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그대(A Woman to Remember)
Miranda Lee
프롤로그
그녀는 케이스에서 옷을 꺼내 호텔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표범 가죽 무늬가 찍힌 홀터넥(목 뒤에서 끈을 매는 스타일의 등, 소매 없는 여성용 드레스)의 미니 드레스와 섹시한 금색 하이힐 샌들 그리고 음부만을 간신히 가린 크림색 끈 팬티가 전부였다. 브래지어와 스타킹, 패티코트는 물론 걸치지 않고 있었다. 등과 가슴이 훤하게 패인 드레스가 더 이상의 속옷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야한 의상을 걸친 채, 황갈색 금발머리를 부풀려 어깨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데다 입술을 도톰하게 보이도록 립 라이너로 신경 써서 원래보다 크게 그려 놓은 내 모습이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은근한 멋이 풍긴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게 그녀가 노리는 바였다. 평소의 요조숙녀다운 이미지를 지킬 때가 아니었다. 새침을 떨 시간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그날 밤이 전부였다. 이제 겨우 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 시간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방법이 떠오르자 혐오감이 밀려왔다. 하느님, 지난 한 해 동안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셨나요? 제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거죠?
짧은 순간 그녀는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절망감과 좌절감이 다짐을 더욱 새롭게 했다. 내일 아침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죽어 가는 남편이 있는 집으로....... 실망과 절망과 고독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그녀는 이 기회를 그대로 놓쳐 버릴 수 없었다. 어떻게든 잡아야만 한다. 꼭 그래야만 해!
베개 위에 놓여 있는 신문을 집어 든 뒤 그녀는 사진 전시회장의 주소를 다시 살폈다. 수요일 밤에 열리는 유일한 개막식이었다. 귀에 익은 지명이나 화랑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시드니에서 살며 일했던 것도 벌써 오래된 과거였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행사가 전과 변함없기를 빌어 보았다. 일테면 매우 사교적인 미혼 남녀로 득실대기를 바란 것이다. 이런 행사에는 도덕심을 존중하기보다는 남성 우월주의에 빠진 단도직입적인 사내들이 득실거리게 마련이니까......
한데, 네 도덕심은 어디에 있는 거지, 레이첼? 마음속에서 양심이 속삭였다.
"집에 남겨 두고 왔다구......."
그녀는 신문을 휴지통에 버리며 자신을 향해 쏘아붙였다.
"한때 사랑했던 모든 것들과 함께. 인생이란 원래 매우 어려운 게임이니까......."
그녀는 화장실로 가는 길에 결혼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냈다.
오늘 밤은 죄책감이나 자책에 빠질 시간이 없다구. 물론 이건 수치스러운 짓이야. 하지만 수치심이란 건 평범한 상황에 놓인 정상적인 아낙네를 위한 거라구.....
그녀는 지금 수치심 따위를 느낄 때가 아니었다. 절대로!
1
"넌 치과에 가야 해."
루크는 진통제 두 알을 먹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갈게요. 그렇게 심하진 않거든요."
그레이스는 여성들의 마음을 녹여 버리는 아들의 미소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서른두 살의 루크는 용모에 관한 한 치명적인 살상 무기였다. 인생과 세월이 마침내 그의 지나치게 핸섬했던 얼굴에 흔적을 남기긴 했지만, 그 덕분에 전보다 더 섹시해진 것이다.
그의 두 형들도 잘생겼지만, 루크는 부모의 장점만 물려받은 이상적인 미남이었다. 아버지의 균형 잡힌 몸매와 깨끗한 올리브색 피부와 검은 눈동자 그리고 어머니의 윤곽이 뚜렷한 얼굴선과 높은 광대뼈와 감각적인 입술 등, 이 모든 것이 조합되어 강력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십대 소년 시절, 이 그레이스의 막내아들은 소녀들의 애간장을 녹이곤 했다. 그리고 요즘에도 여성들의 반응은 변함 없었다. 하지만 불쌍하게도 제 짝을 만나 안주하지 못하고 있으니.......그레이스는 내심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원하는 며느리감과는 사는 세상이 달랐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인물 및 사생활 사진만을 전문적으로 찍는 사진작가로서 루크는 연예계와 영화계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으므로, 장기간에 걸친 헌신과 전통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었다.
그레이스는 루크가 일 년에 일주일 정도 시드니에 들르는 대신 영원히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기를 바랐다. 그는 타고난 이곳 사람인데다 고향에서 더 많은 행복을 누릴 게 분명했다.
게다가 요즘에는 아들의 행복한 낯은 보기 어려웠다.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아들의 눈매와 축 늘어진 입꼬리는 그녀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다. 혈혈단신으로 10년 전에 세상에 뛰어들어 성공했던 청년은 이렇게 냉소적이진 않았는데......
하긴, 시차와 치통을 겪고 있는 마당에 명랑한 기분을 갖기란 어려울 거야..... 남자들이 육체적인 고통에 약하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는 그레이스는 루크가 치과를 피하도록 어물쩡 내버려 두진 않았다.
"네가 로스엔젤레스로 돌아갈 날은 이 주일도 더 남았잖니."
그녀는 엄하게 지적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치통을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넌 어렸을 때 치과 가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했었지만, 이젠 다 자란 어른이잖니. 서른두 살이나 먹고도 여전히 치과 의사를 두려워하다니, 참 재미있구나."
"치과 의사가 두려운 게 아녜요. 그저 그 빌어먹을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싫을 뿐이죠. 무기력하게 남의 손에 자신을 맡기다니!"
그레이스는 아들의 고집스런 턱을 훑어보았다. 그래, 넌 그게 싫겠지. 넌 항상 네 인생을 결정해 왔으니까. 어떤 누구도 너에게 네가 원치 않은 일을 시킬 수는 없었지......또 네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말릴 수도 없었지.
그녀는 아들의 미래를 보는 안목과 의지를 자랑스럽게 여겨 왔다. 아들은 다른 사람들이 꿈만 꾸는 일을 감히 현실로 이루었던 것이다. 자신만의 꿈을 추구하고, 동시에 세상에서 성공했으며, 꿈을 현실화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 2년 동안 동거하던 그 여배우와는 어떻게 된 걸까? 편지로 봐선, 그녀와의 결혼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는데........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와 결혼에 대한 언급이 뚝 그쳤던 것이다.
그 후 집에 돌아온 루크는 못 먹을 것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그레이스의 애간장을 태우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여자에 대해 더욱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그 이유에 대한 속내를 그녀에게 털어놓지는 않았다. 사실, 아들이란 여자 친구를 갖는 그 순간부터 어머니에게 숨기는 것이 많아지는 법이다. 그리고 루크는 족히 20년 동안 쭉 그래 왔던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성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치과도 옛날 같진 않단다.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예전처럼 아프지 않아."
그녀의 살살 달래는 말에 루크는 퉁명스럽게 반박했다.
"여전히 입 안에 솜을 잔뜩 처넣어 말도 못하게 만들잖아요. 그리고 그 윙윙거리는 끔찍한 소리를 내는 갈고리를 입에 물고 있는 꼴이란.....화성의 외계인, 저리 가라예요."
그레이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문제의 근원은 거기에 있었구나? 에반스 선생님의 예쁘장한 간호사에게 덜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게로구나."
"에반스 선생님네 간호사가 예뻐요?"
루크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냉소적인 관심을 드러냈다.
"그렇더구나. 넌 아직도 예쁜 아가씨들에게 사족을 못 쓰니?"
갑자기 날카로워진 아들의 시선은 그레이스의 추측을 확인해 줬다. 그래, 저 아이가 예쁜 아가씨에게 상처를 받았구나. 그 동거하던 여배우가 그랬을까?
"제 취향은 예쁜 쪽에서 관능적인 쪽으로 변했다구요."
아들은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특별히 관능적인 아가씨라도 있는 거니?"
"아뇨......."
그레이스는 조개처럼 입을 봉한 아들에게 정보를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전에 편지에 썼던 그 트레이시란 아가씨는 어떻게 됐니? 당장 결혼할 것처럼 그러더니........"
"저는 그랬어요. 하지만 막판에 그녀가 연기 경력이 더 중요하다는 결단을 내렸죠."
"왜 그 아가씨는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 했니? 미국 아가씨들은 그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하잖니. 결혼과 아이들과 경력까지 말야."
루크가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현실은 어머니가 보시는 연속극 같지 않아요. 트레이시는 결혼을 마음에 두지 않았어요. 그저 루크 세인트 클레르 부인이 되기만 바랐던 거예요. 하지만 아이들 문제가 튀어나오자, 솔직하게 자식은 갖고 싶지 않다고 그러더군요. 저는 자식 없는 결혼은 무의미하다고 봤고, 우리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났어요."
"그랬구나. 너에겐 자식 없는 결혼이란 큰 불행이 되겠지. 너는 좋은 아버지감이거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루크, 난 네 어미야. 난 다 안단다."
"아하. 여성의 육감?"
"모성 본능이야. 그리고 네 아버지는 좋은 본을 보이셨단다. 부전자전이라고 하잖니."
"제가 자식은 고사하고 결혼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마당에 좀 안타깝네요."
"트레이시를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했니?"
"맙소사, 아니오! 그저 그 야심만만한 계집에게 매혹되었을 뿐이라구요."
"그렇다면 뭐가 문제니, 루크? 넌 이제 겨우 서른두 살이잖니.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시간은 충분하단다...."
어색한 침묵이 부엌에 깔린 가운데 루크는 얼굴을 찡그린 채 턱을 비벼 댔다.
"그녀가 누구니? 또 배우니?"
다짜고짜 그레이스가 물었다.
그의 단호한 눈매에 분노가 위험스런 빛을 발했다.
"이래서 제가 어머니께 속마음을 다 털어놓지 않는 거라구요. 제발 여자 이야기 좀 그만두실 수 없을까요? 저는 즐거운 휴가를 보내려고 집에 온 거예요. 스페인 종교 재판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구요!"
"난 너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이러는 거란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네 행복밖에는 없단다. 마크와 앤디처럼 말야."
루크는 오랫동안 어머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후회스런 미소가 그의 좌절감 어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마침내 그는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전 불행하지 않아요, 어머니. 대체 무엇 때문에 불행하겠어요? 이 망할 치통만 뺀다면 말예요."
그레이스는 이제 아들의 사생활에 대한 질문을 멈춰야 할 시간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미꾸라지처럼 이빨 치료마저 피하는 꼴은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너의 사리 없는 행동을 그냥 넘기지는 않겠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전화로 치과 의사와 약속을 정하고, 직접 너를 병원까지 데려다 주마. 그리고 네가 치료를 다 마칠 때까지 쇼핑을 하며 기다리겠다.
"어휴, 알았어요. 어머니는 일단 마음을 정하시면 하늘이 무너져도 꼼짝도 하지 않으실 분이니, 마음대로 하세요. 정말 노새처럼 고집불통이시라니까!"
사람은 생긴 대로 사는 법이지.....그레이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부엌을 빠져 나가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
다음 날 아침 열 시 정각, 루크는 탐탁치 못한 기분으로 어머니의 낡은 세단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 치과 의사가 두렵지 않다던 전날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는 두려웠다.
하지만 서른두 살 먹은 남자는 자신의 그런 마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포복 졸도하게 만들고, 여자들에게 무시당할 그런 감정을 인정할 남자는 없을 것이다.
남자가 된다는 것은 때때로 힘겨울 만큼 고독한 일이었다. 진짜 사나이는 신음하거나 투덜거리지 않는 법이다. 엄마의 어깨에 대고 눈물지을 수도 없었다.
흥, 어림도 없지! 모름지기 사나이란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과 직면해야 하는 법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강하고 과묵하고 침착해야 진짜 사나이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진짜 사나이 역할에 염증을 느끼곤 했다. 특히 치과에 갈 경우에는!
"어머니는 왜 새 차를 안 받으시죠? 그리고 새 집도 마찬가지구요......."
그는 투덜거렸다. 마침 그레이스는 차고에서 후진하던 참이었다.
"난 몬트레이가 좋아. 결혼한 후 이곳에서 계속 살아왔거든. 네 아버지와 나는 이 집에서 매우 행복하게 살았고, 너를 포함한 세 자식을 키웠단다. 게다가 친구들도 다 이 주변에 살고 있잖니. 그뿐이니, 네 아버지 묘지가 이 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네, 알아들었어요. 저는 그저 어머니에게 뭔가를 해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40년이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시다가 5년 전에 어머니를 남겨 두신 채 아버지가 저 세상에 먼저 가셨다. 그 이후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삶을 의탁하는 낌새를 조금도 보이지 않으셨다. 대신 그녀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맘에 맞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다시 시작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엄지손톱 밑에 낀 가시처럼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단다."
"뭔데요?"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오너라. 일단 자리를 잡으면, 좋은 여자를 만나서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루크는 깊고 어두운 감정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꼈지만 최선을 다해 그것을 억눌렀다. 전에 집에 왔을 때, 여기 시드니에서 제 짝을 만났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그다지 좋은 여자가 아니었다. 또 자리를 잡고 자식을 낳을 그런 타입도 아니었다.
그러나 루크는 그녀를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단 한 순간도.....그녀는 낮이나 밤이나 그를 사로잡으며 천천히 마음의 평화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그에게 불행해 보인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하기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모르는 마당에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18개월 전 그날 아침에 눈을 떠서 그녀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순간 이후로 그는 살아 있는 허깨비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녀를 찾고 또 찾았지만 허탕만 쳤다.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존재처럼 그녀가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존재해 있었다. 그냥 눈만 감으면 모든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으니까. 그녀의 얼굴. 그녀의 정열. 아름다운 몸에서 발산되던 그 열기.......
젠장, 그녀가 나를 놓아주기만 한다면! 내가 기억을 멈출 수만 있다면!
"루크?"
어머니가 옆에서 채근했다.
"난 내 아들들이 입을 꼭 다물고 쀼루퉁해 있는 꼴은 못 참는다."
루크는 그녀에 대한 회상을 멈추고는 부러 냉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앤디와 마크 형이 어머니에게 손자들을 듬뿍 안겨 드렸잖아요. 벌써 다섯이나요. 그뿐인가요? 두 명의 완벽한 며느리도 있잖아요. 저까지 세인트 클레르 가문의 혈통 잇기 작전에 투신할 필요는 없다구요. 제발 중매쟁이 아줌마처럼 설치지 마세요. 계속 그러시면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어요."
어머니의 상처 받은 표정에 그는 즉시 죄책감을 느끼고 한숨 쉬었다.
"농담한 거예요. 제가 어머니 곁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서는 못산다는 사실을 잘 아시잖아요."
"아첨꾼 같으니........"
그레이스는 타박하는 말과는 달리 즐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니가 운전에 집중하는 동안, 루크는 조용히 앉아 정답고도 아름다운 주변 환경을 둘러보았다. 오른편으로는 보타니 만의 푸른 바다와 청명한 하늘이 맞물려 있었다. 이 세상 어느 곳의 하늘도 오스트레일리아에 비교할 수는 없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구름 한점 없이 깨끗한 화창함은 세계 제일이었지만 빛이 너무 강한 터라 좋은 사진 작품의 적당한 배경을 이루기는 힘들었다.
황혼이나 새벽녘을 제외하고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풍광을 가장 잘 잡아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비와 기술이 필요했다. 그는 그런 기술을 구사해 본 적이 없었지만 갑자기 그것이 흥미로운 도전의 대상처럼 여겨졌다.
그는 정열과 관심을 온통 인물 사진에만 쏟아 왔다. 특히 흑백 초상 사진에 일가견이 있었고, 그것으로 한 재산을 벌기도 했다.
과거에 그는 과감하고 기교적인 사진들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때도 있었다. 루크 세인트 클레르가 촬영했던 모델이나 배우들은 미국에서 승승장구 성장을 거듭해 왔다. 말하자면, 그는 카메라 한 대로 명예와 부를 한 손에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 모든 게 점점 시들해졌다.
게다가 더 이상 돈을 위해서 일하고 싶지도 않았다. 2년 전에 투자했던 소규모 독립 영화 한 편이 전세계를 강타한 바람에 마음만 먹으면 평생 무위도식하며 살 수도 있었다. 이제 그의 창조적인 눈을 만족시켜 줄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할 때였다.
어머니 말씀이 옳아. 이제 고향으로 돌아올 때야..... 꼭 결혼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구. 작년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말아야지. 그야말로 사람 피 말리는 짓이 뻔하니까.....
"너를 여기에 내려 줄게."
어머니가 모퉁이를 돌며 말씀하셨다.
"건너편의 작은 아케이드 2층에 치과가 있단다. 나중에 한쪽에 있는 커피숍에서 보자."
그는 불안한 나머지 속까지 울렁거렸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 병원 유리문을 열자, 매우 매력적인 흑발 미녀 간호사가 안내석에서 고개를 들고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녀가 다정하게 물었다.
루크는 그녀의 아름다운 푸른 눈이 던져 오는 침묵의 제안을 억지로 무시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자동적으로 그녀의 왼손으로 향했다. 내심 그녀의 손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약혼반지가 끼여져 있기를 바라면서....왜냐하면 지난 1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예쁜 아가씨를 꼬셔서 하룻밤 지내고 차 버리는 짓은 신물이 났기 때문이었다.
뭐, 그 역시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동기는 이해할 만했다. 그는 그녀를 대신하여 여자들 모두에게 벌을 줬던 것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그는 진짜 열망하는 여자들만 골라서 상대해 왔다. 그가 원하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상대만 말이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항상 유혹하고 차 버리는 입장에서 어두운 만족감을 느끼고 싶었지만, 아침에 낯선 여자와 한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자신이 하찮은 버러지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리고 그런 게임이 반복되어 가자, 결국 자신이 싫어졌던 것이다.
그는 마음만 내키면 얼마든지 악질적인 행동을 할수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기준을 세웠고 그에 자부심을 가진 터였다. 즉, 결혼하거나 약혼한 여자들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는 그 사소한 사실을 두고, 내심 자신이 아주 못 말릴 망나니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는 접수계원에게 의도적으로 이름을 대는 대신 성만 댔다.
"세인트 클레르입니다. 열시 삼십분에 예약을 했습니다만...."
"아, 네. 에반스 선생님의 진료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한 십오 분 정도 기다리세요. 그 동안 커피나 차를 드시겠어요?"
울렁거리는 속에 차나 커피를 마시라구? 위스키라면 또 몰라도. 하지만 병원에서 그런 것을 제안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기 잡지가 많이 있어요......"
그는 그녀의 말을 뒤로 하고 대기실의 검은색 가죽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다리를 포개고 팔을 의자 팔걸이에 놓는 등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자신이 손가락을 퉁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옆 탁자에 얹혀진 낡은 잡지를 손에 집어 들었다. 벌써 4년이나 묵은 여성지에 쓴웃음이 나왔지만......
시간을 죽이려고 나른하게 페이지를 넘겼을 때, 문득 어떤 기사의 제목이 그의 시선을 잡아 끄는 거였다. <전도유망한 모델, 경력을 포기하고 저명한 과학자와 결혼하다.>
루크가 패션 잡지 일로 밥벌이를 했던 때도,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 당시 친구들은 대부분이 모델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혹시 지인들의 소식을 알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그는 가시를 읽어 내려갔다.
잡지에 실린, 키스하는 신혼부부의 사진은 얼굴 부분이 어두웠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신랑의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루크는 사진의 아래쪽 설명 부분에서 모델의 이름을 찾아 보았다.
4년 전의 어느 토요일 오후, 시드니의 세인트 메리 대성당에서 스물두 살의 모델 레이첼 매닝이 저명한 유전학자 패트릭 클리어리와 결혼했다는 기사도 그의 기억을 일깨우지 못했다. 하지만 기사 하단 부분의 신부만 찍힌 작은 사진을 대한 순간, 그의 몸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는 손가락의 관절이 하얗게 드러날 만큼 힘주어 잡지를 쥐고는 미소 짓는 신부의 사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금발의 아름다운 신부였다.
흰 웨딩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순진해 보였다. 완벽한 순수의 초상이었다. 청초한 여성의 정수였다.
다음 순간 한 줄기 분노가 안에서 솟구쳤다. 온몸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유부녀였다니! 그 망할 계집이 이미 결혼했었다니!
그래, 이제야 말이 된다. 말이 되고도 남고말고!
아직 그의 마음에 찜찜하게 남아 있는, 그날 밤의 석연치 않았던 부분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풀리지 않은 의문이 응어리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야 그 대답을 얻다니.........
그러나 그녀가 4년 전에 결혼했다고 해서 18개월 전에도 유부녀였다는 뜻은 반드시 아니지 않은가. 그 사이에 이혼을 했을 수도 있잖아? 그녀는 난잡하고 헤픈 여자는 아니었다. 그날 밤 그렇게 했어야만 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야. 하지만 왜 그녀는 내가 잠든 틈을 타서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몰래 사라졌을까?
흥, 차라리 돼지보고 하늘을 날라고 하라지. 그의 이성이 냉소적으로 끼어들었다.
"에반스 박사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세인트 클레르씨....."
루크는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잡지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호사가 진찰실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긴장과 신경질로 움츠러들었던 속도 편안해졌다. 다시 한번 그녀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더러 그의 생각을 현실에서 분리시켰던 것이다.
루크는 무덤덤하게 치과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지만 마음은 지난날의 기억으로 소용돌이 쳤다. 이제 와서 그녀를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그녀의 이름을 안 지금에 와서 말이다.
레이첼.
18개월 저의 그날 밤 전시회에서 그녀가 그를 유혹했을 때, 그는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 다음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일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기 때문이다.
레이첼이라니......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로군.
그는 화가 났다. 그 이름은 사진 속의 신부에게나 어울렸다. 그날 밤 그의 눈을 사로잡았던, 여성의 순수한 화신 같았던 존재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아다. 레이첼은 숙녀의 이름이다.......하지만 그에게 다가와 유혹적으로 미소 지으며 여자 치고는 대담한 말을 속삭였던 그 여자는 숙녀가 아니었다.
치과 의사는 치료를 하는 동안 루크에게 치아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루크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덧 그의 마음은 그날 밤 그 전시회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가 속삭였던 그 적나라한 말이 그의 귀에 윙윙 울린 다음 순간 그는 영혼이 파괴되는 듯한 밤의 추억을 되살려 냈다.
2
"내가 묵고 있는 호텔 방은 여기서 가까워요......"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깊고 진한 초록색 눈으로 그를 빤히 주시하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이 겉보기만큼 이 파티에 싫증났다면 나와 함께 그곳으로 가요...."
루크는 몸을 바로 세우고 갈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그 길고 우아한 손으로 넘어간 자신의 술잔을 응시했다. 그가 계속 잔을 들고 있었더라면 지금쯤 그 내용물을 옷에 쏟았으리라. 물론 그 제안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 시간을 얼어붙게 만들 만한 충격적인 여파를 몰고 왔다.
그는 그녀의 깊고 관능적인 두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다른 부분을 보는 것보다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는 그녀가 천천히 살랑거리며 화랑을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왔을 때 이미 파악한 터였다.
그녀는 경탄할 만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황금 갈기에 둘러싸인 완벽한 얼굴 생김새와 탄성이 절로 나오는 몸매.......키는 크고 날씬한데다 가슴은 풍만했으며 두 다리는 길었다. 허리는 한 줌이나 될까?
그가 갖고 있는 평소 여성 취향에는 너무 야한 그녀의 표범 가죽 무늬 미니 드레스는 상상의 여지를 불허하고 있었다. 맙소사, 이 여자는 아무 속옷도 입지 않은 게 분명해.....마치 피부처럼 딱 달라붙는 그 드레스는 팔과 어깨를 훤히 드러냈고, 팽팽한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야 그녀의 직업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흠, 아예 모르는 편이 좋겠군....
대체로 그는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은근하고 미묘한 관능미를 풍기는 세련되고 고전적이면서도 차가운 분위기의 여성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 대담한 여자처럼 노골적으로 초대를 하는 대신 그럴 듯한 분위기만 풍기는 그런 여자들 말이다....
"생판 모르는 타인을 낚는 게 취미요?"
그는 충격이나 흥분된 기색을 감추며 여자에게 물어 보았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흥분을 두어 달 전에 트레이시와 파경을 맞은 이후 어떤 여자와도 성 관계를 맺지 않았던 금욕 생활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는 눈앞에 서 있는 그 암고양이 같은 여자를 원했던 것이다.
그녀의 양미간 사이에 희미한 주름이 잡혔다.
"당신은 미국인이시군요......"
그는 부지불식중에 미국식 악센트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정정하려 했지만, 그 순간 차라리 여자가 착각을 하는 편이 훗날 편리하겠다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거였다.
"미국인을 좋아하진 않소?"
그는 그녀의 손에서 잔을 받아 들고는 한 모금을 벌컥 들이켰다. 오늘 밤을 제대로 넘기려면 술을 마셔둘 필요가 있을 것 같군.......
"그거야 사람 나름 아니겠어요? 이곳에 휴가를 오신 건가요, 아니면 무기한 체재중이신가요?"
"휴가요......"
그는 사실에 가깝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와 매일 밤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무기한으로 머무를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이미 그의 뜨거워진 피는 사타구니로 몰려 있었다. 이미........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녀의 동물적인 관능에 제물이 될 준비가 되었음을 이 여자 사냥꾼에게 눈치 채이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대담한 접근과 멋진 미모에 홀린 마당에도 그의 남성적인 자아는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초연하고 냉정한 자세를 견지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기준 미달이오?"
그가 짐짓 나른하게 물었다.
"그 반대에요......"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그의 척추를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난 관광객을 좋아해요. 특히 섹시한 검은 눈동자를 가진 키 크고 핸섬한 사람을요. 당신은 홀몸이겠죠? 호텔이나 미국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나 여자 친구는 없겠죠?"
"꼴불견이지만, 알짜배기 혼자요....."
그는 세련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갖은 힘을 다 썼다.
"당신에게 꼴불견인 점은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는 걸요, 미남 양반. 당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해요. 자, 나와 함께 가요........"
그녀는 사이렌(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반은 요정이고 반은 여자인 존재.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지나가는 뱃사공을 꾀어 들여 죽였다고 함)의 미소를 지으며 얼어붙은 그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덕분에 그녀의 완벽한 젖무덤이 훤하게 드러났다. 다시 허리를 편 그녀는 그의 팔을 끼고 전시장을 가로질러 그를 넓고 흰 계단 쪽으로 이끌었다.
실날처럼 여리게 남아 있던 루크의 이성이 정지된 두뇌에서 마침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갑작스레 멈춰 서서 부드러운 여자의 이끌림을 거부했다.
"당신, 창녀는 아니겠지?"
부지불식중에 거친 질문이 입을 막을 사이도 없이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계단에 서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초록색 눈에 어린 충격을 읽은 순간 그는 자신의 실수를 타박하며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졌다. 아니면 그 충격을 목격하고 내부에서 솟구친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만약에 그녀가 나의 의심을 사실로 인정했다면, 나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십중팔구는 그래도 그녀와 함께 갔으리라.....
"내 실수요. 앞장서도록 하시오."
그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복잡하지도 않고, 서로 얽혀 들지도 않는 하룻밤 상대를 찾는 여자에 불과했다.
루크는 그날 밤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가 혹하지 않은 척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혹한 것 이상인데.....
그녀는 온몸에서 발산되는 원초적이고 감칠 맛 나는 관능미로 그를 매혹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이성에 마법을 걸고 그의 육체와 상상력을 자극하여, 그녀와 함께 보내는 밤의 기분을 상대방이 미칠 듯이 알고 싶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앞장서서 남은 계단과 혼란스런 화랑 입구를 가로지르는 동안 계속 뒤를 돌아보며 그의 존재를 확인했다. 마치 그가 이렇게 쾌히 동행에 나선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순간 예상치 않은 그녀의 자신 없는 듯한 행동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이런 방식이 그녀의 평소 스타일과 거리가 먼 건 아닐까? 마침내 거리로 나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그녀를 어두컴컴한 골목 안으로 밀어 넣고는 온몸이 부서져라 부둥켜안았다.
그녀는 헐떡거리는 호흡과 경악한 눈매는 그의 의심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었다. 그래, 그녀는 이런 위험한 게임에 길들여지진 않았구나. 아니면 전에 진짜 매운 맛을 보지 못했거나.......
"이 바보 아가씨야. 처음 보는 남자와 어울리는 짓이 위험하다는 것도 모르시는군?"
그녀는 고개를 바짝 쳐들고 분노로 눈을 반짝이며 쏘아붙였다.
"지금 그 발언을 마음이 변했다는 뜻으로 접수해 드리죠. 흥, 지옥에나 가시지...."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꿈틀거렸다.
"난 오늘 밤 겁쟁이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다구요."
"겁쟁이라니! 요 아가씨가......"
분노가 폭죽처럼 눈앞을 가리자, 그는 무의식중에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고 뒤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놀란 입술을 틀어막고 생각지도 않던 키스를 퍼부었다. 정열이 아닌 분노의 키스였고, 유혹이 아니라 상처를 주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키스였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 유혹이 찾아 들었다.
그의 혀가 반복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헤집고 들어오자, 그녀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 신음 소리에 그는 생전 처음 여자의 신음을 들은 것처럼 그녀를 처벌하기보다는 보호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무자비한 키스를 계속하기가 불가능했다. 어느새 그의 혀는 부드럽게 그녀를 탐하고 있었다. 그녀가 힘없이 그에게 기대 오는 감촉에 그는 뛸 듯이 기뻤다. 다음 순간 항복을 알려 오는 그녀의 길고 관능적인 신음 소리에 그는 눈앞이 아찔할 만큼 흥분했다. 그녀의 옷을 벗기고 나란히 눕는 시간을 더 이상 기다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 호텔 방이......."
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중얼거렸다.
"여기서 먼가?"
그녀는 그 달콤한 입술을 그의 것에 대고 문질러 대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열다섯 살 이후 처음 맛본 압도적인 흥분에 진저리를 쳤다. 헐떡거리며 뒤로 물러선 그는 야성적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는.......깜짝 놀란 것 같았다. 깜짝 놀라는 동시에 그의 처분에 몸을 맡긴 상태였다. 그야말로 남성의 환상이 현실로 이루어진 순간이 아닌가. 저항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그렇다면 갑시다. 그곳에 빨리......."
그가 중얼거렸다.
치과 드릴이 이빨에 닿자, 루크의 육체는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여전히 생생한 기억 속에 떠돌고 있었다.
그녀가 그 자발적이고, 완전히 정신을 잃은 듯한 항복한 태도로 나를 속여 넘긴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그날 밤의 주도권을 잡은 듯한 확신에 빠지게 할 만큼 그렇게 영악하고, 능수능란한 여자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뒤에서 모든 상황을 조종했던 장본인이었던 것일까?
그는 절망적이리만큼 그 당시 그녀가 유부녀가 아니었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유부녀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최소한 그날 밤이 그녀의 첫 외도였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하룻밤 상대를 유혹하기에 충분한 도구로 무장한데다, 또 그런 뜻을 공공연하게 밝혔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녀는 그날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종의 광란스런 유희를 원한 동시에 그것의 증거를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끼어 맞출 수 없는 부분은, 그녀가 외도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 만한 위험을 감수했던 이유였다.
그래, 그것은 고의라고 할 수 없어. 혹시 그것이 그녀가 맛보고 싶어 했던 정신 나간 환상의 일부가 아니고서야....... 그녀는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들었던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그의 정신 건강과 자존심에 훨씬 이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집착해 왔던 것이다. 전에는 그런 식으로 정신을 잃을 만큼 분위기에 휩쓸려 든 적이 없었기 때문에.......그리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난 당신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소."
마침내 호텔 방문이 닫히자, 그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들은 화랑에서 두 블록 떨어진, 작지만 우아한 호텔에 들어선 이래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곳은 싸구려 관계를 위한 장소는 아니었다.
"내 이름?"
그녀는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그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는 분별을 잃은 듯한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를 왈칵 품에 안을 때, 헐떡거리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됐소. 오늘 밤엔 이름 따위는 아무 상관없소. 내일 아침에 이야기합시다."
그는 마법이 풀리기 전에 그녀에게 다시 키스했다.
아, 그는 그녀의 키스가 좋았다. 그녀의 신음 소리가 좋았다. 그의 품에 녹아 드는 그녀의 육체가 너무 좋았다. 그토록 그의 품에 꼭 들어맞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달콤한 항복은 그의 안에서 강력한 힘을 솟게 만들었다.
그는 기꺼이 몇 가지 되지 않는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는 기꺼이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황홀하게 그녀의 나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기꺼이 그녀의 옆에 앉아 온몸을 전부......철저하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저 몽롱한 초록색 눈을 그에게 고정시킨 채 간헐적으로 도톰한 입술을 열어 숨을 몰아쉬곤 했다. 그의 애무를 기대치 않았던 걸까? 아니면 남자에게 그런 기쁨을 얻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걸까?
마침내 거의 절정에 도달하자 그녀는 허벅지를 떨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등을 둥글게 휘더니 온몸을 그의 손에 맡겼다. 그가 돌연히 그녀에게서 손을 떼자, 그녀는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을 토해 냈다.
그때서야 처음으로 루크는 자신의 호흡이 그녀만큼 거칠고 빠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흥분해 보기는 몇 해 만에 처음이었다. 야한 옷가지를 벗어버린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더 이상 싸구려 같은 면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고전적인 곡선미를 자랑하는 그녀는 순수한 미의 결정체였다.
그는 저 부드러운 황금의 굴곡 속에 몸을 담근 채 그녀의 관능적인 입술이 벌어지며 절정의 탄성을 발하는 순간을 기다릴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그 자신의 만족을 조금도 고려치 않았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과거 그에게 사랑을 맺는 우선순위는 자신의 만족이 첫째였는데.......
하지만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저 받기 보다는 주고 싶었다. 그야말로 과거에 없던 첫 경험이었다.
루크는 호텔 방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몸은 백 퍼센트 충전된 듯한 기분이었고, 그 힘은 낯선 부드러움으로 자꾸 더 부풀어 갔다. 그가 풋내기였다면, 그 오랜 세울 후에 드디어 사랑에 빠졌다고 단언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게 아닌 이상, 그때 그의 경우는 평범한 범주를 초월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트레이시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처음 사랑을 나눴던 기억을 훗날 전혀 기억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그 밤이 지나기도 전에 그는 평생 동안 그 순간을 잊지 못하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전에 이래 본 적이 없었지?"
루크는 옷을 벗기 시작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술을 핥았다.
"왜 그런 말을 하시는 저죠?"
"당신이 너무 긴장한 것처럼 보여서......"
"난 처녀가 아녜요."
"그렇다고 말한 적도 없소."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거의 처녀의 것에 가까웠다.
루크는 그를 향한 그녀의 감탄과 공포를 알아차렸다. 그의 육체는 수많은 여성들의 환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서두르지 않고 마지막 속옷을 천천히 벗어 들었다. 눈에 보일 만큼 침을 꼴깍 삼키는 그녀의 반응에 그의 흥분은 더욱 고조되었다.
"콘돔은 어디에 있소?"
그는 그녀의 곁에 누워 아름다운 몸매를 다정하게 애무하며 물었다.
순간,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눈을 꼭 감았다.
"이봐요, 콘돔은?"
그는 짧지만 단호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더니 고통스런 초록색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신음을 발했다.
그는 그녀의 순진함에 짜증이 나면서도 동시에 미묘한 감동을 받았다. 그녀가 다시는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못박아 둬야지. 오늘 밤 이후 오랫동안 그녀는 나 이외의 다른 연인을 갖지 못하게 되리라. 내일 아침에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둬야지.......
"괜찮소. 내가 항상 여분의 것을 지갑에 넣어 갖고 다니니까."
"안 돼요!"
그가 막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순간 그녀가 외쳤다.
그는 초조하게 어깨 너머를 돌아봤다.
"안 되다니, 뭐가?"
"난 못하겠어요, 할 수 없어요...."
루크는 막판에 그녀의 마음이 변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그런 가능성은 생각 밖이었다.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는 번뇌로 가득 찬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이해하오. 당신은 이제야 오늘 밤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깨달은 모양이군. 하지만 난 좋은 사람이오. 당신에게 상처 입히는 짓은 하지 않겠소. 자, 이제 근사한 사랑을 나눕시다."
그는 약속과 함께 그녀를 자리에 눕히고는 키스를 시작했다.
그의 거듭되는 키스에 그녀의 욕망에 다시 불이 지펴졌다. 하지만 무방비한 상태로 사랑을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온몸에 키스를 퍼부은 다음에 그녀가 말리기 전에 침대를 빠져나갔다.
그녀는 다시 돌아온 그를 강하게 끌어당기더니 더 이상의 전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순간 루크는 이미 폭발 일보 직전에 도달해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두 다리로 그의 몸을 감싸고 온몸을 열었을 때 다른 대안은 사실상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뜨거운 안으로 파고 들었고 그 빽빽함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맛봤다. 그를 지어드는 그녀의 강렬함에 그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전율이 온몸을 달리는 순간, 그는 참을 수 없는 절정에 도달했다. 그들은 태고적부터 면밀히 이어 온 합일의 기쁨을 누렸다.
마침내 그 순간이 지나자, 그는 달콤한 피로에 젖어 그녀의 몸 위로 무너졌다. 그의 품에 파고 드는 그녀의 몸짓에 즐거운 친밀감이 몰려왔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왼쪽 귀를 간지럽히자, 그녀는 만족에 찬 한숨을 내뱉었다. 따뜻하고 놀라운 평화에 젖은 채로 그는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경이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하지만 마냥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뒤처리를 하려고 화장실에 다녀왔을 즈음, 그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으로 만들어졌다는 성경 구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곁을 떠난 그는 자신이 불완전한 반쪽짜리 인간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나른하게 누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위치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과 어깨와 다리의 곡선이 적나라하게 고스란히 드러났고, 무거운 듯 내리깔린 그녀의 속눈썹과 관능미는 천천히 그의 욕망을 다시 일깨웠다.
그가 당장 침실을 빠져 나가 약국으로 달려가고픈 충동을 느낄 때,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를 옆으로 끌어당겨 눕히고는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좀 전과 역할이 바뀐 것이다.....
루크는 놀란 나머지 말을 잃고 그냥 누워 있는 반면, 그녀는 그의 온몸에 키스와 애무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그녀의 모습은 순진했던 아까의 것과는 판이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를 감질나게 흥분시키도록 고려되었기 때문에 그는 빠르게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몸에서 차오르는 감각을 억제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가 절망적인 인내의 어둠에 몸을 맡긴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가 그의 엉덩이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그의 단단한 것을 그녀의 몸 안에 깊숙이 집어넣는 거였다. 적나라한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눈을 번쩍 떴지만 그녀는 이미 합일의 율동을 엮어 내고 있었다.
"안 돼........"
그는 신음했다. 하지만 약한데다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저항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는 그 순간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밀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녀를 꽉 부둥켜 잡고는 더욱 강하고 빠른 리듬을 유도했던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황홀한 감각이었다.
아, 그녀는 뜨거웠다. 너무 뜨거웠다. 그의 피는 흘러내리는 용암처럼 혈관을 타고 돌았다. 그의 욕망의 화산은 자제되지 못한 채 미친 듯 뛰는 심장 박동에 따라 더 높이 분출하여 그녀의 여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는 헐떡거리며 야성의 신음을 발했다.
절정이 지나자, 그는 그녀의 따뜻한 입술을 느끼고 픈 마음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 순간 그녀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반짝거렸다. 아, 이런 순간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그는 입이 열 개라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그녀를 꼭 껴안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위로의 말을 건넸을 뿐이었다.
"울지 말아요, 달링. 제발 울지 말아요. 자, 눈물을 거둬요.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소. 아까 말했듯이, 난 건강하오. 그리고 당신도 건강하고......우리는 별 이상이 없는 사람들이오. 쉿, 잠을 자요. 그래, 그거요. 그만 자도록 해요....."
그는 자신의 말이 옳기를 바랐다. 그녀가 건강하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전에 없던 바보짓을 저지른 셈이었다. 완벽한 타인과 아무런 방비도 없이 동침하다니. 게다가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져 버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다 끝났습니다, 세인트 클레르 씨."
치과 의자가 세워지고, 간호사가 휴지로 그의 입가를 닦아 줬다.
루크는 눈을 꿈벅거리며 간호사의 미소 띄운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벽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열한 시 십오 분이었다. 벌써 30분이나 치료를 받았건만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니! 그의 마음과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차갑게 응결된 분노를 가슴에 담은 채 그는 치과 의사와 간호사에게 감사와 작별의 말을 건넨 다음 접수처에서 현금으로 치료비를 지불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세인트 클레르 씨."
간호사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국식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럴 거요......"
그의 목소리에는 음울한 만족감이 배어 있었다. <즐거운 시간> 이란 정의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잊지 못할 시간이 되리란 것은 확실했다. 마침내 집착했던 상대의 이름을 알아냈으니 말이다. 그녀의 이름과 과거를, 오랫동안 유령처럼 나를 따라다닌 그 여자를 찾아내고야 말리라.....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가 무슨 짓을 할지는 오직 신만이 아시겠지.......
"저기 저 낡은 잡지를 한 권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옛날 친구의 사진이 게재돼서요."
그가 간호사에게 말했다.
"네, 가져가세요."
그리고 나도 당신의 처분에 맡길게요.....그녀의 눈은 그런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여자들이란 못 믿을 족속들이야.
그는 탁자로 다가가며 생각했다. 세상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다 그래.....
루크는 문제의 잡지를 들고 간호사에게 두 번 다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치과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3
그의 어머니는 커피숍에서 카푸치노 한잔을 앞에 놓고 그를 기다리고 계셨다. 루크가 다가가자, 어머니는 보고 계시던 신문을 옆으로 접어 두고 의자에 앉는 아들의 모습을 자세히 응시했다.
"왜 그러니? 이빨 치료를 못 받았니?"
그는 퉁명스런 신음을 억눌렀다. 당장 택시를 잡아 타고 가까운 공항으로 달려가 최신형 자동차를 임대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차와 사생활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아녜요. 저는 괜찮아요. 이빨도 괜찮구요. 문제없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쀼루퉁해 있는 거냐?"
"맙소사, 어머니는 제 얼굴을 척 보시자마자 기분을 감지해 내는 안테나라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저는 그냥 카페로 들어와서 앉았을 뿐인데, 어머니가 제 기분을 어떻게 아신다는 거예요? 그런 판단을 내리실 만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잖아요."
"네 걸음걸이가 삐뚜름했잖니."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잡지를 옆에 높여 있는 의자에 올려놓은 뒤 어머니의 신경을 분산시킬 만한 화제를 머릿속으로 찾았다.
"어머니,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위해 정절을 지키셨어요?"
"얘가! 그런 질문이 어디에 있니?"
"그건 대답이 아니라 회피예요."
"숨을 좀 돌리자꾸나.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니?"
"음, 어머니는 아름다우시잖아요. 사십오 년 전 결혼식 사진에서의 어머니는 보는 사람이 숨을 멈출 만큼 아름다우셨어요. 미녀들은 대부분 결혼 유무에 상관없이 많은 유혹을 받잖아요."
그레이스는 아들의 상대가 아름다운 유부녀라는 감을 잡았지만 전략적으로 질문을 뒤로 돌렸다. 때가 드디어 왔군......
"내가 유혹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또 두 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지. 하지만 네 아버지에게 정절을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고, 기술상으로는 그랬어."
루크는 눈을 껌뻑거렸다.
"기술상으로 그랬다니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예전에 한 남자에게 긴 키스를 허락했거든."
"아, 그게 전부예요?"
"그 당시 나에게는 굉장히 큰일이었단다. 하지만 그는 매우 잘생긴 미남인데다 매력이 철철 넘쳤거든. 그의 접근에 난 우쭐하고 마음이 설?단다. 그는 겨우 삼십대 초반이었고 나는 마흔한 살이었지. 나는 한창 때를 지났다는 생각에 절망적으로 누군가의 관심을 필요로 했는데, 그가 그것을 줬단다."
"그 바람둥이는 누구였어요?"
"네가 모르는 사람이야. 그 해 여름에 시드니를 방문했던 덴마크 사람이었단다. 네 아버지가 술집에서 그를 만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날 밤 그의 키스를 허락하셨단 말씀이에요?"
루크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어머니의 뺨이 약간 붉어졌다.
"아까 말했듯이, 그는 굉장히 매력적이었어."
"아니,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는 어디에 계셨어요?"
"평소처럼 텔레비젼을 보고 계셨지. 에릭은 설거지를 도와주다 나를 부엌 한구석에 몰아넣은 뒤 키스했단다. 난 처음에 까무라칠 만큼 놀랐지만 그의 키스가 싫진 않았어. 아, 물론 너무 도가 지나치기 전에 그를 중지시켰단다. 하지만 그가 떠난 다음에 난 그의 생각을 많이 했단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그가 투숙한 호텔 방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그냥 끊어 버렸어."
"네에......."
"난 네 아버지를 사랑했단다. 네 아버지는 젊었을 땐 좋은 연인이었어.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친밀감이 자리 잡자 우리의 침실 생활은 전 같지 않았어. 지루함이 자리 잡고, 네 아버지는 고된 일로 피곤해 하셨지. 그래서 난 에릭 같은 남자의 희생양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야."
루크는 얼굴을 조금 찡그린 채 어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거짓말이 아니시겠죠? 정말 그와는 아무 일도 없으셨던 거죠?"
"그럼! 난 섹시한 검은색 속옷을 사고 책에서만 읽었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단다. 그 다음부터는 네 아버지와의 관계가 초기처럼 좋아졌지."
"어머니도 참! 전 충격을 받았어요......."
그녀는 얼굴을 더 붉히면서도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 순간 그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아버지가 어리석게도 어머니를 무관심하게 대했을 때, 어머니는 현명하게 유혹을 물리치고 선한 의지를 굳게 지키셨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여성이 다 그렇게 강하거나, 정절이 깊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루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부는 약하고 이기적이기에 외도로 원하는 것을 취하고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게 아닐까......
웨이터가 그의 테이블로 주문을 받으러 왔다. 그는 치과 치료로 아직 미각을 되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문을 거절했지만, 진짜 이유는 더 이상 그곳에 앉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찾아야 할 여자가 있었으니까......
"제가 먼저 자리를 떠나도 될까요? 병원에 있을때, 전에 레이를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던 게 생각났거든요......"
"레이라니?"
"레이 홀랜드라는 사진작가예요."
제발 그가 시드니에서 작업중이길.....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구나. 네 유일한 사진작가 친구는 테오가 전부였잖니? 전에 그에게, 네가 그의 사진 전시회 테이프를 끊는 날 참석했다가 십 분 후에 사라졌다는 불평을 들었다만......"
"음, 지난 몇 년 동안 불쌍한 테오의 작품은 형편없어졌거든요. 그날 밤 그곳에 더 있다가는 사실대로 그에게 말하게 될 것 같아서 예의상 얼른 자리를 피했던 거예요."
"그럼, 그날 밤 어디를 갔었니? 내 기억에 의하면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어머니! 제가 정말 대답을 하리라고 기대하시지는 않으셨지요? 열여덟 살이 된 다음부터는 제 사생활에 대한 보고는 그만뒀을 텐데요."
"흥, 착각하지 말아라. 넌 열다섯 살 때부터 그랬다구. 신이 창조하신 중 가장 반항스럽고 까탈스런 아이였다! 넌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여전히 까탈스러워."
"<반항적>이진 않구요?"
"서른두 살짜리 노총각에게 <반항적>이라는 형용사는 그다지 잘 어울린다고 볼 순 없지. 그냥 까탈스럽다고만 해 두자꾸나."
"네, 좋아요......"
루크는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에게 감정적인 협박이라도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관찰하고 계셨던 것이다.
여자들이란 호기심이 발동하면 못 말린다니까. 이유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려 드니까. 중국식 물고문형 수사에서 새침한 침묵과 눈물 작전까지 말이다.......
루크는 다른 대응에는 거뜬히 버틸 수 있었지만 읍소 작전만은 예외였다. 그 방법에는 그는 백전 백발 손을 들기 일쑤였다.
"진짜 가 봐야 겠어요, 어머니. 오늘은 할 일이 많아서요. 차는 제가 직접 임대하겠어요."
"오늘 저녁 시간에 집에 돌아올 거니?"
"메뉴가 뭔데요?"
"흥, 네가 집에 돌아오는 이유가 그뿐이라면 굳이 대답할 생각은 없다."
"아니, 그런 섭섭한 말씀을. 일곱 시에 집에서 뵐게요, 어머니."
그는 어머니의 뺨에 키스하고는 잡지를 쥔 채 밖으로 나갔다.
그레이스는 아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커피숍에 있는 모든 여성들의 시선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저 아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여자 때문일 거야. 계속 숨기려 들었던 저 잡지 표지 모델이겠지. 유부녀인 게 확실해.
아, 루크........루크야.
그레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부녀를 쫓아다녀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깨달을 거니? 절대로 미래를 바라볼 수 없는 관계라구!
루크는 테오의 아파트 거실을 서성거리며 친구가 암실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그는 좀처럼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너무 쉽게 자신의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헤어진 지 한 시간 만에 잡지 사무실에서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레이 홀랜드의 주소를 얻어낸 것이다.
사십대 초반의 홀랜드는 클리어리의 결혼식을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그전에도 그녀와 함께 여러 차례 작업을 했었던 덕분이었다. 그녀는 수영복과 속옷 전문 모델이었다.
루크는 또한 그의 사랑스런 레이첼이-그녀를 부를 때마다 이빨이 갈렸지만-최근에 모델계로 복귀했다는 정보도 함께 입수했다. 풍문에 의하면, 그녀의 과학자 남편이 최근에 죽었던 탓으로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다시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그 마지막 정보는 루크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의 집착의 대상이 최근에 과부가 되었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뻤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남편이 죽은 지 얼마 안 된다는 것은, 18개울 전의 그날 밤 그녀가 유부녀였다는 뜻이 아닌가.....그의 씁쓸함은 배가되었다.
믿지 못할 계집 같으니......그는 맹렬히 화를 내며 그녀가 속한 모델 에이전시의 주소를 알아냈다. 에이전시로 향하는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추측이 스쳤다. 그녀보다 훨씬 나이 많은 남편이 그녀를 못살게 군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환경에서 그녀가 품위 있게 정사를 가졌다면, 그 행위는 나름대로 용납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녀의 옷차림이나 그에게 접근한 방식 그리고 잠든 그를 내팽개치고 도망 친 태도는 어느 모로 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뒤에 남은 그는 바보가 된 기분으로 몇 개월 동안 지옥 같은 의심의 시간을 보낸데다 그 후에는 그런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이유로 치명적인 병에 걸려 죽지나 않을까 해서 확인 검사까지 받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그런 궁지로 몰아넣었던 그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그녀를 일대일로 만나 그녀의 어떤 점이 그를 끈질기게 놓아 주지 않는 건지 항상 확인하고 싶었다. 또한 이유를 묻고 싶었다. 그녀는 왜 나를 선택했을까? 왜 그런 무모한 위험을 저질렀을까? 왜, 왜, 왜?
그리고 이제.......이제 이틀 내로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아, 그는 도저히 그때를 기다릴 수 없었다!
"이 친구, 좀 웃어 보라구. 여기는 웬일이야?"
루크는 퍼뜩 고개를 들고 암실에서 나온 친구를 바라보았다. 삼십대 후반의 테오는 카메라와 사진 기술을 바꾸듯 여자 친구를 정기적으로 갈아치우는 사진작가 친구였다. 루크는 유행만을 좇는 테오의 작품 경향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친구의 넉넉한 마음씨와 유쾌함을 좋아했다.
"카메라를 두 대 빌려 달라고 하면 자네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하던 참이었어."
루크는 짐짓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카메라를 빌리고 싶단 말야? 이런 일은 처음이잖아."
"그래, 하지만 최근에 작업을 하던 피사체들을 싫증이 나서 뭔가 다른 방향에 도전해 볼까 해. 임대료는 후하게 쳐 줄께."
"어떤 카메라를 빌리고 싶은데?"
루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걸 모르겠단 말씀이야. 그래서 자네의 식견을 빌려야겠어."
테오가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아첨은 여전하군. 좋아, 어디에서 사진을 찍을 예정인데?"
"여기저기 해변에서 비키니 차림의 아가씨를 찍을까 해서......."
"예술 작품을 찍을 거야, 아니면 오스트레일리아 홍보용 사진이야?"
"상황에 달렸어."
"아하, 알겠다. 그녀의 이름이 뭐야?"
테오의 푸른 눈이 반짝거렸다.
"누구?"
루크가 시치미를 뗐다.
"자네가 쓰려는 모델 말이야, 이 친구야. 날 바보로 아는 거야? 이봐, 관두라구. 대체 그녀가 누구야? 내가 아는 여자야? 왜 그렇게 그녀에게 전전 긍긍하는 거야?"
루크는 테오에게 그녀의 이름을 말해 줘도 아무 탈이 없으리란 결론을 내렸다. 또 알게 뭐람? 테오는 패션 관계 일을 더 이상 하지는 않지만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지......
"레이첼 메닝이야......."
모델 에이전시에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녀는 처녀 때 이름으로 수영복 전문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는 거였다.
에이전시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수요일과 목요일에 센트럴 코스트 해변에서 촬영한 뒤 하룻밤을 홀리데이 인에서 묵는 일을 받아들일지의 여부를 확인할 때, 루크는 가슴 졸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가 돈이 필요하다면 그 제의를 거절할 수 없는 건 분명했다. 그는 일류 모델 가격을 제시하면서 자신을 호주 출신의 사진작가지만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루크 세인트 클레르라고 에이전시에 밝혔던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테오가 중얼거렸다.
"워낙 이름 외우는 데 재주가 없어서."
"됐네."
루크는 그녀의 이야기만 꺼내도 가슴 설레곤 하는 자신이 미워졌다.
"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거야."
"지금은 안 돼."
"나중에는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휴, 지금 여자 친구가 없는 모양이지?"
"응, 벌써 일주일째야."
루크는 낙담한 친구의 표정에 웃음을 터뜨렸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로군."
"나에게는 그래."
"자네도 안주할 때가 된 모양이군. 좋은 여자를 찾아서 결혼하라구."
"허튼 소리 말게."
루크가 노총각의 전형적인 대답에 아무 말도 못하자, 테오가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자네도 결혼할 생각은 아니겠지? 루크, 벌써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은 아니겠지?"
루크는 두 가지 질문에 모두 대답을 못한 채 머뭇거렸다. 그저 혼란스럽고 답답하기만 했다. 결혼할 가능성은 없었고,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더더욱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바보짓은 그만두라구......그는 자신에게 엄중하게 말했다. 그녀는 고려의 대상조차 안 돼. 그런 여자에게 마음을 바치고 인생 전체를 걸 수 없다구!
"아니. 난 결혼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어."
그저 머리가 돌 듯한 정욕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라구......그는 속으로 이유를 달았다.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정욕뿐이라는......
하지만 수요일에는 그는 모든 힘을 다해 그녀에 대한 호기심뿐 아니라 지난 18개월 동안 충족되지 못한 흥분을 모두 만족시킬 생각이었다.
4
수요일 아침은 완벽했다. 최소한 날씨만큼은 그랬다. 9월의 첫째 주였으므로 약간 쌀쌀하기는 했지만, 청명하고 온화한 봄날을 연상시키는 그런 날씨였다.
여섯 시경에 수평선에서 떠오른 태양은 재빨리 동틀녘의 잿빛을 벗어 던지고는 노보크의 해변가 소나무위에 떠올라 루크의 호텔 방 창문을 밝은 빛으로 채웠다.
그리고 벌써 한 시간이나 흘렀다. 그 동안 그는 샤워와 면도를 하고 옷을 입은 다음 호텔 방으로 배달된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드는 매순간 그녀가 루크 세인트 클레르의 진짜 정체를 모른 채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계획을 세웠다. 그녀를 그의 비밀스런 거미줄로 끌어들여 그녀의 정체를 밝힐 전략이었다. 만일 그녀가 18개월 전에 한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 계획은 잘 먹혀 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반드시 일말의 양심을 가졌으리라 기대했다.
마침내 일곱 시가 됐다. 모델 에이전시를 통해 그녀와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 시각이었다. 하지만 서로 못 만날 경우, 그녀가 그의 방으로 연락하기로 되어 있었다. 루크는 그녀가 정각에 도착한다 해도 좀 시간을 뒀다가 그의 방으로 연락하리라 예상했다. 이렇게 화창한 날, 일을 서두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는 전화를 기다리며 호텔 방에 딸린 발코니에서 서성거렸다. 방 바로 아래에 아름다운 수영장이 보였고, 그 옆으로 해변에 난 길과 햇살을 반사하는 바다가 펼쳐졌다.
그가 테리갈을 선택한 이유는, 그곳이 시드니에서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십대 후반에 친구들과 어울려 자주 방문해 봤기 때문에 주변의 해변이 그림처럼 아름답고, 사진을 찍을 만한 멋진 장소가 산적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레이첼 매닝 양은 그곳이 전문적인 사진 촬영지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의심을 한다면 모든 일이 어긋날 것이다. 바보가 되거나, 조종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 어떤 누구도 말이다.......루크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매분 매초가 괴로울 만큼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침내 5분이 지났다. 그리고 10분이 흘렀다.
그녀가 늦고 있는 것이다.
몇 분이 더 흘렀지만 여전히 전화는 오지 않았다.
루크는 약간 짜증나는 것 이외에도 솟아오르는 다른 감정에 화가 났다. 사실 공포 같은 것으로 인해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공포일까?
그녀가 오지 않으리란 공포일까? 아니면, 그녀와 대면했을 때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결과가 드러날까 봐 미리 두려운 것일까? 그녀를 다시 만나서........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어쩌지? 그녀에 대한 집착이 나의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펄쩍 몸을 돌리고는 방 한편에 놓인 전화기를 코브라나 되는 것처럼 응시했다. 그리고는 몇 초 동안 전화 벨 소리만 듣고 있다 결국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그가 날카롭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세인트 클레르 씨."
호텔 남자 접수원의 목소리였다.
"이렇게 일찍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여기 매닝양이 오셨습니다. 좀 늦어서 죄송하지만 오는 길에 사고가 났었다고 전해 달랍니다."
루크의 속이 더욱더 울렁거렸다. 그녀가 여기....아래층에서.......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곧 내려가겠다고 그녀에게 전해 줘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루크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는 안 돼. 두려워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녀라구......그게 그가 계획한 복수의 일부분이었다.
그는 침실에 달린 긴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아래위로 꼼꼼이 점검했다. 키가 크고 군살 없는 몸매에 청바지가 썩 잘 어울렸다. 바위 같은 회색의 청바지와 단순한 디자인의 흰 티셔츠, 가벼운 진회색의 재킷이 색상의 통일감을 이루고 있었다.
롤렉스 금시계를 제외하고는 그의 부를 드러낼 만한 소품은 없었다. 뭐, 세상에 흔하디 흔한 게 가짜 롤렉스 시계잖아. 루크는 그녀에게 자신의 부유함을 눈치 채게 하고 싶진 않았다. 후한 모델비를 제의한 것마저 후회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암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다음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채 방을 나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대신 로비를 살펴볼 수 있는 계단을 통해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내가 그런 식으로 내려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하리라. 또한 나와 일하게 되는 것 역시 예상치 못했으리라. 18개월 전 그녀는 나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휴가 온 미국인으로 생각했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녀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놔주지 않겠어.....그는 침울한 만족감을 느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로비 중앙에 자리잡은 팔걸이 의자를 자세히 살폈다. 모두 비어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살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은 접수계로 향했다.
처음에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백금색에 가까운 금발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검은색 레깅스와 검은색 재킷을 걸친 그녀는 검은색 샌들 덕분에 키가 더 커 보였다.
그녀는 접수계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직원임에 틀림없었다. 잘생긴 젊은 접수계원은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크는 속에서 북받쳐 오는 뜨거운 감정이 질투가 아니라 냉소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흥, 여전히 남자를 꼬시는 데에는 능숙하시군....
이제 행복한 과부가 된 이 마당에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하려고 나섰겠지. 하기야 더 이상 몰래 숨어 하룻밤 상대와 정을 통할 필요가 없어졌을 테니까........마음만 내키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원하는 상대와 어울릴 수 있으니까........
그 생각만으로도 루크의 사타구니는 아플 만큼 죄어 들었다. 좀 전에 느꼈던, 그녀를 더 이상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어느새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접수계원이 계단을 내려오는 그를 알아보고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숨이 막혔다.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저 깨끗한 피부와 맑은 눈매를 한 여자에게서는 유혹적이거나 선정적인 면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목 위까지 단정하게 오는 흰 블라우스를 걸친, 신선하고 청초한 천연 미인이었다. 남자를 홀리는 요부가 아니라 천사였으며, 창녀가 아니라 처녀였다.
루크는 마지막 생각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바보 같은 자신에 대한 분노로 속에서 불이 붙었다. 그는 앞으로 나섰다. 저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이라구.......천사와는 거리가 멀다구. 스물여섯 살이나 먹은, 닳고 계산적인 계집일 뿐이라구.......
그녀는 넓은 이마에 주름을 잡고 자세히 그의 모습을 살폈다. 선글라스 덕분에 그를 쉽게 알아보진 못했지만,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그 동안 그는 그녀를 마음껏 탐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젠장, 그녀는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갈망에 몸이 쑤실 정도였다. 한 번만으로는 부족해. 더 이상 원치 않게 될 때까지 그녀를 갖고야 말 거야.
그때서야 나는 평화를 얻게 되리라.
그때서야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환상을 씻어 버릴 수 있으리라......
그는 완벽한 순간을 골라 선글라스를 벗고는 정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매닝 양이시죠?"
그녀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혼란에 빠졌다. 깜짝 놀란 눈으로 그의 얼굴과 악수를 청한 손을 번갈아 봤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게 틀림없어. 하룻밤 상대와 재회하게 된 걸 알아채지 못한 게 분명해......
다음 순간 그녀는 재빨리 자신을 추스르고는 떨리는 손을 용감하게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와 비슷한 정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아요....."
그녀는 그날 밤의 허스키하고 관능적인 어조와 달리 긴장된 목소리를 냈다.
"당신이 세인트 클레르 씨이가요?"
"장본인입니다."
"하지만...하지만 에이전시에서는, 당신이 오스트레일리아 사진작가라고 하던데요......"
"그렇습니다. 내 억양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십 년 동안 생활한 덕에 터득한 겁니다."
당황하는 그녀와는 달리,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 완벽하게 시치미를 뗐다.
"아, 아. 그랬군요......"
그녀는 그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믿는 눈치였다. 처음에 하얗게 질렸던 혈색이 차츰 발그레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가끔 시드니를 방문하곤 합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더 풀어 줬다.
"이번에는 휴가중에 일을 좀 해보기로 했습니다. 지난번에는 너무 많은 파티에 참석한 결과 내내 숙취에 시달렸거든요. 아, 당신을 레이첼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루크라고 불러 줘요. 거창하게 아무개씨, 아무개양 하는 식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요?"
"그럴 것 같네요......."
그녀의 방어벽은 점점 풀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아니면 그 상황 자체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 같았다.
"그러면 일을 시작해 볼까요?"
그가 선글라스를 다시 끼며 말했다.
"네? 아......네, 그렇게 하세요."
그녀는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 했다. 당황하여 쩔쩔매는 모습이 지난 몇 개월 동안 그가 품어 왔던 그녀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처음에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가 재빨리 그의 재등장을 받아들이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과부가 된 마당이니, 그에게 적극적으로 수작을 걸어오리란 기대마저 품었었는데.......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간 것이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차를 어디에 주차시켜 놨습니까?"
그는 돌연하게 몰려드는 죄책감에 짜증이 났다. 죄책감은 그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스런 시선으로 그의 눈치를 보는 짓은 제발 그만둬 주기를 바랄 수밖에.........
"거리에 세워 놨어요."
"차에서 가져올 게 있습니까?"
"아니에요. 화장 도구와 머리 장식품은 모두 여기에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 차를 호텔 주차장에 세워 두도록 해요. 어차피 당신은 이곳에서 밤을 보내야 하니까."
그녀의 얼굴에 확연한 공포의 빛이 드러났다.
"저기, 나는....저기.......나는......오늘 밤 집에 돌아가야 해요. 아침에 다시 이곳으로 오도록 할게요."
루크는 그녀를 응시했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람? 왜 그녀가 나를 두려워하는 걸까? 내가 아니면, 나와 같은 호텔에 묵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내가 그녀를 원하는 것처럼 그녀가 나를 원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녀는 전처럼 유혹에 항복하고 나와 친밀한 상황에 돌입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하지만 왜 그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까?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머릿속으로 거듭 궁리했다.
어느 순간, 그 질문에 대한 명백한 대답이 복부를 치는 듯한 충격과 함께 떠올랐다. 또 다른 남자가 있는 게로구나......약혼자나 남자 친구, 아니면 연인이 있는 게 분명해. 그녀는 또다시 마음 내키는 상대와 어울릴 수 있는 자유의 몸이 아닌 거야.
젠장, 그 생각을 진작 했어야 했는데. 그녀 같은 여자가 오랫동안 홀로 지낼 리가 없지.........
"집이 어딥니까?"
그가 짧게 물었다.
"캐링바예요."
캐링바는 그의 어머니가 거주하시는 몬트레이를 지나는 곳에 있는, 시드니 남쪽의 교외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두 시간 거리가 아닙니까. 당신 남자 친구는 하룻밤도 혼자서는 지낼 수 없답디까?"
그는 질투심을 내색치 않으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남자 친구요?"
그녀는 멍하니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남자 친구가 없구나. 남자 친구도, 연인도, 약혼자도 없는 게 분명해!
"당신이 집에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그는 문제의 핵심을 지적했다. 왜 그녀가 나를 두려워하는 걸까?
"시......시어머니가 편찮으세요."
그녀는 마지못해 우물거리며 설명했다.
"당신은 시어머니와 단둘이서 살고 있습니까?"
그녀의 망설임이 그의 호기심에 불을 질렀다.
"네. 그래요. 나는........남편을 잃었거든요."
"음........그러시면 나중에 시어머님께 전화를 드리세요. 그분은 당신이 시드니의 교통 정체를 뚫고 힘들게 귀가했다가 내일 아침 다시 이곳에 오는 것을 원치 않을 겁니다."
"아, 네....., 네."
"그럼 그 일은 결정된 겁니다.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는 것은 일이 끝난 다음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차를 호텔 주차장에 세워 두세요......."
잠시 후 그는 커피숍을 빠져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녀가 회전문을 막 나가자마자 바람에 머리가 날렸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돌리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뒤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자태는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색다른 아름다움이었다.......야한 화장을 하거나, 가슴을 강조하지 않았는데도 그녀에게는 은근한 관능미가 풍겨 나왔다.
당연히 루크에게 그녀의 자연스러운 매력은 두 배나 더 효력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 못 박힌 듯 우뚝 서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온몸의 근육이 갑작스런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그녀는 잠깐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보폭이 넓고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루크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오늘 밤을 그녀와 함께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 버리겠어.....
하지만 그의 목표를 달성하기란 그의 예상만큼 수월할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저항하리란 것은 자명해졌으니까.....비록 그 이유는 명료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그녀가 여전히 자신에게 육체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말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전에 그랬었으니까.......그리고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러하니까.
잠시 후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흰 소형차에서 내렸다. 루크는 짜증이 났다. 이제 그녀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 장비는 어디에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내 차에 있습니다."
"어느 차예요?"
"이쪽으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려 들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녀가 손을 잡아 빼는 반응은 그를 놀라게 하는 한편 화나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쏘아붙였다.
"그저 당신을 도와 드리려던 것뿐이었습니다. 당신이 사람과의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 부류라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너무 냉소적으로 말한 걸까?
"아녜요, 내가 오히려 미안해요......"
그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얼마 전에 어떤 남성 사진작가에게 불유쾌한 경험을 당한 후로 내가 약간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아요."
그 고백에 루크의 속에서 강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가 당신을 공격한 겁니까?"
"아녜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남자의 관심은.......촬영 밖이었어요. 매우 불유쾌한 경험이었거든요."
"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레이첼. 나는 한번도 여자에게 강요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 이 여자는 어떻게 나에게 욕망과 함께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걸까?
"네, 그러셨겠지요."
그녀의 사랑스런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루크는 그녀를 한 번 훔쳐 본 다음에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 그녀는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자신이 올바른 카드만 내놓는다면 그녀가 그날 밤 자신을 거절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좀 전에 보인 공포는 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거칠게 다뤘던 다른 바보에 대한 것이었음이 분명해졌으니까.......
루크가 지난번의 경험에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레이첼이 섹스나 유혹 문제에 주도권을 잡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선택을 하고 우위에 서는 것을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날 밤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다시 떠오르자, 혈관을 타고 불꽃이 자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모든 자제력을 총동원한 끝에야 그녀를 무사히 그의 차로 안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어두운 골목으로 끌고 가 미친 듯한 욕망이 담긴 뜨거운 키스를 열렬히 퍼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인내심을 가지라구, 루크. 그는 계속 자신을 달랬다. 인내심을 갖는 거야. 오늘 밤이 곧 온다구.......
그는 이빨을 갈며 좌절감에 어린 신음을 지그시 억눌렀다. 오늘 밤은 지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견뎌야 하는 지옥이 되리라........그녀에게는 서둘러선 안 된다.
게다가 그는 육체적인 욕망 이상으로 만족시켜야 할 것이 있었다. 지난 18개월 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다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 인내심을 갖자. 그게 열쇠야. 기다리는 자는 복을 받나니. 레이첼을 찾았으니, 이제 다른 대답을 또한 찾게 될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리라.......
5
"어떤 수영복 회사의 일인가요?"
호텔 주차장을 빠져 나오면서 그녀가 그에게 물어보았다.
루크는 이 질문을 예상했으므로 이미 좋은 대답을 마련해 뒀다.
"수영복 회사 일이 아니라, 샌트럴 코스트 관광청의 홍보물 제작입니다. 관광청측은 원래 풍경 사진만을 원했지만, 내가 비키니를 입은 멋진 오스트레일리아 미녀를 곁들이면 해변이 더 근사해 보일 거라고 설득했거든요."
그녀는 인상을 써 보였다.
"하필이면 왜 나를 선택하셨나요? 나는 몇 년 전부터 오랫동안 일을 쉬었는데요."
"레이 홀랜드라는 친구에게 당신을 추천 받았어요."
"아, 레이 말이군요. 정말 좋은 사람이죠........"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가 당신 결혼식 사진을 찍었다면서요?"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네. 그래요."
그리고는 입을 꼭 다물었다.
루크는 초반에 그 화제를 물고 늘어졌다가 그녀가 영영 침묵을 지킬까 두려워졌다. 그는 말없이 테리갈 트라이브에서 차를 돌려 스킬리온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한 쌍의 남녀만이 손을 잡고 풀이 무성한 언덕으로 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루크는 전에 보지 못했던 철책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고 예방용 철책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저렇게 낮은 철책으로는 자살을 결심한 사람을 말리지는 못할 텐데....
"저곳은 바람이 심하겠는데요."
레이첼이 철책이 둘러지지 않은 절벽 꼭대기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루크는 얼굴을 찡그린 채 좁은 공간에 차를 주차시켰다. 철책 때문에 사진을 찍으려던 생각을 이미 버린 참이었다.
"그럼, 저쪽은 어떻겠소?"
그가 앞의 협소한 바위를 가리켰다.
"앵글을 잘 맞춘다면 절벽을 배경으로 잡을 수 있을 거요. 어떨까요?"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불편하거나 춥지도 않을 것 같구요. 그런데, 수영복을 어디에서 갈아입죠?"
루크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군......
"차 뒷좌석에서 갈아입도록 합시다. 미안합니다. 요즘은 주로 실내 작업을 많이 했던 탓에 이런 촬영에 대한 감을 잃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진들이었는데요?"
그녀는 의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주로 인물 사진이었소."
"그것으로 돈이 벌리나요?"
"꽤 많이 벌고 있지요."
루크는 사실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남성적인 자존심에 위배되기도 하지만, 그는 돈을 끌어들이면서까지 그녀의 관심을 얻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결혼 배경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은 얼마나 나이가 많았던 걸까? 그는 부유했을까? 그녀가 돈에 이끌려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재정적인 곤란 때문에 일에 복귀한 마당이니 다시 예전의 경제적인 위치를 되찾고 싶어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집에 처박혀서 무슨 수로 부자 남편감을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루크, 당신은 유명한가요? 에이전시 측에서는 당신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작가라는 여운을 풍겼지만, 그들이 과장하는구나 싶었죠. 그들은 종종 그러는 경향이 있거든요."
"나는 캘리포니아에서는 꽤 알려진 편이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몇 사람이나 내 이름을 알고 있을지 의문이오."
"난 못 들어 봤어요."
"기대도 안했소. 자, 내가 카메라를 설치하는 동안 뒷좌석에서 옷을 갈아입으시지."
"비키니만요?"
"내키지 않는 거요?"
"아녜요. 나는 그저.......그저........"
"뭡니까?"
"난 추위에 약하거든요. 게다가 이번이 일에 복귀한 후 처음 하는 야외 촬영이라서요."
"그럼,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갈 때까지 재킷을 걸치도록 하시지. 나중에 해변으로 갈 테니. 그곳에는 당신이 옷을 갈아입을 만한 탈의실이 있을 거요."
잠시 후 그가 자동차 뒷좌석 창문으로 준비한 옷을 건네자, 그녀가 물었다.
"어떤 옷을 먼저 입을까요?"
루크는 전날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현지의 옷가게에서 에이전시 측의 정보에 따라 수영복을 몇 벌 구입해 두었다. 모두 화려하고 대담한 비키니들이었다.
"별 차이 없으니, 당신 마음대로 하시지."
"창문에 등을 돌리고 서세요. 그리고 훔쳐보시면 안 돼요!"
그녀의 지시를 들은 루크는 적당한 표정을 짓기가 어려웠다. 맙소사, 내가 보지 못했던 그녀의 신체 부위가 한 군데라도 있을까?
하지만 바로 뒤에서 그녀가 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극도로 흥분시켰다. 그는 저절로 떠오르는 상상을 지워 버리고 카메라 설치에만 마음을 집중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그리고 겨우 그녀의 나신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을 때, 그녀가 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부는 통에 겉에 걸친 그녀의 재킷 앞부분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루크는 인상을 썼다.
맙소사, 그녀의 몸매는 추억보다 훨씬 근사했다! 화려한 색상의 비키니 상의에 가려진 그녀의 가슴은 전보다 더 풍만해 보였다. 그리고 살이 더 빠졌는지, 엉덩이의 곡선은 더 풍만했고, 배는 더 홀쭉했다. 예전과 다름없는 부분은 그녀의 다리뿐이었다. 길고 탄탄한 종아리와 허벅지는 몸에 달라붙는 청바지를 걸친 사내에게 더 이상의 생각을 불허하게 만들었다.
루크는 신음을 감추고 그녀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뗀 다음 카메라 앵글을 조작하는 척했다. 테오가 적당한 카메라를 빌려 준 덕분에 그처럼 미녀에게 홀린 바보라도 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내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카메라에 무슨 문제라고 있나요?"
그녀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약간......."
루크는 카메라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아, 선글라스를 끼고 있길 천만 다행이다....여자를 원할 때, 그의 눈은 종종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야성의 빛을 번뜩이기 때문이다.
"양쪽 카메라 모두 친구에게 빌린 겁니다. 내 물건은 전부 미국에 있거든요."
내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다녀야 하는 물건을 빼고 말이오. 그것도 뒤에 남겨 두고 다닐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는 종종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유감스러워하는 편이었다. 여자들은 성적인 반응을 숨기거나 꾸며낼 수 있지만, 그에 반해 남자들의 반응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빨을 갈며 그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고 가장 좋은 촬영지를 찾기 위해 바위투성이의 만으로 향했다. 바위 사이로 여러 개의 길이 나 있었지만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그의 신발은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발 조심해요. 중간 중간에 미끄러운 곳이 있으니......"
그가 뒤를 돌아보며 그녀에게 경고했다. 그녀의 손을 잡아 주거나 부축하는 짓은 그리 현명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의 평화나, 더 나아가 임무의 성공 양쪽 모두에 말이다....물론 나중에 호텔로 돌아가서 그녀에게 손을 대는 짓 또한 현명치 못하리라....적당한 순간이 오기까지는.
사진 촬영은 놀라울 만큼 훌륭하게 진행되었다. 루크는 일시적이나마 욕망을 접어 두고 매 컷마다 최선을 다해 집중했다. 그것은 수 년 간에 걸친 전문 사진작가로서의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물론 진실로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그는 일단 일을 시작하면,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훌륭한 사진을 찍곤 했다. 하지만 선글라스를 벗어야 한다는 점이 못내 유감스러웠다.
15분 후, 루크는 레이첼 매닝이 보기 드문 모델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타고난 보석이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잘 받을 뿐 아니라 진짜 전문 모델이었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포즈를 정확하고 빠르게 취했으며, 그녀의 태도나 표정은 그의 창의력을 더욱 고취시켰다. 그녀는 정말 타관 모델이었다. 건강하고 친근감 넘치면서도,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그가 꿈꿔 왔던 한순간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는 등을 휘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살포시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너무 부드러우면서도 너무......너무........
"이제 섹시한 포즈를 취해 봐요....."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 다음 그의 지시에 따랐다. 그녀는 앉아 있던 반들반들한 회색 돌에 등을 대고 눕더니 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등을 약간 들어 올린 다음 왼쪽 무릎을 구부린 다음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입술을 관능적으로 벌린 채 카메라를 향했다.
그 순간 루크의 피는 정점까지 끓어올랐다. 그는 숨죽여 욕을 내뱉은 다음 눈을 더 바짝 파인더에 갖다 댔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그 장면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찍은 다음에야 간신히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좋아요....."
마침내 그가 짧게 내뱉었다.
"이만하면 이곳 사진은 충분합니다. 다른 촬영지로 이동합시다. 공동 작업을 하기에 앞서 내가 먼저 스킬리온으로 걸어가서 그림엽서 같은 풍경 사진을 찍을 테니, 당신은 차로 돌아가서 몸을 녹이도록 하시오. 기다리는 동안 옷을 갈아입어도 좋소."
루크가 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을 때 뒤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났다.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그 고통 어린 소리에 루크의 가슴이 철퍼덕 내려앉았다. 그가 얼른 뒤돌아보니, 레이첼이 바위 가장자리에 앉아 발을 디딘 작은 물웅덩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발목을 삐지나 않은 거요?"
그의 목소리에 어린 감정이 공포일까?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까지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별거 아녜요......"
그녀는 물웅덩이를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여기에서 술을 마시고 맥주병을 깨뜨린 모양이에요. 유리 조각에 발을 좀 베었지만 걱정하진 마세요. 상처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니까요. 일단 발을 소금물에 담궈서 세균을 죽이면 돼요."
"안 돼요. 상처를 만지지 말아요! 내가 가서 봐야겠소."
루크는 허겁지겁 길을 되돌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요.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안전을 택하는 편이 낫소."
루크는 그녀의 옆에 꿇어앉아 그녀의 발바닥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많이 아파요?"
그는 손으로 그녀의 발을 꼭 쥐고는 상처를 살피며 물었다.
"아......아뇨."
더듬거리는 말투가 냉정하고 세련된 그녀답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야........
하지만 그가 그녀의 얼굴에서 본 것은 충격이 아니라 긴장이었다. 전기 감전처럼 전율적인 성적인 긴장감......
그녀의 발을 잡은 그의 손가락이 점점 뜨거워졌다. 갑자기 심장이 요동을 쳤다. 그는 그녀의 종아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핀셋 없이도 뽑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냉정하고 차분한 자신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만족감을 느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그가 유지했던 평정도 잠시뿐이었다. 유리 파편이 뽑혀 나간 자리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자, 그는 엉겁결에 입술을 그녀의 상처에 대고 빨아 댔다.
그의 본능적인 행동에 담긴 원초적인 친밀감이 두 사람 사이에 천천히 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동그란 초록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흥분한 그녀의 모습은 루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18개월 이란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만을 꿈꾸며 보내 온 터였다. 이제 그 꿈이 현실로 된 마당에 그의 묵계는 순식간에 깨어졌다.
그의 안에서 오래 묵었던 분노가 솟구쳤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녀의 발을 더 높이 쳐들었고, 그에 따라 그녀는 바위에 반쯤 드러눕게 되었다. 다음 순간 그는 그녀의 발가락 전체를 다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빨기 시작하며 그녀의 화들짝 놀랐던 반응이 서서히 욕망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그녀의 맑은 초록색 눈동자는 안개 낀 회색으로 짙어졌고, 벌어진 입술에서는 다급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루크는 그 입술을 바라보며 전에 맛봤던 그 감촉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런 경험을 다시 누리기 전에는 절대로 쉴 수 없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의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때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길 원했다.
그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이 스킬리온의 확 트인 해변에 있다는 자각이 밀려왔다. 유혹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녀는 주변을 의식하거나, 소음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은 그에게 야만스런 만족감을 가져다줬다. 예전과는 상당히 다른 경험이었다. 그 당시에 그녀는 모든 주도권을 잡고 사랑에 나섰기 때문에 그는 수동적인 입장에 섰었다...... 그야말로 즐거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다짜고짜 그녀의 발에서 입술을 떼자,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경악한 그녀의 눈에는 자신이 그에게 그런 행동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통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담겨 있었다. 루크는 그녀의 흥분을 전혀 모르는 척하는 대신 그녀의 발과 고통스런 얼굴에만 관심을 쏟기로 했다.
"이제 피가 멈춘 것 같소. 하지만 발에 먼지가 묻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당신을 안고 차까지 모셔다 드리겠소."
"안 돼요!"
그녀는 즉각적으로 반대했다.
"왜요? 난 보기보다 힘이 센데....."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난 혼자 걷는 편이 더 좋거든요. 하지만 말씀은 고마워요."
"마음대로 하시지......."
루크는 어두운 미소를 띄우며 재빨리 일어나 차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곳에서 당신을 손에 넣었어, 레이첼 매닝 양. 당신의 눈에는 내가 그저 침착한 사진 전문가에 지나지 않겠지. 그리고 오늘 당신은 수치를 맛보게 될 거야. 당신의 껍질을 한 겹 벗기고 나면 그 밑에는 여전히 그날 밤 나를 유혹했던 그 창녀가 나오겠지. 당신의 관능은 여전히 그 껍질 아래에서 살아 숨쉬며 적당한 시기를 노리고 있다구......
그리고 오늘 밤 그 관능을 이끌어 내는 남자는 바로 내가 될 거야.... 루크는 속으로 맹세했다. 그리고 당신을 내 몸과 마음에서 몰아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밤을 함께 보내겠어! 그러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 난 당신에게서 자유를 되찾아야만 해.....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든가.
루크는 생각의 전개 방향에 놀라 우뚝 멈춰 섰다.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가 사랑에 빠졌으며, 또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다던 테오의 지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루크는 몸을 돌려 갈등의 원인 제공자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위 사이에서 한 발을 들고 깡총깡총 뛰어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공연히 그 자신과 그녀에 대한 분노를 느끼며 그는 단숨에 길을 돌아가 그녀를 덥석 안아 올렸다.
"내가 도저히 참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가 윽박질렀다.
"도움이 필요할 때 남자의 도움을 거절하는 여자요. 당시에게는 내가 필요하오, 레이첼. 그걸 인정하시는 게 어떻소?"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좌절감에 불타는 눈과 그녀의 당황한 눈이.....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고 그녀는 턱을 바짝 치켜 올렸다. 그리고 맑은 눈을 똑바로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루크......"
그녀는 허스키하지만 꽤 안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인정하겠어요.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동시에 그는 다시 한 번 주도권이 그의 손에서 그녀에게로 옮겨졌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젠장.......그는 분개했다. 젠장할!
감정을 다시 가라앉히려는 투쟁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마음을 추스린 그는 그녀를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반갑군요, 레이첼."
그는 청산유수로 말을 풀어 놓았다.
"남자들은 여자에게 필요로 되는 것을 좋아하는 법이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니까.....자, 이제 차로 가서 반창고를 찾아봅시다."
그리고는 사업적인 태도로 말을 덧붙였다.
"아직 하루는 많이 남았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했잖소....."
6
루크는 그럭저럭 하루를 보냈다.
겨우 보낸 하루였다.
그는 자존심과 자아가 구겨지지 않을 만큼 간신히 살아남았다. 테오가 그의 필름 현상을 자청하고 나섰으므로, 루크는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얕보일 수도 없었다. 그 동기는 그를 분발하게 만들고 촬영에 정신을 집중하도록 했다.
또한 평소 여자에게 몸을 사리고 경계했던 습관 덕분에 촬영을 하지 않는 순간에는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위험에서 간신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를 데리고 테리갈 해수욕장에서 곧장 왐베랄로, 그 다음에는 북쪽의 포레스터 해수욕장과 셀리 해수욕장을 휩쓸고 다녔다.
그녀와의 대화는 최소한으로 자제했고, 그것도 전문적인 범위 내에서만 나눴다. 루크는 그녀의 반나체에 가까운 비키니 차림을 촬영하는 동안, 그녀의 개인 신상과 결혼에 대한 속사정을 염탐하겠다는 계획을 버렸다.
그것은 시간 낭비이자 그의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평정을 깨트리는 짓이기도 했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그날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완전히 갖춰 입은 그녀와 나란히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본격적인 유혹에 나서는 거야......
어쨌든 그는 그녀가 편하게 이야기를 많이 하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품지도 않았었다.
게다가 레이첼 매닝 역시 끝까지 평정을 잃지 않았다. 정말 조종하기 어려운, 신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루크는 그녀가 자신을 상대로 고양이와 쥐 게임을 하고 있다는 의심마저 솟았다. 종종 그녀는 강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나를 재난에서 구해 주려는 걸까? 아니면, 몸이 달아오른 채 내버려 두려는 걸까.......
태양이 서서히 지고 기온이 쌀쌀해질 즈음, 루크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이제 마지막 필름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슬슬 일을 정리합시다."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일몰 사진은 찍고 싶지 않으세요?"
그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지금 저 여자가 농담을 하고 있는 건가? 그녀 역시 피곤할 텐데, 더 일을 하자고 제의하다니?
"아니오. 난 너무 피곤합니다. 당신도 그러시겠지만.....그만 호텔로 돌아갑시다. 난 뜨거운 샤워를 하고 한잔 마셔야 되겠소."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루크는 그녀가 밤이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그녀의 눈에서 공포 비슷한 것마저 감지했다.
짜증이 난 그는 성큼성큼 차로 돌아갔다. 제발 그녀가 나에게서 뭘 원하는지 마음을 정해 줬으면 좋으련만......그리고 나 또한 그녀에게서 뭘 원하는지 마음을 정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또한 그녀에게 찍은 낙인을 믿고 싶었다. 그의 마음속에 그녀는 방종한 창녀였다.
지금은 그의 확신이 흔들리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새롭고 진귀한 일도 아니었다. 언제 그가 그녀를 확신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신비와 양면성으로 가득차 있었다.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레이첼 메닝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루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만 그녀와 다시 성적인 관계 이상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전에 감정적인 측면을 발전시키는 짓은 너무 위험했다.
그는 감정적으로 그녀와 연루되어 있었다. 그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단, 그 감정의 색깔이 모호했을 뿐이었다. 사랑일까, 아니면 증오일까. 혹은 분노일까?
그가 아는 것은, 그녀의 손아귀에서 다시는 바보가 되지 않으리란 자신의 다림뿐이었다. 그는 대답을 원했고, 그녀를 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생각이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젠장, 꼭 필요하다면 그녀가 혼수상태가 될 때까지 술이라도 마시게 할 참이었다.
사랑과 전쟁에서 모든 수단을 정당화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야! 이번만큼은 그녀는 자기 멋대로 하지 못하리라.....그는 이 기회를 18개월이나 기다려 왔으므로, 그녀를 쉽게 놔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날 저녁 일곱 시 이십오 분 루크는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기분도 새로운데다 적절히 이완된 상태였다. 석 잔의 스트레이트 위스키가 그 효과를 발휘한 덕분이었다.
그는 일곱 시 삼십 분 정각에 레이첼의 방으로 가서 그녀를 데리고 호텔 일층에 있는 노포크 테라스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일곱 시 이십육 분에 그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봤다. 진회색 바지에 맞춰 입은 검은색 실크 셔츠와 연회색 스포츠 재킷이 멋들어지게 잘 어울려 보였다. 젤을 바른 암갈색 머리가 저녁 불빛에 거의 흑발처럼 보였고, 그 날렵한 스타일은 그의 강인한 골격과 눈빛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었다.
"이제 슬슬 출동해 볼까, 미남씨........"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눈썹을 들어 올려 보였다.
"기억해 둬. 지금은 네가 고대해 왔던 시간이야. 절대로 일을 망치지 말라구......"
그녀의 방은 그와 같은 층이었지만 복도 끝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방과 나란히 붙은 방을 얻을 만큼 노골적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루크는 신경이 잔뜩 곤두선 상태로 긴 복도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갔다. 두 번 노크를 하자 그녀가 문을 열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전화를 받고 있던 중이었어요. 금방 지갑을 가져오겠어요."
그녀가 방문을 열어 둔 채 지갑을 가지러 갔기 때문에 루크는 방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주색인 청색과 황색으로 통일시킨 방은 그의 것과 거의 똑같았다. 목재로 만들어진 식민지 시대의 가구들이 매우 편안한 안정감을 줬다.
잠시 후 그녀가 그에게 돌아왔다. 초록색 실크 정장 바지와 함께 펄럭거리는 긴 재킷을 목까지 단정히 단추를 잠근 차림새가 우아해 보였다. 정숙한 옷차림과 한 듯 만 듯한 화장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움직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섹시해 보였다. 루크의 뜨거운 시선 아래 그녀의 볼록한 젖가슴이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틈을 주지 않고 재빨리 방을 나와 등 뒤로 문을 닫아 버렸다.
"뜨거운 샤워를 마음껏 하셨나요?"
그녀는 세련된 태도로 그에게 차분하게 물었다.
루크는 레이첼 매닝에게 두 개의 측정기가 있다는 사실에 점점 익숙해졌다. 일테면, 그녀의 이성과 육체는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싫다 싫다 하면서도, 몸은 그 반대의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앞으로는 그녀의 말 대신 육체 언어에 정신을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네, 물론이죠......."
그가 나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강한 술도 마셨소. 당신은 지난 두 시간을 어떻게 보냈소?"
"목욕을 한 다음에 커피를 여러 잔 마시면서 가장 좋아하는 텔레비전 게임 쇼를 시청했어요."
"당신은 카페인 중독자인가 보군?"
그는 그녀와 함께 복도를 걸어가며 말을 붙였다.
"그뿐인가요. 게임 쇼 중독자이기도 하죠."
"우리는 둘 다 무해한 중독 증세를 갖고 있군......."
"아, 그래요? 당신은 뭐에 중독되셨는데요, 루크 세인트 클레르?"
이윽고 그들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고개를 그에게 돌린 그녀의 얼굴에는 역력한 호기심이 드러나 있었다. 오늘 밤 그녀는 나와 무슨 게임을 하려는 걸까? 그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마주 보았다.
그녀는 흔쾌히 유혹 쪽에 마음을 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인 매력을 의식하고 있었고, 손가락만 하나 까딱해도 대부분의 남자들이 달려오리란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유혹에 꼼짝하지 않으리란 생각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지조차 않았으리라.....
루크는 그녀를 무시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독단적인 태도는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그가 유들유들하게 되물었다.
"처음부터가 좋겠어요. 당신이 어렸을 때 어떤 소년이었는지 알고 싶어요. 어디에서 성장했죠? 그리고 어떻게 사진작가가 되셨어요?"
그는 눈에 띄게 깜짝 놀랐다. 젠장, 그녀가 또 주도권을 잡았군.......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입장이 아니라 그 반대 역할을 해야 옳았다.
"그런 걸 왜 알고 싶은 거요?"
그는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며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되잖아요? 자기 이야기를 싫어하는 남자를 한 명도 본 적이 없거든요."
"아하......."
그가 가볍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루크 세인트 클레르라는 남성의 육체가 아니라 인간 됨됨이에 관심을 가졌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그의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당신은 남성에 대해 고결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나 보군......"
"네. 난 쉽게 감명 받는 타입은 아니에요."
그 단정적인 대답이 루크의 신경에 거슬렸다. 흥, 자기가 성녀인 줄 아나......"
"나 또한 여자를 감명시키는 일에는 관심 없소. 나는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 주의니까......."
그가 차갑게 대꾸했다.
"난 당신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외양상 당신은 여자에게 감명 받을 타입도 아닌 것 같은데요."
그의 차갑고 섹시한 미소는 가장 차가운 여자마저 녹이기에 충분했다.
"나의 냉소적인 반응을 당신 개인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기 바라오. 레이첼.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어 주시오."
그가 낮고, 실크처럼 유혹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는 그녀를 향한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뜨겁고 강렬한 시선으로 그녀의 눈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가 피어올랐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그녀의 공포는 적나라한 성적 인식으로 변해 갔다. 그녀의 뺨은 홍조로 물들고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그 순간 루크는 그녀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리란 것을 알았다.
그의 승리감은 너무 강렬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다른 승객이 오르는 바라에 그는 그녀에게 키스할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여전히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옆으로 끌어당겼다. 순간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그는 온통 원초적이고 야만스런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말과 상관없이 저녁 식사 후에 그녀가 그를 거절하지 않으리란 확신을 즐겼다.
"아파요........"
그녀가 날카롭게 말했다.
"미안하오......"
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있던 손을 주르르 미끄러뜨려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난 가끔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편이라서.....이편이 낫겠소?"
그는 그녀의 잡은 손을 들어 올려 그 손등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는 새빨갛게 물든 그녀의 뺨에서 다시 한 번 승리감을 맛봤다.
"우리 테이블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진 않으시겠죠?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프군요......
7
루크의 승리감은 짧았다. 레이첼 매닝은 오랫동안 불리한 입장을 고수하는 여성이 아니었다. 특히 성적인 면에 있어서.......
사실 그가 그녀에 대한 공격의 끈을 늦추자, 그녀는 평상시의 속도로 의연한 태도를 되찾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추스르고 당당하게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붉어진 안색을 정상의 것으로 식히는 그 속도에서 그녀는 강철 같은 의지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서 루크는 자신이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냈다. 그녀의 실체는 의문이었지만, 그녀는 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약한 것과는 거리가 먼 여성이었다.
순간 루크는 자신이 왜 그날 밤 이후 그녀에게 집착해 왔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도덕상 문제를 지녔지만 결코 약한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멋진 전망이에요......"
웨이터가 음료수 주문을 받아 가자, 그녀가 초연한 태도로 말했다.
"우리가 이 집에서 가장 좋은 테이블로 안내되었군요........"
정말 그랬다. 호젓한 구석에 놓여 있는 창가의 테이블은 사면의 전망을 남김 없이 보여 주었다. 어둠이 짙게 내리 깔렸지만, 테리갈은 여전히 멋진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해변가 마을의 불빛이 어두운 바닷물에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잔잔한 파도가 황금빛 모래사장으로 밀려왔다 다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루크는 풍경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모든 관심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쏠려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좀 전에 일어난 일에서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고조된 흥분 상태로 되돌리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키스만 하면 된다......다양한 경험을 겪은 그였지만, 18개월 전의 그녀처럼 그의 키스에 반응했던 여성은 처음이었다. 그는 그녀가 내뱉은 작은 신음이나 흐르는 벨벳처럼 그에게 녹아 들던 그녀의 감촉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웨이터가 백포도주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포도주가 잔에 따라지는 동안 루크는 과거의 기억에서 현재로 마음을 돌렸다.
"아까 당신 이야기를 하다 말았지요?"
그녀는 웨이터가 떠나자마자 말을 걸었다.
"눈물이 날 만큼 지루하실 겁니다."
"아니, 안 그럴 거예요."
루크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원을 들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게다가 일단 그가 그의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될 테니까......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군요."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냥 내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당신은 몇 살이죠?"
"서른두 살....."
"양친 부모님은 모두 살아 계신가요?"
"어머님만요.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심장 발작으로 돌아가셨소.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몬트레이의 집에서 아직도 살고 계시죠."
"당신은 외동아들이시죠?"
"전혀 아니오. 위로 형이 두 명 있소.....모두 장가를 가서 가정을 꾸렸지."
"당신은 결혼한 적이 없나요?"
"네."
"다른 사람과 동거하고 있나요?"
"아뇨."
"여자 친구는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없소....."
그녀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다음 포도주로 입술을 축였다. 그녀의 손은 약간 떨리고 있었지만, 시선은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짐짓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당신은 학교에서 인기 학생이었을 것 같군요. 그리고 모든 과목에 만능이구요."
"인기는 있었지만 만능은 아니었소. 스포츠, 특히 축구에 미쳤었지만 공부에는 관심 없었으니까. 나는 관심이 가는 과목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었소. 덕분에 내 성적표의 가정 통신란에는 항상 이런 글이 올라가곤 했소. <본인이 집중하면 성적이 더 좋아질 것임.>. 하지만 난 열세 살 때부터 전문 사진작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적에 대해선 신경 쓰지도 않았소......."
"어떤 계기로 그렇게 어린 나이에 사진작가가 되기로 결심하셨죠?"
"열두 살 때 생일 선물로 아버지께 카메라를 받자 마자, 즉시 매혹되었기 때문이오. 얼마 후 인물 사진을 찍는 데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소. 그리고 그 재능으로 돈을 벌 수 있으리란 사실도 발견했죠."
그는 옛추억에 싱긋 웃음 지었다.
"나는 학교에서 가장 예쁜 소녀들의 사진을 찍은 다음에 그것을 학교 운동장에서 소년들에게 팔아 한몫 벌었소. 심지어 달력까지 만들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세무소 직원이 교실로 들이닥쳐 몸수색을 하는 통에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소. 다행히 그때까지 번 돈을 모두 침대 아래의 저금통에 보관해 뒀지. 그래서 나는 사진 촬영을 취미 생활이라고 둘러댈 수 있었소. 난 주로 돈을 사진 장비 구입에 쓰곤 했소...."
"영리하시군요."
"영리하기보다 현명했던 거죠. 난 천재는 아니지만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왔소, 나름대로는......."
그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고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루크는 그녀의 침묵에 포도주 잔을 들어 올려 건배를 청했다.
"자, 뭘 위해서 건배를 할까요? 내 성공을 위해서, 아니면 당신을 위해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유감스런 미소는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함께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안 돼요. 나에게만 웃기는 일이에요."
"뭐가 말이오, 레이첼?"
그녀는 잔을 들어 올려 그에게 건배하는 몸짓을 보여 주었다.
"당신과.......나........우리가......"
"하지만 우리는 없을 텐데요....아직은."
"네, 그래요. 하지만 곧 그렇게 될 거잖아요? 이런 식으로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그는 그 몸짓에 담긴 미묘한 긴장을 알아차렸다.
"내 말뜻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루크. 당신은 나를 유혹할 생각이잖아요, 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어떻게 될까요? 당신은 오전 중에 나와의 관계를 끝내고 오후가 되면 다른 로맨스에 이끌릴 테죠. 아니면 당신은 당신 차로, 나는 내 차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겠죠."
루크는 포도주 잔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럴까요?"
그는 그녀의 말을 굳이 힘들여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그녀를 상대로 꿈꿔 왔던 시나리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네. 그럴 거예요."
그녀의 체념한 듯한 태도가 그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당신 자신은 아무렇게나 돼도 상관없다는 투로 말씀하시는군...."
그는 자신을 그런 남자로 보고, 그리고 그런 남자에게 몸을 은쟁반에 담아 스스로를 제공하려는 그녀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것을 찾았다. 순간 루크는 움찔 놀랐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가 <아녜요> 라고 단 한마디만 해준다면 모든 부정적인 혐의에 대한 탈을 벗을 수 있을 텐데....왜 그러지 않는 걸까?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또, 그녀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난감했다. 뭔가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는 영민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밀은 모두 그녀의 것이었고, 이번에 그는 비밀을 비밀인 채 묻어 버리지는 않을 심산이었다.
그녀는 섹스 편집증 환자일까? 일단 열이 오르면 욕망의 대상에게 항복하는 것을 자제할 수 없는 그런 여자일까? 아마 그녀는 성적인 욕구가 너무 강한 나머지 스스로 육체의 희생양이 되려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런 추측은 그날 밤 그녀의 행동에 대한 그럴 듯한 변명이 되었다. 루크는 그녀의 성 생활이 아무 의미도 없는 남자들과 하룻밤 관계를 나누는 선상에 있으리란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을 거요?"
그가 도전적으로 물었다.
"변명을 요구하시는 건가요?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죠? 맙소사, 당신은 원하는 것을 갖게 될 텐데, 왜 화를 내시는 거죠? 이보세요, 오늘 아침에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내가 적나라하게 말하길 바라신다면, 원대로 해 드리죠. 당신은 보기 드문 미남이고 섹시한 남자예요, 루크.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많이 끌리고 있구요. 오랫동안 남자와 접촉하지 않았지만, 난 당신을 너무 원하기 때문에 여기 이렇게 앉아서 정상적으로 대화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예요......"
루크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노골적인 말은 세련되고 차분한 태도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농담을 하고 있는 건가?
그녀가 밝혔던 <오랫동안 남자와 접촉하지 않았다>에서, 그 <오래>는 어느 만큼의 기간을 가리키는 걸까? 어젯밤? 한 달? 설마 18개월 동안은 아닐 테지!
그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성질이 났다.
"그렇다면 왜 앉아만 있는 거요? 당장 일어나서 내 손을 잡고 나를 당신 방으로 데려가요. 왜 스스로를 오랫동안 고문하려는 거요? 겁쟁이처럼 굴지 말아요, 레이첼. 어서 해봐요!"
그녀는 그를 한 번 매섭게 노려본 다음에 웃기 시작했다. 그 광기와 요부스러움으로 가득 찬 웃음에 그는 얼굴까지 얼어붙었다.
"당신은 여자를 부추기는 방법을 잘 알고 계시군요, 루크? 그야말로 능수능란해요. 하지만 당신 말은 모두 옳아요."
그녀는 정말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들었다.
"이것은 전부 위선에 불과해요. 자, 가요....."
그리고는 성큼성큼 레스토랑을 빠져 나갔다.
루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를 따라잡았다.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뿐 아니라 웨이터에게 변명을 꾸며대느라 곤욕을 치른 그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천만 다행이오."
그가 농을 걸었다.
"마찬가지에요. 아는 사람이 있는 데서 내가 이런 행동을 할 것 같아요?"
그녀의 양뺨 역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잘 모르겠소."
"그렇다면, 아예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평소 하던 대로 하세요. 즉, 의문을 갖지 말고 굴러 들어온 호박을 잡으란 말예요."
그는 그녀를 노려봤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스스로 두려워졌다.
그녀는 그의 살기등등한 시선을 의식했든지, 아니면 갑자기 제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뜬금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아, 맙소사.......맙소사....."
그녀는 진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비탄에 찬 신음만으로도 루크의 가슴은 찢어지도록 아파 왔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자제력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썼고, 그는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녀가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나도 미안하오."
그는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눌렀다. 그러자 그녀는 진저리를 치는 듯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리더니 뺨을 그에게 댔다. 그 몸짓은 달콤한 감각을 그에게 전해 줘다.
온몸을 그에게 맡긴 그녀의 태도는 처음 만남처럼 그의 품안에서 보호 본능과 함께 다정함을 자극했다. 전에라면 마음에 걸렸을 그 감정에 그는 이제 타당한 명분을 댈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감정을 왜 억눌러야 하지?
그는 너무나 단순 명쾌한 그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부인하고 이성이 꾸며대는 절망적인 논리에만 귀를 기울여 왔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하마터면 껄껄 웃어 젖힐 뻔했다.
그녀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하룻밤을 같이 보낸 것뿐이었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란 말도 하잘것없는 쓰레기가 아닌가. 그녀는 막돼먹고, 행실 나쁜.....망할 계집이다! 이런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 없잖아!
하지만 그런 이성의 말은 다 소용없었다.
그는 대책 없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논리적이거나, 타당하거나, 이성적이지는 않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녀는 갈 데까지 다 간 여자였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레이첼......"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고 싶었다.
다음 순간 그녀가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올리자, 그는 그녀의 콧잔등과 양볼에 이어 부드럽게 벌어진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와의 키스는 그의 기억과 똑같았다. 그녀의 감각적인 입술, 그녀의 목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작은 신음, 그에게 온몸을 여는 뜨거운 태도 등 그 모든 게 변함이 없었다.
한순간 그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루크는 의식 한편에서 누군가의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감지하고는 재빨리 레이첼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들은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그녀의 방으로 갔다. 그런 다음 어색한 침묵 속에서 그는 그녀의 지갑에서 열쇠를 찾아 방문을 연 뒤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녀는 열쇠와 재킷을 차례로 탁자 위에 던지는 그의 행동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침묵과 어색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루크......"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의 손이 셔츠의 두 번째 단추를 끄르다 말고 동작을 멈췄다.
"왜?"
"난....난.....당신이 보호책을 갖고 있으면 하고요....."
그는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가 오늘 밤 그녀와 관계를 나눌 때 보호책을 사용하기를 원한다는 건가? 이젠 더 이상 어처구니없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건가? 완전히 이성을 잃고 분위기에 빠져 들고 싶진 않으시다 이 말씀인가?
그는 괜히 성이 나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요. 난 위험을 자처하는 버릇은 갖고 있지 않으니까."
그러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겸연쩍은 듯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루크는 자신이 분위기를 망쳤음을 깨닫고, 정열에 미친 남자가 할 만한 행동을 했다. 옷을 벗다 말고 한 걸음에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와락 껴안고 강렬하고 굶주린 키스를 퍼부었던 것이다.
좀 놀랍게도 그녀는 그의 정신 나간 정열의 과시에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신음과 함께 그에게 팔을 두르고 그를 열렬히 껴안더니 그의 남성에 자신의 하반신을 밀착시켰다.
"맙소사, 레이첼......"
그는 헐떡거리며 그녀를 밀어내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자제심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다 썼다.
"이러면 안 돼. 아직은 안 돼."
"당신 말이 옳아요."
그녀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불행한 영향을 끼쳤다구요."
"불행하다니?"
그는 화가 나서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겉옷 단추를 하나씩 끄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의......금지된 모습을 끄집어내요.......나를 사악하고......약하게 만든다구요."
그리고는 마침내 겉옷을 벗어버렸다.
그 순간 루크는 숨이 막혔다. 그녀는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실크 상의가 그녀의 팔로 흘러내린 뒤 하늘거리며 카펫 위로 떨어졌다. 루크는 헐떡거리며 그녀가 손을 바지춤에 대고 그대로 바지와 함께 속옷까지 벗어 내던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바지에서 발을 빼느라 몸을 숙였다. 그러자 탐스럽고 탄력 있는 가슴과 단단해진 유두가 아래쪽으로 쏟아지며 그 존재를 명확하게 알려 왔다.
그의 머리에서 몸으로 전광석화처럼 격렬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너무나 강한 욕정으로 그의 온몸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는 그녀를 꼭 가져야만 했다. 되도록 빨리.....
"맙소사, 레이첼."
그는 허리를 편 그녀의 온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어깨에서 뒤로 넘기는 그 단순한 행동에서조차 말할 수 없는 관능미가 풍겨 나왔다.
"이제 당신 차례에요."
그녀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
"그래요. 난 당신 옷을 벗기고 싶어요."
그는 신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신음에 그녀는 연민이 아니라 미소가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발꿈치를 들더니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녀의 유두가 그의 가슴을 스쳤다.
"빨리 할게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바삐 손을 놀려 그의 셔츠 단추를 끌렀다. 곧 근육이 단단한 그의 어깨가 드러났다.
"아,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요......."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며 비단처럼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는 다시 말하며 그 새틴처럼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털을 쓰다듬다 말고 가볍게 그의 유두를 건드렸다. 그의 것은 단번에 단단해졌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 잘 되지 않더라도 날 원망하진 않겠지."
그는 그녀가 불러일으킨 흥분을 자제하려고 용을 쓰며 절망적으로 경고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더니 그의 가슴을 혀로 핥았다.
루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애무를 허락했다. 그녀는 혀와 이빨을 번갈아 사용하며 그의 어깨에서 아랫배까지 탐험을 계속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붙잡았다.
"이만하면 충분하오........"
그는 이빨을 갈며 스스로 남은 옷가지를 벗었다. 그리고 정신을 완전히 잃기 전에 지갑에서 콘돔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그녀가 민첩하게 그의 손에서 콘돔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앉더니 그를 위해 그일을 대신했다. 그녀의 노련한 손길은 그가 남 몰래 품고 있던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 갔다.
그녀가 이런 여자가 아니기를 바랐는데.....흥, 오랫동안 남자를 접해 보지 못했다구? 길어 봤자, 사흘이었던 게 분명해!
아, 그녀가 나에게서 손을 떼기만 한다면.....이제 그만 애무의 손길을 멈춰 주기만 한다면.....그는 더 이상 이렇게 친밀한 전희를 참을 수 없었다.
"레이첼......"
그가 마침내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만둬요."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내 말을 듣지 못했소?"
그는 그녀를 벌떡 일으키고 흔들며 신음했다.
그녀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이미 현실 감각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녀의 숨은 그의 것만큼이나 가빴다. 루크는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약간 벌어진 채 숨을 헐떡거리는 그녀의 입술을.....이제 그는 정열의 가장자리까지 몰린 상태였다.
"나와 사랑을 나눠요, 루크."
그녀가 다시 한 번 그에 대한 주도권을 잡았다.
루크의 혈압이 신기록을 갱신하며 상승했다.
"당신은 나에게 당신을 만질 기회조차 주지 않았소."
"알아요......"
그녀는 헐떡거리며 오른쪽 허벅지를 그의 다리에 대고 도발적으로 쓸어 내렸다.
"난 당신을 위해 준비를 하고 싶었어요. 난 이제 준비되었어요, 루크. 지금을 놓치지 말아요...."
그에게 더 이상의 자극은 필요치 않았다.
그는 기쁨과 혐오감이 섞인 신음과 함께 단숨에 그녀의 안으로 파고 들었고, 다음 순간 자신이 거의 절정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 뜨겁고 촉촉했고 자발적이었다. 그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순수한 환희의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를 꼭 안고 절정에 올랐다. 그녀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하나의 리듬으로 고동치며 육체와 정신적인 합일의 만족감을 맛봤다.
이윽고 그들은 함께 침대에 쓰러졌다. 여전히 서로 결합한 상태였다. 루크는 마라톤을 완주한 기분이었다. 격렬한 심장 박동이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온 방이 그들의 헐떡이는 숨소리로 가득 찼다. 하지만 천천히 피가 가라앉자 숨소리 또한 잦아졌다.
그가 또다시 그녀와 사랑을 나눌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전화 벨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깼다.
레이첼은 즉시 눈을 뜨고 침대 옆의 전화를 올려다 보았다. 루크는 초조한 신음을 내뱉으며 그 장애물을 원망스레 응시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늦은 시각에 그녀에게 전화를 건 걸까? 그리고 왜 그녀는 저렇게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8
"전화를 받지 않을 거요?"
루크가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저......"
그녀는 여전히 하나로 결합돼 있는 그들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루크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알았소......."
그는 그녀에게서 몸을 떼어 낸 뒤 침대에서 내려갔다.
"이제 전화를 받아요."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갔지만 문을 살짝 열어 놨다.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세요, 어머니? 저는 오늘 밤에 집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에 와도 될 거예요. 사진작가에게 촬영을 좀 늦게 시작하거나, 아니면 다른 날에 하자고 말하겠어요. 그게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모델을 찾아보라고 하죠. 내 아들의 건강에 비하면 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아들? 그녀에게 아들이 있었다니? 루크는 문고리를 꼭 잡고 중얼거렸다.
참담한 질투심이 솟구쳤다. 그에게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새침을 떨었던 그녀에 대한 배신감과 고통 또한 참을 길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꽤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격렬한 육체적인 반응을 보였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다시 한 번 이용된 것에 불과하다니.....그는 참담했다.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결국 18개월 전에 그녀는 남편뿐 아니라 자식까지 속였다는 말이 아닌가! 정말 상종 못할 여자로군!
"아녜요, 어머니. 전 마음을 정했어요......."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지금 당장 집으로 가겠어요. 이대로는 걱정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요. 지금 출발하면 새벽 두 시에 집에 도착할 거예요. 그럼, 그때 뵐께요, 어머니.......네, 그럴게요......."
그녀는 여전히 벌거벗은 채 고개를 돌려 침대 발치에 서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좌절감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저어.....조심해서 운전하겠다구요. 시어머니셨어요. 좀 편찮으시대요. 난 집에 가 봐야겠어요.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다시 돌아오겠어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레이첼. 다 들었소."
그는 그녀가 창백하게 질리는 모습에서 희열을 얻었다.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으리라.....
"당신은 아이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소."
그가 그녀에게 다시 결정타를 날렸다.
"엿들었군요!"
그녀가 그를 비난하고 나섰지만, 그는 변덕스런 그녀의 반응에 실소를 머금었다.
"당신에 대해 알려면 그 방법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당신은 비밀을 사랑하잖소. 자, 다시 한 번 묻겠소. 왜 자식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거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거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내가 왜 말을 해야 하죠? 내 아들은 당신 일과는 아무 상관없는데.....꼭 알아야겠다면, 말씀드리죠. 딸린 자식은 일에 도움이 안 되는 수가 많거든요. 이만 실례하겠어요. 난 옷을 입고 가겠어요."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당신은 내일 아침에 돌아와서 일을 마무리져야 해."
그는 자꾸 마음에 차 오르는 의심을 억누르며 그녀를 다그쳤다. 사실 가능성이 희박한 의심이야. 다 공상에 불과해. 그녀가 그렇게까지 사악할 리는 없어.......
하지만 그는 <아이>라는 말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아이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한 살? 두 살? 갓 태어난 신생아? 만일 그 아이가 태어난 지 아홉 달 되었다면.....설마 그럴 리가?
"난 마무리를 지을 일이 없어요."
그녀는 옷으로 앞을 가린 채 그를 당당하게 마주 대했다.
"일을 그만두겠어요. 다른 모델이나 찾아보세요. 그다지 어렵지도 않을 거예요. 이런 말을 알죠? 다양함은 인생의 향신료라는 말......"
그의 손이 저절로 주먹 쥐어졌다. 그 짧은 순간 그는 수많은 원초적인 감정과 살의를 느꼈다. 그녀는 그의 살기등등한 시선을 무시한 채 당당히 화장실로 사라져 버렸다.
몇 분 후 그녀가 옷을 다 갖춰 입고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그 역시 옷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가 짐을 싸는 모습을 지켜보며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은 충동과, 고문적인 침묵을 지키고픈 마음 사이에서 방황했다.
모르는 편이 좋아. 상식의 소리가 그에게 말했다. 그녀를 가게 놔 둬. 그녀는 못된 여자라구.......
하지만 무시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모르는 채 참을 수 없었다.
"당신 아들은 몇 살이오, 레이첼?"
그가 뜬금없이 그녀에게 물었다.
"왜.....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
그녀는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며 그에게 되물었다.
그의 의심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루크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향해 욕을 퍼붓고는 또 욕을 했다. 목을 놓아 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남자는 울지 않는다. 대신 욕을 할 뿐이다........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실컷 욕을 한 뒤 그녀를 증오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녀는 헐떡거리며 쟁반처럼 동그란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충격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는 화가 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 악마! 내가 누군지 다 알고 있었군요!"
"당연하지. 그래서 당신을 고용한 거요. 자, 이제 대답해 보시지. 당신 아들은 몇 살이지? 감히 거짓말을 할 생각 말아요. 이제 내가 그 애의 존재를 안 이상 당신 가족의 인적 사항쯤은 쉽게 알아볼 수 있으니까."
"열한 달째 됐어요. 당신 자식이기에는 달수가 안 맞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원치 않는 아이 걱정을 하지 않고 얼마든지 즐겁게 놀아날 수 있다구요! 내 아들은 남편 자식이에요. 패트릭 레지날드 클리어리 삼세죠....."
루크는 자신이 안심을 하는 건지, 아니면 실망을 하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날 밤 그녀는 이미 임신 2개월째 였다는 말이 된다......그녀의 안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남편의 아이가! 이제야 그녀가 아무 걱정 없이 무방비로 섹스를 나눴던 이유를 알만했다.
"이 못된 계집......"
그가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당장 여기서 나가! 내가 너를 죽이기 전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비탄에 찬 시선을 그에게 던진 다음 지갑을 집어 들고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 나갔다. 루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한동안 방 안을 정신없이 서성거렸다.
"못 믿겠어. 말이 안 돼. 앞뒤가 맞질 않는다구."
갑자기 그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앞뒤가 맞질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야.......
루크는 헐떡거린 다음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가 이가의 나이를 속였다면? 그 아이가 생후 열한 달째가 아니라면? 그녀가 아이의 나이를 알아내려는 나의 질문에 대경실색해서 진짜 나이에 두 달을 더했다면? 그녀는 내가 그녀의 아이에 대해 이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리라....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여자와 모델, 하룻밤 상대들을 전전하는 바람둥이 사진작가일 테니까.......
루크의 속이 쓰려왔다. 내면의 소리는 그가 옳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해 주었다. 그 아이는 그의 자식이다! 그것만이 그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설명할 수 있는 타당한 논리일 것이다. 따라서 이제야 말이 된다. 맙소사, 오늘 밤이나 18개월 전의 그날 밤이 이해가 갔다.
<난 오늘밤 겁쟁이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다구요> 그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지.
그 말은 사심 없는 진심이었어. 루크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아이를 원했지만 남편은 육체적으로 그럴 수 없었던 게 분명했으리라.
그는 그녀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았겠지. 그래서 그녀는 밖에서 방법을 찾았던 것이리라. 보통 여자들이 무책임한 남자들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임신하듯,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바람둥이를 유혹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왜 처음에는 뒷걸음질을 쳤을까? 내가 섹스의 주도권을 잡고서 콘돔 사용을 고집함으로써 그녀를 놀라게 했던 거겠지. 그 때문에 그녀가 두 번째 나를 유혹했던 것이리라....진짜 나를 유혹해서 정신을 잃게 한 다음 감히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사라져 버렸으니까.....
물론 그녀가 서전에 모든 일을 계획한 게 분명했다. 가짜 이름으로 호텔을 예약하고, 현금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등, 옷차림에서 적당한 상대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의도된 것이었다.
루크는 씁쓸한 마음으로 그녀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헤아려 보았다. 나의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혼자였기 때문에? 내가 쉽게 그녀의 유혹에 빠져 들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던 탓일까? 아니면 모든 게 운명의 장난일까?
그녀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를 미국 관광객으로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다시 한 번 교차되었고, 그녀는 그가 그녀를 못 알아보는 줄 알고 다시 정열의 올가미 속으로 빠져 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는 그에게 또 반했던 것이다.
루크는 다양한 여성 편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처음에도 그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그의 맛만 보려던 첫 의도와는 달리 실제로는 그에게 더 많이 반했던 것이다.
그 생각은 그녀에 대한 선입견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차갑고 계산적인 계집! 나를 두 번씩이나 이용해 먹다니. 이번에는 나의 자식마저 빼앗으려 들다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그는 맹세했다.
루크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행동했다. 그는 재빨리 방으로 달려가 자동차 열쇠를 찾아 가지고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시드니로 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그녀를 쉽게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지금 같은 시간에 차는 얼마 없을 테니 그녀의 소형차로는 나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결국 몬트 화이트 부근에서 그는 그녀를 찾아내 뒤를 교묘히 따라붙었다. 마침내 그들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내로 들어갔다. 그는 몇 번이나 그녀에게 너무 바짝 접근하거나, 교차로에서 그녀를 잃어버리는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마다 기지와 운으로 무사히 그녀를 다시 찾아내곤 했다.
자동차 계기판에 달린 시계가 열한시를 가리켰을 무렵, 그녀는 대로를 벗어나 클로놀라 쇼핑 단지 부근의 주택가로 들어섰다. 루크는 시간 차이를 계산해 가며 커브를 돌았다. 그녀의 차가 100미터쯤 서행한 다음 한 주택의 진입로로 들어섰다.
잠시 후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다음에야 그는 차에서 내려 그의 아들이 살고 있는 집 앞에 멈춰 섰다.
낡고 초라한 붉은 벽돌집이었고 화단과 잔디밭은 손을 볼 필요가 있었다.
루크는 얼굴을 찡그렸다. 레이첼의 집이 이곳이라면, 그녀가 돈 때문에 결혼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잘못된 투자 한 번으로 모든 재산을 다 잃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레이첼의 사람됨이나 그녀의 결혼 동기나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녀와 정면 대결을 해봤자 소용도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얼마든지 다시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까. 그는 좀더 주도면밀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루크는 레이첼의 주소를 확인한 다음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몇 번씩 멈춰 서서 도로 이름을 파악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스스로를 놀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 왔다. 만일 네가 틀렸으면 어쩔래? 그 아이가 네 자식이 아니라면?
"난 틀리지 않아....."
그는 소리 내어 스스로를 타일렀다.
"난 알아! 그냥 안다구!"
9
그날 루크는 테리갈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집으로 돌아온 다음 호텔로 전화를 걸어 집안의 긴급한 사정 때문에 시드니로 돌아왔으니 그의 물건을 챙겨 집으로 부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매닝 양이 호텔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 그와 똑같이 처리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모든 비용을 신용 카드로 처리했다.
그가 막 수화기를 내려놨을 즈음 어머니가 푸석푸석한 얼굴로 침실에서 나왔다.
"네 목소리가 나는 것 같더구나, 루크. 넌 집에서 뭘 하는 게냐? 오늘 밤은 해변에서 보내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레이스는 심히 걱정스러웠다. 루크는 테오에게 카메라를 빌려 센트럴 코스트 해변으로 간다고만 말했지만, 그녀는 아들이 한 여자와 동행한다는 사실을 짐작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유부녀와 심각한 관계에 빠진 게 틀림없었다.
솔직히 그녀는 아들이 유부녀와 어울린다는 사실에 놀람과 함께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전혀 아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시대를 앞서 가는 90년대 젊은이긴 해도, 도덕과 결혼에 있어서만큼은 항상 구식의 관점을 갖고 있었는데......
물론 아들은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깊은 사이가 될 때까지 상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 외에는 납득할 만한 설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머니의 눈으로 볼 때 아들의 안타까운 사랑은 막판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아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런 여자와는 하루빨리 손을 씻는 편이 모두를 위해 좋을 텐데........
"차를 한잔 줄까?"
그녀가 아들을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
"좋아요......"
그레이스는 유감스런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 뒤를 루크가 따르며 덧붙였다.
"그리고 토스트나 샌드위치도 거절하지 않을게요. 저는.....저는 저녁을 못 먹었거든요."
그레이스는 질문을 하려다가 아들의 굳은 얼굴을 대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 밤은 안 돼. 저 아이는 오늘 밤 또 다른 전쟁을 치를 준비가 안 되어 있다구. 내일 아침에 묻도록 하자....
"앉아서 기다리렴."
그녀는 무뚝뚝하게 말한 뒤 요리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고마워요, 어머니......"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이스는 루크에게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루크가 열흘 뒤에 미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 정사는 영원히 매듭 짓게 되겠지. 최소한 그녀는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루크는 자리에 누워 끊임없이 몸을 뒤척거렸다. 자기 연민과 의심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걱정하고 근심해 봐야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오랫동안 고민만 일삼던 햄릿의 최후를 생각해 보라.....
다음날 아침 루크가 해야 할 일은 진실을 확인하는 절차뿐이었다. 한 번에 하나씩 해결하자. 일단 그 아이가 네 아들인지 확인하는 거야.
루크는 레이첼이 했던 말과 행동을 다시 한 번 곰곰이 따져 보았다. 그녀의 거듭된 사과가 무슨 뜻이었을까?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레스토랑에서의 행동은 또 어땠지? 물론 그녀의 행동이 과격하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나의 동의나 이해 없이 나를 아이의 아버지로 이용했던 사실을 사과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빌어먹을,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나 옷장으로 다가갔다. 지금은 확신을 구해야 할 때야, 루크. 대답을 얻을 때라니까......
그는 어머니의 낡은 자동차 운전석에 몸을 숙인 채 가만히 앉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벌써 열한시가 되었건만 인기척은 통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이를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제 한 살 된 아기가 밖에 나와서 놀 리가 만무했다. 아직 걸음마도 못할 텐데! 아이는 레이첼이나 그녀의 시어머니가 유모차에 태워 주지 않는 한 밖에 나올 일이 없을 것이다.
다시 30분이 지나고 루크가 정면 돌파를 감행할 결심을 한 순간, 레이첼이 청바지와 긴 소매 블라우스 차림으로 밖에 나왔다. 그녀는 머리가 센 노부인과 문간에서 짧은 대화를 나눈 다음 몸을 돌려 현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손에는 지갑을 들고 있었다.
그녀가 거리로 나가 모퉁이를 돈 다음 쇼핑 센터가 있는 방향으로 접어들자, 루크는 밖으로 나와 한숨을 쉬었다.
쇼핑센터는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레이첼이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 5분이 걸린다고 가정할 때, 루크에게는 필요한 사실을 알아낼 시간이 최소한 25분 정도 확보된 셈이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노부인에게 쓸데없는 의심을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5분 동안 자신의 매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녀의 신뢰를 사야만 했다.
루크의 첫 번째 충격은 레이첼의 시어머니를 대하는 순간 닥쳐왔다. 머리가 하얗게 세기는 했지만 그녀는 노부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만큼도 늙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패트릭 클리어리는 몇 살이었단 말인가? 내가 짐작했던 것처럼 나이 많은 남자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클리어리 부인이십니까?"
루크는 충격을 감추고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부인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와, 부인처럼 젊은 분이 레이첼의 시어머니라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는 여자들에게 항상 먹혀 드는 아부에 진심을 담아서 말을 건넸다. 물론 그녀의 뺨이 기쁨으로 붉어지는 모습에 일말의 가책을 받기는 했지만.....
"저는 루크 세인트 클레르라고 합니다. 어제 레이첼과 함께 작업을 했던 사진작가입니다. 그녀는 집에 있습니까? 남은 촬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는데요. 저는 정말 다른 모델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레이첼처럼 특별한 자질과 스타일을 지닌 모델은 흔치 않거든요."
"레이첼은 데릭의 약을 사러 약국에 잠깐 갔어요. 아기가 이빨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거든요."
"데릭이오? 그녀의 아들 이름은 패트릭인 줄 알았는데요?"
"정말이세요? 이상하군요. 당신이 착각하신 모양이에요. 패트릭은 내 아들 이름이에요. 사실 내 아들은 대를 이어 손자에게 패트릭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어했지만 레이첼이 반대하고 나섰어요. 난 며느리와 주장에 강력하게 동의했지요. 나 역시 아들 이름을 패트릭으로 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남편이 고집을 피웠거든요. 그 당시 여성들은 지금보다 더 많이 남편의 의사에 따라야 했답니다......"
그녀는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크는 그 미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지만, 그녀가 섬세하고 유순한 구시대의 여성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정면 대결은 그들의 행동 양식이 아니었다.
"어머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그녀가 소리 쳤다.
"손님을 문간에 세워 두고 나 혼자 수다를 떨었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세인트 클레르 씨."
"루크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는 그녀를 따라 좁은 실내로 들어섰다. 협소한 공간은 질이 좋지만 낡고 초라해진 가구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렇다면 저를 사라라고 부르세요."
노부인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깐 차를 끓여 올 테니 편안히 쉬고 계세요."
루크는 혼자 남게 되자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 순간까지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벽에 걸린 몇 장의 결혼식 사진이 루크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린 채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웨딩드레스 차림의 레이첼 곁에 서 있는 남자는 전혀 늙어 보이지 않았다! 뒤로 빗어 넘긴 회색 머리카락은 새치가 분명했다. 활짝 미소 지은 잘생긴 얼굴은 삼십대 중반이나 됐을까?
은테 액자 속의 사진들은 레이첼에 대한 그의 편견이 틀렸음을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그녀는 돈을 노리고 늙은이와 결혼한 게 아니었다. 즉, 그녀의 결혼은 사랑 때문이었음이 분명했다.....
루크는 그 사진에서 고통스런 시선을 돌리고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찾느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것을 발견했다. 아기 사진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팔걸이 의자 뒤에 숨은 아름다운 책장 위에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침을 꿀꺽 심키고 양손으로 그 사진을 움켜잡았다. 약 6개월 된 아기가 옷을 홀딱 멋고 욕조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부드러운 금발 곱슬머리와 밝고 푸른 눈을 한,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기였다.
루크의 가슴이 죄어들었다. 그의 눈은 암갈색이었다. 양쪽 부모님 모두 암갈색의 눈동자를 지녔고, 두 형제들과 다섯 조카들 역시 한결같이 암갈색 눈을 타고났다. 그래서 그들의 눈 색깔은 종종 가족 토론의 소재가 되곤 했었다.
갑작스럽게 뇌리를 스친 생각에 그는 서둘러 레이첼의 결혼식 사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딱 부러지게 말하긴 어려웠지만, 레이첼의 남편 눈 색깔은 루크와 달라 보였다.
레이첼에 대한 루크의 또 다른 의심이 풀어졌다. 그녀의 아기는 그의 자식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기에게 패트릭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 이유가 쉽게 설명되었다. 그런 행동은 그녀의 죄책감을 지속적으로 되살려 줬으리라.....
루크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의 정확한 나이만 알아낸 다음 이곳을 빠져 나가기로 하자......
그는 아기 사진을 갖고 부엌을 찾아갔다. 사라 클리어리가 부엌에서 분주히 차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발소리에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머, 당신은 데릭의 사진을 보셨군요. 정말 예쁜 아이지요? 하긴 워낙 엄마가 예쁘니까요."
루크는 순진한 척하며 물었다.
"레이첼의 말로는 아기가 다음 달로 한 살이 된다면서요?"
"네. 맞아요. 시월로 십사 개월째로 접어들지요."
사라의 흔쾌한 대답에 루크의 가슴이 찢어졌다.
멍청이 바보, 아기의 파란 눈을 보고도 여전히 희망을 품다니. 넌 정말 대책 없는 멍텅구리야.....
그가 아기를 한 번 보고 싶다는 이유를 머릿속에서 찾을 때, 별안간 집 안의 정적을 깨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힘차게 우는 게 아니라 칭얼거리는 울음이었다.
그의 시선이 사라에게로 향했다.
"데릭 주인님이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군요. 난 울음소리만 듣고도 아기가 어떤지 알지요. 지금 데릭은 지루한 거예요. 일단 잠에서 깨어나면 혼자 있는 것을 참지 못하거든요. 아기를 데려올 테니, 잠깐 차를 마시며 기다려 주시겠어요, 루크?"
"어....글쎄요."
루크는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15분이나 지났군......
"한 일이 분밖에 안 걸릴 거예요. 우선 기저귀를 갈아 줘야 하거든요."
아기의 울음소리는 점점 요란해졌다.
작은 폭군이로군......루크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라가 아기의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울음소리는 뚝 그쳤다.
루크가 차와 비스킷을 들고 있을 때 사라가 사진보다 훨씬 큰 아기를 안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저렇게 크고 예쁜 갈색 눈을 한 아기는 처음인 걸.....
"갈색 눈이네....."
그의 목에 비스킷이 걸린 순간이었다.
"그게 왜요?"
사라가 아기를 식탁 끝에 있는 아기 의자에 앉혔다. 아기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할머니와 손님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아기의 눈이 갈색이네요. 하지만 여기 사진에서는 푸른 눈이었는데......."
사라는 그의 말에 부드럽게 웃었다.
"당신은 모르셨군요? 갓 태어난 아기들은 모두 푸른 눈이에요. 몇 달 지나면 타고난 눈 색깔을 찾지요. 데릭은 제 아비의 눈을 쏙 빼닮았어요."
루크의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데릭의 눈은 그의 것만큼 짙지는 않았다. 오히려 패트릭 클리어리의 것처럼 중간 갈색이었다.
이제 그는 방문이 후회스러워졌다. 당장 그 집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이상 레이첼을 보고 가야 한다. 그녀가 얼마나 화를 낼까. 아.......
"데릭이 까다롭습니까?"
루크는 형식적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 아기는 그의 자식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으로 나의 본능이 틀린 걸까.....
사라는 아기에게 과일 조각을 먹인 뒤 자기 몫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지금은 이빨이 나느라 잇몸이 붓고 짜증이 나서 그래요. 하지만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물론 레이첼은 아기에게 지나치게 야단 법석을 떠는 경향도 있지만.... 하지만 힘들게 얻은 자식이니 이해할 만하죠."
"네? 병치레가 잦은 아기인가 보군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팔삭둥이라서 육 주 동안 인큐베이터에 있었답니다."
그 순간 루크는 사라가 아기의 목에 턱받이를 해주느라 등을 돌리고 있는 점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에는 생생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분노는 아니었다. 첫 충격이 가시고 난 다음에 압도적인 감정의 물결이 분출되었다. 당장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루크는 눈물 어린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가슴은 아들에 대한 부성애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데릭........"
그가 부드럽게 아기를 불렀다. 아기는 행복하게 가글거리며 그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사라는 손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데릭이 당신을 좋아하는군요, 루크.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저 아이는 남자 손님들을 싫어한답니다. 하긴 남자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으니까요. 데릭이 생후 이 주일 만에 제 아비를 잃었다는 말을 레이첼에게 들었나요?"
"아니오, 하지만 그녀가 미망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드님이 죽은 이유는 뭡니까, 사라?"
"백혈병이었어요. 레이첼과 결혼한 지 일년 만에 발병했답니다. 한 일 년 동안 화학 요법을 받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우리는 그 아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다 알고 있었어요. 패트릭이 그만큼이나마 살았던 이유는 레이첼이 임신했던 덕분이었지요. 그는 항상 아들을 원했거든요. 거의 광적으로 집착했지요. 레이첼이 아기를 가졌을 때 비로소 난 한시름 덜었답니다."
"모든 분들께 어려운 시기었겠군요."
"네. 하지만 레이첼은 용감하게 견뎠어요. 며느리가 아니었다면 난 참지 못했을 거예요. 그애와 데릭은 나의 모든 것이랍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구심점이 되어 준 이 아기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지요. 또 다른 인간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일은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삶의 목적을 갖게 해준답니다."
루크가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 하는 중에 현관 문이 열리더니 이어서 레이첼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데릭에게 줄 약을 사 왔어요. 유아용......."
루크를 발견하는 순간, 레이첼의 목소리가 잦아지면서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10
참 이상하게도 루크는 레이첼에게 분노와 유감이 아닌 연민을 느꼈다. 이성을 지닌 남자라면 저렇게 아름다운 초록색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방종한 여인이라는 상상을 단 일초도 하지 못하리라....
18개월 전 그녀가 그를 몰아 댄 것은 이기적인 욕망이나 육체적인 욕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을 확신했다. 죽어 가는 남편에게, 그가 항상 갈망했던 아들을 주고픈 절망감에 몰렸겠지.....
"루크......"
그녀는 오직 그 한마디밖에 하지 못했다.
"안녕, 레이첼."
그는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애썼다.
"당신이 언제쯤이나 남은 촬영을 끝낼 수 있을지 알아보려고 들렸소. 여기 사라가 당신이 멀리 나가지 않았다면서 나에게 차를 대접해 줬소."
"그랬단다. 데릭이 루크를 얼마나 잘 따르는지 모르겠구나, 레이첼."
사라는 방에 깔린 긴장을 눈치 채지 못했다.
"조금 전에 데릭이 그에게 웃어 보였단다. 항상 남자 손님들에게는 수줍어했잖니. 봐라.....지금도 루크를 향해 웃고 있잖니."
"네, 그러네요....."
레이첼이 굳은 어조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혈색이 얼마간 돌아왔다. 그녀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게임에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루크는 더 이상 이런 게임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사라 앞에서 무신경한 발언을 할 만큼 잔인하지도 않았다.
"레이첼, 당신과 단둘이서만 할 말이 있소."
루크가 단호하게 말했다. 레이첼은 공포에 질린 눈망울로 그를 애원하듯 바라보았다. 그날 아침 그녀는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루크를 거실로 모셔 가지 그러니, 레이첼?"
사라가 제안했다.
"난 데릭을 데리고 뒤뜰 모래밭으로 나가마. 그리고 유아용 모자와 햇빛 차단제를 가져갈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
레이첼이 아들을 의자에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그 턱을 간질여주었다.
"할머니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할머니가 안으로 들어오자고 하시면, 순순히 말을 들어야 한다. 어머님, 지금 이 무렵에는 십오 분이 적당해요. 그때쯤이면 저와 루크의 대화가 끝나 있을 거예요."
루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도전적인 시선을 되받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사라와 데릭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루크의 속이 죄어들기 시작했다. 그는 뻣뻣한 동작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거실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는 푹신푹신한 소파에 앉아 그녀가 거실 문을 닫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사라의 호감을 샀던 방법에 내가 감명 받으리란 기대는 말아요. 당신은 교활하고 야비한 악마예요, 루크 세인트 클레르. 난 당신과 더 이상 일을 함께 하고 싶지 않아요."
루크는 숨을 크게 내쉰 다음 의자에 완전히 몸을 파묻었다. 그가 성질을 낼 때가 아니었다. 모욕을 주고 받아 봤자 소득이 없으리란 건 뻔했다. 하지만 심장이 턱없이 두근거렸고, 혈압이 점점 높아 갔다. 그는 양손으로 팔걸이를 꼭 잡고 그녀를 되쏘아봤다.
"모든 일이 전만큼 단순했으면 좋겠군, 레이첼. 내가 여기 온 이유가 단순히 당신에 대한 욕망뿐이었으면 좋겠소. 하지만 그렇지 않아....."
"그러시군요! 하지만 죄송하게도 그 말은 믿기 힘들군요. 난 전에도 당신 같은 타입을 만나 봤거든요."
"난 그 타입이 아니오. 난 내 기준에 따라 판단을 내리고, 진실로 존중하고, 고집스럽게 그것을 추가하는 독립적인 개인이오."
"대단하시군요. 이제 본론이나 말해 봐요!"
"좋소......"
그의 목에 핏줄이 섰다. 그는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난 데릭이 팔삭둥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리고 당신 남편이 죽기 전에 백혈병으로 투병 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소. 데릭은 내 아이지?"
대답이 없었다.
침묵이 그녀가 해야 할 대답이었다. 그녀는 그저 고통스런 눈으로 그를 응시한 채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아녜요."
마침내 그녀가 속삭였다.
"아녜요......"
몸을 돌린 그녀는 꽉 쥔 주먹으로 문을 치려다 말고, 다시 몸을 돌려 낮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니에요...."
루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말이 무슨 뜻이지? 당신이 나와 무방비하게 섹스를 나눈 다음 일곱 달 만에 데릭이 태어났소. 그 아이가 팔삭둥이인 만큼, <칠 더하기 이는 구> 라는 계산이 나오잖소. 가령 당신이 그 시기에 수많은 남자와 동침을 했다면, 그애가 내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수많은 남자는 없었어요. 내 자식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은 내 남편 이외에는 당신밖에 없어요. 그리고 당신 말이 옳아요. 난 진위 여부를 몰랐기 때문에 데릭을 출산한 다음 그의 유전자 검사를 했어요. 그래서 이제 그 아이의 아버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루크,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데릭은 당신 자식이 아니에요."
루크는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침울한 눈으로 바닥을 뚫어져라 보기 시작했다. 복부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데릭이 나의 자식이 아니라니......레이첼이 내 자식의 엄마가 아니라니......비밀스럽게 속으로 기도했던 모든 희망과 계획이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당신이 마음을 놓길 바라요....."
레이첼이 이성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화가 난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벽에 걸린 결혼식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루크의 가슴에 상처를 줬고, 이제 자기 연민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변했다.
"그럼, 왜 그랬소?"
그가 윽박질렀다.
"말해 봐. 난 설명을 들을 자격이 충분하니까."
그녀는 고통에 찬 눈을 천천히 그에게로 돌렸다.
"당신이? 그날 밤 당신은 별 생각 없이 나의 제의에 응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도 별 생각이 없었으리라 확신해요."
"당신이 틀렸어!"
그가 벌떡 일어났다.
"난 다음 석 달 동안 AIDS(후천성 면역 결핍증)에 걸렸을까 봐 노심초사한 덕분에 당신 생각을 밤낮으로 했단 말이오."
"아! 그런 걱정을 하셨군요. 나는......나중에야 그 생각이 났었어요. 당신에게 그런 걱정을 안겨 드려서 정말 미안해요, 루크. 진심이에요."
"그렇다면 왜 그런 짓을 한 거요? 말해 봐. 난 알고 싶...아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소. 레이첼, 나에게 진실을 털어놓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거요? 난 이제 당신이 방종한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 하지만 그날 밤 당신은 임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나와 동침한 거요, 그렇지?"
"네, 당신이 옳아요. 난 임신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녀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맺혀 뺨으로 떨어졌다.
"당신은 내 심정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해요...."
그는 그녀의 눈물에 가슴이 뭉클해졌지만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진실을 알아야만, 데릭이 그의 자식이 아니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번 말이나 시원하게 해봐요, 레이첼. 난 듣는 데는 명수니까....."
그 말은 거짓이었다. 그는 타인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타입이 결코 아니었다. 평생 그의 바람과 욕망과 꿈과 관련된 부분에만 온 신경을 쏟아 왔던 것이다.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의 꿈이나 문제를 진지하게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그는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자아를 살리기 위해 들으려는 것이었다.
이 잔인하리만큼 솔직한 주제 파악은 그로 하여금 레이첼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끔 만들었다. 그녀가 그를 부담 없이 하룻밤 재미나 추구하는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를 책임감 없는 바람둥이로 여기는 것도.....그러나 이제 와서 그 누구를 탓하랴. 다 나의 잘못인 것을......
하지만 모든 게 다 달라질 거야.....그는 맹세했다. 바로 지금부터 시작이야.
"내가 말한다 해도...."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덧붙였다.
"당신에게 그 당시 상황은 그다지 반갑지 않을 거예요."
"레이첼, 이제 당신 시어머니가 데릭과 함께 실내로 돌아오실 시간은 불과 십 분 밖에 남지 않았소. 일단 말이나 해봐요. 난 당신을 결코 매도하지 않겠소. 그러니 왜 당신이 그렇게 절망적인 방법을 취했는지 말해 보시오."
"그러면 가 주실 거예요?"
그녀가 애원조로 물었다.
"그때 가서 봅시다....."
이미 그의 마음은 다른 희망과 다른 꿈으로 가득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어젯밤 일을 착각하진 마세요, 루크. 그건 실수였어요. 난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당신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 줬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에요. 난 다시는 당신과 동침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요. 그러니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그는 그녀의 말이 진심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한 동안 그녀를 그렇게 놔 두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겠소, 레이첼?"
그녀는 그의 단호한 태도에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하지만 당신의 동정은 사양하겠어요. 난 똑같은 상황에 또 처한다면 다시 그렇게 할 거예요. 옳건 그르건 말예요....."
루크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과거를 회상했다. 그가 초조하게 그녀의 말을 재촉하려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난 아버지의 실물을 본 적도 없어요."
맙소사, 그녀는 너무 먼 과거부터 시작하는구나.....
하지만 그는 방해를 해봤자 시간만 지연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기로 했다.
"내가 두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우리 어머니는 좋은 분이셨지만 과잉 보호적인 경향이 강하셨어요. 특히 내가 평균 이상의 용모를 지녔기 때문에 더 그러셨겠지만....어머니는 내가, 예쁘지만 순진한 먹이를 찾는 잘생기고 부유하고 도덕감 없는 남자의 표적이 될까 봐 두려워하셨던 거예요. 난 모델이 되고 나서야 어머니의 우려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난 몇 차례 그들의 공허한 매력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아차리곤 했죠...."
레이첼은 잠깐 숨을 돌린 뒤 말을 다시 시작했다.
"스물두 살이라는 절정의 시기에 남편을 만날 즈음, 나는 부자이건 아니건 모든 잘생긴 남자들을 경계하게 되었어요. 패트릭은 특별히 핸섬하거나, 부유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그는 매력적이었고, 약관 서른 네 살에 과학계의 정상에 오를 만큼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지요. 우리는 그의 연구 분야인, 아이들의 질병 연구를 위한 자선 모금 파티에서 만났어요. 난 그를 만난 순간부터 그와 사랑에 빠졌어요. 그래서 그가 나에게 모델 일을 그만두고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달라고 했을 때, 서슴지 않고 청혼을 받아들였어요. 우리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하셨죠. 늘 내 삶의 방향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하고 계셨거든요. 그리고 내가 패트릭 클리어리 부인으로 행복을 누리길 바라셨어요....."
레이첼의 한숨은 루크에게 그녀가 패트릭 클리어리 부인으로서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생가가을 하게끔 만들었다. 남편의 병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머리 좋은 남편이 그녀가 꿈꿨던 백마 탄 왕자가 아니었던 걸까?
하긴 성인인 남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는 과학 연구를 직업으로 선택한 남자가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일에 중독되었으리란 상상을 쉽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질문을 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 아니니까......
"우리가 결혼식을 올린 후 몇 주일 만에 우리 어머니가 갑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돌아가셨어요."
레이첼이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큰....충격을 받았어요. 어머니는 겨우 마흔 아홉이셨거든요. 당연히 그분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시어머니가 따뜻한 동정과 친절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다면, 나의 절망감은 길어졌을 거예요. 그리고 서너 달 후에 내가 임신되지 않았을 때에도 시어머니는 큰 도움을 주셨어요. 패트릭은 크게 동요하고 그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어요. 그는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염원했거든요. 그래서 그는 내가 진찰을 받아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어요. 그리고 내가 정상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스스로 각종 테스트를 받았는데, 결국 그의 정자 수가 평균보다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설상가상으로......그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결과마저 나왔지요. 똑같은 병으로 그의 아버지가 삼십 년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 소식에 우리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어요. 패트릭은 자신이 오랫동안 화학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자를 시드니 종합 병원의 정자 은행에 비축해 뒀어요. 대를 이을 아들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거죠......."
레이첼은 또다시 한숨을 가만히 삼켰다.
"병세가 악화되자, 그는 나에게 매달 인공 수정을 받게 했어요. 매일 아침 내 체온을 재고 도표를 만드는 등 별짓을 다 했죠.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난자 생산기에 나는 시드니의 병원으로 가서 필요한 절차를 받고 하루 동안 안정을 취한 다음날 돌아오곤 했어요...."
그랬었구나.....루크는 말없이 고개를 서너 번 끄덕였다. 말을 꺼낼 시기도 아니었지만 할 말도 없었다.
"나는 인공 수정을 다섯 달이나 받았지만 매번......헛수고였어요. 차츰 패트릭의 절망적인 시선을 보기가 두려워지지 시작했죠. 그의 그런 표정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했을 거예요. 의사는 내가 임신을 하면 그가 몇 년 동안 더 살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어요. 따라서 내 삶은 의미나 목적 없이 너무 외롭고, 초라해지기 시작했죠. 난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어요. 패트릭은 이미 오래전에 나와의 접촉을 그만뒀거든요."
그때 레이첼은 이야기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래서 난 그런 짓을 했던 거예요. 그 짓이 고상한 의도를 가진 명예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예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만지고, 나를 안고, 나에게 키스한 그 순간, 나는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열정에 휘말리게 되었어요. 난 그날 밤 당신과 보낸 한순간 한순간을 모두 즐겼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군요. 하지만 믿어 주세요, 루크. 나는 내가 범한 죄로 고통 받아 왔어요. 그리고 원하지 않게 당신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하여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당신은 아이의 친부를 확신하오? 추호도 의심 없이?"
레이첼은 그의 질문이 날카로운 비수나 되는 것처럼 몸이 경직된 채 뒤로 물러났다.
"네, 확신해요. 그날 오후 패트릭의 정자를 인공 수정 받았거든요. 당신과의 사랑으로 수정의 정상적인 과정을 더 원할하게 이루어진 모양이에요."
루크는 그 순간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네, 그래요.....모든 것이 전략적이지요? 그날 밤처럼 말예요. 난 더 이상 당신에게 약삭빠르게 굴고 싶진 않아요, 루크."
그녀의 목소리는 마구 떨리고 있었다.
"이만하면 충분해요. 이만 돌아가 주세요........"
그녀는 다시 양팔로 몸을 감싸 안고는 모든 게 끝났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너무 감정이 격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귀에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두고 떠날 생각은 없었다. 그녀와 아이, 그 어느 쪽도 말이다. 데릭은 그의 자식이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루크에게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그녀를 사랑할 이유가 충분했다. 이상하게도 자신이 아이의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도 아이에 대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은 자신이 데릭의 진짜 아빠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으로 가득 찼다. 말하자면 그 아이를 사랑하고, 그 아이를 돌봐 주는 그런 아빠가 되면 어떨까...... 루크는 이런 자신의 감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옳은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에게 전적으로 찬성이오, 레이첼. 우리 사이가 더 이상 전략적으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라오. 나중에 다시 봅시다......"
그는 그녀의 깜짝 놀란 얼굴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녀의 곁을 지나 집 밖으로 나섰다. 루크는 뭘해야 할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저 용감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가져야 한다는 결심뿐이었다. 저 여자는 사랑할 가치가 충분히 있지 않은가!
11
"이런 질문을 하는 나를 용서하렴."
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유부녀와 사귀고 있니?"
루크의 첫 반응은 놀라움과 유감스러움의 혼합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에 아로새겨진 진정한 걱정을 읽은 순간 그의 태도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잠시 후 그는 다소 망설인 다음 어머니에게 레이첼과 데릭에 대한 사정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나의 삶의 일부가 될 테니, 어머니도 결국 모든 일을 아시게 되리라....
루크는 그 기적을 언제 어떻게 일궈 내야 할지는 몰랐지만, 죽도록 노력해서 반드시 현실화시키리라 마음먹었다.
"일이 그렇게 된 거예요......."
그는 결국 어머니께 모든 사실을 다 털어놓았다.
"어머니가 말씀을 하시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전 누가 뭐래도 레이첼과 결혼할 겁니다. 데릭은 제 자식이 아니지만, 아무 상관없어요. 아버지를 당연히 필요로 하는 아주 좋은 아이니까요. 그리고 그 아버지는 제가 될 겁니다."
"하지만.....아이 엄마가 널 원하지 않잖니."
어머니는 언제나 아픈 데를 콕 찌르신단 말씀이야!
"네, 알아요. 하지만 조만간 시정할 겁니다."
"어떻게 말이니?"
어머니의 다그침에 루크의 절망감은 커졌다.
"어머니는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나오셔야 겠어요? 지금 당장은 뭐라고 말씀 드릴 수 없어요. 아직은요. 잠이나 자러 가겠어요."
"너는 그녀에게 널 사랑하거나 결혼하도록 만들 수 없을 걸."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점을 이용할 겁니다. 그게 먹혀 들지 않는다면, 극단적인 방법이라도 동원해야죠......"
그레이스는 아들을 한동안 응시했다. 제발 아들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면서........섹스나 유혹으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믿는 남자는 모두 바보인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그녀를 다시 임신시킬 계획을 꾸미지 않기를 바랐다. 그건 일종의 재난이 되리라.....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니, 루크?"
"건설적인 것이 아니라면 아예 말씀도 꺼내지 마세요."
"넌 그녀의 집이 초라하고 정원도 엉망이라고 했지? 그 부분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겠니?"
루크는 얼굴을 찡그렸다.
"즉, 사람을 고용해서 집을 수리시키라는 말씀인가요?"
"그게 아냐. 네 말을 들어 보니, 레이첼은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여성인 것 같구나. 네가 직접 집 안 일을 돌보는 게 어떻겠니? 넌 잔디 깎기나 수리에는 능하잖니. 우리 집 차고에 있는 잔디 깎이 기계는 아직도 잘 작동된단다. 그리고 작년에 네 형들이 나에게 사준 공구들도 있단다. 그러니 그걸 이용해 보렴."
루크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번졌다.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어머니! 왜 제가 그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요. 내일 아침 당장 <만능 수리공 루크>의 작전을 실천에 옮길게요. 고마워요, 어머니. 안녕히 주무세요."
그레이스는 잠자리로 가는 동안 루크와 레이첼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단지 레이첼이 성적인 좌절감을 못 이긴 나머지 루크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아들의 좋은 천성과 매력이 그녀의 육체는 물론 마음도 끌 수 있기를 바랐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생각은 손자가 될 뻔했던 아기에게로 옮겨갔다. 그 아기가 루크의 자식이 아니라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이제 패트릭 클리어리는 죽었으니, 루크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 텐데....
제발 레이첼이 아들에게 기회를 한 번만 더 주도록 해주세요.....그레이스는 잠들기에 앞서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저 아이는 정말 좋은 남자랍니다.......
다음날 아침 루크가 레이첼의 집에 도착해 보니 집이 텅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 루크는 공포에 질렸지만, 뒤뜰로 돌아가 보니 모래밭에 몇 가지 장난감이 흩어져 있었다. 부엌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싱크대에 설거지감이 쌓여 있었다. 사라 같은 여성이 집 안 일을 소홀히 할 턱이 없는데.....그녀는 그의 어머니와 비슷한 유형이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또 달랐다. 그녀는 다른 우선순위의 일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설거지를 뒤로 미룰 수 있는 여성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루크는 좌절감에 찬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과연 어머니의 충고가 먹혀 들까?
두 시간 후, 집의 현관과 뒤뜰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잔디밭은 산뜻하게 깎였고, 화단이 정리되었으며, 꽃씨까지 뿌려졌다. 하지만 그때까지 집주인들의 인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루크는 다양한 가능성을 곰곰이 따져 보았다. 그들은 쇼핑을 하거나, 병원에 가거나, 드라이브를 하러 갔을 수도 있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열한시 삼십분이었다. 11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외출해야 할 이유가 뭘까? 데릭은 낮잠을 자야 할 텐데....
슬슬 배가 고파왔다. 루크가 뒤뜰의 수도에서 물을 마시며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을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진입로를 따라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가 서둘러 집을 돌아가 확인해 보니 레이첼의 차였다. 비로소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사라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데릭은 뒷좌석의 유아용 시트에 앉아 있었다.
루크가 재빨리 다가갔을 때, 레이첼이 차에서 나왔다. 그녀의 표정은 가히 치명적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리고 당신이 뭐기에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집 잔디를 깎은 거죠?"
"좋은 아침이오, 레이첼. 쇼핑을 다녀왔소?"
그는 웃는 낯으로 사라와 데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족들 앞에서 이러지 말아요."
"흥,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마세요. 난 당신이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셨으면 좋겠군요."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난 당신을 걱정하고 있소, 레이첼. 그리고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을 테니, 나에게 익숙해지는 편이 좋을 거요."
"하지만.....하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을 걸요!"
"뭘 말이오? 내가 왜 당신을 걱정할 수 없다는 거요? 왜? 당신은 외모보다 훨씬 많은 장점을 가진 멋진 여성인데. 뭐, 성질이 좀 있긴 하지만 말이오."
"하지만......당신은 미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잖아요."
"계획을 바꿨소."
"아, 맙소사......."
"몸을 사릴 필요는 없소, 레이첼. 난 당신에게 상처를 줄 생각이 없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럴 거예요. 그걸 모르시겠어요?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난 상처를 받는다구요."
사라가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데릭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단다, 레이첼."
"곧 갈게요."
레이첼이 말했다.
"우리, 나중에 이야기해요."
"오늘 밤 나가서 식사나 할까?"
그러자 레이첼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요, 레이첼."
"루크, 왜 당신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은 거죠?"
레이첼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차로 돌아가 차를 얼른 차고로 몰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니?
루크는 얼굴을 찡그린 채 차고로 향했다.
다른 누구를 말하는 거지? 다른 연인들? 그녀를 사랑하고 떠난 남자들?
망할 놈들.....그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것은 이미 그녀의 죽은 남편만으로도 충분했다.
데릭의 성난 울음소리가 루크의 사념을 깨뜨렸다. 그는 상냥하거나 명랑하게 행동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서둘러 자동차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퉁명스런 몸짓으로 아기를 안아 들고 달래기 시작했다.
"자, 당장 짜증을 멈추거라, 이 작은 군주야!"
그는 데릭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명령했다.
데릭은 즉각 울음을 멈추더니 천사 같은 미소를 방긋 지어 보였다. 그리고 크고 반짝이는 갈색 눈에 애교 있는 웃음기를 담고는 루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게다가 <아빠>라고 말하려는 듯 <바바>라는 소리까지 내는 게 아닌가!
루크는 그 순간 데릭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봤지, 레이첼?"
사라가 즐거운 어조로 며느리를 향해 물었다.
"이게 데릭에게 필요한 거야. 단호한 남성의 손길 말야. 어머, 데릭이 루크를 정말 잘 따르지 않니."
"루크가 남은 오후 동안 저 작은 악마를 돌봐 줄 생각이라면...."
레이첼은 차에서 식료품 봉지를 꺼내 들고 집으로 향했다.
"저 착한 사마리안의 점심 식사를 준비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어머니. 의심할 것 없이 그는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 들 테니까요."
사라가 루크에게 사과하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힘든 아침이었다우. 레이첼이 쇼핑 봉지를 떨어뜨리기 전에 내가 얼른 가서 문을 열어 줘야겠어요. 다시 봐요."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데릭은 할머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다시 요란하게 울어 젖혔다.
"네 성깔이 보통은 아니로구나....."
루크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우는 아기를 어르며 뒤뜰로 갔다. 하지만 온갖 수단을 다 써도 아기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루크는 좌절감을 느꼈다.
그때 사라가 뒷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기를 안으로 데려오세요, 루크. 데릭은 피곤하고 배가 고픈데다 기저귀가 축축해서 그런 거예요."
잠시 후 레이첼이 아기를 침대에 눕히고 어르기 시작했다. 루크가 사라의 샌드위치 두 개를 다 먹어 치웠을 무렵 집 안에는 평화와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는 한숨을 길다랗게 쉬며 커피를 한잔 더 잔에 따라 부었다.
"맙소사, 아기들은 항상 저런가요?"
"아녜요. 데릭은 쇼핑에 피곤했던 거예요. 아침 열시에 낮잠을 재워야 했거든요. 다른 아기들 같으면 유모차에서 잠들었을 텐데, 데릭은 안 그래요. 저 아기는 쇼핑이나 드라이브가 너무 재미있어서 잠들지 않았어요. 구경하는 것을 참 좋아하거든요."
"우리 어머니 말씀이 저도 그랬다더군요."
루크가 중얼거렸다.
"저도 참을 통 안 잤대요. 한 번에 네 시간 이상을 자는 법이 없었대요. 제 침실에 형형 색색의 램프와 각종 모빌을 주렁주렁 달아 놓으셨던 이유는, 그래야만 어머니가 좀 쉬실 수 있으셨기 때문이라더군요. 저는 여러 시간 동안 가만히 누워서 빛과 그림자가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대요."
"어렸을 때부터 유망한 사진작가가 될 싹수를 일찌감치 보였군요."
"당신 말씀이 옳을 겁니다. 저는 그 두 가지를 미처 연결 지어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당신은 정말 현명하신 분입니다, 사라. 사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인데요, 나중에 데릭 사진을 몇 장 찍고 싶습니다. 차에 있는 카메라에 필름이 좀 남았거든요. 기촬영분을 현상하기 전에 남은 필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어머, 참 좋은 생각이에요. 우리는 데릭의 사진을 많이 찍어 주지 못했답니다. 생활이 워낙 빠듯해서요. 패트릭의 투병에 저축이며 여유 돈이 전부 들어갔거든요. 패트릭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진찰 결과가 나오자마자 근무하던 국제 제약 회사의 연구직에서 사임 해야 했거든요. 그들의 처사는 정당치 못했어요."
"이 집은 자택이십니까?"
"아니에요. 남은 돈이 얼마 없었어요. 이곳은 임대 저택이랍니다. 패트릭이 죽은 후 한동안 우리는 연금으로 생활했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활하다가는 데릭의 뒷받침을 해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은 레이첼이 직업 전선에 다시 복귀했지요. 며느리는 일을 잘해 왔고, 점점 일거리도 늘어 가고 있답니다."
"그녀는 아주 좋은 모델입니다."
"그리고 매우 아름답죠......"
사라는 묘한 여운을 담아 말하며 걱정스런 시선으로 루크를 훔쳐 봤다.
그는 안심시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레이첼에게 공적인 관심 이상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우 명예로운 의도의 것입니다. 단, 유일한 문제라면 레이첼이 제 마음을 좀처럼 알아주지 않는다는 거죠. 그녀에게 그 점을 확신시킬 필요가 있는데 말씀입니다."
"며느리는.......패트릭을 매우 사랑했어요. 하지만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저렇게 젊은 여성이 평생 수절을 한다는 게 우습잖아요. 루크, 나는 당신이 우리 며느리의 새로운 상대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요."
루크는 사라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맙습니다. 그녀에게 저랑 외식을 하러 나가도록 설득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며느리가 거절을 했단 말인가요?"
"네에......"
"그걸 개인적인 거절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루크. 레이첼은 나에게 데릭을 또 맡기기가 미안해서 그랬을 거예요.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다니까요. 나는 데릭을 사랑하고, 평소에 데릭은 밤에 다루기 수월한 편인데요. 저번에는 예외였지만요. 하지만 이제 약이 충분히 있으니까, 별 문제 없을 거예요."
"데릭이 일어나면, 제가 실컷 데리고 놀아서 나가떨어지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사라가 웃었다.
"참 좋은 생각이에요! 그리고 함께 노시는 동안 그 아이의 사진도 찍을 수 있을 테니, 일석 이조네요....."
"무슨 사진이오?"
레이첼이 부엌으로 들어서며 의아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데릭의 사진이야."
사라가 대답했다.
"루크가 데릭의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우리에게 주시겠대. 정말 친절하신 분이 아니니?"
"네. 매우 친절하시죠......"
"내가 그에게 데릭을 돌볼 테니, 두 사람이 아무 걱정 말고 나가서 외식하라고 권유했단다."
그러자 레이첼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다정하시네요, 어머니. 하지만 전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어요."
"말도 안 돼. 내 말에 따르라니까."
"나 역시 사라의 말에 동감이오."
루크가 불쑥 끼여 들었다.
"외식은, 오늘 내가 한 일에 대하여 당신이 보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사가 될 거요. 아직 일을 다 끝내지 못했지만 말이오. 차고의 색이 많이 바래서 바꿔 칠할까 생각중이니까......"
레이첼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본 다음에 한숨을 쉬더니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좋아요. 오늘 저녁을 함께 하도록 해요. 루크, 잠깐 밖에서 나 좀 볼래요? 난 당신이 무슨 색을 사용할지 알고 싶어요."
하지만 단둘이 남게 되자, 화기 애애한 분위기는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루크 세인트 클레르, 내 말을 잘 들어요...."
그녀는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삿대질을 했다.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겠어요. 다시는 우리 시어머니를 구워삶아서 날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말아요. 같은 이유로 내 아들을 이용해서도 안 돼요. 난 당신이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구요. 흥, 그건 순수한 저녁 데이트가 아니죠!"
"사실이오......"
"흥, 마침내 인정하셨군요!"
그녀는 팔짱을 끼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얼굴을 붉힌 채 초록색 눈을 분노로 반짝이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거야 질문에 달렸지. 정확히 내가 뭘 인정해야 하는 거요?"
"당신이 이 주변을 맴도는 유일한 이유는.........나를 고려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잖아요."
"그건 그렇소."
그는 깜짝 놀라는 그녀를 갑자기 확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고 입술을 그녀의 것에 포갠 다음 힘찬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지금까지 항상 그랬듯이 일단 그의 품에 안겨 키스를 받자, 그녀의 온몸의 근육은 일제히 풀리며 그의 품에 녹아 들었다. 그 달콤한 항복은 그를 마비시킬 만큼 강력했기 때문에, 한순간이나마 그녀를 원하는 이유가 오직 그것뿐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녀는 이 세상의 어떤 여자들보다 그에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는 기분이 들게끔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연약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그의 품에 안기면 약해지는 거였다.
이윽고 그가 입술을 떼자, 그녀는 비통함에 찬 초록색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늑대! 왜 날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 거죠?"
"당신이 그걸 원하지 않으니까........"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반박한 다음 그녀에게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무릎이 풀리고 온몸이 떨릴 때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루크의 기분 또한 평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만 멈춰야 해요......"
키스가 점점 길어져 루크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을 때, 그녀가 문득 중얼거렸다.
순간, 그는 십대처럼 그녀를 덤불 속이나 자동차 뒷좌석에 눕혀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훤한 대낮인데다 사라가 눈을 똑바로 뜨고 그들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라를 떠올리자 루크는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을 차렸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레이첼에게 품은 마음을 정욕의 수준으로 깎아 내리는 짓을 하다니. 그녀는 나에게 그 이상의 것을 원하고 있을 텐데........
"당신 말이 옳아. 이건 내가 원하는 전부가 아니오......"
그는 어렵게 그녀에게 입술을 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뒤로 물러나 그녀와 거리를 뒀다.
그녀는 여전히 홍조에 물든 얼굴에 냉소적인 미소를 담고는 그의 팽팽해진 청바지를 힐끔거렸다.
"글쎄요. 당신 같은 남자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뿐일 텐데요......"
"당신이 틀렸소, 레이첼. 나와,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모두 틀렸소."
"내가요? 흥, 오늘 밤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두고 보자구요. 당신은 날 놀라게 하진 못할 걸요."
루크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오후 내내 서로를 모욕하며 보낼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 아무것도 증명하진 못해. 내가 오늘 밤에 행동으로 보여 주겠소."
"조금 전과 같은 행동으로 말이죠? 네, 말보다 훨씬 웅변적인 행동이더군요."
루크는 이빨을 갈았다. 젠장, 그녀는 그를 참기 힘들 지경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긴 매번 키스로 끝나는 것도 놀랍지 않았다. 그것만이 저 매운 입술을 닥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말이다.......
"당신이 내 음험한 성격과 의도에 대해 그렇게 확신한다면......."
그가 장난스럽게 지적했다.
"오늘 밤이 새도록 나와 함께 있는 게 어떻겠소?"
"흥, 내가 매조키스트거나, 아슬아슬한 삶을 좋아한다면 그렇게 못할 것도 없겠죠."
"아니면 당신이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날 좋아하거나!"
그의 단정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친밀한 것이었다.
공포였다.
루크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레이첼, 왜 나를 그런 식으로 보는 거요?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날 믿어 주겠소? 난 결코 당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거요."
"몇 번이나 더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당신은 그저 당신이라는 존재만으로도 나를 상처 입힐 거예요!"
그녀는 분노와 가슴 절절한 슬픔을 섞어 그에게 대꾸했다.
"맙소사....제발 부탁이에요. 나를 딱하게 여긴다면 그냥 떠나 주세요. 내가 그것을 진심으로 원한다는 것을 모르겠어요?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해야 당신을 떠나게 할 수 있는 거죠?"
"좀 전에 당신은 행동이 말보다 더 웅변적이라고 했지, 레이첼. 그래, 당신 말이 옳아!"
그는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면서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잡고는 짧지만 정열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입술을 떨리게 하기에는 충분한 키스였다.
"당신이 내 키스에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 말을 따르지. 지금 나는 당신이 사라져 주길 원하오. 잠시만. 나에게는 당신의 증오로부터 한숨 돌릴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녀는 상처 입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지만, 그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오늘 밤에 상황이 악화된다면,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 되리라.......
그에 대한 그녀의 강렬한 정욕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였고, 필요하다면 그는 그것을 가차없이 휘두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가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리라. 진짜 증오를 담은 눈으로.......
"당신 같은 남자는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녀는 툭 쏘아붙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녀의 말은 유혹적인 여운을 풍겼다. 루크는 씩 웃은 다음 휘파람을 불면서 차고를 칠하러 갔다.
12
"어떻게 됐니?"
그레이스는 루크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하루 종일 아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 좌불 안석이었다.
그는 그저 그랬다는 뜻의 손짓을 해 보였다.
"오늘 밤이 지나 봐야 알겠어요. 그녀를 간신히 저녁 식사에 끌어냈거든요."
"어디로 갈 거니?"
"작고 아담한 해산물 식당으로요. 너무 튀지 않는 곳이죠. 화려한 곳으로 데려가면, 그녀는 제가 그녀에게 감명을 주거나, 유혹하려 드는 걸로 생각할 것 같아서요."
그의 씁쓸한 말투에 그레이스는 <2 더하기 2는 4> 라는 당연한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네가 정사만을 원한다고 생각하는 구나?"
"뭐, 비슷해요......"
"네가 정원의 잔디를 깎아 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디?"
"그 일을 전부 그녀를 침대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공작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아이에게 잘해 주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받아들이더라구요."
"넌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서 그녀에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해야 해, 루크.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애시당초 손을 떼거나......"
"말처럼 쉽지 않아요. 어머니, 제가 샤워를 하는 동안 셔츠를 다려 주실래요? 서둘러야 해요."
"하지만 이제 겨우 다섯 시잖니. 언제 그녀를 데리러 가기로 했지?"
"일곱 시요. 하지만 먼저 쇼핑을 할 게 있어요. 그 다음에 가는 길에 테오의 작업실에 들려 아까 현상을 부탁한 필름 사진을 찾아 갈 거예요."
"네가 비키니 차림의 레이첼을 찍은 사진들 말이니?"
"네. 하지만 그것은 그리 급하지 않아요. 저는 오늘 오후에 데릭이 모래밭에서 노는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그것을 오늘 밤에 레이첼에게 주고 싶어요."
"어머, 나도 좀 보고 싶구나. 테오에게 여분의 것을 현상해 달라고 부탁할래? 내친 김에 레이첼도 좀 보고 싶구나."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테오는 항상 모든 필름을 두 장씩 인화하거든요. 자, 이제 제 셔츠를 다림질해 주실 거죠? 제가 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어머니 솜씨가 더 좋아서요."
"아부는......어떤 셔츠니?"
"검은색 실크 셔츠요."
그레이스는 아들을 엄한 눈으로 응시했다.
"다른 셔츠가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크림색은 어떠니? 아니면 주머니에 수가 놓인 푸른색은 어때?"
"검은색 실크로 입겠어요."
그는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그레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넌 여전히 성적인 매력으로 그녀를 사로잡으려는 야심을 버리지 못했구나. 그건 옳은 방법이 아냐."
"동의해요. 하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잖아요."
그레이스는 루크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차올랐다. 하지만 아들과 말다툼해 봤자 헛수고였다. 그대로 샤워를 한 다음에 손수 다림질을 할 게 뻔하니까......
그녀는 혀를 쯧쯧 차며 세탁실로 들어가 검은색 실크 셔츠를 다림판에 올려놓았다. 이 셔츠를 입은 아들은 악마처럼 핸섬해 보이겠지.
불쌍한 레이첼.......
그리고 불쌍한 루크.......
남자들이란 생각이 없다니까. 자식이 딸린 여자들은 섹스만을 원치 않는 법인데.....안전이라는 꼬리표가 달리지 않은 이상에는 말이다. 그리고 이 셔츠를 걸친 루크는 오로지 전자만을 원하는 남자의 대명사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몸소 인생의 쓴맛을 체험해야만 제 어미 말을 듣게 되리라!
"와, 와, 멋있는데!"
테오가 외쳤다. 루크가 사진을 찾으려고 들른 참이었다.
"하여튼 이해할 만하다. 나라도 그녀와 사라에 빠졌을 거야."
"고마워, 테오."
루크는 엷은 미소와 함께 갈색 봉투를 테오에게서 받아 들었다.
"이만 가 볼게."
"잘 가. 나는 언제나 진짜 내 짝을 만나게 될지 암담하다. 참, 그런데 그 아기는 누구야? 눈망을이 초롱초롱하던데."
"데릭이야. 그 근사한 금발 비키니에 딸린 부록이지."
"정말? 네 아들이야?"
루크의 가슴이 죄어들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야....."
"그렇다면 누구의 자식이야?"
"그녀의 남편."
"어이, 젠장....."
"꼭 그렇지도 않아. 그녀는 미망인이거든."
테오는 여전히 코에 주름을 잡았다.
"좋지는 않은데. 나라면 다른 남자의 아이를 키우진 못할 거야. 아무리 그 엄마가 금발 미녀라 해도 말야. 이봐, 십 년쯤 후에 그 아이는 네가 친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네 속을 지지리도 썩힐 거야."
"하지만 난 데릭의 친아버지가 될 거야, 테오. 입양할 생각이거든. 자, 이만 가 봐야겠어. 나중에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하자, 좋지?"
"나에게 신랑 들러리를 시켜 준다면 그러지."
"당연히 네 차지지!"
레이첼의 집으로 향하는 루크의 머릿속에 테오의 경고가 메아리 쳤다. 물론 친구의 경고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데릭과의 관계가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았다.
그 아기를 보거나, 안아 주거나, 함께 놀아 줄 때, 루크는 친부자와 같은 유대감을 느꼈던 것이다. 뭐라 분석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는 레이첼을 사랑하는 것만큼 데릭을 사랑하고 있었다.
또한 나름대로 사라도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멋진 삼인조였고, 그는 그들에게 편안한 삶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들에게 크고 좋은 집을 사주고, 갖은 호사를 베풀어서 패트릭 클리어리의 죽음 전후로 그들이 겪었을 고생을 말끔히 씻어 주고 싶었다.
루크는 데릭에게 주려고 구입한 모빌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데릭은 춤추는 코끼리 모빌을 좋아할 거야. 아이들이란 코끼리를 좋아하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 나비 모빌도 귀여웠어. 물론 인형도 뒤지지 않지. 아, 사내아이에게 인형을 사줬다고 사라와 레이첼이 기겁을 하지 않기를......하나같이 또렷한 색상을 자랑하는 인형들이었다. 그중에는 야광 날개가 달린 인형도 있었다.
이윽고 그는 레이첼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초인종을 누르며 어머니가 그의 검은색 셔츠를 반대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의 구겨진 얼굴은 레이첼이 문을 여는 순간 말끔히 펴졌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고전적인 크림색 정장을 걸치고 머리카락을 올린 뒤에 진주 귀고리와 목걸이로 장식한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더 자세히 관찰하자, 그 옷은 구식이며 진주는 싸구려 모조품인 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아름다움이나 그의 경탄을 훼손시키지는 못했다. 사실 그는 그녀를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내면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타고난 자존심과 개성을 지닌 여자였다.
"좋은 밤이오, 레이첼. 정말 아름답소."
"늦었군요."
"겨우 십오 분인데."
"나는.......당신이 안 오는 줄 알았어요."
루크는 그녀가 힘주어 쥔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배어 있었다.
"당신은 내가 멀리 가 버리길 원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자 그녀가 송곳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루크는 실언을 했음을 깨닫고 만회에 나섰다.
"장난감 가게에 들려서 뭘 좀 샀소. 데릭에게 줄 선물을 말이오."
"데릭의 선물을?"
"그렇소. 아이의 방을 장식할 모빌이오. 나가기 전에 그것을 걸어 놓으면 어떻겠소?"
"당신이....데릭을 위해 모빌을 사 오셨다구요?"
"그렇소. 특히 코끼리 모빌은 얼마나 깜찍한 줄 모르겠소. 아까 당신의 시어머니께도 말씀 드렸듯 나 역시 까다로운 아이었거든. 우리 어머니는 내 방 천장에 모빌을 달아 놓으면 내가 자지도 않고 여러 시간 동안 혼자 논다는 사실을 알아내셨다고 훗날 내게 들려주셨지. 그래서 난 그 방법이 데릭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거요. 내가 들어가도 되겠소? 고 작은 악마가 이렇게 일찍 잠들진 않았겠지?"
루크는 레이첼이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아, 맙소사......맙소사....."
다음 순간 루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선물 상자를 내려놓은 다음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가 실언이라도 한 거요? 무슨 일이오? 데릭이 잘못되기라도 한 거요?"
그때 사라가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루크의 당혹감은 표정과 목소리에 확연히 드러났다.
"모르겠습니다. 제.....제가 데릭에게 모빌을 사 와서 레이첼이 화가 난 모양이에요."
레이첼은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울었다. 루크는 사라에게 절망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이첼......"
사라가 그녀를 달래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렇게 울면 공들여 한 화장이 망가지잖니. 자, 잠깐 누우면 어떻겠니?"
"그를 보내세요....."
그녀는 어깨 너머로 루크에게 고통스런 시선을 던지며 흑흑거렸다.
"그를 보내세요. 전 더 이상 그를 보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요. 못하겠어요."
루크는 심장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레이첼!"
사라 역시 충격을 받아 소리 쳤다.
"전 그에게 말하고 또 말했어요. 하지만 그가 듣질 않았어요!"
레이첼이 히스테리를 부렸다.
"전 더 이상 그가 제 인생에 끼여 드는 것을 원치 않아요. 하지만 그를 멀리 떠나 보낼 힘도 없어요! 어머니가 절 대신해서 그렇게 해주세요. 제가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요. 이 죄책감과 고통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어요. 전 더 이상 죄책감을 참을 수 없어요....... 이 고통도요. 제발, 어머니, 그를 보내 주세요."
말을 마친 뒤 그녀는 사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오열을 터뜨렸다.
"레이첼.....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루크........당신은 알겠어요?"
"네....."
그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말해 준다면 내가......"
"아녜요, 안 돼요!"
레이첼이 울부짖었다.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그에게 간청했다.
"제발, 루크, 그냥 가 주세요........"
루크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실을 똑똑히 주시했다.
그녀는 18개월 전에 저질렀던 짓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으리라. 절대로!
그녀는 정사를 즐긴 성인이었고, 그에 대한 자책에 시달렸던 것이다. 사라는 레이첼이 패트릭을 많이 사랑했었다고 들려주었다. 그러니 그가 죽고 난 다음에도 레이첼은 무거운 죄책감을 느꼈겠지......
레이첼이 여전히 그를 원하는 만큼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죄책감과 부끄러움의 상징으로 남아 있게 되리라. 그녀는 그와 또 다른 하룻밤을 지내고 싶은 순간적인 유혹에 빠졌었으며, 그 후로도 그가 그녀의 뒤를 계속 따라다니자 그와 일시적인 정사를 나눌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관계는 생각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선물 몇 가지로 그녀의 아들을 사려는 행동으로 그는 그녀의 눈 밖에 나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루크가 그녀의 인생에 끼여 들 기회는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그는 그녀의 흐느끼는 모습을 대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차지한 자리를 헤아려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평생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알았소, 레이첼........"
그는 그녀와 비견할 수 있을 만큼 고통스런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소. 이제 갈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소. 안녕히 계십시오, 사라. 당신을 알게 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선물 상자를 집어 들더니 하얗게 질린 레이첼에게 건넸다.
"데릭이 이것들을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잖소? 그 아이는 이것이 누구의 선물인지도 모를 테니까."
레이첼이 다시 오열을 터뜨리자, 루크는 선물 상자를 그녀의 손에 쥐어 주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를 더 이상 바라볼 수도 없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잘라 내듯 작별 인사를 던진 다음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자동차의 조수석에 놓인 사진 꾸러미를 대한 순간, 그의 강철 같은 평정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온몸의 의지력을 쥐어짜 그는 차를 몰고 도로로 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그는 그렇게 감정의 끈을 세게 죄고는 놓아 주질 않았다.
하지만 일단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의아함과 걱정이 교차한 얼굴을 대하는 순간, 냉철한 겉모습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레이첼과의 관계가 끝났다는 짧은 설명을 하는 동안 속에서부터 점점 자제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하지만......."
"<하지만> 이란 없어요, 어머니. 그냥 끝난 거예요. 그녀는 절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질 않아요. 그녀는 절보는 것조차 참을 수 없대요!"
루크는 너무 창피해서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조차 없었다. 바보처럼 주절거리다니!
부들부들 떨리는 턱에 힘을 준 채 그는 사진 꾸러미를 식탁에 던진 다음 침실로 올라갔다.
"어머니가 호기심을 만족시킨 다음에 그것들을 태워 버리세요. 전 그녀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13
그레이스는 침실 문이 요란하게 닫히는 소리에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의 성깔에 속지는 않았다.
루크가 매우 깊은 상처를 받았구나.......아들이 서른두 살이 아니라 열두 살이라면, 이 엄마가 꼭 안아 주며 달래 줬을 텐데. 그러나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식탁 위에 놓인 사진 꾸러미로 향했다. 그레이스는 자리에 앉아 봉투에서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두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미녀들과는 달랐다. 그 레이첼이란 여성의 사랑스런 얼굴에는 강한 개성이 엿보였다. 인형 같은 금발 미녀가 아니라, 말 그대로 여성 그 자체였다.
그레이스는 모델이 찍히지 않은 사진을 보며 아들의 실력에 모성적인 자부심을 느꼈다. 풍경 사진은 뛰어난 작품이었다. 해변이나 해안선이 그림 같았다.
이런 예술 작품을 불태워 버리는 것은 죄악이야!
그녀는 모든 사진을 레이첼이 찍힌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하나하나 분류하기 시작했다. 전자는 기꺼이 불태워 버리리라......
사진을 반쯤 정리했을 때, 남자아이의 사진이 드러났다.
다음 순간 그레이스는 충격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방실방실 웃고 있는 아기의 사진을 들고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사진을 보고, 보고, 또 봤다.
족히 10분쯤 들여다본 다음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선반에 보관해 둔 앨범을 뒤적거렸다. 가장 오래되고 큰 앨범을 찾아냈을 즈음, 루크의 침실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그녀의 가슴은 갈가리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들이 울고 있었다. 서른두 살이나 먹은 성인 아들이 20년 만에 처음으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레이스는 아들이 그런 식으로 감정을 터뜨렸던 마지막 경우를 기억했다. 남편이 아들의 탄생을 기념해서 사와서, 아들과 함께 자랐던 늙은 래브라도 개가 차에 치어 죽었을 때였다.
그때를 회상하니,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날 아들은 두 가지를 맹세했다. 절대로 개를 기르지 않겠다는 것과, 울지 않겠노라고. 이미 지나간 일에 눈물 흘려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영특한 아들은 깨달았던 것이다.
그레이스는 루크가 맹세를 깨고 눈물을 흘릴 만큼 깊은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의 숨죽인 울음소리에 그녀의 가슴이 메어졌다. 그리고 그 레이첼이란 여자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감히 루크를 저렇게 만들다니? 건방지게 내 아들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용해 먹고 차 버리다니?
당장 아들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의 추측을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루크가 이미 추악한 진실을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저렇게 절망해 하는 거겠지.
그레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대로 행동하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켜고 셰리주를 한 잔 마셨다. 아니, 한잔 더 마셔야겠다.....
한 40분쯤 흘렀을까? 그레이스가 가장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 마음에도 없는 텔레비전을 보며 두 잔째 셰리주를 마시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십오 분이었다. 남의 집을 방문하기에는 늦은 시각인데....
문을 열었을 때, 그녀의 눈앞에는 놀랍게도 사진속의 레이첼이 서 있었다. 실물은 사진보다 더 아름다웠다. 눈은 충혈되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지만 타고난 아름다움은 감춰지지 않았다.
"세인트 클레르 부인이신가요?"
그녀가 부드럽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요......."
그레이스는 레이첼에게 친절을 베풀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저.....루크가 안에 있나요?"
"그래요. 당신이 레이첼이군요?"
"네. 저는 그를 만나야 해요, 세인트 부인. 부탁입니다.....아주.......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글쎄, 루크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할지 모르겠군요. 매우 흥분해 있어서...."
"아, 하지만 그를 꼭 만나야 해요! 부인께서는 모르실 거예요. 그에게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어요."
"난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레이첼. 난 루크가 당신 아들을 찍은 사진을 봤어요. 그 나이 또래의 제 아비를 쏙 빼어 닮았더군요."
경악에 찬 초록색 눈동자가 그레이스의 추측을 확인해 줬다.
"아....루크가 이미 알고 있나요? 부인께서 말씀해 주셨나요?"
"아니에요."
"그렇다면, 제발 제가 그에게 직접 말하게 해주세요, 부인. 저는 그 때문에 왔습니다."
"알 만하군요. 하지만 경고하겠는데, 내 아들을 이용해 먹을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 아이는 좋은 남자라서 당신에게 받은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다구요."
"네 알고 있습니다. 제 행동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일을 바로잡으려고 왔어요. 그러니......그를 만나게 해주세요......"
"혹시 내 아들이 부유한데다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마음을 바꾼 것은 아니겠죠?"
다시 충격이 어린 초록색 눈동자가 진실을 말해 주었다.
"그렇지는 않군요....."
그레이스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안으로 들어오세요....."
루크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대자로 누워 있었다. 감정적으로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여자들은 울고난 다음에 기분이 좋아진다고들 말하곤 하지만 루크의 경험에 의하면, 남자들은 울고 난 다음에 더 비참해지는 법이다. 눈물은 남자의 내적인 힘을 무르게 만들어 주었다. 20년에 걸친 맹세가 이렇게 깨지다니......
그가 누워서 암담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아, 친척들이겠지.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뒤였다. 레이첼과 거리를 두는 게 상수였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그녀를 다시 찾아가지 않을, 유일한 보증 수표였다. 지옥 같은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참아 내리라.......
그때, 방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왜 어머니는 나를 혼자 내버려 두시지 않는 걸까? 내가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것도 모르시는 걸까?
"뭐예요?"
"손님이 찾아왔다, 루크."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루크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감전된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적인 눈으로 열리는 문을 응시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이건 현실이 아니야.
하지만 정말 그녀가 문간에 서 있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레이첼을 실재 인물로 받아들이고 나자, 그의 머릿속에 잔인한 상상력이 발동하면서 서서히 격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여기서 뭘 하는 거요?"
그가 쏘아붙였다.
"아직도 못 다한 말이 더 있는 거요? 아니면 재미를 원한다는 결론을 내린 거요? 섹스가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던가, 레이첼? 그렇다면 안으로 들어와서 옷을 벗어!"
그녀가 정말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 그는 기절초풍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정열이 아니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화를 낼 권리가 있어요, 루크. 그러니 난 당신 말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노력하겠어요. 지금 당신은 나에게 불같이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거니까요."
"그렇지 않아! 난 당신을 정말 썩어빠진 계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구!"
"그 말은 당신의 진심이 아니에요, 루크. 난 알고 있어요."
"흥, 무슨 수로 당신이 안다는 거지?"
"시어머니가 말씀해 주셨어요. 그분이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데릭도 진정으로 아낀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당신이 나와 결혼해서 한가족이 되기를 원한다구요."
"지금 농담하는 거요? 당신 눈에는 그런 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거요? 반푼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을 옆에서 설명해 줄 제삼자가 필요했다는 말이오?"
"네. 그래요. 난 나에게 설명해 줄 제 삼자가 필요했어요. 왜냐하면, 난 당신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마음을 졸여 왔기 때문에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십팔 개월 전.....그 전시장에서.....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에 대해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어요."
그 순간 루크는 입이 말랐다. 그는 감히 희망을 품지 못한 채, 그러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려 했지만 소리만 요란하게 날 뿐 침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마, 레이첼. 그랬다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책임질 수 없소."
"내 말은 모두 진실이에요, 루크. 그리고 지금부터 하는 말도 전부 진실이에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두려웠다. 앞으로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도 두려웠고,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도 두려웠다.
"말해 봐요....."
"난 극도의 절망 상태에 빠져 그 전시회를 갔어요. 더 이상 집에서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내 월경이 시작될 때마다 나를 바라보는 패트릭의 시선과 끔찍한 외로움을 말이에요. 그 당신 시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시지 않았고, 패트릭은 내가 생각했던 남편이 되어 주지 않았어요. 우리 사이는 단 한 번도 진짜 동반자가 된 적도 없었어요. 공유하는 것도 없었고, 동료 의식도 없었죠. 그는 일만 했고 나는......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녀는 한숨과 눈물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아, 나는 패트릭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기꺼이 모델 일을 그만두고 전업 주부 겸 엄마가 되기로 했던 거예요. 하지만 내가 곧 임신하지 못하자 패트릭의 태도가 변했어요. 서서히 나는 그가 나와 결혼한 이유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의 자식들의 엄마가 될 완벽한 유전자를 지녔기 때문임을 알게 됐어요. 나는 우리 두 사람의 가장 좋은 부분만을 이어받을 아이들을 위한 인큐베이터였던 거예요. 즉, 두뇌와 아름다움을 갖춘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에요......."
인큐베이터라니.....어떻게 레이첼 같은 여자에게 그 따위 역할을 기대했던 것일까? 루크는 놀라움을 가라앉히느라 무진 애를 썼다.
"물론 난 처음에는 몰랐어요. 데릭을 임신할 때까지는 그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내 결혼이 일그러지자, 난 혼란스럽고 상처를 받았어요. 임신하지 못하는 나의 불완전함을 책망하면서, 내가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내 에너지를 모두 임신에만 쏟았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난 남편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하지만 패트릭에게 갈망하는 자식을 안겨 주면 그는 다시 행복해질 테고, 나 역시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던 거예요......."
회한을 누르느라 애쓰는 탓일까? 레이첼의 어깨는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인공 수정이 거듭해서 실패할 때마다 나는 감정적으로, 이성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매우 의기소침하고 불안정했던 그날 밤에는 창녀처럼 옷을 입고 처음 만나는 갈색 눈을 한 남자를 유혹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임신 이외에 다른 것은 중요치 않았던 거예요....."
루크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는 갈색 눈을 한 사내, 그 이상은 아니었던 거야? 젠장.......
"내가 그 갈색 눈을 한 사내에게 반하리라는 생각은 상상조차 못했어요. 하지만 그 남자가 나를 품에 안는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것이 되었던 거예요. 그날 밤뿐 아니라 남은 평생 동안......."
루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가슴은 무섭게 고동 치고 있었다.
"난 그날 밤 당신과 사랑에 빠진 줄은 몰랐어요, 루크. 그저 당신을 잊을 수 없었어요. 당신은 낮이나 밤이나 할 것 없이 내 생각과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그 동안 당신을 그리워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저께 아침에 당신이 호텔 계단을 내려오던 순간, 나는 죽은 줄 알았어요. 뭘 해야 할지도 몰랐어요. 당신이 날 알아보지 못하자, 난 처음에 안도감을 느꼈지만 그 다음에는 첫날밤 느꼈던 그 감정에 압도당했어요. 난 당신을 죽도록 원했던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정열을 느끼자 루크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가 인정한 감정이 사랑일까, 정욕일까? 그리고 그녀의 발목을 지금 잡고 있는 죄책감을 훗날 그녀가 다시 느끼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내가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거예요. 그날 밤에 일어난 일은....변명은 하지 않겠어요. 난 당신에 대한 갈망으로 미쳐 있었어요, 루크. 그건 정욕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지만, 나중에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하지만 당신에 대한 갈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갔어요. 그래서 닥치는 대로 변명을 대고 당신에게 도망 쳤던 거예요. 나중에 당신이 쫓아왔을 때는 당신에 대한 감정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것이 뭐였소?"
그가 숨을 멈춘 채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루크. 너무나 사랑해요......"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고백하고는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다음 순간 그는 신음하며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입술을 그녀의 머리칼에 댄 채 격량이 이는 감정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녀의 갈비뼈가 부스러져라 안고 그녀의 울음을 잠재우려 했다. 가끔 그녀가 숨을 쉬지 못할 때에만 팔에서 힘을 뺐다.
"그렇다면 왜 그랬지, 레이첼? 왜 나를 떠나 보내려고 했소? 왜 나에게 그런 행동을 보였던 거요?"
그는 아직 완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나를 미워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시겠어요?"
"약속하겠소........"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그로 하여금 그녀를 증오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데릭은 당신의 자식이에요, 루크. 내가 유전자 검사에 대해 거짓말을 했어요. 네, 그 검사를 받긴 했어요. 패트릭이 죽은 다음에요. 병원 측은 여전히 그의 정자를 보유하고 있었거든요. 검사 결과, 데릭은 그의 자식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당신 자식이지요."
루크는 그녀의 말에 기가 막혔다. 그는 충격으로 그녀의 몸에서 팔을 풀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왜 거짓말을 했지? 왜?"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처음에 난 당신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믿을 수 없었어요. 그 다음에는 시어머니께 상처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사랑의 대상을 떼어버릴 수 없었던 거예요. 그분에게는 남편도, 자식도, 형제 자매도, 아무도 없거든요. 오직 나와 데릭이 전부예요. 게다가 난 당신이 내게서 섹스만을 원한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르곤 했어요. 하지만 오늘 밤 당신이 늦어질 때 내가 초조해 하자 시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당신이 나와 데릭을 사랑한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라구요...."
고맙소....정말 고맙소. 그는 그 순간 레이첼의 시어머니에게 속으로 감사를 드렸다.
"나는 그분의 말을 무시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데릭의 장난감을 사 들고 온 걸 대한 순간, 난 당신이 진짜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예요. 난 당신의 얼굴을 보며 속일 순 없었어요. 당신을 떠나 보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이 가고 난 다음에 난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시어머니는 나를 꼭 붙잡고 차근차근 설명을 요구하셨고, 나는 결국 모든 사실을 털어놨어요."
시어머니를 생각했기 때문인지 레이첼의 얼굴이 조금쯤 환해졌다.
"그분은....그분은 용감하고 상냥하게 사실을 받아들이셨어요. 전혀 화를 내지 않으셨어요. 그저 패트릭이 좋은 남편이 아니었던 것을 이해한다고 하셨어요. 그는 그의 아버지만큼 이기적이고 까다로운 사람이라면서요. 또한 데릭을 그의 핏줄이 아니라 그 아이 자체로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가서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권하셨죠. 그래서....내가 여기 온 거예요."
그녀는 다시 절망적인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를 용서할 수 있겠어요, 루크?"
"데릭은 내 아들이야......"
그 순간 그의 입에서는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네. 당신 아들이에요. 우리 아이에요."
그는 그녀를 부둥켜안고 눈을 꼭 감았다. 자신의 생애에서 그 순간만큼 행복한 때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1개월이란 시간과 그 모든 사랑이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뒤를 돌아보지 마. 그의 내면의 소리가 그에게 충고했다. 그건 바보 같은 자기 파멸이라구. 미래를 보는 편이 훨씬 좋아. 너뿐 아니라 그녀도 생각해야지. 그녀는 힘든 시간을 보냈잖아. 시간을 두고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라구. 시간을 두고 네 사랑을 증명하라구.....
이윽고 그는 포옹을 풀고 그녀의 걱정스런 눈망울을 지그시 응시했다.
"난 당신을 완전히 용서하기 전에 두 가지 약속을 받아야겠소."
"뭐든지 말만 하세요."
"첫째, 내일 당신은 나와 함께 우리가 함께 살 집을 보러 가야 해."
그녀의 얼굴에 사랑스런 미소가 어렸다.
"이 근처에 집을 구합시다. 그래야 우리 어머니가 손자를 보러 오실 수 있지. 내 스튜디오와 암실과 조수들이 함께 쓸 공간까지 있는 큰집을 구합시다. 그리고 사라도 함께 살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보장된 곳으로 정합시다. 그분은 영원히 데릭의 할머니니까...."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도 못했다.
"둘째, 당신은 가능한 한 빨리 나와 결혼해 줘야해."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때까지 당신은 내가 둘째 아이를 만드는 것을 막지 않을 테지?"
"그럼요....."
루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강렬한 키스를 했다. 하지만 도를 넘기 전에 이성을 되찾고 입술을 뗐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아직 하지 않았지?"
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말했다.
"아뇨, 당신은 이미 했어요. 당신이 내 잔디밭을 손보고, 차고를 칠해 줬을 때도 그 말을 한 거예요. 우리 아들에게 장난감을 사줬을 때도 그 말을 했어요. 당신은 계속 그 말을 했지만 난 그것을 듣기를 거절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좋다면 다시 해주세요."
"당신을 사랑해, 레이첼. 난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어."
"우리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 셈이군요. 아, 당신 어머니가 결혼을 좋아하지 않으실 거예요."
"어머니는 데릭이 손자라는 사실을 아시면 당신을 환영하실 거야."
"그분은 이미 알고 계세요."
"뭐?"
"데릭의 사진을 보고 추측하셨대요. 데릭이 그 나이 또래의 당신을 빼다 박았대요."
"음,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겠군. 어머니는 원래 가족들에게 r관대하시니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아들에게 특히 관대하시죠."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냥 내 말을 믿으세요. 자, 어머니께 말씀드리러 가요. 지금쯤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그런 다음 사라에게도 전하러 가야지. 그분 역시 걱정하고 계실 거야. 그리고 우리 아들을 깨워 말해 줘야지. 어차피 그 아이는 잠자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루크 세인트 클레르. 당신은 자식들 버릇을 망쳐 놓겠군요!"
"그럼, 물론이지. 그리고 내 아내의 버릇도 망쳐 놓는 남편이 될 거야."
"아, 그건 반대하지 않겠어요. 얼마든지 망쳐 놓으라구요!"
두 사람은 함께 웃으며 침실 문을 열었다.
주방에 앉아 있던 그레이스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행복한 웃음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손자의 사진을 가족 앨범에 끼운 뒤 고개를 들었을 때, 루크가 행복한 얼굴로 레이첼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주방 입구에 서 있었다.
"어머니, 새 며느리의 인사를 받으세요."
그러자 그레이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잘됐구나. 한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한다. 앞으로 너희 두 사람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레이스는 레이첼이 아들에게 던진 표정에 감동을 받았다. 안도와 사랑으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 어머니가 나를 받아 들이셨어요. 앞으로는 모든 것이 잘될 거예요......
그리고 정말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