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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김상옥(1920~2004)

가을 뜨락에 서서

강 건너 마을

강(江) 있는 마을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선생 송(頌)

고아 말세리노의 입김

과학 비(非)과학 비비(非非)과학적 실험

궤짝처럼

그림자

그 문전(門前)

금(金)을 넝마로 하는 술사(術士)에게

기러기

깃을 떨어뜨린 새

꽃의 자서(自敍)

꽃피는 숨결에도

나의 악기(惡器)

낙엽(落葉)

난(蘭) 있는 방

남은 온기

노리개

노방(路傍)

늪 가에 앉은 소년

다도해

다보탑(多寶塔)

다섯 개의 항아리

달의 노래

대불(大佛) - 석굴암(石窟庵)

대역(代役)의 풀

더러는 마주친다

돌아온 걸(乬)이

딸에게 주는 홀기(笏記)

뜨락

모란

모래 한 알

목련(木蓮)

무엇을 생각할 때는

무연(無緣)

무열왕릉(武烈王陵)

무제(無題)

묵을 갈다가

방관자의 노래

백자(白瓷)

백자부(白磁賦)

벽화(壁畫)

변신(變身)의 꽃

변씨촌(邊氏村)

병상(病床)

봉선화(鳳仙花)

부재(不在)

부처님 걸이(乬伊)가 막일꾼 차걸이(次乬伊)에게

불모(不毛)의 풀

비(碑)

비가(悲歌)

비 듣는 분막(墳幕)

비 오는 제사(祭祀)

비취인령가(翡翠印靈歌)

사향(思鄕)

산(山)

산골

살구나무

세례(洗禮)

수해(樹海)

술래잡기

숲보담 돌보담

승화(昇華)

신록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안개 낀 항구

어느 가을

어느 날

어느 초여름 저녁에사

어머님

어무님

억새풀

여황산성(艅艎山城)

연적

열쇠

영어(囹圄)

옥적(玉笛)

우수(憂愁)의 서(書)

은선암(隱僊庵) 즉흥(卽興)

이순(耳順)의 봄

이조(李朝)의 흙

인간(人間) 나라 생불(生佛) 나라의 수도(首都)

인연이여

입동(立冬)

잠자리

장서(藏書)처럼

저 꽃처럼

전설(傳說)

정물(靜物)

제기(祭器)

제주의 오름

조개와 소라

종적

주변(周邊)에서

지주(蜘蛛)

질그릇

집오리

착한 마법

참파노의 노래

창(窓)

청자부(靑磁賦)

촉촉한 눈길

촬영(撮影)

추천(鞦韆)

축제

측(厠)

태(胎)

포도(葡萄)

푸른 초여름

학(鶴)

항아리

행화동(杏花洞) 설화(사슴과 나무꾼)

향낭(香囊)

형상

화창한 날

회심곡

회의(懷疑)

3.1 절

 

 

 

가을 뜨락에 서서

김상옥

 

이마에 마구 짓이기던 그 독한 꽃물도

몸에 둘렀던 그 짙고 어두운 그늘도

이제는 다 벗을 수밖에... 벗을 수밖에

 

채어 오른 물고기 그 살 비린 숨 가쁨

낱낱이 비늘 쳐 낸 지난 뜨락에 나서면

보아라 혼령마저 적시는 이 순금(純金)의 소나기.

 

 

 

강 건너 마을

김상옥

 

강 건너 재 너머

재 너머 강 건너

제비나 찾아오는 머언 마을

 

나 제비처럼

그 마을로 찾아가랴.

 

늘보리 철따라 익고

보리 익는 냄새 같은

구수우한 맘씨들이 살고 있고

 

연자방아 돌아들면

박넌출 오른 담집 안에

옛적같이 누에는 잠자고

 

맨드라미 꽃밭 속에

장닭도 한 마리 앉아 조올고

 

뒤뜰 석류나무 밝은 그늘 아래

빨간 댕기 파란 조끼

아직 내외 없이 서로 예쁘게 크고

 

재 너머 강 건너

강 건너 재 너머

갈래도 갈 수 없는 머언 마을

 

내 제비처럼

그 마을로 찾아가랴.

 

 

 

강(江) 있는 마을

김상옥

 

한 굽이 맑은 강(江)은 들을 둘러 흘러가고

기나긴 여름날은 한결도 고요하다

어디서 낮닭의 울음소리 귀살푸시 들려오고

 

마을은 우뜸 아래뜸 그림같이 놓여 있고

읍(邑)내로 가는 길은 꿈결처럼 내다뵈는데

길에는 사람 한 사람 보이지도 않어라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선생 송(頌)

김상옥

 

철쭉이 진다. 전신(全身)에 철쭉이 진다. 만산(滿山) 철쭉이 점점이 어룽진다. 흥건히 떨어져 수북이 꽃잎은 쌓인다.

바람도 햇빛도 오지 않는 이 세상 저승, 전옥서(典獄署) 감방(監房) 안엔, 뒤척여 뒤척여도 굴신조차 할 수 없는 한 분 수인(囚人)이 앉아있다. 만고(萬古)에 외로운 수인이 앉아있다.

날이 날마다 그 습(濕)하고도 어두운 그늘에 묻히어, 바랠 대로 바래져 흴 대로 희어진 그이 살갗위에 꽃잎이 난장(亂杖)으로 어룽진다. 어룽진 꽃잎은 또 어쩌면 그리도 영절스레 산(山)을 그리고 강(江)을 그리던가? 오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저기 천년 묵은 지네처럼 산의 등뼈 갈비뼈를 새겨내던 그의 팔뚝, 그의 부르튼 손끝이 파르르 떨고 있다.

보아라 저 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 한라산(漢拏山) 백록담(白鹿潭)에도 한결같이 그의 푸른 마음은 떨고 있다. 달빛처럼 드푸른 마음은 떨고 있다. 지금 이 백년 후생(後生))의 가녀린 가슴에도 사시나무 떨듯 그렇게 떨고 있다

 

 

 

고아 말세리노*의 입김

김상옥

 

길가 쓰레기 속에서 주워 온 아이의 입김

그날 없어진 빵과 해어진 담요 조각은

캄캄한 창고 하나를 빛으로 가득 채웠다

 

어느 해 치운 겨울날 정동(貞洞) 외진 뒷골목

이따금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간들거렸다

그 아이 밤새 예 와서 입김 녹이다가 갔던가

 

올해도 차츰 저물어 책은 불쏘시개나 할까

쓸 때 못 쓰면 쇠붙이도 녹이 스는 법

살얼음 엉긴 가슴엔 입김이란 아예 닿지 않는다

 

* 이태기 가톨릭 설화에 나오는 아이 이름

 

 

 

과학 비(非)과학 비비(非非)과학적 실험

김상옥

 

한 장의 무색투명한 거울이 수직으로 걸어온다. 맞은편에서도 꼭 같은 무색투명한 거울이 수직으로 걸어온다. 이 두 장의 거울은 잠시 한 장의 거울로 밀착되었다가, 다시 둘로 갈라져 제각기 발뒤축을 사뿐히 들고 뒤로 물러선다.

뜻밖에 이 난데없는 거울 앞에, 또 난데없는 손이 하나 나타나 한 자루의 춧불을 밝혀 든다. 순간, 촛불은 앞뒤로 비친다. 하나의 촛불은 하나의 촛불로 비추고, 그 비쳐진 촛불은 촛불을 비추고, 비쳐진 촛불은 촛불을 비추고, 다시 비추고 비치고, 비치고 비추고, 일천의 촛불은 일천의 촛불을 비추고, 천만 억만의 촛불은 천만 억만의 촛불을 비추고, 항하사(恒河沙)의 촛불은 항하사로 비추고, 아승기(阿僧祇)의 촛불은 아승기로 비추고, 나유타(那由他)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촛불은 나유타 불가사의로 비추고, 다시 비치고 비추고 비추고 비치고, 무량무진(無量無盡)의 촛불은 무량무진의 촛불로 비춘다.

오호라, 이 무량무진의 촛불은 먼저 그 단 하나의 촛불이 꺼지는 일순! 그 일순에 다아 꺼져, 일체의 무명(無明) 무무명(無無明) 속에 잠기고 마는 사실을 내 지금 확실히 보고 있다. 명명(明明)한 실험을 통하여 내 지금 명명히 촛불 보듯 보고 있다.

 

 

 

궤짝처럼

김상옥

 

종일 나는 혼자 집을 보더란다.

볕살이 마루에 따사로이 비치고 마룻널이 볕살에 쪼여가다가 한 번씩 찍찍 소리를 내더란다.

지극히 고요한 시간이 고갯짓을 하며 지나가는데 방안엔 의농(衣籠)과 책장과 화병이 다 숨을 쉬더란다.

그때 나도 혼자 무엇을 넣어둔 궤짝처럼 한쪽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있자니까 -

이렇게 종일 무료한 궤짝은 혼자 집을 보더란다.

 

 

 

그림자

김상옥

 

당신은? -

언제나 내 뒤를 따라다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누구이기에 내 뒤만 이렇게 따라다니는 것입니까? 왜 대답이 없습니까?

나의 철없는 질문이 하도 어처구니없어 말씀하실 흥미를 못 가지십니까?

   

그러면 당신이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따라다니는 것일까요?

혹시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지시를 받아 가자는 대로 복종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과 나와는 한 번도 대좌(對座)하여 서로 의사(意思)를 교환한 적이 없습니다만

이렇게 자연히 서로 가까이 있자니까 당신이 나를 알듯이 나도 어쩌면 당신을 알 듯도 합니다.

아마 당신은 그림자... 쉬이... 아마 당신은 불행이란 그림자가 아닙니까?

답답하게 당신은 왜 대답이 없습니까?

그러면 설령 아닐지라도 당신의 성함을 그림자 - 아니 그만 쉬운 대로 불행이라 부릅시다.

   

당신이 내 뒤를 따라오면 나는 오히려 마음이 든든합니다.

응당 따라오실 이가 따라오시니까 말이지요 -

그러나 혹여 당신이 따라오시지 않으면

아니 내게 당신의 지시가 없으면 - 나는 냉큼 불안해집니다.

더구나 오랫동안 친(親)하던 터에 당신이 없으면

나를 또한 어떤 유혹이 노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내 뒤를 따르는 그림자!

   

-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마 당신은 행복이겠지요? 뜻밖에 왜 당신이 내 뒤를 따르는 것입니까?

고기를 낚는 미끼입니까? 마지막 처형(處刑)의 새벽에 베푸시는 만찬 같은 자선입니까?

희롱삼아 당신은 내 허리에 매인 줄을 풀어서 늦금을 주어보는 수작입니까?

   

그렇지도 않다면 -

당신이 때로는 어린애 같아 노변(路邊)에서 한눈팔고

배암을 주무르며 약을 파는 요술사(妖術師)를 잠시 들여다보는 틈에

여지껏 불행이 나를 따르듯이 당신이 따르던 그 사람을 떨구어 보내고

나를 그 사람인 줄 잘못 알고 따라오지나 않는지요?

   

그렇다면 모처럼 오신 당신이 정말 난 줄 알고 보면

애정(愛情) 낡은 부부처럼 곧 나를 버리고 아무 말도 없이 돌아가실 것이 아닙니까?

   

설령 당신은 나한테 새로운 정(情)을 쏟고자 해도 방금 저지른 당신의 실수같이

또 어드메서 한눈팔던 불행이 마구 달려와서 당신의 멱살을 잡아 한쪽으로 밀친다면? -

   

여보! 당신은 어쩌렵니까?

   

- 아아 모처럼의 행복이여!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우리는 어디든지 달아납시다.

불행이 제아무리 우리 뒤를 추격해올지라도 우리 발길에 채이던 그 장애(障碍)의 돌멩이는

도로 그를 제어하기에 유효(有效)한 팔매가 될 것이 아닙니까!

 

 

 

그 문전(門前)

김상옥

 

모처럼

지는 꽃 손에 받아

사방(四方)을 둘러본다

 

지척엔

아무리 봐도

놓아 줄 손이 없어

 

그 문전(門前)

닿기도 전에

이 꽃잎 다 시들겠다.

 

 

 

금(金)을 넝마로 하는 술사(術士)에게

김상옥

 

네 앞에 있으면 그저 멍멍하구나. 어디에 대질렀던지 산산이 금간 저 혼령(魂靈)의 거죽. 이제사 나도 너처럼 나를 놓아버리고저! 그동안 얼마나 부질없는 기나긴 여행이던가

저희가 손끝으로 날리던 명목(名目)의 새는, 공중에 표표하는 나뭇잎 부스러기 종이 조바기 ... 너는 또 이네들을 하나하나 옷 입히는 자상한 술사. 일찍이 너를 기웃거린 그 많은 구경꾼, 숫제 다른 박수와 눈물을 찾아 길을 떠났지만.

그러나, 또 무슨 꿈으로 요량하는가. 어느새 손바닥에 궁궐이 서고, 머리 위에 내려앉는 머언 두우(斗牛)의 물빛! 여지껏 광을 내던 나의 금은, 오호(嗚呼)라 네 앞에서맍 이렇게 마구 넝마처럼 뒹구는구나

 

 

 

기러기

김상옥

 

갈잎에는 이겨진 달빛

바람도 서걱이는 그림자 속으로

   

무수한 선(線)과 선은 어딘지

서로 대질려 긁히는 소리가 난다.

   

강(江)물!

굽이도는 수묵(水墨)의 띠는

오랜 허무를 감고 누워 흐르는데...

   

모두 떠나간 빈 하늘!

외떨어진 기러기는

저 강보다 차가운 핏줄을 긋는다.

   

아아

보이지 않는 아픔으로

무수한 죽지를 꺾어뜨린 생채기!

   

어드메 서리 묻은 긴 행렬은

다시 슬픈

박모(薄暮)에 저무는가...

   

눈시울이 얼어붙는 강가에 서서

이 죽지 없는 기러기는

울음으로 그어진 먼 강물을 듣는다.

 

 

 

깃을 떨어뜨린 새

김상옥

 

새는 앉는 자리마다

깃을 떨어뜨린다.

나도 서울 와서

수없이 옮겨 앉고

또 수없이 짐을 꾸렸다.

산다는 일은 고작

짐이나 꾸리는 일,

그동안 넝마로 넘긴 짐이

자그만치 다섯 가마니

남은 짐도 결국은 넝마뿐이다.

이번에 옮겨 갈 곳은

또 어느 길목, 어느 등성인가?

문득 머무는 한 생각-

이윽고 더는 못 옮길

땅거미 깔린 이승의 끝,

내 이미 깃을 떨어뜨린 새

이 새는 스스로 짐 되어

마지막 짐짝모양 실려 가리니

그때는 돌아볼 이승도

다시 꾸릴 짐도 없을라.

 

 

 

꽃의 자서(自敍)

김상옥

 

지난 철 가시구렁 손톱이 물러빠져

눈 덮인 하늘 밑창 발톱마저 물러빠져

뜨겁고 아픈 경치를 지고 내 예꺼정 왔네

 

뭉개진 비탈 저쪽 아득히 손채양 하고

귀밑볼 사운대던 그네들 다 망설여도

오지게 눈치 없는 차림 내 또 예꺼정 왔네

 

 

 

꽃피는 숨결에도

김상옥

 

꽃피는 숨결에도 자미(子美)는 눈물지다

고운 그 마음에 짐지운 아픔이라

스스로 꽃다운 몸짓, 못 가짐이 설어라

 

먼 앞대 바닷가엔 첫눈이 내렸더냐

헐벗은 저나무들 밤낮없이 우니는데

내 어찌 가슴 조임을 벌 받는다 하리오

 

 

 

나의 악기(樂器)

김상옥

 

실로 몇 백 년 묵은 악기 한 채가 놓였것다

줄도 다 끊어지고, 안족(雁足)도 다 닳아 망가지고

애타던 그 무릎 위에서 제소리 한번 못 꾸린 악기.

   

몇 번은 혼수에 빠지고, 몇 번은 까무러치고

모골(毛骨)이 조이도록 뜬눈으로 꼬박 지새인 밤은

피맺힌 이 열 손가락 진물 흐르기 몇 번이던고!

   

내 이제 가락을 찾아 미처 모를 춤을 춘다

홀리던 귀신(鬼神)도 타일러 저만치 눌러 앉히고

하늘을 온통 물들이던 노을도 구름도 불러다가.

 

 

 

낙엽(落葉)

김상옥

 

맵고 차운 서리에도 붉게 붉게 타던 마음

한 가닥 실바람에 떨어짐도 서럽거늘

여보소 그를 어이려 갈구리로 검나뇨

 

떨어져 구을다가 짓밟힘도 서럽거든

티끌에 묻힌 채로 썩을 것을 어이 보오

타다가 못 다 탄 한을 태워 줄까 하외다

 

 

 

난(蘭) 있는 방

김상옥

 

난 있는 방이든가, 마음 귀도 밝아온다

얼마를 닦았기에 눈빛마저 심심하고

흰 장지 구만리 바깥, 손 내밀 듯 뵈인다

 

 

 

남은 온기 - 가람 선생 영전(靈前)에

김상옥

 

계동(桂洞) 제일 막바지 물지게 진 젊은 아낙

말 좀 물읍시다, 가람 선생 댁이 어디요

먹기와 낡은 오두막집 눈으로만 가리키네.

   

대문을 두드리자 짐작으로 알으신 척

어줍은 걸음걸이 면도(面刀)마저 잊으시고

너무나 외로우시던 참에 눈빛으로 반기시다.

   

서울에 오래 사셔도 시골에 갓 오신 티

그 말씀 그 웃음 어디 하나 다치신가

구들목 남은 온기(溫氣) 나처럼 에워쌓더니

   

지금은 옛집 뒷산 흙으로 돌아가고

그의 남긴 글은 밤낮으로 입에 올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을 무관하게 말하시네.

 

 

 

노리개

김상옥

 

깊은 산 숲속에 연둣빛 열매,

반딧불 보오얀 호박꽃 초롱,

- 이건 말이지

농사지기 시골서 크는 아기

엄마를 기다리는 노리개란다

   

바닷물에 돋아나는 새빨간 산호,

조개 품에 잠자는 동그란 진주,

- 이건 말이지

고기잡이 시골서 사는 아기

아빠를 생각하는 노리개란다.

   

시골에선 못 보던 세발자전거,

시골에선 못 듣던 꼬마 손풍금,

- 이건 말이지

먼지 깊은 서울서 노는 아기

가져도 짜증 나는 노리개란다.

 

 

 

노방(路傍)

김상옥

 

겉으로 외면해도 속으론 조바시고

못 본체 지나와도 자로 돌아 뵈는 것을

그래도 그는 모르고 마음 없이 가느니...

   

​어디든 가고 싶어 옷을 털고 나왔다가

스치는 사람 속에 그 뉘를 보았든지

멍하니 길섶에 서서 가도 오도 못하여라.

 

 

 

김상옥

 

온 세상 뜰안인 양 포근히도 고요한 날

저 하늘 푸른 속에 깊숙이 숨었다가

흰 날개 고이 펼치고 춤을 추며 나리네

 

헐벗은 가지에도 흐뭇이 꽃이 벌고

보리 어린 이랑 햇솜처럼 덮어주고

오는 철 새로운 봄을 불러오려 하느냐

 

깃드는 추녀 끝에 낙수 소리 들리거든

참고 견딘 추움 헌 옷처럼 벗어두고

우리네 헐린 살림을 다시 가꿔 보리라

 

 

 

늪가에 앉은 소년

김상옥

 

생시엔 꿈도 깰 수 없어 연신 내리쬐는 뙤약볕은 무섭도록 고요하다. 혼자 뒤처진 한 소년(少年)이 늪가에 앉아, 피라미 새끼 노니는 것을 보고 있다.

그 백금(白金)빛 반짝이는 눈물 속엔 장대가 하나 꽂혀 있다. 장대의 그림자도 물에 꺾인 채 거꾸로 꽂혀 있다. 멀리서 터지는 砲(포) 소리, 이웃끼리 살상(殺傷)하는 저 무서운 포 소리에, 놀란 어린 새가 앉을 데를 찾다가 장대 끝에 앉는다. 어린 새의 체중(體重)이 장대를 타고 흔들린다. 털끝만큼 흔들린 장대는 물 위에다 몇 겹으로 작은 파문(波紋)을 그린다.

이 순간, 파문에 놀란 피라미 떼는 달아나고, 장대 끝에 앉은 어린 새 모양, 혼자 뒤처진 그 소년도 연방 물속으로 늪물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앉아있다.

 

 

다도해

김상옥

 

쟁반에 담긴 쪽빛, 뉘가 여기 바다랬나!

멀리 구름 밖에 겁겹이 포개진 것.

그린 듯 고운 이마에 졸음마저 오누나.

 

이제 막 솟아오른 반만 핀 꽃봉오리

잠길 듯 둥군 연 옆, 떠 있사 물굽이로

잔잔히 흐르는 돗대 나비 되어 숨는다.

 

어미 소 곁에 노는 귀여운 망아지 떼

송아지 뒤따르다 돌아보는 얼룩말들

점점이 꿈을 먹이는 푸른 벌판이구료.

 

 

 

다보탑(多寶塔)

김상옥

 

불꽃이 이리 튀고 돌조각이 저리 튀고

밤을 낮을 삼아 정 소리가 요란터니

불국사(佛國寺) 백운교(白雲橋) 위에 탑이 솟아오른다.

 

꽃 쟁반 팔모 난간(欄干) 층층이 고운 모양!

그의 손 간 데마다 돌옷은 새로 피고

머리엔 푸른 하늘을 받쳐 이고 서 있다.

 

 

 

다섯 개의 항아리

김상옥

 

목말라 목말라 받아마신

진하고 착한 아편은

그 중독도 물밀듯이 향기롭다.

 

하나는 가슴을 풀어내 놓고

상스럽지 않을 만큼 부끄럽다.

대추씨만큼 부끄럽다.

 

하나는 한쪽 볼기를 까고

남루한 예절마저 벗어놓고

고개 숙여 능청스레 앉아 있다.

 

하나는 나비 수염 눈썹이다가

젖꼭지를 물었던 모란꽃이다가

문득 구름이 되고 싶다.

 

하나는 녹슨 쇠 둥지

알을 까고 나오는 새가 되다가

그 녹아내린 어깨 너머

산을 뿌리 뽑아 짐 지고 온다.

 

하나는 마지막 하나는

어느 어슴푸른 달밤

그 달무리 싸늘한 비수를 밟고

은빛 박쥐 떼로 춤추며 온다.

 

모두가 모두 물찬 알몸이다.

시큼하고 참한 아편은

그 중독도 눈부시게 싱그럽다.

 

 

 

달의 노래 - 이호우(爾豪愚) 사백(詞伯) 영전에

김상옥

 

낙동강(洛東江) 나루터에 달빛만 푸르다더냐

사슬 묶인 날은 그 마음 더 푸르더니

풀섶에 생애를 묻고, 몸도 마저 묻힌다.

   

쫓는 사냥꾼에 발을 삔 사슴처럼

빗장 닫아걸고, 나를 반겨 숨겨주던 밤

그 밤도 푸른 달빛은 뜰에 가득했어라.

   

집을 옮기고 뜰도 예대로 옮겨오고

그 목과(木果) 사람처럼 풍상(風霜)에 부대끼더니

익어서 떨어지는 소리, 미리 듣고 알던가.

   

긴긴밤 걷히어도 갈피조차 못할 판국

외로 닦은 길을 손잡고 가쟀으나

저 어둠 다시 헹궈낼 달은 이미 잠겼다.

 

 

 

대불(大佛) - 석굴암(石窟庵)

김상옥

 

가까이 보이려면 우러러 눈물겹고

나서서 뵈올사록 후광(後光)이 떠오르고

사르르 눈을 뜨시면 빛이 굴(窟)에 차도다.

 

어깨 드오시사 연꽃하늘 높아지고

나한(羅漢)도 물러서다 가슴을 펴오시니

임이여! 큰 한 그 뜻은 다시 이뤄지이다.

 

 

 

대역(代役)의 풀

김상옥

 

허구헌 날, 서울의 구정물을 다 받아 내리던 청계천(淸溪川) 육가(六街). 그 냇바닥을 복개(覆蓋)한 시멘트 위로 고가도로(高架道路)가 놓이고, 그걸 또 받쳐 든 우람한 교각(橋脚). 그 교각(橋脚)의 틈서리에 한 포기 강아지풀이 먼지 묻은 바람을 맞아 나부끼고 있었다. 시멘트 아스팔트로 덮인 서울은 풀씨 하나 묻힐 곳도 없는데, 이 교각(橋脚)의 강아지풀은 온갖 가냘프고 질긴 목숨들을 스스로 대신(代身)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날아와 떨어진 씨앗이던가? 이 강아지풀은 또 좁쌀보다 작은 그의 씨앗을 실오리 같은 줄기 끝, 흰 다갈색(茶褐色) 털 속에 달고 있었다.

 

 

 

더러는 마주친다

김상옥

 

살아가노라면

더러는 마주친다.

 

세상에는

외나무다리도 많아,

아무리 피하려도

피할 수 없는-

 

이 다리 위서 너는

뒤따라온 모리꾼으로 마주치고,

또 젊으나 젊은 날

허리 꾸부린 내시(內侍)로도 마주친다.

 

이 다리 위서 너는

한 오리 미꾸라지로 마주치고,

이미 눈에 불을 끈

늙은 암여우로도 마주친다.

 

세상(世上)을 사노라면

외나무다리도 많아,

아무리 피하려도

피할 수 없는-

 

짐짓 꽁무니 감추어도

더러는 마주친다.

 

 

 

도장(圖章)

김상옥

 

옛날 옹기장수 순(舜)임금도 지나가고, 안경알 닦던 스피노자도 지나가던 길목. 그 길목에 한 불우한 소년(少年)이 앉아, 도장을 새긴다.

전황석(田黃石)을 새기다 전황석의 고운 무늴 눈에 재우고, 상아(象牙)를 새기다 상아의 여문 질(質)을 손에 태운다. 향목(香木)도 회양목도 마저 새겨, 동그란 도장, 네모난 도장, 온갖 도장을 다 새긴다. 하고많은 글자 중에 사람들의 이름字(자), 꽃이름 새이름도 아닌 사람들의 이름자, 꽃모양 새모양으로 전자체(篆字體)를 새긴다.

그 소년, 잠시 칼질을 멈추고, 지나가는 얼굴들을 바라본다. 그 많은 얼굴 하나같이, 지울 수 없는 도장들이 새겨져있다. 찍혀져있다

 

 

 

김상옥

 

큰 슬픔 절로 곰삭아 고난 속에섣호 한결 그윽한 너

어쩌다 팔목을 잃고 그 오똑하던 콧날까지 망가져

풀섶에 마냥 뒹굴어도 어떤 형상보다 더욱 완벽한 너

 

 

 

돌아온 걸(乬)이

김상옥

 

걸(乬)아, 명(命)타고 복(福)타라고 빌어 낳은 걸아 너는 예서 못 살아, 서양사람 양자(養子) 갔다가 돌아왔구나.

이제는 다 커서 돌아온 바위, 덕수궁(德壽宮) 판화전(版畵展)에서 만나본 바위, 돌아와 만난 너는 어째서 양복지(洋服地) 모양 구겨져만 있느냐, 수피(獸皮) 모양 부들부들 떨고만 있느냐.

미불(米芾) 절 받던 바위는 정 맞아 성(城) 돌이 되고, 우리네 걸이는 서양 사람 양자 갔다 노랑내를 피우며 돌아왔구나.

 

 

 

딸에게 주는 홀기(笏記)

김상옥

 

십 년이면 강산 둘레 풀빛도 변한다는데

그 십 년, 갑절도 넘겨지고 온 애젓턴 짐을

그토록 애젓턴 짐을, 부리고 돌아서는 허전함이여

 

빚지지 못해보고 어이해 그 빚을 갚는다느냐

보아라, 수양산(首陽山) 그늘은 강동팔십리(江東八十里)

내 도로 너희들 그늘에 묻혀 홀(笏)이나 불러주마

 

 

 

뜨락

김상옥

 

자고 나면

이마에 주름살,

자고 나면

뜨락에 흰 라일락.

 

오지랖이 환해

다들 넓은 오지랖

어쩌자고 환한가?

 

눈이 부셔

눈을 못 뜨겠네.

구석진 나무 그늘

꾸물거리는 작은 벌레……

 

이날 이적지

빛을 등진 채

빌붙고 살아 부끄럽네.

 

자고 나면

몰라 볼 생시.

자고 나면

휘드린 흰 라일락.

 

 

 

멧새알

김상옥

 

어느 날 그들은 뒷산 느티나무 숲속을 거닐며 이름 모를 멧새알 하나를 주웠더래요.

이 속에 무엇이 들었을까요?

먼 창살에 등잔불도 꺼지고, 눈 오는 슬픈 밤엔 따사로이 몸을 가리고, 봄날 아지랑이 속에 보이지 않는 파문을 그리며 춤을 추는 아롱아롱 무늬 짜인 찬란한 날개가 들었을게요.

이속에 또 무엇이 들었을까요?

끼리끼리 꽃 속에 잠을 자던 이슬방울의 슬기로운 얘기를 쫑그리고 듣는 귀도 들었을 게고. 저 닿을 길 없는 하늘의 푸른 자락 속에 숨겨진 비밀을 엿보는 별처럼 빛나고 산초 알처럼 까만 어여쁜 눈짓도 그 속에 들었을게요.

이 속에 또 무엇이 들었을까요?

쌓인 가랑잎을 헤쳐서 금잔디 파릇한 속잎을 찾아내고, 아늑히 무르녹은 향기 속에 흰 꽃가지를 쥐는 샛노란 발톱도 들었을 게고, 또 형용할 수 없이 오묘한 목소리와 아름다운 노래를 머금은 채 산호처럼 연붉은 뾰족한 입술도 들었을 게요.

그러면 그밖엔 뭐가 또 없을까요?

저 외로운 마을가 에 저녁연기 꿈결인 양 떠오르고, 갈미봉 언덕길로 접낫을 든 초동들이 송아지를 앞세우고 내려올 무렵엔, 모이를 물고 둥주리를 찾아들어 지친 죽지를 쉬는 복된 안식도 의초로운 단란도 고스란히 들었을게요.

 

 

 

모란

김상옥

 

어디서, 질탕한 최후의 연희는 벌어지는구나!

너무나 진한 향기라 잃어버린 후각...

나비떼, 나비떼는 저희끼리만 어우러져 노니는가?

   

어여쁜 죄여! 참으로 어여쁜 죄여!

오롯한 보탑(寶榻) 아래, 우러러 선(善)을 뵈입는 자리기에

   

그건 바람일 게다. 아무 것도 아닌 바람일 게다.

나풀거리며 겉치레하는 것들 아예 가까이 오질 마라.

컬컬컬 불이 붙는, 이 입을 벌린 불가마 앞에는 -

우리가 사는 가냘픈 이 골짝에도

저 노아의 핏줄은 상기 세류(細流)를 갈라, 곤곤(滾滾)히 스며 흐른다.

   

그 속으로 속으로 피비린 수맥(水脈)을 타고서

나는, 지금 여기 뜨락에 앉아

또한 황홀하기 난데없는 머언 해일 소리를 듣고 있다.

   

이제 나는 무엇을 붙들어 타고

이웃이사 채 돌아볼 새 없이

어찌 한 겹 누더기를 걸치고, 이 우람한 너울 속을 헤쳐 나오려노?

   

아아 염려(艶麗)한 탄식을 가라앉고

단내 나는 입김, 무수한 유리알을 닦아내어

이제야 저것들이 완연하게 꽃으로 보이는구나!

 

 

 

모래 한 알

김상옥

 

본디 너 어느 바닷속 크나큰 바위로

파도의 독아(毒牙)에 깨물린 천겁(千劫)의 갖은 풍상(風霜)을

이제 여기서 다시금 회상하누나.

   

저 밀려오는 조수(潮水)의 포효!

반항도 없으나 굴종 또한 없었거니

   

몸은 닳고 쓸리어 작아만 가도

너 마음 한없이 한없이 넓어만 져

   

그리고 또 알았노니

쓸모없이 육중한 체구는 모조리 모조리 내던지고

오직 참된 연혼만을 가지려는

오오 너의 의도(意圖)여!

 

 

 

목련(木蓮)

김상옥

 

뜰에 한그루 목련이 있다. 물같이 맑은 아침 대기 속에 줄기와 가지 움과 봉오리 - 이렇게 나타난 질서로 그의 자세는 좌정(坐定)한다.

줄기의 주변 봉우리의 피부에 감겨있는 공간은 이미 비참(悲慘)한 탄력을 가진다. 이것을 밀고 가지가 벋고 봉오리가 터지고 또 꽃잎 너울거리는 꽃잎...

목련은 실로 스스로의 형체(形體)대로 저 무한한 공간속에 다시금 은밀한 동작(動作)을 쉬지 않는 한 그루 진공(眞空)을 구성한다. 아아 진공 - 이것은 그냥 성장하는 신비의 체구(體軀)다!

여기는 모두가 하나의 정점(頂点)! 다들 머언 연만(連巒)의 눈썹을 바라보며 제여곰 딛고 오른 그 층계위에서 오히려 산화(散華)를 기다리는 그의 고요한 절규를 듣는다.

목련은 이제 맑은 대기 속에 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 분별할 수 없는 것을 경계하여 이미 그로 하여금 생명의 고독으로 그의 극비(極秘)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김상옥

 

분명히 입성인걸, 하염없이 앉은 이 몸

한 자락 구름 끝에 머흐는 구름인걸

목숨이 잠시 입었다 벗어두고 가지만,

   

무엔가 목숨이란 빛도 꼴도 없는 그것

한 송이 꽃이랄까 한 알의 열매랄까

아늑히 미묘한 숨결, 숨겼던 집이랄까.

   

물로도 흙으로도 뒤집다 나타나다

굳은 채 돌이 되면 그 속에 갇히는 것

부르면 이름을 업고, 모양 지어 나오는 것.

 

 

 

무엇을 생각할 때는

김상옥

 

눈을 사르르 감지요.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인 채

고개 수그리고 눈을 사르르 감지요.

엄마가 무엇을 생각할 때는 -

   

머언 산을 가만히 바라보지요.

파아란 담배 연기 속으로

흐리는 머언 산을 바라보지요.

아빠가 무엇을 생각할 때는 -

   

살포시 휘파람을 불지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추녀 끝에 걸린 구름을 내다보지요.

언니가 무엇을 생각할 때는 -

   

초롱초롱 눈을 깜짝이지요.

젖 먹는 것도 노리개도 잊어버리고

등잔불 밑에서 눈을 깜짝이지요.

아기가 무엇을 생각할 때는 -

 

 

 

무연(無緣)

김상옥

 

뜰 안에 매화 등걸 팔꿈치 담장에 얹고

행길로 가던 분도 눈여겨보게 한다

한솦에 살아온 너희는 언제 만나보것노

 

 

 

무열왕릉(武烈王陵)

김상옥

 

한결 깊숙해라 송뢰(松籟)소리 그윽하고

다만 무덤 앞에 엎드린 돌 거북은

아득한 향수(鄕愁)를 안고 임을 외로 뫼시다.

   

오랜 비바람에 띠는 아직 푸르르고

널리 흩어진 겨레 한우리에 들이고저

애쓰던 임의 백골(白骨)은 여기 고이 쉬시는가.

   

칠칠한 숲속으로 저문 빛이 짙어오고

골안개 풀리는 양 눈앞이 흐리는데

벌 끝에 갈가마귀 떼만 어지러이 날아라.

 

 

 

무제(無題)

김상옥

 

봄도 여름도 내게는 하냥 없었다.

돌아보면 고대 저무는 그 짧은 가을날 하루를 또 내 해동갑하여

분분히 돌아와도 목에 가시처럼 걸리는 너의 생각 - 이제 사약(賜藥) 아닌 설움은 단 한 모금도 넘길 수 없고나!

차츰 번지던 그 오렌지 빛 황혼마저 어느덧 걷히고 기다림에 겨운 긴긴 밤만이 물릴 수 없는 운명처럼 남아있다.

그 긴긴 밤을 지새워 끝없이 풀어내는 저 실솔(蟋蟀)이 소리에 나는 이렇게 마음의 물레를 돌리고 앉았는데 나의 직녀(織女) 회한(悔恨)이여! 다시는 어룽지지 않을 고운 비단을 짜라.

아아 서럽지도 않은 너의 생각 -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고운 무늬를 짜라

 

 

 

묵(墨)을 갈다가

김상옥

 

묵(墨)을 갈다가

문득 수몰(水沒)된 무덤을 생각한다.

물 위에 꽃을 뿌리는 이의 마음을 생각한다.

꽃은 물에 떠서 흐르고

마음은 춧돌을 달고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묵(墨)을 갈다가

제삿날 놋그릇 같은 달빛을 생각한다.

그 숲 속, 그 달빛 속 인기척을 생각한다.

엿듣지 마라 엿듣지 마라

용케도 살아 남았으니

이제 들려 줄 것은 벌레의 울음소리밖에 없다.

 

밤마다 밤이 이슥토록

묵(墨)을 갈다가

벼루에 흥건히 괴는 먹물

먹물은 갑자기 선지빛으로 변한다.

사람은 해치지도 않았는데

지울 수 없는 선지빛은 온 가슴을 번져난다.

 

 

 

방관자(傍觀者)의 노래

김상옥

 

슬퍼라 가을이여! 서릿발에 서걱일 잎새는커녕, 진구렁 뿌리마저 썩더란 말가. 해마다 이맘 때면 살을 긁던 그날의 그 갈대숲, 한강(漢江)엔 인제 등뼈 굽은 피래미만 꼬리치나니.

슬퍼라 가을이여! 차라리 갈대처럼 살갗이라도 긁히고지고. 피가 배이도록 자해(自害)라도 저지르고지고. 사위(四圍)는 둘러 봐야 막막한 무인지경(無人之境). 쉬이 쉬이 손꾸락 입에 대고 하던 말 도로 멈출, 그런 눈짓이라도 만나고지고.

슬퍼라 가을이여! 이미 약물에 산천(山川)은 찌들었건만, 지금쯤 애가 탈 금수(錦繡)로운 마무리. 그러나 이런 걸 비로 울릴 한 가닥 심금(心琴)인들 없단 말이냐. 골수에 스민 방관자(傍觀者)의 뉘우침은 곪아 가나니.

 

 

 

백자(白瓷)

김상옥

 

상머리

돋아온 달머리

시정은 까마득하다

 

어떤 기교

어떤 품위도

아예 가까이 오지 말라

 

저 적막

범할 수 없어

꽃도 차마 못 꽂는다

 

 

 

백자부(白磁賦)

김상옥

 

찬 서리 눈보래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風磬)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틈에 불로초(不老草)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내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純朴)하도다

 

 

 

벽화(壁畵) - 어느 날의 이중섭

김상옥

 

새로 도배한 하얀 벽 앞에 앉아 있다. 끝난 세상을 내다보듯 하얀 이 벽 앞에 앉아, 그동안 얼마를 돌아다녔는지 헤아려본다. 절뚝거리고 온 그 발자국마다 차례로 눈이 내려 덮이고 있다. 아무런 흔적 없이 덮이고 있다

그런 것이다. 그런 걸 혼자 그렇다 생각하고 술을 따른다. 투명한 유리잔에 투명한 술이 넘친다. 한 모금 술로 전신이 찌릿해 온다. 눈시울을 스치는 가벼운 경련! 내 어찌 미칠 것인가, 너희들의 이유로 내가 어찌 미칠 것인가. 나는 오직 나로하여 미칠 뿐이다.

여전히 햐얀 벽 앞에 앉아 있다. 유리잔 속에도떨고 있는 하얀 벽, 깨물고 싶어, 지독한 결백으로 깨물고싶어. 입속에 잔을 넣고 짓씹는다. 혀를 찌른 유리 파편! 뿜어 내인 하얀 벽은 난데없는 꽃으로 만개한다. 새빨간 꽃잎 눈 위에 얼룩진다

 

 

 

변신(變身)의 꽃

김상옥

 

아무도 없는 뜨락이었다.

이내 같은 흰 꽃이 피어 있는-

 

가까이 가 보지 않았으나

이미 만개(滿開)한 배꽃일시 분명하다.

 

굳이 배꽃이 아니래도

이내같이 머흐는 꽃이었다.

 

하루는 이 꽃이

느닷없이 하나의 열쇠가 되었다.

꽃이 어찌 열쇠가 되는가?

 

느끼며 기다리며 또

오래 오래 참고 살아 볼 일이다.

 

이 꿈꾸듯 적적(寂寂)한 꽃은

어떤 엉구렁에서도 길을 낸다.

 

때로는 목숨도 잊어버리고

때로는 만남의 문턱으로 드나든다.

 

아무도 없는 뜨락에

호젓이 핀 이 이내 같은 꽃은-

 

 

 

변씨촌(邊氏村)

김상옥

 

내 한때 두만강(豆滿江)ㅅ가 변씨촌(邊氏村)에 살았는데

고향을 묻길래 통제사(統制使) 영문(通門)이던 통영

진사립 자개장롱 나는 곳이래도 모르데요

 

아메야 에미네야 웃음이 마구 터지는데

가수내 이 문둥이 말끝마다 흉을 봐도

비빔밥 꽃찌짐 얘기는 숨도 없이 듣던데요

 

되땅은 하로 아침길 경상도(慶尙道)는 꿈의 나라

동삼 내 눈이 싸여도 한우리의 고장인데

아득한 먼 옛말같은 겨레들이 삽데다요.

 

 

 

병상(病床)

김상옥

 

내 어찌 조심 없이 세상을 살았기로

뜯기고 할퀴어 왼몸에 상처(傷處)거니

이 위에 병을 마련해 날로 이리 지든다

 

잦아진 촛불인 양 숨소리도 가냘프고

외로 돌아누워 눈이 띈지 감겼는지

창(窓)밖에 저무는 빛이 죽음같이 고와라

 

 

 

김상옥

 

1

우유처럼 따스한 햇빛이 마루위로 지르르 흐릅니다.

아기는 나서 아직 아무것도 만지지 아니한 손으로 햇빛을 주무르고 있습니다.

   

봉숭아 붉은 앞뜰 울타리에 청제비 돌아앉아 한쪽 죽지를 펴고,

짙은 자줏빛 목덜미로 저리 가려운 듯 햇빛을 휘젓고 있습니다.

   

보시시 한량없는 따스한 햇빛! 아기의 가슴에 넘치도록 안겨들고,

푸르다 못해 검은 아기의 눈초리는 처음으로 보는 새로운 봄의 눈부신 조화에 놀란 듯 깜작이고 있습니다.

   

수그리고 바느질하던 장지 안 젊은 엄마는 반짇고리 한쪽으로 밀어놓고,

아기 곁에 살며시 나와 진정 숨길 수 없는 웃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아아 이렇게 이 젊은 엄마는 그 그지없는 애정을 영롱한 패물처럼

아기 옷고름에 채워놓고 세상은 잠시 고요한 행복 속에 쌓였습니다.

 

 

2

심지어

동냥 온 쪽박에도

눈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신(神)도

이런 날은

저 달동네 꼬맹이처럼

 

추녀 밑

제비 새끼랑

해종일 재잘거리고 논다.

 

 

 

봉선화(鳳仙花)

김상옥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부재(不在)

김상옥

 

문빗장

걸려있고

섬돌 위엔 신도 없다

 

대낮은

아닌 밤중

이웃마저 부재하고

 

초목만

짙고 푸르러

기척 하나 없는 날은

 

 

 

부처님 걸이(乭伊)가 막일꾼 차걸이(次乭伊)에게 - 어느 날 경주박물관에서

김상옥

 

꽃방석 아니라

어떤 진구렁에라도

수인(手印)을 짓고

앉아 기다릴게.

 

목이 달아나고

몸마저 삭아 내린대도

마음 속 이 사리(舍利)

빛나고 있는 동안은.

 

지척에 두고 못 찾던

그날의 내 눈썹

오늘사 인부(人夫) 차걸이가

들고 올 줄이야.

 

 

 

김상옥

 

난만하게 흐드러진 테두리 속에

저 요요하게 아름다운 혀를 보아라.

   

짓이겨 물들던 숱한 꽃잎 위로

뒹굴며 밀착(密着)한 가슴과 가슴

눈감고, 문지르던 그 입술 아닌가.

   

호흡, 호흡

노을 진 바다처럼 흐느끼는 울음소리...

   

아니, 거기선 신풀이 굿을 한다.

너울져 덩실거리는 춤!

두 손에 채선(彩扇)을 들고 한바탕 추는 춤이다.

   

저기 또 몰려오는 젊음이 있어

9월도 지난

만물상 골짜기 회오리바람,

산 메아리 진동하는 만세소리 아닌가.

   

혼백들아 혼백들아

지붕에도 거리에도 광장에서도

서로 불러 일깨우는 부활제(復活祭) 아침.

   

정말 어딘가?

지금은 들어가려야 어림도 없는 무서운 방(房) 안,

아니, 문득 내닫던 막다른 길목.

   

아하 눈부시게 아름다운 장미밭 속에

휘어잡아 찢기운 옷자락을 보아라.

 

 

 

불모(不毛)의 풀

김상옥

 

늙은 서인(庶人) 두자미(杜子美),

징용으로 끌려온

그 변방(邊方)에도

풀은 철따라 푸르렀다.

 

고향 강남(江南)엔

담 넘어 꽃잎 날리고,

부황난 처자(妻子)

눈앞에 아른거렸나니

 

이룬 것 없이 나도

그만큼 찌들었는가

서울은 가을,

불모(不毛)의 풀만 무성하다.

 

 

 

비(碑)

김상옥

 

소녀여! 얼굴보다 마음이 곱고 손짓보다 그 머언 눈매가 한결 아름답던 너 - 슬픈 영상(映像)이여!

어느 하루저녁 나는 들었노니 너의 어줍음이 이내 들켜버린 그 따뜻한 비밀들을 이미 내 가슴에 새겨져서 썩지 않을 문자(文字)가 되었었다.

그러나 소녀여! 나는 차라리 그 아름다운 비밀마저 어서 비에 젖고 바람에 깎이어 몰자비(沒字碑)처럼 이끼를 입고 서 있고 싶다.

아아 너의 가슴 속에 다시 넘어지지 않을 하나의 그 부동(不動)한 자세가 되고 싶다.

 

 

 

비가(悲歌)

김상옥

 

아파트 꼭대기에도

자욱한 귀뚜라미 소리,

이미 잃어버린 밤을

올올이 자아 올린다.

 

알것다 알것다

그만하면 알것다.

 

남루한 영혼들

짜고 매운 양념으로

푸성귀 발기듯

그 살갗 치대고 있다.

 

알것다 알것다

그만하면 알것다.

 

깎아지른 벼랑 밑

강들은 숨을 죽이고,

홑이불 같은 달빛

강물 위에 깔려 있다.

 

 

 

비 듣는 분막(墳幕)

김상옥

 

등성이 넘어 넘어 골도 차츰 아늑한데

무덤은 도란도란 한 뜸으로 둘러 있고

비 듣는 안개 속으로 벌레 소리 자욱하다.

 

여기 다른 하늘 낮과 밤이 흘러가고

금잔디 다 젖어도 버설거지 하지 않고

외로운 넋들이 모여 의초롭게 살더란다.

 

 

 

비 오는 제사(祭祀)

김상옥

 

이 어둡고 비 오는 밤에 찾아오신다.

발도 지루고 젖어 늘어진 옷자락 걷어쥐고 찾아오신다.

   

아홉 하늘 층층계(層層階)를 내려와서

그 침침하고 무거운 무덤 속을 벗어 나와서

잔디밭을 지나서 오솔길을 들어서 징검다리를 건너서

이승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쥐어뜯고 살고 있는 하고많은 사립 사립을 다 지나서 찾아오신다.

   

온갖 것이 쥐죽은 듯 고요한데

여기 그 누구도 돌보는 이 없는 - 그지없이 외로운 한 가족이 있어

먼지처럼 쌓인 아득한 슬픔을 그 무슨 벗을 수 없는 의복처럼 입고 있는데

영상(影像)도 아닌 그들은 들고나는 발자국 소리도 없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기혈(器血) 소리만이 빗소리에 섞이어 간간이 들려온다.

사신 날 거니시던 타작터로 접어들자

갈모 끝에 맺힌 빗방울을 씻고 집안을 기웃거리고 한식경 동정을 살피시더니

마침내 추녀 밑으로 들어서서 장(房)에 뫼신 제상(祭床) 앞에 가까이 나가 앉으신다.

   

- 지키고 선 한 쌍의 촛불!

   

보얗게 둥근 무리를 쓰고 그 속에 빛을 머금고 있음인지

벽에는 의관(衣冠)을 바로 하는 그의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는다.

   

때전 옥양목 두루막에 낡은 고무신 -

못살고 가신 지난날의 그 아픈 흔적이 낙인(烙印)인 양 찍히어

아아 가실 수 없는 초라한 행색(行色)!

그러나 농이 흐르며 지지직 지지직 심지를 튀기는 촛불 빛에

늠름히 흩날리는 백발(白髮)은 서리같이 반짝인다.

향을 사르고 잔을 부어 올린다.

그 잔을 받으시다 말고 애끓는 축(祝)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

향로(香爐)에 오르는 연기처럼 눈앞이 흐린다.

기인 한숨 속에 감으신 눈자위로 두 줄기 눈물이 번져 내린다.

드디어 도로 눈을 뜨고 고요히 자리를 이신다.

   

밖에서 기다리기에 겨운 차사(差使)들은 발을 구른다.

하마 닭이 울겠으니 동트기 전에 어서 떠나자고 성화같은 재촉이다.

   

- 비는 여전히 내린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놓으려다 다시 돌아보신다.

차사의 부라린 눈짓은 매질보다 아픈데

그래도 발을 멈추고 꺾인 길목에 서서 다시 돌아보신다.

   

아아 이렇게 이승과 저승을 가로막은

그 무수한 산하(山河)와 구천(九天)의 운하(雲霞)를 넘어와서

이 억계(億界)의 일편(一片) 고토(苦土)에서 잠시 맺었던 인연의 사슬은 끊을 수 없으신지

우장(雨裝)도 없이 저 굽이 잦은 머언 영겁(永劫)의 길을 뵈다 숨다 사라지는데

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돌아보셨을꼬?

   

(어디선가 들려오는 닭의 울음소리...)

 

 

 

비취인령가(翡翠印靈歌)

김상옥

 

파편(破片) 기일(其一)

본디 끝없다가 또 다른 모양을 금 긋던 부분

이렇게 한 결정(結晶)으로 돌아온 내 슬픈 비눌이여

깊은 밤 미친 풀무질 속에 녹아 나온 혼령이여

 

하늘 푸르른 거미줄에 걸려든 진사(辰沙) 꽃잎

다시 어느 무한으로 잘려간 저 구름의 꼬리

무너진 너의 잠적(潛跡)을 찾아 구조(構造) 안에 머무느냐

 

 

파편(破片) 기이(其二)

아픔을, 손때 절인 이 적막한 너의 아픔을

잠자다 소스라치다 꿈에서도 뒹굴었다만

외마디 끊어진 신음, 다시 묻어나오는 바람을

 

풀고 풀어볼수록 가슴 누르는 찍찍한 붕대 밑

선지피 얼룩진 한 송이 꾀벗은 포도알

오늘이 오늘만 아닌 저 끝없는 기슭을 보랴

 

 

 

사향(思鄕)

김상옥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깊섶으로 흘러가고,

백양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산(山) - 시(詩) ‘무등(無等)을 보며’에 화(和)함

김상옥

 

아마 이 소슬한 바람은 그의 죽지에서 스며 나올 게다

추녀에 희자렴(囍字薕)을 걷거나, 사립 밖에서

문설주를 기대고 서는 일이 하루에도 몇 차례나

조석(朝夕)을 치루고, 겨우 하염없는 생각으로 눈을 주고 있으면

저기 수려한 아미(蛾眉)를 그린 보랏빛

   

생긴 대로 등허리를 드러낸

연보라와 갈매보라...

그 추스른 사이로 으늑한 골이 트인다. 골에는 -

푸른 혼령들이 목숨 되어 살고 있고,

아니 그 목숨이 무슨 액체가 되어 괴는 것이다.

   

보라와 푸른 액체의 모습을, 노상

두레박질할 수 있는 자리에 우리는 자태(姿態)를 마주 놓는다.

좀해서 흔들리지 않을, 그러나

끝내는 한번 흔들리울 마음과 마음들을 가라앉히고 -

   

결국 으스대던 젊음도 그 젊음도 그랬지만

할멈 옆에 노인은 말이 없다.

이 두 개의 어깨너머로 우중충한 낡은 벽면이 보인다.

역시 벽은 어느새 푸른 자락을 드리워, 무슨 액체처럼

꼬부라진 그들 어깨위로 그 많은 亭亭(정정)한 어깨위로

고운 봄비 오듯 흥건히 마구 젖어 내리는 것이다.

   

- 시시로 감도는 실안개가 꼬리를 물고 엉긴다.

   

산울림... 산울림...

(서로 불러 소리 없이 목메이는 산이여! 혼령이여!)

 

 

 

산골

김상옥

 

진달래 꽃피는

산골

어디서 울었다.

뻐꾸기

   

흰 구름 머흐는

산골짝

혼자서 흐른다.

실개울

아무도 못 오는

산골짝

멀리서 울었다.

솔바람

   

* 이 시를 8. 15 이후 처음 발표된 그의 유작에서 만나게 된 시인 고 윤동주의 영전에 바친다

 

 

 

살구나무

김상옥

 

집 앞에 두어 그루 늙은 살구나무가 있다. 이로 말미암아 선(善)한 도시들이 이 두메를 그들 부조(父祖)의 입내 나는 시구(詩句)처럼 행화동(杏花洞)이라 일컫는다.

요 며칠 동안 그 앙상하고 시커먼 가지는 문득 자줏빛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채선(彩扇)을 가진 귀신이 나와 굿을 하는가보다... 웬일인가 눈여겨 지키노라면 이윽고 붉은 빛이 어룽져 군데군데 묻어나기 시작하였다.

뜻밖에 오늘 아침 세숫물 놓는 기척에 장지를 여노라니 갑자기 내 어둔 오지랖이 환하게 바래도록 저 멀리 눈뜨는 버들과 함께 온 골짜기가 한 덩어리 밝은 담홍색(淡紅色)으로 내리 덮였다.

그동안 이 은밀한 은밀한 추이(推移)는 어쩌면 옛날 동양(東洋)사람의 아침저녁 그 가난하고 때 묻은 행색에도 가만히 우로(雨露)처럼 옮아 있었을 것을 믿는다.

이제 두어 그루 살구나무는 본시(本是)대로 누가 보나 안 보나 무관하다. 그는 스스로의 오랜 성정(性情)을 이미 이 화창한 언(言語) 속에 새로 담가 한창 맑은 내음 풍기는 술을 빚는다.

그들의 후예인 나는 지금 어느 수선스런 시간의 강변에 서서 생각한다. 반드시 내게도 저렇듯 황홀히 눈부신 발효(醱酵)를 가질 날이 지척 같이 먼 곳에 드디어 가까워옴을 생각한다.

 

* 杏花洞(행화동)은 실재하는 지명이 아니라 이상향을 일컫는 곳이다

 

 

 

세례(洗禮)

김상옥

 

입춘 가까운 볕살은 볼 부비는 시늉

숲 속에 틈바구니에 한창 자랑스런 공사(工師)

그 위에 생금(生金)가루 물을 뿌린다. 그 누구요

 

 

 

수해(樹海)

김상옥

 

도끼에 닿기만 하면 선 채로 썩어지는 나무

한 번 보기만 해도 삽시에 연기로 갈앉는 나무

몇 백리(百里) 지름을 가진 그런 숲 속에 묻히고 있다.

 

숨을 거두는 향기 속에 멍석만한 꽃이 피고

먹으면 마취(痲醉)되는 아름드리 복숭아 열매

인종은 벌레만 못해, 발도 아예 못 붙인 이곳.

 

칠흑의 머리를 푼 수양버들이 달려오고

휘황한 등불이 매달린 계수나무도 달려와서

구천(九天)에 휘장을 두르고 세상 밖에 노닐고 있다.

 

 

 

술래잡기 - 시성 타고르의 ‘참바꽃’에 화답함

김상옥

 

일찍 저녁을 먹고 난 서늘해진 해거름,

어머니가 부엌에서 설거지 하시는 틈을 타서

슬그머니 장난이 하고픈 마음으로

저는 잠시 별빛같이 작은 반딧불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머니는 저를 정말 알아보시겠습니까?

   

더구나

어두워오는 지붕위의 점점이 떠오르는 하얀 박꽃!

그 박꽃 속에 숨어 앉아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자장가를 부른다면

어머니는 술래처럼 부엌문을 가만히 나오셔서

손끝에 떨어지는 그 구슬 같은 물방울을 뿌리시고,

물기 남은 손들을 행주치마에 씻으시며 저를 찾으실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저는 짓궂은 희롱이 즐거워

의연히 어슴푸른 별빛을 띠고 박꽃 둘레를 은은히 밝히고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그런데 저를 정말 당신의 귀여운 아들로 알아보시겠습니까?

촉촉이 저녁이슬에 젖은 빨래를 걷어

마루 끝에서 어머니는 여지알 같은 숯불을 담아들고 다림질을 하실 때,

저는 살짜기 박꽃 속에서 헤어 나와

저 무한한 밤하늘을 날아 다시는 요동도 하지 않는 크나큰 어둠을 흔들어 놓고,

드디어 머나 먼 나라로 별이 되어 사라질까 망설이다가

도로 어머니 계시는 우리 집 이 작은 꽃밭위에 옮겨 앉아,

빨갛게 익은 숯불에 비취어

한쪽 볼 언저리가 보오얀 어머니 얼굴을 뵈옵고 다시금 가슴 조이는 그리움에

몰래 어머니 어깨 뒤로 그 옛날 기다리던 소식처럼 돌아와서

귀 곁으로 두 손 내밀어 어머니 눈자위를 살포시 감긴다면...?

아 그때서야

그 보드라운 촉감으로 어머니는 눈을 감고라도 정말 전 줄을 알아내시겠지요.

 

 

 

숲보담 들보담

김상옥

 

숲보담 들보담 아름다운

저녁 놀은 얼마나 곱습니까?

- 우리 엄마 얼굴은 어쩌고요.

   

잠보담 꿈보담 아름다운

시냇물은 얼마나 맑습니까?

- 우리 엄마 목소린 어쩌고요.

   

달보담 별보담 아름다운

무지개는 얼마나 곱습니까?

- 우리 애기 얼굴은 어쩌고요.

   

꽃보담 새보담 아름다운

은하물은 얼마나 맑습니까?

- 우리 애기 목소린 어쩌고요.

 

 

 

승화(昇華)

김상옥

 

1

언젠가 나는 불국사(佛國寺)엘 갔었다. 그러나 그 날짜와 시간은 도무지 요량할 수 없어 봄인지 여름인지 더구나 꿈인지 생시인지 또 밤인지 낮인지도 정말 아심하여 쉬 분간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 들었는지 ‘백운교(白雲橋)라 불리는 아치形(형)의 교량과도 같은 계제(階梯)를 나는 혼자 분명히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오싹! 소름이 끼치도록 고요가 철철 넘치는 비로전(毘盧殿) 앞뜰에 하얗게 씻기운 두 채의 석탑(石塔)! 그 아랫도리는 넓고 크며 치츰 올라갈수록 좁아들고 가늘어지며 층층이 포개져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자세(姿勢)의 안정(安定)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저기 끝없이 뻗어진 광야! 그 퍼언한 벌판으로 달리는 외줄기 길! 고금(古今)의 무수한 순례자(巡禮者)는 그 길 위에 서서 하나 초점(焦點)으로 사라지는 원근(遠近)의 차이를 느꼈듯이 이미 가도가도 구원(救援)이 없는 이 지평선에서 갑자기 방향을 꺾어 드디어 하늘로 승화하려는 입체(立體)의 노정(路程)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그 거리를 측정하고 이렇게 오묘한 시공(施工)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었다.

   

   

2

꿈의 나라 신라(新羅)는 그의 昇天(승천)하는 길을 둘로 창조하였다. 그 하나는 사각(四角) 정방(整方)의 단아한 직선을 무수히 반복하여 어느 순교도(殉敎徒)의 계단처럼 그지없이 슬픈 보행(步行)으로 오르는 정숙(靜肅) 적막(寂寞)한 길이며, 또 하나는 요철(凹凸)의 기복이 무쌍(無雙)한 변화 끝에 마침내 팔모 난간 위에 오롯한 꽃쟁반을 받침한 - 아아 끝없는 환희(歡喜)가 지극히 고운 선율을 타고 오르는 화려(華麗) 찬란(燦爛)한 길이었다.

아득히 바벨탑(塔)을 세운 이무론을 우리는 한 번도 이웃하지 않았기로 조석(朝夕)으로 보채는 이 육신의 목마름을 위하여 하염없이 두레박을 드리어 끼니마다 맑은 샘을 길어 올리듯 눈먼 영혼의 안타까운 도래질을 위하여는 이렇게 목을 뽑아 저 청명(淸明)한 하늘을 우러러 스스로 솟아오르기를 염원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세로 저립(佇立)한 두 채의 석탑은 분수의 대좌처럼 바로 그 정점(頂点)위에 마구 넘쳐 거꾸러지는 하늘! 오직 하늘은 높고 넓고 푸르기만 할뿐 여기서는 어떠한 의미(意味)도 아직 한발 내딛지 못한 채 그저 높고 넓고 푸른 그대로 또한 의결(疑結)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 언제나 짙푸른 하늘. 그의 드높은 의지(意志)의 고요한 중량을 저울에 끼운 추돌모양 저렇게 드리워둔 것이나 아닌가 한다. 나는 이제 눈을 들어 바라보는지... 고개를 수그리고 명상하는지... 이미 나를 구성한 모든 사개가 물러나고 나는 다만 하나의 위치 위에 까맣게 초점하여 떨고 있을 따름이었다.

 

 

 

신록(新綠)

김상옥

 

참 신기한 일이다.

물에도 수심(水深)이 있으면 물빛이 어리우듯이

우리의 염려도 그것이 멀고 깊으면 깊을수록 그만큼의 농도로 차츰 짙어지던가 보다……

   

허지만 아무래도 깨쳐지질 않는다.

그 동안 얼마를 자맥질하던 물속에서 이제 막 숨가빠 솟아오르는 찰나!

물 묻은 얼굴을 훔친다.

귀밑이고 목덜미고 앞가슴이고 싱싱한 방울이 타 내린다. 굴러 떨어진다.

눈시울을 껌적여도 산들한 속눈썹은 그냥 축축하다.

   

저쪽에는 또 무엇이 엉겼는가?……

사방에 저것들은 어디서 저리 안개 같은, 눈에도 안 보이는 선연한 물가루를 묻혀 가지고 나왔는가?

연신 물결에 일렁이는 모양을 하고서 -

   

그렇지, 누구나

저것들이 바라뵈는 곳에 와 닿으면, 어느 때든

저 머언 이태리 플로렌스의 고요한 湖畔(호반)으로 헤엄쳐 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서 어느 해질 무렵, 단테는 포옹(抱擁)의 다음보다 더 잔잔한 외면으로 지나가는 베아트리체를 만난 것이다.

잠시 굽어보고 기다리면

잔주름 파문(波紋)이 자고, 구름이며 부서져 이 빠진 산 그림자 도로 나타나듯,

아사녀(阿斯女)! 아사녀!

정말 여기서 조금만 더 쉬고 있으면, 가진 것보다 더 반가운 것, 절실한 것들이 차츰 비취기도 하고, 탑(塔) 모양 솟아오르기도 하고,

- 또 어디서 걸어 나와서 옷자락 소리 가벼이 스쳐 지나기도 할 것이다.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김상옥

 

으슷이 연좌(蓮座) 위에 발돋움하고 서서

속눈섭 조으는 듯 동해(東海)를 굽어 보고

그 무슨 연유(緣由) 깊은 일 하마 말씀하실까

 

몸짓만 사리어도 흔들리는 구슬소리

옷자락 겹친 속에 살결이 꾀비치고

도도록 내민 젖가슴 숨도 고이 쉬도다

 

해마다 봄날 밤에 두견(杜鵑)이 슬피 울고

허구헌 긴 세월(世月)이 덧없이 흐르건만

황홀한 꿈 속에 쌓여 홀로 미소(微笑)하시다

 

 

 

안개 낀 항구

김상옥

 

안개 낀 항구에

등불 하나

안개에 젖어서

멀리 보이네

 

등불은 떡국집

유리 램프불

뱃사람 혼자서

떡국을 먹네

 

뚜…

 

어디서 떠나가는

뱃고동 소리

안개에 젖어서

멀리 들리네

 

 

 

어느 가을

김상옥

 

언제나 이맘때면 담장에 수(繡)를 놓던 담쟁이넝쿨. 병(病)든 잎새들 그 넝쿨에 매달린 채 대롱거린다.

가로(街路)의 으능나무들 헤프게 흩뿌리던 그 황금(黃金)의 파편(破片), 이 또한 옛날 얘기. 지금은 때묻은 남루조각으로 앙상한 가지마다 추레하게 걸렸다.

멸구에 찢긴 논두렁 허옇게 몸져 눕고, 사람 같은 사람은 벌레만도 못해 인젠 마음 놓고 한 번 울어 볼 수도 없다.

 

 

 

어느 날

김상옥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生涯)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어느 초여름 저녁에사

김상옥

 

크나큰 농익은 과일이 꼭지 지듯

정작 황혼이 떨어지고 박모(薄暮)(박모)는

깃을 벌려 겹겹으로 어둠을 품고 있는 속에

   

산이고 들이고

모두가 꼼짝 않고 -

그 피부의 색깔마저 생김새마저 모조리 뭉개지는데

나는 뜻밖에도 잊었던 우리 집 담모롱이 짬에서

그 짙어온 어둠을 도려내고 있는,

스스로 발현(發現)하는 한 포기 하얀 작약 꽃을 보았다.

   

꽃은 이미 온갖 주변(周邊)을 절단하고

오직, 살이 으스러지는 그 외로운 숨결만 함초롬히 젖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부잠(浮潛)하는 무수한 밤과 낮

지나간 비바람의 그런 고행(苦行)에도, 한 톨 꽃씨는 제 존재를 믿었던가?

   

- 사람이여!

차라리 눈물을 조려 기름을 내는 의식(意識)이여!

   

짐짓 세놓는 집을 얻어오듯

우리의 목숨도 비록 육체란 생김새를 빌려왔지만

이 서늘한 초여름 저녁에사

꽃은, 저 푸른 별빛 아래

분명히 하나의 목숨이지 형상(形象)이 아님을 알게 한다.

 

 

 

어머님

김상옥

 

이 아닌

밤 중에

홀연히 마음 어려져

 

잠 든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보다

 

깨시면

나를 어찌나

손 아프게 여기실고

 

 

 

어무님

김상옥

 

늙으신 어무님은 나만 보고 언정하고

안해는 그 사정을 내게 와 속삭이다

어찌누 그는 남으로 나를 따라 살거니

 

외로신 어무님은 글안해도 서럽거늘

안해를 가진 맘이 금 갈까 삼가로워

이 밤을 어서 새우고 그를 가서 뵈리라

 

 

 

억새풀

김상옥

 

봉은사(奉恩寺) 가는 길은 억새풀 바다였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덮던 물결

황량(荒凉)도 아름다울손, 그 가을 그 억새...

 

멀리 해으름은 솔푸른 그늘에 젖고

신간(新刊) 고서(古書)들 나란히 꽃힌 방안

억새풀 우짖는 소리, 승속(僧俗) 따로 없었다

 

 

 

여황산성(艅艎山城)

김상옥

 

옛 성(城)에 올라서서 더 멀리 바라보니

안개만 자욱하고 산하(山河)를 모를노다

그 전날 임의 귀선(龜船)이 연막(烟幕)을 펴듯 하여라.

   

검은 구름떼는 소나기를 묻어오고

저 불칼 휘두르는 번개와 우렛소리

임란(壬亂)을 다시 치는 양 눈에 방불하여라.

   

* 차(此) 경남통영자북록(慶南統營之北麓) 등지망견즉(登之望見則) 임진란혈전지처(壬辰亂血戰之處) 한산도(閑山島) 거제도(巨濟島) 견내량등(見乃梁等) 즉재안전卽在眼前)

 

 

 

연적

김상옥

 

손에 쥐고 왔다 다시 옮겨 쥐어준다

그가 데운 온기, 내 살에 스미는 백자

이 희고 둥근 모양을 어따 도로 옮기나

 

흙이 불에 들어 한 줌 뭉친 눈 송이

손과 손을 거쳐 오늘 여기 내온 모양

시시로 볼에 문질러 눈을 감고 찾는다

 

눈에 묻은 때는 눈으로 씻어내고

마음 어린 그림자 마음으로 굽어보다

어디메 홈대를 지르고 다시 너를 채울까

 

 

 

열쇠

김상옥

 

나는 어디서 와서 지금 이 門(문) 앞에 서 있는가? 어쩌면 이 상형문자(象形文字) 같이 생긴 나의 열쇠는 아직 그 음훈(音訓)을 해독할 수 없다.

이런 돌담 너메는 아마 한그루 자줏빛 목란(木蘭)꽃이라도 피어 있음직하다. 그런 목란 꽃으로 끝동을 댄 흰 저고리를 입은 한 여인이라도 서 있음직하다. 그러나 혹시 그 여인은 카인의 주점(酒店)에 염염(炎炎)한 입술을 그린 채 이미 창부(娼婦)로 팔려갔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랜 날 돌쪽에 녹이 슨 이 문을 나는 어떻게 열고 들어왔는가? 들어온 이후 내가 지닌 열쇠는 이미 자물쇠가 되어버린다. 풀면 감기는 이 영원한 해답(解答)과 문제(問題)! 나는 다시 다음 대문을 들어선다. 뒤쫓아 열두 대문을 들어선다.

어느 옛 설화 속의 연당(蓮塘)을 건너 그 깊숙한 초당(草堂)으로나 나는 찾아온 것인가... 아아 이 화려한 안도(安堵)는 어쩌면 지금도 피바다 바늘산(山)이 첩첩한 저 지옥의 공포를 달래는 진한 마약(魔藥)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꼭 내가 들어온 대문의 수효만큼 나는 목란꽃이 아니면 피가 묻었을 그 문지방을 도로 넘어 이미 현실 밖에 나와 있다. 나를 이렇게 영사(映寫)하는 현실은 어쩌면 한 장의 참혹한 거울일 게다. 앞뒤로 돌린 과거와 미래의 틈바구니에 서 있는 나는 두 개의 거울 속에 놓인 하나의 엄숙한 상형(象形)! 이 열쇠는 다시 무수한 그림자를 서로 비추며 번져나간다.

아직 해독할 수 없는 나의 열쇠는 아무리 찍어도 책임을 묻지 못할 기고(奇古)한 인영(印影)과도 같은 것이다.

 

 

 

영어(囹圄)

김상옥

 

1

새도록 잠 못 일고 저물도록 맘 조리고

때때로 이는 괴로움 나날이 새로워라

언제나 이 문(門)을 나서 그런 임을 뵈올꼬

 

 

2

잠도 그 아니고 꿈도 정녕 아니어니

밖앝에 발자욱 소리 멀었다 가까웠다

그러다 눈이 뜨이면 날이 다시 새워라

 

 

3

밤은 이슥한데 삐그럭 열쇠 소리!

그들은 무슨 일로 이 밤에 잡혀온고

쇠창살 침침한 속에 얼굴들이 보여라

 

 

4

꿈은 깊었어도 잠은 사푼 들었든지

곁에ㅅ벗 앓는 소리 놀래어 잠을 깨다

오늘도 널우에 앉아 해져감을 보리라

 

 

 

옥적(玉笛)

김상옥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축이시며,

뚫린 구멍마다 임의 손이 움직일 때,

그 소리 은하(銀河) 흐르듯 서라벌에 퍼지다.

 

끝없이 맑은 소리 천 년을 머금은 채,

따스히 서린 입김 상기도 남았거니,

차라리 외로울망정 뜻을 달리하리요!

 

 

 

우수(憂愁)의 서(書)

김상옥

 

장서(藏書)처럼

빌려온 책들은 쉬 읽고 이미 도로 돌려보냈으나 오랫동안 사서 꽂아두고 먼지가 쌓인 채 아직 한 번도 뒤져보지 못한 나의 이 가난한 장서처럼 밤낮 내게는 가까이 두고도 차라리 남같이 무심히 지나온 서럽고도 소중한 인정(人情)들이 있었다.

그러나 정녕 이대로 가다간 누구의 손에 옮아 다시 어느 서가에나 꽂힐는지 모르는 이 몇 권의 낡은 서적처럼 나와 그들과는 언제든 한번은 반드시 있어야 할 그 마지막 애끓는 결별(訣別)마저 내처 모르고 지나칠 것만 같다.

 

   

효수(梟首)

잎 떨린 북풍(北風)받이 나뭇가지에 까치집 하나, 종일을 지켜보아도 드나드는 기척 없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리 이 한갓 미물이 살다 버린 자취까지 오늘 저렇게 효수하듯 달아두고 미리 다짐하여 저희에게 보이느니...

   

   

밤비

또 하루의 신산(辛酸)을 한 끼 저녁 밥상처럼 물리고 등불 돋구어 책(冊)이나 읽고 앉았으면 갑자기 창밖에 내리는 뜻 아닌 밤비 소리... 이 소곤대는 빗소리에 나는 마음에 일던 먼지를 재우고, 어쩌면 사람이 못내 그리웠다는 고로(古老)의 무료를 제법 수염처럼 쓰다듬고 있다.

 

   

비(碑)

오늘도 너희로 하여 이렇게 간을 저미도록 기막히는 사실(史實)을 다시 한줄 가슴에 새겨둔다.

죽어도 차마 이 육신과 함께는 썩을 수 없는 그 기나긴 애증의 사연을 지닌 그는 어느 보이지 않는 곳에 이미 매몰되었던 유적같이 우뚝 솟아나서 다시 세상의 덧없는 우로(雨露)에 젖고 섰을 비갈(碑碣)이 된다.

   

 

궤짝처럼

종일 나는 혼자 집을 본다.

볕살이 마루에 따사로이 비친다. 마룻널이 볕살에 조여 가다가 한 번씩 찍찍 소리를 낸다. 지극히 고요한 시간이 실솔(蟋蟀)이 소리를 하고 지나간다.

방안엔 의롱(衣籠)과 책장과 화병이 다 숨을 쉰다. 나도 혼자 궤짝처럼 한쪽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있자니까 -

 

 

 

은선암(隱僊庵) 즉흥(卽興)

김상옥 

 

극락은

이승 저승

다 일어나고

 

여기 은선암(隱仙庵)엔

상극락(上極樂)만 기다린다

 

부용(芙蓉)꽃

향기(香氣)에 떠서

일렁이고 있고녀!

 

 

 

이순(耳順)의 봄

김상옥

 

올봄은

이순(耳順)의 봄.

 

지난날

지난봄은

 

시정(市井)잡배(輩)도,

산중 돌배꽃도,

 

제 얼굴 아니게

분(粉)칠했다.

 

올봄은

이순(耳順)의 봄.

 

더덕더덕 칠한 것

말짱 지우고,

 

몰라본 주인(主人)도

찾아뵈옵고,

 

피부색(色) 그대로

볕 발리 서리로다.

 

 

 

이조(李朝)의 흙

김상옥

 

솔씨가 썩어서 송진을 게워내기까지

송진이 굳어서 반쯤 밀화(蜜花)가 되기까지

용하다 이조의 흙이여, 너는 얼마만큼 참았는가

 

슬픈 손금을 달래던 마음도 네게로 가고

그 숱한 비바람도 다 네게로 갔는데

지금쯤 이조의 흙이여 너는 어디만큼 닿았는가

 

하룻밤 칼을 돌려대고 5백 년 훔쳐 온 이름

어느 골짜기 스스로 무구(無垢)한 눈을 길러

끝끝내 찾아낸 네 유백(乳白)의 살은 또 어디로 옮겼는가

 

 

 

인간(人間) 나라 생불(生佛) 나라의 수도(首都)

김상옥

 

신라(新羅) 일천년(一千年) 서라벌은 한 왕조(王朝) 아니라, 한 왕조(王朝)의 서울 아니라, 진실로 인간(人間)의 서울, 오직 인간(人間) 나라의 서울이니라.

한 가닥 젓대의 울림으로 만(萬)이랑 사나운 물결도 잠재운 나라, 모란빛 진한 피비림도 새하얀 젖줄로 용솟음 치운 나라, 첫새벽 홀어미의 사련(邪戀)도 여울물에 헹궈서 건네준 나라, 그 나라에 또 소 몰던 백발(白髮)도, 행차(行次)에 나선 젊으나 젊은 남의 아내도, 서로 죄(罪) 없는 눈짓 마주쳤느니

꽃벼랑 드높은 언덕을 단숨에 뛰어올라, 기어올라, 천지(天地)는 보오얀 봄 안개로 덮이던 생불(生佛) 나라 생불(生佛)들의 수도(首都)이니라.

 

 

 

인연(因緣)이여!

김상옥

 

짐을 꾸리고 행장도 가벼이 이제는 길을 떠날 때가 되었다.

어쩌다 동네도 없는 길에서 해가 저무는 날은 까마귀처럼 논두렁에나 예사로 앉아 노숙(露宿)하고 또 개울을 건너다 눈물처럼 점점이 떠오는 꽃잎에 윗녘 머언 봄을 문득 생각키도 하며 또 어느 외따른 촌(村) 정거장에나 어느 부두가 대합실 같은 데서 서성대는 사람 틈에 끼여 쉬고 가겠다.

그리고 언젠가 꼭 오르고 싶던 그 장대(將臺) 언덕에도 올라 손을 들어 모자 앞창처럼 눈부신 햇살을 가리고 굽어 흐르는 강물이며 저 티베트 어디 사막 속에 나타난 古代(고대) 도시의 유해처럼 일조(一朝)에 무너진 그 누라(累累)한 폐허를 바라보고 내려오겠다.

또 언젠가 그날 지나치던 우물가에서 어느 모르는 여인의 손에 두레박을 받아 마시고 그 물맛같이 담담한 인정을 나는 노자(路資)하여 다시 더 먼 곳을 둘러오겠다.

그동안 나의 서러운 인연이여! 다들 자리 잡고 그 전같이 잘 있거라.

 

 

 

입동(立冬)

김상옥

 

그대 바람같이 가 버리고 이내 이날로 소식(消息)도 없다

 

잎 진 가지 새로 머언 산(山)길이 트이고

새로 인 지붕들은 다소곤히 엎드리고

김장을 뽑은 밭이랑 검은 흙만 들났다

 

둘안을 깔린 낙엽(落葉) 아궁에 지피우고

현불에 지새우던 그날 밤을 생각느니

몹사리 그리운 시름 눈에 고여 흐린다

 

칩고 흐린 날을 뒷뫼엔 숲이 울고

까마귀 드날르고 해도 차츰 저무는데

헐벗고 떠나신 길에 주막(酒幕)이나 있는지……

 

 

 

잠자리

김상옥

 

오랜만에 씻은 듯 날이 개어

뜰에고 길에고 사람 하나 얼씬 않고

옛날대로 펼쳐놓은 하도 고요한 아침

.

바람결에 날려 온 꽃잎처럼

마음 가벼이 마루 끝에 나앉았으니

저 새 푸른 호수처럼 맑은 하늘로

어디선지 난데없는 잠자리 서너 마리

날개 잔잔히 물결처럼 스쳐 흐른다.

잠자듯 꿈꾸듯

나 잠시 눈을 감고 있노라면

문득 어인 소년 하나...

달같이 둥근 채를 장대 끝에 꽂아 들고

그 물결 밑으로 헤치며 달아간다.

   

이윽고

도로 눈을 뜨고 돌아다보니

그새 한동안 세월이 지나간 듯

나 몰래 내 안에 살던

그 토끼처럼 즐거운 소년은 간 곳 없고

나는 그대로 그 마루 위에

하얀 석고상처럼 거죽만 천연스레 놓여 있다.

 

 

 

장서(藏書)처럼

김상옥

 

빌려온 당신의 책들은 쉬 읽고 이미 도로 돌려보냈으나 오랫동안 사서 꽂아두고 먼지가 쌓인 채 아직 한 번도 뒤져보지 못한 이 가난한 장서처럼 밤낮 내게는 가까이 두고도 차라리 남같이 무심한 지나온 서럽고도 소중한 인연이 있었다.

정녕 이대로 가다간 누구의 손에 옮아 다시 어느 서가(書架)에나 꽂힐는지 모르는 이 몇 권의 낡은 서적(書籍)처럼 나와 그들과는 언제든 한번은 반드시 있어야할 그 마지막 애끓는 결별마저 이렇게 내처 모르고 지나칠 것만 같구료!

 

 

 

저 꽃처럼

김상옥

 

초여름 후미진 뜨락에 때아닌 눈이 왔다.

보는 이 없고 가꾸는 이 없어도, 또 오늘처럼 이렇게 바람 한 점 없어도, 찔레꽃은 혼자서 피고진다. 참으로 간결하고 조용하다.

사람도 그 은혜로운 목숨, 저 꽃처럼 누릴 수는 없을까.

 

 

 

전설(傳說)

김상옥

 

기일(其一)

카이저수염을 한 어느 도적놈 소굴

주름 번득이는 검은 바윌 등지고

꽃 같은 촉루(髑髏)가 나와 샘을 긷고 있었다

 

 

기이(其二)

천년 반석 밑에 그날같이 고인 물빛

한 방울 지는 소리 파뿌리 청상(靑孀)과수

그 아미(峨嵋) 싱그러운 볼도 한 이불에 재운다

 

 

 

정물(靜物)

김상옥

 

때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그중에는 세 번이나 단식을 하였다는 얼굴이 해쓱한 젊은 친구! 그가 남기고 간 몇 마디 말 가운데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는 구절... 꼭 어느 사전(辭典)의 주석처럼 생각날 듯하면서도 차츰 미궁으로 들어간다.

지금 장지밖엔 고요함이 보일 듯 들리는 낙수(落水) 소리뿐... 저 지극히 정확한 간격을 두고 이 초조(焦燥)의 절박한 무료(無聊)를 저울질한다. 으레 이런 때 나의 영혼의 그가 가진 여유는 지난날 한 개 애원(愛翫)하던 정물이런가... 미리 교섭도 없이 저만치 적당한 위치에 따로 떨어져 나앉는다.

 

 

 

제기(祭器)

김상옥

 

굽 높은

제기(祭器).

 

신전(神前)에

제물을 받들어

올리는-

 

굽 높은

제기(祭器).

 

시(詩)도 받들면

문자에

매이지 않는다.

 

굽 높은

제기(祭器)!

 

 

 

제주의 오름

김상옥

 

아스라하게 펼쳐진 제주 들녘에는

고만고만한 모양새의 오름들

도·레·미·파·솔·라·시

신이 그려놓은 악보다

 

그 악보를 놓고

새는 새소리로

벌레는 벌레 소리로 연주를 하는데

내가 연주를 하면,

그리움이 사무치는

애틋한 노래가 된다

구름은 오늘도 내 노래를 싣고

임 있는 곳을 향해

길을 재촉하노니

 

늘 푸른 나라

그 ‘영지(靈地)’를 찾아서……

 

 

 

조개와 소라

김상옥

 

달빛! 으스름 달빛! 올 없는 엷은 비단처럼 은은히 흘러내린 그 달빛을 덮고, 할 수 없이 그들은 이 하얀 모래언덕 위에서 하룻밤 새워가기로 하였단다.

물결도 일지 않는 푸르기 유리알 같은 깊은 바닷속! 산호 가지 빨갛게 그늘진 어느 바위 밑에서 어쩌다 서로 만나게 된 조개와 소라는 그 뜻아닌 기쁨에 남모를 비밀한 얘기들을 이렇게 나누었더라고 -

예예 당신은 소라입니까? 저는 조개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처음 밖에서 무슨 기척이 나길래 저는 살짝 뚜껑을 열고 내다보았겠지요. 그때 저는 정말 당신을 꼭 한 덩이의 천연스런 괴석(怪石)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하 그렇게 보셨습니까? 한 번도 바깥을 내다보지 못한 저는 아직 저의 외모를 모른답니다. 그렇지만 이 괴석의 내부는 몇 굽이인지 모르게 돌아드는 이상한 동굴로 되었답니다. 보지 않고 어찌 아시겠습니까만, 저는 이곳에서 혼자 둥우리를 틀고 앉아 밤낮으로 참을 수 없는 적막의 쓰라림을 그대로 붓에 옮겨 불도 없는 이 캄캄한 동굴 안에서 오색 자개로 영롱한 벽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아 벽화의 동굴! 어쩌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화려한 곳에서 사십니까? 어쩌다가 진정 어쩌다가 저는 위아래도 분간할 수 없는 이 무슨 둔갑처럼 야릇한 뚜껑 속에 그만 수족도 못쓰게 감금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호올로 일각(一刻)도 견딜 수 없는 이 천추의 고독을 앓다가 그 어쩔 수 없는 슬픔은 마침내 암 같은 진주를 잉태하여 내 마지막 칠빛 같이 유현한 꿈을 한 겹씩 한 겹씩 싸 덮고 있습니다.

오오 겹겹이 꿈으로 싸인 진주! 어쩌면 당신은 가슴이 벅차도록 그렇게 아름다운 꿈을 언제나 안고 계십니까? 당신은 그러면서 어째 저를 부러워하십니까? 저는 본디 스스로 이 동굴을 파고든 것도 아니요 또 여기를 제가 즐겨 찾아온 것도 아니언만, 이미 살다 돌아보니 이렇게 괴상한 꼴을 둘러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라! 이제야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내 앞에 가리운 이 우매의 그림자를 헤치고 또 하나 괴로운 생명을 부지하는 다른 세계의 존재를 투득(透得)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 무서운 무지 속에 저의 영혼은 영영 유폐되어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아아 얼마나 고마운 인연이랴! 저는 순간일망정 이 뚜껑 안을 떼어버리고 나올 수만 있다면 지금 제가 가진 이 진주를 꼭 당신께 선물로 드렸으면...

조개! 고마운 말씀이오. 저도 만약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죄악처럼 험상한 외모를 어찌 알았겠습니까? 당신은 곧 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이 바다보다 갚은 업고(業苦)에서 어찌 저를 건져낼 수 있었겠습니까? 아아 제도(濟度)의 거울이여! 정말 저는 이 동굴을 잠시라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미 저의 심혈을 기울인 이 구름같이 이 휘황한 벽화를 당신 앞에 좀 펼쳐봤으면...

이렇게 서로 마음 홀리는 꿈같은 얘기에 자지러져 다시 깨어났을 땐 벌써 바다는 물결을 따라 머언 변두리에서 출렁거리고, 그 물살이 떠밀어놓은 이 끝없는 모래언덕 위에서 그들은 이미 달빛을 깔고 앉아있었다.

이왕 바다로 들어갈 수 없는 그들은 이 밤 모처럼 달빛을 타고 울려오는 천상의 운율을 들으며 잠을 잤더란다. 소라는 진주를 품고 조개는 벽화를 구경하고 노니는 꿈을 꾸면서 -

 

 

 

종적

김상옥

 

언제나

꽃 이름처럼

사운대는 가슴이 있어

 

아무리

재를 뿌려도

해맑은 눈길이 있어

 

그들은

지금 어딨는지

종적을 찾을 길 없네.

 

 

 

주변(周邊)에서

김상옥

 

그것은

한 가지 질문이었다,

두엄 곁에 핀 달개비꽃도.

 

그것은 또

한 가지 대답이었다,

풀잎을 기는 딱정벌레도.

 

참으로

뭉클한 슬픔이었다,

가까이 들리는 먼 귀울림.

 

 

 

지주(蜘蛛)

김상옥

 

무엇을 감으려는고!

갈고리 같은 험상한 발을 지니고서 어찌 보면 저들 수전노(守錢奴)의 전대처럼 아랫도리의 불룩한 몸짓을 가짐도 짐짓 우연함이 아닐레라.

너 나날이 밑으로 내는 그 배설(排泄)마저 공교로워 가느른 가느른 은실을 뽑아 빈 공중(空中)에 가로 새로 투망처럼 얽어두고 한가히 바람을 쐬고 잠자듯 시침을 떼고 앉았건만 -

어이쿠! 조그만 나비 한 마리 걸려도 재빠르게 달려들어 버티고 물어뜯고 덤벼드는 거미여!

너 날 적부터 어떤 간계(奸計)를 지녀왔기에 이미 生理(생리)는 버리기로 마련된 분뇨이언만 여기 다시 혀를 대어 그 지독한 이윤(利潤)을 보려는고 - 거미여!

아아 하고많은 거미들이여!

기는 놈이 다시 나는 놈의 피를 빨고 지내건만 정작 너희에겐 이미 아무런 회오(悔悟)도 없고 오직 물려받은 슬픔으로 오랜 습성(習性)으로 이를 받들어 오히려 기르고 사는도다.

 

 

 

질그릇

김상옥

 

1.

처음 나는 아무래도

내 스스로를 무언지 알 수 없었다.

   

오늘도 홀연히 너를 생각하므로

그 골똘한 생각을 담아둔

문득 하나의 질그릇인 것을 알게 된다.

   

휘저을수록 맑게 가라앉는 것...

   

그러나 이것은

부피 없는 깊이와 넓이

언제나 개피어도 차고 넘칠 수 없다.

   

   

2

그동안 나는

몇 번이나 자리를 옮겨놓았다

여기는 뜰 안

한쪽 장독대가 아니다.

어느 끝없는 벌판 같은 데

어쩌면 갈밭 속 같은 그런 데일 것이다.

   

내 곁에도 이만큼 다가앉고

혹은 저만큼 떨어져

서로 그 무엇을 담아두었는지

독 단지 항아리 -

이런 것들이 도란도란 짜고 모여 있는 것이다.

   

나와 그들 사이

- 이 어쩔 수 없는 빈틈에

이따금 무수한 갈잎 소리도 서걱이고

아침저녁으로 맑고 고요한 것이 개피운다

   

제여곰

운두가 높거나 낮거나

그 무수한 윤곽들을 포섭하고 있는 것

   

그러면서 한가닥 금을 그었을 뿐

틈이 없이 치밀해도

그 존재마저 범연(凡然)한 것

   

- 이것은 어디다 담아둘 누구의 것인가...

 

 

 

집오리

김상옥

 

때 묻은 쭉지 밑에 푸른 꿈을 안아두고

나날이 욕된 삶을 개천에서 보내건만

때때로 고개 비틀고 눈을 감고 느끼도다

 

몸이야 더럽혀도 마음만은 아껴 가져

슬픔도 외로움도 달게 받아 겪었거니

목메인 그 우름 소리 어느 날에 그치려나

 

 

 

착한 마법(魔法)

김상옥

 

몇십 층 빌딩보다 오히려 키가 큰 너

지금 먼지 구덕에 어깨 쭈그리고 앉았지만

한대는 불구덩에 휘말려도 차디찬 눈발 끼얹던 너!

 

너는 언제나 시들지 않는 꽃을 입고 있다

너는 목도리로 뇌문(雷文)을 휘감고 있다

그리고 또 하늘도 구기지 않고 그대로 담고 있다

 

 

 

참파노의 노래

김상옥

 

늙고 지친 참파노

인제는 곡예(曲藝)에도 손을 씻고

철겨운 눈을 맞으며

종로의 인파(人波) 속을 누비고 간다.

 

길은 찾으면 있으련만

봄이 오는 머언 남쪽 바닷가

내 전생(前生)의 젤소미나

너는 이날 거기서 뭘 하느냐?

 

내 그만 돌아갈까

우장(雨裝) 모양 걸쳤던 코오트

그 체크무늬에도 봄은 오는가.

 

쑥국으며 햇상치쌈

울 밑에 돋아난 향긋한 방풍나물

그런 조촐한 저녁상 앞에

너와 함께 그날처럼 앉고 싶구나.

 

'참파노오 참파노오

참파노가 왔어요!'

 

흐린 날 외론 갈매기

목이 갈리던 그 울부짖음

뒤끝이 떨리던 나팔(喇叭) 소리

지금도 쟁쟁 내 귓전에 울린다.

 

언제나 사무적(事務的)인 이승에선

눈만 껌벅인 젤소미나

내 역시 골이 비었어도

아직 추스릴 눈물만은 간직했다.

 

 

 

창(窓)

김상옥

 

여기 열어놓은 네모난 윤곽으로 내다뵈는 세월은 그대로 쌓아둔 바이블의 두꺼운 책장 -

그 어느 한 장을 넘기면 저 천애(天涯)에 맞닿은 바다가 보이는 저 묘막한 創世(창세)의 말씀!

그리고 그 머언 푸름 위에 가물가물 흰 돛대 한 점 나비로 화(化)하는 이적(異蹟)도 있고 또 행을 바꾸어 다음 장(章)을 읽으면 우수수 가랑잎 듣는 소슬한 黙示(묵시)의 구절도 적혀있다.

그러나 여름날 마른하늘이 울고 소나기 쏟아지는 심판의 예언이 들리기도 하고 겨울밤 함박눈 몰래 내린 -

그 속죄의 은총을 기록한 아아 당신의 문자! 지극한 정밀(靜謐)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어떤 至密(지밀)한 밤이었다. 잠시 육체를 잃고 깊이 잠든 틈에 눈물처럼 찬란히 흐르는 오리온 별빛과 가만히 빗장을 흔드는 바람의 그 은밀한 소명(召命)!

다시 다음 장 몇 절(節)을 보면 함초롬히 꽃술을 적신 이슬의 세례와 저무는 봄 어스름 속에 저 울려오는 노고지리의 찬송! 그리고 또 뜨락에 드리운 포도며 저 간살 터진 석류알 -

그 속에 비장(秘藏)하여 아아 스스로 영혼을 만나게 하는 구원(救援)의 신비와 가지마다 휘어진 그 풍성한 축복이 있었다.

어찌 그뿐이랴 이미 읽다가 접어둔 그 책장을 다시 펴면 온갖 진진한 비유로 엮인 부활의 섭리와 길이 깨칠 수 없는 영생(永生)의 진리!

더욱 춘추(春秋)를 거듭하여 읽을수록 뜻 깊고 넘길수록 아득한 이 적은 간격은 - 아아 - 권능 많으신 당신의 예비하신 복음!

 

 

 

청자부(靑磁賦)

김상옥

 

보면 깨끔하고 만지면 매촐 하고

신(神)거러운 손아귀에 한줌 흙이 주물러져

천 년 전 봄은 그대로 가시지도 않았네.

   

휘넝청 버들가지 포롬히 어린 빛이

눈물 고인 눈으로 보는 듯 연연하고

몇 포기 난초(蘭草) 그늘에 물오리가 두둥실!

   

고려의 개인 하늘 호심(湖心)에 잠겨 있고

수그린 꽃송이도 향내 곧 풍기거니

두 날개 향수(鄕愁)를 접고 울어볼 줄 모르네.

   

붓끝으로 꼭 찍은 오리 너 눈동자엔

풍안(風眼)테 너머 보는 한아버지 입초리로

말없이 머금어 웃던 그 모습이 보이리.

   

어깨 벌숨하고 목잡이 오무속하고

요리조리 어루만지면 따사론 임의 손길

천년을 흐른 오늘에 상기 아니 식었네.

 

 

 

촉촉한 눈길

김상옥

 

어느

먼 창가에서

누가 손을 흔들기에

 

초여름

나무 잎새들

저렇게도 간들거리나

 

이런 때

촉촉한 눈길

내게 아직 남았던가

 

 

 

촬영(撮影)

김상옥

 

입덧 난 유백(乳白) 속에 동자(童子)들이 숨어 있다

서로 시새우며 또 마주 희롱하며

어느 날 비눗물을 찍어, 불던 일을 되새기며

 

초순(初旬) 개인 하늘빛 창살에 깔리는 아침

젊은 안주인이 달리아를 꽂아놓고

옷자락 옮겨가는 소릴 귀담아들 듣고 있다

 

다시 조용해진다, 얼마나 무료했던가

제여금 꽃대를 입에 물고 불어본다

탐지고 예쁜 꽃송이들이 비눗방울 모양 부푼다

 

 

 

추천

김상옥

 

멀리 바라보면 사라질 듯 다시 뵈고

휘날려 오가는 양 한 마리 호접(胡蝶)처럼

앞뒤 숲 푸른 버들엔 꾀꼬리도 울어라.

 

어룬 님 기다릴까 가비얍게 내려서서

포탄 잠(簪) 빼어 물고 낭자 고쳐 찌른 담에

오지랖 다시 여미며 가쁜 숨을 쉬도다.

 

 

 

축제(祝祭)

김상옥

 

살구나무 허리를 타고 살구나무 혼령이 나와

채선(彩扇)을 펼쳐 들고 신명 나는 굿을 한다.

자줏빛 진분홍을 돌아 또 휘어잡는 연분홍!

 

봄은 누룩 딛고 술을 빚는 손이 있다.

헝클린 가지마다 게워 넘친 저 화사한 발효(醱酵)

천지(天地)를 뒤덮는 큰 잔치가 하마 가까워오나부다.

 

 

 

측(厠)

김상옥

 

여기는 먹고 마신 것이 오장과 육부를 거쳐

살과 피와 뼈가 되고 그 나머지를 배설하는 곳ㅡ

 

다음 끼니 다시 먹고 땔 것을 구하여

내 어디론지 분주히 쏘대다

여기 잠시 들르면 마음 그지없이

편안히 쉬이도다.

 

그 지독한 식욕의 주구되어

날만 새면 거리에 나와

내 그들과 더불어 장도림같이 떼 제치고

의리를 눈감겨 온갖 거짓을 팔고

차마 말 못 할 그 모욕에도 다시 가유를 사고

 

날이 저물어 산 그림자

이 무거운 가슴 덮어내리면

기다림과 주림에 겨운 파리한 가권들이

창을 내다 웅크리고 앉았을

이 게딱지 같은 오두막을 향하여 돌아오다.

 

이미 먹은 것은 흉측한 악취와 함께

이렇게도 수월히 쏟아버릴 수 있건만

눈에 헛것이 뵈는 주린 창자를 채우기에

또한 염치없이 떨리는 헐벗은 종아리를 두르기에

 

나날이 저질러 지은 이 끝없는 죄고들로

저 크나큰 어두움에 짙어오는

무한한 밤을 휘두르는 한점 반딧불처럼

 

아직 내 염통에 한 조각 남은 양심의 섬광에

때로 추상같이 준열한 심판을 받는 이 업보는

오오 분뇨처럼 어드메 터뜨릴 곳이 없도다.

 

 

 

태(胎)

김상옥

 

벽장 안

낡은 손가방

그 속엔 으례 칫솔과 타올.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호로병(甁) 속에 있고,

 

겨울 숲

땅거미 깔려도

다 그 태(胎) 속의 고물거림…….

 

 

 

포도(葡萄)

김상옥

 

파르란 하늘 밑

드리운 포도

   

알알이 하늘 속

숨긴 이야기

   

만지면 문질리는

엷은 분결

   

검붉은 빛 터질 듯

물이 실리어

   

살긋이 한 알 따

입에 머금고

   

어린 걸 품어 안고

입 맞추면

   

발갛게 젖은 입술

꿀같이 달아

   

마음속 오랜 상처

절로 아물고

   

새로운 즐거움은

샘으로 솟아

   

포도처럼 조롱조롱

고이는 눈물

 

 

 

푸른 초여름

김상옥

 

세상엔 말도 노래도 다 사라진다.

네가 옹아리를 시작하면 -

 

물에 뜬 수련, 수련 속의 이슬도 구른다.

꿈꾸듯 네 긴 속눈썹 깜박이면 -

 

강보에 싸인 채 요람이 흔들린다.

좜좜좜 네 작은 손등의 푸른 초여름 -

 

 

 

학(鶴)

김상옥

 

한 겹 등덜미를 덮었던 죽지를 좌우로 벌리면 난데없는 운무(雲霧)가 인다. 문지르던 부리를 바로하고 이내 솟구치면 찢어도 흠 없는 저 푸르름 속으로 사라진다.

어드메 낙락(落落)한 가지가 너울대는가... 도로 그 흰 구름자락을 가지런히 접고 다시 내려앉는 그는 목을 수직으로 뽑는다. 물보다 맑고 서늘한 분수가 철철 넘쳐흐른다.

몸은 강(江)가의 갈풀 같이 말리면서 살점을 저미어도 견디는 마음이 있어 항시 머리 위엔 붉은 생채기 꽃피는 관(冠)을 쓰고 - 어느 고인(古人)의 그림 속에도 정숙(貞淑)이의 수놓는 마음속에도 또 어느 푸른 단애(斷崖) 위에서도 사는 너는 언제나 없는 듯이 늠름하다.

 

- 너는 학이다

 

 

 

항아리

김상옥

 

종일 시내(市內)로 헤갈대다

아자방(亞字房)에 돌아오면

나도 이미 장(欌)안에 한 개 백자(白瓷)로 앉는다

때 묻고 얼룩이 배인 그런 항아리 말이다.

 

비도 바람도 그 희끗대던 진눈개비도

누누(累累)한 마음도 담았다 비운 둘레

이제는 또 뭘로 채울건가 돌아도 아니 본다.

 

 

 

행화동(杏花洞) 설화(사슴과 나무꾼)

김상옥

 

홀아비야 홀아비야.

옛날도 아닌 옛날 채양 볕바른 섬돌 아래 바둑이는 한쪽 다리를 베고 눈곱채로 졸고 있다.

헌 뜨개를 꿰매고 있는 소녀같이 작아진 꼬부랑 할머니와 그 곁에 상기 홀아비 늙은 아들은 서로 말없이 눈물어려 앉았는데

아직 제비도 종달이도 오르지 않은 저 포란빛 휘어진 하늘은 아지랑이 나는 건너편 구릉(丘陵) 위에 드리워 있다.

사슴아 사슴아 뿔이 고운 사슴아.

살구꽃 구름 너머 꽃구름 너머 어드메 맑은 우물 속에 선녀(仙女)의 두레박은 잠기는가?

“하늘에는 하늘에는 없는 것이 없다는데 목욕하는 우물물에 비친 그림자는 지상(地上)에만 있었던가?”

정녕 오늘도 그런 옛날...

노곤한 봄빛은 이 나무꾼의 오두막집 뜨락으로 한되박 소리 없이 부어진다. 뻐꾹! 뻐꾹! 뒷산 혼령처럼 뻐국 소리 들려오고 -

아아 홀아비야 홀아비야.

오랜만에 그의 우의(羽衣)를 두었던 빈 궤짝이나 열어보자. 그렇게도 서럽고 소중한 이별을 생각하며 -

“이미 이 아름다운 설화마저 생각 없이 벗어버린 우리는 아직 초라한 헌 옷 한 벌 개켜둔 상자 하나 마련 없다!”

 

 

 

향낭(香囊)

김상옥

 

꽃은

그의 향낭을

대궁 속에

감추고 있고

   

노루는

제 사향을

배꼽에다

달고 다닌다.

   

풍상에

부대낀 이 허리춤

무엇을

달고 다닐까?

 

 

 

형상

김상옥

 

설레던 그 물결이 이다지도 잔잔터냐

너 얼마를 깊은 데서 씻기어 나왔기에

한 오리 추억도 아예 발붙이지 못하느냐

 

목숨을 받아나기 오죽이나 힘든 일가

아침 빛 건너오면 무심한 채 돌아봐도

빌려온 거죽 안에서 향내만이 들리거니

 

 

 

화창(和暢)한 날

김상옥

 

우리 평생(平生)에 이런 날이 며칠이나 될까. 지금 강변로(江邊路)엔 꾀꼬리빛 수양버들, 머리 푼 세우(細雨)처럼 드리웠다. 흩뿌리는 시늉으로 천만사(千萬絲) 가지마다 연초록 휘장 모양 드리워 있다.

휘장에 가리운 외인묘지(外人墓地). 저 호젓한 구릉(丘陵)에도 초록빛 사이사이, 흰 묘비(墓碑) 사이사이, 연교(連翹)꽃 노오랗게 어우러졌다. 브로크 담장 밖엔 살빛 분홍꽃도 조금씩 조금씩 초친 듯이 번져난다.

여기는 절두산(切頭山) 드높인 성당(聖堂), 낭떠러지 받쳐든 위태로운 난간(欄干)을 기대선다. 삶과 죽음마저 남의 일처럼 굽어보기에 알맞은 곳. 살아 있는 외로움이 뼈에 사무친다.

 

 

 

회심곡

김상옥

 

1

바다 위에서 꽃이 피기는

심씨황후(沈氏皇后) 때 겨우 있었던 일

한꺼번에 세 송이나 피어나기는

바다가 접시 위에 옮아온 다음의 일

수염을 꼬아 물고 앉았노라면

중천(中天)에는 전등 같은 달이 떠온다

 

 

2

꽃은 연꽃인데 잎은 당초(唐草)잎

잎은 문어발로 춤을 춘다

구름도 허리를 쥐는 현악(絃樂)에 따라

일렬횡대로 쭈욱 늘어서고

오가진 문어발이 어깨춤 춘다

내 말이 거짓말인가 마음 돌려라

 

 

회의(懷疑)

김상옥

 

푸른 칼끝으로 풀어헤친 가슴을 찔러

새빨간 염통을 갈기갈기 저며내어

잠드신 임의 窓(창) 앞에 던져두고 떠나리라.

   

잠을 사리다가 어수선한 꿈을 깨고

어인 비린내가 코를 이리 찌르는고

그제사 임이 찾아도 그는 가고 없으리라.

 

 

 

3. 1절

김상옥

 

만세를 부르면

잡아간다고

입속으로 만세를

불러왔었네.

   

속옷 안에 꿰어맨

오랜 태극기

만져보면 가슴을

덮고 있었네.

 

* 해방 다음 해의 3.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