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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산책(The Cliff walk) 1

절벽 산책(The Cliff walk)

Dong J. Snyder

 

프롤로그

 

페인트공이 된 교수님

.898월 하순 콜게이트 대학 영문과 교수로 부임

.923월 초순 내가 쫓겨날 거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함

.3월 중순 총장에게 해고 통지서를 받음

.6월 넷째 아이가 태어남

.7월 집을 내놓음

.92년 가을 지원한 28개 대학에서 거절 편지를 받음

.936월 이사(고향 메인 주로 돌아옴)

.여름 6개 대학에서 거절 편지를 받음

.834개 대학에서 거절 편지를 받음

.94년 가을 33개 대학에서 거절 편지를 받음, 골프장 청소부로 취직

.겨울 시간당 15달러를 받는 목수로 취직

이 사회에서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하며 살아간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에 충실해야 가장의 역할을 겨우 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나는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 인기도 있었고, 장밋빛 미래도 보장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40대 초반에 갑자기 해고된 이래, 지난 2년은 분노와 좌절과 죽음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좌절과 고통이 우리 가족을 괴롭혔으며, 나는 끝없는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나만 보며 살아가는 아내와 네 아이들 때문에 인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가야 했다. 그리곤 골프장 청소부를 거쳐 마침내 막노동을 시작하며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며칠 전, 나는 어느 돈 많은 여인을 만나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에게 창문 보수 작업을 맡기러 찾아온 여인이었다. 나는 여인을 따라 포도나무 수풀을 함께 걸어갔다. 이른 봄이라 그런지, 여인의 별장 안에는 기다란 소파들이 주검처럼 하얀 시트에 덮여 있었다. 실내 공간은 엄청나게 넓었다. 돌로 만든 벽난로, 그리고 참나무와 호도나무로 멋들어지게 만든 벽이 갖가지 무늬를 넣은 천장과 잘 어울렸으며, 바닥부터 천장까지 한쪽 면 전체를 통유리로 만든 아름다운 창에서 현란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페인트공으로 밥벌이를 시작한 이래, 이런 별장은 여러 번 구경했다. 부잣집 마나님들은 나를 좋아했다. 묵은 칠을 공들여 벗겨낸 다음에 새 칠을 하는 데다가 뒷정리도 깨끗했고, 커다란 라디오를 들고 와서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대는 일도 없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는 여름 별장족하고 대화를 별로 안 하는 편이다. 교수 출신의 잡역부라는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여인은 내가 우리 아이들 넷에게 차례대로 페인트 칠 시키는 모습을 우연한 기회에 보았다며 아이들이 정말 행복하게 자라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유쾌했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아이들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애쓰고 있다면서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바로 며칠 전 밤이었습니다. 우리 식구들 모두가 큰아이의 학예회에 가려고 서두를 때였지요. 나는 저녁 식사를 끝낸 다음, 설거지를 하다가 무심코 옆방을 보았어요. 그런데 바로 그곳에 너무나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지더군요! 네 살짜리 막내는 흰 양말과 검은 구두를 신은 채 하얀 속옷 차림으로 두 팔을 높이 치켜들어 갈비뼈를 앙증맞게 드러내며 서 있고, 열 살짜리 언니는 푸른 줄무늬 치마를 머리 위부터 잡아내리며 막내야, 가만히 좀 있어! 하며 소리치고, 아홉 살짜리 언니는 땋은 머리에 분홍색 리본을 묶어 주면서 막내야, 껑충껑충 뛰지마! 하며 타이르고, 여섯 살짜리 오빠는 두발자전거를 타다가 다친 동생의 무릎에 반창고를 붙여 주면서 막내야,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하고 소리치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니까 온몸이 저리도록 행복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에는 내 얘기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지, 여인은 잠자코 걷기만 했다. 하지만 계단을 다 내려간 다음,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면서 정말 행복하겠다고 하더니, 자기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았지만 당신 딸한테 무슨 일 하나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며 말했다. 그 덕분에 난 창문 하나 제대로 고치지 못한답니다. 자기 연민의 흔적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담담한 어투였다.

그리곤 내가 그 저택에서 혼자 일하는 이틀 동안, 여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이런 어마어마한 별장에 올 때마다 여기저기 들러보며 부자들이 사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습관이 있다. 빈방을 살펴보며 걷다 보니, 여인의 아버지 초상화가 방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딸은 아버지의 서재와 책상을 너무 꼼꼼하게 청소한 나머지, 내 눈에는 여인이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박물관 관리 같은 존재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사진 속에는 매력적인 미소를 살짝 머금은 귀여운 꼬마의 모습으로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옆에 선 여인이 바뀔 때마다 귀여운 꼬마의 매력적인 미소는 점차 엷어졌다. 여인이 다시 나타날 즈음엔 이미 여인에 대해 많은 내용을 알고 난 다음이었다. 그래서 오후 일을 마친 후에는 버들고리 베란다에 않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게 하루 일과처럼 되었다. 어느 날 오후, 여인은 자기 아버지가 다섯 번 결혼하고 다섯 번 이혼했는데, 저마다 이혼의 대가로 이 저택을 한 조각씩 떼어갔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배다른 자녀와 손자, 손녀가 많아서, 자신이 별장을 쓰는 기간은 기껏해야 일 년에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된다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제일 먼저 이 별장을 사용하다가 똥파리들이 우르르 몰려들 여름 휴가 직전에 서둘러 떠나곤 하죠. 자기 연민의 감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담담한 어투가 존경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여인을 보면 아내 생각이 난다면서 말했다. 아내는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여자예요. 나한테 바라는 건 자기를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는 것뿐이지요. 이 말에 여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일을 마친 날, 여인은 수표를 끊어 주면서 아름다운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다시 반복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삶의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 역시 이 나라를 살아가는 다른 많은 사람처럼 안정된 직장과 안정된 미래를 한순간에 잃어버렸다고. 해고된 이후, 너무 억울해서 근 2년 동안 비난할 사람만 찾아다녔다고. 살아가기가 아주 힘들어졌다는 뉴스를 접하며 위안을 삼다가, 마침내 삶이란 고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무엇이 가족을 위한 최선이고 무엇이 최악인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최악을 선택했다고. 그래서 가족 전체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고.

나는 여인에게 혹시라도 다시 고장이 날지 모르니 아예 창문 고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여인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기분 좋은 제안이었던 모양이다. 여인은 앞치마부터 둘렀다. 우리는 함께 층계를 올라 3층까지 갔다. 여인은 창틀 가장자리에 연필 자국 몇 개가 촘촘히 찍혀 있는 창문을 골랐다. 여름이 되면 어머니가 자신의 키를 재던 추억 어린 자리였다. 간단한 작동 원리를 깨달은 여인이 두 눈에 아름다운 빛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나는 처음 집을 지을 때 아주 좋은 부품을 사용한데다 이음매를 수제품으로 튼튼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작동 원리만 알고 있으면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곤 여인이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란 사실을 깨닫기 이전에 이 집에서 누렸을 행복의 깊이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자 여인이 갑자기 조그만 소녀로 변하더니, 우리 딸아이 가운데 하나로 보이기 시작했다. 여인에게서 아이의 모습을 보았는지, 아이에게서 여인의 모습을 보았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한 손에 망치를 든 채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배웅하던 여인이 아직도 눈에 선할 뿐이다.

 

1. 별을 보며 스케이트 왈츠를

 

내가 쫓겨날 거란 소문이 학교 안에 막 떠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학생이 나를 찾아와서 냉혹한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머리도 좋고 감정도 풍부한 학생이었다. 처음에는 안됐다고 위로하더니 나중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불평을 터뜨리고 말았다.

베이비붐 세대가 이렇게 자꾸 직장에서 떨려 나면 우린 정말 난감해요! 직장에서 쫓겨나면 꼭 쇼핑센터나 식당 같은 데서 잡일을 하는데, 그럼 우리 같은 학생은 여름방학 때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란 말입니까?

나는 이 말을 그다지 마음에 새겨두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만사가 너무나 잘 풀려나가고 있었던 터라,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삶과 실제로 벌어지는 삶의 경계선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남보다 앞서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절대 남보다 뒤쳐지지 않으려고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약속을 하고 필요하면 미소를 보내는 생활에 성년의 대부분을 바치고 나니, 그동안 억세게 운이 좋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가 19923월 초순이었다. 그때 난 아내와 6월에 태어날 막내까지 합쳐 아이 넷을 둔 마흔한 살의 가장이었다. 우리는 뉴욕 북부의 작은 도시에서 남한테 빚지지 않고 별로 힘들지 않게 큰 집에서 그럭저럭 유복한 생활을 하며 서둘 것 없는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저기 쥐덫을 놓은 메인주의 허술한 아파트를 떠나 미식축구 장학생으로 비싼 사립대학을 다니고, 지금은 감사하다는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 두둑한 연구비를 받아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 익히 느끼고 있었던 안정과 특권이 보장된 삶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멈출 수 없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일당도 적고 야망도 없이 그저 토요일 밤에 주말 프로나 보면서 일 년에 고작 두 주일의 휴가를 보내는 전형적인 노동자로 살아가던 삼촌과 할아버지, 그리고 사촌들을 뒤로 하고 열심히 달렸다. 나는 내 가족과 친척들이 인간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딱히 쓸 데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을 알 만큼 철이 난 다음부터는 내 주변 사람들 과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치 불길을 피하는 사람처럼 삶에 가속도를 붙여서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결코 뒤는 보지 않았다. 유망한 일자리가 눈에 보이면 언제라도 자리를 옮겼다.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어도 더 좋은 직장이 없나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나 알고 싶었고 더불어 그네들 입에서 거, 참 대단한 친구로군! 하는 감탄사를 듣고 싶어서 일부러 입사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다. 거의 완벽한 행복을 보장하던 메인 대학의 좋은 자리를 그만두고, 삼촌 둘이 은퇴할 때 받은 퇴직금의 합계보다 더 많은 돈을 준다는 콜게이트 대학의 영문과에 새로 자리를 얻었다. 당시 인기가 대단하던 텔레비전 광고 하나가 생각나는데, 잘생긴 아일랜드계 남자가 새로 나온 세숫비누를 손에 들고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푸르른 초원을 가로지르며 달려가는 내용이었다. 19898월 하순에 콜게이트에 도착하니, 대학 캠퍼스의 잔디와 운동장이 어찌나 무성하고 푸르던지, 그 광고를 혹시 여기서 찍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학생들은 이 대학을 콜게이트 캠프나 콜게이트 컨트리클럽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언젠가 학생들이 다른 대학을 마다하고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몇 가지를 알려 주었는데, 그건 내 연구실 건너편에 자리 잡은 스키 슬로프와 스쿼시 코트, 훌륭한 실내 테니스 코드,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를 조금만 벗어나면 닿을 수 있는 18번 홀 골프장과 트랩 사격장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이 학교의 법대 대학원 진학생 숫자가 상위 20위권 안에 든다는 학문적 매력이었고, 1인당 알코올 소비량으로 따졌을 때 콜게이트 대학이 전국 최고의 파티 학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세 번째 이유였다! 하지만 내가 콜게이트를 선택한 진자 이유는 실속이었다. 학교가 명문 대학 모임인 아이비리그에 아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아이비리그에 속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한 걸음만 더 옮기면 아이비리그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슨 책이든 필요하면 도서관에 주문할 수 있는 수천 달러가 포함된 다양한 목록의 수당도 물리치기 힘들었다. 또한 주말을 가족 단위로 보내면서 식사까지 할 수 있는 호수의 산장, 캠퍼스 근처에 주택을 마련할 수 있는 저리의 융자금, 3,000달러의 여름 연구비와 필요한 경우에 쓸 수 있는 유급 연구 조교, 넉넉하게 운영되는 건강 진단과 이빨 치료 및 생명 보험,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 곱절로 증식되는 환상적인 퇴직 연금, 아내가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각종 교사 자격증 취득 강좌, 교직원 자녀에게 모든 학비를 지급하는 장학금 제도, 구내 서점의 할인 제도, 신형 매킨토시 컴퓨터 지급, 3년 강의 후에 얻게 될 유급 안식년 휴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부한 시간! 시간적인 여유야말로 가장 큰 매력이었다. 성탄절 휴가 5주일, 봄 휴가 10, 여름 휴가 3개월, 모두 합하면 1년에 유급 휴가가 대략 4개월 반이나 되었다. 게다가 학기 중에 주당 2일을 쉴 수 있으니 2개월 반의 휴가가 추가되는 셈이었다. 이건 꿈이었다. 강의 시간은 첫 학기에 주당 9시간이 전부였고, 둘째 학기엔 주당 6시간뿐이었다. 우리는 대학 캠퍼스와 초등학교에서 얼마 안 떨어진 가로수 길가에 방 여섯 개가 딸린 주택을 구입했다. 대학과 관련이 없는 주민 대부분은 최저 임금이 겨우 넘는 정도의 수입으로 살고 있었지만 우리는 대학에서 받는 봉급으로 왕족처럼 살 수 있었다. 아내 콜린도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살림만 하고 싶다던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다. 처음 맞는 12월의 겨울은 딱 이틀만 빼고 거의 매일 눈이 내렸다. 캠퍼스는 동화의 나라로 변했다. 우리는 꼬마들을 썰매에 태워 온 시내를 데리고 다녔고 스키장에도 올라갔다. 아내는 눈으로 천사를 만드는 멋진 비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언젠가 로렌스 홀 3층에서 열린 학과 회의 도중에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바라보니, 우리 가족들이 안들에 모여 거대한 눈사람에 마지막 손질을 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밤에 펼쳐지는 정경은 훨씬 더 눈에 선하다. 유난히 환하고 추운밤이면 우리 부부는 밖으로 나와 않아서 별을 바라보다가 들어가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 시절 우리 부부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면, 그건 아내가 너무 정직하다는 사실 하나였다. 아내는 메인주의 전형적인 농촌 출신답게 남한테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 타입이었다. 어느 날 아침, 교수 휴게실에서 같은 학과의 여성 해방론자들과 함께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아내가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같이 잡담을 나누던 동료 여교수가 아기를 낳았는데 기저귀 갈아 주는 데 아까운 청춘을 다 바치기가 끔찍해서 유모를 들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자, 아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최악의 경우에는 하루에 기저귀가 열 장까지 나오지만 한 장을 갈아주는데 130초 정도밖에 안 걸린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교수들이 아내를 아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앞으로 더 좋은 학교로 자리를 옮기려면 그 여자들 한테서 추천서를 받아야 될지 모르니 말을 조심해서 하라고 시킨 적도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우리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이 하도 쾌활하고 적극적인 나머지, 나는 다른 어느 교수보다도 많은 시간을 내서 학생을 지도하고 집까지 초대하여 저녁을 함께 하거나 영화를 같이 볼 정도였다. 문학에 대한 무한한 열정 덕분에 내 강의는 캠퍼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수업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교수들 대부분이 말도 안 되는 문학 이론을 따분한 목소리로 강요하는 동안, 학생들은 밀려드는 잠귀신과 영웅적으로 투쟁해야 하는 것이 바로 당시 우리 학과의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력에 비해 많은 보수를 받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마다 봄만 되면 학생 위원회가 선출한 올해의 교수에 선정되어, 문학을 학생들의 삶 속으로 끌어들인 나의 헌신적 노력을 극구 칭찬하는 예쁜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콜게이트 대학에서 가르친 지 3년째가 되던 19923월 어느날, 나는 공교롭게도 그런 감사의 편지와 함께 이사회에서 해고를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총장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래도 해고 조건은 대체로 적절한 수준이었다. 남은 학기를 마칠 수 있고, 정기 인상분이 반영된 다음 학기 봉급 및 연금 총액에다가, 토론회의 고문으로 일하고 싶으면 추가 수당 3,000 달러를 더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내가 면직된 건 순전히 우리 대학의 영문과 정년 보장 교수의 정원이 이미 꽉 찼기 때문이라는 내용과 함께 총장이 나를 다른 대학에 적극 추천하겠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열세 살 적에 처음으로 야채 판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래 나는 단 한 번도 해고당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당장 머릿속에서 떠오른 반응은 무언가 착오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실수로 명단이 바뀌었겠지. 아내가 방금 전에 창문에 새 커튼을 달고 아이들 방에 페인트칠을 막 했었는데.... 그뿐인가! 예금 계좌에 남아있던 마지막 9,000달러를 빼내서 주철 파이프를 구리 파이프로 바꾸고 석면 바닥을 이제 막 벗겨냈는데.... 그래 맞아. 착오로 명단이 바뀐 게 분명해. 게다가 얼마 안 돼서 아기도 새로 태어날 거고, 우리 아버지는 뇌종양 때문에 목숨이 위태롭단 말이야. 이 친구들아! 뒤편 베란다에 않아 총장이 보낸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고 또 읽었다. 그러고 나서 캠퍼스 언덕을 올라 총장실로 가서 면담을 신청하고, 차례가 될 때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겐 확신이 있었다. 아니,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볼 수 있을 거라는 교만한 생각이 가득했다. 완벽한 논리를 전개하며 지금까지 내가 성취한 모든 업적을 이야기하면서 총장에게 정확한 인상을 심어 주면 결정이 번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비서들이 열심히 전화를 받고 앞에 놓인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시키고 있었다. 그래, 그러면 될 거야. 나야말로 영문과에서 신입생 세미나를 가르치는 유일한 교수이고, 학기마다 고급 강좌를 담당하는 유일한 교수이며, 자진해서 복수 학급의 필수 개론 강좌를 가르치는 유일한 교수라는 사실과 아울러 지도 학생이 나보다 많거나 연구를 나보다 많이 지원한 교수는 없다는 학과 사정을 아주 침착하게 설명해야지. 맞아, 총장은 개인적으로 나를 잘 모르니까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려 주어야 해. 내 이름으로 출판된 자랑스러운 저서 세권이 있고, 대학원 학점도 놀랄 정도로 우수하고, 게다가 인사 기록 카드에 적힌 평가도 후한 편이니까 내가 조금만 강하게 밀고 나가면 충분할 거야. 총장은 정중하면서도 좀 서두르는 눈치였다. 학생과 동료 교수들한테 지극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내용으로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약속하는 동안에도 총장의 눈길은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흘끔흘끔 훔쳐보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시게나, 총장 어른! 지금 나한테 추방령을 내리면 안 되나이다. 물론 안 되고 말고. 우리 서로 시간을 좀 가지고 이야기를 하사이다. , 필요하다면 오후 시간을 전부 할애해도 좋겠지.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냐구? 그야 당신이 총장 책상에 않아서 컴퓨터 게임이나 즐기고 있는 동안 내가 여기서 이룩한 업적에 대해 할 이야기가 아주 많기 때문이지. 준비했던 말을 꺼내 놓았다. 하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는 총장의 미소는 나라는 존재를 이미 외면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입원해 계실 뿐 아니라 조금만 지나면 아기가 태어난다는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목소리가 조금씩 가파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 말이 끝나자 총장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숨이 막혔다. 총장의 미소는 석고로 만든 듯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나로선 몹시도 당혹스럽고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총장의 손은 나가는 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아이들 침대 머리맡에서 넬과 에린에게 <작은 천사>를 읽어 주었다. 아이들이 잠들자 희미한 전등이 비치는 마룻바닥에 앉아 읽어 주던 책 표지 안쪽에다 난생처음으로 가계부라는 걸 써 보기 시작했다. 계산을 해 보니, 매달 고정적으로 드는 생활비가 꼭 2,000달러 남짓이니까 남은 봉급에서 매달 140달러를 저축할 수 있었다. 봉급 지급이 내년 81일 자로 중단될 것이므로 앞으로 17개월의 저축이 보장된 셈이었다. 합계 2,380달러. 하지만 마지막 봉급을 받기 전에 주택을 구입할 때 쓴 융자금 5,000달러를 대학에 상환해야 한다. 따라서 이사에 드는 비용을 제외하면 약 3,000달러에 가까운 돈이 모자랐다. 그날 밤 아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손전등을 들고 방을 하나씩 차례로 돌아보면서, 혹시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 있는지, 또 처분을 한다면 얼마나 돈이 될는지 따져 보았다. 세탁기와 건조기 500달러. 아내는 오후의 햇살이 듬뿍 쏟아지는 커다란 창이 난 세탁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 창 아래에 매단 길고 낮은 선반에는 매일같이 정갈하게 개어놓은 세탁물이 놓여 있었다. 물론 나는 아내가 이곳에서 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주방에는 거친 판자로 내가 직접 만든 식탁이 놓여 있었다. 이건 꼬마들이 엄마와 함께 그림물감으로 칠한 것이기 때문에 아마 20달러밖에 안 나갈 것이다. 아이들 놀이방에도 20달러 정도는 받을 만한 탁자 하나가 더 있었다. 일전에 석고판으로 땜질한 천장 구석을 손전등으로 비춰보았다. 이 집에는 내가 이런 식으로 손을 본 곳이 여남은 군데나 되었다. 나는 내 기준에 맞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달라붙어 해치웠다. 기준이란 간단하다. 시작해서 하루 안에 완전히 끝낼 수 있으면 된다.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중요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루가 넘어가면 곤란했다. 여름이 되면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작은 정원을 만들 요량으로 키우고 있던 묘목이 창문 문턱을 따라 쭉 배열되어 있었다. 무릎을 꿇고 딸아이가 휘갈겨 쓴 묘목의 이름표를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이름을 적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고 잘못 써서 지우고 다시 쓰는 동안에 아이들 엄마는 옆에서 이름을 바르게 표기하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으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으리라.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점검해 보았다. 냉장고에 붙여놓은 액세서리들은 한쪽으로 치운 다음 긁힌 자국이라도 있나 살펴보았다. 못 돼도 200달러는 받을 수 있을 것 같군. 사랑방에 400달러는 족히 나갈 벚나무 책상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젊었을 적에 쓰시던 책상이었다. 그래서 아내도 이 책상만큼은 단순한 가구 이상으로 애착을 보이며 우리 아이들한테 꼭 물려주겠다고 작정한 터였다. 거실에는 각각 100달러와 50달러가 나갈만한 긴 소파 두점이 있었다. 그리고 팔걸이가 달린 의자 두 점도 있었다. 최소한 75달러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건조실 옆에는 아내가 겨울이면 그곳에 앉아서 잭에게 젖을 먹이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언젠가 앞가슴을 열어 젖을 물린 채 한 손으로 아기의 금발 머리를 연신 쓰다듬던 아내의 모습이 눈에 어렸다. 2층으로 올라가니, 꼬마들 침대 위에서 흔들리는 모빌 노리개도 그렇고 벽과 옷장에 매달려 있는 레이스 장식도 그렇고, 어디를 가나 방마다 아내의 손길이 느껴졌다. 어둠을 관통하는 기다란 빛을 따라 걸었다. 어쩐지 내가 도둑이라는 느낌이, 아니 왠지 실내 분위기 전체가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아내와 꼬마들이 이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만한 걸 모두 내놓으며 어림잡아 1,200달러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허리띠를 꽉 졸라매고 산다면 매달 들어가는 잡비를 400달러에서 200달러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3,400달러를 더 저축할 수 있다. 따라서 콜게이트 대학에 5,000달러를 갚고 나면 학교를 그만둘 즈음에는 수중에 2,000달러 정도가 남게 된다. 다음날 총무과에 가서 알아보니, 현금으로 받을 수 있는 연금 총액은 대충 16,800달러였다. 세금 3,200달러를 뺀 나머지 13,600달러를 예상 저축 액수 2,000달러와 합하면 모두 15,600달러였다. 이 정도면 아주 비관적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콜게이트 대학에서 17개월 치의 봉급을 모두 받을 즈음이면 비상금으로 15,600달러는 마련할 수 있다. 이 돈을 모두 사용할 때까지 매달 고정수입을 보장하는 새로운 직장을 찾으면 된다. 게다가 우리가 투자한 만큼만 돈을 받고 집을 팔 수 있다면 걱정할 건덕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내에게 내가 해고될 예정이라는 말을 해야 되는데, 적당한 기회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한쪽에는 새로 태어날 사랑스러운 아기와 나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아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해고 통보를 받은 내가 있었다. 몹시 추웠지만 아주 맑은 밤에 마침내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 내가 닦아 놓은 뒷마당 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을 만큼 추운 밤이었다. 2층 침실로 올라갔더니, 아내 콜린은 책을 손에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임신 후반기의 요즘은 잠옷을 입고 잠들어 있는 아내를 번쩍 들어 올려 뱃속의 아기가 출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오늘 밤에도 아기가 움직일 때마다 잠든 아내의 눈꺼플이 가늘게 떨렸다. 한동안 침대에 앉아 있다가 잠을 깨우려고 아내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 우리, 스케이트 타러 가지. 지금이 몇 시조? 늦었어. 한밤중. 아내는 눈을 감고 잘 자라면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뜨거운 초콜릿 차 타 줄까? 아내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래층까지 안고 내려가면 같이 타러 가겠어? 빙판까지 왔지만 아내의 고운 얼굴을 마주한 나는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10년 전에 아내를 처음 만날 때의 기분이 느껴졌다. 우리는 밝은 별빛 아래서 보드카에 취한 러시아의 아이스댄서가 스케이팅을 하듯 비틀거리며 연기를 했다. 아이들은 우리들의 이런 연기만 보면 항상 킥킥대고 웃었다. 스포트라이트에서 나오는 원뿔 모양의 하얀 빛다발 속에서 아내를 빙그르르 돌렸다. 내 안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아내의 존재가 느껴졌다. 마치 내가 어디서 끝나고 아내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이런 순간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모든 인류와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지친 삶의 무게에 떠밀려 어제와 하나도 다른 게 없는 내일을 위해 의자에 옷가지를 걸어둔 채 잠들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우린 달랐다. 우리는 완전하게 깨어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알려줄 게 있어. 멋진 소식이야. 해고당했어.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아내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정말이냐고 물었다. 그 음성에 묻어 나오는 실망의 기색은 나로선 적잖은 놀라움이었다. 세월 저편으로 사라진 옛날이지만, 아내는 결혼 출발부터 대단히 모험적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으로 도망치는 일등칸 열차의 칸막이 속으로 숨어들어 코트를 둘러쓴 채 사랑을 나눈 적도 있었다. 게다가 아내는 항상 새로운 장소를 좋아했다. 1987년 주택 할부 자금으로 돈을 조금 모았을 때, 아내는 그 돈으로 가족 모두 아일랜드로 가서 겨울을 지내자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갓 태어난 아기와 18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한밤의 어둠을 뚫고 대서양을 건넜다. 샤논 공항에서 내릴지 더블린 공항에서 내릴지도 미처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내가 나한테서 손을 빼냈다. 이제 마법의 주문이 풀리고 아내는 나에게서 스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동계 올림픽 출전 준비나 해볼까? 내가 아내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내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더니 스케이트를 지쳐 나한테 와서 말했다.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아빠도 한동안 실직하신 적이 있어요. 그게 부끄러우셨던지 두 달 동안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처럼 식구들을 속이셨죠. 당신 아버지도 내가 크면서 본 주변 사람과 마찬가지야. 직장을 잃으면, 그 사람들한테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지. 정치나 종교, 심지어는 사랑까지도. 아내는 몸을 돌려 다시 어둠 속으로 스케이트를 타며 사라졌다. 아내는 이 일을 우리가 만난 이후 10년 만에 생긴 최초의 나쁜 사건으로 기록하게 될까? 건강하게 미소짓는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내던 10년이란 세월 동안에도 한밤의 사이렌 경보는 어느 누군가를 향해 계속 울지 않았던가.

누가 여기서 살게 될까? 아내 곁으로 가서 다시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리곤 다른 일자리를 찾을 시간은 충분하다고 덧붙이면서 아내를 끌어당겼다. 다음에는 어느 쪽으로 가고 싶어? 다시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머릿결에 얼굴을 밀착시킨 채 고개를 들어 한 그루 나뭇가지 사이로 이름 모를 별자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별자리냐고 물었더니 아내가 대답해 주었다. 아내 콜린은 내가 그런 모든 것에 관심을 갖도록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근방에서 자라는 꽃과 나무를 열심히 공부해서 아이들한테 가르쳐 주라고 성화였다. 아내는 아이들처럼 나 역시도 현재에 충실하면서 살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언제나 나는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광활한 야심과 막연한 공상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 왔다. 하지만 아내가 볼 때 그것은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빛과 마찬가지로 한낱 추상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었으리라. 내가 탈출하는 속도가 너무 빠른 탓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긴 그땐 정말 너무 빨리 움직인 나머지 관심다운 관심을 제대로 기울일 수가 없었으니까. 당신한테는 교수가 딱 맞는데. 생각에 잠긴 음성이었다. 그때 비로서 깨달았다. 나에게는 이곳에 기나긴 성공과 획득의 여정에서 스쳐 지나가는 한순간의 쉼터일 따름이지만 아내에게는 단란한 가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 전혀 걱정 안 해. 아이들도 여기를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아내가 주변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에린과 넬은 여기서 학교도 다니고, 잭은 여기서 걸음마를 배웠고, 또 얼마 있으면 여기서 새로운 아기도 태어나는데...모르겠어요. 여기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기 싫어요. 1년 동안은 이사 생각을 안 해도 돼. 당신도 여기서 좋았잖아요. 행복해 보였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래, 행복했지. 다른 데 가서도 행복할 거야. 그렇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고,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아니, 난 매일 이사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아내가 말했다. 지금에야 깨달았지만, 바로 이게 우리 둘의 차이점이었다. 나는 여기서 알고 지내던 사람한테 편지 한 장 쓸 여유도 없이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 나갈 터이지만, 아내는 이제부터 조금 있으면 헤어질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친구들과 만날 게 분명했다. 아내가 현관에 도착할 즈음에 내가 불렀다. 여보, 뭐 그리 큰일은 아니야. 직장을 잃었어. 그뿐이야. 더 나은 직장을 찾아보면 되잖아. 아내가 뒷문을 열자, 주방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마당에 쌓인 눈더미에 떨어졌다. 아내의 발걸음이 출입구에서 멈췄다. 잠시 나를 기다렸다가 같이 침실로 올라가자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노란 전등 박스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있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그냥 문을 닫았다. 그날 밤을 생각해보면 아니는 그때 불 켜진 출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리며, 새로 태어날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한밤중에 깨어나 앞쪽 창가에 앉아,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의 어둠에 싸인 지붕 너머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던 것 같다. 나는 밖에 남아서 혼자 스케이트를 탔다. 어쩌면 이 밤중에 깨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재고 조사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의 총합, 그러니까 무진 애를 써서 힘들여 얻었지만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그 모든 것을 열심히 헤아려 보는 사람이,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날 밤만은.

 

2. 속 죽은 시인의 사회 - 교수님 안녕!

 

유월에 카라가 태어났다. 정말로 예쁜 아기였다. 갓 태어난 아기는 우리 가족에게 황홀한 축복을 선사했다. 아기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맑은 눈으로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뱃머리를 스친 어뢰를 참치 떼라고 생각하며 실컷 낮잠을 즐기는 해군 제독처럼, 나 역시 내가 직장에서 떨려난 수백만 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그저 순간의 좌절에 불과한 것으로 믿고 싶었다. 현실적인 동료 교수 하나가 와! 일곱 살이 안 되는 올망졸망한 꼬마들이 넷씩이나 되다니! 하고 던진 말에도 나는 그래도 아직 쌍둥이를 두 번 정도 더 낳으면 좋겠어 하며 곧바로 대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아직 1년이라는 계약 기간이 온전히 남아 있으니까, 1992년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을 지낸 다음 이듬해 봄과 여름 동안 새 일자리를 구하면 되니 말이다.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여관처럼 7월에 아무렇지도 않게 집을 내놓았다. 태어나서 처음 다니던 학교와 정든 친구들을 뒤로 하고 떠나는 이별이, 뭐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아이들을 설득하는 역할은 아내의 몫이었다. 첫딸 에린은 9월에 여섯 살이 되었다. 우리는 생일 파티를 열어 주었다. 모두가 돌아간 다음 아내가 위층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있을 때, 나는 마루에 않아서 에린에게 이사 갈 도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새로 살 집이 얼마나 큰가를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에린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아빠, 난 그래도 이 집이 더 좋아. 그건 아빠도 알아. 하지만 새 집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걸? 에린이 어깨를 약간 치켜 올리며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빤 안 보고 어떻게 알아? 확실한 건 아니야. 얼떨결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지금 사는 집보다 더 멋지다고 그랬잖아? 그건 거기서 아빠가 더 좋은 일자리를 갖는다는 뜻이야. 물론 그때도 나는 더 나은 교수 자리를 찾고 있었다. 교수신문에 모집 공고가 있기 때문에 어릴 적 아버지처럼 일반 신문의 구인란을 구석구석 뒤질 필요가 없으니, 교수신문은 나에겐 참으로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그해 늦가을까지 스물세 군데에서 자리가 났다. 서너 군데 빼고는 지금보다 못했지만 스물세 군데 모두 신청서를 보냈다.

콜게이트 생활의 마지막 해는 그런 대로 괜찮았다. 어떤 식으로든 젊은 학생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다 그렇겠지만, 나 역시 학생들과 함께 일한다는 사실에 대해 엄청난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고, 문득 운명이 인간사를 주재하고 있다는 영감을 받기도 했다. 교수가 살짝 방향만 돌려줘도 학생이 인생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운명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한다. 마치 가정주부가 외투를 부엌 의자 등받이에 펼쳐놓다가 무심코 화초를 햇빛 쪽으로 돌려놓는 것과 똑같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심결에 그렇게 했지만 화초는 그 덕에 햇살을 듬뿍 받아 아주 잘 자라지 않는가! 이래서 천직이라고 불리는 직업이 더러는 있는 모양이다.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미식축구 선수로 덩치가 아주 큰 댄이라는 학생이 새벽 두시에 캠퍼스 안에 있는 스키 슬로프를 내려오다가 강철로 된 리프트 기둥에 부딪쳐 머리가 쪼개진 수박처럼 된 사건이 있었다. 살아날 가망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한 지 두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댄의 아버지가 나에게 연락을 해 왔다. 아들이 나에 대해서 묻던데, 한번 아들을 만나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더 놀라운 일은 내가 댄에게 꼭 읽어야 한다고 말했던 리차드 예츠의 혁명가의 길 이란 소설책도 함께 가져오면 고맙겠다는 요청이었다. 나로선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제작자를 꿈꾸던 스티브라는 학생도 있었는데, 이 친구가 영화 전공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려면 예술대학 교수들한테서 추천을 받는 게 유리했다. 하지만 녀석은 예술대학 교수들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스티브는 내가 지도를 맡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잃지 말고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UCLA에 원서를 내라고 격려해 주었다. 내가 맡은 학생이 그 학교에 들어간 적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스티브한테는 그곳을 권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두 주일 동안이나 글자 하나하나에 신경 쓰면서 추천서를 작성해 주었다. 입학이 결정되고 나서 스티브의 부모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왔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에 스티브의 아버지가 나에게 상체를 굽혀오며 나 같은 인재를 내보내는 처사야말로 콜게이트 대학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고 말했다. 세상일이라는 게 심심치 않게 그런 식으로 된다니까요. 하지만 뭐 개발에 편자라고 생각하십시오. 개발에 편자 말입니다. 아주 정확한 표현이었다. 개발에 편자라! 혼자서 중얼거리는 입놀림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보니 동료들이 저만치 아래로 보였다. 상상력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는 가련한 교수 나으리들, 안녕히 계시지요! 난 아니오. 나에겐 여기가 더 화려한 색채가 번쩍이는 어딘가를 향하여 나가는 도중에 잠시 스치는 곳에 불과할 뿐이오. 나는 마지막 몇 달 동안 콜게이트에 대한 복수극을 실행에 옮겼다. 어느 날 오후 늦게 학과장실에 들렀다. 그래서 문학 강의가 문학 일반, 특히 시에 담겨 있는 통찰력과 삶의 환희가 깃든 진짜 세계에서 살아 숨 쉬는 진짜 사람들을 무시한 채 학생들을 우리처럼 떠돌이 사이비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으니, 교수들 모두가 진정한 교육을 외면하고 있는 셈이라고 역설하면서 이건 살인입니다. 살인! 이라고 했다. 그런 다음 학과장인 여교수의 팔을 잡아끌고 복도로 나와서 학생회가 붙여놓은 벽보를 보여 주었다. 마지막 기말시험이 끝나는 즉시 모든 교재를 헌책방에 팔아 버리고 생맥주집으로 합류하기 바람!!! 저게 뭘 말하는 건지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대학에는 선량한 사람도 많았다. 학과장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내가 우리 모두 문학을 살해한 공범자라고 말했지만 학과장은 유쾌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동료 교수가 발렌타인 데이 파티를 주최한 적이 있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하나 꺼내다가, 지금 교수들이 혹사당하고 있다고 어떤 교수가 말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함께 잡담을 나누던 또 다른 교수가 볼멘소리로 간호사가 교수인 나보다 훨씬 돈을 잘 번다구 하고 지껄였다. 파티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파티에 오기 전에 아끼던 학생 하나가 자기가 치른 시험 답안지를 나한테 보여 주었다. 답안지 꼭대기에 교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밑에는 19822월 며칠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9년 동안 똑같은 시험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은 아버지는 여길 나오면 뭐가 어떻게 달라진다고 자꾸만 대학, 대학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 생각만 하면 정말 돌아 버리겠다니까요. 하며 투덜거렸던 것이다. 나는 잡담이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난 간호사보다 열심히 일하는 교수를 여지껏 본 적이 없습니다만. 마치 대포에서 금방 튀어나온 포탄처럼 흐트러진 차림의 인상 좋은 교수 한 명이 자신은 1주일에 80시간을 일한다고 대답했다. 상당히 많군요. 그런데 수업은 몇 시간인가요? 여섯 시간. 여섯 시간이라? 그럼 학생 면담 시간은 몇 시간이나 되는지요? 세 시간. 세 시간이라면, 모두 합쳐서 아홉 시간인 셈이군요. 그럼 71시간이 남는데요? 다른 두 교수는 슬슬 자리를 뜨고 있었다. 상대방이 뭐라고 대답을 하려는 찰나에 나는 상대편이 대답하려고 머뭇거리는 걸 외면한 채 담배연기 사이를 헤치며 간호사들은... 하고 입을 열었다. 궁지에 몰린 상대방을 보면서 내가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허둥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을 끝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요.

그날 밤 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가 말했다. 다들 매일 직장에서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한테 도대체 뭘 입증하겠다는 거죠? 아니, 아무 것도 없어. 다만 그 친구에 비해서 내가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 그랬어.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해본 소리야.

아내 콜린이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해고 통지를 받은이래 계속 신경질만 늘고 있으니, 그게 걱정이에요. 이제 그런 분위기는 털어 버려야 했다. 하지만 내 가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모든 게 불만스럽게 보일 때였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가 메인 주로 돌아가도 장인 장모가 사시는 근처에는 집을 구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즈음, 우리는 이미 콜게이트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콜린의 친정집 근처에 집을 구하기로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아이들한테도 외할아버지 댁 근처에서 살 거라는 이야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해 주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단 하루도 지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갑자기 몰려들었다.

왜요? 아내가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보고 바닷가 근처에서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여름 휴가를 즐기러 메인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처럼요? 그런 식으로 살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거예요. 으흠,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에게 그만한 여유는 있을 것 같은데. 바로 그 순간, 노동자들이 사는 마을에서 뚜렷한 직업 없이 살아야 한다는 암담한 생각에 숨이 턱턱 막혔다. 예나 지금이나 나만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웃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자신에게는?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근처를 지나다가 일요일도 아닌 평일에 집에 있는 나를 우연히 발견하면 어떡하나? 휘황찬란한 기회를 잡으러 다니다가 잠시 쉬고 있을 분이라는 사실을 이웃한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해 봄 제자들 몇이서 나의 복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했다. 300 명이 넘는 학생들이 탄원서에 서명해서 총장에게 들고 갔다. 곧이어 학생회관과 구내서점에 대자보가 나붙었다. 게다가 최근 졸업생 하나가 항의의 표시로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반납했다는 기사가 대학신문에 나고, 침대보로 만든 커다란 항의 현수막이 기숙사 창문에 내걸렸다. 나는 부러 별 관심이 없는 척했으며, 학생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을 때마다 대학촌을 떠나 고향 메인으로 돌아갈 거라고 가볍게 대답해 주었다. 카라가 배가 고파 잠에서 깬 어느 따스한 봄날 밤, 젖병을 물린 채 팔에 안고 캠퍼스를 걸었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휘어진 버드나무 아래를 지날 때, 카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끔씩 아이 앞에서 우쭐대고 싶어지는 게 우리네 아빠들의 인간적인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날 밤, 나도 카라를 번쩍 안아 올려서 기숙사 창문에 내걸린 침대보 현수막에 적인 내 이름을 보여 주었다.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도 인생이 유치하기란 별로 다르지 않다. 자기 자신을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분명히 정상적인 균형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내 마음속에서도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뿌리 의 한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주인공이 갓 태어난 아기를 하늘로 높이 쳐드는 광경 말이다. 나를 위해 학생들이 보여준 행동이 갑자기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와 카라를 침대에 눕히면서 나도 무언가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장 의미 있는 감사의 표시는 역시 학생들에게 문학을 선물로 남겨 주는 일이었다. 학자들의 문학이론이나 교수들의 통조림식 강의를 벗어나 문학 그 자체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순수한 힘 말이다. 영화학과의 분장사더러 내 모습을 윌트 휘트먼처럼 꾸며 달라고 했다. 아주 그럴 듯한 변신이었다. 그리곤 학생들이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에 들어올 때, 나는 의자에 푹 파묻힌 채 양다리에 위스키 병을 끼고 찢겨진 턱시도 자락을 마룻바닥에 질질 끌면서 않아 있었다. 내가 입을 열 때까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 학생이 옆자리 친구에게 휘트먼이 아직 살아 있니? 하고 묻는 음성이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휘트먼의 시 한 편을 낭독했다. 남북전쟁을 노래한 내용이었다. 낭독을 마치고 강의실 문가로 걸어가서 문을 발로 걷어찼다. 문이 열리자, 문턱으로 걸음을 옮겨서 한가운데 버티고 섰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문학은 이런 데서 살 수 없다! 오히려 전장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입술에서 입술로 넘나들 때 생명을 가지도다! 피끓는 청춘남녀의 열정을 빌려야 살 수 있단 말이다!... 나머지는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몸을 돌리자 덩치가 큰 미식축구 선수 한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떠나는 선생을 위해 모두들 책상에 올라가 박수갈채를 보내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았던 모양이다. 내가 우아하게 몸을 굽히자 나머지 학생들도 손뼉을 쳐대기 시작했다. 동료 교수들도 이 함성소리를 듣고 있을까? 잿빛 구레나룻을 가면삼아 복도 쪽을 흘끗 보았다. 세 명의 동료 교수가 라운지 밖에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선생의 모습이 어떤 거지 잘 보시게나!

문제가 생겼다. 그 해 봄에 지원한 23개 대학 가운데 14개 대학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가슴이 너무도 뜨거웠던 터라 미역국의 의미가 제대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거절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박박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어쩌면 그 의미를 너무나 똑똑하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편지는 한 번 읽고 나서 주방 휴지통 바닥에 묻어 두었다가 어느 정도 양이 차면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담아 학교로 가져가서, 그 학기에 강의하던 조형 예술 대학 뒤편 쓰레기장에 버리곤 했다.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침, 번호판이 없는 차 한 대가 쓰레기장 옆에 있는 게 보였다. 그 안에는 흰색 셔츠에 넥타이 차림의 직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나는 쓰레기를 버리면서 그 친구한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 시간쯤 있다가 관리과장이 찾아왔다. 이번 학기 내내 누가 그런 쓰레기를 버리는지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저귀가 들어 있는 걸로 봐서 학생이 버린 쓰레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말입니다. 나는 아차 싶어 정중하게 사과를 하면서 벌금은 얼마든지 물겠다고 했다. 그리고 관리과장에게 내가 해고를 당했다고 말해 주었다. 사흘 후면 이 학교도 떠나고 이 도시도 떠납니다. 관리과장은 교수한테서 해고 이야기를 들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지, 깜짝 놀라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농담 한번 해 본 겁니다. 하지만 난 농담이 아니었다. 항상 유복한 삶 쪽에 서고자 열망해 왔고 그 열망을 달성하기 위해 기꺼이 타협하곤 했던 반쪽의 나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안정된 교수 자리를 얻으려면 떠나면서 도 처신을 잘해야 한다 는 사실을. 내 목을 자른 사람과 악수를 나누고 작별 인사를 하며 품위 있게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권력 집단에게 욕을 퍼붓는 즐거움을 알아 버린 또 다른 반쪽은 성난 아웃사이더가 되어 이제부터라도 솔직하게 살라고 나를 다그쳤다. 어느 날 저녁, 학생들 몇이서 작별 인사를 하러 집에 들렀을 때 쓰레기장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는데, 학생들과 함께 옥상에 올라가 앉으니 동아리방에서 뿜어 나오는 함성이 멀리고 들려왔다. 내가 가운데 앉아서 짐짓 과장된 몸짓까지 섞어가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니까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인사이더냐 아웃사이더냐가 결정되는 거지. 쓰레기를 가득 실은 조그만 카트를 밀고 다니는 교수가 이 대학촌에 있다면 자네들 믿겠나? 내가 사는 데서는 말이죠, 교외에 나가면 부자들이 우리한테 쓰레기를 좀 버려 달라고 돈을 줘요. 아무 데나 버리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죠. , 자 여기 있어. 30달러야. 이거면 치워 줄 수 있지? 그럼요! 그리곤 우리는 그 쓰레기를 가져다가 마을 공터에 던져 버리고 다시 도시로 나가면서 우리의 봉 들을 마음껏 비웃어 주지요. 한 학생이 내 말을 받아서 말했다. 그녀석의 웃는 얼굴에는 여보세요, 교수님. 상아탑에 너무 오래 계셨군요. 그래서 진짜 아웃사이더가 되는 핵심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군요! 하는 표정이 쓰여 있었다. 그 농담이 나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난 녀석과 함께 웃어 주었다.

졸업식 아침이었다. 아래층 욕실 문을 걸어 잠그고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뉴욕 타임즈>의 구직난을 읽어 보았다. 내가 대학에 있는 동안 바깥 세상의 일자리들은 차곡차곡 교통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한 쪽은 컴퓨터의 귀재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간호사와 영업사원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구질구질한 구직난은 볼 필요가 없어. 교수신문에서 좋은 자리를 찾으면 될 테니까. 나는 신문지를 농구공처럼 구겨서 휴지통에 처넣었다.

도대체 컴퓨터 시스템 분석자가 뭐야?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욕실 밖에서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지금 뭐랬어? 나는 손과 무릎을 욕실 바닥에 대고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기어가서 문을 홱 열어젖히며 놀래켰다. ! 아빠! 넬이 울음을 터뜨렸다. 넬에게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얘야, 아빠는 인제 시스템 분석자가 될 거란다. 그럼 돈을 많이 벌어서 우리 식구 모두가 행복해질 거야. 행복, 행복! 우리 꼭 이사 가야 돼? 넬이 물었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졸업식 날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식이 끝나고 나서 푸른 잔디밭 둘레를 걸으며 땅을 밟고 또 밟았다. 어린 형제자매들과 나이든 친지들이 졸업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동안, 아버지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타고 온 차에 짐을 싣고 다시 집과 일터로 돌아갈 긴 여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가운과 모자를 대학 본부에 반납한 다음 책을 정리하기 위해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로 올라가서 책꽂이 맨 윗단에 손을 대려는데, 문가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냥 인사나 드리고 가려고요. 여학생 목소리였다.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행운을 빌어 드리고 싶어요. 대학에 근무하는 우리 남자 교수들은 한 가지 불문율을 가지고 있다. 그건 여학생과 함께 문을 잠근 채로 연구실 안에 있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다. 그래서 여학생이 들어오면 난 항상 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왜 이리 덥지? 라고 말하곤 했다. 안은 더우니까 문을 그대로 열어두지 그래? 그날도 역시 그렇게 말했다. 학생은 속이 비치는 깜찍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늘상 도발적이라고 말씀하시던 옷차림이었다. 온몸에 샴페인을 뒤집어썼더니 온통 술 냄새 천지예요. 학생은 한 손에 학사모를 들고 다슨 손으로 모자의 테를 만지작거리며 빙글빙글 돌렸다. 언젠가 의사가 되겠다고 이야기한 학생이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학생은 내가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지만, 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 계획은 이미 포기했다고 말했다. 유기화학을 공부하려던 생각은 2학년 때 바꿨어요. 그럼 앞으로 뭘 할 건데? 학생은 아버지 사업을 도와 드릴 예정이라고 했다. 그동안 나한테 이력서를 갖다 준 학생은 많았지만, 명함을 건네준 경우는 이 여학생이 처음이었다. 하늘색 글자로 도안된 포드차 대리점 이라는 이름 아래 검은색 필기체로 학생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훌륭하군! 명함을 보고 내가 말했다. 아니, 뭐 그렇게 훌륭하진 않아요. 학생이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쨌든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집에서 그냥 빈둥대는 것보다야 낫겠죠. 엄마랑 며칠 같이 지내다 보니까 다시 고등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내가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학생을 바라보며 웃어 주었다. 혹시 승용차 구입하실 일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럼, 좋지. 학생은 어깨를 으쓱 치켜 올리며 연구실 안에 슬쩍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학생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잘 풀리셨으면 좋겠어요. 고마워. 난 학생이 작별 인사를 하고 내 인생에서 영원히 나가 주기를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학생은 나더러 메인으로 갈 거냐고 물었다. 그럴 예정이야. 그 군인을 만나실 수 있을까요?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이지 몰랐다. 학생의 말을 듣고 보니 언젠가 강의 시간에 지껄인 적이 있는, 메인 주의 고향마을에서 함께 자라 나중에 군에 입대한 내 친구 이야기였다. 그 친구와 나는 중학교 1학년을 같이 다녔는데 과학시간에 서로 다툰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 두 사람을 교실 앞에 세우고 끝나는 종이 칠 때까지 수업시간 내내 북북 인상을 쓰고 서 있도록 벌을 내렸다. 3년이 지나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그 친구는 직업반에 들어가고 나는 대입 준비반에 들어갔다. 우리는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 관계로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지나가다가 얼굴을 마주칠 때면 서로 인상을 구기는 일이 인사의 전부였다. 그 후 친구는 월남전에 참전했고,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나요? 학생이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신병 훈련소로 떠나기 얼마 전 밤에 시내 공원에서 만나 맥주 서른여섯 캔을 마셨지. 그 친구는 내 어깨를 딛고 공원 안에 있는 어떤 동상에 기어 올라가서 캔맥주 꼭지를 동상의 장화 위에다 가지런히 올려놓았어. 잠시 연구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 친구가 월남에서 전사했느냐고 학생이 물을 때는 앞에 누가 있다는 사실조차 깜빡 잊고 있을 정도였다. 잘 몰라. 나는 대답과 함께 학생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들러줘서 고맙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학생은 문 찰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했다. 어쨌든 교수님이 윌트 휘트먼으로 분장하고 강의실에 계시던 그 날만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예요.

 

3 귀향,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짐을 꾸리고 이사를 간다는 건 네모난 이삿짐 상자를 나르는 이상의 그 무엇이다. 한 손으로 스탠드 갓을 들고 다른 손으로 앨범뭉치를 든 채 옆구리에 축구공까지 한 번 끼어 보라. 아마 과거의 온갖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갈 것이다. 다목적 탁자를 이삿짐 트럭에 올려놓고 한 발자국 비켜서서 트럭 유리창을 바라보니, 이 탁자를 구입한 8년 전 아이오와의 농가가 기억의 저편으로 떠올랐다. 그 당시 파산 선고를 받은 어느 젊은 부부가 비오는 날 아침에 자기네가 소유한 모든 가구를 팔았었지. 탁자를 트럭 한쪽 구석에 놓고 나니, 넬이 태어날 때 근무하던 콜비 대학의 교수 아파트가 생각났다. 넬을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온 첫날밤은 영하 20도를 밑도는 엄청나게 추운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 부부는 모자가 달린 담요 석 장으로 아기를 꼭꼭 싼 다음, 조심스럽게 안아서 스웨터를 깔아놓은 요람에 눕혔다. 아내는 아기가 따뜻한 젖을 배불리 빨 수 있게끔 손가락을 전부 동원해서 젖무덤을 열심히 문질러댔다.

당시는 교수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할 때였다. 대학에 정착하기까지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좋은 일자리가 많았고 외국에서 생화하는 환상적인 기회도 많았다.

큰딸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17개 주와 대서양, 아일랜드, 미시시피 강을 넘나들었다. 우리 가족이 함께 묵은 지점을 찾아서 지도에 별표를 한다면 필경 밤하늘의 별자리 가운데서도 가장 볼썽 사나운 별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 별자리에 아무렇게나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 욕망 이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나는 장작더미를 지어 나르는 일꾼처럼 세간살이 들어다가 트럭으로 옮겨 실었다. 욕망 을 위해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욕망은 무엇을 위한 욕망 이었는가? 계속 앞만 보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나가는 동안, 설령 대답할 시간조차 없다 하더라도 가끔씩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건 아주 바람직하다. 더 많은 돈, 더 확실한 안정, 더 높은 지위, 더 큰 존경, 무언가에 대한 더 풍요로운 약속이 해답이던가? 나로서는 이 모든 욕심이 적당하게 섞어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정직하리라. 그렇다, 나 역시 돈만 보고 달리는 그런 부류였다. 그런 사람한테는 가정도 오로지 출세의 발판이고, 따라서 땅도 사람들도 안중에 없다.

이삿짐을 트럭에 옮겨 싣는 데만 한나절이 꼬박 걸렸다. 일곱 살 먹은 넬은 당나귀 장난감 세트를 찾아 달라고 칭얼댔다. 지난겨울 내내 당나귀 세트를 못 찾아 걱정하던 터였다. 하지만 어쩌면 내 곁에 있고 싶은 게 진짜 속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모른 척하고 내 일에 열심히 몰두했다. 이삿짐을 다 싣고 보니 무거운 세간살이는 우리 인생에서 거의 다 사라졌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어디서 일자리를 구하게 되든, 가볍게 이사를 다닐 수 있도록 가정용품을 몽땅 벼룩시장에 내놓아 처리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가구를 거의 다 들어냈을 때는 가진 게 거의 없던 갓 결혼한 신혼 시절이 문득 생각났다. 이사하기 전날 퇴직 연금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힘들여 나를 만한 가구가 하나도 없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연금 담당자가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했다. 피난민 같겠군요. 지극히 간결한 어조였다. 들어 나르는 데 어른 둘과 아이 하나는 필요한 냉장고나 전기난로, 침상 같은 무거운 물건과 연금 계좌는 우리를 어른의 세계에 묶어두는 것들이며, 따라서 만일 이런 게 없으면 품위가 떨어질 뿐 아니라 아무한테나 언성을 높이고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 즉흥적인 존재로 타락하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세상사람 모두는 자기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미성년자에 불과하다. 드디어 이삿짐을 다 싣고, 내가 만들고 있던 새장만 남았다. 그건 해마다 봄이 되면 북행길에 들르는 제비 가족을 맞이하기 위한 일종의 조류 호텔 이었다. 물론 많은 공을 들였다. 삼나무로 지붕을 만들어 달고 하얀 기둥으로 밑을 받치고 출입구도 만든 새장은 방이 열두 개였다. 원래는 큰딸과 둘째 딸에게 주려고 만들기 시작했는데, 우리 집을 구입한 지질학과 교수한테 남겨주고 떠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뒷마당에 구멍을 파서 5미터짜리 삼나무 장대를 1.2미터 정도 깊이로 파묻었다. 새장을 매달 나무였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너무 늦지 않았소? 올해는 참새들만 올 것 같아. 이웃집에서 쳐다보던 사람이 말했다. 비가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하자 그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폭풍이 몰아쳐 나무들을 할퀴고 장대를 쓰러뜨리는 광경까지 안에서 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비를 맞으며 쓰러진 나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우리가 짧게나마 여기서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기념물로 그 새장이 오래도록 서 있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면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서 욕실에다 젖은 옷을 벗어던졌다. 욕실 거울에 나신을 비춰보았다. 내 몸을 마지막으로 구석구석 찬찬히 훑어본 게 언제였던가? 이 학교에 오려고 면접을 받던 4년 전이었나? 뒤로 돌아섰다. 하얀 피부. 살점 밑에 얌전하게 묻혀 있는 근육. 오랫동안 실내에서만 살아온 흔적이 그대로 나타났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와 거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몸으로 때우면서 먹고 사는 부모와 형제 곁을 떠나려고 발버둥치던 노력 덕분에 이제 내 몸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빈껍데기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조그맣게 볼록 나온 배를 앞으로 쭉 내민 채 거울을 향해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시오, 나는 밀크토스트 교수라고 하오.

넬이 찾던 당나귀 장난감 세트는 아기 옷가지를 넣어둔 배낭 안에서 겨울을 보낸 모양이었다. 우리는 당나귀를 계기판에 앉히고 동쪽으로 트럭을 몰았다. 배트맨 망토를 뒤집어쓴 아들 녀석이 내 옆에 앉고, 그 옆에는 음악에 푹 빠진 딸아이가 탔다. 매사추세츠주를 넘을 때는 꼬마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고 어서 오십시오. 메인 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고 쓴 표지판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에게 네일이 주는 유목민 상 을 주겠다고 하면서 75센트를 계기판에 올려놓았다. "아빠, 네일이 누군데? 넬이 물었다. , 콜게이트 대학교 전임 총장님. 콜게이트가 보고 싶어. 잭이 말했다. 고개를 돌리니 아들의 두 눈에 어린 슬픔이 보였다. 나한테 책임이 있는 슬픔이었다. 잭은 몰랐지만 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배트맨아, 너무 그 생각만 하다가는 표지판을 놓쳐. 알지! 엄청나게 거대한 메인 주 표지판 밑에 붙어 있는 대학 아이스하키 챔피언 간판은 차라리 개인적인 환영 인사처럼 보였다. 트럭을 길가에 대고 아내의 승용차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콜린은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 콜린이 내 뺨에 키스를 하면서 가족 모두 여기서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는 아내에게 야생화를 배경으로 하되 쇼핑몰 광고판은 빼고 찍어 보라고 했다.

우리 가족 모두가 한껏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픽업 트럭 한 대가 경적을 올려대며 달려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손을 크게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운전기사 녀석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면서 손가락으로 엿이나 먹으라는 욕을 남기고 휭하니 달아나 버렸다. 나는 저런 개 같은... 하고 입속으로 웅얼거리면서 꼬마들을 모아 아내의 승용차에 태운 다음 조심해서 차를 몰라고 당부했다. 트럭 운전기사를 메인의 악명 높은 바보천치 정도로 치부하고 잊기로 했다. 메인의 촌뜨기들한테는 인생에 두 갈래 길이 마련되어 있다. 교도소로 들어가든지 주립 경찰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다. 트럭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바퀴 뒤에 않아 고속도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욕실 거울 앞에서 느꼈던 공포가 또다시 세차게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트럭을 몰아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아까 그 기사 녀석을 쫓아가서 욕을 해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트럭을 길옆으로 몰아붙이면 어떨까? 이 생각을 30분 이상 구체적으로 머리에 떠올렸다. 같은 상상을 앞으로 진행시켜 보다가 다시 뒤로 돌려보면서 몇 번씩이나 반복했다. 그 녀석을 따라붙었다면 아마 이런 말을 했으리라.

적어도 난 너 같은 쓰레기보단 나아지려고 노력해 왔어. 대학을 다닐 때는 미식축구 스타로 체격도 좋았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뒤로 가던 상상의 영상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저 녀석이 내가 누군지나 알까? 아내 콜린을 만나기 전 20대의 나는 무서운 속도로 변화되어 갔다. 밑바닥에서 노는 잡놈들보다 엄청나게 훌륭한 인물이 되려고 말이다. 내 인생을 중요하고 의미 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내 인생이 중요하고 의미있게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신문의 머리기사를 뽑고 석간 뉴스 원고를 작성했다. 그러다가 스물일곱에 신문 편집 일을 그만두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한 군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일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몰아 법정에 세우던 억지 반공주의 시절이었던 털, 육군은 그 군인에게 간첩 협의를 뒤집어씌웠다. 물론 그 군인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백을 입증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그가 최후의 심장마비를 일으키기 직전에 만났고, 그 후 7년 동안 육군과 FBI, CIA 등을 상대로 힘든 싸움을 벌였다. 1955년 대법원에서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사람들을 찾아 전국을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중요한 증인들을 설득하여, 사령부 고위 장교가 메인 출신의 이 군인 사건을 날조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고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FBI를 압박하여 이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은 허위 비밀 보고서를 공개하게 하여 사령부 장교들의 과오를를 밝혀낸 다음, 국방장관에게 압력을 넣어 국무성에 명예 회복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하게 했다. 내가 이 일에 적극적으로 매달린 것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자기 아버지의 결백을 믿지 못하는 아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고인의 아들을 워싱턴에 데리고 가서 자기 아버지에 관한 진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왜 그랬을까? 트럭을 몰면서 자문해 보았다. 나는 언제나 내가 명예로운 동기에 입각해서 행동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직접 소설로 썼고 그 판권을 헐리우드에서 사들였을 때도 수익금을 고인의 미망인과 반반씩 나누어 가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모든 행동이 어쩌면 나 자신의 능력을 만인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계속 물밀 듯이 일어났다. 물론 고인과 그 가족에 대한 관심이 아주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일이 장기적으로 나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를 항상 계산하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톨게이트에서 요금이나 제대로 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는 메인의 작은 도시에서 아주 깔끔한 농장 집 하나를 발견하고 그 집을 월세로 얻어두었다. 아내의 친정 부모님이 사는 인근보다 두 배가 비쌌지만,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바라던 바로 그런 집이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성공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저택처럼 보였다. 가족 모두와 함께 여름 내내 안락한 생활을 즐기는 해변의 별장 같은 그런 집 말이다. 우리 트럭이 대문을 지나 현관에 이르자, 처남 둘과 장인 장모 처제 둘이 우리를 마중해 주었다. 길 아래에 사는 오랜 친구 하나가 피자와 맥주를 들고 때맞춰 나타나서 3층에 매트리스 까는 일을 도와 주었다. 우리는 나란히 걸으면서 빈 방을 차례로 지나쳤다. 친구가 왜 메인으로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고향이니까. 아니, 내 말은 왜 그 좋은 콜게이트 대학을 떠났느냐는 뜻이야. 대서양과 너무 멀어서, 처음 거기 갈 때 2년만 있기로 했어. 그런데 4년이나 지났으니, 너무 오래 있었잖아. 내 음성이 벌거벗은 벽과 마룻바닥에 메아리쳤다. 고작 한 시간 전에 머리에서 짜낸 귀향의 이유였다. 하지만 이 변명은 4년 전에 희망에 차서 의기양양하게 이상향을 쫓아 떠났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언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게 써먹은 손쉬운 대답이 되어 버렸다. 나 역시 반쯤은 내가 해고를 당한 게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에 그런 대답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때 우리 가족에게 몰아닥친 공포감을 절실하게 받아들여야 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고향에 돌아온 처음 몇 주 동안은 내가 지원한 일곱 군데 대학에서 거절 편지를 보내왔고, 이 같은 거절 편지와 앞으로 서류를 낼 수 있는 대학은 단 두 군데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내한테 숨어야 한다는 욕구 이상의 절실함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거절편지가 올 때마다 여러 번 접어서 헛간에 처박아 둔 낡은 골프 가방 맨 밑바닥에 쑤셔 넣었다. 아직 여름이라 그런지 고향에 돌아온 기분은 좋았다. 층계를 올라가니 바로 옆에 붙은 침실에서 아내와 네 아이가 한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어찌나 아름답던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딸아이 셋은 저마다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나는 엄지손가락 세 개를 각각 입에서 빼낸 다음, 질펀하게 젖은 침대 한 구석에서 자고 있는 잭을 들어올려 욕실로 데리고 가면서 나지막이 얘야! 하고 불러 보았다. 변기 앞에 세워 놓았더니, 녀석은 마치 술 취한 어른처럼 비틀거리며 오줌을 누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그 녀석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위로 딸 둘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일 거라는 기대는 전혀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깨가 넓고 머리카락도 두꺼운 데다가 뺨도 발그레한 4.5킬로의 건강한 사내아기였다. 하지만 난산이었다. 핀셋도 소용이 없었고, 진공청소기처럼 끔찍하게 생긴 기구도 녀석을 제대로 끄집어내지 못했다. 갑자기 담당 의사가 도움을 요청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분말실로 모여들어 아내의 힘주기를 도와주었다.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나는 무력하게 한쪽 구석에 서서 그 모든 노력에 감사하고 있었다. 고통에 싸인 아내의 모습은 마치 달빛처럼 아름답고 고고했다. 다시 침실로 돌아와 카라를 아기 침대에 누이고 나니 비로소 내가 누울 자리가 생겼다. 바로 그때 아내가 공들여서 달아놓은 레이스 벽장식이 눈에 띄었다. 출산 직전에 새로 태어날 아기들을 위해 아내가 손수 뜬 레이스였다. 그 속에는 서럽도록 푸른 하늘에 달과 별이 자리 잡고, 머리 위로 한 떼의 갈매기를 거느린 가재잡이 배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가 레이스 다는 장면을 본 적은 없었다. 마치 갑자기 나타난 것 같았다. 아내에게 언제 이걸 달만한 시간이 있었을까? 궁금했다. 아내는 이 낯선 방을 가정답게 꾸미려고 무진 애쓰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내의 얼굴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기막힌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 아내가 하는 대로 따라가면 돼! 아내는 과거를 헤매지도 않고 미래를 향해 무모하게 돌진하지도 않아. 아이들을 돌보면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야. 깜빡 잠이 들었다가 카라의 울음 소리에 깨었다. 다른 식구들이 깨지 않도록 서둘러 아기 침대로 갔다. 다년간 아기와 함께 지내다보니 울음 소리까지 분간할 수 있었다. 직장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 전화벨 소리만 듣고 받아야 할 전화인지 안 받아도 되는 전화인지를 단번에 알아내듯이 말이다. 이번 울음 소리는 자기를 안아서 안심시켜 달라는 신호였다. 나로선 급히 서둘러야 하지만 동시에 아주 쉽게 달랠 수 있는 울음이었다. 카라를 품에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우유를 타서 젖병을 물리고 몇 분 동안 자장자장 하면서 흔들어 주다가 다시 아기 침대에 눕히면 그만이다. 그 동안 수백 번 이상 경험한지라,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심지어 자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냉장고 문을 열면서 카라를 내려다보니, 내 몸무게가 느껴짐과 동시에 주변의 모든 물체가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25년 전 성공을 향해 힘찬 질주를 시작한 이래 처음 겪어 보는 맥 빠진 속도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카라를 침대로 서둘러 데려가지 않고 달을 보여 주었다. 낡은 창문 밖으로 꿀이 흘러내리듯 끈적한 빛이 잔디밭에 쏟아지고 있었다. 소나무로 된 마룻장을 맨발로 밟으니 까슬까슬한 모래알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해변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며 생각했다. 이제 속도감을 늦추고 네 엄마처럼 너와 함께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싶구나. ,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곳은 보지 말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만 바라보며 살자꾸나.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달그림자의 평안한 광경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카라를 안고 캠퍼스를 거닐다가 내 이름이 크게 적힌 현수막을 보여 주던 장면이 생각났다. 어느 틈엔가 그날 밤은 이미 과거의 삶으로 묻혀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추억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계속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야 멀리 야적장에서 울리는 기적 소리와 발길이 닿을 때마다 울음을 멈추는 귀뚜라미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당 끝에서 스컹크 한 마리가 보이더니 어두운 숲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카라는 품안에서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조용히 있었다. 내 눈에 카라의 미소가 들어왔다. 나에게 카라는 여전히 경이로운 존재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말문을 여는 극히 가냘픈 음성이 있었고, 두 발은 찻잔에 담긴 물로도 닦을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자그마했다. 문 밖으로 스물일곱 걸음을 나섰다. 도로는 건너지 않았다. 도로 건너편에 다른 나라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는 나라가, 다행히 우리가 멈춘 곳에서 강가에 정박한 배에 매달아놓은 전등빛이 보였다. 소금기를 머금은 진흙바닥 저습지에서 피어오른 짠 냄새가 언덕을 타고 올라왔다. 수면에 비친 기다란 달빛을 볼 수 있도록 카라를 안아 올렸다. 뒷마당은 가파른 오르막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열심히 오르다보니 숨이 찼다. 여든아홉 걸음을 걸어 꼭대기에 오르니 거미줄처럼 생긴 배드민턴 네트가 가로막았다. 우리는 인디언처럼 몸을 수그리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버섯과 이끼, 소나무의 바늘잎새, 말라 버린 이파리, 썩은 나무껍질들이 발밑에서 느껴졌다. 헛같을 닫은 빗장이 이슬에 젖어 축축했다. 카라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스노우 타이어 몇 개와 연장통 다섯 상자, 낡은 카메라 가죽 케이스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내가 배팅 연습을 하던 야구 방망이 한 자루와 훌라후프, 먼지로 뒤덮인 돌돌 만 양탄자도 보였다. 창문 두 짝에는 나방이 여러 바리 붙어 있었고 풍뎅이 한 마리가 유리창에 팅팅 부딪치고 있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다음날 출근하기 위해 잠을 청하러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느라고 지붕 위의 풍향계가 남서쪽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카라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지금 네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마. 나는 손가락으로 남쪽을 가리킨 채 그 쪽에서 잠들어 있을 사촌들의 이름을 일러 주고, 30년간 간호사 생활을 하신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72년 전에 아일랜드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신 증조할머니의 이름을 일러 주었다. 우리 딸아이가 이름을 알게 될 마지막 조상이었다. 방향을 남쪽으로 15도 각도 돌리면 외할아버지가 일하시는 기름통이 즐비한 선창가가 있었다. 카라는 외할아버지를 닮았다. 서쪽과 북쪽에 잠들어 있을 다른 삼촌과 사촌들도 일러 주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들 이름을 하나씩 가르쳐 주었더니 방글거리던 카라의 미소가 어느 틈엔가 싱긋하는 웃음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친지들의 이름을 알려주다 보니, 마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곱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프란시스 고모가 생각났다.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시던 월터 할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고모를 인형 들어 올리듯 안아 올려 침대와 욕실로 데려가기를 60년 동안 매일 반복했다. 고모는 평생동안 집 밖을 나서 본 적이 없었다. 월터 할아버지는 일흔아홉이 되어서도 고모를 들어 나를 힘을 기르려고 팔굽혀펴기를 했다. 끝없이 계속된 고통과 비애 속에서 할아버지는 딸과 단둘이 있을 때 느끼는 기쁨도 누렸을 것이고, 품에 안은 예전의 아기가 이젠 늙은 노파가 되었음을 보고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고모를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기는 데 무려 10분이나 걸렸다. 오늘 밤에 느껴지는 느릿한 속도감이 마치 할아버지와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라야, 너도 이 밤을 기억해 주겠지? 다시 내려다보니, 카라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우리 집 나무와 헛간이 길게 드리워 놓은 그림자 너머, 계곡 건너편에 있는 몇 채 안되는

주택에서 불빛이 점점이 반짝였다. 성공한 현대인은 이웃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했던가? 나 역시 그동안 많은 동네에서 살았지만, 이웃의 이름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주변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작디작은 존재인가! 그러면서도 또 빛을 찾으려고 얼마나 악착같이 버둥거리고 있는가! 카라야, 너만은 나를 이곳저곳으로 내몰았던 욕망, 결코 만족을 모른 채 항상 새로운 성공을 찾아 헤매게 만든 그런 욕망에 절대 사로잡히지 말아라.

 

4 위기의 남자 - 봄날은 갔는가?

 

수입: 세금 공제 후 연금 13,600달러 + 저축 3,401달러 = 17,001달러

지출: 여름철 임대료 선불 3,000달러, 이사 트럭 임차료 546.30달러, 전화료 84.14달러, 식료품비 218.17달러, 연료비 125달러, 자동차 등록세 61.50달러, 잡비 114.98달러

잔액: 12,850.91달러 (66일 현재)

머리가 맑아졌다. 6월 셋째 주로 접어들면서 교수신문 네 군데에 모집 광고가 났고, 나는 모든 침울한 생각을 뒤로 하고 다시 정상 페이스를 찾았다. 이제 지원 가능한 대학이 총 여섯 곳으로 늘어났다. 새로 공고가 난 네 군데는 갑자기 결원이 생겨서 급하게 모집하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지원자도 많지 않고 대학측 사정도 급하고 하니 잘만 하면 한 군데 정도는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다. 가슴 벅찬 희망을 우울하게 만드는 게 있다면 그건 콜게이트에서 해고 통지서를 받은 이래 16개월 동안 지원서를 낸 스물한 군데 대학 전부가 그네들 나름대로 나를 거절한 이유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건 내가 여성도 아니고 소수민족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 이력서에는 신기한 구석이 전혀 없으며, 나 또한 영문과에 백인 남자 교수가 맥도날드 간판만큼이나 흔하게 널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백인 남자 교수 한 사람이 정식으로 대학 강단에 설 때마다 자리가 하나씩 줄어드는 셈이다. 복에 겨워 좋은 조건을 보장해 주겠다던 다섯 군데의 초빙 제안을 물리치며 1988년에 콜게이트 대학과 계약한 내가 아마도 백인 남자로 영문과 교수 시장 에 나온 마지막 물건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꿈은 높았다. 새털같이 많은 나날을 해변에서 지내는 동안 카라는 걸음마를 시작했고 넬과 에린은 파도타기를 배웠다. 그리고 나도 잭한테 캐치볼 연습을 시켰다. 아이들 외가 식구들도 우리와 함께 소풍을 갔다가 날이 저물 무렵에는 한 집을 정해서 가든파티를 즐겼다. 식구 중에 누구라도 표정이 좀 안 좋다 싶으면 내가 앞장서서 쇼핑센터로 데리고 가 선물을 사 주었다. 선물을 한아름 안고 현관에 들어서면 모두들 나한테 몰려와서 환호성을 올리는 그런 순간을 나는 몹시도 좋아했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플라스틱 장난감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보석 장신구나 축구공, 인형, 전자게임기 등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는 나한테 받은 선물을 아래층 벽장에 감춰두었다가 다시 돈으로 물러오곤 하였다. 그래서 아내는 선물을 받을 때마다 영수증도 함께 달라고 했다. 나는 아내가 돈 걱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처음에는 내 기분을 다치게 할까봐 말하지 않았으리라. 아내는 그런 선물 공세가 성공한 남편과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더욱 굳건하게 다지기 위한 제스처였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초빙 거절 편지를 아내한테 감추면서까지 지키려고 애썼던 그런 이미지 말이다. 하지만 내가 선물을 사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딘가 갈 데가 있다는 점에서 쇼핑 자체가 일종의 구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여섯 살짜리의 넬의 경우에는 상황이 좀더 복잡했다. 아이들이 많다 보면 어느 한 아이에게 유난히 끌리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물론 이런 현상을 설명할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물이라면 크기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뭐든지 좋아하는 넬의 성향 때문에 특히 좋아했다. 동물에 대한 넬의 애정이 어찌나 강하던지 잠을 자다가 강아지나 고양이 혹은 쥐 따위를 집안에 들이는 생생한 꿈을 자주 꿀 정도였다. 그래서 딱히 할 말이 없을 때라도 동물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주 잘 풀리기 때문에 넬한테는 무슨 이야기든 꺼내기가 쉬웠다. 언젠가 백화점에서 건전지로 다리가 움직이고 짖기도 하는 하얀 강아지 인형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넬은 이 강아지한테 매혹 당했는지 몇 시간이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강아지한테 푸프 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일까지 시간을 정해서 꼬박꼬박 지킬 정도였다. 나 또한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 장난감 강아지가 혹시 망가지진 않을까, 만약에 망가지면 넬의 작은 가슴도 덩달아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특별히 정열을 쏟을 데가 없었기 때문에, 넬을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과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아낌없이 바치고 싶었다. 사흘 연속해서 비가 내리던 어느 날, 꼬마들 모두가 뉴욕 생각을 하며 시무룩해 있었다. 그래서 자전거를 사서 하나씩 나눠 주었다. 잭은 처음 가져보는 자전거였다. 나로선 뉴욕에 두고 온 친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자전거로 조금이라도 달래길 바랄 뿐이었다. 그동안 잭은 거의 매일같이 친구 브라이언 머피의 목소리가 창고 뒤나 침대 밑에서 들린다고 말하곤 했던 것이다. 잭에게 자전거를 건네주면서 이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면 나중에 브라이언과 함께 탈 수 있을 거야 하고 약속했다. 하지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동안 계속 우울해 하더니 마침내 울부짖는 소리로 나를 향해 톱으로 싹뚝 잘라 버려! 하고 소리쳤다. 어느 날 오후,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던, 멋진 해변가로 이어지는 자갈길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마침내 그 길을 찾았다 생각하곤 좁다란 오솔길로 접어들었지만 눈 앞에는 경비실이 나타났고 제복을 입은 경비가 나와서 제지했다. 우리는 서둘러 다시 오던 길로 돌아 나왔다. 다른 해변가로 가자. 내가 아이들한테 말했다. 그럼 거긴 언제 가? 뒷좌석에 타고 있던 잭이 큰 소리로 물었다. 아내가 나를 쳐다보지 마세요, 잭은 당신 아들이기도 하잖아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맥도날드 햄버거 하나씩 어때?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시선을 돌린 채 창가를 가만히 응시했다. ? 햄버거도 안 된다구? 내가 다시 묻자, 아내가 대답했다. 우린 모두 여섯이나 된다구요. 가격도 너무 비싸고, 게다가... 여섯 식구가 된 건 어제 오늘이 아니잖아! 그만한 돈이면 내 손으로 휠씬 더 좋은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어요.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구. 우리 모두 안에서 먹을 수 있어. 아내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다. 아내를 바라보았다. 한쪽 뺨에는 잘 빗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리고 다른 쪽 뺨에서는 두껍게 한 가닥으로 땋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12년을 함께 살았지만 아내의 미모는 여전히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지갑을 꺼내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여민 부분이 벌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갈비뼈를 보았다. 몸무게가 줄지 않았다고 우기지만 아내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럼 밀크셰이크라도 한 잔 하지? 배가 안 고프다니까요. 아직도 많이 먹어야 해. 그래야 빨리 회복을 하지. 아내가 한숨을 쉬며 지갑을 건네주었다. 지난번 자전거 값은 가계부에 안 적었더군요. 단둘만 있게 되면 아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옷을 천천히 벗길 생각을 하고 있는 바로 그때, 아내의 비난이 두 귀를 때렸다. 나는 아이들을 뒷좌석에서 내려 맥도날드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아내한테 다가갔다. 다시 한 번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난 배가 안 고파요. 알아. 자전거 값은 300달러 들었어. 참 돈도 많으시네요. 딸아이들은 고물 자전거도 잘만 타요. 그래, 알았어. 그쯤 해 두자구. 가게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몇 분 동안에 새로운 혼란이 시작되었다. 차 속에서 아침 식사를! 이라는 표어가 담긴 엄청난 현수막의 기세에 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이제야 꿈이 실현되나보군. 내가 생각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뭐요? 곁에 서 있던 남자가 거칠게 되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시선을 잠시 딴 데로 돌렸다가 다시 쳐다보니 그 남자가 나를 구석구석 훔쳐보고 있었다. 나한테서 뭘 봤을까? 그 사람 딴에는 내가 요주의 인물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불현듯 몸 전체의 균형 감각이 흔들리면서 뒤로 넘어질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탁자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고, 딛고 있는 탁자가 조금씩 기울어지는 기분이었다. 구두 뒤축이 다 닳아빠져 허공을 딛고 휘청하는 느낌도 들었다. 지원 서류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류는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그 편지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골프가방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 어느덧 우리 식구는 짐짝처럼 유리창 안쪽으로 밀려와 있었다. 아이들은 주문 음식을 받은 채 계산대 쪽으로 밀려났다. 돈을 받는 직원의 갈색 블라우스에 표어 하나가 붙어 있었다. 친절하게 모시겠습니다! 갑자기 휘청거리는 느낌이 또다시 엄습했다. 무슨 물체든 붙잡아 중심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렸다. 옆에 있던 남자는 이미 사라진 다음이었다. 환한 색상의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치즈버거가 미소를 짓고 음료수 병이 춤을 추었다. 다른 아버지들도 나처럼 이렇게 허공에 떠서 뒤로 자빠지는 느낌일까?

그러길래 내가 들어가지 말자고 했잖아요. 며칠 후, 맥도날드에서 받았던 역겨운 기분을 말하니까 아내가 내게 던진 말이었다. 나는 새로 구입한 배드민턴 장비 세트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헛간 작업용 의자에 앉아 있었고, 아내는 문턱에 서 있었다. 아내의 얼굴 뒤로 푸른 하늘이 높다랗게 펼쳐졌다. 알아, 그건 내 생각이었다는 걸.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때 느꼈던 기분은 꼭 얘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난 사다리를 올라가는 일에 평생을 다 바쳤다는 느낌이 들어. 사다리 끝까지 올라가서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을 내려다보려고 말이야. 아버지 인생만 보려고 했던 건 아니야. 내가 살아갈 인생도 보고 싶었어. 아버지는 근처에 맥도날드가 생기자 우리를 그곳에 데려 가시곤 하셨어. 그럴 때마다 굉장한 선심을 쓰고 있다는 듯, 얘들아, 이건 아주 좋은 거야. 아버지가 사 주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는 표정을 하고 계셨지. 나는 가루우유가 싫었기 때문에 거기 갈 때마다 꼭 우유를 시켰어. 아버지는 언제나 가루우유를 아주 묽게 타서 주셨거든. 그래서 집에서 마시는 우유는 흰 빛보다 차라리 창백한 잿빛을 하고 있었어. 겨울에 외풍을 막으려고 창문에 댄 비닐 색깔처럼 말이야. 맥도날드에서 느낀 현기증이 사다리가 발밑에서 흔들리는 느낌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사다리 오르는 걸 단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그런 일이 생기나봐. 당신은 안 떨어져요. 계속 올라갈 거예요. 지금까지 잘했잖아요.

아내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서 배드민턴 장비 세트를 살펴보며 내가 지불한 가격을 알아내려 하는 아내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이해심이 너무 고마웠다. 손을 뻗어 아내의 손을 슬며시 잡아끌었다. 아내는 헛간 안으로 들어서면서 문을 닫았다. 아내를 안고 있는 동안에도 내 인생이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인파가 들끓는 광장으로 달려 나가 앞으로 앞으로 계속 달리는 운동에 동참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대열에서 탈락했다. 나는 옷을 요란하게 입은 젊은이를 바라보는 게 좋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대학 캠퍼스를 향한 향수병만 도지게 만들 뿐이다.

히커리 농장에서 쇠고기를 자르는 인부 한 명을 살펴보았다. 내 나이 또래였다.

그가 그 직업에 얼마나 종사했는지,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건 일을 한다는 건 내가 점차 내 아버지와 같은 세계로 빠져든다는 걸 의미하지 않을까? 어느 날 향수 냄새의 흔적을 쫓다가 생전 처음으로 향수 가게에 들어서게 되었다. 실내에 진열된 거의 모든 제품이 남성용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 카탈로그 하나 보시겠어요? 판매원이 짓궂은 표정으로 카탈로그를 건네주었다. 심장이 멎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의 아가씨였다. 어떤 사람은 이걸 가난한 사내가 보는 플레이보이지라고 말한답니다. 그녀는 다 알고 있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카탈로그를 받아 들고 겉장을 보았다. 속이 훤히 비치는 브래지어를 통해 자기 젖꼭지를 내려다보는 사진이었다. 판매원 아가씨를 돌아보았다. 아가씨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가져가도 돼요. 비록 직장이 없어 돈도 못 벌고 쇼핑센터를 구경하면서 시간을 소일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하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연한 색깔의 팬티를 사탕처럼 늘어놓은 진열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다시 돌아가서 사랑을 나눌 때 켜놓는 카세트 테이프 진열대를 툭툭 건드려 보았다. 아내한테 잠옷 한 벌을 선물할까 생각했지만, 모두 다 너무 얇아서 메인의 차가운 밤공기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스타킹 몇 벌을 만져보고 있으니까 탈의실 안에서 여자 두 명이 나와 그 가운데 한 명이 물었다.

제가 좋은 걸 골라드릴까요? 어떤 걸 찾으세요? 부인한테 선물할 걸 찾으세요? 다른 한 명도 물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는 아가씨였다. 그래요. 내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이게 아주 근사해요. 아가씨가 스타킹 한 짝을 보여 주면서 금세라도 미니스커트를 걷어 올리고 입어 보일 자세로 말했다. 스타킹을 사들고 밖으로 나왔다. 잠시 심호흡을 하니까 머리가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다음날 아침 스타킹을 아내의 머리맡에 놔두었다. 아내를 깨워 아무 걱정 말라고 위로하고 싶었다. 햇빛을 많이 쬐어서 그런지 아내의 어깨에 점점이 자리 잡은 검붉은 기미가 이른 아침의 희미한 햇살에 발그레했다. 침대 머리맡에 앉은 채 아내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쌓이는 눈더미처럼 욕망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사랑을 나누고 싶다기보다 아내더러 행복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일렀다. 그냥 밖으로 나와서 언덕 아래 보트 선착장에 있는 방파제에 앉았다. 연못처럼 잔잔한 물가에는 가지각색의 보트가 들판으로 내몰린 황소 떼처럼 가지런히 정박해 있었다. 빵집에 가서 아내에게 줄려고 젤리도넛을 샀다. 돌아오니까 집은 아직도 조용했다. 하지만 아내는 잠에서 깬 상태였다. 침대 위로 찾아든 햇살의 향연을 평화롭게 즐기며 누워 있을 뿐이었다. 스타킹 고마워요. 여보.

잠시 기다렸다가 몸을 숙여 아내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근데 당신 운동 좀 해야겠어요. 운동?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이런저런 운동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아무 운동도 안 하잖아요. 하고 있어. 자신 없는 대답이었다. 그날 나는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야규장에서 센터필드를 광대처럼 뛰어다니며 공중에 높이 뜬 플라이볼을 쫓겨다니게 되었다.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야구장이 나타나 덕아웃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두 선수가 공 한 바구니하고 배트를 들고 야구장에 나타난 것이다. 중요한 시합을 앞둔 모양이었다. 글러브 좀 빌려 줘. 그럼 너희가 친 공을 내가 잡아서 던져 줄게. 내 제안이 괜찮았던지, 홀쭉한 녀석이 자기 글러브를 나한테 던져 주었다. 나는 글러브를 받아들고 외야로 달려 나갔다. 첫 번째 공이 날아오자 정확하게 낙하지점 밑으로 달려가서 막 잡으려는 순가, 공이 갑자기 왼쪽으로 예리하게 꺾이더니 내 어깨를 때렸다. 돌멩이로 맞은 느낌이었다. 놀라움과 통증을 감추려고 했지만 공을 던지던 녀석이 괜찮냐고 커다란 소리로 물었다. 계속 플라이볼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가 더 나쁜 일이 생겼다. 두 발이 접질려 뒹굴면서 펜스에 부닥친 것이다. 60개의 공 가운데서 잡은 공은 단 2개였다. 1시간가량 야구장에 있었지만, 언제 끝을 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픈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육체적인 한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믿을 수 없는 건 야구공이 날아오는 거리와 낙하지점에 대한 판단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이 같은 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예전에는 타석에서 105미터 떨어진 중견수 자리에 대기하고 있다가 타자가 공을 치면 공이 날아올 지점을 파악하고 미리 가서 기다렸다 잡을 정도였다. 대학 시절에는 메이저리그 세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메인 대학과 시합하던 어느 날 오후였다. 한 번은 등 뒤로 날아오는 공을 쫓아 큰 걸음으로 십여 보를 뛰어가서 공중을 여전히 날고 있는 공을 건져내곤 그대로 펜스 꼭대기에 몸을 부딪친 일도 있었다. 그래도 공은 글러브 안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이 경기를 지켜보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스카우터가 우리 팀 코치더러 저런 공을 잡을 수 있는 중견수는 셋밖에 없는데 셋 다 메이저리그에서 대활약중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봄날은 갔다. 완전히 갔다. 연습이 끝나고 두 선수는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시멘트 바닥에 부딪치는 그네들의 스파이크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실려 예전에 내가 살았던 화려한 인생이 슬며시 돌아오다가 사라졌다. 덕아웃의 닳아빠진 마룻장과, 녹색 페인트를 덕지덕지 몇 겹으로 칠한 벤치를 둘러보았다. 잡초와 먼지도 보였다. 거기 앉아 있으려니 갑자기 아내가 생각났다. 사실 나는 아내에 관해서 거의 모르고 있었다. 학생 때 무슨 운동을 했는지, 뭘 가장 무서워하는지, 우리가 처음 만날 때를 계속 그리워하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아내가 어떻게 웃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아내의 웃음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아내가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렸던가? 집에 돌아와서 아내더러 외출하자고 했다. 영화 구경을 하고 레스토랑에서 치즈케이크를 먹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나는 유모차를 가지러 갔다가 야구 배트와 중고 테니스공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집어 들어 피크닉용 돗자리와 함께 스테이션 왜건의 뒷좌석에 던져 넣는다. 나는 아내를 데리고 리틀 야구 경기장으로 갔다. 아내가 배트를 들고 테니스공으로 플라이볼을 쳐주었지만, 높이나 거리가 별로여서 큰 도움이 안 됐다. 나중에는 손으로 던져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어두워질 때까지 던지고 받기를 계속하다가 중견수 자리에서 서로 손을 잡고 축축한 잔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사방에 널린 노란 테니스공이 완전히 우리 두 사람을 포위한 꼴이었다. 영화를 보긴 좀 늦었죠? 그럼 내일 밤에 보지, . 우리는 집 근처 초원에 반딧불이 굉장히 많이 몰려들어 잠자는 에린과 넬을 깨워서 보여 주던 한여름 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너무 어려서 기억 못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우리 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그런 추억을 심어 주면서 길렀다. 아내가 말했다. 내일부터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해요. 웨이트리스 같은 자리. 깜짝 놀랐다. 우선 머리에 떠오른 건 집에 남아서 내가 아이들을 돌보느라 아무 일도 못 하고 깨끗하지도 않은 앞치마를 걸친 채 점심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내더러 그러지 말라고 했다. 모든 게 흔들리고 있어. 나도 분명히 느낄 수 있어.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흔들리지 않는 게 하나쯤 있어야 돼. 제발 부탁이야. 콜게이트의 쓰레기통과 골프 가방에 처박은 초빙 거절 편지가 생각났다. 아직 답장을 보내지 않은 대학이 몇 군데나 남았더라? 나는 더 이상 직장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부탁하며 아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이 일자리를 찾아다닌다는 건 내가 취직을 못 할 거라는 의미밖에 안 돼. 하지만 나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단 말이야. 꼭 좋은 자리가 나올 거야. 그러니까 나를 믿어줘. 어쩌면 진작부터 일을 시작하는 게 좋았을지 몰라요. 아이를 갖는 일 대신. 갑자기 아내가 슬퍼 보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가 계속 입을 열었다.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노라면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지만, 다른 엄마들처럼 직업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들한테 체면이 깎이지나 않을까 가끔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내가 게으르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동정을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후에 야구장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최선을 다했어. 그런데 공을 잡을 수 없었어. 괜찮아요. 아직 칠 수는 있잖아요. 아내가 내 팔을 베고 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난 아기를 갖는 게 너무 좋아요. 지금도 아기를 담은 커다란 배가 가장 그리워요. 8년 동안 젖을 먹였으니, 이제 그만 끝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 아니에요. 평생토록 그리워할 거예요. 나는 아내를 내려다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말했다. 나중에 아기가 또 생길지도 몰라. 아내는 이 말에 아무 대답도 안 하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모르는 것 하나를 확실히 알고 있어요. 그게 뭔데? 아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5 과거를 떠나기 위하여

 

해변가에 앉아 있는 게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휴가 때나 되어야 느긋하게 즐길 법한 일을 휴가 때가 아닌 지금 하고 있다는 자체도 찜찜하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할 사람이 매일같이 해변가에 나와 세월을 보낸대서야 어찌 말이 되겠는가!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일상에 익숙해져 갔다. 아침이 되면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여러 대학에 보낸 신청서 사본을 검토하고, 아내는 꼬마들을 모아 매일같이 되풀이하는 순례를 떠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을 챙긴다. 야외에서 먹을 점심을 싸고 (나한테 땅콩버터와 잼 샌드위치를 준비할까 물어본다), 잭의 수영복을 열심히 찾는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나는 가족들이 탄 스테이션 왜건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준다. 그리곤 내 일상으로 되돌아와 으시시한 슬픔과 싸우다가 자전거를 타고 마을 교외에 있는 꼬마 야구장으로 간다. 아예 테니스공을 담은 양동이와 야구 배트를 덕아웃에 놓아 두었다. 두세 시간 동안 홈플레이트에서 감독이 선수에게 연습볼을 치듯 아무도 없는 외야를 향해 공을 쳐낸다. 배트를 휘두르는 동안 내 마음은 서류를 제출하고 결과가 오기만 기다리는 대학의 목록을 점검해 본다. 스윙을 멈추고 외야에 흩어진 공을 주워 담다 보면, 우리 꼬마들에게 아름다운 캠퍼스를 구경시켜 주던 장면이 꿈처럼 떠오른다. 가을이 되면 노랗고 빨갛게 물드는 휘휘 늘어진 커다란 나무들이 있고, 주말마다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러 다니는 극장이 있고,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줄 장미꽃을 사던 꽃집의 아가씨가 있는 곳.

어느 날 아침, 야구장에 도착하니 어떤 남자가 외야로 골프공을 날리고 있었다. 남한테 안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욕을 해 주고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 후에 갔는데 여전히 그 남자가 있었다. 나는 사내에게 어줍잖게 말했다.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어요. 그래서 뭔가 새로운 구상을 하려는 중인데, 혼자 있지 않으면 집중이 통 안 되더라구요. 그래서 여기 오게 되었습니다. 선생 마음, 알고도 남습니다. 사내가 친절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내 역시 메인 남부의 부동산 경기에 불황이 닥치자, 잘 나가던 회사가 파산하여 2년이 넘도록 실직 상태에 있다고 했다. 그리곤 컨트리 클럽에서 떨려난 다음부터 이 황량한 꼬마 야구장에서 외야로 골프공을 날리고 있다는 것이다. 손이 꼭 어린아이처럼 부드럽고 주름 하나 없었지만, 나이는 대략 60 전후로 보였다. 이젠 설령 기회가 생긴대도 직장으로 돌아가 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몸무게가 너무 많이 빠져 입던 옷 중에서 맞는 게 한 벌도 없을 정도니까요. 착한 성품에 마음이 끌렸다. 매일 그 사람과 만나는 일이 몹시도 기다려졌다. 사나흘 지나 그 사람이 여벌로 골프채를 하나 더 가져와서 함께 스윙 연습을 했다. 어느 날, 친한 친구들이 모이는 보스턴의 친목회에 갈 참인데, 구체적인 직업이나 전망이 없어 친구들 얼굴을 대하기가 껄끄럽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꺼내게 되었다. 그러자 사내가 대답했다. 그래요. 전망이 없으면 한가롭게 친구들 사이에 끼여서 쉴 틈도 없지요. 내 기분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내는 사내의 말에 용기를 얻어 가끔 뒤로 넘어질 것 같은 묘한 느낌이 일어난다는 얘기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사내도 동조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 하지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꼭 명심해야 합니다. 선생이 총장 마누라와 간통을 저지른 건 아니니까요. 지금은 나라 전체가 그 모양이에요. 가장이 쉴 만한 공간은 이제 전혀 없어요. 내 말을 명심하세요. 자기 탓이라는 느낌이 들 때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절대 자기 탓이 아닙니다. 망할 놈의 조직사회가 주범이지요. 공산주의가 무너졌어요. 우리 모두가 그 장면을 흐뭇한 기분으로 바라보았을 뿐, 바로 그 다음이 우리 차례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죠. 문명 자체가 사양길에 접어들었어요. 시기를 잘못 만난 거지 당신이 뭘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감미로운 음악이 이보다 더하랴! 불편한 내 심기를 조직 사회 의 책임으로 돌리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격려는 그야말로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래도 친구들을 만난다는 건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친목회를 사흘 앞둔 어느 날 꼭 궁둥이에 꼬리를 달고 친구들 앞에 나서는 기분 이라며 가지 않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꼬마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고 아내 혼자 소파에서 빨래를 개던 깊은 밤이었다. 아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제일 친한 친구들이잖아요? 꼬마들 양말을 차곡차곡 개고 옷과 내의를 접는 아내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꼬마 하나당 옷가지가 각각 한 단씩 쌓여 있는 게 모두 네 무더기였다. 아내는 옷을 갤 때마다 어느 옷가지가 어느 단에 속하는지 잘도 알고 척척 분류하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많은 옷가지를 살 때 난 어디 있었지? 꼬마들한테 옷 입는 법을 가르쳐 줄 때 난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모르겠다. 생각이 안 난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아내만큼 아이들을 속속들이 알게 될 가망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아내 곁으로 가서 서류를 보낸 대학마다 모조리 거절당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신한테 말은 안 했지만, 모두 스물한 군데야. 괜찮아요. 앞으로 좋은 자리가 생기겠죠 뭐. 나도 그렇게 믿고, 당신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아이들 옷더미를 바라보았다. 나는 하얀 티셔츠 한 장을 개면서 말했다. 모든 게 아기자기하군.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어요. 물론 그렇겠지. 내 말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기야. 주름이 잡힌 옷에 얼굴을 대고 아기용 파우더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리고 그 옷을 아내에게 주면서 냄새를 맡아 보라고 했다. 아내는 웃으면서 아이오와에 있을 때 에린이 그 옷을 입은 모습이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그럼, 기억 나구말구. 대답은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카라가 훌쩍 크고 나면 아기 때 쓰던 물건은 전부 버려야 할까 봐요.

아내의 얼굴을 보니 내가 그러지 말라고 대답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럼 이제 아기에게 해방이 된 건가? 아내는 내 눈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치켜올렸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런 말은 하지마세요, 알았죠?

알았어. 보스턴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억지로 태연한 척하지 말아요.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주세요. 고속버스를 타고 보스턴으로 가는 도중에 아내가 한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했다. 물론 지금 다른 친구들도 보스턴으로 모이고 있을 것이다. 플로리다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짐 로빈슨은 비행기로 날아오겠지. 정형외과 의사 존 브래드포드와 검사 조지 우드콕은 메인의 벵고르에서 승용차로 달려오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짐 라이트를 비행기로 날아올 터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둥근 얼굴에 붉은 머리칼을 가진 통통한 소년이었던 브래드포드는 웨이트리스만 보면 사랑에 빠졌다면서 추파를 던지는 악동으로 유명했지. 반면에 로빈슨은 넘치는 재치와 주먹이 빠른 싸움꾼이었지. 그리고 일곱 형제 가운데에서 넷째인 우드콕은 사색형으로 중학생 때 벌써 유행가 가사를 음미한곤 했지. 짐 라이트는 목적이 뚜렷한 성격답게 당당하게 걸었고. 나는 터치다운을 여러 번 기록하고 홈런을 수없이 친 데다가 행운이 따른 덕에 가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네들 세계에 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네들의 화려한 삶을 한 번 경험한 다음부터는 나도 그런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네들에게는 집을 청소하는 가정부와 음식이 그득한 냉장고와 찬장, 미식 축구도 할 수 있는 널따란 정원, 덮개를 열고 닫는 스포츠카, 해변가에서 보내는 여름 캠프, 변호사나 의사인 아버지들이 있었다. 브래드포드네 집에는 농구장만큼 커다란 헛간이 하나 있는데, 헛간과 이어진 뒷계단으로 가다보면 사탕이 가득 담긴 유리 단지를 지나치게 된다. 아무도 안 보고 있으면, 난 언제나 거기서 걸음을 멈추고 사탕을 한 움큼 꺼내 주머니에 집어넣곤 했다. 신기하게도 다음에 가 보면 단지에는 다른 사탕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쩌면 이 작은 사건이 상류사회를 향한 내 욕망에 불을 당겼는지도 모른다. 이런 욕망은 나로 하여금 열일곱 살 때 여름 별장식 호텔에서 접시 닦기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스무 살 때는 친구들한테 간단한 일자리 하나쯤 얻어 줄 수도 있을 만한 위치까지 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호텔에서 유년기의 마지막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 우리들은 각자 아내와 자식과 직장이 이끄는 대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그 해 여름 우리는 호텔 4층에 있는 종업원 숙소에서 함께 지냈다. 문 몇 개만 지나면 잘 빠진 웨이트리스들과 칵테일바 호스티스들이 있었고, 전국 가지에서 모여든 여대생들도 있었다. 꿈 같은 시절이었다. 그래, 그때는 그랬어. 난 모든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거물이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과거의 나를 회상하며 약간의 자신감을 회복하다 보니, 어느덧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목적지에 도착했다.

예전의 자신감을 조금이라도 되살리자. 하지만 검은 망또를 뒤로 길게 늘어뜨려 조로처럼 차려입은 호텔 직원에게 가방을 맡기다 보니, 그가 나를 조롱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또다시 현기증이 일어났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깔릴 무렵, 브래드포드와 우드콕이 코트에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녀석들은 그동안 내가 기억 속에서 그려왔던 소년이 아니라 신용카드를 꺼내 신분을 과시하는 중년의 신사들이었다.

우리는 함께 로빈슨을 마중하러 공항으로 나갔다. 머리가 거의 은발로 변해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로빈슨이 내 이름을 불러 비로서 알아볼 수 있었다. 첫날 밤 늦은 시간에 로빈슨은 아내가 멀어지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다면서 말했다. 제기랄, 뭔가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그럴 만한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결혼은 하나의 환경이라구.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커다란 재난은 잘 견디어 내지. 그런데 매일매일 눈꼽만큼씩 깨져나가는 건 어쩔 수 없어. 로빈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역시 아내가 멀어지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만일 우리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되면, 아내는 아이들이 다 자란 다음에 아이들에게 결혼 생활의 종말을 어떻게 설명할까? 문제는 네 아버지가 콜게이트 대학에서 일자리를 잃으면서 시작되었지. 내가 아끼던 집을 팔고 다정한 친구들 곁을 떠나야 했어. 그 후로도 네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어. 날이면 날마다 꼬마 야구장에 가서 어떤 사람하고 골프공이나 치면서 시간을 보냈단다. 이 모든 사태에 책임을 질 생각은 안 하고, 자기는 남과 다른 인생을 살 자격이 있는 훌륭한 인물이라는 예전의 자화상에만 매달려서 세상이나 비난하며 돌아다닌 거야.

첫날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해고가 기정사실로 되던 날, 한밤중에 일어나서 손전등을 들고 집안을 돌며 팔 수 있는 세간살이를 점검하던 일이 생각났다. 가족들이 나를 버리면 나중에 가족을 만나러 처음 보는 낯선 집으로 가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낯선 현관문을 두드리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처음에는 친구들끼리 오래간만에 한자리에 모여 웃고 떠들며 주말을 보내게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우리는 거의 모든 시간을 공원 벤치에 조용히 앉아서 보냈다. 호텔에서 함께 보낸 마지막 여름 이야기도 나왔다. 그 시절을 묘사하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다보니, 당시의 손님과 그네들의 독특한 버릇이 뇌리에 떠올랐다. 바우만 여사는 나이가 90대인데도 매일 아침마다 바다가 아무리 사납더라도 1.5킬로미터를 꼭 헤엄치고 돌아왔다. 자코비 부부는 매주 일요일 밤만 되면 음악실에서 연주를 했다. 남편은 첼로를 연주했고 아내는 바이올린을 켰다. 두 사람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다. 두 사람이 연주를 마치면 호텔 손님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며 부드럽게 에워쌌다. 그러면 자코비 씨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실력이 좋지 않아요. 미안합니다, 여러분. 나는 지난 25년 동안 단 한 번도 기억의 표면에 떠오른 적이 없는 아이어 여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두 해 여름을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똑같은 아침식사를 가져다주었다. 3분 정도 삶은 계란 하나에 무가당 포도 주스 한 잔, 버터를 바르지 않은 통밀 빵, 조간신문, 그게 매일 반복되는 아침식사 메뉴였다. 내가 한 손으로 은쟁반에 담은 아침식사를 받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은 채 자전거를 타고 여사가 묵는 방갈로로 가기만 하면, 그녀는 90줄에 접어든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와 대화 나누는 걸 좋아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친구들과 일몰 항해를 계획하고 있으니 믿을 만한 일기 예보를 알려 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에 바다로 나가 보니 인명 구조원 한 사람이 천둥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칠 가능성이 있다고 일러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이어 여사가 당할지 모르는 불행한 사태를 막으려고 한달음에 호텔 방가로로 달려왔다. 여사는 호텔 수영장 옆에서 친구들과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어 여사가 앉아 있는 탁자로 걸어갔다. 여사는 나를 등지고 있었지만 친구 하나가 손짓으로 알려 주어서 고개를 돌렸다. 일기 예보를 들었어요. 나는 여사에게 바다의 기상 현황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여사의 얼굴에서 갑자기 핏기가 싹 가시기 시작하더니, 턱을 아래로 떨구며 안 돼, 안 된다구. 하고 소리치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자리에서 싹 증발해 버리고 싶었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해. 그러자 브래드포드가 말을 받았다. 자네는 그 일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어. 매니저 비슷한 자리로 승진한 다음부터 자네는 우리하고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 우리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묻자 브래드포드가 대답했다. 모른 척하지 마. 이건 꼭 알아야 해. 넌 그때부터 식당에 들어와도 전용 탁자에서 혼자 따로 식사했을 뿐 아니라, 바지도 우리와 다른 붉은색을 입었어. 브래드포드가 당시의 내 모습을 떠올리는 이야기를 하자,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가 폭소를 터뜨렸다. 내가 식당에서 손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 다음부터 브래드포드의 임무는 나에게 네모난 작은 버터를 갖다 주고 내 앞에 놓인 크리스탈 유리잔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내가 식탁에 앉아서 정장 차림으로 내 옆을 지나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동안 브래드포드가 내 유리잔에 물을 계속 부어 탁자는 물론 사타구니까지 물바다로 만들어 놓은 다음 맛있게 드십시오 라는 말을 남긴 채 수레를 밀고 식당을 가로질러 유유히 사라진 적도 있었다. 갑자기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때 난 손님과 호텔 임원의 눈에 들려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던가! 그래서 다른 종업원들과 사이가 얼마나 안 좋았던가! 친구들과 함께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기도 했지만 여름 휴가를 즐기는 손님들의 마음에 들길 훨씬 더 원했었다. 그네들이 나에게 일자리와 특권을 나눠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네들이 나를 좋아하면 나한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그토록 도망치려고 애쓰는 세계로 다시 전락하지 않도록 만들어 줄 것 같았다. 만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신중하게 처신한다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물을 한아름 안겨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신념까지도 굳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날 밤 보스턴에서, 나는 예전의 그 두려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브래드포드와 나는 다른 친구들이 다 잠에 떨어진 다음에도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시절에 내가 호텔에서 왜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는가를 이해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는 자네에 비해 아주 절실하게 그 사람들 돈이 필요했어. 엿먹어. 네 놈은 정말 나쁜 놈이야. 브래드포드가 웃는 얼굴로 말하더니, 두 손을 내밀며 던지라는 시늉을 했다. 방 열쇠나 이리 던져. 열쇠를 던졌지만 녀석은 받지 못했다. 못 받을 줄 알았어. 내가 말했더니, 녀석은 이 곳에 오기 전에 검진을 받았는데 아침에 결과를 통보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중추신경계에 이상이 생겼대. 녀석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가끔 공상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했다. 갑자기 엄청난 재난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온 천지에 무장한 강도들이 넘쳐나고, 인간의 삶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되겠지. 하지만 우리는 미리 피난 갈 장소를 만들어 놓았으니까 별문제 없을 거야. 녀석은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너와 우드콕, 로빈슨, 짐은 제각기 식구들한테 일정한 양식을 나눠 주고 뒷길을 따라 우리 가족의 여름 별장으로 숨어드는 거야. 우리는 거기서 경비를 철저하게 하면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한편, 자녀들도 가르칠 수 있을 거야. 그러다가 사태가 훨씬 더 절망적으로 변하면, 우리 모두 큼직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거야. 브래드포드는 슬픈 목소리로 나폴레옹 이야기를 해주었다. 군대가 너무 방대해진 나머지 장교를 일일이 알아보기 힘들게 되자 진급 목록에 적힌 각자의 이름 옆에다 운이 좋은가? 라는 한 가지 질문만 써 놓은 다음, 참모들에게 진급 대상자 중에서 운 좋은 장교가 누구인가 알아보도록 지시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했다. 여태까지 우린 운이 좋았어. 건강, 사랑, 칭찬 그리고 일정한 자유. 녀석은 언제나 내가 제일 운이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운이 좋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친구들이 영웅처럼 바라보며 부러워할 위치를 차지하려고 지금까지 평생을 바쳐 일했다. 그런데 친구가 나한테 기대려고 하는 지금 오히려 나 자신이 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뱃속이 메스꺼워졌다. 브래드포드는 잠에 빠져들기 전에 내년도 학교 생활은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전망이 아주 좋은데, 조금 있으면 결정 날 거라고 대답한 것이다. 녀석은 이 말을 완벽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호텔에서는 너무 일찍 일어나면 별로 재미가 없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밤새도록 한 잠도 못 자고 호텔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식당의 아름다운 호스테스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 마스카라도 못 그리고 브래지어도 못 한 상태였다. 인조 나무의 잎새들을 반짝반짝 빛나도록 닦아놓은 게 마치 진짜처럼 보였다. 공중전화가 놓인 탁자에는 새빨간 루즈 자국이 묻은 담배꽁초가 남아 있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환상이 다시 살아나기 전이었다. 태양을 받은 나무가 밝게 빛나기 전. 벨보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근무 시간이 끝나 조로 망토를 벗어던진 모습이 피곤해 보였다. 벨보이가 나를 기다린다는, 나를 무대 뒤로 에스코트해서 지금까지 나 자신에 대해 진심으로 믿어왔던 모든 것이 일종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버스 시간이 다른 친구보다 늦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모두 떠난 다음에도 내 방 창가에서 좁다란 잿빛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대학 시절에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보스턴에 왔던 기억이 났다. 우리는 그때 하버드 광장에 갔는데, 월남전 반대 시위가 폭력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말을 탄 경관들이 학생들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노스이스턴 대학의 여학생 기숙사에 묵고 있던 그날 밤 늦은 시간에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학생 녀석 하나가 걸어가다가 보도에 주차된 차량의 앞면 유리를 모조리 박살내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행복과 안전을 보장하는 미국 사회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생각한 기억이 났다. 상류 사회에 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할 수 있던 시절!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어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호텔 창가에 서서 이 말을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갑자기 나 자신이 역겨워졌다. 다음 순간, 콜게이트의 전임 교수들과 총장도 내 속에 숨어 있는 이런 속물근성을 꿰뚫어보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학생들한테 잘 보이려고 너무 많이 노력했고, 학점을 너무 후하게 주었으며,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넘으면 안 될 선을 너무 자주 넘었다. 체크아웃을 하고 나니 딱히 갈 데가 없었다. 로비에 앉아서 벨보이가 팁이 나올 법한 손님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다시 교수 자리를 얻을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이, 호텔 로비에 앉아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아직 답장이 오지 않은 여섯 군데 대학으로 내 약점이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만일 내가 직업이 없어 부양 수단이 없다면, 친구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승용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브래드포드가 생각났다. 몸 안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는 죽음의 질병이 핸들 잡은 손가락을 뻣뻣하게 만들 터였다. 녀석은 어렸을 적부터 언제나 내가 필요로 하는 자리에 있었다. 나는 로비에 앉아서 나 자신에 대한 모멸감을 실컷 느끼다가, 앞으로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한 방향으로 생각을 돌렸다.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멋진 정장 차림의 호텔 손님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보스턴에서 새 직장을 찾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사람들 목록을 떠올려 보았다. 미안하다는 거절의 답장 이 골프 가방에 가득하니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긴 힘들 테지만, 다른 직업을 구하는 건 가능하지 않겠는가! 20여 년 전 대학을 갓졸업한 무렵, 메인의 기숙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함께 하던 동료 한 명이 마침내 생각났다. 내가 알기로는 교직을 떠나 보스턴의 한 출판사로 자리를 옮겨서 승진을 거듭한 끝에 부사장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우선 전화부터 걸었다. 이게 누구야? 콜게이트 생활은 어떤가? 전화선 너머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나왔다. 좋아, 일은 잘 풀리고 있지만... 이곳에 다니러 온 김에 자네 얼굴이나 볼 수 있을까 해서. 그야 물론이지. 예전의 동료는 나를 점심에 초대했다. 옛 동료 역시 멋진 정장 차림을 하고 나왔다. 출판사 건물과 함께 있는 카페에서 줄을 선 채 점심 주문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의 삐삐가 울렸다. 젠장. 금방 돌아올게. 자네 주문은 어떻게 할까? 하지만 옛 동료는 벌써 전화통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줄을 따라 앞으로 나가다 보니 음식을 주문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치킨을 주문했다. 주방장이 건네준 치킨이 너무 끔찍하게 보였다. 하지만 나에겐 그걸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방은 사업 이야기에 몰두하는 정장차림 천지였다. 나는 친구가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호흡을 고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여름 호텔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증발해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옛 동료가 빨간 사과 하나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나타났다. 선약이 있는데 깜빡했어. 미안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손을 내저으며 제지했다. 아니, 아직은 괜찮아, 5분 정도는 시간이 있어. 근데 요즘 어떻게 지내? 일자리를 부탁한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올 리 없었다. 일자리가 절박하게 필요한 건 아니지만 다른 계통으로 직업을 바꿔볼까 생각하고 있다는 정도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꼬마가 넷이기 때문에 생활비가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한 기억도 난다. 그래, 그렇겠지. 옛 동료는 대답과 함께 선약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1시간 정도 걸릴 거야. 선약은 2시간 정도가 지난 다음에 끝났다. 북적대던 정장들은 이미 모두 사라진 다음이었다. 오렌지색 플라스틱 테이블에 덩그러니 남아 마치 초등학교 학생처럼 앉아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드디어 옛 동료가 돌아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주 친절했다. 나를 도와줄 방법이 없다는 말을 하기가 몹시 어려웠던 모양이다. 아마 여기 일도 자네 마음에 별로 안 들 거야. 영업직도 괜찮아. 밖에 나가서 책 파는 일 말이야. 딴은 나도 지금까지 책을 팔아 왔다고 할 수 있어. 기를 쓰고 안 읽는 학생들한테 문학 을 팔아왔으니 말이야. 옛 동료가 잠시 관심을 보이는 듯하더니 이내 표정을 바꾸어 말했다.

실은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대개 20대 초반이야. 대학을 갓 나온 젊은이들이라구. 그런데 내가 자네를 추천하면 자네 체면이 뭐가 되겠나? 내 입장도 편치 않을 테고 말이야. 그건 말도 안 돼.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너무 창피해서 아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심한 모욕감이 몰려들었다. 옛 동료와 만난 일을 처음부터 천천히 떠올리면서 마음속으로 대화 내용 일부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이 녀석도 나에 대해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털어내려고 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불편해 하던 옛 동료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나는 그 후 몇 개월 동안 현실 세계에서 직업을 구하려는 시도를 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콜게이트 대학을 떠났으며 대학 강단에 다시 서게 될지 어떨지 확실치 않다고 옛 동료에게 고백했으며 내가 말을 한마디 꺼낼 때마다 옛 동료의 얼굴은 더 창백하게 변했다.

 

6 적개심과 신용카드

 

콜게이트 대학의 최종 급여: 2,082.00달러

지출: 식료품비 231.12달러, 연료비 34.35달러, 전기 요금 87.55달러,

보스턴 여행 경비 242.00달러, 카라 생일 잔치 61.00달러, 아이들 자전거 323.33달러

잡비 29.00달러, 집을 팔 때 입은 손해 1,733.00달러

잔액: 12,191.56달러(622일 현재)

꼬마 야구장을 다시 찾았다. 전에 만났던 실직한 사업가를 만나, 보스턴에서 친구들한테 거짓말을 한 게 영 찜찜하다고 했더니, 참 낭만적이라고 하면서 딴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해 주었다. 언제 해내면 되는 건데요? 지금. 오늘 안 되면 다음 주에라도.

함께 골프공을 날리면서 잠시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진짜로 달성하고 싶은 건 돈과 관계된 일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입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 그럼 집을 구하면 되잖습니까? 아마 지금 가진 돈으론 입주금도 모자랄 거에요. 게다가 매달 꼬박꼬박 내야 하는 할부금은 어떻게 하고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능력이 안 됩니다.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 잘 들어 보세요. 아이들이 넷씩이나 있는 가족을 지금 당장 살고 있는 집에서 쫓아낼 법원은 없어요. 은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적당한 주택을 골라 보세요. 그 후 나는 며칠 동안 아내와 아이들에게 다시 우리 집을 갖게 해 줄 방법만 생각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집을 돌아보고 얼마나 많은 부동산 중개인과 만나고 전화 통화를 했는지 모른다. 공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 때마다 꼬마 야구장에 가서 실직한 사업가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용기를 얻었다. 그는 파산을 당한 와중에도 변호사에게 거의 90만 달러에 달하는 채권을 가지고 있는 은행으로 편지를 보내게 하여 자신이 타고 다니던 벤츠 두 대 가운데 한 대와 해변가에 있는 방 여덟 개짜리 주택을 건졌다고 했다. 우리는 은행 측에 우리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달했어요. 안 그러면 난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당신네는 땡전 한 푼도 못 받게 될 거라구요. 요즘은 이런 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전에 나하고 동업하던 사람은 캔자스의 신용 금고에서 현찰로 1,400만 달러를 빌린 후 말레이시아로 날라 버렸지요. 20세기 초에 카네기나 록펠러가 했던 짓거리도 하나도 다를 게 없어요. 항상 자신만만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한테 최상의 기회가 오는 법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착하게만 살면 안돼요. 집을 보러 다니다 보니, 잘못된 건 내가 아니라 조직이나 제도 자체라는 그의 말이 정말로 실감이 났다. 신문의 부동산 광고 바로 옆에는 다이어트 프로그램 광고가 세 개나 있었다. 그리고 14호 웨딩 드레스를 판다는 광고도 있는데, 한 번도 안 입은 드레스라고 했다. 몸이 갑자기 불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매일같이 대여섯 시간씩 부동산 광고 난을 뒤졌다. 진짜 양심적인 부동산 업자 즉, 방이 셋 달린 사랑스러운 농장이 있습니다. 최근 5년간 열 번이나 팔려고 내놓은 것인데, 이 농장을 산 사람은 처음에 잘 지냈지만 비만 오면 지하실에서 심한 악취가 올라오기 때문에 금방 팔려고 내놓습니다. 하고 광고하는 업자를 찾고 싶었다. 한번 집을 구입하러 다녀 보라. 그러면 이내 알게 될 것이다. 행복한 이유 때문에 내놓은 집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집을 한 채 산다는 건 다른 누군가의 슬픔을 함께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부동산 거래에 속임수가 그렇게 많이 끼어드는 모양이다. 어느 집이든 항상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부동산 중개인들의 꺾이지 않는 의지는 가히 존경스럽다. 어떤 광고에는 중개업자의 얼굴 사진이 큼직하게 나와 있었다. 구레나룻 끈에서 구부러진 미소 밑에 씌여 있는 문구가 가관이었다. 귀하의 행복이 저의 행복입니다! 말은 화려한 게 그럴 듯하다. 부동산 업자들은 이런 문구로 서민의 굳센 믿음 즉, 어떤 물건이든 자기 것으로 만들면 행복해진다는 믿음을 자극하는 법이다. 하기야 나 역시 그런 믿음을 끌어안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을 소개한 여자 부동산 업자도 나와 악수를 나누면서 그런 나의 믿음을 한눈에 알아보았으리라. 카스코 만에 있는 섬에 가면 땅값이 싸다는 말을 들었던지라, 나와 아내는 아이들을 하루 동안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배를 탔다. 물론 생전 처음 보는 여자 부동산 중개인의 소개로 집을 보기 위해서. 우리를 맞이한 여자 중개인은 밝은 오렌지색 초미니 반바지에 같은 색 배꼽티를 입고 있었다. 배꼽티 가슴 부분에 수놓은 태양 숭배자 라는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여인은 배에서 내린 우리를 자동차에 태워서 섬을 한 바퀴 돌았는데, 아내가 앞좌석에 앉고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자동차가 꼬마 여자아이와 함께 걷는 남자를 지나칠 때, 여인은 차창을 내리고 아이가 나날이 예뻐지네요. 레스터 씨! 하고 인사를 건네더니, 다시 창문을 올리고 페달을 밟으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못생긴 여자도 저렇게 예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저 아이 엄마가 이 섬에서 제일 못생긴 사람이거든요.

여인은 보트장 근처에 있는 땅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나무숲을 가리키며 걷는 그녀 뒤를 졸랑졸랑 따라다녔다. 이건 상품 가치가 대단한 거예요. 저 소나무들을 한번 보세요. 처녀림이죠! 게다가 얼마나 깨끗합니까? 옹이가 전혀 없으니까 사람 한 명만 사면 휴대용 전기톱으로 잘라서 곧바로 목재로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러면 멋있는 통나무집 한 채를 지을 수 있죠. 여인이 말을 마치면서 나무로 다가가 새빨간 손톱으로 나무껍질을 툭툭 쳤다. 정말 엄청난 나무예요. 나라도 당장 땅을 사서 이 나무들을 베보자고 했다. 현지에서 바닷가재를 잡는 어부 소유인 오두막 한 채가 169,000달러에 나와 있었다. 집안에 들어가 보니 대낮인데도 어부의 두 아들이 소파에 퍼질러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내가 여자 중개인을 따라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두 아이와 함께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어떤 남자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너희들, 요리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지? 두 아이에게 물었더니, 녀석들은 글쎄요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창문 너머로 섬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섬이 무슨 섬인지 알지? 아이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한 번 어깻짓을 했다. 그날 아침 배를 타러 가기 전에 나는 에린과 토스트를 먹으면서 앞으로 섬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내 음성이 꿈결처럼 들렸으리라. 낡은 가재잡이 배를 한 척 사서 운반선으로 개조하고 너희 자매와 잭과 내가 다같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육지로 가서 식료품을 받아다가 섬에 사는 사람들한테 갖다 파는 거야. 섬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을지 아빠가 어떻게 알아? 육지로 떠나기 전날 밤에 섬사람들한테서 미리 필요한 물건을 주문 받는 거야. 그러면 필요한 물건을 아침에 모두 구입할 수 있겠지. ! 그런데 지금 환한 여름날 대낮에 요리 프로를 보고 있는 아이들 옆에서 에린 생각을 하며 창 너머로 바위섬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이건 내가 그토록 벗어나려고 노력해 마지않던 메인의 삶이었다. 차로 돌아와서 여자 중개인은 어부가 16,000달러를 들여서 혼자 그 집을 지었는데 연간 4,000달러 가까이 되는 세금을 감당할 길이 없어 팔려고 내놨다는 사정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기분 좋은 어조로 말했다. 그 사람은 집을 팔면 금방 부자가 되겠지요. 물론 그 돈은 전부 술값에 쏟아 붓겠지만 말이에요. 그 사람, 엄청난 주정꾼이에요. 그 친구하고 결혼하지 않은 것만 해도 정말 운이 좋은 셈이에요. 여인은 잠시 자기 집데 들렀다 가야겠다고 했다.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집을 담보로 대출을 신청한 상태인데 아침 일찍 은행 측에서 사람이 나와 집을 감정한다는 것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여인이 감정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와 아내는 제라늄이 있는 거실에서 아름다운 카스코 만과 포틀렌드의 지평선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방에서 커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보세요, 이곳을 깔보면 안 돼요. 보통 이런 집을 산장 스타일이라고 하지만, 내 말을 잘 들어보라구요, 바닥에 깐 타일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거고, 그리고 저 창문 좀 보세요, 저 창문도 최고급 제품이라구요. 선착장으로 가기 전에 집을 한 군데 더 둘러보았다. 떡갈나무 판자로 멋지게 지은 하얀 농가였는데, 검은색 셔터가 달려 있었다. 그곳에는 나이 든 부인이 혼자 살고 있었다. 정식으로 시장에 나온 매물은 아니었지만, 두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뉴저지에 있는 양로원으로 보내려고 하면서 여자 중개인에게 매매를 부탁한 관계로 우리가 둘러볼 수 있었다. 여자 중개인은 한 손에 노트를 든 채 두 다리를 딱 버티고 선 자세로 우리를 배웅했다. 햇빛에 잘 그을린 피부가 마치 갈색 구두약을 칠한 것처럼 보였다. 배가 방파제에서 멀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여인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상체가 뒤로 기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체를 생전 처음으로 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계속 앞으로 질주하면서 주머니를 채우는 동안 세상은 이렇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인이 차에 올라타 다음 약속 장소를 향해 언덕으로 차를 모는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여인은 차를 한 번 세우더니 선창에 배를 대고 있는 가재잡이 어부한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우리가 둘러본 오두막의 소유자이자 두 소년의 아버지인 것 같았다. 배 갑판을 따라 걷는 어부를 지켜보았다. 한 사내가 16,000달러를 들여서 혼자 집을 지었는데 세월이 흐르자 오렌지색 초미니 반바지에 배꼽티를 입은 여자가 나타나 열 배의 가격으로 팔 수 있다는 말을 건넸을 때, 그게 그 사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게다가 사내는 자신이 매일 걸어 다녔던 곳을 영 실감나지 않는 엄청난 액수를 받고 팔아 주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만일 여자의 말을 통해 자기 집의 가치가 자기가 아는 가격의 열 배로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매일같이 하는 노동의 가치는 도대체 어떻게 된단 말인가? 결혼의 가치는 또 무어란 말인가? 게다가 아이들한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많은 섬의 이름이나 가르쳐 주면서 오후 나절을 보내는 가치는 또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날 오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 모두를 한꺼번에 벗어 버렸다. 사기성이 짙은 풍요로운 삶과 가난에 찌든 하층민의 삶을. 극단적인 두 개의 섬 사이에서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판단력 즉, 이성적인 사고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요소가 나한테 없는 것은 아닌지,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포기한 건 아니지, 아니면 앞만 보며 급히 달려오다가 도중에 잃어버린 건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그날 밤, 산책에서 돌아오니까 아내는 에린과 함께 앉아 있었다. 나는 잭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자고 있는 아이를 들어 올려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서 오줌을 뉘었다. 그래야 자리를 축축하게 적시지 않을 테니까. 잭을 거실로 데리고 가서 아내와 에린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어때, 정말 잘생겼지? 에린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생을 쳐다보더니, 깨어 있는 동안에 하루 조일 자신을 괴롭히던 동생의 뺨을 토닥이며 입까지 맞추었다. 잭을 다시 침대에 눕히고 아래층 거실로 내려가 보스턴 야구팀의 경기 결과를 알아보려고 라디오를 틀었다. 흘러간 노래가 나와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에린이 웃는 게 보였다. 나는 노래를 더 크게 부르며 거실 전체에 울려퍼지는 재즈 가락에 몰두하다 보니 마침내 나 자신에게 완전히 빠져나오게 되었다. 여길 봐! 이게 새로 나온 춤이야! 부동산 댄스! 음악 너머로 내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닭이 날개를 편 엉거주춤한 모양으로 안짱다리를 한 채 몸을 비비고 흔들고 꽥꽥 소리를 질러대면서, 호주머니를 뒤져 안에 든 돈을 몽땅 꺼낸 다음, 주머니 속천을 모두 다 밖으로 꺼냈다. 에린이 깔깔대며 옆에서 함께 춤을 추었다. 이 모습을 보라구! 느낌이 어때? 완전히 파산할 때까지 빚을 얻으라구! 다른 방법이 없잖아! 내가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내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리듬이 느린 곡으로 바뀌었다. 아내의 눈을 쳐다보았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그래? 노래 소리가 너무 끔찍해요. 난 그냥 웃겨 보려고 그런 거야. 미안해. 내가 라디오를 껐다. 하나도 웃기지 않아요. 끔찍할 뿐이에요. 당신은 자기 모습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안 그래요. 너무 무섭다구요. 이 말을 들으니 기분이 아주 상했다. 그래서 꼬마 야구장에서 만난 노신사에게 부동산 시장에 대해 그만 신경 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돈은 자꾸 빠져나가기만 하고, 은행 잔고는 매일같이 줄어들고. 그러자 노신사는 내가 너무 민감한 것 같다면서 말했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선생이 갖고 있는 돈 전부를 친한 친구한테 맡긴 다음 신용카드를 최대한 많이 발급 받는 거예요. 소득이 얼마냐고 물으면 눈 딱 감고 여섯 자리 숫자를 적어 넣으세요. 그래서 발급 받은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최대한 많이 받아내서 입주금을 지불하는 겁니다. 선생도 적개심을 느껴야 합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적개심과 신용카드가 꼭 필요합니다. 선생이 집을 구입한 지 한 달쯤 있다가 모든 카드회사에 편지를 보내는 겁니다. 뭐라고 쓰냐면 실직을 해도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만일 회사 측에서 대금을 독촉하면 선생은 파산 신청을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 그리고 아직 없으면 자동 응답기 한 대 구입해서 수금회사 직원들의 전화를 걸러내도록 하세요. 장담하건대, 수금 회사 친구들이 계속 전화를 할 겁니다. 크리스마스 날에도 일하는 친구들은 그네들밖에 없을 텐데 전화를 안 할 리가 없지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시간은 선생의 편이라는 사실을, 빚을 졌다고 다 잡아 넣는다면 이 나라 감옥이 모두 넘쳐날 겁니다. 그리고 이 점도 명심해 두세요. 카드회사는 대부분 은행이 운영하는데, 은행에서 일한다는 작자들은 대부분 아주 교만하고 냉소적이죠. 만나기도 싫을 정도로, 그런 그들이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는 거 봤습니까? 시간을 두고 천천히 빚을 갚을 수 있는 신용카드가 가난한 사람한테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은행에서 받는 이자는 엄청나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빚을 매달 꼬박꼬박 갚는 사람을 은행에서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멍텅구리 라고 부른다구요. 멍텅구리! 얼마나 딱 맞는 말입니까? 선생은 뱃속 가득히 적개심을 채울 필요가 있어요.

그 다음 주 어느 날인가, 꼬마 야구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 들렀다. 우리 집 아이들 전부가 수두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층에 있는 커다란 침실을 야전병원처럼 만들어서 아이들이 요구하는 대로 아이스캔디와 약을 제공하고 오트밀로 번갈아 가며 목욕을 시켰다. 잠을 자는 동안 몸을 뒤척이다가 상처 딱지를 긁지 못하도록 카라의 소맷부리와 잭의 파자마 셔츠에 벙어리장갑을 달아주기도 하였다. 퉁퉁 부어오른 눈과 상처가 덕지덕지 앉은 머리가죽은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약국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군복에 장화 차림의 창백한 사내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집에서 마누라를 도와주고 싶은데, 일이 너무 많아서 어려워요.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사업을 하고 있지요. 나는 바로 내 차 옆에 주차되어 있는 사내의 봉고차 양쪽에 시퍼렇게 큰 글자로 써넣은 지피 청소라는 글씨를 조금은 그럴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차를 몰고 떠나기 전에 사내는 자기 사업을 시작한 지 벌써 3년째라면서 말했다. 이 사업에서 딱 하나 안 좋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시간이에요. 매일 열 시간 일하고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다섯 시간 잔 다음, 다시 일어나 밤새도록 사무실 건물을 돌면서 일합니다. 선생은 어떠신지요. , 전 지금 일을 안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내온 이력을 죽 꺼내놓으려는데, 사내가 중간에 자르면서 명함을 건네주었다. 커다란 법률회사 청소 용역을 한 건 따려고 하는데, 그걸 따면 선생을 쓸 수 있을 겁니다. 우린 창문 청소를 안 하는 대신, 작업 시간은 약간 긴 편이에요. 나는 명함을 받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아주 잠깐 동안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임마, 네 눈에는 내가 청소부 정도로밖에 안 보여? 내가 아무리 안 풀린다 해도 지피 청소 의 잡역부로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 난 대학 교수란 말이야. 내 모습을 보고도 모르겠어?

 

7 너희 세대가 모든 걸 망쳐 버렸어!

 

제일 기억에 남는 날은 내가 화를 낸 날이다. 그건 나에게도 화를 낼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투자했기 때문이리라. 콜게이트에서 마지막 나날을 지낼 때도 약간씩 화를 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표출하기 시작한 분노는 원인이 불분명하고 맹렬한데다가 창조적이기 때문에 훨씬 더 통쾌하다. 사춘기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데만 몰두하느라 이런 식으로 처신한 적이 없었으니,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게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아침 꼬마 넷이서 모두 쥐어짜듯이 울고 있었다. 잭한테는 배트맨 책을 주고, 카라한테는 우유병을 물리고, 에린과 넬에게는 책과 인형을 안겨 주었지만 달랠 수가 없었다. 졌다 싶은 생각에 침실 한복판에 포기하고 서 있을 때, 아내가 올라왔다. 아내는 다짜고짜 꼬마들 옷을 하나씩 벗겨나갔다. 아이들 목욕시킬 준비 좀 하세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했다. 욕실에 돌아오니, 꼬마들이 모두 벌거벗은 채 발레 수업을 받고 있었다. 아내의 능력에 은근히 화가 나서 주방으로 내려갔다. 국영 라디오 방송국의 대담 프로가 진행 중이었다. 뉴욕 북부의 콜게이트 대학교에 재직중이신 X 교수께서 나와 계십니다. X 교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맨주먹으로 무엇이든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X 교수가 최근의 주식 시장 동향을 놓고 전혀 실감도 안 나게 설명하면서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교만이 가득 묻어 나오는 음성으로... 내가 콜게이트에서 X와 부딪쳤던 당시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어조였다.

콜게이트에 부임한 첫해였다. 우리는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즐겁게 살았다. 어느 일요일 아침, 아내와 나는 안에서 솟구치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어서 꼬마들을 데리고 웅장한 실내경기를 찾았다. 테니스 코트 뒤를 지나려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를 불러 세우더니 너무 소란스럽다고 했다. 양말의 줄무늬와 잘 어울리는 아대까지 팔목에 찬, 완전한 테니스 복장 차림의 남자였다. 실내 경기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오면 안 됩니다. 찌푸린 눈쌀은 말이 끝날 때까지 곱게 펴질 줄 몰랐다. 뭐라고 대꾸를 하기 전에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태부터 파악해 보려했다. 사내가 여전히 눈쌀을 찌푸린 채 물었다. 교수신가요? 이 시설은 오전에는 교수 전용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찌푸린 눈쌀과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교수신가요? 사내가 재차 물어 왔다. 갑자기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러자 사내가 다시 큰 소리로 강조하며 말했다. 이 코트는 교수 전용입니다. 테니스 코트를 빙 둘러싼 트랙에서 아내가 나를 불렀다. 아내의 음성도 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아직 햇병아리였기 때문에 정년을 보장받기 전까지 적을 만들면 안 되는 처사였다. 한 달 뒤, 나는 아내와 함께 총장 공관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칵테일 잔에서 눈을 들어 보내 테니스장에서 만났던 바로 그 사람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경제학과 교수였는데, 곧 교수 평의회 의장 직함을 달고 정년 심사와 승진 건에 관한 업무를 책임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대학촌에 집을 한 채 구입하고 네 번째 아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방송을 들으면서 그 작자한테 보복할 방법만 궁리했다. X 교수한테 전화를 걸어 연구실에 있는 그와 통화를 했다. 교수님, 저는 국영 라디오 방송의 사이먼입니다. 오늘 아침 교수님의 인터뷰 방송을 듣고 많은 청취자들이 전화를 했습니다. 대부분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수님의 동료들 같습니다. , 그렇습니까? . 그래서 교수님과 통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교수님 전화번호를 알려 주려고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 좋도록 하시지요. 내가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전화기의 온기가 식기 전에 X 교수의 집으로 다시 전화를 했다. 난 터프트 대학교 경제학과에 근무하는 스탠리 교수요. 오늘 아침에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당신 정말 대학원이나 제대로 다니고 교수가 된 거요? 그날 오후에 세 번 더 전화를 걸었다. 텍사스 악센트로 X를 찾은 건 한밤중이었다. , X교수? 여긴 오스틴의 드리스데일이요. 당신, 입 안에 똥이 가득하더구만.

그 사건 이후로 걸핏하면 화를 냈다. 어느 날 아내가 주방에 앉아서 카라한테 젖을 물리고 있을 때, 수금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을 내가 받게 되었다. 돈을 안 낸 난방용 연료 대금을 받으려고 계속 추궁하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선생께서 이 달 말까지 대금을 정리하신다고 했는데요, 스나이더 씨? 아니, 난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소. 난 분명히 지난 달에 기름 50갤런을 주문했소. 그러니까 200갤런을 내려놓고 간 건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오. 기름은 분명히 선생의 주거 지역 안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스나이더 씨. 200갤런을 주문한 적이 없소. 우리는 선생의 부인과 대여섯 차례 통화를 했습니다. , 그래요? 앞으로는 나하고 통화를 합시다. 아내하고 통화하지 않기를 바라겠소.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스나이더 씨? 정유 회사로 청구서를 돌려보내시지요. 여기서는 청구서를 발행하지 않습니다, 스나이더 씨. 그럼, 내가 발행하지요. 너무 늦었습니다. 스나이더 씨. 지금 하시는 말씀은 이 달 말까지 정리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스나이더 씨? 왜 말끝마다 내 이름을 들먹이는 거요? 뭐가 잘못됐나요, 스나이더 씨? 왜 꼬박꼬박 내 이름을 들먹거리냔 말이요? 우리가 선생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스나이더 씨. 나 역시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소. 이제 그만 전화 끊읍시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스나이더 씨? 여긴 수금 회사입니다. 여기가 수금 회사라는데도 아무렇지 않습니까, 스나이더 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요, 아니면 그냥 물어본 거요? 수금 회사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으신가요, 스나이더 씨? 꼭 알고 싶소? 그렇습니다, 스나이더 씨. 그렇다면 알려 주지. 그런 엿 같은 게 나한테 중요할 리가 없지. 전혀 아무렇지가 않다구. 감사합니다, 스나이더 씨.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꼬마 야구장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다. 신용카드 가지고 있소?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내 수입을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컴퓨터에다 거짓말을 하는 것뿐인데요, .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노신사도 나에 대해 점차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나라는 끝이 났어요. 조짐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지요. 최대 규모의 전기통신회사에서 5만 명의 근로자를 해고시켰더니 주식이 폭등을 했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계약이 깨졌다는 뜻이에요. 음성이 흔들리고, 눈에서는 거친 표정까지 나타났다. 그는 최근에 다트무스에서 강의를 한 다른 동료 사업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친구가 아주 영리한 흑인 학생 하나를 길러냈단 말씀입니다. 졸업식에서 내 친구는 학생 아버지와 나란히 서 있다가 이 도시가 왜 이 모양이냐고 물었던 모양입니다. 학생 아버지가 한 대답은 이랬답니다. 교수님, 머지않아 여기서 불길이 치솟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 공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 세대는 더이상 견딜 수 없어요. 지금까지 다양한 계층이 생겨나고, 최하계층은 점차 많아지는데도 나라가 제공하는 온갖 혜택은 점차 줄어들고 있지요. 도시에서는 지금 그런 사람들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입니다. 내 친구 하나가 밀워키에서 경관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 밀워키란 곳이 참 대단하더군요. 그 친구가 그러는데 거긴 아예 약탈자들이 만든 하층 문화가 존재한다고 합디다. 진짜 비열한 이 약탈자들이 언젠가 우리한테 덤벼들 게 분명해요. 온갖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대며 교외로 몰려들 태세이고 보면 그 말도 실감이 나요. 그 놈들은 이곳까지 쳐들어와서 우리에게 총을 겨누며 말하겠지요. 이 뚱뚱한 놈들아! 니놈들은 너무 좋은 걸 너무 오랫동안 처먹었단 말이다! 노신사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언뜻 뺨에 가는 실핏줄까지 보였다. 공은 잊어버립시다. 새로 사면 되니까요. 내가 말하자, 노신사가 대답했다. 아뇨, 안 됩니다. 돈을 벌지 못하게 된 그 날 이후 공을 찾으러 숲에 들어왔다가 못 찾고 그냥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한 개에 1달러가 넘으니까요. 며칠 후, 펜실베니아에 계신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오셨을 때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할 기회가 생겼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가, 뭔가 잘못 되었구나 싶었다. 어떤 놈이 벌건 대낮에 아파트로 들어와서 거실 소파에 있는 계모의 지갑을 강탈해 갔다는 것이다. 다른 식구들이 바로 옆 방에 있었는데 그런 일이 있어났다구. 상상이나 할 수 있겠니? 아버지는 잡역부 출신으로서 적은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평생 동안 화가 난다고 해서 주먹을 한 번 휘두른 적이 없는 위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 겁에 질려서 전화를 걸었지만 난 너무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도와드릴 수가 없었다. 왠지 끔찍했다. 아버지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이전에 내가 안전한 직장과 집을 구했을 때 나에 대한 아버지의 유일한 소원을 들어 드렸고, 아버지와 계모께서 더 이상 생활 능력이 없더라도 내가 두 분을 헤어지도록 만들지 않겠다는 통화를 했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는 목사로 활동하시는 동안 노부부들이 생활상의 어려움 때문에 헤어지는 장면을 많이 목격하면서 그 같은 상황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사태로 여기곤 하셨다. 마약을 하는 녀석들이 도시 밖까지 나와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니까! 아버지는 전화기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이 나라가 이렇게 엉망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이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정부에서 각급 학교의 기도 시간을 금지하고, 낙태를 허용하는가 하면 중산층에게 막중한 세금을 부과하니 이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은 적도 없었고 그렇게 화난 목소리도 처음이었다. 난 가장 친한 친구 둘을 전쟁에서 잃었다. 찰리는 노르망디에서 전사했고, 랠프는 아프리카에서 총에 맞아 죽었지. 그 친구들이 뭣 때문에 죽었느냐 말이야! 그런 펄펄 나는 청년들이 뭘 바라고 죽어갔느냐구! 이 나라에는 이제 지킬 만한 규율이 더 이상 없어! 너희 세대가 모든 걸 망쳐 버렸단 말이야! 중간에서 말을 막으려고 했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돈은 전부 세금으로 흘러나가니...

그만하세요! 세금은 무슨 세금입니까? 한 푼도 안 내시잖아요! 그만할 수 없어!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영부인이라는 여자가 다 주무른다더라. 그런 여자가 설치니... 아버지, 감당하기 싫으시면 이 나라를 떠나세요. 아니면 그냥 참으시든지. 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1960년대 후반이던가, 닉슨 대통령을 비난하는 나에게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그 말을 내가 지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했다. 참든지 떠나든지 하라는 말, 기억나시죠? 난생 처음으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집에서 나와 큰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어 8킬로를 더 달렸다. 달리는 동안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길렀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야간에는 우유 트럭의 내부를 청소하시고 주간에는 트럭에 화물을 싣는 작업을 하시며 돈을 벌던 어느 겨울이 기억났다. 만일 아버지께서 지금 나처럼 수입원이 모두 사라진 입장이었다면 보수가 얼마든 얼마나 더러운 작업이든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든 하실 게 분명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달리다 보니 메인의 고급 주택가가 나타났다. 나무가 늘어선 넓은 길을 따라 바다가 보이는 경사가 적당한 잔디 언덕 위에 좋은 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유모차를 미는 여자들과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쳐갔다. 조깅족의 팔은 시계 바늘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였으며, 신체가 너무 탄탄하고 날씬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차량도 몇 대 스쳐갔다. 운전자들 몇은 휴대폰을 들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를 돌봐드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때가 되면 곁에서 함께 지내겠다고 얼마나 뻔질나게 말씀드렸는지 생각하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거기에는 분명히 본질적인 그 무엇이 빠져 있었다. 내면적인 힘이랄까 자신에 대한 믿음이랄까, 그런 것이 모자라 결국에는 항상 겁쟁이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메인으로 돌아와 첫 드라이브 갔던 낡은 해변가를 며칠 만에 다시 가니, 경관 한 명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예전에는 아무나 접근할 수 있었는데, 새 임자가 누구길래 경관까지 고용해 나 같은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지 궁금했다.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걸까? 갑자기 경관한테 말을 걸고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경관 역시 나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서로 통성명을 하고 나서, 화려한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고용한 사람이 누군지 알려 줄지도 모를 터였다. 별장이 있는 해변가로 다가가면서 속력을 줄였다. 젠장, 저 친구처럼 부자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내가 직장을 잃고 이리저리 떠돈다는 사실쯤은 금세 알아볼 것 아닌가! 가까이 가니, 경관이 노란 권총을 잡았다. 권총이 나를 향해 불을 뿜었다. 불소 냄새가 나는 노란 권총이라? 더 가까이 가 보니 권총은 물총이고, 경관은 바람을 집어넣어서 실물 크기로 부풀린 풍선이었다. 하지만 복장은 진짜 경관 차림이었다. 처음에는 웃음이 터졌으나 서서히 분노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큰길로 나와서 풍선 인간을 푹 찌를 뾰족한 물건이 없나 여기저기 찾아보았다. 마침 펜 한 자루가 눈에 띄었다. 그걸 가지고 풍선 경관과 마주섰다. 그 다음은 정신없이 찌른 기억밖에 없다. 집에 돌아와서 주방 의자에 걸쳐 둔 아내의 코트 주머니에서 가계부를 끄집어냈다. 헛간으로 가서 혹시 아내와 내가 실수로 더 많이 빼 버린 돈이 없나 하고 가계부의 숫자를 점검해 보았다. 배드민턴 세트가 담긴 종이상자 뒤쪽의 기둥에 숫자를 적어 두었다. 돈은 자꾸 줄어들었지만, 숫자로 적어놓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었다. 숫자를 들여다볼 때는 일종의 만족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회계사들이 인간 내면의 복잡한 열망과 기술의 힘을 숫자로 환원시킬 때 느끼는 그런 만족감 말이다. 고개를 드니, 아름다운 일몰이 펼쳐지고 있었다. 삼나무 숲을 통해서 스며 나온 짙은 오렌지빛이 목장 너머로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배드민턴 상자를 허벅지에 올려놓고 상자에 인쇄되어 있는 행복한 가족사진을 응시했다. 배드민턴 게임에 열중하는 엄마와 아빠, 아들과 딸의 사진이었다. 이 정도로 행복한 가정을 보고 있으면 빙그레 웃음이 나와야 할 텐데, 사진을 찬찬히 뜯어보면 볼수록 분노가 솟아올랐다. 사진 안에는 아버지의 노후를 돌봐줄 아들이 있었다. 아내를 울리지 않는 남편도 있었다. 똑같은 나비 리본이 달려 있는 네 켤레의 운동화에는 예쁜 레이스가 장식되어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아이들의 운동화 끈을 일일이 묶어 주는 봉급 노동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계부에 적힌 숫자가 머릿속에서 여전히 헤엄치고 있었다. 한 달에 딱 2,000달러만 쓰는 정도의 생활수준이라면 연말까지 버틸 수 있겠지. 그렇다면 앞으로 반 년. 나는 상자를 발길로 걷어찼다. 사진 속의 찢어진 얼굴들을 바라보며 혼자 말했다. , 현실 세계로 나온 걸 환영합니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노신사는 내 분노를 칭찬하는 대신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매주 한 번씩 포틀랜드에서 모이는 남성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회원들은 교회 지하실에서 모이는데, 만나는 목적은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함께 그곳에 가자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제 꼬마 야구장에 두 번 다시 못 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에는 수요일 밤에 모이는데 내가 차로 댁까지 찾아갈까요? 다음 주에 갑시다. 내가 힘없이 대답했다. 노신사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스윙 위치로 돌아섰다. 그리곤 자기 생각에는 내가 생명보험 하나쯤 들어 두는 게 좋겠다고 말하면서 스윙을 날렸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가족한테 돌아갈 게 있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노신사는 공이 날아간 곳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진짜 살인자는 스트레스란 놈이에요. 그 말이 옳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20만 달러짜리 생명보험이라면 내가 덜컥 죽더라도 아내가 아이들을 기르며 쓸 만한 돈을 남겨 줄 수 있으리라. 문제는 내가 흡연가이기 때문에 연간 보험료를 두 배나 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담당자한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장수와 탄탄한 내 건강을 자랑하면서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간호사인 장모님한테 전화를 해서 조언을 구했다. 이 사람아, 그 사람들이 얼간이들인 줄 알어? 자네 집으로 사람을 보내서 혈액과 소변을 채취할 거야. 그러면 니코틴이 금방 나타나고 말아. 임상병리실의 전문가가 내 혈액과 소변을 채취하러 우기 전날 밤에도 보험 회사를 속일 궁리를 하느라 머리를 쥐어짰다. 잭과 텔레비젼 야구 경기를 보고 있다가, 이를 닦고 오줌을 누라는 일상적인 지시로 잭을 챔대로 보내려는 찰나에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잭이 오줌을 누려고 하자, 내가 아기용 이유식 병을 들이댔다. 왜 이 병에다 누어야 돼요? 아들이 물었다. 요술이야. 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의 요술? 그래, 그럼 셈이지. 하지만 오줌을 다 누어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나자, 잭이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무슨 마술이야? 나는 푸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잭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번쩍 들어 올려 꼭 껴안았다. 내가 죽으면 너희에게 계속해서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주는 마술이란다. 임상실험 전문가는 잡담 따위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철저하게 훈련된 친구였다. 탁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두 벌의 접안렌즈와 플라스틱 컵, 주사기를 앞에 꺼내 놓고 약간의 조작을 거쳐 나란히 배열해 놓았다. 사내는 내 건강에 대한 갖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나는 계속 모범답안을 했다. 소변을 받아오라고 컵을 건네주자 목욕탕으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 아기용 우유병에 담긴 잭의 소변을 욕조의 더운 물에 담갔다. 하루에 이런 검사를 몇 번이나 하십니까? 식당으로 가서 잭의 소변이 든 플라스틱 컵을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 생각으로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가 대답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가느다란 종이띠를 소변에 담갔다. 아이들이 있습니까? 사내가 물었다. 나는 아뿔사, 들켰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1주일 후에 결과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보험증서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이삼일 후부터 우리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분노가 아니라 머리라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보험 회사를 속인 데 대해서는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보험 증서를 받은 직후, 프린스턴 대학에서 완벽한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 을 발견했을 때는 일종의 정당성까지 느껴졌다. 나는 교수신문에 난 공고를 냉장고 문에 자석으로 붙여 두고,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내가 해고당한 이유를 설명하는 연습을 했다. 자신을 심문하는 경관 앞에서 알리바이를 주장한는 피고인 같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아름다운 도시에 살면서 온 가족이 함께 기차를 타고 맨하탄으로 가서 박물관과 브로드웨이 쇼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 마음은 마냥 부풀었다. 당신과 함께 꼭 가보고 싶어. 아내가 내 팔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던 어느 날 밤, 아내에게 말했다. 한 줄기 달빛이 우리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밤의 산들바람이 레이스 커튼을 재우고 있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프린스턴까지 여행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후보자 면접이 언젠데요? 대충 두 주일 후. 그럼 며칠 기다린 다음에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흥분에 싸여 아무 것도 안 보였다. 이 좋은 가능성을 덥석 붙잡지 않는 아내의 주저하는 마음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이 가능성을 그냥 가능성 자체로 보았다. 그러니까 아내는 그건 그냥 신문에 난 광고일 뿐이며, 수천은 아니더라도 수백 명에 달하는 실직자들이 지원할 거란 사실을 제대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나는 내가 성장해 나갈 완벽한 다음 단계로 보았다. 프린스턴의 교수 자리는 사다리를 타고 상당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 지평선 너머를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꼭 더 좋은 직장이 나올 거라는 예측과 열심히 고집스럽게 일하면 그런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될 거라는 오랜 믿음이 증명되는 기분이었다.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보낸 다음, 가족과 함께 다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해변가에 나가 가족 모두가 모래성을 쌓고 있는데 에린이 말했다. 우리, 지금부터 작은 도시를 만들어요. 해밀턴을 만들어서 여기다가는 우리 집을 놓고 저기다가는 우리 학교를 놓고 또 슈퍼마켓도 놓고... 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잠깐. 도시를 만들려면 프린스턴을 만들자. 뉴저지 주에 있는 프린스턴, 알겠지? 가만있자, 바로 여기에 우리가 살 새 집을 만들자. 아빤 거기서 살아 본 적이 있어요? 넬이 모래구덩이를 파면서 물었다.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브라이언 머피의 집이 어디 있지? 잭이 큰 소리로 물었다. 프린스턴. 에린이 잭한테 대답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고 영문과로 전화를 걸었다. , 제 이름은 테렌스 델모니코인데, 안녕하십니까? 동문으로 59학번입니다. 영문과 교수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아는 사람을 그 자리에 추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면접 초청장은 언제 발송하실 예정이신가요? 열흘 남았다. 전화를 끊고 잠시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부터 면접 때까지 뭘 하고 지낸다지? 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엉터리 이름으로 전화를 걸고 보험 회사를 속여 먹는 작자가 과연 프린스턴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을까? 해고와 매수와 집단 이기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매일 나오는 저녁 뉴스에서 해답을 찾았다. 나는 오랫동안 게임의 규칙에 충실했다. 하지만 이제 규칙 같은 건 더 이상 없었다. 규칙을 어기는 방법을 깨우친 사람만이 상을 타든 시대가 되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이 세상은 항상 그런 식으로 돌아갔는데, 나만 이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8 이제 제발 정신 좀 차리라구!

 

나는 가족과 함께 다리 위에 앉아서 카스코 만의 하늘 위로 펼쳐진 독립기념일 불꽃놀이를 지켜보았다. 아내가 나더러 아이들 앞에서 말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내에게 사과했다. 내가 보니까 당신이 말을 너무 거칠게 하는 것 같아요. 미안하다고 했잖아. 우리 품에는 아이들이 안겨 있었다. 줄무늬 여름 파자마를 입고 있는 아이들의 뺨은 햇빛에 그을렸고, 갈색 머리칼은 저녁때 목욕을 해서 축축했다. 자동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행복한 가족이라 생각하며 지나칠 것 같았다. 나는 잭한테 슬며시 기대어 머리 꼭대기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아내가 가르쳐 주기전까지는 아기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뼈대가 아직 굳지 않은 아기 머리의 물렁물렁한 지점에 대해서 설명하던 아내의 모습이 생각났다. 세무서 이야기를 해도 화 안 낼 거죠? 갑자기 우리가 올라앉은 다리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무슨 얘긴데? 당신이 세금을 정확하게 계산하지 않았어요. 무슨 세금? 연금에 대한 세금, 세무서에서 편지를 보내왔어요. 당신한테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괜찮아. 그래, 얼마나 더 내야 한대? 내가 냈어요. 얼마나? 3,000달러. 잭의 머리 꼭대기에 대고 입술을 꼭 누른 채 호흡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 젠장!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이대로 행복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한테 없는 걸 욕심내지 않으면서. 우리한테 없는 것? 프린스턴의 일자리 같은 거, 좋은 일자리. 나한테 그런 직장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행복해야 하지?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아내가 아이들을 가까이 끌어당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7월 첫째 주에 다른 대학에서 편지가 날아들었다. 내가 보낸 지원 서류를 기쁜 마음으로 검토해 보았지만, 다른 후보자를 뽑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의 초빙 거절 편지가 다른 편지와 다른 점은 이 대학이 미시건 북부의 외곽에 동떨어진 조그만 학교라는 사실이었다. 그곳은 겨울철을 보낼 스포츠가 빙판 낚시밖에 없는 아주 조그만 지역이었다. 게다가 머릿속에 새 직장에 대한 꿈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선 설사 초빙된다는 편지가 왔다 하더라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거절했을 터였다. 어느 날 아침, 프린스턴에서 아직까지 나에게 면접 요청서를 보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오전 여덟 시에 다시 전화하라는 자동응답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마찬가지 대답이었다. 지금이 벌써 아홉시 반이라구, 이런 빌어먹을 놈들아! 내가 자동응답기에다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에요? 에린이 옆을 지나가다가 물었다. 그날이 일요일이란 사실을 내가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드디어 통화가 되어 영문과 학과장과 전화를 연결할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침을 삼키며 용건을 말했다. 학과장은 내 이름을 기억했다. 그리고 전국 최고의 명문 사립대학 두 군데에서 쌓은 7년 동안의 경력과 세 권의 저서, 권위 있는 재단의 연구비 수혜 사실 등을 주워 섬기는 내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들어 주었다. 내가 예상한 답변은 자격은 넘칠 만큼 충분하지만 이었다. 학과장이 사정을 설명했다. 우리가 신문과 잡지에 모집 공고를 낼 때만 하더라도 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분이 응모를 하리라곤 전혀 기대를 못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3백 건이 넘는 서류가 접수되었더군요. 그래서 선생님보다 경력이 나은 아홉 명을 후보자로 뽑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은 퓰리처 상에 지명되신 적도 있더군요. 세분은 전직 학과장이었고요. 가려내는 데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하게 됐습니다. 나는 에린이 방으로 들어올 때까지 수화기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멍하니 앉아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아빠? 물어봐. 아빤 왜 해고당했어요?

내가 왜 해고당했느냐구? 제기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일곱 살 먹은 딸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의 틀에 갇혀 있다가 어느 틈엔가 훌쩍 자라 버린 느낌이었다. 중년이 되어 있을 딸아이를 생각해보았다. 두 눈이 아이 할머니의 형언할 수 없는 녹색 눈과 꼭 닮았다. 중년이 된 아이가 고양이하고 단둘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창가에 앉아 비오는 바깥을 내다보며 일상의 삶 속에서 평범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웃는다. 중년의 아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토록 행복할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던 중년의 아이는 학교에 들어간 첫해가 끝날 즈음을 회상한다. 조그만 학교가 방학을 하여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기나긴 무료함 속으로 빨려들 때를, 중년의 아이는 여전히 아름답다. 두 손도 아기 손처럼 통통해서 손가락을 다 펴면 불가사리 모양이 된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단다. 내가 에린에게 말했다. 에린은 손으로 계속 감았다 폈따 하던 기다란 털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를 너무 쉽게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 반 만에 하나, , , , 전혀 힘이 안들었다. 분만실에서 본 아기는 모두 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분홍빛 피부도 그렇고, 아내가 부르는 소리에 크게 뜬 파랗고 초록빛을 띠는 예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약속이나 하고 모인 것처럼 하나같이 예뻤다. 막상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분만실에서 아내가 이를 악물고 진통을 하는 동안, 나는 극심한 통증을 참아내는 젊은 여인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이방인처럼 서 있었다. 네 책 한 권을 가지고 나무 밑으로 가서 끝까지 읽어 보자. 하루 종일. 네 생각은 어떠니? 내가 에린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에린한테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눈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이를 낳아 집으로 데려오던 첫날부터 나는 아이들을 꼭 싸서 장거리 하이킹이나 자전거 여행, 크로스컨트리 스키, 스케이팅 등을 다녔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 항상 바빠야 했다. 아내가 지난 7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거실 마룻바닥에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건 생각만해도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에린이 갓태어 났을 때는 테니스나 스쿼시를 할 때 가슴에다 아기를 매달 수 있도록 멜빵을 달았다. 계속 움직일 수 있으면 아무 거나 좋았다. 아빠가 해고를 당해서 걱정되니? . 우리가 가난해질 테니까. 우리는 가난해지지 않아. 우리는 집도 없잖아요. 여길 둘러봐. 여기가 바로 우리 집이야. 이사를 안 가도 되는 그런 집 말이에요. 곧 멋진 집을 찾게 될 거야. 여기보다 훨씬 멋진 집. 여기가 싫으니? 엄마하고 매일 해변가도 갈 수 있고, 사촌들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도 볼 수 있잖아. 나는 에린의 슬픈 얼굴을 발견하곤 아무 것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 나름대로 세상에 대해 판단을 하고 그 속에서 이미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아빠도 배드민턴 아저씨가 될 수 있을 거야. 누구라구요?

에린이 미소를 지었다. 배드민턴 아저씨. 매일 아침마다 직장에 일하러 나가고, 우리는 다시 배드민턴 가족이 되고, 그래서 모든 게 잘 될 거야. 엄마는 배드민턴 아줌마, 나는 배드민턴 아저씨, 넌 배드민턴 딸.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배드민턴 집에 살면서 배드민턴 가족을 이뤄서 정말 좋겠다고 생각할 거야. 에린의 미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조심스런 표정이 자리잡더니, 배드민턴 가족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에린을 번쩍 들어 품에 안고 헛간으로 갔다. 그리곤 얼마 전 발길로 걷어차서 구멍이 생긴 종이상자에 인쇄된 가족 사진을 보여 주었다. 왜 이렇게 됐어오? 조금만 사고가 있었단다. 어떤 가족이든 내낸 좋은 일만 생기는 건 아니란다. 배드민턴 가족도 마찬가지구. 전선용 테이프가 눈에 띄었다. 나는 찢어진 상자를 테이프로 붙여서 작업대 위에 비어 있는 벽에다 못질을 해서 박았다. 이제 쏠 목표가 생겼어. 아빠가 저 사람들을 쏠 거예요?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아니야. 이리 와. 아이스크림 사러 가자. 우리는 시내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왔다. 아이가 납득할 수 있는 어떤 말을 해주고 싶었다. 언덕 꼭대기에서 에린에게 하늘을 쳐다보라고 했다. 인간은 저 하늘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조차 모른단다. 사람들은 모든 해답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건 고작 네 엄마 뱃속에서 튀어나왔듯이 자기 역시 누군가의 뱃속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뿐이야. 우리는 그저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할 따름이야. 그러다 보면 가끔씩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단다. 직장에서 해고도 당하고, 친구들과 멀어지기도 하고. 그러면 한동안 행복하지 못하지. 어쩌면 아주 오랫 동안. 하지만 그러다가 다시 행복해진단다. 그리고 가난한 것과 깨진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단다. 깨져요? 상자에 있는 배드민턴 가족 사진처럼? 나는 웃으면서 에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바고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었다. 자동차가 고장나는 식으로 말이에요? 자동차는 고장나지 않았어. 아니에요. 오늘 아침에 엄마가 몰고 나갔을 때 고장이 났어요. 연기가 많이 나왔거든요. 정비공은 뒤 차축과 휠베어링을 교체하려면 대략 1,200달러 정도 견적이 나올 거라고 하더니, 라디에이터와 브레이크라인의 누수를 발견하고 나서는 주행 거리가 18만 킬로 이상 되니까 이 정도 수리비로도 어림 없을 거라고 했다. 프린스턴의 교수 자리를 얻을 거라는 최소한의 믿음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아버지가 포드차 딜러로 일한다는 오하이오에서 살고 있는 여제자에게 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화로 제자에게 직업이 없는 관계로 은행 대출을 신청할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제자는 자기네 가족 내부 금융 으로 지원할 수 있다면서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오하이오까지 가서 내가 직접 스테이션 왜건을 운전을 하고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비행기 왕복 요금이 편도 두 장 요금보다 턱없이 싸서 일단 왕복표를 예약했다. 나는 여자를 쉽게 유혹하는 위인이 못 된다. 여자에게 인기 있는 남자라고 생각해 본 적도 절대로 없다. 딱 한 번 여자가 나에게 추파를 던진 건 내가 쓴 책을 파라마운트 영화사 에 팔고 난 직후 헐리우드에서였다. 그 영화 때문에 파라마운트 영화사 와 공동 작업을 하는 소규모 프로덕션의 사장과 나흘 동안 비버리 호텔 특실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여사장은 나흘 내내 리무진으로 나를 픽업하여 각종 모임과 식사에 동반하고 다녔다. 그런데 리무진 뒷좌석은 그렇고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하는 곳이다. 그러나 아내를 만나 사랑에 빠진 직후였기 때문에 여사장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배신자가 되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 프로덕션의 간부 한 사람이 그때 내가 눈 딱 감고 10분만 즐겼으면 그 영화 사업이 엉망으로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했다. 있지도 않은 작은 대학의 초대를 받아 오하이오에 간다고 둘러댔다. (랭던 대학교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랭던은 다년간 콜게이트 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사람의 이름이다.)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끔씩 예전 그대로 남아 있는 풍물을 발견한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주중에 보스턴에서 오하이오 행 비행기에 올라타니 정장 차림의 여행객 대부분은 여전히 하얀, 아니 너무 하얘서 얼굴빛이 창백한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점심을 받기 위해 일제히 받침대를 펼치는 모습은 마치 웃자란 꼬마들이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유치원처럼 보였다. 개중에는 냅킨을 셔츠깃에 접어넣어 턱 밑으로 길게 내려뜨린 사람도 있었는데, 우리가 어렸을 적 식탁에 처음 앉을 때 엄마들이 가르쳐 준 그대로였다. 그리고 어렸을 때 배운 그대로 어깨에 멜빵을 멘 사람도 있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근본적인 기술을 엄마라는 여인들한테 배웠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이 여인들은 정말 어디에 있는 걸까? 양로원? 운이 좋은 여인은 플로리다의 골프 코스를 어슬렁거리거나 병원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겠지. 당신의 모든 희생과 노력과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소년들이 자라서 자기 아내 아닌 다른 여인들 앞에서 바지 지퍼를 내리고 그 여인의 배 위로 올라가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이 엄마들은 무슨 말을 할까?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탑승객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머리 염색을 했으며 의치를 한 사람과 가발을 한 사람, 구두 뒤창을 높인 사람, 화장실 약품 상자 안에 위장약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여인의 허영심은 오히려 정직하다. 대체적으로 남자의 시선을 끌려는 욕구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의 허영심은 자신의 야심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믿을 게 못된다. 비행기에 타고 있는 승객 중에서 머릿속으로 섹스를 상상할 때 자기 아내를 파트너로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그 생각을 하니 아내를 처음 알았을 때 아내와 사랑을 나눌 적마다 내가 아내의 두 눈을 계속 쳐다보았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나는 아내를 숭배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그런 감사한 마음을 느꼈다. 그래서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다음에도 아내의 눈을 그렇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서지 않았다. 만일 내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다면 아내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그리울 것 같았다. 아내의 오랜 고통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나를 압도하고도 남을 것이다. 옆에 앉은 남자가 노트북 컴퓨터에서 갑자기 고개를 쳐들더니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비행기 여압실의 커다란 소음 너머로 자기를 부르는 음성을 들었다는 듯이. 널찍한 마당 너머에서 어머니가 빨리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신호일 터였다. 이제 나쁜 짓을 저지르면 안돼!... 필리스, 언제까지나 내가 이렇게 너를 지켜 줄 순 없단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황혼 무렵, 졸업한 여자 제자의 집에 도착했다. 제자는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함께 마실 음료를 준비했다. 80년대 초반 사친회 이래로 독한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었지만, 나는 스카치와 생수를 부탁했다. 벽난로가 있군. 잠에서 깨어나 휴, 악몽이었군 하고 안심하는 사람처럼 명랑하게 한마디 던졌다. 제자는 주방으로 가서 불을 붙여 달라고 했다. 앞에 있는 벽장을 보면 장작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곳에 있는 거라곤 50여 개의 오렌지색 인조 통나무뿐이었다. 자질구레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콜게이트 대학에 돌아와 강의실 교단에서 편안하고 자신에 찬 어조로 거침 없이 이야기하는 내 모습을 그려 보려고 애썼다. 쫓겨나기 전까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던 모습이었다. 이 정도까진 솔직하게 얘기해야지. 스카치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졸업 후 서로가 헤어진 이후에 나한테 일어난 모든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게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제자의 동정심을 유발시키려고 하거나 우리의 만남을 낭만적인 재회로 만들기 위해, 한 번쯤은 가졌음직한 모든 가능성 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설득할 생각은 없었던 것같다. 그렇게 한두 시간쯤 흘렀을 것이다. 이야기를 하면서 제자를 흘끔흘끔 훔쳐보다가 얼른 시선을 돌려 칵테일 잔의 테두리에 그려진 조그만 요트 클럽 깃발을 내려다보는 동안에도 제자는 계속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제자의 유일한 대꾸는 내가 보험 사기에 대해 말했을 때뿐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화가 났던 모양이다. 그런 속임수를 쓰면 안 돼요. 만일 교수님이 사망하면 보험 회사 측에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할 수도 있어요. 그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해요.

잔잔한 어조였다. 현실적이지 못하다? 혼자서 되뇌어 보았다. 내 기분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제자는 대학 시절에 사귀었던 남자 친구들, 그러니까 자기 목매달고 기다리던 작자들 이야기를 경멸어린 어조로 늘어놓았다. 내가 아내에게 사다 준 것과 비숫한 그물 모양의 검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스카치를 가지러 주방으로 걸어갈 때마다 허벅지 안쪽에서 마찰음이 일어났다. 하이힐을 벗어서 발옆에 놓은 광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어떤 차를 마음에 두고 계시나요? 마침내 제자가 물어싸. 새 차는 필요 없고, 주행 거리가 10만 킬로 미만이면 아무 차나 좋아.

그래도 꼬마 넷과 사모님, 그리고 강아지까지 한 마리 집어넣으려면 뒷좌석이 세 개는 있어야 할 거예요. 화장실에 갔다가 거실로 돌아오자, 제자가 나에 관한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보내며 물었다. 최근에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어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 솔직하게 대답했다. 콜게이트에서 지낸 8학기 동안 밀러의 희곡을 열두 번이나 가르쳤다. 영문학을 전공하는 모든 학생은 초기 미국 문학 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들어야 한다. 내용이 어찌나 따분하고 조악한지 꿋꿋한 학구파를 제외한 모든 학생을 깊은 잠으로 밀어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내가 새로운 요술 가방을 가지고 부임할 때까지. 그 강좌는 학생들에게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세일즈맨의 죽을>을 낡은 텍스트 사이에 끼워넣어 아메리칸 드림 에 대한 초기 관념을 통해 현재 진행되는 아메린칸 드림 의 붕괴를 추적하고자 했다. 이 강좌는 대단한 인기글 누려서 멀리 자연과학부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자연과학부의 의예과 학생들은 대부분 내 강좌를 수강하여 인문계 필수 과정을 이수했다. 물론 나는 우쭐한 마음에 수강생 규모를 20명에서 30명으로 늘렸는데, 해고 통보를 받은 다음에는 낡은 텍스트를 완전히 처박아두고 거의 전학기를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로만가에 관한 강의에 바쳤다. 최근에는 윌리 로만의 얼굴을 볼 처지가 못 된다고 털어놓았다. 잘 알다시피, 지금은 아주 절박한 상태야. 제자의 표정이 일종의 순수한 동정심으로 변했다. 하지만 난 교수님을 비프로 생각해요. 제자가 새로 부은 스카치 잔을 내밀면서 말했다. 하느님 맙소사! 머릿속으로 외쳤다. 길을 잃은 인기몰이 소년. 그녀가 말했다. 내가 물었다. 그 소년이 왜 길을 잃지? 윌리가 제시한 어리석고 감상적인 온갖 생각을 믿었기 때문이죠. 내가 술을 한입에 털어넣는 동안, 제자는 계속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어요. 할아버지는 돈을 모으기만 하셨죠. 그리곤 아버지를 대학에 보내는 대신, 당신 재산을 몽땅 교회에 헌납하셨어요. 우리 할아버지도 윌리처럼 바보였어요. 윌리가 직장을 잃고 나서 돈을 비리기 위해 하나 남은 진짜 친구 찰리를 찾아가는 장면이 있죠? 윌리는 하워드가 자기를 어떻게 해고할 수 있는지 이해를 못 하죠. 그때 윌리가 한 말, 기억 나세요? 내가 곧장 대답했다. 하워드가 어떻게 나를 해고할 수 있을까? 갓난아이일 때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 바로 난데. 제자가 웃었다. 맞아요. 그런데 찰리는 이렇게 말하죠. 그런 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언제쯤 깨닫게 될까? 그래, 자네가 이름을 지어 주었어. 하지만 자넨 그 이름을 팔 수 없어. 이 세상에서 재산이 될 수 있는 건 팔 수 있는 물건뿐이야. 자네 자신이 세일즈맨이면서도 정작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니 정말 우스워. 정말 멋진 말이에요, 그렇죠? 우리 할아버지는 남들한테 사랑을 받고 싶어 하셨고, 우정이나 충성심 같은 감상적인 존재가 중요하다고 믿길 바라셨어요. 나는 제자의 말을 라고막고, 우정이나 충성심은 단순한 감상 이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자가 내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죠. 윌리 역시 필사적으로 사랑을 받고 싶어했죠. 기억 나세요? 만일 자신이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게 좋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죠. 파산당하지도 않고 아들의 존경심을 잃지도 않고. 갑자기 제자가 예전에 알고 있던 이상으로 똑똑해 보였다. 나는 제자가 의도적으로 무언가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윌리가 찰리에게 말하죠. 자신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래서 호감을 사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그러니까 찰리가 이렇게 말하죠. 저는 이 부분도 확실히 알고 있어요. 교수님께서 학기말 시험에 내신 거, 기억 나세요? 찰리가 윌리에게 이렇게 말해요. 모든 사람이 왜 너같은 사람을 좋아해야 하지? 누가 모건을 좋아했지? 모건이 감동적인 인물이었나? 목욕탕에서 옷 벗고 보면 그 친구도 백정처럼 보일 거야. 하지만 주머니에 돈이 있으니까 다들 좋아했잖아. 전 마지막 구절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주머니에 돈이 있으니까 라는 부분 말이에요.

제자는 나한테 남는 침대 하나를 내주었다. 나는 옷장 속에서 주름진 테니스 스커트 다섯 장을 헤아려 보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제자는 아주 빠른 속력으로 포드차를 몰아 시내 중심가를 통과했다. 운전하면서 한때 자기 아버지가 소유 다가 자기가 자라는 동안 수년에 걸쳐 팔아치운 여러 건물과 사업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830분에 시작하는 문학 강의에서 나를 잠에서 번쩍 깨어나도록 자극하던 눈빛, 바로 그 눈빛이 제자의 눈에 남아 있었다. 나는 뒷자석에 기댄 채 제자가 운전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제자는 자기가 다니던 고등학교와 테니스를 치던 코트를 보여 주었다. 아더 애쉬가 자기 옆에서 공을 친 적도 있다면서 그 사람은 나를 가르친 코치의 친구였어요 하고 말했다. 나는 옷장 안에 있던 멋진 테니스 스커트를 입고 코트를 누비는 제자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우리는 제자의 할아버지가 묻힌 묘지를 지나쳤다. 제자는 자동차 속력을 줄이더니, 자기 할아버지가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타일공으로 일했다고 말해 주었다. 제자에게 차를 산 젊은이들을 생각했다. 밤에 잠을 잘 때 그녀와 결혼하는 꿈을 꾸었을게 틀림없었다. 잠시 후 큰길로 들어서자, 중고차 대리점과 쇼핑 센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커다란 벽돌 건물 뒤의 조그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대형 유리를 달아 안까지 들여다보이는 사무실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차가 있는 데서 일하지 않나? 내가 바보처럼 물었다. 제 사무실은 이곳이에요. 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매장에 나가요.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있는 못생긴 아가씨가 머그잔에 담긴 계피향 커피와 따끈하고 맛 좋은 롤빵을 가져왔다. 그런데 빵이 어찌나 맛있는지 아무도 안 볼 때 접시에 남은 네 개를 마저 먹어야겠다고 작정할 정도였다. 공항에서 제자는 한때 나에게 홀딱 반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먼 옛날의 추억이라는 의미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예비 학교에서 4년을 보낸 다음 콜게이트 대학에 들어가니까 비프 로만같은 인기있는 사내한테 싫증이 났어요. 아빠는 그런 녀석들을 사기꾼이라고 부르시죠. 이런 사내들은 자기네가 특별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고, 또 다른 사람처럼 매일 규칙적으로 직장에 나가서 생활비를 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여기로 돌아온 이후, 그런 사내를 몇 명 걷어찼어요.

바윗덩어리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할 때, 차를 구입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다고 제자가 말했다. 스테이션 왜건을 원하시죠? 다달이 들어가는 할부금만 해도 꽤 될 텐데요. 나는 공짜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빈정대는 투로 말하고 나니, 서른여섯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정말로 스테이션 왜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뿐이었다. 제자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존심이 강해서 동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꼭 윌리 같으세요. 나는 제자가 지원하려는 MBA 과정 신청서에 첨부해야 하는 몇 개의 소론 작성을 돕는 대가로 나중에 자동차를 받기로 약속했다. 제자가 요구한 건 초고와 윤곽이 전부였다. 제자는 프린스톤 리뷰 라는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전국 최고의 경영 대학원에 대한 안내책자였다. 그 안에는 합격을 보장하는 소론 샘풀 몇 개가 담겨 있었고 표지 사진에는 서류 가방과 노트북 컴퓨터 그리고 <윌스트리트 저널>이 들어 있었다.

곧장 짐으로 향할 수 없었다. 공항에서 자동차 한 대를 렌트해서 브래드포드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려고 뱅고르로 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시는 어린 시절의 추억 그대로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립스틱이 똑바로 그려지지 않고 느슨한 가죽끈이 항상 어깨 밑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데다가 파티에서 양무릎을 단정히 붙이는 에티켓을 잊어버린 채 자리에 앉는 그런 늙은 여인의 모습과 비슷했다. 브로드웨이 서부의 높직한 단풍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가운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세우고 어느 유명한 SF 작가의 생가를 시진에 담고 있었다. 브래드포드의 집은 바로 그 옆이었다. 마침 브래드포드가 야간에 테니스를 치는 날이었다. 우리는 실내 코트에서 게임을 가졌다. 테니스를 치면서도 친구의 병이 그동안에 얼마나 발전했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브래드포드의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면서, 아마도 가을 학기에 교수 자리를 얻기가 어려울 것 같고 그렇게 되면 꼬박 1년을 실직 상태로 보내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최소한 내년 신학기까지 자리가 없다는 얘기지. 그러면 파산이잖아? 뭔가 찾아야지! 브래드포드가 나더러 무슨 직업이든 구해서 헤쳐 나가다 보면 더 나은 직장이 생길 거라고 했다. 자네 아내도 직장을 구해야 할 거야. 어찌나 단호한 목소리였던지,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그럼, 너 같으면 한 시간에 5달러 받고 일할 수 있겠어? 그게 최선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이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친구가 치즈 껍데기를 벗겼다. 우린, 찬장에서 먹을 걸 모래 꺼내 아버지 차에 앉아서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고 시내를 뛰어다니던 열여섯 살 소년이 되어 있었다. 브래드포드의 부모님이 먼 곳으로 가고 일하는 아가씨가 혼자 집에 있을 때마다 자주 찾아가곤 했던 이야기를 했다. 난 브래드포드의 가족이 드라이브를 나갈 때면 곧바로 그의 집에 나타났다. 한 번은 그의 가족이 뭔가를 잊고 나갔다가 금방 다시 돌아와서 브래드포드가 나를 침실 옷장에 숨겨준 일도 있었다. 비스듬히 경사를 이룬 지붕 밑에 놓는 짧은 옷장이었기 때문에 키가 큰 나는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비스킷 깡통 위에서 몸을 구부린 채 그의 가족이 어서 빨리 차를 몰고 떠나기만 기다렸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난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왔다. 아래층에 내려와 보니 브래드포드 녀석이 자기 아버지의 커다란 침대 위에서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 말에 브래드포드가 어찌나 크게 웃었던지 한입 가득 물고 있던 치즈덩어리가 파편이 되어 자동차 계기판 너머로 튀어나왔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난 아직도 자네가 계속 누려온 것들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다구. 내가 자동차 안에서 고함을 질렀다. 자동차를 세운 곳에서 수백미터만 가면 중학교 때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길이 있고, 점심값을 털어서 과자와 음료수를 사 먹던 조그만 구멍가게도 있었다. 언덕을 내려오면 졸업 과 닥터 지바고 를 감상하던 낡은 극장도 있다. 그때는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만 자신이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곤 했었다. 우리 모습 좀 보라구. 카폰의 불빛이 테니스복을 입은 채 BMW 안에 앉아 있는 우리 얼굴을 비추지 않는가? 나는 머릿속으로 스치는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우린 가난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이 없어. 그럼,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어때?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서. 잠시 말이 없어 브래드포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반박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라구? 내가 보기엔 꼭 그런 뜻 같은데? 자넨 내년쯤이 되면 몰려드는 청구서를 감당하기 위해 잡일 두세 가지는 해야 할 수도 있어. 젠장, 어쩌면 트레일러 주택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구. 내 판단이 정확하다면, 자넨 계속 뭔가 그럴싸한 일이 일어나기만 기대하고 있어. 자네 아내와 네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제 제발 정신 좀 차리라구!

 

9 아웃사이더

 

세금 3,000달러, 오하이오 여행 경비 675.00달러, 뱅고르까지 차량 임대료 59.00달러,

차량 수선비 1,378.00달러, 전기 요금 112.45달러, 생명 보험료 338.00달러,

식료품비 ?, 잡비 88.00달러,

잔액: 7,141.79달러 (728일 현재)

이건 절대 변명이 아니다. 하지만 여름 내내 미친 듯이 돌아다닌 이유는, 인생이란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의 문제라는 우리 세대의 거창한 허위의식을 아직 벗어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침대에 배 깔고 누워서 아침나절 정도만 노력하면 대학원 입시용 소론을 끝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면 포드가 만든 스테이션 왜건 한 대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구하는 질문이 모두 미국 자본주의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인 데다가 나로선 미래가 너무 암울하게 보였기 때문에 우울한 글을 한 단락 한 단락 써내려 갈때마다 결과적으로 현대 문화와 문명에 대한 서글픈 애도곡이 되고 말았다. 경제는 물론 사회 전반의 미래가 가난과 굴욕과 빈민의 분노로 가득할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상류층은 편안한 삶을 즐기면서 밤이 되면 문을 걸어 잠근 채 빌려온 비디오테이프로 감각을 마비시키면서 아무것도 못 본 척 마냥 앞으로 전진할 터였다. 나흘 동안의 씨름 끝에 침침한 눈으로 고독에서 빠져나와 소론 작성을 포기하고 지원서를 오하이오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정비공에게 전화를 걸어 내 스테이션 왜건을 고쳐 달라고 하면서 물었다. 어쩌면 그만한 비용을 들여서 고칠 만한 가치가 없는 거 아닙니까? 이보세요, 이게 선생이 지금 갖고 있는 유일한 자동차인 데다, 경제적인 여건상 다른 자동차를 구입할 순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만한 비용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구요. 그후, 나는 아내의 밭일을 거들어 주려고 했다. 콩 줄기를 받치려고 자른 버팀목을 보여 주자, 아내가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하지만 나한테 콩 버팀목을 만들어 달라고 했잖아. 그건 한 달 전이었어요. 내 도움 없이 아내 혼자서 세운 울타리 밖에 선 채 상점에서 사온 작은 완두콩 갑을 내밀었다. 완두콩은 벌써 심었어요. 더 심어도 되지 않겠어? 나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잔디밭에 머리를 처박았더니, 잭과 넬이 제각기 막대기를 집어들고 내 잔등에 올라타서 노를 저었다. 내가 카누인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밭일을 하는 아내를 계속 바라보았다. 진흙이 잔뜩 묻은 맨발에다 바지를 종아리 위까지 말아 올린 차림이었다. 갑자기 밭일을 멈추고 똑바로 서서 삽의 손잡이에 기대어 고개를 숙일 때, 아내가 무척 강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로선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았다. 아내가 천천히 춤을 추듯 삽에 의지한 채 몸을 부드럽게 돌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요트 놀이를 계속 하느라 엄마의 동작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만일 보았다면, 한낮에 쉬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 꼬마들 역시 놀랐을지도 모른다. 소녀 시절 그리고 어른이 된 다음에도 함께 살던 모든 이웃에게 다정하게 기억되는 엄마의 모습을. 부모를 힘들게 하는 동네 아이들을 모두 끌어모아 마을을 행진하던 엄마의 모습을. 아내가 하루를 끝마칠 즈음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점심 시간 전부터 소변이 마려웠는데 이제 처음으로 변기에 앉아 보네요 하며 행복한 어투로 말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아내는 장모님을 닮았는데, 장모님은 십대 소녀였을 때 메인 주 프레이크 아일에서 하룻동안 감자 캐기 신기록을 수립한 적도 있었다. 피곤한 모양이군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내가 피곤한 이유는 내가 아내를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다른 에너지와 희망을 가지고 있는 낙관적이고, 마음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데다가 주관이 확실해서 한 번 만난 사람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아가씨와 결혼했다. 그런데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아내가 가지고 있던 이 모든 게 사라지고 있었다. 자기가 결혼한 남자가, 세상살이가 조금만 힘들어지면 여지없이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제 막 깨닫고 침울해 하는 것 같았다. 아내는 이런 문제를 놓고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아니, 아내는 천성적으로 불평과 거리가 먼 여자였다. 내 생각엔, 아내에게 항상 엄청난 에너지가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에 에너지를 전혀 낭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순간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아내는 삽에 기댄 채 서 있고,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자기 분석이라는 감상적인 여행으로 빨려들다가 부지불식중에 고개를 숙여 손가락으로 넓적다리 두드리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을, 그건 바로 우리 할아버지가 40대 초반에 겪은 무도병이라는 신경 질환의 초기 단계에서 보여준 바로 그 동작이었다. 난 그때 다섯 살짜리 꼬마로, 눈 높이가 할아버지의 손 높이와 똑같았기 때문에 이 현상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손가락을 두 개씩 움직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어머니가 나와 쌍둥이 아우를 낳고 열흘 만에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다시 본가로 들어와서 할머니에게 우리를 맡기셨다. 거리에서 사과를 팔며 대공황 속에서 당신의 아이 네 명을 길러낸 고통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지극히 개인적인 할아버지에게 갑자기 아이 둘이 생긴 것이다. 아버지가 우리를 품에 안고 본가로 들어온 직후, 인쇄공이었던 할아버지는 인쇄기를 한 대 조그만 뒷방으로 들여와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했는데, 묵직한 인쇄기에서 나는 화물 기차가 지나가는 듯한 소음으로 집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기 때문에 아기가 우는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를 무릎위에 덥석 앉히던 할아버지 나이와 내 나이가 이제 거의 비슷해졌다. 삽에 기댄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내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느님 맙소사! 이런 최악의 순간에 다섯째 아이가 생기다니! 꼬마 야구장의 노신사가 말했듯이, 전망이 없는 사람은 한순간도 편히 쉴 수 없는 법인가보다. 그리고 편히 쉴 수 없는 아빠는 온갖 짜증과 불안을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전가시킨다. 밭일하는 아내를 지켜보면서 원치 않는 아기를 갖는다는 게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보았다.

아내가 가장 갈망한 건 아기를 갖는 것이었다. 처음에 아이를 몇이나 갖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아내는 아주 많이 라고 대답했다. 아내가 생각하는 여인의 소명은 엄마가 되어 아이들을 사랑하고 훌륭하게 키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항상 쉬웠다. 임신을 하고 아기를 키우는 일이 아내한테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임신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런 사람이 겪는 좌절과 고통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우리는 연애를 하던 3년 동안 카톨릭의 주기법을 제외한 여하한 모든 종류의 피임이란 것을 실시하지 않았지만, 아내의 신체 리듬은 내기를 걸어도 좋을 만큼 정확했다. 결혼을 한 다음에도 아내는 아기를 가질 시기를 스스로 결정했다. 그래서 임신 3,4개월이 될 때까지 아기가 생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난 그때 서른네 살이었다. 그래서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낳아서 기를 나이가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었다. 우리가 다시 영국에서 달아난 지 이틀 후 파리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첫째 아기를 가질 적기라고 결정했다. 나한테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파리의 첫날 밤에 네 번의 잠자리를 가질 때만 해도 나는 강아지가 마룻바닥에 놓인 밥그릇 네 개를 넙죽넙죽 받아먹듯 일을 치렀다. 그리고 파리를 떠난 지 두 주일이 되자, 아내는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떨어져 다음 날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곤하게 잤다. 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재혼하고 나서 소년 시절을 보낸 한 아파트에서는 밤이 되면 생쥐들이 다락을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아파트 지하층에는 아주 오래된 기름보일러가 있었는데 납과 쇠로 만든 커다란 것이었다. 그 보일러에는, 계기판과 밸브와 지레, 그리고 문어의 촉수처럼 뻗어 나온 녹슨 쇠파이프가 달려 있었다. 겨울을 나는 동안 보일러는 예고 없이 꺼지기 일쑤였으며 그럴 때마다 온 식구가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전등불을 비추고 앞장을 서면 우리는 그 뒤를 졸랑졸랑 쫓아갔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 채 보일러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보일러 앞에 선다는 건 건물주만 정복할 수 있는 무자비할 정도로 수수께끼에 싸인 기계 앞에 바보처럼 서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다 보면 건물 주인 여자가 메리 포핀스처럼 거센 바람을 뚫고 나타나서 팔을 걷어부치며 당당하게 우리 앞을 지나가 녹슨 쇠그물과 시커먼 판금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곤 얼마 후 건물 주인 여자가 다시 나오면 망할 놈의 보일러가 다시 돌아가곤 했다. 아기들의 세계를 대하는 아내의 모습도 똑같았다. 아내는 처음부터 아기들 156 들 각자의 욕망을 해석하는 방법과 잔병을 치료하는 방법, 편안하게 해 주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내를 담당한 산부인과 의사 가운데 한 명은 아내에게는 다섯 쌍둥이를 먹여도 좋을 정도로 풍부한 모유가 있다고 했다. 그 모유가 하루 종일 흘러나와 셔츠를 흠뻑 적셨으며, 그 안에는 우리 아기들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첫날부터 십대 아이들처럼 잠을 푹 자게 만드는 특수한 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다. 아내는 눈부시게 푸른 눈과 뺨이 발그레한, 내가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편안한 표정의 아기들을 나한테 선물했다. 어찌나 예뻤던지 아내가 아기들을 내 품에 안겨 준 그 순간부터 아기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삶을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네 명의 아기가 차례대로 태어난 5년 동안, 남이야 아기에 대한 계획을 조심스럽게 세우면서 새로 태어난 아기 하나하나가 얼마만한 시간과 돈을 의미하는지 따져보든지 말든지, 우리는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많은 아기를 낳을 것이다! 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아기가 또 생겼으니,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쯧쯧, 아기를 또 가져서 어쩌겠다는 건가?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은 어느 틈엔가 넓적다리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마당에서 아내를 지켜보다가 아이들을 등에 태운 채 그냥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마당에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약간 얼떨떨하고 허전한 기분이었다. 헛간 옆을 돌아갔더니, 아이들이 보도 옆 잔디밭 앞에다 탁자를 펴놓고 레몬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잠시 지켜보다가 숲속으로 들어가서 난로에 넣을 막대기를 모았다. 주변을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마냥 걷다가 다시 돌아서니, 너무 멀리 걸어와서 집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을 향해 걷다 보니, 갑자기 이상한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바보 같다고 스스로 타일렀지만, 나는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고물 스테이션 왜건을 탄 사내가 우리 아이들을 자동차에 태워 주는 환상이 눈앞에 가득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내는 아이들한테 다음 토요일에도 나와 있을래? 여기 길가 바로 옆으로, 너희들만? 하고 말했다. 나는 장작을 내던지고 달려가면서 몽둥이로 쓸 만한 막대기를 찾아 보았다. 나는 아이들이 뚜렷하게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본 건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서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했을 말과 표정, 아이들의 불행을 막아줄 힘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이 아이들의 가슴을 허전하게 만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소나무 숲에 앉아서 은밀하게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 아침 정비공장에 가서 수리비를 지불하고 포틀랜드까지 차를 몰고 가서 메인 주 직업 안내소 를 찾았다. 납작한 지붕의 단층 벽돌 건물이었는데, 창문 하나 없어서 마치 감옥의 독방처럼 보였다. 정문 밖에는 구세군 복장을 한 남녀 몇몇이 보도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몇 미터 안 되는 한쪽 구석에는 엘카미노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덮개는 닫혀 있었는데, 머리가 하얀 여인 한 명이 맨발을 계기판에다 올려놓은 채 발톱에 메니큐어를 칠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베트남 사람 뒤에 줄을 섰다. 어깨가 벌어진 불한당 하나가 카운터 뒤에 있는 여인에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당신에게 말했잖아.

난 그 일을 할 수 있다구! 난 연장도 가지고 있단 말이야! 여인은 계속 사과를 했으며, 사내는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베트남 사람이 나를 돌아보며 슬프게 말했다. 주소가 없으면 일자리도 없어요. 카운터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간호사처럼 명랑하고 단호했다. 여인들은 차례가 된 사람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도록 훈련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면 커다란 소리로 이름 부르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사회의 낙오자라는 걸 새삼 강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우리에게 내용을 기입할 양식과 포틀랜드 시에서 실업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 57가지를 담은 안내 책자 한 권을 주었다. 예를 들어 신문의 우대권을 찾아보라..., 유선 방송을 끊어라 등의 조언이었다. 주소는 있는데, 연장이 없습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카운터에 말했다. 담당자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일단 주소가 확실하니 출발은 좋군요. 믿을 만한 교통 수단이 있습니까? . 어떤 종류의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까? 아무 거나. 의료 보험만 되면. 아내가 아기를 가진 것 같아서요. 담당자가 적다 말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인은 설사 의료 보험이 제공되는 일자리를 구한다고 해도 보험이 나올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 아기가 나올 거라고 설명했다. 나도 알고 있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너무 오랫동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온실 속에서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안내소에 나가서 같은 담당자한테 의료 보험이 되는 일자리를 구한 는 같은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군중 틈에 있는 나를 선택해서, 석사 학위와 교양을 갖춘 사람에게 적당한 사무직으로 데려갈 주로 믿었다. 밤마다 아이들이 병에 걸리는 악몽에 시달린다고 담당자에게 털어놓았다. 가장 저렴한 의료보험 비용만 하더라도 식구가 여섯이므로 최소한 월 600달러나 되기 때문에 의료보험만 제공하는 일자리라면 충분할 것 같았다. 담당자는 매일 컴퓨터 출력지를 점검하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아직 없습니다.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크게 두 부류였다. 내가 여기까지 오다니! 하며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 나 같은 게으름뱅이가 별 수 있나? 하는 체념의 표정. 그곳에는 항상 조그만 베트남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친절한 여인들이 이름을 어렵게 발음하며 부를 때마다 항상 웃는 얼굴로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히며 인사했다. 그들은 자기네가 부담으로 작용한 데 대해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항상 웃으며 고개숙여 인사했다. 실업자들에게 무료 입장권을 제공하는 런던 극장 바깥에 길게 늘어선 영국의 거지들이 생각났다. 정신적인 영양분도 구걸하는가! 만일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 우리 모두를 야외 수업 나온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처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엘름 거리를 지나 의사당 거리를 거슬러 포틀랜드 심포니 홀까지 데리고 가서 마흘러의 교향곡 제3번을 듣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줄서서 기다리는 며칠 동안 솔벨로우의 소설책 <허조그>를 가져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는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조금 산만하긴 했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는 겉장과 뒷장에 예산을 적었다. 그곳에 서서 다음 한 해의 예산을 적으니까 괜히 안정감이 들었다. 중요한 인물과 점심 식사 약속을 두 달 후에 한다고 적어넣는다. 그러면 두 달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나쁜 운명에서 지켜줄 것이다. 복잡한 직업 소개소의 화사한 꽃병 밑에서 숫자 속으로 사라지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남은 여름 동안의 식료품 비용: 400달러. 치과: 250달러. 전화요금: 50달러. 자동차 보험: 240달러. 전기요금 : 80달러. 자동차 수리비: 1,378달러. 여름이 끝날 즈음에는 4,700달러가 남는다. 내 목표는 최소한의 완충 지대인 4,000달러 밑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직장을 잡는 것이다.

하루는 직업 안내소 카운터 앞에 늘어선 줄에서 빠져나와 화장실에 간 적이 있었다. 문을 여니까 키가 조그만 베트남 사내가 세면대에 서 있었다. 고기 조각이 들러붙어 끔찍하게 보이는 차가운 고깃국이 들어 있는 타파웨어 겉에 뜨거운 물을 틀어 붓고 있었다. 그걸 보자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친구는 몸을 돌려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했다. 따뜻한 게 낫지요. 따뜻해야 맛있어요. 그 말을 들으니, 단지 이 나라에서 살기 위해 굉장히 힘들게 일한다는 사실을, 그네들의 영혼이 열악한 환경을 딛고 어떻게 꿋꿋하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난 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저렇게 못 하는가? 난 왜 상황이 좋을 때만 행복할 수 있는 나약한 남자여야 한단 말인가? 면접 후보자 명단에 내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편지가 프린트턴에서 날아들 때까지 난 그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그 편지를 읽는 순간, 내가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고 팁을 받거나 서점에서 책 파는 일자리를 구하러 포틀랜드 거리를 걸어 다니지 못하는 이유를 확연히 깨달았다.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기회를 빼앗겼을 때, 안락하고 유쾌한 삶을 제공하는 의미 있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할 기회가 없어졌을 때, 월남전 세대 대부분이 겪는 하층민 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을 때, 운명에 아무렇게나 몸을 맡기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나는 운명이 나를 버렸는지 어쨌는지, 만일 나를 버렸다면 내가 용감하게 그 대가를 감수할 것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만 우리 가족이 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아이들이 잠들자 아내가 목욕탕에서 나를 불렀다. 욕조에 누워 있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아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목욕을 하니까 정말 좋아요.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게 이거예요. 등 밀어 줄게. 욕조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천국에서는 아마 목욕 같은 게 없을 거예요. 설령 있다 하더라도 목욕을 하면서 사랑을 나눌 수 없다면 천국의 삶은 이곳의 삶보다 못할 거예요. 적어도 나한테는. 한 손으로 머리칼을 치켜올리고, 다슨 손으로 등을 밀어 주었다. 뜻밖에도 아내는 임신만 하면 유산하는 친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엘렌이 매번 유산하는 걸 보고, 엘렌 오빠한테 내가 엘렌 아기를 대신 임신하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가까운 곳에 살면 아기가 성장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난 아기를 갖는 일이 여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임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당신도 잘 알 거예요. 임신은 어렵지 않아요. 나는 아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내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나 역시 묻지 않았다.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신문에 난 광고 읽은 적 있어요? 당신은 그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아기를 바라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난 그 사람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아기를 포기해도 아마 당신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아내가 아니라고 부정하기를 기다렸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하는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지 않아요? 아내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걱정이 돼요. 난 지금 이 순간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미래예요. 손자의 미래와 손자들이 낳은 아이들의 미래. 미래를 생각하다 보면 가끔씩 섬뜩해요

아내가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나는 욕조에 기댄 채 아내와 뺨을 부비면서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어때요? 지금 당신과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요?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나면, 스나이더 씨, 난 정말 당신한테 화를 낼 거예요. 당신이 만약 우리를 떠난다면, 진짜 큰 실수를 저지르는 거라구요.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아내가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야. 아내는 듣지 않았다. 다른 사내들이 그러듯이, 다른 짝을 만나면 모든 일이 좋아질 거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난 안 그래. 다행이군요. 만일 당신이 그러면, 우린 친구가 아닐 테니까. 우리를 찾아와서 아이들한테 좋은 물건을 사줄 수도 없을 거예요. 난 아이들을 데리고 먼 곳으로 가서 당신 없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테니까요. 내가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요. 나는 아내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알았어.

며칠 후, 내가 가장 좋아한 제자의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왔다. 뜻밖에도 자기 아들이 신경쇠약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가능하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나를 만나고 싶다는 내용과 자신의 전화번호 그리고 수신자 부담으로 연락을 취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제자 아버지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관련 사업으로 약간의 재산을 모았고, 제자는 내가 알기엔 시인이 되고 싶어 했다. 그날 밤, 아내에게 읽어 주려고 편지를 들고 이층으로 올라가니, 아내는 침실에서 아이들에게 옷을 갈아입히다가 문으로 들어서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난 여름밤을 제일 좋아해요. 지금처럼 밤에 목욕을 시키고 나면 아이들이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몰라요. 아내한테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재는 척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있었다. 놀라운 점은 자신의 세계가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을 때조차 시간을 가지고 끈기있게 이 아름다움을 바라본다는 사실이었다. 아내는 나한테 임신 사실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했다. 임신 못 하는 친구에 대해서 나눈 대화와 정원에서 삽을 기대고 선 아내의 모습을 제외하면, 내 판단은 모두 직관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 느낌은 강렬했다. 그래서 나는 일간신문의 입양 이라는 표제가 실린 면을 펼쳐 주방 식탁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입양이라는 표제 밑에는 자식을 못 둔 부모들이 각자의 장점을 알리는 광고가 가득했다. 커다란 주택과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기독교 가정, 활발하고 다정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부부, 컨트리 클럽에 살면서 일하는 부부. 전문 직업을 가진 기독교인 부부. 컨트리클럽에 살면서 일하는 부부. 전문 직업을 가진 기독교인 부부. 결혼 생활이 안정된 부부. 이런 사람들은 원치 않는 아기를 둘러싼 경제 상황, 그리고 교환에 대한 재정상의 부담까지 곧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광고든 저한테는 아기를 먹이고 입히고 치열 교정을 하고 의료비를 내고 대학에 보낼 돈이 있다 는 투의 약속이 담겨 있다. 신문에서 이런 광고를 읽을 때마다, 나는 자식 없는 부부가 과연 얼마의 돈을 지불하고 아기를 사는지 궁금했다. 아내가 카라를 품에 안아 재우면서 제자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동안, 드디어 운명 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아직 존재 여부가 불투명한 아기를 넘겨 주자고, 돈 많은 아버지들이 지금 나한테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아내에게 말하면 어떨까 고민스러웠다. 운명의 무쇠 바퀴는 정해진 트랙을 따라 굴러가고 있었다. 그날 밤늦은 시간에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오는 제자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음성을 들으니, 보스턴 외곽 숲이 우거진 어딘가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저택 안에서 전화를 받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가을 주말에는 사냥을 하러 가겠지. 집안 어딘가에는 아들이 콜게이트에서 학비로 낼 수표를 끊어 주던 책상이 있으리라. 어쩌면 나한테도 한 장쯤 끊어 주거나, 나한테 자기 회사의 일자리를 주게 되어서 대단히 기쁘다고 말할 수도 있어. 기꺼이 아드님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필요한 걸 부탁해야 할 것 같군요. 제 말은... , 알았습니다.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5,000달러 정도면 되겠습니까?

, 좋습니다. 그 정도면 아기를 출산하는 데 드는 병원비를 충당할 수 있을 겁니다.

제자 아버지는 다음날 자기를 만날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보스턴 북부에서 한 시간 거립니다. , 그럼 내일 만나뵙겠습니다. 몇 시에요?

내일 하루 종일 시간이 있습니다. 그다음 날에도,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빌리의 아버지는 검은 머리칼 몇 가닥을 머리 위로 조심스럽게 벗어넘긴 작은 체구의 점잖은 아일랜드계 남자였다. 빌리 아버지가 빌리의 사진을 들고 왔다.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네 자녀가 정장 차림으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빌리는 전혀 안 어울리는 이국적인 누더기 차림으로 항상 스케이트보드를 가지고 다녔다. 내가 알고 있는 빌리는 주말마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멀리 여행을 떠나거나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고 다니느라 바쁜 상당히 명랑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산진 속에 있는 빌리는 억지로 잡혀 있는 포로처럼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 한 시간 동안 빌리의 아버지는 시간을 내서 빌리를 만나주면 아이 엄마한테도 굉장한 도움이 될 거라고 서너 번이나 말했다.

그리곤 빌리가 병에 걸린 뒤 빌리의 어머니가 아들의 옷장을 뒤지다가 나한테 쓴 편지를 발견했다고 했다. 빌리 아버지가 빌리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을 들으니,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은 빌리가 아니라 빌리의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녀석은 장남입니다. 여름에 시내에 있는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라고 떠민 사람은 난데, 애엄마는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습니다. 녀석은 자신이 맡은 업무에는 전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복장에 대해서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자신이 입은 정장과 넥타이를 원숭이 복장이라고 불렀으니까요. 이 사실을 회상하며 잠시 미소를 머금더니, 이내 미소는 사라지고 두 눈에 아득한 표정이 어렸다.

녀석은 열흘 후에 그곳을 그만두었습니다. 금요일 아침이던가, 화장실 갈 때만 빼놓고 자리에 누운 채 꼼짝도 안 하는 겁니다. 의사들은 신경쇠약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내 친구가 있는 예일대학 부속병원으로 데려가 진찰했더니 빌리의 증상이 신경쇠약을 나타내는 모든 기준에 정확히 일치한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아름다운 해변가를 따라 걸었다. 빌리 아버지는 끝없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빌리 아버지에게서 이번 시련이 닥치기 전까지 침묵 속에서 인생 전반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메사추세츠 주 벨몬트에 있는 노동자 마을에서 보낸 자신의 소년 시절을 얘기하면서. 그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고 했다. 아버지들은 열심히 일했으며, 그래서 자기 집을 한 채씩 장만할 수 있었고, 그들 대부분이 아이를 대학까지 보냈다며 슬픈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모든 게 변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교수님 세대글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사실 제 나이도 교수님에 비해 그리 많은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사는 모습이 몹시 그립군요. 예전에는 젊은이들이 거쳐야 하는 일종의 비공식적인 수습 기간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30대 후반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어린 후배들에게 길을 제시해 주었지요. 그건 전혀 새로운 제도가 아닙니다. 중세부터 내려온 방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제도가 교수님 세대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겁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만 찾고 있지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한테는 삶이 점점 더 힘들어졌습니다. 제가 몸 담고 있는 비지니스 세계에서도 그런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저는 빌리가 직장을 얻어서 저 혼자만 특출나게 살아가기를 원한 게 아닙니다. 그 녀석이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요. 저는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시가 아주 좋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 녀석은 절대 그런 삶을 헤쳐나갈 만큼 강인하지 못합니다.

나는 다른 버스를 탔다. 영화를 틀어 주었다. 대화를 나누거나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머리를 좌석에 씌워 놓은 하얀 종이 시트에 맡긴 채 계속 위만 쳐다보면서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영상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버지가 우리 집에 텔레비전을 처음으로 들여오신 날이 생각났다. 그때가 1956년이었으며 다른 아버지들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구입을 했다. 우리 텔레비전은 아주 커다랗고 무거운 나무 상자 안에 모셔져 있었기 때문에 토미 아버지가 오셔서 아버지와 함께 거실에 갖다 놓았다. 영상과 소리가 흘러나오는 정말 멋진 기계였다. 주변에 있는 집은 모두 다 동일한 구조였다. 그래서 어느 집이나 거실 가구는 난로를 향하도록 배치가 되어 있었는데, 텔레비전이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가구를 놓는 방향이 제각기 변하고 말았다.

보스턴에서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계속 빌리 생각을 했다. 빌리가 대학 구내식당 담당자를 설득해서 점심 식사가 끝나고 남은 밥을 모아다가 시리큐즈에 있는 무주택자 숙소에 갖다 주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할 즈음이면, 남은 밥이 돌덩이처럼 차가워지기 때문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래서 녀석은 편의점을 돌아다니며 설득하여 팔고 남은 도시락 만 개를 숙소에 기부했다. 빌리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비록 빌리 아버지와 내가 그런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아들이 그렇게 되는 데 내가 한몫 했다는 느낌이 확연하게 들었다. 빌리에게 시를 써 보라고 격려한 사람도 나였다. 녀석은 1학년이 끝날 무렵 나를 찾아와서 여름 동안 읽을 책의 목록을 적어달라고 했다. 기차에 실려 코네티컷으로 가면서 그 책들을 생각했다. 릴케, 디킨슨, 스타인벡, 휘트먼. 그 책들이 녀석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어 아버지의 소프트웨어 사업 세계와 담을 쌓게 만들었던 것이다. 뉴 헤이븐으로 가는 동안 마음속에 그렸던 최초의 그림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기존의 가치관을 다시 받아들여 예전의 건강한 정신을 완벽하게 회복한 빌리를 기뻐하는 부모에게 선사하는 감동적인 그림이었다.

빌리가 그렇게 창백하게 여위었을 거라곤 전혀 예상을 못 했다. 녀석은 양무릎이 해진 바지와 얼룩진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은행 일에 지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난 녀석의 손을 잡고 우스운 얘기로 웃기려고 했다. 플랫폼에 기차 두 대가 서 있었는데 그 중간에서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어. 바로 뒤에서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었지. 그러니까 함께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야. 그래서 내가 먼저 인사를 했어. 아가씨는 납치범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엄청난 광풍이 불어와 아가씨 치마를 머리끝까지 올려 버리는 거야. 아가씨는 졸지에 브라와 팬티만 걸치고 내 옆에 서 있게 된 거지. 볼 건 다 봤어. 아가씨 얼굴이 빨간 튤립처럼 변하더군. 나는 하마터면 손을 뻗어서 아가씨 치마를 아래로 끌어내려 줄 뻔했어. 인간은 전혀 예상 못 하던 일을 갑자기 당하면 쉽게 무너지는 법이에요, 그렇죠? 빌리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마음속까지 웃은 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빌리의 고물차를 세워 둔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빌리는 처방약을 사야 하는데, 나에게 약국까지 태워다 주겠느냐고 물었다. 여자 약사는 빌리를 알아보며 인사를 나누고는, 알약이 든 병 다섯 개를 카운터에 내놓았다. 그리곤 관심 있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빌리가 약물 복용으로 시력이 나빠져 병원에서 구입했다는 싸구려 금테 돋보기안경으로 조그만 글씨를 읽느라 애쓰는 동안, 여자 약사는 온갖 지시 사항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지시 사항이 어찌나 복잡하던지, 설사 빌리가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나한테 물어보면 나로서도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노인들이 매일 복용하는 정량을 담아두는 조그만 그릇 하나를 달라고 부탁했다. 빌리는 팔을 쭉 뻗어 약병을 쓸어서 주머니에 담았다. 거스름돈 여기 있어요. 약사가 불렀지만 빌리는 그냥 밖으로 나가면서, 동전만 보면 아버지가 동전을 짤랑거리며 권위적으로 나오던 모습이 생각나기 때문에 여름 내내 주머니에 동전을 넣고 다닐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빌리의 안경을 놀렸다. 가디건 스웨터 한 벌 걸치고 가느다란 쇠사슬 하나를 구입해서 안경에 매달아 목에 걸치면 도서관 사서 자리 하나는 쉽게 구하겠구만. 예전에는 시력이 정말 좋았는데요. 빌리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빌리의 아파트에 가니 벽에는 숲속에 있는 호수를 찍은 항공 사진 한 장만 달랑 붙어 있었다. 저기가 어딘지 아세요? 빌리의 물음에 내가 모른다고 하자, 월든 호수라고 설명했다.

행크가 이 호수 어디다가 오두막을 지었죠? 행크라구? 헨리 데이빗 소로우. 누군지 몰랐다. 저는 그 책을 아주 좋아했어요. 교수님은 작가의 삶을 아주 완벽하게 설명하셨죠. 나는 거실 건너편에 있는 빌리를 쳐다보았다.

빌리는 마치 적이 공격하기만을 기다리는 자세로 문가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난 사실 소로우의 작품에 대해 그다지 많이 알고 있는 건 아니야. 대학에 다닐 때는 <윌든 호수>조차 안 읽었으니까. 이 말에 무슨 반응이든 보여 주기를 기대했지만, 빌리는 그냥 건너갔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분노의 포도>였어요. 아시겠지만 그 책은 저를 뒤흔들어놓았어요. 어떤 사람이 그 책을 읽고서도 비즈니스나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뼛골을 빼내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다시 한 번 읽어 보는 게 좋을 거예요. 내가 자기와 한방에 있는 사실이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는 표정으로 빌리가 갑자기 나를 굽어보았다. 시간이 있으시면, 제 침대에서 주무셔도 됩니다. 전 소파를 더 좋아하니까요.

나도 소파에서 자는 걸 좋아한다네. 그럼 좋아요. 교수님이 소파를 쓰도록 하세요. 빌리가 시간을 보더니 10분 안에 텔레비전을 켜야 한다고 말했다. 제가 알기론, 교수님은 텔레비전을 싫어하시는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교수님은 강의 시간에 항상 텔레비전을 비판하셨잖아요. 목 뒤로 작은 거품처럼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잘 듣게 빌리. 내가 교수일 때 한 말은 몽땅 잊어버려야 하네. 빌리는 내 말을 무시하고 텔레비전을 켰다. 오후 토크쇼였다. 전 이프로를 꼭 봅니다. 빌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날의 등장인물은 순결을 가져간 남자친구와 재회한 중년 여인들이었다. 잠시 광고가 나오는 동안, 빌리가 정신병동의 생활에 대해서 설명했다. 매일 아침이 되면 우리한테 신문부터 읽어 줍니다. 그런 다음에는 역할극 을 하죠. 작은 카드에 적힌 첫 번째 질문은 병아리 오른쪽 가슴과 왼쪽 가슴 중에서 어떤 쪽이 더 부드러운가? 였습니다. 전 왼쪽 가슴 이라고 대답했는데,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답이 맞았어요. 기온이 30도를 넘었다. 빌리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선풍기는 벼룩시장에서 50센트를 주고 산 것이었다. 그래서 제일 강한 바람만 나오고, 버튼을 누르면 비행기 프로펠러처럼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신문지를 사방으로 날려보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면서 10분 간격으로 선풍기를 켰다껐다 하면서 공기가 부족한 실내를 정화시켰다. 내가 선풍기의 굉음보다 커다란 소리로 테니스를 치자고 악을 썼지만 빌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녀석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고 라켓과 운동화를 찾느라 수선을 떤 사람은 나였다. 준비하는 데만 거의 30분이 걸렸다. 밖으로 나와서 뜨거운 태양속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벌써 온몸이 흠뻑 젖었다. 우리는 공원까지 걸어갔다. 테니스 코트가 시야에 들어올 즈음에 빌리는 너무 피곤해서 칠 수가 없다고 했다. 빌리가 잠든 동안, 나는 녀석의 세간살이를 둘러보았다. 비싸게 보이는 망원경이 분해된 채로 마루에 널려 있었고, 은행에서 금방 지불한 것 같은 빳빳한 적황색 지폐가 상자 속에 넉 장 들어 있었다. 책장에는 내가 문학 강의 시간에 읽으라고 한 책들만 있었다. <분노의 포도>를 펼쳤더니 그 안에서 사진 한 장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유명한 테러리스트 패티 허스트가 전투복 차림으로 총을 휘두르는 사진이었다. 그날 밤 시내를 산책하고 나서 빌리가 나에게 <윌든 호수>를 읽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녀석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나는 집에서 꼬마들한테 하듯이 녀석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그랬더니 우리 꼬마들보다 빨리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나는 잠시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드럼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악단에서 시끄럽게 쳐대는 드럼 소리가 아니라, 장례 행렬에서 나는 것처럼 천천히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니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녀석의 숨 막히는 아파트에서 단 하룻밤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녀석의 소지품을 몽땅 차에 챙겨 넣고 메인의 우리 집으로 데려가 함께 살면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그 커다란 선풍기 날개를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 드럼 주자들이 점호 이틀째를 맞아 시내 중심에 있는 잔디밭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캠버랜드 농장에서 신문 한 장을 산 다음, 어떤 드럼 주자 뒤에 줄을 섰다. 덩치가 조그만 드럼 주자는 콜라 상자를 들고 동료들이 있는 곳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그의 노란 피부는 너무 창백하다 못해 투명하게 보일 정도였으며, 머리칼은 머리 꼭대기까지 곧게 뻗쳤고, 귀 위까지 면도를 했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드럼을 걸 수 있도록 고리가 달려 있는 번쩍이는 검정 구두와, 드럼 채를 끼우도록 홈 두 개를 파놓은 넓은 검정색 가죽 벨트가 제복의 전부였다. 게다가 그가 걸치고 있는 하이테크 안경 덕분에 제복이 더 이상하게 보였다. 잔디밭으로 걸어가는 그 사람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신경쇠약에 걸리면 결국 저런 존재가 되고 마는가 싶었다. 그들은 우편으로 드럼 주자 복장을 주문하여 주말 내내 코네티컷의 해안선을 따라 시내 광장과 마을 잔디밭을 행진하며 보내는 가련한 영혼들이었다. 얼굴은 천장을 향한 채 소파에서 자고 있는 빌리를 잠시 지켜보았다. 약물에 취해 잠든 꿈속에서 가끔 두 손을 치켜드는 폼이 마치 천장을 향해 헤엄치는 것 같았다. 점호가 뭐죠? 미안해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깨우자 빌리가 말했다. 시내 잔디밭에서 드럼 주자들이 점호를 받고 있다고. 우리는 나중에 스페인어를 쓰는 중년 남자 몇이서 건성으로 축구 경기를 하는 축구장으로 걸어갔다. 뜻밖에도 빌리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의료 보험 혜택이나 보조금이 바닥 난 환자들을 강제로 퇴원시킬 때가 가장 놀라웠다는 말을 했다. 난 반찬 가게에 못 가! 길을 모른다구! 하고 비명을 지르며 강제로 병실에서 겨난 여자도 있었다고 했다. 저는 거기서 많이 변했어요. 자신의 신경쇠약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빌리는 계속해서 오른손으로 머리칼을 긁으면서 뒤로 넘겼는데, 점차 세게 긁다가 피가 나나 확인하려는 듯 가끔씩 동작을 멈춘 채 손톱을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녀석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여름 동안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일이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을은 냉혹했는데, 그들은 주말마다 모여서 뭔가 음모를 꾸민다는 것이었다. 나는 빌리가 그곳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하길 기다렸다. 가령, 멋진 아가씨를 만난 이야기도 좋았다. 하지만 빌리는 거기서 입을 다물더니 멍한 표정으로 축구 경기만 쳐다보았다. 마침내 엄청난 천둥 소리가 한밤중에 쿵쾅거리는 드럼 소리를 잠재웠다. 빌리는 잠들기 전에 나한테 자기 부모가 이혼을 생각하신다고 말했다. 녀석은 자기 때문이라며 자책하고 있었다. 자기가 여름에 집을 옮기고 나서부터 모든 분란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저는 카프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느낌이 들어요. 벌레로 변한 채 자기 침대에서 사는데 결국 가족들에게 증오를 받게 되는 그 주인공 말이에요. 우리 엄마는 내 방에 자꾸만 먹을 걸 갖다 주시죠. 그리고 우리 아빠는 은행에서 일만 잘하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나를 데려다 쓰겠다는 사람들 이름을 끊임없이 보여 주셨고요. 전부 다 아빠의 거래처 사람이래요. 은행에서 얼마나 오래 일했느냐고 물었더니, 빌리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빌리가 의자 안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갑자기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학생 때의 빌리는 아주 날카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생각과 동시에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시작되는 지루한 일상시나 황량한 임대 아파트 생활에 대해 내가 학생들에게 전혀 아무런 준비도 시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빌리의 두뇌를 속속들이 씻고 있을 약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알약이 빌리의 입술에 가느다란 하얀 거품을 남겨 놓았다. 만일 내가 빌리처럼 약해지면 우리 아이들도 이런 광경을 보게 되겠지. 빌리는 은행 일이 불쾌하게 변할 때 많이 놀랐다며 말했다. 그래서 그냥 밖으로 나가 이 옷 세 벌을 샀어요. , 보여드릴께요. 빌리는 침실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양복들이 이제 맞지 않는다며 꼬마 야구장에서 만난 노신사 생각이 았다. 방으로 돌아온 빌리는 한 벌은 입고 나머지 두 벌은 손에 들고 있었다. 나도 일당으로 보이죠, 그렇죠? 구분이 돼요? ? 내가 협잡꾼처럼 보이잖아요. 빌리가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이 옷 좀 보세요. 멋있죠? 이런 옷을 입으면 뭔가가 된 느낌이에요. 원숭이 옷. 전 이 옷을 입고 은행에서 모임에 가입했어요. 매주 금요일 오후만 되면 우리는 멋쟁이 사무실에 모여앉아 게으름뱅이들한테 전화를 걸죠. 게이름뱅이들은 전부 다 흑인 고객인데, 생활이 말이 아니더군요. 우리는 전화를 걸어서 이 친구들에게 호되게 야단을 칩니다.

, 검둥아, 자네 캐딜락에 난방장치 성능이 좋기를 바라겠어. 이번 겨울을 그곳에서 보내야 할테니 말이야! 뭐 이런 이야기들이에요. 우리 모두가 이런 전화를 했어요. 커다란 축구 경기 같았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최고 실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했어요. 여직원들까지도. 내가 은행 일을 그만 둔 건 더러운 느낌 때문이었어요. 뜨거운 물로 계속 샤워를 했는데도 아직도 더러운 느낌이 가시지 않아요. 그래서 그만 뒀어요. 아빠 친구인 총재의 책상에 메시지 한 장만 남겨놓고요. 빌리는 나한테 보여 줄 게 있다면서 다시 침실로 모습을 감췄다. 다시 돌아왔을 때, 녀석은 최소한 야구공 정도는 될 커다란 돌맹이 몇 개를 가져와 텔레비전 위에 일렬로 세워 놓았다. 제 트로피예요. 녀석이 또다시 크게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 얼마 전부터 창문을 부수기 시작했어요. 원숭이 옷을 입고 호화 생활을 하는 집들을 자동차로 돌아다니면서 창문에다 돌을 던지는 거죠. 아마 한 오륙십 장은 깼을 겁니다. 최근에 이렇게 하고 싶어졌어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녀석이 고개를 숙이더니 텔레비전 위에 놓은 돌멩이들을 갑자기 나꿔챘다. 빌리, 우리 아이들이 이 사실을 알면 흉내를 낼 걸세. 빌리가 마루에 앉았다. 양반다리에 팔짱을 낀 자세였다. 그러더니 이쪽 저쪽으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보게 빌리. 자넨 너무 고독하게 사는 것 같군. 한동안이라도 메이로 와서 우리와 함께 사는 게 어떤가? 최소한, 빌리, 최소한... 빌리가 내 말을 잘랐다. 패티 허스트가 샌디에고에서 은행을 터는 근사한 비디오 테이프가 있어요. 잡지에서 보고 주문한 건데요, 저도 그 여자처럼 싸우고 싶어요. 차를 몰고 잘 사는 집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젠장 처치해야 돼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대로 행동하던 그 시절이 제 입을 닫아 버린 거예요. 이게 앞으로 내가 살아갈 세상인가요? 불켜진 집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처럼 흑인한테 전화를 걸어 욕설을 퍼부어대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톰 조드처럼 되고 싶을 뿐이에요. 톰이 뭐라고 했는지 아시죠? 계속 움직여야 해.

놈들을 최대한 멀리 앞질러야 해. 다음날 아침, 빌리는 나를 기차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내가 열차 시간표를 잘못 알고 있어서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작은 가게로 들어가서 각자 사과 주스 한 병씩을 샀다. 역사 밖에 앉아서 열차를 기다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잘 들어. 톰 조드는 없어. 스타인벡이 허구로 만들어 낸 인물일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녀석이 웃었다. 우리 엄마도 그렇게 말하셨어요. 교수님처럼 우리 엄마도 제가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길 바라세요. 속으로 숨지 않는 영웅도 분명히 있어요. 내가 이 말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나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었고, 한 동안 내가 그런 영웅이라고 믿은 적도 있었다.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녀석은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가겠다고 말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여기서 교수님과 함께 기다릴 수 없어요.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차를 몰고 사라지는 빌리를 지켜보았다. 나와 함께 있는 게 싫증 났거나, 아니면 영원히 아웃사이더로 남아야 한다고 믿는 체제 속으로 자신을 억지로 끌고 가려는 다른 사람과 내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가 찾아온 이유가 혹시나 자기 아버지한테서 뭔가를 얻을 수 있을까 은근히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빌리가 알아 버릴까 두려워하며 역을 떠났다. 빌리는 내가 콜게이트에서 해고되자 스스로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대학 당국에 항의한 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다. 빌리는 대학 총장과 면담을 요청해서 설명회를 열 것을 요구했다. 그 자리에서 총장은 수백 명의 학생들 앞에서 내가 방출당한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총장이 정치적으로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빌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건 충분한 이유가 못 돼요! 하고 총장에게 고함을 쳤다고, 다음날 누군가가 알려 주었다. 빌리의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말한 건 그다음 날이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빌리의 아버지가 내 노력에 대해 보상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 소프트웨어 회사에 취직시켜 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빌리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책 상자를 뒤져 학교에 있을 때 녀석에게 읽어보라고 할당해 주었던 책들을 찾아보았다. 책들을 뒤져서 녀석에게 격려 삼아 보내 줄 구절을 찾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눈은 강의 시간에 써먹으려고 책 겉 가장자리에 적어놓은 온갖 메모만 쫓아다녔다. 그 순간, 내가 문학 작품들을 순수한 목적으로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문학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강의실이나 동료 교수들 앞에서 나를 똑똑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줄 것만 찾았던 것이다. 파티에서 써먹을 구절을, 총장 부인이 나중에 잠자리에 들면서 여보, 영문과의 젊고 매력적인 익살꾼 친구, 기억나요? 하며 나의 존재를 일깨워 주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주방에서 쓰레기 봉지 몇 장을 가져왔다. 그리곤 책들을 꼼꼼하게 점검하여 메모를 써넣은 책은 따로 분류했다. 하지만 곧 모든 책을 쓰레기 봉지에 쓸어담기로 마음 먹었다. 강의용 메모가 담긴 여남은 권이 넘는 노트도 함께. 아침 일찍 동이 트기가 무섭게 차를 몰고 쓰레기 처리장으로 갔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나는 밖에서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무슨 쓰레기인데요? 쓰레기 매립지를 지키고 있던 이빨 빠진 남자가 물었다. 과거의 삶 사내가 나를 쳐다보더니, 옆좌석에 쌓아놓은 쓰레기 봉지를 가리켰다. 하나만 열어보슈. 내가 열어보이며 모두 다 책이라고 하자, 사내는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언덕 꼭대기로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봉지를 한꺼번에 불길 속으로 던지지 않고, 하나 하나 열어서 한 권씩 집어던졌다. 거대한 카탈로그 더미가 잿더미 속에서 연기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 위에 책을 던졌다. 에밀리 디킨슨과 멜빌의 전작집, 호돈의 <주홍 글씨>, 낡은 양장본으로 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오하이오의 여자 제자가 암기한 구절들을 찾아보았다. 해고된 윌리에게 가장 친한 친구 찰리가 직장을 구해 주는 장면이 나왔다. 자존심 강한 윌리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찰리에게 말한다. 이미 직장을 구했어. 그러자 찰리가 묻는다. 그래? 그런데 도대체 무슨 직장이길래 수입이 하나도 없나? 그 장면 가운데 몇 줄을 칠판에 써놓고 강의하다가, 우리 모두 언젠가는 바로 이런 직업을, 작업 내용 자체가 너무 좋아 보수를 한 푼도 안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말하면서 강의를 끝내던 기억이 났다. 학생들에게 이 말을 할 때는 나 자신이 흐믓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그 구절을 다시 읽으니, 나야말로 학생들 앞에서 전혀 아는 게 없는 아웃사이더의 삶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던 최악의 사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온 우편물 가운데 채용을 거절하는 편지 세 통이 있었다. 나는 편지를 읽고 주방 식탁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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