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길
가을 문안
가을 산새
가을 속삭임
가을에는 떠나리라
가족
거울 앞에서
겨울 메시지
고래들은 바다를 버렸다
고별
곡비(哭婢)가 왔다
과속
그 강 건너지 마오
그대를 보내며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그대에게 띄운다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는 까닭
기다림
길
길 위에서 이름을 부르며
길을 걷다
꿈꾸는 사람에겐 어둠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시가 좋다
나라 안이 상중(喪中)이라
나비의 검은 꿈
나의 마을
나의 아내 뉴질랜드
나의 하늘
남기는 말씀
내란(內亂)
네게 보낸다
넝쿨장미
녹차를 마시며
누군가가 떠나갔다
눈
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
느닷없이 봄은 와서
늦저녁의 버스킹
당신을 위하여
당신의 난로 – 드디어 나는 눈이 멀었다 – 나의 말
대한민국이 유리창에 떠 있다
도시의 새
동안거(冬安居)
따뜻한 봄날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면회
모두 허공이야
목화꽃을 따다
물, 우리의 사랑법
미궁 속에서
바늘귀
바람 부는 날
반품
벚꽃 지다
봄꿈을 꾸며
봄날 열흘
봄날은 약속처럼 눈물처럼
봄날, 화염병을 던졌다
봄바람
봄이여 무심하구나 – 이어령 선생님을 그리며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다
비밀
빗소리
사라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사람으로 살아보니까
사모곡
새
새는 자기 길을 안다
새벽 뜰에서
새 아침의 기도
서정시인 허페즈의 무덤을 밤에 찾아가다
섬
섬 하나
소주를 맛보다
손칼국수 그 집
시를 읽다
시인 선서
아버지와 아들
아직도 사람은 순수하다
어머니와 설날
어머니의 맷돌
열쇠
옷에 대하여 – 자화상을 보며
외로운 별은 너의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우산
우편배달부
유월의 녹슨 철조망은 유월에 걷는다
이모
이 봄의 축제
인사동으로 가며
입관(入棺)
잔치국수 한 그릇에
잡초 뽑기
저녁 밥상
저녁, 유리 위로 출연하다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주여, 용서하소서
찔레꽃
찔레꽃 열매는 눈 속에서 더 붉다
천년 석불을 보다
천지 만물 중에서
촛불을 켜신 어머니
최근에 나는
탄환
텃새
푸른 별에서의 하루
풀
풀잎, 말하다
하늘을 날다
항로를 찾아가다
항해일지
행진
황톳길
회항
5월의 사랑
가을 길
김종해
한로 지난 바람이 홀로 희다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가을
서오릉 언덕 너머
희고 슬픈 것이 길 위에 가득하다
굴참나무에서 내려온 가을산도
모자를 털고 있다안녕, 잘 있거라
길을 지우고 세상을 지우고 제 그림자를 지우며
혼자 가는 가을 길
가을 문안
김종해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오,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슬픔이
어둠 속에서 굳어져 별이 됩니다.
한밤에 떠 있는 우리의 별빛을 거두어
당신의 등잔으로 쓰셔요.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만 가혹하게 빛나는 우리의 별빛
당신은 그 별빛을 거느리는 목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종루에 내린 별빛은 종을 이루고
종을 스친 별빛은 푸른 종소리가 됩니다.
풀숲에 가만히 내린 별빛은 풀잎이 되고
풀잎의 비애를 다 깨친 별빛은 풀꽃이 됩니다.
핍박받은 사람들의 이글거리는 불꽃이
하늘에 맺힌 별빛이 될 때까지
종소리여 풀꽃이여…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가을 산새
김종해
새끼 네 마리 데리고
산에서 마을로 내려온 가을 산새
가을이 되니까
저녁 햇살이 밥으로 보이니까
우리 집 찔레나무 덤불 속에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다
서오릉 길 너머
봉산에서 내려온 가을 산새가
뭐라고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어린 날 귓속에 쟁쟁 울리는
엄마새 소리
종해야, 죽 먹고 자!
죽 먹고 자!
굶고 자는 아기새 위로
엄마새가 맨 앞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가을 속삭임
김종해
인간의 아들아, 신(神)의 어머니가 와서 너희 날의 아픔을 꿰매려는 이 시각에 너희들은 모두 숨어 있구나. 어서 나오너라, 시들지 않는 풀잎을 주리니
이제 날은 저물고
우리 깊은 마음에 구르는 한 장의 잎사귀에서도
우리 님은 떠나려 하노니
바람이 불기 전에, 큰 어둠이 오기 전에
어서 흔들어 깨워라
우리 깊은 마음에 날려와 쌓이는 가랑잎을 타고
우리 님은 떠나려 하노니
이 가을에 우리가 까마득히 잠들고
우리 님이 떠나가면
또 다른 여인이 우리를 다시 낳아주지 않으리라
오래오래 닦아둔 은빛의 등촉대에
까물거리는 우리의 영혼이 서로 부둥켜안고
서걱이는 갈대밭의 갈대꽃에게나 지껄이듯
이 가을에 떠나지 않는
단 하나의 영원을 말해주어라
바람이 불기 전에, 큰 어둠이 오기 전에…
가을에는 떠나리라
김종해
바람 부는 날 떠나리라
흰 갓모자를 쓰고 바삐 가는 가을
궐(闕) 안에서 나뭇잎은 눈처럼 흩날리고
누군가 폐문에 전 생애를 못질하고 있다
짐(朕)의 뜻에 따라
가야금 줄 사이로 빠져나온 바람은 차고
눈물이 맺혀 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
짐(朕)이 이곳에 머뭇거리는 것은
아직 사랑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직 그리워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이 가는 길을 탓하지 않으며
손금 사이로 흐르는 일생을 퍼담는다
슬픔이 있을 것 같은 날을 가려
가족
김종해
천마산 눈썹 아래
초장동 산비탈이 있고
천마산 코딱지 같은 우리집이 있고
충무동 푸른 바다가 있고
새벽별을 보며 생선도가로 내려가는
이모집이 있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소리치는
외삼촌집이 있다
이른 새벽부터 우리집에 와서
해장술에 취한 천마산은
어머니에게 술국을 더 달라 한다
아버지와 형은 말없이
절구에 떡을 치고
누나와 나는 맷돌을 돌린다
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아우가
손을 놓을 때쯤
누더기 같은 우리의 희망이
빨랫줄에 펄럭일 때쯤
천마산은 바람과 안개를 거느리고
넌지시 산을 오른다
거울 앞에서
김종해
내가 내 이름을 불러볼 때가 있다
하루의 시간을 끝낸 자에게
등 두드리며 나직이 불러주던 이름
거울 앞에 서 있는
주름진 늙은이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내 이름을 호명한다
세상 나들이 끝내고
돌아가야 할 마지막 시간을
나는 서둘러 묻지 않기로 한다
적멸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으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어왔던
그 길 위에 서서
오늘 저녁 나는 다시 등불을 켜며
그대를 사랑했노라 나직이 말한다
겨울 메시지
김종해
시들 것은 다 시들고 떨어질 것은 모두 떨어졌다.
들판이여, 목마른 이 땅을 기르던 여인들은 모두 집으로 숨고
새벽에 일어나 저희 우물을 긷던 그 부산한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집집마다 등불을 끄지 않고 이 밤에 다들 자지 않지만
오오, 이제 바람이 불면 마을의 문들은 꼭꼭 닫으시오
허나 대문에 빗장을 내다 지르고도 저희는 잠들지 못한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익숙하게 비벼댈 이 깊은
어둠 속에서
저희 불빛은 더 희게 번쩍인다
캄캄한 숲속에서 컹,컹,컹,컹, 울리는 저 울부짖음
사나운 한 마리 짐승의 울부짖음이 차라리 그리운
이 외롭고 어두운 날
목마른 대지에 젖을 먹여 기르던 여인들은 모두
집으로 숨고
들판은 새로 태어날 제날을 안고 머리를 숙이었다
이 외롭고 어두운 날, 아버지여
시들은 풀꽃이 죽지 않은 뿌리, 짓밟히고 억눌린
모든 것의 얼굴들에
이제 곧 저희의 배가 가까이 옴을 예언하소서.
고래들은 바다를 버렸다
김종해
지평선 위로 산이 꾸물거린다
비는 내려서 산을 적신다
검은 산은 비를 마시고
지평선 위로 비를 뿜어올린다
오늘 저녁
비 오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나는 한 잔 술에 취한다
선창에 기댄 채
나는 비를 맞고 있다
사람마저 항해하기 힘든 도시
나는 비를 맞고 있다
고래는 왜 내가 살고 있는
지평선으로 헤엄쳐 왔는가
내 젊은 날의 바다,
내가 뿜어올렸던 바다,
고래들은 모두 수평선을 버렸다
고별
김종해
지상의 시간이 끝난 사람이
잠자러 가는 시각,
인간의 이름은 모두 따뜻하다
이 별을 떠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
곡비(哭婢)가 왔다
김종해
어머니 장례식 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방성대곡(放聲大哭)해 본 적이 없다
그날 몸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슬픔의 한 방울까지
다 짜내어 울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로 생긴 슬픔을
가장(家長)의 이름으로 감추어 두었기 때문일까.
나를 알고 있는 그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목 놓아 울고 싶은 날이 있었으련만
가장이라서 나는 그럴 수 없다
아침 식탁에 앉아서 숟가락을 들고 있을 때
문득 그가 왔다, 곡비(哭婢)가 왔다
여름의 끝자락을 쥐고
고층 아파트의 방충망을 붙들고
천지가 무너지듯 그가 울었다
한바탕 통렬한 울음이 계속될 동안
창문 안을 들여다보며 그가 흐느껴 울 동안
지금까지 가슴 속에 감춰둔 내 슬픔도
그의 호곡 하나하나에 사설을 붙였다
여름의 끝자락을 쥐고
내 슬픔을 알고 있는 그가 와서
나 대신 소리쳐 울고 있다.
과속
김종해
이젠 어쩔 수 없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은 탄식했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흑장미 열다섯 송이 사들고
네가 사는 도시
가속기 페달을 밟지 않아도
나는 이미 네게로 고속으로 가고 있다
차창을 때리는 파국이라든가
맹목이라는 빗방울을
워셔로 닦아내고 또 닦아내고
급브레이크를 밟을 수도 없는 비탈길에서
너를 향해 나는 달려가고 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그 강 건너지 마오
김종해
강 너머 더 멀리 요양원이 있다
일생의 끝, 일생의 마지막 여행지
안식과 치유, 사랑을 건네받는
요양원이 오라고 오라고 손짓한다
오래 전에 강 건너 그곳으로 가서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나는 보았다
그 강 건너가면
세상의 마지막 절벽이 있다
강 이쪽 언덕에서
이생의 삶이 언제나 따뜻하다고
안온하다고는 믿지 마라
아침이 오면 반드시 저녁이 오리라는 것을
순명(順命)하는 사람들
지금 한평생 우리의 일상
우리 곁을 지키던 지인들이
하나둘 그 강을 건너간다
어쩌랴, 강 건너로 하나둘
떠나가는 사람들
오늘 나는 탄식하며 혼자서 부르짖는다
그 강 건너지 마오
그 사람들의 마지막 음성이 담긴
내 스마트폰 속의 따뜻한 전화번호를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나는 끝내 지우지 못하리
그대를 보내며
김종해
이별은 누구의 삶에서나 찾아오지만
나는 아니야,
나 오늘은 이별이 아프지 않다고
아픈 이별 하나를 잊기까지
오랜 세월 얼마를 흔들려야 했나
세상은 늘 창밖에 거기 그대로 있을 뿐
비는 하늘에서 내리고
나는 창窓 안에서 홀로 젖는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지
삶은 혼자서 걷는다는 것
우리는 서로 스쳐가고 있을 뿐
이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나는 아니야,
나 오늘은 손 흔들며
그대를 보낼 수 있어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그대에게 띄운다
김종해
덤프트럭 위에는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수화물이
위태위태하게 적재되어 있고
야반에 고속으로 질주하는
덤프트럭 위에는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서른다섯 송이의 장미 다발과
안전장치가 풀어진 뇌관,
그리고 기타 등등의 물건 꼬리표에는
수신인의 주소,
내 불륜의 사랑이
모나미 사인펜으로 적혀 있다
이 밤 안으로 나의 덤프트럭을
불이 환한 그대 집까지
당도케 해야 한다
쌍라이트 환하게 켜고
고속으로 달리는 덤프트럭 위에는
내가 그대에게 보내는 수화물이 있고
크라프트지 꼬리표가 달린
내가 있다.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는 까닭
김종해
나는 내 차의 결함이 어떻다는 것을 모른다. 치질수술을 받고, 이빨을 갈아 끼우는 단순한 내 몸의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나는 내 차의 결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90년식 콩코드의 노회한 숨소리가 조금씩 내 몸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나는 헐떡이고 있다, 밀리고 있다, 새고 있다라는 자각증상이 내가 밟은 타이어 자국마다 묻어났다. 순정부품으로 갈아끼우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자주 눈발처럼 차창에 달라붙는 저 쓸쓸함과 허전함은 무슨 순정부품으로 갈아 끼울 것인가. 갈현동 언덕 아래서 멈칫, 나는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는다.
기다림
김종해
까무러치듯 외로운 날빛이
서창(西窓)에 걸리고
흉흉한 황사바람 몇 날 며칠 부는데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굳게 닫힌 하늘에
복사꽃은 또 한 번 하얗게 떨어지고
깊은 밤 별들은 새벽빛 수틀 위에 자수로 뜨이는데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청천벽력이라도 못 깨어날
깊은 잠이 드셨나요
극락왕생 별천지에 홀로 단꿈 꾸시나요
까무러치듯 캄캄하고 외로운 이날에
순정한 마음의 바늘 끝에 뜨이는
아픈 사연 감추옵고
이 마음에 맺혀 있는 철천지 원망을
사랑으로 불꽃으로 모두 오려서
당신 오신 날 밤
길 밝히는 연등(燃燈)으로 내걸리렸더니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길
김종해
잠을 잘 시간에만 길이 보인다
꿈속에서만 세상을 걸어 다녔는데
새벽녘에는 길이 다 지워져 있다
특히 잎 지는 가을밤은 더욱 그러하다
지상의 시간이 만든
벼랑과 벼랑 사이
떨어지는 잎새를 따라가 보면
아, 그 시각에만 환하게
외등이 켜져 있다
길 위에서 이름을 부르며
김종해
“친구여, 길 위에서 나는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친구여, 봄날 꿈속에서 그들은 하나하나 모습을 보인다
김광협, 이문구, 조태일, 임영조, 손춘익, 박정만,
오규원, 김영태, 마종하, 신현정, 최하림……
살아 있는 자의 꿈,
한평생 살아온 길 위에서 뒤돌아보면
거기 보이는 모든 삶이 봄꿈이다
외롭고 슬프고 어두운 날의 기도마저도
더 오래 내 것이 된 길 위에서
살아있는 자에게 오늘만이 봄날이라면
사람 살아가는 한평생이 봄날이다
친구여, 헛된 봄꿈을 꾸는 나는
삶이 우리에게 한 번쯤 허락하는 봄날을 믿는다
친구여, 길 위에서 나는
길을 걷다
김종해
아침 산책길에
혼자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가는
꼬부랑 노인을 보았다
그 사람 걸어가는 뒷모습 보는 동안
어느새 그 사람은 내 안에 들어와 있다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나에게 얼마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겐 병들지 않은 몸과
지팡이 없이 걸어갈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음을
고맙다, 고맙다고
하늘에 기도하듯 입속말하며
나는 천천히 걷는다
어제까지 세상 속의 허상(虛像)을 좇아온
나의 보법(步法)은 너무 단순하다
걷는 길 어디에서나 허방이 따라 오고
사는 곳 어디에서나 참회가 필요했다
아침 산책길 위에
꿈꾸는 사람에겐 어둠이 필요하다
김종해
춥고 어두운 날의 은혜가 있으므로
새날은 더욱 눈부시다
서설이 깔린 길은 더욱 눈부시다
그대 식탁 위의 은식기마다 반짝이는 것은
햇빛 같은 사랑
가득 담겨 있을수록
내일은 푸르고 더욱 아름답다
새날을 받기 위해 줄지어선 사람들
그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약간의 어둠이다
꿈꾸는 사람에겐 어둠이 필요하다
내일 아침 햇살을 낳기 위해
오늘 밤을 진통하는 여인처럼
그대의 식탁 위엔
아무도 손대지 않은
한 세기가 차려진다
춥고 어두운 날의 은혜가 있으므로
오늘 아침
세상은 더욱 눈부시다
나는 이런 시가 좋다
김종해
나는 이런 시가 좋다.
아침에 짤막한 시 한 줄을 읽었는데,
하루종일 방안에 그 향기가 남아있는 시.
사람의 온기가 담겨 있는 따뜻한 시.
영혼의 갈증을 축여주는 생수 같은 시.
눈물이나 이슬이 묻어 있는 듯한,
물기 있는 서정시를 나는 좋아한다.
때로는 핍박받는 자의 숨소리,
때로는 칼날 같은 목소리,
노동의 새벽이 들어 있는 시를 나는 좋아한다.
고통스러운 삶의 한철을 지내는 동안 떫은 불 다 빠지고
시인의 마음 안에서 열매처럼 익은 시.
너무 압축되고 함축되다가 옆구리가 터진 시.
그래서 엉뚱하고 다양한 의미로 보이기까지 하는 선시(禪詩) 같은 시.
뿌리와 줄기도 각기 다르고, 빛깔과 향기도 다르지만,
최상의 성취를 꽃으로 빚어내는 하느님의 시.
삶의 일상에서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가
세상사의 중심을 시로써만 짚어내는 시인의 시.
시로써 사람을 느끼며,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하고 싶은 시.
울림이 있는 시, 향기 있는 시.
나는 이런 시가 정말 좋다.
나라 안이 상중(喪中)이라
김종해
나라 안이 상중(喪中)이라
봄날마저도 가슴에 노란 흉장을 다는구나
올해 봄이 왜 슬픈지 너희들은 알겠구나
진도 팽목항 애끊는 포구
애절하고 비통하다
억울한 죽음이여
사는 길 지켜주지 못해서
노랑 리본 가슴에 꽂고
엎드려 사죄한다
이 나라와 사회는 아직도 미숙하다
얼마나 많은 세월호가
우리 곁에서 또 침몰해야 하느냐
나라 안 방방곡곡 슬픔을 삼킨다
봄날마저도 상중(喪中)이라
꽃들마저 상복을 입는구나
하얀 미사포 머리에 썼구나
눈 감고 가는 봄날
천지가 하얗게 저물어 가는구나
나비의 검은 꿈
김종해
번개 흩날리고, 폭우 지던
어두운 새벽에 나는 보았다.
허공중에 맴도는 한 검은 나비를.
홀로 깨어 일어나, 벼락 살피던 나에게
까마득히 나부끼는 검은 혼.
삶에 흔들리어, 맹물이 다 된 나에게
아직 저렇게 어둠을 떠도는
작은 몸부림이 남아있다는 말인지.
유리에 부딪혀 되살아 오르는
푸른 반점의 어두운 꿈.
하늘이 물 젖은 종이처럼 찢어지는 새벽에
나도, 살아 있음의 몰염치,
흐린 번개나 되듯, 성냥을 그어 올렸다.
어둠을, 한 개비의 성냥으로 당기어
불을 붙여 물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꿈,
이 수동적인 삶의 흐릿한 자유.
빗물은 어둡게 폐부로 흘러들고
상한 주검보다 마음이 더 흐린 날
내 꿈의 날개짓이 나비보다 더 아스라한 날
나는 비로소, 새벽의 창을 열고
어둠 속에 길게
목이나 내어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이제 비로소 기꺼이 절망이다.
비 젖은 나비의 인광처럼
두 눈을 안으로 가득 불 밝히면서
나비보다 까마득히, 나는
이 지상을 날아올라 흩어질 것이다.
나의 마을
김종해
12월 초순에도 빨간 겨울 망개가 열리는 눈에 묻힌 나의 마을에는
난롯가에 앉아 두 볼이 붉은 아낙들이 커다란 귀바늘을 쥐고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눈에 덮인 이 마을의 창틀마다
황홀한 화제와 불빛이 새어나고
한겨울밤 아낙들이 하는 그 고요의 뜨개질에
천사의 제일 아름다운 詩와
꿈의 세포가 짜여진다
사나이들은 읽던 책의 마지막 章을 덮고
색색의 수실로 뜬
아낙들의 꽃병에 꽂힌 겨울 흑장미의 보이지 않는 동요와 신비스런 소리를 듣는다
눈이 한밤내 내리는 날 밤은
영혼을 재는 저울을 들고
하늘에서 몰래몰래 강림한 겨울 신(神)들이
아낙들이 떠놓은 자수 속에 들어가
사슴이 되기도 하고 학이 되기도 하고
겨울 매화의 봉오리를 다소곳 열기도 한다
나의 아내 뉴질랜드
김종해
뉴질랜드가 나의 아내는 아니지만
아내가 가진 사막,
습기 없는 사막 가운데서 자라는 풀,
터석을 보았다
아내의 사막에 바람은 불고
마른 터석은 굴러다닌다
봄이 오는 뉴질랜드가
나의 아내는 아니지만
만년설을 이고 귀국하는 아내
뉴질랜드의 터석은 굴러서
내 이순의 사막에 와서
딱 멈추었다
나의 하늘
김종해
1 -유리창을 닦다
마포 쪽에 있는 백여 평 미만의 하늘을 사들여 내 이름으로 등기를 끝내고 취득세를 물고 난 얼마 뒤 나는 완벽한 나의 하늘을 갖게 된 기쁨 속에서 이웃들로부터 축복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내 하늘에 있는 별들을 가끔 빌려보고 싶다는 소박한 친지의 말이었다. 나는 내가 사들인 하늘의 별들이 잘 보이도록 오늘도 유리창에 낀 성에를 닦고 또 닦아내었다.
남기는 말씀
김종해
바람이 부는 것을 허락하였고
꽃이 피는 것을 막지 않았다
봄이 오는 것을 허락하였고
봄이 가는 것 또한 막지 않았으니
다툴 일 하나 없다
사는 일 이 같으니
짐의 마음 가뿐하다
잠시 머무는 땅
사랑할 일 너무 많다
천년 뒤 또 바람이 불고
꽃이 피거든
짐의 궁성에 사는 모든 이들
이같이 하라
내란(內亂)
김종해
낙엽이 내린다. 우산을 들고
제왕은 운다 헤맨다. 검은 비각에 어리이는
제왕의 깊은 밤에 낙엽은 내리고
어리석은 민중들의 햇불은 밤새도록 바깥에서
궐문을 두드린다.
깊은 돌층계를 타고 내려가듯
한밤중에 촉대에 불을 켜들고
궐 안에 내린 낙엽을 투석을
맨발로 밟고 내려가라 내려가라
내려가라 깊고 먼 지경에 침잠하여
제왕은 행방불명이 된다. 제왕은
화구의 불구멍이라 자기 혼자뿐인 거울 속에서
여러 개의 탁자 위에 내린
낙엽이 되고 투석이 되고
독재자인 나는 맨발로 난간에 앉아
벽기둥에 꽂힌 살이 되고
깊은 밤이 된다. 제왕은 군중 속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인가, 낡은 법정의 흔들리는 벽돌을 헐어
이 한밤 짐에게 비문을 써다오
화염인 채 무너지는 대리석처럼 깊은 밤 인경은
시녀같이 누각에서 운다 누각에서 떠난다
아, 한 장의 풀잎인가 미궁 속에서
내전에 세워둔 내 동상은 흔들리고
나는 거기 가서 꽃힌 비수가 되고
한밤 동안 석단을 내리는 물든 가랑잎에
붉은 용상은 젖어
우산을 들고 제왕은 운다 헤맨다.
네게 보낸다
김종해
눈발이 흩날린다
보온밥통에서 밥을 푸다 말고
나는 문득 네게
문자 메시지를 날린다
벚나무에서 분분히 흩날리는 꽃잎
그 한 잎이 차창 안으로 들어와서
차를 멈추고 나는 문득 네게
문자 메시지를 날린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밤, 꿈자리 헤집고
창문에 와서 부서지는 달빛 때문에
하늘에 있는 네게
나는 문득 문자 메시지를 날린다
세상 살아가는 모든 날이 가랑잎
나 여기서 이리저리 구르다
손끝에 찍어서 보내는 글
-눈 온다, 꽃이 진다, 보름달 떴다
네게 보내는 아주 짧은 메시지
넝쿨장미
김종해
허황한 불빛 속에 장미가 핀다.
말라 비틀린 꽃잎 속에
장미의 혼이 핀다.
때로 소년들이 뛰듯
무희의 어린 꿈은 살아나온다.
나를 정신없이
마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눈은 알고 있다.
하롱하롱 꽃잎이 잠드는
뒷뜰을 알고 있다.
한여름 줄기차게 뜰을 넘어가던
장미의 마른 향기,
향기는 뜰을 채우고, 벌판을 채웠다.
누가 열 것인가, 저 하늘을.
그대와의 자유를 충분히 토론하고
참담한 유형의 고독을
하늘에 길이 뻗고, 걸어간다.
작은 숨결이
대회전의 꿈을 약속하는 시간,
얼킨 팔다리는 더욱 붉게 맺어진다.
전쟁이 끝나는 곳에서
노래는 시작된다고
거인인 그대가 뇌까리고 있을 때
장미의 혼은 피고 또 핀다.
쌓인 슬픔의 겹겹을
붉은 피 가득 빛나게 한다.
녹차를 마시며
김종해
그대여
눈빛보다 먼저 입술로 오는구나
눈 오는 날 밤이 아니더라도
그대 연록의 잠옷을 입고
뜨겁게 뜨겁게 나를 깨우는구나
봄밤의 푸른 달빛으로 감기는
우리들의 은밀한 접합
알 수 없어라
두 손으로 감싸쥔 잔 속에
그리운 이의 몇 모금 향기이듯
그대여
오늘 밤 내 잔 속에
뜨거운 몇 잎의 봄을
풀어놓고 가시려는가
누군가가 떠나갔다
김종해
바람이 분다
천지에 낙엽이 흩날린다
한 시절 삶을 끝내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나뭇잎은 저마다
몸속에 제 이름을 새긴 문양이 보이고
투신하기 전에 껴안고 살았던
아찔한 벼랑 하나가 보인다
이 세상의 삶을 끝낸 누군가가
먼길 떠나기 전 그곳의 벼랑
평생 낮은 곳에서 뜻을 벼룬 사람은
하늘에 올라 별이 되고
나뭇잎은 지상으로 내려와
슬픈 이름을 받든다
하늘과 지상의 경계 사이에서
바람은 불고
벼랑 하나씩을 껴안고
서로 이름을 부르며
나뭇잎은 떨어져서
누군가가 떠나간
가을을 적멸(寂滅)로 물들게 한다
눈
김종해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이다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 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릴 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
김종해
새해 첫날 아침
유리창으로 굵은 눈송이가 들이친다
바람은 눈송이를 이고 하늘로 오른다
나는 고층 아파트와 함께 끝없이 하강한다
간밤의 어지러운 꿈속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지워지고
공중에서 새해를 맞는 아침은 눈 세상
각을 세운 세상 속으로 나는 하강한다
사선을 그으며 파닥이는 눈송이들의 율동
세상 속으로 연착륙하는 눈송이는
저마다 하얀 날개를 갖고 있다
가슴 속의 각을 지우고
시야에서 사라지는 눈송이
새해 첫날 아침 내리는 눈은
지상에 닿기 전에
내가 가진 세상의 각을 지우고 있다
느닷없이 봄은 와서
김종해
봄은 화안하다
봄이 와서 화안한 까닭을
나는 알고 있다
하느님이 하늘에다 전기 스위치를 꽂기 때문이다
30촉 밝기의 전구보다 더 밝은 꽃들이
이 세상에 일시에 피는 것을 보면서
헐, 나는 하느님이 능력을 믿는다
봄은 눈부시고 화안하다
사람과 세상이 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긴긴 겨울밤은 하느님이 스위치를 꽂지 않으니
어둡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 느닷없이 봄은 와서
내 눈을 눈부시게 한다
늦저녁의 버스킹
김종해
나뭇잎 떨어지는 저녁이 와서
내 몸속에 악기(樂器)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간 소리 내지 않았던 몇 개의 악기
현악기의 줄을 고르는 동안
길은 더 저물고 등불은 깊어진다
나 오랫동안 먼 길 걸어왔음으로
길은 등 뒤에서 고단한 몸을 눕힌다
삶의 길이 서로 저마다 달라서
네거리는 저 혼자 신호등 불빛을 바꾼다
오늘 밤 이곳이면 적당하다
이 거리에 자리를 펴리라
나뭇잎 떨어지고 해지는 저녁
내 몸속의 악기를 모두 꺼내어 연주하리라
어둠 속의 비애여
아픔과 절망의 한 시절이여
나를 위해 내가 부르고 싶은 나의 노래
바람처럼 멀리 띄워 보내리라
사랑과 안식과 희망의 한때
나그네의 한철 시름도 담아보리라
저녁이 와서 길은 빨리 저물어 가는데
그동안 이생에서 뛰놀았던 생의 환희
내 마음속에 내린 낙엽 한 장도
오늘 밤 악기 위에 얹어서 노래하리라
당신을 위하여
김종해
잠자지 말아줘요
보리밭의 보리들이 자라거든 그대 곁에서 보리 피리를 불겠어요
작년에 시든 벌판의 풀잎들이 이 봄에 무성하게 하늘을 이거든
풀잎을 따서 풀피리, 풀피리, 풀피리를 불겠어요
내 곁을 떠나선 안 돼요, 잠들어선 안 돼요.
사라지고 넘어지고 죽어지는 것들의 이름 속에서
무너지고 쓰러지고 없어지는 것들의 헛된 이름 속에서
오오, 잠자지 말아줘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깊은 곳에 숨어도
내 가슴에 흐르는 사랑의 피가
그대의 깊은 잠 머리맡에서
그대가 기르는 들판과 풀잎을 지켜보아요
오오, 잠자지 말아줘요
당신의 난로 - 드디어 나는 눈이 멀었다 - 나의 말
김종해
나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난로를 보아요
연기마저 보이지 않는 불꽃
다른 이에겐 보이지 않는 화염을
나는 당신에게서 보아요
당신 곁에 있으면
나는 늘 화상을 입어요
나는 보아요
영원의 한순간을
지상의 사랑이 떠올라 별이 되는 것을
나는 보아요.
대한민국이 유리창에 떠 있다
김종해
광화문 근처 아파트로 이사 온 지 4년
삶의 가파른 벼랑을 날마다 오르느라
나는 대한민국의 안위(安危)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놈의 좌파와 우파, 온갖 노조와 이익집단이
광화문의 멱살을 잡고
대한민국의 숨통을 죄고 있을 때도
나는 귀를 막았다
아파트 창문을 닫아걸고 커튼을 내렸다
인왕산도 북악산도
아직 이삿짐을 풀지 않은 밤
한밤중 불면의 시간 속에
광화문이 조금씩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나는 예리한 그 소리를 들었다
이사 온 첫해부터 들었던 그 소리는
수십만의 매미가 일제히 몰려와 내는 함성이었다
저 미물들이 내는 경고음에 잠을 설치며
내일 대한민국이 날아오르는 박동을 생각했다
광화문 근처로 이사를 오고 난 다음부터
나는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축구를 사랑하는 열혈 팬들이
문밖에서 연호하는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밤마다 유리창에 등불처럼 떠 있다
그런 날 밤에 나는 조용히 창문을 연다
도시의 새
김종해
서울에서 가장 먼저 겨울이 오는 곳을
나는 모른다
겨울이 오든 말든
사람들은 종묘 앞 공원에 서성거리고
저마다 몰래 감춰둔 날개를 꺼내
하늘을 날기 시작한다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보고 있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그들이 이 도시에서 막 떠오르는 찰나
사과탄 연기가 그들의 발목을 붙들었다
포도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은 낙엽이지만
포도에 떨어진 그들의 옆구리에는
먼 겨울 길을 가는 붙박이 철새의 날개가
비죽이 나와 있었다
나는 알지, 이 도시의 지붕
천년의 겨울이
그들이 날아가는 하늘을 가로막고 있어도
저 뜨거운 날개가 있는 한
날아오르고 다시 날아오르고 할 것임을
나는 잘 알지
동안거(冬安居)
김종해
한겨울의 석 달 동안은
세상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요리를 한다
눈을 감으면, 눈 밑에 잠든 숲과 평원,
채찍을 든 매운 바람 속을 지나
눈덩이 속 이글루 안에 나 어느덧 혼자 있다
모자를 벗고 언 손을 녹인 뒤
얼음 도마 위에서 칼질하는 요리사
어젯밤 눈 속에 파묻어 둔
상형문자가 된 짐승의 내장
한 획, 한 줄의 온기를 적출하라
그러나 나는 먹지도 못하는 시를 쓰는구나
눈 덮인 한 장의 평원 위에
누구의 한 끼 보시도 못할 붓질을 하는구나
눈 감으면 하늘 위에 얼어붙은 야밤의 오로라
눈을 가리지 않았음에도
한겨울의 극지(極地)는 어둡고
허기진 깨달음은 언제나 외롭고 목이 마르다
따뜻한 봄날
김종해
대티고개 너머 구덕산에서
아버지가 지게로 지고 오신 나뭇단 꼭대기에
진달래꽃이 꽃혀 있다
젊은 아버지가 장난삼아 지게 위에 쓴 시(詩)는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진달래꽃만 곁에 두고
솔가지를 꺾어 아궁이에 넣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어머니의 얼굴 위에
황홀하고 발그레한 무늬를 수놓았다
시보다 아름다운 무늬가
젊은 어머니를 뜨겁게 했다
물을 설설 끓고 가마솥 위에 떡시루
김은 하얗게 장지문을 적시는데
떡은 다 익었다, 떡은 다 익었다,
절구통에 떡칠 일 빼놓고도
젊은 아버지는 할 일이 많으시다
따뜻한 봄날
부엌 강아지 같은 어린 아들이
할 일 많은 아버지 옷깃에
자꾸 걸치적거린다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김종해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까
나의 동무들은 모두 떠나고
나 혼자 남아있다
외로워지니까 추억이 그 자리를 넓힌다
내 안에서 인기척을 내는 것은
무인도뿐이다
저 혼자 바위가 되거나
바람이 되는 것이다
하루치의 미세량!
무인도에선
그리운 사람의 이름만
파도 소리를 내고 있다
면회
김종해
수감되어 있는 너를 만나려고
아들아 네가 갇힌 쇠창살 바깥쪽에
나는 서 있다
역할이 바뀐 우리들의 시대
네가 가진 진보와 혁신이 아직 서툴고
뽀오얀 최루탄 연기 속에 연행된
네 청춘의 봄을
나는 탓할 수 없다
탓할 수 없는 것은 너뿐만은 아니다
아들아 이 봄날 나도 외치고 싶구나
살아가는 일 모두가 쇠창살이 되어
나를 갇히게 하는 이 봄날
또 다른 감방 하나가 내 안에서
육중한 문에 자물쇠를 채우는구나.
모두 허공이야
김종해
이제 비로소 보이는구나
봄날 하루 허공 속의 문자
하르르 하르르 떨어지는 벚꽃을 보면
이생의 슬픈 일마저 내 가슴에서 떠나는구나
귀가 먹먹하도록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벚꽃을 보면
세상만사 줄을 놓고
나도 꽃잎 따라 낙하하고 싶구나
바람을 타고
허공 중에 흩날리는
꽃잎 한 장 한 장마다
무슨 절규, 무슨 묵언 같기도 한
서로서로 뭐라고 소리치는 마지막 안부
봄날 허공 중에 떠 있는
내 귀에도 들리는구나
목화꽃을 따다
김종해
눈 오는 날
바람은 목화꽃잎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지워진 먼 길 위로 산이 떠오르고
허공에 떠오른 나무들이 희끗하다
저녁까지 날리는 눈은
목화꽃 송이를 더 벌게 하고
귀청까지 막아
물소리를 재우고 천지마저 재운다
이런 날, 허공에 떠 있는 목화꽃 송이마다
천사가 깔깔대고 있다는 것을
눈여겨 본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물, 우리의 사랑법
김종해
이 여름날
내가 물이 되어 흐르고 있을 때
그녀는 대지가 되어 와 눕는다
그녀를 향해 끝없이 하강하고
그녀의 모든 굴곡을 더듬어
익숙하게 흐를 때
솟구쳐오르는 분수의 말이거나
절정의 높이에서 하얗게 투신하는
폭포의 말이거나
나는 나의 화법으로
그녀 위에 되풀이 쏟아짐으로써
나의 여름은 완성된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임하는
우리들의 사랑법
우리 살아가는 일 저와 같아서
이 땅 있음에
사랑은 영원하여라
미궁 속에서
김종해
새벽에 문득 잠이 깨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초겨울의 흰 눈이 집집의 눈썹에
매어달리고
방안에 둔 용설란의 발등에
설레이는 먼 겨울의 풀빛의 바다,
오늘 누가 내 영혼의 발등에
새 물을 길어붓나
아이들은 모두 유년시대로 돌아가고
몇 주일째 우리 집 연후(咽喉)에 와서 걸린 언어장애,
이사야書 제25장 제8절을
소리내어 읽으며
이 겨울 새벽에 문득 나는 깨어
어디로 가고 있나
도처에서 누전(漏電)되어 와닿는 세상의 착오,
한 계절을 불면과 감기로 보내며
小兒的인 악몽에 몸을 도사리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베갯머리에까지 차오르는 겨울바다에
정박한 한 척의 외로운 꿈이
수천 톤의 운명의 짐들을 풀어놓고는......
이 새벽에 문득 잠이 깨어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바늘귀
김종해
틑어진 단추를 달기 위해
고희를 넘긴 아내가
바늘귀에 실을 꿰어 달라고 한다
예닐곱 살 때 어머니의 바늘귀에
직방으로 꿰었던 그 실이
오늘 내 손끝을 달군다
어머니의 푸른 하늘을 꿰차며 날던
그 방패연과 실꾸리
아내가 내민 바늘뀌에 실을 꿴다
돋보기를 쓰고도 바늘 구멍을 찾지 못해
나는 허둥댄다
갈 길을 찾지 못해
바늘귀 바깥에서 헛짚는 시간
바늘귀 하나 꿰지 못하는 나는
무엇을 잃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바늘귀가 내 앞에 절벽처럼 서 있다
바람부는 날
김종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적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반품
김종해
그대에게서
반품이 되어 돌아온 내 詩를
오늘은 작두날로 쓸어
파지로 버린다
전에는 국판 크기였는데
오늘은 탈색된 B-6판 크기의
쓸모없는 세상의 한쪽에 비켜서서
작두날마저 먹지 못하는
파지로 버린다
몇 대의 트럭에 실려
파지공장으로 떠나는
저 낯익은 얼굴!
그 트럭 위에
오늘은 내가 반품으로 앉아 있다.
벚꽃 지다
김종해
이제 비로소 보이는구나는
봄날 하루 허공 속의 문자
하르르 하르르 떨어지는 벚꽃을 보면
이생의 슬픈 일마저 내 가슴에서 떠나는구나
귀가 먹먹하도록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벚꽃을 보면
세상만사 줄을 놓고
나도 꽃잎 따라 낙하고 싶구나
바람을 타고
허공중에 흩날리는
꽃잎 한 장 한 장마다
무슨 절규 무슨 묵언 같기도 한
서로서로 뭐라고 소리치는 마지막 안부
봄날 허공중에 떠 있는
내 귀에도 들리는구나
봄꿈을 꾸며
김종해
만약에 말이지요,저의 임종 때,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열두 달 가운데 어느 달이 가장 마음에 들더냐
하느님께서 하문하신다면요,
저는 이월이요,라고 서슴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눈바람이 매운 이월이 끝나면,
바로 언덕 너머 꽃 피는 봄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
네,이월이요.한밤 두밤 손꼽아 기다리던
꽃 피는 봄이 코 앞에 와 있기 때문이지요.
살구꽃,산수유,복사꽃잎 눈부시게 눈처럼 바람에 날리는
봄날이 언덕 너머 있기 때문이지요.
한평생 살아온 세상의 봄꿈이 언덕 너머 있어
기다리는 동안
세상은 행복했었노라고요.
봄날 열흘
김종해
슬픈 일 하나에 깊이 빠져서
누구나 어둠 속에 갇힐 때가 있다
세상이 어두워 캄캄할 때가 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세상
천지에 봄날이 와도 봄날 같지 않구나
그런 날 어둠 속에서 꿈꾸듯
아침 유리창 햇살을 걷어 올리면
슬픔이 있던 자리
아! 거기, 눈부신 봄날
창밖은 수천의 환호하는 꽃잎들이
나 보란 듯이
반짝반짝 빛난다
벚꽃이 피고 지는 봄날 열흘 동안
바람은 불고
조도(照度) 30촉의 분홍 꽃잎들이
하늘에서 사방으로 흩날린다
더러는 내게로 와서 나를 깨우는
봄날의 꽃잎
슬픈 날을 지우는 꽃잎도 있다
봄날은 약속처럼 눈물처럼
김종해
며칠째 황사 바람이 불더니
비가 오더니
대낮마저 캄캄하더니
오늘 아침 일시에 세상이 눈부시다
촛불시위하듯 벚꽃이 앞장서고
홍매·청매·산수유
담장 위엔 개나리꽃
진달래·목련꽃·유채꽃도 피어 있구나
이 환한 꽃잔치 속에서
약속처럼 눈물처럼 봄날은 왔는데
너네들, 지금 어디 가 있나
먼길 떠난 동무들이
하나 둘 꽃잎처럼 공중에서 펄럭인다
차창 위로,
서행하는 내 승용차 보닛 위로 와서
봄날은 동무들과 함께
약속처럼 눈물처럼 꽃잎을 뿌린다.
봄날, 화염병을 던졌다
김종해
산에 들에 번지는 불꽃.
사월이 오면
누군가가 만들어 던지는 화염병 시위
누가 저 불길 좀 잡아다오
뒷짐지고 서 있기가
괴로운 봄날
봄바람
김종해
개같이 헐떡이며 달려오는 봄
개들은 깜짝 놀라 날아오르고
꽃들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속치마 바람으로
반쯤 문을 열고 내다 본다
그 가운데 숨은 여자
정숙한 여자
하얀 속살을 내보이는 목련꽃 한 송이
탓할수 없는 것은 봄뿐이 아니다
봄 밤의 뜨거운 피가
천지에 가득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뜨뜻해지는
개 같은 봄날!
봄이여 무심하구나 - 이어령 선생님을 그리며
김종해
바람이 불자
벚꽃 꽃잎이
하르르 하르르 날린다
꽃지고 바람부는 그 짧은 순간을
그 사람은 볼 수 없다
평창동 영인문학관 언덕 위
눈부신 하늘을
그 사람은 두고 떠났다
그 사람 떠나고 없는 봄날
바람이 불자
푸르고 슬픈 하늘 위로
꽃잎이 하르르 하르르
또 떨어진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다
김종해
서울에 며칠째 폭염경보가 내려진 8월의 첫째 주
3.1 독립선언을 선포했던 기미년 100주년
우리 조손(祖孫) 3대는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손주들이 함께 하는
두만강 건너 옛 발해가 숨쉬는 땅
한겨울 혹한기에 바다가 얼면
간도 지방에서 인마(人馬)와 함께 건너가던 땅
해외 독립운동의 전초기지
뜨거운 햇살 아래
신한촌이 자꾸 눈에 밟혔다
대한의 자주와 독립을 꿈꾸며
새 삶과 자유를 갈망하던
유랑 한인(韓人)들의 고난이 시작된 곳
옛 개척리에서 쫓겨와
블라디보스톡의 변두리 산비탈
피땀으로 다시 일군 신한촌
지금은 이곳에 집시보다 더 슬픈
카레이스키들은 멀리 떠나고 없다
그 자리에 우리 조손(祖孫) 3대가 서서 올리는 묵념
한적한 신한촌 기념탑 앞에 서면
가슴이 시리다
세 개의 대리석 기둥 기념탑 주위로
계절마다 피고 지는 야생화가 자라고
누군가 잊지 않고 올려놓은 꽃바구니에는
민족의 번영을 기리는
한인들의 꿈이 담겨 있다
비밀
김종해
다섯 시간 동안 나의 영혼은 정전되었다
다섯 시간 동안의 수술을 통해
의사들은 내가 가진 불가사의의 풀잎들을 뜯어맞추었다
세포의 하나하나
내가 가진 우수의 실뿌리를 잘디잘게 풀어헤쳤다
미세한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
미세한 모든 것이 의사들에게 낱낱이 포착되었지만
그러나 단 하나
내 가슴 깊이깊이 감추어둔 비밀만은 찾아내지 못하였다
수술이 끝난 뒤 일주일 동안
의사들은 내 몸에서 끓어오르는 고열(高熱)을 잡지 못하였다
수술 뒤 일주일 동안 내 가슴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열풍에
의사들은 지치고 두 손을 들었다
아아, 시대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스스로 열풍을 거두어들였다
내 가슴 깊이깊이 감추어둔 단 하나의 비밀,
의(義)와 사랑으로 수놓여진 그 주머니 속의 열기를
부활하는 나라의 새 아침에
무릎 꿇고 조용히 당신께 바치리라
빗소리
김종해
빗소리 환히 창에 지네.
저렇게 시끄러운 빗소리들이
끌려간 내 님의 웃음소리들이
귓전에 머무네. 그 울음소리들이.
저마다 등 비비며 외치는 사람들은
욕망보다 더한 거짓말을 하고
숨어서 친구와 죄를 씻지만
나는 술집이네.
더운 피 터치는 숯불들이
검은 의식의 낱낱을 밝혀 놓고
허공이게 하네. 춤이게 하네.
나는 골목이네. 비틀비틀
문을 열고 다시 창이네.
빗소리 환히 창이 지네.
사라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김종해
누구에게나 바람이 불고 비오는 날이 있다
젖을대로 젖어서
슬픔을 슬픔이라 말할 수 없는 날이 있다
아픔을 아픔이라 말할 수 없는 날이 있다
세상에 보이는 것 모두,
움직이는 것 모두가 그대의 것이 아닌 날
오오, 그대여 기억하라
몸을 태우고 한 줄기 연기만 남긴 사람들을 생각하라
오늘 그대 뺨에 흐르는 눈물만이
재가 되지 않는 사리,
그대가 쥐고 있는 한줌 보석이다
사람으로 살아보니까
김종해
사람으로 살아보니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함께 살아가는 대자연 속의 또 다른 생명을
날마다 뜯어먹고 삼켜야
사람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야채나 우유와 밥과 고기가
누구의 삶을 허물어뜨려야
비로소 사람의 식탁에 오르게 된다는 것
일평생 살면서
먹고 삼키며 살생한 죄는
스스로 죄가 아니라고 한다
채소 잎사귀 한 장, 생선 한 마리 굽는 일마저도
누구 하나 마음 아파한 적이 없다
사람으로 살아보니까
사람의 식탁이
때로는 죽비로 나를 깨운다
사모곡
김종해
이제 나의 별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지상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나의 별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
어 머 니
새
김종해
님과 나는 날지 못하는 한 마리 새 되어
숨어서 울어라
떨리는 님의 숨소리 내 품속에 사무쳐오니
이 아픔 함께 나누노니
식어가는 그대 입술 위의 마지막 향기
아, 나는 그윽한 그 향기를 입술에 물고
천고(千古) 뒤까지 날아야 하네
커다란 죽음이 님과 나를 덮을지라도
아, 나는 날아가 그것을 전해야 하네
새는 자기 길을 안다
김종해
하늘에 길이 있다는 것을
새들이 먼저 안다
하늘에 길을 내며 날던 새는
길을 또 지운다
새들이 하늘 높이 길을 내지 않는 것은
그 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새벽 뜰에서
김종해
밤 사이 꽃들이 궁거워
잠이 깨자마자 내려선 뜨락,
아직은 좀 싸늘한 맑은 바람 속에
언제나 그렇듯 낯익으면서도 낯선 손님처럼
새벽이 나보다 먼저 내 뜰에 와서 서성거린다.
선잠을 깬 백목련(白木蓮) 꽃송이들이
부시시 눈을 뜨며 하품을 한다.
목단(牧丹) 꽃망울들은
그 현란한 너털웃음을 단단히 숨긴 채,
아직도 한참은 더 자야 할 모양이다.
기지개를 펴는 라일락 가지 끝마다
숨가쁘게 향그러운 입김을 내뿜는
쌀알만한 흰 꽃알갱이들.
모두 다 입맞추고 볼 비비고
어루만져 주고 싶은 귀여운 것들.
이렇게 봄철 새벽 뜰에는
또 한 무리의 애타는 식구들이
바깥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을.
새 아침의 기도
김종해
아버지
새날로 시작되는 오늘 새 아침
깨끗한 희망 한접시
햇살 한접시
공기 한접시
우리의 식탁위에 오르게 하소서
가장 소박한 것의 은혜를
크게 깨닫게 해주시고
어제의 풀어지고 느슨한 나사를
오늘은 꼭꼭 죄어주소서
일하러 나가는 사람의 어깨위에
기쁨과 보람을 더 얹어 주소서
우리 살아가는 일의 중심이
평범한 자의 행복에 있음을
치중해주소서
슬픔이 있는날
괴로움이 있는 날을 지내온 사람에게
더 큰 행운을 적용해 주소서
아버지
하늘을 주시고 빛을 주시어
더 바랄 것이 없는
새날로 시작되는 오늘아침,
당신을 찬송하기에는 우리의 식탁에
너무나 빈 접시가 많이 놓여 있음을
당신은 보소서
우리의 살아가는 일의 비바람 불고
천둥 번개치는 날은 견딜 수 있지만,
하늘에서 땅에서 바다에서
우리 사는 길목마다
재앙의 뇌관이 터지고
끓어진 길 위에서
허둥대는 사람들을 보소서
절망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보소서
우리 살아가는 길 위에서
암초를 거두소서
위험해, 위험해, 미리 경계하시고
그 뇌관을 지워주소서
하늘의 길, 땅의 길
물길도 길은 길이지만,
남을 위해 일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길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소서
아버지, 새 날로 시작되는 오늘 아침
깨끗한 희망 한 접시
햇살 한 접시
공기 한 접시
우리의 식탁위에 가득하게 하소서
서정시인 허페즈의 무덤을 밤에 찾아가다
김종해
페르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서정시인
허페즈의 무덤은 그의 고향 시라즈에 있다
허페즈 공원 안에 안치된 그의 유해는
14세기의 대리석 관 안에 그대로 누워
모든 페르시아 영혼들의 사랑을 받는다
여름밤에 그의 무덤을 찾아가서 경배했는데
히잡을 쓴 젊은 여성들이 그의 관에 기대어
허페즈 시집을 읽고 있다
부러워라
사랑과 평화와 안식의 아름다움
이란 사람들은 누구나 허페즈를 사랑한다
이란 사람들의 집집마다
서가에 꽂혀있는 두 권의 책
한 권은 코란
한 권은 허페즈 시집
올해의 운수, 그날의 길흉을 점치려면
파랑새 점을 쳐보세요
새장 안에서 새가 물고 나온 점괘에는
이란 시성 허페즈의 시 한 구절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길을 환하게 안내한다
섬
김종해
동백잎으로 얼굴 가리고
밤이면 내 바다로 오는 여자,
그리운 섬 하나 머리에 이고
내 배의 이물에 오르는 여자
내 오늘 우리나라 남해에서 흔들리나니
집어등을 켜지 않아도
밤바다는 내 그물마다 넘치나니
불빛이 실리나니
그대가 이고 온 섬 하나에
대륙의 숲과 바람을 가득 채워서
천년의 사랑으로 떠 있게 하마.
다만 사랑할 일 하나만
저 섬에 동백나무로 심어두고
아침이면 물결로 돌아오나니
섬 하나
김종해
어머니가 이고 오신 섬 하나
슬픔 때문에
안개가 잦은 내 뱃길 위에
어머니가 부려놓은 섬 하나
오늘은 벼랑 끝에
노란 원추리꽃으로 매달려 있다
우리집 눈썹 밑에 매달려 있다
서투른 물질 속에 날은 저무는데
어머니가 빌려주신 남빛 바다
이젠 저 섬으로 내가 가야 할 때다
소주를 맛보다
김종해
저녁 식탁에 앉아 소줏잔을 기울인다
식도를 타고 전류보다 빠르게
위胃까지 흐르는 화기火氣
문득 증류소주를 만들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부산하고도 천마산 아래
그래, 열 살이었던 나는
아버지를 과학자처럼 지켜보았다
불 지핀 거대한 무쇠솥과 천장에 매단
가느다란 몇 겹의 구리관을 통해
한 방울, 또 한 방울
흐르는 증류소주를 맛보던 아버지
식도를 타고 빠르게 위까지 도달하기 전에
아버지는 50도의 화기火氣를
혀 끝에 올려놓고 승부를 건다
옆집 `복상 아저씨'도 맛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득한 세월의 저쪽
벼랑 끝의 그 승부사들을 떠올리며
나는 소줏병의 마지막 술잔을
혀 끝으로 맛본다
손칼국수 그 집
김종해
비오는 날은 칼국수
점심을 먹으려고 우산을 편다
우산 위에서 튀는 빗방울
광흥창역 네거리
칼국수집으로 가는 동안
밀가루 반죽을 방망이로 치대는,
펄펄 물이 끓어오르는
광흥창역 네거리 칼국수 그집
바지락조개 다싯물을 마실 때마다
칼로 썬 굵은 국수가락이
어머니의 손맛을 흔든다
비오는 날 손칼국수 그집엔
특별한 것이 있다
징소리마저 귀에 덩덩 울린다
시를 읽다
김종해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시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집 속에 끈끈하게 저희끼리 결속되어 있던 시들이 바닥에 부딪쳐 허공으로 일제히 튀어 오르고, 시의 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성음으로 하얗게 허공에서 반짝이다 천천히 천천히 높이를 버리고 떨어졌다 바닥에는 피가 흘렀다 응고된 말들이 모두 풀어지니까 그게 모두 시처럼 보였다 시집은 시를 모두 버렸다 하얀 종이뿐이었다
시인 선서
김종해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 시(詩)이며, 거짓말 시(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 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
김종해
사춘기가 끝나자 아들은 가출을 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반장이었던 아들, 집과 학교가 없는 낙원을 찾아 아들은 문득 가출을 했다. 체제와 사회에 각을 세우고 갓자란 뿔을 들이댔던 어린 양 한 마리. 뿔은 가렵다. 목가적인 집안의 목책은 뚫렸고, 담임 선생님은 학내 감염을 우려해서 교실 곳곳마다 구제역 백신을 뿌렸다. 몇날 며칠 동안 텅 빈 구윳간을 보며 아버지는 잠을 설쳤고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했다.
가출한 아들을 찾아서 아버지는 노숙자의 역(驛)과 어린 짐승이 뛰어놀 만한 야생의 산과 초원을 뒤졌다. 아들의 절친 인맥을 하나하나 찾아 헤매던 아버지, 드디어 단서를 찾았다. 아들에겐 음악이 있었다. 아들은 초식(草食)이나 육식(肉食)보다 향긋한 음악에 더 정신을 쏟고 있었던 것을.
기적소리조차 검은 서울역 근처 남영동의 한 음악다방 DJ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 아들은 음악다방 문을 밀치고 나와 바람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그 뒤를 아버지가 쫓아갔다. 기적소리조차 검은 서울역 뒤 골목에서 골목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바람보다 빠르게 달렸다. 목책 바깥을 나와 길을 잃고 달려가는 어린 양 뒤로 아버지 양이 달려간다.
석탄재 날리는 막힌 골목에서 마지막 질주는 끝나고,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짚고 헉헉헉헉. 아들은 머리를 숙이고 헉헉헉헉. 아버지와 아들 사이엔 세상의 어떤 인간의 말도 오가지 않았다.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헉헉,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오랫동안 헉헉헉헉.
아직도 사람은 순수하다
김종해
죽을 때까지 사람은
땅을 제것인 것처럼 사고팔지만
하늘을 사들이거나 팔려고 내놓지
않는다
하늘을 손대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은 아직 순수하다
하늘에 깔려있는 별들마저
사람들이 뒷거래하지 않는 걸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순수하다
어머니와 설날
김종해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어머니의 맷돌
김종해
맷돌을 돌린다
숟가락으로 흘려 넣는 물녹두
우리 전 가족이 무게를 얹고 힘주어 돌린다
어머니의 녹두, 형의 녹두, 누나의 녹두, 동생의 녹두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녹두물이
빈대떡이 되기까지
우리는 맷돌을 돌린다
충무동 시장에서 밤늦게 돌아온
어머니의 남폿불이 졸기 전까지
우리는 켜켜이 내리는 흰 녹두물을
양푼으로 받아내야 한다
우리들의 허기를 채우는 것은 오직
어머니의 맷돌일 뿐
어머니는 밤낮으로 울타리로 서서
우리들의 슬픔을 막고
북풍을 막는다
녹두껍질을 보면서 비로소 깨친다
어머니의 맷돌에서
지금도 켜켜이 흐르고 있는 것
물녹두 같은 것
아아,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열쇠
김종해
삽입하자마자
안에서 놓치지 않고 물고 돌아가는
탄력 있는 금속성
황홀하다 황홀하다
손끝에서 온몸으로 옮겨붙는
마음의 성감대를
나만 혼자 가진 것일까
삽입하자마자 찰나에 감응하는
순발력을 나는 좋아한다
아무도 없는 잠긴 문밖에서
나는 절정의 순간을 교감한다
찰나 속에 스치는
황홀한 우주의 블랙홀을
오늘도 잡았다
옷에 대하여
김종해
아침에 어머니가 지어주신 옷
해지기 전까지 입고 있었는데
으스름 저녁에 돌아와
인생의 옷을 벗으매
내 안에 마지막 남은 것이
비로소 보인다
구름 한 벌, 바람 한 벌
하느님 말씀 한 벌!
외로운 별은 너의 것이 아니다
김종해
떨어지는 잎을 보며 슬퍼하지 마라
외로운 별 그 안에 와서
사람들마저
잠시 머물다 돌아가지 않더냐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것이든 사라져 가는 것을
탓하지 마라
아침이 오고 저녁 또한 사라져 가더라도
흘러가는 냇물에게 그러하듯
기꺼이 전별하라
잠시 머물다 돌아가는 사람들
네 마음속에
영원을 네 것인 양 붙들지 마라
사람 사는 곳의 아침이면 아침
저녁이면 저녁
그 빈 허공의 시간 속에서
잠시 안식하라
찰나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
외로운 별은 너의 것이 아니다
반짝 빛나는 그 허공의 시간을
네 것인 사랑으로 채우다 가라
우리들의 우산
김종해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빗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리들 우산 안에 들어와 있다
잠시 접혀 있는 우리들의 사랑 같은
우산을 펴면
우산 안에서 우리는 서로 젖지 않기
외로움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서로 젖지 않기
물결 위로 혹은 꿈 위로 얕게 튀어오르는
빗방울 같은 우리 시대의 사랑법 같은
우산을 받쳐 들고
비오는 날 우산 안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가기
비는 내려서 우리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로 흘러가지만
정작 젖는 것은 우리들의 여린 마음이다
우산 하나로 이 빗속에서
무엇을 가리랴
젖지 않는 꿈, 젖지 않는 희망을
누가 간직하랴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물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산 만큼 작아져서 정답다
아직 우리에게 사랑이 남아 있는 한
한번도 꺼내 쓰지 않은
하늘 같은 우산 하나
누구에게나 있다.
우편 배달부
김종해
아직 바람은 차고
사람들은 저마다 한 그루 나목으로 서 있을 뿐,
저희 잎사귀와 푸르름을 달기 전의
신새벽 같은 그리움 속으로
우편 배달부이신 우리 아버지
당신은 집집마다
한 장 한 장 엽서를 보내 주시나니
아직도 봄에 대하여 자유에 대하여
그리움을 가진 분들께
우편 배달부이신 당신은
손수 한 장의 눈발로
지상에 강림하시나니
그 엽서 받아보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흘의 봄밤을
저희 땅에 예비하고
비로소 등불을 켜달고
먼길 채비를 하는 눈물겨운 풀잎들
아직 바람은 차고
이 2월에 무슨 일이 있든 말든
새로 혼령을 받아 거듭거듭 일어서는
저 하찮은 풀잎이 하는일 하나만 보아도
우리 아버지 뜻을 알겠네.
유월의 녹슨 철조망은 유월에 걷는다
김종해
2000년 유울의 둘째 화요일
평양의 순안 비행장에서
두 남자가 처음으로 굳게 손을 잡은 그날
나는 불어 터진 라면을 점심으로 먹었다
분단 55년의 철조망을 걷어내기 위해
두 남자가 맞잡은 손
진분홍 꽃술을 흔드는 평양 시민들의 환호와 열광이,
자발적이었든 동원되었던간에
가슴에 불을 붙이는데
나는 자꾸 눈가에 달라붙는 물기를 닦아내었다
오오, 이것이 눈물이었구나
그날 나는 '통일'이라는 낯익은 이름 때문에 목이 메어
불어터진 라면을 점심으로 먹었다
남북의 두 남자
나는 개인적으로 남북의 두 남자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러나 이날만은
'민족'을 어깨에 지고
'통일'을 등짐진
두 지도자가 더없이 소중하고 자랑스럽다
이 시대 우리의 가장 큰 희망
우리의 소원 앞에
다 함께 경건하게 다가선 사람
세계가 경악한 유월의 또 하나의 사변 앞에
대책없이 나는 젖을 수밖에 없다
세계가 분단 한반도에 축복을 보내는
2000년 유월의 둘째 화요일은
코리아의 날, 한민족의 날
*
묻지 마라, 우리에게 전쟁이 언제 있었는지
남에서 북에서 총폭탄이 터지고
깨지고 허물어지고 죽고 헤어지던
그 유월의 전쟁을 묻지 마라
그날의 상흔이 묻힌 유월에
남과 북은 오늘 서로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려 한다
가슴속에서 '적'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민족애'로 서로 굶주림을 채우려 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참으로 조심스럽게 큰 걸음 내딛는
자주통일을 향한 첫보법
남과 북이 서로 위하고 서로 나누고
서로 사랑하며
공존공영을 엮어가는 통일의 시대
한반도의 영광을 필생의 힘으로
오늘 우리는 준비하려 한다
평양에서 서울에서 숨가쁘게
조국통일의 꽃불잔치가 벌어질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 서울 마포의 구석진 사무실에 웅크리고 앉아
불어터진 한 그릇의 라면 국물을
눈물처럼 마신다
이모
김종해
생선장수 이모가 내다파는 바다
바다는 다 팔았고
도마 위에 비늘만 남아서
이모는 따로 할 일이 없는데
밤마다 새벽별은 이모를 깨우는데
청상과부 이모는 대답이 없다
이모가 다 팔아버린 바다
이 세상에 바다는 더이상 없다
이 봄의 축제
김종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풀잎은 일어서고
꽃들은 하늘에다 오색 종이를 날린다
일어선 풀잎 하나만 보아도
눈물나는 이 봄에
황사는 자욱하게 하늘을 가리고
일어서라일어서라일어서라고
누가 외치지 않아도
저 하찮은 들꽃들마저 일어서서
하늘에다 오색 등불을 매단다
嚴冬에 엎드려 숨죽이던 것들아
척박한 황지에 뿌리내린 쑥맥들아
누가 오늘의 이 축제를 숨어서 구경하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나도 풀잎으로 일어서서
황사 흩날리는 하늘에다 새를 날린다
아아, 이름을 짓지 않은 한 마리의 새를!
인사동으로 가며
김종해
인사동에 눈이 올 것 같아서
궐(闕) 밖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퍼다 버린 그리움 같은 눈발
외로움이 잠시 어깨 위에 얹힌다.
눈발을 털지 않은 채
저녁 등이 내결리고
우모(羽毛)보다 부드럽게
하늘이 잠시 그 위에 걸터앉는다.
누군가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를
눈 속에 파묻는다.
궐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내 생의 그리움
오늘은 인사동에 퍼다 버린다.
입관(入棺)
김종해
누구에게나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저녁이 다 있건만
그 하루를 뜻대로 채운 사람은
오늘, 행복하다
팔 것 다 팔고
손털고 돌아가는 자 앞에서
내 오늘 머리 숙여 경배하노니
그대 지은 옷에서
며칠 후, 며칠 후라는 말의
실밥을 뜯으며
눈물짓는 까닭은,
잔치국수 한 그릇
김종해
어머니 손맛이 밴 잔치국수를 찾아
이즈음도 재래시장 곳곳을 뒤진다
배고픔이 많았던 어린 시절
그릇에 담긴 국수 면발과
가득한 멸치육수를 다 마시면
배불러 든든해지는 잔치국수
굶어 본 사람은 안다
잔치국수 한 사발을 먹고나면
잔칫집보다 넉넉하고 든든해지는 것을
잡초 뽑기
김종해
호미로 흙을 파면서
잡초를 뽑는다
잡초들은 내 손으로 어김없이 뽑히고
뽑힌 잡초들은 장외(場外)로 사라진다
옥석(玉石) 구분하는 나의 손도 떨린다
하늘은 이 잡초를 길러내셨으나
오늘은 내가 뽑아내고 있다
밭을 절반쯤 매면서
문득 나는 깨달았다
이 밭에서 잡초로 뽑혀 나갈 명단 속에
아, 어느새 내 이름도 들어가 있구나!
저녁 밥상
김종해
스승 목월 내외분이 우리 집에 오셨다
상계동 저녁 어스름이 하늘에 깔리고
그 밑에서 불암산이 발을 씻고 있었다
목월은 지팡이로 불암산을 가리키며
그놈 참 자하산 같구나
저녁 밥상 위에는 어머니가 손수 기른
닭 한 마리 올라와 있다
아내와 아이들은 자하산을 모르지만
어머니 입가에 감도는 대웅전 같은 미소
북쪽 창에는 수락산이 고개를 들이밀고
우리 집 저녁 밥상을 훔쳐보고 있다
저녁, 유리 위로 출연하다
김종해
아직까지 나는 행복하다
식탁에 앉아 나는 혼자서 소줏잔을 비운다
16층 아파트 전면 강판유리에는
언제나 저녁 6시의 황혼이 붙어 있다
그 속에 내가 붙어 있다
말을 버린 나는 나에게 중독된다
잠시 뒤 노을을 지우고 어둠이 들어서고
유리 위에는 네온사인,
유리 속엔 적막이 들어 있고 내 얼굴이 겹쳐 있다
어둠을 배경으로 유리 무대 위에 내가 꽉 찬다
내 속에서 문제가 될 적막, 끄집어내지 않아서
나는 아직까지 행복하다
식탁 위에서 마시는 몇 잔의 술,
밤이 오기 전
16층 아파트의 전면 강판유리가
말을 버린 나를 복사하고 있다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김종해
사라져가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안녕히라고 인사하고 떠나는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그가 돌아가는 하늘이
회중전등처럼 내 발밑을 비춘다
내가 밟고 있는 세상은
작아서 아름답다
주여, 용서하소서
김종해
여름방학 중인
여자 중학교는 적막하다
빨간 4층 벽돌 건물 아래
여학생 하나 느닷없이 출현한다
초조하다
전후좌우를 경계하며 살핀다
급히 팬티를 내리고 스커트를 걷어 올린다
아, 엉덩이
하얗고 예쁜 꽃송이
쉬야를 한다
빨간 벽돌에 분사된 물줄기는 흘러서
하얀 엉덩이 뒤쪽으로 도랑을 이룬다
보지 마라!
눈을 감을 수도 없는 그 잠깐 사이
나는 중학교 이웃집 옥상에서
죄인이 된다
주여, 용서하소서
찔레꽃
김종해
2 - 별들도 궁녀처럼
오월의 며칠은 늦잠을 잘 수 없다
어머니가 이고 오신
달빛 열두 필
한뜸 한뜸 오려내어
찔레덤불 위에 부려지면
찔레꽃 향기 천지에 가득하다
오월의 며칠
노란 꽃술 흰 드레스로
새벽같이 어머니는 오시고
별들도 궁녀처럼 가만가만 뒤따른다
3
오월의 며칠은 늦잠을 잘 수 없다
밤새도록 하늘에서 별들이 내려와
찔레덤불 위에
하얗게 앉아 있다
알몸으로 웃고 재잘거리는
애기별똥별
주먹이 눈부시다
오오, 귀여운 것
개중에는 내 손주도 몇 앉아 있다
찔레꽃 열매는 눈 속에서 더 붉다
김종해
찔레꽃 열매는 눈 속에서 더 붉다
바람에 날려
흰 꽃잎 다 떨어지고
꽃잎 매달린 자리
오늘은 별들이 내려와 매달려 있다
한번 바람 부니까
지난 봄 간곳 없고
사람이 살다 간 자리
아슬하게 벼랑만 남아 있다
붉은 열매 떨어진 자리
오늘은 눈이 흰 꽃잎 오려 붙인다
천년 석불을 보다
김종해
괴로워하지 마라
그대 이생에서 몸 하나 가졌기 때문에
슬프고 기쁜 일 또한 그대 몫이다
그대 몸 하나를 버리고 이곳을 떠나면
슬프고 기쁜 일 또한 부질없으리
몸 하나 지니고
이생을 스쳐 간 사람들은 알고 있으리
그대의 몸 바깥에서 해가 뜨고
다시 해가 저문다는 것을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위로하라
짧은 날 빛 그 안에서
몸 하나 비우려고
바람은 저렇게 제 모습마저 지우지 않느냐!
천지 만물 중에서
김종해
참 우습지
잎 진 야생의 숲이며 나무등걸들
동안거(冬安居)의 승려들보다
더 진지하게
겨울 동안 죽은 듯 엎드려 있다가
봄이면 부스스 몸을 일으켜
가지마다 줄기마다
잎이며 꽃장식 하는 거
참 우습지
세상 살아본 사람들 눈에는
천지만물 중에서
왜 야생이 그 짓거리를 되풀이하는지
이 봄에는
좀 알아보고 싶구나
촛불을 켜신 어머니
김종해
새벽의 적막을 어머니는 두 손으로 감싼다
가족의 새벽잠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는 지혜롭다
어머니의 손안에는 소리를 죽이는 스폰지가 있다
부뚜막에서 사기그릇 부딪는 소리를 어머니는 잘도 죽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리는 것은
어머니 두 손 안에 스폰지가 있기 때문이다
새벽에 부뚜막에서 그릇 부딪는 소리를 죽이기 위해
어머니는 손끝에 닿는 그릇들에게마저
몸을 낮춘 시종이 된다
어머니가 부뚜막에서 자주 찾는 제왕님,
정안수 한 그릇과
새벽에 촛불을 켠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최근에 나는
김종해
최근에 나는 세 사람의 장님이 한 덩어리가 되어 걸어가는 것을
퇴계로에서 보았다.
번쩍이는 한 줄의 文章이 맨 앞에서 휘두르는 지팡이에서부터
손과 손을 맞잡은 세 사람의 장님을 지나
최근에 단절된 나의 어휘 속으로 순식간에 뛰어들었다
이 겨울에 내가 부딪힌 어둠,
어디서나 헛휘두르는 저 서투른 지팡이질,
어둡고 침울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겨울을
더듬더듬 헛짚으며 나아가는 나의 겨드랑이 곁에
세 사람의 문장(文章)이 익숙하게 팔짱을 꼈다
이 겨울에 외로운 것은 나만이 아니구나
괴로워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구나
어디서나 깔리는 어둠을 밟고
퇴근길을 걸어가는 나의 그림자 앞에 서서
세 사람의 장님은 걸어가고 있었다.
탄환
김종해
내가 만약 당신을 조준하여 날아간다면
날아가서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다면
가 닿아서 함께 불덩이로 흩어진다면
흩어져서 한순간이 영원으로 치솟는다면
나는 미련을 갖지 않으리
이승에 남길 나의 소중한 것들
내 하늘과 별과 바람과
이승의 온 갖 보석들을 버리고
탄환이 되리
내가 만약 당신을 조준하여 날아간다면
날아가서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다면...
텃새
김종해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새는 언제나 나뭇가지에 내려와 앉는다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하늘 바깥에서 노숙하는 텃새
저물녘 별들은 등불을 내거는데
세상을 등짐지고 앉아 깃털을 터는
텃새 한 마리
눈 날리는 내 꿈길 위로
새 한 마리
기우뚱 날아간다
푸른 별에서의 하루
김종해
우주 바깥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언제나 푸른 별이다
작고 아름답다
저 푸른 별 안에서
나는 지금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길은 사막 같기도 하고 강물 같기도 하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만리 바깥을 보지 말라던
앞선 사람들의 유훈을 깜박 잊어버렸다
푸른 별의 시공 속에 잠시 살았던
그 사람들이
가끔 꿈속에서 별로서 나타난다
푸른 별은 언제나 나의 일상 속에 있다
사람의 하루가 또 저물어가는구나
풀
김종해
1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풀잎, 말하다
김종해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마라
죽었다고 생각되는 만물과 자연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사람들은 가엾다
사람이 산다는 것
영원 앞에서는 허상(虛像)일 뿐
흙 속에 뿌리내린 한 포기 풀잎마저도
제 앉은 자리에서 속도를 지니고 있다
누구 하나 발견하지 못한 저 춤
별과 한몸이 되어 움직이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죽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살아서 영원을 움직인다
풀잎 한 포기에 말 걸어보면
풀잎은 말한다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마라
하늘을 날다
김종해
내가 가끔 기체를 끌어내어
하늘에 오르는 것은
내 사는 곳의 활주로를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하늘을 비행하면서
조종석 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낯익은 구름
이미 지상을 스쳐 지났던 그 뜬구름을
또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내 사는 곳에 떨어져 내린 별들보다
더 아름다운 인간의 등불을
이 밤에 황홀하게 내려다보고
또 내려다보고 싶기 때문이다
항로를 찾아가다
김종해
바람 불고 안개 자욱한 바다
젊은 날 탔던 500톤 알마크 호(號)가
가끔 내 꿈속으로 와 정박하다
나는 아직도 열일곱 살
온몸에 땀을 흘리며 밤새 뒤척인다
섬과 근해 어디에도 정박할 수 없는데
파고는 높고 밤새 나는 표류하고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항로 속에서
무적을 울리며 경광등을 번쩍이며
밤새워 물길을 간다
조선소(造船所)에서 이미 폐선이 된 알마크 호
왜 이 밤에 나는 조타실에서 식은땀을 흘리나
나는 왜 아직도 바다 한가운데에서
세상의 등불을 그리며 꿈을 꾸고 있나
철골 하나하나 해체된 젊은 날의 알마크 호
일흔 살이 넘은 나는
꿈 속에서도 물길을 가듯
아직도 찾지 못한 항로 하나 찾아가고 있다
항해일지
김종해
1 - 무인도를 위하여
을지로에서 노를 젓다가 잠시 멈추다.
사라져가는 것, 떨어져 가는 것, 시들어가는 것들의 흘러내림
그것들의 부음 위에 떠서 노질을 하다.
아아, 부질없구나
그물을 던지고 낚시질하여 날것을 익혀 먹는 일
오늘은 갑판 위에 나와 크게 느끼다.
오늘 하루 집어등을 끄고 남몰래 눈물짓다.
손이 부르트도록 날마다 을지로에서 노를 젓고 저음이여
수부(水夫)의 청춘을 다 바쳐 찾고자 하는 것
삭풍 아래 떨면서 잠시 청계천 쪽에 정박하다.
헛되고 헛되도다, 무인도여
한잔의 술잔 속에서도 얼비치는 저 무인도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
그러나 눈보라 날리는 엄동 속에서도 나의 배는 가야 한다.
눈을 감고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저 별빛을 향하여
나는 노질을 계속해야 한다.
2
이웃에서 항해하던 배가 한 척 침몰하였다.
야음(夜陰)을 타고 우리는 그가 살았을 때
떠 있던 그의 항로 위를 가 보았다.
대전 오류동의 물살이 거세었나
하늘에는 별, 땅에는 시인(詩人)
이승을 밝히던 그의 항해등도 울음소리도
물결 속에 흔적없이 가라앉았다.
그의 손때묻은 돛폭이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다감하던 우리의 선량한 어부,
흰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와
노질하는 우리의 돛대 위에 앉아 깃털을 날렸다.
해저를 걸어
천주교 공동묘지에 그의 유해를 조용히 내렸다.
해저 속에 그를 수장(水葬)하며 비로소 우리는
고인(故人) 몰래 눈물을 뿌렸다.
감추고 억제하던 우리의 슬픔을
우리들이 맞이한 이날의 부음(訃音) 위에
비로소 마음 놓고 뿌릴 수 있었다.
3
아무리 노질을 해도 이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구나.
물길은 사납고 며칠째 비가 오고 있다.
오늘은 노예선을 보았다.
약 5천만 톤의 선적 위에 그들의 고뇌와 슬픔이 못질 되어 있었다.
여보, 이 배는 어디로 가지요.
황량한 을지로의 물목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저희 배를 갖지 못한 자의 노질을 바라보다가
선창을 닫았다.
어제 삼각지의 비 오는 해협에서 침몰했던
한 불행한 남자(男子)의 난파 때문에
깊게 방수되어 있는 나의 조타실이 침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선창을 굳게굳게 닫아걸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핑계삼아 읽다.
비안개 속에서 어디선가 슬픈 무적(霧笛) 소리
길게 두 번 울린다.
4
상어는 이 도시의 어느 건물 안에서도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정작 나는 갑판 위에서 작살을 날리지 못하였다.
날마다 작살의 날을 시퍼렇게 갈고 또 갈았지만
나는 작살을 쓸 수 없었다.
무엇인가 그물에 걸려서 퍼덕일 것 같은 번쩍임의 예감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날마다 을지로나 청계천으로 노를 저어가지만
헛일이었다. 아아, 헛일이었다.
눈은 와서 이미 겨울 바다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석유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물 사이로 빠지는 눈 오는 바다를 금전출납부 위에 올려놓고
아침마다 도장으로 눌러대지만,
계산기 위에 결재서류의 숫자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지만,
한 장의 방한복으로 추위를 가린 젊은 수부의 항로는 어디로 열려 있나.
상어가 출몰하는 흉흉한 바다,
그물을 물어뜯고 배를 뒤엎어놓는 저놈의 상어,
음흉한 상어는 이 도시의 어느 건물 안에서도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아아, 나는 왜 작살을 날려 저놈의 심장을 꿰뚫지 못하나.
춥고 어두운 겨울 항로 가운데
오늘은 한 젊은 수부가 사는 화곡동에 닻을 잠시 내리고 잔을 나누다.
6
암초를 보았다
청계천이나 을지로, 삼일로나 종로
혹은 퇴계로의 어느 쪽이거나
노를 저어가는 곳마다 그것은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뿌리를 내리지 않은 어뢰마냥 둥둥 떠서
그것은 나의 배 곁에 따로 다가와 있었다.
항해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저 절대적인 힘의 덫을 우회하기 위하여
나는 한낮에도 날개를 접고 돛을 접고
점화하는 일마저 삼가야 한다
저 암초에 부딪혀 부질없이 사라져간
어리석은 수부들을 생각하라
우리가 날마다 떠 흐르는 바다 위에서
상하고 으깨어진 일이 어디 이것뿐이랴
진달래.개나리가 그리운 오늘은
선창을 활짝 열고
4월에 침몰했던 젊은 수부들의 혼을 떠올리다.
7
을지로 쪽을 날마다 항해하다가 느낀 일이지만 나는 바람 한 점 없는 이 고요한 바다에서 해적들을 불러 모으리라 작심하였다. 을지로 2가에서 닻을 내리고 한밤중에 자주 나는 이 부근에 가라앉았던 해적선을 인양하려 했지만, 마하트마 간디가 갖고 있을 법한 해저 케이블에 걸려 쓰러지기를 여러 번 하였다. 퇴계로 목에서 흐르는 물살을 타고 1960년 4월에 가라앉았던 수부(水夫)들이 갑판 위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는 시각에 황량한 바다를 항해하고자 하는 해적들과 함께 나는 안개 자욱한 이 항구에서 무적(霧笛)을 울리고 싶었던 것이다. 목발을 짚은 이 시대의 절름발이들, 애꾸눈이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싣고, 의(義)와 사랑을 선창 가득히 싣고, 개인적인 우수(憂愁)를 존중할 줄 아는 해적선의 수부들과 함께 날카롭게 이 시대의 물살을 가르고 싶었던 것이다.
10
노를 젓다가 기진맥진한 종로 뒷골목에서
우리는 흡반을 길게 드러내 놓고 서로 엉겼다.
포장 술집에서 우리는 밧줄을 잡아당기며
부담 없이 정박하기 위해
한 잔, 한 잔, 한 잔을 붓고 또 부었다.
너도 나에게 열어 주지 않았고
나도 너에게 열어 주지 않았던
우리의 단단한 껍질이 뜨겁게 달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지키기 위해
맞물고 있는 두 개의 껍질,
상처받지 않으려는 조심조심조심 때문에
우리의 낱말 위에 새로 돋아난 단단한 조가비
그 속에서 우리가 숨기고 있는 슬픔이야
하얗게 진주가 되든지 말든지
가슴 아픈 소금이 되든지 말든지
오늘은 노를 젓다가 기진맥진한 종로 뒷골목에서
우리는 흡반을 길게 드러내놓고 서로 엉겼다.
12
조선소의 전기용접공 김씨는 평소 말이 없다.
그가 사용하는 말이란
그가 하루 종일 땜질하는 용접봉의 숫자보다 적다.
용접공 김씨가 하는 일이란
도크 안으로 들어온 폐선의 내장을
새것으로 바꿔 끼우는 일이다.
빨갛게 녹슬은 쇠붙이에 불을 당기고
그가 든 용접봉이 적개심으로 이글거릴 때
그의 언어는 불꽃으로 나타난다
용접공 김씨가 절단기를 들고 일하는 날은
바다는 흰 파도를 거칠게 물었고
해저의 먼 산악은 우뢰 소리를 내었다.
그가 사용하는 용접봉은
전류의 충전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숨기고 있는 한(恨)으로 불꽃을 점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한(恨)을 숨기고 있었지만
젊은 나의 눈엔 그것이 보였다
이십오 년이 지난 지금
그의 항해가 끝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소의 전기용접공 김씨가 든 그 용접봉이
종로 뒷골목의 거친 물목을 항해하는
나의 손에 어느 날 문득 쥐어져 있었다.
13
시인들은 서울의 수위(水位)가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그리고 곧 해일이 일어나 바람 한 점 없는 평온한 이 도시가 침몰될 것이라고 얘기들을 했지만, 정작 그들은 지진의 진앙지를 어디라고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다. 이 도시의 밑바닥에서 그물을 던져 살아가고 있는 하찮은 수부(水夫)인 나는 밑바닥에서 울렁거림과 부르짖음과 그날그날의 흔들림을 잘 알고 있다. 지진의 진앙은 해저의 어느 곳에 잠복된 지층의 엇갈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해저가 아닌 더욱 다른 의미의 지층 간의 엇갈림 때문이란 것을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하찮은 수부(水夫)에 지나지 않으므로 형이상학적 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오늘도 약간의 미진이 또 있었다.
14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기로 했어
뜨거운 모랫바람
햇살에 잘 익은 청동빛 근육
깊고 깊은 바다에서 해신(海神)들이 울리는
종소리마저도
오늘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
깨질지언정 열리지 않는
석회질 속에 깊이 감춘 슬픔 때문에
나는 걸어갈 수 없었어
말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지킬 것 하나 없는 빈 공동(空洞)에
우리의 슬픔은 하얗게 진주로 굳어지고
갯흙바닥에 나뒹굴며
나는 결코 문을 열지 않기로 했어
안개를 걷으며 무적(霧笛)을 불며
그대 내 조가비의 햇살로 닿을 때까지
오늘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
15
에게해(海)는 청람빛,
삶과 죽음의 일천 겁 물굽이를 돌아
포세이돈 신전에 와서 나는 나의 바다를 비워내다
해신(海神)들이 울리는 아침 종소리는
어디에서도 울려오지 않았지만
귤빛 젖가슴을 드러낸 그리스 소녀가
에게해(海)를 지키고 있었다
지진과 바다를 관장하는 포세이돈,
나는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오늘 그가 지키는 청람빛 바다에
잠시 닻을 내리다
바람은 머리칼을 날리며
대리석 신전의 일만 년 허적(虛寂)을 뒤적이지만
포세이돈, 그대만은 알리라
내가 숨기고 있는 한(恨)과
내 해저에 잠복한 큰 지진을 그대만은 알리라
에게해(海)는 청람빛,
포세이돈 신전에 와서 잠시 정박하다
16
갠지스강(江) 물 위에 촛불을 띄웠다
황토물에 몸을 씻는 고행자의 기구(祈求)를
갠지스강(江)은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늙은 갠지스강(江)이 인도를 안고 잠들었을 때에도
동방의 지혜로운 빛은 강물 위에 넘실거렸다
형제여, 나는 타고르의 음성을 들었다.
형제여,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붉은 천에 묶은 2구의 시신이
물가로 걸어나왔다.
죽은 자의 흰 뼈가 가라앉고
허무 사이로 빠지는 바람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고별을 받아들였다
갠지스강(江) 물 위에 촛불을 띄우며
기우뚱기우뚱 삐걱거리며 흘러가는
이방인의 서툰 노질마저도
그녀는 부드럽게 품어 주었다
17
파리 정박 이틀, 나는 가보았다
셍 미셀 여자형무소의 단두대
돌벽으로 된 지하 암벽에
암혈의 어둠을 껴안고 죽어갔던 여인들을 만났다
죽을 때까지 돌벽에 새긴 저희의 이름
헬렌, 엘레나, 마들렌…
단 하룻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녀들은 차라리 지상의 자유와 공기를 버렸다
활달하고 부드러운 눈짓으로 그녀들은 달려나와
금빛 정조대의 열쇠를 흔들었고
나는 7백 년 저쪽의 시간의 벽 속으로
노질하기 시작했다
새벽 두시의 보랏빛 파리
술잔을 기울이며
정조대가 벗겨진 파리의 탄력을 힘껏 껴안았다
18 - 아구탕 집에서
아구란놈에대해이야기하고자한다. 아구란놈이해저海底에서입을벌리고물길을가고있을때는오징어·전광어·갈치·고등어·가오리·게따위가통째로들어와뱃속에쌓인다힘없고왜소한것들이눈을뜬채삶의본전까지아구의뱃속에상납해버린다.철벽위장을가진바다의날강도아구란놈이빠르게물길을가고있을때, 불쌍한것들아무력한것들아가급적밑바닥에더욱머릴처박고소리내지말라.
나는확신한다. 바다의날강도아구란놈이반드시이도시의어느곳에몇백마리, 몇천마리가눈빛날카롭게빛내며서식하고있는것을, 이도시의가장기름진물목에서음흉하게덫을놓아두고있는것을.
허전한 저녁나절,
종로에서 입을 벌리고 앞으로 앞으로 물길을 나아가면
아아, 내 뱃속에 와 쌓이는 것들.
몇 잔의 소주와 몇 잔의 비애
그리고 또 몇 잔의 적개심.
종삼(鐘三) 아구탕집의 아구찜을 어금니로 물어뜯고 뜯으며
씹고 또 씹을 뿐이다.
20
오늘은잔잔,황사바람마저불지않았다. 어느바다에도물이보이지않았으므로나는노를젓지않았다. 항해등도꺼버리고드디어나는빈손으로표류하기시작하였다. 흘러간시간속에서부표가하나씩떠오르기시작했다.
- 대낮에씨를받기위해이웃의유부녀와아버지가화간(和姦)하고있을때말이지요. 그때종마가되어달리던아버지가말이지요. 어떤체위로신음소리를내고있는지말이지요. 궁금하게여기고있을어머니가말이지요. 그때어머니는두남녀의대낮정사를돕기위해그간음을지켜주기위해말이지요. 문바깥에서문고리를잡고보초를서고있었지요. 그때도어머니의남빛바다에는물이보이지않았는데요. 항해등도꺼졌는데요.
그때다른여인의몸에서태어난여아(女兒)를나는항해중에여러번만났다. 순애야순애야, 그녀의얼굴은내가가진거울속에기끔비쳐보였는데성별만다른나의얼굴이었다. 아버지의생애를담은배가당감동의화장터에서소각되고난다음에도나의배는표류하였다. 아버지가물길을거슬러오르며꽃씨를심던그날불가사의한부표가오늘종로의물목에서불쑥떠올랐다. 순애야, 그러나나는너를알지못한다.
21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도끼로 패주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민중시를 쓰지 못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한낱 장사아치의 계산기가
더 소중스럽지만
민중민중민중민중민중민중
말의 남발보다
땀 흘려 일하는 개인주의를 더 사랑한다.
절망과 눈물과 구호를 단지 속에 묻어놓고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도끼로 패주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십 년 전,
아버지가 쥔 도끼자루는 녹슬었지만
밑바닥을 살았던 아버지의 적개심이
이 가을에
문득 내 손에도 쥐어져 있구나.
23
우리들의대장만출이가스스로저희삶과바다를반납한것(좋게해석해서)이라고가정한다면, 공구는정말달랐다.
공구는정말달랐다. 그녀석은이른봄에제일먼저피는할미꽃이고, 이른봄에천사에게서제일먼저날개를받아날아다니는찔찌리새였다. 청승맞게새의울음소리를잘내는공구의겨드랑이에는언제나날개가두장달려있다.
녀석이날개를퍼덕이며날아다닐때우리들은하늘속이거나별속에떠있었다. 위험해위험해, 초장동사람들은우리들이떠있는것이위험하다고항상공구의날갯죽지부터묶어놓았다. 우리들이숲속에서잡은찔찌리새를갖고놀다가새가죽자공구는울었다. 이른봄바다가보이는언덕에서새의장례식을올리며공구는한마리찔찌리새가되어울었다. 어른들에게날개를뺏긴공구는결코날지않았지만그대신한마리새가되어울었다. 며칠뒤공구가죽고우리들의머리위로처음보는커다란날개를퍼덕이며공구가날아올랐을때, 우리들은저마다함께날아오르려고버둥거렸지만모두땅으로떨어졌다. 그새는먼별속으로날아갔다.
별을보며인사동에정박하다. 새벽두시, 수부들은부질없이날아오르기를다투며술을마시다. 공구가가진날개를빌지않고나는착실하게나의노만저으리라. 노를젓고저어서저별에닿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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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공원의 열대실에 죽은 듯이 엎드린 악어는 박제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동전을 던져 악어를 깨우려 들지만, 악어는 정작 깊은 잠에 빠진 것이 아니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나도 정작 이 여름에 박제된 한 마리 악어일까. 종로나 청계천 물목을 어렵게 노질하는 수부, 내 친구 가운데도 악어가 한 마리 있다. 돈이든 여자든 먹성 좋게 해치우는 걸 나는 언제나 못본 척했다. 톱니같은 이빨로 강철과 대지를 잘라먹는 더 큰 악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같이 태풍이 이는 날은
나도 어차피 서울대공원의 동물원에나 가서
물질하는 한 마리
포악한 짐승이 되는 수밖에 없다.
27
우리의 수부 이탄(李炭)이 쓰러지고
죽은 임홍재(任洪宰)가 누웠던 휘경동 위생병원
이승과 저승의 물길을 넘나들던
우리의 수부 이탄(李炭),
우리는 마음 졸이며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가를 귀기울였다.
삶과 죽음의 절반
그때 중환자실에서
그의 아내가 외던 기도 소리
그의 가족들이 탄 배가 좌초해 있을 동안
우리는 진눈깨비 뿌리는 외항을 돌며 깃발을 흔들었다
고장난 그의 배가 수리되고 있을 동안
우리는 기울어진 그의 심전도를
지켜보고 또 지켜보았다
그의 배가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기까지
우리 또한 가야 할 물길
젊은 시인이여, 일어나라
그대 찢어진 돛폭에 우리가 달 수 있는 것은
한 줄의 맑은 사랑
한 줄의 궁핍한 시밖에,
더 무엇을 바라랴.
28 - 한려수도 물길에 사량도(蛇樑島)가 있더라
사량도 눈썹 밑에 노오란 평지꽃이
눈물처럼 맺힌 봄날
나도 섬 하나로 떠서
외로운 물새 같은 것이나
품어주고 있어라
부산에서 삼천포 물길을 타고
봄날 한려수도 물길을 가며
사랑하는 이여
저간의 내 섬 안에 쌓였던 슬픔을
오늘은 물새들이 날고 있는
근해에 내다 버리나니
우는 물새의 눈물로
사량도를 바라보며
절벽 끝의 석란으로 매달리나니
사랑하는 이여
오늘은 내 섬의 평지꽃으로 내려오시든지
내 절벽 끄트머리
한 잎 난꽃을 더 달아주시든지
30
정박등을 켜고 임시로 닻줄을 내린 곳
서초동, 그러나 아직도 안개고 밤이다
봄은 선미(船尾) 끝으로 물결처럼 사라지고
한 평의 바다도 얻지 못한 채
저 피안의 수풀과 꽃잎은 사라져가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날마다 별로 떠 있어
이승의 노질이 서툴지 않구나
한 사람의 별, 한 사람의 새
한 사람의 섬
이런 단순한 사랑의 말을 읽기 위해
오늘도 갑판 위에 나와 등피를 닦다
- 그리워하는 일 하나로 화재가 있었다고 나는 쓴다
- 사랑하는 일 하나로 화재가 있었다고 나는 쓴다
행진
김종해
세사람이장님행렬로가고있었다
세사람의장님이지팡이하나에매어달려서
노을길로노을길로가고있었다
앞사람은뒷사람이두손으로눈을가려주고
뒷사람은그다음사람이
그다음사람은뒤에선하나님이두손으로눈을가려주고
노을길로노을길로가고있었다
황톳길
김종해
황간에서 상주, 상주에서 두원 가는 길은
발바닥이 아프다
나는 여섯 살
배가 고파 하늘이 노랗다
가도가도 황톳길*
나는 주저앉아 있고
뒤따르던 제비꽃, 애기똥풀꽃이
황토분 바르고
엄마 등에 업혀서 쉬고 있다
소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농부가
엄마의 미색에 반해서
여섯 살 나를 번쩍 들어 소 등에 태웠다
무섭다고 악을 쓰며 나는 울었는데
발바닥이 아파도
배가 고파도
엄마와 단둘이 걷는 황톳길이
나는 더 좋았다
* 한하운 시의 일절
회항
김종해
겨울비 내리는 새해의 첫 주말
나는 너를 보려고
김포에서부터 날아올랐다
내가 가진 두 장의 은빛 날개
두 눈을 감고서도 고향 가는 길을 나는 안다
육신을 벗어난 영혼의 날기
그리움의 날기
나는 너를 보려고
시시때때 기체를 활주로로 끌어낸다
저 조그만 지상의 불빛이
우리 살아 있음의 사랑의 주소
겨울꿈들이 구름으로 떠올라 있는
네 하늘 위에서
그러나 나는 일순 멈칫거린다
접근 금지.
겨울 폭우 속에 빗장을 굳게 잠근
네 공항 위에서 몇 바퀴 돌고 돌다가
네 얼굴 언저리
두 뺨 위를 돌고 돌다가
깜빡이는 비행등을 달고 회항하는
겨울의 내 사랑아
5월의 사랑
김종해
그대는 내 남쪽 바다의
작은 섬으로 떠 있누나
섬으로 떠서
그대는 노오란 유채꽃으로 웃고 있누나
맑은 바람 있는 대로 풀어놓고
내 남쪽 바다의 물결을 다스리누나
다도해의 봄밤은 깊어 가는데
잠 못 드는 젊은 짐승
내 베갯머리에
물결로 와 찰싹이누나
초파일 꽃등행렬 위로
물인 듯 바람인 듯
그대는 내 남쪽바다의
작은 섬으로 떠 있누나
그대, 5월의 사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