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을, 나는 문득 죽음을 알아 버리지
가을, 또 한 번의 죽음
가을, 비, 하염없이
가을 햇살, 아름다운 모순
건너편의 여자
겨울 벌판
결핍으로서의 존재
구멍투성이 혼의 기도
구신 같은 애
그가우리를우산처럼
그리고 다시 가을이 왔다
꽃등 켜는 손 하나
꽃의 말
나비의 꿈
나의 병
나의 시(詩)
나진스키
낮꿈
내 가슴 빈터에 내 침묵을 심는다
내가 아무렇게나 죽인 여자
내면의 천사
눈
눈 내리는 마을
눈물의 방
늦게 온 빗방울
늦봄
당신의 어깨
도시, 교외
도시, 실내에 있는 여자 – 탁자 또는 생애
도시, 하루종일 눈 내림
도피선 긋기
돌로로사, 서울
동동 떠다니는 말들
딩동 노래
또 봄, 기다렸던 봄, 또 봄은 가고
라일락 향기, 내 몸은 갈갈이 찢어지고
말에 의하여 깨어나는 짐승
매복
모네 씨의 수련
모래 사면
무시무시한 공허
미망(迷妄)의 아이들
바다의 지진 이후
바람
바람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
밧줄 끊기
배꽃 화르르 지고
베로니카, 두 겹의 삶
벽 위에서
봄
봄, 빛
봄, 위태로운 삶, 순수 또는 위기의 맛
봄, 즐거운 부서짐
부재의 습격
불면
비
빈 가슴에 꽃 피고
빛나는 살성
사람의 (못)과 (사람)의 못
사랑으로 나는
사랑은 있다
상처들, 길
새로운 죽음
새벽 눈물
설국(雪國)
소리 없이 눈물, 나를 찾아오네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또는 막가는 나의 시법(詩法)
스물네 살의 바다
스물네 살의 산꼭대기
스.타.카.토. 내 영혼 – 연금술사의 화덕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슬픔에 대하여
슬픔의 바다
슬픔의 방
슬픔의 술 장식
시(詩)
시법(詩法)
시(詩)와 힘
시(詩), 1992년, 서울
쓸쓸한 몇 편의 사랑 노래
아담에게
아주 조금 습한 웅덩이
아직도 미래는 유령 같은 것
안개
안 잘라지는 손가락 한 개
어느 날의 가벼움
어느 날의 바다
어느 밤의 울기
에우리디체, 언덕 위, 또는 나지막한 들리움
여자들, 고요히, 나뭇잎처럼
여자의 말 – 세기말, 적극적인 죽음
역사의 뒷길
연가(戀歌)
오늘 오후, 부재(不在)의 경험
오, 달빛
오백 살 먹은 마녀와 나
오월, 비 내린 뒤
오지 않은 사람
용연향
우리는 밤새 깃털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령의 노래
육체의 길
은사시나무
이를테면
이미지들 –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있는> 별
잎사귀 바람 만지며 돌아누울 때
잔혹한 외출
장미 화환을 쓴 암흑
저녁 노래
전골 남비 속의 희한한 허공
절망적인 시법(詩法)
젊은 프랑켄슈타인
존재, 거지
종이비행기 접기
죽은 ‘엄마’에 의한 엄마의 교정
지상의 나무들
지하철에서
천 년 동안의 고독
천 년 전에 물가에서
천사
첫눈
침묵, 바닷가에서 주운 칼날
커피 타임
타인(他人)들과의 관계
탈출
파롤, 가난한 말
파비안
편지
폐허의 집
화장
4월
가을
김정란
가을, 나는 문득 죽음을 알아 버리지
바람,
난 문득 알아 버리지, 신비한 부서짐,
비스듬히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어딘가로, 나 알지 못하는,
곳.......... 있지만 없는......... 장소의
귀신들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가슴속엔 웬 수많은 목소리들,
속삭임, 말의 싹들, 작게 바시시
웃거나 한숨짓거나 조금 흐느끼거나
그리고, 산 너머, 오늘 유난히 짙은 석양
아래, 잔잔히 흔들리는 벌써 죽은 사람들,
투명한 귀신들의 나지막한 목소리, 두런거림
가만히 멀리 바라보면...... 너무나 잘 보인다,
살아 있는 사람들, 마른 가랑잎처럼
바시락
부서지는 것
가을, 또 한 번의 죽음
김정란
가슴이 툭 떨어진다
가을, 존재가 빠져나갈 다음의,
아주 희미한, 물그림자 같은,
흔적…내가 가만히 그 곁에
다가간다, 비수처럼 내 가슴에
와닿는, 부재의 결…차디찬…
삶이, 나날의 줄거리의 그물이
펄럭인다, 잊지 마, 넌 노예야
내가 비껴선다 또는 돌아선다
가을의 경사…윙윙 내 영혼의
벽을 따라 오르페의 울음소리
피처럼 뚝뚝 떨어진다, 안녕,
살아서 유령처럼 내가 존재의
변경에 이른다…그곳에서
이슬 젖은 금가루처럼 후두둑
내가 흩어진다 흩어진다
가을, 비, 하염없이
김정란
여자아이 하나가
하염없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바람은 연갈초록빛
깊이 넓게 흔들리는 별 냄새
간밤에 이슬비가 내렸다, 고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타박타박 우주까지 걸어가는
숨죽인 발자국소리 하염없이
가을 햇살, 아름다운 모순
김정란
가을 햇살 한 줄기, 참을 수 없이 아름다운,
기어이 내 존재를 베어내어
허공에 매다네 내가 대롱대롱
흔
들
리
네
무게와 가벼움 사이
내가 아주 잘 흔들리네
마치 그것이 내가 할 줄 아는
일의 전부인 듯이
마치 그것을 소명으로 가지고
태어난 영혼처럼,
내 흔들림 사이로 얼핏 보이네
가늘게 떠는 안개부터
흔들리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
하느님 어깨, 내가 가슴이 메어
울지도 못하며 막막히
그걸 바라보네 가을 햇살,
기어이 내 존재에 비수처럼
박힌 - 아름다움, 모순,
건너편의 여자
김정란
오늘 저녁엔 한번 찬찬히 살펴보시길
봄비 스스스 내리는 저녁 무렵
혹시 당신의 양복 뒷단을
희고 찬 낯선 손이 몰래 다가와
살며시 잡아당기지는 않는지
혹시 당신 아파트 문 위에
손톱자국이 나 있지는 않은지
자동응답기에 숨죽인 흐느낌이
녹음되어 있지는 않은지
당신이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을 기다리면서
일간지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 그리곤
불 밝은 전동차 안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가는 동안,
혹시, 건너편, 시외로 빠져나가는 플랫폼
어두운 한구석에 숨어서 한 여자가 당신을
막막히 애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그녀가 가슴을 불어가는 바람을 견디느라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고 있지는 않은지
당신이, 문밖으로 쫓아버린 여자
당신이,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 잊어버린 여자
그 여자, 당신의 일상이 잊어버린, 그러나
어쩌면 당신의 영혼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겨울 벌판
김정란
난 그것에게 이름을 줄 수 없어요
동그란 달무리 언제나 날
겨울 벌판,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데려가
얼어붙게 해요
산 채로 미이라가 되어 生氣를 버리는
나의 살을, 육체의 감각으로 느끼는
이 전율이 얼마나 막강한지
그럴수록 나의 정신은 오히려
단호해지고 또렷해져서
맹렬한 백열 상태로 돌입하는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언제나 난 내가 어디 있든지
그건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난 내 맘대로 왔다 갔다 하니까
난 삶이라는 구체성의 엄살을 끝내고
어디서든 시간이 금가루처럼 떨어지는
이 멋진 헐벗은 광야에서
결핍으로서의 존재
김정란
1 - 어두움의 기록
나는 어떤 어두움에 얻어맞은 것인가.
어떤 결핍에 의하여
내 실존은, 본질에 대해,
이토록 민감하게, 거의, 물리적으로
감(感)을 잡으면서도,
어떤 형식의 不在에 의하여
이토록 그것으로부터 늘
이반되는가, 대체,
세계의 밝음, 세목의 즐거움에서
놓치지 않고 그림자, 결핍의 예감을
감지하는 이-존재의 뻐그러짐.
나는 머리를 쳐든다, 알 수 없다
이 절망의 뿌리에서 나를 지켜주는
이 지독한 갈증, 그것의
성실성이 얼마나 끝간 데를
모르는가를.
나는 세목의 확인에서 빛의 예감에까지
철저히 움직인다. 일단은,
그 수밖에 없다. 얻어맞은 자아여
치유 너의 아이덴티티를
꿈꾸며. 눈을 뜬 채. 세계의
세목으로부터 절대로
눈돌리지 않은 채로.
2
나는 신(神)을 믿지 않는다
나는 신(神)을 꿈꾼다
신(神)은 내게 모랄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내게 욕구의 대상이다
신(神)을 꿈꾸기
나는 시(詩)를 쓰며 욕구로서의 자아를
갈망한다
한쪽 어깨는 너무나
아래로 기울어져 있고
한쪽 어깨는 너무나
위로 날아 올라가는
나의 시(詩) 쓰기
나는 뒤뚱거리며 그러나 어쨌든
앞으로 나아간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갈망의 순수함만이
닫혀진 봉인의 비밀처럼
빛나고 있을 뿐
오늘 내가 몇 번이나
존재의 현기증으로
되돌아서는, 이
어두움 속에서
구멍투성이 혼의 기도
김정란
내 젊음은 까칠까칠했습니다.
언제나 석양빛이 내 삶의 창틀에 어깨를 기대고,
이따금 핏발선 눈으로,
어떤 규정되지 않는 사악한 힘으로
나의 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나의 방안에서
이유 없는 적의의 불이 붙고,
그것은 순수의 이름으로 나를 매혹했습니다.
오랫동안 웅크려 있던
그 방안에서 걸어 나와 거리로 나섰을 때,
나는 내가 숭숭 구멍 뚫린
비루한 영혼과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적의가,
그 휘황한 매혹이
나를 오랫동안 갉아먹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시간이 바람처럼
우리의 남루한 삶을 흔들며 지나가고
그것은 딱 한 번만 허용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쥐고 흔들었습니다.
삶의 용렬한 개개(個個)의
구체성은
그것의 추상성에게 부대꼈습니다.
그러나 ..
나는 ...
시간에 떠밀려 가면서도,
행위의 어떤 행복한 꽃핌을 꿈꾸었습니다.
나는 나의 행위에게 다가가
"얘야,
나는 네가 되고 싶어.
너는 흰옷 입은 천사처럼
당당하고
자유로워야 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꽃은 언제나 지고,
마음속에는 그들의 시들은 꽃과
비 오는 날 마음의 모든 문들을
허무의 바람으로 열고, 흩날립니다
그들의 파리한 그림자가 나를 병들게 했습니다.
나는 도망가고 싶었어요.
오 하느님,
나는 부끄러운
나의 모든 행위들을 목 졸라 죽이고 싶었어요.
존재의 어설픔과 행위의 서투름으로부터 도망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죽어 버리고 싶었어요.
마치 내 모든 행위가 나에게서 빠져나간 것이 아닌 것처럼.
밤이 왔습니다.
그것이 나의 존재를 절망의 힘으로 패대기쳤습니다.
오히려 상쾌하기도 했습니다.
자학의 확실한 쾌감이었을 테지요.
내 몫의 업(業)으로 내 몫의 절망을
내가 감당한다는 그런 오만이었겠지요.
그러나 나는 압니다.
그것은 허위이며
우리는 존재에 관해 아무 몫도 가진 바 없다는 것을.
존재의 어두움 안에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은 은총뿐이라는 것을.
그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놀랍게도
잘 보이던 별이 그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요,
사랑하는 하느님
나는 오랫동안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진실로 하느님,
당신에게 들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만유(萬有)를 찾아가 깃드신다 하더라도,
나는 내 편에서 먼저 당신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의식(儀式)입니다.
나는 잠들고, 봄비 내리고,
사물들은 웃음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있는 곳에 있는 것들이 그들만의 언어로 메세지를 보냅니다.
하느님, 내 귀가 밝아지며,
눈이 밝아져, 그 비의(秘意)에 이르고 감히 원컨대
내가 그 즐거움의 노래를 알아듣기를.
내 혼은 비루하며 구멍투성이입니다.
그 구멍들로부터 바람이 일어납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다른 것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
확신에 이르려는
내 이성의 오만한 熱望을 흔드는 바람.
결핍을 통하여
존재가 존재들을 부른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바람.
나를 이끌어 올리는 모든 것들이
정작 내 깊은 바닥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부끄러워 그것들을 버리려는
나의 눈길을 뒤흔들어
다시 돌아서게 하는,
소용돌이의 바람.
안으로 돌아가며 바깥으로 나가는 바람.
하느님,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나날의 삶을 주시니
그것들의 지리멸렬함 속에
우리는 남아있습니다.
그 어두움은 가히 완전하여,
그 형태의 다양함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가 광명으로 온전할 수 없음으로 절망할 때
"그러면 이쪽은 어때?
이쪽으로는 온전할 수 있지 않아?"라고
말하며 꼬드깁니다.
그럴 때 그들의 뺨이 사과빛이며,
그들이 수금을 탈 줄 알며,
그들의 혼이 참으로
세련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당황합니다.
하느님,
실로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오래 걷게 하소서,
진실로,
내가 내 비루한 영혼 안에서
겸손하게
겸손하게 당신을 배우게 하소서.
아무도 아무것도 버리지 말게 하소서.
사랑하고 사랑하여 스스로 행위의 주인이 되게 하소서.
어두울수록 빛나는 별을 누리게 하소서.
내 구멍투성이 혼을 채워주소서.
결핍의 소산인 바람을 기꺼이 쓰게 하소서.
구신 같은 애
김정란
이따금 이유 없이 몸이 떨리곤 했다
그리곤 그 떨림의 끝에서
무엇인가 탁, 탁, 터지곤 했다
난 그냥 그게
내 안의 꽃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가끔씩 몸이 달달 떨리고
햇빛 쨍쨍 비치는 날
공연히 장화가 신고 싶었다
내 속에 핀 꽃이 젖을 것 같았다
정말 참을 수 없이
걱정스러웠다
내가 엉엉 울며
장화를 신고 학교에 가면
엄마가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쯧쯧 구신 같은 애야
구신 같이 나는 꽃을 피우고
죽음이 목덜미에 감겼다
꽃은 지지 않고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엄마
쯧쯧 구신 같은 애야
장화를 신고 햇빛 아래에서
나는 자꾸 재채기를 했다
내 안의 꽃잎들이 아아 입을 벌리고
햇빛에게 한꺼번에 말을 걸려고
서로 밀쳐댔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말들이 내 몸을 막 흔들었다
내가 오두마니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으면
엄마가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쯧쯧 구신 같은 애야
그가 우리를 우산처럼
김정란
비가 왔어 천둥이 쳤어 모두 웅성거렸어 드디어 세상 끝날이 왔구나 삶은 꼬일대로 꼬였어 삶을 비극이라고 부르는 것도 희극적일 정도로 이미 너무 비극적이었으니까 말이 말 안에 더럽게 갇혀서 안으로 곤두박질치며 타락했어 말은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했어
아 그런데 이제 큰 말씀이 오시는구나 말과 그 안에 갇혀있는 우리를 꺼내주려고 큰 해방자가 오시는구나 이젠 비를 비라고 조국을 조국이라고 원수를 원수라고 어버이를 어버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겠구나 아 이젠 썩은 말을 먹으며 내장에 독이 가득 차 증오 속에서 숨 막히며 연명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가 우산처럼 우리를 그의 진리 안에 숨게 하겠구나
그러나 시냇물처럼 우리는 하릴 없이 주르르 흘러갔어 우리의 무리 짓기도 소용없었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희망을 가졌던 자들의 입술만 갈증으로 오히려 더 새카매졌어
그래서 우리는 눈부시게 깨달았지 아직도 때가 아니니 입 닥치고 작작 열심히 너절하게 살리라 명민한 눈이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으면 먹는 대로 잡아 잡수시라고 우리의 예쁜 몸을 통째로 내어주며 그래도 어둠을 죽어도 어둠이라고 부르며 그 안에서 눈뜬 채로 마른번개 우릉우릉 우리 내장을 흔들고 지나가네 괴상한 음악이 들려오네 주제에 우리는 지겹게 당당하네
그리고 다시 가을이 왔다
김정란
핏줄, 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핏줄, 이라고, 가을이
내 핏줄 곁에 와서 가만히 눕는다고
그러면 내 존재가 다
다
흩어진다고, 맑은....... 하늘이.....
저...... 너머로.....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알아들었던 근원적인 떨림이
내 안에서, 가을에, 참을 수 없이, 회복한다고
핏줄, 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핏줄, 이라고, 가을이
내 핏줄 곁에 와서 가만히 눕는다고
꽃등 켜는 손 하나
김정란
내 마음은 너무 가라앉아서 밑도 보이지 않지
적요한 우울...... 나는 가만히 엎드리고
하아 하아 숨 쉬고 있어 내 마음
상처받은 어리석은 짐승 음... 음...
입을 틀어막고 견디지 나는 혀를 깨물어 삼킨다
얘기할 방법이 없어 난 안으로만 파고든다
어쩔 수 없어 내 안에서 해결할 거야
그러다 망하더라도 어떻게든 이 안에서 끝장을 볼 거야
난 바깥으로 줄줄 쉽게 끌고 나가지 않을 거야
어쨌든 한 원칙 안으로 진도를 다 떼기 전엔
이를 악물고 난 참을 거야
난 울지 않아 난 일어날 거야
난 알아 난 죽음과 대결하고 있는 거야
살아야 해 알겠니 살아남아 지혜로워져야 해
봄바람 설핏 불어간다 가끔 나는 떠오르기도 해
그럴 때 내 다친 짐승 부스스 몸을 떨지
가끔 그놈 눈곱 비비고 눈부셔하며 바라봐
내 작은 방 어디 한구석에
나지막이 꽃등 켜는 손 하나
겸손하고 초라한 기적처럼!
그 손 주위로 물에 젖은 빛 한없이 흔들리고
방 조금씩 흔들리며 떠오르고
울음의 벌레들 젖은 날개 털며 와와 날아오르네
바람............................ 먼지가 풀썩 일어난다
그때 네가 왔었다 문득 내 얼굴 지워지고
봄, 문간에서 덜컹거리는...... 난 당신을 알아
꽃의 말
김정란
꽃들은 지상에 완벽함을 가져온다.
꽃들을 보면 눈물이 난다.
내가 꽃의 말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깨닫게 되므로,
꽃은 내 영혼 속에 빛의 검을 찔러 넣는다.
이 어두운 말의 땅에서도 빛을 잊지않았다는 것.
그것이 내 영혼의 유일한 덕목이다.
나비의 꿈
김정란
나비를 보았다.
깊은 밤, 내 숨소리 허공을 향해 올라갔을 때.
우리의 기질이 나비의 날개를 가진다면
우리는 다만 있는 일만으로 족하리라. 왜냐하면
버려버릴 것을 모두 가벼운 날갯짓으로 벗어버린 뒤에
우리는 알몸으로 비로소 남아 있을 수 있으므로.
그때에 내가 내 육체를 향해 새삼스러이 말을 걸리라.
'안녕! 예쁜 나여!'
나비는 언제나 내 영혼의 깊은 곳을 찾는다. 그가 말했다.
'가능하면 더 깊은 곳을'
어느 날인가 나는 그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금이 간 영혼을 사랑해.'
어째서지?
'잘 몰라, 하지만 어쨌든 그들에게선 좋은 냄새가 나.'
그리고 그는 날아갔다.
나는 덜덜덜 흔들렸다.
그리고 조금 뒤엔 바람이 칠흑이 그리고 핵이 남았다.
꿈꾸는
핵
나는 다시 나비를 보았다, 아니 오히려 가졌다.
내가 모든 여행길의 돌짝밭에서 돌아올 때
조심스러운 비상으로
다시 시작하는 나비.
나의 병
김정란
1 - 자가 진단, 반성을 위하여
등 뒤로 음모처럼 삶이 다가왔다, 사뭇,
음험하게. 그는 마치, 내가 저와
마주 서지 못하는 것을 잘 안다는 듯이.
나는 알고 있다-그것이 병이다, 정말은
-내 생존 형태에 대하여.
빠져나오기, 살지 않으려 들기,
유보되는, 꼭 그만큼의 죽음의 양만큼의
생존. 내 삶에 관하여 등돌리는
꼭 그만큼의 생존의 의미.
-나는 살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만큼만 존재한다-
그리고 숨이 막힌다. 내 한길 작은 몸뚱이 안으로
흐르는 생명-이, 삶이라는 질병에 대하여
거꾸로 흐르는 피. 최소한. 지금은 그렇다.
언제, 내 삶이여, 나를 늘 바깥에서 조여오는 형식이여,
언제 내가 그대라는 옷 속을 채우는
체적이 될 때까지, 지금은, 이 명목 없는
모반을, 텅 빈 알맹이로부터,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밀어내는 이 기약 없는 안에서의 집짓기를 용서하라,
적어도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적어도
나의 자기 증오가, 머물기 위하여 꾸며대는 음모의,
은밀한 징표는 더더욱 아니므로,
그러므로 이 움직임을, 이 빠져나감을, 지금은
용서하라, 굴레, 오 내 他者의 삶이여.
나의 시(詩)
김정란
1 - 삶은 각질이다. 따라서 언어도 각질이다.
정해져 있는 모든 테두리들을 향해
또는 체제라고 불리는 모든 삶의
딱딱한 껍질들을 향해 - 시(詩), 오 빨개벗은 연체동물
나는 시(詩)의 혓바닥으로 `아니'라고 말한다.
그대는 꼬물대며 기어간다- 효율적!
어느 천년에……아닌 게 아니라 걱정스럽기는 하다.
그 기약 없는 절대성의 존재 놀이……
나는 축적된 생명의 모든 물량적 양식(樣式)을,
형태를 내용을 빠져나온다. 나의 달팽이는
속살만으로 성벽을 기어 내려온다……오 그대에게
내 궁극의 기원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나의 달팽이는 알고 있다. 이 삐그덕댐이
긍정적 징조라는 것을, 혼, 안개 무리, 또는
언어, 또는 우리가 신(神)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궁극에 대한. 감(感)만으로 나의 달팽이는
최소한 지향(指向)한다
(길은 도처에 있고 길은 아무 데도 없지만)
따라서 시(詩)여 나는 그대의 덕성으로
삶 앞에 막바로 맞선다…… 나,
앞뒤로 인연의 끈을 주렁주렁 엮어든,
축적된 만큼의 행위로 결정되는
구체적 삶과 무관한 (내)가.
나의 영혼의 대벽이여 잠재태여 물렁살이여,
그러므로 갈망하는 만큼 네가 되기를,
너, (너)의 창세, 그리고 동시에 (너)의 말세인 너,
그러므로 되기를- 될 수 있는 것이.
(집- 우리는 꼭 한 채의 집만 짓는다 조갯살인 존재여
네 영혼의 크기에 꼭 들어맞는 집 한 채-
절대의 집- 될 수 있는 것=되어야 할 것)
꿈꾸며, 시(詩)여, 나는 무너진다.
삐그덕거림, 나는 목마름으로
사막을 건넌다, 사막- 나는
텅 빈, 태고의, 무관한 집을 꿈꾼다.
2
그때 천사의 날개로 퍼덕이며 무형의 공간을 헤집으며 날아오르던
너의 힘센, 순결한 움직임을, 그 상향의,
형태 없는, 존재로의 비약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잡히지 않는 유령이여.
몸을 얻기 위해 내 깜깜한 비천한 창고 속
와글거리는 흐느낌 속을 뒤척이던 아
순결이여, 내가 그대를 향해 일껏
퍼줄 수 있는 것이 이 덜덜 떨리는 예감뿐인 것을,
어쩌면 그대 자신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가.
내 가난한 넝마의 혼 안에서 울부짖는 날개,
피투성이로. 피투성이로.
울며, 뒤채며, 안으로만 날이 서는 이
끔찍한, 삶이라는, 내향성의, 양날의 톱니 사이에서
으깨어져라 시여 죽어라 시여,
내가 그대를 이렇게 지겹게 떠나지 못하므로,
죽어라 시여, 적어도 그렇게
그대 내 필멸의 뻔한 삶을
더불어라. 퍼렇게 살아 눈뜬 채로
잠자지 않는 나의 기(氣), 오 성스러운 망할 끼여.
3 - 그대에게 가기 위하여
나의 시(詩)는 도상(途上)에 있습니다. 나는 아주 서투른 사인밖에 던질 줄 모르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이거나 풀이거나 흔들리는 물바가지이거나 떡갈나무에 매인 노란 리본이거나, 그들은 한결같이 게으르고, 한결같이 풀이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허둥댑니다. 작은 나의 마음을 시행(詩行)마다 박아두고, 당신이 조금이라도 문을 열면 얼른 그곳에 물결을 일으키리라고 매복하여 기다리며. 오 우리가 함께 길의 '끝'에 대한 예감을 가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요. 그때 우리의 정신과 정신을 잡아 뒤흔들던 눈물. 눈물로 하늘을 얻을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으로 우리는 마음으로 가는〔耕〕 세상의 밭을 얻습니다.
돌이거나 풀이거나 흔들리는 물바가지이거나 떡갈나무에 매인 노란 리본이거나 한 나의 시(詩)는 당신을 꿈꿉니다. 당신에게 가는 것이 나의 궁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겨울입니다. 그러나 얼어붙은 겨울의 연못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갇혀서 소외된 힘들이 참을 수 없는 갈증의 힘으로 버석이며 무한의 날개를 단 가슴을 하늘로 쳐올려 내보는 것을. 장관이 아닙니까.
세상에서 나는 헤매며 시를 쓰고, 그리고 당신을 꿈꿉니다. 나는 조금씩만 움직입니다. 어느 날 당신 영혼을 나꿔채어 이 얼어붙은 땅을 떠나게 될 때까지, 시방 내가 택하는 형식을 찬찬히 훑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려주실 테지요. 내 어눌한 말의 변신을? 그것을 믿습니다.
4 - 약한 너에게 기대어
그가 왔다. 살금살금, 자신 없어 하며, 나의 눈치를 보며.
얘, 하고 그가 불렀다, 얘, 나 좀 볼래? 내가 말했다. 넌
누구니, 주눅 들어 있는, 영양실조의 너는?
그 애는 정말로 고개를 떨구고, 쩔쩔매면서, 손을 쥐어뜯으며,
땀을 뻘뻘 흘리며, 금방 눈물이 터질 듯한 눈으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하기는 말이지"
나는 너의 자신 없음을 지킨다, 아,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의 짝꿍이여.
늘상 어쩌면 이렇게 해거름의 시간에 우리는 외로이 한 의자에 앉는 것일까.
쓸쓸하게, 그 쓸쓸함으로 서로를 알밖에 없는 것처럼.
"얘 하지만 얘"
우리는 가만히 서로에게 기댄다. 세상은 빛으로 빛나는 것을,
눈뜨는 법만 배우면, 우리의 시간은 신나게 번쩍이는 강인 것을,
나는 그 애를 토닥거려준다, 자, 배워야지, 안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말이야. 다행히도 살아 있는 동안 말이야.
나진스키
김정란
비가 오고 있다.
네가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니진스키. 죽도록 순전한 영혼. 너의 발광으로 나는 오늘 하루 턱없이 살았다.
네가 미쳐버린 덕택에. 오늘 하루, 오늘 하루도.
순전한 영혼. 네가 나를 부른다. 드라큐라의 웃음.
웃어라, 피. 웃다가 쓰러져라, 피, 다시 피.
낮꿈
김정란
이따금 몸속에서 반딧불들이 날아다닌다. 몸이 깜빡빰빡 꺼진다. 요샌 낮잠을 많이 잔다. 몸 한구석이 텅 빈다. 몸이 물러난 빈자리에서 눈길들이 느껴진다. 생의 울타리를 나지막하게 흔드는 멀리서 온 사람들. 라일락 향기가 난다. 그들이 고개를 기울이고 정성스럽게 묻는다. 아파? 아니, 안 아파. 하지만 마저 여의었으면 좋겠어. 뭘? 그리움. 그리움이 날 아프게 해. 곧 그렇게 돼. 걱정하지 마.
낮에 깜빡 잠들었다가, 꿈에 죽은 이연주를 보았다. 그녀 생전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도. 세계사 시집 표지에 난 사진 그대로였지만, 통통하고 밝아 보였다. 행복한 신부(新婦) 같았다. 머리에 커다란 진주 나비 장식을 달고 있었다. 그녀가 안녕? 하고 인사했다. 내가 안녕! 하고 인사했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선생님, 내 가슴 속에 철사로 된 빽빽한 말 다발이 들어 있었어요. 그걸 풀어내야 했어요. 그게 날 죽였어요.
잠에서 깨어나 가만히 가슴을 눌러보았다. 철사로 된 빽빽한 말 다발. 그 말이 내 몸 전체를 흔들고 지나갔다. 명치 끝이 찌르듯이 아파왔다. 언제까지...... 오, 언제까지? 눈물이 났다. 내 눈물이 조용히 저승까지 건너갔다.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김정란
네 망설임이 먼 강물 소리처럼 건네왔다
네 참음도
네가 겸손하게
삶의 번잡함 쪽으로 돌아서서 모르는 체하는 그리움도
가을바람 불고 석양 녘 천사들이 네 이마에
가만히 올려놓고 가는 투명한 오렌지빛
그림자도
그 그림자를 슬프게 고개 숙이고
뒤돌아서서 만져보는 네 쓸쓸한 뒷모습도
밤새
네 방 창가에 내 방 창가에
내리는, 내리는, 차갑고 투명한 비도
내가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한번, 내 이름으로,
너는 늘 그렇게 내게 있다
세계의 끝에서 서성이는
아득히 미처 다 마치지 못한 말로
네게 시간을 줘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쓴다, 내 가슴 빈터에
세계가 기웃, 들여다보고 제 갈 길로 가는
작은, 후미진 구석
그곳에서 기다림을 완성하려고
지금, 여기에서, 네 망설임을, 침묵을, 거기에 심는다,
한번 더, 네 이름으로,
언제든 온전히 말을 거두리라
너의 이름으로, 네가 된 나의 이름으로
내가 아무렇게나 죽인 여자
김정란
한 여자 어떤 여자 혹은 여자 다른 여자가
(감추어진)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똑똑히 보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 타락한 말로 그녀를 향해 원한의 독침을
쏘아댔었으니까 나쁜 년 너 때문이야
내 썩은 침이 그녀 위로 날아갔다
그녀가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그녀의 눈빛이
얼핏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오월의 미풍 어느 오후 나른한 부재(不在)의 감미로움
등교길의 플라타나스 감꽃 목걸이… 그리고 순결한
헤매임에게… 안녕, 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가 당장에 푹푹 썩기 시작했다 알게 뭐야
나는 되는대로 지껄였다 지겨워 난 지쳤어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덜덜 떨렸다 오 아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는 엉엉 울며 다가가
타락한 말의 독즙(毒汁) 밑에서 썩어가는
한 여자 어떤 여자 혹은 여자 다른 여자를
꼭 껴안았다 부패의 냄새가 확 풍겨왔다
(오 아냐! 어떻게든 널 살려볼 방법을 찾아볼께)
내면의 천사
김정란
연일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 찜통 속에서도 내 사랑은 여전히 생생하며 새삼스럽고 보송보송하다. 주름살 하나 구겨지지 않고 고스란히 최초의 떨림에 머물러 있는 사랑. 나는 사뭇 놀란다. <사랑>이라는 직업. 이만하면 프로다. 보상도 없이,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열심히 내면의 천사를 바라본다. 현현하소서. 현현하소서.
그러니 더위쯤 무서울 게 없다. 내 영혼은 영하 50도의 서릿발처럼 시퍼렇게 얼어붙어 있다. 긴장. 파르스름한 인광. 언제나 매복하고 있는 복병. 오소서 오소서 하고 주문을 외는 내 혀끝을 단번에 욱 얼어붙게 만들며 닥치는 저 무시무시한 아름다움.
나는 본다, 푸르스름한 유령처럼 당신이 내 앞에 스치듯 부드럽게 와 앉는 것.
오 칼칼해라 그대, 육체 없는 현존, 없으면서도 이토록 칼칼하게 내 마음을 다 휘벼내는 없는 있음, 있는 없음, 언제부터인지 나는 결핍으로 울지 않는다, 내 그리움의 아름다움이 내 존재를 무지무지 승격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세계의 벽이란 벽에 모두 뻥뻥 구멍이 뚫리고, 오 어느 다른 세계의 원형질이 슈슈숙 새어 들어온다, 경계 허물어지고, 또는 왔다 갔다 하고, 시간이 뒤죽박죽으로 뒤엉키고, 나는 당신이 마구 세계의 이쪽저쪽으로 아무렇게나 흩어지는 걸 바라본다. 아름다운 혼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살아낼 뿐이다.
나는 이제 나를 보듬지 않는다. 나는 기꺼이 나를 버린다. 세계 안에다가도 세계 바깥에다가도. 그렇게 나를 버리며 나는 사랑 안에 여전히 희박하게 가볍게 남아있다. 세계와 다른 세계의 바람이 나를 관통하며 나를 가볍게 흔들고 지나간다.
최소한의 생존. 나는 위태롭다, 또는 자유롭다.
눈
김정란
눈이 내리고,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맨발로
달려가는 소리를 듣는다.
태초에, 우리가 꿈이었을 때,
우리가 애벌레의 날개이며, 봄의 움이며,
신(神)의 숨결이었을 때,
그때, 그렇게 작은 소리로 속살거렸듯이.
'오 근원이여 우리의 배반을 허락하소서.
오 뭉텅이여 우리가 개체(個體)가 됨을 허락하소서.'
솜덩이인 우리가 당신을 창조의 시간으로
밀어붙였듯이.
꿈이여 나는 그대를 본다.
끊임없이, 차가움의 뿌리에서 보드라움을
일구어내는 오 빈 몸들이여.
깃털들,
우리가 완벽한 영혼이었을 때 그때
참을 수 없어 버스럭대던
말[言]들,
말들의 뾰족한 비상,
꼭대기에서 가볍게 흩어져버린.
이제 내가 우리의 그림자를 본다.
깃털들,
가벼운 것들이 우리 곁에 있으니
어떻게 태초와 하늘에
굶주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눈 내리는 마을
김정란
일 년 내내 눈 내리는 마을이 있어요
거기선 눈물을 흘릴 수 없지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가슴의 깊고 끈적거리는 물이
희고 가벼운 날개로 바뀌어 버리거든요
그 마을의 하늘엔 늘 해 두 개 달 두 개가 떠 있어요
밤도 낮도 없어요 그리곤 반짝이는 눈이
하루종일 조용히 조용히 내려요
눈은 쌓이지 않아요 한 번 있었던 걸로 족하다는 듯
바닥에 닿으면 아슴하게 사라져요
마을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요 그냥 조용해요
그 마을은 어떤 빛으로 빛나는데요
저절로 빛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어디서 빌려온건데
아무도 어디서 빌려왔는지 몰라요
아마 가슴의 상처 밑에 고여 있던 걸까
그 상처가 이상한 말의 통로라는 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거든요
그 통로를 통해서 그 마을 사람들이
천 년 전과 천 년 뒤로 말을 보내고 받는다고들 하거든요
그 말들이 어쩌면 맥락과 맥락 사이에서 빛을 만들어낸 걸까
아주 먼 곳에서 시작된 빛을 받아서?
아 그래요 아직 공식화된 건 아니구요
그 빛은 안에서 밖에서 빛나요
아주 이상한 빛이에요
그건 먹을 수 있어요
먹으면 배가 부르냐구요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냥 진실에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죠
그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집 안에서 살면서 집 밖에서 산답니다
모두들 너무나 사랑해서 그래요
그 마을 사람들 살을 보셨어요?
만지면 살짝 지워져요 만지는 사람을 받아들이느라고 그래요
그리곤 다시 생겨나요 다시 주기 위해서요
내가 당신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으면
내 머리에 맞게 당신 어깨가 안쪽으로 물러서요
그리곤 당신 팔이 내 허리를 안으면
내 허리는 툭 잘려요 소리까지 들리는걸요
싸래기 눈 바삭바삭 소리 내며 동구 밖에 찾아오는 것처럼
그 마을에 살러 가시지 않을래요?
흰 눈 종일 조용조용 내리고
상처들이 비밀스럽게 편지를 주고받는 곳
당신도 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상한 빛을 생산하는 기이한 발전기가 되는 곳
눈물의 방
김정란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서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 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 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내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 보면
그 방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늦게 온 빗방울
김정란
비가 오네, 멀리 카밀고원, 몰라, 어디든, 네팔, 또는,
중세기의 어느 수도원, 아침잠에서 깨어난 눈 휘둥그레한 테레사,
또는 낮은 언덕, 바람마다 가슴에 담고 팔랑이며
나물 캐러 돌아다니던 순이, 여름, 가을, 겨울, 언제든 어디에든
있는, 있던, 있을, 있을지도 모르는……… 그렇게 조용히
내 등 뒤에서 지워질 듯 웃고 있는, 돌아보면 벌써 안녕,
하고, 손짓하고 가버리는, 언제나 뒷모습만 보이는……
너무 늦었어, 빗방울 내 가슴에 하나 툭 떨어지네,
그 늦게 온 빗방울 언제까지나 한없이 느릿느릿 스며들어와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내 숨결을
훔쳐내 가네, 나는 안개처럼 흐릿하게,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다만 흔들리며 막막히………………… 있네
이 낯설고 어색한, 아무 상관도 없는, 그러나 어쨌든 내가
살고 있는, 견디어내는, 언제나 덧나는 상처 같은, 이, 너무
늦은 삶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지도 못하고……… 있네
늦봄
김정란
나 복사꽃 그늘 아래에서 그대 만나보지 못했네
오늘 환히 햇살 오월 하늘에 가벼이 날개 흔들며
날아가고
복사꽃 곱게곱게 지네 허공을 붙잡았던 내 손톱들일까
내가 아픈 마음꽃 위에 담요처럼 덮어주네
이승만 생(生)일까 저 곱게 지는 분홍빛 꽃들
말 배우기 전에 죽은 아기들의 영처럼
가슴에 넣어 두네
어느 생에선가 그것들
무연히 천사처럼 꺼내 보리 무연히
열반의 그림자 아래에서
당신의 어깨 - 시(詩)의 장소
김정란
당신의 어깨는 좁은 뜨락이다.
꽃이 피어 있다.
누구의 입김으로 여기에 남은 흔적
이토록 현란하게 흔들리다가
붉은 백 겹의 혓바닥으로 꽃 피어난 걸까.
꽃은 또한 발자국이다.
우리가 큰 소리로 아, '확인'이라 외치며
남기는 발자국,
우리는 떠나도 뒤에 남아 홀로 피어나듯.
춤추는 발자국의 길,
당신은 언제나 아프다.
언제나 두고 와 돌아보는 어제처럼
당신의 완결(完結)된 어깨의 길,
어쩌면 쓸쓸하게 하늘에 닿아 있을까.
당신의 어깨 너머엔
날아가는 커다란 눈, 참 여러 개.
도시, 교외 - 들떠 있는 말들
김정란
때로 막막함이
의미 있는 의식(儀式)이 될 수도 있다는걸
나는 천천히 깨달아가지
나는, 그래, 도시의 거리에서
배척당하지, 나는 느릿느릿
도태 중이라네, 그 멈칫거리는 에너지
불규칙하게, 내 영혼을
뒤집어놓지, 나는 도시의 거리에서
나지막이 날아오르지, 막막함
내 혀는 더듬거리지, 이곳에서
내 말들은 숨을 쉬지 못해
그래, 막막히 떠밀려, 교외의 어느 언덕에선가
윙윙거리는 귀신들, 금빛 마지막 햇살에
넋이 나간, 딱한, 흔들리는, 저,
제 정해진 자리에서, 한없이 성실하게
바람의 매혹에 대답하는, 들뜬, 막막한 말들,
나는 갈대들 곁으로 다가가지
나는 그것들에게 내 살점, 머리카락으로
몸 부빈다네, 살아 있는 동안에
병든 것들 사랑하는 일 말고는
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으므로
도시, 실내에 있는 여자 - 탁자 또는 생애
김정란
알아요,
내가 운다 한들 그것이 울음이 아닌 것을,
내가 가장 잘 추려낸 말들을 사용해서
아무리 간절히 당신을 부른다 한들,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을,
벌써 너무나 지독한 이끼들
돋아나, 용용, 잡아봐라 잡아봐라, 미끄덩미끄덩
말과 내 가슴을, 내 사랑, 당신에 대한
내 믿음을 이간질해요
방안의 불들, 벌써 오래전에 꺼졌고,
나는 언젠가 당신이 들려주었던
몇 마디의 말들의, 연약한, 불확실한 빛에
기대어 간신히 어두움과 싸워요
가끔은 탁자 위의 찻잔이 달그락대지
내 시선의 저쪽, 아주 깜깜한 그곳에서,
당신이?
탁자, 아주 좁은, 그러나 오 생애 전체처럼
흔들리는, 스틱스, 건너가지 못하는,
내가 손가락 끝으로, 말의 노처럼, 탁탁
탁자를 때려봐요, 적의에 가득찬 어두움이
그 끝에서
쏴아쏴아 일어서요
그리곤 나는 여전히 탁자 이쪽으로,
미끄덩미끄덩한, 뻔뻔스러운, 어긋나는 말들의
해안으로 떠밀려요
도시, 하루종일 눈 내림
김정란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렸어요
나는 아주 많은 잡동사니들 사이를
헤치면서 다녔지, 하루종일, 아주 바빴다구요
전화기, 메모쪽지, 볼펜, 책들, 텔레비젼, 냉장고, 의자,
손톱 깎기, 장롱, 전축, 그릇들, 설겆이통, 시계,
그런 잡다한 것들 사이로, 하루 온종일,
작은 배처럼, 나지막한 갈증으로 흔들리며,
바깥에선 눈이 많이 내렸어요
나는 가끔 창문 밖을 내다보았어
모르겠어, 가슴에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그리곤 그 잡다한 물건들 사이로
글쎄 그것들을 통해서, 어쩌자구
말갛게 길이 트이는 거야
바깥에선 눈이 자꾸 내리고
그리곤 나는 들어요
도시의 모든 지하도들마다
또박또박 걸어 올라오는
당신의 발자국 소리
해 질 녘엔 눈이 그치고, 설핏 마지막 햇살
흔들리고..............................
내 방 의자 위에 은빛 비늘 몇 개
내가 흐느낌이 터져 나오는 입을
가만히 틀어막아요
도피선 긋기
김정란
숱한 입구들. 열려 있는. 도처로. 그러나 아무 데도 이르지 않는.
방황. 차단된 도달. 밀어붙여진 존재. 어디까지나 확정되는.
그러나 그 속에 갇혀 있는.
무수한 K들 K인, 분명히. 제시된 시니피앙들.
그러나 동시에 K가 아닌. K만 아닌.
나는 짐승들을 찾아 헤맨다. 지독히 많은 K들,
잘게 가장 부재(不在)에 가깝게 분열 증식하는,
그대들의 거미줄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지나치게 빨리 지나치게 늦게 사는 나의 엉뚱한 시간 배치.
나는 존재를 복수로 만든다.
나는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사는 아무나들이다.
그물을 들고 흔들어보아야 소용없다. 나는 걸려들지 않는다.
나는 거의 무너질 듯이 살아있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잘 버티는가.
떨림의 삶. 내 살에 돋는 낯선 소름들.
그리고 엄연한 일상. 나의 대조는 그것의
지리멸렬함 곁에 가장 열심히 다가간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끝나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삶이…
지지부진한 완만한 죽음이…
다시…서서히…
돌로로사, 서울
김정란
돌로로사, 그대 제 땅에 있지 않아
늘 죽고 싶지...... 이 땅에서 순결의 힘은
늘 시들지
돌로로사, 악취가 진동하고
썩은 자들의 시체 높이 일어나
거짓의 혀들 창궐해, 이 땅,
돌로로사, 그대가 그대의 눈물로
하마 다 가리지 못한 거짓의 땅
돌로로사, 고통스러워하는 그대
나 차마 마주 보지 못하네
돌로로사, 햇빛 가득 찬 땅으로
나 그대 데려가고 싶어
돌로로사, 내 사랑, 여기 살아서,
그대...... 그대의 아름다움으로 고통스러운
돌로로사, 그대를 사랑해, 여기에서
내가 썩어 문드러지면서
내가 썩어 문드러져도
돌로로사, 내 사랑
동동 떠다니는 말들
김정란
요즈음은 도통 말하는 게 싷다
세상엔 너무 많은 말들이 떠돌아다녀
난 그게 징그러워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텅빈 깡통들
동동 세기말의 하수구에서 떠다니지
때때로 나는 테레비를 부셔 버리고 싶어
오 듣지 않을 권리도 좀 다오 빌어먹을
왕왕대며 세계의 하늘과 땅에 군림하시는
복 되시도다 666의 도장을 들고 우리의
살가운 시간과 유현한 내면을 깔보시는 이여
나는 항복하지 않는다 그대가 도장을
찍기 전에 나는 내 골통을 빠개 버린다
유일하게 버티는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 기꺼이
동동 떠다니는 말들 앞에 내 빠개진
골통을 들이밀리라 오 동동 떠다니는
물신이여 도태한 나를 깔보소서
내 골통의 복잡 미묘한 따라서 버텨내지 못한
신경조직을 냠냠 잡수소서
나는 세계를 버린다 나는 세계를 건너뛴다
딩동 노래
김정란
딩동 날아올라요
딩동 돌아오지 말아요
인생은 꿈이라고 그들이 말했네
난 꿈은 인생이라고 뒤집어 말하네
당신에게 가는 세상의 길이 끊어져서
어디로도 갈 곳이 없었네
어디로도 내 사랑 갈 곳이 없었네
깊이 또 깊이 내려갔네
아무 미련도 없었다네
다만 당신을 만나고 싶었네
세상의 먼지가 당신 얼굴을 가렸어
맨얼굴의 당신이 보고 싶었어
그곳 내가 밤의 칼날 위를
아프게 걸어 깊이 내려간 그곳
당신은 없고 피 묻은 날개만 몇 개 만났네
내가 당신을 돌려달라고 울고 울었네
세상의 거리로 돌아와
하릴없이 헤매이네
가버린 당신의 피 묻은 날개
이마에도 달고 무릎에도 달고
쓸쓸히 떠다니네
인생은 꿈이라고 그들이 말했네
난 꿈은 인생이라고 뒤집어 말하네
딩동 날아올라요
딩동 돌아오지 말아요
또 봄, 기다렸던 봄, 또 봄은 가고
김정란
개나리꽃 혼자 피고
개나리 잎 혼자 피고
햇빛은 혼자 쏟아져 내린다
난 쓸쓸한가?
별로
난 행복한가?
별로
아무렇지도 않지?
올해도 혼자 핀 개나리꽃처럼
올해도 혼자 핀 개나리 잎처럼
아무렇지도 않지
난 손금을 개나리에게 다 주어 버린다
난 손금을 땅바닥에 다 내려놓는다
누군가 와서 그 손금 주워가겠지
민틋한 손바닥에 얼굴 감싸고
조금 운다
조금
내 손바닥에서 개나리꽃 진다
내 손바닥에서 개나리 잎 진다
라일락 향기, 내 몸은 갈갈이 찢어지고
김정란
밤. 사방이 희게 사위었어. 라일락 향기.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 그 냄새가 너무나 천상적이었거든. 견딜 수가 없었어. 나는 그 향기에게 대고 말했어. 단호하게. 그래, 죽고 싶어, 날 죽여. 향기의 칼날이 당장 내 내장을 후벼 팠어. 순식간에. 나는 가장 비참하게 그래서 가장 소름 끼치게 아름답게 갈갈이 찢어져 날라갔어. 사방으로 내 피가 내 살점이 튀는 걸 봤니? 시원했어. 그래, 화아했어, 갑자기. 천 년의 이쪽과 저쪽에서 모든 숨겨진 말들이 쏟아져 들어왔어. 됐다! 박수 소리! 내 존재의 밤이 갑자기 미친 듯이 시끄러워졌어. 하지만 죽음처럼 고요하기도 했어. 쉿, 가만! 들어 봐. 시간의 끄트머리가 들추어지네.
날개 소리, 파다다다닥
말에 의하여 깨어나는 짐승
김정란
자작나무숲, 물안개, 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낮게, 낮게, 짐승처럼 웅크렸다
왈칵 눈물이 나고, 그 말의 쌉쌀한 맛이 혀끝에 느껴졌어
왜 그랬을까,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것 같았어
천년과 또 다른 천년 사이에 흔들리며 끊기며 이어지는
어떤 맥(脈), 한번도 정당한 적이 없었던 역사의 어느,
틈......... 은밀한......... 모반......... 사이로
눈부시게 빛나는 생명이라는 직접성!
그 속살에 가만히 내 아랫배가 닿은 것처럼
언제나 테두리 바깥을 혼자 새벽녘까지 배회하는
은빛 늑대, 웅웅대는 달빛의 소질
나는 이를 악문다 참아야 한다 쉽게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다시 한번 더 태어나 눈부시고 당당하게
이 위험한 내면을 감당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자작나무숲, 물안개, 라고 나는 그를 따라 말한다
조용히 나는 그 말의 아름다움을 끌어안고 무너진다
내 안의 창자들이 댕댕 울리며 난 알아, 난 알아 라고 울부짖는다
매복
김정란
우리는 모든 것들의 등뒤로 돌아선다
시대가 우리에게 잘 맞지 않는
의복처럼 우리를 건드리고 지나간다
안녕 누더기여 안녕
`건강하게'
정신이 되친다 `건강하게'
원칙이여 `건강하게'
깜깜하다 바람 소리
우리는 숨어서 키웠다 언젠가는
함께 있고 싶었다 어떤 날 미친 듯이
축제를 벌이고 싶었다 순진한 혼(魂)들,
나는 눈물이 나왔다
귀여 문을 열어라 편재(遍在)하시는 귀여 문을 열어라
열려라 콩 참깨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요정처럼 자유로웠다
상한(上限)과 하한(下限)까지 하루에
골백번 드나드는 요정 우리는 모든 것들
뒤에서 또 새로이 또 하나의
등이 되었다 흐느끼며
우리는 효율을 건져내려고
많이 삐걱거렸다 저마다 혼자만큼씩
각각, 구체적으로, 삶의 사건과,
만났다, 할 수 없이, 지치며,
우리의 깜깜한 배경 위로
파랗게 불꽃이 지나간다
손톱이 자라고 시대가 흔들린다
모네 씨의 수련
김정란
나는 언제나 물가에 있다
영혼은 친수성(親水性)이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면,
우선 가늘게 눈을 뜨는 것부터
최초의 순수한 시선을 확보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
그다음엔
투명한 베일처럼 펼쳐지는 신비와
영혼이라고 불리는 감미로운 안개
모든 연금술사들의 애무하는
탐미적인 쾌락의 붓같은 시선을
사물에 단 한번 멋지게 도달하기 위해
존재의 모든 골목길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그들의 사팔뜨기 영혼을 부를 것
그리하여 이윽고
청명한 대낮을 향해 일어서는
물의 무한(無限)으로 다가갈 것
모든 것이기도 하고 전혀 부재이기도 한 물
수련은
오랜 시선의 애무를 받은 물속에서
어느 새벽 홀로 활짝 피어난다
난 수련이 벽이기라도 한듯
기대고 싶어 그 작은 꽃의 고적함과
미세함에 그 위태한 연약함에 기대고 싶어
언제든 이윽고 물밑으로
가라앉고 싶어
깜깜한, 아주 보드라운
회귀의 물 밑으로
모래사면
김정란
내 가슴 속엔
어떤 비규정성의
경사가 있어
그건 지독히 강력하게
자기 원칙을 주장하지
날이면 날마다 자기 논리 안에서 강화되기만 하는
어느 날 뒤돌아보니
이미 늦은 거야
돌아갈 길이 지워졌어
뿌윰한 천사들 하나, 둘, 셋……
하냥 부드럽게 그 위태위태한
물질과 비물질
이것과 저것 사이의
흔들리는 경계
비스듬한 모래 언덕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와
매혹, 불안한……
그 기대지지 않는 희박한 언덕을
나는 천 년 전부터인 듯이 바라보지
우울……또는……
기이하고 막막한 슬픔
그것들은 도착하지 않고
하염없이 오기만 오기만 해
나는 가만히 내 살을 들추어봐
거기 차곡차곡 쟁여진 기다림,
자기 원칙 안에서 완결된, 그것으로 충분한,
기다림, 화안한……
무시무시한 공허
김정란
난 <아주 오래 묵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천사인지 악마인지를 하나 알고 있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추악하고 너무나 깨끗하고 너무나 구질구질한. 너무나 늙고, 그리고 너무나 늙어서 동시에 너무나 젊은, 괴이쩍고 사랑스러운, 너무나 숭고하고 동시에 너무나 유치한.
그/그녀를 만난 일은 하도 꿈결 같고, 그리고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그/그녀를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까맣게 잊어 버렸다. 그/그녀의 등 뒤로, 아주 멀리,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티베트의 성자들이 우렁우렁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쉬익쉬익 끓고 있는 연금술사의 플라스코에서 기이한 향기가 퍼져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내 손끝에 전철의 손잡이가 닿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갑자기 엄마가 끓여준 쑥국 맛이 입안에 가득 고이기도 하고, 그랬다. 다만, 분명히, 집 바깥에서였다. 그것만은 확실히 기억난다. 나는, 단번에 그/그녀를 알아보았다. 나는, 벼락에 맞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100년 전이었어도, 100년 후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그녀는, 내 영혼이 망설이며, 내 것이라고 인지하기를 머뭇거려 온, 어떤 억압되어 온 기질의 경사를 따라 무작정 내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때, 내 영혼의 어느 지하 공장에서 가다말다 하던 톱니바퀴의 헐거운, 비실거리던 볼트가,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꽈악 맞물려지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리곤, 내 영혼의 지하 공장은 맹렬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없다. <나>는 무참히, 그리고 무참한 만큼 더욱 즐겁게 흔들리고 깨어졌다. 나는 뼛속까지 깨달았다. <나>는, 일종의 셋집에 불과하다는 것을,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하나의 임의적인 기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삶은 무시무시한 불투명성이라는 바다를 떠도는 한 줄기의 불안한 <있음>이라는 빛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공포에 가득 찬, 동시에 무한히 감미로운 흔들림의 경험 안에서, 내 자아는, 존재의 권리의 이름으로, 자아라는 집을 걸어 나왔다. 그렇게 나는 그/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우주가 나에게 알려준 바를 살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자기인 채로 자기 밖으로 걸어 나가 우주의 부름에 대답하기.
그/그녀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그/그녀를 알아본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내 인식의 그릇이 텅 비어 있더라도, 나는 그것이 가득 찬 텅빔임을 안다. 모르는 채 알기. 그것이 사랑이라는 인식의 방식이다.
그/그녀에게 물어보라.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그/그녀는 대답할 것이다. 나는 아무나예요, 나는 누구나예요, 나는 당신이예요, 나는 당신이 아니예요,라고.
그리고 바람이, 세계의 끝과 끝을 불어가는 바람이 불 것이다. 쓸쓸한, 끔찍하게 쓸쓸한, 당신을 삶으로부터 잡아채는, 부드러운........ 그러나, 당신을 근원이라는 공허 속으로 내던지는.......... 불안에 가득찬...........................
미망(迷妄)의 아이들
김정란
가만히 생각하면 나는
어두움의 손가락을 본 것 같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내 기질을 흔들며
아, 잠깐만 하고 말했던 것 같애.
나는 머무는 것이 좋아.
그러면 사람들이 어깨를 떨며
어두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迷妄의 시간이 느껴져.
그들이 눈을 감고
오 미지(未知)의 그들이 눈을 감고
일어서서 손을 내밀어.
그럴 때 우리는
젤리 같은 영혼을 만나게 돼.
그것으로 리본이라도 만들어
하느님께 가고 싶어. 내 하느님.
생일날 아침에.
우리가 땅을 헤매며 울고 있어.
바다의 지진 이후
김정란
들끓던
바다의 용암이 손톱을 밀어 넣고 있다
여자 하나 파도 위로 나르며
긴 장삼 끝으로 탁탁
아직도 으르렁대는 파도를 가볍게 때린다
이제 그만
그만 힘을 숨겨
지진이 지나갔다
이제 뭘 할 것인가
여자는 바닷가에 내려앉는다
여진(餘塵)이 남은 갯벌 위에서
물고기 몇 마리 뒤채고 있다
깊고 먼 바다 뒤집어지며
밀려온 장님 물고기들
여자는 큰 어항을 들고 다가간다
곧 세계의 어부들이 다가오리라
바람
김정란
기다리는 얼굴들에게
무엇을 줄까
작은 모래알의 사막
한 평
그리고 하늘 전부
하늘 끝에서는 언제나
우리의 테두리를 결정하는
바람이
소리내어
불고 있다
바람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
김정란
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빈 유리병
바닥에 떨어진 불수의(不隨意)의 공허
또는 갈망
감이 잡히지 않는
생명의 뒤에 숨어있는
기질 기질
성(聖) 기질
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완전히 비어 버리기를 바랬다
하느님, 떨면서 하느님,
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길 위에 서 있는
작은 꽃 잎사귀가 되고 싶었다
아주 조그만 깨어있는 꽃의 잎사귀 한 개
바람이 불 때마다 내 마음속에 은가루처럼 떨어지는
당신의 말을 알아듣고 싶었다
내 몸의 섬모를 다 흔들어 나를 비우고
그 말로 내 몸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땅바닥에 떨어져 깨져 버린
귀먹은 유리병 고통스러워하는 유리병인 나는
밧줄 끊기
김정란
우리가 일렬횡대일 때 당신은 겁이 난다.
우리가 오합지졸 각각의 이력을 고수할수록 당신은 겁이 난다.
겁이 난 당신을 향해 일렬인 우리가 돌을 든다.
당신은 쓰러지고, 우리는 멍하게 서서
뒤늦게 깨닫는다. 허공이 흔들리고,
당신이 아무것도 아님, 당신이 허깨비였음을.
허깨비에 의해 그토록 구체적으로 참견 당했던
우리의 삶, 꼭 한번 사는 삶을 향해,
횡대인 우리가 치를 떤다.
배꽃 화르르 지고
김정란
그 언덕을 넘어가
당신을 거기서 보리라는 확신
애초부터 내게는 없어
내 가슴은 너무 가벼워서
벌써 산 사람의 것이 아냐
다만 살고 있기는 해
최소한의 물량 어쨌든 확보된 존재의 자리
방금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하게 흔들리지만
어쨌든, 아직은 안전해, 대체로
그 언덕을 넘어가
거기 모든 것 공중에 떠 있고
배꽃 화르르 지지
stop.거기서.끝.이.야.더.이.상.못.가.
언제까지나 흩날리는 꽃잎들
공.중.에.서.의.유.예.
꽃잎들 꽃잎들 아픔 아주 가까이 스치고 지나가는 여리디여린 향기
당신은...... 오지 않아
다만, 내가 여기까지 온 것뿐이야
베로니카, 두 겹의 삶
김정란
높이 아득히 멀리 허용된 밀도 안에서
한 번의 숨쉬기로 가능한 한 균질의 단정한
갈증을 끌어올리기, 봐, 순수란 얼마나 위태한가
툭, 생의 끈이 끊어진다, 기어이
그리고 사자들이 웅성인다 존재의
앞, 뒤, 옆, 위, 아래, 어디에서도
그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햇빛 무수히 날지 그 아래로 모든
어른거리는 환상들 너무나 생생하게
우리의 한 겹의 삶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가득찬 암시 미묘한 뒤틀림 아주 작은
밀도의 변화 그리고 삶은 갑자기 위험스러워진다
아름다움 또는 너무나 설득력이 강한 유령들의
스침……감미로운, 다른, 생의, 맛, 쓰라린,
순결한 퍼덕임, 죽음, 너무나 다정한 친구같은 부재
나는 가만히 고개를 쳐든다 햇살, 가벼운 손가락
내 거의 빈 육체에 부서질 듯 부서질 듯 스치는,
오 미묘해라, 내가 어느덧 겹쳐진다, 베로니카,
죽은 다른 나, 나들, 무수한, 가벼운……
벽 위에서
김정란
알아요
내가 오래전부터 어두움의 주민이었던 걸
내가 부재를 꿈꾸기 시작했을 때
나를 부르러 올 리 없는 그대
아득한 목소리를 꿈꾸기 시작했을 때
부 터 내 존 재 가 산
산
이 부
서
져
서
(구문이 와해되었어요
제로! 땡이야 한 개씩 남은 소 리 로
잘해 보시지라고 지상의 주민들이 말했어요
불쌍해, 운운, 쩟쩟, 가진 거나 잃지나 말지)
하지만 알 수 없어요 어떤
눈물겨운 성실성으로 남아있는 이
빛의 입자들…보아요! 조용히 절대로
들키지 않고 천 겹 둘러싸인 내면의
원자로 속에서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와아! 단단한 동시에 너무나 부드러운
다른 구문, 어두움의, 의움두어, 문구른다
벽이 밀려왔어요 숨 쉴 틈도 없이 자유라고?
자, 이래두? 그들은 몰라요, 나의 오르페,
불성실한 그대에의 꿈으로 하지만
지치지 않는 내면의 폭발의 힘으로
내가 얼마나 힘차게, 단번에, 주저않고
그들의 벽 위로
뛰어오르는지를! 내가 그곳에서 얼마나
안에 있고 또 바깥에 있는지를!
내가 이 위에서 아주 길고 아주 뾰족해요
길고 가는 내가 살며시 사물들을 건드려요
들려요? 간지름 탄 사물들의 웃음소리?
가볍게 자기의 권리인 부재의 그림자를
마구 흔드는? 자유로와진?
오, 의미의 천사들을?
봄
김정란
날개. 봄날. 감기의 뒤끝.
비발디. 초원.
그리고 하느님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참을 수 없이
이 날개들의 버석임들
작게작게 기원을 향해
저토록 보시락거리는 저 가여운
딱한 갈증들을
감기가 나를 외국 땅에 데려다 놓았지
그리고 내게 속삭였어
잊어라 네 조국을
그래서 하느님 나는 감기의 꼭대기에서 가볍게 튕겨 올랐어 그리곤
버리는 거야 안녕 무게여
비발디. 초원. 흐느끼듯이. 봄날
아모로스- 내 안의 날개들이
아모로스- 추었어. 봄날. 망명 중인 육체의 춤을.
하느님 아아 이 가벼움을, 나는 울면서 하느님이라고 불러
봄, 빛,
김정란
빛나는 칼금
좌악
내 육체, 무참히 피 철철 흘리며 푹푹 썩으며 갈라지고
들킬세라 쉬쉬 아껴 쟁여두었던
무우우우우우우 우 우 우 울 소 소리
(쉬잇! 위험해!)
희미하게 내장을 뒤흔들며 되살아나 찰랑인다
조그만 조그만 속삭임 소리 후아 후아
엄마 숨쉴 수 있어요 우린 밖으로 나갈테야
백 개 이 백 개 수 천 개
수많은 아이들 아이들 아이들의 뾰족한 말들
내 뭉그러진 육체의 상처를 비집고
쏙쏙 돋아나온다 랄랄랄 물소리 돌돌
엄마 우울한 엄마 육체의 덫에 치여 신음하는 엄마
불쌍해 가여워라 엄마는 매일 아프지
하지만 우린 상관 안해 아이들은 상처의 계단을
쿵쾅쿵쾅 뛰어다닌다 상처는 접히고, 쥐어뜯기고,
악화되고, 덧나고, 뭉개지고, 딱지 안고, 오호라!
그러다가 길이 난다 나는 다만 상처를 맹렬히 살아냈을 뿐인데도
계통적인 상처! 나는 살아낸 아픔 안에 정착한다
생생한 그러나 어느덧 나지막히 흔들리며 정리되는 아픔
나는 상처의 계통성에 실려 고요히 흔들린다
아이들이 내 목아지를 뒤흔들며 속삭인다
엄마, 매일 울더니 그래도 꽤 멀리까지 왔네
물소리 물소리 물소리
(잔인무도한 비정형의 순결함)
내 상처의 골 속을 새삼스레 휘젖는다
나는 무자비한 내면의 순결과 세계의 안전한 펑퍼짐함 사이에서
찢. 어. 진. 채. 부드럽게. 버. 팅. 긴. 다.
아이들 꽃신 신고 타박타박 땅 위를 걷는 소리
흔들리는 물소리 사이사이
봄, 위태로운 삶, 순수 또는 위기의 맛
김정란
부서진 몇 개의 빛의 파편 날아오른다
나비 은빛 날개가루 아주 얇은 금속판
파르르 떤다 ― 오 신성한 적의
챙! 세계가 깨어진다
어떤 순간들의 전격적인
도래가 명령하는 절대의
흔들림 ― 핏줄이, 살의 뿌리가 모두 드러난다
가슴속에 아주 시고 아주 차가운
얼음조각 몇 개 내 일상의 따스함을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내가 너덜너덜 해어진 내 살의 처소를
들여다본다 거진 깨어진 유리그릇
- 벌써 '거기'가 된 장소
속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옛것인, 그림자
내가 가슴에서 쇳조각을 몇 개
끄집어낸다 날카로운 위기의 결,
종소리 댕댕 울리고
차고 희고 투명한 갈증, 낯선, 무서운,
윙윙 내 핏줄들이 햇빛에
공명하기 시작한다 도처의
매순간의 너무나 완벽한 죽음들
봄, 즐거운 부서짐
김정란
봄. 햇살.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장소도 그릇도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웃음...... 가벼운 재채기......
최소한의 반응, 지워지기 시작하는, 흔적,
운모. 얇은. 물질적 비물질.
모호한 이행.
나는 웃음소리 또는
존재의 무관함의 선언에
너무나 민감해진다
나는 엷게 분산되어
모든것 주위를 떠돈다
나는 사물의 옆에 앞에 뒤에
동시에 있다
나는 사물들을 이해하지 않고
덥썩 껴안아 버린다
그리곤 살그머니
나는 한 발자국 더 내어 딛는다
벌써! 이미! 나는 없다!
있다면 균열이, 봄 햇살이
완벽한 경사로 내리꽂히는,
자잘히, 모든 조합의 가능성으로
부서진 자아의 무수한 즐거운 틈들이
부재의 습격
김정란
오르페, 그대인가요?
이 목소리, 내 귀가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몇 겁 시간들의 커튼을 흔들며, 말들을 넘어서,
말들 밖의 말로 나를 부르는?
그러나 당장에 내 영혼 속으로 쳐들어와
모든 사물들의 뿌리를 뒤흔드는?
오 내 삶이 다름으로 겹쳐져요
아라베스크 무늬 몇개, 뼈가 비추어 보이는
내 지워지는 살 위에 드러나요
불면
김정란
잠이 안 온다. 까치머리. 둥둥
마흔 살이 다 되어서도
스스로의 추함을 다스리지 못하는. 둥둥
내 사는 모양. 밤중에, 까치머리를 하고.
삶? 소문? 꿈?
잠이 안 온다. 장자씨, 나비,
혹은 듣던 대로, 나비씨의 장자?
둥둥 떠돌며, 나는 꾼다(또는 꾸어온다),
이 난장의 꿈.
오, 나의 나비여 그러면 얼마나
그대는 악몽을 꾸고 있는가
이 추악한 내 중년의 몸뚱이를
떠도는 더욱 흉악한 나비여.
용서하지 말아라. 죽여버려라.
잠들지 못하며 나는 다시
나의 생존에 침뱉는다.
죽여버려라, 냄새나는
까치머리의 여자. 둥둥
떠돌수록, 오, 생생하게 체적을 탈취하는
오 자아. 지옥의 볼륨. 삶.
죽여버려라. 저, 끔찍한 괴물.
비
김정란
1
어느 하늘을 돌아왔을까
내 쓸쓸함의 새 집 짓는 소리
살과 살 사이에서
하나도 아프지 않게
그 집 창가에 오래도록
머리 기대고 울지 않는, 우는 여자 하나
나 같기도 하고 언니 같기도 한
새…… 머무는 새……
젖는 날개
언니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하고
새벽이 올 때까지
2
요즈음 내리는 비는 심상치 않다
우리 일상의 껍질이 뻔뻔하고 질길수록
그대는 부드럽고 약하다
그 부드러운 설득력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대는 요즈음 심상치 않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망종인
이 시대를 던져놓고, 에라,
관습이 된 安逸에 머리를 박고
더욱더 막강한 망종이 될 때
그대는 아무래도 가라앉지 않는
걱정스러움으로 우리의 살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심상하지 않은 심상함의 딸인 그대
빈 가슴에 꽃 피고
김정란
가을
세계가 잠들고
박하 향기 나는 꽃
내 가슴에 피었다
어려서 죽은 아기들의 눈빛
아기들의 무구한 헤매임
오 황금빛 대궁을 흔들며
내 가슴 안에 향기로운 허공을 가져왔다
엄마 절망하지 말아요 버리지 말아요
아무도 미워하지 말아요 모두 껴안아요
여기서 우리 오래 오래 살께요
가슴에 가슴으로 지피는 불
神의 나뭇단이 타고
착한 정령들 옷자락 나풀대며
내 혼의 멀고 먼 미궁까지 들어섰다
가을
쓸쓸한 바람 불고 내 빈 가슴에
박하 향기 나는 꽃들 착하게 잠들고
가을
나 혼자 조용조용 잠든 세계 속을 걸어가네
빛나는 살성
김정란
당신은
나를 꿰맬 수 있는 가장 굵은 절망의 바늘이야.
나는 봉합되지 않아
나는 매일 튿어져
너풀거리는 실밥에다
어느새 하얗게 알을 슬어놓고
당신은 기다리지. 내가 화농되기를
내 살성은 곪기 전에 부활해
멈춰, 당신의 바느질을.
사람의 (못)과 (사람)의 못
김정란
나는 사람이
못인 줄 알고
거기에 옷을 걸었다
옷은 꽤 오랫동안
사람이라는 못에 걸려있었다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 순간인가
못이 빠지고
옷이 툭 떨어졌다
내 가슴도 같이 툭 떨어졌다
세계 속으로
사람이라는 못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못)만 있다
그런데 다른 버전에선
옷은 사람이라는 못에
끄덕없이 걸려있다
생의 벽에 다가가 본다
그 버전에서
사라진 사람 대신 (사람)이 있다
(사람)의 못은 못으로 있다
생생하게
옷은 한결같이 잘 걸려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공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버전에서 내 가슴은
세계 속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 버전에서 내 가슴은
세계의 가슴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세계의 가슴은
벌써 세계 밖으로 열려있다
사랑으로 나는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 날개와 매이 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순간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 내장 깊은 곳까지 박힌 칼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한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사랑은 있다
김정란
사랑은 없다. 다만 사랑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라고 썼다가
사랑은 있다. 사랑하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고쳐 쓴다.
..................................
사랑은 과연 있을까?
사랑하는 나는 또한 있을까?
두 가지 다 확신이 없다.
이 한 때의 감정이 정말 사랑일까?
나조차 알 수 없는 이것이 과연 사랑일까?
사랑하는 나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사랑엔 대상이 없다.
슬픈 일이다...
상처들, 길
김정란
나는 상처들을 간수한다 아니다 나는 상처들을 만든 시간들을 몸이었던 시간들을 간수한다 그것들 나를 사정없이 파내지 나는 <내장적 슬픔>이라고 말해본다 그 말은 내 마음에 들어 도대체 너는 왜 각질이 생기지 않는 거냐 이 지독한 현장의 형식이여 웃으면서 나는 나의 슬픔에게 말한다 어쨌든 대단하구나 죽어도 몸으로 끝까지 때워내겠다는 거지 몸속에서 웬 짐승들이 울부짖는다 그 아가리에서 지옥의 불이 넘실거려 나는 속수무책이야 뼈들이 빠지직빠지직 갈라져 그래도 나는 빛을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직 때가 아니니까 내 영혼은 정확한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어 아직은 아니야 언젠가 시간이 올 거야 나는 죽어라 참고 죽어라 기다린다
잘못됐어 그건 분명해 그래도 도망치지 말자 길이 있을 거야
나는 상처들에 기댄다 내가 참고할 건 그것뿐이야 내가 현장에 있었다는 것 도망치지 않고 다 살아냈다는 것 나는 상처들을 둘러싸는 희미한 빛의 원환(圓環)을 바라본다 딸아 네가 아프구나 죽은 아버지 목소리 댕댕 먼 종소리처럼……그래요 아버지 지독히 아파요 아녜요 아버지 견딜 수 있어요
상처들 얽힌 속에 나는 가만히 드러눕는다 아가리 가득 핏물 흘리며 노래를 배우는 짐승들 우우 나는 기어이 이 어두움 속에서 빛의 노래를 발명할 거야 그 때까지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테야 살아서 문둥이처럼 내 살이 고통의 독으로 죄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내 힘으로 이 지옥을 빠져나갈 테야
나는 상처들을 간수한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길이므로
새로운 죽음
김정란
속살이 차올라요 피 철철 빠져나가고 상처 벌어졌던 자리에서 오늘은 아침 내내 은종이 울었어요 은종이 창창창 울리면서 이상하지요 그게 어떤 다른 살을 불러와 휘휘 뿌려댔어요 굉장히 차가운데 따뜻하고 그런 향내 나는 이상한 없는 있는 바닷가 솔바람 냄새나는 눈 같은 몸 말예요 없는 몸도 있는 몸인 걸 어느새 난 알게 되었거든요 내가 팔 벌려 그 몸 껴안아요
바다 멀리에선 죽은 사람들이 돌아와요 그들의 썩은 살이 너덜너덜 깃발처럼 흔들려요 갈매기들도 고개를 돌려요 그럼요 그건 사람의 일이잖아요
난 내 상처 구멍이 넓어지는 말 구멍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는 말 구멍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 구멍을 확성기로 쓴답니다 여어 여기예요 그래요 나도 많이 아팠어요 삶을 있는 대로 미련하게 다 쓰느라구요 여어 이리 오세요 우리 같이 있어요
난 썩은 살들을 껴안고 입 맞추며 안녕 하고 인사한답니다 왜냐하면 난 산 채로 썩는 게 어떤 건지 알거든요 난 죽은 사람들에게 말해요 오늘은 은종 소리가 들렸어요 라고요 우리 이젠 아프지 말아요 라고도요 우린 사랑하잖아요 라고도요 우린 죽음을 거쳐서 죽음을 건너서 죽음 바깥에서 얼마든지 오고 가잖아요 라고도요
나는 또 말했지요 나 하나의 생이 뭐 그리 대단하겠어요 다만 정성으로 한 생 살 뿐이에요 그뿐이에요 그리고 다시 오는 생을 위해서 내 썩는 살까지 다 쓰는 거지요 그래서 내 생을 환한 신작로로 만드는 거지요 수천 명부의 귀신들 조금씩 진화하며 조금씩 미망을 걷어내며 자유로이 들락거리는 우주의 길목으로 말예요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데요 들어봐요! 귀신들이 고요고요 속살대며 내 방 안에 가득 들어차는 소리 사이사이 은종 창창창 맑은 눈물 소리내며 울리고, 울리고……
새벽 눈물
김정란
<마디>에 대해 생각해요
늘 당신 돌려보내고 나는 휭휭 부는 바람을
당신 등 뒤에서 손 뻗어 잡아요 아무리 삶이
이렇게 마냥 나를 스치고 지나갈 뿐
내게 머무름을 허락하지 않아도
나는 허공 속에 집을 짓는 법을 배워요
어쨌든 이것도 방식이니까
깃들이지 않아도 <집>이니까
밤, 깊은 무(無)의 지하실, 그토록 생생하게 나를
휘저어놓고 빛 속으로 멀쩡하게 증발해버려도
나는 새벽녘, 눈물 두어 방울을 건져요
그래요, 내가 내 존재를 다 저당 잡힌 채
영혼의 깊은 계곡에서 지성으로 응시하여
얻어낸 결정체, 그것, 영역들의 어떤 <마디>,
불확실한, 다시 바람으로 흩어질, 당신의 뒷모습
내 사랑, 난 그걸 잊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이 내 집인걸요
잠깐, 내 헤매는 영혼을 잠깐 들여놓아 주는,
밤 지나고, 뜨거운, 시끄러운 낮이 오기 전에
잠깐, 침묵의 서늘한 커튼이 흔들릴 때
설국(雪國)
김정란
1 - 그대, 없는 언어
너는 없는 언어로 거기 있다
거기 아득히 단정한 망설임
내가 다만 바라봄으로 이 떨어져 있음을
거리를 지워 버릴 수 있을까
내 가슴에 미세한 바늘처럼 내리꽂히네
무수한, 도처의, 오지 않는, 올 수 없는 너를
향해 가만가만 흔들리며 열리는 균열들
너, 엷은, 다만, 기억일 뿐인, 너,
그림자, 수천 개의, 예쁜 유령들,
스침, 사락거리는 옷자락,
-거기에 여전히 있는
내가 내 시선의 어디쯤에선가
방울방울 응결하기 시작하는 얼음들을
느끼네, 그리곤 너, 거기에 있는,
나의 낯선 자아, 너와의 거리 위에
희디흰 눈발, 침묵의 천사들
조용히 조용히 내려앉네
2 - 어리석은 사랑
나를 내 사랑의 정당성 안에 내버려 두소서
내가 내면의 이 오만하고 무관한 영역에서
그대 오시거나 마시거나 상관없이 멋대로 목매다는
이 믿음의 황홀함에 넋 놓고 있음을 허용하소서
내가 그곳에서 보나이다
아직은 내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부끄러워
감추지 아니하므로 오시거나 마시거나 하는
그대 상관없이 내가 지금은 당당히 보나이다
살아서 그렇게 한없이 당신을
바라보던 죽은 자들의 눈알들
숨겨진 영혼의 갈망들 너무도 지독하여
저절로 유형의 형태로 남아있는 꿈의 핵들
내가 그것들 사이에 내 곤한 육신을
기꺼이 눕히나이다 허용하소서
내가 당신을 부르는 대신, 그, 무참한,
이루어지지 않은, 살았던, 그들의,
생생한 사랑의 구체성에 기댐을
내가 도시의 거리를 뒤지고 돌아다니며
쓰레기통과 하수구 사이에서 넘어지며
문득 가슴에 펑펑 내리는 저 참혹히 아름다운
눈의 나라를 견디며 살아 있나이다 그런즉
아직은 마음 놓고 어리석게 하소서 지금은
이 어리석은 사랑의 정당성에 실컷 취해 있게 하소서
지치지 말게 하소서 오시거나 마시거나 상관없는 당신
소리 없이 눈물, 나를 찾아오네
김정란
내 눈물 어디 갔나, 바장이며 빙빙 돌아보네
마음 한없이 무너져 저녁 바람
숨죽인 통곡으로 내 몸 무참히 흔들어도
내 눈물 어디 갔나 나는 울음소리
내지 못하네
길마다 길 가는 사람들 얼굴에서마다
마저 지워지지 않은 꿈의 옷자락
자꾸 내 눈에 밟히고
눈물 어디 갔나,
폭포처럼 무너지며
울고 싶네, 내 잘린 혀
뿌리로라도, 그것 아주 조금
남아있기라도 하다면
세상에 아직 살아, 이렇게 멀쩡하게 아직 살아
진작에 죽은 여자
그 지워진 삶, 위태한 흔적 위로
소리없는 눈물, 울어지지 않는 통곡
그렇게도 자주.................................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또는 막가는 나의 시법(詩法)
김정란
나는 줄거리를 참을 수 없다. 나는 일상을, 역사를 참을 수 없다.
즉 나는 발단과 결말을, 원인과 결과를, 요컨대 얽힘을 참을 수 없다.
말은 궁극적으로 무엇에 봉사해야 하는가.
부재(不在)에…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는 자유에…라고 나는 생각한다.
체적에 대한 혐오. 상대성에 대한 혐오.
내용과 거기에 가슴 얽어넣기,
구질구질한 연연함에 대한 혐오.
본질의 가출, 존재의 가출.
나는 빈집 앞에서 잉잉 운다…하느님…어디 있는 거야.
스물네 살의 바다
김정란
너는 끔찍하게 아름다웠다. 나는 숨을 죽였다. 잠들어 바람의 나라에 이른 너.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너의 혼, 손 한번 내밀면 만져질 듯 흔들리고 있는. 네 얼굴에 바다가 차올랐다. 스물네 살의 바다.
바다는 굉장히 힘이 세었다. 나는 사방에 대고 절을 하고 싶었었다.
비, 땅 위로 내리는 비. 넋 놓고 한데로 나앉았던 젊음.
스물네 살이야. 죽고 싶어.
이제 막 스물넷이야. 죽고 싶어.
바다가 네 얼굴 위를 흘러갔다. 달빛. 별빛. 스물네 살.
바람이 불었다, 휘익, 그리고 한꺼번에 달겨들던 죽음. 아름다워라. 나는 자꾸만 절을 하고 싶었었다.
스물네 살의 산꼭대기
김정란
난 스물네 살에
산꼭대기로 올라가기로 결정했어
웬만큼 살았으니까
이젠 뭘 좀 알아야 하잖아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몸을 돌려보았어
내가 지나온 계곡물이 환히 보였어
나는 깃발을 들었어
바람이 불어왔거든
신호가 필요했어
바람에게 내가 거기 왔다는 걸
알려야 하잖아
계곡에선 듣건대 대개 엇비슷한 얘기들뿐이었어
그런데 왜들 그렇게 갈팡질팡 법석인지
도대체 알 수가 있어야지
난 요정처럼 팔랑팔랑 뛰었어
무엇이든지 알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산꼭대기에 올라왔어
바람에게 물어보면 가르쳐줄지도 모르잖아
밤새 그곳에 있었어 깃발을 들고
밤이 내리고
어둠이 숲 위에 긴 망토를 덮었어
달이 떠오르자 숲이 바르르 떨었어
그러자 숲속에서 만물이 천천히 걸어나왔어
귀신들이 哭을 하고 어디선지 음울한 방울소리도
들려왔어 윙윙 바람이 상형문자로 불었어
몸이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었어
신성한 소름이 내 몸을 유선형으로 만들었어
밤속으로 내 날렵한 몸이 튕겨나갔어
하지만 그뿐, 난 다시 땅바닥에 던져졌어
바람 소리 귓가에 윙윙대고
지금은 난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해
무서워서 너무나 무서워서 내 몸은 떨고 있어
하지만 알고 싶어
바람의 말을 언젠가 배우게 될까
그랬으면 좋겠어
그럼 계곡에 가서 사람들이랑 살아야지
오래 오래
주름살마다 바람의 말 참하게 새겨넣고
스.타.카.토. 내 영혼 - 연금술사의 화덕
김정란
너는 네 개의 벽 안에 있다
일단 너는 그 갇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기쁘게
(상승을 위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더욱더 어두운
동굴을 택한다)
나는 특히 네 눈을 본다
거기에 갇혀 있는 불이
사물의 핵에 이르기 위해
밤낮없이 타고 있다
네게는 모든 것이 영혼이다
너는 영혼인 물질을 네 플라스코에 넣고
불을 붙인다, 천천히, 아무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태어나게 하기 위해선
아주 보드라운 게으른 불이 필요하다
이윽고 모든 것이 벽을 부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할 때 너는 참을성 있게
그것들이 질서로 돌아오길 기다린다
생성이 혼돈의 젖을 다 빨아먹을 때까지
불 앞의 불이여
화덕 앞의 화덕이여
나는 네가 네 개의 벽을 짚고 일어서는 것을 본다
아주 큰 금이 네 안에서
번쩍이고 있지 그것은
질료인 너의 영혼을
화덕인 너의 몸을
그리고 과정인 너의 시간을
한데 뭉뚱그려 가지고 있어
핵의 비밀에 이른 자는 금처럼 번쩍이지
그대가 스스로 불을 지를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알지 네 삶이
질료에 대한 확신인 것을 너 자신이
이미 소용돌이치는 생성의 자질이며 열쇠라는 걸
우주의 바람이 씽씽 자유를 구가하며
벽 안에 붙잡힌 우리 머리 위로 불어간다
내 자유를 봐라, 이 무력한 혼들아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벽 안에
얌전히 가두어둘 수 있을까?
이미 무한을 맛본 건방진 영혼들을?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김정란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가만히
삶의 옆얼굴에 손을 대어본다
그리고 들여다보면 손금 속에는 작은 강물이 흘러
랄랄라 랄랄라 숨죽여 노래하듯 울고 있는
눈물 젖은 날개 상한 깃털들 그 강물 속에 보이네
청이도 홍련이도 민비도 죄 모여 앉아서
가만가만 그 깃털들 말리고 있어 가슴이 저려서
갸웃이 고개 숙이고 조금씩 조금씩만 걸어가지
슬플 때는 바람처럼 꽃처럼 가만히
삶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갸웃이 바라본 그것
얼마나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지 얘기해 줄까
슬픔에 대하여
김정란
어느 날부터인지 몰라요 내가
이토록 희게 탈색되기 시작한 것이
삶의 모든 줄거리가 빠져나가고
내가 망연히 흔들려요
가만히 그 흔들림의 끝을
바라보면 저녁노을처럼 문득 드리워지는
눈물 한 방울 보이네요 불안하게 흔들리며
망설이며 글썽이는 금색의 작은 방울
내가 그걸 정성스레 들여다보아요
거기 천사들의 희미한 날개
힘없이 파드득대고 있어요, 그런 것 같아요
내가 고개를 숙여요 파르스름한
거의 없는 하지만 너무나 생생한
상처 한 줄기 천사들에게 동의하는
내 존재의 균열 내 가슴 정적 속에서
가만히 눈을 떠요
슬픔의 바다
김정란
난 내가 혼자 건너가야 할 이 생의 바다를 그렇게 불러요
슬픔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바의 다함의 바다라고
이젠 알아요 왜 당신이 그토록 내 눈앞에
완강히 옆 모습으로만 나타났던지
그것이 운명이 내게 던진 도전의 기호라는 걸
한때는 당신이랑 같이 그 바다를 건너가고 싶었어
정말로 간절히 이승에서 그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듯이 그렇게
이젠 알아요 내가 이 바다를 혼자 다 건너야 저 건너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듯이 당신을 만나리라는 걸
내가 나의 당신을 여의어야 그의 당신을 얻는다는 걸
거기 그의 땅에 한 송이 꽃이 아니라
천만 송이로 피어 있는 당신을 내가 나로 가지리라는 걸
이 생에서 오래 참고 오래 기다린 뒤에
이 슬픔의 바다를 다 건넌 뒤에
그때에 내가 진실로 사랑을 알게 되리라는 걸
슬픔의 방
김정란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서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 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 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내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 보면
그 방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슬픔의 술 장식
김정란
<슬픔의 술장식>이라는 말이 오늘 아침에 문득 떠올랐다. 파르스름한, 하늘색이기도 하고, 물색이기도 한, 이, 모든 경계들을 지우는 영혼의 바탕, 고요, 무참하게 아름다운............ 자잘한 단정한 흔들림, 늘, 망설이며 그 단정한 핵을 문지르며, 배어 나오는, 아주 작은 소리로, 할 수 없잖아, 라고 말하는,
가장자리, 거기서 삶은 시작된다, 아니, 거기서 나는 나와 상관없이 이미 시작된 삶을 견디고 유지시킨다, 물론 조금씩 밀어 보기는 한다, 다만, 벌써 뻑뻑해지고, 규정된 것 특유의 질긴 자기주장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고(개체는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조심조심, 그 고요한 하늘색/물색 바탕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나는 아주 조금만 산다, 그것만이 내가 알고 있는, 삶을 배반하지 않는 유일한 방식이다
<슬픔의 술장식>, 나는 그걸 가끔, 흔들어본다, 찰랑찰랑, 그리곤 가만히 배를 깔고 엎드린다, 내장 속으로, 서늘한 어떤 바람, 말들을 꽃씨처럼 흩뿌리는 말의 바람이 지나간다
시(詩)
김정란
나뭇가지를 하나 생각한다
그것을 흔들며 언제나 무형의 발을 딛고 떠나는 바람
그것을 알아보는 눈
어머니인 새가 나른다
새, 희고 정결한 魂들의 춤 우리의 눈길이 닿으면 몇천의 깃털로 분산하는 새
시법(詩法)
김정란
홀로 있을 것
백 배와 천 배로 홀로 있을 것
피처럼, 살처럼 뻑뻑하게 쓸 것
왜냐하면, 그것이 생의 조건이므로
나는 정신의 극한까지 달려갈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듣는다, 아득한 타인들의 음성
너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함께 여기, 낮은 곳에 있다
머릿속으로 정신의 맑은 물이 흘러간다
지혜여, 너는 얼마나 내게 다정한가
그러나 용서하라, 나는 살에게 간다
아프고, 찢기고 썩는 살, 구체적인 생의 근거
살과 살이 만나 이루는 계곡 속에
내가 늘 흐르게 하리라, 우리의 외로운 시선,
만나지 못해도 아름다운 우리의 방황하는 시선이
강처럼 흐르게 하리
그러나 잊지 말 것
언제든 날아오르리라
날아올라 상한 날개쭉지로 떠나온 땅을 돌아보리라
그 날 내가 그곳에 두고 온 눈물을 보리라
가난하고 빈 마음으로
시와 힘
김정란
내 육체가 나를 속였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은
육체의 시간에게 잡아 먹혔다
존재하는 일이 나를
탕진시켰다 젊음이
시간의 요란한 부채를 뒤흔들었다 언제나
쌓이고 쌓이는 부스러기들 그것으로
젊음이 만족하리라고?
오 가슴에 패이는 골 깊은 추락
현기증 삶이 나를 내어던졌다
어느 날이건 내가 칼로서
시를 가지리라 허공과 시간과
우리의 갈증을 베어내는 칼,
지그 위에서 우리가 공유한
결핍을 베어내리라 베어 던지리라
내가 칼인 시를 가지리라
시(詩), 1992년, 서울
김정란
그 여자, 어떤 여자, 분명히 내 삶의 옷자락을 끌고,
모호하게, 뒷모습만 보이며, 걸어갔다
뻘밭, 전쟁터, 목매 죽은 귀신들, 거기
푹푹 썩어, 호박빛 나는 누르끼리한 점액 속에,
통곡-숨죽인, 거부당한 형태들-웅웅 흔들리고
그 여자, 뒷모습의, 철벅철벅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알 수 없는, 말릴 수 없는,
오만함, 혹은 무모함-사랑이라는 이름의
투기-그 여자 아주 낮게 몸을 숙이고
죽은 자들의 점액 속에 손을 넣고 휘저었다
그 여자, 천천히, 분명히 내 삶의 옷자락을 끌고,
돌아섰다, 너무나 어슴푸레한, 작고 빈약한 구슬 한 개,
그러나 분명히 구슬이라고 부를 수 있을, 작은 알갱이
한 개, 그 여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울렁이는 욕지기를 꾹꾹 참으며 그 여자를 마주 보았다
움푹 파인 두 개의 구멍 그리고 너덜너덜한 살
나는 그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고 불쾌한 끈적거림
나지막한 음산한 웃음 그리곤 들릴락 말락 그 끝에서
방울 소리,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가자
무엇인가 나를 힘차게 공중으로 튕겨 올렸다
맹렬히 부푸는 존재-내 안에서 나를 패대기치는
1992년 7월 서울의, 달빛
쓸쓸한 몇 편의 사랑 노래
김정란
1 - 전화
그의 목소리가, 幼年의 모든 기억과 풀밭, 등교길의 돌멩이, 막막함, 손 내밀기, 혹은 갈증, 혹은 흔들림, 그것들의 아주 섬세한, 작아서 모두 소유할 수 있는, 촘촘한 무늬의 날개로 날아왔다.
그의 목소리는 줄무늬야, 내가 눈치채었듯이,
아무것도 아무 기질도 서로 화해하지 않지,
즤들끼리만 심각하게, 즤들끼리만 완벽하게,
따 로 따 로
서로 옆으로 손 내밀지 못하게
그의 영혼을
차단하고 있다.
묶여있는 그가 말한다. 보고 싶어. 아주 낮게.
나비는 절벽에 부딪친다. 그의 등뒤에서 밤이 일어섰다.
고적함으로 흔들리는 영혼들. 나는 맥을 놓는다.
내 영혼의 얇은 껍데기가 무방비로 흔들린다.
사랑은 힘일까, 그럴까......
3 - 저녁 식사 뒤의 담배
목이 긴 네가 담배를 피웠다.
막막하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네가 말했다, 허공이, 윙윙 울렸다.
"내가 뭘 보고 있지, 응?"
눈 속으로 구름이 흘러갔다.
네 목덜미에도 구름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죽음을 보고 있어."
모든 것이 갑자기 멀어진다.
죽음만이 만물 위에 내려앉는다.
자유로운 것은 그것뿐이다.
6 - 그대 곁에서
네 곁에서
내 모가지가 길게 자란다.
"그늘에서 꽃이 피는 거야."
내가 장난말을 한다.
네가 쓸쓸하게 웃고
손가락을 조금 움직인다.
네 웃음과 손가락 사이에
바람이 불어간다.
내 가슴에 벌판이 하나 생긴다.
아담에게
김정란
아담,
떨며 부르는 이름.
마음속 이렇게 태어나는
산, 강,
............ 그 건너 죽음까지도.
아담, 돌아눕는 당신의
흔들리는 하늘.
아주 조금 습한 웅덩이
김정란
이건 진전일까, 아니면 퇴행일까 어느 순간인지 세계의 끈을 놓쳐 버린 그녀가 자기 앞에서 흩날리는, 벌써 유령인 사물들의 그림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상관없지 뭐, 거의 끝나가, 괜찮다구, 난 느낌이 없어 바람이 불어요, 모든 게 펄럭여요 그런데 내 마음이 어디로 숨은 걸까 난 거의 아무렇지도 않은 걸요 다만 맥락 안에 있으면서 맥락과 무관한 희박한 흔적들 몇........개......... 그녀는 그녀의 창문 밖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눈目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조금만 기다리면 이제 정말 모든 게 끝나요, 벌써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는 걸요, 내 귀는 굉장히 예민하거든요 그녀는 어떤 <사이>의 방식의 숨쉬기를 배운다 바깥? 안? 아니, 둘 다 아냐, 아니, 둘 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그녀는 창문 밖으로 몸을 조금 내밀고 가만히 지켜보는 눈에게 말했다, 하기는 당신이 거기에 있네, 그럼 내 지푸라기가 되어 줄래요? 눈이 잠깐 망설이다가 기어이 어두워진다, 그녀는 빨리 포기한다 하기는 세상을 어떻게 건넌담 할 수 있는 건 가만히 빠져 죽는 일뿐이지 뭐 그녀는 방안으로 되돌아와 옷을 벗는다 적막한 우울, 존재 지수 0, 우 난 먼지처럼 가볍네 그녀가 웅크린다 거기 아주 조금 습한 웅덩이 흩어진, 무관해진, 모든 관계들 <사이>의 통로를 따라 그녀는 자신 안으로 수렴한다, 빛, 아주 다른 빛이 그 방을 어슴푸레 적신다 물보라처럼 조금 습한 빛
아직도 미래는 유령 같은 것
김정란
거대한 눈과
거대한 피와
거대한 손이
겨울, 방안에서 밀려오는, 파도,
바다 위에 내려온다
우리는 의식의 도착(倒錯)으로만
위대함을 꿈꾸고
어디 구석구석에
포태된 불안. 먼지처럼 도사리고 앉아
우리의 머리를 잡아 흔든다
한꺼번에는 결코 떠나지 못하는
겨울. 암담한 자리.
갑자기 들끓는 피
우리는 어느덧 다른 줄을 탄다
그러나 아직도 미래는 유령 같은 것
안개
김정란
생각할수록
삶의 복판에서
밀 려 난 다
그건 틀림없어
술이 많이 달린 옷을 입고 싶어
햇살마다그늘마다먼지마다있는
만물의모든부스럭댐을온몸에묻히고싶어
그래서지레그림자쪽에서서살아야하더라도
어느날상심한영혼이알아볼수없게야위더라도
그 때문에
내가 살아온 시간의 어느 꽁지라도
놓치지 않고 잘 짚어내는
안개 이 부드러운 편재(遍在)
그 끝과 또다른 끝에 있는
커다란 눈에게 띄고 싶어
안 잘라지는 손가락 한 개
김정란
울다가 지쳐서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손가락 하나가 없어졌다. 꿈이 먹어 버렸나? 좋아,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날카로운 가위를 하나 가지고 와서 나머지 손가락들을 쌍둥쌍둥 잘랐다. 깨끗하게 잘 잘라졌다. 그런데, 어떤 손가락인지(어떤 손가락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손가락 한 개는 죽어도 안 잘라졌다. 핏줄이 무지 질겼다. 끝까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너무해. 너무해.
어느 날의 가벼움
김정란
그날 갑자기 불이 켜졌다.
반짝반짝
반짝
반짝
반짝
반짝
반짝
갑자기, 그리고, 예쁘게 예쁘게
내 앞에서 앞으로 나란히를 하는 사물들
이것 봐요, 그들이 말했다. 알아요? 우리가 내부의 빛으로
얼마나 우리만큼 환하게 빛날 수 있는지?
그 애들이 다가왔다 아줌마 엄마 언니 형
누나 선생님 얘 오빠 할아버지 여보 할멈하고
그 애들이 내 옆에서 반짝이며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때로 세상은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순진한
웃음으로 가득차 있는지, 나는 참을 수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방울 소리 또는 소리의 빛
웃음 또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폭발!
견딜 수 있어
나는 나지막하게 흔들리며
말했다 휘익 무턱대고
언제나처럼 쳐들어오는 절망의 예감에게 나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견딜 수 있어 정말이야
나는 가벼움에 실려 있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내 존재의 아무것도 아님으로
승부를 거는 거야
어느 날의 바다
김정란
절망과 언제나 함께 있는 젊음
그녀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났다
역사는 그녀의 발목에
시대의 삶을 칭칭 동여매었다
그런데도 외곬으로 자라는 정신과
점점 막강해지는 영혼
그녀의 작은 방안에
서너 번쯤 교차하는
미로(迷路), 계곡, 바람,
어제와 오늘, 내일의 바람,
무엇이든 언제나 너무나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았다
우리는 꼭 한 번만 사는데도
그녀의 바다 하얗게
눈뜨고 지키고 있는
오 공허한 어머니여
그녀는 그 바다 앞에서
용수철처럼 팔딱였다
용수철은 가끔 늘어졌다
모든 것이 함께 있었다
탄력과 공시적(共時的) 사고(思考)와
비루먹은 문화와 싱싱한 젊음이
수동성과 탐험이 함께 있었다
어느 밤의 울기
김정란
(졸렬한 연습, 별 각성도 없이, 내친김에,
기왕 낮아진 김에, 죽음이 아니므로 삶인 정도의 삶 속에서)
울다, 울다, 비우다, 끄집어내다, 더욱더 절망하다,
기왕 간 기에, 가다, 막가다,
악화는 악화끼리 친하다, 진작에 양화가 없는 판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잠깐! 세계?
…………………
그걸 들먹이면, 구신인 내가
새삼 사람이 될까, 사람? 세계 안의?
세계 안의?!
……………
나는 되짚어 묻는다, 수치스러움으로라도 어떻게
발을 내리기 위하여, 내둥 빙빙 도는, 이 모든
구체적인 나의 넝마들을 향하여
눈을 부릅뜨고, ! 라고.
절망은 구체적이다, 이를테면, 시대여,
그대가 나를 얽어매는 만큼,
그런데 오 그것과 마주 서 있는
이 무방비의 구신을 좀 보시라.
에우리디체, 언덕 위, 또는 나지막한 들리움
김정란
나는 말들을 넘어선 고적함을 꿈꾸어요
한 송이 민들레의 지독한 섬세함 그리고
그것의 생의 결에 완전히 겹쳐지는
바람 오 내가 얼마나 깊이 그 열림을 이해한 것일까
내 가슴의 모든 섬모들이 그 바람을 따라 흔들려요
세상에 둘 곳 없는 흔들림, 의미의 오로라가 그것 위에
천 년 전부터 있었던 광휘를 드리워요 내가
외양들의 거의 지워진 마지막 저항에게
손짓해요 쉿 조용히 해 그리고 기다려 봐
나의 존재가 잠깐 파르르 떨어요, 보아요, 내가?
지워진 자리에서 언제? 지금? 아니 천 년 전에?
물빛 이슬처럼 자유롭고 순결한 규정되지 않는
윤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눈물이 나요 - 안녕
아직은 어스름 저녁 어두운 육체 안에서
망설이고 있지만, 그렇지만 나는 한번 드러난
부재를 잊지 못해요 - 우연한 형태 안에 갇혀 있는-
나는 그것의 이마 또는 눈썹 위에 조용히
내 마른 장작개비 손을 가져다 대어요
그때 얼마나 엷고 부드러운 불이
내 존재의 발치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인지
나는 조금 지워진 내 발목을 내려다보아요
언덕 위, 또는 조금만 벗어난 삶,
흔들림 - 나지막한 들리움
여자들, 고요히, 나뭇잎처럼,
김정란
여자들, 고요히, 나뭇잎처럼, 그 계곡 산모롱이 틈새로 여자들의 나뭇잎, 나뭇잎, 뾰족하게, 연약하게, 손가락 끝마다 엷은 연두 손톱 달고 하늘............넓기도 해라, 늘 떠나기만 하는 없는 생, 어긋나 뒤로 돌아선 하늘 가만히 껴안는다네 차마 떠나가는 하늘에 상처 날까 봐 아무 말도 않고 손톱 안으로 안으로 밀어넣고 정성으로 흔들리며 간청하네 열 번의 생 내내 그랬다네 조심조심 엷은 연두 손톱으로 여자들은 자꾸 가슴을 누르고 눌렀다네 땅에 붙박힌 그녀들의 몸 이윽고 투명해질 때까지 실금 상처 안으로부터 떠올라 선연한 무늬를 만들었다네 나는 안다네 그 무늬 이룰 때까지 그 상처들 얼마나 하늘을 향해 조용조용 말을 걸었는지 그 산 속으로 여행 갔다가 그 계곡에 나뭇잎들의 사원이 섰다는 말을 들었네 난 들었네 그 여자들 모여 서서 나지막이 부르는 노랫소리 그녀들의 투명한 몸에서 수정처럼 울리는 저녁 종소리 신의 옷자락 산모롱이 스치고 그 엷은 연두 손톱들 안으로 안으로 눈물 흘리며 땅 깊은 곳까지 쓰다듬는 소리 그 땅 깊은 곳에서 문득 하늘 열리는 소리 우주, 내 아들, 내 가여운 아들 열 번의 생쯤 더 지나면 그 나무들 그 계곡 떠날 것도 나는 아네 그러나 알면서도 지금 아픈 그 나무들 때문에 나는 우네 나는...........지금 숨죽여 우네
여자의 말
김정란
1 - 세기말, 적극적인 죽음
떡장수하는 엄마는 장에서 떡을 다 팔고 언덕 하나를 넘었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그녀는 치마폭에서 팔다 남은 떡 하나를 꺼내어 주었다 호랑이가 떡을 꿀꺽 삼켰다 남은 떡은 열두 개 호랑이가 열두 번 나타나서 열두 개의 떡을 다 먹어 버렸으므로 열세 번 째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 엄마는 남아 있는 떡이 없어서 팔 한 짝을 떼어 주었다 냠냠 떡장수 아줌마는 팔도 맛있네 호랑이가 맛있게 먹었다 호랑이는 자꾸만 나타나서 떡장수 아줌마의 척추까지 오드득오드득 씹어먹었다 그믐달이 기우뚱기우뚱하더니 어두움 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세계여 나를 먹고 싶니 먹어라 뭐 까짓꺼 또 태어나면 되지 뭐
나는 머리 뚜껑을 열어준다 맛있을 거야 열심히 살았거든
나는 이제 쓸쓸해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서 천 개의 태양과 천 개의 달이 뜨고 지는 걸 나는 단 하나 사랑의 끈만 잡고 놓지 않는다 세계여 난 너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나로 하여 이 사랑에 지치지 말게 하라
나는 사랑 하나에 기대어 이 적막한 생을 건넌다 오 힘센 그대들의 생
2 - 기도, <사이>에서 도약하거나 무너지거나
나는 피하지 않아요, 그것이 무엇이든,
고통이든, 갈비뼈까지 다 드러나는 시려움이든,
실핏줄 뿌리까지 잡아당겨지는 외로움이든,
때로는 살아 있다는 실감에 실려
목메게 달려드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내게 가만히 가느다란 손가락을 내미는 애닯음이든,
내게 천 개의 에어지는 가슴들이
있는 걸 알아요, 그걸로 내가 세상에
몸 부벼요
그래요, 천 번 무너질 각오를 하고요
다만, 지켜보아 주셔요,
언젠가 내가 기어이 이 고통스러운
감추임의 땅에서 절절하고 아름답게
내 기다림을 완성하는 것을
사물의 사이와 사이에서 넘어지며, 일어나며
이 긴장과 가슴앓이를 차마 다 살아내요
마련도 없이, 다만 당신을 향해 서서,
둥둥 세계를 등에 업고 잠재우면서......
다만, 당신이 거기 계시기만 하면, 다만......
3 - 세기말, 혼자 여는 문
나는 그의 영혼을 눈여겨보았다 그가 걸을 때마다 미세한 삐꺽임 소리가 새어나왔다 향수(鄕愁) 또는 갈증이라는 부재의 표지 그의 몸에서 조금 그러나 편안한 삶의 양식에게는 충분히 절망적일 만큼 조금 살의 실감을 덜어내는 상처 균열 그가 무심코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아주 엷은 미묘한 먼지 냄새를 맡았다 아니 오래된 책 냄새였을까 작은 휘파람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어 아 세계가 그를 다치게 했구나 그의 상처에 대한 인식이 나를 그의 곁에 데려다 놓았다 나는 향기로운 영혼들을 언제나 정확하게 알아본다 저 사람은 이백년 쯤 걸어 내게 왔음이 틀림없어
그가 흔들리는 걸 나는 알아본다 그렇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영혼 안에 그가 조용히 꽃등을 켜 들고 들어선 것은 그 흔들림의 자질 때문이라는 걸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저녁 바다에 가요 그리고 그는 머뭇머뭇 덧붙였다 나는 다른 사람이예요 나는 나인 걸 견딜 수 없어요 그 말끝에서 세계의 모든 파도가 쏴아 거품을 일으키며 흩어졌다
저녁 바다 바람 몇 줄기 쓸쓸하게 불어왔다 그리고 문이 어떤 불안한 입구가 파리하게 수평선 저너머에 떠올라왔다 그는 가만가만 그 문을 두들겼다 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는 조용히 진저리치며 말했다 오 아냐 아직은 낯설어 난 계속할 수 없어 난 이 습한 미지(未知)를 견딜 수 없어
나는 그가 켜준 꽃등을 들여다본다 파도 위로 반사되어 수천의 광채로 고요히 빛나는 불 조그만 일렁이는 한없이 기다리는 참을성 많은 불 나는 어느새 깨닫는다 그 대신 내가 그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의 영혼이 지펴준 그 빛의 연약함에 기대는 법을 배운다 이젠 무섭지 않아 나는 바다 앞에 혼자 있다 금방 해가 지겠지 나는 그 문이 두렵지 않다 나는 세계의 어머니처럼 그 문을 향해 걸어간다 향기가 아슴프레 풍겨왔다
죽......... 음...........
4 - 버림받은 말들의 어미
그것이 본디 가난한 내 영혼에게 턱없는 호사였던가요. 그렇게 내 혼의 꺼끄러기가 당신을 힘들게 했던가요. 마냥 그렇게 푸른 그림자로만 서성이는 내가 내 팔로 안고 싶어 했던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었던가요. 언제든 온전히 당신을 얻으리라던 내 믿음이 오만이었던가요
내가 내 아픔 속에서 무섭게 깊고 고요해져서 바라보았어요
오 세계의 강물 내 몸속으로 울며울며 떠밀려 들어오고
그 속을 세상에 머리 둘 곳 없어 헤매던 말들
세상이 내친 거지 떼의 말들
그것들의 유해(遺骸)들 미처 바셔지지 못한 채 떠가는 것을
이것들은 어떻게 해요 이 가여운 것들을
내가 결핍의 몸뚱이 안에 그것들을 싸안고
신음해요 버릴 수 없어요 내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이대로 고꾸라져 죽더라도
왜냐하면 내가 너무나 깊이 알고 있는 걸요
이것들이 내 가슴 안에 깃들어 쉬이 숨 쉬는 것을
그 오두막의 옹색한 처소에서 그것들의 처참한
뼈다귀에 살이 붙고 그리곤 조심조심
나지막히 옹알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그러니 당치 않으시거든 오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여기서 내가 할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내 사랑의 성실함에 대한 확신이 내가 누릴 보상의 전부라고 해도 내 믿음이 이미 대를 놓친 것이라고 해도 내가 기다림 안에서 이 불쌍한 아이들을 키워요. 내 살과 피와 갈증 밖에는 그것들을 먹여 기를 다른 방법이 없는 채로 그래도
5 - 세기말, 부풀고 뒤틀리는 들판
어떤 들판 하나? 둘? 셋? 또는 하나, 그, 하나
밑뿌리에서 윙윙 소리 내며 들뜨기 시작한다
아, 이상한 느낌, 내 눈앞에 떠오르는
이상한 이미지, 종합적인 지각 정보
뭐라 딱히 짚을 수는 없지만, 특히
<통합>이라는 주제를 돌출시키는
세계를 포괄하는 반세계의 메세지
흔들림, 그러나 큰 파장 안에 감싸이는
응, 그렇군, 나는 불안을 응시한다
한없이 가라앉은, 완성된, 불변의 배경을 가진,
이상하게 안정된 흔들림
내 존재는 기댄 채로 흔들린다
이건 괜찮은데.... 라고 나는 생각했다기보다
그렇게 알아졌다, 들판 부풀고 뒤틀리고 흔들리고
거기 아주 알아보기 힘든 미세한 <사이>들이 생겨난다
벌써 그 <사이> 속으로 다른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대탈출이 시작된 거야 나는 눈을 반짝인다
부부부부부 내 안에서 작은 우주선들이 시동을 건다
제 3의 시간과 우주와 존재방식에 대해서
그 우주선들이 분주히 교신하기 시작한다
난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다만 나는
이상하게도 행복한 모순 안에 통합되어 있을 뿐이다
아아아무거어어엇도 아아아니이이인 것
멋대로 자유롭게 흐르는 시간
나는 찍찍 늘어난다 나는 5mm이거나 5km이다
축! 고무찰흙 아줌마
6 - 연두색 잎사귀들과 낮은 태양
뒷모습의 여자들. 어떤 여자들. 이마와 눈에 빛과 깊은 어두움의 기억을 달고 있는 여자들. 참혹하게 아름답고 고독한 그녀들을 오래 생각했다. 그녀들의 여리고 작은 몸에 대해서, 그녀들의 몸을 찢어발겨, 세계의 열 두 구석에다 걸어놓는, 잔인하고 아름다운, 세계와 무관한 곳에서 세계와 비밀스럽게 관계를 맺는, 가만히 제 자리에 있는, 어리디어린, 위태한, 순결한 힘에 대해서...................
나지막한 나무 한 그루. 겸손하고 부드러운. 연두색 나뭇잎 몇 개.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과 똑같이 말하는. 난 내 밖으로 튀어나가는 정도 안에서만 나야, 라고 말하는. 그리움 때문에 야위고, 그리움 때문에 아름다워지는, 매순간 치받치는 순결의 소명 때문에 미처 살 틈이 없는, 살아서 고정된 존재가 될 틈이 없는, 연두색, 매일 시작하기만 하는 존재의 색깔. 난 그 잎사귀들이, 난 졸려, 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 오후? 덜 세계와 세계의 사이. 세계와 덜 세계의 사이. 여자들이 왔다. 얼굴이 없는 여자들. 검은 옷을 입고 흰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여자들. 그녀들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그 나무를 둘러쌌다. 서넛? 열 두엇? 연두색 나뭇잎들 사이로, 낮은, 분명함의 독성이 빠진, 자기 확신을 버린, 모호한 태양이 흔들렸다.
여자들이 아기들을 안고 있었다. 하나씩. 아기들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난 알 수가 없다. 똑같이 얼굴이 지워진 아기들. 여자들의 없는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세계의 강을 향해 그 눈물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7 - 불 꺼지고, 그리고 다른 길이 열릴 것이다
팍
모든 불들이 꺼진다
음악이 조그맣게 시작된다
아기들의 혀짜래기소리 간간이 음악과 침묵
사이사이에
그리고 찰랑거리는 물결 소리
음음음음 우린 바람을 닮았지
우린 절대적으로 무관해
끝까지 가자, 가자, 이대로
(다른 길이 열릴 거야
응, 그럼, 그렇게 살 수 있어, 그럼, 천 년쯤)
아기들이 바시락대며 돌아눕는다
안녕, 세계여, 안녕,
별들 사이사이로 바람이 불어간다
"열린 영혼"이라는 말이 세계의 하늘 위에 고즈넉히 떠오른다
역사의 뒷길
김정란
그 길은 수많은 울혈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길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콧물땀 특히 잘린 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길은 왔던 사람들과 와있는 사람들과 올 사람들의 무수한 자빠짐 바시러짐 통곡 버림받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길은 지금도 말을 찾지 못한 유령들의 신음으로 가득차 있다
그 길은 다른 진화를 선택한 다른 종(種)의 다른 길
그 자체로 처참한 생의 길, 지금은 처참한 길
아주 홀로/아주 함께 걷는 길, 생 자체의 저항을 무릅쓰며
연가(戀歌)
김정란
오색의 티끌과 더불어 너는 온다
네가 와 앉는 자리에 고개 숙이는 어두움
어두움 속을 흐르는 나는 강물
희디 흰 강물
소리죽여 흐느끼는 나는 안다
네 무구한 뒤척임
밤새워 너는 온다
네가 만나는 들판의 길들
너는 길의 냄새 지니고 온다
네가 거느리는 길과 먼지를 지우며
하얀 강물
나는 흐른다
적막한 아픔으로
오늘 오후, 부재(不在)) 경험
김정란
무연히 가슴 가라앉다
적막 - 항거할 수 없이
내 삶의 어디, 멀고 먼
근원에서 솟아오르다
아, 이럴 때 막막히
눈물 차오르다, 삶이
왜 이렇게 갑자기
가벼워지는 것일까, 나는
의아스러워 눈물 너머로
바라보다, 산, 또는 하늘
어느 오후 문득, 체험하는
아주 가벼운 生
무엇이든 내 안으로
다 들어왔는데도 - 눈물
흔들리며 나는, 무연히 삶 안으로 들어온
이 부재(不在)의 지평선을
바라본다, 적막, 나지막한.
오, 달빛
김정란
오, 달빛
뼛속 깊은 곳에
슬픔의 강물이 흐르네
천 년 전 나를 향해 떠난
네 눈빛
오백 살 먹은 마녀와 나
김정란
무엇이든지 있는 없음에 대해서
지독히 시끄러운, 쿠당당대는 정적에 대해서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
언제나 입을 쫑끗거리는 어떤
쭈그렁바가지 할망구에 대해서
나는 아주 뾰족한 오백살 먹은 마녀이다
그녀는 자기를 뜯어먹으며 다시 태어난다
나는 문턱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말한다:
나는 꽃이야, 나는 똥이야, 운운......
나는 그녀의 말없음표에 편승한다
(물론, 그 사이에 살살 살면서)
나는 그녀의 혓바닥을 물어뜯고
그리고 잡아늘린다 세월아 네월아
그것은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오월, 비 내린 뒤
김정란
오월, 며칠 비 내림. 햇살. 나무 꼭대기.
나는 가능한 한 높이 발꿈치 들고.
오늘 아침. 아니 저녁이었던가. 어느 어스름.
또는 사이에 문득. 졸음 물러서는. 끝에서.
보다. 나뭇잎들. 거의 적의와 같은.
생경함. 챙챙. 칼끝 부딪치듯.
말고. 눈부신. 꼭대기. 햇살.
비에 씻긴. 잔인하게. 맑은.
(존재는 꼭대기에만 있다)
내가 햇살의 끝을. 휙. 나꾸어챈다.
세계의 핏줄들. 모두 팽팽히.
당겨지다. 연초록. 아슬아슬한.
순수. 정점을 향하여. 버스럭대며.
솟아오르는. 존재들. 단지 上向의.
사물들, 기어이. 제 바깥으로.
튀어나가며. 비로소. 제가 되는.
거기 던져져 있음과 무관한.
문득. 투명한. 섬광들. 한껏 당겨진.
존재들의 육체 위로. 튀어오르다.
길게. 늘어나는 세계.
불안. 영혼의 뿌리까지 흔들리는.
그러나 항거할 수 없는. 아름다움.
너무나 기이한.
오지 않은 사람
김정란
-영원한 유예. 나는 기다림에 처형되어 있다. 그러나 <기다리는 나>는 <나>보다 언제나 얼마나 더 아름다운가.
당신 생각을 해요
오지 않은 사람(아직은)
나는 흔들리고 열려요
왜냐하면
나는 아주 깊이 깨달았거든요
<내>가 감옥이라는 걸
기억나요, 그때, 어떤 천사가
라일락 향기로 내 몸을
정성스레 문대었던 걸
그 후론 아무도 없어요 다만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텅 빈
내 존재를 죽음의 신비 쪽으로
한없이 날아오르게 하는
오 모호한 전부의
부드러운 부드러운 입맞춤만이
(그리고...그것...사물들 지워진 자리에...가만히...남아있는...나...나라는 소질...존재의 분위기...존재에 대한 겸손한 열망...)
한때 나는 갈망으로
미칠 것 같았어요 지금
나는 세계 안에서 벌써 세계 밖으로
튀어나와 있어요 당신(결국 나를 포함한)을
기다리는 내 고요한 열림이
내 갈망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향기로 바꾸어요
당신 생각을 해요
오지 않는 사람(아직은)
용연향
김정란
당나귀 등 위에
내 썩은 혀
한 짐
딩동
문 열어라
* 용연향(龍涎香) : 몇 종류 안되는 동물성 향료의 하나. 밀향 고래 창자 속에 들어있는 이물질이 고여 썩은 뒤 만들어진 값비싼 향료. 향기 성분은 전체의 1%에 불과하다. 그대로는 향기가 없으나 다른 향료와 작용하여 영속적인 향기를 낸다
우리는 밤새 깃털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정란
우리는 산 위로 올라갔다. 도시의 모습을 한눈에 보고 싶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잘 보기를 원했다. 집집마다 가을밤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고독한 영혼과 그들의 불편한 잠자리를, 그들의 꿈과 분노를.
해가 우리 머리 위에서 하나씩 따로 저물었다. 지는 해는, 그것을 향해 번쩍번쩍 일어서는 창문들 위에 너무나 처연한 빛을 남겼다. 석양이 우리 영혼에 불을 질렀다. 사람들은 거리의 술집으로 비틀거리며 찾아갔고, 우리는 그들의 등뒤에서 숨죽여 울었다. 언젠가 눈물마저 천박해져 버릴까 봐 무서웠다. 우리는 사람들 등뒤에서 우리의 마지막 소유인 눈물을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하루가 저물고, 흉흉한 소문들이 유령처럼 어두운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우리는 밤새워 깃털에 대해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눈물로 그것을 살 수 있을지, 막막히 알지 못하는 채로.
유령의 노래 - 뭉크의 화면
김정란
예쁜 네가 손을 내밀었어
네 하얀 손바닥 위에
얼른 내 살점 하나 떼어준다
울지 마, 아가, 울지 마
시름시름 흔들려도 아직 한 번도 쓰러지진 않았어
떼어 주어도 주어도, 내 검은 살, 원수처럼 남아 있네
피를 잃었어, 남은 윤기 다 잃었어
그런데도 끝까지 남아있는 이 모진 살 좀 봐
장미처럼 예쁜 네 혓바닥이 문대가도 문대가도 또 일어서는
............... 오 맹목의 살을 봐
너에게 줄 것이 없어
천 길 깊은 텅 빈 눈으로 너를 떠나와
내가 네게 이르지 못하는구나
생전의 하늘 이 가려운 하늘 아래 내가 또 남아
생의 가난을 건너온 피곤한 四肢
왜 아직 육신으로 남아있는 걸까
남아서 이토록 무섭게 모질어지는 걸까
내 살이 너의 자양이 될 수 있을까
내 이마, 신의 폐허가 너의 침대가 될 수 있을까
너에게 줄 것이 없어,
검은 살 또 한 점 떼어 들고 곤두박질하는,
저승에서 이승, 이승에서 저승,
흔들리는 신의 두 어깨를 봐
갈가리 내 살 저며내서 빛나는 빛만 남겨 네게 이르려 해도
살들 저마다 뾰족히 자라는구나
영악한 아이들, 제각각 눈 뜨고 살아있구나
오 나는 두려워,
어느 날 내 영혼은 이 아이들과 헤어지는 걸까
헤어져 어떤 모진 살을 또 만나게 될까
헤어지라...... 헤어지라...... 오, 떠나라......
떠나라, 살들, 침강하라, 살의 눈들, 맹목의 습성들
너에게로 갈 수가 없구나, 용서해다오
너, 정당한 습성, 생전의 내 생명,
오, 외로운 생명, 생명.........................
.................................................................
홀로 남은 내 생명의 기억이여
육체의 길
김정란
나는 내 날개가 푸드득대는 날갯짓의 반대 방향으로만 날아왔다
종알종알, 관념, 순수, 하고 재잘대는 동안 나는 몸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몸 안에 깃들일 수 없으므로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계속 분리의 덕목으로만 살아왔다
나는 내가 가려고 하는 방향으로는 가위눌린 듯 한 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신은 내게 내 갈망의 반대 방향만을 허용하셨다
내가 기어이 솟아오르려고 버둥대는 동안 신은 내 발을 모질게 붙들어 뿌리를 내리게 하시더니, 내가 내 작은 뜨락만 지키고 앉아 기지개를 켤 때, 불쑥 내게 세계를 보여주셨다 내가 고뇌 안에 웅크리고 앉아 고뇌의 쓰디쓴 마지막 쓴 물까지 다 빨아 먹으려고 그래서 죽음 안에서 살이나 만지작거리며 노닥거리려고 마음먹었는데, 아비여, 이건 무슨 느닷없는 양식(糧食)인가
난 아직 그걸 먹을 줄 모른다 그래서 난 혀만 살짝 대보고 한옆으로 밀어놓는다 아버지 난 누굽니까 그리고 세계는 나에게 누굽니까
은사시나무
김정란
‘난 은사시나무를 본 적이 없어’
어느 날 거실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난 은사시나무를 아는 것 같애’
나는 가슴에 두 손을 대고 낮게 말했다
“은사시나무”
갑자기 거실 한복판이 쫙 갈라지고
은사시나무가 솟아나왔다
난 은사시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은사시나무가 은종을 마구 흔들며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은사시나무가 내 몸뚱이를 들어올려 나뭇가지 하나에 매달았다
은사시나무가 내 자궁에 손을 쑥 집어넣고 당신을 끄집어냈다
은사시나무가 당신을 맞은편 가지에 매달았다 난 당신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눈물이 내 영혼을 다 녹여낼 때까지
그리곤 보았지 당신과 나 눈길 만나는 곳에서
눈물의 길을 타고 나-당신, 당신-나가 하나씩 태어나는 것
은사시나무가 나를 동쪽으로 당신을 서쪽으로
나-당신을 부쪽으로 당신-나를 남쪽으로 집어 던지는 것
우리 거실 네 귀퉁이에 그렇게 우리 네 사람 살고 있지
은사시나무 가운데 두고 거실은 매일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네
은종은 전생까지 후생까지 오며가며 울리네
‘난 은사시나무야’
난 살며 생각하네 고요한 말이 내 마음 가득히 가득 차 있네
이를테면
김정란
이를테면,
미묘한, 있는지 없는지 모를 <사이>에
그 일은 닥친다 가만히 내가
짐승처럼 긴장하고 존재라는
지독한 이물감 안에서
뾰족하게 매복하고 있을 때
이를테면,
강의를 하다가, 툭, 분필이 부러질 때
분필의 우연한 단면, 그 아무 필연성도 없는
단면의 우둘투둘함에 나는 갑자기 무섭게
민감해진다 그리곤 내면이 피를 뚝뚝 흘리며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다 아 미치겠어
왜 이럴 땐 모든 것이 바닥까지 다 들여다보이는지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천사의 날개를 퍼덕이는지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제 자리에서 들떠 일어나
위험한 귀신의 혓바닥으로 속삭여대는지
나는 임박한 예감에 몸을 떤다
그럴 때, 강의실 문이 슬며시 열리고
지독히 차갑고 지독히 섬뜩한 그림자 하나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리곤 영락없이
분필이 또 한 번, 툭, 부러진다
잠깐, 푸피피 날아오르는 분필 가루 먼지
글자를 에워싸는 글자의 귀신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그리곤
칠판에 쓰인 글자 앞에 서서 고즈넉히 발음해 보는 것이다
당신?
이미지들
김정란
1 -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가벼운 발걸음 소리 난 알아
그 여자가 집을 나왔다는 걸
그 여자 옷자락 스치는 소리
그리곤 모든 것이 사악사악
지워져
길은 외길이야 언제나
길이 뽀얗게 일어나 안개
응 안개 따뜻해? 아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아무 느낌도 없어
그건 조금 물질이 된
되다 만 정적일 뿐
그뿐이야
길 위엔 고요 아니면 근원의 예감만 있어
있는 둥 해
그 여자 그 가벼운
없음의 길로 어쩌자구 타박타박
모든 것 사악사악 다 지워진 자리
그 여자 옷자락 향기만 남은 자리
나는 가만히 거기 내 뺨을 대 봐
그 여자, 이젠! 이라고 말하는 듯이
손가락 들어 올릴 때
깃털 잎새 꽃잎 사이 바람 하늘 사이
고요 금가루 파시시 날지
정적...............................
그리고 어떤 입구가
떠올라 외길 저끝에서
그 여자 뒤돌아보고 조금 웃었어
가.............
내가 나지막하게 말했어
나는 제 자리에서 큰 숨 한번 들이쉬지
그리고 쿵쿵 뛰어 봐 응 땅은 아직
안 꺼지네 아직은 살아있네
안녕, 난 여자에게 말했어
울지 마, 언제든 나도 거기 갈 거야
안녕
먼저 가서 나를 기다려 줄래?
좀 더 좀 더 조금만 더
너의 체온이 식어 질쯤
그땐...
나도 갈 거야
그렇게 웃지 마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
설마!
내가 잡아주길 원하는 건 아니겠지???
2 - -밖으로 나간 여자, 세기말의 사랑
#1
정면의 앵글. 캄캄한 하늘, 또는 우주 한복판. 처음엔 파르스름한 점처럼 나타나는 불씨. 점점 커지면서 왼쪽 방향으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사방으로 힘차게 날리며 소용돌이치는 불의 꼬리. 속도 점점 빨라진다. 이제는 거대해진 파란 화염 끝부분에서 어렴풋하게 <신>, 또는 <사랑>이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2
우물 안.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아진 깊고 어두운 우물. 매우 가파르고 높다. 까마득한 우물 벽 위로 아슴히 좁은 입구가 보인다. 태양이 입구 주위에 어른거린다. 우물은 아직 어슴프레하다. 빛을 받은 우물 벽면의 습기가 이따끔 반짝인다. 어른거리던 태양빛이 어느 순간 찬란하게 우물 바닥까지 직선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3
도시 한복판. #2에서와 같은 앵글. 빌딩들이 늘어서 있는 큰 길. 새벽 어스름. 양 옆 정면에 두 채의 높은 빌딩이 서 있다. 거의 비슷하지만, 약간씩 다른 색깔과 형태. 정면에 있는 두 채의 빌딩들 사이로 피를 뚝뚝 흘리는 거대한 검은 여자가 하나 나타난다. 여자 처음엔 비틀거리다가 똑바로 선다. 여자 견고하게 버티고 선 뒤, 천천히, 힘들게 두 팔을 펼쳐서 두 채의 빌딩을 감싸안는다. 빌딩 벽 위로 끈적이는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태양이 여자의 머리 뒤로 서서히 솟아오른다. 갑자기 여자가 빌딩을 껴안은 채 쓰러진다. 빌딩들 굉음을 내며 부서진다. 자욱이 피어오르는 먼지.
#4
다시 정면의 앵글. 도시가 무너진 자리. 끔찍한 폐허.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폐허의 흐릿한 분위기와 정반대의 찬란하고 명료한 태양. 태양 천천히 한가운데로 이동한다. 태양이 절정에 왔을 때, 여자가 쓰러진 자리에서 황금빛 어린아이가 하나 나타난다. 먼지가 서서히 걷히고 폐허의 잔재들 사라진다. 작은, 뾰족한, 연두색 새싹들이 조금씩 대지에서 솟아나기 시작한다. 아이의 가슴에서 천천히 작고 가난한 성당이 하나 빠져나온다.
3 - 빛나는, 순연한, 만져지는, 어두운
어젯밤 잠들기 전에
거대한 검은 벨벳 장미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다
꽃잎 가장자리는 야광 장식으로 테가 둘러져 빛나고
<그것>이라고 숨 쉴 틈도 없이 단번에
나는 생각했다
장미가 떠 있었던 (어떤) 어두움
아주 깊은 - 그리고 먼
스스로의 힘으로 빛나는
아주 어둡고 아주 밝은
삶이 그 체적 전체로 와서
내 육체 전체에 뺨을 부볐다
겨워라 삶이라는 신비
<있는> 별
김정란
그렇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은 언제나 질곡이었다. 잘못 꿰어진 단추.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애썼던가. 어긋나기 시작한 걸음걸이. 나는 거의 포기한다. 내가 꿈꾸는 것은 너무나 멀리에, 너무나 아름답게 (있다). 또능 거의 있다. 그대는 있다, 내가 알듯이. 아,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밤새 잠을 설치고, 불러내도 불러내도 늘 올 듯 말 듯 한 지혜의 문 앞에서 운다. 대체 이 문을 어떻게 열 수 있단 말인가.
가능하다면, 나는 그대들을 닮고 싶다. 칼과 돈을, 교수대의 밧줄과 교언(巧言)의 혀를, 힘센 자를 잘도 골라 적절히 허리 굽히는 그 비법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여러 개의 얼굴, 또는 두꺼운 피부를. 나는 그대들을 흠모한다. 오, 나의 주여, 어찌하여 내게 사랑을 주시나이까. 내가 그로 인하여 새카맣게 타나이다, 용서하소서, 내가 이 잔을 들고 쩔쩔 매나이다.
걸어도 걸어도 이 길은 늘 스산한 황혼길이다. 그분의, 어느 분의, 어느 새벽, 또는 어느 밤, 어느, 또는 그 시간, 시간의 변경(邊境), 시간의 일탈, 찬란하게 이곳을 탈출하기 위하여 나는 늘 걷는다. 걸인의 행장. 그러나 가슴 한 귀퉁이의 이 버려지지 않는 별 하나, 거의 <있는> 별 하나, 그대의 꺼질듯한 연약함에 기대어 나는 (여왕)이다.
그렇다, 나는 참을 수 없이 신(神)을 믿는다, 아니다, 오히려 나의 걸인의 행장에 대한 자부심을 믿는다. <그 시간>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는 이 걸인의 갈증, 순수하게 가슴 뛰는 이 막연한 사랑만이 내 삶의 보장 전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힘세고 아름다운 그대들을 흉내 내지 않는다, 나는 그대들을 흠모하지 않는다. 내가 영혼의 아주 깊은 눈으로 보아 알거니와, 그대들의 밧줄은 나를 묶지 못한다. 천년을 살아 어디 한번 휘둘러보시라.
어느 날 밤, 기어이 별은 감옥 문을 연다
잎사귀 바람 만지며 돌아누울 때
김정란
아마
몇 생쯤 전이었다
내가 저 잎사귀처럼 슬프고 아름다웠던 것이?
눈이 아파
가슴도
피부도
땀구멍도
내장 속의 돌기까지도
그 잎사귀
바람 만지며
가만히 몸 뒤챌 때
난 알아
(난 기억한다고 말하지 않아)
나도 언젠가
그렇게 당신을 만졌었어
바람 같은 당신
아직도 그 잎사귀
바람 만지며 돌아누울 때
후두둑 소금 떨어지네
내 몸 당신 몸에 닿았을 때
그때 세계의 바다 밑에서
죽은 모든 여자들 모여
소금 만들어내던 소리
지금 그 소리 듣고 있네
그 소금 살에 묻히고
살아야 할 시간 안으로 걸어 들어가네
찬찬히 세계의 / 나의 시간 섞어 짜며
그래서 저 잎사귀 / 그 잎사귀 한데 붙여놓고
그리움의 거리를 몸의 체적으로 채우고
지금은 저기 있는
저 잎사귀 뒤에
당신 그림자 놓아두고
착하게 혼자 놀게 놓아두고
잔혹한 외출
김정란
바다
해가 졌다
저녁내 흔들리는 모랫벌
대낮은 편안한, 규정된 부피를 부정하는
칼처럼 달이 뜨고
바람이 잔잔히 불기 시작한다
살이 저며지고 있다
아니, 오해 마시기를
이건 부패가 아니다,
싱싱하고 생생한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신선한 살의 이별
결 따라 완벽하게 저며져 뼈를 떠나는 삶
희디흰 뼈 눈부시게 드러나고
바람과 바람의 결 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던
잊혀진, 강렬한 말들이
핏줄 위에서 널을 뛰기 시작한다
잔혹한 외출
최소한의 삶으로 버티던 여자 하나, 모랫벌을 달려가
시퍼런 바닷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장미 화환을 쓴 암흑
김정란
어느 날인지 내 리듬이
몽땅 허물어졌다, 그 사이로
어떤 손이 나를 잡아끌었다.
그 커다란 손이 나를,
운명적으로 만들었다.
암흑과 절망이 내 사지를
눌렀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내가 암흑 속에서 울면서
하느님을 생각했다. 언제나
내 존재의 깊은 상처에
별빛 눈길이 남아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깊이깊이 어두움을 헤집고 다녔다,
그곳에서 졸음이 왔다.
그리고
딩동딩동 노랫소리를 들었다.
멀리 달려갈수록 더 멀리 반대편의
몫이 가까워진다, 삶과 유머.
외계로 내 긴장한 혼을 열 때마다
들리는, 랄라,
엉뚱한 노래들, 악의에 찬 노래들.
나는 암흑에게 장미꽃 화환을
둘러 주었다, 나는 요정처럼 즐겁게
`나의 암흑'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내 것인 암흑을 잘 알아보기 위해.
어느 날 내 것인 절망을 부리며 살기 위해.
저녁 노래
김정란
차마 못 다한 말로 가슴이 찢어져
안으로 드리우는 母音의 혓바닥 안고
세계의 헛된 들과 세계의 미망(迷妄) 속에
서성이는 자들
저녁을 향해 간다
그들은 오만한 모음의 습관으로
저녁의 뜰에 불을 지른다
불꽃은 그들의 혓바닥 까맣게 그을러 먹고
배가 부르다
그럴 때, 그들은 모음 주위를 맴돌며
춤이나 추다가
춤이나 추다가
쓰러져 운다
너희, 저녁으로 돌아간 저녁의 아이들,
안으로만 자라는 평안의 혓바닥이
이윽고 너희 몸까지 삼켜버리면
깊은 모음의 계곡에서 생각해 봐
울다가 문득 생각해 봐
너희 울음 홀로 강하여져 신(神)을 만나는 것
너희 홀로 우는 울음
함께 무성한 숲으로 일어나
각각 맹랑하게 변신하는 것
그러니 두려워 말자
이제 혀의 빨간 상처라도 되자
이제 혀의 깊이 파인 한의 계곡이라도 되자
모든 것 보내고 보낸 뒤
가여운 육신만 남기고
우리가 하늘과 땅에
죽도록 남는 단단한 길이 되어 울음 울겠네, 울겠네
백날이나 천 날이나
저녁 뒤에 숨어 솟아오르는
완강히 감긴 神의 눈을 기어이 불러내겠네
전골남비 속의 희한한 허공
김정란
나는 찌개를 잘 끓여요 먹기도 잘 먹고요 어릴 때 엄마는 나에게 아이구 이 찌개 구신아 그러셨었지 그게 예언인 걸 그때 난 몰랐어요 난 뭐든 보글보글 끓이는 걸 좋아한다구요 왜냐하면 내 영혼이 바로 찌개남비거든요 뭐든 범벅으로 집어넣곤 하아하아 끌탕을 해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배짱으로 믿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예요 왜냐하면 그게 집중적인 살기의 방식이 만들어내는 에너지 소비 형식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가짜였다면 진작 꺼꾸러졌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거든요 보글보글 끓으면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건 어떤 믿음 없이는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녜요 그 믿음이란 게 아무리 신통찮은 것이라도
내가 제일 잘 하는 건 내 영혼의 내장까지 다 뒤져내서 있는대로 조물락거린 뒤에 적당히 콤콤한 열등감 소외감 쓸쓸함 등등의 밑간을 해가지고 시대적 묶임이라는 지리학적 위상의 전골남비 속에 넣고 한바탕 끓여내는 거랍니다 걱정 말아요 나는 절대로 찌개국물이 남에게 튀게 안 한답니다 그것에 관한 한 도가 터 있어요 나는 내 찌개가 내 문제인 걸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요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지요 혼돈 안에서 혼돈이 맥을 잡더라니까요 이게 무슨 일일까 나는 요즘 눈이 휘둥그래져 있어요 어떤 천사가 물꼬를 낸 것일까 나는 내 영혼이라는 전골남비를 들여다봐요
신기하기도 하지 그 돌돌대며 펄럭이며 움찔옴찔 파드득대는 부적응의 전골남비 한가운데에 어떤 서늘한 허공이 낙낙히 생겨나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무섭도록 고요한지 그리고 자기 안에 통일되어 있는지 가만히 잘 들어 보면 무슨 날개소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하구요 난 그걸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아직 잘 몰라요 다만 어떤 통로인 것 같기는 한데........
난 조금 더 있다가 남비를 들고 하느님께 가 볼 거예요 어때요 보시니 드실만 하신지요 라고 겸손히 물어 볼 꺼예요 다시 끓이라 하시면 다시 끓이지요 뭐 제대로 끓일 때까지 그이가 시간을 주실 꺼예요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절망적인 시법(詩法)
김정란
나는 구체성의 원수이다.
나는 구체성을 향하여 돌진한다.
죽어라.
나는 아무렇게나 말한다. 요컨대, 나는 자주 잘 말한다.
사실은 아주 말 잘하고 싶을수록 나는 아무렇게나 말한다.
나는 시니피앙을 들이대며 악악댄다.
(요컨대 나는 들키기 싫은 것이다.)
숨겨진 옷자락 가늘게 흔들리는…내가 숨죽여 이토록
사랑하는…보여줄 수 없는…세상은 거칠어…작은 아니마.
나의 예쁜 병균. 나는 그것과 더불어 꽁꽁
자폐의 형식을 음모한다. 모반.
알지…세상에선 딱딱한 형식만이 득세한다.
젊은 프랑켄슈타인
김정란
1 - 오월, 소문의 벽
오 맙소사 하느님 아버지
그들이 밤에 왔다
우리가 알라딘의 등잔불인 듯이
의식을 등걸 위에 올려놓았을 때
그 막간의 어둠을 이용하여
교활하고 치밀한 그들이
우리의 낙관주의 쪽으로 먼저
문을 닫아걸었다
소리 내지 않는 음흉한 타락의 손
우리의 힘없는 기도를 그들이 한 손으로 잡아들였다
그들이 그것을 한 단의 부케로 만들어
우리의 면전에 되던졌다
그런 식으로 삶의 벽 위에
매달려 비실비실 말라가는 우리의 기도
장식적인 알리바이
모욕적인 무력한 기다림
우리의 가슴에 불길이 일었다
불길이 일었다 하루가 천년처럼
그들의 술수가 완벽할수록
우리의 적의도 완벽하다
너무나 완벽하다
존재, 거지
김정란
빨리 늙어 버리고 싶어 아예
아무런 생생함에도 더 이상 시달리지 않는
빛이란 빛, 빛의 예감, 소질들 몽땅 죽어버린
시커먼 돌덩어리, 지혜로운 쭈그렁바가지
실종의 욕심장이, 야차가 되고 싶어
추악하고 무거운 살, 살뿐인 살이 되고 싶어
이건 싫어 정말 이건 싫어
빅뱅! 연속되는, 이 견딜 수 없는 긴장!
늘 거기 눈뜨고 침을 삼키며 백열의 환희를
기다리는 늙지 못하는 여자, 시, 감질나는,
드러나지 않는 예감, 가끔 와서 내 영혼을
잔인한 빛으로 물들이고 가버리는, 일상의
어느 주름살 틈바구니 틈바구니에 악마처럼
숨어서 반짝이는 위험한 칼날, 날카로운 금빛 파편
나는 거지처럼 목을 빼고, 이 재산이 안되는
말의 금가루들을 구걸한다 지겨워 죽고 싶어
종이비행기 접기
김정란
밤새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내가 언어를, 행위의 꼬랑지도 아무것도 아닌 이 난감한
문화사의 세련된 망종을
삶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
징그러웠다
아침의 소질도 보이지 않는 이런 밤에
우리가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벽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런 밤에
우리가 교묘하게 적에게 먹히운
밤에
나는 이를 북북 갈며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유선형의 발랄한 몸으로 날기 위해서
온갖 역사적인 억압을
부모 형제 내 유전인자 내 권속이라고 부르며
솟아오르기 위해
다른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이렇게 초월의 포즈 취하기로 우리가 늙어가도 좋은 것인지
누구에게 물어 보아야 하나
누구에게? 어느 벽에게?
죽은 `엄마'에 의한 엄마의 교정
김정란
1
엄마가 죽었다. 사실적인 죽음의 예증(例證)이
눈앞에 나열되었다.
염(殮), 입관(入棺).
그리고 드라이하고 선연하게
머릿속 수레바퀴가 멈추고
사고가 선언한다.
'엄마는 죽었다.'
2
아버지는 아프다. 중풍이다.
엄마가 곁에 앉아 있다, 정성스러운 엄마.
아버지가 아기처럼 칭얼거린다.
엄마가 다독거려준다.
둥둥 내 아기 자장자장 내 아기.
3
아버지의 병이 낫는다, 말끔히.
시냇가의 조약돌 같은 아버지, 아버지는
꽃밭을 거닐고 있다. 국화꽃의 향기가
가슴을 흔든다. 엄마가 곁에서 웃고 있다.
작은 불꽃처럼 흔들리는 따스함.
4
수퍼마켓, 팝콘을 사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엄마! 아, 엄마가!
여지껏 깨닫지 못했다니!
아! 죽은 엄마가!
5
엄마가 바느질을 한다, 늘 하듯이
입에 하나 가득 노랫소리를 문 엄마,
내가 문간에 선다. 엄마……
엄마가 쳐다본다, 시선이 부딪치고
우리 사이에서 아, 강처럼 소리 내어 흐르는
이승과 저승의 아픔.
6
아버지는 진찰을 받고 있다.
병원 복도에서 엄마가 나비처럼
걷고 있다. 내가 다가선다.
엄마……
응?
그곳은 어떤 곳이유?……사뭇 다르우?……
글쎄, 무어랄지……형식의 저 너머……안개 무리랄지……
우리가 생각나서 온 거유, 엄마?……
……낮은 소리의 웃음, 작게, 아주 작은 메아리 같은……
우리가 보고 싶었수?
그래, 하지만 그곳에선 그 때문에 시달리지는 않는단다.
길다란 복도가 명부의 편안한 웃음으로 감싸였다.
흰옷을 입은 닥터가 천사처럼 스르르 미끄러져갔다.
재미있어, 내 가슴에서 아주 작은 솜털들이
즐겁게 바시락거렸다.
7
잠이 깨었다. 가슴이 떨고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일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명부(冥府)를 생각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햇살로 가득 찬 명부(冥府)를……
지상의 나무들
김정란
길, 지상의 길 위에서 나무들이 숨을 죽인다. 그들은 영혼의 마른 이야기로 버석대며 우리 영혼의 고향, 메마른 고향의 상형문자들을 얘기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들 행복해라. 그들의 가난한 생존에 제 피를 뽑아주는 자들 당당해라.
프랑시스 잠의 저녁. 프랑시스 잠의 가로수길. 어디서든지 평안할 수 있는 겸손한 영혼을 가진 자들. 내가 우주가 되리라고 내가 너희를 맑게 하는 우주가 되리라고 깊이 고개숙이는 자들의 평안하고, 평안한 석양.
길 위의 나무, 나무, 서서 있는 자들. 서서 얼어붙은 손으로 팔을 벌리고 기도의 애원으로 잎을 피우며 가끔 참을 수 없는 몸짓으로 상형문자의 꿈을 말하는 자들, 샨티 샨티. 보석처럼 숨어있는 자들의 수줍은 기다림을 말하다가, 기다리다가, 나무는 얼어붙은 생존의 습관, 생존의 방향으로 기울기만 할 뿐, 나무가 피우는 잎사귀들, 그 반짝임이 나무의 것이 아닌 때가 되면, 그 공허한 생존의, 줄기...... 그 줄기에서 독립하는 나무의 푸름, 잎새, 생명......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 당당하다. 거기에 하나의 화면을 만들고 모든 순간을 메마른 삽화로 오려낼 것. "여기와 저기에 있음"으로 너희 무한의 삽화는 계속되어 슬픈 이야기, 이야기의 실을 타고 팔락팔락 쓰러지리라.
나는 듣는다. 쓰러진 너희가 눈감는 소리, 아, 가슴 저미는 순명(順命), 예쁜 노예들. 슬픔이 이마에 별처럼 반짝인다. 나는 너희들 곁에 천천히 눕는다.
지하철에서
김정란
낮에 애들 앞에서 어설픔으로 진저리 치며 그러나 꾹꾹 눌러 참으며 글쓰기와 꿈꾸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고 나는 참을 수 없어서 종일을 굶었다, 견딜 수 없었다, 이, 수없는 말들, 허망함으로 이빨을 가는, 오 떠도는, 우리가 만들어낸, 저 넝마들을.
이 턱없는 삶. 나는 밥풀 딱지같이 세계라는 밥그릇의 가두리에 붙어 있다, 용서해다오, 세계여 또는 밥이여,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들어낸다, 바깥쪽으로?
밤에, 지하철 창에 비치는 어떤 한 여자, 안의 짐승이 울부짖었다. 맞아? 틀림없어? 너냐구, 그래? 그리고 묵시처럼 찾아오는 눈물…… 우리가 이름 붙이지 못하는 어떤 알맹이를 향하여 나는 떨며 떨며 서 있었다.
나는 그 여자를 향해 기어갔다, 날지 말자, 어쨌든 당분간은. 나는 통곡하며 그 여자에게 빌었다, 제발, 너라도 되어야 해, 그렇게 하자, 그것으로라도 나 스스로의 유령이 되지 말아야 한다.
천 년 동안의 고독
김정란
그녀는 그 언덕에 천 년 전에 도착했다
오 까실한 언덕 늘 따가운 가시가
그 언덕의 등성이에 솟아올랐다
언덕이 울며 말했다:
엄마, 아파, 내 가시를 빼줘.
그녀는 천 년 동안 그 언덕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세계의 강들만큼 많은 흉터가 생겼다
딱지가 앉을 때쯤, 가시는 또 솟아났다
그녀는 말했다
흐르는, 머물지 않는, 언제나 출발하는 피의 순수성의 이름으로:
아니야, 난 아프지 않아, 널 안아줄 테야
보이지 않는 깊고 깊은 숨겨진 눈물이
늘 그녀의 눈 속에서 흔들렸다, 사랑,
어느새 하늘을 닮은, 쓸쓸하고 무관한 사랑,
침묵의 끄트머리를 언제나 가만히 들어 올리는,
우우....... 파랗게....... 저만큼....... 늘 흔들리는.......
그녀는 늘 까실한 언덕을 안고 잠든다 천 년 동안 묵묵히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아직도 천 년은 더 그렇게 하리라
천 년 전에 물가에서 - 시와 붙어버린 생
김정란
말들이 가물가물 차오르면
난 내 가슴의 우물물을
버드나무 국자로 퍼내지요
천 년 전에 당신이
버드나무 늘어진 물가에서
내게 깎아주셨잖아요
버드나무는 낮게 낮게
물과 하늘과 땅에
참, 열심히도 절을 하대요
물 위에는 죽은 사람들
환히 웃으며 떠서 지나갔지요
그 이들, 참, 아름다웠어요
당신 이마 위에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던 게 생각나요
문득, 비구름에 몰려오고
빗방울 두어 방울 후둑 떨어지고
오늘, 국자로 물을 뜨다가,
내 얼굴을 보았어요
당신인지 난지 죽은 그 이들인지
아님 버드나무인지 나비인지 빗방울인지
웃다가 보니까 국자가 손에
붙어버렸네요 글쎄 나도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봐요
참 좋아요 그럼 당신 만날 수 있잖아요
천사
김정란
이따금 가로등불 밑에 그림자들 두엇 지나간다
작은 속삭임 나지막이
어떤 갑작스러운 몸짓이 허공에 솟아오른다
느닷없이, 단속적으로,
그 몸짓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관하다
그것은 홀로 우주를 소환한다
몸짓 사이, 금속성의 눈빛, 잠깐 번쩍인다
독립적인,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 통합되는,
다치게 하지 않는, 어떤 사나운 아름다움
그리곤 다시 고요
난 당신을 기다린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곤 기다린다
난 이제 거리(距離)가, 어긋남이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낮은 낮은 비명소리도
내 생은 고비를 넘겼다
거리(距離) 위로 천사들이 옷자락을 쓸며 지나간다
내가 울었던가? 아마 천년쯤 전에
천사들이 내 눈물을 가져갔다
기다림 안에서 내가 한없이 자유로워지도록
난 가만히 있다 다만 가만히 있다
때로 시간의 힘줄이 만져진다
첫눈
김정란
그녀는 창가에 서있다
읽던 책은 몇 페이지 남지 않았다
그녀는 본다
사물들 눈부셔하며
고요히 일어나
적요 속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그녀는 적요 속으로 되돌아간 사물들을 바라본다
그녀는 낮게 덧붙인다
'근원적인'이라고
그녀는 책을 가슴에 끌어안는다
토끼 발자국 저 멀리 종종대며
흰 눈 위를 달려온다 이윽고
책장이 눈밭 끝에 이어진다 까만 토끼 발자국
재재거리며 폴싹거리는 까만 글자들
바람, 그녀의 몇 장 남지 않은 가슴을
조심스레 넘긴다 눈발을 날리며 까만 글자들
떨어진다 토끼 발자국 송송
그녀의 책-가슴으로 들어온다
지워진 글씨들 침묵의 혀로
말하기 시작한다
적요 문득 희디 흰
침묵, 바닷가에서 주운 칼날
김정란
나는 이제 망설이지 않는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므로
나는 내면의 신전에 내려갔었다
신탁은 분명했다 그것은 쓰여진 글자였다, 이번엔
당당하라, 너를 죽여라, 그리고 너 자신이 되어라
나는 거대한 침묵에 휩싸여 무섭게 조용해진다
어제 새벽에 내가 찾아갔던 푸르고 검은 바다,
바닷속 어느 숨겨진 지역에서 낮게 빛나는
적의에 가득 찬 빛의 아름다움에 놀라서
나는 맨발로 모랫벌을 오랫동안 헤매어 다녔다
무엇인가가 내 발을 찔렀고, 나는 그것이
녹슨 칼날 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들을 주워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왔다
어제 오후 무렵부터 명치 끝이 뻐근히 아파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칼들이 가슴 속으로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파고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가슴 어느 오래된 지역에선가
녹이 씻겨나가고 새파란 제 색깔을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밤, 보름달이 뜨고,
그것들 달빛 아래에서 신성한 푸른 빛으로 날카롭게 벼려진다
나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림으로 흔들림을 다시리는 방식을 익혔으므로
나는 흔들리는 연약한 내 안에서 단단하다
나는 사물들의 뿌리에 나의 쇠붙이를
가만히 가져다 놓는다
그리곤 낮게 배를 깔고 바라본다
그것들 체계의 사이와 사이를 조용조용
그러나 날렵하고 가볍게 헤집고 다니는 것을
그리고 제3의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을
꿈꾸는 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다
커피타임
김정란
난 내 아픈 마음을 커피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추억은 설탕쯤으로 해두기로 하고
다이어트해야 하니까
너무 많이 넣으면 안 돼
아주 조금씩 아껴서
커피의 쓴맛이 힘을 잃을 정도로만
하루에 다섯 잔만 마시자, 라고 생각했다
가버린 시간과 오는 시간 사이에
바늘구멍 내고 하루에 다섯 번
커피 들고 피난 간다
흠, 흠,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듯이
필사적으로
그 커피 마시면 내 몸뚱이가 둥 뜬다네
내가 없어졌어 얘가 어디 갔나 찾아보면
몇 개의 맥락들이 들쑥날쑥 무질서하게
그러나 어쨌든 위로 위로
날 집어던지고 있다네
(물론 아직 명쾌하진 않다)
하느님, 나 그럼 이제 안 아프게 해줄 거예요?
난 흐르는 시간 속으로 심상하게 되돌아와
조용조용 서랍 정리를 시작한다
아파도 괜찮아
다만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기만 하다면
그때까진 인간의 시간의 이름으로
몇 번이고 더 찢어지겠지
괜찮아, 하느님,
견뎌내고 기다릴 힘만 주신다면
그 사이 바늘구멍 점점 더 넓어질 테지
난 그걸 믿어
타인(他人)들과의 관계
김정란
나는 그들 곁에 있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참을 수 없이
이것봐, 두부들아
그리고 나는 조심성 없이
아무 데나 그들을 푹푹
찔러보았다
(언제나 내 뒤에는 내가 지나온 시절의 바람이 불었다 뒤돌아보면 내 발자국들이 나를 규정하며 펄럭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핵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들이 무형일수록
더욱 초조했다
내 뼛속에서 악마들이
달그랑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작은 영토가 답답해서
종일 뒤척였다 나쁜 년
악마들이 말했다
나는 나이가 먹었다
그래도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었다
그러나
문득문득 내 손끝에 팽팽히
긴장한 감촉이 왔다
그들이 내 손끝을 깨물었다
그리고 나는 몇몇 얼굴들을 식별해냈다
아직도 분명치는 않지만,
그들은 두부가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탈출
김정란
몇 개의 시선, 흔들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숨겨진 거울에 부딪혀 이따금 탁탁 튀는 불꽃들. 그리고 그걸로 끝이다. 나는 더이상 없다. 내가 귀신처럼 내 밖으로 나와 참으로 괴이쩍은…… 저 대강 만들어진 밀가루 푸대를 들여다본다. 흉, 축 늘어졌군. 나는 그것이 부시럭대며 사방으로 쏘다니는 걸 지켜본다. 못 말려.
전철 타다가, 지하도의 계단을 올라가다가, 또는 미역국을 퍼먹다가, 갑자기 대책 없이, 이유도 모르는 채. 나는 내 밖으로 빠져나온다. 존재 - 이 망연한 갈증…… 내 가슴속, 어디에 남아있었던 것인지 모르는 짐승들이 와와 가볍게 날갯짓하며, 여긴 좁아, 좁다니까, 풀어줘, 죽겠어, 라고 소리 지른다. 그래, 정말 보인다. 아주 환히 들여다보인다, 그럴 때, 나를 칭칭 묶는 사슬들, 시간, 직업, 국적, 역할 등등, 염산에 닿은 쇠처럼 푸시시 녹아 버리는 것. 그리고 날개들, 와르르, 묶여있었던 만큼 더욱더 와르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
내가 또는 (내)가 보고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그리고 다시 텔레텔레 걸어 들어간다. 일상 또는 참을만한 진창. 늘 고만고만한. 밀도. 체적. 묶임. 어두움……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저 은밀한 음모를 잠재우며 내가 온순하게 다시……
(눈빛 몇 개, 영 떠나지 않는 달빛, 어스름 위에 배회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유령 몇 개, 영락없이 함께)
그러나 존재는 불꽃들 뒤에도 여전히 같은 것일까?
파롤, 가난한 말 - '언어의 본질은 `결핍'이다'라는 명제를 기쁨의 이름으로 뒤집기
김정란
아이들의 팔랑이는 옷
나는 옷의 확실한 물질성에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그 애들의 드러나지 않은 순결한 밀빛 살 위에
아, 저렇게 어두운 빛의 옷이, 어째서?
아줌마, 아이들이 다가와 말했다
봄, 아줌마, 그래요, 우리는 봄이에요
우리의 봄의 몸에 입혀진 가을의 옷
그게 딱해서 그래요?
하지만 어때요, 결핍으로 인해
우리의 봄의 존재 이유는 한결 돋보이는걸
어떤 이가 말했다, 아주 딱딱한 자로
우리의 몸을 탁탁 두들겨서
일렬로 서게 만든 뒤에,
'애구 딱해라 가난한 족속들'
우리는 결핍의 옷을 마구 흔들어댔다
모르시는 말씀 우리는 뒤서거니 앞서거니
마구잡이로 대열을 흩뜨렸다
우리가 묶여있다니!
터진 옷 틈새로, 별빛, 진주빛,
살들이 마구 삐져나왔다
안에서 파열하는 존재,
가난한 집안의 숨겨진 재산들
나는 아이들이 예뻐 죽을 지경이었다
다시 말하면 삶이…
아니면 가난해도 이토록 당당한
아이들의 실존이, 또는 그것을
지키는 어느 시인들의 밤샘이…
파비안
김정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달려갔다. 어머니, 착한 어머니.
길이 우리 앞에 있었다. 시간이 죽은 거리.
우리는 나비처럼 옷을 벗었다. 어두움.
뱀처럼 꿈틀대는 길. 그것은 우리보다 강했다.
누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진실보다 아름다웠다. 진실을 향해 옷을 벗어던진 여자.
진흙이 일어섰다. 안녕.
'너무 늦었어요. 너무……'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삼켜졌다.
인류의, 타락한 종족의 방황이 신(神)을 겨누고 흔들렸다.
도처를 향(向)한 표적.
편지
김정란
그대는 내 새벽 안개.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건 늘 당신입니다.
오래 방황했습니다. 육체는 피곤하고 혀로는 죄를 저지르고 그리고 일상의 수치는 끝나지 않습니다.
숲이 떠나가네요. 새들이 날아오릅니다. 새들은 언제나 눈을 뜨고 날아갑니다. 그들을 위해서 세계의 끝에서 종이 울립니다. 내 사랑 당신도 사뭇 따뜻한 삶의 터를 버리고 날아갑니다. 그대, 언제나 단 한 번만 있는 새벽안개 속으로. 그 끝에 신(神)이 계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홀로 떠오르는 자들에게 손을 주십니다. 결국,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만나는 것일까요. 결국, 홀로 완벽하게 있기 위해서 우린 사랑했던 것일까요. 결국, 순결한 이별을 위해서 우린 그토록 따뜻한 추억들을 만들었던 걸까요. 결국, 아름답게 잃어버리기 위해서만?
그 쓸쓸함 속에서 나는 그대의 어깨 너머 떠나가는 숲을 배웁니다. 그대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깊은 숲을 향해 떠나는 내가 됩니다. 당신은 새벽 안개에 씻긴 내 그림자, 내 맑은 본질입니다.
폐허의 집
김정란
당신은 어디 있을까? 지금? 오, 아무려면 어때.
어제? 내일? 천년 뒤?
난 당신에게 아무 요구도 하지 않지, 난 기다리지도 않아,
그런 경지쯤 진작에 뛰어넘어 버렸거든.
내가 어떻게 하는지 말해줄까?
난 시간을 뭉개 없애지
(물론, 나까지 사라질 각오를 하고)
그리곤 당신을 발명하는 거야
거기, 허공, 내 폐허의 집,
모든 줄거리가 빠져나간 슬픔의 집,
하늘이든지, 땅속이든지, 어디든지, 아무 곳도 아니든지
거기에서 당신이 살게, 언제나, 아무 때나,
그 집엔 굉장히 방도 많고, 층도 많아
그래서 난 요즈음 숨을 참 잘 쉬지
오 천지가 당신이야, 후아, 향내,
그 집 문이 열렸나 봐......쉬잇!
화장
김정란
내가 내가 아니었어도 아무렇지도 않았을 테지, 그러면서 나는 이 끔찍한 서른 몇 살의 팅팅 불은 두부를 바라본다. 두부여. 두부여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을 때, 사실은 나는 굉장히 무섭다. 정작 그때부터 마음 놓고 나는 두부가 되어갈지도 모르니까.
무서워. 나는 작게 조바심친다.
언젠가 나는 겁도 없이 그대에게 말했지. 아닌 게 아니라 이젠 추해지는 게 무섭지는 않아요, 라고. 나는 푹푹 썩으면서 물귀신처럼 그대를 끌어넣으려고, 뻘밭처럼. 아니, 그렇지는 않다, 사실은, 나는 내가 나인 것이 견딜 수 없어서 그냥 내다버리는 거지, 나를, 두부가 되기 싫어서, 나는 내가 아니고 싶어서 아무렇게나 내가 되는 거지.
하느님. 다시 만들어줘요.
나는 푹푹 찍어 바르고, 분칠을 하고 법석을 떤다. 화장하는 두부, 아 웃기는 일이지.
나는 돌아선다, 나는 언제나 돌아선다.
4월
김정란
캠퍼스의 이쪽과 저쪽에
햇살이 떨어졌다 그들은
일어섰다 같이 있어야 해 낮이라도
밤이라도 저녁 어스름 어느 새벽에라도
밤은 언제나 느닷없이 우리의 어깨를 쳤다
진실로 어떻게 말해야 하나 꽃
오 영혼이여 어떻게 말해야 하나
눈밝은 정신이여 무엇을 말해야 하나
어느 곳을 다니다 온 봄,
갑자기 우리는 따뜻해졌었어 그해 4월
우리는 같이 있었어 밤이 와도 어느새
무섭지 않았다
누구는 쓰러졌다
스물두어 살 혹은 백 이십 살 짜리 삶
또는 꽃 또는 4월 또는 가슴의 가슴의 가슴
딴전을 피우다 이윽고 눈뜨는 뜰
네게 손이 두 개뿐이더라도 이천 개의 손을 다오
네게 가슴이 한 개뿐이더라도 천 개의 가슴을 다오
그들을 쓰러뜨리지 않고 싶어 그들이,
한번 가졌던 열쇠를 얻어 가지고 싶어
천 개의 가슴을 단번에 열던 그 열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