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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조건

위험한 조건

Lynne Graham

 

1

글로리가 그라치니 산업의 런던 본사 건물로 들어서자 주위에 있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녀의 얼굴은 웬만해서는 잊을 수 없을 만큼 특색이 있었다. 넓고 높은 광대뼈와 블루벨(푸른 종 모양의 꽃이 피는 풀)색이 나는 시원한 눈매와 크고 도톰한 핑크빛 입술. 그리고 벌꿀 색의 금발머리를 뒤로 붙잡아 매고 카키색 전투복 바지와 간편한 상의를 입고 있는데도 눈에 확 띄었다. 놀랄만큼 아름다운 얼굴과 관능적인 몸매를 가진 그녀에게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글로리는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시선은 의식하지 못한 채 점점 약해지는 용기를 북돋우려고 애썼다. 라파엘로가 얘기를 들어줄 거야. , 들어 주고말고. 4년 만에 만나면 어때? 두사람이 안좋은 상태로 헤어졌으면 어때? 아직도 그때의 기분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그에게 큰 상처를 입었지만 나는 그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어. 유력한 실업가들은 민감하지 못한 법이야. 내가 그의 자존심을 좀 상하게 했을지는 몰라도 그는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야. 라파엘로가 가슴 아프도록 짧았던 우리의 연애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녀는 매일, 매시, 매순간을 기억했다. 자신이 얼마나 순진하고 남을 잘 믿고 어리석었는지 기억했다. 그와 함께 보내고 싶었던 마지막 날 밤과 상실감과 거부당한 고통에 이은 굴욕감을 기억했다. 아주 평범한 이야기지, 그녀는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기억들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그녀는 사랑을 원했지만 그는 단지 일시적인 기분 전환을 바랐을 뿐이었다. 그는 쉽게 그녀의 첫사랑이 되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허락할 만큼 그를 믿기 전에 헤어졌다.

그녀는 점점 높이 올라가는 강철 벽으로 된 승강기 안에서 서늘한 금속 표면에 뜨겁고 축축한 이마를 갖다대며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용기를 내, 글로리. 턱을 쳐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어. 지금 긴장되는 게 문제가 아냐. 아니면 세련되지 못한 옷차림이. 또는 강철과 유리로 된 라파엘로의 거대한 빌딩이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것이 .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넌 가족을 돕기 위해 여기 와 있는 거야. 아버지와 남동생 샘을 돕기 위해서.

그녀는 맨 꼭대기 층에서 내려 안락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흐르는 현대풍의 안내 데스크 쪽으로 다가갔다.

"그라치니씨와 약속이 되어 있는데요." 너무 긴장한 탓인지 기어들어가는 소리가 나왔다.

매력적인 갈색 머리 아가씨가 완벽하게 그린 눈썹 사이를 찡그리며 그녀를 아래위로 흝어보았다."성함이...?"

"리틀. 글로리 리틀이에요." 글로리는 서둘러 대답했다.

"저기 앉아서 기다리세요."비서는 시원한 아이스 블루색의 가죽 좌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글로리는 그녀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아서 여성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자신의 반 년치 월급과 맞먹는 옷을 입은 여자들이 맵시를 뽐내고 있었다.

라파엘로가 사업을 잘 해나가고 있는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부자로 출발해 틀림없이 더욱 부자가 되었을 테니까. 그는 그런 유전인자를 갖고 있잖아? 언젠가 그에게 자신의 가문은 중세때부터 장사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가 맺어지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녀는 딱하게도 무지했던 자신의 열아홉 살 시절을 웃어넘기려 했다. 그녀는 젊은 허세에 서로 배경이 다르고 사람들이 <교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새 천년이 된 지금은 아무 문제 될게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엄청나게 구시대적인 사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들은 라파엘로가 <한가지 목적>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때도 그녀는 웃으면서 라파엘로는 자신이 열일곱 살에 학교를 중퇴한 일 같은 것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리틀양...?"

그녀는 쏟아지는 기억 속에서 급히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말쑥한 옷차림의 젊은 남자가 자신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

"사장님께서 지금 만나시겠답니다."

글로리는 간신히 평소의 명랑한 미소를 긴장되게 짓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10시 정각이네. 라파엘로는 조금도 변한 게 없네요. 시간은 늘 철저히 지켰거든요."

그녀의 허물없는 반응에 젊은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순간 글로리의 얼굴은 머리끝까지 빨개졌다. 내가 너무 쓸데없는 말을 했어. 도시 사람들은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그러나 그녀는 초조해지면 말이 많아졌고 기회가 생기면 어색한 침묵을 급히 메우려는 경향이 있었다.

"전 사장님의 비서인 존 리용이라고 합니다." 그가 알려주었다.

"전 글로리예요." 그녀는 상대가 생각처럼 냉담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말했다.

"아주 독특하군요." 그는그녀와 함께 복도를 천천히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하지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에요."

글로리는 외동딸의 출생에 너무 들뜬 아버지가 출생증명서에 글로리아나를 잘못 기재하는 바람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말해 주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155센티미터의 키에 성까지 리틀인 그녀는 놀림을 당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녀는 계속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존을 무시하고 벙어리처럼 행동했다. 당당한 문과 복도끝을 향해 다가갈수록 점점 힘이 빠지고 불안해졌다. 라파엘로가 저 문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무튼 거절하지는 않았으니까 희망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글로리는 무척이나 바쁜 그가 자신에게 가족을 변호할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아주 운이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라파엘로에게 뭐라고 하지? 제발, 제발 다시 생각해 달라고? 우리 아버지를 해고하지 말아 달라고? 철없는 동생이 장난친 걸 갖고 아버지를 탓하지 말아 달라고?

샘은 아주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다. 가정부가 없는 틈을 타 아버지가 맡아 둔 열쇠를 제멋대로 사용해 그라치니 가문의 영국 별장인 몬터규 파크에서 즉석 파티를 연 것이다. 그런데 파티가 도를 넘고 말았고, 그 상황에 겁이 난 샘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갔다. 하지만 아버지 또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샘의 행적을 감추고 그가 개입된 걸 부인하려 했다. 그렇게 기만적인 행위를 변명할 생각에 얼굴이 하얘진 글로리는 활짝 열린 문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복도에 남아 있던 남자가 뒤에서 문을 닫기 위해 그녀를 가볍게 안으로 밀었다. 글로리는 바싹 타는 입으로 현대식 유리와 연철 가구에서부터 아주 호화로운 넓은 사무실을 급히 쭉 둘러보았다. 라파엘로는 어디 있지? 아직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아 보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7년전 라파엘로 그라치니를 처음 만나던 때가 떠올랐다.

글로리의 아버지 아치 리틀은 2백년 동안 대대로 물려받은 몬터규 파크의 정원사였다.

아버지가 수석 정원사가 되기 전에 리틀 집안은 몬터규 파크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서 살다가 승진이 된뒤부터 저택 부지안의 쾌적한 별채에서 살았다. 그녀의 부모님은 좋아했지만 글로리는 친구들이 모두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싫었다. 훼손되지 않은 몇천 평의 아름다운 시골 한가운데 묻혀 사는 게 그녀로서는 죽음보다 더한 파멸처럼 느껴졌다.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오후 여전히 자기 연민에 빠져 길을 걷고 있던 글로리는 인생이 바뀌는 드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산악용 오토바이를 탄 라파엘로 그라치니가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와 경주를 벌이는 걸 지켜보게 된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열여서 살짜리 소녀에게 그날처럼 인상적인 젊은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가 힘차게 몰던 오토바이를 멈추고 헬멧을 벗는 걸 지켜보았다. 강렬하고 생기 넘치는 거뭇한 얼굴 뒤로 검은머리가 쓸어 넘겨져 있었다.

그 순간 글로리는 시골생활에 하나의 커다란 위안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라파엘로 그라치니, 자신보다 여섯 살이 많았지만 처음으로 정신을 홀딱 빼앗길 대상은 될 만했다. 그 뒤 2년동안 그녀는 짝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꿈이 실현되어 라파엘로와 실제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때 예고도 없이 사무실 반대쪽 문이 열렸다.

"갑자기 이사 한명이 급히 찾는 바람에...." 라파엘로가 시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글로리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4년 만의 만남이었다. 4년이라는 긴 시간은 그녀를 소녀에서 여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힘들게 이루어낸 성숙함은 라파엘로가 이 방으로 들어선 순간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기억보다 더 커 보였다. 19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떡 벌어진 어깨와 넓은 가슴, 좁은 엉덩이, 타고난 운동 선수 같은 긴 근육질의 다리....

"앉으시오." 라파엘로가 차분하게 권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는 오만한 얼굴에 보기 좋게 손질된 검은머리 한 가닥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어. 아무것도. 그 생각에 속이 비틀리면서 생애 최악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4년 전 라파엘로가 자신의 앞에서 투자금융회사의 사장 딸인 거만한 빨강머리 아가씨와 키스를 나누던 장면이. 교양 있는 그의 친구들은 그녀가 눈물을 뿌리며 달아나는 걸 보고 무척 재미있어했다. 그들은 시골뜨기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정원사의 딸을 라파엘로가 차버린 것에 안도했다.

뒤에서 다가온 라파엘로가 그녀의 뻣뻣한 팔을 가볍게 잡고 의자에 앉혔다. 그녀는 방금 끔찍한 사고를 목격한 아이처럼 똑바로 앞만 보고 앉은 채 굴욕적인 기억을 뭉개 버리고 다시 방어 자세를 취하려고 애썼다.

"사람들은 내가 워낙 바쁜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말을 쏟아내지." 라파엘로는 느릿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러니까, 좀 충격적이라서. 아니, 어색해서...." 글로리는 고르지 못한 소리로 급히 강조했다.

라파엘로는 유연한 걸음으로 책상 모서리에 기대서더니 울렁거리는 그녀의 속을 얼음처럼 싸늘하게 만드는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쳐다보았다. "난 조금도 어색하지 않소, 글로리."

글로리는 그의 넥타이에 시선을 두었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을 테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어요."

"그래 준다면 고맙겠소." 라파엘로가 촉구했다.

그녀는 준비해 온 말을 막 꺼내려다가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면서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다는 대책 없는 감상에 빠져 들었다. 아주 간단한 말도 특별한 것으로 바꿔 놓는 허스키한 이탈리아 억양이 애무하듯 그녀의 등을 타고 흘렀다.

글로리는 얼굴을 붉히고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얘기를 꺼냈다. "우선 동생을 대신 해서 사과하겠어요. 정말 미안해요. 우리 둘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존중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샘이 아직 어려서....."

"그런 것 같았소." 라파엘로는 냉담하게 말했다. "내 얼굴을 쳐다보고 말할 수 없겠소? 당신이 내 넥타이만 쳐다보고 있으니 정신이 산만해지는군."

그녀는 턱을 쳐들고 벌꿀 색의 금발머리를 뒤로 젖혔다.

"좀 낫군, 카라." 라파엘로는 반쯤 내리뜬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요." 글로리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속삭였다. "너무 긴장해서 하려던 말을 자꾸 잊어버리게 돼요."

"긴장된다고? 내 앞에서 말이요?" 라파엘로가 맹수처럼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반문했다. "설마?"

그녀는 갑자기 그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치명적이고 음흉하고 위험하지만 보통 여자들은 그 위험을 잊고 말 정도로 비길데 없이 근사했다. 저 갸름한 구릿빛 얼굴이 꿈속을 떠날 날이 없었지만 날이 밝으면 언제나 흐릿해졌다. 단단하고 높은 광대뼈와 힘찬 콧날과 아름답고 관능적인 입술이.

"잠시 가벼운 얘기나 나누도록 하지." 라파엘로가 긴 손을 뻗어 사무기기의 단추를 누르고 커피 두 잔을 시키고 말했다. "이건물엔 허브 차가 없소."

"커피도 괜찮아요."가벼운 얘기? 무엇에 관해? 두 사람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얘기가 뭐가 있지?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소?" 라파엘로가 무심히 물었다.

"직장 근처에요."

"누구와?"

"혼자서요. 단칸방에서...."

"어디 있는?"

"집이요?" 글로리는 총알처럼 날아드는 질문 공세를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되물었다.

라파엘로가 한숨을 쉬었다. "내말은, 어느 지역에 있냐는 말이오?"

"버밍엄이요." 그녀가 대답했다.

"시골 아가씨인줄 알았는데."

"시골에서는 내가 할 만한 일이 없어요." 글로리는 그가 생각하는 가벼운 얘기가 심문에 가깝다는 걸 깨닫고 딱딱하게 지적했다.

"그래, 무슨 일을 하고 있소?"

노크 소리에 이어 달그락거리며 접근하는 찻잔 소리가 반가운 방해로 다가왔다. 언제나 이렇게 빨리 커피가 준비되는 걸까?

"하던 얘기를 계속하시오."

어느새 작은 탁자위에 커피가 조심스럽게 내려져 있었다.

"내가요?" 글로리는 커피 쪽으로 손을 뻗었다. ", , 내가 일하는 곳이요? 공장이에요."

"무슨 공장?"

" 글쎄요, 그렇게 흥미로운 얘기는 아니에요."

반짝이는 검은 눈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어떤 것에 흥미가 있는지 알게 되면 아마 놀랄 거요."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듯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포장용 폴리스티렌 등을 만드는 공장이에요."

라파엘로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계속 그녀를 지켜보았다.

"거기서 당신이 하는 일은?"

"그걸 포장하죠. 폴리스티렌을요. 가끔 다른 일을 하기도 하고요."

"언제부터 공장에서 일하는 데 그렇게 재미를 느끼게 되었소?"

"재미있진 않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보수도 나쁘지 않아요." 빈정대는 그의 말투에 글로리는 아름다운 눈에 비난을 담고 얼굴을 붉혔다. "거기서 일한 지 2년 됐어요."

"이런 걸 물어 봐서 미안하지만, 카라." 라파엘로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모델이 되겠다는 그 불타는 야심은 어떻게 된 거요?"

글로리는 얼굴이 하얘지면서 굳어졌다. "불타는 야심까지는 아니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런 제의를 받았지만 생각대로 안돼서...."

"어째서?"

그녀는 그의 질문공세가 몹시 불편하고 당혹스러워서 핑크빛 혀끝으로 팽팽한 아랫입술을 축였다. 어두운 시선이 보드랍고 도톰한 그녀의 입술로 내려오더니 눈에 띄게 열심히 그곳을 주시했다. 그가 그곳을 만지는 것처럼 입술이 따끔거리고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를 조금씩 마셨다. 제발, 그녀는 기도했다. 안 돼, 다시 이런 기분이 들어선 안 돼.

"어째서 말이오?" 라파엘로는 끈질기게 캐물었다. "왜 모델 제의가 생각대로 안 풀린 거요?"

그는 만족할 때까지 계속 추궁할거야. 그녀는 결국 솔직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생각하던 그런 일이 아니었어요. 소위 말하는 <육체적 매력>에 치중된 일이었어요. 당신도 알죠? 카메라 앞에서 옷을 입는 게 아니라 벗어야 하는...?"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옷을 벗으라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거요? 그들이 제시하는 돈이 적었소?"

글로리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나는 그런 일은 할 생각이 없었어요."

라파엘로가 조롱 섞인 눈길을 던졌다. "난 지난번 소나기 때 땅에 내려온 사람이 아니오, 카라. 우리 아버지가 제시한 5천 파운드에 매수된 사람이 당신 아니었소?"

뜻밖의 질문에 글로리는 충격 받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커피잔을 잡고 있던 손이 저도 모르게 풀려 티하나 없는 양탄자 위로 커피가 쏟아지는 걸 보고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렇군."그녀가 마비된 채 앉아서 엎질러진 액체가 값비싼 양탄자를 더럽히는 걸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동안 라파엘로가 확신했다. "내가 당신의 일생의 사랑이 아니라고 납득시키는 데 단돈 5천 파운드가 들었다고 하시더군. 그 돈은 당시 당신에게 무척 큰 액수였겠지."

글로리는 아직도 양탄자에 스며들고 있는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그 돈에 관해 알고 있었어. 너무 수치스러워서 속이 메슥거렸다.

"비밀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모르게 할 거라고 했는데...."그녀는 괴로운 듯이 중얼거렸다.

"순진하기도 하지. 당신은 그 말을 다 믿는단 말이오?" 라파엘로가 갈비뼈 사이로 칼을 쑤셔 박는 것처럼 잔인하게 속삭였다. "재미있군."

"재미있다구요?" 글로리는 메슥거리는 배위로 팔짱을 끼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집안의 화목에 걸림돌이라고 생각되는 하녀를 돈으로 매수하는 서투른 빅토리아 시대의 대지주 역할을 하셨다는 게 말이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는데." 라파엘로는 깊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난 우리 관계를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소. 하지만 당신이 남자의 돈을 노리는 여자처럼 탐욕스럽게 그 돈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즐겁지 않았소. 천하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짓이었소."

글로리는 마치 돌로 변한 것처럼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할말이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 수표를 찢어버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게 결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베니토 그라치니의 눈에 들기 위해 그녀가 집을 떠나야 한다면 그 정도 보상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돈을 노리는 탐욕스런 여자? 라파엘로가 지난4년동안 나를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지독한 쓰라림이 그녀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녀는 부자들의 농간과 그들이 입히는 피해를 생각해 보았다. 그들의 돈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힐 힘을 그들에게 부여했고, 자기들 맘대로 하게 해주었다. 그녀가 집을 떠난 건 아버지의 일자리와 생존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똑같은 이유로 이렇게 라파엘로를 대면하고 있었다.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어깨를 펴고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들었으니까 이제 내가 왜 찾아왔는지 얘기해도 되겠어요?"

"해보시오." 라파엘로가 냉담하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에게 한 달 뒤에 해고한다는 통보를 내렸다면서요?"

"놀랐다고는 하지 마시오." 라파엘로가 매끈한 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당신 아버지의 무능으로 당신의 불량배 동생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졌으니까."

"아버지가 주무실 때 샘이 열쇠를 몰래 빼낸 거예요." 글로리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반박했다. "샘의 의도를 전혀 모르셨기 때문에 그 일로 아버지를 탓할 순 없어요!"

"하지만 경찰에 거짓말까지 해서 당신 동생과 그 불량배 친구들을 보호하려 한 점에 대해선 탓할 수 있지." 라파엘로가 가차 없이 말을 가로챘다. "내가 입은 손해가 얼마인지 아시오?"

"샘한테 들었어요." 하지만 막상 그 질문을 받자 그녀의 호전적인 태도는 즉시 사라지고 말았다. "양탄자에 얼룩이 지고 가구가 긁히고 유리창이 깨졌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피해는 두 방뿐이었다고 하더군요. 샘은 친구들이 너무 취해 통제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마자 도움을 청하러 달려갔어요. 경찰에 신고했을 때 사실대로 말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지." 라파엘로가 절묘하게 끼어들었다.

"결과가 두려우셨기 때문이에요. 샘은 겨우 열여섯 살밖에 안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샘은 경찰의 심문에 사실대로 말했어요. 그는 자신이 한 짓을 몹시 부끄럽게 여기고 반성하고 있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글로리는 창백해진 채 절망적으로 말했다. "당신은 청소년기에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어요?"

"지금 나한테 남의 집에 침입해 물건을 파괴해 본 적이 없냐고 묻는 거라면 대답은 <그렇소>."

"당신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니까요." 글로리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거기선 십대들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어요."

"동정심을 일으키려고 하지 마시오." 라파엘로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냉담하게 말했다. "내집과 재산을 침해한자를 위해 내줄 시간은 없소. 청소비만 해도 몇 천 파운드...."

"몇천 파운드요?" 그녀는 질겁하며 되물었다. "바가지 쓰고 있는 거예요!" 글로리가 외쳤다. "다들 당신이 부자라는 걸 아니까요. 청소회사에서 당신이 그만한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그런 금액을 부른 거예요."

라파엘로가 냉소적인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 글로리, 값비싼 골동품을 보수하고 훼손된 회반죽 벽을 복구하는 데는 숙련된 전문가가 필요하오."

"당신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해줄 형편이 못 되어 정말 유감이에요."

"난폭한 십대들에게 서른 대의 태형을 내리던 시대가 아니라는 게 유감이오." 라파엘로가 냉담하게 말을 잘랐다.

"하지만 거실에서 없어진 그 코담뱃갑만 돌려준다면 당신 동생을 고소하는 일은 고려해 볼수도 있소."

글로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뭘 잃어버렸다고요? 하지만 경찰은 그런 말을 안 했는데요?"

"오늘 아침에 내가 알아채기 전까지 그들도 몰랐기 때문이오." 라파엘로가 침울하게 설명했다. "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물건이라서."

"코담뱃갑이라구요?" 글로리는 귀중한 물건을 도난당했다는 소식에 아연해 힘없이 되뇌었다.

"18세기 독일산으로 금에 보석이 박혀 있소. 사실상 다른 것과 대체가 불가능한 물건이오." 라파엘로가 설명했다.

글로리는 팽팽히 긴장된 입술을 뗐다. "얼마나 하는데요?"

"6만 파운드 정도."

"6...파운드라구요?"

"내가 워낙 고급 취향이라...."

"그걸 도난당했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글로리가 외쳤다. "내 말은, 찾아보기는 했어요? 확실해요?"

"내가 찾아보지도 않고 경찰에 연락했을 거라고 생각하오? 난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다는 따분한 십대들에 관한 당신의 그 감동적인 견해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소. 난 그런 절도 행각은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오."

글로리는 핏기가 다 가실 정도로 입술을 꼭 다문채 후들거리는 다리로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샘이 뭘 훔쳤을 리가 없어요."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그랬소."

그녀가 알고 있는 것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즉석 파티에 참석한 스무명 정도의 아이들 가운데 그 작은 물건을 슬쩍 하기도 쉬웠을 것이다. 세상에, 6만 파운드나 나가는 물건을.... 속이 울렁거렸다. 샘이 술 취한 친구들과 파티를 열기 위해 큰 저택에 잠입한 것만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인데 물건까지 없어졌으니....

"샘을 고소하고 아버지를 해고한다는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겠군요?" 글로리는 이제 그를 설득할 희망이 없다는 걸 알았다.

"당신의 미모와 멋진 몸매를 보고 압도된 나머지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할 줄 알았소?"

그녀는 라파엘로의 상냥한 속삭임 속에 사무치는 경멸을 읽고 움찔했다. "아뇨,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그녀는 지독한 배신감을 안고 단호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강조했다. 그에게 이렇게까지 낮게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아버지와 동생이 잘못을 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그들의 인생을 파멸시킬 생각을 하고 있군요? 아버지는 전문 정원사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 연세에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요. 그 담뱃갑이 없어져서 이러는 거예요? 그 담뱃갑이 당신에게는 그다지 큰 물건은 아닐 텐데요?"

"아름다운 것은 즐거움을 안겨주지." 라파엘로는 주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글로리는 초조하게 물었다.

"지금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바뀌겠냐고 묻고 있는 거요?" 라파엘로는 냉소적인 평가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허스키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내게 뭘 줄 수 있소?"

"끝없는 고마움이면 될까요?" 글로리아는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제의했다.

"대가없는 일은 내 취향이 아니오. 더 원초적인 본능에 호소한다면 모를까. 어디보자. 내가 당신에게서 뭘 받고 싶을까?" 라파엘로는 희미한 빛을 발하며 긴장한 채 앉아 있는 그녀르 건너보았다. "한가지뿐이오. 섹스."

 

2

섹스? 이건 또 무슨 농담이지? 글로리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겠죠.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닐 테죠?"

"내가 말이오? 난 당신이 5천 파운드를 받고 판 남자잖소. 밤마다 도덕관념을 생각하느라 잠 못 이룬다고 말할순 없을 텐데?" 라파엘로가 사포로 실크를 문지르는 것처럼 그녀의 팽팽한 등을 타고 흐르는 조용한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어떻소, 글로리?"

"뭐가요?" 글로리는 아직도 그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반항적으로 벌떡 일어서며 되물었다. "지금 농담하는 거죠?"

"농담? 그럴 리가. 오히려 기쁘게 생각해야 하지 않소?" 라파엘로는 뒤로 느긋이 기대서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난 지금 당신을 그 공장 바닥에서 내 침대로 옮겨 놓는 동시에 당신의 아버지와 동생을 곤경에서 구해주겠다고 제의하고 있는 거니까. 그게 관대한 처사가 아니고 뭐겠소?"

"날 싫어하기 때문에 이런 말로 내게 굴욕을 주고 있는...."

"글로리, 당신을 갖기 위해 당신을 좋아하거나 존중할 필요는 없소." 라파엘로는 조금도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냉담하게 반박했다.

"어떻게 내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글로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따졌다.

"당신의 유일한 무기가 될 수 있는 성적요소를 내치지 마시오. 지금 그렇게 입고 있어도 당신은 매력적이거든." 반짝이는 짙은 금빛 눈이 스웨터 밑으로 솟아오른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가 가는 허리 밑으로 뚜렷한 굴곡을 이룬 엉덩이로 내려가더니 이어 더 밑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로 그대로 서 있었다. 민감한 살을 태우는 성적 모욕의 불꽃처럼 뻔뻔스럽게 음미하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곤란한 건 거의 잊고 있었던 감각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골반 깊숙이 팽팽한 떨림이 전해지고, 꽉 조인 허벅지 사이로 흐르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숨 막힌 소리로 외치고는 획 돌아서서 경직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고려해 볼수록 난 더 솔깃해지는군, 카라." 라파엘로가 쉰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솔직한 섹스. 부담 없는 공정한 계약. 난 당신을 지켜주고, 당신은 날 즐겁게 해주고."

"당신이 날 지켜주는 일도 없을 거고, 내가 당신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일도 없을 거예요. 라파엘로 그라치니!" 글로리는 격분해서 외쳤다. "난 창녀가 아니란 말예요!"

"당신에게." 라파엘로는 기분 나쁠 정도로 초연하게 팔목에 찬 금시계를 흘끗 들여다보았다. "세 시간 반을 줄 테니 그때까지 결정하시오. 오늘 오후 2시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이 거래는 없었던 걸로 하겠소."

글로리는 너무나도 침착한 선언에 충격을 받아 그를 노려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말 내가 몸을 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최고 입찰자에게? 그렇소." 라파엘로는 단언했다. "4년전에는 당신이 뭘 원하는지 정말 몰랐소. 그래서 비싼 선물도 해주지 못했소. 내가 원하는 은밀한 관계를 얻기 위해선 현찰을 내놓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도 몰랐고."

"그만해요!" 글로리는 절망적으로 외치며 상처받은 굴욕감을 감추기 위해 다시 한번 그에게서 획 돌아섰다.

"우리 사이는 그렇지 않았어요."

"나와 잠자리를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잖소. 그렇다면 잠자리를 하기 위해선 그보다 나은 조건이라야 받아들이지 않겠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글로리는 갈라지는 소리로 그를 돌아보며 외쳤다. "난 당신을 사랑했단 말이에요!"

"하지만 5천 파운드보다는 덜 사랑했겠지." 라파엘로가 경멸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뻔뻔스럽군."

"당신을 증오해요." 글로리는 그가 주고 있는 굴욕감에 치를 떨며 내뱉었다. "이젠 정말 당신을 증오해요."

"난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거요." 그가 오만한 검은 머리를 높이 쳐들고 침착하게 말했다.

글로리는 성난 발길로 다시 의자로 돌아가 가방을 집어 들며 격하게 외쳤다. "날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싸구려 흥분을 느끼나 보죠?"

"8만 파운드의 빚을 청산해 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오. 지배하는 기분이 어떠냐고? 더할 나위 없이 좋소, 카라." 라파엘로가 인정했다.

"당신은 날 지배할 수 없어요. 내가 주지 않는 한 당신에게 그런 권한은 없어요!" 글로리는 발끈해서 외쳤다.

"하지만 당신은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거요. 내가 그걸 모를 줄 아오? 아무튼 나약한 겁쟁이들은 어디에 숨어 있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치와 샘 말이오. 두 사람은 왜 안 나타난 거요?" 라파엘로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고는 우아하게 문 쪽으로 걸어가 예의를 갖추고 문을 열어 주었다. "하긴, 당신은 그들이 없어도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랬는지도 모르죠."

"어쩌면 다시 한번 나와 어떻게 해볼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고."

"자신을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는군요?"그녀는 이를 악물고 빈정거렸다.

"적어도 당신보다는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남성지지자를 데려오든지 내 반감이 가라앉을 때까지 앉아서 울거나 빌기라도 했어야 할 텐데...."

"난 그런 짓은 안 해요!"

"그랬다면 당신은 원하지도 않았을 거요." 라파엘로는 복도 끝 안내 데스크에서 몸을 떼고 있는 존 리용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여기 온지 5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내 비서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군. 웬만하면 저 친구는 내버려두시오. 나가는 길에 쌀쌀맞은 모습을 보여 주시오!"

"닥쳐요!"그녀는 분노와 수치심과 괴로움으로 치를 떨며 성난 발길을 돌렸다.

어떻게, 무슨 말로 나를 변호할 수 있단 말인가? 라파엘로는 나를 탐욕스럽고 비양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싫든 좋든 나 자신이 4년 전에 중대한 판단 착오를 한 탓에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 아버지가 그 수표를 챙기도록 내버려뒀으니. 아치 리틀은 빚이 있어 절실히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배니토 그라치니를 만난 뒤 그녀에겐 아버지의 요구를 거부하고 올바른 생각을 밀고 나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라파엘로의 아버지를 만나고 나자 자신이 너무나 작아진 기분이었다. 그는 그녀가 갖고 있던 사회적 평등이라는 그릇된 통념의 환상을 깨버렸다.

베니토 그라치니는 그녀가 아들의 인생에서 떠나준다면 근무 태만을 이유로 해고할 수도 있는 아치를 그냥 봐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직장을 잃는다면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반년 전에 예고도 없이 세상을 떠난 아내 털리사를 잃은 슬픔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집안 배경을 생각해 볼 때 네가 우리 아들에게 어울린다고는 생각지 않을 거다. 네가 집을 떠나 새 출발을 하는 게 모두를 위해 최선일 것 같구나." 라파엘로의 아버지는 그 불쾌한 임무를 실행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모질게 단언했다. "대신 네 아버지가 문제를 극복하도록 힘닿는 대로 돕겠다고 약속하마."

집안 배경. 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한때 존경받던 그녀의 아버지는 지금은 술 취한 게으름뱅이로 전락했고, 어머니 털리사 리틀은 집시라는 출신 배경 때문에 지역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글로리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라치니 산업의 최고층에서 다시 승강기에 들어설 때 존 리용이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동생과 아버지가 역 근처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라파엘로 그라치니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의를 했다고?

글로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의 거리를 급히 헤쳐 나갔다. 라파엘로가 왜 이러는 거지? 우리는 4년전에 겨우 한달 반 가량을 사귀었을 뿐이야.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사랑에 빠졌어. 하지만 사랑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는 남자에게 순결을 바칠 만큼 긴 시간은 아냐.

글로리는 어머니 덕분에 몸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털리사 리틀은 여자의 가장 소중한 재산은 순결이라고 믿었다.

옛 기억에서 빠져 나온 글로리는 가게 유리창 앞에 꼼짝 않고 서서 바보같이 멍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식구들이 처한 곤경을 해결할 방법을 궁리하며 다시 걸음을 뗐다. 샘은 법률상 미성년자였다. 그리고 라파엘로는 샘이 그 코담뱃갑을 훔쳤다는 증거는 갖고 있지 않았다. 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뭐지? 샘이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샘은 달라." 글로리의 어머니가 한때 딱하다는 듯이 푸념한 적이 있었다. "사내 녀석이 너무 예민하고 마음이 여려. 강해지지 않으면 앞으로 세상 살아나가기가 힘들텐데...."

아버지는 어떻게 될까? 금주하겠다는 다짐을 깨고 다시 술을 마시게 될까? 마음씨 곱고 착한 분이지만 나약하다는 걸 그녀는 가슴 아프게 인정했다.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는 곧바로 무너졌다.

아버지와 동생은 카페 뒷자리에 앉아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두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그녀는 역력히 괴로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동생 옆에 앉았다.

"그라치니씨가 뭐라고 하던?"아버지가 주름진 이마를 깊게 찡그리며 채근했다.

"아버지...."

"안 좋지? 베니토 그라치니씨가 은퇴해 그 사유지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괜찮았을 텐데."아치 리틀이 몹시 좌절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의 아들 라파엘로는 아주 모질거든. 네가 뭘 보고 그런 사람에게 빠졌는지 모르겠다, 글로리. 내가 아무리 뭐라 해도 널 그 친구에게서 떼놓을 수 없...."

"...." 글로리는 아버지의 말을 급히 잘랐다.

"어떻게 됐어?"동생이 초조하게 물었다.

" 라파엘로가 아주 값비싼 코담뱃갑이 없어졌다고 하던데?"

"뭐라고? 우리가 한 짓이 아냐!"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그 정도로 멍청한 줄 알아?"

"친구들에게 그 담뱃갑을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고 전해야 돼. 아주 비싼 물건이래."

"그걸 갖고 있는 애는 못 봤어."샘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아주 작은 물건이래." 글로리는 그 말을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동생이 한 짓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제 끝났어. 네가 라파엘로 그라치니를 설득하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냐."아버지가 침울하게 말했다. "그 친구를 탓할 수도 없지. 샘이 저택에 들어가서 손해를 입힌 것만도 엄청난데 값비싼 물건까지 없어졌으니...."

"죄송해요, 아버지."샘이 숨막힌 소리로 우물거렸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다시 그럴 기회도 없을 것 같구나."아치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한숨을 쉬었다. "우린 이제 집으로 돌아갈 테니 너도 버밍엄으로 돌아가거라. 미안하다, 글로리. 이번 일에 너까지 끌어들이는 게 아닌데."

"어째서 라파엘로가 제 얘기를 들어 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글로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 네 엄마가 한 말 때문이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 라파엘로가 언제나 널 돌봐 줄 거라고 하더구나.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믿은 내가 바보지."그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처음 듣는 그 말에 글로리는 이상하게 오싹해졌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을 도울 수 있는데도 몸을 사렸다는 생각에 지독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를 경멸하는 남자의 손에 어떻게 몸을 던진단 말야? 그 넓고 화려한 사무실에서 나를 부당하게 취급한 그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해 줬어야 했는데. 그리고 4년 전에 그의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그 불쾌한 사실도 말해 줬어야 했고!

갑자기 결정적인 순간에 글로리는 발길을 돌려 그라치니 산업 쪽으로 향했다. 내가 라파엘로 그라치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줄 거야! 그리고 라파엘로가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 그 훌륭한 분, 약한 자를 괴롭히는 비열하고 돈 많은 그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이제 그도 나에게만 창피하고 부정직한 집안 식구가 있는게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가 왔어.

그라치니 산업의 맨 위층에 도착했을 때 글로리는 여러 가지 감정들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접수요원이 전화로 라파엘로를 불렀다.

"곧바로 들어오시랍니다."접수요원이 말했다.

라파엘로에게 뭐라고 말하지? 그의 아버지가 나에게 그를 포기하도록 아주 비열하고 불쾌한 협박을 가했다고 말할까? 난 정말로 라파엘로에게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자기도취가 심한 그가 4년 전에 내가 미칠 듯이 사랑했다는 얘기를 들을 자격이 있나?

그녀는 갑자기 자신감을 잃고 라파엘로의 사무실 문 앞에서 망설였다. 시간이 갈수록 심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한참 갈등에 빠져 있는데 문이 열렸다. "아직도 생각 중이오?" 라파엘로가 표정없이 냉담하게 중얼거렸다.

글로리는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혀가 마른입 천장에 달라붙었다. 갑자기 가슴이 빠르게 뛰어 숨을 제대로 쉴수가 없었다. 저 갸름하고 힘찬 얼굴과 움푹 들어간 검은 눈. 아주 강력한 자석에 붙었는데 너무 기운이 없어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해하지 말아요. 내가 다시 온 건 솔직하게 말할 게 있기 때문이니까요."

"점심을 먹으면서 들읍시다.." 라파엘로가 느릿하게 말하면서 가볍게 그녀의 등에 손을 대고 승강기 쪽으로 이끌었다.

"점심요?" 글로리는 화들짝 놀라 외쳤다.

"나는 지금 배가 고프오." 라파엘로는 희미하게 번뜩이는 짙은 금빛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몹시."

글로리는 육감적으로 올라간 그의 멋진 입술을 넋 나간 듯이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그녀가 알기로 그는 늘 하루에 두 번 면도를 해야 했다. 그 순간 한때 그가 어떻게 키스했고, 어떤 기분을 안겨 주었는지가 생각났다. 그녀는 그만큼 자신을 걷잡을 수 없이 흥분시킬 수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발견하고 무척이나 그를 갈망했다.

내가 왜 다시 돌아왔지? 그라치니 산업으로 다시 쫓아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 4년전 일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대 내가 다시 나타난 것이 그에게 전적으로 엉뚱한 인상을 주었다면 역시 나의 잘못이 아닐까?

"갑자기 아무런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그가 가차 없이 승강기 안으로 몰아넣자 글로리는 서둘러 말했다.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왕 왔으니 말해 두죠. 샘에게 그 담뱃갑 얘기를 해봤는데, 그아인 그게 사라진 것조차 모르고 있었어요."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으려는 순간 라파엘로가 그녀를 승강기 구석으로 몰아가며 갸름한 두손을 긴장된 여린 어깨에 얹었다. "말이 너무 많군."

"하지만 샘이 친구들에게 물어 본다고 했으니까 그 일만 해결되면 난 버밍엄으로 돌아갈 거예요." 글로리는 더욱 빠르고 숨 가쁘게 말을 이었다. 팽팽한 자신의 몸에서 겨우 몇 센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힘찬 그의 몸이 지독히 의식되었다.

"당신은 버밍엄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요." 라파엘로가 그녀의 팔을 쓰다듬다가 예고도 없이 작은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아뇨!" 글로리는 문득 그의 손을 홱 뿌리치며 외쳤다. "내 말을 안 듣고 있군요? 난 당신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요. 당신과는 얽혀들고 싶지 않...."

라파엘로가 못 참겠다는 듯이 거친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한손을 부드럽게 굽이치는 그녀의 금발 속에 집어넣고 맹렬하게 입술을 덮쳐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경직되었고, 그는 그 기회를 이용했다.

그는 차가운 금속 벽으로 그녀를 몰아넣고 엉덩이 밑에 두 손을 펼치고 자신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고는 에로틱하고 힘차게 그녀의 입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속에서 전율하는 온몸의 세포를 날뛰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정신없이 키스에 응했다. 괴로운 반응의 신음소리가 그녀의 목안 깊숙한 곳에서 빠져 나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잊으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썼건만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힌 그녀는 허벅지를 벌리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주 느닷없이 라파엘로가 얼어붙었다. 그는 거친 신음소리를 내며 입을 떼고 이글거리는 짙은 금빛 눈을 무겁게 내리뜨고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맙소사, 공공 건물의 승강기 안에서 이러고 있다니...!"

글로리는 그제야 승강기가 멈춰 있고, 계기반에 모두 불이 들어와 있는데도 문이 닫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왜 안 움직이죠?"

"내가 세웠소." 라파엘로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몇 개의 단추를 눌렀다.

승강기가 살짝 흔들리면서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글로리는 떨리는 손으로 뭉쳐진 스웨터를 쓸어내렸다. 심한 수치심과 본질적인 솔직함이 결합되어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내 아파트로 갈거요." 라파엘로가 탁한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아뇨, 난 집으로 갈 거예요. 이건 단순한 사고였어요."

"사고?" 라파엘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뇌었다.

"길에서 잠시 한눈을 팔다가 차에 꽝 부딪히는 것처럼요!" 글로리는 심한 자기 혐오감에 사로잡혀 떨리는 목소리로 강조했다.

승강기 문이 전자음을 내며 열렸다. 밖에서 씩씩거리며 기다리던 사람들은 안에 탄 남자를 보는 순간 갑자기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글로리는 비틀거리며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꼼짝 않는 사람들 숲을 헤치고 무작정 달렸다.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지? 기차역을 향해 반쯤 달리던 그녀는 숨이 차서 더 이상 뛰지 못하고 걷기 시작했다.

 

3

다음날, 금요일 오후면 늘 그렇듯이 글로리는 아침에 공장 일을 마치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제일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셋방을 향해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문틈에 옆방 아가씨의 글씨체로 <긴급, 아빠한테 전화해봐>란 메모가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글로리는 현관에 있는 공중전화를 향해 다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아버지가 벨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 글로리?"

", 무슨 일이에요?"그녀는 숨가쁘게 물었다.

"경찰이 수색 영장을 들고 오늘 아침 일찍 들이닥쳤다."

"...수색영장요?" 글로리는 경악해 말을 더듬었다.

"우리 집 연료 창고에서 도난당했다는 그 코담뱃갑을 찾아냈어."아치 리틀이 침울하게 말했다. "샘이 잡혀갔어. 경찰이 그 애를 잡아갔지만 그건 샘의 짓이 아냐. 그건 내가 알아!"

그녀는 충격으로 피부가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샘이 구속됐다구요?"

"그애 친구가 그걸 훔쳤어."그가 강력하게 주장했다. "파티가 벌어지는 동안 샘이 도움을 청하러 달려왔을 때 조도 함께 따라왔는데 자기는 밖에 있겠다고 우겼어. 그리고 아이들을 저택에서 쫓아내려고 집을 나설 때 조가 연료 창고에서 나오는 걸 봤어."

", 아버지...." 글로리는 낙담해 괴롭게 중얼거렸다.

"그아이가 왜 거기서 나오는지 의심스러웠지만 파티를 중단시키려고 쫓아가느라 물어 볼 시간이 없었어. 조가 겁이 나서 그 코담뱃갑을 거기다 숨긴 게 틀림없어. 그렇다 해도 우리 연료 창고에서 발견됐으니 그걸 누가 믿어 주겠니?"아치 리틀은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남자처럼 격앙된 투로 말했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 글로리?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제가 알아서 할게요." 글로리는 억지로 자신 있게 단언했다."샘에게 누나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말라고 전해 주세요."

"네가 어떻게 해결하겠다고? 너무 늦었어."아버지의 신음 섞인 소리에서 울음과 좌절을 읽을 수 있었다. "변호사 말이 법정에 서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대."

"절 믿으세요. 제가 어떻게든 샘을 구하겠어요. 약속드릴게요. 아버지는 이번 일로 샘이 너무 충격 받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써 주세요."그녀는 샘이 어린 마음에 달아나거나 어리석은 짓이라도 저지를까 봐 겁이 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겁먹은 십대 소년이 의지할 단단한 버팀목도,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싸울 수 있다고 샘을 납득시킬 인물도 못 되었다.

글로리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자신이 와들와들 떨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일을 막을 수도 있었는데.... 이제 문제가 커졌으니 어떻게 해결한담?

그녀는 부랴부랴 라파엘로의 런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라파엘로와 통화할 수 없다는 딱딱한 대답이 돌아왔다.

"설마 해외로 나간 건 아니겠죠?" 글로리는 벌벌 떨며 다그쳐 물었다. "아주 급한 일이라 그 분과 통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사장님께선 시골 별장에 가 계시는데 죄송하지만 주소나 전화번호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용건은 전해 드릴 테니...."

"아뇨, 됐어요!" 그녀는 시골 별장이라는 말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여행 가방을 꺼내 짐을 챙겼다. 그녀는 몬터규 파크로 가는 기차를 잡아타고 라파엘로와의 만남을 시도한 뒤 가족들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라파엘로가 나의 얘기를 들어 주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어제 오후에 그렇게 분별없는 행동을 했으니 라파엘로가 격분한 것도 당연해. 그의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으면서 그렇게 열렬하게 키스했으니. 나 자신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에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가방의 지퍼를 채우고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기겁을 했다. 매력없이 뒤로 묶은 머리는 드문드문 빠져 나와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고, 창백하고 불안한 얼굴엔 화장기 하나 없었다. 그를 설득하려면 멋지고 유혹적으로 보여야겠지?

자신을 성적인 도전이나 전리품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봐 주는 특별한 남자를 찾는 게 최대의 바람이었을 때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곤경에 처한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는 좀 더 유혹적으로 보여야 하잖아. 그녀는 결심하고 나가 옆방의 문을 두드렸다.

타니아가 문을 열었다. " 글로리, 내가 쓴 메모 봤어?"

", 고마워. 저기, 혹시 네 클럽의상 좀 빌릴 수 있을까?" 글로리는 주저하며 물었다.

타니아가 과장되게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심해서 입을게." 글로리는 겸손한 말투로 약속했다.

"구역질 나는 멍청이들에게 싸구려 흥분을 주기 위해 짧은 치마에 다리를 드러내 보이는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

글로리는 얼굴이 빨개진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젖가슴은 덮으라고 있는 거지 가판에 올려놓은 싸구려 과일처럼 내놓으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한 여자 맞아?"

글로리는 두 번째 말에 움찔하고는 다시 한번 양심에 찔리는 고갯짓을 했다.

타니아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글로리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말해봐, 너의 전투복 바지와 작업 부츠 대신 내 옷을 빌려 입게 만든 남자가 누구야?"

글로리는 얼굴이 하얘진 채 대답을 궁리했다. "도전이라고 할까?"

"도전 좋지!"타니아가 옷이 꽉 찬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나만 믿어, 글로리. 내가 발벗고 도와줄게."

45분 뒤 글로리는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주름 장식이 달린 핑크빛 상의가 풍만한 가슴에 꼭 달라붙었고 아슬아슬하게 트인 짧은 핑크색 치마는 억지로 껴입어야 했다. 뾰족한 하이힐엔 인조 보석이 박힌 가늘고 작은 공단 띠 두 개만 달랑 걸려 있을 뿐이었다. 한쪽 발목엔 요즘 유행하는 동양풍의 적갈색 전사한 문신이 보란 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타니아는 문신이 남자들을 흥분시킨다고 장담했다.

"이만한 노력을 들인 가치가 있는 남자여야 할 텐데...." 타니아가 말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할거야." 글로리는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며 말했다.

 

그날 저녁 7시가 막 지났을 때 글로리는 마침내 몬터규 파크의 웅장한 대문 앞에 도착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멋진 조지 왕조식 저택의 거대한 현관문에 달린 초인종을 눌렀다.

가정부 모드 벨퍼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 글로리?"

"절 여기서 봤다는 얘기를 저희 아버지께 하지 않으시면 고맙겠어요." 글로리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알고 있는 나이 든 부인 곁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서며 양심에 찔린다는 듯이 속삭였다. "그라치니 씨 안에 계세요?"

"베니토씨 말이니, 라파엘로씨 말이니?"모드 부인이 물었다.

" 라파엘로요." 글로리는 얼굴이 빨개진 채 우물거렸다.

"코트 이리 줘."

글로리는 코트를 꽉 움켜잡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감기 기운이 있는지 좀 추워서요."

"그라치니씨는 서재에 계셔."

글로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힘차게 서서히 멀어져 가는 가정부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서재 문을 향해 절뚝거리며 걸어가 레인 코트의 벨트를 풀었다. 노출광 같은 기분이었다. 라파엘로가 웃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한 대로 천박하고 멍청하게 보이면 어쩌지? 이게 다 샘을 위해서야, 그녀는 자신을 상기시키며 앞뒤 가리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가 레인 코트를 벗었다. 그녀의 예고된 도착과 요부 같은 모습이 한 가지 뜻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을 터였다. 그가 의미를 깨달으면 그렇게까지 비굴하게 굴 필요는 없을지도 몰랐다.

창가에서 통화를 하고 있던 라파엘로는 글로리가 수류탄을 휘두르며 뛰어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계속해서 쳐다보기만 했다. 놀란 짙은 금빛 눈이 그녀의 벌꿀색 금발 머리에서 시작해 긴장돼 있지만 예쁜 얼굴로 천천히 내려가더니 몸에 꼭 달라붙은 핑크빛 옷 속에서 삐죽 솟은 풍만한 젖가슴으로 향했다. 거기서 한참 쉬어갈 필요가 있는지 소리 나게 숨을 들이쉬더니 계속 이어지는 도전을 받아들여 더 밑으로 내려갔다.

글로리는 그 어떤 불꽃이 일으킬 수 있는 것보다 더 화끈거리는 얼굴로 기둥에 묶인 순교자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긴장이 고조되면서 숨을 쉴 때마다 거친 숨이 경련을 일으키는 목안을 힘들게 빠져 나왔다.

라파엘로는 윤곽이 뚜렷한 그녀의 엉덩이에서 억지로 눈을 떼고 마침내 적갈색의 전사한 문신이 그려져 있는 가는 발목에서 탐색을 멈추었다.

갑자기 이글거리는 눈이 몹시 긴장된 그녀의 얼굴로 급히 올라왔다. 귀족적인 검은 한쪽 눈썹이 획 올라갔다. "뭐 하는 거요? 대단한 성적 매력을 지닌 여자로 분장하고 무언극이라도 하는 거요?"

<무언극?>그녀는 너무 창피해서 움츠러들었다. 그의 빈정거리는 반응이 겨우 자신을 지키고 있던 그녀를 좌절시키고 말았다.

그녀는 아픈 발의 통증을 분산시키기 위해 발을 번갈아 내디디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낚아채듯 레인 코트를 집어 들고 몸을 가려주는 옷 속으로 얼른 들어갔다. 다시 한번 자신을 완전히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숨 막힐 듯한 굴욕감이 밀려왔다. 타는 듯한 눈물이 금방이라고 쏟아질 것 같았다.

"아니, 당신에게 한 말이 아니오."그녀가 이방으로 들어섰을 때 통화를 하다 잠시 그 존재를 잊었던, 영문을 모르는 가엾은 전화 저쪽의 사람에게 라파엘로가 냉정하게 말했다. "손님이 왔소.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소."

라파엘로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움푹 들어간 짙은 눈을 반쯤 내리깔고 코트를 꼭 끌어안고 있는 글로리를 쳐다보았다. "설명을 해주시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예요?" 글로리는 잠긴 소리로 거칠게 물었다.

"좋소."그는 주저 없이 도전을 받아들이는 남자처럼 느릿한 말투로 나긋이 말했다. "어제는 사무실로 다시 돌아와 내품에 안기더니...."

"난 당신 품에 안기지 않았어요. 당신이 낚아챈 거지." 글로리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라파엘로는 그녀의 반박을 무시했다. "내가 멈추지 않았으면 그 승강기 안에서 관계를 가졌을...."

"그건 당신 생각이죠!" 글로리는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난 그런 짓은 안 해요."

"그렇소?" 라파엘로가 비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이방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난 어떤 섹스광이 내게 스트립쇼라도 보여 주려는 줄 알았소!"

", 뭐라고요?" 글로리는 경악했다.

"당신은 지금 싸구려 매춘부처럼 차려 입었잖소." 라파엘로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녀를 흝어보며 육감적인 입술을 비틀었다. "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오. 오히려 흥미가 달아나게 할 뿐이오."

글로리는 괴로운 시선을 내리뜨고 고개를 푹 떨구며 물속으로 가라앉는 사람처럼 생명을 지탱해 주는 숨을 들이마셨다. 동생의 미래가 그의 손에 달렸는데 라파엘로의 반감을 사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팽팽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그의 주제넘은 의견에 대해 한마디 해주고 싶은 걷잡을 수 없는 충동과 싸워야 했다. 내가 의상을 잘못 고른 거야. 하지만 뭘 기대했지? 고급 디자이너 옷? 지금 이 순간만큼이나 두사람 사이의 격차가 커 보인 적도 없는 듯 했다.

"제대로 설명할 수 없나 본데, 당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내가 이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 그렇지 않소?" 라파엘로는 냉담하게 물었다.

발끈한 글로리는 팽팽히 긴장된 얼굴을 들었다. 하지만 빛나는 그의 짙은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입이 마르고 몸이 떨렸다. "샘이 그 담뱃갑을 훔치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지만 동생의 결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어요. 당신은 그 담뱃갑만 돌려받으면 고소를 취하하겠다고...."

"자진해서 돌려받을 경우에 한해서였지." 라파엘로가 냉담하게 이의를 달았다. "경찰 수색 중에 발견되는 건 원하지 않았소."

"지금이라도 그 고소를 취하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어요."

말없이 창가로 걸어가던 라파엘로가 그녀를 획 돌아보았다. "물론 고소는 취하할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걸 어떻게 믿겠소?"

"난 사기꾼이나 거짓말쟁이는 아니에요."그녀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말했다.

라파엘로는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신과의 거래 후에 우리 아버지가 꼬투리를 잡을 일은 확실히 없었소. 내가 잘못 알고 있는게 아니라면 당신은 지금 4년 만에 그라치니 땅에 발을 들여놓았소. 그 후로 아버지와 동생도 거의 만나지 않았고."

지금 나를 비난하는 건가? 샘과 글로리는 거의 매주 전화 통화를 했다. 처음 2년은 글로스터의 고모 집에서 살면서 가족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모가 돌아가시자 직장을 구하기 위해 더 북쪽으로 옮겨가야 했고,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가족과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동생과 가깝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자 베니토 그라치니가 잔인하게 자신의 몇 안되는 식구들에게 입힌 피해에 심한 적의가 느껴졌다.

"3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살면서 자주 만나기는 쉽지 않았어요." 글로리는 자신을 변호했다. "우리에겐 리무진이나 전용기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와 함께 하면 가질 수 있소."그는 발그레해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 코트는 벗으시오. 오늘밤은 여기서 지내야 하잖소."

글로리는 얼어붙었다. "오늘밤요?"

라파엘로가 느긋하게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다음 달에 날짜를 잡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소?"

"하지만 오늘밤은 봐줘요!" 글로리는 그가 당장 거래 조건을 실행할 생각이라는 걸 깨닫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당신을 만난 뒤에 아버지와 샘을 놀래 줄 생각이었어요."

"대신 날 놀래 주면 되겠군." 라파엘로가 상냥하게 청했다. "식구들이 당신이 오는 줄 모르고 있다면 거북한 질문을 받게 될 테니까. 고소를 취하하고 오늘 저녁에 내가 직접 당신 아버지에게 알려주겠소."

"그럼 좋죠." 글로리는 고마운 마음으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내일 코르푸로 떠날 거요." 라파엘로가 조용히 말을 잘랐다.

"내일 코르푸로 간다고요?"그녀의 파란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난 직장도 있고, 집도 있고, 어디로든 떠나기 전에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사람을 시켜서 당신 셋방을 비우게 하고, 청구서도 정리하고, 집주인과 고용주에게 당신이 안 돌아갈 거라는 얘기를 해두겠소. 아무 문제 될 것 없소."

"하지만 나한테는 문제가 돼요. 이틀 정도만 시간을 주면 내가 직접 처리하겠어요." 글로리는 실망스럽지만 끈질기게 주장했다. "그리고 날 해외로 데려갈 거라면 오늘밤에 식구들을 만나고 싶어요."

"한번만 더 내게서 달아나면 다시는 못 돌아올 줄 아시오."

폭풍 전야의 고요 같은 침묵이 흘렀다. 자신의 모든 주장을 가차없이 잘라버린 싸늘한 위협에 얼어붙은 글로리는 정말 충격 받은 얼굴로 라파엘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이러는 거예요?" 글로리는 무력하게 따졌다. "난 모든 걸 양보했는데 당신에겐 아직도 충분하지 않나 보군요?"

"과장하지 마시오, 카라." 라파엘로는 침착하게 그녀가 레인 코트 위로 꽉 잡고 있는 손을 풀어 포근히 감싸 쥐었다. "난 그저 우리 사이에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니까. 지금 명령하고 있는 거요. 달리 뭘 기대했소?"

그의 손이 전하는 체온에 글로리는 몸을 떨었다. 새까만 눈을 응시했지만 그의 주의는 이미 딴 데 가 있었다. 레인코트가 벌어지고 내리 뜬 그의 시선이 삐죽 솟은 젖가슴의 노출된 만곡부에 못 박혔다. 찌르는 듯한 상처가 그녀를 가르고 지나갔다. "나더러 싸구려 매춘부 같다고 하더니 왜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도 아주 자연스런 반응을 지닌 피가 끓는 보통 남자니까." 이글거리는 짙은 금빛 눈이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얼굴로 올라왔다. "더 이상 순진한 매력으로 날 미치게 만들던 십대 소녀는 아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오. 난 경험이 풍부한 애인을 원하니까, 나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그의 고백에 글로리는 경직되었다.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처녀인 것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그에게 사실대로 말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거래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성적 쾌락에만 관심이 있는 남자는 당연히 잠자리에서 능숙한 여자를 선호할 거야.

"4년 전에 내가 당신을 거절했기 때문에 날 원하는 거겠죠?" 글로리는 저도 모르게 그 얘기를 하고 말았다.

갸름한 손이 그녀의 턱으로 올라오더니 고개를 들어 올려 타는 듯한 금빛 눈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내가 압력을 가한 적은 없잖소?"

"없다구요?" 그가 손을 다시 등 밑으로 내리자 그녀는 숨막힌 소리를 냈다.

"대기 작전을 쓰고 있었지." 라파엘로가 목쉰 소리로 털어 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소."

그는 그녀를 만지려 했고, 그녀 또한 그걸 원했다. 정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라는 걸 알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팽창한 젖가슴과 저릿하게 민감한 장밋빛 유두가 몹시 의식되었지만 무엇보다 여체의 중심부가 축축하게 뜨거워지는 게 강렬하게 의식되었다.

그가 가까이 끌어당기자 그녀는 머리를 어지럽히는 익숙한 체취에 코를 벌름거렸다. 그가 입술을 포개고 맹렬히 입을 맞추자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걸 거부한다고 생각해 보시오, 카라." 라파엘로가 오만한 머리를 들고 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그를 붙잡지 않고 혼자 힘으로 서 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글로리는 다시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순진한 갈망에 압도당했다. "날 괴롭히지 말아요."

"이걸 괴롭힌다고 말하는 거요?" 이글거리는 금빛 눈이 재미있다는 듯이 강렬히 그녀를 응시했다. "서서히 유혹받는데 익숙지 않은가 보군, 카라 미아?"

열렬한 갈망에 사로잡혀 전율하는 몸이 더 이상 자신의 것 같지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욕구 불만에 굴복하고 팔을 뻗어 그의 입을 끌어당겼다. 그녀가 숱 많은 검은머리 속에 손을 집어넣자 그는 그녀의 입 안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들어올렸다.

" 라파엘로?" 그녀는 그가 자신을 고풍스런 마호가니 책상위에 내려놓자 깜짝 놀라서 불렀다.

"당신이 너무 작아서 완전히 접근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오." 그는 벌꿀색이 나는 그녀의 머리를 감상하듯이 훑어 내렸다. "비단결 같소."

미처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가 그녀의 엉덩이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가 치마를 드러난 허벅지 위로 끌어당기는 동안 그녀는 맹렬한 갈망에 전율하면서도 그의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의 경종을 지나칠 수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글로리는 외쳤다.

라파엘로가 날렵한 양미간을 찡그린 채 놀랄 만큼 아름다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는 거요?"

"왜 그러냐구요?" 글로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지금 책상 위에서 날 가지려고 하잖아요?"

마치 그녀가 정지 수위치를 넣은 것처럼 라파엘로가 동작을 멈추었다.

"책상 위에서 하는 건 재미없단 말이에요!" 글로리는 그가 자신의 제약을 비웃을까 봐 사납게 외쳤다. "지금까지 정말 불쾌한 남자를 몇 명 상대해 봤어도 책상위에서 덮치려는 남자는 없었어요."

"그게 사실이오?" 라파엘로는 얼어붙은 듯 고르지 않은 소리로 물었다.

", 사실이에요." 글로리는 창피스러움에 비례해 괴로움도 커져가자 목이 메어 잠긴 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라는 것에 범위를 정하면 좋겠어요."

"그 범위에 책상은 집어넣지 않고 싶다는 얘기군." 라파엘로가 살짝 떨리는 긴장된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예의 문제죠."

"모험은 좋아하지 않는군?"

"승강기 안이나 책상 위에서는 안 하죠." 글로리는 급히 책상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떨리는 손으로 구겨진 옷을 쓸어내리며 동요된 목소리로 인정했다.

"나도 서재 책상에서 우리 계약을 이행할 생각은 없었소."

글로리는 너무 창피해서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진 채 변명하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사람을 당황시켜서...."

"혹시 전희라는 말을 들어보았소?"

"당신이 지금 골프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죠. 그런 뜻으로 묻는 거라면!"그녀는 톡 쏘아붙였다. "하지만 난 지금 당신의 건방진 말을 들으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라파엘로 그라치니."

"책상위에서 노닥거리려고 여기 온 것도 아니고 말이지. 미안하오. 참을 수가 없었소, 카라." 라파엘로가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목록을 작성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뭐라구요?"

"성적인 행위가 금지된 곳의 목록 말이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 전에 싫어하는 게 있으면 추가해도 좋소."

반짝이는 짙은 눈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새하얘졌다. "이걸 재미있다고 생각하는군요?"

"아니오. 단지 흥미로울 뿐이오. 지금까지 여자들을 겪으면서 이런 대화는 해본 적이 없거든." 라파엘로가 다정하게 말했다. "결국 당신 어머니가 날 이긴 셈이오. 그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진 마시오."

글로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메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원칙들을 버려야 하는 이 밤만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나 때문에 즐거웠다니 다행이네요."그녀는 사무치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라파엘로가 약하게 쉿 소리가 섞인 숨을 내쉬며 그녀가 꼭 움켜잡고 있는 손을 잡아 자기쪽으로 다시 끌어당겼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됐을 때에야 몸을 움직였다.

그가 신음소리를 내며 속삭였다. "재미있어 한 게 아니오."

"그랬어요."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뻣뻣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확실히 섹시한 옷을 입고 있소. 이런 옷을 입은 여자가 그렇게 쉽게 겁을 낼 줄은 몰랐소." 라파엘로가 고개 숙인 그녀의 머리 위로 고백했다.

"겁이 난 게 아니에요."그녀는 생쥐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의자 위로 뛰어오르는 빅토리아 시대의 노처녀를 연상하며 궁지에 몰린 소리로 부인했다.

"알았소. 화가 났겠지. 하지만 이젠 끝났소." 라파엘로가 쉰 소리로 바꿔 말했다. "2층에 올라가 있도록 하시오. 난 당신 아버지에게 전화한 뒤에 곧 바로 올라가겠소."

글로리는 불안한 긴장감이 다시 되살아나서 얼어붙었다. "어디로요?"

"내방에. , 당신은 2층에 올라가 본 적이 없지. 내가 데려다 줄 테니...."

"아니에요. 어딘지 가르쳐 주기만 해요." 글로리가 긴장된 소리로 말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고, 라파엘로는 낮은 욕설을 퍼부으며 성난 걸음으로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내 전용회선인데 중요한 일인지 모르니까 받아봐야겠소."

"어디예요?"그녀는 코트 소매 속에 팔을 집어넣으며 다시 물었다.

"중앙 층계참에서 첫 번째 방이오. 잠깐만 기다리시오." 라파엘로가 전화기로 손을 뻗으며 지시하고는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글로리는 망설였다. 그의 표정 많은 넓은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가슴을 울리는 매력이 가득한 미소가. 한때 사슬처럼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미소가.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다가가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라파엘로가 그녀의 손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이탈리아어로 얘기하는 그를 쳐다보았다. 따지는 말투였고 약간 성난 표정으로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얼굴을 찡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오늘밤 운명이 우리편이 아닌 것 같소. 우리 아버지였소."

"...?"순간 글로리는 긴장했다.

"친구들과 런던에 머물고 계셨는데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는 급한 문제가 생겨서 10분 안으로 이리로 오시겠다는 전화였소."그는 갈색 손으로 숱 많은 검은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은퇴하고 나니까 견디기가 힘드신 것 같소."

"난 별채로 가서 식구들을 만나 볼게요." 글로리는 벗어 날 수 있다는 생각에 열광적으로 제안했다.

"아니오."조용한 한마디였지만 그녀를 그 자리에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다.

"당신 아버지와 부딪히고 싶지 않아요, 라파엘로."

"내방에 있으면 안전할 거요. 아버지는 다섯 살 때 이후로 내방으로 들어와 잘 자라는 인사를 해주신 적이 없으니까." 라파엘로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난 당신을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소. 함께 만납시다. 어차피 조만간 우리에 대해 알게 되실 테니까."

여기 와 있는 나를 보면 베니토 그라치니는 기겁을 하며 격노할 거야. 글로리는 그 원기 왕성한 노인네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당신 혼자 있을 때 말씀드려도 되잖아요."

"겁쟁이." 라파엘로는 그렇게 놀리며 상체를 숙여 그녀의 긴장된 입술을 덮고 맹렬한 키스를 훔쳤다.

"2층에 있는 게 더 편하겠어요."

라파엘로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럴 거요."

그녀는 둘 사이의 본질적인 상황을 상기시키는 말에 얼굴을 붉히고 서둘러 문을 향해 걸어갔다.

 

4

글로리는 크고 우아한 현관에 놓아둔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발가락 사이에 깊은 채찍 자국을 남긴 인조보석이 박힌 샌들을 벗고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하면서도 재빨리 넓은 계단으로 향했다.

하지만 운이 글로리편이 아니었다. 모드 벨퍼가 계단 아래 부엌으로 이어진 녹색 문 뒤에서 나타났다. "여기서 묵을 거니?"

몸이 화끈거리고 양심의 가책이 들고 무안해서 목에서부터 이마까지 발그레해진 글로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는 유순한 양반이지. 좀처럼 흥분하시지 않지만 이번 일을 알게 되면 그러실 것 같구나."

글로리는 입을 다물고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전 이제 어른이에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글로리." 후덕한 얼굴이 심란해지면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네가 지금 발을 잘못 들여놓고 있다는 걸 경고해 줘야 할 것 같구나." 가정부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다시 그 녹색 문안으로 사라졌다.

글로리는 비겁하게 도망치듯이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모드 벨퍼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라파엘로에게 몸을 던지려는 때에 왜 옆에서 훈계하는 목격자가 있어야 하는 거지?

글로리는 중앙 층계참에서 첫 번째 방으로 돌진해 들어가 문을 닫고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었다. 축구장만한 침대가 방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었다. 뜨끔해진 그녀는 침대에서 눈을 떼고 세련된 나머지 가구들을 찬찬히 살려보았다. 무척 아름다운 방이었다. 문득 그녀는 긴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질겁해 경직되었다.

섬세하지 못하고 너무 대담해. 타니아가 입었을 때와는 달리 싸구려처럼 보인다는 라파엘로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목 위의 전사한 문신을 발견한 그녀는 콧등을 찡그리고 대리석으로 꾸며진 방에 붙은 인상적인 욕실로 들어갔다. 스타킹을 벗고 물을 틀어 모조 문신을 지워 보려 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지금 샘을 위해 자신을 물건처럼 팔려하고 있어. , 전적으로 샘을 위해선 아니지. 글로리는 양심에 찔려 바로잡았다. 아무리 부정하려 애써도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라파엘로 그라치니를 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몹시 부끄러웠지만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서글프게 만들고 자존심을 영영 뭉개버릴 계약을 하게끔 몰아붙였다.

그녀는 감정이 여려서 그에게서 자신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 내가 그에게서 떠나야 하는 거야? 우리 두사람은 일이 잘못되기 전까지 황홀한 6주를 함께 보냈는데....

조금 전 서재 책상에서 벌어질 뻔했던 일이 생각났다. 정말로 불이 환하게 켜진 방의 책상위에서 첫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정말 겁이났어. 그녀는 비참하게 인정했다. 진짜 두려움만이 라파엘로의 입술이 불러일으킨 그 취할 듯한 흥분에서 그녀를 떼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4년만의 접촉이 그 정도로 그를 원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라파엘로가 자신을 정부로 삼으리라는 사실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두렵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열일곱 살 때 라파엘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보호의식이 강한 큰오빠처럼 굴었다.

그녀는 어머니 털리사 리틀이 클럽에 가거나 데이트하는 걸 허락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친구를 사귀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에 어머니의 말씀을 거스르고 친구를 따라 동네 바로 몰려갔다. 그때 글로리의 파트너는 스물다섯 살짜리 팀이었다.

", 저기 누가 와 있는지 좀 봐." 그날 저녁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그녀의 친구가 속삭였다. "빈민굴에 행차하셨네!"

확연히 눈에 띄는 디자이너 옷을 입은 라파엘로가 친구 두명과 함께 바 입구에 서 있었다. 글로리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작 그녀가 통학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가 스포츠카를 타고 지나가는 걸 보았을 뿐이었다. 궂은 날씨면 그가 사람들을 차에 태워 준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그런 제의를 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자 충격을 받았다. 얼굴이 빨개졌지만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빛나는 짙은 눈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잘하면 될 것도 같다." 친구가 야유하듯이 말했다. "네가 팀의 파트너인 게 유감이지만."

그러나 팀은 붐비는 술집 저쪽으로 다트 놀이를 하러 갔고, 술이 주는 생소한 효과에 고무된 글로리는 그 자리에 앉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초롱거리는 눈으로 라파엘로만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너무나 가슴 설레고 지나치게 들떠 있었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라파엘로가 앞길을 막았을 때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내 포르셰를 타고 드라이브나 할까?" 그가 목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너무나 감격해서 감히 거절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언제요?"

"지금. 날 따라와."

그녀는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의리 있는 여자 친구는 아니군?" 라파엘로가 한마디 했다.

"팀은 오늘밤에 처음 만났어요." 글로리는 얼른 해명했다. "날 알아봤군요?"

", 그럼. 모를 수가 없지."

그가 포르셰의 문을 열고 교양 있는 태도로 먼저 차에 타게 하자 그녀는 감동했다.

",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요?" 글로리는 부모님의 집이 보이자 경악해서 따졌다. "오늘밤 친구 집에서 자기로 되어 있단 말예요. 이런 옷차림으로는 집에 들어갈 수 없어요. 게다가 술도 마셨잖아요. 드라이브를 시켜준다고 했잖아요!"

"그럴 생각이었지."

"...."

"넌 지금 아무것도 제대로 생각할 수 없어. 네 파트너가 일부러 널 취하게 만든 거야. 미성년자가 술을 마시면 안 되잖아. 특히 어른과 데이트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나이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글로리는 괴로운 나머지 날카롭게 외쳤다.

"넌 그 술집에서 순순히 날 따라 나와서 내 차에 올라탔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여자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어? 넌 갓난아기만큼도 생각이 없었어. 너한테 가장 안전한 곳은 집이야."

"엄마가 날 가만두지 않으실 거란 말예요!"그녀는 완전히 겁에 질려서 외쳤다.

"내가 잘 말씀드릴게." 라파엘로가 운전석 문을 열어 대화를 중단시켰다. 그러고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그녀를 조수석에서 힘들게 내리게 했다. "그 녀석이 네게 자꾸 술을 권하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그가 못 참겠다는 듯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이 오늘 저녁에 결국 어쩔 생각이었는지 너도 알 거야."

"지금 꼭...."

"넌 미성년자야, 글로리.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라고."

"아까는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바라보았잖아요!" 그녀는 울면서 비난했다.

"널 거기서 나오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넌 아주 예쁘니까 조금도 힘들지 않았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는 애처롭게 물었다.

그는 소리 내어 웃었고, 그녀는 온 마음을 빼앗겼다.

바로 그때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었다.

털리사 리틀은 성미가 급한 편인데도 그날 밤에는 별로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식사시간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네가 충분히 깨달았을 테니 특별한 말은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글로리는 라파엘로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그해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술이 평소 자신의 조심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깨닫고는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글로리는 그런 기억에서 빠져 나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2층에 올라온 지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나를 보호해 주던 그 남자가 정말 내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남자가 맞는 걸까? 베니토 그라치니가 아직도 라파엘로와 함께 있을까?

글로리는 조용히 방을 나가 층계참에서 현관을 내려다보았다. 서재문이 열리면서 라파엘로와 큰 키에 가슴이 두툼하고 떡 벌어진 백발의 베니토 그라치니가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베니토 그라치나가 밖으로 나가다 갑자기 돌아서더니 이해를 구하는 감상적인 몸짓으로 두 손을 펼치며 아들에게 말을 건네는 게 보였다.

글로리는 노인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척하고 몹시 동요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옆얼굴은 팽팽하고 험악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뒤에 베니토가 지치고 좌절한 몸짓으로 두 손을 다시 옆으로 내렸다. 노인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서더니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 쪽으로 천천히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 라파엘로?"그녀는 참을 수가 없어서 그가 문을 닫자마자 불렀다. "무슨 일이에요? 뭐가 잘못됐어요?"

그가 깜짝 놀라 경직되더니 이내 검은머리를 뒤로 젖히고 계단 꼭대기에 서 있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소?"

"방금 나왔어요. 당신 아버지가 떠나시는 걸 봤어요. 무척 심란해 보이시던데...."

라파엘로는 창백한 얼굴로 넓은 어깨를 무심히 으쓱했다. "그랬소?"

"아버님께 내가 여기 있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그가 계단을 올라오자 그녀가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라파엘로가 초연히 빈정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계획이 변경되었소. 늦었지만 당신은 버밍엄으로 돌아가야겠소. 내 본능적 욕구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겨서 지금 그 문제부터 처리해야 하오."

글로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밀려드는 수치심에 그녀는 얼굴이 벌개져서 돌아섰다. 오히려 기뻐하고 안심해야 되는 상황에 온통 섭섭한 마음뿐이었다. "가방 갖고 올게요."

"월요일 정오쯤 차를 보내겠소. 당신 주소를...."

그녀는 멈춰 섰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샘에게 더 이상 절도혐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주긴 할 거죠?" 뜻밖에 긴장된 침묵이 흐르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소." 라파엘로가 갸름하고 거뭇한 얼굴에 험악한 표정을 짓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소, 확실히 믿어도 될거요."

"다행이네요." 글로리는 그의 방으로 돌아가 여행 가방을 집어들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너무도 싫어진 상의와 치마를 벗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그를 동요시킨 뭔가 중대한 일이. 하지만 그게 뭔지 나에게 말해 주거나 자신의 감정을 함께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는 거야.

그녀는 청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편안한 신발을 신었다. 그러고는 전화기 옆에 놓인 메모장에 주소를 적어 두었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그는 생각에 잠긴채 운치 있는 응접실의 웅장한 대리석 벽난로 옆에 서서 타오르는 불꽃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됐어요."

"밖에 차가 기다리고 있소. 나한테 화내지 마시오, 카라." 라파엘로가 숱 많은 짙은 속눈썹 밑으로 쓸쓸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오늘밤은 단순히 운이 안 좋았을 뿐이니까."

"내가 왜 화를 내요?" 글로리는 발끈해서 매섭게 반문했다. "당신이 이번 주말에 내키지 않아 하는 정부를 받아들일지 어떨지 재고해 보기만을 바랄 뿐인데!"

라파엘로가 짙은 금빛 눈으로 강렬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키지 않는다고? 코르푸에서 알게 되겠지, 안 그렇소?"

 

사흘 뒤, 도요타 랜드크루저가 섬 공항에서 글로리를 태워갔다.

코르푸까지 더할 나위 없이 호화로운 라파엘로의 전용기를 타고 온 글로리는 그가 함께 타지 않은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도 승무원들은 그녀를 왕족처럼 접대했다.

초현대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별장은 나무가 무성한 언덕과 바다가 보이는 멋진 전망에 둘러싸여 있었다. 웅장한 건물에 그보다 더 웅장한 주위 환경이군, 글로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랜드크루저에서 내렸다.

옛날 흰색 집사 재킷을 입은 중년 남자가 그녀를 대리석 타일이 깔린 현관으로 맞아들이더니 나무로 된 전망대를 향해 나 있는 호화로운 응접실로 안내했다.

"주인님이 곧 나오실 겁니다, 리틀양." 하인이 알려주었다. "차나 커피를 좀 갖다드릴까요? 아니면 저녁식사전이니까 반주를 드릴까요?"

"그라치니씨는 어디 계셔요?" 글로리는 갑자기 모욕적인 기분이 들어 긴장된 소리로 물었다.

나이 든 남자가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요. 내가 직접 찾아보죠." 글로리는 성난 걸음으로 다시 복도로 나가 엉덩이에 손을 얹고 큰소리로 외쳤다. " 라파엘로."

15초쯤 뒤에 넓고 높은 복도로 난 문들 가운데 하나가 벌컥 열리더니 라파엘로가 나타났다. 큰 키의 건장한 체격에 절묘하게 들어맞는 연한 크림색의 가벼운 양복 차림의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근사했다. 그는 무늬 있는 파란색 짧은 면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바싹 땋은 그녀의 긴장된 모습을 쭉 훑어보았다.

"당신이 오라고 해서 왔어요!" 글로리는 자신이 긴장으로 몹시 떨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팔짱을 끼고 터질 것 같은 침묵을 깼다.

"아주 색다른 방법으로 시선을 끄는군." 유리를 자르는 듯한 영국인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글로리는 슈퍼모델처럼 매혹적이고 고상한 미인이 유유히 걸어와 라파엘로 옆에 서는 걸 보고 놀라 경직되었다.

그 여자는 마치 내 것이라는 듯 한손으로 그의 옷소매를 잡고 연인들끼리의 오래된 의사 소통 수단인 은밀한 눈길을 던졌다. "나도 다음에 주인이 즉시 나타나지 않으면 힘껏 소리를 질러 봐야겠네. 아주 간단하고 효과적이겠어."갈색머리 여자가 아양떠는 소리로 빈정거리며 말했다.

" 글로리, 이쪽은 피오나 우드로 양이오." 라파엘로는 매우 태연한 태도로 여자를 소개했다.

갈색머리 여자가 나긋한 한손을 내밀었다.

글로리는 빨개졌다가 이어 백짓장처럼 하얘진 얼굴로 피오나의 무의미한 몸짓을 무시했다. 위선은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그녀 뒤로 어디선가 문이 열렸다. "." 라파엘로가 차분한 어조로 느릿하게 불렀다. "시간이 있으면 글로리에게 시원한 음료수 한잔 대접해 주겠나?"

존 리용이 글로리를 전망대로 데려나갔다. 글로리는 금빛으로 불타는 듯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양옆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피오나 우드로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자신을 왜소하고 바보 같고 세련되지 못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지만 일이 그렇게 된 건 전적으로 라파엘로 탓이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나이 든 남자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북극 바다에 뛰어들어도 시원할 것 같지 않네요." 글로리는 마침내 그렇게 중얼거리며 존 리용을 향해 괴로운 눈길을 던졌다. "피오나가 누구예요?"

"레이디 피오나는 오래 전부터 사장님과 잘 아는 사이입니다." 존 리용이 긴장된 얼굴로 갈색 눈을 내리뜨고 잠시 어색하게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저로선 그 정도밖에 모릅니다."

레이디 피오나? 그렇다면 영국 귀족이라는 뜻이군. 글로리는 혀를 이로 세게 내리 눌러 마른 입안으로 톡 쏘는 피 맛을 봤다. 잘 아는 사이라고? 정중한 표현이기도 하지! 그 갈색머리 여자는 자신과 라파엘로와의 관계가 친밀하다는 걸 과시했어. 라파엘로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어. 게다가 그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피오나 우드로를 이 별장에서 내보내는 관대함조차 보이지 않았어. 구역질이 났다.

"그는 여자들을 이곳으로 많이 데려오나 보죠? 여기가 언덕 위의 하렘인 셈인가요?" 그녀는 고르지 못한 소리로 물었다.

순간 존이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그녀의 파란 눈을 보고는 안됐다는 듯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사장님은 발이 넓으신 분이에요. 그렇다고 사장님을 탓할 순...."

"없다구요?" 글로리는 그 부분에서만큼은 존이 거들어 주지 않아도 라파엘로의 넓은 어깨에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울 수 있었다.

"여자들이 워낙 사장님 같은 거물을 좋아하니까...."

그래, 늘 궁금했는데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되었어. 라파엘로는 돈 많고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야. 그러니 여자들이 줄을 서서 따라 다니는 것도 당연해.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이 쓰린 거지? 그에게 뭘 기대했지? 그가 너만 사랑해 주기를 원한 거야, 글로리? 그는 나를 즐겁게 해주려는 게 아냐. 사려 깊은 관심과 예민한 감각은 그의 일정에 없어. 라파엘로는 당연히 영국에서 나와 함께 같은 비행기로 올 수도,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올 수도 없었어! 그가 원하는 건 나의 육체뿐이야. 일시적이고 구속받지 않는 섹스. 그는 그 점을 솔직히 밝힌 거야.

"아가씨는 그 일반적인 틀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 기분 나빠하지 마십시오." 존 리용이 뒤틀린 저음으로 털어놓았다. "아가씨가 감정적으로 얽혀들었다고 느낀 순간 사장님은 더 이상 아가씨를 만나려 하지 않을 겁니다."

"난 그와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았어요." 그녀는 언덕 위의 하렘에서 일시적인 오락거리가 되기 위해 코르푸에 머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말했다.

동생 샘과 아버지는 무사했다. 절도 혐의는 취하되었고, 아버지도 복귀되었다. 위기상황, 그녀에게 가해진 압력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지난 토요일에 그녀는 샘의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를 통해 그녀는 라파엘로가 자정이 넘도록 두 사람과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저녁에 발생했다는 급한 일은 어쩌고?

동생과의 통화를 회상하다 현실로 돌아온 글로리는 긴 유리잔을 들어 올려 바싹 타는 입을 축였다. 이제 라파엘로 그라치니와의 오랜 추억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어. 세상에, 무엇에 근거를 둔 비현실적이고 소녀다운 추억이지?

"마지막 비행기를 타려면 전 지금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존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존이 몇 발자국 앞에 서 있는 라파엘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리잔을 내려놓고 턱을 쳐들고 놀라운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짙은 금빛 눈을 시야에서 떨쳤다. ", 공항으로 가는 길이라면 나도 좀 태워 줘요. 여길 떠나고 싶으니까요."

젊은 남자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잽싸게 실내로 들어갔다.

"당신은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요, 카라." 라파엘로가 위협적일 만큼 침착하게 선언했다.

"날 어떻게 막을 건데요?"그녀는 피오나 우드로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무심코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물었다.

"필요하다면 완력을 써서라도 막아야지."

글로리는 짙은 청색 눈을 크게 뜨고 그런 위협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감히 그렇게는 못할걸요.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를 테니까."

"소음은 견딜 수 있지만 이용당하는 건 참을 수 없소."

순간 보이지 않는 경고의 불꽃처럼 긴장감이 흘렀다.

"바른 말을 하고 있군요!" 글로리는 톡 쏘아붙였다. "당신이 강요한 뻔뻔한 거래를 일깨워...."

날렵한 검은 한쪽 눈썹이 획 올라갔다. "강요했다고? 오로지 날 위해 매춘부 차림으로 금요일 밤에 몬터규 파크까지 쫓아온 사람이 누구였소?"

"난 매춘부처럼 입지 않았어요!" 글로리는 발끈해서 외쳤다.

"여자들이란 별수 없군." 라파엘로는 넥타이를 홱 풀어 탁자 위에 던졌다. "미끼를 내던졌다가 희생물이 그걸 물면 지조 있는 척 부인하는 게...."

"당신은 어떤 여자의 희생물도 아니에요, 라파엘로 그라치니!" 글로리는 그의 주장에 분개했다. 나는 자포자기 상태였고, 그를 유혹하는 것이 나에게 남은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었어. 하지만 내가 그 정도로까지 자신을 낮춰야 한 건 라파엘로가 품위를 손상시키는 그런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야.

"그렇소." 라파엘로가 이글거리는 짙은 금빛 눈으로 강렬하게 그녀를 응시하며 인정했다. "당신이 그런 사실을 꿰뚫어보다니 반갑군. 4년 전에 당신이 날 바보 취급하려 했던 거 기억나오? 그러다 결국은 어떻게 됐는지? 울면서 달아난 사람은 내가 아니었소."

"비열한 인간." 글로리는 모욕감과 괴로움에 치를 떨며 내뱉었다. 이 순간 그녀에게 정말 필요하지 않은 게 있다면 열아홉 살 때 그가 자신을 대신하는 여자들, 투자 신탁회사의 사장 딸을 과시했을 때 받은 참담한 기분을 생각나게 만드는 일이었다.

라파엘로가 넥타이 옆에 양복 상의를 던졌다. "난 누구도 날 그렇게 부르도록 놔두지 않소."그가 위협적인 저음으로 느릿하게 억양을 붙여 말했다. "당신은 어떤 것에서도 빠져나가지 못할 거요. 모두 당신 이름으로 결산보고를 하게 될 테니까. 난 바보가 아니오."

" 라파엘로, 난 당신하고 이런 얘기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결산 보고라는 말에 글로리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공항으로 가는 존의 차를 얻어 탈 거예요."

"난 분명히 안 된다고 경고했소." 라파엘로는 차분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의 허리를 양쪽으로 붙잡고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글로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팔을 젖혀 견고한 그의 뺨을 힘차게 올려붙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이 닿기 전에 잽싸게 피했다.

"한번만 더 날 치려고 하면 수영장에 던져버릴 거요." 그는 그녀를 어깨 위로 들어 올리며 냉담하게 위협했다.

"난 수영을 못 한단 말예요!" 글로리는 기겁을 했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들어가겠지만 꼭 물을 먹일 거요." 라파엘로가 큰 걸음으로 복도로 향하며 장담했다.

"날 안 내려주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글로리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협박했다.

"무슨 수로? 더듬이로?" 라파엘로가 물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사장님."존 리용이 헛기침을 하며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손님을 그렇게 난폭하게 다루셔도 되겠습니까?"

"자네는 가만히 있게." 라파엘로가 얄밉게도 깊게 울리는 느릿한 말투에 웃음을 머금고 비서에게 충고했다. " 글로리와 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니까."

"아니예요!" 글로리는 건장한 그의 등에 손을 짚고 고개를 들었지만 존 리용은 보이지 않았다.

"우린 글로리가 네 살 때 처음 만났네. 우리 사유지의 고용인 자녀를 위한 파티에서. 글로리는 겨우살이를 들고 쫓아다니는 어느 사내아이를 두들겨 패주고 있었네. 매섭게 공격을 가하더군."

라파엘로의 얘기를 듣고 있던 글로리는 어리둥절해져서 눈을 깜박였다.

"다치기 전에 내가 그 사내아이에게서 떼어놓았지만 글로리는 <때릴 거야!>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발버둥을 치더군. 그런 점은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아."

"없는 얘기 지어내지 말아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라파엘로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당신이 열세 살이 됐을 때 다시 알아보았소. 하지만 너무 좋아할 건 없소. 처음 내 주의를 끈 건 당신이 아니었으니까. 아침에 차를 타고 당신이 서 있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다 감탄한 남자 운전사들이 끝없이 울려대던 경적소리 때문에 알아봤으니까. 그 이후 당신 가족이 정원사의 별채로 이사를 온 후로는 당신이 정문 차도 옆에 있는 만병초 속으로 들어가 통학 버스에 오르기 전에 화장하는 걸 보곤 했소."

글로리는 그의 얘기에 멍해져 육감적인 입을 떡 벌렸다.

"제가 주제넘게 아는 척했군요." 아래쪽 복도에서 존 리용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물러나며 말했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신 말씀이 농담이 아니었군요, 사장님. 두분은 함께 성장하셨군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아래층 현관문이 쿵 닫히고 다시 침묵이 흐르자 글로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라파엘로의 등을 쳤다. "내가 립글로스를 바르는 동안 그 덤불 속에서 몰래 뭘 한 거예요?" 그녀는 당장 공격할 말이 없어 그렇게 따졌다.

"대학을 마치고 별장에 돌아와 있을 때 아침마다 달리기를 했소. 당신은 허영심이 강한 여자애였소. 바위 위에 앉아서 인어처럼 마냥 머리를 빗어 내리곤 했으니까."

"날 훔쳐봤군요!" 글로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비난했다. "허영심이 강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때 서너 번 당신을 본 뒤로는 정문 차도는 피해 다녔소. 어린 여학생을 훔쳐보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내 취향이 아니니까."

"엄마가 내 친구들처럼 치장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버스를 타기 전에 꾸민 것뿐이에요." 그녀는 강력하게 자신을 변호했다. "그걸 허영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또래들과의 경쟁심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요? 내려줘요, 라파엘로!"

라파엘로는 그녀를 아름다운 방안의 양탄자 위에 내려놓았다. 발코니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프랑스식 창문에서 실크 커튼이 부드럽게 펄럭거렸다. 순간 독특한 침대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긴 침대 머리판에 화려한 조각으로 테두리가 되어 있고 광택 나는 표면에 은색 테를 댄 여러개의 작은 그림이 있었다. 글로리는 잠시 주의를 팔았던 사실에 눈살을 찌푸리고 문쪽으로 곧장 걸어갔다. "난폭한 남자처럼 보이는 짓은 이제 그만 해요."

라파엘로가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섰다. "왜 갑자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 거요?"

글로리는 경직되고 창백해졌다. "내가 당신의 그 긴 매춘부 대열에 끼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거예요!"그녀는 이를 갈며 응수했다.

"그 대열에 낀 걸 환영하오, 벨라 미아." 라파엘로의 말투는 너무도 부드러웠다.

 

5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예요?" 글로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자극을 받으면 당신이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라파엘로의 반짝이는 짙은 눈이 그녀에게 꽂혔다. "피오나의 부모님 별장이 이 근처 해안에 있소.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주 여길 찾아오고 있소. 오늘도 내가 초대한 건 아니오. 내가 도착했을 때 피오나가 이미 와 있었소. 그녀 때문에 이렇게 발끈 화를 내는 거요?"

글로리는 새빨개진 얼굴로 항변했다. "난 관심을 끌려고 애쓰는 응석받이 꼬마처럼 발끈 화를 내는 일은 없어요. 당신 맘에 들든 말든 내겐 원칙이 있어요."

"하지만 돈만 충분히 주면 버릴 수 있는 원칙이지." 라파엘로가 비꼬았다.

", 결국 내가 열아홉 살 때 받은 그 수표 얘기로 돌아가는군요?"그녀는 심하게 충격을 받았지만 여린 어깨를 활짝 펴고 벌꿀색 머리를 홱 쳐들었다. "그 점에 관해 당신에게 사실을 말해 줄 때가 된 것 같군요. 난 그돈을 우리 아버지께 드렸어요. 당신 아버지가 날 집에서 떠나게 만들었거든요."

"정말로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단 말이오?" 라파엘로는 몹시 냉담하고 무언의 불신이 담긴 무례한 태도로 따졌다.

"우리 아버지는 그때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술만 마시며 사셨어요. 당신도 분명히 알고 있을 거예요." 글로리는 긴장된 저음으로 주장했다. "당신 아버지는 나에게 당신을 만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를 해고하겠다고 위협했어요. 그때 난 아버지를 구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가 직장까지 잃는다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참 동안 긴장된 침묵이 흐른 뒤에 라파엘로가 어둡고 무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불쾌한 일이오. 하지만 난 우리 아버지가 당신 아버지를 해고하거나 당신 가족을 별채에서 쫓아내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하오."그는 딱딱하게 말했다. "협박을 받았다니, 새빨간 거짓말이오."

라파엘로가 쉽게 믿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즉각적으로 부인하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사실을 숨기려고 하오?"그는 육감적인 넓은 입가에 경멸을 담아 말했다. "당신은 명예와 부를 거머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델 제의를 받아들였잖소. 이미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 있던 차에 우리 아버지가 그런 제의를 하자 웬 떡이야 하며 받은 거잖소."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도 난 어리석게도 라파엘로가 내말을 믿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

"아래층에서 한 말은 진심이었어요. 떠나겠어요. 그렇게 정부가 필요하면 레이디 피오나에게 부탁하지 그래요? 기꺼이 그럴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그녀는 참담한 심정으로 말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지만 난 당신을 훨씬 더 원하오." 라파엘로는 느긋한 걸음으로 문에서 떨어져 걸어왔다.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는 남자와는 얽히고 싶지 않아요."

"내 침대는 지금 비어 있소. 피오나와 나 사이엔 과거가 있지만 당신과 얘기하고 싶은 내용은 아니오." 라파엘로는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 위에 꼬여 있는 머리를 침착한 손길로 풀었다.

"뭐 하는 거예요?" 글로리는 가까이 다가선 그에게 위협을 느끼고 따졌다.

"난 인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걸 좋아하오."

"당신이 뭘 좋아하든, 난 관심 없어요."

"하지만 내가 차근차근 가르쳐 주면 당신도 좋아하게 될 거요, 벨라 미아."

타는 듯한 짙은 금빛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의 손은 그녀의 머리를 풀어헤치느라 바빴다.

"집에 가게 해줘요, 라파엘로. 난 당신을 기쁘게 하지 못해요." 그녀는 포기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그건 내가 판단할 거요."

"당신은 경험 있는 애인을 원한다고 했잖아요?" 자신은 그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걸 납득시키기 위해 최후의 방법을 썼다. "난 아마추어란 말예요."

"나도 프로를 원하는 건 아니오." 라파엘로가 즉각 재치 있게 답했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난 처녀예요."

순간 꼬여 있는 머리를 천천히 풀고 있던 갸름한 손이 딱 멈추었다. "조금도 웃기지 않소."

그녀는 이를 갈았다.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라파엘로는 그녀의 양팔을 잡고 자신의 앞에 꼭 붙잡아 두었다. 그러고는 미심쩍어하는 눈길로 빤히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피노키오라면 그 코가 현관문까지 닿았을 거요. 당신이 처녀라고? 4년 전에도 순결하다는 주장을 완전히 믿을 순 없었지만 선의로 해석하기로 마음먹었소.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으니까."

글로리는 아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무슨 이유로 내가 처녀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거죠?"

"당신은 너무 섹시하거든." 라파엘로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당신의 몸짓이며 걸음걸이며 자신의 몸을 알고 있는 여자처럼 말하는 그 말투하며...."

"오랫동안 그 몸으로 살아왔으니까요."

"처녀는 선발된 족속이오. 당신 나이에 아직도...."

"만나는 여자마다 물어 보나 보죠?" 글로리는 창피하다기보다는 화가 나고 분해서 쏘아붙였다. "당신은 섹스를 사 갖고 가는 요리와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 여자들이 아주 많다는 걸 깨우쳐야 돼요."

"나도 사 갖고 가는 요리는 좋아하지 않소. 난 못 말릴 정도로 프랑스 요리사가 제공하는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이오. 지금 나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려는 거요? 그래서 갑자기 이렇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거요?"

라파엘로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당신이 처녀인 줄 알았다면 멀찌감치 도망갔을 거요.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소. 지구가 돌고 있다는 걸 아는 것만큼이나 확실이."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글로리는 그가 4년 전에도 자신의 순결을 의심했다는 사실에 상처를 입은 채 도톰한 아랫입술을 깨물고 애타게 호소하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난 그냥 당신 정부가 되고 싶지 않을 뿐...."

"그렇다면 당신 옷을 벗기지 못하게 만들었어야지. 하지만 당신의 입술을 맛본 이상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당신을 쓰러뜨리고 말거요."

어수선한 생각에 몰두한 나머니 글로리는 그가 드레스의 지퍼를 내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어깨에서 드레스를 천천히 걷어내 가는 팔을 따라 끌어내려 흰 레이스에 감싸인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는 걸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 라파엘로, ... 안돼요."

"당신의 가슴처럼 날 지독히, 그리고 빠르게 흥분시키는 건 없소.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겠소." 라파엘로는 사내다운 저속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온몸으로 그를 의식하며 몸을 떨었다. 강렬한 그의 시선에서 타오르는 갈망을 알아챈 순간 아주 지독한 육체적 나약성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타고난 정숙함은 그가 자신을 칭찬하고 있다는, 감탄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압도당했다. 그녀는 언제나 라파엘로가 자신의 첫 남자이고, 마지막 남자이고, 영원한 남자이길 바랐다. 유혹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가 제의한 냉혹한 거래 외의 다른 뭔가가 두 사람을 다시 재회시킨 거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한때 라파엘로가 느끼게 해준 그런 기분을 안겨주는 남자를 4년 동안 찾아봤지만 헛수고였잖아?

라파엘로는 그녀를 든든한 품에 안고 넓은 침대로 갔다.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소."

"정말이에요?" 그녀는 그가 깨끗한 흰 리넨 시트 위에 내려놓자 속삭였다.

그가 구두를 벗고 우아하게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그걸 의심할 수 있소?"

멋진 금빛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당신은 날 거부한 유일한 여자였소. 영리한 작전이었지." 라파엘로는 셔츠 단추를 끄르며 모양 좋은 입가에 빈정대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당신을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 건지도 모르오, 벨라 미아."

"작전이 아니었어요. 영리하게 굴려던 게 아니에요."

"그렇소?"그가 셔츠를 벗어 던졌다. "아무튼 이젠 상관없소."

하지만 그녀에겐 상관이 있었다. 그녀는 4년 전 그가 저택의 실내 수영장에서 같이 수영하자고 초대했을 때 <겁도 없이 상류사회 남자와 사귄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라파엘로의 단단한 근육질의 가슴과 팽팽하고 납작한 배를 보고 있자 입이 말랐다. 상상했던 대로 그는 정말 근사했다. 구릿빛 피부와 꿈틀거리는 근육과 엷게 가슴을 덮고 있는 북슬북슬한 털이 사내답고 섹시했다. 그녀는 그가 바지를 벗는 동안 좁은 엉덩이와 길고 힘찬 허벅지를 은밀히 훔쳐보았다.

"당신도 똑같이 해줘야 할 텐데." 라파엘로가 느릿하게 말했다.

"뭐라구요?"

검은 실크 사각 팬티만 걸친 라파엘로가 음흉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이 날 삼킬 듯이 쳐다보고 있잖소."

글로리는 머리 밑까지 빨개져서 그가 풀어헤친 머리 뒤로 숨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

"욕망은 욕망을 알아보는 법이오." 라파엘로가 그녀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게 마지막 옷가지를 벗어 내리며 단언했다.

완전히 드러난 그의 알몸을 보는 순간 그녀는 멍해졌다. 그의 모습은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우린 안 맞을 것 같아요." 글로리는 숨 막힌 소리로 중얼거렸다.

"칭찬이오, 벨라 미아?"그는 억양이 들어간 깊게 끌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작은 조가비 같은 당신 귀까지 빨개졌소." 라파엘로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그녀는 급히 머리로 귀를 가렸다.

순간 매트리스가 출렁이면서 그가 목쉰 소리로 재촉했다. "이리 오시오." 라파엘로가 그녀의 팔뚝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 순간부터 그는 사정없이 공격해 왔다. 그는 입술을 녹일 듯한 열정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핑크빛 입술을 약탈했다. 그러고는 입안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기교는 그녀를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만들었다.

라파엘로가 부풀어 오른 입술을 놓아주고는 열정으로 흐릿해진 뜨거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층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고 있어야 하는 건데...."

"먹을 수 없을 거예요!" 글로리는 그가 위협이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라서 외쳤다.

"나중에." 라파엘로는 현재의 즐거움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말하고는 능숙한 손길로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거의 고통에 가깝게 솟구치는 감각에 숨이 막힐듯했다. 라파엘로의 손이 고동치는 핑크빛 유두를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정신이 아뜩해졌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신음 소리를 냈다.

"4년 전에 당신은 이 정도까지도 허락하지 않았소." 라파엘로가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로 상기시켰다. "당신을 미치도록 갈망하게 만들 거요, 카라."협박과 약속이 결합된 말이었다.

"이미 그랬는걸요."그의 애무에 도취된 글로리는 고르지 못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라파엘로가 그녀를 뒤로 쓰러뜨리고는 벌꿀색 머리를 베개 위로 펼쳐 놓았다. "난 이제 막 시작인데?"

그는 그녀의 무릎을 세우고 몸을 들어올리더니 거침없이 팬티를 벗겨냈다. 그런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문득 그 정도로 능숙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옷을 벗겼을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의 오만한 검은머리가 내려와 장밋빛 유두를 고문하기 시작하자 그런 의문은 사라지고 말았다.

"당신 몸매가 완벽한 줄은 이미 알고 있었소." 라파엘로는 사내다운 저속한 칭찬에 얼굴이 빨개진 그녀를 훑어보며 신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모든 남자가 꿈꾸는 완벽한 애인이기도 한 줄은 정말 몰랐소, 벨라 미아."

"완벽한 애인이라구요?"

"당신은 빨리 달아오르거든." 라파엘로가 감상하는 손길로 그녀의 날씬한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설명했다.

글로리는 빨리 달아오른다는 게 가슴속에 간직해도 좋을 칭찬인지 몰라 긴장했다. 그리고 그의 남성이 느껴지자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프게 하면 다시는 안 할 거예요."그녀는 긴장된 소리로 경고했다.

라파엘로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을 아프게 한다고? 그런 일은 없을 거요. 평생 한 번도 여자를 아프게 한 적은 없으니까!"

그의 확신에 안심한 글로리는 육감적이고 부드러운 키스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능숙했다. 그녀는 곧 아무런 불안이나 걱정 없이 만족을 향한 애타는 갈망에 몸부림쳤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더니 침대 머리맡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괜찮겠소?" 잠깐 망설이던 라파엘로가 멋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그의 행동이 무척 사려 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모양 좋은 그의 팽팽한 아랫입술을 애무하듯이 손끝으로 쓸었다. "물론이에요."

라파엘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뜨겁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두손을 그녀의 엉덩이 밑에 집어넣고 들어 올렸다 매우 부드러운 살에 와 닿는 뜨겁고 절박한 남성을 느낀 글로리는 애타는 갈망에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그를 재촉했다.

그는 세찬 돌진으로 그녀의 초대에 응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다음 순간 말할 수 없이 친밀한 행위가 주는 쾌감에 압도당했다. 그러다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통증이 그 관능적인 마법에서 강하게 비틀어 떼어놓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라파엘로는 동작을 멈추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럴리가...."그는 반쯤 숨죽인 소리로 속삭였다.

"그만둬야겠소." 라파엘로는 이를 갈며 말했다.

글로리는 두 팔로 그의 목을 안으며 부드럽고 숱 많은 검은머리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낮게 속삭였다.

"...고맙소." 그가 중얼거렸다. "아마 지금 그만둔다면 난 미쳐버리고 말 거요!"

그녀는 그에게 선심을 베푼 것 같아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그는 이번에는 아주 부드럽게 물결치듯이 들어왔다.

"걱정마시오." 라파엘로가 다정하게 장담했다.

그녀의 가슴은 다시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고, 짧은 고통의 순간 직전에 느꼈던 쾌감이 열배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하나가 되어 자제력을 잃고 얕은 숨을 몰아쉬며 점점 더 솟구치고 있는 강렬한 흥분감에 몸을 맡겼다.

한참 뒤에 현실로 돌아온 글로리는 라파엘로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욱 바싹 안겨들며 입술을 잡아 늘이는 꿈같은 미소를 억누르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품이 천국 같다고 생각하며 마치 그가 살아남는 데 필요한 약이라도 되는 듯 뜨겁고 축축하고 섹시한 그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그만 좀 파고 드시오." 그가 냉담하게 말했다.

글로리는 마치 지붕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베개 위에 똑바로 눕히고 몸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이마 위로 헝클어진 벌꿀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내려다보았다.

그 멋진 미소에 그녀는 그제야 그의 말을 잘못 해석했다는 걸 알았다.

"당신 때문에 정말 놀랐소." 그가 털어놓았다.

글로리는 계속 미소만 지었다. 지금 그녀는 너무나 행복했다. 그는 내가 능숙한 파트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전혀 불만스러워 보이지 않아.

"할 말이 없소. 당신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벨라 미아." 라파엘로는 몹시 후회한다는 듯이 겸손하게 고백했다.

"그래요, 그랬어야 했어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얼른 그를 다시 끌어안았다.

"놀라울 뿐이오." 라파엘로는 황홀한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동안 음흉한 남자들 속에서 살면서도 이토록 순수할 수 있다니...."

"당신이 다른 남자들보다 좀 더 설득력이 있었다고 봐야죠." 글로리는 수줍게 인정했다.

"그런 것 같소." 라파엘로가 몸을 굴려 일어나 앉았다. "아무튼 당신은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에 아주 커다란 구멍을 냈소."

"그런 것 같네요." 글로리는 붕 뜬 기분으로 인정하고는 옆으로 돌아누워 그를 살펴보았다. 세상에,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꿈꾸는 듯하고, 기절할 것 같았다. 마음 편하게 그와 다시 살을 맞대고 싶었지만 너무 들러붙는 것처럼 보일까 봐 두려웠다. , 그가 다시 안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에게 굉장하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데....

4년이나 헤어져 있었는데도 아직도 그를 이렇게 좋아하다니, 난 너무 보수적이야. 그녀는 씁쓸하게 인정했다.

"그래도 당신이 준비를 하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라파엘로가 마구 헝클어진 머리에서 빠져 나온 금발 한 가닥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글로리는 이마를 찌푸렸다.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라파엘로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은 그녀를 나무라듯이 머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콘돔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당신이 나보다 준비성이 철저한 걸 알고 내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를 거요, 카라."

글로리는 꼼짝도 못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준비성이 철저하다구요?"

"지난번에 왔을 때 이방이 실내 장식 중이라 옆방을 썼거든."그가 설명했다.

글로리는 침대 머리맡의 서랍을 열던 그를 떠올렸다.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미리 피임조치를 하는 처녀는 아주 현명한 여자라고 할 수 있지."

글로리에게 그 말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두 사람 위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바위와 같았다. 그녀 자신의 상식에 대한 견해가 급강하했다. "하지만.... 하지만 난 피임을 하지 않았어요."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고백했다.

"다시 말해 보시오." 라파엘로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동작을 멈추고 긴장할 때면 늘 그렇듯이 심하게 이탈리아 억양이 들어간 소리로 재촉했다.

"아무런 조치도 안 했다구요." 글로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히 밝혔다.

라파엘로의 단단한 턱이 굳어지면서 가늘게 뜬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콘돔이 없는 걸 알고 당신과 관계를 가져도 괜찮냐고 물어 봤잖소!"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유리 같은 침묵이 흘렀다.

글로리는 낙담한 채 침을 삼켰다. "난 섹스를 해도 괜찮다고 대답한 거였어요. 그 질문이 피임에 대해서 묻는 건지는 몰랐어요." 글로리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고 더듬거렸다. "내가 생각이 없었어요."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잘못 해석했다는 얘기요?" 라파엘로가 성난 비난의 화살을 그녀에게 꽂았다. "그 엉터리 같은 소리를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오?"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면 뭐겠어요?" 글로리는 그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전형적인 발목 잡기는 아니고?" 라파엘로는 경멸 섞인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발목잡기요?"그녀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반문했다.

"내가 제대로 걸려든 거 아니오?" 라파엘로가 사납게 캐물었다. "당신과 관련된 내 운을 아니까 하는 말인데, 아마 임신을 하게 될 거요."

"아닐 거예요." 그녀는 괴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의심에 충격 받은 글로리는 침대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내가 일부러 준비 없는 섹스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 어떻게 내가 계획에 없는 임신을 바랄 거라고 믿을 수 있는 거야?

지독한 가난과 결합된 미혼모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그려지면서 몸서리가 일었다.

"정말 그러길 바라오? 만약 당신이 임신을 했다면 앞으로 적어도 20년은 당신과 그 아이를 책임져야 한단 말이오!" 라파엘로는 격분해 결론을 내리듯이 말했다. "당신의 그 소중한 처녀성에 대한 대가치고는 엄청난 희생이지. 샤워를 해야겠소!"그는 그 말을 내뱉고는 방에 붙은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어떻게 그는 내가 그 정도로 영악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그의 불신에는 끝이 없는 걸까? 나에 대한 생각을 쉽게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다니, 나는 정말 어리석어.

나의 순결을 바쳤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는 부자고 나는 가난해. 평등 같은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평등이 없다면 존중이나 믿음도 없다고 봐야지. 그녀는 비참하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정원사의 딸, 집시의 딸, 공장 노동자 글로리 리틀이야. 그리고 그는 아주 성공한 실업가이자 기업가적인 수완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라파엘로 그라치니지.

그는 다시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어. 어떻게 그에게 다시 그럴 기회를 준 거니, 글로리? 이제 깨우칠 때도 됐잖아? 그의 정부가 되기로 동의했잖아. 그는 섹스를 원할 뿐이라고 분명히 밝혔잖아. 그가 원하는 걸 주었으면 그걸로 만족해야지. 왜 그에게 매달리는 거야? 전형적인 발목 잡기라고? 글로리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와 몸서리를 쳤다.

그녀는 침대에서 나가 헝클어진 이부자리를 부끄럽고 곤혹스러운 듯이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경고한 것보다 더 빨리 천벌이 찾아온 셈이군. <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어떤 남자도 널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야> 어머니는 언젠가 엄하게 말씀하셨다. 그래, 나 자신을 팔아서 뭔가를 얻겠다고 기대한 것이 잘못이야.

그녀는 후회의 눈물을 삼키며 라파엘로를 다시 대하기전에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다. 하지만 드레스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가 꺼지는 소리가 들리자 서둘러 가방이 있는 아래층으로 갔다. 그녀는 반들반들한 붙박이장으로 쫓아가 일렬로 걸려 있는 셔츠 가운데 하나를 빼내 정신없이 입었다. 그녀는 10초 만에 급히 현관문을 빠져나가 실외등이 환한 길로 나섰다. 엄청난 강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깐 주저하다가 해변으로 난 길을 달려 후미진 곳을 에워싸고 있는 위성류 나무 숲 속으로 향했다.

 

6

6월의 아름다운 그리스 섬에서 얼굴에 모래를 맞아가며 윙윙거리는 강풍 속을 힘들게 헤쳐 나가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바다는 마치 감정의 대 혼란을 겪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나타내듯이 큰 솥처럼 포말을 일으켰다. 라파엘로는 나를 경멸했어. 4년 전에 묻어 두었던 혼란한 감정들이 모두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해안 끝 부근에 거대하게 돌출된 바위 밑으로 들어가 밀려드는 성난 파도를 피했다. 괴로운 심정과 함께 기억이 되살아났다.

글로리는 열일곱 살 때 학교를 중퇴하고 지역 경매 사무실에서 일했다. 그라치니 집안은 이탈리아와 영국 집을 오가며 살았고, 경영학 학위를 받은 라파엘로는 런던에 아파트를 얻어 몬터규 파크에는 이따금 들를 뿐이었다.

그녀는 열일곱 살 때 그와의 창피한 만남과 비행소녀처럼 집으로 인도되었던 불쾌한 기분을 극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뒤 그녀는 라파엘로가 차를 타고 옆을 지나치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를 지어 아는 척을 할때면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다.

그녀가 열아홉 생일을 맞은 지 1주일 뒤에 라파엘로가 갑자기 페라리를 멈추고 태워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글로리는 침착하려고 애쓰면 대답했다.

"오늘밤에 저녁식사는 어때?"그녀가 막 조수석에 올라타는데 그가 말했다.

그 후 한 달 반 동안 글로리는 구름 위를 떠다녔다. 그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큰 부담이긴 했지만, 그들은 그때까지 그녀가 모르고 있던 화제를 대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키, 오페라, 발레, 요트, 그리고 꼭 갖고 있어야 할 최신 디자이너 핸드백 등등. 그녀의 친구들은 분명히 불행에 빠지게 될 거라고 경고하면서도 자신들의 옷을 앞다투어 빌려주었다. 라파엘로와의 데이트는 공동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클럽에서 그녀를 본 한 스카우트 담당자가 그녀를 북부의 모델 에이전시에 가입시키려고 했다. 그녀는 무척 기분이 좋았지만 라파엘로는 그녀의 꿈을 뭉개버렸다.

"넌 패션모델을 하기엔 키가 너무 작아. 그 사람은 아마 합법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닐 거야. 잘못하다간 편물 기계 앞에 앉아 있는 신세가 될지도 몰라."

글로리는 그가 자신이 모델 일을 찾아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석했다. 그 당시 그녀는 모든 관심을 그에게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제의는 더 이상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라파엘로는 그녀에게 몬터규 파크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1층을 다 둘러보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가 방해를 했다. 글로리는 베니토 그라치니가 자신의 아들이 정원사의 딸과 사귀고 있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우리가 사귀는 게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한참 뒤에 그녀가 라파엘로에게 말했다.

"그냥 좀 놀라신 것뿐이야.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어." 라파엘로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러나 그 주가 다 가기도 전에 베니토 그라치니가 별채로 찾아왓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일을 해야 할 시간에 과음으로 2층에서 자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니토 그라치니는 며칠 못 잔 사람처럼 눈이 움푹 들어가고 파리한 안색이었다. 그러나 그는 꾸물거리지 않고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그의 부탁을 거절하면 아버지를 해고하겠다는 말을 들은 글로리는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라파엘로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겨우 한달 반 동안 사귄 여자와 아버지를 바꿀 수는 없을 테니까.

술이 깬 아치 리틀은 집을 떠나겠다는 딸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글로리는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라파엘로에게 모델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순진하게 두 사람이 친구로 헤어질 수 있을 거라도 믿었다.

다음날 오후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날은 그녀의 평생에서 가장 길고 괴로운 날이었다.

" 글로리, 지금 나와 헤어지자고 말하는 거니?" 라파엘로가 잘생긴 얼굴에 놀란 표정을 짓고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당신은 대부분 해외에서 시간을 보내니까 어차피 서로 만날 시간도 없잖아요. 그럴 바에는 깨끗이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어려울 것 없지." 라파엘로는 냉소적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오늘밤까지만 함께 지내면 안 될까요?" 글로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애원했다.

"안 될 것 없지."

그날 그는 그녀를 태우러 오지 않고 직접 식당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가 불러 준 택시를 타고 식당에 도착한 그녀는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몰랐다. 천천히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간 그녀는 라파엘로가 아주 예쁘게 생긴 빨강머리 여자와 키스를 나누다 몸을 떼던 광경을 목격하고는 당황해서 뛰쳐나왔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그녀가 아무 것도,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는 듯이 그가 냉담한 얼굴로 놀라고 당황한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비웃기 시작했고, 그의 친구들은 파멸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무척 재미있어했다.

라파엘로는 변하지 않았어. 글로리는 현재의 긴급한 문제로 돌아오며 비참하게 생각했다. 그는 늘 가장 나쁜 쪽으로 가정해 주저 없이 공격했어. 내가 그와 같은 계층에 속한 여자였어도 그렇게 쉽게 비난했을까? 그럴 리가 없을 거야.

"글로리!"

그녀는 그제야 바위에 부딪쳐 떨어진 바닷물에 몸이 흠뻑 젖은 걸 깨닫고 오들오들 떨었다. 파도를 헤치고 바위 쪽으로 달려오는 그가 보였다. 그의 흰 셔츠와 바지가 달빛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했다. 셔츠가 그의 건강한 구릿빛 가슴 뒤로 나부꼈다.

"글로리!" 그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녀는 얼어붙은 사지를 천천히 움직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녀를 발견한 라파엘로는 순간 우뚝 멈춰 서더니 이어 더욱 빠른 속도로 돌진해 왔다. 그는 그녀를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물에 빠진 줄 알았소." 그는 무척 걱정했다는 듯이 말했다."다시는 이러지 마시오!"

글로리는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물에 빠져? 그의 억센 손이 그녀의 여린 어깨에 파고들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잘못 되었을까 봐 정말 두려워했어. 그 사실이 단단한 골격의 얼굴과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강렬한 시선에 담겨 있었다. ", 내가 물에 빠져도 상관없었을 텐데요."그런데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내가 임신했다면 내 죽음이 아주 값싼 해결책이 됐을 테니까 말이에요."

"맙소사!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소?" 라파엘로는 심한 책망을 담은 눈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날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글로리는 고르지 못한 소리로 반박하며 몸을 떨었다.

"몸이 다 젖어 얼음장 같군." 라파엘로는 건장한 한 팔을 그녀의 등에 두르고 해변 길로 이끌었다. "시로코 바람은 순식간에 폭풍우를 불러일으킬 수 있소. 이 물가 끝에서 비틀거리다 빨려 들어가면 곧 급경사면으로 떨어진단 말이오. 당신은 수영도 못하잖소.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 포효하는 바다 가까이 접근할 정도로 멍청이로 알았다니, 정말로 라파엘로다운 발상이야. 그녀는 침울하게 생각했다.

그는 비탈길 발치에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완전히 지쳤군."그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말했다. "따뜻한 물로 목욕한 뒤에 뭘 좀 먹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요."

"당신이 근처에 있는 한은 안 그럴 거예요." 글로리는 작은 소리로 응수했다.

그가 팔에 힘을 가했다. "아무튼 당신이 무사하다는 게 중요하니까."

그는 그녀를 별장까지 내내 안고 가서 욕실의 긴 의자에 내려놓고 거품 욕조에 물을 받았다.

"들어가시오, 카라." 목욕물이 다 차자 라파엘로가 재촉했다.

"당신이 나가야죠."

그의 눈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당신을 혼자 놔둘 순 없소."

"자기를 돌봐주는 건장한 남자에게 열광하는 작고 연약한 여자를 아주 많이 겪었나 보군요? 난 기절 안 해요. 당신 때문에 폭풍우 속으로 뛰어나간 거라구요!"

라파엘로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 거품 욕조 속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의 셔츠를 입은 채 물 속에 앉아 분출구를 통해 만들어지는 기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임신시켰다면 당신과 결혼할 거요." 라파엘로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강력히 주장했다.

글로리는 깜짝 놀랐다. 가슴이 빠르게 뛰다가 이내 느릿해지고 약해졌다. 진심일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라파엘로 그라치니가 여자를 임신시켰다고 정원사의 딸과 결혼할 리가 없어. 죄의식에서 나온 마지못한 청혼이야. 그가 나처럼 미천한 배경의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 일이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가슴을 설레었다는 걸 그가 모르도록 무뚝뚝하게 응수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리고 나는 옳지 못한 이유에서 나온 충동적인 청혼을 덥석 받아들일 만큼 어리석지 않아.

"내가 실수한 거요. 전적으로 내 책임이오. 미안하오." 라파엘로는 조용히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일 날 집으로 보내줄 만큼 미안해요?" 글로리는 그의 마지막 말이 느닷없이 청혼하게 만든 심정을 전적으로 확증해 줄뿐이라는 실망감에 넌더리가 나서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딱딱하게 속삭였다.

한동안 터질 듯한 침묵이 흘렀다.

"아니오. 그 정도로 미안하지는 않소."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게 뭐가 있죠?"

"당신이지."

그녀는 지친 몸을 따뜻하게 풀어주는 물줄기를 맞았다. 평생 이렇게 피곤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사정없이 밀려드는 잠을 뿌리치고 욕조에서 나와 라파엘로에게 기대섰다. 그는 그녀가 미처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젖은 셔츠를 벗기고는 부드러운 커다란 수건으로 그녀를 감쌌다.

"지금으로선 이해가 안 되겠지만 우린 잘 어울릴 거요, 벨라 미아." 라파엘로는 아주 확신에 차서 말했다."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해가 나 있을 테고, 당신 기분도 달라질 거요."

그녀는 너무 기진맥진해서 아무 말도 못한채 안락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뭘 좀 먹어야 하오." 라파엘로가 말했다.

"못 먹겠어요."포크와 나이프를 들 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졸린 눈을 깜박이며 침대 머리판에 그려진 정교한 초상화를 쳐다보았다. "저들은 누구예요?"

"성인들이오. 성상이지."

글로리는 동요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침대 머리맡에 웬 성인들이에요?"

"이건 코르푸의 신혼부부침대요. 어머니 집안의 물건이오."

글로리는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가 이곳 코르푸에서 자란 이탈리아인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신혼부부 침대라구요?" 결혼도 안 한 남녀에게는 너무도 부적절한 현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너무나 당황했다. "이 침대를 쓰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침대일 뿐이오, 글로리." 라파엘로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글로리는 자연계의 질서도 인식 못할 만큼 정말 어리석다는 의미가 담긴 성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라파엘로가 장담했듯이 글로리는 햇살 속에서 눈을 떴다. 침대에는 혼자뿐이었고, 옆 베개에 누가 누웠던 흔적도 없었다. 그녀는 곧장 샤워를 하러 들어가 아직도 머리에 붙어 있는 모래를 씻어냈다. 수건을 몸에 감고 욕실에서 나오자 하녀가 가방을 풀고 있었다. 그녀는 청색 치마에 하얀 여름 상의를 골라 들고 옷을 입으러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조금 열어 둔 문이 서서히 더 넓게 벌어졌다. "아침 식사?"검정 티셔츠에 모양 좋은 면바지 차림의 라파엘로가 문간에 서 있었다. 더 없이 멋진 모습이었다.

"뭐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글로리는 뺨을 붉히며 고백했다. 그와 제대로 눈을 맞출 수도 없었다.

방 저쪽 발코니 탁자에 아침 식사치고는 도가 지나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글로리는 쿠션을 댄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라파엘로는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쫓아 반짝이는 짙은 눈으로 유심히 쳐다보았다. "오늘 새롭게 출발하는 거요."

"그래요?"그녀는 벌꿀색 머리를 숙인 채 토스트를 먹으며 물었다. 새롭게? 어젯밤 일은 없었다는 듯이? 아직도 낯선 은밀한 욱신거림이 두 사람이 함께 나눈 육체관계를 상기시키고 있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임신 가능성을 생각하자 다시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라파엘로는 여자가 임신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에 사랑을 나누었다. 게다가 지금 이순간 자신의 몸속 깊은 곳에서 작은 생명의 세포가 정신없이 아기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는 불가해한 확신이 들었다.

"글로리." 라파엘로가 손을 뻗어 토스트 한 조각을 더 집어들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기 오기 전에 굶었소? 아니면 벌써부터 2인분을 먹고 있는 거요?"

글로리는 창백해진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예요?"

라파엘로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 심정이 어떤지 알고 있소, 벨라 미아. 어젯밤에 침대 머리맡의 성상을 보고는 원시적인 미신이 바로 내 눈앞에서 당신을 쓰러뜨렸소."

"난 원시적인 미신은 안 믿어요!" 글로리가 외쳤다.

"안 믿는다고? 하지만 가까운 교회가 있었다면 당신은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거기 있었을 거요." 라파엘로는 씁쓸히 신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요? 우린 아무 것도 잘못 한게 없소."

글로리는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니 무서운 형벌이 가해지는 일은 없을 거요." 라파엘로가 확신에 차서 말을 이었다. "한번의 관계로 영향이 있진 않을 거요."

"생리적 현상에 관해 긴급 전화 상담이라도 받았나 보죠?" 글로리는 그렇게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파엘로는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다. "당신은 정말 지독한 비관론자군. 몇 년 전에 우리가 소풍을 나갔던 일 기억하오? 당신은 계속해서 날씨가 화창한 걸로 보아 분명히 비가 올 거라고 했소. 그런 연관성을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소. 하지만...."

"비가 내렸죠." 글로리는 둘 사이의 모든 것이 거의 놀랄 만큼 완벽했던 4년 전 그 여름날의 오후를 떠올리며 말했다. "차 있는 곳으로 가던 도중에 비가 내렸어요."

"그래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초조해하며 모든 경우에 기가 꺾인 거요?" 라파엘로는 그녀의 턱을 들고 반항적인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건 시간 낭비고 기운 낭비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난 당신을 돌봐 줄 거요. 날 믿으시오."

그 각별한 말에 글로리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미신을 믿는 게 맞아. 초감각적 지각을 믿는 게 맞아. 그녀는 그가 더 이상 결혼하겠다고 자신을 확신시키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 경솔한 단언을 고쳐 생각했다는 걸. 그는 내가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걸 벌써 고맙게 여기고 있는 게 분명해. <돌봐주겠다>는 말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가 임신의 완곡한 표현으로 <영향>이라는 말과 <무서운 형벌>이라는 용어를 쓸 때는 본인이 깨닫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거야. 십중팔구는 낙태가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라는 뜻일거야. 안돼, 내 아기는 안 돼, 글로리는 맹렬히 거부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행위에는 인과응보가 따른다는 타고난 믿음 때문에 괴롭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사랑을 나눈 지 몇 시간 만에 임신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건 너무 심하잖아? 라파엘로가 옳아. 임신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냐.

"마저 드시오." 라파엘로가 권했다. "왕성한 식욕을 가진 여자와 함께 하는 것도 큰 기쁨이니까."

저도 모르게 그녀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 입도 더 못 먹겠어요."

"나도 마찬가지요."

"당신은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그녀가 이의를 제기했다.

"당신이 자는 동안 아침을 먹었거든."그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

갸름한 그의 손이 그녀의 둔부에 얹혔다. 그녀는 놀라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뜨겁게 타오르는 금빛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이 바싹 타 들어가는 가운데 부끄러움도 모른 채 갈망에 사로잡혀 가까이 다가섰다.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만족한 미소가 그의 아름다운 입가에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귓불을 어루만졌다. "어젯밤에 당신과 한 침대에서 얌전히 잘 자신이 없었소."그가 고백했다.

"자신이 없었다구요?" 글로리는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그의 관능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숨을 훅 들이마셨다.

"당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난 옆방에서 잤소. 하지만 밤새도록 뒤척이다 새벽녘엔 찬물로 샤워를 해야 했소."

"자신을 학대하면서요?"

"어쩔 수 없었소. 당신 생각만으로도 못 견딜 것 같았으니까." 라파엘로는 목쉰 소리로 말하고는 맹렬히 그녀의 입술을 훔치며 방안으로 이끌었다.

글로리는 그가 이렇게 빨리, 이렇게 쉽게 이성적인 사고를 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동요되어 몸을 떨었다. 마치 그만이 가라앉혀 줄 수 있는 열병에 걸린 듯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런 갈망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자 갈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잘못 알고 있었던 거야. 냉담하고 무정한 거래라고 잘못알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어젯밤 그는 나를 찾아 헤매며 관심과 후회를 보여주었어. 그걸로 충분해.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녀는 자신을 타일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라파엘로는 그녀와 함께 침대로 쓰러지며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글로리는 두 손을 들어 그의 근육질 상체를 탐색하듯이 만졌다.

그는 반짝이는 눈을 놀란 듯 가늘게 뜨고 그녀의 손길에 만족한 호랑이처럼 몸을 한껏 뻗었다. 그가 머리를 숙이자 그녀는 도톰한 입술에 아주 은밀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 관계가 얼마나 갈지 몰라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항상 기억하리라는 걸 확신했다.

마치 그 열망을 같이 나누려는 것처럼 라파엘로는 노련한 입술로 쭉 뻗은 그녀의 목을 따라 키스를 퍼부었다. 옷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단단하고 준비된 그의 감촉만으로도 그녀 안의 불꽃은 더욱 불타올랐다.

 

글로리는 거울 앞에 서서 은과 터키석으로 된 목걸이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밝은 색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을 음미했다. 이렇게 우아하고 기품 있는 여자가 자신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3주 만에 그녀의 겉모습이 변했다. 그녀는 자존심을 버리고 라파엘로가 사주는 옷을 입었다. 왜냐하면 4년 전 그와 사귈 때 한 번도 제대로 된 옷을 입은 적이 없는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피상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자신을 타일렀지만 사람들 숲에서 눈에 띄었을 때 그건 별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녀나 그녀의 친구들에겐 라파엘로의 세계에 속한 여자들이 입는 옷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겉모양이나 상류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로 그를 무안하게 만들까 봐 늘 두려워했다.

하지만 여름에 이 섬으로 모여드는 부자들이 찾는 코르푸 번화가의 디자이너 제품 대리점에서 산 베르사체 옷을 입은 그녀는 그런 두려움이 없었다.

숱 많은 머리는 손질을 받고 얼굴 뒤로 늘어뜨렸고 눈꺼풀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섀도로 미묘한 빛을 냈다. 하지만 그녀를 가장 즐겁게 만든 건 아주 기만적으로 햇빛에 그은 모습을 만들어내는 데 얼마나 많은 작업이 소요되는지 알게 된 일이었다.

터키석이 삽입된 구슬 모양의 은 귀고리가 그녀의 귀에 달려 있고, 팔목에는 은시계도 있었다. 그리고 라파엘로가 그녀의 목에 걸 목걸이를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금과 다이아몬드로 된 목걸이를 골랐지만 은을 좋아했기 때문에 은을 선택했다. 은으로 된 장신구는 부담없이 가지갈 수 있잖아

그녀는 어제 비로소 자신의 몸속에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제 아침에 그녀는 안 좋은 기분으로 잠을 깼다. 생리가 늦어지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욕지기가 났다. 갑자기 두려움이 되살아났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라파엘로까지 걱정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너무 늦게까지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놀리자 글로리는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난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단 말예요."

"그 날인 거요?" 라파엘로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녀는 비참한 심정으로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렇다면 좋은 소식이군, 안 그렇소?"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어도 임신한 건 아니라는 얘기니까, 벨라 미아."

그가 그렇게 짐작하고 한시름 놓는 모습을 목격하고 나자 도저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 후 그녀는 몰래 시내에 있는 병원을 찾아가 임신 사실을 확인했다. 그녀는 라파엘로에게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결혼도 낙태도 없을 것이고, 그가 부양의 의무를 이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건 그녀에겐 너무 큰 상처였다. 그녀에겐 이제 마지막 자존심밖에 남은 게 없었다.

" 글로리?" 라파엘로의 굵고 느릿한 목소리에 담긴 웃음이 그녀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그녀는 억지로 결연히 밝은 미소를 지으며 가게 거울 앞에서 돌아섰다.

"그게 마음에 드나 보군." 라파엘로가 재미있다는 듯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랜 침묵을 그가 순전한 감상으로 해석해 이미 그 목걸이의 계산을 마쳤다는 걸 알았다. "정말 아름다워요."

하지만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그녀는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매력적인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와 함께 보낸 최근의 몇 주는 그녀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4년 전에도 이런 행복은 느껴 보지 못했다. 그의 아이를 낳게 될 거라는 잔인하게 현실적이고 반갑지 않은 발표로 도저히 이 황홀한 순간을 망칠 수 없었다.

아무리 슬픈 일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은 서서히 끝나가고 있는데 일부러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임신으로 몸이 무거워지면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몸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변화가 황홀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가슴이 부드러워지고 음식 냄새에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앞으로 몇 주간은 그런 사실을 감출 수 있을 거야.

라파엘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가게 밖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좁은 거리를 오가는 다채로운 색상의 생동감 넘치는 인파 속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코르푸 시내가 좋았다.

4세기에 걸친 베네치아의 통치 뒤에 남은 덧문과 발코니가 달린 높은 이탈리아식 건물들과 붐비는 거리와 카페, 은과 올리브 재와 자수와 가죽 수공예품들을 파는 멋진 상가의 행렬....

"이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갑시다.." 라파엘로가 느긋하게 말했다.

"괜찮다면요."

어느 프랑스인이 파리의 리볼리 거리를 흉내 내어 리스턴 거리를 만들었다. 유행하는 카페들이 즐비한 아치가 드리운 거리 전면에는 나무숲에 둘러싸인 크리켓 경기장이 내다보였다. 그녀는 라파엘로와 함께 앉아 세상 돌아가는 구경을 했다.

"사람들이 왜 우릴 빤히 쳐다보죠?" 그녀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괜한 불편을 느끼고 그렇게 물었다.

"당신이 무척 아름답기 때문이오." 그는 너무나 재미있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감탄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순간 그녀는 늘 감추려고 애써 온 불안감이 사라지면서 가슴이 터질 듯했다. 자신도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처럼 보일 수 있다는 믿음이 절실히 필요했다.

라파엘로가 포도주를 주문하는 동안 글로리는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고르고는 안락한 의자에 기대앉아 고통과 기쁨 사이를 오가며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그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반짝이는 검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가지. 그녀는 그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지붕에 올라가서 만인이 들을 수 있도록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헤어질 생각을 하자 즉시 움츠러들었다.

글로리는 그 비참한 자각을 억누르고 대신 두 사람이 함께 한 멋진 날들과 끝없는 열정의 밤을 떠올렸다. 아주 드물게 의견이 안 맞아 삐걱거리다가도 놀랄 만큼 빨리 화해해 풀어지는 하루하루가 순조롭게 영원처럼 지나갔다. 그가 수영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다 큰 아이처럼 커다란 비닐 튜브를 타고 별장 수영장을 떠다니거나 안전한 로마식 계단 발치에 앉아 있는 걸 좋아했다.

처음에 그는 그녀를 겁쟁이라고 놀렸지만 나중에는 그러한 모습도 무척 귀여워했다.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 별장을 에워싼 과수원 길을 거닐던 일과 매끄러운 감촉의 복숭아와 귤과 체리가 달린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끝없이 얘기를 나누던 기억을 안고 떠날 거야

하얗게 반짝이는 한낮의 모래 언덕과 이 섬에서 존경받는 스피리돈 성자에게 바친 음산한 분위기가 나는 교회의 강렬함은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나를 한 번도 정부로 부르지 않은 점이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소중히 간직할거야.

"마음에 걸리는 일이 뭔지 빨리 말하지 않으면, 카라 미아." 라파엘로가 반짝이는 짙은 금빛 눈을 캐 묻듯이 그녀에게 고정시킨 채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화를 낼 거요."

글로리는 자신이 생각만큼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놀랐다. 아니, 그는 조그만 변화도 금방 알아차릴 만큼 나에게 관심이 많은 걸까?

"마음에 걸리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왜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 글로리는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어깨까지 으쓱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탁자 밑으로 아직도 납작한 배로 한 손을 가져갔다.

"당신은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니오. 하지만 지난 며칠간은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많았소. 대체 무슨 일이오?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요?" 라파엘로는 기대감을 안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글로리는 당황해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가족들 얘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을 애초에 코르푸에 오게 만든 거래를 떠올리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게 돈만 아는 여자라는 인상을 남긴 그 5천 파운드 사건이 다시 언급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화 정도는 해도 괜찮을 거요." 라파엘로가 아량을 베푸는 남자처럼 제의했다.

"여기 온 뒤로 며칠에 한 번씩 통화해 왔어요." 글로리는 당황하여 고백했다.

라파엘로는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긴장했다.

글로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이 상관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통화를 오래 하지는 않았어요."

라파엘로는 격앙된 저음으로 금빛 눈을 번뜩이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조심하라고 부탁했는데도, 며칠에 한 번씩 아버지와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어 왔다는 얘기요?"

글로리는 그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하얘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로는 무례한 욕설을 내뱉었다.

글로리는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행각하며 침을 삼켰다. "당신이 샘에게 잘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어요. 왜냐하면 그 일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에요. 미안해요."

"입 다무시오." 그는 그녀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이 조금도 도움이 안된 듯 침착치 못한 소리로 말을 잘랐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벌떡 일어서더니 식탁 위에 지폐를 몇 장 던져 놓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글로리 역시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갔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소?" 라파엘로는 거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뻔한 사실을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벨라 미아." 라파엘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가족들에게 당신이 여기서 나와 동거한다는 사실을 떠벌렸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요!" 글로리는 그가 두 사람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말하자 가슴이 아파 받아쳤다.

라파엘로는 우뚝 멈춰 서더니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고?"

"내가 당신과 함께 지낸다는 사실에 들떠 있긴 했어도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아요. 당신과 여기 있는 걸 내가 자랑스럽게 여길 줄 알아요? 미안하지만 내가 당신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걸 아버지나 동생이 알면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 거예요!" 글로리는 힘차게 말을 맺었다.

라파엘로는 몹시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속이 메스꺼워서 발길을 돌려 차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너무 화가 나서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가 어느새 다가와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녀는 대리석처럼 창백하고 표정 없는 얼굴로 차에 올라탔다.

그가 차에 올라탄 뒤로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떨리는 걸 막기 위해 두 손을 깍지 끼고 말했다. "아버지와 샘은 내가 이사한 줄 알고 있고, 편지를 쓰는 일은 없기 때문에 주소는 물어 보지도 않았어요. 두 사람은 내가 공중 전화를 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녀는 딱딱거리며 설명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내가 버밍엄에 있을 때 찾아 온 적도 없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내 생활을 그렇게 궁금해 하지도 않아요."

"미안하오. 내가 오해를 했소." 라파엘로는 냉담하면서도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억양이 들어간 말투가 어딘지 거칠었다. "당신 아버지는 내 고용인이오. 동생도 예의가 바르더군. 난 두 사람과 당신을 위해 조심해 주길 바랐소. 결코 날 위한 것이 아니었소."

"당신이 일시적으로 빈민가의 여자와 교제 중이라는 걸 알릴 필요는 없다는 뜻이겠죠?" 글로리는 고약하게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쨌든 이제 내게 이런 비싼 옷까지 사 입혔으니 아무도 당신이 날 공장 바닥에서 건진 줄은 모를 거예요!"

조금 전의 침묵이 고동쳤다면 그 무뚝뚝하고 자극적인 말 뒤에 이어진 침묵은 지글거리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차를 출발시켰다. 차의 기어를 삐걱거리지도, 핸들을 난폭하게 돌려 감정적으로 혼란하다는 걸 보여 주지도 않은 채 운전 면허시험을 치르는 사람처럼 아주 신중하게 차를 몰았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당신이 정말 싫어요, 라파엘로 그라치니!"

"당연히 그럴 테지."그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어떤 관계에서든 섹스와 빚은 만족할 만한 출발점이 못 되니까. 내가 선택한 일이고, 내 실수요."

글로리는 왈칵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그는 왜 사태를 악화시키는 걸까? 벌써 내가 싫증났나? 하지만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을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떠날 작정이었으니까. 점점 배가 불러오는데 어떻게 그의 곁에 남을 수 있겠어?

별장으로 돌아온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엉엉 소리 내 울어도 밖에서 듣지 못하도록 물을 힘껏 틀었다.

그녀는 한 시간 뒤에야 찬 물에 맞아 얼얼한 눈으로 욕실에서 느릿느릿 나왔다. 고맙게도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여기 도착한 뒤 처음으로 서랍에서 잠옷을 꺼내 입고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지독한 자기 연민에 빠져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른 새벽에 방문이 열리면서 밝은 달빛에 남자의 구릿빛 윤곽이 보였다. 좁은 엉덩이에 흰 수건 한 장을 달랑 걸친 라파엘로였다.

그녀는 얼어붙은 채 눈을 꼭 감고 모른 척하고 있었다. 몇 초 뒤에 라파엘로가 내려앉았는지 매트리스가 살짝 출렁거렸다.

그녀는 조금 뒤에야 몸을 굴려 그가 있는 쪽으로 갔다.

그는 놀란 숨을 내쉬며 그녀를 안았다. "얘기 좀 합시다."

글로리는 겁이 났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상태였다. 아무 것도 결정될 게 없었고, 아무 것도 변할 게 없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단단한 근육질의 몸을 따라 올라가 그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의 대담한 초대에 놀랐는지 그의 몸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그녀를 자신의 밑에 고정시키고 격렬하게 키스를 했다.

조금 뒤 그는 달빛 속에서 고개를 들고는 속을 헤아릴 길 없는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을 갖고 싶지만...."

글로리는 그 다음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해서 아직 젖어 있는 그의 머리에 절박하게 손을 집어넣고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목안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녀는 그가 거부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그를 흥분시키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단 몇 분 만에 그녀만큼이나 이성을 잃고 욕망의 포로가 되었다. 그녀는 완전히 걷잡을 수 없는 강렬한 열정을 드러냈다. 그도 기분 좋은 추진력으로 몰아붙여 그녀의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그녀는 끝날 것 같지 않은 흥분과 황홀감으로 온몸이 땀에 흠뻑 젖고 머리까지 혼란스러웠다. 기진맥진해진 그는 곧바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는 그의 곁에 누운 채 이번에 나눈 사랑은 왠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그는 나에게 작별인살

한 거야. 그는 이제 우리의 관계를 끝내고 싶은 거야. 어쩌면 내가 깊이 잠들어 있을 거라도 생각하고 침대로 오기 전에 이미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도 몰라. 그는 벗어나고 싶은 거야. 하지만 내가 싫증이 났거나 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 아냐. 그는 혼란한 사태를 좋아하지 않아. 어쩌면 이제야 내가 자신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도 몰라.

그 동안 내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깊이 얽혀 들었는지 몰랐다 하더라도 그는 방금 일어난 일로 확실히 알게 되었을 거야. 내가 닳아빠진 여자처럼 자신을 내던졌으니.... 그녀는 넌더리를 내다가 이내 두려움과 의심 속으로 빠져들었다. 임신에 대한 스트레스와 불안감 때문에 지나치게 민감해 졌는지도 몰라. 그녀는 그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날 아침 늦게 완전히 옷을 갈아입은 라파엘로가 그녀를 깨웠다. 그는 가벼운 재킷에 짙은 청색 셔츠와 흠잡을 데 없는 베이지 색 맞춤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너무나 근사한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 봐야겠소."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잭 우드로씨가 지난주에 투자 자문을 부탁했는데, 아직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소."

여기 온 첫 주에 그녀는 라파엘로를 따라 우드로 집안의 궁궐 같은 별장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진짜 백작과 그 부인의 접대를 받는다는 생각에 글로리는 긴장해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냉소적인 피오나는 보이지 않았고, 그 갈색머리 아가씨의 부모인 우드로 경 내외는 몹시 유쾌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라파엘로를 다정하게 맞았고, 조금도 난감해하지 않고 글로리를 자신들의 피서용 별장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라파엘로가 힘찬 옆얼굴에 긴장이 확연한 모습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짐을 꾸려야겠소. 오늘 오후에 런던으로 돌아갈 거요."

그래, 폐기 통보를 받기 위해 기다릴 필요는 없지. 글로리는 차분히 자신에게 말했다. 곤란한 마지막 만남에 이어 더욱 괴로운 세시간의 비행을 함께 겪을 수는 없어. 그는 예의를 다한 배려로 나와 깨끗하게 정리하길 원할 거야.

그녀는 그가 나가자마자 라파엘로의 하인 힐라리오에게 공항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녀는 힐라리오가 출발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시내로 돌아갔다. 카페와 술집에서 임시직을 구하는 광고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라파엘로 혼자만 코르푸를 떠나면 되잖아. 굳이 나까지 떠날 필요는 없잖아? 영국으로 돌아가도 나에겐 더 이상 집도 없고 직장도 없어. 게다가 돈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몬터규 파크의 정원사 별채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아버지와 동생이 임신사실을 알면 무척 괴로워하고 창피해 할 게 뻔했다. 그리고 소문이 퍼지면 라파엘로가 알게 될 가능성이 많았다. 안돼, 나는 혼자야. 다시 그런 인식에 익숙해져야해.

 

7

글로리는 좁은 골목길에 놓인 빈 탁자 위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차양 밑에 서서 통증이 가장 심한 등 밑을 문질렀다. 늦은 오후의 술집은 지나가는 손님들의 발길을 거의 끌지 못했지만 그렇다 해도 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규칙이었다.

라파엘로의 별장을 나온 지 벌써 8주가 지났다. 그녀는 이내 자신의 충동적인 결정을 후회했다. 왜냐하면 모든 게 생각대로 안 풀렸기 때문이다. 코르푸 시내에 방을 얻는데도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었고, 일자리도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겨우 얼마 전에야 런던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았다.

게다가 이제 여름 관광객이 뜸해져 그나마 일자리까지 잃을 형편이었다. 지금 영국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생활해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코르푸에 남는 게 아니었어. 영국에 있었다면 그다지 배가 부르지 않은 동안에는 이보다 나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고무줄 바지가 아니면 입을 수 없을 만큼 배가 나왔다.

내가 왜 그때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했을까? 내가 너무 어리석은 행동을 했어. 하지만 그가 긴장한 얼굴로 <그 날>이라서 기분이 안 좋냐고 물어 보는 순간 나는 그를 확연한 불안감에서 해방시켜 줘야 한다는 본능적 의무감을 느꼈어. 그리고 불행하게도 너무 이른 확인에 안도하는 그를 보자 나 혼자 운명을 결정하기로 마음먹고 말았지.

하지만 라파엘로가 한시름 놓는 것도 당연하다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남자에게 아이는 섹스와 별개의 문제니까. 물론 여자들만큼 아이를 원하는 남자도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원하지도 않는 아이를 핑계로 그를 구속하거나 속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사실을 말해 주었어야해. 그의 아이를 갖고 있지만 나 혼자 키울 테니 아무런 의무감도 갖지 말라고 말했어야 해.

글로리,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괜히 뱃속의 아이를 핑계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거 아냐? 라파엘로가 못 견디게 보고 싶은 거지?

정신 차려, 글로리. 너를 버릴 생각을 하고 있던 남자를 그리워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그것도 겨우 3주를 같이한 남자를.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글로리는 요즘 들어 너무 쉽게 찾아드는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분명 나보다 현명한 여자들도 남자에게 속긴 하겠지만 한 남자에게 두 번이나 속지는 않을 거야.

자신이 들인 노력과 단지 그에게 우아하게 보이기 위해 내팽개친 자존심을 생각하자 신음이 나오려고 했다. 정말 야하게 차려입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무안을 주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오, 세상에.... 글로리 리틀은 마지막 순간에 매춘부처럼 굴었어. 라파엘로의 침대에서 마지막 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떠올린 그녀는 수치심으로 움츠러들었다. 이제 임신한 몸에 가난하고 비참한 외톨이 신세가 되고 보니 그에게 호통을 쳤다는 사실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제야 새로운 손님이 와서 앉아 있는 걸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두 걸음을 뗐다. 하지만 곧 오만한 검은머리와 앉아 있는데도 냉정한 자제력과 부유하고 고급스러운 인상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신비로울 정도로 유연하게 빠진 몸을 알아보았다. 순간 걸음이 비틀거리고 심장이 경련을 일으키며 목까지 튀어 올라올 것 같았다.

라파엘로가 선글라스를 벗고 움푹 들어간 번쩍이는 눈을 그녀에게 꽂았다. 험악하고 긴장된 표정에 딱딱한 정장 차림인데도 그는 놀랄 만큼 미끈하고 섹시해 보였다.

그녀는 몹시 힘을 빼놓는 사랑과 욕정의 물결에 휩싸였다. 그가 미소를 지으면 얼마나 좋을까? 왜 저렇게 험악해 보이는 거지?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말없이 떠나 준 게 오히려 고마울 텐데.

그녀는 고개를 쳐들었지만 기대를 저버리는 자의식의 홍조가 뺨 위로 번졌다.

"앉으시오." 라파엘로가 권했다.

"그럴 수 없어요. 여기 규칙이에요."그녀는 고르지 못한 소리로 대답하고는 얼른 덧붙였다. "뭘 줘요?"

"자리에 앉든지 아니면 사는 곳을 말해 주시오. 거기 가서 얘기합시다." 라파엘로가 긴장된 소리로 반격했다.

"날 어떻게 찾았어요?"

"아주 힘들게 찾아냈지."

속눈썹 밑으로 몰래 훔쳐보니 그의 육감적인 큰 입술이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소."

"샘이요?" 글로리는 어리둥절해서 반문했다.

" 글로리, 당신이 들으면 괴로울 소식을 갖고 왔소."

그가 다시 돌아오라고 설득하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이 강한 산처럼 그녀의 마음을 부식시켰다. 아무리 상상해 보아도 그가 그런 제안을 <괴로운 소식>으로 분류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신이 하는 어떤 말도 날 괴롭히진 않을 테니까 주문을 하지 않을 거라면, 난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요."그녀는 한심한 실망감을 감추기 위해 냉소적으로 단언하고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젠장!" 라파엘로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더니 의자를 뒤로 밀치고 그 당당한 키를 완전히 일으켰다. "당신 아버지가 편찮으시단 말이오."

글로리는 홱 몸을 틀고 충격으로 할 말을 잃은 채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소." 라파엘로는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침착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살갗이 축축하고 싸늘해지면서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편찮으시다니.... 어디가요?"

"뇌종양이오." 한참을 망설이던 라파엘로가 이윽고 털어놓았다.

공포가 글로리를 집어삼켰다. 뇌종양? 그녀는 엄습해 오는 현기증을 가라앉히려고 의자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그녀는 카페 위층의 자신의 좁은 침대 위에서 멍하니 의식을 찾았다. 라파엘로는 술집 안주인과 그리스말로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글로리는 괴롭게 움찔거리며 기억을 되살렸다. 라파엘로가 차분히 알려주려고 한 게 그 소식이었지만 공공장소에서 전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아버지가 엄마처럼 그렇게 가셨나요? 갑자기?" 글로리는 힘없이 속삭였다.

라파엘로가 미간을 찡그리고 획 돌아보았다. "당신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소."그가 즉시 바로잡았다. "수술을, 큰 수술을 받으셨소. 지금은 꿋꿋이 버티고 계시오."

글로리는 백짓장처럼 하얘진 얼굴로 그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충격으로 멍해진 머리가 너무 더디게 움직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구요?"

"그렇소. 하지만 아직 의식은 없으시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통화를 했어요." 글로리는 팔꿈치로 기대 일어나 앉으며 반박했다.

라파엘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갑자기 아무런 뚜렷한 전조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소. 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그냥 쓰러지셨소. 샘이 구급차를 불러 동네 병원으로 갔다가 거기서 검사 장비를 갖춘 큰 병원으로 이송했소."

"수술을 했다면... 희망이 있다는 얘기군요?" 그에게라기보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점만 생각하면 되겠군요."

"밑에서 기다리겠소." 라파엘로가 일어서며 말했다. "서둘러 짐을 싸면 저녁 늦게는 런던에 도착할 수 있을 거요."

글로리는 라파엘로가 빈말이라도 자신을 안심시켜 주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여기 볼 일이 있어 온 거예요?" 글로리는 공항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겨우 그의 입장을 생각하고 궁금해서 물었다.

"아니오. 당신 때문에 왔소. 샘은 당신이 이곳의 어느 술집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밖에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내 부하 직원들을 시켜 일일이 전화를 걸어 확인했소."

"샘에게 내주소를 가르쳐 주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요." 글로리는 그가 자신을 찾아내려고 그런 고생을 했다는 데 놀라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순전히 나를 위해 이곳까지 날아온 거야.

"내가 도착할 때쯤에는 당신 소재를 알 수 있길 바라며 무턱대고 비행기에 올랐소. 그리고 다행히 여기로 날아오는 도중에 존 리용이 당신을 찾아냈소." 라파엘로가 팽팽히 당긴 입술로 말을 마쳤다.

글로리는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아치 리틀의 고용주고, 그라치니 가문은 늘 고용인들에게 잘해 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샘은 겨우 열여섯이라서 이 위기 상황을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필요했어. 그 반갑지 않은 책임을 떠 안은 사람이 바로 라파엘로였지.

"혼자 병원에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딱딱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당신이 애를 많이 썼어요."

"난 당신과 함께 갈 거요. 그리고 샘을 설득해서 좀 쉬게 해야 하오. 너무 지쳤을 거요." 라파엘로가 주장했다. "우리 집 가정부도 당신 아버지 병상을 철야로 지키고 있소."

"모드 벨퍼 아줌마가요?" 글로리는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 아버지가 지난주에 그녀에게 청혼하신 것 같소."그녀가 더욱 놀라 입을 떡 벌리고 있자 라파엘로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샘이 당신에게 그 말은 하지 않았나 보군."

충격이 가시고 나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모드 벨퍼는 평생 알고 지낸 사이였다. 여러 해의 우정이 마침내 애정으로 발전했다면 두 사람을 위해 잘된 일이었다. 그래, 아버지는 너무 오랜 세월 혼자 살아왔어.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에겐 알리지도 않고 재혼할 결심을 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상하거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하긴, 오랫동안 아버지 인생의 주변에서만 살아왔으니 내가 의논 상대가 되지 못한 것도 당연해.

라파엘로를 돌아보자 그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여위어 있었다. 그리고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모든 게 너무 미안해요."그녀는 병원 승강기 안으로 급히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승강기 문이 윙 소리를 내며 닫히자 라파엘로가 꿰뚫을 듯한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내 말에 오해는 하지 마시오. 하지만 내게 고마워하거나 미안해 할 필요는 없소. 난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

글로리는 상처받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다시 한번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깊고 넓은 대양이 가로놓여 있는 상황에선 불가능했다.

대기실에 있던 샘이 두 사람을 보고는 안도의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샘이 쏟아놓은 말은 모두 어깨너머에 있는 라파엘로를 향한 것이었다.

"이렇게 빨리 누나를 데려올 줄은 몰랐어요!"샘이 말하고 있었다. "정말 누나를 찾기가 쉽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주로 아줌마를 아버지 겉에 있게 해드렸...."

"아버지를 만나 봐야겠어." 글로리는 쉴 새 없이 늘어놓는 동생의 얘기 중에 끼여들었다.

"아줌마가 나오셔야 돼." 샘이 말했다. "중환자실에는 한 사람밖에 못 들어가."

라파엘로가 문간에서 사라졌다.

"알아서 할 거야." 샘이 호리한 몸을 지친 듯 수그리고 중얼거렸다. "저 형이 다 알아서 했어. 라파엘로가 아니었으면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야. 여기 의사들이 아버지를 수술할 수 없다고 했다는 말 들었어?"

"아니."

샘은 그나마 아버지가 생존할 가능성이 있는 수술을 지금까지 영국에서는 한번도 행한 적이 없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라파엘로가 그 수술을 위해 뉴욕에서 일류 신경 외과의를 데려왔다고 덧붙였다. 라파엘로가 나의 가족을 돕기 위해 전력을 다했어.

친절한 간호사의 안내로 중환자실로 들어간 글로리는 아버지 주위를 둘러싼 기계를 바라보다가 이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문제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대신 아버지가 깨어나기만을 기도했다.

새벽녘이 되자 아버지는 뚜렷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운을 얻어 동생을 찾으러 갔다.

그러나 대기실로 들어섰을 때 달려온 사람은 샘이 아니라 그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모드 벨퍼였다. 글로리는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며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다. 나이 든 여인의 충혈된 눈에 심한 긴장 뒤의 안도의 눈물이 고였다.

모드 벨퍼는 글로리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내가 잠시 들어가 있어도 되겠니?"

"그럼요. 제가 아줌마 생각은 못했어요. 죄송해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글로리가 권했다. "샘은요?"

"그라치니씨가 시내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갔어. 샘이 너무 지쳤거든. 두 사람에게 전화 좀 해주겠니?" 모드 벨퍼는 한시라도 빨리 사랑하는 사람의 곁으로 가고 싶어 안달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글로리는 전화번호부에서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벨이 울리기가 무섭게 라파엘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샘이 나중에 깨어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 정도로 동생을 생각해 주는 마음에 당황했지만 이의를 달진 않았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구석 자리에 몸을 말고 남은 밤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오전에 라파엘로가 샘과 함께 병원으로 왔다. 의식을 회복한 아치 리틀은 모드 벨퍼의 손을 꼭 잡은 채 딸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라파엘로가 글로리를 유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내 아파트로 가서 좀 자도록...."

"괜찮아요." 그녀가 딱딱하게 사양했다.

"일을 더 힘들게 만들지 마시오." 라파엘로는 나무라는 얼굴로 말했다. "단지 날 이기려고 의자에서 선잠을 잘 생각이오?"

글로리는 얼른 팔짱을 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모두가 필요로 하지 않는 인물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중 환자실 문간에서 지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모드 부인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나보다 저 나이 든 여인에게서 더 많은 힘과 위로를 얻고 계셔.

아버지가 좋아졌다는 것을 확인한 샘은 아주 크고 징그러운 강아지처럼 장난스럽게 라파엘로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작별인사를 하고는 그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샘은 라파엘로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늘 낯선 사람에게 내성적이던 샘이 라파엘로에게는 허물없이 대하는 걸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아버지의 고용주이지 샘의 친구나 형이 아니었다!

"난 누...누굴 이기려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울음이 터지기 직전에 급히 막느라 말을 더듬었다.

라파엘로는 웅크린 그녀의 어깨에 한 팔을 두르고 소파 위의 핸드백을 집어들고는 승강기 쪽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의 가슴에 매달려 엉엉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가족들은 더 이상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녀 없이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건 그녀였고 라파엘로는 절대적인 성자처럼 그들 모두를 도와주느라 바빴다.

라파엘로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리무진에 태웠다. "당신은 지금 몸과 마음이 지쳐 있소. 쉬어야 하오. 그리고 기분이 나아질 것 같으면 실컷 울어도 괜찮소."

"친절한 척 좀 하지 말아요!" 글로리는 책망하듯이 외치고 구석 자리로 몸을 던져 고개를 푹 숙였다.

예고도 없이 결연한 두 손이 허리에 놓이더니 그녀가 벌려 놓은 공간으로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글로리는 푸줏간의 큰 식칼을 피해 달아나는 닭처럼 놀란 소리를 질렀다.

라파엘로가 입술을 덮치자 그녀의 호르몬은 화산처럼 솟구쳤다. 몇 만에 혼란과 눈물의 격앙된 상태에서 생생한 흥분상태로 옮겨갔다. 즉시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와 머리, 그리고 손이 닿는 곳은 어디든 파고들며 그의 키스에 응했다.

다시 그의 품에 안긴 그녀는 너무 편안하고 좋아서 자제력을 잃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엄청나게 들끓는 사랑과 간절한 열망에 이끌릴 뿐이었다. 그 쾌감이 폭발할 듯하고, 원초적이고,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가 고개를 뒤로 빼고 입술을 떼자 그녀는 지독한 상실감을 느꼈다.

라파엘로는 높은 광대뼈를 부각시키는 불그레한 얼굴로 턱에 힘을 주고 밝은 햇빛처럼 빛나는 금빛 눈으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오. 사과하겠소, 카라."그가 껄껄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날 밀어내시오."

그녀는 그와 마찬가지로 수면 부족으로 몸이 떨리고 멍했기 때문에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의 마지막 말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다시 그를 끌어안고 강렬한 열기와 흥분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감정이 그녀를 지배했다. 폭발하기 쉬운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감정이 그녀를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모드 아줌마도 여기 묵으세요?"고급 옥상 아파트로 들어선 글로리는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반들거리는 바닥을 보고 너무 놀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물엇다.

"아니오, 클래펌에 있는 여동생 집에 묵고 있는 걸로 알고 있소."

"그럼 샘은 왜 여기서 지내는 거예요?"

그 질문에 그가 움찔하고 긴장하는 게 보였다. 그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는 그를 보고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드 아줌마는 이제 새어머니가 될 분인데...."

라파엘로가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 아버지가 입원하신 뒤로 모드 부인은 거의 병원을 떠나 본 적이 없소."

그는 넓은 복도를 걸어가 문을 열고 그녀에게 여분의 열쇠를 놔두는 곳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이 얼른 눈앞에서 사라져 주길 바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리무진 안에서의 자신의 격정적인 반응을 떠올렸다.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굳이 참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옷을 입은 채 침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오후에 잠이 깬 그녀는 뜨내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에 붙은 욕실은 광택 나는 타일에 넓고 호화로운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거울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거울 속의 그늘진 눈과 헝클어진 머리를 들여다보았다. 오래도록 샤워를 하고 나니 한결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수건을 몸에 두르고 등 아래쪽의 쑤시는 곳을 문질렀다. 요즘 들어 변하는 몸매가 늘 의식되었다. 편한 자세를 취하자 불러오는 배가 확연히 눈에 띄었다. 어깨가 축 늘어졌지만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어깨를 결연히 펴고 무거운 발길로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우뚝 멈춰 섰다. 라파엘로가 막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문을 두드렸는데.... 자고 있는 줄 알았소." 그가 먼저 설명했다. "샘이 왔는데, 아버지가 당신을 찾으신다는군."

"정말요?" 글로리는 그 소식에 기뻐서 외쳤다. 그녀는 곧장 침대 발치에 놓아 둔 가방 쪽으로 걸어갔다. "옷을 입고 병원으로 가봐야겠어요."

순간 라파엘로가 날카로운 숨을 헉 몰아쉬었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고 그를 다시 흘끗 돌아보았다. 그는 푹신한 수건 위로 드러난 그녀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조각상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맙소사."그가 터질 듯한 침묵 속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조용히 외쳤다. "풍요의 여신 같소."

학교 다닐 때 박물관에서 그 상을 본 적이 있었다. 선사시대의 그 뚱뚱한 여자와 비교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은 칭찬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뜨끔해 얼굴을 붉히고 등에 닿도록 배를 힘껏 집어넣고 억지로 웃음을 터뜨렸다. "살 찐 여자에게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라파엘로. 잘 먹는다는 걸 아니까 내가 살이 찌고 좀 아름다워지고...."

"임신하고?" 라파엘로는 그녀의 배에서 놀란 시선을 들어 동요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임신요?" 글로리는 날카로운 소리로 반문했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수건을 치우고 숨을 쉬어 보시오!" 라파엘로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 보이려는 남자처럼 성큼성큼 다가왔다.

글로리는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수건을 치우면 모든게 드러날 거야. 무너져 가는 허리선과 점점 풍만해지는 몸매가.

"글로리, 난 사실을 알아야겠소." 라파엘로가 강렬한 금빛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글로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아니겠군." 라파엘로는 창백하고 긴장된 그녀의 얼굴을 강렬하게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틀림없소! 이제 몇 개월 됐겠군."

"좋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글로리는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떨군 채 굳게 다문 입술 새로 그렇게 속삭였다. "아니면 어머니이신 자연이 이겼다고 해야겠죠. 그래요, 물론 당신 아니...."

"그런데 왜 코르푸에서는 걱정할 일이 없는 것처럼 말했소? 순전히 실수였소?" 라파엘로는 더 이상 침착하지 않은 억제된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날 떠난 후에 아기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거요?"

"아뇨." 글로리는 갑자기 죄책감이 들었다. "머리를 하러 간다고 한 날 병원에 들렀어요. 그때 알았어요."

라파엘로는 놀란 눈으로 그 고백을 들었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소?"

그녀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세차게 눈을 깜박거렸다. "당신이 알고 싶어 하지 않았...."

"그건 사실이 아니오."무서울 만큼 차분한 반박이 돌아왔다.

"내가 임신하지 않은 줄 알았을 때 당신이 얼마나 안도하는지 봤단 말이에요!" 글로리는 목멘 소리로 주장했다.

라파엘로는 인내심을 갖게 해달라고 비는 것처럼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극도의 긴장으로 어깨가 뻣뻣이 뭉친 모습으로 획 돌아섰다. "그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안심한 거요. 과거가 되풀이되는 게, 우리 사이도 그렇게 되는 게 싫었기 때문에."

"과거가 되풀이 되다뇨?" 글로리는 그의 말에 완전히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그는 경직된 얼굴로 그녀를 향해 획 돌아섰다. "전에 우리 집안에 그 비슷한 일이 있었소."

"...." 그녀는 기운이 빠져 침대 모서리에 주저앉았다."임신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아무래도 내겐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대로 들려주는 나쁜 버릇이 있나봐요."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소." 라파엘로는 성난 비웃음이 담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당신은 충분히 모진 여자요. 발진처럼 내게 달라붙었다가도 다음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말지. 하지만 이건 전혀 별개의 문제요. 왜냐하면 내 아이이기도 하니까. 만약 그때 알았다면 코르푸에서 결혼했을 거요. 하지만 당신은 그 정도로 절망적이진 않다고 선수를 쳤지!"그는 마지막 말에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을 드러냈다.

글로리는 충격 받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결혼을 제의한 뒤 거의 3개월 만이었다. 내가 임신했다면 결혼하겠다던 그의 말은 진심이었어. 그런데 난 어떻게 했지? 낙담한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제의를 받고도 세상에서 가장 마지못한 청혼이라고 믿고 불같이 화를 내며 그를 비방했어.

"그건 공정하지 않아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날 밤 난 화가 나고 당황했어요. 솔직히 당신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난 단지 임신했다고 해서 그 사람과 결혼해야 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바라는 것과 실제로 얻는 게 늘 일치하지 않소." 라파엘로는 또박또박 냉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우린 준비가 되는대로 결혼할 거요. 선택의 여지가 없소."

글로리는 심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 그는 청혼을 하는데 있어서 정말 가망이 없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녀는 완고한 거절의 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척 사랑하고 있는, 뱃속의 아이의 아버지인 그와 결혼한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두사람의 미래는 장밋빛일 거라고 간절히 믿고 싶었다. 그것보다 더 바라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결혼하겠다는 그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어요. 당신이 왜 나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몇 가지 이유를 말해 봐요."

"우린 심한 궁지에 몰렸단 말이오!"

글로리는 그 대답에 몹시 실망했다. 그는 근사하고 영리했다. 그런데도 <심한 궁지에 몰렸다>는 말밖에 못하다니.... 그건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임신이 그의 유일한 청혼 동기라는 걸 비참하게 인정했다.

"내가 한마디 거들어 줘요, ? 아이에겐 아버지를 알 권리가 있어요. 그건 어때요?"전혀 예고도 없이 공격적으로 격앙된 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글로리와 라파엘로는 둘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둘 다 저 십대 소년이 이 아파트에 묵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우리 누나에게 그걸 써먹지 그래요? 그 이유는 그라치니가 사람에겐 아주 확실한 농담일 텐데!"

그녀가 미처 동생의 갑작스런 출현의 충격을 추스르기도 전에 샘이 문안으로 돌진하더니 말 그대로 라파엘로에게 몸을 던졌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샘은 평소에 화를 내지도 난폭하게 군 적도 없었다. 그런데 라파엘로에게 뛰어들다니.... 그녀는 흥분한 라파엘로가 반격할 것을 두려워하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 제발, 그러지마!" 그녀는 괴로워하는 동생을 보자 마음이 아파 갈라진 소리로 애원했다.

"당신을 믿었어!" 샘이 라파엘로를 향해 외쳤다. "당신은 다를 줄 알았는데...."

"난 달라." 라파엘로가 마침내 샘을 제압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라파엘로 또한 그녀만큼이나 샘의 공격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난 그냥 잘난 척한 거야, ."그는 버둥거리는 샘을 진정시키기 위해 벽에 꼼짝 못하게 밀어붙이고 아주 빠르게 말하고 있었다. "난 네 누나를 사랑해. 알겠니? 정말 결혼하고 싶단 말이야!"

아직도 성난 샘의 눈이 그 광범위한 주장의 증거를 찾고 있는 듯 라파엘로에게 못 박혀 있었다. "누나는 단지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형이 필요하진 않다고 하잖아요."

"그래. 하지만 난 그녀가 필요해." 라파엘로는 확고한 신념에 차서 주장하고는 뒤로 물러서서 샘을 놓아주었다.

글로리는 어느 쪽도 쳐다볼 수 없었다. 그녀는 동생이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에 아연했고, 자신의 행동과 상태가 동생을 그 정도로 동요시켰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사과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말아요!" 샘이 라파엘로에게 그 말을 던지고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뒷걸음질 쳐서 방을 나갔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 글로리가 딱딱하게 중얼거렸다. "가서 동생과 얘기 좀 해봐야겠어요."

"아니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게 내버려두시오. 지금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에게 가는 게 먼저요." 라파엘로가 침착치 못한 손으로 검은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특별허가증을 받아야 할 것 같소, 벨라 미아...."

글로리는 괴로운 눈을 꼭 감았다.

"우린 충분히 손해를 입혔소. 샘의 말이 옳소. 아이에겐 아버지가 누군지 알 권리가 있소." 라파엘로는 후회가 역력한 굵은 저음으로 느릿하게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8

아치 리틀은 중환자실에서 일반 독실로 옮겨와 있었다.

모드 벨퍼가 심란한 얼굴로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나와 얘기 좀 할수 있을까, 글로리?"

"아버지는 괜찮으시죠?"

"그래, 아버지는 많이 좋아지셨어." 나이 든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치는 꼭 지금 네게 그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계셔. 부탁인데, 아버지를 위해서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든 침착해 줄 수 있겠니? 아직도 많이 쇠약하시거든."

글로리는 여인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써도 모드 부인의 간섭이 불쾌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벌써 알고 있다는 사실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글로리는 그래도 이해해야 한다는 마음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기울여 나이 든 여인을 충동적으로 끌어안았다. "물론이죠. 아직 두 분의 결혼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정말 잘 된 일이에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어요." 글로리가 평소처럼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두 분이 함께 계신 걸 보자 진정한 사랑이 느껴졌어요. 두 분이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 깨달을 수 있었어요. 아버지를 위해서도 정말 잘된 일이에요."

"글로리, 넌 정말 착한 딸이구나." 하지만 말과는 달리 모드의 긴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치가 말하고 싶어 하는 건 그게 아냐."

글로리는 수수께끼를 싫어했고, 3개월 전 몬터큐 파크에서 모드 부인이 한 모호한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 여인도 하찮은 일을 크게 떠벌리기 좋아하고 불길한 암시와 경고하는 걸 즐기는 사람일까? 하지만 그녀는 그런 의심을 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새어머니가 될 모드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서둘러 아버지의 병실로 들어갔다.

아치 리틀은 혈색이 돌아와서 그런지 많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아버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좋아 보이세요, 아버지."

"널 만나서 이 사실을 꼭 알려줘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괴로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듣게 될 얘기는 너로선 무척 당황스러울 거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러는 거지?

글로리는 침대보 위에 놓여 있는 아버지의 손을 두손으로 보듬고 안심시키려 했다. "전 그렇게 쉽게 당황하지 않아요."

"샘에 관한 일이다. 샘은.... 그래, 샘은 내 자식이 아냐." 아버지가 주저하며 말했다.

글로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의 걱정스런 얼굴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럼... 샘을 입양했다는 말씀이세요?"

"아니다. 네 엄마가...." 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나서...."

"농담이시겠죠?" 글로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요?"

"샘이 태어났을 때 넌 겨우 일곱 살이었어."아치가 침울하게 말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네 엄마와 난 남남처럼 살았단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글로리의 기억이 꿈틀거렸다. 엄마가 한동안 자신의 방에서 함께 지낸 기억이 났다. 부모님이 각방을 쓴 거야. 그녀는 이 순간까지 그런 별거가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배가 꽉 죄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두 분은 행복하셨잖아요."그녀는 아직도 아이 때처럼 안심시켜 주길 바라듯이 말하고 있었다. "두 분이 행복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나중에 다시 화해했지. 하지만 샘은 베니토 그라치니의 자식이야. 결국 라파엘로의 이복동생이지." 그녀의 아버지가 주름진 얼굴에 피곤과 스트레스가 역력한 모습으로 털어놓았다. "너한테 결코 그런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글로리, 네게 상처를 주거나 털리사에 대한 네 기억을 망쳐놓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글로리는 간신히 그렇게 대답했지만 손이 떨려 아버지의 손을 놓아야 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엄마가,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딸에게 순결을 역설한 여인이 부정한 짓을 저지를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애인의 아이까지 낳는 짓을? 나의 어머니와 베니토 그라치니? 말도 안돼! 아버지가 왜 이렇게 터무니없는 얘기를 지어내시는 거지? 수술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걸까? 사람들은 혼동하고 과거의 일들이 뒤죽박죽이 된 걸까?

"난 네 엄마를 용서했다. 하지만 네 엄마는 죄책감을 극복하지도 못했고, 늘 너나 샘이 그 사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했어." 아버지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단다. 저택 파티에서 베니토 그라치니가 네 엄마를 처음 봤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사람과 네 엄마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어. 그게 시작이었어. 그해 겨울 내내 계속되었지."

글로리는 이제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라파엘로와 얽히는 걸 알면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 지에 관해 그날 밤 몬터규 파크에서 모드 부인이 뭐라고 했더라?

<네가 지금 제대로 모르고 있는 상황 속으로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거야>

그녀는 오싹해져 몸을 떨었다. 베니토 그라치니가 샘의 아버지라면 라파엘로가 샘의 형이 된다는 뜻인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미안하구나, 글로리. 나도 너한테 공정하지 못했다."

"어떻게요?"

"베니토 그라치니가 열아홉 살인 네게 라파엘로를 포기하게 만들었을 때, 나도 아주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곤혹스런 고백에는 지독한 진실의 울림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베니토 그라치니 밑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어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솟구치는 불신을 걷어내려고 애쓰며 물었다.

"내가 이겼으니까. 난 네 엄마를 가졌잖니?"아치 리틀의 말투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은 만족감이 역력히 묻어 있었다. "그자는 내게서 네 엄마를 빼앗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진 거야!"

글로리는 예기치 않은 결론에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방금 알게 된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하지만 곧 아픈 아버지를 괴롭히는 짓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후들거리는 다리로 병실을 나왔다.

모드 부인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쉬고 계세요." 글로리는 과장되게 말했다. "아줌마는 처음부터 알고 계셨죠?"

"올해 네 아버지가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는 샘에 대해서는 확실히 몰랐어. 하지만 나머지는 알고 있었지."나이든 여인이 글로리를 사람이 뜸한 곳으로 데려가며 대답했다. "30년간 일해 오고 있으니까 그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다 알게 되지."

글로리는 아직도 크게 동요된 상태였다. "엄마가 어떻게 아버지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대요?"

"네 엄마도 아버지에게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을 거야."

"그 사람은 유부남이었어요." 글로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도 아버지와 결혼한 상태였고요."

"두 사람 다 비싼 댓가를 치른 것 같구나."모드 부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쨌든 네 엄마는 베니토씨에게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했고, 그걸로 끝이었어."

"그럴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자식을 키워야 했어요." 글로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랑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무책임한 불륜에 빠져 결혼생활과 남편과 자신이 세상에 내놓은 아들의 장래를 망친 여인과 일치시킬 수 없었다.

"그건 아치의 결정이었어. 그는 네 엄마를 많이 사랑했단다.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거야."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글로리는 잠깐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 라파엘로는 샘이 자신의 동생이라는 걸 알고 있군요?"

"샘도 알고 있단다, 글로리. 베니토씨가 자신의 아들에게 말한 걸 알고 아치도 샘에게 말씀해 주셨어."

"나만 빼고 다 알고 있었군요." 글로리는 탁한 소리로 속삭였다. " 라파엘로는 내가 저택에 간 날 밤 알게 된 거예요. 그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달리 방법이 없었을 거야. 라파엘로한테 샘이 절도죄로 고소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베니토씨는 큰 걱정을 하셨을 거야. 그래서 결국 고백할 수밖에 없었겠지."

조각퍼즐이 맞추어질수록 글로리의 머리는 더욱더 아팠다. 그녀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모드 벨퍼와 헤어져 병원을 나왔다.

십중팔구 라파엘로는 그날 밤 자신의 아버지와 심한 말다툼을 벌였을 거야. 지금의 나만큼이나 폭로된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게 틀림없어. 그런데도 나에겐 한마디도 안 했어. 오히려 두 집안 사이의 은밀한 결합을 모르도록 나를 버밍엄으로 내쫓았지. 그런 뒤 갑자기 생긴 동생을 자세히 보기 위해 정원사의 별채로 가서 밤늦게 까지 거기 있었어.

라파엘로는 샘을 받아들이고 가족으로서의 인연을 맺고 싶었을까? 어쩌면 그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내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그렇게 발 벗고 나섰는지도 모르지. 샘이 격앙된 상태인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샘은 이복형이 생겼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하는 것 같았다. 누나와는 대조적으로? 의붓누나, 글로리는 사랑하는 동생과의 혈연관계를 축소시키는 구별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래서 내가 돌아온 후로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걸까?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라파엘로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최대의 배신으로 여겨지는 사실이 마침내 그녀를 가격했다. 라파엘로는 자신의 동생을 고소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나와 거래를 했어. 기어코 나를 코르푸로 데려가 정부로 만들었어. 샘이 자신의 동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해 줄 생각도 않고.

그녀는 라파엘로의 아파트로 올라가는 승강기 안에 들어선 뒤에야 가장 괴로운 관련성을 생각해 냈다. 샘이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고 라파엘로에게 일격을 가한 것도 이해가 갔다.

글로리가 펜트하우스로 들어서자 라파엘로가 복도로 나와 그녀를 맞았다. 놀랄 만큼 수려한 외모와 유연하고 힘찬 체격은 글로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정말 너무 근사했다.

그가 결혼 얘기를 꺼내는 순간 뭔가 수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발목을 잡아? 농담이 아니었어. 그녀는 지독한 괴로움과 거부감이 밀려와 눈을 감고 들끓는 감정을 제압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분노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샘은요?" 그녀는 그를 지나쳐 현대식 거처방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그 애와 단둘이 얘기 좀 하고 싶어요."

"벌써 떠났소."

"뭐라구요?" 글로리는 깜짝 놀라서 휙 돌아섰다.

"앞으로 며칠간 친구 집에 가 있겠다고 했소."

"그래서 순순히 보냈단 말이에요?" 글로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따졌다.

"샘은 벌써 새 학기의 첫 주를 빼먹었소." 라파엘로가 침착하게 지적했다. "자신의 계획을 오늘 아침에 당신 아버지와 상의했다고 하더군. 샘은 괜찮을 거요, 글로리."

"내가 오기 전에 당신이 일부러 보냈겠죠!" 글로리는 격하게 비난했다.

" 글로리,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흥분한 거요?" 라파엘로는 넓은 어깨를 뒤로 으쓱하고 의아한 짙은 금빛 눈으로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몰라서 물어요?" 글로리는 격분한 얼굴을 그를 노려보다가 창문 쪽으로 걸어가서 다시 홱 돌아섰다. "당신의 그 비열한 아버지가 우리 엄마를 유혹해 우리 부모님의 결혼생활을 완전히 망쳐 놓았다는 사실을 왜 내겐 말해 주지 않았어요?"

라파엘로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끝이 뾰족한 검은 속눈썹을 반쯤 내리뜨고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도 알고...."

"당신 덕분은 아니었죠!" 글로리는 사실상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폭로에 차분한 그를 보고 격분해서 쏘아붙였다. "샘에게 더러운 그라치니 가문의 피가 흐른다는 걸 언제 알게 됐어요?"

라파엘로의 눈빛이 희미하게 빛나더니 이어 불꽃을 튀었다. "그만 하시오, 벨라 미아. 그렇지 않으면 나도 받아칠 거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난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당신 아버지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우리 가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어요!" 글로리가 비난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열세 살 때 신경 쇠약에 걸리셨소. 3개월 전 샘에 관해 알기 전까지는 그 이유를 몰랐소."

글로리는 라파엘로의 고백에 충격을 받고 잠잠해졌다.

"어머니는 말이 없는 분이셨소. 그런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마음먹으려 했지만 아버지한테 아이가 태어날 거라는 고백을 듣고는 무너지고 말았소. 우리 어머니가 돈과 지위를 가졌다고 해서 당신 아버지처럼 상처받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오?"

"당신 어머니 생각은 안 했어요. 뵌 적이 없기 때문이겠죠." 글로리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독한 배신감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다시는 몬터규 파크로 돌아가지 않으셨소. 아버지는 샘만 아니었다면 그 저택을 팔았을 거라고 털어 놓으셨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아버지와 당신 어머니가 지독한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진짜 피해자는 샘이오." 라파엘로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아버지는 샘을 원하셨지만 당신 아버지를 생각해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소."

"그랬겠죠." 글로리는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사실이 밝혀진 지금 우리 아버지는 샘을 간절히 알고 싶어 하시오." 라파엘로가 털어놓았다. "하지만 샘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소."

라파엘로는 다시 한번 그녀가 원치 않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베니토 그라치니가 사생아 아들을 알고 싶어 한다고? 왜 뻔한 사실을 나는 언제나 이렇게 설명해 줘야 깨닫는 거지?

라파엘로가 나에게 청혼한 이유가 이제야 분명해졌어.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그의 아버지가 샘의 호감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야. 글로리는 그 깨달음에 기가 꺾여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경직되고 하얘진 채 괴로운 눈을 내리뜨고 목쉰 소리로 말했다. "나와 함께 있던 그날 밤에 샘에 관한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당신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어떻게 말할 수 있겠소? 그때 난 당신 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자식을 키우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줄 알았단 말이오." 라파엘로는 퉁명스럽게 반박했다. "하지만 당신 아버지는 샘이 자리를 비우자 그 점에 관해 내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소. 샘에게도 그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엄마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할 수 없었다고 하셨소."

"그래도 당신은 말해 주었어야죠." 글로리는 고집스럽게 반박했다.

"그건 내 비밀이 아니오. 솔직히 당신 아버지가 샘에게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참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소." 라파엘로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내게 샘에 대해 얘기 하셨다는 걸 아신 당신 아버지는 샘 또한 그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셨소."

"하지만 난 여전히 제외되었어요. 우리 가족에게조차도." 글로리는 상처받은 걸 감추려고 애쓰며 말했다.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샘과 그 절도사건을 이용해 날 정부로 만들었을 때도 알려주고 싶은 소식은 분명 아니었겠죠!" 글로리는 맹렬히 비난했다.

순간 라파엘로는 오만한 검은머리를 뒤로 젖히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샘을 절도죄로 고소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당신은 날 잠자리로 끌어들였어요!" 글로리는 점점 목소리를 높여가며 말했다. "어떻게 그 정도로 저급할 수 있어요?"

"한 여자를 나처럼 원하면 그보다 더 저급해질 수도 있소." 라파엘로는 어두운 눈으로 턱에 힘을 주고 당황스럽도록 솔직하게 인정했다. "나도 내가 한 짓이 자랑스럽지는 않소, 카라."

"그런데도 그만둘 순 없었죠?"

구릿빛 안색이 창백해지고 갸름하고 힘찬 얼굴이 팽팽히 당겨졌다. "내가 자초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소. 당신이 날 다시 버리고 떠나...."

"당신이 날 버리려고 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았소." 라파엘로가 주장했다.

"왜 거짓말을 해요?" 글로리가 날카롭게 외쳤다. "내가 임신했다고 더 이상 솔직히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오." 라파엘로가 대답했다. "당신이 임신했기 때문에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오. 아이한테 안 좋으니까."

그는 그녀가 들이대고 있는 주요 쟁점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허를 찔린 글로리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는 분노를 경험했다. "내 아이는 거기서 빼도록...."

"내 아이이기도 하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주장에 그녀를 이를 갈았다. "당신은 코르푸에서 날 이용했어요."

표정이 풍부한 턱 선이 더욱 공격적이 되면서 짙은 눈에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감히 날 원하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그게 당신의 변명인가요?" 글로리는 위험을 알리는 억양과 점점 고조되는 주위의 긴장감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변명이 필요한 사람이었소. 부모들의 실수 때문에 우리가 갈라서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나에게 무슨 변명이 필요하죠?"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윙윙거리면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라파엘로가 몹시 지배적인 남자처럼 아주 자신만만하게 위협적으로 성큼 다가섰다. "열정이 즐기는 데 대한 변명이지."그가 나직이, 그리고 매우 오만하게 대답했다. "난 당신에게 그런 변명을, 그런 출구를, 그런 자유를 주었소. 강제로 그 거래를 맺게 했다고 날 비난할 수 있는 한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당신은 마지못해 응한 정부가 아니었소!"

그녀는 자신의 나약성을 상기시키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분하고 창피해서 그를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라파엘로가 그녀를 끌어당겨 안고는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관능적인 충격이 그녀의 온몸을 훑고 지나가면서 힘을 빼놓았다.

그녀는 심한 동요 속에서도 맹수의 발톱처럼 자신을 끌어당기는 육체적 접촉을 향한 갈망을 느꼈지만 그걸 이겨내기 위해 싸웠다.

"이러지 마시오." 라파엘로가 검은머리를 들고 거칠게 호소하듯이 말했다. "날 이렇게 흥분시켜서 당신에게 상처 줄 말을 하게 만들지 마시오, 벨라 미아."

이글거리는 그의 금빛 눈을 바라보자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마치 마법의 단추를 눌러 분노를 싹 가시게 만든 것처럼 몸을 떨며 그에게 더욱 가까이 나아갔다. 부드러운 여체에 닿은 힘찬 몸이 발산하는 황홀한 매력은 굉장했다.

딱딱한 정장 밑으로 골격과 힘줄로 이루어진 단단한 몸의 윤곽과 고동치는 남성이 지독히 의식되었다. 동시에 욱신거리는 젖가슴과 다리사이의 열기에 그녀의 모든 저항력은 무너지고 말았다.

"라파엘로...."그려는 쉽게 영향을 받는 자신을 막아 보려 애쓰며 자포자기가 되어 중얼거려싸.

라파엘로가 타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아 올려들고 방을 나섰다.

안돼. 이럴 수 없어. 그녀의 양심이 미친 듯이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고 얼굴을 넓고 단단한 어깨에 밀어붙인 채 익숙한 그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그가 그녀를 낯선 침대에 눕히고 구두를 벗겼다. 그러고는 아주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양복 상의를 벗어 던졌다.

글로리는 얼굴을 붉힌 채 뻣뻣하게 일어나 앉았다. "우린 싸우고 있었어요."

"이건 싸움을 훨씬 능가하는 거요, 아모레 미아." 라파엘로가 목쉰 소리로 자신 있게 주장했다.

그녀는 세운 무릎에 떨리는 손을 두르고 다시 침대를 내려갈 기운과 자제력과 분별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의 방어력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몇 시간 전에 아버지가 얘기를 꺼낸 순간부터 그녀의 전 세계는 함몰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을 고정시켜 주던 벽돌과 회반죽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작은 기억들이 그녀의 잠재의식에서 아직도 살금살금 기어 나와 맹공을 가하고 있었다. 계속 울려대는데도 받지 않던 전화, 전화선을 빼놓고 괴롭게 방안을 오가던 엄마,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고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의아해하는 어린 딸을 내몰고 저녁상을 차리던 엄마, 유혹과 싸우고 있는 여인, 사랑하지만 거부해야만 하는 남자를 갈망하는 여인....

털리사 리틀이 베니토 그라치니를 사랑했듯이 글로리는 그의 아들을 사랑했다.

"잊어버리시오, 모두 잊어버리시오." 라파엘로가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성난 투로 재촉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 때문에 그가 나와 결혼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야? 그렇다면 나는 과연 라파엘로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가장 원하는 걸 거부하는데 자존심이 위안이 될까? 나의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라파엘로를 얻고 싶은데. 어쨌든 그를 가질 수는 있지, 그녀는 코르푸에서의 음탕했던 몇 주를 회상하며 가슴 아프게 인정했다.

그녀는 타는 듯한 금빛 눈을 바라보며 분노와 좌절과 욕망을 감지했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과 단추가 달린 면 상의 밑으로 솟은 젖가슴을 훑는 이글거리는 그의 눈 속에 욕망이 있었다. 그는 화장도 안하고 옷도 갖춰 입지 않고 멋을 부리지 않았어도 그녀는 원했다.

"당신은 날 꼼짝 못하게 하고 열광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소." 라파엘로가 셔츠를 벗어 젖혀 털이 북술북슬한 넓은 근육질의 가슴과 납작한 구릿빛 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옷을 벗는 그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녹아 내렸다.

그는 밝은 청색의 두 눈을 그녀에게 붙잡아 둔 채 침대로 터벅터벅 걸어와 손을 뻗었다. 그는 약 5초만 에 그녀의 바지를 벗겨냈다. 그러고는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촉촉한 입안을 혀로 한번, 두 번 에로틱하게 헤집었다

"당신은 정말 섹시해요." 그녀는 들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속삭였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멋진 몸매를 가졌소." 라파엘로가 목쉰 소리로 응수하며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거의 숭배하듯이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제 더 민감해졌군, 아모레 미아." 라파엘로가 성급한 손길로 옷을 벗겨낸 뒤 그녀의 자세를 바로 잡으며 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팔로 방어하듯이 몸을 가렸다. 하지만 그가 그손을 붙잡아 양쪽에 고정시켰다.

"라파엘로!"그녀는 변하고 있는 몸이 몹시 의식되어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 이렇게 사람을 흥분시키다니...." 라파엘로는 그녀의 수그린 자세를 황홀하게 바라보며 팔목을 잡고 있던 한 손을 놓고 약간 부른 배를 만족스럽게 쓸었다. "당신이 경멸하던 그라치니 가의 유전인자가 당신 몸 안에 들어 있소. 당신의 일부이고 나의 일부인...."

"자신만만한 인자죠."

라파엘로가 타는 듯한 눈길로 쉽게 영향을 받는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강하고 고집스런 인자지, 카라 미아."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받아쳤다.

그는 정말로 우리들의 아이를 원해.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안심이 되는 동시에 고통을 느꼈다. 그의 열광이 그녀 자신이 아니라 아이에게 향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아이 때문이야. 그래서 그가 부풀어 오른 배에 입을 맞추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가 유두를 찾아내 그 오만한 검은머리를 숙이고 팽창한 봉우리를 맛보자 흥분이 불길처럼 솟구쳤다.

"당신을 원해요. 언제나 당신을 원해요!"그녀는 그가 불 붙여 놓은 강렬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신음 섞인 소리로 외쳤다.

라파엘로는 복수하는 영웅처럼 몹시 흡족한 얼굴로 그녀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애원할 때까지 당신을 즐겁게 고문하는 거요."그는 열정으로 달아오른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나의 포로가 될 때까지 애원하고... 또 애원하도록, 아모레 미아."

글로리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꼼짝 못하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뭐라구요?"

라파엘로는 노련한 손길로 떨고 있는 그녀의 중심부로 접근했다. 그녀의 온몸이 밀물처럼 걷잡을 수 없이 맹렬하게 솟구쳐 올랐다.

"당신이 열아홉 살 때는 내가 정말 어리석었소. 그때 당신을 잠자리로 끌어들였어야 하는 건데. 그때는 아무 것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었는데!"

" ...라파엘로?" 글로리는 깜짝 놀라 외쳤다.

"하지만 이렇게 함께 하고 있으니 정말 행복하오." 라파엘로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말하고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사랑해요."그녀는 열망에 사로잡혀 숨 막힌 소리로 고백했다.

라파엘로가 긴장하더니 이내 쉰 웃음을 터뜨리고는 분노를 발산하는 맹렬한 금빛 눈으로 그녀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한번만 더 그런 말을 하면 영영 떠나버릴 거요!"

글로리는 갑작스런 협박에 질려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고이는 게 느껴졌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잡고 짭짤한 눈물을 입으로 닦아주었다. "걱정마시오."그가 고르지 못한 소리로 달랬다.

그가 숨 가쁘게 키스를 퍼붓자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이 솟구치며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녀의 머리는 하얀 백지가 되어 갔다. 그녀는 맹렬한 반응의 노예가 되어 두 손으로 그의 숱 많은 머리를 잡아 비틀며 속수무책으로 목안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확실하고 힘차게 밀고 들어와 아뜩하게 헤매는 그녀를 경련을 일으키는 절정으로 몰아갔다. 그녀는 갑작스럽고 놀랄 만큼 엄청난 쾌감에 정신을 잃고 황홀경의 정점에서 그의 이름을 외쳤다.

 

글로리는 몸을 꿈틀거리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라파엘로의 펜트하우스 침대에 있었다. 순간 두 사람의 격정적인 사랑이 생각나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가 드러낸 지독하고 성난 좌절과 자신이 충동적으로 선언한 사랑에 거부감을 보이던 태도가 떠오르자 다시 싸늘해졌다.

라파엘로는 덫에 걸렸다고 느낄 거야. 내가 사리 분별없는 십대처럼 사랑에 관해 떠벌리자 더욱 덫에 걸린 기분이 들었을지도 몰라. 아직도 나에게 매력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을 거야.

하지만 그가 달리 어떤 선택을 할수 있겠어? 베니토 그라치니가 그렇게 샘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면 두 집안간의 관계는 순탄하고 좋아야 했다. 하지만 내가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라파엘로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두 집안의 관계는 영원히 좋아지지 않을 거야.

그때 문소리가 나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말끔히 면도한 얼굴에 깨끗한 면셔츠와 짙은 맞춤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몇 시예요?" 그녀는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라파엘로가 긴장한 채 흘끗 돌아보았다. "7시가 다 되었소. 그렇지 않아도 깨울 생각이었는데 잘 되었군. 마르셀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소."

"마르셀요?"

"내 요리사요. 그 친구가 당신이 시내를 떠날 때 몬터규 파크까지 동행해 줄거요. 당신이 하루에 적어도 세 번은 식사를 하도록 지시해 놓았소."

글로리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 시트를 움켜잡았다. "당신은 어디로 가는데요?"

"내일 로마에 급한 일이 있소. 지난 한 주간 일을 제대로 못했거든." 라파엘로가 그녀를 상기시켰다. "불행히도 그라치니 산업은 저절로 굴러가는 게 아니오. 공항으로 가는 길에 당신 아버지에게 잠깐 들러 우리 결혼식에 대해...."

"우리... 뭐요?" 글로리는 다시 그와 거리감이 느껴졌고 침착하게 끄는 듯한 말투에 어딘지 모르게 냉소가 담겨있다고 느낄 만큼 극도로 예민해졌다.

"우리 결혼식 말이오. 오늘 오후에 특별 허가증을 신청해 놓고, 열흘 뒤에 저택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예약해 놓았소."

"열흘 뒤요?" 글로리는 놀라 앵무새처럼 되풀이 말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런 때에 말다툼을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빨리 결혼식을 올릴수록 좋으니까. 당신 아버지의 주치의와도 통화를 했소." 라파엘로가 상의를 집어 들고 그녀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이번 출장에서 돌아올 때쯤엔 적어도 휠체어를 타고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실 정도는 될 거라고 했소."

"하지만 난 아직 결혼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당연히 동의할 거라고 생각했소." 라파엘로가 암시하듯 어지러운 침대를 강렬하게 바라보더니 반짝이는 짙은 눈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우리 두 집안간에 3차 대전이 일어나는 걸 보고 싶다면 거절해도 좋소. 이건 당신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터질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그녀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사랑과 증오가 그녀의 안에서 한 쌍으로 결합되었다.

"내가 당신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가 갑자기 획 돌아섰다. "그렇소?"

"말해 봐요. 나와 결혼해서 당신이 얻게 되는 게 뭐죠?" 글로리가 딱딱하게 물었다.

"기막힌 섹스와 아기. 당신이 사랑타령을 하지 않는 한." 라파엘로는 자르듯이 분명하게 말했다. "난 아무런 불만 없소."

그 말에 그녀는 움찔했다.

"존이 결혼식에 필요한 것들을 당신에게 알려줄 거요."그가 말을 이었다. "연회 준비 등은 그가 다 알아서 할 거요. 당신은 신부 입장을 할 때 천사처럼 보일 눈부신 하얀 웨딩드레스만 준비하면...."

"이런 상태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을 순 없어요!"

라파엘로가 성난 짙은 금빛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당신을 보고 싶소. 그리고 당신 아버지는 무척 보수적인 분이오. 상태가 좀 더 호전될 때까지 첫 손자를 보게 됐다는 소식은 보류할 생각이오. 우리의 결혼 발표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일 거요."

그녀는 천천히 마지못해 그 주장을 받아들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엔 동감이에요."

"아버지를 모드 부인의 헌신적인 보살핌 속에 맡겨 둬도 좋다 싶을 때 당신은 저택으로 옮기도록 하시오." 라파엘로가 말했다.

글로리는 놀라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결혼식 전까지는...."

"별채는 4년간 당신 집이 아니었소. 당신이 샘을 한 지붕 밑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면, 샘과 우리 아버지 사이의 경직된 분위기가 좀 더 쉽게 누그러질 수 있을 거요."

"그때가 언제죠?"

"샘이 동의해야지." 라파엘로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는 샘이 만나겠다면 당장이라도 쫓아오시겠지만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고 계시오."

그 다음에는? 그러니까 그는 내가 어떻게 느끼든 결혼을 하겠다는 말이군? 겁쟁이, 이 나약한 겁쟁이, 그녀의 잠재의식 속의 목소리가 외쳤다. 그가 잠자리에서 한말이, 둘의 첫 데이트 때 관계를 갖는 게 촛불 아래서 저녁을 먹으며 구애하는 것보다 더 그녀다운 스타일이라는 말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그게 바로 라파엘로가 본 나의 모습이야. 섹시하고 음탕한 여자. 그의 성적 충동을 만족시키는 데는 괜찮지만, 그라치니 가의 다음 세대를 생산하는 부화기로는 괜찮지만 그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

"당신 아이의 엄마이자 장래 아내가 남자의 돈만 노리는 탐욕스런 창녀라고 생각하면 무척 흥분이 되겠군요." 글로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는 아주 한결같고 진지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그래요?" 글로리는 밝은 청색 눈을 크게 뜨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대단한 아버지가 4년 전에 내게 떠나라고 협박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아버지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요." 라파엘로가 즉시 말을 잘랐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조금 쓸쓸한 웃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돈이 당신에게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코르푸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소."

그는 그 말을 하고는 공항으로 향하기 전에 아치 리틀에게 잠깐 들를 거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주고 조용히 떠났다.

그녀는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그를 사랑하더라도 그 복잡한 검은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절대로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사랑>이라는 말에 마치 욕을 들은 것처럼 반응하는 걸까?

 

9

"조는 내가 그라치니 가의 사생아로 밝혀진 게 무슨 복권에라도 당첨된 줄 알아!"샘이 화를 내며 말했다.

샘이 도착한 순간 글로리는 그가 라파엘로와 닮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샘을 유심히 뜯어보면 볼수록 닮아 있었다. 그런데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으니. 검은머리와 짙은 색의 움푹 들어간 극적인 눈. 그녀의 어머니는 저렇게 짙지 않았다. 조각 같은 광대뼈와 새삼 공격적으로 보이는 샘의 턱은 순수한 그라치니였다. 이렇게 눈앞에 빤히 펼쳐진 사실을 어떻게 그렇게 몰랐을까?

"내 말은, 이걸 좀 보라고!" 샘이 몹시 비판적이고 불편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 라파엘로 형에게 말했듯이 그라치니가 사람들은 왕족처럼 살고 있어. 코담뱃갑만 봐도 그래. 세상에, 6만 파운드라니. 거리에서는 집 없는 사람들이 굶어죽어 가고 있는데!"

글로리는 철저히 자본주의자인 라파엘로가 그 훈계를 썩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라치니 가문의 돈이 아버지의 생명을 구했다는 걸 잊지마."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해." 샘이 근처 의자에 달린 술 장식을 발로 차더니 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돌아섰다. "하지만 더 이상 그분을 <아버지>라고 생각할 순 없어. 내가 원한다면 아치 아저씨라고 불러도 된단 말야."

"...!" 글로리는 그런 요청이 나이 든 양반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을까 싶어 경악했다. "그분은 16년 동안 네 아빠 역할을 해오셨어. 그 정도 대접은 받을 자격이 있잖니?"

"그래, 하지만 누나를 사랑한 것처럼 날 사랑해 주신 적은 없어. 아니, 그건 그분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 반박할 생각은 마."샘은 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획 돌아서며 갑자기 힘차게 경고했다. "난 아치 아저씨가 원하는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살아왔어. 내가 왜 마음에도 없는 그 모든 운동을 했다고 생각해? 그분이 내가 그러길 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리틀 가문이 5대에 걸쳐 이곳의 정원사였다는 얘기를 되풀이해서 듣는 게 어떤 기분인 줄 알아?"

글로리는 아버지를 옹호하는 충동적인 말을 삼켰다. 샘이 억눌러 왔던 감정을 자신에게 털어놓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주장에 일일이 반박하는 건 아이를 침묵시킬 뿐이었다.

샘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아저씨 자식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아?"

글로리는 고개를 저었다.

", 다행이다. 정원사가 안 되어도 되는구나. 누나, 내가 그 정도로 천박했다는 게 믿어져?"

글로리는 점점 강도를 더해 가는 충격을 감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4년 전에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느긋하고 다정하지만 내성적이던 열두 살짜리 소년은 이제 완전히 다른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난 잘 안 맞는 존재였어. 엄마까지도 늘."샘이 거북하게 중얼거렸다. "앉아서 그림 그리는 일은 여자애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좁은 소견을 가진 속 좁은 사람들."

글로리는 얼굴이 하얘져 입술을 깨물었다. ",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

"누나는 공부를 계속해도 될 만큼 똑똑했는데도 부모라는 사람들이 학교를 그만두게 했어. 그게 우리 분수에 맞는다며 하찮은 일을 하게 만들었어. 야망을 갖지도, 꿈을 꿀 수도 없는 밑바닥 인생을 살도록 강요한 거지."샘이 격분해서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서 리틀 가의 사람이 아닌 걸 알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

"그래." 글로리는 샘의 말에 동의했다.

그라치니 가의 유전인자가, 그 강하고 독단적인 그라치니 가의 유전인자가 겉보기엔 평온한 샘의 몸속에서 분출될 기회만 노리며 윙윙거리고 있었어. 그는 영리하고 통찰력이 있었고, 낮은 기대치에 속박되는 걸 무척 싫어했어.

"문제가 하나 있다면."샘이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라치니 가의 사생아라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거지."

"넌 너 자신으로 있기만 하면 돼." 글로리는 격려하는 포옹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 난 널 아주 많이 사랑해. 난 네가 평온을 되찾고 다시 행복하기만 바랄 뿐이야."

"행복하다고 인정하는 십대는 없어, 누나." 샘이 놀렸다. "난 그림 공부를 위해 할 일이 너무 많아. 내방을 알려주면 짐을 정리한 뒤에 다 얘기해 줄게."

그녀는 동생이 오늘밤을 여기서 지낼 거라는 사실에 기뻤다. 왜냐하면 조의 아버지가 데려다 주었을 때 샘은 가방을 현관문 옆에 보란 듯이 내려놓고 이 집에서 지내는게 영 내키지 않는다는 심정을 역력히 비쳤기 때문이다.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던 샘이 걸음을 늦추더니 벽에 나란히 걸린 그림들 쪽으로 갔다.

"이 사람은 누구지?" 샘이 노인을 그린 유화 작품 앞에서 우뚝 멈춰 서며 물었다.

"네 조상 가운데 한 분일 것 같은데? 라파엘로한테 물어보면...."

"아무튼 이 노인네도 대단한 성공을 이룬 그라치니 가의 한사람인 건 분명해."샘이 얼굴을 찡그리며 누나를 따라갔다. "난 아무 데도 안 어울릴 것 같아, 누나. 이 집안사람은 돈과 큰 사업에 열중해 있는데 난 화가가 되고 싶으니."

"그런데 왜 안 어울려?" 글로리가 반박했다. "적어도 그라치니 가 사람들은 예술을 보는 안목은 있잖아."

샘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누나가 라파엘로 형을 비참한 상태에서 구해줘서 다행이야."

"무슨 뜻이니?"

"거의 매일 형하고 통화를 했어." 샘이 털어놓았다. "런던에서 그 날 형한테 대든 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 그 동안 두 사람 사이의 일을 형한테 듣고 나서는 말야."

"그가...어쨌다고?" 글로리는 팔짱을 끼고 호전적인 눈길로 캐 묻듯이 동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나, 형의 말을 들어보니까 정말 누나가 늘 발뺌만 했어."샘이 주장했다. "형이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해. 누나가 계속 형을 따돌리기만 했잖아. 금요일 날 누나가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던걸."

"그게 사실이니?" 글로리는 뜻밖의 말에 당황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나보고 여기에 와 있으라고 하겠어? 누나가 결혼식 전에 또 엉뚱하게 도망칠까 봐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야."

글로리는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도망칠까봐 걱정을 한다고? 마치 태양이 나와서 따뜻하게 비춰 주듯 흔들리기 쉬운 그녀의 마음이 활짝 피어났다. 라파엘로는 꼬박 1주일 째 해외에 나가 있었고, 그녀는 어젯밤에야 런던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그는 로마에서 뉴욕으로 날아가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일을 하는 듯했다. 매일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지만 둘의 대화는 매우 일반적인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웨딩드레스를 샀냐고 물어왔을 때 그녀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 그 뒤 라파엘로는 결혼식에 대해서는 일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 그래. 그녀는 라파엘로가 조금이라도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자신에게 신경 쓰고 있을지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다 좀 더 이성적인 생각이 들면서 그녀의 얼굴은 금세 침울해졌다. 라파엘로는 불안할 리가 없어. 그런데도 교활하고 감동적인 얘기로 샘을 설득했어. 샘은 처음에는 별채로 돌아갈 생각이었어. 하지만 라파엘로의 설득에 넘어가 그라치니 집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야.

아치 리틀은 결혼식 전날에나 퇴원할 예정이었다. 아버지 곁에는 모드부인이 있었다. 아치 리틀과 미래의 새어머니는 라파엘로가 제시한 조기 퇴직 안을 받아들였다. 그건 모드 부인의 생각이었다.

라파엘로는 이미 한 무리의 일꾼을 시켜 마을에 있는 저택 소유의 집을 수리하게 했다. 단층으로 된 아담한 집이었다. 그는 작은 차와 함께 그 집을 아치와 모드 명의로 넘겨 줄 생각이었다.

글로리는 무척 관대하고 사려 깊은 처사라고 눈물을 훔치며 인정하고는 임신과 육아에 대한 잡지를 뒤적거렸다.

그녀가 꿈꾸는 눈길로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정말 귀여운 아기 옷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현관문이 꽝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복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임신한 사실이 창피했기 때문에 얼른 책을 방석 뒤에 쑤셔 넣었다.

"맙소사!" 위협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고함을 쳤다. "난 베니토 그라치니일세. 내가 더 이상 내 아들 집에도 마음 놓고 못 온다는 말인가?"

글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는 소파에서 넘어지다시피 하며 서둘러 문 쪽으로 달려가 몰래 밖을 내다보았다.

존 리용이 고용한 새 가정부가 베니토 그라치니를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라치니씨께서 아무도 리틀양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하셔서...."

"난 그 아가씨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만나 보고 싶을 뿐이야!" 베니토 그라치니가 크고 우람한 백발의 곰처럼 씩씩거리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설마 이 시간에 벌써 잠자리에 들진 않았을 것 아닌가?"

글로리는 문 뒤에 바싹 붙어서 숨을 죽였다.

아주 잠깐 동안의 침묵이 또 하나의 지극히 귀에 익은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라파엘로의 성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라파엘로? 라파엘로가 어디서 나타난 거지?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타고 그녀를 구하러 온 기병대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다시 문밖을 내다보았다. 라파엘로와 그의 아버지는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로 급속한 단속음의 격앙된 이탈리아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저기...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제발 그만두세요." 글로리는 부자지간의 사랑이 자신 때문에 깨지는 게 두려워서 끼어들었다.

갑자기 말소리가 뚝 그치면서 두 남자가 아주 당혹한 얼굴로 그녀를 획 돌아보았다. "샘이 여기 있는데 그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면 안 되잖아요."

"누나, 지금 농담해? 연속극보다 더 재미있는데. 있는 그대로의 그라치니식의 가정생활!"샘이 웅장한 계단 중간쯤에서 노인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안색은 무척 창백했고, 손마디가 하얘진 게 보일 정도로 한 손으로 난간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샘이 처음으로 친아버지를 만나는데 이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은 없다는 생각에 글로리의 입에서 하마터면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뻔했다.

"아버지답군요." 라파엘로가 잠잠해진 노인을 성난 눈길로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는데도 이렇게 다짜고짜 밀고 들어오시다니."

"그렇게 경건한 척하지 마라. 이제야 평생 처음으로 내 작은 아들을 제대로 보게 되었구나." 베니토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열심히 샘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섰다. "전에는 널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지. 네가 이 집에 와 있는 줄 몰랐구나. 오늘 저녁엔 네 누나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

라파엘로가 못 참겠다는 듯이 쉿 소리가 섞인 숨을 내쉬었다. "그 점에 대한 제 생각을 이미 말씀드렸...."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시라고 하세요." 글로리가 끼어들었다. "이렇게 안 좋은 감정과 불편한 관계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그래, 라파엘로." 베니토 그라치니가 그녀를 두둔했다. " 글로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 멀리서 이렇게 허둥지둥 날아올 필요는 없었다. 이제 모두 한 가족이니까 화해를 해야지. 내려와서 너도 들어보렴, . 싫으면 말고."

"라파엘로 형보다 더 말씀이 많으시군요." 샘은 홀린 듯 친부를 빤히 쳐다보았다. "끼어들 틈이 없겠어요."

"내가 왜 소리를 질렀겠소?" 라파엘로가 한 팔로 글로리의 여린 몸을 둘러 안으며 신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글로리는 그가 끌어당길 때에야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알았다.

"미안하오, 당신이 듣고 있는 줄 몰랐소. 난 그저 아버지가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까 봐 그랬소, 카라."

그들은 넓은 응접실로 한사람씩 줄지어 들어갔다. 글로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베니토가 소파에 앉았다. 샘은 창가를 서성거렸고, 라파엘로는 인상적인 벽난로 옆에 호전적이라고밖에 할수 없는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모양 좋은 짙은 색 가는 세로줄 무늬 양복에 검은머리가 살짝 헝클어져 있었지만 놀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눈을 떼기 위해 정말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베니토가 물었다.

"저희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어요." 글로리는 긴장된 눈으로 노인을 얼른 훑어보다가 다시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물어 볼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그런 걸 묻다니, 지금 제정신이오?" 라파엘로가 힐문했다.

"용기가 있었다면 나라도 물어 봤을 거예요." 샘이 누나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베니토가 넓은 어깨를 활짝 폈다. "털리사와 난 그때까지 각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서로 만나면서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녀는 내 일생의 사랑이었고, 그녀와 함께 하면서 난 비로소 완전함을 느꼈다."

"정말이세요?" 글로리는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노인이 충격 받은 모습이 역력한 라파엘로를 바라보다 곤혹스럽게 찡그린 얼굴로 글로리를 돌아보았다. "우린 서로 사랑했고, 한동안 나머지 세상은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가 매우 이기적이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털리사가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 난 라파엘로의 엄마 카리나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내가 얼마나 큰 고통을 초래했는지 알게 되었다."

"...." 글로리는 불안한 눈길로 라파엘로를 몰래 훔쳐보았다. 너무나 가여운 모습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아내와 이혼할 생각이었다고?"이런 얘기는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제가 너무 어리석은 질문을 했어요."

"아니오." 이번엔 라파엘로가 반대했다. "나도 들어야겠소. 이미 3개월 전에 들었어야 하는 이야기요."

"네가 너무 격분해서 들으려 하지 않았지. 그때 네게 고백한 대로 네 엄마는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베니토가 죄책감과 심한 후회를 감추지 못하고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난 나의 잘못을 실감하지 못했다. 끝내자고 말한 건 털리사였어. 우리에겐 남을 그렇게 괴롭힐 권리가 없고 서로 생각해야 할 애들이 있다고.... 그뒤 그녀는 날 다시는 만나 주지도 않았고,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엄마는 뭔가 결심을 하면 꿈쩍도 안하시죠." 샘이 긴장된 침묵을 깨고 말했다.

"아버지도 리틀가의 여자에게 버림을 받으셨군요?" 라파엘로가 놀라움과 동정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우리 엄마를 그냥 재미로 만난 저속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샘이 베니토를 향해 어색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군요. 마찬가지로 상처받으셨네요."

베니토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젖히고 라파엘로를 똑바로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4년 전에 글로리에게 한 짓을 고백해야겠구나."

", 신경 쓰지 말아요." 글로리는 급히 끼어들었다. 라파엘로가 더 이상 충격 받는 건 원치 않았다.

"난 신경 써야겠소." 라파엘로가 벽난로에서 몸을 떼며 말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얘기인 것 같으니까." 샘이 사람들을 어색하게 돌아보며 말했다. "냉장고나 뒤져봐야겠어요. 배가 고프거든요."

베니토가 조금 긴장을 풀고 글로리에게 물었다. "샘도 알고 있니?"

"아뇨, 앞으로도 모를 거예요."

"아버지가 글로리의 아버지를 해고하겠다고 협박했군요?" 라파엘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경멸에 찬 눈길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 글로리가 내게 사실을 말한 거고,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군요. 왜죠?"

베니토가 얼굴을 찡그렸다. "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셨으니까. 네가 털리사의 딸을 집으로 데려와 카리나에게 인사시키는 걸 볼 수는 없었다. 네 어머니는 견디지 못했을 거야. 너무 아슬아슬했어. 샘에 대한 비밀도 있었고. 모든 게 밝혀져 샘의 가정생활을 파멸시킬까봐 겁이 났다."

"무슨 권리로 아버지의 실수를 제 인생에까지 개입시키신 거죠?" 라파엘로가 빈정거렸다.

"그럴 권리는 없었지."그의 아버지가 침울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너와 글로리가 사귄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서로 쉽게 잊을 줄 알았다. 그 점에선 확실히 내가 틀린 것 같구나. 어쩌면 내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아버지를 믿을 수 없다면 제가 누굴 믿겠어요?" 라파엘로가 정말 넌더리 난다는 듯이 외쳤다.

"미안하구나. 네가 털리사와 샘에 대해 알게 되면 내게 적의를 품을까 봐 두려웠다. "베니토는 창백해진 얼굴로 말하고는 무거운 발길로 방을 나갔다.

글로리는 괴로운 눈길로 라파엘로를 돌아보았다. "따라가 봐요. 우리 아버지도 그때 우리가 사귀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당신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으면 당신도 할 수 있잖아요.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예요? 우리가 헤어질 때 당신은 그렇게 비탄에 잠기지도 않았으면서!"

"그라치니 가의 모든 남자들이 그렇게 다 솔직한 줄 아시오?" 라파엘로가 몹시 비통하게 힐문했다. "아버지가 우리 관계를 망쳐놓다니.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당신을 협박하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소!"

"그럼 샘을 생각해 봐요!" 글로리가 당황해서 말했다. "샘은 당신을 의지하고 믿고 있어요. 당신이 아버지와 사이가 나쁘다면, 그 애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할 거예요."

"4년 전의 고통을 잊을 기분이 아니오." 라파엘로는 한마디 한마디를 거칠고 또렷하게 내뱉었다. "당신을 사랑했단 말이오. 그 일로 난 너무 괴로웠소!"

글로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날 사랑했다고요? 하지만 내가 헤어지는 게 서로를 위해 좋겠다고 했을 때 당신은 미소를 지었...."

"난 색다른 감정을 느낄수록 점점 더 숨기니까." 라파엘로는 단호한 눈빛으로 오만한 검은머리를 높이 쳐들었다. "당신이 내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걸 보여 줄 수는 없었소. 당신은 우리가 단지 친구였을 뿐이라는 듯이 말하고, 내가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소."

"달리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어요." 자신이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당신을 사랑했지만 우린 겨우 몇 주를 함께 했을 뿐이잖아요."

"몇 주만으로도 충분했소. 열일곱 살이던 당신을 집으로 태워주던 날 밤, 당신 어머니는 내게 당신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다시피 하셨소." 라파엘로가 육감적인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난 떠나면서 당신을 너무 나무라지 말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소. 당신 어머니는 내 속마음을 간파하...."

"엄마가 당신에게 경고를 했다고요?" 글로리가 놀라서 외쳤다.

"하지만 그런 금지 명령을 내릴 필요는 없었소. 왜냐하면 난 당신이 너무 어리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신 어머니는 내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시다는 걸 나에게 확인시키고 싶으셨던 거요."

"그때부터 내게 관심이 있었다고요?" 그의 고백에 마음이 사로잡힌 그녀는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한 확신에 차서 그의 손을 깍지 꼈다. "나무 뒤에 숨어서 당신이 오토바이를 타는 걸 훔쳐보곤 했어요. 내 친구들은 내가 당신에게 푹 빠져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어요. 그날 밤 술집에서 당신을 봤을 때...."

"당신은 아주 바보짓을 했소. 하지만 결국 나한텐 잘 된 일이었기 때문에 반가웠소." 라파엘로가 말했다. "그리고 아주 재미있기도 하고."

"재미있었다고요?"

라파엘로가 갑자기 짓궂게 씩 웃었다. "당신은 정말 예뻤지만 열 살짜리 여자애가 요부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모든 행동이 지독히 과장되고...."

"술 때문에 그랬어요." 글로리는 뺨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그때 날 사랑했다면 그날 밤 식당에서 왜 내게 그렇게 지독히 굴었어요? 내가 보는 앞에서 그 빨강머리여자와 키스를...."

"당신이 자리에 앉아 그녀와 잘 되길 바란다고 했어도 전혀 놀라지 않았을 거요." 그는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털어놓았다. "내 평생 최악의 밤 중 하나였으니까."

"나한테도 가장 멋진 밤은 아니었어요!" 글로리가 발끈해서 지적했다. "당신이 정말 잔인하게 굴었기 때문에 난 아직도 사과를 받고 싶어요!"

"내가 잔인했다고?" 라파엘로는 놀랍다는 듯이 외쳤다. "날 차버리고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날 밤을 같이 보내고 싶다고 해서 사람을 더욱 괴롭혔으면서도 말이오?"

"난 그저 당신과 가능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가 원해서 당신을 차버린 게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그를 상기시켰다.

"하지만 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소. 내가 진짜 겁쟁이였다면 그날 밤 만나자는 말에 싫다고 했을 거요. 하지만 당신처럼 나도 침착하고 냉정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소." 라파엘로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렸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 취하도록 술을 마셨소. 난 사랑에 관한 한 철저히 그라치니 가의 남자였소. 그날 밤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소."

"취하도록 마셨다고요?"

"당신보다 먼저 식당에 도착해 친구들에게 곯아떨어지도록 마실 거라고 선언했소. 그러자 내 친구들은 날 아주 딱하게 여기면서 당신 험담을 늘어놓았소. 그 빨강머리 아가씨가 당신이 도착한 걸 보고는 날 와락 낚아채더군. 난 그녀가 내 체면을 세워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라파엘로...." 글로리는 위로하듯이 그의 옷소매를 살짝 움켜잡으며 떨리는 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어리석었어요. 당신이 마음을 쓰는 줄, 내가 당신을 그렇게 만든 줄 몰랐어요. 당신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하지만 며칠 뒤 아버지에게 5천 파운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몹시 격분했소. 그리고 아버지의 거짓말에 당신을 쫓아갈 마음이 안 생겼지."

"그때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뿐이에요." 글로리는 예쁜 얼굴에 몹시 안타까운 심정을 담고 슬픈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날 사랑했는데도 우리가 헤어져야 했다는 게...."

그는 위로하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목에 두르고 소파로 뒷걸음질쳐 갔다. "당신이 스스로 나를 차버린 게 아니라는 사실이 내겐 매우 중요하오. 우리 아버지가 협박하고 있다는 걸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는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오."

"자신이 없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피해를 입는 건 우리 가족들 같았기 때문이에요. 당신 눈이 맘에 들어요." 그가 쿠션에 기대놓고 자세를 바로잡자 글로리는 주의가 완전히 딴 데로 쏠려 그렇게 고백했다. "48시간 뒷면 결혼할 텐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

그 말에 라파엘로는 동작을 멈추더니 몸이 굳어지면서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갔다. "맙소사.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결코 내가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글로리는 그를 다시 끌어당기기 위해 벌어진 양복 상의 자락을 가는 손가락으로 거머쥐고 급히 말했다.

라파엘로가 기대에 찬 아름다운 얼굴과 유혹하는 듯한 핑크빛 입술을 바라보며 낙담한 신음소리를 냈다. "곧장 뉴욕으로 돌아가 봐야 하오."

"뭐라구요?" 글로리는 얼른 일어나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부드럽고 숱 많은 머릿속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이건 말 그대로 급히 날아온 거였소, 카라 미아. 아버지가 오늘 저녁 당신에게 접근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만사를 팽개치고 달려왔소. 당신이 아버지를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젠 그렇지 않아요. 라파엘로, 가지 말아요." 그녀가 애원했다.

"가야 하오."그는 아쉽다는 듯이 그녀의 손바닥에 뜨겁게 입술을 누르고 벌떡 일어섰다. "이 집에 샘도 있잖소. 소파에서 난잡한 십대들처럼 날뛸 순 없소."

"그래요." 그의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그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여전했다.

문 쪽으로 걸어가던 라파엘로가 획 돌아서서 그녀를 와락 끌어안더니 열정적인 입맞춤을 했다.

"48시간이요." 그가 거친 소리로 상기시키고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현관문을 향해 뒷걸음질을 치며 걸어갔다.

"괜찮아요?" 글로리는 그가 복도의 대리석 벽난로 모서리에 어깨를 부딪치자 놀란 소리로 물었다.

"차마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곳들이 이보다 더 욱신거리오, 벨라 미아." 라파엘로가 신음 섞인 소리로 말하고는 사라졌다.

한참 뒤에 그녀는 샘을 찾아 나섰다.

샘은 오락실에 있었다. 베니토와 함께. 베니토가 상의를 벗은 채 한 손에 당구 큐를 들고 샘에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녀는 다정한 아버지와 아들을 몰래 훔쳐보다가 살금살금 그 자리를 떠났다. 라파엘로가 자신을 열아홉 살 때부터 사랑했다는 고백에 흐뭇한 마음을 안고.

 

10

다음 이틀은 글로리에게 정말 바쁜 날이었다. 그녀는 퇴원하는 아버지를 위해 별채를 청소했다. 그리고 결혼식을 주관할 신부님을 찾아뵈었고, 친구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렸다.

"샘이 베니토 그라치니를 좋아하게 되었구나."아치 리틀이 돌아온 지 10분 만에 라파엘로의 아버지가 아직도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 말했다.

"마음이 안 좋으세요?" 글로리가 거북하게 물었다.

"예상한 일이다. 샘은 원래 그 집사람이잖아." 아치 리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 아이를 리틀 가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써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직 어린애였는데도 뚜렷한 고집이 있었어. 하지만 모든 게 그 애 탓은 아니지."

그녀는 아버지가 실리적인 사람이라는 게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라파엘로는 결혼식 전날 밤에 몬터규 파크로 돌아왔다. 그는 글로리가 결혼 전 마지막 밤을 별채에서 보내기로 했고, 너무 바빠서 그를 만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

"식장에서 봐요!" 그녀는 전화로 쾌활하게 말했다.

"5분이면 되는데...."

"미안해요. 오늘밤은 아버지와 함께 보내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리고 일단 만나면 5분으로는 안 되리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10분 뒤 별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라파엘로가 서 있었다.

"결혼 선물이오." 라파엘로가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의 손에 얇은 꾸러미를 디밀었다.

".... 고마워요!" 글로리는 삼킬 듯이 바라보던 눈길을 떼고 놀란 소리로 외쳤다.

"약혼반지요." 라파엘로가 첫 꾸러미 위에 작은 상자를 올려놓더니 이어 두 번째 상자도 올려놓았다. "이터너티링(보석을 돌아가며 틈 없이 박은 반지로 영원성을 상징함)이오. 한꺼번에 해치우는게 나을 것 같아서."그는 놀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설명했다.

그녀는 선물들을 문 옆에 있는 서랍 안에 넣어두고 그의 품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저지하듯 두 손을 들어올리며 과장되게 뒷걸음질을 쳤다.

"나도 당신을 애타게 만들 수 있소, 벨라 미아." 그가 금빛 눈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거뭇하게 잘생긴 얼굴에 이글거리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우아하고 침착하고 지극히 섹시하게 빨간색 페라리를 향해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글로리는 그를 쫓아 달려 내려갔다. "괜찮다면 잠깐 들렀...."

라파엘로는 한 손을 열린 차 문에 얹고 재미있고 만족스런 눈길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꿈도 꾸지 않을 거요. 아차, 잊을 뻔했는데."그가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식장에 늦지 마시오. 여기서 2분 거리니 내가 쫓아와서 데려갈 수도 있으니까."

"신부는 좀 늦는 게 전통이에요!"

"말도 안 되는 전통." 라파엘로가 페라리 안으로 획 뛰어들며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정각에 도착하도록 하시오."

글로리는 그와 차 문 사이로 뛰어들어 열쇠를 빼냈다. "좋아요, 무슨 일이에요?"들뜬 그를 보는 게 황홀하긴 했지만 그의 변화를 놓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라파엘로가 웃었다. "난 마냥 행복할 뿐이오!"

"...." 그녀는 그에게 차 열쇠를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차에서 나와 아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런던에서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행복한 거요. 난 그 말이 진심이었길 바라오."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물론 진심이었죠."

그가 갑자기 그녀를 들어 올려 안고 성큼성큼 보닛을 돌아가 조수석에 앉혔다.

"세상에,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글로리가 숨 막힌 소리로 물었다.

"당신을 납치하는 거요." 라파엘로는 얼른 운전석에 올라타고는 시동을 걸며 대답했다.

"당신, 지금 제정신이에요? 아버지 저녁 식사를 차려드려야 한단 말이에요."

좁은 길에서 차를 급하게 후진시킨 라파엘로가 브레이크를 걸어놓고 카폰을 집어들었다. "? 그래, 내가 납치한다고 하는데도 네 누나는 이 극적인 사태에 전혀 감동하지 않는구나. 아버지 저녁 걱정만 하고...."

글로리는 그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

라파엘로가 전화기를 내려놓더니 재미있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샘이 아버지 저녁은 자신이 차려 드릴 테니 걱정 말라고 하는군.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겠소?"

멋진 초가을 저녁이었다. 그는 저택 사유지를 관통하는 강 옆으로 숲길을 따라 늘어선 너도밤나무 밑에 페라리를 세웠다. 그러고는 갸름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게 했다. "결혼식 전에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벨라 미아."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는 중요한 말이에요?" 글로리가 놀렸다.

라파엘로가 우뚝 멈춰 섰다. "샘에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당신에게 직접 한 적은 없다는 걸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깨달았소."

글로리는 그의 멋진 뺨을 부각시키는 뚜렷한 홍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고르지 못한 소리로 물었다. "런던에서 샘에게 그 말을 했을 때, 진심이었다는 거예요? 난 그냥 그 애를 진정시키려고 한 말인 줄 알았어요."

"당신에 관한 한 난 위기 상황에서 거짓말을 못하는 편이오. 당신이 코르푸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그때 사랑한다고 말했을 거요."

글로리는 그의 사랑을 절실히 믿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바라는 일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별장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에 당신이 아주 침울하고 긴장된 얼굴이었기 때문에.... 난 당신이 날 버릴 생각인 줄 알았어요!" 글로리는 어색하게 해명했다. "결혼을 앞둔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러는 거라면 싫어요."

힘찬 그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 글로리, 난 평생 어느 여자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소. 그런데도 당신은 내 말을 못 믿고 있으니! 하긴, 내가 모든 걸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당신을 탓하겠소? 왜 난 당신과 관련된 일은 모두 그르치기만 하는지 모르겠소."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렇소.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도 내가 망쳐버렸잖소!" 라파엘로는 획 돌아서서 심한 좌절의 몸짓으로 검은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신에게 빠져 있는 나를 동정해서 그런 말을 하는 줄 알았소.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해...."

글로리는 움켜쥔 주먹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그를 끌어당겼지만 그는 얘기에 몰두해 거의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내겐 당신 외에는 결코 아무도 없었소." 그가 거칠게 말했다. "당신을 만나자 다시는 놓칠 수 없다는 마음에 당신과의 거래를 생각해 낸 거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당신을 되찾고 싶었소."

라파엘로가 숨을 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자 글로리는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임신으로 내 발목을 잡으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해서 다시 일을 그르치고 말았소." 라파엘로가 가책을 느낀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이 처녀라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당신이 내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척 흥분해 있었소."

"그랬어요?"

"그러다 당신이 폭풍우 속으로 뛰쳐나간 걸 알게 되었지. 정말 그때의 공포를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소, 카라." 라파엘로가 몸서리를 치며 고백했다. "당신을 다시 별장으로 데려왔을 때에야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소."

"그래서 내가 욕조 안에 있을 때 청혼을 했군요. 내가 그걸 진심이라고 믿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난 우리 아버지와 달리 용기가 없었소. 아버지는 남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당신 어머니를 일생의 사랑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오. 난 그 말을 듣고 정말 인상을 받았소." 라파엘로가 긴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을 보기만 해도 감정이.... 난 감정에 못이겨 그곳이 청혼하기에 낭만적이거나 적절한 장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글로리는 그가 그 정도로 자신감을 잃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난 그 청혼을 즉석에서 거절해 버렸군요. 미안해요. 라파엘로."

"아니오, 내 잘못이오. 그런 식으로 청혼하는 게 아니었소." 라파엘로는 그녀를 끌어안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우겼다.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당신에게 입증해 보이도록 노력했어야 했는데...."

"아무튼 성공했잖아요."

"하지만 당신이 떠나버릴까 봐 그 거래를 취소할 용기가 없었소." 라파엘로가 부끄러운 듯 격앙된 저음으로 고백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 밤에 우린 바보 같은 말다툼을 벌였소. 당신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가족들이 알게 되면 너무 창피할 거라고 말했소. 당신은 그때 내가 얼마나 멍청이 취급을 받았다고 느꼈는지 모를 거요."

"당신에게 화가 나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에요."

"하지만 난 심하게 죄책감이 들고 부끄러웠소. 그날 새벽에 내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당신은 깨어 있었소." 그가 상기시켰다. "난 꼭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말을 꺼내기가 두려웠소."

"무슨 말을요?" 글로리가 재촉했다.

"억지로 내 정부로 만들어서 미안하지만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그래서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한 번도 당신을 정부로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말을."

"왜 그렇게 두려웠어요?" 글로리는 약간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는 이글거리는 금빛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이 짐을 싸서 떠나버릴까 봐...."

"하지만 나도 당신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잖아요!" 글로리가 외쳤다. "당신 말을 듣고 보니 그 다음날 아침 여전히 망설이느라 그렇게 긴장하고 있었군요? 그런데 난 당신이 날 버리려고 분위기를 잡는 줄 알았어요. 잠자리에서 그렇게 행동했는데 어떻게 내가 떠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당신이 자유를 되찾을 첫 번째 기회를 열정 때문에 놓칠 것 같지는 않았소."

"라파엘로, 이젠 그렇지 않다는 걸 믿죠? 열정과 사랑은 내겐 서로 붙어 있어요." 글로리가 조용히 말했다.

"집에 돌아와서 당신이 떠난 걸 알았을 때 난 완전히 무너졌소." 라파엘로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영국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사설탐정을 고용했소."

"그랬어요?" 글로리는 깜짝 놀랐다.

"그러던 도중 당신 아버지가 쓰러지셨고, 끔찍한 두 달을 보낸 끝에 마침내 당신을 찾아낼 수 있었지."

"하지만 당신은 너무 쌀쌀해서...."

"두 번이나 차인 여자에게 반가운 존재가 아니라는 건 아주 멍청한 남자라도 알 거요, 벨라 미아." 라파엘로는 변명하듯이 지적했다. "그리고 내가 당신 아버지에게 한 일을 두고 고맙다고 말하는 태도가 내 기분을 더욱 형편없이 만들었소. 뿐만 아니라 난 샘에 대해 알고 있는데 당신은 모른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소."

그를 올려다보는 글로리의 밝은 청색 눈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당신은 평생 한번도 내게 반갑지 않은 존재였던 적이 없어요, 라파엘로 그라치니." 그녀가 갈라지는 소리로 장담했다. "날 사랑하죠? 날 정말 사랑하는 거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당신에게서 손을 떼지 못할 만큼." 라파엘로는 그녀를 바싹 끌어당겨 격정적으로 입을 맞춘 뒤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서 빨리 결혼하고 싶소. 어서 빨리."

그는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억지로 달래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글로리는 집안으로 들어가 동생을 껴안았다. "넌 생각보다 영리해, ."그녀가 말했다.

"?" 샘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미안하지만 설명해 줄 수는 없어. 하지만 네가 옳았어." 그녀는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라파엘로가 갖다 준 선물을 상기시켜 준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납작한 상자에는 다이아몬드와 백금으로 된 정교한 목걸이와 물방울 모양의 귀고리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라파엘로의 아낌없는 마음씨에 하늘까지 붕붕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결혼식 날 아침, 그녀가 2층에 올라가 있는데 집밖에 차가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다.

라파엘로의 아버지였다.

베니토 그라치니는 자신의 어머니의 유품인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머리 장식관을 그녀에게 주러 왔다고 말했다.

"늘 이걸 라파엘로의 신부에게 줘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서야 네게 줄 용기가 났다." 베니토가 마음을 졸이며 고백했다. "너와 라파엘로에게 정말 용서받고 싶구나. 네가 우리 집 식구가 되는 걸 진심으로 환영한다, 글로리."

글로리는 베니토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자신은 벌써 용서했으며 라파엘로도 곧 그렇게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한 시간쯤 뒤 웨딩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선 글로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우아한 목선에 은구슬이 달린 실크가 실제보다 가늘어 보이게 하는 모양의 허리선까지 이어졌다. 소매는 꼭 끼었지만 팔꿈치에서 나팔꽃 모양으로 퍼지면서 정교한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공단 치마는 중앙이 터져 몸통 부분처럼 역시 구슬이 달린 실크 천이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레이스 면사포와 함께 쓰려고 산 예쁜 모조 보석 관을 옆으로 치우고 베니토가 준 다이아몬드 보석 관을 썼다.

아버지를 찾아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모드 부인은 벌써 교회로 떠나고 없었다. 아버지는 지팡이에 기대서 있었지만 상태가 무척 좋아 보였다.

"이게 무슨 소리죠? 말소리 같은데." 글로리는 갑자기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세상에...."아치 리틀이 현관문 밖을 내다보니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서 외쳤다.

라파엘로가 두 사람을 태우고 갈 차를 보낸 게 아니라 사파이어 색의 벨벳으로 주름이 잡힌, 정식 의복을 갖춘 마부와 정교한 깃털로 장식된 백마 네 필이 끄는 사륜 무개마차를 보내온 것이다.

글로리는 몹시 감격했다.

"그 친구가 널 확실히 만족시켜 줄 작정을 했구나." 정말 비현실적인 흰 양탄자가 교회로 들어서는 그녀 앞에 깔려진 걸 보고 아치 리틀이 말했다.

흰 양탄자 위에 사뿐히 올라선 그녀는 사진사들을 위해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라파엘로를 향해 걸어갔다.

"동화 속 공주 같소." 그가 어른거리는 금빛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속삭였다. "내가 늘 상상했던 대로요, 벨라 미아."

결혼식이 끝난 뒤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몬터규 파크로 돌아왔다. 성대한 결혼 피로연이 준비되어 있었다.

글로리는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부케를 던졌고, 그것을 모드 벨퍼가 잡았다.

두 사람은 토스카나에 있는 그라치니 가의 저택에서 신혼여행을 보낼 예정이었다.

해질녘에 그곳에 도착한 라파엘로는 그녀를 안고 문지방을 넘어 곧장 호화로운 2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신부를 독차지 할 수 있었다.

"아주 멋진 날이었어요." 그녀는 사랑과 만족이 깃들인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었소, 아모레 미아." 라파엘로는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아주 다정하게 말했다. "앞으로 나와 보내는 매일이 행복으로 넘칠 거요."

 

그 후 1년이 지나는 동안 그녀는 그의 약속대로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글로리는 라파엘로를 쏙 빼닮은 아들을 아기 침대에 눕혔다. 벌써 생후 6개월이 다 되어 가는 로렌조는 부드러운 검은 곱슬머리에 커다란 파란 눈을 지니고 있었다. 웃는 모습이 기막힌 성격 좋고 쾌활한 아이로 잘 자고, 잘 먹고, 안기는 걸 좋아했다.

그들은 바로 오늘 오후에 코르푸의 별장으로 날아왔다. 전날 밤 몬터규 파크에서 가족끼리 특별한 저녁식사를 하면서 두 사람의 결혼 1주년을 축하했다. 더 이상 아무도 거북해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모드부인, 샘과 베니토가 함께 했지만 모두가 즐거워했다.

라파엘로도 아버지와 다시 예전처럼 가까워졌다. 그리고 글로리와 라파엘로의 결혼식 두 달 뒤에 식을 올린 아치와 모드는 마을의 가게를 인수해 즐겁고 바쁜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샘은 현재 런던에서 대학 입학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 주말엔 아치 부부와 함께 보냈다. 베니토가 런던 시내에 아파트를 얻어 준 덕분에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건 샘이 그라치니 가문이 자선 단체에 많은 기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었다.

글로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결혼 첫 해를 보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주입시키려 했던, 엄하게 권고하던 그 도덕적 신념들이 이해되었다.

"로렌조가 벌써 자는 건 아니겠지?" 라파엘로가 아이의 방으로 들어서며 실망한 투로 물었다.

글로리는 얼른 회상에서 빠져 나왔다. 큰 키에 거뭇하고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남편이 곤히 잠들어 있는 어린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님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통화하더니요?" 글로리가 그를 상기시켰다.

"내 아들인데도 제대로 놀 수가 없으니...." 라파엘로가 탄식했다. "왜 우리 로렌조는 매일 밤 8시만 되면 잠이 드는 거요? 아기들은 밤 늦게 까지 안자고 보채는 줄 알았는데."

"밤늦게까지 안자고 보채면 안 되죠." 그녀는 불평하는 그를 비웃지 않으려고 애쓰며 주장했다. "한밤중에 안 자고 울면 당신도 그렇게 반갑진 않을 거예요."

"우리 아들에 관한 한 언제나 당신이 옳소, 벨라 미아. 우는 아이 달래는 법에 관해 그 수많은 책에서 읽은 지식을 써먹을 수 없어서 정말 유감이오."

"그만 놀려요." 글로리가 경고했다. "아버님과는 무슨 얘기가 그렇게 길었어요?"

"아버지가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단체의 의장이 되기로 자원하셨다기에...."

글로리는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샘의 사회적 양심이 친부에게까지 손을 뻗친 게 분명했다. "좋은 소식이네요, 안 그래요?"

"그렇소. 우리 아버지는 완전히 은퇴해서 쉬시기에는 너무 정력이 넘치시니까."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날씬한 몸을 자신의 건강한 몸에 끌어당겼다.

그녀가 살짝 몸을 떨자 그는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 카라 미아."그는 애정 어린 감사와 열의가 깃들인 짙은 금빛 눈을 반짝이며 목쉰 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해 곤경에 빠졌던 남자와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했소?"

"그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가 아주 컸거든요." 글로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복 많은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굴 빨개질 것 없이 <사랑하오>라고 하면 될 텐데!"

"그걸 언제나 잊게 해줄 거요?" 라파엘로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투덜거렸다.

"어림없죠."

"사랑하오, 벨라 미아." 그가 속삭이며 놀랄 만큼 아름다운 눈으로 빨아들일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훌륭한 아내이고 굉장한 엄마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랑이 깊고 섹시한 여자...."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글로리는 숨 가쁜 소리로 응답했다.

로렌조가 평화롭게 잠든 사이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누며 점점 지나쳐 가는 칭찬을 주고받았다.

라파엘로는 결국 글로리를 번쩍 들어 안고 나란히 붙은 방으로 가서 늘 새롭고 기쁘고 만족스럽게 두 사람을 채워주는 열정으로 사랑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