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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1942~ )

가을비

갈대밭에 숨긴 나의 노래

강(江)

개화(開花)

고모

기러기

길이 다한 곳에

나는 너에게 별 하나 주고 싶다

나에게 말했지

녹음사략(綠陰史略)

누이야

대본 읽기

돌멩이

막금도(莫今島) 사공

매미 소리

부러진 낫

분수의 눈물

새들도 봄이니까

소복

수유리의 침묵

스무 해 전의 바다

신기료 할아버지

어느 시인에게

우리 옆집 여자

우리 오늘 살았다 말하자

운주사 돌부처님께 말 걸기

인동일기(忍冬日記)

입춘화첩((立春畫帖) - 설송도(雪松圖)

작은 새

첫눈 오는 밤에

초승달 삽화(揷話)

통일로 코스모스

하늘에 깁다

해님도 봄이니까

 

 

 

가을비

김창완

열애도 열망도 다 쓸어 가는 소슬비

저마저 몽그라져 갈숲에 버려지면

내 꿈도 허수아비처럼 남루 젖어 떨겠다

 

 

 

갈대밭에 숨긴 나의 노래

김창완

 

누가 보는가

허리 부러진 갈대 옆 진구렁 옆

남루의 내 이웃 뉘어 놓고

곱게 늙어 가는 마른 갈대 들으라고

누가 듣는가 누가

들으면 마천령(摩天嶺) 풀잎들도 고꾸라지는

바람으로서 막힘 없이 우리

여기까지 와서 억센 누이의 손

누가 잡는가

악수마다 손금 끊어져 손가락 베어져

가뭄 강보다 밭은 피 마저 버리며

놀 속 새털구름 흐르는 하늘을 보아

저녁별로 살아나는 아픔이라면

또 밤길 떠나는 이의 길섶에 모여

손 흔들다 아아 아아 속 소리 지르다

너희 뿌리 더 깊이 뻗은 뿌리 누가

누가 흔드는가.

 

 

 

강(江)

김창완

 

강(江)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노하여 넘치면 사정없이 휩쓸고

주저앉아 마르면 가슴 바닥까지 내보이는

저자거리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말라도 강(江)은

다시 흐를 자리 남겨 놓고

아무리 노해 날뛰어도

뿌리 약한 나무 몇 그루

반나마 기울어진 오막 몇 채

그 밖엔 아무것도 어쩌지 못한다.

 

강(江)은 얼마나 많은 누명을 써 왔던가

허리 잘려 둑이 쌓이고

가슴 바닥 더 깊이 파헤쳐지고

누운 채 정형 수술받고 있는 강(江)은

저자거리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저자거리의 사람들처럼.

강(江)은 죽어서 흐르는 강(江)은

물고기 한 마리 기르지 못하고

철새도 찾아와 주지 않는 강(江)은

괴로움 아는 누군가의 익사체 보듬고

배신의 세월 따라 흐를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개화(開花)

김창완

 

저것은 누구의 바다입니까.

지금 한참 밀물인걸

가로막을 제방조차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냥 그대로 점령당하는

개펄이기도 하나

만조이면 하늘에 닿는

수평선일 수도 있습니다.

보릿골 위로 목선 타고 온 오늘이

평일의 해돋이에다 닻을 내립니다.

 

하역 작업하고 있는 인부들의 어깨 위에

고조선의 놀이 지워져 있습니다.

원시림 찍어 토기 굽던 불꽃이

노동자의 하루를 잘 익게 하고

소금기 많은 땀 흘리어 만든 이슬을

하얀 여객선은

내가 사는 섬으로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덕(善德) 씨가 주고 간

금팔찌와도 같고

그것을 보듬고 금환식 하고 있는

나는 갈대꽃 이우는 한가윗날

강강수월래와 같습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마당을

밟고 돌아가는 무수한 꽃신

무수한 발자국 가운데서

오다 줄리아

당신의 본명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하얗게 뒤집히는 뉘ㅅ살이

당신의 동정을 항상 새것으로 있게 하는

천 년을 부딪쳐도 지치지 않는

파도 소리가 파도 소리가

나날의 해안에 쌓이고 있습니다.

쌓이어 섬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다도해를

거느리고 있지만

저것은 누구의 바다입니까.

 

 

 

고모

김창완

 

그날부터 고모는

우리 집에서 살았다

 

미친 듯 미친 듯 거멍이가 짖던 밤

어머니는 이불 속에 나를 파묻고

꼼짝 말고 있거라잉! 그러셨다

 

그날부터 캄캄한 이불 속 같은 데서

꼼짝 말고 있으라면

꼼짝 않고 있으면서

오늘까지 살아 왔다

 

고모도 그러셨다

대숲 헤집고 지나는 바람에도

심심해서 달 보고 짖는

개 짖는 소리에도

심장을 두 손으로 누르며 살아 왔다

 

이불 속보다 더 답답할

무덤 속에 누워서도

고모는 자주자주 놀라시는지

잔디풀 파르르 떠는 걸 보았다.

 

 

 

기러기

김창완

 

너희들 어디서 오는지 설운 사람은 안다.

이 땅의 외진 홑섬 개펄도 얼어붙어

앉을 곳 없으므로 떠도는 너희들

기다렸다. 기다림으로 말라버린

꺾어지는 갈대로

 

얼굴 모르는 이모부 생사 모를 외할머니

그들이 전하란 말 가슴 먼저 미어

울며 가는 너희 마음 끼루룩 나는 안다.

시읏자로 기역자로 서로 모를 암호로

말로 못 할 사연으로 안타까와 우는지?

 

울지 않는 나의 마음 너희는 안다.

아파아트 단지 위 하늘은 낮고

등으로 어둠 밀어 별의 잠을 깨우며

꿈 잃은 자여 한밤중 꿈 잃은 자여

또는 첫새벽의 너희의 이사

 

주민 등록표에 써넣는 신거주지 주소

들판 끝난 곳 산이 있고 산 너머

마을 있고 마을에 사람 살고 그래서

떠도는 너희의 행선지를 나는 안다.

 

 

 

길이 다한 곳에

김창완

길이 다한 곳에 바다가 뒤척였다

바다에 마침표처럼 섬이 하나 있었다

그 섬에 아직 처녀인 오솔길이 있었다

 

외로운 사람이여 섬에 와서 보시라

길들이 바다 앞에서 사라지는 까닭을

수평선 바라보면서 물어보고 오시라

 

노을이 하늘 가득 바다 가득 깔리거든

바닷새 내려앉는 섬 그늘로 가 보시라

길들이 사라진 거기 꿈길 하나 있었다

 

 

 

나는 너에게 별 하나 주고 싶다

김창완

 

나는 너에게 별 하나 주고 싶다

서해 노을 속에 우리들의 집을 짓고

맨 먼저 찾아오는 별을 주고 싶다

그때 썰물 되어 멀리 가버리거나

흩섬처럼 오롯이 하냥 그 자리

건너오라 건너오라 너를 부르며

새벽까지 기다리다 맨 나중 사라지는

그 별 하나 너에게 주고 싶다

 

 

 

나에게 말했지

김창완

 

머나먼 우주에서 별 하나 태어나듯

깊은 산 품속에서 풀꽃 하나 피어나듯

그렇게 너는 왔단다 우리 엄마 말했지

짙은 어둠 허무는 첫새벽 종소리처럼

꽃에도 쇠똥에도 고루 비친 햇살처럼

그렇게 살았으면 해 우리 아빠 말했지

 

 

 

녹음사략(綠陰史略)

김창완

 

1

수풀이 기전체(紀傳體)로 수목열전(樹木列傳) 쓰도다

 

뙤약볕 가려주는 느티나무 어진 덕도 천둥 칠 때 미물 안는 염주나무 자비도 태풍 막다 허리 부러진 방풍나무 희생도 거침없이 내리긋는​ 미루나무 필봉도 무더위마저 벌벌 떠는 사시나무 상소도 먹구름 쓸어내는 ​싸리나무 개혁도 황금시대 꿈꾸는 은행나무 녹운(綠雲)도 날카롭게 발톱 세운 호랑가시나무 호위도 동색으로 위장한 단풍나무 역심에 찬바람 건듯 불면 불바다 될 사직이라​ 소나무 그걸 극세필 가다듬어 심장에 자자(刺字)하듯 시일야방성대곡(是日夜放聲大哭) 쓰는 날

 

대숲은 뼈피리 모아 비가(悲歌) 합주 하도다​

 

 

2

잡초가 강목체(綱目體)로 동국통감(冬菊痛感) 쓰도다

 

밭둑엔 바랭이가 둔덕에 개망초가 산허리엔 칡덩굴이 둔치엔 억새풀이 땡볕 아래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가도 소나기 한줄기면 기세등등 봉기하여 해일로 몰려오는 저 무성한 반란을 호미로 발본하고 낫으로 타진해도 수시로 일고 스는 뭉게구름 민심이라 돌아서면 도로 아미타불인데, 투구꽃이 투구 끈을 풀 때쯤 꽃무릇이 선혈 낭자 기진할 때쯤 구절초 쑥부쟁이에 고추잠자리 앉을 때쯤 감국(甘菊) 산국(山菊) 야국(野菊) 지고 한국(寒菊) 동국(冬菊) 필 때쯤

 

지쳐서 제풀에 쓰러질 한해살이 사초(史草)다

  

 

3

풀벌레가 편년체(編年體)로 열하일기(熱夏日記) 쓰도다

 

초복은 땀방울을 쥐어짜며 착취하고 중복은 열대야가 잠 못 자게 고문하고 말복에는 천둥 번개 윽박질러 겁주나니, 입하에서 하지까지 소서에서 대서까지 눈 씻고 보아도 세상은 온통 국방색뿐 피조차 붉으면 안 되는 획일주의 시대라 여치도 풀무치도 살려면 별수 없지 식민사관 물들인 갈맷빛 제복 입고 변명하듯 가성 질러 격양가 합창할 때 삼복에 불복하여 물러가라 물러가라 온종일 자지러지게 목청 높인 매미여

 

오늘도 죽을힘 다해 청사(靑史) 만 권 읽는가

 

 

 

누이야

김창완

 

누이야, 너의 슬픔을 위해 너는

밤에는 기도 일요일엔 성당

평일엔 네 남자 친구의 내의를 짜는

파리한 손가락의 노동, 웃음과 말을

잃어 가는 너를 지켜보는 나는 가슴 아프고

네가 기르는 분노에게 술을 권한다.

마셔도 취하지 않는 사람끼리

새벽 별에게 이마를 찔리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들길 방황할 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 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 퇴원한 그날로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土地)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그는 네가 보내준 책의 서문(序文)을 읽고 있거나

성경 몇 구절을 외고 있으리라.

수척하여 창백한 얼굴에 눈만 형형히 빛나고

더부룩이 자란 수염을 쓰윽 문지르며

걱정 마, 나는 떳떳해

그러면서 하늘을 가리키더라고

뽀얀 흙먼지와 어지러운 햇살 속에서

누이야, 너는 비로소 그의 이름을 불렀고

누이야, 너는 길바닥에 쓰러졌었다.

누이야, 너의 기다림을 위해

침묵을. ……눈보라와 불면을

 

 

 

대본 읽기

김창완

 

햇살 뿌연 회의실에 둘러앉아 대본을 읽는다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임금을 읽고

빨간 추리닝을 입고 대감을 읽는다

백정은 운동화를 신었고

며느리는 슬리퍼를 달랑거리고 있다

대사가 없는 노복은 문자를 보내고 있고

조연출은 읽는 사람들을 눈동자로 좇아다닌다

공주는 계속 연필만 돌리고 있고

성질 급한 감독님은 지문을 읽다

배우들 대사도 따라 읽는다 더 큰 소리로

중전이 읽으면 대궐이 된다

할아범이 읽으면 초가집이 되고

의원이 읽으면 약방이 되고

포졸이 고함치면 포도청이 된다

바람이 불고 비 오고 눈 오고 세월 흐르고

말이 달리고 화살이 날아가고

영감이 죽고 아기가 나온다

그러나 바로 거기도 바로 그때도 바로 그 사람도 아니다

그저 한낮의 풍경이다

 

 

 

돌멩이

김창완

 

척박한 땅일수록 여럿이 묻혀

개간의 괭잇날을 완강히 거부하던

너는 한때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던 네가 어디를 떠돌이로 다니다가

고향 버린 막벌잇군들만 모여 사는

이 변두릿길에까지 굴러 와서

취한 사내들의 발부리에 채거나

리어카아 바퀴에 밀리거나 하면서도

너는 그들과 같이 살고자 원한다.

흙먼지 뒤집어쓴 채

더러는 개굴창에 처박힌 채

추워도 절대로 떨지 않고

더워도 땀 흘리지 않는다.

할머니 좌판 위에 내리쬐는 햇살

순대집 나무 의자에 내려앉는 그늘

그들이 조금씩 조금씩 희망을 포기하고

순종조차 조금씩 조금씩 포기해 버려

아무 가진 것 없는 맨손이 되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너를 움켜쥐리라 믿는다.

너는 날개 없이도 날 수 있고

거만하게 번쩍이는 유리창을 깨뜨렸고

눈부셔 바로 보지 못하던

넓고 환한 이마도 깨뜨렸다.

겨울이 아무리 길고 추워도

네가 묻혀 있던 이 땅의 어느 어덩 하나

어깨 움츠린 걸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막금도(莫今島) 사공

김창완

 

죽기 전에 가야지 꼭 가야지

예순여덟 늙은 사공 노 젓는다

세월 흐르거나 말거나 서두르지 않고

더 천천히 노 젓는다

흐르는 눈물 흐르는 대로 놓아두어

노로 가른 물살보다 깊게 주름이 지고

자라는 수염 자라는 대로 놓아두어

바람에 휘날리는 수염이 가리키는 곳

건넛섬 가까와지는 그것만 보며

노 젓는다

물창도 사나와라 막금도(莫今島)와 장산도(長山島)여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는

그의 노질

그렇게 이어지고 이어져서

하마 옹진반도쯤 가 닿았을까

끝없어라 아아 끝없어라

섬도 무덤처럼 다가오는 뱃길

설움 깨물던 어금니로 곰방대 응등 물고

이 나룻배 한 척이면 갈 수 있겠지

그 땅 가고파서 노 젓는다

예순여덟 늙은 사공, 죽기 전에

가야지 꼭 가야지 노 젓는다.

 

 

 

매미 소리

김창완

 

포말로 구슬 꿰어 발을 짜는 폭포 소리

그 발을 치고 앉아 구운몽 읽는 소리

어머니 더우실 거야

녹음하여 보내자

 

 

 

부러진 낫

김창완

 

너를 쥐고 누군가의 손은

부들부들 떨었을 터인지라

그날 쨍쨍한 햇볕

휘젓는 낫날에 베어져 저녁놀 붉었으리.

피바다에 가라앉은 마을의 지붕들

산그늘 속으로 숨었음에랴.

- 모깃불 놓지 말 것

- 나다니지 말 것

 

그런 밤보다 어두운 숯에서

부엉이 울음 만난 불꽃은 눈떠

숨길 거친 풀무 속 시퍼렇게 살아

뜨겁게 뜨겁게 달아오른 낫이여.

(불길에 싸여 기왓장 튀는 소리

담 뛰어넘는 소리

고샅길 내닫는 소리)

망치질 소리 속에서 오히려 단단하던

너. 부러져 밭고랑에서 나뒹굴다니

손잡이도 썩다니, 마침내

 

그 사람 손가락의 상처도 썩었으리

베어도 우거지는 아비들의 쑥구렁과

머슴, 아비 머슴, 머슴 아들 머슴

그 연줄 왜 자를 줄 몰랐을까만

무뎌질라 갈고 갈아 새벽 별빛 이고

숫돌은 닳고 닳아 어디 갔을까?

 

평생 베어 넘겨 쓰러뜨린 것들의

그들의 피 대신 흘리느냐 벌겋게 녹슬어

버려진 낫이여 우리의 아이들은

엿장수만 그리워하고 우리의 아이들은 너의

단 한 번의 격노조차 헤아리지 못해라.

너를 쥐고 부들부들 떨었을

손, 누군가의 손을

 

 

 

분수의 눈물​

김창완

​오를 땐 한맘으로 솟구치던 분수(噴水)더니

떨어질 땐 제 갈 길 서로서로 흩어지며

 

너는 너 나는 나인 것 분수(分數) 말고 우는가​

 

 

 

새들도 봄이니까

김창완

 

이내가 안개 되고 안개가 는개 된 날

 

촉촉이 젖은 앞산이 속살 얼비친 망사로 몸을 가리고 요염하게 누워 있자 몸이 단 장끼 놈 까투리 년 꾀느라 사랑가 한 대목을 꺾는소리로 꾸어 탁성으로 꾸엉꿩 동편제 창법에 목이 다 쉬었는데 앞산에서 추임새 넣던 꾀꼬리 뻐꾸기 종다리 휘파람 새 뒷산에서는 흉보며 소문내기 바쁘고 그 바람에 세상이 현기증 일었는지 망칙해라 할미새마저 알을 낳았다네그려 낯 뜨거운 염문이 산불 들불로 번지는 날

는개가 이슬비 되어 타는 마음 식히네

 

 

 

소복

김창완

 

꽃상여 태우는지 하얀 연기 오른다

 

소복(素服)한 여인이 새 무덤 앞에서 소복(紹復)을 다짐하며 울다 간 저녁 눈이 소복소복 내려 무덤을 솜이불로 소복이 감싸 놓는다 하느님의 소복(小僕)이 된 망자에게 차려낸 마지막 밥그릇처럼 소복하다 냉기 도는 오늘밤 누가 이 여인의 소복(小腹)을 쓰다듬어 줄까 솜이불 속이 설원 같아도 이 겨울 지나면 점차 소복(蘇復)되겠지 봄바람이 살살 붕대를 풀어낼 때쯤 땅의 상처 심신의 상처에 딱지가 떨어지고 새살 돋아나는 간지러운 소복(小福)을 누릴지도 몰라

 

숫눈이 내일 아침을 소복하게 덮겠다

 

 

 

수유리의 침묵

김창완

 

꽃샘바람 불리라 미리 알았다 해도 피고야 말

진달래 무더기로 져 길 위에 나뒹군다.

짓밟혀도 아프단 말 못 하는 꽃잎 짓밟고

손등으로 눈 비비며 황사(黃砂) 속 더듬어 수유리 찾아가니

꽃샘바람은 좁은 내 어깨 다시 움츠리게 하고

말라붙은 입술도 트게 한다 그러니 침묵해야지.

저물녘 두꺼워지는 산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나에게

내 키보다 훨씬 큰 그림자 앞세우고 돌아나오는 나에게

그러니 침묵해야지 아직은 침묵해야지 일러 주는 이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이냐는 물음에조차 입 다문다.

돌에 새긴 그대들의 주먹만큼 내 주먹은 단단하지 못하고

돌에 새긴 그대들의 가슴만큼 내 가슴은 뜨겁지 못해

쓰다듬어 보아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내 손바닥엔

감옥에서 보내온 아우의 편지가 구겨져 있을 뿐

형님, 형님이란 말이 돌멩이처럼 날아와 나를 때린다.

작은 돌멩이들아 너희가 왜

날아가 새 되지 못하고 떨어져 뒹굴며

이 외면당한 변두릿길에서 짓밟히고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침묵해야지

돌멩이들조차 그렇게 일러 주는 수유리

짙어지는 어두움.

 

 

 

스무 해 전의 바다

김창완

 

그리고 나는 보았다

황토 고갯길 너머 떠 있는

삼각형의 바다, 그믐달 낚시에 걸려

희뿌옇게 떠오른 시체 같은

바다를 나는 보았다 그리고

굴비 두름으로 엮여 가빠졌다는

아저씨의 발길에 차이던 자갈

지금도 굴러다니는, 앵두나루 가는 길

무성한 풀섶에서 여치는 울어 대고

머리칼 풀어 헤치고 이 길을 뛰어가던

아주머니 할머니들을 나는 보았다

바다를 향하고 무덤 속에 누워

떠오르지 않는 아들을

지아비를 기다리는지

울음 아직 그치지 않고 길섶 가득

여치들 울음 자지러드는 한낮에

나는 보았다 그리고

황토 고갯길 넘다가 땀 닦다가

혼자 중얼거리며 무언가 찾고 있는

바다를 보았다

스무 해 전의 바다를 다시 보았다

 

 

 

신기료 할아버지

김창완

 

걸어가시라 신발 해진 이 기워 신고

넘어야 할 고개 몇 개라도 넘으시라

아직은 아무도 이르지 못한 땅끝으로

거기 당신네들 발길이 헤맬지라도

땅끝까지 안심하고 걸어가시라

무딘 송곳, 밀 먹인 실, 허리 굽은 귀 큰 바늘

키 작은 구두못 여기 모두 모였으니

당신네들 안심하고 걸어가시라

떠돌며 십 년 주저앉아 십 년

굽은 등에 햇살 받고 다시 몇 년 기약 없이

다리 부러진 돋보기로 지내 온 길 돌아보니

돌자갈 가시밭길 험하기도 하여라

이 세상 모든 신발이여 앞길 또한 그러하나

새 신보다 헌 신이 발 편한 줄 아시라

닳은 뒷굽 갈아 대고 터진 앞창 기워 신고

당신네들 갈 길로 걸어가시라

걸어가시라 개오릿들 건너 샛말 지나

두고 온 우리 동네 고샅길 꺾어 돌아

왼쪽으로 세 번째 집 머무를 곳 거기

못 가는 사정 아는 이 없어도 서운치 않으니

사과 궤짝 위 낡은 구두 몇 켤레여

먼지와 해으름과 눈꼽과 잔기침과

그런 것 아랑곳 말고 걸어가시라

 

 

 

김창완

 

자네가 허겁지겁 세상에 뛰어온 건

구황(救荒)을 위해서고

 

자네가 아득바득 세상을 사는 건

폐허가 불쌍해서 그러는 거다.

 

이장네 씨암탉 허벅지를 뜯어먹고

기름진 뼈끝마다 고름 든 면장님의

등창에 뜸질을 위해서

자네는 한 줌의 재로도 스러진다.

 

자작농이 되었다는 자랑 때문에

쇠스랑에 찍혀 죽은 우리 외삼촌

피보다 먼저 흘린 허연 골을 머리에 이고

보따리장수 외숙모의 발자국마다

괴어 있는 정액들은 눈감고 웃는다.

면사무소 뒤뜰에는 만발한 아카시아.

 

바보 같은 그를 위해 자네는 불린다.

 

쑥이라고

자네더러 쑥이라고 세상이 그런다.

농부의 무덤에는

쑥이라고 불리는 풀이파리만 무성하다.

 

시퍼런 핏물로 돌절구를 물들이고

이빨에 시퍼런 풀물이 들도록

씹어도 씹어도 향기롭기만 한 쑥이여.

 

 

 

어느 시인(詩人)에게

김창완

 

야윈 볼 시멘트벽에 문지르며

당신이 부르던 이름을

아무도 못 듣게 가만히 나도 불러 봅니다.

비겁한 나와 용기 없는 우리 대신

겨울 숲에 이르러 숨져 가는 햇살 한 올기가

고목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그 이름의 뺨에

눈물 바르며 당신의 아내마저 흐느끼게 하고

시대의 어느 끝으로 바람이 붑니다.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그것들을

항아리에 쓸어 담아 소금 비벼 섞으며

행주에 눈물 적셔 접시를 닦습니다.

그릇의 크기는 타고나는 것인지

황토 구덩이에 나를 묻고 당신은

오늘 내가 한 줄의 시(詩)로써 썩어 가는 사실을

자꾸 부끄럽게 만들었읍니다.

부끄러워 불조차 못 켜고 어두운 창 바라보니

새벽 가까운 어디쯤서

당신의 어린 딸 웃는 소리 들리고

어둠 밖으로 빠져나가는

골목 안 사람들의 발소리도 들립니다.

용기로운 자만이 기다릴 수 있다는 말

설움을 아는 자만이 기다릴 수 있다는 말

당신을 대신하여 비겁한 내가 듣고

용기 없는 우리가 대신 듣습니다.

 

 

 

우리 옆집 그 여자

김창완

 

그리하여……

그 여자 순대 장사 시작했지

먼지바람 잘 날 없는 시장바닥에

그 여자, 내장 꺼내 도마 위에 올려 놓지

 

그리하여……

그 여자 기름때에 절어갔지

손도, 앞치마도, 세월까지도

순대보다 시커멓게 타버린 사랑마저

인제는 칼로 베도 아프지 않지

 

썰어서 팔아버린 내장 길이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 여자도 모르지

논둑처럼 꾸불텅, 밭둑처럼 꾸불텅

고향까지 갈 것인가, 저승까지 갈 것인가

밤중까지 돼지 창자 까뒤집는 그 여자

 

돼지처럼 먹고 자고, 아무렇게나 살았지

사람들께 살점 모두 발라내 주고

인제는 창자까지 썰어서 파는

순대 장사 벌인, 우리 옆집 그 여자

그리하여……

그 여자, 새벽마다 식칼 쓱쓱 갈지.

 

 

 

우리 오늘 살았다 말하자

김창완

 

중복과 말복 사이

햇볕 불타는 오후 두 시를

살가죽에 불붙는

제 그늘 제가 잡아먹는 불볕 속을

오늘을

우리는 살았다고 말하자

 

늘어진 혀로

갈라진 입술로

타들어 가는 목청으로

햇살보다 따가운 환한 진실로

말하자

땀보다 짜게 사랑보다 더럽게

오늘을 우리는 살았다고 말하자

 

시멘트와 땀을 섞고

햇빛과 자갈을 섞고

목마름과 모래를 섞고

굳어지는 것은 벽돌이 아니라

오기와 구덕살과 악이라고 말하자

 

리어카 끌며 살았다고 말하자

벽돌 짐 져 올리며 살았다고 말하자

미싱을 돌리며 생선을 팔며

사실은 몸뚱이도 팔았다고 말하자

 

다시 한번 곱씹어 말하자

헐린 집터에는 맨드라미 피었더라

팔아넘긴 입주권에는

도장밥이 피었겠지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희고

 

놀은 붉겠지

혈육은 나뉘었다

그리움은 아직도 햇살보다 뜨겁다고

말하자 마른 입술로

불타는 목청으로

사막이 된 가슴으로

 

 

 

운주사 돌부처님께 말 걸기

김창완

 

어느 별에서 망명 온 난민인지요

온몸 가득 마마 자국 더께 진 몰골에

집도 절도 없이 노숙자로 사시는

 

영구산(靈龜山) 운주사(雲住寺) 돌부처님들

 

왜 하필이면 눈뜨고 코 베어 가는

이 막돼먹은 세상에 오셨는지요

아낙네가 코 떼어 속곳 속에 감춰도

없어도 없지 않고 있어도 있지 않으니

숨 쉬지 않고도 영겁으로 가시며

 

아등바등 사는 이들 깨진 꿈 주워

개떡 탑 거지 탑 요강 탑 쌓아놓고

어느새 내 맘속에 기척 없이 들어와

탐욕 덩어리 모아 돌탑 천 기 쌓더니

 

지쳐 널브러진 우리 삶의 너럭바위에

마마 자국처럼 천문도 쪼아 놓고

그 위에 누워 밤낮으로 하늘만 보면서

왜 혼자 빙그레 웃는지요

혹시 고향 별이라도 찾았는지요

아니면 여기가 극락인 걸 깨달았는지요

 

 

 

인동일기(忍冬日記)

김창완

 

1

새마을 사업장에 나가 호박구덩일 팠다.

돌자갈 틈 비집고 뻗어나갈 어린 뿌리 위하여

언 손 부르트니 맨소래담 바르고

내 뼈일는지도 모를 풀뿌리가 혹한 속에 드러나

나도 마른 풀잎 하나로 떨고 선다.

너희들 곁에서 서로의 몸 비비다 바스라지는 가랑잎.

이 가혹한 핍박으로부터 우리가 빠져나갈

통로라도 뚫듯 파놓은 호박구덩이엔

빨리 온 어둠이 먼저 와서 드러눕고

우리의 하루가 다하자 호루루기 소리 들려

작업이 끝났다. 반장님의 호명에 힘차게 대답하자

작업이 끝났다. 우리 영세민들은

끝없이 뻗어나갈 호박넌출 붙들고

담장 넘어 지붕 넘어 산을 넘어

다시 각자의 남루 곁으로 되돌아오고 말았지만

몇 됫박의 밀가루 타 들고 돌아오는 길엔

온종일 내 손아귀에서 놀아난 삽

돌담에 기대어 쉬는 밤에도

혼자서 빛을 내는 삽

삽과 같이 걷는 밤길 두려울 것 없었다.

과부로 둔갑한다는 여우가 재주 넘는 고갯길도

무덤 쪼개고 나온다는 처녀 귀신도 무섭지 않았다.

 

 

2

눈 오는 날은

부르고 싶은 이름이 너무 많다.

부를수록 반가와서 눈 오는 날은

이름과 이름으로 마주 잡을 손이 없다.

가로수는 잎이 없고

시민들은 목이 없고

 

없음이 없음으로 더 깊이 내통하는

시민들은 멈춰 서서 담뱃불을 건네며

묵시(黙示)로 인화하는 연탄 같은 단어 하나

 

하나 남은 불씨마저 소주 부어 꺼 버리고

골목 안 방뇨(放尿)로써 눈 위에 글씨 쓰는

그를 보았는가?

눈 내리고, 덮이고, 덮여도 남는, 검은

그의 그림자를 보았는가?

 

오늘도 그리운 얼굴이 하나 안 보였지.

소문과 눈발이 어지러운 거리에서

 

어디 갔지요? 그는 어디 있습니까?

물어볼 만한 이웃도 없는 동네에서

겨울 만난 우리의 목 없는

어깨와 머리 사이

귓밥까지 쌓이는 눈, 눈 오는 날은

부르고 싶은 이름이 너무 많다.

 

 

 

입춘화첩 - 설송도(雪松圖)

김창완

설화(雪禍)에 부러진

소나무 굽은 가지

지팡이 삼아 짚고

논길 헤쳐 오던 화신(花信)​

 

동구 밖​ 개울가에서

고뿔 만나 머뭇대네

 

 

 

작은 새

김창완

 

당신은 내 생년월일보다 더 먼 곳에 항상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보다 앞장서서 내 무덤의 봉우릴 넘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의 꿈을 물어다

거목(巨木)의 아득한 실가지 끝에 둥주릴 짓고

당신은 내 첫울음의 목청을 가다듬어 주었습니다.

 

당신의 잠 속에는 무엇이 있읍니까?

나는 저 산허리에 감기는 밤우뢰의 여운을

당신의 잠 속에 드리우고

떨어져 가던 살별들의 안부를 낚아 내려 합니다.

 

당신이 깨고 나온 알껍질 속에서

지금은 무엇이 부화하고 있읍니까?

나는 내 나이를 담아 놓고 부화하길 기다리며

물 묻은 바람, 날개 돋는 뉘ㅅ살, 아아 겨울 아침의 공복

풀덤불 속에 숨겨 둔 당신의 체온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첫눈 오는 밤에

김창완

 

나보다 마음 약한 새침떼기들이

스스로 모질구나 모질구나 생각하면서

 

하늘은 어디 갔나 하늘은 어디 갔나

우리 다닐 길 모두 없애 버리고

세상의 길은 오직 하나

하나만으로 모아서 남기려 하네

 

산 속의 노루는 무슨 꿈 꿀까

길 아닌 곳만 골라 다닌 그 발 오그리고

무슨 꿈 꿀까 무슨 꿈 꿀까

내 못난 근심처럼 흔들리면서

눈은 내리고 쌓이려 한다

길 없이도 멋대로들 잘도 내려서

길과 풀섶의 경계도 없애 버리고

 

죽은 풀잎 흔들며

너도 죽었니?

깊이 든 잠 뿌리의 잠 깨우는

눈은 내려서 쌓이려 한다

 

다 잠든 다음에도 꿈길 비껴 내려서

나보다 고운 말만 골라 쓰는 이들이

세상의 모든 길을 없애 버리면서

나보다 고운 말만 골라 쓰는 이들이

 

 

 

초승달 삽화(揷話)

김창완

숫돌에 낫날 세워 베어 넘긴 모진 세월

 

허리 휘어지게 져 나른 가난을 봉분 한 짐으로 쑥구렁에 부려놓고 아버지 인제는 노송 그루에 등 기대고 쉬시는지 나그네로 살다 간 한평생이 노랑눈썹솔새 따라 고향 찾아가시는지 휘이 호르르 한숨 쉬다 날아가고 뒷산도 등 구부리고 곤히 잠들 무렵

 

 이 빠진 조선낫 하나 하늘가에 버려졌다

 

 

 

통일로 코스모스

김창완

 

너희들 여태 여기서 떠도느냐

작년에도 여기서 모가지만 늘이더니

한가위 아니라도 거닐고픈 그 거리

어째서 귀향 열차 남으로만 가느냐

 

파편 맞아 죽은 이는 빨강 꽃으로

배고파 죽은 넋은 하양 꽃으로

벼 익어 누런 들판 너희 논 버려두고

여지껏 피난살이 끝나지 않았느냐

어째서 귀향 열차 남으로만 가느냐

 

이 길 따라 하루면 가고 남을 마을 두고

코스모스, 야위어 가는 슬픈 넋이여

해맑은 햇살 속 한가위 달빛 속

너희들 여태 여기서 떠도느냐

어째서 귀향 열차 남으로만 가느냐

 

 

 

하늘에 깁다 ​- 윤동주 기다리는 어머니의 침선

김창완

한 눈 감고 보는 바늘귀 밖 세상에

새벽녘 첫 종소리 한 타래 길게 꿰어

너 기려 해어진 속가슴 하늘에다 깁는다

 

헤어져 사는 날들 마주 꿰맨 솔기 따라

꿈길로 한땀 한땀 누벼 온 발길 따라

골무도 막지 못하는 통증으로 오는 너

 

가랑잎 한밤중에 사립 밖 서성이면

눈물로 헹군 달빛 실꾸리에 감다 말고

내 새끼 발소리인가 방문 자주 열어 본다

 

부르면 명치끝이 뜨거워지는 이름으로

얼굴 깊은 주름 다림질해 곱게 펴서

시렁 위 반짇고리 옆 사진틀에 두고는

설친 잠 자투리 이어 박은 조각보에

악몽에 가위눌린 징한 세월 싸서 이고

별 내린 언덕에 오르면 너를 볼 수 있을까

 

 

 

해님도 봄이니까

김창완

먼 산에 아지랑이 가물가물 오르자

시냇가 머리 감는 실버들 치렁머릴 흰 손가락으로 애무하던 햇빛이 송순주 두견주 매화주 들이켜고 온몸이 녹작지근 나른해진 햇볕이 어제는 암노루 꼬리만큼 짧더니 오늘은 수여우 꼬리만큼 긴 해덧이 구미호에 홀린 듯 춘정을 못 이겨 이 고샅 저 마을 쏘다니던 햇발이 발바닥에 배어난 앵초꽃 핏방울로 춘화도 그려 놓고 낙관 찍던 햇살이 복사꽃 그늘에 꽃뱀이 벗어놓은 색동옷 끌어안고 낮거리하던 해꽃이…

 

어스름 해거름 녘에 게슴츠레 눈 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