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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유혹 2

합의된 작전

 

그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 경시청 수사괴의 경감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수사상 필요한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2백만 달러라는 큰돈을 지원해야 하는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건의와 승낙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그렌드 경감이 난처한 빛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결과적으로 저스틴이 런던의 컨싱턴 클럽 총지배인 조지에게 받아온 2백만 달러는 종족을 감추고 말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의 손으로 들어갔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연적으로 소멸되는 물체가 아닌 이상 호텔을 짓고도 남을 액수의 지폐는 누군가의 수중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달리 어떠한 추측도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 리차드로서는 저스틴을 보낼 수가 없었다. 데스타브 남작과 만나는 일만 아니라면 부담없이 하그렌드의 수사에 협조해 줄 수도 있다. 정의를 위한 일일 경우에는 언제라도 기꺼이 나서는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런던에 갔을 당시 저스틴이 룰렛 게임에 관여했다는 사실부터 탐탁치 않았다. 행운의 여신이니 뭐니 하며 도박꾼에게 칭송을 들었다는 사실이 리차드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스틴의 마음이 상할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ㅂ루만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원래부터 그는 도박과 거리가 멀었다. 아니 그보다 도박을 싫어했다. 하그렌드 경감이 나름대로 리차드의 제안을 몹시 꺼려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영국의 경시청에서는 이미 데스타브 남작에게 미기를 던지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왔다. 그 돈의 행방도 묘연한 현재로서는 다시 자금을 투입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메인 씨, 다시 한 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부인께서 그자를 한 번 만나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요?"

"솔직히 말씀드리죠. 현재 우리는 데스타브 남작의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못 난처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런던경시청을 대표해서 특별히 파견된 만큼 현재의 입장에서는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경감님의 계획은 어떤 것입니까?'

". 메인 씨. 제 생각은..."

하그렌드는 자시의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데스타브 남작의 행동은 신출귀몰했다. 런던의 켄싱턴 클럽에서 하그렌드가 그를 놓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현장에서 체포할 목적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계속 미행을 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 현장에서 하렌드는 남작을 순간 감쪽같이 놓쳐 버렸고 다만 그가 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로스앤젤레스로 급히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스타브 남작은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수인 로만과 혈안이 되어 수색을 해보았지만 남작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복면강도로 위장해서 메인 부부의 집에 침입할 정도로 다급했다. 따라서 그들이 한밤중 강도행각은 그가 고백한대로 강도로 위장을 해서라도 뛰어들어 사건을 흐트러뜨리면 어떤 단서가 잡힐 수도 있다는 막연한 추리에서 벌인 해프닝이다. 그 결과 메인 부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협조를 부탁하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리차드의 이견으로 앞이 막히게 되었다. 경감의 계속되는 난항 속에서 돌파구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스틴이었다. 그는 분명히 돈을 찾기 위해 저스틴에게 연락할 것이다. 반드시 연락을 취해 올 남작은 저스틴이 만나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하그렌드의 수사 각본이었다. 남작은 분명히 무방비 상태일 것이다. 따라서 그 기회를 이용해서 덮치면 남작을 무난히 체포하고 영국 정부는 돈을 회수하게 된다는 것이 그것의 내용이었다. 그의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건 해결에 조급한 나머지 리차드 만큼이나 저스틴의 안전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리차드도 정의를 위해서 돕고는 싶지만 그보다 저스틴의 안전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하그렌드의 설명을 듣고 난 다음에도 리차드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경감님, 그것은 당신네 영국 경찰의 문제입니다."

"이해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이해를 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솔직히 당신과 영국 경찰은 남작을 체포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죠?"

"바로 그겁니다."

"?"

"당신네 영국 경찰은 남작을 체포하고 돈을 회수하면 그만이겠지만 난 그렇지 않아요."

이 때 입을 다물고 있던 로만이 리차드에게 물었다.

"메인 씨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시죠."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겐 남작의 체포보다 저스틴의 안전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해하시겠죠?"

"물론 이해합니다, 메인 씨."

하그렌드는 어떻게 해서든지 리차드를 설득시키기 위해 온갖 지혜를 동원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래서 애당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부인의 신변을 책임지고 보호하겠다고 말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리차드의 계속되는 주장에 하그렌드는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노련한 수사관인 그는 재빨리 좀전과 같은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무리한 부탁인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메인 씨, 메인부인께도요. 그렇지만 남작 같은 자가 계속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니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점에서는 동의합니다."

"그러시다면..."

그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저스틴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녀는 리차드와 하그렌드 양측이 원만하게 합의하기를 원했다. 리차드의 의견과 하그렌드의 의도를 충분히 들은 만큼 저스틴으로서는 나름대로 어떤 절충안을 내놓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우선 하그렌드에게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경감님?"

", 메인 부인."

"말씀하신 그대로라면, 남작을 제가 만나기만 하면 현장에서 체포할 수 있다고 하셨죠?"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걱정인지 이해할 수 없어요?"

"?"

"남편은 나의 안전을 위해 잃어버린 2백만 달러를 진짜 돈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좀..."

"이해할 수 없군요. 현장에서 남작을 체포하기 위한 2백만 달러도 영국경찰은 지원해 줄 수 없나요? 설마 그런 건 아니겠죠?"

"그럴 리 있겠습니까. 부인께선 좀 지나친 말씀을 하시는군요."

옆에서 듣고 있던 로만이 끼어들며 말했다.

"부인이 옳습니다."

"뭐라고?"

하그렌드는 다그치듯 로만을 곧장 바라보았지만 로만은 의외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부인의 말씀처럼 돈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인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 경찰에서 그 정도라면 충분히 준비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로만이 갑자기 저스틴의의견에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인 이유를 하그렌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두게, 로만, 우리는 이미 백만 파운드를 잃어버렸지 않은가."

돈 문제에 대해서 하그렌드는 계속 비관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하지만 로만의 태도는 전혀 하그렌드와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그 돈은 남작이 국외로 빼돌렸습니다."

"그러니까 문제지."

리차드와 저스틴은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경감님,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로만."

"우리 경찰에서는 이미 잃어버린 돈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남작을 체포해야 됩니다."

"당연한 일이지.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 건가?"

"바로 그겁니다."

"뭐라고?"

", 경감님. 정부에서는 그 돈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다시 백만 파운드를 지원해 줄 겁니다."

로만은 계속해서 타당성 있는 결정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것은 리차드의 뜻과도 부합되는 내용이었다.

"메인 씨도 계속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즉 메인 부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돈을 우리가 준비하는 겁니다."

듣고 있던 리차드와 저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의 논리는 빈틈없이 완벽한 것이었다. 경찰 측과 저스틴 측이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한 내용으로 모두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조건이라고 한다면 리차드도 반대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실은 그도 데스타브 같은 인물이 빨리 체포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다만 저스틴의 안전이 더 중요했을 뿐이다. 드디어 하그렌드 경감이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메인 씨. 메인 부인. 로만의 의견을 듣고 보니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더 이상 이의를 갖지 않고 있었다.

"그럼 두 분께 묻겠습니다."

"좋아요."

"그러세요."

리차드와 저스틴이 함께 대답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메인 부인?"

"그런 사람은 반듯이 체포해서 또 다시 이런 짓을 못하게 해야죠."

"그럼 남작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만나기로 약속해 주십시오."

"그러겠어요."

"감사합니다, 부인.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그렌드는 비로소 얼굴 가득히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직 아니었다.

"전화 왔습니다. 메인 부인."

거실에 있던 시고니가 아직 침실에 있는 저스틴에게 큰소리로 알려주었다. 런던에 다녀온 후 저스틴과 리차드는 이전보다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상 전화가 일찍 걸려 오긴 했지만 그 이전에 비해 메인 부부는 확실히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다. 느닷없이 끼어들게 된 데스타브 남작 사건이 바로 그 원인이었다. 어느 때의 다른 사건들보다 그 문제는 저스틴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안겨주고 있었다.

"여보세요."

저스틴은 침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아직도 가운 차림이었다. 사실 런던에 다녀온 후 처음으로 지난밤 그녀는 리차드와 함께 황홀한 잠자리를 같이했던 것이다. 덕분에 리차드는 아직까지 자고 있었다.

"메인 부인이시오?"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저스틴은 금방 그가 누구라는 걸 알아 차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부시시 깨어나는 리차드에게 가벼운 눈짓을 보냈을 뿐이다.

"그런데 누구시죠?"

", 데스타브 남작이오."

켄싱턴 클럽에서와는 다르게 남작의 목소리는 매우 딱딱했다.

"어머, 남작님이시군요?"

그녀가 짐짓 다정하게 말을 걸자 비로소 남작이 말투도 바뀌었다.

"그렇습니다. 부인."

남작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저스틴의 반응에 굉장히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셨습니까? 어제도 전화를 했는데 주무신다고 하더군요."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부인. 그건 그렇고 난 지금 로스앤젤레스에 와 있습니다."

"그러세요?"

이때는 리차드도 이미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기다리던 참이었어요. 런던에서 맡기신 돈을 돌려 드려야 하니까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역시 제가 부인을 제대로 봤군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감사 표시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제가 그쪽으로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방문하신다구요?"

저스틴은 옆에 앉아 있는 리차드가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소리 내어 반복해 물었다. 리차드는 놀라면서 안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니요."

"?"

"마침 오전에 시내에 나갈 일이 있어요. 어디에 계신지 말씀해 주신다면 제가 그 곳으로 가겠어요."

", 그것도 좋겠군요. 그럼 다시 한 번 신세를 져야 하겠습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아요, 남작님."

어렵지 않게 남작이 있는 호텔을 알아낸 저스틴은 시간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보."

리차드가 갑자기 저스틴을 불렀다.

"경감한테 그 호텔을 알려주고 우린 빠지는 게 어때?"

"안돼요, 여보."

"그럴 수도 있잖아, 남작을 체포만 하면 되는 거니까."

"농담하시는 거예요?"

"할 수 없군."

"약속은 지켜야죠, 아무리 영국 경찰이지만. 그리고 또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더 잘 아실 텐데요?"

"그래?"

"물적 증거요. 남작이 우리가 가지고 간 돈을 받는 현장에서 체포해야 되잖아요, 안 그래요."

"과연 그렇군. 당신 이제 웬만한 사건 정도는 수사관만큼이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

"이러지 말아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직 가운만 걸친 리차드와 저스틴은 어느덧 서로를 뜨겁게 껴안고 있었다. 시고니가 언제 커피를 가지고 들어올지 모르는 시간에도 메인 부부는 가끔씩 스릴을 느끼며 재빠르고 결력하게 아침의 정사를 즐기곤 했다. 그것은 번갯불이 지나가는 것과 비슷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토록 커다란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부부는 아마 그들밖에 없을 것이다. 리차드가 좀 더 깊숙이 공격해 들어오는 순간 저스틴은 벌써 전신을 뚫고 달리는 희열과 함께 소리 죽여 신음하며 몸부림을 쳤다.

 

 

한발의 총성

 

리차드가 저스틴과 동행한 것은 실과 바늘이 함께 움직이는 원리와 같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이번 같이 저스틴의 신변 문제가 걸려 있는 경우라면 리차드는 그룹의 업무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저스틴을 최우선으로 선택했다. 그녀가 존재할 때에 비로소 자신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데스타브 남작이 투숙하고 있는 장소는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호텔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그런 한적한 장소를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저스틴에게서 2백만 달러를 넘겨받으면 그는 즉시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이번에는 런던이 아닌 미국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 갈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도 한몫 잡기 위해 또 다른 음모를 꾸밀 것이다. 그가 영국에서 불법적으로 빼돌린 돈과 그 밖의 다른 돈들의 행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그리고 빗나간 욕망으르 채우기 위해 한적한 소도시 내지는 작은 섬을 몽땅 사들여서 요새화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만큼 베일에 쌓인 인물이었다. 호텔 앞, 차에서 내린 리차드와 저스틴은 자신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저스틴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마음 한 구석에서는 데스타브에게 미안한 감도 없진 않았다. 그가 비록 체포되어야 마땅한 인물이긴 하지만 자신이 미끼를 물고 그를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저스틴은 안 될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하그렌드 경감에게 미리 한 가지 부탁을 해 보았다.

"경감님, 우리가 남작을 만난 후에 그를 체포해 주세요."

"?"

하그렌드는 그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

"우리가 남작을 만나서 돈을 건네주고 나온 다음에 그를 체포해 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그건 안 됩니다."

"어째서죠?"

"설명 드리죠."

경감의 설명에는 충분한 일리가 있었다. 남작에게 돈을 건네준 저스틴이 현장에 없으면 체포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 경감의 설명이었다. 그것은 그 돈이 어떤 돈인지 법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자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돈이라고 우긴다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히 저스틴이 문제의 돈을 넘겨준 현장에서만 비로소 남작을 체포할 증거가 생긴다는 것이다. 경감의 그 말에 대하서는 리차드도 동의했다. 저스틴은 그런 이유로 마음 한구석에는 미안함을 지닌 채 계획대로 하그렌드가 머물고 있는 호텔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메인 부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평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금씩 운동을 하는 것이 메인 부부의 습관이었다.

"몇 호실이라고 했지?'

"313호실이요."

"혼자 있을까?"

"그럴 거예요. 아니, 그럴지도 모르죠."

"무슨 소리야?"

"떳떳한지 못한 돈을 받는 데 옆에 사람이 있기를 원하겠어요?'

"그것도 그렇군."

이윽고 313호실 앞에 도착한 그들은 잠시 멈추어 호흡을 안정시킨 후에야 문을 두드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요?"

"저스틴 메인이에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에서 부지런히 다가오는 발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 메인 부인."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데스타브 남작은 너무나도 친절했다. 그는 묵묵히 저스틴과 함께 들어서는 리차드를 향해서도 예의를 갖췄다.

"메인 씨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했다. 남작은 힘껏 손을 잡고 흔들 생각이었지만 리차드 쪽에서 가볍게 건드리는 것처럼 잡았다. 문제의 돈 가방은 리차드가 들고 있었다. 그는 가급적이면 일을 빨리 끝낼 생각이었다. 그런 곳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끈다는 것이 그로서는 견딜 수가 없을 만큼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가방만 건네주고 그 후에 하그렌드 경감이 들이닥쳐 남작을 체포하면 상황은 모두 끝나게 된다.

"이 가방 당신 것이죠?"

리차드는 더 묻지 않고 가방을 남작에게 건네주었다. 남작은 초조해 하면서도 회색이 만연한 가운데 거의 낚아채듯 가방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가방을 건네받자 곧 탁자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현금으로 2백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남작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남은 문제는 그 가방을 가지고 호텔에서 유유히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그는 문에서 돌아선 채 저스틴에게 나름대로 사의를 표시하고 싶어 했다.

"메인 부인, 약소하지만 저의 호의를 받아..."

이때 남작은 저스틴에게 사례할 목적으로 지폐 뭉치 가운데 한 움큼을 집고 있었다. 그러나 남작의 호의가 채 저스틴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하그렌드 경감이 로만 경사를 대동하고 객실 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돈을 집던 남작은 느닷없이 등쪽에서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놀라서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방에 함께 있던 리차드의 목소리가 아니, 전혀 다른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시오, 찰스."

그 목소리와 그 말투, 남작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찰스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를 데스타브 남작이라 불렀다. 자신의 뒤에 누가 나타났는지 알게 된 남작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어떤 생각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지금은 저스틴을 원망할 수도 없고 자신을 탓할 수도 없었다. 데스타브 남작의 성격 가운데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체념이 빠르다는 것이다. 재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일에 가히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망설이지 않고 체념하는 것도 가히 천부적이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어서 오십시오. 경감님."

그렇게 말하는 남작의 태도나 표정은 리차드와 저스틴을 충분히 놀라게 만들만큼 차분했다. 하그렌드 경감 역시 회심의 미소를 얼굴 가득히 짓고 있었다. 이때 남작은 경감과 나란히 서 있는 로만을 날카롭게 노려보더니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남작은 바라보는 로만 역시 무표정했다. 전날 런던에서 그들은 일주일 후 알카불고에서 만나 서로의 몫을 나누기로 분명히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그 로만이 바로 하그렌드 경감과 나란히 나타나 그날의 공범을 체포하려는 것이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한쪽으로 물러서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에도 저스틴은 그녀만의 가책을 느꼈다. 그녀가 남작을 배신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사람은 마땅히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다만 하필이면 그녀가 그런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 저스틴으로 하여금 순수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하그렌드는 여유 만만했다. 곁에 로만까지 함께 있는 상황에서 데스타브 남작은 드디어 독 안에 든 쥐와 마찬가지였다.

"내 예상이 꼭 들어맞았군. 돈 냄새가 나는 곳에 찰스 당신이 나타날 줄 알았지."

데스타브 남작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역력했다. 올 때까지 왔다고 생각한 것일까? 특히 리차드와 저스틴이 목격자라는 사실이 그를 완전하게 묶어 놓는 셈이 되고 말았다. 데스타브 남작은 그 앞에서 어떤 비굴한 짓을 하더라도 소용없음을 인식하는 듯했다.

"솔직하게 얘기해 봅시다, 경감."

"좋소."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소?"

남작은 경감에 이어 로만과 메인 부부를 차례로 바라보며 약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여유 있는 표정을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거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오, 남작."

경감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함께 있는 로만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어떤가, 로만 경사. 남작과는 서로 아는 사이겠지?'

순간 남작의 눈빛에 번뜩이는 날카로운 것이 스쳤다.

"로만이군."

그는 침통한 투로 짧게 그 이름을 불렀다. 이 순간까지도 그는 로만의 신분을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확실할 수 없지만 표정과 분위기로 보아 남작은 로만이 경찰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하그렌드 경감은 남작에게 로만을 정식으로 소개하며 그를 다시 놀라게 했다.

"이 사람은 런던경시청에 소속을 두고 있는 수사과 경사 아서 로만이요. 데스타브 남작. 이제 알겠소?"

"그렇군."

"이 세상에 완전 범좌란 있을 수 없소."

남작은 로만을 향해 어떤 비난이나 추궁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궁지에 몰린 자신의 입장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자칫 어설픈 감정 표현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비굴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범죄 사실이 현장에서 발각되어 체포되기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몰리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신분과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오히려 로만을 향해 부드럽게 빈정거렸다.

"축하하네, 로만. 내가 자넬 아직 모르고 있었다니 내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군."

그는 웃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로만에게 한마디 더 던졌다.

"이제 보니 돈의 유혹도 거절할 줄 아는 애국 청년이었군. 몰라 봐서 미안하네."

리차드와 저스틴은 일이 빨리 끝나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사실상 할 일을 끝낸 셈이다. 그대로 호텔 밖으로 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만 사건의 결말을 지켜보고 싶을 뿐이었다. 이윽고 하그렌드 경감이 로만 경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로만, 지금 즉시 로스앤젤레스 경찰에 연락해 주게."

"알겠습니다. 경감님."

"이 지역의 경찰과 사소한 마찰도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 돈 가방을 챙긴 후에 어서 전화로 연락하게."

"."

전화기는 남작이 올려놓은 돈 가방 바로 그 곁에 놓여 있었다. 로만이 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며 리차드와 저스틴은 상황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만은 로스앤젤레스 경찰에 연락하기 위해 가방과 전화기가 있는 탁자로 갔다. 그는 우선 돈 가방의 뚜껑을 닫은 다음 이어서 전화기를 들었다. 바고 그때 로만의 행동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그 안에 한 사람도 없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물론 하그렌드 경감조차 남작에게 시선을 준 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로만은 왼쪽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의 바로 곁에는 가방 속을 확인하다 잡힌 데스타브 남작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로만은 양복저고리 자락을 활짝 열어젖혔고 권총은 바로 남작의 코앞에 있었다. 남작은 믿었던 로만의 배신을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체념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번뜩였다. 로만은 양복 자락을 다시 한 번 젖혔고 남작은 로만의 허리에서 그를 향해 고개를 삐쭉이 내민 권총을 볼 수 있었다. 로만의 동작에서 남작이 행동을 옮기기까지의 사이에는 채 몇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남작이 번개 같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일순간 상황은 뒤바뀌고 말았다.

"꼼짝 마!"

남작은 손에는 이미 로만의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번개 같이 로만의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 모두를 겨눈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앞에서 경감은 비롯한 모두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남작은 움켜잡은 총구에 힘을 주며 명령을 내렸다.

"로만, 수화기를 내려두고 뒤로 물러서라!"

로만은 꼼짝없이 뒤로 물러섰다. 돈 가방이 있는 곳에서 한 발짝 씩 물러선 셈이다. 남작은 그럴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경감, 총을 꺼내 놓으시오!"

총구 앞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속수무책이었다. 자칫 서툰 동작 때문에 하나뿐인 생명을 날려 버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바닥에 던져!"

경감은 꺼내든 권총을 바닥에 떨어드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탄식했다. 자신이 10년만 젊었어도 하는 생각으로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에 몸을 날렵하게 굴리며 바닥에 엎드려 상대에게 선제공격을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 이쪽으로!"

남작은 총구로 지시했다.

"모두 저쪽으로 비켜서시오!"

경감과 경사, 리차드와 저스틴은 그의 총구가 지시하는 대로 벽 쪽으로 물러섰다. 남작은 총을 쥐지 않은 손으로 돈 가방을 들었다.

"메인 부인?"

그는 저스틴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도저히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 앞에서 저스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리차드 역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들 중에 어느 누구도 상황이 이렇게 돌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쪽으로 오시오, 부인."

거절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설프게 멈칫거리다가는 거친 행동이나 폭언을 뒤집어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스틴은 체념한 표정으로 남작에게 다가갔다.

"우선 용서를 구해야겠소이다. 메인 부인."

남작은 사뭇 예의를 갖추며 양해부터 구했다.

"부인, 나를 한 번 더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남작은 저스틴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댔다. 그 광경을 보고 리차드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분노의 용암이 들끓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위기를 여러 차례 겪긴 했었지만 매번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곤 했었다. 하지만 현재 그는 두 명의 수사관과 함께 있으면서도 남작의 총구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리 비켜!"

경감과 리차드가 움직이려 하자 남작은 갑자기 거칠게 소리쳤다. 그 자신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상대들에게 위협을 주고 있지만 내심 불안과 초조로 긴장하고 있었다.

"순순히 길을 비켜주지 않으면 여자가 죽는다."

리차드는 멈추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저스틴이 무사할 수 있다면 남작이 돈을 가지고 도망쳐도 상관없었다. 저스틴이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남작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남작은 문 쪽을 향해 가면서 사납게 소리쳤다.

"이리 와! 빨리! 돌아 서!"

그는 리차드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 부인을 해치진 않겠어. 그냥 방패로 삼을 뿐이지. 걸어! 어서 걸어!"

그는 저스틴을 강제로 몰다시피 해서 문 쪽으로 가도록 재촉했다.

"메인 부인은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사람이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부인은 무사히 돌려보낸다."

데스타브 남작은 지금도 저스틴을 행운의 여신으로 믿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 어서! 어서 걸어! !"

남작은 저스틴을 인질로 삼아 호텔 방을 나섰다. 누구 하나 손을 쓰지 못한 채 남작의 명령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저스틴이 피투성이가 되어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저스틴은 무사할 수 있다. 단 이것은 남작이 돈을 가지고 무사히 탈출한다는 전제조건에서만 허용되는 문제였다. 남작이 문 밖으로 막 나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로만이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 외에 비상용 무기로 또 다른 초소형 권총을 양말 속에 넣고 다녔다. 남작이 문밖으로 나가서 방안의 상황을 보지 못하는 사이 로만은 권총을 꺼내서는 망설이지 않고 문밖을 나서며 소리쳤다.

"남작!"

일제히 놀랐다.

남작 역시 소리가 난 방향을 재빨리 바라보며 들고 있는 권총을 곧장 겨누었지만 로만이 한 발 빨랐다. 남작이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요란한 총성이 복도를 울렸다. 로만의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은 남작을 향해 날아갔다. 남작은 심장을 움켜쥐고는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이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개된 상황 속에서 남작은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스틴은 남편에게 달려가서 그의 품에 안기는 것조차 잊은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차드 역시 쓰러진 남작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경감이 먼저 움직였다. 쓰러진 남작의 목 부분에 손등을 대어 본 후 그는 무겁게 선언했다.

"죽었어요."

로만 경사의 사격 솜씨는 정확했다. 단발에 남작의 심장을 명중시켜 그를 절명시킨 것이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 채 서 있기만 했다. 로만 경사만이 당황하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벽했다. 여인을 인질로 삼아 거액의 국고금을 가로채어 도망치려는 범인을 정확하게 맞춰서 사살하고는 극적으로 인질을 구출해 냈다. 이 이상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로만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모범적인 수사관으로 표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남작이 비록 저스틴의 안전을 약속했어도 확실하게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적을 달성한 다음 남작이 저스틴을 물론 리차드와 경감, 경사까지 처치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증거를 없애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더 연장시키기 위해 충분히 피를 뿌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작이 완전히 숨졌다. 저스틴은 무사했고 영국 정부로 환속해야 된는 거액의 돈도 무사히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이보다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작은 사살한 것은 수사관의 업무상 필요한 조치였다. 로만은 아직 얼떨떨한 표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더구나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불쾌한 방문객

 

한 가지 문제만이 아직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었다. 저스틴이 런던에서 가져왔던 2백만 달러의 행방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돈을 되돌려 받고 데스타브 남작을 체포하기 위해 영국 정부가 두 번째에 출연한 돈은 결국 되돌려 받게 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데스타브 남작이 죽었기 때문에 애당초 그가 도박장에서 땄던 2백만 달러의 향방은 찾을 길이 막혔다. 그 돈의 행방을 알고 있을 남작이 이미 죽었다. 그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마련이다. 로만이 꼭 남작을 죽여야만 했던가에 대해서 의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그가 유능한 수사관이었다면 남작을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범인을 사살하는 것은 최악의 경우에 한에서 마지막에 사용해야 할 극단적인 방법이다. 로만이 극단적이 방법을 사용해야 할 만큼 그 상황이 최악의 경우였는가에 대해선 의무의 소지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로만의 사격 솜씨라면 남작의 심장을 피해서 총격을 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만은 단발에 현장에서 남작을 즉사시켰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 때문에 노련한 하그렌드 경감조차도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로만의 신속한 대처와 처리에 만족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리차드는 역시 저스틴의 신변 안전에만 신경을 쓰느라 전후 사정을 유추해 볼 여유가 없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하그렌드가 본국에 돌아가 보고하기 위해 작성하는 서류 작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스틴의 증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리차드 역시 증인이 되어 주었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일선 수사관이 범인을 사살할 경우 자칫 심각한 문제로 비약될 수도 있었다.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기 위해선 저스틴과 리차드의 증언이 꼭 필요했다. 결과적으로는 로만이 취한 행동을 옹호해 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 경찰이 작성하는 조서 및 진술 내용들에는 수사관 만큼이나 경험이 풍부한 리차드가 크게 도와줄 수 있었다. 그들은 하그렌드와 로만이 묵던 호텔로 함께 돌아왔다.

"고맙소, 경사."

리차드는 비로소 저스틴을 무사히 구해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로만 경사에게 전했다.

"천만해요, 메인 씨."

"이 정도면 천천히 런던에 돌아가서 다시 조서르 ㄹ작성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경감이 로만 대신 대답했다.

", 메인 씨. 메인 부인. 너무 오랜 시간을 붙들어 두게 되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스틴 역시 자신을 무사히 구출해 준 로만에 대해 급히 감사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경사님. 수고가 많으셨어요. 다시 한 번 저를 남작으로부터 구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부인."

저스틴은 문득 런던의 카지노에서 딜러였던 그의 모습과 지금의 로만을 비교해 보았다. 그때는 어딘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의심스러운 청년이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유능한 수사관이라는 생각과 함께 몹시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젊은이다운 기백과 기지가 넘치는 그 모습 속엔 경찰만의 든든함이 배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을 떠나기 전에 저스틴은 하그렌드 경감에게 넌지시 물어 보았다.

"경감님?"

"네 부인."

"런던에서 바뀐 그 돈은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건가요?"

"그것이 딜레마입니다."

"?"

"지금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공연한 질문을 한 것 같은데요."

리차드와 로만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과는 달리 하그렌드 경감은 농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문제이겠지요."

"?"

"국가의 재정은 어느 나라나 똑같은 논리 속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인."

"네에."

"그 돈을 영원히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만큼의 세금을 더 걷어 들여야 하는 것이 그 논리죠."

저스틴은 하그렌드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결국은 여왕만 괴로운 일이겠죠."

그 말을 들은 리차드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애당초 리차드는 하그렌드를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르게 보았을 때부터 그를 옛날 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면에서 구식 냄새가 났었고 그런 사람이 런던의 경시청에도 핵심적인 수사관으로 재직한다는 사실이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믿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미지의 하그렌드와 그의 조수인 젊고 날카롭게 생긴 로만이 멋진 대조를 보이는 한 쌍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오히려 호텔에서 일행이 위기에 몰렸을 때 로만이 보여주었던 민첩한 동작은 그야말로 현직 수사관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윽고 하그렌드는 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로만과 나는 호텔에서의 계산이 끝나는 대로 즉시 런던 행 비행기를 타겠습니다."

리차드 역시 저스틴과 그 동안의 미묘했던 문제로부터 원래의 지신들만의 세계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 했다.

"경감님."

"말씀하시죠, 메인 씨."

"우리가 더 필요한 일이 없겠습니까?"

그는 곁에 함께 앉아 있는 저스틴의 팔을 잡았다.

", 아닙니다. 오히려 대단히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더 이상 우리는 필요가 없겠군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메인 씨 당치도 않아요. 런던에 돌아간 다음에도 우린 두 분을 기억할 겁니다."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리차드와 저스틴이 막 돌아서려 할 때 하그렌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무례했던 것을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헤어지기 전에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천만에요, 경감님."

로만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한마디 끼어들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도 남작을 해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걱정할 거 없어요, 경사."

"?"

"그것은 전적으로 근무 중에 발생한 문제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요, 경사님."

저스틴도 한마디 거들자 로만은 몹시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두 분께서는 굉장히 너구러우시군요."

"나중에 필요하다면 증언해 줄 수도 있어요, 경감."

"다음 번에 런던에 오실 기회가 있으시면 꼭 경시청에 들러 주십시오. 기쁘게 맞아들이겠습니다."

"그 동안 수고 많았소 경사.'

"경감님도요."

"안녕히 가십시오, 메인 씨 메인 부인."

리차드와 저스틴은 가벼운 마음으로 경감과 경사가 묶고 있던 뉴 파더 호텔을 떠났다. 호텔을 나선 메인 부부는 세워 둔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사건이 완전히 종결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여보."

자동차가 거의 집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저스틴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뭘 말이요?"

리차드는 정면을 응시하며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그 돈 말이에요."

"?"

"우리가 런던에서 조지한테 받았던 돈이요."

"2백만 달러?"

"맞아요."

"그 돈이 왜?"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저스틴, 이제 그만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경감이 영국으로 돌아가서 해결할 텐데 말야."

"그래도 궁금해요."

"당신은 정말 못 말리겠군."

"그럴 수밖에 없죠. 우리가 조지한테 받았고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돈인데 궁금해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만 잊읍시다."

"알겠어요."

저슨틴은 그런 점에서 매우 집요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리차드가 잘 알고 있었다. 저스틴은 어떤 문제에 말려들었을 때나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도 그 문제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편이였다. 덕분에 미궁에 빠질 뻔했던 사건이 새롭게 수사에 착수되어 뜻밖의 개가를 올렸던 경우도 여러 번 있기도 했다. 저스틴은 그들의 집이 시야에 들어오자 다시 한 번 그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해 봤는데요, 여보."

리차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돈은 영국을 떠나기 전에 사라졌을 것 같아요."

리차드는 언제나처럼 대화의 상대역이 되어 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미국까지는 돈이 들어오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글쎄."

"제 생각으로는 런던에서 바뀐 것이 분명해요."

"카지노에서?'

"아뇨."

"그럼?"

"우리가 비행기를 탔던 히드로 공항 화물 구역이 가능성이 많아요."

"으음."

저스틴의 말에 리차드는 자신도 모르게 동의했다. 그 역시 거금이 바람같이 사라진 문제에 대해 곰곰이 행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켄싱턴 클럽의 총지배인인 조지에게 돈 가방을 건네받은 다음부터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할 때까지의 상황을 샅샅이 떠올려보았다. 가방이 바뀔 만한 기회는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부터는 직접 가방을 차에 싣고 집까지 싣고 집까지 달렸다. 귀신이라 하더라도 달리는 차에서 가방을 바꿔치기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스틴의 말을 듣는 순간 리차드의 머리를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왜 그 문제를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문제의 돈 가방이 타인에게 노출될 수 있는 기회는 그때뿐이었다. 공항의 화물 구역이라면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가방을 바꿔치기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리차드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자동차는 벌써 집 가까이에 도착하고 있었다.

"당신 생각이 맞을 것 같군."

"그렇죠?"

"그곳이 아니고서는 가방에 손을 댈 수 없었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어떻게 하긴, 하그렌드 경감도 바보는 아닐 테니까?"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에서 내려 시고니가 기다리고 있을 현관을 향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벨을 눌렀을 때 시고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2백만 달러의 돈이 런던의 히드로 공항 화물 구역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며 로비로 들어서던 리차드와 저스틴은 깜짝 놀랐다. 예기치 못했던 관경이 그들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실의 안쪽에서 불쑥 나타난 것은 시고니가 아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는 닐 완슨이었다. 전에 자도차로 맹렬히 추격해 왔던 그가 이젠 집에서 메인 부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저스틴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리차드는 몸이 굳어지고 있었다. 닐 완슨은 손에 권총을 들고 유유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망칠 생각은 말아요. 당신은 행운을 안겨주는 여신이니까."

닐 완슨은 저스틴을 향해 총구를 곧장 겨누었다. 뜻밖의 상황 앞에서 저스틴과 리차드는 그 자리에서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은 안쪽에서 시고니가 천천히 나타난 것이다. 그는 전혀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니었다.

"이제 오셨어요? 닐 완슨 씨는 이미 두 분 다 알고 계시죠?"

"시고니!"

리차드가 재빨리 소리쳤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시고니?"

저스틴은 닐 완슨의 총구와 시고니를 번갈아가며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도저히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닐 완슨이 총을 겨누고 있는데 시고니의 얼굴에서는 전혀 겁에 질린 표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시고니, 말 좀 해봐요!"

리차드는 전과 다르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안에는 사실을 빨리 해명하라는 리차드의 강한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 메인 씨."

그 때 닐 완슨이 시고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해 마십시오, 메인 씨 댁의 부인께서는 행운의 여신이십니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리차드와 저스틴은 재빨리 마주보았다.

"부인께서 도박장에서 돈을 따시는 것을 보았다는구요."

시고니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리차드와 저스틴은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닐 완슨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렇습니다. 부인."

"?'

"그때부터 부인을 찾기 위해 런던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습니다."

비로소 리차드와 저스틴은 상황을 짐작했다. 닐 완슨이 누구도 해칠 뜻이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자 리차드는 점점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이것 봐요,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소, 그러나 그 총을 계속 겨누고 있을 장정이요."

"이것 말입니까?'

닐 완슨은 비로소 깨달은 것처럼 들고 있던 총을 들여다보더니 너무나도 어이없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건 라이터일 뿐입니다. 선물로 받은 거죠, 어때요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닐 완슨은 그 권총을 당겨 물고 서 있던 시가에 불을 붙였다. 리차드는 더욱 불쾌해졌다. 이 위험이 사라졌다고 판단되자마자 느끼는 안도감보다는 어처구니없는 닐 완슨의 해프닝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저스틴도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남에게 화를 내거나 남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을 훤하지 않는 그녀도 이번 일에는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하루에도 두 번씩이나 권총으로 위협 당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문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데스타브 남작의 위협은 로만이 해결했다. 그러나 또 다시 이런 일이 집에서, 그것도 그 일이 끝나지 미처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일어난다는 것은 관장한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대체 용건이 뭐요?"

닐 완슨은 라이터 권총을 아래로 내리며 이번에는 저스틴을 향해 간청하기 시작했다.

"부인."

저스틴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시고니 역시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이번에 나는 라스베가스에 있는 라운드 로빈 호텔로 갈 것입니다."

저스틴은 차가운 시선으로 닐 완슨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곳을 저하고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만하시오!"

리차드의 날까로운 목소리에 놀란 것은 닐 완슨보다는 시고니였다. 지금까지 집에서 리차드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닐 완슨은 비굴할 정도로 단념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끌어 나갔다.

"메인 씨, 다른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절대로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그럼요, 믿어 주셔야죠."

리차드의 얼굴에 차가운 당혹스러움과 경멸이 점점 피어나고 있었다.

"메인 씨께서도 함께 가주신다면 더욱 영광이겠습니다. 사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룰렛 게임에서 번호만 결정해 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지켜보는 세 사람의 얼굴에 똑같이 조소의 빛이 나타났다. 리차드는 화를 낼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동업을 하자 이것이죠. 5050, 어떻습니까?"

듣다 못한 저스틴이 철부지 아이를 부르듯이 닐 완슨을 불렀다.

"닐 완슨씨."

", 부인."

"내가 행운의 여신이라면 무엇 때문에 당신과 동업을 해야 하는 건가요?"

"휴우!"

닐 완슨은 한숨까지 내쉬어 가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 말씀을 하실 줄 알고 있었습죠. 그렇죠, 부인. 그러나 저를 믿어 주시고..."

문 쪽에서 리차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완슨 씨."

"?"

그가 돌아보았을 때 리차드는 이미 현관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잘 가시오."

리차드의 엄한 표정에 닐 완슨은 비실대듯 문을 향해 걸어 나가며 볼멘소리를 냈다.

"이거, 이러는 것 아닙니다. 이렇게 확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힘이 들거나 돈이 드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단지 번호만 불러 주시면 거액의 금액이 한꺼번에 수중에 들어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는 데요, 지금 아주 후회할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내가 할 소리요."

닐 완슨은 이미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고 계속해서 몸을 비틀거렸다. 그는 쫓겨 나가고 있었다. 어차피 스스로 자초한 문제였으므로 그렇게 밀려 나가는 것이 당연했다. 밖으로 나가던 그가 갑자기 등을 돌렸다.

"시고니."

그는 시고니에게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다음 주에 네바다로 오시겠어요?"

"사정이 허락되면요."

시고니의 대답에 메인 부부는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해졌다.이 순간 그들은 마치 광대들의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이때처럼 시고니에 대해 의아해 하거나 거리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변신한 친구

 

"메인 씨"

오전에 시내에 나갔다. 돌아온 시고니가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시고니?"

그와 생활해 오는 동안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리차드는 이미 시고니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얘기해 봐요."

"그런데 그게 좀..."

시고니가 이렇게 망설이며 이야기를 꺼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들은 단순한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아니라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상 시고니가 리차드에게 못할 말이란 없었다.

"얘기해 봐요, 시고니. 내가 도울 일이라도 있나요?"

"그보다 조언이 필요합니다."

"그래요?"

"."

시고니는 다시 한 번 망설인 끝에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 친구 가운데 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리차드는 시고니의 기분을 파악했기에 더욱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 친구는 돈이 좀 많죠."

"..."

"원래는 빈민가에서 태어났지만 크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저보다는 좀 젊습니다만. 그 동안 무엇을 해서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업을 하나요?"

"네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이번에 그 친구가 로스앤젤레스로 다시 돌아왔어요."

"돌아와요?"

리차드는 아직 시고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을 못하고 있었다. 다만 시고니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정도만을 파악할 뿐이었다.

". 돌아왔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좀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래서 메인씨와 상의를 하려는 겁니다. 전 원래 말재주가 없어서...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때 저스틴이 욕실에서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나왔다. 그녀는 가끔씩 오후에 샤워하는 습관이 있었다. 외출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 그녀는 자주 샤워를 하곤 했다. 로만에게 재판을 걸쳐 실형이 선고된 후 오랜만에 메인 부부는 느긋한 시간을 함께 집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 동안 런던 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으로부터 몇 차례 전화가 왔었다. 금명간 미국에 올 것 같으며 그때 꼭 로스앤젤레스에 들르겠다는 것이었다.

"무슨 얘기예요. 여보?"

시원하게 샤워를 끝낸 저스틴은 상쾌한 표정으로 리차드와 시고니를 바라보았지만, 시고니의 표정에서 문득 심각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녀도 정색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지금 시고니하고 그의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야. 시고니, 어서 얘기해 봐요."

", 메인 씨. 메인 부인께서 들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저스틴은 더욱 의아하게 생각하며 리차드의 옆으로 자리를 고쳐 앉았다.

", 그 친구는 동부구역의 빈민가 출신입니다. 그렇다고 빈민굴에서 태어났거나 자란 건 아닙니다. 그래도 학교는 제대로 다닐 수 있는 집안이었죠."

리차드는 들으면서도 나름대로 시고니의 이야기를 정리하려 애썼다. 시고니는 마치 한편의 소설을 시작하려는 것처럼 서두를 꺼내고 있었다. 분위기로 보아 재촉하거나 앞서서 물어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제가 친구와 사귀게 된 것은 벌써 오래 전 일이죠. 그것도 아주 이상한 인연으로 말입니다. 지금은 그 친구와 제 입장이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리차드는 특별한 계획이 없는 만큼 이날만큼은 시고니를 위해 할애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시고니는 존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의 거주 지역 중에는 특수한 구역이 있었다. 미국에선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구역이 있는가 하면 뉴욕 등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매우 지저분한 빈민굴이 도심의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자기 잡을 가지고 있다 해도 하류층에 속해 있으며 주변에는 부랑아들이 들끓었다. 부랑아의 무리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아이에서 노인까지 연령층은 다양했으며 남녀의 구별도 없었다. 대낮에도 길가에 누워 잠든 사람들이 있었고 여기저기서 왕래하는 행인들에게 손을 벌린 아이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울려 싸움질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는 그곳은 미국이 아닌 완전한 이색 지대처럼 보였다. 20년 동안, 어디에 가서 어떤 사업을 했는지 도무지 통 소식을 전하지 않던 존이 그 지역으로 돌아온 것은 나름대로 굉장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가 시고니를 찾은 것 역시 의외의 일로, 뭔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기 전의 전초전처럼 느껴졌다. 시고니도 전혀 존이 어디에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호텔 커피숍으로 나갔다.

"안녕하신가, . 오랜만일세."

시고니는 전처럼 그를 대하면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잘 있었소, 시고니?"

존의 태도는 이미 그 전의 그가 아님을 느끼게 했다.

"나야 뭐 항상 그렇지."

시고니는 존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볼수록 존에게서는 돈 냄새가 물씬 풍겼다. 재벌의 총수이기도 하듯, 느껴지는 분위기가 사뭇 예전과는 달랐다. 재벌이라며 메인 그룹의 총수인 리차드 메인을 손꼽을 수 있지만, 그 에게는 전혀 대 그룹의 총수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업가 정도로만 보일 뿐이었다. 다름 사람이 메인 그룹을 최고 경영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를 만나게 된다면 분명히 평범한 신사 정도로만 알아볼 것이다. 저스틴 메인도 마찬가지였다. 별도로 사교계에 출입하지 않았으며 항상 남편을 가진 아내로서 현숙하고 검소하게 생활해 왔다. 번쩍거리는 장신구를 달고 다니지도 않았고 최고급의 미용실에서 비싼 서비스를 받지도 않았다. 메인 그룹이 기타 재벌 그룹에 비해 계속 향상되면서 견실하게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 밑거름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존에게선 전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돈 냄새만 풍길 뿐이었다. 말투와 태도, 몸짓 등이 너무나도 어색했으며 그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시고니는 의아하며 이어서 조금씩 실망하기 시작했다. 친구하고의 의리라면 자신의 목숨도 마다 않는 것이 시고니의 성격이긴 했지만 몇 년 만에 만난 존의 모습은 충분히 그를 실망시킬 만큼 변해 있었다.

", 이제 보니 신수가 아주 훤해졌는데 좋은 사업이라도 하는 모양이군?"

시고니는 자신도 모르게 말투가 어색해졌다. 백만장자 앞이라 하더라도 의기소침해지거나 주눅들지 않는 성격임에도 이상하게 존은 어색할 상대로만 느껴졌다.

"당신은 지금 뭘 하고 있소?"

"나야 뭐 메인 씨 댁에서..."

시고니는 재빨리 거기서 말을 바꾸었다.

"그렇지, 원래 가진 게 없는 사람이니까. 큰 변동이야 없지 않은가."

존이 등뒤로 서류 가방을 옆에 낀 두 명의 신사가 다가왔다. 언뜻 보기에도 법조계에서 일하는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강한 인상을 풍겼다. 그 중의 한 명이 공손하게 존에게 말을 걸었다.

"회장님, 준비됐습니다."

시고니는 깜짝 놀랐다. 서류 가방을 가진 신사는 존에게 회장님이라는 존칭을 깍듯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회장님이라니, 놀라움은 시고니가 근래에 가졌던 어떤 사건보다도 컸다.

"수고했고, 닉 그리고 와그너 당신도?"

", 회장님, 저도 분부하신 대로 처리해 놓았습니다."

"고맙소, 와그너."

시고니는 갑자기 앉아 있는 자리가 불편해졌다. 오지 말아야 될 자리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 시고니. 이쪽은 내 고문 변호사들이오. 닉과 와그너. 그리고 이쪽은 오래 전 내가..."

존의 소개에 시고니는 더욱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고문 변호사를 두 명씩 두고 있는 존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몰랐다. 리차드에게도 고문 변호사들은 있다. 그것을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존의 출신이 빈민가였기 때문에 더 더욱 놀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시고니는 존이 이미 옛날에 알고 지내던 그 친구가 아님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 셈이다.

"시고니 내가 당신을 보자고 한 것은 오랜만에 보고 싶기도 하고 또 도움을 받고 싶어서였소."

"내 도움이야 뭐..."

"앞으로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이 지역에서 계속 살아온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시고니는 가만히 앉아 존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날 위해 시간 좀 더 내줄 수 있겠지?"

"오래 걸리지만 않는다면야..."

시고니는 말할 때마다 말끝을 흐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떤 경우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그의 모습이다.

"잠깐이면 되오."

존은 차분히 강압적이었다. 자신이 결정하기만 하면 끝난다는 식이었다. 별도로 상대의 의견을 참고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 가서 차를 대기시키시오."

". 회장님."

"그리고 와그너, 시고니를 차까지 안내하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

존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명의 변호사가 공손히 곁에 서 있는 모습 속에서 시고니는 문득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하찮은 직업에 불과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시죠."

시고니는 와그너 변호사의 일방적인 안내를 받으며 호텔을 나섰다. 호텔 밖에서는 그 어느 누가 타더러도 안전할 것 같은 리무진이 운전사와 함께 대기 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시고니는 다시 리차드 메인을 생각했다. 존의 재정적이며 사회적인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시고니가 생각하기에 리차드 메인의 맞수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메인 그룹에 대한 사회적인 지명도와 성공을 시고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메인 부부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리차드가 리무진을 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는 자신의 몸처럼 아끼는 소형 자동차만을 애용했다. 시고니가 아는 한 그 차가 고장만 나지 않는다면 리차드의 손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일행을 태운 2대의 리무진은 시가지를 약 10분 동안 지나 어느 빌딩 앞에 도착했다. 이때도 존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두 명의 변호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몇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경호원처럼 존을 호위하는 가운데 일행은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존을 선두로 그의 좌우와 뒤를 따라 걸으며 엘리베이터를 향했고 일행 뒤를 시고니도 변호사와 나란히 걸어갔다.

청년들 중에서 몹시 불량해 보이는 몸집이 큰 사람도 있었고 날렵하고 눈빛이 매우 날카로워 보이는 사람도 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존을 에워싸며 마치 보스를 둘러싼 경호원처럼 걸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을 영상하게 할 정도로 절도 있었고 엄격했다. 시고니는 빌딩 안으로 들어설 때 빌딩이 몇 층이었는지 미처 보지 못했다. 초고속의 엘리베이터가 멎었을 때에야 비로소 35층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한번 놀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40층에 달하는 그 빌딩의 주인은 존이었다. 일행이 들어간 곳은 드넓은 사무실로 안에는 회의실로 꾸며진 곳이었다. 동시에 수십 명도 넘게 앉을 수 있는 자리와 긴 테이블, 정면에 서리된 상황판 등등. 시설도 최첨단으로 갖추진 곳이었다. 시고니는 시간이 지나자 눈으로 보이는 것 외에 더 굉장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존이 회장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뒤쪽에 청년들이 섰으며 두 명의 변호사가 존의 앞, 양쪽 자리에 앉았다. 시고니는 특별히 존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이제 시작할까?'

"알겠습니다."

닉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상황판으로 보이는 공간이 커튼에 가려져 있었다. 닉이 커튼을 천천히 열어 그 안의 내용을 보이기 시작하자 시고니는 깜짝 놀랐다. 존을 만나면서부터 계속해서 놀랄 일을 겪어 왔지만 이 광경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실제와 똑같은 조형물의 모형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곳이 어느 지역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외곡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빈민구역이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구체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들, 판잣집들, 공동수도, 심지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거리들까지 똑같이 표현되어 있었다.

"어떻소, 시고니. 이곳이 어디인지 알겠소?"

존이 물었을 때 시고니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시고니는 모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돈은 시고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시고니, 내가 당신을 제일 먼저 찾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오."

시고니는 두 눈을 크게 떴다.

"회장님."

변호사 와그너가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잘못 판단하신 겁니다."

"어째서 말이오?"

"투자할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와그너는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시고니는 이방인처럼 조용히 앉아 들으면서 나름대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건 당신이 틀렸소, 와그너."

"?"

"난 이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오."

"알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나에게 평생의 숙원을 갖게 해준 곳이오. 그리고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투자할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오."

"그렇지만 회장님, 이 지역의 절반은 이미 히든 벨이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가장 큰 문제요."

"?"

"문제는 한 사람이 전체 지역을 한꺼번에 개발해야만 투자할 가치가 생기는 것이오."

"하지만 히든 벨을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알고 있소."

시고니도 히든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히든 벨 클라크 회장으로 알려진 그는 굉장한 주식과 함께 호화판 술집, 도박장들을 가진 재벌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리차드 메인 같은 건실한 기업가가 이니라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초기에 돈벌이를 위해 여자 장사를 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주로 최고급 콜걸을 밑천으로 삼았고 또 그 분야에 남달리 재능이 있어서 직업적인 창녀보다는 값비싼 여자들을 상당히 거느리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유부녀를 비롯해서 대학생, 직장인 등 각양각색의 향락에 굶주린 고급여성들을 거물급한테 안겨주고 두둑한 대가를 받아 챙김으로서 짧은 시간에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계속된 사업 확장과 투자로 오늘날 존이 노리는 지역의 절반을 소유하게 된 히든은 최근 들어서는 과거를 완전히 청산한 채 새로운 사업가로 변신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히든이 어떤 사람인가는 이미 파악해 놓았소. 그리고 그를 꺾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여 일단 우리는 나름대로 계획을 차질 없이 추진시켜야 하오."

"전 아직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곳에 투자할 액수로는 더욱 좋은 조건에서 수익성 또한 보장되는 사업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와그너는 끝까지 존의 의견을 반대하고 있었다.

"회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그 지역은 빈민굴입니다.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역적으로 관광단지를 조성할 수도 없는 곳입니다."

"천만에."

"?"

"뭘 모르고 있군, 와그너. 그곳이야말로 개발만 하면 최고의 투자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곳이오."

"그렇지만 회장님,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을..."

"잠깐."

존은 와그너의 다음 이야기를 가차 없이 중단시켰다.

"."

". 회장님."

"보여 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시고니는 한마디로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물론 존이 묻거나 말을 시키지도 않았다. 마치 참관인 자격을 특별히 초대된 사람 같이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닉은 천천히 움직였다. 먼저 빈민구역의 모형도 위쪽에 있는 장치를 점검한 다음 존을 바라보며 지시를 기다렸다. 존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것을 신호로 닉은 장치를 작동시켰고 그와 동시에 위에서부터 육중해 보이는 물체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 시간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거기에 나타난 모형을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계속 반대하던 와그너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존의 계획에 의해 제작된 신도시의 모형이었다. 빈민구역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초호화판 지역이 들어서 있었다. 최신형으로 건축된 고층빌딩과 상가, 아파트, 위락시설 등 미국의 어느 대도시에서도 불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신도시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어떻소, 와그너?"

"굉장합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이 정도면 내가 왜 그렇게 강력하게 추진하려 하는 이해하겠소?"

"이제야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히든은 어떡합니까?"

"그 문제가 관건인데, 한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오."

"어떤 방법인지 저희가 알면 안 되겠습니까?"

"좀 기다려요, 머지않아서 알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됐소, 여러분. 난 옛 친구와 할 얘기가 있소."

존의 한마디에 모두들 그 즉시 자리를 떠났다.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소, 시고니?"

"당신, 정말 대단하군요. 저 지역을 모형처럼 개발하겠다는 것이오?"

"물론 그렇소."

시고니는 존의 말투로 인해 상했던 기분이 바뀌었다. 그는 굉장히 돈이 많은 부자이고 한 구역을 몽땅 개발할 계획까지 진행시키고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시고니."

이윽고 존이 정색하며 말을 시작했다.

"당신은 계속 이 지역에서 살아왔으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내게 무슨 도움을 청하는지 모르겠군요. 난 아무런 능력도 갖고 있지 않아요."

"그게 아니오."

"?"

"이런 일에는 새로운 지역을 개발할 때마다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과의 사이에서 발생되는 문제가 있소. 더구나 내가 개발하려는 곳은 빈민가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움이 따르게 될 것이오. 알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고집이 셀 뿐더러 바라는 것도 턱없이 많거든."

시고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존을 바라볼 뿐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주민들이 응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뜻이오."

"땅을 내놓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바로 그거요. 물론 그들을 몰아낼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

"방법이요?"

"물론."

"강제로 말입니까?"

"그런 방법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소. 하지만 난 순리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사람이오."

시고니는 존의 말하는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마음과 마음

 

리차드와 저스틴은 시고니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그들이 보기에 시고니는 그 문제 때문에 몹시 착잡한 모습이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착잡해 하는가에 대해서 메인 부부는 이미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시고니."

리차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단신이 걱정하는 것은 존이 주민들을 강제로 몰아낼 경우를 생각하는 거죠?"

"맞습니다, 메인 씨.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거든요. 만일 거기서 강제로 내쫓기게 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일방적인 행동을 하겠어요? 적절한 보상이 선행될 테죠. 안 그래요?"

"그것이 영 개운하지가 않아요."

"무슨 뜻인가요, 시고니?"

저스틴이 궁금해 하면서 한마디 물었다.

"이런 말씀을 들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메인 씨나 부인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어요."

리차드와 저스틴은 동시에 시고니를 쳐다보았다.

"원래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의 형편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메인 씨."

"아녜요, 시고니."

"우리한테까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리차드에 이어 저스틴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위로를 했다. 시고니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고 해서 메인 부부는 조금도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해 봐요, 시고니. 전부터 그 사람하고 친했었나요?"

"친했다기보다는 그냥 좀 알고 지낸 사이였죠."

"같은 고장 출신 정도였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큰 뜻을 품고 돌아온 셈인데, 오자마자 시고니를 찾았다면 뭔가를 시고니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그래요, 여보."

저스틴이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제 생각에는 시고니에게 주민들을 몰아내는 악역을 시키려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습니다."

시고니도 저스틴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것이 바로 시고니를 착잡하게 만드는 이유였던 것이다.

"전 그런 일은 못합니다. 충분한 보상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시고니, 그건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군요."

"그가 만일 충분한 보상을 계획하고 있다면 시고니에게 도움을 청하진 않았을 거예요."

"맞습니다. 메인 씨.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 사람을 직접 만나보니 좋은 뜻을 가진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그래요?"

"변호사 두 명이 비서처럼 따라다니고 보디가드가 여러 명씩이나 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좋은 방법으로 사업을 하려는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해요."

시고니의 생각은 간단했다. 떳떳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리차드처럼 경호원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시고니의 결론이었다. 그가 리차드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존처럼 돈을 가졌다고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는다. 변호사는 사업상 필요에 의해 사무실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지 비서처럼 대동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사업을 위한 경쟁에는 늘 정당했고 가지지 못한 사람을 멸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해 출혈을 감수하면 도산한 기업을 인수해서 활성화시키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그가 정식으로 부탁했나요?"

리차드 역시 시고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또 다른 문제가 해결되어야 개발에 착수할 수 있을 테니까요."

"또 다른 문제?"

저스틴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지만 가끔씩 그렇게 한마디씩 묻기도 했다.

"좀 복잡해요. 그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존, 그 사람이 모두 인수해야 되는데 그게..."

시고니는 존과 히든 벨 클라크와의 관계를 간단히 설명했다.

"히든 벨 클라크?"

리차드가 재빨리 물었다.

"."

"그래요, 시고니. 나도 그 사람을 알고 있어요."

"알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 초창기에는 좋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제대로 사업을 경영하는 사람이오. 자신의 그런 과거 때문인지 좋은 일도 많이 하는 모양이더군요."

"'좋은 일이요?"

"몰라도 되는 그런 일이 있어요."

리차드는 그 이야기를 시고니와 저스틴 앞에서 꺼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히든 벨 클라크는 최근 과거를 뉘우치려는 뜻에서 직업훈련학교를 설립했다. 주로 창녀나 불우한 여성들을 수용한 다음 적성에 맞는 직업훈련을 무료로 시키는 곳이었다. 히든 벨 클라크가 아직 독신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으며 리차드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맞아요. 히든이 빈민구역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어요."

"바로 그겁니다, 메인 씨."

"?"

"존은 히든 씨가 소유하고 있는 몫까지 전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까지?"

"그 몫까지 합쳐서 자기가 전체를 소유해야 개발할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문제라면 심각하게 발전될 수도 있겠군요."

리차드는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오늘날의 메인 그룹이 있기까지 그가 겪어온 과정과 경험은 어느 경영자 못지않게 넓고 깊다. 시고니가 설명하는 이런 경쟁 과정도 여러 번 지켜 보아온 터였다. 정당한 경쟁에서는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그것과는 정반대일 경우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심지어 피까지 보는 분쟁이 발생하는 광경도 직접 목격한 경험도 있었다.

"그런데 메인 씨."

시고니는 문득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오늘은 매우 조용하군요."

"뭐가 조용하다는 거지요?"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으니 말입니다."

"미리 특별한 문제가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부탁해 놓았어요."

"그러셨군요."

그때 시고니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전화벨이 울렸다.

"저런! 제가 받죠."

시고니가 혀를 차며 전화기로 가는 모습에 리차드와 저스티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여보세요, ? 메인 씨 댁입니다. ?"

리차드와 저스틴은 곧장 시고니를 바라보았다.

"지금 계십니다만, 누구시라구요? 나이젤 하그렌드 경감님이요... , . 그러시군요."

리차드와 저스틴이 재빨리 마주보았다.

"경감?"

리차드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은 채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런던으로 돌아간 다음 몇 번 전화가 왔지만 최근에는 뜸했던 하그렌드 경감의 전화였다.

"전화 받으세요, 메인 씨."

"고마워요, 시고니."

리차드는 시고니로부터 전화기를 넘겨 받았다. 시고니도 저스틴도 궁금한 표정으로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오랫만이군요, 경감님."

"안녕하세요, 메인 씨."

"런던에는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습니까?'

"런던요?"

"."

"여긴 런던이 아니에요."

"?'

"미국입니다. 방금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해서 곧장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그래요?"

리차드는 놀라더니 재빨리 전화기를 막고 저스틴에게 경감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하그렌드 경감이 이곳에 왔다는데."

"어머, 그래요?"

저스틴도 놀랐다. 하그렌드 경감이 로스앤젤레스에 와서는 곧바로 메인 부부에게 전화를 한 것은 확실히 심상치 않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처럼 보였다. 나이젤 하그렌드 경감의 미국행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슨 일로 로스앤젤레스까지 오셨습니까?"

"아무래도 전 로스앤젤레스하고 인연이 있나 봅니다."

"그래요?'

"여기는 공항이라 긴 얘기는 만나서 하도록 하죠. 제가 댁으로 찾아가도 괜찮겠습니까?"

"우리 집으로 오신다구요?"

리차드가 설명하지 않아도 저스틴은 그가 집으로 직접 오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시고니 역시 커피나 저녁식사를 손님 몫까지 준비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연락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왜요?"

"회사에서 아주 까다롭게 묻더군요.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신분을 확인한 다음에야 겨우 계신 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보안장치가 철저한 데 놀랐습니다."

"미안하게 됐군요. 불필요한 전화들이 많이 걸려와서요."

"이해합니다."

"그건 그렇고, 지금 곧장 오시겠습니까?"

"지장만 없으시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부탁드릴 일도 있고 해서요."

"좋아요. 기다리죠."

"곧 가겠습니다. 거기가 어딘지는 제가 잘 아니까요."

리차드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지금 오신 답니까?"

시고니가 묻자 저스틴 역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시고니."

"뭘 좀 준비해야겠어요, 공항에서 여기까지 금방이니까요."

"도착한 다음에 준비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이상한 예감이 드는군."

"뭐가요?"

"부탁할 일이 있다던데 일상적인 문제 같지가 않아."

"혹시 또 무슨 사건 때문에 온 것이 아닐까요?"

"글쎄..."

"그 사람 매우 바쁜 형사군요, 런던에서 여기까지 출장을 또 오다니."

"형사가 아니고 경감이죠. 런던경시청에서는 베테랑으로 손꼽힌다고 들었어요."

"네에."

시고니는 그 문제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에게는 형사나 경감이나 똑같이 생각되었다. 어차피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녀야 되는 사람이라면 다를 것이 뭐가 있겠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시고니. 아까 그 얘기 아직 안 끝났죠?"

"존 얘기요?"

"그래요. 그러니까, 아직 정식으로 부탁을 받은 건 아니군요?"

"."

화제는 하그렌드에서 다시 존에게로 돌아갔다. 시고니의 표정은 화제가 돌아가자마자 곧 바뀌었다. 그만큼 부담스러운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부탁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요?"

리차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시고니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뭐죠?"

"왜 히든이라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리차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존은 그 사람에게도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일을 꾸민 후에 계획을 진행시키려 하는 게 분명합니다."

"히든 정도면 만만한 상대가 아닌데 그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존도 대단해요. 40층짜리 빌딩이 그의 소유인데다 그 시설도 굉장하더군요."

저스틴은 하그렌드 경감이 또 무슨 사건 때문에 미국에 왔을까를 생각하느라 시고니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뉴 파더 호텔에서 침대에 앉혀진 채 묶여 있던 모습은 아직도 저스틴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메인 씨,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요...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우리 변호사를 통해 넌지시 알아볼까요?"

"아닙니다. 메인 씨.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단지 메인 씨의 의견을 들었으면 해서요."

시고니는 공연한 문제로 리차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변호사까지 동원시키는 문제는 더 더욱 원하지 않았다. 다만 리차드에게서 개인적인 조언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리차드 역시 난처했다.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시고니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좀처럼 자신의 내면적인 문제를 꺼내놓지 않는 성격을 가진 시고니였기 때문에 더욱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과묵한 성격에다가 성실한 성격 때문인지 시고니는 불필요한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메인 그룹이 있고 메인이 있기까지의 시고니는 건축물의 초석과 같은 존재였다.

"시고니, 내 생각에는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어때요?"

"알겠습니다.."

"언제 그 사람하고 만날 약속이 되어 있나요?"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알았어요. 나도 그 문제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겠어요."

"고맙습니다. 메인 씨."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메인의 집까지는 비교적 한적한 도로이기 때문에 차로 곧장 달리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하그렌드 경감은 필경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올 것이다. 시고니가 말한 존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던 리차드는 무심코 시계를 보다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하그렌드 경감이 도착할 시간이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집 앞에서는 자동차가 들어와 멎는 소리가 들렸다.

 

 

빗나간 야망

 

존은 야망으로 가득찬 사람이었다. 현재의 그는 자신을 능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다만 아직 어려 연륜이 부족하기 때문에 표면상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그는 히든 벨 클라크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를 했다. 히든의 재정적인 능력은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으므로 특별히 알아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재무 구조가 견고한 만큼 자본의 대결로는 그에게 뒤진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현재 히든의 대외적인 평판도 상당히 좋아 정상적인 대결이나 경쟁만 가지고서는 그를 꺾기 어렵다는 것이 조사된 결과였다. 따라서 편법을 쓸 수밖에 없다. 존은 수단가 범법을 가리지 않고 히든을 꺾을 결심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옛고향을 위해 발전시킨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야의 탈을 쓴 특대와도 같았다. 존은 히든의 사생활 및 성격상의 약점을 주안점을 두고 조사시켰다. 히든이 어떤 경우에 가장 쉽게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가를 철저하게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존이 현재의 위치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의 자존심을 자극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비열한 비법이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존은 그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변호사인 닉의 지휘 아래 여러 명을 동원시켜 히든의 자존심과 거기에서 비롯될 수 있는 약점을 낱낱이 조사하도록 시켰다. 힌든이 거대한 건축물이라고 한다면 그 기초가 되는 초석을 제거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비열한 작적이었던 것이다. 히든에게 매우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떳떳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며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하려는 그에게 보이지 않는 막강한 상대가 나타난 셈이다. 히든의 자존심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아직 그런 일은 없었지만, 누군가 자존심을 건드리고 자극하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했다.

"회장님."

"말해 보시오."

"아무래도 쉬울 것 같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각오한 사실 아니오. 조사한 결과는?"

"그보다 다른 문제부터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다른 문제?"

닉은 모형을 집어가면서 설명했다.

"이 지역에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여러 명을 만나서 직접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뭐라고 하던가?"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어차피 가난하게 태어난 운명이니까 단지 호강하려고 태어난 집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히든이 땅주인인데 그가 자기들한테 잘 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히든의 인기가 그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군."

"저도 놀랐습니다. 히든은 굶주리는 거지들에게 선교단을 통해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한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우리도 할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죠."

닉은 평소 솔직한 그의 성격처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말이며 꼭 덧붙여 했다.

"회장님이 지금 시작하시면 이미 늦었습니다."

"어째서 그렇소?"

"히든이 이미 기반을 굳혔기 때문에 지금 다른 곳에 급식소를 마련하더라도, 주민들은 히든 쪽으로 갈 것이 확실합니다."

"배불리 먹여 주는 데도?"

"이렇게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식당에 음식이 맛은 좋지만 집에서 먹는 음식만은 못한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 정도로 히든의 인기가 좋단 말이오?"

"죄송합니다."

존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히든에 비해 아직 젊은 그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현재의 위치에 설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의혹을 갖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결국 히든과의 싸움이군."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만 그와 겨루면 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선 그는 주민들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고 있으니까요."

"그 문제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소. 그건 그렇고 내가 지시한 사항은 어떻게 됐소?"

"다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히든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공할 가능성에 대하서는 그 누구고 예측할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지?"

우수한 성적으로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규정된 코스를 밟아 변호사가 된 닉이지만 경제적인 문제 앞에서는 존의 개인비서나 다름없었다. 존은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닉과 와그너가 별도로 개업해서 얻을 수 있는 수익 이상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 따라서 사건이 이어야만 하고 의뢰인이 일정하지 않은 개업 변호사보다 훨씬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회장님?"

닉은 조사해서 기록한 서류를 이미 존에게 건네준 상태였다.

"내가 우선 이 서류를 검토한 후에 결정하겠소."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얘긴데, 별도로 나한테 생각이 있소."

"어떤 겁니까?"

"당신도 지난번에 봤을 거고, 내가 데려온 사람을."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시고니."

", . 생각이 납니다."

"겉보기에는 그래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요.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설득력을 갖춘 사람이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지금은 리차드 메인의 집에서 일하고 있소."

존은 이미 시고니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로 준비를 해 놓고 있었다.

"리차드 메인이라면 저 메인 그룹의 총수 말씀입니까?"

경제계에서 리차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맞소. 거기서 보수를 얼마나 받는지 모르지만 내가 적당히 대우해 주면 금방 협조하겠지."

존은 시고니를 자기 식으로 판단했다. 항상 그는 매사를 돈으로 계산하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존이 닉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리차드와 저스틴은 런던에서 미국에 도착한 하그렌드 경감과 만나고 있었다. 지난번 복면침입 때에는 경감이 메인 부부에게 커피를 서비스했지만 이번에는 시고니의 차례였다. 메인 부부를 찾아온 손님에게는 항상 정성을 다하는 것이 시고니의 생활 철학이었다.

"그 사람이 결국 그런 짓을 범했군요."

리차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매우 불안한 사람 같아 보였어요. 런던에서 여기까지 나를 따라 올 때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에요."

"그렇습니다, 메인 부인. 돈에 눈이 어두워지면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죠."

예상했던 일이라기 보다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라스베가스의 라운드 로빈 호텔에서 저스틴의 행운을 이용해서 도박을 하겠다던 닐 완슨이 그 사이에 사건을 저질렀던 것이다. 런던 경시청에서는 지난번 로만 사건을 해결한 하그렌드 경감에게 역시 이번 사건을 맡겼다. 로만 사건도 사실상 리차드의 도움으로 해결한 경감은 이번 사건의 무대가 로스앤젤레스라는 점에서 더욱 리차드가 생각났던 것이다. 지역적인 문제 이외에도 리차드가 이 방면에선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경감은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경감님, 닐 완슨이 미국으로 도망친 게 확실합니까?"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이미 확인했죠. 다른 곳도 아닌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를 탔더군요."

"그 사람 라스베가스에서는 얼마나 있었죠?"

"런던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두달 정도 있다가 런던으로 돌아 왔다고 하는군요."

"런던에서도 계속 도박을 했나요?"

"그렇다면 그곳 총지배인인 조지도 그를 알겠군요?"

"그렇겠죠."

"확실하지는 않다는 겁니까?"

"켄싱턴 클럽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메인 씨, 아시고 계시겠지만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도 벅찬 일이라서."

"이해합니다, 경감님."

"그런데요, 경감님."

곁에서 듣고 있던 저스틴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경감에게 물었다.

", 부인."

", 그 사람 혹시 이곳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시죠?"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리로 왔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많은 곳 중에서 이곳을 선택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군요."

그때 저스틴의 머릿속에 반짝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 그가 우리 집에 왔던 적이 있어요. 그렇죠, 여보?'

"그렇습니까?"

"경감은 뜻밖이라는 듯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리차드는 별다른 뜻 없이 대답했다.

"그때 집에 오기는 했었지만 우리가 내보냈지, 쓸데없는 헛소리를 하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경감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자 눈이 빛났다. 그로서는 미국에서 그의 행적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쾌거를 올린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말씀드리겠어요. 닐 완슨은 우리가 없을 때 이미 집안에 들어와 있었어요. 라이터 권총을 가지고."

"권총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까?"

경감은 무척 놀라면서 물었고 그에 대해 리차드가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총이 아니고 라이터였죠."

"네에. 그런데 메인 씨, 그것이 언제인가요?"

"그날이죠. 로만이 도망치려다 잡힌 날."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여보, 당신이 얘기해 드리지."

리차드의 말에 저스틴은 망설일 것 없이 말을 꺼냈다.

"그날 뉴 파더 호텔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어요."

저스틴은 그날의 일을 간단명료하게 경감에게 설명해 주었다. 듣는 동안 하그렌드 경감은 두세 번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잠깐."

저스틴의 이야기가 막 끝났을 때 리차드가 갑자기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때 시고니가 집에 있었지, 닐 완슨과 함께."

"맞아요. 그랬군요."

저스틴도 동의했다.

"시고니가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겁니까?"

"그랬어요. 시고니를 불러서 물어 보는 게 좋겠군요?"

리차드는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시고니를 불렀다.

"시고니, 잠깐만 와 보세요."

주방에 있던 시고니는 앞치마를 두른 채 거실로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메인 씨?'

"한 가지 당신께 물어 볼일이 있어요."

경감은 메인 부부보다 훨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닐 완슨을 알고 있죠?"

"누구요?"

시고니는 처음에는 리차드가 누구를 말하는지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닐 완슨요, 언젠가 우리 집에 당신과 같이 있었던."

"아아. 그 사람이요? ,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켜보던 경감이 조급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자를 잘 압니까?"

시고니는 경감 족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리차드와 저스틴을 차례로 쳐다보며 표정을 살핀 다음

마치 지나가는 말투로 대답했다.

"잘 알지는 못해요."

그렇게 묻던 리차드는 혹시 시고니의 마음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덧붙였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녜요, 시고니. 실은 경감님이 그 사람 때문에 여기에 오셨거든요."

"무슨 잘못된 일이 있나요?"

"닐 완슨이 런던에서 사건을 저지르고 이곳으로 도망쳤어요."

경감의 말에 시고니는 크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요, 시고니. 그래서 당신이 혹시 잘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묻는 거예요."

시고니는 비로소 상황을 이해하는 듯했다.

"그랬었군요. 그렇다면 말씀드리죠, 메인 씨. 전 원래 그 사람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전화로 소개해서 알게 됐죠."

"그래서 집에 들어오게 했나요?"

"죄송합니다, 메인 씨."

"아니, 사과를 듣자는 것이 아녜요. 친구가 소개했다고 했잖아요. 그 친구라는 사람은 시고니가 잘 아는 사람이겠군요?"

"그럼요."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경감은 경감대로, 리차드와 저스틴은 그들 나름대로 거의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닐 완슨의 친구를 시고니가 알고 있다는 그의 말에 관한 것이었다.

 

 

한 번의 기적

 

하그렌드 경감은 뜻밖의 쾌거를 올린 셈이었다. 닐 완슨이 로스앤젤레스에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있다는 사실, 런던에 있는 동안에는 그 친구와의 교분은 끓지 않고 지냈다는 사실만으로도 흡족해 했다. 그와 같은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도 시고니 덕분이었다. 경감은 집에서 묵으라는 리차드의 권유를 끝까지 거절하며 호텔로 갔다.

"전번에 좋지 않은 일도 있고 해서 뉴 파더 호텔로 가겠습니다. 저번에 갔던 굿이라 프론트에서 기억하고 있을 테니 잘해 주겠죠."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군요. 대신 아침식사는 집에 와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자동차로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지만 차를 가져오셨으니 그것도 안 되겠네요."

경감이 떠난 다음 리차드와 시고니, 저스틴은 거실에 마주앉았다. 리차드는 아까부터 생각해 왔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시고니, 아까는 경감 때문에 가만히 있었어요."

"알고 있었습니다, 메인 씨."

"역시 그랬군요."

메인 부부와 시고니는 늘 그런 식이었다. 눈빛만 보아도 상대의 마음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묻지 않아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군요?'

"물론입니다, 메인 씨."

"좋아요."

그때 저스틴이 시고니의 입장을 옹호해 주었다.

"난처한 문제라면 얘기하지 않아도 좋아요, 시고니. 그렇죠, 여보?"

"..."

그렇지만 리차드는 듣고 싶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시고니가 그런 눈치를 모를 리 없었다. 그 자신도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닐 완슨이라는 사람은 모릅니다 그런데 그날 친구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가끔씩 연락을 했던 친구인가요?"

"전에는 빈번했었는데 한동안 뜸했죠. 사실 그 친구는 제가 여기서 살고 있는 걸 모르고 있어요."

저스틴이 물었다.

"내가 밖에 나가 있을 때 우리가 잘 가는 단골 술집으로 연락을 했었죠."

"사람은 시고니가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을 몰랐단 말이군요?"

"대개는 알고 있지만 그 친구한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봅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말입니다."

리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활하다 보면 고의적이 아니면서도 그런 경우가 가끔씩 생기는 것이다.

"시고니의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요?"

저스틴이 물었을 때 시고니가 잠깐 망설이자 시고니를 항상 생각해주는 눈치 빠른 저스틴이 재빨리 말을 했다.

"난처하거나 곤란하면 대답하지 말아요, 시고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렇지만."

리차드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계속이었다.

"시고니, 당신도 이미 짐작했을 거예요. 나이젤 경감은 그 문제 대문에 런던에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시고니, 이해하죠?'

"물론입니다, 메인 씨. 사실 난 감추고 싶은 일도, 숨길 것도 없는 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지금 상황에서는 아마 닐 완슨의 행방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할 거예요. 마침 시고니가 그의 친구를 알고 있다는 의외의 성과가 나올지도 몰라요."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메인 씨, 우선 전화부터 한 통화하고 얘기하면 어떻겠습니까?"

"상관없어요, 시고니."

리차드는 말하면서 저스틴 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메인 부부는 전화기로 다가서는 시고니의 모습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시고니는 이미 외우고 있는 번호를 침착하게 돌리더니 이윽고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시고니는 의례적인 몇 마디를 건넨 다음 마치 안불 전화를 거는 것처럼 말했다.

"제이 제이, 지금 있죠?"

리차드나 저스틴에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시고니는 분명히 저스틴의 행방을 알려주겠다고 닐 완슨과 약속한 제이 제이를 찾고 있었다. 그 제이 제이가 시고니의 친구라는 것은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시고니가 평소에 잘 알지도 못하는 닐 완슨을 집에 들어오도록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지금 없다고요?'

리차드와 저스틴은 계속 묵묵히 지켜보았다.

", 그래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겠네요? , 네에...알겠습니다. 아닙니다. 다음에 다시 연락하죠."

시고니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요, 시고니?"

저스틴이 먼저 물어다.

"이상하군요."

"뭐가요?"

리차드 역시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웬만해서는 집을 비우지 않는 친구인데 없다는 군요."

"제이 제이가요?"

", 메인 씨. 나간 지 몇 칠이 지났답니다. 그것도 언제 돌아온다는 말도 없이 나가서요. 그럴 리가 없는데 이해가 안 가는군요."

시고니의 말에 리차드는 자신도 모르게 저스틴을 바라보았고 그녀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리차드를 마주 바라보았다. 이윽고 리차드가 시고니에게 말했다.

"시고니, 전화부터 건 후에 모든 사실에 대해 말하겠다고 했죠?"

"."

"좋아요."

"실은 제이 제이, 그 친구가 갑자기 전화로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닐 완슨을 집에 들어오도록 했었습니다. 메인 부인을 꼭 만나야 되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난 그 친구를 믿었죠 사실상 제 친구 가운데 나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알아요, 시고니. 그 문제는 이미 지난 일이에요. 지금 중요한 것은 제이 제이를 통해 닐 완슨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닐 완슨은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에 탑승했어요."

"로스앤젤레스요?'

"."

"그렇다면 분명히 제이 제이를 찾아 왔을 겁니다. 메인 씨. 그가 언제 떠났죠?"

"닐 완슨은 말하는 건가요?'

"."

"3일 전에 떠났다는군요."

"맞아요!"

시고니가 갑자기 소리치는 바람에 저스틴은 놀랐다.

'맞아요?'

", 메인 씨 제이 제이도 사흘 전에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분명히 관련이 있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예기치 못했던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닐 완슨이 런던을 떠난 날과 제이 제이가 집에서 나간 날짜가 같다는 것은 두 사람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듯했다.

시고니가 제이 제이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갖고 신경 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다른 친구와 달리 그는 신체 장애자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으로서는 가장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시고니도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과 똑같았고 성격도 좋은 편으로 그런 문제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또 다른 친구의 소개로 그를 알게 된 이후 시고니는 매년 여름휴가를 그와 같이 보냈으며 그 후에도 함께 단골 술집에서 만나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인생 얘기를 하면서 둘 사이의 우정을 쌓아왔다.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작년 여름휴가 때의 일이다. 다른 때처럼 시고니는 그를 비롯한 친구들과 어울려 카드놀이를 했고 술도 마셨다. 술을 마실 때의 일이었다. 그날따라 시고니는 다른 때보다 많이 마셨다. 좀처럼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상당히 취해 있었다. 전에 없이 시고니에게 친구들이 여자와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멋대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봐, 시고니. 자네 도대체 여자가 어떤 건지 알기는 하는 거야?"

한 친구가 느닷없이 시고니에게 불을 당겼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여자를 모르다니?"

"안 그런가?"

"물론 아니지."

"늙어 가는 나이에다 그렇게 혼자 사는데 무얼 어떻게 알겠나, 안 그래? 어떤가, 시고니. 집에 젊고 섹시한 여자가 같이 살던 데 마음이 끌리지는 않는가?"

"누구?"

평소 같으면 벌써 화를 냈을 시고니도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직접은 못 봤지만 사진에서 여러 번 봤어, 그 여자. 그런 여자가 끝내 주지, 알기나 해?"

시고니는 그 친구가 저스틴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여자를 한 번 안아보면 죽여주지. 그 입술 봤지? 그런 입술이 최고야. 내가 보건대 그 여자는 꽉꽉 물고 빨아들이고 정신없을 거야. 이건 정말이라고."

그 친구는 시고니보다 훨씬 더 취해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술 취한 남자들의 빼놓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였다. 평소 수준 높고 교양 있는 사람들도 가끔씩 취하면 별 수 없었다.

"예끼, 이 사람!"

시고니는 짐짓 그러면서도 정말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술에 취해서 그러려니 하며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시고니의 장점일 것이다. 금실 좋은 메인 부부를 보면서 독신으로 계속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스스로가 억제할 수 있는 인내력을 쌓아왔기 때문이므로 덕분에 다른 친구들처럼 주책없이 구는 법이 없었다. 문득 시고니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멋대로 지껄여 대고 있을 때 계속 침울한 모습으로 침묵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제이 제이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봐, 제이 제이. 자넨 그런 이야기에 흥미가 없는 모양이군. 정말 그런가?"

시고니의 물음에 그는 가볍게 웃기만 했다. 시고니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래, 자네? 혹시 언짢은 일이라도 있나?"

"'아니."

"그런데?"

"없어, 아무것도."

그때 저희들끼리 떠들어대던 친구 중 한 명이 불쑥 기어들었다.

"이봐, 시고니. 그 친구한테 쓸데없는 소릴랑은 아예 말게나."

"쓸데없는 소리?"

아직 아무런 내용도 모르는 시고니로서는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이 제이, 이 친구 말야. 시고니, 자네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그만해!"

제이 제이가 낮게 소리쳤지만 잔뜩 취한 친구에게 그 소리는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저 친구 젊었을 때 물을 너무 뽑아서 지금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다네."

"그만해!"

제이 제이의 두 번째 경고도 무시당했다.

"지금은 꽃 같은 아가씨가 옆에서 무슨 짓을 해도 반응이 없다니..."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만 해도 지껄여 대던 친구의 얼굴이 테이블에 처박혀 있었다. 제이 제이가 술병으로 정수리를 내려찍은 것이다. 순식간에 테이블은 피바다가 됐다. 맞은 친구는 머리에서 피를 쏟으며 기절했고 잠깐 사이에 흥겹던 분위기가 깨졌다. 기절한 친구는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제이 제이는 계속 술을 병 채로 들이켰고 시고니는 마신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 문제로 인해서 시고니는 제이 제이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젊었을 시절에는 정상적인 생기발랄한 청년이었지만 그의 문란한 애정 행각과 지나치게 방종한 생활이 발기 불능의 성불구자로 만든 것이다. 제이 제이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치료를 시도해 보았지만 계속 실패했다. 의과적인 방법은 물론 물리적인 방법도 동원했지만 한 번 잠잠해진 제이 제이의 남성은 끝내 방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시고니는 조롱하는 친구를 술병으로 내리친 제이 제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시고니는 그 친구를 각별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시고니는 그때 닐 완슨을 집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 인해 절망에 빠진 제이 제이는 한동안 거리를 방황했다. 잔뜩 취한 상태에서 벌거벗고 뛰어다니는가 하면 아무 집이고 거침없이 뛰어 들어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지금처럼 안정을 되찾기까지에는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은 체념한 상태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닐 완슨을 알게 된고 그의 신세를 지게 된 것도 이 문제 때문이었다. 닐 완슨은 영국에서 일류의 섹스 걸을 미국까지 데려와 주었으며 제이 제이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기적처럼 제이 제이는 딱 한 번의 반응을 나타냈었다. 그 때문에 제이 제이는 닐 완슨에게 진 신세를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짓과 위선

 

하그렌드 경감은 로스앤젤레스 경찰국과 공조 수사를 벌이면서도 메인 부부의 집이 마치 수사본부인 것처럼 자주 드나들었다. 경찰국보다는 리차드의 도움이 더욱 켰기 때문이다. 리차드에게 도움을 받을 경우에는 경찰국처럼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지도 않아 신속 정확하다는 것이 그가 리차드의 집을 이용하는 이유였다. 지금은 완전히 변해 버린 존에 대해 시고 닌가 리차드에게 의논하려 했던 것도 이 문제 때문에 뒤로 밀려났다.

존과 히든의 문제는 리차드가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닐 완슨의 사건만큼은 적극적이었다. 닐 완슨이 저지른 죄질에 대해서 리차드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가 돈 때문에 저지른 범죄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도박장 주변에는 언제나 돈과 여자, 향락이 있기 마련이다. 불로소득으로 큰돈을 딴 사람은 당연한 것처럼 거의 대부분 향락에 그것을 탕진했다. 그런 눈먼 돈을 행해 여자들도 암내를 풍기며 모여드는 것을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몰랐다. 닐 완슨의 경우도 특별히 예외일 수는 없었다. 데스타브가 죽은 후 도박판에서 판돈을 끌어들인 닐 완슨은 쓰고 있는 검정색 카우보이 모자를 번쩍거리며 돌아다녔다. 주위에는 당연히 아리따운 여자들이 모여들었고 그 가운데서 닐 완슨이 선택한 여자는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니아였다. 소녀 같이 싱싱한 아주 젊은 여자를 선택한 그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며 향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도박판에 끼어들지 않을 때에는 항상 그녀를 곁에 두었다. 전에는 도박을 위해 여자와의 관계까지 신중을 기했던 그가 돈이 들어오고

예쁜 여자가 생기자 습관도 바뀌었던 것이다. 한때 저스틴을 행운의 여신으로 믿었던 일 완슨은 이번에는 이 젊은 여자를 행운의 여신으로 확신하였다.

그래서 그는 게임을 할 때마다 항상 젊고 싱싱한 그녀를 그의 뒤에 붙어 있게 했고 그럴수록 돈을 쉽게 땄다. 그러나 도박판의 행운이 결코 지속적일 수는 없었다. 향락에 무친 생활을 6개월쯤 보냈을 때의 일이었다. 도박의 생리가 그렇듯이 한 번 잃기 시작하면 그 내리막길은 급경사를 이루게 된다. 한 번 잃으면 두 번째 게임에서 만회하려 하고 그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된 다음에는 헤어나지 못하고 게임의 수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닐 완슨의 젊은 애인이 그에게 붙어 있던 이유도 돈 때문이었다. 그에게 돈이 떨어지자 자연히 그녀는 멀어졌고 끝내 막바지까지 몰린 닐 완슨은 무서운 계획을 세우기까지 이르렀다. 평소 닐 완슨에게 끈질기게 그의 여자를 요구하던 친구가 있었다.

"어차피 평생 데리고 살 여자도 아니잖아, 안 그래? 닥 한 번만 빌려주게, 두둑이 낼 테니."

닐 완슨의 여자 니아는 그런 사내들이 한 번 보면 금방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 정도로 매력이 넘쳤다. 궁지에 몰린 닐 완슨이 그 친구를 생각해 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생각에 다음번 판돈만 이으며 꼭 딸 자신이 있었고 그 돈을 꼭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얼마 낼 텐가?"

"정말이야?"

그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그쳤다.

"장난이 아냐. 하지만 두둑하지 않으면 어림없지."

"얼마면 되겠나?"

"사실 다른 여자 열 명을 상대해도 그녀와 한번 지내는 것만 못할 거야."

"그 정도야?"

"말은 필요 없어. 어떡할 텐가?"

"그런데... 그녀가 정말 응해 줄까?"

"값만 흥정하고 그건 내게 맡겨. , 어서 말해 봐."

젊은 여자를 놓고 벌이는 흥정이 결코 일상적일 수는 없었다. 비인간적이고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그들은 여자를 사이에 두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자네가 말해 봐."

그 문제라면 닐 완슨은 이미 생각해 둔 상태였다.

"10만 파운드."

친구는 깜짝 놀랐다.

"농담하지 말게. 여자 한 번 껴안는 데 10만이라니 말도 안돼!"

"싫으면 그만 둬."

닐 완슨은 딱 잘랐다. 그는 상대가 그 정도는 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박에서 딴 돈이 두둑한 이때 그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닐 완슨의 거절은 친구의 마음을 갑자기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도 사실 그 정도의 여자를 얻기 위해서는 10만 파운드 정도는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좋아."

"좋아?"

힘든 입씨름을 걸쳐 닐 완슨은 자신의 여자를 친구에게 10만 파운드를 받고 넘겼다. 빌려준다기보다 사실상 떼어 넘긴 셈이다. 그에게는 다음 도박에서 돈을 따서 모든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는 확신이 있었다.

심각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변호사나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고 단 둘이 만난 존과 히든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장소를 선택했다. 존의 건물도 히든의 건물도 아닌 개발 대상 지역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옥상에서 둘은 만났다.

"히든 회장님."

단둘이 있을 때에는 존도 어쩔 수 없어 보였다. 히든은 자신과 비교해 보면 대 선배였고 실질적으로 재무구조도 훨씬 단단한 것은 사실이었다.

"당신은 이 지역에 대해 잘 모르실 겁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난 여기서 태어나 자랐죠. 여기서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내 고향과도 같습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오?"

"아시겠지만 난 옛날의 가난했던 존이 아닙니다."

"알고 있소."

히든은 그곳이 고향이라는 구실로 어느 날 갑자기 뛰어들어 전 지역의 소유권을 노리는 존을 사실상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곳에 뿌리를 박은 것은 그 자신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마땅히 이젠 개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문제라면 나도 해결할 수 있소. 불쑥 나타난 당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말이오."

"물론 그건 압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으시겠죠. 하지만 이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조건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무슨 조건을 말하는 것이오?"

존은 말할 때마다 손으로 자신이 고향이라고 지칭한 도시의 빈민 지역을 가리켰다. 마치 그 지역에 대한 향수심에 젖은 모습을 보이려는 듯해 히든으로서는 건방지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현재 히든 회장님이 지역의 절반 정도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것은 그 나머지뿐이죠."

"당신이 차지한다고 했소?"

"현재 추진 중인데 조만간 그렇게 될 겁니다."

히든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정보를 통해 파악하고 있는 중이긴 했지만 존의 태도가 우서 건방졌고 무엇보다 히든은 그의 지나치게 큰 야심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자신이 대단하군요. , 일이 그렇게 당신의 뜻대로 된다고 확신하시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방금 그 말씀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아시겠지만 이 지역이 양분된 상태에서는 개발을 불가능합니다."

"누군가 독점해야 된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이유는?"

"전 지역을 동시에 개발하지 않으면 개발하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투자 가치도 물론 상실하게 됩니다."

"투자 가치?"

"물론이죠. 막대한 자금이 투자될 예정인데 그 가치를 계산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간단히 말합시다."

"."

"당신 말은 우리 둘 가운데 누군가 단독으로 저 지경의 소유권을 가져야 된다는 것 아니오?"

"그렇습니다. 히든 회장님은 역시 안목이 깊으시군요."

히든의 얼굴에 갑자기 단호한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히든의 갑자스런 변화에 존도 잠깐 어리둥절해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특별히 그를 만난 것은 그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서라기보다 묘수를 찾아내려는 속셈에서였다. 꼭 할 수만 있다면 목적을 위해 물리적인 방법으로도 히든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히든은 과거와 관계없이 현재는 정통성을 가진 재벌이지만 존은 정통성이나 정의보다는 야망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존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라도 동원시켜 목적을 달성할 것이고 그럴 만한 능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얘기는 끝났소, ."

"?"

존은 잠깐 어리둥절했다.

"어차피 이 지역에선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소. 당신이 꼭 미개발 지역에서 투자 가하다 찾고자 한다면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적당한 장소가 있을 것이오."

"그건 안 됩니다."

존도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이곳을 정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충분한 이유?"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신은 어릴 때부터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았더군요."

"내 신상에 대한 조사까지 했단 말이오?"

히든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다른 뜻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미리 파악해 두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조사를 시켰을 뿐이며 그 사실은 극비에 붙여졌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시의 신상에 대해 조사해도 할 말이 없을 거요?"

"그거야..."

"대답해 보시오, ."

"그래도 특별히 얻을 것은 없으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전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살아온 사람인데 히든 회장님처럼 화려한 경력이 있을 순 없죠."

"화려한 경력?"

히든은 더욱 불쾌해졌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조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해서 덧붙여 말했다.

"과연 굉장하시더군요. 손을 안 댄 사업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다양하게..."

"닥치시오!"

히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존을 노려보았다. 존은 확실히 그를 모욕하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과거의 치부를 공개해서 망신을 줄 수도 잇다는 배짱이 존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언짢으시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존은 히든이 더 이상화를 낼 수 없도록 금방 태도를 공손하게 바꾸는 교활함을 보였다.

"하지만 저에게도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히든은 아직 기분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난 당신이 전혀 모르는 것을 얼고 있습니다. 당신은 고생이 무엇인지 모를뿐더러 가난 자체도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에 대해서 아십니까?"

갑자기 진지해진 조의 질문에 히든은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존의 그 말이 사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히든은 가난에 대해 전혀 몰랐다. 존은 계속해서 히든의 취약함 부분을 건드렸다.

"난 그걸 알죠. 어릴 때부터 충분히 경험했고 그로 인해 지금처럼 뼈가 굵어졌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이 지금 하는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오?"

"상관이 있죠. 절대적으로."

히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그들을 위해 개발할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어야 된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들을 위한 개발이기 때문이죠."

존의 설명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가지 게임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시고니?"

저스틴은 그 문제에 대한 굉장한 관심을 나타냈고 리차드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서 듣고 있었다.

"어이없는 일입니다. 아이들 장난 같은 일이죠."

"내기를 걸었나요?"

리차드가 묻자 시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히든 회장이 하루만 여유를 갖자고 했답니다."

"존은 뭐라고 말을 했나요?"

"그 사람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좋지 않은 일을 벌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시고니. 어쨌든 굉장한 도박이 되겠군요, 내기가 설립된다면."

"그렇습니다, 메인 씨.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 게 어디 어린애 장난하듯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시고니 역시 매우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여보, 그 사람들 정말 그런 내기를 걸까요?"

저스틴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고 그녀는 다시 시고니를 행해 확인하듯이 물었다.

"히든 회장이 빈민가에서 한 달 동안 버텨야 된단 말인가요?"

"그럼요."

"평생 동안 고생을 모르고 살던 사람이 돈 한 푼 없이 버틸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존이 노리는 점입니다, 메인 부인. 히든이 어리석게 말려든 셈이죠."

그러나 저스틴과 시고니의 의견에 비해 리차드는 다른 견해를 나타냈다. 히든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 게임이 히든에게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히든, 그 사람 대단하거든."

"대단하단요?"

"한번 결심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 성격이야. 글쎄,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설령 내기가 성립된다고 해도 존이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해."

"내 생각에는 존이 내기에서 이겨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메인 씨."

"그래야겠죠."

이들이 말한 것처럼 존은 히든에게 한 가지 기발한 내기를 제의했다. 개발예정지 전체에는 현재 거지들이 우글거렸다. 골목마다 그들이 있었고 다리 밑은 그들의 가장 아늑한 보금자리였다. 집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비록 그들이 거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근근히 연명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동냥그릇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 않을 뿐이었다. 존의 자극적인 제안은 히든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평생 동안 고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 온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수 없다는 것이 존의 강력한 주장이다. 결국 고생을 경험한 자신이 적임자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명분을 찾으려는 존의 속임수였다.

"지금까지는 내가 고생을 모르고 살아왔지만 나도 자신이 있소."

히든은 이렇게 강력히 항변했으며 이것은 내기의 기폭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히든 회장님?"

"물론!"

"저기서 그들가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단 말이죠?"

"그렇소.!"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죠."

히든의 수중에 돈도 한 푼 없이, 신용카드도, 누구의 원조도 없이 부랑아들과 어울려 30일 동안 버틴다는 것이 존이 제안한 희한한 내기의 전부였다. 시고니의 말처럼 어린아이들 장난 같기도 했다. 만일 성공하면 존은 기꺼이 다른 지역으로 철수해야 했고 실패하게 되면 히든이 다른 지역으로 철수해야 되는 것이다. 완전한 자존심의 대결이었다. 리차드가 생각하고 잇는 것처럼 히든은 자존심이 대단하기로 주위에 소문난 사람이었다.

"존은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요, 여보?"

저스틴은 히든보다 존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컸다.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믿겠지, 그러나 항상 변수는 있기 마련이니까. 난 히든을 믿어."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요?"

시고니는 리차드와 견해를 달리했다.

"어째서죠, 시고니?"

"그 사람은 결국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히든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한 번 결심하면 낙타를 바늘구멍에 넣기 위해 평생이라도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요."

"아무리 그렇지만 그곳은 빈민굴입니다. 굶주리고 헐벗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게다가 거지들이 우글거립니다. 도둑이 판을 치고 싸움질이 끊일 날이 없죠. 사방에서 악취가 품어 나와서 코를 막게 만듭니다. 향수 대신 썩은 오물 냄새를 맡아야 하는 곳입니다. 스테이크 대신 쓰레기통 속에서 찬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그런 곳에서는 정말 상상도 못할 삶이 기다리고 있죠."

"글쎄요..."

리차드는 시고니의 설명과 지신이 알고 있는 히든 벨 클라크를 조용히 비교해 보았다. 시고니의 판단이 들어맞을 수도 있다. 히든은 평생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가난이나 빈곤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다. 하루나 이틀 정도라면 또 모르겠지만 기간은 무려 30일이라고 했다. 그 기간이 히든에겐 30년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속일 것은 분명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존과 히든의 어이없는 내기에 대해 생각 중이던 세 사람은 동시에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내가 받죠, 메인 씨."

언제 나처럼 시고니가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경감님이시군요."

리차드와 저스틴이 재빨리 마주 바라보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바꿔 드리죠."

시고니는 리차드에게 전화기를 건냈다.

"경감님?"

"안녕하세요, 메인 씨."

"사건은 잘 되어 갑니까?'

"그 문제 때문에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말씀해 보세요."

하그렌드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메인 씨, 지금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군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그래요?"

리차드는 시계를 보았다.

"부탁합니다."

"오래 걸리겠습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좋아요."

리차드는 하그렌드가 있는 장소를 알아 놓은 다음 전화를 끓었다.

"무슨 일이에요?"

"경감인데, 급히 좀 보자고 하는군."

"왜요?"

"모르겠어. 급한 것 같은데 가봐야 할 것 같아. 당신도 같이 가겠소?"

"물론 가고 싶어요."

언제나 리차드의 곁에 있고 싶어하는 저스틴이다. 이번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다녀오세요, 메인 씨. 메인 부인."

", 시고니."

시고니는 급히 밖으로 나가는 메인 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존을 생각했다. 모든 점에서 존보다 훨씬 앞서 있으면서도 평범해 보이는 리차드에게 새삼 존경스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닐 완슨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 사태가 발생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10만 파운드를 받고 니아를 넘긴 것으로 끝날 줄 알았고 그녀를 넘겨받은 친구 역시 도박판에서 사귄 친구일 뿐,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온 사이는 아니었다. 니아를 그 친구에게 넘기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닐 완슨의 이야기를 들은 니아가 크게 하를 내었던 것이다.

"니아,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뭔 데요?"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닐 완슨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니아가 시큰둥해져서 대답했다.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이간 다 니아와 나를 위해서야."

"얘기나 해요."

"니아, 니아는 그 동안 남자를 많이 사귀었겠지?"

"그래서요?"

"내 말은 이번에는 우리를 위해서 한 번만 눈 감아 달라는 거야."

"뭘 눈 감아요?"

"다음 판에는 내가 꼭 딸 자신이 있는데 판돈이 없어. 그래서 말인데... 니아가 한 번만 눈 감아 주면 10만 파운드가 굴러 들어와."

"글쎄 뭘 눈감아 달라는 건지, 말이나 해 봐요."

"이만큼 말했으며 알 텐데?"

"모르겠어요."

니아는 알면서도 설마하는 생각에 모르는 척했다. 터놓고 얘기할 수도 없는 입장인 닐 완슨은 망설인 끝에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고 말았다.

"니아를 굉장히 원하는 친구가 있어. 니아가 그를 한번만 만나 주기만 한다면 10만을 내 놓겠다는 거야."

니아는 갑자기 입을 다물며 닐 완슨을 서글픈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화를 낼 줄 알았던 닐 완슨은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니아는 놀랍도록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날더러 다른 남자에게 돈을 위해 아니 당신을 위해 몸을 팔라는 거예요?"

"그렇다기 보다는...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군."

"바꾸어 말하면 지금 날더러 다른 사내와 한 번 하룻밤을 지내라는 거죠? 그리고 그 대가로 10만 파운드를 받아 다음 도박의 밑천을 삼겠다는 건가요?"

닐 완슨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어떤 말이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어 불안했다. 그러나 잠시 후 니아는 승낙하면서 뜻밖의 조건을 제시했다.

"좋아요."

"좋아?"

닐 완슨은 뛸 듯이 기뻐했다.

"대신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뭐든지 말해 봐."

니아는 확실히 특별한 여자였다. 그녀는 닐 완슨이 상상하지 못했던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그 남자가 누구든 허튼 짓은 안돼요."

"뭐라구?"

"애무나 키스도 허락하지 않겠어요. 곧바로 간단히 끝내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하여튼 좋아. 나마지 조건은 뭐지?"

"이건 당신과의 약속이에요. 10만을 걸고 도박을 해서 돈을 따게 되면 원래 걸었던 10만을 제외한 나머지 돈은 몽땅 나한테 넘겨요."

"뭐라고?"

닐 완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명은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박에서 돈을 따게 될 경우 몇 십만 아니 몇 백만 이나 되는 파운들 긁어 올 수도 있다. 그녀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데는 닐 완슨으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니아가 제안한 두 가지 조건은 모두 이색적이고 엄청난 것이었으며 둘 다 지켜지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키스도 애무도 안 되고 도박에서 딴 돈 중 밑천만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니아에게 뺏기다시피 주는 것은 그야말로 상식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당장 급한 닐 완슨은 우선 니아의 조건을 순순히 승낙했다. 그러나 바고 그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친구는 니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바로 직전에 10만 파운드를 주기로 약속했다. 사건이 발생한 곳은 니아와 닐 완슨의 친구가 만나기로 정한 장소에서였다. 마치 10만 파운드가 저절로 들어오는 것 같았고 그것으로 다음 번 도박에서 한 몫 잡을 자신이 있는 닐 완슨은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 그는 아직까지는 이루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들떠서 많은 사람들에게 값비싼 술을 한잔씩 돌리고 있었다. 바고 그 카지노 클럽의 이층 방에선 니아와 닐 완슨의 친구가 만나기로 되어 있고 그 후에는 10만 파운드가 저절로 닐 완슨의 손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닐 완슨은 저절로 흥이 났던 것이다.

약속 시간은 저녁 8시였고 도박은 오후 9시에 시작한다. 니아의 조건에 따라 일은 몇 분이면 끝날 테고 그런 다음에 한 전 더하면 게임을 즐길 수가 있다. 닐 완슨은 멋진 계획이라고 확신했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계획대로 진행되어 730분쯤 친구는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그보다 약간 앞서 니아는 이미 약속된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 왔나?"

"이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잘 됐군."

"돈은?"

"걱정 말게, 여기 이렇게 있으니까."

친구는 직접 돈을 닐 완슨에게 보여 주었다.

"이봐, . 우선 그 여자 얼굴이나 한 번 보세."

"뭐라고?"

"시작하기 전에 얼굴 정도는 볼 수 있겠지?"

"그거야 어렵지 않지."

"올라가 보세. 내가 안내할 테니."

"좋아."

닐 완슨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눈앞에서 10만 파운드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언제 돈을 보았었나 할 정도로 닐 완슨은 마음이 급했다. 10만 파운드가 도박판에서 몇 십, 몇 백만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도박꾼의 고질적인 희망이 닐 완슨으로 하여금 잔뜩 부풀게 만들었다. 친구는 마치 고의적이기라도 하듯 조용히 노크한 다음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내려갈까 했던 닐 완슨은 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친구가 나오면 우선 돈부터 받고 다시 들여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친구의 돈만을 생각했다. 니아가 비록 이런 생활을 하는 여자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자존심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닐 완슨은 돈이 필요했고 그것을 갖기 위해서 그녀를 이용하려는 것뿐이었다. 이런 일에 어떤 양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순순히 응했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 않고 있었다. 니아도 이런 환경에서 생활하는 여자이긴 하지만 그녀는 이 제의에 실망과 분노를 느꼈다. 니아의 이런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닐 완슨은 복도를 서성거리며 앞으로 펼처질 즐거운 나날을 생각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앞으로 발생할 뜻밖의 사건을 예상하지 못한 채. 니아의 얼굴이나 보고 나오겠다고 약속한 친구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을 때 니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지?"

낮게 중얼거리는 사내의 귀에 물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던 그의 두 눈은 커졌다. 문이 바쯤 열린 욕실에서 니아는 샤워를 하는 중이었다. 약속된 시간까지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니아는 그렇게 알몸을 드러내고 방심한 채 샤워를 하고 있었다. 사내는 입을 벌린 채 넋을 잃은 사람처럼 니아의 알몸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닐 완슨은 복도에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친구가 나오면 10만 파운드가 손에 들어온다는 생각뿐이었다. 바로 그때 별안간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예기치 못한 사건

 

"자네 나 한테 신세진 일을 아직까지 잊진 않았겠지?"

닐 완슨의 말투는 마치 협박 조였으며 제이 제이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거야...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야? 자네가 이곳으로 도망쳤다고 런던 경시청이 거기서 구경만 하고 있을 것 같은가?"

"그건 지금 생각할 문제가 아냐, 알겠어?"

"그럼."

"자네가 나를 경찰에 고발하지만 않으면 돼."

"내가 왜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해?"

"어쨌든 분명히 얘기해 두겠는데 만일 내가 여기에 있다는 소문을 내면 죽여 버리겠어."

닐 완슨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사람을 죽였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먼저 친구를 니아가 있는 방으로 들여보내고 밖에서 기다리던 닐 완슨은 난데없는 비명소리에 놀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전까지 닐 완슨은 그 친구가 그와 같은 습관을 가졌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가 뛰어 들어갔을 때 친구는 샤워 중이던 알몸의 니아를 거실 바닥에 쓰러뜨린 다음 강제로 두 손을 묶는 중이었다. 그 상황으로 보아 니아를 결박한 다음 강간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닐 완슨이 사납게 소리쳤지만 친구는 그 소리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깐만 나가 있으라고."

"뭐야?"

"이걸 보고 애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나, 안 그래?"

그는 닐 완슨이 들어갔는데도 뚫어지게 노려보는 니아의 엉덩이를 슬슬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직 물기도 채 마르지 않은 니아의 몸에는 아무것도 걸쳐진 것이 없었고 사내의 억센 힘에 의해 바닥에 엎드린 자세에서 두 손은 등뒤로 묶이고 있었다.

"약속이 틀리잖아!"

"무슨 약속, 어차피 한 번의 기회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안돼. 당장 그녀를 놔 줘!"

"그거야 안 될 말씀이지. , 안 그런가?"

그의 친구는 이미 니아의 두 손을 벗어 놓은 브래지어로 완전히 묶어 놓은 상태였다.

"나가고 싶지 않으면 거기서 구경이나 하게. 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는 니아의 두 손을 묶은 다음 몸을 한 바퀴 돌려 벗겨진 니아의 몸을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뉘였다. 처음에는 닐 완슨이 구해 줄 것으로 생각했던 니아는 다시 발버둥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안 돼! 이러지 마!"

그녀는 발길질을 시도했지만 두 손이 등뒤로 묶여 있기 때문에 역부족이었다. 사내는 여유 있게 웃으며 니아의 발목을 붙잡았다. 사내의 억센 힘에 니아는 속수무책이었다.

"얌전하게 있으라고. 난 닐한테 이미 약속을 받아 놓았어. 알고 있을 텐데, 안 그래?"

사내는 니아의 발목을 양쪽으로 크게 벌림 다음 가운데로 파고 들어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닐 완슨이 쳐다보았을 때 그의 친구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가 발로 힘껏 걷어찼던 것이다.

"이것이!"

사내도 잔뜩 화가 났다.

"가만히 있지 못하겠어?"

니아가 다시 걷어차려 할 때 사내는 먼저 주먹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니아를 내려쳤다. 그녀의 입에서는 쥐어짜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화가 오른 사내는 어느 틈엔가 무서운 폭력배로 변해 고통스로워 꿈틀거리는 니아를 계속 사정없이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런 상황에서도 니아는 계속 저항했고 저항하는 그녀의 발길질에 사내의 눈은 확 뒤집혀진 것처럼 보였다.

"이년이!"

욕설과 함께 벌떡 일어난 사내는 마치 성난 호랑이처럼 미친 듯이 니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만, 그만 뒤!"

보다 못한 닐 완슨은 냅다 소리치며 친구를 니아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지만 이미 그는 이성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막무가내였다.

"저리 비켜!"

그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닐 완슨을 냅다 밀쳤다. 닐 완슨은 뒤로 비틀거리며 밀려나면서 발에 걸리는 무언가에 의해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그사이 실내는 친구의 가죽벨트까지 마구 휘두르는 병적인 행동으로 삽시간에 처절한 비명과 함께 살벌한 분위기로 변했다. 뒤로 넘어졌던 닐 완슨이 겨우 일어났을 때는 니아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그 광경은 닐 완슨으로 하여금 제 정신이 아니도록 만들었다.

"그만두지 못해! 이러다 사람 죽이겠어!"

"저리 비켜!

흥분한 사내는 오히려 닐 완슨에게도 덤벼들려는 자세를 취했다. 순간 닐 완슨은 반사적으로 위험을 느꼈고 그때 그의 손에 움켜잡은 것은 탁자 위에 있던 금속제로 만들어진 재떨이였다. 하지만 이것저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순간 닐 완슨이 움켜잡은 금속제 재떨이는 사내의 얼굴을 향해 힘껏 날아갔다. , 하는 둔탁한 소리와 거의 동시에 어이쿠, 하는 묵직한 비명소리가 닐 완슨의 귀에 들렸다. 순간적으로 흥분했던 상태에서 자신을 방어했던 닐 완슨은 소리 나는 쪽을 재빨리 쳐다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이 친구는 니아의 곁에 허물어진 벽돌담처럼 쭈그리고 있었고 온몸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니아는 헝클어진 자세로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더구나 주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니아?"

대답이 없다.

"이봐!"

그의 친구도 대답이 없었다. 니아에게로 가려던 닐 완슨은 먼저 친구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확 잡아챘다.

"대체 무슨 짓을..."

그는 말을 뚝 그쳤다. 어깨를 당겼을 때 친구는 썩은 나무토막처럼 나뒹굴었던 것이다.

"이러지 마!"

닐 완슨은 갑자기 더욱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때 니아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쓰러진 사내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 니아는 기절할 듯이 놀라 부르짖었다. 그 바람에 더욱 놀라 친구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닐 완슨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그의 친구는 이미 두 눈이 허옇게 뒤집혀진 채 죽어 있었던 것이다. 니아가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닐 완슨은 정신없이 소리쳤다.

"조용, 조용히 해!"

니아는 막무가내로 계속 부르짖었다. 그대로 계속 소리를 치면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닐 완슨은 이렇게 생각이 되자 본능적으로 니아에게 달려들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니아는 닐 완슨의 손가락을 깨물었고 닐 완슨은 비명 소리와 힘께 니아의 몸을 힘껏 밀었다. 니아의 몸뚱이는 맥없이 침대 쪽으로 밀려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다른 사람이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니아는 침대 다리에 기댄 채 기절해 있었고 사내의 시체는 바닥에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이봐, "

제이 제이는 표정이 심각하게 고치며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자네는 고의적으로 사람을 해친 게 아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사람이 죽었단 말이야."

"고의적으로 그런 건 아니잖아."

"마찬가지야. 내가 재떨이로 그를 때려 죽였다고."

"우선 변호사를 만나보는 게 어떻겠나?"

"안 돼."

"어째서?"

"경찰이 먼저 살인죄로 날 체포할 테니까."

"자넨 정당방위였어, . 그가 먼저 가죽벨트로 공격하려 했잖아. 그리고 그는 그때 이미 여자한테 폭력을 휘둘렀고. 자넨 오히려 옳은 일을 한 거야. 그래도 모르겠나?"

"아내. 안 그래. 경찰은 애가 그를 죽였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것이 분명해. 그건 또 사실이고..."

닐 완슨은 비참하게 중얼거리며 주먹으로 벽을 쳤다. 자신이 니아까지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도망친 다음 곧장 외곡지대에 있는 모텔에서 며칠 동안 숨어 있으면서 앞으로의 행동을 모색한 후 로스앤젤레스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경시청이 수사에 착수한 후였다. 병원에 실려 간 니아는 그날로 퇴원했다. 사건 수사를 맡은 경시청에서 닐 완슨을 체포하려는 것을 결정적으로 니아의 증언 때문이었다. 그녀는 닐 완슨이 친구를 무론 자신도 죽이려 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제이 제이는 딱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봐, .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서 지낼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도 몰라. 하여튼 난 이대로 붙잡힐 수는 없어. 밑천을 만들어 한몫 잡아 보석금이라도 마련하기 전에 안 돼."

"그건 틀린 생각이야."

"그럼 날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그래, 이제 알았다. 날 숨겨주는 게 싫단 말이지?"

"이러지 말게, .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다만 자네가 직접 자수하기를 원할 뿐이야."

그때 닐 완슨의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제이 제이, 한 가지 날 위해 해줘야 될 일이 있어."

"뭔데?"

"만일 런던의 경시청에서 수사를 시작했다면... 그래, 어쩌면 여기까지 다라 왔을지도 몰라. 그러니 그걸 알아봐야겠어."

'어떻게?"

"자네 메인 씨 집에서 일하는 친구 알지?"

"시고니?"

"맞아. 그한테 연락해 봐."

"그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시고니가 알겠어?"

"짚이는 게 있어서 그래."

닐 완슨은 지난번 로만 사건 때 하그렌드 경감이 라차드의 집에 갔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말인가?"

"그래, 지금."

"그건 어렵지 않아."

"나하고 같이 있는 것을 눈치 채게 하면 절대로 안 돼, 알았지?"

"걱정 말게."

제이 제이는 교환을 통해 평소 기억하고 있던 리차드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때마침 혼자 있던 시고니가 전화를 받았다.

"잘 있었나, 시고니?"

"누구신가요?"

시고니는 금방 상대를 알아차리고는 놀랐다.

"제이 제이 아닌가!"

"어떻게 된 거야?"

시고니는 제이 제이가 집에서 나간 지 며칠 도안 연락도 없이 지냈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어떻게 되다니 무슨 소리야?"

"지금 어디 있어?"

"시내에 있어."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않은 거야?"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없겠나?"

"그보다 시고니, 자네 혹시 내 친구 닐 완슨을 기억하고 있나?"

"닐 완슨?"

시고니는 바싹 긴장하면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기억하지.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전화를 했더니 며칠째 집을 나가 소식이 없다더군. 몹시 걱정했네. 자네 괜찮은가?"

제이 제이는 시고니의 이야기 속에서 무엇이든 알아내려 했다. 그는 곁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는 닐 완슨을 힐끗 바라본 다음 모르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닐 완슨 때문이라니, 그 친구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는 말인가?"

시고니는 제이 제이가 닐 완슨과 함께 있을 거라곤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의심이 가긴 했지만 직접 통화를 하는 동안 오히려 그를 의심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제이 제이는 자신에 대한 비관 때문에 떠돌아다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메인 씨 집에 손님이 왔었지. 런던에서 말야."

"런던에서?"

그 말에 닐 완슨은 크게 긴장했다.

"자넨 모를 거야. 지난번에도 왔었던 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이야."

"그가 왜 왔지?"

"닐 완슨을 찾고 있었어."

"그래? 아니, 그 친구가 뭘 잘못했기에?"

"그건 나도 모르겠어. 좋은 일은 아닌 게 확실하지만 어떤 일로 이곳에 왔는지 그건 잘 모르겠네."

"런던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이 왔단 말이지?"

제이 제이는 곁에 있는 닐 완슨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또박또박 반복해서 묻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통해 사실을 알아차린 닐 완슨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그렌드 경감이 로스앤젤레스에 왔다면 그 목적은 이미 밝혀진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에게는 로스앤젤레스도 더 이상 안정한 지역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궁지에 몰린 쥐

 

이 시간 하그렌드는 닐 완슨과는 상관없이 전혀 다른 장소에서 메인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의 변두리에 속한 고속도로 입구에 위치한 주유소 옆 작은 모텔에 로비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리차드는 그와 주변을 한 차례 살펴보았다.

"그나저나 죄송해서 어쩌죠?"

하그렌드는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정보가 잘못된 것을 모르고 연락을 드렸어요."

"그래요?"

"이 모텔에 닐 완슨이 투숙하고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난 미국인도 아니고 경찰보다는 메인 씨의 도움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다음에 설명을 드리겠지만 나름대로 신경을 좀 썼죠."

"닐 완슨이 이 모텔에서 묵었다는 정보는 정확합니까?"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하룻밤 묵고 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요."

"뭐죠?"

"그자는 혼자가 아니었답니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미국인이 동행했다고 하는군요."

"미국인요?"

"."

곁에서 듣고 있던 저스틴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보 혹시 시고니의 친구라는 그 사람이 아닐까요?"

"시고니의 친구?"

하그렌드는 갑자기 긴장된 표정을 나타냈다.

"있잖아요, 전에 시고니가 말했던 그 친구요."

"아아, 그렇군."

리차드도 그 생각을 해냈다.

"이름이 뭐랬더라... 제이.... 그래, 제이 제이였어.

하지만 닐 완슨과 함께 다니는 미국인이 제이 제이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지?"

"그냥 떠올랐던 생각을 말해 본 것뿐이에요."

언제나 생각나는 대로 생각을 표현하는 저스틴은 이번에도 스스로 말꼬리를 접으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두 분."

하그렌드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생각납니다. 시고니가 그날 전화했다던 친구라는 사람 말입니다.

닐 완슨이 히드로 공항을 떠났던 그날, 그 사람도 집을 나갔다고 하지 않았었습니까?"

"그렇군요."

"맞았어요!"

리차드와 저스틴은 거의 동시에 맞장구쳤다. 하그렌드가 말을 꺼내기 전가지 그 사실에 대해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 제이의 부탁으로 시고니가 닐 완슨을 집에 들여보냈다는 사실을 메인 부부는 다시 생각해 냈다. 닐 완슨을 위해 그런 도움을 줄 수 잇는 친구라면 현재도 친구를 위해 도움을 줄 확률은 그만큼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여보."

저스틴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이렇게 있지만 말고 같이 우리 시고니에게 가보는 게 어때요?"

"지금?"

"그럼요."

"아니, 우선 전화부터 하는 게 좋겠어."

"그게 좋겠군요, 메인 씨."

리차드는 즉시 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고니가 기다리고 있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시고니가 전화를 받았다.

"메인 씨 댁입니다."

"나 에요, 시고니."

"메인 씨,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저스틴과 하그렌드는 똑같이 리차드를 주시했다. 리차드가 어떤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표정만큼은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좀 물어 볼 것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시고니의 친구 중에 제이 제이라는 사람이 있죠?"

"제이 제이요?"

"홰 지난번 하그렌드 경감이 왔을 때 전화했던 사람 말입니다."

"네 압니다."

"글 사람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알고 있어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 조금 전에 제이 제이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었습니다."

"그래요?"

리차드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저스틴과 하그렌드는 긴장된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 메인 씨."

"그게 언제였죠?"

"아마 10분이 좀 지났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지금은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공중전화니까. 제이 제이가 어디에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나요?"

"아뇨.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디에 있냐고 물었더니 그냥 시내라고 하더군요."

"시내?"

". 그 친구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메인 씨."

"무슨 뜻이죠?"

"그것 역시 지금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아무튼 자신을 비관하고 있을 겁니다."

"무슨 이유죠?"

"그 이유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마 그 이유 때문에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이 분명합니다."

"좋아요, 나중에 듣기로 하죠."

"집에 들어오시면 말씀드리죠."

"그럼 나중에 집에서 봐요."

", 메인 씨."

리차드는 전화를 끊고 저스틴과 하그렌드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나 뭔가 꼭 중요한 것을 빼먹은 것 같은 기분이 리차드의 머리에 머물고 있었다.

"시고니가 뭐라고 하던가요, 여보"

하그렌드보다 저스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만!"

리차드는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저스틴과 하그렌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유심히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경감님. 다시 전화해 봐야겠어요."

"?"

그때 리차드는 이미 전화기를 향해 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저스틴도 하그렌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리차드는 시고니와 통화할 때에 잠깐 잊고 있었던 일을 생각해 냈다. 제이 제이가 10분 전에 전화했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시고니."

다이얼을 돌린 리차드는 시고니가 수화기를 들자마자 본론부터 이야기를 했다.

"메인 씨 인가요?"

"그래요, 나예요."

"그런데..." 시고니는 의아해 하며 말끝을 흐렸다. 좀처럼 그런 조급함을 보이지 않는 리차드였다.

"제이 제이 말이에요, 시고니."

", 메인 씨."

"전화할 때 혹시 이상한 느낌을 받지는 않았나요?"

"?"

시고니는 리차드의 말을 재빨리 이해하지 못했다.

"시고니 혹시 누구와 함께 있는 것 같지는 않았던가요?"

"글쎄요, 약간 이상한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상했죠?"

"그전 같지 않고 마음이 조급한 것처럼 들렸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요, 시고니. 그가 전화를 할 때 곁에서 어떤 소리라도 들리지 않던가요?"

"글쎄요..."

시고니는 재빨리 제이 제이가 전화한 당시를 생각해 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차드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에는 무엇인가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시고니는 금방 깨달았다.

"무슨 소리가 들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요. 메인 씨."

"그런데?"

"글쎄요, 정확히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평소 때와는 좀 달랐어요, 네 맞습니다. 그건 꼭 곁에서 누군가 감시하고 잇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분명하죠?"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메인 씨. 무슨 일입니까?"

"간단히 말하죠."

"알겠습니다."

"지금 우린 닐 완슨이 하룻밤 묵고 간 모텔에 있어요."

"모텔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

"닐 완슨이 어떤 미국인과 함께 머물렀다는 거예요."

"미국인요?"

"그래요."

"혹시 그가 제이 제이 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시고니와 전화를 하는 도안에도 리차드는 이번 사건을 해결할 결정적인 단서를 궁리하는데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확신 같은 것이 그를 계속 몰아대는 것만 같았다. 제이 제이가 닐 완슨과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확신 속에 사로잡은 것이다.

"시고니,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메인 씨."

"지금 교환에 연락해서 제이 제이가 어디에서 전화를 했는지 좀 알아 달라고 부탁해요. 그러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지금 빨리요."

전화를 끝낸 리차드는 저스틴과 하그렌드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는 동안 침착성을 되찾았다. 그의 마음은 굉장히 조금해 있었다. 일종의 육감 같은 것으로 하여금 어떤 확신을 갖게 만든 것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제이 제이는 닐 완슨과 함께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이 제이는 아마 동정을 살피기 위해 시고니에게 전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전화예요?"

저스틴은 아직 리차드의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있었다. 함께 있던 하그렌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비록 런던 경시청의 베테랑급 수사관이라고는 하지만 시고니와 리차드의 통화내용을 일지 못한 상태에서 사건 전반에 대해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시고니한테 뭘 좀 부탁했어. 그리고 경감님, 어쩌면 닐 완슨의 소재가 곧 밝혀질 것 같습니다."

리차드는 저스틴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경감을 바라보며 의외의 성과를 알렸다.

"그래요?"

하그렌드 경감은 깜짝 놀랐다.

닐 완슨의 행적을 찾은 후에 체포할 수 있게 됐다고 믿으며 리차드에게 협조까지 요청했지만 의외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 실망에 빠져 있던 중이었다. 실추된 체면을 살리는 것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같다는 리차드의 말은 경감으로 하여금 더욱 놀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장담은 아직 할 수 없어요."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

"글쎄요..."

하그렌드의 얼굴에는 초조와 긴장된 표정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었다. 런던 경시청에서는 내로라하던 자신이 전문 수사관도 아닌 리차드의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현재로서는 자존심을 따지기 이전에 닐 완슨을 체포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체면이나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닐 완슨은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그렌드 그자가 로스앤젤레스에 왔단 말이지?"

그는 다시 확인하듯 제이 제이를 쏘아보면서 물었다.

"그렇다는군."

"그리고 또, 또 뭐가 있지?"

"뭐가 있냐고?"

"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냐고."

"아니."

"너 혹시 나와 같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만든 건 아니겠지?"

"아니야, 절대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어. 바로 옆에서 너도 들었잖아."

이미 제이 제이도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닐 완슨과 동행하며 그를 숨겨 주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닐 완슨을 설득해서 자수시키고 싶었다. 그것이 친구를 위해서도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닐 완슨은 끝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조급한 나머지 또 무슨 짓을 저지를 지 알 수 없는 위험만 높아질 뿐이었다. 시시각각 닐 완슨의 초조와 불안은 더해 가고 있었다. 조그마한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덤비는 것처럼 닐 완슨의 모습이 바로 그렇게 보였다. 하그렌드 경감이 로스앤젤레스에 왔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부터 그의 눈빛은 벌써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제이 제이, 아무래도 안되겠어. 장소를 이동해야 할 것 같아."

"어디로?"

"멕시코로 빠지면 어떨까?"

"국경을 넘자는 말이야?"

"거기에만 가면 안전할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닐, 생각해 봐 우리가 멕시코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것 같나?"

"왜 못 간다고 생각하지?"

"런던에서 경감이 왔다고 하는데 그래도 모르겠나? 이미 수사망을 전국에 걸쳐 펼쳐 놓았을 거야?"

"자수하는 길이 최선의 방법이야. 달리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

"닥쳐!"

닐 완슨은 갑자기 소리치며 날카롭게 제이 제이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 ."

제이 제이는 침착한 표정으로 설득을 시도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넨 고의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야. 그건 실수였고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도 있어. 죽은 그 친구가 니아를 학대했으니 말이야. 그리고 자네까지 공격하려고 덤비지 않았는가.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자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야. 그러니 제발 진정하고 내 말대로 해보란 말야. ."

"안돼! 난 그럴 수 없어. 경감은 날 미워해. 보기만 하면 당장 감옥에 처 넣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넌 몰라서 그래 아무튼 죽어도 자수는 못 해. 그보다 제이 제이, 우리가 멕시코로 넘어 갈 수 있는 길을 빨리 알아 봐."

"또 그 소리야?"

"이번 한 번만 부탁해. 다시는 부탁하지 않을게."

닐 완슨은 몹시 불안정한 상태에서 빌 듯이 간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는 순간 다시 사납게 날뛸 지 알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마음은 불안정 했다. 그와 같은 모습은 그가 뻔뻔한 살인자는 되지 못한다는 의미로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살인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측면에서 항상 자위하며 타당성을 준비하기 마련이니까. 사건 후 곧장 도망친 닐 완슨은 니아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현재 니아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그 후 또 다른 남자를 사귀어 지금은 유럽으로 향락 여행 중이라는 사실은 닐 완슨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닐 자네 자꾸 멕시코로 가겠다고 하는데 가진 돈이라도 있나?"

"?"

"나도 돈은 없어. 이미 다 써버렸다고."

"나도 없어."

"그러면서 어떻게 멕시코로 가겠다는 거야?"

"아무튼 가야 해. 여가 있다간 잡혀."

"불가능해."

"돈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돈이라도 넉넉해야지. 그러면서 뭘 어찌겠다는 거야. 안 그래?"

닐과 말하는 동안에도 제이 제이는 이미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과 함께 기회를 노려 경찰에 소재지를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닐 완슨이 눈치 챌 경우 어떤 위험이 따를지 예측할 수 없다. 그를 죽이려고 덤빌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두면 닐 완슨은 초조한 나머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몹시 불안해했다. 제이 제이는 닐 완슨은 위해서라도 그 방법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닐 완슨이 체포된다고 하더라도 공정한 재판은 받으면 금방 풀려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봐, . 자네 배고프지 않아?"

"아니?"

"난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어."

이들은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런던에서 도망칠 때의 닐 완슨은 거의 빈털터리였다. 제이 제이 역시 갑자기 집에서 나왔기 때문에 수중에 있던 돈도 이미 다 써버린 상태였다.

"우선 뭘 좀 먹어야 살지. 식당에서 사 먹을 처지도 못되고... 햄버거라도 사와야겠어."

그 말에 닐 완슨의 눈빛은 금방 사납게 변했다.

"밖에 나가면 안 돼!"

"무슨 소리야?"

"나 혼자 방에 있는 건 싫어."

"그럼 같이 가지."

제이 제이는 닐 완슨을 피해 밖으로 나간 후에 경찰에 신고할 작정이었다.

"난 자네 친구야. 그래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아닌가, 맞지?"

"그래서?"

"금방 나갔다.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안된다니까!"

"그럼 같이 나가자니까. 여기서 누가 자넬 알아보겠나, 자넨 미국인도 아닌데 미국인도 아닌데 말야?"

"하그렌드가 왔잖아."

하그렌드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닐 완슨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그는 제이 제이를 잡아먹을 듯이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제이 제이는 겁을 먹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닐 완슨의 두 눈에 난데없이 살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이것 봐, . 정신 차려."

닐 완슨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더욱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제이 제이를 놀려볼 뿐이었다.

"리차드 메인 씨 계십니까?"

프런트 데스크에 앉아 있던 모텔의 지배인이 큰소리로 리차드를 찾았다.

"여기 있소."

리차드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프런트로 다가갔다. 그는 시고니의 연락을 기다리던 주이었다. 하그렌드와 저스틴의 긴장된 시선이 리차드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접니다 메인 씨."

생각대로 시고니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시고니, 어떻게 됐어요?"

"방금 알아냈습니다."

"잘 됐군요, 시고니. 그가 지금 어디에 있답니까?"

"시내에서 약간 털어진 모텔에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확실한 위치를 아는 건 아니지만 전화로 확인한 겁니다."

"모텔?"

". 제이 제이가 그곳에서 전화를 걸오온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분명히 확인된 거죠?'

"물론이죠."

"혹시 전화해 보지 않았어요. 아직 그가 있는지?"

"그건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눈치챌 지 몰라서 그냥 물어 보기만 했을 뿐인 걸요."

"알았어요."

시고니는 항상 신중한 사람이었다. 만일 제이 제이가 닐 완슨과 함께 있다면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섣불리 전화를 했다가 역효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었다.

"시고니, 한 번만 더 수고해 줘요."

"말씀만 하세요, 메인 씨.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선 그 모텔에 전화를 해요."

"."

"그리고 친구라고 하면서 제이 제이를 찾아요. 거기서 전화가 걸려 왔었으니 괜찮을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런 다음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죠."

"부탁해요, 시고니."

"알겠습니다."

리차드가 자리로 되돌아가는 동안 시고니는 잠깐 망설였다. 리차드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제이 제이가 닐 완슨과 같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시고니는 리차드만큼이나 높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시고니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쉽게 이동할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장담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위험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반면에 언제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고니가 전화기를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모텔에 투숙 중인 닐 완슨은 또 다른 범죄를 벌이려 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가 아니라고 생각될 만큼 변해 버린 그는 제이 제이를 인질로 잡고 강도 짓을 벌리려 했다. 닐 완슨이 설마 이렇게까지 변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이 제이의 두 손은 뒤로 묶은 후 닐 완슨은 술병을 깨서 그 깨진 술병의 날카로운 부분을 제이 제이의 목 근처에 대고 프런트 데스크로 다가가면서 사납게 소리쳤다.

"얌전히 굴어! 허튼짓 않으면 이 사람을 죽인다.!"

모텔의 로비는 순식간에 공포의 분위기로 변했다.

", 자네 미쳤나?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닥쳐! 어서 가~!"

닐 완슨은 제이 제이를 몰고 계속 지배인 앞으로 다가갔다. 날카로운 유리 끝이 닿기만 해도 제이 제이의 목에선 금방 피가 콸콸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서랍 열어!"

지배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시키는 댈 계산대의 서랍을 열었다. 바로 그때 닐 완슨의 시야에는 돈과 함께 서랍 속에 들어 있던 권총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이리네!"

", !"

지배인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닐 완슨에게 넘겨주었다.

"이거 설마 장난감은 아니겠지?"

닐 완슨이 권총을 잡고 겨누자 지배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 권총에는 탄환이 장전되어 있습니다."

"그래?"

닐 완슨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럼 이제 이런 건 필요 없게 됐군."

그는 들고 있던 깨진 병을 집어던지고 다시 권총으로 모두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지배인은 전화기도 들지 못한 채 겁에 질려 닐 완슨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이러지 말게, .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이러면 죄만 더 무거워질 뿐이야."

"나도 이렇게 까진 하고 싶지 않았어. 널 해치고 싶지 않으니까 잠자코 있어."

전화벨은 계속해서 울렸고 지배인은 더욱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해 했다.

"전화를 받으라고 해, 어떤 전화인지 알 수 없으니까."

제이 제이의 말에 닐 완슨은 비로소 승낙했다.

"그 전화 받아. 대신 허튼 수작하면 쏴버리겠어."

지배인 비로소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걸온 것은 다름 아닌 시고니였다.

"거기 모텔이죠?"

"그렇습니다만..."

시고니는 상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떨리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전화기를 통해서 그의 공포와 겁에 질린 표정이 적나라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시고니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여유를 보였다.

", 그곳에 제 친구가 묵고 있을 겁니다. 조금 전 그곳에서 나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제이 제이라고..."

"? 누구요?"

"제이 제이요. 지금 방에 있을 겁니다."

"제이 제이요?"

지배인이 되묻는 순간 닐 완슨이 사납게 소리쳤다.

"전화 끊어!"

그와 거의 동시에 제이 제이가 소리쳤다.

"안 돼!"

지배인은 전화기를 든 채 어쩔 줄 몰라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한편 시고니는 전화기를 통해 모텔에서 나는 공포와 비명의 소리들을 이미 들을 수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상황이 파악됐다. 세부적으로 자세히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충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직감한 것이다. 시고니는 재빨리 전화를 끊고 리차드에게 연락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리차드는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메인 씨. 빨리 경감님과 함께 가보셔야 되겠습니다."

"알았어요, 시고니."

자리로 돌아온 리차드는 초조한 빛으로 서둘렀다.

"경감님, 빨리 갑시다. 그리고 당신도."

"어딜 가는 겁니까. 메인 씨?"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가면서 얘기하죠."

세 사람은 리차드를 선두로 급히 모텔을 나섰다. 저스틴도 그렇지만 이미 사태는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하그렌드 경감은 긴장하며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을 의식했다. 리차드는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로만의 경우와는 달리 경찰의 오토바이나 순찰차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때문에 계속해서 전속력으로 달릴 수가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메인 씨?"

미국에 온 다음부터 계속 궁지에 몰려 있는 것 같던 하그렌드 경감은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닐 완슨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네에?"

저스틴도 깜짝 놀랐다. 이번 사건에는 하그렌드 경감이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지켜보는 입장을 보여 온 그녀였다.

"방금 시고니가 알려왔어요. 그 모텔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모텔의 지배인이 협박당하고 있는 게 확실하답니다. 분명히 닐 완슨일 거예요. 보다 결정적인 것은 제이 제이의 목소리도 들렸다는군요."

"큰일이군요!"

저스틴은 말하진 안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리차드와 결혼한 이후 온갖 사건을 그와 함께 겪어온 그녀였다. 수사과이나 사립탐정을 능가할 정도로 저스틴은 사건해결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많이 남았습니까?"

하그렌드 경감은 계속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곧 도착할 겁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군요. 메인 씨. 지난번에 이어 또 한 번의 신세를 지고 말았으니..."

"그런 말씀 마세요, 경감님. 우리 부부는 원래 이런 일들 좋아한답니다. 안 그래, 여보?"

"맞아요. 경감님."

저스틴의 맞장구에 하그렌드는 더욱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거의 다 왔어요. 저 앞에 보이는 곳입니다."

이미 주변의 지리를 잘 알고 있던 리차드는 곧장 문제의 그 모텔을 향해 차를 달렸다.

"잠깐만요, 메인 씨."

차가 모텔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경감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

"조용히 진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리차드는 엔지의 소음을 줄이며 디시 물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그 사이에 자동차는 벌써 소리를 죽인 채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리차드는 정문으로 뛰어들 작정이었다. 무기를 소지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배우나 측면으로 현장을 급습하지 않는 것이 범죄를 해결해 왔던 리차드의 습관이었다.

"메인 씨는요?"

"정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좋습니다. 내가 먼저 내린 다음 3분 동안의 여유를 두고 들어가게요."

"?"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죠."

하그렌드 경감은 뚱뚱한 몸집에 비해 비교적 재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차에서 내린 그는 정문을 피해 자세를 낮추며 건물 모퉁이로 이동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저스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차에서 잠깐 기다려, 나주에 들어오는 것이 훨씬 안전하니."

"같이 가겠어요."

"위험할 텐데?"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할 수 없군. 좋아. 같이 들어가자고."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나란히 정문을 행해 걸었다. 저스틴은 리차드의 팔을 곡 붙잡은 채 리차드와 함께 투숙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처럼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 안의 풍경은 리차드의 예상 그대로였다. 막 카운터의 금고를 들어 있는 돈 뭉치를 움켜쥐고 밖으로 뒤쳐 나가려던 닐 완슨과 딱 마주친 것이다.

"꼼짝 마!"

닐 완슨이 겨눈 총구 앞에서 메인 부부는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메인 시로군! 안녕하시오, 행운의 여신?"

뒤쪽에선 재이 제이 간곡하게 빌고 있었다.

", 제발 그러지 마. 대체 어쩔려고 그런 짓을 계속 저지르고 있나? 자네 그러다가 붙잡히면 정말 감옥에서 평생 있게 돼. 제발..."

"입 다물어, 제이 제이! 또 그러면 정말 쏴버리겠어!"

리차드와 저슨틴은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전에 그들이 집에서 만났던 닐 완슨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그는 완전히 미친 듯한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 순순히 길을 비켜 주실까? 이 몸은 갈 길이 급해."

닐 완슨은 총구를 움직여 메인 부부가 비켜서도록 명령했다. 닐 완슨은 덮치려던 메인 부부도 닐 완슨을 밖으로 내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리차드는 권총의 방아쇠에 걸린 닐 완슨의 손가락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잘 있었나, 닐 완슨. 그 총 내려놓고 두 손을 들게."

뜻밖에 뒤쪽에서 하그렌드 경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닐 완슨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그 순간 리차드는 몸을 던져 닐 완슨을 덮쳤다. 리차드는 닐 완슨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를 덮쳤고 발사된 총알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를 박살내고 말았다.

 

시고니의 발길이 분주하게 주방과 거실로 움직였다. 메인 부부와 하그렌드 경감은 모든 긴장에서 벗아나 가벼운 칵테일을 즐기는 중이었다. 하그렌드 경감은 닐 완슨을 먼저 런던으로 압송시킨 다음 인사차 메인 부부를 방문하는 길이다.

"뭐라고 감사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메인 씨. 메인 부인."

"천만에 말씀입니다, 경감님. 마지막에 경감님이 아니었으면 우린 꼼짝도 못하고 그를 놓아주어야 했을 겁니다."

"맞아요,, 여보 그때는 정말 겁이 나던데요."

저스틴의 말에 세 사람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 시고니가 주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됐어요. 시고니."

리차드는 닐 완슨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문제를 생각해 냈다.

"참 시고니, 당신도 이리 와서 좀 앉아요, 궁금한 게 있으니까?"

시고니는 리차드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 역시 친구인 제이 제이가 관련된 이번 사건에 전적으로 몰두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게임 어떻게 됐어요?"

"?"

"지난번에 얘기했던 존과 히든의 내기 말예요."

"아아, 그거요."

시고니는 비로소 리차드의 말을 이해했다. 저스틴 역시 깊은 관심을 나타내듯 표정을 상기시켰다. 오직 하그렌드만이 알아듣지 못한 채 사람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내기가 성립됐나요?"

". 그렇다고 합니다."

"흥미가 끌리는데요?"

"정말 그런 내기를 한다는 거예요. 시고니."

"그렇습니다, 메인 부인. 아주 재미있게 됐어요. 하지만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죠. 언제나 그렇지만 좋은 사람은 이기고 나쁜 사람은 패하게 될 겁니다."

"그렇겠죠."

가만히 듣고 있던 하그렌드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군요. 누가 누구하고 무슨 내기를 했다는 겁니까?"

리차드는 저스틴을 바라본 후 다시 시고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일은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합니다만, 특정지역의 개발사업을 둘러싸고 두 재벌이 내기를 했다는군요. 아이들처럼."

"그런 내기도 있나요?"

"그러니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경감님."

저스틴의 말에 경감은 더욱 어리둥절해 했고 사람들은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윽고 하그렌드 경감이 정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메인 씨, 그리고 메인 부인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벌써 두 번씩 신세를 졌으니 정년까지 계속 신세를 져야할 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에 저스틴이 얘기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경감님.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이에요. 더 큰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를 체포해서 다행인 걸요. 그 사람은 원래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닐 완슨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도박이 문제요. 일하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만을 노리는 그런 자들은 사회에서 모조리 쓸어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국과 미국은 물론 전 세계 대도시의 카지노부터 영업을 못 하게 해야겠네요."

리차드의 말에 모두들 소리 내어 한 차례 웃었다. 하그렌드 경감은 그날 오후에 출발하는 비행기 편으로 런던으로 돌아갔다.

"다시는 이런 문제로 만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냥 친구로 지내면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또 연락해도 되겠죠, 메인 씨?"

"물론입니다, 경감님."

시고니도 하그렌드 경감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메인 부부의 침실에는 다시 평소와 같은 밝은 분위기가 찾아왔다. 사랑을 나누기에 시간은 너무 짧았고 세월도 또한 너무나 빠르게 흐른다고 항상 아쉬워 해 온 그들이었다. 항상 외적인 이유 때문에 방해받기 일쑤였고 사건에 휘말리다보면 둘만의 행복한 순간을 빼앗기는 일은 다반사였다.

"여보."

방금 샤워를 끝내고 나온 저스틴이 싱그러운 비누냄새를 풍기며 리차드에게 다가왔다.

"어때요, 당신?"

"오늘은 상당히 기분이 좋은데!"

"사랑하기에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좋은 날?"

리차드는 저스틴의 말뜻을 알아차렸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리차드는 비스듬히 누운 채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엷은 실크 가운 사이로 저스틴의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단 둘이 있을 때 저스틴은 노골적이고 공격적이 되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을 만큼 적극적이었다. 저스틴은 상상할 수 없는 쾌락과 환희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고 싶어 했다. 리차드는 그녀의 살갗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사랑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목격했다. 몸 전체의 감각이 예민하게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리차드의 옆에 저스틴은 가볍게 누웠다. 리차드는 저스틴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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