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The Girl he left behind)
Emma Goldr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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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닛산 자동차를 몰고 골목길을 돌아선 몰리 패터슨은 자신의 집이 눈에 들어오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케이프앤의 케틀 해협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 유서 깊은 시팀보트 고딕 맨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집 앞에 낯선 자동차가 세워져 있고, 한 남자가 편안한 자세로 계단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몰리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깜박이며 그가 누군지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안경을 벗고 있어서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는다. 몇 달 전까지만 했어도 그녀는 누가 찾아와도 선뜻 반갑게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6주전쯤에 복권에 당첨된 뒤로는 몰리 패터슨은 갑자기 신중해졌다. 물론 느닷없이 백만장자가 된 것은 아니고, 그 돈이면 종사하던 교직에서 1년간은 휴가를 내도 넉넉한 정도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알프레드에 관해서 한 엄청난 혼동에 비춰보면 시의적절 했다. 당첨금은 7만 달러였다. 물론 그 돈을 다 받은 것은 아니다. 그녀가 그 돈을 보기도 전에ㅐ 세무서에서 먼저 달려와 세금부터 뗐으니까. 세금을 떼고 6만 달러가 그녀의 손에 남았다. 그녀가 사는 작은 도시에서는 그만한 돈ㄹ도 상당한 거금이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그녀는 알프레드가 그런 거금은 셈조차 하지 못하는 얼간이라는 걸 알지 못했었다.
"몰리?" 계단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서자 긴 그림자가 따라 일어섰다.
면도를 하지 않은 남자의 수척하고 피로에 지친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햇볕에 그은 갈색 피부와, 해풍에 가볍게 날리고 있는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도 낯익다. 짙푸른 눈동자도 마찬가지다. 훤칠한 키에 비쩍 말라 여위어 보이는 체격, 하지만 다부진 근육질. 그녀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몰리는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허둥지둥 계단을 향해 뛰었다. 순간 옛일들이 뒤죽박죽 떠올랐다.
몰리가 6살, 그는 8살이었다.
"아프지 않아, 몰리. 정말이야. 또 우린 친구니까 그걸 해야 돼, 안 그래?"
"하지만 겁나, 팀! 칼은 날카롭고, 또..."
"그래도 우린 피로 맹세를 해야 해. 그럼 우린 영원히 변치 않는 친구가 될 거야!"
하지만 그건 아팠고, 그녀는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어머니가 칼로 벤 상처에 붕대를 감아 주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손에 댄 커다란 붕대덕분에 그녀는 친구들 사이에서 한동안 으쓱댈 수 있었다. 그렇게 큰 붕대를 손에 감고 다니는 아이는 없었으니까.
몰리가 12살, 그나 14살 때 팀은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 그는 성한 팔로 부러진 팔을 감싼 채 눈물을 참고 있었지만,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결국 그는 그해 여름 내내 팔에 깁스를 하고 다녔는데, 그것은 사과나무에 올라간 고양이를 구출해 오라는 그녀의 억지 때문이었다.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그가 나무에 올라가기는 했지만, 으르렁대며 할퀴려고 덤벼드는 고양이를 피하다가 결국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듣고 난 어머니는 그녀를 방안에 가둬 버렸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회상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몰리가 13살, 그가 15살 때였다. 그들은 바닷가 절벽아래에 있었다. 그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기어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어렵지 않아" 그가 부추겼다. "나만 따라오면 돼. 아래를 바라보지 말고 내가 하는 대로만 해"
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그녀는 그를 따라 20m는 족히 되는 절벽을 절반쯤 올라갔지만 더 이상은 올라갈 수 없었다. 그녀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벌벌 떨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겁내지 말고 올라와"
그가 침착하게 달랬지만 그녀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10분쯤 그렇게 달래다가 눈물범벅이 되어 울고 있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혼자 내버려졌다는 생각에 사색이 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그가 돌아왔다. 로프와 태클 따위를 가지고.
"날 꽉 잡아, 몰리" 그가 로프를 타고 내려와 말했다. 물론 그녀는 그렇게 했다. 한없이 두렵기는 했지만 그에게 매달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런 모험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별탈 없이 절벽을 올라온 뒤 갑자기 어른스런 말투로 팀이 말했다. "네게 절벽을 오르자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어."
그러나 몰리는 그에게 자신의 생명을 전적으로 맡겼다는, 또 그가 생명을 지켜 줬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몰리가 18살, 그는 20살 때였다. 팀의 부모는 이혼을 하고 그 혼자 남게 됐다. 그해 여름엔 사촌언니 수잔이 그녀의 집에서 같이 지냈다. 몰리에게 그 해 여름은 너무도 비참했다. 18살의 몰리도 이제 어엿한 숙녀였지만 키만 훌쩍 크고 비쩍 말라 모매는 볼품없고 어리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에 비하면 19살의 수잔은 작고 귀여운 용모에 풍만한 몸매를 자랑했고, 얼굴에는 언제나 남자들을 유혹하는 미소를 달고 다녔다. 몰리는 마치 개밥에 도토리 같은 신세로 되고만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수잔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말았다.
몰리는 어기 웃음을 지으며 수잔의 결혼식에 참석해 색종이를 뿌려 줬지만, 마음속으로는 신랑신부의 머리위에 날리는 꽃가루가 차라리 폭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수잔이 던지는 부케를 받았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이제 그 결혼식에 참석했던 여자란 여자는 모두 결혼을 했다. 몰리 패터슨, 그녀만 아직도 미혼인 것이다!
그렇게 수잔은 그녀에게서 팀을 빼앗아 갔다. 팀이 살던 옆집은 텅 ㅣ비어 버렸고, 그동안 양친을 모두 바다에 잃은 몰리는 28살이 됐지만 늙은 개와 함께 쓸쓸히 살고 있다.
"팀?" 애써 감정을 숨기고 태연한 목소리를 꾸몄다. 하지만 가슴속에는 온갖 감정들이 들끓고 있다-사랑과 미움, 추억과 번민의 감정들로. 계단 아래까지는 달려갔지만 더 이상은 움직일 수 없다. 발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것 같다. 그가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따뜻한 그의 손길이 느껴지자 지난 몇 년 세월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마치 옛날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다.
몰리는 한숨을 쉬고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그녀의 눈가에 이슬방울이 맺혔다. ㅣ실로 10년만의 포옹으로 덮어뒀던 마음의 상처가 쓰리게 되살아났다. 하지만 옛일들을 구차하게 상기하지 않겠노라고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팀, 당신은 한때 몰리 패터슨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었지. 하지만 이제는 당신으로 인해 나의 마음이 상처받는 일을 없을 거예요!
그가 그녀의 담황색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힘껏 포옹했다. "몰리, 난 너무 어리석었어!" 그녀의 귓가에 대고 그가 속삭였다. 입 밖에 내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도 그의 말에 수긍했다.
"어서 말해 봐요." 뜨거원 커피를 내오며 그녀가 재촉했다. 이제는 두근거리는 심장도 웬만큼 진정됐고, 되살아났던 쓰라린 기억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시간은 이제 그를 다정한 친구로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마치 그로우세스터 고등학교 시절 속마음은 감춰 둔 채 시침을 떨었듯이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기대를 걸지 말자. 어차피 그는 다른 여자의 남편이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이 필요해. 당신 말고 내가 누굴 찾아가겠어?" 그는 애써 그녀의 눈길을 피한 채 커피 잔만 내려다보다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몰리는 울컥 화가 났다. "10년 만에 나타나서 다짜고짜 뭘 도와달라는 거죠?"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어렴풋이 예전의 순수했던 소년의 모습이 엿보인다.
"내가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일 거라는 건 나도 알아."
그는 당황한 듯하다. 그녀가 알던 옛날의 팀은 도움을 요청할 때는 전혀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특히 몰리 패터슨에게는!
"그건 아니에요." 행여 그가 오해할까봐 그녀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환영해요. 우리가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었다는 걸 잊었어요?"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싱긋 웃었다. "아직도 그걸 증명해 줄 상처가 있는 걸요!"
그가 팔을 뻗쳐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가늘지만 다부지고 억센 손길이다. 그가 그녀의 손에 난 흉터를 살폈다. "제길, 내가 일으킨 문제는 끝이 없군, 그렇지?"
몰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서 말해 봐요. 피로 우정에 맹세한 사인데 뭘 주저해요. 친구란 어려울 때 필요한 거잖아요?"
그의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어떤 일도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순 없어. 당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그런 당신을 보니 기뻐, 몰리."
그래요, 어떤 일도 날 아프게 하지 않아요. 당신의 결혼 이후에 무엇이 날 더 아프게 할 수 있겠어요, 팀? 그녀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저, 우선 돈이 필요해"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말했다.
"돈요? 백만장자 홀랜드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가 돈이 궁해요? 무슨 소리예요, 팀? 놀리는 거예요?"
"절대 농담이 아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돈이 별로 없어. 하여튼 내 유산은 수백만 달러는 아니었어. 겨우 백만 달러 정도였지. 어머니와 이혼한 뒤 아버지에게 남은 건 그뿐이었던 거야. 더군다나 수잔과 결혼한 뒤 너무 탕진했어. 대개 유럽에 머물렀는데, 특히 파리에서 흥청망청 낭비했지. 수잔은 파리를 무척 좋아했어. 물론 나도 한때는 좋아했는데 바로 싫증이 났지. 그럭저럭 아는 사람은 많아도 진실한 친구는 하나도 없었어. 몰리"
"커피 마셔요." 그녀가 고갯짓을 하며 권했다. "그래, 돈을 다 써버렸다는 말예요?"
"전부는 아니지. 아직도 어선과 냉동회사, 얼마간의 부동신과 그밖에 몇 가지 재산이 여기저기 있지만 통제도 잘 안 돼.한 곳에 정착해서 홀랜드 수산회사 일에 몰두해야겠어. 신경 써서 열심히 하면 고비를 넘길 수 있을 테고 수습할 자신도 있어." 그가 주먹으로 탁자를 탕 치는 바람에 커피가 흘렀다.
그녀가 얼른 냅킨을 꺼내 닦았다. "하지만 난, 난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냉정하게 대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 새 그녀는 자꾸만 그에게 끌려가고 있다. "물론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돕겠어요. 그런데 수잔은요? 수잔은 어디 있죠?"
"내가 알게 뭐ㅕ야" 그가 불끈 주먹을 쥔 채 말했다. "내가 돈이 떨어졌다고 하니까 자기도 그렇다고 하더군. 벌써 7년도 넘게 수잔을 보지 못했어."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어요, 팀. 나한테 원하는 게 뭐죠? 돈인가요?"
그가 의자를 뒤로 밀치자 낡은 마룻바닥이 삐그덕거렸다. "돈?" 힘겹게 일어나며 그가 냉소적으로 반문했다. "제길, 왜 이리 피곤하지! 우리는 오늘 워싱턴에서 왔어. 자동차로. 아니, 당신한테 원하는 건 돈이 아냐, 몰리. 난 당신이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짜증이 나서 그녀도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글쎄, 당신 혼자서 스스로를 가련하다는 생각은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팀 홀랜드 그리고 사정을 차근차근 설명해 봐요!"
그가 멋 적게 웃고 나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내가 원하는 건 무엇보다도, 몰리, 솔직한 진심이야"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진심만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그가 다시 싱긋 웃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 뒤따라 앉으며 그녀가 말했다. "우선 워싱턴에서 여기까지 같이 왔다는 그 <우리>가 누군지부터 말해 봐요! 수잔이 아니라면 그게 누구죠?"
팀이 손을 들어 짐짓 애원하는 몸짓을 했다. "요즘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당신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깜빡 잊었어."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모이라가 같이 왔어."
몰리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욱 의아해질 뿐이다.
"모이라는 내 딸아이야." 그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도대체 그 아이가 지금 어디 있다는 말예요?" 고개를 번쩍 쳐들고 그를 쏘아보았다.
"차 안에서 자고 있어. 보스턴에 올 때까지는 줄곧 재잘대다가 곯아떨어졌지. 사실은 내 고민은 모이라야, 몰리. 내가 일에 몰두하는 동안 그 애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 2,3달이면 돼"
그의 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 몰리는 우둔하지 않았다. 그만하면 그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애초의 결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렇담 어서 데리고 들어와요. 얼마나 강심장이라서 어린애를 혼자 놔두고ㅛ 태연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화를 낼 수 없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 역시 나의 몰리야"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며 그가 말했다. 아니, 난 당신의 몰리가 아니야.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난 언제나 당신의 몰리가 되고 싶었지만, 그 바람을 이루지 못했어. 내가 분별이 있는 여자라면, 팀 홀랜드, <몰리가 팀을 사랑한건 옛날이야기다>라고 당신의 이마에 써붙여 둬야 할 거야.
발소리에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그녀는 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팀이 들어오고 있다. 그의 딸은 그의 뒤에 바짝 매달려 쭈뼛거리며 따라왔다. 꼬마요정처럼 예쁘장한 얼굴, 작은 체구, 긴 금발의 소녀는 함박웃음을 지은 채 들어오다가 몰리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꼬마는 수줍은 듯이 아버지의 코트 자락을 붙잡고 뒤로 숨어 버렸다.
그 아이는 수잔을 꼭 닯은 모습이다. 단지 한 가지, 수잔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보라색 눈이 아니라 갈색 눈동자인 것만 다르다. 몰리는 혼자만의 생각에서 벗어나 밝게 웃으며 꼬마를 맞았다. "어서 오렴, 모이라"
꼬마는 여전히 제 아버지의 등 뒤에 숨어서 낯가림을 했다. 그때, 새그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갈색과 흰색 점이 나 있는 순종 세인트 버나드인 새그는 60kg이 넘는 육중한 몸에 나이가 들어 털 색깔도 희끄무레 변해 가고 있다. 새그는 관절염이 걸린 뒷다리를 거의 쓰지 않고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모이라의 정면에 조용히 앉았다.
"우와!" 모이라가 입을 열었다. "개가 엄청나게 크네!"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어눌하다는 걸 몰리는 순간적으로 느꼈다. 다시 모이라가 몰리를 올려다본 뒤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당신도 그래요."
"모이라!" 팀이 약간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며 딸의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딸이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내 말을 개가 보통 개보다 커 보인다는 뜻이고, 그녀도 여자로서는 큰 편이라는 말이에요, 아빠" 다시 자기 아버지의 등 뒤로 숨으며 모이라가 종알댔다.
"몰리다." 그녀의 아버지가 일러주었다. "저분의 이름은 그녀가 아니라 몰리야. 또 이개의 이름은 새그고." "저 개를 알아요?" 호기심을 나타내며 모이라가 물었다.
그가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대답했다.ㅣ "물론 알지. 몰리의 14번째 생일날 내가 선물한 강아지였는 걸" "15살 때였어요." 몰리가 정정해 주었다. 그건 정말 맘에 쏙 드는 선물이었다. 일생동안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고도 할 만하다. 벌써 10년이 더 된 일이지만.
"그래,ㅏ 몰리는 개의 이름을 뭐라고 부를까 일주일이나 고민했었지. 아마 눈물도 꽤 흘렸던 걸로 기억나는데...." "그야 15먹은 소녀들은 감성이 풍부하니까요." 갑자기 눈물이 맺히는 바람에 눈을 깜박이며 몰리가 쏘아붙였다. 불현듯 지난 일들이 억누르기 힘들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몇 차례 헛기침을 했다.
"일주일이 다 가도록 그녀는 결정을 못했단다." 팀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내가 대신 이름을 지어줬지. 털복숭이 개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새기라고 했는데, 차츰 부르기 쉽게 새그라고 한 거야"
새그는 머리를 들고 있기조차 무겁다는 듯이 꼬리는 좌우-로 한번 흔들고 마루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새그는 입을 쫙 벌리다가 팀의 손을 혀로 핥았다.
"날 알아보는데" 어린애처럼 밝은 표정으로 팀이 말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도 해봐도 되요?" 모이라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몰리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천천히 두 손을 내밀어 봐. 만지진 말고, 개가 네 냄새를 맡도록 네 손을 내밀기만 해." 모이라가 그대로 따라하자 늙은 개가 머리를 쳐들고 몇 차례 코를 킁킁거리더니 아이의 손을 핥았다. 아이는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개 이름을 부르면서 머릴 쓰다듬어 줘." 몰리가 가르쳐 주었다.
"새그, 새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이라가 개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새그는 기분 좋은 듯이 귀를 축 늘어뜨리고 즐겁게 짖기 시작했다. 모이라가 몰리를 다시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당신은 뭐라고 불러야 하죠? 어른의 이름을 부르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아빠가 가르쳐 주셨거든요." "그래 그건 옳아" 몰리가 맞장구쳤다. "하지만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렴. 그냥 몰리라고 블러도 되고, 아니면 난 네 엄마의 사촌이니까 이모라고 해도 되지. 그게 좋겠니? 몰리 이모가?" 꼬마는 몰리의 상냥한 태도에 적이 친밀감을 느낀 눈치다. 아버지의 등 뒤에서 벗어나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몰리 이모요? 우리 엄마를 아세요?"
그녀의 작은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어렸다. "엄마는 예뻤어요?" "매그놀리아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녀였지." "매그놀리아요? 그게 어딘데요?" "바로 여기지" 몰리가 대답했다.
"이 동네를 매그놀리아라고 한단다. 배고프지 않니?" "애가 배가 고프지 않을 때가 언제 있겠어?" 팀이 웃음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빼빼 마른 애가 먹기는 황소처럼 많이 먹는다니까!" "아빠!" 발까지 굴리며 모이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 미안"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이젠 어른이라는 걸 깜빡 잊었단다." "어쩔 수 없다니까요." 어린 소년가 아주 어른스런 투로 사과를 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아빠도 별수 없는 남자거든요." "그래, 나도 안다." 몰리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모이라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네 아빠가 어린 소년일 때부터 알았지만, 여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도통 모른단다! 자, 그건 그렇고 뭘 먹고 싶니?"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처럼 모이라도 햄버거를 먹겠다고 했다. 몰리는 햄버거와 오믈렛을 준비하면서도 궁금증을 지울 수 없었다. 아이의 언행이 뭔가 유별났기 때문이다. 너무도 어른스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무래도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다.
"혼자 살다 보니까 음식이 별로 없어요." 식탁에 둘러앉자 그녀가 변명했다. "빈방에는 불도 넣지 않고 살았어요. 부엌과 내 침실만 난방을 넣었죠. 하지만 모이라가 같이 있는 동안은 온 집을 따뜻하게 해야겠어요." "그건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뜻인가?" 팀이 물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결코 미남은 아니지만 좋은 인상의 남자다. 또 뭔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기도 하다. "그야 당연하죠. 마침 잘됐어요. 학교를 쉬니까 시간도 넉넉하거든요. 그런데 왜 내가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친구 좋아하는 게 뭔데요?" 그가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딴전을 피우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서 할 일이 많지 않아?" 말은 짧았지만 그가 수만 가지를 알고 싶어 한다는 걸 얼굴 표정으로 알 수 있엇다. 하지만 몰리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할 일은 별로 없어요. 얼마 전까지는 학교에서 특수아동들을 가르쳤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예 그만뒀나?" "아뇨"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서 일어나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커다란 실수를 그에게 애기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를 할까 생각했었는데....어쨌든 난 너무 게으름뱅이가 돼버렸어요." "믿어지지 않는데"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를 도와주자 그녀가 손을 저어 그만두라는 시늉을 했다. "이 정도 집안일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아직도 카스테라를 먹느라 정신이 없는 모이라를 건너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아이는 그들의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럼 난 나가보겠어." 그 말에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보스턴으로 가야 잠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녀가 고함치듯 말했다. "옛날처럼 화제를 돌려서 날 놀리려고는 하지 말아요. 그런 수법은 이제 안 통해요." "그래" 그가 웃음 지었다. "하지만 진심이야. 직장과 가까운 곳에 거처도 마련해야 하고, 또...."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군요, 팀 홀랜드."
그녀가 투덜댔다. "옛날과 다름없이 오만하고 센스가 없어요! 이 집에는 빈 방이 많아요. 또 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노처녀예요. 그러니 당신이 몇 달 우리 집에 머문다고 해서 흉 될 건 없어요. 또 당신도 딸을 내게 맡겨 놓고 나 몰라라 하려는 건 아닐 것 아녜요. 여기서 지내요. 방도 있고, 전화도 있고, 128번 고속도로로 10분 거리밖에 안돼요. 당연히 그래야 된단 말예요!"
모이라가 얼굴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봄 날씨처럼 밝은 표정이다. "아빠, 혼났네요. 아빠의 판정패예요!" "그렇구나, 요 귀염둥이" 그가 딸을 번쩍 안아 돌려 비행기를 태우자 모이라는 질겁을 해서 비명을 지르다가 바닥에 내려놓자 즐거움을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몰리이모도 비행기를 태워줘요." 두 사람을 기대에 넘친 눈으로 올려다보며 모이라가 말했다. 몰리는 두 팔을 저으며 뒷걸름질 쳤다. "이모는 장난을 치고 싶지 않은가 보다." 팀이 애석한 투로 말했다. "그만하자, 애야. 글로스터에 가서 맡겨 놨던 짐을 찾아와야겠다. 금방 돌아올 거야. 괜찮지, 모이라?" 모이라는 금세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빨리 오겠다고 약속해요. 아빠 친구인 몰리 이모가 좋기는 하지만....." 몰리는 싱크대에 등을 기대고 부녀간의 다정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딸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내밀자 딸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즐거움에 넘친 웃음을 터뜨리며 아버지의 키스를 받았다. 그런 뒤 그가 살짝 윙크를 하고 일어섰다. 부녀간의 다정한 울타리는 제삼자가 끼어 들 여지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몰리는 갑자기 목이 메이고 눈가에 이슬이 맺혀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모이라가 내 딸일 수도 있었는데!
팀이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의 딸이 헛기침을 하고 발을 콩콩 굴렀다. 그가 몇 걸음을 떼다가 발길을 돌려 몰리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정말 고마워, 몰리. 사람은 자기가 정말로 곤경에 처할 때까지는 누가 진정한 친군지 알 수 없는 법이야." 그는 팔을 뻗쳐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놓고는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그에게 키스조차도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에게 더 이상 오랜 친구이고 시피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말없이 희미한 미소만 지을 수 있을 뿐이다. "자 그럼, 모이라 홀랜드" 팀이 떠난 뒤 몰리가 입을 열었다. "넌 어떠니?" "뭐가 어떠냐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금세 긴장한 표정으로 변했다. "음, 우선" 몰리가 미소를 지었다. "요즘 네 옷은 누가 사주지? 네가 입고 있는 옷은 너무 짧은데...이번 겨울에는 상당히 추워 보인다. 네 옷은 다 이러니?" 모이라가 무릎위로 5cm는 족히 올라가 있는 자신의 작은 치마를 내려다보았다. "내 옷은 전부 아빠가 사줘요." 대답하는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다. 그것은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어른들 틈에서 자란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하지만 이내 효를 낼름대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아빠는 여자 옷에 대해선 잘 몰라요. 난 바지가 많은데, 아빠는 내가바지를 좋아하는 줄 알거든요." "어떻게 아빠가 그렇게 생각하게 됐니?" "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죠. 그게 내 다리를 춥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남의 딸에 대해서 구태여 신경을 쓰지 말자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녀의 성격에 그럴 순 없다. 그가 부탁한 이상 힘닿는 한은 돌봐야 한다. 나가서 옷도 사 입히고, 학교도 데려가고, 난방연료도 가득 채워 놓고, 우유도 더 시켜야 할 것이다. 혼자 고적하게 겨울을 나려던 생각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놓고 몰리는 아이를 달래서 욕실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얌전을 빼더니 알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어주자 서서히 어린애다운 즐거움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몰리가 조심스럽게 모이라의 머리를 감기기 위해 기다란 금발을 플라스틱 욕조에 담그자 어린 소녀는 오른쪽 귓가를 더듬어 뭔가를 찾아 욕조 옆의 의자에 올려놓았다. 모이라는 물장구를 치며 즐거워했다. "이제 그만하는 게 좋겠다." 어느새 물이 식었다. 아이가 갑자기 물장난을 그치고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제 몰리는 확연히 눈치를 챘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같은 말을 입술 모양으로 만들었다. 모이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모이라는 몰리의 입술 모양을 읽은 것이다. 몰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채 8살도 안된 애가 입술 모양으로 말을 알아듣다니!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커다란 목욕수건으로 아이를 닦아주었다. 욕조에서 나오자마자 모이라는 우선 오른쪽 귀를 수건으로 닦고 나서 보청기부터 끼웠다. "기분이 좋아요." 모이라가 종알댔다. "난 물장구치는 게 좋은데, 모리세트 아줌마는 몹시 싫어했어요." "난 물장구치는 걸 전혀 싫어하지 않는단다." 몰리가 대꾸했다. "나도 한땐 물장구치고 노는 걸 굉장히 좋아했거든"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아빠가 애기해 주지 않든? 우리 엄마가 애기해 준건데, 네 아빠와 난 바로 이 욕조에서 어렸을 때 같이 목욕했대." 그 말이 아이와 몰리를 친밀하게ㅐ 해준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아이는 제 아빠를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팀은 얼마나 행복한 남자인가! "이름이 참 귀엽구나, 모이라. 난 그 이름을 좋아한단다. 원래 아일랜드식 이름이라는 건 너도 알지?" 모이라의 몸을 마른수건으로 닦아 주며 몰리가 말했다. "그래요?" 밝고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모이라가 물었다. "무슨 뜻인지도 알아요?" 자신이 입던 리넨 셔츠를 잠옷 대용으로 모이라에게 입히며 몰리가 물었다. "어원을 따지면 내 이름과 같은 뜻이야. 몰리, 폴리, 마미가 다 같은 뜻인데, 다 메어리라는 뜻이야. 원래 히브리말에서 유래된 거지. 자, 이제 침대에 가서 애기하자" 복도가 추운지 모이라는 종종걸음으로 침실로 달려가 침대로 냉큼 올라갔다. "몰리 이모" 몰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우물쭈물 모이라가 입을 열었다. "이모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뭘?"
"내 보청기에 대해서요. 모리세트 아줌마는 보기 흉하다고 했거든요." 누군지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울컥 화가 났다. "그렇지 않단다, 애야"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넌 아주 예뻐. 그 여자는 누구니?" "우리 가정부였을 거예요. 아빠의 친구들 중 한명이었어요. 왜 알고 싶은데요?" 어린아이에게 진짜 이유를 솔직히 말할 수는 없다. "그냥 호기심으로. 네 아빠는 여자 친구가 많았나 보지?" "무지무지 많았어요." 모이라가 앙증맞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는 여자 친구들과 오래 사귀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언젠가는 우리가 아빠에게 그 점에 관해 애기를 해야겠어요. 안 그래요? 이모는 아빠의 오랜 친구잖아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 몰리는 신중하게 대꾸했다. "네 아빠는 좋은 사람이란다. ㅓ힘도 세고, 영리하고, 또...." "잘생겼어요." 어느새 꾸벅꾸벅 졸면서 모이라가 거들었다.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팀이 돌아온 모양이다. 몰리는 막 잠이 든 모이라가 깨어 놀라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나가보지 않고 집안에서 기다렸다. 11월 밤의 한기를 몰고 팀이 들어왔다. 추위로 뺨이 붉게 얼어 있고, 피곤한 숨을 헉헉거리고 있지만 눈빛은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다. "잠들었군. 내일 아침까지는 못 일어날 거야." 그가 소곤댔다. 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찬장에 마실 게 있을 거예요." 그녀의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가구였던 오래된 마호가니 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종류는 많지 않지만 아무거나 마셔요." 그가 찬장으로 걸어가 병을 꺼냈다. "뭘 좀 마시지 않겠어?" 소파에 걸터앉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술은 마시지 않겠어요.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어요." "고작 한가지뿐이야?" 당신은 정말 대단한 여자야, 몰리!" "한가지뿐이에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모이라의 청력에 대해서 애기해 줘요." 팀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반쯤 채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그녀가 도전적으로 물었다. "아니, 전혀. 나와 모이라는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수잔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어. 모이라와 같이 지내려면 당신도 물론 알아야지." "맙소사!" 몰리가 놀라 짧게 소리쳤다. "모이라가 난청이라는 이유로 수잔이 딸을 버렸단 말예요?"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어." 그가 괴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이라는 태어날 때부터 귀가 좋지 않았어. 생후 6개월째 진찰을 받았는데, 왼쪽 귀는 전혀 듣지 못하고 오른 쪽 귀도 청력이 약화되어가고 있었어. 의사 말로는 사춘기가 되면 완전히 귀가 먼다고 하더군" 그의 어깨가 축 쳐졌다. "그 문제 말고도 수잔에게는 돈이 중요했던가 봐. 어느 날 밤에 내 예금통장과 자기 옷가지들을 싸가지고 도망갔어.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듣지 못하는 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에요." 몰리가 조용히 말했다. "난 학교에서 특별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동들을 가르쳤어요. 모이라는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런 장애를 극복할 수 있어요. 벌써 입술모양으로 상대의 말을 알아듣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앞으로 의학이 발달하면 치료법이 개발될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은 몰라, 몰리." 그가 벌떡 일어나 술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마시고 위태롭게 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녀도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마주보고 말했다. 그녀의 키도 상당히 큰 편이라서 서로 엇비슷하다. "난 몰리 패터슨이에요. 당신이 사귀었던 바람둥이 여자들이 아니라고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고 생각되면 말해 봐요!" 눈빛은 점점 부드러워졌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선천성 난청이라고 애기했잖아" 그가 괴로운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그건 유전성이라는 거야. 그런데 우리 가족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 수잔 쪽도 그렇고. 그렇지만 난 모이라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 애 엄마가 수잔이라는 건 분명해. 그 애가 태어날 때 내가 옆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애 아버지가 누군지는 정말 몰라!"
침대에 누웠지만 몰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내가 좋아서 팀이 돌아온 건 아니다. 그가 날 찾아온 건 딸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역할이야. 좋은 친구, 그것이 다시 나의 역할이다. 너무 서운해 하거나, 그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돼! 냉정하고 침착하고 태연해야 해.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 가는 그가 모르게 해야 해!
그런데 저 어린 소녀는 누구의 딸일까? 수잔은 자기 딸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를만큼 방탕한 ㅏ생활을 했단 말인가? 신체장애는 있지만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아인데....그런데 그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지? 우선 모이라를 팀의 딸로서 받아들이자. 그리고 그녀의 결함을 가급적 의식하지 않도록 하자. 정상적인 아이들처럼 대해야 해. 말은 천천히, 그리고 또렷한 발음으로 하자. 그리고 시시각각 그 아이를 위협해 오고 있는 적막의 벽을 허물 수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일을 힘닿는 껏 하자!
몰리는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계속 뒤척였다. 바로 옆방에 팀 홀랜드가 누워 있다는 생각에 더 잠이 오지 않았다.
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하던 남자인가!
다음날 아침 몰리가 분주히 머리를 빗고 있을 때 모이라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몰리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핑크 색 플란넬 나이트가운을 입고 있는데, 몸의 윤곽이 선명히 들어나 보인다. 몰리의 낡은 셔츠를 입고 있는 모이라는 옷이 너무 커서 바닥에 거의 닿았다. 어린 소녀는 몰리의 옆 의자에 올라와 거울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하고 있는데요?" "머리를 땋고 있지. 너도 해줄까? 땋아도 되겠는데" "싫어요."
"생각도 해보지 않고?" 몰리는 빗을 옆으로 내려놓고 거울에 비친 어린 아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작은 턱을 빳빳이 치켜세워 자신의 단호함을 시위하는 듯한 모습니다. "정말로 싫어요. 귀가 보이는게 싫거든요." "하지만 네 귀는 예쁜데, 모이라"
"보청기를 보면 애들이 놀려요. 보청기를 낀 귀가 뭐가 예뻐요?"
몰리는 속으로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무엇보다도 이 문제부터 풀어야겠다. 아이들에게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이다. 아이들 세계에서는 자기들과 조금만 달라도 놀림감이 된다. "날 봐라, 모이라" 어린 소녀는 다소곳이 말을 들었다. 몰리는 서랍을 열고 금테 안경을 꺼내 화장대 위에 놓았다.
"자, 근사해 보이지 않니?" "네" 아이가 대답했다.
"하지만 어젯밤에는 쓰지 않았죠? 왜 그랬어요?" "내가 너무 어리석었기 때문이란다." 몰리가 설명했다. "추해 보인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난 안경을 쓰지 않으면 볼 수 없단다."
"보이지 않아요?" 아이가 부쩍 관심을 보였다. " 아무것도요?"
"그래, 어렴풋하게만 보이지. 그러니 아주 가까이서야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어. 그것도 어렴풋하게만 말야."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앞이 보여야 살죠. 얼간이가 아니면 보기 위해서 안경을 낄 거예요. 더군다나 안경이 얼마나 예쁜데!"
"그래, 예쁠 거야" 몰리는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말이지. 보청기를 끼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데도 보청기를 끼지 않는 사람도 얼간일 거야. 더군다나 보청기가 예쁜데도 말이다!" "왜 내가......" 어린소녀는 더듬거리다가 입을 다물고는 잠시 뒤에 다시 말했다.
"그건 교묘한 말장난이에요." 몰리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모습이 아니라 천연덕스런 어른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 도대체 이 아이는 몇 살이란 말인가?
"전혀 아니야. 난 협상을 하자는 거야." 아이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뒤 신중하게 물었다. "무슨 협상요?" "내가 안경을 끼는 동안은 너도 보청기를 끼라는 거야. 그리고 남들이 뭐라건 자긍심을 갖자는 거야. 우리는 예쁘잖니!"
몰리는 더 이상 애기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이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머리를 땋는 데만 정신을 집중했다. 모이라가 침묵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온갖 소리들로 떠들썩하다는 걸 알려 주고 싶다. 만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를 돕고 싶다.
"머리를 어떻게 땋는 거예요?"
긴 상념을 깨며 모이라가 물었다. 두 여자는 거울 속의 눈으로 은밀한 미소를 교환했다.
제일 늦게 일어난 팀이 어슬렁거리며 식당으로 내려왔다. 딸의 머리 모양의 변화에 잠이 확 달아난 듯 놀라는 표정이다. 모이라는 긴 머리를 두 갈래로 가지런히 땋아 내렸는데, 아침햇살을 받아 탐스럽게 빛나고 있다. 창밖에 안개가 자욱히 끼어있는 걸로 봐서 날씨는 더없이 화창할 징조다.
몰리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계란을 집어 들었다. 팀이 대식가였다는 게 기억났다. 그는 햄과 계란, 토스트, 커피, 그리고 주스를 좋아했고 스테이크는 싫어했다. 몰리는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눈치 채지 않게 팀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숱이 많은 머리칼은 옛날에 늘 그랬듯이 대충 빗어 넘긴 모습이지만, 그래도 면도는 한 듯하다. 이마에 커다란 주름이 두 줄로 나 있고, 기품 있는 콧등에는 조그만 흉터가 자리하고 있다. 푸른 눈동자는 오늘 아침 유독 더 맑고 부드럽다. 계란처럼 둥근 얼굴은 전보다 훨씬 더 야위었지만 그래도 영락없는 옛날의 그 모습이다.
"왜 여기서는 아침을 이모가 해요?" 모이라가 몰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집에선 아빠가 하는 데요." "그건 집에 여자가 없을 때지." 팀이 웃으며 말했다.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하단다, 모이라" 몰리가 한탄조로 말했다.
"여자는 일만 하다 죽으라는 꼴이지. 안됐다, 너도 남자로 태어나지 못해서"
"난 안 그래요." 아이가 바로 대꾸했다. "여자가 더 좋아요. 남자들은 털투성이에다가 두꺼비처럼 징그러워요!" "재밌구나." 식탁에 앉으며 몰리가 웃음을 지었다.
"난 그걸 25살이 돼서야 알았는데 넌 벌써 깨달았니? 생일이 언제니?"
모이라는 8살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너무 어른스러워보인다.
"3월과 4월 사이요." 모이라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 애의 생일은 유동적이야." 아이의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너무 떠돌아다니다 보니까..." "알아요." 몰리가 대꾸했다.
그녀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오늘 할 일이 많아요." "우리가 할 일이 많다고?"
부녀가 다 같이 놀란 듯이 말했다. "그래요." 몰리가 힘주어 대답했다.
"가볼 데도 많고, 차도 좋은 걸로 바꿔야겠어요." "아줌마는 차는 잡고 있지 않....."
"차는 갖고 있지 않다고 해야지." 아이의 아버지가 말을 정정해 주었다.
"이 아이는 아직 영어를 잘 못해. 하지만 불어와 스페인어는 아주 잘하지."
애정이 넘치는 손길로 딸의 머리를 매만지며 그가 덧붙였다.
"차는 갖고 있지 않잖아요." 모이라가 다시 말했다.
"마당에는 차가 없어요. 자전거 한 대뿐이던걸요."
"뒷곁의 차고를 보지 못했구나." 몰리가 대답했다.
"차가 있긴 하지. 하지만 한마디로 맘에 안 들어. 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차를 사기가 쉽지 않겠니?" "논리정연하군" 팀이 끼어들었다.
"잘 생각해야 할 거다, 모이라. 몰리 이모는 논리를 펴기 위해서 돌려서 말을 하거든"
"이해를 못하겠어요, 아빠" "맹목적인 국수주의자지" 몰리가 중얼거렸다.
"바로 내가 할 말인데" 그가 크게 웃었다. "어떤 차를 사고 싶은데, 몰리?"
"투도어형 빨간 차요." 포크로 계란을 집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아침을 굶고 대충 커피로 때우며 살아왔지만 오늘은 새 식구를 생각해서 식탁에 끼어들었다. "원하는 게 그것뿐이야?"
"물론 그것뿐이에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그 이상 뭘 바래요? 투도어형을 원하는 건 당신의 어린 딸을 뒤에 태우고 차문이 열리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에요. 빨간색 차를 원하는 건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이고요. 그밖에 뭐가 더 필요해요?" "속력이나 브레이크 따위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일어나며 그녀가 말했다.
"굴러가기만 하면 되죠. 얼마나 많이 굴러가는가는 관심 없어요. 가다 고장 나면 근사한 남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은근한 눈짓을 할 거예요. 그러면 알아서 해주겠죠. 어떻게 하는지 아니, 모이라? 이렇게 하는 거야."
그녀는 어린 소녀 옆에 무릎을 굽히고 눈을 깜박였다. 모이라는 킬킬 웃으며 그녀를 흉내 냈다.
"알았으니까 내 딸한테 그런 걸 가르치지 마!" 팀이 버럭 소리쳤다.
몰리는 웃음을 뚝 그치고 접시를 놓칠 뻔했다. 하지만 모이라가 양념통을 들고 싱크대 쪽으로 걸어오다 기어코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자 새그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어머!"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싫어하던 양념통인데 오히려 잘 됐다." 아이를 안심시키며 몰리가 말했다.
다시 그들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공감대가 이어졌다.
그들이 쇼핑을 나갈 때쯤에는 비도 그치고 안개도 말끔하게 걷혔다.
"어제는 으스스춥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왔구나. 조금 있으면 눈이 명치께까지 쌓인단다. 케이프앤의 겨울은 유난하지" 몰 리가 아이에게 날씨를 설명해주었다.
"내 명치는 어딘데요?" "오, 그건 네가 앉아있는 부분의 바로 위쪽이야"
운전을 하면서 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하고 아이를 흘끗 바라보았다. 작은 미소가 어려 있다. 생각할수록 모이라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더 어른스럽고 눈치가 빠르다. 8살이 좀 못됐을 텐데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어른스럽다.
운전하는 중에는 잠시 모이라와 대화가 중단됐다. 차창 밖의 풍경이 아이의 관심을 온통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거리에는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래도 차창 밖의 충경은 아름다운 목가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아이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먼드 성의 쌍동이 탐이 아이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진짜 성이에요!" 아이가 탄성을 질렀다.
"그래" 몰리가 웃으며 대꾸했다. "갑옷과 투구를 입은 기사와 중세의 하녀들은 없지만 진짜 성이다. 1920년대에 존 해먼드가 지은 성이야. 그 사람은 FM라디오를 발명한 사람이지. 언제 한번 가보기로 하자."
"약속한 거예요?" 어린 소녀가 못 미더운 듯이 반문했다. 처음에는 원하는 차를 사기가 쉽지 않았다. 자동차 판매상이 2명이나 달라붙어 몰리의 주문을 교묘히 돌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현금으로 대금을 치르겠다고 하자 즉시 원하는 차를 대령해 주었다. 결국 매그놀리아로 돌아가는 길에는 보톤코11을 몰 수 있었다.
"자, 여기 좀 들렀다 가자" 렉싱턴 가에서 차를 세우고 몰리가 아이에게 말했다.
"네" 모이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차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시내중심가에 위치한 상가다. "시장에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보도로 나서며 몰리가 빙긋 웃었다
"여기가 매그놀리아에서 제일 좋은 가게들이 있는 곳이야. 사실 이곳밖에 없지만 말이다. 새그, 차를 지키고 있어!" 새그가 거대한 머리를 열린 문으로 내밀고 앞자리에 버티고 있으면 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워낙 몸집이 크고 위압적이라서 감히 낯선 사람들은 차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마치 다정한 친구처럼 손을 마주잡고 아동복파는 가게를 찾아 나섰다. 옷가게에서 몰리는 또 한 번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린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또 그것을 고르는 것이다. 멀리가 보기에도 아이가 고른 게 제일 어울렸다. 더 기가 찬 것은 여성용 내의를 파는 가게에 갔을 때다.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들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1번가 A블록에 있는 식료품점인 스타마켓이었다. 배달원들의 도움을 받아 쇼핑한 물건을 차에 실으니 한 차 가득 차버렸다. "돈이 많이 들었죠?" 모이라가 물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차에 오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런 건 넌 몰라도 돼" 몰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리라>는 말이 있지. 나도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성경에 있는 말이야."
"이모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요." 아이는 어느새 다시 어른이 되어 말했다.
"이모는 뭐든 알아요. 우리 아빠는 속일 수 있어도 난 못 속여요." 고개를 약간 외로 꼬고 진지한 표정이다. "그를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누굴 사랑했냐고?" 뜸을 들였다가 몰리가 반문했다. "우리 아빠요." 턱없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아이가 말했다.
"모이라 입 좀 다물렴." 몰리는 매몰차게 쏘아붙이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들이 도착하자 팀은 포도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몰리는 은근히 차를 자랑하고 싶어서 급브레이크를 밟아 흙먼지를 일으키며 정차했다.
"어서 오십시오." 모자테에 손가락 하나를 대며 그가 장난스럽게 인사를 했다.
"진짜 빨간색 차네!"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점심을 굶기겠어요." 몰리가 빽 소리쳤다.
"짐이나 날라요." "그럼 난 짐꾼인가? " 모자를 고쳐 쓰며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녀가 짐짓 위엄 있게 말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여자라면 그런 이유 말고 또 무슨 이유로 집에 남자를 들이겠어요?"
"왜 아니겠습니까?" 차에서 딸을 안아 내리며 그가 항복했다.
"쓰레기 치우는 것도 잊지 마세요." 모이라가 끼어들었다. "그것도 남자들이 할 일이니까."
"올 겨울은 고달픈 나날이 될 게 눈에 훤히 보이는군" 팀이 아이를 땅에 내려놓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모이라가 깡총대며 집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새그가 모이라의 두 배쯤 되는 몸을 이끌고 어슬렁거리며 따라갔다. 모이라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팀이 몰리의 어깨를 잡았다. 순간적으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풀렸다. 하지만 그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차말고 뭘 더 샀어?" 그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우리가 먹을 식료품들요." "그래, 나도 식비는 부담하려고 생각했어." "받지않...."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난 내겠어." 그의 억센 손이 다시 어깨에 닿지 등줄기에 전율이 스쳤다.
"한 달에 어느 정도나 들 거라고 생각해?" 그가 어느새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전혀 생각해 본적 없어요, 팀. 한 번도 난 손님에게 돈을 받은 적이 없어요. 돈은 나도 충분히 있어요. 그러니 정 그렇다면 월별로 일괄 계산하기로 해요." "정말이지?"
그녀의 녹색눈동자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당신 형편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그렇다고 구호자금을 받을 형편도 아니에요."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되받았다. "페인트칠 좀 벗겨졌다고 해서 궁한 건 아니니까. 요즘은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페인트 공을 구할 수가 없다는 걸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다시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위로 다가왔다.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몰리. 당신은 잘해 나가고 있어. 또 난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 거야."
몰리는 이내 냉정해졌다. 도대체 왜 내가 돈 문제로 그에게 화를 내야 하는가? 아니 어떤 문제로건 말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와 같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은가! "미안해요, 신경질적으로 대해서" 그녀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쉽게 언쟁을 그치는 건 처음 봐요. 이젠 짐이나 옮겨요."
"우리의 염탐꾼이 듣지 않는 곳으로 가서 애기 좀 나누고" 그녀의 등을 가볍게 떼밀며 그가 말했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손길을 그저 친구의 손길일 뿐이야. 그는 날 한 여자로 대하는 게 아니다. "송이가 시원찮은 포도는 눈에 보이는 대로 다 땄어."
그의 말에 그녀는 울컥 부아가 났다. 이건 그녀가 나누고 싶은 대화가 아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해요!" 그녀는 소리치고 나서 이내 후회했다. 팀은 적어도 게으름뱅이는 아니다. 좀 어리숙한 편이기는 해도 말이다.
"그런 게 아녜요." 그녀가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 난 포도를 따지 않아요. 독일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데, 그래야 포도주 맛이 좋아요. 그건 그렇고 하고 싶다는 애기는 뭐예요?" "저리로 가지" 그녀의 등을 떼밀어 포도밭 끝에 있는 벤치로 가며 그가 말했다. 그 벤치는 그녀가 11살 때 그가 만들어 준 것이다.
"모이라와 당신과 나에 관한 애기야." "듣고 있으니 애기하세요." 그녀가 재촉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다. 11월 하순이지만 아직도 햇살은 따갑다. 자연스럽게 그가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당신이 이해하기를 원해"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언제든지 내겐 모이라가 우선이야. 난 그 애가 최고의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돈을 벌어야 해! 귀를 고치지 못한다면 돈으로라도 그 애에게 편안한 생활을 누리게 해주겠어."
"이해해요, 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의 넓은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래서 앞으로 서너 달은 닥치는 대로 돈을 모으겠어, 몰리. 그러려면 밤낮없이 뛰어야 돼. 또 당연히 좀 이상한 인간들과도 어울리게 될 테고, 당신의 관점에서 보면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가는 꼴이 될 거야. 가끔은 추잡하게 보일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래야겠어." 상당히 생각을 해야 하는 문제다. 또한 몰리는 그<좀 이상한 인간들>이 어떤 부류인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녀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말이다.
"당신이 누군지도 못 알아볼 만큼 변해 버리면 안돼요." "반대하는 거야?"
냉정한 어투였다.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팀"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내겐 반대할 권한도 없어요. 내가 모이라에게 뭘 해주기를 원하는 지나 말해 봐요."
"아주 많아" 그녀의 어깨를 만지며 그가 말했다.
"봄까지만 아이에게 엄마처럼 대해 줬으면 해" "그 아이의 엄마처럼요? 그건 어느 여자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렇지 않아" 우울하게 그가 말했다.
"신만은 내가 그런 여자를 얼마나 찾았는지 알 거야. 하지만 찾지 못했어. 모이라는 숱한 대리모들에 의해 정신적으로 학대를 당했을 뿐이야."
이제 내가 그 노릇을 하는 셈이구나. 숱한 대리모 중의 한 사람의 대열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도도한 코를 후려치고 싶다.
"당신의 가장 큰 실수를 애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녀가 신중하게 입을 열자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 여자들을 몽치라의 대리모로만 선택했었다면 그렇게 많은 문제는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그러지 못했을 테죠. 그 여자들을 당신의 침대로 끌어들였을 거예요, 안 그래요!" "도대체 무슨 소리야!"
하지만 그는 쉽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건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성격이다.
"아냐, 난 어떤 여자도 침대로 끌어들이지 않았어. 물론 그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필요로 한 사람을 날 섹스의 상대로 보지 않는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어!" "하지만 당신은 나에 관해서 실제로 아무것도 몰라요, 팀"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난 세월동안 당신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지내진 않았어요!" "이봐, 난 당신에 관해서 모든 걸 알아" 그가 웃었다.
"당신이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학위를 받고, 어떻게 특수아동을 가르치는 가장 훌륭한 교사에게 국가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교사상>을 받았는지....."
"최고상이 아니라 은상이었어요." 자랑스럽게 떠벌릴 애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래?" 그녀의 팔을 꽉 쥐고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제다 고모가 그건 잊었었군, 그래" "아, 제다 아주머니" 몰리도 웃음을 지었다.
"모든 정보고, 모르는 게 없는 대예언가죠. 또 홀랜드 가문에서 유일하게 친절한 분이고요." "맞는 말이야" 그가 수긍했다."지난 몇 년 동안 우린 한 달에 한 번꼴로 편지를 주고받았어. 또 사실 고모는...." 마치 무심결에 비밀을 누설한 것처럼 그가 말을 그쳤다.
"사실은 뭐예요?" 그녀가 다그쳤다.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가 더 이상 그 애기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재밌군요." 몰리가 웃었다. "나도 제다 아주머니와 자주 왕래를 했어요.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 필요할 때는 프레이밍햄에 있는 아주머니의 집을 몇번 찾아가기도 했었죠."
"그래? 그런 애기는 한 번도 하지 않던데?"
"그것 참 신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군요!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이 제다 아주머니 애기를 하는 걸 보니 그분이 뭔가 애기를 했군요. 그래서 나를 생각해냈을 거고요."
그녀가 도전적으로 말했다. "그래" 그가 선선히 인정했다 "봄까지 내 부탁을 들어주겠어?"
그녀는 번민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고개를 외면하고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그뒤에는요?" 그 말을 묻지 않을 수 없었지만 오히려 대답을 듣고 싶진 않다. "그뒤에는 다시 생각해 봐야겠지" 그가 우울하게 대답했다.
"내가 너무 무리한 걸 부탁하고 있지?" "아니에요, 절대 아녜요."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서둘러 대답했다.
"하지만 어떤 집에나 규칙이 있다는 건 알겠죠?" "그건 지키겠어."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하기 편한 일은 당신이 해. 힘든 일들은 내가 맡을게. 그리고 생활비는 내가 부담하겠어. 그래도 물론 우리 때문에 불편하기는 할 거야."
"내 직업은 학교 선생이에요." 그녀가 상기시켰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바로 그 순간이 내겐 더 편해요."
"그러니 더 생활비를 내겠다는 거야" 그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몰리는 그의 턱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난 우정으로 이러는 거예요, 팀 홀랜드. "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돈을 받기 위해서 한다면 그걸 보상할 수도 없을 거예요."
"쉽게 생각해, 몰리! 내 생각은 그저..."
"당신과 재키가 내가 제일 아끼던 인형을 망가뜨렸을 때일 생각나요?"
그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고 애를 쓰며 그녀가 험악하게 말했다. 얼굴가득 웃음을 머금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키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이를 하나 부러뜨렸지, 또..."
"또 한 번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싶은 거예요, 티모시 홀랜드?" 그의 말을 가로채고 그녀가 주먹으로 위협하며 말했다. 그가 벌떡 일어나 그녀의 주먹을 감싸 쥐고는 어깨를 몇 차례 토닥이는가 싶더니 와락 포옹을 해버렸다. "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생각나?"
그녀의 귀에 대고 그가 속삭였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그녀가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생각 안 나요." "이렇게 해보자고 했지." 그가 중얼거리며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온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팀은 격정적인 연인들의 그것처럼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서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한참 뒤에야 그가 천천히 몰리를 놓아 주었다. "이런 일은 없었어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물론" 갑자기 낯선 음성으로 그가 대꾸했다. "그때 우리는 이러지 못했지." 몰리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려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거기서 뭘 했어요?" 식료품 다발을 들고 들어온 아빠에게 모이라가 캐물었다. "애기했지. 어른들만 아는 이야기 말이다." "도저히 애기를 나눈 것 같지 않은데요." 딸이 키득댔다. "창문으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요. 그래도 의자위에 올라가서 보니까 조금은 보이던 걸요! 몰리 이모, 창문에 먼지가 너무 많아요." "유리창 청소를 하고 싶니?" 아이 아버지가 겁을 줬다. "어른들을 엿보는 건 좋지 않아! 가서 몰리 이모나 도와 드려라!" "아빠가 도와드려요." 탁자 뒤로 달아나면서 어린 소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모는 점심을 준비하고 있는데 난 선반에 손이 안 닿아요, 그러니 아빠가..." "알았어요, 알았어." 마침내 아버지가 딸에게 두 손을 들었다.
몰리는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서 달걀 샐러드를 바빠 준비하면서 질투심 섞인 눈으로 두 사람의 장난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수프 통조림을 꺼내 데우면서 모이라가 자신의 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 얼마나 단란한 가정일까! 가정을 이룬다는 생각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화가 나지? 이제 수잔을 이기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을까? 생각해본지 팀은 수잔과 이혼을 했는지 어쨌는지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생각에 취해 있다가 무심결에 그녀는 음식 접시를 조심성 없게 식탁에 내려놓고 말았다. 양송이 스프가 엎질러지면서 국물이 팀의 무릎으로 튀었다. "앗, 뜨거!"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다가 딸의 따가운 눈초리에 찔끔해서 그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모이라가 식탁 아래서 아버지의 발꿈치를 쳐서 눈치를 준 모양이다. "미안해요." 몰리가 사과했다. "생각에 잠겨 있어서 그만..."
"나쁜 생각이에요?"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몰리의 거동을 주의 깊게 살피던 아이가 물었다. "저, 사실은 몰리가 대답했다. "오히려 좋은 생각이었지. 내 최대의 적의 목을 조르는 생각을 했거든!"
"우와!" "쉿!" 아이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나 아니면 널 거다, 조심하자." "넌 절대 아냐, 모이라" 그러나 팀은 아니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점심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아이는 그날 아침에 쇼핑 나가서 봤던 것들을 제 아버지에게 조잘대느라고 잠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또 성도 있었어요, 아빠. 몰리이모, 공주가 되어 성에서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지 않았어요?" 갑자기 말문이 막혀 몰리는 얼굴만 붉혔다. 어떻게 대답한담? 물론 그런 공상은 수도 없이 했었다. 나의 기사는 다른 여자와 달아나 버렸지만. "많이 생각해 보지 않았어."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팀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몰리 이모는 언제나 실제적인 사람이었단다." 팀이 딸에게 말했다. "그런 낭만적인 공상에 젖어들 시간이 많지 않았던 거야." "아빠는 그걸 믿어요...?" 딸이 애석한 표정으로 말했다.
팀은 점심을 먹으며 나눴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며 아래층에 혼자 남았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두 번째 울렸을 때 프레이밍햄에 있는 제다 고모가 나왔다.
"팀이냐? 이렇게 빨리 너한테 전화가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잘돼가니?" "잘 모르겠어요, 고모님" 그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두 사람은 청소하느라 이층에 있어요. 몰리가 모이라를 좋아해요,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어요." "그럴 거라고 내가 애기하지 않든" 홀랜드 가문의 최고의 모사가가 말했다. "몰리 패터슨은 정말 참한 여자다." "어린이나 개에 관해서는 그런 것 같은데요." 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팀 홀랜드라는 사람이 아직도 그녀의 가슴에 남아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어요. 몇 차례 시도를 해봤지만..., 글쎄, 전혀 효과가 없어요. 좋은 친구라는 건 확실하지만 그게 전부예요." "아직은 일러" 그의 고모가 충고했다. "지난 10년 동안 잃었던 것들을 전부 되찾을 수 있다고는 기대할 수 없다, 팀. 내가 그렇게 일렀건만 넌 내 말을 듣지 않았잖니? 바보처럼. 지금부터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저도 고모처럼 자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다정하고 사랑스러워요. 차라리 고백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에요. 정말 고모 말대로 하면 될까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내 경험을 믿어라." 아무리 생각해도 팀은 그 경험이 무슨 뜻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제다 고모는 결혼한 지 얼마 안돼서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했다. 게다가 그 2년간은 불행한 결혼생활이었다. 그 일이 그녀를 그 분야의 전문가로 만들어 준 것일까? 하지만 팀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수잔과의 우연한 만남이 여자에 대한 그의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네, 알았어요." 그가 미적거리며 수긍했다. "그렇게 할게요. 느려도 착실한 게 이긴다는 뜻이죠?" "친밀감이 중요하다는 거야. 또 입은 꾹 다물되 눈은 감지 말란 말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관심을 끌고. 알았지? 자, 이제 몰리가 의심하기 전에 끊지. 다음부터는 공중전화를 이용해라. 전화요금 청구서를 보면 통화지역이 나오니까 의심할 수 있단 말이야, 이 바보야!" "네, 알았어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의 심정은 줄리어스 시저를 죽이기 전날 밤의 부르터스처럼 불안한 음모자의 심정이었다.
인구 2만 7천의 글로스터는 매사추세츠에서 가장 큰 도시도, 가장 오래된 도시도 아니지만 주정부의 정책을 수립하는 데 언제나 중요하게 고려되는 지역이다. 미국 북부에 위치한 많은 도시들처럼 에식스와 록포트와 같은 도시들이 주위에 자리 잡고 있다. 매그놀리아는 기다란 낚싯대에 달린 미끼처럼 그 글로스터에 속한 소도시다. 해안도시인 그곳은 어선이 생명의 젖줄이다. 뉴 베드퍼드처럼 원양어선이 정박하는 중요 항구는 아니고 주로 연안어업을 하는 소형 어선들이 정박하는 항구다. 몰리와 모이라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미로처럼 복잡한 시내 중심가를 통과해 아그네스 성당 맞은편의 플레즌트가에 주차했다. 성당에 딸린 학교를 찾아가는 길이다. 성당과 학교가 실제보다 작아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몰리는 오래된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팀과 같이 학교에 다닌 게 벌써 20년 전이라는 게 어쩐지 실감나지 않는다. "굉장히 큰데요." 몰리의 손을 꼭 잡고 바싹 뒤따라오며 모이라가 재잘댔다. "아빠도 같이 왔으면 좋았겠어요." "그래" 몰리도 맞장구쳤다.
"그런데 네 아빠는 7시에 벌써 나가셨어. 그렇다고 기죽을 건 없어, 모이라. 여기 사람들은 다들 좋은 분들이고, 널 돕고 싶어 하니까. 게다가 네 아빠는 지금 월스트리트의 곰들과 씨름하고 있어."
"곰들과요? 난 아빠가 어업에 종사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가 몰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주식시장을 말할 때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말한단다." 교장실을 찾아가며 몰리는 적당한 설명을 하기 위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난 엄마 손을 잡고 처음 여기 왔을 때 완전히 기가 죽었었어. 하지만 네 아버지 팀은 이미 입학을 해있었지. 그래서....."
"두 분은 학교에서 모범생이었어요?" 몰리는 갑작스런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응? 그럼, 물론이지. 우리는 아주 뛰어난 학생들이었단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들이 복도를 돌아가자 앨리스 수녀가 문을 열고 서 있었다. 겨우 150CM 정도의 될락 말락 한 키에 통통하고 정정해 보이는 노부인의 얼굴에는 오랜 교직생활의 특징들이 물씬 배어 있다. 몰리를 보자 수녀가 두 손을 내밀었다.
"절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몰리가 입을 열자 수녀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웃음을 참으며 두 사람을 교장실로 이끌었다.
"몰리 패터슨 아닌가" 의자에 앉으며 수녀가 밝게 말했다.
"당연히 알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봤지. 머리를 보니까 금세 기억이 나던걸. 그래, 어느새 몰리가 이렇게 커서 딸을 데리고 오다니!"
"저..., 그게 아니에요." 몰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티모시 홀랜드를 기억하세요? 전..." "물론 기억하고 말고" 수녀가 호호댔다.
"그 악명 높은 2인조를 내가 어떻게 잊겠나?" "우리 아빠를 아세요?"
수녀에게 쪼르르 달려가며 모이라가 관심을 보였다. "아빠도 이 학교에 다녔어요?" "그래, 팀 홀랜드의 딸이라. 얼굴 좀 보게 여기 밝은 데로 오너라." 교장수녀가 회전의자를 돌려 모이라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럼, 물론이지. 네 아빠도 알고 또..." "몰리 이모도요?" 아이가 거들었다. "이모라고?" 앨리스 수녀가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난 당연히 팀과 몰리가 결혼하리라고 믿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구나!" 노수녀가 아이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유명한 말썽꾸러기들이었다. 네 아버지는 골목대장에다가 장난꾸러기였지. 네 아버지 옆에는 항상 몰리가 있었고. 몰리의 머리는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기 때문에 빨간 금발만 보이면 아이들이 어디서 소동을 피우고 있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단다." "말썽꾸러기였어요?" 모이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모는 두 분이 훌륭한 학생이었다고 했어요!" 앨리스 수녀는 책상에 놓인 조그만 손 종을 쳐서 사람을 부르고 의자에서 힘겹게 일어섰다.
"훌륭한 학생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단다." 교무실에서 급사 아이가 왔다. "알티아" 교장선생이 온화하게 말했다. "우리학교에 입학할 모이라 홀랜드란다. 아이의 엄마, 아, 미안! 이모와 애기하는 동안 이 아이에게 학교를 구경시켜 주렴." 모이라는 급사 아이의 손을 잡고 쭈뼛거리며 따라 나갔다. "자, 그럼" 앨리스 수녀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애기해 보지. 특별한 관심이 필요한 아이라고 전화했었지?"
"청각 장애가 있어요. 한쪽 귀는 전혀 못 듣고, 다른 쪽 귀도 보청기를 껴야 되는데 그걸 무척 의식해요. 퇴행성 난청인데요, 수녀님, 고치진 못할 것 같아요." "퇴행성이라고?" "네, 유전이래요." "아이도 그걸 알고 있나?" "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품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겠군" 교장수녀가 수심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걱정이에요." 몰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더 많은 어휘를 익히고,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게 필요해요. 또 수화를 가르치고 싶어요." "그거야 자네가 제일이잖아? 1년 전쯤 자네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었지. 좀 실례되는 질문을 해도 될까?" "네, 뭐든지요." 몰리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왜 팀과 결혼하지 않았지?" "그건...." 당황해서 몰리가 더듬거렸다. "그가 청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글쎄, 내겐 모이라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생각에 잠겨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수녀가 말했다. "우린 부모가 학교일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하는데" "팀은...저..." 몰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에겐 엄마가 없어요." "그건 나도 알겠고" 노수녀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팀 홀랜드가 딸을 고향으로 데려와 자네에게 떠맡긴 게로군?" 세월이 흘러도 전혀 변하지 않았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부정하려다가 수녀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녀는 말을 돌렸다. "그렇다고도 볼 수 있긴 해요.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들은 프랑스에서 살았기 때문에 학교도 거기서 다녔는데..."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그녀가 우물쭈물 했다. "학교생활이 엉망이라는 애긴가?" "네, 그래요. 생활기록부도 없고, 몇 학년 정도의 실력인지도 모르겠어요. 나이는 이제 8살이 되는데..." "그건 문제없어." 수녀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시험을 봐서 편입시키면 되니까. 행동상의 문제는?" "제가 알기론 없어요. 그런데 아주 내성적이에요. 청력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잖아요. 또 팀의 딸이라는 걸 고려하셔야 할 거예요. 제가 보기엔..."
교장선생이 웃음을 터뜨렸다. "팀 홀랜드의 딸에다 몰리 패터슨이 이모란 말이지! 그건 그렇고, 알고 있겠지만 조건이 있어요."
"수업료 말씀인가요? 그건...앨리스 수녀님, 팀은 제가 모이라를 여기 데리고 온 걸 모르고 있어요. 형편도 넉넉하지 못한가 봐요. 하지만 수업료는 제가 치르겠어요." "물론 그것도 있지만" 수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그럼 뭐죠?" 도무지 그것 말고는 짐작이 가는 게 없다. "우리는 부모가 학교 활동에 참여하도록 요청하고 있어요. 대개 엄마들이 참여하지만 모이라의 경우를 말하자면 이모가 되겠군. 더군다나 이모가 매사추세츠에서 특수아동교육의 권위자니까 더욱 좋겠지. 몰리, 일주일에 한번 정도 수화교육을 담당해 줄 수 없겠나?"
"네? 전..., 그렇게 장애아동이 많은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바로 교장이 손사래 짓을 하며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신체적인 장애를 뜻하는 거면" 수녀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나 나름의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내 애기는 그게 아닐세. 우리는 정상적인 아이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할 필요가 있어. 그러기 위해선 수화를 가르친다면 아주 좋겠지. 물론 우리는 그걸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급료를 지급할 처지는 못 되지만, 몰리, 도와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몰리가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 도와드리겠어요." 앨리스 수녀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온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의 수녀가 일생을 바쳐 감수해온 희생에 비하면 그녀의 봉사는 봉사랄 것도 없지만 몰리는 자못 가슴이 뿌듯했다.
모이라를 학교에 남겨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몰리의 얼굴은 아직도 붉게 상기되어 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덮여 있어서 햇빛 한 점 보이지 않는다. 곧 폭풍이 몰아칠 모양이다. 부두를 보니 어선 몇 척이 파도에 흔들리고 있다. 모이라는 오후 6시에 집에 돌아왔다. 물론 몰리가 가서 데리고 왔다. 모이라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텔레비젼 앞에 앉아 만화영화에 빠져들었다. 몰리는 혼자 바람을 쐬면서 생각을 할 요량으로 두꺼운 외투 속에 스웨터를 받쳐 입고 황혼녘의 바닷가로 나갔다.
해안가 벼랑에는 오래전에 지은 조그만 목조 전망대가 있다. 비바람을 피하기 위한 지붕만 덮고, 벽 대신에 난간만 둘러쳐 놓은 그곳은 전망이 더없이 좋았다. 전망대 북쪽 면에는 엉성하게 엮어 놓은 계단을 통해서 소형 어선을 두세 척은 매어 놓을 수 있는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동쪽으로는 탁 트인 대서양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캐틀 해협의 입구에 해당되는 세 개의 바위섬이 있다. 한때는 꽃이 꽂혀 있던 커다란 돌 항아리가 전망대 입구에 놓여 있다. 하지만 지금은 쓰레기통으로 쓰이고 있다. 몰리는 차가운 손으로 항아리를 만져보았다. 그건 모험심 많은 작은 할아버지가 위대한 파라오 문화의 기념몰이라며 엄청난 돈을 주고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인데, 후에 그것은 브루클린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게 판명됐다. 패터슨 가문의 사람들은 그런 식이었다. 대의를 소중이 여기고, 정이 많았다.
보스턴의 마천루에서 비치는 불빛들이 수평선에 떠오르기 시작한 차가운 겨울밤의 달빛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어두운 하늘을 밝혀주었다. 해가 기울고 나자 바람이 서서히 잠을 깨고, 폭풍 전야의 고요를 만들어 주고 있다. 팀이 타고 온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치더니 이내 팀이 곁으로 다가왔다. 몰리는 몸을 약간 돌려 그를 맞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흡족한 기분으로 그에게 등을 기댔다. "요즘 이곳엔 등을 기댈 남자가 없었어요." 한숨을 흘리며 그녀가 말했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날 기다렸군! 모이라는 어디 있지?"
그래, 내가 받을 수 있는 당신의 관심은 이것밖에 안되는군. 몰리는 그에게서 한걸음 떨어져 팔장을 꼈다. "집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어요. 흑백 영환데, <지구를 삼킨 요괴>란 제목이던데요." 그녀를 잡아당겨 가볍게 포옹하며 그가 말했다. "그건 우리가 오래전에 봤던 영화 같은데, 안 그래? 당신은 공포영화라면 사죽을 못 썼었지! 어떻게 지냈어?"
그야 아무렇지도 않게 허리에 손을 대는지 몰라도 그녀는 온몸의 말초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다."당신이 그런 걸 다 묻다니 의외군요."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죠?" "뭘 말하지 않았다는 거야?"
"모이라가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는 것 말예요."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귓가에 따뜻한 그의 숨결이 닿았다. "모이라를 학교에 입학시킨 거야? 난 미처 생각을 못했어." 그가 미안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모이라는 가정교사한테만 배웠어. 그런데 왜? 무슨 일 있었어?" "글쎄요, 학력 측정을 하기 위해서 상담교사가 모이라를 테스트했는데 읽기 평가는 6학년수준이었어요. 또 다른 과목들도 아주 우수했어요. 내가 모이라는 8살밖에 안됐으니 3학년이 적당할 거라고 애기했지만, 5학년에 편입시켰어요. 그게 문제가 없기를 바랄 뿐이에요."
한동안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팀?"
"듣고 있어." 그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져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어둠 때문에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몸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 문제없을 거야. 그 아이는 어려도 같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난 오히려 그 아이가 당신과 어떡하면 잘 지낼 수 있을까에 더 관심이 있어, 몰리" "나와요?" 그녀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한 발짝 떨어졌다. "난..우린 잘 지내고 있어요." 몰리는 화제를 돌렸다.
"추워지고 있어요. 가서 저녁 먹어요?" "그러지" 팀이 그녀 쪽으로 다가와 어깨를 잡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의 몸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내게 키스하려는 거야, 그럼 난 산산이 부서지고 말 텐데. 그 경황 중에도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키스를 했다, 그녀의 작고 오똑한 콧등에. "고마워, 친구여" 그가 속삭였다.
그녀가 미처 뭐라고 입을 열기도전에 그는 뛰다시피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옆에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친구라고?" 씨근대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 멍청한 친구야, 넌 네 코앞에 있는 것도 모르냐!"
몰리가 집으로 들어가니 부녀는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외투와 스웨터를 벗어 놓고 말없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만화영화가 끝나는 시그널 음악이 들리더니 떠들썩한 새끼 곰들처럼 요란스럽게 부녀가 들어왔다. "저녁식사는 뭐에요?" 제일 좋은 의자를 골라 앉으며 모이라가 종알댔다. 그녀의 아버지도 의자를 끌어내 앉으며 기대에 찬 눈으로 몰리를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다가가 아무렇게나 내려놓으며 몰리가 대꾸했다. "콘플레이크" "하지만 그건 아침.." 누가 아이의 발꿈치를 걷어차기라도 한 듯이 아이가 찔끔해서 말을 돌렸다. "난..., 콘플레이크가 좋아요." 아이가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아빠는요?" "물론 나도 좋아하지. 난 진짜로...., 어..., 콘플레이크를 좋아하지." "다행이군요." 몰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사납게 노려보고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녀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거칠게 닫았다. 한참을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며 울음을 그친 뒤 침대에 몸을 던지고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모든 게 눈에 선하다.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웃고 있는 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불쑥 눈을 뜨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내가 아무리 슬퍼해도 그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칠게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칠게 빗질을 했다. 머리가 얼얼해져서야 그녀는 빗질을 멈추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순전히 바보 같은 짓이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어린애 같은 짓이야. 이건. 그는 무심결에 내 몸에 손을 댄 것에 불과한데, 내가 그걸 대단한 일인 양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는 10년 전에도 날 사랑하지 않았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지 않는다. 단지 나 혼자 한 번의 포옹으로 세기의 로맨스라도 이루어질 것처럼 공상하고 있는 거야. 콧등에 한 번의 키스를 받았다고 그가 내 마음을 갈가리 찢었다고 억측하고 있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겨울은 길다. 그의 부탁에 따라 급사로서 그를 돕든지, 아니면 은행에서 돈을 찾아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짐을 싸서 플로리다로 떠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러나 기분 내키는 대로 처신하는 건 몰리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그래, 난 아직도 팀 홀래드에게 빠져있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지? 팀 홀랜드? 그럼 그를 차지하자! 물론 단계적으로. 그에게 적응할 수 있는 여유를 주자. 그 다음.. 그 다음엔 어떡하지? 그래, 남자를 차지한 경험이 없다고 해서 내가 그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 걸 알려 주는 책이야 산더미처럼 있으니까! 그가 날 여자로 ㅓ의식할 수 있도록 옷차림에 보다 신경을 쓰는 거야.
그리고 그에게 질투를 유발하는 거야.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팀 앞에 내세워 자랑할 만한 다른 남자를 물색하는 거다. 누가 있을까? 알프레드? 몰리는 고개를 가로젓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머리가 엉망이다. 어떤 남자도 유혹하지 못할 모습이다. 녹색눈동자는 약간 흐리멍텅해 보인다. 서랍을 열고 안경을 꺼내 써보았다.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빈약한 얼굴이 훨씬 기품 있어 보인다. 또 안경테가 콧잔등 주위의 주근깨를 가려주었다. 마치 18살 소녀의 얼굴처럼 통통해 보이고, 살포시 웃음을 짓자 양볼에 매혹적인 보조개가 패었다. 안경을 고쳐 쓰고 조금 뒤로 물러나 불그레한 입술과 뾰족한 턱을 살펴보았다. 하얀 살결을 드러낸 어깨선 아래에는 작은 젖가슴이 봉긋 솟아 있다. 그 미친 밤에 건방진 알프레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손에 쥐기에 딱 좋은 가슴이라고 했었지. 그녀는 그의 뺨을 후려갈기고 달아났었다.
쭉 뻗은 두 다리는 아름답다. 둥그스름한 엉덩이, 호리호리한 허리, 어디 하나 자신이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었다. 주여, 이제 제가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전투에 나서려 하옵니다, 무기도 없이!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몰리 패터슨. 이제 방황은 끝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저녁식사를 하자! 거울 앞을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갑자기 늙어버린 것처럼 발이 말을 듣지 않는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몸을 바빠 놀렸다. 머리는 다시 묶지 않고 자연스럽게 뒤로 빗어 넘기고 옷장으로 걸어갔다. 대부분의 학교선생들이 그렇듯이 그녀의 옷들도 보잘 게 없었다. 화려하고 남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변변한 게 없었다. 그녀는 별로 주저하지 않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우아한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 그게 그중 가장 매혹적인 것이었다. 두 부녀는 여전히 부엌의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애기를 하고 있다가 그녀가 나타나자 말을 뚝 그쳤다. 그녀는 어색한 기분을 숨기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뺨은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저녁 메뉴는 내 실수였어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콘플레이크는 내일 먹고, 오늘저녁은 스테이크예요." 화난 걸음으로 싱크대로 다가가 거울에 비친 부녀의 표정을 흘끗 살펴보니 그들은 숨을 죽이며 빙글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옷차림의 변화에는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요리를 시작했다.
스테이크를 브로일러에 집어넣고, 그녀 자신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자 모이라가 쪼르르 달려와 참견을 했다.
"몰리 이모는 스테이크 안 먹어요? 그건 뭔데요?"
"코니시 닭" 전자레인지에 집어넣으며 그녀가 대꾸했다.
"코니시 닭요? 난 모르겠는데요." 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건 병아린데..., 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있어요." "네?"
아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팀은 웃음을 참느라 킥킥댔다.
"그만 귀찮게 하고 이리와 앉아라, 모이라. 안 그러면 스테이크를 태우겠다!" 스테이크를 태우진 않았지만 닭은 좀 덜 익은 편이었다. 모이라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으며 식사를 마쳤을 때는 몰리의 기분도 다시 풀렸다. 그들은 다 같이 설거지를 하고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모이라는 벌써 숙제를 한다고 부산을 떨었는데, 옆에서 보기에는 꼭 장난을 치는 것처럼 혼자 킬킬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지냈어요?" 뜨개질감을 찾아들며 몰리가 상냥하게 물었다. "언제나 바쁘지, 몰리?" 대답은 않고 그가 되물었다. "옛날에도 당신은 무슨 일을 하든 늘 손은 손대로 바빴었지"
"나도 생생히 기억나는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교묘하게 질문을 피했는지! 어떻게 지냈어요?" "그런 옷을 입고 있으면 감기에 걸릴 거야." "팀!" "내 생활? 파멸 직전이지" 그가 울적하게 대답했다. "냉동시설은 절반 정도만 가동되고, 어선 4척은 묶여 있고, 빚쟁이들은 잡아먹을 듯이 쫓아오고 있어." 몰리는 뜨개질바늘을 집어 들었다. 그에게는 지금 동정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럼 대충 굴러가는 거네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가 이마의 주름을 펴고 윙크를 했다. "대충 굴러가지" 그가 맞장구쳤다.
"할일이 태산 같아. 한편으로는 빚쟁이들을 피해 다녀야지. 또 한편으로는 사업을 정상으로 돌려놔야지. 눈코 뜰 새가 없다니까!"
"그래도 당신이 정착해서 기뻐요." 뜨개질바늘이 부딪혀 딸깍 하는 소리를 냈다. "이제 진지한 애기 좀 해요. 모이라의 교복도 맞춰야 되는데 어쩔 건지, 또 제다 아주머니는 어떻게 지내는지도 애기해 줘요. 프란시스 선장은 아직도 오션 프린세스 호를 타나요?" 그가 우물쭈물 대다가 깊이 심호홉을 하고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래, 당연히 교복을 맞춰 줘야지" 그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알아서 해줘!" "그건 이미 그렇게 했어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몰리는 그의 표정을 더 잘 보기 위해 ㅓ조금 돌아앉았다. 그녀는 그가 쩔쩔매면서 달아날 틈을 엿보느라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게 언제나 즐거웠다.
"그럼 제다 아주머니는요?" "글쎄..., 어.., 프란시스 선장은 그만둔 것 같아. 사실은 그래서 오션 프린세스 호도 폐선 됐지. 언제 한번 그분을 찾아봐야 할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몰리는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은 참 좋은 분이에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요. 한데, 제다 아주머니는요?" "참 나." 팀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나한테 묻는 거야?"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믿는 팀다운 수법이다. "정말 우리는 선장님을 찾아가 봐야 할 거야. 당신 말이 맞지" "글로스터에서 배를 가장 잘 아는 분일 거예요." 몰리가 말했다. "배를 갖고 있다가 고장이 나면 난 그분에게 가겠어요. 자, 이젠 제다 아주머니 애기 좀 해줘요." "아! 그거 좋은 생각이야, 몰리! 내가 왜 프란시스 선장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모이라가 잘 시간이 안됐나?" "우리 애기 좀 하고요." 그녀가 깔깔대며 말했다.
"팀, 그런 회피전술로 결코 날 속일 순 없어요. 아주머니가 내 애기를 당신에게 줄곧 알려줬을 거예요. 그게 뭐죠?" "왜 고모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거야?" 그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
"당신의 친척 중에서 가장 좋은 분이고, 당신과 가장 가깝고, 또 어린애들을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왜 당신 고모한테 가지 않은 거죠?"
"그럴 수 없었어."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계시거든. 어린애를 돌볼 형편이 전혀 안 돼, 특히 장애아동은"
심각한 표정을 꾸민다고 꾸미고는 있지만 입가에 웃음이 감돌고 있는 걸로 볼 때 그건 너무도 뻔한 거짓말이다! "그럼 그 고모님은 살아 있는 귀신을 데리고 사는가 보군요." 그녀가 뜨개질을 멈추고 무릎에 내려놓았다. "매년 내게 생일축하 카드를 보내 주셨고, 올해도 빠뜨리지 않은 걸 보면 말예요." "생일...?" 더듬거리다가 그가 말했다. "아, 그거야 변호사에게 부탁하셨겠지. 나도 받았지 그거야" "아주머니 변호사는 그럼 틀림없이 여자겠군요. 목소리도 아주머니를 빼닮았고. 오늘밤에도 내게 전화를 걸어서 거짓말쟁이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아냐고 물었으니까!"
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고모님이 전활 했다고?"
"5시쯤에 댁에서 하셨더군요." "에이, 거짓말이겠지, 그렇지? 그걸 어떻게 믿어?" "한 달 전에 당신한테 무슨 충고를 했다고 하던데요."
"충고가 아니라 명령이었지." 팀이 신음하듯 말했다. "무자비하게 꾸짖고 일장훈시를 하신 거야" "어떤?" "그런 말할 수 없어, 몰리. 비밀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누설하겠어?" "그럴 테죠." 몰리는 다시 거짓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바로 그걸 알아낼 수 있을 것 같군요. 제가 겨울을 같이 지내자고 초대했거든요. 다음 주쯤에 오실 거예요. 이제 아일 재워야겠네요. 이리와, 모이라" 그녀는 모이라를 데리고 문을 나서면서 팀의 표정을 흘끗 살폈다. 서리해온 사과가 풋사과란 걸 발견한 소년처럼 울상을 짓고 있다.
"우리 아빨 골탕 먹였죠?" 손을 잡고 이층으로 올라가며 아이가 책망 투로 말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판사님" 몰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러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가끔 잘난 체한단 말야. 그래서 단순한 여자하고는 아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고. 틀림없이 너희 고모할머니가 네 아빠의 꽁무니를 비틀어 줬을 거야."
"어떠했다고요?"
"괴롭혀 줬을 거란 뜻이야. 꼬마 아가씨, 이제 자요. 우선 씻고"
종종 감사의 분위기보다는 축제의 분위기가 압도하는 11월의 마지막 목요일, 추수감사절 날 아침에 제다 고모님이 도착했다. 옷을 두텁게 껴입은 몰리는 이른 아침부터 새그를 데리고 현관에 나가 노부인을 맞았다. 60살이 넘은 작은 체구의 노인이 힘겹게 리무진에서 내렸다. 노부인이 몰리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팀의 고모인 제다는 1년에 서너 차례는 몰리를 방문했고, 몰리도 1년에 서너 번꼴로 인사차 제다를 찾아뵙곤 했다. 그녀와 제다는 서로 격의 없이 상대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다.
이번 여행에도 어김없이 70살의 노운전사 윌리엄이 제다를 수행해왔다.
"이제부턴 휴가예요, 윌" 제다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플로리다로 가세요. 돈은 그만하면 충분할테고, 팔에 유칼리 나무 기름을 바르는 걸 잊지 말아요. 듣고 있어요?" "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누구도 그 늙은 운전사가 그대로 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한데 그건 냄새가 지독해서요."
"냄새가 나건 말건 그걸 발라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오, 잘있었니, 몰리? 윌에게 할 일을 이르고 있는 중이다. 안 그러면 윌은 자기 몸도 간수하지 않거든" "어련하시겠어요." 몰리가 말했다. "짐은 이리 주세요."
차 트렁크에는 커다란 가방이 4개나있었다. 그녀는 도저히 집안으로까지 나를 엄두는 내지 못하고 현관 입구에 쌓아 두었다. "또 플란넬 옷을 입는 것도 잊지 말아요, 윌!" "플로리다에서 말입니까?" "당연하죠. 폐가 약하잖아요." 이어서 작별인사를 남기고 제다가 돌아서자 윌이 탄 차가 서서히 사라졌다.
"윌과 같이 있으면 너무 피곤하단다." 몰리에게 다가와 뺨에 키스를 하며 제다가 푸념했다. "일일이 챙겨 줘야 하거든" "아주머니가 챙겨 주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어요?" 몰리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하긴 그래" 탐색하는 듯한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제다가 대꾸했다. "자, 그럼 여기서는 내가 뭘 참견해야 할지 볼까!"
몰리는 여전히 환한 미소를 머금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제다 고모님은 수다스럽게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일에 참견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다. 하지만 두터운 푸른색 외투와 테 없는 납작한 모자를 쓰고 있는, 아무래도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노부인의 성품은 한없이 온화하다.
"한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내 조카 놈은 어디 있지?" "글쎄요, 방금 전까지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아침 드시겠어요?" "내가 먹는 걸 싫다고 할 사람이 아니지" 제다가 배를 두드려 보이며 대답했다. "아침부터 먹고 나서, 짐을 나르게 그 녀석을 침대에서 끌어내자!"
"어쩜 제 생각과 그렇게 똑같아요." 몰리가 맞장구쳤다. "남자들이란 짐 나르는 데나 쓸모가 있잖아요, 그렇죠?" "너한테서 처음으로 옳은 말 한번 듣는 구나." 팀의 고모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두 사람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석이 너한테 쳐들어오리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단다, 몰리. 창피한 일이야!" "전 상관없어요." 몰리가 상냥하게 말했다.
"진작 알았으면 내가 총알처럼 달려왔을 게다! 몇 주 동안이나 너와 단둘이 지낸 남자의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지 알고 싶구나! 참, 아침은 간단히 먹을거야" 그 작은 몸 어디에서 그렇게 힘이 솟는지 노부인은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프레이밍햄에서 토스트와 차를 마셨거든. 하기야 여행 전에는 멀미 때문에 별로 먹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몰리는 홀랜드 가문 사람들의 식욕이 얼마나 왕성한지 익히 알고 있다. "여기서 프레이밍햄은 40KM나 떨어져 있잖아요? 오시는 동안 다 소화됐을 거예요. 베이컨과 달걀, 토스트, 커피, 오렌지 주스를 드실래요?" "좋아, 한데 내 조카손녀는 어디 있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단다." "만나본 적이 없어요?" 의아한 눈으로 몰리가 물었다.
팀은 제다 아주머니가 모이라에 관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두 번 다시 그 애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는 나와 제다가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기를 썼다. 왜일까? 분명히 내가 몰랐으면 하는 어떤 걸 제다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제다 아주머니를 초대한 이유야! 팀, 우리 두 사람은 게임을 하는 거야! 내가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 이상, 꼭 밝히고야 말겠어!
몰리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게임을 하는 사람이 그들 두 사람 말고 더 있다는 걸 그녀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몰리는 제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을 팔고 있다가 모이라가 낡아빠진 인형을 손에 들고 부엌으로 들어오며 수선을 떠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이는 세수를 하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었지만 잠옷 바람이었다. "이것 좀 봐요!" 아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엉겹결에 몰리가 말했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모이라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손뼉을 치고 수화로 말을 이었다. 모이라도 이제는 수화로 어느 정도의 대화가 가능하다. "그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이다, 모이라. 그리고 이분은 네 고모 할머니셔" "같이 놀아도 되요?" 아이도 수화로 응수했다.
몰리는 베이컨을 써는 데 신경을 쓰느라 다시 입으로 말했다. "제다 할머니와 놀겠다고?" "아뇨, 인형하고요!" "무슨 일이 있나?" 굵은 바리톤 음성이 들렸다. 팀이 잠자리에서 막 일어난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났다.
모이라가 낄낄대며 수화로 말했다. "사랑해요." 몰리도 수화로 말했다.
"나도 사랑해" 팀이 기지개를 켰다. "그래, 두 사람이 수화에 열중하고 있다는건 나도 알고 있어." 그가 투덜댔다. "그건 아침 인사인가? 어떻게 하는지 다시 한번 보여 줘 봐" "맞췄어요!" 모이라가 답을 알려 주기 전에 몰 리가 말했다. "아침 먹을래요?" "아함...나는..." 그가 하품을 하고 입을 열려고 하자 제다 고모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보다 우선" 그녀가 명령했다. "팀" 딱딱한 말투에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팀" 그의 고모가 단호하게 다시 말했다. "몰리는 지금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니 넌 눈이 오기 전에 나가서 내 짐 좀 가지고 들어오너라." "하지만..." "아침부터 기분 좋겠네요, 아빠" 그의 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는 딸을 한번 내려다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꼼짝없이 걸렸구나." 그가 중얼거리고 밖으로 나갔다.
제다가 그의 뒷모습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면도도 좀 하고 머리도 깎을 것이지, 쯧쯧. 저런 남자는 좋은 여자를 만나서 손아귀에 쥐어 살아야 하는데" "그래요." 모이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몰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다른 두 여자가 그 말을 듣고 눈빛을 반짝였다. "당신이 진짜 우리 고모할머니예요?" 아이가 노인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물었다. "살아있는 유일한 고모할머니지!" 베이컨과 계란을 맛있게 먹으며 노인이 대답했다.
몰리는 집안이 한결 더 훈훈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와 노인이 혈육의 정을 드러내며 급속히 친밀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행복이 넘치는 분위기에- 같이 있다 보면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도 절로 그 분위기에 젖어드는 법이니까.
추수감사절의 저녁식사는 보통날과 다른 시간에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들은 오후 3시에 식탁에 앉았는데, 식사 후에 간식을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두기 위해서 그래야 한다는 제다의 주장 때문이었다. 메뉴는 당연히 양념을 넣고 적당히 구운 칠면조 요리와 으깬 감자, 으깬 순무, 당근, 완두콩, 야채샐러드, 그리고 크랜베리 소스가 함께 나왔고, 생크림과 함께 사과, 호박, 블루베리의 3가지 파이가 이어졌다. "아빤 이걸 꼭 드셔야 돼요." 모이라가 말했다. "나혼자서 이 크림을 다 저었걸랑요!" "그래, 아직도 너에 대한 희망이 있구나." 그가 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웃음을 떠뜨렸다.
"오랫동안 아빠는 네가 커서 남자가 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단다!"
"어휴, 아빠!" 아이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그는 체스를 두자며 딸을 데리고 거실로 나갔다. 몰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거리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설거지라도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녀가 투덜거렸다. "어떤 남자가?" 제다 아주머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냉소적으로 반문했다. "추수감사절 날 설거지를 해준다고? 너무 무리한 걸 기대하는구나, 몰리. 한 50년 뒤라면 몰라도, 내 생전에는 그런 일은 없을 게다. 자, 내가 좀 도와주마."
몰리는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칠면조에 양념을 넣고 은근한 불에 굽기 위해서 아침6시부터 일어나 요리를 했다. 그 전날 밤에는 파이를 굽느라 밤늦게 잤다.
"맨 처음 추수감사절에는 어땠는지 궁금해요." 그녀가 푸념투로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먹을 걸 들고 축제에 나왔었지." "휴, 그걸 다 여자들이 준비했겠죠?" 몰리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팀이 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왜냐고?" 제다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뒤에 남기고 떠난 여자 때문이 아닐까?" "이제 와서요? 옛날의 내 모습이나 그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팀이 아주머니와 애기했다고 하던데요?" "입이 가벼운 녀석이야.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거든! 이건 어디다 둘 거지?" "저쪽에요." 몰리가 가리켰다. "이제 애기해 보세요." "무슨 애기를?" "애기를 하려다 말았잖아요." 몰리가 재촉했다. 몰리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눈을 깜빡이는 바람에 제다의 얼굴 표정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제다 부인은 일생에 가장 큰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몰리. 애기 하마." 제다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팀이 내게 전화했었지. 그게....., 한 3개월 전쯤일 게다." "그렇게 오래됐어요?"
"글쎄다, 아닐지도 모르지. 나야 날짜 감각이 흐리잖니" "이상하네요." 몰리가 생각을 더듬으며 말했다. "난 팀이 유럽에서 돌아온 지가 얼마 안 된 줄 알았어요. 또 귀국하자마자 나한테 곧바로 온 걸로 생각했고요. 내가 잘못 생각했겠죠. 계속 말씀하세요." "음, 그 아이가 모이라의 문제를 설명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더라. 그래서 너에 관한 신문기사를 기억하고 네 애기를 해줬더니 너한테 오겠다고 한 거야.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그럼 돈에 대해서도 애기했어요?" 제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다. "오, 그래. 당연하지. 돈 애기도 했다. 남은 칠면조 고기는 냉동실에 넣을까, 아니면 그냥 뒀다 간식으로 먹을까?"
아무리 둔한 여자라도 제다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건 눈치 챌 수 있다.
"그냥 두세요. 오늘 저녁 안으로 다 먹어치우게 될 테니까요. 나가시죠."
모이라와 제다의 잠자리를 살펴 주고 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팀은 거실에서 스포츠면 기사를 읽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서자 고개를 들었다.
"내년에는 레드삭스가 우승할 것 같은데" 팀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미소로 대답하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프로 야구팀을 응원하는 모든 팬들은 늘 <내년에 보자!>는 게 입버릇처럼 따라다닌다. 하지만 삭스팀이 어떻든 그것은 그녀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제다와 많은 애기를 했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팀은 움찔하고는 신문에 눈을 돌리고 못 들은체했다. 그녀는 그가 신문에서 눈을 뗄 때까지 신문을 잡아당겼다. "제다 아주머니는 당신이 모이라 문제로 걱정하길래 나한테 상의해 보라고 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팀, 어째서 당신은 내겐 그렇게 말하지 않았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신문을 옆으로 밀쳐놓으며 그가 말했다. "무슨 말이야?" "당신은 오로지 돈이 없어서 나한테 찾아온 것처럼 말했잖아요." "그런 것만은 아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성급하게 말했다. "사실, 그렇게만 애기한 것도 아냐, 몰리" "그건 그래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 고모님은 당신이 돌아온 것도, 또 여기에 온 것도 모이라의 문제 때문이라고 했어요." "이론적으로 말하면" 그가 신중하게 반문했다. "그것도 맞지 않을까?" "오, 팀!" 벌떡 일어나 그녀가 팀의 옆으로 가 앉았다. "정말 모르겠어요? 당신은 훨씬 고결한 이유 때문에 날 찾아왔으면서도 돈이 없어서 날 찾아온 것처럼 애기했어요! 당신은 딸을 먼저 생각한 거예요. 그게 중요해요!" 그녀가 착한 학생을 칭찬해 주듯 그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고결하다고?"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난..."
"그 고결한 마음을 더러운 돈 뒤에 숨기려고 했던 거예요." 그녀가 말을 가로챘다. "난 당신의 그런 모습 때문에 더욱 당신을 좋아해요." "다른 면에서 보면"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건 있는 그대로보다 친구를 더 좋게 봐주는 당신의 착한 심성 때문일 거야. 정말로 모이라를 좋아해?" "내 기분을 망치지 말아요." 그녀가 훈계조로 말했다. "그래요, 정말로 모이라를 좋아해요. 사랑스럽잖아요!" "그런데 그 애한테 가르치고 있는 게 뭐야?" "수화예요." 몰리가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두 종류의 수화가 사용되고 있어요. 가장 널리 통용되는 건<신호영어>인데, 그건 표준영어의 어휘와 구문을 뒷받침하는 일련의 신호로 구성되어 있어요. 보통 텔레비젼에서 볼 수 있는 게 바로 이 수화죠. 또 한 가지가 <미국수화>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 자신의 문법을 가지고 있는 완벽한 하나의 언어예요. <신호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우선 보통사람들처럼 입으로 발성되는 말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하는 사람은 배우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미국수화>는 자유자재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고,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어요. 모이라가 배우는 게 바로 그거죠." "도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 "학교에서요. 또 열심히 연습해서 배우죠."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난 이제 옛날의 어린 소녀가 아니에요. 내게도 세월이 많이 흘렀어요." "알아" 팔을 뻗쳐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그가 심각하게 말했다. "하지만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모든 게 옛날처럼 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어. 아니, 옛날보다 더 잘 될지도 모른다고 말야!" "아, 얼마나 좋은 말이에요!"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 여자한테 친절한 당신에게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겠네요!"
"노력해 봐, 사랑하게 될 거야"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바로 그때 새그가 어슬렁거리며 들어와 낑낑대는 바람에 대화가 중단됐다. "왜 그래, 새그?" 못내 서운한 감정을 숨기고 그녀가 일어났다. "나가자고?"
보통 때 같으면 개는 문 뒤에 있을 텐데 이상하다. 늙은 개는 그녀의 다리를 건드리며 다시 낑낑댔다. 개가 하지 않던 짓을 하는 게 걱정스럽다.
"나가자고?" 그녀가 다시 물었다. 새그는 컹컹 짖더니 다시 낑낑거렸다.
"뭔데? 가자, 새그" 늙은 개는 요란하게 한번 짖고는 그녀가 뒤따라오는지를 확인하고 계단으로 달려 올라갔다. "가보고 올게요." 어깨너머로 팀에게 말하고 그녀는 개를 쫓아갔다. 개가 이끈 곳은 모이라의 방이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몰리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불이 켜 있지 않은 방안은 캄캄하다. 문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흐느끼는 소리는 침대 쪽에서 들려왔다. 몰리는 어둠 속을 더듬더듬 걸어가 불을 켰다. 모이라가 무릎을 깍지 끼고 침대에 앉아 서럽게 울고 있었다. 마음이 찡했다. 듣지 못하니까 빛이 없으면 다른 사람과 아무런 의사전달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가 너무 안쓰럽다. 어린 것이 견뎌내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생각에 몰리는 울컥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몰리는 침대로 다가가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팔을 뻗쳐 등을 토닥이자 아이가 쓰러질 듯 그녀의 품에 안겼다.
"몰리 이모?" 울먹이며 아이가 말했다.
"그래, 그래" 몰리가 다정하게 말했다.
"몰리 이모?"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훌쩍이던 아이는 몰리의 품으로 자꾸만 파고 들더니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몰리는 힘이 들었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깨로 모이라를 받치고 있는 자세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이라를 편하게 눕히려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이가 다시 울먹이는 바람에 포기했다. 대신 그녀는 모이라를 안고 침대에 같이 누웠다. 아이가 칭얼거림을 멈춘 건 다시 깊은 잠에 들었을 때였지만, 몰리도 고된 노동으로 몸이 피곤해서 잠깐 쉬었다 일어난다는 게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한동안 아래층에서 몰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던 팀이 기다리다 못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모이라의 방에 들어가 두 사람이 곤하게 자는 모습을 보고 이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모이라가 깨지 않게 조용히 몰리를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몰리, 내 딸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이 날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추수감사절이 지나자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올겨울에만 벌써 40cm가 넘는 눈이 내렸고, 도로만 겨우 눈을 치우고 통행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길가에는 눈을 치우느라 생긴 눈산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수요일이다. 몰리는 아그네스 성당 부속학교에서 막 수업을 끝냈다. 그 학교에는 청각장애 아동이 모이라 외에도 3명이나 더 있었다. 하지만 학교전체가 수화를 배우느라 아우성일 정도로 수화 교육은 대성공이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수화교육이 유익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전 상관없어요." 몰리가 말했다. "아주 유익하지. 학생들은 실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더욱 관심을 갖게 됐으니. 나도 찬성이고, 신부님께서도 찬성하셔" "그럼 주교님은요?" 몰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애기를 들으면 주교님도 찬성하시겠지." 앨리스 수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한데 어떻게 했길래 아이들이 수화교육을 그렇게 좋아하지?" "아주 간단해요." 몰리가 설명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씩 가르치자>는 멕시코 교수법을 이용했어요. 상급생에게 가르치면 그들이 흩어져서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죠."
그렇게 3주 동안 교육했다. 수화교육 때문에 학교의 수업 일정이 뒤죽박죽돼 버렸지만 한 선생님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이제 오늘부터는 열흘간의 방학이다. "우린 행복해요." 차에 오르며 모이라가 기분 좋은 투로 말했다.
"그래 맞다." 그녀가 무심코 맞장구 치고 나서 이유를 물었다. "왜?"
"왜냐고요? 그건 왜냐하면..." 모이라가 밝게 웃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우선 자동차가 있어서요. 또 크리스마스 때문이고..., 또 내가 유명하기 때문이에요! 오, 몰리 이모!" 모이라가 와락 그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당혹한 표정으로 몰리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눈엔 눈물이 글썽하다. "울고 있니?" 등을 토닥이며 몰리가 물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행복해서 나오는 눈물이에요." 소맷자락에 눈물을 닦으며 모이라가 설명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게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어요. 그건 전부 몰리 이모 탓이에요!" "행복해서 운다면서 그게 내 탓이라고?" "적당한 말을 몰라서 그렇게 표현했어요." 모이라가 훌쩍이며 말했다. "그건 이모의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내말 뜻은..." "알아" 몰리가 웃으며 말했다.
"구태여 설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가끔 개념이 뒤죽박죽되어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다른 거야. 네가 유명하니?" 모이라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난 유명해요. 학교에서 날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또 다 날 좋아해요. 믿어지지 않죠? 전에는 친구가 이렇게 많지 않았어요! 전에는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수백 명이나 되는 학교 애들이 ..." 아이가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다들 날 좋아해요!"
몰리가 차에 시동을 걸고 입을 열었다. "대단하구나. 친구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무척 애썼겠구나." 모이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요? 내가 아니에요! 내가 유명한 건 몰리 이모 때문이에요! 수화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몰리 이모를 좋아하거든요. 또 특히 수화시간 때문에 앨리스 수녀님이 가르치는 철자법과 음악 수업시간이 줄어들어서 좋아해요." "오, 이런!"
차를 천천히 움직이며 몰리가 혀를 찼다. "네가 유명한 건 내가 철자법수업 시간을 깎아먹어서구나!" "놀리지 마세요. 어른들은 철자법 수업이 얼마나 따분한지 모를 거예요." "모이라" 부두 쪽으로 핸들을 꺾으며 몰리가 말했다. "나도 한때는 어린애였어. 또 바로 네가 다니는 학교를 다녔고!"
아이를 슬쩍 곁눈질해 보니 전혀 수긍하는 눈치가 아니다. 모이라는 마치 어른들은 아이였던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난 몇 주 사이에 모이라에게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장애아동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내성적인 성격이 꽤 많이 나아지고 있다.
평소와 달리 몰리는 해안을 따라 홀랜드 수산회사의 창고가 있는 부두 쪽으로 갔다. 크리스마스 철이라서 대부분의 어선들이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홀랜드 수산의 어선은 전부 8척이었다. 정말 8척이었던가? 다시 세어보기 위해서 몰리는 차를 세웠다. 크고 작은 8척의 배가 갑판에 눈을 뒤집어쓰고 매어 있다. 3주 전만 해도 홀랜드 수산의 어선은 4척뿐이었다.
아니 저게 누구야? 뱃사람 특유의 걸음걸이로 몸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프란시스 선장이었다! 몰리는 창문을 열었다. "애이해브 선장님!"
그 지방에서는 나이 든 선장을 <모비딕>에 나오는 선장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들 불렀다. 그가 그녀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흠, 아무도 날 애이해브라 부르지 않는 게 언제부터인데..."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몰리가 사과했다. "워낙 습관이 돼서요. 얜 모이라 홀랜드예요." "아!" 창문으로 팔을 쑥 들이밀어 모이라의 조그만 손을 덥석 잡았다. "팀의 딸이냐 네가?" 일생을 바다에서 생활한 선장의 말투는 투박하고 간결했다.
모이라는 겁먹은 얼굴로 몰리 쪽으로 슬금슬금 피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암" 선장이 말을 이었다. "내가 홀랜드 수산의 어선들을 모두 지휘하고부터는 아무도 날 애이해브라고 부르지 않지. 빈틈없는 사내야, 네 아버진, 꼬마아가씨" "선장님이 무서운가 봐요." 몰리가 말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언제요?" "추수감사절 한 달 전부터 워싱턴에 있었는데 그 건방진 팀 홀랜드가 불렀어. 네가 그 뭐냐..., 아차, 그건 애기하지 못하겠군. 이제 가보라구. 그놈이 전화통에 대고 배에 가보라고 했거든. 난 가서 어째서 고기보다 선원들이 많은지 알아봐야겠어! 참 정력적인 놈이야, 네 남자는, 몰리!" 추수감사절 한 달 전이라고? 내가 말을 꺼내기 훨씬 전에 이미 그가 프란시스 선장을 찾아갔잖아. 갑자기 맥이 풀려 몰리가 변명처럼 말했다.
"그는 내 남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선장님이 일자리가 생겼다니 기뻐요. 좀 더 약삭빠른 사람이었으면 그런 일자린 줘도 안하겠지만 말이예요!"
"그럼" 몰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정작 알고 싶은 걸 물었다.
"선장님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배를 감독하게 됐어요?" "아, 그거?"
그가 파도에 흔들리고 있는 어선들을 손짓했다. "저건 우리 배의 절반도 안 돼" 그가 껄껄 웃었다. "바바라앤 호는 저 맞은편에 있지. 막 4만3천 파운드의 고기를 하역했어. 또 테레사마리 호는 고기를 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중이고. 한 4만 파운드는 싣고 있을걸!" "하지만 난 회사가..." "이렇게 형편이 좋은 적이 없었지." 프란시스 선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팀이 점점 더 제 할아버지처럼 빈틈없고 끈기 있게 돼가고 있어. 아주 쏙 빼닮았다니까!" "그건 그래요." 맞장구를 쳐주고 몰리는 차를 출발시켰다. 그건 그래. 팀 홀랜드처럼 말을 믿을 수 없는 사람도 없을 거야. 돈이 한푼도 없다고, 흥! 도산직전이야! 남은 어선은 한 4척쯤 된다고! "뭐라고 하는 거예요?" 의아한 표정으로 모이라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냐" 몰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눈이 오는구나. 곧장 집으로 갈까, 아니면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먹고 갈래?" "난 레스토랑을 택하겠어요. 그래야 설거지를 하지 않을 테니까요!" "참 귀여운 말이구나!" 몰리가 짐짓 꾸짖듯이 말했다. "하지만 제다 할머님 혼자 집에 있는데" "점심만 먹고 얼른 가면 되잖아요." 모이라가 애교를 부렸다. 몰리는 아이의 귀여운 얼굴에 어린 간절한 소망을 져버릴 수 없었다. "좋아, 그럼 레스토랑에 가서 고모할머니를 부르자" 그들은 동부대로로 차를 돌렸다. 폭설 때문에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았지만 다운이스트 레스토랑은 영업 중이다. 몰리는 제설되어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종종걸음으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훈훈한 실내 분위기가 일시에 몸을 녹여 주었다. "집에 전화하고 올 테니까 그동안 뭘 먹을까 생각해 둬" "이미 정해져 있어요." 아이의 대답을 뒤로 하고 몰리는 전화박스로 갔다. "내 걱정은 마라" 제다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뜻한 집안에서 소설이나 읽고 있을 테니까 너희들이나 재미있게 보내다 와" 하지만 유쾌했던 몰리의 기분은 모이라가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일시에 잡치고 말았다. 실내의 조명이 밝지 않은데다 안경에 김이 서려 있어서 몰리는 모이라 옆에 두 사람이 있다는 건 알았어도 누군지는 분간하지 못했다. 가까이 가서야 팀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가 일어나 그녀를 반겼다. "이거 뜻밖인걸. 날씨도 좋지 않아서 난 두 사람이 당연히 집에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이 아니에요." 그의 딸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늘 학교에 오잖아요. 또 이모는 제일 훌륭한 선생님예요!" "흥, 어련하겠니" 모이라 옆에 앉아 있던 조그만 여자가 말했다.
"언제나 믿음직한 몰린데. 안녕, 몰리"
그때까지도 몰리는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고 다시 한번 눈의 초점을 맞췄다-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심정이었다. 팀과의 재회 이후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안녕, 수잔" 씁쓸하게 대답하고 몰리는 고개를 돌려 넋 나간 표정으로 팀을 쏘아보았다. "수잔과 난 풀어야 할 집안문제가 있어." 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잘됐네요." 몰리가 희미하게 말했다. "잘됐어요. 난..." "이게 얼마만이야? 내 결혼식 때 보고 못 봤잖아" 수잔이 말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소프라노 목소리에는 독사 같은 독기가 서려 있어서 듣기 거북했다.
"모이라, 몰리가 내 들러리였다는 걸 알고 있었니?" 차라리 노골적인 험담을 듣는 게 그보다는 나을 성 싶다. 불편해하기는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모이라는 앉은 자리에서 들썩거리더니 마침내 의자를 제 아버지 쪽으로 끌어당겨 앉았다.
"모이라, 엄마가 네게 애기하고 있잖아" 팀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아이가 아버지를 화난 얼굴로 쳐다보았다. "난 엄마가 없어요." 아이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내겐 몰리 이모밖에 없어요!" "그래 됐다." 아이 아버지가 나무랐다. "자, 두 사람은 뭘 먹지?" "난 배 안 고파요." 모이라가 단호하게 말하고 애원하는 눈길로 몰리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먹고 싶지 않네요." 몰리가 말했다. "눈도 많이 오고, 제다 아주머니 혼자 집에 있으니까 우린 집에 가는 게..." 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몹시 불쾌할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난 당신이 겁쟁인 줄은 몰랐어, 몰리" "그럼 그만큼 당신은 날 모른다는 거예요."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난 여기 앉아 있지 않겠어요." 다시 그녀가 지극히 의례적인 말투로 말했다. "당신의 따님이 당신과 같이 있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제가 데리고 갈까요?" "제발, 몰리, 왜 이래?" "그럼 우리 둘이서 다정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겠네" 수잔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난 내 딸과 애기하기를 원했어요, 팀" "난 몰리 이모와 갈래요." 벌떡 일어나며 모이라가 말했다.
"당신은 왜 와서 모든 걸 망치죠?" "모이라!" 팀이 나무랐다. "이걸 보더라도 당신은 절대로 소송에서 이길 수 없어요!" 수잔이 빽 소리쳤다. "저렇게 버릇이 없다니! 내가 키울 때는 이러지 않았어요." "말도 배우기 전에 딸을 버려 놓고 무슨 소리야" 팀이 격하게 말했다. "자, 팀, 이렇게 불쾌한 애기는 그만해요. 특히 당신은 내게 원하는 게 아주 많잖아요." 수잔이 비아냥댔다. "마음이 변했어요. 모이라, 가거라. 네 이모와 가버려. 그리고 몰리, 넌 정말 머리 좀 어떻게 해라. 아무리 노처녀라도 용모에 신경을 써야지! 내게 할 말 없지?" "없어." 분을 삭이며 몰리가 대답했다. "전혀 없으니까 커피나 마셔. 그게 너한테 좋을거야" 밖에는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차 안은 싸늘하게 추웠고 쉽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날씨뿐만 아니라 삶의 소중한 것들을 묻어 둔 몰리의 마음마저도 차가웠다. 가슴에 묻어 둔 소망은 소박했지만 극히 소중한 것이었다. 수잔이 돌아왔다. 몰리가 혼자 중얼거렸다. 수잔이 돌아왔고 팀은 그녀의 남편이다. 이제 내 인생은 또 한번 되풀이되는구나. 난 통속적인 연속극의 주인공 꼴이야. 제목은 몰리 패터슨의 10명의 연인들이라고 할까? 한데 그 연인들이 모두 똑같은 남자이고, 결말도 똑같은 건 이상하지 않을까? 신은 도대체 내게 무엇을 애기해 주려는 걸까? "안가요?" 모이라가 그녀의 공상을 깼다. "추워요!"
길에 눈이 쌓여 있어서 운전하기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눈을 치우기는 했지만 다시 눈이 내리면서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시내의 도로 사정은 그나마 좋은 편이다. 차가 시내를 빠져나가 케틀 해협의 맞은편으로 접어들자 사정이 판이했다. 통행이 많지 않은 편이라서 제대로 눈이 치워져 있지 않았다. 몰리가 모는 작은 차는 상하좌우로 심하게 흔들거리면서 겨우겨우 나
갔다. "저렇게 아름다운 걸 본 적이 없어요." 차를 세우자 모이라가 말했다.
"뭐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눈에 띄는 특별한 게 없자 몰리가 물었다.
"잘 안들려요." 모이라가 몸을 비틀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차 안이나 시끄러운 곳에서는 모든 소음이 한꺼번에 들려서 소리를 구분할 수가 없어요." "소음을 걸러 주는 보청기가 얼마든지 있는데 왜 그런 걸 끼고 그러니"
몰리가 짜증난 말투로 말했다. "비싸기는 해도 네 아빠 정도면 사줄 수 있을 거다." "나한테 화내지 말아요." 아이가 기분이 상한 투로 말했다. "내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래 네 잘못이 아냐, 모이라. 한데 아름답다는 건 뭐니?" "저 집요. 차를 타고 오면서 우리가 시궁창에 빠지는 게 아닌가 생각했거든요. 지붕이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고 해도 너무 아름다워 보일 것 같아요!" 몰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서 들어가자" 그들이 현관에 들어서자 새그가 먼저 알고 뛰어나왔다. 제다가 손에 닭다리를 들고 뒤따라 나왔다.
"안 오는 줄 알았는데" 노부인이 의아한 표정을 말했다. 그녀는 닭다리를 마치 지휘자의 지휘봉처럼 흔들었다.
"생각을 바꿨어요." 몰리가 울적하게 대꾸했다.
"먹을 만한 게 없었어요." 모이라가 끼어들었다.
"치킨 좀 남았어요?"
"냉동실에 있다. 전자레인지에 넣기만 하면 돼. 날씨가 어떻게 될 것 같니?"
"눈보라가 칠 것 같아요. 라디오 들어 봤어요?"
"북동풍이 오고 있단다. 앞으로도 눈이 4,50cm는 더 내릴 거래" 부엌으로 들어가며 제다가 대답했다.
"그게 뭐예요, 북동풍이?" 모이라가 캐물었다.
"엄청난 폭풍이란다." 몰리가 설명했다. "북동풍에서 불어오는 건데 바다에서 많은 습기를 몰고 오지. 그래서 최악의 폭풍이란다. 일기예보가 맞는다면 우린 눈 속에 파묻히게 될 거야" "어제 식료품을 비축해 두길 잘했어." 제다가 말했다. "또 대비해야 할 일이 없을까?" "몇 가지 있어요." 몰리가 말했다. "아주머니는 비상양초와 랜턴을 점검하세요. 모이라, 넌 욕실에 가서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두겠니. 난 집안을 둘러보겠어요. 바람이 불면 아무래도 전기가 문제일 것 같아요. 서둘러, 모이라!" 아이는 저도 한몫 거들 수 있다는 게 좋은지 깡총거리며 뛰어갔다. "그래 이제 아이도 없으니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다가 조용히 말했다. 몰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한텐 늘 있는 일인걸요, 뭐" 몰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재수 없는 사람 때문에 취소했어요. 다운이스트 레스토랑에 갔었는데 거기서 팀을 만났어요, 안 믿으시겠지만" "믿는다." 제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바보같은 조카에 관한 거라면 대개 믿는다. 그 아이가 누구와 같이 있었지?" "아내와 같이 있었어요." 몰리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수잔이 돌아왔어요." "오, 맙소사!" "지난 몇 주 동안 내가 얼마나 달콤한 꿈을 꿨는지 모르실 거예요. 난 두 사람이 이혼한 줄로만 알았어요!"
"글쎄, 그게 네게 도움이 된다면 그들은 이혼할 거다. 가서 문단속이나 하자"
오후 3시쯤에는 패터슨의 낡은 집은 웬만한 눈보라에도 끄떡도 없을 만큼 거의 완벽하게 대비가 되어졌다. 이제 거의 다 됐다고 한시름 돌리고 있을 때 뜻밖에도 제설차가 집 앞까지 눈을 치우며 왔다. 전에 없던 일이라 밖을 내다보니 제설차가 일으켜 놓은 눈보라 사이로 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뭐예요?" 모이라가 옆에 다가와 재잘거렸다. "이런 날 제정신인 사람이 오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네요!" "네 말이 맞다." 몰리가 맞장구쳤다. "네 아버지구나. 수행원까지 딸렸는걸!" "알고 싶지 않아요." 아이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새그와 난 이모 방에 숨어 있을게요. 그래도 되죠?" 아이가 간절한 눈빛으로 간청했다.
허락할까 하다가 몰리는 다시 생각했다. "내 방은 안돼요, 꼬마아가씨. 내 방에는 네 크리스마스 선물을 숨겨뒀거든. 네가 구태여 겁쟁이가 되려면...." "누가 겁쟁이야?" 제다가 나오며 말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현관으로 올라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이라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다가 현관문을 열자 찬바람이 휙 몰아쳐 들어왔다. 두 사람이 바람에 쫓기 듯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엄청나군!" 팀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68년도 이후로 처음 보는 폭설이야!" 그가 동행인을 돌려세워 그녀의 코트에 묻은 눈을 털어 주고 모자르 벗겨 주었다. 수잔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오, 안녕하세요, 제다 고모" 그녀가 감격한 듯이 말했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절 기억하세요? 수잔이에요." "반갑구먼" 제다가 중얼거리고 이내 투박하게 말했다. "발 털어!" "어머" 수잔이 소프라노로 말했다. "변한 게 없어요. 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에게 우리 애기를 해줘요." 팀은 몸을 털고 두터운 외투를 벗었다. "여긴 몰리의 집이야. 우리는 애기를 할 게 아니라 물어야 해" "오, 물론이예요. 미안해요." 수잔은 외투를 벗었다. 몸에 꼭 맞는 자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팀이 신경질것으로 머리칼을 대충 뒤로 빗어 넘기고 추위로 꽁꽁 언 몸으로 몰리에게 주춤주춤 다가왔다. "수잔은 몇 시간 전에 보스턴에서 도착했어. 한데 방을 구하지 못했어. 신혼 여행자들로 시내의 객실이 만원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래서 몰리의 집으로 가자고 했을 테죠." 몰리가 너그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을 가로챘다. "그게 뭐 문제예요, 팀? 당신의 친구는 다 내 친구잖아요, 안 그래요?" 그녀가 우정을 맹세한 흉터가 나 있는 손가락을 그의 코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그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잔에게 그렇게 말했어. 최소한 크리스마스 휴가철이 끝날 때까지는 몰리가 당신을 기꺼이 묵게 해줄 거라고 말이야"
몰리는 재빨리 속으로 계산을 해봤다. 크리스마스가 이틀 뒤니까 휴가철이 끝나려면 12일이 더 남았다. 그럼 14일 동안인가? 그렇게 여러 날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그녀의 양심이 그런 매몰찬 생각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게 용납하지 않았다. 수잔은 내집의 손님이야. 더구나 기뻐해야 할 크리스마스 철이잖아. 그러니 불평불만은 그만해, 몰리 패터슨. 팀 홀랜드를 다른 여자에게 뺏겼다고 해서 남은 인생을 허비할 필요는 없어. "네, 물론이죠." 그녀가 한숨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묵어도 좋아요. 자, 부엌으로 가요. 거기가 따뜻하니까. 따뜻한 커피라도..." "난 홍차로" 수잔이 말했다. "그럼 홍차" 몰리가 말을 정정했다. 제기랄, 소크라테스를 독살할 때 잔에 탄 게 뭔지 모르겠어? 그녀는 황망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털어 버리고 앞장섰다. 부엌에서는 제다가 부산히 움직이며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람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만약에 대비하는 게 좋겠어." 커피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팀이 말했다. "집이 벼랑위에 있기 때문에 바람이 강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일기예보에서는 뭐라고 해요?" "폭풍이 밤새 계속되고 내일까지는 그치지 않을 거란다." 제다가 말했다. "우리가 글로스터에서 오는 길에 보니까." 몰리가 덧붙였다. "3,4일은 눈 속에 갇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 동안 영락없이 눈 속에 갇혀 있겠네." 섭섭한 듯이 모이라가 중얼거렸다. "산타클로스가 오기 좋은데 뭘?" 팀이 놀렸다.
"피, 누가 그런 걸 믿어요?" 아이가 의자를 뒤로 빼고 창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제 겨우 오후4시밖에 안됐는데도 밖은 벌써 캄캄하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니 기쁘구나." 제다가 웃으며 말했다. "가져왔던 선물을 도로 집으로 가져갈 수 있으니" "어, 난 믿어요." 팀이 말했다. 그의 딸이 아버지를 한번 쏘아보더니 눈물을 뿌리며 달려 나갔다. "못된 버릇만 늘었구나." 수잔이 매몰차게 말했다. "당신이 내 딸을 제대로 키우지 않았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팀" 신중하게 할 말을 선택하고 있는지 그가 수잔을 주의 깊게 쏘아보았다. "당신은 불평해서는 안돼, 수잔. 그럴 자격도 없어." 다른 사람에게는 그 말이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지건 수잔에게는 가슴을 치는 말일 거라고 몰리는 생각했다. 물론 수잔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을 경우지만. "생필품은 넉넉한가? 식료품은 어때?" 팀이 물었다. "넉넉해요." 몰리가 대답했다. "낭비하지만 않으면 충분해요. 다 같이 부엌 일을 도우면 잘 해닐 수 있을 거예요." "난 그런 일 못해" 수잔이 말했다.
"난 제외해 줘" "우린 아무도 일급 요리사는 아냐" 팀이 점잖게 말했다.
"그럼 당신은 설거지를 맡으면 되겠군. 모이라가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그 밖에 다른 건, 몰리?" "물이 문제예요. 이 집은 수돗물이 아니라 전기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다 써요." "그럼 문제는 전기군. 비상발전기는 없어?"
"창고에 있긴 한데 몇 년 동안이나 쓰지 않아서 어떨지 모르겠어요. 연료는 충분하지만 가동이 될지..." "좋아, 그럼 발전기부터 살펴봐야겠군. 그리고 당분간은 샤워는 금하고 물을 최대한 절약하자고" "그건 안돼요!" 수잔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난 그런 건 견디지 못해요!" "닥치면 당신도 감수할 수 있는 게 수도 없이 많아" 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도 그렇게 해야 돼. 그밖에 다른 건 몰리?" 팀은 그 애기를 끝낸 걸로 생각하지만 수잔은 전혀 그런 눈치가 아니다. 수잔은 혼자 중얼대다가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몰리가 뒤따라가려고 하자 팀이 손을 저어 가지 못하게 했다. "수잔은 이 집의 구조를 잘 몰라요. 여기를 와본 게 벌써 몇 년 전인데요." 몰리가 납득하지 않고 말했다. "죽진 않을 테니까 내버려둬. 자, 다른 문젠 없어?" 몰리는 갑자기 팀이 더욱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빈틈없고 단호하고...,역시 남자답다!
"몰리?"
혼자만의 생각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 그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말썽을 피우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난..., 저..., 이 집은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덧문들도 다 닫았어요. 200년이 넘은 집이지만 그래도 끄덕없어요. 비상 양초와 랜턴도 충분해요. 불이 나지 않게만 조심하면 돼요. 소방차가 오지 못할 테니까 화재가 나면 대책이 없어요. 그래요, 다른 건 걱정할 게 없어요. 담요와 시트를 꺼내야겠어요. 그래야 모두가 불편하지 않을 테니까." 그 모두란 수잔을 두고 한 말이다. 내가 그녀를 이렇게까지 배려해 줘야 할까? "서둘러야겠어요. 수잔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내 생각엔 우리가..." 얼굴이 빨개져서 그녀가 말을 멈췄다. "내 생각엔 그녀가..., 누군가와 방을 같이 써야..., 팀, 당신하고?" "당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당신이 그녀와 같이 자겠다는 건 아니지?"
몰리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굴만 시뻘개진채 쿵쾅거리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건 너무 심술궂구나." 제다가 그럴 타일렀다. "지나치게 심술궂어. 넌 도대체 뭘 하는 녀석이냐?" "일주일 전이나 똑같죠. 설마 모른다고는 말씀하지 마세요, 꾀쟁이 마법사 할머니" "아니 네 고모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제다가 목소리를 낮춰 꾸짖듯이 말했다. "아니, 그건 나중에 따지자. 이집에는 지금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어서 정신을 못차리겠구나. 하여간 수잔은 왜?" "그래요." 그가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정말 뜻밖이에요. 몇 년 만에 만난다는 걸 믿으시겠어요? 그녀는 정말 아닌 밤에 홍두깨 격으로 나타난 거예요." "난 널 믿는다." 제다가 엄하게 말했다. "남들은 믿지 않아도, 난 어린 소녀 적부터 전혀 믿어지지 않는 주제를 곰곰이 생각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자신을 확신시켰단다!" "제다 고모님!" "비웃지 마라, 팀 홀랜드. 난 네가 오래전에 돌아온 걸 안다. 한데 몰리가 그걸 어떻게 믿을 거라고 생각하니? 또 수잔이 정말 원하는 게 뭐지?" "하나씩 대답하죠. 수잔은 이혼소송에서 뭔가 내 약점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내가 결함 있는 부모라는 걸 입증할 수 있고, 그래서 아이의 양육권을 자기가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 너도 그녀가 그걸 입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지금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가 어깨를 으쓱햇다.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가 진짜 원하는 건 돈이에요. 홀랜드 수산회사가 결코 도산직전에 처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들은 모양이에요. 돈을 더 뜯어낼 심산인거죠!" "그럼 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니?"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고모의 성화에 못 이겨 대답했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시겠지만, 전 희망을 봤어요. 몰리가 그 희망의 불빛을 밝혀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가 볼 수 있었겠어요? 우린, 몰리와 난 서로를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돌아가는 사정으로 볼 때 절친한 친구는 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조금도 접근이 안돼요!" "그러게 내가 뭐라든" 제다가 심각하게 말했다. "미루면 미룰수록 사태를 악화시킨다고 누차 지적했잖아!" "젠장, 올 수 없었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그가 투덜댔다. "모이라를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올 수 없었어요. 저길 가면 치료한다더라, 어디에 용한 의사가 있다더라 하는 애기를 듣고는 포기할 수 없었던 거라고요.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했지만, 도저히 고칠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기 전에는 돌아올 수 없었어요." "그래도 진작에 돌아왔어야 해" 제다는 너그러운 목소리지만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걸 이해해 줄 사람은 몰리 같은 여자였어. 아니 네가 편지만, 아니 전화만이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말씀이야 백 번 옳죠." 그가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 맞아요. 하지만 몰리에게 뭐라고 할 수 있었겠어요? [안녕, 몰리, 난 못된 여자에게 당했어. 하지만 이제 돌아갈 테니까 결혼해 주겠어?]라고 해야 했나요?" "아마 조금은 돌연한 사태였겠지만, 이 소동보다는 훨씬 좋았을 게 분명하다. 몰리는 오늘 아침에 부두에 가서 홀랜드수산의 배가 몇 척인지 세어 본 모양이더라. 다시 가난에 찌든 것처럼 연극을 할 생각이냐?"
"오, 주여!" "그래, 주님은 네가 요청하면 언제든지 도와주실 게다."
팀이 결혼식 날 이외에는 한번도 교회 문턱을 넘지 않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제다는 그에게 가시 돋친 말을 퍼부었다. 그녀는 결국 두 사람의 결합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결합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조카가 상당한 마음의 고통을 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 수잔이 널 양육권 분쟁으로 끌고 들어가리라고 생각하니?" "정말, 모르겠어요. 돈만 적당히 쥐어주면 협상이 어루어질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갈은 그치지 않을 거예요. 한번 돈을 주면, 내년에는 더 많은 돈을 요구할 게 분명하거든요. 난 찰거머리처럼 그녀가 날 울궈먹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그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또 난 그저 운명에 맡기고 기다릴 수만은 없어요, 안 그래요? 모이라는 내게 너무 소중해요." 제다의 눈에 불꽃이 번쩍였다. "그럴 가망은 전혀 없다, 팀. 아무리 아둔한 판사라도 네게 불리한 판결을 내릴 수 없을 거다. 그녀가 소송을 낼 것 같니?" "모르겠어요."
그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아요. 제 생각엔 모이라를 볼모로 날 궁지로 몰아갈 심산인 것 같아요. 몰리만 내편으로 끌어들이면 수잔이 무슨 짓을 해도 걱정이 없는데, 몰리가 어떨지 알 수가 있어야죠. 혹시 숨겨 놓은 남자는 없을까요?" "글쎄" 제다가 느릿느릿 말했다. "몇 달 전에, 지난여름에 우리 집에 왔을때 누굴 애기하더라만, 이름이 뭐더라? 우스꽝스런 이름이었는데..., 그래, 알프레드였지. 알프레드 드몽"
"알프레드요?" 팀이 눈을 반쯤 감고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들은 기억이 있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런데 뭐가 우스워요?"
"월터 스코트" 그의 고모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팀이 벌떡 일어나 그의 공모자이자 유일한 친척인 고모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이제 좀 속 시원히 애기해 주세요." 그가 애가 탄 목소리로 말했다. "월터 스코트라니까." 고모가 의미심장하게 다시 반복했다. 그가 포기한 듯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도대체가 워낙 복잡한 작전을 세워놨으니 이거 원!" 이런저런 생각에 팀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폭풍이 거세게 우짖는 밤이다. 낡은 집이 거친 바람에 시달리며 삐걱거리고 힘겹게 신음을 토했다. 몰리는 몸을 웅크리고 침대에 누워 있다. 전기담요가 따뜻한 걸로 보아 전기는 끊기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까? 그가 수잔과 노닥거리는 걸 감내하기 괴롭지만 말하지 말까? 그럼 모이라는 어째야 좋을까? 아이는 돌봐 줄 어머니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그게 팀과 결혼할 충분한 이유가 될까? 나 자신은 어떤가? 팀을 원하면서도, 팀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랑은 복잡난해한 과정이지만 그녀는 그 복잡 난해한 수수께끼를 풀만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팀은 옛날의 그 어린 소년이 아니다. 그녀와 같은 시골뜨기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교활한 남자가 아닐까? 어느덧 그녀의 베갯머리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뒤척임으로 헝클어진 침대만큼이나 마음도 복잡했다.
갑자기 소연하던 바람소리가 일시에 멎고 적막이 찾아왔다. 폭풍의 소란스러움만큼이나 일시에 닥친 고요도 견디기 힘들었다. 갑자기 집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때 복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몰리는 귀를 기울였다. 모이라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려고 마련한 강아지가 침대 아래에서 낑낑댔다. 새그가 밖에서 방문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몰리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실내복을 걸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문고리를 벗기자마자 새그가 육중한 몸으로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래, 고맙구나." 몰리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지만 새그는 이미 저만큼 앞장서서 모이라의 방 쪽으로 달려갔다. 모이라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몰리는 복도를 지나 모이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모이라가 침대에서 몸을 구르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 몰리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진정해" 그녀가 달랬다. "몰리 이모야" "필요 없어요." 아이가 중얼댔다. "아빠 말고는 아무도 필요 없어요! 나가요!" "나도 잠을 못 잤어." 몰리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집안 분위기가 짓누르는 것 같구나." 아이가 일어나 몰리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근사한 크리스마스가 될 수 있었는데.."
아이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녀가 왔어요?" "그녀라니?" "빤히 알잖아요. 수잔 말예요!" "그녀는 네 엄마야.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는 거야" "안 그래요." 어린 아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또 그녀는 엄마가 아니에요. 그녀는 오래전에 엄마로서의 의무를 저버렸어요. 난 그녀가 미워요! 난..." 눈물 때문에 아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빠와 애기하고 싶어요. 아빠와 애기할래요." 몰리는 측은한 마음에 위로할 말도 잊고 안타깝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저 어린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저럴까! "그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가서 아빠를 데리고 올게" 하지만 아이가 놓아 주지 않았다.
제 아버지를 원하지만 또 그녀가 나가는 것도 싫은 모양이다. 몰리는 새그를 침대로 올라오도록 명령했다. 새그는 힘들이지 않고 침대로 올라왔다.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를 놓아주고 새그를 껴안았다. 아이가 염려스러워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 아빠 말고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아이가 측은했다. 아직껏 아무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팀의 방문은 닫혀 있었지만 쉽게 열렸다. 방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두꺼운 커튼이 쳐 있어서 불빛 한 점 들지 않고 있었다. 몰리는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팀?" 조용히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다. 숨소리만 크게 들렸다. "팀?" 전혀 반응이 없다. 몰리는 두 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걸음을 내딛었다. 숨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서 들렸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발이 침대 모서리에 걸려 몸이 기우뚱했다.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딛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쳐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중심을 잃고 만 것이다. 그녀의 손이 팀의 가슴에 닿았다.
"어머!" 깊은 잠에 곯아 떨여져 있던 그가 반사적으로 그녀를 잡았다. 잠을 자면서도 반사적인 운동신경은 깨어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벗은 가슴팍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휴" 그녀가 한숨을 쉬고 그를 불렀다 "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막무가내로 그녀를 잡아 끌 뿐이다. 어느 새 그녀는 침대로 끌려 들어가 있었다. 저항해? 소리를 쳐? 설득을 하는 게 옳을까? 아니면 만사를 잊고 따뜻한 그의 품에 안겨 버릴까? 몸은 그에게로 끌려가고 있었지만 청교도적인 마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팀" 그녀가 팔을 빼내며 조용히 불렀다. "팀!" "토론을 하자고 침대로 찾아오는 여자는 반갑지 않아" 그가 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휴, 팀 홀랜드"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밤늦은 시간에 큰소리로 떠들 수도 없다. "이거 놔요!" 하지만 어느새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고 있었다. 아찔할 정도로 짜릿했다. 한동안 그녀는 정신을 잃은 것처럼 그를 받아들였다. 침착하고 정숙한 몰리 패터슨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사랑에 애타는 여인으로 변했다. 사고가 마비된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 모이라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녀는 기를 쓰고 그를 밀쳐내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팀" 그녀가 거칠게 말했다 "난 수잔이 아니라 몰리예요!" "알아" 그가 대답했다. "난 모르는 여자와는 절대 동침하지 않아. 몰리" "오! 당신은...짐승이에요!" 소리를 지르고 제 풀에 놀라 그녀는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당신은..."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거칠게 문을 열고 홀로 나왔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수잔이 방문을 열고 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진해 빠진 몰리.."
그녀가 깔깔댔다. "침대에서 뛰쳐나왔니, 몰리? 법정에서 유리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여전히 깔깔대면서 수잔이 방문을 닫았다. 몰리는 도리질을 치면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모이라의 방으로 갔다. 방이 텅 비어 있다. 몰리는 급히 자기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방에서 기쁨에 넘친 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모이라는 몰리의 침대 아래에 놓여 있는 바구니를 궁금한 듯이 건드려 보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서 강아지가 낑낑대고 있었다.
"몰리 이모? 저게 뭐예요?" 몰리는 더 이상 선물을 숨겨둘 수 없었다. 그녀는 방안의 불을 켰다. 이제 막 이유기를 지난 강아지가 바구니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저건 네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모이라가 기쁨에 겨운 탄성을 지르고 강아지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정말요?" 어느새 아이의 눈엔 눈물이 사라져있다. 어린이다운 순수한 기쁨만이 넘치고 있다.
"그래, 네 거야" 그녀가 말했다. "쉿, 조용히 해. 정말 네 거야. 내일 아침에 예쁘게 포장을 해서 네게 주려던 참이었어." 모이라가 다시 한번 탄성을 지르고 조그만 갈색 강아지를 꼭 껴안았다. "버티라고 부르겠어요." 아이가 말했다. "내 친구 니콜도 개를 가지고 있는데 버티라고 불러요. 그 애가 내가 제일 친한 친구니까 나도 내 개를 버티라고 부를 거예요." 몰리는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강아지는 아이의 따뜻한 품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자, 이제 침대로 들어가요, 귀여운 아가씨. 발이 얼기 전에 말예요!" 모이라는 순순히 말을 들었다.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모이라는 몰리의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강아지가 아직 집에 길들여지지 않았어." 몰리가 조용히 주의를 주었다. "개가 떠들지 못하게 조심해야 돼. 다들 자고 있으니까!" 모이라는 강아지에게 코를 비비며 장난을 치다가 잠이 들었다. 강아지를 안고 잠든 아이가 천사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저 천사 같은 아이도 어른이 돼야 한다니! 차라리 아이가 영원히 자라지 않았으면...
이튿날 아침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팀은 느지막히 일어났다. 제다는 밀빵을 굽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모이라는 한 손으로는 강아지를 껴안고 다른 손에는 포크를 들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새그는 빵부스러기라도 던져 주기를 기다리며 배를 깔고 마루에 누워 있었다. 몰리는 기쁨이 넘치는 바다 에 떠 있는 외로운 슬픔의 섬처럼 한쪽귀퉁이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모두들 잘 잤어요?" 팀이 아침인사를 했다. 몰리는 흠칫 하고 놀랐다가 이내 그가 간밤의 일에 대해서 뭐라고 입을 열겠지 기대하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딸이 아버지를 보고 환히 웃으며 수화를 했다. "사랑해요." 팀이 기대에 참 시선을 몰리에게 보냈지만 그녀는 무시하듯 등을 돌렸다. "편히 자지 못했지?" 팀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움찔하고 몸을 피하자 그는 불에 덴 것처럼 화급히 손을 치웠다. "밥 먹어라, 팀" 제다가 조카에게 말했다. "몰리 이모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 거예요!" 모이라는 자랑하고 싶어 안달하는 눈치로 강아지를 아버지의 코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강아지?" 슬픈 표정으로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몰리 이모는 우리가 바라는 게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나 보구나, 애야" 몰리는 피곤한데다 짜증이 나서 버럭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획 몸을 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요, 팀 홀랜드! 당신은 언제나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는군요! 지옥으로나 날아가 버려요!" "도대체 내가 뭘 어쨌길래?" 그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난 아침인사를 한 것밖에 없다고. 오늘은 면도까지 했어. 내가 악취라도 풍기고 있나? 맙소사, 처음 매그놀라아에 돌아왔을 때는 당신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어, 몰리 패터슨. 하지만 이제야 내가 얼마나 잘못 생각했는지 알겠어. 당신은 너무 까다로워!" 몰리가 자리를 박차로 일어났다. 한바탕 결전을 앞둔 시장통의 억척아줌마 같은 기세였다. "그래요!" 그녀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당신은요! 정작 알지도 못하면서 뚱딴지 같은 말이나 하고, 고함만 지르고 있어요. 저 강아지는 독일산 순종 세퍼트예요. 6개월 동안 모이라와 친숙해지게 한 뒤 훈련을 받으러 보낼 거예요.
주인의 귀가 되게 훈련을 받을 개란 말이에요!" "뭐라고?" 일시에 사람들의 눈이 그녀에게 쏠렸다. 내친걸음이다. 이제 와서 설명을 멈출 수도 없다.
"말하자면 보청견인 셈이죠." 감정이 격해져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톤을 높여 말했다. "장님들이 길잡이 개를 이용하는 건 당신도 알 테죠? 귀가 먼 사람도 똑같은 문제가 있어요. 그들도 뒤에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나 사이렌 소리, 자동차 경적 등을 누군가 알려 주지 않으면 안돼요. 보청기를 벗어 놓고 있는 밤에는 특히 더 그렇죠. 그럴 때 주인이 듣지 못하는 위험이나 침입자의 소리를 주인에게 알려주는 보청견이 필요한 거예요. 보청견은 작은 소리도 식별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고 그것들을 주인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해요. 그러니까 소리를 전달해 주고 주인을 지켜주는 게 보청견이라는 애기예요. 그리고 바로 저 강아지가 그런 일을 하게 될 개라고요. 그러니 맘대로 하세요. 저 강아지가 귀찮아서 창고에 처박아 두더라도 난 조금도 개의치 않을 테니까!" "어!" 팀이 놀란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봐, 내 무지를 사과해, 몰리. 정말 처음 듣는 소리야! 하지만 당신의 설명을 듣고 보니 알겠어. 미안해, 몰리" "그러시겠죠." 화해할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녀가 매정하게 말했다. 그 순간의 기분 같아서는 사랑은커녕 우정조차도 넌더리가 났다.
"내 말 좀 들어!" 그가 바짝 다가와 말했다.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몰. 당신은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어, 그렇지?" 그는 그녀의 기분을 전환시킨답시고 농담을 던졌다. "나도 혼자 힘으로는 잠을 이루지 못해서 도움을 청해야 했다고. 지난 몇 달 동안이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단 말이야!" "그랬을 테죠."
몰리는 그에게만 들리게 낮게 중얼거렸다. "남자들이란 그런 짓을 해야 편해진다고 하더군요." 간밤에 팀의 방을 나설 때 수잔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쏘아보던 모습이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하" 그가 키득거렸다.
"맞아. 너무 좋아서 2배나 도움을 받아야 했어!" "오, 하느님!" 눈물과 절망과 분노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어디에 그런 힘이 있었는지 그녀는 단숨에 그를 밀치고 눈물을 쏟으며 부엌을 달려 나갔다. 혹시나 했는데 이젠 의심할 여지도 없다. 내가 나가자마자 수잔이 그의 방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제기랄 도대체 알 수가 없군" 팀이 한숨을 쉬었다. "수면제를 먹고 잠을 잤다는 애기밖에 한 게 없는데 불같이 화를 내니! 옛날의 몰리 같지가 않아! 아무래도 내가..." "아무래도" 그의 고모가 함축성 있게 충고했다. "넌 조용히 앉아서 아침이나 먹는 게 좋을 것 같다." 마침 그때 수잔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부엌으로 들어오자 제다는 팀에게 빵을 던져 주고는 휭하니 나가 버렸다
"어휴 배고파" 수잔이 투덜댔다. "알아서 찾아 먹어." 팀이 화난 음성으로 면박을 주었다. "요리를 못한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토스트를 해줄게요." 모이라는 혐오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모이라가 가져다 준 토스트는 새카맣게 타 있었지만, 수잔은 차마 불평을 못하고 굶지 않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듯이 입으로 집어넣었다.
실컷 울고 한숨자고 일어났더니 한결 기분이 좋았다. 몰리는 아침에 자신이 일으킨 소동이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부끄러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그래, 이제 사랑의 희망은 전혀 없다. 혹시라도 다정한 옛날의 친구로는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서 그녀는 두터운 울셔츠와 일하기 간편한 바지차림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거실에는 모이라가 창문에 코를 바짝 붙이고 눈바람이 흩날리고 있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고, 제다는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소란을 피워 미안해요." 몰리가 제다에게 말했다. "사과할 것 없다. 팀은 그래도 싸다. 간밤엔 어쨌는지 모르지만 지난 9년 동안의 일만으로도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부족해. 다시 말하지만 내 조카는 바보라니까! 하지만 그건 종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라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녀는 아무런 장식도 되어 있지 않은 방을 손짓하며 말끝을 흐렸다. "맞는 말씀이에요." 몰리가 수긍했다.
"그런데...아빠는 어디 있니, 모이라?" "비상발전기를 고친다고 창고에서 끙끙 대고 있다." 제다가 못마땅한 투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엉뚱하게 눈만 치우다 이제사 거기로 갔단다. 아니, 뭐한다고 해안 전망대로 가는 길의 눈까지 치운다냐, 글쎄" "벼랑에서 뛰어 내릴려나 보죠." 모이라가 우울하게 거들었다
"혹시 누군가를 밀쳐서 떨어뜨릴 생각인지도 모르죠." 몰리가 울적하게 거들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많은 돈을 벌 수 있었는지...아니 사업은 망해먹지 않은 게 신기하다니까." 제다가 투덜거렸다. "야구방망이를 들고 쫓아가서 그 아이 좀 혼내줘라, 몰리" "환영받지 못할 텐데요."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수잔더러 가보라는 게 어떻겠어요?" "그 여자는 몸에 탈이 나셨다고 누워 계신단다. 아침을 너무 많이 먹었던가 설거지를 좀 했다고 생색을 내는 거겠지." "설거지는 내가 했어요." 모이라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녀가 먹은 것까지 내가 했다고요!" "하여간 다른 사람이 가 봐요. 난 야구 방망이가 없거든요." 아이의 말에 울적하던 기분이 풀려 몰리가 웃으며 말했다. 제다가 그녀를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다가 뜨개질하던 걸 집어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리가 부족하지 않은 게 있다면..." 올라가기 전에 제다가 수잔을 빗대 한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건 약삭빠른 입을 가지고 있는 여자다! 저녁 먹을 때나 날 부르렴." 몰리는 모이라와 함께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뭘 할까 생각에 잠겼다. 눈이 멈춘 하늘에 나타났던 해가 북동쪽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두꺼운 구름에 가려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가 수화를 하자고 눈치를 했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 우리가 살아 있을 것 같아요?" 아이가 수화로 물었다. "그야 물론이지." 몰리가 수화로 대답했다
"비록 건빵으로 때운다고 해도 말이지. 내가 그걸 해야겠다." "뭘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의 수염을 뽑아 버리겠다고. 내 말은 창고에 가겠단 뜻이야" "호랑이 다음의 신호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아이가 말했다. "털이라고 했어요?" "수염" 몰리가 웃으며 다시 손짓을 해주었다. "아직도 뜻을 모르겠어요." 모이라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호랑이 수염을 뽑아요?" "그래, 그건 속담인데" 몰리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뜻이니까, 가서 너희 아빠를 두들겨 패주겠다는 말이야" "나도 도울까요?" "아니, 넌 여기 있어. 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되야 하니까." "알았어요." 모이라가 수긍하고 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럼 이모는 무시무시한 늙은이가 돼야겠네요. 근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출연한 영화를 뭐였어요?" "내 입술을 잘 봐" 몰리가 엄하게 말했다. "내가 이탈리아 말을 가르쳐 줄 테니까. '꼬마야, 입 닥쳐' 알았어?" "이모는 흥을 깨는 사람이에요!" 아이가 말을 해놓고 재빨리 달아났다.
창고에서는 팀이 고물딱지 같은 발전기에 매달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낡은 창고는 갈라진 벽틈에서 바람이 숭숭 들어오고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서 춥고 어수선했다. 팀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맘대로 안 되는지 혼자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주먹으로 발전기를 두들겨 보기도 하면서 그녀가 다가가 어깨를 잡을 때까지도 사람이 들어온 것도 알지 못했다. "어. 당신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어?" 그가 드라이버를 내려놓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보고 있었죠. 수은주가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가 있다는 걸 알고나 있는 거예요?" "몰랐는데" 윙윙거리는 바람소리 때문에 그가 고함치듯 말했다. "이거 말고 내가 칭찬받을 만한 게 있어야지?" "그만해요, 팀"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가서 말했다. "그만 비아냥대요. 요즘 우리는 모든 게 비비 꼬여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날씨에 그런 쇠를 만지면 동상에 걸리니까 제발 그만 두세요. 또 오늘밤은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그래, 몰리. 어쩐지 난 하지 말아야 할 일들만 한 것 같지?" "그 반대예요." 그녀가 쓸쓸히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은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어요. 크리스마스트리가 저 쪽에 있어요." "알고 있어." 그가 껄껄 웃었다. "알고 있었다고! 잠깐만 기다려 줘. 그리고 나서 트리를 장식하자고" "모이라가 무척 좋아할 거예요. 그리고 이 고물딱지는 그냥 내버려두지 그래요?" "모욕하지 말라고"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기계는 비평에 민감하니까. 엔진이 우리 회사 배의 모터와 거의 비슷하니까 분명히 고칠 수 있을 거야. 어제처럼 폭풍이 몰아치면 분명히 전기가 끊길 테니까 지금 손을 봐야 돼. 한데 저 굉음은 뭐지?" 밖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몰리는 문 쪽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저게 어떻게 된 거지! 제설차예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다른 땐 눈이 그치고도 5,6일은 지나야 왔었는데..." "뭔데 그렇게 놀래?" 서툰 솜씨로 발전기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팀이 물었다. "홀랜드 수산회사의 마크가 찍혀 있는 커다란 푸른색 제설차라면 믿을 수 있겠어요?"
"믿지" 그가 환하게 웃으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내가 오늘 오후3시에 눈 좀 치워달라고 부탁했거든. 확실한 설득의 힘이지!" "그냥 부탁만 했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물론 아주 정중하게 부탁했지만 전화로 그냥 부탁만 한 거야" "그랬는데 치워 준 거로군요." 그녀가 낡은 술통 위를 대충 치우고 앉으며 울적하게 말했다. "팀, 있잖아요, 난 가끔 내가 부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돈을 태워버릴 수 있을 정도의 부자 말예요." "흠, 크리스마스이븐데..." 그가 엄숙하게 말했다. "받아" 그가 뭔가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성냥갑과 빳빳한 20달러짜리 지폐였다.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못했다. "젠장, 떵떵거리며 살지, 뭐" 그가 느릿느릿 말했다.
"하느님도 당신이 얼마나 선량하게 살았는지 아실 테니까 소원을 들어주실 거야. 불을 붙여. 태울 돈을 가졌잖아!" "팀, 바보처럼 굴지 말아요!" "바보짓 하는 게 아냐. 어서 불을 켜" "못하겠어요, 팀. 정말 못하겠어요."
"아냐, 할 수 있어." 그가 재촉했다. "편히 생각하고 불을 붙여. 태워, 자 어서!" 그녀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사악함의 발로였던지 그녀가 눈빛을 반짝 빛내고 성냥을 그었다. 지폐에 성냥불을 대는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불이 붙은 지폐가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들은 지폐가 다 타버릴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았다. 마침내 불꽃이 사그라지자 몰리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여, 정말 불가사의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럼 2주에 한번씩 그렇게 해" 다시 발전기에 달라붙으며 그가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양심의 거리낌에도 불구하고 묘한 기분이다.
조금 뒤 고물 발전기가 둔탁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돌아가기 시작했다. 작동되는 발전기를 바라보는 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졌다. 그의 얼굴에 그처럼 자랑스럽고, 자신에 넘치고, 소년 같은 미소가 어린 건 몇 년 만에 처음이다. 그랬다, 그녀가 어떤 기계건 고쳐달라고 부탁만 하면 그는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뭐든 그녀가 부탁만 하면 그는 해줄 것이리라!
"자, 어때?" 팀은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려 키스했다. 깊고 감미로운 키스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키스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몇 번을 하더라도 그 감미로움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여성의 자립에 대해 굳은 신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키스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팀은 돌격 앞으로를 외쳐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실언이라는 고질병이 도지고 말았다. "가서 트리를 장식하지" 그가 말했다.
모이라는 코가 납작해질 정도로 바짝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엄마가 뒤에 있는데도 아이는 모르는 척하고 있다. 밖에는 다시 눈이 오기 시작했고,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것은 확실했다. 이제 몰리이모가 돌아오기만 하면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다.
"모이라, 나와 뉴욕에 가서 살래?" 아이는 듣고도 못 들은 척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계집애야,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수잔이 잔뜩 화난 걸음으로 달려가 아이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못들었어!" 수잔이 빽 소리를 질렀다. "듣지 못해요." 모이라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뭐라고 했어요? 아시겠지만, 전 귀머거리잖아요." "난 그딴 거 몰라" 수잔은 딸을 2,3차례 세차게 흔들며 매몰차게 말했다. 모이라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뭘 원하는지 모르겠네요." 아이가 단숨에 말했다. "나도 당신이 날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의 딸이 귀머거리라는 걸 알면 친구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아니, 이 조그만 게!" 수잔이 막 모이라에게 손찌검을 하려는 찰나에 제다가 방으로 들어오다 그걸 보았다. 세 사람은 마치 얼음으로 만든 조각처럼 일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내 눈이 잘못 됐다고 생각한다." 뚱뚱한 노부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난 누구라도 아이에게 손을 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게 누구건 말이야!" "내 딸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수잔이 빽 소리쳤다. "그럼 나도 그걸 팀에게 말할 수 있지."
제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 아이가 어쩔지 상상할 수 있겠지? 아니, 저기 오고 있군" "와, 크리스카스트리를 갖고 와요." 모이라가 흥분해서 말했다.
"너희 이모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잊을 사람이 아니지" 제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치밀한 여자다, 네 이모는. 내 말은 아주 생각이 깊다는 뜻이지. 또 사랑으로 넘치고 있고" "다시 이야기하자" 수잔이 모이라에게 귓속말을 했다. "잊지 마. 그 강아지 새끼를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지겨워! 그 강아지 새끼를 내 눈앞에서 치워 버리란 말이야!" 모이라는 문 쪽으로 달아났다. 밖에서 눈싸움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이 모이라의 모습이 보이자 잠시 눈싸움을 중단했다. 하지만 몰리는 바로그 순간을 노렸던 것처럼 팀을 향해 눈뭉치를 날렸다. 공교롭게도 눈뭉치는 맞으라는 사람은 맞지 않고 엉뚱하게도 모이라의 머리에 가 부딪쳤다. "에이, 그렇게밖에 못해요? 두 사람 다 내가 눈뭉치로 묵사발을 내겠어요!" 모이라가 고함쳤다. "그럴 기회가 없을걸." 크리스마스트리를 팀에게 떠맡겨 놓고 현관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몰리가 말했다. "저녁 먹기 전에 트리를 다 장식해야 돼. 장식물들은 홀의 벽장에 있으니까 아빠가 들어오기 전에 가져올래...거기가 아니에요, 팀! 우린 언제나 트리를 거실에 놓았다는 걸 알잖아요!" 그날 오후는 웃고 떠들면서 트리를 장식하느라 분주했다. 제다는 감독을 하고, 몰리와 팀은 높은 곳의 장식을 맡았다. 모이라의 손이 닿는 곳은 모이라의 차지였다. 새그까지도 흥분해서 유모라도 되는 것처럼 강아지를 돌보면서 한몫 거들었지만 수잔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5시가 되자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폭풍이 곧 닥칠 듯한 기세였지만 아직 거세지는 않았다. 벌써 눈이 평지에 3,4M정도나 쌓여 있었고, 바람을 맞받고 있는 곳에는 그보다 1M더 싸여 있어서 매그놀리아 사람들은 집안에 틀어박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 "눈이 더 온대요." 부엌에 가서 비스킷을 한 움큼 집어 갖고 나온 모이라가 사람들에게 보고했다. "그런다고 해도 이제는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 못하겠다." 한때 몰리의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안락의자에 축 늘어져 팀이 말했다. "치울 만한 눈은 다 쳤으니까." 몰리가 웃고 있는 모이라에게 수화로 말했다. "네 아빠의 영어실력은 순 엉터리야!" "그만 좀 해" 팀이 요구했다. "그 수화 좀 이제 그만하자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거든 당신도 배우세요." 몰리가 놀렸다. "당신 딸은 번개처럼 빠르게 배우고 있어요. 이걸 따라해 보세요." 그녀가 팀의 앞으로 다가가 수화로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이젠 나도 알지" 그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건 잘 잤냐는 인사지, 그렇지?" "맞아요." 몰리와 모이라가 깔깔 웃으며 동시에 맞장구쳤다.
팀보다는 눈치가 한결 빠른 제다가 옆에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팀이 몰리를 똑바로 바로 보며 천천히 수화를 흉내 냈다. 바로 그거예요. 몰리가 속으로 말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에게 고백을 하게 했구나.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저 말을 내게 할 만큼 진실하지 않아, 아니 그는 자기가 하는 말의 뜻조차 모르고 있어! 팀이 다시 의자에 앉아 말을 돌렸다. "트리가 멋져 보이는데. 옛날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 모이라, 내가 너 만했을 때 크리스마스를 대부분 여기서 몰리와 같이 보냈다는 걸 모르지?" "그럼 재미있었겠네요." 딸이 대꾸했다. "아빠의 엄마와 아버지도 같이요?" "그렇진 않았지"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나의 어머니는 크리스마스 때 자주 우리와 같이 지내지 않았어. 또 아버지는...어, 너 내가 파리에서 스크루지에 관해 해준 이야기 생각나니?" "구두쇠 영감요?" 모이라가 낄낄댔다. "그래 바로 그 사람이야" 몰리가 아이를 부추겨 주었다. "너희 할아버지가 바로 그랬어." 팀이 엄숙하게 말했다. "스쿠루지 영감 같은 구두쇠였어! 크리스마스를 믿지 않으셨지"
"오빠는 그러셨지" 제다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분은 사람들까지도 믿지 않으셨어. 주여, 그를 편히 쉬게 해주소서! 이제 저녁 먹을까? 음식 앞에서는 아무리 좋은 설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니라!" "손 좀 씻어라, 모이라" 눈에 띄지 않으려고 슬금슬금 피하는 모이라를 내려 보며 몰리가 말했다. "내손은 닳아 없어지겠어요." 아이가 투덜댔다. "조금만 움직여도 누구나 나한테 씻으라고만 한다니까. 내 피부는 다 벗겨져서 쭈글쭈글해지고 말 거예요!" "요 녀석" 아버지의 호령에 모이라는 벌떡 일어나 강아지를 안아들고 한걸음에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수잔은 2층 홀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몰리가 다가갔을 때는 막 전화를 끊고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짓고 있던 참이었다.
"잠깐만, 몰리" 수잔이 돌아서려는 몰리를 불러 세우고 한껏 얌전을 빼며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수잔과 얼굴을 맞대자 엉뚱하게도 할머니가 얼마나 탐욕스런 사람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로서보다는 고리대금업자로서 더 기억됐다! "내가 왜 이 먼 길을 왔는지 팀이 네게 애기했을 거라고 생각해" 수잔이 기분 좋은 투로 말했다. "그가 말했다고는 할 수 없어." 몰리가 대꾸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와 관련된 것도 조금은 있어." "그래?" "그래, 사촌동생아"
구태여 사촌동생이라는 걸 강조하는 데에는 어떤 흉계가 있다. 친척으로서의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몰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난 모이라의 문제를 상의하러 여기 온 거야. 그건 이혼재판에서 확정짓지 못했던 거야. 대개 아이들의 양육권은, 특히 딸일 경우에는 엄마가 갖는다는 건 너도 알 거야" "뭐?" 너무 놀라서 몰리는 제대로 반문조차 하지 못했다. 수잔이 양육권을 가질 수도 있을까? 맙소사! 그녀는 너무 황당한 소리를 들어서 수잔이 혼자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또 우린 내 변호사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수잔이 계속 말했다. "물론 여행이 너무 어려울 경우만이지만....하여간 우리가 변호사의 사무실로 찾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 해. 하지만 다행이야" "그래, 물론이야" 몰리는 아직도 이야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뭐가 행운이란 말이지?" "왜냐하면 내 변호사가 여기 맨체스터에 살고 있기 때문이지"
수잔이 설명했다. "잘됐지? 변호사가 오늘 저녁에 여기로 와주기로 했어. 그래서 팀과 나, 그리고 변호사 셋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된 거야"
"그럼 물론" 여전히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폭풍이 다시 불면 말이야" 수잔이 재빨리 말했다. "그가 맨체스터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자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
수잔의 심중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에 안도하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 그래, 변호사를 오라고 한 거야?" "글쎄, 말한 대로야" 수잔의 얼굴에 악의에 넘치는 음험한 미소가 퍼졌다. 몰리는 전에도 여러 번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래층에서는 빨리 내려오라고 성화였기에 더 이상 곰곰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서 와" 몰리가 수잔의 팔을 잡고 재촉했다. 어찌됐건 크리스마스이브였고, 그녀는 사촌이었으며, 모든 걸 잊고 용서하라는 게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었던가?
크리스마스이브의 만찬은 즉석요리였다. 몰리는 스파게티와 미트볼을 요리하고, 제다가 과일을 곁들인 젤로디저트와 마늘빵을 책임졌다. 팀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고 모이라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수잔은 미소만 지은 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기다리는 흡혈귀와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몰리가 스파게티를 담은 커다란 접시를 들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들어갈 때 팀이 도와주겠다며 달려왔다.
"닿았다!" 모이라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뭐에 닿았다는 거니?" 몰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몰리와 팀은 서로 스파게티 접시를 빼앗으려는 것처럼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겨우살이 나무예요!"모이라가 좋아서 숨 넘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몰리와 팀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겨우살이 나무에 닿은 여자에게는 남자가 키스를 하는 게 풍습이다. 몰리는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팀이 접시를 잡아당기고 그녀에게 따뜻한 입술을 부딪쳐왔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그녀는 더없이 행복함을 느꼈다.
"와, 잘한다." 모이라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참 보기 좋구나." 제다도 한마디 했다.
"스파게티를 흘리지 마" 수잔이 불쾌한 투로 말했다. 수잔의 그 말에 몰리는 그냥 황홀한 기분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해요, 팀" 고개를 저으며 그녀가 말했다.
"겨우살이 나무아래서는 키스를 거절한 적이 없었잖아" 팀이 중얼거렸다.
그래요, 수잔이 당신의 침실에서 나오는 걸 보지 못했을 때는 그랬죠. 당신이 수잔과의 동침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때는 말예요. 하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라하더라도 분별해야 할 게 있어요.
"이 접시나 들고 나가요." 몰리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소스를 가지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걸맞게 식탁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특히 제다가 팀과 몰리의 어린 시절 애기를 꺼내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골칫덩어리 2인조로서 악명을 날리던 어린 시절의 애기를 구수하게 전하자 모이라는 먹는 것도 잊고 애기에 빨려 들어갔고, 수잔도 불평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정작 두 당사자는 쑥스러운듯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그들이 거실로 자리를 옮겼을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모이라가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 아직 태풍이 본격적으로 불지는 않았지만 운전을 하기는 쉽지 않은 시간이다. 모이라는 뛰어나간 지 얼마 안돼서 프란시스 선장의 팔짱을 끼고 돌아왔다.
"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결국 도착했군." 들어오는 길로 벽난로가로 가 손을 비비며 불을 쬐면서 선장이 말했다.
"폭풍이 다시 오고 있어. 내가 놓친 게 뭐 있나?"
"스파게티요, 에이해브 선장님" 모이라가 종달새처럼 지저귀자 그가 고개를 돌리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 몰리와 같이 만났던 그 꼬마 아가씨구먼. 그렇지, 몰리?"
"맞아요, 선장님. 크리스마스이브에 뵈어서 기쁘긴 한데 제가 초대한 걸 잊었나요?" "내가 오시라고 했다." 제다가 선장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늘 같은 날 혼자 지내야 하는 남자가 너무 불쌍해서 말이지"
"게다가 우린 지난 몇 년 동안이나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낸 사이지" 선장이 껄껄 웃었다.
"내가 방해가 되나?"
"천만에요." 몰리가 유쾌하게 말했다.
"사실 우린 오늘 파티에 남자가 모자라거든요. 저녁은요?"
"벌써 먹었지. 이 선물들은 트리 아래에 둘까?"
"내가 하죠, 조시아" 팀이 말하고 두 사람이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옆에서 보기에도 상당히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모르는 분이 계시군요." 선장이 수잔을 보고 말했다.
"아, 수잔, 이분은 프란시스 선장님이셔"
"팀의 아내예요." 수잔이 자신을 소개했다.
"그렇군요." 선장이 힐끗 제다를 보고 눈짓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부인은?"
"재산분재에서 내가 속았다고 생각해요." 수잔이 선장에게 말했다.
"변호사와 난 사정을 조사해 보고 있는 중이에요. 또 당연한 애기지만 딸을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의 사랑이란 억누르기 힘들잖아요!"
"난 그런 건 잘 모른다오." 선장이 투박하게 말하고 몰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밤에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몰리" 그가 말을 끊었다 이었다.
"하룻밤 묵어가도 괜찮을까?"
"그야 얼마든지 괜찮죠." 제다가 몰리를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요." 몰리도 흔쾌히 말했다.
"이리 와 앉으세요, 조시아. 정말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시겠어요?"
"아무것도" 선장이 선언하듯 대답했다.
"잔뜩 배를 채우고 왔다니까. 우린 여행을 하기 전에 잔뜩 배를 채우는 게 신조야. 한데 도대체 누가 또 오고 있지?"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팀이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데..." 그가 누구에랄 것이 없이 말했다.
"눈이 엄청나게 오고 있어요. 이러다가는 사상 처음이라는 말이 나오겠는걸."
"내가 나가 보겠어요." 수잔이 말하자 웬일이냐는 듯이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변호사가 오기로 했다고 애기했었지, 몰리?"
"어, 그래" 몰리가 대답했다.
"깜빡 잊고 있었어." 경황 중에도 몰리는 주인으로서 고민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7사람이 밤을 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침실은 6개밖에 없다. 몰리는 낭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팀은 모이라와 얼굴을 맞대고 버티에 대해서 잡담을 하고 있고, 제다와 프란시스 선장도 오랜만에 만난 연인들처럼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몰리는 수잔이 떠들썩하게 손님을 맞는 소리를 들으며 새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님은 꽤 시간이 흐르도록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수잔과 밀담이라도 나누는 모양이다. 그런데 수잔은 뭘 원하는 걸까? 모이라의 양육권일까? 그런 의향을 비친 건 사실이지만 정작 속뜻은 그게 아닐 것이다. 그렇담? 수잔이 진짜 원하는 건 틀림없이 더 많은 돈이다. 만에 하나라도...수잔이 원하는 게 팀과의 재결합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수잔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텐데!
"여러분" 수잔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식당을 들어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제 변호사인 알프레드 드몽이에요!"
오, 하느님 맙소사! 몰리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수잔이 변호사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소개하는 동안 몰리는 애써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알 드몽!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왜 그런 인간이람! 이제는 그가 기억하지 못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아니, 이게 누굽니까?" 몰리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알 드몽이 아는 체를 했다. 그는 여자들이 한눈에 반할만큼 미남이다. 사소한 결점들이 그 준수한 용모에 가려 여자들에겐 보이지 않을 정도다. 177cm정도의 키에 몸무게는 고등학교 시절에 비해서 거의 불지 않아 보였다. 머리카락은 갈색이었는데 가발일게 틀림없다. 알프레드 드몽, 그는 몰리가 난생처음으로 몸을 허락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남자다. 다행히도 그가 얼마나 탐욕적인 인간인지를 알고는 매정하게 헤어졌지만 말이다.
"오랜만이에요, 알프레드" 몰리가 마지못해 인사르르 하자 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몰리 패터슨이죠, 그렇죠!" 알프레드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요 근래 최고 행운의 주인공, 몰리 패터슨! 당신을 찾으려고 내가 케이프 앤을 다 뒤졌다는 걸 알고 있어요?"
"몰랐어요." 몰리는 입을 다물었다. 알프레드를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근방의 친구들과의 교제는 물론이고 그렇게 애착을 갖던 학교까지 휴직을 했다. 그건 알 드몽이 그녀가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운의 주인공이라니?" 팀이 다가와서 물었다.
"그렇죠." 알프레드가 대답했다.
"복권에서 한몫 잡고, 막 서방세계의 플레이걸로 나섰다가 홀연히 사라졌죠. 그야말로 홀연히 사라졌어요! 하여간 다시 만나서 반갑소, 몰. 당신은 내게 빚을 졌어요."
"날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그녀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내 친구들만이 그렇게 부를 수 있어요."
"아 물론이지" 그가 킬킬댔다.
"그리고 난 친구이상이지 않소, 안 그래, 몰리 피?"
"그녀를 그렇게도 부르지 마시오." 팀이 몰리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은 오랜만에 몰리의 기분에 쏙 드는 행동이었다. 믿음직한 팀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자 용기가 솟는 것 같다.
"하하, 몰리와 난 흥미에 넘친 여러 밤을 함께 지낸 사이요." 알프레드가 떠벌렸다.
"하룻밤이었죠." 몰리가 정정했다.
"또 난 다행히도 집으로 돌아 올만한 충분한 돈이 있었고요, 드몽씨"
"우린 중단했던 그곳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오."
"난 그렇게 생각지 않소." 팀이 말하자 알프레드가 새삼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알프레드는 이내 쓴 입맛을 다시고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권리를 주장하는 거요? 내가 그녀를 먼저 알았소." "이런 젠장!" 팀이 화난 음성으로 반박했다.
"몰리와 난 강보에 있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소. 그리고 당신은 사교모임에 참석한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마시오, 드몽씨. 수잔의 변호사라서 이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는 애기요. 자, 이제 당신과 당신의 고객은 나와 서재로 가서 용건을 애기하는 게 어떻소? 애기가 일찍 끝나야 돌아갈 수도 있을 테니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수잔이 끼어들었다.
"밖에 저렇게 눈이 많이 오고있 는데 누가 운전을 할 수 있겠어요? 내 생각엔 알은 여기서 묵고 가야 한다고 봐요."
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가 불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 집은 몰리의 집이니까 그건 전적으로 몰리가 결정할 문제야. 자, 가자고!"
팀이 식당을 나서자 알프레드가 미적거리며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수잔은 식당에 있는 사람들을 한참이나 노려보고 나서 몸을 돌렸다.
"잘 들어." 수잔이 나가기 전에 거칠게 말했다.
"몇 마디 우연한 말로 네가 승자라고는 생각하지 마, 몰리. 네가 내 사촌일지는 몰라도 팀은 내 남편이야! 넌 옛날에도 그를 붙잡지 못했지만, 지금도 네가 그를 차지하도록 내가 가만있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더러운 짐승을 내 앞에서 치워 버려, 이 계집애야! 넌 위생관념도 모르니?" "허, 참!" 제다가 기가 찬 듯이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천박해요." 모이라가 말했다.
"어째서 버티가 더럽단 말이죠? 오늘 오후에도 목욕을 시켰는데!"
"신경 쓸 것 없다." 몰리가 아이를 달랬다.
"세상에는 정신적으로건 육체적으로건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디저트나 마저 먹고 트리에 불을 켠 다음에..."
"그 다음엔 침실로 가서 산타클로스가 오는 걸 기다려야죠." 모이라가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 산타클로스가 있다고는 믿지 않지만요. 왜냐하면 선물을 주는 건 우리 아빠라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요..."
"속셈이 너무 뻔하다." 몰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선물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늘밤만은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겠다는 거 아니니?"
"몰리 이모는 어떤 땐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 같다니까요!"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11시다. 모이라는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다 지쳐 10시쯤 잠이 들었다. 제다와 프란시스 선장은 아이를 침실로 안아다 눕히는 김에 잠자리에 들겠다고 2층으로 갔다. 몰리는 설거지를 하고 부엌청소까지 마치고 나서 거실 쇼파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바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고 있다. 성난 바람이 창문에 부딪치면서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낡은 배처럼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때 팀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수잔과 그녀의 변호사가 뒤따라 들어왔다. 팀은 곧장 몰리가 앉아 있는 쇼파로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것은 2인용 쇼파였지만 팀이 앉아 비좁은 편이어서 두 사람은 바짝 몸을 대고 앉아야 했다. 수잔은 그들을 냉소적으로 흘기고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랬을 거야" 모이라가 트리를 보며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몰리가 애기하자, 팀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우린 집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으니까. 난 딸에게 그것을 보상해 주고 말겠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몰리는 속으로 자기가 돕겠다고 다짐했다. 친구는 그런 말을 마음에 담아 둘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팀은 너무도 잘 놀라는 사람이라서 독신 여성이 그런 말을 하면 다시 달아나 버릴지도 모른다!
"이상한 아입디다." 알프레드가 끼어들었다.
"몇 년 전 처음 수잔을 만났을 때는 수잔에게 이런 딸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는데"
"그래요? 전에도 수잔을 알고 있었단 말이오?" 팀은 애써 무심한 투로 묻고 있지만 몰리가 보기에는 뭔가 유도하는 듯했다. 무심한 체하면서도 상대를 예리하게 살피는 게 그의 특기다. 몰리는 대화를 자세히 듣기 위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럼요." 알프레드가 장황하게 떠벌렸다. "말하자면 난 수잔을 풋내기 처녀 때부터 알았죠." 수잔이 알프레드의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발을 뻗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몰리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팀이 일어나 알프레드의 잔에 브랜디를 가득 부었다. 변호사는 이미 상당히 취해 있었는데도 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수잔이 안절부절못하면서 변호사를 제지하려고 하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그리고 난청도 그렇죠." 변호사는 이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 가문에는 귀머거리가 상당히 많거든요. 내 고모와 누이도 선천적인 난청이죠. 유전성이라고 하더군요. 또 여자 쪽으로 더 쉽게 유전되나 봅니다. 다행히 난 건너뛰었지만 말이오."
"그것 참 다행이군요." 팀이 붙임성 있게 맞장구를 쳐줬다.
"당신이 난청이었으면 변호사 노릇이 무척 힘들었을 테니 말이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수잔?"
"난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수잔이 소리쳤다.
"알프레드의 잠자리는 있니?"
"응, 그래" 몰리가 대답했다. "모이라와 내가 같은 방을 쓸 테니까 모이라의 침실을 쓰면 돼. 네가 안내할 테야, 수잔?"
"그래, 내가 뭔가를 보여주지" 수잔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제서야 알프레드는 자기가 실언을 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는 홍당무처럼 얼굴이 시뻘개져서 수잔을 따라갔다.
"저게 전부라고 생각해?" 둘만이 남게 되자 팀이 그녀에게 물었다. 얼굴표정만으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애기해 보세요."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은 뭔가 알고 있군요. 오래전부터 알 드몽은 수잔을 알고 있었어요. 알 드몽은 난청을 앓고 있는 가계에서 태어났고요. 2에다 2를 더하면..."
"5지" 팀은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말을 막았다.
"내 말 잘 들어, 몰리. 이 애기는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것이니까. 모이라는 내 딸이야.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한은 그 애를 사랑하고 기쁘게 해줄 거야. 그 애의 실제 아버지가 누구건 그건 상관없어. 이해할 수 있지?" 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 그녀가 소곤댔다. "알겠어요."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크리스마스트리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었다. 바람은 한결 잠잠해졌지만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벌써 새벽이에요, 팀. 날이 새기가 무섭게 모이라가 일어날 텐데 준비를 해야죠. 선물은 홀의 벽장에 있어요. 내가 양말을 매달 테니까 그걸 가져올래요?"
"그렇게 합죠, 산타클로스 할머니"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예 순록을 위한 건초까지 대령하겠습니다."
"감히 못할걸요!" 몰리가 일부러 무서운 시늉을 했다.
"건초는 창고에 있으니까 건초를 가져온다고 거길 갔다가는 베르나르 개가 2마리는 있어야 당신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조심합죠." 그가 여전히 우스갯소리를 했다. "베르나르 개는 외로운 여행자를 위해서 목에 술통을 메고 다니는 개라면서요, 그렇지 않사옵니까?"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아요. 내 목에는 아무것도 걸고 있지 않단 말예요!"
"그래도 당신은 날 바보로 만들 수도 있었어." 팀의 말에 몰리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어느새 그의 팔이 그녀의 목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감았다. 포옹은 단지 우정 어린 포옹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건 이내 격정에 넘치는 키스로 이어졌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죠?" 그가 다소 진정되어 뒤로 물러서자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옛날을 위해서" 그가 조그맣게 중얼댔다.
제발 내게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몰리는 속으로 격하게 말했다. 즐거웠던 옛 시절은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이 좋아요, 팀 홀랜드. 난 한 번도 이처럼 격정에 넘친 키스를 해 본적이 없어요. 지금처럼 꿈결 같은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그가 흥을 깨버렸다.
"날 도와줘야 돼, 몰리"
"뭘로요?" 은근한 속삭임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직도 그의 마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수잔과 아둔한 그녀의 변호사에 대해서 말이야"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생각엔 모든 게 준비됐다고 봐. 난 프랑스에서 그녀와 법적으로 이혼을 했어. 아무 하자가 없어. 하지만 미국의 법정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어. 돈도 중요하지만 내가 견딜 수없는 건 모이라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야"
"내가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거라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몰리가 대답했다. "나도 모이라를 사랑해요..." 내가 그 아이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거나 다름없이 말이에요! 입에서 그 말이 뱅뱅 돌았지만 그녀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2가지가 있어." 그가 주저하다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그들 두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거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말이야, 할 수 있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쉽진 않겠지만 좀 참으면 되겠죠. 또 한 가지는요?"
"그건" 그가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 댔다. "가장 큰 문제는 법원의 일반적인 판례가 아이의 양육권을, 특히 아버지가 재혼을 하지 않았을 때는 어머니 쪽에 준다는 거야. 그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쪽이 딸을 훨씬 더 잘 키울 수 있다는 작은 반증이기도 하지"
"그래서요?" 몰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바짝바짝 타고 심장이 기대로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재혼할 작정이세요, 팀?"
"그래야겠지" 그가 어렵게 말했다. "모이라를 위해선 당연하지"
"그럴 테죠. 그 행운의 주인공은 나도 아는 여잔가요?" "몰리?" 그가 등을 보이고 서너 걸음 걷다가 몸을 돌렸다. 뭔가를 꾹 참고 있는 표정이다.
"몰리, 당신은 그 주인공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팀? 그 여자가 무척 힘들지도 모르는데. 아마도 그 여자는 10살때부터 남모르게 당신을 흠모했었던가보죠? 그래, 그 여자로부터 언질은 받았어요?"
"직접적으로는 없었어." 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다고모님 말씀이..."
"아하! 비밀이에요? 내게도 말해줘요, 팀"
그가 숨을 훅 들이마시고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아냐"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직은 당신이 내 애기를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 같아. 선물은 어디 있다고 했지?"
"홀의 벽장에요."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획 돌렸기 때문에 팀은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걸 보지 못했다.
몰리의 침대는 이미 모이라와 2마리의 개가 차지하고 있어서 새그를 쫓아내지 않고는 침대에 들어갈 수 없었다. 몰리는 새그를 침대 아래로 끌어내렸다. 늙은 개는 불만스러운 듯 터벅터벅 걸어 문 쪽으로 가 배를 깔고 누웠다. 몰리는 안락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캄캄했지만 하얀 눈 때문에 어렴풋하게 밖의 풍경을 볼 수는 있었다. 늙은 개가 자면서 푸푸거리고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불쑥 그녀는 우리는 같이 늙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밤에는 잠시나마 손에 구리반지라도 낄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편자던지기 놀이에나 쓸모가 있는 것이었지 결혼반지는 아니었다.
아둔하기 짝이 없는 팀! 그렇게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여자에 관해서는 어찌 그리 어리석을까? 그가 말하는 여자는 정말 새로운 여자일까? 혹시라도 수잔과의 재결합을 생각할 만큼 어리석은 건 아닐까? 세상에 어떻게 모이라의 실제 아버지가 알프레드 드몽일 수 있단 말인가? 수잔이 팀과 결혼했을 때는 알프레드는 아직 법대에 재학 중이었고, 그로부터 2년이나 뒤에 졸업했다. 그가 유럽으로 날라가 그런 추잡한 짓을 할 만한 가능성은 아무리 봐도 희박하다! 그렇담 팀의 고모는 알 것이다! 그래, 제다는 내 편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아냐, 그 두 사람, 선장과 제다는 이 알 수 없는 비밀에 깊이 개입되어 있다. 그렇담 당장 가서 제다를 깨워 물어 보자!
생각을 당장 실행에 옮기기로 작정하고 몰리는 옷을 걸쳐 입고 슬리퍼를 신었다. 문 쪽에 누워 자고 있던 새그가 한참이나 버티다가 일어나 그녀가 나가자 어슬렁거리며 따라 나왔다. 제다의 방은 불이 꺼져 있어서 캄캄했다. 몰리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가 불렀다. "제다?" 대답이 없었다. "제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왕 내친 걸음이라 그녀는 어깨를 흔들어서라도 깨울 작정으로 담요를 들췄다.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손을 휘저어 보았다. 보이는 것도 잡히는 것도 없다. 한참을 더듬거려서 침대에 딸린 전등을 켰다. 제다는 그녀의 침대에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몰리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이제 어쩌지?"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유명한 희극작가인 길버트 같은 사람이라도 와야만 그녀의 처지에 맞는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이리라. 제다의 연세가..., 아마 60살이지? 물론 그렇게 늙은 건 아니다. 뭘 생각하고 그렇게 늙은 게 아니란 거야? 너 혼자 엉뚱한 상상을 하는 건지도 몰라. 화장실에 갔는지도 모르잖아? 프란시스 선장도 같은 나이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늙은 건아냐. 어떤 노인보다도 기운이 넘치지!
호기심에 사로잡힌 몰리는 진짜 텅 빈 화장실까지 조사했다. 제다 아주머니는 1888년의 대폭설 이후처음으로 미친 듯이 눈이 퍼붓고 있는 한밤중에 실종된 것이다. 그렇다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볼 수는 없잖은가. 더욱이 모이라만 빼놓고는 모두들 성인이고, 그들이 당연히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권한이 있다. 그래,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잔의 방을 지날 때 다시 한번 엿보고 말았다. 수잔의 방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어서 안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빈방이 또 하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맥이 풀리고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괜히 침실이 모자란다고 걱정했잖아. 벌써 빈방이 2개나 되는데 말이다. 그녀는 옷깃을 여미고 자기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몰리는 곤히 자고 있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따뜻한 온기가 몸을 감싸자 졸음이 밀려왔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은 햇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대신 두꺼운 구름만이 매사추세츠의 북쪽 하늘을 덮고 있고, 눈은 그쳐 있었다. 예상대로 모이라는 날이 새기가 무섭게 눈을 뜨고 부산스럽게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몰리도 덩달아 아이의 부산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온 집안이 아이의 즐거운 환성으로 시끌벅적했다.
"그 꼬마 좀 조용히 시킬 수 없겠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아래층으로 내려온 알프레드가 투덜댔다.
"그럴 수야 있죠." 몰리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하지만 누가 원하는데요?"
"나요." 알프레드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가 아버지라면 아이의 볼기짝을 두들겨 주겠소!" "당신이 그 애 아버지라면 그럴지도 모르죠." 몰리가 야무지게 응수했다. "커피와 토스트, 계란이 있으니까 그거나 들어요."
"난 커피와 크루아상이라야 되오." 그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식성도 까다로우시네" 제다가 신랄하게 비꼬았다.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네요." 부엌으로 들어가며 몰리가 노부인에게 말했다.
"뭐가 나빠 보이지 않다는 게야?"
"저, 어젯밤에 아주머니를 찾았었거든요." 몰리가 빙그레 웃자 제다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이는 좀 들었지만 아직 죽진 않았어. 아직은 아니라고 새침떼기 아가씨. 그래, 왜 날 찾았는데?"
"지금은 필요 없어요.": 몰리가 한숨을 쉬었다. "팀과 애길 했었거든요. 애길 들어보니까 아주머니도 팀의 재혼작전에 개입되어 있는 것 같던데..., 내가 관여할 건 아니지만 그는 그다지 열성적인 게 아닌 것 같아요."
"작전?" 제다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런데 그게 너완 상관없단 말이지?"
몰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네가 왜 당황했는지 알겠다." 제다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건 팀이 설명할 문제고, 난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다. 프란시스 선장님이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독립기념일 같은 휴일이면 날 찾아오는 걸 알고 있었니?"
"정말요?" 몰리가 밝게 웃었다. "즐거웠어요?"
제다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최고지. 독신생활이라는 게 남들이 애기하는 것하고는 많이 틀리거든"
"전 모르겠어요." 몰리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난 괜히 바쁘기만 해서 깨닫지 못한 것 같아요."
"눈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것 같니?" 제다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지금이 기회다. 2층으로 달려가서 골라잡으렴."
"못할 것 같아요." 몰리가 침울하게 대꾸했다. "사실, 어젯밤에 아주머니 방만 살핀 게 아니에요. 다른 방까지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복도의 통행이 빈번했던 건 분명해요. 통행세를 받았다면 한몫 잡았을 거예요. 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내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어요."
"쯧쯧" 노부인이 말했다. "커피포트 좀 다시 다오."
거실에서 딸과 장난을 치던 팀이 기회를 엿보다 부엌으로 들어왔다.
"허허, 왜 이리들 아침부터 우울한 얼굴들이죠?"
"쳇, 쩨쩨하긴" 몰리가 말했다. "아침은 먹었어요?"
"먹었지" 그가 대답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굉장한 넥타이는 누가 저한테 준 거죠?"
"불을 뿜는 노란색 용무늬가 있는 거요? 그게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몰리가 새침하게 말했다. "그게 당신이 내게 준 녹색 숄과 견줄 만하잖아요. 캉캉 춤을 추는 무희들의 무늬가 있는 거 말예요."
"자, 종이 울려서 1회전은 끝났습니다." 제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 코너로 돌아가 주세요. 알프레드, 토스트는 다 먹었수?"
"누구, 저요?" 변호사가 충혈된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술 꽤나 마신 모양이다. "이야기를 좀 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홀랜드"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팀이 냉담하게 대답했다. "충분히 생각해봤지만, 내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안 된다는 거죠! 한 푼도 더 줄 수가 없소. 그리고 내 딸에게 조금이라도 엉뚱한 짓을 했다가는 그게 누구건..." 그의 목소리는 살기등등했다. "가만 두지 않겠소. 자, 토스트 좀 더 드시겠소?"
바로 그 순간, 그 집에서 북쪽으로 1.5KM쯤 떨어진 노르만 가에서는 빌리 선더슨이라는 양반이 늦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배달해야겠다며 무모하게도 눈길에 운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웬만큼 쌓였어야지, 그가 교차로를 지날 때쯤에 개가 한 마리 길을 잃고 창 앞에 나타나자 개를 피한다는 게 그만 미끌어져서 길옆에 있는 전신주를 들이받고 말았다. 전신주가 기울어지면서 전선이 과열되어 끊어지고 매그놀리아 마을의 절반쯤이 불에 나가 버렸다. 그래서 몰리의 집에도 불이 나가게 됐다.
"이런, 젠장!" 팀이 투덜거렸다.
전기가 나가면서 자동으로 비상발전기가 돌아가게 되어 있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제기랄!" 팀이 다시 투덜거리며 일어나 작업복을 걸쳤다. "창고에 가서 손으로 발전기를 돌아가게 해야겠는 걸"
"저도 돕겠어요." 몰리가 돕겠다고 일어났다. 그러나 알프레드는 자기는 상관할 바 아니라는 표정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 신경통 때문에 거들지 못하겠고, 프란시스 선장님을 불러오마" 제다가 말했다.
"아니, 그럴 것 없어요." 팀이 만류했다. "고모님은 랜턴과 가스 불같은 거나 살펴 주세요. 전기가 나가도 난방은 상관없나, 몰리?"
"그럴 거예요."
"아빠, 나도 가도 돼요?" 밖에서 뛰어 놀고 싶은 생각에 모이라가 나섰다.
그는 안 된다고 하려다가 몰리가 등을 쿡쿡 찌르자 승낙했다.
"그럼, 되고말고. 대신 옷을 두텁게 껴입고, 강아지는 안에 두고 나가야 한다. 이런 날씨에는 강아지가 견디지 못하니까."
"이것도 쓸모가 있군요." 섬뜩할 정도로 추운 밖으로 나서면서 몰리가 말했다.
"이 스카프로 코를 감싸는 게 좋겠어요."
"아니, 캉캉 춤을 추는 아가씨들이 있는데도?"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체신 머리 없이 굴지 말거라" 그녀가 울적하게 말했다. "눈삽을 들고 가라, 이놈"
"어디로 가실 건데요?"
"명령은 내가 한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깔깔댔다. "주인은 나고 넌 하인이다. 자, 가자!"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 군요." 팀은 눈삽을 그녀에게 떠넘기고 털모자를 한껏 멋부려 쓰고는 앞장서 나가 버렸다.
"팀 홀랜드, 이 더러운 쥐새끼 같은 놈" 제임스 캐그니의 흉내를 내려고 애쓰며 그녀가 소리쳤다. "돌아와서 삽질을 해라!"
"아빠를 그렇게 야단쳐선 안돼요." 모이라가 등 뒤로 다가와 말했다.
"네 아빠지 내 아빤 아니다." 몰리가 툴툴댔다. "팀 홀랜드, 이리 오라니까!"
"명령대로 하고 있수다." 그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걸어가라고 했잖소! 우리는 발전기를 돌리려는 거지 길을 내려는 건 아니오. 눈이 발목까지 밖에 쌓이지 않아서 난 얼마든지 걸아갈 수 있다고. 내가 가서 발전기를 돌리고 오는 동안 두 사람은 눈을 치우고 있어!"
"난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몰리가 옆에서 장난감 삽으로 눈을 헤적이고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몰라요." 모이라가 말했다. "벙어리장갑을 끼면 어떻게 수화를 해요?"
"못하지" 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또 밤에도 못하고. 자, 착한 꼬마 아가씨들처럼 눈을 치워볼까?"
"몰리 이모는 아니에요." 아이가 삽질을 하며 말했다.
"뭐가 아니라는 거니?"
"이모는 꼬마 아가씨가 아니라고요." 모이라가 키득거렸다. "착한 건 뭔지 모르겠어요. 근데 아빤 이모가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래요."
"글쎄" 몰리가 삽질을 더욱 빨리 하며 느릿느릿 말했다. "더 애기해 봐! 아빠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니?"
"아니 되옵니다, 마마" 모이라가 낄낄거렸다. "전 밀고자가 아니거든요. 어, 저게 무슨 소리예요?"
몰리가 욱식거리는 허리를 폈다. "이제 나도 늙었나 보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저 소리는요, 젊은 아가씨,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죠."
"그럼 눈을 더 치울 필요가 없겠네요?"
그들은 팀이 개선장군처럼 으쓱거리며 돌아올 때까지 눈싸움을 하다가, 팀이 다가오자 같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휴, 추워" 수잔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문 좀 닫아! 동태가 되겠어! 세상에 눈 속에서 뭘 한 거예요, 팀?"
"전기가 들어오게 했지. 몰리가 전기요금을 내지 않았거든!"
"알 만하군" 수잔은 이내 냉소적으로 말했다. "집이 이렇게 너저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때려 부수고 판잣집이나 짓는 게 낫겠어."
몰리는 수잔이 일부러 싸움을 걸고 있다고 생각하고 꾹 참았다. 아무리 그래 보라지 내가 넘어가나. 팀이 친절하게 대해 주라고 했으니 들어줘야지.
"그렇잖아도 한 건설 회사로부터 그런 제안을 받았어." 그녀는 비비꼬인 투로 말했다. "50만 달러를 주고 내가 살집도 마련해 준다고 하던데"
"그런데도 거절했단 말야?"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수잔이 반문했다.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어."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즘의 부동산 시세를 모르는 모양인데, 이 집터가 3만 평방미터야. 이걸 팔아서 내가 다시 이 정도의 넓은 이사할 만한 집을 찾을 수 있겠어! 불가능해"
"하지만 파리나 뉴욕 같은 데서 살면...."
"안 돼, 난 시골뜨기잖아. 아침은 먹었어?"
"아니. 제다에게 아침 좀 달랬더니 골을 내며 2층으로 올라가 버렸어. 아마 지금 2층에서 그 선장이라는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하고 있을 거야. 몰리, 넌 어떻게 그런 사람을 재워주니? 아무튼, 밤새 추워서 침대에서 오들오들 떨었어!"
"세상에, 너야말로 누구 침대에 있었는데?" 몰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수잔은 듣지 못했지만 팀은 그 소릴 들었다.
"열을 세 봐" 팀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소곤댔다.
"벌써 두 번이나 셌어요." 그녀가 귓속말로 대꾸했다. "수잔, 뭐 먹을 거야? 토스트? 그레이프 프르트?"
"다 필요 없어." 그녀의 심술은 숙취 때문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너무 심했다.
"아니, 토스트 좀 줘. 부스러기는 털어내고, 제발이지 태우지 좀 말아줘!"
10,11,12...빵을 구으며 몰리는 속으로 수를 셌다. 부스러기까지 털어내 달라고? 얼핏 옆을 보니 모이라가 손가락을 꼽으며 열심히 수를 세고 있었다. 아이는 몰리를 쳐다보며 빙긋 웃고는 계속 손가락을 꼽앗다. 18, 198, 20. "그만해" 몰리는 수화로 말했다. "그래도 네 엄마야"
모이라가 고개를 힘껏 흔들고 수화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그 보기 흉한 손가락 놀림 좀 집어쳐" 수잔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눈 속에 갇혀 있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내 앞에서 그 바보 같은 짓을 해야 하겠어?"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그래?" 팀이 점잖게 한마디 했다. "두 사람이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중이란 걸 알면 오히려 보기 좋을 거야. 한데 왜 수화를 하지, 모이라?"
아이가 아버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보청기 배터리가 다 됐어요." 아이는 아주 심각하게 말했다. "그래서 배터리를 갈 때까지는 수화와 입술 모양만으로 알아들어야 돼요. 파리에 있는 엄마 친구들이 그걸 좋아할까요, 엄마?"
커피를 마시다가 사래가 들렸는지 수잔이 켁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팀이 급히 달려가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몰리는 모이라가 수잔을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그때 처음 들었다. 이제 엄마를 받아들인다는 뜻인가? 그러나 이내 그녀의 의문은 풀렸다. 아이의 도전적인 눈빛을 보았던 것이다. 팽팽하게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때 버티가 문지방을 넘어 부엌으로 뒤뚱거리며 들어왔다. 모이라가 반색을 하고 강아지를 얼렀다.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마루를 위태위태 걸어가다 그만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불행히도 수잔의 다리 아래로 달려간 것이다.
"저 더러운 짐승 좀 없애란 말야!" 그녀가 악을 쓰고 발길질을 했다. 팀이 조금만 더 늦게 그녀의 발목을 잡았더라면 여지없이 강아지가 발길질을 당할 뻔했다. 모이라가 정신없이 달려가 강아지를 안아들고 저만큼 달아났다.
"내 강아지한테 손끝 하나 대지 말아요." 아이가 야무지게 쏘아붙였다. "절대로!"
"웃기고 있네" 수잔이 표독하게 말했다. "네 아버지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난 조만간 양육권을 찾기 위해서 소송을 낼 거야. 그럼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그때 보자. 그놈의 강아지 새끼건, 볼썽사나운 손가락질이건, 버르장머리건 내가 그냥 두나!"
"싫어요." 모이라가 아버지의 뒤로 슬금슬금 숨으며 힘없이 말했다. "난 싫어요. 당신과 살 바에는 차라리 도망가 버리겠어요. 아빠, 그렇다고 말해 줘요!"
"그래, 아무래도 말해야겠다." 팀은 잠시 몰리를 바라보고는 이내 무겁게 말을 꺼냈다. "7년 전에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만 없었더라도 프랑스 법정에서 내가 양육권을 인정받지 못했을 거야. 난 당신이 미국의 법정에서 혈액형검사 따위와 같은 것을 받자고 주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데 말야, 그럴 작정인가? 당신의 변호사인 드몽씨와 같이 혈액형 검사를 받자고 주장해서라도 소송을 내겠냐고?"
"악마..." 그녀가 의자를 뒤로 밀치며 중얼거렸다. "염병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고 말테니 두고 봐. 그래, 모이라에게 모든 걸 말해 버릴 테야. 친아버지도 아닌데 독신으로 살면서 아이를 데리고 살겠다는 거야?"
팀의 얼굴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냉랭해졌다. 수잔은 엉겁결에 뱉아놓고 자기도 놀라서 다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계속해보시지" 팀은 조용히 말했다. "모이라와 난 이 문제에 관해서 충분히 애기했어. 실제의 성만 빼놓고는 아이도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 그래, 정 소원이라면 들어주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도록 해주겠다고.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수잔" 그가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데 몰리와 내가 결혼할 거라는 걸 당신이 제일 먼저 알았으면 좋겠군!" 수잔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모든 걸 이겼다고 생각하시는데, 난 아직 당신과 끝난 게 아니야, 팀 홀랜드, 절대로!" 그녀는 씩씩거리며 나가 버렸다.
"근데 아빠" 모이라가 질질 끌며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이에요, 아빠. 몰리 이모와 아빠가 결혼할거라는..."
"아무래도 내가 좀 성급하게 애기한 것 같구나. 몰리 이모와 할 애기가 많으니까 넌 강아지와 좀 나가 주겠니?"
"그래, 좀 그래 주겠니?" 몰리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지금처럼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사랑의 고백도 없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이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속절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몰리, 이렇게 불쑥 말해서 미안해" 팀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도리질을 쳐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팀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몰리? 달리 방법이 없었어. 수잔도 내가 당신과 결혼을 하면 법정으로 가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어떤 판사도 그녀보다는 당신이 낫다고 생각할 거야"
"지금은 당신과 애기하고 싶지 않아요." 몰리는 매몰차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할 일이 많아요. 또 당신과 애기하고 싶지 않아요, 팀 홀랜드. 나가줘요, 제발!" "알았어."
그가 나가고 부엌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몰리는 싱크대로 달려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저 일만이 그녀가 할 일이라는 듯이 바삐 손을 놀렸다. 정말 아무하고도 마주치기가 싫었다. 애기는 더욱더 할 기분이 아니었다. 팀 역시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 창고 앞까지 말끔히 눈을 치우고 벼랑의 전망대에 이르는 길도 냈다.
"참 어리석은 짓도 하는구나." 찬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 밖으로 나온 제다가 면박을 주었다. "도대체 누가 다니라고 길을 내니, 그래?"
"아무도 없겠죠." 팀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몰리의 아버지가 생전에 하시던 버릇이에요. 그분은 바다를 너무 사랑해서 눈만 오면 이러곤 하셨거든요. 그래서 나도 그냥 한 거예요. 하지만 이건 누구의 마음도 아프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기야 할 테지": 제다가 못마땅한 투로 대꾸했다. "큰길까지나 치웠으면 좋겠다." "그건 나중 일이에요." 팀은 눈삽을 놓으며 숨을 돌렸다.
"제설차가 오기 전에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이틀은 있어야 제설차가 올걸요. 라디오에선 뭐래요?"
"라디오에서도 그러더구나. 오늘밤이나 내일부터는 갤 거래. 그래도 제설차가 여기 매그놀리아까지 오려면 이틀은 기다려야 되니까 외출은 삼가라고 하더라. 우린 외출할 필요는 없으니까, 뭐!"
"젠장, 이틀씩이나 이놈의 집에서 그 지겨운 인간들하고 같이 지내야 한단 말인가! 그 인간들이 그냥 있을 리는 없고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을 텐데"
"그래, 그들이 미운 건 이해하는데, 너처럼 영리한 아이가 어쩌자고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니?"
"솔직히 전 모이라와 날 돕기 위해서 기꺼이 몰리가 결혼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 그래" 제다는 신랄하게 비아냥댔다. "그렇게 애기했다는 건 이미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가 조심스럽게 인정했다.
"그래, 잘했구나. 수잔이 처음으로 알아서"
"난...네, 그래요. 얼마든지 꾸짖으세요." 팀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제가 또 실언을 한 거군요, 그렇죠? 네, 맞아요. 몰리에게 먼저 애길 했어야 했어요. 먼저 몰리에게 물어 봤어야 하는데..., 하지만 몰리와 같이만 있으면 도대체가 말이 나와야 말이죠. 그때가 아니면 도저히 말을 못할 것 같았어요! 이제 어떡해야 좋죠?"
"그걸 나한테 물어, 지금?" 실망스럽게도 노부인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 시원스레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난 지금껏 당사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여자 하나 못 다루는 남자는 보지를 못했다! 한 번도 못 봤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야 물론이지. 몰리 패터슨이 널 사랑한건 100년도 더 됐을 게다. 내가 어떻게 수습해 볼 테니까 넌 방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예 큰길까지 눈을 치우는 게 어떻겠냐? 해안가를 산책하는 것도 좋겠지?"
"참, 고모님은 사람 약 올리는 데는 천재라니까요."
부엌에서는 여전히 몰리가 꿀벌처럼 일만 하고 있었다. 이제 눈물은 말라 버렸는지 울음은 그쳐 있었다. 제다가 추위로 발갛게 된 뺨을 문지르며 부엌으로 들어왔건만 그녀는 모른 체 하며 일에만 열중했다. 그러나 제다가 일부러 냄비를 딱딱 소리가 나게 부딪치며 소란을 피우자 마냥 모른 척 할 수 없는지 만류했다.
"하는 수 없잖니" 제다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내일이 팀의 생일인데 케이크는 만들어줘야 하잖겠어?" "그럼 지금..."
"딸기 쇼트케이크를 만들고 있다." 몰리의 말문을 막고 제다가 말했다. "팀이 제일 좋아하는 거지. 생크림을 잔뜩 넣고 옛날 뉴잉글랜드 식으로 만든..."
"생크림은 없어요." 몰리가 말했다. "딸기와 크림은..., 내가 그걸로 뭘 하려고 했는지 알아요..."
"몰라" 제다가 다시 말을 막았다. "내게 말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가서 모이라에게 수화나 가르치지 그래?"
"나가서 팀이나 돕겠어요."
"아니, 그건 좋은 생각이 아냐. 그냥 혼자 좀 괴로워하게 내버려둬"
"괴로워하게 내버려두라고요?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게요?" 몰리가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고모님의 조카가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요?"
"아니, 모르겠다. 바빠서 듣고 싶지도 않다. 자, 어서 나가 보렴."
몰리는 머뭇거리다가 부엌을 나서고 말았다. 거실에서는 모이라가 그림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이렇게 고달프다니까." 안락의자에 앉으며 몰리가 중얼거렸다.
"난 이해를 못하겠어요." 아이가 앙증맞게 말했다. "난 너무너무 즐거운데... 정말이예요, 몰리 이모, 난생 처음이었어요!"
자신에게는 그렇게 견디기 힘든 날이었는데도 누군가는 즐거웠다는 게 놀라워서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이 정말 더없이 밝아보였다. "선물 땜에?"
"그것도 사실이지만" 모이라가 대답했다 "선물보다 더 소중한 게 있잖아요? 안 그래요? 아빠와 몰리 이모가 결혼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선물이 어디 있겠어요?"
"그건...네 아빠와 내가 결혼하는 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냐, 안 그래?"
모이라가 몸을 들썩하고 그녀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중요하지 않아요? 오늘 있었던 일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에요!"
아이가 몰리의 손을 잡았다.
"미처 깨닫지 못했구나." 몰리가 중얼거렸다.
"글쎄, 그런 것 같아요."
몰리는 어느새 기분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보청기의 배터리가 다 됐다면서 듣기만 잘 하는구나."
"배터리는 아무 문제없어요." 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접촉 불량 정도로 생각하면 돼요. 그건, 그 여자만 가까이 오면 발생하는 것 같아요."
"그래, 알겠다." 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네 강아지는 어디 있니?"
"너무 피곤한가 봐요. 새그와 함께 방에서 쉬고 있는데요, 그 여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방문을 닫아놨어요."
"그거 잘했다."
"결혼은 언제해요. 그리고 나도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어요?" 모이라가 궁금한 듯 물었다.
"네 아빠는 아직 결혼식 준비까진 못했을 거야. 우선 너도 알다시피 약혼 기간도 있어야 하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도 가져야 하거든" 몰리는 아이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서 잠시 말을 끊었다. 모이라는 이미 충분히 알아들은 것 같았다. 몰리의 시선을 받자 아이는 눈을 깜박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난 네 아빠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몰리가 조그맣게 말했다.
"비록 그를 죽이는 한이 있어도 말야"
"잘됐네요." 모이라가 장난스럽게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몰리는 아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난 언제부터 그럴 수 있었을까? 언제부터 난 회의적인 노처녀로 됐을까? 왜 난 팀 홀랜드가 찾아와서 내 계획을 뒤엎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때마다 형편이 나아지리라고 생각할까? 글쎄, 이번에는 그도 자기 마음대로는 못할 거다. 어떻게 하겠다는 작정은 없다. 하지만 복수를 할 사람은 수도없이 많다. 다 갚아주고 말테다. 수잔 홀랜드는 내 남자를 훔쳐갔으니까, 알프레드 드몽은, 그 인간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팀 홀랜드는 그 오랜 세월 동안을 날 사랑의 열병을 앓게 한 댓가를 반드시 치루게 해야겠지. 단 한 가지 조심할 게 있어. 팀 홀랜드에게 빚을 갚더라도 모이라가 고통을 받는 일은 없게 해야지!
부엌 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란시스 선장이 제다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몰리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알 수 없는 게 남녀의 관계인 것 같다. 누가 그 나이에 사랑에 빠지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랑이란 양쪽에서 우러나는 것일 때는 경이로운 것이다. 바로 두 사람 사이가 그렇다.
가만있어라, 선장님이 아래층에 내려왔을 때 침실 청소를 하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녀는 당장 2층으로 올라갔다. 선장의 방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몰리는 혼자 키득거리며 침대시트를 갈아 끼우고, 정성을 다해 방안을 정돈한 뒤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선장의 방을 나섰다.
"아니, 여기서 뭘 하지?"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로 징그럽게 알프레드가 말했다
"뭘 하긴요. 방청소를 하고 나오죠." 그녀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길 좀 비켜 주시겠어요?"
"자, 자, 몰리" 그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다들 바쁜 것 같은데..."
"수잔만 빼면요." 그녀가 말허리를 자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둘 더하기 둘도 계산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에요, 드몽씨"
"드몽씨? 이런, 우리가 언제 이렇게 예의를 차리는 사이가 됐지! 지난번 만날 때까지도 우린 이러지 않았어. 마침 수잔도 자고 있으니까, 몰, 당신의 침실로 들어가서 애기 좀 하는 게 어떻겠어?"
"그러고 싶지 않아요." 몰리는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파리 한 마리 다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필요하다면 그를 죽여 버릴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방면에는 능숙한 전문가다. 어느새 그는 능숙한 솜씨로 그녀를 꼼짝 못하게 껴안고 그녀의 침실로 밀어 넣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귀여운 사람" 그가 능글맞게 웃었다.
"소리를 지르겠어요." 그녀가 위협했다.
"자, 자" 그가 느물느물 웃었다. 하지만 그녀를 밀어 넣고 뒤를 따라 들어오다가 길게 누워 있는 새그를 보자 잠시 멈칫했다. 기회는 이때다. 두렵지 않다. 몰리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팔을 뻗쳐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무릎으로 냅다 걷어차 버렸다. 호신술을 배워둔 게 다 소용이 있군. 알프레드는 헉 하고 숨을 멈추더니 고통스럽게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새그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무슨 일이냐는 듯 알프레드를 살폈다. 알프레드가 질러대는 신음과 비명을 들었는지 프란시스 선장이 우당탕탕 거리며 뛰어올라왔다.
"죽었어요?" 몰리가 의기양양하게 선장에게 물었다.
"아닌데, 하지만 2세를 생산하는데 지장이 있겠는걸."
너부러져 있는 사내를 대충 살펴보며 선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12월 26일 아침이 됐다. 시계는 하루가 밝았음을 알려 주고 있는데도 해는 뜨지 않았다. 눈은 그쳤지만 하늘을 먹장구름이 덮고 있어서였다. 몰리는 쌀쌀한 아침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발전기 연료가 하루는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장화를 벗으며 몰리가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제다가 대꾸했다. "아침 먹을래?"
"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안 일어났어요?"
"모이라는 일어났고, 선장도 면도를 하고 있다. 드몽씨는 몸이 안 좋은지 내려올 생각도 없나 보더라"
"수잔은요?"
"사람들만 물어 봐야지" 제다가 투박하게 말했다. "난 수잔은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잘 잤니, 팀"
"네, 편히 주무셨어요." 느긋하게 걸어 들어오며 팀이 대답했다. 몰리는 괜히 심술이 나서 깊이 심호흡을 했다. 요즘은 그만 보면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심통을 부릴 것만 같아서였다. 언제 봐도 그다지 미남은 아닌 얼굴에 오늘은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고, 허리를 제대로 못 피고 엉거주춤한 자세다.
"아파 죽겠군" 은근히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제 종일 눈을 치웠으니 당연하지" 제다가 면박을 주었다. "소시지 여기 있다, 몰리"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몰리는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팀이 투덜거리며 힘겹게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아침 먹고 나서 내가 도와주죠. 특효약이 뭔지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친절은 고마운데, 몰리" 팀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좋아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말해 줄 수 없겠어?"
"정작 궁금한 건 왜 묻지 않죠?" 그녀가 깔깔댔다. "당신의 등을 마사지해 줄 생각...."
"그런데 왜 기쁘지 않지?" 그가 말을 가로챘다. "뭘로?"
"그야 당연히 유칼리 나무 기름이죠. 우리 어머니가 요통에는 그게 특효라고 호언을 한 거예요!"
"즉효지" 제다가 거들었다.
"죽어도 그건 안해!" 그가 기를 쓰며 달아나려는 시늉을 했지만 두 여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한마디 덧붙였다. "난 고약한 냄새를 피워대는 사람이란 낙인은 찍히고 싶지 않다고"
"유칼리 나무 기름 좀 발랐다고 죽진 않아요." 소파에 수건을 깔고 팀을 그 위에 억지로 눕게 하며 몰리가 말했다. "지리학 잡지에서 보니까 코알라는 유칼리 나뭇잎만 먹고 산대요. 그러니 그렇게 몸부림치지 말아요!"
익숙한 솜씨로 몰리는 그의 등에 기름을 바르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데"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날 죽이든지 불구로 만들 생각인 줄 알았어."
"그건 내일 봐요." 좀더 힘을 줘 문지르며 그녀가 대꾸했다. "당신한테서도 며칠 동안은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겠군" 그가 낄낄거렸다. "코알라의 입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지? 며칠은 씻어야 냄새가 없어질 거야!"
"난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몰리가 태연히 응수했다. "당신이야말로 그렇겠지만 말이죠, 팀 홀랜드. 난 가죽장갑을 끼고 있거든요!"
"도대체 이 고약한 냄새가 뭐야?" 수잔이 거실 문을 들어섰다. "팀, 어떻게 이런 냄새를 참고 있죠? 아니 몰리가 지금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신경 쓸 거 없어, 수잔" 그가 유쾌하게 대꾸했다. "나와 결혼할 여자는 누구건 그녀가 원하는 마사지 기름을 사용할 권한이 있거든. 유칼리 나무기름인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특별히 수입한 걸 거야, 아마!"
"시시한 소린 그만둬요." 수잔은 콧방귀를 뀌었다. "알프레드가 당신과 애길하고 싶어 해요. 그러니까...."
"하지만 난 그와 애기하고 싶지 않은 걸" 팀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힘들 텐데" 그가 수잔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프란시스 선장님한테 들으니까 어제 엉뚱한 짓을 하려다가 혼났다던데. 그래서 정신 좀 차리면 나도 한방 먹이려던 참이지"
"힘 자랑 할 건 없어요." 수잔이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가능한 한 나도 이 쥐구멍 같은 집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난..."
"아니 내 생일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팀이 비꼬는 투로 말했다.
"저..." 수잔이 더듬거렸다. "난 우리가..."
"더군다나." 그가 냉혹하게 말을 이었다. "그 변호사 양반의 차는 눈 속에 파묻혀 있어. 떠나려면 당장 그 양반을 깨워서 눈을 치우라고 해야 할 텐데?"
"팀" 수잔이 격분해서 말했다. "이런 식으로 끝내서는 안돼요. 당신의 기분이야 어떻든 우린 한때 부부였잖아요. 알프레드와 애길 하세요, 부탁이에요."
그녀의 애원에 팀이 조금 누그러졌다.
"좋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변호사와애기하지, 수잔. 하지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어. 내 마음은 콘크리트처럼 확고하니까. 애인은 일어났나?"
"아직 침대에 누워 있지만..." 수잔이 대답했다. "애긴 할 수 있어요. 당신을 올려 보내겠다고 했어요."
"잠깐만 기다려" 팀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와 수잔 사이에는 낮은 티 테이블이 놓여 있고, 거기에 뚜껑이 열려 있는 유칼리나무 기름병이 있었다. 하지만 수잔은 팀이 알프레드와 애기를 하겠다는 약속에 그만 흥분해서 티테이블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팀의 목을 껴안으려고 달려들었다.
"기름 조심해!" 몰리와 팀이 동시에 소리쳤다.
수잔이 멈칫하고 옆으로 기우뚱거리는 병을 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병은 벌써 나동그라져서 기름이 쏟아지고 있었고, 목표를 상실한 수잔의 손은 잡을 것을 찾다가 기름범벅이 되어 있는 탁자를 짚었다. 몰리가 장갑 낀 손으로 다급하게 병을 잡았지만 수잔의 손에는 이미 유칼리나무 기름이 흠뻑 묻은 뒤였다. 팀이 벌떡 일어나 깔고 누워 있던 수건으로 탁자에 흘린 기름을 닦아 다행히 카펫은 젖지 않았다.
"이걸 어째! 어떡해!" 수잔이 망연자실해서 눈물바람으로 욕지기를 퍼부었다.
"이걸로 닦아" 몰리가 수건을 건네주었다.
"제일 좋은 옷인데" 수잔이 중얼거렸다. "염병할, 이놈의 집구석에선 손에 닿는 것마다 기름덩어리라니까! 다 네 탓이야, 몰리 패터슨! 일부러 네가 꾸민 거야! 지옥에나 떨어져 버려!"
"그런 어리석은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이건 우연한 사고일 뿐이야. 자, 내가 당신 변호사와 애기하기를 원한다면 가서 손을 씻고 와"
한바탕 소란을 피운 수잔은 팀과 같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날 미워하고 있어." 몰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누가 미워해요?" 얼굴에는 온통 초콜릿을 묻힌 모이라가 강아지를 안고 들어오며 참견했다.
"맙소사, 넌 뭐하는 애니? 사고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 같구나?"
"도우려고 온 거예요." 모이라가 변명했다. "고모할머니가 딸기 쇼트케이크와 컵케이크를 만들고 있걸랑요."
"초콜릿 컵케이크?" 몰리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하지만 아이의 품에 안긴 강아지가 바둥거리며 아이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핥아먹는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누가 이모를 미워해요?" 아이가 다시 물었다.
"아무도. 내가 오해했던 거야" 몰리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참, 깜빡 잊었어요. 고모할머니가요 저녁식사를 준비하려면 빨리 하래요. 왜냐하면요 코니시 닭요리만 하면 되는데요..."
"알았어요." 아이의 장황한 설명을 도중에서 가로막고 몰리가 말했다.
"그런데 꼬마 아가씨는 말이죠, 강아지는 강아지 집에 넣어두고 2층으로 올라가서 목욕을 하세요. 깨끗하게요. 청결은 신앙심 버금으로 중요하니까요."
"어휴, 이모는 사람을 괴롭히는 그런 말들을 어디서 안 거예요?"
"당장 못 가니, 안 그러면 정말로 괴롭혀 줄테다." 몰리는 부엌으로 들어가며 아이에게 겁을 주었다.
팀의 생일상은 두 여자에 의해서 그야말로 국제적으로 준비됐다. 양념을 넣고 튀긴 코니시헨 통닭, 멕시코에서 수입한 아스파라거스 야채, 아이다호에서 생산된 감자, 캘리포니아산 완두콩, 그리고 초콜릿크림이 주요한 메뉴였다. 초콜릿크림은 강아지를 찾는다며 부엌으로 들어온 모이라가 특별히 주문한 것이다.
"어디 아장거리고 있겠지" 근심스런 표정의 아이에게 제다가 말했다.
"새그를 찾아봐라. 같이 있겟지" 몰리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아이의 걱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세상을 다 달라는군" 변호사와 애기를 하고 내려온 팀이 씁쓸하게 말했다.
"너무 화가 나서 한 푼도 주지 않겠다고 했지. 정말 한 푼도 못 주겠어. 그런데 그 망할 자식 드몽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지? 몰리 당신에 관해서 추잡한 말을 늘어놓길래 손을 좀 봐줬어."
"아니, 팀, 손가락을 다쳤어요?"
"그만한 이유가 있지" 그가 오른손을 주무르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애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몰리"
"닭에 양념을 해야 돼요."
팀은 말을 더하고 싶은 눈치로 미적거리다가 서재에 있겠다며 쓸쓸히 고개를 젖고 나갔다.
"도저히 저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몰리가 옆에 있는 제다에게 말했다.
"어떤 땐 한없이 좋은 사람인데 또 어떤 땐 심술궂고..."
"심술궂을 땐 아주 심술궂지" 제다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한데 저 심술쟁이 공주님이 어딜 가시나?" 창문 밖을 손짓하며 제다가 말했다. 화사한 옷차림의 수잔이 오돌오돌 떨면서 알프레드의 캐딜락 자동차를 살펴보고 있었다.
"눈구덩이에서 저 차를 빼내지 못할걸요." 몰리가 무심히 한마디 했다.
잠시 뒤 수잔이 상스러운 말을 끊임없이 주절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참 인상적인 어휘들이군." 제다가 못마땅한 듯이 한마디 내뱉었다. 그때 모이라
가 풀죽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아직도 버티를 못 찾았어요." 아이가 힘없이 말했다. "초콜릿케이크 하나 더 먹음 안돼요?"
"조금 뒤면 점심을 먹을 거야" 몰리가 주의를 주었다. "새그를 깨워서 찾아보렴."
"자신이 없어요." 모이라가 한숨을 쉬었다. "새그는 너무 커서 깨우기가 힘들어요."
"해보지도 않고" 몰리가 꾸짖듯이 말하고 다시 손을 바삐 놀렸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벌써 오후 2시다. 점심 준비가 끝났다고 소리치자 한사람 한사람 식탁으로 몰려들었다.
"모이라는 왜 안 보이지?" 모두들 식탁을 두리번거렸다.
"버티를 찾는다고 돌아다녔는데" 몰리가 말했다.
"강아지도 없잖아?" 팀이 의아한 듯 말했다.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몰리는 다급한 표정으로 제안했다. "지하실 계단이 문제예요. 아침에 지하실 문을 잠궜는지 자신이 없어요."
"내가 가보지" 갑자기 팀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장님?"
"난 2층으로 올라가서 찾아보지"
"수잔? 당신은 아래층을 살펴보도록 해"
"난 싫어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난 점심 먹으려고 왔지 집 뒤지려고 온 게 아니에요."
"내가 살펴보마." 제다가 부르르 성을 내며 말했다. "난 너 같은 인간만 보면 식욕이 뚝뚝 떨어진다, 수잔 홀랜드. 아무튼지 빨리 이혼해서 네 성이나 갈기를 바랄 뿐이다. 내 기독교적 양심이 용납하지 않으니까."
식탁엔 몰리와 수잔만 남게 됐다. 몰리는 걱정으로 애가 타는데 수잔은 로봇처럼 음식만 집어먹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몰리가 조용히 말했다.
"너한테 이상한 게 그것뿐이겠어!" 수잔이 이빨을 갈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집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야. 다시는 이놈의 집구석에 발도 들여놓지 않겠어. 구역질이 날 정도라고! 넌 날 너무도 비참하게 만들었어. 내가 네 코앞에서 팀을 훔쳐가서 마음이 아팠었니?"
"그렇게 생각한다니 미안해" 몰리가 말했다. "가만 방금 전에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무슨 소리가 들려? 내 귀에는 저주받은 집이 삐그덕거리는 소리밖에 안 들리는걸. 이 망할 놈의 집은 언제 무너질까?"
몰리는 넌더리가 났다. "넌 정말 구제불능이야!"
바로 그 순간 몰리의 귀에 다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불길한 생각이 엄습했다. 그녀는 허둥지둥 신발을 신고 집 밖으로 내달렸다. 외투는 입을 생각조차 못했다. 집 밖으로 나오니 소리가 한층 더 분명하게 들렸다. 집에서 한참 떨어진 벼랑께에서 땅바닥에 있는 뭔가를 입으로 끌어당기며 새그가 낑낑대고 있었다.
"오, 맙소사!" 몰리는 비명을 지르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다가가는 소리를 듣고 새그가 컹컹 짖기 시작했다. 늙은 개는 몇 발자국 마주 달려와 몇 번 짖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안경을 벗고 있어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벼랑 끝에 뭔가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지만 미끌어지면서 몸이 앞으로 쭉 나갔다. 집 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왔는지 정신이 없었지만 전망대까지 왔다. 모이라가 쓰러져 있었다. 눈앞에서 미끌어지면서 기둥에 머리를 부딪친 것 같다. 이마에서 생채기가 나 있고, 나무기둥 옆에 모자가 떨어져 있었다.
"오, 이걸 어째" 몰리가 중얼거리며 아이의 머리를 흔들었다. "모이라, 모이라!"
아이는 신음소리만 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몰리는 불안을 억누르고 급히 아이를 살폈다. 사지는 멀쩡했다. 단지 이마만 다친 것 같았다. 그때 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급해도 외투는 입고 나와야지" 그는 몰리의 어깨에 두터운 외투를 걸쳐 주고 모이라를 두 손에 안아 올렸다. 몰리는 외투를 입으며 팀이 침착하게 아이를 살펴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강아지를 안아" 팀이 그녀에게 이르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병원으로 가야겠어. 아마 충격 때문일 거야"
"트럭으로 가요. 운전은 내가 할게요."
"그러던지" 그가 차고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하지만 눈 때문에 운전하기가 힘들 테니까 내가 하는 게 좋을 거야"
몰리는 고집을 피려다가 그의 말이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그가 힘이 더 세고 운전 경험도 풍부할 테니까. 그는 어느새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다. 다리가 길어서인지 걸음도 빨랐다. 그 추운 날씨에 뭔가가 몰리의 코를 살살 자극했다. 물론 유칼리나무 기름을 발랐으니까 팀의 몸에서 나는 냄새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팀과 그녀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냄새가 코를 싸쥘 정도로 심하게 났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의 진원지를 찾았다. 강아지에게서 나는 게 틀림없었다. 유칼리나무 기름을 잔뜩 쳐바른 것처럼 버티가 역한 냄새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팀이 창고 문 앞에서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몰리는 버티를 내려주고 창고 앞으로 달려갔다. 또 마침 그때 프란시스 선장이 집안에서 뛰어나왔다. 세 사람이 달라붙자 문은 쉽게 열렸다.
"그 변호사 말예요." 팀이 말했다. "이리 나오라고 하세요. 병원에 같이 데리고 가죠."
선장이 집으로 들어갔다. 몰리는 트럭에 올라타 운전석 아래에 자석으로 붙여둔 비상키를 찾아 꽂았다. 팀이 올라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추위로 한참이나 씨름해서야 시동이 걸렸다. 몰리는 뒷자석으로 가 모이라를 무릎에 안았다.
"걱정할 것 없어." 팀이 말했다. "그저 충격을 받은 정도일 거야. 하지만 호흡에 이상이 있으면 내게 말해 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아이가 거기까지 갔을까?"
그녀가 대답을 하기 전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알프레드가 뭉그적거리며 다가왔다.
"내 짐을 두고 갈 순 없소." 변호사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더군다나 이런 날씨에 어떻게 운전을 한단 말이오?"
"입 닥치고 얼른 타요." 팀이 명령투로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 같은 비열한 작자를 내가 여기 두고 갈 거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오."
"에디슨 병원으로 갈게요." 출발하며 몰리가 프란시스 선장에게 알려 주었다.
조그만 트럭은 이리저리 미끌어지고 덜컹거리고 눈 속에 빠지면서도 신기하게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설차가 지나가지 않은 길에서 그나마 제설차가 한번은 지나갔음직한 길로 들어설 때는 정말 가슴이 철렁했다. 조그만 트럭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하면서 쭈르르 미끌어졌기 때문이다. 노련한 팀의 운전솜씨가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소." 트럭이 제설로 된 길로 들어섰을 때 알프레드가 불평을 터뜨렸다.
"그거야 당신 생각이고" 팀이 으르렁거렸다. "가다 시동이라도 꺼지면 당신이 차를 밀어줘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입 닥치고 잠자코 있어요!" 그는 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느 길로 갈까?"
"저 마을을 가로질러갈 엄두는 안 나는데요." 몰리가 대답했다. "저 앞에 있는 게 서부로로 통하는 127번 도로인데 저 길로 가는 게 어때요?"
팀이 고개를 앞으로 쭉 빼서 앞을 살폈다. "제설차가 다녀간 것 같은데..좋아,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가보지"
그 말에 몰리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만큼 팀이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알프레드는 편치 않은 눈치였다. 오히려 그 말에 더 겁이 났는지 누가 봐도 핼쓱한 표정이다. 트럭은 이제 블린몬 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 서부로로 접어들었다. 아, 이렇게 반가울 수가! 2대의 제설차가 그들 앞에서 눈을 치우며 서서히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제설차가 일으키는 눈보라가 허공에 하얗게 날리다가 길 양옆으로 달아났다. 그때 모이라가 몸을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클리포드 가로 접어들 때쯤에 몰리가 중얼거렸다. 그곳에서부터는 제설차가 가는 방향과 달리 북쪽으로 접어들어야 했다.
"이제 몇 블록만 가면 돼" 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이라가 의식을 회복했어요." 몰리는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조심해서 가요."
그녀의 말에 그가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살짝 들고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클리포드가도 깨끗이 눈이 치워져 있었다. 클리포드 가를 지나 애머슨 가로 갈리는 골목을 돌아서 두 블럭을더 달려 그들은 애디슨 길버트 병원의 응급실 앞에 도착했다.
몰리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차에서 내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팀의 팔을 잡았다.
"애기할 게 하나 있어요." 그녀가 고백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팀"
그가 빙긋 웃으며 딸을 안았다. "당신이 그런 고백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충분히 알지, 몰"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해 두겠어."
"알프레드" 몰리가 격양된 음성을 말했다. "난 정말로 당신이 뭘 하든지 개의치 않겠어요."
병원라운지에는 그들 두 사람밖에 없었다. 팀은 진찰실에서 모이라와 같이 있었고, 몰리는 혼자 애를 태우며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병원에 도착한지 거의 2시간이 다됐는데도 아직 그녀는 한마디도 못 듣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간단한 진찰 결과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은 뒤였다.
"택시가 다니고 있는 걸 봤어요." 그녀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변호사에게 말했다. "택시를 불러서 여관으로 가지 그래요? 아니면 의사에게 사정해서 입원실을 내달라고 하던지?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는데 말예요."
"당신 탓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그가 죽는 소리를 했다. "당신 때문이오."
"그럴지도 모르죠." 조금도 동정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그녀가 냉랭하게 되받았다. "그래도 다시 그런 경우가 생기면 똑같은 대접을 받을 거예요!"
그가 손을 앞으로 내밀고 방어 자세를 취하며 뒤로 비실비실 물러났다.
"세상에 내가 당신의 어디에 반했었나 모르겠어요?" 그녀가 다소 과장되게 물었다.
"수잔 역시 당신의 어디에 반했는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당신은 해파리만 한 용기도 없는 겁쟁이예요! 한 번 더 내 주먹맛을 보여 주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주먹을 쥐고 왼손바닥을 톡톡 치면서 알프레드에게 접근했다.
"그럼 안돼" 그가 고함을 쳤다. "다친단 말야!"
"그렇겠죠." 그녀가 맞장구쳤다. "하지만 내 기분이 얼마나 짜릿할지도 생각해야죠, 알프레드"
알프레드의 얼굴은 이제 완전 사색이 돼버렸다. 아예 말다툼을 할 용기마저 없는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걸음마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쳐버렸다. 몰리가 그 모습을 보고 배꼽을 쥐고 웃고 있을 때 팀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아무것도 아녜요." 몰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진실한 양심이 결여돼서 약자를 괴롭혔던 거예요. 모이라는 어때요?"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안 해. 당신에게 애기하겠다는 거야"
그녀는 다급한 걸음으로 진찰실로 들어갔다. 진찰실 창가에 서 있던 한스콤 박사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아니, 몰리, 결혼을 했다는 건 몰랐는데? 꼬마가 제 엄마 외에는 누구하고도 말을 하지 않겠다는군"
"임시로만요." 몰리는 알고 있는 몇 마디 안 되는 라틴어로 엄숙하게 말했다.
의사가 껄껄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사실 그도 처방전에 필요한 몇 마디 외에는 라틴어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모이라는 침대에 시트를 덮고 누워 있었다. 아이가 팀의 친딸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그녀의 조그맣고 홀쭉한 얼굴 모양은 팀이 고집을 피울 때의 모습을 꼭 빼닮았다. 몰리를 보자 아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울음을 터뜨렸다. 몰리가 달려가 아이를 두 팔로 안았다. "그래, 이제 괜찮아" 아이를 달랬지만 말은 아무 소용없다. 소동 속에서 아이의 보청기가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다. 몰리는 아이를 힘껏 껴안고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울음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아이가 입술모양으로 말을 알아들을 만큼 진정되자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아빠에겐 비밀로 해야 돼요." 몰리가 손가락을 걸어 맹세할 때까지 아이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가 내 강아지를 훔쳤어요." 아이가 천천히 수화로 말했다. "버티를 벼랑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그 여잔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야비한 짓을 할 수 있겠어요. 그 여자가 우리 엄마일 리가 없어요, 그렇죠?"
몰리는 눈물범벅이 되어 있는 아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한숨을 쉬며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엄마인데 어떻게 그녀가 엄마일 수 있니!" 새로 탄생한 두 모녀가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허허, 금세 효과가 있군" 한스콤 박사가 커튼을 밀치고 들어오며 말했다.
"어떻게 된 일어요, 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여자들끼리의 일을 단순한 남자들이 알 수 있겠어요! 진찰결과는 어때요?"
"X-레이 촬영 결과는 아주 좋습니다. 어디 골절된 데도 없어요. 가벼운 충격이야 있겠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자,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집에 가서는 하루동안 침대에서 안정을 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통증이나 현기증의 증후가 보이면..."
"알고 있어요. 군의관 출신 의사들은 하나같이 똑같단 말예요. 아스피린 2알을 먹고 아침에 병원으로 와라, 이 말 아닙니까?"
"아, 화를 낼 건 없어요." 의사가 껄껄 웃었다. "크리스마스이브부터 병원에만 있는 나도 있으니까."
"이제 집에 가는 거예요?" 의사가 안 된다고 팔을 저을 때는 이미 아이가 환자용 침대에서 반쯤 내려와 있었다.
"아직은 안돼요." 의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병원에 오는 사람은 없단다, 그렇지. 자, 여길 소독 좀 하고 반창고를 붙이자. 이렇게 말이다. 자, 한결 좋아 보이지?"
간호사가 아이에게 조그만 손거울을 보여 줬다. 아이가 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 궁금한 듯 몰리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직업적으로 보이는데" 몰리가 장난스럽게 말해주었다. "진짜 환자처럼 보이거든"
"그런 말이 어딨어요." 아이가 귀엽게 눈을 흘기고 침대에서 내려와 새로 생긴 엄마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이제 집에 갈 준비 끝이에요."
진찰실을 나서는데도 조그만 승강이를 벌여야 했다.
"휠체어를 타지 않고는 누구도 병원 문을 나설 수 없어요." 간호사가 막무가내로 고집했다. "그게 규칙이고 제가 수납계까지 태우고 가야 돼요."
결국 15분을 허비한 뒤에야 그들은 트럭에 오를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도 운전은 내가 하지" 팀이 고집했다. 그건 몰리의 차였다. 길도 그녀가 더 익숙한 편이었다. 그녀야 매일 오간 길이 아닌가. 하지만 몰리는 반발심이 없진 않았지만 이내 단념했다.
병원에 갈 때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결 쉽고 편했다. 세 사람은 모두 앞자리에 앉았다. 팀이 운전석에 앉았고, 몰리는 모이라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있었다. 모이라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가끔 몸을 심하게 떨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아이를 꼭 안아주는 것 외에는 몰리가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매그놀리아로 들어가는 길은 아직 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의 바로 앞에서 제설차가 막 그 방향으로 출발하려는 중이었다. 그것만도 대단한 사건이었다. 예년보다 훨씬 신속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난여름에 매그놀리아 주민들이 소동을 피운 게 효과를 보는 모양이다. 하지만 제설차는 아직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4명의 제설요원들은 제설차의 운전석에 앉아서 지도를 살피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죠?" 몰리가 참을성 있게 물었다.
"기다리지" 팀이 웃으며 한가롭게 대답했다. "라디오를 켜봐"
그녀가 고전음악을 방송하는 FM방송에 주파수를 맞췄다.
"가벼운 컨추리 음악이었으면 더 좋겠는데" 팀이 말했다.
"글쎄요, 전 싫어요." 그녀가 반대했다. "이 방송이 한사람이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으로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거예요. 겔러 씨 생각나죠, 팀?"
"아니, 아직도 그 사람이 운영하고 있어?"
"듣고 있는 대로예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기술담당, 영업, 디스크쟈키에 모든 일을 그분 혼자 하고 있어요. 지금도 그분의 거실에서 방송을 하고 있을 걸요."
"방송이 중단되는 건 그 사람이 일 때문에 외지로 나갈 때뿐이었지" 팀이 제설차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회상에 잠겨 말했다. "그래, 잘 운영하는 편이었어. 아마 모짜르트는 좋아하지 않았을 걸? 자, 가자. 저 2대의 제설차와 우리 트럭을 위한 찬송가가 C단조로 흐르는구나!"
"우리가 집에 도착해서 우선 할일은 모이라의 보청기를 찾는 일이예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팀이 대답했다. "보청기가 여분으로 두 개나 더 있으니까. 또 배터리도 한 상자나 있어."
모이라의 어깨를 툭 치고 몰리가 수화로 팀과 한 애기를 들려주었다. 아이가 낄낄대며 웃었다.
"그건 필요 없어요." 아이가 수화로 대답했다. "수화를 하는 데는 배터리가 필요 없잖아요. 또 아빤 돈을 절약해야 한다고 했어요."
"왜?"
"결혼식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래요."
"그만들 좀 하지" 팀이 참견했다. "다른 사람도 있는데 둘이서만 소곤대는 건 실례잖아"
몰리가 그의 말을 수화로 모이라에게 전달했다.
"네, 나리" 모이라가 공손히 대답했다.
"네, 알았습니다, 나리" 그의 미래의 아내도 군말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날부로 맺어진 두 모녀의 수화는 그치지 않았다. 팀은 운전하느라 두 사람의 손놀림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으므로 더 이상 막지 않았다. 그들은 헤스페러스로 꺾이는 지점까지는 제설차의 꽁무니를 따라가다가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노르만 가로 통하는 길로 접어든 셈인데, 그곳에서는 2대의 트럭이 부러진 전신주를 새로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매그놀리아로 접어들자 제설차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왔던 길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팀이 차를 세우고 제설차 쪽으로 걸어가더니 제설차 운전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 중 나이가 많은 운전사에게 주었다. 그가 휘파람을 불며 돌아서서 으쓱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제설차가 방향을 돌렸다.
"집 앞에까지 자청해서 눈을 치워 주겠다는데" 운전석으로 와 앉으며 그가 싱글거렸다. "제길, 밖은 엄청 추워! 저 사람한테 들으니까 보스턴으로 가는 길은 제설이 끝났대. 효과가 어때?"
"그건 당신만이 할수 있을 거예요, 팀" 몰리가 짐짓 엄숙한 말투로 농담을 했다.
"그럼!" 그가 차에 시동을 걸고 눈보라를 일으키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 제설차를 따라가며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밝게 웃었다.
제설차가 커다란 소음을 일으키며 벼랑가에서 방향을 틀어 마을 복판 쪽으로 돌아갔다. 몰리의 집에는 전기가 다시 공급되어 방마다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제다가 문으로 달려 나와 서걱서걱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는 3사람을 마중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제다가 말했다. "내 새끼는 어떻누?"
"버티는 어딨어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모이라가 성급하게 말했다. "버티가 보고 싶어요!"
"걱정 말거라" 제다가 온화하게 말했다. "내가 잘 데리고 있지. 여기 있다."
몰리는 잠이 든 강아지를 받아 모이라에게 건네고 제다에게 설명했다. "모이라는 괜찮아요. 하지만 보청기를 잃어버렸어요. 2층으로 데려가 재우고 와서.."
"너희들이 언제 올지 몰라 우린 먼저 저녁을 먹었다. 이제 막 수저를 놓고 있었다."
"피곤할 텐데 가서 식사를 하세요. 전 모이라를 재우고 내려올게요."
"내가 할 게" 팀의 얼굴에는 근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할 수 있어요. 제가 하고 싶어요." 몰리가 아이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모이라는 이제 제 아버지보다도 몰리에게 더 의지하고 싶어 했다.
"어서 들어가세요." 팀이 제다에게 말했다. "전 씻고 들어갈게요."
몰리는 아이를 앞세우고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갔다. 부엌에서 접시를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이라가 그런 소리들을 듣지 못하는 것이 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몰리는 아이를 침실로 데려가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보청기를 찾아 주었다.
"이제 됐어요." 보청기의 볼륨을 조정하면서 모이라가 말했다.
"그래, 그럼 이제 네 강아지에 관해서 애기해 주겠니?" 수화를 섞어 몰리가 말했다.
"버티가 없어졌었어요." 모이라가 성급하게 말했다. "넣어 둔 상자에서 버티 혼자 힘으로 나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없어진 거예요. 집안을 다 뒤져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새그를 깨웠어요. 새그가 현관문으로 달려가 문을 막 긁잖아요. 그래서 문을 열어줬더니 번개처럼 전망대로 달려가 그 돌 쓰레기통으로 뛰어 올라가는 거예요. 내가 안을 들여다보니까 거기에 버티가 있었어요. 오돌오돌 떨면서 울고 있더군요. 쓰레기통이 깊어서 버티를 꺼내기가 힘들었어요. 겨우 내가 강아지를 꺼냈다 싶었는데 얼음에 미끄러졌어요. 그 다음은 생각이 안나요."
"다른 사람을 보지는 못했니?" 몰리가 수화로 말했다.
"아뇨. 아무도 못 봤어요."
"그래, 이젠 됐다. 씻고 한숨 자거라"
"그럼 아빠의 생일파티에 빠지잖아요!" 모이라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같은 손짓을 두 번이나 되풀이했다. 모이라의 수화실력은 풍부하지만 의미전달이 조금 불확실한 편이다.
"걱정할 것 없어." 몰리가 한숨을 쉬었다. "네 아빠는 1,000년도 넘게 살 거고, 네 케이크는 내가 남겨 둘 테니까, 알았지?"
"네" 모이라는 집으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표정이 밝아졌다. 모이라는 몰리의 팔에서 버티를 받아 안고 침대로 올라가더니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난 이모와 같이 있는 지금이 좋아요." 그리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 "전 몰리 이모를 사랑해요.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어요, 한번도, 어디서도요. 아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려고 했어요. 아빠는 항상 내게 용기를 가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난 언제나 두려웠어요. 그렇지만 이젠 이모가 같이 있어서 두렵지 않아요." 아이가 숨을 돌리고 계속 말했다. "난 말예요, 내게 요술지팡이가 있어서 다른 사람을 없애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몰리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얼른 고개를 돌리고 아이의 목욕가운을 가지러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모이라는 버티를 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몰리는 다시 욕실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서 눈물자국을 지우고 그날 밤의 계획을 곰곰이 생각했다. 진실을 찾아내기란 미로를 헤쳐 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우선 모이라와 그 애의 행복을 감안해야 했다. 팀과 그의 혼란, 수잔과 그녀의 증오, 그리고 제다도 고려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프란시스 선장만 탓할 게 아니다. 글쎄, 그건 두 당사자가 알아서 처리할 간단한 문제라고 법전에도 나와 있으니까. 그녀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떨쳐 버렸다.
팀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그가 든 이유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심이 서지 않았다. 팀은 모이라를 위해서 결혼을 하려는 걸까? 즉 그의 청혼은 수잔을 떼어 버리기 위한 단순한 음모라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가 몰리 패터슨과의 사랑에 푹 빠져 있자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말했다. 네 엉터리 상상이 시험대에 올려져 있어! 그녀는 거울속의 자신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복도로 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그녀는 수잔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는 더 이상 착하기만 한 몰리가 아니었다. 가슴에 분노이상의 그 어떤 걸 품고 있는 잔다르크 패터슨이라고나 할까? 또는 요술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엄마 요정일 수도 있겠지?
팀의 생일파티는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몰리는 식당으로 들어가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게 프란시스 선장에게 손짓했다. 선장이 나오자 몰리는 그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소곤댔다. 선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 없어?" 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모이라는 아무 일 없어요." 몰리가 일부러 모이라에 힘을 주며 대답했지만 아무도 그걸 의식하지 못했다. 몰리가 들어오면서 중단됐던 담소가 다시 시작됐다. 커다란 원형식탁을 가운데 두고 팀의 좌우에 제다와 수잔이 앉아 있고, 제다 옆에 프란시스 선장이, 그리고 팀을 마주보는 위치에 몰리가 앉았다. 그게 또 몰리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나게 했다. 몰리는 입술을 깨물며 분을 참았다. 다른 사람들은 앞에 놓인 음식을 거의 먹어치운 참이었다. 그녀의 접시에만 손도 대지 않은 코니시 닭요리가 남아 있었다. 새그가 그걸 눈치 채고 그녀의 발 아래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녀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개에게라도 의지하고, 오래 동고동락해 온 개의 응원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점점 부아가 끓어올랐다.
"그럼 이제 케이크를 가져올까?" 제다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특별한 케이크지. 팀이 부탁해서 내가 만들고, 장식은 몰리가 했어요."
제다가 부엌에서 커다란 케이크를 들고 나왔다. 딸기 주스가 듬뿍 발라져 있고, 생크림도 약간 흐물흐물한 케이크였다.
"내 맘에 쏙 드는 케이크군요." 팀이 싱글벙글했다. "몰리가 날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흠잡을 데 없는 케이크 맛을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몰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에서는 내가 당신에 관해서 아는 것은 우편엽서 한 장도 채우지 못할 정도밖에 안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케이크를 자르기 전에 풀어야할 문제가 하나 있어요." 몰리가 입을 열자 소란이 뚝 그쳤다. 팀은 얼굴을 찌푸리고, 수잔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돌연한 그녀의 태도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말해 봐" 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몰리는 의자를 뒤로 밀치고 팀과 수잔의 사이에 가 섰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오래전에 아주 부정한 여자가 내 남자를 훔쳐갔어요."
수잔이 우습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럴만했으니까 그건 자랑스러운 게 아니에요. 그런데 똑같은 여자가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아주 귀여운 아이에게 지독히도 잔인한 짓을 했어요."
수잔의 입가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팀은 병정개미께의 습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제다와 선장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어 흡족한 표정이다.
"하지만 난 그 애가 그 당시에는 내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몰리가 팔짱을 끼고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또 똑같은 여자가 어린 강아지에게 끔찍한 짓을 했어요. 그래서 나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됐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엉덩이를 들썩이며 수잔이 씩씩댔다. 몰리가 수잔을 의자에 눌려놓았다.
"증거를 못 댈 것 같아? 그래, 내가 늙은 페리 메이슨에 미친 여자로 보여? 잘 들어. 누군가 강아지의 목덜미를 낚아채서 영하의 날씨에 전망대의 쓰레기통에 처넣고 죽게 내버려뒀어!"
수잔이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기를 썼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냐니까?" 그녀가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그래, 근거를 대지. 하지만 우선 강아지를 찾아 나섰던 모이라가 얼음에 미끄러져서 크게 다칠 뻔했다는 걸 잊지 마."
"내 딸에게 내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거야?" 수잔이 악을 썼다.
"그래, 난 그렇게 믿어." 몰리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무슨 근거로!"
"그래, 근거를 대겠어." 몰리가 나직하게 말했다. "개의 털에 냄새나는 액체를 묻히면 몇 시간 동안은 개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걸 알고 있지?"
수잔이 당황해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뒤로 숨기고 한 발짝 물러났다.
"오늘, 이 집에서 내가 팀의 등에 유칼리 기름을 발라 줬다는 건 너도 알지?"
"그럼 개를 내다 버린 건 바로 너잖아!" 수잔이 악을 쓰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천만에" 몰리가 냉혹하게 말했다. "난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어. 팀은 그 기름을 등에만 발랐지. 손에는 묻히지 않았어. 그러니 팀일 가증성도 없어. 하지만 넌, 생각나지? 넌 유칼리 기름을 엎지르면서 맨손에 기름칠을 했어. 기억하겠지?"
몰리가 수잔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수잔이 방어하는 자세로 팔을 내밀었다.
"그리고 넌 강아지를 잡으면서 버티의 털에 유칼리 기름을 묻혔어. 생각나지?"
"팀, 이 미친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난 아주 흥미 있게 듣고 있어." 그가 미동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
"내 애기를 좀 더 들어." 몰리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복수를 위해서 어린 개를 학대하는 사람보다 더 사악한 사람은 없어. 나는 세상에서 그런 사람을 제일 혐오해"
"넌 제정신이 아냐. 완전히 미쳤어!" 수잔이 덜덜 떨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몰리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여긴 내 집이야. 그리고 난 네가 더 이상 이집을 더럽히는 걸 원치 않아, 수잔. 사촌이건 아니건 상관없어."
몰리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포도주 잔을 집어 들고 수잔의 머리위에 술을 부었다.
"이런 밤에 어떻게 날 내쫓을 수가 있어." 수잔이 침을 튀기며 애원했다.
"팀, 당신은 못 본 체하고만..."
"여긴 몰리의 집이야" 팀이 그녀에게 냅킨을 던져 주며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말릴 수는 없어. 사실은 나도 같은 심정이고"
"아니, 당신은..."
수잔이 식탁에 놓여 있던 은촛대를 집어 들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몰리는 호신술교관이 가르쳐 준대로 쉽게 수잔을 몰아붙였다. 의외로 쉽게 은촛대가 마룻바닥에 힘없이 떨어지고, 수잔의 팔을 등 뒤로 돌려 비틀어 꺾었다. 몰리는 그 자세로 수잔을 문 쪽으로 끌고 갔다. 문에는 이미 프란시스 선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몰리가 미리 챙겨놓은 수잔의 가방이 들려 있었다.
"모든 걸 용서해 주겠지?" 몰리가 수잔을 놓아 주고 돌아서면서 말했다.
몰리는 손을 툭툭 털고 문에 그대로 서서 프란시스 선장이 수잔을 트럭에 태우고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이 탄 트럭의 불빛까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분노로 몸을 덜덜 떨며 식당을 들어갔다.
"이제 케이크에 촛불을 켜도 되겠는데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느새 그녀의 분노는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제다는 걱정스런 표정이고, 팀은 뭐랄까....
"수잔은 떠났어?" 팀이 물었다.
"네, 선장님이 로건공항으로 데려가고 있을 거예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죠. 우리가 살아있는 한은"
"난 당신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팀이 낄낄대며 좋아했다. "내속이 다 시원해!" 그가 말을 마치고 펄쩍 뛰었다. 제다가 식탁 아래에서 정강이라도 걷어찬 모양이다.
"정말 잘한 일이다." 제다가 말했다. "하지만 난 네게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단다. 자, 얄미운 인간들이 다 없어졌으니까. 참, 그 변호사 양반은 어디 있지?"
"알프레드요? 그 남자는 그러니까 내가 병원에서 제안했고 그가 결정했는데요, 한마디로 우리와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지금쯤 호텔 방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거예요."
"그럼 이제 건배를 들어도 되겠지?" 팀이 엉뚱하게 서둘렀다.
"뭘 위해서요?" 평생의 사랑을 의심하는건지는 몰라도 뭔가 빠진 듯한 기분이다.
"뭘 위해서?" 팀이 싱글벙글했다. "음, 이건 어떨까? 당신이 내 문제를 다 해결해 줬으니까, 이제 원하지 않으면 나와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위해서!"
무거운 침묵이 방안을 짓눌렀다. 몰리는 후들후들 다리를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봤지만 너무 멀다. 그녀는 이번에는 제다와 팀의 사이에 가 섰다. 그는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당신은 지금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거죠? 당신의 청혼은 단지 계략이었죠?" 찬바람이 휙휙 도는 어투였다.
"아냐" 그가 불안하게 대답했다. "그런 말이 절대 아냐. 당신이 나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야"
"당신도 모르지 않을 거예요. 난 당신을 오래전부터 사랑했어요, 팀. 그러나 너무 사랑했기에 난 당신을 미워했어요. 그걸 알기나 해요?" 그녀는 식탁을 두리번거리다가 시선을 둘 마땅한 대상을 발견했다.
"몰리, 당신은 결혼을 원치 않잖아!"
"내가 원치 않아요?" 그녀는 날카롭게 소리치고 생일 케이크가 담겨 있는 접시를 집어 들었다. "내가 정말 원치 않아요, 팀 홀랜드? 당신은 앞뒤가 꽉 막힌 바보예요. 난 8살 때부터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어 했단 말예요!" 말과 동시에 케이크를 그의 얼굴에 던졌다.
딸기와 생크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데도 그는 꼼짝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몰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놀라 멈칫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갔다.
제다는 웃음을 참느라고 고역을 치루었다. 하지만 조카가 한손으로 눈가에 묻은 딸기를 닦아내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배꼽을 쥐고 웃어댔다.
"아직은 네게도 희망이 있구나. 이 주변머리 없는 녀석아" 제다가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케이크가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했던 것처럼 맛이 완벽하지 않은데요. 생크림에 설탕이 충분히 들어가지 않았어요."
몰리는 11시에 공항에서 돌아온 프란시스 선장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왔다. 팀과 제다는 설거지를 해놓고 거실에서 쉬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가자 제다가 달려 나와 선장의 뺨에 키스를 하고 브랜디를 권했다.
"죄와 벌을 위해서!" 그가 잔을 들었다.
팀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얼굴은 케이크를 뒤집어썼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제다도 잔을 들었다. 몰리는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말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더 이상 결혼을 생각하지 말고 수녀원에나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한 뒤였다.
"그래, 그 독거미 같은 여자는 어디에 떼놓고 왔수?" 제다가 물었다.
"공항에. 가는 동안에 내내 입을 다물지 않더군. 뉴잉글랜드가 구역질이 난다나 어쩐다나. 이 지방 사람은 물론이고 눈까지도 증오하다더군"
"공항에 그냥 내팽개치고 왔어요?"
"그야 아니지" 그가 껄껄 웃었다. "몰리 양이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도와주라고 해서 그렇게 했지. 첫 비행기를 타겠다고 해서..." 술을 마시기 위해 그가 말을 멈췄다.
"뜸들이지 말고 애기해 봐요." 제다가 재촉했다. "어디로 가는 비행기였는데요?"
"글세, 그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가 또 뜸을 들였다. "우리가 갔을 때에야 공항이 다시 문을 열었지. 첫 비행기는 알래스카의 놈으로 가는 전세 비행기였는데 그걸 탔어."
"아니, 이 양반!" 제다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했군요. 지금은 놈에 눈이 내리지 않는 철인게 다행이지만"
"그래" 선장이 대답했다. "당신과 난 부엌으로 가서 애기합시다. 이런 화사한 분위기의 거실은 신경이 쓰인단 말씀이야"
한동안 두 사람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팀이었다.
"저 두 분은 30년 이상이나 결혼문제로 다투었지. 결국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셨대"
"다행이군요." 몰리가 한숨을 쉬었다. "팀..."
"몰리..."
동시에 두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먼저 말해" 팀이 말했다. "레이디퍼스트잖아"
"난 숙녀가 아니에요." 그녀는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그리고 난 당신 얼굴에 케이크를 쏟아 부은 걸 사과하지 않겠어요. 몇 년 동안이나 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그래, 나 같은 바보도 그 이유는 알 수 있어."
"팀..." 그녀가 더듬거렸다. "그 점은 사과해요. 당신은 바보가 아니에요, 글쎄, 어쨌든 자주는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먼저 말하는 게 좋겠어." 그가 몰리의 옆으로 와 앉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우린 10년 전으로, 당신의 생일날로 돌아가야 해, 몰리. 생각 나?"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영원히 못 잊을 거예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날 아침에 내가 왜 왔는지 알아?"
"난 당신이 아침에온 건 생각 안 나요." 그녀가 희미하게 말했다. 팀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과거를 회상하게 하고 있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난 당신에게 청혼을 하려고 왔었어."
"하지만 이해를 못하겠어요. 당신은 청혼하지 않았고, 수잔과 결혼했잖아요."
"그랬지, 몰리, 들어 봐. 당신 아버지가 날 서재로 부르시더군. 중요한 애기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따라갔지. 거기엔 수잔이 기다리고 있더군. 그런데 당신 아버지가 수잔이 임신을 했다고 말하더군. 그리고 그게 나라는 거야! 모이라의 나이가 몹시 궁금했을 거야. 수잔과 난 10년 전에 결혼했어. 그런데 모이라는 9년 6개월 전에 태어났어."
"오, 맙소사, 팀. 그럼 그게 사실이었어요?"
"사실은 아니었지만, 사실일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내가 인정한 이유야. 수잔과 난 한 차례 관계를 가졌거든. 수잔이 얼마나 많은 망나니들과 놀아났는가를 안 것은 훨씬 뒤였어. 그녀는 창녀나 다름없었어. 그녀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날 제물로 삼았어. 내가 돈이 많다는 이유였겠지. 변명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하지만 몰리, 난 그 때 유혹을 이겨내기에는 너무 젊고 혈기왕성하던 청년이었어. 그래서 우리의, 당신과 나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말았어."
"하지만 팀, 당신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가버렸어요, 너무도 오랜 세월을!"
"무슨 염치로 내가 말을 하겠어, 몰리.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그래서 난 결혼생활에 충실하려고 했어. 그렇지만...당신도 이젠 다 아는 애기들이야. 또 이혼을 한 뒤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 차마 당신을 찾아올 용기를 못 냈어. 처음엔 당신도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제다 고모로부터 당신이 아직도 혼자 있다는 애기를 들었어."
"하지만 당신은 그 애길 듣고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원망스럽다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불쌍한 팀,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런데도 난, 나 혼자만 괴로워하는 줄 알았다니!
"그래" 그가 한숨을 쉬었다. "돌아오지 않았어. 언제나 모이라가 날 잡았지. 우린 온 유럽을 돌아다녔어.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유명한 의사란 의사는 다 찾아다녔어. 모이라를 고치겠다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거야. 뭔가 비법을 가진 의사가 꼭 있을 것만 같았어! 그래서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말았어."
"이제 당신은 돌아왔어요."
"우리는 같이 있게 된 거야"
몰리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팀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와서 열심히 손짓을 했건만 그녀는 생각에 잠겨 눈치 채지 못했다. 팀도 소중하고 모이라도 소중하다. 그 귀여운 아이를 나의 아이로 하고 싶다. 하지만 그 남자의 딸을 사랑한다고 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까? 그건 좀 이상한 결혼이 아닐까, 안 그래? 차라리 결혼은 하지 않고 그냥 이모로 아이를 돌보는 게 낫지 않을까?
제다를 봐라. 프란시스 선장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회피하다가 세월을 보내고 말았지. 몰리 패터슨, 네 40년 후를 상상해 봐라. 꼬부랑 할머니가 돼가지고 팀 홀랜드에게 찾아가 '팀, 우린 그 옛날에 결혼했어야 옳았어요'라고 후회할게 눈에 선하지 않니?
이제 차츰 마음이 정돈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옆에서 팀이 열심히 수화를 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는 열심히,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당신을 사랑해"
"팀" 그녀가 탐색하는 어투로 말했다. "우리가 당신을 놀렸던 거예요. 그건 <잘 잤어요?> 란 뜻이 아니에요."
"나도 무슨 뜻인지 알아"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수화 교본을 봐서 알고 있어. 단지 그걸 큰소리로 말할 만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야!"
"오, 팀!" 그녀의 모든 억측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고, 백기를 들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에 넘친 울음을 터뜨리며 몰리가 자신을 두고 떠났던 남자의 품으로 달려갔다. 그의 따뜻한 입술이 맹세하듯 그녀의 입술위에 포개졌다. 부엌에서는 두 공모자가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제다가 소곤댔다. "이젠 화해를 하든지 팀이 몰리를 죽이든지 둘 중 하나겠군요."
"아니면 그녀가 팀을 죽일지도 모르지" 선장이 목소리를 죽여 대꾸했다.
"하지만 내 생각엔 당신의 공작이 성공한 것 같구만. 저쪽에서만이 아니라 여기서도 말이야. 저 두 사람이야 어디든 상관없지만 우리 나이엔 이런 딱딱한 의자는 좋지 않아요. 2층으로 올라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