.
3
로지로 돌아오자마자 곧. 켄트는 자기일의 내용과 모건이 해야 할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등을 돌리고 말을 계속하는 켄트를 상을 찌푸리고 바라보며 모건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요령을 알 수 없는 점이 몇 가지 있었지만 너무나 까다로운 일인 듯했다.
"내 말을 알아들었나." 켄트는 돌아서서 모건을 바라보았다.
모건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켄트는 이런 설명을 하는 것 그 자체가 귀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치 게이트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경주마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어서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것이 눈에 보이듯 알 수 있었다.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켄트는 무의식중에 초조한 빛을 감추려고 눈썹 있는 데를 매만졌다.
"대개 알 것 같습니다. 일을 시작하면 아직 모르는 것이 나올지 모르지만, 익숙해지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테일러 씨."
"됐어. 그런데 우리는 이제부터 한 지붕 밑에서 일을 하는 거니까,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하면 어떨까? 나는 켄트라고 불러 줘."
"좋아요, 켄트."
그때, 문득 데스크로 눈을 옮긴 모건은 거기 놓여 있는 시나리오의 제목을 보고 기쁜 듯 소리쳤다.
"어머나, ‘최후의 낙원’아냐. 켄싱톤 T 마틴의 작품이군요."
"원본을 읽은 일이 있나."
"그럼요, 읽고 말구요. 정말 재미있는 책이었어요. 당신은 그 마틴 씨의 책을 페이스로 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계시는군요." 모건은 켄트를 뚫어지도록 보았다. "그런데 왜 마틴 씨는 스스로 쓰지 않을까요?"
켄트는 한순간 주저하는 빛을 보였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틀림없이 다른 베스트셀러를 쓰기 때문에 바쁜 게지. 문예평론가 말을 빌면, 그다지 시간도 걸리지 않고 비슷한 작품을 대량생산하고 있다니까." 켄트는 쌀쌀하게 웃으며 다시 덧붙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를 에워싼 부인들과 노는데 바쁜 게지."
"틀림없이 그래요. 그의 스캔들 기사는 저도 읽은 일이 있어요." 켄트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모건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틴 씨를 경멸하지는 마세요. 그 사람의 책은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최고에요."
"당신은 독서가로군." 켄트의 말투에는 비꼬임이 가득 섞여 있었다.
"좋고 싫고를 판단할 만큼은 읽었어요." 모건이 되받아 넘겼다.
"그의 맨 처음 작품은 읽었나?" 느닷없이 켄트가 물었다.
"그럼요. 그것으로 완전한 팬이 되어서 계속 읽고 싶은 맘이 든 거예요.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도서관에 가서 빌려 봤어요. 이제는 기다려질 만큼이에요." 모건은 데스크 위의 시나리오에 힐끔 눈을 보내고 물었다. "어떤 시나리오가 되는지 기다려지네요. 원작과는 많이 달라지는 건가요."
"좀 손질을 하지. 배역이 정해진 파트도 있으니까. 배우의 개성에 맞춰서 대사를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돼. 그러나 되도록 원작에 충실해서 써나갈 셈이야."
"그렇다면, 괜찮지만 맘대로 고쳐 써버리면 나는 팬으로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모건은 원고 표지를 자랑스러운 듯 어루만졌다.
"그나저나, 제일 좋아하는 소설의 시나리오를 타자로 칠 수 있다니 꿈만 같군요."
"이봐, 이봐. 그렇게 꿈처럼 생각하지 마. 이 일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편한 게 아니야. 자아, 나는 내 일을 시작하기로 할게. 당신은 집안을 둘러보고 맘에 드는 곳을 일하는 방으로 고르라구. 타이프라이터나 책상은 뒷곁 창고에 처박혀 있을 거야."
모건은 그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것을 켄트가 불러 세웠다.
"그리고 모건……일만 똑바로 해주면 그 뒤에는 뭘 하거나 당신 자유야. 그다지 위로가 될 거리는 없지만…….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고 찾아오는 건 조 뿐이지. 수영이나 하이킹이나 일광욕이라도 하라구. 그렇지만 보트는 없어. 본토에 볼 일이 있을 때는 깃발을 올려서 페리를 보내 달래는 거야. 리빙룸에 있는 책은 맘대로 읽어도 좋아. 다른 오락은 자신이 생각하는 거야."
그런 말을 들어도 별로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바깥세상과 일체 단절된 데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없어도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미 켄트의 데스크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원고를 타이핑하는 것만으로도 넉넉히 시간을 잡을 것 같았다. 모건은 지루한 것과는 연이 먼 성격이었다.
여러 개의 방을 신중하게 살펴본 뒤에 모건은 포치로 향한 작은 방에서 일하기로 했다. 창문을 통해서 섬이나 바다의 웅장한 경치를 즐길 수가 잇다. 켄트의 방에서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여기라면 그에게 조심할 것 없이 타이프를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꽤 오래도록 쓰지 않고 있던 침실에 낡은 가구가 처박혀 있었다. 모두가 하나 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맘에 드는 걸 써도 좋다는 켄트의 말이 생각나서 모건은 등나무 의자와 소파를 끌어내서 밖으로 날랐다.
잠시 후에 뒤뜰로 산책 나온 켄트는 기묘한 모양과 마주쳤다. 모건이 색 바랜 진즈와 어딘지 눈에 익은 닳고 닳은 셔츠를 입고 의자에 먼지를 열심히 털고 있었다. 청소하는 일에 열중해 있어서 켄트가 다가오는 것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켄트의 목소리에 모건은 펄쩍 뛰며 놀랐다.
"어머나, 거기 계셨군요. 몰랐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먼지가 다 털렸나를 보려고 몸을 굽혔다.
"아까 뭐든지 써도 좋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이걸 빌리려구요."
"쓰는 건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한 여름 동안만 있을 테니까. 그렇게 열심히 털고 닦아서 가구를 차려놓을 것도 없잖아?" 눈살을 찌푸리고 쌀쌀하게 말했다. "그런 태도가 이른바 둥지 틀기의 본능이란 거겠지. 여자는 아무리 짧은 동안이라도 자기 주변에 여러 가지 것을 놔두지 않으면 마음이 차지 않는 게지."
켄트는 모건을 바라보며 느닷없이 그녀 옆에 몸을 굽히고 셔츠 소매를 만졌다.
"이 셔츠, 어디 있었지?"
모건은 켄트의 손가락 감촉에 몸이 움칫했다.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외면하고 중얼댔다.
"빈방 옷장 속에 들어 있었어요. 다 떨어져서 청소할 때 입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켄트의 얼굴을 힐끔 살폈다. "안 되나요?"
"아아냐. 나는 아직도 이 셔츠가 있었나 하고 놀랐을 뿐이야. 나한테 이런 작은 셔츠를 입을 수 있었던 때가 있었으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군."
켄트는 찬찬히 셔츠를 보고는 이윽고 시선을 모건 옆으로 옮겼다. 열심히 청소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짙은 눈썹 아래 눈동자는 밝게 반짝였고 이마에 맺힌 땀이 반짝반짝 빛났다.
갑자기 켄트는 얼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내게는 할 일이 많아.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지."
사라져 가는 켄트의 뒷모습을 모건은 눈길로 쫓았다. 셔츠 소매를 살짝 만져 보았다. 모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켄트의 낡은 셔츠를 입고 있다고 해서 왜 이토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까? 그는 완고하고 밉살스런 사내인데도.
그러나 청소를 계속하면서도 모건의 머릿속에서는 해협에서 헤엄치거나 선착장에서 낚싯줄을 드리우고 건강한 웃음소리를 지르는 켄트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가는 지워지는 거이었다.
2,3일 지남에 따라서 모건의 일하는 방은 차츰 편하게 바뀌어 갔다. 그녀는 하얀 등나무 의자나 타이프용 테이블 외에 화분을 올려놓는 받침틀을 몇 개 찾아내서 테이블 곁에 놔두기로 했다. 완성된 원고와 아직 손대지 않은 원고로 나누어서 그 위에 올려놓는다. 옛스런 발이 달린 항아리에 드라이플라워를 소복하게 장식하고 정원에서 꺾어온 생화는 꽃병에 꽂았다.
산책할 때마다 주워 오는 색다른 모양의 잔돌이나 조개껍질은 유리가 깔린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섬세하게 세공된 크리스탈 꽃병에는 새의 깃털을 넣어 두었다. 햇빛이 비치면 검은 깃털 위에 연한 청색이나 라벤다 빛깔이나 무지갯빛의 광채가 나타났다. 모건은 모래 터에서 찾아낸 보물을 하나하나 소중하고 깨끗하게 모두 장식했다.
켄트는 처음에는 그런 짓은 모두 시간낭비라고 말했으나,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녀 방으로 발길을 옮기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하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매일 정해진 일과에 따라 지날 수 있게 되었다. 모건은 똑바로 계획을 세워서 생활했다. 그러나 모건이 제아무리 똑바로 계획을 세워도 켄트가 제멋대로여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켄트는 미리 말했었지만 언제나 한밤중에 일을 하고 있었다. 모건이 일어날 무렵에야 겨우 잠드는 날도 있었다. 잠들기 전에 완성시킨 원고를 모건의 방으로 가져오는 일도 있었으며, 원고의 산더미를 테스크나 화장대 위에 흐트러놓은 채 베드에 쓰러져 버리는 수도 있었다. 그런 날은 모건이 원고를 가지러 서재로 갔다. 켄트는 닳고 닳은 진즈를 입고 셔츠의 다슴께를 벌린 채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베드 위의 켄트를 볼 때마다 모건은 생각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이런 절제 없는 생활을 켄트는 왜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켄트의 육체는 트레이닝을 쌓은 육상선수처럼 우람하다. 햇볕에 탄 어깨가 숨소리에 맞추어 위아래로 움직였다. 깊은 잠속에 빠져 있는 얼굴은 마치 놀다가 지쳐 있는 어린애 같았다.
켄트 테일러는 결코 미남은 아니었다. 우람하게 퍼진 턱이 아무래도 뻔뻔스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제멋대로 자란 머리가 이마로 흘러내려 있고, 털에서 목으로 짙은 수염이 덮고 있었다. 그리고 눈, 파랑도 초록빛도 아닌 어슴푸레 빛나는 고양이 눈 그대로의 호박색인 것이다. 화를 내면 그곳에 초록빛 불꽃이 떠오르지만 평소에는 무색투명한 것으로 보였다.
꽉 짜여진 몸통과 정강이, 털에 덮인 긴 다리 켄트는 솜씨 있는 맞춤옷을 차려입은 몇 백 명의 남자들 속에 있어도 주목을 끌 만한 존재였다. 옷차림에는 무관심한데도 왠지 그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한 매력이 있다.
켄트의 주위에는 언제나 어수선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베드룸에는 옷이 벗은 모양 그대로 버려져 있고, 노트나 연필도 아무 데나 함부로 팽개쳐져 있었다. 켄트는 세상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는다.
그러나 켄트는 어찌된 일인지 우편물에만은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 앞으로 보내오는 편지는 모두 포트 엘긴의 우체국에 닿도록 되어 있었다. 식료품을 사러 본토에 간 김에 우체국에 가서 받아 온다. 때로는 조가 갖다 주는 수도 있었다. 또 편지를 보낼 때도 켄트는 조에게 조 자신이 편지를 반드시 직접 우체국에 가져가라고 단단히 부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 조가 오면, 아무리 방금 막 잠이 들었더라도 깨워 달라구. 당신이 편지를 대신 받거나 하면 안 돼. 알겠어?"
그는 모건에게도 엄하게 명령했다. 왜 그토록이나 편지에 신경 쓰는 것일까? 아마도 스탄티슈 감독으로부터의 연락을 자칫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는 거겠지. 모건은 착실하게 하라는 대로 하고 있었다. 켄트는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일체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온 신경을 시나리오에 집중하고 있었다. 모건이 제아무리 밤늦게 잠자지 않고 있을 때라도, 또 한밤중에 어쩌다 잠이 깼을 때라도 켄트의 서재는 밝게 불이 켜 있었고 안절부절 못하며 걸어 다니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모건은 제아무리 밤늦게 잠자지 않고 있을 때라도, 또 한밤중에 어쩌다 잠이 깼을 때라도 켄트의 서재는 밝게 불이 켜 있었고 안절부절 못하며 걸어 다니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모건은 그 발소리에 익숙해져서 깜깜한 어둠속에서 그 소리가 들려오면 왠지 마음이 놓였다.
모건은 자신도 놀랄 만큼 섬 생활에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 태어나서 이때까지 차의 소음이나 사람들이 웅성대는 속에서만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서 섬의 고요로움은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페리의 기적소리,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폭음소리, 아침저녁의 귀뚜라미의 대합창, 모건은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하루를 즐겼다.
날이 새기 전 삼은 어둠으로부터 새어드는 안개로 완전히 감싸인다. 아침 일직 일어나 보면 대안의 굽은 곳에서 출항하는 어선이 보였다. 어부들은 예로부터의 어구를 싣고, 날이 밝지도 않은 바다로 나가서 해가 지고 어두워진 뒤에야 하루의 어획을 싣고 돌아간다. 로브스터, 새우, 게, 청어 같은 것이 그들의 어획물이었다.
바닷가 나무 그늘에 서서 안개 속을 달려가는 커다란 배를 보고 있노라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을 조여왔다.
어느 날 아침, 모건이 배를 보고 있는데 켄트가 다가왔다.
"어머나, 이렇게 아침 일찍 어찌 된 거예요?"
"잠을 잘 수가 없군. 너무 피로해서 오히려 신경이 흥분되는 모양이지." 켄트는 천천히 지나가는 어선을 눈으로 좇았다. "당신도 저 배를 보는 걸 좋아하는군."
모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켄트도 같은 일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왠지 개운한 마음이 가슴속에서 시원하게 퍼져 갔다.
켄트는 두터운 쉐터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우람스런 팔의 근육이 드러났다.
"이 근처의 어부는 거의가 모두 아카이아인이야. 아카이아인에 대해서 알고 있나?"
"아뇨, 전혀 몰라요."
"아카이아인은 자기들은 퀴벡 주의 사람들과는 다른 인종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퀴벡 주의 사람들은 원래 노르망디나 불타뉴 지방에서 왔지만, 아카이아인은 프랑스 중서부의 출신이야. 말씨도 같은 프랑스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이야. 그들은 아카이아의 역사나 전통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고, 아카이아인의 노래 ‘아베 마리아 스테라’나 기를 소중히 하고 있지. 그 기라는 것이 프랑스 국기의 파란 부분에 금빛 별 모양을 그려 넣은 것으로 그 별이 스테라 마리아, 즉 마리아의 별을 뜻하는 거야."
켄트는 머리를 돌려서 모건을 바라보았다. 모건은 눈동자를 빛내며 조용히 켄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 어촌도 틀림없이 당신 맘에 들 거라고 생각해. 작은 여인숙이 있고 뛰어나게 맛있는 생선요리를 먹게 해주지. 일이 대충 끝나면 그곳을 안내해 줄게."
모건은 방긋 웃고 켄트의 초대에 따랐다.
"오늘 갈 수 있으면 좋은데 거추장스런 신이 있어서 안 되겠군." 마음 탓인지 어깨를 떨구고 켄트는 걷기 시작했다.
모건은 켄트의 뒷모습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까지 들은 역사 이야기 가운데, 지금 들은 것이 제일 재미있었다. 어떤 역사책보다도 훨씬 진실성이 담겨 있었다. 켄트가 말해 주워 들은 덕분에 아카이아인이 한결 가까운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조도 아카이아인의 피를 물려받고 있다. 그래서 켄트도 조에게는 경의를 표하는 것이리라. 켄트는 아카이아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모건은 단 혼자서 포트 엘긴에 왔던 날의 일이 생각났다. 알퐁스 캐논이나 조는 내가 무사히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애써 주었다. 특히 조는 한 푼도 받지 않고 배를 내준 데다 담요까지 빌려주었다. 두 사람 모두 친절하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살아가고 있었다.
모건은 바닷가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문득 무뚝뚝한 고용주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황토 빛으로 물드는 바닷물처럼 측량하기 어렵고, 바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처럼 완강하고 딱딱한 껍질과는 다르게 이 고장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감추어져 있다. 좀처럼 남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남에 대한 따뜻한 감정도 그가 갖고 있을 게 틀림없다.
안개 속으로 아침 햇살이 비쳐들고 섬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후가 되면 모건은 비키니로 갈아입고 뜨거워진 바위 위에 뒹굴면서 일광욕을 즐겼다. 살갗은 차츰 보랏빛으로 변하고, 강한 햇살을 받은 머리나 속눈썹은 검푸른 색으로 반짝였다. 쇼트 팬츠에 셔츠를 걸치고 옷자락을 꼬옥 묶은 차림으로 산책을 나가는 일도 있었다.
한편 켄트는 매일 저녁 무렵에 일어나서 수영복 차림으로 몇 킬로쯤 조깅하고, 그 뒤에 점잖게 헤엄치는 걸 일과로 하고 있었다. 모건은 켄트가 일어날 시간이면 자기 방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있었다. 켄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켄트의 일과는 그날 따라서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마주쳐 버릴 수도 있었다.
어느 덥고 나른한 오후, 모건은 맘에 드는 바위에 누워 있었다. 비키니의 브래지어 끈을 풀고 등을 햇빛에 드러냈다. 내리 쬐이는 태양과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잠으로 이끌어 갔다.
느닷없이 바로 가까운 곳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브래지어를 손으로 누르며 허둥지둥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켄트의 머리가 내려다보였다. 마치 바위가 같은 높이에 켄트의 얼굴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고 있는 줄 알았지."
‘네에, 졸고 있었어요."
서둘러 브래지어 끈을 묶고 있는 손놀림을 켄트는 찬찬히 보고 있었다. 모건은 낯을 붉히고 다시 얼굴을 돌렸다.
"퍽 많이 탔군."
"그래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모건은 허둥대며 입을 다물었다. 켄트는 마치 그리스 신화의 해신 포세이돈과 같다. 그렇지만 그런 걸 부끄러워서 말할 수는 없었다. "당신도 정말 건강해 보이는군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루종일 서재 안에 갇혀서 시나리오와 씨름하고 계신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나는 씨름 같은 건 하지 않아. 글 쓰는 사람은 번쩍 떠오르는 것으로 승부를 하는 거야. 맞붙어 시름을 해가지고는 명작이 나오지 않지. 솟아나는 와인처럼 아름다운 말이 은빛 혀끝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명작인 거야."
뜻밖의 켄트의 대답을 듣고 모건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가볍게 농담을 할 줄 아는 켄트는 이제까지 본 일이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빙긋 웃으며 켄트가 말했다.
"천재는 지금 한참 쉬고 있는 중이야. 어때, 저 뗏목까지 경주하지 않겠나?"
켄트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까, 물가에서 백 미터쯤 되는 곳에 파도에 실려서 흔들거리고 있는 뗏목이 보였다.
"좋아요, 이 경주는 해볼만 하군요, 천재님. 자아 그럼 가요."
모건은 물보라를 날리며 뛰어들었다. 수영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상대가 켄트라면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생각한 대로 켄트는 유유히 파도를 가르고 헤엄쳐 가서 힘 안 들이고 뗏목 위로 올라섰다.
모건은 겨우겨우 헤엄쳐 가서 뗏목 끝을 움켜쥐었다. 숨이 차 있었다. 바로 눈앞에 켄트의 손이 뻗어왔다. 모건이 손을 내미니까, 켄트는 몸을 드러내고 뗏목 위로 끌어올려 주었다.
켄트는 모건이 떨어지지 않도록 허리께에 손을 갖다 댔다. 모건은 깜짝 놀라 몸을 떨며 켄트를 쳐다보았다. 눈은 약간 가늘어지고 그가 이쪽을 뚫어지게 되받아 본다.
태양이 내려 쬐는 데 소름이 끼쳤다. 그걸 보고 켄트가 모건의 팔과 어깨를 문질렀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추워?"
"아뇨." 왠지 목이 쉬어 있었다.
모건은 일어섰다. 몸이 흐느적거리고 말았다. 양팔이 굳어져서 축 쳐져 내려갔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켄트는 어깨로 손을 감싸왔다. 따뜻한 입김이 젖은 머리와 관자놀이에 와 닿았다.
‘아아뇨." 목에 뭐가 걸린 듯했다.
"왜?" 켄트는 모건의 턱에다 손을 대고 얼굴을 들고는 자기 얼굴을 가만히 갖다 댄다.
의문, 불신, 공포, 모건의 머릿속에 갖가지 감정이 맴돌았다. 켄트는 모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켄트는 잠깐 입술을 부딪치고 얼굴을 돌렸다. 모건은 그의 눈에 비치는 이상한 빛에 매료되어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켄트가 다시 입술을 갖다 댔다. 입술의 따뜻함이 공포나 불신감을 조금씩 조금씩 씻어내려 갔다. 그가 잠깐 입술을 떼고 모건의 얼굴을 살며시 살폈다. 이때 처음으로 모건의 얼굴에 정열의 빛이 떠올랐다.
켄트는 천천히 고개를 낮추었다. 모건은 얼굴을 쳐들고 그의 키스를 기다렸다. 눈을 감고 양손을 내밀었다. 단단하게 조여진 켄트의 허리가 손가락 끝에 닿고 전신에 몸서리가 스쳤다. 부풀어 오른 근육의 감촉이 손에 전해져 왔다.
켄트의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모건의 볼을 타고 내렸다. 켄트의 입술이 그것을 닦아내니 그녀는 머릿속이 저린 듯해서 몸이 둥실 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애, 키스 탓일까? 그게 아니고 파도에 흔들리고 있는 탓인가?
모건은 켄트의 키스에 희열을 느끼고 그녀 스스로 자문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허둥지둥 몸을 떼어 내고 찬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물가로 올라와 숨을 몰아쉬며 뒤돌아보니, 캔트는 아직도 뗏목 위에 서 있었다. 모건의 몸은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타월을 집어 들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로지로 향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기고 말았을까? 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 켄트와는 일을 통한 관계로 매우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켄트와 일하는 덧 이외의 관계를 갖게 되면 안 된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심장이 덜컹했다. 익숙했던 그 솜씨, 켄트는 여성 경험이 풍부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버진이라는 걸 그는 알아차렸을 테지. 켄트는 반쯤 장난삼아 내 반응을 시험해 본 것뿐이다.
모건은 왈칵 화가 나서 타월을 집어 던졌다. 시나리오가 완성될 때까지 나는 이곳에 있어야 한다. 그동안, 켄트를 남성으로 의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떻게 마음을 컨트롤해 가야 할까?
4
어둠과 정적이 섬을 온통 감싸버리고 있었다. 조금만 지나면 날이 샌다. 안개가 내려앉은 노드바렌초 해협 수면에 연한 핑크의 빛이 스며들고, 이윽고 오렌지 빛 태양이 수평선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모건은 바닷가에 서서 아름다운 해돋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베드 위에서 몇 차례고 몸을 뒤척이고, 켄트의 방에서 울려오는 발소리를 무의식중에 들으며 한밤을 지새고 만 것이다.
생각도 하지 않은 뗏목에서의 일을 되풀이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내의 키스를 정열적으로 받아 버린 자신이 퍽이나 화가 났다. 그런 일에 익숙한 켄트의 솜씨 있는 리드에 저도 모르게 끌려가고 만 것이다. 켄트에게는 그런 일은 갓난애의 팔을 비트는 것만큼 손 쉬운 일일 테지. 아마도 켄트는 내 반응을 미리 계산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켄트가 약간 건드렸을 뿐인데도 나는 몸속까지 뜨거워져 있었다. 정말로 켄트가 싫었다면 그처럼 황홀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에 젖어서 반짝이는 켄트의 우람스런 몸집이 눈에 떠올라서 어쩔 수 없이 몸이 떨리고 만다. 켄트는 마음속으로 이상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금단의 사과인 것이다.
켄트의 따뜻하게 젖은 입술은 그때 내 입술을 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몸 안으로부터 욕망이 솟아올라서 몸이 근질거렸다.
안 돼. 이제 자야 해. 이런 걸 생각하면 안 돼.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은 켄트의 모습을 몰아내 버릴 수는 없었다. 밤이 어슴푸레 밝기 시작하는데도 켄트의 일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모건은 잠 자는 걸 단념해 버리고 살짝 베드에서 빠져나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물가로 부딪쳐 오는 파도도 부드러운 아침 햇빛 속에서는 조심스러워 보였다. 이따금 갈매기가 일직선으로 내려와서 물고기를 입에 물고 날아 올랐다.
모건은 젖은 안개에 몸을 떨면서 로지로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모건의 걸음이 딱 멈췄다.
켄트가 이쪽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빛바랜 진즈와 꼬깃꼬깃 주름진 셔츠를 입고 발은 맨발인 채로였다. 그 모양으로 1주일 동안 자고 일어나고 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의 전신은 비실비실 했고 초라했다. 먼발치에서도 머리가 마구 엉켜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켄트의 시선이 모건의 전신을 슬쩍 훔쳐보았다. 눈 언저리에는 그늘이 생겨 있었고 입가는 굳어 있었다. 켄트는 손짓을 했다.
"아침 식사를 만들려고 하는데 부엌으로 오라구. 당신 몫도 만들어 줄 테니."
첫날의 요리가 생각나서 모건은 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적어도 나를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켄트는 어제 그 일을 별로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오늘 아침은 커피와 토스트만으로 하고 곧 일을 시작할 생각인데요." 켄트의 요리를 먹지 않아도 될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모건은 말했다.
"아니, 어젯밤에는 거의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이핑 해줄 원고도 없다고."
켄트의 말씨는 담담했지만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 일을 후회하고 있는 걸까? 사과할 셈인가? 아니 내가 지나치게 생각하는 걸까?
둘이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로지로 향했다. 모건은 켄트의 심정을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다.
거짓말로도 맛있다고 하지 못할 아침 식사였다. 언제나처럼 계란은 버석거렸고, 토스트는 너무 타버려서 딱딱했다. 일부러 오렌지를 짜가지고 주스를 만들어 주었지만 유리컵 속에 씨가 많이 떠 있었다.
켄트와 모건은 끝까지 입을 다문 채 아침을 끝마쳤다. 모건은 씨를 스푼으로 떠내며 켄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켄트는 이쪽을 찬찬히 보고 있었다.
"손 들었나?" 켄트가 중얼댔다. 아침식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네에."
모건은 낯을 찌푸리고, 다음 순간 깔깔대고 웃어 버렸다. 가슴속 깊이 달라붙어 있던 긴장이 일시에 풀렸다. 켄트는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직도 물리지 않고 자기가 요리하겠다는 걸요. 손 들었어요. 그러나 저는 이제 어떤 게 나와도 놀라지 않을 걸요. 면역이 생겨 버렸는걸요." 켄트의 자존심 상한 표정을 보고 모건은 상냥스레 덧붙였다. "여보세요, 켄트. 당신은 역시 요리하는 것보다 시나리오에 전념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켄트는 모건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이 놓이는 듯 의자를 고쳐 앉았다.
"체! 모처럼 애써서 만들어 주었는데도 고맙다는 말도 없이 실망했군. 그래, 그렇다면 접시 닦는 일은 당신한테 부탁하기로 하지. 됐나, 미스 앤더슨."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요, 미스터 테일러. 적당한 운동이야말로 소화불량에는 첫째가는 약인걸요."
모건은 행주를 손에 들고 접시를 날랐다. 켄트는 의자 등에 기대고, 연한 커피를 마시며 만족한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모건은 본래의 밝은 성격을 되찾은 듯 했다.
"서서히, 일에 대한 의욕이 솟아나는군. 모건, 당신도 바빠질 걸." 켄트는 큰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몇 시간, 켄트가 서재에서 일에 파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모건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켄트의 원고는 정말로 어젯밤에는 거의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후에 조가 우편물을 갖고 찾아왔다. 모건은 일광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에게 포트 엘긴 우체국에서 편지를 보내 달래야지. 모건은 자기 방으로 편지를 가지러 갔다.
방을 나와 보니, 켄트가 마침 선착장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모건의 발소리를 깨닫고 뒤돌아보며 근심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입가에 새겨진 피로의 주름살이 약간 비쳤다.
"이 편지를 조한테 부탁하려구요."
"내가 전해줄게." 켄트가 손을 내밀었다. "내 앞으로 온 편지를 받으러 가는 길이니까." 켄트는 모건의 편지에 무심코 눈길을 보냈다. "이건 뭐야." 엄한 말투였다. 금방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고 노여움의 불길이 불타올랐다.
"궁금하세요? 친구한테 보내는 편지인 걸요……" 켄트의 말투에 겁을 먹고 모건은 어물어물 대답했다.
"마침, 뉴욕 프레스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있단 말이로군." 모건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양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래요. 판매부에서 일해요 그런데 어째서 그게 마음에 걸리죠?"
켄트는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왜 그럴까? 켄트의 얼굴은 더욱 험해졌다. 눈에서 초록빛 눈동자가 빛나고 엄격한 턱 근처에서 혈관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켄트는 빙글 등을 돌리고는 한마디도 않고 선착장으로 행했다.
모건은 문 앞에 서서 그가 편지를 주고받는 걸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켄트는 조와 두세 마디 말을 나누고 돌아왔다.
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걸으며 켄트는 아직도 문 앞에 서 있는 모건을 힐끗 쳐다보고 금방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는 점잖게 집안으로 들어가 곧장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모건은 도무지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켄트는 기쁘게 편지를 받아드는가 했더니 다음 순간,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뭔가 켄트의 노여움을 살만한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아무래도 편지가 원인인 듯싶다. 그렇지만 그 편지 때문에 화를 내다니 바보 같군. 켄트는 편지 보내는 상대를 내 애인쯤으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내가 누구한테 편지를 써 보낸 건, 켄트한테는 아무 상관도 없을 텐데. 혹시 켄트가 질투하는 게 아닐까? 아니야, 켄트는 그런 일로 화를 낼 마음이 좁은 사내는 아니야. 무엇보다도 켄트와 나와는 서로 질투를 느낄만한 사이가 아니잖은가.
뉴욕 프레스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가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켄트의 문제다. 나한테 화를 낸들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해 보았지만, 끝내 화를 낸 원인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일 동안 켄트는 미친 듯 일을 해냈다. 그가 서재에 들어앉아 있는 한, 딱 마주칠 걱정도 없었다. 모건은 속으로 마음이 놓여서 평소 때와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켄트의 일하는 모양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 갔다. 날마다 밤새도록 글을 쓰고, 겨우 두세 시간 자는가 하면 다시 일을 했다. 침식을 잃고 하루 진종일 쉬지 않고 원고지와 씨름하는 일도 있었다.
태도도 거칠었고 차츰 미친 듯해 갔다. 깨끗하게 타이핑된 종이는 갈겨 쓴 글씨로 메워져 꼬깃꼬깃되어서 모건한테로 되돌아왔다.
켄트의 감정은 46시간 내내 폭발 직전이었다. 그는 모건이 하는 일에 철저하게 간섭을 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모건 어디 있어!" 켄트의 악쓰는 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수영을 끝내고 타월로 몸을 감싼 채로 있던 모건은 몸이 굳어졌다. 또 잔소리 하는군. 이번에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밖에 있어요."
"빨리 이리 와!"
이를 악 물고서 모건은 일부러 천천히 타월을 몸에 다시 감고 그 끝을 수영복 사이에 끼웠다. 엎드려서 샌들을 신고 몸을 일으켜서 느릿느릿 로지로 향했다.
날마다 저런 식이라면 이쪽이 못 견딜 거야. 되도록 시간을 벌기로 하자.
켄트는 모건의 테이블 곁에 서 있었다. 휴지통은 뒤집혀 있었고 바닥 전체에 종이가 널려 있었다. 모건의 모습을 보고는 그는 더욱 노여움을 나타냈다.
"422페이지는 어디 있나?" 켄트가 따지고 들었다.
"퍽 기다리시게 했는가 보군요. 미안해요." 모건은 비아냥을 섞어서 대답했다.
"이걸 보라구!" 테이블의 원고를 가리켰다. "이건 421페이지. 그리고 이쪽은 423페이지야. 422페이지는 어디 두었나?"
"아마, 페이지 숫자를 잘못 적은 모양이군요." 모건은 성이 나서 대꾸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똑바로 살펴보았는데 신이 한 페이지 빠져 버렸어. 남자와 여자의 달콤한 신이야. 매우 소중한 신이라구. 나는 분명히 쓴 기억이 있어. 이봐 어디다 둔 거야?"
"그래요. 당신이 달콤한 신을 쓰는 법을 알고 계실지는 몰랐는 걸요. 정말 로맨티스트예요? 싸움하는 신이 아니었나요?"
켄트는 얼굴을 들어 모건을 쌀쌀하게 노려보았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성이야말로 진짜 여성, 여성 가운데 여성이지. 따뜻하고 인정이 있고 사랑스런 여자……. 그에 비해서 당신이란 여자는……"
"뭐라구요!" 모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치켜 올렸다. 그러나 그 손은 켄트의 볼을 때리기 전에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켄트는 모건을 와락 끌어당겼다. 모건은 그의 두꺼운 가슴팍에 부딪쳤다. 얼굴을 들고 켄트의 눈을 드려다 보았다. 황갈색 안개 속에 타오르는 노여움의 불꽃, 모건은 마음의 동요를 나타내지 않으려고 눈을 내리 깔았다.
켄트의 손에서 원고지가 떨어져 내렸다. 그 손을 모건의 턱에 갖다 대고 와락 얼굴을 추켜 들었다.
모건은 몸이 떨리며 숨이 더 가빠졌다. 손가락 끝까지 긴장되어 있었다.
욕망의 물결이 켄트의 낯을 스쳤다. 그가 천천히 모건의 몸에 손을 돌리고 억세게 끌어당겼다. 켄트의 격렬한 욕망에 혼마저도 빼앗길 듯싶었다. 모건은 하는 대로 내맡겨 둘 수밖에 없었다.
‘그만 해요, 켄트. 부탁이에요. 정신을 차려야 해요. 당신은 자신이 하고 하는 걸 모르고 있어요.’ 모건은 겨우 마음속으로 목소리를 짜냈다.
"그만 해요, 켄트……" 그 뒤는 그의 입술에 의해 막혀 버리고 말았다.
모건은 숨을 헐떡이며 힘없이 저항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켄트의 욕망을 자극할 뿐이었다.
켄트는 한 손을 들어서 등을 쓸어내리고 또 한 손으론 머리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더욱 힘을 주어서 모건을 끌어안았다.
모건의 몸 안에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노여움이 뜨거운 욕망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켄트의 어깨를 붙들었다.
느닷없이 켄트가 손을 놓았다. 모건은 마음이 썰렁해진 마음이 들어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호흡은 아직도 흐트러져 있었다. 몸이 켄트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는 거칠게 모건의 어깨를 붙들고 아직도 젖어 있는 입술을 가만히 드려다 보았다.
이윽고 켄트는 마치 만지면 안 되는 것을 손을 댄 것처럼, 손가락 끝을 문지르며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홱 등을 돌리고 엄격한 말투로 명령했다.
"422페이지를 찾아갖고 오라구. 우물쭈물 하지 마. 5분 이내에 말야, 알겠어." 이런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방에서 나가 버렸다.
모건은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켄트의 손의 감촉은 놀랄 만큼 모건의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와 깊은 사이가 되면 안 된다. 나중에 상처 받는 것은 틀림없이 바로 나야. 켄트가 어떤 심한 말을 던져 오거나, 힘으로 키스해 오더라도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와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접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모건은 문득 아까 주고받은 일이 생각나서 이를 깨물었다. 켄트 테일러가 말하는 따뜻하고 인정이 넘치고 사랑스런 여성이란, 손쉽게 남자에게 몸을 내맡기고 정열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를 뜻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갖고 행동하며 인생의 목표를 뚜렷하게 정하고 있는 여성은 그 자리의 분위기에 따라서 몸을 내던지거나 하지 않는다. 켄트가 보기에는 그런 여성은 차갑고 싫은 여자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모건은 화가 나는 김에 닥치는 대로 종잇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방안의 모든 종이쪽지를 주워 모아서 끝내 모건은 문제의 그 페이지를 찾아냈다.
수영복 위에 타월을 휘감은 모양 그대로, 그녀는 켄트의 서재로 가서 말없이 그것을 건네주고 켄트의 굳어 있는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밤에 비슷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모건은 진즈에 스웨터의 옷차림으로 주방에서 차를 끓이고 있었다. 그때 켄트가 발소리를 울리면서 왔다. 발소리를 쿵쿵거리며 콧구멍을 벌렁거리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부터 문필가가 된 거야. 미스 앤더슨."
"뭐라구요?" 모건은 가스렌지 앞에 선 채로 뒤돌아보았다.
"도대체 누구 허락을 받고 말을 바꿔 썼느냐 묻고 있는 거야."
"당신 원고 그대로, 한 자도 틀림없이 타이핑하고 있는 걸요."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 않는데." 켄트는 원고를 테이블로 내던지면서 모건에게 다가왔다. "자아, 그럼 설명해 주실까." 원고를 뒤적이며 모건이 타이핑한 페이지 옆에 늘어놓았다.
모건은 켄트 옆으로 다가섰다. 그때 문득 켄트의 육체를 의식하고 살갗이 움찔했다. 모건은 엎드려서 두 개의 원고를 견주어 보았다.
켄트가 바로 가까이 있다고 해서 침착을 잃고 있다니 그에게는 절대 눈치 채도록 해서는 안 된다. 되도록 침착하도록 해서 몸을 일으키고 얼굴을 쳐들어 켄트를 보았다.
"알겠어요. 여기서 잘못 친 거로군요." 모건은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갈겨 쓴 것을 전혀 틀리지 않고 바르게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내가 쓴 것을 맘대로 바꾸었다는 건 인정하는 거지." 켄트가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네에, 분명히 다른 말을 쳤군요. 그렇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서로가 약간 주의가 모자랐던 것예요."
모건은 노여운 나머지 울음이 터질 듯해서 켄트에게서 떨어졌다.
"정정할 곳을 표시해서 내 데스크 곁에 놔두시면 되는 건데. 다는 틀림없이 다시 고쳐서 가져갔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모건은 큰소리로 악을 썼다. "이런 짓으로 나를 괴롭히며 즐기고 있는 거군요."
켄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립자가 떠올랐다. 모건은 종종걸음으로 나가려 했지만, 도중에서 뒤돌아보고 딱 잘라 말했다.
"당신 신경질에는 이제 신물이 나요. 이러다간 병이 나고 말 거예요. 이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이 말을 남기고 달려가려 했지만 도어까지 가기도 전에 켄트의 팔이 뻗어 와서 모건은 거칠게 붙잡히고 말았다.
모건은 부들부들 떨면서 켄트의 어두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켄트는 무섭도록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을 괴롭히다니, 내 자신을 알 수가 없어. 모건 앤더슨. 나는 바로 당신한테 달려 있으니까."
"뭐라구요?" 모건은 까닭을 알 수 없어 되뇌었다.
켄트의 얼굴이 다가왔다. 손은 아직 모건의 어깨를 붙든 채였다. 노여움을 가라앉히려고 내뱉은 거칠고 뜨거운 입김이 머리에 와 닿았다.
"당신은 내가 이제까지 만난 여성 가운데서 가장 때 묻지 않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일가는 명 여배우야." 잔잔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켄트는 어깨에 올려놓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이 어깨에 파고드는 듯했다. 모건은 아픔을 참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켄트의 눈길은 입술에 쏠리고 있었다. 모건이 아파하는 것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모건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검은 눈동자가 어두컴컴함 속에서 빛났다.
켄트는 모건을 팔 안에 끌어들여서 살짝 입술을 갖다 댔다.
"모건……" 속삭이는 목소리가 머리에 엉켰다. "아아, 모건.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 지 모를 테지……"
켄트는 이마와 볼 그리고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나 입술을 뺏으려 하지는 않았다.
모건은 자신의 희열이 한숨으로 새어나오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려서 켄트의 등으로 돌렸다. 엷은 셔츠를 통해서 전해져 오는 우람스런 육체의 감촉, 커다란 이 몸을 혼자서 차지하고 싶다…….
드디어 참을 수가 없어서 모건은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끝내 켄트의 입술을 찾고 있었다.
둘이는 탐하듯 입술을 겹치고서 오래오래 키스를 나누었다.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어서 모건은 살짝 입술을 뗐다. 켄트는 그녀가 호흡하는 걸 기다렸다가 다시 입술을 더듬었다.
환희의 소용돌이가 몸 한복판에서 끓어올라서 그것이 전신에 번져갔다. 그에 따라서 켄트의 키스는 더욱 깊어 자신을 잃어 간다. 켄트는 모건의 허리에 손을 돌리고 꼬옥 끌어안았다. 허벅지가 목선의 다리에 와 닿았다.
다음 순간, 켄트는 몸을 떼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모건은 켄트의 몸에 매달리듯 무의식중에 한발 앞으로 내딛어 갔다. 켄트는 양손을 살짝 모건의 볼에 대고 뚫어지도록 보았다. 그의 눈동자 안에, 이제까지 보지 못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길은 모건의 얼굴을 구석구석까지 기억 속에 새겨두려는 듯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켄트는 따뜻한 입술로 모건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리고 갑자기 손을 떼고 확 달라진 엄한 표정이 되어 말없이 성큼성큼 사라져 갔다.
다음날, 반미치광이 같던 켄트의 일하는 모습이 갑자기 멈췄다. 모건이 일어나서 가보니 켄트는 리빙룸의 소파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시간은 새벽녘이 가까웠다. 난로에는 아직 약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새벽 추위에 몸을 떨면서 모건은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꼬깃꼬깃한 쇼트팬츠를 입은 맨발의 다리가 한쪽 소파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그는 깊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모건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켄트의 건강이 마음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 된다. 몇 시간이고 때로는 며칠 동안이고,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해서 몸이 지탱될 까닭이 없다. 그러나 켄트는 훌륭한 어른이다. 자신의 건강관리쯤 자기가 하는 것이다. 그가 몸을 상한다 해도 그것은 그 자신의 책임이다. 나는 주어진 일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켄트도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모건은 그에게 담요를 덮어 주면서 자기 자신한테 몇 번이고 그렇게 타일렀다.
5
어느 날 아침, 켄트가 느닷없이 본토에 가자고 말을 꺼냈다.
"오늘은 일을 안 해." 모건이 주방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는데, 켄트가 와서 이렇게 한마디 했다.
"어머나, 기뻐요. 하루 종일 쉬는 거예요?" 모건의 눈이 빛났다.
"그렇구 말구. 우체국에 가거나 물건을 살 것도 있으니까 말야."
모건의 얼굴에 떠올랐던 들뜬 표정이 금방 지워져 버렸다.
"어머, 시시해." 쉰다고 해도 놀러가는 것이 아니어서 실망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일을 빨리 끝내면 이곳저곳 돌아볼 시간쯤 있을지도 모르지." 켄트가 새삼스레 마음을 끌려는 듯 말했다. 모건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감돌았다.
"잘 됐어요. 나는 가보고 싶은 데가 많은 걸요. 우선 뉴브런즈윅이죠. 그리고 프린스 에드워드 섬, 그리고……"
"잠깐 기다려 봐. 오늘 하루에는 그렇게 많은 곳엘 갈 수가 없어. 한 달 휴가가 아니니까." 켄트는 웃어댔다.
"하루라도 없는 것보다야 나아요. 곧 준비하고 올 게요." 서둘러 방으로 가는 모건의 발걸음은 가볍기 짝이 없었다.
오후부터 더워질지 모른다. 모건은 노란색 선드레스를 입고, 거기 알맞은 노란색 스웨터를 걸쳐 입었다. 이런 차림이라면 페리의 배 위에서 찬바람이 불어와도 우선 걱정이 없다. 머리에는 윤기가 날 만큼 브러시질을 했다. 신발은 걷기 편한 샌들로 했다.
노란 백에 브러시, 입술연지, 향수 그리고 지갑을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거울 앞에 서서 전신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방을 나왔다.
켄트는 포치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리가 그 방향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모건의 기척을 깨달았는지 그가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짙은 갈색 슬랙스에 베이지 색 셔츠, 그 복장이 금발머리와 햇볕에 딴 피부에 잘 어울렸다.
켄트의 눈길은 빨려들 듯 모건의 전신에 완전히 쏠려 있었다.
"멋지군. 야생의 데이지 같군.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 손을 잡게 해주지 않겠나." 켄트가 반쯤 익살스럽게 말했다.
모건이 주저주저하고 있자 켄트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주저하면서 그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해맑은 미소를 주고받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모건은 마치 처음 데이트 하러 가는 소녀 같은 마음이었다.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이 기분, 하루 동안 일에서 해방되어서 처음 가보는 곳에 가는 것이다.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게 틀림없다. 자아, 이제부터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선착장에서 페리의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허둥대며 달려가서 겨우 탈 수 있었다.
갑판의 난간에 기대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히든 섬이 자꾸만 멀어져 갔다. 파란 하늘을 갈매기가 높게 바람 속을 날고 있었다.
모건은 텐트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열심히 경치를 바라보는 체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에게 쏠린 채 움직이지 않는 켄트의 시선을 아플 만큼 의식하고 있었다. 끝내 견딜 수 없게 되어 어색하게 눈을 떨구고 훨씬 아래쪽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이는 해면을 들여다보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머리가 헝클어졌다. 그 머리에 어느새 다가온 켄트의 손이 조용히 와 닿았다.
"헤어스타일이 엉망진창이 돼 버리는군. 상관없나?"
"헤어스타일이라구요? 저는 겨우 브러시질만 할 뿐이에요. 그밖에 특별한 손질은 안 해요. 자연스럽게 한다는 걸까요."
"내가 알고 있는 여성들은 모두 스프레이로 모양을 만들고 거기다 다시 스카프로 감싸는 거야. 조금이라도 헝클어지면 그야말로 소동이 벌어진다구." 켄트가 빙긋 웃었다.
모건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떨렸다. 켄트는 밴드브레이크를 벗어서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바람이 세군. 이 항로는 언제나 그렇다구."
귓전에서 울려오는 켄트의 목소리 모건의 몸은 다시 떨렸다.
"이리 와요." 켄트는 바람을 막는 듯하며 팔을 잡았다. "햇볕이 드는 곳으로 가자구."
모건은 순순히 따랐다. 남성이 지켜주는 일에 익숙해 있지 않는 탓인지 묘하게도 간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매우 기분이 좋았다.
페리가 본토에 가까워오고 도착을 알리는 기적이 울려퍼졌다. 덜컹덜컹 크게 흔들리며 접근하니까, 승객이 일제히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켄트는 모건의 손을 잡고 트랙을 내려갔다.
포트 엘긴의 거리를 걸어가며 모건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릴 때 할아버지를 따라서 축제에 간 일이 있어요. 뉴욕 교외의 조그만 도시였지만 이 고을은 그곳하고 똑같아요. 비슷한 식료품점이나 교회가 있어서, 나는 이런 한가로운 분위기가 제일 좋아요. 오늘은 어쩐지 그 축제날 같은 기분이에요. 당신은 축제 같은데 가본 일이 있어요?"
"아니, 없어. 그렇지만 말만 듣고 있어도 가슴이 울렁거리는군." 켄트는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빨리 일을 끝내고 아침을 먹기로 하지." 거리를 걸어가며 켄트가 말했다.
"요전에 갔던 레스토랑으로 가는 거예요?"
"아니 북쪽으로 좀 가면 좋은 카페가 있어. 당신도 틀림없이 마음에 들 거야."
"북쪽이라니? 어떻게 가는 거지요?"
"오늘처럼 멀리 가고 싶을 때를 위해서 캐논네 가게에 지프를 맡겨두고 있는 거야." 켄트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모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켄트는 역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섬에서 살기 시작해서 벌서 꽤 오래 되었는데 지프 이야기는 지금까지 들은 일이 없었다.
식료품점에서 물건을 사고 두 사람은 우체국으로 갔다.
그 뒤에 두 사람은 주유소에 들렸다. 알퐁스 캐논은 하필 집에 없었지만 젊은 사내가 차에 휘발유를 넣고 있었다. 아마도 이 사람이 캐논이 말하는 일을 도와주는 ‘젊은이’인 모양이다.
사내는 켄트를 보더니 빙긋 웃으며 가게 벽에 걸려 있는 키를 가리켰다.
키를 손에 들고 뒷곁으로 돌아간 켄트가 지프를 타고 나타났다. 모건이 조수석에 올라타니까, 지프는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커브를 꺾어 돌아서 해안을 따라가는 길로 나왔다. 모건은 도어의 손잡이를 잡고 웃음소리를 냈다.
푸르름을 누비며 꾸불꾸불한 비좁은 길이 몇 킬로나 이어져 있었다. 모건은 시트에 기대고서, 쌓아올린 건초나 축축한 밭의 흙내음을 즐겼다. 도시에서는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자연의 향기였다.
이윽고 도로는 2차선 고속도로로 합류했다. 양편에 낡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잘 손질된 잔디밭과 정원, 색색의 꽃이 만발한 화단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마음속이 씻기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달려가니 앞쪽으로 큰 도시가 보였다. 쇼핑가나 레스토랑 거리도 있고 포트 엘긴보다도 규모가 큰 곳이었다.
켄트는 차를 멈추고는 모건의 손을 잡고 작은 카페로 데려갔다. 창에는 스트라이프의 차양이 걸려 있고, 보도에 세워진 파라솔 밑에는 캔디스트라이프로 가려서 칠해진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조용히 바라보면서 한가롭게 쉴 수 있는 것이다.
켄트가 주문한 아침식사는 다 먹지 못할 만큼 볼륨이 있었다. 햄, 계란, 빵, 케익, 막 구워낸 파이, 짙은 블랙커피 어느 것이나 맛이 있었다. 두 사람은 전부 먹어치우고 카페를 나왔다.
넓은 가로수 길 양쪽으로는 멋진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켄트와 모건은 한 집 한 집 돌아보기로 했다. 맨 처음에 고전 다실에 들어갔다. 그는 귀뚜라미 모양을 한 도어스톱이 마음에 든 듯 집어 들어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거기다 또 귀뚜라미를 사려는 거예요?" 모건이 놀려대듯 말하니까 켄트는 빙긋 웃고 나서 그것을 싸달라고 했다.
식기류 가게에서 영국제 본차이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켄트가 데이지 모양이 든 흰 컵과 소서를 발견하고 큰소리를 질렀다.
"이걸 본 순간 나는 누군가를 생각해 냈습니다. 과연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소리 내서 웃고 있는 두 사람을 점원이 이상한 듯 보고 있었다.
"그걸로 하시겠습니까?" 점원이 말했다.
"그래요, 싸주세요." 켄트가 모건에게 윙크하면서 말했다.
모건은 그 순간 심장이 멎어 버린 듯 느껴졌다. 마음의 동요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녀는 앞장서서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나왔다.
다음에 두 사람이 들린 곳은 레이스 가게였다. 옛날에서부터 지금 유행하는 것까지 전 세계의 온갖 레이스가 갖춰져 있었다. 섬세한 손수건이나 테이블크로스를 볼 때마다 모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블라인드 코너 앞에 이르니 켄트는 똑바로 손을 뻗어서 베일을 집어 들고 모건의 머리에 씌웠다. 순백의 레이스가 부드럽게 얼굴을 감싸고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켄트는 모건의 턱에 손을 대고 찬찬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멋지군, 모건. 성모마리아 같아요." 퍼뜩 볼이 붉어져 낯을 돌리고 모건은 베일을 벗어서 살짝 얼굴을 감쌌다.
그 다음에 오래 돼 보이는 책방으로 들어갔다. 먼지투성이 선방 위에 옛날 프랑스 요리책과, 셰익스피어 전집이 이웃하게 늘어세워져 있었다. 두 사람은 넉넉하게 시간을 내어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손에 들고 서로 미소를 주고받았다. 모건은 이전부터 읽고 싶었던 소설을 두 권, 켄트는 시집을 한권 샀다. 저마다 산 것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은 책방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어때? 즐거워?"
"네에, 매우. 저는 이 도시가 맘에 들었어요." 모건은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맘에 들 줄 알았지. 나도 이곳이 좋아서, 이쪽으로 올 일이 있으면 꼭 들리고 있는 거야."
지프로 돌아와서 두 사람은 이 도시를 뒤로 했다. 어느새 경치가 완전히 바뀌고 웅장한 자연이 눈에 들어왔다. 울퉁불퉁한 바위의 해안선이나 깊은 숲은 어디선가 본 캐나다의 포스터의 그대로였다.
켄트 쪽으로 향해서 모건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여기라면 창을 든 기마대와 마주쳐도 놀라지 않을 거예요."
"정말 그렇군." 켄트도 웃으며 끄덕였다.
모건은 마음속 밑바닥에서부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거리감이나 긴장감은 전혀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이라는 날이 특별한 날처럼 생각되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그런 기분이었다.
모건은 시트에 기대고 차례차례로 커브를 꺾어서 지프를 몰고 가는 켄트의 핸들 잡는 솜씨를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켄트가 언제나 이랬으면 - 밝은 웃음소리를 내고 농담이 서슴없이 튀어나오고, 일에 대한 고민거리 같은 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어제까지의 켄트와는 딴 사람인 것 같았다. 모건은 기분이 좋아 있는 켄트에게 기쁜 한숨을 쉬고 그의 옆얼굴을 몰래 살펴보았다. 그 순간, 켄트도 이쪽을 보고 방긋 웃었다. 모건의 심장은 금방 두근댔다.
켄트가 멋지게 커브를 꺾어 도니까, 지프는 포장도로를 떠나서 덜컹거리는 비좁은 길로 저어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 시간쯤 이어졌다. 끊겼다 하는 차바퀴 좌우를 따르며 지프는 달려갔다. 지프는 도랑이나 시냇물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건너서 숲속을 시원스레 달려나갔다. 차체가 크게 흔들릴 때마다 모건은 환성을 질렀다.
갑자기 하얗게 빛나는 모래사장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페리에서 본 눈에 익은 해변이었다. 켄트는 즐거운 듯 웃으며 엔진을 끄고 신발로 손을 가져갔다.
"뭘 하는 거예요?"
"신발을 벗고 있어. 자아 당신도 맨발이 되는 거야, 모래사장을 산책하자구."
모건은 샌들을 벗고 따뜻한 모래 위로 뛰어내렸다. 좀 뒤늦게 슬랙스 자락을 무릎까지 걷어 올린 켄트가 뒤따랐다.
천천히 걸어 나가니, 물거품이 이른 바닷물에 발을 씻고 이따금 물보라를 날리며 밀려갔다.
켄트는 한손 가득히 조약돌을 주워서 차례차례로 바다로 던졌다. 조약돌은 수면을 튕기며 날아서 첨벙 가라앉고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파문이 퍼져나갔다.
모건은 눈에 띠는 조약돌이나 조개껍질을 주우면서 걸었다. 혼자도 들 수 없게 되면 켄트가 받아들고 호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둘이는 새소리가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1킬로쯤 계속 걸었다. 어제까지의 아웅다웅은 어느새 파도 속으로 사라지고 서로가 마음을 허락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발자국을 더듬어 지프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켄트가 자연스럽게 모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모건도 주저 없이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발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모건이 중얼거렸다.
"이곳이 우리만의 해변이라면 좋을 텐데."
미소 지어 보이며 켄트가 끄덕였다. 지프의 엔진이 으르릉댔다.
"이제 섬으로 돌아가나요?"
"아니, 또 갈 곳이 남았어. 좀 더 드라이브하고 나서 저녁을 들기로 하지. 이 앞에 조촐한 가게가 있어."
차는 간선도로로 들어서서 한동안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갔다. 이윽고 커다란 커브에 이르렀다. 커브를 꺾어 든 순간 모건은 숨을 들이마셨다. 오른편에 펼쳐지는 숲속에 클래식한 호텔이 서 있었다. 좁은 길을 지나서 문에 이르는 동안 모건은 놀라운 눈빛으로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진짜 중세시대의 성 같았다. 장식용의 작은 탑도 있어서, 건물 전체를 키가 큰 상록수가 에워쌓고 그 아래 야생식물이 색색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켄트는 지프를 세우고는 손을 뻗어서 모건을 차에서 내리게 했다. 손을 마주잡고 입구로 향했다. 무겁게 생긴 출입문 옆에 스텐드글라스의 장식 창문을 노크하니까, 안에서 블랙타이의 초로의 사나이가 나타나 두 사람을 맞이했다.
"테일러 씨로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리 들어오십시오."
사나이의 안내를 받고 천장이 높은 홀을 가로 질러가면서 모건은 켄트에게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당신 이름을 알고 있나요?
빙긋 웃으며 켄트가 속삭였다.
"예약전화를 걸어 둔 거야. 이곳은 그다지 손님을 받지 않기 때문에 미리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식사를 하지 못하지."
판자벽이 된 제법 편해 보이는 방으로 두 사람은 안내되었다. 아무래도 프라이비트 다이닝룸인 듯했다. 이 방의 주인은 오늘은 켄트와 모건인 것이다. 레이스크로스가 깔린 둥근 테이블에 크리스탈 글라스나, 은식기가 죽 늘어서 있었다. 오래 사용된 나무로 된 마룻바닥은 세월의 무게로 중후하게 번쩍였고, 곁의 돌로 된 난로에서는 장작이 딱딱 소리를 내며 활활 타고 있었다.
켄트는 모건을 창가로 불렀다. 완만한 잔디의 저편에 포도밭이 널려 있었다. 넝쿨장미의 나무 받침 아래는 교외의 벤치가 생각나는 긴 의자가 만들어져 있고, 돌 블록이 깔려 있는 안마당에서는 비둘기가 먹이에 몰려 있었다. 멀리에 종려 잎으로 이엉을 한 마국산도 보였다.
모건은 한숨을 쉬었다.
"타임머신을 해서 중세의 시대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켄트 정말 멋있어요."
켄트는 의자를 끌고 모건을 앉도록 했다. 급사가 붉은 와인을 날라 왔다. 켄트의 잔에 조금 따랐다. 켄트는 와인을 입에 머금고, 좀 시간을 둔 다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나이는 글라스에 와인을 따르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이곳 와인은 여기서 담근 거야. 맛보라구. 정말 맛있지?"
입에 잘 맞고 향기가 참 좋았다. 와인을 잘 마시지 않는 모건에게도 저항감 없이 마실 수가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서 급사가 요리를 날라 왔다. 아직 주문하지 않았을 텐데, 모건은 놀랐다.
"전화로 요리도 주문했나요?" 급사가 방에서 나간 다음 모건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아니, 테이블을 예약했을 뿐이야. 이 집은 디너의 메뉴가 정해져 있어."
오도블은 조개껍질 모양을 한 시프드의 파이 위에 끼얹어진 몽클몽클한 크림소스가 입안에서 저절로 녹아들었다.
이어서 시금치에 잘게 썬 삶은 계란과 베이컨을 얹어서 풍미가 강한 드레싱으로 버무린 샐러드가 연이어 나왔다.
술잔이 비워지면 급사가 점잖게 와인을 따라주었다. 메인 디슈는 레몬의 흰 와인에 절인 것이었다. 함께 내놓은 포테이토와 양파에도 잔손이 가 있어서 예쁜 공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음식에 입맛을 다시며 켄트는 모건의 어린 시절로 화제를 돌렸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이전에 들었지만 부모님은 어찌 된 거야."
"아버지는 내가 네 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1년도 안 지나서 이번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예요. 그래서 절 할아버지가 길러 주셨어요. 할아버지는 나를 되도록 씩씩하게 키우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모건은 난로의 불을 들여다보았다.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저는 때때로 ‘할아버지는 무서워서 싫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할아버지는 엄하셨어요.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언젠가 내가 혼자가 될 테니까, 그때 가서 어렵지 않도록 하실 셈이었어요. 혼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길들이는 거이 자신의 의무이고, 장래 내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맞았어요. 나는 지금 혼자이지만 행복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릿광대로 자라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모건은 힘없는 미소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마음속으로 나를 사랑해 주셨어요. 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도 어떤 일도 모험이 되고 말아요."
"그게 당신이 히든 섬의 단조로운 생활을 참아내는 비결이로군. 그 생활도 마음 갖기에 따라서 모험으로 바뀐다는 건가?"
"그래요." 모건은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곧 켄트가 놀리는 거라는 걸 깨닫고 낯을 붉혔다.
켄트는 의자 등에 기대고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당신은 진심으로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있군." 켄트는 따뜻하게 말했다.
"그럼요. 그야 큰 모험이에요. 도시에서 자란 내게는 섬은 그야말로 딴 세상인 걸요." 고개를 떨군 채 양손을 들여다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이제까지 줄곧 내 스케줄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이었어요. 그것도 내 자신이 세운 스케줄이 아니고, 남에게서 주어진 스케줄. 학교에 다닐 때는 물론, 열다섯 살 때부터 학교가 끝나면 일을 해온 걸요. 괘종시계가 시간을 알리는 벨소리에 쫓기는 하루하루였어요. 지금 일하는 학교도 수업시간 사이사이에 벨이 울려요. 거기가 일이 끝나면 내가 공부하는 학교에 가니까요." 모건은 웃으며 덧붙였다. "올 여름에는 괘종시계와 헤어질 수 있어서 마음이 개운한 걸요."
"섬에서 혼자 외롭다고 생각지는 않나."
"외롭다뇨?" 모건은 험한 말투로 되풀이했다. "켄트, 저는 내내 혼자서 해왔어요. 뉴욕 같은 떠들썩한 도시에서도 아니 그런 도시이기 때문에 사람은 모두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혼자 살고 있다고 해서 쓸쓸한 것만은 아니에요. 저는 올 여름에 여기 와서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기 자신이 깨닫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게 되었어요. 일상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난 덕분이겠죠. 여러 가지 것이 새로운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어요. 뉴욕으로 돌아가서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의미에서 자신이나 생활을 소중하게 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모건은 어깨에 늘어뜨려진 머리를 털어냈다.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저는 섬의 고요함이 정말 좋아요. 쓸쓸하다고 생각한 일은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저는 혼자뿐만이 아닌걸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계시는 걸요."
켄트는 테이블에서 몸을 돌려 모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내가 일을 하고 있으면 당신이 바닷가를 배회하며 잡동사니를 주워 모으는 것이 보이지,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모건은 부끄러운 듯 미소 지었다.
"혼자서 산책하는 게 좋은 걸요. 보물을 줍는 것도요." 소리 내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잡동사니라고 말했지만……."
켄트도 따라서 웃어댔다.
"섬 생활 그 자체가 제게 있어서 얼마나 뜻 깊은 것인지 당신은 모르시겠죠. 해마다 여름이 되면 어디선가 한가롭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지만 현실을 캠핑 가서 어린이들이나 상대하는 게 고작이었어요." 모건은 피식피식 웃었다.
"아이들과 함께 캠핑을 가 보세요. 고요함이나 고독 따위란 결코 찾을 수 없어요. 모두가 나를 엄마 대신으로 생각하거든요. 아이들은 무엇이든 궁금한 게 있으면 날 찾는 거예요. 모두가 빈틈만 보이면 나를 호수에 집어던지겠다고 노리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 한 밤중에 파자마바람에 물에 내던져진 일도 있으니까요."
켄트는 모건의 찌푸린 낯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캠핑 가면 그런 것이 즐거움이지."
"올 여름은 예전과는 전혀 달라요. 하루 종일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는 걸요. 어머나, 물론 타이핑하는 일 외에의 시간을 뜻하는 거예요. 일에 대해서 생각 않는 건 아이에요. 다만 아침에는 몇 시에 일어나야 한다든가, 몇 시까지 어디를 가야 한다든가, 털털이 차를 몰아서 앞으로 몇 킬로를 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든가 하는 제약이 전혀 없잖아요? 그래서 휴가 같은 기분이에요. 급료가 있는 휴가예요."
순식간에 디너를 끝이 났다.
"어때? 이 호텔 마음에 들었나?"
"네에, 정말 멋있었어요." 볼이 달아 있었다. 와인 탓인지 난로의 불 탓인지 그보다는 가슴이 설레는 오늘 하루의 일들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다 켄트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도 매우 멋있다구." 켄트는 테이블 위에 있는 모건의 손을 따뜻하게 쥐고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간지럽혔다.
모건은 움찔해서 손을 빼내고 무릎 위에서 꽉 쥐었다. 붉어진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모건,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야." 켄트가 속삭였다.
그때 급사가 크림이 듬뿍 얹혀진 딸기를 디저트로 가져왔다. 모건은 마음이 놓였다. 심장은 당장 파열할 듯 소리를 내고 있었다. 켄트의 귀에도 들릴 만큼이었다.
디저트가 끝나고 켄트는 블랜디, 모건은 커피를 부탁하고 디너를 끝냈다.
태양은 서산으로 가라앉고 어슴푸레한 빛이 바깥 나뭇가지를 비치고 있었다.
어두운 정원을 지나 지프로 향해서 걸어가며 켄트가 속삭이듯 말을 걸어왔다.
"축제에는 따르기 마련인 솜사탕이나 사과엿을 사주지 못했군. 그러나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거야."
"솜사탕이나 사과 엿은 먹은 일이 있지만 성에서의 디너는 처음이었어요. 크리스탈 글라스로 와인을 마신 것도 말이에요. 정말 멋있었어요. 저는 오늘 일을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도." 지프에 오르며 모건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포트 엘긴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모건은 문득 생각나서 물어 보았다.
"당신은 자신의 일은 하나도 말해 주지 않는군요." 우람한 몸을 바라보았다. "형제는 없나요?"
"없어." 달갑잖은 듯 켄트는 말했다. "나는 외독자로 아버지는 돌아가셨지. 어머니는 팜 스프링에 살고 계셔."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모건이 다른 것을 물으려고 입을 열려 했을 때 갑자기 켄트가 말했다.
"이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이 말 때문에 모건의 호기심은 오히려 부풀어 올랐다. 한참 있다가 모건은 다시 물었다.
"시나리오를 쓰지 않을 때는 뭘하고 계세요?"
"다른 걸 쓰고 있지."
"어머나! 어떤 거요?"
"당신이 들어도 별로 재미없는 것뿐이야." 여전히 쌀쌀한 대답이었다.
이윽고 지프는 주유소에 닿았다.
"마지막 페리를 놓친 것 같군. 조한테 배를 부탁해야지. 전화하고 올께."
두 사람은 선착장으로 가서 물 위에서 움직이는 배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서 있어도 모건의 마음속에는 켄트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는 바람으로 가득했다. 끈질기게 달려드는 강아지처럼 마음을 괴롭혔다.
끝내 모건은 입을 열었다.
"이봐요, 켄트. 내 질문이 귀찮아요?"
"일을 하는데, 내게 대해서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잖아? 비서가 고용주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나?"
이 대답은 커다란 쇼크였다 모건은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어둠속에서 그의 머리가 움직이는 듯했다. 켄트는 찬찬히 모건을 바라보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모건, 당신 몇 살이지? 스무 살쯤인가."
모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의 갑절쯤 나이를 더 먹었지. 알겠나, 모건. 나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현실에 직면해 왔다. 세상에는 남의 일을 이것저것 캐내서 기뻐하는 녀석도 있고, 일부러 사실을 뒤틀어서 중상하는 녀석도 있어. 과거에 나는 그런 녀석들 때문에 혼이 난 일도 있었어. 이제 앞으로도 그런 일은 또 있겠지. 세상이란 그런 거야." 켄트는 말을 멈추고 성냥을 켜 담배에 불을 붙이자 연기가 허공으로 향해 자욱이 깔렸다. "당신이 보기에 시니컬하게 사는 법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내게 있어서는 몸을 지키는 수단이야. 당신이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 조작된 내 소문을 들을 일도 없을 거야. 모건 나는 그게 좋은 거야……"
모건이 뭔가 말대꾸를 하려고 입을 벌리려고 사는데 켄트는 그녀의 입술에 손을 갖다 댔다.
"아무 소리 말아, 모건. 나는 ‘켄트 테일러와 지낸 여름의 추억’이라던가 ‘나는 켄트의 팔 안에서 달아올랐다’라는 수기는 싫단 말이야."
모건은 뒷걸음질 쳤다. 벌컥 화가 나서 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따끔하게 말했다.
"모욕이군요! 내가 그런 수기를 쓸 까닭이 없잖아요."
등을 돌리고 떨어져 가려고 하는 모건을 켄트는 손을 뻗어서 붙들었다.
"화내지 말아줘, 곧잘 있는 일이니까. 혹시 돈더미가 눈앞에 쌓여지면 마음이 흔들릴 게 틀림없어."
켄트가 모건의 몸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거야." 켄트가 중얼댔다. "정말 자주 있는 이야기지. 나는 자주 그런 기사거리가 되었어, 면역이 되어 있지만."
"저는 당신 기사 같은 건 읽은 일이 없어요." 모건은 노여움을 폭발시켰다. 누가 무명의 시나리오 라이터의 스캔들을 기뻐한다는 거야?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지만 모건은 노여움 탓인지, 켄트가 손을 갖다 댄 탓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배의 엔진 소리가 들려와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끊겼다. 조가 미소 짓고 있었다. 켄트는 먼저 올라타서 손을 내밀어 모건을 배로 이끌었다. 시트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모건은 단추를 잠그고 몸을 굽혔다. 배는 얕은 데로 전진했다. 앞바다로 나오니 엔진의 회전이 빨라지고 속력이 빨라졌다. 배가 크게 흔들릴 때만다 모건은 뱃전을 다시 온몸이 박살이 날 것 같은 진동을 꼭 참았다. 바람이 머리를 거꾸로 흩날렸다. 빨리 닿으면 좋을 텐데.
켄트는 담배를 바다에 던져 버리고는 모건의 어깨에 손을 감았다. 켄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힘을 뺐다. 갑자기 모건의 가슴에 뜨거운 전율이 끓어올랐다. 이 거친 항해가 언제까지고 끝나지 말았으면 좋으련만, 이대로 오래오래 켄트의 팔안에 있고 싶다.
보트가 선착장에 닿으니 켄트는 조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모건의 손을 잡았다. 손을 이끌면서 모건은 로지로 걸어갔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간 곳에서 켄트가 말을 걸어왔다.
"떨고 있잖아. 춥지? 난로에 불을 지펴 줄게." 그대로 곧 방으로 돌아가서 켄트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줘야겠지. 그렇지만 즐거웠던 하루를 끝내는 게 아쉽기 짝이 없다. 켄트가 힘껏 끌어안아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려운 것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속 어딘가에 그에게 끌려가는 자신의 무서운 마음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켄트는 일어나서 불이 붙은 걸 확인하고는 뒤돌아서 모건을 보았다. 그녀는 양팔을 꼬옥 몸에 감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겁을 먹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러나 있었다. 마치 숲속에서 뇌성에 겁먹은 새끼사슴 같았다.
켄트의 표정이 풀리고 눈초리에 웃음이 모아졌다. 방을 가로질러 모건에게 다가가며 그는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걱정하지 마, 모건. 나는 신경질적이긴 하지만 물고 덤비지는 않을 테니까."
모건은 억지로 웃어 보이고 곧 눈을 내리깔았다. 벨벳 같은 짙은 속눈썹 아래서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켄트의 손이 뻗어오니까. 그녀의 몸이 움찔하고 떨었다.
"오늘은 재미있었나?" 켄트가 조용히 물었다. 모건의 맥박이 갑자기 빨라져 갔다.
"정말 즐거운 하루였어요." 모건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켄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모건을 지켜보았다.
"이봐요, 이제 일하실 시간 아녜요? 저는 자겠어요."
켄트가 어깨에다 손을 올려놓고 살짝 속삭였다.
"모건, 그렇게 상냥하게 굴지 말아요. 마음이 더욱 흐트러지잖아."
"쉬세요, 켄트." 모건은 목소리를 짜냈다. 목구멍에 소리가 걸려버리고 만다. ‘이젠 가야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아직 가지 말아 줘."
몸이 굳어지는 걸 스스로 알 수가 있다. ‘그는 뭐라고 했나?’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녔고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저는 피로해요. 지금 당장 눈이 감기려고 하는 걸요.‘ 이건 거짓말이었다. 마음이 흥분되어 있어서 오늘밤은 도저히 잠을 자지 못할 것 같다. 켄트의 손이 닿고 있는 곳은 불탈 만큼 뜨거웠다. 심장은 두근두근 큰 소리를 내며 입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켄트는 억지라도 막으려는 듯 어깨에 올려놓은 손에다 힘을 주었다.
머릿속에서 경보벨이 울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다시, 단 두 사람끼리 이 섬에서 지낼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모건은 어깨를 흔들어 켄트의 손을 떨쳐버렸다.
"안 돼요, 켄트. 정말 녹초가 됐어요. 쉬도록 하세요."
종종걸음으로 도어까지 갔지만 켄트의 무쇠 같은 손에 다시 어깨를 붙잡히고 말았다. 켄트는 모건의 어깨를 거칠게 홱 돌렸다.
"부탁이니, 조금만 더 여기 있어 저. 왜 도망치는 거야? 그토록 내 곁에 있고 싶지 않나?"
켄트의 손이 어깨에 파고 들어 모건은 아픔 때문에 몸을 뒤틀었다. 켄트 곁에 있으면 안 된다. 손닿기만 하면 하늘과 땅이 뒤덮어질 것 같다. 너무 위험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 것만 같다.
"네에, 이제 충분히 함께 지냈잖아요. 이제는 내 시간이에요. 쉬게 해줘요."
그렇게 말하고 낯을 돌린 순간 켄트가 머리털을 움켜쥐고 당겼다. 항의하려고 벌렸지만 켄트는 입술을 거칠게 덮는다. 양손을 몸에 휘감고 힘껏 끌어당겼다. 모건은 켄트의 몸을 밀쳐내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손끝에 닿은 것은 부풀어 오른 근육과 가슴 털이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켄트를 바라보면서 이제까지 몇 번이나 이 우람한 가슴을 만져 보았으면 했을까. 저항하던 힘이 몸에서 쑥 빠져 나갔다.
모건은 근심스런 듯 켄트의 어깨에 손을 갖다 대고 켄트의 키스를 받았다. 입술을 포개면서 켄트는 도어를 밀쳤다. 도어가 열리자 켄트는 모건을 안아들고 그녀의 방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베드에 살짝 내려놓고 다시 힘껏 끌어안았다.
갑자기 몸이 자유스럽게 되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귀를 기울여 보니 켄트가 셔츠를 벗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그는 모건의 드레스에 손을 갖다 댄다.
"뭘, 뭘 하는 거예요." 모건은 제 정신이 들었다.
"당신 시간을 좀 얻을까 해서 말야." 손가락 끝으로 단추를 매만졌다.
"그만 둬요!" 켄트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 키스는 싫어하는 느낌이 아니었는데, 모건……"
"당신의 잘못된 생각이에요." 베드에서 내려서서 켄트를 쏘아 보았다. "이 이상 아무 짓도 하지 마세요. 나는 남자와 불장난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나가 주세요. 자아, 빨리 나가 달라구요." 가슴속의 갈등이 눈물이 되어 넘쳐흘렀다.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했다
켄트는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볼의 눈물을 훔쳐내고 턱에다 손을 가져가서 얼굴을 들게 했다.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모건은 눈을 내리깔았다.
"모건, 당신 같은 여자는 이제 없다고 생각한 거야." 켄트는 입술로 눈물을 빨았다.
아아, 이대로 켄트 앞에 몸을 내던져 버리고 싶다.
이성을 되찾으려고 자신과 싸움하고 있는 모건을 남겨둔 채 켄트는 성큼성큼 그 자리를 떠났다. 도어가 꽝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모건은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되씹으며 그저 멍청하게 서 있었다.
6
본토에서 지낸 날의 경계로 해서 켄트와 모건의 관계는 약간 변화가 있었다.
켄트는 여전히 서재에 파묻혀 있었지만 모건이 실수를 해도 이전처럼 덮어놓고 나무라지 않았고, 잘못된 까닭을 제대로 들어주게 되었다.
모건은 처음에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망설여졌다. 켄트의 마음의 동향을 알 까닭도 없지만, 아무튼 바람직한 변화임에는 틀림없었다. 모건은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기를 몰래 빌었다.
어느 날 오후, 조가 산더미 같은 편지와 신문을 정하러 왔다. 그것을 직접 받아 든 켄트는 편지를 데스크에 던져 버리고 신문을 펼쳐 보았다. 편지는 나중에 시간을 갖고 읽을 셈인 듯했다. 어떤 신문이고 제목만 읽고 베드 옆의 테이블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모건은 언제나처럼 오후의 수영을 끝내고 로지로 돌아왔다. 머리를 닦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켄트가 손거울과 가위를 손에 들고 드레스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턱에는 셰이빙 크림이 듬뿍 칠해져 있었다. 그는 어색한 듯 빙긋 웃었다.
"수염을 깎을 참이었는데 막상 깎다보니 머리도 커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 되어서 잠깐 당신 거울과 가위를 빌리려고 왔지."
"네에, 쓰세요. 그렇지만 우선 수염을 먼저 깎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렇군. 당신 세면대를 써도 되겠나?"
켄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베드룸으로 들어가서 수염을 깎기 시작했다. 모건은 저도 모르게 뒤따르고 있었다. 진즈를 입었을 뿐 상반신의 발가벗은 사내가 자기 욕실에서 수염을 깎고 있다. 처음 보는 탓인지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모건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켄트의 우람스런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켄트는 크림을 씻어내고 타월로 닦은 다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문득 거울 속에서 모건과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 커트는 잘 하나?"
"남자의 머리를 깍은 적은 없는 걸요."
켄트는 휙 돌아보았다.
"머리가 거추장스러워서 못 견디겠어. 뒤도 짧게 하고 싶은데 혼자서는 할 수가 없어. 모건 커트해 주지 않겠나."
켄트는 주저하는 모건의 손을 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의자를 들고 마당으로 나와서 가위를 모건에게 건네주었다.
"자아, 해달라구."
모건은 목에 걸고 있던 타월을 갖고 켄트의 목에 둘렀다. 조심스럽게 머리털을 한웅큼 쥐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빗을 갖다 댔다. 가위질을 하는 동안 주저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농담을 말할 여유도 생겼다.
"손이 잘못 미끄러지면 어떻게 되죠?" 가위를 벌리고 머리 밑둥에 갖다 댔다.
"그런 짓을 하면 두들겨 패줄 거야."
"당신이 그런 폭력을 쓸 수 있겠어요?" 모건은 다시 한번 머리를 움켜쥐고 가위를 벌렸다.
"자아, 어떨까. 시험 삼아 해볼까."
"네에, 네에 알겠습니다. 주인어른. 푸른 멍이 들기 전에 그만 두는 게 좋겠군요. 그런데 머리는 마음에 드셨나요?"
켄트는 거울을 쳐들었다. 여름 햇살을 받고 금발머리가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셰이빙 크림의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모건은 이제 막 커트한 머리에 살짝 빗을 갖다 댔다. 안 돼. 이런 태도는 너무 친한 체하는 거야. 몸에 쇼크가 스쳤다.
켄트는 모건의 미묘한 변화를 깨달았는지 천천히 일어서서 그녀를 찬찬히 보았다.
"당신이 오래 곁에 있어 주지 않으면 안 되겠군. 이렇게 커트하는 솜씨가 좋고, 그밖에도 숨은 재주가 많을 거야."
"저, 저는 무슨 일이고 스스로 해왔거든요? 그래서 대개의 일은 해낼 수 있어요. 제 머리도 제 손으로 자르는 걸요."
"이 머리를 자르는 건 죄가 된다구." 켄트는 모건에게서 머리를 손가락에 감아대며 말했다.
두 사람은 그대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한참 지난 뒤에 켄트가 허리를 굽히고 달콤한 입술을 살며시 내밀었다. 거기에 대답하듯 모건의 손은 빗을 떨구고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등으로 손을 가볍게 감쌌다. 켄트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모건을 억세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귀에 켄트의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안 돼. 켄트 하고는 거리를 두고 상대해야지. 그렇지만 켄트의 손이 와닿을 때마다 욕망은 이전보다 더욱 높아져 갔다. 정열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간 나중에 남는 것은 후회뿐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켄트의 손끝이 모건의 살갗을 더듬었다. 환희와 괴로움이 동시에 명안을 뚫고 지나간다. 쾌감에 빠져들면 안 된다.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해야지.
‘안 돼.’ 머릿속이 혼란해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켄트에게 거역할 수도 없다.
켄트의 손은 온 전신을 쓰다듬으며 입술은 살갗을 더듬으며 욕망의 불을 당기고 있었다. 모건은 하는 대로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애무는 다시없는 희열이었다. 켄트가 마지막 선을 넘어서더라도 틀림없이 받아들이고 말 것이다. 그의 팔 안에서는 내게 있어서 마치 천국 그것이었다.
켄트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왔다. 모건은 맥박이 갑자기 빨라지고 체온이 자꾸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입술을 가슴께서 움직이며 켄트는 브래지어 끈을 찾아냈다.
켄트는 천천히 몸을 굽히고 모건을 안아 올려서 로지로 걷기 시작했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자기 방으로 들어가 그녀를 내려놓고 그 곁에 몸을 눕혔다.
‘안 돼, 이대로 몸을 맡겨버리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모건은 켄트의 목에 팔을 감고 끌어당기고 있었다. 활짝 열려 있는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도 달아오른 몸을 식혀주지 못했다.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신문이 바람에 날려서 베드로 떨어져 버렸다. 모건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켄트는 모건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자기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모건은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욕망의 그림자가 떠올라 있었다. 자기 얼굴에도 같은 그림자가 떠올라 있겠지. 두 사람 사이에 타오르는 욕망의 불길을 끌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켄트는 모건의 베갯머리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고 있는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그것을 베드 밑으로 내려놓으려 집으려고 했을 때 신문의 기사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는 몸을 일으켜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벌떡 뛰어 일어나서 베드 끝에 걸터앉았다.
모건은 켄트 쪽으로 몸을 다가갔다.
"왜 그래요, 켄트. 무슨 일이 있어요? 신문에 좋지 않는 거라고 나와 있나요?"
켄트는 쏘는 듯한 눈초리로 모건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신문에 손을 뻗으려고 했을 때 켄트는 벌떡 일어섰다. 격한 노여움 때문에 얼굴에 이상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당신 친구가 뉴욕 프레스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지."
모건은 당혹해서 켄트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그런데 그건 왜요……"
"역시 그랬군." 켄트는 느닷없이 소리 지르고는 신문을 꼬깃꼬깃 뭉쳐서 벽에다 휙 던졌다. "왜 당신 거짓말을 그리 쉽게 믿어 버린 거지. 당신이란 여자는…… 그토록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정말 웃기는군."
혼잣말로 켄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날 밤, 당신이 처음 여기 왔던 밤에 나는 직감에 따라서 당신을 당장 쫓아 보냈어야 했어." 켄트의 말이 마치 매질하듯 가슴을 때렸다. "그쪽에서 그럴 마음이라면 나도 맞서야 하지 않겠어, 모건 앤더슨. 당신은 이 일을 끝장 내보라구. 그리고 나를 끝까지 미워하라구. 자아, 이 방에서 나가지. 당신 얼굴을 보기도 싫어. 내 프라이버시에는 끼어들지 마!"
켄트는 모건의 팔을 거머쥐고 베드에서 끌어내렸다. 모건은 어이가 없는지 제방으로 뛰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혼자가 되고 보니 새삼스럽게 가슴의 아픔이 커져가고 있었다. 모건은 몸이 굳어져서 베드에 쓰러졌다.
7
미칠 듯 노여움에 찬 켄트의 얼굴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한 욕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모건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가 노여워하는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신문에 뭔가 쓰여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켄트는 그것을 내 탓이라고 넘겨짚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내용의 기사가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좋지 않은 일은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며 모건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두 눈을 꼬옥 감았다. 켄트가 화를 내기 시작하기 전의 달콤한 한 대를 생각해 보았다. 켄트의 그 부드러운 입술이나 짜릿한 팔의 감촉 - 금방 몸이 사랑의 정열로 달아오른다. 그 몇 분 동안의 정열의 불길은 지금도 기억속에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그때의 나 자신은 완전히 의지를 잃고 있었다…….
모건은 갑자기 공포감을 느꼈다. 두 사람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틈이 생겨 버린 지금도 켄트가 그럴 마음을 품고 있다면 나는 전신을 내던져 버리고 말 것이다. 도대체 왜 이토록 약한 인간으로 전락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젠 나로선 어쩔 수 없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켄트의 손에 걸리면 어쩔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이제까지 켄트와 같은 남자와 어울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46시간 중 마음에 드는 여자를 항상 곁에 두고 싫증이 나면 주저하지 않고 새 여자로 바꿔 버리는 사내, 켄트는 바로 그런 남자다. 나는 얼마만큼이나 켄트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모건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켄트는 틀림없이 내가 사랑이나 이성이나 남성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을 비웃고 있겠지. 할리우드의 유명인과도 친교가 있는 켄트는 아름답고 매력이 넘치는 여자들과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게 틀림없다. 켄트의 주의를 끌려하다니 생각하는 사람이 어리석다.
몇 차례 몸부림쳐 보지만 마음이 무겁고 답답한 것은 쉬 풀리지 않는다. 이곳은 히든(숨어 사는 집)이라는 이름 그대로 정말 적적한 곳이다. 켄트는 이곳에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마, 그는 잠시 동안 그 적적함을 견딜 수 없게 된 것뿐이다. 사실은 나라도 사람이 그리울 것이다. 그럴 때 켄트의 애무는 나를 꿈속의 세계로 데려다 준다.
켄트의 팔에 몸을 맡겨두고 있으면 자신이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여성이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 켄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뿐이 아니라 오히려 싫어하고 있다. 우리 둘사이에는 따뜻한 전율 같은 건 없다. 언제나 다투기만 하지 서로를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켄트는 내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타이핑이 필요할 때와 맛있는 요리가 먹고 싶을 때만 나라는 여자가 곁에 있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단순한 비즈니스로 좋은 여자라는 것뿐이다.
어제의 사건만 해도 그렇다. 켄트는 다만 내가 가까이 있는 여자니까 상대하려 했을 뿐이다.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던 게 틀림없다. 켄트는 내가 일을 끝내고 이 섬을 떠나고 나면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켄트는 서재에 틀어박혀서 일을 계속하면서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모건은 도어 저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방을 나갈 때는 켄트와 마주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조심했다. 신경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켄트와의 사이에 생긴 틈은 다시는 메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켄트의 마음속에 있는 완고한 노여움은 그 직전에 보였던 뜨거운 정열 따윈 날려 버릴 만큼 컸다. 모건은 오로지 사태가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도록 빌고, 하루라도 빨리 일을 끝내고 이 외딴섬과 까다로운 남자로부터 도망쳐 나갈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때 모건은 혼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 앞바다로 눈을 돌려보니 페리가 자꾸만 가까워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물이 얕은 곳을 달려가며 이마에 손을 갖다 대고 페리의 움직임을 보았다. 페리는 천천히 선착장에 닿았다. 왜 여기서 멈출까, 발코니에 노란 깃발도 내걸리지 않았다. 아무튼 켄트는 지금쯤 잠이 들었을 테니 기를 내 걸 시간도 없을 테지만.
틀림없이 켄트 앞으로 보내오는 짐이 있을 것이다. 모건은 선착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목선이 선착장에 이르기 전에 금발의 여성이 페리에서 내려서 로지로 향해서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여우한테 홀린 듯한 기분으로 모건은 타월을 집어 들고 로지로 뛰어 돌아왔다. 페리는 닻을 올리고 파도를 가로질러 나갔다. 선착장에는 큼직한 슈트케이스가 쭉 늘어서 있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굴까? 그가 누구이건 한동안 이곳에 머물 셈인 듯했다. 페리는 차츰 보이지 않게 멀어져 갔다.
뒷문을 통해 집안에 들어온 모건의 귀에 쩌렁쩌렁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일을 방해 당하고 싶지 않다고 남자 비서와 이 섬에 머물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스탄티슈 감독이 파티 석상에서 당신 이야길 하잖아요. ‘켄트는 여비서와 단둘이서 사이좋게 지내는 것 같애’라구요! 이봐요, 듣고 계세요? 우리 어제 오늘 사귄 사이가 아니잖아요. 저는 그렇게 간단히 타이피스트 계집애 따위한테 당신을 넘겨주지 않을 거예요."
"나는 누구 것도 아니야, 오드리. 레이놀스가 정말 내가 젊은 여자와 단둘이서 여기 있다고 소문을 퍼트렸나? 아무튼 당신이 여기 있는 걸 바라지 않아. 내일 아침 제일 먼저 페리로 돌아가 주지 않을 테야."
"그런……" 켄트의 시선이 문 쪽으로 옮겨진 걸 깨닫고 오드리라고 불리운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뒤돌아보며 모건을 힐끗 바라보았다.
모건은 오드리의 얌체스런 눈길에서 피하려고 썩 안으로 들어갔다. 무의식중에 타월을 몸에 찰싹 감고 있었다. 머리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려서 볼을 타고 내렸다.
모건은 적대감정을 드러내놓고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켄트와 이 사람이라면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키는 훤출하고 알맞게 햇볕에 탄 볼에 금발이 비치고 스타일도 뛰어났다. 페리에서 강한 바람에 날렸을 텐데도 머리는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머리뿐만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의 태양을 마음껏 쬔 황금빛 살결, 실크 스커트에서 훤출하게 뻗어 내린 맵시 있는 다리 어느 곳도 빈틈없이 완벽했다.
"켄트, 저 사람을 소개해 줘요." 라고 오드리가 강경하게 말했다.
"모건 앤더슨이야. 모건 이쪽은 오드리 알랜이야."
모건은 오드리와 악수를 나누었다. 손톱은 매니큐어로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오드리는 모건의 손질이 되지 않은 손톱을 보고 있었다. 모건은 한손으로 단호하게 타워을 움켜쥐고 또 한 손을 뒤로 돌렸다.
"처음 뵙겠어요, 미스 알랜. 잠깐 실례하고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모건은 뒤로 물러서서 방을 나와서는 제 방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오드리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안심했어요. 이곳이 제아무리 외딴곳이라도 당신 같은 사람이 저런 젖비린내 나는 시골계집애를 상대할 까닭이 없는 걸요."
모건은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도어를 힘껏 닫고 베드를 발로 걷어찼다. ‘젖비린내 나는 시골 계집애라니? 저런 여자한테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야!’
노여움을 삭이며 샤워 밑에 서서 머리를 문질러 감았다. 30분 뒤, 겨우 욕실에서 나와서 모양을 내기 시작했다. 섬으로 와서 한 번도 써본 일이 없는 드라이어와 칼라로 머리를 세트했다. 다음에는 메이크업, 화장품은 거의 쓰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끝나니 실크드레스를 몸에 걸쳤다. 뉴욕에서 큰맘 먹고 산 드레스였다. 마지막으로 또 한 번 머리에 브러시질을 하고 전신을 거울에 비추고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나는 이것으로 힘을 다한 거야. 그 여자는 디너 용, 값비싸고 섹시한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있을 테지. 모건은 마음을 가다듬고 방을 나왔다.
집안은 조용했다. 모건은 약한 불빛이 켜져 있는 리빙룸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주방으로 가 보았다. 천장의 불빛이 테이블에 올려진 메모를 비치고 있었다. 켄트의 글씨였다.
‘방을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어서 오드리와 본토에 간다. 돌아오는 건 늦어질 예정.’
그토록 힘들여 준비했는데 버려두고 가버리다니! 차려 입은 모습을 보아줄 사람도 없다. 약이 올라서 메모를 똘똘 말아서 냉장고를 향해서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단숨에 방으로 뛰어 돌아왔다. 거울에 자기 모습이 비쳤다. 멋 부린 처량한 모습이-.
모건은 베드에 엎드려서 그만 흐느끼고 말았다. 한번 흘러내리기 시작하니 눈물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오드리 알랜, 얼마나 얄미운 여자일까? 켄트를 이 섬까지 쫓아와서 교묘하게 팔 안에 뛰어든 그 여자, 둘이는 지금쯤 화사한 레스토랑에서 디너를 즐기고 있을 테지. 요전에 데려다준 그 성같은 로맨틱한 가게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협을 건너갔을까. 밖은 벌써 어둠이 짙었고 페리의 마지막 편은 훨씬 전에 통과했을 테고 조한테 연락할 수단도 없다.
다시 눈물이 흘러 넘쳤다. 그런 건 어찌 됐든 좋다. 그 여자가 이곳으로 온 것이 가장 귀찮고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입술을 깨물며 드레스를 벗고 화장을 지웠다. 예쁜 자수가 놓여 있는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맨발 채로 주방으로 가서 차를 따랐다. 방으로 돌아와서 베드 위에 올라앉아 차를 마셨다.
둘이서만 자유롭게 어디든지 가면 되는 거야. 두 사람이 뭘 하거나 내가 있건 말건 상관없는 존재인 거야. 켄트는 자기 일밖에 생각하지 않으니까.
한 시간쯤 지났다. 모건은 아직도 베드에 앉아 있었다. 마음을 달래려고 시작한 트럼프의 카드를 모으고 있었다. 피너츠버터의 샌드위치를 입안에 집어넣으면서 벌써 몇 백번이고 자신을 타이르고 있었다. 나는 조금도 상처받지 않은 거야. 켄트가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나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차츰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모건은 베개에다 등을 기댔다. 잠깐 눈을 감는 것뿐이야. 켄트와 오드리에 대해서 따져볼 생각은 없다. 어떻게 섬을 빠져 나갔는지가 알고 싶을 뿐. 그러나 별로 깊은 뜻은 없다. 다만 호기심일 뿐. 이제 자기로 할까, 아니 아직 이르다. 좀 더 기다려 보자…….
모건은 눈을 떴다. 언제나처럼 아침 해가 비쳐들고 있을 방은 어두웠고 거기다가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이나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였다. 날씨를 오드리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바보스럽지만, 하늘마저 그녀에게 반발하고 있는 것같이 고소하다. ‘천사의 눈물’ 할아버지는 비가 내리는 것을 이렇게 부르고 있었지. 며칠 동안 계속된 맑은 하늘 뒤에 오드리가 불길하고 어두운 구름을 몰고 이 낙원에 쳐들어온 것이다.
낙원이라니? 농담이 아니야. 이곳에는 노여움과 다툼과 적대감정이 있을 뿐이다. 켄트의 팔 안에서 맛보았던 기쁨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니까.
모건은 문득 생각이 나서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일은 꿈이었을까. 아니 어슴푸레했지만 기억이 났다. 누군가가 살짝 머리를 들어서 베개에다 올려놔 주었다. 크럼프는 깨끗이 치워져 있고 담요도 덮여 있다. 그리고……. 그거야 말로 꿈이었을까? 관자놀이께에 입술을 갖다 대곤 내 이름을 부르는 듯싶었는데…….
이게 어찌된 셈인가! 분명히 카드를 펼쳐 놓은 채 불도 끄지 않고 잠들어 버렸을 것이다. 켄트가 그런 나를 발견하고 담요를 덮어준 거야. 어젯밤은 모양이 엉망이었는데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울다가 부어 오른 눈, 흐트러진 머리, 나이트가운도 헝클어져 있었을 게 틀림없다. 아이 부끄러워, 트럼프를 허트러 놓은 채 얇은 나이트가운밖에 걸치지 않은 몸을 드러내 놓고 베드에 기댄 채 마치 어린애 같군.
켄트와 오드리는 그런 나를 보고 웃었을까. 오드리는 문 앞에 서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을 것이다. 약이 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늦도록 자고 있을 테니 혼자서 멀리 가버리자. 그렇지만 어디로?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있으니 로지에서 나갈 수도 없다. 아무튼 이 방에서 꼼짝 않고 있으면 되는 거야. 이젠 일어나서 아침을 먹자. 켄트도 오드리도 이런 시간에 일어나 있지는 않겠지. 모건은 로브의 끈을 묶고 주방으로 갔다.
프라이팬에 넣은 버터가 녹기까지 토스트에 버터를 발랐다. 날씨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에도 회색 구름이 끼어 있었다. 멍청하게 계란을 뒤섞어서 프라이팬으로 흘러 보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켄트! 이렇게 일찍 어찌된 거예요?" 모건의 얼굴에 당황하는 붉은 기가 감돌았다. 체크무늬 셔츠 위에 파란 스웨터를 끼워 입은 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프라이팬을 들여다보았다.
"계란이군. 마침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참이야."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어젯밤은 밤을 세웠다구. 당신도 그랬나?" 켄트의 목소리는 따뜻하게 가슴을 때렸다.
"아아뇨, 저는 이제 막 일어났어요." 켄트의 맑은 눈동자는 보고 싶지 않았다. 모건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계란을 또 한 개 깨뜨렸다. 켄트는 어제 일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육지로 건너갔는지 묻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모른 체하고 있자. 그러나 손놀림은 매우 어색했다.
모건의 마음속을 알아차렸는지 켄트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 전에 돌아오기 잘했지. 어젯밤 당신은 어떻게 하고 지냈지?"
"샌드위치를 배불리 먹고 트럼프를 했어요. 오랜만에 혼자 있게 되어서 정말 즐거웠어요." 토해내 듯 이렇게 말하고 프라이팬의 계란을 화난 김에 뒤섞어서 접시에 담고, 켄트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접시를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켄트는 웃음을 참으며 중얼댔다.
"꽤 트럼프에 열을 올렸던 모양이지, 피로에 지쳐서 그대로 잠들어 버린 거지?"
"오늘 아침, 누군가가 담요를 덮어준 것 같애요."
"흥, 당신 나이트가운은 매우 섹시하던 걸."
모건은 켄트의 시선을 피하며 토스트를 가지러 일어섰다. 켄트가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이 나오질 않는다.
"어젯밤은 잘못했어, 모건. 당신도 함게 갈 거라고 방으로 갔었는데, 몇 번씩 노크해도 대답이 없었다구. 일부러, 무시할 셈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오드리가 그 모양이니 당신도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내 샤워하고 있었어요." 켄트는 어젯밤 머리의 세트나 정성들인 화장을 눈치 챘을까?
"오드리는 처음부터 육지에 갈 셈으로 페리에 타기 전에 마중 나올 배를 수배했던 거야. 나도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당신이 그녀의 독설에는 진저리가 났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젖비린내 나는 시골 계집애한테 그토록 마음 써주시다니 정말 친절하시군요. 저는 당신들이 없는 덕에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었어요. 당신도 오드리의 상대라면 화나는 일도 없고 즐거웠을 테지요."
모건은 접시를 싱크대에 올려놓고 주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도어까지 가 닿기 전에 켄트의 팔이 모건을 붙들고 있었다. 모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서 뺨을 갈기려고 했다. 켄트는 어렵잖게 그 손을 붙들고 비틀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켄트의 얼굴 따윈 보고 싶지도 않다. 모건은 낯을 돌렸다. 켄ㅌ는 한손으로 모건의 양손목을 쥐고, 또 한쪽 손을 턱에 갖다 대고 얼굴을 들게 했다. 켄트의 어두운 얼굴이 측은하게 눈에 비쳤다.
"거짓말 하지 마, 모건."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체하지 말아요."
켄트의 눈초리가 험해졌다. 이런 일로 겁을 먹거나 할 게 뭐야! 모건은 똑바로 켄트를 쏘아보았다. 켄트의 노여운 입김이 볼에 와 닿았다.
켄트는 느닷없이 머리를 숙이고는 모건의 입술을 거칠게 덮쳤다. 이를 꽉 다문 그녀의 입술을 필사적으로 열려고 했다. 양손의 자유를 빼앗겼기 때문에 모건은 반항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모건은 완고하게 입을 열지 않았다.
입술을 떼어낸 켄트의 얼굴을 있는 만큼의 경멸을 담아서 노려보았다. 이제까지의 복수를 해줄 테야. 그 사람 말 탓으로 얼마나 내가 괴로워했는지 알아요? 켄트의 뜻대로는 이제 절대로 안 될 걸요?
"이런 짓을 해서 당신은 만족하세요?"
켄트의 눈초리가 더욱 험해졌다. 열심히 노여움을 참으며 켄트는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댄다. 이번 키스는 따뜻하고 모건의 반응을 부르듯 혀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모건은 완강하게 거역했다. 뭐가 어찌 됐던 반항해야지, 그러나 그것은 금방 별수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켄트가 움켜쥔 손을 놓고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모건은 도어에 기대서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켄트의 입술이 뜨겁게 맥박 치는 목덜미께로 내려왔다. 모건의 몸 안에서 욕망이 커다란 물결이 되어 밀려왔다.
켄트는 입술을 떼어내고 모건을 바라보았다. 모건은 한순간 켄트의 눈을 되돌아보고 허둥지둥 주방을 빠져 나갔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모건은 방안에서 왔다 갔다 했다. 아무래도 오드리는 오전 중에 여기서 나갈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한 시간 뒤 모건이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서 켄트의 글씨를 알아보려고 악전고투하고 있는데 오드리가 들어왔다.
"흐응, 여기가 당신 일하는 방이군요. 서재에서 제일 떨어진 방을 고른 만큼 켄트도 자세가 바르군."
모건은 얼굴을 치켜들고 오드리를 바라보았지만 한순간 말을 잃고 있었다. 오드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빛나고 반짝이는 듯 아름답다. 지금 막 미용실에서 나온 것처럼 말끔하게 세트가 된 머리, 정성들여 마무리 된 메이크업, 커다란 눈동자가 아이라인이나 마스카라로 한결 빛나고 있었다. 빨갛게 칠해진 입술도 크로스로 섹시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검고 헐렁한 팬츠와 광택이 있는 시퐁 브라우스, 마치 스크린에서 빠져 나온 듯했다. 아무리 보아도 로지에서 하룻밤 머문 것 같지 않았다.
"켄트가 이 방을 쓰라고 한 게 아니에요. 내가 정한 거예요." 모건은 원고에 눈을 돌리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오드리는 모건의 쓸쓸한 태도에는 상관없이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눈에 띤 책을 손에 들고 표시된 페이지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다시 되돌려 놓고, 이번에는 모건의 등 뒤로 다가와서 테이블의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일이 밀려 있어요.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모건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오드리는 어깨를 움찔했다.
"어머나, 켄트는 당신도 우리와 함께 관광을 할 거라고 말하던데."
마치 오지 말란 듯한 말투였다. 모건이 예의 바르게 거절하려고 하는 순간 켄트가 문 앞에 왔다.
"자아, 어서 준비하라구, 모건. 전세로 빌린 배가 곧 올 거야." 두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말투였다.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모건은 옷을 갈아입으려고 일어섰다.
배의 기적소리가 선착장에서 들려왔다. 모건은 무영셔츠와 팬츠에 솔질을 잘한 데키슈즈라는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근처를 구경할 수 있는 건 기쁘지만, 오드리와 함께라니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우고 모건은 두 사람이 기다리는 선착장으로 서둘렀다.
오드리는 보기에 비싸 보이는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걸치고 있었다. 모건이 배에 오른 것을 확인하고 나서 켄트의 팔을 붙들고, 사닥다리에 발을 걸쳤다. 선장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배안으로 인도했다. 선장은 오드리의 고전적인 분위기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긴 듯했다.
배는 해협을 천천히 전진해 갔다. 변화가 풍부한 해안 풍경이 눈앞을 가로 질렀다. 모건은 난간에 기대서서 기분 좋은 바람이 머리를 흩날리는 대로 내맡기고 있었다. 오드리는 경치에는 전혀 흥미가 없어 보였다. 켄트와 선장을 좌우에 거느리고 땅 끝까지 여행한 이야기로 흥을 돋우고 있었다.
모건은 흰 모래가 반짝이는 작고 움푹한 해안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요전에 켄트와 둘이서 걸은 해안이 저기였을까, 갑자기 귓전에서 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느낀 게 없어?"
"뭘요?" 모건은 뒤돌아봤다. 누른 눈빛이 모건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건은 슬쩍 눈길을 돌렸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우리들의 프라이비트 비치야."
"해안은 모두 같은 걸로 보이는 걸요." 켄트하고 프라이비트 비치 이야기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오드리가 즐거운 듯 있으니 더욱 그랬다.
"아아니, 그렇지 않아." 켄트는 먼 해안을 가리켰다. "우리들의 비치는 반달 모양이고, 그 곁의 절반이 바다에 감추어진 바위가 솟아 있는 거야. 잊었나?"
"잊을 까닭이 없잖아요."
모건의 신경질에는 마음도 두지 않고 켄트는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보라구, 저게 그거야."
켄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깨로 전해지는 켄트의 손의 온기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재미있는 거라도 있어요?" 오드리가 갑자기 켄트 곁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팔에 자기 팔을 걸고 방긋 미소 지었다.
"재미있는 모양의 움푹한 바닷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낯이 된 모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서는 그다지 재미 있어 하지 않은 것 같아요, 켄트. 익숙하지 못해서 배 멀미하는 게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투였다.
"아뇨, 아무렇지 않아요. 실례하겠어요." 켄트와 오드리를 그 자리에 남겨두고 반대편 갑판으로 갔다.
선장이 ‘아름다운 어촌이 보입니다’라고 말을 걸어왔다. 모건은 켄트와 오드리 사이에 서서 난간에 기대섰다. 켄트의 어깨가 닿을 때마다 심장이 덜컹 소리를 냈다.
모건은 양쪽 두 사람을 무시해 버리고 경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재주 있는 화가라도 이곳 경치는 다루기 힘들 것이다. 기슭의 물은 새파랗고 기슭에서 멀어지는데 따라서 코발트블루로 바뀌어 갔다. 태양이 파도에 반사되어 황금빛 물보라가 보였다.
배는 카아디건만으로 들어가 여기서 점심을 들기로 되었다. 켄트가 선장을 점심에 초대했다. 속으로는 그다지 재미없었으나 모건도 선장한테 미소를 보냈다. 선장은 오드리에게 끌리고 있는 자신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드리도 켄트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내면서도 선장의 태도가 나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림 같은 경치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행은 신선한 생선요리를 맛보았다. 창가의 자리에서 잔잔한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요트나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가 보였다. 내리쬐는 태양아래 새까맣게 볕에 탄 어부들이 어망을 손질하고 있었다.
모건은 테이블 밑에 켄트의 다리가 와닿는 것을 좋지 않은 기분으로 의식하고 있었다. 슬쩍 오드리 쪽을 샆펴 보니 그녀는 선장을 상대로 열심히 지껄이는데 열중해 있었다.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모건은 켄트에게 속삭였다.
"좀 더 떨어져 주세요."
"바닥에 내려앉으라고 할 셈이야." 켄트의 눈 안에서 노여운 불꽃이 튕겼다.
모건은 얼굴을 돌리고 켄트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선장이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켄트가 몸을 들어 올린 것이다. 켄트의 허벅다리가 찰싹 달라붙고 모건의 몸이 떨렸다. 모건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고는 켄트는 더욱 몸을 들어댔다. 모건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왠지 덥고 답답했다. 그리고 매우 위험했다. 아아 혼자 있고 싶다. 켄트의 체온, 뚫어지도록 이쪽을 들여다보는 시선, 무엇보다도 자신이 끌려 들어갈 듯한 달콤한 목소리에서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식사를 끝내고 배에 오르려고 하니까 켄트는 모건의 팔꿈치를 붙들었다. 다시 몸이 움찔 떨렸다. 모건은 켄트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배에 올랐다. 오후 내내 모건은 난간에 기대서서 변해 가는 경치를 바라보고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오드리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멍청하게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귀로에 겨우 히든 섬이 보여 왔을 때, 모건은 마음속으로 맘이 놓였다. 집에 닿았구나 생각한 순간 가슴에 씁쓸한 생각이 스쳤다. 여기는 내 집이 아니야, 왜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이 섬에서 계속 살아갈 것도 아니고, 여름이 지나고 뉴욕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찾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섬에 다가감에 따라 가슴의 고통은 높아져만 갔다. 되도록 빨리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오드리와 켄트의 시선에서 피하고 싶었다.
배가 선착장에 닿았다. 모건은 단숨에 뛰어가려는 마음을 누르는데 힘겨웠다. 선장에게 감사하며 방긋 웃어보이고는 로지로 향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켄트는 모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건은 쌀쌀한 낯으로 켄트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오드리가 육지까지 저녁 먹으러 데려다 달라고 선장과 교섭하고 있었다. 모건은 뒤돌아보며 머리가 아프다고 초대를 거절했다. 곁눈질로 보고 있느니, 켄트가 험상궂은 낯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거짓말을 알아차린 것이다. 모건은 걸음을 빨리해서 제방으로 서둘렀다.
샤워를 하고 선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낮 동안의 끔찍했던 생각을 씻어버리고 베드에 누워 있으니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도 한순간, 짧은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힘 있게 도어가 열리면서 켄트가 뛰어 들어왔다.
"준비해, 모건. 식사하러 가는 거야." 엄하게 명령하는 투로 말했다.
"가지 않겠어요." 베드에서 내려서 똑바로 섰다. 켄트는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크로젤을 열고 그 안의 옷을 뒤졌다. 곧 장밋빛 실크 드레스를 끌어내서 베드 위에 던져 보냈다.
"이걸 입는 거야. 한 시간 이내로 떠날 테니까."
"가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대담하게 가슴을 펴고 켄트를 쏘아 보았다.
켄트는 모건에게 다가왔다. 가냘픈 몸집으로 가슴을 내밀고 버티고 선 모건의 모습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우스워서 깔깔거릴 뻔했다. 이 어린애 같은 체격의 여성은 이제부터 아무도 할 수 없던 일, 그러니까 자기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거역하려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켄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켄트는 모건의 허리에 팔을 돌리고 선드레스의 옷깃을 매만졌다.
"이 옷을 찢어버리고 드레스를 입혀 주면 좋겠나."
모건은 켄트의 말투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부탁이에요, 그만 둬요." 켄트의 손이 티슈벨트로 뻗었다. 모건은 뒷걸음질 쳤다. "그만둬요, 켄트 그만둬요!"
켄트가 다시 한 발짝 다가서자, 모건은 양손을 번적 들고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알았어요. 옷을 갈아입을 테니 나가 줘요."
켄트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빙긋 웃고는 나가버렸다. 모건은 클로짓을 힘껏 닫고, 선드레스를 머리서부터 벗어 던졌다. 좌우충돌해도 하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갈곳을 잃은 노여움이 몸 안에서 들끓고 있었다. 모건은 벌벌 떨면서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모건은 방을 나섰다. 머리에는 부드러운 웨이브가 치고, 말끔하게 화장한 얼굴에 장밋빛 드레스가 돋보였다. 모건은 발밑을 조심하며 리빙룸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굽이 놓은 힐을 신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몸이 흔들렸다.
리빙룸에서 켄트와 오드리는 선장을 대접하고 있었다. 얼음이 든 글라스와 마실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문득 마음이 캥겨서 모건은 도어 입구에서 멈춰 섰다. 세 사람 얼굴이 일제히 이쪽으로 향했다.
"어머, 그런 모양이면 손색이 없겠군." 오드리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억지로 칭찬해 주지 않아도 돼요." 순간적으로 대꾸했지만 모건은 속으로 자신의 싫은 소리에 싫증이 났다. 이 사람이 상대가 되면 아무래도 항상 이런 말투가 되어버릴 테지.
켄트는 방 한구석에 서 있었다. 어두컴컴해서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모건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야." 오드리가 말했다.
"내 일은 마음 쓰지 말고 어서 계속하세요." 모건이 대답했다.
오드리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니 켄트가 와인을 한손에 들고 다가 왔다.
"매우 아름답군. 모건."
"고마워요."
"함께 가주기로 해서 잘됐군. 아까는 미안했어."
"아까라니 무슨 말이죠? 트러블이 너무 많아서 어떤 걸 말하는지 알 수 없군요."
금방 켄트의 낯이 굳어졌다.
"지금 말한 것은 취소하겠어. 미안하다고 생각지 않아. 그 일도 다른 일도 모두야."
모건은 떨리는 손으로 글라스를 받아 들었다. 식사하는 동안 내내 이런 일을 견디어내야 하나? 모건은 살짝 다른 사람 표정을 살폈다.
오드리는 여전히 아름답다. 헐렁한 바지에 가슴이 크게 벌어진 블라우스를 맞추고 풍만한 가슴을 자랑스럽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어깨에다 벨벳의 쇼올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것이 또한 잘 어울렸다. 머리는 깨끗하게 묶어 올려져서, 큼직한 다이아몬드의 이어링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얄밉도록 예뻤다.
선장은 작업복에서 잘 맞춘 셔츠로 갈아입고 있었다. 핸섬한 얼굴에 햇볕에 탄 살갗, 모래 빛 머리털 괘 멋있어 보였다.
모건은 켄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숨을 들이마실 만큼 멋있는 것이다. 검은 바지와 셔츠 위에 생 대마 자켓을 걸치고 셔츠의 검정과 금발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켄트는 모건을 무시해 버리고 쾌활하게 손님을 대접하고 있었다.
출발시간이 되었다. 모건은 세 사람에게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고 따랐지만, 지독한 소외감을 맛보고 있었다. 선장이 권하는 레스토랑으로 가기로 되어서, 배는 포트 엘긴을 향해서 출항했다. 도중에 모건은 다른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혼자서 뚝 떨어져 앉아 있었다.
포트 엘긴에 닿아서 배는 굽어든 해변으로 들어갔다. 해안을 따라서 커다란 낡은 창고가 서 있었다. 최근에 새로 개장된 듯, 1층은 수입품 상점으로 그리고 맨 위층은 레스토랑으로 되어 있었다.
유리가 박힌 커다란 창을 통해서 바다가 바라보였다. 판자벽에 구리로 된 덮게가 달린 난로, 바다에 떠 있는 배의 불빛, 매우 따뜻하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가게였다. 피아니스트가 손님의 신청 음악에 따라서 연주를 시작했다. 손님들의 대화가 끊기고 피아노 소리만이 로맨틱하게 울려퍼졌다.
네 사람은 창가의 자리로 안내되었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가게가 물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모건의 자리는 켄트의 옆자리였다. 맞은편은 선장이며 그 옆자리가 오드리, 선장 옆이 좋았을 걸, 이래 가지고는 식사하는 동안 내내 켄트의 몸을 의식하지 않은 수 없게 된다.
선장은 매우 기분이 좋아서 와인을 잔에 따르고 이 가게에서 자랑하는 몇 가지를 들어 말했다. 모건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의자등에 기대고서 배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사람의 즐거워 뵈는 대화가 머리를 스쳐 지났다.
피아니스트가 슬픈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다. 모건은 그 노래의 가사를 모리에 떠올렸다. 남자가 상처 받은 마음을 애절하게 고백하는 노래였다. 실연의 노래는 이제까지 몇 백 곡이고 들어왔는데 가사가 가슴에 배어오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문득 켄트의 시선을 느꼈다. 뒤돌아보니 그는 이상한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싫은 거야?"
모건은 까닭을 알지 못해서 켄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죠?"
"춤을 추지 않겠어? 내가 묻는 건 벌써 두 번째인데 왜 그러는 거야? 마음은 콩밭에 있는 거야?"
"뭘 좀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마음은 틀림없이 여기 있다. 켄트의 팔에 자기 팔을 걸치고 싶다는 강한 욕망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켄트는 일어섰다.
"자아, 가자구. 모건."
"아니," 모건은 필사적으로 욕망을 짓눌렀다.
"그렇다면 제가 상대할게요." 오드리가 섹시한 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댄스 플로어로 나갔다. 모건과 선장은 잠자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야.‘ 선장이 한숨을 섞어가며 입을 열었다.
"그, 그렇군요."
"당신도 아실 테지만 저 사람은 여배우라지요?"
"몰랐군요." 오드리는 열심히 귀를 기울여주는 사내 앞에서 자기 자랑을 했을 게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씁쓸했다.
모건은 댄스플로어의 두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손님들은 모두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곡이 끝나고 두 사람은 테이블로 돌아왔다. 얼굴을 빛내고 있는 오드리에게 켄트는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면 한곡 상대해 드릴게요, 선장님." 자리에 앉으면서 오드리가 말했다. 마치 동정을 베풀 듯한 말투였다. 오드리는 핸섬한 남자를 두 사람 모두 독점할 수 있어서 만족해 있을 테지.
"그건 감격스럽군요." 선장이 대답했다.
식사가 날라져 와도 모건은 도무지 맛을 알 수 없었다. 와인, 야채샐러드, 갓 잡은 생선으로 만든 요리, 식욕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먹는 체는 해야지. 모건은 눈앞에 있는 요리를 말없이 먹고 있었다.
오드리가 지껄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 자리의 분위기에 맞춰서 정당하게 웃고 이따금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면 아무도 내 속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것은 게임이야. 모건은 차츰 침착을 되찾았다. 켄트의 일도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사태는 모건의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식사를 끝낸 오드리와 선장은 댄스플러어로 가버렸다. 켄트가 일어섰다. 춤을 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거절할 까닭을 찾아낼 수 없었다. 모건은 마지못해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켄트는 모건의 손을 잡고 댄스플로어로 데리고 갔다.
켄트가 허리에 팔을 돌렸다. 움찔하면서 모건도 켄트의 어깨에다 살짝 손을 올려놓았다. 동작이 어색해 버리고 만다. 이 가슴속을 켄트에게 눈치 채도록 하고 싶지 않다. 두 사람은 서로 입을 다문 채 춤추기 시작했다. 댄스라기보다는 그저 꼼짝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모건은 켄트의 등 뒤에 있는 벽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켄트의 입술이 관자놀이께를 스쳤다. 이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디너는 어땠지?" 켄트의 따뜻한 입김이 볼에 와 닿았다. 저절로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비킬 수도 없었다.
"맛있었어요."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순간적으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이 거짓말쟁이가……" 켄트의 부드러운 목소리, 모건은 뜨끔했다.
"거짓말 아녜요, 켄트."
"괜찮아, 모건. 아무 소리 하지 마. 그냥 이대로 있게 해줘." 허리에 감은 손에 힘을 주어서 모건을 끌어안았다.
모건의 손은 켄트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켄트의 턱이 머리에 살짝 닿고, 이윽고 입술이 관자놀이까지 내려왔다. 아아 뼛속까지 녹아 버릴 것 같애. 온 몸의 힘이 빠져버려서 켄트한테 자리까지 안겨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애. 그래도 모건은 겉으로는 모양을 갖추고 춤을 계속 췄다.
음악이 끝나고 두 사람은 오드리와 선장이 기다리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리고 파트너를 교대해서 네 사람은 또 한 곡의 춤을 췄다.
한참 지난 뒤에 저마다의 생각을 안고 네 사람은 돌아가기로 했다. 어두운 하늘에 은빛 달이 빛나고 온 하늘의 별이 바다에 비춰서 파도 사이에 흔들리며 빛의 리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섬에 닿으니 모건은 선장에게 인사를 하고 켄트나 오드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로지로 들어갔다. 방으로 돌아와서 드레스를 벗으며 창가에 섰다. 바다를 건너가는 배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조용히 그것을 바라본 뒤 모건은 베드에 들어갔다.
켄트의 서재에서 귀에 익은 발소리가 들려 왔다. 잠에 빠져들며 모건은 오늘 하루에 일어난 일을 되새겨 보았다. 켄트는 왜 그토록 제멋대로일까. 화를 냈는가 하면 놀랄만큼 따뜻하게 해 주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 이윽고 모건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8
모건은 데스크 위에 놓인 산더미 같은 원고를 바라보았다. 켄트는 하룻밤 새에 무지무지한 양의 원고를 써놓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일까.
커피를 여러 잔 거푸 마시고 모건은 겨우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았다. 오늘은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조금 있으면 정오가 될 즈음에 오드리가 일어났다. 실크의 하램팬츠와 홀타넥크의 톱으로 몸을 감싸고 씩씩한 모습으로 모건의 방으로 나타났다.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있는 모건을 곁눈질하며 그녀는 함부로 쏴돌아 다녔다. 조개껍질 콜렉션을 보고 있는가 하면 켄트가 손으로 쓴 원고를 집어 올려서 바라보고 모건이 막 끝낸 원고를 비교하고 있었다.
모건은 초조하다 못해서 소리 질렀다.
"용무가 있으면 분명히 말해 줘요."
"별로 용무는 없어요. 켄트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낼 뿐인 걸."
"켄트를 기다리는 거야. 안됐군요. 그는 아마 하루종일 잠만 잘 거예요. 이렇게 많이 썼는걸. 틀림없이 밤을 새웠을 거야."
"잠들어 있는지 어떤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왔는걸. 곧 보트가 오게 되어 있으니 얼마 안 있으면 이리로 와 줄 거야."
"보트가 오다니 무슨 뜻이지요." 모건은 놀라서 오드리를 보았다.
"나는 이런 지루한 곳에 있고 싶지 않으니까, 선장한테 오늘 어디론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구." 오드리는 일단 말을 끊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당신도 가고 싶으면 함께 가면 어때?"
모건은 책상 위의 원고를 쳐다봤다. 켄트와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어제처럼 그것을 되풀이 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오늘은 가지 않기로 하겠어요. 이렇게 일이 많은 걸요."
"어머나 안됐군요." 오드리는 거창하게 한숨을 쉬어 보이고 이겼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자리를 떠났다.
모건은 이를 악물고 일을 계속했다.
얼마쯤 지난 후 켄트와 오드리가 도어 입구로 왔다. 켄트는 언제나처럼 구겨진 옷차림과는 달리 베이지색 바지와 셔츠를 입고 어깨에는 검은 쉐터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잠깐 모건을 보았다.
"자아, 어서 가요." 오드리가 재촉하듯 말했다. "저녁도 거기서 먹는 거지요."
"아직 그것까지는 정하지 않았지, 오드리. 선장하고 둘이서 계획을 세웠잖아?"
"어머, 맘에 안 들어요? 저는 좀 더 이 근처의 경치를 보고 싶어요. 카디건만이나 말레이 하바 따위는 굉장히 로맨틱한 이름이잖아요. 그리고 거기에도 나가 보고 싶어요. 몽크톤이라던가 그렇군. 프레드릭토에도."
켄트의 팔을 붙들고 오드리는 걷기 시작했다. 모건의 귀에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외딴섬에 갇혀 있으면 마음이 우울해지는 거 아녜요. 미용과 건강에 안 좋아요. 비서는 내버려 둬도 괜찮아요. 일이 있다고 했는걸요."
현관의 도어가 꽝하고 닫혔다. 산들바람을 타고 오드리의 웃음소리가 토막토막 들려왔다. 모건은 창가에 서서 두 사람이 배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모두 오드리가 정한 거겠지. 또다시 핸섬한 남자를 양손에 거느릴 셈인 것이다.
오드리가 섬에 닿은 날, 분명히 켄트는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주저앉고 있을 뿐만 아니라 켄트를 끌고 다니고 있다. 켄트도 켄트야. 일은 내팽개쳐 두고 이곳저곳 안내하고 있다니. 그렇지만 켄트는 어째서 마음이 변했을까. 오드리와 오랜만에 만나서 잊고 있던 사랑이 되살아난 걸까.
하얀 바닷가에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모건의 마음은 매우 흐트러져 있었다. 오드리 알랜, 그녀는 폭탄처럼 위험한 여자야. 켄트가 그걸 모를 까닭이 없다. 내게는 켄트의 머릿속을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시나리오를 빨리 완성시키려고 붙들고 있을 텐데. 마치 관광객처럼 바쁘게 떠나가다니.
창가를 떠나서 모건은 데스크로 돌아왔다. 그 두 사람을 생각하거나 하는 것은 시간 낭비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내몰아도 의문은 고개를 쳐들고 있다. 오드리는 영화계에서 얼굴이 팔려 있을까? 켄트는 아무래도 신출내기 시나리오 라이터니까, 아마도 오드리의 도움이 성공의 열쇠가 되는 걸 거야.
모건은 연필을 깨물고 멍청하게 생각에 잠겼다. 켄트와 오드리는 그저 친구사이일까? 그보다는……더 깊은 사이? 한번은 돌아가라고 해놓고서 왜 내 쫓아 버리지 않을까? 역시 켄트는 오드리가 필요한 거야. 그 자신이 그런 자기를 깨달은 게 틀림없다.
그로부터 한 시간 모건은 일에 몰두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끝내 단념해 버리고 방을 나왔다. 머릿속은 켄트의 일로 가득했다. 이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일은 뒤로 미루고 헤엄치고 좀 마음을 풀기로 하지.
타월로 몸을 감싸고 모건은 수명의 잔물결을 바라보았다. 켄트의 손의 온기를 생각해내면 몸이 떨렸다 켄트의 팔에 몸을 내맡긴 밤이나, 머리를 커트 해준 달콤한 오후 한 때, 오드리가 등장한 지금 와서는 그것도 모두 켄트의 변덕에서 생겨나서 물거품처럼 꺼져 버린 꿈일 뿐이다. 그때 정열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지 않기를 잘했어. 만약 일선을 밟고 넘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완전히 짓밟힌 심정이 되어있을 게 뻔하다. 단단히 자신을 바라보고 켄트에 대한 생각을 끊어버려야지. 켄트는 한여름의 고용주에 불과하니까.
모건은 느릿느릿 로지로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태양은 서산에 기울었는데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켄트가 없으니 하루가 이토록 지루하고 길게 느껴지는 것일까. 켄트의 의사로 자기의 하루가 돌고 있다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거칠게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혼자서 맘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을 고맙게 생각해야지. 높은 보수의 혜택을 받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걸 기쁘게 생각해야지. 그러나 여기서 지낸 짧은 여름 동안에 인생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성질이 급하고 완고하고 야심가인 사내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제 두 번 다시 이전의 자기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밤의 장막이 로지를 감쌌다. 모건은 추위를 느끼고 난로에 불을 피웠다. 그리고는 책을 들고 읽으려고 해보았다. 켄트와 오드리의 일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몇 번인가 다시 읽은 끝에 겨우 처음 한 대목을 다 읽었다. 차츰 초조함이 더해져서 견딜 수가 없어서 북을 끄고는 베드룸으로 돌아왔다. 방안의 불을 끄고 도어를 꼭 닫고 나서 담요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아직도 어린애 취급 받는 건 질색이다.
몇 차례고 돌아 눕는 동안에 모건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켄트와 오드리가 돌아온 소리는 모건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날이 밝기 전의 고요 속에서 모건은 눈을 떴다. 꼼짝 않고 누운 채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켄트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모건의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 짜여져 있었다. 이따금 한밤중에 잠이 깨면, 그런 소리를 듣고는 안심하고 다시 잠드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켄트는 벌써 잠들었을까? 그보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베드에서 미끌어져 내려와 맨발 채로 주방으로 향했다. 얇은 네글리제 하나로는 추위가 몸에 아프게 스몄기 때문에 물이라도 마시고 어서 베드로 돌아가야 했다.
다이닝룸으로 들어간 순간 창가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멈칫 놀라며 벽에 바짝 붙어 무서운 그림자를 보았다. 켄트였다. 켄트라고 알고 나니 공포심이 약간은 가라앉았다.
"이런 시간에 뭘 하고 있는 거야." 켄트가 따지듯 물었다.
"아니, 깜짝이야. 심장이 멎을 뻔했어요. 잠이 깨서 물이라도 마실까 해서요." 유리창에 비치는 켄트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서재가 너무나 조용해서 벌써 잠들었나 생각했는데……"
켄트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잘 써지지 않는 신이 있어서 어렵다구,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중이었지."
켄트의 시선이 모건의 몸을 훑어내렸다. 맨발로 서 있는 몸의 선이 비치는 네글리제를 더듬어 어깨에 걸려있는 머리에서 멎었다. 모건은 볼이 붉어졌다. 그렇지만 어두우니까 켄트는 눈치 채지 못할 테지. 모건은 허둥지둥 주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싱크대 있는 곳에 선 채로 가슴이 두근대는 걸 누르려고 했다. 그리고는 물을 마시고 다이닝룸으로 돌아왔다.
켄트는 난로의 재를 긁어내고 불을 피우고 있었다. 작은 불꽃이 일어나고 벽이나 천장에 기묘한 그림자를 떨구었다. 모건이 난로 쪽으로 걸어가니 켄트도 길다란 그림자를 끌고 다가왔다. 난로에 불붙는 장작이 딱딱 소리 내고 있었다. 그리고 불꽃이 크게 흔들리고, 가라앉는가 했더니 장작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켄트는 손을 진즈에 닦고 나서 모건을 보았다. 불길이 켄트의 눈에 비쳤다. 두 사람은 난로 곁에 서서 따뜻한 것을 즐겼다. 켄트는 조용히 모건의 입언저리를 보고 있었다. 모건은 불안스런 듯 입술을 빨았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나요?"
"아니 틀렸어. 당신은 잠잘 수 있을 것 같애?"
모건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도 틀렸어요. 왠지 머리가 맑아버렸어요."
머리의 움직임에 따라서 머리털이 흔들렸다. 켄트는 손을 뻗어서 모건의 볼을 가리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따뜻한 켄트의 손의 감촉, 모건의 얼굴에서 무시무시한 표정이 지워지고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치고 서로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주위의 공기는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켄트는 잠자코 모건을 끌어당겼다. 모건은 줄로 다루는 인형처럼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켄트의 입술이 머리에서 관자놀이로 움직였다. 심장은 터질 듯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모건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켄트의 입술을 기다렸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느껴졌다. 켄트의 손이 몸을 더듬고 더욱 억세게 끌어안고 있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얇은 옷 천을 통해서 부드러운 손의 온기가 전해져왔다.
천천히 켄트는 입술을 포개왔다. 등줄기를 따라서 미치도록 쾌감이 스쳐 지났다. 어깨로 숨을 헐떡이며 모건은 켄트의 몸에 손을 돌렸다. 켄트의 그리고 모건의 몸 안에 뜨거운 욕망이 끌어 올랐다.
켄트는 약간 몸을 떼고 욕망으로 흐려진 눈길을 보내왔다.
"모건……" 괴로운 듯 중얼대고 다시 억세게 끌어안았다. 모건의 부드러운 가슴은 켄트의 두꺼운 가슴에 눌려 있었다. 그의 우람한 어깨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모건은 키스를 기다렸다. 켄트는 격렬하게 키스를 했다. 두 사람의 몸은 하나가 되고 그대로 녹아버릴 듯했다.
켄트의 입술이 볼이나 관자놀이나 귓볼을 더듬고 목덜미까지 내려왔다. 타들어갈 듯한 욕망으로 몸을 그을리면서 모건은 저도 모르게 켄트의 머리를 치켜들고 목줄기에 입술을 갖다 댔다. 사내의 냄새가 모건을 감쌌다. 뜨거운 핏발을 느꼈다. 손가락 끝으로 컬한 가슴털을 매만졌다. 아아, 이대로 오래 있고 싶다. 넋이 빠진 사람처럼…….
켄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건 앞으로는 한밤중에 잠이 깨더라도 방에서 한발짝도 밖으로 나오면 안 돼. 도어에 단단히 자물쇠를 채워야 돼." 양손으로 살짝 얼굴을 들고서 모건의 눈을 들여다보고 엄지손가락으로 모건의 볼을 만지기 시작했다.
"켄트, 저요……"
모건의 입술에 손을 갖다 대고 켄트는 말을 가로 막았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몸을 스치고 지나간 뜨거운 욕망은 켄트에게도 전해졌을 거야. 켄트는 뜨거운 입술로 모건의 입술을 더듬었다.
"당신을 이 가슴에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차지 않아, 모건. 이젠 방으로 돌아가라구……서로가 나중에 뉘우치는 일을 저지르기 전에."
어깨에다 손을 올려놓고 모건의 몸을 빙글 돌리고는 슬쩍 떠밀었다. 도어까지 걸어가서 모건은 주저하며 뒤돌아보았다.
켄트는 난로의 불꽃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자제심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리라. 몸 전체가 굳어져 있었다. 나도 이제까지 보다 더욱 강하게 켄트를 바라고 있는데…….
모건은 뜨거운 가슴속을 떨쳐 버리고 제방으로 돌아왔다.
9
샤워의 더운 물이 몸을 타고 흘러 내렸다. 켄트와의 일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모건은 날이 샐 때까지 베드 속에서 몸부림치며 지냈다. 그는 정말 나를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면서 자신을 억제해준 것이다. 모건은 방긋 웃었다. 오드리가 제아무리 방해를 하려 해도 오늘은 멋진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심플한 팬츠와 셔츠를 입고 아직 덜 마른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힘있는 발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어에서 발걸음이 멈춰졌다. 아름다운 옷차림에다 완벽한 화장을 한 오드리가 소파에 앉아서 켄트의 원고를 읽고 있었다.
화가 나는 것을 꾹 참고 모건은 말을 걸었다.
"미스 알랜, 거기서 도대체 뭘하는 거예요."
오드리는 힐긋 얼굴을 들고 차가운 눈초리로 모건을 쳐다보고 나서 다시 원고에다 눈을 떨구었다.
"보면 몰라요? 내 배역을 미리 보아두려는 거예요."
"당신 배역이라니?" 모건은 한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래요. 나는 이 영화에 출연할 셈이에요. 물론 주연이에요. 지금가지 출연한 중에서 가장 좋은 역이지. 벌써 켄트한테는 말했지만, 나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배역을 내 것으로 해 보이고 말 거야." 이렇게 말하고는 마치 개라도 내몰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까닭이 있으니까, 방해하지 말아줘요." 신경질 난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지금까지 읽은 것으로는 이 대본 그다지 잘된 것이 아니로군. 다른 배역이 대사가 더 많거든. 캘리포니아에 돌아가면 레이놀스한테 전화로 감상을 말할 셈이야."
마지막 한마디에 모건의 노여움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여자한테 시나리오를 이러쿵저러쿵할 권리는 없다. 허리에 손을 갖다 대고 모건은 오드리를 쏘아보았다.
"그만 해둬요. 이 시나리오는 지금 이대로면 충분히 훌륭해요. 감독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켄트가 시나리오 라이터로 이름을 날릴 모처럼의 찬스를 망치잖아."
"이름을 날린다구?" 오드리는 날카롭게 소리 지르고 손에 든 원고 너머로 모건을 바라보았다.
"당신 말대로라면 켄트 테일러는 유명해지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일하는 신출내기 시나리오 라이터 같군-" 그때 켄트의 얼굴이 도어에서 내밀어져 있는 것을 깨닫고 오드리는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오드리!" 켄트가 소리쳤다.
모건은 그 소리에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켄트의 눈은 노여움으로 번쩍번쩍 빛이 났다. 텐트는 거친 발소리를 내며 방안으로 들어와서 오드리의 손에서 원고를 뺏어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오드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여자라는 걸 잊고 한 대 맛을 보여주기 전에 내가 여기서 나가버리는 게 좋겠군."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오드리는 빙긋 웃었다.
"그래요, 켄트. 나가도록 하세요. 서로가 나중에 뉘우치는 일을 저지르기 전에 말이에요."
모건은 휴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오드리는 새벽녘에 일어난 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아마도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 우리가 감정이 끓어올라 서로 껴안고 괴로워하며 참아내는 모양을 지켜보고 있었건 게 틀림없다.
켄트는 오드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노여움을 어떻게든 누르려고 하고 있었다. 모건은 그런 켄트에게 말을 걸 이유가 없어서 그저 점잖게 보고만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쥔 채 켄트는 폭소를 터뜨렸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어떤 더러운 수법이라도 쓰는 거로군. 남을 상하게 하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시는 군."
오드리가 켄트의 시선을 흘겨 버렸다.
"그래요. 나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드디어 해낸 거예요. 켄트 축하해요! 당신은 참된 사랑이란 걸 찾아낸 거죠?"
켄트는 한참 동안 오드리를 쏘아보고는 이윽고 넌지시 고개를 돌렸다. 오드리는 매니큐어로 물들인 손톱으로 켄트의 팔을 붙들었다. 켄트의 눈초리가 더욱 험상궂게 되어갔다.
"그렇지만, 당신 본심으로 이런 조그만 계집애가 자기한테 어울리는 상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지요."
켄트는 오드리의 손을 뿌리쳐 버렸다. 그의 노여운 목소리가 팽팽한 방안 공기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만 해둬! 이젠 그만."
"아아뇨,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요. 들어봐요. 당신은 이상주의자예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멋진 여성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거예요." 마치 귓속말이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이 아이가 그런 여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신용하고서 진실을 털어놓지 않는 거죠."
켄트는 거머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정말로 손찌검을 할 셈인가. 모건의 걱정은 빗나가서 켄트는 점잖게 그 자리를 떴다. 어두운 표정이었다. 오드리가 말한 것이 가슴을 찌른 듯했다.
방안을 가로질러 도어로 향하는 켄트에게 오드리가 다시 덧붙였다.
"이 계집애, 틀림없이 당신을 배신할거예요. 상처받는건 당신이에요. 배신당하고 우는 건 당신이에요."
켄트는 그대로 돌아보지도 않고 나갔다. 한참 있다가 서재의 도어가 꽝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모건과 오드리는 서로 노려보았다.
"당신은 최고급 여자로군요, 오드리." 모건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야말로 바보 같은 계집애야, 모건. 켄트의 마음을 쏘아 맞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모건이 대답할 말이 막혀 있는 사이에 오드리는 빈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켄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구. 우리는 꼭 닮았는걸."
"꼭 닮다니, 어떤 뜻이지."
"당신보다 내가 켄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구. 바보 같으니, 우리는 야심가이고 또 성공하려고 하고 있는걸." 불쌍하다는 듯 모건을 바라보고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켄트는 당신의 곱절이나 되는 나이야. 당신은 심심풀이 장난감이라구. 한창 나이에 사내는 가까이 있는 여자를 욕망의 배설구로 이용하는 거야. 그걸 모르다니 가련하게도."
오드리는 가슴을 펴고 허리를 반쯤 뒤틀며 요염한 몸집을 드러내보였다.
"당신은 아직 멀었어. 어린애야, 모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면 안 돼. 도어에 꼭 자물쇠를 채워둬야 되는 거야."
모건은 따귀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청하게 서버렸다. 켄트가 귓전에서 속삭인 말까지 이 여자는 훔쳐들어 버린 것이다.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어린애가 몸을 뻗고 어른의 게임을 하고 있을 뿐. 이봐, 정말 켄트와 잘 해갈 수 있을 것 같애? 그 사람의 생활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켄트의 친구나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세련되고 부자라구. 당신 같은 시골계집애는 그에게 거추장스러울 뿐이야."
모건은 참다못해 얼굴을 돌렸다.
"거울에다 자기를 잘 비춰 보라구. 쥐새끼 같으니. 켄트가 당신 포로가 될 까닭이 없잖아."
오드리는 이런 말을 남기고 세련된 여배우 몸짓으로 방을 나갔다. 모건은 그저 멍청하게 서 있었다.
이윽고, 모건은 비틀거리며 방을 나왔다. 켄트와 오드리의 말다툼이 무슨 까닭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오드리는 ‘배신한다’고 말했지만 무슨 뜻일까. 나는 켄트를 배신한 일도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진실’이라니? 켄트가 내게 감추고 있는 것이란 그게 뭘까.
모건은 비참한 마음에 괴로움을 겪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으로 밝은 햇살이 새어들고 있었다. 이제부터 켄트에게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지금도 켄트의 서재 앞을 지나왔지만 도어는 닫혀 있었다.
주전자를 렌지에 올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다위로 반사되는 햇살이 눈부셨다. 모건은 이마에 주름을 잡고 생각해 보았다. 오드리가 던져 보낸 욕설은 분명 옳았다. 켄트와 같은 남자를 이해하기에는 나는 너무 어리다. 오드리가 말해 주지 않아도 그런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오드리처럼 아름답지도 않고 남성을 매료시키는 법도 모른다. 오드리와 맞서 싸울 무기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가 켄트도 나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모건은 커피포트에 끓는 물을 따르면서 생각했다. 오드리는 주연을 맡을 셈이라고 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해보이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어떤 것이라도! 모건은 덜컹 소리를 내며 주전자를 렌지에 내려놓았다. 그 여자는 자기를 방해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고 때려눕히고, 필요하다면 켄트 앞에 몸을 내던질 셈이다.
발소리가 들렸다. 모건은 땀에 젖은 손바닥을 셔츠에 닦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차를 끓였어요. 당신은 어때요?" 마음의 동요가 목소리로 되어 나오지 않기를 빌었다.
"아니, 커피를 들겠어."
켄트가 주방을 서성거리며 커피를 따르는 동안 모건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눈을 내리깔았고, 켄트는 맞은편에 앉았다. 모건은 적극적으로 안전한 화제를 찾으려고 애썼다.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 - 날씨 이야기, 경치 이야기, 아무튼 아까 방에서 일어난 일 이외의 것이라면 아무 거나 괜찮다.
"겨울에 이 섬에 온 일이 있어요?" 모건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아따금씩."
켄트의 눈길이 공중에 떠돌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한참 있다가 켄트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혼자 있고 싶어지면 여기 오는 거야. 추운 겨울 동안, 이 섬은 문명과는 일체 끊겨 버리고 말지. 내게는 때때로 그런 시간이 필요한 거야."
켄트도 부담 없는 대화를 기뻐하는 듯 했다.
"그럴 때는 비서도 함께 오나요?"
"헬렌 말야? 그녀한테 겨울에 여기 오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어. 여름에 한 달쯤 머무는 건 상관없지.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이 한계야. 우선 내가 글을 완성하고, 그 다음에 이곳으로 불러서 타이핑하도록 하는 거야. 헬렌은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자랐으니까. 뉴욕에도 투덜거리며 와줄 거라고."
모건은 켄트의 태도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대로 내내 화를 내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으면 좋겠다.
"뉴욕에 사무실을 갖고 있어요?"
"아파트가 있지."
켄트는 파크 아베뉴의 주소를 말했다. 대개 어디쯤인지 짐작이 갔다. 고급 맨션이 늘어선 곳이었다. 나중에는 아마도 돈 많은 친구로부터 방을 빌리고 있는 거겠지.
"뉴욕에서는 뭘 하세요?"
켄트가 이야기를 더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물었다. 켄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친구가 있나요? 뭘 하는 사람이에요? 작가? 아니면 화가?"
"그런 친구도 몇 사람 있지." 애매한 대답이었다.
"캘리포니아에는? 누군가 유명인을 알고 계세요?"
캔트는 테이블 너머로 모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끊지 말아요.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오드리나 그 일을 머리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도 뭔가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 것이다.
켄트가 놀랄 만큼 부드러운 말씨로 물어 왔다.
"당신이 알고 싶은 건 뭐지, 모건?"
모건은 고개를 떨구었다. 푸른 하늘에 흩날리는 구름처럼 검은 머리가 볼에 걸렸다. 켄트는 모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려고 몸을 일으켰다. 모건은 반사적으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켄트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 소년 시절이 일,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색……그리고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벌겋게 낯을 붉히고 모건은 대답했다.
"특별히 알고 싶은 건 아니지만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내가 자기 일을 이야기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인가."
"네에, 그래요. 저는 당신에 대해서 알지 않으면 안 되는걸요."
"알지 않으면 안 된다구?" 켄트는 모건의 눈을 찬찬히 쏘아보았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요."
눈 딱 감고 이렇게 말하고 얼굴을 들어 보니 켄트의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모건은 몸 안에서 뜨거운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켄트는 테이블 위의 모건의 손을 쥐었다. 켄트의 따뜻한 손길에 환한 기쁨이 스쳤다.
"알겠어, 모건. 묻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해 보라구. 오래 망설였지만, 이젠 마음을 정했어. 당신 질문에 대답하기로 하지."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드리가 말하는 대로 나는 좀처럼 당신을 신뢰할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모건의 심장의 고동이 높아졌다. 신뢰 -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당신의 어린 시절, 여기서 하신 일을 알고 싶어요. 그리고 시나리오 말고 쓰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또 허리우드의 유명한 사람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스탄티슈 감독에 대한 일도……" 두 사람은 문득 눈이 마주쳤다. 조의 배가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함께 허둥지둥 포치로 나갔다. 조가 선착장에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여어, 조!" 켄트가 큰소리로 불렀다. "날씨가 좋군. 어쩐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나."
모자를 들어 모건에게 인사하면서 조는 말했다.
"미국에서 편지가 왔군요. 급히 갖다 드리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되어서요." 조는 봉투를 건네주었다. 모건은 편지를 읽고 있는 켄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모건." 켄트의 얼굴이 잠깐 흐려졌다. "내가 짐을 챙기는 동안 조한테 커피를 끓여 주라고. 곧 준비할 테니까 기다려 주지 않겠나, 조. 육지까지 좀 태워다 줘야겠어."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가 병이 드셨다는군. 지금 곧 팜 스프링스까지 가지 않으면 안 돼." 켄트는 집으로 향했다.
문손잡이에 손을 댄 순간, 안에서 뛰어나온 오드리와 이마를 마주칠 뻔했다. 거기서 오드리는 듣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갈 거예요." 오드리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아뇨, 갈 거예요. 당신이 없다면 이런 곳에 있어 본들 별수 없는 걸요. 되도록 빨리 준비할게 기다려요."
"이번 주말에 레이놀스가 전용비행기로 마중 와준다고 했잖아. 그와의 약속을 깨뜨릴 셈이야?"
"전화해서 계획이 바뀌었다고 말하면 그만이에요."
그랬구나, 모건은 겨우 납득이 갔다. 오드리는 아까 말한 것처럼 자기에게 이익이 있을 듯한 사람과는 누구라도 사귀고 있는 모양이다. 영화계의 거물, 스탄티슈 감독마저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켄트도 함부로 그녀를 쫓아 보내지 못했으리라.
켄트와 오드리는 바쁜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모건은 조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그를 앉도록 하고 커피를 따랐다. 그런 다음에 켄트의 서재로 갔다.
"뭔가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어요?"
켄트는 얼굴을 들고 한동안 모건의 얼굴을 바라보고 아무 소리하지 않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모건은 이마로 흘러내리는 켄트의 머리칼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곧 움직이려는 발에 힘을 주어 똑바로 섰다. 커트했을 때의 머리의 감촉이 되살아나 온몸에 또다시 전율이 느껴졌다.
가방에 양복을 챙겨 넣으며 켄트가 입을 열었다.
"원고를 갖고 갈 셈이야. 아직 마지막 신이 완성되지 못했어. 그곳에 가서 쓸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갖고 가봐야겠어."
"그럼, 저도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해야겠군요."
"아니, 하지 않아도 돼." 켄트는 딱 잘라 말했지만, 곧 자신의 신경질이 부끄러웠던지 말씨를 부드럽게 했다. "모건. 저쪽 사정을 알 때까지 당신은 여기 있어줘. 대단한 일이 아니면 나는 곧 돌아올 거야. 만약 오래 걸릴 것 같으면……"켄트는 갑자기 생각에 잠겨 말을 끊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을 혼자 있게 해서…… 아직도 마무리되지 못한 일이 산더미 같은데."
"제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혼자서도 어떻게든 해나갈 거예요."
"그렇군, 당신은 어떤 일이건 틀림없이 해결해 내는 여자야." 켄트는 모건의 턱에 손을 갖다 대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혼자서도 무섭지 않지?"
모건의 마음속에 작은 불안이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뿌리쳐 버리고 똑바로 켄트를 되돌아보았다.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보통일 거예요. 이제까지도 해왔으니까, 이번에도 틀림없이 집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건, 말해 둘 게 많은데……" 엄지손가락이 모건의 입술을 매만지자 엄한 표정이 다소 풀렸다. "잘 들어 줘." 켄트가 빠른 말투로 이야기했다. "내일 정오, 이 번호로 전화해 줘. 캘리포니아와 여기는 시차가 있으니까 이곳 시간, 정오에 부탁해. 나는 그 시간에 전화 앞에 있을 테니. 지금 약속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 켄트는 번호를 적어서 건네주었다.
"알겠어요. 뉴브런즈윅의 시간이 내일 정오군요. 만약 그때 당신이 받지 않으시면 어떡하죠." 전화를 아무도 받지 않으면……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조한테 전하는 말을 전하도록 부탁해 둘 테니까."
켄트는 가방을 닫고 베드 곁에 놓았다. 다가선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켄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다. 내 눈은? 아무쪼록 가슴속의 불안을 비춰내지 말기를. 켄트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켄트는 슬쩍 모건 곁을 떠나서 가방을 집어 들고 방을 나갔다. 모건도 뒤따랐다.
선착장에서는 조가 이미 오드리의 짐을 다 싣고 켄트의 짐도 갑판 위에 올리고 있었다.
켄트는 뒤돌아보며 가늘게 미소 지었다.
"조심하세요, 켄트."
"당신도 조심하라구."
오드리는 배에 오른 켄트의 팔에 자기 팔을 걸었다. 그리고 억지웃음을 짓고 소리쳤다.
"안녕, 미스 앤더슨."
"잘 가요, 오드리." 모건은 되도록 상냥하게 대답했다.
배는 조용히 선착장을 떠나, 천천히 멀어져 갔다. 커다란 파도가 밀려와서 배가 기울였다. 켄트는 키를 잡은 조 옆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모건은 선착장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태양은 내리비치고 있는데 어쩐지 추웠다. 양손으로 몸을 감쌌다. 드디어 배는 검은 점이 되어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모건은 천천히 몸을 돌리고 로지로 향했다.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는 힘이 있었고 희망에 차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불길한 예감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다. 불길한 예감의 정체는 확실하지 않았다. 모건은 왠지 그 어두운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다음날, 모건은 포트 엘긴의 우체국 밖에 있는 전화박스에 있었다. 아까부터 호출음이 울리고 있는데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단념하고 끊으려고 했을 때 겨우 수화기에서 귀에 익은 낮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여보세요." 숨이 찬 목소리였다
"켄트……" 이야기할 것을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제대로 페리를 탈 수 있었을까 걱정했어, 모건. 그쪽은 어때?"
"모든 게 순조로워요."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어젯밤은 최악의 밤이었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 뉴브린즈위게 폭풍이 몰아쳤다고 하던데 섬에는 피해가 없었나."
"네에, 좀 혼이 났어요."
비가 심하게 내렸을 뿐만 아니라, 돌풍이 불어닥쳐서 목선은 로지가 바람에 견딜 수 있을까 퍽이나 걱정했었다.
"피해는?"
"나뭇가지가 많이 부러졌어요, 전기가 안 들어와요. 수리하는 사람이 내가 돌아갈 때쯤에는 복구될 테니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전기는 폭풍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끊기고 말았다. 모건은 어둠 속에서 온 집안을 뒤지고 다니며 겨우 주방 선반 안에서 양초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악몽의 하룻밤이었다. 그렇지만 켄트한테 쓸데없는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모건은 자세한 것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켄트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어젯밤의 공포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모건은 화제를 바꿨다.
"그보다 어머님은 어떠세요?"
"병원에서 검사받고 있는 중이야. 의사가 좀 기다리라는군."
모건은 피식피식 웃었다. 켄트에게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다.
"그냥 기다려야 하다니 어머님도 괴로우시겠군요. 물론 당신도 참기 어려우실 테지만요, 켄트."
"그렇다구." 켄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지금 걱정되는 건 당신이야. 그 근처의 폭풍이 대단했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구. 모건, 조가 바래다주면 전기가 들어오는 걸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 만약 복구가 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포트 엘긴으로 돌아오는 거야. 깨끗한 여관이 있으니까 안내해 달래서 오늘밤은 거기서 자도록 해, 알겠어?"
켄트의 따뜻한 말에 모건은 방긋 웃었다.
"네, 네에. 알아 모셨습니다, 주인나리."
"농담할 때가 아니야. 당신을 깜깜한 섬에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다구. 그렇지 않아도 당신을 혼자 두고 싶지 않은데, 혹시 2,3일 새에 돌아가지 못하면……" 켄트의 목소리가 끊겼다.
"알겠어요, 켄트. 당신 말대로 할테니 안심하세요. 그런데 그곳은 어떤 날씨예요?"
"더워서 숨이 막힐 것 같아. 여름에는 가게도 모두 닫아 버린다구. 아마 기온이 40도 가까울 거야.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어."
"그럼, 빨리 이리로 돌아오세요. 이젠 폭풍도 지나갔으니까요." 모건은 웃었다.
"모건……" 켄트가 목쉰 소리로 중얼댔다.
"뭐예요?"
"그 근처를 마음껏 구경하라구."
"그래요, 그렇게 할게요. 그밖에 또 뭐가 있어요?"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이윽고 켄트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젠 됐어. 모레, 오늘 이 시간쯤 다시 여기다 전화해 주지 않겠나?"
"알겠어요, 그럼요. 켄트."
"조심하는 거야, 모건." 켄트는 역시 목쉰 소리로 중얼거리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모건은 한동안 전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켄트와의 연락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그가 멀리 땅 끝으로 가버린 것 같았다. 모건은 어깨를 움찔하고 나서 전화박스를 나와서 부두로 향했다.
비바람 때문에 생긴 물웅덩이를 뛰어넘은 순간, 모건은 달려 나가고 있었다. 왠지 마음속에 올 여름에 일어난 일이 모두 바보스런 로맨틱한 꿈처럼 생각되었다. 아무튼, 다시 한번 히든 섬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 섬이 현실의 것이라고 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켄트 테일러라는 사나이가 있어서 나는 그를 사랑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지.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확인해야지.
조의 배는 부두에 멈춰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배에 올라탄 모건을 조는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햇볕에 탄 얼굴은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섬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 죽겠지요?"
"그렇군요. 저 섬이 정말 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생각에 잠기며 모건이 말했다. "출발해요."
어젯밤 폭풍 탓으로 바다는 평소와 달리 거칠어져 있었다. 모건은 시트에 내려앉아서 난간을 움켜쥐고 물에 떠 있는 섬의 그림자를 열심히 바라보았다. 섬이 똑똑하게 보여 왔다. 모건은 만면에 웃음을 담았다. 마음 설레는 경치였다.
"당신 집에 당도했습니다, 아가씨." 조는 선착장을 향해 키를 돌리며 말했다. 모건은 이제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늘까지 지내온 귀중한 시간 동안에 이곳은 모건의 집이 되어 있었다. 나의 섬, 나의 집, 그리고 내 사람.
모건이 전기가 들어왔나 보러 간 사이에 조는 근처를 돌아다니며 바람 대문에 뿌리가 떠버린 나무가 없는지 살펴봐 주었다. 발전기는 훌륭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모건이 그것을 전하러 조한테로 가니까, 조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이 나무를 말려서 장작으로 하면 되겠어요." 조가 얼굴에 주름을 모으며 방긋 웃었다. "이렇게 굵은 가지가 꺾어진 것을 보니까, 어젯밤에는 몹시 센 바람이 분 것 같군요."
"로지 채로 날려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예요."
"아니 아니, 이 집은 튼튼하게 지어져 있으니까 괜찮아요. 더 지독한 폭풍이 불어 닥친 일도 있었는데 끄떡하지 않았으니까요." 조는 잠시 생각한 뒤에 따뜻하게 말했다. "테일러 씨가 돌아오실 때까지 매일 찾아와서 도와 드릴게요."
모건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방긋 웃으며 사라져가는 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로지로 돌아왔다.
다음날, 모건은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가는 페리에 올라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관광객들은 모두 밝은 표정이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고 가이드는 손님이 지루하지 않도록 이것저것 마음을 써주었다. 이렇게 한가롭게 관광선을 타는 것은 히든 섬에 오고 나서는 물론, 20년 동안 살아온 가운데서도 처음이었다. 드디어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켄트가 곁에 없는 쓸쓸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라면 더욱 즐겁게 지낼 수 있을 텐데.
자그마한 어촌의 멋진 호텔에서 맛있는 식사를 맛보며 모건은 켄트한테서 들은 아카이아인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실제로 아카이아인의 유서 깊은 땅을 방문하고, 자신의 눈으로 사실(史實)을 보고 있는데도 켄트의 이야기 쪽이 훨씬 무게가 있는 것 같았다. 켄트가 없는 지금 보이는 것 모두가 텅 빈 듯 음식 맛이 당기지 않았다. 겨우 한여름 함께 지냈는데 켄트는 모건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았다.
그 다음날 약속한 대로 조가 마중을 나와 주었다. 큰 파도에 흔들리며 배는 포트 엘긴으로 향했다.
서둘러 전화박스로 달려가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켄트의 음성이 멀리서 들렸다. 역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가느다란 아픔이 가슴을 때렸다. 켄트는 한마디 ‘여보세요'라고 말한 뒤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 끝에 모건은 불안해져서 먼저 말을 걸었다.
"켄트? 잘 들려요?"
"……"
"켄트? 어머님은 어떠세요?"
"괜찮아. 소동을 벌일 만한 일은 아니었어." 켄트의 말소리는 기분 나쁠 만큼 억양이 없었다.
"그래요. 잘됐군요. 언제쯤 돌아오시겠어요?"
켄트의 짤막한 대답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나는 안 돌아가. 시즌 오픈 때 로지를 관리해 줄 부부가 있지. 여기서 연락해서 내일 섬으로 가달라고 했어. 당신은 지금 곧 짐을 챙겨, 내일 아침 첫 페리로 섬을 떠나는 거야."
무서운 침묵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게 이어졌다. 모건은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이유가 뭐죠, 켄트?" 그녀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 까닭은 알고 있을 텐데. 게임은 끝내도록 해줘, 부탁이야." 켄트의 목소리는 피로에 지쳐 있었다. "당신의 모험은 끝났어."
"게임? 모험?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그만둬, 모건." 켄트의 노여운 목소리가 매질하듯 울렸다. "모든 걸 알고 있었지? 분명히 말해 봐!"
"알고 있었다구요? 당신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모건은 앙칼진 목소리로 악을 썼다.
"처음 로지에 왔던 그날 밤부터 모두 계획적으로 행동한 거지? 내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응모해 온 순진한 여자인 체한 거지?"
켄트는 일단 말을 끊고 모건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뉴욕 프레스에서 일하는 친구가 튀어나온 거야. 나는 당신을 믿으려고 퍽 괴로워했지. 그래, 나는 정말로 당신을 믿으려고 노력했어."
모건은 켄트의 말을 조금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전화박스의 벽에 기댔다. 망연하게 수화기를 거머쥐고 더욱 흥분된 켄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을 때부터 난 당신이 기사거리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거야. 그래도 나는 당신만은 다른 리포터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었지."
"리포터라구요?"
"뉴욕 프레스에 처음 실린 기사를 본 순간, 기사를 쓴 것은 당신이라고 알아차렸었지." 켄트는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오드리가 와서 레이놀스가 당신 소문을 이야기하더라고 말했잖아? 그래서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누군가가 당신 이름을 빌어서 기사를 썼는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매스컴에서는 곧잘 있는 일이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는 또 한 번 당신을 믿어 보려 했어."
그날 오후, 신문을 보고 켄트가 크게 화를 낸 까닭을 겨우 알 수 있었다. 켄트는 가십난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하고 내가 그 가십을 흘려보낸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건은 깊은 숨을 들이쉬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곧 귀를 가리고 싶은 말이 쏟아져 왔다.
"그렇지만, 어제의 기사. 그건 뭐야? 이제 그만이라구. 이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알겠나, 뉴욕 프레스의 기사가 방아쇠가 돼서 다른 잡지들 모두 나에 대해서 다루기 시작했다구. 딱딱한 뉴스 잡지까지 거짓말투성이 기사를 싣고 있는 거야. 내 기분을 알겠나? ‘켄싱톤 T 마틴의 애욕의 섬’이라고? 심한 것은 ‘자기 딸만큼 나이 차이가 나는 여자를 장난감으로 한 끝에 여배우 오드리 알랜과 즐기는 마틴’이라고 했어. 그 타이틀이야말로 ‘독자의 양식에 묻는다! 유행작가의 적나라한 성’이냐? 이제까지의 것 중에 가장 엉터리고 비열하고 모욕적인 기사야."
"켄싱톤 T 마틴?" 모건은 들뜬 목소리로 되물었다. "켄트, 당신이 켄싱톤 T 마틴이에요?"
수화기 저쪽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와서 모른 체하는 게 아냐!"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유행작가인 켄싱톤 T 마틴인 것이다. 모건은 대꾸할 말을 잃고 서 버렸다. 켄트는 가십기사 거리를 찾을 목적으로 내가 접근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기사를 쓰도록 한 것도 나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모건은 전신의 힘을 쥐어짜내며 겨우 소리쳤다.
"켄트, 기다려요. 당신이 말하는 건 사실이 아녜요. 내 말을 들어줘요. 네에, 부탁해요. 기다려요……"
켄트는 모건의 말을 날카로운 말투로 딱 잘라 말했다.
"짐을 챙겨 갖고 나가라! 내일 중에 떠나는 거야. 나머지 급료는 헬렌을 시켜서 보내줄 거야. 알았나, 모건. 당신은 오늘부터 해고야!"
전화는 끊겼다. 모건은 땀이 흠뻑 젖은 손으로 한동안 수화기를 쥐고 있었다. 전화박스의 차가운 유리벽에 이마를 눌러댔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켄트가 켄싱톤 T 마틴이라니. 그런 바보 같은, 무명의 시나리오 라이터가 아니라니. 그렇지만 켄트가 이제까지 무명의 시나리오 라이터라고 말한 일이 있었던가. 머릿속이 완전히 혼란되어 버렸다. 아아니, 켄트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맘대로 보잘것없는 시나리오 라이터라고 덤볐을 뿐이다. 그리고 켄트도 굳이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유명한 유행작가, 켄싱톤 T 마틴. 이것이 현실인 것이다. 켄트가 이제까지 숨겨운 진실이란 이것이었다. 바람둥이이며 방탕한 것으로 이름 높은 작가. 켄트는 지금 일련의 스캔들 기사를 흘려보낸 것이 나라고 생각하고 화내고 있다.
모건은 눈물을 꼭 참고 부두까지 달려갔다. 밀려오는 커다란 파도도 머리를 흩날리는 센 바람도 머리가 깨질 듯한 엔진 소리도 이제는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손을 잡고 배에서 내려준 조에게 힘없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모건은 로지에 뛰어 들어갔다.
새들이 즐거운 듯 지저귀고 갈매기는 하늘 높이 날고 있었다. 먼 바다를 달리고 있는 모터보트가 보였다. 모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켄트는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즐거웠던 여름날들이 너무나도 갑자기 끝나 버렸다. 흐느껴 울면서 자기 방으로 향했다. 왜 켄트는 이런 짓을 하나. 나는 이제까지 신출내기의 가난한 시나리오 라이터를 힘껏 도와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켄트는 그런 나를 그늘에서 웃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네 태도를 보면서 가벼운 농담인 셈으로 맞장구 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모건은 걸음을 멈추고 신음소리를 냈다. 아아, 나는 얼마나 바보였을까. 켄트의 서재에서 시나리오의 타이들을 처음 보았을 때 뻔뻔스럽게도 본인을 향해서 마틴이야말로 최고의 작가라고 말해 버렸지. 방탕한 사람이라고 해서 경멸하지 말라고 말한 기억이 있다. 켄트는 마음속으로 나를 보았을 것이다.
켄트에게는 사실을 털어놓을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말을 않고 있었다. 켄트는 끝까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날마다 구겨진 초라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머리와 수염도 자랄 대로 자란 채 괴로워하면서 일을 계속해 왔다. 그런 모양을 보인다면 누구라도 그를 팔리지 않는 작가라고 생각해 버릴 게 뻔하다.
그 다음 마음에 떠오른 것은 더욱 커다란 충격이었다. 매스컴을 통해서 알고 있는 켄싱톤 T 마틴은 어쩔 수 없는 플레이 보이였다. 차례차례로 상대방을 바꾸어 끊일 새 없이 가십난에 오르내린다. 제아무리 켄트가 부정한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나지 않는다. 아마도 소문의 절반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켄트한테 사랑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왔다. 사랑이라구! 그 사내는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모르고 있을 게 틀림없다. 내가 상대라면 더욱 그렇다 오드리가 말하는 대로 그런 사내는 그녀와 같은 여자를 상대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잘 어울리는 그 두 사람. 정상을 향해서 서로의 명성을 서로 이용하면서 살아가라구. 짐을 꾸리는 기력조차 잃고 모건은 베드로 파고 들었다. 노여운 눈물이 끊임없이 넘쳐흐르고 볼을 타고 베개를 적셨다.
다음날 아침, 모건은 몸도 마음도 지친 채 짐을 다 꾸렸다. 무거운 발을 끌고 치워지지 않은 곳이 없는지 둘러보았다. 켄트가 고용한 부부는 곧 올 것이다. 그 사람들이 겨울에 대비해서 덧문을 내리거나 문단속을 해주겠지. 이윽고, 길고 추운 겨울이 찾아와서 로지는 봄이 오기까지 깊은 눈 속에 파묻히고 말 것이다.
자기 방 도어에 서서 방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조용한 여름밤을 보내던 이 방, 여기서 일어난 일들은 꼭 머리에 새겨두고 떠나기로 하자. 나이트 테이블이나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던 자질구레한 것들은 모두 치웠다. 시트와 담요도 벗겨서 베드 위에 똑바로 접어 두었다. 욕실에 내놓았던 세면도구도 모두 챙겼다. 여기저기 모든 게 텅 비어 있어 여기서 지낸 일조차 거짓말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흰 그림물감으로 칠해진 환상의 그림 같았다.
주방으로 들어가 아직도 남아 있는 접시를 씻었다. 그것을 깨끗하게 닦아서 찬장에다 들여놓았다. 이 찬장에는 켄트가 언젠가 사준 데이지 모양의 커피잔이 들어 있었다. 모건은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섬에서의 나날을 봉해 버리듯 꼬옥 문을 닫았다.
뒷곁으로 돌아가 타월을 말리고 돌아와서 다시 한번 로지를 돌아다녔다. 어느 방이고 텅빈 공간이었다. 다시 이 집의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조용히 잠들어 있겠지. 모건은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와있는 듯 고독을 씹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서 섬 전체를 바라보았다. 키가 큰 야생당근이나 노란색 데이지나 연한 핑크의 들장미가 눈에 띄었다. 켄트는 다음에 여기 왔을 때 나를 생각해 낼까? 틀림없이 그는 내 이름도 잊고 있겠지.
물가에까지 걸어가서 뒤돌아서 로지를 바라보았다. 심한 비바람과 겨울 추위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건물이다. 씁쓸한 생각이 가슴을 스쳤다. 켄트가 아직 철부지 소년이었을 때 여기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아아, 어째서 나는 이런 곳에 와버렸을까. 여름 동안에는 마음을 쓸 것도 없는 일이었는데. 도시의 시끄러움을 피해서 약간의 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닿자마자, 그렇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에 차가 고장 난 것은 이런 결과를 암시하는 불길한 전조였던 것이다.
켄트 테일러, 그 사내는 거짓말쟁이다. 이름도 켄트 테일러가 아니다. 거짓말쟁이, 사기군이다. 이것은 맨 처음날 밤에 그가 내게 던져 보낸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야말로 큰 거짓말쟁이 사기꾼이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가 모건 발자국을 지워갔다.
슈트케이스와 백이 놓여 있는 포치에 서서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처음부터 이 세상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가 떠돌고 있었다. 아마도 이 섬이 바깥세상과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이야기에 작은 왕국과 같다. 임금님은 켄트 테일러, 아침마다 눈을 뜰 때마다 기묘한 기대가 우러났었다. 꿈같은 멋진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페리의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모건은 슈트케이스와 백을 들고 선착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50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배에서 내려오는 아내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까이 오는 모건에게 방긋 미소 지어 보였다.
"앤더슨 씨로군요." 남자가 말했다.
모건도 웃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와 아내는 테일러 씨의 부탁으로 로지를 닫으려고 왔습니다. 이제까지도 몇 차례인가 그런 일을 해왔기 때문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뒷일은 걱정 마십시오. 저희들은 익숙해 있으니까요. 자아, 어서 배에 오르시고 좋은 여행하세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 모건은 짐을 들고 페리에 올라탔다. 짐을 내려놓기가 바쁘게 난간에 매달려서 히든 섬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켄트가 돌아와서 모든 것이 원상태로 돌아갔으면 하는 엷은 희망이 숨겨져 있었다. 짐을 챙기고 있는 동안에도 집안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저도 모르는 새에 그런 희망이 부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페리는 선착장을 떠나서 앞바다로 나와 버렸다.
나는 왠 터무니없는 공상가인가. 자신의 바보스런 짓은 이젠 지겹다. 그런 해피 엔드는 영화 속에서의 이야기다. 현실이란 이런 거야. 켄트는 몇 천 킬로 먼 곳에서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을 테니. 자아, 그에 대한 일은 말끔히 잊기로 하자.
그렇게 생각해 보아도 섬이 멀어져가는 데 따라 눈물을 참을 수는 없었다. 이제까지 줄곧 참아왔던 뜨겁고 애처로운 눈물이었다. 켄트 따윈 울 가치조차 없는 사내다. 모건은 화난 듯한 몸짓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러나 켄트는 마음속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금도 섬으로 다시 데리고 갔던 아침, 포트 엘긴에서 마주보고 앉아있던 켄트의 얼굴이 눈에 떠오른다. 그때, 나는 켄트가 명령하는 대로 섬으로 돌아갔고 그리고 모든 걸 잃었다.
키그 크고 우람한 몸집, 사자처럼 당당하게 걷는 모습, 마구 헝클어져서 넓은 이마에 흘러내리는 금빛 머리, 태양에 반짝이고 때로는 생각에 잠겨서 가늘어지고 때로는 노여움에 불타는 눈. 난로 곁에서는 붉어지고 때로는 잿빛으로도 되고 무색으로 보이는 이상한 눈동자. 때가 지나면 이런 기억도 사라져 갈까.
모건은 바다에 떠 있는 수많은 물거품을 보았다. 켄트의 모습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켄트의 애무를 생각할 때마다 몸이 떨렸다. 켄트 테일러라는 사내의 존재가 영혼 깊숙이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페리는 포트 엘긴에 닿았다. 모건은 슈트케이스를 끌며 거리를 서둘러 걸었다.
주유소에서는 캐논이 다른 차에 휘발유를 넣고 모건은 캐논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렸다.
"오늘 돌아가게 되었어요. 캐논 씨." 휘발유를 다 넣고 온 캐논에게 모건은 되도록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차는 고쳤나요?"
"네에, 그거라면 겨우 뉴욕까지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키를 가져올게요."
모건이 차에다 짐을 던져 놓고 나니 캐논은 방긋 미소 지어 보였다. 그는 이 젊은 여성의 팬이 되어 있었다.
"아무쪼록 조심해서 안전운전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캐논이 말했다.
모건도 열어젖힌 창으로 손을 흔들어 대답했다.
"여러 가지로 신세 많이 졌습니다. 정말 고마웠어요. 당신도 건강하세요." 다시는 만나는 일이 없을 테지만……
이그니션키를 돌리니까 엔진은 어렵잖게 걸렸다. 모건은 천천히 스타트했다. 백미러에 비치는 노드바렌츠 해협과 아스라이 보이는 푸는 섬은 끝내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10
싸늘한 가을바람이 포장도로를 휩쓸고 지나갔다. 먼지가 모건의 벌겋게 된 볼을 때렸다. 길바닥의 종잇조각이 바람에 날려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제 갈곳을 향해서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건은 고개를 숙이고 바람을 피하면서 아파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무거운 도어를 밀치고 한 발 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방이 그녀를 맞아주었다.
연 사흘쯤 기온이 자꾸만 내려가서 기록적으로 이른 첫눈이 내리지 더욱 겨울다워졌다.
자기 방으로 통하는 계단을 다 올라서 쇼핑백을 내려놓고 지갑에서 열쇠를 꺼냈다. 급히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서 도어를 발로 밀어 닫고 주방으로 식료품을 갖다 두러 갔다.
한 시간 뒤, 모건은 뜨거운 샤워를 하고 따뜻한 울의 베스로브로 몸을 감쌌다. 수프를 담은 컵을 양손으로 들고 리빙룸의 의자에 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스 도중에 모건은 아연해서 눈을 크게 떴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잊혀지지도 않는 오드리와 핸섬한 남자 배우였다. 두 사람은 뉴욕의 어느 클럽의 사람 물결 속에서 즐겁게 춤추고 있었다.
모건은 화가 나서 스위치를 꺼버리고 의자에 고쳐 앉았다. 이게 뭐람, 겨우 원상태를 되찾았는데, 여름동안의 쓰디쓴 기억은 줄곧 모건을 괴롭혀 왔다. 켄트에 대한 일이나 히든 섬의 일이 몇 차례고 머리에 떠올라서 그때마다 날카로운 아픔이 스치곤 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뒤에 켄트로부터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물론 있을 까닭도 없다. 우송되어 온 마지막 수표에는 보지 못한 사인이 들어 있었다. 비서인 헬렌이 다시 돌아온 게지. 켄트의 기사는 되도록 읽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이전의 생활은 놀랄 만한 속력으로 되돌아왔다. 섬에서 돌아와서 2주일도 못되어 페어필드 하이스쿨의 일이 시작되었다. 동료나 선생들은 신학기 준비에 쫓겨서 휴가 동안의 일들은 그다지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이따금 물어오는 수가 있어도 모건은 그저 캐나다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왔다고만 말했다. 자세한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모건은 컵을 갖고 주방으로 갔다. 문득 깨닫고 보니, 다시 켄트와 지냈던 여름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멈춰 서서 어깨를 움츠리고 자기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렇게 심한 짓을 한 사내를 생각하다니 시간낭비다. 그 따위 녀석 시 생각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켄트에게 심한 상처를 받았는데도 켄트를 생각하는 마음을 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나를 믿어 주지 않는 남성이란 사랑할 필요도 없는 거야. 제아무리 그렇게 생각해 보아도 마음에 새겨진 켄트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켄트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머리, 우람스런 몸집, 따뜻한 손, 기분에 따라서 빛이 변하는 눈동자 그리고 뜨거운 키스, 이제까지 나를 이런 기분으로 만들어 준 남성은 아무도 없었다. 켄트와의 추억이 가슴안에 있는 한 다른 남자와 사귈 수는 없다. 켄트를 대신하는 남자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뉴욕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잡지기자가 모건을 찾아와서 섬에서 지낸 일을 수기로 쓰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다. 모건은 단호히 거절했다. 사례금은 아주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여름에 일어났던 일을 매스컴에 공표한다면 켄트에게 복수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그런 기사에 익숙해 있다고는 하지만 모건이 쓰는 것은 켄트에게 커다란 타격이 되는 것이 틀림없다. 모건은 아무래도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양식이 노여움을 눌러버린 것이다
그런데 오드리는 모건과는 정반대였다.
섬에서 돌아와서 2,3주 지냈을 무렵, 모건은 잡지 스캔들 난에서 오드리에 관한 기사를 발견했다. ‘여배우 오드리 알랜은 지난 여름 한 달 동안 캐나다의 뉴브런즈윅 지방을 여행했다. 또한 이 여행에는 작가 켄싱톤 T 마틴도 동행한 모양으로……’ 모건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는 마치 켄트와 오드리가 줄곧 함께 여행한 것으로 해석된다. 오드리는 이 기사에 대해서 ‘캐나다에 가서 켄트와 지낸 것은 사실이에요……’라고 암시적인 코멘트를 발표했다.
모건은 오드리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여러 가지 화제를 매스컴에 제공하고 세상의 주목을 모아서 영화의 주연을 따낼 속셈인 것이다. 기사의 자료를 흘려보낸 것도 오드리 자신인 것이 틀림없다.
모건은 그날 밤 켄트의 달콤한 속삭임이나 애무를 머리에 떠올리고 잠을 자지 못하는 하룻밤을 지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주 동안은 신경이 과민해져서 사소한 일에도 그냥 벌컥 화를 내버리는 날이 계속되었다. 함께 일하는 친구와 이야기하다가도 저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서 사나운 말을 해버리곤 했다. 모건은 되도록 노력해서 켄트나 오드리나 여름 동안의 괴로운 추억은 생각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켄트는 전에 엉터리 기사 때문에 혼이 난 일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드리의 기사를 읽고 나서는, 켄트가 완고하게 정체를 감추려고 한 까닭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기사를 처음부터 신용해서는 안된다는 걸 겨우 깨닫게 된 것이다. 모건은 차츰 명랑한 성격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또 오드리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고만 것이다. 아아, 또 시작되어 버렸군. 앞으로 얼마 동안 다시 괴로운 추억 때문에 괴로와하게 될 거야. 잠을 자지 못하는 밤이 계속되고 신경이 못 견디고 말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몇 주일이나 걸릴 게 틀림없다.
정말 그 사내야말로 짜증내도 매력이 넘치는 사내, 왜 그런 사내가 내 앞에 나타났을까. 모건은 페이퍼 타월을 똘똘 말아서 휴지통에 던졌다. 안에 든 휴지가 바닥에 흩어졌다. 이젠 모든 게 싫어졌다. 모건은 노여움 때문에 한숨을 쉬고 휴지를 주으러 갔다. 아무데고 부딪쳐 본들 아무런 해결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때 거칠게 노크소리가 울렸다. 모건은 움찔했다. 이런 시간에 누굴까? 틀림없이 앤일 거야. 위층에 사는 앤은 남편이 집에 없을 때 곧잘 놀러오곤 했다.
모건은 타월로 손을 닦고 수건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서둘러서 도어를 약간 열었다.
"앤, 안됐지만, 나 지금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모건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다음 순간 그것은 노여운 눈초리로 변했다.
"당신이에요!" 도어 입구 가득히 버티고 선 켄트를 보고 큰소리를 질렀다.
도어를 닫으려고 하는 모건을 켄트는 말렸다.
모건은 켄트의 얼굴을 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돌아가 줘요."
"당신은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이웃집에서는 내가 떠드는 소리 때문에 곤란을 당하게 될 걸."
"할 수 있다면 해보시라구요."
"그럼, 시작할 거야." 거침없는 태도나 번쩍이는 눈빛으로 보아서 켄트는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소문이 나면 역시 곤란하다.
모건은 도어에 쥐고 있던 손을 떼고 한 발 물러섰다. 켄트는 안으로 들어와서 도어를 닫고 똑바로 모건을 내려다보았다. 켄트가 곁에 있어서 관자놀이가 욱씬욱씬했다. 모건은 켄트한테서 떨어져서 팔짱을 끼었다.
"어떻게 여기를 알았지요?"
"이력서에 적혀 있었지. 그런 것도 잊고 있었나."
켄트의 시선은 모건의 날씬한 몸을 더듬고 있었다. 가냘프고, 약간만 건드려도 꺾어져 버릴 듯한 어깨의 선, 높은 광대뼈가 전보다 눈에 띄었다.
"마른 것 같군." 켄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런가요. 그렇지 않을 텐데."
"그 뒤로 어떻게 지냈어?"
"아주 좋았어요. 최고라고 할 만큼이에요. 당신은?"
"건강해, 다시없을 만큼이야." 켄트가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도 되겠나."
"아뇨, 안 돼요. 어서 용건을 말하고 돌아가세요."
"그렇잖아요, 당신이 쓸데없는 추억담을 하려고 일부러 찾아올 까닭이 없잖아요."
모건은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왜, 켄트가 이제 와서 찾아왔을까. 대접 받고 싶어 한는 저 몸짓, 도대체 무슨 말을 하러 왔을까. 눈앞에 있는데도 켄트의 팔 안에 뛰어들 수 없다니, 몸이 찢기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녀석들이 당신 이름을 악용한 거야." 켄트가 잔잔한 말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녀석들? 누구 말이에요? 나는 모르겠는걸요." 모건은 초조해서 대꾸했다.
"뉴욕 프레스에 기사를 쓴 녀석들 말이야. 멋대로 당신 이름을 쓴 거야, 몰랐었나?"
"알 까닭이 없잖아요. 읽지도 않은 걸요."
"정말이야?" 켄트가 이상하다는 듯 어깨를 추썩였다.
"그런 기사를 쓰는 녀석들은 대개 자기 이름을 당당하게 내세우는데……"
모건은 마음속에서 노여움이 부풀어 올랐다. 이 사내는 여기까지 나를 괴롭히려고 온 거야.
"이야기는 그것뿐인가요? 그럼, 이제 끝난 거죠. 돌아가 줘요."
"아니, 아직 안 돌아갈 거야." 켄트는 갑자기 진지한 낯이 되었다.
"군소리 말아요. 나는 돌아가라고 했어요." 모건은 방안을 가로질러 도어로 서둘러 갔다.
그런데 도어에 닿기도 전에 켄트의 손이 모건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모건은 몸이 뻣뻣해졌다. 쇼크가 몸을 스쳐 지났다. 약간 손이 닿았을 뿐인데도 벌서 몸에 불이 붙어 있었다. 모건은 켄트의 손을 뿌리쳐 버리고 몸을 뗐다. 켄트는 그녀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했다.
"왜, 여기 온 거예요."
켄트의 태도는 묘하게 서먹서먹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걱정이야, 모건. 지난여름, 섬에서 함께 지낸 여자를 잊을 수가 없다구. 내 머릿속에서 그 여자의 그림자가 아롱거리는 거야. 그녀는 매우 순진하고, 좋은 아이고,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지." 켄트는 한 발 모건에게 다가섰다. "망아지 같은 아가씨는 내 마음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어." 모건의 볼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등줄기를 따라서 자잘한 떨림이 전해왔다. 켄트는 손가락을 움직여서 모건의 얼굴을 쳐들고 그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어쩨서 그녀를 잊을 수가 없을까? 왜 이다지도 괴로울까?"
모건은 켄트의 손의 감촉을 견딜 수가 없어서 켄트의 손에서 물러섰다. 목을 쥐어 비트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히는 듯한 심정이었다.
"오드리는 내 신변을 냄새 맡아서 매스컴에 정보를 흘려보낼 목적으로 당신이 섬에 왔다고 말하더군. 잘 되면 일약 유명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야."
"그래서 당신은 오드리가 말하는 대로라고 생각했다는 거지요." 모건은 켄트의 말을 가로막고 째지는 소리를 질렀다.
켄트는 그 악마 같은 여자의 말을 믿은 것이다. 마음이 납덩이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켄트가 사랑을 고백하러 와주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공상이었다는 걸 지금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켄트는 오드리한테 들은 내 모습을 확인하러 왔을 뿐이다.
켄트와 오드리, 그야말로 비슷한 타입의 인간이다. 어느 쪽도 야심가이며 남을 상처 입게 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냉혹한 인간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지루한 외딴섬에서의 심심풀이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 좋을 대로 믿으면 될 그 아녜요!" 모건의 노여움은 폭발했다.
"나는 당신을 믿고 싶은 거야." 켄트의 부드러운 목소리, 모건은 섬찟해서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켄트의 낯빛은 엄숙했다. 잘 맞추어 입은 검정 셔츠와 실크의 파란 셔츠에 감싸인 당당한 몸짓, 여기 있는 것은 허름한 옷차림의 초라한 시나리오 라이터, 켄트 테일러가 아니다. 크게 성공한 유행작가 켄싱톤 T 마틴인 것이다.
"이제 돌아가 줘요, 켄트."
"그렇지만, 한 가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 켄트의 눈은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뭐예요."
"뉴욕 프레스에 자료를 흘려보낸 것은 당신인가?"
켄트의 질문은 모건의 마음을 날카롭게 도려냈다. 필사적으로 손이 떨리는 것을 감췄다. 어째서 이 질문을 빨리 해주지 않았을까. 마지막 전화에서 일방적으로 악을 쓰는 대신에 왜 한 마디도 이렇게 물어주지 않았을까.
모건은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관절이 하얗게 되어갔다. 턱을 높이 쳐들고 켄트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서 격한 노여움의 불꽃이 튀었다.
모건은 이를 악물고 얼음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모욕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내 프라이드가 허락하지 않아요."
켄트의 낯빛이 한층 험하게 변했다.
"첫째로 당신은 나를 믿지 않겠다고 벌써 예전에 정해 버렸잖아요? 팜 스프링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오드리가 당신의 가슴속에 의심의 씨앗을 뿌렸을 테지요.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당신은 의심의 싹을 뽑아 버릴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믿으려 하지 않을 거예요. 머리부터 의심하려고 든 거예요. 신뢰하려고 노력했다면, 의심 같은 건 지워졌을 거예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오늘 여기 온 것도 내가 당신을 배신했다는 걸 확인하려고 온 거지요. 이젠 그만해요. 이젠 싫어요." 모건은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얼른 돌아가 줘요. 다시는 오지 말아요."
켄트는 몸을 돌려서 도어를 향해 갔다. 가슴에 아픔을 느끼며 모건은 켄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갔다.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켄트는 영원히 내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켄트는 나를 엉망진창으로 상처 입힌 미운 사내다. 깨끗하게 손을 끊을 수 있어서 고맙게 생각해야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슴의 아픔은 더욱 더해왔다.
모건은 의자 등받이를 움켜쥐었다. 귀찮은 걸 털어 버렸어요. 그래 이것이면 되는 거야. 내 성실을 의심하고 그런 거짓말로 나를 책망하는 사내란 필요 없다. 만약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면 내가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것쯤 알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몸 안에 충격이 꿰뚫고 지났다. 바로 나도 같은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도 오드리의 말을 곧이 듣고 켄트의 참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오드리가 말하듯 켄트가 나같은 여자를 사랑할 까닭이 없다고 마음먹었던 일은?
나도 켄트와 같은 함정에 빠져 든 것이다. 켄트를 둘러싼 갖가지 소문이 밑도 끝도 없는 거라고 알고 나서도 내가 알고 있는 켄트 테일러라는 사내를 마음속으로부터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켄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프라이드를 버리고까지 일부러 찾아올 까닭이 없다.
모건은 숨을 들이 삼키고 방을 뛰쳐 나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켄트는 마침 리무진에 오르려던 참이었다.
"켄트, 기다려요."
켄트는 뒤돌아보았다. 모건은 맨발인 채 도로를 가로질러 달렸다. 찬바람에 날려서 가는 몸집이 크게 흔들렸다. 켄트는 낮은 소리로 나무라며 모건의 팔을 붙잡고 차안으로 끌어들였다.
"무슨 바보짓을 하는 거야! 그런 상태라면 얼어버리고 말걸."
켄트가 도어를 닫으니 밖의 소음도 뚝 멈춰버렸다. 이어서 작은 버턴을 누르니까 운전석과 뒷좌석을 가로막는 유리가 소리도 없이 솟아올랐다. 제복을 입은 운전사에게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켄트는 모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어찌된 거야, 모건." 초조한 듯 묻는다.
"또 한 번, 또 한 번 물어줘요." 모건이 속삭였다.
"뭘 묻는 거야?"
"아까 질문을 다시 한번 해줘요."
켄트는 뚫어질 듯 모건을 쏘아보고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기사의 자료를 흘려보낸 건 당신인가?"
침묵,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전류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크게 벌린 모건의 눈에서 수정 같은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떨어졌다.
"오오, 켄트. 그 질문을 더 빨리 해주었더라면…… 내가 배신하지 않은 걸 알아주셨을 텐데.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 짓 할 까닭이 없잖아요."
켄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랐다.
"언제부터 당신을 사랑했는지 나도 잘 모르지만 섬에 있는 동안 줄곧 사모해 온 것 같아요. 이곳으로 돌아온 뒤에는 마음의 상처가 쉴 새 없이 아파서 괴로웠어요. 그렇지만 나를 의심하는 남자는 사랑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당신에 대한 일은 잊어버리려고 했어요. 만약에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그런 엉터리를 믿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당신이 아까 방을 나갔을 때 나는 이 세상 끝장인가 생각했어요. 그리고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하는 나도, 당신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도 오드리나 매스컴이 만들어 낸 켄트 타일러를 보고만 있었을 뿐이라고 말예요.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을 때 겨우 당신도 같은 마음이란 걸 알았어요."
모건은 켄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부탁이에요! 내 말을 믿어줘요.’
켄트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모건의 두 팔을 움켜쥐고 팔을 뻗어서 그녀를 보았다. 그 순간 이제까지 참아온 뜨거운 눈물이 물고를 터버린 듯 흘러내리고 모건의 볼을 적셨다. 켄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다. 모건은 얼굴을 돌렸다.
"아아, 나는 정말 바보였어요." 모건은 흐느껴 울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확인해 주려고 와준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틀렸군요. 당신은 나한테 앙갚음 해 주려고 온 것뿐이군요. 나를 괴롭혀 주려고 왔을 뿐이군요."
"그만해, 모건." 켄트가 가로막았다.
모건은 뺨을 찰싹 얻어맞은 듯 켄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힘껏 노여움을 참고 있었다. 갑자기 그 엄한 표정이 사라지고 아픔에 찬 슬픈 빛이 떠올랐다. 눈동자 속에 초록빛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구." 모건을 끌어당기고 속삭였다.
켄트의 입술이 모건의 입술을 더듬었다. 모건은 넋을 잃고 입술을 갖다 댔다. 작은 욕망의 불꽃이 몸 안에서 타오른다.
"저를 믿어 주시는 거예요."
"그럼, 믿고 말구." 입술을 살짝 들이대고 억세게 끌어안았다.
"아니 켄트, 왜 이제까지 잠자코 있었지요? 당신은 끝까지 ’사랑한다‘고는 말해 주지 않았어요."
"나는 완고한 사내니까, 딸처럼 나이가 어린 여성한테 끌리고 있다고는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었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켄트는 다시 입술을 포갠다. 모건의 가슴속에 따뜻한 사랑의 물결이 퍼져 나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입술을 뗐다. 모건이 중얼거렸다.
"저는요, 오드리한테서 말을 들었어요. ‘당신 따위는 켄트와 잘해 나갈 수 없을 거야’라구요."
안절부절 못하는 말투로 켄트가 대답했다.
"그 여자의 이름을 다시는 듣고 싶지 않군. 그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이 큰일 날 뻔했다구." 모건의 몸에 두른 손에 힘을 주고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 모건. 당신이 없으면 내 인생은 텅빈 거야."
켄트는 문득 고개를 들고 피식피식 웃었다.
"당신은 그날 밤, 물에 젖은 새끼고양이 같은 모양으로 로지에 찾아 왔었지." 손을 모건의 머리에 갖다 대고 사랑스런 듯 매만졌다. "헐렁한 내 베스로브를 입고 피로했을 텐데, 용감하게 대들려고 했었지. 나는 그때부터 당신을 사랑했던 거라고 생각해." 켄트는 입술을 모건의입술에 살포시 겹쳤다.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고 나서는 나는, 서두는 내 마음을 힘껏 누르려고 한 거야."
믿지 못하겠다는 낯으로 얼굴을 든 모건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를 이런 마음을 갖도록 한 여자는 이제까지 없었지. 당신에 대한 생각을 끊고 싶어서 나는 일에만 열중했어. 당신을 멀리하고 싶어서 말야. 소리를 지르거나 못살게 군 것도 그 탓이었어. 그렇지만 그러다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어서,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당신한테 보이려고 한 거야." 켄트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당신처럼 터프한 여자는 처음이야."
"터프?" 모건은 놀라서 되받았다. "저는 조금도 터프하지 않아요. 당신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걸요." 모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다 겨우 당신이 소중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을 때 자칫 잘못했더라면 당신을 영원히 잃을 뻔했어요."
"영원히야." 켄트는 자기 가슴에 모건을 끌어안았다. "멋진 말이군, 모건. 당신은 영원히 내 아내로 있어 줄 테야? 내 아내이며, 연인이며, 친구이고 좋은 의논 상대로서……"
"그리고 당신의 요리사예요." 모건은 밝은 웃음소리를 질렀다. "무엇보다도 당신에게는 요리사가 필요해요."
"그 말이 맞군." 켄트는 모건의 귀에 입술을 갖다 댄다. "모건, 나는 평생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
"아아, 켄트." 모건은 숨을 허덕이며 두터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을 평생토록 사랑할 거예요."
"내가 악명 높은 플레이 보이라도 상관없겠나?"
"켄트, 나는 당신의 재능이나 명성이나 소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나는 지난 여름에 알게 된 켄트 테일러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 줄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거야. 귀여운 모건. 내 모든 것이 당신 거야."
켄트의 입술이 목덜미를 더듬고 모건의 몸에 불을 당겼다.
"새 살림은 어디서 시작할까? 당신이 좋아하는 곳을 고르면 돼. 스위스에 산장, 파리 교외의 맨션, 캘리포니아에는 집, 그리고 뉴욕에도 맨션이 있다구. 아니, 우선 허니문 갈 곳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어디가 좋겠나?"
켄트는 머리를 들었다. 눈에 유머가 담겨 있었다.
"아마, 오래 관광할 시간은 없겠지만. 우리는 그밖에도 할 일이 있으니까 말야."
"어머, 켄트. 아마 그렇겠군요." 모건은 쑥스러워 낯을 붉혔다.
켄트의 키스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에 따라서 모건의 심장의 고동도 커져 갔다. 앞으로 서로가 감출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야. 켄트가 살아 있는 세계에서 손을 맞잡고 가는 것이다. 사랑과 신뢰로 맺어진 새로운 생활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모건은 마음속으로 몰래 결정짓고 있었다. 새로운 인생은 두 사람이 만난 섬에서 시작하는 거야. 오랜 동안 참된 사랑을 찾고 있던 두 사람만의 그 외딴 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