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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김명수(1945~ )

가죽장갑

강가에 있으면

개미

검차원(檢車員)

고향

고향에 가서

곡옥

굴다리

그렇게

그림자

그 봄의 식수

꼽등이

꽃꽂이 시간

꽃 지듯

꿀을 먹을 때

낙과

낙엽 냄새

남북 어로 한계선

내 오래도록 오르내리는 산길 중턱에

너 속의 너

노굿 일어, 희미한 노굿 일어

눈 귀 가슴 손

눈물겨움에 대하여

늑대와 개

니체를 덮으며

다시 들국화에 부쳐

단추

돼지가 낳은 달걀

만월(滿月)

메밀

무개차(無蓋車)

물안개

민들레

발자국

방아깨비

배추와 무가 없어지던 날

버섯

별빛이 늙은 몸에 걸려 꿈꾼다

봉답(奉畓)

북두칠성

비빔밥 한 그릇

사랑

사막의 노래

산수유꽃을 보며 – 쓸쓸한 사랑

상처

새꽃

서빙고를 지나며

선창 술집

소나무와 잣나무들

소낙비

소리 씨앗

소속

숲이 숲인 것이

심장(心臟)

아는 이름들이

아셨나요, 언제까지

앵무새의 혀

어머니의 눈물

어제의 바람은 그치고

옥수수밭

우수(雨水)

월식(月蝕)

우리나라 꽃들에겐

유리칼

이별

인연

자를 보며

저 파아란 하늘 속에는

전쟁이 그 꽃을 심어주었다

점경(點景)

주먹 원숭이

질그릇

집어등(集魚燈)

찔레 열매

침엽수 지대

카페 문의 마을에서

태양이 나에게 그림자를 주었다

풍선

피뢰침

하급반 교과서

헬리콥터

호랑나비

혼자 밥 먹다

1월, 그 어느 날

 

 

 

가죽장갑

김명수

 

나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

엄지 검지

다섯 손가락 모두

 

석유(石油)난로에 손을 쬐어 보라

함성이 들려 온다

한 마리 짐승이 골짜기를 도망친다

야만의 눈알 하나

차근차근 숲을 뒤진다

 

나의 손은 검다

검은 손에 피가 묻어 있다

장지도 무명지도

열 손가락 모두

 

친구여 그러나 피가 묻은

나의 손은 따스하다

짐승의 피보다 더욱 따스하다

석유난로가에서, 문명(文明)의 따스함 곁에서.

 

 

 

강가에 있으면

김명수

 

굽이굽이 흐르는

강가에서 시를 쓴다

 

돌아 갈 수 있는 여유와

때로는 직진할 수 있는 박력

그냥 가는 대로 맞겨 두는 자연스러움까지

함께 어우러질 수 있어

 

잠시 고개를 들면

깎아지는 바위 틈에 하얀 풀꽃

수줍은 듯 고개 숙이고

높고 파란 하늘과 흰 구름

창공을 나는 새들까지

모두 내 품에 안을 수 있기 때문

 

그 강가에 있으면

연두빛으로 물드는 산 비알

어느새 칡넝쿨은 산등성이를 타고

바람은 가슴을 파고 드는데

내가 기다리는 사랑은 저기

저만치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오는 것이 보인다

 

 

 

개미

김명수

 

개미는 허리를 졸라맨다

개미는 몸통도 졸라맨다

개미는 심지어 모가지도 졸라맨다

나는 네가 네 몸뚱이보다 세 배나 큰 먹이를

끌고 나르는 것을 여름 언덕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네 식구들과 한가롭게 둘러앉아

저녁 식탁에서 저녁을 먹는 것을 본 적 없다

너의 어두컴컴한 굴속에는 누가 사나?

햇볕도 안 쬐 허옇게 살이 찐 여왕개미가 사나?

 

 

 

검차원(檢車員)

김명수

 

칠흑같이 어두운 밤

화차들이 정거한 역 구내 선로 사이로

늙은 검차원 하나

침착하게 날카로운 망치를 들고 차바퀴를 두드리며 지나간다

 

디젤엔진의 고동은 꿈처럼 울리고

검게 빛나는 석탄 차의 석탄은

밤중의 고요를 지켜보는데

 

반짝거리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간 데라 불빛 하나

 

유개차(有蓋車) 속에 숨죽인 쥐 한마리

홀로 눈 떠 인기척을 넘보고

차거운 금속성의 망치 소리가

탱-하고 차륜을 울려

대륙을 횡단하는 긴 철로로 멀어져 갈 때

 

천 길 땅 속에 잠자던 쇠붙이의 원음을

칠흑같이 어두운 밤

늙은 검차원 하나

낡아빠진 수차보(修車譜)에 적어 넣는다

 

 

 

고향

김명수

 

천지에 폭풍우 잦아들고

하늘에 천둥 번개 스러진 뒤

별을 바라보는 나무가 있다

나무를 바라보는 별이 있다

순결한 아이들의 숨결 같은

우리들의 고향은 거기 있으리!

 

 

 

고향에 가서

김명수

 

대한 소한 다 지난 날

진눈깨비 내린다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진눈깨비

 

정월 이월 다 지난날

진눈깨비 내린다

울음도 아니고 눈물도 아닌 진눈깨비

 

우리 할매 칠십 평생

외동아들 낳으시고

허구헌 날 영화 한번 못 보시더니

 

우리 할매 칠십 평생 긴긴 나날

그 아들 하나 믿고 살아가시더니

 

그 아들 보국대에 보내버리고

한숨으로 바라보던

먼 신작로……

 

정월 이월 다 지난날

진눈깨비 내린다

눈물도 아니고 울음도 아닌 진눈깨비

 

우리 할매

쓸쓸하신 늙은 만년에

안질 드신 노안에도 어른거리던

그 진무름 같은 진눈깨비가 내린다

그 진무름 같은 진눈깨비가 내린다

 

 

 

곡옥

김명수

 

갈고 갈아서 갸름한 곡선

맑고 맑아서 어리는 속살

금관은 아니지만

금관의 한 일부

저마다의 별들은

밤하늘 아니지만

밤하늘에 별들 있어

반짝이듯이

찬란함은 아니지만

찬란함의 한 일부

찬란함에 깃든

별들의 적요

영락에 스미는 무언의 환유

존재와 부재의 그 외로움

네 가슴에 어려오는

고요한 슬픔

 

 

 

굴다리

김명수

 

이른 아침 그 남자

빈 수레를 끌고 나가고

해가 지면

그 남자

빈 수레를 끌고 들어온다

 

언제나 비어 있을 그 남자의 허기

수천 개의 발자국이 짓밟아 간다

언제나 비어 있을 그 남자의 가슴

먼지와 바람이 스쳐 지난다

 

아! 아무도 모르는 그 남자의

서울살이 몇 년의 이력을 보라

가슴 속에 텅빈 실의를 보라

 

오늘 아침에도 그 남자

빈 수레를 끌고 나가고

오늘 저녁에도 그 남자

빈 수레를 끌고 돌아온다

 

 

 

그렇게

김명수

 

꽃은 여러 송이이면서도 한 송이

한 송이이면서도 여러 송이

나무도 여러 그루이면서도 한 그루

한 그루이면서도 여러 그루

내가 너에게 다가가는 모습

한결같이

네가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

한결같이

향기와 푸름과

영원함은 그렇게

꽃은 여러 송이이면서도 한 송이

한 송이이면서도 여러 송이

나무도 여러 그루이면서도 한 그루

한 그루이면서도 여러 그루

 

 

 

그림자

김명수

 

어둠 속에 눈 감으면

밀려드는 별들

감은 눈에 밀려드는

별들, 별들

명멸하고 생성하는

수많은 별들

떠오르고 흘러가는

아! 별들

감은 눈에 밀려오는

아득한 우주

 

빛 앞에 눈 감으면

피어나는 꽃들

감은 눈에 피어나는

꽃들, 꽃들

영화하고 화육하는

수많은 꽃들

벙글고 만개하는

아! 꽃들

감은 눈에 밀려오는

찬란한 홍채(紅彩)

 

별들과 꽃들 사이

멀고 먼 찰나

가뭇없이 사라지는

빈 그림자

아득하고

아득한 빈 그림자

 

 

 

그 봄의 식수

김명수

 

내가 이등병이었던 그해 봄

사월이라 식목일이라고

덕지덕지 언 손으로

후방사단 사령부 앞에 심은 한 그루 상록수

 

논산 훈련소에서 기합받고 얼어터진 손으로

빨래하고 식기 닦던 손으로 심은 한 그루 상록수

주번사관 김대위님 호루라기 독촉소리 들으며

(아, 지금도 `김대위님'이라고 `님'자가 절로 나오는)

사단사령부 태극기 걸린 콘크리트 막사처럼

한번 심으면 영구히 뿌리박은 한 그루 상록수

 

-전쟁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매일 아침 빗자루 들고 사역병이 되어

티검지 하나 없이 쓸던 사단장실 앞에

나는 그때 내가 심은 그 나무의 당번병이었다.

 

부목 대고 새끼줄 감고

물을 주며 가꾸던 그 나무는

내가 제대를 할 무렵

콘크리트 영구막사처럼 어느새 튼튼하게 뿌리 내려 버렸는데

 

지금도 허리 끊어진 남북분계선

시계(視界) 청소를 하는 병사들의 톱에

아름드리 소나무는 베어져나가는데

 

그 봄에 내가 심은 한 그루 상록수

내 동생이 언 손으로 보초를 서는

그 끊어진 허리에는 좀체

다시 옮겨 심을 수 없던 나무

 

 

 

꼽등이

김명수

 

선뜻 생각나지 않았다

꼽등이라는 이름

누구나 흔히

귀뚜라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꼽등이는 귀뚜라미가 아니다

내가 처음으로

일본의 어느 시인 시집에서

꼽등이라는 이름을 익혔는데

그 실물을 몰라 궁금해했지만

곤충도감을 찾아보고 꼽등이를 비로소 알았다

여느 때처럼

식구들이 잠든 밤

혼자 오랫동안

거실에 나와 불을 끄고 앉았다가

불을 켰을 때

펄쩍펄쩍 뛰어

책상 뒤로, 텔레비전 뒤로

숨는 꼽등이는

수염이 길고 메뚜기를 닮았지만

낮에는 좀체 제 모습을 안 보인다

누가 처음으로

야행성인 이 곤충을

꼽등이라 불렀을까

등이 꼽추처럼 둥글게 보여서 꼽등이라 불렀다면

꼽등이 이름은 너무 쉽게 지은 셈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정희수 시인은

밤이면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로 이사를 온 사람들이

나를 보고 무얼 하고 사느냐고 물어요."

"나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네."

정희수 시인은 다리를 몹시 절었다

나는 오늘 밤에도

식구들이 다 자고

거실에서 혼자 나와 앉았다가

귀뚜라미처럼 울지도 못하는 꼽등이가

수염이 너무 길고

뒷다리도 너무 가늘다고 여겨졌다

 

 

 

꽃꽂이 시간

김명수

 

그래

꽃꽂이 사범님이 말씀하셨다

줄기를 자르고

이파리를 솎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그래

밑동을 가위로 잘라 버리고

불지짐을 해두라고 말씀하셨다

꽃이 드문 날

겨울 마루에서

오래 오래 화병에 꽂혀 있기 위해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피지 않을 꽃망울은 솎아 버리고

어찌 오래도록 살아남기 위해

밑동에 불지짐을 당하는 게 너 뿐이랴

줄기째 잘리는 게 너뿐이랴

그래, 그래 꽃꽂이 시간이다

꽃이 귀한

겨울 안방이다

 

 

 

꽃 지듯

김명수

 

꽃 피고

꽃 지고

한참 뒤

봄이 간 줄을

떨어져

무른 꽃을

밟고서야

알았네

 

꽃 지듯

이 한 살이(生)도

앞뒤 안 재며

지기를

 

 

 

꿀을 먹을 때

김명수

 

꿀을 먹을 때 꿀벌들을 보느냐

꿀벌을 볼 때 꽃밭을 보느냐

꽃밭을 볼 때 꽃을 피운 흙을 보느냐

흙을 볼 때 흙에 스몄던 빗방울을 보느냐

빗방울을 볼 때 흙에 스몄던 빗방울을 보느냐

빗방울을 볼 때 구름과 하늘을 보느냐

꿀 한방울이 빗방울이 되고 빗방울은 또 하늘이 된다.

꿀을 먹을 때 단맛만을 보느냐

 

 

 

낙과

김명수

 

달려 있는 열매와 떨어진 낙과 사이

무심(無心) 흐른다

가지와 바닥 사이

머무는 평정

열매들은 모두에게 한 번의 일생

시간과 자연은 무방하다지만

바람은 이따금씩 태풍이 되고

푸른빛에 붉은빛이 희미하게 지나갔다

아직 못다 익은 과피의 흔적

낙과는 떨어져도

나무 아래 떨어진다

비바람 흔적 찾을 길 없다

낙과가 스스로 비바람이거늘

 

 

 

낙엽 냄새

김명수

 

물든 나뭇잎 속에

그대 마음이 들어 있다

아, 가을의 눈부신 변색

사람들은 그런 가을 날을

밟고 즐기며 사진을 찍는다

발자욱 밑에 깔린

계절의 화신

그러나 그대는 깔려 있는게 아니다

누워서 기다리는 거다

가로 눕고 세로 눕고 겹쳐누워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대 눈부심속에 잠시 머무는

사람들의 눈빛

오늘같은 날은 낙엽

사이사이 비가 스며들고 있다

아, 너의 살냄새

비에

젖은

 

 

 

남북 어로 한계선

김명수 

 

배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네

바다는 여전히 파도가 치고

소문은 흉흉하게

날로 퍼지네

높새바람 불던 날 떠나간 배가

꽃이 피고 잎 돋아도 돌아오지 않네

그 사이 생긴 아들

첫돌 지났지만

책상 위에 걸어 놓은 그대 사진은

언제나 웃고 있지 말이 없다네

누가 기억하랴

우리들 한숨

노모의 근심 낀 깊은 침묵을

고기떼 물결 따라 오르 내리고

갈매기들 해풍 따라 날아 들지만

바다 위 그은 금 보이지 않지

배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네

북방어로한계선에서 고기 잡던 배

알전등 밝게 켜진 언덕받이 집

온 식구 얼굴에 주름살 지고

배에 탄 어부들 돌아오지 않네

배에 탄 남편들 돌아오지 않네

 

 

 

내 오래도록 오르내리는 산길 중턱에

김명수

 

내 오래도록 오르내리는 산길 중턱에

튼실한 아름드리 참나무가 두어 그루 서 있다오

어느 때는 가끔, 가쁜 숨 가라앉혀

나무 곁에 다가가 가만히 걸음 멈춰

두 팔로 나무를 감싸 안아보지요

그러고 부드러운 나무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오

아마도 그런 날은 쓸쓸한 날이거나 우울한 날일 게요

또한 그런 날은 가망 없는 기대가

우리를 실망케 한 날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무를 안아보면

한자리에 뿌리 내린 아름드리 참나무는

언제나 변함없이 묵묵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따금 느낀다오

마치 우리가 철없던 어린 날 엉뚱한 잘못으로

부모님께 꾸중을 듣고 혼이 났을 때

근엄하면서도 자애롭던, 그리고 언제나

말수가 적으시던 백부나 조부님이

조용히 우리 곁에 다가와 우리 등을 감싸주던 그때 그 순간처럼

내가 나무를 안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나를 안아주는 것이라고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끼면서

나무와 내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을 맛본다오

그리하여 나는 꽃피는 봄날, 혹은 가을날

비록 우리네 하루가 덧없이 속절없이 흘러갈지라도

나도 또한 든든한 아름드리나무들로 인하여

새로운 힘을 얻어 세간의 도시로 발걸음을 돌린다오

 

 

 

너 속의 너

김명수

 

너 속의 너가 있다

너라고 부르면

너라고 하는 너

나 속에 내가 있다

나라고 불러보면

나라고 하는 나

거짓에 익숙한 혀는 어디 숨었나

분노에 눈감는 비겁은 어디 있나

아름다움은 차차 사라지고

너 속에 두려운 너가 숨었다

두려워하자

저 칭정한 가을 하늘 아래

모든 아름다운 시듦 앞에

이제는 차차 드높아지는

가을의 맑은 햇살 앞에

일 년의 씨를 영글게 하고

대지를 향해 고개 숙인

산등성이 이름 모를 풀포기 앞에

젊은 날 꿈꾸었던 아름다운 순수 앞에

나 속에 두려운 애가 숨었다

 

 

 

노굿 일어, 희미한 노굿 일어

김명수

 

열매는 다만 모래알 같고

어린 새 메마른 눈물 같다

 

갈퀴덩굴 한삼덩굴

얼크러진 벌판

노굿 일어 희미한

새콩 줄기 노굿 일어

 

여름 가고 다시 벌판

 

눈여겨 당신도 보지 않고

눈여겨 당신도 거두지 않고

 

새콩 줄기 끝매듭에

맺힌 열매

땅속에도 감춰 지닌

여분의 열매

 

지닌 것 오직 이것이오니

누리에 바치는 가녀린 공양

누리와 하나 되는 가녀린 숨결

 

 

 

김명수

 

녹은 칼에 잘 슨다

녹은 새파랗게 갈아놓은 칼날에 잘 슨다

녹은 도끼에도 잘 슨다

녹은 지하실 바닥에 감추어 둔

지난달에 버려 둔 도끼날에 잘 슨다

녹은 저 혼자 힘이 겨우면

습기의 힘을 빌어서도 슨다

공기의 힘을 빌어서도 슨다

칼의 힘을 믿는 순간

도끼의 힘을 믿는 순간

녹은 제 몸과 더불어 칼날을 삭여낸다

남몰래 남몰래 쇠붙이를 삭여낸다

 

 

 

김명수

 

꽃 동지야

잎동지야

나는야 기다리네

엄동(嚴冬)

눈보라에

나는 먼저 기다리네

선득한

바람 속으로

다녀가게

어떤가

 

자작나무 껍질 위에

보고 싶다

보고 싶다고

수없이 할켜대는

상처로 남는들

봄날에

꽃보라 되어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넘어가세

 

 

 

눈 귀 가슴 손

김명수

 

문밖에는 문밖에는 태양도 꺼졌는데

캄캄한 어둠속에 캄캄한 어둠속에

두근대는 가슴, 가슴들

 

문밖에는 문밖에는 태양도 꺼졌는데

캄캄한 어둠속에 캄캄한 어둠속에

반짝이는 눈, 눈들

 

문밖에는 문밖에는 태양도 꺼졌는데

캄캄한 어둠속에 캄캄한 어둠속에

모아 듣는 귀, 귀들

 

문밖에는 문밖에는 태양도 꺼졌는데

캄캄한 어둠속에 캄캄한 어둠속에

마주잡는 손, 손들

 

문밖에는 문밖에는 태양도 꺼졌는데

그 태양도 다시 밝힐

눈과 귀와 가슴과 손들

 

 

 

눈물겨움에 대하여

김명수

 

세째 이모가 왔다 가는 날은

신작로가 젖는다

눈물로 젖는다

빌목과 무릎은 이슬로 젖고

풀잎과 들꽃은 바람에 젖지만

가슴과 두 볼은

눈물로 젖는다

 

 

흰구름 가는 저쪽

노을지는 산동네

셋째 이모는 왜 울고 가나

머리에 이고 가는 콩 한되 팥 한되

쌀 한말과 마늘 두어접

한 걸음마다 뒤 돌아보고

세걸음마다 눈물짓고

나는 텅빈 신작로에 서서

덩달아 눈물 닦는다

 

 

 

늑대와 개

김명수

 

누가 저

늑대를 보고 개라 이르느냐

누가 저 늑대를 보고

우리집 누렁이라 말을 하더냐

꼬리가 길고

털이 누렇고

두 귀가 쫑긋하고 겉모습이 같다 하여

늑대는 우리집 누렁이가 아니다

한밤중 캄캄한

우리 마을에

붉은 달 피칠하고 뛰어 들어와

누렁이 목줄기를 송곳니로 물어 뜯던

저 네 다리 비슷한

늑대를 보고

누가 저 늑대를 개라 이르느냐

누가 저 늑대를 보고

우리 집을 지키는 누렁이라 속느냐

 

 

 

니체를 덮으며

김명수

 

낡은 나에 순종하느니

낡은 나에 긍정하느니

치열하게 저항하고

치열하게 부정하고

같잖은

떼거리를 벗어나

위함 속으로

홀로 가자

 

 

 

다시 들국화에 부쳐

김명수

 

내 마음 다다를 곳 어디 있다면

가을볕 외진 언덕 어느 산자락

들국화 고요히 피는 산자락

그 꽃 홀로 피어나 향기 지니고

그 꽃 홀로 제 향기 지니지 않고

청명도 향기도 서로 물드는

내 마음 다다를 곳 어디 있다면

 

 

 

단추

김명수

 

떨어져 있는

단추 하나를 바라보면

간밤

검은 구두 발자욱 남아 있지 않다.

 

떨어져 있는

단추 하나를 바라보면

지난밤 짧게 울던

초인종(招人鐘) 소리,

소리도 없던 회오리바람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다.

 

떨어져 있는 단추 하나에는

간밤의 흐릿한

외등(外燈) 흔적뿐

 

떨어져 있는 단추 하나여

오늘 아침 무심히

내 발길에 밟히는

단추 하나여.

 

 

 

돼지가 낳은 달걀

김명수

 

닭이 닭장에서 알 낳는 걸 돼지가 보았다.

알 낳는 닭은 <거울 보는 닭>이었다.

주인이 알 낳는 그 닭을 칭찬했다.

돼지가 주물공장을 찾아갔다.

주물 공장 안에는 쇳물이 펄펄 끓고 있었고, 형틀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몸에 꽉 끼는 쇠 옷을 만들어 주세요. 엉덩이 부근에 도넛 크기만 한 구멍을 뚫어주세요"

돼지는 다진 모래 속에 들어가서 형틀을 만들었고 주물공장 사장은 형틀에 쇳물을 부어 돼지의 쇠옷을 만들었다.

돼지는 다음날 주물공장 사장님이 만든 옷을 찾아와 입었다.

돼지는 살이 쪘다.

엉덩이 부근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돼지의 살이 삐어져 나왔다.

알 낳는 닭을 칭찬하던 주인이 돼지고기를 먹고 싶을 때면 구멍 밖으로 삐어져 나오는 살을  잘라 먹었다.

돼지는 엉덩이에 상처가 아물지 않았지만 오래 오래 살았다.

당신도 돼지고기를 먹을 때 조심해서 살펴보아라!

당신이 먹는 고기가, 돼지가 엉덩이 구멍 밖으로 밀어낸 살인지도 모른다.

아니, 돼지가 낳은 달걀인지도 모른다.

 

 

 

만월(滿月)

김명수

 

내 죄지은 사랑에 대하여

그대 만나고 돌아오는 길

둥근 달이 내 뒤를 따라왔어요

죄짓고 고개 숙여 걷는 내 곁을

손잡고 함께 걷자 따라왔어요

 

 

 

메밀

김명수

 

오월에 밭을 갈고

유월에 다시 갈고

씨앗에 재를 섞어

씨 부리기 전 다시 갈아

여름날

도리깨질에

온 마을이

구수하다

 

 

 

무개차(無蓋車)

김명수

 

컥컥 컥컥

내 종고종 매형의 바튼기침 받아 먹고

저 무개차의 석탄들은 오늘도 실려 가고

바람도 자고 있는

사택 지붕 위에

시커먼 달덩이는 막막하게 떠오른다

매형은 오늘밤 어디 있는가

낙동강 범람하면 황토물 굽이치고

가난한 고향 집도 휩쓸려 흘러갔다

오늘밤 누가 절망하고 있는가

여름 되면 쩍쩍 봉답논은 갈라지고

소리 소리 지르던 아버지 누런 얼굴

깊고 깊은 막장 캄캄한 어둠 속에

곡괭이로 찍어 봐도 어둠은 끝이 없다

소리쳐라 소리쳐라 기차가 가고 있다

무개차 석탄차들 철교를 지나

울음 같은 탄무데기 터널을 지나

한 식구 태워오던 영암선 느린 기차

오늘밤 어느 누가 절망하고 있는가

갱도 무너지던 그해 여름 수직 사갱

지하 삼천 미터 낙석에 치여

한쪽 다리 절름이는 매형의 일생아

아직도 그의 삶에 지붕이 있는가

찬비 서리 막아줄 지붕조차 있는가

 

 

 

물안개

김명수

 

바지를 벗어 말아 머리에 얹고

깜장고무신 같이 싸

함께 얹고

여울로 할매와 손잡고 건넜다

토채비가 나온다는 합수목에도

잉어가 철썩 뛰는 용머리 소에도

이른 아침 물안개는 자욱이 피고

종아리에 물살이 살랑거렸다

어디로 가던 날이었던가?

기억은 희미하다

일곱 살 나던 봄날

이른 아침에

얕은 여울 건너서 다시 바지 입고

젖은 발에 고무신 다시 신고

돌자갈 강변 건너 신작로 따라

강물 따라 삼십 리 읍내까지 걸어

옥양목 할매 적삼 새물내 내음

얕은 여울 흐르던 여울물 소리

발목에 감기던 뒷냇물 소리

 

 

 

민들레

김명수

 

어머니가 부르던 이름도 버리고

벗들이 부르던 이름도 버리고

세상에서 부르던 이름도 버리고

 

내 이름을 아는 자, 그들에게도 잊혀지고

봄날의 민들레야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야

흩날리는 바람결에 내 이름도 버리고

 

 

 

발자국

김명수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방아깨비

김명수

 

방아깨비는 모든 메뚜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타고 났습니다.

시원스럽게 죽 뻗은 허리의 모습과 펴면 보드라우면서도 힘이 있는 날개가 매우 아름답지요.

그 중에서도 길쭉한 뒷다리의 자태는 때때메뚜기나 벼메뚜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우아한 모습과는 반대로 방아깨비는 매우 겁쟁이입니다.

사람의 손이 뒷다리에 닿기라도 하면 무턱대고 덜컹덜컹 방아를 찧습니다.

두 눈은 불안스레 껌벅거리고 더듬이도 겁이 나서 웅크립니다.

펴면 파란 들판이 더욱 빛을 낼 날개는 아주 접어 버립니다.

 

어느 날 송장메뚜기가 방아깨비를 찾아왔습니다.

'방아깨비야, 무턱대고 덜컹덜컹 방아를 찧지 마! 네 길쭉하고 자랑스런 두 다리에 비해 덜컹덜컹 방아를 찧는 모습이 너무 서글퍼. 사람의 손이 뒷다리에 닿아도 덜컹덜컹 굽신굽신 방아를 찧지 마!'

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방아깨비한테 굉장히 의미 깊은 날이 다가온 것입니다.

방학을 맞아 멱을 감으러 냇가로 나온 한 아이에게 그만 방아깨비가 뒷다리를 잡혀 버린 것이었습니다.

방아깨비는 아이의 손이 뒷다리에 닿자마자 덜컹 겁부터 났습니다.

그러나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더듬이를 곧추세웠습니다.

며칠 전 송장메뚜기가 한 말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뒷다리를 쭉 뻗고 파란 들판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는 움직이지 않는 방아깨비를 방아를 찧게 하려고 억지로 흔들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방아깨비는 아이의 손 반동을 이용해 아이의 손에서 힘껏 날았습니다.

 

멀리 멀리 날아서 풀밭에 앉은 방아깨비 곁으로 때때메뚜기와 벼메뚜기가 모였습니다.

송장메뚜기도 날아 왔습니다.

그러나 방아깨비는 뒷다리 하나를 소년의 손바닥에 희생물로 남겨놓고 온 것을 몰랐습니다.

다른 메뚜기들이 모두 슬퍼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리 한짝을 소년의 손바닥에 남겨 놓고 온 후로는 덜컹덜컬 방아를 찧는 비굴함으로부터는 해방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덜컹덜컹 굽신거리는 버릇이 없어졌으니까요.

그것이 아니라 굽신굽신할 다리마저 온전하지 않았으니까요.

 

 

 

배추와 무가 없어지던 날

김명수

 

농부가 땅을 파고 배추씨를 뿌렸다

채소밭에 배추가 무성하게 자랐다

거둘 때가 되자 배추는 집체만큼 커졌다

배추를 뽑아보니 배추 뿌리 자리에 전봇대만한 커다란 무도 달려있었다

농부는 그 배추를 '무추'라고 불렀다

 

이웃마을 농부가 땅을 파고 배추씨를 뿌렸다

채소밭에 배추가 무성하게 자랐다

거둘 때가 되자 배추는 집체만큼 커졌다

배추를 뽑아보니 배추 뿌리 자리에 전봇대만한

커다란 무도 달려 있었다

이웃마을 농부는 그 배추를 '추무'라고 불렀다

 

그때부터 세상에는 배추가 없어졌다

그때부터 세상에는 무가 사라졌다

그리고 무추와 추무가 생겨났다.

 

 

 

버섯

김명수

 

숲 너머 저편 밝은 세상은

환한 꽃도 활짝 핀

햇살 속인데

어두운 골짜기 습지로 가면

남몰래 돋아나는 울음을 보네

 

꽃 한번 피워보랴

씨 한번을 맺어보랴

인적 없는 습한 땅에 홀씨로 돋아

 

누구 위한 끝 모를 상사이더냐

네 무슨 그리움 그리 많길래

큰 눈물 비온 뒤에 벌겋게 돋았느냐

 

 

 

별빛이 늙은 몸에 걸려 꿈꾼다

김명수

 

모든 존재는 별빛에 걸려 꿈꾼다

 

밤의 강물, 새벽 산길

별빛에 걸려 꿈꾸고

말들의 누더기, 무겁게 휘어진 생애

별빛에 걸려 꿈꾼다

 

모든 존재에 꿈이 있다면

존재로 드는 길이 있을 것이다

모든 존재에 길이 있다면

길로 드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길 위에 물끄러미 서 있는 늙은 사람 하나 있다

늙은 사람은 별빛에 걸려 꿈꾸지 않는다

별빛이 그의 늙은 몸에 걸려 꿈꾼다.

 

 

 

봉답(奉畓)

김명수

 

할매요

60 평생을 홀로이신 할매요

열여덟에 나이 어린 낭군님

사별하신 할매요

진성이씨(眞城李氏) 양반 가문에 태어나셔서

6․25 때 흔적 없는

양자 하나 기다리고 사는 할매요

할매요

흰 머리도 이제는 붉게 변한 할매요

풍년이 들었니더

봉답논 여덟 마지기에

풍년이사 들었니더 할매요

길쌈으로 직조로

품앗이로 이뤄 놓은 뒷골 봉답논에

풍년이사 들었니더 할매요

훼재도 없이 나락은

고개를 숙였니더 할매요

할매요

지금도 새벽이면

지금도 새벽이면

물 한 그릇 떠다가 장독 위에 올려놓고

새벽 하늘 눈물 별 바라보시고

호미들고 맨 먼저 들로 나가시는 할매요

올해는 풍년이사 들었니더 할매요

풍년이사 들었니더 할매요

 

 

 

북두칠성(北斗七星)

김명수

 

먼 길 떠나시던

아버님 발자욱이 보인다

 

어두운 밤 홀로 흰 두루막자락 날리시며

검은 산(山) 넘어 넘어

먼 길 가시던 날.

 

어머님이 감추시던

눈물어려 몇 방울

 

내 이젠 나이 들어 어린 딸 거느리고

여름 저녁 한때 언덕에 서면

 

만주(滿洲)땅 어느 곳에 잠들어 계실

아버님 모습……

 

풀벌레들 정적 더하던

고향(故鄕) 옛 집에서

철 모르던 우리 남매(男妹) 잠재워 놓고

 

두만강(豆滿江)

된서리 묻어 온 두루마리

남 몰래 읽으시던 우리 어머니

 

촛불에도 떨리시던

당신의 눈물 모두 어려 보인다.

 

 

 

비빔밥 한 그릇

김명수

 

콩나물이 뚝배기 속에 보이고

고사리도 뚝배기 속에 보이고

새빨간 고추장도 뚝배기 속에 보이고

살코기 참기름 깨소금도 뚝배기 속에 보이고

 

콩나물 맛이 그래서 분명히 담겨 있고

고사리 맛이 그래서 분명히 살아 있고

고추장 매운 맛도 그래서 분명히 살아 있고

 

그런데 콩나물 맛만은 아니다

고사리 맛만은 아니다

고추장 맛만도 아니다

 

이 맛은 저마다 합쳐져서 빚어내는

오래 전 조상들이

다독거려 간직해 온

언제나 한결같은 한 가지 맛이거늘

 

내 오늘 이 도시 한 허름한 식당에 들러

콩나물도 고사리도 새빨간 고추장도

다 함께 어우러진 비빔밥을 맛보면서

 

먼 훗날 우리 모두 다 함께 어우러질

아름다운 그 큰 힘을 아득히 꿈꿔 본다

 

 

 

사랑

김명수

 

바다는 섬을 낳아 제 곁에 두고

파도와 바람에 맡겨 키우네

 

 

 

사막의 노래

김명수

 

뼈가 뼈를 기다린다

살점이 살점을 기다린다

눈물이 눈물을 기다린다

 

단단한 뼈 하나 홀로 떨어져

썩다 남은 살점 하나 홀로 떨어져

모래에 스며 버린 눈물 한 방울 홀로 떨어져

 

거두어다오 나의 허연 뼈

흰 보자기로 덮어다오 썩어가는 살

푸른 손수건으로 닦아다오 뜨거운 눈물

 

헛된 것이 아니다

헛된 것이 아니다

증거도 없는 뼈가 뼈 한 토막을

눈 가리고 끌려온 살 한 점이 살 한 점을

한밤중에 끌려온 눈물이 눈물 한 방울을

 

부르고 있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니다.

뼈야 살점아 증거도 없이 스밀 우리들의 눈물아

가거라 뜨거운 불볕 사막으로

 

뼈가 회오리바람에 쓰러지는 곳

살이 불볕에 익어 타는 곳

푸른 풀 푸른 숲이 질식하는 곳

사막으로 가거라 불볕 사막 속

 

가서 한데 어우러져

뼈는 뼈 부여잡고 살은 살 부여잡고

눈물은 눈물 부여잡아 일으켜세워

 

산이 되고

강이 되고

들판이 되어

 

먼저 가서 기다리던 뼈 한토막

살 한 점 눈물 방울 헛되지 않게

가거라 사막으로 가거라

 

 

 

산수유꽃을 보며 - 쓸쓸한 사랑

김명수

 

식장산 산책길 모퉁이에서

제일 먼저 화사한 얼굴로

나를 반겨 주더라

 

스스로 얼음이 풀리는가 싶더니

나무숲에서 하늘하늘

새색시처럼 걸어 나오더라

 

여기가 봄이라고

여기서부터 봄이라고

아기손같이 꽃잎을 흔들더라

 

 

 

상처

김명수

 

경기도 의정부시 가릉 3동

롱비치 하우스를 지나

무지개홀을 끼고

쟈니숍 골목으로 한참을 들어가면

거기 좁다란 골목은 이어지고

그 끝,

덜 탄 연탄재가 서너 개 나뒹구는

빈터 보잘 것 없는 작은 집 한 채

 

그 집 초라한 대문 곁에

대나무로 깃대 세운 무당집 방 한 칸

 

순이 순이 스무 살 날 순이

강원도가 고향인 스무 살 난 순이

술에 취해 찾아와 점을 치고 있다

 

 "빌리가 글쎄 가버렸어요

  토요일 오후에 다시 온다 해놓고

  본국으로 열흘 전에 도망쳤어요."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무당은 신장대를 흔들어대고

몸 팔아 번 돈 5달러 지폐가

옻칠한 소반 위에 놓여 있는데

 

 "빌리가 언제 다시 찾아올까요

  편지라도 한 장 보내줄까요?"

 

손톱칠도 벗어진 그녀 손목에

담뱃불로 지져버린

시뻘건 상처 하나

 

 

 

새꽃

김명수

 

갈매기와 함께

축산(丑山) 포구에서

새꽃을 보았다

바람과 함께, 북풍과 함께

마주 보지 않는 새

갈매기와 함께

새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오래오래

새꽃을 보았다

바다에 갇힌 새

갈매기와 함께

 

 

 

서빙고를 지나며

김명수

 

청량리에서 기동차를 타고

왕십리를 지나 용산을 간다.

 

이촌동 쪽에 새로 이사를 간 내 이종은

한강을 끼고 살고 있는데

 

기동차에서 바라보는 왕십리 쪽 바위산 집들은

한치의 땅도 없이

예나 이제나 가파른 바위산에 비좁게 서 있다.

 

차가 한 정거장을 더 가면 다가서는 서빙고역

제법 야트막한 구릉을 끼고 돌면

이내 파아란 잔디밭이 이어지고

그 안 넓은 언덕에

깃발을 세운 채 미군부대 건물들이 듬성듬성 서 있다.

 

마침 토요일 오후인지

이중으로 삼중으로 겹겹이 쳐진 철조망 속에

사복 차림의 미군들이 한가로이 골프를 치고 있고

`출입엄금'이라는 영문자 경고판이

붉은 글씨로 싸늘하게 씌어 있는 영문 밖에는

우리 겨레들의 행상 리어커와

먼지를 펄썩 일으키는 만원버스가 달리고 있는데

 

고개를 돌려 어두운 시선으로 한강을 보면

멈춘 듯 고요한 서러움의 강물이

그래도 천천히 흐르고 있음이

눈물겹게 반갑다.

 

 

 

선창 술집

김명수

 

앵미리 굽는 연기가 술집 안에 자욱하다

오징어배를 탔던 사내 장화를 신은 채

목로에 들어와 소주를 마신다

주모는 술손님과 너나들이로 스스럼이 없다

남편도 옛날에 오징어배를 탔다 한다

사내들이 주모에게 소주잔을 건네고

주모가 서슴없이 술잔을 받는다

진눈깨비 몰아치고 날씨가 사납다

술청 안에 욕설이 뒤섞이고

멱살잡이가 벌어진다

자정이 넘어서야 술집 불이 꺼지고

비틀대며 사내들이 선술집을 나선다

동이 트자 환한 해가 술청으로 쏟아진다

어느새 주모가 선창으로 나선다

안주감을 흥정하는 그녀의 얼굴에

싱싱한 아침해가 환하게 빛난다

 

 

 

소나무와 잣나무들

김명수

 

늦가을 산속은 이미 겨울이다

골짜기는 벌써 얼음이 깔렸고

응달에도 어느새 눈이 쌓였다

 

숲길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자옥했다

여타의 나무들은 이파리를 벗었다

 

그 길을 일행 없이 홀로 걸었다

 

"다음에도 우리는 소나무와 잣나물까?"

 

착각인 듯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소나무와 잣나무 일색이다

 

이파리는 푸릇푸릇 푸른빛을 띠었고

두 종류의 나무들은

남남인 듯 이웃인 듯

무연하게 서 있었다

 

"다음에도 우리는 소나무와 잣나물까?"

 

다시 또 둘러봐도 소나무와 잣나문데

소나무는 잣나무는 푸른빛이 형벌인 듯

이승의 시간 속에 적막하고 적요하다

 

 

 

소낙비

김명수

 

나는 그 여자의 문을 두드린다.

숨가쁘게 계단을 뛰어 올랐다.

 

한 번을 두드린다,

대답이 없다.

두 번을 두드린다,

대답이 없다.

 

세 번을 두드린다, 조금 세게……

대답이 없다.

 

네 번을 두들긴다, 다섯 번을 두들긴다,

끝없이 끝없이 백 번을 천 번을

급하게 두들긴다, 대답이 없다.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대답이 침묵이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대답이 아주 깊은 잠이란 것을

 

그러나 내 주먹은 그침이 없다

내 주먹이 내 가슴을 쿵쿵 울릴 때까지.

 

어둠에 잠긴 먹구름 속에

천둥이 울려 내 가슴 치고,

 

마침내 번갯불이 그녀에 닿아

침묵의 옷가지를 벗을 때까지.

 

 

 

소리 씨앗

김명수

 

늙은 호박 하나, 한아름이다

덤불이 메마르자 형상이 드러났다

누런 겉껍질 흉턷도 있다

소리는 어떻게 숙어졋나

목젖 떨림이 잦아지면서

가랑비에 소나기 스며 있었다

천둥 번개도 잠재웠으리라

구린내도 오랫동안 품어왔으니

그렇다면 구린재도 소리가 되고

한줄기 소변도 시원하리라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들엇다

소리는 이제 없고 소리 씨앗만

주름진 흉중에 품고 있으리

 

 

 

소속

김명수

해지는 저녁 들판

까마귀 울어

  

까오, 까오 까마귀

까마귀 소리

 

어느 편 어느 쪽에

소속하지 않는

 

하늘과 땅에도

소속하지 않는

 

까마귀 것도 아닌

까마귀 소리

 

 

 

숲이 숲인 것이

김명수

 

숲이 숲인 것이 우연이 아니다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닌

저 굳건한 나무들의 뿌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굳건한 뿌리 위에 가지는

가지대로 화목스럽고

줄기는 줄기대로 무서히 뻗어서

비바람 이겨내며

큰 힘 이룬 것은

 

숲에서 돋아나는 한포기 풀과

숲에서 뛰어노는 다람쥐 한 마리

작은 짐승들까지도

모두 다 생기에 차서

숲이 숲으로 빛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들이 지친 다리로 숲속에 들면

가슴 하나 이내 가득차는

숲속에 있는 살아 있는 공기

 

숨 쉴 수 있는 공기 속에

만물이 생동함은 우연이 아니다

 

 

 

심장(心臟)

김명수

 

비수(匕首)가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칼끝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백주 대로에서

캄캄한 골목에서

왜 비수는 심장을 노리는가

왜 심장은 비수 앞에 당당한가

 

 

 

아는 이름들이

김명수

 

아는 이름들이 한아름 다가왔다

태풍이 잦아진 포구였거든

갓밝이 뿌윰한 빛에 싸였다

휩쓸린 부표들과

뒤엉킨 그물들이 공기 같았다

묶여 있는 고깃배가 수평선을 떠올린다

어디서 들려오는 묵음이 있다

여명이 농아처럼 내 귀를 막았다

귀는 태풍의 눈이었구나

그 귀가 소리 찾아 난바다 넘어가면

해안선에 안겨 있는 나지막한 집들과

동트면 드러날 푸른 지붕들이

바다에겐 모두 다 아는 이름이다

바다에겐 모두 차별 없는 이름이다

 

 

 

아셨나요, 언제까지

김명수

 

세상에 내 모습 내가 얻기 전

나는 이 길을 걷고 있었다

바람 안온하고 볕은 다양했다

솜양지가 해맑게 피어 있었다

먼 옛날 하루처럼 눈부셨다

 

내 그림자 이윽고 그늘 따라 잦아든 후

나는 이 길을 걷고 있었다

햇살 따스하고 하늘 눈부셨다

패랭이가 새뜻하게 피어 있었다

먼 훗날 하루처럼 눈부셨다

 

또다른 나는 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또다른 너도 있다

 

아셨어요, 아셨나요

언제까지, 언제까지

 

 

 

앵무새의 혀

김명수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 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어머니의 눈물

김명수

 

마당 한 켠에 쭈그리고 앉아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는

어미의 머리 위에

별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지금의 어머니 흰 머리카락 숫자만큼

빛나는 별들이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쏟아질 듯 다가오던 그 밤!

아이를 안은 채

어미는 울고 있었다

별의 반짝임보다 어미의 눈물이

더 반짝이던 밤

은하수 아래

앵두꽃이 막 피려 할 무렵

새우깡이 먹고 싶었던 아이

사탕을 좋아했던 아이

고기반찬 하나 없어도

밥 잘 먹던 아이

우리 어머니 큰아들이

울고 있었다 엄마 품에 안겨

덜 익은 국수 냄새를 풍기며

엄마! 세상에서 국수만 아니면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하며

칭얼대는 소리에 어머니는 밤하늘만

흘기고 있었다

죄 없는 밤하늘

가난이 뭔지 사전적 의미조차

모르던 시절

마지막 남은 쌀알들을 긁었다

어미의 심정이 그럴까

차라리 너랑 나랑 죽자

독백처럼 던졌던 그 말의 의미를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그 시절

쌀 살 돈이 없어 매일 국수로

끼니를 때웠던 그때

어머니가 떠주신 흰쌀밥을

볼이 터져라 받아먹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쌀밥을

사흘 후 할아버지 기일에 쓸

쌀로 지은 밥을 게 눈 감추듯 감추고 있었다

어머니 가슴 그곳에 흐르고 있는 피멍 든 바다

 

그 밤

내 생에서 잊지 못할

별의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머니 눈에서 떨어지는

반짝임으로 아이는 웃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물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제의 바람은 그치고

김명수

 

어제의 바람은 그치고

오늘의 바람이 불고 있다

 

어제의 바람은 꽃잎을 지게 하고

오늘의 바람은 나뭇잎을 흔든다

 

비바람 속에 흔들리는 나무여

비바람 속에 흔들리는 초목이여

 

우리의 오늘도

우리의 역사도 무엇이 다르랴

 

풍우 속에 나무는 상처를 지니고

설한 속에 나무는 무늬를 지니나니

 

우리의 삶도, 우리의 역사도

비바람 없이 어찌 내일을 맞으리

 

상처를 안은 나무여

바람 속에 나이테를 지니는 나무여

 

어제의 바람은 그치고

오늘의 바람이 불고 있다

 

어제의 바람은 꽃잎을 지게 하고

오늘의 바람은 나뭇잎을 흔든다

 

 

 

옥수수밭

김명수

 

옥수수밭에 들어가면

옥수수밭이 되고 싶어요

 

옥수수밭에 

옥수수가 커졌어

 

아가야, 옥수수밭에

들어가보렴! 

옥수수밭에 들어가서

옥수수가 되어보렴

 

너풀거리는 이파리는

소낙비와 마주하는 7월의

검푸른 영혼일 거야

 

 

 

우수(雨水)

김명수

눈 녹은 우수(雨水) 날

외출에서 돌아오는 골목 안

야트막한 북향집

대문은 삐끗 열려 있고

응달진 마당 구석

아직도 덜 녹은

때에 절은 눈 더미가

쌓여 있는데

겨우내 묶여 있던

수척한 개 한 마리

목줄 묶인 채 대문턱에 나앉았다

눈에 회백 내려앉은

눈굽 아래 두 줄

절은 듯

적갈색, 눈곱 눈물줄기 흔적

본래 흰빛일

때에 절은 털빛은 희읍스레한데

파리하고 여윈 그 개

지나치는 나를 보고

꼬리를 사린다

돌아와 불 끈 잠자리에서

응달에 묶여 있는

그 개와 더불어

결핍과 격리 속

또 다른 생명들

영어(囹圄)의 생명들도

우수(憂愁)의 그림자를

겹쳐 보인다

 

 

 

월식(月蝕)

김명수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욱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우리나라 꽃들에겐

김명수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 틈에 뿌리 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유리칼

김명수

 

금강석의 유리칼이

매끄러운 유리 위에 금을 긋는다

 

거짓말처럼

익숙하게도

유리는 이등분으로 짤려 나간다

 

속수무책이다

단단한 것에는 더 단단한 것이

이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짤려진 유리는

이 쪽에 한 장

저 쪽에 한 장

 

창틀에 끼워져서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창틀이 된다

 

저 쪽과 이 쪽을

딴 세상으로 비춘다

 

나는 서쪽 창에 기대서서

움직일 수 없는

창 밖을 본다

 

 

 

이별

김명수

 

바다였는지 큰 호수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삭풍의 도움 받아 가는 배가 있었다

 

 

 

인연

김명수

 

모래 속에 모래 하나 있었지요

바람 속에 바람 하나 있었지요

모래는 그저 모래

바람은 그저 바람

물결 속에 물결 하나 있었지요

물결도 그저 물결

모래는 모래를 그리워했지요

바람은 바람을 그리워했지요

물결은 물결을 그리워했지요

아득한 모래사장

무심한 바람

반짝이는 물결

 

 

 

자를 보며

김명수

 

한때는 분명 대나무였던 것을

누군가가 눈금을 파고 새겨서

비로소 하나의 자가 되었다.

누구든지 이걸 보면 재려고 든다.

길이든 폭이든 넓이든 거리든

아무도 더는 대나무라 하지 않고

누구도 이제는 자라고만 부른다.

 

 

 

저 파아란 하늘 속에는

김명수

 

저 파아란 하늘 속에는

보고 싶은 엄마의

숨은 얼굴이 있지

 

지금, 나뭇가지를 흔드는

하얀 바람 속에는

엄마의 다정한 이야기가

몰래 몰래 숨어 있지

 

활짝,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보면

어느새 두 손을 펴고 달려와

나를 꼬옥 껴안는

엄마의 따스한 가슴

 

뜰 앞에 서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잡고

엄마를 생각하면

나뭇가지 끝에선

엄마의 옛날이야기가

엄마의 자장 노래가

은은히 흘러나오지

 

 

 

전쟁이 그 꽃을 심어주었다

김명수

돌아가신 아버지께

물어보지 못한 말이 남아 있었습니다

임하면 대추월, 옛날 우리 집

꽃꿈처럼 피어나던 겹겹 황매화

꽃밭 황매화는

누가 심으셨나요?

길고양이 울어대는

추운 겨울밤

무릎 시린 새벽녘 언뜻 잠깨어

물어본다, 물어본다

못 물어봤던

황매화는 어느 때

누가 심으셨나요?

아버지가 목소리로

대답하셨어요

추운 겨울이 심어주었다

전쟁이 그 꽃을 심어주었다

 

 

 

점경(點景)

김명수

 

먼 산에 아직도 잔설이 남아

바람 끝은 살결에 차기만 한데

여기는 남도 벌판

흙바람이 인다

 

지난해 봄날을 누가 모르랴

바라보면 서러운 들판 끝머리에

봄빛은 그래도 찾아오는지

 

헐벗은 산맥들은 가차이 다가서고

냇물도 다시 풀려 흐르고 있다

 

아, 우리네 서러움도 저렇듯 강물처럼

마음 깊이 눈물을 묻어야 하랴

 

겨우내 말을 잃은

흰옷 입은 백성들은

버려 둔 연장들 하나씩 꺼내 와

묵묵히 들판에서 흙을 덮는데

 

아지랭이 어리는 양달 냇둑에

어린 딸들 점점이 쑥을 뜯는다

 

 

 

주먹 원숭이

김명수

 

이 세상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본 한 중년 신사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에는 참 신기로운 것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살아간다는 원숭이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지금도 이 세상 어느 숲에 가면 주먹 크기만 한 작은 원숭이들이 흉포한 맹수들의 이빨에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나뭇가지에 흡사 과일처럼 매달려 산다고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무섭기만 한 땅에서 힘없는 작은 원숭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란 고작 피가 거꾸로 흐르는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그러나 바람이 불면 바람에 흔들리면서 표범이나 삵괭이 눈치를 피하며 사는 그것들은 때때로 자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소낙비처럼 산사태처럼 최후의 수단으로 나무에서 쏟아져 내려 그 무서운 삵괭이와 표범을 깔아 덮쳐 죽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질그릇

김명수

 

처음에는

흙과 물이

사람의 살로 섞이다

머물고

흐르는

불길 속의

단단함

 

활활활

흙, 물, 불이 녹아

그릇이 되는

비의(秘儀)라

 

 

 

집어등(集魚燈)*

김명수

 

꽃밭 속일까

바다 속이 정녕 꽃밭 속일까

대관령 위 너훌너훌

흘러가는 흰 구름 속

그 구름 뭉게구름 꽃밭 속일까

 

아니라네 아니라네

뱃사내들 혼령 삼킨

시퍼런 바닷물 속

열 번도 고개 저어 꽃밭 속 아니라네

 

해마다 여름 되면 이까*철이 돌아오고

이까철 돌아오면 오징어배 타던 사내

이른 새벽 단칸방에 처자식 남겨두고

 

나누는 몫 3․7 제

고용살이 밤샘 어로

파도에 목숨 거는 생떼 같은 사내들아

 

피 토하는 통곡 소리

부둣가에 들리는데

끝 모를 그 밑바닥 어질머리 바닷물 속

 

오징어잡이 불꽃이 너무 밝아서

밤새워 허기져 물레 돌릴 때

그대 눈에 헛보이던 시퍼런 바닷물 속

그 바다 천 길 파도

꽃밭 속 아니라네

 

그대 혼령 삼켜버린

시퍼런 바닷물 속

그 바다 너훌너훌

흰 구름도 아니라네

 

* 오징어잡이를 할 때 켜는 등불. 2,500촉짜리 전구를 한 배에 100여 개 이상 단다고 한다. 어부들은 그 뜨거운 불빛 아래 밤새워 어로작업을 하다 보면 바다가 마치 꽃밭 속인 것처럼,흰 구름 속인 것처럼 착란을 일으켜 바다에 실족해 빠져 죽게 된다는 이야기를 속초 부두의 한 선술집에서 들었다.

** `오징어'의 일본식 발음, 즉 いか. 속초 지방에서는 흔히 이렇게들 부른다.

 

 

 

찔레 열매

김명수

 

12월달 어느 날

싸락눈이 내린 오후

어린 아들 함께 산에 오르다가

얼음 덮인 골짜기에

빨간 열매를 보았네

 

황량한 골짜기에

풀잎들은 서걱이고

마른 나뭇가지들도 정적에 싸였는데

긴 겨울 잎 떨어진 찔레덩쿨 위에

서리에도 안 떨어진

그 열매가 눈부셨네

 

이제 겨울 깊어

흰눈 쌓이면

모이 없는 멧새들이 와서 따 먹으리

 

인적 없는 골짜기

빨간 그 열매

모이 없는 꿩들에게 모이가 되리

 

때로는 눈물짓던 내 영혼아

네 바램 어디에 두고 있느냐

 

어느 날 내가 죽어

깊은 겨울 오면

인적 없는 골짜기 모이라도 되랴

 

긴긴 겨울 잎 떨어진 찔레덩쿨 위에

서리에도 안 떨어진

그 열매가 눈부셨네

 

 

 

침엽수 지대

김명수

 

깊은 밤 눈 덮여 고적한 곳에

꼿꼿이 머리를 하늘에 두고

침엽수들이 서 있다

 

먼 산맥을 이어

내어 달리고 싶은 마음이건만

푸르른 정열에 가두어 두었다

 

눈이 내리면 온몸에 흰 눈을 이고

바람이 불면 우우 소리를 낸다

 

일월성신 잦은 계절의 변화에도

잎새조차 변하지 않음은 태고적 고독인가

 

차운 바람 부는 날에도

나무는 오히려 위엄을 잃지 않는다

 

그러기에 겨울밤 차가운 별도

침엽수 머리 위에 더욱 반짝인다

 

 

 

카페 문의 마을에서 - 대청호를 보며

김명수

 

대청호가 바라다뵈는

카페 문의 마을에서 보는 산은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주인이 그림쟁이라고 하는 이 곳은

벽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주변의 산과 호수를 모두

통째로 안으로 들여다 놓을 수 있다

비가 오면 실내에서 비 오는 호수를 느끼고

눈이 오면 소복히 눈을 맞을 수 있는

카페 문의 마을에서

난 그의 눈빛과 함께 차를 마신다

그리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신의 빛깔

호수의 율동

그의 가슴에 고동치고 있는

사랑의 언어

이것에 오면 모두가 아름답다

이곳에 오면 모두가 사랑스럽다

이곳에 오면 말이 필요없어지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침묵속에서

부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 한다.

 

 

 

태양이 나에게 그림자를 주었다

김명수

 

그래 아이야 너는 물었다

태양이 그늘이 있나요?

그림자가 있나요?

황혼은 태양의 휴식이고

안개는 바다의 그림자일까요?

그래 아이야

영원히 불타는 눈부신 광채

작열하는 태양은 그림자가 없구나

태양이 나에게 그림자를 주었다

수평선이 나에게 안개를 주었다

 

 

 

풍선

김명수

 

비 개어

푸른 하늘

 

바람도 한 점 없는

높은 

허공에

 

어미의 탯줄에서

버려진 

아이

 

푸른 하늘 멀리 멀리

가고 있는

아이...

 

 

 

피뢰침

김명수

 

아득히 솟아 있는 높은 굴뚝 위에

날카로운 은빛 피뢰침 하나

 

캄캄한 구름 하늘 덮을 때

비로소 반짝이는 피뢰침 하나

 

천 번도 만 번도 어두운 밤중에

너는 왜 슬프게도 불타지 않는가

 

온 누리에 번개도 휘몰아 올 때

너는 왜 슬프게도 쓰러지지 않는가

 

 

 

하급반 교과서

김명수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 읽기여

우리 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헬리콥터

김명수

 

중량교 밖에 집이 있는 나는

의정부 쪽 하늘로 날아가는 헬리콥터를

아들과 함께 바라보고 있다

 

옛날 가교사 옆

폭탄에 패인 웅덩이에서

잠자리를 잡으며 바라보던 저 헬리콥터를

 

전쟁이 지나간 지 삼십 년이 지난날에

이제는 우리 눈에 익숙해 버렸지만

오늘은 일요일

세상이 온통 의문투성이인

내 네 살 난 어린 아들과

이마에 손 얹고 바라보면서

나는 어떻게 내 지나간 어린 시절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일곱 살 때였던가

삐라를 뿌리며 읍내 상공을

커다란 프로펠러 빙글빙글 돌리며

버짐 난 우리들 머리 위로 날아가던 저 비행기

잠자리채 속에 사로잡았던

장수잠자리보다

더 신기하던 헬리콥터를

 

우리들 조무라기 환호성을 울리며

떼지어 넘어지며 뒤쫓아 따라갈 때

하상(河床) 드러낸 낙동강 너머로

유유히 유유히 사라지더니

 

오늘은 다시 우리 집 마당에

그림자 드리우며 날아가는 헬리콥터여

 

아직도 평화가 멀기만 하고

아직도 아픔이 아물지 않는 월남 땅에

내 자라서 자유의 용사로 파병되었을 적

끝 모르는 정글에 매복하던 밤

후진국 늪지 위에 슬픔으로 떠오르던 헬리콥터여

 

오늘은 맑은 가을 하늘 날

서울에서도 하늘은 푸르기만 한데

아들아

내 네 살 난 어린 아들아

 

어느 곳에서나 쉽사리 앉기도 하고

어느 곳에서나 쉽사리 뜨기도 잘한다는

저 커다란 강대국 헬리콥터를

나는 너에게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호랑나비

김명수

 

경상도집 아주머니가 낮잠을 잔다

서른 살에 혼자 되어 산전수전 다 겪었다

 

억세고 요란스런 경상도 아주머니

오늘은 공일이라 색시들 다 소풍 보냈다

하나뿐인 뚱뚱이 딸도 따라 보냈다

 

보아라, 경상도집 아주머니 태평스런 낮잠 속에

이 세상 쓸쓸하고 아름다운 만고풍상

 

꿈속에 꿈속에 봄날 천지에

호랑나비 한 마리만 날아 다닌다

 

 

 

혼자 밥 먹다

김명수 

 

가을 한철 ‘자발적 유배’ 살이를 했다

추사는 내가 기거하는 고산과 이웃한 대정 귤중옥(橘中屋)에서 9년간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살이를 했다

가시방석에 앉아 혼자 밥을 먹으며 추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키이스 페라지의 〈혼자 밥 먹지 마라〉를 읽으며 혼자 밥을 먹는다

앞집, 옆집, 뒷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들도 혼자 밥을 먹는다

“서쪽에서 빛살이 들어오는 주방, 혼자 밥을 먹는 적막”*에서 시간과 겨루어 슬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추사는 가시밥을 먹고 한기 서린 책을 읽으며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다 그에게 혼자 밥 먹는 일은 온축(蘊蓄)의 의식이었으리라

추사 곁에서 배운 ‘온축’의 힘으로 시를 쓴다

자발적 유배지에서 쓴 시가 사막에 버려진 무상 경전이 되어도 좋으리

 

* 박경리의 시 〈못 떠나는 배〉의 한 구절.

 

 

 

1월, 그 어느 날

김명수

 

1월의 하늘은 강물 같다

별들이 하나씩 시간을 세고 있다

호수에 가득 내려앉은 별들이

달빛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맥박은 지금 얼마나 뛸까

 

마른 나뭇가지 위에

바람이 자고 있다

산새들의 숨소리가

달빛을 타고 내려 온다

호수에 숨은 푸른 눈빛들

슬프도록 아름답다

 

1월의 그 어느 날

빛나는 그대의 눈빛을 읽는다

시리도록 아름답다

사랑이리라

힘든 자에게 나누어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