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가시
Johanna Lindsey
1
로즈린 화이트는 잔뜩 부풀어 오른 기대감을 주체 못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아직 열어보지 않은 채 자신의 책상 옆 작은 제구대 위에 그냥 올려놓기만 한 상자 때문이었다. 속으로는 좀 더 의연하게 기다리자고 되뇌어 보지만, 그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분명 자제심이 아닌 흥분이었다. 겨우 몇 분 만에 한 번씩 상자를 흘끔흘끔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론 그것을 무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른 날과는 달리, 시간이 쏜살같이 달아난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로즈린은 오늘밤 안으로 학생들이 제출한 답안지의 성적을 모두 매겨 놓아야만 했다. 보통대로라면 그 답안지들을 집으로 가지고 갈 테지만 오늘밤엔 사정이 달랐다. 학교에서 곧바로 친구인 게일의 집으로 가서 주말을 함께 보내기로 계획이 짜여져 있었다. 더구나 월요일엔 오랫동안 미루어 온 치과의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출근을 하지 않기로 되어 있다. 그러니 월요일에 그녀 대신 수업을 진행할 강사를 위하여 채점이 끝난 답안지를 자신의 책상 위에 남겨 놓아야만 했다. 겨우 사흘이란 기간 동안 할 일들이 이미 꽉 짜여져 있었다. 로즈린이 자신의 인생에서 원했던 바처럼. 하지만 어제 집에 도착했을 때 오래도록 기다려온 상자가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도착한다는 뜻밖의 통지를 우편함에서 발견했다. 이웃사람 캐롤을 응급실로 급히 실어 날라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지도 못했던 지난밤 사건들에 대한 생각이 그녀의 주의를 답안지로부터 자꾸만 끌어내었다.
그녀는 오늘 아침 학교로 오는 길에 우체국에 들렀다. 가능한 한 빨리 상자를 펴보기 위해 가위를 가방 속에 넣은 채 말이다. 그러나 늘상 우체국 앞에 늘어서 있기 마련인 기다란 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그녀에겐 첫 수업에 겨우 대어올 정도의 시간만이 남았다. 그 후로도 계속 그녀의 호기심을 채울 만한 자유로운 시간이 나질 않았다.
금요일은 항상 바쁜 날이었다. 수업이 세 시간이나 연달아 있고, 그 다음에는 수업이 없는 학생들로부터 쏟아지는 질문공세를 피할 수 없었다. 또한 그녀는 오늘 이번 학기에 낙제했다는 사실을 통고하기 위해 두 명의 학생과 면담시간을 가져야 했다. 너무나 긴 하루가 마침내 끝나간다는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재빨리 저녁식사를 마치고 상자를 열어보려고 했을 때, 이번에는 학장이 보낸 답안지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로즈린은 학장과의 대담을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존슨 학장은 배리 홀톤이 종신교수직을 제안 받았다는 소식을 내가 다른 곳에서 듣기 전에 자신이 직접 점잖게 알려주고 싶어했어. 배리 같은 위인이 종신교수라니! 배리는 내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재난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사람이지. 그 만남의 결말은 내가 나이에 비해 느슨하고 잘 속는 여자임을 확실하게 알려준 증거였어. 그런 그가 이제 나와 동등하게 될 참이라니…….
학장은 매우 능란한 말솜씨를 발휘했다. 노련한 외교관처럼, 그는 그녀가 배리에 관한 주장을 다시 끄집어내어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지를 아주 매끄럽게 전달했다. 마치 그녀가 지금까지 견디어왔던 모든 굴욕을 일부러 다시 불러들이려고 한다는 듯이 말이다.
로즈린은 이제 허기도 느꼈고 얼토당토않게 주어진 배리의 행운에 화가 났다. 게다가 아침부터 죽 열어보고 싶어 안달이 난 상자를 옆에 놓아둔 채 답안지에 주의를 모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신의 의지력을 시험 당하는 심정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마지막 답안지의 성적을 매길 때까지 상자를 열지 않을 작정이다.
오래된 무기들은 매번 로즈린의 정열을 자극했다. 특히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중세에 깊은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그마한 마을에서는 이례적으로 그런 물건들을 수집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로는 그녀가 물려받은 수집품들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조금씩 더 보태기 시작했다. 영국을 방문할 때마다 집필중인 노르만 정복(노르만의 영국 정복, 1066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만큼이나 많은 시간들을 골동품 상점의 순례에 쏟아 붓곤 했다.
로즈린은 길다란 상자를 교실에까지 들고 갔다.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을 차 안에 내버려두기 싫어서 -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눈 밖에 내놓기 싫어서였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 상자가 도착하길 기다려온 탓에 잠시도 떼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흡혈귀의 저주>라는 묘한 이름을 가진 검에 대해 듣고 난 순간부터 이상스레 마음이 끌렸다. 무려 삼 년의 시간을 들인 끝에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었다. 또, 손에 넣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가격이 매겨지기 십상인 경매에 붙여진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괴팍스런 주인인 아이삭 데어본 경과의 흥정에서 겪은 좌절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물건을 팔려고 하지 않는 데어본과 더불어 가격과 세부 사항들을 놓고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또다시 사 개월을 흘려보내야 했다.
"여자는 <흡혈귀의 저주>를 소유할 수 없소."
로즈린이 처음 구매의사를 밝혔을 때 들은 말이었다. 물론 아무런 설명도 붙지 않았다. 데어본은 그 뒤로 이어지는 그녀의 전화나 편지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데이비드, 비록 혈연상으론 남이지만 마음으로 이어지는 오빠인 친애하는 데이비드가 그녀를 위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고아가 되었을 때 그녀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 네 달이 지난 후 데이비드는 데어본의 별난 요구를 모두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나서 그 물건을 구입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녀는 검이 그녀의 집으로 배달될 것이라는 데이비드의 전화를 받았을 때 거의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더욱 흥미로웠다.
"넌 나에게 비용을 갚을 수 없어, 로지. 난 그 검을 팔지 않겠다고, 비록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여자에게는 팔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해야만 했어. 그렇지만 그냥 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건도 없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 50년 동안의 네 생일선물을 미리 한꺼번에 주는 셈으로 치면 될 거야."
비록 생일선물이라는 농담이 꼬리표로 붙어 있긴 하지만, 그간의 저금을 톡톡 털고 거기다가 2만 불의 빚을 내야 했을 그 검의 가격을 생각해 볼 때, 그녀는 분명 데이비드에게 큰 빚을 졌다. 사실 데이비드는 자기를 흠모한 나머지 돈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한 덕분에 그만한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아내인 리디아는 로즈린이 무기들을 수집하듯이 집 - 사실은 저택 - 을 수집했다. 하지만 로즈린은 데이비드가 그녀를 위해 검을 사주고 행복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빚진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회를 찾아내 데이비드의 마음에 보답하는, 그를 즐겁게 만들어 줄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로즈린은 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방 속에 든 가위를 끄집어냈다. 그리곤 흘끔흘끔 강의실 문을 쳐다보며 그것이 닫혀 있는지 확인한 다음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녀의 행동에서는 약간의 편집증 증세마저도 엿보이고 있다. 교정은 거의 비어 있었다. 이번 학기에 상연하자며 고른, 헤일리 씨의 어떤 연극의 리허설을 위해 늦게까지 남아있는 드라마 클래스 학생들과 몇 명의 다른 교수들뿐이었다. 그녀를 방해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으며, 비록 방해받는다고 해도 숨길 게 없었다. 단지 여자가 그 검을 소유할 수 없다고 뻣뻣하게 버티었던 데어본의 주장 때문에 괜스레 캥기는 마음만이…….
글쎄, 아무렴 어때. 난 이제 이 검의 주인이야.
<흡혈귀의 저주>는 분명 그녀의 것이다. 그녀의 소장품들 중에 가장 귀중한 물건이고, 가장 오래된 무기였다. 그녀는 그 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 보지도 않고 - 단지 오래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것을 가지고 싶어했다. 그리고 아직 보지 못했다. 심지어 사진으로도 말이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자신 있게 장담했었다.
"로지, 그 검은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칼자루와 10세기에 만들어진 칼날이 약간 부식된 것 말고는 흠이 없어. 그 시대의 유물로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단다."
텅 빈 강의실에서 누가 들을세라 그녀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아마 이 검을 소장했던 역대 주인들도 지금의 나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 내놓는 것도 아까워할 정도로 아주 아주 소중하게 다루었을 거야.
이제 그녀는 손에 든 가위로 상자를 묶은 비닐 끈을 자른 다음 긴장된 손길로 상자를 열어 안에 넣어둔 포장용 짚더미를 파헤쳤다. 그 아래에는 또 하나의 상자가, 윤이 반지르르 흐르는 마호가니 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수그린 채 물건을 포장했을 데이비드의 모습을 생각하고 혼자 키득거렸다. 상자를 열 수 있는 작은 열쇠가 리본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무상자를 밖으로 들어내고 두꺼운 종이상자는 바닥으로 밀어내었다. 상당한 무게인지라, 그녀가 그 상자를 강의실로 가지고 들어갈 때엔 두손으로 받쳐들어야 했었다. 아마도 좁고 기다란 이 나무상자 때문인 게지. 나비 매듭을 잡아당겨 풀고 열쇠를 손에 넣었다. 열쇠구멍 안에 넣은 열쇠가 스르륵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흡을 멈추었다. 딸칵 하고 열리는 소리가 강의실 전체에 퍼져나갔다.
다음 순간 로즈린은 천 년도 넘은, 역사의 눈부신 유물 하나를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양쪽으로 날이 선 길다란 칼날은 딱 두 군데만이 부식으로 인해 조금 깨어지고 세월에 의해 색이 검어졌을 뿐, 은으로 세공된 칼자루가 책상 램프의 불빛에도 반짝거릴 만큼 잘 보존돼 온 아름다운 검이었다. 검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둥근 호박이 한가운데에 박히고 세 개의 작은 호박이 조각된 칼자루 끝을 장식하고 있었다. 손잡이 부분에는 아마도 용이나 뱀 같은 기형의 동물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이상한 모양만으론 어느 쪽인지 분명하게 말하기가 불가능했다.
아름답고 탁월한 솜씨라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땅 위에서 수세기를 지내오면서도 이처럼 잘 보존된 공예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검은 원래 스칸디나비아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데이비드가 말해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로즈린은 그 이교적인 스타일에서 검의 기원을 알아내었을 것이다. 남자의 물건이었으며, <흡혈귀의 저주>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바이킹의 검이었다.
로즈린은 역사학자다. 바이킹의 시대가 그녀의 전공분야는 아니지만, 그 시대나 예술품에 관해서는 꽤 친숙한 편이었다. 바이킹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무기만큼이나 특이한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비록 <흡혈귀의 저주>처럼 괴이한 이름은 처음이긴 하지만. 그녀는 원래의 주인이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척이나 궁금한 일이지만, 그 이름에 숨어 있는 사연은 수세기의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새로운 소장품에 완전히 매혹당한 그녀는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모두 알고 싶었다. 그 검은 얼마나 많은 목숨을 앗아갔을까? 아니면 조금?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남자들은 호전적이고 피에 굶주린 사람들이며, 북해의 약탈자로서 습격하고 달아나는 데 명수들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주인과 함께 묻히는 바이킹의 관습에 따르지 않고 수세기 동안 바뀌어 온 주인들의 전쟁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원 주인이 잃어버려서? 만약 그가 전쟁에서 죽지 않았다면, 그 검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한 것일까? 혹은 그가 바이킹의 관습에 대해 전혀 모르는 외국의 전투에서 그의 친구들이나 부하들로부터 떨어진 채 죽어간 것이라면……?
끝없는 질문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아내진 못할 거야.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군. 그러나 로즈린의 실망도 검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는 즐거움 앞에서 무디어질 수밖에 없었다.
"흡혈귀의 저주라……."
로즈린은 오래된 검을 손에 쥐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넌 본래의 임무에서 이미 은퇴를 한 거야. 넌 더 이상 피를 묻히지 않을 거야. 평화로운 날들이 펼쳐질 테지만, 나는 널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 주겠어."
로즈린은 놀라우리만치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칼자루를 손에 쥐고 금빛 벨벳의 잠자리에서 검을 들어내었다.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녀는 검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재빨리 또 한손을 들어 손목을 받쳐 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검을 위로 세워 들었을 때,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강의실 유리창에 번쩍이는 번개는 그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마치 열두 개의 전구가 코앞에서 작렬하는 것처럼 강한 빛이 뻗어 나오면서 순간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무기는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탁자를 내려치지 않기 위해 손으로 긴 칼날을 잡아야만 했다. 부식되어 울퉁불퉁해진 곳에 손가락이 걸리자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심장이 내려앉을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 이유는 뭔가 끔찍스런 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검을 본래의 자리에 다시 눕히면서 오늘과 내일의 날씨가 맑겠다고 예보한 기상 해설자를 향해 욕설을 중얼거렸다.
게일의 집으로 가기 위해 세 시간이나 비 속을 뚫고 운전해야 한다면, 난 전혀 즐거워하지 않을 거야.
"그 소리 들었나요, 화이트 교수님?"
그날의 숙직 당번인 포베스가 문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상한 일이오."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느닷없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일은 이곳에선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로즈린은 재빨리 상자의 뚜껑을 내렸으나 완전히 닫진 못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 포베스임을 알아차렸을 뿐, 실제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직 빛이 퍼지는 책상 주변까지만 보이는데, 눈앞에 펼쳐진 강의실의 나머지 부분은 크고 검은 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로 그게 이상하다는 거요, 교수님. 저녁 내내 하늘은 맑았거든요. 구름 한점 없이 말이오."
그녀는 아까의 뇌성을 생각하며 그 남자와 입씨름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점수가 매겨지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답안지가 시선을 끌었다. 그녀에게는 날씨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할 시간이 없었다.
"난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요, 포베스 씨."
그녀가 대답했다.
"만약 폭풍우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바람에 날려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면, 나에게는 되려 잘된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는 대답을 하면서 문을 다시 닫았다.
포베스가 떠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잠시 동안 금속테 안경 아래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눈동자를 문질렀다. 다시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을 때, 여전히 검은 점들이 그 위로 마구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깊게 울리는 낯선 남자의 음성을 듣고 깜짝 놀랐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단지 귀찮아하는 것일까? 실상이 무엇이든 간에, 한가닥 한기가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은 날 불러들이지 말았어야만 했소, 부인."
2
로즈린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있나요?"
그녀는 유리창 가까이에 있는 거무스름한 물체에 시선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물었다. 책상 위에 켜진 램프의 빛은 겨우 책상 주위만을 비추고 있었다. 그나마 거무스름한 덩어리를 볼 수 있는 것도 창문을 통해 들어온 교정의 불빛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물체를 바라보았으나, 물체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냥 거기에 서 있었다. 불안과 함께 또다시 한기가 엄습해 왔다.
그녀는 두려움을 떨쳐내며 스스로에게 화를 내었다. 그녀는 이곳의 교수이자 권위의 대변자였다. 십중팔구 물체는 아마 학생일 테고, 포베스는 아직도 그녀가 부르면 달려올 거리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물체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포베스가 그녀를 방해하기 전에 한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는 다그치듯 물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에 숨어 있었죠, 미스터……?"
그는 이름을 대지, 아니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그에게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문객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문 쪽으로 걸어가 스위치를 올려서 천정에 달린 전등을 켰다. 불빛이 커다란 강의실 구석구석까지 흘러넘치고 천정에 달려 빛을 내는 물체를 보기 위해 고개를 쳐든 남자의 모습 위로 쏟아졌다. 얼굴을 찌푸린 것일까? 아니면 단지 곁눈질을 하는 중? 그가 놀랐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운동선수, 의심할 여지없이 미식축구 선수나 뭐 그쯤 되어 보였다. 웨스터리의 코치는 그를 팀에 집어넣기 위해서라면 아마 자신의 어머니라도 팔아치울 것이다. 비록 서른줄로 보이는 그의 나이가 미식축구 같은 격렬한 운동엔 조금 많게 느껴지지만, 그의 근육은 아직 훌륭했다. 그녀의 학생들 중에도 그런 남학생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그녀가 가르치는 내용보다 농담을 던져 수업을 방해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보이곤 했다.
어쨌거나 그가 단지 여학생들에게 '근육질 덩어리'라고 불리울 타입이라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녀의 놀람은 그가 입은 옷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상 그는 옷을 거의 입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는 그가 연극의상을 입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입은 결이 거칠고 짧은 바지는 짐승의 생가죽을 그대로 잘라 만든 것이었다. 그의 발목에서 무릎 바로 위까지 십자형으로 얼기설기 엮은 거친 가죽끈의 모양은 중세풍으로 알려진 것인데, 바지와 같은 가죽 천이 허리에서 엉덩이를 가리는 선까지 내려와 펄럭거렸다. 만약 나풀대는 가죽 아래에 단추나 지퍼가 달려 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로즈린은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 헤일리 씨의 새로운 재봉사에게 찬사를 보내야만 할 것 같았다. 요즘 그런 바지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다. 물론 벨트 고리도 없다. 그리고 거의 8센티미터 가까운 넓이의 벨트는 바지의 위치를 가는 허리에 고정시켜 주었으며, 한가운데 있는 금색의 버클 말고는 아무런 장식도 달려있지 않았다. 북미 인디언의 신발처럼 솔기가 바깥으로 향해 바느질 되어 있는 그의 가죽 신발은 발목 바로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셔츠를 입지 않았다. 처음에 그녀가 놀란 이유가 바로 그것인데, 모든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의 무대의상이 채 완성되지 않았거나 헤일리 씨의 대본이 벗은 가슴을 그대로 내보이도록 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녀는 역도선수처럼 잔뜩 부풀어 올랐을 뿐 아니라 근육이 잘 발달되고 엷은 갈색 털이 무성하게 나 있는 넓은 그의 가슴이 무척 인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더욱이 솜씨 좋은 화장술은 그의 가슴과 두꺼운 팔에 전투에서 얻은 것 같은 오래된 상처를 만들어 놓았다.
그의 목둘레에 세워진 높은 칼라는 굵은 구슬로 만든 특이한 스타일이었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길고 엷은 갈색 머리카락은 그가 그런 역할을 맡게 된 이유인 듯했다. 그는 고대의 전사, 색슨 족 혹은……, 바이킹의 화신처럼 보였다.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그녀가 검을 손에 쥐자 마자 바이킹 의상을 입은 드라마 클래스의 학생이 여기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왠지 으스스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다음 순간 그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오더니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로즈린은 이제 불안이 아닌 또 다른 감정을 느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거칠게 보였으나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두꺼운 눈썹은 거의 일자로 뻗었고 그 아래 깊게 들어앉은 눈동자는 맑고 푸르렀다.
만약 그가 웃는다면 보조개가 패일 것 같았으나, 그의 위협적인 표정을 보조개 정도가 부드럽게 만들어 줄 리는 없을 듯했다. 행복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의 귀에 들린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훑어 내려와 드러난 그녀의 종아리에 머물렀을 때, 그녀는 자신이 처음 했던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남자들의 그런 행동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즉시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뛰어난 편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소년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고등학교 때부터 죽 그렇게 믿어왔다. 그녀는 그런 일로 방해받거나 신경 쓰고 싶어한 적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소박한 꾸밈새가 그녀의 사고방식을 잘 나타내 주었다.
그녀는 돗수가 들어 있지 않은 안경을 일부러 쓰고 있었다. 사실, 안경이 꼭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주 드물게 화장을 했고, 게다가 학교에서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는 드레스나 치마들은 모두 무릎 아래로 3센티미터 가량 내려왔으며, 그냥 일자형이거나 허리 아래에서 벨트를 묶는 헐렁한 스타일을 좋아했다. 그런 옷차림은 편안할 뿐 아니라 두리번거리는 시선들의 공격을 막아 주었다. 그녀가 고른 신발의 뒤축 높이는 5센티미터가 최고이며 항상 밋밋한 모양이었으므로 매력적인 여성의 신발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적갈색 생머리를 옛날 스타일로 말아 올렸다. 한때 배리는 그녀의 자연스러운 머리카락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들 사이가 깨어진 이후, 그녀는 머리카락을 검게 염색할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했었다.
방문자가 다시 말을 했을 때야 비로소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당신은 적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날 불렀어야만 했소."
그는…… 화가 난 목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블라우스 단추가 열려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벨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리고 스타킹이 흘러내렸는지를 살펴보았다. 아니었다. 구김이 가지 않는 폴리에스테르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그녀의 차림은 언제나처럼 평범하고 단정했다.
로즈린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을 때 코에 걸린 안경이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는 안경을 위로 올리면서 엄격한 선생의 전형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드라마 수업은 이 복도 저쪽으로 네 번째 강의실에서 진행 중이니 만약 늦었다면 지금이라도 가는 게 좋을 거예요."
로즈린은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은 다음 그녀 앞에 쌓여 있는 무더기에서 제일 위에 있는 종이를 집어들고 그것을 읽는 척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단 한 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나가는 소리를 기다렸으나 강의실을 가로지르는 발자국이나 문을 여닫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또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무시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직도 거기에 있었으나 적어도 불온하게 꿰뚫어보는 그의 시선은 다른 곳에 돌려져 있었다. 그녀의 강의실에 매료된 듯, 마치 책상들과 칠판, 커다란 세계지도와 중세의 기사를 그린 화려한 포스터들을 예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포스터들 중 하나에 멈춘 그의 눈동자 속에 뭔가 알아보겠다는 듯한 빛이 번쩍였다.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은 누구요? 어떤 재능이 있길래 윌리엄 경과 저렇게도 똑같이 그린 거요?"
놀라움이 섞인 그의 질문 속에서, 로즈린은 어느 나라인지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외국인의 악센트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감지해 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그녀는 10세기의 긴 의상을 입은 남자의 포스터를 보았다.
"누구라고 했죠?"
푸른 눈동자가 그녀에게 돌아왔다.
"윌리엄, 그 사생아 말이오."
그가 대답했다. 이제 그의 말투 속에는 더 이상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암시가 들어 있었다.
'사생아 윌리엄'은 유명할 뿐 아니라 영국의 역사를 뒤집어 놓은 사람으로 소위 '정복자 윌리엄'이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11세기에 만들어져서 겨우 전해 내려오는 태피스트리 융단에 그려진 월리엄과 포스터에 그려진 근육질의 젊은 사내 사이에서 어떻게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로즈린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를 놀리는 중이며, 그것은 그의 성격을 알려주는 단서였다. 그녀는 그를 좋게 평가하지 않으리라.
"이것 봐요, 미스터……?"
그는 그녀의 말투에 들어 있는 질문의 요지를 알아들었다.
"내 이름은 소온(가시라는 뜻)이오."
로즈린은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나 자주 그 짓궂은 말장난을 들어왔는지 모른다.
'네 덤불은 가시가 있어, 로지.' 혹은 '난 네 덤불 속의 가시가 되고 싶어.'
그녀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 또래 남학생들은 그런 노골적이며 선정적인 농담을 던지곤 했다.
이 남자는 드라마 수업을 놓친 학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누군가 그녀를 놀리려는 사람의 짓이 분명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은 배리 홀톤이었다. 아마 그가 교수 자리를 얻어낸 방법도 이런 것일 게다. 이치에도 맞는 추리였다. 그 액센트!
배리는 웨스터리에 있는 몇몇 외국인 교수들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의 친분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여 자신이 매우 잘났다는 기분에 빠져 들었나보다.
아까 참에 학장 사무실에서 느꼈던 분노가 또렷이 되살아났다. 그 도둑, 그 거짓말쟁이, 배리 홀톤. 만약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더라면 무덤에서 되살아났을 것이다. 로즈린은 욕설을 해보았자 자신의 품위만 손상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생각들을 억지로 누른 다음 배리의 말도 안 되는 장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미스터 소온……."
"아니오. 소온은 그냥 이름이라오. 소온 블러드링커(흡혈귀). 이름 앞에 미스터를 붙이는 영국인은 당신이 처음이군요."
맙소사, 그는 그녀가 검에 대고 하는 소리를 듣고서 자신의 농담에 이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당황했다. 그는 자신의 전 약혼자에게 여기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모조리 일러바칠 게 분명했다.
"우리 미국인들은 그냥 미스터라고도 부른답니다. 자, 이제 여기서 나가 주실까요. 그리고 홀톤 씨에게 이건 그를 꼭 닮은 풋내기 같은 장난질이라고 전해줘요."
"고맙소, 아가씨. 당신은 날 돌려보낼 만큼 현명한 여자군요. 그렇다면 다시는 날 부르지 마시오."
로즈린은 코웃음을 쳤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내쫓았고, 또다시 그를 무시한 채 손에 들고 있는 시험지에 시선을 돌리면서 일을 계속했다. 만약 그가 2분 안에 사라지지 않는다면 학교 경비원을 부를 생각이었다.
멀리서 또 한 번의 뇌성이 들려왔을 때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까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내면서 그녀는 재빨리 눈을 감았으나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번개가 다시 그녀의 강의실을 메우고 감은 눈까풀을 통해 그녀의 시신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강렬한 빛의 자극으로 인해 눈앞에 나타난 많은 점들 때문에 그리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눈을 뜨고 바라본 창문 밖의 교정은 마냥 고요했다. 비가 내린 흔적은 물론이고 바람이 휩쓸고 간 기미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고요하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몇 초안에 폭풍우가 몰아닥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일기예보자 같으니. 오늘날의 과학문명을 가지고 정확한 일기예보를 기대한다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요구일까? 분명, 대자연의 변덕은 인간에게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에는 초대받지 않은 방문객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로즈린은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기막히게 잘 먹혀든 자신의 장난질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배리 홀톤의 모습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의 모든 거짓말과 허식으로 가득 찬 사랑의 고백을 믿을 때처럼 아직도 잘 속아넘어가는 여자였다.
갑작스런 붕괴로부터 그녀를 위로해 준 것은 오직 아버지가 심어준 도덕관이었다. 배리 홀톤은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줄 뻔했고, 2년여에 걸쳐 조사한 그녀의 값진 기록을 훔쳐내었을지 몰라도 그녀의 침실에는 들어 올 수 없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의 태도가 진지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녀의 감정은 자신이 생각한 만큼 그에게 깊이 빠져 들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그녀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인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던 것보다는 더 나았다.
3
"자, 나에게 보여 줄 거야 말 거야?"
로즈린은 빙그레 웃으면서 길다란 나무상자가 놓인 침실용 서랍장이 있는 침대 발치에 선 게일에게 다가갔다. 지난밤에는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방금 아침식사를 끝낸 그녀는 게일에게 오래도록 기다린 골동품이 마침내 도착했으며, 지금 가지고 왔다고 알려주었다. 게일은 그 검에 대해서나 로즈린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로즈린과 게일은 단짝 친구였다. 둘 다 메인 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같은 학교를 다니고, 심지어 같은 대학을 나왔다. 로즈린이 기억할 수 있는 한, 게일은 그녀 인생의 일부분이었고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그녀에게 게일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다. 심지어 데이비드도.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자신의 모든 비밀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으나 게일에게는 죄다 털어놓았다.
그들은 닮은 꼴이 아니었다. 로즈린은 적갈색 머리카락에 눈동자는 연한 초콜릿 색깔이었고, 게일은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졌다. 로즈린은 키가 크고 책에만 몰두하는 학자 특유의 딱딱한 인상을 풍기면서도 천성인 양 부끄러움을 잘 탔다. 반면에, 게일은 키가 작고 통통하며 두려워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당찬 여자였다. 한 사람에게 부족한 면을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그들은 함께 있을 때 특히 빛을 발했다.
둘 다 고등학교 때 데이트를 썩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게일은 노력을 계속했다. 십대 시절에는 그리 예쁘지 않아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았던 그녀는 관심을 보이는 남자애들에게 심한 모욕을 안겨주곤 했다.
반면에 로즈린은 남자애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인생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우수한 학점은 그 목표 중의 일부였다. 불행히도 천재적인 아니면, 그 비슷한 지능을 타고 나지 않았기에 다른 학생들보다 더욱 더 힘들게 공부를 해야만 원하는 학점을 따낼 수 있었다. 그녀가 현재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전 생애를 걸고 그것을 향해 돌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부는 그녀에게 사교 생활과 같은 오락을 허락하지 않았다.
게일은 자라면서 '미인'이라는 평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아직도 통통한 편이지만,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대학 2학년 때 결혼과 더불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녀가 받아본 세 번째 청혼이었다.
로즈린은 결혼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만약 청혼을 받았더라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한번도 결혼하자는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공부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나마 데이트를 해본 몇 안 되는 남자들은 그녀가 그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신들을 만난다는 사실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데이트 할 다른 여자들을 찾아 나섰다.
그녀가 정말로 관심을 가진 첫 번째 남자가 배리 홀톤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을 때 그는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었다.
"드디어!"
그때 로즈린은 스물여섯 살이었다. 배리는 그녀보다 일 년 늦게 웨스터리에서 강의를 시작했는데,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이 그녀가 빨려 들어간 이유였다.
명문 대학들 중의 하나에 들어가는 웨스터리에서는 그녀가 대학 4학년이 되자 학교에 남아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그녀의 높은 학점 때문이었다. 그녀가 웨스터리를 선택한 이유는 그곳이 그녀가 좋아하는 작은 마을이었고, 게일이 이사해 온 곳까지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 데다, 그녀에게 대학 측의 기대에 부응한다면 강의를 시작한 첫 해에 종신교수직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배리가 교직원으로 참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와 데이트를 하기 시작한 그녀는 모든 남자들이 모여 앉아 대화를 즐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배리는 지적인 방법으로 그녀에게 구애를 했었다. 그녀가 그를 그렇게나 많이 좋아했으며 그와 사랑에 빠지는 기간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배리는 한참만에 구혼을 했으나 그녀가 그와의 결혼을 결심할 만큼 충분한 기간은 아니었다. 그는 중세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하여 그녀가 조사한 노트를 훔쳤다. 그런 사실에 대해 까마득히 모르던 그녀는 배리가 추측한 대로 2년 동안의 힘든 노력이 우연찮게 쓰레기통으로 쓸려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1년이 지난 후 그녀의 연구 노트가 배리의 이름으로 출판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책이 출간되기 전에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결혼식을 연기했다. 만약 그녀가 상상력이 풍부한 여성이었다면, 요정 할머니가 그녀를 인도하여 생애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해주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로즈린은 배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그로 인해 직장을 잃을 뻔했다. 고소 취하를 해달라는 학장의 요구를 그녀가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재판에서 졌다. 그 일은 그녀가 증오에 가득 찬 버림받은 여자에다, 남자와 동등하게 되려고 안달하는 복수심이 강한 여자라는 사실을 은근히 암시하는 사건이 되어 버렸다. 거짓말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그녀는 사실을 완전하게 증명할 수 없었다. 배리는 그녀의 연구실적을 가로채었고, 그녀는 남자를 완전히 믿으면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모두 6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웨스터리 대학의 종신교수직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녀는 배리 홀톤과 우연히 마주칠 수밖에 없는 작은 캠퍼스는 물론 같은 주에서 사는 일마저도 역겨웠다. 그리고 어제도 겪어 봤듯이, 그는 우습지도 않은 장난을 걸어올 수도 있었다.
로즈린은 이번 여름 할머니의 유일한 유산인 영국에 있는 카베노프 별장에 머무르는 동안에 결정을 내릴 참이었다. 5년 전 그 별장이 그녀의 소유가 된 이래로 매년 여름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주로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다. <흡혈귀의 저주>라는 특이한 이름의 검에 대한 이야기도 바로 그곳에서 들었다.
지금 그녀는 검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면서 지난밤에 느꼈던 흥분과 똑같은 기대를 경험했다
. 그리고 왠지 친구에게 경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봐. 하지만 만지지는 말고."
게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남자에 대해 말할 때와 비슷한 말투야, 로지."
로즈린이 코웃음을 쳤다.
"넌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잖아."
그러나 로즈린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자동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에게서 소유욕이 드러난 말투가 나오다니……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수집품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맞다, 그러나 질투심을 보일 정도로 끼고 도는 것은 아니었다.
로즈린은 자신의 말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덧붙였다.
"너무 오래된 것이라서 공기 속에 드러내기가 겁나서 그래. 물론 아주 오래 견디어 오긴 했지만, 난 그것을 유리상자 속에 안전하게 넣어 두기까지는 걱정스러워."
"널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 이런 물건은 네 보호가 필요하니까, 로지."
게일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나 몇 초 후 그들은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답지, 그렇지 않니? 만지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만드는 것 같아. 내가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손대기 전에 빨리 상자를 닫으렴."
게일은 그녀를 놀려 대었다. 그러나 로즈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상자를 닫고 잠그었다. 만약 누군가가 검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면,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더구나 검을 쳐들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그녀는 자신이 또 공상에 잠긴 모양이라고 결론 지었다. 다른 설명은 있을 수 없다.
"이젠, 그 검보다는 '널 잘 알고 있는' 이라는 말에 대해 함께 토론을 해보자."
게일이 어물쩡 넘기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넌 거의 4년 동안 애쓴 끝에 중세의 검을 손에 넣었어. 네가 원하던 직업을 얻을 때와 똑같이 말이지. 이제 사라져 버린 사교 생활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할 셈이지?"
로즈린은 움찔했다. 사실상 그녀가 거기에 있는 동안 마침내 터져 나오고야 말 화제였다.
"난 노력중이야, 기억하니?"
"자, 로지, 네가 만난 모든 남자들이 배리처럼 바보는 아니야. 넌 지금까지 공부하는 사람만 찾아왔어. 이젠 운동선수나 심지어 근로자들, 그러니까 머리를 쓰는 대신 근육을 사용하는 일을 하는 남자들, 네가 쓴 책에 대해 야유를 퍼붓지 않는 남자들과 사귀어 보면 어떨까? 글자 그대로 널 침대 위로 던질 수 있는 남자들 말이야."
로즈린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게일은 강한 남자를 좋아했다. 그녀는 어물쩡거리며 꽁무니를 빼려고 했다.
"배리와의 일이 끝난 지가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고……."
"시간은 충분히 지났어."
"난 아직 찾고……."
로즈린은 거짓말을 했다. 이번에는 게일이 코웃음을 치며 말허리를 잘랐다.
"어디에서? 학교에서? 넌 다른 곳엔 가지 않아. 그리고 자신을 보라구. 넌 너무 일을 많이 하고 있어, 로지. 하도 울어서 눈 밑이 불룩하게 부어 있잖아. 일만 하고 즐기지는 않고……."
"오, 제발 그만둬. 이번 주말 동안 네가 엄마처럼 굴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 내가 여기에 있는 시간의 절반은 잠을 자라고 밀어붙이겠지."
"지금 농담하고 있니? 난 널 데리고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모임에 나갈 작정이야. 우리들 중의 하나는 너에게 맞는 남자를 찾아낼 수 있겠지. 잠은 너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자렴. 다음에 네가 찾아왔을 때, 난 거의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창백한 안색을 보고 싶지 않아."
로즈린이 한숨을 쉬었다.
"아마 너무 늦게까지 책에 매달려 있었나 봐. 학교 일도 집에 가져가서 하니까. 그렇지만 이번 학기도 거의 끝나가. 이번 여름에 영국으로 가서 푹 쉴 생각이야."
"오, 물론이시겠지."
로즈린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게일의 말투는 회의적이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골동품들을 구하러 다니거나 자료를 수집하러 다니는 시간 중에 쉰다는 말이겠지. 항상 네가 떠들고 다닌 것처럼 말이야. 대체 사람들과 사귈 시간은 언제쯤이나 생기는 거니? 또, 쉴 시간은?"
"난 쉴 거야. 약속할게. 사람들과 사귀는 일은…… 글쎄, 난 아직 또다시 위험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게일. 아마 영국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괜찮을 거야."
"영국에 이상적인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이게 다른 일들처럼 계획 세워서 될 거라곤 생각하지 말라구!"
"좋아. 마음은 계속 열어 두겠어."
로즈린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만약 내가 멋진 남자를 우연히 만나면, 절대로 그냥 지나가지 않을게."
"분명히 약속한 거야?"
로즈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몇 해 동안 그녀의 관심을 끈 몇 안 되는 남자들은 그녀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아직 또 다른 관계를 형성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배리는 그녀가 나누어야 할 믿음을 바닥까지 말려 버렸다. 아마 어떤 날…….
4
"오, 로지, 나는 네가 여기까지 이것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데이비드는 넓은 거실의 한쪽 구석에 설치되어 있는 작은 바에 서서 잔에 스카치를 채웠다.
"만약 내가 너의 계획에 대해 알았다면, 이것을 보내는 대신 네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로즈린은 오빠의 눈을 감히 마주보지 못하고 자신의 잔에 얼음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그 검이 자신에게 얼마나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에 대해 곧이곧대로 고백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절대 믿지 않을 테고, 그녀 역시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단지 <흡혈귀의 저주>를 미국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영국으로 오는 첫번째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런던에는 예정보다 하루 늦게 도착했다. 공항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검을 가지러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었지만, 비행기를 놓치는 일보다 그 검을 자신에게서 떼어놓을 일이 더 괴로웠다. 적어도 그녀가 있는 나라에 있어야 한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데이비드에게는 설명이 필요했다.
"나는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이곳에 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것을 여기까지 들고 온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요. 이게 얼마나 값진 물건인지 생각해 봐요. 보안장치도 안심하고 믿을 만한 것은 못 되구요. 특히 내 것은 구식이니까 말이에요. 휴가 내내 걱정만 하고 지낼 수가 없어서 아예 가져온 거예요."
로즈린은 그럴싸한 이유는 죄다 들었다.
"게다가 옆집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 왔는데, 난 아직 만나지 못했거든요. 겨우 이틀 전에 온 사람들이니까. 오빠는 사람들이 새로 이사 올 때마다 내가 얼마나 가슴 졸여 하는지 잘 알고 있잖아요. 바로 옆에 연쇄살인의 범인이 사는지, 아니면 가장 친하게 될 친구가 사는지 알 수 없는 일이거든요."
데이비드는 빙긋 웃으면서 자신의 잔을 들어 그녀의 잔에 부딪혔다.
"그냥 한번 놀려본 거야, 로지. 난 네가 얼마나 열렬하게 그 검을 기다렸는지 잘 알아. 만약 네가 매일 밤 그 검을 침대 밑에 넣고 잔다고 해도 난 절대 놀라지 않을 거야."
데이비드는 놀리느라고 한 말이었으나 실제로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던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사실, 이 특별한 골동품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불합리하고 무분별한 정도였다.
로즈린에게는 또 다른 골동품 무기들이 많이 있었다. 수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사람 발만한 길이의 15세기 단도로서 칼집에 달린 두 개의 주머니 속에는 손잡이에 작은 보석들이 박힌 식기구를 넣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단도를 제법 사랑했지만 <흡혈귀의 저주>처럼 온통 마음을 빼앗기진 않았다. 그녀는 마치 자식이라도 얻은 듯이 검을 다루었다.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날까, 누가 만지기라도 할까 혹은 부서지거나 잃어버릴까봐 안달복달이었다.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도 내내 공포에 시달렸다. 검을 나무상자에 단단이 싸서 곱게 넣어 두었으니 마음을 놓아도 되련만, 화물을 운반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던질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낯선 사람이 그 나무상자를 열어보라고 말하기를 기다리며 서서 세관을 통과하는 일도 악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운이 좋았다. 나머지 세 개의 가방만 정말 조사를 받았을 뿐 그 나무상자는 평온하게 통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즈린은 미국으로 돌아갈 때 데이비드에게 부탁을 하여 그의 아내가 소유한 개인 비행기로 그 검을 운반해 달라고 부탁할 예정이었다. 정말이지 가능하다면 그런 가슴 죄는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몇 년 동안의 애타는 기다림 끝에 물건을 손에 넣은 셈이어서 그녀가 가진 특별한 애착이며 극성 등이 모두 당연하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일시적이며 그런 걱정이 진정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라고 달래줄 테지만, 그녀는 그에게 그렇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오빠일지라도 자신이 느끼는 강박관념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그가 이해해 주길 바랄 수 있겠는가?
로즈린은 데이비드의 놀림에 미소를 보내면서 그가 소파로 다가와 곁에 앉기를 기다렸다. 그는 그날 아침 공항에서 그녀를 태우고 카베노프 별장으로 곧장 달렸다. 그의 아내인 리디아는 최근에 산 트로이 근처 성채의 일을 돌볼 실내장식가들과 만나기 위해 프랑스에 가고 없었다. 리디아는 이번 주말까지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므로 데이비드는 로즈린과 함께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머무를 작정이었다.
비록 서로 닮을 이유가 하나도 없고 피를 나눈 사이도 아니며, 어린 시절 동안 한 집에서 살았다는 것밖에 없지만, 얄궂게도 로즈린과 데이비드 사이에는 약간의 닮은 점이 있었다.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들이 친 형제지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태어날 때 받은 뮬렌이라는 성(姓)을 그대로 유지했으므로 사람들은 로즈린의 성이 결혼으로 바뀌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어쨌거나 로즈린이 대리인이 되어 줄 다른 남자를 구하지 못했을 때 데이비드가 검의 전주인과 흥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성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둘 다 깊고 맑은 초콜릿 색 눈동자를 가졌다. 비록 데이비드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로즈린의 것처럼 붉은 기운을 띠지 않았으나 둘 다 높은 광대뼈와 똑같은 모양의 눈매를 가졌으며 눈썹이 기울어진 각도 역시 비슷했다. 둘 다 커다란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다.
데이비드가 양친을 잃고 그녀의 가족이 되었을 때 로즈린은 다섯 살, 그는 일곱 살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친오빠나 다름없으며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각별한 형제간이나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도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로즈린은 화제를 완전히 바꾸지는 않고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난 <흡혈귀의 저주>를 가진 것에 대해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껴요. 그건 너무 아름답고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물건이에요. 그러니 박물관에 진열되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에요."
데이비드는 눈썹을 들어 올리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 검을 기증하겠다고?"
로즈린이 웃었다.
"오빠가 살아있는 동안은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난 죄책감과 더불어 살아야 할 테니까요."
"그 검이 내 소유가 된 후, 아이삭 경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 그 노인네는 정말로 괴팍스럽더군. 그는 박물관을 믿을 수 없다는 거야. 여자들이 검을 만질 수도 있다는 거지."
"여자에게 그 검을 팔지 않는 이유를 말하던가요?"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자신도 모른다고 말했어."
"네 - 에?"
드디어 데이비드는 킥킥거렸다.
"나도 똑같이 되물었단다. 그러나 아이삭 경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에게 검을 물려주면서 만약 그가 끔찍한 고통에서 영원히 헤매고 싶지 않다면 어떤 여자도 검에 손을 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는 거야. 데어본의 아버지는 그 전 주인으로부터 검을 살 때 내가 서명한 것과 비슷한 각서에 서명을 한 게 분명해. 데어본은 전 주인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그 이전에는 어떠했는지 전혀 몰라. 하여간 한 가지 말해줄 게 있어, 로지. 아이삭 경은 딱 부러지게 말하거나 인정하지 않았지만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그는 정말로 그 검에 저주가 들어 있다고 믿고 있지."
"단지 그 이름 때문인가요?"
데이비드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름이 이상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거다. 그리고 그 검을 소유했던 모든 주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며 검을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도 말이지.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전설이란 몇 세기에 걸쳐 내려오면서 많이 바뀌게 마련이죠. 끝까지 남는 건 별로 많지 않아요. 중세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미신적이며 공상적인지 오빠도 잘 알잖아요. 이교의 신들, 마법사와 마녀, 악마 심지어 난장이와 요정들이 잔뜩 나오죠. 그때에는 사람들이 정말로 믿었을 때니까, 그런 이야기들이 매우 중요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 검은 천 년 동안 악명을 지켜왔어요. 거기에 저주나 미신 같은 게 붙어 있어서 정말로 안됐어요. 그게 뭔지 알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든 지불할 용의가 있어요."
"틀림없이 여자와 관계가 있는 것일 거야."
로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체만 놓고 생각해 보면 꽤나 이상한 일이에요. 역사적으로 여자는 무기 같은 것과는 별로 연관이 없잖아요. 여왕들이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녀들이 직접 무장을 하진 않았잖아요?"
그런 다음 그녀는 빙긋 웃었다.
"예외가 있긴 할 테지만요."
"네가 그 검을 만졌을 때 혹시 전쟁터로 달려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은 아니냐?"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전쟁은 아니구요. 난, 기어이 종신교수가 된 배리가 자축하기 위해 나에게 한 우스꽝스러운 장난에 대한 대답으로 그에게 이 검을 휘두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죠."
데이비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한번도 그에게 배리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건에 대해 거의 잊어버렸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더라도 더 이상 얼굴을 붉히지 않았을 만큼 자제심을 길렀다.
"그 자식이 이번에는 어떻게 했는데?" 데이비드가 다그쳤다.
"내가 마침내 그 검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그는 나에게 바이킹의 옷을 입은 젊은이를 보냈더라구요. 이름이 소온 블러드링커라나요."
"소온 블러드링커?"
배리의 장난을 생각하던 그녀의 표정이 혐오스러움을 드러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이름과 관련해 까다로운 장미덤불로 빗대어져 오랫동안 놀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름이 소온(가시)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제정신을 가진 부모라면 자기 아들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줄 리가 없었다.
"사실,"
그녀가 망설이듯 말했다.
"배리가 그런 장난을 오랫동안 계획해 왔다는 것은 내 짐작이에요. 그는 아마 검이 도착한 날 그것을 질질 끌며 강의실로 들어가는 나를 보았을 거예요. 우체국에서 찾은 다음에 집에 가져다 놓을 시간이 없었어요. 만약 그가 나를 보았다면, 그는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 테고 그날 저녁까지 그런 장난을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어요."
"기본 상식도 없는 그런 놈은……. "
"쉬이!"
그녀는 노여움으로 벌겋게 달아오르는 그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잘랐다. 데이비드는 그녀만큼이나 배리 홀톤을 경멸했다.
"그는 대가를 치루게 될 게야. 어떤 식으로든 말이지. 로지, 나는 인과응보를 확실하게 믿는 사람이란다."
로즈린은 데이비드의 분노가 가라앉고 그의 머릿속에서 배리 홀톤에 대한 모든 생각이 사라지도록 화제를 돌렸다. 오빠를 다시 웃게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 다음 다시 자기가 흥미를 느끼는 화제로 되돌아갔다.
"어째서 아이삭 경이 그 검을 팔았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그 바보 같은 저주에 대해 그토록 걱정을 하면서 말이에요."
"그 저주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지. 그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더군. 그리고 외동딸에게 재산을 물려주게 돼 있고. 그는 그 검을 팔아서 자신이 죽기 전에 '저주'를 떼어내 버리고 싶어 해."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저주를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재미있는 걸요."
"오, 그렇지만 네게는 잘된 일이잖아."
그는 빙긋 웃었다.
"만약 아이삭 경이 저주를 믿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그 검을 팔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그 저주를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증거야. 저주든 뭐든, 그 검을 여자에게 주었다고 해서 날 어떻게 하진 못해. 그리고 너도 아직 돌로 변하거나 뭐 그런 것 같지 않은 걸. 아니, 잠깐…… 지금 네 얼굴이 회색빛으로 조금 변한 것 같기도……."
그녀는 그에게 소파에 놓인 쿠션을 던졌고, 그는 말을 멈추며 밝은 웃음을 터트렸다.
5
로즈린이 카베노프 별장을 유산으로 받았을 때엔 담쟁이덩굴이 우거지고 옛 정취가 따스하게 스며나오는, 방이 두세 개쯤 되는 조그만 집을 상상했다. 그러나 방이 열네 개나 되며 네 대의 차는 너끈히 들어갈 수 있는 차고와 원래 기대한 크기만한 관리인의 집 그리고 오천여 평의 땅을 보자, 그녀는 충격을 금할 길이 없었다.
존 흄스와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가 그 집에 가끔씩 들릴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증조할머니를 위해 근 20년 가까이나 일을 했고, 비록 더 이상 젊지 않았으나 그 집과 땅을 잘 돌보아 주었다.
거의 이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별장은 지난 10년 동안 말끔히 개축되어 로즈린은 그 집을 팔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녀에겐 그런 커다란 집에 보수공사를 일으킬 능력이 없었다. 허나 재공사를 벌일 날은 아직 까마득히 멀었고, 그녀는 맘껏 그 집의 크기가 아닌 고풍스런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었다.
그녀는 증조 할머니인 모린을 잘 모른다. 할머니는 로즈린이 어렸을 적에 손자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두어 번 미국을 방문했을 뿐이었고, 그녀의 가족들에게 영국 여행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치였다. 어쨌거나 할머니의 개인적인 물건들은 모두 이 집 안에 있었다. 젊은 시절에 썼던 일기, 다락방에 가득 찬 고가구들, 유행이 지난 옷가지들과 장신구들은 로즈린처럼 옛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보물과도 같았다.
로즈린이 사용하는 주인 침실은 미국에 있는 집의 거실과 식당을 합친 것보다 더 넓었으며, 네 귀퉁이에 기둥이 세워진 손으로 만든 커다란 침대는 50년도 더 된 것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온 소지품들과 처음 영국에 왔을 때 자료 수집을 위해 사서 이곳에 남겨둔 타자기를 제외하고, 이방에 있는 모든 것은 그녀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흡혈귀의 저주>는 특별히 오래된 물건이었다.
로즈린은 침실을 통해 욕실로 들어가면서 나무상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상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열어보겠다는 충동은 미국에 있을 때만큼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달 동안이나 그 충동과 싸워오면서 그것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했었다.
오늘은 예외였다. 이곳 카베노프에 짐을 풀어놓았을 때 그녀는 검이 비행기 안에서 어떤 자그마한 손상도 입지 않았음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나 검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싸워온 가장 강하고 고통스러울 만큼 힘든 충동을 견뎌냈다.
중세의 무기에 손을 대보고 싶다는 욕망과의 싸움이 그녀의 생각을 온통 지배했다. 그녀는 집에 있는 수집품들 한가운데 만들어서 놓아둔 값비싼 유리 진열장에 검을 집어넣지 않았다. 그녀는 이 검만큼은 항상 볼 수 있는 장소에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을 보고 싶다는 욕구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을 때까지는 말이다.
별장에 있는 욕실은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주인 침실에 딸린 곳에는 샤워기와 욕조가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 피곤했다. 시차에서 오는 피로가 이제서야 덤벼드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저녁 내내 잘 버티는 자신을 보고 놀라워했다. 심지어 데이비드마저도 이미 침대에 든 지 오래였다.
십 분도 채 안 되어 샤워를 마쳤다. 두꺼운 수건을 몸에 감고, 잠옷을 찾기 위해 아까 옷을 풀어 놓은 오래된 장롱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욕실에 들기 직전 침대에 놓인 마호가니 상자 옆에 푸른색 실크 잠옷을 던져 놓았었다. 아직 잠옷을 입기에는 몸이 덜 마른 상태이므로 먼저 머리를 빗기로 했다.
로즈린은 거울 속에 비친 침대를 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상자가 눈에 들어왔으나 그것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너무 피곤해서 그럴 테지. 혹은 그 검이 본래 있던 이곳 영국에서 더 편안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녀에게 미치는 힘이 줄어들었는지도 모른다. 오, 하나님…… 갑자기 그녀의 공상력이 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문제점이었다.
그녀는 검을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을 이길 수 있을 때야 비로소 검에 손을 대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젠 서둘 필요가 없었다. 이런 무관심한 기분이 피로에서 오는 거라고 할지라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은 다음 등 뒤로 늘어뜨리고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어 침대로 다가갔다.
불과 몇 초 후, 그 검은 다시 그녀의 손 안에 들려 있었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칼자루의 감촉은 여전히 따스했다. 이상한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녀는 전에도 들었던 적이 있는, 멀리서 울리는 뇌성을 또다시 들을 수 있었다. 비록 방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으나 뒤뜰로 면해 있는 두 개의 유리창에 쳐진 커튼을 뚫고 약하지만 번쩍이는 빛이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창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만약 폭풍우가 몰아친다면 문을 닫아야 했다. 처마가 없는 창문으론 비가 들이치기 쉬웠다. 더구나 다락방도 없는 이곳은 만약 그녀가 원하고 자금이 충분하다면 완벽한 삼 층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천정이 높았다.
그러나 미처 유리창에 눈길이 닿기 전에 방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른 남자도 아닌 바로 그 남자, 스스로를 소온 블러드링커라고 했던 남자였다. 이번에도 배리 홀톤의 장난? 아니야,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눈을 깜박여 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혼란스럽고 피곤한 그녀의 이성은 눈앞의 광경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배리가 이렇게 멀리까지 손을 뻗칠 수 있을까? 과연 이 남자를 영국까지 보내는 데 드는 비용을 댔을까, 구두쇠 배리가? 대체 저 사람은 누구지? 만약 그가 다른 이유로 이곳에 올 예정이었다면……, 배리가 머리를 짜내어 그녀를 상대로 계속 장난을 칠 가능성은 있었다.
그는 강의실에 나타났던 바로 그 남자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의 얼굴과 몸매가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떠나질 않았었다. 그녀는 단순히 육체적인 매력만으로 그에게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맹세코, 그녀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단지 외모 때문에 한 남자에게 이끌린 적은 거의 없었다. 다른 여자의 경우에조차 남자와 눈이 마주친 즉시 마음이 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항상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와는…….
그의 복장은 이전과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달랐다. 그는 긴 소매의 흰 장옷을 입고 벨트를 느슨하게 매었는데, 그 천에 묻은 검은 자국이 피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또한 그의 입가에 묻은 피를 보았다. 싸움을 한 거야. 틀림없어.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 맙소사. 여기에 몰래 들어 올 때 데이비드와 싸운 거죠?"
"데이비드? 난 내 형인 토르와 주먹다짐을 했소. 날 지금 다시 보내주시오. 난 싸움을 끝내……."
표정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그의 목소리는 확연하게 노기를 띠고 있었다. 장난이든 아니든, 침실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자가 들어와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화만 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정말로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정체를 밝혀요. 당신이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먹혀들지 않을 거예요. 바보스러운 짓이 조금 지나친 것 같군요. 난 당신과 배리 두 사람을 모두 고소할 거예요. 만약 당신이 계속……."
그가 끼어 들었다.
"당신이 날 불러낸 거요, 아가씨. 내가 원해서 온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계속하겠다는 건가요? 당신은 내가 정말로 재미있어한다고 생각하나보죠? 만약 배리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갑자기 그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말을 하는 베리(딸기)가 있소?"
그녀는 기가 막혔다.
"뭐라구요?"
"난 푸른 것을 매우 좋아한다오."
"푸른……?"
로즈린은 그가 블루베리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낭패스런 신음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약 잠자리를 위해 날 불렀다면 내 형은 기다려 줄 거요."
그는 말을 하면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침대를 사이에 두고 그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녀의 몸에 둘러진 수건 아래로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 있었다. 은근한 뜻이 담긴 그의 말을 듣자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칼자루를 손에 쥐고 칼날은 침대 매트리스 위에 내려놓았던 그녀는 순전히 방어본능 때문에 다급하게 그것을 치켜들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매우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 대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보조개가 있군. 그녀의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그녀에게 기꺼이 말을 붙였다.
"내 칼로 나의 피를 흘리게 할 수 없소. 지금은 신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오. 그리고 미치광이 울프스탄 - 만약 그가 날 찾아낸다면 - 도 가능은 하지."
로즈린의 귀에는 '내 칼' 다음의 말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 무기에 대한 소유욕이 일제히 몰려나왔다.
"당신의 칼? 당신의 칼이라고! 당장 내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난 경찰을 부를 거예요!"
"잠자리는 어떡하고?"
"당장 꺼져요!"
그는 어깨를 으쓱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멀리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빛이 번쩍였다.
그녀는 거의 오 분 동안 그가 서 있던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는데 머릿속은 얼어붙은 듯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살갗에는 와르르 소름이 돋았다. 가까스로 제정신을 되찾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조심스럽게 검을 내려놓고 상자를 침대 아래에 밀어 넣은 다음 잠옷을 걸치고서 그 아래로 수건을 잡아빼었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잠옷을 입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래야 한다고 느꼈다.
그녀의 눈길은 자꾸만 비어 있는 방 한구석으로, 정직하게 말하면 그가 서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침대 위로 올라간 다음에도 그녀는 앉은 채로 한참 동안 그곳을 응시했다. 불을 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지친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내일 아침엔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생각날 거야. 아침이 되면 아무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지친 몸이 다시 활력을 되찾을 거야. 지금 당장은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정도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어. 내일 아침엔……. 그녀는 스르르 잠 속으로 미끄러졌다.
6
꿈.
로즈린은 지난밤 일어난 사건에 대한, 아니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건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검에 대한 호기심과 배리의 장난에 대한 생각이 무의식중에 결합해서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꿈. 그것만이 가장 간단하면서 논리적인 설명이었다. 비록 꿈속에 잘생긴 남자가 들어왔다는 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고 해도 그녀는 화를 발칵 내며 그를 쫓아 버렸다. 검에 대한 호기심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자겠다는 말까지도 했다. 거기에 대해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 '네, 그것 참 멋지군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를 생각하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아마 꿈속에서 즐기는 것보다 더 안전한 관계는 찾아볼 수 없으리라. 꿈이 아니면 상상도 못할 것들을 즐기는 동안 도덕관, 죄의식, 후회나 자신의 성질, 그 모든 것을 옆으로 밀어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꿈에서조차 자신의 도덕관이나 분노를 불러와야 했을 만큼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지금까지 꾸어온 꿈들 중 가장 이상하고 재미있는 그 꿈은 그녀의 성격상 인정할 수도 없고 얼른 잊어버려야 할 그런 것이었다. 정말로 부끄러웠다.
로즈린은 자신의 설명에 만족했다. 물론 근 한 시간 동안이나 방 안에 사람과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전선이나 숨겨진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지 샅샅이 뒤진 후에 말이다. 그녀는 방 안에서 어떠한 이상한 기미도, 그러한 물건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상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도 않았다.
이런 복잡한 장난은 배리 홀톤의 상상력을 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속임수를 위한 장비를 마련하는 데 드는 비용을 지불하기에 그는 너무 구두쇠였다. 그들이 연애를 하는 동안 그녀에게 안겨 준 사치스런 선물을 들라면 학교로 오는 길에 피어 있는 꽃들을 한아름 꺽어 안겨 주는 정도였다. 비용은 덜 들수록 좋은 것, 이것이 그의 좌우명이었다.
분명히 그의 장난은 미국에서 시작하여 한번 크게 웃고 끝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왜냐면 그녀의 무의식은 배리의 잘생긴 공범자에 대한 세세한 면까지 모두 기억해내어 한 달이 지난 후 그와 비슷한 꿈을 꾸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가 그녀의 휴가 기간 동안 그의 자동차를 사용하도록 해주었기에, 그녀는 내일 그를 기차역까지 바래다 주어야 했다. 오늘 그와 함께 미국에서 수입된 식료품들을 파는 상점으로 가는 길에 미리 운전대를 잡아 봤다. 도로 반대편으로 운전하는 법에 익숙해 지는 데는 늘 약간의 곤란을 겪곤 했으므로, 이곳에 올 때마다 처음 며칠간은 누군가가 차에 함께 타서 미국과 반대인 운행방법에 대해 일깨워 주어야 했다.
로즈린은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데이비드에게 자신이 꾸었던 이상한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그는 그녀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넌 그에게 검의 저주에 대해 묻지도 않고 내쫓은 거냐?"
"난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데이비드. 나는 배리의 친구가 그 검의 원래 주인이라고 자칭하면서 몰래 들어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녀는 혼자 빙긋 웃었다.
"게다가, 물어보았다고 해도 사실상 내 잠재의식에 들어 있는 대답밖에 듣지 못할 텐데요. 그리고 난 그 저주가 어떤 것인지 전혀 감도 못 잡고 있는 걸요."
"오, 그렇지만 네 잠재의식이 그럴듯한 해답을 발견했다면 재미있었을 거야. 잠재의식이란 신기한 거니까. 환생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모든 삶이 그 사람 내면 깊숙한 곳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지."
로즈린은 눈망울을 굴리다가 구부러진 좁은 시골길을 돌면서 차선을 벗어났다. 그녀가 다시 제대로 차선을 잡았을 때 그들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같은 저주에 대한 토론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닌 듯해요. 만약 괜찮다면 윤회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둬요."
"그렇지만 말이야, 네가 말한 천둥과 번개는 꿈속의 일이 아니야. 지난밤에 나도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잠시 깨어났었어."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꿈을 꾸면서 그 소리를 들었다는 거지."
"맞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말을 듣는 순간, 전에는 깨닫지 못한 무언가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이킹은 지금까지 두 번 모습을 드러냈는데, 모두 그녀가 검을 만지고 난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검을 소유한 이래로 그것을 만지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껴왔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로즈린은 공상으로 빠져드는 자신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는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자신에게 증명해 주기로 했다. 그들이 별장에 도착하자 마자 데이비드에게 식료품들을 옮기도록 맡겨놓고서 그녀는 곧장 침실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침대 아래 넣어둔 상자를 끄집어 내어 매트리스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열었다. 그런 다음 손으로 검을 쥐었다.
뇌성이 울렸다. 그녀는 번개가 치는지 보기 위해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는 대신에 지난밤 소온 블러드링커가 서 있던 방의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살진 닭다리를 손에 든 채로.
오, 하나님 맙소사.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검의 원주인의 유령이 그녀의 침실에 서 있다니. 이렇듯 환한 대낮에. 꾸며 낸 바이킹이 아니라 진짜 바이킹이었다. 그것도 유령이라니! 그녀는 유령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유령이 아닐 수 있을까? 그리고 어찌되었든, 그는 검과 관련된 인물이었다……. 그의 검. 아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로즈린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으로 미루어 그가 여기에 불려온 것을 무척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신은 오딘의 축제를 즐기고 있는 나를 불러내었소, 아가씨. 날 돌려보내 주지 않으려면 먹을 것을 주시오. 내 왕성한 식욕을 빨리 달래야 한단 말이오."
"가세요."
그녀는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온 블러드링커는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면서 손에 든 고기를 베어 물었다. 단 한 번에 뼈에 붙은 살점을 모두 뜯어내더니 뼈를 뒤로 홱 집어던졌다. 뼈는 벽에 부딪힌 다음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거기에 서서 고기를 질겅질겅 씹고 손가락을 핥았다
"만약 내가 오딘의 축제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난 이곳에 있을 거요. 아무튼 당신에게 경고 한마디 해드리겠소, 아가씨. 당신은 날 돌려보낼 수 있고 난 갈 거요. 단, 내가 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말이오. 만약 내가 머무르겠다고 선택하면 당신은 날 보낼 수 없소."
그가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현란한 그의 보조개를 보자 그녀는 뱃속이 울렁거렸다.
"다음 번에 나를 다시 불러 주시오, 아가씨. 그러면 당신에게 그 증거를 보여 주겠소."
그는 사라졌다. 온 것처럼 갑자기 가 버렸다. 보통의 유령들이 그러하듯 서서히 엷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줄기 연기나 으스스한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갔다. 그리고 로즈린은 떨어진 곳에 그대로 남아있는 뼈를 바라보았다.
유령이 무엇인가를 남길 수 있을까? 유령이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왕성한 식욕이라고? 저주보다도 유령을 더 믿을 수 없어.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으나 신음소리로 끝을 맺었다.
나는 분명히 꿈을 꾸고 있는 중이야. 그래야 해.
그녀는 벨벳의 천 위에 검을 다시 올려놓고 상자를 닫은 다음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7
낮잠에서 깨어난 로즈린은 여전히 뭐가 뭔지 분간이 안 되는 상태이긴 했지만, 아직도 침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뼈를 마치 처치해 버려야 할 죽은 쥐를 들고 가는 사람마냥 손가락 두 개만을 사용하여 집어들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부엌으로 향하던 그녀는 그들의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한 데이비드를 발견했다. 그는 그녀를 향해 등을 돌린 채 서 있었고, 옆에 있는 테이블에는 야채들이 쫘악 널려 있었다.
로즈린은 그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꺼냈다. 가냘픈 목소리로.
"꼬집어 줘요, 데이비드.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몸을 돌리면서 그녀를 보았다.
"넌 마치 유령이라도 본 사람 같구나."
그녀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으나 그것을 억지로 목 안으로 밀어넣었다. 다행히도 그의 눈길은 그녀가 손가락 사이에 쥐고 있는 물체에 쏠렸다.
"엘리자베스의 고양이가 뼈다귀를 흘렸나보구나?"
로즈린은 깜짝 놀라 제정신을 차렸다.
물론, 데이비드의 말은 이성적인 설명이었다. 엘리자베스 흄스는 가끔씩 집 안으로 들어오는 고양이 한 마리를 키웠는데, 고양이들이란 강아지만큼이나 뼈다귀를, 특히 닭고 같은 가금류의 뼈다귀를 몹시 좋아했다. 그녀는 그 뼈에 대하여 억지스런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좋았다.
그녀는 부엌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걸어가 그 안에 뼈를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도와줄까요?"
"네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아서 기쁘구나. 그렇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몇 초 전까지 네 얼굴이 왜 그렇게 창백했을까 하는 것이야. 혹시 아픈 건 아니니, 로지?"
"아뇨.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아니에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단지 꿈을 꾸었을 뿐이에요. 지난밤 꿈과 비슷한 거죠. 바이킹의 유령인 소온 블러드링커가 내 침실 한구석에 또 나타났어요. 그가 나타남과 동시에 천둥이 울렸어요."
"이제는 왜 그를 유령이라고 부르는 거지?"
"그는 천 년 전의 사람이니까요."그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비록 꿈속이긴 하지만 지금 나타난 거잖아요. 그럼 그가 유령이 아니고 뭐겠어요?"
"불사신?"
그는 키득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그 저주에 대해 물어보았니?"
"그가 나타난 것이 너무 무서워서 저주에 대해선 생각조차 못했어요. 난 그냥 그에게 가 버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는…… 사라지기 전에 내가 어떻게 그를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죠. 그는 자신이 가고 싶을 때 간다고 말했어요. 만약 그가 머무르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어떤 것도 그를 보낼 수 없다고 그러더군요."
"적어도 네가 잠에서 깰 때까지는 말이지."
데이비드의 간단한 말을 들은 그녀는 마치 해답을 얻은 사람처럼 빙그레 웃었다. 긴장이 빠져나간 지금에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몸이 잔뜩 얼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을 꾸는 동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음번에 그런 일이 생기거든……."
"다시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아요, 데이비드!"
그녀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만약 꿈을 꾸게 되면, 저주에 대해서 알아볼 때까지 그를 붙잡아 두거라. 난 네 잠재의식이 어떤 해답을 찾아내는지 알고 싶거든."
로즈린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 꿈을 꾸었던 때부터 그녀의 의식은 너무나 공상적으로 흘러갔으므로 더 이상 무의식이 파고 들 여지를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데이비드가 말을 이었다.
"만약 천둥이 치지 않았다면 난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거야. 지난밤까지는 괜찮았는데 이번엔 비바람이 몰려왔어."
그녀는 몰랐다. 부엌 창문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던 그녀는 정말로 비가, 그것도 가랑비가 아닌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비 오는 모습이 이렇게 좋은 줄은 미처 몰랐어요."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말해 둘 게 있어요.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 두 번이나 천둥 번개가 쳤어요. 적어도 이번에는 진짜 보통의 폭풍우군요."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미신에 사로잡힌 걸까?"
그녀는 약간 얼굴을 붉힌 채로 빙긋 웃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로즈린은 그날의 나머지 시간을 데이비드와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유령과 바이킹 그리고 천 년 동안의 저주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내어야 했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 주부터 자료수집을 시작할 생각으로 박물관들과 서점들을 방문할 참이었다. 거기에는 소장하고 있는 책만큼이나 오래된 서재들이 있었는데, 그녀의 관심 분야는 물론 고대의 무기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저주에 대한 호기심을 진실로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꿈에 매달려 해석하려고 애를 쓰면서 보낼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잠재의식이 생각해낸 해답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진짜 해답이 아니며 그리고…….
로즈린은 침대 위에 누워 몸을 뒤척이면서 잠을 청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머릿속을 여전히 떠다니는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찾기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면?
만약 실제 상황이라면 정말로 커다란 사건이었다. 논리적인 그녀의 머리는 조심스럽게 생각을 이어갔다. 만약에 소온 블러드링커가 꿈속에 나타난 유령이 아니고 그녀가 속임수의 희생양이라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녀는 유령과 대화를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의문점들을 불러 모았다.
소온 블러드링커는 그녀가 가라고 했을 때마다 떠났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녀에게 한 말이 사실이라면…… 만약 그가 머무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유령을 믿거나 말거나와 상관없이, 그녀가 유령에 대해 아는 것은 무엇일까? 검의 저주가, 검의 원주인이 온 것일까? 내가 여자라서?
전주인은 만약 그 검이 여자의 손에 들어가면 영원한 저주가 내려질 거라고 경고했다. 단지 여자만이 그 유령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게 아닐까? 검을 소유하는 한 그 유령이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뜻일까? 그런 가능성이 떠오르자 두려움과 매력을 동시에 느꼈다. 만약 유령이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로즈린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신음소리를 내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믿을 순 없었다. 그러나 만약에…… 만약 블러드링커가 정말로 유령이라면, 천 년 전 바이킹의 유령이라면?
또 다른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자신이 죽은 이래로 이어진 역사를 직접 보았다면? 중세의 실제 생활에 대해 그녀에게 말해 줄 수 있다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그녀에게 들려준다면? 그녀의 자료수집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러한 생각들은 그녀를 들뜨게 만들었다. 로즈린은 검을 꺼내기 위해 이불을 들치다가 '끄응'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그대로 멈추었다.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영국으로 오기 전에 약간의 휴식이라도 취했어야만 했다. 여기에 와서 쉬겠다고 약속하는 대신에 말이다. 어쩌면 온몸을 점령한 피로야말로 그녀가 자신의 환상이 이렇게 미쳐 날뛰도록 내버려둔 단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른다.
글쎄, 거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역사에 대한 조사를 하고 싶다는 그녀의 열정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공상적으로 비약하는 데에는 그 어떤 변명도 인정될 수 없었다. 유령 같은 것들이 있을 리 없고 저주는 사실이 아니었다. 기묘한 꿈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모두 잊어야 했다. 그냥 생각하지 않고 필요한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난 뒤 이곳에 있는 동안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조사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갈망하던 평화를 헤집어놓는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되길 간절하게 희망했다.
8
로즈린은 데이비드를 기차역에 바래다주고 별장으로 돌아오면서 더 멀지만 경치가 아름다운 길을 택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그가 떠나면서 남긴 충고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만약 긴장을 늦추고 재미있는 생활을 즐기지 않는다면 결국 피로에 지쳐 쓰러져 버릴 거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그러나 좋은 의지에서건 그 반대이든, 로즈린이 해본 그 모든 '만약'에 대한 생각들이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달래어 머릿속에 들은 꿈에 대한 생각을 겨우 쫓아낸 다음 얼마 남지 않은 데이비드와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장난칠 수 있는 동반자가 있을 때 골치 아픈 문제를 잊어버리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혼자된 로즈린의 생각은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지난밤으로, 꿈을 향해 나아갔다. 아니, 소온 블러드링커는 꿈이 아니라 진짜 유령이었다. 그 이론을 시험해 볼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일단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잡자 도저히 가라앉히기 힘든 흥분이 세차게 끓어올랐다. 그녀는 할 수 있다. 언제라도 검을 만질 수 있는데, 어째서 불필요하게 기다리고 의아심을 품어야 한단 말인가?
풍경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만약 - 그것이 그렇게 커다랗다면, 만약 - 그녀의 유령이 다시 나타나서, 자신이 경고한 대로 그냥 남아 있겠다고 하면 그녀는 어떻게 그를 통제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가 늘어붙어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 의해 소환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었다. 매번 그녀가 부를 때마다, 그는 그녀에게 원래 있던 곳으로 자신을 돌려보내 달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그 유령에게 오랫동안 붙잡아 두지 않겠다고, 단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줄 시간만 있으면 된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협조해 주기만을 원할 뿐이었다.
로즈린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그를 통제할 수 있을지 혹은 없을지와 상관없이, 이제 그를 다시 불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만약 그의 출현이 단지 꿈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가 그녀에게 말해줄 수 있는 과거의 사실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중요했다. 이번에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결정을 내리고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지금까지의 어떤 때보다도 난폭하게 차를 몰았다. 자동차 밖의 세상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향하는 계단으로 곧장 뛰어올랐다.
로즈린은 자신이 설명을 제대로 마칠 때까지 유령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고 열쇠를 감추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가 도망칠 수 없기만을 희망했다. 만약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처럼 유령들이 자유자재로 벽과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또 자신의 유령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그녀는 그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녀는 숨을 멈춘 채 침대 아래에서 검이 든 상자를 꺼내어 그것을 열었다. 온기가 전해지는 검의 손잡이에 손을 대기 전에 그녀는 방 한구석을 계속 바라보았다. 또, 거대한 뇌성이 들릴 거라는 예견을 하며 미리 몸을 움츠렸다. 뇌성이 울렸다. 그리고 소온 블러드링커가 나타났다.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로즈린의 심장은 거의 고통스러울 정도로 펄떡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꿈이란 이렇게 조정할 수도, 의지에 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유령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정식으로 차려입은 매무새였다. 아니, 그의 시대에서는 어떤 차림이 정장으로 통용되었던 것일까? 그는 옷깃과 가슴이 드러나도록 V자로 패인 부분을 금실로 세밀하게 수놓은 검푸른 튜닉을 입었고, 같은 수가 놓여진 짧은 어깨망토를 금색의 커다란 원반과 함께 넓은 어깨에 둘렀다. 그가 신은 장화도 전보다 질이 좋아 보였다. 적어도 이번엔 꿰맨 솔기가 눈에 뜨이지 않았다. 또한 가늘고 매끈한 허리를 졸라맨 벨트 역시 어깨 위에 달린 원반과 한쌍을 이루는 더 멋진 것이었다. 사실상, 그의 모습도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때보다 더 근사했다. 그녀는 아직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소온 블러드링커."
그는 즉시 푸른 눈동자를 그녀에게 돌리더니 방 저편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갈기처럼 굽이치는 긴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쓱 훑어 내리는 모습에서 그가 화가 나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로즈린은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유령은 여기에 오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또다시 말이다.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나보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으나, 그 순간에 그런 화제를 거론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사과를 했다.
"당신을 뭔지…… 특별한 행사에서 불러낸 듯하군요. 미안해요. 오래 붙잡고 있지 않을게요."
"날 붙잡는다고?"
그는 즉시 눈쌀을 찌푸렸다.
"아가씨, 지금 나와 놀고 싶은 게요?"
너무나 위협적인 그의 찡그린 얼굴을 본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 사실은, 나…… 난 당신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을 뿐이에요. 그리고 내가 어떻게 당신을 부를 수 있는지 알고 싶었구요."
"당신은 이미 알고 있잖소."
그는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손에 내 검을 들고 있소. 그것은 당신에게 나를 부를 힘을 주는 거요."
그는 말을 하면서 검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가 자신의 검을 빼앗을지도 몰라 겁이 난 그녀는 무기를 상자에 넣어 얼른 닫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 정도는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매번 나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말했잖아요.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죠?"
그의 표정으로 보아 그녀의 질문을 영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으나 그래도 대답을 거부하진 않았다.
"당신은 내 검을 사용해서 날 이곳으로 불러내었소, 아가씨. 따라서 날 돌려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도 당신뿐이오. 내가 떠나고 말고는 나의 선택이지만 동시에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난 떠날 수 없소."
"다시 말해서 내가 당신을 떠나보내고 싶을 때의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고, 내가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을 때의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는 말이군요?"
그는 화가 난 사람처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만약 그가 그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녀가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보다 더 말이다.
만약 그가 떠나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혹은 그녀가 그에게 말하기 전에 그녀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그녀는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몇 시간 아니, 며칠이 걸리더라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담고 그녀가 제안했다.
"앉으실래요?"
두 개의 창문 사이에는 푹신한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거기에 앉지 않고 침대로 걸어가서 검이 든 상자 바로 옆에 걸터앉았고 그녀는 즉시 상자를 나꿔채어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을 본 그는 비웃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렸으나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가에 앉아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재빨리 소매 없는 블라우스와 통이 넓은 바지를 입은 그녀의 몸을 훑어 내렸다. 그녀는 집에 혼자 있을 때엔 머리 모양을 편하게 하고 있는 편이지만, 지금은 데이비드를 데려다 주고 막 돌아온 길이므로 평소 외출할 때처럼 타래머리를 단단히 틀어 올리고 안경을 썼다.
잠시 동안 그녀는 그가 짧은 타월을 몸에 감고 적갈색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는 여자를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비치지 않았고,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정말로 몸집이 거대한 남자였다. 아니, 거대한 유령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닌 모든 것이 거칠고 단단하며…… 위험스럽게 보였다. 어느 모로 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는 실체가 없는 유령이므로 그래 보이는 만큼 위험하진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무심결에 불쑥 물었다.
"유령이 된다는 건 어떤 거죠?"
그는 즉시 웃음을 터트렸다.
"난 당신처럼 피와 살을 가지고 있다오, 아가씨."
분노가 놀라움의 자리를 대신 채울 때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럴 리 없어요. 당신은 유령이에요."
그녀는 이제 정말로 혼란스러웠다.
로즈린은 그에게서 자신이 전공한 시대에 대하여 듣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대답을 듣고서 그가 한 말이 사실인지 혹은 정교하게 구성된 장난인지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입술에 매달린 미소가 그렇다고 말해 주었다.
"그런 식으로 나에 대해 말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은 아니오. 내가 당신에게 이미 말했듯이 단지 신들만이 내 피를 흘리게 할 수 있소. 그리고 미치광이 울프스탄 하고. 난 그가 날 발견하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오."
그녀는 아직도 화가 나 있었으나 그의 말이 호기심을 잔뜩 자극했다.
"당신은 전쟁에서 그와 함께 죽고 싶은가요?"
그의 목소리에서 오만불손함이 배어나왔다.
"난 그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증명해 보일 작정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오, 그는 이미 죽었소. 마녀 건힐다에 의해 말이오. 그는 그런 이유로 날 미워하고, 건힐다는 발할라(오딘 신의 전당)에서 그녀의 저주와 함께 그를 부정했다오."
"발할라? 잠깐만요…… 오딘의 축제? 어제 내가 당신을 오딘의 축제 - 발할라에서 불러내었다고 말했죠?"
"그럼 거기 말고 다른 곳이 있단 말이오?"
"잠시만요,"
그녀는 잔뜩 흥분했다.
"발할라는 신화에 나오는 거예요. 오딘(지식, 문화, 군사를 맡아보는 최고신)과 토르(천둥, 전쟁, 농업을 주관하는 신) 그리고……,"
그녀는 그가 지난밤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토르 - 그의 형인 토르와 싸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만약 당신이 바이킹의 신이라고 말한다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당신이 유령일 가능성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신화에 나오는 신들에 대해서라면 그만두겠어요."
그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거의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재미있어 하는 그를 보면서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는 말인가요, 아니라는 건가요?"
그는 웃음을 가라앉혔다.
"난 신이 아니오. 나를 알고, 내가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작은 무리의 숭배자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바로 저주의 힘 때문이라오. 그리고 내 형은 그런 처지를 불쌍하게 여겨서 날 발할라로 들여보내 준 거요."
"그렇지만 당신은 당신의 형이 신이라고 말했잖아요?"
"토르는 나보다 훨씬 많은 숭배를 받아왔소. 잊혀진 내 이름과는 달리 그의 이름은 전설 속에 살아남았다오."
그녀는 그의 말 속에 숨은 약간의 비애를 보았다.
"그래서 당신은 화가 났나요?"
"당신이라면 그렇지 않겠소?"
그가 다그쳤다.
"나는 할 수 없지만 그는 할 수 있는 나쁜 짓들이 있다오. 그리고 나는 심지어 싸움에서 그를 능가하기도 하오. 그러나 건힐다의 저주를 받은 것은 정말로 나의 불행이오."
로즈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녀 건힐다, 당신은 지금 나에게 마녀들과 바이킹의 신들을 믿느냐고 묻고 있다면 난 단지 그럴 수 없……."
"아가씨, 당신의 믿음 따위는 내가 알 바 아니오. 난 내가 한 말을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만약 당신이 여기에 있다면,"
그녀가 말을 정정했다.
"난 다시 그것을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녀가 빙긋 웃었다. 그는 일어나더니 침대를 빙 돌아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로즈린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올랐다.
"오, 이젠 당신이 떠날 시간이 된 것 같군요."
그녀는 재빨리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당신이 나에게 선택권을 준 데 감사하오. 그렇지만 난 아직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오."
소온은 그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불과 십여 센티미터에 불과했다. 그녀의 키는 보통 여성보다 큰 173센티미터였으나 그의 키는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이는지라 그녀는 고개를 쳐들어야만 했다. 다음 순간 자신의 얼굴을 향해 오는 그의 손을 보았을 때 그녀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로즈린은 눈을 꼭 감고 숨을 멈추었다.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잊혀지지 않는 경험? 무언가 정말로 두려운 것일 테지만…….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서 안경이 스르르 벗겨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이상한 물건이군. 당신이 하고 있는 이 보석 말이오. 이건 뭐라고 부르는 거요?"
그녀는 눈을 살짝 떴다. 그는 그녀의 안경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테 대신에 렌즈 부분을 손으로 쥐고 있는 모양으로 미루어볼 때 그에게는 생소한 물건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공격은 없었다. 그렇게 가까이 서 있는 유령 같은 존재로부터 차가운 한기 같은 기운도 흘러들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안경이라고 부르는 물건이에요."그녀가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돌아와 머물렀다. 닭다리 뼈와 마찬가지로, 그는 안경이 어디에 떨어지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어깨너머로 던져 버렸다.
"장식은 꾸미기 위해 있는 거요, 아가씨. 그런데 당신이 한 보석은 어째서 장식의 효과가 없는 거요?"
"안경은 보석이 아니에요."
그녀는 설명을 하려고 했으나 그가 또다시 그녀의 얼굴에 손을 뻗치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헐떡거렸다.
"무엇……?"
로즈린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목 뒤로 단단하게 틀어 올려진 타래머리에 닿았다. 그가 그것을 잡아당기면서 머리카락을 고정시킨 금속 핀을 제거하자 말아 올린 머리카락이 풀리면서 등 뒤로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그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모아 쥐고 앞으로 넘겨 그녀의 왼쪽 가슴 위로 내려뜨렸다. 그는 가슴 가까이에 매달려 있던 금속 핀을 발견하고서 그것을 잡아뺀 다음 살펴보았다. 그녀는 머리핀도 안경과 같은 신세가 되리라고 직감했다. 그녀가 옳았다. 그리고 이제 그의 눈길은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더 낫군."
그는 천천히 그녀의 모습 하나하나를 뜯어보았다. 그런 다음 그의 시선은 그녀의 적갈색 머리카락을 따라 허리까지 내려왔다.
"나에게 당신의 내부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보여 준다면 난 매우 기쁠 거요. 난 당신이 내 검을 소유한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녀는 정말로 우둔한 여자임에 틀림없으리라. 단숨에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또다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가 입고 있는 소매 없는 블라우스의 좁은 어깨 부분에 닿았다.
"이 이상하게 생긴 튜닉은 어떻게 벗는 거요?"그가 물었다.
그녀의 심장이 껑충 뛰어올라 다시 뚝 떨어진 게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이건 블라우스예요. 그리고 난 이것을 벗지 않아요. 만약 당신이 내가 입은 모든 것을 살펴볼 때까지 내가 여기에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아니, 당신의 의복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오."
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으나 아직도 손에 쥐고 있던 가느다란 끈을 잡아당겼다.
"이것을 찢어 내는 일은 간단하오. 만약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면 지금 말하시오, 아가씨."
그녀의 심장이 다시 목구멍으로 기어 올라왔다.
"그 정도로 이미 충분해요, 소온."
그의 반응은 손가락 두 개로 그녀의 다른쪽 어깨 끈을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양어깨 끈이 벌어지자 그는 주먹을 쥐고서 홱 잡아당겼다. 얇은 여름 블라우스 천은 이제 두 조각으로 찢어져 그녀의 양팔에 하나씩 대롱대롱 매달렸다.
충격 속에서, 그녀는 실망으로 가득 찬 그의 한숨소리를 들었다.
"당신 몸에 감긴 그 기묘한 장치는 뭐요?"
그녀의 브래지어. 오로지 브래지어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그는 이제 그것을 벗겨내는 방법을 알아내기로 결정했음을 알아차린 그녀는 즉시 팔로 가슴을 가렸다. 그의 시대에서는 약탈과 강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녀의 시대였다. 그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로즈린은 지금 자신이 옷을 절반밖에 걸치지 않고 서 있는 상태임을 무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소온 블러드링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며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당신은 이곳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없다구요. 당신은 물어봐야 하고 나의 대답은 '아니오'예요."
그는 단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바보같이 왜 물어보겠소?"
"당신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아니, 난 당신의 말을 모두 이해하오. 당신은 내가 굽실대길 바라겠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요. 내 검을 소유했던 마지막 여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오. 그러나 아가씨, 당신은, 내가 가진 거대한 식욕에 대해 필히 알아두어야 할 거요."
"음식 말인가요?"
그녀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리고 싸움에 대해…… 그리고 여자에 대해. 사실 아름다운 여자와 즐겨본 지도 상당히 오래 되었소."
"안됐지만 당신은 그런 금욕생활을 좀 더 해야 될 것 같군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소온 블러드링커는 로즈린의 바로 옆에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음 순간 우악스런 두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꽉 쥐고 그의 벌려진 다리 사이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까이 더 가까이, 그녀가 균형을 잃고 그의 몸 위로 쓰러질 때까지 손길은 거두어질 줄 몰랐다.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그녀의 가슴과 그의 가슴이 충돌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몸을 굴려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흥분이 파도처럼 로즈린의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유령에게서 얻을 수 있는 느낌치고는 그의 몸무게가 너무나 사실적이고 단단하고 또한 매우 무거웠다. 그는 거칠거칠한 뺨을 그녀의 얼굴에 대고 마구 문지르며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매트리스 안으로 그녀의 몸을 짓누르는 그의 몸은 완전한 실체였고 그녀의 입술 위에서 움직이는 그 입술은 그녀가 가진 그 어떤 경험보다도 더 관능적이었다.
로즈린이 느끼는 공포는 그녀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들의 폭동을 자극하는 데 한몫을 톡톡히 했다. 심장이 무섭도록 세차게 뛰었다. 피는 몸이 얼얼할 정도로 빠르게 혈관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빨아들일 때 그녀는…….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흐를 때 로즈린은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멈추어 달라고 요구하면서 미약하나마 그 상황의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 전체에서 격렬하게 느껴지는 독특한 기분을 맛보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그녀는 아득한 나락 속으로 더 깊이 빠져 들고만 있었다.
브래지어 한쪽이 아래로 당겨졌다. 그는 그렇게 하는 데 이빨을 사용했다. 커다란 손으로 가슴 가까운 곳의 옆구리를 쥐었으나 가슴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바싹 조여드는 그의 손가락은 그녀를 미치도록 흥분시켰고 이제 자유로이 드러난 그녀의 가슴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의 가슴이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둘러싸이자마자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로즈린은 신음소리를 내며 열기를 향해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었다. 짜릿했다. 자신의 몸이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직도 날 유령이라고 생각하오, 아가씨?"
그의 말은 아주 천천히, 그녀의 혼란스러운 머리에 와 닿았다. 그리고 그녀는 느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다지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단지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이제 그녀의 감각이 평온을 되찾은 지금, 그녀는 자신이 실망을 해야 하는지 안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신에게 두 번째로 하는 경고요, 아가씨. 날 다시 부르면 당신은 나의 욕구가 무엇인지 모두 보게 될 것이오."
"당신에게 싸움을 걸 수 있나요? 그럼 내가 당신의 검을 사용하나요, 아니면 당신이?"
그녀는 자신의 말이 잔인한 줄은 알고 있었으나, 너무나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어떻게 감히 그녀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데 대해 그런 대가를 치르라고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이렇게 대답할 만큼 대담하기도 했다.
"당신에게 내가 휘두를 수 있는 검은 하나뿐이오."
그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환영받을 시간은 모두 지났어요, 소온 블러드링커."
로즈린은 엄한 투로 말하면서 그의 몸을 떠밀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하여간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침대 가에 앉아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를 사로잡은 그의 시선은 너무나 강렬하여 그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눈길이 아직도 드러나 있는 그녀의 가슴 위로 떨어졌을 때 로즈린은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브래지어를 찾아 제자리에 돌려놓고 잠옷을 꺼내기 위해 황급히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녀가 뒤돌아서기도 전에 멀리서 뇌성이 울렸다.
로즈린은 그가 가 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뒤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물론 안도감과 함께. 맞다, 이건 안도감이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기회에 대해 탄식하지 않을 것이다. 천 년 전의 바보를 다루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 바이킹은 그녀가 다시 불러내기 전에 신화의 장소인 발할라에서 썩어 버릴 수도 있다.
9
그로부터 오 일 동안 로즈린은 소온 블러드링커가 남긴 말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또한 자신의 침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느꼈던 거친 흥분과 독특한 즐거움이 머릿속에 들러붙기라도 했는지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공포가 자신의 경험을 실제보다 더 대단하게 과장해서 느끼게 하는 거라고 믿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무척이나 크게 자극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고 발버둥을 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아직 그가 '무엇'인지 모른다. 차라리 그가 유령이라면 인정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유령의 존재를 믿고 또 직접 보았다고 맹세한다.
로즈린은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믿지 않는' 타입이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널 로즈린에게 불사의 신이라니 가당찮은 우스개임에 틀림없었다. 차라리 외계인을 믿고 말지. 잿빛 머리카락도 한 올 없이 천 년을 살았다고? 게다가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전에서 산다고? 어림없는 소리.
그렇다면 소온 블러드링커는 대체 누구일까.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값비싼 장치를 사용하여 저주가 내려진 검 때문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수 있다는 말로 그녀를 바보로 만드는 괴팍스럽고 노련한 익살꾼? 그는 맹세코 '진짜 사람' 이었다. 그녀의 몸을 덮은 그의 몸에서는 유령다운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 입술은 너무나 뜨겁고…….
그녀는 어떻게 그것을 증명해야 할지 알고 있다. 그녀의 방 안에, 혹은 집 안에 있는 모든 방 안에 비밀스런 장치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녀가 사용하는 차의 내부에도 말이다. 그녀는 그것을 찾는답시고 집 안을 모조리 들쑤시지는 않을 참이다. 그럴 필요조차도 느끼지 않았다. 단지 그 검을 가지고 한적한 시골로 가면 될 텐데 일부러 복잡한 상황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가 다시 나타난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그가 첨단기술이 만들어 낸 환영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낼 순 없을 테지. 그의 정체에 대한 질문은 로즈린이 하게 될 수많은 질문들 중 하나가 될 터였다. 만약 그가 나타나고, 만약 그녀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면, 그가 남긴 최후의 통첩을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날 다시 부르면 내가 가진 모든 욕구가 무엇인지 보게 될 거요'
그의 욕망을, 그의 성적인 욕구가 어떤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자, 로즈린은 자신의 배꼽 근처 깊숙한 곳에서 퍼덕거리는 뜨거운 날갯짓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심어 준 엄격한 도덕관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다. 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자신의 처녀성에 대한 회의도 일었다. 무엇보다도 나이가 스물아홉이나 된 여자들 중에 숫처녀가 몇 명이나 된다고……. 이 시대와 이런 나이에 로즈린 같은 여자는 눈씻고 찾아도 없을 것이다.
성에 대한 인식은 60년대와 70년대에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급격하게 변했다. 80년대에 들어서 힘을 갖게 된 여자들은 평등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으며 사회내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계속 변화되었다. 여자들은 많은 것을 얻어내었고, 그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 과정에서 진짜 '신사'도 사라졌다.
배리는 신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남자의 전형적인 모델이었어. 자못 남녀평등의 전도사처럼 굴었다고.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거나 저녁식사 테이블에서 먼저 자리에 앉혀 준 적이 없었어. 어쩌다 나를 집에까지 바래다 주었던 때도 내가 직접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 데이트를 할 때, 그가 나를 맞으러 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대개 중간지점에서 만났었지. 당시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말이지, 난 나름대로 보수적인 데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신세대라고 믿었거든.
배리와 결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 때, 바로 그 '보수적인 면'이 그녀를 긴장하고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결혼 첫날밤 그녀의 별난 상태에 대해 설명할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앞섰다. 재미있는 것은 남자들이 더 이상 '숫처녀' 신부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배리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으려고 할 테고 또한 너털웃음과 조롱 역시 예견 가능한 반응이었다.
로즈린은 함께 잠을 자자는 그의 청을 번번이 거절했지만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녀도 그가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물론, 그는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일 만큼 뜨거운 열정을 보여 준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약혼자들처럼 그가 그녀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을 때, 비록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라도 한번쯤은 스스로 의문을 가져 보았어야 했다.
소온 블러드링커와의 상황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최후의 통첩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와 사랑을 나눌지도 모른다는 예견은 그녀의 몸과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사실상,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알고 싶은 정보를 위해 대신 몸으로 값을 치루어야 한다니, 창피스럽고 지저분하며 그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소온이 다른 것을 원한다면 그녀는 깨끗이 들어줄 수 있었다. 자료 수집을 위해 책을 사거나 안내자가 딸린 역사탐험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가라면 말이다. 그런 경우라면, 그가 정보의 대가를 원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몸은, 특히나 경험이 없는 몸의 경우는?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대가를 요구했는지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아마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해. 그는 내가 자신을 또다시 불러내지 못하도록 그런 엄청난 요구를 했을 거야.
궁지에 몰린 그녀는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생각을 거듭한 끝에 방법을 찾아내었다. 두 사람은 위협과 최후의 통첩을 사용하여 줄다리기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해결 방법을 찾아내자 마자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에 물건을 챙기고 칼을 담은 상자를 들고서 야외로 차를 몰고 나갔다.
안성맞춤인 장소를 찾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고, 또 그곳은 그녀의 목적을 위해 너무나 알맞은 장소였기 때문에 하마터면 못보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황금색 밀이 자라나는 두 개의 밭 사이에 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간 곳에 도로에서 잘 보이지 않는 목초지가 있었다.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고 여름이라 무성하게 돋아난 나뭇잎새가 그늘을 드리운 곳으로 한적한 오후의 미풍을 따라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자연만이 눈에 들어오는 곳, 시골이라면 어디든 찾아볼 수 있는 이런 장소가 이상적이었다. 그녀는 바이킹이 20세기를 보고 정신을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적어도 그들이 흥정을 마칠 때까지는 말이다.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와 검이 들어 있는 나무상자는 한꺼번에 들기에 너무나 무거워서 두 번에 걸쳐 날라야 했다. 그녀는 나무 아래에 담요를 깔고 피크닉 바구니를 열었다. 그녀가 넣어 온 음식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손을 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검이 든 상자를 열었다.
음식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장만한 미끼였다. 소온은 그녀가 안겨 줄 최후의 통첩을 듣고 나면 그리 행복해하지 않을 테니, 그의 욕구들 중에서 적어도 하나는 잘 달래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 시대에선 중세의 바이킹에게 익숙한 싸움을 찾기가 무척 힘들 것이다.
로즈린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빙그레 웃었다. 불쌍한 사내. 그는 그녀의 제안을 빨리 받아들이게 되리라. 그녀는 그가 나타나길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집 안이 아니므로 감추어진 장치가 있을 리 없었다. 만약 그가 뇌성을 동반하고 나타난다면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그녀는 혼자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정말로 생각조차 하기 싫었고, 너무나 믿기 어려운 상황들과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또 다른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했으며, 그녀는 그것을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로즈린은 검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아직 만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심장이 갑자기 세차게 뛰고 혈관 속의 피는 빠르게 그녀의 몸속 구석구석을 날아다녔다. ……오, 맙소사, 그를 또다시 만난다는 생각은 그녀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흥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 아니, 아니. 아직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남자와의 거래라니.
로즈린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몸과 마음을 한껏 진정시키면서 칼자루에 손을 대었다. 항상 그랬듯이, 검은 따스했다. 금속이란 본시 차가와야 했고 체온으로 따스해져야 했으나, 이 검은 처음부터 달랐다.
태양이 구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만약 번개가 쳤다고 해도 그녀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둥소리만은 확실하게 들렸다. 그녀는 아직 소온 블러드링커를 보지 못했다. 재빨리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기분은……. 실망과 참담함 그 자체였다. 마치 무언가 매우 아끼던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울고 싶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가까스로 자신을 자제했다. 그리곤 이 모든 일이 누군지 모르지만 자신의 침실에 침입한 남자의 장난에 불과했음을 깨달으며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아직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혹은 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날 놀라게 했소, 아가씨. 난 당신이 잘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단 말이오."
10
로즈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거기에 있었다. 소온 블러드링커. 그녀 머리 위로 뻗은 나무가지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드는 모양이 마치 장난꾸러기 소년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향한 그의 미소에는 어린애 같은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악함이 깃든 표정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말해 주었다. 기나긴 금욕생활이 곧 끝날 거라는 기대였다.
로즈린은 잠시 동안 그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실의에 빠졌던 자신의 감정을 추스렸다. 지금 막 그녀가 지금 느끼게 된 감정은 낙담이 아니었다. 신경이 예민해졌다고 하는 게 재빨리 뒤집어진 감정에 대한 적확한 표현일 게다. 나는 정말 이 남자를 다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던가?
로즈린의 심장이 이번엔 정 반대의 의미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소온 블러드링커는 역사상 가장 호전적이고 야만적이며 손에 무기를 쥔 채 전쟁터에서 죽어야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거만한 민족의 남자였다.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생각을, 이 남자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더라면, 그 순간 자신의 자동차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그 위에 올라간 거죠?"
그녀는 자신의 질문으로 그가 딴 생각을 하게 되길 바랐다.
소온은 얇은 천으로 만든 풍성한 흰색 튜닉을 걸쳤는데, 목 부분을 고정시키지 않아서 그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대자 주욱 미끄러져 내려왔다. 가슴의 맨살이 드러나고 짙은 밤색 각반을 찼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묶은 가터가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드러운 장화를 감싸 주었다. 만약 그의 넓은 벨트에 달린 칼집이 없었더라면, 그는 매우 태평스럽고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칼집은 비어 있었으나, 바로 옆에 꽂혀 있는 사나와 보이는 단검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가 약올리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이 날 부를 수 있을진 모르지만, 내 발을 어디에 내려놓을지 정도는 내가 직접 결정한다오. 난 잠시 동안 발을 땅에 내려놓지 않기로 했소."
잠시 후면 그는 훌쩍 몸을 날려 그녀의 바로 앞에 내려설 것이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그녀가 무엇을 느끼는지, 그녀가 그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오늘 로즈린은 푸른색과 노란색 꽃무늬의 긴 치마와 노란 실크로 만든 소매 없는 웃옷을 편히 내어 입고 샌들을 신었다. 이처럼 더운 날씨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긴 소매 옷을 입었을 것이다. 허나 그녀의 옷차림이 그에게 좀 더 익숙한 모양새라는 게 문제였다. 이번 시대 전까지 여성들이 무릎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은 단지 침대 안뿐이었다. 바로 전세기까지만 해도 매우 용감한 여성만이 바지를 입었다. 로즈린은 그가 마지막으로 불려나왔을 때가 몇 세기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바로 그녀가 알아내야 할 사항 중의 하나였다.
로즈린은 전쟁터에서 입는 갑옷처럼 안경을 쓰고 머리카락은 평상시보다 더 정갈하고 단단하게 말아올렸다. 그녀는 그가 또다시 그녀의 안경을 빼앗거나 머리핀을 빼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그에게 매력적인 여자로 보일 의도가 전혀 없다는 점을 알리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제 그녀는 어깨를 쭉 펴고 겁쟁이 같은 인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백 킬로그램이 훨씬 넘는 운동선수들도 벌벌 떨게 만들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소온."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재미있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중에 하시오."
그는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내려서더니 다시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한 발만 더 가까이 오면 당신은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거예요."
그는 발을 멈추었다. 비록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으나 그는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 사이에 그를 통째로 삼켜 버릴 덫이라도 설치된 듯이 땅바닥을 노려보았다. 분홍색 꽃들과 풀이 깔려 있는 평범한 땅이었으나 그는 마치 밀밭에 적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설명해 보시오, 아가씨. 무엇 때문에 날 여기에 붙잡아 두려는 거요?"
다음 순간 그녀는 뛰어 달아나고 싶었다. 그는 분명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화를 낼 터이다. 그러나 그녀는 얼른 말을 해 버렸다.
"나 때문이죠."
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향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움이, 그 다음에는 호기심이 엿보였다.
"당신이? 어떻게?"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당신을 놓아줄 수 있는 말을 하지 않는 거죠."
그는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사실상, 매우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날 당신 옆에 붙잡아 둘 생각이오?"
그가 이끌어 낸 결론에 깜짝 놀란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소온, 내 질문에 대답을 해달라는 거예요……. 손은 가만히 두고 말이죠. 만약 내 제안에 동의를 하면 당신은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난 동의할 수 없소."
그가 거절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녀는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왜죠?"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다그쳤다.
"난 당신을 원하기 때문이오."
그의 말은 간단했으나, 효과는 대단했다. 로즈린은 풀썩 주저앉을 뻔했다.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렀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는 마치 그녀의 내부를 꽤뚫을 것처럼 날카롭고 태워…….
"그리고 당신도 날 원하고 있소."
그가 덧붙였다.
"그건 아니에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신은 날 이곳에 붙잡아 두면서 내가 허기질 거라고는 생각치 않았단 말이오?"
"물론 예상했죠. 당신 뒤에 바구니가 있어요. 음식이 가득 들어 있는."
"그런 종류의 허기가 아니오, 아가씨.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이제는 화가 많이 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것은 그녀의 용기를 더욱 부추켰다.
"내가 당신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에요."
그녀가 못을 박았다.
"음식과 침대는 제공해 줄 수 있지만, 당신이 한 제안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우린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잖아요?"
"나는 당신을 가지게 될 테고, 그러면 당신도 날 좋아하게 될 거요. 더 이상 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소?"
또다시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녀의 뱃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소용돌이 치고 양볼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다니, 그는 정말 야만인이야. 로즈린은 그가 그런 문제를 거론할 때 어떻게 말을 돌려야 할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럴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렇다면 아까 한 말을 정정하겠어요."그녀가 말했다.
"난 당신에 대해 잘 몰라요. 그러니 그런 말은 다시 꺼내지도 말아요. 손을 얌전히 두어야 하고, 당신 몸이 내 몸에 닿는 것도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발할라를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거예요."
"나의 신체?"
그녀는 엄격한 도덕주의자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신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사실은 몹시 당황해서 거의 죽을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몸 말이에요."
그녀가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트렸고, 그녀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매우 현명하군요, 아가씨. 좋아요. 난 당신에게 덤벼들지 않을 거요. 그러니 떠나도 좋다는 말을 해주시오. 그러면 당신의 질문에 대답해 주겠소."
"당신을 믿기 어려우니…… 이러면 어떨까요? 당신이 나의 부탁을 들어주면 나도 즉시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겠어요."
"그럼 나더러 당신을 믿으라는 말이오?"
"잠깐만요, 소온. 칼자루를 쥔 사람은 나라고 생각해요. 난 정말로 당신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단지 내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에요."
"그럼 내 호기심을 달래주겠소?"
그녀는 반쯤은 강요하다시피 그의 동의를 받아냈다. 하지만 그의 요구사항을 듣는 순간 경계심이 일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호기심을 달래 달라고? 그렇다면 내 죄책감도 좀 덜어지겠군.
"물론이죠."
그녀가 대답했다. 주저하는 듯 어설픈 미소와 함께 말이다.
"당신은 뭘 알고 싶죠?"
"당신이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요?"
"지금은 20세기에요."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코웃음을 쳤다.
"내가 마지막으로 불려왔던 때와 별 다를 바가 없는걸."
이 목초지를 발견했을 때, 바로 그녀가 바라던 바였다. 로즈린은 그의 생각을 바로잡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거기에 대해선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가 몇 년도 였나요?"
"1723년이라고 했소. 그리고 난 그 새로운 시대를 좋아했다오. 만약 ……내 기술을 시험해 볼 전쟁이 여기에도 있소?"
로즈린은 별로 놀라지 않은 채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바이킹들, 그들은 항상 싸움에 굶주려 있다. 그녀는 그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현대의 전쟁은 당신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거예요, 소온."
그녀는 힘주어 말했다.
"당신이 17세기에 보았던 총과 폭발물 같은 무기류가 지금은 훨씬 더 정교해졌어요."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즈린은 그가 아마도 '폭발물'이나 '정교'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라고 짐작하고, 덧붙여 말했다.
"더 이상 검을 사용하지 않아요. 요즘의 전쟁에선 상대방에게 그렇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이 나라는 아주 평화스러워요."
'평화'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의 실망은 눈에 뜨일 정도였다.
"그럼 여기는 어떤 나라요?"
"영국이에요."
그는 빙그레 웃었다.
"영국이라……. 그들의 평화는 오래 지속된 적은 한 번도 없다오."
물론 역사가 그의 말을 증거하고 있다. 그녀는 얼른 덧붙였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요즘의 나라들은 좀 더 외교적인 수단을 발휘하고 있죠. 영국도 마찬가지구요."
"세계대전이 있었는데 내가 몰랐단 말이오?"
그녀는 실망의 기색이 완연한 그를 보자 기가 막혔다.
"당신은 1차 세계대전이나 그 다음의 전쟁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그 말은 잊어버려요, 소온. 이곳에서는 몸으로 싸우는 전쟁을 발견하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서 전쟁에 대한 잡념을 몰아내기 위해 얼른 덧붙여 말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불려왔을 때 이후로 몇 번의 전쟁이 있었고 그 이후로 세상은 많이 달라졌어요. 이번 세기만큼 급격히 변화하는 시기도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을 거예요. 어떤 변화는 당신도 좋아하겠지만, 싫어하는 것도 있을걸요. 예를 들면, 당신이 지금 나에게 품고 있는 생각도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엄연히 불법이에요."
"불법?"
"법을 어긴다는 말이에요."
그는 빙그레 웃었다.
"내가 지킬 법은 스스로 만든다오, 아가씨. 그리고 강철 같은 내 팔이 그 뒤를 받쳐 주고 있소."
그녀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됐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어요."
소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해왔다는 표정이었다. 로즈린은 그런 주제를 놓고 아웅다웅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체포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원하는 것은 단지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따라서 그런 말은 다시 끄
집어내지 말아야만 했다. 그는 스스로 화제를 돌렸다.
"난 이미 당신이 말한 변화들 중에 몇 가지를 보았소. 윌리엄의 그림을 보면, 너무나 실물과 닮아서 매우 재미있었다오."
로즈린은 이제 미국에서의 강의실에 처음 나타난 남자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진짜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혹은 어째서인지, 그녀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기만 했다.
하지만 자신의 질문거리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가 지금의 시대에 관심을 가진다면, 과거에 대한 그의 정보를 그녀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오래도록 머무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말했다.
"그건 그림이 아니에요. 확대 사진이라는 거죠."
그녀는 자신을 멍해진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다시 덧붙여 말했다.
"자, 내가 보여 줄게요."
로즈린은 담요가 펼쳐진 곳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가방 속을 뒤졌다. 그리고 찾고 있던 지갑을 들고 일어나서야 비로소 그가 자신의 등에서 불과 십여 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까지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렸다.
소온은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보고 있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그녀는 자신을 사로잡은 그의 시선을 감히 깨뜨릴 수 없었다. 아까 느꼈던 후끈함이 또다시 몰려들고 무언가가 뱃속을 마구 휘젖는 느낌이었다. 불현듯,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뺨에 댄 다음 그의 목을 감싸쥐고 입술을 가까이 끌어당기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녀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거의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다가가고…….
로즈린은 눈을 꼭 감았다. 오, 맙소사, 그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이런 곳에서 그를 머무르도록 하다니. 이건 미친 짓이었어. 아니, 아니야. 그녀는 얼른 생각을 바꾸었……. 방금 전의 상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려면 미쳐 버려야만 했다. 그런 모순된 생각 속에서 그녀는 속으로 신음소리를 내었다. 만약 그녀가 좀 더 다르게 성장했더라면, 그가 검에 의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지 않는 보통의 인간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로즈린은 자신을 향해 빙그레 웃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주 가까운 미래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에게 보여 주겠다는 것이 무엇이오, 아가씨?"
그랬던가? 맞다, 지갑 속에 들어있는 사진. 그가 현대의 신기한 물건에 놀라 마음을 빼앗긴다면 그녀에 대한 생각을 젖혀 둘 수도 있으리라.
그녀는 지갑을 열고 사진들이 들어 있는 곳을 펼쳐서 그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그런 다음 한 장을 넘기고 또 한 장을 넘겼다.
"이것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의 사진이에요. 내 부모님, 오빠인 데이비드, 가장 친한 친구인 게일. 그리고 배…… 이런, 내가 아직도 이 사진을 가지고 있다니."
그녀는 배리의 사진을 꺼내서 박박 찢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내가 사진을 얼마나 안 들여다보는지 말해 주는 증거예요."
그녀는 투덜거렸다.
"왜 그러는 거요?"
그녀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작은 조각들을 피크닉 바구니 바닥에 털어넣었다.
"사진을 왜 찢느냐구요? 이 남자는 도저히 참고 봐 줄 수가 없어서 그래요."
"그렇지만 그건 비싼 것일 텐데, 그렇잖소?"
"전혀요. 내가 당신에게 설명하려고 하는 건, 당신이 내 강의실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날 보았던 포스터가 이런 사진들의 확대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예술가의 그림이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그 포스터에 등장한 사람도 사생아 윌리엄이 아니에요. 사진은 카메라가 찍는 것인데, 그것은 약 일 세기 전에 발명된 작은 상자처럼 생긴 기계에요. 그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의 모습을 찍어서……."
그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어쩌면 그가 모르는 낱말들이 너무 많아서 그녀가 한 말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거나, 그녀의 허락도 없이 지갑을 뒤적이다가 좀 더 관심을 가질 만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대로라면 즉시 화를 내겠지만 로즈린은 입술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그가 무엇에 관심을 두던지 그녀에겐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되새기며 분노를 삭였다. 남자의 우월함을 극단적으로 믿고 있는 사내에게 화를 내봤자 단지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었다. 그가 여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외모만큼이나 중세적이다. 또, 그녀는 중세 시대의 여자들이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 잘 알았다. 목초지의 가축과 별반 다름없는 재산의 일부였음을. 사실상 여자의 가치란 팔 수 있는 물건들보다도 더 낮았다.
만약 그가 그녀의 기분을 건드린다고 해도, 만약 그녀가 화를 낸다고 해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레, 그녀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생각해보니 그를 다루는 일은 그 자체가 역사공부였다. 그녀는 자신이 역사에 대해 잘 안다는 사실을 무척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자신의 생각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무런 소득 없이 이 호전적인 바이킹에게 시간만 빼앗기고 말겠지.
로즈린은 입을 꼭 다문 채 무엇이 그의 관심을 끌었는지 보기 위해 기다렸다. 지갑 속에 들어가는 향수병? 태양 전지로 가는 조그마한 계산기? 아니면 비행기에서 집어온 휴대용 휴지?
그의 손에 들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녀의 립스틱이었다. 그는 흰색 금속 통을 여러 각도에서 찬찬히 뜯어보았다. 립스틱이라…….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손색이 없는 물건이로군. 그에게 금속은 무기를 만드는 재료일 테지. 심지어 그는 그것이 금속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손톱으로 튕겨 보기까지 했다. 그런 다음 뚜껑이 분리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그것을 마저 잡아빼었다.
그는 완전히 정신이 팔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왜 립스틱 구멍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 안으로 자신의 커다란 손가락을 집어넣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사용법을 알 턱이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얇은 금속이, 그리고 완전히 동그랗군."
그는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대장장이는 무척 솜씨가 좋고 독창적인 것 같소, 아가씨!"
그녀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립스틱처럼 작은 물건이 그의 흥미를 끌 수 있다면, 그가 텔레비전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혹은, 오 하나님, 그를 굽어 살피소서. 비행기는 그의 혼을 빼앗아 버릴 수도 있었다.
"요즘은 대장장이를 찾아볼 수 없어요, 소온. 그들은 말들처럼 그 중요성을 빼앗겨 버렸거든요. 신경 쓰지 말아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 알게 될 테니까요."
갑자기 그를 자동차에 태우게 될 때가 기다려졌다. 그는 겁에 질릴까? 아니면 단순히 경외의 눈으로 쳐다볼까? 혹은 그를 조금 더 빨리 전쟁터로 내보내 줄 수단으로 생각할 것인가? 그녀는 그가 다음에 보일 반응을 생각하며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금속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젠 플라스틱이나 섬유유리처럼 어떤 모양이나 크기로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공장들은 각각의 부품들을 생산에서 다른 공장에서 조립해요. 그 결과물들은 현대인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죠. 소온,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는 물어보지 말아요. 난 기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그저 코웃음 치는 그를 보면서, 로즈린은 또다시 그를 이해시키지 못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 안에 또 하나의 튜브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로즈린은 빙긋 웃으면서 가르쳐 주었다.
"여기를 잡고 아래 부분을 돌려보세요."
그는 시키는 대로 했다. 튜브 바깥으로 올라오는 색깔 있는 막대기를 본 그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그런 다음 아까 돌렸던 부분을 반대 방향으로 다시 돌리자 그것은 다시 튜브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는 마치 새로운 것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거의 일분 가까이 립스틱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것은 어디에 쓰는 거요?"
적어도 그 물음만큼은 그녀가 자신 있게 대답해 줄 수 있고, 그 역시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입술에다 바르는 거예요. 여자들의 입술 말이에요."
"왜죠?"
그녀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도 가끔은 이해할 수 없긴 해요. 그건 여자들이 외모를 좀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사용하는 화장품들 중의 하나랍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는 눈길에 따스한 기운이 또다시 그녀의 복부를 휘저어 놓았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 빨리 자신을 자극시킬 수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었으나, 그는 두 눈동자만으로도 그 일을 거뜬하게 해치웠다.
그의 시선이 연자주색 립스틱으로 돌아갔다.
"당신은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군."
그녀는 숨 쉬기도 힘들었지만 간신히 목소리를 짜낼 수 있었다.
"그래요. 아주 가끔씩 사용해요."
그는 그녀에게 립스틱을 건네주었다.
"나에게 보여 주시오."
그건 명령이었다. 오히려 아무런 대꾸 없이 명령에 복종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남자였으나, 그녀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 자신을 던져 버리고 싶다는 욕구를 털어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로즈린은 활달한 손놀림으로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문지른 다음, 거울을 보지 않고 발랐기에 입술선 바깥으로 그어졌을 색을 지우기 위해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를 닦아내었다.
"어떤 맛이 나는 거요?"
그녀는 그의 생각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알았다.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홱 립스틱을 채어가더니 자신의 혀 가운데에 대고 천천히 내리눌렀다.
"그리 나쁘진 않지만, 난 당신을 더 맛보고 싶소."
그녀는 얼른 피크닉 바구니를 끌어당겼다.
"여기 먹을 것이 있어요."
그녀가 빽 소리쳤다.
"난 산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로즈린은 뛰다시피 하면서 목초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걷는 걸음걸음마다 그의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11
소온은 목초지를 거닐고 있는 로즈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늘어져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나 자신을 향해 약간 벌어진 입술이, 그리고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뜨거움이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로즈린은 그에게 매력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부인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 검을 소유했던 여자들 중에서 자기를 거부한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았던 간에, 일단 자기를 알게 되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자신의 검을 소유한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건힐다가 알았다면, 그녀는 아마 무덤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화를 낼 것이다.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은, 늙은 마녀가 저주를 내려 그를 자신의 무기에 얽매어 놓았을 때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늙은 마녀의 저주는 그를 여자들의 힘 속에, 변덕스러움의 대명사라고 볼 수 있는 여자들의 자비 속에 가두고 말았다. 건힐다는 그가 무엇보다도 그런 상태를 끔찍하리만치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녀의 판단은 지금까지 잘 들어맞았다.
물론 그는 정말로 싫어했었다. 그러나 이상한 단어들을 사용하고 '교수'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이 여자는 분노로 가득한 그 모든 세월들을 보상해 주려는 듯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갖도록 한 기분과 대항하여 싸움을 벌였다. 그녀의 힘이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그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싫었다. 그러나 첫 번째 입맞춤을 한 후로 오직 생각나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그녀가 명령을 내리든 말든, 이번에는 그녀를 남겨놓고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녀가 다른 여자들과 매우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그의 검을 이용하여 자신의 적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에게 자신을 즐겁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자신의 개인 노예처럼 취급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강제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저주의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몰랐다. 그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해를 입힐 수 없으며, 만약 그녀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에게 좀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가 놓여나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힘은 그의 것이었다.
소온은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여자들을 경멸해 왔다. 그녀들은 저주의 힘을 모두 휘두르려고 했다. 심지어 그녀들 중 몇몇은 머뭇머뭇하다가도 한번 자신감을 얻고 그가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깨닫게 되자 탐욕스럽게 변해 가기도 했다.
그녀들은 모두 검을 소유하기 전부터 부자이고 제멋대로인 데다 타락한 부류들이었다. 심지어 한 여자는 검의 비밀을 알고 그것을 가지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남편을 밀어내고 대신 지위가 높은 젊은 귀족을 끌어들이려했는데, 남편에게 발각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그녀가 소온에게 자신의 남편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동시에 함구하라는 명령을 덧붙이지 않았던 게 커다란 실수였다.
불행히도 소온은 그 남자를 죽여야만 했다. 저주는 그에게 명령 받은 그대로 시행할 뿐 다른 길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키지 않은 살인이었다. 사실, 그는 명예를 위해서나 혹은 다른 사람과 겨루어 자신의 기술을 시험해 보는 싸움을 즐겼지만, 살인이나 그 여자의 남편같이 죽일 가치조차 없는 늙은이와의 싸움은 경멸했다.
그는 오딘 신이 끼어 들어 그 일을 막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남자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었고, 그 탐욕스럽고 불쌍한 여자는 남편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그 자리에 있다가 대신 목숨을 잃었다. 그 즉시 소온에게 미치던 그녀의 힘은 사라지고, 다행스럽게도 남편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1723년 마지막으로 불려온 이래로 너무나 오랫동안 <흡혈귀의 저주>는 다른 여자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그때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블리스가 불러냈을 때를 제외하곤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혼란 속에 휩쓸어 넣었으나, 개인적인 탐욕은 없었다. 그녀의 명령은 단지 자신의 군주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옆에서 싸우라는 것뿐이었다. 소온은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그는 블리스의 시대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고 오딘 신도 가능할 것이라고 격려했으나, 그 여인은 그런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잃을까 너무나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 여자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그가 원하고 심지어 그녀 자신이 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빠르게 거부해 버렸다. 게다가 저주를 믿지도 않았으며, 그녀와 함께 있지 않을 때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말해 주어도 통 믿지 않았다. 따라서 검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어떻게 그녀에게 알려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가 그녀에게 확신을 심어 준다 할지라도, 그녀가 그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어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의구심을 품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은 마녀들의 존재를 믿었으며, 마녀의 저주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아는 상식이었다. 그런데 왜 이 여자는 그렇지가 않은지 그는 정말로 궁금했다. 이 시대에는 마법사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마침내 모두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아니면 어딘가에 꼭꼭 숨어 버렸을까?
그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사라졌는지가 정말로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건힐다보다 더 힘이 세다는 평판을 얻고 있던 또 다른 마법사에게 저주를 풀어 달라고 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너무나 바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관심은 온통 이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저주는 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저주의 힘은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건힐다는 바로 그 점을 가지고 그를 놀려 대었다. 만약 그가 어떻게 자신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는지 설명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를 지배했던 여자들 중에 저주가 풀릴 수 있는 지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여자도 이 속박에서 그를 풀어 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오직 그를 이용하는 것만이 그녀들의 관심거리였다.
소온은 야생화를 꺽느라고 자주 몸을 구부리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단 한번도 그가 있는 곳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으나 소온은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먹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바구니 안에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대로 꺼내 먹었고 가끔씩 씹혀지지 않는 것이 발견되면 그냥 뱉어내었다.
그는 그녀를 가지게 될 터이다. 적어도 그 사실만큼은 의심스럽지 않았다. 아직은 그녀가 그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며 그녀의 호기심이 뭘 뜻하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신을 만족시킬 때까지 그를 여기에 붙잡아 둘 것이다.
그녀는 용기 있는 여자였다.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 그가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으나 -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검으로부터 그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았다. 그녀는 또한 그를 자신의 힘 안에 가두어 두었다. 물론, 그가 그녀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으나 지금 당장의 심정으로는, 그녀에게 영원히 속박된다고 해도 상관없을 듯했다.
12
로즈린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소온 블러드링커를 그의 검과 함께 남겨둔 셈이었다. 만약 그가 검을 다시 소유하게 된다면, 그녀는 무슨 수로 그것을 되찾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혹시 그가 검을 되찾고 그를 지배하는 그녀의 힘이 효력을 상실한다면, 그는 검을 가진 채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허둥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검이 아직도 상자 속에 남아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제자리로 돌아와 보니 담요와 주변에는 음식 찌꺼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고, 소온은 마치 배가 고파 죽을 것만 같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즈린은 그가 자신이 들고 온 음식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웠음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허기진 표정을 짓는 그에게 급히 말했다.
"난 당신이…… 좀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요."
그가 눈길을 떨어뜨리자 그녀는 다시금 그의 시선을 받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오, 하나님,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 그녀는 그랬다. 그녀는 과거에 대한 그의 지식을 나누어 받고 싶었다. 그녀는 그 생각에만 주의를 집중하면서 흘깃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몸 달아 하지 말아야 했다.
로즈린은 그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주변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 잔디밭에 던져진 것들을 줍기 시작했다.
"당신이 살던 시대에는 청결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걸 잘 알아요. 쓰레기 관리라는 말이나 500달러의 벌금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겠지만, 소온,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려야만 해요. 우린 자연 환경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고, 그러려면 우리가 남긴 것은 모두 주워야 하죠."
"나에게 벌을 주려는 거요, 아가씨?"
그녀는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호기심만 가득할 뿐 아까의 노골적인 욕망은 사라진 표정이었다. 혹은 숨겼거나.
"나는 그럴 꿈도 꾸지……."
그녀는 말문을 열었으나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만약 그녀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이런 자잘한 문제들로 그의 감정을 다치고 싶지 않았다. 다루어 내야 할 다른 걱정거리가 이미 산더미 같았다.
"그래요. 난 당신을 혼내 줄 생각이에요. 볼일을 다 보았다고 해서 그냥 어깨너머로 던져 버리지 말아요. 제자리에 되돌려놓거나 제대로 버리는 게 적절한 태도예요."
"당신도 보았다시피 난 그저 버렸을 뿐이오."
그는 화가 난 목소리였다. 물론, 그녀의 설명이 적절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자신이 부당하게 비난 받았다고 느끼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말을 하기 전에 매번 무슨 말을 할지 심사숙고해야만 할까? 후 -, 중세인과 대화를 나누는 건 무척 힘든 일이야.
"미안해요. 현재에서는 '버린다'는 말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말의 줄임말이죠. 그리고 주위에 쓰레기통이 없는 경우, 우리는 모든 것을 바구니 속에 다시 담아서 가지고 가야 한답니다."
"야생동물들은 당신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거요, 아가씨."
그녀는 꾸짖는 말투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음식물 찌꺼기를 사방에 내던진 이유가 바로 그것이란 말인가? 야생동물에게 먹을 것을 주는 바이킹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 바이킹들과는 너무나 다른 달콤하고 관대한 바이킹이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는 솔직하게 말을 해야했다.
"영국에 더 이상 야생동물들이 남아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소온, 적어도 당신이 익숙한 종류와는 많이 다를 걸요. 자, 같이 치우도록 해요, 괜찮죠? 당신은 담요 위에 있는 것들을 모두 바구니 안에 넣도록 해요. 난 나머지를 치울게요."
그녀는 제일 먼저 검이 들어 있는 상자를 들고 일어났다.
"난 당신이 검을 가져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손도 대지 않았군요."
그는 담요를 걷어들고 일어나서 그녀가 있는 쪽은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검을 되찾는 게 나의 가장 큰 소망이오. 그러나 당신이 버리지 않는 한, 난 그 검에 손을 댈 수 없소."
"할 수 없는 건가요? 아니면 하지 않는 건가요?"
"저주가 허락하지 않는다오. 내 손에 검을 쥐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오."
그녀는 그의 말이 사실이길 바랐다.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그녀의 걱정거리들 중에 하나가 해결된 셈이었다.
"만약 내가 당신의 손에 검을 쥐어 준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는 이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너무나 강렬하여 그녀는 숨을 죽였다.
"그렇다면 나에게 힘이 돌아오는 거요. 당신은 날 위해 그렇게 해줄 수 있소?"
"만약 그렇게 되어서 당신이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면, 그럴 수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답했다.
"그 검은 이제 내 것이에요, 소온, 난 절대로 포기 못해요."
풀이 죽은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는 하마터면 '자, 여기 가져가요'라고 말할 뻔했다.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밀어내었다. 하지만, 왜 그런 충동이 드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은 사라질 수 있나요?"
"만약 당신이 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나에게 완전한 힘을 준다면, 가능하오. 만약 당신이 단지 검을 사용할 수 있게만 한다면 그럴 수 없소. 난 당신의 허락이 있어야만 떠날 수 있다오."
그가 말하는 이상하고 복잡한 저주는 다시 한 번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그 검을 잠시 빌려준다고 하면, 당신을 놓아 주게 되는 건가요? 당신이 내 검을 가져가게 되면 난 당신을 다시 불러낼 수 없나요?"
"그것은 불가능하오, 아가씨. 난 갈 수 있지만 검은 가지고 갈 수 없소. 만약 당신이 나와 함께 가는 데 동의하면서 내 손에 검을 쥐어 주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오."
내가 발할라에 간다고? 로즈린은 생각에 잠겼다. 신화에서 나오는 오딘의 축제가 열리는 홀에 떠들썩하고 술에 취한 바이킹들에게 둘러싸인단 말인가? 그건 전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로즈린은 문득 그에게서 방금 들은 말이 바로 그녀가 듣고 싶어했던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그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그녀는 그와 검이 함께 사라지고 나서야 속임수였음을 알게 되겠지만, 먼저 그가 발할라에 산다는 것과 자신이 누구라는 말을 그녀가 믿었다는 가정하의 상황이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정말로 믿어야 한단 말인가? 로즈린은 자신의 몸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확실히 통증이 느껴졌다.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어떤 논리적인 설명이 있어야만 했다. 사실들. 그녀는 사실이, 증거가 필요했다. 그리고 필요한 모든 증거를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꼭 가질 작정이었다. 그녀가 얻어낼 수 있는 과거에 대한 정보가 그것을 입증해 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기억들로부터 그 정보를 끌어내야만 할 것이다.
"지금 그 이야기는 그 정도로 충분해요."
그녀는 먹다 남은 찌꺼기를 모아 바구니에 집어넣고 돌아와 다시 줍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당신이 날 계속 '아가씨'라고 부르는데 듣고 있기가 불편하군요. 당신이 온 곳에서는 상대방을 높여 주는 말인 줄은 알고 있지만 미국인들은 그 단어를 좀 다른 뜻으로 사용한답니다. 내 이름은 로즈린이에요. 당신은 날 그렇게 부르……."
"로즈?"
그는 그렇게 되물으면서 웃음을 터트렸고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에게도 - 그가 무엇이던 간에 - 이름들 사이에 지워진 관계가 보인다는 말인가……. 아니면 무엇이 그를 웃게 만들었지? 그녀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장난처럼 들리나 보죠?"
"장난? 아니오. 난 단지 '교수'가 당신 이름인 줄 알았다오. 그렇다면 '교수'라는 이름은 무엇을 가리키나요? 그래서 그렇게 부르는 거요?"
그녀는 자신이 끌어낸 결론이 잘못 되었음을 알고 속으로 빙긋 웃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과 꽃 이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녀 스스로 알려줄 생각도 없었다.
"역사학이에요."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대학에서 전공한 학문이죠. 이제는 가르치고 있지만요."
"모든 역사를?"
"난 중세의 역사를 잘 알아요. 특히 17세기를요."
그의 미소도 아직 가시지 않았다.
"아, 나도 그 시대에 대해 잘 안다오. 전쟁을 즐겼지."
그런 말을 듣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 딱 그렇다기 보다는 그것과 비슷한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물어볼 질문이 줄잡아 천 개도 넘을 듯했다. 그러나 별장으로 돌아가 손에 노트를 쥘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소온, 나는 당신의 말을 아주 많이 많이 듣고 싶어요."
"난 당신에게 보여 줄 수……."
이런, 오해가 있었군. 그녀는 얼른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아요. 그냥 사실대로만 말해 주면 되니까요."
로즈린은 방금 집어든 샌드위치를 보느라고 실망으로 어두워진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셀로판지에 싸인 그 샌드위치는 소온이 한입 베어먹고 내버린 것이었는데 그녀는 포장지도 벗기지 않고 베어 물은 모양을 보고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먹기 전에 포장을 벗겨내야 한다는 것을 몰랐나요?"
그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흘깃 본 다음 다시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그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게 고개를 으쓱 했다.
"난 먹는 것을 보지 않고 당신을 보고 있었다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로즈린, 난 당신을 보는 게 좋소."
그녀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그런 식으로 볼 수 없게 만들 수 있을까? 아무래도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뜻을 명확히 밝혔다. 손대지 말 것. 지금은 흥정할 만한 거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데다 그의 의지를 꺾으면서까지 여기에 붙잡아 둔 사람은 그녀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막을 순 없다. 그녀는 아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13
그들이 경사진 도로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소온은 그녀의 차를, 아니 데이비드의 차를 처음 보았다. 로즈린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새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영국에서 차를 모는 미국인의 주문에 따라 만들어진 점잖은 검은색 포드로, 운전석이 왼쪽에 있었다. 그러나 아주 검소한 차였다. 리디아는 벤틀리나 리무진을 타고 다녔지만 데이비드는 자신의 재산 정도를 드러내지 않는 차를 선호했다.
소온 블러드링커는 차를 보고 재미있어 하지도 않았지만 당황한 기색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동안 멈추어 서서 물끄러미 자기 앞에 서 있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관심을 끄는 데엔 성공했는지, 호기심을 잔뜩 품은 얼굴로 데이비드의 자동차를 들여다보았다.
로즈린은 작은 환성조차 지르지 않는, 거의 무반응에 가까운 그의 반응에 꽤나 실망했다. 물론 그는 자동차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아직 모르는 상태이므로 미리 속단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힘입어 그가 묻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당신은 내 강의실 안 천정에 달린 전등을 기억하고 있나요, 소온? 그건 전기로 불을 켜는 물건이죠.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선들이 전기를 필요한 곳으로 운반해 준답니다. 더 이상 냄새 나는 기름 램프나 촛불은 사용하지 않아요. 전기가 나가지 않는 한은 말이죠."
의문점들을 가득 실은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나에게 전기에 대해 설명하라고 부탁하지……."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정전이 되면, 그것이 내 검에 영향을 주는 거요?"
그의 관심사는 그게 전부일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검이 가진 힘이 무엇이든, 그것은 초자연적인 거예요. 전기에서 오는 힘은 물건들을 기계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 준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당신은 그런 물건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배터리나 개솔린 같은 것도 역시 에너지를 낼 수 있는 또 다른 물질이에요. 당신은 이제 곧 개솔린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들 중의 하나를 보게 될 거예요."
그녀는 차를 향해 다가가 뒷좌석에 검이 든 상자를 넣고 트렁크를 열어 그가 바구니를 집어넣도록 했다. 그녀는 어떤 반응을 기다렸으나, 그는 약간 신경질을 낼 뿐이었다.
"이게 뭐요?"
"당신은 17세기에 가 본 적이 있다고 했죠? 그 시대에서 당신은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이나 마차 같은 것들을 본 적이 있을 거예요. 18세기에는 좀 더 발달했고……."
그가 못 참겠다는 듯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게 대체 무엇에다 쓰는 물건이오?"
"이건 오토 모빌Automobil이고 현대적인 용어로는 자동차라고 하죠. 이것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에는 '말이 끌지 않는 마차'라고 불렸어요. 내가 마차에 대해 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죠. 당신에게 현대적인 운송수단을 쉽게 이해시키려고요."
"말이 끌지 않는 마차? 그렇다면 이건 움직이지 못하는 거요?"
"움직이죠."
그녀가 빙긋 웃었다.
"가솔린을 먹이면 당신을 어디에든지 태워다 줄 수 있어요."
"그럼 살아 있는 거요?"
그녀는 찔끔했다. 표현을 좀 더 잘할 필요가 있었다. '먹는다'라는 장난스러운 표현은 그에게 혼란만을 일으킬 뿐이었다.
"아뇨. 이것은 살아 있지 않아요. 이것은 현대판 마차예요, 소온. 자, 말 대신 무엇이 있길래 이것이 움직일 수 있는지 보여 주겠어요."
그녀는 후드를 열고 설명을 계속했다.
"이것이 엔진이에요. 내가 말했던 가솔린은 엔진이 움직이도록 해주면서 '마력'이라고 불리는 힘을 내게 해줘요. 그 힘은 바퀴를 돌리고, 따라서 이 물체가 움직이게 되는 거죠. 그 증거를 볼 준비가 되어 있나요?"
"난 말을 택하겠소, 아가씨."
다시 '아가씨'라는 호칭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아마 혼란과 의심 그리고 불편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만약 그녀가 그를 자동차에 태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어찌되었건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여기서 집까지 거의 5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요즘은 교통수단이 아닌 즐거움을 위해 말을 탄답니다."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어딘가에 가고 싶을 땐 자동차를 타거나 혹은…… 음, 우선 차에 대해서만 얘기하겠어요. 이것을 탄다면, 우리는 몇 분 만에 집에 갈 수 있어요. 자동차는 매우 빨리 달리거든요."
로즈린은 그의 팔을 잡고 운전석 옆자리로 데려가 문을 열었다. 그를 태우기 위해서는 억지로 떼밀어 넣어야만 했다. 그가 긴 다리를 편히 뻗을 수 있게 하려고 의자를 뒤로 밀어내자 그는 신경질적으로 으르렁거렸고, 그녀는 편안함과 움직이는 의자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마침내 그녀는 운전석에 앉았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의 불안을 가라앉혀 주기 위해 미리 말을 해놓았다.
"내가 이 열쇠를 돌리면 엔진이 작동하기 시작해요. 무슨 소리가 들리겠지만 놀랄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제발, 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너무 놀라지 말아요. 원래 그렇게 되는 거니까 말이에요, 알았나요? 준비됐어요?"
소온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양손으로 의자 옆을 꼭 잡고 자동차 앞유리 밖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길게 뻗은 도로가 그들 앞에 놓여 있고 저 멀리 오래된 헛간 한 채만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잔뜩 긴장했고 또 걱정스러워 보였다.
로즈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출발을 지연시키고 그에게 좀 더 설명할 것을 잠시 고려해 보았으나, 그 어떤 말로도 난생 처음 차를 타보는 그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없을 듯했다. 그녀는 열쇠를 돌렸다. 그런데, 그만 깜박 잊고 라디오를 꺼놓지 않았었다. 부르릉거리는 엔진소리와 함께 라디오가 작동하자 휘둥그레진 소온의 푸른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휙 돌아 그녀에게 쏠렸다.
"말도 할 줄 아오? 살아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잖소!"
그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불만과 비난이 가득 담긴 말투에, 분노와 경외감이 뒤섞여 있는 희극적인 표정을 짓는 소온을 보면서 그녀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맞추어 둔 채널에서 뉴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소온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건 자동차가 말하는 게 아니에요, 소온, 그것은 라디오예요. 음악이 나오기도 하고요, 고르는 데에 따라 여러 가지가 나오기도 하죠."
그녀는 시끄러운 록 음악이 나오는 두 개의 채널을 지나 부드러운 음악이 나오는 곳에 주파수를 맞추었다.
"봤죠? 라디오는 우리에게 오락거리를 안겨 주는 문명의 이기들 중 하나예요."
소온은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줄곧 라디오만 바라보면서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차 안의 열기를 내보내기 위해 창문을 내렸으나 라디오만 쳐다보던 그는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즈린은 가능한 빨리 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기어를 넣고 차가 움직이자 의자에 앉아 있던 소온이 펄쩍 뛰었고, 그 바람에 그녀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먼지를 일으키며 길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녀는 어떻게 그를 안정시켜야 하는지 몰랐다. 그의 긴장감이 그녀마저도 펄쩍 뛰게 만들었으므로 그녀 역시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특별한 해결방법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가 다시 나타난 이래로 계속 생각해 온 터라 아주 쉽게 되살아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비난하지 않았다. 도움은 어디까지나 도움이었다. 그녀는 자동차를 처음 접하게 된 그의 마음속에서 공포심을 쫓아내 주어야만 했다.
로즈린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잡아 천천히 끌어당겼다. 소온은 그녀의 손길이 닿은 즉시 의문이 담긴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다음 순간 그는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었고 동시에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몸을 움직이는 대신 그녀가 조금 더 다가오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들 사이에 맺은 약속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로즈린은 지금 당장 그들 사이에 오고갔던 약속 따위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도덕관으로는 그런 키스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아낼 수 없었으므로,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그에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앞으로 좀 더 몸을 내밀어 팔로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긴장을 풀어요. 소온, 이건 괴물이 아니에요. 현대적인 교통수단을 처음 탄 것을 즐기도록 해요."
그런 다음 그녀는 더욱 깊게 입술을 맞추었고 그도 더 이상 버티지 않았다. 이제 키스의 주도권은 그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짧게 끝내려고 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호전적으로 달려드는 그의 혀는 그녀를 희롱했다. 아니, 희롱이라는 말은 정확한 말이 아니었다. 허기를 드러낸 그의 키스는 야만에 가까우리 만큼 격렬했고, 그녀 역시 아직도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거리낌 없는 열정을 보여 주었다.
키스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로즈린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키스가 끝났을 때 로즈린은 현기증을 느꼈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 때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몸은 억센 팔에 감기운 채 소온의 무릎 위에 절반쯤 얹힌 상태였다. 자신이 뒷좌석으로 내동댕이쳐지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물론, 소온은 자동차의 뒷좌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을 터이다. 만약 그가 알고 행동으로 밀고 나갔다 해도 자신은 막지 않았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왈칵 밀려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단지 키스만으로도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린 그녀가 더 나아가 순결을 빼앗겼다고 해도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로즈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 안에 들어 있을 허기를 보고 또다시 입을 맞추게 될까봐 와락 겁이 났다.
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자아, 난 우리 둘 다 어느 정도 느긋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느긋하다'라는 말은 지금 그녀가 느끼는 기분을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려고 했으나,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로즈린은 지금 그를 보아야만 했다. 고맙게도, 그의 눈동자 속에 든 열기는 뭔가에 의해 막혀 있었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그녀를 오래 오래 붙잡아 둘 만큼 강렬했다.
"우린 가야 해요, 소온."
"내가 필요한 것은……."
"말하지 말아요."
그녀는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얼른 가로막았다.
"나는 당신의 머릿속에서 자동차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 주기 위해 키스를 한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의 흥정은 아직 효력을 발휘하는 중이에요."
"아니오. 내 손이 이미 당신의 몸을 만졌기 때문에 그건 그렇지 않소."
그는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당신이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게 될 거요. 그리고 당신은 날 다시 거부할 수 없을 거요. 당신 스스로 불러들인 일이오."
로즈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에게 입을 맞춤으로써 그녀 스스로 그의 손길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부인하고 싶다 해도 적어도 그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 또다시 손대지 말라고 한다면 상당히 위선적인 행동임에 틀림없겠지만, 그렇게 해야 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은 집으로 가도록 해요."
소온은 바로 그녀를 놓아주었고 그녀는 얼른 핸들을 잡고서 천천히 길로 들어섰다. 그리곤 그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즈린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또한 안경을 쓰지 않았고 머리카락이 늘어뜨려져 있다는 것도. 그는 그녀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안경을 벗기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쳐 놓았나 보다. 그녀는 자신의 안경이 열려진 창문 너머로 던져졌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애써 생각해 봤지만 여분의 안경은 가져오지 않았다.
꼬투리잡듯 따지고 문제 삼을 일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행동에 약이 오를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안경을 좋아하지 않는지 벗겨 버릴 기회가 오기만 하면 그렇게 했다. 그녀가 무어라든 상관하지 않는, 전형적인 중세 남자의 행동이었다. 그 당시 여자의 의견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남자들이 모든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화를 내선 안 된다. 소온은 중세의 남자답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단지 그가 소환된 시대가 20세기라고 해서 곧 자신의 모든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에 흠뻑 빠진 로즈린은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다른 차 한 대를 보지 못했다. 오, 맙소사, 트럭이군. 그것도 아주 커다란 트럭이었다. 그녀는 소온에게 말이 끌지 않고 달리는 이 운송수단에 여러 가지 모형과 크기가 있다는 것을 깜박 잊고 알려주지 않았다. 흘낏 쳐다보니 그는 아까보다도 더 심하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단검을 움켜쥔 그의 주먹에는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나 보였다.
"눈을 감아요."
그녀가 제안했다.
로즈린은 그가 자신의 말을 들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으나 그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을 본 그녀가 다시 덧붙여 말했다.
"저건 우리를 덮치지 않아요. 그냥 옆길로 지나칠 테고 조금 후엔 사라질 거예요."
"로즈린, 날 놓아주시오."
오, 맙소사. 왜 진작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에게 이런 공포를 안겨 준 것일까?
"좋아요. 당신은 가도 돼요. 다시 부를게요. 아무런……."
"고맙소."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놓아줄 필요가 있는 것은 나의 두 눈 만이오."
"무슨 말이에요?"
그는 다시 말해 주지 않았다. 트럭이 지나갔다.
"이제 눈을 떠도 돼요, 소온. 이제 지나갔어요."
그는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이러지 마시오. 날 겁쟁이로 만들 셈이오?"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그리고 내가 허락했는데 왜 당신은 가지 않는 거죠?"
"당신이 여기에 있는데 내가 왜 떠나야 하는 거요?"
14
식당에 걸린 그림은 고풍스럽고 우아했다. 진한 와인색 천이 고급스런 마호가니 벽을 장식하고, 머리 위의 커다란 샹들리에에 매달려 있는 수백 개의 장식유리 조각과 크리스털 잔 그리고 은식기는 촛불을 받아 반짝거렸다. 로즈린이 미리 저녁식사에 손님이 온다고 알려 놓았기 때문에 흄스 부인은 전보다 세심한 공을 들여 식탁을 차렸다.
로즈린은 지금 손님 건너편에 앉았는데, 기분도 훨씬 편안했다. 그들이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 소온은 집 안을 살펴보고 싶어했고 그녀도 동의했다. 그러나 그에게 전기 제품으로 가득 차 있는 부엌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그를 부엌 부근에서 떼어놓는 것도 그녀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였다.
고맙게도 집의 나머지 부분들은 소온이 마지막으로 불려왔던 시대와 비교해서 크게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상당히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가장 흥미를 보인 것은 전등 스위치였다. 방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몇 번씩 켰다가 끄기를 반복했다. 텔레비전 옆을 지나쳤지만 그는 그게 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녀는 아직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다. 며칠쯤 지나 그가 현대에 약간이나마 익숙해지면 보여 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겁나는 자동차를 타고 난 직후인 지금은 너무 빨랐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껐을지 몰라도 전화에 대해서는 깜박 잊어버렸다. 그들이 지나갈 때 전화 벨이 울렸고 로즈린은 아무 생각도 없이 수화기를 들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데이비드였는데, 그는 리디아와 만나기 위해 주말에 프랑스로 간다는 말을 전했다.
소온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가 전화를 끊은 다음 20분도 넘게 그에게 놀라운 대화와 어떻게 멀리 있는 사람들과, 심지어 반대편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말을 나눌 수 있는 지에 대해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는 수화기와 전화기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전선을 보고 난 다음 똑같은 전선이 벽에 달린 플러그로 이어진 것을 살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수도시설에 대해서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비록 수세식 양변기의 물을 열 번도 넘게 눌러 보고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수도꼭지에 손가락을 데이고 난 후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즉시 샤워기를 사용하겠다고 졸랐다. 그녀는 저녁을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타일렀다. 그는 그녀가 설명하기 전에 헤어드라이기를 들고 스위치를 올리다가 마룻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이제 부서져서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신세가 되었다.
지금 로즈린은 자신을 따라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는 상당히 잘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그녀가 하는 데로 따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손에 짐승의 고기를 들고 뜯어먹는 데 익숙한 사람에게 테이블 매너를 가르치기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당신은 미국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 두 번이나 그랬소."
그는 요크셔 푸딩을 한입 가득 물었다.
"그들은 누구요?"
그는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에, 아니, 음식뿐 아니라 소금과 후추 가는 것을 포함한 모든 새로운 것에 지대한 관심과 탐욕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대화를 기대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가 방금 꺼낸 화제는 그들의 소화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인은 북부 아메리카를 차지하고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에요."그녀가 설명했다.
"이런, 소온! 당신은 또 전쟁을 놓쳤군요."
그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를 놀려 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게 편안하게 느껴지고 심지어 친근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까 차에서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었다.
'당신이 여기에 있는데 내가 왜 떠나야 하는 거요?'
로즈린은 꼼짝할 수조차 없었다. 그녀가 그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그들간의 흥정에서 선수를 빼앗긴 때문이 아니었다. 떠날 생각이 없다는 그의 말은 두려움에 떨게 하면서도 기운을 북돋는, 감정상의 모순을 초래했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줄곧 그녀는 감정의 혼란을 느껴왔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 속으로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머릿속에 든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를 쓰면서 다른 문제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를 달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에겐 아직도 그의 검과 그것이 지닌 독특한 힘에 대하여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나저나, 소온, 왜 그 검의 마지막 주인은 검이 여자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는 그녀를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만 접시에서 시선을 떼내었다. 고개를 든 소온의 얼굴엔 잘난 척하고 자기 만족에 빠진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그 표정을 지워 버리고 싶어졌다.
"쟝 폴에 대한 내 경고가 효력을 발휘한 거요."
"쟝 폴?"
"내 검을 마지막으로 소유했던 여자의 큰아들이오. 그는 <흡혈귀의 저주>를 물려받았다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심지어 어깨까지 으쓱 올리면서 말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저주할 힘을 가지고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단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가 지금 그녀를 놀리는 것일까?
"바보 같은 질문인 줄은 알아요."
그녀는 그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자신을 타이르는 중이었다.
"당신은 신이 아니라고 나에게 분명히 말했는데 말이에요."
다음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또 다른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검이 나에게 주는 힘들 중에 내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나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이미 알고 있소."
"알고 있다고요? 지금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구요?"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힘이 당신에게 있었소. 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고, 해를 입히거나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소. 따라서 당신은 날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던 거요."
로즈린은 믿기 힘들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아까 차 안에서 그녀가 눈을 감으라고 했을 때 그가 즉시 따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는 데도 그녀의 명령이 필요했다. 이 바이킹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니, 그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과거형이었다.
그녀가 수상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내가 그 힘을 가졌었다고 말했는데, 그럼 지금은 아닌가요?"
그는 더욱 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당신이 나에게 떠나도 좋다고 말했을 때 당신은 나에 대한 힘을 잃은 거요."
로즈린은 한숨을 쉬며 뒤로 기대 앉았다. 그가 곧바로 말해 주지 않은, 그녀가 잃은 무엇인가에 대해 분명 화가 나야만 했다. 그가 자청해서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왜 그렇게 하겠는가? 그녀는 그와의 흥정에 대해 걱정을 해왔으나 뜻밖에도, 그는 그녀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맞다, 그녀는 화를 내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나 그 밖의 것을 완전히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을 정말 원하는 게 아니므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놓아주는 일은…….
그녀는 그가 무엇을 언급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심해 봐야만 했다.
"그 검과 연계된 힘 가운데 내가 꼭 알아야 할 게 또 있나요?"
"당신이 알아야 할 것? 아니오. 다른 힘들은 나와 관계된 거요."
"예를 들면?"
그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나에게 검을 주어 보시오. 내가 보여 드리죠"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뻔뻔스러운 빈정거림은 언제 어디서나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당신은 잠깐 동안 나에게 검을 빌려주지 못할 이유가 있소?"
그가 성난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요, 소온. 당신은 지금 원하면 언제든지 이곳에서 떠날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내 검을 가지고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가 들은 것은 당신의 말뿐, 다른 증거가 없잖아요? 난 그런 식으로 당신의 말을 시험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오?"
"당신이 쟝 폴을 겁준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나요?"
그녀가 반박했다.
길고 당황스러운 시간이 지난 후,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와인 잔을 집더니 그녀를 향해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농담을 던졌다.
"당신이 나를 믿지 않는 게 나에게는 다행이오."
로즈린은 깜짝 놀랐다.
"당신이? 왜죠?"
"그것에 대해 대답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오."
이맛살을 찌푸리는 그녀의 모습을 본 그는 혼자 즐거운 듯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나에게 보복을 하고 싶지 않은가요? 계속 하세요."
"로즈린, 내가 당신에게 보복을 할 거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을 거요."
이유를 알 순 없지만, 그녀는 분명 약이 올랐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나에게 보복을 할 건가요?"
그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약이 바짝 오른 그녀는 손톱으로 식탁 위를 긁는 바람에 그 위에 금이 여러 개 패였다. 그는 곧 눈치채고 그녀의 손가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들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마도 당신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 같소."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제의했다.
소온이 어떻게 할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는 그녀를 완전히 성적으로 지배할 작정이었다. 그녀의 의지를 엉망으로 만들고 그가 원하면 무릎이라도 꿇겠다고 애걸하도록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상상만으로도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만해요."
그녀가 경고했다.
그의 눈썹 하나가 꿈틀거렸다.
"뭘 말이오?"
로즈린은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말로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주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을 보자 다시 슬금슬금 약이 올랐다.
"당신은 그게 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그런 식으로 날 보지 말라고 부탁했잖아요."
"이 시대에 사는 모든 여성들은 남자들이 모두 여자의 명령에 따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소?"
저의가 숨겨진 질문이었다. 대답도 여러 갈래로 나올 수 있다. 그녀는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신경쓰지 말아요. 우리는 흥정을 했어요. 당신은 그것을 지킬거죠?"
"그 흥정에 당신을 보지 말라는 조항도 있었소? 이상하군, 난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그는 그녀를 희롱하는 중이었다. 분명 즐기고 있다. 더구나 그녀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약간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화제를 바꾸었어야 했으나, 이젠 너무 늦었다.
"그건 흥정이에요, 소온, 지킬 거죠?"
"당신은 지켰소?"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당신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가라앉혀 주려고 노력한 거예요."
빌어먹을, 그는 스트레스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자동차를 처음 탄 당신을 도와주려던 거죠. 난 당신이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떠나도 좋다고 허락까지 해주었잖아요. 당신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맙소."
그는 짐짓 겸손한 척,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말했다.
로즈린은 그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어리둥절한 상태로 남겨놓을 참이며, 그리고 긴장과……. 그녀가 바라보자 그는 나른한 미소를 보냈다.
저녁 식사. 물론, 그녀의 입맛은 단숨에 사라지고 놀라움이 뱃속을 대신 차지하고선 베베 꼬아 대고 있는 중이었다. 혹은……? 아니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않겠다는 류의 생각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서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다음 선언하듯 말했다.
"난 당신이 내가 말한 '법'에 대해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여기에서는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해요. 당신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거예요. 만약 당신이 내 조사에 도움을 줄 생각이 있으면 한 시간 후에 서재로 오세요. 그렇지 않으면 내 집에서 그만 나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로즈린은 무엇인가가 목구멍으로 솟구쳐 오름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쾌재를 불렀다. 아까 자신에게 했던 말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후론 그가 여기에 머무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망감이 또다시 그녀의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자료를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렸으나 그녀는 애통해하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을 두었다. 그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냥 방에서 나와 버렸다.
15
소온이 떠났는지 아니면 서재에 나타날지를 기다리며 보낸 한 시간은, 로즈린이 지금까지 겪어 본 중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약속된 시간보다 더 빨리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그를 기다리기 위해 서재로 가려는 자신을 억지로 막아내기 급급했다. 그리고 자신의 침실 안을 서성이면서 그에게 그런 최후의 통첩을 남겨놓은 자신을 마구 꾸짖었다.
로즈린, 넌 그를 올바르게 이해시켰다고 믿어? 그는 아마 20세기의 남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을 거야. 그가 너에게 대답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진 않아. 안 그래? 소온은 아마도 여자의 기이한 대담함에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어. 그의 시대에 살던 여자들은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아 있지 않는 한 남자들에게 요구를 하거나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테니까. 말하자면 로즈린, 넌 정말 그를 놀래켰을 거라고…….
소름이 끼칠 만큼 끔찍한 시간이 느리게 흐른 뒤, 로즈린은 마침내 아래층으로 내려가 작은 서재로 갔다. 예상했던 대로 어둠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만약 그가 머무르고 싶었다고 할지라도, 여자의 지시대로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는 떠났을…….
"전등을 켜는 스위치는 어디에 있소, 로즈린? 난 찾을 수가 없다오."
로즈린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뒤쪽 홀에서 흘러들어온 불빛에 의지하며, 그녀는 커텐이 내려진 방 안에 있던 세 개의 안락의자들 중 하나에 앉아 있는 소온을 보았다.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그의 의자 옆에 있는 램프를 켰다. 지금 막 받은 충격뿐 아니라 그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그러나 소온은 그녀의 반응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램프를 켜는 그녀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동안, 그녀의 속마음은 즐거움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것이 빛을 내는 물건이리라고 짐작은 했소."그가 말했다.
"하지만 다른 것들처럼 벽에서 스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소."
"그래요, 램프는 다르죠. 스위치를 위로 올리거나 내리지 않아요. 돌리면 되는 거예요."
소온은 마치 그녀가 미리 알려주었어야만 했다는 듯, 책망하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그들의 마음 속에, 아니 적어도 그녀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무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난 당신이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날 다시 불렀을 때 또다시 흥정할 기회를 주라는 말이오? 아니, 지금의 통제권은 나에게 있으니, 난 그것을 놓지 않을 거요."
로즈린은 가만히 서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틀림없이 그가 떠났다고만 생각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가 떠나는 쪽이 그녀에게 더 나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는 다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을 텐데.
로즈린은 검을 통해서 가질 수 있는 힘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 힘은 소온이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그녀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통제권이 그에게 있는 지금, 그녀는 아직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그녀의 세포 하나까지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소온은 그녀를 덮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아주 느긋했고 성적인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의 흥정을 지키려고 하는지도 몰랐다.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그를 놓아준다는 조건에 기초하는 사항으로, 그녀는 이미 그렇게 해 버렸다. 어째서 그가 그들의 거래에 대해 배려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재빨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영어를 배웠죠? 마지막으로 불려왔을 때인가요?"
"내가 이 나라에 세 번째로 불려왔을 때였소. 그리고 나는 노르만 사람의 불어를 배웠소."
"하지만 옛날 영어는 많이 다를 텐데요. 대학에 다닐 때 고어에 대해 한 학기 동안 공부를 했거든요. 그것은 마치 외국어 같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어떻게 현대 영어를 사용하는지 나에게 말해 줘요."
"나에게는 가정교사들이 있었소."
"무슨 말이죠?"
그는 깜짝 놀라는 그녀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쟝 폴의 가정교사들."그가 명확하게 말했다.
"그의 어머니가 시킨 거요. 그녀는 자신이 나에게 말을 할 때 어떤 오해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소."
그 당시 영국 상류층의 아이들이 공부를 할 때 흔히 그랬듯이 통풍이 잘 되지 않는 다락방에서 아이들용 책상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과 그 옆에 엄격한 표정의 남자 교사가 자를 든 채 서 있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녀는 거의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로즈린은 그 충동을 겨우 참았으나, 미소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아마 당신의 선생은 아주 훌륭했나 보군요."
그가 약간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노력은 대단했다오."
그녀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그녀? 날 놀리지 말아요. 당신의 말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1700년대에 여자 가정교사는 아주 드물었고, 아니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여자에게 배운 거죠?"
"그녀는 내 침대 속으로 기어들곤 했던 이층의 하녀였소. 밤마다……."
그녀는 양볼이 더 붉게 변하기 전에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신경쓰지 말아요. 자세한 이야기를 듣자는 게 아니니까요. 당신의 공식적인 가정교사는 남자가 아니었나요?"
"아, 이 세상 어디에도 그보다 더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이 없을 거요. 하지만 내가 그의 코를 부러뜨려 놓은 다음부터 태도가 좀 나아지긴 했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당신은 자주 그러나요?" 그녀가 과감하게 물었다. "코를 부러뜨리는 일 말이에요."
빙그레 웃는 그를 보고서 그녀는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내가 물어본 것은 잊어버리도록 해요. 당신이 얼마나 많이 부러뜨렸는지 알고 싶지 않으니까요."
"발할라의 축제는 한두 번의 싸움 없이는 끝나지 않는다오. 그것은 좋은 스포츠요."
그는 정확한 숫자를 말해 주지 않았으나 그녀는 호기심이 나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싸움에 끼어 드나요?"
"항상."
그는 즐거운 듯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난 항상 이긴다오."
허풍일까? 나는 왜 놀라지 않을까? 소온처럼 크고 건장한 사내라면 늘 싸움에 이기는 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당신은 가끔 당신의 형에게 진다고 했잖아요."
"토르가 내 도전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오딘이 주관하는 공식적인 것이오. 그리고 토르는 오딘의 홀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오."
나는 정말로 신화에서 나오는 신들 - 그녀가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는 - 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 봐야 할까? 난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속의 바이킹들을 믿어야만 하는 걸까? 사람들을 잔뜩 호려놓을 게 틀림없는 허풍스런 이야기들까지도? 그들은 확실히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텔레비전을 보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 거죠?"
소온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오. 지난번에는 내 형이 오딘의 발을 비웃었기 때문에 싸움을 벌였으니까."
전혀 뜻밖의 이야기였으므로 그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고요? 토르는 그것이 너무 크다거나…… 어떤 식으로 놀린 건가요?"
"너무 보잘것없이 작아서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했소."
그녀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그녀는 바이킹의 신이 할 수 있는 욕설이 얼마나 찬란할지 상상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나에게……,"
그녀가 입을 열었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가로 걸어가는 소온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 소리는 어디서 나는 거요?"
로즈린은 그를 따라 창문가로 다가갔으나 보통 들려오는 소리 이외의 것은 들을 수 없었…… 다음 순간 그녀는 들었다. 비행기 엔진소리.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별로 특이할 것이 전혀 없는 정도의 소음이었으나, 바이킹의 귀에는 달리 들렸으리라. 들어본 적은커녕 눈으로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겐 말이다.
소온은 그 소리를 확실하게 들었을 뿐 아니라 어디에서 나는지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다그쳤다.
"저게 무엇이오?"
로즈린은 그의 어깨 너머로 날아오는 물체를 바라보면서, 날이 어두워져 비행기의 선만이 달빛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행기 모양을 정확하게 보았다면 그는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 그리고 자신에게 퍼부어 댈 엄청난 양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자면…… 오, 맙소사, 상상도 할 수 없군.
로즈린은 간단한 설명을 시작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갑자기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를 비행기에 태우려고 한다면, 그녀는 혀가 닳다 못해 마침내 신경쇠약에 걸릴 게 거의 틀림없으므로, 그런 시도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특별한 현대의 신기한 물체에 대해 설명하는 것 대신에 어깨를 으쓱하며 생각보다 더 간단히 말했다.
"그건 새에요. 옛날보다 더 커졌죠."
그는 미심쩍은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믿는지 혹은 믿지 않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으나 하여간 그를 잡아끌어 창가에서 떼어냈다.
"걱정하지 말아요.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들은 정말로 해를 입히지 않아요. 추락하지 않는 한은 말이죠."
그녀는 그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얼른 덧붙여 말했다.
"내가 말했던 자료수집에 대해서……."
그가 갑자기 멈춰 섰다.
"내가 궁금하다는 점을 고백해야겠소. 당신이 발견할 수 없어서, 그것을 찾는 데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대체 무엇이오?"
"무슨 말이죠?"
"당신은 뭔가를 찾는 중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그의 자세와 표정으로 보아, 그녀에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좋아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그녀의 말에서 액센트를 잘못 알아듣고 약간의 오해를 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로즈린이 그의 말을 고쳐 주기 전에 다시 물었다.
"만약 내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면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겠소?"
그는 지금 그녀와 흥정을 하자는 겐가? 그녀를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이려는 또 다른 수작일까?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글쎄, 생각해 보죠."
그녀는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원하는 게 무엇이죠?"
"내 검을 돌려주시오."
다른 대답을 예상했던 그녀는 그의 말을 듣자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이미 그럴 수 없다고 말을 했을……"
"당신이 검을 소유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오?"
그가 말을 막았다. 지금은 화가 난 목소리였다.
"부자가 되고 싶소? 노예가 필요한 거요? 나에게 검을 돌려주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의 가장 커다란 소원을 들어 주겠소."
"당신은 내 발 아래에 보물 한덩어리를 떨어뜨려 주는 요정이 되겠다는 말인가요?"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아니오, 난 왕들의 수집품들을 약탈할 거요."
"어떤 왕?"
"당신이 원한다면 어떤 왕이라도 상관없소."
"어떤 왕이라도? 말도 안 돼요, 소온. 영국은 지금 여왕이 다스리고 있어요. 그리고 난 내 검을 어떤 가격에도 팔 생각이 없어요."
소온은 대단히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는 감추려고 노력했으나 축 늘어진 어깨와 찌푸린 표정은 안경이 없이도 못 보고 지나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분명했다. 더구나 그는 그녀에게서 검을 빼앗기 위해 달콤한 말을 늘어놓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그의 얼굴에서 찌푸림을 펴주고 싶은 충동을 얼마나 강하게 느끼는 가와 상관없이 말이다.
"이제 조사를 시작할 수 있나요? 그건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일이 아니에요. 자료 수집이란 특별한 주제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거예요."
그는 투덜거렸다. 그녀의 설명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직도 검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음이 분명했다.
"나에게 그런 기술이 있을지 의심스럽소."
"아니에요. 난 당신에게 정보를 모아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당신에게서 알아내는 일이에요. 과거에 대한 당신의 지식을요, 소온, 난 그것이 내가 쓰고 있는 책에 도움이 되길 바래요."
"나의 지식? 만약 내가 주지 않겠다고 결정을 했다면?"
지금 두 사람 사이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힘이 너무 팽팽해서 그녀는 뒤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잊어버려요."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쏘아보며 그에게 경고했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순진한 척 되묻지 않았다. 대신에 빙그레 웃었다. 불쾌해진 그녀에 반하여 그의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확실한 거요, 로즈린?"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욧!"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 자극을 받아 스멀거리는 뱃속의 움직임을 무시하면서 쏘아붙였다.
"만약 당신이 날 도와주길 원치 않는다면, 너무 안됐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은 또다시 날 내쫓을 생각이오? 아마 쉽지 않을 거요. 그리고 난 당신이 원하는 것을 거절한다고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어떤 정보를 원하는지 나에게 말해 주어야 하지 않겠소?"
소온이 갑작스레 협조를 하겠다고 나서자, 그녀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 없었다. 다음 순간 포스터를 기억해내곤 어디에서 시작할지 정확히 결정했다.
"당신은 그날 밤 내 강의실에 있는 중세의 포스터를 보았을 때 그것이 사생아 윌리엄이라고 했어요. 마치 당신이 그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음 - , 개인적으로요. 그가 살던 시대에 불려갔던 적이 있었나요?"
그는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런 다음 조금 흥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그를 만났소. 당신도 만나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