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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빨간 장미(Obsession)

이별의 빨간 장미(Obsession)

Charlotte Lamb

 

1

템즈강의 먼지 섞인 눈이 녹아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면, 런던 시민들은 본격적으로 봄의 내방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직 하늘에는 두꺼운 구름이 덮여 태양은 겨우 그 틈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을 뿐이다. 강변의 길을 따라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는 니콜라의 마음도 오늘아침의 하늘처럼 흐려 있었다.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도, 주말에 걸린 감기 때문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동생의 편지가 신경 쓰였다.

'일주일 정도 머무르게 해달라……'는 편지였다.

오직 하나뿐인 혈육이므로 귀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특히 몸의 컨디션이 이런 형편일 때는 동생이 멀리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은 자매가 여덟 살과 여섯 살 때였다. 세 식구의 생활을 위해 벌이를 해야 했던 어머니가 어느 날 맏이에게 말했다.

"니키, 캐롤라인을 잘 돌봐야 한다."

어머니는 차차 일에 익숙해지고 딸들도 남들처럼 생활 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잔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캐롤라인을 잘 돌봐야 한다, 니키. 너는 언니니까 동생에 대해 잊으면 안 된다."

잊으려 해도 잊을 틈이 있었던 것일까? 캐롤라인은 무분별하고 활달한 데다 성급한 성격을 가져 항상 말썽을 일으켰기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한 캐롤라인이 16세 생일을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이 위험한 딸을 오직 한 사람의 혈육인 니콜라의 손에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니콜라는 그때 자기 청춘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뒤에는 악몽과도 같은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사춘기를 지난 캐롤라인은 남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성으로 성장했다. 특히 그 푸른 눈동자와 아름다운 육체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철이 덜 들어 마음은 중학생과 같았다. 캐롤라인의 사전에는 <노우>라는 말이 없는 것 같았다.

니콜라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아파트나 올나이트 파티에도 태연히 따라가는 동생을 얼마나 짖었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캐롤라인은 울면서 사과했으나, 이튿날만 되면 깡그리 잊고 또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니콜라가 심신의 피로를 느끼고 자기 인생에마저 절망을 느꼈을 때, 데이비드라는 청년이 캐롤라인 앞에 나타났다. 쾌활하고 사람이 좋았으며 분별력도 있는 청년이었다. 데이비드는 캐롤라인과 결혼하여 런던에서 2백 킬로 정도 떨어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 덕택에 니콜라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4년 만에야 겨우 오랜 시름에서 해방되었다. 그때 니콜라는 22세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행복하리라고 생각했던 동생네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정말 지겨워요'

라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캐롤라인의 이 편지가 니콜라의 마음에 걸렸다.

"제발 데이비드에게만은 싫증을 내지 말아 다오, 캐롤라인! "

그녀는 푸른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니콜라는 자기 직장이 있는 큰 빌딩으로 들어가며 애써 동생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안쪽 방에서 빠른 말로 질러대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탕 하고 수화기를 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이 또 신경질을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오늘은 가장 <즐겁지 못한> 날이 될 것만 같았다.

코우트를 행거에 걸고 타이프라이터 커버를 벗긴 뒤 일을 시작하려 했을 때, 안쪽 방으로 통하는 문이 난폭하게 열렸다. 니콜라는 얼른 돌아다보았다.

랭 하일랜드가 굵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 검고 숱이 많은 머리,핸섬하고 정력적으로 보이는 얼굴 모습, 놀라운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튼튼한 몸. 이 남자의 비서로 일한지 2년이나 되는데도, 이처럼 정면으로 그를 볼 때마다 왜 그런지 주눅이 드는 자신을 니콜라는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각이야! 도대체 어디를 산보하다 오는 거지?"

그가 이런 식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는 천천히 열을 센 뒤에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2년에 걸친 경험을 통해서 익힌 생활의 지혜였다.

"죄송합니다. 감기에 걸려 그만 늦잠을 잤습니다."

니콜라가 천천히 대답했다.

"나도 머리가 아파. 그런데도 제 시간에 출근했어!"

니콜라는 말을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두통? 아마 밤놀이가 지나쳐서 그럴 테지. 자업자득이야. 거친 걸음걸이로 창가로 간 랭은 벽에 기대어 흐린 하늘을 쳐다보면서, 창가에 놓인 화분의 푸른 잎을 아무렇게나 만지작거렸다. 니콜라가 정성을 기울여 키우고 있는 화초인데…….

"메모할 준비를." 굵은 음성이 명령했다.

니콜라는 메모 용지를 꺼내고 지시를 기다렸다.

"빨간 장미 한 다발을 미스 사우드에게 보낼 것."

"빨간 것으로 말인가요?"

"귀까지 먹었나? 빨강이야! 언제나 하던 그 빨강으로, 알겠어?"

"."

그러니까 로이스 사우드도 마침내 버려지는 셈이었다.

랭이 어딘가에서 그녀를 주워온 것이 언제였던가?

니콜라는 벽에 걸린 달력에 시선을 보냈다, 그렇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전이었다. 그 무렵에 먼저 사귀던 걸프렌드에게 빨간 장미를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으니까.

그녀가 알고 있는 단어란 <어머나!>,<멋져!> 등 대 여섯 가지로서, 모두가 <좋다>는 의미의 말들이었다. 로이스도 역시 금발의 미인이었다. 사장이 지금까지 사귀어 온 여자 가운데서는 가장 기품이 있어 보이고 호감이 가는 아가씨였다. 어휘도 다소는 풍부했으나, 그것이 모두 <좋다>는 의미라는 점에서는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였다. 남자란 관성(慣性)의 동물인가?

"출근하기가 바쁘게 벌써 낮잠인가?"

갑자기 귓전에서 굵은 소리가 나는 바람에 니콜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일하고 싶지 않은 인간에게 급료를 줄 생각은 없어. 목이 붙어 있고 싶거든 어서 동생한테 전화를 연결해!"

랭은 성큼성큼 자기 방으로 돌아가 거칠게 문을 닫았다. 유리창이 흔들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니콜라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관자놀이에 손을 갖다 댔다.

'정말 거칠기 한이 없는 사람이야! 저런 사람 밑에서 일하는 직원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거야!'

니콜라는 앤드루 하일랜드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여어, 니콜라. 오늘 아침은 쌀쌀하군, 그래 건강한가? "

이 사람은 사장과 달리 정말 다정했다.

"공교롭게도 감기에 걸려서..."

"그거 큰일인데. 약이라도 먹었나? "

", 즉효약이라고 선전하는 캡슐을 먹었어요."

"빨리 나았으면 좋겠군. 그리고 오늘은 결근하고 안정하는 편이 좋았을 걸 그랬어."

"제가 쉬면 트리시아가 제 대신 일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할 거예요."

트리시아가 사장을 아주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앤드루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이것을 기회로 전화를 사장실로 연결하자, 이쪽에서 수화기를 놓기도 전 에 사장의 울부짖는 듯한 음성이 귀를 찢었다. 니콜라는 전화기를 향해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이번에는 꽃집에 전화를 해야 할 차례였다. 주문을 받은 꽃집 점원은 그 가게에서 가장 고참이었으므로 사정을 곧 알아차렸다.

"저런, 그녀도 벌써 끝장인가요? 카드는 언제나의 그것이면 되겠죠? "

", <당신의 랭으로부터>란 한 마디면 족해요."

"웃기는군요."

"말도 마세요." 니콜라는 이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관절 그 사람의 어디가 좋아서 그처럼 여자들이 따라다니는 것일까? 확실히 영화배우와 같은 모습을 하고는 있다. 씀씀이도 좋다. 로이스는 다이아몬드 팬던트를 선물로 받았다. 로이스는 그것을 랭한테 받자 기쁜 나머지 니콜라에게까지 보여 주었던 것이다.

"멋지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니콜라는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며, 가기에 가서 물건을 고른 것이 자기라는 말은 한 마디도 비치치 않았다.

그 자리에는 랭도 동석하고 있었다. 그는 로이스를 곁눈으로 보면서 니콜라는 향해 즐거운 듯이 눈을 껌벅거려 보였다. 그와 농담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던 니콜라는 모르는 체하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로이스를 전송한 랭은 문을 닫기가 바쁘게 니콜라에게로 왔다.

"그 팬던트는 니콜라의 기호대로 선택한 것인가?"

"저는 다이아몬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다이아몬드를 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나?"

"제가 기억하고 있는 한 그런 경험은 없어요."

"그렇다면, 만일에 누가 실제로 선물한다면?"

"그 사람 얼굴에 던져버리겠어요."

랭은 조롱하기를 단념했는지 잠자코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적어도 이 사람으로부터 선물받을 걱정은 없었다. 랭 하일랜드는 금발에다 특정한 타입의 여자에게밖에 흥미를 갖지 않는 것이다. 눈이 동그란 인형 같은 얼굴, 그리고 다리가 길며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듯한 여자라야 한다. 돈은 남아 도는 형편이므로 자주 노리개를 바꾸는 것도 삶을 즐기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비서 따위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그 아가씨들이 굉장한 대우를 받는 것도 사실이었다. 최고급 레스토랑이나 클럽에 안내되기도 하고, 호화로운 선물도 받는다. 때로는 사업상 외국에 갈 때 동반하는 기회도 얻는다. 회사에서는 완고하고 잔인하기조차 한 그가 침실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여자들이 버림받았을 때 그 비탄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호화로운 다이아몬드가 수중에 있으니 적당히 헤어져 버리면 될텐데도 아가씨들은 좀처럼 헤어지려 하지 않는다. 아마 그녀들은 물질 이외에도 그에게 이끌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이를 거꾸로 먹어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은 실로 적절한 말이다.

안쪽 방의 통화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저렇게 큰 소리로 고함지르지 않아도 앤드루는 잘 이해할 수 있는 두뇌를 가졌는데도!

2년 전 직업소개소에서 설명을 들었을 때, 니콜라는 과거 1년 동안에 교체된 전임자의 수가 많은 데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만큼 조건이 좋은 직장도 좀처럼 없을 텐데, 무슨 불만이 있기에 그리 자주 그만두는 것 일까?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취직한 바로 그날 알게 되었다.

랭 하일랜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맹렬하게 일하는 남자였다. 그것은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그 밑에서 똑같이 일할 것을 강요받는 부하들이었다. 사소한 잘못, 약간의 노력만 부족해도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 이다. 분명히 랭은 보통 사람이 몇 시간이나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문제도 순식간에 핵심을 파악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두뇌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를 표준으로 일을 결정하기 때문에 밑에서 일하는 사원들은 목이 몇 개 있어도 붙어 있지를 못한다.

하일랜드 동산 부동산 주식회사는 런던에 본점을 두고, 전국은 물론 유럽 각지에도 지점을 갖고 있는 대 회사였다. 시장 변동에 대한 정확한 정보 외에도 일종의 직감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 이 업계에서 승리하는 길이라 한다면, 사장은 의당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2년 동안이나 이 직장에 있었다는 것이 니콜라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특히 최근 일주일 동안의 일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계속 일에 쫓기는가 하면, 독촉을 하고 고함을 지르며, 재수가 없는 날에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심한 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몇 번이나 사표를 던지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마침내 이런 사람을 다룰 수 있는 요령을 터득했다.

어떤 말을 하든지 참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녀가 가진 유머의 센스도 몇 번이나 위기는 넘기는 데 힘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그 말끔히 빗은 검은 머리 위에 쓰레기통을 덮어씌우고 싶은 충동이 자주 일어나긴 하지만, 그때마다 실행에 옮기지 않고 용케 참아 왔다. 그리고 다른 직장에 비해 처음부터 급료가 좋았는데도, 그 후 몇 번이나 더 올려 주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결단코 그만두겠다고 하면서도 자꾸 주저앉게 되는 것이었다.

"그 보고서는 도착했나?"

날카로운 소리에 니콜라는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저런 내가 방해했나?"

"보고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니콜라는 애써 머리를 현실로 되돌렸다.

"도대체 그놈들은 무얼 하고 있는 거야! "

랭이 큰 걸음으로 다가와 몸을 앞으로 내밀고 니콜라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숨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의자의 방향을 돌린 순간, 데스크의 서랍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치고 그만 비명을 질렀다.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니콜라는 몰래 무릎을 쓰다듬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랭은 회전의자의 등을 잡고 의자를 돌린 뒤, 마루에 무릎을 대고 니콜라의 스커트를 치켜 올렸다. 니콜라는 당황하며 스커트를 내리려 했으나 랭의 손이 그것을 억제했다. 그는 흰 살에 나타난 빨간 자국을 손으로 눌렀다.

"아파?"

", 그러니 손을 떼 주세요."

"걱정이 되어 그러는 거야, 니키." 랭은 무릎을 굽힌 자세에서 머리만 들었다. 그의 친절 따위는 받고 싶지도 않았고, 가까운 사이나 되는 것처럼 애칭으로 불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랭은 서슴없이 다음 말을 속했다.

"이건 멍이 크게 들겠는데. 니키의 살은 너무 약해. 몇 주일 전에 문에 부딪쳐서 생긴 팔의 멍이 겨우 없어질까 했는데 , 이번에는 다리로군."

랭은 계속 지껄이면서 무릎의 상처를 가볍게 문지르고 있었다. 니콜라는 부끄러움을 참느라고 말대꾸도 하지 못했다.

"뜨거운 철판 위에 놓인 고양이도 아닌데 내가 접근 할 때마다 펄쩍펄쩍 뛰다니, 이제 그런 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어."

랭은 자신의 농담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스커트를 내려 주고 일어섰다.

"오늘 아침에 온 우편물은?"

말없이 편지 뭉치를 내미는 니콜라의 눈을 흘끗 쳐다보고 난 랭은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그 표정이 왜 그런가,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누가 그렇게 하라고 내버려 둘 것 같아요?"

니콜라는 고개를 떨구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 지금 뭐라고 했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태연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 본 니콜라는 아차, 하고 생각했다. 잿빛 눈에 짓궂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어쩌면 들었는지도 모른다.

짐짓 웃는 얼굴을 지우고 편지 뭉치에 시선을 돌린 랭의 옆얼굴에, 니콜라는 왠지 모르게 신경을 쏟고 말았다. 넓은 이마에서 높은 광대뼈를 거쳐 공격적인 턱 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선. 얼굴의 부분 부분은 아름답다 기보다는 험상스럽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겠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는 어째서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되는 것일까? 지나칠 정도로 남성을 느끼게 하는 눈썹과 유머가 넘치는 것 같은 입. 이 두 가지가 균형 잡힌 얼굴에 따뜻한 맛을 더해 전체적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랭이 얼굴을 들었으므로 니콜라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루치 노인이 또 파티를 열 모양이군. 토요일이야. 여느 때처럼 동반해 주기를 부탁해."

니콜라는 속으로 크게 놀랐으나 내색을 않고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무리일 것 같다니?" 느긋하고 온화한 그 목소리는 벼락이 떨어질 징조였다.

니콜라는 얼른 상대방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미스터 하일랜드. 다른 사람... , 트리시아가 좋을 것 같군요. 제가 말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트리시아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으나 이번만은 눈을 감아 달래는 수밖에 없다. 방금 런던에 온 동생을 남겨 두고 외출할 수는 없는 일이며, 무엇보다 그녀를 혼자 두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므로.

"걱정을 말라니, 누가 그런 것을 부탁했어?트리시아 따위는 이쪽에서 거절하겠어. 그 아가씨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어. 말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니까."

그것은 사장 앞에 나왔을 때만 그러는 것이다. 다른 상대라면 트리시아도 훌륭하게 대응할 수 있다.

"왜 니키는 참석할 수 없지? 이유를 말해, 이유를!"

니콜라는 대답이 궁해서 생각에 잠겼다. 숏커트한 검고 윤기 있는 머리가 투명하게 흰 얼굴을 둘러싸고 있었다.

"일이 있어서요……." 마침내 니콜라가 입을 열었다.

사생활을 공표할 의무는 없는 것이고, 물론 이쪽에서 보고할 생각도 없었다.

"남자 때문인가?" 흥미 있다는 듯한 음성이었다.

니콜라는 대답을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는지, 랭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질문을 퍼 붓기 시작했다.

"남자를 싫어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니키에게도 사내가 있었나? 그와는 어느 정도의 관계인가? 결혼할 생각이라고는 설마 말하지 않겠지? 여자란 결혼을 하면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든."

니콜라는 질문을 무시하고 화제를 돌렸다.

"부사장님은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니, 참석할 거야. 하지만 앤드루도 기억력에 있어서는 니키를 따라가지 못해."

이것은 사교적인 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실이었다. 랭이 그토록 니콜라를 필요로 하는 것은, 파티에서의 자기 언동을 모두 기억했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브레이크를 걸어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주석에서 실수를 하는 일은 좀처럼 없는 랭이었으나, 노련한 루치가 상대이고 보면 권하는 대로 마시다가 그만 필요 이상으로 자기를 노출시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그 사람과 같이 가도 좋아. 꼭 얼굴을 보게 해줘, 만일에 실재하는 경우에는."

랭은 의기양양하게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니콜라는 다시금 큰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노려보았다.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상대는 허스키한 목소리의 로이스 사우드였다.

"그 사람 있어요?"

이런 경우 랭은 언제나 부재중인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는 충동적으로 "물론이죠, 미스 사우드."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사장실로 연결했다. 랭이 수화기를 들었다.

"! 당신이란 사람은...."

로이스의 울음 섞인 음성을 들으면서 니콜라는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야기가 곧 끝났는지 옆방의 수화기가 거칠게 내려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니콜라는 태연히 눈을 둥글게 뜨고 랭을 바라보았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있었다.

"어째서 전화를 연결했지?"

"그야 미스 사우드의 전화는 최우선으로 연결하라고 하셨기에."

니콜라는 애교 있게 웃음을 띠고 조용히 대답했다.

랭은 맹수와 같은 기세로 돌진해 왔다.

"대관절 그게 무슨 짓이야, 그 명령을 취소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엉엉 우는 소리를 전화로 듣는다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어. 참을 수가 없어!"

젊은 여자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고는 그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니!

"일부로 그랬지?" 랭이 다그치기 시작했다.

"천만의 말씀이에요. 제가 그럴 까닭이 없지 않아요?"

펄쩍 뛸 듯이 말했으나, 얼굴을 마주치면 웃음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니콜라의 눈앞에 굵은 두 팔이 뻗쳐 왔다. 놀라서 얼굴을 든 니콜라는 불과 10여 센티 앞에까지 다가와 있는 랭의 얼굴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당황하여 다시 한번 눈을 내리깔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고 있지 않아?" 불쾌할 정도로 착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니콜라는 성난 상대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비상 수단을 썼다. 얼굴을 똑바로 들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어 보였다.

"미안합니다, 미스터 하일랜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목소리도 최대한 상냥하게 했다. 그러나 화가 난 랭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는 그 수법에 놀아나지 않을걸. 아양을 떨며 달콤한 목소리를 내는 니키가, 사실은 마음속으로 성을 내고 있다는 것 쯤은 나도 들여다보고 있어. 처음에는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는 둔감하고 단순한 처녀라 생각했었는데, 천만의 말씀이었어. 모든 것이 계산 끝에 나온 행동이야. 더구나 아주 정확한 계산이지. 방글방글 웃으며 솔직하게 대답하는 체하는데 이쪽에서 화를 낼 수는 없거든."

"그런 효과가 있다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니콜라는 이렇게 내뱉고는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효과가 크지. 그 증거로 니키는 매번 같은 수법을 쓰지 않았어? 방글방글 웃고 있지 않았느냐 말이야?"

랭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아까 그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냈다.

"내가 로이스와 손을 끊었다는 것을 알면서 왜 전화를 연결했지?"

"그만 실수를 하고 ……."

니콜라는 상대의 시선을 피하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교묘히 빠져나가려 하는군! 이봐, 이번에는 정직하게 대답해야 할 거야. 주말 계획을 망쳐 버리게 돼서 그 앙갚음이었지? 그러기에 그 사람도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어? 루치의 파티라면 더할 나위 없을 거야. 샴페인은 목욕을 해도 좋을 만큼 많을 것이고, 산해진미도 산더미같이 있을 것이고."

니콜라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남자가 아니에요. 동생이 시골에서 올라와요."

"동생? 니키는 천애의 고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캐롤라인만이 제 혈육입니다."

"캐롤라인이라……좋은 이름이군, 나이는?"

"이미 결혼했어요." 목소리가 저절로 거칠어졌다.

잿빛 눈이 이상하게 빛났다.

",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가?"

이 사나이에게 동생을 만나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캐롤라인은 유혹에 약하고, 더구나 랭 하일랜드가 좋아하는 금발미인이 아닌가……. 니콜라는 몸이 떨리는 것을 깨닫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동생을 파티에 데려가도록 하지."

랭의 목소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죽어도 데려가지 않겠어요!' 마음속으로 니콜라는 다짐했다. 이 남자와 캐롤라인이 만나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저지해야 한다. 랭을 거쳐 간 지난날의 애인들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1개월에서 길어야 반 년-평균 석 달에 한 번씩 버려지는 아가씨들. 이런 남자에게 걸려드는 여자가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어딘가로 숨어 버린 그를 대신하여 아가씨들의 하소연을 듣노라면, 니콜라는 그 여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남남인 여자들에겐 그것으로 끝났지만, 희생자가 캐롤라인일 경우에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불과 3개월이면 이 남자가 캐롤라인의 인생을 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

"동생은 어떤 사람이지, 나이는.....?"

전화 벨이 니콜라를 곤경에서 구해 주었다. 또 로이스로부터였다. 니콜라는 일부로 랭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거짓말을 지껄였다. 그러나 로이스는 금방 전화를 끊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도 생겼나요? 난 별로 나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좋죠? 사랑하고 있어요, 그를!"

로이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만큼 현재의 입장이 더욱 쓰라렸다.

"사장님이 돌아오시는 대로 전화 왔었다고 전하겠어요........., 알았어요. 꼭 그렇게 전할게요."

수화기를 놓는 니콜라는 보고 랭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앞으로도 그녀한테서 전화가 오면 반드시 없다고 해야 돼. 두 번 다시 잊어버린 체하면 못 써."

랭은 낮게 휘파람을 불면서 발길을 돌려 자기 방으로 갔다. 그 검은 머리를 한대 때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 것인가!

그 사내가 어떤 생활을 하건 관여할 필요가 전혀 없을 텐데도, 왜 그런지 오늘은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환절기가 되어 그런지, 아니면 감기에 걸려서 그런지, 또는 캐롤라인의 편지 탓인지, 좌우간에 주위의 일에 대해 반항하고만 싶은 하루였다. 니콜라는 한숨을 쉬며 펜을 잡고 일을 시작했다.

2년 동안 같은 직장에서 매일처럼 얼굴을 대하다 보니, 이제 니콜라와 랭은 완전히 상대와 호흡이 맞게 되었다. 예컨데 랭이 파일을 달라고 하면, 니콜라는 무슨 파일인지 곧 깨닫고 얼른 갖다 주게 되었다. 그러면 랭은

"이것은 니키가 맡고 저것은 내가 하겠어."

하고 말한 다음, 그 후에는 아무 말도 없이 일을 해치운다. 방대한 서류 묶음도 순식간에 처리되고 만다. 업종으로 미루어 랭의 일에는 비밀을 요하는 사항도 많다. 개중에는 친동생인 부사장도 손을 대지 못하는 극비 문서도 있다. 그러나 니콜라는 그런 서류가 든 금고의 스페어 키도 가지고 있으며, 사장의 부재시에는 상당한 범위에 걸쳐 자신의 판단으로 처리할 권한도 부여받고 있었다.

정오가 지났을 때, 복도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앤드루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점심이라도 하러 같이 가지?"

니콜라는 웃는 낯으로 대답하고 책상 위를 정리한 다음 앤드루와 함께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혼잡한 차들과 인파를 뚫고 단골 음식점으로 갔다.

앤드루는 서른 살로, 형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키는 형보다 작았으나 역삼각형으로 균형잡힌 체격은 형에 못지않게 늠름했다. 머리는 짙은 갈색이고, 눈을 엷은

청색이었다. 사람도 좋고 일에도 건실하므로 좀 더 중요한 일을 맡겨도 좋을 텐데, 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랭과 같은 예민한 재능이나 강렬한 개성은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부사장 비서 트리시아는 그를 <어린양>이라 불렀다.

"사장과는 크게 달라요. 그래서 여간 다행이 아니에요."

트리시아는 랭이 사장실에 있는 경우에는 니콜라의 방에조차도 오려 하지 않았다.

"형의 기분은? " 앤드루가 물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가시지 않는 게 좋아요."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요트라는 공통된 취미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두 사람은 갑자기 친해졌으며, 업무와 관계없는 곳에서는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루치의 파티에 참석할 셈인가?"

"명령을 받았어요."

니콜라가 <갈 생각>이라는 말을 피한 것은 아직도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명령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의 성격으로 보아 "그렇다면 해고야!" 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급료를 주는 직장은 그리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또 생활을 갑자기 바꾼다는 것도 결코 즐거운 일이 못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기분 좋게 급료를 올려 준 것은 책략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나도 가기로 했어, 루치의 파티라면 가서 손해 볼 것이 없을 테니까," 앤드루는 니콜라의 망설임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그것은 사실이에요,"

루치 회사와 하일랜드 회사는 사사건건 맞서면서도 때로는 제휴하여 한사업에 참여하기도 하는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었다. 사장인 조 루치는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언행도 조용한 은발의 노신사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모와는 달리,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정체모를 어떤 것을 느끼고 있는 니콜라는, 이 노인에게 별로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들인 캐리 루치는 아버지만큼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당사자가 교묘히 숨기고 있었지만, 이쪽에서는 그 내심을 금세 꿰뚫어볼 수 있었다. 전형적인 귀공자 타입으로서 옷차림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파티 같은 데서 얼굴을 마주쳤을 때 몇 번인가 유혹을 해 왔으나, 니콜라가 전혀 움직이지 않자 최근에는 그다지 치근덕거리지 않았다.

하기야 캐리도 랭과 마찬가지로 금발을 좋아했고, 가망이 없는 헛된 상대와 헛된 시간을 보낼 사내도 아니었다.

"니콜라의 역할은 역시 형을 지키는 일인가? " 앤드루가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니콜라가 그만두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큰일이군."

감사의 얼굴로 랭의 동생이 말했다.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니콜라가 그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있을 리가 없어. 요즘 여자들은 랭의 비서가 될 수 없지, 미쳐 버릴 테니까."

"미치기 전에 아마 도망칠 거예요."

"3개월 이상 계속된 것은 니콜라가 처음이자 마지막 일거야. 그런 몸으로 용케도 견딘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감탄하고 있지."

사장에게 일러바칠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니콜라는 본심을 털어놓고 싶었다.

"상당한 유머 감각과 자제심이 없으면 근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에요. 퇴직할 때에는, 제일 먼저 사장실에 가서, 평소에 생각했던 것을 전부 말하고 나가겠어요."

"그것이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군." 니콜라의 등 뒤에서 두 사람의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쳐다본 앤드루는 어느새 애교 있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아아, 형이군. 이제부터 점심인가?오늘 스테이크는 맛이 있더군. 괜찮다면 여기 앉아도 좋아. 우리는 일어서려던 참이니까."

대답이 없었다. 니콜라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보지 않아도 랭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소름이 끼칠 듯한 아주 낮은 음성이었다. "그럼 우리는 먼저 돌아가겠어."

앤드루는 일어서서 웨이트리스를 불러 계산을 끝마쳤다.

니콜라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랭이 의자 바로 뒤에 서서 비켜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내용이지?" 랭이 거듭 물었다.

니콜라는 크게 숨을 내쉬고, 테이블과 의자 사이의 작은 틈을 이용해서 일어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퇴직하는 바로 그날에 말씀드리겠어요."

앤드루는 니콜라의 허리에 팔을 감고 형의 눈에서 보호하듯 하며 입구로 향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랭이 예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2

랭 하일랜드는 우주인이 아니면 정교한 로봇일 거라고 니콜라는 생각했다. 밤마다 금발 미인을 상대하느라 바쁠 텐데도, 아침에 사원들이 출근할 무렵에는 이미 자기 책상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체력이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랭이었으나 목요일에는 근무 시간이 시작된 후에도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 연락도 없었다. 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니콜라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일을 하고 있으려니, 로이스 사우드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향수 냄새를 풍기며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니콜라는 당당히 안쪽에 있는 방문을 열어,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로이스는 주인 없는 큰 데스크를 본 순간 흐느끼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를 믿고 있었는데!"

니콜라로서는 이미 익숙해진 말투였다. 그 뒤 로이스는 15분 이상이나 우는 소리를 반복하다가 돌아갔다.

니콜라는 겨우 숨을 돌렸으나 로이스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품도 착하고 요리 솜씨도 뛰어나 결혼하면 좋은 아내가 될 터인데, 그것을 조금 지나치게 떠벌렸기 때문에 랭에게 버림받은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랭 하일랜드는 정글에 사는 맹수와 같아서 우리에 갇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언제 적을 만나도 괜찮을 만큼 항상 이빨과 발톱을 갈고 있는, 드릴에 넘친 인생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열 시 반이 되었다. 서류를 가지고 들어온 앤드루는 형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눈을 가늘게 떴다. 앤드루의 얼굴 모습은 형과 비슷했으나 형처럼 맹렬한 성격은 아니었다. 핸섬하고 복장에 대한 센스도 있었으며 유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나무랄 데 없는 청년이었으나, 애써 흠을 찾는다면 삼십이라는 나이에 비해 아직 덜 성숙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었다.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어?"

앤드루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 아마 밤의 환락이 지나쳤기 때문일 거예요."

"벌써 다른 여자를 가까이 했을까?"

"글쎄요. 하지만 지금까지의 예로 보면, 오래 사귀던 여자를 버리는 것은 대개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니콜라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전화 벨이 울렸다. 갑자기 수화기에서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니키한테 감기가 옮았어. 목이 아프고 머리가 쪼개질 것 같군."

"어마, 죄송합니다."

니콜라는 웃음을 참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앤드루에게 형의 전화라고 신호했다.

"동생 방에 연결해 줘."

랭이 불쾌한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침 여기 와 계십니다."

"또 니키한테 놀러 왔단 말인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이 꼴이라니까. 오늘은 일하고 있는 사원이 한 사람도 없을 테지?"

니콜라는 말없이 수화기를 앤드루에게 넘겼다. 랭이 빠른 말로 이것저것 명령하는 목소리가 니콜라에게도 들렸다. 이윽고 앤드루는 수화기를 다시 니콜라에게 건네주었다.

"빨리 와요, 우편물을 잊어버리지 말고."

대답도 듣기 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는 조용히 놓아야 한다는 정도의 예의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어쨌든 니콜라는 랭의 맨션으로 택시를 달렸다.

맨션의 문을 연 랭은 안색이 나쁘고 머리가 마구 흩어진 데다 수염이 아무렇게나 자라 있었다. 짙은 청색의 짧은 가운을 입고는 있었으나, 그밖에는 나뭇잎 하나 걸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가운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털이 무성한 긴 다리. 마침 샤워를 하려던 참 이어서 가운 하나만 걸친 것일까, 아니면 침대에 들어 갈 때는 언제나 아무것도 입지 않는 것일까?

"왜 그래? 하루 종일 거기 서 있을 생각인가?"

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니콜라는 머리를 들고 랭의 곁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부사장님께서 몸조리 잘 하시라는 전갈이었어요."

"."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나서 랭은 문을 닫고 니콜라의 뒤를 따랐다. 니콜라는 흐트러진 침대가 보이는 방 앞을 지나 거실로 향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야겠어."

랭이 뒤에서 말했다.

니콜라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을 때에는 이미 랭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할 수 없이 되돌아가서 침실의 입구에 섰다. 랭은 침대에 들어가 있었으나 다행히 가운은 입은 채였다.

"제기랄, 최악의 상태야. 몇 년 동안 감기 따위는 걸리지도 않았는데!"

랭이 신음하는 듯한 소리로 말 했다.

"자아, 빨리 들어와."

니콜라는 침대 가까이로 갔다. 킹사이즈 침대에 덮여 있는 이불은 연한 갈색이었다. 시트류와 커튼은 초콜릿 빛이었다. 그 커튼 틈으로 새어든 빛이 랭의 얼굴에 비쳐 푸르스름하고 우울한 표정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랭은 크게 재채기를 하고 나서 휴지를 집으려고 몸을 비틀었다. 그 바람에 가운이 벌어져 우람한 가슴과 숱이 많은 가슴털이 드러나 보였다. 니콜라는 시선을 돌렸다.

"니키가 옮긴 거야." 랭이 힐책했다.

"죄송합니다."

"반드시 갚고야 말겠어."

니콜라는 어이가 없었다. 진심으로 말하는 것일까?

랭은 이마를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우편물은?" 랭은 니콜라가 건네 준 편지 묶음을 받아들고 훑어보기 시작했다.

"부사장님과 둘이서 지장 없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니콜라가 말하자 랭의 검은 눈동자 속에 음험한 빛이 감돌았다.

"대단한 자신이로군, 미스 애드니?"

니콜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재채기를 한 랭은 편지읽기를 중지하고 편지를 묶음 째 니콜라에게 넘겼다.

"긴급한 일은 없는 듯하군. 오늘의 내 일정은 모두 연기하도록 해."

"이미 조치를 취했습니다."

니콜라가 말하는 순간 벼락이 떨어졌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제멋대로 하면 못 써! 앞으로는 반드시 명령을 받고 행동할 것."

"잘 알겠습니다."

니콜라는 상냥하게 대답했으나, 이것이 더욱 상대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빈정거리지 말아! 니키는 재미있는지 모르지만, 난 그렇지 않아. 인간이란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야."

"병환이라뇨.... 가벼운 감기에 걸리신 것뿐이에요. 미스터 하일랜드."

"남이 알 리 없지. 목이 아프고 재채기를 할 때마다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아, 열도 있고."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머리를 짚어보면 알 거야." 니콜라는 다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자아, 짚어 봐. 열 때문에 온몸이 탈 것 같아."

니콜라는 할 수 없이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괜찮을 거예요, 별로 열이 없는걸요."

"있다면 있는 거야."

이것은 완전한 억지였다.

"알겠습니다, 본인이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틀림없겠지요."

랭은 달려들 듯한 눈으로 니콜라를 노려보았다.

"나는 분명히 병에 걸렸어. 니키의 마음속에는 여자다운 데가 전혀 없단 말인가? 로이스라면 지금쯤 핫레몬을 만들어 주고 찬 물수건으로 이마를 식혀 줄 텐데, 니키는....."

"그렇군요, 그러면 사우드양에게 전화를 해서....."

"닥쳐! 농담이 아니야."

"프레스톤은 어디 갔나요?"

니콜라는 이 집 하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므로 이렇게 물었다.

"귀가 먹은 누님을 찾아 블랙풀로 갔어. 지금쯤은 어린 시절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겠지."

랭은 다시 재채기를 했다. 니콜라가 휴지를 갖다가 그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것을 받아 든 랭은 원망스러운 듯이 눈을 들었다.

"누구 한 사람 간호해 줄 사람이 없어."

"정말 불편하시겠어요. 누님을 부를까요?"

니콜라는 자기기 나름대로 묘안이라 생각했다.

랭의 누나인 모니카는 할 스트리트에서 개업하고 있는 일류 외과 의사에게 시집가서, 런던 교외의 웅장한 저택에 사는 재기 발랄한 여성이다. 하일랜드 회사의 대주주의 한 사람이기도 하며, 주가(株價)와 동생들의 행동에는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랭은 그녀가 런던에 온 기색이 보이면 틀림없이 숨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무서운 것이 없는 랭의 유일한 약점이 바로 이 누나인 것이다.

"제발 그만둬. 이 몸으로는 도저히 모니카를 상대할 수 없어. 그보다는 무언가 마실 것을 만들어 주지 않겠어?" 어린아이가 어머니한테 조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여기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으나, 니콜라는 아무 대꾸도 않고 주방으로 갔다. 랭이 어떤 속셈이건, 또 본인이 병을 과장하는 것이 사실이건 간에, 현재 그의 몸이 정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더라도 랭의 속마음에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니콜라는 알고 있었다.

주방에는 최신식 기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프레스톤은 완벽한 사람인 듯했다. 니콜라는 물을 끓이고 레몬즙과 설탕, 오렌지 주스를 넣은 다음 위스키를 적당히 넣고 저었다.

랭은 베개를 등에 받치고 경제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니콜라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손을 내밀어 컵을 받아 들었다.

"다른 용무는 없으세요?" 니콜라가 물었다.

"침대를 좀 정돈해 줘. 밤새도록 뒤치락거렸더니 시트가 엉망이 되고 말았어."

그러면서 랭은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니콜라가 좀 거칠게 침대를 정돈하고 있을 때 머리맡에 있는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랭은? 거기 있겠죠?" 로이스의 목소리였다.

"지금 병환으로 누워 계십니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이 거기 있죠?"

로이스의 음성이 갑자기 의혹을 띠기 시작했다.

"서류를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전화가 왔었다는 말을 전해 드리죠."

마악 전화를 끊는 순간에 랭이 맨발인 채로 들어왔다. 깨끗해진 침대로 들어간 랭은 만족스러운 듯이 한 숨을 쉬었다.

"수고했어. 전화는 어디서 왔었지?"

"미스 사우드로부터였어요."

"저런! 깨끗이 손을 뗐는데, 여자는 왜 그것을 모를까!"

"그것도 그렇지만, 왜 여자는 위험한 남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일까?" 니콜라가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 뭐가 어쨌다고?"

니콜라는 못 들은 체하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어디 가는 거지?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그리고 이대로 두면 폐렴이 될지도 몰라."

"그럴 염려는 없어요, 가벼운 감기니까요."

조용히 이야기하는 데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환자에 대한 위로의 말이 고작 그것인가?"

랭은 베개에 기대어 토라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마 로이스겠지. 나는 말을 못한다고 전해 줘."

랭의 짐작은 적중했으나, 로이스는 니콜라의 설명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니콜라의 악전고투를 보면서 랭은 유쾌하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니콜라는 그를 힘껏 때려 주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목소리가 안 나오다니, 아까는 그런 말을 안했지 않아요?"

로이스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그러면 듣기는 할테죠?전화를 바꿔 주세요,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니콜라가 바라보자 랭은 이불을 머리 위까지 푹 뒤집어썼다.

"지금 욕실에서 양치질하고 있어요."

니콜라가 이렇게 말하자 로이스는 약간 듣기 거북한 말을 늘어놓았다. 예상 외로 그녀는 어휘가 풍부한 듯했다. 랭이 거짓말쟁이이고 비열한 사람이라는 로이스의 의견에는 니콜라도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로이스는 분풀이를 계속했다.

"잘 해 보세요. 그리고 늦기 전에 필요한 것을 많이 사 달래세요. 아니면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로이스가 전화를 끊자 랭이 겨우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열없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니콜라는 나무라는 시선으로 이에 응했다.

"제가 다음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그녀에게 말해 주시겠죠? 그런 소문이 돈다면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랭은 한순간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했나?"

"분명히 말해 주시겠죠?"

"만일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분명히 이야기하지."

두번 다시 만나지 않으리란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서 무엇이든 만들어 줘. 하지만 목이 아프니 굳은 것은 안 되겠지. 어렸을 때 내가 목이 아프면 어머니는 곧잘 빵을 밀크에 적셔서 먹여 주곤 하셨지!"

"빵과 밀크라면 주방에 있어요. 가져올까요?" 즉석에서 니콜라가 말했다.

"아니, ....되도록이면 스크램블 에그 같은 것이 좋겠어."

랭이 당황하며 말했다. 니콜라는 그것을 보고 속으로 비웃었다. 어릴 때 이야기를 하면 모성 본능이 자극될 줄 아는 모양이지만, 어림없는 착각이야.

랭은 눈을 치뜨고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환자는 영양 섭취가 제일인데, 이대로 가다가는 영양실조로 죽을지도 몰라." 긴 속눈썹을 가련하게 껌뻑였다. 분명히 안색은 좋지 않았다. 랭이 아양을 떠는 듯이 미소를 던져 왔다.

"스크램블 에그와 커피 한 잔 이면 충분해. 미안하지만 부탁해도 괜찮을까?"

이번에는 남자의 매력을 무기로 삼을 작정인가보다.

잿빛 눈과 우아한 입술이 달콤한 미소를 띠고 호소하고 있었다. 니콜라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사무실에서 발을 구르며 호통치는 랭이라면 태연히 바라볼 수 있겠지만, 여심(女心)을 긁어대는 듯한 이런 태도에는 약했다. 이런 때에는 주방으로 사라지는 것이 상책일 듯싶었다. 니콜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침실을 나왔다.

빵을 얇게 썰어 토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깨끗한 무늬가 있는 접시에 토스트를 얹고 주위를 스크램블 에그로 둘러싼 다음 전체를 얇게 썬 양파로 덮였더니, 그런대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이 되었다. 랭은 읽고 있던 신문을 내동댕이치다시피 하고 접시를 받아 들었다.

"야아, 니키의 요리 솜씨도 제법인걸." 속이 들여다보이는 칭찬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니콜라는 주방으로 되돌아가서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밀크를 잔뜩 섞은 커피를 가지고 침실로 돌아갔더니, 접시 위에는 빵 부스러기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랭은 뜨거운 커피를 만족스럽게 마시고 컵이 비자, 어린아이처럼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착한 아이로군, 어서 잠을 자거라.> 하고 달래 주었으면 제격이겠다고 니콜라는 생각했다.

"감기가 드셨으면 파자마를 입으시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니콜라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랭은 방 구석에 있는 장롱을 가리켰다.

"제일 윗서랍에 있어."

니콜라는 싸늘한 눈으로 랭을 보고 나서 장롱 앞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얇은 비단으로 된 밤색 파자마였다. 땀도 빨아들이지 않을 것 같고 모양도 환자용으로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서랍을 뒤져도 적당한 것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제일 괜찮다고 생각되는 비단 파자마를 꺼내 그에게 주자, 랭은 얼른 가운의 띠를 풀기 시작했다. 질겁을 하고 침실에서 뛰쳐나온 니콜라의 귀에 유쾌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옷을 갈아입은 랭에게 다시 불려 침실로 간 니콜라는 이제 회사로 돌아가겠노라고 했다.

"아아, 그래. 가도 좋아."

어깨를 으쓱하며 달래는 듯한 투로 랭이 말했다.

"일이 많이 밀려서요."

어째서 변명 따위를 하는 것 일까?아무리 월급이 많다고는 하지만, 가벼운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일부러 집에까지 찾아와 간호하기 위해 고용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알고 있어."

다시 원망하는 듯한 투로 말한 랭은, 막 문을 열고 나서려는 니콜라를 불러 세웠다.

"퇴근할 때 들러서 그 보고서의 완성 여부를 알려줘."

"알았습니다."

"그리고 걸려 온 전화는 모두 메모했다가 그것도 가져오고, 또 어제 구술(口述)한 서류도 오늘 안으로 타이핑해 두도록."

"예정 외의 일을 너무 많이 말씀을 하시니 어떻게 될지......"

"니키는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드디어 평소의 랭으로 되돌아갔다. 니콜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맨션을 나왔다. 회사에서는 앤드루가 형의 데스크에 앉아 제법 의젓하게 사무를 보고 있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일에 쫓겨, 겨우 일단락되었을 때는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 니콜라는 서류 뭉치를 들고 다시 랭의 맨션으로 갔다.

문을 열어 준 랭은 다시 가운 차림으로 되돌아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정말로 샤워를 한 듯, 젖은 머리를 타월로 문지르면서 니콜라를 거실에 안내했다. 테이블 위에 빈 글래스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혼자서 위스키를 마신 모양이었다. 곁의 카펫에는 경제 잡지가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

니콜라가 서류를 건네자 랭은 대충 훑어보고 옆으로 놓았다.

"보고서는?"

니콜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까보다는 기분이 좋아지신 것 같군요."

랭의 입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렇게 보이나?" 그의 기분이 좋은지 어떤지 알아보려던 니콜라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앤디의 일하는 태도는?"

"아주 훌륭했어요."

"다행이군." 랭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방금 면도를 한 듯 얼굴이 아직 촉촉해 보였다.

"무얼 먹게 해줄 수 없을까?"

"초과 수당을 받아야겠군요."

말하는 순간 니콜라는 후회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랭의 눈이 험상궂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이지. 얼마가 필요한가?"

가시 돋친 목소리였다. 니콜라는 한숨을 쉬었다.

"미안합니다, 농담이었어요."

"환자에게 함부로 농담을 하면 못 써."

"침대에서 좀 쉬시는 것이 어때요?" 니콜라는 갑자기 온몸에 피로를 느꼈다. 감기가 아직 덜 떨어진 몸으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퇴근 후까지 다루기 힘든 남자를 상대해야 한다니!

뜻밖에도 랭은 순순히 침실로 갔다. 니콜라는 냉장고에 있던 재료를 모아 생선 요리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식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잠자리를 보아 주는 일이 남아 있었다. 큰 침대에 몸을 앞으로 내밀고 시트를 펴거나 매트리스를 쳐들거나 하는 니콜라의 몸짓 하나하나를 랭은 예리한 잿빛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니콜라는 대단히 불쾌했다.

별로 어쩌는 것도 아닌데,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일을 끝내고 몸을 일으킨 니콜라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랭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만 더 키가 컸더라면 완전한 프러모션이었을 텐데. 그리고 좀 더 살이 쪄야겠는걸."

랭의 말에 니콜라는 얼굴이 빨개졌다.

"희망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니콜라의 분노는 랭을 더욱 재미있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기분좋게 침대에 들어간 랭은 돌아가려던 니콜라를 불러 세웠다.

"내일 열 시에 이리로 와요."

니콜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건물 전체가 진동할 만큼 힘껏 문을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니콜라는 맨션을 나섰다. 그 야비스런 눈초리! 머릿속으로는 나체를 상상하며 점수를 매겼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이같이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근무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날마다 그러했다. 일년쯤 지나서는 겨우 그 버릇이 고쳐진 줄 알았었는데......

아마 기분이 울적해서 그런 것으로라도 위안을 받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니콜라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 남잔 자기의 성적 매력을 무기로 삼고 있는 거야. 사실 대부분의 여자는 그 잿빛 눈으로 의미있게 바라보기만 해도 몽롱해지고 만다. 그러나 니콜라로서는 불쾌감과 분노만이 치솟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니콜라는 앤드루에게, 랭을 다루기 힘들다고 실토했다.

"니콜라는 형과 성격이 안 맞는 모양이군."

"팬클럽에 끼고 싶지 않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여자는 대번에 녹아들고 마는데."

"함께 일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형님에 대해서 트리시아는 무어라 말하고 있나요?" 앤드루의 푸른 눈이 웃었다.

"트리시아는 랭을 염병에 걸린 사람처럼 무서워하고 있어."

"그것 보세요. 사장님은 머리가 좋고 맹렬하게 일을 하시지만, 부하에겐 결코 좋은 상사가 되지 못해요."

니콜라가 지시받은 시간에 맨션으로 갔더니 랭이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 주었다. 지금까지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머리가 흩어지고 수염도 깎지 않은 채였다. 더구나 어제처럼 맨몸에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쇼나: 아예 에덴동산에서 뛰놀아라, 뛰놀아!!!)

"아침 식사를 부탁해." 랭은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고 안으로 들어갔다. 열한시 회의에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고 앤드루와 약속했기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었다.

거절할 생각으로 뒤를 올라갔더니 랭이 돌아서며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목욕을 하겠는데, 등이라도 밀어 줄 생각인가?"

랭은 막대처럼 그 자리에 굳어진 니콜라의 모습을 한번 바라보고 유유히 욕실로 자취를 감추었다. 니콜라는 작은 소리로 숙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폭언을 퍼부었다.

겨우 아침 식사를 마련하여 침실로 가져가자, 공교롭게도 랭이 욕실에서 나오는 참이었다. 아직 물이 채 마르지 않아 윤기가 나는 몸에 타월 한 장을 둘렀을 뿐이었다. 니콜라는 당황하여 주방으로 도망쳤다. 나를 하찮은 가정부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옷을 갈아입었으리라 생각되는 때를 기다려 니콜라는 쟁반을 들고 주방을 나섰다. 침실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곧 대답이 있었다.

"들어와요."

그러나 문을 연 니콜라의 눈에 띈 것은,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빗고 있는 랭이었다.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니콜라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쟁반은 침대 위에 놓아둬." 랭의 음성은 아직 쉬어 있었으나, 어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아져 있었다. 침대 곁의 테이블에는 막 뜯어놓은 휴지 상자가 있었다. 하루 동안에 한 상자를 모두 써 버린 모양이었다.

"약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야." 랭은 돌아서서 쟁반을 침대 위에 놓고 있는 니콜라는 바라보았다.

니콜라가 머리를 들자, 키가 크고 건강한 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니콜라는 기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왜 이렇게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일까?

"가운은 어떻게 하셨어요?"

니콜라가 빠른 말로 물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지?"

랭의 목소리는 웃음을 담고 있었다.

"니키는 남자의 나체를 보지 못했다는 말인가? 이건 유쾌한 일이로군!"

그 어투에 니콜라는 버럭 화를 냈다.

"어서 무엇이건 입으세요! "

"손 들었어. 니키는 숫처녀인 모양이군."

불같이 뜨거워져 방에서 뛰쳐나가려는 니콜라의 팔을 그의 억센 손이 잡아당겼다.

"놓으세요!"

니콜라는 붙잡힌 팔을 뿌리치려 하면서 상대방을 보려보았으나, 다음 순간 얼른 시선을 돌렸다. 드러나 보이는 넓은 어깨와 가슴. 지금까지 이처럼 훌륭한 근육의 소유자가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팔에도 넓적다리에도 근육이 불끈 솟아 있다. 랭은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무서운가?"

"아니오."

니콜라는 갸날픈 음성으로 거짓말을 했다. "다만 거북할 뿐이에요. 어서 놓아주세요!"

"내가 무슨 짓을 할 것 같은가?"

웃음을 띤 낮은 음성에 니콜라는 점점 더 화를 내며 몸부림쳤다. 랭의 또 다른 손이 니콜라의 턱을 받쳤다. 얼굴을 돌리려 했으나 억센 손이 떠받치고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랭은 허리를 굽히고 입술을 니콜라의 입으로 가져가 가볍게 키스했다.

"이제 됐어. 떨지 않아도 좋아, 끝났으니까."

랭이 손을 놓고 침대로 향하는 순간, 니콜라는 이미 침실에서 뛰쳐나가고 있었다. 주방으로 가서 몸을 벽에 기대었다. 얼굴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찬물로 세수를 하니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용기를 내어 침실로 돌아갔다. 랭은 식사를 끝내고 스웨터와 바지로 갈아입고 있었다.

"기분이 좀 나아졌나?"

니콜라가 대답대신 말했다.

"이제 회사에 돌아갈 시간이 됐으니 실례하겠어요."

"루치의 파티에는 동생과 같이 가도록 해. 나는 이번 주엔 정양할 생각이야."

니콜라는 아까의 일로 아직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채 회사로 향했다. 랭이 그런 식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손을 대려 하다니, 도대체 무슨 저의가 있어서일까? 혼자 맨션에 틀어박혀 있자니 지루해서 그러는 것일까? 하기야 본인이 엄살을 떠는 것같이 중병에 걸린 것은 아니니까 지루한 것도 당연한 일일 테지. 그렇더라도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성적 매력을 과시하다니, 무슨 남자가 그럴까? 니콜라는 랭에 대해, 그리고 비록 한순간이지만 상대가 하는대로 몸을 내맡긴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내일 파티에는 내 차로 가도록 하지, 아파트로 데리러 갈 테니."

그날 퇴근 시간에 앤드루가 말했다.

"동생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런던에 일주일밖에 머무르지 않겠다는데, 올라온 날부터 혼자 집을 지키게 하기가 안 돼서요."

"대환영이야." 앤드루가 기분좋게 승낙했다.

"동생도 혼자 사나?"

"아니에요, 벌써 결혼했는걸요."

"자매가 비슷하게 생겼나?"

"만나 보면 아실 거예요."

니콜라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를 닮은 맏딸과는 달리, 동생은 아버지 쪽의 혈통을 이어받아 금발이었고, 얼굴 생김도 전혀 달랐다. 눈빛이 약간 비슷한 것 외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이튿날 아침 캐롤라인은 그림 속의 귀부인같이 우아한 모습으로 열차에서 내렸다. 그 뒤를 따라, 아마 차 안에서 캐롤라인의 매력에 반해 버린 듯한 청년이 산더미 같은 짐을 안고 걸어나오고 있었다. 폼에서 언니의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기쁜 듯이 손을 흔들어 신호했다. 별볼일이 없게 된 청년은 그만 이것으로 일이 끝난 셈이었다.

"오래간만이구나, 캐롤라인."

니콜라는 동생에게 환영의 키스를 하면서도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이들 자매 가운데서 누가 런던의 일류회사에서 근무하는 여자이겠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열명이면 열 명 모두 캐롤라인을 가리킬 것이다.

"드디어 왔어...런던에! 어쩐지 꿈만 같아."

캐롤라인은 푸르고 큰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무얼 그러니, 기차로 겨우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살면서."

"그런 시골은 지겨워, 제대로 된 상점 하나 없는걸."

"네가 지금 입은 옷과 모자를 파는 정도의 가게라면 훌륭하다."

캐롤라인은 점잖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그런 시골이 살다 보니 따분해 죽겠어."

"데이비드는 잘 있니?"

캐롤라인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명랑하게 말했다.

"모처럼 런던에 왔으니까 있는 동안만은 마음껏 즐기고 싶어."

기쁜 듯한 동생과는 반대로 니콜라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캐롤라인은 파티 이야기를 듣자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지 알고 싶어 하며, 특히 루치의 아들과 앤드루에 대해서는 미주알고주알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나 마중을 온 앤드루를 보고 캐롤라인은 다소 김이 샌 모양이었다. 유부녀를 가까이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캐롤라인과 악수를 나누는 앤드루는 놀란 나머지 말도 안 나오는 형편이었다. 캐롤라인은 커피색 새틴 드레스로 갈아입고 있었다. 등이 깊게 팬 데다가 몸에 꼭 달라붙는 대담한 디자인, 아름다운 육체의 선이 더욱 돋보이고 있었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데이비드가 이런 옷인 줄 알면서도 사주었을까? 그리고 캐롤라인의 태도도 어쩐지 수상했다. 제발 옛날 같은 버릇이 되살아 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2년 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캐롤라인의 아름다움은 더욱 세련되어 있었다. 이런 아내를 거느리려면 데이비드가 아무리 돈을 벌어도 부족할 것이다. 니콜라의 마음에서는 여러 가지의혹과 불안이 교차했다.

니콜라는 동생처럼 화려하게 입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파티에 나갈 경우를 위해 사두었던 평범한 검정 옷을 입고 있었다. 노우슬리브로서 스커트 부분만이 자연스럽게 플레어로 되어 있었다. 보기 싫지도 않은 반면에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이런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여자한테 눈길을 보내는 남자란 없을 것이다. 하기는 니콜라는 그것을 노렸던 것이다.

앤드루는 두 사람에게 꽃을 사다주었다. 캐롤라인에게는 금빛 리본이 달린 크림색 카네이션, 니콜라에게는 은빛 리본으로 묶은 흰 카네이션이었다. 니콜라는 그것을 받아 얼른 머리에 꽂았으나, 캐롤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꽃을 드레스의 가슴에 달아 달라고 앤드루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그는 귀밑까지 빨개지면서 어색한 동작으로 미인의 요구에 따랐다. 캐롤라인의 냉랭한 표정으로 미루어, 그는 이 시점에서 숭배자 후보의 리스트에서 영원히 제외된 것처럼 보였다.

런던에서도 최고급 호텔이 루치가()의 파티 장소였다. 세 사람이 회장에 도착하자마자 조 루치가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노인은 캐롤라에 대해서는 애교 있는 미소를 던졌을 뿐, 곧 니콜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대가 아무리 미인이라도 랭 하일랜드의 일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투였다.

아들인 캐리는 아버지처럼 장사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교묘한 말로 정보를 알아내려는 노인을 겨우 쫓아 버린 니콜라의 눈에 띈 것은, 회장의 한쪽구석에서 사이좋게 잔을 기울이고 있는 동생과 캐리였다.

깜짝 놀라 그리고 가고 있을 때, 뒤에서 앤드루가 쫓아오며 오늘은 정말 멋진 차림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런 잠꼬대를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어서 그들을 떼어 놓아야지! 니콜라의 초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앤드루는 캐리와 한가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캐리는 앤드루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시선은 캐롤라인에게 못 박힌 채였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그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캐리의 행운도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갑자기 랭 하일랜드가 회장에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니콜라는 자기 바로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랭의 도착을 알지 못했다. 제발! 제발.....그가 아니기를!

그러나 두려운 마음으로 동생의 얼굴에 시선을 돌린 니콜라는 그 기도가 하늘에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니의 등뒤에 선 인물을 본 캐롤라인의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을 소개시켜 주지 않겠나?"

랭의 나직한 목소리가 니콜라의 등을 꿰뚫었다.

캐롤라인의 긴 속눈썹이 약간 움직였다. 생선을 앞에 둔 타일랜드 고양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니콜라가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잿빛 눈이 의미 있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니콜라는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랭은 처음부터 여기 올 생각이었던 것이다. 안정을 위해 불참하겠다고 한 것은 캐롤라인을 데려오게 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감기 정도를 가지고 소란을 떠는 것이 수상하다고는 생각했으나, 이런 계략이 있었다니!

니콜라가 무뚝뚝하게 소개를 끝내자, 랭은 성큼 앞으로 나서며 캐롤라인의 손을 잡았다. 랭이 평소보다 더욱 사나이답고 핸섬하게 보이는 것이 니콜라에게는 야속하기만 했다.

"당신이 그 미스터 하일랜드십니까?"

캐롤라인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언니가 나를 어떻게 말하던가요?"

랭은 흘끗 니콜라를 바라보고 웃고 나서 다시 캐롤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니콜라도 새삼스레 동생을 관찰했다. 지루해서 죽겠다고 역에서 말하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미인의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한 얼굴은 생생하게 빛나고, 랭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랭도 오래간만에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를 발견한 것에 기쁨을 나타내며 여심(女心)을 빨아들일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니콜라는 두 사람이 만나면 반드시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늦기 전에 그들을 떼어 놓지 않으면......!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3

무엇보다도 니콜라의 마음에 걸린 것은, 랭 하일랜드가 사태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캐롤라인을 상대로 잡담을 하면서도 니콜라를 한시도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려 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는 그녀를 보고는 빙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랭이 뛰어난 유머감각을 지녔다는 것은 니콜라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머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당사자에게는 전혀 즐거운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니콜라는 이날 처음으로 알았다. 이것 역시 자기가 뿌린 씨라고 니콜라는 생각했다. 랭이 캐롤라인에 대해 물었을 때, 이 사람에게 동생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을 표정에 나타낸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머리가 좋은 그는 캐롤라인이 매력적인 여자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니콜라가 동생을 감출 이유가 따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생이 뛰어난 미인이란 것을 왜 한 번도 말하지 않았나?"

랭은 단둘이 되자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니콜라를 나무랐다.

"유감이군요. 캐롤라인은 유부녀이므로 놀이의 대상이 되지 않아요."

니콜라는 일부러 유쾌하게 말했다.

"그래? 하지만 내가 상대하면 기꺼이 응해 줄 것 같던데."

니콜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억울한 일이지만 랭의 말은 옳았다. 캐롤라인이 랭을 만난 순간부터 완전히 떴다는 것은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머리 위에 <언제라도 좋아요>라는 네온사인을 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캐롤라인은 아직 세상을 몰라요." 니콜라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 따위를 상대하면 안 된다, 이런 말인가?"

잿빛 눈이 다시 웃으면서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니키는 지금까지 누구한테 청신호를 보낸 적이 있나, 아니면 나를 대하는 것같이 노상 <비매품>이란 신호만 내보이고 있나?"

"어떤 신호건 남에게 보인 기억은 없어요."

"아니, 그렇지 않아. 자기 일은 자신이 잘 알고 있을 텐데."

이때 캐리 루치가 가까이 와서 랭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니콜라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캐비어 맛을 보지 않았을 테죠? 나와 같이 가서 의견을 들려주겠소?"

랭이 니콜라의 가는 허리에 팔을 돌리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미 배가 부른 모양일세."

부드러운 말에 더 이상 말을 걸 여지가 없었다.

캐리의 아버지가 아까부터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랭이 혼자 있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으나, 상대가 비서를 한시도 곁에서 떠나게 하지 않아 안타까운 듯했다.

이에 캐리는 비상 수단을 썼다. 니콜라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녹아들 듯한 미소를 보냈다. 보통 여자라면 이것으로 넘어가고 말 것이다.

"한 입이라도 좋으니 캐비어 맛을 봐 줘요, 니키."

캐리는 니콜라의 손을 잡고 살며시 끌어당겼다.

니콜라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으나 겨우 참았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싫어요."

점잖게 니콜라가 사양했다.

"그러지 말고 자아, 니키."

캐리는 손에 힘을 주며 니콜라에게 재촉했다. 랭도 손에 힘을 주었다. 니콜라가 쳐다보니 빈정거리는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니콜라는 그를 화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캐리의 권유에 응하고 싶었다. 그녀의 눈에 떠오른 반항의 빛을 보고 랭은 빙긋 웃었다. 충동에 몸을 맡기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 라는 경고의 신호였다.

아들의 서투른 수완에 안달이 난 루치 노인이 가까이 왔다.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 니콜라?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니까."

노인의 가세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미 실컷 먹어서 한 입도 더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니콜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유감이군요."

캐리는 미련이 남은 듯, 다시 예의 미소를 보냈다.

", 하지만 이렇게 샴페인을 마시고 있지 않아요? 정말 훌륭한 샴페인이에요."

마침내 캐리도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갔다. 노인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10여 분이나 더 서성거리고 있었다. 노인이 좀 더 다루기 쉬운 상대를 찾아 장소를 옮기자, 니콜라는 몸을 비틀어 랭의 손에서 벗어났다.

"캐리 루치는 니키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더군?"

랭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캐리 루치는 속이 깊은 사람입니다."

니콜라는 캐리라는 사나이를 잘 알고 있었다. 매력적이라는 둥 그 싸늘한 목소리가 어떻다는 둥 하지만, 본심은 잠자리를 같이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니키는 캐리에게 마음이 있나?"

갑자기 온 몸이 뜨거워졌다. 별로 알콜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웬일일까? 니콜라는 얼굴을 돌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핸섬한 사람이에요."

대답이 없었다. 놀라서 머리를 들었더니 랭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캐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지?"

니콜라는 온몸이 더욱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캐리와 몰래 데이트라도 하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신임하여 기밀을 요하는 사항까지 맡기고 있는 비서가 라이벌 회사의 사장 아들과 만나고 있다면, 아무리 랭이라도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랭이 예리한 음성으로 다그쳐 물었다.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지? 그 녀석은 니키의 애인인가?"

분노가 니콜라를 제정신으로 돌아가게 했다.

"아니에요. 앞으로도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캐리 루치 같은 플레이보이는 제 취미에는 맞지 않아요."

굳어졌던 랭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비꼬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여자의 마음이란 알 수 가 없거든. 니키 같은 타입에게는 아마 앤디가 잘 맞을 거야."

"그건 어떤 타입인가요?"

"착하고 가련하며 때 묻지 않은 아가씨지."

랭의 조소에 니콜라는 버럭 화가 치밀었다.

"앞으로 틀림없이...." 말하다가 니콜라는 당황하며 다음 말을 끊었다.

"앞으로는 틀림없이, 그 다음은 뭐지?"

".............."

"그것도 니키가 퇴직할 때까지 미루겠나? 궁금해서 기다릴 수가 없는걸." 랭은 니콜라가 글래스에 남아있던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켜는 것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이것만은 잊지 말아야 해. 루치네 젊은 녀석은 내 비서로서의 니키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야. 그 녀석에게 마음을 허락하거나 해서는 안 돼."

"저도 그만한 안목은 있어요!"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역시 여자니까. 여자란 그 친구같이 매끈하게 생긴 애송이한테는 약하거든."

"저는 달라요."

"어떤 타입을 좋아하나?"

랭은 흥미있다는 듯이 니콜라의 스마트한 전신에 시선을 보냈다.

"역시 앤드루 같은 타입이야? 그놈은 언제나 니키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점심도 같이 하러 다니더군. 앤디가 니키의 이상적인 타입인가?"

니콜라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아직 잠자리를 같이한 것 같지는 않더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랭의 표정이 니콜라의 비위에 거슬렸다.

"사장님 머릿속에는 그런 것밖에 없나요?"

잿빛 눈에 묘한 광채가 서렸다.

"그렇다면 앤디와 니키는 그 이상의 관계라는 말인가?"

굳어져 있는 랭의 음성이 니콜라를 긴장시켰다.

단순한 불장난이라면 상관없으나, 하일랜드 가문의 남자가 비서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나 생각하는 것일까?

니콜라는 가슴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분노를 필사적으로 누르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런 것은 동생한테 직접 물어 보세요."

", 그렇게 하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한 랭은 드레스 속에 감추어진 몸을 감상하는 듯한, 그 무례하기 짝이 없는 시선을 니콜라에게 쏟아 부었다. 잿빛 눈이 흰 목덜미에서 검은 드레스를 따라 밑으로 내려 갔다. 겨우 시선을 얼굴로 돌린 그는, 분연히 노려보고 있는 니콜라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니키의 단단한 방벽을 함락시키려면 앤디 녀석도 꽤 힘이 들겠는 걸!"

니콜라는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유머 감각을 끌어 모았다.

여기서 자제심을 잃는다면 상대방을 즐겁게 할 뿐이다. 애써 명랑한 표정을 지으며 니콜라는 말했다.

"사장님도 역시 예상이 빗나갈 때가 가끔은 있을 거예요."

"되도록 그런 일이 없도록 하고는 있지만........"

랭은 유쾌한 듯이 말하고는, 지나가는 웨이터의 쟁반에서 잔을 집어 들었다. 흰 커프스 속에서 억센 손목과 털이 드러나 보였다. 니콜라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앤드루가 있었다. 이쪽으로 오고 싶으나 형의 허락이 없기 때문에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랭은 동생을 비꼬듯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니콜라에게 말했다.

"불러 줄까?내가 휘파람을 불면 그는 달려올 거야."

일부러 이런 데서 자기 힘을 과시하려는 랭에게 니콜라는 비위가 상했다. 이 사람은 동생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앤드루는 랭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형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는데도.

"저 역시 휘파람쯤은 불 수 있어요."

니콜라는 이렇게 말하고 랭 곁을 떠났다. 앤드루가 기쁜 듯이 다가왔다. 니콜라는 등 뒤로 랭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니콜라가 깨닫고 보니 랭은 캐롤라인과 같이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의미 있는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니콜라는 가슴이 섬뜩했다. 캐롤라인의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들고 푸른 눈은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거든 언제든지 말해요, 내가 바래다 줄테니까."

앤드루가 말했다.

"고마워요. 가능하다면 돌아가고 싶지만, 그래도 될 까요?"

두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랭에게 보냈다. 니콜라가 여기 온 것은 직무 때문이기도 했으므로 랭의 허락 없이는 돌아갈 수 없었다.

"내가 가서 형에게 물어 볼까?" 하고 앤드루는 말했으나 마음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인과 즐기고 있는 자리를 방해당하고 좋아할 랭이 아니므로, 마음 약한 그가 망설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제가 캐롤라인을 데려오겠어요."

니콜라가 말하자 앤드루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캐롤라인은 언니가 가까이 오자 약간 이맛살을 찌푸렸다. 랭도 돌아보았다. 니콜라는 동생에게 돌아갈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앤드루가 우리를 바래다주신댔어."

"니키나 앤디에게 바래다 달라고 해. 그리고 언제 돌아가도 좋아." 랭이 말했다.

갑자기 웃는 낯으로 돌아간 동생을 보고 니콜라는 히스테릭한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잘 가, 니키."

랭이 속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좋아, 언니. 먼저 자."

캐롤라인이 언니의 시선을 피하면서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아침 열쇠를 받았으니 열고 들어갈 수 있어."

"알았어."

니콜라는 이제 끝장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주착없이 소란을 피울 수도 없었다. 캐롤라인도 그것을 알고 배짱을 부린 것이다. 앤드루에게 돌아가던 니콜라는 도중에서 캐리한테 붙들리고 말았다. 니콜라는 랭에 대해 분노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웃는 낯을 캐리에게 돌렸다.

"동생은 굉장한 미인이군요!"

어딘지 불만스러운 투였다. 랭과 캐롤라인의 친밀한 교제를 관찰하고 있던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요?" 니콜라는 가볍게 양미간을 찌푸렸다.

이것을 묘하게 해석한 듯, 캐리가 한 걸음 다가와서 니콜라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물론 니키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속이 들여다보이는 칭찬에 니콜라는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고마워요, 캐리."

캐리는 몹시 기뻐했다. 아무리 접근하여 해도 냉담한 태도밖에 취하지 않는 처녀가 있다는 것은, 허영심이 강한 남자에게는 별로 유쾌한 일이 못되기 때문이다. 캐리는 더욱 바싹 몸을 기대어 왔다.

"하일랜드 밑에서 일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나요, 니콜라? 그는 니키를 충분히 평가하고 있지 않아요."

이 남자도 어쩌다 진실을 말하는 일이 있구나, 하고 니콜라는 생각했다.

"니키만큼 아름답고 머리가 좋은 여성이라면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일랜드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는 생활을 청산하고 좀 더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 볼 생각은 없나요? 니콜라 역시 비서로 평생을 보낼 생각은 아닐 테죠?"

캐리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루치 노인의 지시임에 틀림없었다.

"비서로 일생을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캐리는 이 말에 용기를 얻은 듯,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니콜라의 팔을 붙들었다.

"내일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겠소?"

니콜라가 대답하기 전에 싸늘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니키, 아직 돌아가지 않았나?"

언제 왔는지 랭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캐리는 낭패한 듯 랭을 쳐다보았으나, 갑자기 묘안이 떠올랐는지 다시 니콜라에게 말을 걸었다.

"집에까지 바래다줘도 되겠죠, 니콜라?"

"앤드루가 데려다 주기로 했지." 랭이 말했다. 그러고는 범인을 끌고 가는 형사처럼 니콜라의 팔꿈치를 잡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걱정스러운 듯이 기다리고 있는 앤드루 앞에 오자 랭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집으로 바래다줘."

니콜라가 쳐다보니 그의 잿빛 눈이 강철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럼, 다음 주에 회사에서."

랭은 싸늘하게 내뱉고는 홱 몸을 돌려 캐롤라인에게 되돌아갔다. 니콜라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려 했다. 어떤 수단이라도 좋다. 어쨌든 저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지금 당장!

니콜라는 이마에 손을 대고 비틀거렸다. 앤드루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니콜라! 괜찮아?"

니콜라는 눈을 감은 채 힘없이 앤드루에게 기대었다.

그러고는 받쳐 들려는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와 바닥에 쓰러지면서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갑자기 몸이 공중에 떴다. 억센 두 팔이 니콜라의 몸을 밑에서 받쳐 들고 어디론가 운반해 갔다. 눈은 감고 있었으나 밝은 방에서 어두운 곳으로 나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바깥이었다. 사람이 붐비는 방안에서 나오니 밤공기가 시원했다. 니콜라는 자기가 누구한테 안겨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랭은 자기 차의 뒷좌석에 니콜라를 뉘고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 그녀의 심장은 맹렬한 기세로 뛰기 시작하고 온몸이 뜨거웠다. 땀으로 젖은 이마에 큼직 한 손이 놓였다.

"열이 있어, 맥도 상당히 빠른 것 같아." 놀란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어째서 그럴까? 의사에게 보이는게 좋지 않을까?"

이 목소리는 앤드루의 것이었다.

"감기가 덜 나아서 그럴 테지. 오늘 밤엔 외출을 삼가야 했는데."

다시 랭이 말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랭이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거든."

아마 앤드루가 비난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던 모양 이다.

"아파트에 혼자 있게 할 수는 없어, 누가 붙어 있어야지."

한참 만에 앤드루가 입을 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캐롤라인의 음성이 들렸다.

"걱정없어요, 내가 곁에 있겠어요."

니콜라는 하마터면 환성을 지를 뻔했다.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앤드루의 커다란 음성이 캐롤라인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만일에 열이 더 오르면 곧 의사를 부르도록 하세요. 정신을 잃다니, 니콜라답지 않은 일이니까요."

"확실히 평소의 그녀답지 않군."

의외로 온화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자, 그는 곧 몸을 굽혀 니콜라를 관찰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기절한 체하는 연극을 계속했다. 캐롤라인을 무사히 아파트에 데려갈 때까지 안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앤디, 네가 운전해."

랭은 이렇게 말하고 자신은 니콜라 곁에 앉았다. 캐롤라인이 조수석에 앉자 문이 닫히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 급커브를 돌며 도로에 나오는 순간, 니콜라는 그만 시트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그러한 니콜라의 몸을 랭의 팔이 꼭 붙들었다. 무의식을 가장하고 있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니콜라의 몸이 천천히 옆으로 뉘어져, 드디어 얼굴이 랭의 와이셔츠에 닿고 말았다. 니콜라는 크게 당황했다.

랭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니콜라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마음과 그 손을 뿌리치고 싶다는 충동의 틈바구니에 있는 니콜라의 귀에 랭의 심장의 고동 소리가 규칙적으로 전해졌다.

"언니는 괜찮을까요?"

캐롤라인이 뒷좌석의 두 사람을 돌아다보았다. 언니가 쓰러진 것을 보고 그녀는 충격을 받고 있었다. 지금까지 도움을 받거나 신세를 진 것은 항상 자신이었고, 따라서 언니는 항상 냉정, 침착하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 믿고 있었다. 언니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오늘 밤의 모험쯤은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나, 랭이 언니를 꼭 부둥켜안고 있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언니는 정말 왜 그럴까요?" 그녀는 약간 초조해 하면서 물었다.

"괜찮아요, 죽지는 않을 테니까."

랭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 지금까지 허리를 받치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면서 가슴의 융기에 닿으려 했다. 몸을 깊이 숙였는지 숨결이 니콜라의 머리에 와 닿았다.

캐롤라인은 앤드루과 이야기하느라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니콜라는 몰래 눈을 살며시 떠 보았다. 불과 몇 센티 안 되는 곳에 랭의 얼굴이 있었다. 입이 약간 벌어지고 눈은 즐거운 듯 빛을 발하고 있었다.

랭은 니콜라의 연기를 간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까부터 하고 있는 괘씸한 행동도, 이쪽에서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정말 비열하고 징그러운 짐승 같은 남자! 어떤 기회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은 과연 이 사람다운 짓이다. 깊이 생각지도 않고 순간적인 아이디어를 곧바로 행동에 옮긴 자기도 나쁘다면 나쁘다. 랭 하일랜드의 의사에 반하여 무슨 일을 하려면 미리 치밀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을 것이다. 마치 그것은 장기를 두는 것과 같아, 말을 움직이기 전에 상대의 수를 충분히 읽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 순간, 니콜라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랭의 손이 가슴의 부드러운 언덕에 덮여 왔다. 이것도 고의로 하는 짓이리라. 니콜라는 방금 정신이 든 듯이 눈을 번쩍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기분은 좀 어때?"

걱정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는 듯 한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니콜라는 랭의 품에서 빠져나와 똑바로 앉았다. 캐롤라인이 돌아보았다.

"열이 있는가봐, 얼굴이 빨간 것을 보니. 기분이 언짢으면 그렇다고 진작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모처럼 즐거워하는 마당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서 그랬지, 니콜라?"

자못 친절한 목소리로 랭이 말했다.

니콜라는 여기 대답하지 않고 이마에 손을 대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걱정을 시켜서 미안해, 캐롤라인. 완전히 나은 줄 알았는데, 아직 감기가 덜 나았던 모양이야."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운 앤드루는 니콜라에게 손을 빌려 주기 위해 운전석에서 뛰어내렸으나, 여기서도 형한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랭은 깨지는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니콜라는 가만히 차에서 내려놓았다.

"방에 데려다 주지."

니콜라는 차에 매달렸다.

"혼자서도 걸을 수 있어요."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야. 다시 쓰러지는 날엔 그 책임이 우리한테 돌아와." 랭은 말하기가 바쁘게 니콜라를 안고 걷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랭의 눈에 깃들인 조소를 보고 니콜라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무언지 모를 기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연기가 아니라, 정말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몸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랭은 마치 전혀 무게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로 니콜라의 방 앞에까지 걸어갔다. 캐롤라인이 문을 열었다. 랭은 그대로 방안에 들어가 니콜라는 침대에 뉘고 나서 검은 드레스가 뚫어질 정도로 강한 시선을 쏟아 부었다.

"오늘 밤엔 외출하지 않았어야 하는 걸 그랬어."

캐롤라인도 안으로 들어와 니콜라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말했다.

"탓하지는 말아요." 랭이 타이르듯 말했다.

"언니도 이제는 무리를 하지 않을 거야. 오늘 밤엔 좋은 공부가 되었을 거야. 그렇지, 니콜라?"

큰 공부가 되었어요- 니콜라는 대답 대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약간의 허점만 보여도 그것으로 마지막이다. 이 사내는 대번에 덤벼드는 것이다. 차 안에서의 행위는 캐롤라인과의 사이를 떼어 놓은 보복일 것이다. 앞으로는 랭 하일랜드에게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할 기회를 만들어 주지 말아야지

 

4

월요일 아침, 랭의 사무실에는 앤드루가 있었다. 랭은 어제 에든버러 지사에서 긴급 사태가 발생하여 출장 갔다는 것이었다. 해결되려면 삼, 사일이 걸릴 것이라고 앤드루는 말했으나, 되도록 오래 머물렀으면 하고 니콜라는 바랬다. 어쨌든 캐롤라인이 랭과 재회할 위험성이 당분간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얌전히 있을 동생이 아니란 것을 니콜라는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보고 알게 되었다. 아파트는 비어 있었고, 밤늦게야 돌아오겠다는 동생의 메모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니콜라는 절망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캐롤라인도 어린아이가 아니다. 더구나 이성 관계에 있어서는 언니보다 훨씬 더 경험이 풍부하다. 하지만 그녀의 경우, 과거의 경험이 전혀 약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랭의 출장도 사실은 거짓말이어서, 두 사람은 이 런던 어딘가에서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당사자인 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용건은 그 보고서의 독촉이었다. 랭은 보고서가 완성 되는 즉시 연락하라면서, 체류중인 호텔의 전화번호를 니콜라에게 메모시켰다.

니콜라는 전화를 끊은 뒤, 충동적으로 수화기를 다시 들고 메모에 적힌 에든버러의 번호를 돌렸다. 호텔의 교환수가 전화에 나왔다.

"그 호텔에 숙박하신 미스터 하일랜드의 방에 연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호출 신호가 몇 번 울렸다.

"여보세요?"

확실히 랭의 목소리였다.

니콜라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이것으로 우선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면 캐롤라인은 어디서 누구하고 같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재미도 없는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니콜라의 귀에 동생과 그 동반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캐리였다. 니콜라는 자신의 불찰을 후회했다.

캐롤라인의 안내로 거실에 들어온 캐리는 긴의자에 앉아 있는 흰 스웨터와 진즈 차림의 니콜라는 보자 얼른 인사를 했다.

"몸은 괜찮아요? 그 때는 정말 놀랐어요. 아버지도 걱정하셨어요."

"고마워요. 보다시피 완전히 나았어요. 캐롤라인, 커피라도 대접하지 그러니? 드시겠어요, 캐리?"

", 물론입니다."

캐리는 기쁜 듯이 말하고 니콜라 곁에 앉아 호기심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처음 오셨던가요? 저 녹색 가구가 나로서는 제일 마음에 드는 거예요. 감상을 들려주시겠어요?"

"훌륭하군요."

성의 없이 대답한 캐리는 시선을 곧 니콜라의 얼굴로 돌렸다. 니콜라도 사교적인 미소를 보이면서 새삼스레 상대방을 관찰했다.

얼른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청년인데, 어째서 이처럼 경박한 인상을 주는 것일까? 동정심이나 윤리관 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는 랭도 마찬가지였으나, 두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에는 어쩐지 저항감이 느껴졌다. 랭의 경우 사업적인 일에는 상당히 강인한 면이 있지만, 비열한 행위나 부정한 수단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엄한 규율을 부과하고 있다. 자신의 발언과 체결한 계약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진다. 반면에 캐리는 그런 귀찮은 모럴에는 구애받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 어떠냐..이것만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다. 사업상의 약속도 이 사람 앞에서는 휴지와 마찬가지다. 결국은 인격의 차이 일 것이다. 니콜라는 상대의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캐롤라인을 꾀어 같이 관람하고 온 뮤지컬 코미디에 대해 열심히 지껄이는 캐리도 내심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며 웃고 있었다. 오늘 밤 이 여자의 동생에게 말을 건 것은 상당한 수확이다. 섹시한 금발 미인과 데이트를 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 하일랜드의 비서에게 접근하라.'는 평소의 아버지의 지시에도 한걸음 다가선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약간 냉담한 면이 있는 이 미인을 유혹해 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번 접근해 보았지만 본 체도 않는 데는 약간 애가 탔으나, 오늘을 계기로 이 아가씨도 나라는 사람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른다.

커피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온 캐롤라인의 토라진 얼굴을 보고 니콜라는 다시 피곤을 느꼈다. 캐리과 단둘이 즐겁게 보내려고 생각했었는데, 깊이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언니가 깨어 있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정말 곤란한 동생이다.

앞으로 닷새나 더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했다.

"뮤지컬은 재미있었니?"

니콜라가 애써 명랑을 가장 하고 동생에게 물었다.

"재미있었어."

캐롤라인은 두 사람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모양 좋게 생긴 다리를 꼬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분명히 캐리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렇게 한 것이리라.

"런던은 역시 좋은 곳이야.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너무 많은 것은 좋지만, 제발 실행에 옮기지는 말아 주었으면.... 니콜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 했다.

"이제 그만 실례해야지."

잠시 후,만류하기를 바라는 태도로 캐리가 일어섰다. 니콜라도 곧 뒤따라 일어서서 현관으로 안내하며 상냥하게 전송했다. 캐롤라인은 완전히 기분을 잡친 즛 전송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귀찮게끔 간섭하지 말아 줘."

캐롤라인은 언니가 거실로 돌아오기가 바쁘게 물고 늘어졌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언니의 간섭이 지긋지긋해 못 견디겠어."

"여기 온 뒤 데이비드한테는 전화했니?"

니콜라는 못 들은 체하고 커피 잔을 치우며 질문했다.

"누가 전화 따윌 하겠어! 데이비드도 이젠 지긋지긋해. 하지만 그 사람이나 언니가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내가 좋을 대로 하겠어."

니콜라는 그릇들을 주방에 갖다 두고 다시 돌아오며 물었다.

"데이비드와 무슨 일이 있었니?"

"내가 잘못 생각했었어."

씁쓸하게 캐롤라인이 말했다.

"데이비드는 나보다 언니하고 결혼하는 게 좋을 뻔 했어. 어차피 나는 아내 될 자격이 없어. 하지만 누구라도 가끔은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가 있어. 이것을 그

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데이비드가 원하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가정부야. 더구나 나보고 더 굵어져야 한다는 거야. 농담도 아니고, 정말 나는 못 참겠어."

"굵어지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

"몇 달 동안이나 풍선처럼 배를 불룩하게 하고 있으라니, 그런 것은 못하겠다는 말이지 뭐!"

캐롤라인은 일어서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아기도 싫어. 하루 종일 빽빽 울고 있는 꼴을 어떻게 보겠어?"

그러고는 캐롤라인은 문을 탕 닫고 자기 침실로 가 버렸다. 혼자 남은 니콜라가 이제서야 짐작하게 되었다.

남편은 아이를 원하는데 아내는 싫다고 한다. 이것이 그녀가 런던에 온 이유이기도 하고, 그토록 놀아나고 싶어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캐롤라인은 아직 어머니가 될 자신이 없어, 그 때문에 남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이다.

이튿날 아침, 니콜라는 회사에서 데이비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캐롤라인은 어떻게 지냅니까? 그곳에 간 뒤 한마디 소식도 없어 모르겠지만, 아마 즐겁게 지내고 있을 테지요?"

니콜라는 그가 애써 분노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니콜라는 이 동생의 남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 악몽과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이므로 그가 비록 드라큘라의 친구였다 해도 감사해야 할 것이지만, 데이비드는 워낙 호감을 갖게 하는 청년이었다.

결혼 전에 몇 번이나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동생의 성질을 걱정하는 언니의 마음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니콜라는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기 문제로 말다툼을 했나 보죠?"

데이비드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캐롤라인이 그런 말을 하던가요?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요? 집도 있고 수입도 충분하니 아버지가 될 자격은 있지 않을까요?"

"그애는 겁을 먹고 있어요."

"? 죽기라도 하는 줄 알고 있나요? 우리 누님은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만 여간 건강하지 않아요."

"캐롤라인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릴 수 없겠어요?"

"2년이나 기다렸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그녀는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지금 같아선 희망이 없어요. 나는 아이가 없는 가정이란 생각할 수도 없어요. 니키,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캐롤라인이 없는 편이 더 참기가 수월하겠어요?"

오랜 침묵이 흐른 뒤 데이비드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내 독단으로 말해본 것뿐이에요. 지나친 말을 해서 미안해요."

"처형은 아무 근거 없이 함부로 말할 사람이 아니에요. 도대체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음성이 분노로 떨리기 시작했다.

"별로……. 하지만 약간 들떠 있는 것 같아서 나로서도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아요."

"그렇군요."

아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데이비드는 상상하도고 남는 모양이었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굳이 집을 나가겠다면 나도 억지로 말리지는 않겠어요. 현재와 같은 생활은 청산해야 할 것 같아요. 날마다 외식을 하고, 노상 파티에나 참석하는 생활에는 이제 진력이 났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엄청난 옷값을 치러 줄 생각도 없습니다. 그녀에게 분명히 이야기해 주세요. 남의 돈을 자유로이 쓰는 것만이 결혼 생활이라 생각한다면, 좀 더 돈이 많은 남자를 찾으라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 니콜라는 이마를 찌푸렸다. 사태는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모양이었다. 부부 사이에는 자식 문제 말고도 여러 가지 의견 대립이 진작부터 있었던 듯 했다. 동생의 성질로 보아 지루하거나 마음이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들이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자기 주머니가 비는 것도 아니므로 마음놓고 쇼핑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참을성 있는 남편이라도 인내력의 한계를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어떻게...... 니콜라는 연필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만일 캐롤라인이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있을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일주일 정도 묵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지만, 언제까지나 같이 있는 다면 이편에서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본다면, 동생은 방값이나 식대 등 사소한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언니가 모두 해결할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할 것이다. 또한 가사를 돕는다든지 하는 기특한 일은 캐롤라인이 생각할 리가 없고, 몸치장하기에만 바쁠 것이다. 모양만 아름다울 뿐인 기생충 같은 존재다. 데이비드의 노고도 이해는 되지만, 그는 남자인 만큼 한 가지는 아내에게서 얻는 것이 있을 것 이다. 이에 대해 이쪽에서는 아무런 이득도 없고, 더구나 금전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고생마저 짊어지게 된다. 역시 미안한 일이지만 데이비드에게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지게 하는 도리밖에......

그날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니콜라 앞에 랭이 나타났다. 왜 점잖게 스코틀랜드에 머물러 있어 주지 않은 것일까?

"내가 돌아와서 그렇게 기쁜가?" 랭은 니콜라의 표정을 보고 통쾌한 듯이 말했다.

"저쪽 사건은 해결되었습니까?"

"됐지."

그렇지 않으면 여기 있을 까닭이 없지 않느냐는 투였다. 랭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벌써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났군 그래. 무슨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겼어?"

"아닙니다, 일은 만사가 순조롭습니다."

니콜라는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골치 아픈 일은 여기가 아니라 아파트에 있는 것이다.

"그럼 어째서 퇴근하지 않았지?"

문이 열리며 앤드루가 들어왔기 때문에 니콜라는 대답하는 수고를 덜었다. 형을 보자 앤드루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형이 돌아오다니, 우리는 전혀 몰랐는걸."

"우리?"

랭은 고개를 돌려 니콜라가 입고 있는 빨간 드레스는 빤히 쳐다보았다. 니콜라는 바로 10분 전에 문을 걸고 이 옷으로 갈아입었던 것이다.

"어디 갈 데가 있나보지?" 랭이 물었다.

대답은 앤드루가 대신 해주었다.

"남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데이비드슨이 저녁에 초대해 주었어, 형이 그들에게 소개한 바로 그 클럽에서."

"데이비드슨은 그 클럽에서 배운 도박 맛을 못 잊는 모양이군. 니키도 도박을 하나?"

"공교롭게도 호주머니가 비어서 저는 사양하겠어요."

니콜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급료는 결코 적지 않을 텐데."

랭이 농담을 하고 동생한테 시선을 옮겼다.

"니키에게 칩을 나누어주도록 해. 그리고 데이비드슨에게 안부를."그로부터 불과 두 시간 후, 니콜라는 가장 두려워했던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자기네가 있는 메이페어 클럽에 랭이 캐롤라인과 같이 나타났던 것이다. 앤드루와 동행한 것은 괜찮다고 치더라도, 남아프리카에서 온 손님 앞이므로 쫓아가서 두 사람을 떼어 놓을 수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동생과 랭은 다시 어디론가 나란히 가 버렸다.

앤드루와 데이비드슨은 도박에 정신이 팔려 두 사람을 보지 못한 듯싶었다. 내기에 취미가 없는 니콜라는 테이블 위의 동정에 멍하니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머리 위의 샹들리에가 꺼지고 넓은 클럽 안이 갑자기 어두컴컴해졌다. 벽에 장치한 조명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던졌다. 익숙한 솜씨로 칩을 긁어 모르는 사람, 군침을 삼키며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 이상한 열기..... 이런 곳에 오래 있으면 자기 마음까지 거칠어질 것 같았다.

니콜라는 살며시 앤드루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머리가 아파서 먼저 실례하겠어요. 택시로 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내가 바래다주지."

하고 앤드루는 말했으나 사실은 미련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니콜라가 남아서 데이비드슨의 상대를 해 달라고 하자 순순히 응했다.

데이비드슨은 도박에 열중하고 있는 마당에 냉수를 끼얹으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인사를 했을 뿐이다.

열쇠로 문을 열고 아파트 안에 들어가니 캄캄하고 조용했다. 캐롤라인은 잠들었거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제발 후자의 경우가 아니었으면...... 니콜라는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침실 앞에 서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안에서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실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니콜라의 발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스탠드의 불이 희미하게 비치는 실내에서 캐롤라인 이 긴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깃이 넓게 트인 드레스가 반쯤 벗어져 있는 것은 알겠으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랭의 머리가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랭은 키스를 중단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니콜라는 송장처럼 핏기가 가신 얼굴로 소리쳤다.

"나가 주세요!"

캐롤라인은 긴의자에서 일어나 벗겨지려는 드레스를 끌어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니키!" 언니가 대답을 않자, 그녀는 손을 입에 대고 흐느끼면서 니콜라의 곁을 빠져 침실로 달려갔다.

랭은 흩어진 머리를 매만지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동생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야. 누구하고 무엇을 하든 니키와는 관계가 없을 텐데."

"어서 나가세요!"

"나한테 그런 말버릇을 못 써."

"내 집에서 어떤 말을 쓰든 그것은 자유에요!"

"하지만 이렇게 떠들어대지 않아도 이야기는 할 수 있어. 니키는 도대체 누구 부탁으로 동생의 도덕 선생이 됐지?"

"여기가 어딘 줄 아세요? 내 아파트에요!"

니콜라는 웃옷을 입고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는 랭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니콜라의 기세에 랭도 놀란 모양이었다.

"마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처녀 같군."

"그래도 당신 같은 치한보다는 나아요. 당신이 다른 여자와 무슨 일을 하건 아무 상관이 없지만, 내 동생에게만은 손을 대지 못하게 하겠어요!"

물어뜯을 듯 이 말해 버리고, 니콜라는 홱 등을 돌렸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도망칠 생각인가?"

랭이 니콜라의 손을 잡고 가지 못하게 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은 누군데요? 나는 당신에게 버림받은 여자들의 뒤치닥거리에 진력이 났어요. 하지만 캐롤라인만은 한사코 지키겠어요."

니콜라는 보기에도 무서운 시선을 랭에게 던졌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어디가 좋아서 그러는지 모르겠군요. 나 같으면 차라리 코브라와 잠자리에 드는 편이 낫겠어요."

"허어, 그래?" 랭의 눈이 험악하게 빛났다.

니콜라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으나 손을 붙들렸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

"이 깨끗한 체하는 암여우야! 용케도 남한테 설교를 하려 드는군! 급료는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라고 주는 게 아니야. 지시받은 일이나 하고 다른 일엔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해. 그것이 싫다면 다른 일자리를 찾으란 말이야!"

"잘 알았어요! 당장 내일부터 그렇게 하겠어요!"

"지금 말을 잊지 말아."

랭은 낮은 음성으로 엄숙하게 말하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등을 돌렸다. 복도를 쾅쾅 울리며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니콜라는 심한 구토가 일어났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그 소리가 니콜라의 전신을 떨게 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말 기절할 것 만 같았다. 조심스러운 발소리를 내며 캐롤라인이 나타났다. 레이스로 된 네글리제를 통해 진주와도 같은 살이 비쳐 보였다. 지금까지 울고 있었던 듯했다. 예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눈물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니콜라가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데이비드에게는 비밀을 지켜 주겠지?" 캐롤라인의 목소리에는 아직 울음이 섞여 있었다.

니콜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용암처럼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역겨움. 캐롤라인의 사랑스런 핑크빛 입술에 시선이 간 순간, 니콜라는 아까 문을 열었을 때의 광경을 상기했다. 저 입술에 랭이......

"나는 별로....."

캐롤라인은 흐느껴 울면서 이야기 했으나, 별로 어떻다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내어서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니콜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얼어붙을 듯한 눈으로 동생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바탕 울고 난 캐롤라인은 눈물을 닦으면서 놀라는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언니의 이런 태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노했다가도 눈물을 보는 순간 달려와서 위로해 준 언니였는데, 이번만은 달랐다. 캐롤라인은 자기가 좀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말없는 애원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어느 정도 깊어졌니?"

니콜라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키스를 했을 뿐이야."

캐롤라인은 입술을 깨물면서 모깃소리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뿐이라고? 너는 유부녀가 아니냐? 그 사실을 잊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지?"

"데이비드에게는 말하지 말아 줘, 언니!"

캐롤라인은 그녀 특유의 애처로운 표정으로 애원하듯 언니를 쳐다보았다. 지난 22년 동안 몇 번이나 캐롤라인을 위기에서 구해 준 그 표정이었으나, 오늘 밤만은 효과가 없었다.

"그에게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

니콜라가 분명하게 말했다.

캐롤라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죽였다. 그러한 동생의 심중을 니콜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단순한 위협인지 또는 진심인지 알 길이 없어 불안해하는 것이리라. 어렸을 때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스스로 불속에 뛰어들었다가 화상을 입게 되어서야 겨우 후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스런 얼굴이 캐롤라인에게는 오히려 재앙이 되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귀여움을 받다 보니 저도 모르게 버릇이 없고 상식 밖의 여자가 된 것이리라. 독신 시절의 꿈을 다시 한번 실현시켜 보려고 런던에 왔으면서도 데이비드에게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뻔뻔스런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 말하겠다는 것은 거짓말이지, 언니? 진심으로 말한 것은 아닐 테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캐롤라인이 말했다.

"어째서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니? 데이비드는 훌륭한 남자야. 너와 이혼하면 이번에는 정말 어울리는 여자와 결혼하게 될 거야. 그는 나하고 어울리는 상대라고 한 것이 누구였지?"

공포로 숨을 죽인 동생을 보고, 평소의 니콜라였다면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런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거짓말! 아니야....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

"정말?" 니콜라는 의미 있게 웃었다. "분명히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오늘 밤에 내가 목격한 일을 안다면 그가 무엇이라 말하겠니?"

"너무 해....너무 해! 언니는 짓궂어!"

캐롤라인은 언니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자기가 언니 입장이었다면 반드시 그랬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캐롤라인은 질투에 타는 눈으로 언니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알겠어. 이 모든 것은 언니가 꾸민 계획이야! 틀림없어! 내가 방해되니까 언니가 그 사람과 짜고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무고하게 걸려들고 말았어."

그녀로서는 제법 그럴듯한 탈출구를 찾아냈다고 니콜라는 생각했다. 캐롤라인은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울고 있었어. 자아, 내 얼굴을 한번 봐!"

"분명히 울었구나." 니콜라가 무감각하게 말했다. 치솟는 분노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웃음보가 터졌을 것이다.

", 내일 돌아가겠어."

캐롤라인은 네글리제 자락을 펄럭이며 돌아서서 말했다.

"만일 한마디라도 데이비드에게 고자질한다면 후회하는 건 언니일꺼야!"

새된 목소리로 내뱉고 캐롤라인은 침실로 사라졌다.

어렸을 때와 똑같군-니콜라는 쓰러질 듯이 긴의자에 앉으며 생각했다. '엄마한테 고자질하면 후회하는건 언니야!'

잠시 잊고 있던 구토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동생이 남편에게 되돌아간다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직장을 잃어버린 것이 다행한 일일 수는 없다. 캐롤라인 대신 자기가 큰 소리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니콜라는 울지 않았다. 울기에 앞서 내일부터 할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니콜라는 아무런 대책도 찾아내지 못하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침대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눈을 떴을 때는 캐롤라인이 벌써 짐을 꾸리고 있었다. 고개를 잔뜩 꼬고 있는 동생을 니콜라는 씁쓸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어떤 일이 생기면 아양을 떨며 찾아와서 해결해 달라고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이다.

"열 시 차를 타겠어. 그동안 신세가 많았어." 캐롤라인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잘 가." 니콜라는 동생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남기고 서둘러 아파트를 나섰다. 오늘만은 랭보다 일찍 출근하고 싶었던 것이다.

니콜라는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오늘의 계획을 세웠다. 우선 그 남자가 오기 전에 짐을 정리해야지. 이어서 데이비드에게 전화를 걸어 캐롤라인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리고, 너무 심하게 꾸중하지 말라고 부탁해야지. 부부 사이가 지금보다 더 원만해질 것인지 또는 그 반대로 될 것인지는 그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니콜라가 사무실 문을 연 순간, 동생네 부부에 대한 생각은 머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창가에 랭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니콜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바로 자기 책상으로 가서, 서랍을 열고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흉내는 내지 말아." 갑자기 랭이 말했다.

니콜라는 잠자코 서랍 정리를 계속했다.

"다음 직장도 구하지 못했쟎아."

"루치에 가면 얼마든지 있어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전화 한 통화면 차로 마중을 올 것이다.

랭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쪽에서 어떤 조건을 내세우건, 루치 노인이 한마디로 <예스>할 것은 랭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머릿속에는 하일랜드 회사의 기업 비밀이 가득 들어있다. 물론 한마디도 발설할 생각은 없었으나, 루치는 그러리라는 것을 모르고, 랭도 그 점에서는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사내와 접촉이 있었어?"

말없이 어깨를 으쓱한 것이 니콜라의 대답이었다.

"그쪽에서는 어떤 조건을 내세우던가?"

니콜라가 빈 서랍을 닫고 사물을 넣은 백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랭이 그것을 빼앗아 옆에 내동댕이쳤다.

"내가 니키를 루치한테 보내리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지?"

"나가라고 한 것은 바로 당신이에요."

니콜라가 상대 방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랭은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시선을 돌렸다.

"어젯밤엔 머리가 약간 혼란해서.... 사실 말이지, 진심은 아니었어."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어요."

니콜라도 자진해서 이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캐롤라인이 이 사람의 품속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캐롤라인에게 덮치듯이 키스를 하고, 캐롤라인의 흰 손이 이 남자의 검은 머리를 끌어안은 광경을 회상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니콜라는 혐오감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어젯저녁에 한 말은 모두가 진심이에요."

랭이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나도 그런 일은 하지 않았어야 옳았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로서도 마음이 내킨 것이 사실이야. 차려 놓은 음식에 왜 손을 대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가 없었어."

"그러실 테죠." 알 만하다는 투로 니콜라가 말했다.

"그만 해 둬. 지금이 몇 세기인지 아나?"

"동생이 유부녀란 것은 아시겠죠?"

"하지만 당사자인 그녀 자신이 그럴 마음이 있었는데, 왜 나만을 탓하는 거지?"

"그 애는 그 애예요. 당신은 정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랭의 얼굴이 빨개졌다.

"알았어. 그러기에 그런 일은 하지 않았어야 옳았는지도 모른다고 자인하지 않았나?"

"옳았는지도 모르다뇨?"

니콜라의 통렬한 반격은 과연 효과를 나타냈다. 랭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휘두르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는 듯했다.

"그 말버릇이 뭐야!"

"나는 이미 당신의 부하가 아니니까 말투에 대해 주의를 받아야 할 까닭이 없어요, 미스터 하일랜드."

니콜라는 얼굴을 숙이고 백을 집어들려고 했다. 랭이 억센 손이 그것을 제지했다.

"아파요, 손을 놓으세요!"

손은 놓지 않았으나 약간 느슨해졌다. 랭은 허리를 굽히고 달래듯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니키, 쓸데없는 말다툼은 이제 그만두기로 하지. 동생에게 키스를 했다고 직장을 버리다니, 그건 니키답지 않아."

니콜라는 얼굴을 돌린 채 비난을 계속했다.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어떻겠어?"

랭은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럼, 이렇게 말하지... 나는 니키를 잃고 싶지 않아. 자아, 이것으로 됐나?"

"아니에요."

니콜라는 외면했던 얼굴을 도로 정면으로 가져가며 냉랭한 시선으로 상대를 쏘아보았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아요. 아시겠어요?"

랭은 실망한 듯이 허리를 폈다.

"농담은 그만 해. 설마 진심은 아닐테지? 니키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급료도 넉넉히 주었고, 무엇하다면 더 올릴 수도 있어."

"돈의 문제가 아니에요." 니콜라는 자유로운 쪽의 손으로 책상 위의 메모를 집어 들었다.

"이것이 내 일과표에요. 후임자가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하면 별로 문제가 없을 걸로 생각해요."

"니키! 이제 그만 하라고 하지 않았어?"

"잊은 것은 없을 거예요."

니콜라가 방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 화분에는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물을 주면 돼요."

"화분이 다 뭐야! 마음대로 해!"

랭은 거친 발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면서 유리창이 흔들렸다.

"저 소리를 듣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야."

울고 싶은 마음으로 니콜라가 중얼거렸다.

문 저편에서는 랭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니콜라는 백을 주워 들고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았다. 역시 화분에 물을 주고 나가는 것이 좋겠어. 가져가고 싶지만 너무 많아서 무리일 것 같았다. 모든 화분에 물을 주고 드디어 나가려 했을 때, 앤드루가 허둥거리며 들어왔다.

"랭에게서 전화가 왔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만두다니, 진심이 아니겠지?"

"아니, 진심이에요." 니콜라가 조용히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진지한 앤드루의 얼굴을 본 순간, 니콜라의 마음속을 팽팽히 죄고 있던 것이 탕 하고 끊어졌다. 그녀는 백을 놓고 울음을 터뜨렸다. 앤드루가 곁으로 달려왔다.

"랭이 무슨 짓을 했어?"

니콜라는 어린아이처럼 앤드루의 어깨에 기대고 더욱 세차게 울었다. 앤드루의 손이 검고 부드러운 니콜라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니키...니키, 그만 울어요."

니콜라는 겨우 침착을 되찾았다. 답답한 가슴을 눈물이 약간은 씻어 준 것 같았다. 앤드루가 다정하게 물었다.

"이제 말할 수 있겠지?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랭과 말다툼을 했어요."

"이유는?"

니콜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어...괜찮다면 말하고 싶지 않아요. 어쨌든 그 사람 밑에서는 더 이상 일하지 못하겠어요."

"알겠어."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것이 약간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이제 가야겠어요." 니콜라가 비틀거리며 걸으려 했으나 그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나하고 일하지 않겠어?"

니콜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트리시아가.....?"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타이프실로 옮기면 되니까. 마침 얼마 후에 퇴직할 록우드 부인의 후임을 정해야지,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어."

"하지만, 트리시아가 무어라 할지...."

"타이프실 주임으로 승격시키려 해, 급료도 올리고. 트리시아가 마다 할 이유가 없지."

확실히 매력있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니콜라는 굳게 닫힌 사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이 회사에 남게 되면 싫든 좋든 저 남자를 다시 보게 될 것이고....

"지금 정도의 급료는 보장하겠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앤드루를 보고 니콜라는 가만히 웃었다.

"급료를 더 주지는 않나요?"

"그것도 생각중이었어."

당황한 둣이 앤드루가 대답했다.

"어느 정도 희망하지?"

니콜라는 진지한 앤드루의 얼굴에서 갑자기 시선을 돌려 랭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야기는 형님의 아이디어인가요?"

", 천만에!" 이렇게 말하는 앤드루의 귀가 빨개져 있었다. 거짓말에는 익숙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니콜라는 발밑에 있는 핑크빛 제라늄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참 좋은 분이군요, 앤드루." 가냘픈 미소가 니콜라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미소는 앤드루의 얼굴에도 퍼졌다. 앤드루의 입술이 다가왔다. 니콜라는 자진해서 팔을 내밀어 키스에 응했다. 이 사람과의 키스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으나 이번만은 어딘가 달랐다. 격렬하게 입술을 요구하는 것이 니콜라는 기뻤다. 며칠 동안의 고통, 슬픔,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안쪽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니콜라는 돌아보지 않고 앤드루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앤드루는 상기되고 꿈꾸는 듯한 얼굴을 문 쪽으로 돌렸다.

"니콜라는 우리 회사에 남기로 했어."

눈이 승리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앤드루는 미소를 띠며 니콜라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우리는 왜 좀 더 일찍 이렇게 되지 못했을까?"

"글쎄요...... 당신은 어째서?"

"약간 둔해서 그랬을 거요. 그러나 오늘부터는......."

얼굴을 쳐든 니콜라에게 다시 키스가 퍼부어졌다.

 

5

하늘 어딘가에 구멍이 뚫리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6월은 억수 같은 비로 시작되었다. 템즈 강변을 중심으로 곳곳이 침수되어 탁류가 도로를 뒤덮었으나, 주민들은 이젠 체념한 상태였다. 니콜라가 이러한 빗속을 뚫고 출근하여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레인코트는 물론이고 블라우스에까지 물이 배어 있었다.

얼마 후 앤드루가 출근했다. 새로 맞춰 입은 양복에는 물방울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차를 탄 채 지하실 주차장으로 들어왔으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앤드루가 있는 방면에만 날씨가 갠 모양이군요?"

니콜라는 가볍게 농담을 하며 기분을 풀었다.

앤드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스마트한 차림으로 방 안에 들어왔으나 평소의 미소를 오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니콜라가 묻자, 그는 남의 이목을 피하려는 듯 복도를 돌아보고 문을 닫았다.

"약간 난처한 일이 생겨서....."

"난처한 일이라뇨?"

"형말이오."

두 사람은 우울하게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트리시아의 말대로 앤드루는 부하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사였다. 니콜라는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여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단 하나, 순조롭지 못한 것이 랭의 문제였다. 니콜라의 후임이 곧 왔으나 사원들이 얼굴도 익히기 전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 다음도, 또 그 다음도...

최근 타이프실의 여자들은 사장의 발소리가 나기만 하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일에 열중하는 듯한 시늉을 하게 되었다. 섣불리 시선을 마주쳤다가 비서가 되라는 말을 들을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사장의 매력적인 외모에 반해 얼른 승낙하는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자살 행위를 하는 여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랭은 점점 기분이 언짢아져서 누구든 상관 않고 빌딩이 울릴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 거의 랭을 보지 못한 니콜라도 음성만은 매일같이 듣는 형편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이유로 화를 내신 건가요?"

"이름은 잊었지만, 그 고수머리 비서가 있지 않았어? 어제 그만두었어. 얼굴에 사전을 내던지면서, 정확하게 스펠을 기억하지 못하면 사전을 입안에 처넣겠다고 고함쳤다는군."

"여자에게는 항상 그러는 분인걸요."

"그러면서 내가 나쁘다는 거야."

"당신이?"

"내가 니키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고 있지."

", 저런! 사장님이 먼저 그렇게 하라고 했쟎아요?"

대답이 없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겠어요. 사장님이 이리 오시는 경우에는."

이쪽에서 자진해서 가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새 비서를 찾으라는 명령이었어. 도와주겠어, 니콜라?"

처량하게 말하는 앤드루에게 니콜라는 격려하는 미소를 보냈다.

"어쨌든 노력해 보겠어요."

전화를 받은 직업소개소에서는 한결같이 난색을 표했다. 랭 하일랜드에게 혼이 난 여자를 더 이상 늘린다면 소개소의 명예가 손상되기라도 한다는 듯한 투였다.

"....알겠습니다. 우리로서도 최대한의 노력은 하겠습니다마는...."

소개소 직원의 성의 없는 대답을 들은 뒤 니콜라는 전화를 끊고 일을 시작했다. 일이라 해도 여기서는 단순한 사무 처리가 대부분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랭의 시달림을 받으며 어려운 일을 떠맡아 악전 고투하던 때에 비하면, 그야말로 그냥 노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처럼 편한 직장에 불평이 있다면 너무 사치하다고 보겠으나, 솔직히 말해서 니콜라는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어떤 건축가와 회합이 있다면서 앤드루가 외출했기 때문에, 니콜라는 가까이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이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랭이었다. 갑자기 온 몸이 뜨거워졌다. 그것을 니콜라는 미소로 감추고 조용히 말했다.

"부사장님은 현재 외출중이십니다."

랭은 돌아가지 않았다. 방안에 들어와 문을 닫고는 거기 기대어 예리한 시선을 던져 왔다. 기분이 그래서인지, 두 달 전보다 훨씬 더 키가 커 보였다. 온몸이 에너지의 덩어리 같은 인상이었다. 요즘에는 특히 영양 있는 것을 많이 먹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내 비서는 어떻게 됐지?"

랭은 한가하게 문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칠 길이 막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니콜라는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개소에 전화했습니다. 이제 곧 연락이 오리라 믿습니다."

"다른 소개소에 연락해 보는 것이 어떨까? 그곳 형편없는 사람들만 모여드는 것 같더군."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미안합니다마는, 저는 점심을 먹으러 가야겠어요."

랭은 움직이지 않았다.

"앤드루와 일을 하니 기쁜가?"

", 무척."

니콜라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랭은 팔짱을 풀었으나 돌아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자기가 신고 있는 검은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니콜라는 그의 얼굴이 긴장되고 약간 붉은 기가 도는 것을 보았다.

"다시 돌아와 줄 수 없을까?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사장의 사업적인 어드바이서로서. 어떻겠어? 물론 승급도 고려하고 있지."

고개를 떨군 채 랭이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기색이었다. 누구에게든 굽히기 싫어하는 성격의 랭에게 있어서 이런 상황은 죽도록 거북할 것이다.

"모처럼의 말씀이지만....."

"잠깐, 그 다음은 말하지 말아요. 땅에 머리를 대고 사과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건가?"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요?"

이 오만한 남자의 얼굴에 따귀를 올려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순간 랭은 갈기갈기 찢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니콜라를 노려보았으나, 곧 눈을 내리깔고 이번에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들었다.

"고집은 그 정도로 해둬, 니키. 사무실이 엉망이 되어 무엇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그런 여자들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참으려고 한번이라도 노력한 적이 있나요?"

랭은 시선을 피하며 전법을 바꾸었다.

"나는 니키의 일 처리에 익숙해져 버렸어. 앤디는 누구하고도 일을 할 수 있으나 나에게는 니키가 필요해."

아부하는 듯한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니콜라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내게 무엇이 필요한가는 나 자신이 결정하겠어요."

"알았어. 무엇을 요구하지?니키의 말대로 하겠어. 지금의 상태에는 신물이 났어. 골이 빈 여자들한테는 사무실을 맡길 수가 없어. 외출도 못 하겠거든."

니콜라는 착잡한 마음으로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사실은 이렇게 되기를 기대한 것이 아닐까? 그 당시에는 얼굴을 보는 것조차 더럽게 여겨졌는데, 막상 그가 가까이 없는 사무실에 있어 보니 마음에 구멍이 뚫린 듯 허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결심이 흔들리는 듯한 니콜라의 표정을 보고 랭은 즉시 공세를 취해 왔다.

"식사라도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이 어떨까?"

마치 사람이 변한 듯한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정말 낯뜨겁고 비열한 사나이로군! 내가 그런 수작에 넘어갈 줄 알아? 아무리 곰살궂게 굴어도 본심은 훤히 들여다보이는걸! 니콜라는 상대의 웃는 낯에 싸늘한 시선을 보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니, 이번 소동으로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만은 사실인 듯했다. 니콜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랭과 같이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니콜라를 데려간 곳은 런던에서도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산해진미와 함께 최상의 와인이 진열되었다. 랭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비용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니키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비서가 되어 있었어."

랭은 니콜라 대신 와인을 따르면서 미소 지었다.

"니키가 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니키가 내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어. 정말 나는 생각이 모자란 사람이었어."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을 하시지! 니콜라는 글래스를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저주했다.

"빨간 장미를 준비시킬 만한 사람이 없던가요?"

랭은 소리 내어 웃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럴 필요가 생길 만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어."

"저런......."

놀라운 일도 다 있군.

"어쨌든 니키가 없어지고부터는 사업 외에 신경을 쓸 틈이 전혀 없었어."

랭이 와인을 추가로 주문하기 위해 웨이터를 불러 세우는 기회를 타서, 니콜라는 새삼스럽게 상대를 관찰했다. 조금도 나무랄 데 없는 복장, 기민한 몸가짐... 랭이 다시 자기에게 방향을 돌리자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니키는 어떤가?"

랭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물었다.

"여전히 앤드루와 데이트를 하고 있나?"

"그분한테 아무말도 듣지 못했나요?"

랭과 눈이 마주친 니콜라는 상대의 표정을 읽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동생은 그 일에 대해선 묘하게 입이 무겁거든."

"형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하시는 모양 이죠."

"비꼬는 거야?"

랭이 나직이 웃었다.

"니키의 말이 옳은지도 몰라. 그것이 앤디의 나쁜 점이야. 사실은 큰 관계가 있는데도!"

대꾸 대신 니콜라가 불쾌한 듯 이마를 찌푸리자, 그는 묘하게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니키와 같은 타입의 여자와 교제하는 것은 동생을 위해 좋지 않아, 위험하지."

"위험? 무엇이 위험하다는 말입니까?"

"니키는 결혼을 전제하지 않는 한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여자야. 이마에 그렇게 씌여 있어."

랭은 약간 붉어진 니콜라를 지켜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짓궂은 시선을 태연히 받아들이면서 니콜라가 분명히 말했다.

"."

왜 그런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가엾은 일이야."

랭은 의자에 기대어 시선을 테이블에 떨구었다.

"결혼이란 삶의 보람을 잃은 남자를 위해 만든 사회적 구제 제도에 지나지 않거든."

"흥미 있는 학설이군요. 상당히 유명한 학자의 연구결과일 테죠?"

니콜라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화를 참으며 자못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랭은 니콜라의 빈정거림을 알아차리고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냥꾼이지, 먹이를 쫓는 것만이 삶의 보람이거든. 스스로 좋아서 결혼식장에 가는 남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니콜라가 자신에 찬 미소로 응답했다.

"그 학설이 사장님 동생한테도 적용되는 것일까요? 그것을 꼭 알고 싶군요."

랭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녀석은 예외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니키를 제수로 받아들일 생각이라는 근거는 무엇이지?"

"받아들일지의 여부를 자신의 권리라 믿고 있는 근거는 무엇이죠?"

랭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번 소동의 목적이 거기 있었나? 니키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내게 재인식시킴으로써 앤드루와의 관계를 승인받고 싶었던 것인가?"

니콜라도 미소를 거두고 냉랭하게 쏘아보았다.

"대답은 사장님 자신이 더 잘 아실 거예요. 그것과 이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한순간의 침묵이 흐른 뒤 랭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캐롤라인과의 일은 완전한 내 실패였어. 때문에 두 달 동안 크게 혼이 났으니까."

니콜라는 애써 마음을 닫으려고 했다. 진실한 후회 때문에 지금의 말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착각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다. 그 점은 알고 있었으나 그때의 충격, 분노, 원통함을 드디어 갚았다고 생각하니..... 니콜라는 얼굴을 돌리고 목구멍으로 치솟는 뜨거운 것을 억지로 삼켰다. 다시 시선을 그에게 돌리자, 예리한 잿빛 눈이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니콜라는 자칫 약점을 노출할 뻔한 자신을 꾸짖으며 등을 꼿꼿이 세웠다.

그 후에는 평범한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요긴한 말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레스토랑을 나와 택시를 탔다. 좌석에 깊숙이 파묻힌 랭은 두 손을 포킷에 찌르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니콜라는 일부러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랭이 그 화제를 꺼냈을 때도 이러한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돌아와 주겠어?"

니콜라는 낮은 음성을 등뒤로 들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부탁해."

남에게 머리 숙이기를 싫어하는 그에게 있어서 그 말이 얼마나 나오기 힘들었다는 것을 니콜라는 잘 알고 있었다. 니콜라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그 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돌아가서는 안 된다. 고개를 돌렸더니 랭이 뚫어지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는 배우의 소질이 있다고 니콜라는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어떠한 과잉 연기도 해 보일 것이다. 가벼운 감기인데도 중병을 가장하기도 하고, 극히 최근에는 여러 비서들을 못 살게 굴고.... 그 여자들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마음만 내키면 충분히 이끌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2개월 전까지 너무 편한 생활을 맛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비서를 교육시키려 들지 않은 것뿐이다.

지체 없이 원만히 진행될 것, 때로는 숨을 돌리기 위해 모습을 감춰도 비서가 그 뒷 일을 잘 처리해 줄 것.... 이 사람의 희망은 그것뿐이다. 변화와 흥분은 사생활에서 충분히 맛보고 있을 것이므로, 사업상의 생활은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리라.

"어떤가?"

랭이 안타깝다는 듯이 물었다. 니콜라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쨌든 부사장님과 상의해 보겠어요."

랭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긴장을 풀었다. 앤드루가 형의 희망이나 명령을 거절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의 말은 사실상 항복을 뜻하는 것이고,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마워."

형식상으로는 아직 아무런 결정이 내려진 것이 아니었으나, 그런 것에 구애될 랭이 아니었다. 그는 니콜라를 곁눈으로 보고 흰 이를 약간 드러내 보이면서 말을 계속했다.

"회사에 돌아가거든 곧 옮기도록 하지. 화분도 가져오는 것이 좋겠어. 그런 것도 없어지고 보니 쓸쓸하더군. 녹색은 방의 분위기를 밝게 하는 데 효과가 있는 모양이야. 요즘에는 방이 정말 살풍경했어."

지금까지 랭은 그 화분을 눈의 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다. 직장은 식물원이 아니고, 공간을 답답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니콜라는 그 말을 끄집어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화분에까지 마음을 쓰는 것도 그녀를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모처럼 마음이 풀린 그에게 씁쓸한 생각을 갖게 하기가 싫었다. 니콜라로부터 상의를 받은 앤드루는 결코 즐거운 마음이 아니었다.

"형을 위해 일할 마음은 절대로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앤드루는 니콜라가 예상했던 대로 말했다. 예상 밖이었던 것은 그 다음 말이었다.

"형이 또다시 구애(求愛)를 해도 좋아?"

"구애받은 기억은 전혀 없는걸요."

눈을 둥글게 뜨고 니콜라가 말하자, 이번에는 앤드루가 놀랐다.

"그렇지 않았다고? 나는 원인이 바로 그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

니콜라는 약간 성을 내며 말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소동을 피웠지?"

"그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어쨌든 나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어떤 사건이 원인이에요."

앤드루는 책상 위에 시선을 떨구었다.

"형은 니키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얼굴이 뜨거워졌으나 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기를 그녀는 바랬다.

"그런 일은 전혀 없어요."

앤드루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이상해요....무엇이?"

"형을 곁에 두고 나한테 호의를 보이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니콜라는 상대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당신이 내게 데이트를 신청했나요?"

"그래서라니?"

"랭이 내 뒤를 따라다니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죠?"

니콜라는 앤드루가 흠칫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았다.

"역시 그렇군요!"

"그게 아니라, 니키에 대한 순수한 호의때문이었지. 정한 이치가 아닌가."

빠른 소리로 말하는 앤드루의 얼굴은 몹시 붉어져 있었다. 호의 때문인 것은 사실이리라. 그러나 형을 떨쳐 버린 상대의 마음을 자신이 붙잡았다는 생각이, 전부터 가졌던 호의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피는 속이지 못 하는 법이다. 이런 얌전한 청년도 경쟁심이 강하다는 점에서는 랭에 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화났어, 니키?"

니콜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니콜라는 앤드루를 위해 소개서에서 새로운 비서를 구해 왔다. 자그마하고, 갈색 눈을 가진 귀여운 처녀였다. 그는 만족했고, 린다라는 이름의 그 아가씨도 원만하게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앤드루와 스무드하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란 있을 까닭이 없다. 니콜라가 옛자리에 돌아온 지 일주일쯤 지나서야 랭은 비로소 린다를 보았다.

"나쁘지 않군."

랭은 서류를 전하고 나가려는 그녀에게 이렇게 중얼거리고, 니콜라가 노려보자 웃음을 터뜨렸다. 사무실 안이 완전히 정리되었다. 처음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다정했던 랭의 태도도 예전으로 돌아갔다. 랭의 말처럼 니콜라가 없는 동안 사무실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수시로 바뀐 비서들이 늘어놓은 서류를 정리하는 데만도 진땀을 뺐다. 니콜라가 돌아온 것을 보고 좋아한 사람은 랭만이 아니었다. 두 달 동안 사장의 신경질에 주눅이 들었던 모든 사원들이 안심하게 되었고, 그녀를 만나는 사람마다 감사의 말을 했다. 심지어 랭의 누나까지도 고맙다는 말을 했다.

"다행이야! 그는 요즘 말이 아니었거든요. 지금 있나요?"

"죄송합니다, 미세스 피니스터."

니콜라는 랭이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앞에서 전화에 대고 거짓말을 했다.

"방금 외출하셨습니다."

"아니면 책상 밑으로라도 숨었겠지."

과연 그녀는 동생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주가(株價)가 조금 내려갔는데, 동생이 어떤 조치를 취하던가요?"

"그 일이라면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단순한 시장변동이므로 내일이면 다시 올라가리라 믿습니다."

"그러기를 바라지만...."

아니면 그리로 달려가서 원인을 알아내고야 말겠어-하고 그 음성은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 전화한 것은 다른 용건 때문이에요. 토비의 일로 동생하고 상의할 것이 있어요."

"."

니콜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토비는 모니카 피니스터가 애지중지하고 있는 먼 친척뻘 되는 청년이었다. 모니카는 이제 스무 살이 된 토비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기특한 듯,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여워했다. 그녀의 남편은 여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스트리트에서 개업하고 있는 조 피니스터 씨에게는 달리 생각할 것이 산더미같이 많은 모양이었다.

"주식 중개인은 토비에게 안 맞는 것 같아요. 하일랜드 회사에서 일하면 어떨까 해서요."

"알겠습니다. 사장님이 들어오시면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단지 주말에 집에 있으라는 말만 전해 줘요. 눈앞에 붙들어 놓고 말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구실이든 대고 곧 도망쳐 버리는 사람이니까."

"잘 알았습니다. 그렇게 전하죠."

니콜라는 이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뭐라고?"

랭은 귀찮은 듯이 묻고, 용건을 듣자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 풋내기를 우리 회사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니콜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랭이 아무리 반대해도 모니카는 결국 자기 뜻대로 밀고 나갈 것이다. 무서울 것이 없는 랭도 누나 앞에서는 머리를 들지 못한다.

"니키는 주말에 무슨 예정이라도 있나?"

하고 그가 물었다.

"앤드루가 바다에 데려가 준다고 했어요."

"니키도 요트광 중의 한 사람인가?"

경멸하는 듯한 어투였으나 니콜라는 상관하지 않았다.

"바다를 매우 좋아하거든요."

랭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약속을 거절하고 나와 같이 누나네 집에 가도록 하지."

"대단히 강압적인 말씀이군요."

빈정거리듯 니콜라가 대답했다.

"주말만은 편히 쉴 권리가 있다고 알고 있는 데요?"

"토비를 만난 적은 있지? 그런 녀석이 매일같이 여기서 우물거리면 곤란한 것은 나만이 아닐 텐데?"

유감이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니콜라는 홱 등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지?"

랭이 노한듯이 소리쳤다.

"형편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사장님 동생에게 말해야 하지 않겠어요?"

니콜라가 쌀쌀하게 말하자 랭은 만족스러운 듯이 고쳐 앉았다.

"나를 절대로 누나와 단둘이 있게 해서는 안 돼."

랭은 누나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니콜라에게 말했다.

"누나가 토비 이야기를 꺼내면 즉시 화제를 바꾸는 거야. 내가 조라면 그 따위 녀석은 당장 쫓아내 버릴 텐데."

"그분은 오히려 토비에게 감사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니콜라가 말하자 랭은 큰 소리로 웃었다.

"분명히 그래. 누나가 토비를 돌보는 편이 매부의 여가를 망치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 그집 아이들이 집에 돌아와 살게 되면 무척 지겨울 꺼야. 가엾은 일이지."

모니카의 아이들은 현재 기숙 학교에서 평화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다. 피니스터씨의 집은 광대한 저택으로서 손질이 잘 된 정원이 딸려 있었다. 마당에는 한 포기의 잡초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번식력이 강한 잡초라도, 모니카가 소중히 가꾸고 있는 화단에는 감히 침입할 용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큰 거실과도 같은 현관홀에 들어선 두 사람을 보고 모니카는 날카로운 시선을 니콜라에게 돌렸다.

"어마, 당신을 초대한 기억은 없는데?"

니콜라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가 초대했어. 그녀를 나무라지 말아요."

랭이 끼어들었다.

"나무라는 게 아니야,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 어서 와요, 니콜라. 초대는 하지 않았지만 와 주어서 고마워요, 사실이에요."

모니카는 애교 있게 말하고 동생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어째서 너는 이 사람을 갑자기 초대할 생각이 들었니?"

"주말에는 가끔 조용한 시골에서 지내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저런, 너도 남을 생각해 줄 때가 있니? 비나 오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녀 방은 어디로 하는 것이 좋을까?"

랭은 누나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그렇군, 네 방 옆방이 비어 있어."

"그럼 짐을 두고 와야지."

랭은 니콜라의 팔을 잡고 누나 곁에서 물러났다.

"누나의 무례한 태도를 이해 해 줘."

층계를 올라가면서 랭이 말했다.

"익숙해진걸요. 누님도 당신과 똑같아요."

태연한 표정으로 니콜라가 대답했다.

"한 방 얻어맞았군."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니콜라도 빈정거릴 생각으로 말한 것이지만, 비슷한 것은 사실이었다. 머리도 눈빛도 똑같았다. 동생들의 핸섬한 얼굴 모습과 닮았으면서도 여자답고 우아한 얼굴, 균형 잡힌 몸매, 옷에 대한 감각도 훌륭했다. 필요하다면 상대의 마음을 녹일 듯이 웃는 웃음까지도 랭과 같았다. 니콜라를 방에 안내한 랭은 아직 기분이 덜 풀린 얼굴로 사라진 뒤, 니콜라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가구나 장식에서 모니카의 취향이 엿보였다. 아늑한 분위기가 감도는 방이었다. 방 한구석에 샤워실이 있는 것을 보고, 니콜라는 옷을 갈아입기 전에 샤워를 하기로 했다. 조금 전에 랭이 옆방에서 나가는 듯한 소리가 났으나 노크가 없는 것을 보니, 잠시 동안이라면 누나와 단둘이 있어도 상관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니콜라는 옷을 벗고 따뜻한 물로 기분좋게 온몸을 씻었다. 커다란 흰 타월을 몸에 두르고 샤워실에서 나와 보니, 놀랍게도 랭이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니콜라의 머리로 피가 역류했다. 언제 온 것일까? 샤워 소리에 가려 다른 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틀림없이 샤워실의 유리 너머로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랭은 점수라도 매기듯이 니콜라의 몸의 각 부분에 엉큼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오다니!"

"했어, 니키가 듣지 못했을 뿐이지."

랭은 다시 니콜라의 젖어 있는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훑어보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역시 몸이 좀 말랐군. 식사 횟수라도 줄이고 있나?"

"용건은 뭐죠?"

니콜라는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질문은 내가 먼저 했어."

니콜라의 분노가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나가 주세요! 옷을 갈아 입어야 하니까."

그가 일어섰기 때문에 니콜라는 겨우 안심했으나, 동시에 부아가 치밀었다.

"여자 방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니콜라는 두어 걸음 비켜서서 랭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랭은 스쳐 지나가는 체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그녀의 두 어깨를 붙들고 끌어당겼다.

"놔요! 당신의 금발 미인에게나 이런 행동을 하세요."

랭은 날카롭게 외치고 있는 니콜라의 입을 달려들 듯 이 노려보았다. 갑자기 니콜라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놓으세요! 아니면 정말 화내겠어요!"

두 손을 한 데 모아 상대를 떠밀려 했다. 그러자...... 심하게 몸을 비트는 사람에 가슴에 여미고 있던 타월이 느슨해졌다. 깜짝 놀라 타월을 붙들려고 했으나 그 손도 랭에게 잡히고 말았다. 타월은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어머나....."

니콜라가 외쳤다. 얼굴이 불처럼 달아올랐다. 랭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랭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잿빛 눈이 니콜라의 온몸을 훑었다.

"분명히 웃을 일이 아니군."

음성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의 몸은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랭은 머리를 숙이고, 다음 순간에는 니콜라의 입술을 격렬히 뺏고 있었다. 저항하는 손을 힘들이지 않고 떨쳐버린 랭은, 입을 맞춘 채 만족한 듯 숨을 몰아쉬며 벌거벗은 니콜라의 등 뒤에 팔을 감고 힘껏 끌어 앉았다. 니콜라의 온몸에서 땀이 솟아났다. 손은 어느새 랭의 와이셔츠를 꼭 움켜잡고 있었다. 니콜라는 무의식중에 입술을 벌리고, 뜨겁고 집요한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고, 기묘하고도 뜨거운 아픔 같은 것이 몸속에 끓어올랐다. 니콜라는 자신이 말려들 듯한 뜨거운 소용돌이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소용돌이가 그녀를 더욱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니콜라는 벌거벗은 등줄기를 타고 달리는 손의 감촉에 취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스스로 키스에 뜨겁게 답하면서 랭의 검은 머리를 두 손으로 휘어잡고 있었다. 랭의 입술이 아쉬운 듯 니콜라의 입에서 떨어졌다. 두 사람은 정열에 불타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랭의 얼굴도 홍조를 띠고, 눈에는 욕망의 빛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참아 왔는지 나도 모르겠군. 그러나 함부로 덤벼 들다가는 발길에 챌 줄 알았지. 니키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거든."

얼음물을 끼얹은 듯이 니콜라의 몸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니콜라는 입술을 깨물고 랭의 품에서 벗어나 타월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타월을 몸에 꼭 감으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두 번 다시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그 딱딱한 껍데기 속에 숨어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랭은 아직도 쉰 목소리를 내며 또 그녀를 껴안으려 했다.

니콜라는 홱 몸을 피했다. 비록 한순간이나마 그의 키스에 반응한 자신이 저주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랭은 이것을 느끼지 못하고 말을 계속했다.

"캐롤라인과의 일이 있었을 때부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어. 도의상의 문제로 화를 내는 것만이 아니라는 조짐이 보였거든."

니콜라는 지나친 굴욕감으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항의할 기력마저 없었다.

"니키가 가버렸을 때는 어쩔까 하고 생각했어. 이제는 니키 없이 살 수 없어."

미소 지으며 말하는 랭이 니콜라는 한량없이 미웠다. 이런 말을 듣고 동요하려는 자신도 더없이 미웠다. 니콜라는 홱 랭에게 등을 돌렸다.

"나가 주세요!"

"무얼 두려워하지? 니키의 육체가 나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이라도 받았나? 괜찮아, 나는 진작부터 니키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으니까."

랭의 입술이 니콜라의 어깨를 정답게 애무했다.

"니키가 필요해! 니키에게 사랑의 레슨을 하게 해 줘."

순간 니콜라는 얼어붙은 듯이 꼿꼿이 섰다가, 이어서 랭의 손을 난폭하게 뿌리치고 다시 정면으로 돌아섰다.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당신이 가르쳐 주는 것은 한푼의 값어치도 없어요!"

랭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정력적인 얼굴이 붉어지면서 긴장이 감돌았다.

"큰 소리를 내기 전에 어서 나가세요."

달려들 듯 니콜라가 말했다.

랭은 무슨 말을 하려고 몸을 움직였으나 갑자기 방향을 돌려 아무말도 남기지 않고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냉정을 가장했던 니콜라의 가면이 벗겨졌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니콜라는 몽유병자와도 같은 걸음걸이로 방구석에 가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타면서 조금 전에 교환했던 키스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불처럼 뜨워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나 랭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아물거리며 가슴을 짓눌렀다.

짧은 청색 가운 하나만을 걸친 랭, 가운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근육질의 긴 다리, 흘끗 들여다보이는 갈색 가슴팍,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랭, 전화로 상대를 윽박지르고 있는 입의 움직임, 두꺼운 서류 다발을 들추고 있는 민첩한 손놀림, 때때로 눈꼬리에서 피어나는 미소에 이르기까지 니콜라는 정확하게 떠올릴 수가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니콜라는 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랭의 존재를 온 몸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해 왔던 것일까!

니콜라는 자기감정을 분석함으로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랭에 대한 마음은....그렇다, 욕구불만에서 오는 강박관념이라는 일종의 질병임이 분명하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질병은 사랑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고, 또 질병인 이상 치료한 길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병이 상당히 진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까 그처럼 키스를 받아들인 것도 이 병이 한 짓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번에도 그러했다. 맨션에서 타월 하나만 걸친 랭을 보았을 때,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려 했는데도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도 역시 병 때문이다.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고 랭은 처녀다운 수치심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의 몸에 손을 대보고 싶다는 욕구가 얼굴을 붉히게 만든 것이었다.

대관절 언제부터 이런 병에 걸렸을까?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지금은 이 손이, 입술이, 그리고 온몸이 랭을 원하고, 이성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병을 자각하지는 못했으나, 망연히 지내온 것만은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랭을 향한 생각을 억제하고 자신을 채찍질해왔다. 다른 남자라면 몰라도, 랭 하일랜드를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태연한 체하려 해도 가슴 속의 불길마저 끌 수는 없었다. 사실 눈은 언제나 랭의 동작을 추구하고, 어쩌다 살이 스치기만 해도 화상을 입은 듯이 아팠다. 그의 음성만 들어도 가슴이 안타깝게 뛰었다. 랭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엔 마음의 반이 빈 것 같았다.

그것을 숨겨 온 것은, 자칫 겉으로 드러냈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랭의 기호는 물론 금발에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 밖의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니콜라도 처음에는 꽤 적극적인 유혹을 받았다. 그녀가 상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랭의 잿빛 눈은 한때도 그녀를 놓치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늘, 그는 평소의 염원을 실행에 옮긴 것이리라. 그러나 랭에게 있어서 남녀 관계는 한순간의 기분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남자를 위해 인생을 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치료가 어려워도 좋다. 반드시 이 병을 고쳐야 한다!

니콜라는 조심스럽게 몸단장을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 앞에 이르자 안에서 랭과 모니카의 대화가 들려왔다. 하기야 홍수와도 같은 기세로 몰아치고 있는 것은 역시 모니카 쪽이었지만.....

"....그리고 토비는 머리도 영리해. 틀림없이 성공할 거야."

"차라리 멀리 가버렸으면 좋겠군."

랭의 중얼거림은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 애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기회뿐이야. 너 역시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이 아니겠어? 어째서 토비에게 기회를 주려 하지 않는 거니?"

"안 돼요, 모니카.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다른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돕겠어. 하지만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거만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어. 만일 누나가 억지로 그를 우리 회사에 넣으려 한다면 나중에 어떻게 되건 나는 책임을 못 지겠어."

힘껏 문을 열어젖힌 랭은 문 밖에 서 있는 니콜라를 잠시 노려보다가 성큼성큼 가 버렸다. 니콜라는 방안에 들어가야 할 것인지 잠시 망설였다.

"그런 데서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들어와요."

모니카가 불러들였다.

니콜라는 내키지 않았으나 안으로 들어갔다. 모니카는 의자를 가리키며 "홍차로 할까?" 하고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홍차 포트를 집어 들었다.

"랭은 곤란한 사람이야. 하지만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난 줄 알면 큰 잘못이지." 모니카의 잿빛 눈이 빛나고 있었다. 랭과 똑같았다.

"영락없는 야만인이야, 그 애는."

모니카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니콜라의 홍차 잔에 각설탕을 던져 넣었다. 설탕을 싫어하는 니콜라였으나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모니카가 각설탕 세 개를 넣고 잔을 건네주었을 때에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런 사람 밑에서 용케도 견디는 군요."

모니카는 감탄한다기보다는 경멸에 가까운 시선을 니콜라에게 던졌다.

"당신 정도라면 직장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어째서?"

"급료가 후한걸요."

", 그렇다면 알겠군요. 그런데 당신은 토비를 만난 일이 있나요?"

꼭 한 번 만난 일이 있으나 첫눈에 한심한 청년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불쌍한 청년이에요. 부모에게 재산이 없다는 그것 한 가지 때문에 재능을 이용당해 손해만 보다니. 랭 역시 그를 시기하고 있어요. 몹시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니까!"

첫눈에 벌써 어리석어 보이는 토비 따위에게 랭이 질투할 까닭이 없었다. 니콜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현재는 누구하고죠?"

모니카가 갑자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능청 떨지 말아요."

모니카카 엄하게 말했다.

"동생은 아직 로이스인가 하는 아가씨와 관계를 계속하고 있나요?"

"글쎄요, 최근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그래요? 그리고 당신은 앤드루와 밖에서 자주 만난다면서요?"

니콜라는 유도신문에 말려들지 않고 가만히 미소를 띠었을 뿐이었다.

"당신이 오는 줄 알았으면 앤디도 부를 걸 그랬군. 하지만 그렇게 되면 랭이 앤디를 방파제로 삼아 도망칠 것이 뻔한 일이지!"

친누이인 만큼 동생들의 성격을 보는 눈은 정확했다.

"원래 랭에게는 의무 관념이란 게 전혀 없어요.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니콜라는 부아가 났다.

"사장님은 회사를 훌륭하게 경영하는 것으로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계세요. 가령 부사장님이 경영하신다면 그 결과가 곧 주가(株價)에 나타나지 않을까요?"

모니카는 붉어진 니콜라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점은 나도 잘 알아요. 다만 당신까지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이 재미있군요."

모니카는 말문이 막힌 니콜라에게 짐짓 고양이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분명히 급료 때문에 랭 밑에서 일한다고 했죠?"

동생과 꼭 닮은 잿빛 눈이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어쨌든 당신 말이 옳아요. 앤디는 좋은 사람이지만 큰일을 할 그릇은 못 돼요."

랭이라면 할 수 있다고 니콜라는 생각했다. 이 몸에 불을 붙일 수도 있는 사내가 아닌가.

"앤디는 알고 있나요?"

모니카의 물음에 니콜라는 말을 잃었다.

"저어.....무슨 말씀인가요?"

모니카가 코로 웃었다.

"아마도 모르는 모양이군. 가엾은 앤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노상 랭에게 빼앗기기만 하다니."

"제게 관한 말씀이라면 큰 오해십니다."

니콜라는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다.

"아아,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좋아요. 당신도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니까 가벼운 행동은 안할 거예요."

저녁때 돌아온 피니스터씨는 전적으로 랭을 대화의 상대로 택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건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는 신사였다. 모니카는 식사 도중 기회를 보아 토비 이야기를 꺼내려 했으나, 그때마다 남편과 동생의 공동전선에 묵살당하고 말았다. 식사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모니카가 마비된 듯한 목소리로 동생을 불러 세웠다.

"이것 봐, ......."

"니콜라는 아직 누나네 정원을 보지 못했어. 안내해도 좋을까요, ?"

", 좋고말고." 피니스터씨가 상냥하게 말했다.

"밖은 어두워졌어."

모니카가 불만인 듯 말했다.

"달이 떴는걸. 정원을 보는 정도라면 충분하지."

가볍게 니콜라의 팔짱을 끼고 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 랭의 등에 대고 모니카가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그 사람이 앤디의 연인이란 걸 잊지 말아, !"

어깨 너머로 돌아다본 랭의 잿빛 눈에는 얼음과 같은 찬 불꽃이 튀겼다.

"나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야, 모니카."

보통이 아닌 모니카로서도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는 말투였다.

랭은 정원에 나와 잠시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니콜라의 팔을 놓았다.

"누나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했을까?"

"단순한 추측일 테죠."

니콜라는 모니카와의 대화 내용을 랭에게 보고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것뿐일까......"

"달리 생각할 것이 있겠어요?"

"글쎄, 하지만 모니카의 추측은 가끔가다 적중하는 일이 있거든."

"이번에도 적중할지 어떨지, 런던에 가거든 곧 앤드루에게 물어 보시지 그래요?"

대답이 없기 때문에 니콜라는 혼자 달빛이 비치는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높은 나무에서는 잎이 살랑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집 가까이 있는 넓은 화단의 달맞이꽃이 달콤한 향기를 픙기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랭이 니콜라의 팔을 붙들었다.

"앤디하고는 결혼시키지 않겠어, 니키."

거친 목소리로 랭이 말했다.

"어마, 어째서요?"

다행히도 니콜라는 자제심을 갖고 조용히 미소를 띨 수가 있었다. 랭은 심각했다. 잿빛 눈이 달빛을 받아 험상궂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용서하지 않는다고요?"

니콜라는 소리내어 웃었다.

"결혼하는 것까지 사장님의 결재를 받아야 하나요?"

"얼빠진 짓을 하면 안 돼. 그렇게 하면 파멸이라는 것쯤은 니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앤드루는 아내에 관한 한 만점인 남편이 될 거예요."

니콜라는 붙잡힌 팔을 홱 뿌리치고 걷기 시작했다. 랭이 쫓아왔다.

"아내가 될 상대는 니키가 아냐!"

"당신네 가문에는 나 따위 인간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니콜라가 분연히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야. 관계없는 말을 끄집어내어 화제를 바꾸려 하는 모양이지만, 나한테는 통하지 않아. 만일에 니키가 앤드루와 결혼하더라도 조만간 파국이 올 것은 뻔하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어째서죠? 이유를 모르겠군요."

니콜라는 싸늘하게 쏘아붙였으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가슴이 뜨끔할 정도로 니콜라는 랭이 한 말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니키를 제수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

쉰 목소리로 말하는 랭의 얼굴은 희미한 달빛 속에서도 험상궂게 보였다.

"니키와 앤디가 같이 있는 것을 나는 전부터 못마땅하게 생각했어. 이것은 단순한 질투심이 아니야, 니키. 만일 니키와 내가 제수와 시아주버니 사이가 된다 해도, 얼마 안 가서 나는 니키를 빼앗게 될 거야. 틀림없이 그렇게 되고 말 거야."

"그렇게 되려면 당신 혼자서는 안 되죠! 내가 당신의 유혹에 넘어갈 것 같아요?"

니콜라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소리쳤다.

"물론이지."

그 목소리는 니콜라의 몸에 전류가 흐르는 철사라도 댄 듯한 충격을 주었다. 니콜라는 랭이 손을 뻗치려는 기색을 눈치 채고 얼른 피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랭은 숨을 몰아쉬며 핏기가 가신 눈으로 니콜라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자기도취의 화신이군요."

랭은 가만히 웃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니키가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사실을 변경시키지는 못해."

니콜라의 노력도 이것이 고작이었다.

"당신의 정사(情事)에 상대 역할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니콜라는 연약한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알고 있어, 전부터 니키의 태도는 분명했으니까. 이번에는 내 태도를 분명히 밝히겠어. 나는 어떤 상대와도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 그리고 니키가 결혼을 전제하지 않는 어떤 정사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랭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 토해내듯 말했다.

"니키에 대한 성실성을 지켜나갈 자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당장에라도 니키와 결혼하겠어. 그러나 나는 한 여자와 일년 이상 관계를 지속한 일이 없어. 사귀고 나서 얼마 지나면 곧 지루해지고 답답해서 견디지 못하는 거야. 이런 생활 태도는 변할 것 같지가 않아."

랭은 대답을 기다리듯이 말을 끊었다. 그러나 니콜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하려 했으나 깨진 유리 조각을 삼킨 듯 목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랭은 한걸음 물러서서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발부리의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나는 니키를 갖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지만 이 기분이 영원히 계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어. 그러니 결혼은 할 수 없어."

니콜라는 목구멍으로 치솟는 뜨거운 덩어리를 꿀꺽 삼키고 태연한 체 말했다.

"누가 결혼해 달라고 부탁했던가요?"

랭이 고개를 들었다. 잿빛 눈에는 복잡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니키는 대단한 여자야. 로이스는 니키를 가리켜 위인이라 하던데, 그 말이 옳아."

이 말은 니콜라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그녀가 그런 말을?"

", 로이스는 니키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었어. 니키가 다정하게 대해 주고 고민을 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랬을 테지."

미소가 랭의 굳어진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니콜라의 가슴은 아팠다. 그러나 랭은 갑자기 어투를 바꾸어 말했다.

"하기야, 니키는 넋두리만 반복하는 그녀를 지겹게 생각했을 테지만."

"아니에요, 오히려 그녀를 동정하고 있었어요. 언젠가는 그녀도 당신이 보내는 빨간 장미를 받을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랭의 미소가 조소로 변했다.

"그것 봐, 니키도 내 생활 태도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아?"

"물론 잘 알고 있죠."

이처럼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것만이 다행이었다. 심중을 드러내 보인 굴욕감으로 죽고 싶은 정도인데도!

"나는 니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

랭은 낮고 쉰 목소리로 말하면서 한걸음 다가왔다.

"사랑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야, 니키. 지금 같아서는 니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저 달을 따오라고 해도 기꺼이 승낙할거야. 하지만 이 마음이 내년 이맘때까지 계속되리라고는 약속할 수 없어."

"정직하시군요. 인간에겐 정직이 제일이죠."

랭이 나직이 웃었다.

"니키는 이런 때에도 농담을 하는군! 지금까지 내 애인 중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나는 당신의 애인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았던가, 니키?"

잿빛 눈이 뜨겁게 빛나고, 음성에도 마음속의 흥분이 드러나 있었다.

니콜라는 그 말에 담겨진 자신감을 깨닫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랭은 꼼짝도 않고 유혹하듯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쪽 결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는 순간에 손을 내밀 작정이리라. 그리고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 라고 그는 믿고 있는 것이다.

착각을 하다니 유감이군요, 하고 니콜라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석 달 후 빨간 장미를 받게 될 어리석은 짓에는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니콜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모처럼의 희망이시지만 거절하겠어요. 나도 정직하게 말하죠. 분명히 당신은 나를 열중시킬 힘을 갖고는 있어요. 하지만 나는 열중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빨간 장미나 다이아몬드에도 흥미가 없어요. 만일 당신의 유혹에 못 이겨 3개월 동안의 상대자가 된다면, 나는 앞으로의 일생을 자신에 대한 증오로 일관하게 될 거예요. 자신에게 수치가 될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예요."

랭은 단념하지 않았다. 도발적인 미소를 띠고 다가와 니콜라의 턱을 가볍게 쳐들었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냉정했으나, 랭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니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당신이 침대 속에서는 아주 매력적이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매력이 내게는 통하지 않아요."

랭이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게 해 줘."

랭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갑자기 니콜라를 껴안는 그의 몸은 경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랭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받치고 세차게 키스했다. 니콜라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참았다. 눈을 크게 뜨고 좋아하는 시의 한 구절을 머릿속에서 암송했다. 잊혀져 가고 있던 시를 열심히 되새기려 함으로써, 니콜라는 자칫 무너질 뻔한 자신의 이성(理性)을 유지할 수 있었다. 랭은 가는 허리에 팔을 감고 더욱 격렬한 키스로써 니콜라를 불붙게 하려고 했다.

랭의 노력은 끝내 열매를 맺지 못했다.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는 입술을 떼었다.

"이제 아셨죠?"

조용한 음성으로 니콜라가 말했다.

랭의 손이 힘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만일에 또다시 나를 유혹하려 든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이번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어요."

니콜라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말하자, 랭은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스펠도 모르는 아가씨가 사무실을 어지럽힌다면 곤란할 테죠?"

달이 구름 속으로 숨었다. 침묵을 지키는 랭의 얼굴은 어둠 속에 녹아들고 눈만이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니콜라는 다시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 말처럼 사랑이 몇 달밖에 지속되지 않는 것이라면 더욱 좋아요.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쟎아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예요."

니콜라는 홱 방향을 돌려 그 자리를 떴다.

랭을 쫒아가지 않았다. 어둠 속에 우뚝 서서, 불이 켜진 집을 향해 걸어가는 니콜라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간 니콜라의 귀에, 쇼팽의 멜로디가 서재 쪽에서 들려왔다. 음악소리에 지지 않으려는 듯 크게 떠드는 모니카의 음성도 들렸다. 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 집 주인의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은 아내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쇼팽의 선율일까 ---그것은 당사자만이 알 것이다.

 

7

그 뒤 니콜라는 조 피니스터의 권유에 따라 그의 레코드 컬렉션을 보러 갔다. 서재의 모든 수납 케이스를 가득 메우고 있는 레코드 가운데는, 수집광이 보면 침을 흘리며 부러워할 만한 오래 된 레코드도 있었다. 수집광이 아닌 니콜라로서도 그 컬렉션이 놀랍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확한 목록을 만들고 싶어서 틈을 내어 분류 작업을 하고 있지만, 워낙 시간에 쫓기다 보니...."

한숨을 쉬며 조가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내일쯤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무심결에 말한 것이었으나, 니콜라는 저 나름대로 좋은 생각을 했다고 여겼다. 랭을 피하는 데는 절호의 구실이 되기 때문이었다. 조는 놀라며 사양했으나, 무척 손이 필요했는지 곧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이튿날 아침을 끝내기가 바쁘게 작업을 시작했다. 번잡한 분류 작업도 니콜라의 손이 가자 순식간에 진척을 보였기 때문에 조는 매우 기뻐했다.

"매주 와주었으면 고맙겠군요."

그의 어투로 보아 인사치레만은 아닌 듯 했다.

"사모님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실 거예요."

하고 니콜라는 웃었다.

"나는 토비를 집에 데려오는 것을 매번 반대했지만 아내가 말을 들어야지, 진절머리가 나요."

그는 보기 드물게 불쾌한 낯을 했다. 진작부터 토비의 일로 불만이 쌓였던 모양이었다. 모니카는 니콜라가 없는 것을 기회로 아침부터 동생을 쫓아다니다가 마침 객실에서 그를 붙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음성은 서재에까지 전해져 왔으나, 들리는 것은 모니카의 목소리뿐이었다. 조는 니콜라에게 말은 하지 않았으나 의미 있는 듯이 눈을 껌벅여 보였다. 겨우 누나에게서 도망쳐 나온 랭은 두 번이나 서재에 와서 사나운 표정으로 니콜라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매형이 있어서 그런지, 이따위 작업은 집어치워, 하고 말하지는 않았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랭은 혼자 있는 니콜라를 복도에서 붙들었다.

"직무 태만이야! 무엇 때문에 여기 온 줄 알고나 있어?"

"매형께서는 구식 축음기까지 수집하셨어요. 전시된 것은 여러번 보았지만 직접 손으로 만져 보다니, 꿈만 같아요."

"그거 다행이군."

쓴 오이를 깨문 듯한 얼굴로 랭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니키는 현명한 방법을 생각해냈군?"

"어마, 무슨 뜻이죠?"

니콜라는 티 없이 웃는 낯을 지었다.

"나를 골탕먹이려고 그랬지?"

랭은 이 말만 내뱉고 니콜라를 남겨둔 채 응접실로 들어갔다.

랭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온 니콜라를 보고 조가 웃는 얼굴로 일어섰다.

"훌륭한 드레스로군, 아주 어울리는데."

필요한 일 외에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는 조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번에 니콜라를 재평가하게 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니콜라도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제 손으로 위스키를 따르고 있던 랭이 돌아보았다.

"니키는 무엇으로 하겠어?"

예리한 잿빛 눈이 핑크빛 드레스로 단장한 가느다란 몸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셰리를 부탁하겠어요."

니콜라가 쳐다보자, 랭은 얼른 시선을 돌리고 셰리를 따랐다.

이번 작업의 성과에 흥분하기까지 한 조는 니콜라가 옆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랭이 니키를 놓지 않으려 하는 까닭을 이제야 알았어. 니키와 같은 비서는 좀처럼 구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어때요 니키, 랭만 승인한다면 의료 사무를 배 워 개업의의 비서가 되는 것이?"

"안 됩니다."

랭이 한마디로 반대했다.

"급료는 괜찮은 편인가요?"

니콜라가 묻자, 랭의 무서운 시선이 날아왔다.

"니키라면 아무리 높은 급료라도 받을 수 있지."

명랑하게 웃으면서 조가 대답했다.

"도대체 모니카는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부아가 난 듯이 내뱉는 랭의 말을 무시하고, 니콜라는 다시 조에게 물었다.

"개업의의 비서라면 주로 어떤 일을 하는 거죠? 그리고 급료는 대개 어느 정도일까요?"

조의 설명을 니콜라는 흥미 있게 들었다. 현재 받고 있는 급료와는 비교할 수 없으나, 결코 낮은 편은 아니었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도 알아두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조가 한참 설명하고 있는 동안에 모니카가 들어왔다.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잠자코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따금 동생의 얼굴에 시선을 보냈다. 이윽고 랭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모니카, 아직 저녁이 멀었어? 아니면 저녁을 굶고 집에 돌아가란 말이야?"

"곧 될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곰처럼 방안에서 서성거리는 것은 보기 싫어."

두 사람과의 대화와는 관계없이 조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문제는 스펠이지. 일상적인 문장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데, 그들이 구술을 받아쓴 의학 논문 따위가 제대로 될 까닭이 없지. 그런 점에서 니키라면 아무리 어려운 문장이라도 안심할 수 있지."

랭은 자기의 빈 글래스에 위스키를 가득 따랐다.

"내 비서를 가로채지 말아요, ."

농담같이 말했으나, 그 표정에는 진심이 깃들여 있었다. 런던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니콜라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니콜라에게 랭이 말을 걸었다.

"다시 나를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조의 사탕발림에 넋이 빠졌나?"

랭은 비위를 맞추려는 듯 은근한 미소를 띠고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의 급료라면 약간....."

랭은 헤드라이트가 비치는 도로를 바라본 채 말이 없었다. 이미 웃는 얼굴은 사라지고 없었다.

"급료만 적당하다면 승낙했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생각해 볼만 한 것 같아요."

"니키 없이는 내가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잖아? 협박은 집어치워."

"그만둬야 할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현재는 그럴 생각이 없어요."

랭의 쌀쌀한 시선은 그 정도의 대답이면 족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차 앞에 대도시 런던의 야경이 펼쳐지기 시작했을 무렵,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앤디와의 일은 어떻게 할 작정이지?"

"별로 계획이 없어요."

랭은 시답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니키는 앤디하고 결혼할 수 없어. 이유는 이미 설명한 그대로야."

"그와 결혼하면 당신이 곧 제수를 유혹하겠다는 뜻의 설명이라면 분명히 들었어요."

랭은 갑자기 안절부절 못하고 몸을 움직이면서 강하게 핸들을 쥐었다.

"그런 게 아니라......"

"틀렸나요? 죄송합니다. 착각을 해서."

빈정거림을 당한 랭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니키가 착각할 리가 있나. 그 두뇌는 대단해. 내가 아무리 돌려 말해도 속을 빤히 들여다보거든."

쓴웃음이 랭의 얼굴을 스쳐갔다.

"앞으로는 나도 명심하고 니키에게 손을 대지 않기로 하겠어, 하기야 그런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는 보증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는 본심을 속여 왔는데 말이죠?"

랭은 다시 앞을 바라보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원 저런, 나도 지금 그 말을 니키에게 하려던 참이야. 우리는 의기가 투합하는 모양이군!"

빨개졌던 얼굴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뒤, 니콜라가 조용히 말했다.

"어쨌든 앤디하고는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원래 마음이 맞는 친구로서 사귄 사이니까요."

랭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드디어 경쾌한 휘파람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니콜라를 분개시켰다. 니콜라는 지금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빤히 알고 있었다. 섣불리 손을 대다가 그만두기라도 하는 날이면 만사가 끝나고 만다, 시간을 두고 교묘히 방법을 강구하면 이 여자도 끌려올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것이다. 니콜라는 의기양양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우습게 보면 안돼요, . 당신의 빨간 장미 따위는 받고 싶지 않아요. 만일 보내온다면, 가시가 달린 채로 그 입에 처넣겠어요.>

승부는 앞으로의 일에 달렸다고 니콜라는 생각했다.

랭은 일단 결정한 것을 중도에서 포기할 사람이 아니고, 또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남자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각오와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차가 니콜라의 아파트 앞에 와서 멈추었다. 랭은 니콜라의 뺨을 살짝 만지며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아까부터 전혀 말을 하지 않는군. 좋지 못한 흉계라도 꾸미는 것은 아닐 테지?"

샐쭉해서 고개를 드는 니콜라를 랭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니콜라는 이튿날부터 적당한 구실을 대어, 만나자는 앤드루를 정중히 거절했다. 2주일 정도 지나서야 겨우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했다. 어느 날 그는 니콜라의 책상 앞에 서서 약간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어?"

니콜라는 이미 대답을 준비해 두었었다.

"사실은 어떤 사람과 교제를 시작했어요. 죄송해요."

"누구하고?" 무리한 질문이었다. 니콜라는 미리 준비해 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모르시는 사람이에요.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마는."

"으음......"

"미안합니다."

니콜라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이름은?"

여기까지 질문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곧 이름이 떠올랐다.

"제임스.....제임스 페어팩스. 건축 관계의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이것은 실제 인물이었다. 코인 란드리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동안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두어 번 데이트를 한 일도 있었다. 쾌활하고 사람도 좋아보였으나 별로 깊이 사귀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 후에는 만나자는 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코인 란드리도 바꾸어 버렸기 때문에 그쪽에서도 마음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했다. 연락이 끊긴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앤드루는 이마를 찌푸리고 잠시 생각했다.

"페어팩스라......생각이 나는군! 알고 있지."

니콜라는 깜짝 놀랐으나 겨우 밝은 얼굴을 지었다.

"어마, 정말이세요? 세상은 참으로 좁군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데요."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지, 만난 일은 없어요."

", 그러세요."

니콜라는 안도의 숨을 삼켰다.

앤드루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 그랬었군. 그 사람과....."

니콜라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끄덕였다.

"그런데, 요트는 즐거웠나요?"

", 즐거웠지."

앤드루는 어떻게 하면 어색하지 않게 이 자리를 빠져나갈 것인가를 궁리하는 듯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만일 요트에 다시 흥미가 생기거든 언제든지......"

"감사해요. 그때는 꼭 부탁하겠어요."

그토록 자주 니콜라의 방에 드나들던 앤드루의 발길이 뜸해지고, 같이 식사하러 가는 일도 없어졌다.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랭이 아니었다. 그의 기분은 말로가 아니라, 자못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로 니콜라에게 전해졌다. 흰 이까지 드러내고 웃는 그 얼굴에 니콜라는 힘껏 주먹을 안겨 주고 싶었다.

두 사람은 두고두고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다. 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노력했다. 니콜라도 지지 않았다. 타이프 같은 것을 칠 때는, 반드시라도 해도 좋은 정도로 목덜미에서 랭의 숨결을 느끼는 것이었으나 결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온몸을 훑어 내리는 듯한 시선을 받고서도 무감각하게 상대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여자의 심금을 울릴 듯한 시선도 완전히 묵살하고 말았다. 랭의 집요한 공격은 그칠 줄을 몰랐으나, 한 달 이상이나 지나도 니콜라가 함락된 기색을 보이지 않자 차차 초조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니콜라는 7월 말부터 휴가를 떠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전의 일주일 동안 랭은 먹이를 앞에 둔 호랑이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그런데 먹이는 안전한 우리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호랑이는 손을 댈 수 없었다. 니콜라는 여봐란 듯이 가슴을 폈고, 반대로 랭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자신의 매력이라면 어김없이 항복하리라 생각했던 상대가 의외로 강한 것을 알자 부아가 나는 모양이었다.

니콜라가 드디어 휴가를 떠나는 전날, 랭은 초조한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띠고 고양이 같은 음성으로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니콜라가 밝은 소리로 대답했다.

"유감이로군요. 짐을 챙겨야만 해요."

랭이 무슨 말을 하려 했을 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랭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래서 용건은?"

단호한 목소리로 응대하고 있는 랭에게 니콜라의 시선이 붙박이고 말았다. 내가 왜 이러는 것이지? 안돼! 니콜라는 자신을 꾸짖었다. 어리석은 일이고 위험하기도 하다. 이렇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몸속에 기묘한 전율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랭이 탁 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니콜라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무방비하게 바라보는 것을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랭은 니콜라의 책상 뒤에 있는 캐비닛에서 파일을 꺼내 조사하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끊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다가왔는지 랭이 니콜라의 귓전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니키의 모습을 2주일이나 못 보게 되다니 쓸쓸하겠군."

랭의 입김이 니콜라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니콜라는 태연히 몸을 피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그 일로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니콜라는 자기가 없는 동안 트리시아에게 일을 보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며 울상이 된 트리시아를 열심히 설득하여 납득을 시켰으나, 너무 거칠게 다루지 말라고 랭에게도 당부해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지?"

랭은 니콜라의 의자 뒤에서 손을 돌려 책상에 두 손을 짚었다. 니콜라가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는 형태였다.

"니키는 무슨 향수를 사용하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바꿉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니콜라는 말을 이었다.

"트리시아에 대한 일이에요."

"아니, 또 그 여잔가! 제발 그러지 말아 줘."

"그렇다면 직업소개소에서 새 사람을 부를까요?"

"그보다는 저쪽 여자가 어떨까? 앤디 밑에 있는 여자 있지 않아? 그녀에게는 약간 흥미가 있어."

짓궂은 미소가 랭의 얼굴에 퍼졌다. 니콜라는 가슴에 치미는 구토를 억제하고 웃음을 띠었다.

"알겠습니다. 앤드루에게 상의해 보겠어요."

랭의 미소가 사라졌다. 린다에게 흥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겠으나, 본래의 목적은 니콜라의 질투심을 일으키는 데 있다는 것을 그녀는 간파했다.

"니키는 혼자서 여행 가? 행선지는?"

"스페인입니다."

니콜라가 첫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놓칠 랭이 아니었다.

"혼자?"

"아닙니다. 그보다는 린다를 잘 부탁합니다. 스펠이 틀린 것 정도를 가지고 고함을 치거나 물건을 내던지지 말아 주세요."

"누구하고 여행을 떠나느냐니까?"

"물론 친구하고죠. 린다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세요. 만신창이가 된 비서를 되돌려 준다면 앤드루가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어떤 친구지?"

"당신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알지 못하는 친구도 있었던가?"

괘씸하다는 투였다.

니콜라는 경멸하는 눈으로 그를 뒤돌아보고는 곧 후회했다. 랭의 얼굴이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심장이 뛰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랭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랭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니콜라가 얼굴을 돌렸기 때문에, 랭의 입술은 붉어진 뺨 위에서 허공으로 미끄러졌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집요하게 입술을 요구하는 랭과 대치하고 잇는 찰나에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니콜라를 놓고 수화기를 집어든 랭은, 뜻밖의 방해꾼이 끼어들어 신경질이 난 듯 호주머니의 동전을 절렁거리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서 서류 꾸러미를 안은 앤드루가 들어왔다. 니콜라는 마침 좋은 기회라 여겨 린다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앤드루는, 아직도 전화를 받고 있는 랭의 등을 노려보았다.

"겨우 린다가 익숙해졌는데, 어째서 매번 내 비서를 차출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전화를 끝낸 랭이 돌아섰다.

"2주일 동안이야, 참을 수 있겠지, 앤디?"

물론 이야기는 그것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돌아서려던 앤드루가 갑자기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고 니콜라에게 말했다.

"아 참, 어제 우연히 페어팩스를 만났지. 니키 이야기도 했지. 그는 오늘 밤 니키한테서 전화가 올 거라고 하던데."

니콜라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속에서는 천지가 뒤바뀐 것 같은 동요가 일어났다. 제임스가 무슨 말을 했을까?

앤드루가 돌아가자 곧 랭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페어팩스? 페어팩스란 도대체 어떤 녀석인가?"

"친구예요."

하고 대답했으나, 니콜라의 마음은 한시라도 빨리 아파트에 돌아가 제임스에게 전화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생이 건네 준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랭은 페이지를 넘기면서 지나가는 말 비슷하게 물었다.

"같이 여행할 친구 중의 한 사람인가?"

어리석은 충동이 니콜라에게 "." 하고 대답하게 했다.

랭은 아무말도 않고 자기 방에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니콜라는 김이 샌 듯한 놀람을 느꼈다. 랭은 퇴근 시간이 되어 돌아갈 준비를 하는 니콜라에게 "즐거운 휴가가 되기를 바라겠어."라고 말했으나,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닌 듯한 얼굴이었다. 니콜라는 웃옷을 벗고 넥타이도 느슨하게 맨 시들한 낯으로 책상을 향해 서 있는 랭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파트에 돌아오기가 바쁘게 니콜라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하마터면 엉뚱한 소동이 일어날 뻔했는걸."

제임스가 나무랐다.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잖아요?"

"그건 그래, 하지만 다음부터 나를 이용하려거든 미리 통고를 하는 것이 좋겠어."

"미안해요, 제임스.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알겠어, 이제 됐어."

제임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남자가 니키에게 치근거리던가? 그런데, 스페인에 간다며? 스페인 어디지?"

처음 일주일은 마드리드에서, 다음주에는 해안의 작은 피서지에서 지낼 것이라는 니콜라의 설명을 듣자 제임스가 곧 말을 되받았다.

"나도 다음 주에 마드리드에 가게 되었어. 그러나 놀러 가는 것은 아니지. 일 때문이야. 거기서 스페인 요리라도 같이 하는 것이 어떨까? 니키는 내게 약간의 신세를 졌을 텐데?"

"져도 많이 졌어요."

니콜라는 예약해 둔 호텔 이름을 말했다.

"만일 틈이 생기면 전화해 주세요."

"시간을 내지 못할 줄 알겠지? 어디 두고 봐."

위협하듯 말하고 제임스는 웃었다. "그 사람이 느닷없이 전화를 걸었을 때 하마터면, 몇 달 동안 못 만났다고 실토할 뻔했어. 하지만 니키 생각을 하고 용케 둘러댔지. 그 공로를 인정해 주겠지?"

"물론이에요, 정말 감사해요."

"그 마음을 잊지 말도록. 그럼 빚은 마드리드에서 받기로 하지."

 

8

같은 나이 또래 아가씨 세 사람의 여행이었다. 조안나와 수잔은 니콜라와 같은 아파트의 한방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의 친구였으나 성격은 전혀 달랐다. 어쩌면 그 점이 우정을 지속시키는 원인인지도 모른다. 자그마한 조안나는 쾌활하고 경박스러웠다. 보이프렌드를 노상 갈아치우고 밤에 아파트에 얌전히 앉아 있는 일은 드물었다. 한편 수잔은 내성적인 우등생 타입이었다. 니콜라가 아는 한, 계속 한 사람의 보이프렌드와 사귀고 있었다. 그 상대인 테리 현재 해군에 나가 있기 때문에 만나는 것은 일년에 두 번 정도지만, 편지만은 매일같이 오간다. 그 답장을 쓰는 것이 수잔의 일과였다. 수잔은 결혼에 대비하여 착실히 저금을 하고 있으며, 이미 가구와 식기도 상당히 마련하고 있었다. 찬장은 흰 포장지로 싼 식기가 반은 차지하고 있다. 쓸쓸할 때 그것을 꺼내 바라보고 있으면 우울한 마음이 풀린다는 것이었다.

셋이서 스페인 여행을 하자고 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조안나는 "그만두겠어.", "아니, 가겠어."를 여섯 번이나 되풀이하여 친구들을 당황케 했다.

마드리드에서의 일주일 동안은 명승지 순례로 보낼 예정이었으나, 이틀이 지나자 조안나는 벌써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물론 한 가지밖에 없었다.

조안나가 두 사람에게 소개한 것은 가르시아라는 스페인 청년-이라기보다 남자였다.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싶어서 그래."

하며 조안나는 나가 버렸다. 뒤에 남은 두 사람은 그녀가 어떤 스페인어를 배워 올 것인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나흘째 되는 날 제임스가 전화를 걸어왔다. 니콜라는 수잔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으나 깨끗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오늘 밤에도 테리에게 편지를 쓸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는 일단 말한 것은 실행하는 사람이지."

제임스는 촛불이 타고 있는 테이블에서 스페인 명물 파에리아를 먹으면서 말했다. 촛불 너머로 보이는 제임스는 아주 남자답게 보였다. 평소에는 간편한 옷만 입는 그가 오늘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그런 것 같군요."

"그래, 하일랜드와는 어떻게 된 거야?"

"미안해요. 어쨌든 구실이 필요했던 거예요. 당신에게는 정말 죄송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이용해도 좋아."

제임스가 웃으면서 니콜라의 글래스에 와인을 따랐다.

"한데, 그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지? 내가 보기엔 훌륭한 사람 같던데."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지만....이란 말이군? 그 다음을 듣고 싶군. 하기야, 니키는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지. 안 그래?"

니콜라는 웃으면서 대답을 피했다.

"나는 하마터면 그에게 말할 뻔했어..우리 클럽에 가입하지 않겠느냐고."

제임스는 확 얼굴을 붉히는 니콜라를 짖궂게 바라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1년에 한 번씩 총회를 열지. 이란 클럽이지. 묘안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을거야, 별로 조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사업은 잘 되세요?"

니콜라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이렇게 묻곤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화제를 바꿀 생각이군? 사업은 순조롭습니다. 댁의 회사는 경기가 좋습니까?"

그는 일부러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덕택에요."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제임스가 말문을 열었다.

"할 말이 좀 더 많을 것 같은데."

"그래요....아 독신이세요?"

하고 말했으나, 그다지 현명한 질문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임스는 놀려대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것은 유혹의 뜻인가? 그렇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어."

그 말을 무시하고 니콜라가 말했다.

"특별히 사귀는 사람이 있을 테죠?"

"여자라면 누구나 좋아, 나는 극히 다루기 쉬운 남자니까."

"그 말을 잘 기억해 두겠어요."

"니키야말로 어떻게 된 거지? 하일랜드에게 새 여자가 생겼나?"

니콜라는 웃으면서 교묘히 화제를 바꾸었다. 제임스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니콜라에게는 예상외로 즐거운 밤이 깊어 갔다. 토속주라는 와인의 맛에 반해 평소보다 좀 많이 마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크게 웃고 떠들었으며, 런던에 가거든 다시 만나자는 약속까지도 했다. 일을 끝내고 내일 귀국한다는 제임스는, 니콜라가 돌아갈 비행기 시간을 묻고 자동차로 공항까지 마중 나가겠다고 했다.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 친절하군요."

니콜라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와인을 따랐다.

두 사람은 니콜라의 호텔까지 걸어서 갔다. 습기를 머금은 밤바람이 니콜라의 눈을 무겁게 했다. 제임스는 기대어 오는 니콜라의 몸에 팔을 감고 부축해 주면서 가만히 웃었다.

"괜찮겠어, 아가씨? 비틀거리는 것 같군."

니콜라도 따라 웃으며 머리를 들었다.

"이게 누구탓이죠?"

"내게 책임을 전가시킬 생각인가?"

"아니에요, 죄는 와인에게 있어요."

니콜라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조금 지나치게 마신 것이었다.

호텔 앞에까지 오자 제임즈는 니콜라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니콜라는 저항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간단히 키스에 응했다. 응하는 태도가 조금 지나쳤는지 몰랐다.

제임스는 기분이 좋아, 좀 더 힘 있게 껴안고 오랫동안 키스를 했다.

"반드시 공항에 나가겠어. 나를 찾지 않고 그냥 돌아가면 용서하지 않겠어."

"잊지 않겠어요."

니콜라는 멀어져가는 제임스에게 손을 흔들고, 방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물론 모든 것을 잊고.....

토요일에 니콜라들은 마드리드를 떠나 해안의 피서지로 이동했다. 세 사람은 호텔과 해변을 왕래하는 일 외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낮에는 해수욕과 일광욕, 밤에는 호텔에서의 저녁 식사와 댄스 파티가 전부였다. 마음만 내킨다면 얼마든지 남자를 사귈 수 있었다. 조안나는 매일 밤 다른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매우 만족해했다. 니콜라에게는 버밍엄 근처에서 왔다는 외국인이 따랐고, 수잔도 자주 유혹을 받았다. 테리에게 편지를 쓴다는 중대한 임무를 띤 수잔은 단호히 유혹을 물리쳤으나, 유혹을 받는다는 것 자체는 별로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니콜라의 살갗은 차차 고운 밀빛으로 변해 갔다. 정성껏 선오일을 바르고 얼룩이 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일광욕을 한 성과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그처럼 곱게 태울 수 있어?"

부러운 둣이 조안나가 말했다. 그녀의 살갗은 뜨거운 물에 데친 새우처럼 빨갛게 되는가 싶더니, 곧 껍질이 벗겨져 밀빛과는 인연이 없게 된 것 같았다.

"네가 태양을 독점했나 봐."

"모처럼 남쪽나라에 왔으니 그 증거를 가지고 갈 생각이야."

니콜라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해. 누가 보아도 남국에서 왔다는 것을 믿을 거야."

하고 조안나가 보증했다.

여름휴가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에서 세관의 검사를 받고 있을 때, 니콜라는 제임스가 마중 나오겠다고 한 말을 비로소 상기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두 사람 모두 취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마중 나올 리가 없다고 니콜라는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이 어긋났다. 슈트케이스를 받아들고 출구로 향한 니콜라의 눈앞에 제임스가 나타났던 것이다.

"여어, 어서 와!"

순간적으로 당황해 하는 니콜라에게 제임스가 말했다.

"이거 놀랐는걸. 아주 멋지게 탔군. 어울리는데."

"고마워요, 제임스."

니콜라가 가볍게 인사하고 웃음을 띠었다. 가까이 살고 있는 관계로 조안나와 수잔도 제임스의 얼굴은 알고 있었으나 아직 인사를 한 적은 없었다.

니콜라에게 두 사람을 소개받은 제임스는, "그렇다면 모두 차에 타시죠." 하고 말했다. 조안나와 수잔은 매우 기뻐하며 먼저 차 쪽으로 걸어갔다. 제임스는 니콜라의 짐을 받아들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낀 채, 앞서 가는 두 사람을 따라갔다.

"즐거웠어?"

"물론이죠. 맛있는 음식과 태양와 바다-달리 무엇을 바라겠어요?"

"역시 여자로군!"

제임스가 말하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갑자기 니콜라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레인코트를 옆에 낀 양복 차림의 랭이 뚫어지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콜라는 멈칫하고 우뚝 섰다.

"왜 그래?" 제임스도 걸음을 멈추었다.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제임스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니콜라의 시선을 쫓았다. 랭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손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제임스가 니콜라에게 얼굴을 돌리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지? 연적(戀敵)이라면 여간 녹록하지 않겠는데.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군."

"우리 사장이에요. 어마, 애들이 안 보여요."

"괜찮아, 저것 봐.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쟎아?"

랭에 대한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제임스는 세 아가씨를 차에 태우고 시내로 달리면서, 여행 이야기에 즐거운 듯 맞장구를 쳤다.

"유감이군, 나도 끼었어야 했는데."

이야기는 조안나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것도 남자와 지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제임스가 조수석에 앉은 니콜라에게 시선을 보냈다.

"니키는 어땠지? 그 미소로 몇 명의 남자를 뇌쇄시켰어?"

"몇백 명인지 모르겠군요."

"우리 클럽이 초만원의 대성황을 이루겠군!"

"? 무슨 클럽이죠?"

조안나가 뒤에서 몸을 내밀었다. 니콜라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제임스가 이야기를 폭로하고 말았다. 모두 웃었으나 니콜라는 씁쓸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파트 앞에서 세 사람을 내려놓은 제임스는 니콜라의 손을 잡았다.

"다음에는 언제 만나지?"

"멀지 않은 장래에요. 전화 주세요."

니콜라는 화답을 피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덕택에 편히 왔어요."

"천만에, 대수롭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제임스는 유쾌한 음성을 남기고 차를 달렸다.

니콜라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제임스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조금만 다정히 대해 주면 '한 침대에서 아침을 맞는 게 어때?' 하는 정도의 말은 태연히 내뱉을 사람이었다.

월요일이 되었다. 2주일 만에 사무실에 들어선 니콜라가 본 것은 산더미 같은 서류와 울상이 되어 있는 린다의 모습이었다. 지난주에 끝내라고 한 서류 정리가 아직 다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린다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니콜라, 돌아와서 정말 살았어요! 사장님이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처음에는 괜찮은 편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이 떨어지면서 그때부터는 지옥이었어요. 그것도 단 한 번의 전화가 원인이었어요. 사장님이 누님을 싫어하시는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니콜라는 잠자코 듣고 있었으나, 혼자라면 깔깔 웃었을 것이다.

"수고했어요. 다음 일을 내가 맡을 테니 어서 부사장님한테 돌아가세요."

린다는 미안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햇볕에 곱게 탔군요. 여행은 재미있었어요?"

"무척 즐거웠어요."

니콜라가 말했을 때 안쪽 방의 문이 열렸다. 린다는 기급을 하고 도망쳤다. 문에 기대 선 랭이 험한 시선으로 니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오기 싫었겠지?"

묘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랭이 물었다.

니콜라는 린다가 남기고 간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날씨엔 마음이 울적하게 마련이군요."

8월인데도 밖에서는 싸늘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디 다녀오셨나 보죠?"

"일 때문에 덴마크에 이틀 동안 가 있었지. 코펜하겐에도 비가 내리고 있더군."

"유감이군요."

니콜라가 미소지었으나 랭의 반응은 없었다.

"니키는 즐거웠던 모양이군?"

", 무척. 힘껏 날개를 폈어요."

서류를 캐비닛에 넣고 돌아선 니콜라는, 자기를 바라보는 잿빛 눈이 너무나 싸늘한 데 놀랐다. 갑자기 랭이 입을 열었다.

"공항에 있던 그 사람이 페어팩스인가?"

니콜라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랭은 제임스도 같이 여행한 것이라 오해하고, 노리고 있던 먹이를 가로채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웃으면서 오해를 해명하려던 니콜라는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 그야말로 하늘의 도움이었다. 되도록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그녀가 말했다.

", 그 사람이 바로 제임스에요."

"언제부터 알게 됐지,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

흡사 심문하는 것과도 같은 어조였다.

"엣정을 나누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는."

", 옛날 친구인가?"

랭은 안심하는 듯했다. 그러나 니콜라는 안심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주 만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에요."

니콜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나서 일부러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부사장님과의 데이트를 중단한 후부터죠."

랭의 얼굴이 다시 흐려졌다. 이마를 찌푸리고 찌를듯한 시선으로 니콜라를 노려보았다. 니콜라가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어요."

"충고? 내가 니키한테 충고를 했다고?"

"."

니콜라는 마침내 울리기 시작한 전화를 받으러 가면서 환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충고는 전문가한테 받아야 되겠더군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모니카로부터의 전화였다.

"어마, 돌아왔군요?"

탐탁지 않은 목소리였다.

"랭은? 설마 없다는 말은 또 안할 테죠?"

"아직 출근하지 않으셨어요. 나오시면 이쪽에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좋아요."

혀라도 차는 듯한 음성이었다.상대가 니콜라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저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달콤한 음성으로 니콜라가 말했다.

"그럼 할 수 없군요. 결산 보고서는 언제 되죠?"

"현재 인쇄 중이므로 아마 월말에는 여러분의 손에 배포되리라 믿습니다."

"그러기 전에 한번 보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인쇄가 되는 대로 제일 먼저 보내 드리겠어요."

이것은 결산기가 가까워 올 때 연례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전화를 끊고 돌아다보니, 랭은 이미 자기 방으로 돌아가 마구 물건을 내던지고 있는 듯했다. 기분이 언짢다는 증거였으나, 소음 공해를 받는 피해자의 고충도 이해해 주었으면 싶었다.

"니키, 내 팬을 어디다 감췄어?"

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랭이 소리쳤다. 니콜라는, 감추고 싶어도 내가 자리에 없었는걸요, 하고 싶었으나 잠자코 사장실을 뒤졌다. 펜은 랭의 눈앞에 있는 메모지 속에 끼여 있었다.

"무얼 멍청히 서 있어? 일하고 싶은 생각이 없나?"

이것이 랭의 인사였다.

랭은 오전 내내 신경질을 부리며, 온갖 악의 근원은 네게 있다는 눈으로 니콜라를 노려보았다. 니콜라는 미소를 잃지 않고, 상대의 불쾌감을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오후 한 시가 지나 겨우 일에서 해방되어 밖으로 나온 니콜라는, 점심을 단념하고 조안나의 생일 선물을 사려고 했다. 보석상의 쇼우 윈도우를 들여다보고 있던 니콜라에게 누가 말을 걸었다. 캐리 루치였다. 햇볕에 탄 살갗을 칭찬하는 캐리에게 니콜라는 "고마워요."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누가 선물하겠다고 한다면 어떤 것을 택하겠소?"

의미 있는 말로 캐리가 물었다.

"이 사파이어 반지."

니콜라가 즉석에서 대답했다.

캐리는 흘끗 정가표를 보고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 멋진 반지로군."

니콜라의 장난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아양을 떠는 곁눈질을 하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사파이어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비서인 주제에 건방지게---얼굴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으나 캐리는

"점심이나 같이 할까요?" 하고 물었을 뿐이었다.

"유감이군요. 살 물건이 있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루겠어요."

용케 빠져나가려는 니콜라의 팔을 붙들고, 캐리가 자만의 미소를 보냈다.

"오눌 밤 파티에도 랭과 동행합니까?"

"파티?"

그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니콜라의 몸에서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랭은 누구하고 갈 작정일까? 십중팔구는 금발 아가씨임에 틀림없다. 캐리는 니콜라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아닌가요? 그럼 나와 동반합시다."

"오늘은 무슨 파티죠?"

니콜라가 울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 재개발 사업의 착공 기념이죠. 우리 회사에 낙찰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겠죠? 랭도 입찰했지만 우리 회사의 응찰가에 이길 수가 없었죠."

그도 그럴 것이다. 루치가 제시한 가격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싼 값이었다. 랭은 입찰 장소에서 돌아와 "그 영감, 틀림없이 큰 손해를 볼 거야!" 하고 분을 터뜨렸으나 파티에는 참석할 것이다. 루치 노인이 그 가격으로 어떻게 채산을 맞출지, 그것이 궁금할 것이기 때문이. 물론 니콜라는 캐리의 제의를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그만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기꺼이 함께 가겠어요."

캐리는 한 술 더 떴다.

"괜찮다면 아파트까지 마중 가죠."

"어마, 기뻐라. 몇 시에?"

"여덞 시. 오늘 밤은 즐겁게 지냅시다, 니키."

당신이나 즐기세요! 니콜라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녁때 니콜라가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랭이 말했다.

", 잊었었군. 오늘 밤에 파티가 있어. 루치가 재개발 사업 착공을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야. 니키도 참석할 준비를 하도록 해."

경솔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고 있는 니콜라에게 예리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디 갈 일이라도 생겼나?"

"저어....캐리과 먼저 약속을 해서......"

"? 지금 뭐라고 했지?"

"그러니까 파티에는 캐리와....."

"캐리라니, 캐리 루치 말인가?"

랭은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듯이 물었다.

"캐리 루치의 초대를 니키가 받아들였다, 이 말이지?"

"파티가 있을 때는 언제나 미리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기에 그만....."

"뭐라고? 내가 언제 니키더러 루치네 사람과 어울리라고 허락했나?....아니, 대답은 필요 없어."

랭이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니키는 사람의 허를 찌르는 데는 천재로군, 그렇게 시치미를 떼면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으니."

"남의 허를 찌른 기억은 없어요."

니콜라는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루치네 파티에 니키를 안 데리고 간 적이 있던가?"

랭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니키는 캐리 루치와 함께 가는 것을 내게 보여 부아를 돋우려는 속셈이지? 부아가 지나쳐 미쳐도 좋다는 거지?"

랭의 얼굴이 분노로 검붉어졌다.

"하지만 그 수에 놀아나지는 않을걸. 니키는 모니카와 비슷한 데가 있어. 다만 방법 이 조금 다를 뿐이야. 모니카는 남이 지겨워할 정도로 지껄여대지. 니키는 머리가 좋으니까 그런 수법을 쓰지 않지만, 나를 골탕 먹이는 데는 모니카 이상이야."

니콜라는 얼른 웃는 낯을 보이며 그를 달래려 했다.

"지금 캐리에게 거절한다 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었노라고 그에게 말하겠어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그 녀석과 같이 가도록 해,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랭은 쏜살같이 방에서 나갔으나, 니콜라가 겨우 어깨의 힘을 뺄 무렵에 다시 돌아왔다.

"이번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어! 잘 기억 해 두도록 해!"

랭은 다시 복도로 뛰어나갔다. 니콜라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놀람이 진정되자 이번에는 분노가 치솟았다. 큰 잘못도 없이 2년 남짓이나 충실하게 일해온 비서를 붙들고 배반자 취급을 할 권리는 없을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기억해 두세요, 랭 하일랜드!

여덟 시 정각에 캐리가 마중 왔다. 그는 몸단장을 하고 나온 니콜라를 보고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고 추켜세웠다. 드레스는 여전히 그 검은 드레스였으나, 이번에는 해수욕으로 살이 탔기 때문에 좀 더 섹시하게 보인다는 점은 니콜라도 자각하고 있었다. 머리에 맨 붉은 헤어밴드와 펄이 든 입술연지가 밀빛 살갗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캐리의 입에 발린 찬사에 니콜라는 여유 있는 미소로 답했다. 무엇 하나 믿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파티의 동반자로는 손색이 없는 상대였고, 그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칭찬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파티장에 도착한 니콜라는 혼잡한 인파속에서 랭을 찾아보았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캐리의 아버지가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손에 키스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마치 귀부인처럼 대접하는 것이었다.

"마음껏 즐기시기를."

루치 노인은 니콜라에게 말하고 나서, 잘 했다는 듯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담소와 술과 댄스 속에서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나 랭은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캐리도 이것을 의식한 듯, 여기에 대해 결코 점잖다고 할 수 없는 농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랭은 두 시간이나 늦게 회장에 나타났다. 동반자는 없었다. 급한 일로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지각의 구실이었다. 랭이 얼음 같은 시선을 니콜라에게 퍼붓고 눈길을 돌리는 것을 본 캐리가 즐거운 듯이 물었다.

"니키는 랭과 말다툼이라고 했나요?"

"언제나 그래요."

랭의 성질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캐리는 실망하는 듯했다. 그래도 캐리는 교묘히 스텝을 밟으면서 랭에게 접근해 갔다. 니콜라와 가까워졌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랭은 돌아보지도 않고 루치 노인과 이야기하면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노인은 잡아 놓은 먹이를 혀로 핥듯, 만면에 웃음을 띠고 랭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니콜라는 일부러 스텝을 헛딛고 댄스를 중단했다.

"캐리, 잠시 쉬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랭은 돌아보지 않고 다시 위스키를 마셨다. 루치 노인의 눈이 아들을 향해, 그 아가씨를 먼 데로 데려가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효자인 아들은 저쪽에 가서 시원한 것이라도 마시자고 니콜라를 유인했으나, 그녀는 이를 무시하고 사장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훌륭한 파티에요, 미스터 루치."

"정말 훌륭하군."

랭이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 음성이 평소와 다른 것을 깨닫고 니콜라는 눈썹을 찌푸렸다. 약간 취해 있는 듯했다. 도가 지나치게 마시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 오늘 밤은 어찌 된 일일까? 여기 오기 전에 벌써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실 것을 좀 갖다 주시겠어요?"

니콜라가 먼저 캐리를 쫓아버렸다. 이번에는 아버지 차례였다. 탐탁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의 어깨 너머로 니콜라가 시선을 보냈다.

"어마, 누가 찾으시는 것 같군요."

노인이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문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까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미스터 루치."

물론 거짓말이었다. 노인이 인파를 헤치며 사라져 버리자, 니콜라는 재빨리 랭의 귀에 속삭였다.

"저를 아파트까지 바래다주세요."

"캐리에게는 이제 싫증이 났나?"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취해 버려요. 정보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털어놓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해요."

"취하지 않았어. 나는 말짱해. 문제없어."

하고 말하는 자체가 이미 취한 증거였다. 캐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노인도 몹시 당황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어서 빨리요!"

니콜라는 랭의 양복소매를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랭이 조용하게 웃었다.

"캐리의 기쁨을 헛되게 해서야 쓰나, 안 되지."

니콜라는 힘껏 발을 밟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말씀 마시고 어서 돌아가요!"

루치 부자가 거의 동시에 당도했다. 노인은 한 방 얻어맞았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몹시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랭은 글래스를 곁에 있는 테이블에 놓았다.

"우리는 이제 실례하겠어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루치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니콜라에 해당하는 말 같았다. 캐리가 마실 것이 든 글래스를 니콜라에게 내밀었다.

", 여기 있어요, 니콜라. 랭씨, 당신은 가셔도 좋아요. 그녀는 내가 바래다줄 테니까."

형식적인 웃음을 띠고 캐리가 말했다.

"아니, 내가 바래다주겠소. 이것은 상사의 특권이오."

랭은 캐리에게 냉소를 던지고 니콜라의 팔짱을 꼈다. 니콜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얼른 랭의 차에 탔다. 차가 밤거리를 달리기 시작하자, 니콜라는 갑자기 몸을 긴장시켰다. 랭이 휘파람을 불면서 경쾌하게 핸들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

"이 거짓말쟁이! 조금도 취하지 않았으면서도!"

니콜라가 덤벼들었다.

랭은 히죽이 웃으며 니콜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취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모습을 보면 누구든지 취한 것으로 믿어요!"

랭은 대답 대신 휘파람을 계속 불었다.

"나는 돌아가겠어요."

"그래서 지금 바래다주고 있잖아."

랭은 니콜라에게 얼굴을 돌리고 흐뭇한 미소를 보냈다.

"니키의 충성심에 감탄했어. 니키와 같은 부하를 가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야."

니콜라의 분개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아파트 앞에 차가 멎기가 바쁘게, 니콜라는 조수석에서 뛰쳐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랭은 긴 팔을 뻗어 손잡이를 붙들고 말았다.

"나가게 해 줘요!"

니콜라의 몸은 위험을 느끼고 경직되었다.

몸부림치는 니콜라를 랭은 어렵지 않게 자기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잿빛 눈이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밤엔 무척이나 섹시해 보이는군, 니키."

이 말 만 들어도 니콜라의 가슴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살빛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답군."

랭의 숨결이 니콜라의 귀를 간질였다. 뜨거운 입술이 가볍게 목덜미에 와 닿았다.

"아아, 니키의 향기로군......"

쉰 목소리로 말하고 랭은 니콜라를 자동차 시트에 쓰러뜨렸다. 뜨거운 것이 니콜라의 몸속에서 꿈틀거렸다. 저항하려고 고개를 쳐든 니콜라의 입술을 랭이 사정없이 빼앗았다. 소리 지르기는커녕 숨도 쉴 수 없는 키스에 니콜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상대의 몸을 밀쳐 버리려던 니콜라의 팔에서 차차 힘이 빠졌다. 키스는 더욱 격렬해지고 뜨거워져 니콜라의 이성을 앗아갔다. 드디어 니콜라는 저항을 단념했다. 저항하려 해도 랭의 키스로 불이 붙은 몸이 저절로 반응하고 있었다.

니콜라는 집요한 키스에 미친 듯 반응하면서 랭의 와이셔츠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랭의 온몸에 경련이 이는 것을 니콜라도 느낄 수 있었다. 손이 떨려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단추를 모두 끄르기까지 몇 년이나 걸릴 것인가?

랭의 혀가 니콜라의 입 속에서 미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니콜라는 치솟는 환희에 크게 몸을 떨면서 이에 응했다.

"니키, 니키....."

마주 댄 입술 사이로 굵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니콜라가 열에 들뜻 듯이 속삭였다.

"오늘 밤엔 끝까지......부탁이에요."

니콜라는 겨우 와이셔츠를 바지에서 빼내었다. 어두컴컴한 빛 속에서 억센 가슴이 떠올랐다. 그 가슴에 가만히 손을 댄 순간, 니콜라의 몸은 다시 격렬하게 떨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참고 또 참아 온 욕구 불만이 마침내 폭발하여 자기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니콜라의 손은 랭의 가슴에서 어깨로, 그리고 다시 가슴으로 애무를 계속했다. 심장에 손을 대니 거센 고동이 손에 전해졌다.

니콜라는 눈을 감고 랭의 가슴에 안겼다. 굵은 목줄기에, 어깨에 니콜라는 숨을 헐떡이며 뜨거운 입술을 밀어붙였다. 랭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니콜라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도 가만히 시트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니콜라를 밀쳐 버렸다. 니콜라는 초점이 흐린 눈을 크게 뜨고 망연히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더러운 것!"

내뱉는 듯한 중얼거림. 잿빛 눈이 칼날처럼 예리했다.

어째서 그럴까? 무엇이 못마땅한 것일까? 왜 이런 눈으로 노려보는 것일까?

"니키만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어. 나를 초조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조롱하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어.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군. 그렇지? 용케도 그런 흉내를 냈군."

"무슨 말이에요?"

아직도 몸이 타는 듯이 뜨거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시치미 떼지 말아. 니키의 변화를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변화라구요?"

"지난날의 니키와 현재의 니키 말이야."

랭의 음성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처음에 니키는 살만 닿아도 깜짝 놀라며 여학생처럼 얼굴을 붉혔어. 멀리서도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릴 정도였어. 내가 목욕을 하고 나온 모습을 보고 머리끝까지 붉어졌던 것이 누구였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니키는 지금처럼 남의 몸을 더듬거나 하지는 않았어. 누구한테 그런 테크닉을 배웠나?"

음성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목의 힘줄이 크게 움직였다.

"알고 있어. 스페인에서 그 녀석한테 배웠지?"

랭은 말할 기력도 없이 고개를 돌린 니콜라의 어깨를 붙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놓으세요! 아파요!"

"아프다고? 나를 뿌리치고 일부러 다른 사내와 잔 니키가 이 정도를 갖고 불평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랭은 저주스럽게 웃었다.

니콜라의 머릿속에서는 할 말의 윤곽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제임스와 함께 스페인에 갔던 것처럼 랭이 생각하게 만든 것은 분명히 자기 자신이었다. 충동에 사로잡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말해 버린 것을, 그 당시에는 멋진 아이디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던 것처럼도 여겨졌다. 충격으로 온몸이 굳어지고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 니콜라는 오직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니콜라가 떨면 떨수록 랭의 얼굴은 험상궂어졌다. 귓전에서 랭의 음성이 들렸다. "이 냉혈동물 같으니라고! 나를 골탕 먹이려는 거지? 그리고 상처를 입히려는 것이겠지? 좋아, 만족하라구, 할 만한 가치가 있을 테니까."

랭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며 굳게 다물어지는 것을 니콜라는 보았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경멸로 검게 변해 있었다.

"....."

니콜라가 호소하듯 손을 내밀었으나, 그 손은 랭에게 무참히 뿌리쳐졌다.

"그 손은 녀석을 위해 아껴 둬! 더러운 손으로 나를 건드리지 말아!"

저도 모르게 니콜라의 가슴에 분노가 치솟았다. 그녀는 시트에 꼿꼿이 앉았다.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는 거예요! 그런 말로 나를 탓하거나 비판할 권리가 어디 있어요? 설혹 내가 한 다스나 되는 남자와 침대를 같이했다 해도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는 없어요!"

랭은 씁쓸한 웃음을 띠었다.

"만일 니키가 진심에서 그런 일을 했다면 나도 잠자코 있겠어. 그러나 니키는 나와 자고 싶으면서도, 단지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잔 거야. 그것을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용서치 못해!"

"당신은 지금까지 몇 사람의 여자와 관계를 맺어 왔지요?"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래요? 자기만은 어떤 일을 해도 좋다는 것이로 군요?"

"그것은 문제가 달라. 즐겁고 놀고 깨끗이 헤어지는 것뿐이야. 저쪽에서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에서 사귀려 들고 있어. 지금 문제와는 전혀 차원이 달라."

"차원이 다른지 어떤지는 몰라도, 당신이 그 여자들한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은 할 거예요. 당신이 한 일을 내가 했다고 해서 그게 무슨 잘못인가 요? ?"

랭의 눈에서 불꽃 같은 것이 빛났다.

"니키가 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야!"

큰 소리로 외친 랭은 숨을 죽이고 니콜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험상궂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어 있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야 겨우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니콜라는 치솟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자기에 대해서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었는데...단순한 욕망이다-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생각하려 했었는데...

그런데 당사자로부터 이런 형태로....그러나나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사랑하고 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랭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랭은 그것을 알아내고 말았다. 니콜라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손발의 떨림을 진정시 켰다.

"사랑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당신의 주장이지 않아요? 내 사랑도 곧 식고 말 거예요. 이런 사랑 따위는 곧 쓰레기통에나 던져 버리고 말겠어요!"

니콜라는 난폭하게 문을 열고 자동차 밖으로 나왔다. 랭은 얼굴을 돌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니콜라는 피로한 다리를 끌고 아파트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갔다.

 

9

그날 밤 니콜라는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에 시달리면서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랭의 그 말이 귓전에서 한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니키는 나를 사랑 하고 있어!

이렇게 말했을 때의 그 얼굴도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몹시 놀란 듯한 그 얼굴, 아마 그 순간까지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다. '사랑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한 주제에,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은 믿는 것일까? 그 무슨 모순인가?

그러나 랭을 사랑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오늘 밤의 그 행동-- 경우에 따라서는 자진해서 몸을 허락하겠다는 듯한 말까지 하다니! 하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었다. 이성도 분별도 자취를 감추고, 타는 듯한 욕망만이 몸을 불사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몸속에서 뜨거운 것이 불끈 솟아난다. 이성으로써는 어쩔 도리가 없는 자기 육체의 어리석음에, 니콜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저주의 말로 자신을 책했다.

랭을 사랑하고, 또 그것을 본인에게 알린 것은 그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결코 평탄치 않았던 24년간의 인생을 통해 이처럼 비참한 생각이 든 것은 처음 이었다. 지금쯤 랭은 집에 돌아가서 쓴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작 손에 넣을 것을 그랬어.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

하고 중얼거리면서 홧술이라도 퍼마시고 있는지 모른다.

분명히 랭은 예상 밖의 고생을 했다. 로이스에게 손을 뗀 것이 봄, 지금은 8월이다. 그동안 애인은 한 사람도 만들지 않았다. 만일 또 다른 금발 아가씨가 등장했다면, 앤드루나 모니카의 입을 통해 반드시 귀에 들어왔을 것이다. 몇 달 동안이나 랭은 금발 미인 없이

지내 왔고, 니콜라 애드니란 처녀를 손에 넣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자신의 성적 매력을 구사해 왔다. 그것이 아무런 효과도 나타내지 못해 초조해 할 무렵, 먹이를 다른 사람에게 가로채이고 말았으니 억울해 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일부러 상처를 입히려 했다고 랭은 윽박질렀다. 정말 상처를 입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간은 위안이 된다. 지금까지의 걸프렌드와는 달리 여기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아니다. 상처받은 것은 플레이보이로서의 긍지뿐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좋다. 어떤 여자도 자기 앞에서는 정신을 못 차린다고 생각한 오만한 사나이의 콧대를 꺾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도 니콜라의 마음은 조금도 홀가분해지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니콜라는 무거운 발을 끌 듯이 하고 회사에 출근했다. 놀랍게도 랭은 아직 출근해 있지 않았다. 니콜라는 집행 시간을 연기 받은 사형수와 같은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으나, 아주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고 시계에만 정신이 팔려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긴장과 불안으로 기분이 언짢아질 무렵에야 겨우 랭이 회사에 나왔다. 그는 핏기가 가신 니콜라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그녀에게는 몇 시간이나 되는 듯한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에 대한 지시였다. 험상궂은 얼굴에서는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랭이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신하려 한다는 것을 니콜라도 알 수 있었다. 오늘의 랭은 매우 점잖았다. 쌀쌀하고 예의바른 태도를 보일 때마다 니콜라는 허전한 기운이 밑에서부터 올라와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것을 느꼈다. 랭에게 용무가 있어 들어왔던 앤드루가, 조용하고 태연한 태도로 응대하는 형을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가 버렸다. 니콜라에게 있어서 이처럼 하루가 길게 생각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랭의 고함 소리가 들리지 않고, 문도 조용히 여닫히는 직장이 얼마나 답답한 것인지 니콜라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

니콜라는 심신이 극도로 피곤하여 아파트에 당도했다. 오늘 밤은 아파트 안이 이상하게 넓어 보였다. 스테레오를 틀고 책을 펴 들었으나, 음악도 책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밤에 한잠도 자지 못한 탓인지 침대에 눕자 곧 잠이 들었으나,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리느라고 단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부터 랭은 평상시처럼 니콜라보다 먼저 출근하게 되었으나, 그 냉담한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니콜라는 자기와 랭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도랑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랭은 사업상의 이야기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니콜라는 비록 표면적으로는 냉정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마음은 깊은 상처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만두지를 않고, 지금은 완전히 멀어져 버린 사람밑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놀라기도 하고 한심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사장이 갑자기 온순해진 데 대해 회사에서는 차차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앤드루가 니콜라에게 와서 말했다.

"형은 요새 몹시 얌전해졌군.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니콜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러나 앤드루의 재촉을 받고 니콜라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아마 사업에 지쳐서 그러실 테죠."

"니키는 여전히 페어팩스와?"

니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어제도 데이트를 했던 것이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거는 바람에 거절할 도리가 없어 같이 식사를 하러 나갔었다. 니콜라는 제임스에게 건축학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자신의 보람인 사업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는 키스를 요구해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앤드루가 약간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

"만일 괜찮다면 요트를 타고 바다에라도……."

"고마워요. 하지만 이미 바다의 계절은 지나지 않았나?"

니콜라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여름의 태양이 쨍쩅 내리쬐던 때가 아득한 옛날 같았다. 공원의 나무에는 이미 잎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템즈강의 물도 불어나고, 아침에 출근할 때는 수면에서 피어나는 흰 수증기를 보게 되는 날도 가끔 있었다.

"하기는 그렇지만."

앤드루가 할 수 없이 인정했을 때, 랭이 방으로 들어왔다. 니콜라의 책상 옆에 서 있는 동생을 보고 랭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앤디?"

"아니, 별로. 저어...."

앤드루는 슬금슬금 모습을 감췄다.

랭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니콜라는 그 문을 향해 무엇이건 내던지고 싶었다. 이제 곧 겨울이 온다. 니콜라의 가슴에도 싸늘한 북풍이 불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니콜라는 그 후에도 가끔 제임스와 데이트를 했다.

혼자 아파트에 틀어박혀 인생의 허무를 알리는 듯한 시계소리를 듣고 있기보다는, 그 편이 조금은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임스는 수시로 키스를 요구해 왔다. 니콜라는 별로 거절하지 않았으나, 그런 키스가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제임스가 키스 이 외의 것을 요구해 오지 않는 것만이 다행이었다. 그가 싫은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키스 이상의 깊은 관계에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10월이 저물어 가는 어느 날, 니콜라는 제임스와 함께 극장에 갔다. 소문이 자자했던 연극의 첫날이라 극장은 초만원이었다. 막간의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로비의 바에 갔던 니콜라는 거기서 랭의 모습을 발견했다. 바로 곁에 모니카와 토비가 있었다. 따라서 랭의 기분이 언짢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것 봐, 니키네 회사 사장이야."

옆에서 제임스가 말했다.

"그렇군요."

니콜라는 아직 랭이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그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제임스의 눈치를 보기

가 싫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모니카는 동생의 팔을 붙들고 무어라 계속 말하고 있었으며, 토비는 하릴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모니카가 이 청년을 그토록 감싸려 하는지 니콜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 자기한테 고분고분하는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리라. 모니카는 남의 생활에 뛰어들어 지시하는 것이 취미인 듯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간섭에 대해 저항할 것이지만, 토비는 입을 비죽거리는 것이 고작이고, 정면으로 말대답을 할 용기를 갖기 못했을 것이다. 토비가 조금 더 나이가 많았다면 모니카와의 관계를 의심받았을지 모르나, 지금 형편으로는 아무리 보아도 과잉보호를 받고 있는 자식과 같은 상태일 것이다.

혼잡한 실내를 둘러보고 있던 토비의 시선이 니콜라를 발견했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피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순간 모니카의 목청 높은 소리가 들려왔다.

"니콜라가? 어디?"

랭이 돌아보았다. 인파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니콜라는 빨려 들어가듯이 예리한 잿빛 눈을 바라보았다. 잊혀져 가고 있던 뜨거운 것이 몸속에서 되살아났다.

니콜라는 뺨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얼른 시선을 돌려 모니카를 바라보았다. 모니카가 신호를 보냈다. 이쪽으로 오라는 뜻인 듯싶었다. 니콜라는 할 수 없이 제임스와 함께 가까이 갔다.

"묘한 데서 만나는 군요."

모니카가 제임스를 곁눈으로 보며 말했다.

니콜라는 제임스를 소개했다. 랭 쪽은 보지 않으려 했으나 저절로 시선이 그리로 갔다. 랭은 글래스에만 눈을 주고는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모니카에 이어 토비와 악수를 나누고 이어서 랭에게 손을 내밀었다. 랭은 글래스에 남아 있던 술을 한꺼번에 들이켜고 발길을 돌려 사라져 갔다.

제임스는 놀라는 표정을 짓고, 이어서 화난 기색을 보였다.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모니카가 이상한 듯이 니콜라를 건너다보았다. 6월에 자기 집에 왔었을 때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던 모니카는 머릿속으로 컴퓨터 같은 계산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그러지?"

토비가 혼잣말처럼 의아하다는 투로 말하자 모니카가 예리한 눈으로 니콜라를 쏘아보았다.

"정말, 왜 그럴까?"

니콜라는 이런 마당에서 얼굴을 붉혀 버린 자신에 화가 났다. 개막 5분 전을 알리는 벨이 울리는 것을 기회로 니콜라가 말했다.

"제임스, 이제 들어가야죠?"

그러나 모니카가 니콜라의 팔을 잡으며 제지했다.

"이 연극을 어떻게 생각하죠?"

"대단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임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그 역시 예상 외로 재미있다고 대답했다.

"저는 별로 연극을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마는, 니콜라가 졸라서 따라왔습니다. 하지만 걱정했던 만큼 졸리지는 않더군요."

개막 직전의 벨이 울리자 바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임스가 니콜라의 허리 에 팔을 감았다.

"우리도 들어가야지."

니콜라가 모니카에게 미소 지었다.

"뵙게 되어 정말 반가웠습니다."

랭도 누나 곁으로 돌아와 있었다. 니콜라는 돌아보지 않았으나, 그가 옆에 있다는 생각만 해도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심장도 크게 뛰어, 같이 걷고 있는 제임스의 귀에까지 들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2막이 시작되었으나, 그 대사는 니콜라의 귀를 스쳐갈 뿐이었다. 제임스가 웃으면 니콜라도 웃고, 제임스가 무대에 넋을 잃으면 니콜라도 그러는 체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에 있었던 랭의 행동과 그 표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뒤 두 사람은 랭 일행과 다시 얼굴을 마주치는 일 없이 구경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그날 밤 니콜라는 다시 악몽에 시달리면서 한잠도 자지 못했다. 니콜라는 출근을 서두르면서, 랭이 이번에는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지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랭이 그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잿빛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니콜라를 맞이했다. 몇 주일 동안이나 랭을 덮고 있던 두꺼운 얼음이 드디어 깨지고 분노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니콜라의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랭이 소리쳤다.

"지각이야! 우편물을 개봉하여 정리하는 일까지 사장에게 시키다니, 근무 태만이야!"

랭은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발을 구르며 서성거렸다.

니콜라는 놀람을 감추기 위헤 손목시계로 시선을 떨구었다. 정각 아홉 시였다.

"지각이 아닌 줄로 생각합니다마는......"

"지각이라면 지각이야. 지난주 그로스터에서 도착한 서류는 어디 있지?"

니콜라는 랭의 고함 소리가 거칠어질수록 기뻐지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지 않았으나, 지금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달려들 듯한 고함 소리를 들을 때마다 니콜라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곤 했다. 얼음 덩어리처럼 차고 조용한 랭보다, 굶주린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는 랭이 훨씬 나았다. 니콜라는 명령받은 서류를 찾아 건네주었다.

"왜 히죽거리는 거야? 무엇이 우스운지 말해 봐.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

"웃고 있지 않아요."

"닥쳐! 니키가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너무 지나친 말에 니콜라도 버럭 화가 났다.

"따귀를 때려도 되겠어요?"

랭은 이를 악물고 니콜라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기분 나쁠 정도로 나직하게 말했다.

"때려 봐, 때릴 수 있다면."

니콜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은 힘껏 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랭의 눈에 떠오른 험악한 빛은, 이쪽에서 손을 대면 그 곱절로 되돌려줄 것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니콜라는 마침내 눈을 내리깔고 조용하게 말했다.

"그로스터 지점에 전화를 걸까요?"

"."

랭이 맥빠진 듯이 대답했다.

몇 분 후 앤드루가 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동생의 음성을 들은 랭이 방에서 뛰어나와 큰 소리로 불렀다. 앤드루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형의 방에 들어갔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랭의 음성이 니콜라에게도 들렸다. 겨우 방면되어 나온 앤드루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니콜라에게 말했다.

"드디어 형답게 되었군."

오랜 중병 환자가 위기를 벗어났기 때문에 안심했다는 둣한 투였다. 무척이나 바쁜 하루였다. 랭은 지금까지의 몫을 한꺼번에 해치우려는 듯 테이블을 치고 고함을 질러대며 니콜라를 들볶았다.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때문에 니콜라는 점심을 먹을 틈도 없이, 남이 사다 준 샌드위치를 먹어가며 일을 계속했다.

랭은 유유히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몇 시간이나 지나 그가 돌아왔을 때는 가슴에 빨간 카네이션이 꽂혀 있었다. 빨간 장미는 아니었으나, 그 꽃은 니콜라로 하여금 급강하하는 엘리베이터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누구하고 점심을 먹은 것일까? 질투의 불꽃이 그녀의 가슴을 태웠다.

퇴근 시간이 되어 니콜라가 돌아갈 준비를 하자, 랭이 자기 방에서 나와 힐문하는 투로 말했다.

"벌써 돌아갈 셈인가?"

"나는 아홉 시 정각에 출근했어요. 지금은 오후 여섯 시입니다."

"시계만 쳐다보며 하루를 보냈나? 제법 한가한 모양이군. 그래, 오늘 밤에도 페어팩스인가 하는 녀석과 데이트인가?"

"아뇨, 오늘은 천천히 목욕이나 하고 일찍 잘 생각이에요."

니콜라가 분연히 대답했다.

"벌써 그에게 싫증이 났나?"

니콜라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빈정거림엔 대꾸하지 않고 방에서 나와 버렸다.

가벼운 식사를 끝낸 후, 니콜라는 향료를 넣은 욕조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머리를 감으려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제임스야! 오늘 밤은 싫다고 거절했는데....... 니콜라는 재빨리 가운을 걸치고 약간 언짢은 말까지 준비해 가지고는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제임스가 아니었다. 니콜라는 자기 눈을 의심하며 랭을 바라보았다. 낮에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으나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깃의 단추도 끌러져 있었다. 취한 것일까? 한걸음 들어서려는 랭을 보고 니콜라는 얼른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랭은 문을 어깨로 밀고 들어와 제 손으로 닫고 문에 기대어 섰다.

"놀랐나?"

조소를 담은 눈이 분노에 타는 니콜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겨우 제정신이 들었을 뿐이지."

랭은 깔보는 듯한 어투로 말하고는, 의미가 파악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는 니콜라를 향해 말을 이었다.

", 지금까지 나는 얼빠진 바보였다는 말이야."

니콜라의 심장이 갑자기 고동치기 시작했다.

"하찮은 일에 구애될 것 없이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어."

니콜라는 상대방의 눈을 노려본 채 한걸음 물러서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 텐데. 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잖아?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여자한테는 넘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내를 어느새 사로잡아 버린 니키니까 말이야."

그 말은 니콜라의 가슴을 예리하게 찔렀다. 니콜라는 와락 울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고 태연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거예요?"

"귀가 먹었나?"

랭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니키라는 여자는 정말 영리한 머리를 가졌군. 사람을 한껏 골탕먹였으니 이제 속이 시원할 테지. 연극은 그만 하는 게 어떻겠어?"

"돌아가 주세요."

니콜라는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니콜라는 천천히 다가오는 랭을 피해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랭은 다시 몸을 앞으로 내밀어 손을 벽에 대고 니콜라가 도망칠 길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그녀는 험상궂은 공격적인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요란스럽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랭은 부아가 난다는 듯이 혀를 찼다.

"누구야?"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니콜라는시선을 피했다.

", 페어팩스로군...... 좋아, 나한테 맡겨, 쫓아 버릴 테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쫓아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랭이다. 니콜라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문 쪽으로 향해 걸어가는 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문 여는 소리에 이어 제임스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안녕하시오. 니콜라는?"

"없소."

랭의 싸늘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네에?"

믿을 수 없다는 음성이었다.

"그럼, 나도 안에 들어가 기다리겠소. 좋겠죠?"

"싫은걸."

니콜라는 그 목소리에 함축된 적의를 깨달았다. 제임스의 음성도 험악해졌다.

"도대체 무슨 뜻이오?"

"다치지 않으려거든 돌아가는 것이 좋을걸! "

랭은 제임스의 눈앞에서 탕 하고 문을 닫았다. 순간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문을 열려고 하는 랭에게 니콜라가 호소했다.

"그만둬요!"

랭은 그만두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제임스가 소리치며 덤벼들었다.

"도대체 너는 뭐야?"

"조용히 말할 때 얌전히 꺼지지 못하겠어."

랭의 말이 더 거칠어졌다. 니콜라는 깜짝 놀라 앞으로 나섰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랭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은 제임스의 몸이 문 밖으로 나가떨어지면서, 머리가 무엇에 부딪쳤는지 둔탁한 소리를 냈다. 뒤이어 신음소리와 함께 저주의 말이 튀어나왔다.

"다시 접근하는 날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걸!"

랭이 난폭하게 문을 닫으며 말했다. 문으로 달려가 열려고 하는 니콜라의 손을 랭이 비틀었다.

"어디 가려는 거야?"

"제임스가 상처를 입었는지도 몰라요."

"아마 약간 다치기는 했겠지, 그럴 생각으로 때려 주었으니까."

"뭐라고!"

문 밖에서 제임스가 겨우 일어난 모양이었다.

"다음번에 만나면 그냥 두지 않겠어!"

제임스의 고함 소리가 복도를 울렸으나, 이윽고 비틀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랭은 니콜라를 돌아다보며 껄껄거리고 웃었다.

"니키의 애인은 제법 체념을 잘 하는 군."

"당신도 돌아가세요. 자아, 어서 나가요!"

"못 가겠어, 니키. 그 녀석을 해치웠으니까 이번에는 니키 차례야."

불길한 낮은 목소리였다.

"여자에게까지 손을 댈 작정인가요?"

니콜라가 도전적으로 머리를 들었다.

"평소라면 그런 짓을 안 하지. 그러나 세상에는 예외라는 것이 있어."

설마 진심이랴 싶었으나, 그 잿빛 눈은 농담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니콜라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랭은 비록 제지하는 동작은 취하지 않았으나, 눈만은 뚫어지게 그녀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니콜라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구석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니콜라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깨닫고 보니 바로 뒤에서 랭이 웃고 있었다. 니콜라는 숨을 죽이고 우뚝 섰다.

"옳지. 그대로 침실로 직행하시지, 아가씨."

"사람을 뭘로 보는 거예요!"

니콜라나 홱 돌아보았다.

"당신 따윈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그 순간 랭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험상궂게 일그러진 랭의 얼굴. 무섭지 않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니콜라는 마음속으로 정말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체념하시지, 니키. 얼른 처벌을 받으라구."

니콜라는 푸른 눈을 크게 뜨고 가운의 앞섶을 꼭 여미었다. 그러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부탁이에요. 제발......."

"안돼! 아까도 말했듯이 여자에게 폭력을 쓰는 것이 내 취미는 아니야. 대신에 그 귀여운 엉덩이를 때려 주겠어. 두 번 다시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힘껏 말이야! 니키가 한 짓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벌은 받아서 마땅하지."

랭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다음 순간, 니콜라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랭은 발을 버둥거리며 몸부림치는 니콜라를 가볍게 안아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랭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니콜라의 몸을 엎어 놓은 다음 손으로 그녀의 목을 눌렀다. 니콜라는 소리치려 했으나 강철 같은 손으로 목덜미가 눌려 입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파요! "

부드러운 살에 손바닥이 세차레 내리쳐졌다. 이어서 두 번, 세 번.... 아픔과 분노가 니콜라

를 엄습했다. 대여섯 살 된 아이라면 몰라도, 이런 나이에 이 같은 굴욕을 당하다니!

그러나 랭은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이것이 니콜라에게는 참을 수 없이 억울했다.

랭은 어깨로 숨을 쉬면서 니콜라의 몸을 앞으로 돌리고 등에 팔을 감아 천천히 안아 일으켰다. 저주의 말을 퍼부으려는 니콜라의 입술을 랭이 난폭하게 빼앗았다. 니콜라는 용서없이 공격하는 랭의 그 거친 키스를 뿌리치려 했으나, 그 저항은 10초도 계속되지 못

했다. 어느새 그녀는 두 손으로 랭의 목을 감고 저도 모르게 미친 듯이 키스를 요구하고 있었다. 겹쳐진 입술의 틈새로 랭의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니키....."

그는 한 손으로 교묘하게 니콜라의 가운 끈을 풀고, 가련하게 드러난 가슴을 긴 손가락 끝으로 애무했다. 숨가쁜 흥분이 니콜라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러자 랭은 살며시 가운을 벗겨 바닥에 떨어뜨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침실의 조명을 받은 니콜라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랭의 얼굴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랭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의 얼굴에서 하얀 가슴으로, 그리고 차차 다리 쪽으로......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니키,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좀 더 오래전부터에요."

니콜라가 조용히 말했다. 이미 랭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연기를 계속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랭의 얼굴에 어두운 미소가 스쳤다.

"그렇게 기다렸었나?"

"."

한숨과 함께 그녀가 대답했다.

랭은 니콜라를 조용히 침대에 뉘고 일어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마침내 니콜라와 같은 모습이 된 그는 약간 입술을 떨면서 침대에 들어가,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누운 니콜라의 몸에 손을 댔다.

"이제 됐지, 달링?"

"."

니콜라는 공허한 미소를 띠며 그의 온몸을 살펴보았다. 어차피 헌신짝처럼 버려질 몸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뇌리에 새겨 두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슬픔에 짓눌린 마음과는 관계없이, 니콜라의 피는 뜨겁게 끓어올라 큰 소리를 내면서 몸속을 내닫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뜨거운 시선이 교차되었다. 거친 숨결이 니콜라에게 덮쳐 왔다.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환희의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랭은 이것을 힘찬 키스로 봉쇄하면서 두 손을 니콜라의 어깨에서 등으로 돌렸다.

니콜라 역시 남자다운 그의 등뒤로 두 손을 돌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억센 가슴에 파고들었다. 랭은 입술을 떼지 않고 니콜라의 흰 목덜미로 옮겼다. 부드러운 살 위에서 간질이는 입술의 감촉이 그녀의 온몸을 또 다시 떨게 했다.

랭이 머리를 들고 니콜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니키가 말랐다고 생각한 건 큰 잘못이었군."

니콜라는 랭의 어깨를 붙들고 일어나 근육으로 뭉쳐진 그 어깨에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을 굵은 목덜미로 미끄러뜨렸다. 그러자 랭은 다시 니콜라의 사랑스런 입술을 입으로 막았다.

"알겠어, 달링."

랭은 그 자세로 니콜라의 날씬한 다리에 손을 뻗쳤다. 기대와 불안에 떨며 조용히 누워 있는 니콜라였 다. 그러나 손끝이 허벅지에서 차차 위로 올라왔을 때에는, 그녀도 공포가 온몸을 위축시키는 것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돌처럼 굳어진 육체에 경련이 일어났다.

"왜 그래?"

랭이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니콜라는 이를 악물었다. 경직을 풀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왜 그래, 니키.......?"

이마를 찌푸리고 묻던 랭이 그만 숨을 삼켰다.

"니키!"

니콜라는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랭이 이것을 용서치 않았다.

"내 눈을 봐."

그녀는 겁을 내며 그 말에 따랐다.

"니키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처녀였나?"

외치는 듯한 소리에 니콜라는 말없이 고개를 틀었다.

"거짓말이었어? 나를 속이기 위해, 그 남자에게 몸을 허락했다고 거짓말을 했나?"

랭은 니콜라의 두 어깨를 부여잡고 저주스럽다는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니콜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 거짓말쟁이! 용케도 몇 달 동안이나 나를 속였군! 속는 사람의 심정이 어떠했겠는지 생각해 봐! 어땠겠어?"

랭은 니콜라를 껴안은 채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난폭하게 흔들면서 다그쳤다. 그러고는 니콜라 의 두 손을 뿌리치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잿빛 눈이 맹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니콜라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게 중얼거렸다.

"당신을.....사랑하고 있어요."

갑자기 니콜라의 몸이 자유롭게 되었다. 달려들 듯이 쏘아보는 얼굴에는 아까와 같은 분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윽고 묘한 어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니키는 세상에서 제일 가는 바보야. 아까처럼 다시 한번 두들겨 패고 싶어. 니키가 그 사나이에게 몸을 허락한 줄 알고 나는......"

"당신은 지레짐작을 한 거예요. 나는 그런 일을 했다고 말한 기억이 없어요. 당신의 억측을 부인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가볍게 항의하는 니콜라의 말을 랭이 가로막았다.

"나는 니키가 그 사나이에게 몸을 맡긴 것이라 생각했어. 더구나..."

갑자기 말이 끊겼다. 입술이 말라 있었다.

"더구나, 사실은 나를 사랑하면서 말이야!"

가슴을 에는 그 말! 니콜라는 몸을 떨며 절망적으로 랭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 보지 말라니까, 달링."

호소하는 듯한 그 목소리는 어떤 모욕보다도 더 잔인하게 니콜라의 가슴을 도려냈다.

왜 그런지 랭이 초조하게 어깨를 오그렸다. 쑥스러운 듯이 시선을 피한 그 얼굴에는 기묘한 수치감이 떠올라 있었다.

"저어.....약간 말하기 힘든 일이지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불안에 떠는 니콜라의 얼굴에 그의 시선이 겨우 되돌아왔다.

", 사랑하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

니콜라는 히스테릭하게 웃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고 씁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억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좋아요."

"내가 좋아서 이런 말을 하는 줄 아나?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천금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겠어."

가만히 미소 짓는 니콜라의 입술을 미친 듯이 입으로 막아 버린 랭은, 이어서 풍만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지막하고 쉰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니콜라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귀를 기울였다.

"거짓말이 아니야. 정말 사랑하고 있어, 니키.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은 그 사나이에게 가로채였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하는 걸 그랬어. 내가 니키의 사표를 내동댕이치던 일이 생각나나? 그 뒤 나는 내 방에서 앤디의 이야기와 니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어. 그러다가 갑자기 조용해졌어. 나는 필사적으로 의자에 매달려 있었으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문을 열었더니, 니키가 앤디와 키스를......"

그는 안타깝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곤봉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 문을 닫고 자리에 돌아오니 이번에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었어. 그런 경험은 처음이야.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 없었어."

니콜라가 가만히 그의 가슴에 뺨을 갖다 대었다.

"누나 집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는 니키를 껴안았을 때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나는 생각했어. 아무것도 아니다, 니키를 손에 넣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라고. 니키가 아직 남자를 모른다는 것은 금방 알았고, 내가 니키의 첫 번째 남자라는 것을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더군. 지금까지는 상대방 여자의 과거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말이야." 랭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풀 죽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공항에서 니키가 그 사내와 걷는 것을 본 순간부터 이상하게 가슴이 뛰며 의혹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이었어. 그리고 그날 밤, 차 속에서 니키는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어. 나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고 말았지. 내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니키를 다른 남자가 먼저...."

랭은 고개를 들고 씁쓸히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나는 매일같이 그 일만 생각하고 있었지. 니키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으려 했어.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기는커녕 도리어 온 몸에 힘이 빠지면서 고통이 더해질 뿐이었어. 그러다가 어제가 된 거야. 그 사나이와 같이 있었지만, 니키의 눈에는 나를 사랑한다고 씌어 있었어."

지금도 니콜라의 눈은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니콜라는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았다. 랭은 뜨겁게 타오르는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몸을 떨었다.

"니키는 남자에게 어떤 갱각이 들게 했는지 모를 거야."

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모를 것 같아요?"

그 음성도 쉬어 있었다. 니콜라는 팔을 뻗쳐 눈 앞의 억센 근육에 손을 대었다.

"니키...니키는....."

신음소리라고밖에 할 수 없 는 목소리가 랭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늠름한 육체를 다정하게 애무하며 니콜라의 푸른 눈이 미소를 띠었다.

"이런.....사랑의 테크닉을 내게 가르쳐 준 분은.....당신이에요. 매일같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저절로 알게 되었어요. 이렇게 해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어요. 오래....오래 전부터."

"수치를 모르는 여자로군."

랭이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육체가 니콜라의 애무에 격렬히 반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랭은 니콜라를 가만히 침대에 뉘었다.

"약간 무섭지? 니키는 처음이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이제 곧....."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 좋도록 하세요."

하고 속삭이면서, 니콜라는 랭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강하게 매달렸다. 다음 순간, 찌르는 듯한 아픔과 환희의 전율과 함께 니콜라의 처녀 시대가 막을 내렸다. 석달 후 심신에 상처 입은 한 여자가 황량한 거리를 헤매게 될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이미 후회는 없었다.

꼭 감은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 뺨을 따라 내려오다가 랭의 목덜미를 적셨다. 랭음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약간 몸을 일으켜 니콜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 그래, 니키? 어째서 우는 거야? 울지 말아 줘, 달링!"

니콜라는 눈물을 닦고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미안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석 달이 지나면 내가 직접 꽃집에 전화를 걸어 빨간 장미를 주문하겠어요. 그러니......."

"니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하지만 믿어 줘, 내가 여자를 사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지금까지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은 사실이야. 그러나 사랑한 일은 한번도 없었어. 내가 사랑한 사람은......니키가 처음이야."

"그 한마디로 충분해요. 석 달이란 세월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므로, 하찮은 말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기로 해요."

랭이 조용히 몸을 떼었다. 착잡한 미소가 사나운 얼굴에 그림자를 떨구고 있었다.

"남이 말하거나 책에 씌어 있는 사랑 따위는 새빨간 거짓이란 것을 분명히 알았어. ? 음악? 달빛? 웃기지 말라고 해. 사랑하는 여자를 남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을 때 남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가슴이 찢기는 듯한 아픔과 분노로 한잠도 이루지 못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랭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쓰라림을 다시는 맛보게 하지 말아 줘, 니키."

싹트기 시작한 희망. 그것을 밟아버리는 절망. 니콜라의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니키, 부탁이야. 내게 모든 것을 걸어보지 않겠어? 현재의 마음이 영원히 계속될지 어떨지는 단언하지 못하겠어. 이런 마음이 생긴 것은 나로서는 평생 처음 있는 경험이니까. 하지만 용감하게 도박을 해 봐. 결코 니키가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어. 믿어 줘.

키와 나 사이의 말이니까 이것이 엉터리 연극 대사가 아니란 것은 알겠지? 나도 니키 앞에서는 무력해.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어졌어."

"하지만 최근에는 그렇지도 않았어요."

랭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야. 니키는 알고 있었어- 질투한 나머지, 내가 니키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는 것까지도. 니키는 일부러 내게 벌을 주고 있었어. 그렇지?"

"아니에요. 최근에 와서 갑자기 조용해진 당신의 태도가 이상했고....괴롭기까지 했어요."

"나도 내심으로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어. 하루도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없었어. 니키를 손에 넣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 자유롭고 방종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엄중한 무쇠 우리에 갇히게 될 테니까 말이지.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가슴을 누르고 있던 납덩어리가 녹기 시작했다. 정말...정말 믿어도 좋은 것일까?

"내게 싫증이 나면 어떻게 하죠?"

"그것도 몇 번이나 생각했어. 그러나 니키에게 싫증이 날 때가 올 것 같지는 않아. 지난 3년 동안 나는 니키에게 감사도 하고 화도 내며 여러 가지로 생각했지만, 싫증이 난 일은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내가 병으로 누웠을 때....."

"가벼운 감기에 걸렸을 때 말이죠?"

"짓궂게 굴지 마. 그때 나는 갑자기 니키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어. 보통 때 같으면 피곤하거나 기분이 언짢을 경우 여자가 곁에 있는 것이 싫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니키가 옆에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어. 니키가 홱 돌아가 버리자 나는 정말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어."

니콜라도 그때 일을 생각했다--- 버릇 없는 아이같이 졸라대는 랭에게 정말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집안에서 여자가 설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랭으로서는 비정상적인 행동이었다. 감기 탓일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대부분의 여자는 부탁을 하지 않아도 주방에 뛰어 들어 멋진 요리 솜씨를 발휘하려 하지. 그러나 니키에게 스크램블 에그 하나를 만들게 하려고 내가 얼마나 부탁하고 빌고......."

니콜라의 눈을 스치고 간 미소를 랭은 놓치지 않았다.

"그것 봐, 니키는 언제나 지금처럼 나를 비웃고 있었어. 내가 알지 못하는 줄 알았나? 나는 니키 마음대로 조종되고, 또 그렇게 조종당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게까지 되었어. 정말 괘씸해!"

랭은 니콜라의 귀에, 목덜미에 뜨거운 키스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니키가 그만두고서야 비로소 니키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알게 되다니, 나도 바보였지. 캐롤라인의 일로 왜 그렇게 니키가 화를 내는지, 정직하게 말해서 그 당시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어. 그러나 니키가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놀랐어. 그러면서도 설

마 진심이 아니겠지, 그만둔다 해도 곧 꺾여서 돌아오겠지, 하고 굳게 믿고 있었어. 그런데 니키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어. 어쩌다 얼굴을 마주쳐도 모르는 체하는 것이었어. 어떻게 하면 니키를 도로 데려올 수 있을까-나는 그것만을 생각하며 지냈어.

니키의 후임자들에게는 내가 좀 지나쳤지. 한두 사람은 일을 꽤 하는 편이었으나 나는 얼굴을 보기도 싫었어. 니키 아닌 사람이 니키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 보아도 참을 수가 없었어."

"자업자득이에요. 캐롤라인에게 그런 짓을 하는 당신을 보자 죽여 버리고 싶었어요."

"그때는 분명히 내가 잘못했어. 평소의 버릇대로 부담없이 연애를 할 생각이었으나, 니키가 더러운 것이라도 본 듯 대하는 것을 깨달은 순간 큰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당연하죠."

"요것이! 여자가 약하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야. 니키가 앤디 밑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암흑 속에 빠진 듯 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 그리고 결국에는 니키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애원하는 시늉까지......."

"애원? 엎드려요? 거짓말!"

웃으면서 항의하는 니콜라의 입을 랭은 키스로 막았다.

"지난 두 달 동안은 지옥과 같았어. 그 사내와 같이 있는 니키의 모습이 어른거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어. 밤새도록 방안을 서성거리다 아침을 맞은 날도 있었지. 이제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함께 살기를 원한다는 말인가요?"

"우리 결혼해! 아아, 드디어 이 말을 하게 하고야 마는군. 정말 니키는 나빠!"

니콜라의 얼굴은 치솟는 기쁨으로 빛났다. 랭의 잿빛 눈도 빛나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이 요물이야. 그 웃는 얼굴 때문에 나는 우리에 갇히고 말았어."

"아아, 가엾은 랭! "

"사실이야, 이처럼 가련한 남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니콜라는 말없이 웃으면서, 랭의 탄력 있는 몸을 다정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왜 그러지, 푸른 눈의 모나리자? 무엇을 생각하는 거야? 니키는 그 귀여운 얼굴로 나를 마음대로 조종해 왔어. 니키는 모니카보다도 성질이 나빠. 모니카는 내게 두통을 일으키지만, 니키는 내 마음을 녹여 없애버리거든. 그 푸른 눈과 정다운 음성, 그리고 남자를 사로잡는 그 미소로!"

랭의 손이 부드럽게 니콜라의 전신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의 온몸에 뜨거운 환희가 되살아났다.

"니키를 처음 본 날, 나는 문을 잠그고 열쇠를 침대 밑에 감추어야만 했어. 그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드디어 이렇게 되고 만 거야."

하고 랭은 자기 목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게 무슨 흉내죠?"

"개목걸이와 가죽끈에 묶인 것이지."

니콜라가 눈을 치뜨고 랭을 올려다보았다.

"도망치려면 지금이 기회예요, . 지금이라면 붙들지 않겠어요."

"그것이 바로 니키다운 점이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하지 못할 줄 빤히 알고 있으니까. 사실 총을 들이댄다 해도 나는 니키 곁에서 떠나지 않겠어. 이 우리는 그토록 매력적이거든."

니콜라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 한 가지 경고해 둘 것이 있어요. 결혼하면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을 해방시키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좋아요?"

랭은 푸른 눈을 들여다보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알고 있어. 알고 있었기에 지금껏 고민한 거야. 니키는 자신의 룰을 깨뜨릴 사람이 아니니까."

"그 룰을 깨뜨리려던 사람이 바로 누구였죠?"

"남자의 마지막 발악이지."

랭이 웃었다.

"그러나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니키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이미 각오는 되어 있어."

니콜라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뿐이에요."

"니키! 사랑해. 그 이상이야. 나는 이미 니키 없이는 살 수 없어. 니키를 놓아줄 수 없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니키와 결혼하고야 말겠어."

"이제 급료 없이 일하는 가정부를 구했군요!"

니콜라의 빈정거림에 큰 소리로 웃던 랭은 갑자기 진지한 말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 충성심의 증거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지--- 나는 니키를 잃는 것이 무서워 이미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돌릴 기력을 잃었어."

"그럼 금발 미인과는 이미?"

"니키를 원하기 전부터 금발에는 약간 싫증이 나 있었어. 이제는 질색이야."

"어머나, 가엾어라!"

"취미가 변했지. 웬일인지 말버릇이 몹시 사나운 아가씨가 좋아졌어. 이번 취미는 당분간 변할 것 같지가 않군."

"이왕이면 빨간 장미에 대한 취미도 바뀌었으면 좋겠군요. 만일 그런 것을 내게 준다면 나중에 어떤 일을 당해도 책임을 지지 않겠어요."

"그렇게 나쁜 것으로 취급하면 장미가 가엾군. 은혼식 기념일에는 온 집안을 빨간 장미로 장식하고 성대한 파티를 열려고 했는데."

니콜라는 만족의 숨을 내쉬었다.

", 한마디만 질문해도 될까요?"

"무언데?"

랭이 그녀의 굴곡진 가슴을 살며시 애무하면서 물었다.

"오늘 밤을 이야기로 지새울 건가요?"

랭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럴 마음은 태산 같지만, 달리 할 일이 있어. 우리에 갇힌 사내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줄 수 있는 가에 대해 지금부터 니키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되겠어. 잘 배우도록 해!"

이렇게 말하고 랭은 즉석에서 수업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