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황순원(1915~2000)

가두(街頭)로 울며 헤매는 자(者)여

강(强)한 여성(女性)

고향

고향(故鄕)의 품에 안겨서

꺼진 등대(燈臺)에 불을 켜자

나의 꿈

나의 노래

넋 잃은 그의 앞가슴을 향하여 힘있게 활줄을 당겨라

늙은 아버지를 보내며

동무여 더 한층 의지(意志)가 굳세라

떨어지는 이 날의 태양(太陽)은

미래(未來)에 사는 사나이

사막(砂漠)을 횡단(橫斷)하는 사나이

석별(惜別)

압록강(鴨綠江)의 밤이어

우리 안에 든 독수리

우리의 가슴은 위대하나니

우주(宇宙)를 향하여 호령 하나니

이역(異域)에서 부른 노래

일구삼삼년(一九三三年)의 차륜(車輪)

임아! 옛사랑으로 돌아오라

잡초(雜草)

젊은이여

젊은이의 노래

팔월(八月)의 노래

패강(浿江)의 우수(憂愁)에 눈물을 짓지 마라

황해(荒海)를 건너는 사공아

황혼(黃昏)의 노래

 

 

 

가두(街頭)로 울며 헤매는 자(者)여

황순원

 

하로의 삶을 이으려고, 삶을 찾으려고

주린 창자를 웅켜쥔 후 거리 거리를 헤매는 군중(群衆),

때때로 정기(精氣) 없는 눈에서는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르며

피ㅅ기 없는 입술을 악물고 떨고 있나니

토막(土幕)에 있는 처와 자식이 힘없이 누워 있음을 생각함이다.

 

날카로운 세기(世紀)-.

팔목을 걷고 일만 하면은 살 수 있다는 도덕(道德)도

지나간 날의 한 썩어빠진 진리(眞理)가 안인가.

눈앞에 있는 순간적(瞬間的) 향락(享樂)에 도취(陶醉)되여 있는 무리,

빈 주먹을 들고 가두(街頭)로 울며 헤매는 무리.

술! 돈! 쾌락(快樂)!

피! 땀! 눈물!

아하, 너무나 지나친 간격(間隔)있는 대조(對照)여.

 

그러나, 그러나 -

마음에 뜻 안 했던 상처를 받고 가두(街頭)로 울며 헤매는 자(者)여!

지금의 원한을 가슴 깊이 묻어 두어라, 눈물을 갑 없이 흘리지 마러라.

 

 

 

강(强)한 여성(女性)

황순원

 

자식은 아직 약(弱)하나,

그러나 그를 기를 어머니는 강(强)하다.

 

그렇게 목에 핏대줄을 세우고 울든 자식이

그래도 어머니의 팔목, 낯익은 손길에 쥐워

울음을 끊고 머나먼 별을 바라본다.

이제껏 쌓였던 비애(悲哀)가 환희(歡喜)로 바뀌었다는 듯이,

머­ㄹ리 지평선(地平線) 끝, 해 돋는 쪽으로 향하였다.

 

그러면 그만한 자식이 왜 울었을까,

왜 달래는 어머니의 말도 안 듣고 눈물을 흘렸을까,

그보다도 강(强)한 어머니를 가진 그가 왜 무르게 생겼을까,

아니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지금까지 다른 어머니에게서 학대를 받고 있었으니깐……

 

그렇다 해도, 그가 울지 않을 수 없어서 울었다 해도

우리는 그가 약(弱)하다 할 수 있다.

꺼먼 맨발로 가시 밭을 걷고, 돌쌀을 씹을 만치 되기까지는,

또한 자기를 낳지 않은 딴 어머니를 내쫓기까지는,

마지막으로 지금  자기를 끼고 있는 어머니를  위하여 팔을 걷고 나서기까지는,  약(弱)하다고할 수 있다.

 

그러나, 친어머니와 아들의 만남의 기꺼움이어,

강(强)한 여성(女性)인 자기 어머니의 품에 든 자식의 얼굴에는

벌서 명랑(明朗)한 희망의 웃음까지 떠오르고 있다.

 

자식은 점점 강(强)해지고,

강(强)한 여성(女性)인 그의 어머니의 마음은 넓어진다.

 

 

 

고향

황순원

 

참말 어미 닭의 품속을 파고드는 병아리같이

그리움에 사모쳐 고향의 품에 안기건만

그는 언제나 같은 눈물겨운 가슴을 헤쳐 놓는 것이다

아하, 기름 마른 이곳, 정서(情緖) 빼앗긴 싸늘한 이곳에

누가 뛰쳐나와 괴롭단 큰 소리를 질러 보지 않는가

 

 

 

고향(故鄕)의 품에 안겨서

황순원

 

끝없는 바다, 잠자는 바다에 배부른 돛을 달고

임이 살고 있는 뭍을 찾아가는 한 척의 배,

그리고 믿음성 있게 엄마 품속에 포근히 안겨

조용히 행복된 꿈을 꾸며 발쪽이는 아가의 입술,

고향(故鄕)의 품에 안기려 할 때의 심정(心情)을 말하는듯 하나니

기꺼운 귀향(歸鄕)의 마음의 고동(鼓動)이어 - 사랑의 율동(律動)이어.

 

고향(故鄕)의 푸른 솔밭은 예전이나 다름없이 묵직한 침묵(沈黙)에 잠겼으며

수차(水車)의 목쉰 소리는 여름의 논두덩을 울려 놓는다.

순박(純朴)한 시골 처녀(處女)애들이 머리 감는 앞시내의 물,

벅센 목동(牧童) 애들이 소멕이고, 꼴 베는 냇언덕의 벌판,

또 마을 동(東)쪽에 오뚝 솟은 교회당(敎會堂)의 헌 종각(鐘閣),

심지어 왼편에 바라뵈는 공동묘지(共同墓地)의 무덤까지

무럭무럭 끓어오르는 수증기(水蒸氣) 같은 평화(平和)를 자아내는구나.

 

그리고, 산(山)꼴짝 슬기러운 안개가 인가(人家)에 기여들 새벽이면

농기(農器) 든 농군(農軍)들이 가장 생기롭게 들판으로 헤여지며,

( - 이런 때, 고즈넉한 한낮에 집에 남은 사람, 즘생이라고는

늙은 할머니, 젖먹이 애, 애보는 계집애, 병든 사람, 그리고 지주(地主) 집사람들과

입맛 다시는 도야지, 집 보는 개, 멍이 쫓는 닭, 쌔김질 하는 소,…… 뿐.)

어두움이 저녁 추기 나런 온마을에 퍼질 때면

그래도 안식처(安息處)를 향한 그들의 가볍다 할 발소리가 들린다.

 

(아하, 우리는 그들의 하루를 위하여 묵도(黙禱)를 올려볼까.)

 

그러나, 내 마음아,

저 찢긴 고향(故鄕)의 허파 속을 드려다 못 보는가.

 

쇠를 녹일 듯한 따가운 볕에 목욕하는 농민들, -

여름내 길러온 낱알을 힘 적게 나려다 보는 눈알과 눈알,

버­ㄹ서 전에 그들은 자연(自然)의 미(美)를 빼앗겼고, 신(神)을 버렸고,

오늘 최뚝에서 밤 달라 발버둥 치는 자식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

아 밭이랑에서 호미질을 멈추고 김줌을 쥔 채

짬짬히 차돌빛 얼굴을 들어 마을쪽을 바라봄이어.

영양부족(營養不足) 때문에 앓고 누워 있는 식구를 생각함인가.

그러치 안으면 호박넝쿨 새로 가늘게나마 기어오를 저녁연기를 기다림인가.

저것 봐라, 잠시간에 두 눈이 흐려지는구나, 흐려지는구나.

 

더구나 년년히 늘어 가는 우막들의 빈터는

쫄아든 각 사람들의 공포(恐怖)를 파내고 있으며,

모혀 앉아 서로 주고받는 세간사리 이야기 속엔

맨발로 어름 우를 걷는 것 같은 매움이 숨어 있지 안는가.

올해도 기러기 날으는 밤 타작(打作) 터에서 통곡해야 하고,

눈포래 치는 밤 또 도망을 쳐야 하겠구나.

비나리는 항구(港口)의 가을밤 같은 서글픔이어,

소리 못 내는 이 땅의 울음소리여.

 

고향(故鄕).

 

참말 어미 닭의 품속을 파고드는 병아리같이

그리움에 사모쳐 고향(故鄕)의 품에 안기건만

그는 언제나 같은 눈물겨운 가슴을 헤쳐 놓는 것이다.

아하, 기름 마른 이곳, 정서(情緖) 빼앗긴 싸늘한 이곳에

누가 뛰쳐나와 괴롭단 큰 소리를 질러 보지 않는가.

 

 

 

꺼진 등대(燈臺)에 불을 켜자

황순원

 

별 없는 하늘에 번개가 부딪히고,

고운 달빛이 잔물결 우로 미끄러지는 사이에

쉬지 않고 바뀌는 태양(太陽)의 빛을 맛보며 회색(灰色) 바위에 높이 서 있는 등대(燈臺),

지금은 유탄(流彈) 맞은 성벽(城壁)같이 양쎈 힘을 잃어버렸나니

무너지는 대벽(臺壁)이어, 깨여진 유리창이어,

산산히 부서진 등(燈)알이어, 녹슬은 쇠지붕이어.

 

바닷가에 솟은 검바위를 삼킬 듯한 날카로운 바람과 물결!

저어가는 배사공을 뒤엎으려는 기운찬 대양(大洋)의 호흡(呼吸)!

이날에 이곳을 지나려는 나그네들

무엇을 바라보고 바로 치를 잡을 것인가.

 

더구나 넘치는 사랑으로 불켜든 늙은 등대수(燈臺守)는

선지피 묻은 입술을 꼭 물고 원한의 눈을 뜬 채로 넘어졌으며,

하늘에 뭉킨 구름 떼, 땅에 줄달음치는 바다물까지가

간악한 적(敵)의 승리(勝利)를 알리는 때, 축하하는 때

해기운 저녁에 이름 모를 새의 우지짐이어,

아하, 떠러진 역사(歷史)의 한 절을 조상하고 있고나.

 

뜻있는 친구여, 억함에 가슴 뜯는 무리여

좀먹는 현실(現實)을 보고 슬퍼만 말라.

우리는, 참 사내는, 다시 등대(燈臺)의 불을 겨누아

뒷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의 기꺼워함을

아하, 가슴 깊이 안아야 하지 않는가, 안아야 하지 않는가.

 

 

 

나의 꿈

황순원

 

꿈, 어제밤 나의 꿈, 이상한 꿈을 꾸었다.

세계를 짓밟아 문지른 후 생명의 꽃을 가득히 심으고,

그 속에서 마음껏 노래를 불러 보았다.

 

그러다, 언제던지 잊지 못할 이 꿈은

깨어 흩어진 이내 머리에도 굳게 못 박혔다.

다른 모든 것은 세파(世波)에 스치어도 나의 동경(憧憬)의 꿈만은 영원(永遠)히 존재(存在)하느니

 

 

 

나의 노래

황순원

 

나는 귀를 막았다.

어째서? -

비명, 탄식, 애원, 호소, 저주!

그대로는 듣지 못할 부르짖음 행여나 아니 들릴까 하여.

그러나, 쟁쟁히 귓고막을 깨치고, 새여 들어오는 것을 어떻거나?

괴로우나마 내가 들어야 할 소린 것 갓다.

 

나는 눈을 감았다.

왜 -

거짓, 간사, 속임, 증오, 모순!

눈을 바로 뜨고 보지 못할 현상을 멀리로 사라지게 하려고.

그러나, 더한층 똑똑히 눈앞에 나타나 머리 속을 산란케 하는 것을 어떡하나?

쓰라리나마 내가 보아야 할 증상인 것 같다.

 

마침내 나는 길을 떠났다.

등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늘도 내일도 걸을 나그네의 길이다.

나의 진 짐이 무거우니 좀 쉬어 가라고?

아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고 기다리는 그곳까지 가서

얽매인 신들매를 풀고, 그 짐을 내리려 한다.

 

 

 

넋 잃은 그의 앞가슴을 향하여 힘있게 활줄을 당겨라 - 잠자는 대지(大地)를 향(向)하여 부르는 노래

황순원

 

피 흘릴 날이 오면 날리는 기폭을 둘러싼 후

부러진 총대나마 어깨에 메겠다고,

기운차게 나오야 될 그 말소리를 지금은 잊었느냐, 힘을 잃었느냐,

그러치 안으면 뛰는 피를 빼앗겼느냐.

쓰라린 뒷날의 피 묻은 과거(過去)를 가슴에 안고

그때 생각에 몸서리치며 외치나니

사나이의 마음이 더 한층 굳어지고, 뜨거워짐을 바람이다.

 

엉큼하게 뼈만 남은 해골(骸骨) 떼는

황폐(荒廢)한 성벽(城壁) 밑 묘반(墓畔)에서 울고만 있으며

불없는 거리에 햇빛 찾는 무리는

칼자리에 왼몸이 피뭉치 되었구나

빛 잃은 눈동자(瞳子)여, 힘없는 입이여,

나팔 못 든 손이여, 못 걷는 발목이여.

 

아, 악착한 분위기(雰圍氣) 속에 헤매는 사나이들아,

그러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냐?

굳건한 의지(意志)까지 사라트리려는가?

아직 뼈 사이에 기름방울이 남어 있거들랑

대지(大地)를 바라보며, 목이 터지도록 외쳐라, 발거름을 마춰라.

그리고 넋 잃은 그의 앞가슴을 향하여 힘있게 활줄을 당겨라, 당겨라.

맞은 심장(心臟)의 피가 용솟음 쳐서 놀래 깨기까지.

 

 

 

늙은 아버지를 보내며

황순원

 

일에 지친 쇠약한 몸뚱아리를 눕혀,

아들의 꿈틀거리는 팔목을 어루만지며 장엄한 과거(過去)에 눈감어 취하는 아버지,

인제는 그때 생각에 가슴이나 썩지 마시라, 눈물이나 흘리지 마시라

벌서 청춘(靑春)의 기염(氣焰)을 잃은 지 오래나니, 잃은 지 오래나니.

 

그러나 그날의 위자(偉姿)를 되풀이하게 하는 듯한 흰 수염,

일만 군졸을 호령 하는듯한 입맵시,

철판(鐵板)을 뚫고도 오히려 남을 눈자위의 힘 자취 -

모두가 옛날의 추억(追憶)을 새롭게 하는 씨로구나.

 

그도 한때는 원대(遠大)한 포부(抱負)와 영웅적(英雄的) 기상(氣象)과 희생(犧牲)의 정신(精神)을 가졌고,

세상을 쥐흔들 큰 야심(野心)을 가졌었다.

그러나 때는 그를 허락지 않았고, 그는 때를 만나지 못했나니,

법열(法悅)에 찼던 그의 희망(希望)은 여지 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보라, 젊은아 - 아들아, 딸아,

여기서 인생(人生)의 덧없고, 거칠은 행로(行路)를 보라,

이같이 어버이의 온갖 능력(能力)은 빼앗겨 버렸나니

재만 남은 위력(威力)이어, 움직이는 미­라[木乃伊]여.

 

그러타, 아들은 아버지를 보내야 한다. 인생(人生)의 싸움터에서 제명(除名)을 당한어버이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눈에 어리운 새파란 환상(幻像)과 함께 옛힘을 보아야 한다.

어버이의 옆에 앉아 노쇠(老衰)한 몸의 맥(脈)을 짚고 있는 자식아 -

 

 

 

동무여 더 한층 의지(意志)가 굳세라

황순원

 

빈 주먹을 들어 큰 뜻과 싸우겠다고, 동무가 이곳을 떠나든 그날 밤,

정거장 개찰구(改札口) 앞에서 힘있게 잡었던 뜨거운 손의 맥박(脈搏)

말없이 번뜻거리든 두 눈알의 힘!

프랫트폼에 떨고 있는 전등불 밑으로 걷던 뒷모양!

아하, 꼭 감은 눈앞에 다시 나타나는구나.

 

그것은 벌서 지난 겨울의 일,

지금은 검은 연기 속에 묻히어 희던 얼굴은 얼마나 껌어졌으며,

물렁물렁 하던 두 팔목은 어떻게나 굳어 졌는가.

이제는 그렇게 잘 울던 울음도 적어 졌겠지.

 

오늘은 또한 봄비 나리는 밤,

나는 가시마[貸間]한 구석에서 괴롬과 싸울 그대를 생각한다.

더러운 벽에는 노동복이 걸려 있고,

먼지 앉은 책상에는 변도곽이 놓여 있어

쓰라린 침묵(沈黙)에 사로잡혔을 그대를, 아하, 그대를……

 

그러나 동무여,

나는 믿는다. 그대는 낙심(落心)치 않고 비명(悲鳴)을 내지 않고, 그리고 새 배움을

얻으리라는 것을.

나는 지금 다시 그대를 향하여 외치나니,

더 한층 의지(意志)가 굳세라, 굳세라.

 

 

 

떨어지는 이 날의 태양(太陽)은

황순원

 

하늘의 왕자(王子), 밝음의 사자(使者),

휘황(輝煌)한 화염(火炎)을 내려 쏘든 태양(太陽)이 꺼구러졌다, 서산(西山)에 피를 토(吐)하고.

 

태양(太陽)아, 만민(萬民)이 총대를 겨누고 있든 불덩아

그렇게 너의 영화(榮華)가 오랫동안 계속할 줄 알었드냐?

그런 폭행(暴行)이 앞으로 더 있을 줄 알었드냐?

네가 죽은 후에 너를 위하여 울 자(者)는 눈 우에 우짓는 가마귀 떼뿐이다.

 

가난한 우리, 흑막(黑幕) 속에 허덕이는 우리에게는

너의 홍소(洪笑)의 한끝을 넌즈시 보내고,

화려(華麗)한 양옥(洋屋) 카텐에서만 아양을 부렷지?

도로혀 음영(陰影)을 찾아 X행(行)을 하려는 그들에게 갑있는 너의 힘을 헛되이 빌려주었지?

 

그렇다, 우리는 태양(太陽)에게 반항(反抗)한다.

우리를 버린 너와의 인연을 끊으련다.

지금 회색(灰色) 구름을 넘어 떨어지는 이 날의 태양(太陽)은

우리의 총알에 맞아 마지막 호흡(呼吸)을 고하는 것이 아니냐,

저 흙 속에 묻힌 날쎈 봉화(烽火)에 쫓기는 것이 아니냐?

 

 

 

미래(未來)에 사는 사나이 - 그는 과거(過去)를 묻어버린 사나이

황순원

 

 

생각하면 가지가지의 애달픈 추억(追憶) -

아내를 찾아 저 암흑(暗黑)의 거리 거리를 싸돌았고,

자식을 안고 눈비 속에 밤을 새웠다.

그리고 고양이의 눈에 불켜는 봄밤에 험한 산(山)을 넘어도 보았고,

마가을 살얼음진 한길의 강물을 헤처 건너기도 했다.

생각하면 가슴 답답한 추억(追憶)의 더듬길.

 

그는 이미 고향(故鄕)의 맑은 하날을 잃었고,

그렇게도 사랑하든 들과 강물도 빼앗겼으며

끝으로 아내의 살뜰한 정(情)마저 버리게 되었다.

제단(祭壇)에 피 흘린 양(羊)같이 참된 정성이

그보다도 어리석게 착한 빈 마음이

장마물에 쓸리듯이 앗기었나니, 아끼었나니.

 

거의 영겁(永劫)에 달린 비애(悲哀).

뜬뜬히 머듬든 마음의 상처(傷處), -

흰 장미(薔薇) 들고 옛연인(戀人)의 무덤을 찾는 소복한 처녀(處女)에게 지지 않게 안타까이

주먹으로 가슴 밑바닥을 치며 통곡하였고,

 

달겨드는 맷도야지의 만용(蠻勇)보다도 더 되세게 세차히

모든 오뇌(懊惱)와 저항(抵抗)하여 보았으나,

그러나, 보래빛 같이 함박한 추억(追憶)의 실마리는 풀리었나니, 그를 괴롭혔나니

차라리 과거(過去)의 기록(記錄)을 재로 불사뤄 버림만 같지 못했다.

 

과거(過去)를 장사지낸 사나이, 미래(未來)에 사는 사나이

이젤랑 야스꺼운 미련(未練)에 얽매우지 마라.

희망(希望)의 서광(曙光)이 빛나는 감벽(紺碧)의 바다에 떠서

미래(未來)를 위하여 꾸준히 노질을 하렴으나,

우렁찬 개가(凱歌)를 불러 불러

웅장(雄壯)한 미래(未來)를 바라고 무보(武步)를 옮기려므나.

 

 

 

사막(砂漠)을 횡단(橫斷)하는 사나이

황순원

 

피로(疲勞)에 핏대줄 서리운 다리를 한 개의 지팽이에 맡기어

무한(無限) 광대(廣大)한 사막(砂漠), 파상형(波狀形)의 사구(砂丘)을 넘는 사람,

흐린 얼굴로 지평선(地平線) 우에 기운 햇볕을 안았나니

모랫바다 속에 묻어 둔 동반자(同伴者), 안해를 생각함인가,

자기의 생령을 위하여 사로 죽인 악대의 시체(屍體)를 그려 봄인가……

머지않아 이곳에도 저녁의 싸늘한 침묵(沈黙)을 헤치고 두려운 암야(暗夜)가 깃들리겠구나.

 

그는 왼종일 녹지(綠地)를 찾아 따가운 사원(砂原)을 걸었고,

다시 오는 날의 고로(苦勞)를 가슴 쓰리게 새기고 있다.

하니깐, 선풍(旋風)과 기갈(饑渴), 그리고 맹수(猛獸)가 노리고 있는 속에 섰으니깐

기름진 악대를 타고 별빛의 인도를 받아 잠든 사막(砂漠)을 지나는

저 거룩한 `동방박사(東方博士)'의 성서(聖書)­ㄹ랑 생각이나 할까,

서(西)쪽 벌끝 산(山)머리에 목을 바치고 있는 해를 애껴

풀 뜯는 양(羊) 떼 새에 끼워 풀피리를 불고 있는 목동(牧童)의 꿈일랑 렴이나 할까.

 

*

 

사막(砂漠)을 횡단(橫斷)하는 사나이, 힘찬 젊은아,

하나뿐인 동생의 무덤을 찾아 목비(木碑)를 바라보는 듯한 외로움을,

천가만가 물결이 늘어선 바다에 홀배 띄운 듯한 매서운 심사를

떠날 때의 광영(光榮) 스러웠든 순간(瞬間)과 비겨보고 울지마라.

이제 바라든 최후(最後)의 승리(勝利)를 잡게 되리니, 몇 갑절의 희열(喜悅)을 맛보게 되리니

머나먼 노정(路程)에 녹은 다리나마 앞으로 옮기라.

(그대의 뼈는 아직 굳어 있지 않은가,

그대의 마음은 능히 지금의 괴로움을 이길만 하지 않은가.)

 

 

 

석별(惜別)

황순원

 

말없이 가로(街路)로 걷던 두 사람의 심사,

침묵(沈黙) 속에서 서로의 뜻을 통(通)케 하려던 마음이어.

공장에 울리는 싸이렌도 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무심하구나.

친구의 나누임, 애타는 이별(離別).

 

군은 여러 번 자살(自殺)을 도모(圖謀)했었지?

철도(鐵道), 강(江)물, 독약(毒藥), 칼날, 농끈, - 이 주마등(走馬燈)같이 군의 뇌(腦)를 잡어 흔들었나니,

세상의 헛됨을 분통(憤痛)히 여김이 아니였던가.

그러나 자살(自殺)은 약자(弱者)의 짓이라는 것을 깨달었을 때,

다시금 군의 앞에는 `삶의 힘'이 닥쳐 오곤 하였었다.

 

그러던 군이 이제 별다른 포부(抱負)를 갖고,

가난뱅이 집, 아니 평양을 떠나게 되었다.

처음엔 상경(上京), 다음에는 발 닿는 곳으로 가겠다고?

그렇다 군의 말처럼 타락(墮落)은 말고, 승리(勝利)의 깃발을 잡도록만 해다고.

 

그러면 군아, 양(梁)군아,

가가, 떠나가라.

눈물 젖은 나의 수건을 바라보며, 떠나가거라.

 - 이 눈물은 헤여짐에 있어서 갑 없는 줄은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이 속으로 솟는 것을, 아하 쏟아지는 것을……

 

자, 군아 용기를 내라, 나는 마지막으로 합장(合掌)하여 바란다.

군이 세상에 나선 이상 그 물결에 거슬려서라도, 누가 네게 반대(反對)를 한대도

꾹 잡은 신념(信念)만을 변치 마라.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을 잊지 말아다고.

 

오호, 떠남이어.

…………

오호, 기억하라, 만날 날을……

 

 

 

압록강(鴨綠江)의 밤이어

황순원

 

물, 물, 물.

흐른다, 눈에 충혈(充血)되듯이 붉은 흙물이 흐른다.

성난 듯이, 우는 듯이, 압록강(鴨綠江)아, -

 

길 떠나는 나그네의 심회(心懷)를 욱여내는 국경(國境)의 밤하늘,

뵈누나, 저 어렴픗한 배전의 등(燈)들이,

들리누나, 저 물쏘리가, 그리고 국경순경(國境巡警)의 발소리가.

내 홀로 늦은 봄 강가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나니,

압록강(鴨綠江)의 밤경치에 새로운 맛을 찾고 있나니.

 

이곳은, 바로 탁류(濁流)가 밤공기를 짜개는 이곳은,

소란한 말굽소리가 대지(大地)를 흔들어 놓을 때마다

이적(夷狄)의 창(槍)과 화살을 막어, 물리치든 자연(自然)의 대참호(大塹濠) 엿고,

아침 햇빛 맞은 지붕에 입 맞추고 있는 한 쌍의 비둘기에 눈을 줄만 한 평화(平和)한 때면

가을 달 나린 물 우에 천만 사랑의 노래를 불러 띄워 보내든 곳이다.

한데, 아 마땅히 숭엄(崇嚴)함에 머리를 숙일만 한데, 이것이 웬일일까,

한번 싸움에 진 수탉이 항상 쫓기우듯이

오늘에는 다못 서러운 눈물의 수탄장(愁嘆場)이 되고 말았단 말이.

 

그랬더니 정성을 놓고 다시 마음을 살폈더니만, -

나제, 꾸릿빛 옷 등을 벗어제친 노동자군(勞動者群)은

염천(炎天)에 양식(糧食)을 날러 드리는 개아미 떼나 된 듯이 양강반(兩江畔)을 배회(徘徊)하엿고,

떼목 타고 나려 올 남편을 위하여 빨래질하든 여인(女人)은

첫아이 죽인 어머니의 초췌(憔悴)한 얼굴이 되여 수심을 지코 있지 안엇든가.

아하, 어부(漁夫)의 안해가 광풍(狂風)에 가슴 떨듯이

겹겹히 싸히여 줄지여 달리는 생각생각에 몸서리친다.

 

압록강(鴨綠江), 압록강(鴨綠江), 압록강(鴨綠江)의 밤이어,

그러면 그대는 변함없이 달빛까지 흐리게 할 눈물을 품어야 하고,

새길을 못 찻겠다고 쏘다놋는 찬 한숨만을 가저야 올흔가.

안이다.

눌리워 쫄어 들엇든 우리의 가슴이 터지는 때, 아하, 그때

그대는 이쪽 움쏙에서 갓난애의 힘찬 울음소리를 들을 것이다.

 

물, 물, 물.

흐른다, 눈에 충혈(充血)이 되듯이 붉은 흙물이 흐른다.

성난 듯이, 우는 듯이, 아하, 압록강(鴨綠江)아, -

 

 

 

우리 안에 든 독수리

황순원

 

세상의 평화(平和)를 상징(象徵) 하듯이

넓으나 넓은 하늘에서 자유로이 나래 펴는 독수리,

그러나, 얼마의 날즘생이 그 사오나운 발톱에 피를 흘리다

그 날카로운 주둥이에 골이 패워 죽었던가.

날센 몸집도 힘 있거니와 불 쏘는 눈알 더욱 무섭구나.

잔악한 존재(存在)여, 날즘생의 통제자(統制者)여.

 

때로, 그는 한낮의 작란으로, 잔인성(殘忍性)의 발로(發露)로,

어미 찾는 귀연 적은 새를 잡어다 농락하였고,

바위에 앉아서는 독한 소리를 질러 질러

멀리 있는 어미새의 마음을 공포(恐怖)에 떨게 하였다.

그는 가저야 할 애련(愛憐)의 눈물을 못 가진 대신에 폭력(暴力)만을 믿는 것이다.

 

한데, 이렇듯한 그에게도 슬픈 때가 왔다, 그날이 왔다.

지나친 욕망(慾望)을 채우던 그는 덧에 치우고 말았나니

모든 규계(規誡)는 그에게서 온갖 자유(自由)를 빼앗아 버렸다.

늘어진 날개죽지는 서리맞은 풀잎같이 생기를 잃었고,

반쯤 감은 눈자위에서는 이 힘을 찾아 볼 수 없구나.

아하, 쇠사슬에 억매우듯이 우리 안에 자치움이어, 쇠잔(衰殘)해 진 권력자(權力者)의 말로(末路)여.

 

그러면, 다시 수건으로 닦은 듯한 푸른 하늘이 그립고,

단숨에 만리(萬里)라도 내달을 기상(氣象)을 갖고 싶다고,

이날에 철망(鐵網)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은들 무엇하며,

오히려 비감(悲感)을 자아내는 함성(喊聲)을 질러 무엇하랴.

한갓 이슬 사라지듯 달아나 버린 그 날의 영화(榮華)인 것을.

 

그렇다. -

수많은 날즘생의 조소(嘲笑)를 받고  있는 독수리, 빼낼 수 없는 욕을 당하고 있는 독수리,

이젤랑 초록빛 옛 꿈에 가슴이나 태우지 마라,

다만 어젯날을 조상하는 듯한 풀죽은 몸집만이

다가온 값없는 죽음을 말하고 있나니, 말하고 있나니.

 

 

 

우리의 가슴은 위대하나니

황순원

 

옥순아,

가난과 고생에 차혀 커가던 옥순아!

너는 아직 그때를 잘 기억하고 있겠지?

궂은 비 나리는 밤, 빗방울이 처마 끝을 구을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국경(國境)을 넘은 아버지 어머니가 몹시 그립다고,

나의 무릎에 눈물 젖은 얼굴을 파묻고 가슴에 맺힌 몽아리를 풀어 보려 하던 때를……

지금 생각하면 까마득한 옛날의 한 이야기와도 같건만.

옥순아!

그러던 네가 또한 이 젖은 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

삶의 사슬에 얽매어 그해 봄 서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

비록 몸은 갈라서도 한 뜻을 품고 나아가는 동생이라는 것을 믿자고

젖빛 안개 낀 새벽 촌역(村驛)에서 외친 목소리,

언제까지나 이 귀에 쟁쟁히 들리는구나.

그때도 너는 마음 약한 쳐녀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누나 - 옥순아!

요새는 우리에게 더 한층 괴로운 여름철이다.

나는 항상 너의 원대로 튼튼한 몸으로 있다만

여기서도 몸이 약하던 네가 지금껏 고생에 질려

얼마나 더 얼굴이 핼쑥해졌니, 파리해졌니?

그 크던 눈이 더욱 크게 되여 나타나 뵈는구나.

그러나, 옥순아!

우리는 어데까지든지 지금의 고통을 박차고 마음을 살려야 한다, 또 지켜야 한다.

그리고 늘 한때의 감정(感情)을 이겨야 한다.

헤친 우리의 가슴은 위대하나니, 위대하나니.

 

 

 

우주(宇宙)를 향하여 호령 하나니

황순원

 

한때에 주인을 만나 해빛을 보았고,

지금은 할 일 없이 벽에 걸리운 칼 -

그러나 무섭게 빛 변한 핏줄기!

아직껏 남은 부러진 칼날의 힘!

우리는 오날 그 칼의 마음을 잘 아나니

어젯날 일을 생각코 안타까워함을……

 

무너진 성벽(城壁) 밑에 이끼 낀 비석,

부러진 칼을 사랑하든 투사(鬪士)의 무덤이어.

일을 채 못 이루고 칼자루를 남길 줄 뉘라서 믿었으며 생각이나 하였을까.

뜻 않았던 화살에 심장(心臟)을 맞고서 꺾인 칼날을 뒷사람에게 맡겼나니.

 

이렇듯이 많은 쓰라림을 품고 있는 칼 - .

굳게 닫았던 성문도 깨여진 지 오래고, 지키든 장사는 뼈까지 썩었으며

먹을 것을 찾는 가마귀 떼는 저녁 하늘을 울고 헤매이는데,

석양(夕陽) 빗긴 벽 위에서 칼은 옛꿈을 꾸고 있구나.

 

무섬 없이 칼날을 휘날리며 용감히 싸우든

지난날의 장군 - 우리의 어버이를 생각할 때,

맹렬(猛烈)히 불타는 가슴을 억제키 어려워 두 팔목을 부르것고 성(城) 돌에 올라

힘있게 부러진 칼을 높이 드나니, 우주(宇宙)를 향하여 호령 하나니

참다운 젊은이가 있거들랑 뛰여 나와다고.

 

 

 

이역(異域)에서 부른 노래

황순원

 

빼앗긴 것 없이 빈듯한 마음, 찬 것 없이 무득한 가슴,

관대(寬大)한 우주(宇宙)의 애인(愛人)과 껴안고 입맞추겠다던 큰 생각이

때로 이는 자칫한 외로움에 갈래갈래 찢기운다.

 

더구나 피 빨린 듯이 창백한 조각달이 찬 적요(寂寥)를 도웁고,

더듬는 안마(按摩)의 쇠피리 소리가 흰 고독(孤獨)에 숨여들 때

눈 우에 갈팡질팡하는 거지애의 거름결 같이도

젊은이의 환상(幻想)은 드높은 하늘에 닿고, 속깊은 지심(地心)을 뚫고,

더북한 숲속에서 노숙(露宿)하고, 황망한 사해(砂海)를 걷고,

개척자(開拓者)의 구가(謳歌)를 부르고, 유랑민(流浪民)의 비가(悲歌)를 외인다.

 

*

 

그렇다, 이역(異域)의 고독(孤獨). -

인제는 이곳의 야릇한 낭만적(浪漫的) 동경(憧憬)도,

허달뜬 사나이의 정열(情熱)을 빼먹는 도회(都會)의 매력(魅力)도,

투명(透明)한 가을바람에 가랑잎 날듯이 과거(過去)로 굴러가 버렸다.

`안전지대(安全地帶)'에 서서도 오히려 마음이 놓이지 않는 이 곳,

그 속에서 젊은이는 향수(鄕愁)의 고적(孤寂)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가파로운 바위에 붙은 등산자(登山者)같이 긴장(緊張)된 마음이,

단두대(斷頭臺)에 나아가는 용사(勇士)의 최후(最後)같이 단순(單純)한 마음이

고향(故鄕)의 전신을 휘잡아 흔들 때, 휘잡아 흔들 때.

그럼, 창 밑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실려

자꾸만 자꾸만 하늘 저편 구름 솟는 곳으로 날으는 가슴,

거기서 늙어빠진 부부(夫婦)의 참혹한 꼴을 발견했다고

백합화(百合花)를 보는 듯한 안일(安逸)을 찾아 돌아올 텐가,

그리고 주춧돌마저 없어지려는 옛 집터에 여우가 드나들게 됐다고

다시 풀잎에 눈물을 뿌리며 돌아올 텐가.

헤웠다 놓으면 퉁기는 탄력성(彈力性) 잇는 고무와 같이

백만 번 두들겨도 반발(反撥)할 젊은이의 속가슴이.

 

이 밤에 뛰어나가 망향가(望鄕歌)를 부르고 싶구나,

미친 여인(女人)같이 뒷골목을 싸돌며 망향가(望鄕歌)를 부르고 싶구나.

 

*

 

그러나, 그러나 젊은이는 또한 다시 한번 이역(異域)의 애수(哀愁)를 찢은 후

히멀뚝한 이곳 가을 하늘에서 새 힘을 얻고,

몰려온 무리와 함께 새 마음을 굳게 만들 수 없는가.

 

가엾은 겨레의 눈물의 형상 -

이날의 대도회(大都會)의 정맥혈(靜脈血)이나 된 듯이

일을 찾아 힘없는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이날의 대도회(大都會)의 수없는 기아(棄兒)나 된 듯이

빈민촌(貧民村) 우리 속에 우물거리는 미이라들,

그들에게는 고향(故鄕)이 그립지 않고, 여수(旅愁)의 쓰라림이 없을 것인가.

아니다, 골골이 쑤심을 받은 그들의 가슴은

몇 갑절의 강렬(强烈)한 향수(鄕愁)의 불길이 혀를 채고 있다.

그렇지만 그날그날의 삶에 쫄리운 가련한 무리,

못내 귀향의 값있는 희열을 바사트리고 마는 것이다.

 

포도(鋪道) 우에 쭈그러진 헌 구두짝을 보고

오늘의 그들의 송장 같은 얼굴을 그려봄이어,

가로(街路)에 선 실버들이 밤바람에 시든 것을 보고

닥쳐올 그들의 앞날을 염려함이어.

 

*

 

옳다.

젊은이는 이같이 덧없은 분위기 속에서, 깊은 바다속 같은 헤매임에서

다시금 구름에 싸였던 태양 - 크나큰 빛을 발견했나니

뭇 나비가 꽃을 사모하는 듯한 아름다운,

또한 상제없는 상여를 보는 듯한 외로운 귀향(歸鄕)을 꾀함보다도

이역(異域)의 비애와 함께 고향의 참상(慘狀) 속에 묻혀 새롭게 빛나는 희망(希望)을 찾아내기로 했다.

한 계집을 새에 두고 다투는 두 사나이의 격분한 몸뚱이같이

세찬 두 갈래의 괴로움이 젊은이를 뒤채이고 있으나, 젊은이를 뒤채이고 있으나.

 

이날에 뛰어나가 고함을 치고 싶구나,

새벽 나팔(喇叭)같이 우주(宇宙)를 깨워 놓을 고함을 치고 싶구나.

 

 

 

일구삼삼년(一九三三年)의 차륜(車輪)

황순원

 

비냐, 바람이냐?

그렇지 않으면 벼락이냐, 지진(地震)이냐? -

불안(不安)한 흑운(黑雲)이 떠도는 일구삼삼년(一九三三年)의 우주(宇宙)여.

 

무(無)에서 유(有)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개인(個人)에서 군중(群衆)으로, 평화(平和)에서 전쟁(戰爭)으로 -

이십세기(二十世紀)의 수레는 광란(狂亂)한 궤도(軌道)를 달리고 있나니

이 한해의 궤적(軌跡)은 또 무엇을 그릴 것인가.

우리 젊은이의 마음을 꺾어 버리지 않으려나.

 

참말 일구삼삼년(一九三三年)의 차륜(車輪)이 험악(險惡)한 행진곡(行進曲)을 울린다고

젊은 우리는 마즈막 퇴폐(頹廢)한 노래만 부르다가 노두(路頭)에 쓰러져야 옳단 말인가.

이것으로 젊은이의 종막(終幕)을 마쳐야 되는가

아하, 가슴 아퍼라, 핏물이 괴는구나,

울고 울어도 슬픔을 풀어내지 못 할 이날의 현상(現狀)이여.

 

그러나 젊은이여, 세기(世紀)의 지침(指針)을 바로 볼 걸아(傑兒)여,

화장장(火葬場)에 솟는 노­란 연기(煙氣)를 무서워 할 것이 없다.

오늘 우리의 고통은 보다 더 빛나고, 줄기찬 기상(氣象)을 뵈일 시련(試鍊)인 것이다.

자, 어서 젊은 우리의 손으로 일구삼삼(一九三三)년의 차륜(車輪)을 힘껏 돌리자.

괴로운 역경(逆境)을 짓밟고 넘고 넘게 운전(運轉)하자.

억찬 자취를 뒤에 남기도록, 뒤에 남기도록.

 

 

 

임아! 옛사랑으로 돌아오라

황순원

 

임아!

폭풍우(暴風雨)가 지동치는 그 여름날 밤,

세상을 허물려는 빗발, 만물(萬物)을 휩쓸려는 바람결,

그리고 피난민(避難民)의 아우성소리, 죽음의 비명(悲鳴), -

아하, 몸서리 나는 그 속에 임은 나의 손을 꽉 잡고 섰었다.

사나이가 왜 그렇게 무섬이 많으냐는 말과 함께.

 

임아!

그것은 또 어느 늦은 가을날 저녁,

쎄하얀 바람이 얼굴을 핥고, 엽산(山)에서 꿩 울며

발아래 바삭이는 낙엽(落葉)이 옛 보금자리를 그리워할 때

임은 나의 가슴을 안고 힘의 노래를 불렀었다,

사나이의 가슴이, 열정(熱情)이 한결 더 강(强)해지라고.

 

그렇던 임이, 아하, 나의 앞길을 인도해 주든 그 사랑이

지금은 나의 마음을 떠났다, 나를 모르는 듯이 가 버렸다.

 

임아!

아무리 사정이 있다기로서니 옛정을 잊겠는가,

아무리 옛정이였었기로서니 낯 모르는 임을 쫓겠는가.

사랑에 주린 사나이, 임 잃은 나는 울고 있다.

쩡, 쩡, 어름 터지는 강변에서 밤새워 가며

옛사랑아 돌아오기를 빌며 빌며 올고 있다, 피 나게 울고 있다.

 

임아!

대장간 풀무에 타는 불티가 부럽지 않고,

분화구(噴火口)에 넘쳐 나리는 용암(鎔巖)이 그립지 않은가.

임아, 내 사랑아!

우리의 앞에는 다시 동반(同伴)해야만 될 험한 길이 놓여 있나니

돌아오라, 옛사랑으로, 가면(假面)을 버리고, 힘의 상징(象徵)인 옛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라.

 

 

 

잡초(雜草)

황순원

 

아직 사람의 손과 발이 다아 보지 못한 황원(荒原)에,

우쭈ㄹ 우쭈ㄹ 이름 없는 잡초(雜草)가 돋아난다.

빛과 열(熱)의 주인공(主人公)인 태양(太陽)의 후손(後孫)이나 된 것처럼

옆에 있는 여러 아릿다운 화초(花草)를 헤치고,

암초(岩礁)에 부닥치는 탁류(濁流)의 기세(氣勢)를 본바다 잡초(雜草)가 도다 오른다.

 

억만 풀꽃이 고즈넉한 달빛 아래 웃고

벌레와 미풍(微風)은 그들을 완상(翫賞)하고 있는데

그 속에 보기 싫게 잡초(雜草)가 널려 있구나.

질서(秩序) 없이 머리든 잎새여, 거칠게 매듭 앉은 줄기여,

그리고 거미줄 엉킨 뿌리여, 멋없는 새엄이어.

그러나 도로혀 그곳에 줄기찬 생명(生命)이 숨어있지 않은가,

온 들판을 덮을 큰 힘이 용솟음치지 않는가.

 

후각(嗅覺)을 찌르는 향기(香氣)로운 꽃, 시각(視覺)을 놀래는 아름다운 풀,

미(美)의 천사(天使)가 칠색(七色) 무지개를 타고 와 따 간다면

돌가에 무성한 잡초(雜草), 미(美)의 나라에서 축출(逐出)을 당한 잡초(雜草)는

가난에 쫄려 이곳을 헤매는 농부(農夫)의 손에 꺾기울 것이다.

그리고 밤마다 별이 풀꽃과 사랑을 속삭인다면,

잡초(雜草)는 열정(熱情)의 시인(詩人), 태양(太陽)의 품에 안기움을 즐겨 하지 안는가.

보라, 젊은아, 저 늠늠한 잡초(雜草)의 기운을,

배우라 젊은아, 저 씩씩한 삶의 리듬을……

 

야, 내 마음아, 잠자든 마음아 -

들판을 거닐자, 아직 첫길인 잡초(雜草) 우를 거닐다.

그리다가 아침이 되거든, 낭안(朗眼)한 새날이 밝거들랑은,

잡초(雜草)를 한 아름 뜯어다 우리 임께 새 선물 드리자.

 

아직 사람의 손과 발이 다아 보지 못한 황원(荒原)에,

우쭈ㄹ 우쭈ㄹ 이름 없는 잡초(雜草)가 돋아난다.

빛과 열(熱)의 주인공(主人公)인 태양(太陽)의 후손(後孫)이나 된 것처럼

옆에 있는 여러 아릿다운 화초(花草)를 헤치고,

암초(暗礁)에 부닥치는 탁류(濁流)의 기세(氣勢)를 본받아. 잡초(雜草)가 돋아 오른다.

 

 

 

젊은이여

황순원

 

젊은이여,

쉴 사이 없이 붉은 피가 전신을 순환하는 젊은이여,

그까짓 고통은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다.

어째서 눈물을 흘리는가, 한숨을 짓는가.

분하고, 아깝지 않으냐, 그 열정의 눈물이, 그 결정의 한숨이.

 

젊은이여,

더욱이 그것은 마음 약한 사람의 짓이다.

슬퍼할 사람은 따로히 있다, 늙은이다.

젊은 우리는 굳세인 의지(意志)를 갖고,

몸과 마음을 던져 이 세기(世紀)와 싸워 나갈 이 땅의 용사(勇士)가 아니냐, 건아(健兒)가 아니냐.

 

그러면 젊은이여,

우리는 먼저 지금까지 부끄럼 없이 쓰고 온 거짓의 탈을 아낌 없이 벗어,

타오르는 불길에 훨훨 태워 버리고,

뒷날의 썩어진 거문고는 쉬 쓰는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자.

그리고, 누구에 서든지 줄어들지 않을 참된 군복, 투구, 신들매를 든든히 하고,

앞날의 행복을 기약할 수 있는 정의(正義)의 장검(長劍)을 억센 팔뚝에 들어보자

 

젊은이여.

그래도 우리의 마음이 허락지 않고, 거짓만 따르거들랑

젊은이여, 우리는 참다운 젊은이답게 의를 위한 날카로운 그 칼끝으로

주저 말고 우리의 앞가슴을 쿡쿡 찔러 쉬인 피를 쫓고, 살아 뛰는 피만을 남겨두자.

 

 

 

젊은이의 노래 - 피, 열(熱)이 식은 젊은이에게 보내는 시(詩)

황순원

 

 

펄 펄 펄 뛰는 용광로(鎔鑛爐) 불에 쇳물이 끌어 곤두박질친다.

거기 따라 젊은이의 심장(心臟)도 뛴다.

 

한여름 폭양(暴陽) 만난 풀잎파리 같이

젊은이의 참다운 용기(勇氣)는 폭삭 시들었고,

무덤가에서 요소(妖笑)를 받는 영웅(英雄)의 두개골(頭蓋骨)은

부상병(負傷兵) 우에 노을빛 빗긴 것같이 비통(悲痛)하구나.

 

착한 자, 착한 자 굴복(屈服)만 당할 젊은이들아,

다시 피비린내 나는 구름이 떠돌고 있나니, 우리를 부르고 있나니

손아귀마다 총대를 쥐고 영지(營地)로 달리여다고.

 

빗발 나리는 탄환(彈丸)이 콩 튀듯 하고

사자후(獅子吼)의 포성(砲聲)은 지심(地心)까지 숨기여 드는 전장(戰場),

적진(敵陣)을 응시(凝視)하든 병졸(兵卒)이 팩팩 쓰러지며

털 털 털 장갑차동차(裝甲自動車)가 횡행하는구나.

무섭다 쟁투(爭鬪)여, 소름 끼친다 살기(殺氣)여.

그러나 사람의 참 힘은, 거짓 없는 위력(威力)은 이곳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삿대 꺾인 배가 부두(埠頭)에 헤매는 것같이

힘없는 젊은이, 피 식은 용사(勇士)라고 비웃음을 받지 말고,

총칼에 마저 갈비ㅅ대에서 선지피 흐르나 흐르나,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자꾸나.

배암의 입에 물린 개구리도 마지막 힘까지 반항(反抗)을 하거든……

그렇다 암흑(暗黑) 속에서 여명(黎明)을 맞으려는 무리야, 이 땅의 젊은이들아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앉아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다.

비료(悲寥)를 풀어낼 앞길의 빛, 젊은이의 새날은

껍분한 피바다에 두둥실 떠서 오리니, 두둥실 떠서 오리니

 

펄 펄 펄 뛰는 용광로(鎔鑛爐) 불에 쇳물이 끓어 곤두박질친다.

거기 따라 젊은이의 심장(心臟)도 뛴다.

 

 

 

팔월(八月)의 노래

황순원

 

흐늑 흐늑 대지(大地)를 쿨쿠는 팔월(八月)의 태양(太陽),

나무잎 하나 까딱이지 안는 음울(陰鬱)한 위기(圍氣),

마림(魔林) 같은 빌딩의 하품 소리는 흙냄새 가득찬 이곳에도 찾아 오나니

농촌(農村)에서, 도회(都會)에서, 어촌(漁村)에서 -

팍팍 떼여 나오는 이 겨레의 아우성,

진두(陣頭)까지 짓밟힌 비명(悲鳴)은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일까.

 

참이다.

이글 이글 끓던 야로(冶爐)의 쇳물처럼

장부(丈夫)의 염통에 서리운 핏줄기의 나머지로

힘있게 울렸든 손가락은 건반(鍵盤)을 눌렀으나, 영상(嶺上)에 올라 고함(高喊)을 쳤으나

피 묻은 청춘혼(靑春魂)의 부르짖음은 만가(輓歌)보다도 더 애끗게 반주(伴奏)하는구나.

팔월(八月)의 태양(太陽)아, 우리를 녹여라.

웅굉(雄宏)한 음향(音響)이어, 우리를 넘어치라.

우리는, 참 일꾼은 조음(調音)을 바꾼 팔월(八月)의 장엄(壯嚴)한 노래로 너이를 놀래줄 것이다.

 

 

 

패강(浿江)의 우수(憂愁)에 눈물을 짓지 마라

황순원

 

장류(長流)의 패강(浿江), 그는 뵈지 안는 역사(歷史)의 한 구절. -

첫 문화(文化)가 흘러나린 그의 살졌든 염통은

지난 백성이 마음과 함께 흰옷을 빨아 입든 곳이며,

아침저녁, 위엄있게 솟은 성벽(城壁)의 그림자를 따라

씩씩한 젊은이가 말에게 물을 먹이든 곳이다.

아하, 아까운 이야기의 자최여, 거룩한 흐름이어.

 

패강(浿江)은 또한 세상의 절경(絶景) -

부벽루(浮碧樓)는 처녀와 같은 능라도(綾羅島)와 추파를 건니고 있고,

주암산(酒岩山) 밑을 핥고 내린 물은 청류벽(淸流壁) 앞을 감돌며,

대동문(大同門)의 보초병(步哨兵)인 연광정(練光亭)은 깊은 물 속을 드려다 보고 있다.

금파은류(金波銀流)에 배띄워 마음껏 나려가 볼까,

최승대(最勝臺), 을밀대(乙密臺)에 올라 굽어 물줄기를 살피여나 볼까.

(미(美)의 여신(女神)이어, 그대의 첨단(尖端)을 거른 기교(技巧)을 자랑하라.)

 

그러나, 이제 내 슬퍼한다, 치를 떨며 슬퍼한다.

비단결 같은 봄바람이 온 우주(宇宙)를 애무(愛撫)할 때

한편 요리(料理) 배로는 세상(世上) 잊은 남녀(男女)의 웃음이 흩어지는데

석탄(石炭) 실은 깜정 사람들이 묵직한 노(櫓)에 숨차 하지 안는가.

그리고 밤 묵는 떼목꾼의 노래ㅅ가락 처량하고,

여울탁에서 조개 줍는 아낙네의 눈이 흐려져 있다.

더구나, 베니스의 곤도라와 비길 매생이의 모양이 알뜰도 하건만

겨울날 어름 우에 떨고 섰는 처자(妻子) 더욱 가엽구나.

 

이다지고 마음의 어두움을 던져주는 패강(浿江),

그럼 모든 것이 헛이냐, 네 가장 거룩하다는 그 흐름이,

그럼 모든 것이 거짓이냐, 네 가장 아름답다는 그 전양(全樣)이.

모를꺼라, 그 속마음은 우수(憂愁)에 잠긴 그 속마음은……

아하, 생각 하두새 가슴 짜갬이어.

 

그러나, 그러나 안된다.

초생달 아래 휘파람 불며 모래판을 지나는 사나이같이

젊은 우리가 패강(浿江)의 우수(憂愁)에 눈물을 지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역(異域)에 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이 되여,

패강(浿江)의 속 우수(憂愁)를 간절히 살펴, 풀어내야 한다.

 

 

 

황해(荒海)를 건너는 사공아

황순원

 

먹장 같은 구름이 휘날고

우주(宇宙)를 저주(咀呪)하는 번개, 우뢰는 천지(天地)를 흔든다.

이제 사오나운 폭풍우(暴風雨)는 몰려 올 것이며

만경파원(萬頃波原)에 늘어선 파도(波濤)는 날 뛸 것이다.

사공아, 치를 잡은 사공아,

등대(燈臺) 없는 바다나마 앞으로 나아가는가.

그러치 안으면 쫓겨 뱃머리 돌리려는가

깊은 밤중, 향방(向方) 잃은 나침판(羅針盤)만 바라보는 사공의 마음이여.

 

선인(先人)들이 흘리고 간 눈물의 자취는,

앙상한 바람에 갸웃거리는 갈숲을 벗하여 흘러 흘러 나려간 상처(傷處) 바든 옛터는

황해(荒海)를 건너는 젊은 사공의 눈앞에 다가오나니

그대도 높이 춤추는 물굽이를 딸아 값 없는 눈물을 뿌리려는가, 뿌리려는가.

 

아니다, 아니다.

아사지도록 악문 사공의 이 사이로는

금석(金石)을 녹일듯한 뜨거운 입김이 새여 나오며

잿빛 하늘을 치어다 보는 눈동자(瞳子)에서는

암시(暗示)의 불타는 빛을 발견했나니

엄숙(嚴肅)한 얼굴은 태풍(颱風)에 스치어 껌어 졌고,

뻗친 팔목은 날뛰는 물결에 시달려 철편(鐵片)같이 굳어졌다.

지금 무엇이 그에게 무섭고, 또한 거리낄 것인가.

패배(敗北)의 눈물도 그의 뺨에서 마른 지 벌써 오래다.

 

그러타면 젊은 사공아, 미다운 일꾼아

번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아라.

이미 수많은 동지(同志)를 잡어 갔고 또 잡어 갈 바다는,

사나운 물즘생이 입을 딱 벌리고 사공의 힘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바다는

출렁출렁 대지(大地)를 울려 그대를 비웃고 있지 않느냐?

황해(荒海)를 건너는 사공아, 피끓는 젊은아,

어서 손빨리 풍파(風波)와 싸울 준비를 하여라.

돛을 내리고 닻을 감어라, 다시 앞만 보고 치를 힘있게 잡어라

그리고 나아가자, 이 노도(怒濤), 광풍(狂風)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 - .

 

 

 

황혼(黃昏)의 노래

황순원

 

미끄러운 습기(濕氣)가 우주(宇宙)를 나려 깔고,

뽀르릉 뽀르릉 적은 참새떼 깃 찾아 안개 속을 헤엄칠 때

그 안개 속 뭉키는 저녁연기(煙氣)를 따라

날씬한 황혼(黃昏)이 도시(都市) 우에 잠자리를 편다.

 

이맘때, 어여쁜 황혼(黃昏)이 지구(地球)와 귓속말을 할 때,

북극(北極) 얼음 섞인 황량(荒凉)한 야원(野原)에는

암 찾는 껌정 곰이 미칠 듯이 설레일 것이며,

남해(南海)의 고도(孤島), 노을빛 빗긴 야자수(椰子樹) 그늘 속엔

나체(裸體)의 토인처녀(土人處女)가 아지 못할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황혼(黃昏)아, 거문고에 손을 얹어 사랑의 노래를 부르자.

 

하거든, 감상시인(感傷詩人)이 유원(幽遠)한 명상(瞑想)에 눈감을 때어든,

어째서 저 늙은이 죽은 자식을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가,

어째서 저 헐벗은 애 돌자개에 발이 터져 넘어졌는가,

아하,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황혼(黃昏)의 가슴을 짚어본다.

 

더구나, 이런 때 생각 키우는 곳은, 마음이 달리는 곳은,

고향(故鄕)의 황혼(黃昏), 시냇물 소리에 새드는 황혼(黃昏),

햇빛에 타서 깜해진 가마귀 떼 그냥 태양(太陽)의 뒤를 쫓고,

 

방앗간 지붕 우에 박꽃이 웃는, 그 고운 황혼(黃昏), -

그러나 그곳에도 고역(苦役)에 깐 어버이의 얼굴이 있었고,

굶어 맥없이 자빠진 어린 동생이 있지 안았던가.

 

황혼(黃昏)아, 나는 노래를 부른다,

애상(哀傷) 가득한 목청을 찢고, 비분(悲憤)의 노래를……

너도 거문고 줄을 끊고 나의 노래소리에 귀 기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