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로즈린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와 소온이 11세기로 되돌아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여인숙 바깥에 서 있었다. 안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오고 가까이에 있는 부둣가 특유의 내음이 코를 찔렀다. 그러나 그녀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믿을 수 없어 하던 배리의 표정을 아직도 음미하는 중이었다. 그런 배리의 모습을 다시 만날 수 없음은 매우 유감이었으나 세계의 역사를 제대로 돌려놓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빙긋 웃으면서 소온을 흘끔 쳐다보았다.
"만약 사라지는 우리를 누군가 보아야 했다면, 그게 그 남자여서 무척 기분이 좋아요."
그가 투덜거렸다.
"당신의 블루베리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남자가 아니오. 그 남자는……."
로즈린은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던 그의 표정을 기억하고 한마디 던졌다.
"글쎄, 그건 거짓말 같군요. 당신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 없다는 식이었잖아요.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내 남편이 아니에요. 적어도 우리가 여기서 일을 바로잡는 한은 말이죠. '전 약혼자'라는 딱지가 그런 바보에겐 더 적절해요."
"난 상관있소, 로즈린."
소온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졌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면 더 좋았을 거요. <흡혈귀의 저주>는 춤을 추고……."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살인은 필요 없는 일이에요, 소온."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그런 여자다운 말을 할 수 있다니."
그녀는 빙긋 웃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를 손봐 준다고 하더라도 난 상관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를 손보다니?"
"살짝 한대 때리는 것 말이에요."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에게 '살짝'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 형인 토르에게 물어보시오. 난 유일무이하게……."
"또 허풍을 떠는 건가요, 소온?"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나서 대답했다.
"바이킹은 자랑을 하지만, 오직 사실에 관해서 만이요."
웃음을 터트리던 로즈린은 갑자기 그와 함께 너무 즐거워하지나 않는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순간 소온은 자발적으로 그녀를 구해 주기 위해 왔다. 갑옷을 입진 않았으나,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빛을 발하는 기사였다.
"이제 또 다른 당신을 만날 시간이 되었군요.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가 이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에요. 혹은 숙녀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아니, 그곳은 숙녀를 위한 장소가 아닐 뿐더러……."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녀가 말을 가로막았다.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으니까요."
"그리고 로즈린, 난 당신이 그런 장소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소."
그가 덧붙였다.
"고맙군요. 그렇다면 또 하나의 당신은 아직 그곳에 들어가지 않은 게 확실한 거죠?"
"그렇소. 하지만 내가 그날 밤 도착했을 때 존 경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오. 내가 그를 지금 침대로 데려다 놓으면 당신은 나의 분신과 일을 벌일 필요가 없소."
"잠깐만요,"
그녀는 깜짝 놀랐다.
"난 당신과…… 또 다른 당신과 만나는 거예요."
"난 당신이 그를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소, 로즈린. 그는 당신을 모를 거요. 그리고……."
"알아요, 알아. 나도 안다구요.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 뿐이에요. 그렇지만 당신이 그 안에 들어가 존 경을 끌어내는 사이에 당신 분신이 도착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만약 존 경이 그 즉시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마도 존 경을 그 장소에서 나오도록 만들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아, 그는 그날 밤을 위해 골라놓은 여자가 있었소. 가장 예쁜 여자였지.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술 마시기 내기를 제안했을 거요. 난 그녀를 가지고 싶었으니까."
어디로부터 나왔는지 모르는 질투가 그녀를 마구 찔러 대었다. 이건 모순이었다. 다른 여자를 원했던 소온 블러드링커는 적어도 지금 곁에 있는 소온이 아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소온은…….
"이번에는 유혹받지 않겠다고 확실하게 말해요."
그녀가 불평을 터트렸다.
소온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그의 몸이 자신을 세게 누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입술이 마구 파고 들고 팔은 그녀의 몸을 꼭 껴안았다. 불과 몇 초만에 그녀를 들뜨게 만들어 버려, 그가 키스를 끝내고 놓아주었을 때엔 좌절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로즈린은 자기들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녀와 사랑을 나눌 의도가 아니면서 그런 행동을 보인 그에게 똑같이 앙갚음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소."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지금 날 유혹하는 여자는 단 한 사람뿐이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바보처럼 방긋 웃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그러나 앙갚음을 하겠다는 생각은 벌써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이제 당신은 바쁘게 움직여야 해요. 그리고 만약 존 경이 원하는 대로 한다고 해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만약 당신이 그 여자에게 돈을 조금 집어준다면, 그녀는 당신의 부탁대로 그를 침대로 유혹해 줄 거예요."
"그것 좋은 제안이오."그가 대답했다.
"난 여기 모퉁이에 숨어 있을게요. 만약 당신이 시간을 너무 오래 끌면 나도 뭔가 일을 해야 하니까요."
"여기에는 뒷문이 있소. 거기서 날 기다리시오. 아마도 당신이 나설 필요가 없을 거요."
"좋아요, 좋아. 어서 가세요."
그는 갔지만, 그녀는 그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
로즈린은 그늘진 곳이 많아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건물의 모퉁이로 가서 벽에 등을 기대고 기다렸다. 소온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테고, 그가 일을 끝내고 나와 뒷문에서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면 아마도 이름을 부르며 찾아 나설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은 그녀에게 화를 낼 테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 걱정하기로 했다.
어쨌든 로즈린은 진짜 소온이 거기에 있는 동안 너무 빨리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소온을 만나 여관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만약 소온과 소온이 서로 마주쳤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또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는 건물 뒤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29
로즈린은 숨을 멈추고 모퉁이 너머로 살짝 엿보았다. 거기에 그가 있었다…… 아니, 또 다른 '소온'이! 그는 아직 바깥에 걸린 횃불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가 마침내 불빛에 모습을 모두 드러내었을 때,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새로운 소온은 실제보다 더 - 물론 긴장감 때문이겠지만 - 큰 것 같았다. 아무튼 그는 실제로 소온이었고……, 단지 그녀를 알기 이전의 모습일 뿐이었다. 엷은 갈색 머리카락은 지금의 소온보다 조금 더 길고 덥수룩했는데, 짧은 노르만 스타일보다 그에게 더 잘 어울렸다. 비록 시대는 달랐지만 두 명의 소온은 동일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그녀를 몰랐다!
로즈린의 긴장감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쩍 커졌다. 아니, 껑충 뛰어올랐다. 어째서 소온은 그녀가 또 다른 자신과 만나지 못하게 했을까? 이 사내는 그와 정말로 다른 사람일까? 다음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뭔가가 스쳐지나갔다. 물론 그는 달랐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수세기라는 긴 시간이 놓여 있다. 그녀의 소온은 좀 더 오래 살았으므로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 눈앞에 있는 또 다른 소온보다 부드럽고 성숙했으며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줄 알고…….
로즈린, 네가 할 일이 뭔지 잊지 않았지? 지금이야. 어서 시작해. 서둘러!
그는 지금 거의 문 앞까지 도달했다. 일이 이상하게 되려니까 자기 앞을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또 다른 '소온' 때문에 약간 정신이 산만해진 그녀는 그를 막을 방법을 금방 떠올릴 수가 없었다. 물론, 아주 오랫동안 그를 잡아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하지만.
로즈린은 마음을 굳게 먹은 다음 소리를 질렀다.
"실례합니다만, 좀 도와주세요."
다른 소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여전히 문 안으로 들어서려고 손을 내미는 그를 보며, 그녀는 그가 자신을 보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재빨리 건물의 그늘진 모퉁이에서 한걸음 걸어 나왔다.
불빛이 노란색 드레스를 비추자 그의 눈길이 그녀에게 향하면서 문고리를 향해 내민 손은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그의 관심은 완전히 그녀에게 쏠렸다.
로즈린의 긴장감은 또 한 단계 껑충 뛰어올랐다. 특히, 아직도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녀의 시대라면 어떤 장소로 가는 길을 물어 보면서 시간을 끌거나 혹은 벙어리 행세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세의 영국, 특히 밤 시간에 숙녀들은 거리에 나다니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 특히 혼자서는 - 그녀는 다른 방법을 궁리해내야 했다. 그녀는 이미 혼자 돌아다니다가 심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말이다.
다른 소온의 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몸 위를 따라 흐르며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녀의 시대에선 모욕으로 치부될 행동이었으나 이 시대의 남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소온은 전에도 그녀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앞에 있는 그는 그녀가 알고 있는 소온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 남자는 그녀를 모르는, 말하자면 젊은 '소온'이었다. 그녀는 뺨이 점점 빨개졌으나, 다행히도 횃불 덕분에 드러나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와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나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당신의 수행원들은 어디에 있소, 아가씨?"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금 막 그녀에게 시간을 끌 핑계를 알려준 셈이었다. 만약 정신이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 스스로 생각해내었을 핑계거리 말이다.
"잃어버렸어요."
그녀는 애써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꾸며내 대답했다.
"잃어버렸다고?"
"나와 함께 온 파트너 말이에요.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집에 가기 위해 하인들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는 중이죠. 그런데 걱정스럽게도 혼자 남은 것 같아요. 난 이곳 지리를 잘 몰라서 걱정이에요."
"당신은 어디에 가려는 참이었소?"
"공작의 파티에 참석하려고 했어요."
젊은 소온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건 정말 '소온'들의 버릇이란 말인가? 그녀는 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곳에는 윌리엄 공작의 부하들이 있을 것이오. 당신이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 줄 사람들을 불러다 드릴 수 있소."
"아니,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녀는 재빨리 대꾸하면서 이유를 생각해내기 위해 있는 힘껏 머리를 짜내었다.
"공작의 군인들은 험담꾼으로 악명이 높아요. 내가 길을 잃고 부둣가를 혼자 돌아다녔다는 소문을 낼 순 없어요. 아마도 내 명성은 땅에 떨어질 거예요. 지금은 당신과 헤어진 나의 파트너밖에 이 사실을 모르잖아요. 하지만 그들은 날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입 밖에 내지 않을 거예요."
그는 그녀의 핑계거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선뜻 도와주려고 나서지 않았다.
"난 시간이 없어서……."
"당신에게 약혼녀가 있으신가요?"
"아니오, 하지만……."
"오, 당신은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서두르시는군요. 나도 이해해요, 소온.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급한 일이에요. 그리고 공작도 아마 충분히……."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소, 아가씨?"
로즈린은 속으로 움찔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금세 똑같은 얼굴의 소온과 대화를 나누는 일에 익숙해진 그녀는 자신이 어떤 소온과 말을 하고 있는지 깜박 잊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덮어 줄 핑계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차라리 아리송한 말로 그의 관심을 끌며 시간을 지연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암시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어떻게?"
그가 물었다.
"당신을 만났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소."
예상했던 대답은 아니었으나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고, 또다시 그가 자신이 알고 있는 소온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을 한참 동안이나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재차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거요, 아가씨?"
로즈린은 화들짝 놀라면서 시선을 들어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그녀의 소온이 그렇게 정열적으로 키스를 하지 않았으면, 그녀의 욕구를 건드린 채로 남겨 놓고 가 버리지 말고……. 더구나 여기에 그의 분신, 똑같이 잘생긴 얼굴, 전쟁터에서 다져진 몸과 어떻게 하면 그녀를 압도하는지 잘 알고 있는 그의 입술을 가진 또 다른 그가 서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이미 매달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당신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답니다."
그녀가 화가 난 사람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스스로의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절망감에 빠져들기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젊은 소온은 그녀의 말투에 저으기 놀란 듯 한순간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가 잠시 후엔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한 명성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적어도 그것은 전쟁터에서 보인 그의 용맹스러움을 일컫는 게 아니었다.
그는 곧 웃음을 멈추었다. 아직은 얼굴에 웃음기가 조금 남아있긴 했으나, 그는 매우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소. 내가 당신을 윌리엄 공에게 데려다 주겠소."
그녀는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돼요. 당신을 보세요. 당신은 아주 잘할 수 있어요. 어떤……."
"나 자신으로부터 당신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는 말이오, 아가씨."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무슨 뜻이죠?"
그는 상세하게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간단히 벽으로 밀어붙여 한팔로 그녀를 껴안으며 어떻게 안전하지 못한지에 대해 의문의 여지없이 증명해 보였다. 그는 소온처럼 키스를 했다…… 왜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의 키스를 무시해 버리기는 더욱 힘들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온몸으로 그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로즈린은 이미 경고를 받았다. 이 소온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 말이다. 그녀는 정말로 그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는 진짜 소온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잔뜩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와 그의 가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점점 더 가빠지고 있는 숨소리만이. 아무래도 그녀의 소온은 존 경을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하는 임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것은 로즈린이 젊은 소온을 더 오래 붙잡고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지만, 그가 생각하는 방법은 사양하고 싶었다.
도대체 뭐가 좋을까? 저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면서도 그의 입술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척해 보일 수 있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 아무런 상관도 없이 말이다. 혹은 화를 내거나 모욕을 당한 척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 그를 더 오래 잡아둘 수 있을까? 그를 받아들이는 쪽일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오랫동안 키스를 허락해 놓고 느닷없이 화를 내는 각본은 어딘지 설득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약간의 반항은 보여 주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지연시키자는 목표일 뿐, 으슥한 곳에서 치마를 걷어올리는 것은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로즈린은 그의 몸을 조금 떠밀면서 입술을 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탓이었다. 진짜 소온처럼, 그 또한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그녀의 열정을 휘저어놓았다.
"당신의 명성을 증명하는 중인가요? 하지만 이번에는 한 번만 자제를 하실 수 없을까요?"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적어도 날 윌리엄에게 데려다 줄 때까지는 말이에요."
그는 타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로즈린은 만약 그가 다른 대답을 들려주었다면 자신이 무척 실망했으리라는 어처구니없는 진실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녀의 소온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더 이상 키스를 허락하고 싶지 않았고, 그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싶었다.
"난 당신의 이름을 알 것 같소, 아가씨."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머릿속에 델릴라(삼손의 애인. 요부의 대명사)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녀는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고전적인 연애 사기꾼, 바로 지금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재미있어, 정말이야…….
결국, 로즈린은 그의 관심을 붙잡을 만큼 매혹적인 미소를 보내주었다. 물론, 전에는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었으므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그를 보니, 생각만큼 잘 되지 않은 듯했다. 로즈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참을성이 없군요, 소온 블러드링커. 이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그녀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여긴 알맞은 장소가 아닌 것 같군요."
충분히 자극적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젊은 소온은 그녀의 팔을 잡고서 거리 아래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약간 충격을 받았으나 곧 회복되었다. 만약 여기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그녀의 소온을 다시 발견하기까지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기다려요!"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오래 기다려줄 리 만무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오늘밤 공작의 파티에 참석하지 않을 테니까, 급히 서둘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지금……."
로즈린은 나머지 말을 하기 위한 용기를 불러모으기 위해 말을 잠시 멈추었다.
"오, 소온, 난 당신과 다시 한 번 키스를 하고 싶어 거의 죽을 지경이랍니다."
만약 그녀가 공포에 질리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뻔뻔스러운 말은 결코 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 대담함 덕분에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안았다.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쥔 다음 그의 입술은 천천히…….
다음 순간 로즈린은 누군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들었다.
그녀의 결정은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재빨리 이루어졌다. 그의 입술이 막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발을 그의 다리 뒤쪽으로 넣어 걸면서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쳐내어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죽을 힘을 다해 뛰던 그녀는 샛길로 들어서자마자 단단한 가슴과 세게 부딪혔다.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해요! 누가 쫓아올 것인지는 당신도 잘 알 거예요!"
"아! 당신은 추격을 당할 거요."
소온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 그녀가 움찔할 만큼 세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는 지금의 일을 기억하고 있소. 또 다른 나는 분명 당신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거요, 로즈린."
로즈린은 입을 딱 벌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입을 미처 닫기도 전에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와 있었다. 이제 두 명의 소온이 만날 위협은 사라졌다. 놀라움과 당황스러움도 그곳에 남겨놓고 싶었으나, 그것은 그녀를 따라오고야 말았다.
30
로즈린은 굴욕감마저 드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이토록 창피스러웠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붉어진 뺨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등을 돌렸지만, 소온은 아직도 로즈린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그를 보고 싶지 않은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온의 아귀 힘은 여전히 강했다.
'나는 지금 이 일을 기억하고 있소.'
왜 그녀는 그 점을 기억하지 못한 걸까? 과거의 젊은 소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혹은 그가 그녀를 만난 것 같은 이상한 방법으로 인해 새로운 일들이 그의 기억 속에 보태어진 건지……. 하여간 이 소온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까지도 말이다.
입을 꽉 다물고 있지만 조금 전에 내가 둘러댔던 말이며, 시간을 벌려고 했던 우스꽝스러운 행동까지 그는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겠지. 로즈린은 속으로 신음소리를 내었다. 이 특별한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서 빨리 사라지길 바라는 것은 너무 커다란 희망이었고, 소온은 그녀가 그런 행운을 가지기엔 운이 나쁘다는 걸 여지없이 증명해 보였다.
그는 자신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그녀를 오래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나서 분노를 참으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미 경고를……."
"그만해요."
로즈린은 야멸차게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나도,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니 말 돌릴 필요 없잖아요?"
그러나 소온은 그녀의 항변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녀석의 머릿속엔 단 한 가지……, 당신을 침대로 끌고 가려는 생각뿐이었소. 게다가 당신은 그런 녀석을 부추긴 거요."
로즈린은 몸을 홱 돌려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그와 함께 저주받은 검과 불가사의한 힘에 대해 토론이라도 벌이라는 건가요? 그랬다면 아마도 그는 날 마녀라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내가 계속 그곳에 남아 있었다면, 당신은 신나게 뛰어나와 그와 보기 좋게 맞닥뜨렸을 테고……. 난 당신을 재앙에서 구해 준 건데, 어째서 내게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거죠?"
"당신은 똑똑한 여자요."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전혀 꾸밈이 없는 이야기로 그의 관심을 쉽사리 끌어낼 수 있었을 거요. 당신은 나와도 충분히 잘 해내었으니 말이오."
로즈린의 얼굴이 더욱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만약 소온의 말이 맞다면? 정말로 또 다른 소온의 관능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단 말인가?
그녀는 그토록 다급하지만 않았다면, 좀 더 다른 여러 가지 방법들을 생각해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좀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던가, 발목을 삐어 걸을 수가 없으니 도와 달라는 말을 했을 수도 있었을 테고. 이미 다른 사람이 도움을 청하러 떠났으니 잠깐 동안만 함께 있어 달라는 등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 그는 곤란에 처한 숙녀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만큼 무자비한 사내는 아니었을 테니 시간을 벌기엔 충분했을 터였다. 젊은 소온의 관심을 끈 다음 그가 흥미 있어 하는 것이 단 두 가지뿐이란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 중 한 가지에 관해 그와 이야기했더라면 이처럼 난처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당신을 속이고 도망쳤기 때문에 - 그러니까 그 남자 말이에요 - 자존심이 상한 건가요? 그래서 당신이 나에게 그를 대신해 화를 내는 거냐고요?"
"아니오. 난…… 그가 당신의 몸을 만지도록 내버려둔 것 때문에 화가 난 거요."
그녀의 소온은 대놓고 으르렁거렸다.
로즈린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이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질투를 하는 거예요? 오, 이봐요, 소온. 좀 우스꽝스럽지 않나요? 내 말은, 생각을 좀 해봐요. 그는 바로 당신이에요.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단 말예요.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몇 백년쯤 난다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에요. 당신의 모습은 똑같고……."
"나이 차이는 단 몇 년뿐이지만 나와 그 녀석 사이엔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은, 당신도 부인할 수 없을 거요. 지금의 난 당신을 완전히 알고 있소, 로즈린.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오. 비록 그가 그렇게 하길 갈망했다 해도, ……그는 당신의 육체가 주는 즐거움을 몰라. 그런데도 우리 둘이 똑같다는 거요?"
로즈린의 얼굴은 귓볼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좋아요, 그의 뺨을 때려 주지 않고 내게 키스하도록 내버려두어서 정말 미안해요. 난 그럴려고…… 그러고 싶었지만 만약 그랬다가 그가 날 팽개치고 가 버리면, 또 당신과 맞닥뜨리게 될 것 같아 두려웠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의 키스를 허락한 것은 순전히 당신 때문이라고요."
그녀는 그를 힘껏 떠밀면서 말했다.
소온이 생각지 못한 그녀의 행동 때문에 약간 비틀거리며 뒤에 있던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로즈린은 때를 놓치지 않고서 잽싸게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다음 번 당신이 키스할 때 바로 그렇게 하세요, 바이킹 씨."
그녀는 빙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활활 타오를 정도로 오랫동안 말이에요."
로즈린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열렬하게,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더 거칠고 깊은 키스를 그에게 했다. 화가 잔뜩 나 있는 소온은 그녀의 정열적인 키스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려고 버텨 보았지만 오래지 않아 양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꽉 잡고서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은 로즈린의 엉덩이로 내려가며 점점 더 힘이 세져 갔고 그녀의 입술은 소온의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렸다.
방해를 받기에는 정말로 부적절한 순간이었다. 데이비드가 방으로 들어와 목청을 가다듬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전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로즈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해 있던 로즈린은 머리 속에서 매암 도는 생각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한참 동안을 멍한 눈빛으로 데이비드를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기쁨에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데이비드!"
그리곤 소온을 향해 고개를 돌린 로즈린이 커다랗게 외쳐 댔다.
"우린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거예요!"
"안됐지만 내 의견은 다른걸."
데이비드가 조롱하듯 대꾸했다.
"친애하는 동생아,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평상시와 좀 다른 것 같구나."
로즈린의 얼굴이 좀 붉어지긴 했지만, 역사를 제대로 돌려놓았다는 흥분으로 그런 부끄러움쯤은 그럭저럭 무시할 작정이었다. 게다가 돌아오자 마자 소온과의 말다툼에 정신이 팔려 자신들이 눈에 익숙한 카베노프 별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러나 데이비드는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직도 그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의 그런 눈빛이 그녀를 좀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항상 적당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라며 오빠다운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데이비드였는데?
소온이 일어나 앉을 수 있도록 몸을 일으키는 로즈린의 얼굴에선 붉은 기운이 조금 가셨지만, 서로를 소개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긴장감을 이겨내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소온이 누구인지 설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는 지금부터 자기가 털어놓아야 하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기꺼이 받아들일 여지라곤 조금도, 아주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아주 간단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온, 이쪽은 내 오빠인 데이비드예요. 그리고 데이비드, 소온 블러드링커예요."
짧은 소개가 끝나자 로즈린은 '이제 저녁식사 때 유령들을 데려올 작정이구나?'라는 투의 너그러운 척하는 오빠 특유의 유머가 담긴 대꾸를 기다렸으나 데이비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가 보인 반응이라곤 소온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인 것이 전부였다. 마치 한 번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로즈린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말했던 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그 꿈이 소온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로즈린은 그의 기억을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데이비드, 언제 프랑스에서 ……돌아왔어요?"
"프랑스?"
"그래요. 리디아와 함께 온 건가요?"
그는 이제 이맛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냐, 로즈? 난 지난 여름에 너와 함께 프랑스를 다녀온 후론 그곳에 간 적이 없어. 그리고 리디아라니, 그녀는 또 누구냐?"
로즈린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해 보이는 표정으로 데이비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데이비드를 바라볼수록 두려움과 함께 몸이 싸늘해지는 기분 때문에 로즈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데이비드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로즈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지난여름 그들은 프랑스에 가지도 않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에 간 - 소온과 함께 간 것을 제외하면 - 것은 남부 해안 가에 자리한 리디아의 저택에서 열린 데이비드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런데 그는 리디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듯이 보였고, 심지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다면…… 사정은 뻔했다.
로즈린은 소온의 목에 팔을 감고는 숨이 막히도록 세게 껴안으며 여전히 흥분한 표정으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사람은 내 오빠가 아니에요. 내 말은……, 우리가 지난 번에 만났던 배리처럼 전과는 다르다는 거예요. 또 일이 잘못된 것 같아요, 소온. 별장으로는 제대로 돌아왔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잘못된 과거가 있나 봐요."
소온은 목을 감고 있는 로즈린의 팔을 풀어내며 나직이 물었다.
"확실한 거요?"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암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소온은 그런 그녀를 달래려는 듯 꼭 껴안았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잔뜩 못마땅하다는 모습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희 둘만이 남겨질 때까지 그런…… 행동은 자제하기 바란다."
혐오감을 전혀 감추지 않은 볼멘 소리로 짐짓 경고를 해왔다.
로즈린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보았다.
"오, 그만해요, 데이비드. 오빠가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단둘이 있었단 말이에요. 괜찮다면 우린 이만 실례하죠."
그녀는 소온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끌어낸 다음 방에서 나왔다. 이 데이비드는 지나칠 정도로 점잔을 빼며 무게를 잡고는 예전 같았으면, 웃으며 지나갈 일조차도 정색을 해 댔다. 그녀는 그를 좋아했다는 사실마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다음 번에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청교도적인 데이비드가 아니라 그녀가 알고 있는 오빠를 만날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데이비드를 예전처럼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
로즈린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떠올리며 이 새로운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를 알아내려 애써 보았지만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간밤에 그녀는 막사 안에서 거의 밤을 세우다시피 보낸 후라 피곤함이 한층 더 깊었다. 노르만디의 소온의 막사에서 밤을 보낸 이후로 아직 잠다운 잠을 자지 못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이후로 몇 주일이 휙 지나가 버린 기분이었다. 단 이틀 동안에.
로즈린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다음 등 뒤로 문을 닫고는 기대서서 소온을 향해 활기 없는 옅은 미소를 보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침이 되면, 난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고 혹은 누군가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밝혀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지금 당장은……, 난 잠을 잘 작정이에요. 우리 둘 다 잠을 자 두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 같죠?"
소온은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으나 그 역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도 함께 자겠소."
무심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리고 데이비드가 나타나기 전에 당신이 했던 행동을 잊어버리도록 노력할 거요."
그녀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는 은근한 암시에 로즈린은 배시시 웃음이 비져 나왔다. 그리고 나른해 손가락도 움직이기 싫던 지독한 피곤함마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매우 달콤한 소리처럼 들리는군요, 소온. 잊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녀는 문에서 몸을 떼어내며 말했다.
"난, 우리가 지금 당장……. 음,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얼굴 가득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소온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고, 로즈린은 그의 품에 몸을 안겼다. 잠시 후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는 그를 향해 이번엔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
"당신을 충동질하는 데 그리 많은 노력이 들지 않는군요."
"그 보상이 당신일 때를 두고 하는 말이오, 로즈린? 아니, 전혀 흥이 나지 않는데."
로즈린은 그의 말이 그저 장난인지 혹은 진담인지 알아내려 애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이 어느 쪽이든 그녀에겐 상관이 없었다. 그의 목에 나른한 팔을 감으며 그의 입술을 느끼려 살며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는 형식적인 입맞춤만을 원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의 촉촉한 혀가 그녀의 고른 치열을 열고 입 안으로 들어와 독특한 마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안에 그녀는 그가 주는 즐거움 말고는 아무것도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소온은 오랫동안 키스를 하면서 그녀가 그곳에 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온몸을 훑어 다녔다. 그녀는 그를 알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자신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와 닿는 곳마다 더할 나위 없이 멋진 화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그녀의 몸은 그를 위해 조율이 되어 있는 것 같았고, 그는 그녀의 몸을 연주하는 모든 방법을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마침내 그가 반드시 누운 그녀 위에 몸을 누이고, 목덜미에 고개를 숙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로즈린 역시도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이미 끝냈다. 세워진 무릎 사이로 그가 들어와 좀 더 깊은 곳을 향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자 로즈린은 그의 등 뒤로 조심스레 팔을 감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천천히 그리고 깊숙하게 돌진했다. 그녀는 마치 혈관의 피가 노래를 부르며 모든 신경이 바르르 떨리는 듯한 쾌감을 맛보았다. 그는 서둘지 않으면서 자신의 즐거움을 맛보는 동시에 그녀에게 더욱 커다란 쾌감을 안겨 주었다.
나른함이 몰려와 그녀를 잠의 나락으로 이끌었다. 그는 잠드는 그녀의 볼과 입술에 옅은 키스를 하고 애무를 하며 그녀가 그에게 특별한 여자라는 것을 가장 부드러운 방법으로 보여 주었다. 부드러운 손놀림이 등과 허리를 지나 다시 한 번 꼭 끌어안는 그의 따스함은 어느 순간보다 그녀를 감동시켰다.
31
로즈린은 졸리운 눈을 살며시 떴다. 곁에는 한 팔을 이마 위에 올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막으며 소온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바라보다 몸을 기울여 그의 가슴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맞춤에도 소온은 곤한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지난밤 그녀만큼이나 피곤에 지쳐 있었던 그였지만 그녀에게 쾌락을 안겨 주는 일에는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로즈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마주쳐야 했던 곤란한 상황과 맞서는 대신, 그의 곁에 웅크리고 길고 편안한 잠 속으로 다시 빠져들고 싶었다. 그러나 미루어 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이젠 잠마저도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로즈린은 별장으로 다시 돌아왔을지는 모르지만 과거 속의 어딘가는 아직도 잘못된 채 남아 있음이 분명했다. 모습은 같을 지라도 데이비드는 자신이 알아온 그가 아닌, 아주 다른 사람처럼 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만약 그의 인생이 극적으로 바뀌어 예전의 삶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녀 자신은 어떠한지, 전처럼 역사를 공부하고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그런 모습일지 궁금해지기조차 했다. 만약 자신의 인생마저도 오빠처럼 완전히 달라져 있다면 진정한 '로즈린'을 찾기 위해 그녀 자신을 위한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어떻게 변했을지도 모르는 밖을 향해 문을 열고 나가 무엇이 바뀌고, 전과는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찾아내야 한다면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더욱 난감한 것은, 그녀 자신도 이런 경우 어떤 것을 찾아야 할지조차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거였다.
침대에 일어나 앉은 로즈린은 바닥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옷가지들을 보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입을 때는 그토록 힘이 들었던 드레스였으나, 소온은 아무런 문제 없이 쉽게 벗겨 내었다. 심지어 그가 언제 옷을 벗겼는지 그녀는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 미소가 날 위한 것이었으면 좋겠소."
그녀가 미처 대답을 하거나 뒤돌아보기도 전에 그의 팔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그녀의 허리를 감은 다음 맨살이 드러난 등에 입술이 닿아왔다. 보드라운 그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흐르고, 그녀의 미소는 더욱 커졌다.
"글쎄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는 몸을 돌려 그의 가슴에 키스를 했다.
"지금은 그런 걸요."
그는 그녀를 좀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기분이 좋은 거요?"
그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놀려 댔다.
"당신이 얼마나 근사한 애인인지 듣고 싶은가요?"
"아니오, 델릴라라는 여자는 나의 명성이 얼마나 드높은지에 대해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억!"
제 자랑에 정신이 없던 소온은 그녀에게 옆구리를 찔리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는 곧 똑같은 방법으로 앙갚음을 했다.
갑자기 그녀의 몸이 반듯이 눕혀졌고, 그가 간지럽히기 시작했을 때 로즈린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느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잠시 후 가쁜 숨을 몰아쉬던 로즈린은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당겨 꼭 끌어안고는 그를 즐겁게 해줄 작정으로 몸을 흔들었다. 이미 그녀의 가슴 속에는 수줍음이란 감정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감각이 느끼는 즐거움에 익숙해져 오히려 이런 자신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즐거워하기엔 적절한 시기가 못 되었다. 로즈린은 아쉬운 마음으로 그들이 직면한 문젯거리를 끄집어내었다.
"나하고 말 좀 해요, 소온."
"음."
소온은 한숨을 쉬며 몸을 옆으로 굴리더니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 속에서 자신의 옷을 찾아 입고 일어났다. 햇살을 등지고 선 소온의 가슴 - 그의 왼쪽 가슴에 남아 있는 진한 키스의 흔적에 약간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 과 어깨 위로 마구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골치 아픈 문제들을 몽땅 몰아내려 들었다. 그 순간 로즈린은 그와 해결해야만 하는 모든 일들은 차치해 두고 그를 다시 침대로 불러들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무릎을 모아 세우곤 팔로 감싸 안았다.
"또 다른 당신이 무슨 일을 한 건 가요? 나를 만난 후에 말이에요. 제발 나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해 줘요. 왜냐면 난 정말로 그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아니오. 당신을 찾아 잠시 동안 헤매었지만 그뿐이었고, 윌리엄에게 당신에 대해 물어보는 정도였다오. 그는 전혀 다른 일은 벌이지 않았소. 그럴 시간도 없었고……. 로즈린, 그는 다음날 발할라로 돌아갔소."
"그러나 그는 그날 밤 분명히 무슨 일을 저질렀을 거예요. 이전에 '소온'은 존 경을 술에 취하게 한 다음 존 경이 함께 밤을 보내려고 했던 그 술집의 여자와 놀아났죠. 그런데 당신은 존 경을 술집에서 나오도록 만들었고, 그런 다음 당신 - 아니 그 '소온'은 그 여자와 함께 있었나요, 아니면 다른 여자를 선택했나요?"
"당신을 찾아다니다 결국 찾지 못하게 되자 그 소온은 야영지로 돌아갔소. 다른 여자와는 즐길 생각이 나지 않았지."
그녀는 어리둥절해졌다.
"정말?"
찡그린 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웃음이 저절로 흘렀다.
"좋아요, 그렇다면 예전과 달라진 거라곤 당신이 - 그 '소온'이 그날 밤 그 여자와 함께 보내지 않았다는 것뿐인데……."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무엇인가가 스쳐지나갔다.
"만약 그 일이 지금을 엉망으로 바꾸게 된 이유라면, 난 이 뒤바뀐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고 싶어지는 걸요. 비록 구닥다리 같아져 버린 오빠랑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해도 말이죠."
소온은 키득거렸다.
"원래는 존 경이 그녀와 함께 자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처음부터 내가 아니란 말이오. 그 문제라면 제대로 진행되었으니 다시 고쳐져야 될 필요가 없소."
"좋아요. 그렇지만 난 저 새로운 데이비드를 참아낼 수 없을 것 같아요. 만약 우리가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이 이대로 살아야 한다면……, 이번에는 책들을 뒤져야 할 차례예요. 자, 당신은 부엌으로 내려가 우리가 먹을 만한 게 있나 좀 찾아봐요. 난 그 동안 서재에서 뭔가 중요한 걸 찾으려면 역사책들을 좀 읽어야겠어요. 만약 그게 거기에 있다면 말이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곤 방에서 나간 후 그녀는 옷장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리 옷가지들을 뒤져도 이 새로운 현재에서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옷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단순한 모양에서 화려한 것까지 모두 우스울 만큼이나 밝고 화사한 색깔들의 옷뿐이었다. 그녀가 입을 만한, 심지어 잠깐 동안만이라도 걸치고 싶은 옷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것저것을 고르다 겨우 흰색 옷을 골라 입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을 연 로즈린은 막 노크를 하려던 데이비드와 얼굴을 맞닥뜨렸다. 생각지 못한 방문을 받은 그녀가 놀라움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그는 한껏 꼬인 목소리로 그녀를 공격했다.
"밤새 내내 너와 악의 구렁텅이에서 뒹굴었던 그 남자가 이젠 네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단다. 만약 네가 그 난장판을 보고도 미쳐 버리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행운일 게다."
"흄스 부인은……."
"누구?"
빌어먹을, 그녀는 홀로 급히 내려가면서 속으로 신음소리를 삼켰다. 흄스 부인이 이곳에 없어. 오, 이런. 어쩌자고 소온을 다른 장소도 아닌 부엌으로 보냈단 말인가?
부엌으로 다급히 들어서자 부서진 전기 믹서가 싱크대 위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 주위로 세 개의 야채 통조림은 모두 한가운데가 내려쳐진 채였다. 물론 내용물은 여기저기에 쏟아져 바닥과 가구 이곳저곳에서 흘러 다니고, 전기로 작동하는 통조림 따개는 바닥에서 저 혼자 빙글빙글 돌아가는 꼴이라니. 찢어진 종이 팩 주스 통에서는 흘러내리지 못한 방울방울이 똑똑 소리를 냈다. 냉장고 앞에는 소온의 것이 틀림없는 발자국이 나 있었다.
불행히도, 걸쇠가 걸린 것은 아니지만 꽉 닫힌 냉장고의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어야 한다는 걸 그가 알 턱이 없지. 지금 소온은 찬장을 향해 서서 그 안에 들어 있는 통조림들을 노려보느라 로즈린이 들어왔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용물을 고스란히 두고 양철통을 토막낼 방법이라도 연구 중인 듯이.
로즈린은 난장판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에게는 새롭기만 한 문명의 산물들 속에서 제대로 먹을 걸 찾아낼 리가 만무하지 않는가. 부엌은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했고, 심지어 그 중 몇 개는 그녀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소온의 호기심을 자극한 몇 가지들 중 어떤 것은 그에 의해 버튼 몇 개가 눌러졌는데, 작동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판단된 것은 여지없이 칼의 세례를 받아야 했다.
"요리사로는 성공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소온."
한숨 섞인 로즈린의 목소리를 듣자, 그가 홱 돌아서더니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소, 로즈린."
"아니, 여기에 있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냉장고 앞에 섰다.
"이제 당신도 이런 걸 어떻게 여는지 알아야 해요. 바로 이렇게요."
로즈린은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는 손짓으로 냉장고 손잡이를 그러쥐곤 문을 열어 보였다.
"자 봐요. 많이 있잖아요. 아침 식사를 만들도록 할 게요. 오믈렛이나 베이컨과 소시지, 토스트, 그리고 잼……, 어때요? 당신도 나만큼이나 배가 고플 거 같은데. 책을 보는 일은……, 뭐 나중에 하도록 하죠."
소온을 위해 아침을 만드는 순간순간이 지금껏 그녀가 해온 어떤 일보다 즐거웠고, 또 가장 만족스러웠다. 하나를 더한다면 앞에 차려진 음식 하나하나를 신기한 듯 맛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가 마지막에 불려왔을 때, 토스트는 그렇게 얇게 썰려 있거나 부드럽지 않았을 테고, 베이컨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 알맞게 포장되어 있지 않은 건 분명한 일이었다. 옛날에 비하면 투명하기 그지없다라고 표현해야 할 젤리나, 플라스틱 통 속에 담겨져 판매되는 버터를 상상했다면 그가 이상한 사람이겠지.
소온은 모든 것을 맛 - 심지어 플라스틱 통까지 - 보고 싶어 했지만 눈앞에 닥친 일 때문에 식탁에 가득한 음식을 대부분 포기해야 했다.
그들은 데이비드와 다시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서재로 갔다. 다행히 로즈린의 행운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책상과 책꽂이에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연구 자료와 책들이 보였다. 모두 낯선 책들이었으나 무엇인가를 발견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리 달갑지 않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냈다.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역사책들 중 하나를 골라 대충 훑어 내리던 로즈린은 옆에 있던 소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요. 이번에는 그저 조그마한 변화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들 모두 변했어요. 노르웨이 사람들은 원래대로 북해의 싸움에서 졌고, 노르만 인들은 제때에 출항했군요. 여기까지는 똑같아 보이지만, 노르만 인들도 싸움에서 지고 말았어요. 이번엔, 놀랍게도, 영국이 두 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거예요."
"해롤드 구드윈슨은 이십사 년간이나 영국을 지배했어요. 그의 혈통에서 자신의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 왕이 두 명이나 나왔죠. 한 사람은 자신의 아내에 의해 살해당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즐기면서 평범하게 살았다는군요."
소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윌리엄 공은 원래보다 더 일찍 죽은 거요?"
"아뇨. 이번에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싸움에서 패하고 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는 영국과의 전쟁을 시도하지 않아요. 그의 후손들 중의 몇 명이 두어 세기가 지난 후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켰으나 지고 말았어요. 한동안 프랑스는 유럽에서 강대국으로 행세했죠. 영국은 번영을 계속했고, 곧 산업혁명이 일어났어요. 자주 전쟁을 하긴 했지만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와의 싸움으로……,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고요. 그러나 나중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어요. 그리고 이것은 널리 퍼졌을 뿐 아니라, 지금의 내가 데이비드 오빠에게 도덕적인 결벽증으로 똘똘 뭉친 여자로 기억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에요. 16세기에 나타난 청교도들은 미국으로 이주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영국 내에서 힘을 얻었고 지금까지도 그 힘이 계속해서 이곳을 지배하고 있다는군요. 그러니 미국은 독립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죠. 놀랍게도 영국은 아직도 미국을 지배하고 있어요."
소온은 그녀의 장황한 설명 따위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에도 그러했듯, 그는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을 보였다.
"어쨌거나 이번에는 왜 또 윌리엄이 전쟁에서 패한 거요? 당신은 영국군이 북쪽에서 바이킹과의 전쟁에서 지친 채 싸움을 했다고 말했잖소?"
로즈린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요. 여기에 씌어진 것은 원래 일어나야 했던 것과 똑같아요. 북풍이 불어와 이 주일 정도 윌리엄의 출항을 지연시켜 주었고, 그는 9월 27일 저녁 때에야 출발할 수 있었죠. 그가 탄 모라 호는 다른 배와는 떨어져 밤에 출발했어요. 피벤시 만으로 상륙한 것도 같아요. 그 다음날 아침에도 해롤드는 아직 북쪽에 있어요. 그 즉시 요새를 구축할 수도 있었지만 피벤시 만은 너무나 드러난 곳에 있었기 때문에 노르만 군사들은 항구인 헤이스팅스를 손에 넣기 위해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죠. 해롤드는 아직도 북쪽에 있었고 그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어요. 따라서 그는 10월 14일까지 남쪽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던 거죠. 그는 높은 산등성이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노르만 군대의 공격을 막아내요.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해롤드의 병사들의 방어선을 깨뜨리지 못한 거예요."
로즈린은 한숨을 내리쉬고 말을 이었다.
"심지어 퇴각한 날짜도 같아요. 처음에는 진짜였죠. 공격에 성공하지 못한 노르만 군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죠. 영국군은 비록 지쳤지만 뒤쫓아 가서는 싸우기 위해 다시 돌아서는 노르만 군을 마구 학살했어요. 노르만 군은 두 번 더 퇴각해야 하는 지경에 처하지만 이번엔 영국군을 자신들의 복병이 숨어 있는 곳으로 끌어들이려는 작전의 일환이었어요. 상당한 성과를 거둔 걸로 보아서 해롤드는 병사들을 많이 잃었을 거예요. 그러나 기병대를 동원한 마지막 전투 - 원래는 성공했던 작전이어요 - 에서……, 여기선 효과가 없었나 봐요. 해롤드는 완벽하게 방어 대열을 짜고 남아 있었죠. 재집결한 그의 군대는 노르만의 기병대가 네 번째 퇴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을 완전히 무찌른 거예요. 바로 이 부분의 역사가 바뀐 거죠. 원래는 노르만의 기병대가 대승리를 거두고 해롤드는 화살에 맞아 상처를 입은 다음 말을 탄 기사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었는데 말이에요…… 잠깐만요!"
로즈린이 소리 질렀다.
"여기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요."
"무슨?"
"'화살을 마구 쏘아라'라는 윌리엄의 명령 말이에요. 그 명령은 아주 유명해요. 왜냐면 그것이 바로 전쟁의 승패를 가로짓는 전환점이 되었으니까요. 화살들은 영국 병사들 머리 위로 비오듯이 쏟아져 내렸고, 영국군은 그 화살 때문에 많은 사상자를 내야 했죠. 그때 노르만의 기병대는 쇠로 만든 영국군의 방패를 부수고 그들을 모두 죽였던 거예요. 그리고 그 화살들 중의 하나가 해롤드의 눈에 꽂혔죠. 그 화살 때문에 죽었는지 혹은 상처를 입은 채 이름 모를 기사에 의해 죽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화살이 그의 눈에 꽂혔다는 사실에는 모두들 동의하죠. 이 책을 제외하고는."
소온은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바라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여기에는 그런 사실조차 언급되어 있지 않아요."
그녀는 대답을 하면서 확인을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책장을 넘겼다.
"노르만의 궁수들에게 내려진 그 유명한 명령에 대한 것이나 해롤드가 부상을 당했다는 이야긴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그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노르만 군이 아닌 영국군이 이긴 거예요."
소온은 확실치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렇다면 바로 그 점을 바로잡아야 할 것 같소."
"하지만 어떻게요?"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우리는 왜 그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는지 몰라요. 무엇이 잘못된 건지를 제대로 알아내려면 바로 그 시간에 월리엄의 옆에 있어야 해요."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아주 탁월한 제안이오."
그녀는 전투에 끼어 들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것은 전원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전투가 아니에요. 양쪽 모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 당신은 어느 누구도 죽여서는 안 돼요. 게다가 날 데리고 그곳으로 가겠다는 그런 계획은 아예 생각조차도 하지 말아요. 우리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마지막 시대로 돌아가야 해요. 함대가 막 출발하려던 그 시간으로 말이죠. 영국의 해안에 정박하면서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길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죠."
"다른 대안을 생각해낼 수는 없소?"
아쉬운 표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가 물었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어 앉으며 중얼거렸다.
"아뇨. 안됐지만 없어요."
32
로즈린은 앞에 놓인 노란색 드레스를 집어 들며 고개를 흔들어 댔다.
"이 옷을 어떻게 빨아야 하는지, 주의사항이 적힌 상표가 없으니 어림짐작으로 해야 할 것 같군요. 확실한 건 세탁기에 넣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거예요."
"넣는 게 아니고 주는 거요."
소온은 옷을 다 입고 난 다음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주다니요?"
"세탁부에게 주면 되지 않소."
로즈린은 그를 보며 빙글거렸다.
"아뇨. 나의 세탁부는 기계랍니다. 사람이 아니에요. - 신경 쓰지 말아요. 구겨지고 더럽긴 하지만 이대로 입는다고 해서 내가 죽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삼 주 동안이라면……, 그럴 수는 없죠. 가이는 내가 입을 수 있는 다른 옷을 슬쩍 해 올 재주가 있을까요? 아님, 이곳에 있는 동안 분장 의상을 파는 가게에라도 들러야 하나요?"
"슬쩍 해 오다니?"
"음……, 얻는 거죠. 이 드레스를 가져온 것처럼 말이에요."
"아하."
그는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이는 물자 조달에 천부적인 솜씨가 있으니 그런 걱정일랑하지 말아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로즈린은 주섬주섬 노란 드레스를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지금 가이가 이곳에 없으니 이 옷의 매듭 묶는 일은 당신 몫이에요."
소온은 웃음을 터트리며 옷시중을 들러 다가왔다.
"난 차라리……."
"그래요, 나도 알아요."
그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의 말허리를 싹뚝 잘랐다.
"옷을 벗기는 게 당신의 특기죠. 하지만 우리는 당신의 근사하고 원시적인 막사로 되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걸요. 그리고 이번에는 오랫동안 머물러야 할 테니 필요한 물건들을 조금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로즈린은 옷장에서 속옷들을 꺼내어 베갯잇 속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튼튼한 가방을 1066년으로 들고 갈 수는 없잖아. 그런 다음 욕실로 들어가 칫솔과 치약, 방취제, 향수, 브러시, 면도날, 응급 처치 약이 들어 있는 작은 손가방과 비누를 집어 - 중세 시대의 물건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의심할 나위 없이 그녀의 살갗을 발갛게 만들어 놓겠지 - 넣곤 수건으로 조심스레 쌌다.
침실로 돌아오면서 로즈린은 그에게 단단히 일렀다.
"이 물건들을 남겨 놓고 돌아오면 안 되니까 내가 잊어버리면 말해 줘야 해요."
손에 든 것을 한껏 쳐들어 보이며 말했다.
"11세기의 물건을 발굴하다가 에어로졸 캔이 발견된다면 세상이 발칵 뒤집어질 거예요. 우리가 돌아가서 되돌려 놓아야 할 일이 또 생기는 거죠. 시간을 거슬러 간 우리들 때문에 역사는 그야말로 엉겨 버렸어요. 엉망으로 말이죠."
그녀의 마지막 말에 기분이 상했다는 듯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를 보고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기운 내요, 소온. 당신은 원하면 언제든지 발할라로 돌아가 싸움에 참가할 수 있잖아요. 당신은 애써서 과거의 싸움 속으로 말려들 필요가 없다고요."
"난 발할라로 돌아가지 않을 거요."
소온의 말에 그녀는 말문이 탁 막혔다.
"왜죠?"
그는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질문이오."
그리고 이번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가 물어왔다.
"우린 결혼을 할 테고, 당신이 내 아일 낳아 줄 텐데 내가 왜 당신 곁을 떠나야 한단 말이오?"
"잠깐……."
"로즈린, 하지만 먼저 당신은 길들여져야 할 필요가 있소."
로즈린은 입을 꽉 다물었다. 빙그레 웃는 소온의 모습은 자신이 그녀를 놀리고 있다는 것 외에 뭘 더 이야기하고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길들인다'라는 말의 뜻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는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로즈린은 그 문제로 시간을 끌며 따져 물을 기분이 아니었다. 자신이 살던 '현재'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처지니, 앞으로 누구와 결혼하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걱정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었다.
어쨌거나 소온이 발할라에 관해 스쳐 지나는 이야기처럼 말했지만, 덕분에 몇 가지 중요한 의문을 떠올려 주었다. 지금까지는 물어 볼 기회가 없었던 것들이었다. 소온은 가이의 누이가 죽었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왜 자신 속으로 돌아갈 수 없었는지에 관한 설명은 빠뜨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었다. '당신 세계의 시간에서 놓여나서 나의 시대로 돌아갔다'라고. 그리고 지난밤, 그녀가 그와 또 다른 소온 사이에는 몇 세기에 걸친 시간의 차이가 있다고 말했을 때도 그는 단지 몇 년의 차이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로즈린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지난밤 당신과 또 다른 '소온' 사이에 불과 몇 년의 나이 차이만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몇 세기가 지났는데 불과 몇 년이라뇨? 그리고 '나의 시간과 당신의 시간이 다르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이에요, 어떻게 다른 거죠?"
소온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딴청을 부렸다.
"아직 떠날 준비가 안 된 거요?"
"내 질문을 피할 생각일랑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바이킹 씨. 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
그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는 이거 심각하군, 로즈린. 그리고 발할라의 시간이 다르게 돌아간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오."
"어떻게 다른 가요?"
"그곳의 하루는 이곳으로 치면 아주 긴 세월과 같은 거요."
"긴 세월?"
"당신네들이 일 세기라고 부르는 시간만큼."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럼 당신의 나이는 몇 천 살이 아니란 말이에요?"
소온은 정말 재밌다는 듯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소. 스무 살하고 10년 더."
"스무 살하고…… 그럼 당신 나이가 서른밖에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로즈린은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당신 눈에 내가 늙은이로 보인단 말이오?"
빙그레 웃는 소온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자신이 바보가 되어 버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는 서른 살보다 더 많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가 천 년쯤 전에 태어났으니 그의 나이가 아주 많으며, 불멸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인걸.
"당신은 몇 살 때 저주를 받았나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소."
"그렇다면 당신은 불사신이 아니군요, 맞죠? 실제로 나이를 먹고 있어요 - 시간의 체계가 다르긴 하지만."
소온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좀 황당한 이야기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혼란스러운 머리 속을 위해 로즈린은 잠시 앉아야 했다. 그의 나이가 아주 많을 거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날 위해서. 그런데 그의 말을 몽땅 인정한다면 소온의 나이는 그녀보다 딱 한 살이 많을 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검의 주인에 의해 다른 세상으로 불려 나올 때만 실제로 나이를 먹는 셈이고 - 그가 이곳에 있는 동안은 - 그녀와 함께 늙어 갈 수 있다…….
로즈린은 들뜨기 시작한 감정들을 꾹 누르고 참아야 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고, 그에게 물어 볼 질문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건힐다는 당신에게 왜 저주를 내린 거예요? 단지 재미 삼아 그런 일을 한다는 건, 혹은 당신이 저주를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했나요?"
소온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난 그녀 딸과의 결혼을 거절했을 뿐이오."
로즈린은 입을 꼭 다물었다. 사실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 딸이란 사람은 당신과 정말로 결혼하고 싶어 했나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녀는 날 좋아하지 않았소. 건힐다는 내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고 싶어 안달복달했지. 그녀는 토르를 겁나 했소. 그래서 내게 접근하여 자기 딸과의 결혼을 강요한 거요."
"그리고 당신은 거절했구요?"
"그녀의 딸은 심술궂은 마녀요, 로즈린. 나이도 나의 두 배나 된다오. 그런 청혼을 하다니 건힐다는 미친 게 확실해요. 그러나 그녀의 제안에 그냥 웃음을 터트린 게 바로 나의 잘못이었소. 건힐다는 무시무시하게 화를 내더군. 정말 엄청나게 말이요. 그 자리에서 그녀는 나와 내 검에 저주를 내린 것으로도 성에 안 차 미치광이 울프스탄을 죽여서 그가 영원히 날 뒤쫓아 다니도록 만들어 놓았지. 울프스탄은 나와는 지독한 사이라오."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는 걸요."
그 순간 유령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느낌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소온이 키득거렸다.
"울프스탄은 이게 별로 좋지 못하다오."
그는 자신의 머리를 톡톡 쳐 보였다.
"내가 불려 올 때마다 날 찾아내 좇아 온다는 건 그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오. 몇 번 나타나긴 했지만 난 그를 왔던 곳으로 언제나 돌려보냈소. 안된 일이오. 울프스탄은 제대로 훈련받은 전사고 나에게도 좋은 운동 상대가 되었는데 말이오."
좋은 운동이라니. 분명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일 거야. 로즈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에게 한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거렸다. 만약 소온이 싸움을 하다가 죽는 모습을 본다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즈린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시간 낭비는 이것으로 충분해요. 제대로 된 현실로 돌아갈려면,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러 떠나야죠."
그리고 곁에 머무를 작정처럼 보이는 바이킹과 무엇을 할 것인지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33
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배의 갑판에 갑자기 사람이 나타난다면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만한 사건이다. 로즈린은 어깨에 무거운 나무통을 들러메어 자신이 앞에 있는지도 볼 수 없는 선원의 발치에 내동댕이쳐졌다.
소온 역시 좀 더 나을 바 없이 다른쪽 구석에 쳐박혔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모양새라니. 로즈린이 다가가 팔꿈치로 쿡쿡 찌르자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건 심각한 상황이에요."
그녀가 속삭였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눈치채고 소리라도 지른다면 어떻게 하죠? 난 누군가가 큰소리로 떠들며 우릴 향해 손가락질 하거나 화형대를 만드느라 부산을 떨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소온은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진정해요, 로즈린. 누군가는 우릴 보고 놀랄 수도 있겠지만 곧 잊어버릴 거요. 이 사람들은 출항 준비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거든. 설사 보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떠들기 보다는 자신이 잘못 본 탓으로 돌릴 거요."
소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걱정을 잠재워 주려 애썼다. 로즈린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느 누구 하나 소리를 지르거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이가 없으니 그의 말을 믿어야 했다. 익숙해진 천둥 번개 소리가 아니더라도 로즈린은 그가 나타났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사실 그와 함께 지낸 이후로는 그런 소리가 나는지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갑자기 들려온 뇌성에 놀라 소온과 로즈린의 출현보다는 혹시 폭풍이 몰려오는 건 아닌지에 더 신경을 쏟았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주목을 받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로즈린의 불안감을 훨씬 덜어 주었다. 그러나 은근히 치솟는 소온에 대한 짜증은 한층 더 쌓였다.
그녀는 앙다문 이 사이로 불만투성이의 말들을 쏟아냈다.
"내가 살던 시대로 돌아가면 잊지 말고 텔레비전이 뭔지 이야기해 달라고 해요. 혹은, 커다란 새라고 말했던 것을 태워 주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혼자서 투덜거리는 말을 그가 못 들은 척하기엔 그들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게다가 소온의 호기심을 잔뜩 부추켜 놓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애써 그의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입술 양끝에 묘한 미소를 달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반짝일 그를 보는 듯했다.
"그 거대한 새를 탈 수 있단 말이오?"
로즈린은 다그쳐 묻는 그의 물음에 기가 막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온이 이러고도 남으리란 걸 생각해야 했단다, 로즈린. 그녀는 '거대한 새'가 교통수단이란 말은 않기로 작정했다.
"내가 한 말은 잊어버려요, 소온. 우린 그걸 탈 수 있죠. 그럴 수 있다고요. 물론 당신이 생각하는 방법과는 틀리지만. 그건 그렇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 거죠, 날짜는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며칠인지는 나도 모르겠소. 지난 번 영국으로 막 출발하려던 모라 호의 모습을 보던 때를 상상했다오."
"좋아요. 대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의 이곳 상황들은 그나마 정상으로 보이는군요. 함대는 9월 27일에 영국으로 출발해야 해요. 12일에는 좀 더 나은 장소를 찾기 위해 세인트발레리까지만 가야 하고, 그리고 그곳에서 북풍에 발이 묶여야 해요."
그런 다음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앞으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겠군요. 만약 당신의 시종이 나를 위해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 준다면 누군가는 영국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행운을 가질 수 있을 텐데. 가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어요?"
그는 얼굴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모르겠소. 나도 그를 찾아야 하는데. 그러나 난 당신을 여기에 혼자 두고 떠날 수 없……."
소온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무엇인가를 발견했는지 말을 멈추고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그런 다음 말을 이었다.
"윌리엄 공, 로즈린 양을 소개합니다."
로즈린은 소온의 팔 안에서 몸을 홱 돌렸다. 너무 놀란 그녀는 자신이 입을 딱 벌리고 있는지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강의실에 있던 중세 포스터 속의 남자를 소온은 윌리엄 공이라고 말했어. 이제야 알겠군. 포스터 속의 사람과 윌리엄은 섬뜩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은 자신이 윌리엄 공을 똑같이 그려냈다는 걸 모르겠지.
그녀는 마침내 그 위대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로즈린은 고개를 숙여 숙녀답게 공손한 인사를 했다.
"폐하."
윌리엄은 화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은 아니오, 아가씨. 물론 곧 그렇게 되겠지만."
로즈린은 자신의 실수에 은근히 얼굴을 붉혔다. 이제 곧 그는 영국의 새 왕이 될 것이며 역사는 그를 그렇게 부르게 될 것이다.
"영주님, 제가 저의 시종을 찾는 동안, 이 숙녀 분을 돌보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소온. 이곳에 있는 나의 부하들과 동행하게나. 그리고 자네는 나와 함께 모라 호를 탔으면 하네. 앙쥬의 가이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나에게로 와서는 자네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을 하더군. 무슨 끔찍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던걸. 자넨 나에게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 주어야 하네."
소온은 윌리엄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돌아서기 전에 로즈린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공작의 곁에 남겨놓고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로즈린은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지난 몇 주 동안 어디에서 뭘 했다고 윌리엄에게 둘러댈지 궁금해졌다. 소온은 검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불려오지 않는 동안은 발할라에 있다고는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장난이 아닌 진실로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윌리엄은 좀 더 이성적인 대답을 듣고 싶어 하리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물어보지도 않았겠지.
로즈린은 지금 소온이 둘러댈 말에 대한 걱정을 밀어두기로 했다. 이 얼마나 황홀한 기회인가. 윌리엄과, 그 윌리엄 왕과 한 자리에 서 있다니. 그녀는 이 믿을 수 없는 일에 정신이 팔려 다른 걱정 따위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애시당초 소온이 이야기한 시간 여행에 동의 한 것-얼마나 황당한 제안이었던가-도 바로 이 노르만디의 윌리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어느 문서에도 윌리엄이 직접 했던 말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이 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 로즈린이 집필하게 될 책에는 윌리엄의 모든 것이 상세하게 기록될 것이다. 물론 유일한 책으로 알려지겠지. 출항 준비에 정신이 없는 그의 부하들이 윌리엄을 방해할 리는 없는 지금이 그의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만 붙잡아 둘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역사로 기록할 만한 것들에 관해 역사가의 관점에서 그와 인터뷰를 했다라고 말을 하자면, 그날이 정말 9월 27일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 외엔 완전한 낭비였다. 로즈린은 숙녀다운 자세를 유지하며 지적(?)인 몇 가지 질문을 그에게 해보았으나 대답보다는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눈빛과 먼저 마주쳐야 했다. 그녀가 왜 그런 호기심을 갖고 있는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바람에 로즈린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렇게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단지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런 일이 아닌가. 역사란 윌리엄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힘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니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할 이유는 충분하다. 숨겨진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겠지만 이 시대와 여기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자신의 책에 기록할 수 있으리라.
34
소온은 오후가 다 지나서야 앙쥬의 가이와 함께 모라 호로 돌아왔다. 출항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초조해진 로즈린은 난간에 꼭 붙어 서서 부두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출항 시간을 겨우 십오 분 남겨놓고 배에 올랐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로즈린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였다. 만약 그가 제때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하릴없는 이 배에서 내려야 한다. 허허벌판 같은 육지로 올라 그를 찾아 헤매 다녀야 하는 꼴을 상상만 해도……. 게다가 그를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다시 만난 가이는 전혀 반갑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물론 첫 만남에서 서로의 감정을 잔뜩 긁어 놓았으니 그의 그런 냉대 정도는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난 뒤로부터 로즈린은 가이에게 따뜻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소온이 짐작한 대로 가이의 누이가 죽었다면, 그 소식이 이곳까지 전해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지난 후일 테니 그는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로즈린은 첫번째 기회가 왔을 때 가이에게 지난번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러나 가이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난 남자이기 때문에 당신보다 우월하다'라는 식의 태도를 고수했고, 그런 가이의 행동까지 참아 줄 만큼의 아량은 그녀에게도 없었다.
냉정한 표정을 잘 유지해 오고 있는 소온의 얼굴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는 꽤 재미있어 하는 눈치였다. 그가 속으로 키득대고 있다는 것을 알 만큼 로즈린은 그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차가워 보이는 얼굴 속에서 즐거운 듯 반짝거리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모든 걸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뜻대로 풀리지 않은 윌리엄과의 인터뷰 후에 자신의 심사가 뒤틀려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소온이 제 시간에 배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마음을 졸이긴 했지만 말이다. 뒤틀린 감정에 충실해 툴툴거려야 하는 순간 로즈린은 다행스럽게 모라 호에 타고 있는 이들 중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레이날드 드 모르빌 경의 얼굴이 사람들 사이에서 쑥 나타난 것이다.
로즈린은 적어도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소온에게 말을 걸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면이 약간이라도 있는 사람을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녀를 알아본 레이날드 경은 즉시 다가왔다. 사실, 그는 정말 대단한 미남이었다. 그리고 소온의 분신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일이니 소온 블러드링커에게 해가 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를 다치게 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래지 않아 레이날드 경이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 거죠, 아가씨? 아니, 그건 중요한 문제가 전혀 아니지.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오."
'이건 예상 밖의 일이야.'
로즈린은 레이날드라는 기사가 지금 낯설기만 한 배 위에 있다는 사실만이 기쁘게 여겨졌다.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적어도 우리가 영국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리고 그 후에도 난 이 배 가까이에 머물고 싶군요. 만약, 허락된다면 가능한 일이겠죠. 경을 다시 만나 정말 기뻐요. 최근에 또 다른 숙녀를 구해 준 적이 있으세요?"
그녀는 그저 농담을 던진 것이었으나 그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난 그런 일을 자청해서는 하고 싶지 않소. 상대가 당신이 아니라면 말이오."
그녀는 즐거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내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이세요?"
자신을 쏘아보고 있을 소온의 얼굴과 지금 한 대답에 대해 생각하는 레이날드의 실망한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한숨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참 안된 일이구료. 당신에게서, 고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감사를 위해서라면 난 어떤 일도 감수할 수 있소."
로즈린의 기분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멋진 기사의 찬사에 혹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레이날드 경은 용감할 뿐만 아니라 로즈린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의 눈빛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열정에 들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감정의 끝자락에 맞닿아 버린 로즈린은 결국 인정해야 했다. 피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얼마나 힘들어 했는가. 로즈린 화이트는 바이킹과 사랑에 빠졌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는 떠나지 않겠다는 달콤한 말로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온 사람이었다. 옛날이야기처럼 칼의 마법을 빌어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랑이다. 천 년 전에 비이킹 신화 속의 신을 형으로 가진 사람이…….
만약 그의 말처럼 로즈린의 시대에 남아 함께 살아간다면 그가 잘 적응해 나갈까. 그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고 어지럽기만 한 이 세상에서. 어쩌면 그를 20세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녀는 평생을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 로즈린은 그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소온의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무엇보다도 좋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사랑한다.
소온의 가장 큰 관심사는 싸움이었다. 그는 전사로 자랐고, 전투를 생활처럼 받아들였다. 그런 그가 칼과 방패를 놓고 텔레비전 리모트 콘트롤에 만족할 수 있을까. 자신이 끼어 들 싸움을 찾지 못할 그녀의 세상에서 소온은 아주 빨리 지루함을 느끼고 말 것이다.
발할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를 그녀 곁에 영원히 머물게 하는 건 불공평한 처사였다. 발할라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바이킹 식으로 삶을 살며, 전사로서 서로의 기술을 뽐내고 비교하며 마음껏 견주어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행복을 느낄 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겠지. 그리고 그녀는…….
로즈린은 혼자 남겨진 자신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없는 세상,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리움의 시간들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허전해졌다. 소온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감정은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갑자기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감정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딴 남자와 몇 마디 말을 나누는 모습에 발끈해 소온은 얼굴을 찡그리고 그녀를 노려보며 갑판을 건너왔다.
"나와 트렌쳐(Trencher)를 함께 하시겠습니까, 아가씨?"
레이날드가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물어왔다.
"네?"
로즈린은 곤경에서 자신을 구해 준 멋진 기사의 눈에 시선을 맞추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지만 입술 양끝엔 희미한 미소가 매달릴 뿐이었다.
"트렌쳐를 함께 하시는 게……?"
그는 희망에 찬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트렌쳐? 약간의 시간이 걸린 후에야 로즈린은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랐다. 중세에 쓰였던 그릇의 하나로 오래된 빵의 속을 파내 음식을 담아내는 쟁반의 일종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잔뜩 곤두선 신경을 누르느라 머리가 혼란스러웠던 로즈린은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중세 식의 푸짐한 만찬을 즐길 차례였다.
그리고 잘 알려진 윌리엄 공작이 직접 주재한 향연이었으며 이 시대를 연구한 사람들이라면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만찬이었다. 로즈린은 자신이 모라 호에 대해 그들도 모르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조만간 배가 항로를 이탈해 본 함대와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은 입 안에 담아 두었다. 그러나 영국의 에드워드 왕이 무적함대에 드는 과도한 비용을 탓하지 않고 계속해서 해안을 정찰하도록 했거나, 해롤드 구드윈슨이 9월 8일 군대를 해산하면서 일부를 그대로 남겨 둔 채 런던으로 귀향했다면 문제는 달랐다. 로즈린에게는 바로잡아야 할 역사가 추가되는 셈이었다.
아직까지의 정황으로 봐서는 모라 호가 홀로 해협을 건너갈 때 아무런 어려움과 마주치지 않을 것이며 아침이 되면 본 함대와 다시 만나게 되리란 사실이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나 윌리엄의 얼굴만으로는 그의 배가 곤경에 처해 어려운 상황인지 어떤지, 그가 제대로 판단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윌리엄은 뜻밖에 발생한 항로 이탈에 대한 보고를 듣고도 사람들에게 이미 준비된 사치스런 향연을 즐기도록 명령했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침착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면, 영국 땅을 밟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마침내 제 방향을 찾아 낼 것이다.
로즈린은 우울해진 마음도 달래고, 기운찬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고 싶어 조용한 곳을 생각해 봤지만 배 안에서는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잠잘 곳마저도 갑판이 가장 확실해 보이는데, 어디서 그런 곳을 찾겠는가. 게다가 레이날드 경은 아직도 그녀의 대답을 듣기 위해 서 있었다.
로즈린은 다시 미소를 짓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나은 얼굴로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전 기쁜 마음으로 당신과……."
바로 그때 소온의 목소리가 끼어 들어 그녀가 해야 할 대답을 대신 마쳤다.
"아마 혼자 드시는 편이 건강에 더 좋을 것이오. 이 아가씨는 나의 보호 아래 있고, 난 친구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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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린은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당신은 자만심에 빠져…… 남성 우월주의에, 얼마나 불필요한 일인지, 생각이나 해봤겠어요. 소온, 당신처럼 소유욕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감사해야겠군요. 당신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려줘서요. 레이날드 경은 칼을 들고 덤벼들 수도 있었어요. 생각만으로도 정말 끔찍해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누르며 간밤을 보낸 로즈린은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 보았지만 화를 삭이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소온에게 퍼붓고 싶은 말들을 가슴 속에 담아두는 일은 그녀가 느낀 참담함이나 분노를 돋굴 뿐이었다. 항로를 잃는 사고를 만난 모라 호만 아니었다면 벌써 말을 꺼냈을 터였다.
지금은 아침이었다. 배들은 아무런 충돌 없이 영국 해안에 들어선 뒤 피벤시 만을 향했다. 그리고 오래된 로마 시대의 성벽 안쪽을 요새화 하려는 작업이 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은 시간 낭비였다. 피벤시는 요새가 되기엔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탁 트인 데다 환하게 노출되어 있어 함대는 조만간 헤이스팅스를 향하라는 명령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명령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곳곳에 막사들이 부지런히 세워졌다. 로즈린은 가이를 재촉해 잠시 후면 다시 헐 막사를 세우도록 했다. 그녀는 지난밤 소온의 행동에 대해 따져볼 장소로 막사 안만큼 괜찮은 장소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당신은 그를 위협한 거예요."
그녀의 비난은 신랄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겠죠, 그렇죠? 그가 당신에게 덤벼들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예요."
소온은 팔짱을 끼고서 확고한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먼저 덤벼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따름이오."
"왜죠?"
로즈린은 분통이 터질 듯했다.
"레이날드는 식사 시간에 단지 자기 옆자리에 앉지 않겠냐고 물었을 뿐이에요.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왜 그토록 무례하게 굴었죠? 내게 이유를 설명해 봐요."
소온은 그녀가 놀랄 만큼 화를 벌컥 냈다.
"그가 당신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오!"
로즈린은 조금은 잦아든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죠?"
"가이가 그러더군. 우리가 없어진 동안 레이날드 경은 녀석에게 와서 당신의 행방에 대해 아주 세세한 것까지 물었다고 했소. 단순히 약간의 궁금증 때문이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로즈린, 가이도 눈치챌 만큼이라면 이해가 되겠소? 당신은 그런 시시한 귀족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소."
소온이 화를 내고 있는 일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의 말이 옳았다. 일이 원래대로 진행되고 자신과 소온이 20세기로 돌아간 후에도 레이날드 경은 이곳에 남을 사람이다. 로즈린은 여전히 그녀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그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역사 속에서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며, <흡혈귀의 저주>가 아니면 만날 수가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소온의 판단이 옳다고 해서 방법까지 찬성할 수는 없었다. 좀 더 나은 방법도 있었으련만 레이날드 경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당혹스럽게 만들어 버린 소온의 처사는 그냥 넘길 것이 못 되었다.
"좋아요, 레이날드 경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도록 해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공작과 다른 사람들이 모두 듣는 데서, 당신은 나와 함께 시골로 원정 사냥을 갔었다는 말을 꼭 해야만 했어요? 마치 날 잡으러 갔다는 듯이 들리는 바람에……."
"잡힌 것은 사실이오."
"더 나빠요!"
소온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했다.
그녀가 그를 때렸을 때 막사 주변에 누울 곳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로즈린은 웃음을 터트리던 공작의 모습을 기억해 내었다. 레이날드 경 또한 그의 이야기를 듣더니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윌리엄 공은 내가 없어진 이유를 알고 싶어 했소."
그의 얼굴에선 아직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또 다른 내가 당신에 대해 한 말을 공작이 기억하고 있는 한, 나의 대답은 더없이 적절했소. 그리고 로즈린, 당신이 잡힌 것은 사실이고……."
"난 그런 적 없어요, 소온. 그리고 날 핑계 삼은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겠죠. 당신은 레이날드 경이 내 주위에서 왔다갔다하는 게 싫었던 거예요."
"아니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이해했소. 그 핑계는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었소."
"날 위해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째서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아듣는 것을 당신만 모른단 말이오? 심지어 드 모르빌마저도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을 알고 있다오."
가슴 가득 따스함이 번졌다. 소온이 격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로즈린에게는 울고 싶다는 충동에 빠져들 만큼 달콤하게 들렸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따스한 키스로 그를 안았다. 연회가 계속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아야 했던가. 그가 날 사랑한다. 누구보다도. 아마도 한참이 흐른 후에 그를 보내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기란 너무도 힘이 들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생각을 잠재우고 그의 심장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기대고 싶었다.
그를 사랑한다. 소온의 사랑보다 더 크게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손에 잡힐 듯, 그 사랑을 확인하고 확인받길 원했다. 지금 사랑을 표현할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예의 바른 사랑은 원하지 않았다. 아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로즈린은 바닥에 닿는 자신의 등을 느낀 순간 거칠어진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의 손은 거칠게 움직이고, 그녀의 감정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처음처럼 강한 열정이 두 사람을 감싸고 돌았고, 서로가 서로를 향하는 욕망의 깊이도 어느 때보다 강했다. 오직 하나가 되고 싶다는 열망만이 있었다.
열정에 들뜬 거친 손놀림이 오고 갔다. 부드러운 듯 거칠게 그들이 옷이 벗겨지고, 혹은 찢어지기도 하며 그들은 서로를 확인했다. 그의 속살이 드러날 때마다 그녀는 키스하고 애무하며 깨물었다. 소온의 신음소리에 그녀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의 사랑은 시작만큼이나 거칠고 빠르게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격렬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로즈린은 마치 폭풍우가 그녀의 몸을 휩쓸고 지나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한때는 자신의 감정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소온의 능력에 대해 경의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그가 항상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것은 내가 잘못했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뜻이오?"
그녀는 눈을 뜨고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그를 발견하고 앵돌아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뇨.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에요. 당신이 나에게 했던 그 이상한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난 당신을 조금 더 정신없게 만들어야 할 것 같소."
"글쎄……."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어디 최고로 한번 해봐요. 그 다음에 이야길 해드리죠."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그가 주는 즐거움 이외에 로즈린은 아무것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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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판단이 옳다면 과거 중에서도 당신은 이 시대를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아요, 로즈린."
지나가는 말처럼 했지만 소온의 이야기는 로즈린의 주의를 쉽게 끌었다. 그들은 지금, 급히 만들어진 음식으로 식사를 막 끝냈고 그녀의 기분은 모든 면에서 안정된 상태였다.
"매혹되었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거예요."
로즈린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현대식 수도관이 그리울 것 같아요."
그녀는 문득 자신이 한 말의 속뜻을 그가 이해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조금 전보다 더 큰 미소를 지어보였다. 현대식 수도관을 설명해야 한다면……, 적어도 수세식 화장실에 대해 그에게 수도 없이 설명했을 거야. 그러나 그녀의 주의를 끈 것은 그가 방금 한 말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녀가 다시 물었다.
"로즈린. 우리가 온 곳으로 꼭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오. 당신만 원한다면 가능한 일이지. 지금처럼 이곳에 남아 중세식으로 살아간다면 어떻겠소?"
그녀의 심장은 흥분으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중세에 머물러 산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자신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온과 함께 18세기로 가거나 19세기로 갈 수도 있다. 충분한 자료가 모아지면 책으로 출판되겠지. 물론 19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여자가 책을 내는 일이 없으니 누군가의 이름을 빌어 출간된다 하더라도 후세에는 아주 가치 있는 자료로 빛을 보게 될 것이다. 현대처럼 수많은 자료를 제시하고 근거가 명확하지 못하면 사장되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초창기 역사서들은 그렇게 많은 제약을 받지 않았고 그런 것이 문제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학문적 검열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연구하고 책을 낼 수 있다면…….
그래, 그럴 수도 있군. 그러나 그녀를 가장 흥분시킨 것은 소온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소온은 이 고루한 시대에서 행복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와 함께 있는 자기 역시도 행복하리란 사실은 의심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시대를 포기하고 이 중세에 모든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게 될까. 원한다면 검의 힘으로 그녀 시대로 돌아가 친구를 방문하고 필요할 때마다 잠깐씩 다녀올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 글쎄 그건 골치 아픈 일이다. 평생을 두고 지위와 명성을 쌓아왔고, 그런 자신에게 만족했다. 가르친다는 일이 무척이나 그리워지겠지. 그러나 소온과 함께 나머지 생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 그녀에겐 더 크게만 느껴졌다.
"여기에 근사한 집을 지을 수 있소, 로즈린."
소온은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덧붙여 말했다.
"윌리엄이 영국을 지배하면 많은 땅을 하사할 거요."
"그래요, 나도 알아요. 윌리엄은 부하들에게 매우 관대한 사람이죠."
그런 다음 그녀는 즐거움이 넘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
로즈린은 말을 멈추고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근사한 상상 속으로 무시무시한 걱정거리가 고개를 들고 다가왔다. 지금까지의 시간 여행 중에도 어쩌면 많은 일들이 뒤바뀌고 엉켜 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만약 두 사람이 이곳에 정착해서 이곳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역사는 많은 부분에서 변하게 될 것이다. 로즈린은 자신의 삶마저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소온이 자신의 곁에 남겨진다는 그 어떤 보장도 받을 수 없게 된다면…….
"뭐가 잘못되었소?"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온 소온의 손이 로즈린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로즈린은 울고 싶었다. 소온에게까지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지워 마음 아프게 할 수는 없다. 그녀는 뺨에 닿은 그의 손에 입을 맞추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아주 근사한 생각이에요. 하지만 비현실적이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말 거예요. 역사보다 전쟁을 빨리 일으킬 수도 있고,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많은 생명을 파괴시킬지도 몰라요. 내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군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하지만 여기에 사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소?"
로즈린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검의 힘에 의해 당신은 여기에 있는 거요.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단 말이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순리에 벗어나는 수단에 의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게다가 내가 여기에 머물게 되면, 난 자주 20세기로 돌아가 무엇인가를 바꾸어 놓은 건 아닌지 알아보아야 할 테고, 만약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나는……, 그것들을 다시 바로잡기 위해 내 일생을 몽땅 보내게 될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돌아갔을 때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다면,"
소온은 빠르게 물어왔다.
"이 시대에 머무르는 데에 동의할 거요?"
로즈린은 한숨을 내쉬는 일 외에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소온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그가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절절히 배어났고, 그녀에겐 아프게만 다가왔다.
"소온, 잘 들어 봐요. 만약 우리 두 사람이 여기서 일 년 정도 보낸 후에 잠깐 동안 내가 살던 현대로 돌아갔어요. 우리는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안 변했는지부터 살펴야 할 테고, 달라진 게 없다면 다행일 테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 봐요. 변한 게 없어 이곳으로 돌아와 편안히 살 수 있다 해도 일 년 후엔 다시 현대로 돌아가 이상이 없다는 확인을 해야 해요. 10년이나 20년을 그렇게 살았지만 갑자기 엉망이 된 현대를 알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냐구요."
로즈린은 잠시 후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바뀌었는지 짚어 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져요. 아마 살아온 기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아야 할 걸요. 지난 시간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그런 시간을 보낸다면 아마 두 사람 다 미칠 지경이 되고 말겠죠. 그리고 이곳에 남을 수 없어 내가 살던 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런 난 더 이상 예전의 로즈린 화이트가 아닐 거예요. 지금보다 10년이나 20년은 더 나이 먹었을 테고, 당신은 날 내 나이에 맞는 시대로 되돌려 놓지는 못해요. 혹시 그게 가능하다 해도 난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보이도록 행동하거나 그 동안 어디 갔었는지를 딴 사람들에게 설명하느라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 걸요. 소온 이제 알겠어요?"
로즈린은 슬픈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슬프게 반짝이는 소온의 눈빛이 그녀를 가슴 저리게 했다.
"난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길 바랐다오."
'소온 나 역시도 당신만큼이나 이곳에서 함께 머무르고 싶어요. 아마 당신보다 훨씬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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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린과 소온은 근사한 생각을 스스로 무너트리곤 축 쳐진 기분이 되었다. 그런 며칠을 보낸 후 존 드 프뤼엘 경과 우연히 만날 기회를 가진 로즈린은 역사란 보통의 수단으로, 책이나 영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추측하길 - 로즈린이 결론 내리길 - 바이킹이 윌리엄 대신에 해롤드 구드윈슨에게 진 것은 소온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가 존 경을 잔뜩 취하게 만들어 스파이가 죽기 전인 다음날 아침 그를 심문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소온은 그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녀는 또다른 소온이 원래 바른 역사라고 믿는 일들에 관여되었고, 그것이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다는 바로 그 역사의 일부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자신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 이 시간 여행은 그녀의 관점들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로즈린은 가장 침착하고 평온하게, 태연하고 논리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존 경은 윌리엄과 무엇인가를 협의하기 위해 모라 호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배를 내려 서기 전에 로즈린과 함께 갑판에 있던 소온을 알아보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 소온. 강도들이 든 그날 아침 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떠났던 거요? 전날 저녁에 당신을 본 기억이 있는데 아침에는 볼 수가 없더군."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온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도둑이 들었나요?"
"그렇소. 내 가방을 열려다가 실패했다오. 난 그 무법자들 가운데 둘을 잡았지. 그 녀석들은 기사의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로즈린은 소온이 그날 아침 도둑의 습격을 받아야 했는지, 아니면 술에 취해 존 경의 숙소에 계속 머물러야 했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소온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 미루어 짐작해 볼 만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더군다나 존 경이 보는 앞에서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신이 그날 밤에 제멋대로 굴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로즈린은 소온에게 경고의 시선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존 경에게 말을 걸었다.
"만약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물건을 도둑맞는 건 물론이고, 많이 다칠 뻔하셨군요."
그러나 존 경의 대답은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그럴 리가. 아가씨, 용사는 어느 순간에라도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에 긴장하고 촉각이 서도록 훈련 받는다오. 연회장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소. 도둑을 맞은 곳은 이층의 침실이었다오. 그렇지 않았다면……."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로즈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신중하게 되물었다.
존 경은 확신에 찬 고개짓을 해보였다.
"녀석들은 오랫동안 그 일을 계획하고 있었던 모양이오. 틀림없다고 확신할 수 있소. 가능만 했다면 녀석들은 그 건물의 모든 방과 연회장, 아마 부엌까지도 털 생각이었을 거요. 그런데 그 패거리들의 두목이 당일날 아침 뜻하지 않은 큰 부상을 입게 된 거지. 어떤 숙녀분을 희롱하려 들었는데, 때마침 나타난 기사 덕에 녀석들은 늘씬하게 혼이 났소. 심하게 상처를 입은 두목이 직접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자 부하들만이 도둑질을 한 모양이요. 애초의 계획을 바꾸어 이층에서 자고 있는 몇몇 손님들의 물건을 훔치는 정도로 만족할 작정이었지. 덕분에 아래층 연회장에서는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소."
"끙."
로즈린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존 경의 말은, 다시 말해서 소온은 그날 아무것도 바꾸어 놓지 않았다. 존 경이 술에 곯아떨어졌다 해도 아래층 연회장이 도둑들의 습격으로 소란스러워졌다면 그는 스스로의 방어를 위해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그는 술이 완전히 깬 모습으로 다음날 아침 스파이를 심문했을 터였다.
비록 그들이 존 경을 일찍 침대에 들도록 일을 바꾸어 놓았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그러니 나중에 생긴 변화는 소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녀가 바꾼 것이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소온의 은근한 시선도 '그렇지 않소'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시간 여행을 하던 그날 아침 로즈린이 막무가내로 소온의 막사를 뛰쳐나오는 통에 일은 벌어졌다. 막사를 찾지 못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를 둘러싸고 강간하려던 무법자들이 바로 그 도둑들이었다니. 그녀 때문에 패거리의 두목이 부상을 당했고 그들은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로즈린과 소온이 아직 역사를 되돌려 놓지는 못했지만, 존 경이 술에 취했든 그러지 않았든 간에 이층으로 올려 보냈고, 그러고도 바뀐 것이 없었으니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소온과 존 경은 잠시 동안 도둑들에 관해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그러나 경이 떠나자마자 소온은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좋아요. 역사가 바뀐 게 당신 탓이 아니에요. 바로 나 때문이군요. 그래도 이것은 내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거예요."
로즈린은 겸연쩍은 듯이 보였지만 짐짓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 내가 자초한 일이죠. 그러니 잘못된 걸 고치자 마자 우린 이곳을 떠나야 해요. 즉시요."
그녀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그랬는지, 아직 상상조차 못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전쟁이 벌어졌던 날을 기억하고 있겠죠, 소온?"
로즈린은 약간 기죽은 모양새로 서 있었다.
"그나저나, 또 다른 '소온'은 그날 도둑들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나요?"
"그렇소."
소온은 무심히 대답했다.
"왜 내게 그런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았죠?"
"중요한 말? 아니오. 이 시대 사람들은 흔히들 겪는 일이라오. 나 역시도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만약 존 경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기억하지도 못했을 거요. 난 존 경이 말을 하기 전까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소."
"분명히 당신은 그들을 죽여 버렸을 거예요."
"물론."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그녀에게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미리 말을 해주었다면 난 좀 다른 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었을 거예요. 운이 약간이라도 따른다면 화살 사건도 고쳐 놓을 수 있겠죠."
38
2주일이 지나고서야 10월 14일이 되었다. 로즈린은 그 막연한 시간들의 대부분을 모라 호에서 보냈다.
노르만 군은 쉽게 헤이스팅스 항구를 점령했다. 항구로 몰래 다가가 포위하기까지 그들을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그 광경이야 말로 '황폐'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것은 분명 전쟁이었다. 로즈린은 무엇보다도 그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어떤 전략이 세워졌고, 그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실제 상황에선 전혀 도움이 못 되었다. 그런 '알고 있음'이 전쟁의 심각성을 줄일 수 없을 뿐더러, 그날 하루가 끝나기까지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윌리엄과 그의 군대가 멀리 가 버리고 나서야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로즈린은 안전한 후방에 남아 있었으나 소온은 군대와 함께 전투가 벌어질 헤이스팅스로 떠났다. 소온이 전투에서 상처를 입을 수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죽음의 위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역사 속에 불쑥 끼어 든 그는 어느 누구도 죽여선 안 된다. 그가 아무리 호전적이라 할지라도 전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방어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다가오는 밤 윌리엄의 정찰병은 해롤드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것을 보고하러 올 것이다. 윌리엄은 지금의 진지를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릴 테고, 노르만 군은 영국군과의 대치를 위해 행군을 시작해야 한다. 다음날 아침 해가 산의 능선을 벗어난 시간 전쟁은 시작되리라.
이제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로즈린은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잰걸음으로 왔다갔다를 반복했다. 이번 전투에서 소온이 안전하리란 보장은 전혀 없었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사상자는 늘어날 것이다. 전쟁의 정황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소온에게 날라들 화살 하나도 막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칠 지경으로 몰아갔다. 영국군은 산등성이에 잠복해 있다 노르만 군의 습격을 막아낼 테지만 방어선을 넓게 구축하지는 못했다. 그가 가장자리를 돌아가 싸운다면 위험은 반정도 줄 수 있을 텐데.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더 어려웠다. 그녀 곁에 딱 붙어 있는 앙쥬의 가이를 따돌릴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도 로즈린의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일을 내켜할 만큼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녀를 자신의 시야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그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주인으로부터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려 했다.
로즈린은 자신이 가이라면 주인의 애인을 호위하느니 전쟁에 나가는 쪽은 선택하리란 결론을 내렸다. 다른 시종들처럼 자신의 주인 뒤에 서서 그를 보호하며 전사로서의 명성을 얻고 싶어하겠지. 그러나 가이는 아직 정식 시종으로 임명되지 않았다. 덕분에 내키지 않는 로즈린의 보호를 떠맡은 셈이었다. 그러니 방법은 그를 구슬리는 것뿐이었다.
앙쥬의 가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만 무례했다. 그녀가 전쟁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는 로즈린이 무안해질 만큼이나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자존심이 많이 상한 로즈린이지만 꾹 눌러참고,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분명 오늘 엄청난 전투가 일어날 것이란 이야기로 그를 구슬렸다. 가이가 아무리 똑똑한 척하지만 예언과 계시를 믿는 중세 사람이 아닌가.
한참의 입씨름이 오가고 난 뒤 그녀가 마침내 그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영국이 정복당한 후를 생각해봐요, 가이. 노르만 인들은 이곳에 정착하겠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노르만 인들은 자랑스럽기만 한 이 전투를 두고두고 이야기할 거예요. 후손들은 그 이야기에 자긍심을 느낄 테고, 전쟁에 참가했던 선조들의 이름을 되뇌이며 그들을 찬양하겠죠. 이번 전투는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들 중 하나로 기록되고도 남을 일이라고요. 가이, 그 현장에 당신이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지 않나요? 나와 함께 가서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남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전해야 해요. 누군가가 물어볼 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 생기는 거죠."
가이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의 허영심을 잔뜩 자극해 놓았다는 사실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마지못해 후방에 남아 있는 단 한 마리였던 자신의 말을 잡아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이는 로즈린을 태우고 길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전장의 사람들을 지켜보기엔 충분히 다가간 후 멈춰 섰다.
로즈린은 '야호!'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억지로 참았다. 앙쥬의 가이는 전쟁터에서 흘러나오는 칼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함성 그리고 군대를 호령하는 기사들의 거침없는 외침에 정신을 몽땅 빼앗기리라는 그녀의 생각을 알고 그대로 움직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소리도 듯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려 애썼다. 어느덧 그의 말은 노르만의 깃발이 보이는 곳까지 나아갔고, 그의 눈은 전장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모두 쫓아다녔다.
그런 다음 짐짓 놀란 척하며 소리 질렀다.
"이런, 너무 가까이 왔군요."
물론 가이의 말은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로즈린이 '지금 이곳이 우리가 있기엔 안전해요'라는 말을 할 때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싸움이 해롤드가 방어선을 구축해 놓은 완만한 산등성이에서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 있는 장소에서는 키가 큰 노르만 군사들의 뒷모습 외에 다른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로즈린의 시야에 서쪽에 있는 또 다른 언덕이 들어왔다.
그녀는 가이의 귀에 대고 말을 했다.
"우리가 너무 가까이 온 것 같아요. 저쪽이 더 안전할 거예요, 가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녀는 언덕을 가리켰다.
"그리고 전장의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서쪽 산등성이에 닿자 마자 그들은 말에서 내려 덤불 속에 몸을 숨겼다. 해롤드의 부대가 있는 산등성이에는 사과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는데, 웨식스의 용이 그려진 군기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전장의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노르만 군은 희망을 잃은 듯 힘없이 퇴각을 시작했고, 해롤드의 방어선을 뚫지 못한다면 지금으로선 영국군이 훨씬 우세하다는 데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 수가 없었다. 로즈린은 군사들의 움직임만으로는 전쟁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웠으나 이내 상황을 제대로 읽어 냈다.
실망한 가이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퇴각하고 있어요."
노르만 군은 등을 보인 채 달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영원한 승리를 위한 서곡일 뿐이었다.
"그래요, 병사들 사이에선 윌리엄 공이 전사했다는 소문이 떠돌 거예요. 그리고 노르만 군은 오전이 다 지나도록 영국군의 방어선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지금껏 성공하지 못했죠. 그렇지만 저쪽을 봐요."
로즈린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오도 주교가 윌리엄의 생존을 알리며 군인들의 사기를 돋구고 있잖아요. 그는 군인들을 독려하고 있어요. 무시무시한 철퇴를 휘두르면서 말이죠."
"그렇지만 지금은 영국군이 공격을 하고 있어요!"
그는 노르만 군을 향해 비탈길 아래로 달려오는 영국군을 보며 외쳤다.
로즈린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아요, 가이. 저게 바로 역사에 남을 그들의 대실수니까. 이제 윌리엄의 기사들이 돌아서서 그들을 끝장내는 모습을 보게 될 거예요."
로즈린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우선은 소온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일이 급했다. 한참을 더듬은 후에야 비로소 산등성이 아래쪽 윌리엄 곁에 서 있는 그를 보았다. 소온은 아직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윌리엄 가까이에 있는 덕에 아직은 소온이 영국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그가 그곳에 있는 이유를 생각해내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로즈린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윌리엄이 '활을 쏘아라' 라는 명령을 어떻게 내릴 수 있었는지 알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전장을 바라보던 로즈린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번 퇴각은 진짜예요. 그렇지만 모두는 아니에요. 그들은 퇴각하고는 있지만 결국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테죠. 두고 봐요."
"그것을 어떻게 알죠?"
"아, 내가 말했잖아요. 꿈을 꾸었다고."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로즈린은 이 어린 기사 지망생이 자신이 둘러대고 있는 서투른 핑계를 믿는지 혹은 아닌지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 앞에 있는 이 여인이 우리의 운명을 알고 있고, 결코 틀리거나 섣부른 짐작이 아님을 믿는다는 눈길로…….
그녀가 다시 덧붙여 말했다.
"내 꿈은 그리 많은 것을 보여 주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아요."
가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 역시 가이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소온만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런데 소온이 레이날드 경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화를 내거나 위협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돌린 채 웃는 그를 보자 더욱 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로즈린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행동에 놀라 입을 꼭 다물고 말았다.
전쟁은 지리하게 계속되었고, 시간은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해가 서산 머리에 걸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로즈린은 허공을 가로질러 적진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을 보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은 적의 대열을 교란시켰고, 역사가 말해 주었듯이 그 중 하나는 해롤드 구드윈슨을 향했다. 잠시 후 화살에 맞은 해롤드가 쓰러졌다. 자기도 모르게 로즈린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노르만 군이 마지막 힘을 다해 언덕 위로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싸움은 곧 끝이 날 터이다. 해롤드는 아침 녘부터 지켜오던 자리에서 전사할 것이며, 기세가 오른 노르만 전사들은 해가 지고 나서야 패잔병을 쫓는 일을 중단하리라. 해롤드의 애인인 에디스가 연인의 시신을 확인한 후, 윌리엄의 지시에 의해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헤이스팅스 해변에 묻히게 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새로운 영국의 왕은 해롤드의 시신을 월텀 교회로 옮기도록 허락했다.
잘못된 역사는 마침내 제대로 수정되었다. 그녀가 돌아가 살아야 할 현재도 이젠 제 모습을 찾았을 것이며 로즈린은 이제 익숙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윌리엄이 어떤 생각으로 궁수들에게 적확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그들이 원하던 결과가 나온 이상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앞으로 시간 여행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것은 온통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쉽게 역사를 뒤바꾸어 놓을 수도 있음을 배우지 않았던가. 만약 그녀가 엉망이 된 역사를 위해 뒤져 볼 역사책들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가까이에 와 있을 줄 알았소."
로즈린과 가이는 깜짝 놀라 몸을 홱 돌렸다. 소온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불만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로즈린은 단지 미소만 지었으나, 노랗게 질린 가이는 더듬거리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전…… 저는……."
"진정해, 가이."
소온이 그의 말을 잘랐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는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안다. 난 이 숙녀분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얼마나 들볶고 위협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들볶는다고요?"
로즈린이 코웃음을 쳤다.
"난 당신의 말에 동의할 수 없……."
"그랬을 거요. 이번에는 조금밖에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겠지만, 만약 당신이 가만 있었다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겠소? 내 기억엔 여기는 당신에게 남아 있도록 말한 곳이 아닌 게 확실한데 말이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소온은 가이를 보며 덧붙여 말했다.
"곧 막사가 세워지고 부상자들이 옮겨질 것이다. 그들을 도울 일손이 필요할 거야. 넌 그들과 함께 있도록 해라. 이 숙녀분은 이제부터 내가 돌보마. 가이 어서 움직여."
가이는 재빨리 그곳에서 떠났다. 로즈린은 소온과 단둘이 남게 되면 그가 심하게 화를 내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고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윌리엄의 정찰병이 돌아온 새벽녘부터 지금까지 그는 힘든 전투를 치루어야 했다. 피곤하고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를 들어 올려 마구 흔들어 댈 만큼은 아니었다.
"이 시대를 떠날 준비가 되었소?"
그가 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녀의 대답은 '물론'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 있는 베갯잇까지 들고 오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먼저 호기심을 채우고 싶었다.
"왜 엉망이 되어 버렸는지, 우리가 다녀간 후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냈나요? 더 이상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런 특별한 방법으로 활을 쏘자고 제안한 사람은 바로 당신의 레이날드 경이었소. 당신이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내 사람이란 걸, 그가 아무리 해도 당신을 가질 수 없음을 보여 주기 전까지 그는 당신에게 푹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상사병에 걸렸으니, 전투에 관심을 보일 리가 만무하잖소. 그가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노르만 군이 거의 전투를 포기했을 무렵이었지. 레이날드가 윌리엄에게 화살을 쏘라고 제안을 했던 거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럼, 간접적이나마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군요."
"그렇소."
"그런 식으로 날 비난하지 말아요. 내가 그를 일부러 부추긴 것은 아니잖아요."
"당신이 부추겼다고 말하지 않았소, 로즈린. 당신은 그냥 거기에 있었고 그가 매혹 당했을 뿐이지."
그녀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당신은 날 비난할 수 없어요."
"비난할 수 없다고? 당신이 그렇게 뛰어나가지만 않았어도 레이날드 드 모르빌을 만나지 않았을……."
"알았어요! 그건 완전히 몰랐기 때문에…… 실수…….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없군요. 그리고 이 일은 더없이 좋은 증거예요.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과거를 바꾸어 놓아선 안 돼요. 나는 이제 시간 여행에 대한 나의 허락을 취소하겠어요. 물론 우리가 집으로 돌아간 다음부터 말이에요."
그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손을 잡아 입술에 대고 키스를 한 다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리라고 예상했소. 오딘은 과거 속에서 자신과 만나면 좋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지."
"당신은 항상……."
"아니오. 나는 안달하거나 걱정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소, 로즈린."
소온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그 어떤 즐거움이, 당신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오."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하고 싶었으나 그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머지 한손을 그의 목으로 뻗는 순간, 그들은 허공 속으로 빨려들었다.
39
"난 이걸 좋아하지 않아, 블러드링커. 기다리는 것 말이야."
로즈린은 뒤쪽에서 들려 오는 초조한 목소리를 찾아 몸을 홱 돌렸다. 그들은 카베노프 별장의 그녀의 침실로 되돌아왔다. 그러니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고, 게다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목소리가 이곳에서 들린다면…….
그러나 방 건너편 책상 뒤에 놓인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은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녀의 눈은 접시만큼이나 동그래졌다. 너무 놀란 로즈린은 숨이 딱 멎는 듯한 느낌에 마른기침을 해댔다. 소온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지만 그의 손길에 넘어진 로즈린을 보지는 못했다.
소온의 푸른 눈동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게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몰랐으나 입가엔 아주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오, 몰랐어. 하지만 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잖아."
그는 느릿하게 시작한 후,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환영하네, 울프스탄. 좀 더 자주 찾아오려면 노력을 많이 했어야 하잖나."
낮은 으르렁거림이 그에게서 새어나왔다. 저 손님은 유령이다. 로즈린의 침실에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그의 무게를 이겨 내려 애쓰는 듯 의자의 가느다란 다리가 휘어진 것으로 보아 유령은 몸무게를 가지고 있는 게 확실했다.
거칠어 보이는 긴 금발머리가 가슴 아래까지 흘러내려 와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검푸른 바다처럼 어두웠다. 소온만큼이나 떡 벌어진 어깨와 가슴께에 팔짱을 끼고 있는 팔의 근육은 터질 듯 단단해 보였다. 무두질을 하지 않은 가죽조끼를 걸치고 있었는데 검은 털은 윤기가 없었다. 굵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츠의 가장자리에도 조끼와 같은 털이 달려 있었다.
그가 앉은 의자 앞으로 놓인 책상 위에는 그녀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크고 무섭게 생긴 도끼가 올려져 있었다. 바이킹의 전쟁에서나 쓰였을 법한 푸른 날을 가진 것이었다. 아마 저 도낏날 아래 사람의 몸뚱이 정도는 우습게 도막나겠지. 로즈린의 머리 속에 도막나 뒹구는 육신의 모습이 스쳐 지나자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보기에도 미치광이 울프스탄은 매우 기운이 센 사람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놀란 저 무기를 그 역시 보았으리라 생각했지만 소온의 입에선 조롱만이 쏟아졌다.
"아직도 건힐다가 준, 약하기 짝이 없는 장난감을 들고 다니는 구나. 이봐 울프스탄, 그 장난감이 네 손에 넘겨지던 순간 넌 마녀를 죽여야 했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시지. 그녀는 죽기 전에 나를 불러서 널 죽이라고 여러 번 말하더군. 이 도끼는 너의 검처럼 저주에 걸려 있어. 내가 그 마녀를 향해 치켜 들 때마다 보기 좋게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말아."
"부끄러운 일이군."
소온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우리 둘 중 하나는 마녀의 비뚤어진 생을 몇 년쯤 단축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녀가 우리에게 한 짓에 대한 보답으로 말이야. 그 사악한 여자를 악의 세계로 조금 일찍 보내 버리는 거지."
울프스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소온. 넌 왜 가만있는 거야? 적어도 넌 그녀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잖아."
소온은 이제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내가 방법을 찾지 않았다고 여기는 거냐? 그녀가 죽으면 내게 걸린 마법도 풀어지리라고 생각했어. 정말이야, 난 희망까지 걸 지경이었다니까. 그러나 그녀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더군. 내가 발할라를 향해 떠날 때 마녀는 몸을 완전히 숨겼어."
발할라는 바이킹들이 천국이라고 믿고 있는 곳이지만 그들에겐 자신들이 처한 이 비참한 상황과 분명 관련이 있는 듯이 보였다. 그 발할라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소온과 울프스탄은 거친 숨소리를 냈다. 게다가 울프스탄이 벌떡 일어서는 통에 의자는 힘없이 휘청거렸다. 일어선 그는 정말로 소온만큼이나 컸다. 아니, 어쩌면 더 큰 것 같았다.
무지막지한 도끼로 손을 뻗는 건 신호일 뿐이었다.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는……. 소온이 그녀를 자기 등 뒤로 돌려 세우곤 그 역시도 칼에 손을 가져갔다. 방금 전에 마친 시간 여행 덕에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칼은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은 완벽하게 싸울 준비를 마쳤다. 로즈린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하얗게 질린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거대한 체구의 두 남자가 결투를 하려 했다. 그것도 그녀의 침실에서 서로를 죽일 작정으로 덤벼들 찰라였다. 그 죽음이라는 단어는 그녀의 몸 전체에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미치광이 울프스탄은 소온에게 단지 상처를 입히는 정도를 넘어,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는 정말 소온에게 해를 입힐 작정으로 저 전투용 도끼를 휘두르는 중이다.
"멈춰요!"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즉시 멈추라니까요!"
로즈린의 비명은 허공 속의 메아리일 뿐이다. 누구 하나 그녀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 벌판에 단둘이 서로를 노려보는 자세로 선 사람들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공포에 질린 얼굴로 떨며 서 있지 않은가.
방패가 없는 소온은 자신의 칼로 모든 공격을 막아야 했다. 만약 간발의 차로 피하지 못한다면 무시무시한 도낏날 아래 쓰러져야 한다. 아직까지 신은 그의 실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울프스탄에게도 방패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공격자의 위치를 고수했다. 첫 번째 불꽃이 튀겨진 다음부터 울프스탄은 소온에게 단 일 초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로즈린은 살금살금 걸을 용기를 얻었다. 두 사람이 싸움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서 울프스탄의 뒤로 돌아갔다. 그녀는 의자를 간신히 들어 올린 다음 힘껏 내리쳤다. 영화에서처럼 울프스탄의 뒤통수를 겨냥해. 그러나 그녀는 울프스탄이 유령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의자는 실체가 없는 울프스탄의 육신을 뚫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로즈린은 온몸의 기운이 앞으로 쏠리며 중심을 잃었다. 하마터면 소온의 공격을 방해할 뻔했지만, 다행히 때를 피해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잠시 동안 바닥에 앉아서 실제로 존재하는 몸이 없는 울프스탄이 어떻게 의자를 삐걱거리게 만들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무게만큼을 물체에 실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런 힘이 있단 말인가? 그의 손에 들린 도끼는 진짜였다.
소온의 검과 부딪히며 끊임없이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만들어 냈다. 실체가 없다면, 소온은 그를 어떻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소온의 검이 그의 몸을 찌르거나 베어 낸다 해서 그의 몸에 아무런 상처도 입힐 수 없다면…….
로즈린은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엉금엉금 기어서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미처 피하기도 전에 울프스탄의 발이 로즈린의 몸을 통과하자, 온몸을 감싸는 한기에 어깨를 움찔했다.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미친 싸움을 멈추게 해야 하지만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혹시 마을의 신부님을 이곳까지 급히 모셔 온다면…….
"넌 언제나 약했지. 살아 있을 때에도 말이야. 울프, 이번에도 좋은 연습 상대가 되어 줄 수 없는 거냐? 아마 여자도 네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게다."
로즈린은 웃고 있는 소온을 보았다. 그는 즐기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가 처음부터 이 싸움을 즐긴다는 걸 알았어야 했어. 얼마 전에 그는 울프스탄이 좀 더 자주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넌 오만한 허풍쟁이야, 소온. 만약 네 가족이 너에게 힘을 더 부여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 마녀가 너에게 저주를 걸기 전에 내가 네 녀석의 머리를 날려 버렸을 거야."
이젠 중상 모략까지? 로즈린은 의자를 바로 세운 뒤 깊숙이 앉았다. 그리고 20여 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이 서로에게 퍼부어 대는 지독한 욕지거리를 들었다. 차마 듣기에도 민망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귓볼은 붉게 달아올랐다. 이제 그녀는 팔짱을 끼고 떡하니 버티고 앉아 발끝을 무심히 까딱였다. 더 이상 기다려야 한다면 울프스탄보다 자신이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무슨 놀이라도 하는 듯이 보였다. 도둑과 경찰이나 인디언과 카우보이 뭐 그런 게임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저주받은 자와 유령이 벌이는 아주 고전적인 놀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하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소온이 상처를 입을까 하는 걱정은 필요 없는 기우였다. 그는 우위의 기술을 가진 전사였고, 단지 일생을 두고 노려 온 적과의 싸움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소온이 잔뜩 화가 난 채 자신을 쏘아보는 로즈린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싸움을 좀 더 일찍 끝내야겠다고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소온이 방심하는 사이 내려 처진 울프스탄의 도끼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소온은 손목을 틀며 칼을 휘둘렀고, 칼날의 끝이 유령의 배 한가운데를 지났다. 물론 칼엔 피 한방울 묻지 않은 채 그의 몸을 통과했다.
그러나 로즈린이 의자를 내리쳤을 때에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울프가 이번에는 마치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듯이 몸을 움츠렸다. 도끼를 손에서 미끄러뜨리고 양손으로 배를 꼭 부여잡았다. 다음 순간 울프스탄의 모습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고, 그의 도끼 역시 그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 번에 만날 때까지, 울프."
소온은 <흡혈귀의 저주>를 칼집에 꽂으면서 중얼거렸다. 희미하게, 마치 멀리서 울리는 메아리 같은 웃음소리가 로즈린의 귀에 들려왔다.
"이런 일이 일주일마다 일어나나요?"
로즈린의 말은 냉랭하기만 했다.
"한 달마다……? 그가 다시 돌아오려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울프스탄은 내가 검에 의해 불려올 때마다 한 번씩 나타날 수 있소."
소온은 그녀의 빈정거리는 말투를 애써 모른 척했다.
"그는 이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요. 난 다시 불려오지 않을 테니까."
왠지 그의 목소리가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미치광이 바이킹이 다시 불려오지 않는다니……. 그럼 그가, 소온이 영원히 이곳을, 날 떠나지 않겠다는 건가. 영원토록 내 곁에 머무르겠다는 약속이라면…….
그에게 일깨워 주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가, 영원한 적수와의 결투에서 승리해 의기양양해진 소온이 서 있다. 그녀의 숨을 앗아갈 정도로 잘생긴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토록 잔인한 말을 할 순 없을 것 같았다. 아직은. 너무 빠르고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내일. 그래, 내일 하리라.
40
로즈린은 소온과 함께 있을 핑계 거리를 하나씩 만들어 내며 일주일을 끌었다. 이런 시간들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이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를 조금이라도 더 곁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그를 떠나보내리라고 다잡은 마음은 점점 느슨해져 갔고, 그를 떠나 보내는 일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 뿐이었다.
애써 잊으려고도 해보았다. 그가 옆에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 그가 주는 즐거움만을 담으려 했다. 그러나 소온이 역사 속으로 영원히 떠난 후 홀로 지닐 아름다운 아픔이 될 기억들만이 모아졌다. 존과 엘리자베스 흄스 부부에게는 일주일 동안의 휴가를 주며 엘리자베스의 엄마를 방문해 보라는 선심을 썼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돌아온 데이비드가 찾아오겠다고 했으나 그마저도 거절했다. 그녀는 소온과의 마지막 날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더 이상 붙잡아서는 안 된다는 느낌의 끝자락에 닿고 말았다. 이제는 소온 블러드링커를 자신의 시간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더없이 좋은 일이건만 왜 이리도 슬퍼지는지……. 로즈린은 명치끝을 눌러 오는 서운함이 견디기 힘들어 점점 아프게만 느껴졌다.
정말 그를 보내야 하냐는 물음을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스스로 어리석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게라도 시간을 붙잡고 싶은 그녀의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사랑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가 주는 손길을, 그저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즐거움을 누렸다.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몸을 만지는 그의 손길은 그가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게 해주었다.
로즈린은 천천히 그의 가슴께로 손을 올려 털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그 검은 부수어질 수 있나요?"
"아니오. 그것은 처음부터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저주는 그 칼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오."
"그럼 그 저주는요,"
로즈린은 그를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깨어질 수 있나요?"
그의 몸이 갑자기 굳어졌다.
"로즈린, 왜 그런 걸 묻는 거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몰라요. 그냥 궁금하네요. 사실 좀 더 일찍 물어 보고 싶었어요."
"저주는 아주 쉽게 풀릴 수 있소."
"쉽게?"
그녀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왜 저주를 깨뜨리지 않은 거죠, 소온?"
"내게는 그것을 깨뜨릴 만한 힘이 없소."
그는 억울하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칼의 저주는 내가 먼저 그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오. 지금처럼 누군가가 내게 물어 보지 않는 한 말이오."
"그렇다면 쉽게 풀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만약 당신이 할 수 없다면, 누가 하나요?"
"검을 소유한 사람이 그 능력을 가지게 되오."
소온은 잠시 여유를 가졌다.
"저주를 끝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검의 소유권을 돌려주는 거요."
"정말이에요? 천 년이 넘게 끌어온 저주를 푸는 방법이 고작 돌려주는 거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스스로 내 운명을 결정짓는 권리를 되찾게 되고, 마녀가 건 검의 모든 저주는 사라진다오. 그저 검으로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요."
"그렇다면 더 이상 시간 여행에 대한 유혹을 느낄 필요도 없겠군요."
로즈린은 대답을 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희생으로 그는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고 자신의 삶을 자기 것으로 누리는 자유를 얻게 되겠지. 로즈린은 그에게 검과 그 자신의 운명을 돌려줄 결심을 했다. 소온이 얻을 참 자유를 위해 이젠 더 이상 시간을 연장시킬 수 없었다.
검을 담은 상자는 침대 아래에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상자를 끌어냈다.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고 마지막으로 검을 쓸었다. 검에서 밀려나오는 힘이 느껴지는 듯했다. 마치 그녀가 하려는 일 - 작위적이며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비자연적인 힘의 지배를 끝내려는 - 에 대해 마녀의 저주가 거세게 저항이라도 하듯이.
로즈린은 차마 그에게 당신을 떠나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란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설득하려 든다면, 그래서 그의 손에 검을 올려놓지 못하게 막는다면, 그녀는 자신이 이 일을 끝낼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스스로도 그러길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로즈린에겐 거짓말을 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소온은 몸을 일으키면서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것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거요, 로즈린?"
로즈린은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검을 쥔 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동안 검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그 검이 미워졌다. 처음부터 알지 못했더라면……. 이 낡은 유물이 그녀에게 사랑을 안겨 주리라고 누군들 상상했겠는가? 영원히 사랑할 수 없는 이를 그녀에게 보내 줄만큼 검의 운명이 잔인하리라곤 아무도 몰랐겠지.
"로즈린?"
로즈린은 그를 돌아보았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라왔다.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 뿐 나오지 않았고,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떨구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를 위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당…… 당신이 떠나야 할 시간이 됐어요, 소온."
"어디로 가란 말이오?"
"발할라로 돌아가세요."
"안 돼!"
"아니, 가야 해요."
로즈린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녀를 안아 마지막 힘을 앗아가기 전에 끝내려면 이럴 수밖에 없었다.
"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해요. 이제 낡은 맷돌을 다시 돌려야 해요. 내게 주어진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죠."
그는 손을 내밀어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만졌다.
"우리는 운명이오, 로즈린. 당신을 찾느라 천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했소. 그리고 이제야 당신을 가졌는데, 난 떠날 수 없소."
로즈린은 눈을 감고 눈물을 삼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손길이었다. 마지막…….
오, 하나님. 그가 힘들어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를 위한 이 결정을 받아들여 그가 자신의 운명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를 사랑하지만……. 하나님, 떠날 수 있게 그를 도와주세요. 진정으로…….
"당신은 이해 못해요."
로즈린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난 당신이 떠나길 바래요. 당신이 옆에 있는 동안은 좋았어요. 정말로 근사한 애인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난 이제 나의 생활로 돌아가야 하고 당신은 그 일부가 될 수 없어요."
"당신은 날 사랑해, 로즈린. 바로 내가 그런 것……."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제 이해하나요? 그리고 난 당신이 내 옆에 남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검을 돌려주려는 거예요."
"로즈린, 안 돼!"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의 무릎 위쪽으로 검을 내밀었고, 그의 고함소리에 놀라…… 그만…… 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소온과 중세의 무기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로즈린은 그가 있었던, 지금은 텅 비어 버린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있었음을 증명하듯 움푹 들어간 매트리스가 천천히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그녀는 손으로 그 자리를 쓸며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41
소온을 떠나보낸 뒤 로즈린은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간이 얼마쯤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쯤 지난 걸까, 깊고 깊은 아픔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데이비드가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로즈린은 눈을 비볐다. 그녀는 잘못 봤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는 분명 그녀의 침대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데이비드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특별한 소식을 알고 있다는 듯 그의 얼굴은 밝게 빛났다.
"안녕, 아름다운 아가씨."
데이비드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꼭 잡았다.
"세상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해."
"무슨 소리에요?"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내가 죽었나요?"
그가 키득거렸다.
"아니, 그렇지만 그와 비슷했어."
로즈린은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를 가지고 놀려 댈 준비를 마친 데이비드에게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었다. 로즈린은 하품을 하는 척하며 베개에 등을 기대고 따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알았어요. 아마도 몹시 피곤했었나 봐요. 그렇지만 반쯤 죽어 있었다니, 그럴 리는 없어요."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많이 울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다시 덧붙였다.
"내가 느끼는 기분보다 얼굴이 더 상했을 수도 있겠죠."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네 얼굴은 괜찮은 편이야."
"그 모든 일? 자아, 데이비드, 설명해 봐요. 대체 무슨 일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걸요."
"흠."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의사가 그러는데, 네가 기억하지 못할 거래."
로즈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기억하다니 뭘요? 그리고 의사라니?"
"그렇게 흥분하지 않는 것이……."
"데이비드!"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 거냐, 로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대체 뭐죠?"
"로지, 넌 좀 아팠단다. 너무 아파서 흄스 부인이 의사를 불렀고, 상태가 심해 내게 전화를 걸었다고 하더구나."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말아요. 엘리자베스와 존은 여기에 없어요. 그들은 브링톤으로 휴가를 갔다고요. 그러면 그들이 벌써 돌아왔나요?"
"그들이 무슨 휴가를 다녀왔는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이곳에 있었단다. 천만다행한 일이었지. 만약 너 혼자 있었더라면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
그녀는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데이비드 그거 농담이죠, 맞죠? 난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사실대로 말해 줘요."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농담이라니.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그렇지만 왜요?"
"넌 정말로 심한 폐렴을 앓은 거야. 닷새 동안이나 혼수상태였지. 가끔씩 환각 상태에 빠져드는지 소리를 지르곤 하더구나. 한때는 열이 40°까지 올라 우릴 놀라게 했어. 의사에게 잠시도 네 곁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단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정말?"
"전혀."
"차라리 다행이구나."
그는 그녀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넌 악몽을 꾸는 것 같은 소리를 질러 댔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기분이 아주 좋아요."
로즈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약간 피곤할 뿐이에요."
울다 지쳐 심하게 앓았던 모양이야. 그게 언제였을까? 데이비드의 말처럼 닷새 동안이나 혼수상태였다면, 소온을 보낸 지 며칠이나 지난 걸까? 혹시…….
이어서 떠오른 생각이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녀와 소온은 역사를 제대로 돌려놓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과거의 아주 조그마한 부분이, 너무나 미미해서 현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작은 사건이 바뀌어진 채 그대로 남아 있다면…….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녀는 병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한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폐렴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한 사람이 또 다른 로즈린이라면, 배리와 결혼한 로즈린을 만난 것처럼, 또는 도저히 봐 넘길 수 없을 만큼 청교도적인 오빠를 가진 자신이라면…….
그녀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바보스런 질문이긴 하지만 날 위해 대답을 해줘요. 난 배리 홀톤과 결혼하지 않았죠, 그렇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물론 넌 결혼하지 않았어. 만약 네 스스로 녀석과 결혼하겠다고 나선다 하더라도 난 그 개망나니 같은 놈의 엉덩이를 발로 차 버릴 생각이야."
이제야 그녀는 웃을 수 있었다.
"좋아요, 난 오빠를 믿어요. 그냥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 기억이 엉망이 되었으니까요."
데이비드는 키득키득 웃었다.
"기분이 좀 나아진 모양이구나, 로지. 다시 농담을 하는 걸 보니 말이다."
데이비드는 그녀에게 좀 더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로즈린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를 진찰하기 위해 들른 의사는 이틀 정도 더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로즈린은 아직도 자신이 아팠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영국에 도착하던 날 코를 훌쩍이거나 재채기나 두통, 혹은 약간의 열이 있었다는 건 기억이 나지만 폐렴의 징조는 아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소온을 돌려보냈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아픔이었다.
슬픔에 겨워 울다 쓰러진 그녀가 몸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가슴 아팠다면, 그래서 몸져누운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곰곰이 날짜를 따져 보면 소온이 떠난 후 며칠 동안의 기억이 없었다. 아마 그 동안 폐렴으로 앓았던 모양이었다.
소온이 떠난 후 깊은 절망감 때문에 주변에서 일어난 일상적인 일까지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무심히 흘려보냈으리라고 달래어 보았다. 소온과 함께 했던 일들이 떠오를 때마다 로즈린은 한없이 우울해졌고 가슴이 시려왔다. 애써 생각들을 지우려는 노력들이 힘겹기만 했다.
데이비드는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내면서 농담을 던지고, 최근에 다녀온 프랑스 여행에 대해 말해 주곤 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간단한 카드나 게임을 하며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갈 날이 되었고 데이비드는 런던의 집으로 돌아갔다. 로즈린은 생생한 기억이 살아 있는 동안 과거 속에서 보았던 모든 것들을 노트에 기록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몇 가지를 더 조사할 요량으로 헤이스팅스를 향해 차를 몰았다.
로즈린은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과거 속에선 너무나 익숙한 곳이지만 이 시대에서는 지금껏 본 일이 없었다. 얼마나 변했을까. 윌리엄이 호령하던 그 들판이 지금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호기심이 그녀를 서두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 본 순간 너무나 많이 변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늪지가 많던 목초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양어장이 있었다. 탁 트인 벌판이었던 곳엔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리고 해롤드 구드윈슨이 쓰러졌던 자리에는 대수도원이 지어져 있었다.
로즈린은 과거 속에서 보았던 전투를 떠올렸다. 윌리엄에게 영국의 왕관을 안겨 준 중요한 전쟁은 이후 많은 일들에 영향을 미쳤고, 그녀에게 익숙한 역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다녀온 후로도 역사는 아무런 변화 없이 제자리를 찾았다. 정복자 윌리엄은 훌륭한 남자였다. 노련한 전사이자 탁월한 전략가였으나 그가 영국의 왕관을 차지하기 까지엔 행운과 상황이 그의 편이었던 점도 상당한 작용을 했다.
만약 역사가 엉켜 그가 승리하지 못했다면……. 로즈린은 그가 왕관을 차지하게 되어서 기뻤다. 자신이 그 승리의 목격자가 되어서 기뻤다. 모든 역사는 제자리를 찾았고, 역사는 더 이상 바뀔 수 없었다.
42
데이비드는 공항까지 로즈린을 바래다주었다. 아침 일찍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해 두어서 그녀는 떠나기 전날 런던의 데이비드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리디아는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와 주었다. 런던의 마지막 밤 세 사람은 집 근처에 있는 펍Pub에서 포테이토 칩과 생선 튀김을 곁들여 따뜻한 술을 한잔씩 했다. 차가운 것을 원한다면 얼음이 나왔으나 굳이 주문하지는 않았다.
술을 데워 마시는 영국인의 기호를 이상하게 생각했던 로즈린이지만 그날 저녁만큼은 미소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소온과 시간을 보낸 뒤로 그녀의 상상력은 풍부해졌다. 그리고 영국인들의 독특한 습관은 나무통에 든 꿀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던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혼자만이 알 수 있는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로즈린은 데이비드에게 소온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가고 없는 소온에 관해 그에게 설명한다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러나 혼자만이 그 많은 기억을 가지기엔 외로움의 깊이가 더 할 것이란 두려움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데이비드는 게일을 제외하면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가.
그러나 자신도 믿기 힘든 이야길 그에게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옛날이야기처럼 마법에 의해 불려나온 사람과 꿈 같은 사랑을 하지 않았는가. 혹시 그가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렇다고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검의 마법으로 가능했던 시간 여행, 소온을 저주한 마녀, 천 년 전의 바이킹 신화 그리고 정지된 시간 속에서 영생을 누리는 그들이 실존한다는 걸 그가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실제로 그녀 앞에서 일어났던 일이며, 그에게 말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이른 시간 공항을 향해 가던 로즈린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데이비드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 빙빙 돌려 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적어도 시작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히 시작했다.
"데이비드, 난 <흡혈귀의 저주>를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어요."
그는 그녀를 힐끔 보더니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넌 그 검을 살 수 없었어, 기억해?"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데이비드.'
로즈린은 그런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분명 그가 잘못 알아들었다고 믿었다.
"무슨 말이라니……?"
로즈린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나 대신 그 검을 사주었잖아요."
그는 갸우뚱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러지 않았다. 내가 대신 사 보겠노라고 했지만 넌 이삭 데어본이 너와 직접 거래하지 않는다며 화를 냈을 뿐이야. 그러면서 그따위 것은 잊어버리라고 나에게 말했잖아. 검은 아직까지 데어본의 소유야. 내가 잘못 알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 행운을 놓친 거지. 다 망가진 검을 사겠다고 나섰는데도 그렇게 고집을 부리다니."
"그건 아주 상태가 좋았다고요!"
그는 난처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이맛살을 찌푸렸다.
"로지, 귀신이 들기라도 한 거야? 넌 <흡혈귀의 저주>를 본 적도 없잖아."
길게 한숨을 내뱉은 로즈린은 데이비드의 기억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거나, 서로 다른 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란 결론을 내렸다.
"내게 검을 사주었어요. 그리고 미국으로 보내 주기까지 했다고요. 난 휴가를 올 때 그걸 미국에서 여기까지 들고 왔죠. 내가 오빠에게 말했던 꿈 이야기는 기억하겠죠? 검의 원래 주인에 대한 꿈 말이에요. 그건 꿈이 아니었어요. 현실이었다고요. 그 검은 저주를 받은 거래요. 그리고 검의 원래 주인인 소온 블러드링커를 부르고 싶다면 그냥 검을 만지기만 하면 돼요. 난 그를 잘 알게 되었고, 그…… 그와 사랑에 빠졌어요."
그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단한 꿈을 꾸었구나, 로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요, 데이비드, 그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거예요."
"좋아. 조금 전에 나에게 한 말을 다시 해보렴."
"데이비드, 난 그런 걸로 농담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직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군요. 난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죠. 그러나 그를 위해서 검을 돌려 줬어요. 때문에 난 마음이 너무 아파요. 그에게 머물러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그가 힘들어 질 것 같았어요. 그는 바이킹이고 전투에 참가해야 빛이 날 전사였으니까요."
"로지, 잠깐 말을 멈추고 생각을 좀 해보렴. 넌 처음부터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 맹세를 하라면 하지. 나도 그런 걸로 농담하는 사람이 아니야. 인정하지. 그러니 네가 지금 한 말은 날 즐겁게 하려고 꾸며 댄 이야기야. 그렇지, 사실이 아니지?"
"하지만…… ."
"오, 로지. 진정해. 잠깐만 생각해 봐. 그러면 내 말이 옳다는 걸 알 수 있어. 넌 너무 많이 아팠어. 혼수상태였잖아. 그때 네가 꿈꾸었던 걸 현실과 혼동하고 있을 수도 있을 거야. 실제 생활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되는 거지. 만약 네 말이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해도 그건 사실일 리가 없어. 왜냐면 넌 검을 보지도 못했고, 네 손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
꿈? 꿈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많은 일들이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될 수 있다니,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새록새록 쌓이는 그에 대한 그리움마저도 꿈이란 말인가.
로즈린은 갑자기 허무해졌다. 데이비드의 말처럼 처음부터 검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검의 비밀도 몰랐더라면……. 그녀는 소온 블러드링커를 만나거나 그를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 여행도 그와의 좋은 기억마저도 없었겠지.
'소온은 현실이 아닌 꿈속에 존재했을 뿐이다.'
43
로즈린은 비행기 속에서도 내내 초조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데이비드의 말에 동의하며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그 기억을 모두 지우겠다고 말해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꿈을 실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미국에 도착한 로즈린은 렌터카를 타고 집으로 가며 먼저 게일을 만나기로 했다. 그녀에게라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소온이 처음 강의실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의 무릎 위에 검을 떨어뜨려야 했던 이야기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낱낱이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로즈린은 그 모든 일이 결코 꿈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크리스털처럼 영롱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은 투명했다. 그러나 게일은 아연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을 뿐더러 영국으로 떠나기 전 자신을 방문했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했다.
로즈린은 지쳤다.
"나도 그 모든 것이 꿈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꿈이라면 불가능한 일들이야. 세세한 것까지 또렷이 기억나. 실제보다 더 선명하게 말야. 소온이 텔레비전을 처음 보았을 때 어땠는 줄 알아?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내가 리모트 컨트롤 장치를 보여 주었을 때 그의 반응을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오, 그만해."
게일이 키득거렸다,
"폐렴을 앓으면 그런 꿈을 꾸는 거니? 꿈이든 아니든, 그런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아?"
남자를 알게 되어 기쁘지 않느냐고? 로즈린은 우울한 생각에 잠겼다. 조금만 덜 그립고, 이토록 가슴 아프지만 않다면 그를 만난 그 모든 시간을 기쁘게만 생각하겠지.
문을 나서는 로즈린에게 게일이 한마디를 던졌다.
"로즈린, 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얼마 전에 읽은 소설이랑 비슷한 구석이 있어. 아마 너도 읽었을걸. 심하게 앓다 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현실과 혼동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잖니. 아마 그랬을 거야. 나는 책꽂이 가득 꽂힌 책 속에서 사는 게 좋아. 그나저나 당장 냉장고에 머리라도 집어넣어야 할 것 같아. 얼마나 그렇게 하고 있어야 폐렴에 걸려 너처럼 근사한 꿈을 꿀 수 있을까?"
게일의 말에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로즈린은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로즈린은 꿈속의 남자를 잊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걸 느꼈다. 적어도 <흡혈귀의 저주>를 위해 만들어 둔 유리 상자를 무기 수집품 가운데에서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후가 다 될 무렵 집에 도착한 로즈린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말 검을 가지고 싶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모든 것이 어리석은 짓이란 걸 알았지만 덩그라니 빈 유리 상자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애꿎은 화가 데어본에게로 쏟아졌다. 가질 수도 없었던 검에 대한 기대로 돈을 허투로 낭비했다며, 계속 투덜거렸다.
산란한 머리 속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반갑지 않은 걸음으로 문 앞에까지 다가간 로즈린이 막 문을 열었을 때 계량컵 하나가 그녀의 얼굴로 들이 밀어졌다.
"설탕 한 컵만 빌리 수 있을까요?"
"누구시죠?"
"로즈린 화이트, 맞죠?"
컵을 든 남자가 물었다.
"전 손톤 블루베이커라고 합니다. 옆집에 사는 캐롤이 당신에 대해 말해 주더군요."
로즈린이 컵에서 눈을 떼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땅에 닿을 듯이 입이 딱 벌어졌다. 간신히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그를 바라보는 거였다. 귀 아랫부분까지 내려오는 그의 엷은 밤색 머리카락과 몸에 달라붙는 까만 진즈, 주머니가 많이 달린 짧은 상의는 분명히 지금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소온과 꼭 같았다. 단단해 보이는 그의 몸도 소온의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이름도 비슷했다. '소온 블러드링커'와 '손톤 블루베이커'.
로즈린은 어찌할 바를 찾지 못했다. 가슴 속 한구석에선 그에게 안겨 키스를 퍼붓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녀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었다. 그녀가 걱정했던 새 이웃은 소온의 얼굴을 한 이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당신을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그녀는 희망을 품으며 그에게 물었다.
"시간과 장소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니에요, 로즈린.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어요."
그의 시선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혹시 당신이 날 보았을 지도 모르겠군요. 이삿짐을 나르느라 이곳을 왔다갔다 했으니 그때 보았을 거예요. 아마 당신이 여행을 가기 전일 걸요.."
로즈린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동안 그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의 모습이 꿈속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면, 앞뒤가 맞아 들어간다.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들었죠. 나도 그 직업을 택할 뻔했지요. 누군가가 나에게 글쓰는 즐거움을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말이오."
"글을 쓰시나요?"
"공상 소설을 쓰고 있어요. 가장 최근의 작품이 두 달 전에 출판됐죠. 혹시 여행을 했다면 비행기 속에서 내 작품을 읽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유럽 여행을 떠날 때 기억나는 거라곤 <흡혈귀의 저주>를 가져오기 위해 집으로 급히 달려갔던 것과 공항의 신문 판매대에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책 한 권을 낚아챘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확실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녀가 꾸었던 꿈의 일부일 가능성이 많았다. 사실 영국으로 어떻게 갔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면 그녀는 자신이 읽은 책의 저자를 만나고 있는 셈일지도 몰랐다.
"무슨 내용이었나요?"
그녀는 예의상 그렇게 물었다.
"바이킹의 신인 토르의 알려지지 않은 동생 소온에 관한 소설이죠. 저주받은 검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 이봐요, 뭐가 잘못 되었소?"
로즈린의 무릎이 휘청거리고 잠시 동안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바닥에 쓰러지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의 손길,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느낌은 그녀에게 더욱 나쁜 영향을 미칠 뿐이었다. 그녀의 모든 감각은 제멋대로 움직이려 했다. 그가 바로 소온이었다……. 오, 맙소사. 그녀는 다시 꿈을 꾸는 것일까?
"괜찮아요."
로즈린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자신이 미치고 있다는 생각만이 또렷해졌다.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요. 공항에서 당신의 소설을 샀었던 것 같아요. 읽었죠."
"정말이오?"
그는 얼굴을 빛내며 기뻐했다.
"어땠소?"
"그것은…… 아주 독특했어요. 그리고 사랑 이야기였죠."
"난 사랑 이야기를 쓰지 않아요. 그렇지만 왠지 그 책에서만큼은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음,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안 나는군요. 책의 끝이 어떻게 되죠?"
"오딘은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그에게 말해 줘요. 그를 떠나보낼 용기를 보일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이에요. 그녀가 생각한 최선의 방법으로 그를 사랑한 것이죠. 자신의 시대에서 행복할 수 없다라고 생각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어요."
그녀는 마치 자신을 원망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았다.
"전화가 왔나 봐요."그녀가 거짓말을 했다."설탕은 캐롤에게 부탁해 보세요."
로즈린은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닫고는 등을 기댔다. 눈을 꼭 감으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마치 자신이 바보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가 비난하는 얼굴로 로즈린을 바라보지 않은 건 확실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상상이라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는 영국으로 가는 동안 기내에서 그 책을 읽은 것이 분명했다. 그게 가장 적절한 설명이었다. 심하게 앓는 동안 로즈린은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자신을 선택했으며 꿈속에서 충분히 그 위치를 즐겼다.
이런저런 생각이 오가는 동안 또다시 울린 현관 벨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가 다시 왔다. 운명처럼 느낄 수 있었다. 소온은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아. 오, 하나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녀는 멈추고 싶었다. 그는 꿈속의 소온이 아닌,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이방인은 로즈린을 힘껏 끌어안고 진한 키스를 했다. 간단히 나누는 입맞춤이 아닌 연인의 키스였다. 그리고 그녀에겐 너무도 익숙한 키스였다.
손톤이 그녀를 놓아주었을 때 - 그녀는 자신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지만 - 로즈린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품에 몸을 기대는 것뿐이었다. 무례함에 대한 벌로 한방 갈겨 줘야 했지만 그의 키스는 그녀에게 너무나 친숙한 것이기에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당신에게 사과하지 않겠소."
그는 진지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만이 당신에게 키스를 할 권리가 있는 유일한 사람처럼 여겨졌다오."
로즈린은 자신이 왜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는 단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화제를 돌렸다.
"소설의 사랑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물어 보는 것을 잊었군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내 주인공은 발할라에 계속 머무를 수 없었다오. 그는 형의 도움을 받아 손님의 자격으로 그곳에 있었던 것뿐이었소. 그러나 그곳은 죽은 자를 위한 장소고 그는 아직도 살아 있는 건장한 전사였기 때문이오. 오딘은 그를 가엾게 여기고 한 번의 선택의 기회를 주었소. 아마 당신은 그가 어떤 시대를 선택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오, 잘 모르겠어요. 그는 싸움과 전쟁을 좋아하고…… ."
"그는 그녀를 무엇보다 더 사랑했소, 로즈린."
손톤의 얼굴엔 알 수 없는 강렬함이 떠올랐다. 사람을 압도하는 그 힘에 로즈린의 심장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에게 돌아가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을 거요. 그녀가 그를 알게 되었던 나이까지 기다려야 한다 할지라도 말이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죠?"
"오, 그는 기다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점점 옅어졌다. 그녀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 보지 않을 것이다. 꿈과 현실 세계가 뒤바뀌어졌다 해도 그녀는 그를 보낸 후에도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했고 오딘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겠지. 혹 그를 흘낏 본 기억이 그녀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겨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게 되고, 병에 걸린 나머지 꿈을 현실이라고 생각했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로즈린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난 그녀가 그에게 보상을 하기 위해 나머지 생애를 다 바쳐도 모자란다고 생각해요. 그를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한 죄로 말이죠."
짧고 간결한 그의 끄덕거림도 친근한 몸짓이었다.
"여자의 의견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다음 번 책의 마무리를 할 때는 당신의 의견을 참작해야겠소."
그런 다음 그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는 당신 의견이 정말 마음에 쏙 드는구료."
그녀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당신의 책은 그렇게 끝나지 않나요?"
"그렇소.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고 그녀는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오."
로즈린은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밤 저녁 식사하러 오지 않겠어요? 당신의 책에 대해 더 토론을 하고 싶어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로즈린."
그가 반쯤은 놀리고 반쯤은 심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날 초대하면, 내게서 절대 도망가지 못한다오."
로즈린은 같은 실수를 두 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보낸 미소는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녀의 바이킹은 되돌아왔고 다시는 보내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