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로체스타 씨의 소식은 열흘이 지나도록 없었다. 페어펙스 부인의 말을 빌리면 가령 막바로 대륙으로 건너갔다 해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전에도 이번처럼 오랫동안 집을 비운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오한과 실망을 느꼈다. 하지만 기운을 되찾고 설레는 마음을 달래었다. '너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이 아니냐? 따뜻한 대우에 오히려 감사해야지. 그분을 너의
슬픔이나 기쁨, 기타 섬세한 감정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돼요. 너에게도 자존심이 있지 않니?'
나는 일을 조용히 처리하며 하루하루 보냈다. 그가 집을 비운 지 2주일이 넘어서, 페어펙스 부인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주인한테서 왔어요." 하고 부인이 말했다. 그녀가 봉투를 뜯고 내용을 읽는 동안, 나는 계속 커피를 마셨다.
"자아, 이 집도 이제는 꽤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 오랫동안은 아니겠지만." 부인은 아직도 안경을 쓰고 편지를 든 채 말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인에게 요구할까 말까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나는 아델의 앞치마 끈을 묶어 주었고 컵에 우유를 따라 주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자연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로체스타 씨가 쉽게 돌아오지는 않겠지요?"
"아니, 바로 와요. 사흘 안으로 - 라고 씌어 있으니까 목요일에 오겠지요. 하지만 혼자 오시는 게 아니에요. 그쪽에서 훌륭한 분들을 많이 데리고 온대요. 좋은 침실을 하나 남김없이 준비해 두라는군요. 귀부인들은 하녀를 데리고 올 것이고, 남자들은 하인을 데리고 올 테니까 온 집안이 북적거리겠지요."
부인은 식사도 별로 하지 않고, 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예언대로 사흘 동안은 대단히 바빴다. 임시로 고용한 세 사람의 여자가 닦고, 쓸고, 페인트 칠을 하고, 그야말로 법석이었다. 이러한 소란 속을 아델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뛰어다녔다. 공부는 쉬고 있었다. 페어펙스 부인으로부터 억지로 일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저장실에서 요리사들의 심부름을 한 덕분에 치즈, 케이크나 프랑스식 파이를 만드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손님들은 목요일 오후, 여섯 시에 만찬을 할 수 있도록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 동안 나는 괴상한 상념에 시달릴 시간이 없었고, 누구 못지않게 명랑하고 활발하게 일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레이스 풀을 볼 때마다 가끔씩 불안이나 어두운 상념의 세계로 던져졌다. 그는 하루에 단 한 시간만 아래에 내려와 있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3층에 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이 집 사람들은 나 말고는 누구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를 않는 일이었다. 오직 한번, 리어가 임시로 고용한 청소부와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은 적이 있었다. 리어가 뭔가 내게 들리지 않는 말을 한 데 대해 청소부는 말했던 것이다.
"급료가 대단히 좋군요, 그 사람."
"그럼요. 나도 그렇게 받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뭐 그렇지 않다 해서 불평할 처지도 아니에요. 손필드는 째째한 곳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누구도 풀의 5분의 1도 못 받아요. 그래, 그 여자는 저축이 꽤 되겠지요. 월급날에는 매번 밀코트의 은행에 가요. 하지만 그 사람은 이제 여기에 정이 들었고, 몸도 건강하고 하니까 그 일을 그만두기는 아직 이를 거예요."
"아무튼 용하게도 맞는 사람이군."
"그야 뭐, 자기 일은 척척 해내요."
리어가 의미 있게 대답했다.
"누구도 그 사람과 같은 월급을 받는다해도 대신은 그렇게는 못해요."
"그렇겠지! 그런데 나으리는 도대체......"
하고 상대방은 맞장구를 치려 했으나 나를 본 리어가 팔꿈치로 상대방을 쿡쿡 찔렀다.
"저 사람은 몰라요?"
하고 여자가 낮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얘기는 여기서 끊어졌다. 손필드에는 하나의 비밀이 틀림없이 있다. 그 비밀은 나에게 특별하게 알려지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목요일이 왔다. 가구는 닦여지고, 꽃병에는 꽃이 꽂혔다. 오후가 되자 페어펙스 부인은 까만 가운에다 장갑을 끼고 금시계를 차고 성장 차림이었다. 아델도 옷을 갈아입었다. 나만은 공부방이라는 나의 신성한 밀실에서 불려 나가지 않았다. 따뜻하고 맑은 봄 날씨였다. 3월 말이나 4월 초인데도 여름이 온 것처럼 대지는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공부방을 활짝 열어 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꽤 늦군요."
하고 페어펙스 부인이 들어왔다.
"벌써 여섯 시가 지났는 데요. 존에게 문까지 나가보라고 시켰어요. 거기라면 밀코트 방향이 멀리까지 보이니까요."
그러면서 부인은 창가로 갔다.
"어머, 존이 왔어요! 존, 오시더냐?"
"네, 모두 오세요. 10분만 지나면 여기 닿을 거예요."
아델이 창으로 달려갔다. 나도 따라갔다. 커튼 그늘에 가려 밖에서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섰다.
존이 말한 10분이라는 시간은 대단히 긴 것처럼 느껴졌지만 마침내 마차 소리가 들렸다. 네 명의 말 탄 사람이 앞서 달려오고, 그 뒤를 두 대의 포장마차가 따르고 있었다. 말을 탄 네 사람 중 둘은 젊고 발랄한 신사였고 그 뒤를 이어 로체스타 씨와 파일로트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로체스타 씨와 나란히 한 귀부인이 같은 속도로 말을 몰고 있었다.
"잉그람 아가씨!"
하고 페어펙스 부인은 소리치며 급히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아델이 자꾸만 내려가겠다는 것을 나는 무릎에 안고 확실히 부르기 전에는 멋대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아델은 울었다. 하지만 내가 엄격한 얼굴을 보이니까 도리 없이 눈물을 닦았다.
홀은 밝게 술렁거렸다. 신사들의 굵은 목소리와 숙녀들의 맑은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 왔다. 더욱 확실한 웃음소리는 주인인 로체스타 씨의 낭랑한 음성이었다. 이윽고 가벼운 발소리가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 밝은 웃음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리고 조용해졌다.
"옷을 갈아입나 봐."
아델은 귀를 기울이고 하나하나의 순간을 포착해 가다가 프랑스 말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배 고프지 않니, 아델?"
"고파요, 선생님. 식사한 지 벌써 대여섯 시간은 됐어요."
"그래? 그럼 손님들이 방이 있는 동안에 내가 내려가서 먹을 것을 가져올게."
나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와 주방으로 내려가는 뒷 계단으로 갔다. 주방은 일하는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나는 그사이를 뚫고 간신히 식료실에서 닭고기와 빵과 접시 두 개와 나이프와 포크를 챙겨 들고 2층으로 왔다. 복도에서 뒷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숙녀들은 웃고 떠들면서 막 방에서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복도 끝의, 창 없는 어두운 곳에 숨었다. 먹을 것을 들고 오다 들키면 창피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방에서는 아름다운 숙녀가 성장을 하고, 밝고 가벼운 미소를 띠며 나타났다. 청아한 명문의 부인들의 한떼가 서서 움직이는 모습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델이 공부방의 문을 조금 열고 살짝 내다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머, 참 고운 분들이구나! 저런 부인들의 곁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식사가 끝나면 아저씨는 우리를 아래로 불러 주실까?"
하고 영어로 말했다.
"천만에요. 오늘 밤은 귀부인들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아마 내일이 되면 모두 만나 볼 수 있겠지. 자아, 요리를 가져왔어요."
아델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정신없이 먹었다. 이렇게 요리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자칫하면 아델도 나도 저녁을 굶을 판이었다. 아래층 사람들은 너무 바빠 우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델에게 평소보다 훨씬 늦게 자는 것을 허락했다. 밤이 훨씬 깊어지자, 응접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델과 나는 2층 위에 앉아서 들었다. 누군가가 노래도 불렀다. 여자인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었다. 독창이 끝나자 2중창이 이어지고, 어느덧 나의 귀는 로체스타 씨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는 자신을 느꼈다. 시계가 열한 시를 쳤다. 아델은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로 금세라도 눈을 감을 듯이 졸음에 겨워했다. 나는 그녀를 안아다 침대에 눕혔다. 한 시가 되어도 신사 숙녀들은 침실로 가지 않고 있었다.
다음날도 날씨는 좋았다. 그래서 그들은 오전 중에 어딘가로 들놀이를 나갔다. 갈 때도, 돌아왔을 때도 나는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잉그람 아가씨만이 오직 말을 타고 로체스타 씨와 나란히 행동했다. 나는 창에서 보고 있는 페어펙스 부인에게 말했다.
"나, 저분을 보고 싶어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오늘 밤에는 만나 볼 수 있을 거예요."
하고 페어펙스 부인은 대답했다.
"나는 아델이 너무도 조르기에 로체스타 씨에게 얘기해 버렸어요. 그랬더니, '아아, 그래요! 그럼 만찬 뒤에 응접실로 불러요. 에어 선생도 같이......'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어머, 하지만 그건 아마 동정에서 하신 말이겠지요. 나는 안 가도 될 거예요."
"그런데요, 내가 에어 선생은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한다고 했더니 '무슨 소리야, 오지 않으면 내가 가서 팔을 잡고 끌어내겠다고 그래요.' 라고 말하잖아요."
"그렇게까지 하실 것은 없는데, 피할 도리가 없다면 가겠지만 사실 마음 내키지는 않아요."
"손님들 앞에 나가는 것은 별로 좋지 않지요. 숙녀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응접실로 들어가서 조용한 곳에 앉아 있다가 로체스타 씨가 나와서 당신을 보면 곧 나와 버려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마침내 응접실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한 번도 입지 않은 제일 훌륭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빗고, 오직 하나뿐인 장신구, 그 진주 브로치를 달은 것으로 족했다. 아델과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운이 좋게도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객실을 지나지 않고도 응접실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대리석 난로는 조용히 타고 있었고, 촛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치 앞에는 심홍빛 커튼이 쳐지고, 저쪽에서는 식사를 하는 손님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델은 엄숙한 기분이 들었는지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가리킨 발판 위에 앉았다. 나는 창가로 물러나, 테이블 위에서 한 권의 책을 집어 읽으려 했지만 아델이 발판을 들고 내게로 다가와 무릎에 기댔다.
"왜 그러니, 아델?"
"이 멋진 꽃을 내가 한 송이만 가지면 안 될까요, 선생님? 그러면 나의 토아렛은 아주 좋아할 텐데."
"아델은 그런 것만 생각하는 구나! 하지만 꽃은 가져도 좋아요."
나는 꽃병에서 장미를 한 송이 뽑아 그녀의 띠에 꽂아 주었다. 아델은 만족스러워했다. 이윽고 아치를 가렸던 커튼이 열리고, 식당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응접실 입구에 한떼의 숙녀들이 들어왔다. 그러고는 커튼이 다시 닫혔다. 부인들은 모두 8명이었지만 훨씬 더 많은 것같이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한두 사람은 답례를 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나를 힐끔 보았을 뿐이었다.
숙녀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몇 명은 소파에 앉고, 몇 명은 테이블에서 꽃도 보고 책도 봤다. 또 다른 부인들은 난롯가에 주욱 둘러서기도 했다. 우선 이슈턴 부인과 그녀의 두 딸이 있었다. 부인은 확실히 미인이었다. 딸 중에 언니인 애미가 좀 조그맣고 소박한 얼굴에다 태도도 어린애 같았는데, 동생인 루이자는 언니와는 다르게 키가 크고, 우아하고,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디 링은 40세 전후의 덩치 큰 여자였다. 대단히 거만해 보였다. 덴트 대령 부인은 이에 비하면 소박해 보였고, 귀족 같았다. 헌칠한 키, 평온한 얼굴에 금발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세 사람의 여성은 잉그람 경 미망인과 그녀의 두 딸, 브란쉬와 메어리였다. 세 사람 모두 키가 컸다. 미망인은 한 50세쯤 되어 보였는데 용모와 태도에는 역겨울 정도의 거만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험악하고 냉혹했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리드 부인을 생각했다. 브란쉬와 메어리는 마치 포플러처럼 곧은 큰 키였다. 메어리는 키가 큰 대신 몸이 가늘어 보였지만 브란쉬는 마치 다이아나 (여자 사냥꾼) 같은 체격이었다. 물론 나는 페어펙스 부인의 말대로 용모가 아름다운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그리고 내가 상상으로 그린 그림과도 닮았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또 세 번째는 로체스타 씨의 마음에 들지 안 들지를 보고 싶었다.
그녀의 자태는 실로 페어펙스 부인의 설명과 나의 상상과도 일치했다. 하지만 얼굴은 젊어서 주름이 없을 뿐, 어머니를 꼭 닮았다. 좁은 이마에다 그 거만성까지 닮았다. 메어리는 브란쉬에 비교하면 순진한 얼굴이었다. 눈과 코도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었으나, 살결을 희어서 생기가 없어 보였다. 얼굴은 표정이 없고 눈에는 빛이 없었다. 나는 과연 잉그람 아가씨가 로체스타 씨의 마음에 들었을까 생각했다. 나는 그의 여성미에 대한 기호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가 만일 위엄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면, 그녀야말로 실로 위엄의 전형이었다. 대개의 신사들이 이 아가씨에게 반하겠지. 또 로체스타 씨가 지금 그녀에게 반해 있음을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아델은 귀부인이 들어오자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크게 인사를 했다.
"봉 쥬르 (여러분 안녕하세요)."
그러자 잉그람 아가씨는 그녀를 바보 취급하듯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유우, 쬐그만 인형!"
레디 링이 말했다.
"로체스타 씨가 돌보고 있다는 프랑스 태생의 조그만 아가씨가 바로 얜가 봐."
덴트 부인은 상냥하게 아델의 손을 잡고 키스했다. 애미와 루이자와 이슈턴 자매는 모두 소리쳤다.
"어머, 귀여운 아가씨구나!"
그리고 두 사람이 아델을 소파에 부르자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앉아 프랑스 말과 더듬거리는 영어로 지껄여 댔다. 마침내 커피가 나오고 신사들도 나왔다. 나는 커튼 그늘에 반쯤 숨었다. 헨리 링과 프레데릭 링은 대단히 씩씩한 남성이었고, 덴트 대령은 군인다운 인물이었다. 이 지방의 장관이 이슈턴 씨는 신사다운 사람으로 머리는 하얗지만 검은 눈썹과 구레나룻이 인자한 아버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잉그람 경은 누이들과 닮아 키가 컸다. 하지만 메어리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없는 편이었다. 로체스타 씨는 맨 뒤에 들어왔다. 나는 아치 쪽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도와 불을 껐던 날 밤, 그와 나는 손을 잡고 우리도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가! 그런데도 지금의 나와는 얼마나 먼가!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방 저쪽에 자리 잡고 몇 명의 귀부인들과 얘기를 시작했지만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의 정신이 그 부인들에게 쏠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를 몰래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렸다.' 는 말은 옳은 말이다. 나의 주인의 핏기 없는 올리브 색 얼굴, 굵은 눈썹, 움푹한 눈, 엄격한 얼굴, 꽉 다문 무서운 입 모습 - 활력과 결단과 의지로 가득 찬 이러한 것들은, 보통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지만 내게 있어서는 아름다움을 확실히 넘어서 나를 완전히 지배했고, 나의 감정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힘을 잃게 했으며 그에게 완전히 예속시켜 버렸다. 나는 그를 생각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내게서 싹트는 사랑의 싹을 잘라 버리려고 참으로 얼마나 노력했던 것일까. 그런데도 다시 한번 그를 본 순간, 나의 사랑의 싹은 더욱 무성하게 자라 돌아보지도 않는 그를 나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들고 말았다.
나는 손님들과 그를 비교해 보았다. 링 형제의 세련된 태도, 잉그람 경의 기품, 덴트 대령의 군인다움, 일련의 이러한 것이 그의 얼굴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로체스타 씨 외에 다른 사람의 풍채나 표정에도 나는 공명을 느끼지 못했다. '로체스타 씨는 저들과는 다르다. 저분은 나와 같아. 확실히 그래. 그런데 어째서 5, 6일 전에 나는 저 사람의 손에서 급료를 받는 외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했던가? 고용주 이상으로 그분을 생각하는 것을 자신에게 금했던 것일까? 그야말로 자신에 대한 모독이야! 내가 가진 선량하고 진실된 발랄한 감정을 충동적으로 그분에게 집중되어 있어. 나는 나의 감정을 숨겨야 돼. 희망을 죽이고 저분이 내게 마음이 끌릴 턱이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영구히 떨어져 있어야 함을 나는 계속 나 자신에게 타일러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호흡하고, 생각하고, 저분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커피가 나오고 신사들이 나오고, 숙녀들은 종달새처럼 재잘대며 그들은 남녀 쌍쌍이 짝을 지어 웃고 떠들었다. 브란쉬 잉그람은 누구와 짝지을 것인가? 그녀는 누군가의 요구를 기다리고 있겠지. 지금 로체스타 씨는 난로 곁에 혼자 서 있었다. 브란쉬는 맨틀피스의 반대쪽에서 로체스타 씨와 마주 보고 있다.
"로체스타 씨, 나는 당신이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네,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럼 어째서 조그만 인형을 돌보고 계세요? 학교에 보내 버리면 될 텐데."
"내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에요. 학교는 비용이 드니까요."
"어머, 하지만 가정교사를 고용하고 있잖아요. 지금, 그 애하고 같이 있었어요. 아, 저기 창가에 있군요. 물론 저분에게도 급료를 주시지요? 그렇다면 비용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비싸게 들지 않나요?"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는 별로 내키지 않는 듯이 똑바로 앞을 내다보며 말했다. "로체스타 씨는 경제나 상식을 전혀 생각지 않는군요. 가정교사에 대해서는 우리 엄마에게 물어보시면 잘 알아요. 우리들은 아마, 열두 사람은 고용했을 거예요. 반은 화가 나고, 반은 하찮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져요. 그렇죠, 엄마?"
"가정교사 얘기는 그만둬요. 듣기만 해도 속이 뒤틀려요." 잉그람 미망인이 말했다.
"그들의 무능과 허식 때문에 나는 순교자 같은 고통을 맛봤어요. 이젠 필요 없게 됐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에요."
"가정교사의 결점이란 어떤 거예요?"
하고 로체스타 씨가 큰소리로 질문했다.
"나중에 당신한테만 얘기할게요."
실로 뜻있게 터번을 흔들며 그녀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러면 내 호기심이 만족하지 못해요."
"브란쉬에게 물어보세요. 걔가 나보다 가까이 있었으니까."
"어머, 내게 뒤집어씌우지 말아요. 나 같으면 한 마디로 결정해 버려요. 귀찮은 존재지. 나는 그들에게 별로 애를 먹지는 않았어요.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쥬벨 부인이었어요. 그 사람을 꼼짝 못 할 입장에 몰아넣었을 때의 화난 모습이란 지금도 눈에 선해요. 나는 찻잔을 뒤엎고, 버터 바른 빵을 마구 짓찧고, 책을 천장으로 집어 던지고, 자로 책상을 땅땅 치고, 젓가락으로 화덕을 후려치고, 실로 큰 소동이었지요. 엄마가 그런 내 행동을 보고 좋지 않은 경향이라고 생각하여 그녀를 집에서 쫓아내었어요. 그렇지요, 엄마?"
"그래그래. 거기다 바이닝 선생과 미스 윌슨과의 연애 사건도 있지. 여자 가정교사와 남자 선생의 수상쩍은 결합은 예의 바른 가정에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또 이유가 헤일 수 없을 만큼 많지요. 우선 첫째로......"
"어머, 큰일났어! 그 이유를 다 얘기하는 것은 제발 그만둬요. 뭐 뻔한 거니까요."
"그럼 다른 얘기로 옮기지요. 로체스타 씨, 나의 발언에 찬성해 주시겠습니까?"
"네, 찬성하구말구요."
"시놀 에드아르뜨, 당신이 오늘 밤 노래를 좀 해주세요."
"명령이라면 하겠습니다."
그녀는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잉그람 아가씨는 자랑스런 태도로 순백의 의상을 여왕처럼 펼치고 피아노에 앉아 화려한 전주곡을 치기 시작했다. 이날 밤 그녀는 대단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확실히 그녀는 자기를 화려하고 대담한 여성으로 남에게 보이려고 애썼다.
"나는 요새 남성에게 오직 힘과 용맹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남자들의 모토는 사냥하라, 쏴라, 그리고 싸워라 예요. 다른 것은 모두 가치가 없어요. 내가 만일 남자라면 그렇게 생각해요."
누구 한 사람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녀는 한참 있다가 다시 말했다.
"만일 결혼을 한다면 나의 남편은 경쟁 상대가 아니고, 나를 치켜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여왕의 자리 가까이에 경쟁자가 있다는 것은 싫어요. 나는 절대의 순종을 요구하겠어요. 로체스타 씨, 자아, 노래를 하세요. 내가 반주를 할 테니까."
"절대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즉석에서 대답했다.
"여기 해적의 노래가 있어요. 내가 해적을 좋아하는 것, 아시겠지요? 정열을 다해 불러 주세요." 그녀는 활기찬 모습으로 반주를 시작했다.
'빠져나가려면 지금이 때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실내의 공기를 뒤흔드는 목소리가 나를 잡고 말았다. 풍요하고 힘찬 베이스, 거기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을 넣어 그의 목소리는 귀로부터 마음으로 전달하고, 이상하게도 감격에 눈뜨게 했다. 나는 그의 노래가 다 끝나고 다시 장내가 시끄러워져서야 살짝 일어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좁은 홀을 지날 때, 나는 풀려진 샌들 끈을 묶기 위해 계단 아래의 매트에 무릎을 꿇었다. 식당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한 사람의 신사가 나왔다. 내가 당황해서 일어났을 때는 이미 그가 내 앞에 와 있었다. 로체스타 씨였다.
"안녕하세요?"
"네, 덕분에."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뭘 하고 있었어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델의 공부를 봐 주었어요."
"그런데 어째서 얼굴빛이 전만 못해요. 나는 첫눈에 그걸 알았어요. 왜 그렇지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로체스타 씨."
"감기라도 걸린 게 아닐까요?"
"아아뇨."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세요. 너무 일찍 돌아가요."
"난, 피로해서." 그는 잠시 나를 살폈다. 그러고는, "다소 침울해 보이는군요. 무슨 일이에요, 얘기해 보세요."
"아녜요. 침울해 뵈요. 조금만 얘기를 더 하면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침울해요. 거 봐요, 벌써 눈물이 빛나고 있어요. 눈물이 마룻바닥에 떨어졌어요. 하지만 손님들이 있는 동안, 나는 매일 밤 당신이 응접실에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나의 희망이에요. 자아, 가셔서, 소피아에게 아델을 데려가라고 해주세요. 편히 쉬세요, 나의......"
여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입술을 깨물고 급히 내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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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필드에는 즐거운 나날이 흘러갔다. 이 지붕 밑에서 보낸 처음 석 달 동안의 고요하고 단조롭고 쓸쓸했던 것과는 큰 차이일까! 이 집안에서 느꼈던 쓸쓸한 기분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어두운 상념도 모두 잊혀졌다. 진종일 활기찬 움직임으로 가득했다. 나는 로체스타 씨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누차 얘기해 왔다. 그가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귀부인들에게만 정신이 팔려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령 그가 머지않아 여기 있는 귀부인과 결혼할 것임을 느꼈다고 해도, 또 그의 사랑을 그녀가 모두 깨닫고 있다고 해도, 또 그의 그러한 태도에서 시간마다 구애의 태도가 보이고, 그것이 이쪽에서 사랑을 요구하기보다도 저쪽에서 요구하게끔 하는 그런 것이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이러한 갖가지 사정에 비탄은 있었지만, 그 이상의 사랑을 식게 하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질투하지 않는다. 미스 잉그람은 내가 질투를 느끼기에는 너무도 품위가 모자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훌륭해 보였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예절은 있었지만 천성은 나면서부터 가난했고 마음은 거칠었다. 그 토양에서는 아무 것도 자발적으로 꽃피지 않았고, 스스로 익은 자연적인 그 신선함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녀는 선량하지도 않았고, 책에서 배운 사치한 문구를 흉내 낼 뿐 독창력도 없었다. 그녀가 너무 자주 폭로한 것은 아델에 대한 그녀의 모멸과 반감만이 가득했다. 아델이 자칫 자기에게 다가서기라도 하면 무례한 말로 떠다밀기도 하고, 방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실로 냉혹하고 신랄했다. 내가 느낀 것처럼 로체스타 씨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 그의 명민함, 조심스러움이 자기 애인의 결점을 뚫어 보고, 그녀에 대한 그의 심중에 정열이 없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부단히 괴롭히는 결과가 되었다.
그가 가문을 위해서, 또 정치적 이유에서, 말하자면 단지 그녀의 사회적 지위와 연고 등이 좋아서 그녀와 결혼하려는 것을 알았다. 그가 그녀에게 사랑을 주고 있지 않다는 것, 그녀의 성질이 이 귀한 보배를 그에게서 빼앗아 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여기에 나의 신경이 자극되고, 울고, 웃게 되고 열이 식기 전에 오히려 높여 주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를 매혹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로체스타 씨를 유혹하려는 잉그람의 의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모르는 채 자기만족에 들떠 있었다. 이러한 상태를 현실적으로 본다는 것은 끊임없이 정열을 쏟게 되고, 또 사정없이 그것을 억제당하기도 하는 일이었다.
'저 아가씨는 그분에게 가까이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분의 마음을 낚을 수 없는 걸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아, 그녀는 본심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어. 만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흘겨보거나, 난 척해 보이거나, 애교를 떨지 않을 거야. 지금도 그녀가 그렇게 재잘거리고 있는데도 저분은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 하지만 나는 저와는 정반대의 표정을 본 적이 있어. 그녀가 저분과 결혼한다면 어떻게 해서 저분을 기쁘게 할까? 나는 그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꼭 되지 않을 일도 아니고, 그때는 저분의 아내 되는 사람이 이 지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임에 틀림없어.'
나는 로체스타 씨가 이해와 인연으로 결혼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신분, 교육, 기타를 생각해 보면 적어도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사고방식이나 주의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로체스타 씨도 잉그람 양을 비교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처럼 내게 생각되었다. 이 사람들의 계급이란 뻔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이유로 해서 그들은 그러한 주의를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점이 아니더라도 나는 나의 주인에 대해 극히 관대했다. 전에는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던 그의 결점도 지금은 모두 잊게 되었다. 일찍이 나를 반발케 한 익살, 나를 놀라게 한 냉혹성 등이 고급 요리의 양념처럼 짜릿한 맛을 줄 뿐이었다. 실로 그것이 있기 때문에 더 맛을 돋우어 주는, 그런 것이다. 특히 아주 조금만 보여주는, 저 막연한 표정은 늘 나를 겁나게 하고 움찔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신경이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 표정의 의미를 알려고 했고, 그래서 잉그람 양은 오히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언젠가는 천천히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그 비밀을 탐구하고, 성격을 분석하는 기회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로체스타 씨와 잉그람 양이 이 파티의 생명이고 혼이었다. 만일 그가 이 방에 한 시간만 없으면 금세 손님들은 눈에 뜨이게 따분해했고, 그가 돌아오면 다시 기운이 솟아 떠들곤 했다. 어느 날, 그가 사업 관계로 밀코트로 갔기 때문에, 저녁 늦게라야 돌아온다고 예상된 날이었다.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그래서 요즈음 헤이 저쪽의 공유지에 와 있는 집시의 캠프를 보러 가기로 한 안도 연기되고 말았다. 차츰 해가 기울고, 시계는 이미 만찬 때를 알렸다. 한 대의 마차가 자갈길을 지나 다가왔다. 역마차는 서고, 마부가 현관의 벨을 누르고, 여행복을 입은 신사 한 명이 마차에서 내렸다. 키가 크고 사치스런 몸차림을 한 남자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자, 제일 연장자인 잉그람 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아마, 나는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실례하지만 부인, 친구 로체스타 군은 외출 중이라면서요? 하지만 나는 대단히 먼 데서 온 사람이고, 그래서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좀 기다렸으면 하는데요?" 참으로 인사성이 밝은 남자였다. 나이는 로체스타 씨와 비슷해 보였고, 피부색은 묘한 노란색을 띠었다. 그는 호남자로 보였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눈은 크고 모양이 좋았지만 생명이 없이 공허해 보였다.
내가 이 남자를 다시 본 것은 만찬 후였다. 그때 그는 대단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지만, 아까보다 더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잘생긴 데다 사람을 끄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는 극도로 나에게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를 로체스타 씨와 비교해 보았다. 두 사람의 대조는 윤기 나는 거위와 무서운 독수리, 온순한 양과 그것을 지키는 날카로운 개와도 같았다. 그는 로체스타 씨와 오랜 친구라고 했지만 아마 두 사람은 좀 특별한 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양극은 일치한다'라는 속담이 꼭 맞는 예였다. 두세 사람의 신사가 그의 곁에 앉아 얘기하는 소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나의 귀에까지 들렸다. 새로 온 손님의 이름은 메이슨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에 영국에 살았고, 그전에는 어딘가 더운 나라에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자메이카, 킹스턴, 스패니쉬 타운 같은 지명을 입에 올림에 따라 그가 서인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처음 로체스타 씨를 알게 된 것도 그쪽에서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나는 로체스타 씨가 여행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처럼 멀리까지 나갔을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겼다가 어떤 사건 때문에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석탄을 날라온 사환이 이슈턴 씨의 의자 곁에서 뭔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슈턴 씨와 덴트 대령이 말했다.
"여러분, 집시의 캠프를 보러 가려 했지만 여기 있는 샘의 얘기로는 '번치 할멈' 이란 사람이 사환들의 방에 와서 여러분의 점을 쳐 주겠답니다. 어떠세요, 한 번 만나 보시겠어요?"
"어머, 대령님!" 하고 레디 잉그람이 소리쳤다. "당신은 그런 천한 여자와 우리를 만나게 할 작정이세요? 쫓아 버려요, 당장.“
"네, 하지만 쫓을 수가 없어요." 하고 사환이 말했다. "그 사람은 화덕가에 앉아 모두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대요."
"어떤 여자예요?" 하고 이슈턴 자매가 물었다.
"소름이 끼칠 만큼 보기 흉한 늙은이에요. 마치 항아리처럼 새까매요."
"그럼 진짜 마법쟁이인가 봐!" 하고 프레데릭 링이 소리쳤다. "이리로 불러요!"
"찬성." 하고 그의 동생도 옆에서 거들었다. "이런 재미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아까워요."
"나는 내 운명을 점치는 데 흥미를 느껴요. 샘, 그 할멈을 이리로 데리고 와요!" 피아노 앞에 있던 브란쉬가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멈은 이리로 올 것 같지도 않아요." 하고 샘이 말했다.
"점을 치고 싶은 분은 한 사람씩 할머니에게로 오라고 했어요."
"서재로 들어가라고 그래요. 서재에는 불이 피워져 있어요?"
"네. 하지만 할멈이 영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아서......"
"빨리 시키는 대로나 해요." 샘은 사라졌다. 의혹과 기대가 뒤엉켜 모두 흥분하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사환이 다시 나타났다.
"누가 최초로 보게 될지 알고 싶답니다." 하고 샘이 말했다. "신사분들은 만나지 않겠대요." 그는 나오지 않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부인들도 젊고 미혼인 분만 만나겠대요."
"아니, 그건 놀랐는데. 너무 사람을 고르잖아!" 헨리 링이 소리쳤다.
잉그람 양은 엄숙하게 일어섰다.
"내가 맨 먼저 가보겠어요." 그녀는 부하의 앞장에 서서 적진을 공격하러 가는 결사대의 대장 같은 태도로 문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그녀가 서재로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에는 아주 조용해졌다. 잉그람 부인은 무척 초조한 듯이 손을 꽉 쥐었다. 메어리 양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애미와 루이자는 숨을 죽이고 낮게 웃었지만 다소 떨리는 것 같았다. 꽤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15분쯤 지나자 겨우 잉그람 양이 돌아왔다. 일동의 시선은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고, 그리고 그녀는 차가운 거절의 표정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동요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명랑하지도 않았다. 씁쓸한 걸음걸이로 자리에 가서 말없이 앉았다.
"언니, 그 할멈이 뭐라고 말했어요?" 하고 메어리가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어요? 어떤 기분이었어요? 진짜 점쟁이 같았어요?" 이슈턴 자매가 물었다.
"아이구,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여러분은 신기해 하고, 쉽게 믿고, 흥분하는군요. 내가 만난 사람은 돌아다니는 집시였어요. 그 할멈은 낡은 수상술을 실연해 보였고, 그들이 말할 만한 말을 내게 말했어요. 나의 호기심은 만족되었어요. 이젠 별 흥미가 없어요."
미스 잉그람 양은 한 권의 책을 들고 의자에 앉아, 그 이상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로부터 반 시간 이상이나 그녀를 지켜봤지만 단 한 페이지도 읽지 않았고, 가끔 얼굴빛이 평소보다 검어지고, 불만스럽고 낙담한 표정을 보였다. 그녀는 확실히 아무 것도 마음에 드는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말로는 무관심을 표명했지만 어떤 계시가 있었든 간에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 메어리 잉그람, 애미와 루이자 자매는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꼭 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샘이 중간에서 몇 번이나 왔다갔다해서 겨우 세 사람이 한꺼번에 만나 보기로 허락이 났다. 약 20분 후에는 도어를 활짝 열고 마치 놀라서 반은 미친 사람처럼 홀로 들어왔다.
"그 할멈 좋지 않은 사람이야!" 세 사람은 소리쳤다. "우리에게 너무 지나친 말을 했어요. 우리들의 일은 뭐든지 알고 있어요!" 그러고는 신사들이 준비해 주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할멈은 그녀들이 어렸을 때 한 말, 각기 갖고 있는 책이나 장식품을 말했다. 그리고 각기 친척에게서 받은 기념품도 맞췄을 뿐만 아니라 할멈은 그녀들의 마음속도 꿰뚫어 보고 각자의 귀에다 대고 그녀들이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대어 주고, 그녀들이 무엇을 제일 희망하는가도 일러 주었다. 신사들이 끝에 있는 두 가지 문제를 공개하라고 졸랐지만 그녀들은 얼굴을 붉히고, 떨고, 웃고, 대소동을 벌이면서 듣지 않았다. 이 소란 중에 샘이 내게로 왔다.
"에어 씨, 집시 할멈의 말로는 이쪽 방에 아직 자기가 만나지 못한 처녀가 있다는 거예요. 모두 만나 보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대요. 아마 당신을 두고 하는 말 같아요. 달리 아무도 없어요. 뭐라고 대답해 줄까요?"
"어머! 그래요? 가보겠어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이제까지 완전히 흥분했던 호기심이 만족될 기회를 얻었으므로 나는 기뻤다.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19
서재는 조용했고, 점쟁이는 난로 곁의 의자에 기분 좋게 앉아 있었다. 빨간 외투를 입고, 넓은 차양의 집시 모자를 손수건으로 묶고 있었다. 책상 위에 촛불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난로 불빛으로 기도서 같은, 작고 검은 책을 읽고 있었다. 이윽고 할멈은 책을 덮고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모자 차양이 처져 있어서 얼굴의 일부는 그늘져 있었지만 얼굴을 들었을 때 나는 거기서 이상한 얼굴을 봤다. 얼굴 전체가 갈색과 흑색으로 보였고, 턱 밑에 걸린 천 밑에서 헝클어진 머리가 내밀어져 있었으며, 그 흰 천은 뺨에서 입까지 반은 감추고 있었다. 할멈은 대담하게 나를 응시했다.
"흥, 당신도 점을 치고 싶은가?" 확실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할멈은 말했다.
"나는 별로 점을 치고 싶지는 않아요, 할멈. 당신이 좋을 대로 하세요.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별로 믿지 않으니까요.“
"흥, 건방진 아이군. 이 방 문지방을 넘어설 때 발자국 소리로 그걸 알았지."
"어머, 그래요? 꽤 귀가 날카롭군요."
"날카롭지. 눈도 날카롭고 두뇌도 날카로워요. 당신 같은 손님을 대할 때는 더욱 그래요." 할멈은 짧고 검은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잠시 피운 뒤 굽혔던 몸을 일으키고, 입술에서 파이프를 떼면서, 가만히 불을 바라보며 천천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말했다.
"당신은 추워하고 있어. 기분도 좋지 않아. 그리고 당신은 바보야."
"증거를 보여주세요."
"좋아요. 가르쳐 드리지요. 당신은 추워요, 혼자니까. 당신 속에 불을 지를 사람이 없어요.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감정의 가장 좋은 것,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이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야. 당신은 바보야. 왜냐하면 괴로운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고귀하고 아름다운 감정을 갖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야. 또 당신을 기다리는 그 감정을 만나기 위해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까.“
"당신은 큰 저택에 고용되어 있는 고독한 처녀에게는 아마, 누구에게나 그런 말을 하겠지요."
"아니, 당신은 모르지만 당신의 입장은 특별해요. 행복에 지극히 가까운 입장, 그래, 행복이 손에 잡힐 곳에 있어요. 재료는 모두 갖추어져 있어요. 모자라는 것은 재료를 조립할 움직임뿐이야. 운명이 그 재료를 전부 흐트려 놓았어요. 한 번만 그것을 주워 모으면 행복한 결과가 되는 거야. 좀 더 확실한 말을 듣고 싶거든 얼굴을 들어봐요." 나는 그로부터 반 야드 떨어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할멈은 난로의 불빛을 더욱 강하게 했다.
그 불빛은 그녀의 얼굴을 더욱 어두운 그늘에 두고 나의 얼굴만을 비췄다.
"당신이 오늘 밤 어떤 심정으로 내게 왔는지, 나로서는 풀 수가 없는데." 잠시 나를 보더니 그녀는 말했다. "저쪽 방에서 신분 좋은 사람들이 마치 환등의 그림자처럼 오락가락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는 동안 당신의 마음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저쪽 창가에 앉아서 그래, 지금 현재 당신의 눈앞에서 소파나 의자에 앉아 있는 남녀 중 적어도 호기심으로 언제나 지켜보는 사람이 하나쯤 있을 텐데?"
"나는 여러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만 관찰하지는 않았어요? 아니, 어쩌면 두 사람인가?"
"네, 자주 그렇게 해요. 한 쌍의 동작이나 표정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야기되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도 재미있어요."
"어떤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어요?"
"어머, 그렇게 골라 가며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대개는 구애예요. 그리고 끝에 가서는 파국이 된 약속으로 되어 있지요. 결혼이라는."
"그 단조로운 얘기가 재미있어요?"
"솔직하게 말해서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나에게는 조금도 흥미가 없으니까요."
"조금도 흥미가 없어? 젊고, 건강하고, 남자를 끄는 매력이 있고, 신분과 재산을 타고 난 귀부인들이 웃으면서 당신의......"
"저의...... 뭐예요?"
"당신이 알고 있는...... 아마 적어도 미워하지 않는 신사의 눈앞에 보이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가?"
"나는 지금 보는 신사들을 알지 못해요. 한 번도 말을 해보지도 않았어요."
"여기서 제일 시끄럽게 오가는 중매 이야기는 로체스타 씨야. 그걸 당신은 몰라요?"
"열심히 들어 주면 얘기하는 사람도 신이 나겠구나." 이 말을 나는 집시 할멈에게 한다기보다 나 자신을 향해 말했다. 이 할멈의 이상한 얘기, 목소리, 태도 등이 나를 꿈꾸듯이 만들고 말았다.
"열심히 듣는다고 말했는가?" 할멈은 나의 말을 받아서, "그래, 로체스타 씨는 몇 시간이나 하찮은 말을 듣고 그 말에 감사하고 있는 듯이 보여요. 당신은 그걸 알았어요?"
"감사라고요? 주인의 얼굴에 감사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어요."
"본 적이 없다고? 흠, 주인의 얼굴을 자세히도 보고 있군요. 그럼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었나?"
"나는 여기에 점을 치러 왔지, 고백하러 온 건 아니에요. 로체스타 씨가 결혼한다는 것을 이미 모두 알고 있나요?"
"알고 있지. 상대는 그 아름다운 잉그람 씨야."
"가까운 시일 안에 하게 되나요?"
"아마 누구든 그러리라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들은 틀림없이 행복한 한 쌍이 될 거야. 하기야 당신은 굳이 그걸 의심하고 있겠지만 말야. 그만한 용모, 품위 있고 재주 있는 귀부인을 남자가 사랑하지 않겠어? 거기다 여자도 남자를 사랑하고 있어요. 인품이나 용모에는 반하지 않더라도 남자의 지갑에야 반하겠지. 그 아가씨가 로체스타 가의 재산을 갖고 싶어 하는 것도 내가 잘 알아요. 조금 전에 내가 그 처녀에게 말해 주었지만, 그때 그 처녀는 대단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더군."
"할머니, 나는 로체스타 씨의 재산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점을 치러 왔어요. 그 얘기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군요."
"당신의 운명은 아직 확실하지 않은 데가 많아요. 당신의 얼굴을 보니 여기저기가 서로 맞지 않아요. 운명은 당신에게 행복을 할당하고 있어요. 나는 오늘 밤 여기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이젠 당신이 손을 뻗어 그것을 가지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과연 그렇게 할지, 말지, 그걸 나는 모르겠어요. 자아, 다시 무릎을 꿇어 봐요."
"너무 시간을 끌지는 마세요. 불에 델 것만 같아요." 나는 무릎을 꿇었다. 할멈은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하지 않고 의자의 등에 기댄 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눈동자 속에 불꽃이 튀고 눈은 빛나고 있어. 상냥한 마음으로 가득 찬 눈이야. 나의 혼잣말을 듣고 미소짓고 있어. 잘 감동하는 눈이야. 그 맑은 눈동자 속을 차례로 인상이 통과하고 있어. 웃지 않을 때는 눈에 슬픔이 깃들어. 눈썹 위에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울적함이 무겁게 누르고 있어. 이건 쓸쓸한 데서 오는 증거야. 긍지와 은근함이 나의 의견을 증명해 주고 있어. 대단히 좋은 눈이야. 그리고 그다음에는 입인데, 가끔은 즐거워서 웃는 입이야. 머리로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개할 의사가 있지만 마음으로 기억한 것은 되도록이면 잠자코 있겠군. 어때? 잘 움직이는, 자유로이 변화하는 입, 이 입을 영구히 고독한 침묵 속에 닫아 두려고 해도 무리일 거야. 잘 웃고, 상대에게 인간다운 애착을 갖게 하는 입이야. 이 또한 서로에게는 좋은 입이야. 자아, 그다음에는 이만데, 지금 말한 행운의 적이 될 만한 것은 없군 그래. '나는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 자존심이 나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면, 나는 행복을 사기 위해 영혼을 팔지는 않겠다. 내게는 타고난 내면의 보물이 있다. 이 보물은 바깥의 보물이 기쁨을 모두 잃는 한이 있더라도, 또는 내가 살 수 없는 비싼 값을 부르더라도, 나는 꿋꿋이 살아갈 수 있게 한다.'고 말야. 또 이마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군. '이성이 착실하므로 감정이 노출되거나 깊은 데로 빠지게는 하지 않는다. 격정은 이교도처럼 미쳐 날뛸지도 모르고, 욕망은 모든 헛된 소원을 꿈꿀지도 모르지만, 모든 이론에서 마지막 한 표를 던지는 것은 결단일 것이다. 폭풍, 지진, 맹화가 뒤덮여 온다 해도 나는 양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라고 말야. 참으로 좋은 이마야. 그대의 선언은 참으로 훌륭한 거야. 나는 여러 가지 계획을 갖고 있고, 바른 계획이라는 자신도 있다 - 그 계획에는 양심의 요구도, 이성의 조언도 모두 포함되어 있어. 주어진 행복의 잔에 한 방울의 치욕, 일말의 회한이 검출된다면 청춘은 순식간에 퇴색하고, 뜨거운 피도 식을 것을 나는 알고 있어. 또 나는 희생, 비애, 붕괴를 바라지 않아. 나는 마르게 하지 않고 무성하게 하는 거야. 피눈물을, 아니, 소금기가 있는 눈물이더라도 짜내게 하지 않고 감사의 정을 사고 싶은 거야. 나의 수확은 미소 안에서, 애무 속에서, 환희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지껄였던 것 같아.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끌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것도 안 되겠지. 이제까지 나는 악착같이 자제를 해왔어. 이 이상 계속하려 해도 힘이 모자라는 것 같아. 일어서세요, 제인 에어. 돌아가세요. 연극은 끝났어."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눈을 뜨고 있었을까? 아니면 자고 있었을까?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까? 할멈의 목소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보았다. 하지만 할멈은 더욱 얼굴을 가리며 나더러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의 손을 불꽃이 비추었다. 새끼손가락에는 반지가 빛나고 있었고, 거기에는 내가 백 번이나 보아온 보석이 박혀 있었다. 나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그 얼굴은 나를 피하지 못했다. 보네트는 벗어 던지고, 손수건이 풀어지고 머리가 완전히 나타났다.
"자아, 제인.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물었다.
"어머, 어쩌면 그렇게도 묘한 일을 생각했어요?"
"하지만 꽤 잘했지요? 안 그래요?"
"다른 손님들한테는 잘한 것 같아요."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았어요?"
"내게는 무의미한 말만 하시고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려고만 하셨어요. 좋지 않은 일이에요."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제인?"
"잘 생각해 봐야 되겠어요. 내가 그리 형편없는 말을 지껄이지 않았다면 용서해 드리겠어요. 하지만 이건 좋은 일이 아니에요."
"음! 하지만 당신은 실로 정확했어 - 실로 신중하고 실로 현명했어." 나는 내 행동을 돌이켜보고, 대개 그랬었다고 생각했다. 이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나는 이 회견에 처음부터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집시의 점쟁이 여자가 내 일을 그리 쉽게 말할 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거기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또 얼굴을 감추려 하는데도 주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 속에서는 그레이스 풀 - 저 살아 있는 수수께끼라고밖에 나에게는 생각되지 않는 그 여자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체스타 씨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뭘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고 로체스타 씨가 말했다. "그 우울한 미소는 무슨 뜻입니까?"
"깜짝 놀란 것과 내가 실패하지 않은 것을 기뻐하는 두 가지예요. 이제 여기서 나가도 될까요?"
"아니, 조금만 더 있으세요. 그리고 응접실의 친구들이 뭘 하고 있는지 얘기해 주세요."
"집시 얘기로 야단이에요. 아아, 로체스타 씨, 그보다도 아침에 집을 나간 뒤에 외국 손님이 찾아온 것을 아세요?"
"외국? 아니 몰라요, 누굴까? 그 사람은 갔나요?"
"아니, 옛날부터 당신을 안다면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어요."
"괴상한 놈이군. 이름을 말했나요?"
"메이슨이라고 했어요. 서인도에서 왔대요. 자메이카의 스패니쉬 타운에서." 로체스타 씨는 바로 내 곁에 서 있었다. 나의 손을 잡은 채로였다. 내가 얘기하는 동안에 그의 손은 경련했고, 미소는 얼어붙고, 숨이 막혀 버린 것 같았다.
"메이슨! 서인도!" 마치 움직이는 인형이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메이슨! 서인도!" 하고 한 번 더 되풀이했다. 세 번째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지만, 그 사이에 안색이 보기 딱할 정도로 창백했다. 마치 자기를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로체스타 씨?"
"제인, 나는 당했어...... 나는 호되게 얻어맞은 거야, 제인!"
그는 비틀거렸다.
"어머! 내 어깨에 기대세요."
"제인, 나의 조그만 친구!"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과 둘이서 아무도 오지 않을 섬에 가서 살았으면 싶어요. 그러면 고민도, 위험도, 무서운 생각도 내게서 제외되겠지."
"뭔가 도와 드릴 것은 없을까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어요."
"제인, 도움이 필요할 때는 당신에게 부탁하겠어요. 그것만은 약속하겠어요."
"고마워요. 어떡하면 좋을지 말해 주세요. 하는 데까지는 해보겠어요."
"그럼 지금 식당에서 포도주를 한 잔 가져다주세요. 아마 지금은 모두가 야식을 먹고 있을 거야. 메이슨이 뭘 하고 있는지 좀 보고 오세요."
나는 거실로 갔다. 그의 말 대로 그들은 모두 야식을 먹기 위해 식당에 모여 있었다. 메이슨 씨는 난롯가에서 덴트 대령 부부와 얘기하고 있었고, 누구 못지않게 명랑해 보였다. 나는 와인 글라스에 술을 따라 서재로 돌아왔다. 로체스타 씨는 다시 자신을 되찾은 듯했다. 그는 나의 손에서 글라스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건강을 축하하면서!" 그는 마시고 다시 글라스를 내게로 돌려주었다.
"모두 뭘 하고 있던가요, 제인?"
"웃고 떠들고 해요."
"메이슨은?"
"그분도 웃고 있어요."
"내가 만일 그들에게로 간다고 가정하고, 그들이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보고, 냉소적으로 귓속말을 하며 하나둘 우리 집을 떠나간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요. 당신도 함께 나갑니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로체스타 씨의 집에 있는 것이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나를 위로하겠어요?"
"가능하면 당신을 위로해 드리겠어요."
"하지만 나 때문에 세상의 비난을 받아도 괜찮다는 것입니까?"
"나는 내 곁에 있는 가치 있는 벗 - 예를 들어 당신 같은 분을 위해서라면 문제없어요."
"자아, 그럼 다시 한번 식당으로 가 주세요. 그리고 메이슨 곁에 다가가 귓속말로 로체스타 씨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세요. 그를 안내하고 나서 제인은 가서 쉬세요."
"네, 알았습니다." 나는 명령대로 했다. 손님들은 내가 그들 사이를 똑바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메이슨 씨에게 가서 말을 전하고 그를 서재로 안내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오랜 뒤에, 내가 침대로 들어가 잠시 있자니까 손님들이 각기 침실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로체스타 씨의 목소리도 들렸다.
"여기야, 메이슨. 여기가 자네 방이야." 그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 명랑한 어조가 나의 마음을 평안하게 했다. 나는 곧 잠이 들었다.
20
언제나 치던 커튼을 나는 잊고 있었고 블라인드를 내리는 것도 잊고 있었다. 밝은 보름달이 창으로 비쳐들어 나는 잠을 깼다. 나는 반쯤 일어나 커튼을 닫으려 했다. 아아, 저건 무슨 소린가! 대단히 무서운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이다. 나의 맥박은 멎고, 심장은 뛰지 않았다. 커튼을 닫으려고 뻗었던 손도 공중에 그대로 있었다. 비명은 3층에서 들려 왔다. 내 침실의 바로 위였고 나는 지금 격투 소리를 들었다. 사생결단을 하는 그런 격투였다. 이어서 반은 목이 막힌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려 줘! 살려 줘!" 그러고는 비틀거리고 퉁탕거리는 소리가 확실하게 들렸다. "로체스타! 로체스타! 제발 좀 와 주게!" 어느 방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복도를 달려갔다. 아니, 돌진해 갔다. 위층에서는 여전히 발소리가 퉁탕거리더니, 뭔가가 쓰러졌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나는 다리가 떨렸지만 우선 몸차림을 하고, 침실에서 나왔다. 자던 사람들은 모두 깨어 있었다. 방마다 절규와 비명이 들렸다. 차례로 문이 열리고 모두 밖을 내다봤다. 복도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누군가가 울음을 터뜨렸고 누군가가 넘어졌다. 혼란은 수습할 여지도 없었다.
"도대체 로체스타는 어디 있어?" 하고 소리친 것은 덴트 대령이었다.
"여기예요! 여기예요!" 큰 소리로 대답이 들렸다.
"여러분 침착하세요. 내가 지금 그리고 가겠어요." 복도 끝의 문이 열리고, 로체스타 씨가 촛불을 들고 내려왔다. 숙녀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았다. 잉그람 양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일이 생긴 거예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말해 주세요! 아무리 불길한 일이라도, 지금 당장 우리들에게 알려 주세요!"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냐!" 그는 소리쳤다. "괜한 소란이었어요. 하녀 하나가 꿈을 꾸었어요. 그뿐이에요. 아마 그 꿈을 유령으로 착각을 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발작을 일으켰지요. 자아, 여러분은 침실로 돌아가 주세요. 왜냐하면 나는 그 여자를 간호해 주어야 하니까요. 잉그람 양, 당신이 하찮은 일에 겁을 먹는 사람들보다 용기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세요." 이리하여 그는 일동을 침실로 돌려보냈다. 나는 돌아가라는 명령을 기다릴 것도 없이,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르게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침대에 눕지는 않았다. 반대로 나는 신중히 옷을 입고 몸차림을 했다. 비명 뒤에 내가 들은 소음, 그리고 누군가가 지른 목소리는 아마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바로 내 방 위에서 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로체스타 씨의 설명은 단순히 손님들을 진정시키려는 것에 불과했다. 그 괴상한 비명, 격투, 그리고 구원을 청하는 소리에는 다시 다른 일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시간쯤 뒤에 손필드 저택은 다시 사막처럼 조용해졌다. 신발을 벗으려고 몸을 숙이려 했을 때, 조심스럽고, 낮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에요?" 하고 내가 물었다.
"살짝 나와 주세요." 로체스타 씨의 목소리였다. 그는 촛불을 들고 복도에 서 있었다. "부탁이 있어요." 그는 말했다. "당신 방에 해면과 휘발성 소금이 있습니까?" 속삭이는 소리로 그는 물었다.
"네, 있어요."
"그걸 가지고 같이 좀 가요. 서둘지 말고, 소리 나지 않도록." 방으로 돌아와 세면대 위의 해면과 서랍 속의 약용 소금을 찾아 그를 따라 3층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손에 열쇠를 갖고 있었다. 조그맣고 검은 문 앞으로 가서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리려다가 잠깐 주저하고 내게 말했다.
"당신은 피를 보아도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으세요?"
"그런 경험은 한 번도 없지만 아마 괜찮을 거예요."
"손을 잡게 해주세요. 기절을 하면 큰일이니까." 나는 그의 손에 손가락을 잡게 해주었다. "따뜻한 손이야." 그는 말했다. 그리고 열쇠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나는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방을 보았다. 페어펙스 부인이 집안을 안내해 주던 날이다. 전에는 감추어졌던 하나의 문이 열려 있고, 그 안쪽 방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신음 소리와 무엇을 긁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로체스타 씨는 나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후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그를 맞이한 것은 무서운 웃음소리였다. 그레이스 풀의 악귀 같은 웃음이었다. 낮은 소리로 누군가가 로체스타 씨에게 얘기하는 게 들렸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뭔가 조치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쪽으로 나오자 문을 닫았다.
"여기야, 제인!"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커튼으로 이 방의 꽤 큰 부분을 감추고 있는 큰 침대 저쪽으로 돌아갔다. 침대 가까이에 안락의자가 하나 있었고, 거기에 한 남자가 웃옷만 벗은 채 앉아 있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창백한, 살아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저 이국의 손님 메이슨이었다. 그의 한쪽 팔과 옆구리는 피로 엉겨 있었다.
"촛불을 들어 주세요." 나는 그에게서 촛불을 받아 들었다. 그는 세면대에서 대야를 하나 들고 와서 내게 주었다. 나는 그걸 들고 있었다. 그는 솜을 물에 적셔서 시체 같은 얼굴을 적셨다. 다음에는 정신이 돌아오는 약병을 달래서 그것을 메이슨의 코에 댔다. 메이슨 씨는 금세 눈을 떴다. 그는 신음했다. 로체스타 씨가 이 상처 입은 남자의 셔츠를 찢었다. 팔과 어깨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주인은 계속 흘러내리는 피를 스폰지로 닦았다.
"위험하잖아?" 메이슨 씨가 중얼거렸다.
"쳇, 괜찮아. 다만 긁힌 상처야. 정신을 똑바로 차려. 이제 내가 가서 의사를 불러오겠어. 아침까지는 움직이게 되겠지. 제인!" 하고 이번에는 나를 불렀다.
"네."
"한 시간이나, 어쩌면 두 시간이 될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이 방에 이 신사와 함께 남겨 두고 가야겠어요. 피가 다시 흐르거든 지금 내가 한 대로, 스폰지로 닦아 주세요. 이 남자가 기절을 하려고 하면 저 스탠드에 있는 컵의 물을 먹이고, 소금 냄새를 맡게 해주세요. 무슨 이유에서는, 당신은 이 남자와 말을 해서는 안 돼요. 그리고 어이, 리처드, 이 여자에게 말하면 자네 목숨이 위험하다는 점을 알게. 나는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 못 져요." 그 가엾은 남자는 다시 신음했다. 로체스타 씨는 피투성이가 된 해면을 나의 손에 건네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하던 대로 했다. 그는 잠시 동안 나를 지켜보다가, "잊으면 안 돼요. 전혀 말이 없어야 돼요." 하고 나가 버렸다. 열쇠가 울리는 소리와 멀리 사라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나는 이 3층의 이상한 방에 갇히게 되었다. 어둠은 나를 싸고 있다. 나의 눈과 손 아래에는 기분 나쁜 안색의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있었다. 살인 여자는 불과 하나의 문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하고 있다. 그래 - 그걸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그레이스 풀이 저 문을 박차고 나에게 달려들 것을 생각하니 무서워졌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이 보기 싫은 얼굴 - 열리기를 금지당하고 있는 창백한 입술 - 날카로운 공포의 빛으로 빛나는 이 눈 - 이런 것들을 나는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피와 물이 섞인 세면기에 몇 번이고 손을 적셔 흐르는 피를 닦아야만 했다. 심지를 자르지 않은 촛불이 내가 일하는 동안 자꾸 약해져서 내 주위가 차츰 어두워지고, 정면의 거대한 장롱 위에서 으스스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그대로 보고 있어야만 했다.
이러는 사이에도 나는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 저쪽에 숨어 있는 악마의 움직임에게까지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내내 삐걱삐걱하고 마루를 밟는 발소리, 짧은 시간에 개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 거기다가 굵은 인간의 신음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나름의 문제로 고민했다. 이 세상과는 떨어진 저택에 인간의 형태로 들어와 살고, 초목도 잠자는 깊은 밤에 더러는 불을 지르고, 어떤 때는 피를 보는,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이 수수께끼는 도대체 무엇일까? 보통 여자 같은 얼굴을 하고도 때로는 조소하는 요귀 같은, 때로는 살코기를 물어뜯는 맹수 같은 소리를 내는 이 생물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내 얼굴 아래에 있는 남자의 평범하고 얌전한 이국의 손님은 어쩌다 이 공포의 그물에 걸리게 된 것일까? 또 어째서 그 요귀는 그에게 덤벼들었을까? 또 침실에서 자고 있어야 할 이 시간에 어째서 그는 이 집, 이 방에 들어온 것이었을까? 나는 로체스타 씨가 그에게 2층 침실을 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로 온 것일까? 어째서 그는 로체스타 씨가 강요하는 비밀에 대해 이처럼 조용히 순응하고 있는가? 어째서 또 로체스타 씨는 그것을 강요한 것일까? 또 메이슨 씨의 내방을 들었을 때 로체스타 씨의 낭패는 어디서 온 것일까? 이 무저항의 남자가 - 지금은 로체스타 씨의 말 한마디로 아이를 다루듯 이 남자를 자유롭게 다루고 있는데 - 몇 시간 전에는 마치 떡갈나무에 떨어진 벼락처럼 그를 쭉 뻗게 했는데, 그것은 왜일까? 그리고 로체스타의 결연한 정신을 그토록 굴복시키고 강건한 육체를 그만큼 전율케 했다면, 그건 가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언제나 돌아오실까? 언제쯤......' 샐 것 같지도 않은 밤의 느릿한 행보를 따라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는 몇 번째 메이슨 씨의 핏기없는 입술을 물로 적시고 정신이 돌아오는 소금을 제공했지만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몸의 고통인지, 빈혈인지, 아니면 모든 것들이 결합되어 있는지, 그는 쉽게 탈진 상태가 되었다. 나는 죽을까봐 겁이 났지만 그래도 그와 얘기해서는 안 되었다.
마침내 촛불이 꺼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커튼 자락 끝에 희미한 잿빛을 발견했다. 새벽이 다가온 것이다. 파일로트가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희망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5분 후에는 문이 덜컥거렸다. 고작해야 두 시간 정도였겠지만 나는 몇 주간의 시간도 이보다 짧을 것 같았다. 로체스타 씨가 외과 의사와 함께 들어왔다.
"자아, 커터, 잘 부탁하네." 하고 그는 외과의에게 말했다.
"상처의 손질과 환자를 아래로 데리고 가는 것을 모두 30분 안으로 끝내야 해."
"그런데 몸을 움직여도 괜찮을까요?"
"그건 염려 말아. 상처가 크지 않아요. 자아, 시작해요." 로체스타 씨가 두꺼운 커튼을 들어 올리고, 삼베로 된 블라인드를 올리고 아침 햇빛을 최대한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메이슨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이 리처드, 기분은 어때."
"결국 그녀에게 당했나 봐." 그는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농담 말고 용기를 내요! 커터, 아무 걱정도 없다는 것을 보증해 주게."
"양심을 걸고 보증하겠어요." 붕대를 풀고 상처를 본 커터가 말했다.
"아니 이건 어떻게 된 거야. 어깨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어요. 이 상처는 칼에 의한 게 아니야. 여기에 이빨 자국이 있어!"
"물어뜯었어." 하고 메이슨이 중얼거렸다. "로체스타가 그녀에게서 단검을 빼앗자 호랑이처럼 나를 물고 늘어졌어."
"나는 경고했었어." 로체스타가 말했다. "그녀 가까이 갈 때는 몸을 지킬 준비를 하라고 말했잖아. 자네는 혼이 났고, 내 말을 안 들은 탓으로 괴로움을 받게 됐으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자격이 없네. 커터, 서둘러야 해, 동이 트고 있어. 나는 이 사람을 보내야만 해요."
"곧 끝나요. 이제 가슴만 보면 되요. 여기도 아마 물었겠죠."
"그녀는 피를 빨았어. 심장이 바짝 마르도록 빨아 주겠다면서 말야." 하고 메이슨이 말했다. 나는 로체스타 씨가 떠는 것을 보았다. 혐오와 공포와 미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의 얼굴은 마치 뒤틀리듯이 일그러졌다.
"이 나라를 떠나면 잊게 되겠지. 스패니쉬 타운으로 돌아가거든, 그 여자는 죽었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그 여자를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오늘 밤 일을 잊는 것은 불가능해."
"그렇지 않아. 기운을 내. 이제 곧 자네를 깨끗이 낫게 해줄 테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돌아와서 처음으로 내게 말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내 방에 가서 경대 서랍을 열면 조그만 약병과 잔이 거기 있을 테니 그걸 빨리 가져다줘요." 나는 뛰쳐나가 그것을 급히 가져왔다. "됐어. 자아, 의사 선생, 나는 내 책임 아래 투약하겠어요. 이 강심제는 로마에서, 어느 이탈리아 돌팔이 의사로부터 얻은 거예요. 에어, 물을 조금." 그가 잔을 내밀기에 세면대의 물병에서 반쯤 물을 따랐다. "됐어요. 이번엔 그 약병 주둥이를 조금 적셔 줘요." 나는 그렇게 해주었다. 그는 붉은색 액체를 열두 방울 잔에 부어 메이슨에게 주었다. "마셔요, 리처드. 심장이 강해져요, 한 시간쯤은 말야." 메이슨은 마셨다. 그의 치료도 끝났다. 로체스타 씨는 예의 물약을 마시게 하고 나서 3분 동안 그를 앉혀 두었다. 그다음 그는 메이슨의 팔을 잡았다. "자아, 일어서 봐." 환자는 일어났다. "커터, 그쪽 겨드랑 밑을 안아 줘. 리처드, 걸어. 자아. 제인, 먼저 뒷계단으로 가 주세요. 옆 통로의 문을 열어 놓고 뒤뜰에서 기다리는 역마차의 마부에게 준비하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제인, 거기 누가 있거든 계단 아래까지 와서 기침을 해주세요."
그때는 이미 다섯 시 반이었지만, 부근은 아직 어두웠고 조용했다. 나는 옆 통로의 문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열었다. 뒤뜰은 조용했지만 문은 크게 열려 있었고 마부는 바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마부에게로 달려가 신사들이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조용했다. 신사들이 나타났다. 메이슨은 꽤 편히 걷고 있는 듯했다. 이륜마차 안으로 그는 올라갔고 이어서 커터가 탔다.
"잘 부탁하네." 로체스타 씨가 의사에게 말했다. "기운이 날 때까지 자네가 좀 맡아 주게. 나도 한 이틀 뒤에는 보러 갈 테니까. 자아, 잘 가."
"페어펙스, 그애를 잘 좀 돌봐 줘. 되도록 상냥하란 말이야." 그리고 메이슨은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에 젖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지. 이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네." 이 말을 하고 로체스타 씨는 마차의 문을 닫았고 마차는 달려갔다.
로체스타 씨는 뒤뜰의 무거운 문을 닫고 고리를 걸었다. 그러고는 과수원과 경계되어 있는 담의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볼일이 끝났다 싶어 집을 향해 걸었다. 그때 나는 다시, "제인!" 하고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출구의 문을 열고 거기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시원한 곳으로 가지 않겠어요." 하고 말했다. "저 집은 감옥에 불과해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제게는 훌륭한 저택으로 보입니다만."
"세상 모르는 마법에 걸려 당신의 눈은 흐려 있어요. 베일을 통해 보고 있는 거예요. 금박은 흙이고 비단 차양은 거미집이란 것을 당신을 몰라요. 그런데 여기는 (들어선 숲속을 가리키며) 모두가 진실이에요. 감미롭고 청정해요." 그는 가장자리에 회양목이 나란히 심어진 보도를 천천히 걸었다. 보도의 한쪽에는 사과, 배, 버찌 등의 과수가 있고, 다른 한쪽의 화단에는 앵초, 삼색제비꽃, 그 밖의 여러 가지 화초가 4월의 이슬비와 맑은 날씨가 교대로 계속된 후인 아름다운 봄 아침에 신선한 호흡을 하고 있었다. 태양은 지금 동쪽 하늘에 떠올라, 그 빛이 이슬 머금은 꽃송이와 과일나무 위로 비추었고, 그 아래의 조용한 산책길을 비추었다.
"제, 꽃을 드릴까요?" 그는 장미 덤불 속에서 최초로 핀 꽃을 잘라 내게 주었다.
"고맙습니다."
"이곳의 해뜨는 광경은 마음에 드세요, 제인? 저 하늘의 맑고 향기로운 대기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좋아요."
"당신의 얼굴은 창백해요. 당신을 메이슨과 둘만 남겨 두고 내가 갔다 왔으니, 무서웠지요?"
"누군가가 안쪽에서 뛰쳐나올까봐 무서웠어요."
"하지만 그 방에는 자물쇠를 걸어 두었어요. 열쇠는 내 주머니에 있지요. 귀여운 아기 양을 늑대 소굴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나도 엉뚱한 양치기지요. 당신은 안전했어요."
"로체스타 씨, 그레이스 풀은 앞으로도 이 집에서 살게 되나요?"
"아, 그럼요. 그 여자 일로 걱정하면 안 돼요."
"어젯밤에 걱정하던 위험은 이미 사라졌나요?"
"메이슨이 영국에서 떠나기까지는, 아니 그 뒤에도 안 되겠어. 제인, 산다는 것은 언제 불을 뿜을지 모르는 분화구 위에 서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메이슨 씨는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분은 당신에게 고의로 상처를 주거나 하지는 않잖아요.“
"그럼요. 메이슨은 나에게 덤벼들지는 않아요. 하지만 자칫 부주의한 말 한마디로 내게서 영원히 행복을 앗아 갈지도 몰라요. 당신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군요. 당신은 나의 귀여운 친구지요.?"
"나는 당신의 도움이 되고 싶어요. 잘못된 일이 아니면 뭐든지 시키세요."
"음, 정말 그래. 그 마음을 나는 알겠어요. 내가 잘못된 일을 부탁하면 당신은 창백한 얼굴을 내게로 돌리고 '로체스타 씨, 그건 불가능해요. 나는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잘못된 일이니까요.'하겠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도 나의 약점을 당신에게 보일 수는 없어요."
"만일 내 걱정을 안 해도 좋듯이 메이슨 씨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안심이 되겠지요."
"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제인, 여기 정자가 있어요. 앉으세요."
정자에는 등나무가 감긴 나무 의자가 있었다. 로체스타 씨는 거기에 앉아, 내가 앉을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앉아요. 내 옆에 앉기를 주저하는 당신은 아니겠지요. 잘못된 일입니까, 제인?" 나는 대답 대신 앉았다. 거절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아, 귀여운 친구,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얘기를 하고 싶어요. 지금부터 당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들어 주세요. 당신은 어려서부터 귀염둥이로 큰, 겁 없는 청년을 생각하세요. 먼 외국을 상상하세요. 거기서 당신은 대실패를 해요. 그 결과는 평생을 쫓아다니는 치명적인 과실이었어요. 당신은 구원을 받으려고 수단을 부립니다. 좀 이상한 수단이긴 하지만 불법도 아니고 나무랄 성질의 것도 아니죠. 하지만 당신은 불행해요. 왜냐하면 희망은 실로 인생의 문턱에서 당신을 버렸으니까. 당신은 향락 속에서 행복을 찾아 방황해요. 마음은 피로하고, 영혼은 위축되어 당신은 스스로를 추방한 몇 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요. 당신은 새로운 친구를 알아요. 그 사람에게서 20년간 당신이 찾아 헤맨 좋은 자질을 많이 발견해요. 당신은 보다 좋은 날이 찾아왔음을 느껴요. 보다 놓은 희망, 보다 청순한 감정이. 당신은 인생을 새로 시작해 보고 싶은, 남은 생활을 불멸의 것으로 하려고 열망해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숲속의 장애물 - 당신의 양심도 시인하지 않는, 단순한 인습적인 방해물을 뛰어넘는 것이 당신에게는 허락될까요?"
그는 말을 끊고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만 좋을까? 로체스타 씨는 다시 질문했다.
"그 방랑의 죄많은 남자, 하지만 지금은 휴식을 찾아 회개하고 있는 남자는 마음 착하고 아름답게 새 친구를 영원히 자기에게 끌어들여, 마음의 평안과 생활의 갱신을 얻으려 하고, 세속의 의견에 도전해 의존하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일일까요?"
"로체스타 씨." 나는 대답했다. "방랑자의 안식이라든가, 죄인의 재생은 결코 다른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만일 당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고 괴로워한다면 그분이 그 값을 치르는 힘과 휴식을 위한 위로를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찾도록 해주세요."
"하지만 그 수단, 그 방법이 문제예요. 신은 자기의 일을 하기 위해 그 수단을 가져요. 나 자신 - 이젠 바로 말하겠습니다 - 구원을 받을 수단을 발견했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그는 말을 끊었다. 새는 지저귀고 나뭇잎은 가볍게 술렁댔다. 침묵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나는 얼굴을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놀란 듯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귀여운 친구." 그는 어조를 달리하여 말했다. 얼굴도 변해 있었다. 상냥함과 진실함이 완전히 사라지고 괴로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당신은 내가 잉그람 양에게 갖고 있는 마음을 대강은 알겠지요. 만일 내가 그녀와 결혼하면 그녀는 나를 철저하게 재생시켜 주리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는 갑자기 일어나 보도 저쪽으로 걸어 갔다와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제인, 제인."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는 말했다.
"잠을 설쳤기 때문인지 당신 얼굴이 무척 창백해 보여요. 이 다음엔 언제 나와 철야를 해주겠어요?"
"언제든지 필요하실 때는."
"예를 들면 나의 결혼 전야 같은 것! 아마 당신은 잠들지 못할 거예요. 그때는 나를 상대해 주겠습니까?"
"네."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죠, 제인?"
"네."
"우람하고 당당한 여성이야, 제인. 덩치가 크고 피부가 검고, 살집이 좋고. 어이구 안 되겠다! 텐트와 링이 마구간에 있어요. 저쪽 나무 밑으로 숨어서 돌아가세요." 나와 반대 방향으로 그는 걸어갔다. 이윽고 뒤뜰에서 명랑한 목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메이슨은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 인사도 못 하고 떠났어요. 나는 네 시에 일어나 전송을 했어요."
21
페어펙스 부인의 방에서 나를 만나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나를 부르러 온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가 보니 거기에는 하인 같은 풍채의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 들고 있는 모자에도 상장이 감겨 있었다.
"아가씨, 아마 나를 잊으셨겠지요." 그는 일어나 나를 맞으며 말했다.
"나는 리븐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여덟 살인가 아홉 살 때, 리드 부인의 마부가 되어, 지금도 거기 있습니다."
"어머, 로버트! 오랜만이에요! 기억하구말구요. 어쩌다 나를 조지아나의 밤색 말에 태워 주신 적이 있었지요. 벳시는 잘 있어요? 당신은 벳시와 결혼하셨지요?"
"네, 아가씨. 고맙습니다. 두 달 전에 또 어린 게 하나 태어났어요. 이젠 아이가 셋이지요. 에미도 아이들도 잘 있습니다."
"그 댁의 여러분도 잘 있나요, 로버트?"
"이거 별로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지 못해서, 아가씨. 요즈음은 계속 어려운 일만 생겨서......" 그의 상복에 눈을 주면서 나는 말했다.
"누가 죽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도 상복을 보며 대답했다.
"존 나으리가 런던 집에서 돌아가셨어요. 어제로 1주일이 됩니다."
"존이?"
"네, 나으리는 꽤 방탕한 생활을 했고, 지난 3년 동안은 묘한 일에 빠지기도 했지요. 그리고 무서운 죽임을 당했어요."
"벳시로부터도 별로 행동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정도가 아니에요! 세상에서 가장 질이 나쁜 남녀와 친구가 되어, 몸도 재산도 엉망으로 만든 거예요. 빚 때문에 감옥까지 들어간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두 번이나 구해 냈는데, 3주 전에는 게이트헤드로 와서 부인에게 남은 재산을 전부 달라고 했어요. 부인은 반대했지요. 런던으로 돌아갔는데, 그다음에 온 것이 죽었다는 거예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무서운 소식이었다. 로버트 리븐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부인도 요즈음은 건강이 좋지 않아요. 거기다 나으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어요. 사흘 동안 말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부인이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을 벳시가 간신히 알아들은 것이 어제였어요. '제인을 불러요. 제인을 데리고 와요. 할 얘기가 있어요.'라는 거예요. 일라이자님과 조오지아님에게 상의를 했지요. 아가씨들은 처음에는 상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부인이 정신없이 '제인, 제인.' 했기 때문에 마침내 아가씨들도 승낙했어요. 그래서 제인님도 형편이 웬만하시면 내일 아침 일찍 가 주셨으면 해서요."
"네, 가겠어요. 안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가씨. 벳시도 당신이 꼭 올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허락을 받아야 하겠지요?"
"네, 지금 당장 얘기를 해보겠어요.“
그리고 그를 하인들이 묵는 곳으로 안내하고 나는 로체스타 씨를 찾아 나섰다. 페어펙스 부인의 말로는 잉그람 양과 당구를 치고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급히 당구실로 갔다. 로체스타 씨, 잉그람 씨, 이슈턴 자매 등이 모두 이 유희에 열중하고 있었다. 꽤 용기가 필요했지만, 난 잉그람 양 곁에 서 있는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잉그람 양은 무시하는 듯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그 눈은 마치 이 여자가 무슨 일로 나타났을까? 하고 의심하는 듯했다. 내가 낮은 목소리로 "로체스타 씨." 하고 불렀을 때는 나더러 저리 가라고 명령하고 싶은 동작을 취했다. 그녀는 게임에 흥미가 있었으므로, 오만한 표정을 조금도 죽이지 않았다.
"저 여자 당신에게 얘기가 있어요?" 하고 그녀는 로체스타씨에게 물었다. 로체스타 씨는 '저 여자' 가 누군가 싶어 돌아보았다. 그는 기묘하게 찡그린 얼굴을 하고, 키를 집어던지고 나의 뒤를 따라 방을 나왔다.
"왜 그래요, 제인?" 공부방에 들어와서 문을 닫고 기대어 서며 그는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한두 주간, 휴가를 얻을까 해서요."
"무슨 일이에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리드 부인과의 관계, 오랫동안 가지 않은 이유, 외사촌 오빠 존의 비참한 죽음과 외숙모의 병, 그 외숙모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하고, 그래서 하인이 데리러 왔다는 얘기를 했다.
"당신이 간다고 무슨 도움이 될까요? 거기다 그 부인은 당신을 쫓아내지 않았어요?"
"네, 그래요.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이에요. 이제 나는 외숙모의 희망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 묵을 작정이세요?"
"되도록이면 일찍 돌아오고 싶어요."
"1주일 만에 오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어긋날지도 모르니까요."
"아무튼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와야 해요. 무슨 구실이 있더라도 그쪽에서 살면 안 돼요"
"네, 절대로! 볼일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오겠어요."
로체스타 씨는 생각에 잠겼다. "언제 가겠어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겠어요."
"돈이 필요하겠군요. 돈 없이 여행을 한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나는 아직 봉급을 주지 않았으니 돈이 없을 거야. 도대체 얼마나 있어요, 제인?" 웃으면서 그는 말했다. 나는 지갑을 꺼냈다.
빈약한 물건이었다.
"5실링 있어요." 그는 나의 지갑을 빼앗아 돈을 손바닥 위에 쏟더니, 마치 그 가난함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그는 자기의 지갑을 꺼냈다. 받을 돈은 15파운드뿐이었다. 나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는 화를 냈지만 생각을 고쳐먹은 듯했다.
"좋아요. 지금은 다 드리지 않는 편이 좋겠지. 50파운드를 가져가면 석 달 동안은 오지 않을 테니까. 10파운드면 어때요?"
"네, 충분해요. 하지만 그거면 5파운드를 덜 받게 돼요."
"그러니까 그걸 가질러 돌아오세요."
"로체스타님, 마침 이 기회에 다른 문제를 말씀드릴까 하는데요."
"문제? 꼭 들어 봐야 되겠군요."
"당신은 머지않아 결혼하게 된다고 친절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되면 아델은 학교에 넣는 것이 좋겠지요. 당신도 그 필요성을 느끼고 계실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신부가 그 아이를 학대할 위험이 있으니까. 그 의견에는 일리가 있어요. 암, 학교에 보내야 되겠지. 그리고 당신도 여기를 당장 나가서 악마에게로 갑니까?"
"그건 곤란하지요. 하지만 어딘가에 일을 할 장소를 찾아야 되겠지요."
"그게 당연하겠지." 그는 소리쳤다. 그는 잠시 후에 나를 불렀다.
"제인."
"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무슨 일이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약속을 드리지요."
"광고를 내지 말 것. 일자리는 내게 맡겨 둘 것. 내가 적당한 자리를 찾아 드릴 테니까."
"그럼 그 대신, 나와 아델을 신부가 이 집에 오기 전에 안전하게 밖으로 보내 주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요."
"좋아요. 나는 맹세해요. 그럼, 저녁 식사 뒤에 응접실로 오시겠어요?"
"안 돼요. 여행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그럼 이것으로 당신과 나는 이별을 해야 되는 셈이군. 이별이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제인, 가르쳐 줘요. 나는 몰라요."
"대개, '안녕' 이라든가, 또......"
"자아, 그렇게 말해 줘요."
"안녕히 계세요, 로체스타님."
"잘 다녀와요, 에어 씨 - 결국 이것뿐인가요?"
"그럼요. 진정에서 나오는 말이란 하나뿐이고, 그 어떤 말보다 호의를 갖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뭔가 을씨년스러워, 안녕."
'언제까지나 이렇게 문에 기대어 있을 것인가요?'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은 그가 일어나기 전에 나는 출발했다. 나는 5월 1일 오후 다섯 시에 게이트헤드의 문지기네 집까지 도착했다. 나는 저택으로 가기 전에 문지기네 집으로 들어갔다. 청결하고 정리가 잘 된 집이었다. 조각이 새겨진 창에는 하얀 커튼이 걸려 있고, 화덕에는 불이 잘 피고 있었다. 벳시는 화덕가에 앉아 갓 태어난 아기를 어르고, 로버트와 그의 누이는 얌전히 한쪽에서 놀고 있었다.
"어머, 어머, 정말이지, 꼭 오실 줄 알았어요!" 내가 들어가자 벳시는 기뻐서 소리쳤다.
"그런데 벳시." 하고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말했다.
"리드 부인은 어때요? 아직은 괜찮지요?"
"네, 아직은 괜찮아요. 의사도 앞으로 2주간은 견딜 거래요."
"그 뒤에도 내 얘기를 하세요?"
"오늘 아침에도 당신 얘기를 하고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고 있어요. 내가 갔을 때는 그랬어요. 대개 오후에는 혼수 상태에 빠지듯이 자고 있지만 여섯 시나 일곱 시 경에는 깨어나요. 여기서 한 시간가량 쉬시다 같이 가 봐요.“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 마치 어렸을 때 잠자리를 보살펴 주듯이, 벳시는 내 여장을 풀어주었다. 잡담을 하다 보니 한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벳시는 다시 내게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녀와 나는 저택을 향해 나섰다. 9년 전에 이 길을 내가 내려왔을 때도, 벳시와 함께였다. 1월의 짙은 안개가 낀 추운 아침 나는 절박하고 비참한 심정으로 - 세상에서도, 신에게서도 버림받은 기분으로 - 적의 있는 지붕 밑을 떠나 멀고 낯선 땅, 로우드의 춥고 추운 피난처로 향했던 것이다. 바로 지금 적의 있는 지붕이 다시 내 앞에 떠올랐다.
"먼저 아침 식사실로 가세요." 벳시는 내 앞에 서서 가며 말했다.
"아가씨들이 거기 있을 테니까요." 나는 그 방에 도착했다.
모든 가구가 떠났을 때의 브로클 허스트 씨에게 소개된 아침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있었다. 살아 있지 않은 물거품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생명 있는 사람들은 몰라보리만큼 변해 있었다.
두 아가씨가 내 앞에 나타났다. 한 사람은 무척 키가 크고 여위고, 소박한 스커트, 검은 비단 드레스, 착 달라붙게 빗은 머리, 극단적으로 금욕적인 느낌이었다. 그 갸름해진, 혈색이 좋지 않은 얼굴에서는 실로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물론 조지아나였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녀는 아니었다. 성숙하고 살집 좋은 납 인형같이 하얀 젊은 여성으로, 아름답게 정리된 이목구비, 괴로워하는 듯한 푸른 눈, 곱슬거리는 노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도 검은 것이었지만 그 스타일은 언니와 많이 달랐고, 언니가 청교도처럼 보인다면, 이쪽은 사치한 느낌이었다. 내가 들어가자, 두 사람 다 일어나서 마중했고 냉정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둘 다 나를 에어 씨라고 불렀다.
"리드 부인은 좀 어떠세요?" 하고 나는 조지아나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리드 부인? 아아, 그래! 엄마 얘기군요. 많이 약해졌어요. 오늘 밤은 당신을 만나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당신이 2층으로 가셔서 내가 온 것을 얘기해 주면 고맙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조지아나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밤에는 엄마가 귀찮게 구는 것을 싫어하니까......" 하고 일라이자가 말했다. 나는 금세 일어나서 보네트와 장갑을 집어 들고, 부엌으로 가 벳시를 보고 그 부탁을 했다. 그리고 다음 조치를 취했다. 나는 외숙모를 만나기 위해 백 마일이나 여행을 한 이상, 그녀가 좋아지거나, 아니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 곁에 있어야만 했다. 아가씨들의 거만함과 어리석음에 휘말릴 때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정부에게 얘기해서 내게 방을 한 칸 달라고 부탁하고, 아마 1, 2주간은 묵어야 될 거라고 말한 다음, 그 방으로 트렁크를 옮기게 하고, 뒤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위에서 벳시와 만났다.
"부인은 잠을 깼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왔다는 얘기는 했어요. 당신을 알아보시는지 잠시 같이 가 볼까요?"
내게 있어 그 방으로의 안내는 필요없었다. 옛날에는 꾸중을 듣기 위해 늘 불려 갔던 방이었다. 나는 벳시보다 먼저 가서 살짝 문을 열었다. 나는 침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고 높이 쌓인 베개 위를 보았다. 잊을 수도 없었던 리드 부인의 얼굴이었다. 나는 옛날의 이미지를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복수심을 부드럽게 하고, 반감을 진정시켜 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미움으로 해서 이 부인과 헤어졌지만 지금은 그녀의 크나큰 고통에 대한 일종의 연민과 모든 박해를 용서하고 싶다는 소원 - 친구로서 화해하고 악수하고 싶다는 소원 외에 다른 아무런 마음 없이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거기 있었다. 옛날 그대로의 무섭고 무자비한 얼굴! 그 날카로운 윤곽을 쫓는 나의 마음에 유년시대의 두려움, 슬픈 추억 같은 것이 강하게 되살아 올 것인가! 나는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는 나를 보았다.
"니가 제인 에어니?" 하고 그녀는 말했다.
"네, 외숙모님. 기분은 어떠셔요, 외숙모님?" 나는 일찍이 이 여자를 다시는 외숙모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었다. 지금 그 맹세를 잊고 또 깨트리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닐 것이다. 나는 시트 밖으로 나와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리드 부인은 손을 놓고 내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이 오늘 밤은 유난히 따뜻하다고 말했다. 다시 그녀가 나를 보았을 때 그 눈길이 너무 냉정해서, 나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 또 변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돌과 같이 차가운 눈, 상냥함을 모르고 눈물로써도 녹지 않을 그 눈으로 해서, 나는 그녀가 최후까지 나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고통을 느꼈고, 다음에는 노여움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런 것에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그녀의 성질과 의지, 이 두 가지가 어떻든간에 그녀의 여주인이 되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릴 때처럼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지만 나는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외숙모는 나를 부르셨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왔어요. 그러니까 당신의 병이 나을 때까지 여기 있을 작정이에요."
"아아, 그래 줘! 우리 아이들은 만났니?"
"네."
"그럼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줘. 오늘 밤은 너무 늦었고, 난 얘기도 할 수 없을 것 같애.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확실히 있기는 했어요. 잠깐만......" 그 놀란 듯한 눈길과 말투는 옛날에 그처럼 힘찼던 그녀의 육체가 어느 정도 쇠잔해졌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너는 제인 에어니?"
"네, 저는 제인 에어예요."
"난 그 아이 때문에 남이 곧이듣지 못할 만큼 애를 먹었지. 내 손에 남은 그 무거운 짐 - 그 알 수 없는 기질. 문득 화를 내고, 어린애 같지도 않고 남이 하는 일을 엿보기 때문에 나는 얼마나 싫어했는지 몰라! 한번은 나를 보고 마치 미치광이처럼 불평을 늘어놓았었어. 로우드에는 열병이 퍼져 많은 학생이 죽은 적이 있었는데도 그 아이는 죽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죽었다고 말했어. 죽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당치도 않은 것을 희망했군요, 리드 부인. 어째서 그처럼 그 아이를 미워했지요?"
"나는 그애의 어머니가 본래부터 싫었어. 내 남편의 유일한 동생으로, 남편도 몹시 동생을 사랑했지.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은 바보처럼 울었어. 후에 그 아이를 데려왔는데,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미웠어. 약하고, 여위고, 울기만 하고! 남편은 그 아이를 우리 아이들과 친하게 하려고 무척 애썼어. 아이들은 싫어했지. 그래서 앓을 때는 늘 같이 데리고 잤고 숨을 거두기 한 시간 전에 나에게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시키기도 했어. 남편은 약한 사람인 반면에 존은 아버지를 닮지 않아서 나는 그 애를 사랑하지. 아아, 그애가 편지로 내게 돈을 달라고 조르지 않는다면 말야! 난 그 애를 만나면 부끄러워져." 그녀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난 이제 가는 게 좋겠어." 나는 침대 저쪽의 벳시에게 말했다.
"네, 아가씨. 하지만 밤에는 늘 이렇게 혼잣말을 해요. 아침에는 훨씬 더 차분하시지요." 벳시가 진정제를 마시게 해주었다. 리드 부인은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나오고 말았다.
다시 그녀와 얘기하기까지는 10일 이상이나 걸렸다. 그 동안, 나는 될 수 있는 한 조지아나와 일라이자를 잘 다루어 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들이 몹시 차갑고 상대해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할 일이 없어 따분하게 보이지는 않으려고 애썼는데, 그림 도구를 가지고 온 것이 그 두 가지 목적에 닿았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하나의 얼굴을 스케치하는 데 몰두했다. 어떤 얼굴이 될지 신경 쓰지 않고 그려나갔다. 잠시 후 종이 위에는 넓고 튀어 나온 이마와 모난 얼굴의 윤곽이 그려졌다. 그 모양이 마음에 들어 나의 손가락은 부지런히 눈과 코를 그려 갔다. 다른 것을 다 그리고, 이번에는 눈의 차례였다. 매우 주의해서 그려야 되기 때문에 그것을 맨 나중에 했던 것이다. 나는 눈을 크게 모양 좋게 그렸다. 눈동자는 크고 빛나고 있었다.
'잘됐어. 하지만 아직 멀었어.' 그림을 관찰하며 나는 생각했다. '힘과 정기가 아직 모자라.' 그래서 나는 음영을 짙게 하고, 명암을 더욱 밝게 했다. 지금 나는 어떤 가까운 사람의 얼굴을 내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쯤 되면 두 처녀가 내게 등을 돌려봤자 아무 소용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말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이 닮은 얼굴에 미소짓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만족하고 있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분 날의 오후였다. 나는 문득 2층으로 올라가, 누구하나 돌보는 이 없이 빈사 상태에 있는 여인의 병문안을 할까 생각했다. 벳시는 충실했지만 자기 가족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가끔씩밖에 들를 수가 없었다. 병자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혼수 상태 같았다. 납빛의 얼굴은 베개 속에 가라앉아 있었고, 화덕의 불은 꺼져 있었다. 나는 연료를 넣고, 이불을 덮어 주고, 잠시 그녀를 들여다보다가 창가로 갔다. 빗발이 창을 후려치고,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의 영혼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자기 집을 떠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이 영혼은 - 마지막으로 해방될 때 어디로 날아갈까?'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육체에서 떠난 영혼의 평등성에 대해 헬렌 번즈가 한 말을 나는 생각했다. 그때 연약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거기 누구니?" 리드 부인이 이때까지 며칠 동안 말도 하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갔다.
"저예요, 리드 외숙모님."
"누구...... 저라니?" 이것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당신은 누구지?" 놀랍고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당신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군. 나를 외숙모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굴까? 너는 기브슨 가의 사람은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알고 있어요. 그 얼굴, 그 눈과 이마는 내 눈에 익숙해요. 너는 저...... 아니, 제인 에어를 닮았어!"
그래서 나는 공손히 내가 당사자임을 확인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비로소 나인 줄을 알았고, 나를 데려오기 위해 벳시가 남편을 보냈더라는 얘기를 했다.
"나는 말야, 병이 아주 무거워졌어." 이윽고 그녀는 말했다.
"나도 죽기 전에 마음을 평안히 하고 싶어. 건강할 때는 생각도 나지 않던 것이 지금의 나처럼 되고 보니 마음에 짐이 되니까. 간호사는 여기 있니? 아니면 방안에는 너 혼자 있니?"
나는 지금 둘만 있다고 얘기했다. "그래, 그런데 말야. 나는 너에게 두 번이나 심한 일을 했어. 그걸 후회하고 있어. 하나는 내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너를 키우겠다고 남편에게 맹세한 것을 깨뜨렸어. 또 하나는." 그녀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안색이 변하고 뭔가 내심으로 감정의 폭풍을 참는 듯했다. 아마 최후의 고통이 찾아온 것일까 "역시 나는 얘기를 다 해야 되겠어. 영원이 내 앞에까지 와 있어. 역시 얘기하는 게 좋겠어. 내 화장품 상자에서 편지를 꺼내 가져와, 저기 있을 테니까."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걸 읽어 봐." 그녀가 말했다.
- 부인, 소생의 질녀 제인 에어의 주소와 그녀의 근황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근일 중에 그녀에게 편지를 해서 마데이라에서 면회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싶어요. 신의 은혜로 소생은 노력한 보람 있어 상당한 재산을 저축했습니다. 하지만 처자식도 없는 몸이라 생존 중에 그녀를 양녀로 삼고 죽을 때는 나의 온 재산을 그녀에게 주고 싶습니다. 우선은 부인의 건강...... 존 에어, 마데이라에서 -.
그것은 3년 전의 것이었다.
"어째서 내게 이 소식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건 내가 너를 너무 싫어했기 때문에 네가 조금이라도 출세하는 게 싫었던 거야. 나는 네가 내게 복수해 올 것을 잊지 않았어요. 제인, 일단 네가 내게 덤벼들 때의 그 격한 분노, 나를 온 세계의 누구보다도 미워한다고 말했을 때의 어조, 나를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고 내가 너를 몹시 학대했다고 말했을 때의 너의 어린애답지 않은 그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네가 이렇게 덤벼들어 뱃속 독을 모두 뱉아냈을 때의 내 심정도 잊을 수가 없어. 아아, 물을 좀 줘, 빨리!"
"리드 부인." 나는 물을 주면서 말했다. "이제 그런 건 생각지 마시고 마음속에서 모두 풀어 버리세요. 내가 심하게 말씀드렸던 것을 잊어 주세요. 그때는 어렸으니까요. 9년이나 흘렀어요."
그녀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물을 마시자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나는 잊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내가 먼저 복수를 한 거야. 네가 백부의 양녀가 되어 안락한 신분이 되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너의 백부에게 편지를 썼지. 대단히 서운한 일이지만 제인 에어는 죽었습니다. 로우드에서 티프스에 걸려 죽었습니다, 하고. 자아, 이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편지를 써서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해 줘. 되도록 빨리 내가 저지른 거짓을 폭로하는 게 좋아. 너는 나의 고통의 씨앗으로 태어났나 보지. 나의 마지막은 무서운 고통을 겪어야만 해."
"제발 이제는 그 일을 생각지 마세요. 그리고 나를 친절한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어렸을 때도 당신만 그런 기분이었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을 사랑했을 거예요. 나는 지금 진심으로 가까워지고 싶어요. 키스해 주세요, 외숙모님." 나는 뺨을 그녀의 입술 가까이로 가져갔다. 그녀는 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물을 달라고만 했다. 물을 마시는 동안 그녀를 안아 일으키고, 그녀의 얼음처럼 차가운 손을 감싸쥐었다. 약한 손가락이 나를 거부했다. 흐릿한 눈이 나의 시선을 피했다. "그럼 나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용서하고 있어요. 나머지는 신의 용서를 비세요. 그리고 편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하세요."
가엾은 여자여! 그녀로서는 평소의 마음을 고쳐먹으려 해도 이미 때가 늦은 것이었다. 간호사와 벳시가 들어왔다. 나는 반 시간쯤 더 거기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인사불성의 상태로 돌아가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밤 열두 시에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에야 모든 것이 끝났음을 우리에게 알려 왔다. 그때는 이미 그녀가 관 속에 들어간 뒤였다. 그녀의 부싯돌 같은 눈은 차가운 눈시울에 덮여 있었다.
22
로체스타 씨로부터 1주일의 휴가밖에 얻지 않았지만 내가 게이트헤드를 떠날 때는 1개월이 지난 후였다. 장례식이 끝난 후 곧 돌아가고 싶었지만 조지아나가 자기가 런던으로 떠날 때까지는 있어 달라고 애원해 왔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조지아나가 떠나자 1주일간만 더 있어 달라고 일라이자가 또 부탁을 했다. 그래서 살림을 돌보기도 하고 손님을 접대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이제 자유로이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당신에게는 참으로 신세를 졌어요. 정말 고마워요! 당신은 인생을 살면서 자기가 할 일을 다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분이에요." 그리고 화제를 바꾸어, "나는 내일 대륙으로 떠나요. 리일 근처의 수도원에서 살게 돼요. 나는 아마 로마의 가르침을 가슴에 안고, 베일을 쓰게 될 거예요." 수도원 생활은 그녀에게 어울린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틀림없이 당신에겐 도움이 될 거예요!"
돌아오는 여행은 따분했다. 나는 돌아가는 날짜를 페어펙스 부인에게 확실하게 알려 주지 않았다. 그것은 밀코트까지 마중 나오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느 6월의 오후 여섯 시경, 손필드의 옛길을 아무도 모르게 걷기 시작했다. 이런 시각에는 들과 밭 사이로 난 길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다. 화창한 날씨였지만 밝게 빛나는 여름날로써는 아직은 저녁때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손필드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거기 있을 것인가? 오래는 머물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것만은 확실했다. 집을 비운 사이에 생긴 일에 대해 나는 페어펙스 부인으로부터 중간 보고를 듣고 있었다. 파티는 끝났다. 로체스타 씨는 3주일 전에 런던으로 갔지만 2주일 후에는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부인은 그가 사륜마차를 새로 사게 된 얘기를 하면서 아마 결혼 준비를 위해 런던으로 갔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그가 잉그람 양과 결혼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부인이 써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은 다 그렇게 말했다. 내 눈으로 보아도 결혼이 임박해지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행선지가 차츰 가까워지는 것이 나는 기뻤다. 너무 기쁜 나머지 나는 일단 걸음을 멈추고, 이 기쁨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만히 자문해 보았다. 이제부터 가는 곳은 내 집도 아니고, 쉴 수 있는 곳도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도 아니었다. '물론 페어펙스 부인은 웃는 얼굴로 맞아 줄 거야.'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아델은 손뼉을 치며 내게로 달려오겠지.' 하지만 청춘이란 것보다 더 한결같은 것이 있을까? 무경험일수록 맹목적인 것이 있을까? 이 두 가지가 다시 한번 로체스타 씨를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쪽이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별도로 하고도 결국은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자아, 빨리 가자. 그분의 곁에 있는 동안은, 어차피 앞으로 몇 달, 아니 몇 주 후에는 영원히 헤어져야 하지 않는가?' 그러자 나는 새로이 움트는 고통을 필사적으로 억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손필드의 목장에서도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쇠스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아, 마침내 그때가 온 것이다. 앞으로 한두 개의 들판을 더 지나면 나는 도로를 가로질러 문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생울타리에 피어난 장미의 아름다움! 하지만 나는 장미를 꺾을 시간이 없다. 빨리 저택에 가고 싶다. 나는 꽃 핀 가지가 오솔길 위로 뻗어 있는 키 큰 브라이아 나무 밑을 지나 돌계단이 있는 좁은 문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연필과 수첩을 들고 거기에 앉아 있는 로체스타 씨를 보았다. 뭔가를 쓰고 있었다. 아아, 유령은 아닌데도 나의 긴장된 기력은 한꺼번에 풀리고 만다. 나는 그를 만나면 이렇게 떨릴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의 앞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꼼짝도 할 수 없다니. 이런 데서 볼썽사나운 꼴을 보일 수는 없다. 저택으로 가는 다른 길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가 나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야아!" 그는 소리치고 수첩과 연필을 옆으로 치웠다.
"돌아왔군요! 자아, 이리로 오세요." 나는 그리로 가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동작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지만 아주 침착하게 보이려고만 애썼다. 나는 베일을 썼고, 베일은 늘어져 있으므로 어떻게든 겸손한 태도를 취하려고 애썼다.
"이게 제인 에어일까? 밀코트에서 걸어왔어요? 그래, 역시 당신다운 도박이야. 마차도 부르지 않고 마치 꿈이나 그림자처럼 황혼 속을 평민처럼 걸어오다니. 도대체 지난 한 달 동안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외숙모 곁에 있었어요. 외숙모는 돌아가셨어요."
"아니, 실로 제인다운 대답이군! 착한 천사여, 우리를 지키소서! 그녀는 저 세상에서 왔습니다. 죽은 자의 집에서 오직 혼자 어둠에 싸여 여기 와서 나를 만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실로 실체인지, 아니면 그림자인지를 알기 위해 손을 대면 어떡하시겠습니까? 요정아! 아니, 마계와의 경계에서 귀신 불이라도 잡는 게 낫겠지. 이 게으름뱅이! 엉터리 휴가를 즐기고!" 그는 한참 후에 어조를 바꾸어, "한 달 동안이나 나를 기다리게 했어요. 아마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겠지요!"
주인과의 재회가 즐겁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 몇 마디가 향유처럼 내 마음을 부드럽게 녹였다. 내가 그를 잊으려고 한 것이, 그에게 있어서 무슨 뜻이라도 있는 양 한 말, 그리고 그는 손필드를 나의 집이라고 말했다. 아아, 정말 나의 집이라면!
그는 울타리 문을 비켜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굳이 그리고 지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런던에는 가시지 않았댔어요?" 하고 물어보았다.
"갔다 왔지요. 당신은 천리안인가 보군요."
"페어펙스 부인이 편지에 써 보냈어요."
"내가 무엇을 하러 갔는지도 가르쳐 주셨습니까?"
"그럼요. 누구든지 당신의 볼일은 알고 있으니까요."
"제발 사륜 마차를 봐 주세요, 제인. 그리고 그것이 로체스타 부인에게 어울릴지 어떨지 말해 주세요. 당신은 요정이니까. 당신은 나를 미남으로 바꾸는 마법이나, 약 같은 거, 뭐 그런 것을 내게 줄 수 없습니까?"
"그런 것은 마법의 힘으로는 안 돼요."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살짝 말했다. '필요한 사랑은 사랑하는 눈으로 충분해요. 그런 눈에는 당신은 훌륭한 미남자고, 아니, 당신의 두려움에는 이 이상의 힘이 있어요."
로체스타 씨는 일찍이 가끔 나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민감한 통찰력으로 나의 생각을 꿰뚫은 적이 있다. 지금의 경우도 나의 바보스런 대답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의 특징인 미소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지나가세요, 제인." 간신히 지나 갈 수 있는 틈을 내어 주며 그는 말했다.
"집으로 오세요. 걸어서 지친 다리를 친구네 집에서 푹 쉬게 하세요."
그의 말을 듣자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울타리를 넘어 조용히 그와 헤어질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떤 충동이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니, 나 아닌 다른 것이 나 대신 내 뜻에 반대하고 있다.
"대단히 친절히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선 로체스타 씨, 당신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 이상할 정도로 기쁘군요. 그리고 당신이 계시는 곳은 어디든지 나의 집입니다. 나의 오직 유일한 집이에요."
나는 그날 밤, 미래에 대해 단호히 눈을 감고 말았다. 이별이 가까워졌다는 것, 슬픔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티 타임이 끝나고 페어펙스 부인이 뜨개질감을 찾아내자 나는 그녀 곁에 자리를 잡고, 아델은 방바닥에 앉은 채 내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언제까지나 우리들이 헤어지지 않기를 말없이 빌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고 있을 때 로체스타 씨가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서 우리들을 보았고, 우리들의 다정한 모습에 기쁨을 보였을 때 - "늙은이가 양녀가 돌아와 안심되지요."라고 말했을 때 - 나는 문득 그가 결혼한 뒤에도 우리들을 어딘가 그의 보호 밑에서 함께 살게 하고, 그의 몸에서 비치는 빛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싶어졌다.
내가 손필드에 돌아온 2주간의 모호한 평온이 뒤에도 계속되었다. 주인의 결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없고, 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나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잉그람 파크의 왕복 여행이나 방문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허락하지 않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혼담은 깨졌다. 소문은 틀림없다. 나는 주인의 얼굴이 화가 난 얼굴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알려고 했지만, 그 당시만큼 밝고 명랑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이 무렵만큼 번번이 자기 곁으로 부른 것도 - 내가 또 그를 그처럼 사랑한 것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23
한여름의 태양이 온 잉글랜드에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맑은 하늘, 아름다운 햇살이 이처럼 오래 계속되고 있음을 본 일은, 파도에 둘러싸인 우리의 국토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건초는 이미 다 거두어지고, 도로는 하얗게 말라 갔다. 나무들은 지금이 한창이었고, 생울타리도, 숲도 잔뜩 우거져 목장의 밝은 풀빛과 대조적이었다. 한여름 밤, 한나절 동안 헤이렌에서 들딸기를 따다 지친 아델은 해가 지자 곧 자리에 누웠다. 나는 뜰로 나섰다.
그것은 24시간 중에도 가장 상쾌한 시각 - 해는 지고 안개가 서서히 피어오르는 들. 태양이 화려한 구름을 가라앉혀 간 자리, 한 개의 언덕 위에 한 점의 홍옥이 번쩍거렸고, 작열하는 화덕의 불꽃이 피자, 다시 높게, 그리고 연하게 하늘을 반쯤 가린, 엄숙한 자색이 퍼지고 있었다. 나는 돌을 깐 길 위를 조금 걸었다. 거기에 은근히 정든 향기 - 궐련의 - 가 어느 창에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서재의 창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리고부터 나는 감시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과수원으로 갔다. 이곳처럼 나를 독립시켜 주고, 에덴 동산을 닮은 곳은 없다. 월계수가 빙둘러 선 곳까지 오니 밑둥에는 벤치로 둘러싼 거대한 마로니에 나무가 있다.
거기서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또 다시 그 냄새 – 로체스타 씨의 담배 냄새가 났던 것이다. 그는 마침 내가 가려던 나무 숲으로 통하는 문을 들어서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나무 열매와 꽃 따위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한 마리의 커다란 모기가 내 옆을 스쳐 날아 로체스타 씨의 발 밑, 풀 위에 앉았다. 그것을 보자 그는 가만히 허리를 굽혔다.
기회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서 등을 돌리고 그가 모기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에 빠져나가면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잔디 위를 걸었다. 그는 불과 2야드 떨어진 화단가에 있었다. 그는 완전히 모기에서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았다. 달빛을 받아 그의 그림자가 화원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을 밟고 넘으려는 순간 몸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인, 이놈을 좀 봐요."
도대체 그의 그림자에는 감각이라도 달려 있는 것일까? 나는 조금도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곧 거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놈의 날개를 봐요." 그는 말했다. "이건 서인도의 곤충을 생각하게 하잖아. 영국에는 이렇게 크고 화려한 날개를 가진 놈이 별로 없어요. 어어, 날아간다." 모기는 너울너울 날아갔다.
나도 그의 곁을 얌전히 물러가려고 했지만 로체스타 씨가 따라오며 말했다. "돌아갑시다. 이렇게 아름다운 밤에 집에 처박혀 있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오늘처럼 해가 지는 것과 달이 뜨는 것이 겹친 시각에 잠자는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늦은 시간 어두운 과수원에서 로체스타 씨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언가 그럴 듯한 핑계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로체스타 씨의 모습은 아주 침착하고 진실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동요를 느끼고 있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나는 물었다.
"로체스타 씨, 전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만 할까요? 손필드를 떠나서?"
"달리 도리가 없죠, 제인. 안됐지만 떠나야만 할 거요."
이것은 정말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난 타격에 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로체스타 씨, 내게 떠나라는 명령을 해주세요"
"그 명령은 이미 내려진 거나 다름없소. 난 오늘 밤에라도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렇게나 빨리 결혼하시는 거예요?"
"비로 맞혔소. 당신의 머리는 역시 예민하군."
"이제 곧?"
"그래요. 나의...... 아니, 에어 선생. 미스 잉그람을 나의 품으로 맞아들이는 게 나의 꿈이라고 얘기했던 일을 당신도 기억하겠지요. 그 커다란 여자를 안으려면 팔이 아프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처럼 멋진 여자를 안고 불평할 남자는 없을 거요. 제인! 당신은 얼굴을 돌리고 있는데 그 모기를 더 보고 싶은 게요? 내가 당신에게 기억해 달라는 것은, 내가 잉그람과 결혼할 경우 당신과 아델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신중한 고용인의 입장으로써 퍽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오. 아델은 물론 학교에 넣고, 에어 선생, 당신은 새 직장을 가져야겠지요."
"네, 곧 광고를 내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새 직장이 나설 때까지 여기 있어도 괜찮겠지요, 하고 말하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막히고 말았다.
"한 달 안으로 난 결혼할 생각이오." 로체스타 씨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 그 사이에 당신의 직장을 구해 보도록 하겠소."
"고맙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천만에, 당신처럼 책임과 의무를 다한 사람에겐 고용주로서 약간의 편의를 봐 드리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요. 실은 내 미래의 장모될 사람에게서 당신에게 적당한 일자리에 관해 들은 적이 있어요. 아일랜드 코노트의 어떤 명문 가의 다섯 따님에게 가정 교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틀림없이 당신에겐 그곳의 일자리가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참 먼 곳이군요."
"뱃길이지만 당신같이 분별 있는 아가씨에겐 아무 지장이 없겠지요."
"뱃길은 좋아요. 하지만 거리...... 바다는 내게는 장애물이에요."
"무엇에 대한 장애물인가요, 제인?"
"영국이에요. 그리고 손필드."
"또......"
"로체스타 씨에 대해서......" 나는 이 말을 내 의사를 무시하고 말했다. 동시에 내 자유 의사의 허락없이 눈물이 치솟았다. 그러나 나는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다. 약간 흐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다소간 싸늘한 심정으로 나와 로체스타 씨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돈, 계급, 습관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너무 멀어요." 나는 말했다. "그건 확실해. 그리고 당신이 가버리면 우린 두 번 다시 못 만나겠지. 나는 아일랜드란 나라에 흥미가 없으니 그곳에 갈 일도 없어요. 제인, 우리는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지 않소?"
"그랬어요."
"사이가 좋은 사람들은 작별 전야를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오. 여행과, 그리고 작별에 대한 일을 우리 삼십 분만 더 얘기합시다. 여기 마로니 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젠 우리 둘이서 여기 와 앉을 일도 없을 테니 오늘 밤이나마 조용히 여기서 쉽시다." 그는 나를 앉게 하고 자기도 따라 앉았다.
"아일랜드는 정말 먼 곳이에요, 제인. 그런 피로한 여행에 나의 조그만 친구를 보내는 것은 애처로워요. 그러나 달리 그 이상의 것을 해줄 수가 없소. 당신은 나와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인?"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에 무엇인가가 꽉 차올랐다.
"왜냐하면 말이지요." 그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이따금 당신에 대해 이상한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특히, 지금처럼 바로 내 곁에 있을 때는 말이에요. 마치 내 왼쪽 갈빗대 밑에 끈이 하나 달려 있고, 또 당신의 오른쪽 갈비에도 끈이 달려있어서 그 두 개가 서로 꼭 묶여져 있는 것만 같단 말이오. 그러니, 만일에 저 넓고 거친 해협이 우리 사이에 가로 놓이게 된다면 이 매어져 있는 끈은 그만 끊어져 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그러면 나는 체내에서 출혈을 일으켜 버릴 것만 같은 불안이 자꾸 생겨요. 분명 당신은 금세 나를 잊고 말 테지."
"아니에요, 절대로! 잘 아시면서......" 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몸을 떨며 흐느껴 울었다. 겨우 입을 열었을 때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손필드에 오지 말았더라면 하는 깊은 후회와 한탄에 잠긴 말뿐이었다.
"여기를 떠나는 게 슬퍼서?" 마음속의 슬픔과 사랑으로 불러일으켜진 격정의 불길은 모든 것을 멋대로 하려고 마음껏 몸부림쳤다. 우월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극복하고, 살려고 버둥거리고, 그리고 마침내는 완전히 정복하여 - 아아, 말하는 권리를 주장했다.
"떠나는 것이 슬퍼요. 손필드를 사랑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만족하고 기쁨에 넘치는 생활을 나는 하고 있어요. 저는 짓밟히거나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어져 버리지도 않았어요. 존경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했어요. 제가 가까워지고 싶던 분 - 독창적이며, 늠름하고 포용력이 있는 분과. 그래요, 당신을 알게 된 거예요. 당신으로부터, 기필코, 영원히 떠나야 한다는 것은 정말 슬프고 괴로운 일이에요. 하지만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별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어쩌면! 로체스타 씨, 당신이 분명히 그렇게 의도했어요."
"어떤 형태로?"
"미스 잉그람이라는 형태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신부로 맞는다는 것으로써."
"나의 신부? 어떤 신부 말입니까? 내겐 신부가 없어요."
"하지만 이제부터 가지는 것이 아녜요?"
"그건 옳아. 난 가지게 돼요."
"그러니까 전 떠나야 하는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니,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해. 맹세코! 그리고 그 맹세를 지켜야만 해."
"아녜요! 전 가야만 한다고 분명히 말하는 거예요." 나는 격정에 쫓기듯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 있어 이제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된 이상 나는 여기 있을 수가 없어요. 저를 감정이 없는 자동 인형으로 아세요? 감정이 없는 기계로? 입으로부터는 빵을, 손으로부터는 삶에 필요한 한 잔의 물을 빼앗기고도 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가난하고, 신분도 낮고 또 못 생긴 조그만 여자라고 해서 저를 영혼도 감정도 없는 인간으로 아셨나요? 그렇다면 저를 잘못 아신 거예요. 제게도 당신 못잖은 영혼과 감정이 있어요. 만일 하느님께서 얼마간의 아름다움과 풍부한 재산을 베푸셨더라면, 제가 당신 곁을 떠나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처럼 당신 역시 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도록 해 주셨을 거예요. 저는 습관과 인습, 그리고 이 허물어지기 쉬운 육신을 통해서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저의 영혼이, 또 당신의 영혼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우리 두 사람이 무덤을 지나 하느님의 발밑에 평등하게 서 있는 것처럼. 그래요, 우리들은 평등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서로 평등해!" 하고 나를 두 팔로 끌어당겨 자기 가슴에 안고, 입술로 내 입술을 힘껏 누르며 그는 말했다.
"이렇게 제인!"
"그래요, 정말" 나는 대답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해요. 당신은 결혼할 분이 - 또는 결혼하지 않은 그......... 분, 당신보다 훨씬 못한 사람과 결혼하려는 분이니까, 당신은 조금도 공명을 느끼지 않으면서, 당신이 진정 사랑하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 - 아닌가요? 저는 당신이 그 사람을 비웃는 것을 똑똑히 보고 들었습니다. 전 그런 식의 결혼을 경멸하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당신보다는 더욱 낫다고 생각돼요. 이젠 놔 주세요. 가도록 놓아 주세요."
"제인, 조용히, 죽을 힘을 다해 자기 깃털에 상처를 입히는 미친 새처럼 제발 그렇게 몸부림치지 말아요."
"전 새가 아녜요. 어떤 그물에도 유혹당하지 않아요. 전 독립된 사고를 가진 자유인이에요. 그 의사로써 판단하여 저는 당신과 헤어지려는 거예요." 나는 다시 한 번 자유로이 되려고 몸부림치고 그의 앞에 꼿꼿이 섰다. "그런 당신의 의사가 곧 당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거예요."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나의 손을, 나의 마음을, 나의 전 재산의 반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신은 연극을 하시는 거예요? 전 그런 짓은 비웃을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일생 동안 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거요. 나의 신부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겁니다."
"그 운명을 위해서라면 당신은 이미 선택하고 있는 것이니 그것을 꼭 지켜야만 하는 거예요."
"제인, 잠깐만 조용히 해줄 수 없소? 당신은 너무 흥분하고 있어."
월계수가 둘러싸인 산책 길을 바람이 휘몰아치고, 마로니에 가지를 흔들었다. 어디에서부턴가 나이팅게일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다시금 눈물을 지었다. 로체스타 씨는 부드러우면서도 침통하게,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잠시의 침묵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내 곁으로 와 주시오, 제인. 그리고 마음을 터놓고 얘기해 봅시다."
"저는 두 번 다시 당신 곁으로 가지 않아요. 이미 떨어져 나갔어요. 되돌아가지는 못할 거예요."
"그러나 제인, 나는 아내로서 당신을 부르고 있는 거요. 내가 결혼을 생각한다면 상대는 오직 당신뿐이오." 나는 그가 나를 조롱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리로 와 줘요, 제인."
"당신의 신부가 우리들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내게 손을 대었다.
"아니, 내 신부는 여기 있어." 다시금 나를 끌어당기며 그는 말했다.
"왜냐면 나와 대등한, 나와 비슷한 사람이 여기 있으니. 제인, 나와 결혼해 주시겠소?" 나는 대답 없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몸부림쳤다.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제인?"
"제, 그렇고말고요."
"조금도 믿지 못하는 거요?"
"털끝만치도요."
"당신 눈엔 오로지 내가 거짓말쟁이로 보이는 거요?" 뜨거운 정열로 그는 물었다. "의심 많은 아가씨, 내 자세히 설명해 주리다. 나는 잉그람 양에게 아무런 애정도 갖고 있지 않아요. 그건 당신도 잘 아는 일이오. 그녀 역시 내게 아무런 애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는 퍽 애를 먹었소. 나는 나의 재산이 남들이 생각하는 액수의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소문을 퍼뜨렸소. 그리고 그녀의 집엘 갔더니 역시 예상대로 그녀와 그녀의 모친은 냉대로써 나를 맞더군. 제인, 나는 잉그람 양과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소. 당신이라는, 거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당신이라는 사람을 나는 내 몸처럼 사랑하오. 가난하고, 신분도 낮고, 잘 생기지 못한 조그맣고 평범한 사람에게, 나는 나를 남편으로 받아 달라는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아무리 제게!" 나는 소리쳤다. 그의 진지한 태도와 예의를 벗어난 말투를 나는 서서히 믿기 시작했다. "당신 외엔 친구도 하나 없고, 당신이 주는 돈 외엔 1실링도 가지지 않은 제게 말에요?"
"그렇소, 당신에게요. 제인, 나는 나의 것으로서 완전한 나의 것으로 당신을 손에 넣고 싶소. 빨리 그렇게 한다고 대답해 주시오."
"로체스타 씨, 당신의 얼굴을 보게 해주세요. 달이 있는 밝은 쪽으로 얼굴을 돌려주세요."
"왜?"
"당신의 얼굴에서 마음을 읽겠어요. 저쪽을 봐 주세요."
"자아, 실컷 보시오. 마음대로, 그리고 어서 읽어요. 나는 괴로우니까." 그의 얼굴은 빨갛고, 근육이 경련하고, 눈빛이 이상스레 빛나고 있었다. "오오, 제인! 당신은 나를 고문하는구려!" 그는 외쳤다. "그 꿰뚫는 듯한, 그러면서도 성실하고 부드러운 눈길로 당신은 나를 고문하는구려. 제인, 나를 에드워드라고 불러요. 이름을 불러요. 그리고 "에드워드, 당신과 결혼하겠어요"라고 빨리 말해 주시오."
"진정이세요? 정말 저를 사랑하세요? 진심으로 아내가 되기를 원하세요?"
"진심으로. 맹세하라면 맹세하겠소. 그럼 맹세하지."
"그럼 로체스타 씨, 저는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에드워드라 불러요. 나의 조그만 아내!"
"사랑하는 에드워드!"
"이리 와요, 이젠 아주 내 곁으로." 그는 뺨을 내 뺨에 비비면서 가만히 속삭였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오. 나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소."
"주여 용서하소서!" 얼마 후에 그는 덧붙였다. "인간의 간섭을 난 용서하지 않아, 나의 것인 이 사람을 나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아요. 내겐 방해할 친척도 없답니다."
"없다고? 그것이 가장 고마운 일이지." 하고, 그는 말했다.
만일 나의 사랑이 모자랐다면 그때 그의 목소리나 안색이 격화된 것을 야만스럽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별이라는 악몽에서 이번에는 결혼이라는 낙원으로 초대되어, 나는 그처럼 풍부하게 넘쳐흐르는 샘물에서 행복 외에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거듭해 "행복해, 제인?" 하고 물었고 나는 몇 번이나 거듭해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는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보상된 거야. 내가 만난 이 사람, 친구도 재산도 없이 그나마 위안받을 곳도 없었어. 나는 이 사람을 아끼고 위로해 줄 거야. 나의 마음에 사랑이 없고, 나의 결의에 일관성이 없으리라는 것은 신의 심판장에서 보상되리라. 조물주는 나의 행동을 보고 계셔. 세상에서 뭐라고 비평하든 나는 태연하겠소." 그러나 이 밤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일까? 하늘엔 달이 있으면서도 우리들의 주위는 매우 어두웠다. 곁에 있는 로체스타 씨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무얼까, 이 마로니에 나무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나무는 뒤틀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바람이 월계수나무 사이를 휩쓸며 쏴하고 우리들 머리 위로 불어왔다.
"안으로 들어가요." 로체스타 씨가 말했다. "나는 날이 밝도록 여기서 당신과 둘이 앉아 있고 싶은데, 날씨가 변하니 말야."
'저도 그래요.'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사실은 입 밖에 내서 말해도 상관없었지만 때마침 내가 보고 있던 구름 사이로 새파란 불꽃이 튀어나오면서,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그리고 바로 우리의 옆에서 우르르 쾅 하는 뇌성이 무섭게 났다. 나는 눈부신 그 빛을 피하여 로체스타 씨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을 뿐이었다.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황급히 나를 길 위로 끌어올리고,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나 문턱에 들어서기도 전에 우리들은 흠뻑 젖어 버렸다. 그가 홀에서 내 숄을 벗겨 주고 머리카락의 물방울을 털어 주고 있는데 페어펙트 부인이 방에서 나왔다. 우리들은 전혀 그녀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불이 켜졌다. 시계가 열두 시를 쳤다.
"빨리 가서 젖은 옷을 벗어요." 그는 말했다. "잘 자요, 사랑스러운 사람!" 그는 몇 번인지도 알 수 없게 내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포옹에서 풀려나와 얼굴을 들자, 거기 미망인의 심각하고도 질린 듯한 얼굴 표정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나중에 설명하면 되겠지.'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침실에 들어오자, 그녀가 일시적이나마 그 광경을 곡해하지나 않나 하는 불안이 잠시 싹텄지만 환희가 곧 다른 감정을 없애 주었다. 바람 소리가 드높고, 천둥이 가까운 데서 몰아치고, 번갯불이 무섭게 번쩍였지만 나는 아무런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았다. 폭풍이 계속되는 동안 로체스타 씨는 세 번이나 내 방문 앞에 와서 기분이 어떤지를 물어 보았다. 그것은 매우 큰 위로였다. 무엇보다 내게 따뜻한 힘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내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아델이 뛰어 들어와서는, 과수원의 막다른 곳에 있는 커다란 마로니에 나무가 간밤의 천둥으로 해서 절반으로 쪼개졌다고 말해 주었다.
24
잠에서 깨어나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어젯밤의 일들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로체스타 씨를 만나 다시 사랑의 맹세를 듣기까지 나는 아무래도 그 일을 실체로써 믿을 수가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얼굴은 생기가 돋고 희망이 넘쳐흘러서인지 이제는 좀처럼 얼굴도 못생겨 보이지가 않았다. 서랍에 넣어 둔 깨끗하고 수수하고 가벼운 여름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그 옷은 정말 다른 그 언제보다도 내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왜냐면 나는 이토록 행복에 젖어서 옷을 입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어 선생, 아침 식사예요." 하고 페어펙스 부인이 다소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나 그녀 역시, 로체스타 씨가 설명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식사가 끝나자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아델이 공부방에서 나왔다.
"공부 시간인데 어딜 가니?"
"아저씨가 나더러 어린이 방에 있으랬어요."
"어디 계시는뎨?"
"여기."
나는 아델이 가리킨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서 있었다.
"자아, 내게 아침 인사를 해줘요." 나는 주저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인사의 말 따위나 악수가 아닌 따뜻한 포옹과 키스로 나를 반겼다.
나는 그에게서 사랑받고 애무받는 일이 자연스럽고, 또한 즐겁게 느껴졌다.
"제인, 당신은 마치 꽃이 핀 것 같구려. 오늘 아침은 정말 아름다워요. 이젠 창백한 요정 같지가 않아. 이 보조개 패이는 뺨과 장미꽃처럼 귀여운 입술을 가진 아가씨, 아름답게 빛나는 블론드 머리칼과 맑디맑은 갈색의 눈을 가진 아가씨......"
'하지만 나의 눈은 녹색이었다. 어찌된 걸까, 그를 위해서 나의 눈은 새로운 빛깔로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것이 제인 에어의 모습이에요."
"그래, 곧 4주가 지나면 제인 로체스타가 될 사람이야. 제인, 그 이상은 단 하루도 미룰 수가 없어요. 듣고 있어요?"
물론 나는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얼굴색이 빨개졌다가 다시 파래졌어. 왜 그러지?"
"제게 어울리는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아무렴, 나의 신부, 에어 로체스타!"
"꿈만 같은 얘기예요.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인간이 있다니. 오! 그런 행복이 오리라고 상상도 못했어요. 그건 한낮의 꿈이에요."
"사실이오. 난 바로 오늘부터 반드시 실천할 것이오. 아침에 나는 런던의 은행에 편지를 띄워, 손필드 부인이 상속하기로 되어 있는 보석 전부를 보내 달라고 했소. 2, 3일 안으로 그것을 전부 당신 무릎에 쏟아 놓겠소. 당신과 결혼하는 이상 귀족의 딸처럼 모든 특권과 배려를 쏟을 거요."
"어머나, 그런 것에 마음 쓰시다니! 제인 에어에게 보석이라구요? 전 싫어요. 부자연스러워요. 제겐 보석이 없는 편이 훨씬 나아요."
"나는 당신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레이스의 옷을, 그리고 머리엔 장미꽃을 꽂아 주겠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베일을 씌워 주겠소."
"그렇게 하시면 전 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게 돼요. 당신의 제인이 아니라, 광대옷을 입은 원숭이나 깃털에 장식을 단 새나 다름이 없게 돼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아무리 사랑해도 잘 생겼다고 말하지 않아요. 그만큼 더욱 당신을 사랑해요. 제발 제게도 그렇게 대해 주세요."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오늘 당장 우리는 밀코트로 가서 옷을 사도록 하는 거야. 4주일 이내로 결혼한다고 내가 말했지요? 결혼식은 되도록 교회에서 조용히 하고 런던으로 떠나는 거요. 그곳에서 잠깐 머문 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태양에 가까운 지방과 프랑스의 포도원이나 이탈리아의 평원을 여행하는 것이오. 그곳에서 당신은 갖가지 도회의 생활을 맛보면서, 자신의 참된 가치를 깨닫는 거야."
"당신과 함께 정말 제가 여행을 하는 거예요?"
"파리, 로마, 나폴리, 프로렌스, 베니스, 비엔나를...... 내가 돌아다녔던 곳은 당신에게 송두리째 보여줄 거요. 나의 말발굽 자리가 난 곳엔 어디든 당신의 가냘픈 발자국이 찍히게 할 거요.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증오와 분노만이 들끓어 거의 반 미치광이가 되어 유럽을 떠돌아다녔소.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나를 위로해 줄 천사와 함께 행복한 마음으로 다시 그곳을 찾아가는 거요." 나는 웃었다.
"나는 천사가 아녜요. 또한 죽기까지 천사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전 단지 제인일 따름이에요. 로체스타 씨, 제게 하늘 나라에서의 일 같은 것을 기대하거나 강요하진 마세요. 저도 당신께 그런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아요."
"그럼 무엇을 기대합니까?"
"당분간은 지금 그대로의 당신이겠지만 곧 냉정을 되찾으시겠지요. 그러고는 변덕스럽고 화도 잘 내고, 엄격해지셔서 전 당신의 비위 맞추기에 애쓰게 될 거예요. 그러나 저한테 아주 익숙해지면 아마 다시 한번 저를 좋아하실 거예요 - 좋아한다는 것이지 사랑하신다는 건 아녜요. 저의 예측으로는 당신의 사랑이 반 년이 못 가 증발해 버릴 것 같아요. 그러나 결국은 친구로서, 인생의 길동무로서, 전 제가 주인님께 싫증을 느끼게 할 마음은 없어요."
"싫증을 느낀다고? 그리고 다시 당신을 좋아할 거라고? 나는 몇 번이라도 당신이 좋아질 거고 그리고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겠소."
"그렇지만 당신은 곧 변덕이 생겨서....."
"외모만으로 나를 대접하려는 여자들에게는 영혼도 애정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난 곧 악마가 돼요. 무미하고, 경박한, 우열, 비루, 옹고집을 내게 표현했을 때는 말이오. 그러나 해맑은 눈빛과 내부에 불을 품은 영혼, 차라리 휠지라도 부러지지 않는 풍부하면서도 유순하고 성실한 사람에겐 나는 언제나 친절하답니다."
"당신은 그런 성격의 여성을 보았던가요? 사랑한 적이 있어요?"
"지금,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니, 절 알기 이전에 혹시 당신이 찾는 이상형에 맞는 여인과 실제로 가까워진 적 있었던가요?"
"나는 지금껏 당신을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없소, 제인. 당신은 나를 즐겁게 하면서도 나를 지배하오. 그 복종하는 듯한 착한 인상을 나는 좋아하오. 당신의 부드러운 손가락에 감기면 그것은 나의 팔을 통해 심장까지 전해오지. 나는 영향을 받고, 그리고 정복되오. 그러면서도 그 영향력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하고, 그 정복력은 여태껏 내가 얻은 그 어느 승리보다도 마력을 갖고 있소. 아니, 왜 웃지, 제인?"
"저 큘레스나 삼손이 미녀를 당하지 못했던 일들을 생각했어요."
"그래? 이 엉터리 요정아!"
"아니, 지금 당신의 말씀은 그리 현명한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군요. 제가 말한 삼손이 그리 현명한 행동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담에 제가 당신에게 별로 내키지 않는 부탁이라도 드린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실까요?"
"제인, 지금 부탁해 봐요. 나는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소."
"그렇다면 정말 부탁을 드리겠어요. 벌써 부탁드릴 일이 생겼는걸요."
"말해 봐요.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보니, 난 말을 듣기 전부터 벌써 승낙해 버릴 것 같군. 그렇게 되면 나는 바보가 아닌가."
"그럴 리가요. 제 부탁은 매우 사소한 거예요. 보석을 가져오시지 않을 것과 장미꽃을 머리에 꽂지 마실 것 이렇게 두 가지뿐이에요."
"그러면 순금으로 도금하는 편이 좋다는 말인가? 좋아요. 당신의 부탁은 당분간 듣도록 하지요. 은행에 보낸 편지 내용을 곧 취소하겠소. 그런데 제인, 당신은 아직 내게 요구한 게 없소. 뭐 다른 것을 좀 얘기해 봐요."
"그렇다면 한 가지, 저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시겠어요?"
그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게 뭐요 뭐?" 성급히 물었다.
"호기심이란 원래 수상한 거야. 어떤 요구든 들어주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군그래. 모르긴 해도 어떤 비밀에 대한 질문이겠지만 그보다는 내 재산의 절반을 달라는 편이 훨씬 좋겠어."
"어머나! 절 땅덩어리에 투자를 해서 돈이나 벌려는 욕심쟁이 유대인 여자로 아세요? 그보다는 당신의 비밀을 모두 듣고 싶어요. 만일 당신이 마음속으로부터 저를 사랑하신다면 그 비밀로부터 저를 몰아내시지는 않겠지요?"
"당신이 알아야 할 비밀은 뭐든 얘기하겠소. 그러나 쓸데없는 짐을 지려고는 하지는 말아요, 제인. 내 손바닥 위에서 당신이 이브와 꼭 같은 여자가 되게 할 수는 없어요."
"왜 안 되나요? 당신은 설복당하고 정복당하는 일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를 말씀하셨잖아요. 그 고백을 기회로 재빨리 응석을 부리고 비위를 맞추고 조르기도 해서, 또 울거나 화를 내기도 해서 전 제 솜씨를 시험해 보고 싶어요."
"그런 시험을 해보고 싶으면 해봐요. 그렇게 남의 약점을 찌르면 게임은 결국 끝이 나요."
"어머, 그래요? 당신은 그렇게 쉽게 항복하나요? 왜 그렇게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하세요? 눈썹이 손가락처럼 굵어졌어요. 언젠가 어떤 시에 '첩첩이 쌓인 어두운 천둥구름' 이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지금 당신 이마가 그래요. 결혼 후 당신 얼굴이 그래질까요?"
"만일 당신의 그 얼굴이 결혼 후의 그 얼굴이라면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땅의 요정인가 하는 당신과 결혼할 생각은 버리겠소. 그런데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오, 응?"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은 왜 잉그람 양과 결혼할 의사가 있는 듯이 보이려나 애쓰셨나 하는 거예요."
"그것뿐이라니 고마운 일이군." 그의 이마에서 어두운 그늘이 사라졌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미소짓고 머리를 쓰다듬고 마치 위험에서 모면한 듯한 기쁜 얼굴을 하였다.
"제인, 내게 구혼을 한 건 당신이었소."
"물론 저예요. 하지만 잉그람 양의 일은?"
"그렇소. 내가 잉그람 양에게 구혼한 체한 것은, 내가 당신을 미친 듯이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 역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려는 거였소. 질투는 그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한 것으로 가장 효과가 있으리라 여겼소."
"어머나, 그런 짓을 하다니, 부끄러워요. 명예롭지 못한 일이에요. 잉그람 양의 심정은 조금도 생각지 않았었군요."
"그녀의 심정은 오직 프라이드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눌러 줄 필요가 있는 거지요. 제인, 당신은 질투했나요?"
"그런 건 걱정 마세요. 그보다도 로체스타 씨, 당신의 그 희롱 탓으로 잉그람 양이 괴로워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셨나요? 그분은 버림을 받고, 배반당했다고 생각지 않을까요?"
"절대로! 그 반대예요. 내가 전에 얘기하지 않았소. 재정 곤란이라는 소문이 나가 내게 쏟았던 그녀의 정열은 꺼져 버렸습니다."
"당신의 두뇌는 이상한 공작을 잘도 꾸미는군요. 다시 한번 묻겠어요, 로체스타 씨. 저는 얼마 전까지 괴로워했던 그런 괴로움을 누군가에게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이 나에게 보장된 이 커다란 행복을 받아들여도 좋을까요?"
"물론이지, 착한 아가씨. 당신처럼 순결한 사랑을 지닌 사람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거야. 나는 당신의 사랑을 믿어요. 그래서 자신 있게 말도 할 수 있는 거야."
나는 나의 어깨에 놓인 그의 손에 입을 맞췄다.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그를 사랑했다. 나 자신도 못 믿을 정도로. "졸림을 받는 건 즐거운 일이야. 다른 걸 더 요구해 봐요."
얼마 후에 그가 말했다. 나는 다시금 요구할 일을 생각해 냈다.
"당신의 의향을 페어펙스 부인에게 전해 주세요. 어제 저녁에 그분은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보고 놀라는 눈치였어요. 그런 분에게 오해를 받는 것이 저는 괴롭습니다."
"방에 가서 모자를 쓰고 와요." 그는 말했다.
"이제부터 밀코트에 갑시다. 당신이 준비할 동안 노부인께 양해를 얻어 두지요."
"틀림없이 그분은 제가 저 자신이나 당신의 신분을 잊고 있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신분? 당신의 신분이라면 내 마음속에 있어. 그리고 당신을 경멸하는 놈의 모가지에 있단 말이오."
준비는 곧 끝났다. 나는 로체스타 씨가 페어펙스 부인 방을 나오는 소리를 듣고는 곧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정면의 하얀 벽을 바라보고 있는 노부인의 눈은, 차분한 마음씨의 주인이 생각지도 못한 사건으로 휘저어진 데 대한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나를 보자 일어서서 약간 어색한 웃음을 띠며 무언가 축하의 말 같은 것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소는 사라지고 말은 꼬리가 잘렸다.
"정말로 놀랐어요." 그녀는 말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미스 에어. 분명 꿈은 아니지요? 가끔 나는 깜박 잠이 들어서, 전혀 듣지도 않은 일들을 공상하는 때가 있어요. 아무튼 사실대로 말해줘요. 당신에게 로체스타 씨가 구혼을 한 건 사실인가요? 웃지는 말구요. 글쎄 주인님은 5분 전에 이리로 오셔서 한 달 내게 당신을 아내로 맞겠다는 군요."
"로체스타 씨는 제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세요? 그래 당신은 그 말을 정말로 믿고 승낙하셨나요?"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찬찬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강력한 매력을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내 머리론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이상, 의심 없는 사실이군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어요. 결혼에 있어선 신분이나 재산이 대등해야 됨은 물론 또 당신들 두 분은 스무 살이라는 나이 차가 있잖아요. 말하자면 아버지뻘이죠."
"그런 것은 걱정 마세요, 부인!" 나는 답답해서 소리쳤다.
"로체스타 씨는 스물다섯 살 정도로 젊어 보이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젊으세요."
"당신과 결혼하려는 건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인가요?" 나는 그녀의 냉정함과 의심이 깊은 데 너무나 마음이 상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을 슬프게 하는 건 안 됐지만......" 하고 페어펙스 부인은 더 다그쳐 말했다. "당신은 너무 젊어서 남자라는 걸 몰라요. 그러니 조심해야지요. 왠지 이번 일엔 아무도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는군요."
"그렇다면, 내가 도깨비라도 된단 말씀이세요? 로체스타 씨가 제게 애정을 느끼는 건 있을 수 없는 얘기라는 말인가요?"
"그런 말이 아녜요.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고 또 요즘 몰라 보게 아름다워졌어요. 그리고 로체스타 씨는 분명히 당신을 좋아하세요. 그것이 너무 눈에 뜨일 정도여서 나는 오히려 당신이 염려되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 자제해 줬으면, 하고 바랐어요. 어젯밤, 집안을 모조리 뒤졌어도 두 분 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열두 시가 되어서 당신과 주인님이 함께 들어오시겠지요."
"이젠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좋아요." 나는 답답해서 말을 중단시키려고 했다. "아무 것도 잘못된 일은 없으니까요."
"나는 끝까지 만사가 순조롭기를 바래요. 하지만 주인님 같은 신분의 사람이 가정 교사와 결혼한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니 걱정이 돼요."
나는 그만 화가 치밀었다. 이때, 존이 와서 마차가 준비됐다고 알려 왔다.
그러나 밀코트에서의 시간은 나를 다소 귀찮게 했다. 로체스타 씨는 나를 비단옷 가게로 데리고 가서 여러 벌의 옷을 고르게 했다. 내 부탁에 두 벌로 줄일 수 있었지만, 그는 이번엔 그 두 벌을 자기가 직접 고르겠노라고 나섰다. 그는 가장 화려한 자수정 색깔의 비단 드레스와 핑크색 사탱에 눈길을 주었다. 나는 다시 몇 번을 귀띔하여 그런 것은 골라 주어도 입을 용기가 없다고 말했다. 어쨌든 그는 굉장한 고집불통이었기 때문에, 한참이나 애를 먹은 후에야 겨우 수수한 은회색의 비단과 검은색 사탱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오늘만은 당신의 말을 듣겠어. 하지만 나는 역시 눈부신 꽃밭 같은 당신이 보고 싶어요."
비단옷 가게에서 겨우 그를 끌어내고 다시 보석상에서 끌어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물건을 많이 사면 살수록 나는 거북함을 느꼈다. 열이 오르는 것처럼 지쳐 버린 몸을 마차의 좌석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문득 여태껏 까맣게 잊고 있던 한 가지 일이 생각났다. 나의 친척이 되는 존 에어가 리드 부인에게 보낸 편지, 그가 날 양녀로 하여 유산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는 일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구원이야. 내가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자립은 할 수가 있잖아. 로체스타 씨에게 인형처럼 사치의 대상이나 되고, 황금빛이나 뒤집어쓰고 있는 제2의 다이에로는 되기 싫다. 마데이라에 편지를 써야지. 존 아저씨에게 결혼을 알리고, 그 상대를 알리는 거야. 만일 내가 언젠가는 상속할 재산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집을 간다면 지금 이분의 신세를 진다 해서 그리 큰 부담이 될 것은 없어.' 이런 생각이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고 나는 그날로 이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주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생겼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마치 즐겁고 기분이 좋은 회교도의 군주가 노예에게 황금이며 보석 따위를 줄 때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나는 화가 나서, 쉴 새 없이 내 손을 찾아 더듬거리는 그의 손을 빨개질 정도로 꽉 붙잡아서 그의 쪽으로 휙 밀어붙였다. 그는 웃으면서 손을 비볐다.
"어쨌거나 난 당신의 뜻대로야, 제인."
"저는 다만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싶을 뿐에요. 복잡한 의무감은 싫은 거예요. 당신은 세린느 바렌에 대해서 말씀하신 걸 기억하세요? 다이아몬드나 캐시미어의 천을 준 걸 말에요. 저는 당신의 영국제 세린느 바렌이 되진 않아요. 전 아델의 가정 교사로 행동할 거예요. 다만 그것으로서 집과 식사와 또 연봉 30파운드의 급료를 벌겠어요. 그 돈으로 제 옷을 사고, 당신에게선......"
"내게는......?"
"당신의 마음을 받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 보답으론 제 마음을 드리니까요. 그걸로 빚은 상쇄되는 거예요."
"흠, 그 냉정한 거만과 순수한 자존심에 있어선 아마 아무도 당신을 당할 수 없겠소." 마차는 손필드에 가까워졌다.
"오늘 나와 함께 식사합시다."
"고맙지만 싫어요."
"도대체 뭣 때문이오?"
"결혼 때까지의 한 달 동안 저는 종전대로 생활하겠어요."
"지금부터 가정 교사 일은 그만둬요."
"어머나, 실례지만 그것도 사양하겠어요. 그것 역시 종전대로예요. 전 당신과 떨어져 생활하고, 다만 당신은 절 만나고 싶으면 예전처럼 저녁때 불러주시면 돼요."
"아델의 말처럼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 자아, 들어 봐요. 지금은 당신이 도도하지만 당신은 머잖아 내 사람이야. 일단 내가 당신을 꼭 붙잡게 되면. 당신을 이렇게...... (그는 자기 시곗줄에 손을 대면서) 비끄러매겠소. 이 사랑스런 조그만 당신! 당신을 잃지 않도록 내 가슴에 항상 지니고 다니리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마차에서 부축해 내렸다. 나는 그대로 2층으로 달아났다.
저녁때, 언제나처럼 그는 나를 불렀다. 내 맘속엔 이미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마주 앉아 이야기하지는 않을 결심이었다. 나는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기억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대개 그런 것처럼 그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황혼과 함께 로맨스가 푸른 별들에 실려 유리창 너머로 빛나기 시작하자, 나는 피아노의 뚜껑을 열고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 달라고 청했다. 그는 나를 "변덕쟁이 마녀"라고 말하면서 노래는 다른 날에 하자고 했지만, 나는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라고 우겼다.
"내 목소리를 좋아하오?" 그는 물었다.
"더할 수 없이......" 그의 허영심을 부채질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오늘 밤만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제인, 그럼 당신이 반주를 해요."
"좋아요." 하고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지만, "이 엉터리 아가씨야!" 하는 혹평을 받고 의자에서 쫓겨났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바였지만' 그는 자기 손으로 반주를 시작했다.
나는 창가로 갔다. 그곳에 앉아서 희미한 나무숲과 잔디밭을 바라보는 동안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상쾌한 리듬을 따라 밤공기 속에 메아리쳐 나갔다.
가슴속 깊이 타오른다
가식 없는 사랑의 파란 불꽃은
이 몸의 곳곳을 굽이치면서
생명의 조수처럼 흘러내린다.
그대 만나는 날의 이 환희는
이별하는 그날의 비애라고
깨우치며 기다리는 이 애달픔
아아, 때로는 피도 얼어붙노라
사랑하는 그대의 아낌을 받음은
둘도 없는 행복이라 알고 있기에
오로지 사랑만을 좇고자 하는
앞 못 보는 한결같은 내 마음이여
그러나 우리들의 하늘 멀리로
가는 길 하나 없이 끊어져 버려
목숨도 위태로이 바다 가운데
갈 곳은 막막하고 파도는 드높아라
숲속과 들판을 헤매는 사이에
무서운 공포만 가득한 이 적막의 밤
이 세상의 약속과 지켜야 할 일
미움과 분노도 함께 얽히네
험준한 사랑의 언덕을 올라서
위험한 사랑의 늪지를 지나서
저주하고, 미워하고, 질시도 하나
나는 두렵지 않아 오직 가리라
내 가는 하늘은 무지개 다리
섬광처럼 그곳을 뛰어넘으면
보라, 하늘 높이 나의 꿈
그토록 찬연한 나의 꿈을
수심 어린 구름의 멀리로부터
그대 미소짓는 아름다움이여
두려워 않으리, 이제 재앙도
이 세상 고뇌의 그 어떤 환영도
그대는 포근하고 엄숙하게
재게 주었노라 작고 하얀 손
맹세하였노라 하나가 되는
성스러운 인연으로 묶이어져서
이 목숨 다하도록, 아니 죽음에서도
맹세는 드높아라 입술 맞대고
사랑하는 그대의 입김을 받는
이 영혼, 그지없이 행복하여라
그는 일어나서 내게 가까이 왔다. 그의 눈은 독수리처럼 빛났고, 붉은 얼굴 가득히 부드러움과 정열이 넘쳐흘렀다. 나는 겁이 났다. 그러나 곧 기운이 솟았다. 정에 이끌린 장면이나 심한 애정의 표현은 삼가야 한다. 나는 그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곧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래서 그가 다가왔을 때 쌀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와 결혼하려는 거예요?"
"나의 제인에게서의 그런 질문은 좀 우스운데......"
"아니, 저로선 당연한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당신의 미래의 아내는 함께 죽어야 한다면서요? 그런 이교도적인 사상은 어찌된 일이에요? 전 당신과 함께 죽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건 분명해요."
"아아, 내가 가슴 깊이 원하고 바라는 건 당신과 함께 사는 것뿐이야. 당신에게 죽음이 있어서야 될 말인가."
"아녜요, 저 역시 때가 오면 죽어야 할 권리가 있어요. 다만 그때를 기다릴 뿐이지, 인도의 아내처럼 따라 죽는 것은 할 수 없어요."
"그래. 내가 멋대로 가사를 바꾸어 노래한 것을 용서하시오. 그리고 용서의 표시로 화해의 키스를 해줄 순 없겠소?"
"물론 해드리고 말고요." 그는 나를 '이 고집통' 이라고 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다른 여자라면 자기를 칭송하는 노래엔 뼈까지도 녹아 버릴 텐데."
"네, 그래요. 전 고집통이에요. 부싯돌처럼 고집스러워서 이제부턴 그런 저를 자주 보실 거예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고는 한 달이 다 되기 전에,
"제 성격의 거친 면을 보시면 당신의 약속이 얼마나 엄청난 실수였는지를 아실 거예요. 취소할 시간 여유가 충분할 적에 다시 한번 고려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라고도 권해 보았다.
"이봐요, 좀 이치에 닿는 말을 하구려."
"원하신다면 더욱 침착해지겠어요. 하지만 이치에 닿는 말이라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 마침내 그는 화가 치밀어 방구석에 처박혀 버렸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처럼 존경하는 태도로,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옆문으로 해서 방을 나왔다.
나의 생각은 완전히 적중해서 그런 식의 그와의 대면이 약혼 기간 동안 쭉 계속되었다. 때문에 그는 기분이 언짢아 심통스런 얼굴을 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것을 재미있어 하였다. 그의 말을 거역하거나 애먹이는 일은 반드시 그와 둘이 있을 때에만 했다. 어김없이 그는 저녁 일곱 시면 나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는 '귀여운 사람' 이니 '사랑하는 그대'니 라고 나를 부르지 않았다. 대신에 '건방진 인형' 이나 '심술 맞은 요정', '무정한 사람' 이나 '못난이' 따위가 내게 붙여졌다. 또한 애무 대신에 얼굴을 찌푸렸고, 손을 잡는 대신에 팔을, 뺨에 키스하는 대신에 귀를 잡아당겼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지금의 내게는 이런 난폭한 사랑의 표현도 부드러운 애무보다 더 나를 즐겁게 했다. 그리고 페어펙스 부인도 마침내는 나를 인정해 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에 대해 품고 있었던 불안을 버렸다. 나는 현명하게 해낸 것이다.
25
어느덧 약혼 기간도 끝나 그 마지막 시간마저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눈앞에 다가온 결혼 날짜는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준비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었다. 적어도 내게 남아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나의 짐들을 몇 개의 트렁크에 정리한 다음 밧줄로 묶어서 내 방의 바람벽에 일렬로 놓아두었다. 내일 이맘 때면 이 트렁크는 멀리 런던으로 수송되어 가는 중이리라. 나도, 아니 미지의 제인 로체스타도 신의 양도 아래 런던으로 수송되어 가는 중이리라.
화장대 건너편의 옷장에는, 나의 검은 나사의 양복과 밀짚 모자 대신 로체스타 부인의 옷들이 들어 있다. 한 벌의 결혼 의상 - 지금 시간은 9시다 - 그 의상은 내 방의 어둠 속에 흡사 유령처럼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꽉 차 있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또 보지도 못했다. 일어난 것은 어젯밤이었다. 로체스타 씨는 집에 없었고 오늘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약간의 볼일로 3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그의 소유지를 돌아보러 간 것이다.
나는 그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어서 마음의 짐을 벗고 싶었고,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 수수께끼의 해결을 구하고 싶었다.
방의 조그만 시계와 홀의 시계가 동시에 열 시를 알렸다. "왜 이렇게 늦을까, 달빛이 있으니 대문까지 나가 봐야지. 그분도 오실 때가 됐고, 마중을 나가면 마음이 좀 차분해질 거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바람이 울창하게 대문을 뒤덮은 거목들의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양쪽으로 난 길의 끄트머리는 고요했다. 좌우의 길을 살피고 있는 사이, 아이처럼 기다리다 지쳐 실망한 나머지 눈물이 뺨을 적셨다. 밤은 더욱 깊어져 매서운 바람과 함께 비가 뿌렸다.
"빨리 오시면 좋을 텐데. 제발 빨리 와 주셨으면......" 나는 병적이랄만큼 심사가 어수선해져서 이렇게 외쳤다. 간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것이 불길한 전조야. 요즘은 너무도 행복했으니까 나의 행복은 그 정점을 지나 이젠 내리막에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 혼자 집에 갈 수는 없어.' 하고 생각했다. 이처럼 나쁜 날씨에 그는 혼자 밖에 있는 것이다. 화로 곁에서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기보다는 몸이 좀 피로해도 멀리까지 가서 그를 맞는 편이 낫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4분의 1마일도 채 가기 전에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한 명의 기수가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왔다. 한 마리의 개가 그 옆을 따랐다. 불길한 전조여, 물러나라...... 그는 로체스타 씨였다. 레스루아를 타고 파일로트와 더불어 그는 왔다. 그는 엷은 달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는 모자를 벗어 머리 위로 흔들었다. 나는 달려가서 그를 맞았다.
"자아!" 그는 안장에서 몸을 굽혀 손을 내밀었다. "혼자서는 곤란하지요. 내 발 위에 올라서서 두 손을 잡아요, 제인, 어서 올라오라니까!"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를 만난 기쁨으로 해서 나는 날쌔게 올라탔다. 마음으로부터의 키스를 받고, 자랑스러운 승리감을 맛보았으나 나는 그것을 억눌렀다. 그는 기쁨을 감추고 내게
물었다.
"그런데 제인,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마중을 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이런, 흠뻑 젖었군. 자, 내 외투를 써요. 아니 열도 있는 것 같군. 뺨과 손이 불처럼 뜨거워요. 정말 무슨 일이 있었소?"
"아뇨, 이젠 두렵지도 불행하지도 않아요."
"그럼 두렵고 불행했었나요?"
"네, 하지만 천천히 얘기하겠어요. 필경 당신은 제가 두려워한 일을 웃으실 거예요."
"내일이 지나면 웃을 거야. 하지만 당신이 아직 내 수중에 꽉 잡히질 않았으니 지금은 그럴 수도 없잖아. 지난 한 달 동안 당신은 미꾸라지처럼 미끄러웠고, 찔레꽃처럼 가시투성이였어. 가는 손만 내밀면 찔리는 거야. 이제 겨우 방황하는 염소 새끼를 품안에 안았나? 당신은 염소울에서 나와 양치기를 찾아 헤매었던 거요?"
"당신을 기다렸지만, 하지만 뽐내면 싫어요. 어머, 벌써 손필드야. 이젠 내려 주세요."
그는 내 뒤를 따라 홀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서재에서 기다릴 테니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와 달라고 말했다. 그는 다시 층계를 오르는 나를 불러, 지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로부터 5분 후, 나는 밤참을 들고 있는 그와 함께 앉아 있었다.
"거기 앉아요, 제인."
나는 그의 곁에 앉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왜? 여행 생각 때문에? 런던에 갈 일을 생각하니 식욕이 없나?"
"오늘 밤은, 바로 전의 일까지도 확실치 못해요. 내가 뭘 생각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인생 자체가 현실 같지가 않은 걸요."
"나 아닌 다른 것이 그렇단 거지? 나는 확실해. 자, 만져 봐요."
"아녜요. 당신이야말로 제일 확실치 않아요. 환상에 불과할 뿐이에요." 그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이것이 환상이라는 거야?"
"네, 만져 봐도 역시!"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 손을 내게서 밀어냈다.
"식사는 끝나셨나요?"
"응."
나는 벨을 눌러 상을 치우게 했다. 우리는 다시금 둘이 되었다. 나는 주인의 무릎 앞 낮은 의자에 앉았다.
"벌써 열두 시가 다 됐군요." 나는 말했다.
"응, 하지만 잊으면 안 돼요, 제인. 당신은 결혼식 전날 밤엔 나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했소."
"네, 약속은 지켜요. 적어도 한두 시간은 말예요. 아직 졸립지도 않는 걸요."
"내일은 교회에서 돌아와 곧 손필드를 떠나야 합니다."
"네, 좋아요."
"그 좋아요란 말과 함께 당신은 야릇한 미소를 보이는군. 두 볼은 상기되어 있고 눈의 빛깔도 이상해. 어디 아픈 곳은 없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아니, 그건 무슨 뜻이오? 어떤 기분인지를 말해 봐요."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어떤 말라도 이 기분은 모르실 거예요. 지금 이 시간이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았으면 해요. 다음엔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 모르잖아요."
"새로운 일들에 대해 불안한 거요?"
"아뇨."
"당신의 태도는 참으로 애매하군, 제인. 당신의 슬픈 듯한, 그러면서도 배짱스런 표정과 목소리가 말야. 왜 그러는지 설명해 줘요."
"그렇다면 들어 주세요."
열두 시를 쳤다. 작은 시계가 여린 멜로디를 마치고, 큰 시계의 목쉰 듯한 떨리는 소리가 끝났을 때 나는 말하기 시작했다.
"어제는 몹시 바빴어요. 그 쉴 새 없이 바쁜 중에 저는 매우 행복했구요. 당신의 말씀처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공포 따위는 하나도 없었어요. 저는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과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움직이지 마세요, 절 침착하게 얘기하게 해주세요. 만사는 우리를 위해 좋게만 되어 간다고 생각했어요. 바람도 없는 좋은 날씨였고,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세상을 쓸쓸한 황야라고 말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어요. 해 질 무렵 전 집으로 들어갔지요. 소피가 2층에 와서 결혼 의상이 도착되었다고 알려 주었어요. 그 옷 밑에, 당신이 보내신 선물 상자가 있었어요. 왕자나 귀족이 쓰는 듯한 런던에서 주문해 온 그 사치스런 베일 말예요. 아마 보석은 싫다니까 보석 대신 값비싼 물건을 슬쩍 바꿔 놓으신 거겠죠. 저는 제가 준비한, 수가 없는 사각 비단 레이스를 선보일 생각이었는데...... 재산도 용모도 집도 없이 시집가는 여자에겐 그걸로 족하다고 여쭐 마음이었어요. 그때의 당신 얼굴까지 저는 그려보았답니다. 성급한 평민적인 대답, 재산이나 신분 같은 것과 결혼하여 재산을 늘린다든가 높은 자리를 구하는 따위의 필요가 내겐 조금도 없다고 거만하게 거절하는 말소리가 꼭 들리는 것만 같았답니다."
"잘도 내 마음을 아는군, 이 마녀 같으니!" 로체스타 씨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 베일 속에서 뭘 발견하기라도 한 거요? 독약이나 칼이라도 본 것처럼 몹시 슬픈 얼굴이군그래."
"아녜요, 그건 너무도 좋은 옷감이었고 전 페어펙스 로체스타 씨의 자부만을 보았어요. 그런데 해가 지자 바람이 부는 거예요. 지금처럼 야단스런 이런 바람이 아니고, 놀라거나 신음하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의 바람이었어요. 나는 자리에 누웠지만 잘 수가 없었어요. 어쩐지 불안하고 괴로운 느낌이었어요. 잠깐 눈을 붙이면, 꿈속에서조차 어둡고 음울한 바람이 계속되는 거였어요. 당신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나중엔 어딘지 알 수 없는 꼬부랑 길을 가고 있었어요. 아주 깜깜한 데다가 비가 오는데, 제가 웬 갓난아기를 업고 가는 거였어요. 아이는 내 젖은 팔 속에서 울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그 길 훨씬 앞쪽에서 걷고 있다고 생각해서, 난 기다려 달라고 정신없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부탁했답니다. 당신은 멀리멀리 자꾸만 가 버렸어요."
"그래서 그 꿈 때문에 당신이 언짢은 건가? 내가 이렇게 곁에 있는데도? 이 신경질적인 철부지야!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 "당신을 사랑하므로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은 참 멋질 거라고 생각했어요."라고, 자, 날 사랑해? 제인, 다시 말해 봐요."
"사랑하고 있어요. 이 가슴 하나 가득히 사랑하고 있어요."
잠시 침묵한 후에 그가 말했다.
"왜 그럴까? 이상하게 그 말이 내 가슴을 아프게 찌르니. 제인, 심술스런 얼굴을 해 봐요. 어떻게 되면 되는지 당신이 잘 아는 얼굴로 제인, 내가 싫다고 해 봐요. 날 놀려 주고 화나게 해 봐. 다 좋지만 날 감동시키는 일만은 하지 말아. 난 슬픈 것보다는 오히려 화나게 하는 편이 좋아."
"이 이야기만 끝나면 원하는 대로 할께요. 우선은 끝까지 들어 주세요."
"뭐야, 난 그게 끝인 줄 알았잖아. 그 꿈 때문에 당신이 우울한 줄 알았지."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또 뭐요?"
"또 다른 꿈을 꾸었어요. 손필드가 형편없는 폐허가 되어 박쥐나 부엉이의 소굴이 된 꿈을요. 저 쓸모없는 바람벽만 높다랗게 남아 그것도 금방 허물어질 것 같았어요. 달밤에 저는 풀이 무성한 대지를 헤맸어요. 숄을 쓰고 또 작은 아이를 안고 있었어요. 먼 곳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서 분명히 당신일 거라고 생각했지요. 당신은 벌써 수년간 외국에 가 계셨던 거예요. 전 벽을 타고 올라가 당신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발밑에서 돌이 허물어져 붙잡고 있던 담쟁이 덩굴이 느슨해졌어요. 그래도 전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지요. 하얀 길 위에 하나의 점처럼 당신이 보였고, 그것은 점점 작아졌어요. 당신은 길을 꺾어 들었어요.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보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는데 그만 벽이 무너져 전 중심을 잃고 떨어졌어요. 그러곤 깨어났지요."
"제인, 그것으로 끝이야?"
"여태까진 서론에 불과해요. 이야긴 지금부터니까요. 눈을 떴어요. 눈앞이 밝았으므로 난 벌써 날이 밝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게 아녜요, 그건 촛불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난 '소피가 들어 왔군' 하고 생각했지요. 화장대에 불이 높여 있고, 잠들기 전 웨딩드레스와 베일을 넣어 두었던 반침의 문이 열려 있었어요. 그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저는 '소피, 뭘 하지?' 하고 물었습니다. 대답이 없었어요. 대신 사람의 그림자가 반침 속에서 나와서는 촛불을 높이 쳐들고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을 보고 있는 거예요. '소피!' 하고 또 불렀지만 그림자는 그대로 잠자코 있었어요. 전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몸을 앞으로 굽혔어요. 처음엔 놀라고 당황했으나, 곧 그대로 피가 몸 속에서 얼어붙는 듯했어요. 로체스타 씨, 소피가 아니었어요. 리어도 아니고 페어펙스 부인도 아니고, 또 그래요. 확실히 그레이스 풀도 아니었어요."
"그 중의 누구일 거야." 주인이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고 절대로 전 보장해요. 그 인간은 손필드 저택의 울 안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그 키하며 얼굴 윤곽도."
"그것을 말해 봐요, 제인."
"키가 상당히 컸고 몸집도 그랬어요. 숱 많은 검은 머리가 어깨 위까지 내려왔고 옷차림은 잘 몰라요. 아무튼 흰 옷이었는데 그것이 가운인지 이불 홑청인지 수의인지는 알 수 없는 긴 옷이었어요."
"그 여자 얼굴은 보았어요?"
"처음엔 못 봤어요. 그녀는 제 베일을 벗겨 들고 그것을 높이 쳐들었어요.한참을 보고 있더니 이번엔 그걸 자기 머리에 뒤집어쓰고는 거울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 순간에 어두운 거울 안에 아주 뚜렷하게 여자의 얼굴이 비쳤어요."
"어떤 얼굴이었어요?"
"무서운, 몸서리쳐지는! 전 아직 그런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야만스러웠어요. 핏발이 선 초점 없는 눈동자, 꺼멓게 부은 듯한 얼굴의 윤곽을 난 잊을 수 없어요!"
"귀신은 낯색이 퍼렇지, 제인."
"그 귀신은 보라색이었어요. 입술은 부어올라 거무스레했구요. 이마엔 주름이 지고 핏발선 눈 위로 꺼먼 눈썹이 치켜떠져 있었어요. 그것이 제게 무엇을 연상하게 했는지 아세요?"
"말해 봐요."
"추악한 도이치의 요물 흡혈귀에요!"
"오오, 그래 그놈은 뭘 한 거요?"
"그는 자기 머리에서 베일을 벗더니 그것을 둘로 찢어 버렸어요. 그리곤 마구 발로 짓밟았어요."
"그리고......?"
"그러고는 창의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어요. 아마 날이 새는 것을 안 모양이에요. 그는 촛불을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가다 저의 침대 옆에 발을 멈추고는 불 같은 눈으로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촛불을 제 얼굴 가까이 대고서는 제 눈 아래에서 꺼 버렸어요. 그 여자의 무서운 얼굴이 바로 위에서 불탄다고 느꼈을 땐 전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이 세상에서 꼭 두 번째이지요. 공포로 해서 제가 정신을 잃은 건."
"정신을 차렸을 때 누가 곁에 있던가요?"
"아무도 없었어요. 날은 완전히 밝았지요. 머리와 얼굴을 씻고 물을 좀 마셨더니 기분이 나아졌지만 기운은 없었어요. 전 당신 외에는 이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로체스타 씨, 그 여자는 누구예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너무 강한 자극을 받은 당신의 뇌가 만들어 낸 거야. 당신은 각별히 다뤄져야 하겠군. 나는 더욱 당신을 잘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되겠어."
"아닙니다. 제 신경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에요. 그것은 현실이었어요."
"그렇다면 그 전에 꾼 꿈도 현실인가요? 손필드 저택이 폐허란 말이오? 봐요, 우리들이 떨어질 수 없도록 벌써 오늘이 시작되고 있어요. 일단 맺어진 후엔 그런 심리적인 괴사는 다시는 없을 거요, 제인."
"심리적인 괴사라고요? 그렇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렇다고 믿고 싶어요, 지금이야말로 - 왜냐하면 당신조차 그 무서운 사건에 대한 설명을 제게 해주실 수 없기 때문이에요."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이상 제인, 그것은 분명 현실이 아닌 거요."
"저도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런 희망을 갖고 방안을 살펴보았어요. 하지만 제 희망을 배반하고, 양탄자 위엔 아래에서 위까지 찢기운 베일이 떨어져 있었는 걸요."
내가 빠르게 숨을 몰아 쉬자, 그는 숨이 막힐 정도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 잠시 후 그는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럼 제인, 내 속 시원히 설명하리다. 그것은 현실과 꿈이 반반씩 얽힌 거야. 어떤 여자 - 당신 방에 들어온 그 여자는 분명 그레이스 풀이었어. 그 여자가 내게 한 것, 그리고 메이슨에게 한 걸 생각해 봐요. 비몽사몽 간에 당신은 그 여자가 들어온 걸 보았고, 하는 짓을 보았어. 하지만 당신은 꿈에 들떠 정신이 몽롱했기 때문에 그 여자를 전혀 다른 악귀의 모습으로 본 거야. 길게 흐트러진 머리, 부어오른 거무죽죽한 얼굴, 유난히 큰 키 - 그런 것은 몽매간에 상상이 만들어 낸 것이었소. 베일을 찢은 괘씸한 행위는 물론 현실이지. 그것은 그레이스 풀의 짓이야. 왜 내가 그녀를 집에 두는지 당신은 묻고 싶겠지만 결혼 후에 내 꼭 설명해 주리다. 지금은 안 돼요. 자, 이제 납득이 가오? 내 수수께끼에 대한 해석을 믿을 수 있겠소?"
나는 생각했다. 사실, 이것은 유일의 가능한 해석이었다. 만족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마음이 좀 가라앉자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그를 쳐다봤다. 벌써 한 시가 지나 있어서 나는 그 곁을 떠나려 했다.
"소피는 어린이 방에서 아델과 함께 자는 거요?"
"네."
"그럼 당신도 아델의 침대에서 함께 자도록 해요. 당신이 이야기한 사건이 당신을 신경과민으로 만든 것은 이상할 게 없어. 난 당신을 혼자 재우고 싶지 않으니까. 자아, 그애 방으로 간다고 약속을 해요."
"네, 약속 하겠어요."
"그리고 문을 꼭 잠그도록 해요. 2층에 가거든 내일 아침에 일찍 깨워 달라고 소피에게 말해요. 여덟 시 전에 당신은 옷을 입고 식사를 해야 해요. 이젠 침울한 생각은 버리고 근심도 멀리 쫓아 버려요, 제인. 바람 소리가 이제 자고 있군, 유리창을 두들기던 빗소리도 없지 않나. 와 봐요."
아름다운 밤이었다. 하늘의 밤쯤은 맑게 개어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런데......" 하고 그는 나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제인, 기분이 어때?"
"아름답고 고요한 밤이에요. 제 기분도 퍽 좋아졌어요."
"오늘 밤은 이별이나 슬픈 꿈은 꾸지 말아요. 행복한 사랑과 축복된 결혼의 꿈만을 꾸어요."
이 말은 반쯤 들어맞았다. 확실히 난 슬픈 꿈을 꾸지 않았다. 그리고 기쁜 꿈도 꾸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전혀 잘 수 없었기 때문이다.
26
일곱 시에 소피가 옷 입는 것을 거들어 주러 왔다. 그 일은 꽤 시간이 걸렸다. "제인!" 하고 그가 불렀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갔다. 그는 계단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오래 걸려요, 기다리기 답답하니까 열이 오르잖아, 서둘러요."
그는 나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발끝서부터 머리끝까지 자세히 살펴보고는, "백합처럼 아름답다. 내 삶의 자랑, 내 눈의 기쁨!" 하고 칭찬하며 식사 시간은 10분이라고 했다. 그가 벨을 누르자 요즘 새로 고용한 하인 한 사람이 들어왔다.
"존은 마차 준비를 하고 있나?"
"네, 하고 있습니다."
"짐은 모두 아래로 내려갔는가?"
"지금, 나르는 중입니다."
"자네는 교회로 가서 목사님과 서기가 대기하고 있는지 어쩐지를 좀 봐 주고 오게."
교회는 손필드 저택의 바로 대문 앞에 있었으므로 하인은 곧 돌아왔다.
"우드 목사님은 제구실에서 하얀 법의로 갈아입고 계셨습니다."
"마차는?"
"지금 말을 매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돌아오면 곧 떠날 수 있게 준비해 놔야 하네."
"네, 잘 알았습니다."
"제인, 이젠 떠나도 되지?"
나는 일어섰다. 신랑 신부에게 들러리도, 참가할 친척도 없었다. 오직 우리 둘 뿐이었다. 홀을 지날 때 페어펙스 부인이 거기 서 있었다. 나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의 손은 그의 억센 손에 잡혀 있었고, 그는 도저히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서둘러 걸었다. 함께 걸어가는 동안 나는 그가 무서운 눈길로 쏘아보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가 부딪치고 싸우고 있는 무서운 힘을 가진 사상이 과연 무엇인지, 나도 체험해 보고 싶었다. 교회의 쪽문께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내가 숨이 차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까닭에 심한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잠깐 내게 기대어 쉬어요, 제인."
지금도 나는 그때의 일을 기억한다. 눈앞에 우뚝 서 있는 회색빛 교회의 탑 주위를 날고 있는 한 마리의 땅까마귀를. 그리고 멀리 보이는 하늘이 한 폭의 그림처럼 붉게 타던 일, 그리고 푸른 풀로 뒤덮인 몇 개의 무덤이 있던 것도 기억한다. 그와 함께 걸어갈 때 나지막한 무덤의 이끼 덮인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을 읽고 있던 낯선 두 사나이를 나는 기억한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황급히 교회 뒤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이 두 사람이, 옆에 있는 복도의 문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결혼식에 참례할 모양이라는 것을 알았다. 로체스타 씨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내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 순간에 내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을 것이다. - 이마에 식은땀이 배고, 또 뺨과 입술이 식어 버린 걸 내 자신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곧 기운을 되찾았고, 그는 부드럽게 나를 도와서 교회의 현관 앞으로 안내해 갔다. 우리는 조용하고 소박한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옷을 입은 목사가 낮은 제단에 서 있었으며 옆에는 서기가 있었다. 구석 쪽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만이 움직이고 있을 뿐 실내는 매우 조용했다. 내 추측이 들어맞은 것이다. 낯선 사내들은 우리보다 먼저 몰래 들어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제단의 난간 옆에 섰다. 조용히 발소리가 울렸으므로 내가 그의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을 때 낯선 두 사람 중의 하나가 제안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식이 시작되었다. 결혼 의사 표시가 끝나자 목사는 한 걸음 앞에 나서서 로체스타 씨에게로 다소 몸을 기울이고 말을 이었다.
"나 그대들 양인에게 요구하고 명하니, 만일 그대들 누구든지 이 결혼이 합법적인 결합이 되지 않는 어떤 장애물이 있음을 알진대 이를 감추지 말고, 만인의 가슴속 비밀이 벗겨지는 무서운 심판날에 대답하듯이 지금 여기서 고백할지어다. 하느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짝을 맺은 인연은 하느님의 섭리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그 결합은 불법임을 알지어다."
관례대로 여기서 그는 말을 끊었다. 이 선고 이후의 침묵이 대답으로써 깨어지는 일은 아마 백 년에 한 번도 없으리라. 그러므로 기도서에서 눈길을 들지도 않고 다만 잠시 숨을 바꿔 쉬었을 뿐인 목사는 다음 순서인, '그대는 이 여인을 아내로 삼겠는가?'를 묻기 위해 이미 손은 로체스타 씨를 향하고 입술을 벌려졌다. 이때였다. 잠시의 틈을 비집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결혼은 중지해야 합니다. 장애가 있음을 제가 단언합니다."
목사는 얼굴을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고 놀라 입을 벌렸다. 서기도, 마찬가지였다. 발밑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로체스타 씨가 약간 몸을 기우뚱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단단히 버티고 서더니 "식을 계속 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의 굵고도 낮은 목소리에 장내는 깊이 침묵했다. 이윽고 우드 목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발언에 대한 조사가 행해져 진위가 밝혀지기까지는 이 식은 중단돼야 합니다."
"결혼식은 전혀 무효입니다." 뒤의 목소리가 덧붙였다. "저는 이 진술을 입증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 결혼은 성립될 수 없는 장애가 있습니다." 우드 목사는 난처한 듯 물었다.
"그 장애란 무엇입니까? 아마도 제거할 수 있는 거겠지요?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오?"
"아니오. 성립되지 못한다고 저는 말했습니다. 더구나 깊이 생각한 끝에 한 말입니다." 그는 앞으로 걸어 나와 난간에 기대어 섰다.
"장애란 이전에 행한 결혼이 지금도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로체스타 씨에게는 생존한 아내가 있습니다."
나의 신경은 이 낮은 목소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 어떠한 천둥 소리에도 떨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전율했다. 나의 피는 어떠한 서리나 불에도 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곤두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나의 정신은 말짱했다. 졸도할 염려는 없었다. 나는 로체스타 씨를 보았다. 그리고 그도 내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빛을 잃어 마치 바윗돌과도 같았다. 눈은 불꽃이며 부싯돌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고 무시하려고 하는 듯했다. 말도 않고, 미소도 없이, 나를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는 듯이 다만 팔로 내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물었다.
"나의 이름은 브리그스로 런던에 살고 있는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내게 처를 하나 떠맡기러 온 것이오?"
"저는 당신의 부인이 생존하고 있다는 걸 확인시키려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법은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럼 내 처에 대한 설명을 해 보시오. 그녀의 이름과 부모와 주소에 대해서!"
"좋습니다." 브리그스 씨는 침착하게 주머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읽어 내려갔다.
"본인은 아래 사실을 입증합니다. 즉, 지금부터 15년 전 영국 XX주 XX현 손필드 홀 및 휘인디인 마노어의 에드워드 페어펙스 로체스타는 상인 조나스 메이슨과 앙토와네트의 딸인 본인의 누이동생 바사 앙토와네트 메이슨과 자메이카국 스패니쉬 타운 XX교회에서 결혼하였음. 동 교회의 등록원본에 결혼 기록이 있으며, 그 사본을 본인은 소유함. 서명자, 리처드 메이슨."
"그것이 만일 거짓이 아니라면 내가 기혼자라는 것을 증명하겠지만, 그러나 여자가 살아 있다는 것을 뭘로 입증하시오?"
"그 부인은 석 달 전까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할 증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증언은 당신도 항변할 수 없을 겁니다."
"그 사람을 불러요. 불러 올 수 없거든, 썩 꺼져 버리란 말이야!"
"그렇다면 좋아요. 자, 메이슨 씨, 이쪽으로 나와 주시오."
로체스타 씨는 그 이름을 듣자 이를 악물었다. 뒤쪽으로 피해 있던 제2의 낯선 사나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렇다, 바로 메이슨이었다. 로체스타 씨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때껏 까만빛이던 그의 눈동자가 황갈색으로 변해 흰자위는 빨갛게 충혈되었고 얼굴도 빨갛게 변했다. 그는 억새 보이는 팔을 쳐들었다.
"오오, 살려 줘!" 메이슨이 겁먹은 가냘픈 목소리로 외쳤다.
다시금 경멸이 로체스타 씨를 냉정하게 만들어 격정은 사라졌다.
"자넨 뭘 말하려는 건가?" 하고 그는 물었을 뿐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이 메이슨이 창백한 입술에서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대답을 분명히 못하는 걸 보니 악마에게 홀리기라도 했나?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제발! 제발 로체스타 씨, 신성한 장소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고는 메이슨을 향해 목사는 물었다. "이분의 부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입니까?"
"자, 용기를 내서 말해요." 하고 변호사가 격려했다.
"부인은 지금 손필드 저택에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나의 누이동생으로 지난 3월에 만나 보았어요." 메이슨은 다소 불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필드 저택에!" 목사가 소리쳤다. "그럴 리가 있나! 난 이곳에 오래 살고 있었지만 손필드 저택에 로체스타 부인이 살고 있다는 소린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로체스타 씨의 입술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렇고말고. 난 아무도 모르게 주의를 해왔다. 적어도 그것이 그런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그러고는 골몰히 생각에 잠겨서 약 10분 동안을 스스로의 가슴에 묻고 대답한 뒤, 마침내 결정한 것을 입 밖에 내는 듯했다.
"좋아, 총알을 내쏘듯 모든 걸 다 얘기하겠소. 우드, 책을 덮고 그 법의도 벗으시오. 그리고 존 그린 (서기), 오늘 이 결혼식은 중지요, 돌아가 줘요." 서기는 그 말을 따랐다.
로체스타 씨는 대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중 결혼이란 확실히 치욕스런 말이야. 그러나 난 중혼자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운명이 막고 있소. 아니 신의 섭리가 날 방해하여, 여러분은 지금의 나를 마치 악마와도 같으리라고 생각할 것이오. 여기 계신 목사님은 신의 가장 엄숙한 심판, 즉 그 영겁의 불이며 죽지 않는 구더기의 고통을 받아 마땅한 자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오. 여러분!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 변호사의 의뢰인의 발언은 사실입니다. 나는 기혼자이고 내가 결혼한 여자도 생존합니다. 우드 목사, 당신도 저 집에는 미치광이가 있어, 감시와 보호를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거요. 지금에야 말하지만, 그것이야말로 15년 전에 결혼한 나의 처라오. 이름은 바사 메이슨, 지금 여기서 몸을 떨며 새파란 얼굴로 씩씩한 남자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여러분에게 극명하게 보여 준 이분의 누이동생이오. 딕! 정신차려. 날 겁낼 건 없어. 자네를 때릴 바엔 차라리 그녀를 때리는 게 낫지. 바사 메이슨은 광인의 집, 3대에 걸쳐서 백치며 미치광이가 난 집에서 태어났소. 서인도 섬 태생인 그녀의 모친이 광인인데다 술주정뱅이였고, 바사는 마치 효도라도 하는 양 이 두 가지 점까지도 어머니를 꼭 닮았지. 나는 실로 매력 있는 신부를 - 순결, 총명, 겸양의 미덕을 지닌 반려를 가졌던 셈이오.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아아, 마치 천국과도 같은, 여러분은 평생 동안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경험을 나는 했소. 이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지요. 브리그스, 우드, 메이슨, 자 직접 집으로 초대를 할 테니까 우셔서 풀 부인의 환자, 즉 나의 처를 봐 주십시오. 내가 속아서 결혼을 한 인간이 어떤 종류의 생물인지 보고, 내가 계약을 깨뜨리고 적어도 인간다운 동정을 구할 권리가 있었는지 어떤 한지를 가늠해 보시오. 그리고 이 아가씨는......"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드, 당신처럼 이 추악한 비밀은 전혀 몰랐다오. 모든 것이 공정하고 합법적인 것으로만 믿었소. 거짓 결혼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요. 자, 오세요. 내가 안내를 하리다." 그는 날 꼭 끌어당기며 교회를 나섰다. 세 사람의 신사가 뒤를 따랐다. 저택 문 앞에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를 다시 넣어요, 존." 로체스타 씨는 냉정하게 말했다.
"오늘은 필요 없어."
우리가 들어가자 페어펙스 부인, 소피, 아델과 리어 등이 축하를 하려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는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축하 따윈 필요 없어, 15년쯤 늦어진 거야!"
그는 아직도 나의 손을 붙잡고 신사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거침없이 3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여기는 자네도 알고 있지? 메이슨." 하고 그는 말했다.
"여기서 자네는 그것한테 물어뜯기고 칼을 맞지 않았나!"
문 하나가 나타나고 그는 그것을 열었다. 창이라곤 하나도 없는 방 속에, 높고 튼튼한 철망에 둘러싸여 난로가 불타고 있었고, 천장으로부터는 등잔이 쇠줄에 매어져 있었다. 불 위에 몸을 굽히고 무언가를 냄비에 끓이고 있는 그레이스 풀의 모습이 보였다. 방의 깊숙한 한 구석에는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는 하나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네발걸음으로 기어 다니는 모양으로, 무슨 희귀한 야수처럼 할퀴고 또 킁킁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옷을 입었으며, 꽤 숱이 많은 검고 말총처럼 흐트러진 머리로 얼굴이 가려져 있었다.
"안녕하시오? 풀 부인." 로체스타 씨가 말했다. "별일 없지요?
환자는 좀 어떤가요?"
"감사합니다. 그저 그런 정도예요." 그녀는 대답을 하며 끓고 있는 음식을 조심스레 난롯가의 선반 위에 놓았다. "다소 덤비긴 했지만 심한 편은 아니었어요."
그의 호의적인 보고를 뒤엎듯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옷을 입은 하이에나는 벌떡 일어섰다.
"오오, 주인님, 당신을 알아보았어요, 위험해요!" 그레이스는 소리쳤다.
"아주 잠깐 동안이야, 그레이스. 잠깐만 그대로 둬요."
"제발 조심해 주세요. 조심을!"
미친 사람은 울부짖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젖히고 그는 방문자를 난폭하게 노려보았다. 풀 부인이 앞을 막았다.
"비켜요." 부인을 밀어내며 로체스타 씨는 말했다. "지금 칼을 가지진 않았겠지? 나는 염려 없어요."
"무엇을 갖고 있는지 알 수도 없어요. 얼마나 교활한지, 어떤 음흉한 흉계를 가졌는지도 알 재간이 없구요."
"나가는 게 낫겠어." 하고 메이슨이 속삭였다.
"꺼져 버려?" 하고 로체스타 씨가 대답했다.
"위험해요!" 그레이스의 외침에 세 사람의 신사는 약속이나 한 듯 물러섰다. 로체스타 씨가 나를 뒤로 밀쳤다. 광인은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어 그의 목에 달라붙어 물어뜯으려고 했다. 두 사람은 다투었다. 여자는 남편만큼이나 키가 컸고, 살이 쪘다. 건강해 뵈는 로체스타 씨도 몇 번이나 목을 졸리울 뻔했다. 단번의 일격으로써 그는 그녀를 처치할 수도 있었으나 때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운신할 수 없도록 붙들려고 했다. 겨우 그는 여자의 두 팔을 잡아, 그레이스 풀이 내미는 끈으로 여자를 묶어 옆에 있는 의자에 비끄러매었다. 그 사이에도 여자는 처절한 고함 소리를 내지르며 죽을 힘으로 뛰어오르곤 하였다.
"저것이 나의 아냅니다." 로체스타 씨는 사람들 쪽으로 돌아오자 처량하고도 쓸쓸한 미소로 그들을 보았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우리 부부의 포옹이오. 그리고 이쪽 (내 어깨에 그의 손을 얹고), 이 젊디젊은 아가씨가...... 이토록 냉엄하게 지옥의 입구에 서서, 악마의 광란을 보고 있는 이 아가씨야말로 내가 원했던 사람이오. 저 붉은 곰 같은 눈과 이 맑은 눈동자를 비교해 보시오. 저 가면과 이 얼굴을...... 저 꼬락서니와 이 모습을, 다음에 복음의 설교와 법률가인 두 분이 나를 심판해 주시오."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나왔다. 로체스타 씨는 그레이스 풀에게 뒷처리를 지시하는 데 시간이 약간 걸렸다.
"아가씨." 계단을 내려오며 변호사는 내게 말했다. "모든 비난으로부터 몸을 지키게 되어 참 다행이오. 이 소식을 들으면 당신 아저씨도 퍽 기뻐하실 거요. 만일 마데이라로 메이슨 씨가 돌아가기까지 아저씨가 살아계시면 말이오."
"아저씨라니 무슨 말씀예요, 당신은 아저씨를 아세요?"
"메이슨 씨가 알지요. 에어 씨는 벌써 몇 년 동안이나 환샬의 메이슨 씨 가게와 거래를 트고 있었지요. 당신이 로체스타 씨와 결혼한다는 편지를 보냈을 때, 휴양차 마데이라에 체류하고 있던 메이슨 씨는 우연히 아저씨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지요. 에어 씨는 메이슨 씨와 로체스타 씨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 편지에 관한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메이슨 씨는 놀랍고 걱정스런 마음에 그간의 실정을 아저씨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좀 안된 말씀입니다만, 아저씨는 지금 병상에 계신데 회복되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에어 씨는 메이슨 씨에게 늦지 않도록 이 결혼을 중지시켜 달라고 부탁한 거지요. 아저씨는 나의 조력을 얻도록 메이슨 씨에게 권했습니다. 나는 신속한 조처를 취하도록 노력했고, 아무튼 때를 놓치지 않게 되어 퍽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가씨께서도 저와 생각이 같을 줄 압니다만, 만일 마데이라에 가도 아저씨가 살아계시다는 보장만 있으면 지금 메이슨 씨와 함께 그곳으로 가기를 권하겠습니다만, 그러나 하여튼 사정이 이러니 에어 씨에 대한 소식을 듣기까지는 영국에 계시는 것이 좋겠지요. 그런데 아직 여기 더 머물러야 할 용건이 남았나요?"
하고 그는 메이슨 씨에게 물어 보았다.
"아니, 없습니다. 이젠 돌아가야죠." 하고 상대방은 대답했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위해 로체스타 씨를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문으로 나가 버렸다. 목사는 아직 그의 거만한 교인에게 훈계나 질책의 말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므로 뒤에 남았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반쯤 열린 문에 서서, 목사가 돌아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모두가 돌아가자 나는 방에 틀어박혀 고리를 채우고 나서 우는 일도, 비탄에 잠기는 일도 없이 – 그러기에는 너무 침착한 마음으로 결혼 예복을 벗고, 다시는 입을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아사 가운을 꺼내 입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지치고 피로했다. 테이블에 두 팔을 얹고, 그 속에 얼굴을 묻고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언제나처럼, 별로 눈에 뜨이는 변화도 없이 보통 때처럼 그대로 내 방에 있었건만 어제의 제인 에어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의 생활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앞날은 어떻게 되는가? 제인 에어, 열렬한 기대로 가슴 부풀던 여자 - 막 신부가 되려던 여자 - 이제 그녀는 다시금 차갑고 고독한 여자로 돌아갔다. 생활은 더욱 비참하고 앞날은 황량해졌다. 희망은 모두 사라졌다 - 나는 나의 사랑을 바라보았다. 아아, 사랑은 이미 그로부터 뒤돌아서 있었다. 성실은 시들고 신뢰는 무너진 것이리라! 로체스타 씨는 이미 내게 있어 그 전의 그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배반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결백한 진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그의 곁을 떠나야만 한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하나!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일시적인 정열이었을 뿐 진실이 아니었던가. 아아, 눈이 먼, 나약한 행동 뿐인 제인 에어여!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어둠이 소용돌이쳐 갖가지 상념이 검은 탁류처럼 내게 밀려들었다. 스스로 절망하고 긴장이 풀리고 기진한 나머지, 나는 큰 강가의 모래펄에 누워 있는 느낌이었다. 먼 산에서 홍수가 일어나 내게 거센 물결이 닥쳐오는 듯했다. 일어설 의지도, 피할 기운도 없이 나는 오직 죽기를 원하며 넋을 잃고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