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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김경미(1959~ )

가벼움의 춤

가볍게, 가볍게

가을 세탁소

가을을 본다는 것

가을의 전력

가을 통화

가을 편지

각도

강문(江門)에 들다

거리의 초대

겨우 몇 개월

겨울 강가에서

겨울잠

결심은 베이커리처럼

계모전

고백

고요에 바치네

고통을 달래는 순서

과일이라니

구멍

굴원의 불빛

그 나라에서 온 엽서

그날의 배경

그렇게 사랑을

그렇다

그리운 심야

그의 달력 공부

그 창가

그해 봄에는

글씨

글자들

기계, 달리다

기다림은 추한 것

기혼의 독방

길은

꽃씨, 하나

꽃 지는 날엔

나는 모자이크입니다

나는야 세컨드

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좌절하는 것들이 좋다

나는 지나간다

나, 라는 모자이크

나, 라는 이상함

나뭇잎 한 장의 생각

나와 당신이라는 이상함

나의 백만 원 계산법 - 2021년

나의 서역

나의 제1 외국어

나이

날라리와 날파리

내 마음의 지도

네버 엔딩 스토리

네 살의 여자

누가 꽃을

누가 사는 것일까

눈물

눈물의 횟수

다녀오다

다시, 바다로 가는 길

다정

다정에 바치네

다정이 나를

다정이 병인

다정이 병인 양

달걀 빌리러 가기

당신의 순간 – 마크 노스코 시카고 박물관

대도시는 나의 고향

대한 늬우스 혹은 너 같은 것

더 멀어지자

도회 여인들에의 초대

돌파

등(燈) 축제라는데 나는

떠나지 않은 자들의 냄새

떠들지 않는 법

또 다른 저녁

마음 기울다가

마음의 근황

마흔에

막막함 속에서

만재홀수선

맨드라미와 나

멸치

멸치의 사랑

명함에 쓴 편지

모던의 속도

무릎을 끌어안다

무명을 위하여

무병

문밖의 문

물끄러미

물의 미제(未濟)

바닥의 날개

바람둥이를 위하여

발톱 깎는 여자

밤, 기차, 그림자

밤, 내의 가게 앞에서

밤, 속옷 가게 앞에서

밤의 프랑스어 수업

방명록

방부제

뱀을 추억하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본동 258

봄, 무량사

봄밤

봄 안부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

부엌에 대하여

불량품 소사(小史)

불망기 - 1981년

불멸의 신혼

불행

비망록

사람 시늉

사랑

사랑의 근거

사랑하면 할 수 있는 일

사막에 작약이 피는 법

사소한, 사적인 스무 살의 추억을 위하여

사소한, 아주 낡은 사적인 추억을 위하여

삼십 대

생심기(生心記)

생화

서정의 흉가

설명

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

소금론

소란지심

소식

속, 그리운 심야

속도의 전략

수첩

수표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은

스피커

슬픔

슬픔이 너무 큰 날은

슬픔이 해준 것들

실패들

쓸쓸한 날에

쓸쓸함에 대하여

시간

식사라는 일

식물, 욕망

식사법

실의

심수봉

아버지는 설탕 체질이셨다

앉은뱅이 목숨

암에 대하여

애인 도시 – 애정 성시

야채사(野菜史)

약속

어둠의 생김새

어둠이 왔다

어떤 날에는

어떤 여름 저녁에

언덕 위의 베란다

없건만 있는 풍경에의 - 혐오시설

여시아문(如是我聞)

여행의 리얼리티

연꽃 이야기

연애의 횟수

연표(年表)

열쇠

열애들

열애의 나날

열애의 서(書)

엽서, 엽서

영화 시대

오늘의 결심

오늘의 노래

오늘의 철학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

오렌지 주스 캔을 누가 백금으로 만들겠는가

오지선다

요즘 내 문제는

우체국을 찾아서

웅크리다

원시의 통증

유리창 이력서

육식성의 아침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이러고 있는

이유

이장(移葬)

인간

인간론

일상

잃어버린 지상을 찾아서

임계량 - 마이크로라이프

임진강이 말하기를

입의 무게

자동응답기

자서(自序)

자세와 방식

작은 사랑

저기 옛 애인들 지나간다

저녁

전대미문(前代未聞)

조금씩 이상한 일들

즐거운 이명

지구의 위기가 내 위기인가

지나온 날짜들 너무 쓰라리고 갖고픈 날짜들 너무 먼

지리부도 책을 보며

지옥에서

진주

질(質)

차 마시는 동안

참패 시대

천동설

첫눈

청춘

청춘이 시킨 일이다

체리 블러썸의 계절

초승달

출분

춤추지 못하던 여인

취급이라면

타인, 타인들

탄광과 라벤더

통화

틈에서

편력

표절

피아노 소리

하이힐

한낮, 대취하다

한여름의 과대망상

함박눈

해남 엽서

해명

해 진다 어디에나

해 질 녘

호흡 곤란

홍염살

화병(花甁)

화상

화투

회귀

횡단

흉터

흑앵

희망

1분

7월, 넝쿨장미, 사랑

14층 베란다의 시

 

 

 

가벼움의 춤

김경미

 

물 위를 뛰어가는 일회용 은박접시

그저 톡, 쏘고 달아나는 콜라의 침 끝

눌러도 가볍게 도로 펴지는 육체파의 엉덩이

 

세계의 무거운 눈꺼풀을 잘라낼 듯

도마뱀이 제 몸을 끊고도 태연하게 살아서

옆구리로 예수 같은 손구멍 드나드는 현무암은

항상 검은 기체같이

체중을 없애면 투명해지리라

 

멸종의 문단속 끝내고 마악 지상을 떠나는

마지막 공룡의 뒷모습

 

그 후련한 뻔뻔스러움으로, 열쇠처럼

춤추고 싶어

저절로 날고 싶어

 

 

 

가볍게, 가볍게

김경미

 

봄, 연둣빛 따라 어룽대다 계단을 헛디뎠다

X-레이가 카네이션 꽃잎처럼 발 속을 훑고

금가니 비로소 제 뼛속을 보게 되는구나 사랑처럼

 

엄지발가락 실금 하나로 발에 석고가 씌워졌다

온몸을 받치고 살아온 그 작은 못 덕분에

대단히 살았도다 생의 첫 휴식이라도 맞은 듯

날마다 석고발 높이 쳐든 채 빈둥대거나

목발도 샀다---목발에도 사이즈가 있었다 당연히

그 한쪽을 턱, 짚고 나서니

뭔가 완벽해진 기분이었다 불길한 세상에

그 상처 옥시풀처럼 후련하기도 했다

더러는 부모같이 생긴 등에 잔뜩 업힌 채

내친김에 애기같이 칭얼도 댔다

나 가볍지? 내 인생 솜털 같지?

 

아프지도 죽지도 않는 상냥한 병에

위로의 꽃과 과일만 쌓이는 이 귀여운 생을

나도 좀 자주 살아보았으면 좋겠다

 

 

 

가을을 본다는 것

김경미

 

갑자기 다리를 저는 일

눈이 머는 일

심장 부서지기 직전의 일

품이 너무 넓은 옷 안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일

 

누군가가 목의 반쪽을 새빨갛게 물었다

 

아니 단풍 말고

유월에만 붉은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장미의 빨강

 

네가 무너진 무릎 색깔을 가졌다니

 

날아간다 날아 간다 날아간다

기러기 같은 손목과 발목이

유족의 심장을 하고

 

계절은 다섯 개.

봄, 여름, 가을, 겨울, 늦가을

봄부터 겨울까지 하도 오가서

11월 흐린 달력만 제일 낡았다

 

믿을 수 없다 가을이라니

 

갑자기 휘청하는 일

 

무엇을 사랑했는지

미안해지는 일

미안하다고 말 안 하려 입을 꾹 다문 채

 

 

 

가을 세탁소

김경미

 

부르주아 가을. 문패에 나프탈린 내건다.

지난여름 해충처럼 괴롭히던 관계들

얼씬도 마라

 

저 다리미 바닥으로부터 오는 자주 벨벳의 가을

따뜻함이 스쳐내는 접신의 경지

맑은 어깨며 가슴을 되살려내는 저 대단한 의술 좀 봐

스러진 꽃들 생생히 되돋우는

저런 사랑

모든 변덕과 상처들 한약처럼 잘 다려내

마침내 온화함의 지복을 누리는

 

가을 세탁소 앞을 서성인다 구김 많은 한 벌의 옷처럼

 

 

 

가을의 전력

김경미

 

삼천만 년만에 태어나 삼천대천 세상에 가을은 처음이다

 

1

전생의 가을에는 여고생이었다 가을만 되면

성적이 서리 속 기러기 떼처럼 날아가고 검정 비닐봉지

같은 날들 견딜 수 없어 봉지 밖으로 영영

떠나버릴까 자퇴하고 채석장에서 돌이나 깨다

햇빛이나 따라가버릴까 영영 방과후마다 버스 뒷자리

종점까지 가고 또 가다 못내 살아돌아오면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또

유리창을 깨고 있었다

나쁜! 나쁜!

 

 

2

그 전전생의 가을에는 이십오륙칠 세였는데

첫 자취방, 오직 나만의 저녁 불빛을 갖다니

마침내 가족들 마른 낙엽처럼 다 버려버렸다니

누군가 축하의 국화꽃도 가져다주었다

난생처음 기뻐 생의 첫 김치도 담갔었다

간장으로......

그 생의 어머니, 맨날 책만 들여다봤자다, 하시더니, 어머니, 결국 간장으로 김치를......

어차피 이 생도 온통 간장빛인걸요

 

 

3

그 전전생의 전생에는 삼십 번의 장미빛 생일이었는데

생일엔 왜 촛불을 끌까 온통 켜두지 세상 다

불지르도록 소방차 물벼락 다 뒤집어쓰도록

케이크 녹아내려 금강석 되도록 파-티하지 파란의

만장의 파-티하지 세상 사람 다 먹어 치우고 싶은 허기와

목욕탕만 한 슬픔 틈만 나면 하루 삼십 번씩이라도 중얼댔다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가슴 다 후련했지만 그 생의 가을은 오지 않았다 영영

 

 

4

그 전생의 모든 전생들에는 차마 발설키 두렵지만 사십 세였는데

한번은 제 목숨값 손수 치르고 싶어서 어떻게든

다시 잉태되고 싶어서 처음으로 동그랗게 발가락을

입에 말아물고 고개 숙이니

태아처럼 비로소 자세가 나올 것 같은 생이여

영영 떠날 수 없던 그 붉은 단풍잎 가을이여

 

 

 

가을 통화

김경미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좀 덜 슬플 수 있을까

생각해요......"

 

오래전 은동전 같던 어느 가을날의 전화.

너무 좋아서 전화기째 아삭아삭 가을 사과처럼 베어먹고 싶던.

그 설운 한 마디.

어깨 위로 황금빛 은행잎들 돋아 오르고.

그 저무는 잎들에 어깨 잡혀 생이라는 밀교.

밤의 어디든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던.

돌아와 찬 이슬 털며 가을밤.

나도 자주 잠이 오지 않았었다.

 

 

 

가을 편지

김경미

 

녹이 비만하게 또 하루를 슬고

오늘도 고단하고 복잡했습니다

혹은 뻘건 녹 덩어리에 내 쪽이 폐 끼치는지도요

작은 무게에도 걸핏하면 실밥을 끊고 쏟아지는 가슴

툭하면 슬퍼지겠다고 합니다

생각도 틀에 걸려 자꾸 깎여나가는데

무엇이든 덫의 시작일지

 

무수히 파리와 파리채를 만드는 이곳에서

언제라도 청산가리가 든든한 가을입니다

 

 

 

각도

김경미

 

가수이자 배우였던 프랭크 시나트라는 말했다

- 고개를 들어라. 각도가 곧 당신의 태도다

 

팝아트 회화의 대가인 앤디 워홀은 말했다

- 조각품은 모든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인생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종종 잊어버려서 문제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삼각형 각도는 정확히

'51도 52분'

모래를 쌓을 때 가장 높이 쌓을 수 있는 각도.

넘어서면 모래가 더는 위로 쌓이지 않고

흘러내리는 각도다

 

고개를 들어 각도를 높이는 것

고개를 숙여 각도를 낮추는 것

시선 높이의 모든 각도를 한 바퀴 도는 것

 

각도가 곧 존재다

 

 

 

강문(江門)에 들다

김경미

 

피 터지는 사랑 없이는 그곳에 가지 마라

침향을 묻듯 그대 이름을 묻으며

결코 나는 등 돌리지 않았다

 

골 깊은 심연의 소리가 종종 빗물로 내려앉던

저 바다에서 나는 연잎처럼 떠다니고

꽃을 피울 정갈함을 찾아 물속에 뿌리 내리며

푸른 눈매를 가진 그늘 속에서 숨을 쉬는

물고기가 되고

발을 담그는 새가 되기도 했다

 

늪이 아니면서 늪이었던 것처럼

한 생에서 한 번도 또 다른 생을 주어보지 못한 아픔에

오랜 통곡도 용서가 되는 젖은 땅

 

피 터지는 사랑 없이는 그곳에 가지 마라

침향을 묻듯 그대와 나를 묻으며

결코 나는 발밑을 보지 않았다

 

 

 

거리의 초대

김경미

 

등(燈) 축제라는데 나는

어둠을 구경하러 간다

 

어둠은 무거운 걸 많이 들어

팔이 근육질이다

잡힌 사람들은 발버둥을 친다

내려놓으면 서로 재밌었다고 한다

 

천변에는 구경꾼들보다 김밥 장수가 더 많다

어둠 속에서 김밥을 먹은 적이 있다

두 번이었다

한 번은 방문 밖 마당의 축제 때문이었다

초대받지 못했으므로 없는 척 불을 꺼놓고 먹었다

한 번은 옆방의 파티에 초대받아서였다

초대가 싫어 없는 척 불 꺼놓고 먹었다

 

두 번 다 김밥은 식었고

하필 물 한 모금도 없었다

초대는 잔인한 데가 있다

 

없는 척하는 것보다 힘든 쪽은

정말로 없는 취급을 당할 때다

물론 누구나 아는 얘기다

거리엔 김밥 장수가 넘치고

 

등에서 나오는 빛들이 조악하다

서둘러 다시 어둠의 팔짱을 낀다

 

 

 

겨우 몇 개월

김경미

 

겨우 몇 개월 아침에 일어나면 벽에

그립다, 햇빛이

가을의 세 글자를 써놓고 간다

환한 그 빛에도 별들은 채 돌아가지 못하고

창 너머 서성인다

 

나도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다

게르만과 고딕의 체격을 가진 침대에서

가을 저녁 공원에서

날마다 보러 가는 가을 옷가게 고양이 앞에서

내일을 위해 참는 유학생도 아닌데

무엇을 위해 여기 있나

가방도 내던진 채 비행기를 타고 싶지만

 

아직,

줄지어 앉은 새때 같은 지평선들

알아듣지도 못할 거면서

그곳의 가을 얘기를 해보라는

종일 돌아가지 않는 별빛들

그 먼 곳의 가을 얘기를 들려주는

어느 집 아이가 불어 올린 비눗방울이

은행잎처럼 발을 멈추게 하는

 

가을의 세 글자가

불붙은 편지 한 장처럼 벽을 태우는

 

 

 

겨울 강가에서

김경미

 

눈과 함께 쏟아지는

저 송곳니들의 말을 잘 들어두거라 딸아

언 강 밑을 흐르며

모진 바위 둥글리는 저 물살도

네 가슴 가장 여린 살결에

깊이 옮겨두거라

손발 없는 물고기들이

지느러미 하나로도

어떻게 길을 내는지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

오지 않는 것은

가서 가져와야 하고

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

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

이 세상에

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겨울잠

김경미

 

가을 햇빛에 깨끗이 말려진 하늘

그 빛에 눌려 나뭇잎들 납작하게 내려앉으면

다 내려앉은 다음

 

겨울 비단뱀이 된다면

석 달 치 식량

계란 껍질째 깨지도 않고 삼켜

삭고 삭아 계란 껍질이 우유처럼

묽어져

몸 안에서 아무 사금파리 상처도 찌르지 않을 때쯤

일어나

그새 돋은 발

거뜬히 새 신발 사러 뛰어다녔으면

 

 

 

결심은 베이커리처럼

김경미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나를 잘 아는 건 나의 결심들

 

가령 하루를 스물네 개로 치밀하게 조각내서 먹는

사과가 되겠다든지

밤껍질 대신 뼈를

혹은 뼈 대신 고개를 깎겠다는 것

 

사람의 얼굴 양쪽에는 국자가 달렸으니

무엇이든 많이 담아 올리리라

 

국자가 아니라 손잡이라든가

그렇다면 뭐든 뜨겁게 들어 올리리라

 

여하튼 입을 벌리고 살지 말자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건 내 결심들

 

한밤의 기차에 올라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어

입안이 감당 안 되는 느낌처럼

 

무엇보다 창피스러운 건

 

떠나면 후회할까 봐 후회를 떠나지 못하는

 

신선한 베이커리 빵집처럼

언제나 당일 아침에 만들어서

당일 밤에 폐기하는

 

결심들만큼

 

영원히 나를 잘 모르는 것도 없다

 

 

 

김경미

 

1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 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 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밖에는 때로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계모전

김경미

 

아무래도 아닐 거야. 나는. 친엄마가.

네 여린 잎 한장에 줄 햇빛. 고르다가

문득 울먹인단다

네 나이 때부터였나 봐, 그래

저 인도같이 퀭한 눈동자로

문득, 그래, 오렌지빛 가사를 혼자 입어 보는 게,

그게, 문득, 나쁠 거야, 갠지스강 노을에 혼자 붉어 우는 게.

 

기어코 친자식인 네가, 엄마를 좀 키워주렴.

부엌을 책임지는 습관과

사람은 나무처럼 제가끔 외로워서는 안 됨을

아무 사회에도 어울리는 옷이 없으니

늙은 거울 보며 어떤 장면인들 만들 수 있겠느냐고

기어코 친자식인 네가

시정잡배

엄마를 좀 줏어다 길러야 하지 않겠니

 

 

 

고백

김경미

 

나. 아무래도 지뢰인가 봐 늘 인적 드문 곳에

몸을 숨기지 숨겨 기다리지

흙처럼 오직 사람 발자욱만 모른 척 모른 척

 

마침내 누군가 다가오지 멋모르고 닿아오지

그 순간 그 환희 너무 두려워

폭발하고 말지 산산조각 폭발하고 말지

 

깨어보면. 그 사랑들 형체도 없다

내가 다 죽였단 말인가!

 

 

 

고요에 바치네

김경미

 

내가 어리석을 때 어리석은 세상 불러들인다는 것 이제 알겠습니다

누추하지 않으려 자꾸 꽃 본다 꽃 본다 우겼습니다

그대는 쇠무늬 지워진 맨 동전으로 이미 닳아 없어진 지 오래건만

라일락 지나가는 소음들 반원의 무덤 같던 아침,

감빛 구름들 리어카 째 굴러떨어지던 위험한 해 질 녁에,

가을 낙엽들, 노란 형광 나비로 빛나던 착오, 검정 우산 같이 눈동자 종일 흐렸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안간힘은, 물 흔들지 않고 아침 낯과 저녁 발 씻는 일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과일이라니

김경미

 

자몽 들어보셨는지요

쓰면 시지나 말지라는 뜻이죠

시지나 말면 쓸모가 있을까요

뜻대로 되는 일이 많으신가요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나셨나요

벌레가 입술에 잔뜩 물었네요 불길하네요

수박 같은 무덤도 하나 사시죠

크면 쪼개도 팔아요

내가요? 내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무덤을 판다구요?

무던을 잘못 들으셨겠죠

제발 눈과 귀의 각도 좀 낮춰 조정하세요

은행잎이나 바나나나 레몬같이 얼굴 두꺼워지는 게

꼭 세월 탓일까요

 

과일이라니, 꼭 누구 등치는 일 같잖아요

다음엔 지구는 과일이 아니라는 내 학설도 꼭

맛 좀 보시길요

 

 

 

구멍

김경미  

 

어디선가 쇠 닳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가 닳는 소리 꽃이 닳는 물이 닳아지는 소리 입이 닳는 소리

닳아 없어지는 것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있음은 어디로 가 없음이 되는 걸까

쓰레기 모이는 난지도처럼 없음만 모이는 곳도 있을까

수영장 물 빠지는 구멍 있듯이

있음도 없음이 되려면 꼬르르륵 몰려 사라지는 배꼽이 있을 텐데

 

입관되어 내려가는 있음들의 무덤,

그 배꼽은 그 어느 뱃전에

 

 

 

굴원의 불빛

김경미

 

(추란이며 비산의 목란, 물가의 숙망이며 혜치, 추국의 낙엽)

이소(離騷)가 쓰다만 그런 한자 떨기들이 그냥 위로가 돼요

 

마음 하나 헐어

가만히 태우고

요즘도 일기나 편지 따위 태우는 냄새가 있을까

국사도 없는

인간도 없는 막막한 도성 사람들......

 

(난지며 전혜, 비비, 경지를 꺾어다 반찬을 만들고......)

그 이름 낯선 굴원의 꽃들한테로

그냥 가만히 귀양 갈까 해요

 

 

 

그 나라에서 온 엽서

김경미

 

몇 년만인지요

이곳엔

나무와 공원과 연두색 이삼 층 목조 집들만 가득합니다

아래층엔 조용하고 깨끗한 헌책방

다락방 숙소엔 하늘이 보이는 격자 천창과

녹색의 흔들의자가 있습니다

바로크풍의 책상과 오렌지 갓스탠드도 세 개나 있습니다

 

천둥 번개 치던 날 당신의 전화벨 소리 그치지 않고

저 아득한 원시로부터 마음 사냥을 나온 공포도

그치질 않아

아름다운 방 버려두고 남의 방문 앞 어둠 속에서

한강 근처에서 봤던 당신의 가을,

그 가을들을 어떻게 다 건넜던가, 꼽아봤습니다

 

좋아하지 않던 단맛이 생존에 필요하단 걸 느껴

비스킷과 맥주를 사왔습니다

급히 먹고 난 비스킷 겉봉엔 익혀 먹으라고 써있고

맥주병에는 쓴 약이 몸에 달다 써있었습니다

한 늙은 백인 아내는 흑인 남편보다 일주일 먼저 떠나면서

내 남자를 기내용 트렁크에 넣어 데려가고 싶지만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풀밭 토끼가 도망가지 않으므로 사람쪽에서 그만

도망을 다닙니다

매일 고양이를 보러 가는 건 유행이어서가 아니라

왠일인지 당신이 드물게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창틀 화분에 물 주는 일보다

달력에 물 주는 일이 더 이로울 듯하지만

 

어떻게 비사교적인 당신과 겹쳐버렸는지 추억의

유리창 너머 기웃대려 오늘은 <myself>,

서울의 식당 물컵 같은 이름의 펍에 갑니다 눈발인지

세월인지 맞으며 초저녁부터 가렵니다

 

 

 

그날의 배경

김경미

 

몇 날이고 수도승처럼 눈만 감다가 모처럼 나섰다

나서다가 누군가가 머리에 박은

10센티짜리 대못을 꽂은 채 떠도는

고양이 뉴스를 봤다

빼려고 얼마나 부볐는지

핏속 못이 조금 헐거워졌다고 했다 사람이 동물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다정한 모임 속 네가 갑자기 내 머리에 못을 박았다

그 대못 얼버무리려 괜한 웃음을 웃느라

이마와 코가 헐거워졌다,

너무 가깝거나 멀어 몹쓸

사이도 아닌데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는데도 뺨으로 눈썹이 흘러내렸다

나는 확실히

사람과 잘 안 맞아 어떻게 사람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죽은 척하는 순간

고양이가 내 두 손을 지목한다

 

 

 

그렇게 사랑을

김경미

 

옛사람들은

치자꽃 열매에서 배어 나오는 노란색 물이며

관목과 바위 밑 푸른 이끼에서 꺼낸

천연의 색들을 가져다 썼다지

그렇게 흰 광목천도 자목련빛이며 남청색으로

본디 바탕마저 바꾸었다지

 

내 안에도 혹 치자 소리 나는 꽃잎들이며

그늘에서만 오래 묵은 녹색 이끼 같은

타고난 색염료 있어

그대 바탕 물감 들여 영영 빠지지 않았으면

 

 

 

그렇다

김경미

 

아 참, 나는 참새가 아니지

날아가다가 뚝!

허리가 부러진다

(가끔씩 내겐 사람다운 구석이라곤 전혀 없다)

 

그래 참, 나는, 참

사람도 아니지

마저 부러진다!

(상처를 실컷 주고 나니 뜻밖에 후련하다니!

차마 이 비결로 사람들이 여태 행복했었을까,

차마!)

 

 

 

그리운 심야

김경미

 

1

그래 다른 생은 잘 있던지

검정 양복의 연인처럼 그리운 밤 카페들과

눈물처럼 글썽이던 막차의 차창들은

철제 셔터 내려진 어두운 상점들은

붕대같이 하얗게 빈 도로는

정든 미치광이 친구들

무청 같은 새벽 거리는

있기는 정말 있던지 아침마다 조용히 이불 밑

그대로이던 네 흰 발목의 검정 갈기는 정말

담을 넘었던 것인지 실밥처럼 흰 눈 쏟아지는

밤거리를 달리기는 달렸던 것인지 달려 다른 곳

다른 시간이 정말

있기는 있었던 것인지 나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살아보지 못한 것 같기도 한 다른 창밖 다른 생이

 

 

2

그리운 밤

 

밤마다 담을 넘던 마음 속 도둑은

밤거리에 집을 짓고 싶던

핏속의 목수는

말썽 피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던 청춘의 그 날들은

 

술집 출신처럼 밤 풍경이 그리워요, 하던

그 고양이 발목 저문 지금도 눈송이처럼 담을 넘곤 하는지

필사적으로 넘곤 하는지

 

 

 

그의 달력 공부

김경미

 

그는 볼 때마다 뚫어지게 달력을 공부 중이다

제발 빨리 지나기를 기다리든가

제발 빨리 와주기를 기다리든가

날짜 속에 언제나 뭔가가 있는 거다

 

1년 내내 장갑을 끼고 싶다는 여자친구

양말을 30켤레씩 사놔야 잠이 온다는 어머니

머리 감겨준 동네 미용사와 결혼한 늙은 박사 선배

 

달력 공부가 깊어지면 미친다

세수를 하면서도 연애를 하면서도 달력 때문에

미친다

음력은 음력대로 양력은 양력대로 충격이어서

피곤한 날은 입술 대신 달력이 부르튼다

 

건강을 다짐하는 1일

지출이 확성기를 드는 월말

첫사랑의 배신을 떠올리게 하는 9월

새털같이 부드러운 종이는

달력에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빽빽이 적어놓은 날이라고

더 보람 있는 건 아니라는 정도는 알지만

 

볼 때마다 뚫어지게 공부하면서도 누가 물을 때 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하는 건

오늘이 오지 않은 채

숫자 뒤편에 언제나 뭔가가,

언제나 누군가가 숨어 있어서다

 

 

 

그 창가

김경미

 

소읍의 맛없는 식당에 앉아 맛없이도 식당을 해야 하는 주인의 속을 생각해본다

식탁 위 때 절은 소금통 같은 유리문 밖 행인들을 본다

마음 같지 않은 날들에 대해 나도 그들만큼 안다

혹은 그들보다 더 잘 안다

슬리퍼에 무릎 나온 추리닝 차림으로 지나가는 청년

내 낯선 행색을 서슴없이 오래 훑어보던 신발가게 주인은

굽 달아난 구두를 잘린 다리 한쪽을 넣어주듯이

검정비닐 봉투에 싸면서 자꾸 나를 의심했다

문을 열자 달력 뒷장에서 잘못 빠져나온 듯 폭설이 다급하게 쏟아졌고

불꽃에라도 데인 듯 우왕좌왕하던 사람들보다 더 피할 곳 없던 나는 얇은 옷으로 자연과 시간의 난투극을 피하듯 용건 없는 일정으로 버스 정거장에 섰다

십오 분도 안 되어 그칠 일을 때로는 쏟기도 하는 것

나도 잘 안다

인간이 동물인 건

떠돌아 얻는 답과 머물러 얻는 답이 달라서이겠거니

안심스런 인생을 고르듯 들어와 맛없어도 먹어야 하는

저녁 식당도 만나는 법이어서

세상이 미안한 마음 같기만 하지는 않는 것이어서

새 구두는 어김없이 아프고

 

어느덧 밤은 솜 뜯긴 소파처럼 찻집 옆자리에 와 앉고

창밖 별빛도 나도 뭔가 목이 메이는 듯

 

절룩댄다 

 

 

 

그해 봄에는

김경미

 

가슴마다 맺힌 산맥들 길을 주고

봄에는 푸른 땅으로 나서자

산과 들마다 걸려 넘어진 사랑 일으켜 안아

이 땅 끝까지 가랑비로 얼굴 맞대보자

 

봄엔 어딘들 못 나서랴

봄엔 뉜들 얼굴 맞대지 못하랴

 

 

 

글씨

김경미

 

여느 때처럼 글씨를 쓰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수놓은 천의 뒤쪽처럼, 무늬 없이 지저분하기만 한, 실밥들,

터진 스웨터를 끝없이 풀어 감은, 두툼한 실패,

꽃을 담았다, 꽃 잘 오무려 보냈는데, 종이 위에 가서는

지렁이들로 화다닥, 드러나 버리는 꽃잎들,

 

그토록 미워했는데

 

문득, 손끝, 이 밥솥의 김 같은 것들이,

몇십 년, 저녁 해거름이면 밥 지어놓고, 밥 먹어라 불렀구나

검은 쌀알 같은 눈물이, 종이 위에 울컥,

얼룩지는 것이었다.

 

 

 

글자들

김경미

 

여느 때처럼 글을 쓰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수놓은 천의 뒤쪽처럼, 무늬 없이 지저분하기만 한, 실밥들

터진 스웨터 올 끝없이 풀어 감은, 두툼한 실패(失敗),

꽃을 담았다, 꽃 잘 오므려 보냈는데, 종이 위에 가서는

지렁이들로 화다닥, 드러나버리는 꽃잎들,

 

그토록 미워했는데

 

문득, 손끝, 이 밥솥의 김 같은 것들이,

몇십 년, 저녁 해거름이면 밥 지어놓고, 밥 먹어라 불렀구나

검은 쌀알 같은 눈물이, 종이 위에 울컥,

얼룩지는 것이었다

 

 

 

기계, 달리다

김경미

 

기계 위에서 실내가 달린다

동물은 철제 우리 속을 달리고

신발은 신발장 안을 달린다

 

달리는 것은 인화성 물질

자꾸 불이 붙는다 타는 냄새가 난다

시계가 타고 숫자가 타고 몸이 탄다

슬픔이 타고 노래가 탄다

 

원시와 유목이 돌아본다

현대가 돌아본다

귀신이 돌아보고 농경이 돌아본다

상업과 사업이 돌아본다

 

젖은 우산 되어 달라붙는 몸

애착을 잃을 때까지

차가워질 때까지

 

달리자, 기계

 

제자리에 묶인 공(球)이어도

 

달리자, 기계!

 

 

 

기다림은 추한 것

김경미

 

구름들 모였다 금방 흩어지고 다음엔

조용히 비켜간다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면

모든 게 산뜻하고 선명해진다

 

오래전, 당연한 모임을

들떠서 기다리던 친구에게

말해버렸다

너 빼고 이미 다 모였었어 너 기다리는 거 안타까워서

말해주는 거야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추해서였다

 

벌받는 것만큼 산뜻한 것도 없다

 

친구는 저 몰래 모인 친구들이 아니라

말해준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똑같이 당했을 때 나는

몰래 모인 친구들을 다 버렸다

산뜻하게

 

추하긴 마찬가지지만

 

고독만큼 깨끗한 인류도 없다

 

추하지 않기론 구름만한 게 없다

 

 

 

기혼의 독방

김경미

 

아침이면 그녀, 순례를 나서네, 복덕방 아저씨 어디 없나요, 가시 없는 잎사귀들의 마을.

봄의 초록 은행잎처럼 눈에 띄지 않는,

서양 물감 빛들 한 켜씩 세룰로오스를 떨구는 방,

절친한 가족도, 낙지 같은 가재도구도,

정부도 찾지 못할, 나무 꼭대기나 11월의 바닷속인들,

늦가을 포도잎이나 신문지로 벽지를 댄들,

물그릇처럼 고여, 고여 유화 그림처럼 짙어지는,

하루 몇 시간쯤 수증기처럼 아무도 모르게

홀로 나비짓하는,

 

누구와도 섞이고 싶지 않은 시간, 그런 방이요, 창호지같이 제 마음에 은은해지다가

빈둥대다가 울다가

수녀들 기도 소리에 몰래 마음을 달래다가

삿된 사랑에 마음 서성이다가 그 아무도 모르는 독백같이

혼인 속 독방은 왜 자꾸 필요한지요, 아침마다

지상에 없는 주소 들고 그녀, 평생의

반려자인 듯 복덕방 아저씨와 세상의

모든 방문들을 그녀, 자꾸만

열고 또 열어보네

 

 

 

김경미

 

이즈음 나는 무척 아름다우니

가을 하늘이 내 청명을 시기하지

기러기가 밤마다 찬 서리를 뿌리고 가도

흰 서리꽃 위에서 언 발로 세상 상처의 연혁을 사랑하므로

 

곧잘 난투극을 벌이며 앞날을 채가던 절망아 잘 있거라

다만 마음이 이정표일 뿐

믿는 것은 무책임뿐, 새벽안개의 맨발도 두렵지 않단다

 

 

 

길은

김경미

 

길은 사랑때문에 내기 시작했으리라

매일 길이 뻗은 곳을 내다보지만

더 이상 시련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길은 저리 흐르고 흘러

결국은 그대에 이르러

평화 보기 좋은 꽃들 사랑 언저리

틔울텐데 쉽게 가주지 못하는 사랑은

 

그러나 결국 사랑이 길을 내지 않겠는가!

 

 

 

꽃씨, 하나

김경미

 

꿈에 문을 열고 꽃밭을 기웃거렸다

꽃밭을 노니는 꿈을 꾸면

마음에 둔 정인과 이별한다던데

 

그래서 오늘 만난 그에게서

휘파람 소리가 났는가 보다?

 

 

 

꽃 지는 날엔

김경미

 

꽃 피는 날엔

누구와도 다투지 않기로 한다

 

꽃 지는 날엔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연두색 잎들 초록색으로 바뀔 땐

낡은 구두로

바다 위 돛단배와 물고기를 만든다

 

어디선가 기차 지나가는 소리 들리면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고

 

저녁 종소리 들릴 듯 말 듯 기억이

자꾸 고개를 돌리면

내 잘못을 용서한다

 

혀로 망친 날은 용서하지 않는다

일주일이나 보름 동안 별빛 보며

세 시간 이상씩 걸어도 부족하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서 출구가 없었던 날들

 

20대가 다 가도록 아름답지 못했고

아름답기도 전에 20대가 다 갔으니

 

서른과 마흔을 보낼수록 점점 더 산뜻해져야 한다

 

그런 봄날의 믿음

차츰과 주춤의 간격들

 

가방 무거운 날엔 입술도 무거워야 한다

종일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다

 

눈물을 잊으면 부족한 게 점점 많아져

얼굴이 곤두서네

 

비 오는 날에도

비 오지 않는 날에도

아무와도 다투지 않기로 하지만

 

꽃 피는 날에도

꽃 지는 날에도

후회가 많아서 운다

 

세상 살면서 가장 쓸모 있는 건

뉘우침뿐이라고

 

꽃 피는 날에도 꽃 지는 날에도

 

 

 

나는 모자이크입니다

김경미

 

멀리서 보면 사람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28개의 우산과 6천10여 개의 벚꽃잎과

오십 자루의 별빛과 열일곱 트럭의 자두와 반창고

17개의 마을 우체국과 113개의 골목과 3만2 번의 기도와

365장의 커튼으로 이뤄진 모자이크라고

 

우겨도 소용이 없는 일

 

나 모자이크된 곳은 누군가의 심장 부분이어서

나 한 조각만 떨어져도 그는 피를 쏟고 숨이 끊어진다고

 

우긴들 소용없는 일

 

단색의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을 맡아 검은 머리카락들 속에 묻혀

여기는 머리카락입니다, 표시하다가

어느 날, 나로선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어도

포도송이 같은 여기는 여전히 곱슬 머리카락 그대로입니다,

떨어져 굴러도 통증 하나 없는, 심장과는 정반대 부위입니다,

아무리 상실되어도 상실이 아닌 상실이

모자이크 속의 내 위치

 

달빛이 어디에서든 기어이 찾아다 메꾸려는 조각,

삶의 심장을 맡은 조각들은

누구일까 왜일까 생각해보는 밤

어디선가 그네 삐꺽이는 소리가 들리고

듬성 듬성 타일 벗겨진 여행지 욕실에서처럼 남루해지는 마음

수배 전단지의 얼굴들이 더 나은 위치일 듯하지만

 

누구 하나 빠짐없이

멀리서 보면 사람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133개의 죄와 1,330개의 혐의가 넘는

끝내 다 붙잡혀가 모자이크 처리될 얼굴들이다

 

 

 

나는야 세컨드

김경미

 

1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남자든 여자든

그러니깐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

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2

또한 생의 물릴 수 없는 단 하나의 정혼자,

그리하여 언제나 생을 세컨드, 그

기약 없는 지위, 기어이 이별해버리게 될,

설레임과 체념이 다리를 섞는, 아무리 속여도

끝내 넘볼 수 없는 조강지처, 그 천생연분 버티는,

넘보는 순간 끝장인, 

 

그리하여 언제나 나날을 두집 살림으로 남몰래

서럽고 파릇파릇 격렬케 하는, 빈집처럼 외롭고

헛헛케 하는, 들키면 머리채 뽑히게 하는, 그리하여

그날까지, 이곳에서의 모든 생

세컨드, 그

첩질이게 하는, 생의 본처,

그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영원한 언약, 배신 없는

사랑, 그 영광의

퍼스트레이디, 는

죽음, 인 것을......

 

 

3

서로가 첫 번째인 혼인하고 아이 낳고

부부라 불리지만 왠지 항상 당신의

첩인 것만 같지요

당신도 항상 나의 그것인 것만 같지요

 

당신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본부인이

이 하늘 밑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어

당신 마음의 제일 좋은 곳을 발라먹고

 

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내 본남편 있어

귓속에 집을 짓고 끝없이 훌훌 떠날 것을

속삭이는 듯하지요

 

그러나 모두들 한여름 흰 치잣빛 낮잠처럼

어쩌면 그렇게 태연한 연분의 표정들인지

가을 따라 눈썹 몇 번쯤 깜박이면 시야도 창호지 너머처럼 뿌옇게 스러져

 

스러지다 촛불 탁 엎어지면, 그제서야 본댁으로들

각각 돌아가, 삶, 이라는 불륜, 에 대해 무슨 용서와

고통을 치를지, 보지 못한 태생 저편의 본가가 살수록

그립고 궁금치 않은지요

 

 

4 - 연애편지를 위하여

무언가 잊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지요

- 개나리꽃 환합니다 사랑하는 그대 봄볕처럼

겨웁던 눈빛은 여전한지요 혹은 죽었는지요

 

아주 긴 총을 들고 나비처럼 사뿐 세상의 옥상에

올라가고 싶지요 - 당신이 준 연보랏빛 스웨트를 찻집에

잊고 나왔었죠 창밖이 온통 벚꽃의 일생 같기에요.

 

올라가서 그대 머리에 총구를 조준하고 싶지요

정확히 - 사람에게 그 무엇 있어 그토록 열렬히

서로 넝쿨 오르고 그 무엇 있어 고양이 발처럼 돌아서고

대체 사람들에게 그 무엇 있어 생에게 대체 그 무엇 있어

 

찻집 유리창 너머로 그대 얼굴이 마악 부서지는군요

사람들이 웅성대네요 무언가 잊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었지요 - 싱싱하고 맑은

벚꽃색 손톱같이 자라리라던, 벚꽃같이

짧게 깎아내버린 사랑 봉숭아 물인지 핏물인지 알 수 없는

 

가만, 피 흘린 채 들것에 눕혀지는 저건

나 아닌지요 저 옥상 위 저건 당신이 아닌지요

대체 무슨 잊을 수 없는 짓을 한 것인가요 어제도

나, 누군가의 총을 맞고 죽었었는데 - 꽃이 피려고

스스로 애를 쓰는지 바람이 불려고

스스로 애를 쓰는지 사랑도 스스로 사랑을 애쓰는지

 

연보랏빛 스웨터가 툭툭 목숨을 털고 일어나

봄날에 다시 사랑을 하고 총을 들고 옥상을

오르고 우리 탁자 낭자히 보랏빛 스웨터가 흩어지고,

다들 뭔가 잊을 수 없는 생을 갖고 싶은 게지요

- 돌아와 다시 연애편지를 쓰지요 생이여 여전한지요

나비처럼 가볍게 우리를 들어 올리곤 하면서 아름다운

날들이에요 용서해 볼까요 우리 어디 한번 나는

바퀴벌레도 죽일 수 없어요 말하죠 가라 안 보이는 데 가서

살아라 너도 나의 전생일지 모르니

 

 

5 - 우리들의 리그

세상은 단지 두 집안으로 나뉜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박찬호-마이너리그 때는 외로웠어요 혼자라는 생각에

(마이너리그에는 사람수도 훨씬 많은데......)

마이너리그 사람들은 사소한 모욕일수록 목숨껏 화를 낸다

요즘 시 안 쓰나 봐요, 안부를 물으면, 속으로

경멸한다. 천한 것들. 밥 먹는 것 못 봤다고 요즘 통 식사

안 하시나 봐요 하다니 청탁이 없다고 시인이......

......열등감만 한 무기가 어디 있으랴

일 다녀보면 메이저리그의 수위 아저씨는

마이너리그의 사장님보다 더 무섭고 당당하다

미국인 선생을 위해 영어학원에서는 이름을 간다

아이 엠 톰 유 아 린다

꽃일수록 서양풍으로 처신해야 한다 그래도

마이너리그의 의자 수는 소파

메이저리그의 의자 수는 못임을 위안하지만

나라가 토끼 형상이라

우리는 유난히 눈들이 빨갈까 지구는

어디나 그럴까 우리가 아무래도 유난할까

 

덤으로 마음도 늘 메이저와 머이너로 나뉜다

거기서는 항상 먼지가 붕새를 쪼아 죽이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

김경미

 

나는 늘 빗나가는 꿈을 꾸지 라일락 꽃피는 오후에 세상은 항상 내 꿈과 다르고 세상도 나를 꿈꾸지 않을 것 같은 미몽의 달 I don't belong here* 내 노래를 그들이 부르다니 그들 노래를 내가 오늘 다시 부르다니 다섯 개쯤의 노래와 세 가지쯤의 꽃나무들과 저녁이라는 이름 하나면 이곳에 속했던 추억 충분히 벅차다고

그럼에도 기어이 돌아와 다시 또 살아보련다 미몽을 기웃댄다지

 

* 그룹 "radio head'의 「creep」 중에서

 

 

 

나는 좌절하는 것들이 좋다

김경미

 

함박눈 못 된 진눈깨비와

목련꽃 못 된 밥풀꽃과

오지 않는 전화와 깨진 적금,

나를 지나쳐 다른 주소로 가는

그대 편지

 

나는 좌절하는 자세가 좋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뿌리의 세계를 들여다본 것들

마치 하늘에 엎드려 굽어내려 보는 신 같은

 

 

 

나, 라는 모자이크

김경미

 

멀리서 보면 사람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28개의 우산과 6천 10여 개의 벚꽃잎과

50자루의 별빛과 17대 트럭의 자두와 반창고

17개의 읍내 우체국과 113개의 골목과

4만 2번의 기도와

360개의 연필과 지우개이길 바라지만

 

실은 검은 머리카락 한 올

포도송이 뒤편 아래쪽에 끼인 일그러진 포도 한 알

배 갑판 위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

여행지 여관의 세면실 천장 끝 타일의 깨진 금

아무리 떨어져 나가도

전체를 곤경에 빠뜨리지 못하는

 

바람에 뒤집히는 치마

차표에 번진 눈물 자국

오래된 어떤 노래의 리듬 한마디 정도만 되어도

아주 훌륭할 텐데

 

멀리서 보면 사람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133개의 죄와 1,330개의 혐의가 넘는

끝내는 예외 없이 붙잡혀가 모자이크 처리될

 

숨소리들

 

 

 

나, 라는 이상함

김경미

 

새소리가 싫은 것

잦은 이사와 기차는 좋지만

둥근 산책과 등산복이 싫은 것

가만히 있는 건 유리창처럼 근사한 일

유리창 옆에 혼자 있는 건

산꼭대기 구름처럼 높은 일

 

독시체르* 같은 이름

어딘지 지독한 느낌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그 악기의

손자국 같은 부푼 뺨

슬픔에 담갔다 꺼낸 것들은 안심이 된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들은

무조건 믿을 만하다

 

양말을 한쪽만 신는 것

2개는 너무 많거나 아프리카처럼 너무 뜨겁다

높은 굽이 좋은 것

땅과 알맞게 떨어져 걸어야 애정도 생긴다

죄와 벌쯤이어도 괜찮다

나뭇잎들의 성격은 해마다 4개쯤이고

망치와 못 틈에 끼인 내 성격은

오늘의 7개에서 내일은 2개로 줄었다가

3개로 버려 지금은 마이너스다

당신은 몇 개를 발휘하고 몇 개를 휘발시켰는지

 

이 행복이 다 실패지 뭐겠는가 포기하다가도

사실 더 이상한 존재가 있으니

배와 비행기이다

어디든 가고 싶다고

쇳덩이가

물 위를 걷고 허공을 날다니

 

더 이상한 존재는 물고기들

물속에서 익사하지 않다니

 

다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나만 빼놓고 다들 지독하다니!

알약은 절대 못 삼켜

사람도 가루를 내야만 먹는 나인데

 

* 티모페이 독시쩨르(Timofei Dokshitser(1921~2004) : 우크라이나 출신의 트럼펫 연주자.

 

 

 

나뭇잎 한 장의 생각

김경미

 

뿌리에게 나는 어떻게 관여해야 하는 것일까

내 접촉의 세상은

눈썹 한올 같은 이 스트로우가지 하나일 뿐

목숨이 거기서 올라온다는 뿌리는

한번 본 적도 없는데

나이면서 나도 만나지 못한

흙 밑 어둡고 고요한 뿌리에게

내 것이면서도 도무지

일면식도 없는 세상

그 광활에게,

멀고 작은 한 나뭇잎인 나는 대체 어떻게

 

 

 

나와 당신이라는 이상함

김경미

     

나만 이상한가 나만 게와 채송화가 일매(梅)와 일국(菊)의 이름을 얻은 일란성 쌍둥이인가

 

인기 없는 슬로바키아에게 댁이 그 유명한 슬로베니아냐고 물은 적이 없는지 마주칠 때마다 이름 앞뒤를 바꿔 부르는 이에게 관대한지 오래된 취미는 흩어진 모래알, 미치는 반복, 중첩된 뜻, 제1 한강교 건너 갇힐목, 삼각팬티 같은 시간들, 어깨까지 잠기는 허영과 허황, 발목을 닮은 관, 바퀴 달린 여행용 트렁크 사제끼기, 습관적으로 자신에게만 치렁치렁 매달리기

당신은 일 년에 몇천몇만 개까지 나뭇잎을 세어봤는지 당신은 늘 양말 두 쪽을 가지런히 신고 단추는 남녀화장실처럼 왼쪽이나 오른쪽 꼭 구별해서 꿰고 일생에 다섯 명 이상의 친구가 반드시 있어야 성공이고 삼각관계보다는 2인 삼각이 더 낫고 웃음의 부피가 알맞고 지푸라기가 아니고 수치스럽지 않고 당신들은 안 그런가 나만 이상한가 자신이 내 엄마라는 남자를 만나본 적이 당신들은 없는가 나만 이상한가

 

 

 

나의 백만 원 계산법 - 2021년

김경미

 

마음에 절대로 없는 사람들과 밥을 먹고

당연한 듯 밥값을 내고 나오면

 

언제나 백만 원이 나온다

항상 백만 년이 나온다

 

차라리 기차를 백만 원어치 탈걸

천천히 양말을 백만 원어치 고를걸

수상택시를 타고 백만 원어치 바다를 달려 제주도에 눌러앉을걸

 

백만 원 후에는 언제나 소나기가 내리는 법

차라리 삼백 개의 비닐우산을 살걸

 

일회용 칫솔과 비누 천 개,

혹은 김밥 50인분과 소주를 사서

기차역 앞에서 나눠 줄걸

 

언제나 기부와 적선이 되는 법

 

마음에 없으면 언제나 백만 원이 나온다

4만 166일 114년 백만 년이 든다

 

그러므로 양말을 뒤집어

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백만 단위를 쓰지 않도록

114년이나 우산도 없이 소나기 맞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나는

언제나 소수점 이하 다섯 자리 같은 나는

언제나 점심값 백만 원을 대비하며

백만 년을 사는 나는

 

 

 

나의 서역

김경미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 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선천적으로 수줍고 서늘한 가을인 듯

 

오직 그것만이 생의 한결같은 그리움이고

서역이리니

 

 

 

나의 제1 외국어

김경미

 

가을비다

대화가 가능할 때까지

반복 학습 중이다

 

 

 

나이

김경미

 

이목구비에 직업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정물화는 원래 제 뜻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화병, 해골,

꺾인 꽃, 썩은 과일들만 주제로 삼는

허무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건강에는 좋지만 과일 같지는 않은 토마토를

먹어야 한다

 

몸 안에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서로 닮아간다

구두코와 코끝이 맡는 냄새도 닮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벽시계를 향해 생일 케이크를 힘껏 던져보기도 하고

케이크에 달력의 얼굴을 실컷 엎어주고

여전히 재치를 믿는 듯 웃어보기도 한다

   

바위에 제 부리를 깨고 제 발톱 제 깃털을 찧고 나면

살아온 날만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새들의

전설의 바위산 가는

정거장

짐 보퉁이처럼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

몇 년이 지났을까

슬픔도 믿어야 한다

 

사람에겐 스물아홉이나 서른아홉 두 가지 나이가

있을 뿐인가

 

정거장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다시 든다

 

 

 

날라리와 날파리

김경미

 

요즘 시도 안 쓰지 이 날라리!

(가을 결혼식 정원, 허물없는 후배가 내 남산타워만 한 구두 굽을 본다)

 

---쓰면 다니?

(도대체 가볍고 즐거운 치장들은 어떻게 그리 행복할까

포장지를 바꿔치기해서 뜯어보고 싶었던 뱀처럼 긴 소원이었어)

 

---써도 서랍 속이지

누가 청탁받아야 주나, 그냥 갖다주면 싣는 거지

(위대한 너희 단골들!

얘, 나는 이 무거운 심장에 날라리 될 행복이 있을까, 평생......)

 

---그랬다가 거절당하면!

(생각해보니 인생 내내 그게 무서웠다! 그토록 무서웠다!

날파리들은 거절당해도 맞아 죽을 때까지 찾아든다 훌륭하지 않은가!)

 

역사는 날파리한테서 진화할까?

 

 

 

내 마음의 지도

김경미

 

천천히 심장 속을 들여다보니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풍길과

거기, 리아스식 해안과 아픈 톱니들 사이 다도해 어둠들

제풀에 섬이 되어

주먹밥 크기들로 놓여 있는 눈물도 보여요

너무나 오래 헛되고 외로웠으며

어찌 다스릴 수 없었던 몇 채의 무너짐,

그리움들은 많이도 줄 끊어져 나부끼고

사랑

아파서 아름답다니요

 

자꾸 무릎을 다치면서 깊이 돌아보니

행복은 왜 꼭 그렇게 나와 멀리 떨어져 앉아 서먹했던 것일까요

 

 

 

네버 엔딩 스토리 - 밤, 동명항에서

김경미                                  

 

누군가 어둠 속에 웃고 있다

나부끼는 하얀 옷자락

손짓하는 바다와 마주섰다

 

갯벌에 지치도록 발자국을 찍거나

모래성을 쌓고

눈을 맞으며

슬며시 모래 무덤 속에 드러눕는다

 

어두울수록 투명해지는 영혼

 

울컥 독주에 취해

비린 날을 구토하거나

바득바득 우기며 뛰어들어도 저 바다,

성내지 않는다

지극히 가슴 열어 품어준다

 

하늘에 환한 구멍, 아 나는 너무 달이 아프다

 

 

 

네 살의 여자

김경미

 

야야야야

네 살짜리 한 아이 여자가 오월의 라일락꽃 느티나무 밑을

성냥개비 같은 두팔 활짝 바람에 꽂은 채

사과 조각처럼 뛰어간다

그 속 원시의 주술사가 세차게 북을 두드린다

라일락빛 뺨 위로 얼마든지 무한한 날들이

여자의 입술을 귀로 귀로 복숭아처럼 끌어올린다

생에 그리고 사랑에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흰 치아 몇 톨이 보인다

질투와 연민으로 가슴이 에인다

훼손이여

나 생을 얼마나 편지 뜯어보지도 않고 탕!

문 닫아버렸는지

꽃 속의 뜻들 두려워 서성였는지 알지

알아도 멈출 수 없는 낭비 덕에 나 살아냈는가

느티나무 같은 네 살짜리 여자가 펼쳐 보이는 시간이

기울인 양초에서 떨어지는 촛농처럼

 

라일락 꽃잎에서 어깨로 얼굴로 똑, 똑, 너무 뜨겁다

 

 

 

누가 꽃을

김경미

 

꽃은 누가 제일 많이 생각해주나

 

줄무늬 티셔츠의 꿀벌인가

물 주러 오는 비의 발소리인가

해마다 다시 손 내미는 잎들인가

 

너무 큰 식욕이 고민인 흙과

파라솔 색깔의 햇빛들

우박과 천둥과 벼락도 있지

 

그들도 다 생각해서 그 큰 몸집을 끌고

기어이 찾아오겠지만

 

노심초사 언제고 손바닥을 받쳐 들고

여린 귓밥 파줄 듯 무릎에서

접시에서 의자 디딤돌까지

하인까지 다 떠맡는

내내 한결같이 곁에 붙어 있는

 

제때, 혹은 늦은, 식의 이름들

일인다역의

 

꽃받침들!

 

 

 

누가 사는 것일까

김경미

 

1.

약속시간 삼십 분을 지나서 연락된 모두가 모였다

우리는 국화 꽃잎처럼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웃었다

불참한 이도, 더 와야 할 이도 없었다

식사와 담소가 달그락대고 마음들 더욱 당겨앉는데

 

문득 고개가 들린다 아무래도 누가 안 온 것 같다

잠깐씩 말 끊길 때마다 꼭 와야 할 사람 안 온 듯

출입문을 본다 나만이 아니다 다들 한 번씩 아무래도

누가 덜 온 것 같아 다 모인 친형제들 같은 데 왜

자꾸 누군가가 빠진 것 같지? 한 번씩들 말하며

 

두 시간쯤 지났다 여전히 제비꽃들처럼 즐거운데

웃다가 또 문득 입들을 다문다 아무래도 누가 먼저

일어나 간 것 같아 꼭 있어야 할 누가 서운케도 먼저

가버려 맥이 조금씩 빠지는 것 같아 자꾸 둘러본다

 

2

누굴까 누가 사는 것일까 늘 안 오고 있다가 먼저 간

빈자리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저 기척은 기척뿐

아무리 해도 볼 수 없는 그들에겐 또 기척뿐일까 우리도

생은 그렇게 접시의 빠진 이 아무리 다 모여도

상실의 기척 더 큰 생은

 

 

 

눈물

김경미

 

깎아낼 수 없는 나이

 

청진기를 댄 계절이

심장처럼 지나가고

 

심각하지 말지어다

그게 지구의 새로운 전략임을

그렇게 타일렀건만

 

오오 또 생연탄만 한 눈물이

 

 

 

눈물의 횟수

김경미

 

내 집 낡은 뻐꾸기시계는 재 울음의 횟수가 따로 있다

밤 한 시에 갓난애처럼 열 번 스무 번 깨어 울거나

아홉 시에 달랑 한 번만 탁, 침 뱉고 들어가거나

다음 날 정오엔 절 마당 동백꽃 속에 빠진 채 아예 잠잠하거나

 

나 또한 나만의 눈물의 횟수가 따로 있으니

 

안심할 때만 골라서 뒷머리에 돌을 맞거나

시작하려 하자마자 떠나거나

애절하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거나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찬밥을 먹거나

한낮의 버스에서 쇼핑백 터지듯 울음이 터지거나,

 

스무 살에는 서른을 대고

서른엔 스무 살인 척했거니

첫눈에 눈물의 횟수를 알아맞힌 그 새와 나,

 

번번이 땅에 떨어지는 얼굴이며, 다음날 약속을

전날에 나가 자처하는 이별 통첩이며, 내일의 줄거리를

다 발설하고 마는 어제 따위까지

 

다른 시간들은 다 아무래도 좋았다

 

 

 

다녀오다

김경미

 

다녀오면 언제나 잘 이어지질 않는다

더 잘 잇거나 최소한 같아야 하는데

똑같은 곳인데 잘 이어지질 않는다

나이와 잠과 돈과 인내와 교제와

끊길 수 있는 건 다 끊긴 듯

 

다녀오면 다리가 뻐근하도록 잠이 안 오고

종일 사과꽃 지는 소리만 들리고

있던 게 두렵고

없는 게 거슬리고

다녀왔으니 양말만 벗고 가방만 풀면 그만인데

가방은 열리지 않고

양말은 수치스럽고

폭풍우는 창문마다 들이치고

 

애인에게 다녀온 사람들

우체국에 다녀온 사람들

술집에 바다에 야구장에 다녀온 사람들

점술가의 집에 동창회에 백화점에 다녀온 사람들

통영이나 춘천, 라오스에 페루에 프랑스에 다녀온 사람들

다녀와서도 모두 잘만 그치는데

 

자꾸 이러면

허황이거나 허무라고

횡단보도 한가운데

구두 뒷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데

 

다녀만 오면 손끝까지 잠이 안 오고

대체 거기 무엇이 있기에

무엇이 있었기에

종일 비가 내리고

혹인지 매듭인지 구멍인지 파도인지

벌레인지 무덤인지

 

다녀만 오면 앞니가 벌어지는가

 

 

 

다시, 바다로 가는 길

김경미

 

푸른 코트 자락 가득히

만삭의 바람을 담고 떠나는 길

 

단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일렁이는 너의 가슴에

오디새 깃털보다 가벼웁게

포말의 발자국으로 남겨지고 싶었다.

 

차고 긴 너의 혀가

뜨거운 내 목을 조여올 때

다시, 진통은 시작되고

얼룩진 코트 자락 사이로

결 고운 모래는 쏟아지는데.....

 

검붉은 피는 넘쳐흘러

하얀 모래밭을 적시고,

또다시, 장미빛 저녁해는 향기롭게 지겠지

길고 긴 탯줄도 함께.

 

 

 

다정

김경미

 

꿈속에서 그는 물빛 양복의 서양 청년이었고

우리는 신혼여행을 막 떠나려는 참이었다

비행기표가 싱싱한 초록나무잎을 펄럭였고

그는 연신 사랑한다, 애정에 빛나는 트렁크를 꾸렸는데

내 속마음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라벤더 향내의 여행 끝 이태리쯤의 낯선 뒷골목에서 그토록 다정한 그가

날 없애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도 모르게 스윽ㅡ

내 목을 처치해버릴 것만 같았다

 

다정해서 그럴 것 같았다

누가 다정할 때마다 그럴 것 같았다

 

장미 꽃나무가 내게 다정해서 죽을 것 같았다

저녁 일몰이 유독 다정해서 유독 죽을 것 같았다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 같았다,

 

 

 

다정에 바치네

김경미

 

당신이라는 수면 위

얇게 물수제비나 뜨는 지천의 돌조각이란 생각

성근 시침질에 실과 옷감이나 당겨 우는 치맛단이란 생각

물컵 속 반 넘게 무릎이나 꺾인 나무젓가락이란 생각

길게 미끄러져 버린 검정 미역 줄기란 생각

 

그러나

봄 저녁에 듣는 간절한 한마디

 

저 연보랏빛 산벚꽃 산벚꽃들 아래

언제고 언제까지고 또 만나자

 

온통 세상을 중심이게 하는

 

 

 

다정이 나를

김경미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장미 꽃나무 너무 다정할 때 그러하듯이

저녁 일몰 유독 다정할 때

유독 그러하듯이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다정이 병인

김경미

 

매일매일 사태가 나는 삶을 어떻게든 막아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인가.

태생적으로 인간임을 슬퍼하는 운명의 다른 이름이 시인인가.

어느 저녁에 방향과 중심을 잃고 통곡하는 마음의 소리를 마음으로 받는다.

인간사의 간극을 어쩌지 못하고 숨결조차 촘촘히 아픈 그의 시 앞에서 그만 무릎을 모은다.

누가 이 생에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아,

"어떻게 사람이어야 하는지 잘"(「그날의 배경」) 몰라 머뭇거리는 생, 그 생은 이 생과 다정하게 겹쳐진 것이다.

세상이 "수상한 것만 빼면"(「멸치」) 그만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시의 혀, 고약한 과오들을 따뜻이 덮어주는 시의 손목. 그의 발성이 값지고 높으며 또한 이토록 간절한 것은 그가 인간의 숲에서 스밀까말까 하며 파도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는 '인간론'이며 드물게 다정한 사람정원의 시론이어서 참 어쩔 수 없이 목이 메어진다.

 

 

 

다정이 병인 양 

김경미

 

1

매일 기차를 탑니다. 거짓말입니다. 한 주일에 한 번씩 탑니다.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실은 한 달에 한 번쯤 탑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사실을 바라는 건 배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꽉 찬 배신은 꽃잎 겹겹이 들어찬 장미꽃처럼 너무 진하고 깊어 잎잎이 흩어놓아도 아름다울 뿐 다른 방도가 없다 합니다.

 

 

2

산수유가 빨갛게 동백꽃을 떨어뜨립니다. 흰 목련이 거짓말을 하더니 샛노란 은행나무가 됐습니다. 정말입니다. 사람 안에는 사람이라는 다민족, 사람이라는 잡목숲이 살아 국경선을 다투다 갈라서기도 하고 껴안다, 부러져 못 일어나기도 합니다. 꽃필 때 떨어질 때 서로 못 알아보기도 합니다.

 

 

3

당신은 세상 몰래 죽도록 다정하겠다, 매일 맹세하죠. 거짓말이죠. 세상 몰래가 아니라 세상 뭐라든이 맞죠. 아시죠. 이것도 거짓말. 사실은 매일이 아니고 매시간이죠. 매시간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진실이 너무 가엾어서죠. 나사처럼 빙글대는 거짓말은 세상과 나를 당신을 더욱 바짝 조여줍니다.

 

 

진흙으로 만든 기차 같죠 어디든 가겠다 하고 어디도 가지 못하죠 다정이 죽인다 매일 타이르죠 종잇장 같은 거짓말에 촛불이 닿을 듯 말 듯 촛농같이 흘러내리는 다정, 뜨거움이 차가움을 잡는지 차가움이 뜨거움을 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다정이라는 거짓말 죽지요. 죽이지요.

 

 

 

당신의 순간 - 마크 로스코. 시카고 박물관

김경미

 

그렇게 사랑했으면서도 당신이 여기 있는 줄 몰랐다

세 번이나 계단을 다시 뛰어 올라갔다 그는 자살했다

내가 진작 좀 더 잘할 걸 보다 못한 경비원이

검은빛으로 둘을 다정히 기록해주고 자리를 떠났다

 

- 몰래 당신의 피에 손을 넣어본다 입에 흘려 넣어주던 그의

오렌지빛 등불이 아직 따듯하다 당신이 여기에 와 있는 줄

몰랐다 목숨한테 잘하는 법을 몰랐었다 시늉뿐임을 알자

그는 떠났다 하마터면 액자 넘어가 뒤축을 잡을 뻔했다

 

- 다음 날 내년 치 달력을 찾아왔다 당신에게 앞으로 잘할 것이다

못 끝에서나 만나자고 그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흐르는 숫자들을 붙들어 죽은 주소를 받아적고

 

무덤 속에서 혼자 걸어 나왔다 당신이 없는 세상은

만만함의 극치일 뿐이다

 

 

 

대도시는 나의 고향

김경미

 

네온사인과 대리석과 플라스틱 꽃나무들과

흰 와이셔츠같이 건조하고 단정한 이웃과

차가운 눈빛과 이기심은 오 내 고향

 

주황빛 황소 노을 대신 회색 노을 지나가고

나뭇잎들 종일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곳

낯선 이들일수록 친밀감에 넘쳐 사은품처럼

초인종을 누르지

그럴수록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곳

전화벨 소리 그침 없어도 낙타처럼 외롭고

외로워 늘 파티와 일탈의 식탁이 펼쳐지는 곳

 

크리넥스 같은 대화와 햄버그 같은 관계들

온갖 빛깔의 질투와 검정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어디엔가는 그런 고향도 있어서

싸구려 좌판 위 매니큐어 같은 영혼도 있어서

영혼들 비닐을 묻는

대도시 오 나의 고향

 

 

 

달걀 빌리러 가기 – C 시인께

김경미

 

아파트 옆의 옆 동으로 이사 온 선배 시인이

문자를 보냈다

 

"언제고 놀러와 달걀이든 빵이든

아무 때고 꾸러와 무엇이든.

나 외로움"

 

다들 좀 차갑다고 생각하는 시인

 

갈게요 언제고 그 옆으로

짚에 싸인 달걀 한 알

 

칫솔이나 껌이 떨어진 날

생선 반 토막이나 슬리퍼 한짝도 부리나케 꾸러 갈게요

 

헛발질로 절벽에서 떨어진 날

귀에서 심한 추억이 쏟아질 때

맨발이나 귀를 꾸러 갈게요

 

어깨나 코가 떨어진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짝사랑이 시작되거나 끝난

쥐와 새의 시간,

새벽도 불사하고 정신없이 꾸러 갈게요

 

화요일에는 벌써 이해심이 떨어지고

금요일에는 벌써 일 년이 비고 말 때

 

무릎이나 팔꿈치처럼

자꾸만 떨어지고 사라지는 것들

 

자꾸만 더 기억나는 것들

 

울면서 꾸러 갈게요

 

잔뜩 약속하고 나는 항상

달려가지 않죠

 

달걀 같은 창밖만 하염없이 내다보죠

나 외로워, 하면서요

숙명이다 하면서요

 

 

 

대한 늬우스 혹은 너 같은 것

김경미

 

20세기에 제일 성격 나쁘던 친구는 21세기에

여아를 세 명이나 입양해 너로선 쳐다도 못 볼 공부에 이르렀다

 

장마 지나갈 때 일일 백팔배 시작한 동료는

가을이 채 안 되어

너 따위 오백 명도 밟아버릴 검은 무릎에 도달했다

 

유효기간이 이년이나 지난 꽃씨 봉투가 서랍 속

기어이 싹을 틔웠다

 

이제는 너 같은 것도 뭔가를 해야 할 차례

희망의 반대말은 '자꾸만 희망을 놓지 못함'

자동차 옆 유리엔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고

옆 자리 사람은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으니

아무리 애써도 지상에 없는 두 가지는

'정처'와

'형언'.

 

때때로 당장 눈앞에서 꺼져버리라고 네가 네게 구두를 집어 던지는 건

미워서가 아니라

자책보다 자학이 더 정열적이기 때문

정열은 무조건 걸치고 볼 일

여하튼 그건 이를테면 조금 엄격한 사랑

 

재난과 행운에 공평하게 대처할 것

 

가장 최근에 저녁이 갈대숲에 써 보낸 뉴스들이다

 

 

 

더 멀어지자

김경미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내 영혼 얼마나 상했는지

이럴려던 게 아니었는데

밤의 빗소리도 자운영꽃밭도 설탕 냄새 나는 눈물이며 유리창들

기차 같던 손목과 포옹들도 잊은 지 오래다

 

귀가하니 몇 년만에 편지가 와 있다

원망과 악담이 가득한 편지

다들 뒤에서 혀 내두르는 이를 가까이했던 죄가 아니라

본인만 본인의 허물을 모르는 건

그녀와 나와 온 지구의 허물

 

반성하므로 그녀와 나는 각자 고독해야 하며

고독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지를 나는 확인하겠으며

없으면 나라도 머잖아 쓰겠으며

쓰기 전에 몇 겹이고 더 고독하겠으며

가족이나 친구가 없는 건 잘못 산 것이란 단정에

화를 냈던 것

저녁 해 지는 길 위에서 낮의 일들을 후회하는 것과

낙엽이 되어서야 멀리 걸어가는 나뭇잎

무릎 꿇고서야 투명해지는 진실

바람에 쓰러진 떠들썩한 간판

해치고 헤치며 상한 영혼

모두를 한 상자에 담아 조건 없이 반성하겠으나

 

너와 나는 부디 이대로 더 멀어져 더 쓸쓸해지자

입과 귀가 다르게 달린

서로가 별빛처럼 보일 때까지

 

 

 

도회 여인들에의 초대

김경미

 

전화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랑 살고 싶거든 일주일에 한 번의 방문만을.

잦은 숙식은 곡예에 해롭죠

혹시 남기실 말씀이 있으시면, 부디 횡설수설의 미덕을

바른말일랑 하늘나라에나 하세요

삐 소리가 난 후, 가을을 잡아 술병 속에 넣어놓았으니

먹든지 말든지 뱉든지 삼키든지 맘대로

혹 메모를 남겨주시면, 삶의 어느 쪽 유인물마다

왠지 내 취향은 없는가 봐요

잠긴 문 앞, 쌓인 새 신문지들 위에 잔뜩 올라 누운 며칠 치 새 우유들 놀라지 마세요

걔네들은 내가 오래도록 안 보여도 끄떡도 안 해요

다녀와서 연락,

못 드리면 새로운 연인을 찾으셔야겠죠 물론

 

 

 

김경미

 

사람들 내게 마구 돌을 던져도 괜찮겠다

푸른 멍들 꽃밭 이뤄도 괜찮겠다

벌이나 죄값보다 살아 무엇이 더 깨끗하겠나

상처나 좌절을

명예로 알 젊음도 지났지만

 

진심으로는 인간에 스미지 못했다

늙 붉은 옥도정기처럼 쓰라리게 도망해서야 모든

병 나으리라 했다

마음을 주어 마음을 받는 선한 물물교환

깨달음이라곤 이 넓은 천지간

내놓는 마음만큼만 누리리라는 것일진대

인간을 사랑하지 못했으니

온 몸, 무덤처럼 퉁퉁 붓도록

인간의 돌을 맞아

쓰러진 김에 입관 같은 뿌리 다시 내려

치마 같은 활엽수 선선히 펄럭이는

아예 다른 근원에 가보고 싶다

 

 

 

돌파

김경미

 

송곳 끝을 밀어내는 습자지 뭉치

덤프트럭을 통과해내는 채송화

포크레인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개미

톱니바퀴를 물어뜯는 카네이션

총알의 중심부를 가르는 촛불

 

여기 이곳을 끝끝내 돌파하자고 내 영혼이여

 

 

 

등(燈) 축제라는데 나는

김경미

 

등(燈) 축제라는데 나는

어둠을 구경하러 간다

 

어둠은 무거운 걸 많이 들어

팔이 근육질이다

잡힌 사람들은 발버둥을 친다

내려놓으면 서로 재밌었다고 한다

 

천변에는 구경꾼들보다 김밥 장수가 더 많다

어둠 속에서 김밥을 먹은 적이 있다

두 번이었다

한 번은 방문 밖 마당의 축제 때문이었다

초대받지 못했으므로 없는 척 불을 꺼놓고 먹었다

한 번은 옆방의 파티에 초대받아서였다

초대가 싫어 없는 척 불 꺼놓고 먹었다

 

두 번 다 김밥은 식었고

하필 물 한 모금도 없었다

초대는 잔인한 데가 있다

 

없는 척하는 것보다 힘든 쪽은

정말로 없는 취급을 당할 때다

물론 누구나 아는 얘기다

거리엔 김밥 장수가 넘치고

 

등에서 나오는 빛들이 조악하다

서둘러 다시 어둠의 팔짱을 낀다

 

 

 

떠나지 않은 자들의 냄새

김경미

 

얼마나 방바닥에 불처럼 솟구치는지

물소리 차 소리 피아노 소리 TV 소리

얼마나 머리가 터미널 같은지

아이 우는 소리 헌 집 갈려는 공사판 소리

내 방은 다세대주택으로부터 돌덩이같이 흔들리고

오랜만에 얻은 시간들 허공을 휘젓고

슬픔은 염색공장의 굴뚝처럼

주말의 햇덩이를 퍼 올리고

퍼렇게 염색된 정적의 아이들을 퍼 올렸다

 

 

가난할수록 소음의 부피는 느는 것일까

나는 누구의 소음일까

어지럽다 여기는 소음사막 소음의 천국

소음의 기중기가 방을 들어내려고 한다

사람 모인 곳의 이 풍요한 악취

소음은 살아서 떠나지 못하는 자들의

서럽고도 찬란한 냄새

 

 

 

떠들지 않는 법

김경미

 

채송화가 좋아하는 햇빛의 당도에 대해

언덕이 아껴둔 그늘의 명암에 대해

발목 깊숙이 드나드는 골목들에 대해

찢어버린 사진 속 얼굴에 대해

 

내 심장에 제일 해로운 건

너무 큰 언성의 하릴 없는 긴 긴 대화

 

그 무서운 분쇄기에 몸이 끼지 않도록

 

자주 입을 벌린다

비눗방울을 불거나

나뭇잎들에게 입김을 불어주는 방식

가로수들이 간격을 두고 걷는 방식으로

 

때때로 칫솔질을 잊고

한밤중에 발바닥이 너무 뜨거워 깬다

실은 방식을 잊고 하루 종일 불 위에서

심장을 떠벌렸던 것

 

고개를 내려뜨리고

혼자 조용히 울었다면

더 높고 맑았을 확률을 잊은 채

 

 

 

또 다른 저녁

김경미

 

글에 졌다기보다

생에 졌다는

무릎

 

너무 늦지 않은 것이길

 

생에 졌다기보다 은행나무나 뭉게구름에

혹은 새벽 두 시의 밤하늘에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

저녁 석양 앞에서 외국 사람처럼 운다

 

 

 

마음 기울다가

김경미

 

바람둥이처럼 흰 눈 쏟아지는 날

바람둥이라고 소문난 남자와 일 때문에 차를 마신다

소문 달리 그 삼십 대는 언뜻 언뜻 수줍음 드러나고

흰 눈에 덮인 지붕 색깔이나 뾰족한 돌부리처럼

속으면 안 된다고

끌려가지 않으려 뒷발 안간힘으로 뻗대는 고양이처럼

일에만 몰두하려 하는데

창밖의 눈 때문에 일에는 마음이 안 간다며 그는 웃고

어린 시절 담배 불량스럽게 피워문 동네 오빠한테 끌리듯

내 마음도 자꾸 진척이 되어가면서

 

바다 위 한쪽 바닥 뚫린 배처럼 위험하게 기울고

기둥 하나 삭아가는 집채처럼 불안하게 기울다가

 

창밖의 눈 바람둥이처럼 어느덧 그쳐 버리고

그새 사랑과 이별을 다 끝낸 두 남녀는

또 흰눈 같은 즐거운 쓸쓸함 하나를

받침목 줄 세워놓은

마음 헛간에 나눠 담고 총총히

 

 

 

마음의 근황

김경미

 

그저께 저녁에는 눈 내리는 골목길을 마악 돌아섰지요

일주일후 쯤에는 밤 버스 차창을 내다보다가 눈물 핑 돌았지요

오늘은, 오늘은, 어김없이 그대 사랑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못 걸려온.

 

내년에는 사람 없는 곳을 찾아가

사람들을 생각하는데 봄이 꽃 피어 가슴 아팠습니다

삼사 년 후쯤엔 처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려 애썼지요

그저께 밤에는 거울 앞, 화장을 지우고 보니

푸른 시신이 많이도 살아서 돌아다녔더군요

무엇을 더 갖고 싶었을까

바위들 치마에 스쳐서 다 닳아 없어지는

반석 겁의 시간쯤엔 내 눈빛도 맑아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눈물 잘 흘리는 전생에는 사랑이

참 많이 힘들고 미안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기를

 

 

 

마흔에

김경미

 

이목구비에 직업의 뼈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정물화는 원래 제 뜻으로 움직일 수 없는 화병, 해골,

꺾인 꽃, 썩은 과일들을 담는 허무의 그림이었다

건강에는 좋지만 과일 같지는 않은 식탁 위 토마토 식으로

살아야한다

 

몸 안에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서로 닮아간다

구두코와 코끝이 닿는 곳도 비슷해지고

 

마흔개의 생일 촛불은 집과 달력을 모두 태우기에도 좋다

 

바위에 제 부리를 으깨고 발톱과 깃털을 찧고나면

살아온 사십 년만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전설의 바위산 가는

정거장

짐 보퉁이처럼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새들

몇 년이 지났을까

슬픔도 믿어야 한다

 

사람에겐 서른 아홉과 마흔두 가지 나이만 있다는 듯

  

정거장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든다

 

 

 

막막함 속에서 - 수상소감

김경미       

 

바깥세상에서 크게 속상한 일 겪고

간신히 마음 다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파 다듬듯 울면서 가다듬는 즐거움.

단추 달 듯 입 다무는 즐거움.〉

으로 시작되는 메모 글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던

늦은 밤이었다.

허공을 가던 좋은 소식 하나, 내 흰 전화기에 문득 내려앉았다.

그 소식, 받은 게 아니라 마치 가로챈 것만 같아

전화기를 든 손이 뜨거웠다.

시에 대해 할 말 별로 없다.

불 끄고 누웠지만 아직 잠은 오지 않거나,

술자리에서 혼자 슬그머니 일어나 나오거나,

물들어가는 은행잎에 문득 가슴 무너지거나 할 때,

어떤 감정과 글자들이,

마음같이 마냥 잡아당겨지지 않는……

잡아당길 수도 없는……

삼각의 혀만큼만 내밀어진다는 게 진저리나게 막막하기도 하고

기뻐 벅차기도 하다는 것. 그럴 때 조금쯤 울먹대는 눈을 하는 내가, 내가 아는 가장 지순한 나라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칠순 후반의 엄마는 당진으로 훌쩍 이사를 가서도

집 마당에 교회부터 세웠다.

강대상과 피아노와 자줏빛 우단 헌금통과 화병의 들꽃은 있지만

목사님도 없고 신자도 거의 엄마 혼자인 교회다.

그 적적함에 조그만 봉투라도 하나 밀어 넣으면

엄마는 천국을 본 듯 기뻐하시리라.

전화 끊자마자 두 팔 활짝 벌려 축하해주던 광헌과 새벽도 고맙다.

그리고 황동규, 김주연, 김명인, 세 분과 예심 심사위원들께,

가장 막막해하는 시인을 찾아내어 격려해주신 마음,

잊지 않겠다 하면 혹 무례가 될까?

어느 날 한 자리 모인 이들의 한 끼 밥과 술을

시로써 다 낼 수 있다는 것도 고맙고 신기하다.

 

 

 

만재흘수선

김경미

 

그해에는

바람 만드는 법을 배웠으되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괜찮았다

 

다음 해에는

내 삶의 전략이 나뿐임을 눈치채고 모두가 떠나갔다

그것도 괜찮았다

 

가령 내 키가 형편없는 건 너무 일찍 비애가

머리를 눌러서였을 텐데 그것마저 괜찮았다

 

어느 해에는 바다에 나갔다가

선박 옆구리에 그어진 세 단계의 선을 봤다

만재흘수선

- 여기서부터 침몰입니다. 곧 침몰입니다. 침몰 시작했습니다.

출렁대는 경고선들

 

내 침몰의 세 가지 <만재흘수선>은

라일락과 본동가칠목과 슬로바키아

불안과 공황과 흰 동전들

침묵과 기러기와 다정

노란 고무 슬리퍼와 책상과 자신이 내 엄마라는 남자

다 적을 수 없는

기울기와 가라앉음과 잠김

 

그래서 바닷물에는 절대 발을 담그지 않는다

 

 

 

맨드라미와 나

김경미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다 흐린 날씨는 내가

좋아하는 날씨

좋아하면 두통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화단의 맨드라미는 더 심하다

온통 붉다 못해 검다

 

곧 서리 내리고 실내엔 생선 굽는 냄새

길에는 양말 장수 가득할 텐데

달력을 태우고 달걀을 깨고 커튼에 커튼을 덧대고

혀의 온도를 올리고

모든 화단들이 조용히 동굴을 닫을 텐데

 

어머니에게 전화한다

대개는 체한 탓이니 손톱 밑을 바늘로 따거나

그냥 울거라

성급한 체기나 화기에는 눈물이 약이다

 

바늘을 들고 맨드라미 켵에 간다

가을은 떠나고

오늘 밤 우리는 함께 울 것이다

 

 

 

멸치

김경미

 

잡아도 잡아도 멸하지 않는다 하여 멸치라 했다 한다

 

그렇다면

연보라빛 오월의 라일락나무들도 멸치다

유월, 담벼락에 온통 줄도장 찍는 줄장미들도 멸치다

그때마다 자궁 속 다시 나오고 싶은 여자도 멸치다

그 밤마다 치마 속 다시 들어가고 싶은 남자들도 멸치다

 

저 파닥이는 흰 구름도 빗물도 빗물 적시는 먼지도

무엇이든 다 매만진다는 세월도 추억도

다들 단도처럼 반짝대는 멸치다

 

당신이라는 세상, 그 수상한 것만 빼면

 

 

 

멸치의 사랑

김경미

 

똥 빼고 머리 떼고 먹을 것 하나 없는 잔멸치

누르면 아무 데서나 물 나오는

친수성

너무 오랫동안 슬픔을 자초한 죄

뼈째 다 먹을 수 있는 사랑이 어디 흔하랴

 

 

 

명함에 쓴 편지

김경미                                     

 

눈 아주 많이 내리던 날이었지요

여의도 한 빌딩 지하에서 마주쳤지요

십몇 년만인가 아득한데 아직도 혼자라며 웃었지요

걱정 스치는 이쪽 눈빛에 괜찮아요, 괜찮아요

참 번듯한 명함을 내밀었지요

귀찮고 성가신 사소함들에마다 찾으라 했지요

여름 햇빛속 걷다 가방이 귀찮을 때, 손톱 밑에 가시 박혔을 때,

비싼 음식이 맛없을 때, 돈 꾸고 갚기 싫을 때,

그리고 또, 소녀인 양 웃는데 문득 흰 나비 떼들 창을 넘어 들고

따라 들어온 바람은 서늘했지요

신사의 악수는 청량했지요

돌아와 베란다 저 밑, 공사 끝나가는 성당을 봤지요

봄 되면 가서 많이 뉘우치리라 했던 곳이지요

붉은 벽돌 위에 쌓은 흰 눈이 꼭

남자의 울어 붉던 눈 같지만

폐인 된다더니 안 된 그대

그 명함 눈 속으로 날려 보냈지요

마당에 선 성모마리아, 두 손 벌려 그 흰 종이

다 받아드는 것 똑똑히 보았지요

 

 

 

모던의 속도

김경미

  

실내를 달린다 여긴 중앙아시아 초원 사바나 아프리카보다 넓다

낡은 살갗을 걸친 말과 맹수도 독수리도 다 유리창 안에

들어와 있다

 

역사상 최초의 모던은 바로 이곳 런닝머신

영어로는 트레드밀 트레드밀은 한국어로 쳇바퀴

이곳에서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발밑으로 들어가

뒤꿈치로 다시 나온다

달릴수록 더욱 많이 딛게 되는 제자리

앞도 없고 뒤도 없는

진정한 유목의 기술적 재현이다

 

십 년 전의 기차표도 되돌아나온다 나는 스물세 살이었고 젖은 우산

같았다

이별의 홀가분함을 아직은 몰랐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뒤를 돌아본다

이곳은 고백에도 가장 좋은 개인의 성소

그는 미래의 죄를 고백하며 옷을 벗고

지나치게 가벼워진 나는 더욱 멀리 날아가

늙은 유목민을 해독한다

 

- 나뭇가지를 분질러 불을 붙이고 그 연기 눅눅해지면

머지않아 오아시스다

그곳에 주저앉을 사람들은 장차 바깥을 잃을 터

그러나 거기 학교를 차려 가르칠 수는 없는 일

그들의 주검이 돌아올 때마다

벌판의 돌 하나씩 불붙여 밤하늘에 쏘아줄 뿐이다

별들이 끝없다 보폭을 조절한다 런닝머신

 

지상 최후의 모던도 여기 이곳 영어로는 트레드밀

트레드밀은 쳇바퀴

실내라는 문명의 별 하나는

제자리돌기를 위해 이토록 멀리까지 왔다

 

 

 

무릎을 끌어안다

김경미

 

구두 수선소들 문 닫을 시간

게와 거북이 들 손발 거둘 시간

 

청색의 저녁 창 앞에 앉아

두 무릎 잔뜩 끌어안으면

둥그랗게 말린 몸

금세 옛날식 검은 레코드판이 되고

그 까맣고 납작한 바닥에서 첫사랑들

몇 명이고 걸어 나온다

 

상처의 가늘디가는 길을 따라 나오는

남자들 음성

 

이토록 바닷가 소라 껍질 같은 거라면

진주잡이 합창이라면

얼마든지 더 많은 상처였을걸

 

두 무릎 끌어안을 때만

사라진 그 음성들 돌아오고

사라지느라 어깨를 부수고 콧등을 떨어뜨리고

발을 밟고 갔어도

검은 길 돌아와 노래가 되는 시간

바닷가 합창이 되는 시간

 

내 정식 취미는 갈수록

게와 거북이

웅크린 무릎과 검은 레코드가 되어간다

 

 

 

무명을 위하여

김경미

 

눈에서 겨울 사립문 긁는

바람 소리

이 바람 소리

나를 보지마.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

잘 감긴 실타래

처음부터 끝까지 다 풀리기 전

날 본 척하면

저주하겠어 그대들을

 

 

 

무병

김경미

 

단순할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낯선 집 담벽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울며

흰 이빨처럼 퍼부어지던 눈송이에 치여 떨며

눈빛도 가누기 힘든 날들이었지요.

천리 밖 시드는 풀잎까지 느끼는 가슴

남몰래 묶어놓고

앓기도 엄청 앓았지요.

보았다마다요 들었다마다요

한꺼번에 밀려와 잠깨우며 안아줘 업어줘

빗징 따고 문고리 흔들던

식은땀 나는 인간사 세상사

 

이제 저리고 아픈 한 거둬

찬 여울물에 머리 감기고

말끔히 닦은 우리 신 온몸에 싣고

달빛 계곡으로 병든 이름 모두 끌어다

썩은 이름 한 가운데마다 작두날 꽂는다면

작두날을 타고 흐르는 더러운 핏물 대야 본다면

이 천한 병도 끝내 행복이 될 수 있겠지요?

 

 

 

문밖의 문

김경미

 

당신들에게 있듯 내게도 있고

내게 있듯이 당신들에게도 있는 것

 

문밖 강물과 물고기들 어룽대는 소리

어깨보다 큰 귀에 잡히는 바람의 무늬

물푸레나무 밑의 나무 의자

촘촘한 그물과 십자 방아쇠

숨기고 싶다가도 슬쩍 들켜버리고 싶은 사진

슬프므로 떳떳한 흉터 끌고 가다가다 버릴 이름

흰 구름의 유랑의 전설

 

세상에 없듯

당신들에게도 없고 당신들에게 없듯

내게도 없는

 

 

 

물끄러미

김경미

 

-그것, 이즈음의 나를 먹이는 내 어머니의 이름......

 

은적사 대웅전 마룻바닥에서

붉고 노란 잎들 떨어진 금언의 가을마당에서

극락전 단청 뒤 숨어 남은 나뭇잎 부처들 보며......

다리와 입술을 거둬버리면 나 또한 닮을 건가......

 

상처가......

 

어린 나를 죽인 생모 하나가

내 안에 절을 짓고......

 

그렇게......나를 본다

 

세상이 나를 용서하려고 내가,

내가 먼저 또 그만, 울고 만다......

 

 

 

물의 미제(未濟)

김경미

 

1

사우나 마룻장 벌거벗은 호박잎 보살들 화투친다 이건 경찰서 앞에서도 먹어야 해, 내리치는 패 무엇일까 국화 싸리 단풍 공산명월 청홍의 세월 저녁에 물 잃고 불도 잃은 패를 쥔 또 한손

낙화 쇠락에 무엇을 얻은들  다리나 저릴 뿐이라고 아무리 물 들이켜도 불길 꺼지지 않는다는 또다른 손

해거름마다 화투에 피나도록 손 묶지 않으면 저녁마다 남편의 여자집에 전화해 끊고 끊고 또 끊고 끝없이 끊을까봐 모란에 국화에 손을 칭칭 감고 또 감는다며

 

물로 불 끄지 못하는 그물로 바다를 낚는 저 벌거벗은 몸들의 어업사 두툼한 절간들에 갇힌 울음들, 맥주 놓인 그 곁 끼여들어 다 잃어주고 싶은 저녁이 천천히 저문다

 

 

2

그날밤 처음 산 콘택트렌즈 아프리카 초지까지 봐 낼

축지법의 그 또렷하고 비싼

흰 나비가 하루도 되지 않아 팔랑,

저녁 세면대 옆 변기바다에 내려앉았다

꺼낼 것인가 물 내려버릴 것인가

몇천년 지나도록 흰 법랑 앞

마음 못 먹어 아직도 앞이 보이질 않는다

 

 

3

그 패, 혹 똥이었을까

 

 

 

바닥의 날개

김경미

 

가을 속 마른 구두 태우는 냄새가 난다

어디서 또 누가 헤어지는가 변심과 상처가

지나가던 바람결을 흔드는가

 

그……생에 우물을 내는 일

 

난지도 쓰레기 더미 지나다가 보았다

뒤섞인 음식과 헌 양말과 찢긴 사진과

깨진 노란색 컵과 머리카락들……쌓이어

오색의 열반 단청!

 

그……우물에서 끼쳐오는 깊고 진한 향

 

날마다 기억건대 바닥이 말했다

자신의 계단을 걸어간 이들에 대해

 

 

 

바람둥이를 위하여

김경미

 

1

걷지 못하는 민들레가

바람을 만나니 걷잖아 탁! 터져서

간음 없는 마음이 흔하랴

 

그런 거야 욕하지 마

바람둥이들

한번 누운 곳 정 못 들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단잠 못 이루는

 

 

2

욕하지 마

먼지처럼 어디에나 몸을 묻히는 마음

아세톤처럼 어디에서나 쉽게 마음 휘발되는

몸의

사랑

고단하게

귀한 거야

 

 

 

발톱 깎는 여자

김경미

 

목욕을 하고 가을마당으로 내려선다

햇빛에서 잘 말린 수건 냄새가 난다

 

마음 무성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니

낙엽들 큰 손바닥으로 꽃을 다시 말하고

 

젖으니 부드러운 발톱

마음도 눈물에 자주 젖어 식빵처럼 연해졌을까

겨울이면 저 나무들

뜨거운 껍질 속에서 연둣빛 배냇짓을 키우리라

그 헐벗은 외모가 긍지인 줄 이제야 알겠으니

 

욕망들

어디든 마음대로 가서

무엇을 누린들

이제 비로소 겸손이 되리라

목욕 뒤의 연한 손톱처럼

 

 

 

밤, 기차, 그림자

김경미

 

밤은 무엇을 하는가

기차는 무엇을 하는가

좁은 골목은 무엇을 하는가

물안개 속 강은 무엇을 하는가

물을 건져 올리는 그물

손 닿지 않는 바다와

하늘은 무엇을 하는가

 

사과는 썩고

피부약은 뚜껑 밖으로 흘러넘치고

내의는 뒤집히고

구두는 떠나가고

 

어둡던 보관 창고가

한꺼번에 열려버린 그날

 

그 밤에 비는 무엇을 하는가

눈송이들은 무엇을 하는가

기차는 무엇을 하는가

기차를 탄 밤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세상은 무엇을 하는가

세상이 무엇을 할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내가 무엇을 할 때

세상은

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밤, 내의 가게 앞에서

김경미

 

아니, 저 예쁜 브래지어와 팬티 말고

브래지어와 팬티 속 마네킹, 마네킹을 입고 싶어

몸 속에 환하고 둥그렇게

불빛 켠

손 넣으면 자궁처럼 따뜻하게 덥혀진

희망이 하얗게 눈부신 방을 내줄 것 같은

 

몸속에 형광등 빛나는 저 마네킹, 마네킹을

입고 싶어

바깥세상을 더 잘 보기 위해

늘 몸속을 꺼멓게 불 꺼야 했던

지난 연대의 크고 거친 내의 대신

몸매 찰싹 달라붙는 화려한 오늘 밤

 

아직 벗기에 이를까?

 

 

 

밤, 속옷 가게 앞에서

김경미

 

마음의 길들이 다 아프다 덜어내고 싶은

마음 흐려지는 시야‥‥‥

 

세상에서 상처받은 날이면

밤의 정류장 속옷 가게 앞에 서서

내의만 입고 선 마네킹들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그들 몸속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나비 빛들,

유리 건너 눈부시게 날아들 때마다

견뎌다오 나여, 한 번만 더 견뎌다오,

무엇이 그리 대단히 슬프고 아플 것인가

혹은 짐작지 못한 고통도

혹은 있지 않았으면 하는 어둠도

몸빛을 돋우려는 저 검정 슬립 같은 것

그 가슴 한가운데 놓이는 작은 꽃장식 같은 것

밖은 아무래도 괜찮다

몸속 거기, 아름다운 것들 거기 다 모여

불빛 켜 들고 몸 밖까지 나가는 나비색 불빛 켜 들고

가슴 안에 다, 거기, 모여 있으면

무엇인들 아플 것인가

밤 속옷 가게 앞에서 문득 눈물 고이니

 

그렇게 세상을 또 한 번 건너가려고

신호등도 비로소 푸른 빛이다

 

 

 

밤의 프랑스어 수업

김경미

 

스물한 살이거나 하다못해 서른네 살도 아닌데

돌은 썩고 물은 굳는데

나의 기차는 낭비를 싣고 어제도 오늘도 달린다

 

금잔화보다 시끄러운 이빨을 드러내거나

구멍난 검정타이어를 질질 끌거나

바닥없는 슬리퍼가 되거나

원장이 달아난 병원이 되고

소방차들 물 뿌리고 간 전소(全燒)의 집이 되어 달린다

 

아무리 낭비해도

능숙한 종착역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가르듯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까지만

끝도 없이 되풀이하리란 것

 

어떤 말도

혀를 잡아당기고 놓치고 다시 잡아당기다가

또 놓쳐

얼굴에 자꾸 고무줄 맞는 반복이나 반복되리라는 것

 

벚꽃이나 수박처럼 한 계절도 채 못 넘기리라는 것

무엇이든 혀끝에서 끝까지 정체를 감추리라는 것

오 분은 고사하고 이 분도 안 되어 정체는 탄로 나고

대화가 다 떨어지리란 것

 

그런데도 나의 기차는 이 늦은 밤

어쩌자고 낭비를 싣고 계속 달리는가

 

밤의 강의실은 밤바다처럼 깊고 캄캄하고

청춘남녀들에게선 온통 복숭아 냄새가 나는데

어둔 창밖으로 갑자기 밤비 쏟아지고

총소리처럼 쏟아지고

 

총에 맞은 건 나뿐인 듯

이유도 원인도 맥락도 없는 전쟁터에 와서

나만 총 맞은 듯

 

아무리 반복해도

맛있는 복숭아는 다 어디로 가고

복숭아털만 자꾸 얼굴에 따끔대고

 

밤비는 더욱 거세지고 우산은 없고

청춘 다 낭비하고

비에 젖은 맨몸 다 드러난 채

차비도 없이 걸어서 바다를 건너

그 나라 가야 하는 듯

 

가서도 한두 살짜리를 따라갈 수 있을지

점점 더 어이가 없고

점점 더 울고 싶은 밤

 

이 모든 게 프랑스어가 아닌

한국어와의 일인 것

 

 

 

방명록

김경미

 

1

넓고 따뜻한 식빵에게 안겨봤으면 좋겠어

분꽃 그 작은 대롱 속에 들어가

종일 꽃의 내부를 살아봤으면 좋겠어

 

진실을 눈썹처럼 곰곰이 만져봤으면

좋겠어

한 장의 풍경과 침묵과 나,

셋이서 나직이 약혼했으면 좋겠어

추억이 돌아서서 타조처럼 다시 뛰어와

용서의 밤을 얘기하고

오늘도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면 좋겠어

 

당신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2

나는 왜 극장처럼 어두워서야

삶이 상영되는 느낌일까

 

극장 매점의

팝콘처럼 하얗고 가벼운

나비 같은 생은 어떤 감촉일지

 

가끔씩 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병아리 깃털이나 잎일 수 있는지

후, 불어보고 싶어진다

 

 

 

방부제

김경미 

 

한 달이 넘어도 냉장고 속의 빵

썩을 생각을 않는다

두고 본다

성형한 중년 여자의 잡아당긴

뺨처럼 튼튼한 방부제

빵은 사라지고

빵의 윤곽을 가진, 그러니까 독이다

 

평생 변치 않겠다는 사랑의 다짐

속에 든, 사랑의 윤곽을 한 방부제

그 독은

인체에 얼마나 치명적일까

 

생생히 썩어 사라지는 사랑을

그런 사랑을

 

 

 

뱀을 추억하다

김경미

 

그해 여름은 없어야 했다

너의 혓바닥은 물뱀보다

집요했으며

눈빛은 또 얼마나 영롱했더냐

일상 소사처럼 네가 먹어 치운 날것들을

담담하게도 추억하며 힛 힛

손바닥을 마주치며

꽃다운 때에 이미 죽었었노라

이제 너를 알아 살아야겠다 아니 죽고 싶다고

힛 힛 사실은 너의 후끈 달아오르는 몸뚱이를 더듬고 싶었다

산다는 것은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은 눈 딱 감고 퉤퉤거린 밥을 먹어주는 것,

아 그러나 깨어있다는 것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빗줄기를 지극히 안아주는 것,

힛 힛 잘 가거라 냄새나는 여름날

한때의 내 속에 자라나던 푸른 이끼들이여

야성을 잃어버린 슬픈 짐승이여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김경미

 

고통이 이 몸 왕비 삼으사 이 속 간택하사

도장처럼 붉은 상처만 입고 살으라 하여, 하여

그토록 어린 나이의 계집을

중국 비단인 듯 비단인 듯

 

기어코 마음을 깎아

평민의 채송화꽃

저녁 산책을 만들어보려 하였더니

 

누군가가 대신 말끔히 먹어 치우네

한 끼 식사 행차처럼

다시

언제고

처음부터 차려지는 붉은 비단. 비단

 

이 천성

 

요즘 누가 불행한 천성을 지닌다고

 

 

 

본동 258

김경미

 

그 집이 돌연 잠적하지나 않을까

비 오는 날이면 후두둑 마음 거둬 차에 오른다

 

제1한강교 건너자마자 거기 남색 누추를

사고팔아 또 누추를 이익 남기던 긴 파 같은

시장길과

더 쇠잔할 데 없으나 없어지지도 않는 여인숙의

늙은 내의 걸린 분꽃 마당

 

 

저녁 슬픔 못 이겨

사육신묘, 무덤 곁을 거닐면 살아 있음의 복락 없는

가슴에서 장마진 흙냄새 눅눅하던 시간들

 

불. 화. 불. 화. 온통 불길만 주고받는

신문지 같던 집, 부모처럼 영원히 그대로 있을까

두려워(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낯선 두 남녀가

제멋대로 내 생의 시작이라니!)

그 그 집 지우러 빗속을 간다

젖은 옷처럼 자꾸 마음에 달라붙는 상처

떼내려 애쓰며

어떤 이유가 나의 생명이었는지

삶의 몫인지 세상의 그 한 집에 물어보려

묻기도 전 그 집 사라져버릴까 두려워

자꾸 되돌아가 본다

 

 

 

봄, 무량사

김경미

 

무량사 가자시네 이제 스믈몇 살의 기타 소리 같은 남자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어 무엇이든 깨도 좋을 나이

겨자같이 싱싱한 처녀들의 봄에

십 년도 더 산 늙은 여자에게 무량사 가자시네

거기 가면 비로소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며

 

늙은 여자 소녀처럼 벚꽃 나무를 헤아리네

흰 벚꽃들지지 마라, 차라리 얼른 져버려라, 아니,

아니 두 발목 다 가볍고 길게 넘어져라

금세 어둡고 추워질 봄밤의 약속을 내 모르랴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좀 짧게 자른 머리를 차창에

기울이며 봄마다 피고 넘어지는 벚꽃과 발목들의 무량

거기 벌써 여러 번 다녀온 늙은 여자 혼자 가네

 

스믈몇 살의 처녀, 오십도 넘은 남자에게 무량사 가자

가면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 재촉하던 날처럼

 

 

 

봄밤

김경미

 

뻔히 보면서 찔린 자리에

진달래 몇 모금 붉게 흘려 두고

옆집 아줌마 삯바느질 솜씨로

푸른 수의 한 벌 짓는 너는

 

 

 

봄 안부

김경미

 

죽었다니요 무슨 말씀을

하도 물어 가라앉은 잇몸 속

어금니도 좀 돋우고

시들하게 말라버린 몸 속의 솜들도

빨갛게 갈아채우고 있을 뿐

저주는 고맙지만 어쩌나, 아직도 죽지 않았으니

지하도로만 다니더라구요

누가요 아무리 괴로워도

펄펄 분하다고 저럴로 복수가 피던가요 어디

그렇게 성질 내지 말아요

아직 기회는 만잖아요 쉽지는 않겠지만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

김경미

 

필 때 한 번

흩날릴 때 한 번

떨어져서 한 번

 

나뭇가지에서 한 번

허공에서 한 번

 

바닥에서 밑바닥에서도 한 번 더

 

봄 한 번에 나무들은 세 번씩 꽃 핀다

 

 

 

부엌에 대하여

김경미

 

여름 바다가 젖가슴처럼 출렁이는 거리

활짝 벗은 듯

샌들 신고 팔 없는 원피스 입고 나서고 싶어

그 여자들 일제히,

 

김치를 담근다

손톱 밑이 금세 새빨개진다. 습관적인 코피같이

작은 부엌 창으로

이 세상 것 아닌 팔월 하늘을 본다.

이른 저녁 준비

수저에만 부딪쳐도 파래진다

'그런 체질이 있어요 멍이 유난히 잘 드는.....

부엌에서 유난히 잘 넘어지고 부딪치고 떨어뜨리는 체질...

물끄러미 창을 내다보다 냄비를 자주 태워 먹곤 하는 체질

말예요.......'

 

비누로 아무리 씻어도 쉽게 씻어지지 않는

아늑함과 평온함이 비늘

그 행복들이 너무하는구나 싶어 우는 여자들

매일 같이 찾아와 들여다보고 가는

절연의

노을

싱싱하고 아름다운 거리들도 곧 사라지겠지

곧 김치 다시 담가야 하리라

한 번 나가 보기도 전에

 

 

 

불량품 소사(小史)

김경미

 

한 시간 전 창문 치수를 재 갔던 유리집 아저씨는

구름의 치수를 딱 맞게 잘라 오지 못했다

내가 미쳤었네 제정신이 아니었네

대형 구름 두 장을 트럭에 다시 묶는 데만

이미 사십 분째다

 

새 프라이팬이 불 위에서 자꾸 넘어진다

넘어지는 건 다리가 있는 사람의 일

네가 가진 건 손이고 쇠처럼 단단한 엉덩이잖아

불 위에 정좌하는 법을 단련 받고 나왔어야지

어느 녹슨 창고에 부도어음이 쌓이겠지〉

 

후회를 동봉해서 부칠 봉투면 돼요 서류사이즈

100장이 필요해요

200장이면 무슨 일이 닥쳐도 배달비가 무료라더니

그런 상표는 처음 봤어요 꽃잎이라는 이름의

너덜너덜너덜너덜 200장의 카네이션 얇기에

꽃잎 한 장 담아도 후회가 찢어져 나오는 상표는

 

산산조각은 조각중(彫刻中)이란 뜻인가요 서랍이 깨져서

의자가 돼서 왔는데 전화기 저쪽 주인은

소리도 조각낸다 당신 몰라? 인생은 안 바꿔주는 거요

일 회요 영구불변은 없소 모든 건 조각나요

책임은 모두 태어난 구매자에게 있는 거요!

 

어떤 나라의 3대 불량품은 날씨 도로 남자라고 한다

 

내 감정에 속았을 남자와 여자들

나를 속였을 남자와 여자들

그날 계단에서 사망한 그는 애인이 떠밀어선지

 

스스로 발을 헛디뎌선지는

 

오직 그 자리에 살아남은 애인만 알 테니

그때 그녀 외의 세상은 전부 불량품

진실을 모르면 모두 다 일제히 불량품

 

죽음밖에는 어떤 진실도 갖지 못한

목숨의 불량성

다 같은 처지니

살아 있는 내내

썩은 고구마 상자도 사과로 쳐드릴게요

두 배로 쳐 드릴게요

환불해달라 전화도 하지 않고

멀쩡한 조직 내부를 훑어댄 불량진찰비에도

건강한 내 쪽이 어쩔 도리 없이 사과할게요

 

구름의 치수를 재려 한 아저씨 잘못만도 아니니

위쪽 한 뼘이 짧은 유리창으론 그래도

각종 바람이 실마리처럼 드나들겠죠

 

 

 

불망기 - 1981년

김경미

 

꽃잎 같은

글씨를

쓰고 싶다

이 막막한

바다를

건너며

우표에 침도

묻히고 싶다

하늘이

흐리던

어제는

그대가

당장

피눈물처럼

견딜 수 없이

그리웠다

꽃송이를

접어

바다로 띄우며

이제는

용서하고 싶지만

아직

소금 많은

바람이 분다

하늘이 숨어든

바다에

한나절

얼굴을 비춰보다

지치면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노루 꼬리만큼만

짧게

울려고

애썼다

꽃이

놓고

것 같은

글씨로

용서하고 싶지만

바닷바람이

너무

맵다

다시

꽃을 접어

버리는

 

오후.

 

 

 

불멸의 신혼

김경미

 

부엌 채칼을 꺼내서 감자 속을 마구 파들어가 봐

그 안에 분명 숨겨놓은 불멸이 있을 거야

침대와 장롱도 수시로 번쩍번쩍 들어 봐

그 밑의 먼지들이 불멸로 가는 암호일지도 몰라

갓 빨아놓은 와이셔츠한테 다리미를 대고 자꾸 물어 봐

불멸이 어딨는지 낱낱이 다 불지도 몰라

냉장고 야채칸의 파처럼 무조건 다리를 벌려봐

시들기 전에 불멸의 체조를 가르쳐줄지도 몰라

식탁 가장자리에 반쯤 걸린 유리컵 모양의 아이가

마구 휘두르며 입으로 가져가는 것들도 잘 봐

불멸로 가는 종이지도를 단숨에 삼켜 없애버릴지도 몰라

소파처럼 등에 뭉쳐있는 피곤이야말로 잘 봐야 해

드디어 불멸의 입장권일지도 모르니

 

불멸도 없이 매일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어

미칠 것 같이 쉬운 이 일만을 하면서

텅텅 남아도는 무직의

인생을 다 보낼 리 없어

불멸의 명예, 그에게 있는 것 같이

그것이 여기 어디에도 납땜 되어 있을 거야 분명히

 

 

 

불행

김경미

   

음료수 캔에서 못이나 벌레가 나온 적도 없다

길을 가다

공사장 돌벼락에 맞아 죽은 적도 없다

수면제를 사모아 탁, 털어 넣은 적도 없다

이십 세기말의 폭주족에게 납치되지도 않았다

감옥에서의 조찬을 해보지도 못했다

이십대 이후 돈을 못 번 날도 없었다

스트레스로 대머리가 되지도 않았다

 

세상에!

사랑의 이름으로 처형당한 적도 없다!

 

 

 

비망록

김경미

 

1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 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2

옛사람들은

치자꽃 열매에서 배어 나오는 노란색 물이며

관목과 바위 밑 푸른 이끼에서 꺼낸

염색물을 가져다 썼다지

흰 광목천을 자목련빛이며 남청색으로 바탕을 바꾸었다지

 

내 안에 혹 치자 소리 나는 꽃잎들이며

그늘에서만 오래 묵은 녹색 이끼 같은

타고난 염료 있어

그대에게 물감 들어 영영 빠지지 않았으면

 

 

 

사람 시늉

김경미

 

난 영 틀렸다 – 삼 일쯤 연이은 사람 약속엔 사람인 게 고통이 된다

커피 한 모금에도 일주일의 잠이 고단해진다

하루의 불면은 열흘 치 시든 과오들에 물을 준다

다 알면서도 나흘째 목요일에도 커피를 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밤 한 시 삼십 분, 동료 드라마작가가 힘없이 전화한다

멜로드라마 잘 안될 땐 무조건 배신 얘기 쓰라는데

재밌는 배신 좀 없나요?

 

심야 두 시 오 분, 기혼의 친구가 흐느껴 운다

나 너무 오래 외로우니 무슨 짓이든 해도 되겠지

 

물속에 못을 떨어뜨린 자들만이 잠 못 이루는가

못에서 꽃을 기다리는 자들만이 서성이는가

누군가는 연꽃과 기도를 얻기도 하는 불후의 시간

차라리 더 캄캄한 어둠을 기다리는 저 먼 한강대교의 불빛 얼룩들

모든 게 영화세트장의 시늉 같건만 오지 않는 잠은

짐짓 해보는 연기가 아니다 과오들 또한 늘 그렇듯

 

멜로영화 속 추억의 회상 장면이 아니다

 

 

 

사랑

김경미

 

1

물고기 같은.

움켜쥐면 파닥이다 숨을 끊는 것,

흐르는 물에 놔주자

은빛 비늘 생생히 살아나네,

그 물살 내게로 내게로만

가둬지지 않는

고통,

 

 

혹은,

초록색 밀봉의 수박같이

언제고, 상처를

영혼까지 깊게, 삼각쯤으로

그어야 간신히 짐작되는

붉은 속.

수박 그물 끈처럼 온몸을 묶고 또 묶고

 

네가 저기 또 오다니!

 

 

2 - 지뢰식

나는 지뢰인가

인적 드문 곳에 몸을 숨긴 채

흙처럼

유인하듯 오로지

사람 발자국만

기다리다가

 

마침내 누군가 멋모르고 다가오면

손 닿는 순간

이별이 너무 두려워

끔찍히 복잡하고 위험한 심장,

순식간에 폭발하고 만다

 

깨어보면

왔던 사랑

흔적도 없다

 

내가 다 죽였단 말인가!

 

 

 

사랑의 근거

김경미

 

그해 여름,

꽃무늬 비닐장판 같은 게 인생에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밤 열두 시 십분의 택시 기사는 차를 마시자며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 만날 확률이 7만 5천 분의

1, 이라고

어디 근거인지 모르겠으나,

 

75만분의 1인 사람도 매일 그냥

스쳐 간답니다

(정육점 빛깔의 6월 장미들 면장갑 낀 손으로 매일 가슴 부위를 손질하고

나도 더러 누군가를 손질하지만 통증의 근거 또한 아직 알 수 없답니다)

 

태양과 나와 장미와 택시와 면장갑들이

매일 서로 다른 확률의 근거를 호소하던 날들

달팽이 무늬의 낙엽들 몇 번쯤 지나면 비닐 꽃무늬도

잦아들겠으나

택시가 또다른 여자에게 건너갈 확률은 99퍼쎈트

어떤 여자가 그에 응할 확률은

모르겠으되,

 

7천 5백만분의 1로 마주쳐도

스치고 마는 눈빛도 있답니다

(우리가 만난 건 어쩌면 0퍼쎈트의 확률 덕분!)

어디에도 무엇에도 아직 아무 근거도

모른다 합니다 늘 지독한 비닐 꽃무늬의 여름들이라 합니다

 

 

 

사랑하면 할 수 있는 일

김경미

 

사랑이 원하면 할 수 있는 일

 

한 그루 나무에 얼마나 많은 꽃잎들 달렸는지

얼마나 많은 초록잎이나

은행잎이나 단풍잎이 달렸는지

세는 일

 

평생 가장 할 만한 일인 듯이

평생 이만한 행복 없을 듯 세어보는 일

 

 

 

사막에 작약이 피는 법

김경미

 

1

 누군가 '사하라 작약' 얘기를 했다

 

19세기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이름을 딴

'사라 베르나르 작약'

우리나라 화훼 수입상이 '사하라 작약'으로 바꿨다

 

마음대로 줄이거나 늘린 말들이 모여

 

사하라가 되고

사라 사하라 베르베르 베르나드가 되고

버나드 사라가 되고

사라 작약이 되고

사하라 버나드 사라 카라 3세가 되어

 

'사라 베르나르 작약'을 퍼뜨리거나

'사라 베르나르 작약'을 바꾸거나

떨어뜨리거나 멀어지는 법

 

말이 없이는

'사라 베르나르 작약'도 애초에 없었다

 

 

'벨 에포크'를 연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살아 있을 때 늘

관(棺)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사막이 되고

작약이 되고 사라가 된 말들이 모여

 

관(棺)을 짜는 법

 

매일매일

살아서 거기로 들어가는 아름다움 없이는

어떤 삶도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사소한, 사적인 스무 살의 추억을 위하여

김경미

 

양지쪽 창가에 기다리고 있어, 삼십분

힘이 없는 건 너무 눈부신 자리여서야

튼튼한 금붕어들이 휘젓고 간 자리에 한 시간이

설탕처럼 떨어져 끈적이고

아직 커피를 다 안 마셔서에요 커피잔을 뺏기지 않으려고

두 시간, 가늘게 입가가 떨려

 

그리고 세 시간, 눈물이 쏟아질 차례지만

유리창 너머

오래도록 혼자 노는 햇빛을 보니 반쯤 알 것 같아

너 대신 나오곤 하던 팔이나 다리 한쪽

혹은 잘난 척하는 이마 한 개

끝내 보지 못한 너의 전부가

오히려 용기를 주는 지금은 네 시간, 그리고

괴기스런 다섯 시간

다 알 것 같아 이제는

한 달 전의 네 입술을 떼어 메모판에

이렇게 핀침해놓고 보니

안녕.

진작 이렇게 네가 갇혀 버둥댈 수 있음을

 

 

 

사소한, 아주 낡은 사적인 추억을 위하여

김경미

 

1

검은 솥단지 같은 흑백사진 속으로

불행이 정지해 있다

 

발 디딜 틈 없는 불화

 

그런데

저렇게까지 상관없이 겨울 별빛들 찬란해야 하는가

모든 불 민방위 불처럼 끄고 아아 영원히

식고 싶었으나

 

 

2

검은 솥단지 같은 흑백사진 속으로

불행이 정지해 있다

 

발 디딜 틈 없는 불화

 

그런데

저렇게까지 상관없이 겨울 별빛들 찬란해야 하는가

모든 불 민방위 불처럼 끄고 아아 영원히

식고 싶었으나

 

 

 

삼십 대

김경미

 

몸과 마음이 자주 등 돌리네

동명이인,

그 얌전한 사람에 들어가면

행간 없이 한 벌

다정할 수 있을까

 

몸이 마음에 아무 연락 안 하고

어디에 갈 수 있나

검정 맹인 같은 색안경 끼고,

물소리 내는 세월에 닿아

지워지지 않을 몸 없으니

살았을 때 마음껏 몸일 수 있어야 하나

생각도 데려가지 않아야 하나

 

신문지같이 면 많은 마음

밤새도록 안 자고 밤참 라면보다 더욱 꼬부라진

아픔들

사색에 더 까맣게 질려야 하나

혼자 마구 가면 몸은 육신이 있으므로

못 따라오나

 

도대체 어디에서 한번 후련할까

삶이 둘 다 못 보고 지나가면

어둔 강 밤새 걷다

어깨 끌어안고 함께 울까

 

 

 

생심기(生心記)

김경미

 

마음이 마음을 낳으니 이백칠십오 년 석화 바위를 살다가

그리움이 다시 삼백오십 년을 뜻밖의 마음과

납작 꽃 피는 혼인을 하고 꽃이 지니

낙화 속에서 이전의 마음과 이후의 마음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음이 마음을 참되다 못하니

마음대로 권좌에 올라 오백 년을

열두 그루 종려나무에 갖은 풀씨를 쥐어주어

마음에 마음 아닌 것을 심어주어 다툼 그치지 않고

일백 일의 폭우에도 물에 윤기 일지 않으니

내보낸 낙타마다 가서 돌아오지 않더라

아무도 모를 종이에 마음 혼자 천 년 이천 년

비단을 지은들

 

헛됨들로 땅끝까지 네 집들을 지으리니

 

 

 

생화

김경미

 

생생한 꽃들일수록 슬쩍 한 귀퉁이를

손톱으로 상처 내본다, 피 흘리는지 본다

가짜를 사랑하긴

싫다 어디든 손톱을 대본다

 

햇빛들 목련꽃만큼씩 떨어지는 날 당신이

손톱 열 개

똑똑 발톱 열 개마저 깎아준다

가끔씩 입속 혀로 거친 발톱결 적셔주면서

 

신에게 사과했다

 

 

 

서정의 흉가

김경미

 

꽃과 나무는 지겹다 그 집 언덕길 본 개나리들엔

뒤집힌 양계장 트럭, 콸콸 날계란 흰자노른자 진동하고

해바라기는 너무 오래 쓴 노인네 누런 면 팬티 몰골에,

칭찬에 익숙한 나무들 가슴과 엉덩이라곤

10년 묵은 애인같이 서지도 젖지도 않으니 안 볼 때 누가 좀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다 생김새 없이 다 모인 창녀촌 같은

숲은 더욱 싫다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모여서들

또 사타구니에 거품이나 물며 험담 수다나 한창일 텐데

포주처럼 그것들 껴안고 있는 산은 또 좀 보라지

가관이 따로 없다 제발 남의 내장이나 파고 다니는

등산의 아름다움을 설파하지 말아라

입 발린 과찬에 게게 눈 풀어진 흰구름들은 또 어떠며

지렁이껍질 같은 강물에 폭 싸매둔 고향의 보자기들은

더 말할 것도 없으니 아예 끌러보기도 싫다

그 패악의 흉가들

 

여전히 아주 뜨겁고 서럽단 말인가

 

 

 

설명

김경미

 

그녀를 설명하자면

 

자주 인적 끊기고

혹은 끊죠

 

때때로 발광체같이 발광(發狂)

 

앉거나 먹는 습관 나쁘고

 

뭐든 별로 안 좋아하면서 좋은 척도 해보지만

 

어설프거나

들키고

들키니까 더 어설프고

 

빽빽한 악순환

 

선제공격보다

선방(先防)이란 말을 좋아하지만

 

고물별자리

달구지풀이란 말을 좋아하지만

잘 쉬지 않지만

 

뭐든 안 좋아하니

절대 선하지 않고

친하지도 않고

부드러운 바퀴도 없고

 

목은 있지만

면목도 없고

 

체면은 있지만

착각과 실수가 잦으니

 

가령 테이블이나 요리를 만나면

 

접시 바닥의 데코레이션용 돌부스러기를

잡곡밥으로 알고 떠먹다가

혀를 다치는 식

 

혀를 다쳐 말을 못하고 보니

모든 걸 너무 지나치게

사랑했던 게 아니었을까

 

고개를 못 들겠는

 

 

 

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

김경미

 

앙코르와트엔 아직 가지 못했습니다

주황색 가사(袈裟) 입은 촛불들 간절할수록 꺼지기 일쑵니다

 

빗자루와 양탄자를 타고 석류가, 석유처럼 익는 페르시아 시장에는 날마다 갑니다

캐스터네츠처럼 이빨을 딱딱대며 전쟁이 언제나 꽁무니를 쫓아 다니죠

 

물통을 두 팔 높이 받쳐 들고 구름 녹기를 기다려야

세수할 수 있는 밀림에도 오후 늦게 가봤습니다

항복과 경배의 높이를 구경만 하고 왔죠

밀주처럼 진흙 묻은 구두를 만들어 파는 사막에서는

입 벌린 저녁 석양 속에 피조개들이 꼭 장미꽃 같아

상처도 때론 화병이나 액자에 걸 만하다 적어두었습니다

그 나라 이름이 무엇이였던지

 

중국,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만들어내고 다 고장 내는

중국집에는 한두 달에 한 번도 가고 두 번도 갑니다

청춘일 때는 더 잦았을까요

 

비행기는 어린 백합꽃을 닮아서 갈증을 자꾸 내죠

물을 자꾸 찾죠 그래선지 저 밑으론 물이 끝없어서 세상은

물 위의 수상 가옥 몇 채, 물 드나듦의 골목 자국들,

언제고 발밑을 찰랑이는 물의 기척과

팔에 서린 노 자국

다만 수면을 스치는 햇빛의 굴절뿐임을 알게 되죠

 

아직 흙 위의 국경들 끝없는 듯해도요

 

 

 

소금론

김경미

 

1

이곳에서는 늘 소금을 뿌리며 놀아라, 사랑할 때도

꽃이 피면 한 송이 두 숟갈씩

참기름에도 찍어서

 

상스럽게 말할까? 재수가 없어!

 

자신이 그리고 없지

 

전화번호 수첩은 서울역 쓰레기통에 주네

신발 털다 세월아 다 갈라

인간은 기차를 만들었구나

소금 옮기려고

안녕, 소금들.

 

 

2

소금과 설탕이 만나

섞이는 척하다가

토하고

쏟고

침 뱉고

서로 집에 가버렸다

 

 

 

소란지심

김경미

 

들판 가득

이름 아름답지 않은 개망초꽃들 지천이다

 

망하는 건

속으로 어떤 이름에 몰래 침 뱉을 때다

골목 뒤편에 숨은 채 갚아주겠다 벼를 때다

전적으로 네 쪽이 고약했다, 누군가를 팔아넘길 때다

 

 

 

속. 그리운 심야

김경미

 

그리운 밤

 

밤마다 담을 넘던 마음 속 도둑은

밤거리에 집을 짓고 싶던

핏속의 목수는

말썽피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던 청춘의 그 날들은

 

술집 출신처럼 밤 풍경이 그리워요, 하던

그 고양이 발목 저문 지금도 눈송이처럼 담을 넘곤 하는지

필사적으로 넘곤 하는지

 

 

 

속도의 전략

김경미

 

네 개의 벽에 일곱 개의 탁자를 이어놓고

열네 가지의 일을 하라는 것

 

자동차 앞유리창에 스무 개의 일정을 붙이고

바람이 날리는 순서대로 해치우라는 것

 

피곤을 못 이긴 벽이 통째로 주저앉거나

때때로 밤공기를 붙들고 흐느끼면

 

여덟 번째 탁자를 기다리는 몇 초씩

두 팔을 잠깐씩

휴지통에 넣고 식히라는 것

 

모든 게 밋밋한 진행과 납작한 비중보다는

열렬하다며

 

단숨에 이름을 삭제해버리는 것

 

 

 

수첩

김경미

 

도장을 어디다 두었는지 계약서를 어디다 두었는지

구름을 어디다 띄웠는지 유리창을 어디다 달았는지

적어놓지 않으면 다 잊어버린다

 

손바닥에 적어 놓기를 잊어버려 바다도 그냥 지나쳤다

발뒤꿈치에라도 적었어야 했는데 새 구두에 절룩대며

약국도 그냥 지나쳤다

시계도 적는 걸 잊자 한 달이 어디선가 썩어 버리거나

토끼 똥같이 작고 새까매졌다

 

어디 단단히 적어 두지 않으니

살아 있다는 것도 깜박 잊어 살지 않곤 한다

 

다만 슬픔만이

어디 따로 적어 두지 않아도

기어이 눈물 자국을 남긴다

 

 

 

수표

김경미

 

세상을 밀고 들어가네

 

액면가 무섭게 긴 수표 뒤에, 주민등록번호 등등 다 쓰세요,

배서(裵書)하네

'두려움이 없음, 마음이 절대 순수함, 자아실현을 위한 명상

에 굳게 섬, 살아 있는 것들을 불쌍히 여김, 수줍음, 까불지

않음, 어떠한 일도 나를 더럽히지 못함.'

 

세상의 가벼운 안부들

그대들 모두 스치로풀이 되어 간다는데

나는 믿지 않습니다. 괜찮지?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은

김경미

 

나뭇잎 한 바구니나 화장품 같은 게 먹고 싶다 그리고......

말들은 무엇 하려 했던가 유리창처럼 멈춰 서는 자책의 자객들......

한낮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누워 꽃나무들에게 사과한다

지난 저녁부터의 발소리와 입술을, 그 얕은 신분을 외로움에 성실하지 못했던,

미안해 그게 실은 내 본심인가 봐

아무래도 책상 밑이나 신발장 속 같은 좀 더 깊은데 들어가 자야겠다

그러한 동안 그대여 나를 버려다오 아무래도 그게 그나마 아름답겠으니

 

 

 

스피커

김경미

 

영어는 네이티브 스피커에게 배우고

설득은 반값에 행상 트럭 스피커에게 배운다

 

마을버스 승차 요령은 가파른 언덕길에서 배우고

수영은 물 밖 호흡으로부터 배우고

만남은 후회에서 배운다 혹은 그 반대

 

웃음은 스피커로는 안된다

너무 크게 웃고 나면 꼭 불길한 일이 생기므로

 

구두에서는 소를 키우고

손바닥에서는 은행잎을 키우고

 

민박집에서는 벌레와 유리창을 배우고

이사는 계단과 천장에서 배우고

노래는 알콜에서 배우고

그리움은 칫솔질에서 배우고

뱉으면 치약 거품에 피가 꼭 섞여야 한다

 

사과는 품종에 관계없이 교양에서 배우고

서류에서는 인사의 각도를 배우고

행운에서는 서커스를 배우고

물속 수련과 부레옥잠에서는 인내를 배운다

침에서는 얼굴을 배우고

발등에서는 핑계를 배운다

 

거기 바다 닮은 분에게는

스피커 켜는 법을 배운다

 

 

 

슬픔

김경미

 

임산부처럼 슬픔이 무거워 잠시 앉아 쉬면

강이 지나가고

노오란 불빛도 지나가고

막버스도 지나가고

 

이복형제를 낳은들 나라가 할 말이 있을까

 

 

 

슬픔이 너무 큰 날은

김경미

 

못 나눠줘 절대

이 슬픔 나 혼자 다 차지할 거야

애인처럼 연인처럼 다가오지 마

이런 전시에 나눠 먹다니

내 목숨에 슬픔 외의 빈자리 없음을

그런 슬픔

온전한 내 것이 있다는

이 가득함

 

사랑도 오늘은 너 혼자 해!

 

 

 

슬픔이 해준 것들

김경미

 

목련꽃들 족제비처럼 빠르게 지나가도

천천히 숨 쉬게 해주었다

 

물부리개 같은 회색 기와지붕

낡은 전축 기울여 빗소리 뿌려주었다

 

소의 어금니가 되게 해주었다

그 말들 가두느라 입안에 지푸라기 가득해도

 

머리 새빨갛게 물들인 여자

붉은 장미꽃 가득한 담벼락 지날 때

둘 다 고요하게 해주었다

 

다섯 번의 눈물과 후회를 두 번의 열매로 계산해주었다

 

너무 오래 달라붙지 말라고

나뭇잎들 기러기같이 몇 달씩 떼어놔주었다

 

과일과 오후의 그늘 중 어느 쪽이 더 입에 맞는지 알려주었다

 

외로운 곳에 가게 해주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코를 잃고 잊혀진 곳

슬로베니아냐고 자꾸 질문받는 곳

그 마을 광장 뒤뜰의 묘비명들

 

무엇보다

그 무엇보다

꼭 죽이고 싶던 사람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시간

김경미

 

1

내 집의 낡은 뻐꾸기시계는 맞춰 울지 못한다

밤 한 시에 갓난애처럼 열 번이고 울어 제끼거나

아홉 시에 달랑 한 번만 꾹, 울고 들어간다

다음날은 아홉 시에 열두 번을 대성통곡하기도 한다

 

나와 그 새는 첫눈에 알아본 것이다

 

안심할 때만 골라서 뒷머리에 돌을 맞았으며

시작하려 하자 떠났으며

애절했으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찬밥을 먹거나

한낮에 거리에서 울음이 터져 쩔쩔맸거나

스무 살에는 서른을 댔고

서른엔 스무 살인 척했다

 

그렇게 우리는 내통의 역술가 되어

세시 약속을 한 시에 나가 앉은 채

버려짐이란 모든 불길과 불운에의 부적이노라

축원하기도 하고

봄비 오는 오전 열 시에 온 생을

가을 저녁 주황빛 구름 밑에서 집전하는 것이다

문밖의 시계는 다 맞질 않는 것이다

 

 

2

아침, 또 분홍빛 동앗줄들이 몇 가닥

내려온다

썪음과 썪지 않음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를 서둘러 잡고 오를 뿐이다

아프리카 원숭이처럼

 

시간이 점심밥을 먹여주고

 

꽃이 후두둑 지거나

줄이 투두둑 끊겨가는 소리 들린 듯도 하고

 

저녁, 서커스 천막 거두는 소리 들린 듯도 하고

서커스와 마술 차이에 골똘하다가

잡고 대롱대던 손 펴보면

줄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햇빛 속 흰 촛농 같은 글씨로

시간이 뭐러 뭐라는 소리 들린 듯도 하고

 

 

 

식사라는 일

김경미

 

기러기 같은 입술

하루만 닿아도 은수저가 변한다 치약으로 닦아낸 헝겊이 새까맣다

- 식사는 검은 침의 일

 

형광등처럼 새하얀 북극곰

너무 새하얘서 안 보일 지경인데

바다코끼리를 먹느라 가슴팍이며 다리까지 온통 다 피 칠갑이다

- 식사는 피범벅의 일

 

치타의 눈 밑에는 검은 줄이 있다

사냥 때 햇빛의 방해를 막아준다

야구 선수들도 흉내 내는 그 검은 눈밑 차양

- 식사는 신의 일

 

개미는 기차와 설탕통을 좋아하는데도 허리가 잘룩하다

나무들은 어떤 밥상에도 불려 다니지 않는다 앉아서 잎만 벌리면 된다

 

그 모든 식사가 서로의 꼬리를 문 채

하늘로 날아오른다

기러기 떼처럼 거대한 입술 하나

구름을 먹으며 멀리 사라진다

- 식사는 소멸의 일

 

 

 

실의

김경미

 

검은 문상복들 사이로

샛노란 원색 프릴을 입고 왜 이렇게 야단스러운가

앞가슴도 젖꼭지까지 훤하다, 매니큐어 칠한 빨간

구두

부끄러워 쩔쩔맨다, 꿈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얼른 깨려고

검은 상주에게 공손히 조아리는데

바꿔 입을 새 없는 말이 입에서

 

축하합니다, 라니!

 

못 맞추고

세상과 또 이런 식이야!

 

 

 

식물, 욕망

김경미

 

살이나 한 삼백 킬로쯤 쪘으면

한자리 넘어져 못 일어나게

불 끄고 누워도 종소리처럼 떠다니는

샛노오란 거짓말들

잡견(雜犬)들

 

저리 가! 저리 가! 막대를 휘두를수록

손째 뱀 되어 달라붙는

 

 

 

식사법

김경미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 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들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것 마저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 을

잘 넘길 것

 

 

 

실패들

김경미

 

이슬비 흉내에도 실패했다

소의 눈망울도 흉내 내지 못했다

바닷가 모래밭에 엎드려 자는 데에도 실패했다

공연장 계단을 오르다 발목을 찧은 할머니

무섭게 피가 쏟아지는데

늘 갖고 다니던 일회용 반창고가 그날따라 없었다

 

그날따라 없는 것들

귀여운 금요일 오후

성가심을 깎아낼 손톱 깎기와

태풍을 묶을 머리끈

실패를 조그맣게 만들 안경

 

미루나무처럼 크는 데 실패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에도 실패했다

얼굴 검은 고양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

골목과 서재를 가진 집에서

수녀가 되는 데 실패했다

 

만사 제치고 달려와 줄 친구가 있을까

언제고 달려가주겠다

손 내밀 손이 손에 있을까

 

언젠가 여의도 일터 근처 새벽 술집에서

혼자 울던 신사복 남자

낯선 나라 골목 끝 등불 켜진 선술집에서

그 남자 흉내 내는 데도 실패했다

 

페인트 갓 칠한 문에 손자국이 크게 나 있다

 

 

 

심수봉

김경미

 

적막하구나 강산

겨울 네 노래를 듣노라면

너무나 평범하던 여대생

뽕짝 들고 나온 가수에 우린 웃었지

노래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고

겨울밤 네 목소리는 밀주구나

목이 아프다

가슴이 시큰거려 오늘 밤도 잠자기는

글렀는데 겨울 눈 널 따라 천지를 뒤숭숭 흐린

이 강산 가수로 태어나

여성 억압사 남한 현대사

호주머니 속 꼬깃꼬깃 잊고 빨아버린 지폐처럼

값 잃은 한, 뭉뚱그려

나는 행복한 널 왜 떠돈다고

맺힌다고

 

 

 

쓸쓸한 날에

김경미

 

쪽빛 엽서를 쓰고 싶네

몇 다발 정맥을 풀어

견딜 수 없는 안부와 그리움의 목례를

쓰고 또 쓰고

모조리 찢고 다시 또 쓰고

 

갑자기 퍼붓는 함박눈 사이로

자줏빛 달개비들 얼어 죽은 길로

동백 꽃송이

검은 머리카락에 곱게 싸들고

지워진 길을 다시 가겠네

흰 눈발 위를

걷고 또 걸어

성급히 당신에게로

이제 곧 가고 싶네

 

성실한 답장을 받겠네

문 열어보면 거기 당신의 소인 쌓인

서로를 옥바라지하며

해후의 글씨를 다듬고 다듬는

그리운, 그리운 당신과

우리들

 

 

 

쓸쓸함에 대하여

김경미

 

그대 쓸쓸함은 그대 강변에 가서 꽃잎 띄워라

내 쓸쓸함은 내 강변에 가서 꽃잎 띄우마

그 꽃잎 얹은 물살들 어디쯤에선가 만나

주황빛 저녁 강변을 날마다 손잡고 걷겠으나

생은 또 다른 강변과 서걱이는 갈대를

키워

끝내 사람으로는 다 하지 못하는 것 있으리라

 

그리하여 쓸쓸함은 사람보다 더 깊고 오랜 무엇

햇빛이나 바위며 물안개의

세월, 인간을 넘는 풍경

그러자 그 변치 않음에 기대어 무슨 일이든 닥쳐도 좋았다

 

 

 

아버지는 설탕 체질이셨다

김경미

 

길고 험한 여행을 취소했다 날아갈 것 같다

나는 여행 체질이 아니다

나는 앉은뱅이

자괴심을 많이 타고난 체질이다

 

아버지의 취미는 밥에 설탕을 붓거나

달착지근한 분유 마시기였다

하지만 빼빼 마르셨다

 

또 어깨가 아프다 방향들이 나를 찢는가

 

확실히 나는 여행 체질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어느 치약이나 통장이 더 좋은지는

확신이 없지만

입은 쓴 사람한테

마음이 가는 점만은 괜찮은 체질이고

싸구려 민박도 마다치 않으며

어차피 다 바탕은

고통이거나 고독이란 믿음도 꽤 괜찮다

 

설탕을 자꾸 밥에 뿌리던 아버지는

위가 상해

일찍 돌아가셨고

나는 그처럼 다디단 체질은 아니다

 

 

 

앉은뱅이 목숨

김경미

 

저녁 물린 밥상 닦아

앉은뱅이책상 만들어

목숨을 위해 수저질을 했듯

연필심 부러지지 않게 깎아

목숨만큼 소중한 시나 삽질하렸는데

개나리 꽃잎 너머로

머리채 휘어 잡힌 채

젊은이에게 끌려가던 젊음을 본 날

돌아와 수저를 든 손이 이렇게 떨리는데

밥알 흘리듯 목숨을 흘리며

밥상 위에 떨어진 시나 주워 먹는

아마 이대로 앉은뱅이가 될 수는 없다고

 

 

 

암에 대하여

김경미

 

아무래도 너 암 걸렸나보다, 그런 표정으로

친구들이 그런다, 너 득도했나보다

내시경 검사까지 했는데 괜찮댔어

슬쩍 화장실에 가서는 비겁하게 손을 떨며

가슴 밑을 가본다

전에 없던 이 고요

재미없는 평화, 오 자유 얻었네

아무래도 엑스레이 한번 더 찍어봐야 해

이럴 수는 없어, 단추를 잠그는 손이 점점 떨려온다

너 어쩌니 앞으로 어떻게 살래, 착한 친구들 걱정해 준다

뭘 잘못 생각했을까 좀더 조심할 걸

말없이 가부좌 틀고 있는 가슴이 자꾸 원망스럽다

 

 

 

애인 도시 – 애정 성시

김경미

 

2005년 을유닭은 도화볏 유달리 붉은 닭이라, 온 나라 안 분홍도화 앵화꽃들 번성해 바람 속마다 문틈마다 홍염살 분분하리라는 역술 점괘의 해

온 동네 베이커리 케이크 조각 같은 애인들과 안에서는 유리창 바깥에선 거울인 검은 유리창 앞 립스틱을 바르는 애인들과 전봇대 고압선에 걸린 풍선 속 애인들과 붉은 도장을 만난 애인들과 겨울 밤하늘 염소와 만나 촛불 켜든 흰 면사포로 내의를 해입은 애인들과 기러기 흉내를 내는 샤갈 풍의 애인들과 얼굴 갈기갈기 눈물 젖은 피카소 풍보다 윤곽 뚜렷하여 눈에 곧 짓밟힐 고갱 풍의 애인들과 초록 페인트칠의 집에 숨은 모딜리아니 풍의 역삼각형의 애인들과 심장을 눕혀버리는 마크 로스 풍의 심해 바닷속 애인들과

탁구공처럼 짧은 흰색 스커트 뒤집히는 애인들과 혼인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옆집의 애인들과 제라늄나 흰 발코니 이국풍의 창호지 꽃잎 넣은 문살의 애인들과 비 오는 날이면 붉은 간판에다 몸을 쬐고 싶다는 애인들과 야생마같이 남의 집 골목에서 길길이 뛰는 애인들과 무릎 밑의 애인들과 콧잔등 위의 애인들과 온 세상 끝도 밑도 없을 애인들과 똑딱단추처럼 똑딱대는 애인들과 돌이켜보면

애인 없을 때만 인간 같았던 날들의 달리아꽃들 애인 없는 저녁의 먹먹하도록 눈부신 음악들 사람인 적도 아닌 적도 없는 날들의 사과꽃 배꽃 복사꽃 분간되지 않는 시절에 초코시럽 같은 밤이 곧 끼얹어지리라 애정 성시, 그 분분함 속 그 누구도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는 풍문이 울며 만든 사루비아꽃 불타는 슬픔이

눈부시도록 먹먹한 도시에서

 

 

 

야채사(野菜史)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고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약속

김경미

 

무량사 가자시네요 이제 스물 아홉의 당신

아직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고 깨도 좋은 나이

잠시 나도 오래전 그 나이인줄 알아 웃었나봐요

 

뻔뻔키보단 서글프죠 늦은 미혹(迷惑)

 

흰 벚꽃들 얼른 지고 차라리 당신 발이라도 다쳤으면

거기 꽃그늘 아래 어린 여자들 보면 부끄럽기나 할테니

스물아홉 살의 당신 쪽이 약속 하나쯤 깨도

무량사는 여전히 거기 있을 테고 난 차라리 혼자 가지요

미혹의 거품 가만히 맥주잔처럼 기울여

거기 마당 한 켠에 따라버리고

못 지켰던 내 스물 몇 살의 약속들 곁에 따라버리고

지키지 못한 약속들끼리 몇 생을 거듭하여 갚으라다가

어느 생엔가는

나, 열아홉쯤으로 무량사 가자고 늙은 당신께 가자구요

지키지 못한 약속들 때문에 봄은 계속될 거구요

 

 

 

어둠의 생김새

김경미

 

모든 육체는 어둠을 틀에 부어 주조해낸 것

 

어둠의 생김새가 육체를 가르는 것 어둠의 콧날이

좀 더 두툼해지면 분꽃은 나팔꽃이 되고

다리가 길어지면 뱀은 기린의 육체가 되지

어둠의 등에 혹이 돋자 사람들은 그 어둠의 생김새를 가리켜

낙타라 불렀다

 

곁을 이룬 불투명 그 안을 들어가는 건 오직 목숨의

해부와 정지뿐

목숨을 지키는 건 어둠의 모습을 해체하지 않는 것

제 것이어도 단 한번 들어가 본 적 없는,

어둠으로 나선의 계단을 내고 검은 문을 단 집들

기차 같은, 밤길 속에서도 차창 안 불빛 속의 얼굴들

투명 유리 너머 들여다보이는 기차 같은 것, 아니어서

 

모든 생은 끝내

제 몸 밖에서의 풍찬노숙인 것

 

꽃잎들은 한없이 얇고 납작한 어둠의 무게를 가져

바람처럼 아름다운가

 

그러나 어둠이 적을수록 개미허리처럼 약한 것

그리하여 밤 밀물지기 전 석양을 사랑하듯

어둠의 숙명을 많이 아는 자일수록

나 사랑하는 것이니

 

거울 속 저편의 어두운 나신(裸身)처럼

 

 

 

어둠이 왔다

김경미

 

1. 편지

푸른 상처의 출렁거림

청색 잉크병 한 병

읽다가

사약그릇 같은 해가

발을 헛디딘다

 

어둠이……왔다……

 

 

2. 겨울나무

네 머리 가득한 검은 실핀들

너무 아름다워 마주 볼 수 없는

상복

상복 속의 내면

(암전)

어둠이 왔다……

……왔다……

 

 

 

어떤 날에는

김경미

 

수저같이

아귀같이

푸른 잎들 새로 돋는 봄날에

하루 종일

우두커니

부엌 창 앞에 서서

쏟아지는 물 잠그지도 못한 채 서서

두 손 떨군 채 낮고 작은 창 내다보다

핑 눈물이 도네

노란 봄 스웨터 환한 색깔옷들 아무리 가져다 입어도

낡은 겨울 검정 외투처럼

스스로 무겁고 초라해서

 

살아와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 잘. 있. 는. 지. 물어봐 주지 않은 듯

 

어떤 날에는

자꾸 눈물이 나서

잘. 있. 는. 지......자꾸 눈물이 나서....

 

 

 

어떤 여름 저녁에

김경미

 

한여름, 선풍기에서 나오는 약풍 혹은 미풍이란 글자

처음 사랑의 편지 받았던 촉감일 때 있다

 

크게 속상하고 지친 울음 거두고 마악 여는 문

경첩에서 흰 바다 갈매기들 바닷물 닿을 듯 낮게

마중 나올 때가 있다

 

극도로 줄이거나 높인 음악 소리 속

가본 기억 없는 모르코 사막의 터번 두른 낙타

눈 아픈 모래바람 앞서 가려줄 때가 있다

 

유리창 너머 시원한 액자 속 흰 양떼구름

살아 움직이는 활동사진처럼

갈래머리 계집아이의 어린 설레임 되감아줄 때 있다

 

어떤 여름 저녁,

그 모든 것들 한꺼번에 밀려 나와

더위보다 큰 녹색 수박의 무수한 조각배들

잊을 수 없는

석양의 출항을 시작할 때가 있다

 

 

 

언덕 위의 베란다

김경미

 

언덕 꼭대기 낡은 아파트 14층

베란다 문을 열 때마다 기차 소리가 우르르 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지붕들 모두 철교 밑 강물처럼 보이자

수천의 꽃잎들이 폭신거리며

방석처럼 안성맞춤, 안성맞춤, 외치는 소리 들리지

 

그래 이제는 박하 향처럼 화아- 날아올라야 할 때

더 이상 부모 같은 세상을 힘들게 하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한 번 박차기만 하면 나도

비로소 날개가 되리라 허공 속 검정 머리카락들이

망토처럼 시원스럽게 펼쳐지면서 전혀

다른 종(種)이 되리라 종소리가 되리라 손 닿지 않던 하늘도

온통 솜사탕처럼 입에 묻히며 부리 끝에 물고

저 수평선 너머까지라도 맘껏 펼쳐지리라

아주 다른 육체와 언어를 시작하리라

마음을 바꾸는 마음을 보리라 생을 바꾸는 생을 보리라

너무도 큰 그 날개와 노래 누구도 감히 알아보지 못하리라

아주 잠깐 생의 한 발만 헛디디면

아침 나팔꽃처럼 한 번도 못 겪은 몸과 마음이 활짝 되살아나리라

 

 

 

없건만 있는 풍경에의 - 혐오시설

김경미

 

내 살아가는 힘은 알 수 없는 풍경에의 전율들

실루엣처럼 문득 솟는, 살았던 적 없는

소읍의 풍경과 여름 하늘의 적요, 저녁의

대하소설 빛 노을, 없건만 있는 그런 기억에의

전율들

 

아파트 화단의 철제 여인상을 철거한다고 한다

혐오시설물이라서

철거반원들이 오는 날, 부리나케 도망했다

 

내 살아가는 힘은 아무래도 자기혐오

가슴에 손수 쉽게 저녁 물들이니

거울 보기가 미안하다 마음이여 청춘도 다

갔는데

아직도 아름답지 못하다니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없건만 있는 기억들이여

혐오 다 하면 네 안으로 투명 햇살처럼 걸어 들어가

너희들을 살아주리니

 

 

 

여시아문(如是我聞)

김경미

 

봄나비와 함께 날던 햇빛

마음 바꿔

풍진에 몸을 내어놓다

 

진흙비 뿌리다

 

나는 저자에 산다

귤을 까서 입에 넣고 나면

생각해보니 조금 전 발바닥을 긁었던 손이다

인연처럼

 

 

 

여행의 리얼리티

김경미

 

고무줄과 전선이 날파리처럼 꼬일 때

목과 두 눈동자가 뒤통수에 가 붙을 때

사랑한다는 고백이 진심일 때

외로움을 오래 보관하고 싶을 때

 

낡은 외투를 세탁소에 맡기고 그대로 줄행랑친다

 

납작해진 코를 부풀리기 위해

 

입술에 손가락을 대는 것

폐업한 나라의 흥망과 성쇠의 전말을 듣는 것

낭만과 실망은 같은가 다른가

나, 라는 이상함을 메고 끌고 들고

길을 걷다가 멈춰 서서 울어도 창피하지 않은 것

하루에 열 번씩 이름을 바꿔도 탄로 나지 않으며

바다와 목재와 지붕의 서로 다른 가치들

지폐와 동전을

손바닥에 모조리 꺼내 놓고

알아서 집어 가라고 주인을 뒤바꾸는 것

 

구기 종목의 관중이 되는 것

구름의 수입과 지출을 헤아리며

 

아무튼 바퀴와 날짜를 사랑하는 것

 

 

 

연꽃 이야기

김경미

 

그가 손님처럼 앉아 있다

 

문득 그가 사는 세상 안의 집이 궁금하다

 

우물 같은 속내로 자박자박 소리 내지는 않는지

이웃집 마당만 한 햇볕이

간간이 소금처럼 녹아내리지는 않는지

속이 텅텅 빈 나무들이 사는 건 아닌지

지상의 방 한 칸 얻어들 듯

마음의 방 이어주며 경계를 허물며 사는 건 아닌지

 

변명을 늘어놓듯 슬쩍 그의 결을 비집자

스치듯 날아오르는 꽃 무더기 사이로 등 푸른 햇살이

종종걸음이다

 

 

 

연애의 횟수

김경미

  

1

그 나라 입국할 때는 써넣어야 된다 합니다

그러니까

 

밤의 횟수를

 

식초를 식초에 타서 마신 밤 알코올을 촛불에 태워 마신 밤

눈썹의 검은 눈물자국 베개를 지나 귀로 흘러든 밤

 

비상시(非常時) 문을 여세요, 쓰인 비행기 비상문을

한 아이가 열 뻔했다는 밤 모르는 한자 때문에

하늘에서 비행기 문 열릴 뻔한 비상시의 밤

더는 읽을 수 없는 해독불가의 그대라는 실종의 밤

음식 버리면 죽어서 다 먹어야 한다는데 곧 심장 멎으리

그때 굶지 않도록 음식들 미리 버려둔 밤

 

버렸는데도 마구 체해 얼굴 노래진 밤 손톱으로

바늘을 따는 밤 피가 없어 솟구치지 않는 밤

 

버지니아 울프가 길에서 만난 친구 딸에게 물었다는 밤

너 나랑 두꺼운 지우개 사러 갈래? 그동안 쓴 소설들 다 지우게

울프 주머니에 돌멩이 넣고 강으로 데려가고

보름달 같은 국산 지우개 내주면서 미칠 테면 미치라는 밤

그러니까

 

이별의 횟수,

 

그 예술의 순간으로써

저마다 모양과 부피 다른 지도를 나눠주는 게

그 나라 출국하는 방식이라 합니다

 

 

2

그 나라 입국할 때는 기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밤의 횟수를

 

가령 검은 눈물 자국

베개를 지나

침대 밑으로 죽은 팔처럼 길게 흘러내린 밤

 

그렇게 죽음의 태도를 지녔던 첫 결별의 밤

스물한 살의 봄이었는지

열일곱 살의 책가방 든 가을 고궁이었는지

 

서른다섯 살까지는 몇 번의 태도가 있었는지

 

가장 최근에는 누구였는지

 

온 생에 단 한 번의 태도도 없었던

 

불행한 자를 제외한 누구나

 

실연의 피격(被擊)과 가격(加擊)의 횟수를

실명과 주소까지 낱낱이 기입해야

 

골목의 모양과 부피가 다른

지도를 허락하는

 

밤의 입국심사서를 써야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연표(年表)

김경미

 

그가 내 가슴에 복숭아를 던지던 구석기시대가 있었고

내가 그의 가슴을 찌르던 철의 시대도 있었다

 

연잎처럼 큰 편지가 소리 없이 타버리던

종이와 성냥의 시대가 있었고

 

어금니가 아픈 탈락과 취소의 시대도 있었다

긴 복도에는 늘

목례와 악수와 끄트머리 어둠과 귀신이 서 있었다

 

빙하기가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왔다 가는 사이에

나무들은 톱밥이 되거나 새가 되고

나는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 되었지만

그래서 추위를 더 잘 피했다

 

매일 뭐든 옮겨놔야 살 것 같던

변덕의 시대도 가고 나면

꼼짝도 않는 추억들을 다 무슨 수로 막겠는가

 

잡을 수 있었던 것들도 미끄러져 나가는 시간의 시대는

언제까지나 되풀이되겠지만

 

지금은 혹은 검정비닐의 시대

안에 든 것들을 다 허름하게 만드는

 

 

 

열쇠

김경미

 

자주 엉뚱한 곳에 꽂혀 있다

 

달력도 친구도 가구도

수평선도 라일락 나무도 심장도

뱃고동 소리도 발소리도 저주도

언제나 제집에 딱 꽂히지 않는다

바늘이 무던함을 배워 열쇠가 되었다는데

 

미간을 사용하지 말자

 

구름을 사용하자

나뭇잎을 사용하자

귓바퀴를 사용하자

 

 

 

열애들

김경미

 

때로 마음대로 꽃 소리 내는 나무들

언제 와서 언제 졌던가

절간의 새우젓 같은 안부들

이 세상 아직 내 탓에 쓸쓸해하는 이 있을까

 

있다며 곁에 와 눕고는 하는 불빛, 무엇인가

어느 나무에선가

멀리 있는 자격 가까이 입으며

아무나 나라를 생각할 수 있음을 알았지만

게처럼 앞으로 가는데 옆으로 멀어지네

이제는

가을 더듬이에 국운보다 단풍잎 한 채가 아픈 날들

 

적막에 닿았다

인생에 부산스러움이 있다고 믿지 못하는 자는

실패한 자겠지

실패가 편하면 벌써 비겁한 것일까

그럴수록 혼자 외로워 아름다우리라고

눈물, 눈물 나도

끝내 기다려주고 있는 언덕 위

참으로 안아볼 만한 몸이여 마음이여

마지막 불빛은

 

 

 

열애의 나날

김경미

 

휘어진 영혼은 아프다. 아니 아프다 못해 처음 와 닿는

새벽빛처럼 시큼시큼 가슴이 저리다.

스쳐 지나가는 버스 차창에서, 건물에 반사되는 어스름 저녁,

역광 속에서 문득문득 생각나는 상처 받은 영혼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몇 겹의

어두운 회전 유리문 같은 곳에 갇혀 방황하는 영혼들,

그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휘어진 영혼이 굴절되어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상처 받은 그들 영혼이 위안받는 사랑법을

그것을 과연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연하의 사랑 같은 것

대각선으로 마주치는 눈빛 같은 것.

들켜서는 안 될 만남 같은 것.

사람이 그리워서니 용서해다오.

술만 마시면 혀 뒤로 발바닥이 튀어나오도록 토하고

또 엉긴다. 용서해다오 그대들

내 아는 사랑법이 괴로움 붙들고 늘어지는 비루(悲淚)뿐이니

왜 나는 이 세상 짐에 알맞은

어깨를 갖지 못할까?

진 짐도 없이 걸으면서 휘청대기는 잘할까

그래도 끝내 날 모욕 않는 사랑아

 

 

 

열애의 서(書)

김경미

 

개나리꽃이 터졌습니다 노랗게

진달래꽃이 터졌습니다 붉게

터진 그들 곁에서 나도 핍니다 핍니다

지난겨울엔 정말 늘 찬밥이었지요

무엇이던 빨리 버리라고만 하는 사람들 틈에서

사랑에 대한 노력은 갈수록 불온으로 몰리고

나라를 문란히 하지 않기 위해서

사소한 악도 불륜처럼 두려웠어요

 

이제는 산이 화투빛으로 피었습니다

누워 있는 들도 그렇게 피었습니다

강도 그렇게 핍니다

그들 곁에서 내 사랑도 무차별로 터집니다

 

따뜻한 밥으로 끓어납니다

 

 

 

엽서, 엽서

김경미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 년 혹은 이 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대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 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예요...

 

 

 

영화 시대

김경미

 

찔려도 괜찮아. 칼날이 뒤로 밀리게 되어 있어.

이 피는, 먹어봐, 토마토케첩이라니까

죽는 건 표정일 뿐이야 좀 더 죽여 봐

저 남녀노소 피난의 총알받이들, 다 일당제지

적들은, 사방에 거울 붙인 과일가게 알지?

몇 배의 상법을 썼을 뿐이야

겁내지 마 아무것도 폭파 따위

절벽 밑 바다 속에는 그물이 받쳐줄 거야

휙, 새처럼 가볍게 좌절해봐

어때 평평한 지구 위를 기는 재미가

요렇게 돌리면, 봐. 거뜬히 가파른 암벽타기 중이잖아

믿지 마 안약이야 흥분하지 마

살색 스타킹 입은 사랑

 

 

 

오늘의 결심

김경미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실망

오후에는 꼭 치과엘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할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오늘의 노래

김경미

 

편도선이 부었다 새빨갛게 귀까지 부풀었다

심장도 부었다 머리도 붓고 목소리도

비누 거품처럼 부었다

 

모두들 빗속을 뚫고 노래 부르러 간다 나도 부르고픈

사랑 노래가 많지만 목에서 피가 날 것이다

그 목으로 중환자실에서 갑자기 죽은 사람을 안다

 

노래는 실패하고 모두와 헤어지는 길 코까지 부었다

갑자기 비까지 사납게 부풀더니 막대기보다

단단해졌다 맞으면 목이 부러질 거다 다 끊긴

심야 거리엔 행인 하나 없고 우산도 없고

불빛도 없다 깜깜한 상점 처마 밑 잠깐 서 있어도

물에 닿은 빵처럼 곧 형체마저 사라질 것 같다

행방불명될 것만 같다 사방이 폭포 소리인데

목이 갈라지고 침이 안 넘어간다 목이 무섭다

몇 시간 전 지하 약국의 약사는 약을 다섯 갑이나 내밀었다

빚쟁이에 휘어잡혔는지 약에 취했는지 머리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술은 맘껏 먹고 노래만 부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나도

불러보고 싶은 사랑과 이별 노래가 많다

 

평소에 자주 불렀어야 했다 실패를 만회하고 싶지만

목에 소리를 대는 순간 목이 떨어져 구를 거다

서 있기도 무섭다 무서워서 뛰려는데 순식간에 발목마저 삐끗하며

붓는다 구두마저 퉁퉁 붓는다 검은 연못 위에 주저앉은 채

누구를 부르기에도 면목이 없다 면목 없는 게

다 합해서 제일 무섭다 그걸 아는 게 가장 무섭다

밤도 목도 점점 더 퍼붓고 검은 연못에는 점점 잠겨가는데

오늘도 노래는 완전히 실패다 가수도 아니니 괜찮다지만

이런 밤에 갑자기 죽은 사람을 안다

 

 

 

오늘의 철학

김경미

 

친구는 내게 노출 드레스를 입힌 뒤

허리 안쪽을 옷핀으로 여며주고

겨드랑이 제모 상태를 확인한 뒤

뉴욕 뒷골목 클럽에 데려갔다

가는 내내 드레스 속 옷핀이 살갗에 차가웠으니

 

귀를 찢는 연주 소리와 춤과 술

나도 퇴폐와 환락을 좋아하지만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하지만

 

나는 슬픔 속에서 더 안전할 것이며

초라함이 일상의 무대의상일 것이며

발은 주로 한 박자 늦을 것이며

심장은 소규모를 떠나지 못할 것이며

 

이것은 내 옷이 아니며

이 사람은 내가 아니며

이 생은 내가 원하던 모습이 아니라고

 

허리 속에서 풀려버린 차가운 황금빛 옷핀이

자꾸 살을 찌른다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

김경미

 

꽃들이 하루 삼십 번씩 잇몸이 허네

구름들, 그 큰 솜뭉치 들고도

아무것도 닦지 못하고 가네

상인들은 딸기와 수박도 무서워

차들이 이른 폭염을 향해 이마를 박고

배가 산에 목을 매고

불타는 산모 안에서 아이가 기적적으로 걸어 나왔으나

증명서를 떼러 가면 늘 공휴일의

라일락 꽃잎들이 흰 이를 철철 흘리며

내 뼈는 내 뼈는

슬픔도 차마 고개를 못 드네

 

한 역사학도는 사실, 그때

나만의 고통 나만의 낭만 나만의 불행 나만의 눈물

나만의 사랑 나만의

나만의 상처 나만의

머리카락 타는 냄새에도 오늘도 별빛 아련히 아득하네

나만의 별 나만의 어둠

나만의 나만의 우주 나만의 역사

나만, 나만의

 

몇 년의 시간이, 기차 바퀴에 눌려 양은 캔처럼 부피를 잃는 한 도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중계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꼭 촬영용 양동이 물처럼 비 쏟아지고

혼자 스무 가지도 넘는 토속 반찬, 식당을 받으며

 

내 것 아닌 도시에서 어깨가 아팠다

힘에 부치는 사랑이 날 부수고

새로 지으려나 보았다

 

 

 

오렌지 주스 캔을 누가 백금으로 만들겠는가

김경미

 

2007년 1월 아침부터 안개비가 가로등 불빛에 섞여 내렸다

커피와 빵 냄새 속 비행---기는 지연되고 초청단은

공항 근처 레스토랑에서 경제학자의 강의를 당겨 들었다

 

-가격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대한 정보의 집약체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 얼마나 가치를 부여하는가

최고의 생산 방법은 무엇인가 값은 곧 그 물건,

그 존재입니다

가격이 없으면 당연히 교환도 안 이뤄지죠

 

실은 다 가격 때문이었던 거야 안 이뤄지는 사랑도

이별도 나와 그들의 가격 원하는 원치 않는 가격의

이마나 콧날이 등 뒤가 다른 가격

저 크레옹 두께 같은 안개와 낭만의 가격이

모두의 발목을 묶어버리는 거지

 

-사회주의도 가격 제도를 얕보다 망했죠

인생의 먹구름들도 값을 얕봐서였나 먹구름이어서

값이 망한건가 갑자기 유리창에 서리는

부러진 우산살들과 곰팡이 번진 구두와

6월의 장대비 냄새 11월의 나뭇잎, 그들의 가격 제도를

내가 얕봤던가 그들이 나를 얕봤던가

 

-오렌지 주스 캔을 누가 백금으로 만들겠습니까

학자는 일월의 하늘 여기저기 가격표를 붙이고

나는 두 귀를 붉히며 그러니까 내 가격은 얼마쯤인가,

진열대 앞에서 우왕좌왕한다

 

 

 

오지선다

김경미

 

아프리카 오지 마을에서

소년의 편지가 왔다

 

초록빛 편지지엔 단체에서 마련한

소년이 대답해야 할

오지선다의 질문이 있었다

 

"나는 우리 마을에서 이런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꽃향기

비 올 때 나는 냄새

비누 냄새

음식 냄새

그 외

 

아프리카 소년은 '꽃향기'와

'비 올 때 나는 냄새를 골랐다

 

충격이었다

소년 시인

마을에서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없다 해서

 

 

 

요즘 내 문제는

김경미

 

한강철교 위 자살 소동자처럼, 갓 스물의 미니스커트처럼

아슬아슬하지 않은 것

박살, 자주 나거나 자주 내는 것

 

-나는 지금 거리를 걷고 있지만, 대체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염소처럼 종이를 우물대고

있지만,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물속 잉크처럼 번져 흐려지면서도 손목시계

처음 갖던 날을 기억하는 것 밤바다 앞의 파도들

상실되지 않는 것

 

-마음먹고 심어도 피지 않을 수 있고

무심코 꽂아놓은 버들이 그늘을 이루기도 한다*

 

언제쯤 나는 나무가 나뭇잎한테 하듯이 할 것인가

 

 

 

웅크리다

김경미

  

파란 물감 옅게 바다처럼 번져가는 저녁 창 앞에서

두 무릎을 끌어안고 잔뜩 웅크리면

동그랗게 말린 몸이

옛날식 검은 레코드판이 되고

그 까맣게 둥근 레코드판에서 첫사랑도 둘, 셋… 사랑들도

다 걸어나와

 

상처의 가늘디가는 길을 따라 노래하기 시작하니

 

이토록 저절로 바닷가 소라껍질처럼 메아리들 깊이

웅성대며

진주잡이 음성들 밀물져올 줄 알았다면

열 명쯤 스무 명쯤 더 만나고 그 끝

더 참혹했을 것을

 

웅크릴 때만

지나간 옛 노래 소리 들리고

지나가느라고 지금의 어깨를 부수고 콧등을 떨어뜨리고

발을 밟는 것들

밟고 가 검고 은은한 옛 음성의 물결을 보낼

시간의 저 파란빛 바다

 

내 취미는 갈수록 웅크림이 되어가네

 

 

 

원시의 통증

김경미

 

어둡고 깊은 동굴 벽이 나무 햇불을 치켜들었다 공포를 그리려는 것이다 축원을 그리려는 것이다 검은 벽에 천천히 들소가 나타난다

들소의 배에 창이 꽂힌다

날뛰던 공포와 축원이 동굴 벽에 갇힌다

동굴 밖 들소는 이미 벽에 갇힌 제 운명도 모른 채 들판을 마구 달린다 곧 창끝의 공포와 축원에 다리가 꺽일 텐데

무화과 나무는 아무도 벽에다 그리지 않아서 갇히지 않았다 달리지도 못한다 공포와 축원 바른 창끝에 찔리지도 않는다

폭설도 없는데 길에서 이렇게 무릎이 꺾이는 건

누가 햇불 치켜들고 동굴 벽에 내 심장을 그려서이다 거기 창을 꽂을 만큼 간절히 나를 원해서다

 

 

 

유리창 이력서

김경미

 

6월 하순쯤에 왔으니 유리창이- 그 방에 그게 있었다면- 온통 붉은 넝쿨장미빛이거나 진흙투성이 장맛비였겠습니다 온통 피와 다혈질만 갖추고 기다리던 가족까지 평생의 빨간색은 거기서 다 봤겠습니다

오직 유리창만 있었던 유리창이 온 동네를 깨우던 유리창이 내내 불 꺼지던 유리창이 가출만 꿈꾸던 유리창이 귀가를 주저하던 유리창이 서랍을 뒤죽박죽 뒤지던 유리창이 저주를 하던 유리창이 총 가진 경찰관과 연애하고팠던 유리창이 별빛도 없던 검은색을 떠안기던

유리창이 유리창이 유리창이 유리창이 (대하소설 분량으로 열 권도 넘게 반복할 수 있지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동네 유리집만 부자 만들던 유리창이

아직 이십대 얘기는 운도 못 뗐는데 유리창 소리 너무 시끄러워서 이만 쓰렵니다

숙식 제공에

유리창 없는 곳만 있었어도 그날들----

 

 

 

육식성의 아침

김경미

 

누가 채소만 먹는가

누가 채소만 먹으면 귀가 청명해지고

목이 길어진다 하는가

채소를 먹으면 채소의 피를 갖고

동물을 먹으면 동물의 피를 갖는 식탁은 없다

비를 맞는다고 비가 되거나

별을 본다고 별이 되지는 않듯

피는 다른 문제

 

천둥 벼락 그친 뒤의 공기와

너무 피어 뒤집힌 장미꽃들이 불러일으키는

오늘의

식탐

 

무엇이 고마웠는지

저 먹고픈 취 한 마리 문 앞에 놓고 간

고양이의 인내를

따라가도 좋겠으나

눈동자가 없는 채소만으로는

진정한 식사의 슬픔을 알 수 없다며

오늘도 아침부터

 

육식을 한다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 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질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이러고 있는,

김경미

 

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 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마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유

김경미

 

깊어서가 아니라 너무 얕아서 못 건넜다 그대를

 

 

 

이장(移葬)

김경미

 

봄볕, 다사로운 애틋한 첫걸음에

소식 먼 이복형제 마주친 그날처럼

 

공연히

일어나는 경련

아직 굼뜬 봄 소풍

 

풀은 저리 은근한데 한 줌 폴폴 날리는 혼

마음 풀고 가라는 빠듯함만 뒤척이다

 

찔레꽃

하얀 상복으로

허리 굽힌 윤사월

 

 

 

인간

김경미

 

늦은 가을 밤비가 명단을 가져온다

몇몇에 대해 가만히 결론을 내린다

아직 인생 끝 아니지만 누구는 검정 비닐봉지

나를 모욕했다 누구는 천성적으로 선하다

심장의 화살촉에 분홍색도 어룽대고

누구는 더는 상대치 말자

네가 던졌으므로 나도 던진다고 상처가 뜨거운데

그들 또한 나를 더러 결론 내리리라

도중이므로 내일이면 취소도 하고 민망도 하겠으나

 

가을밤 국화 줄기 같이 간신같이 내리는 비와

명단

조잡한 모함과 싸우는지 진실과 싸우는지

인간으로선 모를 일이다

 

 

 

인간론

김경미

 

1

옳지 않다

나는 왜 상처만 기억하는가

가을밤 국화 줄기같이 밤비 내리는데

자꾸 인간이 서운하여 누군가를 내치려보면

내가 네게 너무 가까이 서 있다

그대들이여, 부디 나를 멀리해다오, 밤마다

그대들에게 편지를 쓴다

 

 

2

물 주기기도 겁나지 않는가

아직 연둣빛도 채 돋지 않은 잎들

동요 같은 그 잎들이 말하길

맹수가 아닌 갓 지은 밥처럼 고슬대는 산양과

가슴 한가운데가 양쪽으로 찢긴 은행잎이

고생대 이후 가장 오래 세상을 이겨왔다 한다

 

 

3

관상(觀相)에서 제일 나쁜 건 불 위에 올려진 물 없는

주전자 형상이라지 않는가

바닥 확인하고 싶으면 가끔 울어보라 한다

 

 

 

일상

김경미

 

보름달 안은 쟁반만 한 약,

식후 삼십 분마다 하루 세 번씩

시간 지켜 삼킨다

 

그래도 안 낫는다

그래도 안 죽는다

 

아 듣기 싫어라

어디서 권태가 내 목소리로 징징대는 소리

 

콩깍지만 한 무책임도 없이

참신한 불행도 없이

김치같이

수박껍질같이 둔, 탁, 한 행복들이 집집마다 모여 있는 것도

상쾌하지 않다

 

 

 

잃어버린 지상을 찾아서

김경미

 

우체국은 어디쯤인가

편지를 들고

 

빌딩 옥상에 올라가 퇴근하는 저녁 바다를 내려다본다

파도 위로 자동차 불빛들 주황색 구명조끼처럼

헤드라이트 불빛을 껴입은 채 파닥이고

길을 잃었음을 잊은

시든 물고기들이

정거장에서 반복과 번복의 물방울을 서로에게 뿜는다

플라스틱꽃처럼 아무도 마음까지는 젖지 않고

드물게 몇은 흙과 먼지로 빚던 인간의 숨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기억이 깊으면 붉은 폭죽 같은 두통의 생에 시달려야 한다

먼 원양어선들 끝없이 식인의 물고기들을 데려오고

인근 해 부두에선 날마다 태풍이 숙박계를 쓴다

종이꽃들마다 나무젓가락처럼 자주 다리를 벌리고

언제나 목이 탄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날 것인가

 

어둔 하늘 위 돋아 오는 저 빛조각들은

별이 아니라

혹은 일제히 겨눈 총구들인가

 

혹은 구원의 방주로 불려올라간 우체국인가

내 편지 받을 땅의 몸 맑은 나무들인가

아무도 몰래 어둔 심해 속 손톱처럼 형광빛으로 떠다니는

도망한 땅들인가

 

 

 

임계량 - 마이크로라이프

김경미

 

나 알고 싶은 것은, 우유가 물컹 젤리로

상하는 그 순간

벽시계와 건전지가 마지막 떨림을 끝내는

단추가 옷을 손놓는

유리가 자신을 깨기로 하는

달리던 공이 멈추기로 하는 그 결정의 순간의 까닭과 표정

바다와 태양의 수평선에서의 마지막 한 접점

사랑과 그리움의 그러한 마지막 포화와

소진의 순간

꼭 그 한순간 그 한 경계

그 전복의 꼭 한 지점, 그 찰나의 모든 것이

퇴적이 퇴적을 벗어나는 그 폭발의 한 점의

모든 것이

그 모든 것의 마이크로코스모스가

 

그 옮아가는 변질의 한 순식간의 세계가 항상

궁금할 뿐이지

거기 가면 다 있을 테니 썩은 나뭇잎과

발아하는 구름의 관계가 하늘 너머와 이곳에서의

삶의 이치와

내가 다른 사람이 되지 않은 그 어떤

한 출생에의 결정적인 이유와 까닭이

꽃나무들 꽃잎마다 색깔 밀어넣는 순간의 정체가

무엇들 다 어떤 퇴적으로 그러한 한 순식간을

얻는지

삶과 죽음이 어떻게 옷을 바꿔입는지

그 한 정점의

마이크로라이프가

 

 

 

임진강이 말하기를

김경미

 

보름 달빛이나 덮으며 초승 달빛이나 고르며

바늘귀에 스산한 풍문만 꿰차니 하 좋더냐

내라면 한달음에 산맥 넘고 평야 질러 갈 길

두발짐승 두 손 짐승으로 태어났거든

무거운 그림자 벗어 땅속에 묻고

머리끝 하늘 닿기 전 쿵쿵 땅 꺼지기 전만큼만

가랭이 돋우어 뛰어라

오가는 철새들 깃털이라도 빌려 입어라

친형제들끼리 눈 흘김 미친 행각 그리 즐겁더냐

말로 말할 수 없거든 울부짖음으로 말하며 오라

이복 유복 서자 사고무친 아닌 누가 있어

끄잡거든 잡힌 옷 벗고 가로서거든 메다꽂아 오너라

발톱 검은 때 누가 흉보랴

시궁창 진흙에 신발 들러붙거든 던져버려라

오물이란 똥오물 끼얹겨도 그대로 오라

숨결만 묻힌 바람이 전할 수 없어

바람 탄 풀씨 몇 점이 피울 수 없어

견우별 직녀별 오작교별로 이을 수 없어

뼈를 가져와 살을 묻혀와

따뜻한 혈맥 심긴 흙발로 몸소 와

어린 실개천들 갈 길 몰라 목타하거든

오종종 앞길 물길도 파주며 데불고

집짐승들아 여기도 생솔 타는 구들방 있으니

들짐승들아 이녘에도 손발 넓은 논밭 있으니

가슴 짐승들아 이 언덕들도 헤어짐을 시시철철 해후로 바꾸며 살았노니

친형제 살아낸 또 하루 덧없음을 생각해보라

이 깊은 폐토를

어이 나 혼자 건너라고

 

 

 

입의 무게

김경미

 

그 입으로 시작해서 그 입으로 망할 거다

 

장돌뱅이 운수납자 경계의 말이 그 여자 혀끝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수천 개의 비밀 코드를 만들어 가장 내밀한 유전자를 잉태하는 저 다보탑

입 앞에서 평등한 만인이 입 안에서 속을 비워 불면으로 지탱하는데

세상의 모든 가벼움을 게워낸 여자의 미미한 침묵에 급소마다 치명상을 입는다

종종걸음으로 오는 무심함은 죽음보다 정직한 비린 상처로 무릎을 꿇고

허기진 몸뚱어리 벌거벗은 채 만나는 공황장애

천 개의 꼬리를 가진 그녀는 뼛속 깊이 늙고 늙어도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에라 불쏘시개나 되라

 

 

 

자동응답기

김경미

 

1

집에 없니?…… 그래…… 여긴 어제는 가을비 오더니…… 오늘은 가을볕 눈 시린 게 …… 너무 좋기에……그냥 …… 생각이 나서…… 그래…… 그럼…… 잘 있어…… 그냥 갑자기……그래……잘……근데 이렇게…… 일찍부터 어딜 갔니…… 없으니…… 얘기도 못하겠구나…… 그래 그럼…… 그래…… 그럼 잘 지내고……

 

 …… 이 가을 햇살……너 다 가져라!……아냐…… 나 우는 거 아냐……

 

 

2

나 지금 어떤 전화에도 대답할 수 없음은

가을 단풍잎들 내 입을 봉하고 있어서다

 

한 노스님은 한밤중 대웅전에 불붙은 것 봤지만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한다

묵언 수행 중이었으므로

불이 먼저인지 부처가 먼저인지

다만 불길들

인간의 담 타 넘도록 듣기만 했다 한다

 

나 또한 입을 타 넘어 담을 타 넘기를 바래

당분간 단풍잎들 입에서 뗄 수 없음이다

 

 

 

자서(自序)

김경미

 

한겨울밤 갑작스런 폭우에 온통 젖은 채 물과 어둠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선택의 여지 없이 들어선 시골 마을의 유일한 호텔 방 너무 비쌌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던 검은 폭우 최고급 호텔방

 

책상 위 오렌지색 램프 불빛 아래 놓인 메모지엔 이런 글귀가 인쇄되어 있었다

"위대한 소설과 예술 작품과 도발적인 시들은 모두 이곳에서 시작된다"

 

펜과 함께 놓여 있던 그 메모지, 그 램프, 그 방, 그 호텔, 그 마을, 그 밤

다음 날 아침엔 안개 속으로 흔적도 없이 말끔히 사라졌던......

 

맨정신인 날씨 속 파국을 각오하면 다시 찾아갈 수 있을0까......

 

 

 

자세와 방식

김경미

 

고양이들이 손발을 몸통 안에 접어 넣고 웅크린 자세는

식빵 굽는 자세라 한다

검정고양이는 너무 타버린 식빵 자세인 것 

 

미안함은 그녀가 생을 사랑하는 유일한 자세

멀리 떨어져 있는 건 그녀가 누군가를 얻는 유일한 방식

 

커튼과 모자와 벙어리장갑과 라일락 꽃잎을 자주 구입하는 건

방식일까 자세일까 

 

딸기들이 제 얼굴에 무수히 점을 찍는 동안

그녀는 취소와 후회를 점찍어왔다

귀에서 새로운 이목구비 꺼내는 방법을 

 

날마다 생각했다

귀에 상처가 났다 

 

- 당신은 면전에서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 누군가의 면전에 대고 한 적이 있는가

- 사람들은 리본처럼 꼬였는가 

 

달팽이들은 불안으로 산다

도둑이 집을 훔쳐갈까봐

등이 비에 젖을까봐 늘 집째 지고 다니지 

 

빗소리에 어울리는 눈동자는 어떤 것일까 

 

바닥으로 내려가는 중인지 위로 올라가는 중인지

소라와 나사는 똑같이 음흉해 

 

형광등은 재빠른 도망과 공격과 휴식에 유능하고

파도처럼 쌓이는 월요일들

흰 물거품 같은 일요일들

화살과 별의 거리와 시간의 모양을 주시하며

 

벽돌을 구워 빵같이 부드러운 인간이 되려고

그녀도 등에

소라와 나사와 커튼과 건전지와

일몰과 점박이나비와 발의 통증과

자세와 방식을 그 제일 아래쪽 틈에 괸 채

업고 다닌다

 

 

 

작은 사랑

김경미

 

개나리 작은 손목들

내 손목 같지? 잡아봐

무엇이 꼭 되어야 했던 날들

어두운 청춘을 업고 저리로 가고

햇빛들마다 손목 하나씩 내어

간장 종지만 한 개나리

맘에 드는 한 잎씩 꼭 집어내

저마다 사랑하러 가면 다인

 

올해 봄은 그렇게 오는가

 

 

 

저기 옛 애인들 지나간다

김경미

 

옛 애인 저기 있다

이쪽을 보지 않으려고 횡단보도에 선 채

파란 불이건만 건널 생각도 못한다

그토록 스폰지케이크 같던 표정

사랑을 잃은 만큼 옷핀처럼 단단히 여미고 있지만

그럴수록 영화관 맨 앞자리에 앉혀져

추억의 유리 파편들 온통 화면 밖으로 뿜겨지겠지

가는 길마다 공사 중, 한 얼굴이 길을 막겠지

오직 한 이목구비.

하지만 - 그대들

그래봤자란다

길을 온통 외면하도록

그러나 한시도 눈 떼지 못하도록

가슴 저미는 실루엣 비슷한 옷 색깔마다 이는 현기증

봄 햇빛 눈 시린 듯 손차양 쓰고

마주칠까 봐 마주치지 못할까 봐 두려운

어디서든 나타나는 신(神)

그토록 잊을 수 없는 옛애인은

영원한 청산가리, 독극물의 오직 한 애인은

 

돌아오지 않는 나,

일회의 나, 그 삶, 그 청춘,

나, 그 시간들, 나의

지나감들일 뿐

 

타인은 아무도 자신보다 일생을 그립지,

치명적이지, 않는 법이다

 

 

 

저녁

김경미

 

꿈의 배경이 또 어둡다.

 

먹지 씌워 베껴낸 저녁 어스름

삶의 한 마음은 언제나 거기에 가 있으니

 

왜 행복이 두려웠는지를 생각해보면

거기 쓸쓸함이 없어서였음을

라일락 꽃잎 같은 쓸쓸함에들에 좀 더 성실했어야

라일락나무 되었으리라

그 작은 꽃들에서 너무 많이 걸어 나와버린 길들

 

 

그 걸음에 대해 쓸쓸해하는 게 이젠

욕되지도 성급하지도 않은

또 저녁이다

 

 

 

전대미문(前代未聞)

김경미

 

그녀가 떠났다

그가 떠났다

 

독사진 속으로 구급차가 들어간다

눈동자가 벽에 가 부딪힌다

방석이 목을 틀어막는다

안개가 촛불에 제 옷자락을 갖다 댄다

우편배달부가 가방을 찢어버린다

가로수가 일제히 자동차 위로 쓰러진다

 

숨을 멈춰도 헤어지는 건

언제나

 

전대미문의 일정이다

 

 

 

조금씩 이상한 일들

김경미

 

1

연필깎이로 온 부엌일 다 하는 친구가 해준 저녁밥을 먹고 온다 성찬이다 칼의 크기는 제 등에 꽂힐 깊이의 크기이다

발 헛디디자 손가락 가운데가 찢어진다 두툼한 붕대위 분홍 고무장갑 끼고 세수하자 상처 덕분에 상처 이긴 듯 저 높은 붉은 칸나꽃처럼 기쁘다

일몰 전 가진 것 다 기차로 개조해야 한다 수평선이고 지평선이고 능선이고 구름이며 나무들의 소실점 그 끝까지 다 떠나야 한다며 서성이는 그림자를 알아본다

고생대 은행잎 화석사진과 내 위벽에 찍힌 당신의 말투와 기차와 물고기와 저녁의 흔적들 겹친다 시간이 찍어준 사진첩을 가끔 혀 너머로 당신 냄새가 올라온다

그 칸나와 기차와 은행잎들과 그 냄새, 허공이 베껴가지 않도록 입 꾹 다문다

 

 

2 - 저녁의 답장

 

2 - 1

생각도 늦고 시계도 늦었다 강의하러 뛰듯 걸으며 '시 창작 가는 길' 답장한다는 게 낡은 휴대폰 자음 하나 덩달아 뒤로 늦춰지면서 '시 창자 까는 길'로 간 모양이다 나날의 위선이 가시연꽃의 연못물이어서 비린 속어들 입도 안 댔는데 닳아빠진 손가락이 끝내 말썽이다

비바람 세찬 날 고속열차 차창에 가로로 부딪는 빗물들 꼭 정자 올챙이들이다, 어떤 생을 만들러 저토록 안간힘인가 목숨이란 치달리는 차창에 부딪쳐 얻는 몇억분의 일의 빗방울 아무나 얻는 답장도 아니건만 혹, 내 아버지인가, 앞을 막아볼 새도 없이 휙휙 써지는 나, 라는 차창의 빗물을 본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시계를 찼는데 잊고 다른 시계를 소매 끝에 덧차고 나간 날이,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비슷한 검정 구두를 짝짝이로 신고 나간 날들이 있다 선물 받은 그릇이 아무리 봐도 플라스틱인지 사기인지 성분 표시가 없다 하니 답장이 왔다 불속에 넣어봐

 

2 - 2

그 많은 날들 그렇게 불속에 집어넣고 그 잿가루 찍어 낡은 기차와 빗물과 시계와 손목과 그릇들에게 다시 쓰는 저녁의 답장들,

흰 봉투 가득한 목련나무가 수신인이다

 

 

3

3 - 1

밤이면 가끔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을 다시 읽는다

치자(治者)를 계속 치자꽃으로 읽는 건 흰꽃이 내는 노란 물감의 이치 간은 것

대론 누가 식목했는지 모를 마음의 통치자들 자욱해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3 - 2

단체버스, 늘 맨 뒷자리에 혼자 떨어져 앉는다

내 귀가 어색하고 허랑한 내 말을 좋아하지 않아

내 입과 좀 멀리 떨어져 앉으려는 것이다

 

3 - 3

무슨 말끝엔가 난 침울할 때가 좋아요, 내가 말했단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경전을 흉내 냈을 뿐인데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3 - 4

가끔씩 허공에 떠 있는 투명의 점토색 노루나 청색 달개비꽃이 보인다

손끝에 물을 묻혀 허공에 튕길 때마다 그들 목을 축여준 듯 나 조금씩 달라진다

 

3 - 5

해 지는 저녁이면 한쪽 어깨에서

크고 작은 못들이 가만히 빠져나간다

액자처럼 몸 기울어 물받이통 내려가는 물처럼 버려지는 것들

언제나 조금씩 기운 것들이 나를 지킨다

 

* '전도서' 7장 중에

 

 

4 - 입관실에서

사과에서 녹내 나던 저녁, 한 사람의 숨이 멎었다

 

멎고 보니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숱한 끈과 붕대와 마개로 돌아간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시신의 무엇이 두려워 저토록

묶고 감고 메우고 막는 것일까

마지막 두 발 하염없이 묶일 때

화장실에 달려가 가슴끈을 풀었다

 

창 너머 칸나꽃이 크고 붉은 동물 같았다

 

 

 

즐거운 이명

김경미

 

세상이 바삭바삭 나뭇잎을 뒤집어가며

햇빛도 굽고 생선도 달구고

사과도 파먹고 구름도 베어먹다가

 

가늘고 여린 방패로나마 귀도 막아주다가

 

주전자 부리로 찻물도 종지껏 따르다가

내친 김에 아주 음악이 되렵니다,

독수리같이 턱시도를 갖춰입기도 하다가

 

오늘 같은 밤엔가는

이 긴 전깃줄 위 줄지어 앉아

자신을 잃었던 게 아주 몹쓸 일이었다는 듯

참새처럼 발을 오므리다가

 

 

 

지구의 위기가 내 위기인가

김경미

  

지구가 내 이름을 아는가

날 좋아하는가

나 때문에 비 오는 날 잠 못 이룬 적이 있는가

 

날 환영했는가

날 쓰레기 취급하지 않았는가

  

내가 더 잘나야 하는가

더 잘해주어야 하는가

 

지구가 좋아한 사람은 따로 있지 않았던가

기준이 공정했던가

급하니 찾는가

 

삐뚜름히 서서 밤의 지구 위 별을 본다

별이라는 우산

폭우 쏟아질 때 씌워주던 긴 손목

아무에게도 할 수 없던 얘기

귀에 손을 모았다 덮었다 하며 들어주던

무한한 경청

 

왜 그러는가

별은 또 내게 왜 주는가

언제 무엇으로 다 갚으라고

무한대의 빚부터 안기우고 시작하는가

 

처음부터 위기에 묶어두는가

 

 

 

지나온 날짜들 너무 쓰라리고 갖고픈 날짜들 너무 먼

김경미

 

수첩 사고팝니다

 

손가락과 귀를 다친 수첩 오후 4시부터 환해지는 수첩 술 먹고 심야에 미친 듯이 전화하는 수첩 이틀 전에 따놓은 콜라를 마시는 수첩 겨울의 콘크리트 식당에서 떨어진 김밥 색깔의 수첩 머리 뜨겁게 감겨주는 미용사를 사랑하는 남자의 수첩 나뭇잎도 거울도 너덜너덜한 수첩 옆자리 수첩을 몰래 넘겨다보는 수첩

 

해변가 모래와 양털이라고 쓰인,

러시아 자작나무라고 쓰인,

쓸모없는 레몬빛 등불이라고 쓰인,

저녁노을의 건축학이라고 쓰인,

복권과 첫눈이라고 쓰인,

어젯밤의 심야 영화관이라고 쓰인.

책을 모르는 나무들과 별빛이라고 쓰인,

겉옷이 예쁜 표범과 치타라고 쓰인,

순식간에 잡혀 버둥대는 사슴이라고 쓰인

 

종이라는 얇은 피부

그 밑 맥박처럼 뛰는 미래의 날짜들

지나온 날짜들 너무 쓰라리고 갖고픈 날짜들 너무 멀었던

 

 

 

지리부도 책을 보며

김경미

 

장백산맥에서부터 한라산맥까지

쓰러진 잔가지들만 한데 모아

이 나라 아궁이에 불때 올리면

이 땅 구들장들마다

온통 쩔쩔 끌겠지

 

 

 

지옥에서 - 하늘의 절반

김경미

 

제발 버려다오

등치고 간 빼먹고 버려다오 제발

부디 침 뱉고 돌 던지며

싸늘히 돌아서다오

욕설과 구타를 일삼으며

갈기갈기 옷을 찢어

얼어붙은 거리에 내쫓고

입속과 위에 든 것마저도

빼앗아버려다오

모함과 굴욕과 처참

지옥 바닥에서

이를 악물고 피를 흘리며

그러나 치켜든 얼굴로

천천히 한 발자욱씩 천천히

네 심장을 겨누며

천천히 올라갈 것이니

 

 

 

진주 - 금서

김경미

 

진주가 가득하다 설거지통에 진주가 가득해

아침 진주 점심 진주 진주만 그득하니 그 진주灣(만)

저무는 기습에

급히 책 내려놓아야 한다 북유럽 하늘이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

차창에선들 뛰어내려 새빨간 포물선의 담뱃불처럼

종이 찢듯이 순식간에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저쪽으로

 

고등어가 상할 시간

두부에 붉은 꽃 번질 시간

오이들 아흔 살 버짐 필 시간

강 폭우 속 비단옷과 꽃 우산 풀죽으로 녹아내려도

등뼈만이라도 먼저 도착해야 하네

늦게 따라온 팔다리에

새하얀 소금들 저녁연기처럼 피어날 때

 

진주는 소금이 만드는 것 젖은 머리카락 천장까지 올려붙이고

손끝에서 진주가 방울방울 떨어지고

겨드랑이에 진주가 방울방울 맺히고

 

배고픈 가족들 접시마다

진주알 수북히 퍼 놔주니 난감한 표정들

 

책만 안 읽으면 여자는 살 것 같다

 

 

 

질(質) - 개작(改作)

김경미

 

어머니는, 옷은 떨어진 걸 입어도 구두만큼은 비싼 걸 신어야 한다

아버지는, 소고기는 몰라도 돼지고기만큼은 최고 비싼 질을 먹어야 한다

그렇다 화장하다 만 듯 사는 친구는, 생리대만은 최고급이다

먹는 입 싸도 칫솔에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누구는 귀를 잘라 팔지언정 음악만은 기어이 좋은 걸 쓴다.

다들 세상의 단 하나쯤은 질을 헤아리니

그렇다 라일락꽃들의 불립문자 탁발의 봄밤 혹은 청색 다도해의 저녁 일몰이야말로 아니다

연애야말로 삼각관계야말로 진정 질이 전부이다

고난이야말로 매혹의 우단 벨벳 검은 미망인 기품으로 잘 지어 입혀야 한다

몸이야말로 시계를 꺼낼 수 없는 곳

영혼이든가? 기도야말로 그렇다!

품종이 좋은 하늘을 써야 한다

관건은, 가장 비싼 것 하나쯤엔 서슴없이 값을 치루니 귀함이 가장 싼 셈,

숨만큼은 정말 제대로 비싼 값을 치루는 것

다 쓴 이쑤시개처럼 봄 햇빛들 쏟아지는 오후

싸구려 플라스틱 용품들 한없이 늘어놓아진 봄 길에

값이여 말 자꾸 많이 하지 말아라

 

 

 

차 마시는 동안

김경미

 

그런 그 순간

연못이 수련꽃을 몇 등분의 사과 조각처럼 펼쳐놓는 순간

지나가던 전철 속 아저씨가 자리도 없는 자리에

아줌마 같은 엉덩이부터 끼워넣는 순간

검은 미역 같은 폭우가 남쪽 뭍에 상륙한 순간

한 명의 처녀가 두 사람으로 증가하는 순간

 

한순간은 늘 같은 순간의 매복이거나 보복이어서

 

찻집의 두세 시간 동안 평소보다 더 많이 웃었겠죠

그 방심을 틈타 문밖의 순간이

재빨리 빈 자동차를 밀었겠죠

뜨거운 찻물을 무릎에 쏟거나 천장의 등이 흔들리는

너무 쉬운 경고를 바랜 건 아니었습니다

쏜살같은 뒷걸음질

직감도 막을 재간이 있었을라구요

 

나뭇잎들이 흙탕물처럼 사방으로 튄 순간

뿌리엔 미동도 없던 순간

날아오는 검(劍)을 손바닥으로 잡은 검객의 순간

아니었다면

급커브 4차선 도로 위에 파국이 낭자했을 순간

 

몸을 떨며 생각했겠죠 웃음의 처벌 방식에 대해

또는 나는 대체 왜 한순간도 가벼우면 안 되는가

 

불안이 얼마나 많은 징조를 귀띔했는가

잊은 적 없지만

저 나무

이 순간을 기다려 오랫동안

몸집 키워왔음을

 

보지 못한 현장이 눈동자 속 선명히 찍힌 순간

 

새들이 제 몸보다 큰 솜뭉치를 급히 물어오는 순간

 

 

 

참패 시대

김경미

 

강한 팀에겐 당연히 지고

약한 팀에게는 방심하다 지고

맞수에게는 심판 때문에 지고

어쩌다 간신히 이기면

스포츠신문이 쉬는 날이라 보도가 안 된다

 

인생을 겨누어 용케 먼저 방아쇠를 당긴 날은

총구를 빨대처럼 제 입에 문, 혹은

지푸라기가 장전된 총

그런 유머 어린 불운과 박복이

없는 라일락 냄새가

입덧처럼 그리운 겨울

흰 눈이나 노을이 되지 못한 먼지들

이마 위 저녁 어스름의 흔적을 가진 이들

부끄럼을 잘 타는 내성적인 남자들이

입덧처럼 그리운

겨울, 없는 라일락 냄새가 그리운

 

 

 

천동설

김경미

 

낮 동안 지구는 네모난 거다

가장자리에는 낭떠러지 절벽이 있어

가다 보면 아득히 떨어지기도 하는 거다

눈물도 직사각형이어서

흘릴수록 손등 붉어지다가

 

그 네모진 동백꽃

  

구부려 흐린 발을 씻을 때 비로소

등을 따라 가장자리 둥그러지고

손등의 붉은 상처도 백열전구 쥔 듯 환해지고

수그린 이마를 중심으로 별자리도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하는 것

침을 뱉을 듯이

하루를 버틴 발을 씻으라고

저녁이면 비로소

지구는

 

저무는 세숫대야에 띄워진 수련처럼 둥글어지는 것

흔들리는 부레옥잠처럼

물속, 바닥 없이도 뿌리를 내리는 것

 

 

 

청춘

김경미

 

없었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집 앞에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린 남자가

제게도 있었답니다

데이트 끝내고 집에 바래다주면

집으로 들어간 척 옷 갈아입고

다른 남자 만나러 간 일이 제게도

있었답니다

죽어 버리겠다고 한 남자도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은 남자도

믿기지 않겠지만

 

 

 

첫눈

김경미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린 어제가 쓰리다

줄곧 평지만 보일 때 다리가 가장 아팠다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다

 

 

 

청춘이 시킨 일이다

김경미

 

낯선 읍내를 찾아간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시외버스가 시키는 일이다

 

철물점의 싸리 빗자루가 사고 싶다 고무호스도 사서

꼭 물벼락을 뿜어 주고픈 자가 있다

리어카 위 가득 쌓인 붉은 육고기들의 피가 흘러

옆집 화원의 장미꽃을 피운다 그렇게

서로를 만들고 짓는 것도 청춘이 시켰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시계를 찼던 그때

하늘에 일 년 내내 뜯어 먹고도 남을 달력이 가득했던 그때

모든 게 푸성귀 색깔이었던 그때

 

구름을 뜯어먹으며 스물세 살이 가고

구름 아래 속만 매웠던 스물다섯 살도 가라고 청춘이 시켰다

기차가 시켰다 서른한 살도 청춘이 보내버리고

서른세 살도 보내버리니 다 청춘이 시킨 짓이었다

 

어느덧 옷마다 모조리 불 꺼진 양품점 진열장 앞

마네킹들이 물끄러미 바깥의 감정들을 구경한다

다투고 다방 앞 계단에 쪼그려 앉은 감정,

기차를 끌고 지나가는 감정, 한쪽 눈과 발목을 잃은 감정,

공중전화 수화기로 목을 감는 감정,

그 전화 끊기며 내 청춘이 끝났다는 것도 청춘의 짓이다

 

아직도 얼른 나가보라고 지금도 청춘이 시킨다

지금이라도 줄을 풀라고

기차와 시외버스와 밤과 공중전화가 시킨다 여전히 청춘을 시킨다

 

 

 

체리 블러썸의 계절

김경미

  

제라늄 레몬꽃 체리 블러썸-매운 일을 당해 속이 쓰릴 때면 항상 서양을 생각하네 멀수록 먼 곳에는 무조건 오렌지빛 램프와 은촛대가 있고 라벤더가 있고 프로방스가 있고 부다페스트가 있다고 내 사대주의는

고기나 찌개집엘 우르르 몰려갈 때 중요한 건 옆자리에 누가 앉는가 누구 옆자리에 앉는가 그건 결혼 옆자리보다 어렵고 중요하네 피하고픈 피할 수 없는 자리의 숙명

더 먼 흑인들 나라에는 가지 않네 나만큼 어두우니까 '나'의 반대말은 '너'가 아닌 흰빛의 데이지 레몬꽃 체리 블러썸, 발음해 볼 때마다 내 사대주의가 어둔 낭하에 불을 켜들고 나타나 기뻐하네

그러므로 서양 아닌 것으로는 아무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 체리 블러썸의 계절은 가장 쓰라린 계절. 옆자리에도 맞은 자리에도 사람들 북적이는데 사람이 없어 서양까지 가서야 눈물을 쏟을 수 있는 날 프로방스, 라벤더, 부다페스트, 레몬꽃을 불러보는, 체리 블러썸, 체리 블러썸, 끝없이 반복하며 체리꽃의 계절로 울며 건너가는 내 서구식 사대주의의 계절.

 

 

 

초승달

김경미

 

얇고 긴 입술 하나로

온 밤하늘 다 물고 가는

물고기 한 마리

 

외뿔 하나에

온몸 다 끌려가는 검은 코뿔소 한 마리

 

가다가 잠시 멈춰 서는 검정고양이

입에 물린

타악기처럼 파닥이는,

 

검정 그물

 

나도 당신이란 세계를

그렇게 다 물어 가고 싶다

 

 

 

출분

김경미

 

몸으로 살아가는 일도 꽃 피듯 아름다운 일인 줄 알았어요

저녁이면 깊이 파인 원색 귀걸이 흔들며 사랑하는

화툿빛 불빛이 슬퍼서 아주 멋있는 줄 알았어요

분꽃만한 손목을 가졌을 때부터 솔직히 저 언니처럼

예쁜 슬픈 불빛의 사연을 모아야지 아롱거렸지요

 

그녀의 이름은 여진. 이쁘지도 않은 여진.

아는 것만 많으려 해 더욱 골치인 여진.

아무 데서도 써주지 않는 여진.

쓰이고 싶지도 않은 여진.

세상, 언니의 붉은 입술 빛깔이 아니었네

채석장 등짐에도 못 가고 햇빛 앞에서나 옹녀처럼 앉았다 발소리가 싫은 여진.

겨울 신발 살 돈도 떨어지면 여진.

접시만 보면 떨어뜨리는데 희망만 보면 엎지르는데

더 이상 어디로 떨어질까 여진.

자유가 무서워 울게 될까 그토록 원하던 자유.

나무들에게 가정부가 필요하다면 아주 충실할 수 있는 여진.

아주 작은 잎사귀 한 전만 받아 담배처럼 살았으면 하는 여진.

그녀 여진. 사람들 피하여 온전할까.

 

 

 

춤추지 못하던 여인

김경미

 

대양을 건너 숲을 지나 온 푸른 사내가

춤추지 못하는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훈훈한 입김으로 굳은 얼굴에 스며들거나

거칠게 흔들어도 꼼짝도 않는 그녀

견고한 슬픔에 매혹된 사내가   

겹겹으로 껴입은 그녀를 벗겨냅니다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찡그린 그녀 주위에

무거운 상처의 옷들이 허물처럼 쌓여갑니다

실비가 내리는 대지 위

거침없는 육체가 움직입니다

검고 긴 머리칼이 푸른 동공 안에서 춤을 춥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눈부신 뼈의 질서

단 한 번도 춤 춰 본 적 없던 무거운 미이라,

굳어가던 여인이 바람의 리듬을 탑니다

아 - 아 - 아 -

가쁜 숨을 쉴 때마다 대지의 짐승과 풀들이 노래합니다

춤추는 여인은 가볍고, 푸른 사내는 더 멀리 날아갑니다

무거운 내 몸 깊은 곳에는 나도 모르는 여인이 살고 있습니다

큰바람이 불어와도 피하지 않는

춤추지 못하던 여인이……

 

 

 

취급이라면

김경미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타인, 타인들

김경미

 

그대들 내 곁을 스쳐갈 때마다 손목에

꽃이 돋고 돋아 가지를 뻗고 무성한

나뭇잎들 마음을 뒤덮어 온통 그늘을 만들고

그 무성한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르겠는

마음 털어 겨울 눈 내리는 길가에 홀로 오래도록

서 있으면 전신주처럼 속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부질없다고 대웅전 앞마당을

서성이던 기억밖에 더는 무엇이 있을 건가

몸 이룬 흰 모래들 벚꽃 잎처럼 화르르

털어내는 바람이 있을 뿐 손목의 꽃이며

마음 그늘도 다만 흩날림일 뿐 모든 생의

유일한 흔적은 오직

혼자일 뿐이라는 것

 

 

 

탄광과 라벤더

김경미

 

보라색 라벤더꽃은 본 적도 없던 시절

검은색의 시절

나는 젊었고 꽤 순했고 마음이 자주 아팠고

지하도 계단을 동정했고 예술과 불행을 믿었다

 

검정 속에는 늘 석탄 같은 불꽃이 가득했다

검정에 무엇이든 다 있는 게 틀림없었다

보라색도 좋지만 탄광 속에서 캘 수 있는 건

검은색뿐이었고 성냥불에도 즉시 폭발하던

무지갯빛의 검은색뿐이었는데

 

이제 더는 못하겠다 나는 완전히 틀려먹었다

탄광이 비었을까 더는 지하 갱도로

내려가지 않는다 여기 어둠을 발견했다고 기뻐 소리치지

않는다 그토록 자주 소리치던 검정이었는데

 

정말이지 더는 못하겠다 낯선 라벤더밭에서 머리를 수그린다

너무 얕봤다 처음부터

나를 망치는 건 항상 나다 낯선 보라색 들판들

숙소에 돌아와 모조리 토한다

혀와 목 저 안쪽이 보라색일 거다

 

라벤더꽃은 본 적도 없던 시절

나는 젊었고 꽤 순했고 마음이 자주 아팠고

지하도 계단을 동정했고 예술과 불행을 믿었다

검정 속에는 석탄 같은 불꽃이 가득했다

검은색만이 모든 걸 가진 게 틀림없었다

보라색도 좋지만 탄광 속에서 캘 수 있는 건

검은색뿐이었고

불꽃 없는 성냥에도 즉시 폭팔하던 무지갯빛의 검은색뿐이었는데

 

더는 못 하겠다

더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손을 뗀다

 

 

 

통화

김경미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좀 덜 슬플 수 있을까

생각해요......"

 

오래전 은동전 같던 어느 가을날의 전화.

너무 좋아서 전화기 째

아삭아삭 가을 사과처럼 베어먹고 싶던.

그 설운 한마디.

어깨 위로 황금빛 은행잎들 돋아오르고.

그 저무는 잎들에 어깨 집혀 생이라는 밀교.

밤의 어디든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던.

돌아와 찬 이슬 털며 가을밤.

나도 자주 잠이 오지 않았었다.

 

 

틈에서

김경미

 

내 주먹 쓸모없었음을

은빛 재크나이프같이 늘 한발 더 빠르게 빠를 뿐 귀염성 없던

절망들. 나는, 안다, 화장품 바른 내 얼굴 또한

팔공년의 나라가

가두겠다, 나는 한 적 없던

가슴속 잔 지푸라기 많아, 너무

숨어도 머리카락 다 들켰겠지, 남들 것까지, 안다.

 

그물창 대신 커튼이 예쁜 버스들

가루비누같이 부푼 승객들의 머리

안다, 나는

구공년의 나라가

커튼 속 예쁜 집들이 손님 명단, 내게는 초대 없는, 저

칫솔처럼 길게 벌거벗어 누운 길들로

저 이빨대신 신발을 닦아도 즐거운 칫솔들의

새 희망, 비눗방울들의 터질 듯한 터질 듯함, 안다

 

내 복잡한 슬픔의 방식 또한 쓸모없음을, 환멸 또한,

가슴 속 지푸라기들이

 

넌, 갈 연대도 없지, 어디에서도 다 들켜, 들키니

막히니

눈치채는, 자꾸

 

 

 

편력

김경미

 

 

파꽃이 피었던가요 국화꽃 매워 울었던가요

맨발로 저녁 강물 위를 한없이 걸었던가요

편지들 모아 양지바르게 무덤을 세웠던가요

눈물이 바다로 가자던가요

 

갈대 소리 나는 흐르는 기찻길 따라 너무 먼 곳까지 갔던가요

헌 옷처럼 낡아가는 시간들을 가며 가며 적. 멸. 에 당도했던가요

 

깡그리 불타 사라지는 것들 없는 것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던가요

한겨울의 적멸보궁,

마침내 상복처럼 흰 눈발 쏟아지고 가로등도 무너지고

신발이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마침내 그리운 입적.

 

그 후.

비로소 그 어떤 다른 목숨이 생기던가요

스산한 겨울나무들이

푸르른 형광빛을 내던가요

비로소 무엇도 아무것도 아니던가요

 

아무것도 아니던가요

 

 

 

표절

김경미

 

우리는 매일 표절 시비를 벌인다

네 하루가 왜 나와 비슷하냐

내 인생이

네 사랑은

그렇고 그런 얘기들

 

밤 전철에서 열 사람이 연이어 옆 사람

하품을

표절한다

 

 

 

피아노 소리

김경미

 

내 머릿속으로는 늘 쾅! 하고 놀람 공포 충격의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두 손으로 한꺼번에 모든 건반을 누르는 쾅! 내가 속았다 쾅! 실패했다 쾅쾅! 너는 못났다 콰콰쾅! 끝장이다 콰콰쾅! 네가 싫다 쾅 콰콰쾅!

이걸 막느라 한사코 청춘을 다 바쳤다 누가 피아노 앞에 앉지 못하도록 누구도 피아노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내 앞에서 피,자도 얘기하지 못하도록 멀리멀리 떨어져서

 

 

 

하이힐

김경미

 

운동화가 당연할 때도 하이힐을 샀다

산에 놀러 갈 때도 뾰족한 입술처럼 내밀고

사회의 뒤통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기 시작했을 때도

빨간 하이힐,

여전히 못 버리고 청색 유리구두 더 짙게 또 한 켤레

내 마음을 누가 볼까, 들킬까 겁났던

내 마음을 누가 알까, 외로워 섭섭했던

내 마음을 누가, 나도 믿을 수 없었던, 운동화 실은

신고 싶었네

마음을 하이힐 속에 팥쥐처럼 욱여넣고

 

교활하려는 뜻은 아니었어, 진심이

둘 이상이었을 뿐, 마음은 프리즘 같은 것, 기울기가

내는, 한 개로 이름 그을 수 없는 다색의

뒤섞임, 결침 같은 것

그 안 어딘가에서 단식 한번 안하고 통과한 상처.

껍질 얇은 알전구 속, 끊어진 텅스텐처럼

흔들면 달그락, 달그락 돌아다니는데

또 진노랑 하이힐을

 

고백컨대

밖으로 무얼 신든 남은 것은

마음 안을, 뒤바꿔가며, 송곳처럼

압핀처럼

 

 

 

한낮, 대취하다

김경미

 

아침부터 거친 푸성귀로 일어나는 슬픔들

벌써 할말 아무것도 없는 하루 어제가

가지 않고 섰는 듯 왜 나는 상처에 더 많이 할애되는 것만

같은가 아침부터 골목 끝에 이른 듯 개들 돌아나오고

 

광화문 식당의 점심약속 어색함 지우려 서둘러

낮술들을 마시다 한 남자가 슬프다 했다 흰 치자꽃 대접에

가득한 햇빛이 목을 뜨겁게 하고 견딜 수 없음으로

견디자느니 등 뒤의 그리움이 눈앞의 들소떼 되는 선명함

슬픔 들리지 않은 사람은 결코 믿지 않으니

인류는 이미 절멸하고 없다고 넌 누구냐

맹렬히 환한 한낮, 마침내 발 없는 약속들 마음을 떠나고

기차가 마당으로 해바라기며 금잔화 몰아오고

잠시 나부끼는 사이 세상이 기차를 태우고 가고

한순간 빈 마당의 이치가 등빛처럼 환해도

무어라 한마디인들 천기누설할 수 없는 한낮

손목 끊어지도록 몇천 년 전의 하루가 가지 않고

오늘을 바꿔치는 듯 없는 손목 끊어지도록

슬픔을 붙들고

 

 

 

한여름의 과대망상

김경미

 

그 섬세한 포크를 갖고도

이 몸 하나 꼭 찍어가질 못하다니

번갯불들은 도대체 다 뭐하나

죄 없는 콩들 위만 헛누르니, 미끄러지기나 하지

 

착한 나는 자꾸 안타까워진다

여기라니까 또 그냥 가네 병신같이!

세상의 번개들, 다 번개나 맞아라

 

나 하나 벌주면 지구가 다 화평할 텐데

저 착한 하늘이

좋은 귀감

나를 놓치다니

 

 

 

함박눈

김경미

 

난분분, 난분분한 난봉이다!

설탕 봉지 같은 애인들을

그 달착지근한 연서들을 말끔히 말소 중인, 중인 거다!

흰 칫솔질

비누 거품처럼 펑펑 낯을 씻고 새 세상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거다!

 

아아 그래봤자

도둑년의 손 같은 세월

아무것도 훔치지 못한 채

더러운 누명만 쓰는 게

사랑인 것을!

 

 

 

해명

김경미

 

의사의 처방은 항상 속을 따뜻이 하라는 것이다

 

전기담요를 먹을까요

달걀 비린내 나는 뜨건 백열등이라도 먹을까요

장미무늬 양초와 끓어넘치는 주전자를 함께 먹거나

홧홧한 박하나 겨자를 얹으면 좀더 빠를까요

손 닿지 않는 그 안을 어찌 뜨겁게 달굴까요

 

차라리 개미를 믿지, 개미 지나간 길의 온기를 믿지

사람이건 꽃이건 비단견직물처럼 매끄러워

미덥지 않았다

 

책상이나 서랍만이 더러 눈물 보여주었다

 

저녁 불빛들로 들판의 겨울 한낮들 덥혀질 때마다

 

실은 얼마나 따뜻하고 싶었는지

끝내 말할 수 없었다

 

 

 

해 진다 어디에나

김경미

 

저녁 해 진다 어디에나 등불 켜지는 것 아니다

라일락나무 밑

수없는 누더기의 밤을 거치고도

세상 어디에도 저녁 등불 한점 켜지지 않고

 

발뒤꿈치 같은 바닥이다 찾아간 남쪽 다도해의

밤들도 끝내 별빛 한점 풀지 않고

기러기 한점 풀지 않는

 

해 진다 어디에나 불빛 돋는 것 아니어서

 

저 먼 구두수선소 같은 인가의 소금빛 불빛들이

끝내 기적 같기만 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불에 손을 넣듯 라일락 누더기 밑으로 돌아가야 하는

저녁이 있다

 

 

 

해 질 녘

김경미

 

봄 저녁강에 진달래밭들 온통 쓸어모아다 불질렀다

흰 백지천지 끝없이 말아쥔 구백구십 칸 저녁 구름들에까지

천 그루 그 산불 다 옮겨붙었다

 

거기 적홍빛 문서창고 아래, 심정은 또 쑥밭이다

코끼리처럼 펄럭대는 내상에의 치정

저 붉은 페인트통, 함부로 몸에 옮겨 불붙는 진흙불바다 건너

가장 멀리 도망적멸할 수 있을까

 

세상에 정 주고 저물녘, 마음 허물어지지 않은 날

하루도 없었으니

 

 

 

호흡 곤란

김경미

 

눈 속으로 수백 개의 눈동자 수백 개의 손발

수백 개의 심장 들어오는 소리

귓속으로 수천수만 머리카락 몰려오는 소리

코로 색깔들이 검게 혹은 빨갛게 점점이

혹은 휙휙 뿌연 포플러 나뭇잎같이

둥둥 귀 끝마다 귀 끝마다 귀 끝마다

 

풍선이 된 호흡들이 부르는

 

나비를 나비를 나비를

 

끝까지 올라가서

모든 구름 구름이 되어

빗속에 나비 검정 나비들 쏟으며

 

갚기를

받기를

 

외나무 외나무다리에서

 

 

 

홍염살

김경미

 

1

또 애인을 바꿨다, 천하 없다, 이번에는 출현 정지다,

 

실은 소름처럼, 온몸에 돋았다 갔는데, 차가웠는데,

가기만 했는데,

서둘러 등을 챙겨서, 그들이

 

가기만 했는데, 억울해, 세월은 하나도 안 가고, 작

두 같은 길, 요리사처럼

자르며, 그들이, 울면 더 예쁘다면서, 자꾸

 

 

2

쉴 새 없이 줄기를 떠나려는 잎새

가을이면 저절로 떨어질 텐데

가슴에 돌을 입까지 채워도

맨드라미, 새빨간 점박이들의 허기 셀 수 없는

 

너 화냥쟁이라면서?

 

 

 

화병(花甁)

김경미

 

아무것도 담지 못한 빈 몸뚱이

한때, 수 없이 스쳐 간 꽃들

가시에 찔려도 황홀했던

그윽한 향기에 도취됐던

이름도 모를 풀꽃들의 속삭임으로 밤을 지새웠던

그런 날도 있었다

 

 

 

화상

김경미

 

새 도마를 샀다, 토끼 무늬들이 피크닉을 가고 있다

도마일 뿐이지만 내 음식 밑에서 언제고

그들의 신발과 피크닉 가방이 나뒹군다

라일락무늬 나무 받침에 뜨거운 냄비를 얹다가

라일락꽃들 비명에 냄비를 놓친 적도 있다

문 열린 것들과 닫힌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간다

 

자운영 꽃잎의 물방울들 나에게 더 잘 전해지듯이

나 그대에게 더 잘 전해지지 않듯이

 

 

 

회귀

김경미

 

누가 또 어디쯤서 나를 저버리나 보다

 

마음속 햇빛 많은 나뭇잎들 폭설처럼

떨어져 내리더니

수박향내 애틋하던 저녁 산책길이 돌변했다

이번엔 남의 집 대문 앞이 아니다

누드화 같은 이 바다로 바다로 누가 또 날 버리나 보다

잡을 것 오직 은박지 같은 물뿐이다

소리치는 것도 부끄럽다 망망대해 혼자뿐인데

누군가 나타나도 원수가 될 것이다 기다림 간절했으므로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이렇게는 아니었다 이렇게는 아니었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하라고

현생의 나를 만난 내 생에 사과라도 남기고 싶었으나

물천장 위 비바람에 섞여 내리는 주황빛 저녁이

성당의 색유리 가득한 성가 같아

붉은 점박이 나리꽃처럼 걸핏하면 끼얹어지는 이 침수

이 상실감을,

하긴 나는 사랑하던가 떠나고 없는 고요할 물속

묵묵함을 내심 더 바랬던가 늘 그런 식이었던가

 

 

 

횡단

김경미

 

횡단 열차 기다리는 저녁

 

일 분 전까지 잘 쓰던 볼펜이 갑자기 반으로 부러지고

트렁크 지퍼 한쪽이 갑자기 안 열린다

 

다음엔 내 목이 부러질 차례겠다

낯선 곳에서 갑자기 저절로

 

불길(不吉)함을 가장 빨리 간파하고 두려워하는 능력 말고는

가진 게 없으니

 

포도주 코르크 마개가 부서져 병 속으로 들어가 버린 듯

자줏빛 하늘 가득 부유하는 별들

 

횡단할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병속 이물질처럼 횡단보도에 선 채

 

마찬가지라고

 

누워서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천장에 코가 닿는

3등석 이층침대

사과 반쪽도 떠다니고 낯선 글자들이 그려진 초콜릿과

금지된 술 냄새도 떠다니는 복도

 

죽은 듯 빠져나온 침대 밖 발바닥이나 머리를 보며

 

마지막 줄을 긋듯 당신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동안 과분했던 애정에는 한쪽만 열리는 트렁크나마 남깁니다

무시하던 이들에겐 복수를 남기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창밖 검은 자작나무들 보이지 않게 부러지거나 타오르는 소리

그래도 불길을 참고 밤내 횡단하는 게 어딥니까

서커스단 소녀나 원숭이도 아닌데

 

결국은 목을 내놓고 양순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겨울 난로 가장 가까이 앉은 덕분에

외투 한쪽 약간 그을렸지만 제일 따뜻했던 여학생처럼

 

그렇게 조금 울고 나니

창밖 자작나무들 어느덧 새하얗게 돌아오고

강물도 횡단보도처럼 다시 흐르는군요

 

미리 간파한 두려움 덕분일지

혹은 짧은 꿈속에서 잠깐 만난 당신 덕분일지요

 

 

 

흉터

김경미

 

하루 종일 사진 필름처럼 세상 어둡고

몸 몹시 아프다

마음 아픈 것보다는 과분하지만

겨드랑이 체온계가 초콜릿처럼 녹아내리고

온 몸 혀처럼 붉어져

가는 봄비 따라 눈빛 자꾸 멀어진다 지금은

아침인가 저녁인가 나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빈 옷처럼 겨우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본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온갖 꽃들이 다 제 몸을 뚫고 나와 눈부시다

나무들은 그렇게 제 흉터로 꽃을

내지 제 이름을 만들지

내 안의 무엇 꽃이 되고파 온몸을 가득

이렇게 못질 해대는가

쏟아지는 빗속에 선

초록 잎들이며 단층집 붉은 지붕들이며

비 맞을수록 한층 눈부신 그들에

불쑥 눈물이 솟는다 나 아직 멀었다

아직 멀었다

 

 

 

흑앵

김경미

 

크고 위대한 일을 해낼 듯한 하루이므로

 

화분에 물 준 것을 오늘의 운동이라 친다

저 먼 사바나 초원에서 온 비와 알래스카를 닮은

흰 구름 떼를

오늘의 관광이라 친다

뿌리 질긴 성격을 머리카락처럼 아주 조금 다듬었음을

오늘의 건축이라 친다

 

젖은 우산 냄새를 청춘이라 치고 떠나왔음을

해마다 한 겹씩 둥그런 필름통 감는 나무들이

찍어두었을 그 사진들 이제 와 없애려 흑백의 나뭇잎들

한 장씩 치마처럼 들춰보는 눅눅한 추억을

오늘의 범죄라 친다

다 없애고도 여전히 산뜻해지지 않은 해와 달을

오늘의 감옥이라 친다

  

노란 무늬 붓꽃을 노랑붓꽃이라 칠 수는 없어도

 

천남성을 별이라 칠 수는 없어도

 

오래 울고 난 눈을 검정 버찌라 칠 수는 없어도

 

나뭇잎 속 스물두 살의 젖은 우산을 종일 다시 펴보는

때늦은 후회를

오늘의 위대함이라 치련다   

 

 

 

희망

김경미

 

태양과 달이 여전히 약혼반지처럼 날 맴도는지

별빛들 한낮에도 줄곧 내게 눈길 주는지

한겨울의 나무들 차마 날아가 버리지 못하고 못하고

흰 눈 내리는 강물 위를 걸어 걸어

우편배달부가 매일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지

새벽 배달 우유 같은 편지를 들고

 

하릴없는 망상으로 꽃에 취해보네 마음을 키워보네

아이스크림 스푼이 되고 싶다

어둠을 떠낸 자리마다 흰 달걀빛 희망을 낳고

그 유리알들

주로 손 놓쳐 깨곤 한다마는

손바닥 오래 쥐고 있으면

병아리 깃털들 노랗게 날아오르리라고

이젠 나도 생에 잔뜩 설레어보고 싶으니

 

 

 

1분

김경미

 

대형버스가 교정에서 한 여학생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한 여학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서관 앞 비명 소리가 대형버스보다 더 컸다

버스가 섰지만 이미 늦었다

늦은 건 1분보다 길었을 수도 있지만

1분보다 짧았을 수도 있다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점심이 귀찮아서

서가 사이에서 몰래 초콜릿을 먹었다

긴 여행을 위해 열흘치 일을 앞당겨 해주고

돌아와 개명 신청으로 새사람이 될 생각이었다

 

스물두 살이거나 스물셋, 1분 전까지 거기 있었던

여학생 집으로 전화가 가겠지 따님이

목숨을 잃었어요라고는

차마 말하지 않았겠지 딸의 엄마는 아버지는

더 오래 살았겠지만 시간과 목숨을

이해할 수 있을까 1분 만에

갑자기 영영 사라져버리는 시간과 목숨을

 

나도 1분 만에 영영 사라질 수 있었는데

스물한 살이거나 서른두 살 혹은 어제라도

1분마다 1초마다 없어질 수 있었던 1분 1초마다

기적적으로 남겨진 건 남겨져 몇십 년이나

기적이 당연이 된 건

기적이 아니라 우연일까 우연은 누구를 차별하고

무슨 법칙으로 작동되는가

1분 만에 다 읽어버린 장편소설이라니

1분 만에 다 끝난 이십대라니

5층짜리 도서관의 지식도 아무런 확증도

증명도 제공 못 할 1분의 저쪽과 이쪽

 

겨우 1분의 이쪽과 저쪽인데

그 1분까지 스물몇 해를 걸어왔는데 저쪽으로

단 1분 만에

오직 단 한 번의 1분으로 그걸 바꿔치다니

같은 이름을 갖고 그렇게 다른 짓이라니

 

순식간에 영정 속으로 들어가 버린 구두와 가방과

수첩과 수첩 속 내일모레의 약속과 어제의 기분과

10년 후의 1분 같을 아이와 목주름과 바뀐 유행과

구두 굽들---

 

어떤 1분에도 항의도 못 할 결정만 있다니

결정에 주어가 없다니

저쪽과는 늘 단 1분이 조건의 다라니

 

손에서 녹은 허무가 1분을 못 참고

 

서가 사이에서 나는 펼쳐 든 책 사이에다

기어기 초콜릿을 토했다

 

 

 

7월, 넝쿨장미, 사랑

김경미

 

녹색 나뭇잎들마다 마악 투우 끝낸 붉은 소들 여기저기 주저앉아 있다

햇빛은 어제보다 각진 은박지들 쏟고

검은 숨 기차처럼 들락이니

나팔꽃 피는 소읍에 가 어깨보다 낮은 담벽에 들리라

서해 저녁 하늘에 젖은 이마 영영 맡기리라

 

했는데,

 

불났다

너무 뜨거워

 

나도 내 가까이

못 간다

 

 

 

14층 베란다의 시

김경미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자신에게 낯빛이 변할 때가

 

구두와 슬리퍼 양말까지 모두 14층 베란다 아래로

저 대신 밀어 떨어뜨리고플 때가

다신 영영 안 볼 실망처럼

 

생각해 보면 전화처럼 나만 듣던 세상의 노래 있었네

그때, 전화가 들려주던 노래-- 전화 기다리지 마라

지독히 순하여 벼락처럼 잠깐 아름다웠던 때가 있었던가

있었다면 그때가 좋았지 쓰라렸겠지만 검정구두약처럼

반질대던 사랑의 등에 침이라도 뱉었다면 좋았지

 

가서 귓볼을 뚫었다 당신들 마음을 뚫을 수 없으니

가끔씩 그럴 때가 있지

가서 납작해진 얼굴을 흙 털고 거둬와

조용히 과일 깎아 주거나 경전 읽어 주고플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