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빛 속삭임
Johanna Lindsey
1.
1835. 카르디니아.
왕의 침실 바깥에 마련된 대기실로 들어서던 카드리니아의 왕세자는 문득 발을 멈추었다. 홀로 그를 기다리던 막시밀리안 다네프를 보자, 왕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예외가 있긴 했으나 그는 늘 혼자 그렇게 기다렸다. 왕자는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이 방으로 불려왔고, 다네프 백작은 항상 성질 급한 왕과 왕자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담당했다. 지금은 수상의 자리에 오른 다네프, 그리나 고귀한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그는 왕의 친구이자 충고자였다.
그는 루미니아인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빨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를 찾기 위해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집시 캠프를 뒤져야 하지 않을까 걱정했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날카로운 비난이 그대로 드러났다. 젊은 왕자는 여가 시간에 대해, 막스의 불만은 왕보다 더 컸다. 그러나 그런 말들도 왕자의 분노를 일으킬 만큼 자극적이지 못했다. 엉뚱하게도 젊은 왕자의 주의를 끈 것은 전하가 아닌 폐하라는 호칭이었다. 왕자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맙소사, 돌아가셨소?"
"아니, 아닙니다!"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말이 그런 인상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왕세자가 이곳으로 불려오면서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샌도르는 터키의 대 베지르를 증인으로 세운 가운데 공식적으로 왕위를 물려주셨습니다."
왕자의 뺨에 핏기가 몰려들었다.
"그런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순간에 왜 나를 부르지 않았단 말이오?"
"반대하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론이지! 막스, 이유가 뭐요? 주의치는 왕의 건강을 호전되었다고 말했소, 내가 걱정할까봐 거짓말을 한 거요?"
"호전되셨습니다. 하지만,......왕의 임무를 이행하실 만큼은 아닙니다. 들으셨겠지만, 게다가 그분의 생명은 시한부입니다. 당신 아버님은 예순다섯이십니다. 심장이 좋지 않아서 기운을 내실 수 없답니다. 그저 몇 달 정도 더 사시는 게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바람입니다."
눈만 감을 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 왕자의 얼굴에서 고통의 냄새가 풍겼다. 막스가 상기시킨 내용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을 잃는다는 사실에 직면하자, 여느 아이들처럼 그런 경고를 무시하고 희망에 매달렸다.
주치의가 심어준 희망은 가짜였군.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 때문에 날 부른 거요? 늙으신 왕께서 무덤에 들어가시기도 전에 내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차디찬 목소리로 물었다.
"기분이 언짢으실 겁니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아버님의 뜻이니까요."
"왕께서 나라를 떠나실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대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거요. 죽음이 아버님을 데려갈 때까지 왕위를 포기할 필요는 없소."
막시밀리안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분이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배욕을 억누르는 것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알고 그렇게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당신을 불러온 이유들 중의 하나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이오?"
"샌도르가 직접 말씀하실 겁니다. 지금 기다리시니 어서 들어가십시오. 부디 주의하시길,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왕께서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양위를 하셨습니다. 당신이야말로 그분 인생의 자랑거리니까요. 부디 분노를 참으셨다가 나가실 때 제게 퍼부어 주십시오. 전 그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폐하."
매우 사려 깊은 설교였다. 비록 지금 왕이 되었으나, 막스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를 대하면서 고결한 얼굴 위로 드러난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왕의 침실로 들어간 왕자가 이제 무슨 일로 분노를 터뜨릴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막스는 왕자가 여간해서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무 참기 힘들면 언쟁을 벌이겠지만, 성년이 된 다음부터 왕자는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과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퇴위한 카르디니아의 왕은 윗부분이 들어 올려진 침대가 누워 있었다.
벨벳과 실크가 드리워진 매트리스는 닿기조차 힘들 정도로 높은 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침대 머리판의 금장 휘장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침실의 나머지 부분도 호화스러웠다. 대리석 바닥 위로 촛불이 반사되었다. 섬세한 실크가 드리워진 벽은 유럽에서 데려온 장인들의 예술 감각으로 꾸민 것이다. 금으로 된 액자에 들어 있는 몇몇 그림들을 그 크기가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컸다. 침실 자체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왕궁 전체의 분위기처럼 금과 은이 풍부하게 널린 탓에 카르디니아를 찾는 방문객들이 깊은 인상을 받을 만했다. 이 나라는 무수한 금광을 보유한 덕택으로 동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 중 하나로 꼽혔다.
"벌써 얼굴을 찌푸리고 있구나." 샌도르는 가까이 다가오는 아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 마지막 후궁은 너의 그런 얼굴을 보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고백하더구나."
"아이가 무서워 떨면 침착하게 엄마한테 보내야겠죠."
샌도르는 그런 화제가 불편했는지 재빨리 말을 돌렸다.
"만약 막스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면 그의 혀를 잘라버리겠다."
"그는 단지 내가 왕이라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아하." 샌도르는 아들의 목소리에 들어 있는 날카로움을 무시한 채 다시 베개에 몸을 맡기고 침대 매트리스를 손으로 톡톡 쳤다. "가까이 오너라."
왕자는 주저하지 않고 단으로 올라가 침대 발치에 커다란 몸을 기댔다. 한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채 자신이 자랑하는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아버지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샌도르는, 비록 아들이 그런 결정을 무척 싫어하는 것을 사실이지만 자신의 퇴위에 대하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언쟁이 일어날 만한 것은 그뿐이었다. 나머지는 그저 기억을 되살리는 문제에 불과했다.
"그래. 넌 왕이다. 대 베지르의 방문이 끝나기 전인, 이번 주 안으로 대관식이 있을 것이다."
"아니, 유럽의 왕들에게 금박으로 새긴 초대장도 보내지 않고 말입니까?"
샌도르는 아들의 물음 속에 깃들여 있는 빈정거림을 알아차리고도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곳에서 여덟 명의 군주와 세 명의 왕자, 대공비, 백작들, 그리고 터키에서 온 귀한 친구들이 손님으로 머무는 중이고, 심지어 압둘 무스타파를 따라 국경을 넘어온 영국의 백작도 있지 않느냐. 구리는 그들 모두를 증인으로 세울 것이다. 법에 의해서, 나의 선택에 의해서, 그리고 백성들의 사랑에 의해서, 네가 나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의심할 자는 아무도 없다. 너에게 없는 것은 오직 왕비뿐이지."
왕자의 몸이 굳었다. 뭔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오리라는 짐작이 적중했다. "아버님은 어머님이 돌아가신 이래로 15년 동안 왕비를 맞이하지 않고 살아오셨죠."
그 말을 들은 샌도르는 왕자가 얼마나 화났는지 깨달았다. 소리를 지르며 절규하는 대신, 그는 왕이 대답하기 힘든 엉뚱한 말을 해버렸다. 하지만 샌도르는 분노를 억제하는 아들을 보며 대답했다.
"나에게는 왕세자가 있다. 그런데 왜 다른 아내를 두어야 한단 말이냐. 공연히 분쟁만 자초할 뿐이지. 그렇지만 너는 다르다."
"그렇다면 아내는 제가 직접 고르겠습니다."
중얼거리듯 나오는 말,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샌도르는 전에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 문제가 마지막으로 거론되었을 때, 그의 아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고르기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나버렸다. 물론 그 당시는 조용히 물러서지 않았지만, 지금의 샌도르는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충돌은 피하고 싶었다.
"이건 나의 마지막 소원이자 유언이니라. 너는 타티아나 야나체크가 태어나던 날 약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들의 왕이시고, 네가 그녀의 배우자라는 사실은 그의 소원이자 법령이란다. 유럽의 다른 왕족 가문에서 마음대로 사위를 선택할 수 있었으나, 그는 내 아들을 선택했다. 그 명예는 대단한 것이며..........."
"그 명예는 야나체크의 이름을 가진 아들이 태어났다면 사라져버렸을 겁니다."
"스템볼로프 가문에서 그의 핏줄을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맹세했는데도? 그리고 몇 달 안에 그들은 그렇게 했지. 내가 비밀리에 국외로 도피시킨 여자아이 하나만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스템볼로프보다 더 많은 것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야. 야나체크의 죽음과 함께, 난 왕관을 쥐었다."
"그런 불화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죠."
"어찌되었건, 스템볼로프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 발견되어 제거 당했어. 마침내 공주는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 왕관의 권리를 되찾을 만큼 안전해졌지."
"아버지, 그녀는 자신의 권리를 잃었습니다. 갓난아기 여왕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자객의 칼날 아래 살아남을 기회란 거의 없으니까요. 그녀가 살아 있다고 해도 왕은 당신입니다. 만약 지금 돌아와도 왕관의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죠."
"너를 통해서라면 가능하다." 샌도르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세상은 너를 여왕의 배우자가 아닌 왕으로 만들었다. 너는 더 이상 그녀를 통해 지배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그녀는 정통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네 아이들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우리 핏줄도 왕가의......"
"분명 그렇지. 하지만 직계는 아니야. 내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열 한 명의 야나체크 남자들이 죽임을 당했어. 열 한 명이나! 왕관은 나에게 돌아올 물건도, 내가 탐 낼 물건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 왔고 지금 너에게 간다. 그리고 아들아. 넌 마지막 후계자야. 살아남은 야나체크의 핏줄을 원치 않는다는 구차한 이유들이 머릿속에 한가득 들어 있을 테지만, 제발 무시하고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다오. 넌 그녀를 길러준 토밀로바 남작부인이 있는 미국으로 가게 될 게다. 너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왕가의 격식대로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면, 나도 그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다."
마지막 말이 아니었던들, 왕자는 논쟁을 계속하여 야나체크 공주를 원치 않은 이유들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늙은 아버지의 소원인........
"그따위 여자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누가 기억이라도 한다고?"
왕자는 문을 닫는 순간 소리를 질렀다.
막시밀리안은 샌도르가 듣지 못하도록 얼른 그를 잡아당겼다. 막시밀리안 다네프는 그저 묵인만 하고 있지 않았다. 곧 왕관을 쓰게 될 왕세자보다 머리 절반 정도 작고, 훨씬 약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샌도르의 침실에서 몰아쳐 나오는 분노의 일진광풍 앞에서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당신 약혼식에는 모두 참석했습니다. 그것은 법령과 당신의 명예에 의해 정해진 것입니다."
"빌어먹을!"
"아버님과 계실 때는 좀 더 인내를 발휘하셨으리라 기대합니다만."
"막스. 입 닥쳐요. 그냥 입 좀 다물고 있으라고요!"
왕의 침실에서 잠시 나가 있으라는 명령을 받은 경호원과 시종들을 의식하지 않고 터뜨린 외침이었다. 만약 막시밀리안이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면, 낮은 계급의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듣는 걸 불쾌하게 여겼으리라.
"설마 반대하신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막스는 왕자의 빠른 걸음을 쫓아가며 물었다. "제게 말씀해주시면..."
"지금 그래봤자 뭐가 달라진단 말이오? 아버지는 마지막 부탁을 하셨소. 명령이 아니라 유언 말이오. 당신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는 거요? 그렇게 비겁한 수단을 쓰시다니. 당신을 알고 있었소?"
왕자는 눈을 부라리며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소리를 지르며 서둘러 뒤따라갔다.
"아뇨. 왕께서 생각해내신 겁니다. 지금까지처럼 당신에게 강요한 힐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죠."
"물러가시오. 막스. 내가 당신을 제 2의 아버지로 생각했던 지난날을 잊어버리기 전에 말이오."
막스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무시무시한 경고 때문이 아니라 숨이 찼기 때문이었다. 분노에 찬 새 왕은 자신의 거처가 있는 왕궁의 동쪽 건물로 가기 위해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가 들어선 곳은 막다른 길이었다. 막스는 젊은 왕자가 부득이한 일들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자가 되돌아와 성난 표정으로 으르렁대기 전에 막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불순분자들이 공주를 내세워 우리 권력에 도전하지 않을까 걱정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녀 어머니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토밀로바 남자부인 같은 보호자가 있으니까요. 공주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보호를 받으며 모국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약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을 겁니다. 그녀는 훌륭하게...."
"그리고 제멋대로 응석을 부리면서 자랐을 거요."
"그럴 수도 있겠죠." 막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외모가 그것을 보상해줄 겁니다. 기억 못하시겠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놀라울 정도로 멋지게 생기신 분들이었죠. 왕비의 아름다움은 유럽 전역에서 청혼을 받을 정도였는데, 그분은 우리의 야나체크 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들의 딸이라면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 말도 막스가 기대한 만큼 왕자를 위로하지 못했다. 도리어 더 화가 난 왕자는 으르렁거리며 막스를 지나쳐 걸어갔다.
"난 그녀의 아름다움에 침을 뱉을 거요. 그리고 그녀도 혐오감을 가지고 내게서 돌아서게 될 거요."
왕자의 말을 이해한 막시밀리안의 눈동자 속에 수심이 가득 찼다. 그리나 진짜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알리샤는 방으로 불쑥 들어온 왕자를 보고 놀라 욕조 속으로 풍덩 주저앉았다. 그렇게 거칠게 들어오는 이유를 눈치 채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시녀들을 내보냈다. 시녀들을 험악한 분위기에서 풀려난 걸 대단한 다행으로 여기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이 남자가 화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는, 알리샤 역시 겁에 질렸다. 불길이 치솟듯 뜨겁게 달아오른 눈동자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악마의 눈동자, 사람들이 그렇게 속삭이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진짜 이유는 그의 지위가 가진 힘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도 죽일 수 있는 권력을 소유했다.
그는 친구인 라자르 디미트리예프에게 정말 바로 같은 이유로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당시 그를 잘 몰랐던 알리샤는 저 시선 때문에 뭔가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일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알리샤는 그의 정부다 되었다.
그녀를 점찍자마자 뒤쫓아 온 왕자의 기세를 보았을 때, 알리샤는 왕자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침실로 끌고 들어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열정을 소비하는 것이 전부였다.
몸과 감각이 두려움으로 굳어버렸으므로, 그리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외상 치료를 받기에는 너무 많은 경험을 가진 여자였다. 사실, 일이 끝난 뒤 알리샤가 울음을 터뜨린 이유는 왕자가 원하는 게 그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왕자는 자신이 알리샤를 아프게 했다고 생각했고, 알리샤는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왕자의 죄책감이 금과 놀라운 선물들로 나타났다.
알리샤는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욕조에서 일어나 전신을 드러내며 일부러 그의 열정을 자극했다. 효과가 나타났다. 말 한마디 없이 다가온 왕자는 그녀를 안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알리샤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지난달부터 멋진 사파이어 목걸이를 사고 싶었는데, 일은 치른 뒤 눈물 몇 방울을 짜낼 수 있다면 그것을 손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2
나체스. 미시시리
"타냐. 정말 게으른 애로군. 내 아침식사는 어디에 있지?"
좁은 복도에서, 음식이 든 무거운 쟁반을 든 여자가 고함소리에 놀라 굽실거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윌버트 돕스는 이웃집까지 모드 들리도록 열린 창문 앞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외출할 때마다 낄낄거리는 비웃음소리를 듣고 심지어 흉내 내어 조롱까지 당하는 것이 수치스러웠으나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시달리는 여자에게 동정심이나 연민을 느끼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하도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녀가 느끼는 수치도 면역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돕스는 병이 들어 그녀를 의지하게 된 다음부터는 조금 나아졌다. 그걸 생각하지 타냐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오르고 얼굴에 윤곽이 돌면서 연한 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직도 변화된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지금, 돕스가 휘두를 수 있는 폭력은 그저 말뿐이었다. 타냐는 그가 침대에 드러누운 바로 그날, 오랫동안 그의 충실한 동료였던 지팡이를 태워버렸다.
타냐는 지팡이를 떠올리며 다시 굽실거렸다. 상황은 그녀의 소원대로 나아졌으나 20년 동안의 고통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옆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지?"
"맥주 배달이 너무 빨리 와서 그래요."
그가 궁시렁거렸다. 타냐의 핑계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사실 타냐는 식사를 가져오기 전에 먼저 아침을 먹어 치우느라 늦었다.
"지난밤에 번 돈이 얼마지?"
"아직 계산하지 않았어요."
"난 장부 정리를........."
"지난밤의 난장판을 먼저 치운 다음에 할게요."
타냐의 대답을 들은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뻔뻔스러움에 놀라 얼굴을 붉혔다.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식의 말대답을 상상 속에서도 불가능했다. 그의 분부를 거행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였을 뿐 아니라 말을 가로막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당신과 나의 일을 모두 말이에요. 시간이 모자라요. 우린 사람을 더 고용해야...."
"자. 넌 네 일만 확실하게 해. 급료를 지불해야 할 사람이 이미 셋이나 있어. 더 이상 고용했다가는 돈이 안 남아."
타냐는 말대꾸를 하고 싶었으나 나신에게 이롭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나 그녀가 돈을 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고,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선술집이나 그녀를 위해서 한푼도 쓰지 않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돈을 모으는 것일까? 그의 나이 예순이었다. 그는 죽는다 해도, 타냐뿐 아니라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조금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10년 동안, 타냐는 이 남자와 이 남자의 아내가 자신의 부모라고 생각했다.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고통스럽기는커녕 즐거웠다. 그러나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아이리스 돕스는, 어떤 여자가 아직 갓난아기인 타냐를 자신에게 주었고 곧 연락이 끊겼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흥분에 들떠 갖가지 이상한 소리를 떠들어대던 그녀의 말을 사실이라 믿기 힘들었다.
아이리스는 8년 전에 죽었다. 그녀는 매질을 당하는 타냐를 감싸던 단 하나의 완충지대였다. 솔직히 말해 아이리스를 죽인 것도 바로 그 매질이었다. 그러나 돕스는 사고였다고 변명했음 그녀가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면했다.
남편에게 그런 행위가 허용된다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타냐는 장래의 남편이 자신을 소지품 정도로 생각지 못하도록 하리라 맹세했다. 돕스와 함께 살면서 배운 게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조그만 권리가 대단히 소중한 것이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도망친 노예처럼 추격당하지 않고 원할 때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다. 돕스에게 지팡이로 매질을 당하는 타냐를 보고, 한 접대부가 왜 이곳에 머무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깨달은 내용이었다.
사실 타냐는 떠날 생각을 했다. 그 무렵, 열 여덟 살 된 그녀는 그런 장사를 어떻게 하는지 모두 익혔기 때문에 다른 선술집에서도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돕스가 '시랠료'의 소유권으로 유혹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러나 그것을 말뿐이 약속이었다. 그가 병이 날 때까지는 말이다. 타냐는 약속을 문서로 남겨달라고 요구했고, 그 귀중한 서류를 방바닥 판자 밑에 숨겨놓았다.
시랠료의 모든 일들이 그녀 몫이었다. 타냐는 지치고 두통에 시달렸으나 독립과 평화를 꿈꾸며 참았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그녀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들, 지금은 아주 열정적으로 갈망하는 것들, 그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타냐가 할 일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돕스의 여생을 돌보아주는 것이었다.
타냐는 그를 혼자 남겨두고 나왔다. 그에게 했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많은 일 때문에 시간이 모자랐다. 세 명의 고용인들도 청소에 관한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돕스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타냐에게 일을 떠맡겼으므로 고용인들은 폭풍우가 쓸고 지나간 것처럼 지저분한 방을 보고서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선술집 안은 항상 지저분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머그잔, 흘린 에일 맥주, 기우뚱거리거나 부서진 의자들, 침으로 범벅이 된 담배꽁초.
타냐는 항상 자기 전에 치워놓았으나, 지난밤에는 접대부인 아지를 두고 그 지방 농장주의 아들과 그날 아침 부두에 들어온 선원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 일이 벌어질 경우 돕스는 늘 한 손에 막대기,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싸움을 말렸다. 지금은 바에서 일하는 제레미야에게 의존해야 했으나 그저 몸집만 클 뿐 수완이 없었다.
타냐가 기랠료를 맡은 이래, 싸움판에 끼어 든 건 어제가 처음이 아니었다.
평상시 그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지 않았다. 뛰어난 분장술로 본래의 우아함과 고운 얼굴을 수수하고 단조롭게, 실제 그렇지 않을 때에도 수척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저 선술집의 부속물 같은 존재였다. 남자들이 아지를 귀찮게 하거나, 에이프릴이 공연을 할 때 손님 시중을 들었고, 제레이먀가 나오지 않을 때에는 바 뒤에서 일했다. 그녀는 필요한 곳에 참견할 준비를 갖추고 항상 그곳에 있었다. 심지어 싸움을 뜯어말리는 일까지 말이다.
160센티미터 정도의 키, 뒤로 넘겨 뒷덜미에서 질끈 묶은 머리카락, 질긴 검정 스커트, 꾸미지 않은 얼굴, 부산떨지 않는 태도, 무릎까지 닿은 돕스의 낡은 회색 셔츠, 그녀는 언제나 그런 모습이었다. 돕스가 병이 든 다음부터는, 오른쪽 부츠 옆에 달고 다니던 단도 말고 그보다 날이 더 긴 칼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
지난밤 벌어진 난장판에는 둘 다 사용했다. 두 명의 경쟁자를 효과적으로 갈라놓기 위해 칼을 마구 휘둘렀다. 그 이후로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필요 없었다. 굳이 사용할 생각이 없다면 무기를 꺼내 들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잘 아는 단골손님인, 농장주의 아들은 소란을 부린 데에 대하 사과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처음 그곳에 온 선원은 문제가 커진 것을 보며 너무 놀랐고, 뒤늦게 나타난 제레미야는 그를 문 앞까지 안내했다.
비록 어렵지 않게 소란을 가라앉혔으나, 지난밤 일을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타냐의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섰다. 극도의 긴장은 피로를 몰고 왔다. 문을 닫자마자 침대로 달려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보다 자신이 당하는 편이 쉬웠다. 지금까지 늘 당하고만 살아온 탓도 있었지만 남을 공격하는 일은 기질상 맞지 않았다. 하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지난 6개월간 그런 일이 자주 발생했다.
선술집 단골들에게 매력 없게 보이도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사불성으로 취한 손님들이 아무 여자나 찾으려고 들 때가 있었다. 그녀는 꼬집거나 할퀴던지, 아니면 날카로운 말이나 머리를 쥐어박음으로 끝을 냈다. 앞을 분간 못할 정도로 취했다면 그만큼 다루기도 쉬운 법이었다. 하지만 휴게실 바깥에서 그리 술에 취하지 않은 남자에게 잡히거나, 창고 혹은 부엌에서, 혹은 마구간으로 가는 길게, 심지어 방으로 들어가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문제가 달랐다. 그럴 때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아온 손님 중에는 더러 평상시의 외모가 타냐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돕스가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덤벼들었다.
그녀가 돕스에 대해 좋게 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가 원기 왕성했을 때에는 누구도 타냐에게 손을 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사실이었다. 한번, 그녀에게 키스하려던 오랜 친구 한 명을 거의 죽여놓을 듯 두들겨 팬 적이 있었는데, 그런 종류의 소식들은 빠르게 퍼졌다. 물론 그녀는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욕정에 의한 간음을 혐오했고 자신의 집 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지와 에이프릴이 그런 식으로 손님들을 위로하고자 한다면-둘 다 자주 그런 일을 했는데-그들은 개인적으로 약속을 정하고 슬쩍 마구간 같은 곳으로 빠져나갔다. 어쨌거나 돕스의 반응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더 이상 '그 짓'을 할 수 없다는 아이리스의 고백이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도 못하도록 하는 것은 돕스다운 행동이었다.
타냐는 휴게실을 둘러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배달되는 맥주를 받고,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도박장과 매음굴 그리고 밤낮으로 영업하는 초라한 선술집에 필요한 점심과 저녁을 준비하고 양초를 주문해야 했다. 시랠료가 있는 지역은 나체스에서 최악이라고 말해지는 그런 곳이었다.
문을 열기 직전, 에이프릴의 어린 남동생이 들어와 시랠료의 여주인공이 발목을 접질려서 며칠 동안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알렸다.
문을 열기 바로 전인데 말이다. 즉시 두통이 몰려왔다.
3
"우리가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지, 스테판? 편안한 대접을 해주는 호텔에서 세르게이를 기다릴 수도 있잖아."
라자르는 술 장식이 달린 양가죽 테이블 위에 빈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면서 붉을 수염 사내에게 불평을 퍼부었다.
"자네도 전에 호기심으로 빈민가에 가본 적이 있으면서....."
"모든 사내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 있는 곳은 아니었네."
라자르가 씩씩거리자, 스테판이 껄껄 웃었다.
"이 친구, 과장하는구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실리처럼 나는 기분전환이 좋아. 형태가 어떻든지 말일세."
"맙소사, 자네들 두 사람은 항상 그렇게 말썽만 찾아다닌다니까."
라자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신음을 토했다,
스테판의 검은 눈썹이 불쑥 올라갔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자네에게 기분 전환이 되는 것은 싸움밖에 더 있겠나, 그리고 난 자네가 화났다는 것을 알아.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나. 그러나 자네, 만약 이렇게 말하는 나를 용서할 수 있다면 말이지, 자네는 정말 무슨 짓을 어떻게 저지를지 모를 사람이야."
스테판은 코웃음을 쳤다. 그를 모욕하고도 무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오랜 친구 사이이기 때문이다.
"난 끝낼 수 없는 일은 시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둠세."
"잘 알고 있어."
"자라르, 걱정을 그만 하게나, 우린 단지 바실리의 친구로서 여기에 온 거야. 그리고 우리가 다시 기다리기 게임을 하는 동안 서로의 목을 지켜주기 위해서 말일세."
"바실리의 핑계는 뭘까?"
라자르는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단골손님에게 주문을 받는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로릴리에 탔을 때 이곳의 이름과 여자에 대한 설명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한 게지. 어쨌거나 한번이라도 배를 진동시키면서 웃는다면 그의 향수병이 좀 나아질 테니까."
"압둘이 준 그 빌어먹을 정부 말이야. 그녀도 천사처럼 춤을 추잖아. 안 그런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침대에서의 '진동'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
"그래, 그녀와 한 건가?"
"바실리는 마음이 넓은 친구야.....그럼 자네는 안 해봤나?"
"노예들, 특히 자유노예들은 너무 복종적이라서 내 입맛에 맞질 않아."
라자르는 친구의 대답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때로는 복종도 괜찮았다. 특히 잔소리가 심한 정부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말이다. 여행을 위해 그녀를 남겨놓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내심 반가웠으나 이렇게 기간이 길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예견하지 못할 일이었다. 간단한 임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이제야 뉴올리언스의 마담 루소에 대하 들었을 뿐이었다. 그 이름은 오래 전 샌도르가 알아낸 것으로, 예정대로라면 그녀는 그들을 토밀로바 남작부인과 남작부인이 보호하던 공주에게 안내해야 했다. 일 주일 정도, 공주의 모든 것을 정리한 다음 그들은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너무 간단했다...... 마담 루소가 3년 전에 죽고 그녀의 남편은 찰스턴으로 이사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
남작부인에 대해 알아보느라고 뉴올리언스에서 일 주일을 낭비했지만 마치 그녀가 그곳에 살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마담의 남편에게 물어보기 위해 배를 타고 찰스턴으로 향했다.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마담 루소가 죽은 이래로 그 신사는 술주정뱅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내조차 제대로 기억 못하는 그가 20년 전에,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도 모를 부인을 기억할 리 만무했다. 마구 호통을 치던 그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 당시 함께 있던 아내의 누이동생을 만나보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10년 전, 결혼을 해서 미시시피 주의 나체스로 이주했다는 사실이었다.
뉴올리언스로 다시 돌아왔다. 루소의 의심스러운 기억만을 믿고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올라가 오래된 도시 나체스로 가야만 하는가? 하지만 그 외에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타티아나 야나체크는 카르디니아에서의 정당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가 찾아오길 오랫동안 기다리는 중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그녀는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짜증스러웠다. 모두 같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카르디니아의 새 왕이 인내심을 잃고 모두 집어치우라고 말하기 전까지, 아무도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날 아침 도시 남쪽에 농장을 소유한 마담 루소의 여동생을 방문하기 전이었고, 그녀가 전해준 소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라자르는 아기 야나체크 공주에게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세르게이는 또 다른 곳으로 그녀를 찾아다녔다. 샌도르는 공주의 왼쪽 엉덩이에, 통통한 그 엉덩이에 초승달 모양을 직접 새겨놓았다고 한다. 사촌간인 스텐판과 바실리는 더 이상 가볼 곳이 남지 않을 때까지 줄기차게 찾아다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리도 이제 남은 것은 남작부인을 만난 적이 있는 마지막 사람을 찾는 일이었다.
토밀로바 부인이 그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아주 다급한 일이 벌어질 때에만 샌도르와 연락할 수 있었다. 만약 자구 연락을 했다간 스템볼로프들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야나체크의 마지막 핏줄을 찾아 나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작부인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다급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녀가 죽을지 누가 알았단 말인가? 더 심각한 것은 공주가 스스로를 돌볼 수 있을 만큼 자라기도 전데, 심지어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는지 알기도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마담 루소의 동생 말에 의하면, 언니의 친구라던 남작부인과 그녀의 딸로 추정되던 아기는 그들과 이틀밖에 같이 지내지 않았으며, 남작부인은 미국으로 오는 여행길에 얻은 열병에서 겨우 회복된 상태라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고 했다. 게다가 정신 상태도 매우 불안정했다고 했다. 그녀는 도시로 온 바로 그날, 많은 보석을 강탈당했다고 주장했고, 뉴올리언스 전역에 황달병이 퍼져 사람들이 무차별하게 죽어나가자 단 하루도 더 머무를 수 없다고 히스테리를 부렸다는 것이다.
"언니는 그녀를 설득할 수 없었어요." 나쁜 소식의 전령자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 부인은 혼자 도시를 떠날 준비를 한 거예요. 누구와 함께 어디로 가겠다는 말했을 때 우리는 말리려고 노력했죠. 건달과 스캔들이 무성한 여자와 함께 가겠다고 나선 거예요. 게다가 무법 친지인 곳으로 가겠다고 했으니까요. 우린 그토록 변덕스럽게 구는 그녀는 보고 열병이 도진 것은 아닌가 의심했죠. 심지어 우리가 아기를 맡아 보호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는 이유조차 말하지 않았어요. 그로부터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난 별로 놀라지도 않았어요. 그녀의 지갑 속에는 내 언니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쪽지밖에 없었대요. 돌로 약간 가려진 채 길 옆에 버려진 그녀를 돕스라는 여자가 발견했다는군요."
찾아야 할 이름이 하나 더 생겼다. 한 가지 운이 좋은 점이 있다면, 돕스라는 여자가 바로 이 나체스에 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녀가 아직 이곳에 살고 있을까? 마담 루소의 여동생은 1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도 그녀의 이름을 다시 듣지 못했다고 했다. 만약 여기 산다고 해도, 과연 그 아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을까?
세르게이는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관청으로 찾아가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만약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한다면 다음날부터 마을을 샅샅이 뒤질 작정이었다. 고된 임무, 뉴올리언스에서 이미 경험한 일이었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공주를 못 찾을지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새 왕은 그녀를 데리러 오시 싫어했던 것만큼이나 빈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저쪽 테이블에 앉으면 무대가 가장 잘 보일 것 같군."
바실리는 그들과 합류하자마자 말했다.
"돈을 주고 바꿔 앉자고 할까...........아니면 그냥 빼앗아버릴까? 어쨌거나 귀족이게 우선권이 있으니까. 저 농부들도 그 정도는 알겠지."
"신분을 숨기고 여행하는 중인데도?"
스테판이 냉담하게 반박했다.
"그렇군." 바실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강제로 빼앗는 수밖에. 힘도 특권이니까."
"정말 못 말리는군."
라자르가 씩씩대며 일어났다.
"내 자리에서 보면 그 빌어먹을 무대가 잘 보이니까 여기 앉게나."
"그렇게 말해준다면 받아들이겠네. 내 친구야."
스테판은 전략에 따라 미묘하게 행동하는 바실리과 이빨만 박박 가는 라자르를 보고 혼자 미소 지었다. 칼을 빼어 들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아직은 말이다.
4
그들 모두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스텐판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성질을 지녔고, 바실리는 때때로 그것을 무기처럼 정확하고 솜씨 있게 사용할 줄 알았다. 라자르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냈고, 같은 선생 밑에서 배웠고, 같은 훈련과 같은 적을 가진 그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라자르는 성질이 난 바실리와 스테판이 말썽을 일으키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걱정이 되었다.
라자르는 바실리가 분노의 배출구를 이미 찾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 무대, 전망 좋은 라자르의 자리에 대한 그의 욕심을 매우 현실적이었다. 손님들이 왜 자꾸 공연이 늦어지느냐고 성화를 부리자, 뭔가 색다른 볼거리가 제공되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공연은 지금쯤 시작되어야 했다. 단골손님들은 시끄럽게 테이블을 두들기며 불만을 표시했으나 기다릴 가치가 있는 것 같았다. 이쩌면 이 빈민굴의 댄서가 상상외로 괜찮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녀는 시골 빈민굴의 댄서답게 음탕한 여자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곳 미국인들은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다. 어쨌거나 바실리는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쁨이 실망으로 돌변한다면 모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 못한다는 것을 아는 스테판은 전전긍긍했다.
그는 스텐판에게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동전 몇 푼이면 댄서를 손에 넣을 수 있겠지. 만약 그녀가 나의 파티마만큼 괜찮아 보이면 내 앞에서 공연을 해달라고 해야겠어."
라자르는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바실리. 저런 창녀들에게 너무 많은 모험을 하는군. 뉴올리언스에서 세 번, 배에서 한번, 지금은 또 배꼽춤 추는 댄서라니, 자네가 가져갈 전리품은....."
"라자르는 우리가 이 문을 들어선 이래로 계속 핏대를 세우고 있다네."
스테판은 바실리의 변덕스런 성질이 나쁜 쪽으로 돌아가기 전에 얼른 끼어 들었다.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두 사람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 사람들이 맥주라고 부르는 말 오줌 같은 것을 마시면서, 바보 같은 여자가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것을 보로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다는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바실리는 웃음기 가득한 연한 밤색 눈동자로 라자르를 보았다.
"스테판이 화가 나면 얼마나 못되게 변하는지 알겠지."
"맙소사. 바실리."
라자르는 새로 바꾼 의사에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우릴 잘게 잘라 버려달라고 부탁을 하지 그래?"
바실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스테판을 바라보았다.
"내가 자네를 괴롭힌 건가. 친구?"
"자네가 노력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스테판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난 고집쟁이의 고함소리를 들어도 꿈쩍하지 않아."
"무슨 뜻인 줄 알겠네. 라자르. 뼛속까지 깊숙이 말이지."
바실리가 움찔했다.
"만약 자네 둘 다 입 닥치지 않으면, 무대 공연을 못 보게 될 거야."
바실리는 무대를 흘깃 보며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았다. 손님들이 일제히 보내는 박수갈채에 놀라 말문이 막힌 라자르도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스테판은 춤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엇을 기대했는지 몰라도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녀, 바빌론의 천사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고 고운 자태를 지녔다.
그 방 안에 있는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테판은 넋을 잃었고,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감각에 불을 지르는 춤, 그러나 무희의 우아한 움직임은 순결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수많은 남자들 앞에 서서 공연해야 하는 그녀의 자기 보호 방법일 테지만, 스테판에게 효과를 발휘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녀는 욕망과 방어라는 상충되는 본능으로 남자를 미치도록 만드는 종류의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 스테판이 느끼는 감정은 오직 강한 욕망뿐이었다.
스테판은 그녀가 입은 무대 의상이 어떤 종류인지 궁금했다. 분명 수많은 노예들 중에서 주인 눈에 뜨이려고 노력하는 진짜 하렘의 댄서들처럼 투명하게 내비치는 옷은 아니었다. 이곳은 미국, 여자들이 사지를 가리고 다니는 곳이었다. 적어도 정숙한 여자들은 말이다.
남자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는 창녀는 적어도 양팔과 다리 일부분, 그리고 춤의 성격상 배꼽 부분을 상당히 드러내도 상관없겠지만, 이 여자는 아니다.
배꼽 바로 아래에서 시작하는 풍성한 바지가 엉덩이와 배 그리고 다리까지 모두 감싸고 내려와 발목에서 조여 들었다. 자주색 천은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는 완전 불투명이었지만 너무 얇아서 다리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드러났다. 똑같은 천으로 만든 상의는 비록 짧기는 했으나 관객들이 원하는 길이보다 길어, 바리의 허리 부분까지 내려왔다. 길고 통이 넓은 소매는 손목에서 오므라들었다. 가슴 부위는 꽉 조이고 그 아래는 느슨하게 만들어진 상의가 율동에 따라 흔들렸다. 옷에 달린 조그만 은 조각들은 불빛을 받아 반짝였고, 엉덩이와 손목, 발목에 감은 장신구들은 댄서의 움직임에 따라 딸랑거렸다. 박자에 맞게 딸랑거리는 장신구 소리를 들으면 그녀가 이 춤의 전문가임을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미끄러지듯 무대 위로 오르던 그 순간부터 그녀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율동에 따라 찰랑거렸다. 짧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탓에 눈동자만 겨우 보였다. 강렬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스테판은 그녀가 사용한 두꺼운 화장먹(아라비아 여인들이 눈가를 검게 칠할 때 쓰는 재료) 때문에 눈을 내리깔았고 관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속살이 드러난 곳은 맨발과 몸을 진동시키는 동작을 할 때 언뜻 보이는 배꼽 주변뿐이었다.
놀려대듯 슬쩍 드러난 배꼽을 보며 바실리는 만족하겠지만 이미 대단한 관심을 표현한 스테판은 어떤 행동을 할까? 솔직함이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댄서는 뒷문으로 슬쩍 사라지려고 했다.
"바실리, 자네는 요즘 너무 게걸스러운 경향이 있어. 이번엔 우릴 위해 남겨두게."
"내가? 자네 들었나, 라자르? 저 친구는 내 눈앞에서 내 여자를 훔치려고 하고 있어."
"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자네 여자가 아니잖아. 스텐판 말이 맞아. 자네는 요즘 너무 게걸스럽게 군단 말야. 자네는 어떤 여자든지 좋아하지만 우리 스테판의 취향은 좀 특별하잖아."
라자르는 완벽하게 동의했다.
"난 함께 나눌 용의가 있네."
"난 아닐세."
스테판은 비록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그녀가 자네를 원한다면 자네 마음대로 하는 거야."
바실리는 반쯤은 화나고 반쯤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가볍게 던진 말이긴 했으나 놀라서 숨을 훅 들이쉬는 라자르의 숨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의 농담이 너무 잔혹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이 수의처럼 하얗게 변했다. 스테판은 그들 가운데 가장 잘생긴 남자였고 여자들은 그를 사모했다. 하지만 그것은 스테판이 굶주린 늑대로부터 하나뿐인 동생을 구하기 위해 상처를 입기 전의 일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오싹해진 바실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뒤쪽으로 의자를 밀면서 일어난 그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농담으로 한 말일 거야. 10년 전에 그런 말을 했더라면 좋았을걸."
라자르가 주저하며 말했다.
"내가 그것도 이해 못할 정도로 속이 좁은 줄 아는 건가?"
"맙소사. 스테판. 너무 과민 반응을 보이지 마."
라자르가 반박했다.
"바실리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자책하며 자신의 목을 자르기 전에 뒤쫓아 가야겠군.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내 낯가죽은 더 두껍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주겠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어떤 계급이든지 아름다운 여자들은 스테판을 피하려 한다는 바실리의 말은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다른 남자들처럼 스테판은 기분이 날 때 여자들과 즐겼으나, 그저 금에 대한 유혹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여자들, 주로 창녀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창녀들마저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스테판은 그런 식으로 즐기는 일이 드물었다.
스테판은 조그맣고 오만한 여자가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왜 그렇게 넋이 빠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유욕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춤일까? 아니면 여자를 안아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것일까? 그 여자는 분명 그의 깊숙한 곳을 뒤흔들어 놓았으나, 이상하게도 그 춤이 관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급함이 사라진 지금, 그 어떤 것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은 바실리와 라자르가 기다리는 호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거기에 앉아 시무룩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맥주를 다 마실 무렵, 술집의 다른 여급이 들어왔다. 불 것도 없는 여자였다. 수척한 얼굴과 비쩍 마른 몸매, 뒤로 빗어 묶은 머리카락, 행동도 사내 같았다. 그러나 스테판의 시선은, 방금 손님이 떠나간 테이블을 닦고 잔을 치우는 그녀를 따라갔다. 가벼운 발걸음, 재빠른 동작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여자치곤 너무 빨랐다.
타냐도 그를 보았다. 순간 성호를 긋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만약 악마가 이승으로 불려온다면, 지옥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바로 그런 눈동자를 가졌을 것이다.
타냐는 자신의 지나친 상상력을 피곤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기분은 유쾌했다. 마지막으로 춤을 춘 이래 정확히 6년 만이었다. 춤을 잊어버렸을 것 같아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레리아가 노름꾼과 도망친 후, 6개월 동안 그녀는 돕스의 강요 아래 춤을 배웠다.
처음 타냐에게 춤을 가르친 사람은 레리아였다. 레리아는 흥행단에 섞여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단원 한 사람과 싸우고 나서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돕스에게는 행운의 날이었다. 레리아의 이국적인 춤은 선술집의 이름을 주변에 알려주었고 만만치 않은 돈이 굴러 들어왔다. 돕스는 마침내 매음굴과 도박장까지 만들고 심지어 그 춤에 걸맞게 술집 이름도 '시랠료'로 바꾸었다. 레리아가 도망가자, 그는 발작까지 일으켰다.
나름대로 그 춤을 익힌 타냐는 돕스를 만족시킬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으나 성년이 된 지금처럼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데다 파우더와 크림을 사용하여 얼굴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화장법을 레리아에게서 배워두었다. 그것은 무대에 올라간 댄서가 그녀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던 돕스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으며, 타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단골손님들이 눈치 채려고 하자 돕스는 춤을 출 다른 소녀를 찾았다.
타냐는 춤을 안 추게 되어 기뻤다. 춤을 사랑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과 거친 말을 혐오했다. 하지만 에이프릴의 발이 나을 때까지는 다시 춤을 추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손님들을 옆집에 빼앗길 것이다. 그렇게 하긴 싫었다. 곧 자신의 소유가 될 술집을 지키고 싶었다. 만약 시랠료가 그녀의 것이 된다면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도록 숙련된 댄서를 더 고용해야겠다고 맹세했다.
타오르는 눈동자가 아직도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느낀 타냐는 몸을 떨었다. 모든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그를 다시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고 결심했을 때 그가 손짓했다.
바보 멍청이처럼 굴지 마. 그는 악마가 아니야. 아니라고. 그녀는 거무스름한 얼굴을 가진 부유한 차림새의 신사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걸음이 너무 더뎠다. 다음 순간 타냐는 자신의 바보스러움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남자에게서 두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서 보니, 그의 눈동자가 악마처럼 이글거렸던 이유는 눈동자에 반사된 촛불 때문이었다. 노란색이 아닌 황금색 셰리주처러 아주 옅은 밤색 눈동자가 거무스름한 얼굴 안에서 아름답게 반짝였다.
안심한 타냐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이 술집 안에서 그렇게 미소를 지어본 적을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예쁜 미소는 늘 수척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는 그녀의 의도와 안 맞기 때문이었다. 타냐는 돕스의 노처녀 딸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이방인이며 아침이 되면 배를 타고 떠날 터이므로 약간의 실수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뭘 도와드릴까요. 손님?"
스테판은 미소를 보자 혼란스러웠다. 일에 찌든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데다, 그를 처음 보고 미소 짓는 여자가 드물었던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두려움 섞인 호기심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이 여급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 자신을 정확히 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자신도 그리 예쁜 얼굴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리라.
스테판은 그녀의 반응을 보자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웃음을 참고 있는 아이처럼 장난기로 부글거렸다. 분명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얗게 드러난 치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스테판의 날카로운 눈은 그녀에게서 이상한 구석을 찾아냈다. 남자 옷처럼 벙벙한 회색 셔츠와 조끼, 농부 아낙네 차림의 수수한 검은 스커트, 엉덩이 부근에 매달린 칼........., 대체 그 칼의 용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의 손은 작았다. 손바닥은 붉고 굳은살이 박혔지만 복숭아 빛깔의 손등은 피곤에 전 안색이나 눈가의 거무스름한 얼굴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탄력 있는 발걸음과도 대조를 이뤘다.
마침내 직감이 움직이자, 그는 슬쩍 넘겨짚었다.
"그런 검은 칠을 지우기란 무척 힘들겠군, 그렇지?"
스테판은 깜짝 놀라는 그녀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비벼대는 그녀를 보며 더욱 크게 웃어 젖혔다.
타냐는 이제 정신을 차렸다. 무대 위에 설 때면 그녀는 얼굴을 위장했다. 연한 녹색 눈과 하얀 치아를 제외하곤 전혀 매력이 없는 그녀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급으로 일하면서도 몸을 위장했지만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무대 의상은 풍성한 편이었으나 사람을 자극했다. 타냐는 분명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는 중이었다. 매춘을 하는 댄서와 방해받고 싶지 않은 여급.
"전혀 웃긴 일이 아닌데요. 손님."
눈가의 얼룩을 닦아내자, 그녀는 무뚝뚝하고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스테판은 계속 킬킬거리면서 물었다.
"내가 좀 도와줄까?"
"아직도......., 아뇨. 됐어요."
타냐는 이를 악물며 스커트 밑단을 들어 다시 닦았다.
셔츠 아래로 드러난 타냐의 맨살을 보자, 한동안 잠을 자던 욕망이 스테판의 몸을 가차없이 자극했다.
화장먹을 닦아내자, 눈가의 검은 얼룩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부풀어 올랐다.
"이제 무슨 일로 저를 불렀는지 말해주세요. 다른 손님들도 있으니까........."
"아가씨."
"무슨?"
"난 아가씨를 원해."
타냐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마 조롱을 하는 것이리라. 타냐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몇 분이면 해치우지만, 몇 년 동안 수련한 위장술 아닌가. 그녀의 외모는 상대를 밀어내는 쪽이지 끌어당기는 쪽이 아니었다. 그는 다듬지 않은 보석처럼 거칠기는 했지만 외모는 준수한 편이었다. 또 몸에 딱 맞은 군청색 코트의 재간은 그가 부유한 계급의 사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돈과 외모를 조화롭게 갖춘 사람은 그녀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타냐는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검고 이국적인 얼굴을 보고서 스페인 사람이나 멕시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스페인 사람의 말투를 구별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다. 북부 지방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 잘 오지 않았다. 시랠료에 오기에는 너무나 까다로운 취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는 매처럼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이글거리는 검은 눈썹, 얇은 일자 입술, 흉터를 제외하곤 매끈한 피부로 감싸인 강인한 턱, 흉터는 왼쪽 볼 위에서 아래로 그러진 모양이었는데, 턱 아래쪽으로도 비슷한 상처가 나 있었다. 야생동물이 그 남자의 얼굴을 통째로 삼키려다 실패한 것 같았다.
흉터를 보자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는 고통을 경험했으리라. 타냐는 고통이 뭔지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농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원한다는 사내의 뻔뻔스런 말에,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타냐가 할 말은 하나였다.
"이자한테 말해보세요. 그녀를 보내드리겠어요."
타냐가 돌아서서 나가려 하자, 뒤쪽에서 무언가가 허리띠를 잡아당겼다. 그의 손이었다. 그녀는 균형을 잃고 그의 무릎 위에 주저앉았다. 순간 타냐는 너무 놀라 움직이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마침내 고개를 들고 분명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정말로 후회하게 될 거예요. 손님."
"쉬이!"
그는 빙그레 웃었다.
"아가씨는 화낼 필요가 없어."
스테판은 타냐의 무릎에 25달러짜리 금전을 떨어뜨렸다.
타냐는 예전에 딱 한 번 본 적 있는 그 금전을 바라보았다. 에이프릴과 아지가 벌어들이는 돈은 1달러나 2달러가 고작이었으며, 하룻밤 일하고 돕스에게 받는 돈은 그보다도 적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일할 사람을 더 고용할까.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새 옷을 살까......., 이 남자가 농담하는 걸까?
지금까지 한 번도 유혹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그 돈을 만져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일었다. 이런 망설임을 가져다준 그는 악마가 틀림없었다. 그녀가 할 일은, 어느 누구를 위해 간직한 게 아닌 순결을 그에게 내주는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결혼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가깝게 있으니 그의 체취가 천국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그의 옷차림이 깨끗하고 나무랄 데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것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어쩌면 즐기고 있는지도........오. 맙소사,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당신은 분명히 악마일 거예요."
스테판은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으나 그냥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
타냐는 녹색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당신은 적어도 그 말을 부정해야 한다고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야만 하지?"
"왜냐하면....... 오. 신경 쓰지 말아요."
일어나려고 했으나 허리에 감긴 팔이 타냐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더욱 가늘어졌으나 그는 빙그게 웃을 뿐이었다.
"이것 봐요. 손님. 당신은 선택을 잘못....."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스테판,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바실리, 지금은 아냐, 눈이 있으면 내가 바쁘다는 사실을 알 것 아닌가."
스테판은 성급하게 으르렁거렸다.
타냐는 고개를 돌리다가 금으로 만든 아도니스(여신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미소년)라고 묘사할 만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금발, 갈색 피부, 지금 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보다 연한 색깔의 밤색 눈동자, 새로 나타난 바실리에게서 눈을 뗄 수 가 없었다. 매혹, 그는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내일 것이며, 분명 그녀가 지금까지 보아온 중에서 가장 잘생긴 사내였다.
"자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 자네를 위해 내가 나서서 아까 그 댄서와 거래해보겠네."
그는 타냐를 바라보았다.
순간 타냐는 그의 말이 질 나쁜 모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그런 사실을 떠드는 남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밟고 선 카펫보다 형편없는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예상보다 더 아픈 상처였다.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내뱉은 무심한 몇 마디에 상처받는다는 것 자체가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두 가지 감정이 내부에서 날뛰었다.
대체 이들은 자신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걸까? 한 명은 그녀를 돈으로 살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다른 한 명은..... 그녀를 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보복하고 싶었지만, 일단 사내의 무릎에서 내려와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를 잡고 있던 팔이 느슨해졌다. 타냐는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금전을 올려놓고 그 자리에서 나오려고 몸을 돌렸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현명한 결정, 다음 순간 그녀는 치솟는 분노를 느끼면서 몸을 획 돌려 아도니스의 뺨을 후려쳤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어떤 사람도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바실리가 그녀를 때리려고 팔을 쳐드는 순간, 스테판이 그의 팔을 낚아챘다. 타냐는 칼을 빼들었다. 위협이 먹혀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두 남자가 미동도 하지 않고 그녀의 칼을 응시하는 동안, 타냐는 뒷걸음질 친 다음 뒤돌아서서 뒷문으로 나갔다.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스테판은 자신의 친구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바실리. 자넨 정말 돼지만큼이나 둔감하군!"
바실리 역시 똑같은 강세로 소리를 질렀다.
"저 년이 우리에게 칼을 겨누었어!"
"자네가 그녀를 때리려고 했잖아."
스테판이 혐오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날 때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자네가 그럴 만한 짓을 했어."
바실리는 어깨를 으쓱하고 나서 빙긋 웃었다.
"자네가 나의 실수를 눈감아준다면 말이야. 그게 무슨 문제야? 자. 이제 그 댄서를 찾아볼까?"
"바보 같으니, 저 여자가 그 댄서라고."
"그렇다면 나는 시간을 절약해주기 위해 자네한테 돌아온 것이군. 아마 나중에 나에게 고맙다고 말할 걸세."
5
또 하나의 실마리였던 돕스라는 여자가 몇 년 전 세상을 떴다는 세르게이의 기운 빠지는 소식을 들은 후, 바실리는 지난밤 즉시 시랠료로 가보려고 했으나 스테판은 그에게 아침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찾던 곳이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선술집의 주인이자 타티아나에 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그 여자의 남편도 20년 넘게 그 도시에서 살았는데 밤새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스테판은 그 댄서와 다시 대면하기가 부끄러웠다. 바실리의 오만함이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 때 자신은 그냥 구경만 했기 때문이었다. 바실리의 둔감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건 사실이지만 그건 핑계거리가 되지 못했다. 자신이 골랐던 이상, 그녀를 보호해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녀를 위해 변명을 해주어야만 했다. 물론, 바실리가 왜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그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지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실리는 그 전에 저지른 자신의 실수를 가능한 한 빨리 어떻게 해보려고 그랬을 것이다.
좌우간 스테판은 그 여자가 없을 만한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선술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세르게이가 노크한 순간, 스테판이 피하고 싶은 바로 그 여자가 문을 열더니, 그곳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문을 꽝 닫아버렸다.
문전박대라니, 그건 그들 네 사람 모두에게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들의 반응이 제각기 달랐다.
세르게이는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문을 부술까?"
누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바실리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렇게 뻔뻔스러운 행동을 하다니, 아직도 그녀가 이런 짓을 할 만하다고 말한 건가, 스테판?"
스테판은 자신이 싫을 뿐이었다. 문이 닫히자, 그가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안도였다. 겁쟁이 같은 행동, 하지만 그 순간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이 친구야. 그녀는 카르디니아의 농부가 아니잖나."
"이 여자는 미국 농부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라자르가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녀가 자네에게 말해줄 수 있을 걸세. 그녀에게 물어보세나."
"그렇게 하려면 문부터 부숴야 할 것 같군."
세르게이가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빗장 잠그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어. 밀기만 하면....."
그 말과 동시에 빗장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르게이가 다시 물었다.
"부술까?"
스테판이 앞으로 나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가씨, 우리는 월버트 돕스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거요. 아가씨 때문이 아니오. 그러니까...."
"돕스는 아파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은 내가 이곳을 운영하고 있어요. 따라서 당신들은 나에게 물어 보아야 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제 가주셨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그녀의 대답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문에서 엿들은 게 분명했다. 만약 그녀의 고집이 분노를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스테판은 더욱 수치를 느꼈을 것이다.
"만약 수리할 때까지 문짝 없이 영업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문을 여는 게 좋을 거요. 아가씨!"
그건 분명 마법의 주문이었다. 문이 열렸다. 그러나 그 여자는 한 손을 허리춤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 칼자루를 잡은 채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었다. 칼날은 아직 칼집 속에 있었지만, 바실리와 스테판은 그것이 얼마나 재빠르게 튀어나올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깃들인 호전성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옷차림은 지난밤과 별반 다름없었지만 셔츠 색깔이 그녀의 안색을 더욱 수척해 보이게 했다. 아침의 밝은 햇살이 그녀에게 달가운 존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외국인치고는 우리말을 아주 잘 하시는군요."
그녀는 스테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의미를 제대로 못 알아듣는 모양인데, 난 분명히 당신에게 돕스가 아프다고 말했어요. 그 뜻은 당신들 마음대로 그를 귀찮게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스테판은 뻔뻔스럽게도 한 발짝 앞으로 더 나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칭찬할 만한 용기였으나 그런 상황에선 바보스럽기까지 했다. 우선. 스테판은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체격 조건이 우세했다. 타냐는 스테판의 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불타오르는 그의 눈동자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에 땀이 남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아가씨가 영어를 잘 이해한다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윌버트 돕스를 만나야 한고 아가씨가 대신 말해줄 사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들었을 거요. 만약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아가씨는 뒤로 물러나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타냐는 그를 노려보며 한참 동안 주저했다.
"그렇다면 들어가서 죽어가는 남자를 귀찮게 해요. 당신 양심에 달렸죠."
그녀는 획 돌아서서 길을 비켰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저 여자한테 물어봐야 하잖아."
바실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스테판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서 투덜거렸다.
라자르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킬킬거렸다.
"우리끼리 찾아보는 게 더 쉬울 거야. 바실리. 저 여자에게 묻는 것보다 말이야. 왕궁을 조사하는 것도 아니고 방 몇 개만 뒤지면 될걸."
"그렇다면 빨리 찾자고. 냄새가 지독해서 참기 힘들어."
그 냄새는 잿물비누 냄새였다. 테이블을 한쪽으로 밀치고 그 위에 의자들을 올려놓은 뒤, 비눗물을 풀어 바닥을 문지르는 중이었다. 선술집은 언제 그랬냐 싶게 깨끗했다. 바실리가 매스껍다고 생각한 것은 예상치 못한 접견 의례로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간 다음 더 좁은 복도를 따라 가는데, 아침식사가 늦는다고 불평하는 돕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픈 사람 목소리가 아닌 배고파 짜증난 사람의 목소리였다.
바실리와는 달리, 라자르는 그들의 탐색을 매우 재미있어했다. 그는 다시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으면서 큰 소리로 물었다.
"'굼뜬 창녀' 라고 표현한 여자가 바로 아래층에 있는 아가씨인가?"
"창녀는 맞는 것 같은데, 굼뜨다니?"
세르게이가 대답했다.
"그녀는 무덤 속에서 일하는 것 같아. 아니면 무덤에서 방금 나왔거나."
세르게이는 바실리보다 더욱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스테판의 심경을 자극했다. 어쨌거나 스테판은 자신의 분노 때문에 그녀를 자극하지 말았어야 했다.
"무슨 말인가?"
바실 리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다그쳤다.
"그 뻔뻔스런 암캐는 우리 호기심을 받을 자격이 없어. 게다가 공주가 있는 곳이 곧 밝혀질 테니 말이야."
"안 그럴지도 모르지."
세르게이가 문고리를 잡으면서 말했다.
"빌어먹을, 타냐!"
문을 열기도 전에 그들이 들은 환영 인사였다.
"대체 무슨 핑계로......"
네 명의 사내가 작은 방 안을 가득 메우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윌버트 돕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이 잔뜩 찐 몸이 그렇게 움지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묘기에 가까웠다.
"어떻게 들어왔소?"
그는 소리를 질렀으나 옷차림이나 태도에서 풍기는 부유함을 보자 목소리에 변화가 일어났다.
"방문객은 만나지 않는다고 타냐에게 일러두었는데."
"만약 아래층에 있는 아가씨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당신은 그녀를 용서해야 할 거요. 그녀는 우리를 따돌리려고 별 수단을 다 썼으니까 말이오."
"하지만 충분한 정도는 못 되었군."
라자르의 말에 돕스가 코웃음을 쳤다.
"좋소. 그렇다면 들어나 봅시다. 당신네들처럼 부유한 귀족 분들이 왜 날 보자고 한 거요?"
"죽은 당신 아내와 관련된 일 때문에 왔소."
"아이리스? 무슨, 나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의절한 그녀의 가족들이 유산이라도 남겨준 거요?"
돕스는 뭔가 착오가 있었으리라 생각하면서 허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리스는 아기를 가진 후 돈 많은 애인에게 버림받자 절망에 빠진 채 그와 결혼했다. 돕스는 아이리스가, 나체스에 막 문을 연 선술집에 약간의 품위를 더해주길 바랐기 때문에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기가 죽은 다름 그녀는 몸단장도 하지 않고 지저분하게 지냈으므로 두 사람의 거래는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우린 당신 아내의 가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소, 돕스 씨.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20년 전 그녀가 뉴올리언스에서 떠나올 때 함께 왔던 여자에 관해서요."
"그 미친 외국인?"
"그럼 당신 아내가 당신에게 말했다는 뜻이군."
"내가 아이리스 뒤를 쫓아갔을 때 직접 보았소."
돕스는 아내가 자신에게서 도망쳐, 뉴올리언스의 가족에게 다시 받아달라고 애원했다가 거절당했던 때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그에게 돌아왔음에도 그는 미친 듯이 그녀를 때리려고 했다. 그러나 돕스가 그녀를 찾아냈을 때에는 열병으로 죽어가는 외국 여자와 아기가 함께 있었다. 돕스는 그녀를 때려주지 못해 안달이 났으나 아이리스는 아기를 돌보아야 했다.
그에게 아기는 중요했다.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몇 년만 지나면 아기는 어떤 노예보다도 쉽게 부릴 수 있고, 한푼의 돈도 지불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타냐를 손에 넣게 되었는지 기억하자, 그의 표정을 경계심으로 가득 찼고 목소리는 호전적으로 돌변했다.
"그 여자에 대해 할 말은 많지 않소. 아이리스가 무일푼이었던 여자를 짐마차에 태워 여행했는데........."
"뉴올리언스에서 나체스까지 곧장 가는 배가 있었는데 왜 당신 아내는 육지로 여행한 거요?"
라자르가 물었다.
"당신이 알 바 아니지만 뱃삯이 없었소. 그녀는 거기까지 짐마차로 갔다오. 내 짐마차로 말이오. 그것을 팔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
돕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나에게서 도망갔지만 갈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소. 내가 강가 옆 도로에 진을 치고 기다릴 때 아내는 그 여자를 간호하면서 돌아오는 중이었소. 그 여자는 열에 들떠 왕과 암살에 대한 헛소리를 지껄여댔고......... 대부분 우리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로 떠들었소. 자신의 임무가 실패로 돌아갔다나. 그녀는 그날 밤 자면서 죽었고 그게 전부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돕스 씨."
악마의 눈동자를 가진 검은 사내가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은 아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소."
무척이나 진지해 보이는 그들 가운데서 특히나 이상스럽게 꿰뚫어보는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돕스를 긴장시켰다. 어떤 강력한 감정과 완벽할 통제력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데다 섬뜩하기조차 했다.
돕스는 그들이 찾는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찾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의 표정은 아직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으나 목소리는 훨씬 부드럽게 변했다.
"잊지 않았소. 단지 기억하기 너무 슬픈 일이라서. 아기가 있었소. 그래, 하지만 엄마처럼 열병에 걸렸다오. 나와 아이리스는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었소."
6
"죽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절규가 두 방향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돕스는 자신의 말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야 할지 혹은 자신을 향해 질문이 퍼부어질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손과 이마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그들 악마의 눈동자가 자신의 머리통 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아서였다.
그는 목청을 가닫듬으면서 남몰래 손바닥을 담요에 닦았다.
"왜 그 아기에 대해 관심이 있는 거요? 당신네들 모두 아기 아버지가 되기엔 너무 젊지 않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돕스는 전보다 더 기운이 빠졌다.
다음 순간 지금까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금발머리 남자가 응수했다. 잘생긴 외모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보다는 덜 위험스러워 보였다.
"무덤은 한 개뿐이었소. 그 여자의 것. 아주 초라하더군."
목소리에 깃들인 경명은 돕스가 일부러 바보처럼 굴면서 제 무덤을 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했단 말이오? 삽도 없는데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소?"
돕스가 다그쳤다.
"무덤이 한 개뿐이었소. 돕스 씨."
사내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아기는 그 여자와 같이 죽지 않았소. 우리는 길을 계속 갔고....."
돕스가 제대로 대답할 시간도 없이 다음 질문이 쏟아졌다.
"며칠 후에?"
"조금 후에."
"정확히?"
"이틀이오, 빌어먹을!"
"시간은?"
"그걸 어떻게 기억한단 말이오?"
"그 사내아이가 죽은 시간이 몇 시였소. 돕스 씨?"
"사내아이? 사내아이라니? 그 앤 여자요."
"여자요? 아니면 '였던' 거요?"
"여자였소! 대체 뭣 때문에 이런단 말이오? 여자였든, 언제 죽었든 그걸 알아서 뭐가 달라진단 말이오? 그 애는 죽었소. 내가 아는 것은 그게 전부란 말이오!"
"난 그렇지 않소. 돕스 씨. 증거가 필요하오."
"당신이 댈 수 있는 증거 말이오. 돕스 씨. 그 아기를 묻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까. 돕스 씨. 우릴 그 무덤으로 안내하시오."
돕스는 마치 미친 사람들을 보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심각했다. 끔찍하리만큼 심각했다. 무서운 눈동자를 가진 검은 사내는 질문이 쏟아지는 가운데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들었다. 돕스는 그의 침묵이 더욱 불안했다.
"난 누굴 어디로 안내할 형편이 아니오. 지난 6개월 동안 이 방에서 나가본 일이 없소."
돕스는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다행으로 여겼다.
"병이 깊은 모양이니 우리가 편안하게 여행하도록 주선하겠소."
"그래보았자 소용없소."
돕스가 신경질적으로 주장했다.
"아기를 땅에 그냥 묻었단 말이오. 무덤조차 필요 없었으니까. 표시를 해놓은 것도 아니도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소. 무덤을 제대로 만들었더라도 지금쯤 없어졌을 거요. 난......."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소."
검은 사내가 말을 잘랐다.
"시간을 내줘서 고맙소."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들은 모두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돕스는 베개에 몸을 털썩 눕히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헤쳐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계단 꼭대기에서, 스테판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거짓말을 했어."
"그래."
라자르가 동의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단 하나."
세르게이가 말했다.
그들의 생각은 모두 똑같이 흘러 기가 막힌 결론을 향해 나아갔다.
고함을 친 사람은 바실리였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그녀는 선술집 창녀야. 맙소사. 못생기고......"
"눈동자 색깔이 맞아."
라자르가 지적했다. 더 이상 재미있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 마을만 해도 녹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백 명은 될걸. 게다가 아래층에 있는 불쾌한 여자는 나이가 더 많아 보인다고. 곧 서른은 될 것 같은데."
바실 리가 주장했다.
"힘든 일을 하면 나이가 더 들어 보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여자 이름이 타냐..."
"그만 해!"
스테판이 씩씩거렸다.
"우리 모두 그런 결론을 내린 이유를 잘 알아. 가능성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로만 할 게 아니라 방법을 찾아야지."
바실리는 아직 반대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야."
"우리가 찾는 사람이 그녀인지 아닌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어. 바실리. 자네도 나만큼이나 잘 알잖아."
"그녀가 바로 공주라고는 믿을 수가 없어. 몇 가지 상황이 맞았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는 않아."
바실 리가 대답했다.
"그녀의 왼편 엉덩이에 새겨진 초승달이 말해주겠지."
"빌어먹을. 스테판! 좋아. 그렇게 우긴다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할수 있을 걸세. 난 그런 성질 더러운 여자. 근처에도 가기 싫어."
"자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동전 몇 푼이면 술집 창녀 치마 정도는 걷어올릴 수 있으니까.
스테판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바실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스스로 그녀를 창녀라고 부른 적은 여러 번 있었으나 그것은 스테판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는 달랐다. 대체 그의 사촌은 창녀가 미래의 카르디니아의 왕비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두 사촌이 상반되는 의견을 놓고 물리적인 충돌을 일으키기 전에, 라자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녀를 찾아 몸에 어떤 특별한 표식이 남아 있는지 물어보는 게 어떤가? 만약 그녀가 그 놈의 달 어쩌고 한다면 입씨름이 필요 없을 게 아닌가."
"왜 묻는지 말해주지 않으면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걸? 만약 그녀에게 이유를 말한다면, 몸에 달을 새겨 넣을지도 몰라."
"우리가 무엇을 찾는지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거야. 세르게이."
라자르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말할 수밖에......"
"당신들, 아직도 거기에 있어요?"
음식 쟁반을 든 그녀가 계단 아래쪽에서 다그쳤다.
"엿들었겠군."
스테판이 계단 아래로 내려오면서 말했다.
"그에게 맡겨둬."
"하지만 스테판....."
라자르는 스테판이 손을 드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계단이 너무 좁기 때문에 타냐는 그들이 모두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신경이 곤두섰다. 두 손으로 쟁반을 들고 있느라 순간적인 방어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악마의 눈동자는 지금 이글거리지 않았다. 지난밤에 본 것은 그녀의 실수가 분명했다.
하지만 잘생긴 사내의 눈동자가 타오르기 시작했다....하나님, 도와주소서!
그 눈동자들은 무섭도록 환하게 타올랐다. 흉악하거나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그녀를 행해 이글거리는 중이었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그 사내는 그녀를 미워했다. 지난밤 모욕적인 말을 듣고 뺨을 후려친 탓일까. 그는 마치 그녀의 얼굴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기라도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감정이란 상호 교감의 성질을 지녔을까, 타냐도 그가 안겨준 상처를 곱씹으며 지난밤을 지새웠다. 너무 깊이 맺혀 눈물이 흐를 정도였다. 등을 내리친 돕스의 지팡이가 그런 종류의 모욕보다는 더 나았다. 물리적인 고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지만, 지난밤의 수치는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힐 것 같았다.
다른 두 남자는 먼저 만났던 사람들보다 덜 위협적이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남자가 그녀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마치 그녀가 숨긴 무엇인가를 찾아내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 같았다.
타냐는 그런 호기심에 익숙지 않았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다른 남자는 조금 작은 키에 땅딸막했고 안색은 창백했다. 타냐는 그의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연민을 보았다. 그녀는 등을 곧추세우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마지막 남자가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타냐는 그들을 다시 보지 않게 되길 바라면서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그 중 한 명이 자신을 따라온 다는 사실도 모른 채, 돕스의 방으로 급히 뛰어들어가 문을 닫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7
"그녀가 물어보니까 돕스는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잡아떼더군."
라자르는 윌버르 돕스의 방 밖에서 엿들은 다음 다시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돌아오면 가까이 가지 말라고 경고하던데."
"그 외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냐. 대부분이 불평이었어. 특히 아침식사가 늦은 것에 대해서 말이지. 그녀 말대로 고용인도 두지 않고 혼자 이 선술집을 꾸려가는 것 같네."
"그녀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좋은 이유가 되겠군. 비록 우리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말이야."
세르게이가 한마디 했다.
"그녀가 나오려면 오래 걸릴 것 같나?"
"아닐 거야. 아주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꾸짖는 돕스의 태도로 보아서, 만약 내가 그녀라면 가능한 한 빨리 그 방에서 나오려고 할 걸."
바로 그때 그들은 문 닫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피곤에 지친 표정, 계단 밑에 선 그들을 보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한 손을 칼자루 위에 얹었다.
스테판은 전쟁으로 단련된 남자들에게 그런 무기를 귀찮은 물건이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무시할 의도는 아니었으나 그런 여자는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문을 못 찾은 건가요?"
그녀의 시선이 스테판에게 꽂혔다. 스테판은 자신을 자극하려는 그녀의 의도를 무시했다.
"아가씨와 할 말이 있소."
"아까는 돕스를 만나러 왔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만족할 만큼 대답을 듣지 못했소."
여자의 눈썹 한쪽이 활처럼 구부러졌다.
"당신이 만족했든 만족 못했든 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라자르가 피식 웃었다. 바실리는 혐오스럽다는 듯 코웃음을 쳤으나 다행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스테판은 그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 안에 들어 있는 두 가지 뜻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움찔했으나 겉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린 몇 가지 질문할 것이..."
"난 시간이 없어요."
"당신에 대한 질문이오."
"내가 말했잖............"
그녀가 되풀이 말하려고 했으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막았다.
"그만, 아가씨! 지난밤 일에 대해선 사과하겠소. 또한 아까 함부로 말한 것도 사과하겠소. 지금 우린 아가씨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고함치면서 하는 사과는 쓸모 없었다. 게다가 스테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억지로 사과하는 동안, 다른 남자들은 조금의 관심조차 없는 듯 하릴없이 방 안을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실수였다. 그들은 일부러 방에서 나가는 모든 출입구를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땅딸막한 사내는 그녀가 다시 계단 위로 올라가지도 못하게 가로막고 서 있었다.
분명, 타냐가 '협조'하기 전에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자신에게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물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들이 나가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대답을 강요하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타냐는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그곳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그러려면 빌어먹을,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기꺼이 동의한다는 인상은 심어주지 말아야 했다. 만약 보복을 가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즉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스테판은 망설이는 그녀에게 제안을 했다.
"만약 시간 때문에 그런 거라면 우리가 보상해주겠소."
스테판은 그녀에게 동전을 던졌다. 타냐는 반사적으로 동전을 잡았다가 곧 다시 던져버렸다.
"돈은 그냥 뒤요. 물어볼 게 있다면, 그 남자의 사과를 보상으로 받겠어요."
타냐가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그 남자'는 바로 금발의 아도니스였다. 다른 사내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마치 그가 응하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눈치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타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타냐가 협조에 대한 대가를 더 높이려는 듯 뒤로 물러섰다. 그 자리를 뜰 사람처럼 보여야 했고, 자존심이 그렇게 하라고 명했다. 단지 그들이 너무 거칠게 나오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 타냐는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밤색 머리카락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대신 칼을 빼들었다. 사내들은 물론 타냐 자신도 놀랐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의도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단지 수년 동안의 매질로 인해 생긴 빌어먹을 자기 보호 본능이었다. 어쩌면 오늘 그 본능이 타냐를 죽일수도 있었다. 그 남자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가 지난밤 칼을 빼든 다음 두 사람에게 떠나라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들이 나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도 똑같은 부류의 사내였다.
"바실리!"
누군지 모르지만 매우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불만이 가득한 바실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 다음 큰 목소리로 거만하게 덧붙였다.
"내 말을 잘 들어요. 아가씨. 내 말이나 행동이 당신의 연약한 감수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거슬렸다면 미안하게 되었소."
그는 사과를 하면서 다시 타냐를 모욕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내에게서 더 이상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적어도 칼을 다시 집어넣은 만큼은 되었다. 그녀 앞에 있는 푸른 눈동자가 안심하는 것 같았다. 타냐는 자신도 안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길 바랬다.
그녀는 몸을 획 돌려 바실리에게 환한 미소를 보냈다.
"고마워요. 친절한 신사분, 내가 당신에 대해 잘못 판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군요."
바실리는 자신의 사과보다 그녀의 감사가 더 부실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다시 모욕을 하려드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테판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만족했소. 아가씨?"
그녀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 물론이죠. 난 단지 선술집에서 일하는 여자에 불과하고,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기에도 너무 무식한데, 어떻게 만족하지 않을 수 있나요? 아니. 내 대답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미소는 사라지고 다시 빈정대는 말투가 이어졌다.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은 싸늘했다.
"어서 물어보고 여기서 나가세요."
바실리는 다시 얼굴을 붉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세 명의 사내들이 보내는 경고의 눈짓 때문이었다.
"아주 감동적인 대답이군요. 아가씨. 윗사람들을 흉내 내어 놀리는 법은 누가 가르쳐줬소?"
스테판은 가까운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를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윗사람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되뇌었다.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
그가 재빨리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정정해주겠소. 자신의 선택에 의해 말투가 많이 달라지는군. 아가씨 아버지가 교육을 시킨 거요?"
"아버지? 돕스를 지칭하는 거라면, 그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나 일할 시간을 빼앗는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이리스 돕스는 교육을 받은 여자였죠. 그녀가 날 가르쳤어요."
그는 그녀를 위해 의자를 끌어냈다.
"앉겠소. 아가씨?"
"아뇨. 됐어요."
"내가 앉아도 괜찮겠소?"
그녀의 입술이 약간 움찔했다.
"좋고말고요, 난 서서 남자들을 보는 데 익숙하거든요."
그는 다른 의자를 내리지 않았다. 라자르는 뒤쪽에서 껄껄대고 웃었다. 스테판은 그녀가, 앉아 있는 손님의 시중을 드는 일에 대해 말하는 거라고 짐작했으나 또 다른 의미로 보며.....그는 자리에 앉았다.
"그럼. 윌버트 돕스가 당신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뜻이오?"
"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는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렇다면 아가씨는 여기서 일만 하는 거요?"
"내 기억이 남아 있는 순간부터 난 이곳에서 살았어요."
"오. 그렇다면 돕스의 아내가 아가씨 어머니였겠군."
타냐는 얼굴을 찌푸렸다.
"돕스 씨 부부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요? 아이리스는 죽었고 돕스도 죽어가는 중이에요."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아가씨. 곧 끝낼 테니, 자, 아이리스 돕스가 아가씨 어머니요?"
"아뇨. 내가 아기였을 때 엄마가 죽었다고 아이리스가 나에게 말해주었어요."
"어떻게 죽은 거요?"
"황열병이라고 했어요."
"이름은 알고 있소?"
"엄마 이름 말인가요?"
타냐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질문이 너무 개인적인 내용이어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전에 없던 다급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당신이 그토록 예의바르게 물어보는 돕스에 관한 질문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만약 말해주지 않으면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어요."
"내가 묻는 모든 질문이 서로 관련 있는 거요. 아가씨. 만약 내 질문이 너무 개인적이라면, 그것은 당신이 윌버트 돕스와 지금까지 살았기 때문이오. 자, 어머니 이름은."
"나도 몰라요."
그의 설명에 불만을 느낀 타냐는 그가 얼굴을 찌푸려도 개의치 않았다.
"그럼 아가씨 이름은? 타냐, 맞소? 그건 태어날 때부터의 이름이오. 아니면 아이리스 돕스가 지어준 이름이오?"
"둘 다예요. 아이리스가 내 이름을 말해주었지만, 그건 발음하기 곤란해서 일부분만 사용한다고 했거든요."
그는 그녀를 한참 동안 응시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완전한 이름을 알고 싶소?"
"스테판, 아직은 확인된 게 아냐."
타냐 뒤쪽에서 경고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스테판은 타냐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이상일세, 라자르, 무슨 말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침묵이 그의 대답이었다. 스테판의 눈동자가 다시 타냐에게 돌아왔다.
"아가씨 어머니가 죽었을 때 돕스 부부가 함께 있었다고 했소?"
"네."
그녀는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왜 그렇게 된 거요?"
"그때 함께 여행 중이었다고 했어요."
"어디에서부터?"
"뉴올리언스요."
"배를 타고?"
"아뇨, 짐마차였대요."
그는 승리에 찬 표정으로 다시 라자르는 보았다. 타냐는 더 이상 호기심을 감출 수 없었다.
"내 부모님이 누구인지 알아요?"
"알아낼 수는 있소, 만약 아가씨가 어떤 징표...., 말하자면 태어날때부터 몸에 지니고 있는 점을 가지고 있다면."
타냐는 그가 말을 하며 주저한다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사실이든 믿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돕스와 아이리스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낸 다음부터 누가 진짜 부모인지, 그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었다.
엄마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당시 아이리스는 죽어가는 여자뿐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아이리스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저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과 호기심만 가슴에 자리 잡은 채 속을 태울 뿐이었다.
다른 소녀들은 상세하고 오색 찬란한 출신 성분을 가지고 있었다. 타냐가 가진 것을 백지, 그것도 선술집에서 시작했다.
지금 여기에 자신의 정체를 은근히 암시하는 네 명의 이방인이 있었다. 자신의 정체나 가족사, 친척들의 생존, 심지어 생일도 알아낼 수 있었다! 실현된다면 너무 근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리라.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징표라니.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소용돌이치는 동안, 타냐는 눈앞에 보이는 넓은 가슴만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생활이 안겨준 자기 보호 본능은 그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려는 손을 뿌리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조심스럽게 발라놓은 화장을 망치지 않도록 한 걸음 물러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스테판은 그녀의 방어를 다르게 해석했다. 거절당하는 데에 익숙한 그였으나 그녀가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자 다시 쓰디쓴 실망을 맛보았다. 한동안, 그녀가 창녀이며 여왕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지만 다시는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돌아서서 라자르에게 자리를 넘겼다.
"자네가 물어봐."
라자르는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바실리는 벽에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나무판자에 머리를 찧었다.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계단 제일 아래에 앉아있던 세르게이의 어깨는 축 늘어졌다.
라자르 역시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대만큼 그녀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도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녀 뒤에 붙어 있는 불명예, 즉 댄서, 술집여급, 심지어 창녀라는 말들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하나님 맙소사, 이 사실을 샌도르가 알면, 외국으로 도주시켜 이제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키려는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났는지 알게 된다면, 그는 죽어버릴 것이다.
아니, 라자르는 대답이나 눈에 보이는 증거가 필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판단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기록을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들 중 처음으로 그녀에게 경의를 표시했다. 그녀 앞에 서서 격식에 맞춰 인사를 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 그는 타냐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으나 그녀는 팔을 움츠린 채 노려보았다. 라자르는 그녀가 놀림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바실리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 역시 그녀의 마음을 풀리게 하는데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라자르는 가만히 있기고 결정했다.
"몸에 어떤 독특한 징표가 있는지 말해줄 수 있소?"
"하나 있어요. 하지만 독특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걸요."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분홍색 얼룩 같은 거예요. 큰 사마귀 정도의 크기지만 평평해요."
"위치는?"
라자르는 얼굴을 붉히는 타냐를 보면서 대답을 듣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힘주어 말했다.
"위치가 중요하오. 아가씨."
"그것은 내, 내........"
"어디 있는지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십시오."
그의 제안을 들은 타냐의 뺨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하는 자신의 모습에 짜증이 난 그녀가 얼른 대답했다.
"팔 쪽인데 옷에 가여 있어요."
"가렸다고?"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의 가슴을 응시했다.
"하지만,...........아니오. 당신은 다른 표시를 가지고 있을 거요."
"아뇨. 없어요."
"틀림없이 가지고 있을 거요."
"글세. 그런 건 없다니까요!"
타냐는 화가 났다. 희망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찾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난 이해할 수가......"
"맙소사. 라자르."
바실 리가 끼어 들었다.
"대답을 들었지 않나, 그것도 두 번씩이나, 이젠 우아하게 여기에서 나가자고."
"좋은 생각이에요."
타냐가 동의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야.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말일세."
"두 여자가 똑같은 방법으로 비슷한 날짜에 죽었고, 위층에 있는 늙은 남자가 두 사람을 같이 묻었다는 게 말이나 되나?"
"분명 해괴한 일이지.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닐세."
바실 리가 말했다.
"두 사람은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징표의 위치상 그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잖아."
스테판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
라자르가 킥킥거렸다. 바실리는 조금도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스테판. 자넨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군."
"우리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여기에 왔으니까. 우리가 찾아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말일세."
또 다른 모욕을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타냐는 몸이 굳었다. 스테판이 다시 그녀 앞에 섰을 때 타냐의 녹색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하지만 스테판은 그녀의 분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
"아가씨.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소. 왼쪽 엉덩이에 있는 표시가 증거요. 아마 거울에 비춰 보아야 할 거요. 가서 잘 살펴본 다음에 우리에게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주시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확인하겠소."
타냐는 그가 바실리만큼이나 잔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렸다.
"나쁜 자식."
그는 아무리 모욕적인 발언을 해도 꿈적 않고 바라볼 뿐이었다.
"만약 거기에 표시가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죠?"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와 함께 카르디니아로 돌아갈 거요."
"카르디니아?"
"동부 유럽에 있는 작은 나라요. 당신은 그곳에서 태어났소. 타티아나 야나체크."
이름? 맙소사.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 타냐의 희망이 다시 솟구쳤다.
"당신들이 여기에 온 이유가 그건가요? 날 데려가려고?"
"그렇소."
"그렇다면 거기에 내 가족들이 남아 있나요? 그들이 날 찾아오라고 당신들을 보냈나요?"
"아니오. 안됐지만, 가족 중에 남은 사람은 아가씨뿐이오."
솟구치던 희망이 다시 추락했다. 왜 그런 가능성에 솔깃했단 말인가? 좋아. 가족은 없어도 이름과 자취는 남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에게 표시가 있고 그들이 사실대로 말해준다면 말이다.
"내 가족이 남아 있지 않다면 당신들은 왜 날 찾아왔나요?"
"그런 질문은 무의미하오. 아가씨. 당신이 우리에게 증명해 보일 때까지는."
"내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난 당신네들이 여기에 온 진짜 이유를 알아낼 때까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요."
스테판은 위협을 하듯 한 걸음 앞으로 나갔으나 그녀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당신을 찾아온 건......"
"왜죠?"
"당신의 결혼식 때문이오!"
"내 무엇 때문이라고요?"
"당신은 카르디니아의 새로운 왕과 결혼하게 될 거요."
8
타냐는 그들 모두를 한눈에 보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잘 차려 입은 신사들, 군대식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작이나 꼼꼼한 태도로 보아 아마도 웨스트포인트 혹은 또 다른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젊은 혈기라고 부르기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모두들 30세 안팎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사람들을 잘 알았다. 부유하고 특권을 지닌 귀족들이며 의심할 나위 없이 따분한, 대단히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상기해야만 했다. 그들은 순진하고 가난하며 무식한 시골 여자가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는 모습을 보며 비웃으며 즐거워하는 게 분명했다. 잔인함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소녀들은 상처를 받을 때까지 그게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타냐 엄마에 관한 정보를 준 사람은 분명 돕스이리라. 동전 몇 푼에 말이다. 만약 엉덩이에 그들이 말한 표시가 정말로 있다면, 지난밤 커튼 닫는 것을 잊어버리고 무대 의상을 서둘러 갈아입을 때 누군가가 창문으로 엿보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남자들 중에 한 명이 창밖에 서 있는 고목을 타고 올라와 그녀 자신조차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몸의 표시를 찾아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 고역을 치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표시는 애초부터 없고, 그것으로 농담은 끝이라면...., 그러나 타냐가 실제로 찾아볼 때까지 그들은 의기양양한 태도를 고집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말을 들은 타냐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동화가 물거품처럼 끝났을 때 실망할 그녀의 모습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른 여자는 그녀와의 결혼을 원하는 소위 왕이라는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키스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남자와도, 심지어 진짜 왕이 와서 청혼을 하더라도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왕이라. 맙소사!
솔직하게 말하자면 거짓말은 그때까지 효과를 발휘했다. 타냐는 그들이 정말로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진짜 가족들과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될 거라고 믿었다.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지 결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사실을 모른다.
"왕이라고요?"
그녀는 감짝 놀란 것처럼 애써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맙소사, 놀라움의 연속이군요."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놀란 척하는 게 전부였다. 타냐는 눈살을 찌푸리며 믿기 힘들다는 듯한 말투로 되물었다.
"누가요? 당신이? 아니, 당신은 그리 거만하게 보이지는 않는데요. 그렇다면 저 사람이 틀림없군요."
그녀는 바실리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신이 일제히 스테판에게 향했다. 또 다른 거절을 당한 그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사실이요."
스테판이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카르디니아의 왕, 바실리요. 기쁘지 않소, 아가씨?"
"내가 기뻐해야 하나요?"
그녀는 바실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다시 물었다.
"당신이 정말로 왕인가요?"
바실리는 벽에 기댄 채 혐오스런 눈으로 처음에는 스테판을, 그 다음엔 타냐를 바라보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런 것 같군, 아가씨."
"그런데 왜 당신은 나 같은 여자와 결혼하려는 거죠?"
"내가 원하는 게 아니오."
"아가씨는 태어나면서 정혼을 했소."
스테판이 재빨리 말했다.
"왕이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결혼해야만 하오. 만약 당신에게 표시가 있다면 말이오. 이제는 정확하게 밝힐 시간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 농담은 그만두세요. 당신들이 떠날 시간이 된 것 같군요. 내 시간을 충분히 방해했으니..."
"당신이 왕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못 믿나보군."
바실 리가 끼어 들었다. 재미있다는 듯 입술 한쪽이 조금 밀려 올라갔다.
타냐는 코웃음을 쳤다.
"대체 당신이 날 바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분명히 말하지만 난 바보가 아니에요."
"그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오. 아가씨."
바실 리가 쏘아 붙은 다음 스테판에게 말했다.
"저 빌어먹을 치마를 들춰보고 나서 일을 마무리 짓지 않으려나?"
타냐는 즉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내 몸에 닿는 손을 모조리 잘라줄 테야, 자. 여기서 어서들 나가요!"
스테판은 간단한 문제가 왜 이렇게 어렵게 되어버렸는지 의아해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곳을 떠날 수 없소. 아가씨. 만약 당신이 우리가 온 이유를 이해하지 못........"
"완벽하게 이해해요. 하지만 믿을 수 없어요."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이유야 여러 가지일 수 있죠. 당신은 배우를 해도 괜찮을 것 같군요. 이런 바보스러운 연기를 능청스레 하는 것을 보면 말이죠. 하지만 분명히 연습은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거만 떠는 것만 제외하면요."
"표시는....."
"그 빌어먹을 표신지 뭔지, 난 상관 안 해요!"
"우린 상관있소!"
타냐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주장하니까 한마디 하겠는데요, 난 절대로 당신 왕과 결혼하지 않아요. 따라서 표시가 있건 없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만약 당신 몸에 표시가 있으면 당신은 카르디니아 왕과 결혼하게 될 거요. 아가씨의 아버지가 정한 일이기 때문에 싫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오."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했잖아요. 따라서 그가 무슨 일을 했던 달라질건 하나도 없어요. 내 의견을 고려하는 게 좋을걸요. 아무도 날 강제로 결혼시키지 못해요."
"이건 명령이오. 아가씨."
"빌어먹을! 더 이상 어느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아요. 심지어 돕스의 명령도 마찬가지예요."
"아가씨는 카르디니아 사람이오."
"난 미국인이에요."
"당신이 어디서 자랐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소."
스테판이 말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타냐는 몸이 굳었다. 저 가증스러운 아도니스에게 복종하라고? 그는 타냐를 싫어하고, 모두들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결혼하라고 압력을 가하다니?
아니, 믿을 수 없었다. 그녀 입으로 그들의 잘난 왕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해놓고 왜 이런 농담을 끝내지 않는 것일까? 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은 이 정도면 충분해요."
그녀는 몸을 돌려 뒷문으로 향했다.
"징표를. 아가씨!"
이번에는 화가 난 목소리였다.
"다시 말하자면 우린 당신이 그것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야만 하오. 그러니 아가씨가 보고 나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지 않겠다면 우리가 직접 확인할 거요."
타냐는 앞을 다로막고 선 라자르를 노려보았다. 맙소사, 이토록 진지하다니, 그들은 진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수백 번도 더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
"좋아요."
타냐는 이를 앙다물고 대답한 다음, 몸을 획 돌려 계단 쪽으로 향했다.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죠. 하지만 내가 돌아와서 당신들이 말한 곳에 아무런 표시도 없다고 말하면 그냥 떠나주겠다고 약속해요. 그리고 다시...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요!"
세르게이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스테판은 펄럭이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보면서, 만약 일이 다륵 진행되었다면 지난밤에 그 부위를 만져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입을 꽉 다물자 턱에 난 흉터가 하얗게 변했다.
라자르가 옆에서 키득거렸다.
"너무 기뻐서 졸도라도 할 줄 알았나보군. 만약 우리말이 사실임을 알아차리면 그렇게 하겠지. 자넨 눈치 못 챘겠지만, 이 친구야, 그녀는 우리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아."
"그럼, 그녀가 표시를 보고 나면 기분도 변하겠군."
세르게이가 넘겨짚었다.
"그건 모르지."
라자르가 말했다.
"그녀가 왕을 보고 코웃음을 칠지 누가 상상이나 했나? 그리고 그녀가 한 말도 들었잖아. 그녀는 왕을 원치 않아."
"맞다, 그녀는 정상이 아니야."
바실 리가 한마디 했다.
"그래, 내가 장담하지만, 만약 표시를 발견했다고 해도 우리에겐 없다고 할 거야."
"자네도 나만큼이나 그녀가 타티아나 야나체크라고 믿고 있군. 그래."
스테판이 말했다.
"하지만 스테판, 그녀는 우리를 싫어해. 만약 그녀가 우릴 방해하기 위해 그 표시를 파버린다고 해도 난 놀라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린 전혀 알 수가 없게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해보게. 스테판. 그녀의 태도는 가식일 수가 있어."
"어떻게?"
"만약 그녀가 타티아나 아냐체크가 아니라면, 그녀는 자신에게 표시가 없다는 것을 알 거야. 그녀는 일부러 엉덩이에 상처를 내고 나서 그런 표시를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어. 우리가 의심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지."
스테판은 그들이 말한 사항들에 대한 가능성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 여왕이 될 수 없는 여자가 스스로 상처를 낸다는 건 그리 터무니없는 가정이 아니었다. 희망 없이 살던 여자가 그런 대단한 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또한 똑같은 점에서 볼 때, 결혼을 거부한, 심지어 왕과의 결혼까기 마다한 고집쟁이 여자라면 결혼하지 않기 위해 표시를 없애려고 일부러 상처를 낼 수도 있었다. 더구나 이층으로 간 여자에게는 칼이 있었다.
스테판은 광포한 눈동자로 라자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증인이 더 필요해."
그리고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9
타냐는 5분 정도 기다렸다가 아래층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남자들은 그녀에게 표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갔을 것이다. 농담의 끝, 그녀가 원하는 바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만약 무슨 표시가 있다면, 그건 사내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 아니라 창문을 통해 그녀를 엿보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생각해낼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는데,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타냐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납치당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매음굴로 팔린 소녀들 이야기며 매음굴에서 도망치려다가 다시 잡혀온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 그런 장소는 엄중하게 감시되기 때문에 도망칠 기회를 잡기도 힘들다고 했고, 거기에는 여자들을 잡아다주며 생활을 하는 나쁜 남자들이 있다고 했다. 아래층의 사내들도 그런 사악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넌 정말로 상상력이 풍부하군. 스테판을 보고 처음에는 악마라고 생각했잖아. 어쨌거나 이렇게 수척해 보이는 널 누가 원하겠니?
악마가 원했다. 다른 세 남자들은 그녀를 탐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타냐가 지난밤의 댄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 빌어먹을 춤! 스테판은 그녀가 댄서라는 사실을 눈치 챘고, 그런 춤을 추는 여자는 매음굴에 소속된 창녀라고 생각했다. 가장 이상적인 납치 방법이라면 타냐 스스로 따라나서는 방법일 테고.
그때 조그만 방으로 들어오는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타냐는 침대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을 찌푸린 채 문가에 선 스테판을 보자 공포는 현실로 돌변했다. 두려움을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 시점에서 흥분은 도움이 되지 않는데다 그녀 생각이 틀릴 수도 있었다. 그들에 대해 잘못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잖은가?
"표시가 있는지조차 궁금하지 않단 말이오, 아가씨?"
무슨? 그 표시? 그들은 아직도 표시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녀는 깨달았다. 그들은 타냐가 짐을 꾸려 행복한 마음으로 함께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찾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리라고 생각하죠?"
그녀가 다그쳤다.
"봤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난 그냥 앉아서 당신들이 떠나길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하지만 내 희망이 너무 컸나보군요."
"정말이군."
그녀가 다그쳤다.
"그는 금색 눈동자에 분노를 담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누군인지는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며, 그것을 알아낼 방법이 이뿐이라고 그토록 일렀건만."
"글쎄요. 난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 절대 아니에요."
"미안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소. 아가씨."
"정말 안됐...."
"맞소, 당신을 위해 우리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군."
"나서다뇨? 오. 안 돼요. 그렇게는 못 해요!"
마지막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칼을 빼들었다.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스테판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당신 무기에 상처를 입을 사람은 아가씨 자신뿐이오. 그것을 내려놓고 순순히 말을 들으시오. 당신에게 너무 커다란 수치심을 안겨 주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 말이오."
"정말 뻔뻔스럽군요. 어디 해봐요. 누가 상처를 입게 되는지는 두고봐야 알 테니까요."
"난 당신 용기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바요. 먼저 양자택일을 하시오."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건 없다고 말했잖아요."
"나와 사랑을 나눈다면....."
맙소사, 말투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일까? 그가 내뱉은 단어들이 천천히 소용돌이치며 깊숙이 들어오면서 상쾌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타냐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런 감정을 떨쳐버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쉽지 않았다. 이게 바로 욕망일까?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해냈다. 그를? 지금? 오. 맙소사. 그는 정말 악마였다. 진정으로, 진정으로 그랬다.
"오!"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군."
"항상 그랬죠."
그녀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노란색 눈동자에 분노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는 것으로 보아, 타냐의 말이 신경을 건드린 게 분명했다.
"아가씨, 우리 여행이 끝나기 전에, 난 당신을 가질 거요.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말이오."
그는 벌써 자신들이 벌인 사기행각에 대해 잊었단 말인가? 그녀는 냉소를 머금으며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내가 당신 친구와 결혼해야 한다면서 그런 말을 하나요?"
"오. 바실리는 상관하지 않을 거요. 게다가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소. 당신은 처녀가 아닐 테니 결혼식을 하기 전에 남자 하나쯤 더 받아준다고 문제가 되진 않겠지. 이미 많은 남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테니까.
그 말이 타냐를 자극하기 위한 모욕이었다면, 효과는 스테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타냐는 칼을 들고 그의 심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치솟는 분노로 인해 그녀는 앞뒤도 제대로 분간 못할 지경이었다. 스테판은 반항하려는 그녀의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음을 알려주려는 듯 타냐의 손목을 한참 동안 꽉 쥐었다가 천천히 비틀었다. 타냐는 다른 손으로 그의 얼굴을 때리려고 했으나 역시 붙잡히고 말았다. 그녀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칼은 곧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 이제는 스커트를 들고...."
"악마의 자식 같으니! 이렇게 할 순 없어!"
그녀는 침대로 끌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물론 난 할 수 있소."
스테판은 침착하게 대답하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좁은 침대로 떠밀린 타냐는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다시 몸이 뒤집혀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그는 타냐 옆에 걸터앉았다.
"반드시 당신을 죽여 버릴 거야."
스테판은 더 이상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어 버렸다.
다음 순간 스커트가 들춰졌는지 찬 공기가 다리에 닿았다. 훅 하고 놀라는 소리와 함께 옷감이 다시 다리를 덮었다.
"라자르?"
그가 무뚝뚝하게 불렀다.
그때서야 비로소 타냐는 스테판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고개를 문 쪽으로 비틀어 돌리다가 라자르를 본 타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맙소사, 그렇다면 다른 사내들도 그녀의 수치를 목격하려고 뒤쪽에 줄줄이 서 있단 말인가?
"찾아냈나?"
라자르가 물었다. 그의 시신이 오직 스테판에게만 쏠려 있었다.
"아직. 그냥 우릴 내버려둬."
"난 자네에게 목격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스테판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라자르의 눈을 의식해 아주 조금만 들추려고 했다. 주름 장식과 레이스 가운데 아주 약간의 살갗만 드러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어떤 종류의 속옷도, 심지어 페티코드 한 장도 갖춰 입지 않았다.
"목격자가 있으면 좋겠지만, 이 아가씨는 치마 아래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아. 따라서 나는 자네가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네."
"물론이지."
라자르는 킬킬거리며 문을 닫았다.
신경을 고문하는 듯한 침묵이 이어지면서, 타냐는 눈물을 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너무 수치스러웠다. 또 엄청난 그의 몸무게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조금 전 사랑을 나누자고 제안한 남자와 침대 위에 단둘이 남게 되다니.
"시간 낭비를 싫어하나보군. 아가씨. 아무것도 안 입고, 손님들이 분명 좋아할 거요."
"지옥에나 가요."
타냐가 쏘아붙였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왠지 변명이 튀어나왔다.
"만약 돈이 있었으면 사 입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요."
"잠시 후면 아가씨가 우리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발겨질 거요."
스테판은 다시 타냐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그녀는 그를 막을 힘이 없었다.
"제발.... 그러지 말아요."
타냐는 목이 메었다.
스테판은 망설였다. 그녀가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치마는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타냐는 이를 악물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수치심을 넘어선 시련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를 쉽게 납치하기 위한, 바보 같은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해?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남은 결론은 하나였다. 위에 올라탄 남자는 못된 방법으로 수치심을 안겨주면서 악마 같은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뿐이었다.
스테판은 싫다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또한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여자와 함께 잘 때나 볼 수 있는, 눈앞의 광경이 남자의 피를 들끓게 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늘씬한 종아리만으로도 충분할 지경인데, 그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 스커트는 점점 위로 올라가 날씬한 종아리가 드러나고 마침내 엉덩이 위까지 올라갔다.
스테판은 분노에 찬 그녀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본래의 목적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엉덩이를 만지지 못하도록 그를 막아설 양심의 가책 같은 간 없었다.
고통스러운 타냐의 신음소리는 더욱 커져 마침내 분노의 고함으로 변했다. 스테판은 유감스럽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 왼쪽 엉덩이 옆쪽을 볼 수 있도록 약간 옆으로 밀쳤다. 거기에, 그가 기대한 대로 초승달이 있었으나 그 표시를 발견한 다음에 느낀 기분은 예상과 달랐다.
그는 자세를 바꾸고 치마를 내린 다음, 귀에 대고 속삭였다.
"표시가 있소. 당신이 우리의 명령을 그래도 따라야 하는 증거는 충분하오."
타냐는 그에게 욕설을 퍼붓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이런 개자........"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영혼이라도 훔쳐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전에도 입술을 도둑맞은 적은 있었으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반응을 보이게 만드는 키스, 그 미친 생각을 떨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피 맛이 났다. 저주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강한 두 손 사이에 끼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냐를 공포로 몰아넣은 건 유감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는 노란 악마의 눈동자가 아니라 위장을 위해 정성 들여 한 화장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사실이었다. 타냐는 그를 밀어내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 그에게 잡힌 팔을 빼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창녀들은 이렇게 유별나지 않은데 왜 이렇게 한 거요?"
그녀는 창녀라고 불리는 게 넌덜머리가 났으나 지금은 그걸 부인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타냐는 일부러 더욱 거만하게 말했다.
"난 내가 죽이고 싶어 하는 남자를 받지 않아요."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다만 재미있어할 뿐이었다. 즐거워하는 그 사내의 얼굴이 아주 잘생겨 보였다.
"미래의 카르디니아 여왕다운 말이군. 깊은 감명을 받았소. 타티아나."
이제 그는 그녀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당신은 여기저기 그런 이야기를 팔과 다니는 사람이군요. 난 그런 이상한 이야기는 믿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타티아나 야나체크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소."
당신은 미리 나무를 타고 올라와 내 방을 엿보면서 내 몸에 그런 표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가 히죽 웃었다.
"흥미로운 추측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오. 자. 어디까지 했더라?"
타냐는 자신의 입술로 향하는 스테판의 시선을 보았다.
"또 그런 짓을 하려들면!"
"오. 아가씨, 천천히 알게 될 거요. 내가 그런 모험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오."
입술이 닿는 순간 타냐는 깨물어버리려고 했으나 그는 교묘하게 피하면서 키스를 했다. 그런 다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악마는 진정으로 즐기는 중이었다.
"날 용서해야만 할 거요. 타티아나. 잘못이 전부 나에게 있는 건 아니니까. 당신이 속옷을 입지 않는 바람에 내가 자극받은 것 같소. 우린 당신에게 새 옷을 사주겠소."
타냐는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런 사기극은 그만두는 게 어때요? 난 당신들이 만들어낸 타티아나 야나체크가 아니에요. 그리고 나에게 새 옷을 사줄 필요도 없고요. 나와 그 잘생긴 남자가 결혼할 리도 없고요. 난 당신들이 주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물론 함께 가지도 않을 거고요. 그리고 이제는 그 빌어먹을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말......"
"그만!"
10
타냐는 쓸데없는 위험을 저지르는 건 아닌지 의심해보았다. 그렇지만 '그만'이라는 대답은 그저 못 참고 내지른 소리가 아니었다. 타냐는 자신이 그의 신경을 또다시 자극한 건 아닌지 두려웠다. 침대 위에서 그에게 깔린 채 그러는 건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이유는 모르지만 그의 기분이 변한 건 확실했다. 눈동자 속에서 마지막 불길이 타오르다 사그라지더니, 그는 그녀를 남겨두고 곧장 문으로 향했다.
타냐가 자신의 행운을 깨달은 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그녀는 그가 다시 마음을 바꿀까봐 얼른 벽으로 돌아누웠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가지고 갈 물건들을 챙기시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런 다음 문을 꽝 닫고 나가버렸다.
오만한 악마 같으니. 하지만 그 무뚝뚝한 명령에 화를 내거나, 혹은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우선 망가진 화장을 고쳐야 했다. 고맙게도 일이 분이면 해치울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나무상자로 만든 화장대로 급히 갔다. 거기에서 색깔 있는 파우더와 크림, 그리고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낸 깨진 거울 조각이 들어 있었다.
벽에 대놓은 거울을 보자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 스커트를 들어 올린 다음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려 엉덩이를 살펴보았다. 순간, 뜨거운 열기가 다시 얼굴로 몰려왔다. 맙소사, 그 남자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보았단 말인가? 수치심이 정수리까지 꿰뚫고 들어왔다.
타냐는 간음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화제를 가려서 하지 않는 선술집에서 자란 까닭이었다. 심지어 몇 년 전에 그들이 고용했던 여급들 중 몇몇은 뻔뻔스럽게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장소-돕스가 그들을 발견할 수 없는 곳이면 어디든지-에서 남자들과 뒤엉켜 있기도 했다. 어떤 여자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바로 그 때문에 스테판이 같이 자고 싶다고 말했을 때 소용돌이치는 욕망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검은 악마의 시산과 손길에서 느낀 감정은 스멀거림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스테판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잊어버렸다. 마침내 왼쪽 엉덩이에서 초승달 모양의 모반을 찾아냈을 때 그녀는 또 한 차례 밀려들어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내들 중 한 명이 창문을 통해 벌거벗은 뒷모습을 훔쳐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뭐요?"
문이 안쪽 벽에 부딪히며 금색 눈동자의 악마가 돌아왔다.
타냐는 즉시 스커트를 내렸다. 그러나 스테판을 향해 돌아서는 속도는 무척 느렸다. 뒷모습을 보다가 들킨 지금, 수치심으로 속이 시꺼멓게 타버렸다.
그의 시선은 타냐를 향해 있지 않고 타냐의 손가락에 꽂혀 있었다.
화장을 고쳐야 했던 여자는 그의 말뜻을 쉽게 알아들었다. 그의 문제는 타냐의 꼴사나운 행동이 아니라 손가락에 묻은 회색 파우더였다.
타냐는 그가 자신을 쳐다볼 거라고 재빨리 결론을 내리고서 얼른 뒤돌아 화장이 망가진 부분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거울은 보고 다듬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타냐는 그의 주의를 흩트리기 위해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노크하는 법을 모른다면, 내가 가르쳐드리죠."
"몇 마디 물어볼 게 있소. 아가씨."
그녀는 더욱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하루 동안에 너무 많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난 지금 그럴 기분이......."
타냐의 도전적인 반항은 그의 단단한 손아귀에 목덜미를 꽉 잡히는 걸로 끝장났다.
"자. 말을 해주시오. 당신을 만지자 내 손 색깔이 바뀌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재? 오늘 아침에 벽난로를 치웠는데."
그녀가 변명을 했다.
"그리고 그 재를 얼굴에 문지른 거요?"
"아뇨, 하지만....."
"물론, 이건 재일 수도 있소.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그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두 손가락을 비벼보았다.
타냐가 마음을 놓는 손간, 어떤 힘이 그녀의 머리를 잡아 옆으로 획 돌렸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어쨌거나 난 의심스럽소. 내가 왜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말해주시오. 아가씨."
그가 다그쳤다. 손가락 하나가 그녀의 뺨 위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타냐는 그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사나운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막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는 무섭게 분노했다. 하지만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지, 그가 아니었다.
"이것 놔줘...."
머리를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면서 이미 돌아갈 대로 돌아간 고개를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타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고통스런 숨소리와 원망스런 시선도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손 힘이 더욱 거세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손아귀 힘이 느슨해지자, 타냐는 얼른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물러서다가, 타래머리가 아직도 잡혀 있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순간 머리카락이 그녀의 등 뒤로 풀어 헤쳐졌다. 타냐는 몸을 획 돌려 살임이라도 저지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내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릴 거예요. 짐승 같으니!"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손으로 머리통을 두드렸다.
"대체 언제까지 날 이런 식으로 취급할 건가요?"
그는 타냐의 질문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면서 확보한 공간마저 점령해버린 스테판이 그녀의 턱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진실을 말해보시오. 아가씨. 얼굴을 돋보이게 하려고? 아니면 감추려고 칠을 한 거요?"
비록 묻기는 했어도, 그의 눈동자는 이미 대답을 안다고 말하고 있었다. 타냐는 몸이 굳었다. 그는 물러서려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그럼 당신은 내 자존심의 마지막까지 짓밟아야 속이 시원한가요? 게다가 이미 다 알고 있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면서 나에게 인정하라고 하면 당신은 진짜 잔인한 악마예요."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들리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가슴속에 도사린 분노를 통째로 내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툴툴거렸다.
"당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짓말투성이요. 하지만 이젠 모두 끝났소. 정확히 5분의 시간을 줄 테니 자신의 모습을 모두 드러내고 이 방에서 나오시오. 내 말을 무시하면 내가 직접 박박 문질러 닦은 다음에 날 골탕먹인 죄로 엉덩이에서 불이 나게 해주겠소."
11
스테판이 문을 닫고 나간 뒤 혼자 남은 타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엉덩이에서 불이 날 거라고? 그에게 한번 해보라고 큰소리를 쳐볼까? 다음 순간, 타냐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타냐는 스테판이 나가기 전에 앞에 밀어놓은 세숫대야를 흘깃 보았다. 이미 모든 것을 들킨 이상, 얼굴을 씻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단 하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건 타냐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이유였다. 아무도, 어떤 것에 관해서도 그녀에게 명령할 사람은 없었다. 돕스가 병이 든 다음부터 그녀가 맛본 자유는 포기하기엔 너무나 소중했다. 돕스는 아직도 자신이 명령자라고 생각할 터이지만, 타냐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누구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지금 여기에는 마치 그녀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지는 듯 행동하는 악마가 있어서, 자유와 선택권을 빼앗고 심지어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하는가에 관한 선택마저도 멋대로 했다. 그리고 만약 복종하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결과가 초래될 거라고 위협을 퍼부었다. 거기에다 엉덩이에서 불이 나게 해주겠다니. 맙소사.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많은 나날을 맞으면서 보냈고, 때론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맞기도 했으나 악마가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도록 허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타냐는 그가 자신의 말대로 정확히 행동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또한 얼마나 쉽게 힘으로 자신을 꺾을 수 있는지 이미 증명해 보인 뒤였다. 따라서 그가 그럴 기회를 잡지 못하도록 해야만 했다.
타냐는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칼을 되찾은 다음 창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고 뭔가 달라진 게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바깥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뛰어내리기에는 땅바닥이 너무 아래에 있었고, 만약 창턱을 이용해 몸을 내민다고 해도 나뭇가지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타냐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다가가면서 그 반대편에서 스테판이 기다리고 있지 않기를 조그만 목소리로 빌었다. 아래층으로 이어진 계단은 하나뿐이지만 복도 건너 돕스의 방 옆에 다른 방이 있었다. 그 두 개의 방은 길거리에 면해 있었고 창문 앞으로 비스듬히 내민 현관 지붕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지붕 널빤지를 수리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몸을 놀리는 일에 익숙했고 쉽게 땅으로 뛰어내릴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네 명의 악마들이 기다리다 지쳐, 가난하고 순진한 그녀를 포기하고 돌아갈 때까지 숨어 있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돕스가 회초리를 들고 자신을 찾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고서 며칠 동안 숨어 지낸 적이 있었다. 더욱 세찬 매질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간 이유는 황무지에서 살아남지 못해서가 아니라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작해야 몇 시간일 뿐, 그리 오래 숨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만약 이틀 정도 소요된다고 해도 성년이 된 그녀에게 외로움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돕스에게 사정을 털어놓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지금 현 상태에서 그가 어떻게 도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사실. 가격만 적당하다면 그 악마들을 도와줄지도 모른다. 게다가 스테판의 자금력을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타냐는 손에 칼을 든 채 문에 귀를 댔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생각은 2분 이내에 빠져 나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삐거덕거리는 빌어먹을 경첩 덕분에, 만약 스테판이 거기에 있다면, 그가 깜짝 놀라는 틈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문을 확 열어 젖히는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
다행히 스테판은 거기 없었지만 스스로를 라자르라고 소개한 남자가 그녀 방문에 들을 기대고 서 있었다. 타냐는 미처 돌아서지 못한 그의 옆구리에 칼을 갖다 댔다.
"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마룻바닥에 피가 낭자하게 될 거예요. 난 별로 원치 않아요. 나중에 내가 청소해야 하니까."
"난 당신 명령에 따르겠소. 공주."
그는 동의하는 말투였다.
움찔한 건 타냐였다. 그녀는 협박을 했는데 그는 기갑부대나 검은 악마가 원정 올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군."
그녀는 칼을 좀 더 들이밀었다.
그는 분명 알아들었다. 상의 위로 조그만 핏자국이 번졌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걱정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원하는 게 정확히 뭐요?"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건 그게 전부였다.
"난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그렇다면 나를 데려간다는 뜻인가요?"
"그래야 할 때까지만, 천천히 돌아서서 앞장서요."
그녀가 명령했다.
"검은 악마 스테판과 다시는 부딪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라자르를 보며 타냐는 이를 갈았다.
"그 역시 당신과 똑같은 생각일 거요."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요."
그녀가 비꼬았다.
"자. 이제 움직여요!"
타냐가 겨냥했던 문은 계단 가까이 있기 때문에 라자르를 앞세우고 가던 그녀는 한두 번 돌아다보며 뒤를 확인했다.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라자르가 거기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가 협조하겠다는 이상,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창밖으로 빠져 나갈 때 그가 자신을 막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데 집중했다. 빌어먹을, 왜 진작 칼 대신 총 사용법을 익히지 못했단 말인가?
방에 도달하면, 그를 복도에 혼자 남겨두어야 했다. 그를 밀어젖힌 다음 등 뒤로 문을 꽝 닫고, 그가 방으로 뛰어 들어오기 전에 창밖으로 몸을 날려 현관 지붕을 타고 아래로 뛰어내려야 했다. 그는 너무 몸이 커서 따라올 수 없을 것이며,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그녀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방까지의 거리는 단 한 걸음, 다음 순간 타냐는 꼼짝도 안 하는 남자의 품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녀는 좌절을 느끼며 신음을 토했다. 커다란 손이 그녀를 단단히 감싼 다음 앞에 있는 남자에게서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지금 뭘 하고 있지. 라자르?"
타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구출된 자신의 포로를 향해 던져진 질문을 듣고 있었다. 마치 라자르가 그녀의 탈출을 도와주기라고 한 것처럼 비난 섞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건, 질문자가 스테판이 아닌 세르게이라는 땅딸막한 사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즐겁게 해주는 중이야."
라자르는 뒤돌아 서서 타냐의 손가락을 비틀고 칼을 빼앗았다.
"어쨌거나 곧 우리의 여왕이 되실 분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칼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돼. 다칠지도 모르잖아. 스테판이 무기를 모두 거두었어야 했어."
"그렇게 했지. 그런데 아가씨 때문에 흥분했는지 깜박 잊고 무기를 가져 나오지 않았어."
타냐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건 너무 우스꽝스런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공주."
라자르는 히죽 웃으면서 내려다보다가 마치 그녀의 얼굴에서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스테판이 시킨 일을 아직 하지 않았군."
손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잡아 돌리더니, 그녀가 뿌리치기 전에 얼른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래. 맞아."
라자르의 푸른 눈동자가 타냐에게 돌아왔다. 재미있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가 어떻게 할지에 대해 모두 들었다오. 타티아나. 지금 방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직접 나서기 전에 얼른 얼굴을 닦으시오."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지금은 시키는 대로하는 게 가장 현명한 행동이었다. 탈출 기도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따라서 그녀가 말썽을 부리리라는 사실을 그들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어쩌면, 그렇게 애를 쓰면서까지 그녀를 데려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난 한 달에 한 번 씻을까 말까 해요. 마음이 내킬 때 말이에요."
그녀는 뻔뻔스럽게 미소 지으며 거짓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적어도 3주 동안은 물 근처에 얼씬도 안 하죠."
"그럼 스테판의 말을 무시할 생각인가요?"
"물론이죠."
세르게이는 그녀 뒤에서 투덜거렸다. 라자르는 킬킬댔다. 타냐는 그들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동안 빠져 나오려고 했으나 분하게도 팔 하나가 허리를 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건 웃긴 일이 아니야. 라자르."
세르게이가 툴툴댔다.
"이 아가씨 때문에 스테판이 더욱 화를 낼걸. 지금도 너무 화가 난 상태인데."
"그도 알고 있어. 그래서 나간 거야."
라자르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군데군데 변장이 벗겨진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기분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아. 우리가 기대한 건 아름다운 아가씨였어. 더욱 불행한 사실은 우리가 제대로 찾아냈다는 거야."
"하지만 스테판은 그녀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세르게이가 못마땅한 말투로 결론지었다.
"내 생각도 그래. 난 걱정하지 않아.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우리에게 화를 내진 않을 테니까. 이 아가씨에게 화를 내겠지."
타냐는 손가락으로 라자르의 가슴을 콕 찌르며 대들었다.
"내가 당신들 왕과 결혼하게 된다면서, 왜 스테판이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거죠.?"
라자르와 세르게이는 이유를 떠올리며 다시 빙그레 웃었다.
"결혼식 전까지, 아가씨를 보호할 사람은 스테판이오. 그건 왕의 뜻이라오. 따라서 공주. 그를 화나게 하는 것보다는 달래는 편이 더 이로울 거요."
맙소사, 어떤 질문을 해도 막히지 않을 만큼 그들의 계획을 치밀했다.
"지금까지 내 생각은 완전히 무시당했는데.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하죠? 그리고 대답해봐요. 스테판이 날 보호한다는 뜻은 그가 날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인가요?"
만약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타냐의 줄문에 라자르는 화를 내거나 적어도 곤혹스런 표정이라도 지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히죽거렸다.
"스테판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소. 공주. 그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오직 왕뿐이요."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바실 리가 전혀 상관없다는 뜻이겠죠?"
그녀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바실리는 스테판을 존경하고 있다오. 그들은 사촌간이고, 스테판이 더 나이가 많으니까."
"하지만 왕은 바실리예요."
라자르는 아무려면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스테판이 왕이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나요?"
"난 스테판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그거 안됐군. 공주."
스테판의 딱딱한 목소리가 계단 위쪽에서 들려왔다.
"난 아직 살아 있다오."
12
타냐는 가능한 한 스테판과 마주치치 말았어야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얼굴을 보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선택의 권리는 그녀에게 주어진 게 아니었다. 세르게이가 스테판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돌릴 때, 그녀의 허리를 꽉 잡은 채 함께 돌려세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악마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셈이었다. 만약 그녀의 말 때문에 악마의 눈동자들이 더욱 불타오르는 거라면, 아직도 씻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석탄에 불은 붙이는 격이었다.
"자네 두 사람은 그녀를 설득하지 못했군."
"그래. 우린 단지 의무에 대해 의논하는 중이었지."
라자르가 대답했다.
"그리고 몰래 빠져 나가려던 공주를 붙잡았고."
세르게이가 덧붙였다.
"그럼 우리가 예상한 대로군. 그렇지?"
타냐는 나불거리던 세르게이의 발가락을 뒷굽으로 힘껏 밟았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스테판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갑자기 앞으로 타냐를 떠밀었다. 그 바람에 타냐는 중심을 잃고 스테판의 가슴팍으로 쓰러졌다. 팔 하나가 튀어나와 마치 강철 감옥처럼 그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에게서 분노의 파장이 뻗어 나와 그녀를 둘러싸는 기분이었다.
"날 보내주........."
그녀의 말은 단호하게 가로막혔다.
"안 돼."
불길하게도, 그는 그녀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당신을 내 말을 거역할 수 없소. 타티아나."
잠시 동안이지만, 타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음 순간 그들에게 자신이 어떤 유용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상품에 흠을 내지 않을 것이다. 스테판이 말 한 대로 불기짝을 맞을 수는 있겠지만.
한편, 아래층에서 마차 소리가 들었다. 사샤라는 사람이 짐을 가지고 선창가에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배는 한 시간 안에 떠날 예정이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냐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 남자의 시선을 느꼈다. 스테파니 아직도 꽉 누르고 있었으므로 나머지 두 남자를 보기 위해 목을 빼야 했다. 그들은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타냐는 우둔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배를 타기를 원할 것이다.
타냐는 스테판의 말을 듣고 상황을 감지했다.
"나무상자, 바로 그거야."
타냐가 빳빳해진 몸으로 격렬하게 저항하려는 순간, 놀랍게도 라자르가 반발했다.
"이 여자는 공주일세."
그런 사기극을 계속하다니. 그녀는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스테판의 가벼운 한마디가 자극을 가해왔다.
"만약 그녀가 공주처럼 보이게 되면, 그때부터 그런 대접을 받게 되겠지."
강철 감옥에 끼인 타냐는 몸을 비틀면서 라자르와 세르게이에게 다그쳤다.
"내가 화가 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건가요?"
세르게이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라자르는 무척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누가 당신의 보호자인지 이미 설명한 걸로 알고 있소. 타티아나, 그는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소. 만약 당신이 부드럽게 부탁한다면......"
부드럽게? 뒤에 선 악마에게 부드럽게 대하다니, 절대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나무상자 속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술집 창고 속에서 나온게 분명할 텐데, 그렇게 조그마한 상자 속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타냐는 스테판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고개를 젖혔다. 그는 마치 그녀가 그렇게 하길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다음 순간, 스테판의 눈동자는 씻지 않은 그녀의 얼굴 위로 천천히 떠돌았다.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았소. 공주."
그는 평상시 대화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다시 스커트를 들추지 않게끔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고 확신하오."
들어 올린다고? 오. 맙소사. 그녀는 만약 '엉덩이에 불이 나게' 얻어맞는다고 해도 스커트가 약간 완충 작용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에게 얻어맞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씻겠어요."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양보하기는 죽도록 싫었으나 다른 대안을 찾을 길이 없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소."
그는 그녀를 내보내지 않을 생각인가?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럴 수는...."
그녀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남자가 혐오스러웠지만 지금 당장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널찍한 그이 가슴에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는 것뿐이었다.
"공주, 당신은 정말로 대단히 고집이 세군요."
그녀은 위쪽에서 들려오는 한숨소리를 들었다.
"내가 당신들의 납치극에 순순히 따라갈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우리는 당신이 아버지가 정한 약혼을 명예롭게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했소. 이렇게 대들지 않고 말이오."
타냐는 화를 벌컥 내며 고개를 획 젖혔다.
"대들지 말라니, 당신들을 믿지 못하는 데도요? 심지어 날 납치하면서 그럴듯한 거짓말도 만들어내지 못했잖아요. 당신이 한 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가 의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이렇게 힘들고 노예 닽은 일이 더 낫다는 뜻이오? 우리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소? 무대와 침대에서 음탕한 공연을 해야 하는 그런 생활이?"
타냐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빈정대는 마지막 조롱에 대한 반격으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녀의 몸에 감긴 팔에 약간 힘이 더 들어갔으나 그건 보복이 아닌 반동이었다.
"나는 누가 간섭하지 않는 생활이 좋아요. 이런 때가 오기를 한평생 기다렸어요. 지금 당신은 내게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와 협박, 모욕을 늘어놓으면서 내 인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 방자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요. 글쎄요. 그렇게는 안 돼요.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요. 아무도 그렇게는 못해요."
"당신의 특이한 경험에 대해 토론할 시간이 없어서 매우 유감이오. 당신을 데리고 가는 우리의 권리에 대해서 말해두겠는데, 당신은 카르디니아인이고 모든 카르디니아 사람들은 왕에게 절대 복종을 해야 하오."
"지옥에나 가라고 해요. 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스테판. 따라서 그런 핑계는 내게 먹히지 않아요. 당신이 시도하려는 일은 이 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불법이에요."
"왜 내가 이런 입씨름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그는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을 타냐는 화가 치솟았으나 그것도 날카로운 명령을 들을 때까지 뿐이었다.
"라자르. 세르게이, 아래층에서 기다려주게."
타냐는 두려움으로 몸이 굳어버릴 것 같았다.
스테판의 시선은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셰리주 색깔의 눈동자가 그녀의 긴장을 얼마간 덜어주었다. 게다가 달래려는 듯 한 손을 들어 올려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타냐는 그런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난 결론을 내렸소. 타티아나, 당신의 변장을 지우는 일을 너무 서둘렀던 것 같소. 단지 조금 단정치 못한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을 줄 뿐인데 말이요. 하지만 당신이 그런 식으로 보이고 싶다면 그냥 내버려두시오."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바뀌었다.
타냐는 폭풍우 다음에 찾아온 사탕발림에 조금도 솔깃해하지 않았다.
"지금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뭔가요?"
"당신이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두들겨주겠다는 것은 잊어버리기로 하고, 지금부터 협상을 합시다."
타냐는 더 의심스러웠으나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계속해 봐요. 듣고 있으니까요."
"만약 당신이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고 약속한다면 감금당하지 않고 배에 오를 수 있소."
타냐의 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상자에 갇힌다는 뜻인가요?"
"재갈을 물리고 묶어서 상자에 넣을 거요."
스테판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그 대신 이건 어때요?"
타냐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하려던 짓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얼른 이곳에서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떨까요?"
타냐의 등 아래쪽으로 둘러진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녀가 잡혀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농담하지 말아요. 타티아나.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는 거요. 단지 어떻게 가느냐는 당신 선택에 달려 있소."
"하지만 난 가고 싶지 않아요! 왜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 거죠?"
그녀가 울부짖었다.
스테판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고, 화가 난 타냐는 씩씩거렸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납치당하다니, 하지만 기회가 생기자마자 도망칠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좋아요."
그녀가 심술궂게 대답했다.
"만약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걸어서 가고 싶어요."
"난리는 피우지 않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어요. 그걸 원하는 거죠?"
"좋소. 기억하시오. 타티아나. 이거 협상이오. 그리고 무든 협상과 마찬가지로 만약 어기면 그 책임을 져야 하오.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는 단지 겁을 주려는 것뿐이야. 아무리 협박을 해도 도망쳐야 해.
"그토록 급히 떠나야 한다면, 이제 날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지 않나요?"
"우리 협상에 도장을 찍는 의미에서 먼저 키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안......."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스테판의 입술이 그녀를 덮었다.
발버둥을 치는 게 당연했으나, 어찌 보면 이것은 스테판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황금 같은 기회였다. 만약 그녀가 그의 키스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감시가 약화되어 탈출이 더 쉬워질 것이다. 다만 그의 키스가 정말로 좋아진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입술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굴복하는 척할 필요도 없었다.
스테판이 마침내 입술을 뗐을 때, 타냐는 자신의 전략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몽롱한 순간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키스에 정신을 잃는 것은 그녀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고, 그를 다시 끌어안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도 생각조차 하디 못한 사항이었다.
타냐는 광기에 가까운 충동을 재빨리 잠재웠다. 빌어먹은 악마, 그러나 스테판을 보고 있으면, 타냐는 그 남자 역시 그녀만큼이나 이 작은 경험을 즐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실수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았소. 당신이....., 기적 같은 말이지만, 정숙한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이오. 그렇지 않소?"
타냐는 목에서 뺨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와 싸웠다. 그렇게 쉽게 알아차리다니,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자신이 키스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도 함께 어려 있었다.
"글쎄요. 당신도 잘 모르잖아요. 그렇죠?"
그녀가 빈정거렸다.
스테판은 단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떤 말보다도 오만함을 드러내는, 마치 그건 그녀의 생각일 뿐이라고 말해주는 미소였다. 또한 예전에 이미 타냐에게 해둔 말이 있었다. 그들이 여행이 끝내기 전에 그녀와 사랑을 나누겠다는 약속이 그것이었다. 왜 그들은 타냐가 창녀라고 확신하는 걸까? 하마터면 물어볼 뻔했으나, 서두르는 그의 표정을 보아, 지금은 그런 토론을 벌일 때가 아니었다.
스테판은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향해 돌아섰다.
"따라오시오. 타티........"
"잠깐!"
그녀가 날카롭게 가로막았다.
"내 물건들은 어떻게 하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를 끌고 갔다.
"다음번에."
즉. 옷을 갈아입을 기회마저도 잃어버렸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잠깐 동안일 뿐, 그녀는 다시 돌아와 자신의 소지품을 모두 되찾게 될 것이다. 지금 가져가면 도망쳐 나올 때 모두 두고 나와야 했다. 게다가 스테판이 그녀의 말을 무시함으로써 약간의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그대로 내버려둘 참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하나 더 있었다. 이들로부터 도망쳐 나올 때 약간의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돕스만이 그녀 뒤를 따라갈 사람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가 사라진 줄 모른다면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잆으리라. 게다가 아침식사를 마친 뒤, 곧 잠이 드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복도에서 일어난 이 소동에 대해 듣지 못했을 것이다. 시랠료가 문을 여는 늦은 오후까지 그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잠을 잤다. 만약 그가 무엇인가 들었다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타냐가 버텼다.
"돕스에게 작별인사는 하고 가야 해요."
스테판이 계속 걸어 나가는 바람에 그녀는 질질 끌려갔다.
"이유는? 그는 우리가 왜 당신을 찾는지도 모르면서, 당신에 대해 거짓말을 했소. 그 남자는 당신 친구가 아니오."
"나도 알아요. 하지만 지금까지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이에요."
"더 이상은 아니오."
스테판의 말이 너무나 진심처럼 들렸으므로 그녀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천부적인 거짓말쟁이, 그러나 타냐는 속지 않았다.
"당신이 나의 친척이라는 뜻인가요?"
그는 계단 중간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뒤 한번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같은 조상을 두었다고는 말할 수 있소. 5대 정도 올라간다면 말이오. 사실. 우리는 아주 먼 친척뻘이오."
"당신은 내가 돕스에게 떠난다고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군요."
"그는 아마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할거요. 당신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니 말이오, 그렇지 않소? 비용이 들지 않는 노예, 그런 남자에게는 아주 편리한 일꾼이오."
타냐도 똑같은 생각을 해왔다. 돕스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나이가 든 뒤로부터 그랬다. 지금 그녀는 그의 가정부이자, 하녀, 요리사, 세탁부, 간호사이었고 술집에서는 매니저, 점원, 물건 구입하는 사람, 웨이트리스였고, 때로는 바텐더와 댄서이기도 했다. 만약 시간이 있었다면 스테판과 그의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로 창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언제 쉴 틈이 생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시랠료와 함께 그 동안이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남자들과 함께 간다면 모든 것이 허사였다. 그녀의 자유도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타냐를 창녀로 만들어버릴 게 분명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휴게실 중간 정도에 왔을 때 스테판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만약 가까이 사는 친구들 중에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잠깐 작별인사를 하도록 하시오."
친구들? 그녀가 사귄 친구들은 오직 여급들뿐이었으며, 그것도 술집경영을 맡기 전의 일이었다. 더 엄밀히 말해,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레리아뿐이여,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에다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하나도 없어요."
그녀는 대답을 하면서 갑자기 몰려드는 슬픔을 느꼈다. 전에는 한 번도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마음에 드는 애인도 없다는 말이오?"
스테판이 다시 물었다.
분노가 슬픔의 자리를 대신했다.
"오. 너무 많아요. 하루 종일 거릴 텐데요."
획 잡아끌려 타냐는 밖으로 나갔다.
탈출을 미리 막으려는 듯 나머지 사내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고 옆에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순간 타냐는 기가 막혔다. 누구든 생각나는 이름이 없을까? 돕스의 옛 친구들 중의 한 명이라도.
꼴좋군. 이 아가씨야. 어째서 순순히 끌려가는 거지? 만약 노력이라도 했다면 그들이 이렇게 쉽게 끌고 오지 못했을 거야.
13
"맙소사. 스테판. 저 여자 머리카락을 어떻게 좀 해야겠어."
그들이 마차에 앉았을 때, 바실 리가 말했다.
"창녀처럼 보이잖아."
"우리가 원하는 효과 아닌가?"
스테판이 목소리는 너무 건조해서 물에 담가도 젖지 않을 것 같았다. 타냐는 한술 더 떴다. 화가 난 그녀는 앞에 앉은 바실리를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며 머리를 마구 흔들어대어 더욱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양옆에 앉아 있던 스테판과 라자르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세르게이는 입을 꽉 다물고 마차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바실리는 붉으락푸르락해서는 창밖을 내다보며 애써 분을 삭였다. 누군가의 표정을 저렇게 만드는 것은 꽤나 재미난 일이었다.
스테판은 타냐의 머리카락을 한 손에 모아 쥐고 핀을 내밀었다.
"마음에 들지 않소. 타티아나?"
그녀의 대답은 반항적인 표정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시작했으니, 끝도 내가 맺어야겠군."
그에게 그런 친밀한 임무를 맡길 순 없었다. 타냐는 그의 한 손에서 핀을, 다른 손에서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라자르가 계속 웃어댔다.
"그 조그만 타래머리 속에서 머리카락이 그렇게 많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걸."
라자르가 한마디 했다. 아직도 히죽거리고 있었다.
"당신 어머니는 금발이었소. 난 그녀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스테판은 만나보았소. 그는 당신 약혼식에도 참석했을 거요. 만약 당신이 물어본다면 스테판은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줄 수 있을 거요."
"난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에 관심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입 좀 다물라고요."
"무슨 뜻이지?"
바실 리가 친구들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아직도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말인가?"
"두말하면 잔소리죠."
머리를 매만지던 타냐가 다른 사람들이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만약 내가, 오늘 들은 이상한 이야기들을 조금이라도 믿는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럼. 아가씨. 당신 엉덩이에 있는 표시는 어떻게 설명할 거요?"
그는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물었다.
"스테판에게 물어봐요."
타냐는 도도한 표정으로 그렇게만 대답했다.
모든 눈동자가 스테판에게 쏠렸다. 심지어 타냐 옆에 앉아 있던 라자르는 설명을 듣기 위해 몸을 기울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우리가 나무 위로 올라가 창문을 통해 엿보았다고 생각한다네."
바실 리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점잖지 못한 소리를."
라자르가 빙그레 웃었다.
"만약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런 노력쯤이야....."
"자네라면 창문도 기어 올라가겠지."
타냐는 바실 리가 그녀가 아닌 다른 친구들을 향해 코웃음 치는 것을 보며 내심 놀랐다. 옆을 힐긋 보니 스테판은 대화가 돌아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사내들은 모든 것을 장난 아니면 조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중간치는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시간이 오래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타냐는 마지막으로 타래머리를 다독이고 나서 창밖을 내다보며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헤아렸다.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선창가였다. 또 일분, 이분.....
사내들과 함께 뱅 오르지 말아야 한다. 스테판은 분명히 그녀를 배 밑창에 가둬놓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녀가 유순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믿는 스테판도 신기했다. 자유의 문제가 달려 있는 이 시점에서, 그녀가 협상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마차가 멈추었다. 조그맣고 가무잡잡한 남자가 문을 열고 이국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서로 아는 사리가 분명했다. 하인? 사샤? 비록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뭔가 불평을 하는 것 같았다. 또한 행동으로 보아 다급하게 서두르는 것 같았다. 그런 다음 부산스럽게 앞장서서 걸어가 선장에게 마지막 손님이 마침내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렇다면 배는 곧 떠날 것이다. 타냐도 그렇게 되길 바랐다. 계획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생각해낸 계획은 그리 치밀한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은 순간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만약 라자르와 스테판을 따돌릴 수 있다면 성공할 것이다.
바실리는 걱정한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선창가에서 뛰어내린다고 해도 몸을 날려 잡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세르게이는 쫓아올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따라잡기에는 너무 땅딸막했다. 게다가 선창가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세르게이가 바로 뒤에 따라온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민첩하게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가는 동안 세르게이는 이리저리 부딪히며 그녀를 따라잡으려고 안간힘을 써야만 할 것이다. 세르게이는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가장 버거운 상대는 라자르와 스테판이었다. 그들은 쉽게 그녀를 잡을 수 있었다. 월등한 체격 조건은 말할 나위도 없고, 긴 다리만으로도 충분했다. 시작부터 그녀를 뒤쫓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으며,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다행히 바실리와 세르게이가 마차에서 먼저 내렸다. 계획대로 이루어지려면, 그들이 타냐보다 앞서 배에 올라야 했다.
세르게이가 마부에게 돈을 지불하는 동안 스테판은 타냐를 들어 땅에 내려놓았다. 그들의 짐은 사샤라는 하인이 벌써 실어놓은 것 같았다. 짐을 미리 실어놓지 않으면, 성가신 추격전이 벌어질 경우 짐을 두고 내빼야 하기 때문이리라. 그 때문에라도 그들은 타냐를 쉽게 포기할 것이다. 그러면 타냐는 불쾌한 모든 일을 뒤에 남겨놓고서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다음부터는 총을 가지고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배 입구는 넓은 편이었으나 난간이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위험했다. 세르게이와 바실 리가 앞장서고 라자르와 스테판이 타냐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스테판이 그렇게 바싹 따라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긴장만 하지 않았더라면, 타냐는 지금의 상태를 즐겼을 것이다.
"발밑을 주의해요. 타티아나."
스테판이 말했다.
타냐는 화를 벌컥 내며 쏘아붙였다.
"내 이름은 타, 냐, 타냐, 만약 타티아나 같이 이상한 이름을 한번만 더 부르면 협상이고 뭐고 비명을 질러댈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도와주지 않아도 잘 걸어 나갈 수 있어요."
타냐는 팔을 홱 잡아 빼려 했으나 그는 그런 동작을 예상했다는 듯 더 세게 쥐었다. 그건 타냐에게 뒤돌아볼 핑계를 제공했다. 순간 타냐는 팔꿈치를 뒤로 밀어 젖혔다.
몰론 그녀를 잡고 떨어질 수도 있었으나 스테판은 그녀가 돌아설 때 팔을 놓았다. 스테판은 그녀가 옆쪽으로 뛰어들 거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것도 타냐가 세운 계획의 일부였지만 타냐는 그를 떠밀었다.
타냐는 생각보다 일은 아름답게 진행되었다. 심지어 그의 몸이 물에 닿기도 전에 돌아서서 스테판이 떨어진 반대편으로 라자르도 밀어버렸다.
세르게이와 바실리의 반응을 살필 시간이 없었다. 앞장서서 걸어간 그들은 친구 두 명이 강 속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뿐이며, 나중에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야 어찌된 영문인지 알게 될 것이다.
타냐는 선창가를 향해 펄쩍 몸을 날려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우우!"
그녀의 첫발이 땅에 닫기도 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입다무시오. 아가씨. 그렇지 않으면 한 대 때려서 기절시킬 거요."
빌어먹을, 그는 이미 강한 팔로 타냐의 허리를 휘감은 다음에 다시 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의 계획에 의하면 바실리는 쫓아오지 않았어야 했다. 그는 스테판과 라자르만큼이나 키가 크고 다리도 길었다. 만약 원한다면 그녀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야 정상인데!
"그들에게 날 놓쳐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다음 순간 그녀의 배와 바실리의 어깨뼈가 심한 마찰을 일으켰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되자, 발버둥을 치며 도와달라고 비명을 질렀으나 그는 타냐를 어깨 이에 올려놓고 몇 차례 심하게 흔들어 그녀의 저항을 막아버렸다.
누군가 참견하려 하자 간단히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내 하인의 아내요. 배 타는 것을 싫어하는데, 내 하인은 이 여자를 뒤에 남겨놓고 가시 싫다고 하는구려."
"나라면 두고 갈 텐데."
낯선 사람이 대꾸했다.
"나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그 미련 맞은 사내놈이 이 여자를 사랑한다니, 어쩌겠소?"
"그건 거짓말이에요!"
타냐는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녀가 얻은 대답은 바실리의 어깨 위에서 한 번 더 세게 흔들리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배 안에 들어온 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다시 흐트러졌다. 많은 승객들은 나체스의 풍경대신, 바실리와 그의 어깨에 짊어진 꿈틀대는 짐을 바라보았다. 여자들은 굳은 표정인데 반해 남자들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저 멀리서 세르게이가 호의적인 얼굴의 사내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선장일까? 아마도 그녀가 왜 이런 식으로 배를 타는가에 대해 바실리처럼 엉뚱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모양이었다. 승객들은 의심을 하지 않았고, 그녀를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스테판과 라자르도 보이지 않았다. 희망 사항이지만, 아마 물속에 가라앉았을지도 모른다.
타냐는 아직도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다급한 마음에 말이 자꾸 엉켜 알아듣기 힘들었다. 화가 난 그녀는 소리만 질러댔다.
그때 문 닫히는 소리와 바실리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사샤. 이리 와서 이 여자 입에 뭔가 틀어막아."
다음 순간 몸이 그의 어깨에서 들리더니 거칠게 땅에 내려졌다. 그렇다고 가해자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지 못할 만큼 비틀거리진 않았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는 스테판만큼이나 행동이 재빨랐다. 허공을 가르던 팔의 속력 때문에 몸이 반쯤 돌아가다가, 한 손에 천을 뭉쳐 든 사샤를 발견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타냐는 하인을 향해 신경질을 부렸다.
"그런 건 생각조차 하지 마, 이 땅꼬마 같으니!"
모욕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그는 바실리를 향해 검은 눈동자를 돌릴 뿐이었다. 타냐 역시 바실리를 보면서 그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러섰다.
"신경 쓰지 마라. 사샤."
바실 리가 말했다. 갑자기 뭔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 같았다. 심지어 킬킬거리기까지 했다.
"스테판에게 맡겨야지. 그는 무척 화가 났으니까. 아주 최악이거든."
타냐에게 겁을 주기 위해 한 말이라면, 상당히 효과를 나타낸 셈이었다. 그 순간까지, 타냐는 불쾌한 결말에 대한 스테판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게다가 단순히 소동만 부린 게 아니라 두 남자를 물속에 빠뜨렸고, 그들 중 하나는 그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내였다. 그렇지만 아직 공포에 눌릴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그와 대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타냐는 아도니스의 보복적인 웃음을 보며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입술 끝을 치켜 올렸다.
"내가 당신과 약혼했다고요? 당신도 왜 내가 그 사실을 믿지 않는지 알 거예요."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나도 믿기지 않는 일이오. 하지만 분명 말하지만, 아가씨, 당신을 절대로 나와 침대를 함께 쓰지 않게 될 거요."
그는 비웃으며 덧붙였다.
"왕족의 결혼은 두 사람의 의견과는 상관이 없소. 그리고 공주, 당신도 원하는 애인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소."
"당신의 축복 속에서?"
"물론이요."
그가 관대하게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애인을 추천해줄 수도 있소."
"잠깐, 당신의 그 잘난 사촌?"
바실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당신을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소. 그러니까 그의 분노 대신 관심을 잘 키워보도록 하시오. 그는 영향력이 많은 사내니까."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 그때까지 조용하게 있던 사샤에게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타냐는 자신이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난 왜 당신이 이런 연극을 계속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따라가는 걸 당신 또한 좋아하지 않아요. 그건 우리 두 사람 모두 잘 알아요. 왜 당신은 내가 도망치는 걸 막았죠?"
"의무란 선택과 상관없는 거요. 공주. 당신도 배우게 될 거요."
"지옥에나 가요!"
그는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다음 사샤에게 먼저 나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스테판의 정부는 그가 얼마나 화를 자주 내는지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줄 거요. 이제 곧 경험하게 되겠지만."
그런 말을 남기다니 얼마나 악마처럼 잔인한 사내란 말인가. 바실리는 그녀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가증스런 남자였다. 돕스보다고 더 싫었다. 돕스가 그녀를 때리기는 했지만 그건 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실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시 돋친 말로 그녀를 찔러댔다. 그런 멍청하고 오만한 남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좋아해야 한단 말인가? 라자르나 스테판이 왕이라고 말했더라면, 스테판....
어쨌거나 그에게는 정부가 있었다. 어떤 여자가 그런 변덕스러운 검은 악마와 사랑을 나누기를 원했을까? 타냐는 궁금했다. 하지만 자신도 그럴 뻔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그와의 키스에 정신을 잃었잖은가.
얼굴이 진홍색으로 달아올랐다. 다행스러운 게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아무도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14
로릴리는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는 커다란 배들 중의 하나였다. 커다란 식당과 게임장, 도서실, 그리고 선실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시설을 자랑하는, 2층으로 된 배였다. 타냐가 남겨진 곳은 중간 크기의 방이었는데 그녀가 늘 자던 방보다는 훨씬 크고 근사했다.
침대는 꽃 문양의 누비이불로, 그 옆의 테이블은 하얀 레이스로 덮여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든 사랑스런 램프는 그녀가 방에 들어 올 때 이미 켜져 있었다. 선실에는 창문이 없기 때문이었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하얀 세면대가 고급스런 도자기 대야와 함께 서 있었다. 배 이름인 로릴리의 이니셜 'L'을 수놓은 수건들이 그 아래 쌓여 있었다.
한쪽 벽에 달린 선반에 물건들을 올려놓았고, 트렁크 두 개는 포개어 진 채 다른 쪽 벽 앞에 놓여 있었다. 물건들을 집어넣으려고? 혹은 저 사내들 중 한 명의 것일까? 거기에는 고급 팔걸이의자도 하나 놓여 있어서, 램프가 있는 조그만 테이블 가까이 가져다 놓으면 앉아서 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리스가 그녀에게 읽는 법을 가르친 이래 그런 호사스런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가 지금까지 읽은 것은 회계장부와 청구서가 전부였다.
물론, 단단한 나무로 된 문은 잠겨 있었다. 타냐가 선실 내부를 살피기도 전에 제일 먼저 알아본 내용이었다. 문을 두들겨볼까 생각했으나 스테판이 달려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포기했다.
타냐는 수심에 잠긴 채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용기를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탈출 계획은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만약 스테판이 다녀간 이후에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다리가 성하다면, 다시 시도할 작정이었다. 바실리의 빌어먹을 '선택 이전의 의무' 는 모든 계획을 망쳐 놓았으나 다음번에는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의 받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다.
타냐는 왜 그들이 자신을 선택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다른 매음굴 주인이 이국적인 춤을 추는 댄서를 찾기 위해 그들을 고용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꿈같은 동화를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그들의 저돌적인 행동을 잘 설명해주었다. 그렇지만 여자 한 명을 위해 그 모든 고난과 비용을 감수한단 말인가? 아니면 그들이 제시한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믿고 제 발로 따라온 여자들이 이미 다른 선실에 있는 것은 아닐까?
배가 부두에 닿으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아니, 그것을 알게 될 만큼 오래 남아 있지 않고 도망칠 것이다. 나체스로부터 멀어질수록 돌아오기도 힘들 것이다.
스테판이 날 마구 두들겨줄 거라고?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폭풍 전야의 고요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무슨 소리와 함께 스테판이 나타났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하지만 '얌전한 태도'는 물론 속임수였다. 타냐는 전처럼 그가 문을 꽝 닫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분노라도 소진시켜줄 테니 말이다. 스테판을 바라보던 타냐는 그의 감정 상태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다. 그건 분명 격노였다. 최면이라도 걸듯한 금색 불꽃이 가득한 눈동자, 긴장한 턱선과 꽉 쥔 주먹, 흉터는 하얗게 변색되어 두드러져 보였고, 온몸에서 긴장이 흘러나왔다.
그의 장화와 넥타이, 그리고 상의는 사라졌다. 머리카락과 얼굴을 닦은 수건이 그대로 목에 걸려 있었다. 젖어 몸에 달라붙은 얇은 셔츠는 가슴과 팔의 근육을 모두 드러내면서, 그저 짐작만 했던 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똑똑하게 알려주었다. 너무 크고,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의지와는 달리, 타냐는 다시 시선을 떨어뜨려 커다란 강철 방망이처럼 보이는 그의 손을 보았다. 두들겨준다고? 두들겨준다!
갑자기 공포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재빨리 일어나 의자 뒤로 숨었다. 그러나 타냐의 움직임은 스테판에게 자극을 가했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말을 하기에도 너무 화가 난 게 분명했다. 타냐가 미처 변명을 질러야겠다는 생각도 하기 전에 그가 상큼 다가왔다. 앞에 놓인 단 하나의 장벽이 옆으로 나동그라지는 것을 보며 심한 공포에 휩싸인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들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부드러운 진동이 몸으로 전달되는 것으로 보아 침대 위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무거운 게 몸 위로 털썩 떨어졌다. 스테판, 그의 몸이 그녀를 완전히 감쌌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사태 앞에서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바로 다음 순가, 격렬한 그의 입술이 그녀를 덮쳤다. 징벌의 의미를 담은 키스는 아니었으나 그녀에겐 너무나 열정적인 키스였다. 어리둥절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 강철 같은 주먹으로 그녀의 몸을 부숴버리지 않는 것일까?
다음 순간 타냐는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그가 사용할 무기는 주먹이 아닌 그의 몸 자체였다. 속으로부터 안도의 웃음이 끓어올랐으나 맞부딪친 입술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웃고 싶다는 충동은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의 키스에 장난기란 없었다. 그는 무서우리만치 심각했다. 마침내 그녀와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분노 속에서 말이다.
타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대항했으나, 내리누르는 무게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것에도 느낌이 없는 모양이었다. 주먹질을 해도, 머리카락을 잡아당겨도 꿈적하지 않았다. 키스가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의 숨결이 일치하고, 두 사람의 느낌이 일치했다. 흡인력, 기운이 빠져 나가고 마구 뒤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몸부림을 쳤으나 에너지만 소모할 뿐, 타냐는 그의 맹공격 앞에 대문을 열어놓고 맞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타냐는 두려웠다. 오랜 세월 동안 남자와의 이런 접촉을 피해왔고, 남자들이 욕망을 못 느끼게 하려고 별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겉으로 보여지는 추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타냐를 원했다. 그녀의 소망도 무시한 채 그녀를 가지려고 했다. 타냐는 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지 의심스러웠다. 바로 이 점이 그녀를 더욱 두렵게 했다. 그는 너무나 열정적이었으며, 분노로 인해 자제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심지어 그녀의 저항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무나 뜨거웠다! 물에 빠져 차가워야 마땅했으나, 그의 몸에서 발산된 열기는 증기처럼 그녀의 옷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옷감이라는 장벽은 무용지물로 변해버렸다.
맙소사, 타냐는 두려움 이외에 다른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배가 처음 출발할 때의 충격으로 스테판의 주의가 약간 흐트러졌다. 입술은 비명을 지르고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워졌으나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스테판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동자는 아직 불타올랐고, 표정은 너무 강렬하여 숨쉬기조차 두려웠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자제심을 무너뜨리게 될 것 같아 무서웠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자제심이란 말인가? 어떤 감정이 그를 지배하는지, 그가 억누르고 있는 열정이 어떤 종류인지, 그녀를 갖고 싶은 욕망이니 혹은 때리고 싶은 충동인지 정확하게 짚어내기가 힘들었다.
스테판은 불길에 손이라도 데인 사람처럼, 갑자기 쥐고 있던 것들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시오!"
스테판이 명령했다.
"어서 내 눈앞에서 사라지...."
더 이상 자극을 가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이 아직 절반쯤 덮치고 있었기 때문에 빠져 나오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몸을 빼냈으나 흠뻑 젖은 치마가 거치적러렸다. 그녀는 침대 옆으로 몸을 굴렸다.
"안 돼. 맙소사!"
스테판의 손이 뒤에서 그녀를 잡아챘다.
"적어도 저지른 일의 대가는 치러야지."
타냐엑 그 의미는 단 한 가지였다. 그 순간, 타냐는 그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타냐는 빌지 않았다. 돕스는 아무리 빌어도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벌은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건강하게, 어디가 부러지거나 들것에 실리지 않고 여기를 빠져 나가야했다.
발은 바닥에 닿았으나 아직 스커트 자락이 잡혀 있었다. 그가 쥐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타냐는 스커트를 빼내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그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가를 보게 되었다. 아직도 화가 많이 나 있었다.
하니님의 은총이 있길, 그는 매질을 가할 것이다.
본능적으로 타냐의 손이 허리춤의 칼로 향했으나, 칼은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하지만 장화 속에 다른 칼이 숨겨 있었다. 날이 짧은데다 날카롭지도 않았지만 스테판을 가까이 못 오게 할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몸을 숙이는 순간, 스테판의 손이 치켜 올라갔다.
타냐는 뭔가가 아래로 내려쳐질 거라고 예상하고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스테판이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당겨 무릎 위에 엎어놓았다.
타냐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오. 날 때리지 않는다는 뜻인가? 믿을 수 없었다. 스커트가 들어 올려진 것도 잊었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정도로 살짝 맞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웃고 싶었다. 그만큼 안심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만 지었다. 찰싹 한 대 맞은 다음 다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나마 아픔 느낌을 줄이기 위해 근육의 긴장을 풀었다. 엉덩이가 후끈 달아오르더니 이내 감각이 마비되었다. 스테판은 진지했고, 그건 분명 체내의 분노를 모두 삭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맞은 편이 나았다. 분노는 그에게 여자를 탐닉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는 대체 어떤 종류의 버릇을 가지고 있는 걸까?
15
스테판은 마치 불 속에 손을 넣은 기분이었다. 이런 느낌을 받게 될지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녀를 팔에 안고 달래주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어떻게 보면 자기 탓이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히 경고를 받았다. 그건 앞으로도 허락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카르디니아로 돌아가는 게 그녀의 의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하며, 그건 피할 수 없는 사실임을 명심해야 했다.
그러나 스테판이 선택한 방법은 너무 거칠었다. 지금 눈앞에 증거가 있었다. 붉게 물든 엉덩이! 항상 그렇듯 스테판은 분노에 못 이겨 일을 저질러놓고,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의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그러나 체벌의 효과가 감소될까봐 그런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스테판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뒤집어 일으킨 다음 부드럽게 안았다. 그녀는 아직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편안하게 해주려는 손길도 거부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수그리고 손을 무릎에 앉은 채 가만히 앉아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스테판은 내쉬려던 숨을 참았다. 타냐는 어느 때보다도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감정을 심하게 흔들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욕망, 부끄러움, 격노, 좌절, 그리고 소유욕이 몰려왔다. 그리고 지금은 혼란과 양심의 가책과 애정이 내부에서 솟구쳤다.
예전에는 고의로 여자에게 상처를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이토록 냉담한 사내로 만들어버린 걸까? 어떤 종류의 죄책감으로 대가를 치르게 될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섬세한 여자에게 더 심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면 얼마나 더 나쁜 일이 벌어졌을까? 적어도 그녀는 사랑을 나누는 일에는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의 분노를 분출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비록 그녀가 믿지는 않지만, 그녀는 공주였다. 지위에 걸맞은 대접을 하고 싶었으나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가 본래의 얼굴을 드러냈을 때 그 어머니처럼 아름다울까봐 은근히 두려웠다. 사실 본모습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짐작은 가능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순간이 올 것 같아 두려웠다.
그는 솔직함을 원했다. 아름다운 여인은 순간의 즐거움을 안겨줄 뿐, 애정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이 평범함 여자는 그렇게 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흉터를 보고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니, 스테판은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모른다. 왜 얼굴을 숨기려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그저 타냐를 놓아주어야만 했다.
몸은 이성을 거부하고, 타냐의 몸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타냐는 그 힘에 저항하려는 듯 꿈틀거렸다. 스테판은 즉시 힘을 늦추고 다시 달래듯 그녀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등을, 머리카락을, 뺨을,
스테판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물은 어디로 갔소?"
"무슨 눈물?"
"눈물이 흘러 당신 뺨에 회색 선을 그어놓아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오. 그런 눈물?"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닦아냈어요."
"거짓말."
"글쎄요. 그건 둘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뇨. 그렇게 인상 쓰지 말아요. 당신은 눈물을 원했나본데, 돕스가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부터 내 눈물은 말라버렸어요."
"무슨.........."
타냐의 웃음소리가 스테판의 말허리를 꺾어버렸다.
"스테판, 당신은 날 어디서 발견했는지 잊었나보군요. 돕스와 함께 지낸 내 생활이 학대와 절망의 연속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나의 반항적인 성질 때문에 자주 매질을 당했어요. 그 때문에 육신도 영혼도 굳어버린 거예요."
타냐는 울지 않았다. 아니, 조금이라도 아픔을 느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아팠소?"
"물론이죠."
타냐는 가늘어진 그의 눈동자를 보며 덧붙였다.
"그렇게 많이 아픈 건 아니었어요."
스테판이 너무나 빨리 일어나는 바람에 타냐는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이런 뻔뻔스러운 여자 같으니. 철면피!"
"지금 회초리로 날 때릴 건가요?"
"아니!"
"그렇다면 왜 그렇게 고함을 지르죠? 설마 내가 이런 일을 또 당하고 싶어한다고 믿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소? 당신은 느낌조차 없는데."
그의 대답은 마치 비명처럼 들렸다.
"그렇지 않아요. 단지 늘 맞던 만큼 심하지 않았다는 거죠. 적어도 걸어 다닐 수는 있잖아요."
그녀는 엉덩이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스테판의 몸이 굳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맙소사, 그가 당신을 때린 거요?"
타냐는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멍청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돕스가 당신을 때렸냐는 말이오. 타티아나?"
"이미 말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 싫다고 분명히 일러두었을 텐데요."
"악마에게 물려갈 놈!"
그가 소리 질렀다.
"돕스가 당신을 어떻게 때렸소?"
"그래봤자 달라질 게 뭐가 있죠? 회초리, 손, 날 아프게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사용했어요."
스테판은 그녀의 대답에 들어 있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이 늘 느껴오던 감정이기도 했다.
"그런 인생에 더욱 불편함을 안겨주게 되어 미안하오. 타냐. 당신을 아프게 하려던 뜻은 없었는데..."
"나를 놀리는군요."
그녀가 코웃음 쳤다.
"당신이 다시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을 뿐이오."
"그리고 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던 거겠죠."
스테판은 사과를 해서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싶었으나, 타냐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의 분노가 그냥 사그라지길 원치 않았다. 그녀에게 좀 더 가르침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당신이 그런 일을 당했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오. 당신은 점잖게 양육되어야 했소. 행운이 당신 목숨을 구했고 토밀로바 남작부인이 그것을 보증했소. 그녀는 당신에게 카르디니아 여왕으로서의 의무와 예절을....."
"만약 또다시 싸우고 싶지 않다면,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런 이상한 연극은 그만두도록 해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고요."
타냐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렇게 하겠소. 왜 내 말을 믿지 않는지 이유를 말해준다면 말이오."
"그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잃어버린 공주? 스테판, 웃기지 말아요. 어떻게 공주처럼 중요한 사람을 다른 곳으로 몰래 보낼 수가 있겠어요?"
"그건 비밀이었소. 사실이 알려지면 당신이 죽음을 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당신이 지위에 걸맞는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그리고 남작부인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을 경우 어떻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 믿었소. 그런데 당신이 당신 신분에 대해 알기도 전에 남작부인이 죽어버리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소?"
"당신은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군요. 그렇죠?"
그녀가 화난 목소리로 비꼬았다.
스테판은 그녀가 터뜨린 분노 앞에 미소를 지었다.
"그건 사실이니까."
"그만 해요!"
스테판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좋소. 공주. 당신은 적어도 명령을 내리는 요령을 알고 있는 것 같소. 나머지도 쉽게 배울 수 있을 거요."
타냐는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으스대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스테판의 몸에서 묻은 물기 때문에 타냐의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가슴이 비쳐 보였다. 다행히도,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난. 음. 목욕을 좀 해야 할 것 같소. 당신의 강에서 묻은 오물을 씻어내야 하니까."
그는 문을 향해 사샤를 불렀다.
"우리 강? 그럼 내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인가요?"
스테판은 고개를 돌리고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테지만 난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소. 자. 당신도 목욕을 하고 싶소?"
"아뇨."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럼 옷을 갈아입는 건 어떻소?"
"헤엄쳐서 되돌아가 내 옷을 가져다줄 건가요?"
그녀는 짐짓 달콤한 미소를 짓는 척하며 대답했다.
"오. 영리한 공주. 하지만 그런 제안은 거절할 수밖에 없군. 대신 당신은 내 옷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소. 우리가 뉴올리언스에 도착하면 적당한 옷을 사주겠소."
"댄서들이 입는 옷 말인가요?"
그녀가 비꼬았다.
"당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꽤 구미가 당기는 걸. 만약 당신이 우릴 위해 다시 춤을 추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댄스복을 가져올 시간은 주었을 거요. 하지만 당신이 무엇을 입고 춤을 추던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요. 아무것도 입지 않으면 더 낫겠지."
타냐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스테판은 웃음이 터져 나오기 전에 얼른 방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