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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1-1

임꺽정

홍명희

 

, 임꺽정이의 이야기를 붓으로 쓰기 시작하겠습니다.

쓴다 쓴다 하고 질감스럽게 쓰지 않고 끌어오던 이야기를 지금부터야 쓰기 시작합니다.

각설, 명종대왕 시절에 경기도 양주땅 백정의 아들 임꺽정이란 장사가 있어...

이야기 시초를 이렇게 멋없이 꺼내는 것은 이왕에 유명한 소설권이나 보아두었던 보람이 아닙니다.

수호지 지은 사람처럼 일백 단팔마왕이 묻힌 복마전을 어림없이 파젖히는 엄청난 재주는 없을망정 삼국지같이 천하대세 합구필분이요, 분구필합이라고 별로 신통할 것 없는 말씀이야 이야기 머리에 무슨 말을 얹을까, 달리 말하면, 곧 이야기 시초를 어떻게 꺼낼까 두고두고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십여 세 아이 적부터 이야기 듣기, 소설보기를 좋아하던 것과 삼십지년 할 일이 많은 몸으로 고담 부스러기 가지고 소설 비슷이 써내게 되는 것을 연락을 맺어 생각하고 에라 한번 들떼놓고 인과관계를 의론하여 이야기 머리에 얹으리라 벼르다가 중간에 생각을 돌리어 그럴 것이 없이 문학이란 것을 보는 법이 예와 이제가 다르다고 옛사람이 일신 정력을 들여 모아놓은 그 깨끗하고 거룩하던 상아탑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그 속에 있던 귀신의 자취가 간 곳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그럴싸하게 꾸며가지고 이야기 시초로 꺼내 보리라 맘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이 모두 신신치 아니한 까닭에 생각을 통히 고치어 숫제 먼저 이야기가 생긴 시대를 약간 설명하여 이것으로 이야기의 제일 첫머리 말씀을 삼으리라 작정하였습니다.

한양 개국한 후에 태조 7, 정종 2, 태종 18, 세종32, 문종 2, 단종 3, 세조 13, 예종 1년을 지나 성종대왕이 즉위하였습니다.

성종은 영명한 임금이라 재위 25년간 별로 실덕이 없으셨지만, 한 가지 흠절이 폐비사건입니다.

이 폐비사건도 물론 성종대왕의 실덕은 아니겠지요만 태평성대의 흠절이라면 흠절이 될 만합니다.

폐비사건은 다른 일이 아니라 곧 왕비 윤씨를 폐위서인 하였다가 나중에 사약까지 한 사건인데, 그 윤씨라는 왕비가 투기가 심하고 너무도 방자하여 어느 때는 대왕의 얼굴을 할퀴어 생채기 낸 일까지 있었더랍니다.

대왕은 그대로 참으실 만큼 참으셨지만, 대왕의 어머님 되시는 인수대비 한씨께서 윤씨를 대단 괘씸히 여기셔서 대왕께 말씀하여 구경 폐비와 사약 전교가 내리게 되었었답니다.

성종대왕 뒤에 임금 된 연산주는 폐비 윤씨의 소생인데 동궁으로 있을 때부터 임금 노릇 잘못할 싹수가 보이든지 성종대왕이 극히 사랑하시던 신하 문정공 순손효가 용상 가까이 엎드려 용상을 가리키며 이 자리가 아깝다고까지 말씀을 아뢴 일이 있었답니다.

이 연산주가 임금 노릇한 동안이 12년인데 즉위 4년인 무오년에 간신 유자공의 무고를 믿어 큰 옥사를 일으키고 즉위 10년인 갑자년에 폐비사건으로 또 큰 옥사를 일으켜서 유명한 조신들을 마냥 죽이고 산 사람을 죽일 뿐이 아니라 이왕 죽은 사람은 두번 죽음 시키는데 부관참시라고 관을 파다가 송장의 목을 베기, 쇄골표풍이라고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별별 형벌을 하고 파가저택이라고 집을 헐어 웅덩이를 만든 것이 열 집 스무 집이 아니고, 가장 경한 사람이라야 2천 리 3천 리에 귀양살이를 보냈더랍니다.

이렇게 두 번 큰 옥사로 유명한 신하들을 죽이고 귀양 보낼 뿐 아니라 각 고을의 얼굴이 반반한 계집 또는 계집아이를 서울로 뽑아 올려 기생 명색으로 궐내에 드나드는 것이 만 명 이상이 되었는데, 기생의 칭호를 운평이라고 하고 궐내에 가까이 도는 운평을 흥청이라고 하고 상관이 있는 흥청을 천과흥청이라고 하여 운평, 흥청과 악수들을 살리느라고 종실 대관의 집을 빼앗고 운평, 흥청들을 먹여살리고 몸치장시키느라고 민간 재물을 강탈하고, 이것도 부족하여 종실 대관의 처첩을 빼앗아 갖은 음란한 짓을 다하였답니다.

연산주는 이러한 할 짓, 못할 짓 다한 까닭에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고 그 뒤에 종종대왕이 등극하였습니다.

종종대왕 39년간에는 남곤, 심정같은 간신의 모함으로 조광조 이외 여러 명사를 죽이고 귀양 보낸 유명한 기묘사화가 있었습니다.

즉위 39년 갑진 11월에 중종이 승하하시고 인종이 즉위하니 인종은 성덕이 있던 임금이시랍니다.

수 양제, 금 해릉 같은 임금도 그 당시 신하들은 요순이라고 칭송하여 임금치고 요순 소리 아니 들은 임금이 없겠지요마는, 이 인종대왕이야말로 참말 요순이라고 칭송할 만한 임금이더랍니다.

인종대왕은 그 계모 되는 문정왕후 윤씨의 형제 윤원로, 윤원형이 내전에 자주 드나드는 통에 즉위 1년이 못 되어 의외로 승하하셨는데, 이때 국상 난 지 며칠 안에 팔도가 울음빛이었었답니다.

인종대왕 뒤에 문정왕후 소생이신 명종대왕이 즉위하셨습니다.

명종 초년에는 문정왕후가 정사를 알음하여 윤원로, 윤원형의 세력이 같이 충천하다가 형제간에 세력 다툼이 생겨서 원로는 아우의 음해와 족질의 공격으로 사약까지 받게 되고 원형이만이 문정왕후 상사 나던 을축년까지 혼자 세력을 잡았었습니다.

이야기의 머리 말씀를 한 회에 마치려고 인종, 명종 때 일을 조금 자세히 설명하여야 할 것도 다 못하고 본 이야기로 접어들려고 합니다.

 

 

1권 봉단편 1장 이교리 귀양

 

연산주 때에 이장곤이란 이름난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등과하여 홍문관 교리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교리는 문학이 섬부하여 한원 옥당의 벼슬을 지내나 항상 말달리고 활쏘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신장이 늠름하고 여력이 절등하여 그 재목이 호반에도 적당한 까닭에, 그의 선배나 제배로 그의 문무겸전한 것을 일컫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이교리가 과거에 급제해서 뽑힐 때에는 장차 국가를 위하여 자기의 문무 재주를 다하려는 포부를 가졌었으나 때의 임금의 심법과 행사를 차차로 알게 되자, 그 포부를 펴는 것은 고사하고 큰 죄나 면하고 지내면 다행이거니 생각하여 조심조심하고 벼슬을 다니는 중에 무오년을 당하여 큰 옥사가 일어나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외에 그의 여러 선배와 제배가 죄들도 없이 혹은 죽고 혹은 귀양 가는 것을 목도하고 벼슬 다닐 생각이 찬 재가 되고 곧 조정을 하지가혹 백구를 쫓아갈 맘이 났었지만, 상당한 이유도 없이 섣불리 벼슬을 고만둔다고 하다가는 임금이 싫어 내빼려 한다고 화가 몸에 미칠 것 같아서 그는 굽고 접도 못하였다.

그럭저럭 몇 해를 지내는 동안에 왕의 심법과 행사는 나날이 더 고약하여 이교리는 무슨 화가 자기 몸에 내리지 아니할까 두려워서 하루라도 맘이 편할 날이 없었다.

하루는 그가 조반에서 나와서 입었던 관복을 천근 무게나 되는 갑옷을 벗듯이 간신히 벗고 자리에 앉으려 할 때 시중을 들던 하인이

오늘 아침에 풍덕 정한림 댁에게서 답조장이 전편으로 왔습니다

하고 편지봉을 자리 앞에 놓았다.

정한림은 누구인고 하니 예문관 봉교 벼슬을 지낸 정회량 정한림이니, 그가 무오년에 의주로 귀양 가서 김해로 양이 되었다가 의외로 7년 만에 석방되는데 그가 고향인 풍덕으로 돌아오며 그의 어머니 초상을 당하였다.

이교리는 본래 친구들 중에서도 정한림과 정분이 자별하던 처지라 곧 전인으로 편지도 부치고 또 조장도 부쳤더니 그 답장이 온 것이다.

이교리는 정상제에게서 온 편지봉을 뜯어 답조장을 펴보면서 한편으로 생각하였다.

이 사람은 꼭 한번 가서 물어야 할 터인데 색책하듯이 조장만하고 고만둘 수야 있나. 겸하여 서회도 하려니와 또 그외에도 물어볼 것이 있어. 이 사람이 음양술수로 능히 앞일을 짐작한다니, 오순형의 말 같으면 이 사람의 사주가 세상에 유명한 홍계관의 점보다도 더 용하다지.’

이교리가 편지봉을 접어놓고 나니 불현듯이 정상제를 만날 생각이 나서 하인을 불러서 나위를 얻어온다, 행장을 차린다, 홍문관에 병이 났다고 닷새 수유를 얻는다, 그날은 분주하게 보내고 그 이튿날 새벽 파루 친 뒤에 곧 풍덕길을 떠났다.

봄추위가 남아 있어서 바람이 쌀쌀하나 오래간만에 시골길을 나선 이교리는 답답하던 가슴이 좀 시원하여지는 것 같아서 쌀쌀한 것을 도리어 좋은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 이튿날 승석 때 풍덕에 당도하여 정상제를 찾아서 조례를 마친 뒤에 상제의 파리한 얼굴을 대하니 이교리는 갑자기 무슨 말이 나오지 아니하여 묵묵하고, 주인은 상제라 별로 말이 없어 이따금 이따금 수어를 접할 뿐이었다.

그날 밤 자리에 누운 뒤에야 이교리가 그 동안 조정 이야기를 대강대강 말하고 국사가 한심하다고 눈물을 흘리니 주인 상제가

그것도 막비천운이지. 그다지 상심할 것이야 무엇이 있겠나?”

손을 위로하였다.

이교리는 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있는 듯이 눈물을 거두면서

여보게, 천운이라니 말이지 자네는 앞일을 짐작하지 않나? 그전에는 자네가 알기를 무얼 알아 하고 술수를 잘 안다고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도 술수에 그렇게 맘이 당기지 아니하였었네만 오주부는 바루 자네를 이인같이 말하데그려.”

주인 상제는 이 말을 듣고 잠깐 웃는 듯 웃고서

오순형이 말인가? 그 사람 말은 준신할 것이 있나.”

하고 말을 끊었다.

이교리는 한참 있다가

여보게, 점필재 선생이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가셨을 때 시골 사람이 새 임금은 영명하시다는데 무슨 까닭으로 벼슬을 내놓으셨느냐고 어쭈어 보니까 선생의 말씀이 새 임금의 눈을 보면 나 같은 늙은 신하가 몸 성히 죽으면 다행이지 하시더니, 선생이 사후에라도 그런 화를 당하지 않으셨나, 이로 보면 선생 같으신 이도 앞일을 짐작하시던 것이 아닌가?”

그것이 술수인가?”

이교리는 다시 말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이튿날 도로 서울로 오려고 길을 떠나는데 정상제가 나귀 머리에 상장을 짚고 서서

내가 어렴풋이라도 짐작하는 것을 자네에게 말 아니할 수가 있겠나. 올 갑자년은 지난 무오년보다 더 혹화가 있을 듯한데 그 화가 나 같은 사람에게도 미칠 것이요, 자네도 면하기 여러우리. 그렇지만 자네는 복이 두터운 사람이라, 그러나 혹 앞에 액색한 경우를 당하여서 자처할 생각까지 날 때가 있거든 이것을 뜯어보게. 그전에 뜯어서는 소용없어.”

하고 한손에 상장을 쥐고 다른 한손으로 조그마한 종이봉지를 꺼내서 이교리에게 내주더니

이제로부터 생리사별일세. 아무쪼록 보중하시게.”

하고 이교리를 향하여 한 번 국궁하였다.

이교리가 풍덕 갔다 온 뒤 며칠이 되지 아니하여 홍문관에 번을 들 차례가 돌아왔다.

월화문밖에 있는 홍문관은 증정원에서 멀지 아니한 곳이라 그날 승정원에 번들었던 젊은 동부승지 한 분이 이교리가 번 드는 줄 알고 석반 후에 일부러 찾아와서

여보, 내가 엊그제 입시하였을 때 전하께옵서 이 말 저 말 하문합시다가 너 이모를 잘 아느냐고 노형 말씀을 물으십디다. 그래 내가 말씀을 잘 여쭈어 두었소. 그때 이응교, 권교리, 박수찬의 말씀까지 계셨는데 말씀이 이러하십디다. 이행이와 박은이는 믿을 수 없는 인물이고, 권달수는 위인이 괴악하다고 그리합시고, 또 말씀이 조그마한 일만 있어도 옥당에서 이러니저러니 지껄이니 성이 가시다고 하십디다. 이후에 무슨 말씀이 계시거든 덮어놓고 지당합소이다고 아뢰어만 보구려. 노형 같은 이에게는 그날로 당상이 돌아갈 것이오.”

이교리는 잘 여쭈어 주어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아니하고 그저 네네 하고 그의 말만

듣고 있었는데, 그 네 소리에는 말이 옳다고 동의를 표하느니보다도 멋대로 지껄여라,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다는 듯한 어조가 있었다.

그 승지는 말을 다하고 나서야 이것을 깨달았는지 한참 동안 무료하게 앉았다가

나는 가오.”

하고 일어섰다.

동부승지가 간 뒤 한 식경 가량이나 지나서 밤이 이경쯤 되었을 때에 대내로서 젊은 내시 하나가 나와서 곧 편전으로 입시하랍신다고 어명을 전하므로 이교라는 창황히 관복을 갖추고 사초롱을 든 내시를 뒤따라 들어가서 편전 계하에 부복하니 왕은 이교리에게 계상에 올라 평신하라고 명하고 왕이 앉은 편 영창 한쪽을 열어놓는데, 왕은 밝은 촛불 아래에 앉고 그 뒤에는 여러 여관의 그림자가 쫑긋쫑긋 서 있다.

너 병이 났다더니 인제 쾌히 나으냐?”

물으며 왕이 이교리를 내다보니 이교리는

옳지, 탈났구나. 병을 칭해서 정회량이 찾아간 것이 입문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황송하외다.”

대답하고 그 큰 키를 활같이 구부렸다.

너 이것 좀 보아라.”

할 때에야 비로소 고개를 들고 무엇을 보라나 하고 영창 안을 들여다보니 왕이 두 손으로 여자의 적삼을 펴서 들었고, 여자 적삼이 왠일인가 하고 그 적삼을 살펴보니 흰 비단으로 지은 것인데 앞섶에 거뭇거뭇 얼룩진 것이 있고 소매에도 거뭇거뭇한 점이 있다.

이교리는

왕에게 외조모되는 신씨가 왕의 소생모 윤씨의 옷 한 가지를 왕께 바쳤다더니 이 적삼이 그것인가.’

선뜻 생각하였으나 말 없이 잠잠히 서 있었더니 왕이 적삼을 놓고 손가락으로 그 앞섶을 가리키며

이것은 약자국이고,”

또 소매를 가리키며

이것은 핏자국이다.”

말하고 몸을 부르르 떨며 이를 가는데 두 눈에서는 독기가 철철 흐르는 것 같았다.

이교리는

윤씨가 사약받을 때 입었었다는 적삼이 분명하군.’

생각하며 무슨 말을 하여야 할 지 몰라서 전과 같이 잠잠히 서 있었다.

한참 있다가 왕이 분이 진정된 뒤에 먼저

장곤아

불러놓고

원수가 있으면 갚아야 하지.”

하고 두 손으로 영창 틀을 잡아당기며 이교리를 내다보는데 그 기색이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너도 곧 내 원수다 말할 것 같이 무서웠다.

이교리는 아까 듣던 젊은 동부승지의 말이 언뜻 생각이 나며

지당합소이다

하고 말이 거의 입술에서 떨어질 뻔하다가 의리 부당한 일에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 당상을 하고야 낯을 들고 다닐 수 있으랴 생각하고

임금의 원수 갚는 법은 필부와 다를 것입네다. 금이 덕을 닦으셔서 국가가 태평하오면 원수 갚는 것쯤은 그 속에 있사올 줄로 소신은 생각합네다.”

말이 지당합소이다와는 엄청 다르게 나갔다.

왕은 이 말을 듣고서 눈썹이 쌍그랗게 올라가면서도 허허허거짓웃음을 웃으며

임금이 덕이 없으면 그 임금은 어찌 하노

임금의 자리는 높은 까닭에 위태하옵네다. 덕이 아니면 누리기가...”

무에야, 덕이 없으면 어째

하며 왕이 와락 영창을 닫았다.

조금 있다가 지밀내시 하나가 마루에서 상감마마께서 나가라신다고 말하여 이교리는 기운없는 걸음을 걸어 홍문관으로 물러나와 깊이 한숨만 쉬며 밤을 앉아 새다시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이교리가 집에 나와서 아침상을 대하였을 때 자기를 거제로 정배하되 배도압송하라는 왕의 명령이 내린 것을 알고 아침을 변변히 먹지도 못하고 얼마 아니 있다가 금부도사의 재촉하는 대로 총총히 귀양길을 떠나 문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1권 봉단편 2장 왕의 무도

 

이교리가 거제도로 귀양간 뒤의 일이다.

왕은 자기의 어머니 윤씨가 궁중에서 좇겨나고 마침내 사약까지 받게 된 것은 엄귀인, 정귀인이 성종께 참소한 탓이라고 하여, 어느 날 내전에 들어가서 두 귀인을 불러다가 뜰 아래에 세우고 철여의를 쥐고 내려가서 대번에 머리를 쳐서 바수고, 한 마당에 두 시체가 거꾸러지며 이곳저곳이 피투성이라 마루 위와 뜰 위에 섰던 왕비 신씨 이하 여러 궁인들은 끔찍스러운 일을 보고 한참 동안 모두 섰던 곳에 박힌 듯이 서서 혹은 고개만 돌리고 혹은 눈만 가릴 뿐이었다.

왕에게 조모인 인수대비가 그때 마침 병환이 침중한 중에 이 일이 난 것을 알고 억지로 병석에서 일어 앉아 왕을 불러다 앉히고 부왕의 후궁을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준절히 책망하니 왕은

무어요? 법이요?”

하면서 대비의 가슴을 머리로 받아서 대비는 일시 기가 질리었었다.

왕은 이런 일을 하고도 분이 풀리지 아니하여 정귀인의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절도로 귀양보내었다가 뒤미처 사약을 내리어 죽이고 또 폐비사건에 참섭하였던 사람을 모두 대역죄로 몰아 참혹한 벌을 내리었는데, 이왕 죽은 사람들은 시체를 파내어 뼈를 갈거나 목을 자르거나 혹 시신을 강물에 띄우게 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서울, 시골서 잡아다가 모두 목을 베게 하고 그들의 죄를 동성팔촌에게까지 연좌시키었다.

이와 같이 참혹한 육시와 처참이 나날이 그치지 아니하는 중에 왕의 죄악을 낱낱이 열거한 언문 익명서가 서울 큰길거리에 붙으며 이것이 바로 왕에게 입문되니, 왕은 죄인의 여당의 소위라고 일변으로 평일에 밉게 본 언문 아는 신하들을 옥에 내리어 형벌을 더하며 언문 같은 쉬운 글이 있는 것이 병이라고 일변으로 세종대왕 때 설치한 언문청을 파하고 여염 여자와 궐내 나인까지라도 언문을 배우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그때 마침 인수대비의 상사가 나니 왕은 거상 입기가 성가시어서 삼년간 달수를 날짜로 대신하여 27일 만에 상기를 마치고 자기만이 그리할 뿐 아니라 삼년상을 일체로 금하였다.

이때 대전내시로 세조 때부터 내려오는 김처선이란 늙은 지사가 있었는데, 이 늙은 내시는 왕의 처사가 옳지 못한 것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왕을 간하므로 왕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터이다.

하루는 김지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간하여 보려고 작정하고 종일 틈을 엿보고 있었으나, 왕이 계집들과 장난하느라고 여간하여 틈이 나지 아니하므로 나중에는 왕이 편전 마루에서 두 젊은 기생을 양옆에 끼고 있을 때 편전 뜰 아래 나아가 서서

상감마마

하고 소리를 지르니 왕은 깜짝 놀라 기생들 끼었던 팔을 빼어서 얼른 뒷짐을 지고 김지사를 내려다보며

늙은 것이 소리도 크다.”

말씀 아뢸 것이 많소이다. 노가 마마께까지 사조를 섬기어 오는 중에 예전 사적을 대강 들어 압니다만, 마마 하시는 일같은 것은 고금에 없을 듯합니다.”

김지사는 가쁜 숨을 돌려가지고

부모의 삼년상 못 입게 하는 임금은 어디 있으며, 죄없는 선왕의 후궁을 박살하는 임금은 어디 있습니까. ...”

왕이 처음에는 저 늙은 것이 망령이 나지 아니하였나 생각하고 노려보고만 있다가 자기의 죄악을 글읽듯 하려는 것을 보고 와락 나는 분을 걷잡지 못하여 벽에 걸린 활을 떼었다.

활시위에 살을 먹이자마자 김지사를 쏘았다.

그의 갈빗대가 맞았다.

김지사는 잠깐 입술을 악물었다가

"조정대신도 장난하듯 살육하시는 수단이니까 저같은 천한 늙은 것이야...”

또 한 살이 가슴에 맞았다.

김지사는 마당에 자빠져서

죽어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마마가 오래 임금 노릇을 못하게 될 것이 한이올시다.”

왕은 어느 틈에 활을 놓고 환도를 쥐고 쫓아내려와서 한칼에 김지사의 다리를 끊고, 김지사의 아픈 것 참는 모양을 들여다보면서

일어나 걸어라.”

김지사는 왕을 쳐다보며

마마는 다리없이도 걸으십니까?”

왕이 환도로 그 입을 찍었다. 그래도 김지사는 말 안 되는 소리로 무어라고 지껄인다.

왕은 이를 부드득 갈며 김지사의 배를 가르고 환도 끝으로 창자를 꺼냈다. 그래

도 시원치 못하던지 김지사의 고기를 갖다가 호권 속에 있는 호랑이의 밥을 만

들게 하고 곧 김처선의 자까지 통용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왕이 이것저것 금하는 영을 내릴 때마다 번번이 인심이 소동되어서 대궐 안으로부터 시골 두메구석에까지 세상은 망한다’ ‘나라는 망한다한탄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건마는 왕은 나라가 망하든지 세상이 망하든지 놀고나 보리라고 결심한 것같이 밤낮없이 계집들 데리고 놀기만 일삼는데, 대궐 후원에 서총대를 쌓고 창의문 밖에 수각을 세우고 또 고양땅에 연희궁을 지어서 새로이 놀이터를 만들 뿐 아니라, 성균관 같은 좋은 집을 위패조각과 몇낱 선비에게 맡겨두는 것이 합당치 않은 일이라고 위패는 집어치우고 선비는 내몰고 훌륭하게 놀이터를

만들었다.

계집들 데리고 놀기를 좋아하는 왕은 팔도 기생을 모두 뽑아올려서 서울 안에 만여 명 기생이 복작거리게 하여 놓고 기생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고 백성의 재물을 턱없이 빼앗으니, 한탄하던 것이 원망으로 변하고 원망하던 것이 악심으로 변하여 사방에서 나날이 느는 것이 도적이라.

지리산 속에 대적이 있고 변산안에 적당이 있는 것은 오히려도 예사려니와 서울에서 멀지 아니한 장단, 인천은 온 고을이 거의 다 적굴이 되었고 장단, 인천은 또 고사하고 도성 안에도 이곳저곳에 적굴이 생기어서 밤은 말도 할 것이 없고 낮에라도 사람이 잘 다니지 못할 골목이 많았는데. 이때 남소문 안에 있던 한치봉이의 적당은 서울 안에서 가장 유명하던 적당이다.

한치봉이는 어느 시골 한씨집의 서자로 집안의 홀대 받기가 싫어서 서울로 뛰어올라와서 몸이 날쌔고 완력이 센것을 믿고 갖은 짓을 다하다가 마침내 적당의 괴수가 된 사람이니, 한씨가 처음 괴수가 되어 가지고 남소문 안에서 미인계 판을 차리었을 때 경상도 선산 사는 박선전이란 사람을 옭아들였다가 그가 힘이 장사인데다가 무예까지 절등하던 까닭에 미끼삼아 사람을 옭아들이는 미인까지 빼앗긴 일은 있었으나, 그후로 이때까지 약 10여 년간 별로 봉패한 일이 없이 서울 안에서 거의 횡행하다시피 하는 터이다.

한씨의 부하인 김삭불이란 사람은 이교리의 유모의 아들로 어려서 이교리와 같이 자라다시피 한 사람이니, 노름에 반하여 노름판을 쫓아다니다가 한씨의 부하가 되었는데, 사람이 영리하고 약삭 빠른 까닭으로 한씨가 끔찍이 사랑하여 입당한 지가 2년이 채 못되었건만 한씨 도당 중에서는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한씨와 같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는 중에 한씨가 무엇을 잊었던 것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아니 이애 삭불아, 너의 젖동생 누가 교리 다니다가 귀양 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성명이 무엇이랬지?”

그건 왜 새삼스럽게 물으시오? 알으켜 드리면 상을 주실 터이오?”

삭불이는 하하하하 웃었다.

이 자식 상은 되우 바라네.”

삭불이는 바로 정색이나 하는 듯이 별안간 웃음을 거두면서

당신이 꼭 하나 고치셔야 할 일이 있는데 고치지 않으십디다. 말투는 아무래도 좀 고치셔야 하리다. 무슨 잘못한 일도 없는 사람을 왜 이 자식 저 자식 하시오? 당신이 영광서 오셨소, 순천서 오셨소?”

아따, 그 자식 수다도 하다.”

그래도 고치지 않으시오그려. 그러나 그것은 대체 왜 물으시오?”

삭불이는 눈귀에 웃음빛을 띠고 한씨 얼굴을 들여다보니 한씨는 팔을 늘리어 삭불의 등을 툭 치며

왜 물었느냐? 네 젖동생 교리 나으리가 맞아죽었나 하구.”

맞아죽다니오? 누가?”

어저께 뉘게 말을 들으니까 이교리니 권교리니 무슨 교리이니 하는 것들이 뼈가 부서지도록 매를 맞아서 거의 다 죽을 지경이라더라.”

나와 친하다는 이교리는 거제로 귀양가서 지금 잘 있을 겝니다. 염려 마십시오

삭불이는 다시 하하하 웃으며 일어섰다가 얼굴에 걱정하는 빛을 띠고 다시 자리에 앉으며 한씨를 보고 하는 말이

이교리가 지금 죽지는 않았더라도 죽기가 십상팔구일 것이오. 지금 임금이란 것이 의심이 많은 데다가 사람을 죽이는데 수단이 난 터이니까 내 청으로 이교리를 좀 살려봅시다, ?”

나는 죽일 수는 있어도 살릴 수는 없다.”

한씨는 말하며 껄껄 웃었다.

삭불이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아니 웃으실 것이 아니라 좀 생각해 주시구려. 우리가 좀 빼돌려 봅시다.”

한씨는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침을 탁 뱉으며

어림없는 소리다. 양반님들은 곧 죽어도 도적놈 중에서 사실 리가 없다. 그런 생각은 고만두어라.“

그렇게 말하였지만, 삭불이가 갖은 정으로 청하는데 끌리어서 한씨는 이교리를 구하여 보려고 작정하였다.

 

 

1권 봉단편 3장 이교리 도망

 

그날 삭불이가 한씨와 마주 앉아서 이교리 살릴 계획을 서로 이야기하는데 한씨 말이

, 이교리가 화를 당할 길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약, 하나는 장하에 물고 또 혹은 처참을 당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배소에서 죽거나 서울로 압상되어 와서 죽거나 두가지는 틀림없을 것이니까 이것을 구할 작정이면 역시 두 가지 방법을 차려야 한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오늘부터라도 정원 소식을 잘 탐지합시다. 상감인지 땡감인지 어느 때 그 소위 전교란 것을 내릴지 모르니까. 그래 탐지해 가지고 사약이거든 삼현령 역마보다 빨리 가는 말을 타고 도사 앞질러 가서 살짝 빼돌리고 압상이거든 오는 길목에 동무 한 십여 명 붙였다가 집어칩시다그려.”

삭불이는 말을 할 때 몸과 손을 가만히 두지 아니하고 말을 타고할 때는 몸을 말탄 것같이 까닥거리고, ‘집어칩시다할 때는 손으로 물건을 잡아채는 시늉을 낸다.

한씨는 이것이 구경스러운 듯이 또는 귀여운 듯이 빙그레 웃으며 삭불이를 바라보았다.

삭불이는 자기의 꾀가 한씨 비위에 맞았나 보다 생각하여 좋아하면서

사람을 보고 왜 그렇게 웃으시오? 내 얼굴에 검정이가 묻었나요?”

그리하고 또 자기가 일을 요량하는 법이 경선치 아니한 것을 보이려고

일이 작고 크고 시작하기 전에 아무쪼록 주밀하게 생각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빼돌리거나 집어채거나간에 그 당자가 말을 듣지 아니하면 어찌하나요?”

한씨는 자기가 먼저 생각한 것을 자랑하듯이

그렇기에 내가 말하지 않더냐?”

사람이 죽을 지경에 살려준다는 것을 싫달리는 만무하지요만 그래도 그렇지 아니하니까 일이 나기 전에 내가 한번 거제를 갔다오리다. 당자가 의향이 있으면 좋고 그렇지 아니하면 거제 구경간 셈만 잡고 고만두지요.”

이리하여 삭불이는 한씨의 허락을 맡아 가지고 수일 동안 준비한 뒤에 곧 거제길을 떠났다.

이때 이교리는 거제 배소에 도착한 지 벌써 이삼 삭이라 처음 서울서 떠날 때는 개나리 꽃잎도 돋기 전이었는데, 남방으로 내려올수록 일기가 점점 더 온화하여 거제에 도착한즉 진달래가 만발이더니 지금은 녹음이 우거지고 이른 매미의 찌르르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게 되었다.

다행히 부사가 까다롭지 아니한 사람이라서 이교리는 요식으로 군색도 당히지 아니하고 또 초하루 보름의 점고 외에는 별로 간섭도 받지 아니하여 귀양살이로는 편하다면 편하나, 일천일백 리 머나면 길에 서울 소식이 막히고 또 자기 앞에 오는 위험이 예측하기도 어려운 까닭에 때때로 긍금 답답하여 긴 한숨을 짓는 것은 면치 못할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때 이교리는 집안에 들어앉았기가 갑갑하든지 바닷가에서 나가서 거닐며 바람을 쏘이더니 주인집의 아이가 찾아나와서 서울서 손님이 왔다고 한다.

이교리는 서울 손님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이어 두 걸음에 한 걸음으로 걸어들어와서 닫힌 방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주인을 부르니 주인은 어디 가서 없고 안주인이 대답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 서울 손님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안주인은 이웃집에 장을 얻으러 갔다 방금 돌아온 터이라 손님이 온 것까지 모른다고 한다.

이교리는 아이의 거짓말이 아닌가 생각하여 낙심하고 방문 앞봉당에 주물러 앉았더니 얼마 아니 있다가 그 아이가 촐랑촐랑 앞서고 한 사람이 그 뒤를 따라 들어온다.

이교리는 이 사람을 바라보고 너무 반가워서 어이가 없는지 넋잃은 사람같이 멀거니 앉아 있다가 그 사람이 앞에 와서

문안드립니다.”

하고 재치있게 하정배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삭불아, 웬일이냐?”

삭불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그 아이가 이교리를 향하여

이 손님이 우리 찾아나온다고 갈밭길로 가옵디다. 내가 그리가서 다리고 왔지라오.”

공치사를 한다.

아이 말이 끝난 뒤에 삭불이는

"나으리의 문안 알려고 전위하여 왔습니다."

고 이교리 말을 대답하였다.

"오래간만이다. 반갑다. 너 줄곧 서울 있었겠지? 이번에 서울서 떠났겠지?"

이교리는 말하고 삭불이의 얼굴을 보니 먼 길에 지친 사람이라 피곤한 빛이 많다.

"이리 올라앉아라."

하고 뒤미처

"너 무엇 요기나 했느냐?"

고 물었다.

삭불이는

"황송합니다만 다리가 아파서 좀 앉겠습니다."

하고 일변으로 이교리의 앉은 봉당에 올라와서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일변으로 말하였다.

"아까 장터에서 요기했습니다. 음식을 먹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도 술맛은 좋아요."

이교리는 술맛 좋다는 말에 웃으면서

"네가 제법 술맛을 알도록 술을 먹을 줄 알든가?" 하고 나서

"서울서 언제 떠났니?"

물었다.

"소인이 한 보름 전에 서울서 떠났습니다. 떠날 때 댁 문안은 알고 왔습니다. 다 안녕들 하십니다."

고 삭불이의 전하는 안부를 듣고 이교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녁밥이나 먹은 뒤에 서울 이야기 좀 자세히 듣자."

말하고 천천히 몸을 일어 방으로 들어갔다.

 

이교리의 거처하는 방은 단간이라도 간살이 넉넉하여 과히 좁지 아니하고 뒷들창과 앞되창을 함께 열어놓으면 바람이 잘 통하여 과히 덥지 아니하였다.

그날 밤에 삭불이는 되창문 밖 봉당 위에 앉아서 방안에 앉은 이교리를 들여다보며 봄 이후 서울 이야기를 압담 좋게 늘어놓는데, 그중에도 더욱이 한번 귀양 갔던 사람이 도로 잡혀와서 맞아죽는 이야기를 아무쪼록 자세히 하고 또 상감이

'이교리의 위인이 아무래도 수상하니 다시 처치하여야 한다

고 일대 간신 임사홍이에게 말한 것을 자기가 어찌어찌하여 굴러 듣게 되었다고 그럴싸하게 꾸며서 지껄였다.

이교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혹 말을 채쳐 묻기도 하고 또 혹 말이 없이 한숨만 쉬기도 하다가 삭불이의 이야기가 한참 동안 중간이 그치자

"물어볼 말이 하도 많아서 뒷전이 같다만 너 그 동안 무슨 짓 하고 지냈느냐? 여전히 노름이냐? 노름꾼은 친한 집에 발그림자를 끊는 법인가? 내가 너 못본 지가 벌써 몇해냐!"

이교리는 나무라듯이 말하더니 곧 뒤를 이어

"반갑다. 천리 밖에 있는 사람을 일부러 찾아보러 왔으니."

하고 정답게 말한다.

삭불이는

"황송합니다."

하고서는 다시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나으리쎄 조용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주저주저하니 이교리는

"조용히 할 말이 있어? 방으로 들어오려무나."

하고 문턱에서 몸을 비켜 길을 냈다.

삭불이는 방안으로 들어와서 이교리에게 핍근히 앉기가 어려워서 등잔이 걸린 벽 밑에 앉으려고 하니 이교리가 이것을 보고

이애, 그 쇄뿔에서 기름이 듣는다. 옷에 튀일라. 이리 와 앉아라.”

하여 삭불이가 이교리에게 가까이 와서 모를 꺾어 앉았다.

삭불이는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묻는 이교리의 얼굴을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우선 자기 모친의 이야기를 꺼내어서 자기 모친이 이교리의 덕을 많이 보았다는 것과 자기 모친이 죽을 때 이교리를 저버리지 말라고 유언한 것이 머리에 박혀 있다는 것을 중언부언 말하니, 이교리는 삭불이가 노름빚을 많이 지고 갚아 달래러 온 줄만 짐작하고

나 같은 조불여석의 인생에게 그런 말 하여 무엇하니?”

하고 한숨을 쉰다.

삭불이는 그 말의 뒤를 대어

그 때문에 소인이 천여 리 길을 전휘하여 왔소이다.”

말하고 나서 그 다음에 한치봉의 도당에 든 이야기와 한치봉에게 신임받는 이야기와 또 한치봉을 조른 이야기를 이교리의 눈치를 보아가며 쏟아놓고 말하고 나중에

나으리 의향이 어떠싶니까? 잠깐 소인들에게 와서 피신하셨다가 좋은 세상이 되거든 나서시지요. 나으리, 깊이 생각해 봅시오.”

하고 말은 생각하여 보라 하나 어조는 다시 생각할 것도 없이 동의하라는 것 같다.

이때껏 말없이 귀를 기울이고 삭불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교리는

의향? 의향?”

하고 두서너 번 입속으로 뇌고서는 한참 동안 다른 말이 없이 앉았다가 닭이 첫홰 치는 소리를 듣고서

이야기에 팔려서 닭이 울도록 앉았었구나. 고만 자자. 내일 또 이야기하지.”

하고 목침을 베고 누우니 삭불이는 이교리의 대답을 듣고 잤으면 좋을 줄로 생각하였겠지만,

재촉할 길이 없어 등잔불을 불어 끄고 방 윗목에 누웠다.

삭불이가 늦잠이 들어서 이튿날 해가 높이 돋았을 때 겨우 잠이 깨었다.

일어나서 보니 이교리는 벌써 소세하고 봉당에서 주인집 아이와 무슨 이야기를 한다.

삭불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봉당으로 나가서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이교리에게 인사를 한 뒤 소세하고 조반 먹고 하느라고 한참 분주하였다.

아침밥 때가 지난 뒤에 삭불이가 이교리의 방에서

많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다른 의향이 없으실 터이지요?”

하고 이교리의 대답을 조르니 이교리는 굳센 어조로

네 말이 고맙다만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다.”

고 간단하게 거절한다.

삭불이는 천만의외로 생각하여

할 수 없으시다니요? 어찌한 말씀입니까. 한번 더 생각하여 보십시오.”

권하다가

더 생각할 것 없다.”

고 이교리가 잘라 말하는 것을 듣고서 천여리 길에 찾아온 정성을 받아 달라고, 모친의 유언을 지키게 하여 달라고, 또는 한치봉이 대할 면목을 세워 달라고 여러 가지로 애걸하다시피 말하였건만 이교리는 종시 결심을 변치 아니하고

천여리 길을 찾아온 정성은 내가 고맙게 생각하고 이번 길 왔다 가는 것만 하여도 어멈의 유언은 잘 지켰고 하니 너 할 일은 다한 셈이다. 네가 한치봉이 대할 낯이야 있건 없건 내가 알은체 할 배 아니나 알은체한다면 대할 낯이 없어도 좋다.”

삭불이는 어이없어 한참 잠자코 있다가

소인더러 참말 허행하란 말씀입니까?”

하고 말하는데 이교리의 고집을 딱하게 여기는 기색이 그 얼굴에 가득하다.

허행이라니 의향 알러 왔다가 의향 알았으면 고만 아니냐. 내 의향은 너희들 손에서 살아나느니 차라리 죽겠단 말이야. 인제 잘 알았니?”

이교리의 언성이 높아져서 주인집 식구가 기웃기웃 방안을 들여다본다.

그때 이교리가 다시 언성을 낮추어

남이 보기에 수상할라. 오늘로 곧 떠나 올라가거라.”

삭불이가 할 수 없이 그날 그대로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한치봉을 보고 전후 사연을 말하니 한씨는 자기 말이 맞은 것을 자랑하듯이

그렇기에 내가 무어라고 하드냐?”

고 말하고 그 뒤로는 한씨나 삭불이나 자기들의 벌이할 것이나 생각하고 이교리의 말은 입에도 올린 일이 없었다.

이교리는 굳센 맘으로 삭불이를 쫓다시피 하였지만, 삭불이가 하직할 때

나으리, 인제는 저생에 가서나 또 보입겠습니다.”

절하고 돌아서 나가는 것을 보고는 그의 먹었던 맘이 갑자기 풀리었던지 무엇을 잃은 사람같이 한참 동안을 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였다.

주인집 아이가 이 모양을 보고 있다가 이교리가 깊이 고개를 숙이고 방안에서 서성거릴 때 가만가만히 방문 앞으로 와서

소인 문안드립니다.”

하고 삭불잉의 하정배하던 흉내를 냈다.

이교리가 고개를 들고 내다보더니

이놈 매맞는다.”

빙그레 웃으면서 벼르듯이 꾸짖는데 그 아이는 저대로 또 한번 더 하정배를 흉내내고

나으리 인제는 저생에 가서나 또 보입겠습니다.”

하고 하하하 웃는다.

이교리는 이번에는 웃지도 아니하고 꾸짖지도 아니하고 양미간을 찌푸리며 혼자서 입속말로

저생에 가서나? 저생에 가서나?”

하고서 고개를 세로 몇 번 흔들다가 홀저에 또 가로 흔들었다.

그날은 저녁때가 되어도 바람기가 없어서 해가 지자마자 모기떼가 흩어졌다.

이교리가 방문은 닫혀 두고 부채로 모기를 쫓아가며 봉당에서 오락가락하노라니 모깃불을 놓아 주려고 청솔가지를 들고 오던 바깥주인이 이교리를 보고

오늘은 모기가 대단합니다.”

하고 봉당위에 놓였던 질화로에 모깃불을 놓으며 왔다 간 서울 손님이 누구냐’, ‘왜 호령하여 쫓았느냐꼬치꼬치 물었다.

이교리가 처음에는

유모의 아들인데 나의 안부도 알고 서울 소식도 알려 주려고 온 것이야.”

어물어물 대답하다가 매사에 자기에게 지성스럽게 하는 주인을 속이기가 종시 미안하든지 자기 몸에 화가 박두한 것과 자기를 구하여 피신시키려고 삭불이가 왔던 것과 자기가 삭불이의 말을 듣지 아니한 것을 대강대강 이야기 한즉, 주인은 홀저에 눈을 크게 뜨며

그렇게 의리 있는 사람을 왜 쫓으셨소?”

이교리를 시비한다.

이교리가 허허 웃으며

피신하려다가 붙잡히면 화를 더 지독히 당할 것이 아닌가?”

적당 틈에 가서 피신하기가 싫어서 거절한 것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붙잡히다니? 여기서 피신하려면 사방이 다 바다니 어디를 못가서 붙잡히겠소. 남해를 건너가면 대마도가 지척이고 서해로 돌아서 적해, 백해 지나가면 대국도 갈 수 있고 동해바다로 올라가면 오랑태 땅에는 못 가겠소. 튼튼한 배에 몇말 양식만 실으면 고만이지.”

까닭도 모르고 분개하는 부인의 말을 이교리는 우습게 여기면서

뭍에 살던 사람이 뱃길을 알아야지.”

세상이 망했기로 의리 있는 사람이 그 사람 하나뿐이겠소. 뱃길 모르면 내가 타지. 닷새 엿새 혼자서 큰배를 저어도 이 팔이 끄떡없소.”

하고 팔뚝을 걷어 내밀며

그 사람이 의리 많은 사람이오. 세상에는 의리가 제일이지요, 의리!”

주인이 의란 말을 뜻도 잘 모르면서 연하여 거푸 말하였다.

그렇지.”

이교리는 그 말을 따라 힘없이 대답하고 마침 볼에 앉은 모기를 부채 안 쥔 왼손으로 때리면서

지독하다.”

흉하지요. 여기 모기가 섬모기라도 고성 모기와 혼인을 아니한다오.”

말이 달리 돌기 시작하여 예전에 거제현령이 고성 가서 있었던 까닭에 고성 사람들이 지금까지 거제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일어서 갔다.

그때부터 사오 일 지난 뒤의 일이다.

주인이 장을 보러 읍내 갔다가 장도 채 보지 않고 돌아와서 이교리를 보고

큰일났소. 어제 서울서 무슨 벼슬이라든가 벼슬 가진 자가 읍내 왔는데 당신을 읍에서 멀리 나가 있게 사정 썼다고 원님을 야단쳤답디다. 읍에서는 지금 수선수선입디다. 큰일났지요?”

이교리는

도사라고 하지 않던가?”

한마디 묻고는 이를 악물고 말이 없다가 한참만에

어제 와서 이때까지 아무 말이 없어? 괴상한데! 어렵지만 좀 가서 자세히 알고 오게.”

주인을 도로 읍으로 보내고서

가좨를 당할 것은 거의 의심없는 일이다. 도사가 왔다면 사약이다. 사약 아니면 압상이렷다. 만일 압상이라면 그 갖은 곤욕을 어째 다 당할까. 형장의 고통은 당하고 죽느니 숫제 고기밥이 되지.’

이교리가 혼잣말로 한참 중얼거리더니 홀저에 얼굴에 무슨 결심한 빛이 보이며 빠른 걸음

으로 바닷가를 향하여 나갔다.

 

이교리가 바닷물에 몸을 던질 결심으로 바닷가에 나와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한 곳은 주인집 아이가 여러 아이들과 헤엄치며 장난하고, 한 곳은 이웃 동리의 어부들이 그물을 고치며 두런거린다.

사람을 피하려는 이교리 눈에는 이곳에도 사람, 저곳에도 사람, 사람 없는 곳이 없다.

이교리는 바람을 쏘이러 나온 것같이 천연스럽게 걸음을 떼어 놓아서 사람이 없는 절벽을 찾아왔다.

한참 동안 바위 위에 서서 하늘을 치어다보고 바닷물을 내려다보다가 한번 몸서리를 치고 펄썩 주서앉았다가 다시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서서히 일어섰다.

이교리가 두 손에 주먹을 쥐고 두 발을 모으고 몸을 솟치려 할제 그 뒤에서

에헴!”

기침소리가 났다.

이교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깜짝 놀라며 겁결에 선뜻 몸을 돌치어 서니 윗도리를 벗은 주인집 아이가 한손으로 괴춤을 들고 눈앞에 서 있었다.

이교리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턱을 치어들어서 저리 가라는 뜻을 보이었다.

그 아이는 이것을 본체만체하고

무얼 하러 오시는가 하고 가만가만 뒤를 밟아 왔지라오. 바람을 쏘이시랴거든 저기 나무 밑으로 갑시다. 여기는 뚜약볕이 막 내리쪼이니.”

말하고 한 손으로 이교리의 겉옷자락을 잡앗다.

놓아라.”

갑시다.”

놓고 가자.”

그랩시다.”

이리하여 이교리는 그 아이에게 끌리어 그늘진 나무 밑까지 와서 나무등걸에 등을 대고 비슷이 앉았다.

얼마 동안은 얼빠진 사람같이 우두커니 하늘가를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나는 듯이 염낭끈을 끄르고 그 속에서 조그마한 종이봉지를 꺼내었다.

그 봉지를 떼고 보니 봉지 속에 봉지가 있고 속봉지를 떼고 보니 속봉지 속에 또 봉지가 있는데, 그 셋째 봉지 위에

거제배소개탁.”

이라고 쓰이어 있다.

이교리가 혼잣말로

이 사람이 귀신인가!”

하고 급히 셋째 봉지를 뜯으니 그 속에서 종이쪽 하나가 떨어진다.

그 종이쪽에는

주위상책, 북방길.”

이라고 쓰이어 있다.

이교리가 조그만 종이쪽을 정신놓고 들여다 보는데 그 옆에 앉아서 말없이 보고 있던 아이가

그것이 무엇입니까? 글자가 하나 둘 셋 일곱밖에 안 되는데 왜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십네까?”

물으니 이교리가 그제야 종이쪽을 접으며

나의 사주팔자를 적은 것이야.”

하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사주가 맞습네까?”

맞는 것도 있지.”

그것은 맞았습네까?”

앞으로 지내보아야 알지.”

그 사주를 낸 사주쟁이는 누구입네까?”

나의 친구다. 그만 물어라. 대답하기가 성가시다.”

이교리는 말을 끊고 일어서서 집으로 들어가자고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다가 읍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삽작문께 들어서는 것을 보고 이교리는

여보게!”

불러서 삽작 밖에 세워놓고 가까이 와서

도사라든가?”

물으니 주인이 고개를 가로 흔들며

이야기가 기오. 들어가서 합시다.”

하고 세 사람이 함께 집으로 들어와서 아이는 저리 가라고 쫓아버리고 둘이 이교리는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왔다.

주인이 방 윗목편에 앉아 아랫목에 앉은 이교리를 바라다보며

세상이 망할랴니까 별놈에 벼슬이 다 있습디다. 계집들 빼앗으러 다니는 벼슬이 그게 무어

? 그것이 왔답디다. 원님도 쩔쩔매더라는걸. 한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성명을 들었건만 잊었소. 임무어랍디다.”

이교리가 듣다가

임사홍이라든가?”

말하니 주인이

옳지, 임사홍이랍디다. 향교말 사홍이 김생원의 자를 생각했더면 잊지 않을걸.”

하고 껄껄 웃고 또 말을 이어서

그놈이 오늘 저녁때에는 도루 떠난답디다. 그러나 당신 일은 걱정이오. 그놈이 참말 원님더러 당신 말을 했답디다. 내가 통인 다니는 장줄이를 만나서 자세히 물어보았소. 그놈의 말이 당신이 나라의 큰 죄인이라고 도망 못 가게 잘 보살피라 하고 읍에서 잡아다 가두고 객사 쓰레질 같은 것을 시키라고 하니까 원님이 녜녜하며 분분대로 하겠다고 하더랍디다. 그저 당신이 사람이 고지식하지 서울서 왔던 사람의 말을 들었더면 이것저것 걱정이 없을 것 아니오.”

주인의 말이 끝나자 이교리는 말하였다.

내가 지금 정신이 산란하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세.”

그리합시다. 좀 누우시오. 나도 잠깐 어디 좀 갔다 올 데가 있소.”

하고 주인은 일어서 나갔다.

그날 밤 초저녁에 주인이 관솔과 불씨를 가지고 이교리의 방문 앞으로 와서 봉당 위에 화톳불을 놓으며

여보시오, 어두운 방에서 혼자 무얼 하시오?”

봉당으로 내다보며

이리 들어오게. 내가 머리가 아파서 일어나기가 싫네.”

목소리까지 전같이 웅장하게 들리지 아니한다.

주인은

대단히 불편하신가 보오.”

하면서 불 붙은 관솔 한 가지를 손에 들고 방안으로 들어와서 등잔에 불을 당기고 관솔을 든 채로 이교리에게 가까이 와서 그 얼굴에 불을 비추고 들여다보니 상기된 것이 환하게 보인다.

병환이 나셨소그려.”

아니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으이. 이 사람 관솔을 끄고 거기 좀 앉게. 할 말이 있네.”

나도 할 말이 있소. 그러나 말할 기운이 있겠소?”

그럼, 감기쯤 들었다고 말할 기운까지 없겠나.”

하고 이교리가 벌떡 일어 앉았다.

주인은 관솔불을 꺼서 놓고 한참 이교리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왜 무슨 까닭으로 절벽에서 뛰엄질을 하려 하였소?”

이교리는 말이 없다.

애놈의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이교리는 역시 말이 없으나 이번에는 머리를 조금 끄덕끄덕하였다.

그것이 무슨 일이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두번 살지 못하는 것이오. 진정이 만리 같은 당신이 왜 죽는단 말이오?”

이교리를 시비하고 나중에 고개를 이교리에게로 기울이며

도망하실 생각이 되거든 나오라고 하더라지 않았소? 그 말이 옳지 않소? 그래 생각이 없소?”

하고 은근히 물었다.

이교리는

내가 그러지 않아도 좀 의논하려고.”

말을 중간에 그치고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비면서

섬 속에서 가면 어디로 가나?”

수단이 없는 것을 한탄하니 주인은

배가 없소?”

이교리의 미처 생각 못하는 것을 개도하여 주듯이 말하였다.

그리하여 이교리는 도망할 생각이 있는 것을 토설하고 배 한 척을 얻어 달라고 부탁하고 주인이 어디까지 가든지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장담하는 것을

그러면 안되네. 자네가 나를 데리고 도망한 것이 발각되는 날에는 자네 집이 망할 것일세. 설사 자네는 죄책을 감심한다손 잡더라도 자네 처자가 있지 아니한가? 집에 있던 손 한목숨을 구하려고 사랑하는 처자 두 목숨을 죽이는 것이 무슨 의리란 말인가. 자네가 같이 간다면 내가 아니 갈 터일세. 나를 구하여 줄 생각이거든 튼튼한 배 한 척만 얻어주게. 자네 배도 좋을 것일세. 내가 장난이라도 부리어 보던 것이라 다른 배보다 나을지도 모르지.”

중언부인 달래다시피 하여 간신히 그리 한다는 대답을 받았다.

주인은 몸이 불편한 이교리가 너무 오래 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미안히 생각하여

내일부터라도 내가 슬금슬금 준비하여 둘 것이니 그 동안 몸조리나 잘하시오.”

하고 일어설 때, 이교리는 준비하는 것을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 이튿날 이교리가 마침 방안에 누웠을 때, 이교리를 부르러 읍에서 사령이 나왔다.

주인은 나온 사령에게 술대접을 잘한 뒤에 이교리가 일전부터 병이 나서 지금 누웠으니 앓는 사람을 어떻게 데려가느냐고 걱정하니 그 사령이 제풀로

앓는 것이야 데리고 갈 수 있나. 그대로 들어가서 원님인가 원놈인가한테 그 사연을 말하지. 원놈으로 말해도 쓸개가 빠졌지그려. 이때껏 인정을 써오다가 서울 궐자의 말 한마디에 곧 붙잡아다가 객사의 쓰레질을 시키려고 하니 말이 되나.”

하고 이교리 앓는 것은 보자는 말도 없이 그대로 돌아갔다.

사령이 간 뒤에 이교리는 주인을 청하여

한번 읍내로 잡혀가는 날이면 일은 다 틀리는 것이요, 먼 바다로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다가는 잡혀가기가 쉬울 것이니 오늘 밤에 자네가 나를 고성땅에까지 건네놓아 주겠나? 그러면 거기서부터 걸어서 어디로든지 도망할 터일세.”

의논을 고치었다.

그날 밤중에 이교리가 주인집을 떠나는데 이웃 사람이 혹시 알까 꺼리어서 주인과 단 두 사람이 어두운 속에 가만가만히 바다로 나왔다.

침침한 밤중에 거제 해변에서 배 한 척이 떠나갔다.

도망하는 이교리와 도망시키는 집주인이 그 배에 탄 것이다.

때마침 불어오는 남풍에 그 배는 돛을 높이 달고 동방을 향하여 살같이 달아나니 희미한 별빛 아래에 갈라지는 흰 물결이 띠와 같이 보이었다.

주인은 이교리를 위하여 한참 배질이라도 더하여 줄 작정으로 서편에 있는 고성을 버리고 동북으로 뱃머리를 틀어서 이튿날 새별에 웅천땅에 배를 대고 이교리를 내려놓았다.

이교리는 정한림이 써준 북방길세 글자가 머리에 박힌 까닭에 북도로 도망할 것을 미리부터 마음속에 작정하였지만, 남방 한 끝에서 북도를 생각하니 아득하기가 짝이 없을 뿐 아니라 하루 양식의 준비도 없이 도망하는 몸으로 몇천리 길을 무사히 가게 될지 몰라서 걱정스러운 생각이 머리속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기골이 남보다 유달리 튼튼한 것을 믿고 하루이틀 한데서 잠을 자고 굶으면서라도 어디까지든지 가보겠다고 결심하고 북쪽으로 올라오는데, 길이 돌더라도 촌에서 촌으로 길을 잡아서 될 수 있는 데까지 읍길을 피하였다.

이교리가 촌 농가에서도 자고 절간 판도방에서도 자고 서당에서도 자고 들판이나 덤불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며, 논둑에서 기승밥도 먹고 절에서 잿밥도 먹고 서당에서 훈생의 대궁도 먹도 한 끼 두 끼 굶기도 하면서 하여간 무사히 강원도 땅을 지나 함경도 땅을 잡아들었다.

이교리 생각에는

인제는 북도를 왔다. 북방길이란 것이 어떻게 맞으려나.’

하고 얼른 안신할 곳이 나서기를 마음으로 조이면서 여전히 북쪽으로 올라온다.

이때 이교리가 거제 배소에서 도망한 지 달포가 넘었었다.

처음 이교리의 도망한 것이 탄로되었을 때, 거제현령은 집주인을 잡아들여 중장으로 신문하였으나 칭병하고 있다가 모야무야에 도망하였다는 것 외에는 별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고, 거제현령의 치보가 경상감영으로 올라가고 경상감사의 장계가 서울로 올라와서 왕이 화도 나고 겁도 나서 일변으로 거제현령은 파직 후에 논죄하고 경상감사는 추고하라고 명하고 일변으로 엄중히 기찰하여 기어코 체포하되 체포하는 자에게는 중상이 있으리라고 팔도에 영을 내리었다.

이장곤이 북도로 도망한 형적이 있다고 하여 북도의 수령 방백은 이 소식을 듣고 중상에 탐을 내어 포교와 장교를 길에 늘어놓은 중에 이교리는 북방길을 믿으면서 북도로 올라오던 것이다.

이교리가 함경도 땅을 밟은 뒤에도 요행히 안변, 덕원, 문천, 고원, 몇 고을을 무사히 지나서 영흥 땅에 들어섰다.

한 달 나머지 갖추갖추 고생한 사람으로 오뉴월 폭양이 내리쪼이는 한낮에 논틀밭틀길을 걸어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 이교리는 어느 동리 어귀에 선 정자나무 밑에 마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이 정자나무 그늘에서 낮잠이나 한잠 자자.”

혼자서 말을 하며 누워서 막 잠이 들랴말랴 할 때, 사람의 말소리가 귀에 들리었다.

이 동리에도 수상한 사람이 온 일이 없다니 이제는 어디로 갈까?”

글쎄, 고만 읍으로 들어가세.”

그말이 수상한 데 놀라서 이교리는 잠이 달아났다.

이교리가 눈을 반쯤 뜨고 보니 기찰 다니는 장교 두 사람이 정자나무에서 몇 간 아니 되는 밭모퉁이로 돌아나온다.

일어나서 도망하려다가는 도리어 수상하게 보일 뿐이라 반눈을 도로 감고 자는 체하고 누워 있었다.

여보게. 저기 누운 것이 이 동리 사람은 아닌 모양인데.”

자네 눈에는 낯선 사람은 다 이장곤이로 보이는 것일세. 패랭이 쓰고 베옷 입은 것이 교리 다니던 양반은 아닐세.”

목소리가 차차 가깝게 들리더니 두 사람이 앞에 와서 선 모양이다.

변복은 말란 법이 있나?”

그는 그렇지.”

이교리는 인제 잡히는 것이다 생각하여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여보게, 이 발 좀 보게.”

하고 한 사람이 자기의 발을 가리키고

아이구 기막히게 크다.”

하고 다른 한 사람이 발 큰 데 놀라서 입을 벌린 모양이다.

이것이 소도적놈의 발일세. 양반치고 이 따위 큰 발 가진 것을 본 일이 있나?”

양반이 발 같지는 아니해도 그래도 누가 아나?”

아닐세, 이런 발을 가지고 과거를 하고 교리를 하여? 없는 일일세. 낯바대기도 시커멓고 우락부락하지 않은가. 소도적인지는 몰라도 이장곤이는 아닐세.”

아닌지 겐지 어찌 알아?”

두 사람의 수작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 사이에 이교리의 살은 한 점 한 점 말라드는 것 같았다.

 

그 장교들이 자는 체하는 이교리 앞에서 한참 동안 저희들의 마음대로 지껄이다가 필경은 발 큰 것이 양반 아닌 표적이라고 의논이 일치하여

그만 가세.”

아무려나 하세.”

가기로 작성하고

그 자식 낮잠 잘 잔다.”

그 자식 코빼기에 똥이나 발라 줄까.”

욕설을 남기고서 다른 데로 가버렸다.

이교리가 한번 이 곡경을 치른 뒤에는 촌이라고 염려 놓기가 어려워서 산길로 들어섰다.

나무꾼의 자욱길을 좇아서 산을 타고 골을 넘어 나가다가 나중에 길을 잃고서 헤매는 중에 해가 저물었다.

이교리는 갈길없이 무인지경인 산골에서 그날 밤을 지내는데 배고픈 것도 견디기가 어렵거니와 들짐승의 우는 소리에 간을 졸이느라고 잠 한숨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이교리가 인가를 찾아나오려고 골을 따라 내려온즉 멀지 아니한 곳에 한 동리가 나섰다.

그가 동리를 찾아가면 자연 요기할 수 있으려니 생각하고 주린 배를 움켜위고 차츰차츰 내려오는데, 붉은 상모 달린 벙거지가 그 동리로 가는 것이 언뜻 그의 눈에 뜨이었다.

사령이다. 부질없다. 다른 동리를 찾아가자.’

이교리는 그 동리를 옆에 두고 그대로 지나서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남은 기운이 갑자기 일시에 빠졌는지 칠팝십 노인같이 지척지척 걸어간다.

그는 다른동리를 찾으려고 사방을 둘러보나 그 동리가 외딴 동리라 다시는 동리가 없다.

그는 기운이 시진하여 귀는 울고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한두 걸음 더 걸어나 가려고 하다가 그대로 길에 엎드렸다.

이교리 정신이 돌아나며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려고 애를썼다.

그러나 일식하는 날 같아서 보이는 물건이 모두 똑똑치 아니하였다.

멀지 아니한 곳에 흘러가는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그 편으로 기어갔다.

얼마 아니 가서 물컹하고 손에 집히는 것이 있었다.

밥이다!”

그가 먹으려고 자세자세 들여다보니 똥이다.

보리밥이 채 다 삭지 아니한 똥이다.

그는 낙심하고 시냇가로 기어와서 물을 움켜 마시었다.

이교리는 정신이 깨끗하여지며 길송장이 되는 것이다염려도 생기고 북방길이 뒤쪽으로 맞는 것이 아닌가의심도 나섰다.

물을 마신 까닭에 목은 타지 아니하나 오장이 당기기는 일반이라 그는 아까 밥으로 속던 것을 다시 한번 가보려고 간신히 일어서서 비척거리며 걸어갔다.

가서 보니 똥은 똥이나 보리쌀알이 많이 그대로 있다.

그는 이것저것을 생각할 것도 없이 손으로 움키어 가지고 도로 시냇가로 나와서 보리쌀알을 물에 일어 골라서 입에 넣어 목으로 넘기었다.

그 뒤에야 눈에 보이는 물건이 똑똑하여질 뿐이 아니라 마음에는 길이라도 걸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리가 천근같이 무거워서 시냇가에 있는 풀밭에 누워서 넘어졌을 때, 가죽이 벗겨진 이마와 코에 비름나물 잎을 뚜드려 붙였다.

이교리는 얼마 동안 누워 있다가 천행으로 나무꾼 하나를 만나서 찬밥 한술을 얻어먹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여 무사히 용흉강을 건너서 어느 농가 봉당에서 하룻밤을 편히 자고, 이튿날 정평을 지나 함훙 땅에 들어섰다.

함흥 감영이 가까운 까닭에 더욱 조심이 되어서 멀리멀리 둘러보며 가는 중에, 저 건너편에서 장교들이 떼를 지어 나오는 것을 보고 소로에서 소로로 도망하여 어느 시냇가에 오기까지 달음질을 쉬지 아니하였다.

숨은 턱에 닿고 목은 말랐다.

개버드나무 아래서 처녀 하나가 빨래를 하는데 그 옆에 바가지가 놓인 것을 보고 염치를 돌아볼 사이가 없이 물을 한 바가지 떠달라고 청하였다.

그 처녀는 헐떡거리는 나그네를 한번 흘끗 돌아보더니 바가지에 물을 떠서 한 손이 들고 한 손으로 머리 위에 늘어진 버들가지에서 잎사귀를 따서 물바가지에 띄운 뒤에 외면하여 바가지 든 팔을 내어미었다.

이교리가 처음에는 버들잎 띄운 것을 괴상히 생각할 여가도 없이 덥석 받아서 버들잎을 불어가며 물을 다 마시고 바가지를 도로 줄 때, 처녀의 얼굴을 잠깐 보니 달덩이 같은 얼굴이 복성스럽기도 하거니와 태도가 의젓하여 재상가의 딸이나 다름이 없다.

이교리는 언덕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왜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줄까?’

처녀의 의사를 추측하여 생각하며 처녀의 곁태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1권 봉단편 4장 이교리의 안신

 

그 처녀는 분홍 모시 적삼에 청베 치마를 입었는데 적삼은 낡아서 군데군데 미어졌고 치마는 승새가 굵어서 어레미집 같으니 구차한 집 처자인 것이 분명하고, 또 빨래하는 손을 보더라도 살이 희기는 희나 결이 곱지 못하고 마디가 굵으니 험한 일을 하는 표적이 드러난다.

저런 차자에게 장가를 들고 시골 구석에 묻히허 지냈더면 이런 죽을 고생도 아니할 것이지.’

이교리는 팔자 한탄하다가 자기의 한숨 소리에 처녀가 혹 돌아볼까 생각하여 방망이 소리가 그칠 때에는 한숨을 땅이 꺼지도록 크게 쉬었다.

그 처녀는 방망이질을 그치면 비비고 쥐어짜고 또다시 방망이질을 시작하고 한숨 쉬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은 아는 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이교리가 처녀에게 말을 불이고 싶으나 혹 무악을 볼지 몰라서 할까말까 주저하다가 방망이가 쉬는 틈에 처녀에게로 고개를 내밀며

날 좀 보아.”

하고 반말을 붙이니 그 쳐녀가 돌아본다.

시원한 눈 속에는 총명이 가득하고 천연스러운 얼굴에는 웃도 모양도 없고 성내는 기색도 없다.

버들잎은 무어야?”

이교리는 할 말이 없는 것보다도 그 버들잎이 종시 알고 싶었던 것이다.

처녀는 웃는 듯 마는 듯하게 웃고 말이 없이 다시 방망이를 잡는다.

이교리가 처녀의 대답을 듣지 못하고 또 지싯지싯 말을 붙이다가는 견모가 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앉았던 자리에 드러누워서 아까 허둥지둥 쫓겨오던 모양과 지금의 방망이 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는 모양을 함께 머릿속에 그리어 보고 지금 같이 다리가 아프고 몸이 무거워서는 곧 잡힌다 하여도 도망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틈에 해는 너웃너웃 지게 되고 빨래도 끝이났다.

처녀는 빨랫가지를 자배기에 주워담고 밥 담았던 바가지를 그 위에 놓고나서 머리 위에 또아리를 얹고 자배기를 들어 이려는데, 종일 빨래질에 팔에 알이 배었든지 자배기를 드는 모양이 남보기에도 거북하다.

처녀의 거동을 보고 있던 이교리가 언덕에서 쫓아내려와서 자배기 드는 것을 부축하여 머리 위에 얹어주니 처녀는 또 웃는 듯 마는 듯 웃고 말이 없이 돌아서 간다.

시내에서 활 한 바탕이착실히 되는 곳에 외딴집이 있다.

멀찍이 처녀의 뒤를 따라온 이교리는 그 집 삽작 밖에 와서

주인 좀 보입시다.”

주인을 찾으니 나이 사오십 되어 보이는 사나이가 안에서 나오며

무슨 일로 찾소?”

하고 이교리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이교리가

집 없는 과객으로 하룻밤 자자고 왔소.”

온 뜻을 말하니 그 사나이가 곧 대답을 아니하고 안을 향하여

과객이 와서 하룻밤 재워 달라는데 어찌할까?”

물어서, 거센 여인의 목소리로

어디 재울 데 있소?”

하는 것을 듣고 그제야

잘 데 없소, 다른 데로 가오.”

하고 쫓는다.

하룻밤 자고 갑시다.”

잘 데 없다니까 그래.”

좀 자고 갑시다.”

아따 잔소리 말고 가오.”

사람의 집에서 사람이 못 잔단 말이오?”

사람의 집이면 다 당신의 집이오?”

삽작 밖에서 자자’ ‘못잔다시비판이 벌어졌을 때, 안에서 얼굴이 둥글고 넓적한 심술스러운 여인 하나와 빨래하던 어여쁜 처녀가 내다보고서 그 처녀가 고운 목소리로

어머니!”

불러가지고 그 여인에게 무어라 무어라말을 하더니 그 여인이

여보, 저렇게 염치 없이 모리악 쓰는 이는 처음 보겠구려. 말하기 귀찮거든 아무데서나 하룻밤 재워 보내오.”

사나이에게 말하니 그 사나이는

그럴 테면 진작 재워 보내자지.”

혀를 툭툭 차고 나서 이교리를 보며

과객질을 유년 해 보았구려. 들어오.”

볼멘 소리를 하였다.

 

그 집 주인은 아랫방이 불 안 때는 방이라 덥지가 않다고 과객을 인도하여, 이교리가 그 아랫방에 들어와서 보니, 이구석 저구석에 버들 일거리가 늘어놓였다.

다 만든 모코리, 동고리도 있고 날개를 꾸미지 아니한 키바탕도 있다.

이교리는 선뜻 백정의 집이구나.’ 짐작하고 자기가 삼한갑족의 양반으로 백정의 집에 와서 자는 것은 창피하게 여기거나 또는 옥당 문관의 신분으로 백정의 집에 와서 자게 된 것을 한심하게 생각하느니보다도

그 처자가 백정의 딸이라니 개천에서 용 나는 격이다.’

처녀의 본색이 미천한 것을 의외일로 생각하며

그 처자의 그 버들잎이 본색을 가리키는 군호이었구나.’

처녀의 의사를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고 그 총명을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그날 밤에 이교리가 자는지마는지 하게 한잠을 자고 나니 골치가 패는 듯 아프고 몸이 오그라들도록 오한이 나서 큰 키를 한줌만하게 뭉치고 머리를 부둥키고 누웠다가 외기가 싫은 까닥에 억지로 일어나서 초저녁에 덥다고 열어놓았던 창문을 간신히 닫고, 그리하고 다시 누운 뒤에는 한기가 돌다 신열이 났다하는 통에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앓으며 반밤을 지내었다.

이튿날 식전이다.

그 집 식구들이 모두 일어났을 때, 아랫방의 창문이 닫기고 과객의 기척이 없는 것을 괴상히 생각하여 안여인이 그 사나이더러

여보, 과객 좀 깨우. 과객질하는 신세에 늦잠은 다 무어야.”

그 사섷을 끝내자마자, 집 뒤에 있는 가죽나무에서 여러 까마귀들이 야단스럽게 우는 것을 듣고 아래윗니를 탁탁 맞히며 침을 세번 뱉으니 그 사나이도 여인을 따라서 침을 튀튀 배앝고 아랫방 창문 밖으로 와서

여보!”

소리를 지르며 문을 왈칵 열고 보더니 바로 여인 있는 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큰일났소! 과객 죽었소!”

소리를 친다.

여인은

죽다니?”

처녀는

죽다니요?”

하고 모두 창문 밖으로 와서 참말 죽었나하고 들여다를 보니 과객은 그 큰 엄장에 네활개를 벌리고 가슴을 풀어젖히고 눈을 감고 누웠는데 죽은 사람 같기도 하나, 이따금 응응하는 앓는 소리가 들린다.

여인이 사나이더러 불러보라고 하여 여보 여보!” 여러 번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없고 응응소리만 들릴 뿐이다.

과객이 죽은 것이 아니라 앓는 것인 줄은 알았으나 큰일은 일반이라 내외간 공론이 시작되었다.

저걸 어떻게 하오?”

길에 내다버립시다.”

누가 드나?”

당신이 들지 누가 들어? 내가 부축해 주리다.”

참말로 내다버릴 거조를 차리려고 하니 옆에 있던 처녀는

인정에 차마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 부모의 하는 말을 딱하게 여긴다.

그 여인이 딸에게 손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요년아, 네가 어제 공연히 불쌍해 보이느니 무어니 해서 재운 까닭에 큰일을 내고도 또 무슨 소리냐!”

화를 내니 사나이가

그 애야 무슨 죄가 있소.”

여인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 두둔하고

화는 고만 내고 우리 얼른 저 반송장이나 처치합시다.”

안해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

여인은 그가 딸 역성 들려는데 비위가 틀리어 화를 더 내며

여보, 당신은 말도 마오. 죽지도 않은 것을 왜 죽었다고 소리 질렀어. 나는 놀라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었소.”

사나이에게로 돌려붙는 것을 사나이가

아따, 잘못했소.”

피하니까 다시 딸에게로 화를 돌리어

너는 집에서 궂은 일이 나도 좋겠니?”

야단한다.

처녀는 부드럽게 어머니불러가지고

그럴 것이 무어 있어요? 아랫말 작은아버지더러 좀 와보라고 하시지요. 약 몇 첩 써서 나을 병 같으면 고쳐주는 것도 적덕 아니에요?”

여인은 적덕이란 딸의 말을 뇌면서도 나중에 사나이더러

어떻게 하겠소?”

물으니 그 사나이가 딸의 말이 근리하다 하여 내외간에 공론을 다시 하고 의약 묘리 잘 아는 그 아우를 불러다 보인 뒤에 병이 할 수 없다거든 그때 내다버리기로 하였다.

아랫말 네가 갔다오너라.”

그 딸을 보내면서도 여인은

요년, 팔자에 없는 송장만 치게 돼봐라.”

딸을 벼르고 그 사나이는

내괴, 식전부터 까마귀가 야단이야.”

하고 또 침을 퉤퉤 배앝았다.

처녀가 간 뒤 한식경이 지났다.

그 내외가 번갈아 가며

그만하면 올 터인데.”

그만하면 올 터인데.”

하고 기다리던 차에 처녀가 혼자 돌아왔다.

처녀의 입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그 여인이

너 어째 혼자왔니?”

혼자 온 것을 나무라는 듯이 물으니

작은아버지가 집에 아니 계십디다. 그래서 고원댁 오빠를 가보고 좀 찾아서 뫼시고 오라고 했지요. 나는 어머니 아버지가 기다리실까 봐 먼제 왔세요.”

처녀는 청하러 갔던 삼촌과 같이 오지 못한 것을 발명하이 대답하였다.

아랫방 병자는 앓는 소리조차 없어지고 시각이 위태할 것 같은데, 의원 아우는 좀처럼 오지 아니하여 주인 사나이가 여러 번 삽작 밖을 내다보았다.

그가 나중번에 내다보다가 들어오며

저기 돌이하고 같이 오는군.”

선성을 놓으니 그 여인은 안방문 앞에 놓인 들마루에 앉았다가 일어서며

돌이란 놈은 왜 오나? 저의 집에 나무나 해주지 않고.”

하고 혀를 찼다.

조금 있다가 주인의 아우와 돌이라는 떠꺼머리 총각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오더니 주인의 아우는 바로 사나이에게로 와서 인사하며

어떤 손이 와서 앓는다지요?”

묻고 총각은 처녀를 보고

너의 작은아버지를 뫼셔 왔으니 인제 상급이 있어야지. 염낭이나 하나 지어다고.”

조롱한다.

여인은 먼저 자기를 아는 체하지 않는 데 심술이 나서 돌이를 불러세우고

며칠 만에들 보면서 인사 한마디가 없단 말이냐! 아지미 대접은 알뜰히 한다. 그리하고 실

없는 소리만 하면 제일이란 말이냐! 너도 나이 이십이니 지각 좀 차려라!”

꾸짖는데 시동생까지도 껴잡이 넣으니 돌이가

고모님, 잘못 되었소이다. 차후에는 지각을 차리겠소이다.”

사과하고 주인의 아우도 빙그레 웃으며

아주머니, 날새 안녕하십니까?”

인사한 까닭에 여인의 심술은 즉시 풀리었다.

주인의 아우가 아랫방에 와서 병자의 모양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또 맥을 짚어보더니 하마

터면 탈이 날 뻔하였다고 하며, 약낭 끈을 끄르고 우황청심환 한 개를 내어 동변이 없으면 온수라도 좋다고 온수에 개어서 병자의 입을 어기고 흘려넣었다.

아랫방 문을 닫아 두고 나와서 식구들이 아침을 먹으려고 할 제 여인이

아침 좀 잡수.”

시동생에게 밥을 권하니 주인의 아우는

먹고 왔습니다. 어서들 잡스세요.”

하고

봉단아!”

처녀를 불러서

나 물이나 한그릇 떠다 다오.”

하여 물그릇을 막 받아들자, 아랫방에서

애구애구 물 좀 주십시오.”

하는 병자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리니까 주인의 아우가 그 물을 먹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일어선다.

봉단이가

작은아바지 잡수세요. 다시 떠다 주지요.”

무심히 말하는 것을 그 삼촌이 물끄러미 보며

네가 갖다 먹이려느냐?”

하고 물그릇을 내주려는 체하니 봉단이는

아니에요, 작은 아버지도.”

하고 얼굴을 붉힌다.

주인의 아우가 그 물그릇을 가지고 가더니 병자를 먹이고 와서

물그릇을 뺏어가다시피 받아가지고 한숨에 다 키어버리던걸.”

여럿에게 휘뚜루 들으라고 말하고 특별히 형수에게 대하여 말을 붙인다.

아주머니, 앓는 손의 얼굴을 잘 보셨소?”

잘 보고 말고요.”

얼굴이 사내답지요? 천정이 번듯하고 코도 좋고 입도 좋고 눈이 또 썩 좋아. 아까 물 받아먹을때 눈을 뜨는데 앓던 사람이라 열기가 없을 뿐이지 눈만 보아도 초초한 인물이 아닌 표가 납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 골격도 사내답지요?”

상판대기가 과객질할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과객질이나 하고 돌아다니니.”

일시 과객질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세요?”

수숙간에 왕래하는 말을 듣고 있던 그 형이 일시 과객질이란 말을 타내서

아니다. 과객질은 유년 해본 사람이더라. 일시가 다 무어냐.”

말하니까 지각 차리느라고 이때껏 잠자코 있던 돌이가 참례를 들어

나 보기엔 과객질보다 한량질 해먹는 사람 같든데요.”

저의 고모부의 말이 당치 않은 듯이 말한다.

주인의 아우는 형의 말이나 돌이의 말이나 모두 접어놓고 조카딸더러

너 보기엔 어떻더냐?”

묻다가 그 얼굴 붉히는 것을 보고 무슨 의미가 있는 듯이 허허허웃으니 봉단이 부모와 돌이는 아무 의미도 없이 모두 그 웃음에 끄리어 웃었다.

봉단이의 얼굴은 더 붉었졌다.

 

인사불성하고 앓고 이교리가 청심환 한 개에 기운이 통하고 가미삼금탕 몇 첩에 대세가 돌리어서 그날로 드나드는 사람을 알아볼 뿐이 아니라 사람을 보면 머리를 들썩거리며 미안하다’, ‘감사하다말하게 되었다.

며칠동안 이교리가 병을 조리하는 중에 주인집의 일을 자연히 많이 알게 되었으니 주인의 성명이 양주삼인 것과 봉단이가 주인의 무남독녀로 지금 나이가 18세인 것도 알았고, 주인의 아우 주팔이가 의약뿐이 아니라 문식이 있는 까닭에 근처 양민들이 백정환자라고 별명지어 부른다는 것과 주인의 처질 돌이가 성이 임가요, 돌이의 아버지가 고원 가서 장가든 까닭에 결찌끼리 고원댁이라고 택호로 부른다는 것도 알았다.

이교리가 자기는 서울사는 김대건이란 사람으로 어느 대가에서 하인 노릇하다가 애매히 죄명을 쓰고 쫓겨나서 홧김에 팔도강산을 구경다닌다고 거짓말로 본색을 감춘 까닭에 그 사람들은 모두 이교리를 김서방이라고 불렀다.

이교리인 김서방이 긴 이야기를 할 만큼 병이 나으니까 김서방의 서울 이야기를 듣느라고 아랫방에는 사람이 비지 아니하였다.

주팔이는 김서방과 연상약할 뿐이 아니라 유식한 것이 마음에 맞아 2마장이나 되는 아랫말서 하루 두서너번씩 보러오고, 돌이는 김서방의 언어 거동이 점잖아서 비위에 맞지 아니하나 못듣던 이야기를 듣는데 팔리어서 매일 저녁으로 놀러왔다.

김서방은 이 집을 떠나서 갈 데도 없거니와 여러 사람들과 정분이 생기고 더욱이 봉단이가 있는 까닭에 이 집을 떠나갈 마음도 없었다.

봉단이의 어머니가 혹 불시에 축객령이나 놓지 아니할까 속으로 겁이나서 그 여인이 간혹 서울일을 물으면 정성껏 대답하고 또 재미스러운 이야기와 웃을 만할 말로 환심을 사려고 애쓴 결과, 가라는 영이 내리기는 고사하고 조밥은 먹을 것이 있으니 몸이 소복되도록 안심하고 있으라는 특별한 혜택을 입게 되었다.

어느날 초저녁에 그 집 식구들과 주팔이와 돌이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서로 이야기하는데, 이야기거리가 변변치 아니하여 이야기판이 심심하여지니까 봉단이 어머니가

김서방을 불러내서 우스운 소리나 좀 지껄이라고 합시다.”

말하고 곧

김서방!”

부르니 주인이

바깥에 나와 오래 앉았어도 괜찮을까?”

김서방의 병이 채 다 낫지 아니한 것을 염려하여 말하는 것을

무얼 젊은 사내자식이 그것쯤 어떨라구.”

말대꾸를 하며 일변

이리좀 나오.”

소리를 질렀다.

김서방이

.”

하고 나오는데 어지러운 까닭으로 걸음이 비슬비슬하였다.

김서방 나오려는 것을 보고 봉단이는 어느 틈에 슬그머니 몸을 일어 들마루에 올라가서 등잔불을 켜놓고 하다 둔 고리짝을 겯기 시직하였다.

김서방이 나와 앉아서 가끔 들마루 편을 바라보며 봉단이 어머니의 하라는 대로 또 서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가, 근래 서울은 팔도에서 기생들이 올라와서 계집천지가 되고 서방있는 계집들도 염치가 없어져서 두번 세번 시집을 간다고 이야기 하니 턱을 치어들고 듣던 돌이가

제기 서울이나 갈까 부다. 장가 좀 들어보게.”

말하여 그 말에 여러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주팔이는 웃으면서

여보 김서방, 당신 안해는 다시 시집 못가게 단단히 두고 왔소?”

물어서 그 묻는 말에 여러 사람은 또다시 웃었다.

김서방은 자기가 3년전 스물여섯까지 돌이같이 떠꺼머리로 있다가 간신히 장가를 들었는데, 안해의 얼굴이 반주그레한 탓으로 곧 상전 양반에게 빼앗기고 지금은 안해가 없다고 이야기하니 다른 사람은 들을 만하고 있고 돌이는 남의 일일망정 분하여 한다.

여보, 계집을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었단 말이오?”

그럼 양반을 어떻게 하나?”

양반의 배때기엔 칼이 안 들어가오? 양반을 어떻게 하나라니 당신의 키가 아깝소.”

김서방은 안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웃었다.

그럭저럭 이야기판이 식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이던 주팔이는 너무 아래 바깥에 나와 앉아서 몸에 이롭지 못하다고 김서방을 권하여 방으로 들여보낸 뒤, 김서방이 안해가 없다니 사위로 얻으면 어떻겠느냐고 형수와 형에게 발을 비친즉 형은 대답이 없이 그 형수의 얼굴을 바라보고 형수는 말없이 고개를 외칠 뿐인데 돌이가

누이를 갖다가 또 빼앗기라고?”

분기가 남은 어조로 말을 한다.

그리하니까 주팔이는

너는 잠자코 있어라!”

돌이를 제지하고 형수의 기색을 보며

이 담날 다시 이야기합시다.”

뒤를 두고 말을 그치었다.

며칠뒤에 주팔이가 조용히 형과 형수를 대하여 사윗감으로 김서방보다 더 나은 사람을 고를 수 없을 것이니 불계하고 혼인하라고 권하였다.

주삼의 안해는 사람이 거세기는 하나 지각이 많은 시동생의 말을 남편의 말보다는 더 중하게 여기는 터이라 그 권을 받아

아재 말대로 그년의 혼인을 정합시다.”

말하게까지 되었는데 주삼이는 그 아우의 권유요, 그 안해의 말이지만 선뜻 허락하기를 주저하였다.

나이가 너무 틀려. 스물아홉하고 열여덟하고.”

여보, 다릴사위는 나이 좀 지긋한 것이 좋소.”

형님, 사내 나이 많으면 나중에 같이 늙게 되지요.”

그 안해와 그 아우의 말이 이유는 각각 다르더라도 사나이의 나이 많은 것을 좋다기는 일반이라 주삼이가 나이 틀리는 것을 탈잡다가 말이 몰리니까

그래도 막중대사를 그렇게 경솔히 정할 수가 있나. 좀더 생각해보지. 그러고 우선 김서방의 의향이 어떤지도 알아야지.”

저 편에서 장가들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알아보고서 말하자고 한다.

의향이 무슨 의향이야? 감지덕지할 터이지.”

가죽신에 짚신날이 소용 있나? 김서방도 우리네와는 다른 사람이라 그 의향을 알 수 없지.”

저는 삼정승 육판서의 자식인가? 무슨 말라죽을 의향이야! 싫다거든 고만두지.”

그러자니 창피하지.”

우리가 창피한가 제가 고약하지. 다 죽은 것을 우리가 살려주지 않았는가베.”

내외간에 쓸데없는 말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주팔이가 듣다 못하여서

"그것일랑 내게 맡기시오. 내가 창피지 않게 물어볼 것이니.”

하고 말을 가로막고

지금이라도 물어보리까?”

하고 형과 형수의 얼굴을 번갈아 치어다보니 주삼이는

아무케나 하려무나.”

고개를 끄덕이고 주삼의 안해는

그 자식이 두말만 하거든 다리를 퉁겨 내쫓읍시다.”

눈썹을 일으켰다.

주팔이가 아랫방으로 내려가서 김서방을 보고 이 말 저 말 수어하다가

만일 우리 형님이 봉단이를 당신 준다면 당신이 어찌할 터이오?”

물으니 김서방은 아 입을 벌리고서 한참 대답이 없더니

어찌하다니요?”

뒤잡아 묻는데, 그 묻는 것이 묻고 싶어 묻는 것이 아니라 아무 말도 없이 앉았기가 겸연쩍어서 엄적으로 묻는 것 같았다.

주팔이는 웃으면서

봉단이가 싫진 않지만 뒷생각 없이 선뜻 장가간다는 게 어려운 것 아니오?”

남의 속을 뚫고 들여다보듯이 말하니 김서방은 한번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치어들며

나로는 두말할 것이 없소. 나 같은 사람에게 줄는지들 모르지.”

말하는데 얼굴에 무슨 결심하는 빛이 보이었다.

주팔이는

잘 알았소. 이따라도 또 오리다.”

하고 몸을 일어서 나갔다.

이교리인 김서방은 주팔의 말이 아니라도 뒷날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목전 안신하는데 제일 상책이라고 생각하여 두말이 없다고까지 단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쉽사리 단언하도록 결심하게 된 것은 봉단에게 마음이 끌리었던 까닭이다.

주팔이가 형을 보고

김서방은 두말이 없답디다.”

하니 그 형수가 내달이 말하였다.

그렇지, 당초에 두말이 있을게요?”

이리하여 김서방과 봉단의 혼사가 결정되고 주팔이가 날을 받아 칠월칠석날로 혼인 날짜까지 작정되었다.

주삼이 내외는 말할 것도 없고 주팔이와 돌이는 혼인 준비하느라고 여러 날 동안 분주히 지내다가 혼인 전날밤에 들어가 돌마루에 앉아있는 봉단의 옆에 와서 가까이 앉으며

봉단아, 너는 내일이면 어른이구나. 어른 되었다고 오래비 대접을 조금이라도 나쁘게하면 네 대신으로 김서방을 경쳐놓을 테다!”

너털웃음을 웃고서

이애 그러나 저러나 김서방이 안해가 없다더니 그것이 멀쩡한 거짓말이래. 네가 첩노릇할 일이 딱하다.”

봉단이는 김서방과 혼인을 정하게 된 것이 마음에 싫지는 아니하여도 김서방이 안해가 있지 아니한가 의심은 없지 아니하던터라, 지금 돌이의 말이 자기를 조롱하는 실없은 소리인줄은 알지마는 그 의심은 속으로 더하여졌다.

 

그날 밤에 봉단이가 자다가 갑자기 병이 났다.

날은 거의 샐 때가 되었는데 봉단이는 머리를 동이고 누워서 앓는 소리를 그치지 아니하니 주산의 안해는

이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법석을 벌이고 주삼이는

공교한 일이지. 평일에 병이 없던 아이가 하필 혼인 전날 밤에 병이 나다니 내일 대사는 다 지냈다. 할 수 없이 날짜를 눌리는 수 밖에 없다.”

쓴입맛을 다시고 또 주팔이는

신열이 좀 있어도 대단치 아니하고 맥은 아무렇지도 아니한데 괴상스럽다.”

의심을 마지 아니하였다.

부모와 삼촌이 모두 봉단의 좌우에 둘러 앉아 그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이 체했느냐, 속이 아프냐?”

감기가 들었느냐, 머리만 아프냐?”

여러 가지로 물어보아도 봉단이는 대답이 없었다.

나중의 주삼의 안해가

뜬것이 들린 것이오. 그렇기에 이렇게 갑자기 병이 나지.”

말하자, 봉단이가 별안간 정신기가 좀 나는듯이 그 어머니를 치어다보며 꿈을 꾸고 병을 얻었으니 뜬것이 분명하다는 뜻을 말하였다.

무슨 꿈이냐?”

꿈 이야기 좀 해라.”

다투어 말하는 그 아버지나 삼촌은 본체만체하고 봉단이는

어머니!”

불러가지고

아까 꿈에요.”

하고 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늙은 할망구 하나가 날이 시퍼런 칼을 쥐고 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이년 너를 죽이러 천리길을 쫓아왔다.’ 대번에 호령합디다. 무서운 마음을 참고 무슨 죄인지 죄나 알고 죽어지이다빌며 말하니까 내 딸이 있는데 내 사위를 빼앗아 가는 년은 죽여 마땅하다!’ 또 호령합디다. 부끄러운 마음을 참고 저의 부모가 안해 없단 말을 듣고 정한 일이랍니다.’ 발명하니까 거짓말을 곧이듣다니 죽일 년이다!’ 여전히 호령합디다. 그제는 마음에 좀 분한 생각이 나서 거짓말을 했든지 곧이를 들었든지간에 내게야 무슨 아랑곳이 있겠습니까?' 말을 불쾌히 하였더니 요년, 무슨 앙탈이냐! 죽어봐라!‘ 소리를 지르며 칼을 들고 달려듭디다. 잠이 깨면 곧 한전이 나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머리가 정신없이 아파요.“

병난 사연을 말하여 꿈 이야기를 마치었다.

가위가 눌렸던 것이구나.”

의심을 하면 울타리에 널린 치마가 허깨비의 옷자락으로 보이는 법이야. 네가 의심을 가졌던 것이지.”

주삼의 형제가 봉단에게 말하고 있는 틈에 주삼의 안해는 몸을 일어 방 밖으로 나갔다.

한참동안이나 지나도 다시 들어오지 아니하니까 주팔이는 그 형수가 김서방의 방에 가서 해거를 부리고 있지 아니한가 의심하여

아주머니가 어디를 갔을까? 나가 보고 오리다.”

하고 방에서 나오다가 마침 그 형수가 무엇을 두 손에 들고 삽작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부정 풀러 가는 줄을 짐작하면서 그 뒤를 따라갔다.

주삼의 안해는 길가에 있는 어두컴컴한 풀밭머리에 가서 동향하고 서더니

물 우에 김첨지 물 아래 김낭청 동무들과 같이 가소, 걸게 먹고 빨리 가소, 가지 않고 지체하면, 엄나무 말뚝 무쇠 두멍에, 세상 구경 못하리니, 여율령 어서 가소 쉑쉑.”

하면서 바가지에 담은 묽은 조죽을 내끼얹고 또 왼발을 구르면서 식칼을 세 번 내던지고 그리하고 돌아서 들어온다.

여보 아주머니!”

주팔이가 부르니

에구 깜짝 놀라겠구려!”

하고 우뚝 선다.

김낭청이고 김첨지고 고만두고 나를 따라 김서방한테나 가봅시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말을 듣기만 하시오.”

그리하여 수숙이 같이 아랫방으로 와서 자는 김서방을 깨워가지고 주팔이가 봉단의 병난 이야기와 봉단의 꿈 이야기를 대강대강 말하고서

의심이 있었던 까닭에 꿈도 꾸고 병도 난 것이니 그 의심을 풀어주어야 할 터인데...”

하고 수단 없는 것을 걱정한즉 김서방은 자기의 안해를 상전에게 빼앗긴 것은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는 사실이라고 중언부언하고 만일 이것이 거짓말이면 발설지옥에 떨어져 죽어도 한가를 아니한다고 맹세를 치며 말하였다.

주팔이는

우리야 어디 의심하오마는 나이 어린 계집애라 그렇소그려.”

하고 도로 나와 윗방으로 오는 길에 그 형수에게 말하였다.

지금 들은 말씀을 한마디 빼지 말고 봉단이에게 들려주시지요. ”

주팔이가 형수와 같이 방으로 들어와서 봉단을 보고

아까와 좀 어떠냐?”

물으니까 봉단이는 말이 없고 주삼이가

앓는 소리를 아니하니 그만한 것 같다.”

하고 대신 대답하였다.

주팔이는 형수를 돌아보며

죽 쑤어 버린 효험이 당장에 났습니다그려. 그렇지만 김서방의 맹세만은 못하리다. 김서방의 말을 좀 자세히 들려주시지요. ”

봉단의 어머니가 김서방이 맹세치며 하던 말을 다소간 보태어 옮기었다.

봉단이는 스르르 눈을 감고 혼곤히 잠이 든 것같이 누웠더니 혼인날인 칠석날 아침해가 높이 돋았을 때, 씻은 듯 부신 듯 일어났다.

대사를 받은 날에 지내게 되니 불행중 다행이다. ”

네년의 덕에 잠 못자고 눈이 아파 죽겠다.”

기뻐하는 부모를 대할 때는 봉단의 얼굴에 미안히 여기는 기색이 많았으나

김서방의 맹세가 당약이다. ”

조롱하는 삼촌을 볼 때에는 봉단이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얼굴을 붉히었다.

해가 미처 한낮 때 못 되어서 초례청의 준비도 다 되었고 신랑 신부의 치장도 다 되었다.

준비니 치장이니 하여야 별것이 없었다.

주삼의 내외가 주팔의 주장을 좇아서 여간 것은 모두 제폐하였다.

마당에 차일 치고 멍석 위에 새 돗 펴고 돗자리 위에 주팔의 글씨로 도지단 복지원이라 써붙이고 정한 사발에 정화수를 가득히 떠서 깨끗한 소반에 올려 놓은 것이 초례청의 준비이었으며, 망건을 쓰고 초립을 쓰고 청베 도포에 붉은 술띠를 둘러 띤 것과 큰 다리 작은 다리를 꼭지꼭지 한데 묶어서 큰머리 명색을 틀어 얹고 한삼 달린 겹저고리에 긴 치마를 늘인 것이 신랑 신부의 치장이었다.

또 대사를 지내는 주삼의 집이 외딴집일 뿐 아니라 가근방에 사는 주삼의 결찌가 많지 못하던 까닭에 대사의 구경꾼도 몇 사람이 못 되었다.

말하자면 구메혼인이나 별로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초례 절차도 주팔이가 간단하게 정하여 그날로 초례청인 마당에서 교배를 마치고 신방인 건넌방에서 방합례를 지내고 그날 밤으로 신방을 차리게 되었다.

해가 지고 저녁밥이 끝난 뒤에 신방에는 황초 한 쌍을 켜서 놓고 떡과 고기를 늘어놓은 상 한상을 차려놓고 나이 지긋한 여인 하나가 신부를 데리고 들어와서 일어섰던 신랑과 마주 대하여 앉히어 놓고 문을 닫고 나갔다.

이교리인 김서방은 '연분이란 정한 것이 있는 게다. 북방길이 이 연분을 가리킨 것이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어여쁜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고 앉았다가 신부에게로 가까이 가서 정수리를 누르는 큰머리를 떼 내려주고 빙그레 웃으면서 신부의 발을 끌어낸다.

맨발질하던 마당발이라 버선이 모양 없다.

신랑이 발을 잡고 버선을 벗기려고 하니 신부는 치마 밑으로 오므렸다.

오므리면 끌어내고 끌어내면 오므리고 신랑은 가도를 이 발에서 세우려는 듯이 짐짓 끌어내고 신부는 편심을 이 발로 드러내려는 듯이 굳이 오므린다.

바깥에서 이 모양을 엿보던 신방 지키는 사람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여 낄낄 소리를 내니 김서방은 한번 소리를 내어 웃고 발을 놓고 일어서서 부집게로 촛불들을 집어 끄고 부스럭부스럭 신부의 옷을 벗기었다.

이튿날 돌이가 일지 중 젊은 사람을 두서넛 데리고 와서 자리보기한다고 한참 동안 야단법석을 벌이었다.

김서방의 족장을 때려 색시 훔친 죄를 물어보겠다고 돌이가 얼쩡거리다가

신랑 다는 것이 총각놈에게 당치 않은 일이다.”

고모에게 야단도 만났으려니와 김서방같이 큰 사람에게 손걸기가 엄청나서

족장만은 용서하자.”

그만두고 김서방과 봉단이를 등을 대어 묶어놓고 갖은 조롱을 다하였다.

돌이의 법석 바람에 주삼의 집의 술 몇 병, 떡 몇 그릇, 도야지고기 몇 접시가 없어졌다.

혼인 지내고 오는 손님을 치른 뒤에는 주삼이가 김서방을 데리고 가근방에 사는 일지를 찾아보러 다니었다.

그리하여 김서방은 주팔의 집에 가서 쇠가죽 다루는 것도 구경하고 돌이의 집에 가서 돌이의 늙은 아버지에게 버들 벗기는 법도 이야기 듣게 되었다.

돌이의 어머니는 골골하는 병객이나 돌이의 아버지는 육십 넘은 늙은이가 기운이 좋아서 젊은 사람만 못지 아니하던 것이다.

그 기운 좋은 늙은이가 김서방을 보고

돌이란 놈이 집에 좀 붙어 있었으면 나도 나다닐 틈이 있겠는데 병객 하나만 남겨두고 집을 비울 수가 있어야지. 틈 있거든 놀러와서 재미있는 서울 이야기나 좀 들려주소. 나도 시골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니. ”

돌이 아버지는 고담이 일수라고 같이 갔던 주삼이가 김서방에게 말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아니하여서 봉단이가 남 보는 데서는 김서방과 서로 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단둘이 있어서는 정답게 속살거리고 더욱이 베개 위에서 이야기할 때는 재미가 참깨같이 쏟아졌다.

어느 날 저녁에 김서방이 주팔에게 놀러 갔다가 밤이 든 뒤에 돌아오니 그의 젊은 안해가 마당에 맷방석을 깔고 혼자 앉아서 동고리를 만들며 기다리고 있다가 삽작문을 열어주면서

인제 오세요?”

인사하고 뒤를 따라 들어오며

내가 하든 일을 조금만 더하면 끝을 마치겠으니 먼저 방에 들어가 주무세요.”

하는 것을 김서방이

좀 있다 같이 들어가지.”

하고 머리에 동였던 수건을 끄르고 면빗질을 하며 안해가 일거리 잡는 옆에 와서 가까이 붙어앉았다.

혼자 앉았기 무섭지 않아?”

무섭긴 무에 무서워요.”

도깨비.”

나는 도깨비를 본 적이 없는데요.”

그러면 호랑이.”

호랑이도 말만 들었세요. ”

이렇게 입으로 말대답을 하면서도 손은 여전히 재빠르게 놀리어 동고리 테가 한 테 두 테 늘어가니, 김서방이 이것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묻는 말이

하룻밤에 동고리를 서너 개 만들 수 있소?”

서너 개를 어떻세 만들어요. 내가 남의 두 몫 일을 한다고 남들은 칭찬하지만 긴긴 밤에 한 개 반이나 만들까요.”

장인 장모는 초저녁부터 끼고 자는 것이 일이신가?”

당신은 별걱정을 다하시오.”

봉단이는 잠깐 남편에게 눈을 흘기었다.

밤이 으슥하여질수록 바람은 더욱 선선하고 달빛은 더욱 밝다.

김서방이 안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홑적삼 하나 입고 춥지 않소?”

하고 등을 만져보는 체하다가 살짝 꼬집으니 봉단이는 가만히

아야!”

하고

두 번만 추우냐고 물으시다가는 사람의 등에 살점을 남기지 않으시겠소.”

골이 난 모양으로 김서방을 뒤에 두고 돌아앉아서 김서방이

잘못했소. 도로 이리 돌아앉으우.”

청하여도 들은 체 만 체 하고 부지런히 일만 한다.

김서방이 달을 치어다보며

달이야 참 밝다. 별이 하나 둘 셋...”

별 수를 세다가 종시 싱겁든지 그만두고 조그만 버들 끄트럭을 봉단의 볼에 닿을 듯 말 듯하게 쥐고서

애구 이것 보게.”

갑자기 무엇을 보고 놀라는 체하여 봉단이가 돌아보다가 볼이 버들에 찔리었다.

봉단이가 김서방의 버들 쥔 손을 뿌리쳐 치우면서

점잖지도 못하시우.”

나무라니 김서방은

어여쁜 사람 앞에서는 점잖은 이의 머리가 자라목같이 들어가는 법이야.”

잘한 체하고 웃는다.

그때 마침 안방에서 기침소기가 나는 것을 듣고 봉단이는

어머니가 깨시면 잔소리를 하실지 모르니 소리내서 웃지 마시오.”

나직이 말하였다.

김서방이 웃음을 그치고 한참 말이 없이 앉았다가 안해의 일이 끝나는 것을 보고

인제 방으로 들어가지.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치우지.”

하며 일어서서 버들채의 흐트러진 것을 묶어서 봉당 위에 세우고 안해더러 일어나라고 한 뒤 맷방석을 말아서 처마 밑에 들여놓고 다 만든 동고리를 들고 섰는 안해를 뒤로 가서 번쩍 안고 아랫방으로 향하는데 안겨 가는 봉단이는

이게 무슨 짓이예요.”

하며 달 아래 그림자를 부끄러워하고 안고 가는 김서방은

치우자면 이렇게 다 치워야지. ”

하며 다시 웃음을 시작하였다.

방에 들어와서 자리 보고 누운 뒤에 봉단이가

너무 실없이 굴지 마세요. 남의 눈에 띄일까 봐서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소곤소곤 말을 하니 김서방이

, 말씀대로 하오리다.”

하고 외손가락으로 살그머니 안해의 턱을 치어들었다.

이런 짓을 마시란 말이에요.”

, 말씀대로 하오리다.”

하고 다시 그 손가락으로 안해의 겨드랑이를 간질렀다.

당신이 하우불이시요그려.”

상지불이는 어떤가? 문자를 쓰는 품이 백정학자의 교훈이 많으시오그려.”

학자면 학자이지 백정학자란 건 다 무언지. 미친 놈들이지.”

여보, 과하오. 그러면 버들학자라고 할까?”

지각 좀 채리세요.”

어른더러 지각을 차리라니 버릇없어 못 쓰겠군. 버들학자 좋지않아? 처음 만날 때 가르쳐 준 것이니.”

누가 가르쳐요?”

왜 버들잎으로 군호했었지?”

군호는 다 무어요? 딱도 하시오. 그때 당신 모양이 보기에 하도 황당하기에 급히 자시지 말라고 일부러 버들잎을 띄웠지요. 군호는 무슨 군호?”

이렇게 내외가 재미있게 속살거리다가 닭 울 때가 되어서 간신히 잠들이 들었다.

 

 

1권 봉단편 5장 게으름뱅이

 

이튿날 봉단이는 다른 때나 일반으로 일찍부터 기동하였지만 김서방은 늦잠을 자고 아침밥 때에야 일어났다.

장모가 눈살을 찌푸리며

우리가 화초사위로 두고 볼 처지가 못 되니까 인제는 일을 좀 해봐야지. 해가 한나절까지 자빠져 잠이나 자서야 쓰나!”

하고 잔소리 마디나 좋이 하더니 그날부터 일을 시키기 시작하였다.

처음 며칠 동안은 내외가 버들일하는 옆에서 잔심부름을 시키며 고리를 트는 법, 키를 겯는 법, 이 법 저 법 가르치고 우선 키바탕을 결어 보라고 맡기는데 처음 솜씨에 시초와 끝은 어렵다고 장인이 겯다 둔 것을 내주었다.

버들잎을 물고 죽을 처지에 태어지나 아니한 김서방이 팔자에 없는 버들잎을 물게 되니 일이 잘 될 까닭이 없다.

회창회창하게 가는 채를 골라서 뽑다가 분지르고 씨로 먹이는 채를 날로 놓은 노끈에 얽히게 하여 분질러서 키는 한 뼘도 겯지 못하고 버들채는 줌으로 분질렀다.

장인이 이것을 보고

이 사람 고만두소. 공든 채가 아까웨.”

하고 일거리를 빼앗아 가니 김서방은 무안한 것을 감추려는 듯이

손이 굳어서 잘 되지 않아요.”

발명하였다.

말썽 많은 장모가 듣지 않았으면 모르되 듣고서는 가만히 있을 일이 아니라

손이 아니라 두툼발인가? 방망이로 쳐 이겨서 풀솜같이 만들지 굳은 게 걱정이야?”

김서방을 망신 주고

아따, 처음이라 그렇지.”

사위 두둔하는 주삼이를

처음을 보면 끝도 알지. 사위 봉양하려면 늙게 신세가 고될 판이야. 잔소리 말고 정신이나 차려요!”

두말 못하게 윽박았다.

이로부터 김서방이 장모에게 박대받기 시작하여 나날이 자심한 구박을 당하게 되었다.

김서방이 잠시라도 편히 앉았으면 그 장모는 없던 심정이 저절로 나는 듯이 무슨 일이든지 불러 시키고 시킨 일이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욕설을 예사로 내놓았다.

주삼이도 구경은 안해의 편이라 김서방을 구박할 때는 장모가 선봉대장 격이요, 장인이 후진중군 격이었다.

주팔이가 종종 와서 보고 유세객의 구변으로 형수와 형을 달래지만, 그 힘이 오래 가지 못하므로 항상 봉단이가 김서방을 싸고 도느라고 애를 썼다.

그리하자니 따라 볶이는 것이 봉단의 신세라 남모르게 눈물을 흘릴 때가 많건마는, 그래도 남편과 둘이 서로 대하면 웃음도 웃고 실없는 장난도 자아내고 하여 지성으로 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김서방은 젊은 안해의 얼굴이 야위고 팔목이 가늘어지는 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장모의 마음을 사보려고도 하였으나, 살이 끼었든지 사이가 종시 좋아지지 아니하여 나중에는 나는 나대로 할 터이니 너는 너대로 하라는 뱃심을 가지지 아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장모가 심악하다고만 말하지 못할 점도 없지 않아 있었으니, 김서방이 일치고 힘들여 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배우지 못한 일을 억지로 하노라니 서투르기도 하겠지만, 모든 일을 마음에 하치않게 여기는 것이 남의 눈에 보이었다.

우선 버들일만 하여도 밤저녁에 봉단이가 손을 붙잡고 가르치다시피 하였으니 어지간하면 며칠 안 지나서 잘은 못하더라도 시늉만은 내련마는 달포가 지나도록 봉단의 입과 손을 빌게 되고, 나무를 해오라면 종일 산에 있다가 다 저녁때 내려오되 큰 키에 짊어진 나무가 까치집만밖에 아니 되어 봉단이까지 어이없게 하고 또 거름을 쳐내라면 맞빨이밖에 없는 고의 적삼에 더러운 칠을 하여 봉단의 수고를 끼치고야 말게 되니 데릴사위로 놓고 보면 주삼의 안해가 아니라도 장모로 뛸 사람이 없지 아니할 것이다.

김서방이 일손이 느릴 뿐이 아니라 게으름을 부리어서 조만한 잔소리가 아니면 당초에 일을 잡지 아니하는 까닭에 주삼의 안해가 게으름뱅이라고 별명을 지어서 김서방을 부를 때에

게으름뱅이 게 있나?”

하면 김서방도

.”

대답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삼의 내외 외에는 이 별명을 쓰는 사람이 별로 없던 것이 차차로 기근방에 퍼져 나중에는 게으름뱅이 사위가 조명이 나서 주팔이까지도 김서방보고 농담하려면

게으름뱅이 사위.”

부르게 되었다.

이 별명을 입에 올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오직 봉단이 하나뿐이었다.

어느 날 밤에 봉단이가 김서방과 마주 앉아서 수수께끼로 마음을 위로하는데 장도 장도 못 먹는 장이 무어냐, 강도 강도 못 건너는 강이 무어냐서로 걸고 풀고 하다가 김서방이

뱅이 뱅이 못 쓰는 뱅이가 무언가?”

걸고 봉단이에게 풀라고 하니 봉단이는 잠깐 양미간을 찌푸리다가 얼른 다시 펴며

못 쓰기는 누가 못 쓴대요? 게으른 데는 게을러도 게으르지 않은 데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요?”

하고 소명한 눈 속에 웃음을 머금었다.

 

김서방 내외가 자려고 누워서 겉잠도 채 들지 아니하였을 때 횃불빛이 창에 비치며 십작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김서방이

화적인가?”

의심하며 일어나려고 하니 그 안해가

가만히 누워 계세요.”

남편을 말리고

우리 집에 무슨 화적이 들겠소.”

하고 자기부터 천연하게 누워 있다.

조금 있더니 삽작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나고 뒤미처 안방문 앞에서 두런두런 사람의 말소리가 났다.

봉단이는 그제야 비로소 일어나서 벗어놓았던 치마를 찾아 입은 뒤에 창문을 바스스 반쯤 열고 내다보더니

고원댁 오빠요?”

소리를 높여 물으며 바깥으로 나가고 김서방은 돌이가 어째 밤중에 왔노?’ 의심하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돌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또 장모와 장인의 말소리가 들리고 얼마 있다가 여러 사람의 신발소리가 나고 또 삽작문 닫는 소리가 나더니 안해가 방으로 들어오며

주무세요?”

묻는다.

이때껏 자는 것같이 누웠던 김서방이

아니.”

하고 일어나 앉으며

돌이가 어째 왔던가?”

물으니 봉단이는 등잔불을 다시 켜며

고원댁 아주머니가 지금 곧 운명하실 것 같대요. 그래서 어머니를 뫼시러 왔세요. 아버지하고 내외분이 다 가셨세요.”

대답하였다.

그날 밤은 젊은 내외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마음놓고 웃고 이야기하다가 밤을 밝히다시피 하고 이튿날 김서방이 코가 비뚫도록 늦잠을 자고 나 보니 해는 벌써 아침때가 기울었고 봉단이는 집안을 깨끗하게 치위놓고 앉아 있다.

김서방은 너무 늦게 잔 것이 염치없이 머리를 긁으며

오늘이야말로 별명을 들어 싸군.”

혼잣말하듯 하니 봉단이가 세숫물을 떠다 주며

얼른 세수하시고 점심 좀 잡수시지요. 나는 배가 고파요.”

하고 상글상글 웃었다.

돌이가 상제 되는 덕에 김서방은 단지 며칠 동안이라도 장인 장모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맘 편히 지내었다.

주삼의 내외가 상가에서 돌아오던 날 저녁때 주삼의 안해가 양식이 없어진 것을 보고

연놈이 들어앉아서 밥만 해처먹었니? 양식이 어째 이렇게 없어졌니?”

야단치는 것을 봉단이가

한 끼에 두 끼 밥 먹지 않았어요.”

조금 불쾌히 대답하였더니 그 어머니가 하늘이 낮다고 뛰면서

이년, 서방맛을 되우 안다. 그 게으름뱅이가 양식 도적놈이야! 감추려면 감추어지니?”

욕설을 내놓다가 봉단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쪽쪽 울기는 왜!”

하고 혀를 차면서도 딸을 불쌍히 생각하였던지 욕설은 그치고

여보, 원수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구려. 내일 장날 키 죽이나 갖다 내서 서속 몇 말을 바꾸어 와야겠소. 죽을 채우자면 키가 몇개나 부족이오?”

주삼을 보고 물었다.

만든 것이 반 죽밖에 없어.”

하는 남편의 대답을 듣고 딸을 돌아보며

우리가 들을 맡을 터이니 둘은 네가 맡고 나머지 하날랑은 게으름뱅이더러 밤내로 결어노라고 해라. 못 해놓으면 내일 아침밥은 다 먹을 게니 알아 하래라!”

구별하는데 봉단이가 상을 찌푸리며 나는 오늘 골머리가 아파 일 못하겠어요. 만일 억지로 하라시면 하

나나 맡지요. ” 앙탈하다시피 하여 주삼의 내외가 세 개를 맡고 젊은 내외가

각각 하나씩을 맡게 되었다.

일거리를 각각 나눠 가지고 방으로 들어간 뒤에 김서방은 봉단의 전하는 장보

의 말을 들고 나는 내일 아침밥을 안 먹을 작정하지, 밤을 꼬박 새우더라도

다 겯기는 틀렸으니까. ” 하고 채를 골라놓는 안해의 시중을 들어주다가

머리가 아프다더니 어떻소?” 하고 머리를 짚어보려고 하니 봉단이가 살그머니

짚으러 오는 손을 막으면서 관계찮아요. 개수를 줄이려고 아프다고 했어요.”

하고 잠깐 방그레 웃었다. “꾀병이 일쑤구려. ” “언제 누가 꾀병합디까?” “

우리 혼인 전날 밤에는 그게 무슨 병이오? 능청스럽게 꿈 이야기까지 꾸며가지

, 보기에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하는 짓은 여...” “... 무어요?” “. ” “

잘하시오 잘해. 당신 그러다간 지각 나자 망녕 나겠소. ” 젊은 내외의 속살거리

는 말은 밤이 이슥토록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식전에 주삼의 안해가 아랫방에서 나온 키 두 개를 한두 번 뒤치고 제

치고 하더니 서방 대신 해주려고, 여호 같은 년 아프다고 어미를 속여!” 딸에

게 귀먹은 욕을 해붙이었다.

김서방이 아침밥을 먹은 뒤에 그 장모가 부르더니 장인과 같이 가서 장을 보아 오라고 하여 김서방은 키 한 죽과 고리 몇 짝을 지게에 짊어지고 주삼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함흠은 대처라 장이 크다.

각 촌에서 모여드는 장꾼들이 길이 메어 가는데 그중에는 숯짐이며 장작짐을 지고 가는 두메 사람도 있고 새끼 걸빵으로 곡식말이나 무명필을 걸머지고 가는 촌 농군도 있고 소를 너뎃 마리 혼자서 몰고 가는 소장수도 있다.

감사 행차냐? 길 중간을 잡고 오게. 키짐 저리 비켜라!”

소장수의 볼멘 소리에 김서방은 놀라서 길을 피하다가 등에 잘붙지 아니하는 지게가 삐딱하며 길 옆으로 오던 농군의 머리가 킷불에 스치었다.

이 자식, 정신 차려!”

농군의 호령을 듣고 김서방은 미안한 듯을 말한다는 것이

다쳤어?”

무심히 반말을 하였더니 그 농군이 대번에 얼굴을 붉히며

이놈의 새끼! 백정놈이 반말은... 버릇을 배워라!”

하고 껑청 뛰어 김서방의 뺨을 갈겼다.

김서방이 난생 처음으로 당하는 일이라 기도 막히거니와 슬그머니 분이 나서 그 농군을 떠다박지르니

백정놈이 사람 친다!”

농군이 외치며

백정놈이 사람 치다니?”

백정놈이 무어 어째?”

하면서 두메 장꾼이며 촌 장꾼들이 김서방의 옆으로 모여들었다.

활 반 바탕 가량이나 앞섰던 주삼이가 이때 마침 길가 밭고랑에서 똥을 누다가 밑도 채 씻지 못하고 괴츰을 움켜쥐고 쫓아와서

이 사람 무슨 짓인가?”

일변 김서방을 나무라며

몰라서 그렇소이다. 난데 사람을 사위로 얻었더니 위인이 데퉁궂어 걱정이올시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농군에게도 절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도 절을 하고 꾸벅꾸벅 정신없이 절을 하였다.

주삼의 적덕으로 뭇매질이 나지 않고 여러사람이 헤어지는데

백정의 사위놈이 양민에게 손을 대다니 무엄하기도 짝이 없지. 도대체 세상이 망했어. ”

소장수가 지껄이니까 그 농군은 더러운 손자국을 털어 없애려는 것같이 옷을 털며 지껄이는 소장수를 쳐다보고 나서

제기. 간밤에 꿈자리가 사납더니 마수거리로 창피 보았네.”

혼자 중얼거리었다.

그때부터는 주삼이가 가끔가끔 뒤를 돌보아 김서방이 조금만 떨어지면

빨리 오게.”

불러가지고 앞뒤에 붙어 가는데, 김서방의 고개는 줄곧 아래로 숙었었다.

읍 어귀에 들어서자, 주삼이가 길을 비켜 우뚝 섰다.

뒤에 오던 김서방이 따라서 멈추고 고개를 들어 보니 갓을 쓰고 소매 달린 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한 오십 된 채수염 자리 하나가 아이 하나를 뒤에 따리고 천천한 걸음으로 이편을 몇 걸음 앞으로 나가다가 채수염 자리가 가까이 온 뒤 허리를 구부리고 공손히

집강 나으리, 주삼이 문안드립니다.”

하니 수염 자리가 구부린 주삼의 등을 내려다보며 대답은

오오.”

뿐이다.

그 수염이 그대로 지나가려고 몇 걸음 나가다가 무슨 생각이 나는 듯이 돌아서며

이애 그 동안 댁의 따님이 근친을 와서 계시다가 수이 가실 터이다. 그런데 댁 안에서 엿을 담을 그릇이 없다고 하시더라. 이삼일 안에 동고리 몇 벌을 댁으로 가져오너라.”

주삼에게 분부한다.

주삼이가

녜에.”

대답하고

저기 가지고 오는 것이 있었는데 물건을 보시겠습니까?”

말하여

어디 이리 가져오너라.”

수염의 분부가 떨어진 뒤

여보게, 짐을 이리 가지고 오게.”

김서방을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김서방이 지게를 버티어 놓는 것을 보고

문안 여쭙게. 향곳말 도집강 나으리시어.”

일러주며 곧 일변으로 수염에게

사위올시다.”

여쭙는다.

김서방이 말없이 허리를 구부리는데 고개는 치어들이었다.

그 고개가 수염의 비위에 맞지 아니하든지 오오.” 한마디도 없이

그놈 낫살이나 먹었구나.”

하며 수염을 쓰다듬고 주삼이가 지게에서 내려놓는 동고리를 아이더러 집어오라 하여 받아들고 보더니

이것은 장치구나. 굵어 못 쓰겠다. 맞춤으로 해오너라.”

말은 주삼에게 하고 물건은 아이에게 도로 준다.

그리하고 주삼이를 바라보며

네 아우놈 지금도 공부하느냐?”

묻고서 미처 대답도 듣지 않고

백정놈이 공부하여 무엇하노.”

또 수염을 쓰다듬이며

허허, 허허.”

틀스럽게 웃고 돌아서서 다시 천천한 걸음을 내놓았다.

 

주삼이가 초장에 행패 잘하기로 유명한 감영 장교 하나를 만나서 고릿벌과 킷개를 공히 빼앗기고 파장머리에 나머지 물건으로 콩과 서속 몇 말을 바꾸어서 김서방을 지워 가지고 어두컴컴한 때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상을 치운 뒤에 주삼이가 안해와 마주 앉아서 김서방의 봉변하던 일을 이야기하고

내가 조금만 늦게 갔어도 뭇매질이 났지.”

괴춤쥐고 쫓아간 공로를 자랑하니 그 안해는 사위가 봉변하여 가엾다고는 말할 생각도 아니하고

족가리가 성해서 걱정이든가 경을 치든 말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시비를 말렸다고 도리어 남편을 나무랐다.

주삼이는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여편네란 종시소견이 부족해. 사람이 경을 치면 물건이 성할까.”

꾸벅꾸벅 절한 것이 사위보다도 물건을 중히 여긴 까닭이라고 말하였다.

일기가 추워졌다.

사람마다 겹옷을 입고 오륙십만 된 사람이면 도톰한 가을 차렵을 입을 때다.

김서방은 아직도 홑것을 입고 식전 저녁으로 벌벌 떨고 지내는데, 남의 이목도 좀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주팔이가 형수에게 간곡히 말하여 새 무명으로 겹옷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옷을 짓는 동안에 장모의 입에서 나오는

키는 경치게도 크다.”

안팎 쉬인뎃 자나 드니 옷도적놈이다.”

이 따위 말에 김서방의 귀는 따갑기도 하고 가렵기도 하였다.

김서방이 새옷을 얻어 입던 날이다.

전날부터 아프다고 머리를 동이고 다니는 주삼이가 김서방을 불러서

도집강이 아랫말 사람 편에 동고리 재촉을 하고 오늘 안으로 가져오라더라네. 내가 갔으면 좋겠으나 몸살이 나서 못 가겠으니 자네 좀 갔다 오소. 향곳말 가서 도집강댁이 어디냐고 물으면 어린아이라도 잘 알 것일세. 고리를 받고서 쌀말을 주거든 황송합니다 하고 받아가지고 오소. 그리고 내가 아파 누웠단 말도 잊지 마소.”

이르는데 옆에 있던 장모는

새옷 값으로 남이 주는 쌀이나 잘 가지고 와야 해.”

쌀을 내버리고 오기나 할 것같이 미리 사살하고 봉단이는 김서방의 뒤를 따라 삽작문 밖에까지 나오면서

고분고분히 구세요. 첫째 말씨를 조심하세요. 혹 또 봉변하시리다.”

김서방이 언어 행동이 공손치 못한 것을 걱정하여 다정한 말소리로 신신히 당부하였다.

김서방이 도집강의 집을 찾아왔다.

문간에 들어서서 사람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둘러보자니

누가 왔나 부다. 좀 내다봐라.”

큰방에서 도집강의 목소리가 나고 아랫방에서

.”

대답 소리가 나며 하인인지 머슴인지 세차 보이는 사나이 하나가 아랫방에서 뛰어나왔다.

그 사나이가 김서방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어디서 왔어?”

반말을 하건마는 김서방은 존대하여 빰맞는 법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양주삼이게서 동고리를 가져왔습니다.”

대답하였다.

그 사나이가 튼방 앞에 나아가서 이 뜻을 말하자, 큰 방 창문이 열리고 도집강이 내다보며

인제 가져왔단 말이냐? 주삼이놈 어디 있느냐?”

말에 체증기가 있다.

김서방이 뜰 앞으로 나아가서

주삼이는 앓아 누워서 대신 왔습니다.”

하고 허리를 구부리니 도집강이 한번 큰기침하고

동고리 몇 벌이냐?”

세 벌이올시다.”

이리 가져오너라.”

하여 그 사나이가 두손으로 드리는 동고리를 받아가지고 위짝과 밑짝을 한두 번씩 들었다 놓았다 하더니

일껏 맞춤으로 해바치란 것이 이 모양이란 말이냐!”

말에 호령기가 있고

이니마 그대로 두고 가래라.”

하고 창문을 갑자기 도로 닫았다.

김서방은 두고 가라고 하지만 쌀 주기를 바라고 주저주저하고 섰다가

왜 아니 가고 섰어?”

묻는 사나이의 옆으로 가까이 가서

쌀은 아니 주십니까?”

말하였더니 창문이 화닥닥 열리며

그놈 무엇이라니? ? 이따위로 물건을 해바치고 쌀을 달라?”

하고 동고리들을 집어서 마당으로 동댕이치며

이놈, 무엄한 놈 같으니! 쌀을 달라?”

개 꾸짖듯 꾸짖는데 김서방은 안해의 고분고분하라는 말을 생각하고 속을 썩이어서 붉어진 얼굴빛을 보이지 아니하려고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잘못했습니다.”

사과하였더니 도집강이

이놈, 그래도 무슨 잔소리야!”

호령하고 아무개를 불러라, 멍석을 말아들여라, 매를 해오너라, 채수염을 흔들며 야단치기 시작했다.

이교리인 김서방이 도집강의 강호령을 받고 멍석말이 매를 맞게 되었다.

매를 맞는 것도 유만부동이다.

멍석말이에 볼기를 맞는 것은 회초리로 종아리 맞는 것과는 물론 다르고 형문으로 정강이를 맞고 난장으로 발끝을 맞는 것과도 서로 같지 아니하여 어려서부터 늙어 죽기까지 양반으로 당할 까닭이 없는 일이다.

당할 까닭이 없는 일을 꼼짝없이 당하게 된 김서방이 기가 막히어 얼빠진 사람같이 서 있자니

그놈을 거기 꿇려 엎지 못한단 말이냐!”

도집강의 호령이 내리며 그 수하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상투를 잡고 끌어다가 뜰 앞에 꿇리었다.

김서방이 분한 것도 참고 부끄러운 것도 참고 또 가소로운 것도 참고 찬찬한 어조로 발명하여 보았다.

동고리를 갖다 드리라고 해서 가지고 왔고 쌀을 주시거든 받아오라고 해서 주시지 않느냐고 하인에게 물어본 것이 무슨 죄입니까? 대체 양반은 ...”

발명이 미처 끝나지 못하여 도집강의 입에서

그놈의 주둥이를 쥐어지르지 못하느냐!”

하고 호령이 떨어지며 세차 보이던 사나이가 주먹으로 김서방의 볼을 쥐어질렀다.

김서방은 아픈 것보다도 창피에 창피를 더 당하지 아니하려고 입을 다물었다.

그놈을 올려매라!”

도집강의 호령 한마디에 거행하는 군들이 김서방을 끌어다가 말아놓은 멍석 위에 잡아 엎지르고 무명 바지를 무릎께까지 까뭉기었다.

되우 쳐라!”

연하여 신칙하는 매가 하나, , 열 개에 그치었는데 김서방은 엄살 한마디도 아니하고 곱게 맞고 일어났다.

도집강이는 죽을 때라 잘못했습니다.’ ‘살려 줍시사비는 소리를 못들어서 양반의 세력이 깎인 것같이 생각하였던지

그놈은 저 기둥에 붙들어 매놓고 주삼이놈을 가서 잡아오너라. 앓아 누웠거든 떠메어라도 잡아오너라!"

수하 사람에게 분부하여 보내더니 보리밥 두어 솥 지을 동안이나 지난 뒤에 주삼이가 죽을 상을 하고 잡히어 들어왔다.

도집강의 불호령 소리가 주삼의 애걸하는 소리를 내리누르며 주삼이는 김서방이 맞던 멍석 위에 너부죽이 엎드리게 되었는데, 주삼이가 발둥질을 치니까

잔뜩 동여매라!”

라는 호령이 내리고 주삼의 팔다리가 새끼로 동여매지니까

매를 쳐라!”

호령이 내리었다.

매가 늦은 볼기살에 떨어질 때마다 주삼의 입에서 애구, 애구소리가 입에 벅차게 쏟아져서 도우 치라는 호령이 없이 매 열 개를 맞고, 나중에 장독예방으로 짚신발이 맷자리를 밟아 비빌 때에 주삼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앞머리를 멍석에 비비었다.

너희의 사위는 관가로 보내서 더 족칠 것이나 십분 용서한다. 동고리는 가지고 가거라!”

도집강이 호령기가 남은 목소리로 이르니 쭈그리고 앉은 주삼이가

황송하온 말씀이오나 해 바친 물건을 도루 가지고 가옵느니 이 자리에서 매를 열 개 더 맞아지이다.”

애걸하다시피 하여 동고리는 바치고 쌀은 구경도 못하고 김서방과 함께 도집강의 용서를 받았다.

주삼이는 다리를 끌고 김서방은 고개를 숙이고 도집강의 집에서 나오니 주삼의 안해가 남편의 뒤를 쫓아와서 문 밖에 서 있다가 뒤에 나오는 김서방을 붙잡고

이 자식, 이 길로 다른 데로 가거라! 내 딸이 사위 없겠니? 관비 박지, 관비 박아 염려 마라. 너 같은 사위 두었다간 우리가 비병에 맞아죽겠다. 천하에 망할 자식! 우리 따라오지 말고 어서 다른 데로 가!"

장모의 욕설에는 귀가 익은 김서방이지만 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하릴없이 그 내외의 뒤를 따라가노라니 얼마 아니 가서 주삼의 안해가 들쳐서며

이 자식, 다른 데로 가라니까 왜 따라와! 그래도 안 갈테냐!”

하며 김서방을 떠다민다.

김서방이 주삼이가 혹시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주삼의 얼굴을 다라다보나 주삼이는 입을 떼지 아니한다.

갈 데가 있어야지요. 그리하고 가더라도 봉단이하고 같이 가야지요.”

김서방이 말을 하자, 주삼의 안해의 손이 번개같이 김서방의 귀밑을 올라오며

무엇이 어쩌고 어째! 봉단이하고 같이 가? 봉단이는 내 딸이야. 경칠 자식, 망할 자식! 쇠껍데기를 쓰고 도리질을 칠 놈의 자식!”

갖은 욕설이 다 나왔다.

 

김서방이 주삼의 안해에게 잔생이 곤욕을 당하고는 뒤를 따라갈 용기가 없어졌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섰다가 길 옆 풀밭에 주저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쉬기도 하고 멀리 가는 주삼의 내외를 바라보며 쓴입맛을 다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서방은 열번 고쳐 내쫓긴다 하여도 갈 데는 주삼의 집뿐이라 무슨 별 생각이 있었으랴.

봉단이를 가서 보고 전후 사정을 이야기해야겠다, 또 주팔이를 만나보고 신세 조처를 의논해야겠다, 이리 생각하고 몸을 일어서 주삼의 내외를 멀찍이 따라갔다.

주삼의 집에서 활 두서너 바탕이 착실히 되는 곳까지 주팔이가 나오다가 형과 형수를 만나게 되었다.

주팔이는 마침 형의 집에를 왔다가 혼자 울기만 하고 있는 봉단에게 대강 사정을 듣고 향굣말을 향하여 오던 것이다.

형님 오시는구려.”

반갑게 형에게로 쫓아오니 형은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고 형수는 내달으며

사람이 까닭없이 경을 쳐도 분수가 있디 않수. 매 열 개에 헐장한 게 없습디다. 바깥에서 매질 소리를 듣고 있자니 사람이 치가 떨려 어디 견디겠습디까? 도집강인지 부집강인지 그 늙은 녀석이 무슨 원수요? 물건은 그저 먹고 사람은 초주검을 시키니 도대체 사위 하나 망한 놈을 얻었다가 죽을 봉변 다 하오그려.”

남은 말할 틈이 없도록 혼자 길게 떠들었다.

주팔이가 없는 틈을 간신히 얻어가지고

김서방은 어디 있습니까?”

쫓아버렸소.”

쫓다니요?”

그럼 그 자식을 그냥 둬요?”

그럴 수야 있습니까.”

말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이후에 그 형수의 긴 사설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럴 수라니요? 그 자식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고 참기도 많이 했소. 이런 일이 없더라도 인제는 더 참지 못하겠소. 아재 탓하는 게 아니지만 사내답게 생겼느니, 사위 재묵으론 더 고를 수 없느니 하던 그 자식이 허울뿐인 하눌타린 줄이야 누가 알았소. 그런 망할 게으름뱅이가 천하에 또어디 있겠소. 일을 저지르지 않는대도 첫째 게으름뱅이가 집에 두고 먹이고 입히지 못하겠소. 그 중에 그 자식이 봉단이하고 같이 간다지요. 사람이 귓구멍이 막혀 죽겠지. 그래 귀싸대기를 한번 훑어 주었더니 아무 말도 못합디다. 우리가 오다가 돌아보니까 길가에 주저앉았습디다. 만일에 그 자식이 또 좇아와서 집에 발을 들여놓으면 다리뻑다귀를 통겨줄 작정이요.”

이때껏 듣고만 있던 주삼이가

고만 집으로 가세나. 가서 이야기하자.”

안해의 말을 가로막고 앞서서 몇 걸음 나갈 즈음에 입맛만 다시고 섰던 주팔이가

여보 형님, 먼저 가시지요. 나는 이따가 오리다.”

뒤에 떨어지며

아주머니 다시 생각을 잘해 보시지요. 그리고 차차 이야기하십시다.”

형수에게 말하니 형수는

다시 생각할 일이 다 따로 있지요.”

머리를 뒤흔들며 형의 뒤를 따라갔다.

주팔이는 김서방의 일이 궁금하여 찾아가 보려고 뒤에 떨어진 것이다.

나오던 길로 얼마 더 나오지 아니하여 풀기없이 걸어오는 김서방을 만났다.

김서방에게 전후 곡절을 자세히 듣고 나서

공으로 동고리를 빼앗으려는 자에게 쌀 말을 하였으니 그럼 풍파가 아니 날 리 없지. 대체 양반이란 것이 행세가 양반이라야지 날도적들이 양반은 무슨 양반일꼬? 그라나 도집강 같은 것은 부족괘치야. 날도겆의 소굴은 서울이지그려.”

주팔이가 김서방의 소조를 가없게 여기는 끝에 양반 논란이 나온 것이건만, 서울 양반인 이교리에게는 이 역시 소조라 이교리인 김서방이 주팔의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지며 간신히

그렇지요.”

대답하고

그런데 내 일은 어찌하여야 좋을까요?”

자기의 앞일을 의논하니 주팔이가 입맛을 다시며

그렇지 않아도 지금 형수를 보고 말을 하였지만, 형수의 성미가 성미라 얼른 말을 들을 것 같지 아니하니 며칠 동안 내게 와서 지내 보소. 어떻게 하든지 말썽없이 되겠지.”

말하여 김서방을 데리고 오다가

봉단이를 보려다간 형수 손에 큰코다치기 쉬울 게니 형님 집으로 올 생각 말고 바로 우리게로 내려가소. 나는 잠깐 다녀갈 것이니.”

말하여 김서방은 자기 집으로 보내고 혼자 형의 집에 와서 집안이 너무 조용한 것을 괴상히 생각하면서 삽작문 안을 들어섰다.

 

 

1권 봉단편 6장 축출

 

주팔이가 윗방 문을 열고 본즉 형은 누워 있고 형수는 방을 훔친다.

인제 오시우?”

인사하는 형수에게

.”

대답하고

봉단이는 어디 있습니까?”

물으니, 형수는 머리를 흔들며

난 모르지요. 그년이 이 방을 훔치다가 말고 새촘하고 나가더니 다시는 들어오지 아니하니까 어디 가서 눈물을 짜내는지도 모르지요.”

아주머니가 김서방의 말을 하신 게구려?”

방을 훔치면서 그는

"왜 아니오나요 묻기에 쫓아버렸다고 말했더니 맹랑스럽게 걸레를 톡 내던지고 나갑디다.”

주팔이는 형수와 말하던 것을 그치고 봉단이를 찾으려고 집 안을 둘러보다가 아랫방 문을 와서 열었다.

봉단이는 머리를 싸고 누워서 문 여는 소리가 나도 곰짝달싹 아니하다가

이애 봉단아!”

부르는 주팔의 목소리를 듣고야 겨우 일어 앉는데, 얼굴에는 눈물 흔적이 있고 얹은머리는 풀어져 내려왔다.

주팔이가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니까 봉단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걷어 얹으며 아랫목 자를 주팔에게 비켜 주고 삼촌이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리는 것같이 주팔이 얼굴을 치어다보았다.

주팔이가 김서방에 들은 전후사실을 이야기하고

김서방은 죄도 없이 도집강에게 매를 맞고 죄도 없이 네 어머니께 내쫓겼다. 그 사람의 일도 딱하고 가엾지만 대체 너는 어찌 할 셈이냐?”

조카딸의 의견을 물으니 봉단이는 눈물이 맺거니 듣거니 하며

지금 그가 어디 있습니까? 바깥에 왔습니까?”

김서방의 있는 데를 알려고 묻는다.

주팔이는 그때 마침 바깥에서 형수의 기척이 나는 것을 듣고

그 사람도 사람이지 여기 오려고 하겠느냐? 정히 갈 데가 없으면 서울로라도 도루 가겠지.”

봉단이 묻는 말에 동이 닿을 듯한 대답을 하고서 한번 기침을 하더니 앞창문을 열고 가래를 배앝다가 마당에서 무슨 치임개질을 하는 체하고 있는 형수를 보고

아주머니!”

불러서

이리 오시지요.”

방으로 들어오라고 권하였다.

언제 들어가고 말고 할 새가 있어요. 저녁을 해야지.”

벌써 저녁할 때가 되었나요? 나도 집에 좀 가봐야겠군.”

하며 주팔이는 일어서서 형수에게 들리지 아니할 만큼 나직이

아직 며칠 동안 내게 와서 있으라고 했다. 말썽없게 되고 안 되기가 제일 첫째 네게 달렸어.”

말끝을 힘지게 맺고 봉단이를 내려다보았다.

봉단이는 외손을 벌려서 엄지가락과 장가락으로 관자놀이께를 누르니 자연히 손바닥으로 얼굴이 가리어진다.

그리하고 나서

저를 만나보기 전엔 어디로든지 가지 말라고 해주세요.”

삼촌에게 부탁하니

그것은 내게 부탁도 할 것이 없다. 그 사람 역시 너를 보기 전엔 어디로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더라.”

주팔이는 말이 끝난 뒤에 멀찍이 서 있는 형수에게도 들릴 만큼

사람은 몸 성한 것이 제일이야. 몸조심해라.”

봉단에게 이르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날 저녁에 봉단이는 밥짓는 데도 내다보지 아니하고 밥 먹는데도 내다보지 아니하고 아랫방에 누워 있었다.

저녁이 끝나고 어두컴컴한 뒤에 그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서

"이애 자니?”

하며 봉단의 몸을 흔들다가 자지 않는 표가 나니까

어디가 아프냐?”

하고 머리를 짚어보면서

어지간만 하거든 일어 앉아서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말하니 봉단이는 대답이 없이 일어 앉았다.

봉단 어머니가 등잔불을 켜놓고 앉아서 딸을 타이른다.

게으름뱅이를 내쫓은 것이 부모라도 야속하냐? 그 자식의 지저구니로 말하면 백번 내쫓아도 마땅하고 내쫓은 것이 조금 과하다고 하더라도 이왕 그렇게 된 것을 다시 불러들일 수가

어디있니? 쏟아 엎지른 물은 다시 담지 못한단다. 너같이 소견이 넉넉한 애가 그게야 벌써 잘 알고 있을 테지. 게으름뱅이 생각 마라. 너의 삼촌은 나더러도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더라만 다시 생각할 것이 무어냐? 천하에 사내가 게으름뱅이 하나뿐이란 말이냐? 게으름뱅이는 질동이니까 깨져도 아깝지 않다. 놋동이 사위를 얻어주마. 나이도 알맞고 난밖 사람이 아닌 서방이 좋지 않겠느냐? 서방과 손그릇은 손때 먹일 탓이란다. 정만 들이고 보면 첫서방이나 둘째 서방이나 매일반인 법이다.”

봉단이가 잘 듣지도 아니하는 말을 끝이 없이 지껄이는 판에 주삼이가 어느틈에 일어나서

"무슨 이야기들이야?“

하며 창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삼이가 아이구하고 거북살스럽게 앉더니 안해와 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딸을보고

너의 어머니 하는 일이 종시 생각이 부족해. 게으름뱅이는 내쫓아도 좋지마는 너더러 말이나 한번 할 것인데.”

하고 잠깐 안해를 돌아보며

홧김에 미처 생각을 못한 것이지만.”

뒤를 두고 말을 이어

말도 없이 한 것이 너는 야속할 터이지. 그렇지만 이왕 그렇게 된 일이니 네가 마음을 삭

여라.”

점잖게 말하는 폼이 미리 말만 하였다면, 봉단이가 저녁밥을 안먹을 까닭이 없을 것같이 생각하는 모양이다.

봉단이는 말을 듣는지 마는지 고개를 숙이고 앉았을 따름이요, 주삼의 안해는 봉단에게 향하여

부모 자식 사이에 간격이 있을 턱이 있니? 야속하거든 야속하다고 말을 해라. 너도 어미 애비가 하루 편히 못 지내고 죽도록 고생받이만 하게 되면 마음이 원통할 터이지?”

하고 잠깐 남편을 돌아보며

서방과 무쇠솥은 새것이 언짢다지만 너만한 인물이면 서방 없이 늙겠느냐? 또 감영 관비로 들어가도 게으름뱅이 데릴사위보다는 나을 게다. 눈초리가 처진 감사나 만나게 되면 남부럽지 않게 호강을 할 것이요, 예방비장의 눈에 들면 음식을 노놔 먹을 게니 너도 좋고 우리도 좋지...”

봉단이가 듣다 듣다 듣기가 싫어서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가 아파서 누워야겠어요.”

하고 앉았던 자리에 쓰러져 낯을 벽에 대고 누우니 뒤에 앉은 주삼이 내외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주삼의 안해가 괘씸한 일을 억지로 참는 듯이 하고 남편과 함께 일어서 나갔다.

가을 긴긴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아침때가 되었다.

주삼이 내외는 아침밥을 먹는데 봉단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어제 아랫방에 누운 채로 오늘도 일어나 나오지 아니한 것이다.

주삼이는 딸이 굶는 것을 걱정하여

조죽이라도 쑤어서 그 애를 먹게 하지.”

말하였으나 그 안해는 자애 많은 어머니가 도리어 범범한 사나이 같이

몇 끼나 굶나 가만히 내버려 두고 보지. 제가 좋아 굶는 것을 누가 성가시게 먹어라 먹어라 한단 말이오.”

하고 자기 먹을 밥만 먹고 있다.

아침때가 훨씬 지난 뒤에 봉단이는 그 부모가 방에 들어앉은 틈을 타서 슬그머니 집에서 빠져나와 아랫말로 내려왔다.

여러 끼를 굶은 까닭이든지 또는 너무 속을 상한 까닭이든지 머리가 내둘리고 걸음이 잘 걸리지 아니하여 평일 같으면 한두 번 왔다갔다 할 만한 동안에 간신히 주팔의 집에를 당도하게 되었다.

이때 김서방은 주팔이와 같이 뜰 위에 놓인 들마루에 앉아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는 중에, 삽작문께 들어서는 해쓱한 봉단의 얼굴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박힌 듯이 서서 있고 주팔이는 뜰 아래도 쫓아내려가서

너 오느냐?”

하며 비실거리는 봉단을 붙들고 올라왔다.

여기 좀 앉으려무나.”

들마루에 앉히려고 하니 봉단이는 고개를 흔들어 싫다 하고 숙모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팔의 안해는 나이가 주팔이보다 7년 위일 뿐이 아니라 하나 기르지 못하는 여러 번 아이 낳기에 사람이 곯아서 봉단의 어머니보다도 더 늙어 보이고, 거기다가 병객이라 조만한 일이 아니면 꿈쩍거리지 아니하고 방에 들어앉았는 사람이다.

질녀의 몇 끼 굶은 이야기를 듣고

그래서야 몸이 부지하느냐?”

하고 나무라면서 바깥으로 나와 한참 꾸물거리어서 되지 않은 조죽 한 그릇을 쑤어 가지고 들어왔다.

봉단이는 죽을 먹은 뒤에

작은어머니, 나를 좀 눕게 해주세요.”

하여 얼마 동안 누워 있다가 주팔이가 김서방과 같이 방으로 들어오매 봉단이가 일어 앉는데, 앉아 있는 봉단의 눈에도 눈물이 어리고 서 있는 김서방의 눈에도 눈물이 어리었다.

하룻밤이 십 년 같더냐? 봉단이 너는 여자라 연약한 심장에 눈물 흘리기 쉽지마는, 김서방 자네는 늠름한 대장부가 눈물을 흘리다니 남보기 창피치 아니한가.”

주팔이가 소리를 높여 웃으며 손으로 김서방의 어깨를 치니 김서방은 겸연쩍은 것을 감추려고 억지로 웃으면서

누가 눈물을 흘려. 실없은 소리 고만두어.”

하며 앉을까 말까 주저하는데 주팔이가 그 안해를 눈짓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봉단이를 내려보며

만일 아주머니가 아시고 쫓아오신다면 나도 난처하거니와 너의 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조금만 쉬어가지고 올라가게 하여라.”

말하고 다시 김서방을 돌아보며

십년적회를 잠시라도 풀어보지.”

하고 웃으면서 자기 역시 밖으로 나갔다.

김서방이 봉단의 옆으로 와서 너무 가까이 붙어 앉으려고 하니 봉단이는 말이 없이 몸을 움직이어 조금 사이를 비키었다.

김서방이 면구스러울 만큼 봉단의 얼굴을 들여보다가

하룻밤 새 환형이 되었구려. 이리 좀 누우.”

하며 자기의 무릎 아래를 가리키니 봉단은 잠깐 머리를 흔들어 싫다는 뜻을 보이고 입을 열

어 나직한 목소리로

장독이나 없으세요?”

물으며 양미간을 곱게 주름잡는다.

김서방은 장독이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여보, 내가 말씨를 조심 아니해서 그런 봉변을 한 것이 아니오. 동고리만 받고 다른 말이 없이 가라기에 그대로 오려다가 남이 주는 쌀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장모에게 구박받을

것이 생각나서 쌀 말을 하였었소. 말을 한 것이래야 쌀을 주지 않느냐고 넌지시 하인에게 물어보았는데 그것이 죄목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불분이 발명하며 봉단을 돌아보니 봉단이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 있는데, 눈물 방울이 옷깃에 떨어진다.

김서방이 얼마 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내가 당하는 것은 나의 팔자니까 하릴이 없지마는 이래저래 어린 안해의 맘을 상하게 하니 사내 쳇것으로 염의가 없어.”

혼잣말하듯이 말을 하며 봉단의 턱 고인 손을 만지려고 하니 봉단이는 살그머니 손을 옆으로

치우면서 김서방을 돌아보고

어디로 갈 생각은 마세요.”

당부하는데 말보다도 그 눈이 더 은근히 당부한다.

이때 밖에서 큰기침 소리가 나더니 주팔이가 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해가 점심때가 기울었다. 집에 가봐라. 그리고 굶는 것이 장사가 아니니 밥을 먹도록 해라.”

말하니 봉단이는

.”

대답하고 슬며시 김서방을 돌아보며

가겠어요.”

하고 일어섰다.

김서방이 봉단의 뒤를 따라나섰다.

봉단이가

고만 들어가세요.”

말하면

들어가지.”

대답하면서도 차츰차츰 따라왔다.

아랫말서 거의 중간이나 넘어왔을 때 봉단의 어머니가 멀리서 휘적거리며 내려오는 것이 봉단의 눈에 뜨이었다.

봉단이가

저기 오는 이가 어머니 아니라고?”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김서방이

그렇구면. 잠깐 어디로 비켰다가 지나가신 뒤에 갑시다그려.”

하여 내외 두 사람이 사잇길로 빠져서 시냇가로 나왔다.

버들잎은 이미 떨어졌고 시냇물은 보기에도 차도록 맑아졌다.

가을 여편네의 집안일이 바쁜 까닭인지 빨래꾼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아니한다.

내외가 맘놓고 어깨를 겯고 시냇가로 올라오다가 처음 대면하던 빨래터에와서 김서방이 봉단의 손목을 쥐며

여기가 우리에게 연분이 깊은 곳이라 잠깐이라도 앉았다 갑시다그려.”

말한즉 봉단이도 싫다고 아니하여 언덕 위 풀밭의 양지바른 곳을 골라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첫째로 김서방의 눈이 가는 곳은 봉단이가 잎사귀를 따던 버들가지다.

가지는 전과 같이 늘어졌으나, 성하던 잎사귀는 지금 다 떨어지고 다만 누른 잎새 하나가 매달려서 가는바람에도 지금 곧 떨어질 것같이 한들한들한다.

김서방은 손으로 그 잎새를 가리키고 봉단을 돌아보며

전날 그 잎새는 당신의 근본을 드러낸 것이 아닐지라도 오늘날 저 잎새는 나의 신세를 그려낸 것 같소. 당신은 부모가 있고 친척이 있고 또 나중에...”

하고 말을 그쳤다가 다시 이어서

당신에게는 나 하나 있고 없는 것이 대사가 아니지만, 나는 그렇지 아니하여 당신에게서 떨어지면 다시 붙을 곳이 없는 사람이오.”

신세를 한탄하니 봉단이가 성낸 눈초리로 김서방을 흘겨보며

당신이 말이요, 무어요? 당신이 그런 말을 진정으로 한다면 나는 당신을 잘못 믿었소.”

하고 입술을 악물었다가 다시 김서방의 얼굴을 치어다보며

당신이 나를 못 믿으시는 게지? 사람의 맘을 몰라주어도 분수가 있습네다.”

하고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울음을 내놓았다.

김서방이 처음에는 어찌할 줄 몰라서 어리둥절하다가 나중에는 울지 말라고 봉단의 어깨도 흔들고 봉단의 얼굴을 치어들고 옷소매로 눈물도 씻겨 주었다.

내가 말을 잘못했어. 울지 말고 내 이야기나 좀 들어주어.”

하여 봉단의 울음을 그쳐놓고 김서방은 자기의 근본과 신세와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데 자기

가 김서방이 아니요, 이교리인 것은 물론 말하고 자기가 다른 안해가 없는 것도 빼지 않고 말하였다.

김서방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는 봉단이는

좋은 세상이 되면 다시 나가실 수 있겠지요?”

물어서

, 그렇지.”

하는 김서방의 대답을 듣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김서방에게 향하여 시름없이 묻는다.

대체 양반도 없고 백정도 없는 세상은 없나요?”

 

얼마 동안 김서방이 말이 없이 앉았다가 두 다리를 뻗고 두 팔을 벌리고 기지개를 켜더니 한 팔을 봉단의 무릎에 감고 비슷이 누웠다.

봉단이가 손으로 김서방의 머리를 긁어주며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팔이 감긴 무릎을 가만히 흔들면서

여보세요, 좀 일어나 앉으세요. 인제는 내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정이 듣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니 김서방은

무슨 이야기?”

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봉단이는 무릎을 도사리고 얼굴빛을 고치고 나서

당신이 녹록한 사나이가 아닌 것은 미리부터 짐작한 바이지마는 삼한갑족의 양반인 것만은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줄을 미리 알았더면 뒷일을 한번 더 생각하였을 것인데, 그리 못

한 것이 당신에게 속은 셈입니다. 당신은 잠시 액회를 면하시려고 만리 전정을 생각지 않으실 리가 없으셨겠지요? 좋은 세상이 되는 날에는 백정의 사위가 우세거리요, 망신거리지요? 그때 나를 어찌하실 생각이세요?”

봉단이가 한 마디 묻고 김서방의 눈치를 엿보고 두 마디 묻고 김서방의 얼굴을 살핀다.

김서방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나는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나 들려준다구.”

하고 힘없이 팔을 들어 봉단의 어깨에 깊이 걸치며

남편에게 좋은 세상이면 안해에게도 좋을 것이고 안해에게 좋지 못한 세상이면 남편에게도 좋지 못할 터이지.”

하며 걸친 팔의 손가락 등으로 봉단의 볼을 간지르듯 문지르니 봉단이는 가만히 그 팔을 잡아 어깨에 내려놓으며

서울 양반에게 좋은 세상이 시골 백정의 딸에 좋을지는 누가 알아요? 도리어 좋지 못할는지도 모르지요.”

하고 긴 한숨을 짓는다.

김서방이 정색하며

여보!”

불러놓고 잠깐 동안 말이 없다가 맘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말로

장래의 좋은 세상이 올는지 말는지 지금으로는 모르는 일이거니와 설혹 온다손 잡더라도 그대를 버리고 나 혼자 누릴 생각은 없소. 저기 하늘이 내려다보시오.”

하며 손을 위로 치어들어 하늘을 가리키니 봉단이는 김서방의 얼굴을 이윽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하늘보다도 당신을 믿습니다.”

말하는데 새침하던 얼굴에 웃음이 떠돌았다.

김서방이 다시 정색하며 아까와 같이

여보!”

불러놓고 한참 동안 말이 없으니 봉단이는 김서방이 무슨 말을 하려나 의심스럽게 생각하며 그 입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김서방이 한번 점잖게 기침하고 나서 입을 열어 말한다.

장모가 당신을 낳지는 못하였을 것이고 토하여 놓은 모양이야. 그러한즉 장모는 토끼로다.”

하고 껄껄 웃으니 봉단이는 말을 기다리던 보람이 없어졌다.

실없으시기도 하시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실없는 소리 하는 것을 언제 들어보았나?”

내게 실없으신 건 체모 손실 아닌가요?”

어린 아해에겐 실없은 소리 좀 해도 괜찮은 법이야.”

김서방은 너털웃음을 웃고 봉단이는 상글상글 웃었다.

내외가 해 가는 줄도 모르고 웃고 지껄일 때, 앉은 뒤에서 사람의 발짝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놀라서 일시에 뒤를 돌아보니 주팔이가 온다.

봉단이가 일어서며 김서방도 따라 일어섰다.

이것이 무슨 잣들이야!”

주팔이가 말하며 내외 앞에 와서

한참 찾았다. , 이 사람.”

하고 김서방을 보고 웃더니 봉단이를 바라보며

너의 어머니가 너를 찾아오셨기에 와서 다녀갔다고 말했더니 집에도 오지 않았고 길에서도 만나지 못하였다고 하시고 돌이의 잡에까지 가셨었다. 나는 거기 아니 갔을 것을 짐작하지마는 아는 체하기가 어려워서 아무 말씀을 아니했었다. 거기 가서 허행하시고 오시는 길에 다시 내게 들르셔서 한걱정을 하시기에 내가 너를 찾아 보낼 것이니 염려 마시라고 말씀하여 어머니를 집으로 가시게 하고 이리저리 찾아나선 길이다. 얼른 집으로 가거라. 너무 늦었다. 그리하고 나로서 너에게 어머니를 속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만 김서방 만났단 말은 어머니께 하지 마라. 어머니가 더 역정이나 내시면 너만 더 괴로울 것이다. 머리가 아파서 잠깐 냇가에 와서 바람쏘였다 하려무나. 어서 가거라. 내일 아침때 내가 올라가마.”

주팔이가 봉단이를 좇아보내다시피 돌려보낸 뒤에 김서방의 어깨를 치고

치골 노릇 작작하고 다니소.”

웃으면서 김서방과 함께 아랫말로 내려왔다.

그날 저녁때가 지난 뒤다.

김서방이 시름없이 앉았는 것을 주팔이가 딱하게 여기어서

쓸데없이 걱정하고 앉았느니 나와 같이 마을 가세.”

하여 김서방을 끌고 나서려고 하니 김서방은

뉘 집에를 가?”

하고 갈 생각이 적은 모양을 보이었다.

돌이 아버지의 고담이라도 들으러 가지.”

내가 여기 와서 있는 것을 돌이네 집에서 알면 장모도 알게 될걸.”

속이려 한들 속일래야 속일 수가 있나? 그러고 내일 아침에는 내가 형님과 형수를 가서 보고 말하려는 작정인즉 지금 돌이 집에서 안대야 밤중에 고자질하러 갈 사람은 없을 게니 염려 마소.”

김서방은 마침내 주팔에게 끌리어 돌이 집에 놀러왔다.

돌이는 일지의 집으로 놀러가고 돌이 아버지가 혼자 방에 누웠다가 두 사람을 보고 반색하며 앉아라, 저리 앉아라, 홀아비 늙은이가 긴긴 밤에 심심하여 죽겠는데 잘들 왔다, 반갑다, 고맙다, 한바탕 호들갑을 떨고 나서 김서방을 바라보고

아까 누이가 잠깐 왔었는데 무어 쫓느니 쫓았느니 하기에 말이 되느냐고 조만히 타일러 보냈지만, 워낙 길들지 아니한 생마(生馬)같아 콧등이 여간 세어야지.”

하고 주풀이를 돌아보며

자네 말은 어렵게 여기는 터이니까 자네가 말 좀 하게.”

하고 다시 김서방을 바라보며

콧등이 센 깐으론 뒤는 싹싹한 사람이지. 저 사람이 말이나 하면 무어 일없이 되지그려

하고 허허허 웃음을 내놓았다.

얼마 뒤에 주팔이가 이야기나 한자루 하라고 늙은이에게 청한즉

이야기를 하라, 무슨 이야기를 하나? 우리 조상 이야기나 김서방에게 들려 줄까? 주팔이 자네는 귀에 젖도록 들은 이야기라 재미가 없을걸.”

하고 늙은이는 또 허허 웃었다.

주팔이도 웃으면서

"나 아니 들은 이야기가 무어 있겠소. 아무 이야기나 하시오. 보물이나 또 한번 구경합시다그려.“

하니 늙은이는

자네가 이야기에 쐐기나 치지 말게.”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본래 강원도 통천(通川)사람으로 우리 증조할아버지 때에 북도 경성(鏡城)으로 이사 가서 가근방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몇대를 살아오다가 우리 아버지가 함흥으로 이사를 왔어. 함흥 올때 나는 나이 열살 안이었고 봉단 어머니는 낳기 전이니까 한 오십 년 가량이나 되었지. 그까짓 햇수는 따질 것이 없고 경성으로 이사 간 할아버지의 아버지 되는 고조 할아버지 때 이야기가 정작 이야기야. 우리 고조할아버지는 터지게 잘났던 것이야. 말 잘 타고 활 잘 쏘고 한 끼에 대되 밥을 먹지 않으면 출출하다고 했다니까 기운도 장사던 것이야. 이 할아버지가 통천서 살 때 최장군이란 이하고 이웃해서 살았는데 젊었을 때부터 정분이 여타 자별하게 지냈던 것이야. 이 할아버지가 통천서 살 때 최장군이란 이하고 이웃해서 살았는데 젊었을 때부터 정분이 여타 자별하게 지냈던 것이야. 최장군이 유명한 장군이 되어서 경상도 합포(合浦)로 벼슬살이를 가게 된 때 그 부인이 태중이라 따라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는데, 부인은 그 뒤에 사내아기를 낳고 곧 산후더침으로 작고를 했었어. 최장군이 이 소식을 듣고 그 아기를 길러 달라고 우리 할아버지에게 부탁하니까 평일 정분에 싫다 할 길이 없어서 그 때 돌이 갓 지난 우리 증조할아버지의 젖을 노나 멱여 가며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길러냈는데 이 아들이 그 아버지보다도 더 유명한 최장군이 된 사람이야. 이 아들 최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고 활을 잘 쏘고 해서 우리 할아버지와 같이 사냥을 다니는데 토끼 노루 할 것 없이 닥치면 놓치지 않더라지. 그중에 놀라운 일은 열서너 살 되었을 때 하루 혼자 활을 메고 나가더니 얼마 뒤에 돌아와서 무슨 검은 줄이 있는 누런 짐승 하나를 잡아놓았다고 해서 여러 사람이 무엇을 잡아놓았나 하고 따라가서 본즉, 큰 송아지만한 호랑이 한 마리를 한 살에 쏘아넘겼더라지. 그래서 여러 사람니 모두 널랐더래. 그게 누구든지 놀랄 일이 아니야? 최장군이 아이 적에 쓰던 활이 지금도 우리의 집에 있지. 우리 집의 보물이야.”

하고 늙은이는 일어서서 시렁 위에 얹은 궤 하나를 들어 내려서 뚜껑을 고이 열고 종이로 싼 활을 모시듯 들어내서 싼 종이를 펴고 김서방을 보이면서

이것이 우리 집의 보물이야.”

말하였다.

이때껏 그러세요, 그러세요하며 이야기만을 듣고 있던 김서방이

그 최장군이 최윤덕(崔潤德) 최정승이구려.”

말한즉 늙은이가 최장군의 이름을 어찌 다 아느냐고 놀라며 서울 사람이란 다르다고 칭찬하고서

그래 우리 할아버지가 불원천리하고 그 아버지 최장군에게로 데려다 주었었는데, 뒷날 아들 최장군은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서 대공을 세운 일까지 있었다데. 이 최장군이 병마절도사로 경성 와서 있을 때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경성으로 이사를 갔던 것이야.”

이때 방문이 열리며 돌이가 들여다보고

손님도 오고 조상님도 나오셨군.”

하더니 방으로 들어와서

조상님은 뫼셔놓고 손님하고 엿이나 잡수시오.”

하며 얻어가지고 온 엿봉지를 풀어놓았다.

이리하여 늙은이의 이야기는 중간에 그치었다.

 

이튿날 아침때 주팔이가 형의 집에 와서 보니 윗방 아랫방 할것 없이 방문은 모두 닫히었고 잡안이 괴괴하여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윗방 문을 열어본즉 형은 없고 형수가 포대기 같은 처네 쪽을 덮고 누웠다가 문 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며

아재요? 잘 왔소. 어젯방을 반짝 새우고 하도 곤하기에 눈을 좀 붙이고 아재에게 가려고 했더니 마침 잘 왔소. 이리 들어와 이야기 좀 들으시오.”

하고 처네를 치운다.

주팔이가 밖에 서서

형님은 어디 가셨소?”

물으니 그 형수는

아니 글쎄 들어와 이야기를 들으시라니까 그러오.”

방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하여 주팔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 형수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제 봉단이가 냇가에 있는 것을 불러 보내셨다지? 집에 와서 저녁밥 먹기까지는 천연스럽게 별말 없던 아이가 저녁을 먹고 난 뒤에 저의 아버지와 나를 보고 김가를 도로 불러달라기에 내가 좀 나무랐더니 두말 아니하고 일어서서 아랫방으로 갑디다그려. 그런데 일어설 때부터 눈치는 달랐었어. 그년의 눈치가 수상하다고 우리 내외가 말까지 하였었지. 일어서 나간 뒤에 불과 얼마 동안 안 되어서 형님이 아랫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다고 가본다고 나가더니 아랫방 문을 열자마자 큰일났다고 소리를 지릅디다. 겁결에 맨발로 뛰어가 보니 그 년이 목을 맸습디다. 시렁에 목을 맸습디다. 곧 끌러놓았지만 벌써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요. 주무르고 문지르고 해서 간신히 기운을 돌렸는데 그년이 정신을 차린 뒤부터는 울고 불고하며 죽게 내버려 두라고 몸부림을 치며 야단이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미친년 날뛰듯 하는구려. 수건이고 노끈이고 칡껍질이고 무엇이고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다가는 목에 대고 동이려고 하니 가만 내버려둘 수가 있어야지. 형님하고 나하고 그년을 붙들고 앉아서 밤을 새웠소. 형님은 지금도 그년을 지키고 앉았지요.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오? 딸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저 모양이니 그야말로 죽으라고 내버려둘 수도 없고 기가 막히오그려.”

하고 그 눈에 눈물이 도는 것 같았다.

주팔이는 봉단이가 꾀를 쓴 것이로구나. 자기가 입이 닳도록 말하여야 형수의 고집이 풀릴지말지 생각하고 왔었는데, 지금 형수가 봉단의 꾀에 빠졌으니 남은 고집쯤은 풀기가 쉬우리라 생각하며

큰일날 뻔했습니다그려. 그래도 미리 구하셨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사람이 열에 뜨이면 미친 것 같고말고요. 봉단이가 소명한 아이라 조만한 일에야 미친 것같이 날뛰도록 되겠습니까? 제 맘에는 꼭 맺힌 것이 있어 그런 것이니까 그것을 풀어 주어야지요.”

말하고 걱정하는 빛을 보이니 그 형수는 아직도 김서방을 불러들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년의 맘에 맺힌 것이라면 잘난 서방이겠지. 모든 것이 김가 망한 놈의 탓인 것을 생각

하면 사람이 분통이 터져 죽겠구려.”

열을 내며 고개를 외로 친다.

사위가 장인 장모의 맘에 들고 안드는 것은 둘째나 셋째 일이고, 첫째가 딸의 내외 상득하냐 아니하냐 볼 것인데 사위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상득한 내외의 사이를 억지로 떼려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일 것이라고 주팔이는 완곡하게 말을 하여 그 형수가 주팔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주팔이는 그 형수의 입에서 김서방을 불러오자는 말이 나오도록 하려고

아주머니가 잘 생각해서 처단하셔야 합니다.”

하고 대답을 기다리다가 형수가 입맛만 다시고 있는 것을 보고 아랫방에를 가보고 오겠다고 일어서 나가려고 하니 형수는

에이.”

소리 한마디를 내고서

그 애 아버지를 오시래서 의논을 작정합시다.”

하여 주팔이가 방문을 열고 아랫방을 향하여

형님, 형님.”

불러서 주삼이가 윗방으로 올라오는데 머리는 헙수룩하고 눈알은 붉었었다.

주삼이가

너 왔구나!”

아우가 온 것을 든든히 여기며

이야기 들었겠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아우의 소견을 묻는다.

주삼의 안해가 수숙간의 의논한 말을 대강 남편에게 들려주고

게으름뱅이 그 자식을 다시 불러들여야 될 것 같소.”

말하며 불쾌한 심정을 억제하려는 듯이 방문을 열고 침을 뱉으니 주삼이는 따라서 침을 뱉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더니 질들 생각했군. 사위 내쫓다가 딸 죽이겠어.”

김서방을 불러들일 의논이 쉽사리 작정되었다.

주팔이가 어제 저녁때 김서방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말하니 주삼이는 그 아우를 보고

찾아다니지 않겠으니 잘되었다. 지금 네가 가서 데리고 오너라.”

말하여 주팔이가 김서방을 데려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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