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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Walden) 2

4장 숲의 소리들

 

그러나 아무리 잘 골라진 책이고 고전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책에만 몰두하여, 그 자체가 방언이며 지방어에 지나지 않는 어느 특정의 언어들만을 읽는다면 우리는 어떤 중요한 언어를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런데 이 언어야말로 모든 사물과 사건이 비유를 쓰지 않고 말하는 언어이며, 풍부하기 짝이 없는 어휘와 표준성을 지닌 언어인 것이다. 발표되는 것은 많지만 인쇄되는 것은 적다. 덧문 사이로 스며든 햇빛은 그 덧문을 완전히 걷어버리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어떠한 관찰 방법과 훈련도 항상 주의깊게 살피는 자세의 필요성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볼 가치가 있는 것을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보는 훈련에 비하면 아무리 잘 선택된 역사나 철학이나 시의 공부도, 훌륭한 교제도, 가장 모범적인 생활 습관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단순한 독자나 학생이 되겠는가, 아니면 '제대로 보는 사람'이 되겠는가? 당신 앞에 놓여진 것들을 보고 당신의 운명을 읽으라. 그리고는 미래를 향하여 발을 내딛어라.

첫 번째 여름에는 책을 읽지 못했다. 콩밭을 가꾸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종 일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시간을 보냈다. 꽃처럼 활짝 핀 어느 순간의 아름다움을, 육체적 일이든 정신적 일이든 일을 하느라고 희생할 수는 도저히 없었던 때들이 있었다. 나는 내 인생에 넓은 여백을 갖기를 원한다. 어떤 여름날 아침에는 이제는 습관이 된 멱을 감은 다음, 해가 잘 드는 문지방에 앉아서 해뜰녘부터 정오까지 한없이 공상에 잠기곤 했다. 그런 나의 주위에는 소나무, 호두나무와 옻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고독과 정적이 사방에 펼쳐있었다. 오직 새들만이 곁에서 노래하거나 소리 없이 집안을 넘나들었다. 그러다가 해가 서쪽 창문을 비치거나 또는 먼 행길을 달리는 어느 여행자의 마차 소리를 듣고서야 문득 시간이 흘러간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이런 날들에는 나는 밤사이의 옥수수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정말이지 이런 시간들은 손으로 하는 그 어떤 일보다 내게는 훨씬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감해지는 시간들이 아니고 오히려 나에게 할당된 생명의 시간을 초과해서 주어진 특별 수당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동양 사람들이 일을 포기하고 명상에 잠기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대체로 나는 시간이 가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하루는 마치 내가 해야 할 일을 덜어주려는 듯이 지나갔다. 아침이구나 하면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해놓은 일은 없었다. 새처럼 노래부르는 대신 나는 나의 끝없는 행운에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참새가 내 집 앞의 호두나무에 앉아 지저귈 때 나는 혼자서 키득키득 웃었다. 이 웃음은 차라리 새처럼 노래 부르려는 충동을 억누른 것으로 참새는 내 둥지에서 나는 그 소리를 들었으리라. 나의 하루하루는 이교도의 신 (서양의 요일 이름은 기독교가 아닌 이교의 신의 이름들로부터 유래했다)의 이름이 붙은 한 주일의 어느 요일이 아니었으며, 24시간으로 쪼개져 시계의 재깍재깍하는 소리에 의해 먹혀들어 가는 그런 하루도 아니었다. 나는 푸리족 인디언처럼 살았다. 그들에 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나타내는 데에 한 가지 말밖에 없다. 그래서 어제를 의미할 때는 자기의 등 뒤를 가리키고, 내일은 자기 앞을, 그리고 오늘은 머리 위를 가리켜서 뜻의 차이를 나타낸다."

나의 이런 생활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게으른 생활로 비쳤으리라. 그러나 새와 꽃들이 자기들의 기준으로 나를 심판했다면 나는 합격 판정을 받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이지, 인간은 행동의 동기를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의 하루는 매우 평온한 것이며 인간의 게으름을 꾸짖지는 않는다.

나의 생활 양식은 자신들의 오락을 밖에서, 즉 사교계나 극장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비해 한 가지 큰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 나의 생활은 그 자체가 바로 오락이었으며 끝없는 신기로움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장으로 구성된 끝없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정말 우리가 항상 최근에 배운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의 생계를 유지하고 우리의 생활을 조절해 나간다면 우리는 결코 권태로 인해 괴로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천재성을 바짝 좇아가라. 그리하면 그것은 반드시 시간시간마다 새로운 경관을 보여줄 것이다.

집안일은 즐거운 소일거리였다. 내 집의 마루가 더러워지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와 침대보를 짐 하나로 싸는 식으로 해서 모든 가구들을 집 밖의 풀밭 위에다 옮겨놓았다. 그리고나서 마룻바닥에 물을 끼얹고 호수에서 가져온 흰 모래를 그 위에 뿌리고는 마루가 깨끗하고 하얗게 될 때까지 대걸레로 북북 문질렀다. 마을 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끝낼 무렵이면 집안은 아침 햇볕으로 충분히 말랐으므로 나는 다시 안에 들어가 명상을 계속할 수 있었다.

내 집의 모든 살림 도구가 풀밭 위에 나와 집시의 봇짐처럼 한 무더기로 쌓이고, 내 삼각 탁자가, 책과 펜과 잉크가 그냥 놓인 채로 소나무와 호두나무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그 물건들도 밖으로 나온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고 다시 안에 들어가는 것이 싫은 것 같았다. 때때로 나는 이것들 위에 차일을 치고 그 아래에 앉아 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물건들 위에 햇빛이 비치는 것을 본다든가, 바람이 그 위로 거리낌 없이 스쳐 가는 소리를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무리 우리 눈에 익은 물건들이라도 집 밖에다 내놓으면 집안에 있을 때와는 아주 색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바로 옆의 나뭇가지에는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가 하면, 보릿대국화는 탁자 밑에서 자라고 있고, 검은딸기의 넝쿨은 그 탁자의 다리를 휘감고 있다. 주위에는 솔방울과 밤송이 껍질들 그리고 딸기의 잎사귀 따위들이 흩어져있다. 그러고 보니 이러한 형상들이 탁자나 의자, 침대 같은 우리들의 가구에 새겨진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경로에 의해서가 아닌가 싶었다. , 이들 가구들이 한때는 그런 자연 속에 놓여 있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나의 집은 언덕의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커다란 숲이 바로 거기에 와서 끝나고 있었으며, 집 주위에는 한창때의 리기다소나무와 호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호수까지의 거리는 30킬로미터쯤 되었으며, 집에서 호수로 가는 길은 언덕을 내려가는 작은 샛길로 되어 있었다. 집 앞의 뜰에는 딸기와 검은딸기, 보릿대국화, 물레나물, 미역취, 떡갈나무의 관목, 샌드벚나무, 월귤나무와 감자콩 등이 자라고 있었다.

5월 말이 되면 샌드벚나무는 짧은 줄기 주위에 원통형의 산형 꽃차례로 피어난 섬세한 꽃들로 길 양편을 장식했다. 이 나무의 줄기는 가을이 되면 꽤 큼직한 보기 좋은 열매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방사선 모양의 화환처럼 사방으로 휘어졌다. 나는 자연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열매를 하나 따먹어보았으나 맛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옻나무들은 내가 만들어놓은 나지막한 토담을 뚫고 위로 뻗쳐 나와 집 주위에 무성했는데, 첫해에 벌써 5, 6피트나 되는 높이로 자랐다. 옻나무의 넓고 깃털 모양을 한 열대성 잎사귀는 이국적이면서도 보기가 좋았다. 그것의 커다란 새싹들은 늦은 봄에 마치 마술에 의한 것처럼 푸르고 여린 직경 1인치가량의 아름다운 가지들로 자라나는 것이었다. 그 가지들이 너무 빨리 자라면서 마디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어떤 때 내가 창가에 앉아있노라면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도 싱싱하고 여린 가지가 자신의 무게에 겨워 부러지면서 갑자기 부채처럼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꽃이 피었을 때 수많은 야생 벌들을 끌어들였던 엄청난 양의 딸기들은 8월이 되면 점점 우단 같은 밝은 진홍색을 띠는데, 이 딸기들도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휘어지면서 자신의 여린 줄기들을 부러뜨리는 것이었다.

 

한여름 오후, 창가에 앉아 있노라니 매들이 나의 개간지 위를 빙빙 돌면서 날고 있다. 산비둘기가 두 마리씩 세 마리씩 내 시야를 가로질러 날아가거나, 내 집 뒤의 백송나무 가지에 안절부절못하듯 내려앉곤 하는데 그때마다 소리가 난다. 물수리 한 마리가 거울 같은 호수의 수면에 잔물결을 일으키며 물고기 하나를 채 가지고는 날아오른다. 밍크 한 마리가 내 집 앞에 있는 늪에서 살짝 나와 물가에서 개구리를 잡아챈다. 왕골은 여기 앉았다 저기 앉았다 하는 쌀먹이새의 무게에 눌려 휘청거리고 있다.

나는 반 시간 전부터 보스턴에서 시골로 손님들을 실어나르는 기차의 바퀴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들꿩의 날개짓 소리처럼 이제는 안 들리거니 하면 다시 들리곤 했다. 나는 이 마을에서 동쪽 방향에 있는 어느 시골 농가에 가서 머슴살이를 했다던 소년처럼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소년은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옷은 누더기에다 향수병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그곳처럼 외지고 따분한 곳은 세상에 다시 없을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떠나 가버리고 기적소리도 안 들리는 곳이었단다. 나는 오늘날 매사추세츠에 그런 곳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정말로 이제 우리 마을은

저 날쌘 기차 화살의 표적이 되었네.

평화로운 들판 위를 울리는 정다운 소리는-콩코드."

휘츠버그 노선 철도는 내 집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약 500미터 지점에서 호수 옆을 지난다. 나는 대개 이 철로의 둑을 따라 마을에 간다. 그러므로 어떻게 생각하면, 나를 인간 사회와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철도가 하는 셈이다. 화물 열차를 타고 전 노선을 왕복하는 사람들은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에게 인사를 한다. 나를 그처럼 여러 번 철로변에서 만났기 때문에 내가 자기들과 같은 철도회사 종업원인 것으로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느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나도 지구의 궤도 어디선가 보선부 노릇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니 말이다.

기관차의 기적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내가 사는 숲을 뚫고 들려 오는데, 그 소리는 어느 농가의 위를 나르는 매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이 기적 소리는 바쁘게 서두는 수많은 도시의 상인들이 마을의 경계선 안에 도착하고 있으며, 그 반대쪽에는 한몫 잡으려는 시골 장사꾼들이 도착하고 있음을 나에게 알려준다. 양쪽 상인들이 한 지평선 아래로 접근하게 되면 그들은 서로 상대방더러 길을 비키라고 경고의 기적을 빽빽 울리는데, 이 소리는 때때로 두 마을의 경계선 안쪽까지 들리기도 한다.

", 시골이여, 여기 당신들 식료품이 왔소! 시골 사람이여, 당신들 양식이 왔단 말이오!" 자기 농장에서 자라는 농산물로 자급 자족하고 있으므로 "그런 것 필요 없소!"하고 말할 수 있는 농부는 한 사람도 없다. ", 식료품 값 여기 있소!"하고 시골 사람의 기차는 기적을 울린다. 그 기차 안에는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 쓰는 파성퇴처럼 생긴 목재들이 실려서는 도시의 성벽을 향하여 시속 20마일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또한 성벽 안에 사는 모든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앉히기에 충분한 많은 의자들도 실려있다.

거창하고 투박한 예의를 보이면서 시골은 도시에게 의자를 넘겨준다. 허클베리로 뒤덮였던 언덕들이 발가벗겨지고, 넌출윌귤이 지천으로 깔렸던 들녘들도 갈퀴로 싹싹 긁어 열매란 열매는 전부 도시로 보내진다. 솜은 도시로 올라오고 옷감은 시골로 내려간다. 견직물이 올라오고 모직물이 내려간다. 그런데 책이 올라오면 그 책을 쓴 저자가 내려가는 것은 어쩐 일인가?

차량을 몇 칸씩이나 단 기관차가 마치 행성처럼 달려가는 모습을 볼 때면(아니, '행성처럼'이 아니라 '혜성처럼'이라고 하는 게 낫겠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궤도가 순환 곡선인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그 속력과 그 방향으로 달려서는 그 기차가 다시 태양계로 돌아올 것인지는 구경하는 사람은 모르니까), 게다가 증기의 구름을 깃발처럼 휘날리며, 높은 하늘에서 자신의 모습을 햇빛에 펼쳐 보이는 수많은 새털구름같이 생긴 금은의 화환을 뒤에 남기면서 달리는 모습을 볼 때면,-그 모습은 이 질주하는 반신, 이 구름을 휘어잡는 존재가 머지않아 석양의 하늘을 자기의 제복으로 만들 것만 같다-그리고 이 철마가 발굽으로 대지를 뒤흔들고 불과 연기를 내뿜으며 벽력같은 콧김으로 산울림을 울리게 하는 것을 들을 때면, 지구는 이제 그 위에 살 만한 자격을 갖춘 새로운 종족을 갖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새로운 신화에 어떤 종류의 날개 달린 말과 불을 뿜는 용이 들어갈지 나는 모르겠다)

만약 모든 것이 보이는 대로이고, 인간이 고귀한 목적을 위하여 자연의 힘을 자기의 하인으로 삼은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기관차 위로 뿜어나오는 구름이 영웅적인 행위로 인한 땀이며 농가의 밭 위에 떠있는 구름처럼 자비로운 것이라면, 우주의 원동력 및 자연의 여신 자신도 인간의 사명 완수를 위하여 기꺼이 동반자가 되며 경호를 맡을 것이다.

아침 열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는 나의 심정은 해가 뜨는 것을 보는 나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 열차도 해돋이에 못지 않게 시간을 정확히 지킨다. 기차가 보스턴을 향해 달리면 연기의 구름은 뒤에 처지면서 점점 하늘 높이 올라가는데 잠시 태양을 가리면서 나의 먼 쪽 밭을 그 그늘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 연기의 구름은 하늘을 향해 달리는 기차와도 같다. 그것에 비하면 땅을 달리는 기차는 한낱 창끝에 지나지 않는다.

철마의 마부는 이 겨울 아침에도 그의 말에 먹이를 주고 안장을 채우기 위해 산중에 기울어진 별빛을 보며 일어났다. 철마 속에 생명의 열을 넣어 출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불 역시 일찍 깨워졌다. 아침 일찍부터 바쁘게 돌아가는 이 일이 순진무구한 일이라면 오직 좋으랴! 눈이 많이 쌓인 날이면 그들은 철마에 눈신을 신기고 거대한 쟁기로 산간지대로부터 해안지대로에까지 고랑을 판다. 기관차 뒤의 열차칸들은 마치 쟁기 뒤를 따르는 파종기가 고랑 안에 씨를 뿌리듯 많은 분주한 사람들과 떠도는 상품들을 시골에 뿌려준다. 온종일 이 화마는 전국을 날아다니며, 주인을 쉬게 하기 위해서나 잠시 걸음을 멈춘다.

나는 한밤중에 이 화마의 발굽소리와 반항적인 콧김소리에 잠을 깨는 때가 있는데, 이때는 그가 숲속의 어느 외진 계곡에서 얼음과 눈으로 무장한 자연의 힘과 대결하고 있을 때이다. 그는 새벽별이 뜰 때에야 비로소 자기 마굿간에 돌아온다. 그러나 쉬지도 자지도 못하고 곧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저녁때 간혹 나는 화마가 자기의 마굿간에서 그날의 남아돌아 가는 힘을 발산하는 소리를 듣는데, 아마도 신경을 안정시키고 간과 뇌를 식혀 두어 시간이나마 잠을 이루려는 것이리라. 지치지 않고 계속되는 이 일이 영웅적이고 당당한 일이기까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때는 대낮에 사냥꾼들이나 겨우 들어왔던 시골읍 변두리에 있는 인적 미답의 숲속으로 이 불을 환히 킨 응접실들은 승객도 모르는 사이에 깊숙이, 깊숙이 캄캄한 어둠을 뚫고 달린다. 어느 순간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인 읍이나 도시의 어느 밝은 정거장에서 멈추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음산한 늪지대를 지나며 부엉이와 여우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열차가 도착하고 떠나는 시간은 이제 마을의 하루에서 중요한 기준 시점이 되었다. 기차의 오가는 시간이 규칙적이고 정확하며 기적소리가 대단히 먼 데까지 들리므로 농부들은 그에 따라 시계를 맞추게 되었고 그리하여 일사 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제도가 온 나라를 관리하게 되었다.

철도가 발명되고 나서 사람들의 시간 관념은 상당히 나아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옛날의 역마차 역에서보다 오늘의 기차역에서 더 빨리 말하고 더 빨리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기차역의 분위기에는 무엇인가 흥분을 자아내는 것이 있다. 나는 기차역이 이룩한 기적에 여러 번 놀라고 있다. 나의 이웃 중 어떤 사람들은 철도처럼 빠른 수단으로는 결코 보스턴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장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인데, 그들 또한 역의 종이 울리면 거기에 모습을 나타내곤 한다. 이제는 일을 '철도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어떤 강력한 것이 자신의 선로에 들어서지 말라고 그처럼 여러 번 진지하게 경고할 때는 이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기차는 소요 단속법을 적용하기 위해서 멈추지도 않으며, 군중의 머리 위로 권총을 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로 자기의 길옆으로 비켜나지 않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을, 즉 아트로포스 여신(아트로포스 : 그리스 신화의 '운명의 세 여신' 중의 하나. 사람의 생명의 실을 끊는 역할을 한다)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다.(이 여신의 이름을 따서 기관차의 이름을 지어도 좋으리라)

사람들은 몇 시 몇 분에 기차라는 화살이 어느 일정한 지역의 어느 지점을 향하여 발사될 것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렇지만 기차는 사람들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 없으며, 아이들은 철길을 따라 학교에 간다. 우리는 철도가 있기 때문에 좀 더 꿋꿋한 삶을 살고 있다. 기차 때문에 우리는 모두 윌리엄 텔의 아들이 되도록 훈련을 받고 있다. 공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화살로 가득 차 있다. 당신 자신의 길을 빼놓고는 모두 운명의 길이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

상업이 내 마음에 드는 것은 그 진취적 기상과 용기 때문이다. 상업은 두 손을 모아 주피터 신에게 기도 드리지 않는다. 나는 상인들이 날마다 크든 작든간에 용기와 만족감을 가지고 자기들의 일에 종사하며,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을 본다. 아마 그들이 의식적으로 계획을 했더라도 이보다 더 좋은 일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부에나비스타(부에나비스타 : 멕시코 북부의 지명.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영토 분쟁때문에 벌어졌던 멕시코 전쟁(1846~1848) 때의 격전지이다)의 격전장에서 반 시간을 견뎌낸 군인들의 영웅적 행위보다는, 제설 기관차를 겨울 동안의 숙소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꾸준하고도 낙천적인 용기에 의하여 더 큰 감동을 받는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가장 드문 용기라고 말했던 '새벽 3시의 용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용기는 일찌감치 잠자러 가지 않으며, 그들 자신도 눈보라가 멎거나 철마의 근육이 얼어붙었을 때에야 잠자리에 든다.

폭설이 아직 맹위를 떨치면서 사람들의 피를 얼리고 있는 오늘 아침에도, 나는 그들의 기관차의 종소리가 자신들의 얼어붙은 입김의 두터운 안개층을 뚫고 나오는 둔한 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는 뉴잉글랜드의 지방을 휩쓰는 북동 폭설의 거부 행위에도 불구하고 열차가 큰 지연 없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온몸이 눈과 서리로 덮인 제설 작업반원들이 기관차의 제설 장비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이 제설 장비는 우주의 변두리 어딘가에 있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바위덩이처럼 들국화와 들쥐들의 집이나 부수는 게 아니라 바로 눈덩이를 파헤치는 것이다.

상업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감에 넘치고 명랑하며, 기민하고도 모험적이며 지칠 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상업은 그 방법에서 매우 자연스럽다. 허다한 공상적인 기획이나 감상적인 실험들보다 그 방법이 훨씬 자연스러우며, 바로 거기에 그 특유의 성공 비결이 있다. 화물 열차가 덜커덕거리며 내 옆을 지나갈 때면 나는 기분이 상쾌해지고 마음이 뿌듯해진다. 나는 보스턴의 롱 부두에서 버몬트주의 챔플린 호수까지의 길을 내내 냄새를 풍기면서 가는 화물들의 냄새를 맡는데, 그 냄새는 나로 하여금 이국의 땅들과 산호초와 인도양과 열대의 풍토와 지구의 넓이를 생각케 한다. 내년 여름에 수많은 뉴잉글랜드 지방 사람들의 금발 머리를 가려줄 모자가 될 종려나무 잎들, 그리고 마닐라 삼, 코코야자 껍질, 낡은 밧줄, 마대, 고철과 녹쓴 못들을 보면 세계의 시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화차에 실려 가 찢어진 돛들은 종이로 재생되어 책이 인쇄될 것이겠지만, 그보다는 지금 이대로가 읽기도 쉽고 내용도 재미있다. 이 돛들이 겪은 폭풍우의 역사를 이 찢어진 자국들만큼 생생하게 그려낼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것들은 더 이상 고칠 필요가 없이 바로 인쇄에 들어갈 수 있는 교정쇄인 것이다.

여기 메인주의 숲에서 나온 목재가 실려 간다. 이 목재들은 지난번 홍수 때 바다로 떠내려가지 않은 것들인데, 그때 떠내려간 나무들도 있고 쪼개진 나무들도 있었기 때문에 값이 1,000불당 4불쯤 올라있다. 이 목재들은 소나무와 가문비나무와 삼나무로, 1, 2, 3, 4급의 등급이 매겨져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 같은 품질로서 곰과 사슴과 순록의 머리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던 것들이다. 다음엔 토마스톤산 석회가 지나간다. 최상급 품질인데 소석회가 되려면 산간 지방으로 꽤 멀리 들어가야 할 것이다.

여기 색깔도 품질도 가지각색인 누더기를 담은 가마니들이 지나간다. 무명과 린네르가 닳고 헐어서 최저의 상태로 내려간 것이 누더기이며, 모든 옷의 종착점이 바로 누더기 아닌가? 여기 실려 가는 것들은 이제는 밀워키 시 (밀워키 시 : 당시 독일에서 이민들이 몰려왔던 미국 중서부의 중심 도시)에서가 아니면 떠들어대는 일이 없는 무늬의 것인데, 영국, 불란서, 미국제의 날염천, 깅검천, 모슬린천 등 한때는 화려했던 옷감들로 유행과 빈부의 정도를 막론한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수거된 것들이다. 이것들은 이제 단색 또는 두어 가지 색의 종이로 재생될 예정인데 그 위에 상류사회 인생이나 밑바닥 인생에 관하여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들이 기록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문이 닫혀 있는 이 칸은 소금에 저린 생선 냄새가 나는데, 이 강력한 뉴잉글랜드의 상업적 냄새는 나로 하여금 그랜드 뱅크스의 대어장을 생각케 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먹어본 이 생선들은 어찌나 철저하게 소금으로 절여놓았는지 어떤 일이 있어도 썩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도를 닦는 성자들도 그 앞에서는 낯을 붉히게 될 것이다. 이 절인 생선으로 사람들은 길거리를 청소하기도 하고 도로 포장의 재료로 쓰기도 하며, 불쏘시개를 쪼개는 칼로 쓰는가 하면, 마부들은 이것을 가지고 태양과 바람과 비로부터 자기 자신과 짐을 보호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어느 콩코드 사람이 그랬듯이 상인들은 개업을 할 때 간판 대신 절인 생선을 가게문 앞에 걸어놓을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해서 세월이 지나면 마침내는 가장 오래된 단골 손님도 그것이 동물성인지 식물성인지 또는 광물성인지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눈송이처럼 깨끗한 것이니 솥에다 넣고 끓이면 토요일 저녁식사 때 훌륭한 생선 요리로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지나가는 것은 스페인산 소가죽들인데, 꼬리는 이 소들이 살아서 스페니쉬 메인의 대초원을 뛰놀 때와 똑같은 각도로 쳐들려 있고 그 때와 똑같은 모양으로 끝이 휘어져 있다. 이 꼬리는 모든 고집불통의 표본으로서, 타고난 악덕은 종류를 막론하고 얼마나 바로잡기가 힘든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여기서 솔직히 고백하지만, 어떤 사람의 참된 성품을 알게 되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성품을 더 좋게든 혹은 더 나쁘게든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나는 전혀 갖지 않는다. 동양 사람들이 말하듯이, "개의 꼬리를 뜨겁게 한 다음 눌러서 노끈으로 묶는 일을 12년간이나 되풀이하더라도 그것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이들 소꼬리나 개꼬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완고성을 고치는 데에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은 흔히 하듯이 이것들을 끓여서 아교로 만드는 것인데, 아교가 된 다음에는 붙여놓은 대로 붙어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버몬트주 커팅스빌에 사는 존 스미스씨에게 배달될 당밀 아니면 브랜디의 큰 통이 실려 간다. 그는 그린 산맥 지역의 상인으로 자신의 개간지 근처에 사는 농부들을 상대로 물건을 수입해 팔고 있다. 아마 지금쯤 그는 자신의 가게 출입문 근처에 서서 최근 해안에 도착한 상품들이 자기의 물건 가격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음 기차 편으로 최상급의 물건이 도착하게 되어 있다고 오늘 이전에도 스무 번쯤 되풀이했던 말을 또다시 고객들에게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상품은 커팅스빌 신문에 광고가 나와 있다.

이런 물건들이 올라가는가 하면 다른 물건들이 내려온다. "쉬잇"하는 소리에 놀라 책에서 눈을 들어 쳐다보니 먼 북쪽 지역의 산에서 베어진 큰 소나무가 그린 산맥과 코네티커트 주를 넘어 날아오더니 10분도 안 되어 마을 중심부를 화살처럼 통과하여 어느 누가 보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는데, 그것은

"어느 커다란 군함의

돛대가 되려는 것이니."

(밀턴의 <실락원>)

, 들어보라! 여기 가축 열차가 오고 있다. 천 개의 산에서 자란 가축들을 실은 공중에 뜬 양의 우리요, 외양간이요, 소의 우리인 셈인데, 거기에다가 막대기를 든 소몰이꾼들과 양떼들 한가운데 서 있는 목동들도 끼어 있어 산의 목초지만 빼고는 다 있다고 하겠는데, 이 모든 것들이 9월의 강풍으로 산에서 휘몰리는 낙엽처럼 밀려오고 있다. 사방은 온통 송아지와 양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숫소들이 서로 밀고 비비적대는 소리들로 가득 차 마치 목장의 계곡이 송두리째 지나가는 것 같다. 맨 앞에 있는 방울 단 양이 방울을 울리면 산들은 정말 숫양들처럼 뛰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처럼 뛰는 것이었다. 소몰이꾼들을 실은 열차 한 칸이 중간에 끼어 있었는데, 이들은 이제 소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일거리를 잃은 채 쓸모 없는 막대기를 직무의 표시인 양 여전히 쥐고 있었다.

그런데 몰이꾼들의 개들, 그 개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개들은 지금 떼 지어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들은 길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맡을 냄새를 잃어버린 것이다. 개들이 피터보로 산 뒤에서 짓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니면 그린 산맥의 서쪽 경사면을 헐레벌떡 올라가는 소리 같기도 하다. 개들은 가축들이 도살되는 현장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이제 일거리를 잃었다. 그들의 충성심과 영특함은 지금 최저의 상태에 빠져 있다. 그들은 치욕을 느끼며 개장으로 돌아가거나, 어쩌면 야생의 상태로 돌아가 늑대와 여우들과 한패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목장의 생활을 실은 열차는 바람처럼 지나간다. 그러나 종이 울리니 철로에서 비켜나 기차가 지나가도록 해주어야겠다.

철로는 나에게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어디서 끝나는지를

결코 보러 가지 않는다.

철로는 계곡 몇 개를 메꾸어 주고

제비를 위해 둑을 쌓기도 한다.

철로는 모래를 휘날리며

검은 딸기를 자라게 한다.

나는 숲속에 있는 짐수레 길을 건너듯 철로를 건너간다. 나는 연기와 증기와 기적소리로 눈이 아리고 귀가 먹는 꼴은 당하고 싶지 않다.

 

이제 기차가 지나가고 그와 함께 바쁘게 설쳐대는 세상도 지나가 버렸다. 호수의 고기들도 이제 기차의 덜커덕거림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홀로라는 느낌이 든다. 나머지 오후 내내 나는 명상에 잠겨 있었으며, 마차나 가축 몇 마리가 먼 행길을 지나가는 희미한 소리에만 간혹 깨어나곤 했다.

일요일 중 어떤 날 바람이 알맞은 방향에서 불 때는 종소리가 들려 오기도 했다. 이 종소리는 링컨, 액턴, 베드포드나 콩코드 마을에서 들려오는 은은하고 감미로운 종소리인데, 마치 자연의 멜로디의 하나로 숲속에 들어올 자격을 인정받은 것 같았다. 이 종소리는 넓은 숲 위를 지나올 때 숲속의 모든 솔잎을 하프의 현처럼 건드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어떤 떨리는 음색이 가미되어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이었다. 들릴 수 있는 최대의 거리에서 오는 모든 소리는 '우주의 가야금'의 진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동일한 음향 효과를 낸다. 그것은 마치 먼 산꼭대기들이 중간의 대기로 인하여 감청색의 빛깔을 띠게 되어 우리 눈에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종소리의 경우 나에게 들려온 선율은 공기에 의해 팽팽해진 선율이며, 솔잎을 포함한 숲의 모든 잎사귀들과 이야기를 나눈 선율이며, 자연의 원소들에게 붙들려 조절된 다음 계곡에서 계곡으로 메아리쳐진 선율인 것이다. 메아리는 어느 정도는 독창적인 소리이며 바로 이 점에 메아리의 마력과 매력이 있다. 메아리는 종소리 중 되울릴 가치가 있는 것을 되울린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일부분은 숲 자체가 내는 소리이기도 하다. , 숲의 요정의 속삭임과 노래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저녁 무렵 숲 너머 지평선 멀리서 들려오는 소의 음매 소리는 감미롭고도 선율적이다. 처음에 나는 그 소리를 나에게 이따금 세레나데를 들려주던 어떤 가수들이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계속 이어지면서 소가 부르는 흔한 자연적인 음악이라는 것을 알고 실망을 했지만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 젊은이들의 노래가 소의 노래와 비슷하다고 말한 것은 비꼬는 의미에서 한 이야기가 아니고 오히려 젊은이들의 노래의 진가를 인정하려는 것이다. , 양쪽이 다 같이 자연이 내는 하나의 조화된 표현이었던 것이다.

여름의 어느 기간에는 저녁 열차가 막 지나간 뒤인 일곱 시 반만 되면 쏙독새들이 집 문 앞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나 지붕의 용마루에 앉아서 반 시간 동안 저녁의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저녁마다 일정한 시각에, 즉 해가 지는 시각에서 5분 이내에 거의 시계처럼 정확히 노래를 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새들의 습관을 알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어떤 때는 네다섯 마리가 숲의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우는 적도 있었는데 우연히도 한 소절씩 차례로 뒤늦게 울었고 또 내가 아주 가까이 있었으므로 나는 매 소절 다음에 내는 쿠룩쿠룩하는 소리뿐만 아니라 거미줄에 걸린 파리가 내는 것 같은 그 특이한 웅웅 소리-물론 몸집이 크니까 소리도 더 컸지만-도 들을 수 있었다. 또 어느 때 내가 숲에 들어가면 쏙독새 한 마리가 줄에 묶인 것처럼 내 주위를 불과 두어 자 떨어져 계속해서 빙빙 도는 적이 있는데, 아마 바로 근처에 알을 낳아 놓은 둥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밤새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었으며, 동이 틀 무렵이나 바로 그 직전에 가장 많이 울었다.

다른 새들이 조용해지면 부엉이들이 바톤을 이어받아, 죽음을 곡하는 여인네들처럼 부엉부엉하고 그들의 태고적 울음을 시작한다. 그들의 음산한 울음은 그야말로 벤 존슨적이다. (벤 존슨(1573?~1637) : 영국의 극작가. 그의 작품 중에 <마녀들의 노래>가 있다)교활한 한밤중의 마녀들 같으니! 그들의 노래는 시인들의 정직하면서도 투박한 노래가 아니라 실로 엄숙하기 짝이 없는 무덤의 노래이며, 동반 자살한 두 연인이 지옥의 숲에서 지난날 이승에서의 강렬했던 사랑의 고통과 기쁨을 돌이켜 보면서 서로를 위안하는 노래인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들의 비탄, 그들의 구슬픈 응답이 숲의 언저리에 떨리듯 들려오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때로 나에게 음악과 노래하는 새들을 생각케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말 노래로 표현되기를 원하는 것은 음악의 어둡고도 눈물겨운 측면이며 후회와 탄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부엉이들은 정령이다. 한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밤마다 이 세상을 걸으면서 어둠의 짓을 저질렀으며 이제는 죄의 현장에서 탄식의 노래와 비가를 부르면서 속죄하고 있는 추락한 영혼들의 의기소침한 정령이며 우울한 전조인 것이다. 부엉이는 우리 모두의 집이기도 한 대자연의 다양성과 가능성에 대하여 새로운 느낌을 준다. ", 차라리 태어나지 말 것을!" 하고 호수 이쪽에서 부엉이 한 마리가 한숨을 쉬고는 절망과 불안의 심경으로 날아 올라 한 바퀴를 돌더니 회색 떡갈나무들 속에 새로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러자 "...태어나지 말 것을!" 하면서 호수 건너편에 있는 다른 부엉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응답한다. 그러자 또 "...말 것을" 하고 멀리 링컨 숲에서 응답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올빼미 역시 나에게 세레나데를 들려주었다. 올빼미 우는 소리는 가까이서 들으면 자연의 소리 가운데 가장 우울한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자연의 여신이 죽어가는 인간의 신음소리를 올빼미 소리로 형식화시켜서 자신의 합창단 가운데 영구히 집어넣은 것 같다. 그것은 모든 희망을 버린 어떤 가련한 인간의 혼이 지옥의 어두운 골짜기를 들어서면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인데 거기에 인간의 흐느낌이 가미된 소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 소리가 더 처량하게 들리는 것은 그것이 목구멍에서 나오는듯한 음악적인 소리이기 때문인데-내가 이 소리를 흉내내려고 하면 '쿠르르' 소리가 먼저 나온다-이 소리는 모든 건전하고 과감한 사상을 억누름으로써 끈끈하고 곰팡이가 슨 상태에 도달한 인간의 마음을 나타낸다. 그 소리를 들으면 시체를 뜯어먹는 귀신들과 백치들과 미친 듯한 울부짖음이 생각났다. 그러나 지금은 올빼미 한 마리가 먼 숲에서 울고 있는데, 거리가 멀어서인지 그 소리가 몹시 음악적이다. 우엉 우엉 우엉 우우엉. 사실, 올빼미 우는 소리는 낮이든 밤이든 또 여름이든 겨울이든 나에게는 대체로 즐거운 연상만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 세상에 부엉이나 올빼미가 있는 게 좋다. 이 새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위하여 바보 같고 미치광이 같은 '부엉 부엉' 소리를 내게 하라. 그 울음소리는 낮에도 어두컴컴한 늪지대나 깊은 숲에 너무나도 걸맞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인간이 아직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미개척의 광활한 자연을 암시하고 있다. 이 새들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황혼과 해답을 구하지 못한 사념들을 나타낸다.

하루 종일 태양은 어느 야생의 늪 지대의 표면에 내리쬐었다. 거기에는 가문비나무 한 그루가 이끼가 잔뜩 낀 채로 서 있고, 자그마한 매들은 그 위를 빙빙 돌고 있다. 박새는 상록수들 틈에서 지저귀고 있고, 들꿩과 토끼는 그 밑을 살금살금 숨어다닌다. 그러나 이제 더 음산하고 이곳에 더 어울리는 밤이 다가오고 있으며, 또 다른 종류의 생물들이 잠에서 깨어나서 이곳에서의 자연의 의미를 표현하려고 하고 있다.

저녁 늦게 나는 마차들이 덜커덕거리며 다리를 지나가는 소리(밤에는 이 소리가 어떤 소리보다도 멀리까지 들린다)와 개들이 짖는 소리, 그리고 때로는 멀리에 있는 어느 외양간의 앞마당에서 들려오는 암소의 구슬픈 음매 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는 동안 호숫가는 온통 황소개구리들의 울음소리로 가닥 찬다. 호수에 수초는 별로 없어도 개구리들은 있었던 것이다. 이 개구리들이야말로 그 옛날 술깨나 마시던 주객들과 잔치꾼들의 억센 혼들로서 그들은 아직도 전혀 뉘우치는 기색 없이 이 저승의 호수에서 돌림노래 한 가락을 멋들어지게 부르려는 것이다. (월든 호수의 요정들은 나의 이 '저승의 호수'라는 표현을 용서해 주리라고 믿는다)

이 개구리들은 그 옛날 잔치상에서의 유쾌한 격식들을 지키려고 했지만 목소리는 쉬어 엄숙한 맛이 나 오히려 이들의 들뜬 기분을 풍자하는 꼴이 되었고, 술은 그 맛을 잃어 단지 배만 채워주는 액체가 되어버렸다. 과거의 기억을 잊게 할 달콤한 도취는 결코 오지 않고 물로 찬 포만감과 팽창감만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제일 연장자격인 개구리가 북쪽 물가에서 냅킨 대신 부초 위에 축 늘어진 턱을 고인 채 한때는 경멸했던 물을 깊이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개구울 개구울 개구울" 하고 크게 울면서 잔을 돌린다. 그러자 곧 어느 먼 물가로부터 똑같은 암호 소리가 수면을 타고 들려오는데 이것은 나이에서나 허리 굵기에서나 두번째 가는 개구리가 자기 몫만큼의 물을 따라 마셨다는 신호이다.

이렇게 이 의식이 호숫가를 한 바퀴 돌게 되면 이 잔치의 주최자는 만족한 듯이 "개구울" 하고 운다. 그러면 각자는 차례대로 "개구울" 소리를 반복하는데 착오가 있으면 안 되며, 마지막으로 배가 제일 적게 나오고 제일 연약해서 물이라도 샐 것 같은 개구리에 이르러서 끝이 난다. 그 후 술잔은 계속해서 몇 순을 돌며 해가 아침 이슬을 걷을 때까지 잔치는 계속된다. 그때쯤 되면 최연장자만 빼고는 모두 취해서 쓰러져 버리고 그 혼자만이 남아 이따금씩 "개굴" 하고 울어보지만 응답해주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장닭이 우는 소리를 나의 개간지에서 들은 적이 있었는지 확실한 기억이 없다. 나는 어린 수탉을 단지 그 울음소리를 들어 볼 목적으로 키워봄직도 하다고 생각했다. 한때 야생 꿩이었던 이 수탉의 울음소리는 확실히 어떤 새의 울음보다 특이한 데가 있다. 닭을 가축이 아닌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할 수 있다면 아마 그 울음소리는 머지 않아 이 근처 숲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소리가 될 것이며, 기러기의 끼룩끼룩하는 울음소리나 부엉이의 부엉부엉하는 소리를 훨씬 능가할 것이다. 게다가 수탉이 나팔부는 것을 쉴 때에는 암탉들이 그사이를 꼬꼬댁 소리로 메꾸어 줄 것이다. 달걀과 닭다리를 따지지 않더라도 인류가 닭을 가축의 대열에 끼어 넣은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느 겨울날 닭들이 떼지어 살았던 숲, 즉 그들의 고향이던 숲을 거닐다가 야생 수탉이 나무 위에서 우는 모습을 본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하여 그 울음소리가 날카롭고 또릿또릿하게 몇 마일이고 땅 위에 울려퍼져 다른 새들의 가냘픈 울음소리를 압도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 소리는 여러 민족들을 긴장시키리라. 이 소리를 듣고 그 누가 일찍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다음 날에는 더 일찍 일어나고 계속해서 끝없이 더 일찍 일어나 나중에는 말할 수 없이 건강하고 부유하고 현명하게 되지 않을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모든 나라의 시인들이 노래 잘 부르는 본토박이 새들과 함께 이 외국 태생의 새의 노래를 찬양하고 있다. 이 용감한 수탉은 어떤 풍토에도 적응할 수 있다. 그는 토박이 새들보다 더 토박이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의 건강 상태는 항상 좋으며, 그의 폐는 항상 튼튼하다. 그리고 그는 결코 의기 소침하는 일이 없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항해하는 선원들까지도 이 닭의 소리를 듣고 잠을 깬다.

하지만 내가 수탉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듣고 곤한 잠에서 깨어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개나 고양이, 소나 돼지, 닭을 기르지 않았으므로 내가 사는 곳은 가정적인 소리가 결여되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거기에는 사람을 포근하게 해주는 우유 휘젓는 소리도, 물레 도는 소리도, 솥이 끓는 소리도, 찻주전자가 끓는 칙칙 소리도, 또 아이들의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재래적 관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그 전에 권태감을 이기지 못해 죽어버렸을 것이다. 벽에는 쥐들도 살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었거나, 그보다는 애초부터 들어올 생각을 안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지붕 위와 마루 밑에는 다람쥐들이 있었고, 용마루 위에는 쏙독새, 창밖에는 푸른 어치가 울었다. 집 밑에는 산토끼나 우드척이 있었고, 집 뒤에는 부엉이나 올빼미, 호수 위에는 기러기 떼와 되강오리가 있었으며 밤에만 짖는 여우도 있었다. 그러나 농장 주변에 사는 온순한 새들인 종달새나 꾀꼬리는 단 한 번도 내 개간지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내 집 마당에는 큰 소리로 우는 수탉도 꼬꼬댁거리는 암탉들도 없었다. 아니 마당 자체가 아예 없었다. 단지 아무것에도 막히지 않는 자연이 바로 문턱까지 와 있을 뿐이었다.

창문 바로 밖에는 한창때의 어린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야생의 옻나무와 검은딸기의 뿌리들이 지하 저장실의 흙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강인한 리기다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면서 지붕의 널빤지를 부비고 있었고 그 뿌리들은 집 밑으로 뻗쳐 있었다. 강풍이 불어도 떨어져 나갈 만한 천창도 차양도 없었다. 그 대신 소나무가 집 뒤에서 부러지거나 뿌리 채 뽑혀 땔감이 되어 주고 있었다. 큰 눈이 내리면 앞마당의 대문에 이르는 길이 막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문도 없고 마당도 없고 문명 세계로 통하는 길 자체가 없었다.

 

 

 

5장 고독

 

몹시도 상쾌한 저녁이다. 이런 때는 온몸이 하나의 감관이 되어 모든 땀구멍으로 기쁨을 들이마신다. 나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그 자연 속에서 이상하리만큼 자유스럽게 돌아다닌다. 날씨는 다소 싸늘한데다 구름이 끼고 바람까지 불지만 셔츠만 입은 채 돌이 많은 호숫가를 거닐어 본다. 특별히 내 시선을 끄는 것은 없으나 모든 자연 현상들이 그 어느 때보다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황소개구리들은 밤을 맞아들이느라고 요란스럽게 울어대고, 쏙독새의 노랫소리는 잔물결이 이는 호수의 수면을 타고 들려 온다. 바람에 나부끼는 오리나무와 백양나무 잎들에 대한 친화감 때문에 거의 숨이 막힐 것만 같다. 그러나 호수나 내 마음이나 잔물결만 일 뿐 거칠어지지는 않는다. 저녁 바람에 일어나는 이 잔물결들은 명경같은 수면만큼이나 폭풍우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제 사방에 어둠이 깔렸다. 그러나 바람은 그치지 않고 불면서 숲을 휘저어 놓고 물결은 계속 부딪쳐 온다. 어떤 생물들은 자신의 노랫소리로 다른 생물들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려고 한다. 완전한 휴식은 결코 없다. 야성에 가장 가까운 동물들은 휴식을 취하지 않고 이제부터 먹이를 찾아 나선다. 여우와 스컹크와 산토끼들이 이제 두려워하지 않고 들과 숲을 돌아다닌다. 그들은 자연의 야경꾼이며, 활기찬 생명의 나날을 이어주는 고리이기도 하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방문객들이 들렸다가 명함을 남겨놓고 간 것을 발견한다. 그 명함이란 한 다발의 꽃일 수도 있고, 상록수의 가지들을 화환처럼 엮은 것일 수도 있으며, 또는 노란 호두나무 잎이나 그 나뭇조각에다 연필로 이름을 써놓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다가 숲에 오는 사람들은 도중에 나뭇가지 같은 것을 꺾어 만지작거리며 와서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남겨놓고 가기도 한다.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 그것을 고리 모양으로 엮은 다음 내 탁자 위에 놓고 간 사람도 있었다.

나는 내가 없을 때에 사람이 왔다 갔는지를 나뭇가지가 휘거나 풀잎이 구겨진 모양이나 또는 구두 자국을 보고 틀림없이 알아맞힐 수 있었다. 또 꽃 한 송이를 떨구어 놓고 간 모습이나 풀 한 묶음을 뽑아서 던져놓고 간 사소한 흔적을 보고서(비록 그것이 어떤 때는 반 마일이나 떨어진 철로변에 떨구어진 것일지라도) 또는 시가나 파이프 담배의 냄새가 남아 있는 것을 맡고서도 그 사람의 성별과 연령과 교양 정도를 대략은 맞힐 수 있었다. 심지어 나는 300미터나 떨어진 큰길을 지나가던 사람을 그의 파이프 담배 냄새로 알아본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우리 주위에는 대개 넉넉한 공간이 있다. 우리의 지평선은 바로 우리의 턱밑까지 와 있지는 않다. 울창한 숲이나 호수도 우리들의 집 문 앞까지 와 있지는 않다. 어느 정도의 공간은 항상 개척이 되어 인간과 친숙한 상태에서 인간의 발자국으로 닳아지고 있다. , 인간의 몫으로 차출되어 울타리가 쳐져 있으며, 자연으로부터는 탈취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나는 사람들로부터 버려져 있는 이 광활한 영역을, 이 몇 평방마일이나 되는 인적 드문 숲을 혼자서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도 1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으며,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지 않는 한 내 집 주위의 반 마일 이내의 지점에서는 사람 사는 집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숲으로 경계 지어져 있는 지평선을 나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철로가 호수의 한쪽 옆을 지나는 것이 멀리 보이고, 다른 편으로는 숲속의 도로를 따라 서 있는 울타리의 모습이 또한 멀리 보인다.

그러나 대체로 내가 사는 곳은 대초원만큼이나 적적하다. 여기는 뉴잉글랜드이면서도 아시아나 아프리카 같은 기분이 든다. 말하자면 나는 혼자만의 해와 달과 별들을 가지고 있으며 혼자만의 작은 세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밤에는 길손이 내 집 옆을 지나거나 내 집 문을 두드리는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것은 마치 내가 이 세상의 최초의 인간이거나 마지막 인간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봄에는 메기를 낚으러 밤낚시를 오는 마을 사람들이 이따금씩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어둠을 미끼로 해서 자신의 마음의 호수에서 더 많은 고기를 낚았던 것이 틀림없다. 왜나하면 그들은 대개 빈 바구니를 들고 곧 물러났으며, '세계를 어둠과 나에게'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밤의 어두운 핵심이 사람들의 근접으로 더럽혀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직도 사람들은 어둠을 꽤 두려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녀들은 다 잡혀서 교수형을 받았고 기독교와 양초가 널리 보급되었는데도 말이다.

나의 경험에 의할 것 같으면, 가장 감미롭고 다정한 교제, 가장 순수하고 힘을 북돋우어주는 교제는 자연물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가련하게도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나 극도의 우울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한다. 자연 가운데 살면서 자신의 감각 기능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암담한 우울이란 존재할 여지가 없다. 건강하고 순수한 사람의 귀에는 어떤 폭풍우도 '바람의 신'의 음악으로만 들린다. 소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을 속된 슬픔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사계절을 벗삼아 그 우정을 즐기는 동안은 그 어떤 것도 삶을 짐스러운 것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 내 콩밭을 적시면서 한편으로 나를 집에 머물도록 하는 저 보슬비는 지루하고 우울한 느낌을 주지 않고 오히려 내게 좋은 일을 해주고 있다. 비 때문에 콩밭을 매지 못하지만, 비는 밭 매는 것보다 훨씬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비가 오래 계속되어 땅속의 종자들이 썩고 낮은 지대의 감자 농사를 망치더라도 높은 지대의 풀에게는 좋을 것이며, 풀에게 좋다면 나에게도 좋은 것이다.

때때로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내가 그들에 비해 분에 넘치게 신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마치 내가 남들이 갖지 않은 면허장과 보증서를 신들로부터 받았으며, 신들에 의해 각별한 지도와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지금 스스로를 추어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혹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신들이 나를 추어올려 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외로움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고독감에 의해 조금이라도 억눌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꼭 한 번, 그것도 내가 숲에 온 지 몇 주일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는데, 그때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것이 명랑하고 건전한 생활의 필수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 속에 약 한 시간쯤 빠져들어 있었다. 혼자 있는 것이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내 기분이 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했으며 이 기분에서 곧 벗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으로 느꼈다.

조용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대자연 속에, 후두둑후두둑 떨어지는 비 속에, 또 내 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모든 경치 속에 너무나도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 주는 공기 그 자체처럼 무한하고도 설명할 수 없는 우호의 감정이었다. 이웃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이점이 대단치 않은 것임을 느꼈고 그 후로는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 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명히 느꼈다. 나는 나에게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거나 가장 인간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인간이거나 어떤 마을 사람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는 어떤 장소도 나에게는 낯선 곳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아름다운 토스카의 딸이여!

애도는 슬퍼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불시에 빼앗아 가나니,

이 세상에서 그들이 사는 날은 길지 않은 것이다."

내가 보낸 가장 즐거운 시간들 가운데에는 봄이나 가을에 비바람이 장시간 몰아칠 때를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날 나는 오전은 물론 오후에도 집안에 들어박혀 쉴 새 없이 부는 바람소리와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또 이때는 이른 황혼이 긴 밤을 맞아들여 많은 사념들이 뿌리를 박고 그 나래를 펼칠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저 북동 태풍이 마을의 집들을 엄습하여 하녀들이 빗자루와 물통을 들고 문간에 서서 집안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막으려고 하고 있을 때, 나는 내 작은 집의 문을 닫고 그 뒤에 앉아 비바람으로부터 완벽한 보호를 받았다.

천둥과 비바람이 요란하던 어느 날, 호수 건너편의 커다란 리기다소나무 한 그루에 벼락이 떨어진 일이 있었다. 벼락은 나무 꼭대기에서 밑둥까지 깊이가 1인치 남짓하고 폭이 4, 5인치쯤 되는 나선형의 홈을 마치 지팡이에 홈을 파듯 아주 뚜렷하고 완벽하게 파 놓았다. 얼마 전에 그 나무 옆을 다시 지나간 일이 있었는데, 나는 8년 전 악의 없는 하늘에서 무섭고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번갯불이 내리쳤던 흔적이 그 전보다 더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은 늘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그곳에선 꽤 외롭겠군요. 특히 눈이나 비가 오거나 밤 같은 때는 이웃이 그립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자체가 우주 안의 한 점에 불과합니다. 저 별의 폭의 길이는 인간이 만든 기계로는 측정할 수 없는데, 저 별에 살고 있는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의 거리가 얼마쯤 된다고 생각하시오? 어째서 내가 외롭게 느끼리라고 생각하지요? 우리의 지구는 은하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댁이 나에게 한 질문은 핵심을 찌른 질문은 아닙니다. 사람을 그의 동료들로부터 분리시켜 그를 고독하게 만드는 공간은 어떤 종류의 공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발을 부지런히 놀려도 두 사람의 마음이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압니다. 사람들은 그 무엇에 가장 가까이 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시오?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분명 아닐 겁니다. 기차역이나 우체국, 공회당, 학교, 잡화점, 술집, '비이콘 힐'이나 '화이브 포인츠'(비이콘 힐은 보스턴에 있는 번화가이며, 화이브 포인츠는 지금은 없어진 뉴욕의 우범 지역이었다)같이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곳은 아닐 것이오. 물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가 물 쪽으로 뿌리를 뻗듯 우리의 온갖 경험에 비추어 보아 생명이 분출되어 나오는 곳, 즉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곳에 가까이 살기를 원할 것이오. 사람마다 본성에 따라 각기 다르겠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곳에 지하 저장실을 팔 것이오......."

어느 날 저녁, 나는 이른바 '한 재산 톡톡히 모은' 마을 사람 하나를-그 한 재산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자세히 본 적은 없지만-월든 거리에서 뒤따른 일이 있었다. 그는 소 두 마리를 끌고 시장에 가는 길이었는데 나더러 어떻게 세상의 온갖 편의를 버릴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 현재 생활에 별 불편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물론 농담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나는 잠자리가 기다리고 있는 내 집으로 왔고, 그가 어둠 속에서 진흙 길을 더듬으며 '브라이튼'(브라이튼 : 보스턴의 도살장이 운집해 있던 지역)인가 또는 '브라이트 타운'인가 하는 데로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다음 날 아침쯤에는 그곳에 도착했으리라.

죽은 사람이 눈을 뜨고 다시 살아나리라는 가망이 있으면 그에게는 시간이나 장소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는 항상 같으며, 그러한 장소는 우리의 오관에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 대체로 우리는 핵심에서 벗어나고 일시적인 일들만을 우리의 주요 관심사로 삼는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정신이 교란되는 근본 원인인 것이다.

만물의 옆에는 그것들의 존재를 형성하는 어떤 힘이 있다. 우리들의 바로 옆에서 가장 중대한 여러 가지 법칙들이 끊임없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우리들의 바로 옆에는 어떤 일꾼이 있다. 그 일꾼은 우리가 고용하고 우리가 항상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일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일감으로 삼아 끊임없이 일하고 있는 어떤 큰 일꾼인 것이다.

"천지의 오묘한 힘의 영향은 얼마나 넓고 깊은가!"

"우리가 그 힘을 보려고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고 하지만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만물의 본질과 같은 것이어서 만물과 분리될 수 없다."

"그 힘의 작용으로 천하의 사람들은 마음을 순화하고 성스럽게 하며 복장을 갖추어 조상에게 제사를 받든다. 그것은 오묘한 지혜의 대양이다. 그것은 우리의 위와 좌우 도처에 있으며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이상 세 구절은 <중용> 16장에서 인용한 공자의 말이다)

우리는 내가 적잖게 흥미를 갖고 있는 어떤 실험의 피험자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잠시나마 어울려 잡담이나 하는 것을 삼가하고 우리 자신의 사고로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지낼 수는 없을까? 공자는 다음과 같은 진리의 말을 했다. "덕은 결코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 ( <논어> 425)

 

사색을 함으로써 우리는 건전한 의미의 열광 속에 빠질 수 있다. 마음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우리는 행위들과 그 결과들로부터 초연하게 서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만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격류처럼 우리의 옆을 지나치게 된다.

우리는 자연 속에 전적으로 몰입되어 있지는 않다. 나는 시냇물에 흘러가는 나무토막일 수도 있고, 또는 하늘에서 그 나무토막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드라 신 (인드라 신 : 힌두교의 신 중의 하나로 공기, , , 바람과 천둥을 다스린다)일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연극 공연에 감동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나에게 훨씬 더 이해 관계가 있을지 모르는 실제의 사건에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내 자신을 인간적 실제로서만, 다시 말하면 여러 가지 사고와 감정의 장소로서만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물론 나 자신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어떤 이중성을 느끼고 있다.

나의 경험이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나는 나의 일부분이면서 나의 일부분이 아닌 것처럼 나의 경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단지 방관자로서 메모를 하고 있는 어떤 부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 부분은 ''라기보다는 차라리 제삼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인생의 연극-그것은 비극일 수도 있겠는데-이 끝나면 그 관객은 제 갈 길을 가버린다. 그 관객에 관한 한 그 인생극은 일종의 허구이며 상상의 작품일 따름인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종종 우리를 변변치 않은 이웃이나 친구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 심신에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라도 같이 있으면 곧 싫증이 나고 주의가 산만해진다. 나는 고독만큼이나 친해지기 쉬운 벗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방안에 홀로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대개는 더 고독하다. 사색하는 사람이나 일하는 사람은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항상 혼자이다. 고독은 한 사람과 그의 동료들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의 길이로 재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버드 대학의 혼잡한 교실에서도 정말 공부에 몰두해 있는 학생은 사막의 수도승만큼이나 홀로인 것이다.

농부는 하루 종일 혼자 밭에서 김을 매거나 숲에서 나무를 베면서 일을 하더라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일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밤에 집에 돌아오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방안에 가만히 혼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하루 종일 혼자 있었던 것에 대해 스스로를 보상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을 만나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부는 학생이 온 밤과 낮의 대부분을 집에 있으면서 어떻게 권태와 우울증을 느끼지 않나 하고 의아해 한다. 농부는 학생이 집에 있더라도 농부처럼 그 나름대로의 밭을 갈고 그 나름대로의 나무를 베고 있으며, 그런 다음에는 좀 더 집중된 형태이긴 하지만 농부와 똑같은 휴식과 교제를 찾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교제는 대체로 값이 너무 싸다. 우리는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각자 새로운 가치를 획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는 하루 세 끼 식사때마다 만나서는 우리 자신이라는 저 곰팡내 나는 치즈를 새로이 서로에게 맛보인다.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이 견딜 수 없게 되어 서로 치고 받는 싸움판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의 범절이라는 일정한 규칙들을 협의해 놓아야만 했다.

우리는 우체국에서 만나는가 하면 친목회에서 만나며, 매일 밤 난롯가에서 또 만난다. 우리는 너무 얽혀서 살고 있어서 서로의 길을 막기도 하고 서로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렸다. 조금 더 간격을 두고 만나더라도 중요하고 흉금을 터놓는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터인데도 말이다.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저 여자 공원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꿈 속에서까지 혼자 있는 일이란 없다. 내가 사는 이곳처럼 1평방마일마다 한 사람이 살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사람의 가치는 피부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사람의 피부를 만져본다고 그의 가치를 아는 것은 아니다.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어 나무 밑에서 굶주림과 피곤함으로 거의 죽어가고 있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그는 육체의 쇠약으로 인한 병적 상상력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괴기한 환영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했고 또 이것들을 실재의 것으로 믿었는데, 그 환영들 때문에 고독감을 면하고 결국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과 힘을 지니고 있으면 위와 같은, 그러나 더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교제를 통하여 기운을 얻게 되며 우리가 결코 홀로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 집에는 무던히도 많은 친구들이 있다. 특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아침에는 더욱 그렇다. 나의 처지에 대한 개념이 전달될 수 있도록 몇 가지 비유를 들어 보겠다. 마치 웃는 것 같은 특유한 울음을 큰 소리로 우는 호수의 저 되강오리가 외롭지 않듯이, 그리고 월든 호수가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저 고독한 호수가 도대체 어떤 벗들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저 호수는 그 감청색의 물 속에 '푸른 악마들'(푸른 악마들(blue devils)은 우울증을 뜻한다)이 아닌 푸른 천사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태양은 홀로이다. 비록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태양이 두 개처럼 보이는 때도 있지만 하나는 가짜 태양인 것이다. 하느님 역시 홀로 존재한다. 그러나 악마는 결코 혼자 있는 법이 없다. 그는 많은 패거리들과 어울려 대군을 이루고 있다. 목장에 핀 한 송이의 우단현삼이나 민들레꽃, 콩잎, 괭이밥, 등에, 그리고 뒤영벌이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밀부룩'(밀부룩 : 콩코드의 중심부를 흐르는 개천의 이름)의 개천이나 지붕 위의 풍향기, 북극성, 남풍, 4월의 봄비, 정월의 해동, 그리고 새로 지은 집에 자리 잡은 첫 번째 거미-이런 모든 것들이 외롭지 않은 것처럼 나도 외롭지 않다.

숲속에 눈이 펑펑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긴 겨울밤이면 호수의 옛 개척자며 원래 주인이었던 이가 이따금씩 찾아온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 양반이 월든 호수를 파서 돌로 기반을 단단히 한 다음 주위에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 옛날에 있었던 일과 새로운 영원에 대하여 이야기해 준다. 우리 두 사람은 사과나 과일즙 없이도 사교적인 기쁨과 유쾌한 잡담을 나누면서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곤 한다. 나의 친구는 몹시 현명하고 유머 감각이 풍부해서 나는 그를 무척 좋아한다. 그는 '고프''훨리'(고프와 훨리는 17세기 중반의 영국인들로 국왕 찰스 1세의 처형에 가담한 다음 미국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숨어 살았다)보다도 더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돌아다닌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는데, 그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늙수그레한 마나님도 이 근처에 살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가 않는다. 때때로 나는 이 마나님의 향기로운 약초밭을 거닐면서 약초도 캐며 그녀의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이 마나님은 비할 데 없는 풍요와 천재성을 겸비한 분인데, 뛰어난 기억력은 신화 이전까지 올라가서 모든 전설의 기원과 그 전설이 어떤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까지도 말할 수 있다. 안색이 훤하고 기력이 좋은 이 늙은 부인은 어떤 기후나 계절도 다 좋아하며 자신의 어떤 자녀보다도 더 오래 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자연은-해와 바람과 비, 그리고 여름과 겨울은-말로 표현할 수 없이 순수하고 자애로워서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건강과 환희를 안겨준다. 그리고 우리 인류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정당한 이유로 슬퍼한다면 온 자연이 함께 슬퍼해 줄 것이다. 태양은 그 밝음을 감출 것이며 바람은 인간처럼 탄식할 것이며 구름은 비의 눈물을 흘릴 것이며 숲은 한 여름에도 잎을 떨구고 상복을 입을 것이다. 내가 어찌 대지와 교류를 갖지 않겠는가? 내 자신이 그 일부분은 잎사귀이며 식물의 부식토가 아니던가!

우리들을 늘 건강하고 명랑하고 만족스럽게 해줄 묘약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나 당신의 증조부가 빚은 환약이 아니고, 바로 우리 모두의 증조모인 자연의 여신이 빚은 우주적이고 식물적이고 또 식물학적인 약인 것이다. 이 약을 가지고 자연의 여신은 자신의 젊음을 유지해 왔으며, 수없이 많은 '파아 노인'(토마스 파아 : 152세까지 살았다는 영국의 대표적인 장수 노인) 같은 장수자들보다 항상 더 오래 살았으며, 그들의 썩은 지방으로 자신의 건강을 키워 왔다.

내가 원하는 만병통치약은 엉터리 의사가 저승의 강과 사해의 물을 부어 조제해서는 병의 운반용으로 제작된 것을 종종 볼 수 있는 저 길고 납작한 검은 배 같은 마차에 싣고 다니면서 파는 물약병이 아니다. 내가 진정 아끼는 만병통치약은 묽게 하지 않은 순수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이다.

, 아침 공기! 만약 사람들이 하루의 원천인 새벽에 이 아침 공기를 마시려 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병에 담아 가게에서 팔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침 공기는 아무리 차가운 지하실에 넣어둔다 해도 정오까지 견디지 못하고 그 전에 벌써 병마개를 밀어젖히고 새벽의 여신을 따라 서쪽으로 날아 가버릴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나는 늙은 약초의 아이스큐라피우스의 딸이며, 한 손에는 뱀을 들고 다른 손에는 그 뱀이 물을 마시는 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상에 새겨진 히기에이아 여신(히기에이아 : 그리스 신화에서의 건강의 여신)의 숭배자는 아니다. 나는 오히려 주노 여신과 야생 상추의 딸이며, 신과 인간을 회춘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주피터 신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모습으로 묘사된 헤베 여신(헤베 : 그리스 신화에서의 청춘과 봄의 여신)의 숭배자이다. 이 여신이야말로 지구의 역사상 아마 가장 완벽한 신체조건을 갖춘, 가장 건강하고 굳센 젊은 여성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가 나타나는 곳에는 어디서나 바로 봄이 열리는 것이었다.

 

 

 

6장 방문객들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교를 즐기며, 진정한 열정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 한참 동안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나는 타고난 은둔자는 아니다. 일이 있어 주점에 가는 경우에는 가장 끈질긴 손님보다도 더 오래 눌러앉아 있기도 한다.

내 집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이며, 세 번째 것은 사교를 위한 것이다. 손님들이 뜻밖에 많이 찾아올 때는 그들을 위해서 세 번째 의자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대개 서 있음으로 해서 방을 효율적으로 이용했다. 조그만 집이라도 꽤 많은 수의 어른 남녀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는 한꺼번에 스물다섯 내지 서른 사람의 영혼을 그 육체와 함께 내 집의 지붕 아래에 받아들인 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들 빽빽이 끼어 있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 헤어지곤 했다.

, 사용할 것 없이 우리들의 주택 가운데 많은 수가 그 안에 사는 주민들에게 지나치게 크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방들과 넓다란 홀 그리고 주류 및 다른 평화시의 군수품들을 저장하는 지하실이 있다. 집들이 너무나 크고 웅장하기 때문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의 거주자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안에 기생하는 해충들처럼 보인다. 전령관이 트레몬트 호텔이나 에스터 호텔 또는 미들섹스 하우스 같은 큰 호텔 앞에서 나팔을 불 때, 호텔 바로 앞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한 넓은 광장에 생쥐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가 다시 보도의 어떤 구멍으로 기어들어 가던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생각난다.

내 작은 집에서 이따금 느끼는 한 가지 불편은 손님과 내가 큼직한 사상을 큼직한 말로 표현하기 시작할 때 두 사람 사이에 충분한 거리를 두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이 예정된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항해 준비를 완전히 갖추고 한두 항로를 달려 볼 수 있는 공간을 갖기를 바란다. 사상이라는 탄환은 듣는 사람의 귀에 도착하기 전에 좌우 상하의 동요를 극복하고 마지막의 일정한 탄도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탄환은 듣는 사람의 머리를 뚫고 반대 방향으로 나올지 모른다.

우리들이 표현하는 문장들 역시 넓게 펼쳐져 대열을 정비할 만한 공간을 원했다. 국가들처럼 개인들도 서로의 사이에 적당한 크기의 넓직하고 자연스러운 경계선과 상당한 크기의 중립 지대를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친구 한 사람과 호수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주 드문 즐거운 경험이었다.

내 집에서는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 서로에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잔잔한 물에 두 개의 돌을 너무 가까이 던지면 두 개의 파문이 서로를 교란하듯이 말이다.

우리가 단지 고성 다변만을 즐긴다면 뺨과 턱을 마주 대다시피 하고 상대방의 입김을 맡을 만큼 가까이서 이야기해도 좋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신중하고 사려 깊게 이야기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떨어져서 서로의 동물적 열기와 습기가 증발할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서로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 중 대화의 범위 위나 밖에 있는 것을 진정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침묵을 지키며 서로의 말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신체적으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말이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세상에는 큰소리를 쳐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섬세한 것들이 있다. 대화가 점점 심각하고 고차원적인 색채를 띠면, 우리는 의자를 더욱더 뒤로 밀어 나중에는 벽에까지 닿게 되어 더 이상 물러날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가장 좋은 방, 항상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응접실은 내 집 뒤에 있는 소나무 숲이었다. 이 방의 양탄자에는 해가 쬐는 적이 거의 없었다. 여름날 귀한 손님들이 오면 나는 그들을 이 소나무 숲으로 모셨다. 그 가치를 헤아릴 수가 없는 소중한 하인이 이 방의 마루를 쓸고 가구의 먼지를 털었으며 모든 것을 깨끗이 정돈해 놓곤 했다.

손님이 한 사람인 경우에는 종종 나와 함께 소찬을 들었다. 그런 때면 '즉석 푸딩'을 휘저어 만들거나 재 속에 묻은 한 덩이의 빵이 부풀어 올라 익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대화를 지속하는 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스무 명의 손님이 와서 집에 앉아 있을 때는 비록 두 사람분의 빵이 있더라도 식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마치 밥 먹는 것이 사라져 버린 관습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금욕을 실천했다. 그러나 그것이 손님 대접의 예의를 벗어난 것으로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오히려 적절하고 사려 깊은 행위로 여겼다.

이런 경우, 항상 보급을 해주어야 하는 육체적 생명의 소모와 쇠약은 기적적으로 저지되고 오히려 생명의 힘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것 같았다. 이런 식이라면 스무 명이 아니라 이천 명의 손님도 접대를 할 수 있었으리라. 만약 어떤 손님이 내가 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망해서 또는 배가 고파서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면, 최소한 내가 그들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믿어주길 바란다.

많은 가정주부들은 쉽사리 믿지 않겠지만 낡은 관습 대신에 새롭고 보다 나은 관습을 확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식사에 여러분의 평판을 걸 필요는 없다. 지옥 문을 지키고 있다는 '케르베로스의 개'만큼이나 내가 어떤 사람의 집에 가는 것을 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식사에 초대한 사람이 요리에 대해서 취하는 지나친 과시적 행동이다. 나는 그것을 주인이 나에게 다시는 자기를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아주 점잖은 간접적인 암시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런 곳에는 다시 가지 않을 생각이다.

다음 시는 어떤 방문객이 명함 대신 노란 호두나무 잎에 적어 놓고 간 스펜서 (에드먼드 스펜서(1552~1599) : 영국의 시인. 여기에 나오는 시는 그의 서사시 <요정의 여왕>에서 인용한 것이다)의 시이다. 이것을 내 오두막의 표어로 자랑스럽게 내걸 수도 있겠다.

"그곳에 이르러 그들은 오두막을 가득 채웠으나

도락이 원래 없는 곳이니 도락을 찾지 않는다.

휴식이 그들의 만찬이며 모든 것이 뜻대로이다.

가장 고귀한 정신이 가장 큰 만족을 얻는다."

후에 플리머스 식민지의 지사가 된 윈슬로우가 매사소이트 추장 (1620,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호의를 베풀었던 인디언 추장)을 예방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수행원 한 사람을 데리고 걸어서 숲속을 지나 추장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피곤하고 배가 고팠다. 그들은 추장의 환대를 받았으나 식사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가 없었다. 밤이 되자-그들 자신의 말을 인용하면-"추장은 우리를 자기 부부와 한 침대에 눕게 했다. 이 침대는 1피트 정도의 높이에 판자로 되어 있었고 그 위에 돗자리를 깔은 것이었는데, 한쪽 구석에 그들 부부가 다른 구석에 우리가 누워 잤다. 추장의 심복 부하 두 사람이 잘 데가 없어 우리 옆에 끼어 잤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에서보다 잠자리에서 더 피로를 느꼈다."

다음 날 오후 한 시쯤 매사소이트 추장은 "그가 직접 활로 쏘아서 잡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다." 크기가 송어의 세 배쯤 되는 고기였다. "그것을 끓여 놓자 적어도 40명쯤 되는 사람들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이것이 두 밤과 하루 낮 동안에 우리가 먹은 식사의 전부였다. 우리 둘 중의 한 사람이 들꿩 한 마리를 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내내 굶으면서 여행을 했을 것이다." 먹을 것도 없는데다 "인디언들의 야만스러운 노래 때문에(왜냐하면 그들은 노래하면서 잠이 드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정신이 이상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또 여행할 기력이 남아 있는 동안 집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나섰다.

확실히 잠자리 면에서 그들이 받은 대접은 썩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실은 그들이 느낀 불편은 인디언들이 경의를 표하려는 데서 초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식사에 관한 한 인디언들이 그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 자신들도 먹을 것이 없었고, 또 손님들에게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 식사에 대신이 되리라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식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윈슬로우가 다시 그들을 방문했을 때는 먹을 것이 풍부한 때였으므로 이 점에서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지 방문객의 부족을 느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숲속에 사는 동안 내 생애의 그 어떤 시기보다 많은 방문객들을 맞았다. , 방문객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곳에서 나는 어느 곳에서보다 유리한 환경 아래 몇몇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사소한 일로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훨씬 줄어들었다. 이 점에서 보면 나의 방문객은 단지 내 집이 마을에서 떨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추려졌다고 하겠다. 나는 고독이라는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고, 이 바다로 사교라는 이름의 여러 강들이 흘러들었다. 그러나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따져볼 때, 대체로 가장 훌륭한 침전물들만이 내 주위에 와 쌓였다. 게다가 반대편 쪽에는 아직 탐사되거나 개척되지 않은 대륙들이 있다는 증거들이 바닷물에 떠내려오곤 했다.

오늘 아침 나의 집을 찾아온 사람은 참으로 호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이나 파플라고니아(파플라고니아 : 고대 소아시아에 있었던 나라. <일리아드>에서도 언급이 된다)인 같은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이 사람은 너무나 그럴듯한 시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 그는 캐나다 태생의 나무꾼이며, 나무 기둥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하루에 50개의 기둥에 구멍을 팔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개가 사냥해온 우드척을 요리해서 어제 저녁 식사로 먹었다고 한다.

그 사람 역시 호머에 대해 들은 적이 있으며, "만약 책이 없다면 비오는 날 소일할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여러 차례의 우기 동안에도 한 권의 책을 다 읽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스어를 웬만큼 할 수 있던 어느 신부가 그의 먼 고향 땅에서 그에게 신약성서의 구절들을 그리스어로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제 나는 그가 책을 들고 있는 동안 아킬레스(아킬레스 :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인물로 그리스 군 최고의 용사이다. 패트로클로스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가 패트로클로스의 슬픈 안색을 책망하는 구절을 그에게 번역하여 들려주어야 한다.

"그대는 어찌하여 계집아이처럼 눈물에 젖어 있는가,

패트로클로스여?

혹은 그대 혼자서 프시아에서 온 소식을 들었는가?

듣건대 액토르의 아들 메노티우스가 아직 살아 있으며

이아쿠스의 아들 페리우스도 미르미돈 사람들 사이에 살아 있다네.

그들 중 누구이고 죽었다며는 우리가 크게 슬퍼해야겠지만."

"이 구절 정말 멋있군요." 하고 나무꾼은 말한다. 일요일인 오늘 아침 그는 흰 참나무 껍질을 한 다발 팔 밑에 끼고 있다. "일요일에 이런 책을 읽어도 불경스러운 일은 아니겠지요." 하고 그는 덧붙인다. 그는 호머를 위대한 작가로 보았지만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이 사람보다 더 소박하고 자연적인 사람을 찾아보기란 힘들 것이다. 이 세상 위에 그처럼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악덕과 질병은 그에게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나이는 스물여덟쯤 되었는데, 12년 전에 캐나다의 고향 집을 떠나 미국으로 왔다. 이곳에서 일을 하여 돈을 벌어서는 농장을 마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때는 아마 고국으로 다시 돌아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외모는 상당히 투박했다. 땅땅한 체격에 동작이 느렸으나 몸가짐은 점잖았다. 햇빛에 탄 굵은 목, 더부룩한 검은 머리, 그리고 정기가 없는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눈은 이따금씩 감정 표현으로 밝게 빛나곤 했다. 그는 납작한 회색천 모자에다 칙칙한 양털 외투, 그리고 소가죽 장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는 고기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여름 내내 나무를 베어 넘겼는데 그때는 도시락통을 들고 내 집 앞을 지나 2마일쯤 떨어진 그의 일터로 가곤 했다. 양철통에 담은 도시락은 차게 한 고기로 대개는 우드척 고기였다. 그리고 돌로 만든 병에 커피를 담아 허리띠에 매달고 다녔는데 가끔 나에게 한 잔 들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는 아침 일찍 나의 콩밭을 가로질러 지나다녔으나 미국인처럼 무엇에 쫓기듯이 서둘러 일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는 무리하게 일을 하지 않았으며 그 날의 하숙비만 벌어도 상관 없다는 태도였다. 때때로 길을 가다가 개가 우드척이라도 잡는 때에는 도시락을 숲속에다 던져두고는 1마일 반을 걸어 하숙집으로 되돌아가서는 우드척을 손질하여 그 집 지하실에 보관했다. 그러나 하숙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차라리 그 우드척을 일이 끝나는 저녁 시간까지 호숫물 속에 담가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반 시간쯤 골똘히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아침에 내 집 앞을 지날 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산비둘기들이 무진장 많아요. 매일 하는 노동일만 아니면 산비둘기며 우드척, 산토끼, 들꿩 같은 것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을텐데, 정말이지, 하루만 사냥해도 1주일 먹을 것은 넉넉히 잡을 겁니다."

그는 능숙한 나무꾼으로 나무를 벨 때 약간의 멋을 부리길 즐겼다. 그는 나무를 지면에 가깝게 고르게 잘라냈다. 그래서 나중에 새순이 날 때도 좀 더 무성하게 나오고, 썰매가 그루터기 위를 지나더라도 미끄러지듯 넘어가도록 했다. 그리고 장작 다발들의 받침목을 통나무로 내버려 두지 않고 가느다란 나무로 잘라 사용자가 나중에 손으로도 끊어 쓸 수 있도록 했다.

내가 그에게 흥미를 가진 이유는, 그가 그처럼 말이 없는 외톨이이면서도 몹시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쾌활과 만족의 샘 같았는데 그 샘의 물은 그의 눈을 통해 철철 흘러넘쳤다. 그의 기쁨은 순수한 것이었다. 나는 종종 그가 숲에서 나무를 베며 일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런 때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족의 웃음소리를 내며 나를 맞이했으며, 영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지만 캐나다식 불어로 인사말을 했다. 내가 다가가면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는 기쁨을 억제 못 하는 듯, 잘라 놓은 소나무 위에 길게 누웠다. 그리고는 소나무의 속껍질을 벗겨 돌돌 뭉쳐 입 안에 넣어 씹으면서 웃기도 하고 이야기도 했다.

그는 너무나 야생동물과 같은 기백이 넘쳤기 때문에 이야기 도중 어떤 일이 재미있다고 생각되면 웃다가 굴러떨어져 땅에 뒹굴기도 했다. 사방의 나무들을 둘러보면서 그는 소리치곤 했다.

"사실 말이지, 나무 베는 일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 이상 재미있는 일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는 간혹 한가할 때 권총을 가지고 온종일 숲속을 돌아다니면서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자신을 위하여 축포를 쏘며 즐겼다. 겨울에는 불을 피워 놓고 점심때가 되면 주전자에 커피를 끓였다. 점심을 먹으려고 통나무에 앉으면 박새들이 모여들었으며 때로는 그의 팔에 내려앉아 손에 든 감자를 쪼아먹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이 꼬마 녀석들이 이렇게 와서 노는 게 참 좋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동물적 인간이 주로 발달되어 있었다. 육체적 인내력과 만족 면에서 그는 소나무와 바윗돌을 사촌이었다. 나는 그에게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때로는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천만에요. 평생 피곤해 본 일이 없어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부의 지적인 인간, 소위 정신적인 인간은 갓난아이 안에서처럼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카톨릭교 신부가 원주민에게 가르치는 그런 천진난만하고 비효과적인 방법으로만 교육을 받았었다. 이 방법으로는,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 자각을 할 정도까지는 결코 교육을 받지 않고 단지 신뢰와 존경을 표시할 정도로만 교육을 받는다. 어린아이는 어른으로 자라도록 도움을 받지 않고 어린아이로만 남아 있게 된다. 자연의 여신이 그를 만들었을 때 그녀는 그의 몫으로 건강한 육신과 만족을 주었으며 그가 어린아이로 칠십 평생을 살 수 있도록 그의 온몸에 존경심과 신뢰하는 마음을 심어 놓았다.

그는 너무나 순수하고 세속적으로 전혀 닦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드척을 이웃 사람에게 소개할 수 없듯이 그 사람 역시 소개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내 자신이 그랬듯이 이웃 사람도 자기 스스로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어떠한 역할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았으며 그것으로 의식 문제 해결에 충당해 썼으나 결코 사람들과 자신의 생각을 주고받지 않았다. 아무런 욕망이 없는 사람에게 겸손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이 사람의 겸손은 너무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그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할 수 없었고 그 자신도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명한 사람들을 그는 반신과도 같은 존재로 우러러보았다. 만약 그런 현인이 올 예정이라고 그에게 말하면, 그는 그처럼 위대한 존재는 자기에게 어떤 기대도 걸지 않을 것이고 또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며 자기는 그냥 잊혀진 존재로 놔둘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 칭찬의 말이란 한 마디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특히 작가와 목사를 우러러보았다. 그들이 하는 일은 기적을 시행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나 자신도 글을 꽤 쓰노라고 그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오랫동안 그 말이 단지 글씨를 많이 쓴다는 뜻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글씨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길을 가다가 종종 그의 고향 이름이 불어 특유의 악센트까지 덧붙여져 길 옆의 눈 위에 멋진 글씨체로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지나간 것을 알곤 했다.

그에게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은 적은 없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내 질문에 대하여 그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대신 읽거나 써준 적은 있으나 자기의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대답했다. 아니, 써보려고 해도 쓸 수 없을 것이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며 게다가 철자법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더 계속하다가는 자기는 죽고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저명한 사회개혁가가 세상이 좀 바뀌는 게 좋지 않겠는가 하고 그에게 묻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놀란 듯한 웃음과 함께 그 특유의 캐나다 억양으로 "아니, 이대로가 좋은데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질문에 전에도 제기되었다는 것을 몰랐으리라. 만약 철학자가 그와 교제를 한다면 많은 암시를 받게 될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일반적으로 주었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그에게서 전에 보지 못하던 측면을 보는 적이 있었다. 그럴 때는 그가 셰익스피어처럼 현명한 사람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린애처럼 무식한 사람인지, 또는 그가 섬세한 시적인 의식을 가진 건지 아니면 그냥 어리석은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떤 마을 사람은 내게 말하기를, 그 나무꾼이 꼭 맞는 조그만 모자를 쓰고 휘파람을 불면서 마을을 산책하는 것을 보면 변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왕자가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는 연감 한 권과 산술책 한 권뿐이었는데, 그의 산술 실력은 꽤 높은 편이었다. 연감은 그에게는 일종의 백과사전 같은 역할을 했다. 그는 연감이 인간의 지식이 압축되어 담긴 책으로 보고 있었는데 사실 그렇게 생각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현재 진행되는 여러 가지 개혁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물어보기를 즐겼다. 그런데 그 때마다 그는 한 번도 그 문제들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가장 소박하고 실제적인 측면에서 그 문제들을 따져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공장이 없어도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을까 하고 내가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자기는 집에서 짠 버몬트산 회색 옷감으로 된 옷을 입고 있는데 품질에 만족한다는 것이었다. 차나 커피 없이도 지낼 수 있는가? 이 나라에 물 말고도 어떤 음료가 있겠는가? 그는 솔송나무 잎을 물에 담가두었다가 그 물을 마셔 보았는데 더운 날씨에는 맹물보다 낫더라고 대답했다.

돈이 없어도 살 수 있겠는가 하고 물어보자 그는 돈의 편리한 점을 나에게 설명했는데, 그의 설명은 화페 제도의 기원에 대한 가장 철학적인 설명과도 일치했으며, 라틴어로 ''을 뜻하는 '페쿠니아'라는 단어의 어원과도 일치했다. 가령 한 마리의 소를 그의 재산으로 친다면, 바늘과 실을 가게에서 사려고 하는 경우 그 때마다 소의 일부분을 그 값만큼 저당잡히는 것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제도를 어떤 학자보다도 더 잘 변호할 수 있었는데, 자기와 관련된 측면을 중심으로 그 제도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널리 퍼진 참다운 이유를 지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이유들을 찾아 이리저리 숙고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은 플라톤의 인간에 대한 정의-, '깃털이 없는 두 발 동물'-를 듣고, 또 어떤 사람이 털 뽑은 수탉을 들고 그것을 플라톤의 인간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는 사람과 닭은 무릎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굽혀진다는 것을 지적하며 그것은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따금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얘기하는 게 이렇게 재미있다니! 정말이지 하루 종일이라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어느 때인가 여러 달 동안 그를 보지 못하다가 만났을 때 나는 여름 동안 무슨 새로운 생각이라도 한 게 있느냐고 물었다. "별 말씀을요." 하고 그는 대답했다. "나같이 일이나 하는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을 잊어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만약 당신과 함께 김을 매는 사람이 김매기 경주를 하자고 한다면 당신도 거기에 정신을 쏟게 되겠지요. , 잡초 생각만 하게 될 겁니다." 이처럼 오래간만에 만날 경우 어떤 때는 그가 먼저 나더러 그 동안 무슨 발전이 있었는가 하고 묻기도 했다.

어느 겨울날 나는 그더러 항상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는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그의 외부에 있는 신부를 내부에서 대신할 만한 어떤 대체물을 제시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좀 더 고귀한 어떤 동기를 제시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만족이라고요?" 하고 그는 말했다. "사람에 따라 만족도 가지각색이겠지요.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이 넉넉하면 등을 난로 쪽으로 향하고 배를 식탁에 맞대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별의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그로 하여금 사물의 정신적인 면을 보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가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최고의 개념은 동물 역시 이해하리라고 생각되는 '단순한 편리' 같은 개념이 고작이었다. 하긴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내가 그의 생활방식에 어떤 개선을 제시하면 그는 별로 후회하는 기색 없이 이미 늦었다고만 대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직과 기타 여러 가지의 미덕은 철저히 신봉하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는 비록 사소할망정 어떤 근본적인 독창성이 존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독자적인 사고를 하고 그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을 볼 경우가 있었다. 이런 현상은 매우 희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아무 때이고 10마일을 걸을 용의가 있다. 이 나무꾼의 경우 그의 독창적인 견해는 한 마디로 얘기해서 사회의 여러 가지 제도를 재구성해 보는 것이었다. 비록 그가 망설이며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항상 내놓을 만한 사상을 배후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고방식이 너무 원시적인 데다 자신의 동물적 생활 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단순한 학식만을 가진 사람의 생각보다 더 유망했을지라도 남에게 전달될 수 있는 어떤 형태로 성숙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 나무꾼의 존재는 인생의 최하층에도 천재적인 인물들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 사람들은 비록 평생 비천하고 무식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항상 독창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며,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전혀 견해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비록 어두컴컴하고 흙탕물 같을망정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그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하는 월든 호수와 같다고나 할까.

 

길을 가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나와 내 집의 내부를 보려고 일부러 길을 돌아왔으며, 찾아온 구실로 물 한 잔을 청했다. 나는 내 자신이 음료수로 호숫물을 마신다는 말과 함께 호수 쪽을 가리키면서 바가지를 빌려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외진 곳에 살았지만 사람들이 매년 4월 초하루 전후쯤 해서 나가는 봄나들이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았다. 나 역시 내 몫에 해당하는 방문객들을 맞이했는데 그 중에는 좀 유별난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예를 들면 빈민구호소나 그 밖의 곳에 사는 머리가 좀 모자라는 사람들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나는 그들이 머리를 전부 짜내어 자신의 신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 경우 우리는 '머리'를 대화의 주제로 삼았으며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 중의 몇 사람은 소위 빈민감독관이나 시의원들보다 실은 더 현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주객이 전도되어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머리'라는 것도 머리가 온전한 사람과 반편인 사람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양순하고 머리가 좀 모자라는 가난한 사람 하나가 찾아와서는 나와 같은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이 사람은 들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곡식 부대 위에 앉거나 서서 가축들이(또는 자신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인간 울타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소위 겸손이라는 것을 능가하는, 아니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는 극도의 소박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자기는 '지적 능력이 결여'되었다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하느님이 자신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하느님은 남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걱정해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 때부터 항상 그랬어요. 온전한 정신이었던 때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어요. 정신박이었던 것이지요. 이것도 하느님의 뜻일 겁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마치 자기 말의 진실성을 입증이나 하려는 듯이 그는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나에게는 형이상학적인 수수께끼였다. 나는 그처럼 유망한 기반 위에서 동료 인간을 만난적이 별로 없었다. 그가 한 말은 모두 너무나도 소박하고 진지했으며 거짓이 없었다. 정말이지 그가 스스로를 낮춘 만큼 그는 더 높게 보였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것은 현명한 처신 방법의 결과였다. 이 가난하고 머리가 좀 모자란 가련한 사람이 다져놓은 진실과 정직의 기반위에 우리의 교제는 현자들 사이의 교제보다 더 훌륭한 것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나는 마을의 극빈자 대열에 끼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끼어야 할 사람들, 아무튼 세계의 극빈자 대열에는 낄 만한 사람들의 방문도 받았다. 이 사람들은 손님 대접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손님 대접'을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도움을 호소하는데, 그보다 먼저 자기는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아예 없노라는 뜻을 밝힌다. 나는 손님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식욕을 가졌더라도(그가 그 식욕을 어떻게 해서 가졌는지는 모르나),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되어서 나를 찾아오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자선의 대상은 손님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다시 내 일을 보기 시작했고 점점 더 멀리서 대답하는데도 자기들의 방문이 끝난 줄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철새처럼 이동하는 계절에는 지능 면에서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 어쩔줄 몰라했다. 농장을 도망쳐 나왔지만 아직도 농장에서 하던 대로 굽신굽신하는 버릇이 남아 있는 도망 노예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처럼 자기들 뒤를 쫓아오는 사냥개 소리라도 들리지 않나 해서 때때로 귀를 기울이다가는, "아아, 기독교도여! 당신은 나를 돌려보낼 셈이오?" 하고 말하는 듯 애원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진짜 도망 노예 한 사람을 북극성을 따라 계속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준 적이 있었다.

병아리 한 마리(그것도 실은 오리 새끼인데)를 달고 다니는 암탉처럼 한 가지 생각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천 가지의 생각과 부스스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백 마리의 병아리를 떠맡은 암탉과도 같았다. 이 병아리들은 모두 한 마리의 벌레를 쫓다가 그중 스무 마리는 매일 아침의 이슬 속에 길을 잃었으며, 그 와중에 어미닭은 털이 다 빠지고 온통 지저분한 꼴이 되는 것이었다.

수족 대신 여러 가지 착상을 달고 다니는 일종의 지적인 지네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보면 온몸이 스멀거렸다. 어떤 사람은 화이트 산에서처럼 방문객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명부를 비치해 놓을 것을 제안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기억력이 좋아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방문객들의 몇 가지 특징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숲속에 들어온 것이 좋은 것 같았다. 그들은 호수를 들여다보고 꽃들을 살펴보면서 시간을 잘 선용하였다. 사업가들은 그리고 심지어 농부들까지도 내가 홀로 지내는 점이나 내가 무엇을 하며 먹고 사는가, 또는 내가 이런 것 저런 것에서 떨어져 사는 불편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종종 숲속을 거닐기를 즐긴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즐기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생활비를 버느라고 자기의 모든 시간을 다 뺏기고 있는 바쁘고 여유 없는 사람들, 신에 관한 화제라면 자기들이 독점권을 가진 것처럼 말하며 다른 어떤 견해도 용납하지 못하는 목사들, 의사와 변호사들, 그리고 내가 없는 사이에 나의 찬장과 침대를 들여다보는 무례한 가정주부들(모 부인은 나의 침대 시트가 자기의 침대 시트보다 깨끗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안정된 전문 직업의 닦여진 가도를 걷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린 더 이상 젊지 않은 젊은이들,-이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는 나의 현재의 위치에서는 큰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나이와 성별을 망라한 이들 늙고 병들고 겁 많은 사람들은 질병과 불의의 사고와 죽음에 대해서만 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인생은 위험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러나 위험에 대해서 생각지 않으면 어떤 위험이 있겠는가?) 그리고 신중한 사람이라면 어디를 가더라도 마을의 의사인 B씨가 바로 달려올 수 있는 안전한 지대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마을이란 문자 그대로 '커뮤니티', '공동 방어를 위한 동맹'이었다. 그들은 약상자 없이는 산딸기도 따러 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내 말의 요지는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늘 죽음의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처음부터 산송장의 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죽음의 위험은 적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앉아 있는 사람이나 달리는 사람이나 위험의 정도는 똑같은 것이다.

끝으로, 자칭 개혁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든 사람들 중 가장 귀찮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영원히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지은 집이죠.

바로 이 사람이 내가 지은 집에 사는 사람이죠.

그러나 그들은 세 번째 행이 다음과 같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가 지은 집에 사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죠.

나는 병아리를 기르지 않았으므로 솔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 인간 솔개는 두려워했다.

내게는 그런 사람들보다는 훨씬 유쾌한 또 다른 방문객들이 있었다. 딸기를 따러 오는 어린아이들, 깨끗한 셔츠를 입고 일요일 아침 산보를 나온 철도원들, 낚시꾼들과 사냥꾼들, 그리고 시인과 철학자들. 다시 말하면, 정말로 마을을 뒤에 버려두고 자유를 찾아 숲속으로 온 모든 정직한 순례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을 나는 이렇게 반가이 맞아들였다. "어서 오시오, 영국인들이여! 어서 오시오, 영국인들이여!" (청교도들이 플리머스 항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인디어 추장인 사모세트가 했다는 환영의 인사말)

왜냐하면 나는 이미 이 종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7장 콩밭

 

그러는 동안 밭두둑의 총 연장 길이가 이미 7마일 정도나 되게 심어져 있던 나의 콩들은 김매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심은 콩들은 마지막 콩이 심어지기 전에 이미 상당히 자랐던 것이다. 사실 김매기를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었다. 이 지속적이고 자존심을 요하는 노동, '헤라클레스의 고난'의 축소판 같은 노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콩밭과 거기에 심겨진 콩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바라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콩들이긴 했지만.

콩들은 나를 대지에 연결시켜 주었으며 나는 안타이오스 (안타이오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으로서 대지의 여신의 아들이었다. 몸이 땅에 닿고 있는 한은 무적이었으나, 헤라클레스에 의해 공중에 들려진 채 목을 졸려 죽었다)처럼 대지로부터 힘을 얻었다. 그러나 내가 왜 콩들을 길러야 하는가? 오직 하늘만이 알 것이다. 여름 내내 내가 몰두해 있던 이 신기롭기 짝이 없는 일은 그 전엔 양지꽃과 검은딸기와 물레나물 같은 향기로운 야생 열매와 아름다운 꽃들만이 자라던 땅에서 이제는 대신 콩이 나오도록 하는 일이었다. 나는 콩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이며, 콩들은 나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나는 콩들을 아껴주며 김을 매주고 아침 저녁으로 살펴준다. 이것이 나의 하루 일과이다. 넓직한 콩잎들은 보기만 해도 탐스럽다.

콩밭을 가꾸는 데 나를 돕는 조수들이 있다. 이 마른 땅에 물기를 공급해주는 이슬과 비, 그리고 척박한 땅에 다소라도 남아 있는 생산력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적은 벌레들과 서늘한 날씨,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드척을 들 수 있다. 우드척이란 놈들은 4분의 1에이커나 되는 콩을 깨끗이 갉아먹었다. 그러나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 물레나물과 그 밖의 풀들을 쫓아내며 그들이 옛부터 이룩해 놓은 잡초의 정원을 망가뜨린단 말인가? 이제 남은 콩들은 곧 우드척을 당해낼 만큼 커질 것이며 또 다른 새로운 적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내가 네 살이 되던 해에 보스턴에서 이곳 마을로 이사올 때 바로 이 숲과 들을 지나오고 월든 호수에도 잠시 들렀던 일이다. 그것은 나의 뇌리에 새겨져 있는 가장 오래된 추억의 장면들 중 하나이다. 오늘 밤 내가 부는 피리소리는 바로 그 때의 호숫물 위에 메아리를 울려 퍼지게 하고 있다. 바로 그 날의 소나무들이 나보다 더 나이를 먹은 채 여전히 서 있다. 내가 밥 짓는 데 땔감으로 쓰는 나무 그루터기도 그 때 서 있던 나무들이 잘린 것인지 모른다.

사방 주위에는 어린 나무들이 새로 자라기 시작하여 새로운 어린 눈동자들을 위하여 또 다른 경치를 준비하고 있다. 풀밭에는 옛날과 거의 다름없는 물레나물이 똑같은 다년생 뿌리로부터 싹이 터 자라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나 자신마저도 꿈 같기만 하던 저 어린 시절의 환상적인 경관을 장식하는 데 한몫을 하게 되었다. 내가 숲속에 사는 흔적과 영향력이 바로 이 콩잎들과 옥수수잎들, 그리고 감자덩굴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나는 높은 지대의 땅 두 에이커 반 가량을 경작했다. 그 땅이 개간된 지 약 15년밖에 되지 않았고, 내 자신이 나무뿌리들을 캐어낸 군데군데의 곳은 처녀지와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전혀 거름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내 김을 매면서 파낸 화살촉들로 미루어보면, 백인들이 이 땅에 오기 전에도 지금은 멸망한 인디언 부족이 이곳에 살면서 옥수수와 콩 농사를 지었으며, 그리하여 내가 지금 가꾸고 있는 농작물에 필요한 지력을 어느 정도 쇠진시켰던 것 같다. 우드척이나 다람쥐가 아침에 일어나 길을 건너기 전에, 태양이 떡갈나무 관목들 위에 떠오르기 전에, 그리고 새벽이슬이 한 방울이라도 마르기 전에 나는 콩밭에 자라고 있는 거만한 잡초들을 쓰러뜨리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농부들은 새벽일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가능하면 아침 이승리 있는 동안에 모든 일을 마치라고 권하고 싶다. 이른 아침 나는 마치 조형미술가처럼 맨발로 이슬을 머금고 있어 잘 부스러지는 모래 흙을 밟으며 일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햇볕 때문에 발에 물집이 생기곤 했다. 태양이 이 황색의 자갈 많은 고지대의 밭을 비추는 가운데 나는 거의 80미터의 길이로 길게 뻗쳐 있는 푸른 콩두둑 사이를 천천히 왔다갔다하며 김을 매었다. 콩두둑의 한쪽 끝에는 떡갈나무 관목의 숲이 있어서 그 그늘에서 쉴 수 있었다. 다른 끝에는 검은딸기밭이 있었는데, 김을 한 차례 매고 돌아올 때마다 푸른색의 딸기들은 한층 더 색깔이 진해져 있었다. 나의 매일의 일과는 풀들을 뽑아버리고 콩대 주위에 새 흙을 덮어주어 격려하며, 이 황색의 흙이 자신의 여름 생각을 쑥이나 개밀이나 피 같은 잡초가 아니라 콩잎으로 나타내도록 설득하며, 그리하여 대지가 '!'하고 외치는 대신 '!' 하고 외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소나 말을 부리지 않았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일체의 고용인을 쓰지 않았으며, 또 개량 농기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몹시 더디었다. 그 대신 콩들과는 한층 더 친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손으로 하는 노동은 아무리 지리한 일이라 하더라도 가장 나쁜 형태의 게으름은 결코 아니다. 노동은 지속적인 불후의 교훈을 담고 있으며 학자에게는 고전적인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나 링컨이나 웨일랜드 마을을 지나 서쪽으로 가는 여행자들에게 나는 열심히 일하는 농부의 표본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륜마차에 편안히 앉아서 무릎 위에 팔굽을 얹어놓고, 말고삐는 화환 모양으로 감아 느슨하게 쥐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집에 남아서 힘들게 땅을 파는 농사꾼이었다. 그러나 나의 농원은 곧 그들의 시야와 생각에서 벗어났다. 단지 상당한 거리를 달리는 동안 도로 양쪽에 눈에 띄는 경작지라고는 나의 농원뿐이었으므로 여행자들은 그것을 심심풀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때때로 여행자들이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잡담과 비평이 밭에 있는 나의 귀에까지 들려 오기도 했다. "강낭콩이 저렇게 늦다니! 완두콩이 저렇게 늦다니!" 다른 사람이 김매기를 시작했을 때도 나는 계속 콩을 심었던 것이니 저 농사일을 잘 아는 목사에게는 생각지도 못할 일인 것이다. "여보게, 가축 사료로는 옥수수가 제일이야. , 옥수수가 단연 낫지." "저 사람 저기서 사는 걸까요?" 하고 검은 보네트를 쓴 여자가 회색 외투를 입은 남자에게 묻는다.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농부 한 사람이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더니, 밭에 거름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어찌된 영문이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톱밥이나 재, 석회 등 무엇이라도 좋으니 거름을 좀 주라고 권한다. 그러나 여기 2에이커 반이 되는 밭이 있었지만 수레 대신에 호미 한 자루와 그 호미를 작동하는 두 손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수레와 말이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톱밥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같은 마차를 탄 나그네들이 덜거덕거리며 지나가면서 자기들이 이미 지나온 밭들과 나의 밭을 큰 소리로 비교했으므로 농업의 세계에서 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콜맨 (헨리 콜맨(1785~1849) : 미국의 목사. 매사추세츠 주를 위해 네 차례에 걸쳐 농업보고서를 작성했다)씨의 농업보고서에 포함되지 않은 밭이 있었다면 바로 이 밭이리라.

그런데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보다 넓은 야생의 들판에서 대자연이 산출하는 수확물의 가치는 누가 평가할 것인가? 영국 목초는 수확이 되는 즉시 조심스럽게 무게를 달아보고 습도를 재며, 규산염과 가리의 성분 비율을 측정한다. 그러나 모든 골짜기와 호수, 그리고 숲과 들과 늪에도 가지각색의 풍성한 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단지 사람의 손에 수확되지 않을 뿐이다.

어느 면에서는 나의 밭은 야생의 들과 경작지를 연결하는 고리와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 마치 어떤 나라들은 개발국이라 하고 또 어떤 나라들은 반개발국이라고 하며 또 다른 나라들은 미개국이나 야만국이라고 하듯이 나의 밭은 나쁘지 않은 의미의 개척된 땅이었다. 내가 기르는 콩들은 야생의 원시 상태로 기꺼이 돌아가고 있었으며, 나의 호미는 그들을 위하여 알프스의 목가를 불렀다.

콩밭 바로 옆에 있는 자작나무의 맨 꼭대기 가지에는 갈색 개똥지빠귀(어떤 사람들은 붉은지빠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마리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즐겁다는 듯이 아침 내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내가 이곳에 있었다면 이 새는 다른 농부의 밭을 찾아갔으리라. 내가 씨앗을 심고 있는데 그 새가 소리를 지른다. "씨를 뿌려라, 씨를 뿌려! 흙을 덮어라, 흙을 덮어! 씨를 뽑아라, 씨를 뽑아!"

그러나 이것은 옥수수가 아니므로 그 새와 같은 적들로부터는 안전했다. 내가 씨를 뿌리는 일이 개똥지빠귀의 지저귀는 소리, 즉 그 새가 한 현이나 스무 현 위에 켜대는 서투른 파가 나니 연주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재거름이나 석회거름보다는 그 새의 노랫소리가 씨앗에게는 훨씬 좋을 것 같았다. 그것은 내가 전적으로 신용하는 일종의 값싼 웃거름이었다.

호미로 새 흙을 긁어 콩대 주위에 덮다 보면 호미에 걸리는 것들이 있다. , 원시 시대에 이곳의 하늘 아래 살았으되 역사에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은 민족들의 잔재를 건드려 그들이 쓰던 전쟁과 수렵의 작은 도구들이 현대의 햇빛을 받으며 드러난 것이다. 그것들은 다른 자연석들과 섞여 있었는데 그 중 어떤 것들은 인디언의 모닥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가 하면 다른 것들은 햇볕에 탄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근래에 이 땅을 개간한 사람들이 가져온 그릇의 파편과 유리 조각들도 있었다.

내 호미가 돌에 짤그랑하고 부딪히면 그 음악은 숲과 하늘에 울려 퍼졌으며, 순간순간 무한한 수확을 거두어 들이는 나의 노동에 반주음악의 역할을 했다. 내가 김을 매고 있는 것은 이미 콩밭이 아니었고 또 콩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 사람은 이미 내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라토리오를 들으러 도시에까지 나들이를 간 내 친지들이 혹 생각나는 경우에는 연민의 감정과 더불어 어떤 자부심을 느꼈다.

나는 때로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맑게 개인 날 오후에는 밤매가 눈의 티처럼, 아니 하늘의 눈의 티처럼 머리 위를 비잉비잉 도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때때로 그 새는 하늘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갑자기 급강하해 내려왔다. 그러나 하늘의 천은 아무런 흠 없이 그대로였다. 하늘을 떠다니다가도 알은 사람들이 잘 찾아낼 수 없는 지상의 모래밭이나 산꼭대기의 바위틈에 낳아 놓는 작은 장난꾸러기들. 그들의 모습은 호수에서 떠 온 잔물결처럼 아름답고 늘씬하다. 마치 바람에 의하여 공중으로 떠 올려진 잎사귀들 같다. 자연에는 그처럼 닮은 모습들이 있는 것이다. 매는 그가 공중을 날면서 내려다보는 물결의 하늘에 있는 형제이다. 공기에 부풀은 그의 완벽한 두 날개는 바다의 털 없는 원시적인 날개들에 대응한다.

어떤 때는 한 쌍의 솔개가 하늘을 날면서 높이 치솟았다가는 내려오고, 서로 가까이 갔다가는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내 자신의 생각을 구현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또 산비둘기들이 이쪽 숲에서 저쪽 숲으로 약간 떨리는 듯한 날갯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긴급히 전해야 할 통신문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썩은 나무 그루터기 밑을 괭이로 파헤치다가 둔중한 몸집을 한 이국적인 점들이 박힌 도롱뇽이 나오기도 했다. 이집트와 나일강 냄새가 물씬 나는 이놈은 실은 우리와 같은 시대의 생물이다.

내가 일을 멈추고 괭이에 기대어 서 있노라면 밭고랑 어느 곳이었건 간에 이러한 소리들과 광경들을 듣거나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이 땅이 제공하는 무궁무진한 여흥의 일부였던 것이다.

경축일에는 마을에서 대포를 쏘는데, 그 소리가 이 숲속에서는 딱총소리 정도로 들리며, 어떤 때는 군악소리 몇 가닥이 멀리 이곳까지 들리기도 한다. 마을의 반대편 끝의 콩밭에 와 있는 나에게는 대포소리가 말불버섯이 터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내가 알지 못하는 군사 훈련(군사 훈련 : 소로우가 월든 숲에 들어간 다음 해(1846)에 멕시코 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이 전쟁을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 전쟁으로 보고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이 있는 경우, 나는 때로는 지평선에 성홍열이나 두드러기 같은 질병이나 가려움증이 발생할 것 같은 막연한 예감을 온종일 느끼곤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좀 더 좋은 방향의 바람이 들판과 웨일랜드 도로를 급히 불어올 때에야 민병대가 훈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멀리서 들리는 그 웅웅 소리를 들으면, 마치 어떤 사람의 벌떼가 분봉을 했는데 그의 이웃들이 버질의 충고대로 가정도구 중에서 가장 소리가 잘 나는 것을 뚱땅거려서 벌집 속에 다시 불러들이려는 것 같았다. 그 뚱땅거리는 소리나 웅웅 소리가 다 조용해지고 바람소리가 더 이상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게 되면, 나는 사람들이 마지막 수펄마저 미들섹스의 벌통 안에 안전하게 몰아넣었으며, 그들은 이제 벌통에 발라져 있는 꿀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매사추세츠 주와 조국의 자유가 그처럼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나는 다시 김매기 작업을 하면서도 내 가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뢰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해서 평온한 믿음을 가지고 나의 일을 기꺼이 계속해 나갔다.

여러 악대가 함께 연주할 때에는 온 마을이 거대한 풀무와도 같은 소리를 냈다. 그래서 마을의 모든 집들과 건물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때로는 정말로 숭고하고 용기를 북돋는 음악이 명성을 구가하는 트럼펫 소리와 함께 들려왔기 때문에 나는 멕시코 사람이 옆에 있기라도 한다면 꼬챙이로 꿰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왕 무슨 일을 하려면 철저하게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용맹심을 발휘하여 우드척이나 스컹크라도 있으면 혼내주려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다. 이 군악소리는 먼 중동의 팔레스타인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으며, 지평선 위를 행군하는 십자군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마을 위에 무성하게 뻗어 있는 느릅나무 가지들이 이 시끄러운 소리로 인해 떨리는 모습도 아울러서 말이다. 그즈음은 정말 '위대한'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내 밭에서 보이는 하늘이야말로 영원히 변함 없는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보통 날과 다른 점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콩하고 맺은 긴 교제는 좀 특이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콩을 심고, 김을 매주고, 수확하고, 도리깨질하고, 추리고, 그다음에는 이 콩을 팔기까지 했다(이 마지막 일이 실은 제일 힘들었다). , 콩을 맛보았으니 먹은 것도 넣어야 하겠다. 나는 콩에 대해서 철저하게 알려고 했다. 콩이 자라는 동안 나는 아침 다섯 시부터 정오까지 김을 매주었으며 그 후의 시간은 대개 다른 일을 보았다. 내가 콩밭을 가꾸면서 여러 가지 종류의 잡초들과 맺었던 친숙하면서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상상해 보라(이 이야기는 다소 중복되는 데가 있겠는데, 밭 노동 자체가 중복되는 일이 많았다).

나는 잡초들의 섬세한 조직을 가차 없이 부러뜨렸으며 괭이를 가지고 불공평한 차별 대우를 행사하여 어떤 종류의 식물은 줄줄이 있는 대로 다 잘라 버리고 또 다른 종류의 식물은 세심히 보살펴 주었다. 저것은 로마쑥, 저것은 돼지풀, 저것은 괭이밥이고, 저것은 개밀이다. 달려들어 잘라버려라. 뿌리를 뽑아 햇볕에 말려버려라. 가는 뿌리 하나라도 그늘 속에 놔두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이틀만이면 다시 일어나 부추처럼 파릇파릇해질 것이다.

이 기나긴 싸움은 학들 (호머는 <일리아드>에서 트로이 사람들을 학으로 비유했다)과의 싸움이 아니라 잡초들, 즉 태양과 비와 이슬을 자기 편으로 둔 트로이 사람들과의 싸움이었다. 날마다 콩들은 괭이로 무장한 밭주인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와서는 자신들의 적들을 무찔러 잡초의 시체로 밭고랑을 가득 채워놓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주위에 운집한 전우들보다 최소한 1피트는 더 높이 솟아 투구의 앞술을 흔들면서 용감하게 싸우던 수많은 헥토르 장군(헥토르 : 트로이 왕의 맏아들로 트로이 최고의 용사였다)들이 내 무기 앞에 쓰러져 먼지 속에 나뒹굴었다.

그 해 여름, 나의 동시대 사람들이 보스턴이나 로마에서 미술에 열중하고, 인도에서 명상에 잠기며, 런던이나 뉴욕에서 사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나를 포함한 뉴잉글랜드의 농부들은 이처럼 농사를 열심히 짓고 있었다. 먹을 콩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남이야 콩으로 죽을 쑤든 투표용으로 쓰든 상관할 바 아니겠으나 나 자신은 피타고라스(피타고라스 :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제자들에게 콩을 먹지 말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처럼 콩을 싫어하여 콩을 쌀과 바꾸어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비유와 문학적 표현을 위해서라도, 또는 후일 어느 우화 작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밭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밭농사는 대체적으로 볼 때 흔찮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계속하면 정력의 낭비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콩밭에 거름을 전혀 주지 않았고 한꺼번에 밭 전체에 걸친 김매기를 해준 적은 없지만 내 딴에는 김매기에 상당한 공을 들였으며 그 결과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저술가 이블린이 말했듯이 "사실 어떠한 퇴비나 거름도 삽으로 이렇게 늘 땅을 파고 또 파서 흙을 뒤집어 놓는 것에는 견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흙은, 특히 신선한 흙은 자체 안에 어떤 자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자력으로 염분과 힘을 흡수한다. 이 힘이 흙에게 생명력을 준다. 우리가 늘 흙을 뒤집고 파헤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인분 비료나 기타 다른 지저분한 퇴비를 쓰는 것은 이 개량법에 대한 차선책에 불과하다." 게다가 나의 콩밭은 "지치고 힘이 빠져 안식일을 즐기는 땅"이었기 때문에 케넬름 딕비 경의 생각처럼 공기로부터 '생명의 영기'를 흡수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모두 12부셸의 강낭콩을 수확할 수 있었다.

콜맨씨는 주로 비용이 많이 먹힌 아마추어 농업가의 실험에 대해서만 보고했다는 불평이 있으니까 나의 지출을 비교적 상세하게 보고하면 다음과 같다.

괭이 대금 54센트
쟁기질, 써레질, 고랑 내는 값 750센트(너무 비싸다)
강낭콩 종자 312 1/2센트
씨감자 133센트
완두콩 종자 40센트
무 씨앗 6센트
허수아비용 흰 실 2센트
밀쟁기 및 소년의 품삯(3시간) 1
수확 운반용 밀수레 삯 75센트
합계 1472 1/2센트

나의 수입은 다음과 같다. ("사는 사람이 아니고 파는 사람이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한다."(카토가 그의 <농업론>에서 한 말이다)

강낭콩 9부셀 12쿼트 판매 대금 1694센트
큰 감자 5부셀 250센트
작은 감자 9부셀 225센트
1
콩대 75센트
합계 2344센트

앞서 말한 것처럼 순이익금은 871 1/2센트였다.

내가 콩을 재배하면서 얻은 경험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6월 초순경, 하얀 보통의 강낭콩 중에서 싱싱하고 둥그런 순종을 골라 두둑과 두둑 사이는 3피트, 콩과 콩 사이는 18인치로 띄어 심는다. 처음엔 벌레를 조심하며 빈틈이 있으면 다시 심어서 메꾼다. 그다음엔 개방된 밭 같으면 우드척을 조심한다. 우드척은 밭을 지나면서 맨 처음 나온 새싹들을 깨끗이 갉아먹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 넝쿨이 나올 때에는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다람쥐처럼 똑바로 서서 콩꽃의 봉오리와 콩꼬투리가 달린 넝쿨을 그대로 잘라 버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능한 한 일찍 수확을 하도록 하여 서리를 피하고 최적의 판매 시기를 잡는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큰 손실을 예방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나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얻었다.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년 여름에는 콩과 옥수수를 그처럼 열심히 심지 말고 씨앗만 있으면 성실, 진리, 소박, 믿음, 순수 등의 씨앗을 심어, 적은 노력과 거름을 주더라도 그것들이 이 땅에서 자라나 나의 양식이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지켜보자. 왜냐하면 이 땅은 그런 씨앗들을 키우지 못할 만큼 메마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아, 이제 다음 해의 여름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다음 여름과 또 다음 여름마저 지나갔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심은 씨앗들이, 내가 저 아름다운 덕들의 씨앗이라고 믿었던 그 씨앗들이 벌레를 먹었는지 또는 생명력을 잃었는지 싹이 트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아버지가 용감했던 만큼만, 또는 겁쟁이었던 만큼만 용감성을 발휘하려고 한다. 수백 년 전에 인디언들이 옥수수와 콩을 심고 또 최초의 백인 개척자들에게 가르쳐 준 방법 그대로, 요즈음 세대의 사람들은 매년 꼬박꼬박 옥수수와 콩을 심고 있다. 마치 그것이 자기들의 숙명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마 전 나는 어느 노인이 괭이를 가지고 적어도 일흔 개의 구멍을 열심히 파고 있는 놀라운 광경를 보았는데 그 구멍은 자기가 누울 무덤은 아니었다.

왜 우리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곡물이나 감자, 건초와 과수원에만 그처럼 신경을 쓰고 다른 수확물은 가꾸지 않는가? 왜 우리는 종자용의 콩에는 그처럼 관심을 쏟으면서 새로운 인간 세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가?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말한 여러 가지 미덕들이(우리는 모두 이 미덕들을 다른 산물보다 더 큰 자랑으로 삼고 있지만 그것들은 대개 바람에 날리는 씨앗처럼 공중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그 사람 안에 뿌리를 박고 자라고 있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진실로 그로부터 정신적인 자양과 위안을 얻지 않겠는가?

가령 우리가 길을 가다가 '진실'이나 '정의' 같은 섬세하고 미묘한 미덕을(비록 그 양이 소량이고 새로운 변종이라 할지라도) 보았다고 하자.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의 대사들은 이러한 미덕들의 씨앗을 본국에 보내도록 훈령을 받아야 하며, 의회는 그 씨앗이 전국에 분포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실에 대하여 격식을 차려서는 안 된다. 인격과 우정의 핵만 있으면 우리는 비열한 행동으로 서로를 속이고 욕하고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바쁜 듯이 서로를 만나서는 안 되겠다. 나는 요즈음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는다. 그들이 시간이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들은 콩 농사를 짓느라고 바쁘다 그처럼 늘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과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일하다가 쉬는 틈에는 괭이나 삽을 지팡이 삼아 기대는데, 버섯과는 달리 지상에서 반쯤 떨어져 있으며, 꼿꼿이 서 있다기보다는 마치 땅 위에 내려 걷고 있는 제비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말을 할 때는 그의 날개를 이따금씩,

날아가려는 듯이 폈다가는 다시 접곤 했다."

그래서 그들과 이야기를 하노라면 우리가 천사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빵이 항상 우리를 배부르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나 자연 가운데서 어떤 너그러움을 깨닫는 것은, 그리고 순수하고 영웅적인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 더욱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괴로움의 원인을 모르는 경우에도 우리의 굳은 관절을 풀어주고 우리로 하여금 유연성과 탄력성을 지니게 한다.

농사가 한때는 신성한 예술이었음을 옛 시와 신화는 최소한 암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대형 농장과 대량 수확만을 목표로 삼은 나머지 성급하고 생각 없이 농사를 짓고 있다 농부로 하여금 자기 직업의 신성함을 표현하고 또 그 직업의 거룩한 기원을 회상하도록 하는 축제나 행사나 의식이 전혀 없다. 이것은 가축품평회나 소위 추수감사절이라는 것을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농부의 관심은 오직 눈앞의 이익과 때려먹는 잔치에만 있다. 그는 농업의 여신이나 대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 지옥의 황금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탐욕과 이기심 때문에, 그리고 토지를 재산으로 보거나 재산 획득의 주요 수단으로 보는 누구나 벗어나지 못하는 천한 습성 때문에 자연의 경관은 불구가 되고 농사일은 품위를 잃었으며, 농부는 그 누구보다도 비천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농부는 자연을 도둑으로만 알고 있다. 카토는 농사에서 생기는 이익은 그 무엇보다 성스럽고 정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의 대학자 바로에 의하면, 고대 로마인은 "대지를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농업의 여신 케레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은 경건하고 유익한 삶을 살고 있으며 그들만이 사투르누스(사투르누스 : 최고신 주피터(제우스)의 아버지. 인간에게 농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왕족의 유일한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흔히 잊기 쉬운 것은, 태양은 인간의 경작지와 대초원과 삼림지대를 차별 없이 똑같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태양의 광선을 똑같이 반사하거나 흡수한다. 인간의 경작지는 태양이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내려다보는 멋진 풍경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태양의 눈에 이 지구는 두루두루 잘 가꾸어진 하나의 정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양의 빛과 열의 혜택을 이에 상응하는 믿음과 아량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내가 이 종자콩들을 소중히 여겨 가을에 수확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내가 그토록 오래 보살펴 온 이 넓은 밭은 나를 진짜 경작자로 보지 않고 밭에 물을 주고 밭을 푸르게 만드는, 보다 친절한 자연의 어떤 힘을 더 따르는 것이다.

이 콩의 결실을 내가 다 거두어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 콩들의 일부는 우드척을 위해서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밀의 이삭이 농부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서는 안 되겠으며, 그 낟알만이 밀대가 생산하는 모든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농사가 실패하는 일이 있겠는가? 잡초들의 씨앗이 새들의 주식일진대, 잡초가 무성한 것도 실은 내가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밭의 농사가 잘되어 농부의 광을 가득 채우느냐 아니냐는 비교적 중요한 일이 아니다. 금년에 숲에 밤이 열릴 것인지 아닌지 다람쥐가 걱정을 않듯 참다운 농부는 걱정에서 벗어나 자기 밭의 생산물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최초의 소출뿐만 아니라 최종의 소출도 제물로 바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8장 마을

 

밭에서 김을 매거나 글을 읽고 쓰는 것으로 오전을 보낸 나는 다시 호숫물 속에 몸을 담그기가 일쑤였다. 운동 삼아 호수의 작은 만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헤엄쳐 건너면서 노동의 먼지를 몸에서 말끔히 씻어내고, 공부하면서 생긴 주름살을 모두 펴놓았다. 그런 다음 오후에는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날마다 또는 하루 걸러쯤 나는 세상 이야기를 들으러 마을로 산책을 나갔다. 마을에서는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또 이 신문에서 저 신문으로 이야기거리들이 끊임없이 퍼져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세상 이야기들을 동종요법에서처럼 적은 양을 취하면 살랑거리는 잎사귀 소리나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새들과 다람쥐들을 보려고 숲속을 거닐었던 나는 이제 어른과 아이들을 보려고 마을을 거닐었다. 소나무 사이를 부는 바람 소리 대신에 마을에서는 수레들이 덜커덩거리며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집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면 강가의 풀밭에 사향쥐가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의 지평선에는 우거진 느릅나무와 플라타너스들 밑에 바쁘게 움직이는 인간들의 마을이 있었다. 이들 인간들은 대초원에 굴을 파고 사는 프레이리 다람쥐만큼이나 내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는데, 그들은 각자의 굴 앞에 앉아 있다가도 이야깃거리를 주고받으려고 이웃의 굴로 쪼르르 달려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습성을 관찰하러 자주 마을로 나갔다.

마을은 하나의 커다란 뉴스 열람실 같았다. 마을의 한쪽에는 뉴스의 독자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기 위하여 전에 스테이트 가에 있는 레딩 상사가 그랬듯이 호두, 건포도, 소금, 밀가루와 다른 식료품들을 팔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앞의 상품, 즉 뉴스에 대한 엄청난 식성과 튼튼하기 짝이 없는 위장을 가지고 있어, 큰길가에 꼼짝하지 않고 언제까지라도 앉아서는 뉴스의 바람이 지중해의 게절풍처럼 속삭이며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마취액을 흡입하듯이 뉴스를 흡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의식에는 아무런 영향 없이 고통에 대한 마비와 무감각만을 가져오도록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뉴스고 무엇이고 듣는다는 자체가 너무나도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마을에 오는 때면 이 양반들이 줄 지어 앉아 있는 모습을 거의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사다리에 앉아 햇볕을 쪼이며 상반신을 앞으로 숙이고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신문기사의 줄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또 다른 양반들은 호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고 창고 앞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마치 마네킹 모양의 기둥처럼 창고를 받치고 있는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밖에 나와 있었으므로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듣고 있었다. 그들은 말하자면 일종의 투박한 제분기였으니, 소문이란 소문은 우선 이 속에서 거칠게 바수어진 다음에야 집 안의 보다 정밀하고 섬세한 깔때기 안으로 넣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보는 마을의 심장부는 식료품 가게와 술집, 우체국과 은행이었다. 그리고 이 심장부의 필수 비품으로 마을 사람들은 종과 대포와 소방차를 편리한 곳에 비치해 두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최대한으로 울궈먹을 수 있도록 집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양이나 골목길의 위치 같은 것을 교묘히 배열해 놓았으므로 마을을 통과하는 여행자는 일종의 '몰매 형벌'(몰매 형벌(gauntlet) : 예전에 서양의 사관학교 생도나 선원을 처벌할 때 쓰던 형벌의 일종. 매를 든 사람들이 두 줄로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으면 형벌을 받는 사람은 그 가운데를 나아가면서 매를 맞도록 되어 있다)을 받게 되어 남자, 여자,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 한 방씩 그 사람을 갈길 수 있었다.

물론 줄의 맨 앞 가까이 자리 잡은 사람들은 가장 잘 볼 수 있고 또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이어서 맨 먼저 여행자를 갈겨 줄 수 있으므로 그 장소에 대하여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마을의 변두리에 흩어져 사는 몇몇 주민들은 그곳에 이르면 몰매 형벌의 줄에는 커다란 틈이 생겨 여행자는 담을 넘거나 또는 샛길로 빠져 도망칠 수 있으므로 매우 적은 토지세나 창문세만을 지불하였다.

길 가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하여 사방 여러 군데에 간판이 내걸려 있었다. 술집과 식료품점은 식욕을 미끼로 그를 낚으려 했고, 포목점과 보석상은 사치심을 미끼로 썼다. 이발소와 구두 가게와 양복점은 각각 여행자의 머리털과 발목과 바짓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이런 유혹 말고도 나는 집집마다 아무 때나 방문을 해달라고 하는 더 무서운 초청장을 받아놓은 상태였으며, 이때쯤이면 내가 들러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몰매 형벌을 받을 사람에게 흔히 주는 충고대로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목표 지점을 향하여 과감하게 나아가거나 또는 "거문고의 가락에 맞추어 신의 영광을 찬미함으로써 사이렌 마녀들의 노랫소리를 압도하여 위험을 모면한" 오르페우스(오르페우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뛰어난 음악가 겸 시인)처럼 고상한 생각에 몰두함으로써 이러한 위험들로부터 거뜬히 벗어났다.

어떤 때 나는 갑자기 길에서 뛰어 도망쳤으므로 아무도 나의 행방을 알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체면 같은 것은 별로 따지지 않고 울타리에 개구멍이라도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하는 데도 익숙했는데, 그 집에서 대접을 잘 받고는 체로 마지막 걸러낸 뉴스의 핵심, 즉 바닥에 가라앉은 부분을 청취하고, 전쟁과 평화에 대한 전망과 세상이 조금 더 지탱할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본 다음 뒷길로 해서 나와 다시 숲으로 도망쳐 왔다.

밤늦게까지 마을에 머물다가 다시 집으로 올 때는, 특히 깜깜하고 폭풍이라도 불 것 같은 밤에 환하게 불이 켜진 어느 집 사랑방이나 강연장을 뒤로 하여 호밀이나 옥수수 가루 한 부대를 어깨에 메고 숲속에 있는 나의 아늑한 항구를 향해 떠나올 때는 기분이 그처럼 상쾌할 수가 없었다. 그런 때 나는 배의 외부를 꼭 닫아버린 채 나의 외부적 인간만을 키잡이로 남겨놓고는, 아니 뱃길이 순조로울 때는 키마저 고정시켜 버리고는 사념들이라고 하는 유쾌한 선원들과 함께 갑판 밑의 선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항해를 하면서' 나는 선실의 난롯가에 앉아 많은 즐거운 생각을 했다. 나는 심한 폭풍우를 만나기는 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표류를 하거나 조난을 당한 적은 없었다.

보통날 밤에도 숲속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둡다. 몹시도 어두운 밤에 숲 한가운데를 지날 때는, 나는 나아갈 길을 알기 위하여 자주 길 위의 나무들 사이의 공간을 쳐다보아야 했으며, 수레바퀴 자국도 없는 데서는 나 자신이 전에 밟고 다녀 생긴 희미한 발자국을 발로 더듬어 찾곤 했다. 그리고 가령 사이가 18인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두 그루의 소나무 사이를 통과할 때와 같은 때는 전에 알고 있던 나무들의 서로의 위치를 짐작하여 손으로 더듬어가며 지나기도 했다.

어떤 때 깜깜하고 무더운 밤 늦게 보이지 않는 길을 발로 더듬으며 오면서 몽상에 빠지거나 다른 생각에 깊이 몰두한 경우에는 문의 걸쇠를 올리려고 손을 들 때에야 비로소 정신이 드는데, 이런 때는 내가 걸어온 길이 한 발자국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손이 아무런 도움 없이도 입을 찾듯이 내 몸도 주인이 버리더라도 집을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몇 번인가, 나를 찾아온 손님이 저녁 늦게까지 있다가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다. 깜깜한 밤에는 집 뒤쪽으로 난 수렛길까지 그를 안내하고 그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었는데, 그런 때 그는 눈이 아니라 발로 길을 더듬어 돌아가야만 했다. 어느 칠흑같이 어두운 밤, 나는 호수에서 낚시질하던 두 청년에게도 그런 식으로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숲속으로 해서 약 1마일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으며 평소 그 길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하룬가 이틀 후엔가 두 청년 중 한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자기네 집 근처에서 거의 온 밤을 헤맸으며, 새벽녘에야 겨우 집에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밤새 몇 차례 심한 소나기가 내리고 나뭇잎들이 젖어 있어서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노라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속담에도 있듯이 어둠을 칼로 자를 수 있을 만큼 깜깜한 밤에는 마을의 행길에서도 길을 잃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교외에 사는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마을에 물건을 사러 왔다가 하룻밤을 묵어야 한 적도 있으며, 나들이를 가던 신사 숙녀가 발만으로 보도를 더듬으며 가다가 언제 옆길로 들어선지도 모르고 계속 가게 되어 반 마일이나 길을 빗나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때이고 숲속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놀랍고도 기억해둘 만한 경험이며 소중한 경험이기까지 하다. 특히 대낮이라도 비바람이 치는 경우에는 낯익은 길 위로 나왔더라도 어느 쪽으로 가야 마을에 이르게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자신이 이 길을 천 번이나 지나다닌 것은 알지만 그 길의 특징 하나 알아볼 수 없어 마치 시베리아의 길처럼 낯설기만 한 것이다. 밤에는 물론 그 당혹감이란 비할 수 없이 더 큰 것이다.

사소한 걸음을 옮길 때에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나마 늘 수로 안내인처럼 잘 알려진 등대나 해안의 돌출부를 표지삼아 배를 조종하며, 일상의 항로를 벗어나는 경우에도 근처의 갑의 위치를 항상 마음 속에 두고 있다. 그래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거나 한 바퀴 빙 돌려지거나 하기 전에는-인간이 세상에서 길을 잃으려면 눈을 감은 채로 한 바퀴 빙 돌려지기만 하면 되니까-우리는 대자연의 거대함과 기이함을 깨닫지 못한다. 잠에서 깨어나든 몽상에서 깨어나든, 사람은 그 때마다 나침반의 위치를 다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길을 잃고 나서야, 다시 말하면 세상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관계의 무한한 범위를 깨닫기 시작한다.

첫번째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 날 오후, 나는 구둣방에서 구두를 찾으려고 마을에 갔다가 체포되어 투옥을 당했다. 그 이유는 내가 다른 데서도 (흑인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했던 소로우는 항의의 표시로 세금 납부를 거부했으며, 그 결과 감옥에 가게 된다. 친척 한 사람이 몰래 세금을 대납했기 때문에 그는 다음날로 풀려 나왔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시민의 저항>이라는 글로 발표했는데, 이 글은 후일 톨스토이와 간디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된다. 여기서 '다른 데'라는 것은 <시민의 저항>을 가리킨다) 기술한 바와 같이 나는 의사당 문 앞에서 인간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축처럼 매매하는 국가는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러한 국가에게는 세금도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숲에 들어간 것은 정치적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한 인간이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그의 뒤를 좇아와 그들의 더러운 제도를 가지고 그를 거칠게 다루며,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가증스러운 조직에 그를 강제로라도 붙들어 매려고 한다.

물론 나는 효과가 있든 없든 무력으로 저항을 할 수도 있었고, 사회에 대해 '미친 듯이 날뛸'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차라리 사회가 나에 대해 '미친 듯이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자포 자기적인 것은 그쪽 편이니까. 그러나 나는 그다음 날로 석방이 되었다. 그래서 수선한 구두를 찾아 가지고 숲으로 돌아왔으며 곧바로 페어헤이븐 언덕에 올라가 산딸기로 점심을 들었다.

나는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 말고는 그 누구한테서도 괴롭힘을 받은 적이 없다. 내 집에는 원고를 넣어 둔 책상 말고는 자물쇠나 빗장 같은 것이 없었으며, 문의 걸쇠나 창문 위에 못 하나 꽂아놓지 않았다. 밤이고 낮이고 문을 잠근 적이 없었다. 며칠 동안 집을 비웠을 때도 그랬고, 심지어 다음 해 가을에 메인 주의 산 속에서 두 주일간을 보냈을 때도 그랬다. 그래도 나의 집은 사람들의 존중을 받았으며, 일단의 병사들이 그 집을 둘러싸고 지켰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존중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숲을 산책하다가 피로를 느낀 사람은 내 집의 벽난로 앞에 앉아 몸을 녹일 수 있었으며, 문학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탁자 위에 놓인 몇 권의 책을 뒤적이며 즐길 수 있었으리라. 또한 호기심 많은 사람은 내가 점심에 무엇을 먹고 남겨 놓았으며 저녁 식사로는 무엇을 먹으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온갖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내 집 근처를 지나 호수를 다녀갔지만 이들로부터 어떤 심각한 불편을 겪은 적이 없으며, 조그만 책 한 권 말고는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 그 책은 호머의 작품으로 지나치게 금박을 입힌 것이었는데, 지금쯤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의 수중에 다시 들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 당시 내가 생활했던 것처럼 소박하게 산다면 절도나 강도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일부 사람들이 충분한 정도 이상의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데 반하여 다른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도 갖지 못한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포프가 번역한 호머의 책들은 곧 적절하게 배포가 될 것이다.

"너도밤나무 그릇으로 만족하던 시절에는

사람들은 전쟁으로 고통받지 않았으니."

"그대 정치하는 사람들이여, 형벌을 쓸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대들이 덕을 사랑하면 백성들도 덕을 사랑할 것이다. 윗사람의 덕은 바람과 같고 평민의 덕은 풀잎과 같다. 풀잎들은 그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다."(<논어> 1219)

 

 

 

9장 호수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에 지겨움을 느끼고 마을의 친구들에게도 싫증을 느낄 때면 나는 평상시에 돌아다니는 영역을 벗어나 거기서 훨씬 더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 '새로운 숲과 새로운 풀밭'을 찾아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으로 갔던 것이다. 때로는 해 질 무렵에 페어헤이븐 언덕에서 허클베리나 월귤의 열매로 저녁 식사를 하고 며칠 분을 더 따가지고 오기도 했다.

과일은 그것을 사 먹는 사람이나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하여 재배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그 참다운 맛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맛을 보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인데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산딸기의 참맛을 알려거든 소 모는 소년이나 들꿩에게 물어보라. 산딸기를 손수 따보지 않은 사람이 산딸기 맛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흔히 범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허클베리는 보스턴까지는 결코 오지 않는다. 보스턴의 세 언덕에서 허클베리가 자라기 시작한 다음부터 참다운 허클베리는 그곳에서 사라졌다. 장사꾼의 수레에 실려 오면서 허클베리의 과분만 문질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과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불사약 성분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남은 것은 단지 식품으로서의 딸기일 뿐이다. 영원한 정의가 살아 있는 한 순수한 허클베리는 단 한 알도 산골에서 도시로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어떤 때 나는 그날의 김매기 작업이 끝나면 아침부터 호수에서 성급한 마음으로 낚시질을 하고 있던 친구에게로 가서 어울렸다. 그는 물 위에 떠 있는 오리나 나뭇잎처럼 아무 말 없이 미동도 하지 않고 오직 낚시에만 몰두해 있었는데, 내가 그에게 갈 때쯤이면 자신은 수도승(원문에는 Coenobites로 되어 있다. '수도승'이라는 의미지만 발음이 see no bites(고기가 하나도 안 물린다)와 똑같은 것을 이용하여, 낚시에 몰두한 수도승 같은 모습과 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을 동시에 표현했다)의 한 사람이라는 신념을 굳히고 있었다.

이 친구 말고도 고기를 잘 잡고 목각 기술도 뛰어난 낚시꾼 노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내 집을 낚시꾼들의 편의를 위해 지어진 집으로 보고 있었는데 나 역시 그가 내 집 문 앞에 앉아 낚싯대를 손보고 있는 것이 그리 싫지가 않았다. 가끔 우리는 호수에 배를 띄우고 제각기 배의 한쪽 끝을 차지해 앉아 있곤 했다. 최근에 와서 노인의 귀는 거의 들리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별로 없었다. 노인만이 이따금씩 찬송가를 흥얼거릴 따름이었다. 이것은 나의 철학과도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와 나의 친교는 깨어지지 않는 조화의 친교였으며, 말이 개입된 경우보다 뒷날 회상하기에 더 즐거운 것이 되었다.

거의 늘 그랬지만 혼자라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을 때는 나는 노로 뱃전을 침으로써 메아리를 울리게 하곤 했다. 그 뱃전을 친 소리는 원을 그리면서 점점 팽창하는 소리가 되어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숲을 가득 채우고는, 마치 동물원의 조련사가 야수들을 자극하여 울음소리를 내게 하듯 숲을 뒤흔들어서는 마침내 모든 숲의 골짜기와 산허리로부터 우르릉대는 소리를 끌어냈다.

날씨가 훈훈한 밤에는 자주 보트를 띄우고 그 안에 앉아 피리를 불었다. 내 피리소리에 매혹된 듯한 퍼치들이 배 주위를 떠나지 않고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숲의 잔해가 깔린 이랑진 호수 바닥을 달이 비추는 모습도 보였다.

예전에 나는 깜깜한 여름밤에 가끔 친구 한 사람과 함께 모험하는 기분으로 이 호수에 왔었다. 우리는 고기를 유혹하기 위하여 물가에 불을 피워놓고서 실에 매달은 지렁이들을 미끼로 메기를 잡았다. 밤이 늦어 낚시질이 끝나면 불붙은 나뭇가지를 폭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늘 높이 던졌는데, 그것은 호수에 떨어질 때 '쉬익' 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꺼지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휩싸이면서 주위를 더듬어야 했다. 우리는 이 어둠을 뚫고 휘파람을 불면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제 나는 호수 바로 옆에 내 집을 마련했다.

때때로 나는 마을의 어떤 집의 사랑방에 늦게까지 앉아 있다가 그 집식구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 때에야 일어나 숲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음 날의 점심거리라도 낚을 겸 심야의 몇 시간을 달빛 아래서 배낚시하는 데 보내곤 했다. 부엉이와 여우가 세레나데를 부르는가 하면 이따금 이름 모를 새가 가까이에서 우는 소리도 들렸다. 이런 밤 낚시의 경험은 내게는 매우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물가에서 100미터나 150미터쯤 떨어진 호수 위에 자리를 잡고, 깊이가 40피트가량 되는 물속에 닻을 내린 달빛 아래서 꼬리로 수면을 치는 수천 마리의 퍼치 새끼들과 피라미에 때로는 둘러싸이기도 하면서 아마로 된 긴 낚싯줄을 통하여 저 아래 40피트 물 속에 사는 신비스러운 밤의 물고기들과 교신을 하는 것이었다.

간혹 부드러운 밤바람에 배가 밀려가면서 낚시줄을 60피트쯤 호숫물 속에 길게 풀어주어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따금씩 낚싯줄을 타고 오는 어떤 가벼운 떨림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낚싯줄 끝을 배회하는 어떤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시사했으며, 그 생명체는 어렴풋하고 불확실하며 허둥대는 의욕을 가졌으나 아직 결심하기를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마침내 나는 줄을 당기기 시작한다. 한 손 한 손으로 천천히 줄을 감아올리면 뿔이 난 메기 한 마리가 끽끽거리며 몸을 비틀면서 물 밖으로 끌려 나온다. 깜깜한 밤에, 특히 나의 생각이 다른 천체들의 방대하고 우주 생성론적인 문제 주위를 방황하고 있을 때, 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가벼운 충격을 느끼면서 몽상에서 깨어나 자연과 다시 연결이 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체험이었다. 이제 나는 공기보다 더 진할 것 같지 않은 아래쪽의 물 속은 물론 위쪽의 하늘로도 낚싯줄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리하여 나는 낚시 한 개로 두 마리의 물고기를 낚았던 것이다.

 

월든 호수의 경치는 그 규모가 수수하며 매우 아름답기는 하나 웅장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자주 와 본 사람이나 그 호숫가에 살아 본 사람이 아니면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 호수는 너무나 깊고 맑기 때문에 자세하게 묘사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호수는 길이가 반 마일에다 둘레의 길이가 1 3/4마일에 이르는 맑고 깊은 초록빛의 우물이며 61에이커 반쯤 되는 넓이를 가지고 있다.

소나무와 떡갈나무 숲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영원한 샘물로서 구름과 증발에 의한 방법 이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유입구나 유출구가 없다. 호수를 둘러싼 산들은 수면에서 40피트 내지 80피트의 높이로 가파르게 치솟아 있다. 그러나 동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산들은 1/4마일과 1/3마일의 거리에서 각각 100피트와 150피트의 높이에 이르고 있다. 이 일대는 완전한 삼림 지대이다.

콩코드의 모든 강과 호수들은 적어도 두 가지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멀리서 본 색깔이며 다른 하나는 가까이에서 본, 좀 더 본래의 색깔에 가까운 색깔이다. 첫 번째 색깔은 빛에 많이 좌우되며 하늘의 색을 따른다. 여름날 청명한 날씨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는 청색으로 보인다. 특히 물결이 일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멀리서 떨어져 볼 때는 모두 똑같은 색깔이다. 폭풍우가 부는 날씨에는 때로는 어두운 청회색을 띤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 바다의 색깔은 대기에 눈에 띄는 변화가 없을 때도 어떤 날은 청색, 그다음 날은 초록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나는 사방이 눈으로 덮였을 때 콩코드 강의 물과 얼음이 풀처럼 초록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청색이야말로 액체 상태이건 고체 상태이건 '맑은 물의 색깔'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트 위에서 우리 마을의 강과 호수들을 똑바로 내려다보면 매우 다른 여러 가지 색깔로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월든 호수는 똑같은 관측 지점에서 보더라도 어떤 때는 청색으로 어떤 때는 초록색으로 보인다.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인 이 호수는 양쪽의 색깔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언덕 위에서 보면 호수는 하늘의 색을 반영하고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모래가 보이는 호숫가의 물은 누런 색조를 띠고 있으며, 조금 더 깊은 곳은 엷은 녹색, 그리고는 점차로 색이 진해져서 호수의 중심부를 포함한 대부분의 물은 한결같이 짙은 초록색이다. 빛의 상태에 따라서는 언덕 위에서 보더라도 호숫가 근처의 물이 선명한 초록색일 때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우거진 숲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래가 깔린 철로둑 옆의 호숫물도 초록색이고 봄에 나뭇잎이 무성해지기 전의 호숫가 물도 초록색이니, 그것은 단순히 기본색인 청색이 모래의 노란색과 뒤섞인 결과일지 모른다. 바로 이것이 월든 호수가 눈이라면 그 홍채에 해당하는 부분의 색깔이다. 이 부분이 또한 봄에 호수 바닥으로부터 반사된 태양열과 땅을 통해 전해진 태양열로 인하여 얼음이 맨 처음 녹아서 아직도 얼어 있는 중심부 둘레에 좁은 운하를 만드는 부분이다.

우리 마을의 다른 호수나 강처럼 월든 호수도 맑은 날씨에 물결이 일 때에는, 수면이 태양빛을 직각으로 반사하기 때문인지 또는 수면 자체에 섞인 빛의 양이 더 많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약간 떨어져서 보면 하늘색보다 더 짙은 푸른색으로 보인다. 그런 때 호수의 수면 위에 자리를 잡고서는 물 위에 비친 그림자를 보기 위해 '따로따로 나누어진 시선'으로 보면 물결무늬의 비단, 즉 빛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비단이나 칼날에서 발하는 것 같은 비할 데 없는 밝은 청색을 보게 된다.

이 말로 도저히 표현 못할 밝은 청색은 하늘 자체보다도 더 하늘색에 가까운 색으로서 호숫물의 원래 색깔인 짙은 초록색과 더불어 물결의 양쪽 색깔로 서로 교차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색깔과 비교하면 원래의 짙은 초록색은 차라리 진흙 색깔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것은 해가 서쪽에 지기 전 구름 사이로 보이는 겨울 하늘의 조각처럼 유리 같은 녹색을 띤 푸른색이었다. 그러나 유리잔에 호숫물을 떠서 햇빛에 비추어보면 그것은 같은 양의 공기처럼 색깔이 없다. 누구나 아다시피 커다란 판유리는 초록빛을 띠지만(제조업자들은 그것의 '몸체'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유리의 조그만 조각은 색깔이 없다. 월든 호숫물을 얼마나 큰 몸체로 담아보아야 초록빛을 띨지 내가 실험으로 증명을 해 본 일은 없다.

콩코드강의 물은 똑바로 내려다보는 사람에게는 검은색이나 매우 짙은 갈색으로 보인다. 이 강물은 대부분의 호숫물처럼 그 물에서 수영하는 사람의 몸 색깔에 누르스름한 빛깔을 가미해 준다. 그러나 월든 호수의 물은 수정과 같이 맑기 때문에 수영하는 사람의 몸은 설화 석고의 백색을 띠게 되는데 이것은 한층 더 부자연스러운 색깔인 것이다. 게다가 사지가 확대되고 뒤틀려 보이니 그 백색은 더욱 기괴한 효과를 내게 되어 미켈란젤로와 같은 화가의 좋은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호수의 물은 너무나 투명해서 25피트나 30피트의 깊이라도 그 바닥을 쉽게 볼 수 있다. 보트의 노를 젓고 있노라면 물 밑 수십 피트의 깊이에서 헤엄치고 있는 퍼치와 피라미 떼를 볼 수 있다. 이 고기들의 크기는 고작 1인치를 넘지 못하지만 퍼치는 세로의 줄무늬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이런 곳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수 있다니 퍼치는 매우 금욕적인 고기임에 틀림없다.

몇 해 전 어느 겨울날, 나는 강꼬치고기를 잡으려고 호수에 얼음 구멍을 여러 개 뚫은 적이 있다. 물가로 올라서면서 얼음 위에 도끼를 던져 두었는데 무슨 마가 들기라도 한 것처럼 이 도끼가 20여 미터를 미끄러지더니 얼음 구멍 하나로 빠지는 게 아닌가? 그곳은 깊이가 25피트쯤 되는 물 속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얼음 위에 엎드려서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호수 바닥 한쪽에 도끼가 쇠부분을 아래로 자루를 위로 하여 똑바로 서 있고 자루는 호수의 맥박에 따라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놔두면 그 도끼는 자루가 썩어 없어질 때까지 계속 똑바로 선 채 흔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갖고 있던 얼음끌로 도끼 바로 윗부분에 얼음 구멍을 하나 더 낸 다음 주머니칼로 그 근처에서 가장 긴 자작나무를 잘라가지고 왔다. 올가미를 만들어 자작나무 끝에 매달은 후 조심스럽게 구멍 속으로 내려뜨려서 도끼 자루의 손잡이 아래로 씌우고는 자작나무에 매달은 줄을 당겨서 도끼를 다시 건져냈다.

호숫가는 한두 군데의 작은 모래사장을 제하고는 도로포장용 돌처럼 매끄럽고 둥근 하얀 돌들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가파른 데가 많아서 물 속으로 펄쩍 뛰어들어가면 머리 위를 넘기기가 일쑤이다. 호숫물이 그처럼 투명하지 않았더라면 맞은편에 이르기까지 바닥을 다시 구경하지 못할 것이다. 이 호수가 바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이 흐린 곳은 한 군데도 없으며, 언뜻 보면 수초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근에 수위가 높아져 잠기게 된, 그래서 호수의 일부라고 볼 수 없는 작은 풀밭을 제외하면 눈에 띌 만한 수초라고는 자세히 찾아보아도 창포나 부들은 커녕 노란색이나 흰색의 백합도 볼 수 없으며 약간의 작은 심장초와 가래풀, 그리고 한두 포기의 순채 정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수영하는 사람은 이들 수초마저 보지 못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들 식물들은 호숫물처럼 깨끗하고 밝다.

물가의 흰 돌들은 물속으로도 5미터나 10미터쯤 더 뻗쳐 있고 그다음은 깨끗한 모래가 바닥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가장 깊은 곳에는 약간의 침전물이 있는데, 수없이 많은 가을에 떨어져 물결에 흘러 온 나뭇잎들이 바닥에 쌓여 썩은 것이리라. 한겨울에도 보트의 닻을 걷어 올리노라면 새파란 풀잎이 걸려 따라 올라오기도 한다.

월든 호수 같은 호수가 또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2마일 반을 가면 '나인 에이커 코너'라는 작은 마을 근처에 있는 화이트 호수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12마일 이내에 있는 호수들은 내가 거의 다 알고 있지만 월든 호수만큼 맑고 샘물과 같은 성질을 가진 호수는 보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부족들이 이 호수의 물을 마시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그 깊이를 재보고 그리고는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졌겠지만 호수의 물은 여전히 푸르고 맑기 그지없다. 단 한 번의 봄도 빼놓은 적이 없이 말이다.

아마도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던 그 봄날에도 월든 호수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며, 엷은 안개와 남쪽 바람을 동반한 부드러운 봄비를 맞아 호수의 얼음이 녹고 있었을 것이다. 수면에는 아직 인간의 몰락의 소식을 듣지 못한 수많은 물오리와 기러기들이 이 정도 맑은 호수가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떠 있었으리라.

이미 그때에도 월든 호수는 불었다 줄었다 하면서 자신의 물을 계속 정화시켰을 것이며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색깔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월든 호수가 될 특허권과 하늘의 이슬을 증류할 수 있는 면허증을 하늘로부터 받아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라져버린 민족들의 문학에서 이 호수가 '카스탈리아의 샘'(카스탈리아의 샘 : 그리스의 파르나소스 산 기슭에서 솟아났던 성스러운 샘으로서 시적인 영감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같은 역할을 했는지 그 누가 알겠는가? 또 황금시대에는 어떤 요정들이 이 호수를 지배하였는지 그 누가 알겠는가? 월든 호수는 콩코드 마을이 자신의 작은 왕관에 달고 있는 최고급의 보석인 것이다.

그러나 이 호수에 맨 처음 왔던 사람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조금은 남겨 놓은 것 같다. 나는 호수를 빙 둘러가면서 가파른 산허리에 선반 같은 길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호숫가의 우거진 숲의 일부가 최근에 잘라내진 곳에도 흔적이 남아 있는 이 길은 산허리를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도 하고, 물가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기도 한다. 이 길은 아마도 이곳에 살아온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길로서 원시시대의 사냥꾼들의 발에 의해 닦이기 시작했을 것이며, 현재의 주민들도 그 사실을 모르고 이따금씩 밟고 다니는 것이다.

이것은 겨울에 눈이 약간 내린 다음 호수 한가운데에 서서 보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그때 이 길은 풀이나 나뭇가지로 가려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뚜렷한 기복이 있는 하나의 하얀 선으로 나타난다. 여름에는 가까이서도 그 길을 알아볼 수 없던 여러 곳에서 4분의 1마일 정도 떨어져서 보면 아주 분명히 보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눈이 그 길을 명확한 백색의 활자로 부각시켜 다시 인쇄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이곳에 지어질 별장들의 정원이 이 길의 흔적을 어느 정도나마 보존하게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호수의 수위는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주기적인지 아닌지, 또 얼마 동안의 기간에 그러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항상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하긴 하지만. 대체로 수위는 겨울에는 높아지고 여름에는 낮아지는데 일반적인 강우나 한발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이 호숫가에 살 때보다 수위가 1피트나 2피트 낮았던 때와 적어도 5피트 이상 높았던 때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호수 속으로 뻗쳐 있는 좁은 모래톱이 있는데 그 한쪽은 물이 매우 깊다. 이 모래톱의 끝은 호수 기슭에서 약 30미터쯤 떨어져 있는데 1824년이던가 어른들이 거기서 솥에 생선찌개를 끓일 때 심부름을 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나 지난 25년간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가 하면 내 친구들은 생선찌개 건이 있은 다음 2, 3년 후에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호수 기슭에서 약 80미터쯤 떨어진 숲속의 외진 작은 만에서 내가 보트를 타고 자주 낚시를 했다는 얘기를 하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귀를 기울이곤 했다. 왜냐하면 그 작은 만은 풀밭으로 변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호수는 물이 계속 불어, 1852년의 여름인 지금에 이르러서는 내가 호숫가에 살던 때보다 꼭 5피트만큼 수위가 높아졌다. , 30년 전과 같은 높이의 수위가 되어 위에 이야기한 그 풀밭에서 또다시 낚시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월든 호수의 수위의 변동의 폭은 그 최대 수치가 6피트나 7피트이다. 그러나 주위의 산에서 흘러드는 물의 양은 대수롭지 않으므로 이 같은 물의 증가는 지하 깊숙이에 있는 수원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들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올여름에도 호수의 물은 다시 줄기 시작했다. 이처럼 수위의 변동은 주기적이든 아니든 변동이 완료되기까지 오랜 세월을 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나는 한 차례의 상승과 두 차례의 하강의 일부분을 관찰하였는데, 앞으로 12년 내지 15년 후에는 호수의 수위는 내가 알고 있는 최저의 수치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여기서 1마일 동쪽에 있는 플린트 호수(이 호수는 유입구와 유출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에 따른 변동을 감안하더라도)와 중간에 있는 작은 호수들도 월든 호수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들 호수들은 얼마 전에 월든 호수와 때를 같이하여 최고의 수위에 도달했다. 나의 관찰에 따르면 화이트 호수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월든 호수가 오랜 간격을 두고 물이 불었다 줄었다 하는 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용도를 가지고 있다. , 최고의 수위가 1년 또는 그 이상 지속되면 호수 주위를 걸어 다니는 것을 어렵게는 하지만, 지난 번 수위가 최고로 올랐던 때 이후 물가에 자라난 수목과 관목들인 리기다 소나무, 자작나무, 오리나무, 사시나무 같은 것들을 죽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물이 다시 빠지면 말끔히 정리가 된 호수 기슭이 나타나게 된다.

매일 간만의 차가 있는 많은 호수나 강과는 달리 월든 호수의 기슭은 수위가 낮을 때 가장 깨끗하다. 내 집 바로 옆의 호숫가에 한 줄로 죽 서있던 15피트 높이의 리기다소나무들이 마치 지렛대를 써서 쓰러뜨린 것처럼 죽어 넘어졌는데, 이 나무들이 호수를 잠식해 들어가는 것은 거기서 저지가 된 것이다. 이 소나무들의 크기를 보면 마지막으로 수위가 이 정도로 높았던 때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수위의 변동을 통하여 호수는 기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기슭은 가위질을 한 것처럼 털이 깎이게 된다. 그러므로 나무들은 점유권에 의하여 기슭을 차지할 수는 없다. 기슭은 수염이 자라지 않는 호수의 입술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호수는 때때로 자신의 입술을 핥아서 그곳을 깨끗하게 한다. 수위가 최고에 달하면 오리나무, 버드나무 및 단풍나무들은 물속에 있는 줄기 부분으로부터 사방으로 수없이 많은 불그스레한 섬유질의 뿌리를 수 피트의 길이로 뻗어서 자신을 지탱하려고 하는데, 바닥에서 3, 4피트의 높이에까지 이런 뿌리들이 나온다. 또 물가에 사는 월귤나무는 대개 열매를 맺지 않는데 이런 상황이 되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 호숫가에 어떻게 해서 그처럼 고운 돌이 고르게 깔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거기에 관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들어서 알고 있고, 나이 든 사람들은 그들대로 어렸을 때 들었다고 하는 전설이 하나 있다. 그 전설에 의하면, 옛날 옛적에 인디언들이 이 근처의 산 위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 산은 지금의 월든 호수가 깊은 것만큼이나 하늘 높이 치솟은 그런 산이었다고 한다. 인디언들은 회의를 하면서 신을 모독하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그러나 모독적인 언사의 사용은 인디언들이 결코 범하지 않는 악덕이라고 하겠다), 그들이 이러고 있는 동안 산이 흔들리면서 갑자기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이때 '월든'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노파만이 도망쳐 목숨을 구했으며 호수의 이름은 그 노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산이 흔들릴 때 돌들이 산허리를 굴러 내려와 지금의 호수 기슭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추측이다. 어쨌든 간에 옛날에는 이곳에 호수가 없었으며 지금은 있다는 것 하나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 인디언의 전설은 내가 전에 말한 바 있는 원시의 개척자의 이야기와 별로 상충되지 않는다. 그 개척자는 탐지막대를 들고서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풀밭에서 엷은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또 개암나무로 된 탐지막대가 점차 아래로 숙여지는 것을 보고 이곳에 우물을 파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호숫가의 돌들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호수의 물결이 언덕빼기에 부딪치는 작용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런데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호수 주위의 산들에는 이와 똑같은 종류의 돌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호수 근처를 지나는 철로를 건설할 때 그와 똑같은 돌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 돌들을 가지고 철로 양옆에 돌담을 쌓아야 했다. 더구나 호수 기슭이 가장 가파른 곳에 돌들이 가장 많다. 그러므로 유감스럽지만 이 돌들의 유래는 나에게는 더 이상 신비스러운 일이 되지 못한다. 나는 그 돌을 깐 사람을 알아낸 것이다. ('그 돌들을 깐 사람'은 다름 아닌 빙하를 가리킨다. 이 모든 돌들은 빙하기때 빙하의 작용으로 이곳으로 운반된 것이라고 한다)

 

호수의 이름은 그것이 '새프론 월든' 같은 영국의 지명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원래부터 '월드 인 폰드', '담으로 둘러싸인 호수'라고 불린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월든 호수는 내게는 누가 미리 파놓은 우물과도 같았다. 연중 항상 맑은 이 호수의 물은 그중 4개월간은 차갑기까지 한 것이다. 그 때의 호숫물은 마을의 물 중에서 유일하게 가장 좋은 물은 아닐지라도 최상급의 물 중의 하나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겨울에 대기 중에 드러난 물들은 대기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샘물이나 우물물보다 차갑다. 184636일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정오까지 내 방의 기온은 지붕 위에 내리쬐는 햇볕의 영향도 있고 해서 한때는 화씨 65도 내지 70도까지 올라갔지만, 같은 시간 동안 방안에 놓아 두었던 호숫물은 42도였다. 그것은 갓 길어온 마을의 가장 차가운 우물물보다 1도가 더 낮은 것이었다. 같은 날 보일링 샘의 물은 45도였는데 내가 시험해 본 여러 샘물 가운데 가장 온도가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샘물은 표면에 얕게 고여 있는 물이 섞이지 않으면 내가 아는 물 중에서 여름에는 가장 차가운 물인 것이다.

또 월든 호수는 여름에는 그 깊이 때문에 햇빛에 드러나 있는 대부분의 물처럼 따뜻해지는 일이 없다. 아주 더운 날에는 나는 늘 한 통의 물을 길어서는 지하 저장실에 넣어두곤 했는데, 밤 사이에 차가워져서는 그다음 날의 낮 동안에도 시원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샘의 물을 길어 오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호숫물은 1주일이 지나도 길어 온 날과 물맛이 같았으며 펌프 냄새도 나지 않았다. 여름에 호숫가에서 1주일 동안 캠핑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 통의 물을 텐트의 그늘에 2, 3피트의 깊이로 묻어두면 사치스러운 얼음의 신세를 구태여 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월든 호수에서는 강꼬치고기가 잡힌다. 7파운드짜리가 잡힌 적이 있는가 하면 또 한 마리는 굉장한 속력으로 릴을 채가지고 달아났기 때문에 낚시꾼은 그 고기를 보질 못했으며, 그래서 그 놈이 8파운드짜리는 된다고 안심하고 우겼다. 퍼치와 메기도 잡히는데 2파운드가 넘는 것들도 있었다. 피라미와 황어, 기름종개와 몇 마리의 송어도 잡힌다. 두 마리의 장어도 잡혔는데 한 마리는 4파운드나 나갔다. 내가 무게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이유는 고기는 흔히 그 무게가 유일한 자랑 거리인 데다 이 두 마리의 장어는 월든 호수에서 잡힌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장어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 길이가 5인치 정도에 은색의 옆구리와 초록색 등을 가졌으며 전반적인 인상이 버들개하고 비슷한 작은 물고기를 본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실을 우화에 연결시키려는 의도에서이다.

그러나 이 호수는 고기가 풍부하지는 않다.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강꼬치고기가 제일 큰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얼음 위에 엎드려서 적어도 세 종류의 강꼬치고기를 동시에 목격한 일이 있다. 첫 번째 것은 아주 길고 납작하며 쇠 색깔을 하고 있는데 강에서 잡히는 강꼬치고기와 아주 흡사하다. 두 번째 것은 밝은 황금색의 고기로 초록빛 광택을 가지고 있으며 이 호수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것은 역시 황금색이며 생기기도 두 번째 것과 비슷하지만 옆구리에 짙은 밤색이나 검은색 반점들이 몇 개의 엷고 붉은 반점과 뒤섞여 있어 그 점에서는 송어하고 아주 흡사하다. 이 세 번째 고기에게는 종명인 reticulatus('그물 무늬를 가진')가 맞지 않으므로 차라리 guttatus('점이 박힌')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고기들은 모두 단단한 살을 가지고 있어 겉보기보다는 무게가 더 나간다. 그 점은 피라미나 메기나 퍼치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물이 깨끗하기 때문에 이 호수에 사는 모든 물고기들은 강이나 다른 호수에 사는 물고기보다 훨씬 깨끗하고 모양이 준수하며 살도 단단하다. 그래서 다른 곳의 물고기들과 쉽사리 구별된다. 어류학자들 중에는 이곳의 물고기 중 몇 가지를 새로운 변종으로 분류하려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깨끗한 인상을 주는 개구리와 거북이의 한 종족도 이 호수에 살고 있으며 약간의 민물조개도 있다. 사향쥐와 밍크가 호수 주변에 발자국을 남겨놓고 다니며, 때로는 떠돌아다니는 자라가 찾아오기도 한다. 아침에 보트를 밀어내다가 밤 사이에 그 밑에 들어가 숨어 있던 커다란 자라를 놀라게 한 적이 간혹 있었다.

봄과 가을에는 물오리와 기러기들이 호수를 찾아온다. 여름 내내 흰가슴제비들이 수면 위를 스치듯 나는가 하면 도요새는 돌이 많은 호숫가를 갸우뚱하면서 날아다닌다. 때때로 나는 호수 위로 뻗은 백송나무 가지 위에 앉은 물수리를 놀라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페어헤이븐처럼 월든 호수에도 갈매기가 찾아온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 이 호수는 기껏해야 되강오리 한 마리가 매년마다 찾아오는 것을 묵인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것들이 현재 이 호수를 드나드는 주요 동물들이다.

고요한 날, 모래가 많은 동쪽 물가로 배를 저어 가서 깊이가 8피트 내지 10피트 되는 물속을 내려다보면 호수 바닥에 돌더미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 말고도 호수의 다른 여러 곳에도 발견되는 이런 돌더미는 달걀보다 작은 돌들이 직경 6피트에 높이 1피트로 둥그렇게 쌓인 것이며 그 주변은 그냥 모래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인디언들이 무슨 목적으로 얼음 위에 쌓아놓았던 돌들이 얼음이 녹자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이 돌더미들이 너무 고르게 쌓여져 있고 그중 어떤 것은 쌓은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것들은 강물 속에서 발견되는 돌더미하고 비슷하다. 그러나 이 호수에는 서커나 칠성장어가 살고 있지 않으니 어떤 고기가 그 돌더미들을 쌓아놓았는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황어의 집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호수 바닥에 재미있는 수수께끼가 있는 셈이다.

호숫가의 선은 상당히 불규칙해서 단조롭지가 않다. 지금 나의 마음의 눈은 깊은 만들이 휘어 들어간 서쪽 호숫가와 그보다 더 대담한 선을 긋고 있는 북쪽 호숫가를 보고 있다. 아름다운 가리비조개 모양을 하고 있는 남쪽 호숫가도 보인다. 그곳은 연이어 있는 갑들이 서로 겹쳐서 그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작은 만들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물가에 솟은 산들로 둘러싸인 작은 호수의 한가운데서 볼 때만큼이나 숲이 좋은 위치에 놓여 그 선명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적은 없으리라. 이때 숲의 모습이 비추어져 있는 호숫물은 가장 훌륭한 전경이 될 뿐 아니라, 굽이치는 호숫가의 선은 숲과 호수를 가르는 가장 자연스럽고 보기 좋은 경계가 된다. 그런 때는 숲의 일부분이 도끼로 잘려나가거나 경작지가 숲의 경계를 침범해서 생긴 상처나 결함이 숲의 가장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 나무들은 물가로 뻗어 갈 충분한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나무마다 가장 힘찬 가지를 그쪽으로 내뻗고 있다. 이곳에서 자연의 여신은 수의 끝마무리를 자연스럽게 해놓았으므로 보는 사람의 시선은 호수 기슭의 낮은 관목으로부터 점차로 올라가서 가장 높은 나무들에게 이르게 된다. 인간의 손이 미친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호숫물은 천 년 전이나 다름없이 기슭에 철렁대고 있다.

호수는 하나의 경관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표적이 풍부한 지형이다. 그것은 대지의 눈이다. 그 눈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은 자기 본성의 깊이를 잰다. 호숫가를 따라 자라는 나무들은 눈의 가장자리에 난 가냘픈 속눈썹이며, 그 주위에 있는 우거진 숲과 낭떠러지들은 굵직한 눈썹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고요한 9월의 어느 오후, 동쪽 물가의 매끈한 모래사장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면 맞은편 물가는 엷은 안개로 인해 어렴풋이밖에 보이지 않는데, '유리 같은 호수의 수면'이라는 표현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개를 박아 머리를 거꾸로 해서 보면 호수의 수면은 계곡에 걸쳐놓은 섬세하기 짝이 없는 한 가닥의 거미줄처럼 보인다. 멀리에 있는 소나무숲을 배경으로 반짝반짝하면서 수면은 대기를 두 개의 층으로 갈라놓고 있다. 맞은편의 산까지 물에 젖지 않고 수면 밑으로 해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호수 위를 스치듯 나는 제비들이 수면에 앉을 수도 있을 듯한 생각이 든다. 사실, 제비들은 때때로 착각이라도 한 듯 수면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다가는 깜짝 놀라 다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서쪽을 향해 호수 위를 바라보면 진짜 태양과 물 위에 반영된 태양이 똑같이 눈부시기 때문에 두 손으로 눈을 가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두 개의 태양 사이에 있는 수면을 유심히 바라다보면 수면은 문자 그대로 유리같이 매끄러운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수면 전체에 똑같은 간격을 두고 흩어져 있는 소금쟁이들이 햇빛 속에 움직이면서 반짝반짝하는 아주 작은 빛을 발하는 곳이라든지, 물오리 한 마리가 깃털을 가다듬고 있는 곳, 또는 아까도 얘기한 것처럼 제비가 너무 낮게 날다가 수면을 스치는 곳은 제외하고서 말이다.

멀리서 물고기 한 마리가 아치를 그리면서 3, 4피트나 공중에 뛰어오르는 때가 있다. 그런 때는 물고기가 뛰어나온 곳에 섬광이 번득이고 다시 들어간 곳에 또 한 번 섬광이 번득이는데, 어떤 때는 그 은빛의 아치가 전부 눈에 보일 때도 있다. 엉겅퀴의 갓털이 물 위 여기저기에 떠돌아다닐 때는 물고기들이 달려드는 바람에 수면에 다시 파문이 생긴다.

호숫물은 액체 상태로 녹아 있던 유리가 식어지기는 했으나 아직 굳지는 않은 것과 같으며, 그 속에 떠 있는 몇 개의 티눈은 유리 속의 불순물처럼 차라리 순수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간혹 호숫물의 일부분이 다른 데보다 더 매끄럽고 짙은 색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부분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들, 즉 물의 요정들의 방책에 의하여 호수의 다른 부분들로부터 차단되어 그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언덕 위에서 호수를 바라다보면 거의 어디서건 고기가 뛰는 모습이 잘 보인다. 강꼬치고기나 피라미가 이 매끄러운 수면으로부터 벌레 한 마리를 낚아챌 때 분명 전체 호수의 평정이 교란된다. 고기가 벌레를 잡는 이 단순한 행동이 마치 살인을 감추어 두기가 힘든 것처럼 교묘하게 사방에 알려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원을 그리면서 점점 커비는 그 파문이 직경이 30미터쯤 될 때는 멀리 내가 있는 언덕 위에서도 알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4분의 1마일쯤 떨어진 데서 물매암이 한 마리가 매끄러운 수면 위를 쉴 새 없이 나아가고 있는 모습까지도 보인다. 왜냐하면 물매암이는 물 위에 작은 고랑을 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두 개의 갈라져 나가는 선 사이에 똑똑히 보이는 잔물결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잔물결 위를 소금쟁이는 별 흔적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넘어간다. 호수의 수면에 물결이 꽤 일 때에는 소금쟁이도 물매암이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수면이 잔잔한 날에는 이들 곤충들은 숨어 있던 데서 나와서 한쪽 호숫가로부터 짧고 충동적인 동작으로 물 위를 미끄러져 가다가 드디어 호수를 완전히 횡단해 버린다.

태양의 따스함이 정말 고맙게 느껴지는 가을의 어느 맑은 날에 언덕 위의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호수를 내려다보며, 물 위에 비친 하늘과 나무들의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수면 위에 끊임없이 그려지는 동그라미 모양의 파문을 관찰하는 것은 마음이 무척 차분해지는 일이다. 이 넓은 수면에 어떤 동요가 있더라도 그것은 이처럼 곧 잠잠해지며 가라앉게 된다. 그것은 마치 물이 가득한 항아리를 흔들어 놓으면 그 물이 출렁대지만 가장자리에 닿으면서 결국엔 수면 전체가 다시 잠잠해지는 것과 같다.

호수에 고기 한 마리가 뛰거나 벌레 한 마리가 떨어지기만 해도 그것은 아름다운 동그란 파문을 일으키면서 사방에 알려진다. 그것은 이 호수의 원천으로부터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모습같이 보이며, 호수가 살아서 그 생명이 부드럽게 고동치는 모습, 또는 호흡하느라 그 가슴이 부푸는 모습같이 보인다. 기쁨의 전율과 고통의 전율을 구별할 수가 없다. 이 호수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인간의 작업은 다시 봄날처럼 빛나고 있다. 그렇다. 오늘 오후 모든 잎사귀와 나뭇가지, 돌맹이와 거미줄이 봄날 아침 이슬에 젖어 있을 때처럼 반짝이고 있다. 노가 움직일 때마다 그리고 벌레가 움직일 때마다 빛이 번쩍인다. 그리고 노가 물을 칠 때 생기는 메아리는 얼마나 듣기 좋은가!

9월이나 10월의 이런 날 월든 호수는 완벽한 숲의 거울이 된다. 그 거울의 가장자리를 장식한 돌들은 내 눈에는 보석 이상으로 귀하게 보인다. 지구의 표면에 있는 것으로 호수처럼 아름답고 순수하면서 커다란 것은 없으리라. 하늘의 물. 그것은 울타리가 필요 없다. 수많은 민족들이 오고 갔지만 그것을 더럽히지는 못했다. 그것은 돌로 깰 수 없는 거울이다. 그 거울의 수은은 영원히 닳아 없어지지 않으며, 그것의 도금을 자연은 늘 손질을 해준다. 어떠한 폭풍이나 먼지도 그 깨끗한 표면을 흐리게 할 수는 없다. 호수의 거울에 나타난 불순물은 그 속에 가라앉거나 태양의 아지랑이 같은 솔이, 그 너무나도 가벼운 마른 걸레가 쓸어주고 털어준다. 이 호수의 거울에는 입김 자국이 남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입김을 구름으로 만들어 하늘로 띄워 올리는데, 그 구름은 호수의 가슴에 다시 그 모습이 비쳐진다.

들판과도 같이 넓은 물은 공중에 떠 있는 정기를 반영한다. 그것은 위로부터 끝없이 새로운 생명과 움직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중간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땅 위에서는 풀과 나무들만이 흔들리지만 물은 그 자체가 바람에 의해 잔물결이 일게 된다. 나는 수면에 미풍이 불어 지나가는 곳을 빛줄기나 빛의 파편이 번득임을 보고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호수의 표면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공기의 펴면을 내려다보며 한층 더 신묘한 정기가 어디를 스쳐 지나가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10월 하순경 된서리가 내리면 소금쟁이와 물매암이는 마침내 자취를 감춘다. 그 때부터 11월말까지는 평온한 날에는 호수의 표면에 파문을 일으킬 만한 것이라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11월의 어느 오후였다. 며칠 동안 계속되던 비바람이 그치고 평온이 다시 왔지만 하늘은 아직도 구름이 잔뜩 끼고 공기는 엷은 안개로 가득했다. 호수가 너무 잔잔했기 때문에 수면을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수면은 이제 10월의 화려한 색들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어두운 11월의 색깔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 영상 위를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가만가만히 노를 저었다. 그러나 보트가 일으킨 작은 물결은 내 시선이 뻗칠 수 있는 곳까지 멀리 퍼져나갔으며, 호수에 비쳐진 영상에 이랑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수면 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멀리 물 위의 이곳저곳에 희미하게 깜빡이는 빛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서리를 피한 소금쟁이들이 그곳에 모여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또는 수면이 너무 잔잔하니 호수 바닥에서 샘이 솟는 모습이 그곳에 표출되는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노를 저어 그곳에 다가가자 나는 놀랍게도 내 자신이 수없이 많은 조그만 퍼치의 떼에 둘러싸인 것을 알게 되었다. 5인치 정도 크기의 이 퍼치들은 푸른 물속에서 아름다운 청동색의 모습으로 뛰놀다가, 끊임없이 수면으로 올라와서 파문을 일으키곤 했는데 어떤 때는 수면에 기포를 남겨놓기도 했다. 이처럼 투명하고 바닥이 없어 보이는 호숫물에 구름까지 비치고 보니 나는 마치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이었으며, 지느러미를 돛처럼 펼치고 헤엄치는 이 물고기들은 나보다 조금 밑의 고도에서 나의 좌우로 날고 있는 새들의 떼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에는 그런 퍼치 떼들이 많았는데 겨울이 그들의 넓은 하늘의 창문에 얼음으로 된 덧문을 씌우기 전에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시간을 최대한으로 즐기려는 것 같았다. 고기 떼가 수면 가까이 노는 모습이 어떤 때는 가벼운 바람이 수면을 치는 것처럼, 또는 약간의 빗방울이 수면에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내가 무심히 배를 저어 나가다가 고기들을 놀라게 하면 그들은 마치 누가 잎 많은 나뭇가지로 수면을 친 것같은 소리를 내며 꼬리로 수면을 쳐서 잔물결을 일으키고는 깊은 물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드디어 바람이 일고 안개가 더 짙어지며 물결이 치기 시작하자 퍼치들은 수면 위에 몸이 반쯤 드러날 정도로 더 높이 뛰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은 3인치 길이의 검은 점 백여 개가 동시에 수면 밖에 나타난 것 같았다.

어느 해인가는 125일같이 늦은 시기에도 호수의 표면에 파문들이 생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게다가 엷은 안개까지 쫙 끼었으므로 나는 세찬 비가 곧 쏟아질 것으로 생각하고 급히 노를 저어 집으로 돌아가려고 서둘렀다. 내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니만 비는 더 심하게 오는 것 같았고 나는 금방이라도 비에 흠뻑 젖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수면 위에서 파문들이 사라져버렸다. 그 파문들은 퍼치들이 일으켰던 것인데, 나의 노 젓는 소리에 놀라서 물 속 깊은 곳으로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나는 고기 떼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 날 오후는 끝내 비가 내리지 않았다.

월든 호수에 자주 드나들던 어느 노인이 나에게 한 말에 의하면, 60년 전만 해도 이 호수는 주위를 둘러싼 숲 때문에 어둠침침했으며 물오리와 그 밖의 물새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또한 주위에는 많은 독수리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고기를 잡으러 여기에 올 때면 그는 물가에서 발견한 낡은 통나무배를 사용했다. 그 배는 두 개의 백송나무의 속을 파서 맞붙여놓고 양쪽 끝은 네모나게 잘라놓은 것이었다. 매우 투박하게 생긴 배였지만 오랜 세월 사용되었으며 결국에는 침수되어 호수 바닥에 가라앉았을 거라고 했다. 노인은 배 주인이 누구였는지 몰랐다. 월든 호수가 주인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노인은 호두나무 껍질을 엮어 만든 줄을 닻줄로 사용했다.

미국 독립 이전에 이 호숫가에 살던 직업이 옹기장이었던 또 다른 노인이 그에게 한 말에 의하면, 호수 밑바닥에 쇠로 된 상자가 하나 있었으며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이 상자는 때로는 물가로 떠밀려 오기도 했으나 사람이 가까이 가면 깊은 물 속으로 물러나 결국엔 사라지곤 했다는 것이었다.

그 낡은 통나무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 배는 똑같은 나무 재질로 된,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디언의 통나무배를 대신한 것이라고 했다. 아마 처음에는 호숫가에 자라고 있던 나무 한 그루가 어쩌다가 쓰러졌으며, 그 후 한 세대 동안 호수를 떠다니며 호수에 가장 알맞는 배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이다. 내가 월든 호수의 깊은 곳을 처음 들여다보았을 때 바닥에 큰 통나무들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이던 생각이 난다. 그 통나무들은 바람에 밀려 그리로 갔거나, 아니면 목재 값이 쌌던 시적의 마지막 채벌 때 얼음 위에 쌓아 놓았다가 그냥 버려진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버리고 없다.

내가 월든 호수에 처음으로 배를 띄웠을 때 호수는 키 큰 소나무와 떡갈나무의 우거진 숲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몇몇 작은 만에는 포도넝쿨들이 물가에 있는 나무들 위로 자라 뻗어서, 마치 정자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보트가 그 밑을 지날 수 있었다. 호숫가를 이루는 언덕들은 경사가 매우 급하고 그 언덕에 자라는 나무들이 그 때는 키가 대단히 컸으므로 호수의 서쪽 끝에서 내려다보면 호수는 숲속의 어떤 멋들어진 경관을 보기 위한 원형 극장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내가 더욱 젊었을 때의 여름날 아침, 나는 호수 한가운데로 보트를 저어 가서는 그 안에 길게 누워 공상에 잠기곤 했다. 그리고는 산들바람이 부는 대로 배가 떠가도록 밭겨 놓으면 몇 시간이고 후에 배가 기슭에 닿는 바람에 몽상에서 깨어나곤 했는데, 그제서야 나는 일어서서 운명의 여신들이 나를 어떤 물가로 밀어 보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 시절은 게으름 부리는 것이 가장 매력적이고 생산적인 작업이던 때였다. 하루 중 가장 귀한 시간들을 그런 식으로 보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오전 나절에 몰래 빠져나오곤 했던가! 그 당시 나는 정말로 부유했다. 금전상으로가 아니라 양지바른 시간과 여름의 날들을 풍부하게 가졌다는 의미에서 그러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들을 아끼지 않고 썼다. 그 시간들을 조금 더 공장(소로우는 한때 아버지가 가내 공업으로 경영하던 연필 공장 일을 도운 적이 있고 학교를 직접 운영한 일도 있다)이나 학교의 교단에서 보내지 않은 것을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호숫가를 떠난 이후로 나무 베는 사람들이 그곳을 더욱 황폐하게 해놓았다. 가끔가다 호수가 내다보이는 전망을 가진 숲속의 오솔길을 거닌다는 것은 앞으로 오랫동안 불가능할 것이다. 이제 나의 시신이 침묵을 지키더라도 탓할 수가 없게 되었다. 숲들이 베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새들이 노래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제 호수 바닥의 통나무들과 낡은 통나무배, 그리고 호수 주위의 빽빽한 숲들도 사라졌다. 호수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잘 모르는 마을 사람들이 호수에 와서 멱을 감거나 물을 마시는 대신에 그 물을 수도관으로 마을에 끌어 가 그것으로 접시를 씻으려고 한다. 최소한 갠지스 강처럼 신성해야 할 월든 호수의 물을 말이다. 그들은 수도꼭지를 틀거나 마개를 뽑아서 월든 호수의 물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귀를 찢을 듯한 울음소리로 온 마을을 뒤흔들어 놓는 저 악마 같은 철마는 발굽으로 보일링 샘을 짓밟아 그 물을 더럽혀 놓았다. 월든 호숫가의 숲을 죄다 갉아먹은 것도 저 철마이다. 돈에 눈이 어두운 그리스인들이 데리고 온 이 철마는 그 뱃속에 1천 명의 적병을 숨기고 있다. 이 거만한 괴수를 계곡에서 맞이하여 그의 갈비뼈 사이에 복수의 창을 깊숙이 꽂을 '무어홀의 무어' (무어홀의 무어 : 고대 영국 시가에 나오는 용을 죽였다는 영웅)같은 이 나라의 용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월든의 모든 특성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것은 그 순수성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호수에 비유되어 왔지만 그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무 베는 사람들이 호숫가의 여기저기를 야금야금 베어내고, 아일랜드 사람들이 호수 근처에 돼지 우리 같은 집을 짓고, 철도가 그 경계선을 침범하고, 얼음 장사꾼들이 호수의 얼음을 걷어갔지만 월든 자체는 변함이 없으며 어린 내가 보았던 바로 그 호수 그대로이다. 어떤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나 자신에게 있었을 뿐이다. 무수한 잔물결이 호수에 일었었지만 항구적인 주름살은 단 한 개도 없다. 월든 호수는 영원히 젊다. 지금이라도 호숫가에 서면 옛날과 다름 없이 제비가 벌레를 잡으려고 살짝 물을 스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나는 오늘 밤에도 내가 지난 20여 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이 호수를 보아오지 않은 것처럼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 , 여기 월든 호수가 있구나! 내가 그 옛날 발견했던 것과 똑같은 숲속의 호수가. 지난겨울에 숲의 일부가 잘려 나간 물가에는 새로운 어린 숲이 기운차게 자라고 있다. 그때와 똑같은 사념이 호수 표면에 샘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이 호수는 그 자신이나 그 창조자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기쁨과 행복의 샘물이다. 그것은 확실히 마음에 아무런 흉계를 품지 않은 용감한 사람의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이 호수의 주위를 둥글게 가다듬었으며 그의 사념 속에 호수를 깊이 파고 그 물을 맑게 하였으며 마침내는 유산으로 콩코드 마을에 남겨준 것이다.

호수의 얼굴을 보니 나와 똑같은 회상에 잠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런 말이 내 속에서 나오려고 한다. , 월든이여, 그대인가? 하고.

시 한 줄을 장식하기 위하여

꿈을 꾼 것이 아니다.

내가 월든 호수에 사는 것보다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

나는 나의 호수의 돌 깔린 기슭이며

그 위를 스쳐가는 산들바람이다.

내 손바닥에는

호수의 물과 모래가 담겨 있으며,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은

내 생각 드높은 곳에 떠 있다.

열차는 호수를 보기 위하여 멈추는 일이 결코 없다. 그러나 기관사와 화부와 제동수, 그리고 정기 승차권을 가지고 있어 이 호수를 자주 지나는 승객들은 호수를 보았기 때문에 좀 더 나은 사람들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상상을 해 본다. 하루에 적어도 한 번 이 평온과 순수의 표본 같은 호수를 보았다는 것을 그 기관사는(적어도 그의 본성은) 밤에도 잊지 않을 것이다. 비록 한 번밖에 보지 않더라도 이 호수의 모습은 혼잡한 보스턴의 거리들과 기관차의 검정을 씻어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호수를 '신의 안약'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사람이 있다.

월든 호수에는 눈에 보이는 유입구나 유출구가 없다고 전에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호수는 중간에 있는 일련의 작은 호수들을 통하여 멀리 더 높은 지대에 있는 플린트 호수와 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리고 더 낮은 지대에 있는 콩코드 강과도 역시 일련의 호수들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명백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 어느 지질학적인 시대에 월든 호수는 이들 호수를 통하여 콩코드 강 쪽으로 흘렀던 것 같으며, 지금이라도 호수 바닥을 조금 파면 다시 그 쪽으로 흐르게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일은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호수가 이렇게 숲속의 은자와도 같이 긴 세월을 과묵하고 엄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처럼 놀라운 순수성을 얻었다고 한다면, 비교적 불순한 플린트 호수의 물이 이 호수의 물과 섞이거나, 또는 이 호수의 물이 바다의 물결 속에 그 단맛을 잃게 되는 것을 그 누가 애석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링컨 마을 근처에 있는 플린트 호수는 일명 샌디 호수라고도 하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내해이며, 월든 호수로부터는 동쪽으로 1마일 지점에 있다. 넓이가 197에이커에 달하여 월든보다는 훨씬 크며 물고기도 더 많다. 그러나 이 호수는 비교적 깊지 않으며 물도 뛰어나게 맑지는 않다. 나는 기분 전환차 숲속을 걸어서 플린트 호수까지 간 적이 여러 차례 있다. 얼굴에 바람이 제법 드세게 불고 물결이 이는 것을 보면서 선원들의 생활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가볼 가치는 충분했다. 바람 부는 가을날에 그곳에 몇 차례 밤을 주우러 갔는데, 밤들이 호수 물에 떨어졌다가는 물결에 의해 내 발밑으로 떠밀려 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얼굴에 물보라를 맞으며 골풀이 무성한 호숫가를 헤쳐나가다가 썩어가는 보트의 잔해를 발견했다. 배의 옆 부분은 사라지고 판판한 배 밑창만 골풀들 사이에 거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마치 커다란 썩은 수련의 잎에 잎맥이 남아 있듯이 그 원형은 모습이 뚜렷했다. 그것은 바닷가에 떠밀려 온 그 어느 난파선 못지않게 인상적이었으며 그에 못지않은 어떤 교훈을 담고 있었다. 이제 그것은 비옥한 한줌의 흙이 되어 주위의 흙과 구별이 되지 않았으며, 그 흙을 뚫고 골풀과 창포가 자라고 있었다.

이 호수의 북쪽 물가에 가면 물 밑 모래 바닥에 물결 모양의 자국이 있다. 나는 이것을 볼 때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 자국들은 물의 압력에 의해 단단하게 되어 물속으로 발을 넣어 그 위를 걷노라면 이 자국들의 딱딱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 자국을 따라 골풀들이 한 줄로 자라고 있었는데, 이러한 줄들이 연속으로 죽 서 있어 마치 물결이 거기에다가 심어 놓기라도 한 것 같아 신기했다.

나는 또 거기서 등심초의 조그만 풀잎이나 뿌리가 공처럼 뭉쳐진 이상한 것을 많이 발견했다. 이것들은 직경이 1.5인치 내지 4인치가량 되며 완전한 구형이었다. 이 풀로 된 공들은 모래 바닥의 얕은 물속에서 물결에 앞뒤로 흔들리고 있거나 때로는 물 밖으로 밀려 나오기도 한다. 또한 이것들은 속이 풀로 꽉 찼거나 아니면 중심에 모래가 조금 들어 있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것들이 물가의 조약돌처럼 물결의 작용에 의하여 생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직경 반 인치 정도의 가장 조그만 크기의 공도 그 구성 재료는 똑같으며 일년 중 단 한 계절에만 만들어진다. 더욱이 물결은 이미 어느 정도의 견고성을 갖고 있는 물질을 튼튼히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부스러뜨리려고 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이것들은 말라서도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그 형태를 유지한다.

플린트 호수라니! 우리의 작명 방법은 이처럼 졸렬하기 짝이 없다. 이 하늘에서 내려보낸 물 옆에 자신의 농장을 만들고 그 물가의 나무들을 무자비하게 베어 넘긴 불결하고 어리석은 농부가 무슨 권리로 자신의 이름을 이 호수에 붙였단 말인가? 그는 호수의 수면보다는 자신의 철면피 같은 얼굴이 비치는 1불짜리 은화나 1센트짜리 동전의 번쩍이는 표면을 더 사랑하는 구두쇠가 아닌가?

그는 호수에 내려앉은 물오리들을 무단 침입자로 보는 사람이다. 탐욕스러운 하피 괴물처럼 재물을 긁어모으는 오랜 습관으로 인하여 그의 손가락들은 꼬부라진 각질의 발톱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므로 플린트 호수란 이름을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나는 그 농부를 보거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그 호수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 농부는 한 번이라도 참다운 눈으로 이 호수를 본 적이 없으며, 호수에서 멱을 감은 일도 없고 호수를 사랑하거나 보호한 일도 없다. 또한 호수를 칭찬하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으며, 하느님이 이 호수를 만들어놓은 데 대하여 감사한 적도 없다.

차라리 이 호수의 이름을 그 속에서 헤엄치는 어느 물고기나 그곳에 자주 모습을 나타내는 들새나 네발 짐승, 또는 그 물가에 자라는 어떤 들꽃이나, 또는 그의 삶이 호수의 내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어떤 야성의 어른이나 아이의 이름을 따라 지었더라면 한결 나았을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사고 방식을 가진 이웃 사람이나 또는 법률이 그에게 준 토지 증서 말고는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사람, 이 호수의 금전적 가치만 따지는 사람의 이름을 붙이지는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이 호숫가에 모습을 나타내면 호수 전체에 어떤 저주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호수 근처의 땅의 지력을 쇠잔시켰으며 가능하면 호수의 물마저 다 써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이 호수가 영국건초나 넌출월귤이 자라는 풀밭이 아닌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의 눈에는 호수는 환금 가치가 없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호수의 물을 전부 빼고 바닥에 있는 진흙이라도 팔려고 했을 것이다. 이 호수의 물로는 물방아를 돌릴 수 없었으며 호수를 그냥 바라다보는 것은 그에게는 아무런 '특전'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노동을 경멸하며 모든 것에 가격표가 매겨져 있는 그의 농장도 경멸한다. 그는 단 몇 푼이라도 받을 수만 있으면 경치라도, 아니 그가 믿는 하느님이라도 시장에 가지고 나가 팔려고 할 것이다. 사실 그의 진짜 하느님은 시장에 있다. 그의 농장에서는 아무것도 공짜로는 자라지 않는다. 그의 밭에서는 곡식 대신 돈이 자라며, 그의 꽃밭에서는 꽃 대신 돈이 피어나며, 그의 과일 나무들은 과일 대신 돈이 열리는 것이다. 그는 과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으며, 과일이 돈으로 환금되기 전에는 완전히 익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진정한 부를 즐길 수 있는 가난, 나는 그것을 원한다. 농부의 가난에 비례하여 나의 관심과 애착심은 커진다. 모범 농장! 거기에는 퇴비더미에서 자라난 버섯같이 생긴 집이 있으며, 일꾼들의 방과 말, , 돼지들의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청소가 되고 안 되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가축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사육하는 곳. 가축들의 똥오줌 냄새와 버터밀크의 냄새가 뒤범벅이 된 곳. 사람들의 심장과 뇌수를 퇴비로 쓰는 고도의 경작이 이루어지는 곳. 그것은 마치 묘지에서 감자를 재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모범 농장이란 바로 그런 곳이다.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경치에다 사람의 이름을 붙이려거든 가장 고귀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이름에 한하기로 하자. 우리 고장의 호수들에게 최소한 '이카로스의 바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는 위대한 발명가였던 디달로스의 아들이었다. 크레타섬의 폭군에게 붙들려 있던 두 부자는 디달로스가 만든 인조의 날개를 달고 탈출했으나, 이카로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날개의 아교가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지금도 에게해에 '이카로스의 바다'라는 해역이 있다)처럼 진실된 이름이 주어지도록 하자. 그 바다에서는 지금도 그의 용감한 시도가 해안을 울리고 있다.

 

자그마한 구우스 호수는 플린트 호수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콩코드 강이 넓어진 수역인 페어헤이븐은 넓이가 70에이커쯤 되는데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1마일 지점에 있다. 넓이가 40에이커쯤 되는 화이트 호수는 페어헤이븐을 지나서 1마일 반쯤 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상이 나의 호반 지역이다. 이 호수들이 콩코드 강과 더불어 내가 그 개발권을 가진 수역들이다. 밤이든 낮이든,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오더라도 이 호수들은 내가 가지고 가는 곡식들을 어김없이 빻아준다.

나무꾼들과 철도,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월든 호수를 더럽혀 놓았기 때문에 이제 이 지역의 호수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가장 매력적인 호수, 즉 숲의 보석과도 같은 화이트 호수라고 하겠다. 그러나 화이트라는 이름은 호숫물이 맑은 데서 유래했든 혹은 호수의 모래 색깔에서 유래했든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잘 지은 이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점에서 이 호수는 월든 호수의 쌍둥이 동생이다. 이들은 서로가 너무 닮았기 때문에 지하고 연결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호숫가에 돌이 많은 것도 같고 물의 빛깔도 똑같다. 월든 호수에서처럼 무더운 복날에 숲 사이로 해서 깊지 않은 만의 물을 바라다보면, 바닥으로부터 색깔이 반사되어 호숫물이 엷은 청록색을 띠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래 전에 나는 샌드페이퍼를 만들 모래를 채취하기 위해서 외바퀴수레를 끌고 그 호수에 갔었는데 그 후에도 계속하여 그곳을 찾게 되었다.

그 호수에 자주 드나드는 어떤 이는 호수의 이름을 '비리드 호수', 즉 녹색 호수로 부르자고 한다. 내 생각에는 '미송 호수'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15년 전만 하더라도 물 가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깊은 곳에 뚜렷한 종으로서 분류된 것은 아니지만 이 지방에서 미송나무라고 부르는 종류의 소나무의 위쪽 끝 부분이 물 위에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육지가 가라앉아 이 호수가 생겨났고 이 나무는 과거에 이곳에 있던 원시림 중에서 남아 있는 나무인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당히 오래전인 1792년에 이미 매사추세츠 역사학회의 논문집에 수록된 "콩코드 시의 지형"이란 글에서 콩코드의 시민 한 사람은 이 미송나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월든 호수와 화이트 호수에 대해 기술한 다음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호수의 수위가 내려가면 화이트 호수 한가운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게 보이는데 이 나무는 그 자리에서 자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뿌리는 수면에서 50피트 아래의 호수 바닥에 박혀 있다. 이 나무의 최상부는 잘라져 나갔고 그 잘린 부분의 지름은 14인치쯤 된다."

1849년의 봄에 나는 서드베리 마을 사람 중 이 호수에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10년 전인가 15년 전인가에 그 나무를 호수에서 꺼낸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그 나무는 호숫가에서 60내지 75미터쯤 떨어진 물 속에 서 있었으며, 그곳의 깊이는 30내지 40피트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겨울날 그는 아침나절에 호수에서 얼음을 자르고 있었는데, 그날 오후에 이웃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그 오래된 미송나무를 뽑아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나무가 있는 데서 호숫가쪽으로 얼음을 톱으로 잘라 골을 내고 황소의 힘을 빌어 그 나무를 얼음 위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그가 일을 착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에 나와 있던 부분은 실은 밑둥이며 가지 부분은 아래로 향해 있었고 그 가는 끝이 모래 바닥에 단단히 박혀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나무는 굵은 쪽이 지름이 1피트쯤 되어서 그는 훌륭한 판자용 목재가 되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막상 꺼내놓고 보니 너무 썩어 있어서 간신히 땔감으로나 쓸 수 있을 정도였다.

나하고 이야기할 때만 해도 나무의 일부가 그의 헛간에 남아 있었다. 나무의 밑둥 부분에는 도끼 자국과 딱다구리가 쪼은 자국이 있었다. 그의 추측으로는 이 나무는 호숫가에 있을 때 이미 고목이 되어 있었으며, 바람에 의해 마침내 호수 쪽으로 넘어졌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무의 윗 부분이 물이 배고 밑둥 부분은 아직 말라서 가벼울 때 호수 가운데로 떠내려가다가 거꾸로 호수 바닥에 박혔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의 부친은 연세가 여든이었는데 호수에 그 나무가 없었던 적을 기억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호수 바닥에는 아직도 몇 개의 꽤 커다란 통나무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수면의 물결의 움직임 때문에 마치 커다란 물뱀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호수에서 사람들이 배를 띄우는 일은 거의 없는데, 낚시꾼을 끌어들일 만큼 고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진흙을 필요로 하는 하얀 수련이나 보통의 창포 대신 붓꽃이 호숫가 주변의 돌이 많은 바닥에서 뻗어 올라 맑은 물속에서 가냘프게 자라고 있다. 6월이 되면 벌새들이 붓꽃을 찾아 이곳으로 날아온다. 붓꽃의 푸르스름한 긴 잎과 꽃들, 특히 물에 비친 그 그림자는 청록색의 호수 물과 더불어 신기한 조화를 이룬다.

화이트 호수와 월든 호수는 지상의 커다란 수정 보석이며 빛의 호수들이다. 만약 이들이 영원히 응결되고, 훔칠 수 있을 만큼 작은 것들이라면 아마 제왕들의 머리를 장식하는 보석으로 쓰기 위하여 노예들이 캐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호수들이 액체 상태인데다 그 양이 풍부하며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영원히 확보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들을 무시하고 '코히누르의 다이아몬드' (코히누르의 다이아몬드 : 1850년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소유가 된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뒤쫓는다.

이 호수들은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다. 이들에겐 더러운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 호수들은 우리들의 인생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우며 우리들의 인격보다 얼마나 더 투명한가! 이들은 우리 앞에서 비천한 모습이라고는 조그만큼도 보이지를 않는다. 농부의 집 앞에 있는 오리들이 헤엄치는 물 웅덩이보다 얼마나 더 깨끗한가! 이곳에는 깨끗한 야생 물오리가 찾아온다. 자연에게는 자연을 이해해 주는 인간의 주민이 없다. 아름다운 깃털을 지닌 새들은 노래를 부르며 꽃들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어떤 청년이나 처녀가 자연의 야성적이고 풍요로운 아름다움과 호흡을 같이하는가? 자연은 이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홀로 활짝 피어난다. 자연을 놓아두고 천국을 이야기하다니! 그것은 지구를 모독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0장 베이커 농장

 

때때로 나는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숲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소나무들은 신전들처럼 또는 돛을 전부 올린 바다의 함대처럼 당당하게 서 있었으며, 부드럽게 흔들리는 가지들 때문에 잔물결이 이는 듯이 햇빛 속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 나무들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푸르른 데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으므로 드루이드교 (고대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등지에 살았던 켈트인들은 드루이드교를 믿었으며, 떡갈나무를 신성시하여 그 숲에서 종교 의식을 치렀다)의 승려들이 보았더라면 떡갈나무 숲을 버리고 이 소나무 숲에서 예배를 보려고 했을 것이다.

나는 플린트 호수 너머에 있는 삼나무 숲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곳에는 해묵은 청딸기 넝쿨에 감긴 삼나무들이 점점 키가 높이 솟아올라 설사 '발할라의 전당'(발할라의 전당 : 대 게르만 민족의 최고의 신 '오딘'의 전당) 앞에 선다 해도 조금도 손색 없을 모습을 하고 있으며, 노간주나무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화환으로 땅을 뒤덮고 있다.

어떤 때는 늪을 찾기도 했다. 거기에는 나무 이끼가 가문비나무에서 꽃줄처럼 늘어져 있으며, 늪의 신들의 둥근 탁자인 버섯들이 땅을 덮고 있다. 보다 아름다운 버섯들은 나비나 조개 모양으로 나무 그루터기를 장식하고 있는데, 그 붙어 있는 모습이 꼭 식물성의 고둥 같기만 하다. 늪에는 패랭이꽃과 산딸나무가 자라며, 감탕나무의 붉은 열매는 꼬마 도깨비의 눈처럼 빛난다. 노박덩굴은 매우 단단한 나무라도 부스러뜨릴 듯이 휘감아서 자국을 내놓는다. 야생의 감탕나무 열매는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집에 갈 생각을 잊게 만든다. 그 밖에도 사람이 따먹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이름 모를 야생의 금단의 열매들이 그의 눈을 부시게 하고 그를 유혹한다.

어떤 학자를 방문하는 대신 나는 이 근처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나무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찾아갔다. 이런 나무들은 멀리 떨어진 어떤 풀밭의 한가운데에 서 있거나 숲이나 늪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어떤 것은 산꼭대기에 있는 것도 있었다. 한 예로 검정자작나무를 들 수 있는데, 직경이 2피트쯤 되는 잘생긴 나무 몇 그루가 이 지역에 자생하고 있다. 그 사촌뻘되는 노랑자작나무는 황금색의 헐렁한 조끼를 걸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검정자작나무와 똑같은 향기를 가지고 있다.

말쑥한 줄기에다 아름답게 이끼가 덮여 있는 너도밤나무는 모든 점에서 완벽하다. 이 너도밤나무는 몇몇 흩어져 있는 나무들을 제외하고는 이 지역에는 단 한 군데의 작은 숲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예전에 이 근처에서는 산비둘기를 잡으려고 할 때 너도밤나무 열매를 미끼로 썼는데, 그 열매를 산비둘기가 물고 가다가 떨어뜨린 것이 이 너도밤나무 숲이 생기게 된 유래라는 얘기가 있다. 이 나무를 쪼갤 때 은빛의 나뭇결이 빛나는 것은 보기에 참 좋다.

참피나무와 서나무도 있다. 그리고 단 한 그루의 잘 자란 개느릅나무도 있다. 높은 돛대 같은 소나무와 폰데로사소나무도 있으며, 보통 이상으로 완벽한 솔송나무가 숲 한가운데에 정자처럼 서 있기도 하다. 그 밖에도 많은 나무들을 들 수 있으리라. 이 나무들이야말로 내가 여름, 겨울을 가리지 않고 찾아보는 신전들이었다.

언젠가 나는 무지개의 한쪽 끝에 서 있었던 적이 있다. 그 무지개의 끝은 대기의 하층에 가득차 주위의 풀과 나뭇잎들을 물들였으며, 마치 색깔 있는 수정을 통하여 세상을 본 것처럼 나를 황홀하게 했다. 그것은 무지개빛의 호수였으며,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 속에서 돌고래처럼 뛰놀았다. 그것이 조금 더 오래 계속되었더라면 나의 일과 생명은 완전히 채색되었으리라.

내가 철둑 길을 걸을 때면 나의 그림자 주위에 후광이 생기는 것을 보고 늘 신기하게 생각했으며, 어쩌면 내가 선택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공상을 해보기도 했다. 나를 찾아온 사람 하나는 자기 앞을 걸어가던 어떤 아일랜드 사람들의 그림자에는 후광이 없었으며 오직 이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만이 그런 특징이 있노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벤베누토 첼리니(벤베누토 첼리니(1500~1571):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 및 금세공가. 그의 파란 만장한 일생을 이야기한 자서전 역시 유명하다)는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 그가 성 안젤로 성에 갇혀 있을 때, 밤에 무서운 꿈을 꾸거나 환상을 본 다음날 아침이나 저녁에는 자신의 머리 그림자 주위에 찬란한 빛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그가 이탈리아에 있건 프랑스에 있건 관계 없이 일어났고, 특히 풀이 이슬에 젖어 있을 때 더욱 역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내가 말한 것과 같은 현상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침에는 특히 잘 보이며 다른 때에도, 심지어는 달이 뜬 밤에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늘 있는 현상이지만 사람들은 거의 주목을 하지 않는다. 첼리니같이 흥분하기 쉬운 상상력을 갖고 있는 경우에 그것은 충분히 미신의 근원이 될 수 있으리라. 게다가 그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그것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자신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말 유별난 존재들이 아닌가?

 

어느 날 오후 나는 숲을 지나 페어헤이븐으로 고기를 잡으러 갔다. 식물성만으로 된 나의 넉넉치 않은 식단을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가는 길은 플레슨트 들판을 지나는데, 이 들판은 베이커 농장에 부속된 땅이다. 베이커 농장에 대해서 최근에 어떤 시인이 시를 지어 읊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대의 입구는 유쾌한 들판.

이끼 낀 과일 나무들이 들판의 일부를 기운찬 개울에 양보를 한다.

개울의 임자는

소리 없이 움직이는 사향쥐와,

여기저기 헤엄쳐 다니는 경쾌한 송어들."

나는 월든에 가기 전에는 베이커 농장에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나는 그곳을 지나면서 사과를 훔치기도 하고 개울을 뛰어넘어 사향쥐와 송어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 날은 많은 사건이 발생할지 모르는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그런 오후였다. 우리 인생은 상당 부분 그런 날이 차지한다. 하지만 내가 출발했을 때는 이미 오후의 절반 가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 소나기를 만나 30분 동안을 소나무 아래에 서서 나뭇가지를 여러 개 머리 위에 얹고 손수건으로 비를 막아야 했다.

마침내 물 속에 몸을 반쯤 담그고 낚시를 수초 위로 던졌을 때 나는 갑자기 내 자신이 구름의 그림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천둥소리가 무섭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그 소리에 넋을 잃고 있었다. 불쌍하고 힘 없는 낚시꾼 한 사람을 쫓아내기 위해 째진 번갯불까지 동원하다니! 그러고도 신들은 의기 양양해 있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오두막집으로 급히 달려갔다. 이 오두막집은 길에서는 반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으나 호수로부터는 그만큼 가까웠으며, 오랫동안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 시인이 집을 지었다.

그 먼 옛날에.

보라, 다 쓰러져 가는

이 초라한 오두막집을."

이처럼 시의 여신은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그곳에 가보니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존 필드라는 남자가 아내 여러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는 얼굴이 넓적한 소년이었는데, 방금 비를 피해 아버지와 함께 늪에서 막 뛰어온 참이었다. 그리고 막내는 얼굴에 주름살이 있는 데다 여자무당 같은 모습을 한 원추형의 머리를 가진 아이였는데, 아버지의 무릎이 왕후들의 궁전인 양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습기와 굶주림이 누비는 자기 집 안에서 어린아이의 특권으로 낯선 사람을 수상하다는 듯이 내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존 필드라는 사람의 가난하고 굶주린 자식이 아니고 실은 고귀한 가문의 막내이며, 세상의 희망인 동시에 주목의 대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집안에서 비가 가장 적게 새는 쪽의 지붕 밑에 우리는 다 함께 모여 앉았다. 밖에는 천둥이 치면서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 집식구들을 미국으로 태워 온 배가 만들어지기 전인 그 옛날에도 나는 여러 차례 이곳에 와서 앉아 있던 일이 있었다.

존 필드는 분명히 정직하고 부지런하기는 했으나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역시 저 높다란 아궁이의 한구석에서 날이면 날마다 밥을 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동그랗고 기름진 얼굴에다가 가슴 한 쪽을 드러내놓고 있었는데, 언젠가 자기 집 형편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한 손에는 항상 걸레가 들려 있었으나 그 효과는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닭들 역시 비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가족의 일원인 양 돌아다녔다. 이 닭들은 너무 인간화되어서 요리를 해도 그리 맛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닭들은 똑바로 서서 내 눈을 쳐다보기도 하고, 내 구두를 무슨 의미가 있는 듯 쪼기도 했다.

그동안 집주인은 나에게 자기 신세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이웃의 어느 농부와 계약을 맺고 늪을 개간하는 일에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삽과 늪지대용 곡괭이를 써서 늪을 개간하면 1에이커당 10불을 개간비로 받고, 또 그 땅을 1년 동안 비료를 써서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넓적한 얼굴을 가진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얼마나 불리한 계약을 맺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의 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해온 것이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경험을 토대로 그를 돕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근처에 사는 그의 이웃의 한 사람이라는 것과 낚시질이나 다니며 빈둥빈둥 노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나 자신도 일을 해서 먹고 산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내가 밝고 깨끗한 아담한 집에 살고 있으며, 그의 집과 같은 낡은 집의 1년 동안의 세에 해당하는 돈만을 가지고도 내 집을 지었으며, 그도 원한다면 한두 달 안에 궁전 같은 자신의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나는 차나 커피, 버터나 우유나 육류를 먹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힘든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 그리고 중노동을 하지 않으니 대식을 할 필요가 없고, 그리하여 식료품값으로 아주 적은 돈만을 지출한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기본 식량이 차, 커피, 버터, 밀크와 소고기이므로 그것들을 얻기 위해 중노동을 해야 하며, 중노동을 하면 신체의 소모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다시 대식을 해야 한다는 점, 그러니 결국은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그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몸까지 축내고 있으니 실은 손해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은 미국에 건너온 것을 잘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서는 차와 커피와 고기를 매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다운 미국은 그런 것들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생활 양식을 자유로이 추구할 수 있는 그런 나라여야 하며, 또 노예 제도나 전쟁을 국민이 지지하도록 국가가 강요하고, 그런 물건들을 사용하는 데서 직접 간접으로 초래되는 쓸데없는 비용을 국민이 부담하도록 국가가 강요하는 일이 없는 나라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마치 그가 철학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또는 철학자가 될 의향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 진지하게 들려 주었다.

지상의 모든 풀밭들이 야생의 상태로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이 자기 구제를 시작한 결과라고 한다면 나는 기뻐할 것이다. 어느 사람이 자기 교양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하여 역사를 공부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일랜드 사람을 교화시키는 일은 일종의 정신적인 늪지대용 곡괭이를 써야 할 작업인 것이다.

나는 그에게 그가 힘든 개간 작업을 하기 때문에 두꺼운 장화와 튼튼한 작업복을 필요로 하며 또 그것마저 쉽게 닳아질 것이지만, 나는 가벼운 구두와 엷은 옷을 입고 있으니 내가 신사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다고(사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보겠지만 실은 그가 들인 비용의 절반밖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한두 시간의 수고로 이틀간 먹기에 충분한 물고기를 잡든가, 아니면 한 주일을 지탱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는데, 그것도 노동이 아니고 오락을 하는 기분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만약 그와 그의 가족도 소박하게 살려고만 한다면 여름에는 모두 허클베리를 따러 놀러갈 수도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라고 나는 덧붙였다.

이 말을 듣더니 존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의 아내는 양손을 허리에 대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들 부부는 자신들에게 그런 생활을 시작할 만한 넉넉한 밑천이 있는지, 또 일단 시작하면 그것을 계속해낼 만한 산술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 같았다. 그런 생활은 그들에게는 추측 항법에 의해 배를 모는 것과 같아서 어떻게 해서 항구에 도착할 것인지 뚜렷한 방법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방법대로 용감하게 인생에 달려들어, 얼굴을 직접 맞대고 물어뜯고 할퀴고 있으리라. 인생의 거대한 기둥들에다 잘 듣는 쐐기를 박아 갈라놓은 다음 하나하나 부수어 해결해 가는 기술을 갖지 못한 이들 부부는 마치 엉겅퀴나무를 다루듯 인생을 거칠게만 다루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엄청나게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다. 존필드는 안타깝게도 계산 없이 살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다.

"낚시질 가는 적 있어요?" 하고 내가 물었다. "물론이죠. 한가할 때는 나가서 한 끼니 정도의 물고기를 잡아 오죠. 퍼치를 꽤 잡았습니다." "미끼는 무엇을 씁니까?" "지렁이로 먼저 피라미를 잡고, 피라미를 미끼로 퍼치를 잡지요." "여보, 지금 나가시면 어때요?" 하고 그의 아내가 희망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존은 망설였다.

소낙비가 이제 그쳤고, 동쪽 숲 위의 무지개는 맑은 저녁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작별 인사를 했다.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그릇 하나만 빌려달라고 했다. 이 집의 주변을 마지막으로 살필 겸, 우물의 밑바닥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물은 얕고 모래가 보였으며, 두레박 줄은 끊어지고 두레박은 우물에 빠져 있었다.

그 동안 적당한 그릇 하나가 선택되었고, 물은 끓이기라도 하는 듯했다. 의논하느라고 꽤 시간을 지체한 끝에 물 한 그릇이 목마른 사람에게 건네졌다. 아직 식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은 물이었다. 이런 죽 같은 물이 이곳에서는 생명을 부지해 주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눈을 딱 감고 솜씨 있게 물 바닥을 흔들어 티끌을 한쪽으로 밀면서, 손님 접대에 대해 나대로의 성의를 보여 물을 들이켰다. 예의범절이 문제가 되는 이런 경우에 나는 까다로움을 피우지 않는다.

비가 개인 뒤 나는 아일랜드 사람의 집을 떠나 다시 호수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런데 사람도 없는 황량한 곳에서 물에 잠긴 풀밭에 발목을 적신다든지, 수렁이나 진흙 구덩이에 빠지면서 강꼬치고기를 잡으려고 서둘러 가는 나의 모습이 대학교까지 나온 사람으로서는 너무 하잘것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러나 내가 무지개를 등 뒤에 지고, 맑은 공기를 뚫고 어디서인지 들려오는 작은 방울들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으면서, 붉어드는 서쪽을 향하여 언덕을 달려 내려갈 때 나의 천재성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낚시와 사냥을 가라. 날마다 멀리, 더 멀리, 또 더 멀리. 그리고 시냇가이든 난롯가이든 두려워하지 말고 쉬어라. 그대의 젊은 날에 조물주를 기억하라. 새벽이 되기 전에 근심에서 깨어나서 모험을 찾아 떠나라. 낮에는 다른 호수에 가 있도록 하라. 밤이면 뭇 장소를 그대의 집으로 삼아라. 이곳보다 넓은 평야는 없으며, 여기서 하는 놀이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다. 그대의 천성에 따라 야성적으로 자라라. 여기 있는 골풀이나 고사리처럼 말이다. 그것들은 결코 영국건초는 되지 않을 것이다. 천둥이 울리면 울리도록 내버려 두라. 그것이 농부의 수확을 망칠 우려가 있다 한들 어떻단 말인가? 그것은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사람들이 수레와 헛간으로 피할 대 그대는 구름 밑으로 피하라. 밥벌이를 그대의 직업으로 삼지 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려 들지 말라. 진취성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사고 팔고 농노처럼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 베이커 농장이여!

"이곳 경치의 가장 귀한 요소는

때묻지 않은 햇빛이니."

"울타리로 막아진 그대의 풀밭에는

아무도 까불며 뛰놀지 않는다."

 

"그대는 아무와도 다투지 않으며,

질문으로 괴로움을 받지도 않는다.

소박한 갈색 옷을 걸치고,

처음이나 지금이나 순하기 짝이 없다."

 

"오라, 사랑하는 사람들아,

그리고 미워하는 사람들도 같이.

신성한 비둘기의 아이들이든,

국적 가이 포크스의 후예이든.

그리고 음모를 교수형에 처하자,

단단한 나무 서까래에 매달아서."

사람들은 저녁에는 꼬박꼬박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기껏해야 근처의 밭이나 길거리로부터 돌아오는 것이며, 그곳은 집에서 나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가까운 곳이다. 자신이 내쉰 공기를 다시 들이마시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은 시들고 있다. 차라리 아침 저녁때의 그들의 그림자가 그들이 매일 걷는 걸음보다 더 멀리 뻗쳐 있다. 우리는 매일 먼 곳으로부터 집에 돌아와야 하겠다. 모험을 하고, 위험을 겪고, 어떤 발견을 한 끝에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성격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야 하겠다.

내가 호수에 도착하기 전에 무슨 새로운 충동을 느꼈는지 존 필드가 뒤좇아 왔다. 해 지기 전에 한바탕 개간 작업을 하려던 생각은 포기하기로 마음을 돌린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의 한 줄을 채울 만한 물고기를 잡고 있는 동안 이 가엾은 사람은 두어 마리의 물고기를 놀라게 했을 뿐이다. 그는 그것이 자기의 운이라고 했다. 우리가 배 안에서 자리를 바꾸어 앉자 운도 따라 자리를 바꾸었다.

가엾은 존 필드! 나는 그가 이 글을 읽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어서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라면 몰라도. 그는 낡은 나라에서 쓰던 수법의 한 변형을 가지고 이 원시적인 새 나라에서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다. 피라미를 가지고 퍼치를 낚으려고 하는 것도 그렇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좋은 미끼가 되는 것을 인정하지만 말이다. 지평선을 송두리째 차지하고도 그는 가난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가난과 또 아담의 할머니 때부터 내려온 진흙 수렁 같은 생활방식을 유산처럼 물려받고 있으니 그와 그의 자손들은 늪을 헤매고 다니는 그들의 오리발 뒤꿈치에 날개라도 돋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일어설 도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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