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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오디세이아

Homeros

 

1. 무수한 도시의 약탈자

 

오뒤세우스가 지휘하는 열두 척의 배가 검은 함대와 헤어진 직후 동남풍 덕분에 오뒤세우스의 배들은 트라카아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뒤세우스의 배들이 닿은 곳은 이스라모스라는 도시 근처였다.

이스라모스는 바닷가 산기슭에 있는 도시였다.

트리키아는 트로이아 전쟁중에 트로이아를 편들던 나라였다.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이 트라키아에 상륙한다는 것은 적의 나라에 상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은 상륙하자마자 이스라모스 성을 차지하고 마을을 약탈했다.

그러나 거룩한 월계수 숲 속에 있는 마론의 집안은 털지 않았다.

마론은 아폴론 신의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었다.

오뒤세우스는 마론은 물론이고 마론의 처자식까지 보호해 주기로 마음먹고는 부하들에게 거룩한 숲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말라고 명령했다.

마론은 오뒤세우스의 이러한 특별 대우를 고맙게 여겼다.

굉장한 부자였던 그는 헤어질 때가 되자 오뒤세우스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금덩어리, 여러 가지 술을 섞는 데 쓰이는 큰 은그릇, 포도주가 가득가득 든 열두 개의 거대한 진흙 항아리가 바로 그 선물이었다.

포도주는 술을 섞는 그릇에 물을 열두 배나 부어서 섞어야 할 만큼 독했다.

약탈을 끝내고 약탈한 물건들을 옮긴 뒤에도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은 그 날 밤에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털어온 포도주도 넉넉하게 있었고, 가까이에는 살진 가축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닷가에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었다.

그럴 즈음, 마을 사람들 몇몇이 살며시 마을을 빠져 나와 가까운 다른 마을이나 외딴집을 찾아다니며 이스라모스가 깡그리 털린 사실을 알렸다.

사람들은 벽장에 숨겨두었던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는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모여들었다.

새벽녘이 되자 그들은 해변에 있는 그리스 군을 공격했다.

그리스 병사들은 밤새 어찌나 먹고 마셨던지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힘겨운 싸움이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싸움보다는 배가 있는 쪽으로 도망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마침내 그들은 배에 올라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목숨을 잃고 해변에 쓰러져 있는 동료가 70명이 넘었다.

그들은 전사자들을 남겨 놓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찬 배의 돛이 바람에 부풀었다. 무시무시한 폭풍이었다.

그들은 아흐레 밤과 아흐레 낮 동안이나 그 바람에 실려 향해하다가 열흘째 되는 날에야 피난처를 찾아내고는, 초록빛의 아름다운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닷가 모래밭에다 대었다.

폭풍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 섬에 상륙해, 고사리와 이끼 사이로 솟아오르는 샘물을 물통 가득히 채웠다.

오뒤세우스는 부하 셋을 보내어 혹시 섬에 사람이 사는지 둘러보게 했다.

섬사람들과 잘 사귀면 먹을 것은 물론 향해에 필요한 물건을 얻을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 부하들의 안부가 몹시 궁금했던 오뒤세우스는 부하 둘을 더 뽑아 창으로 무장을 시켜서 사라진 세 부하들을 찾으러 나섰다.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은 온순하고 친절했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일을 잊고 행복한 꿈에 잠긴 채 오직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그늘에서 현재만을 즐기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었다.

오뒤세우스는 마침내 세 부하를 찾아내었다.

그러나 섬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는 세 부하는 하나같이 뻥 뚫린 듯한 눈빛을 하고는 행복한 듯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욕은 잃은 지 오래였다.

오뒤세우스는 그제서야 그 섬이 어떤 섬인가를, 부하들도 연꽃의 열매를 먹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름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고향에서 기다리는 가족 이야기를 했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오뒤세우스는 부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이 흐느적거리는 해파리 같은 것들아!"

오뒤세우스는 데리고 간 부하 둘과 함께 우격다짐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는 창자루로 두들겨 간신히 배 있는 곳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오뒤세우스는 세 부하의 손과 발을 묶었다.

세 부하는 발버둥을 치기는커녕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오뒤세우스는 세 부하를 끌고 와 갑판에다 내굴리고는 닻을 올리라고 명령했다.

오뒤세오스 일행의 배는 다시 바다로 나왔다.

 

 

2. 외눈박이 거인

 

바다에서 이레를 더 보낸 뒤, 오뒤세우스 일행을 태운 배들은 험한 바위섬에 이르렀다.

바위섬 깊숙한 곳에는 바다로 터진, 후미진 해안이 있었다.

그 어귀에도 조그만 섬이 하나 떠 있었다.

산양의 발자국 이외의 어떤 동물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듯한 작고 아름다운 섬이었다.

일행은 배를 섬 쪽에다 붙여 정박시키고 술과 고기로 잔치를 벌였다.

술은 물론 아폴론 신의 제사를 도맡는 마론이 선사한 그 포도주였다.

후미진 해안이라 파도가 잔잔해서 밤을 지내기에 참 좋았다.

조그만 섬이 난바다의 파도를 막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오뒤세우스는 그 후미진 해안에 다른 배는 그대루 두고, 자기 배에다 만일을 경우에 대비해서 마론으로부터 선사 받은 술 항아리 하나를 싣고는 가장 큰 섬으로 들어갔다.

오뒤세우스가 그 섬을 탐험하기로 한 것은 멀리 불빛도 보인 것 같고, 희미하기는 하지만 매애애, 하는 양 울음소리도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뒤세우스는, 연꽃 열매를 먹는 사람들의 섬에서처럼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이 과연 위험한 사람들인지 아닌지 몸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오뒤세우스는 재빨리 배를 후미진 바다를 건너 닻을 내리고는 열두 명의 부하를 선발해서 상륙했다.

산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동굴의 높은 입구 입구 위에는 월계수 가지가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리고 입구 주위에는 큰 돌을 쌓아 만든 가축 우리 같은 것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몇 개의 우리에는 새끼 양이나 새끼 염소가 가득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다 자란 가축이나 양치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동굴 속으로 숨어 들어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치즈가 가득 든 몇 개의 바구니, 우유가 넘칠 것 같은 들통, 치즈 만드는 과정에서 엉긴 우유를 걸러 내고 남은 물이 든 통이 보였다.

바깥 우리에서 새끼 양과 새끼 염소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을 뿐, 동굴 안에는 동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뱃사람들은 치즈를 퍼담고, 되도록 많은 새끼 염소를 몰고 배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오뒤세우스는 동굴 주인의 모습을 본 뒤에야 동굴을 떠나고 싶어했다.

시장했던 그들은 치즈를 조금 먹고는 동울 후미진 데 숨어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해질녘이 되자 짐승들이 요란하게 우는 소리,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 왔다.

곧 시커먼 그리마가 동굴 입구를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여느 사람보다 엄청나게 큰, 괴물 같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마 한가운데에 둥글고 무시무시한 눈이 하나만 박힌 외눈박이였다.

그리스 병사들은 그제서야 저희들이 퀴클롭스(외눈박이)의 섬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인 외눈박이들은 양을 치면서 동굴에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외눈박이의 땅에는 밀이나 포도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눈박이 거인은 불을 피우려고 주워온 거대한 나뭇단을 내려놓았다.

나뭇단을 내려놓은 거인은, 숫양은 모두 바깥에 우리에다 남겨 놓고 새끼 염소, 암양, 암염소만 안으로 몰아들이고는 동굴 입구를 크고 평평한 바위로 막았다.

말 스물도 필로 끌어도 끄떡도 하지 않을 듯한 바위였다.

그런 다음에는 암양과 암염소의 젖을 짠 뒤, 새끼들은 어미에게 붙여 각기 제 어미의 젖을 빨게 했다.

짠 젖은 마시거나 치즈를 만들기 위해 들통에도 채워 두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동안 그리스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채 동굴 후미진 곳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었다.

하지만 어둠이 언제까지 그들을 지켜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눈박이가 모닥불을 피우자 불길이 오르면서 비친 붉은 빛줄기에, 동굴의 후미진 곳에 숨어 있는 그들이 모습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들을 본 외눈박이 거인이 소리쳤다.

흡사 파도에 쓸린 해변에서 돌들이 덜그덕덜그덕 마주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침입자로군! 이 넓고 넓은 바다에서 왜 하필이면 이곳으로 숨어 들었어? 너희들, 장사꾼들이야? 다른 뱃사람들의 물건이나 터는 해적들이냐?"

오뒤세우스가 대답했다.

"우리는 그리스 사람이오. 오랫동안 트로이아를 공격한 아가멤논 장군 부대의 군사들이오. 트로이아는 함락되었소.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오. 그런데 바람과 물결이 우리를 낯선 바다로 데려다 놓고 말았소. 그래서 우리는,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 신의 이름으로, 지친 나그네를 한 지붕 밑으로 맞아들이는 당신의 친절과 호의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오."

그러나 사실 오뒤세우스는 그런 데서 친절과 호의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거인이 말했다.

"너는 신들의 아버지 어쩌고 한다만, 우리 외눈박이 퀴클롭스들은 제우스는 물론이고, 포세이돈을 제외한 다른 신들 알기를 우습게 안다. 우리가 포세이돈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 아버지이신 데다 가장 힘이 센 신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만 섬기면 뒬 뿐, 다른 신은 섬길 필요가 없다."

거인은 목젖이 떨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웅크리고 있던 뱃사람 둘을 집어 들고는 땅바닥에다 패대기 쳤다.

뱃사람들의 골수가 쏟아져 나왔다.

공포에 질린 오뒤세우스 일행의 눈앞에서 외눈박이 거인은 뱃사람들의 다리를 잡아 찢어 사자가 사냥감을 먹듯이 게걸스럽게 먹고는 양젖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런 다음에는 잠을 자려는지, 웅크리고 누운 양 떼 사이에 벌렁 드러누웠다.

거인이 잠들자마자 오뒤세우스는 칼을 뽑아 들고 거인에게 다가섰다.

그는 칼끝을 거인의 갈비뼈 사이에다 겨누었다.

갈비뼈 사이를 찌르면 칼끝은 거인의 간을 꿰뚫어 버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거인이 죽어 버리면 그 동굴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행의 힘으로는 입구를 막고 있는 바위를 치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칼을 칼집에도 꽂고 일행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 앉자 일행은 왜 죽이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을 했다.

아침이 오자 거인은 뱃사람 둘을 더 먹어 치운 다음 양젖과 염소젖을 짜고는, 어미들은 밖으로 내몰고 새끼들은 다시 입구의 우리에도 몰아 넣었다.

그리고는 그 거대한 바위를 들어 화살통 뚜껑이라도 닫는 듯이 가볍게 입구를 막고는 양떼를 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스 병사들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오뒤세우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 계획대로만 되면 적어도 몇 명은 살아나갈 수 있을 터였다.

동굴 속에는 거인이 남기고 간 지팡이가 있었다.

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푸른 기가 도는 올리브 나무 둥치로 만든 지팡이로, 흡사 배의 돛대 간아 보였다.

오뒤세우스는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이 거대한 지팡이를 사람의 키만한 높이로 자른 다음, 부하들에게 껍질 부분을 깎아서 창자루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게 했다.

오뒤세우스는 모닥불을 지펴 훨훨 타오르게 했다.

그리고는 손수 올리브 나무 지팡이를 받아 한쪽 끝을 뾰족하게 깎고는 불 속에다 집어넣어 끝부분이 딱딱해질 때까지 구웠다.

지팡이 끝이 어느 정도 딱딱해지자 끄집어내서, 동굴 벽 앞에 있는 양의 똥무더기 밑에다 감추었다.

오뒤세우스는 섬에 상륙할 때 들고 올라온 마론의 독한 포도주 한 항아리를 외눈박이 거인의 옻나무 그릇에 가득 부어 두었다.

물 한 방울 타지 않은 독하디 독한 포도주였다.

해질녘이 되자 거인이 돌아왔다. 전날 밤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다른 것이 있다면 거인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동굴 속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어미, 새끼할 것 없이 짐승을 모두 동굴 속으로 데리고 들어온 점이었다.

거인이 무시무시한 저녁 식사를 끝마치자 오뒤세우스가 노예처럼 공손하게 말했다.

"사람의 살을 드신 뒤에 입가심으로는 양젖보다 이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거인은 포도주를 받아 마시고는 맛이 있었던지 입맛을 다시고는 한 그릇 더 달라고 했다.

세 그릇을 마셨는데도 그는 더 달라고 졸랐다.

매우 기분이 좋아진 그는 그처럼 맛있는 술을 받아 마신 만큼 자기도 선물 한 가지를 주고 싶다면서 오뒤세우스에게 물었다.

"먼저 너의 이름을 가르쳐 다오. 내가 친절하게 굴자면 이름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내 이름은 <우티카>라고 합니다."

말장난을 잘 하는 오뒤세우스였다.

<우티카>라는 말은 <아무도 아닌 사람>이라는 뜻이다.

외눈박이 거인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네 동료들을 모두 먹고 난 다음에 <우티카>너를 먹겠다. 맨 나중에 먹어 주는 것, 이것이 너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다."

외눈박이는 여전히 웃으면서, 머리카락이 그을리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모닥불 가까이 다가가 벌렁 나자빠지더니 그대로 코를 골았다.

오뒤세우스는 깎아서 감추어 두었던 거인의 지팡이를 꺼내어 뾰족한 끝을 모닥불의 불길 속에 다 넣었다.

나머지 병사들(남은 병사들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은 모닥불을 둘러싼 채 기다렸다.

이윽고 거인의 지팡이 끝이 빨갛게 되자 그들은 여럿이서 이것을 들고는 있는 힘을 다해 거인의 외눈에다 찔러 넣었다.

오뒤세우스는 송곳으로 나무에 구멍이라도 뚫듯이 지팡이를 잡아 돌렸다.

거대한 눈앞에서 소리가 났다.

흡사 새빨갛게 달아오른 쇠붙이를 담금질하느라고 찬물에다 집어넣었을 때 나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거인은 외마다 소리를 내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피가 펑펑 쏟아지는 눈알에서, 그때까지도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지팡이를 뽑아낸 거인은 소리를 질러 근처의 동굴에 사는 동료 외눈박이 거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거인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은 바위가 여전히 동굴을 막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폴뤼페모스, 누가 너를 해친다는 것이냐? 대체 누가 해치길래 이렇게 소리를 질러 우리들의 단잠을 깨우는 것이냐?"

그러자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가 외쳤다.

"우티카가 나를 해치고 있다. 우티카가 속임수를 써서 나를 죽이고 있다.!"

<우티카><아무도 아닌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스 말에서 <우티카가 나를 해치고 있다>고 하면 <아무도 나를 해치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외눈박이 거인은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다,

아무도 속임수를 써서 나를 죽이고 있지 않다>고 대답한 셈이다.

바깥에 있던 거인 중 하나가 소리쳤다.

"아무도 너를 해치고 있지 않다면 너를 도와줄 필요도 없겠구나. 어디가 아프거든 우리 아버지 포세이돈께 기도해라. 그러면 도와주실 게다."

외눈박이 거인들의 투덜대는 소리가 동굴 입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장님이 되어 버린 외눈박이 거인은 고통으로 울부짖으면서,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동굴 입구로 다가가 바위 문을 한쪽으로 치웠다.

상처가 너무 아팠던 나머지 시원한 밤바람이라도 좀 쐬면 나을까 해서였다. 그는 동굴 입구에 주저앉아 두 팔을 벌려 동굴 입구를 막았다.

오뒤세우스 일행이 동굴에서 도망이라도 치다가 그 팔에 걸리면 다시 사로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뒤세우스에게는 그럴 경우에 대비해서 새워둔 계획이 있었다.

동굴의 가장 후미진 곳에서 그는 가장 큰 숫양들을 골라냈다.

그는 외눈박이 거인의 침대에서 축 늘어져 있는 실버들 가지를 끊어내 숫양을 세 마리씩 붙잡아 매고는 맨 가운데 양의 배에다 뱃사람을 하나씩 동여매었다.

그는 숫양 중에서도 가장 크고 힘센 숫양을 골라 이번에는 자신이 그 배에 딱 붙어 부얼부얼한 양털을 두 손으로 힘있게 움켜잡았다.

새벽이 희붐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양 떼와 염소 떼는 일제히, 외눈박이 거인이 두 팔을 벌려 막고 서 있는 입구 달려나갔다.

거인은 양과 염소가 나갈 때마다 한 마리씩 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오뒤세우스 일행이 양의 배 밑에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오뒤세우스를 배에다 매단, 무리 중에서도 가장 크고 힘센 양이 지나가자 거인은 그 양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하소연했다.

"내 사랑하는 집승아, 무리 중에서도 가장 늠름한고 아름다운 녀석아, 여느 때는 맨 먼저 나오더니 왜 오늘은 왜 맨 마지막으로 나오느냐? 너의 주인은 <우티카>라는 놈의 손에 장님이 되어 더 이상 너의 그 늠름한 자태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 이 주인의 불행이 너의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바람에 이렇게 늦게 나오는 것이야?"

오뒤세우스 일행이 마침내 동굴 밖으로 나왔다.

양우리를 지나 편편한 풀밭에 이르자 오뒤세우스는 양의 배 밑에 묶여 있던 부하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일행은 양 떼를 바닷가에 정박해 있는 배 쪽으로 몰았다.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는 소리를 지르면서 두 팔을 내저었다.

배에 남아 있던 선원들은 일행이 풀려난 것을 보고는 좋아했지만 곧 여섯 명이나 되는 동료들이 거인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오뒤세우스는 몰고 온 양 떼를 모두 배에다 싣게 하고는, 다른 배들을 기다리고 있는 작은 섬을 향하여 닻을 올리라고 명령했다.

오뒤세우스는 절벽 위에서 비틀거리며 서 있는 외눈박이 거인을 놀려 주려고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입가에다 대고는 양 울음소리를 흉내 내었다.

그것은 오뒤세우스의 실수였다.

그 소리를 듣고 화가 머리 끝가지 난 거인은 절벽 위의 바위를 들어 배가 있는 쪽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바위 중 하나가 배 바로 앞에 떨어졌다.

거대한 파도가 일면서 배가 섬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오뒤세우스는 긴 삿대로 바위를 떠밀었고 부하들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 배를 다시 난바다 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오뒤세우스는 동굴에서 당한 일이 뼈에 사무쳐 외눈박이 거인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누가 너를 장님으로 만들었느냐고 묻거든 오뒤세우스가 그랬다고 전하라. 라에르테스의 아들인 이타카의 왕 오뒤세우스, 무수한 도시의 약탈자 오뒤세우스가 그랬다고 전하라!"

그러자 외눈박이 거인은 두 팔을 벌리고, 분노와 고통을 참지 못해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기도했다.

"들으소서, 머리카락이 푸른 포세이돈 신이시여. 여기에 있는 제가 정말 아버지 포세이돈 신의 아들이거든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무수한 도시의 약탈자 오뒤세우스가 제 고향에 닿더라도 마지막에, 그것도 홀로 닫게 하소서. 그 자가 남의 나라 배에서 고향땅에 내리는 날, 모진 고초가 그를 기다리고 있게 하소서."

기도를 마친 거인은 조금 전 보다 훨씬 큰 바위를 들어 오뒤세우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겨냥하고 힘껏 던졌다.

하지만 바위는 배 있는 곳에 미치지 못했다.

바위가 떨어지면서 일으킨 파도가 배를 휠씬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게 했을 뿐이었다.

배는 다른 배들이 기다리는 작은 섬 쪽으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3. 바람의 신

 

오뒤세우스 일행이 다음으로 상륙한 곳은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섬이었다.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는 높이 솟은 바위산 꼭대기의 우뚝 선 눈부신 청동 궁전에서 씩씩한 아들 여섯 형제, 아름다운 딸 여섯 자매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이올로스의 아들딸들은 남매끼리 혼인하는 이집트 왕실의 풍습에 따라 다섯 쌍의 부부가 되어 살고 있었다.

아이올로스는 오뒤세우스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만 한달 동안이나 궁전에 머물게 해 주었다.

오뒤세우스는 아이올로스에게 트로이아 성을 포위하고 있을 당시의 이야기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그 때까지 겪은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이윽고 오뒤세우스는 일행이 다시 바다로 나갈 날이 오자 아이올로스는 항해에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모두 마련해 주었다.

그는 특별히 오뒤세우스에게는 황소 한 마리의 통가죽으로 만든 가죽 하나를 주었다.

오뒤세우스 일행을 무사히 고향으로 실어가 줄 서풍만 빼고, 세상의 바람이라는 바람은 다 잡아 가둔 가죽 부대였다.

서풍을 잡아 가두지 않은 것은 그 바람이 있어야 오뒤세우스 일행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오뒤세우스는 은으로 꼰 실로 가죽 부대의 주둥이를 꼭 잡아 묶고는 노잡이들이 앉는 긴 걸상 밑에다 숨겨 두었다.

아이올로스는 오뒤세우스에게, 고향의 항구에 다다르기 전에는 절대로 그 가죽 부대를 열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다짐을 주었다.

오뒤세우스 일행을 태운 배는 아흐레 밤 아흐레 낮을 항해했지만 노는 한 번도 저을 필요가 없었다.

서풍이 부드럽게 돛을 부풀려 주었기 때문이다.

항해가 계속될 동안 오뒤세우스는 손수 방향타를 잡고 배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였다.

그는 방향타 잡은 자리를 어떤 부하에게도 양보하지 않았다.

열흘째 되는 날, 드디어 일행의 눈에 고향 이타카 섬이 보였다.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오뒤세우스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눈에 익은 고향의 산을 바라보는 순간 그 동안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드디어 항해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 그를 곯아떨어지게 만든 것이다.

오뒤세우스가 잠들어 있는 동안, 항해하면서 내내 황소 통가죽 부대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해 하던 뱃사람들이 저희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 선장이 아이올레스로부터 받은 선물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꽁꽁 숨겨 둔 거지."

"선장이 그렇게 꽁꽁 숨기고 밤낮 감시하는 걸 보면 틀림없이 금과 은이 가득 들어 있을 거야. 그게 금과 은이라면 우리도 한몫 나누어 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도 선장과 함께 항해해 왔고, 고생도 선장 못지않게 했으니까."

이런 말이 오고 갈 즈음 배는 고향 해변에 거의 다 다가와 있었다.

해변의 바위 사이에서 사람들이 피우고 있는 모닥불이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뱃사람들은 노잡이들이 앉는 긴 걸상 밑에서 통가죽 부대를 꺼내어 은줄을 풀었다.

그러자 쉭쉭거리는 소리, 우르르 쾅쾅거리는 소리, 배폭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통가죽 부대 속에 갇혀 있던 세상의 바람이라는 바람은 모두 일제히 부대에서 빠져 나왔다.

바람은 바다와 하늘 사이의 공간을가득 채우고 회오리를 일으키면서 열두 척의 배 위로 솟아올랐다.

그 바람은 고향에 거의 다 도착한 열두 척의 배를 산산히 흩어지게 하여 낯선 바다로 보내 버렸다.

오뒤세우스는 뱃사람들의 비명소리, 무서운 바람소리에 잠을 깨고 나서야 일이 그렇게 된것을 알았다.

절망에 빠진 오뒤세우스는 뱃전에서 폭풍의 바다로 뛰어내려 험하디 험한 삶과 방황의 뱃길을 거기에서 끝마치고 싶어질 지경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그가 돌보아 주어야 할 뱃사람들이 있었다.

오뒤세우스는 그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뱃사람들을 지휘해서 폭풍에 부서진 배를 몰았다.

지옥 같은 물보라 속을 여러 날 항해한 끝에 그들은 다시 아이올로스 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돌아온 것을 보면 신들이 그대들을 미워하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신들의 미움을 산 자들에게 내 집을 빌려 줄 수 없고 내 친절을 베풀 수 없다. 떠나라, 떠나되 다시는 뱃길로 내 해변에 이를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아이올로스는 그들을 쫓았다.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섬에서 쫓겨난 뒤로는 돛폭을 부풀려 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배는 노를 젓지 않으면 한 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느린 속도로 항해하자니 다른 육지 섬을 찾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밤이 되어도 오를 만한 섬이 없었다.

그들은 낮이고 밤이고 교대로 노를 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레째 되는 날에야 섬이 눈에 띄었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그 섬으로 배를 몰아갔다.

입구 양쪽이 절벽으로 가려진 아주 안전한 항구가 나타났다.

오뒤세우스는 부하들에게 배를 항구 안으로 몰고 들어가 안전한 곳에다 닻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지휘하던 배만은 난 바다에 그냥 남아 있게 했다.

그가 지휘하던 배의 뱃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바람부대를 연 뱃사람들이었다.

그는 그 부하들이 또 무슨 말썽을 저지를까 두려웠던 것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자기가 지휘하던 있던 배를 항구 어귀의 높은 바위기둥에 단단히 묶어 두게 했다.

그리고는 그 배의 뱃사람들을 지휘하면서 항구 밖에 머물렀다.

오뒤세우스로서는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그 섬에는 밤이 어찌나 짧은지 마지막 햇살이 서쪽 하늘로 사라지자마자 벌써 먼동이 터 올랐다. 해가 뜨기 직전에 오뒤세우스는 항구 어귀에 있던 배의 뱃사람 셋을 보내어 그 섬이 어떤 섬인지 엿보게 했다.

뭍으로 오른 세 염탐꾼의 눈에 오래지 않아 마을 입구가 보였다.

동구 밖에는 나무 그늘에 가려진 샘이 있었다.

그 샘에는 머리카락이 길고 어깨가 넓은 처녀가 물을 긷고 있었다.

세 염탐꾼은 그 처녀에게, 그 섬나라 왕은 누구이며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처녀는 웃으면서 농담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여러분이 찾는 분은 우리 아버지예요. 나를 따라오세요. 금방 아버지 계신 곳으로 안내할 테니까."

세 염탐꾼은 처녀의 뒤를 따라갔다.

마을 한가운데엔 멋대가리 없이 큰 궁전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섬나라 왕이 세 염탐꾼에게 베푼 친절은, 저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가 한 대접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섬나라 왕은 세 염탐꾼은 보자마자 그 중의 하나를 붙잡아 궁전 기둥에다 패대기를 쳤다.

뱃사람은 머리가 부서지면서 곧 숨을 거두었다.

왕은 그 뱃사람의 시체를 저녁거리로 삼겠다고 말했다.

나머지 두 뱃사람은 가까스로 궁전을 빠져나와 배가 있는 곳으로 죽어라고 내달았다.

섬나라의 괴물 왕은 큰 소리로 부하들을 불렀다. 곧 부하들이 달려왔다.

여느 사람들이라기보다 거인들에 가까웠다.

왕의 명령에 따라 절벽 위에 이른 거인들은 좁은 항구 어귀에 정박에 있는 배를 향하여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던지기 시작했다.

왕의 궁전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쳐 온 두 선원은 절벽 위에서 뛰어내려, 항구 어귀에 정박해 있는 배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배에 오르는 부하들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던 오뒤세우스는 그제서야 자기네 함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깨달았다.

그의 귀에는 부하들의 외마디 비명 소리, 떨어져 내리는 바윗덩어리에 배가 부서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로서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칼을 뽑아, 기둥에다 배를 묶어 두고 있는 밧줄을 자르면서 다른 배에 탄 부하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고함을 질렀다.

"노를 저어라. 모든 신들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노를 저어라. 살고 싶으면 노를 저어라!"

머리 위에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모를 노잡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 사람이 된 양, 힘을 합하여 노를 저었다.

그러자 배는 가죽끈에서 풀려난 사냥개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는 항구를 뒤로하고 난바다로 미끄러져 나갔다.

노를 저으면서 그들은 죽음의 항구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기뻐할 사이도 없이, 그 항구에서 죽음을 당한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오뒤세우스는 저 푸른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바다 위 신 포세이돈이, 장님이 되어 버린 아들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의 기도를 들어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열두 척의 배 중에서 이제 남은 것은 오뒤세우스 자신이 타고 있는 배, 단 한 척뿐이었다.

 

 

4. 마녀 키르케의 섬

 

오뒤세우스 일행은 항해를 계속하여 또 한 섬에 이르렀다.

오뒤세우스는 여기에서도, 파도가 덜 밀려드는 조용한 해변에다 배를 대게 했다.

이틀 밤낮 동안 오뒤세우스와 뱃사람들은 하는 일없이 가까운 해변에서 쉬었다.

무서운 모험과 험한 뱃길에 지친 나머지 도무지 다른 일을 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오뒤세우스는 칼과 창을 챙겨들고 혼자 산을 올랐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니 섬 전체는 숲으로 덮여 있었다.

섬을 덮고 있는 무수한 나무가 흡사 검은 양털 같았다.

바다는 사방에서, 섬을 둘러싸고 있는 해변을 핥고 있었다.

논밭이나 사람이 살 만한 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섬의 한가운데, 숲이 가장 짙은 곳에서 실오라기 같은 붉은 연기 한 자락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오뒤세우스는 금방이라도 달려가서 그 연기의 정체를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섬에서 겪어온 무서운 일들이 생각나서 선뜻 그렇게 하기가 망설여졌다.

아무래도 배로 돌아가 뱃사람들을 잘 먹인 뒤에 정찰대를 뽑아 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오뒤세우스는 온 길을 되짚어갔다. 해변에 이르렀을 때였다.

붉은 사슴 한 마리가 덩굴 밑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사슴 한 마리면, 오랫동안 고생을 참아온 뱃사람들을 잘 먹일 수 있을 터였다.

그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는 사슴을 향해 창을 던졌다. 명중이었다.

그는 사슴의 네 다리를 덩굴로 묶어 어깨 위에 둘러메고는 창을 지팡이 삼아 짚으면서 배로 돌아왔다.

오뒤세우스가 돌아왔을 때까지도 뱃사람들은 배 주위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다.

여전히 피로가 풀리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는 사슴을 부하들 있는 쪽으로 던지면서 외쳤다.

"힘을 내자.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 우리 옆에 먹을 것 마실 것이 있는데 굶어 죽는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은 불을 피웠다.

그날 저녁 그들은 사슴 고기로 배를 채우고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오뒤세우스는 일행을 두 편으로 갈라 한 편은 자신이 지휘하고 다른 한 편의 지휘권은 먼 친척인 에우륄로코스에게 맡겼다.

그리고는 나무 조각 두 개 중 하나에다 표를 한 다음 투구 속에 넣고 흔들었다가 제비를 뽑았다.

연기의 정체를 밝히러 나갈 정찰대를 뽑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에우륄로코스 편이 정찰대로 뽑혔다.

에우륄로코스는 스물 두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배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에우륄로코스는 저물녘에야 돌아왔다. 뜻밖에도 혼자 돌아온 것이었다.

혼자 돌아온 에우륄로코스는 부들부들 떨면서 훌쩍훌쩍 울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자기가 당한 무서운 일이 자꾸만 생각나서 그랬던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그는 마음의 고요를 되찾고 그동안 정찰대가 당한 일을 얘기했다.

"숲 한가운데에는 아름다운 돌집이 있었습니다. 길이 잘 든 이리와 사자가 고삐 풀린 채 집 주위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까이 가자, 이리와 사자 무리는 사냥개처럼 재롱을 피우는가 하면 우리 어깨 위로 오르면서 얼굴을 핥기도 했습니다. 한 여자가 집 앞 베란다에 놓인 베틀 앞에 앉아 있더군요. 여자는 아주 가는 실로 베를 짜면서 부드럽고 달콤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 중 하나가 그 여자를 불렀습니다. 여자는 베틀에서 일어났습니다. 짙은 색깔 옷을 입은,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머리와 팔뚝에는 금으로 만든 장식품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여자는 대문을 열고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모두 들어갔습니다. 저는 혹시 함정이 아닐까 해서 바깥에 숨은 채로 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고 있으려니까, 여자와 하녀들이 우리 뱃사람들을 긴 걸상에 나란히 앉히고는 포도주를 꺼내어 아주 친절하게 따라 주더군요. 그런데 우리 뱃사람들이 포도주를 마시자, 여자는 구부정한 나무 막대기를 하나 꺼내더니 우리 뱃사람들 머리에다 차례로 대는 것입니다. 여자가 막대기를 머리에다 대는 순간, 뱃사람들 몸에서 뻣뻣한 털이 돋고 주둥이가 툭 튀어나오지 뭡니까. 그뿐인 줄 아십니까? 앉아 있던 뱃사람들이 두 팔과 두 발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리더군요. 더 이상은 사람이 아니었지요. 돼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돼지가 되어 버린 뱃사람들은 여자를 둘러싸고 꿀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웃으면서 돼지들을 바깥으로 몰아냅디다. 돼지들은 숨어 있는 제 옆을 지나 돼지우리로 들어갔고요. 여자는, '너희들이 있어야 할 곳은 돼지우리다.' 하더군요. 더러운 돼지우리에서 저의 동료 뱃사람들은 사람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울고요."

이야기를 다 들은 오뒤세우스는 칼이 매달린 가죽 허리띠를 차고 활을 들고는 에우륄로코스에게 마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했다.

그러나 에우륄로코스는 무릎을 꿇고 다시 울음을 터뜨리면서 애원했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장군. 저는 그곳으로 다시 갈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도 가지 마십시오. 이제 그들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다시 사람으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뒤세우스는 에우륄로코스를 다른 부하들 있는 곳에 남겨두고 혼자 숲을 찾아 들어갔다.

숲속에서 그는 신들의 심부름꾼인 헤르메스 신을 만났다.

잘생긴 청년 모습을 한, 신들의 심부름꾼인 헤르메스 신은 오뒤세우스의 팔을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마녀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둔갑한 부하들을 구하러 혼자 숲으로 들어온 모양이군. 하지만 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대 역시 돼지가 되고 말아.”

그는 발치에 있던 풀 한 포기를 뽑아 오뒤세우스에게 건네주었다.

꽃은 우유처럼 희고 뿌리는 밤의 어둠처럼 새까만 풀이었다.

인간의 눈에는 띄지도 않고, 따라서 인간은 도저히 뽑을 수 없는 풀이었다.

헤르메스 신은 그 풀을 오뒤세우스에게 주면서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이 약초를 받아 가지고 가거라.

그러면 마녀 키르케가 만들어 주는 마법의 포도주도 그대의 모습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키르케가 가지고 있는 마법의 막대기도 그대를 해코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에 키르케가 마법의 막대기로 그대를 건드리거든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어 금방이라도 찌를 듯이 위협하라.

그러면 키르케는 겁을 먹고 그대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키르케가 겁을 먹고 그대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 마법에 걸리지 않은 인간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키르케는 그대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빌 것이다.

그대는 키르케가 원하는 것을 베풀어 주라. 하지만 그 전에 다짐을 받아야 한다.

먼저 돼지가 되어버린 부하들의 모습을 사람으로 되돌리고 그대와 그대의 동료들에게 다시는 그같이 못된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헤르메스 신은 이 말을 남기고는 환하게 빛나는 길을 따라 신들의 궁전이 있는 올림포스로 날아가 버렸다.

오뒤세우스는 옷의 앞섶을 열어 그 안에 풀을 넣고는 옷깃을 여몄다.

풀의 싸늘한 감촉이 살갗에 느껴졌다.

이윽고 오뒤세우스는 키르케의 집 앞에 이르러, 베틀 앞에 앉아 부르는 키르케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가 현관 앞으로 접근하면서 키르케를 불렀다.

길이 잘든 이리와 사자 무리가 다가와 그의 뺨을 핥기 시작했다.

키르케가 나오더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가 들어가자 키르케는 은으로 장식된, 발 받침대가 있는 의자를 권하고는 포도주에다 치즈와 보릿가루와 꿀을 타고는, 손바닥으로 감추고 있던 유리병에서 뭔가를 꺼내 포도주에다 떨어뜨렸다.

"드세요. 제 집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오뒤세우스는 옷섶에 감춘, 꽃이 하얀 풀을 믿고는 그 마실 거리를 단숨에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키르케는 예의 그 가느다란 막대기를 꺼내어 오뒤세우스의 머리를 건드리고 나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도 어서, 바깥에 있는 돼지우리로 가거라."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돼지가 되어 돼지우리로 가기는커녕 칼을 빼 들고 키르케에게 달려들었다.

키르케는 비명을 지르면서 칼날을 피해 오뒤세우스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는 소리쳤다.

"내 마법이 듣지 않다니, 당신은 누구신가요? 오뒤세우스가 분명하지요. 언젠가 헤르메스신께서는 오뒤세우스라는 사람이 트로이아에서 뱃길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섬에 들를 거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빕니다. 서로 마음을 열어, 서로 믿고 친구가 될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오뒤세우스는 여전히 칼을 움켜쥔 채로 키르케를 내려다보면서 명령했다.

"먼저 나와 내 부하들에게 해코지하는 않겠다고 신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라."

키르케는 맹세했다. 오뒤세우스는 그제서야 칼을 칼집에 꽃아넣었다.

키르케의 네 하녀가 나왔다.

봄과 나무의 여신의 딸인 네 하녀는 은식탁 앞 의자에다 보라색 깔개를 깔고 은식탁 위에 음식을 차린 다음 은술잔에 포도주를 가득가득 따랐다.

그런 다음에는 물을 데워 오뒤세우스 몸을 씻겼다.

오뒤세우는 따뜻한 물에 머리와 어깨를 담근 채 쌓이고 쌓인 피로를 풀었다.

목욕이 끝나자 하녀들은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는 식탁 앞으로 안내하여 우선 먹고 마실 것을 권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이제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대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요."

오뒤세우스가 키르케의 말을 받았다.

"내 부하들은 어쩌고요? 그대 때문에 내 부하들은 돼지가 되어 돼지우리에 잡혀 있는데 어떻게 나 혼자서 먹고 마실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키르케가 바깥의 돼지우리로 나갔다.

키르케는 돼지우리 문을 열고 들어가 돼지들을 앞으로 불러모으고는 그 가느다란 막대기로 돼지의 머리를 하나씩 차례로 건드렸다.

그러자 돼지는, 돼지로 변하기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으로 되돌아왔다.

사람의 모습을 되찾은 뱃사람들은 선장인 오뒤세우스 장군에게 몰려와 어깨동무를 한 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오뒤세우스는 키르케의 양해를 얻어 배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 안전한 해변가에 배를 끌어다 붙이고 무기는 모두 모아 가까운 동굴에 숨기기로 했다.

그의 부하들에게는 얼마간의 휴식이 필요했다.

다시 뱃길로 나서자면 보급품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당분간 키르케의 섬에 머물기로 하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배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 남아 있는 나머지 부하들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한동안 잘 먹고 잘 자면서 휴식을 취하라고 하더라는 키르케의 말을 전했다.

에우륄코스를 제외한 다른 부하들은 모두 키르케의 제안을 반가워하면서 금방이라도 배를 해변으로 끌어다 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에우륄로코스는 여전히 악몽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키르케의 집으로 되돌아갈 것이 아니라 한시바삐 난바다로 배를 내몰아 마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자고 애원했다.

오뒤세우스는 금방이라도 에우륄로코스를 베어 버릴 듯이 칼을 뽑아 들었다.

비록 가까운 친구, 먼 친척이라고는 하나 그대로 두면 에우뤼로코스의 공포가 다른 뱃사람들에게까지 퍼져 나갈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뱃사람들은 에우뤼로코스만 남겨두어 자기네들이 키르케의 집에서 배불리 먹을 동안 배를 지키게 하자고 졸랐다.

오뒤세우스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러나 일행이 에우륄로코스를 남겨두고 키르케의 집을 향해 한참 걸었을 때 뜻밖에도 에우륄로코스가 따라왔다.

동료들과 함께 마녀의 집으로 가는 것보다는 혼자 남아 배를 지키는 것이 훨씬 무섭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일행이 모두 함께 키르케의 집으로 갔다. 잔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5. 죽은 자들의 나라

 

일행은 배불리 먹고는 늘어지게 자고, 또 배불리 먹고는 늘어지게 자기만 했다.

세월은 자꾸만 흘러갔다.

뱃사람들은 물론, 오뒤세우스 자신도 몇 날 며칠이 흘러갔는지 알지 못했다.

키르케가 살고 있는 마법의 섬에서는 시간이 여느 세계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자그마치 일 년이었다.

뱃사람들이 섬으로 올라올 때 꽃잎을 활짝 열고 있던 꽃들이 졌다가 다시 피었을 즈음, 부하 중 한 사람이 오뒤세우스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했다.

" 장군, 우리가 어차피 이 성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고향 이타가를 생각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그 날 밤. 부하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동안 오뒤세우스는 혼자 잠자리에서 일어나 키르케를 찾아갔다.

빗으로 긴 머리카락을 빗고 있던 키르케는 오뒤세우스의 말을 듣고는 이렇게 응수했다.

"가고 싶으시다면 가셔야지요. 하지만 고향에 이르기까지 장군은 머나먼 뱃길에서 여러가지 어려운 일을 겪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시기 전에 먼저 뱃길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셔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알고 있소?"

오뒤세우스가 물었다. 키르케는 여전히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서 대답했다.

"먼저, 죽은 사람들의 나라, 저승 왕 하데스 신과 그 아내 페르세포네가 다스리는 나라로 가셔야 합니다. 거기에서 테바이 출신인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을 만나셔야 합니다. 테이레시아스만이 장군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뒤세우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니,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죽은 자들의 나라로 갔다가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키르케는 어느 쪽으로 어떻게 가고, 어떻게 해야 그 땅에 이를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키르케는 제사에 쓰일 검은 숫양 한 마리와 암양 한 마리까지 오뒤세우스에게 주었다.

다음 날 오뒤세우스는 부하들을 불러모아. 해변으로 끌어올려 두었던 배를 다시 바다에 띄게 했다.

한 사람만 빼고 뱃사람들 모두가 해변으로 나와 배를 띄우는 일을 했다.

이 일에서 빠진 뱃사람은 나이가 가장 어린 엘페노르였다.

전날 술에 취해 있던 엘페노르는 오뒤세우스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만 해도 배의 갑판 위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출항 명령이 떨어지면서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엘페노르는 잠결에 갑판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목이 부러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머지 뱃사람들은 고향인 섬나라 이타카로 향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뒤세우스로부터, 고향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다녀와야 할 무서운 곳이 있다는 말을 듣지 그들은 배에서 뛰어 내려 울부짖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슬픔에 잠긴 채 배를 얕은 물에다 띄우고는 동굴 속에 숨겨 두었던 무기와 키르케로부터 받은 숫양과 암양도 배에다 실었다.

이윽고 오뒤세우스의 배는 돛을 올렸다.

키르케가 보낸 바람이 오뒤세우스 일행이 탄 배의 돛을 부풀렸다.

몇 날 며칠 내내 배는 환한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지구를 둘러싸고 흐르는 깊고 깊은 강 오케아노스로 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영원히 안개 속에 감겨 있는 나라, 햇빛은 볼 수도 없는 나라. 페르세포네의 나무인 백양나무와 버드나무에 덮인 음산한 나라가 나타났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해변에다 배를 대고는 오케아노스의 강변을 따라 저승의 두 강이 서로 만나는 곳까지 걸어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구덩이를 하나 파고, 키르케가 준 꿀과 우유와 포도주를 붓고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향해 기도했다.

이어서 오뒤세우스는 키르케가 시킨 대로 숫양과 암양을 죽여 제물로 바치고는 그 피를 구덩이에 쏟아부었다.

곧 창백한 혼령들이 몰려와 그 피를 마시려고 했다.

오래 전에 죽은 앳된 새색시들의 혼령도 있었고 젊은이들의 혼령도 있었다.

고생고생하다 죽은 노인의 혼령도 있었고,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의 혼령도 있었다.

그림자 창을 손에 든 병사들 혼령의 몸에는 싸움터에서 얻은 상처가 그 당시와 똑같은 모양으로 나 있었다.

오뒤세우스는 두려움을 참고 부하들에게 양고기를 썰어 덩어리를 만들고 이것을 불살라 저승 왕 하데스 신과 페르세포네에게 바치게 했다.

부하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을 동안 오뒤세우스는 칼을 빼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구덩이를 지켰다.

테이레시아스가 오기 전에는 어떤 혼령도 구덩이의 피를 맛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제일 먼저 온 혼령은 젊은 뱃사람 엘페노르였다.

엘페노르는 자기 시체를 불에 태워 주지 않으면 다른 혼령들과 섞을 수 없다면서 오뒤세우스에게 한시바삐 자기의 시체를 불에 태워 달라고 애원했다.

오뒤세우스는 키르케의 섬에 도착하는 대로 시체를 불태워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어서 오뒤세우스 자신의 어머니 혼령이 다가왔다.

오뒤세우스의 어머니는 아들이 트로이아의 싸움터에 있을 동안 세상을 떠났던 것이었다.

오뒤세우스는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혼령도 핏구덩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내 눈먼 예언자의 혼령이 나타나 오뒤세우스에게 제물의 피를 마시게 해달라고 말했다.

오뒤세우스는 그제서야 칼을 칼집에다 꽂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피를 마시고 힘을 차린 테이레시아스는 우렁찬 예언자의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아직까지도 그대에게 화가 나 있다. 이는 그대가 포세이돈 신의 아들을 장님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의 뱃길은 아주 험난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와 그대 부하들은 무사히 고향의 해변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내 말을 잘 들어라. 항해하는 도중에 그대들은 트리나키아 섬에 이르게 된다. 이 섬에는 넓고 기름진 풀밭에서 풀을 뜯는 태양의 신 휘페리온의 소 떼가 있을 것이다. 그 소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고향으로 가는 뱃길이 순탄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뱃사람들은 재난을 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대만은 재난을 피해 남의 나라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집에는 무서운 불화와 슬픔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거만한 인간들이 그대의 집에서 그대의 양식을 축내면서 그대의 아내에게 결혼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대의 아내 페넬로페는 그대가 죽은 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신들의 뜻이라면 어쩌겠습니까?"

오뒤세우스의 말이었다.

오뒤세우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어떻게 하면 어머니의 혼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가 대답했다.

핏구덩이로 와서 피 맛을 보게 하라. 그러면 원하는 혼령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예언자의 혼령은 곧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어서 오뒤세우스의 어머니 혼령이 다가왔다.

오뒤세우스는 그제서야 어머니의 혼령에게 구덩이의 피를 맛보게 해주었다.

오뒤세우스와 어머니 혼령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의 혼령은 아들에게 죽은 자들의 땅으로 온 까닭을 물은 다음, 자기는 아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자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죽은 자들의 땅으로 왔노라고 말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뒤세우스는 두 팔을 내밀어 세 차례나 어머니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혼령은 흡사 그림자처럼, 꿈속에서 만나는 사람처럼 번번이 오뒤세우스에게서 빠져나가 버리고는 했다.

오래지 않아 어머니의 혼령이 있던 자리에는 빈 공간만 남게 되었다.

어머니 혼령이 떠난 것이었다.

다른 혼령들이 차례로 다가왔다.

그 중에는 검은 함대를 몰고 트로이아로 진격했던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혼령도 들어 있었다.

아가멤논의 혼령은 피를 맛보고는 자기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 죽은 자들의 나라에 와 있는지 설명해 주었다.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아내의 애인 손에 죽었다고 했다.

아가멤논 일행은 환영잔치인 줄 알고 그 자리에 나갔다가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던 것이었다.

아가멤논이 자리를 떠나자, 아이아스의 혼령이 왔고, 이어서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한 장군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장군 아킬레우스의 혼령이 왔다.

아킬레우스는, 태양이 비치지 않아 창백한 아스포델로스를 제외하면 어떤 꽃도 피지 못하는 그 슬프고도 음산한 죽은 자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산 사람들 세상의 가난한 농부의 노예가 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그 말끝에 아킬레우스는 산 사람들 나라에 사는 친구들과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오뒤세우스는 알고 있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아킬레우스는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음산한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오뒤세우스와 부하들의 눈앞으로 무수한 혼령들이 지나갔다.

왕을 상징하는 황금빛 지팡이를 든 미노스 왕도 지나갔다.

사냥꾼 오리온도 생전에 자기 손으로 죽인 짐승들의 혼령과 함께 음습한 아스포델로스 벌판을 헤매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갈증의 고통에 시달리는 탄탈로스의 혼령도 그들 앞에 나타났다.

탄탈로스는 턱까지 차 오르는 흙탕물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늘 갈증에 시달렸다.

그가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면 물이 발치 아래로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웅덩이 위로 늘어진 배나 석류를 따려고 손을 내밀 때면 바람이 불어와 가지를 흔들어 구름 높이까지 거두어 가 버리기도 했다.

시쉬포스의 혼령도 보였다.

시쉬포스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진흙이 구름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시쉬포스는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을 참으면서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 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시쉬포스가 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순간 바위는 다시 산기슭으로 굴러 내려와 버리고는 했다. 시쉬포스는 그 싸움을 영원히 되풀이해야 했다.

혼령의 무리가 점점 늘어나면서 그들이 지르는 비명소리, 신음소리로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죽은 사람의 혼령이라는 혼령은 다 몰려드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산 사람들 가슴에 깃드는 공포도 그만큼 견디기 어려워져 갔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죽은 자들의 나라를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백양나무 숲을 향했다.

백양나무 숲은 그들이 들어섰던 죽은 자들의 나라로 들어온 문이었다.

그들은 닻을 올리고, 그 슬픈 해변으로부터 배를 몰고 나왔다.

어둠의 나라에서 햇빛의 나라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서풍을 이용해서 키르케의 섬으로 되돌아왔다.

 

 

6. 목숨을 건 항해

 

마녀 키르케의 섬으로 돌아와 오뒤세우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엘페노르의 시체를 태우고 무덤을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오뒤세우스는 무덤 위에다 평소에 엘페노르가 젓던 노를 꽂아 무덤의 표지로 삼았다.

이어서 성대한 잔치가 베풀어졌다.

그 날 밤, 오뒤세우스 일행이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 키르케는 오뒤세우스에게 뱃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장애물을 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키르케가 말한 장애물이란 바로 사이렌, 떠다니는 바위산, 그리고 스퀼라와 카립디스였다.

오뒤세우스는 키르케의 말을 귀담아듣고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마음에 새겼다.

새벽이 되자 오뒤세우스 일행은 키르케와 이별했다.

키르케는 해변을 서성거리다 숲속으로 들어갔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배에 올라 다시 한번 미지의 난 바다로 나갔다.

처음에는 마녀 키르케가 마지막으로 준 선물인 순풍 덕분에 쉽게 항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다 한가운데 이르자 그 순풍이 멎었다.

순풍이 멎은 뒤부터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그 고요한 바다 위로 꽃이 만발한 풀밭 같은 섬 하나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 때, 그 섬에서 들릴락말락한 여자들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노래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흡사 듣는 사람들을 명주실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뒤세우스는 키르케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노랫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풀밭의 꽃들 사이에 앉아 지나가는 뱃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사이렌 무리였다.

언뜻 보면 사이렌 무리가 노래를 부르는 곳은 꽃밭이지만 그 풀밭의 꽃과 키 큰 풀 사이에는, 그 노랫소리에 홀려 목숨을 잃은 뱃사람들의 뼈가 널려 있었다.

사이렌의 노래는 지나가는 뱃사람들의 혼을 빼는 노래인 것이었다.

바람이 자고 있어서 뱃사람들은 노를 저어야 했는데 오뒤세우스는 문득 노 젓는 손길을 멈추라고 명령했다.

그는 키르케에게서 받은 커다란 밀랍 한 덩어리를 꺼내어 이것을 잘게 잘라 뱃사람들에게 주고는 모두들 그것으로 귀를 막게 했다.

그래야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뒤세우스 자신은 저 사이렌 무리의 노래를 듣고 싶다는 유혹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자기 몸을 아주 굵은 밧줄로 돛대에다 묶게 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자기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아무리 호령하더라도, 사이렌의 섬을 다 지나기 전에는 절대로 풀어 주어서는 안 된다고 단단하게 일러두었다.

부하들은 오뒤세우스의 명령대로 그의 몸을 돛대에 꽁꽁 묶고는 노 젓는 자리로 돌아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배가 섬 옆을 지나고 있을 때 뱃사람들 눈에는 아름다운 처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뒤세우스의 귀에는 모래톱에 부딪쳐 찰랑거리는 물소리 너머로 그들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오뒤세우스여,

그대 그리스 연합군의 꽃이여. 가까이 오세요.

그대의 지친 배를 쉬게 하고 우리의 노래를 들으세요.

우리들 노랫소리는 벌집 속의 꿀만큼이나 달답니다.

우리는 세상일을 다 알고 있지요.

트로이아 전쟁 전에 있었던 일도 알고,

장차 탐스러운 이 땅에서 일어날 일도 다 알고 있답니다.

오뒤세우스의 가슴속에서는 사이렌 무리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다는 욕망이 불길처럼 일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어서 빨리 풀어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뱃사람들은 밀랍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뱃사람들은 죽으라고 노만 저었다. 배는 빠른 속도로 섬을 지났다.

섬이 배의 고물 뒤로 사라지면서 사이렌 무리의 노랫소리도 잦아들었다.

그제서야 뱃사람들은 귀에서 밀랍덩어리를 뽑아내고 선장인 오뒤세우스를 돛대에서 풀어 주었다.

오뒤세우스는 사이렌 무리가 그리웠던지, 온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울었다.

이로써 키르케가 말한 바다에서의 첫 번째 재난은 피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두 번째 재난이 닥쳤다.

하늘로 치솟는 물보라 속에서 꼭대기가 구름에 닿을 듯한 거대한 검은 바위산 두 개가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다.

두 개의 바위산 사이로 산골의 강물 줄기 같은 좁은 뱃길이 나 있었다.

왼쪽 바위산 기슭에는 거품을 뿜어 올리는 무시무시한 소용돌이가 있었다.

바로 그 밑에서 바다의 괴물 카립디스가 하루에 세 차례씩 바닷물을 빨아들였다가 뿜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카립디스가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가 무사히 빠져나온 배는 한 척도 없었다.

오른쪽 바위산 중턱에는 또 하나의 괴물이 살고 있었다.

그 바위산 중턱의 굴속에 사는 괴물의 이름은 스퀼라였다.

이 스퀼라는 머리가 여섯 개인 괴물이었다.

스킬라의 가늘고 긴 여섯 개의 목에는 비늘이 덮여 있었다.

각각의 아가리 안에는 세 줄의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었다.

아가리 앞에는 각각 열두 개의 긴 더듬이가 있고 더듬이 끝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있었는데, 스퀼라는 바로 이 갈고리로 먹이를 잡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스퀼라의 먹이는 큰 물고기나 돌고래가 대부분이었다.

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 역시 스퀼라의 먹이가 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오뒤세우스는 이 모든 것을 키르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또한 파도가 일렁거릴 때마다 불쑥불쑥 드러나는 오른쪽 바위산과 왼쪽 바위산의 뾰족뾰족한 밑동의 암초는 여느 암초처럼 바다 밑에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밑동의 암초들은 사실, 배든 바닷새든 그 사이로 지나가면 한 쌍의 심벌즈처럼 부딪쳐 그 사이에 든 것을 갈아 버리고는 했다.

이 두 암초가 맞부딪친 자리에 남는 것은 나무 부스러기, 사람의 시체, 피에 젖은 깃털 같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신들 사이에서 그 두 바위산은 <떠다니는 바위산>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지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스퀼라와 카립디스 뿐이었다.

그 두 바위산 사이의 뱃길로 자나가려는 배나 뱃사람은, 잡히기만 하면 배를 통째로 삼켜 버리는 카립디스의 밥이 되거나 한꺼번에 몇 사람씩 붙잡아 삼켜 버리는 스퀼라의 밥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감춘 채 오뒤세우스는 키잡이에게 배를 오른쪽 바위산에 가까이 붙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뱃사람들은 바위산 사이로 배를 몰아넣고는 가능한 한 스퀼라의 바위산 쪽에 가깝게 붙인 채 지나가려고 했다.

무서운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치면서 배를 통째로 삼키려는 저 카립디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그 좁은 뱃길을 건너고 있을 때 갑자기 바위산 중턱에 있는 굴에서 스퀼라의 대가리 여섯 개가 나와 눈 깜짝할 사이에 노잡이 뱃사람 여섯을 물고 가 버리는 것이었다.

노잡이들은 몸부림치면서 동료 뱃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외치다가 순식간에 어두운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비명소리는 곧 파도 소리에 파묻혔다.

오뒤세우스는 남아 있는 뱃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노를 저어라! 신들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라. 노를 저어라!"

남아 있던 뱃사람들은 노 앞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처음으로 노를 저어 보는 사람들처럼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 좁은 뱃길로 몰았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 그들은 동료 여섯 명을 잃은 채 바위산 사이의 뱃길을 지나 난바다로 나왔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푸른 섬이 하나 보였다.

섬에 접근하지 않았는데도 양 떼가 우는 소리, 소 떼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친 뱃사람들이 쉴 곳으로는 그 섬보다 나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뱃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노를 저으라고 명령했다.

태양신의 가축을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던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경고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때 에우륄로코스가 오뒤세우스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

그는 지친 뱃사람들이 섬에 상륙해서 넉넉하게 자고 먹어야 다음 뱃길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뱃사람들은 에우륄로코스 편이 되어, 자기네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오뒤세우스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그는 뱃사람들에게 태양의 신 휘페리온의 가축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는 맹세부터 하게 했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해안 후미진 곳으로 배를 몰아넣고는 해변으로 올라가, 키르케가 마련해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는 지치고 지친 나머지 스퀼라에게 희생된 동료들의 죽음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해변에 곯아떨어졌다.

그 날 밤 구름을 지배하는 제우스 신이 그 섬에다 폭풍을 보냈다.

구름이 하늘과 바다로 번지자 무지막지한 서풍이 파도를 일으켜 해변을 덮쳤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파도가 몰아쳐 오는 해변에서 배를 끌어내어 부드러운 풀밭으로 끌어올렸다.

그 부드러운 풀밭은 태양신의 가축을 돌보는 요정들이 춤을 추는 무도회장이었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일단 배를 거기까지 끌어올려 놓고는 파도가 잠잠해지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폭풍은 근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키르케로부터 얻어온 식량은 곧 바닥이 났다.

뱃사람들은 그런 날씨에 잡을 수 있는 물고기나 바닷새 같은 것으로 근근이 목숨을 이어 나갔다.

견디다 못한 오뒤세우스는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기도해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하고 신전을 찾아 섬의 내륙으로 들어갔다.

기도를 마친 오뒤세우스는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참이어서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오뒤세우스가 잠에서 깨었을 때까지도 폭풍은 여전했다.

그는 배와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요정들의 무도회장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다. 그는 너무나 놀랐다.

불어오는 바람에 고기 굽는 냄새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뒤세우스가, 어째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느냐고 꾸짖자 에우륄로코스가 말했다.

우리가 기댈 것이라고는 신들의 자비밖에는 없습니다. 만일 여기에 소가 없었다면 우리는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굶어 죽는 것이 무엇입니까죽는 방법 중에서 가장 고약한 것이 굶어 죽는 것입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 구워 놓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소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잡은 소 몇 마리의 고기를 구워 엿새 동안 배부르게 먹었다.

엿새째 되는 날 폭풍이 멎었다.

바람이 자면서 태양도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들은 얕은 물로 배를 밀어 넣고 돛을 올렸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기 직전에 이르렀던 그들의 형편을 태양신이 헤아려 소 몇 마리 잡아먹은 것을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양신의 섬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난바다로 나갔을 때였다.

비구름이 뭉게뭉게 하늘로 오르면서 삽시간에 하늘을 가려 버렸다.

바다는 여전히 푸른 빛인데 하늘은 검은빛으로 변했다.

이어서 무시무시한 돌풍이 배를 덮쳤다. 돛이 찢어지고 돛대가 부러져 나갔다.

돛대는 부러져 내리면서 키잡이의 머리를 때리고는 갑판 위로 떨어졌다.

키잡이는 숨이 끊어진 채 바다로 떨어졌다.

시커먼 비구름의 한가운데서 나온 창날 같은 벼락이 배를 때렸다.

배는 유황 냄새를 풍기면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뱃사람들은 갑판 위에서 바다로 떨어져 허우적거렸다.

한동안 뱃사람들의 머리는 물새들처럼 파도 위를 오르내렸다.

그러다 하나씩하나씩 가라앉아갔다. 남은 것은 밧줄에 매달린 오뒤세우스뿐이었다.

배가 난파하는 순간 그는 돛대에 걸린 밧줄에 매달렸던 것이다.

폭풍은 시작될 때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돛대는 하염없이 바다 위를 떠갔다.

뱃사람들을 모두 잃고 혼자만 남은 오뒤세우스는 아흐레 동안이나 바다 위를 떠다녔다.

열흘째 되는 날 밤 오뒤세우스는 물결에 밀려 어느 섬의 해변에 닿았다.

산 사람이라기보다는 죽은 사람에 가까웠다.

물새들이 우는 새벽녘에야 오뒤세우스는 그 섬의 여주인인 요정 칼립소의 눈에 띄었다.

오뒤세우스는 물결에 밀려온 해초처럼 해변에 쓰러져 있었다.

 

 

7. 텔레마코스, 아버지를 찾아 나서다

 

오뒤세우스는 7년간이나 칼립소의 섬에서 머물렀다.

칼립소의 섬은 배들이 지나가는 뱃길에서 멀리 벗어난 곳에 있는 섬이었다.

그래서 남들의 눈에 띌 가능성이 없었다. 오뒤세우스 혼자서 배를 지을 수도 없었다.

설사 배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노잡이들이 있을리 만무했다.

칼립소는 오뒤세우스에게 여간 자상하고 친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칼립소도 오뒤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만는 도우려 하지 않았다.

칼립소는 오뒤세우스가 언제까지나 연인으로 자기 옆에 머물러 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뒤세우스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고국 이타카의 바위산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자기 집 굴뚝 위로 오르는 연기 자락을 보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7년이나 흐른 것이었다.

그동안 이타카에 남아 있던 오뒤세우스 아내 페넬로페와 검은 배들이 트로이아로 떠날 당시에는 어린 아기였던 아들 텔레마코스는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가는데도 불구하고 오뒤세우스의 소식은 들려 오지 않았고, 이타카 사람들은 오뒤세우스가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슬픔에 잠겨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오뒤세우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오뒤세우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 라에르테스는 살아 있었다.

이집트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왕으로서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타카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 라에르테스는 전쟁터에 나간 아들을 대신해서 이타카를 다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늙고 병들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던 아버지 라에르테스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다 오뒤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나이가 너무 어려 이타카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오뒤세우스가 검은 배들을 몰고 트로이아로 떠날 당시 청소년에 지나지 않던 이타카의 귀족 젊은이들이 이쯤에는 이미 시건방진 귀족 건달들로 자라나 있었다.

시건방진 귀족 건달들은 오뒤세우스의 궁전에서 저희들 멋대로 굴었다.

그들은 텔레마코스가 왕위를 계승할 왕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페넬로페와의 결혼에만 성공하면 페넬로페를 통하여 왕위에 올라 왕국을 손아귀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탐욕스러운 사기꾼들처럼 궁전에서도 온갖 부정한 짓을 다 저질렀다.

그들은 오뒤세우스의 가축을 잡아먹고 오뒤세우스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왕비 페넬로페가 저희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결혼해 주지 않으면 궁전을 떠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궁전에서 그들을 쫓아낼 수 있는 사람이 이타카에는 하나도 없었다.

건달들의 행패를 견디다 못한 페넬로페는 시간을 벌기 위해 귀족 건달들에게, 베를 짜서 시아버지 라에르테스의 수의, 즉 라에르테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 마지막으로 입혀 줄 옷 한 벌을 다 짓게 되면 그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결혼하겠노라고 약속했다.

페넬로페는 낮 동안에는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고, 밤이 되어 건달들이 궁전이나 별채에서 잘 때면 하루 종일 짠 베를 도로 풀었다.

따라서 계속 그럴 수만 있다면 시아버지의 수의는 완성될 수 없었다.

페넬로페는 이런 방법으로 한동안은 건달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페넬로페에게 원한을 품은 한 노예가 왕비를 배반하고 왕비의 비밀을 건달들에게 누설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왕비 페넬로페는 수의 지을 베를 계속해서 짜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되고 난 뒤에도 페넬로페는 이런저런 핑계로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일을 미루는 데 온 힘을 다 쏟았다.

하지만 건달들의 요구는 나날이 거세어지고 거칠어져 갔다.

올림포스의 신들 중에 눈이 유난히 밝은 신이 있었다.

바로 지혜의 여신 팔라스 아테나 여신이었다.

평소에 오뒤세우스를 좋아하던 아테나 여신은 저 높은 올림포스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다가 이타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아테나 여신은 오뒤세우스를 대신해서 신들에게 하소연했다.

"지금 오뒤세우스는 요정 칼립소의 섬에 있는데 붙잡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입니다. 오뒤세우스를 사랑하는 칼립소는 오뒤세우스의 사랑을 얻고 싶어합니다만 그가 사랑하는 것은 조국과 백성들입니다. 그런데도 칼립소는 자꾸만 오뒤세우스가 자기 조국과 백성들을 잊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런 사이 오뒤세우스의 궁전에서는 건달들이 그의 재산을 축내고 그의 아내를 도둑질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타카로 내려가 텔레마코스를 설득해 보려고 합니다. 헤르메스 신께 부탁드립니다. 칼립소에게 가시어 신들의 뜻을 좀 전해 주세요. 오뒤세우스를 잃는 일이 칼립소에게는 견딜 수 없이 슬픈 일이기는 하겠지만, 이제 오뒤세우스를 떠나보내 제 갈 길로 가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신들의 뜻이라고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제외한 모든 신들이 아테나 여신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포세이돈의 동의를 받아낼 수 없었던 것은 이 바다의 신이 마침 사람들 문제를 해결하러 오디오피아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테나 여신은 별똥별처럼 빠른 속도로 이타카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 쉽도록 오뒤세우스의 친구 멘테스로 변장한 뒤 오뒤세우스의 궁전으로 들어갔다.

궁전 앞 현관에는 무수한 젊은이들이 황소 가죽을 깔고 앉아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고 그들이 데리고 온 하인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기 집 현관인데도 불구하고 텔레마코스는 그 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떨어진 곳에 홀로 서 있다가 나그네를 보고는 안으로 안내했다.

그 나그네가 바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이라는 것을 텔레마코스가 알았을 리 만무했다.

이윽고 귀족 건달들이 저녁 식사가 준비된 식탁으로 몰려들었다.

텔레마코스는 나그네를 식탁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조그만 식탁으로 따로 불러 조용히 저녁을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윽고 하인들이 음식을 날라와 식탁에 차리자 텔레마코스는 귀족 건달들 귀에 들리지 않게 나지막한 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고 아버지의 궁전에서 저렇게들 못되게 군답니다. 사실은 저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까 봐 두렵습니다. 그것은 그렇고, 존함은 무엇이며, 이타카에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자 멘테스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이 대답했다.

"나는 오뒤세우스 왕의 오랜 친구 멘테스라고 하오. 구리를 사로 퀴프로스로 가는 길인데 오뒤세오스 왕이 틀림없이 돌아와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들렀소이다. 트로이아 전쟁 때 무사했고, 트로이아에서 고향으로 떠났으니 마땅히 돌아와 있을 줄 알았지요……."

텔레마코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텔레마코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에 분명했다.

아테나 여신은 텔레마코스의 얼굴에서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덧붙였다.

"이타카 사람들을 모아, 저 건달들이 얼마나 무례하게 구는지 가르쳐 주도록 하시오. 그리고 배를 한 척 짓게 하고 다 지어지거든 그대가 손수 바다로 나가 오뒤세우스 장군에 대한 새로운 소식과 정보를 모아들이시오."

아테나 여신은 이런 말을 남기고는 올림포스 산으로 돌아갔다.

텔레마코스는 난생처음으로 가슴속에서 용기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젊은 왕자는 백성들을 불러모으고는 왕자답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은 텔레마코스를 동정하고 그가 처해 있는 입장을 이해하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힘 있는 건달들에게 저항할 능력이 없었다.

그 날 밤 아테나 여신이 다시 한번 아버지의 친구 멘테스로 변장하고 텔레마코스 앞에 나타났다.

여기에서 용기를 얻은 텔레마코스는 노 스무 개짜리 갤리온 선을 지으라고 명령하고는, 건달들에게는 공개적으로 자기는 아버지의 소식을 들으러 네스토르 왕과 메넬라오스 왕을 찾아간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어머니 페넬로페에게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텔레마코스가 뱃길에 먹을 양식과 포도주를 준비해 준 사람은 텔레마코스의 유모이자 아버지 오뒤세우스의 유모였던 에우뤼클레이아였다.

에우뤼클레이아는 왕실의 곳간 열쇠를 관리하는 왕비의 심복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아테나 여신은 포도주 빛 바다 위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바람을 보냈다.

텔레마코스 일행은 그 바람에 돛을 부풀리고 이타카를 떠났다.

한편, 텔레마코스의 당도한 행동에 한편으로는 겁을 집어먹고 한편으로는 당황한 건달들은 텔레마코스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건달들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안티노오스가 나섰다.

"나에게 배 한 척과 뱃사람 스무 명만 주시오. 이타카와 시모스 섬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텔레마코스가 귀국할 때 덜미를 잡아, 텔레마코스의 뱃길 여행을 아주 끝장내 버리겠소."

다음날 정오에 텔레마코스 일행이 탄 배는 네스토르 왕이 다스리는 퓔로스의 모래톱에 이르렀다.

늙은 네스토르 왕은 텔레마코스를 따뜻하게 영접했지만 텔레마코스가 알고 있는 이상의 소식은 전해 줄 수가 없었다.

그다음 날 텔레마코스는 다시 길을 떠났다.

네스토르 왕은 왕궁의 전차 한 대를 내어 주고는, 트로이아 전쟁 당시 자기의 전차를 몰았던 아들 피시스트라토스를 붙여 주었다.

이틀 동안 전차를 타고 달린 그들은 해 질 무렵 스파르타의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었다.

텔레마코스와 피시스트라토스는 메넬라오스의 궁전 밖에 있는 별채에서 밤을 보냈다.

텔레마코스가 찾아간 것은, 메넬라오스 왕과 비의 헬레네가 스파르타에 도착한 직후였다.

그들도 트로이아를 떠난 이래 길고 오랜 뱃길 여행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텔레마코스 일행이 들어간 것은 메넬라오스가 고향에 돌아온 것을 자축하여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그는 텔레마코스 일행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손님이 충분히 먹고 마시기도 전에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실례였기 때문이었다.

메넬라오스는 하인들에게 따뜻한 물과 깨끗한 옷을 준비하게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자 자기 식탁으로 불러 함께 잔치를 즐기게 했다.

식사가 끝났을 때 자기 방에 있던, 뺨이 고운 미녀 헬레네가 들어왔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헬레네 뒤로는 황금 물레가락과 실톳대를 든 하녀 둘이 따라 들어왔다.

물레가락과 실톳대에는 짙은 보라색 양털실이 걸려 있었다.

왕의 발치에 앉아 실을 감던 헬레네의 눈길이 화로 위를 지나 텔레마코스의 얼굴 위에서 멎었다.

헬레네는 메넬라오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물었다.

"세상에…… 저기 저 손님들에게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오셨는지 묻지 않으셨군요?"

"아직 묻지 않았소. 먼길 여행에 너무 지친 것 같아서 하룻밤 더 쉬게 한 뒤에 내일 아침에 물을 생각이었지요."

메넬라오스 왕이 대답했다. 헬레네가 두 나그네를 보고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두 분 중 한 분은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알 것 같네요. 두 분 중 젊은 분은 우리의 옛 친구 오뒤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일 거예요. 보세요. 저렇게 닮았는데도 모르시겠어요?"

조금 전과는 달리 텔레마코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메넬라오스가 소리쳤다.

"이제 알겠다. 정말 닮았구나. 세상에, 웃어야 할지, 부둥켜안고 울어야 할지‥‥‥."

처음 만난 사람들과 사귀는 데 익숙하지 않은 텔레마코스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는 수줍음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피시스트라토스가 텔레마코스를 대신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오뒤세우스 왕의 아들이 맞습니다. 아버지의 소식을 들으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저는 길동무로 함께 온 네스토르 왕의 아들 피시스트라토스이고요."

모두가 한데 어울려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붙잡고 울기도 했다.

헬레네는 텔레마코스에게, 오뒤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하고 트로이아의 보물을 훔치러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메넬라오스는 오뒤세우스가 목마를 만들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바로 그 목마 덕분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다음 날 텔레마코스는 메넬라오스에게 이타카가 건달들의 횡포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아버지 오뒤세우스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자 메넬라오스가 대답했다.

"네가 묻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얘기는 들려줄 수 있다. 참으로 희한한 이야기라서 네가 믿을지 모르겠다만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신들이 보증할 것이다. 트로이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길을 잃고 온갖 나라를 다 돌아다녔다. 퀴프로스에도 갔고 이집트에도 갔고 포에니키아에도 갔다. 심지어는 아프리카 북부의 리뷔아라는 나라에도 들렀다. 일 년 전에는 폭풍에 떠밀려 파로스 항구까지 간 적도 있다. 나일강 어귀에서는 불과 하루 뱃길이다. 양식이 떨어져 거의 굶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 섬에는 <바다의 노인>이라고 불리는 프로테우스 신의 따님이 사시더구나. 그녀는 우리의 형편이 딱한 것을 알고는, 어느 날 내가 혼자 바닷가를 걷고 있을 때 나에게 오셨더구나. 고국으로 배를 몰고 가자면 바람이 있어야 하고, 바람을 얻자면 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무슨 수로 신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때 그걸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테우스 신의 따님께서는 '신들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우리 아버지만 아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매일 정오가 되면 아버지께서는 바다에서 해변으로 나오셔서 물개들에 둘러싸인 채 낮잠을 주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를 사로잡으셔야 합니다. 어렵고 어려운 일이지요. 아버지는 그대의 손에 사로잡히시는 순간 그대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것으로 다 둔갑하실 테니까요. 무엇으로 둔갑하든 놓치지 말고 꽉 잡고 있으면 아버지는 본 모습으로 돌아가 그대가 묻는 것에 순순히 대답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시더구나. 프로테우스 신의 따님께서는 나와 내 부하 셋이 숨어 있을 만한 모래밭의 조그만 구덩이까지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자 물개 가죽으로 덮어 숨겨 주시더구나. 정오가 되자 바다의 노인 프로테우스 신께서 물개 무리와 함께 바다에서 나오시더니. 파도가 무늬를 그려 둔 모래밭에 누워 잠을 청하시더구나. 신께서 잠이 드는 순간 우리는 그분을 덮쳐 있는 힘을 다해 꽉 붙잡았다. 그분은 처음에는 사자로 둔갑하시더니. 이어서 멧돼지, 표범, 구렁이, 흐르는 물, 커다란 꽃나무로 둔갑하더라. 우리가 꽉 붙잡고 놓지 않자. 마침내 본 모습을 되찾고는 나에게. 도대체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더라. 나는 고향으로 가는 배의 돛을 부풀릴 바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일강 어귀로 나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면 순풍을 타고 무사히 고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내친김에 내 친구들과 친척들 일까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나의 형 아가멤논은 자기 궁전에서 살해되었다고 대답하시더라. 이 일은 너도 들어서 잘 알고 있을 게다. 그분은 마지막으로 오뒤세우스의 안부를 일러 주었다. 오뒤세우스는 먼바다의 외로운 섬에 사는 요정 칼립소에게 붙잡혀 있다고 하시더라. 칼립소가 오뒤세우스를 사랑해서 도무지 놓아주지 않는다는 거야. 오뒤세우스가 그 섬에 산 지가 벌써 7년째라는구나. 오뒤세우스는 자기의 조국, 자기의 백성들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외딴 섬이라 지나는 배가 없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더라‥‥‥."

메넬라오스가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텔레마코스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그 섬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방법이 없구나. 하지만 신들이 아직까지도 살려 놓고 있는 것을 보면 너의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고자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뱃사람들은 모두 죽었지만 너의 아버지 혼자 살아 있는 것이 그 증거 아니겠느냐? 그러니 언젠가는 돌아오시지 않겠느냐?"

텔레마코스는 메넬라오스의 이런 대답에 만족해야 했다.

 

 

8. 칼립소와의 이별

 

레마코스가 메넬라오스의 궁전에 머물고 있을 동안 신들은 심부름꾼인 헤르메스를 요정 칼립소에게 보내기로 했다.

헤르메스 신은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칼립소의 섬으로 날아갔다.

헤르메스 신이 칼립소가 사는 동굴 앞에 사뿐히 내렸을 때 칼립소는 동굴 안에서 베를 짜고 있었다. 칼립소가 이리저리 손을 놀릴 때마다 순금으로 만든 북이 베틀 위에서 반짝거리고는 했다. 화로에서는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동굴 속에서는 삼나무와 백단나무 타는 향기가 진동했다.

동굴 주위에는 오리나무, 백양나무, 향긋한 냄새가 나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새매나 올빼미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는 생명을 새로 얻기나 한 것처럼 흔들거렸다.

잘 익은 포도가 달린 포도 덩굴이 동굴 입구에 이르기까지 나란히 뻗어 있었다.

네 개의 샘에서 물이 흘러 꽃이 만발한 풀밭을 적셨다.

인간이 사로잡혀 있을 만한 곳으로는 그보다 나은 곳은 없을 것 같았다.

헤르메스가 이르렀을 때 오뒤세우스는 동굴 안에 없었다. 그는 해변에 나가 있었다.

그는 7년 동안이나 틈만 나면 그곳으로 나가, 이루어질 수 없는 항해의 꿈에 잠기고는 했다.

조국의 바위산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가슴이 아려 왔다.

헤르메스 신이 들어가자 칼립소는 베틀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들였다.

아름다운 천이 깔린 의자를 권하고는 신들만 먹는 먹거리. 마실 거리인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내놓았다.

칼립소가 헤르메스 신에게 인사했다.

"황금 지팡이를 드신 헤르메스 신이시여. 어느 신께서 오신들 저의 마음이 이렇게 반가움으로 가득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일로 오셨는지요? 헤르메스 신께서 일없이 저희 집에 오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앞에 놓인 것을 드시고 좀 쉬십시오."

헤르메스 신은 앞에 놓인 것을 먹고 마심 뒤에 자기가 온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를 이리 보내신 분은 신들의 아버지이신 제우스 신이시랍니다. 나는 트로이아에서 9년동안이나 싸워 이긴 영웅 오뒤세우스 일로 심부름을 왔어요. 그대가 오뒤세우스를 이 곳에 머물게 하고 있다지요? 트로이아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오뒤세우스 일행은 신들의 미움을 샀답니다. 처음에는 포세이돈 신의 미움을 샀고, 두 번째로는 태양신 휘페리온의 미움을 샀답니다. 두 분 신들은 오뒤세우스 일행을 괘씸하게 여겨 폭풍 같은 재난으로 그들을 괴롭히신 것이랍니다. 그 결과 패거리는 모두 죽고 말았지요. 오로지 오뒤세우스만 바람과 물결을 타고 그대의 섬으로 온 것이랍니다. 그대는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인간을 7년이 라는 세월 동안 이 곳에다 두셨지요? 이제 제우스 신께서는 그대가 이 자를 풀어 주어 제 갈길로 가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오뒤세우스는 여기에서 살다가 죽을 운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간 뱃사람들과는 운명이 다르기 때문이랍니다."

그러자 킬립소는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힌 나머지 바람 부는 날의 백양나무 가지처럼 떨며 소리쳤다.

"너무하십니다. 저를 질투하시다니. 저 높은 올림포스 산에 사시느라고 차가운 비도, 인간 세상의 슬픔도 모르시는 신들께서는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는 해변으로 밀려와 기진맥진해 있는 오뒤세우스를 거두어 이 동굴로 데려왔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사랑하고 그를 거두어 왔습니다. 오뒤세우스가 바랐다면 저는 때가 되어도 죽지 않는 생명을 베풀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분을 풀어 주어야겠군요. 신들의 뜻이니 이루어져야겠지요. 다스리시는 분들은 신이시니 저는 복종해야겠지요? 이제 그분에게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좋다고 말씀드리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드리겠다고 말씀드리렵니다."

"그러세요. 한시바삐 그러세요. 서둘러 그렇게 하세요. 제우스 신께서 기다리시다가 화를 내시는 일이 없도록, 한시바삐 말입니다."

화로 곁에 앉아 있던 헤르메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칼립소는 슬픔을 억누르며 바닷가로 나갔다.

오뒤세우스는 늘 그래왔듯이 바위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흐리고 벌겋게 핏발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울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칼립소가 오뒤세우스의 어깨에다 가볍게 순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제는 우실 필요도 없고, 이곳에서 세월을 허비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제가 그대를 풀어드릴 때가 왔습니다. 이제 그대를 기다리는 여인에게로 돌아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내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나는 신들의 뜻에 따라 이렇게 해야 합니다. 기왕 그렇게 할 바에야 나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대를 보내렵니다."

오뒤세우스가 무거워 보이는 고개를 들고는 물었다.

"그대가 나를 놓아준다고 하나, 내가 이곳을 떠날 방법이 도무지 없지 않소?"

" 내가 연장과 나무를 마련해 줄 테니 쪽배를 하나 지으세요. 쪽배를 지으면 거기에다 빵과 물과 포도주를 실어 드리겠어요. 그리고 순풍을 보내어 쪽배의 돛을 부풀게 하겠어요……."

칼립소는 슬픔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집 화로 앞에 앉기까지 수많은 재난이 그대 앞을 가로 막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그것이 두려우시면 내 집에서 나와 함께 머물러도 좋습니다. 나는 그대가 날마다 아내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그대의 아내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오뒤세우스가 그 말에 응수했다.

"이렇게 말한다고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내 아내 페넬로페의 아름다움이 그대만 못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때가 되면 죽어야 할 팔자를 타고 태어난 인간을 무슨 수로 영원히 사는 신들이나 요정의 아름다움에 겨루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돌아가고 싶소. 뱃길을 가로막는 재난과 위험 앞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끝까지 버티고 싸움으로써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오."

다음 날, 칼립소는 목수 연장을 가져다주고는 쓸 만한 나무들을 보여 주었다.

그는 바닷가 가까이에 서 있는 나무 스무 그루를 찍어 넘어뜨리고는 조그만 쪽배를 만들고, 제일 길고 곧은 전나무는 배 한가운데 세워 돛대로 삼았다.

칼립소가 가져다준 튼튼한 무명천으로 그는 돛을 만들었다.

칼립소가 통가죽을 가져다주자 그는 이것을 가늘게 자르고, 몇 개씩 모아 꼬아서 밧줄과 마룻줄을 만들었다.

나흘 동안 준비한 그는 닷새째가 되자 쪽배 밑에다 통나무를 깔고는 쪽배를 바다로 밀어 넣었다.

칼립스는 물과 포도주가 가득가득 든 가죽 부대와 먹을 것을 실어 주었다.

오뒤세우스가 험한 뱃길을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한 옷도 한 벌 마련해 주었다.

이윽고 둘은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었다.

입맞춤이 끝났을 때 칼립소는 홀로 동굴 쪽으로 갔고, 오디세우스는 바다로 향했다.

돛은 칼립소가 보내 준 순풍에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순풍이 불어올 동안 오뒤세우스는 키만 잡고 있었다.

섬이나 지나가는 배는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태양을 보고 방향을 잡았고 밤에는 별을 보고 방향을 잡았다.

그는 칼립소가 가르쳐 준대로 큰곰자리를 왼쪽에다 두고 항해를 계속했다.

그런 식으로 열이레를 항해했다.

열여드레째 되는 날 그의 눈에 멀리 희미한 산 그림자가 보인 듯했다.

그가 곧 낯익은 땅을 밟게 되며 힘겨운 고생도 끝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머리카락이 푸른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이디오피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의 모습을 보았다.

포세이돈은 자기 아들을 장님으로 만든 오뒤세우스를 다른 신들이 도와주고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가 난 그는 무시무시한 폭풍을 일으켰다

검은 구름장이 하늘을 덮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 쪽배를 때렸다.

이어서 북쪽에서 광풍이 몰아쳐 왔다.

광풍은 돛대를 부러뜨리고 돛을 찢어 바다로 내동댕이쳤다.

키를 잡고 있던 오뒤세우스도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쳤다.

파도가 그의 몸을 삼켰다. 칼립소로부터 받았던 옷의 무게가 그에게는 죽음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파도위로 떠올라 공기를 마시거나 수면 아래서 마신 소금물을 뱉거나 했다.

쪽배의 파편을 찾아 허우적거리던 그는 마침내 쪽배의 몸체에 기어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밀려든 파도에 쪽배는 갈매기 깃털처럼 일렁거렸다.

오뒤세우스가 쪽배의 몸체에 달라붙어 파도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본 바다의 여신 이노가 험한 파도를 헤치고 왔다.

바다의 여신 이노는 흡사 물 속에서 속구 치는 갈매기 같았다.

이노는 빛나는 너울을 벗어 오뒤세우스에게 던져 주면서 소리쳤다.

"옷을 벗어요. 그 옷의 무게 때문에 몸이 자꾸만 가라앉고 있어요. 대신 그 너울을 허리에 감으세요. 그 너울이 그대를 지켜 줄 거예요. 그리고 쪽배는 버리고, 아까 본 육지를 향해 헤엄쳐 가세요. 육지에 이르거든 내 너울을 바다로 던지세요. 고개는 육지로 돌리고 너울을 뒤로 던져야 해요."

바다의 여신 이노는 이 말을 남기고는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간 산 같은 파도가 덮쳤다. 쪽배는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뒤세우스는 쪽배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 하나에 의지해서 옷을 벗어 던지고는 너울을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는 다시 바다에 몸을 맡기고는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이때 아테나 여신이 그를 도우러 왔다.

아테나 여신은 북풍만 두고 다른 바람은 모두 잠재웠다.

북풍을 잠재우지 않는 것은 그 바람이 머나먼 육지 쪽으로 헤엄쳐 가는 오뒤세우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틀 밤 이틀 낮 동안이나 아테나 여신의 북풍이 오뒤세우스의 몸을 육지 쪽으로 밀고 갔다.

사흘째 되는 날 육지가 가까워지면서 바람이 자기 시작했다.

오뒤세우스는 바위섬을 향해 계속해서 헤엄쳐 갔다.

하지만 바위섬에 이른 순간, 바위섬에 부딪쳤다가 튀어 오르는 파도가 그를 휩쓸어 버렸다.

그가 바위 한 귀퉁이에 매달려 몸을 도사리지 않았더라면 바다에 떠다니던 나무 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났을 터였다.

그가 바위에 매달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위섬에 부딪혔다가 다시 바다로 나가는 파도는 자꾸만 그의 몸을 바다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세 차례나 역류에 휩쓸려 바다로 끌려나갔다가는 다시 헤엄쳐 와 바위에 붙어야 했다.

마침내 그는 그 바위 위로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한동안 해안선을 따라 헤엄치면서 접근하기 쉬운 지점을 찾았다. 그러다 넓은 강이 바다와 합류하는 잔잔한 해변을 만났다.

곧 그의 발이 부드러운 모래에 닿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물에서 나와 얼굴을 모래에 댄 채로 해변으로 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림 그는 이노로부터 받은 너울을 허리에서 풀어 바다에 던졌다.

이노가 가르쳐준 대로 바다로부터 돌아선 채 던졌다.

그리고는 강변을 따라 육지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오래 걸을 힘은 없었다.

오래지 않아 올리브 나무 고목의 가지가 뒤엉켜 있는 숲에 이르렀다.

곧은 가지와 잔가지가 지붕처럼 뒤엉켜 바람을 막아주는 곳이었다.

그는 그 가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바닥에는 낙엽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는 거기에 드러누워 낙엽으로 몸을 덮었다. 그의 의식이 다시 가물거렸다.

아테나 여신이 와서 그의 눈을 감겼다. 그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9. 나우시카 공주

 

오뒤세우스가 강둑의 올리브 나무 밑에서 낙엽을 덮고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을 즈음, 그 나라 왕궁의 공주 나우시카 역시 잠을 자고 있었다.

나우시카의 꿈속으로 아테나 여신이 공주의 친구, 선장의 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공주의 친구는, 어떻게 보면 초조해 하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장난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침대 머리맡에 앉아 말했다.

"나우시카, 너는 정말 네 엄마의 한심한 딸이구나. 방에 널린 이 많은 옷가지를 좀 보아라. 이 땅의 귀족 청년들이 모두 너에게 눈독을 들이는데, 이래 가지고 시집은 제대로 갈 수 있겠니? 결혼식 때 혼수가 들어오고 손님들이 선물을 줄 것이니 옷이 또 얼마나 늘어나겠니?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강으로 빨래하러 가자. 수레에다 빨랫감을 싣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나우시카는 간밤에 꾸었던 꿈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우시카는 그 나라 왕인 아버지에게 달려가, 빨랫감을 싣고 강으로 빨래하러 가야겠으니 나귀가 끄는 수레 한 대를 빌려 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두 마리의 나귀가 끄는, 아주 잘 달리는 수레를 한 대 빌려주었다.

하녀들은 빨랫감을 수레에다 실었고 어머니인 왕비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물론, 딸과 하녀가 멱을 감은 뒤에 몸에 바를 올리브 기름도 한 병 마련해 주었다.

나우시카는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고는 수레를 천천히 강변으로 몰았다.

하녀들은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그들은 강변에 이르렀다.

강변에는 물이 아주 맑고 얕아서 빨래하기에 좋은 데가 있었다.

나우시카와 하녀들은 나귀를 풀 밭에 풀어 주고 빨래를 시작했다.

하녀들은 흐르는 물속의 넓적한 바위에 빨랫감을 올려놓고는 발로 밟고 나서 맑은 물에 헹구고 강변 조약돌 밭에다 널어 태양과 바람에 말렸다.

옷이 마를 동안 공주와 하녀들은 가죽공으로 공놀이를 시작했다.

돌림노래를 부르면서 공을 던지고 받는 놀이였는데, 돌림노래의 선두를 맡은 사람은 바로 공주였다.

이들의 놀이터에 아테나 여신이 살며시 끼어들었다.

물론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우시카가 하녀 하나에게 공을 던지자 아테나 여신은 일부러 이 공이 그 하녀를 빗나가 강 가장자리의 물 위에 떨어지게 했다.

그러자 하녀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올리브 나무 밑에서 잠들어 있던 오뒤세우스가 깨어났다.

공주 일행의 놀이터는 오뒤세우스가 잠을 자던 올리브 나무에서 창을 던지면 바닥에 떨어져 꽂힐 만한 거리에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오뒤세우스는 반쯤 몸을 일으킨 채 가만히 처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적의 기습을 받은 가까운 마을 여자들의 비명소리이거나 성질 고약한 주인에게 얻어맞는 하녀들의 비명소리이거니 했다.

하지만 정신이 또렷해지면서부터는 처녀들이 놀이하면서 지르는 환호성으로 들렸다.

처녀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올리브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알몸을 가린 다음 천천히 걸어나갔다.

하지만 맨발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오랜 고생으로 얼굴은 험악하기 짝이 없었으며, 멋대로 자란 머리카락과 수염에는 소금기가 허옇게 서려 있었다.

처녀들에게 그는 덤불 속에서 튀어나온 사자같이 무시무시한 존재로 비쳤을 터였다.

하녀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이리저리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우시카공주는 다가오는 오뒤세우스를 침착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뒤세우스는 공주에게 다가가 공주의 무릎을 어루만지며 애원하고 싶었지만 공주가 두려워할까 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공주에게 말했다.

"젊으신 아가씨. 여신이신가요, 아니면 인간 세계의 여느 아가씨인가요? 여신이시라면 틀림없이 저 초승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이실 테지요. 인간 세계의 여느 아가씨라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라버니들은 참으로 복이 많으신 분들입니다. 그대같이 아름다운 처녀가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참으로 자랑스러우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행복을 누리실 분은 역시 아가씨에게 사랑과 결혼 선물을 안기고 아가씨를 모셔가는 젊은이일 테지요. 나는 아가씨같이 완벽하게 아름다우신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 델로스 섬에서 한번 본 적은 있습니다. 아폴론 신의 제단 옆의 샘물을 마시며 자라는 어린 종려나무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도움을 청할 데는 아가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씨입니다. 여러 날 바다의 폭풍에 시달리다 여기에 닿은 것은 어제의 일입니다. 어떤 신께서 저를 이 해변으로 데려다주신 것일 테지요. 그러나 저는 여기가 어디인지, 어떤 불행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자비를 베푸시어 헌 옷 한 벌만 주시고, 가까운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신들이 아가씨에게, 아가씨의 마음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젊은이를 베푸시어 행복한 가정을 꾸미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그러자 공주가 대꾸했다.

"나그네여, 나쁜 분 같지는 않구려. 말씨를 보아하니 교양 있는 분이신 것 같군요. 우리나라의 해변으로 그대를 보내신 분은 사람을 고르시어 행복과 슬픔을 베푸시는 제우스 신임에 분명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알몸을 가리실 옷을 얻으실 수 있을 테지요. 그리고 제가 그대를 마을로 안내하여 지극한 환영을 받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바로 이 섬나라 파이아케아를 다스리시는 알키노스 왕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공주는 이어서, 오뒤세우스의 출현에 놀라 멀찍이 도망쳐 저희들끼리 모여 수군대고 있는 하녀들에게 소리쳤다.

"애들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냐? 이 가엾은 나그네가 보이지도 않느냐? 세상의 배는 한 척도 지나가지 않는 섬나라, 신 같은 사람들이 사는 머나먼 우리 섬나라로는 나쁜 사람이 온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분은 운이 나빠 이곳에 오신 나그네이시다. 어서 이리로 오너라. 이분이 알몸을 가리실 수 있도록 옷 한 벌을 가지고 어서 오너라.“

처음에는 쭈뼜하던 하녀들이 오뒤세우스 가까이 다가왔다.

하녀들은 오뒤세우스를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오리나무 숲으로 안내하고는 마른 옷가지 중에서 겉옷 한 벌을 가져다주었다.

하녀 중 하나는 병 바닥에 남아 있던 올리브 기름을 따라, 바닷바람에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오뒤세우스의 얼굴에 발라 주었다.

오뒤세우스는 하녀들에게 말했다.

"옷을 주시고 기름까지 발라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잠시 물러가 주셨으면 합니다. 숙녀들 앞에서 목욕을 하고 이 옷을 입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녀들은 오뒤세우스만 남겨두고 공주에게 달려갔다.

오뒤세우스는 강둑 아래로 흐르는 강물에 온몸과 머리카락에 묻어 있던 소금기를 말끔히 씻어내고, 오랜 바다 여행에서 부드러움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피부에는 올리브 기름을 발라 문질렀다.

머리카락도 올리브 기름을 발라 문질렀다.

그러자 히아신스 꽃잎 같은 곱슬머리가 되살아났다.

그런 다음에야 그는 하녀들이 가져다준 겉옷을 입고는 물에서 나가 강둑에 앉았다.

멀리 떨어진 채 서 있던 나우시카의 눈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강둑에 앉아 있는 오뒤세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공주의 눈에는 오뒤세우스가 그렇게 잘난 사람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공주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하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분을 우리나라의 해변으로 보내신 것은 신의 뜻이 아닐까? 처음에 저분을 보았을 때는 그렇게 흉하게 보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냐? 신들도 저렇게 늠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사시게 하여 내 신랑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만…… 아니지, 이렇게 허튼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얘들아, 저분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갖다 드리자."

그들은 왕비가 마련해 준 음식 중에서 저희들끼리 먹고 마시다 남은 것을 오뒤세우스에게 가져다주었다. 오뒤세우스는 여러 날을 굶은 터라 맛있게 먹고 마셨다.

그가 먹고 마시고 있을 동안 공주와 하녀들은 햇빛과 바람이 말린 옷가지를 걷어 수레에 싣고, 풀을 뜯고 있던 나귀들을 몰아와 수레 앞에 매었다.

오뒤세우스의 식사가 끝나고, 궁전으로 돌아갈 준비도 끝나자 공주는 수레에 올라 나귀의 고삐를 잡았다. 공주는 오뒤세우스를 가까이 불렀다.

오뒤세우스가 와서 수레바퀴 옆에 서자 공주가 말했다.

"이제 우리 아버지의 궁전으로 들어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으세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시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출발해서 논밭을 지날 동안에는 하녀들과 함께 걸어서 수레를 따라오세요. 하지만 마을이 가까워지고, 양쪽에 배 짓는 집이 나란히 서 있는 항구에 이르거든 우리 일행에서 떨어져 항구 가까이 있는 백양나무 숲으로 들어가세요. 그 숲이 바로 아테나 여신의 숲이랍니다. 우리 일행이 마을로 들어가고, 궁전으로 들어갈 때까지 거기에서 기다려야 해요. 만약 제가 밖에서 남정네를 데리고 들어갔다는 말이 나돌면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 일행이 궁전으로 들어갔다고 여겨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혼자서 들어오세요. 사람들에게 물어보시면 궁전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줄 것입니다. 아버지의 궁전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문지기도 없으니까 그냥 들어오셔도 됩니다. 숲속의 궁전 본채에 이르시거든 바로 큰 연회장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연회장 화로 옆자리는 늘 우리 어머니가 앉으시는 자립니다. 어머니는 하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거기에 앉으셔서 보라색 실로 뜨개질을 하시지요. 바로 옆에는 아버지가 앉으시는 큰 의자가 있습니다. 만일에 아버지가 거기 앉아 계시거든 옆으로 살짝 지나쳐 어머니께 가세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무릎을 어루만지면서 도움을 청하세요.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데 필요한 배를 내어달라고 하셔도 됩니다. 어머니의 마음만 움직이시면 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무엇이든 도움을 베푸실 것입니다."

오뒤세우스는 공손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대답했다.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나우시카는 채찍으로 노새를 가볍게 때렸다. 수레가 덜컹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오뒤세우스와 하녀들은 수레 뒤를 따라갔다.

백양나무 숲에 이른 것은 해가 서쪽으로 저물녘이었다.

오뒤세우스는 거기에서 하녀들 대열에서 벗어났다.

숲 속에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

오뒤세우스는 신전에서 무릎을 꿇고 파이아케아 인들로부터 은혜를 입을 수 있게 해주십사고 아테나 여신에게 기도했다.

한동안 신전에 머문 오뒤세우스는 일어나 궁전이 있는 마을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지금쯤이면 공주가 궁전에 도착했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서 아테나 여신이 그를 맞았다.

여신은 물동이를 든 마을 처녀로 변장하고 오뒤세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뒤세우스는 그 처녀에게 궁전이 어느 쪽에 있는지 묻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른답니다. 나는 뱃길에서 불행한 일을 당하고 이곳까지 흘러온 먼 나라 사람이랍니다."

그러자 처녀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이 대답했다.

"제가 길을 가르쳐 드리지요. 저를 따라오세요. 하지만 거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을 사람들 거의가 포세이돈을 섬기는 뱃사람이기는 하지만, 바다 건너편에 있는 먼 나라에서 온 나그네 뱃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처녀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앞서 걸었다.

오뒤세우스는 처녀의 뒤에 바싹 붙어 따라갔다.

그러나 그가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는 줄 알지 못했다.

여신이 오뒤세우스의 몸을 안개의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했기 때문이었다.

궁전 문까지 오뒤세우스를 데려온 여신은 오뒤세우스가 가야 할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뒤세우스는 여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있다가 여신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신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궁전 문으로 들어선 오뒤세우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궁전 뜰에는 배나무, 석류나무, 사과나무 등 과일나무가 많았다.

무성한 잎 사이로 반짝거리는 과일들이 보였다. 올리브, 무화과, 포도나무도 있었다.

나무들은 가까이에 있는 샘물에 흠씬 젖어 있었다.

땅바닥으로 스며드는 은빛 샘물의 물줄기에서 나는 소리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잘 어울렸다.

하지만 뜰이 아름다웠다고는 하나 그 뜰이 오뒤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뒤세우스의 앞에는 궁전임에 분명한, 무수한 기둥을 거느린 하얀 건물과 안뜰이 있었다.

그는 그 건물로 다가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오고 가고 있었지만 오뒤세우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넓은 연회장 안에서 왕은 무수한 신하들을 거느리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왕의 옆에는 왕비가 많은 시녀들을 거느린 채 앉아 있었다.

오뒤세우스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 왕비 바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무릎을 꿇은 다음에야 아테나 여신은 모습을 가리는 안개를 걷었다.

그제서야 그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였다. 연회장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들어오는 것을 본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웬 사람이 하나 난데없이 왕비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침묵을 깨뜨리고 오뒤세우스가 왕비에게 탄원했다.

"왕비마마. 폭풍에 밀려 이 나라의 해변으로 밀려온 나그네가 인사 올립니다. 부디 저를 도와주시어, 저를 고향으로 데려다줄 배 한 척을 내어 주십시오. 제가 마지막으로 제 고향의 벽난로 앞에 앉아 보았던 이후로 실로 길고도 험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불쌍한 분이시군요. 우리가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대의 고향이 어디인지 알면 ……."

왕비가 부드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알키노스 왕이 왕비를 말허리를 잘랐다.

"내 궁전은 어떤 나그네든 다 환영하오. 왕비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음식을 드시오. 그리고 난 뒤에 대답해도 늦지 않아요."

오뒤세우스는 반짝거리도록 닦은 의자에 앉았다.

하녀들이 손을 헹굴 물을 가져다주었다.

고기 자르는 사람은 쇠고기를 두툼하게 잘라 접시에 놓아주었다.

빵도 있고 과일과 포도주도 있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웠는데도 불구하고 궁전의 대신들 사이에 섞여 음식을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강변에서 공주로부터 음식을 얻어먹기는 했으나 그것은 겨우 허기를 면할 만한 양이었다.

이윽고 저녁 식사가 끝나고 대신들은 모두 자기네 집으로 돌아갔다.

연회장에는 오뒤세우스와 알키노스 왕과 아레테 왕비 이렇게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오뒤세우스는 왕과 왕비에게 트로이아에서 고향으로 가다가 뱃길을 잘못 든 경위, 요정 칼립소의 섬에서 7년 동안 살았던 사연, 칼립소의 손에서 풀려나 쪽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운 사연을 얘기했다. 뿐만 아니었다.

포세이돈의 원한을 사는 바람에 배가 난파한 경위, 파이아케아 해변으로 밀려오기까지의 경위를 말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해변으로 오른 저는 지친 나머지 올리브 숲으로 들어가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자다가, 가까이서 공주님과 하녀들이 놀면서 웃고 떠드는 소리에 깨어났습니다. 저는 공주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공주님은 저에게 강변에서 빨아 말린 겉옷 한 장과 먹을 것, 마실 것을 준 것은 물론, 몸에 바를 올리브 기름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궁전으로 오는 길까지 가르쳐 주셨답니다."

오뒤세우스의 말이 끝나자 왕이 혀를 찼다.

"내 딸이 큰 잘못을 저질렀군요. 나그네를 홀로 남겨두지 말고 내게로 모시고 왔어야 했던 것을……. 결국 내 딸은 그대가 처음으로 도움을 요청했던 당사자이니, 이제 그대를 도와주고 말고는 내 딸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오뒤세우스가 재빨리 나우시카 공주를 변호해 주었다.

"아닙니다, 전하. 그런 일로 따님을 꾸짖지 말아 주십시오. 따님께서는 저에게 하녀들과 함께 마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성과 오래 떨어진 채 살아왔던 나머지 수줍은 마음이 생겨 여성들과 함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따님께서 수레 뒤에다 나그네를 달고 돌아오면 전하께서도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처녀의 아버지는 누구나 질투심이 강한 법이니까요."

알키노스 왕은 오뒤세우스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푸근하게 웃었다.

"나는 질투나 하는 사람이 아니오. 그대 같은 나그네도 짐작하듯이 나는 나그네에게도 능히 딸을 줄 수 있는 사람이오. 그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내 집에서 머물기로 한다면 나는 그대와 내 딸을 위해 새집을 지어 줄 용의도 있어요."

왕이 이렇게 말했던 것은, 아직은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처지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귀족적인 분위기가 풍기고,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만큼 지혜롭고 힘도 있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왕은 나그네의 얼굴에 근심이 어리고,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보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대가 기어이 먼데 있는 그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 배를 마련해 주고 내 왕국에서 가장 힘이 좋은 노잡이들도 그 배에 붙여 주겠소."

왕비 아레테가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내일 해도 좋지 않겠어요? 잠자리에 드셔야 할 시각입니다."

왕비는 하녀들에게 명을 내려 왕궁 안의 손님방에 융단을 깔게 하고 부드러운 베개도 가져다주게 했다.

오뒤세우스는 보랏빛 이불을 덮고 그 날 밤은 편히 잤다.

 

 

10. 파이아케아 경기

 

다음 날 알키노스 왕은 배를 한 척 마련하고 오뒤세우스를 떠나 보낼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마을 어귀의 방파제 앞에다 정박해 두게 했다.

한낮이 되자 수많은 신하들이 궁전의 연회장에서 왕과 함께 점심을 들었다.

왕과 신하들이 점심을 들 동안 궁전의 음유시인은 노래를 불렀다.

음유시인은 장님이었다.

그 음유시인은 사람들이 새의 노래를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해 새를 장님으로 만들 듯이, 신들이 그의 노래를 더욱 그윽하게 하기 위해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노랫말에 맞게 수금을 뜯으면서 그는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왕 옆에서 노래를 듣고 있던 오뒤세우스는 흡사 거센 바람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그러듯이, 혹은 뭇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그러듯이 겉옷을 끌어 자기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던 알키노스 왕은 오뒤세우스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래와 수금 반주가 끝나자 왕은 모두 밖으로 나가 노천극장에서 벌어지는 달리기와 씨름 같은 경기를 구경하자고 제안했다.

사람들은 모두 식탁을 뒤로 하고 궁전 앞의 운동 경기장으로 나왔다.

젊은이들은 서둘러 경기에 참가했는데, 그 중에는 왕의 세 아들도 있었다.

세 왕자는 달리기, 씨름, 멀리뛰기, 원반던지기 등의 경기에 참가했다.

그런데 세 왕자들은 오랜 고생으로 몹시 지쳐 보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몸매가 씨름꾼 같은 나그네도 경기에 참가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왕자 중 하나인 라오다마스가 오뒤세우스에게 경기에 참가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경기에 참가하기에는 저의 머리가 너무 복잡합니다."

오뒤세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젊은이들이 오딧세우스를 비웃었다.

그중의 하나인 에우뤼알로스는 노골적으로 비웃으면서 이런 말까지 했다.

"우리가 사과해야겠군요, 기껏해야 장사꾼 아니면 장삿배의 선장일 터인 그대에게 씨름을 하자고 했으니......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그대를 운동선수쯤 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이 말에 오뒤세우스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의 두 눈 사이가 좁아졌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 전쟁과 방랑으로 형편없는 꼴이 되기는 했소만 내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 좋은 시절에 내게 깃들어 있던 것들이 아직 조금은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하니,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요?"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겉 옷자락을 걷어 허리띠에 채울 생각도 않은 채 원반 중에서도 가장 크고 무거운 청동 원반을 집어 한 차례 돌려 보고는 그대로 던졌다.

군중들은 활 모양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원반을 눈길로 뒤쫓다가 달려나가 원반 떨어진 자리를 살펴보았다.

오뒤세우스의 원반은 그 날 가장 잘 던진 청년의 원반이 떨어진 자리보다 훨씬 멀리 날아가 있었다.

원반던지기로 다시 기운을 차린 오뒤세우스는 권투든 씨름이든 활쏘기든 자신이 있는 사람은 나서라고 했다.

그러나 자기나라 젊은이들이 모든 경기에서 차례로 망신을 당할 것 같다고 생각한 알키노스 왕은 정중하게 그 도전을 물리쳤다.

"우리의 자랑거리인 세상에서 제일가는 재주를 보여 드리지요."

왕은 이렇게 말하고는 음유시인을 불러, 춤꾼들이 춤을 출 수 있도록 수금을 타게 했다.

사람들이 물러나면서 둥그런 춤판이 만들어졌다.

음유시인은 수금을 들고 그 둥근 춤판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춤꾼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수금 소리에 맞추어 춤꾼들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연주하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사랑 노래는 여름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두 춤꾼이 반짝반짝 빛나는 공을 하나 들고 나와 춤추면서 공을 던지고 받기 시작했다.

한 춤꾼이 펄쩍 뛰어오르면서 공을 다른 춤꾼들을 둘러싸고 발을 굴러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정말 어느 누구도 겨룰 수 없는 기술이군요. 이같이 훌륭한 기술은 본 적이 없습니다."

오뒤세우스가 혀를 내둘렀다.

춤이 끝나자 알키노스는 신하들을 주위로 불러 모으고는 항구에는 나그네 손님을 태우고 갈 배가 기다리고 있으니, 각자 손님에게 금붙이나 좋은 옷가지를 선물로 줄 것을 권했다.

그는 오뒤세우스를 모욕한 에우뤼알로스에게도 용서를 비는 선물을 내놓을 것을 권했다.

모두가 선물을 내놓는 데 선선히 동의했다.

알키노스 왕 자신은 이름 있는 기술자가 세공한 커다란 금 술잔, 왕비가 베를 짜서 만든 훌륭한 겉옷과 속옷을 선물로 내놓았다.

왕비 아레테는 이 선물을 향긋한 냄새가 나는 나무 상자에 넣어 오뒤세우스에게 건네주었다.

신하들도 차례로 선물을 가져오게 해서 항구의 방파제에서 기다리고 있는 배에다 싣게 했다.

에우뤼알로스는 손잡이가 은으로 되어 있고, 칼집은 아주 오래 묵은 상아로 만들어진 청동 칼 한 자루를 선물로 주면서 공손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그네 손님이시여, 그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제가 혹시 손님께 욕을 했다면 그 욕은 바람에 날려가 버리기를 빌겠습니다. 모쪼록 신들께서 도우셔서 그대 고국의 항구에 안전하게, 그리고 빠른 시일 안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뒤세우스가 그 말을 받아 이렇게 응수했다.

"나도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대가 주는 화해의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신들이 그대를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저에게 이렇게 좋은 칼을 주셨지만, 그대에게 이런 칼이 여러 자루 생겨 모자람을 느끼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뒤세우스는 그 아름다운 칼의 끈을 어깨에다 걸었다.

이윽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궁전의 하녀들이 그를 욕실로 안내했다.

그는 하녀들이 준비한 약초 향내 나는 물에다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욕실에서 나와 연회장으로 들어가던 길에 궁전 기둥 아래 서 있는 나우시카 공주를 만났다.

강둑에서 만난 이래로 그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나라 풍습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연회장에서 남자들과 식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첫 만남은 곧 마지막 만남이 될 터였다.

공주가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십시오. 순풍이 뱃길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시더라도 저를 너무 빨리 잊지는 말아 주십시오."

오뒤세우스가 그 말에 대꾸했다.

"나는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대를 기억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아가씨여, 그대는 내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뒤세우스는 이말을 남기고는 연회장으로 들어가 알키노스 왕 옆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가 계속될 동안 음유시인은 수금을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 날 밤에는 특별히 트로이아 목마를 노래했다.

그는 머리가 좋고 재간이 무궁무진한 오뒤세우스가 목마를 만들게 한 경위, 그리고 적군의 의심을 사지 않고 트로이아 성으로 그 목마를 끌고 들어간 사연을 노래로 불렀다. 이어서 오뒤세우스를 비롯한 특공대 용사들이 그 목마의 뱃속에 숨어 있게 된 일과 그 날 밤에 목마의 배를 열고 나와 트로이아 성의 성문을 연 경위를 노래로 불렀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오뒤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의 참상과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무수한 부하들이 생각나서 눈물을 흘렀다.

알키노스 왕은 다시 한번 그가 우는 것을 보았다.

알키노스 왕은 손짓으로 음유시인의 노래를 그치게 하고는 수고했다는 표시로 자기 접시에서 멧돼지 고기를 두툼하게 베어 음유시인에게 주었다.

음유시인이 물러앉자 왕은 옆에 있던 오뒤세우스에게 물었다.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노래만 들으면 나그네는 눈물을 흘리는 모양이오. 혹시 트로이아 전쟁 때 가까운 사람을 잃은 적이 있소? 트로이아 군대의 창에 친한 친구가 목숨을 잃기라도 했던 것이오?"

그러자 나그네 오뒤세우스가 대답했다.

"이루 셀 수 없이 잃었지요. 제가 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가 하면, 제가 바로 라에르테스의 아들, 이타카 왕국의 왕 오뒤세우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열두 척의 갤리온 선에다 부하들을 가득 싣고 가서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했습니다만 지금은 나 혼자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연회장 안에 숨 막힐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그 긴긴 침묵 속에서, 연회장 한가운데 알키노스 왕 옆에 앉아 있는 사나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이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가, 수금을 반주 삼아 무수한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던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고대의 영웅이나 신들 이야기를 들었듯이 오뒤세우스 이야기를 들어 왔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뒤세우스여. 여기에 오기까지 방황하면서 겪은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주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신이 트로이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다가 사라진 뒤로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져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오."

오뒤세우스는 연회장 한가운데서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방황할 당시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외눈박이 거인 이야기에서부터 키르케 이야기, 저승 세계를 다녀온 이야기. 스퀼라와 카립디스 이야기. 태양신의 가축이야기. 그 가축 때문에 부하들과 배를 깡그리 잃은 이야기, 칼립소의 섬으로 간 이야기까지 했다.

새벽이 오기 직전에 잔치와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파이아케아 인들이 선물로 내놓은 금붙이와 훌륭한 옷가지는 횃불이 밝혀진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로 옮겨졌다.

그들은 선물 꾸러미를 노잡이들이 앉는 긴 의자 옆에다 쌓았다.

오뒤세우스는 항구가지 나온 왕과 왕비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왕비에게, 금술잔을 준 것을 고맙게 여긴다면서 이렇게 인사했다.

"왕비마마, 좋은 운수가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마마의 지아비이신 알키노스 왕께서도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그는 배에 올라 두꺼운 겉옷과 융단으로 몸을 감쌌다.

이윽고 노잡이들이 갤리온 선을 물 위로 밀고는 노잡이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갤리온 선은 머나먼 이타카를 향해 항구를 빠져나갔다.

 

 

11. 그리운 이타카

 

오뒤세우스는 아테나 여신이 재워 준 길고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서 보니 파이아케아의 배는 온데간데없고 올리브 나무 밑에 홀로 누워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알키노스 왕이 갤리온 선에 실어 주었던 따뜻한 겉옷이었다.

왕과 신하들로부터 받은 선물은 주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테나 여신이 보낸 자옥한 아침 안개 때문에 그는 주위의 지형을 살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로서는 어디에 와 있는지. 무슨 일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테나 여신이 아침 안개의 장막을 쳐놓은 것은 오뒤세우스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테나 여신은 자기가 먼저 오뒤세우스를 만나 어디에서부터 손을 써야 할 것인지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오뒤세우스는 파이아케아에서 가져온 보물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았다.

손잡이가 은으로 된 칼도 뽑아 보았다.

그는 해변을 걸으면서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해변으로 아테나 여신이 젊은이로 변장하고 나타났다.

왕이나 귀족들이 입을 수 있는 겉옷 차림에 창까지 한 자루 손에 든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오뒤세우스가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저를 도와주세요. 여기가 도대체 어딘가요? 이곳 사람들은 친절한가요?"

젊은이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이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하시다니 그대도 어지간히 아둔한 사람이군요? 여기가 어디냐니? 이타카 섬이 아니오? 저 트로이아 전쟁터까지 이름이 알려진 이타카도 모르시오?"

조국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안 오뒤세우스의 가슴속에 기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오래 조국을 떠나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떠날 때 어린아이였던 젊은이들이 19년 세월이 흐른 뒤에는 어떤 청년들이 되어 있을 것인지.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타카 왕좌에는 어쩌면 자기 아들이 아닌 엉뚱한 인물이 앉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그 젊은이에게도 자기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

젊은이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어디에서 온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오뒤세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크레타 섬 사람이오."

그러자 젊은이로 모습을 한 아테나 여신이 또 물었다.

"아니, 크레타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보물과 함께 이타카에 와 있습니까?

어째서 이타카에 와 있으면서도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것입니까?"

오뒤세우스는 둘러대기 시작했다.

"나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했던 크레타 사람으로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귀국했는데 크레타왕자 중의 하나가 내 전리품을 빼앗으려 했지요. 그래서 그 왕자와 싸우다가 그만 오아자를 죽이고 말았어요. 급하게 보물을 챙겨 가지고 포에니키아 장삿배를 타고 도망쳤지요. 그 배의 선장은 나를 퓔로스에다 내려 주기로 약속했는데 엉뚱한 길로 들어섰어요. 그래서 이 섬에 내려 잠을 잤는데, 자고 있을 동안 나만 이렇게 남겨 놓고 떠난 모양이오."

오뒤세우스의 설명에 젊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뒤세우스도 따라 웃다가 자세히 보니 젊은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름다우면서도 위풍당당한 아테나 여신이 서 있었다.

아테나 여신이 오뒤세우스를 놀렸다.

"꾀많은 오뒤세우스라고들 하더니 과연 잘도 둘러대는구나.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냐? 트로이아에서 그렇게 여러 차례 그대를 도와주었고 알키노스 왕의 궁전에서도 그렇게 여러 번 그대를 도와주었는데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냐?"

오뒤세우스는 아테나 여신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다가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바다에서 온갖 고초를 당할 때는 저를 도와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여신을 저의 수호 여신이라고 믿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제가 어떻게 제 조국에 돌아왔다는 말씀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을 장님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포세이돈 신을 노하게 하여 바다에서 그런 고초를 당했다. 포세이돈 신은 내 아버지 제우스신의 아우가 아니냐? 내가 어떻게 숙부와 맞서면서까지 그대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이제 그대는 그대의 나라로 돌아왔다. 이제 나도 마음대로 그대를 도와 줄 수 있다. 둘러 보라. 이 땅이 그대의 조국이지 아닌지, 어디 한번 둘러보라."

여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옥하던 잿빛 구름의 장막이. 해가 솟으면서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이 말끔히 걷혔다.

오뒤세우스는 주위의 낯익은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가 잘 알고 잇는 풍경. 그가 오래 사랑해 온 풍경이었다.

곶 안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 항구, 해변에 깎아지른 듯이 솟은 울창한 숲의 산. 활을 쏘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잇는 바다 요정의 동굴. 은빛 올리브 나뭇잎에 가려진 그 동굴의 입구......모두가 낯익었다.

오뒤세우스는 목이 메일 듯한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무릎을 꿇고 까실까실한 조국의 흙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의 기쁨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아테나 여신이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돌아왔지만 이 나라 형편은 말이 아니다. 그대의 아내 페넬로페는 슬픔에 잠겨 있다. 궁전에는 왕비와 결혼하자고 조르는 불한당들이 들끓고 있다. 그대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지만 아직 어려서 어머니를 도울 수가 없다. 게다가 텔레마코스는 지금 그대의 소식을 들으려고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궁전에 가 있다."

오뒤세우스는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외쳤다.

"여신이시여, 지금부터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먼저, 사람들 눈에 뛰기 전에 이 보물을 감추기로 하자. 사람들이 이 보물을 보면 그대의 정체를 궁금하게 여길 것이 아닌가?"

아테나 여신과 오뒤세우스는 파이아케아 섬나라에서 가져온 보물을 동굴로 옮겼다.

여신은 거대한 바위를 움직여 동굴의 입구를 단단히 막았다.

그런 다음 여신은 마법으로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바꾸어 주었다.

그가 입은 훌륭한 겉옷은 누더기 숫사슴 가죽옷으로 바꾸었다.

여신은 이어서 오뒤세우스의 살 같을 주름지게 만들고, 눈빛도 흐릿하게 만들었다.

오뒤세우스의 모습은 영락없이 트로이아의 국보를 훔치러 성안으로 들어갈 당시의 거지 모습 그대로였다.

", 이제 섬을 가로질러 그대가 부리던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집으로 가라. 그는 그대의 집안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사람이다. 그대는 일단 그 집네 몸을 숨기고 있거라. 그러면 나는 메넬라오스의 궁전으로 가서 텔레마코스를 불러오겠다."

말이 끝나자마자 아테네 여신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문득 불어온 바람 한 자락이 여신이 있었던 흔적을 대신했다.

오뒤세우스는 내륙으로 통하는 산길로 걸음을 옮겼다.

오뒤세우스가 왕궁의 돼지우리에 이르렀을 때 에우마이오스는 문턱에 쭈그리고 앉아 소가죽으로 신발을 만들고 있었다.

에우마니오스가 기르고 있던 개들이 나그네의 모습을 보고는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이 짖어댔다.

에우마이오스가 달려 나와 돌을 던져 개들을 쫓았다.

에우마이오스는 거지꼴을 한 오뒤세우스를 친절하게 맞아들여 자기 오두막으로 안내하고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놓았다.

에우마이오스는 실로 오래간만에 자기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만남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이 트로이아 전쟁을 끝내고 귀국하는 길에 실종되었다는 이야기, 불량한 귀족 청년들이 왕의 궁전을 차지하고 왕비에게 결혼을 조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했다.

돼지치기는 실종된 자기네 왕을,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오뒤세우스는 노인의 이야기를 끈기 있게 다 듣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

"나도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들은 소문이 있소. 그대의 주인은 살아 있어요. 나는 그가 지금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에우마이오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거지가 듣기 좋도록 말을 꾸며서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역시 나그네 거지를 대접하는 뜻에서 오뒤세우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었다.

이윽고 젊은 돼지치기들이 들판에서 놓아 먹이던 돼지 떼를 끌고 우리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 때가 되자 에우마이오스는 돼지고기를 구워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 오뒤세우스 앞에다 차려 주었다.

식사가 끝났을 때 오뒤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로 노인을 기쁘게 해주었다.

두 사람은 잠들 때까지 트로이아 전쟁과 오뒤세우스 이야기는 계속했다.

그즈음 아테나 여신은 메넬라오스 궁전에 머물고 있는 텔레마코스 곁에 있었다.

텔레마코스는 어머니의 안부와 이타카의 형편이 궁금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테나 여신은 텔레마코스에게 간곡하게 일렀다.

"너의 어머니도 이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래지 않아 귀족 건달들 중 하나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니 어서 빨리 귀국해라. 하지만 올 때와는 다른 뱃길로 가야 한다. 안티노오스의 배가 사모스 섬의 절벽 밑에서 너의 배를 기다리고 있다. 안티노오스는 너를 해치려고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타카에 도착하거든 뱃사람들은 궁전으로 보내도 좋다. 하지만 너는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돼지우리로 가거라. 에우마이오스는 아직까지도 너와 너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이다."

이튿날 아침 텔레마코스와 그의 친구 피시스트라토스는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에게 작별을 고했다. 헬레네는 손수 만든 비단 옷 한 벌을 텔레마코스에게 안겨 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은, 때가 되면 네 신부에게 입혀라. 그때가 오기까지는 네 어머니에게 맡겨 두어라. 너에게 기쁜 일만 일어나기를 빌겠다. 이 헬레네가 온 사랑을 기울여 빌겠다."

텔레마코스 일행이 떠날 차비를 하고 있을 동안 그들의 마차는 궁전 문 앞에 서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을 어서 빨리 내닫고 싶어서 안달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독수리 한 마리가 산 위에서 날아 내려왔다.

독수리는 가까운 풀밭에서 놀고 있던 흰 거위 한 마리를 채어, 말의 잔등 위를 스치듯이 날아 공중으로 올라갔다.

피시스트라토스가 하나의 점이 되어 멀어져 가는 하늘의 독수리를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좋은 징조이기는 합니다만. 전하, 저것은 전하께 좋을 일이 생길 징조입니까. 아니면 저와 텔레마코스에게 좋은 일이 생길 징조입니까?"

헬레네가 메넬라오스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너희 둘에게 좋은 일이 생길 징조다. 잠깐만......오뒤세우스가 오랜 방황 끝에 조국으로 돌아와, 자기 궁전에서 살진 건달들에게 복수한다는 뜻이다."

텔레마코스는 메넬라오스 왕과 헬레네 왕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고는 피시스트라토스와 나란히 마차에 올라 고향을 향해 길을 떠났다.

다음 날 두 사람은 퓔로스에 이르렀다.

피시스트라토스는 마차를 항구로 몰아 거기에서 기다리던 배 앞에서 메넬라오스의 궁전에서 받았던 선물과 함께 텔레마코스를 내려 주었다.

텔레마코스가 퓔로스의 궁전에 들르지 않았던 것은 궁전에 들르면 네스토르 왕이 틀림없이 며칠 더 묵어가라고 조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텔레마코스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뱃사람을 모아 거기에서 바로 이타카를 향해 돛을 올렸다.

이타카 해변에 이르자 그는 아테나 여신이 가르쳐 준 대로 뱃사람들은 마을로 올려보내고 자신은 걸어서 돼지치기의 집으로 향했다.

오뒤세우스와 돼지치기가 아침 식사를 짓기 위해 불을 지피고 있을 때였다.

돼지치기의 집으로 오르는 길에 한 젊은이가 나타났다. 개들이 우르르 달려나갔다.

짖어대는 개도 있었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텔레마코스에게 꼬리를 흔드는 개도 있었다.

돼지치기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포도주 그릇이 엎질러졌다. 돼지치기는 젊은이에게 달려갔다.

오뒤세우스가 젊은이 쪽을 바라보았다.

헬레네의 말대로 젊은이의 모습은 자신은 물론이고 아버지 라에르테스와도 너무나 흡사했다. 그는 북받쳐 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신이 트로이아로 떠날 당시 페넬로페의 품속에 있던 아들이었던 것이다.

돼지치기는 오래 떠나 있던 아들은 맞아들이는 것처럼 텔레마코스를 껴안았다.

텔레마코스는 노인의 등을 두드리면서 물었다.

"내가 때맞추어 온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어머니의 결혼을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

돼지치기는 텔레마코스의 손을 끌고 자기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거지로 변장한 오뒤세우스는, 텔레마코스가 문턱을 넘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왕자 텔레마코스는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손짓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앉아 있어도 좋아요. 넓어서 그대가 일어서지 않아도 불 가에 앉을 수 있겠어요."

돼지치기는 검불 한 아름을 안아다 놓고 그 위에 양의 털가죽을 깔아 텔레마코스가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세 사람은 화덕에 둘러앉아 차가운 돼지고기와 보리빵, 나무 그릇에 따른 포도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중에 왕자 텔레마코스와 돼지치기는 늙은 거지를 장차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의논했다.

오뒤세우스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 골몰해 있는 데다 어찌나 음식을 맛있게 먹었던지 두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결국 두 사람은 텔레마코스가 그 늙은 거지를 궁전으로 데려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꼴로 궁전에 들어갔다가는 귀족 건달들로부터 욕을 먹거나 모욕당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늙은 거지는 돼지우리에서 지내게 되었다.

왕자는 늙은 거지 몫의 옷과 음식을 보내어 에우마이오스의 짐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거지 문제가 결정되자 텔레마코스는 돼지치기를 궁전으로 보내어 자기가 무사히 먼 여행길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게 했다.

돼지치기가 오두막을 떠난 직후 개들이 일제히 짖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끙끙거리면서 꼬리를 내리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와 숨었다.

눈이 유난히 빛나는 아테나 여신이 문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텔레마코스의 눈에는 아테나 여신이 보이지 않았다.

오뒤세우스와 개들의 눈에만 보였던 것이다.

오뒤세우스가 오두막 밖으로 나가 여신을 맞았다. 여신은 오뒤세우스에게 말했다.

"이제 둘 뿐이니, 아들에게 그대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좋겠다."

여신은 이러면서 늘 들고 다니는 황금 막대기로 오뒤세우스의 머리를 건드렸다.

오뒤세우스는 여느 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의 누더기 사슴 가죽옷은 왕이나 입을 수 있는 으리으리한 용포로 변했다.

그는 돌아서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불 가에 앉아 있던 텔레마코스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늙은 거지를 보고는 벌떡 일어나면서 물었다.

"어르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세 잡수신 노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변하실 수 있습니까? 어르신께서는 영생불사하시는 신이신 모양이군요?"

"신이 아니다. 네 아버지가 사람들 눈을 속이려고 거지로 변장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본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텔레마코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내 아버지이실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부탁입니다. 내 아버지 오뒤세우스가 아니시거든 공연한 거짓말로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 모자를 더욱 슬프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거짓이 아니다. 내 말을 믿어라. 내가 바로 오뒤세우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이 사람 말고 오뒤세우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 적도 없었다."

텔레마코스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오뒤세우스는 아들에게 자기가 겪었던 모험 이야기이며, 바다 요정의 동굴에 숨겨 둔 파이아케아 인들로부터 받은 보물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궁전에 몰려들어 행패를 부린다는 건달들은 모두 몇 명이고,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자세하게 물어보았다.

"백여덟 명입니다. 저를 배반하고 건달 패에 붙은 제 하인도 하나 있습니다. 놈들은 어머니에게 결혼하자고 조르러 올 때도 꼭 칼을 차고 옵니다. 무예의 수준도 상당합니다. 여느 때는 방패나 갑옷 같은 것으로 무장하지만 어머니에게 결혼을 조를 때는 무장하지 않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놈들을 물리칠 수 있다. 아테나 여신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분만 우리와 함께 하시면 무장한 적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두 사람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텔레마코스는 다음 날 아침에 궁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텔레마코스에게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태도를 취할 것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텔레마코스는 건달패거리들과 공개적인 말썽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뒤세우스가 아들에게 당부했다.

"놈들과의 싸움을 자제하도록 하여라. 네가 궁전으로 올라간 다음 날 내가 거지로 변장하고 올라가겠다. 내가 신호를 보내거든 놈들의 무기는 연회장 벽장에 숨겨 버리도록 하여라."

"놈들이 무기를 저희들 손 닿는 데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뭐라고 할까요?"

"고기 구울 때 나는 연기에 노출되면 기름이 낀다고 해라. 그래도 곁에 두려고 하거든, 네 어머니의 손님들이 술에 취해서 싸우면 안 되기 때문에 안전한 곳에 치워 두어야 한다고 우겨라."

두 사람이 모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또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오뒤세우스가 대답했다.

"연회장 구석 자리에 앉은 거지는 거지일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거라.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나의 정체가 알려지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12. 구석 자리의 거지

 

텔레마코스는 궁전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갔을 때 귀족 건달들이 창던지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날 오전에 벌어질 잔치를 위해 돼지를 잡는 건달들도 있었다.

건달들은 겉으로는 텔레마코스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하지만 그들은 텔레마코스의 변한 모습에 적잖아 놀라는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소년이 줄로만 알고 있던 텔레마코스가 그들에게 위협을 가할 만큼 어엿한 대장부가 되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건달들은 적당한 때가 오면 텔레마코스를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텔레마코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던 안티노오스 일당이 사모스 섬의 절벽 밑에서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텔레마코스는 알고 있었을 뿐, 내색은 하지 않았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로부터 아들이 왔다는 사실을 미리 통보받고 있던 어머니 페넬로페는 자기 방에서 아들을 맞았다.

페넬로페는 건달들에 대한 분노와 아들을 맞는 기쁨이 어우러진 복잡한 감정을 눈물로 표현했다. 텔레마코스는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자기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음에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아침까지 아버지 오뒤세우스와 함께 있다가 아버지는 돼지치기의 오두막에 남겨두고 왔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당부를 생각하고 침묵을 지켰다.

한편, 에우마이오스는 텔레마코스의 심부름을 마치고 다시 돼지치기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그가 오기 직전에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오뒤세우스의 모습을 늙은 거지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에 그는 옛 주인을 알아볼 수 없었다.

늙은 거지는 한시바삐 궁전에 들어가고 싶다면서 우겼다.

"아무것도 없는 산, 풀을 뜯고 있는 동물 구경은 이제 신물이 납니다. 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 좋습니다. 부디 데리고 가 주십시오."

에우마이오스는 돼지 떼는 젊은 돼지치기들에게 맡기고 거지 노인에게 지팡이를 하나 주어 함께 산을 내려갔다.

마을 가까이 왔을 때 두 사람은 궁전의 양치기 멜란티오스를 만났다.

멜란티오스는 건달 중의 누군가가 왕이 되면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 건달 무리에 붙은 양치기였다.

그런 멜란티오스는 오뒤세우스와 텔레마코스에게 변함없이 충성을 바치는 에우마이오스를 식충이, 부랑자라고 놀리면서 오뒤세우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오뒤세우스는 맨손으로도 멜란티오스를 이길 수 있었지만, 정체가 드러날까 봐 꾹 참았다.

두 사람은 앞을 가로막는 멜란티오스를 피해 걸음을 재촉했다.

멜란티오스는 뒤에서 두 사람을 향해 욕지거리를 해댔다.

멜란티오스로부터 모욕을 당한 것 말고는 별다른 일 없이 두 사람은 궁전 앞에 이르렀다.

궁전의 문 옆에는 논밭으로 실려 갈 똥 무더기가 있었다.

따뜻한 똥 무더기 위에 늙은 개 한 마리가 다리를 뻗고 누워 졸고 있었다.

한때는 알아주는 사냥개였지만 두 사람이 보았을 당시에는 개벼룩투성이인 비루먹은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늙은 개가 고개를 들고는 지나가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뒤세우스와 늙은 개의 눈이 마주쳤다.

늙은 개는, 거지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도 오뒤세우스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늙은 개는 일어날 힘이 없어서 귀와 꼬리를 흔들었을 뿐이었다.

오뒤세우스는 그 개를 잘 알았다.

그가 검은 배를 몰고 트로이아로 떠날 당시에는 강아지였던 아르고스였다.

오뒤세우스는 손등으로 개의 눈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멋진 개가 똥 무더기 위에 이렇게 누워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때는 알아주던 사냥개였을 텐데..........."

에우마이오스가 말대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한때는 굉장했지요. 한창때는 젊은 사냥꾼들이 이 개를 데리고 나가 사슴 사냥, 들염소 사냥, 토끼 사냥도 했답니다. 하지만 이 개의 주인이던 오뒤세우스 왕께서 외국에서 세상을 떠나신 뒤로는 하인들이 이 개를 전혀 보살피지 않았지요. 더구나 궁전이 저렇게 난장판이 된 뒤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요."

오뒤세우스는 자기가 기르던 그 사냥개 아르고스 옆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는 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늙은 개의 지친 머리를 자기 무릎으로 바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이 많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수척한 개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19년 동안이나 기다려 오던 주인을 만나는 순간 아르고스는 숨을 거둔 것이었다.

오뒤세우스는 에우마이오스의 뒤를 따라 궁전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기 것인데도 불구하고 연회장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연회장에서는 건달들이 수금 가락에 맞추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나그네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문턱에 앉아, 향나무 문설주에 등을 기댔다.

텔레마코스는 화로 옆에 있는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오뒤세우스가 문턱에 낮는 것을 보고는 에우마이오스에게 명하여, 그가 보리빵과 돼지고기 덩어리 가까이에 다가갈 수 있게 했다.

오뒤세우스는 다가가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

먹으면서 그는 건달들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남을 동정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저분한 주머니를 꺼내 들고 지나가면서 건달들 앞에다 그 주머니를 내밀며 동냥해 줄 것을 부탁했다.

빵 껍질이나 뼛조각을 넣는 귀족 건달도 있었다.

사모스 섬에서 텔레마코스를 기다리던 젊은 귀족 아티노오스는 의자를 하나 들어 오뒤세우스의 어깨를 내리쳤다.

"여기 계시는 이 안티노오스 나으리가 결혼식을 맞기 전에 죽음을 맞게 되기를......"

오뒤세우스가 중얼거렸다. 좌중이 심상치 않게 술렁거렸다.

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 있게 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들은 나그네를 잘못 대접하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 잘 알았다.

신들이 종종 나그네로 변장해서 사람들을 시험하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잔치 자리에는 하녀들도 있었다.

따라서 연회장에서 있었던 이 작은 일이 왕비 페넬로페의 귀에 들어간 것은 당연했다.

페넬로페는 자기 궁전에서 나그네가 푸대접을 받은 것에 대해 화를 내었다.

더구나 오뒤세우스가 트로이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실종된 뒤로는 이타카를 지나가는 나그네나 여행자는 반드시 불러 지아비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느냐고 물어오던 페넬로페였다.

페넬로페는 하녀를 보내어 에우마이오스에게 그 나그네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오게 했다.

왕비의 부름을 받은 오뒤세우스가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미 연회장에서 한 차례 얻어맞은 사람입니다. 왕비에게 청혼하려는 저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기 전에는 왕비마마의 방으로는 가지 않겠습니다. 갔다가 저 사람들에게 무슨 변을 또 당하게요?"

에우마이오스의 말을 전해 들은 왕비는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왕비는 조용해지면 연회장으로 내려가 거지 노인을 만나겠노라고 했다.

오뒤세우스는 연회장 문턱에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평화를 즐기면서 그때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또 하나의 거지가 연회장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새로 들어온 거지는 한동안 궁전 근처를 주름잡던 이로스라는 이름의 덩치가 큰 거지였다.

이로스는 덩치만 컸지 근육도 시원찮고 기백도 시원찮은 거지였다.

이로스는 생전 처음 보는 거지가 문턱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소리쳤다.

"꺼져. 내 손으로 끌어내기 전에."

오뒤세우스가 조용히 응수했다.

"문턱이 넓잖아요? 둘이 앉아도 되겠어요."

이 말에 화가 난 이로스가 얼굴이 벌게져 시근덕거리면서 외쳤다.

"여기에 계속해서 앉아 있고 싶거든 일어나서 나와 한판 붙자."

식사를 끝내고 춤판을 벌이려던 귀족 건달들은, 두 거지에게 싸움을 붙여 놓고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귀족 건달들은 손뼉을 치면서 싸움을 부추겼다.

이기는 거지에게는 남는 음식을 한 보따리 싸주고, 거지왕이라고 불러 주겠다고 했다.

아무도 거지왕의 영역에서는 구걸을 못 하게 해주겠다고 말하는 건달도 있었다.

싸움을 피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오뒤세우스는 윗도리를 벗었다.

오뒤세우스의 팔과 어깨의 근육을 본 이로스는 아무래도 싸워 봐야 얻어맞기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꽁무니를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귀족 건달들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소리를 지르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로스가 오뒤세우스의 어깨를 향하여 되지도 않은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오뒤세우스의 주먹은 이로스의 주먹이 날아오기도 전에 정확하게 이로스의 왼쪽 귀밑에 꽂혔다.

이로스는 연회장 바닥에 나가떨어져 코와 입으로 피를 쏟았다.

오뒤세우스는 이로스를 끌어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대게 했다.

이로스는 등을 기대고 앉은 채 피를 흘렸다.

귀족 건달들은 배를 잡고 웃으면서 오뒤세오스를 새 <거지왕>이라고 부르면서 환호했다.

환호하는 귀족 건달들에게 오뒤세우스가 한마디 했다.

"궁전의 연회장을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다니 참 한심하십니다. 모두 댁으로 돌아가세요. 이 궁전의 주인이 돌아와 자기 궁전 연회장이 돼지우리 꼴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좋아할까요?"

오뒤세우스의 말에 화가 난 귀족 건달들 중 에루뤼마코스라는 건달이 걸상을 하나 집어 오뒤세우스를 향해 던졌다.

오뒤세우스가 살짝 몸을 틀자 걸상은 벽 앞에 놓여 있던 찬장에 가서 맞았다.

찬장에 놓여 있던 무수한 포도주 그릇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건달들은 그게 재미있었던지 다시 소리를 질러 환호했다.

실컷 먹고 마신 젊은 건달들이 하나둘씩 저희들 집으로 돌아갔다.

오뒤세우스와 테레마코스는 벽에 걸려 있던 무기를 모조리 모아 지하 창고로 옮기고는 문을 자물쇠로 채웠다.

일이 끝나자 텔레마코스는 궁전 안채에 있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오뒤세우스는 벽난로 불빛이 비칠 뿐 여전히 어두운 연회장 구석 자리에서 페넬로페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녀들이 먼저 내려왔다. 하녀들은 저희들끼리 웃고 떠들어대면서 잔치 자리를 치웠다.

하녀들은 거지가 그때까지도 어두운 구석 자리에 있는 것을 알고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하녀 가운데 하나인 멜렌토는 거지를 쫓아내려고 거지의 귀밑에다 횃불을 갖다 대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연회장으로 들어오던 페넬로페가 하녀를 꾸짖고는 그 횃불로 연회장 중앙의 난로에 불을 지피고는 그 옆에 의자를 갖다 놓게 했다.

오뒤세우스가 먼저 의자에 앉았다.

하녀들이 물러가자 페넬로페도 희뿌연 양가죽을 깐 자기 의자에 앉았다.

페넬로페가 먼저 그에게 이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정체를 밝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오뒤세우스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저는 크레타의 왕자입니다만 트로이아 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습니다. 오뒤세우스 왕께서는 트로이아로 가시는 길에 저희 나라에 들르셨지요. 왕께서 저희 궁전에 머무시는 동안 이타카 군사들은 폭풍에 부서진 배를 수리했고요......"

페넬로페는 오래전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꿈에도 그리던 지아비 이야기여서 눈물을 떨구었다.

하지만 당시 페넬로페를 찾아와 오뒤세우스를 이야기하는 나그네들 중에는 가짜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페넬로페는 거지 노인을 시험하기 위해서 물었다.

"오뒤세우스 왕이 어떤 옷을 입으셨던가요? 나는 남편에 관한 이야기에 목말라 있는 사람이랍니다."

오뒤세우스는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그는 진지한 말투로 왕비의 물음에 대답했다.

"보라색 겹 겉옷을 입고 계셨지요. 어깨에서 겉옷을 여미는 것은 집게가 두 개 달린 브로치 였고요. 브로치는 암사슴을 덮치는 사냥개 모양이었습니다. 겉옷 밑에는 양파 껍질처럼 부드러운 속옷을 입고 계셨고요."

페넬로페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떠날 당시 오뒤세우스에게 그 속옷과 겉옷을 입혀 준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뒤세우스가 왕비를 달랬다.

"마마, 울지 마십시오. 그 뒤로 불운이 닥쳐 저 역시 이렇게 방랑하고 있습니다만 오뒤세우스 왕 소식은 그 뒤에도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소문으로는 뱃사람들은 모두 잃었지만, 왕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지금 고향으로 돌아오고 계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페넬로페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헛된 믿음으로 보낸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지 노인이 불어넣은 희망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거지 노인이 고맙게 느껴졌던 페넬로페는 왕실의 유모인 에우뤼클레이아를 불러 뜨거운 물로 노인의 발을 씻겨 주라고 명령했다.

거지 노인의 발에는 먼지가 잔뜩 묻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물집이 잡혀 있기까지 했다.

에우뤼클레이아가 뜨거운 물이 든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그 늙은 유모는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오뒤세우스는 불에 덴 듯이 물러앉으면서 불빛에 비치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에우뤼클레이아가 합쭉한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오뒤세우스의 발을 끌었다.

"내 비록 어리석은 늙은이지만 손님의 발을 씻기는 일에는 보람을 느낀답니다. 타향 땅을 떠도는 우리 주인님에게도 이렇게 해 주는 하녀가 있어야 할 텐데요. 나그네께서도 풍채가 좋아서 몸을 깨끗이 씻고 좋은 옷을 입으면 우리 주인님처럼 보이겠네요. 그래서 모습도 비슷하고 ……손하며 발하며 ……"

"제가 왕과 함께 있는 것을 본 사람도 그런 소리를 합디다."

오뒤세우스가 둘러대었다.

중얼거리면서 발을 씻겨 주던 하녀가 무엇에 놀랐는지 흠칫거리면서 물러섰다.

거지 노인의 누더기 자락이 열리는 순간, 무릎에서 시작되어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길고 하얀 흉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뒤세우스가 소년 시절 사냥에 따라나섰다가 멧돼지 엄니가 박혀서 난 상처 자국이었다.

오뒤세우스의 유모였던 늙은 하녀가 속삭였다.

", 우리 도련님. , 주인님 ……"

늙은 하녀 에우뤼클레이아는 오뒤세우스가 변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았다.

하녀는 늙은 사냥개 아르고스 다음으로 오뒤세우스의 정체를 알아본 사람이기도 했다.

에우뤼클레이아는 손에 잡고 있던 오뒤세우스의 발을 첨벙 소리가 나게 대야에 떨어뜨리고는 옆에 앉아 있던 페넬로페에게 주인이 돌아왔다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때 아테나 여신이 페넬로페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 버렸다.

아테나 여신이 오뒤세우스의 정체가 밝혀지기는 이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오뒤세우스는 한 손으로는 늙은 유모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모의 귀를 가까이 끌어와서 속삭였다.

"유모, 조용히 하세요. 내가 죽는 것을 바라시오?"

오뒤세우스의 뜻을 이해한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도련님. 조용히 하고 말고요. 돌처럼 가만히 있고말고요."

유모는 이렇게 말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오뒤세우스의 발 씻기를 끝마쳤다.

유모가 발을 씻기고 그 발에다 올리브 기름을 발라 문지른 다음 대야를 들고 나갔을 때에야 페널로페는 거지 노인 쪽에서 시선을 돌리면서 걱정스러워하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오뒤세우스가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저 건달 중 하나를 새 주인으로 섬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바라지도 않은 사람을 골라 시집갈 수 있겠어요?"

오뒤세우스가 엄숙한 말투로 왕비에게 말했다.

"무슨 대회를 여시지요. 거기에서 우승하는 사람에게 시집가시면 되지요."

"페널로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물레가락에 실을 감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물레가락을 떨어뜨리고는 연회장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요. 오뒤세우스의 활이 아직도 궁전 어딘가에 있어요. 오뒤세우스가 아니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쏠 수 없는 활이지요. 한 개도 아니고, 도끼 열두 자루를 나란히 늘어놓고는 화살을 쏘아 열두 개의 고리를 다 지나가게 하고는 했는데 정말 굉장한 재주였지요. 그래요. 활쏘기 대회를 열어야겠어요. 누구든지 내 남편의 활을 구부리고 화살을 쏘아 열두 개의 도끼고리를 모두 지나가게 하면 새 주인으로 모시겠어요.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시집와서 이날 이때까지 살아온 이 궁전에 이별을 고하겠어요."

"그렇다면 내일 대회를 여세요. 이것은 내 생각입니다만, 우승하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 오뒤세우스 왕이 여기에 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페널로페는 한참 거지 노인을 바라보다가 일어나 하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침실로 올라갔다.

 

 

13. 활쏘기 대회

 

오뒤세우스는 궁전 복도에 쌓인 양가죽 더미 위에서 그 날 밤을 보냈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적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지 밤새 그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날이 밝으면 무수한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할 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아테나 여신은 걱정스러워 그를 잠재웠다.

아침 일찍 잠을 깬 오뒤세우스는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 신에게 도와주시기를 빌고, 도와주시겠다면 그 조짐을 미리 보여 달라고 애원했다.

그가 기도를 끝마치자마자 마른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가까이에서는 하녀들이 곡식을 갈고 있었다.

궁전으로 몰려들 귀족 건달들에게 먹일 빵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른 하녀들은 모두 곡식 갈기를 끝내고 들어갔는데 노파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노파는 일하는 속도가 느려 자기에게 맡겨진 일감을 다 해치우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노파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말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오 제우스 신이시여. 저 천둥소리는 어느 복 많은 사람을 도우시겠다는 약속의 증거일 테지요? 저도 그 복을 좀 나누어 가지게 하소서. 내 주인의 연회장에서 빈둥거리는 젊은 귀족들을 위해 곡식을 가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게 하소서. 그 젊은 건달들 때문에 이 늙은이의 뼈가 빠집니다. 이것으로 만드는 음식이 그놈들이 이승에서 먹는 마지막 음식이게 하소서."

천둥소리와 노파의 말에 오뒤세우스는 힘을 얻었다.

오뒤세우스의 가슴에 용기가 샘 솟으면서 팔뚝에도 힘이 올랐다.

오래잖아 하녀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흙으로 된 연회장 바닥을 비질한 뒤 물을 뿌리는 하녀들이 있는가 하면 걸상에다 보라색 깔개를 까는 하녀. 식탁을 닦는 하녀. 하녀의 우두머리인 에우뤼노메의 꼼꼼한 감독 아래 포도주 잔을 닦는 하녀도 있었다.

물을 길러 다니는 하녀들의 발걸음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빨라져 갔다.

돼지우리에서 그 날 잔치에 쓰일 돼지를 몰고 온 돼지치기가 오랜 친구 사이나 되는 것처럼 오뒤세우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염소치기 멜란티오스 역시 그 날 잔치에 쓰일 염소 떼를 몰고 들어오다가 오뒤세우스에게 건방지게 한마디 했다.

"거지 양반. 아직도 여기 있었소? 내가 도와주기 전에 얼른 꺼지는 게 좋을 텐데?"

이어서 소치기 필렉티오스 역시 그 날 잔치에 쓰일 소를 몰고 들어왔다.

그는 거지 노인이 귀족 건달들로부터 모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몹시 분개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오뒤세우스에게 달려가 그의 팔을 잡으면서 인사말을 했다.

"노인장, 내 환영 인사받으세요. 어제는 고약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나 곧 사정이 바뀔 것이오. 그대 같은 분에게도 볕들 날이 올 것이고, 내가 키운 소를 잡아먹는 저 귀족 건달들에게도 내리막길이 있을 것이오."

이어서 귀족 건달들이 시끄러운 거위 떼처럼 무리를 지어 아침 식사가 차려질 궁전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좋아하는 사냥개 몇 마리를 이끌고 사냥 창을 든 텔레마코스도 지나갔다.

텔레마코스는 오뒤세우스에게, 그 날만은 연회장 문턱에서 앉지 말고 당당하게 연회장 안에 자리를 잡으라고 했다.

그는 하녀들에게도 당부하여 오뒤세우스도 당당한 손님인 만큼 여느 손님과 같은 분량의 음식을 차려 주게 했다.

귀족 건달 중의 하나인 크테시포스가 이런 말을 했다.

", 여느 손님과 똑같이 주어야 하고말고, 하지만 나는 거기에다 이걸 보태주고 싶은데 ……"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있는 힘을 다해 소 발 하나를 오뒤세우스에게 던졌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날아오는 소 발을 피했다.

소 발은 그가 등지고 있던 벽에 맞았다.

텔레마코스가 크테시포스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그는 거지 노인이 비록 귀족들과는 의견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왕비의 새로운 신랑으로 뽑히기까지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텔레마코스가 항의한 것과 때를 같이 해서, 난데없는 바람이 불어든 듯한 이상한 분위기가 연회장에 감돌았다.

귀족 건달 중에는 까닭도 모르는 채 깔깔 웃는 건달도 있었고, 질질 짜는 건달도 있었다.

울다가 웃다가 하는 건달도 있었다.

분위기가 그 모양이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테나 여신이 생각한 바가 있어서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귀족 건달 중에 이따금씩 예언자처럼 이상한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다른 귀족 건달들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가엾은 사람들아, 내 눈에는 그대들에게 내리는 어둠의 장막이 보인다. 그대들 뺨이 눈물로 젖은 게 보인다. 통곡 소리가 귀가 아프게 들린다. 벽과 바닥은 피범벅이 되었다. 궁전 앞마당에서 그대들의 영혼이 저승길로 내려가려고 서둘고 있구나. 하늘에서는 태양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건달들은 그 말에 큰 소리로 웃고는, 궁전이 그렇게 어둡거든 마을로 내려가 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예언자 같은 사람이 말을 이었다.

"........암 내려가고말고.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그대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나는 더 이상 그대들 동아리 노릇을 하고 싶지 않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는 연회장을 나가 버렸다.

건달들은 여전히 웃으면서도 팔꿈치로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 다시 텔레마코스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텔레마코스에게 시비를 거는 것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텔레마코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버지 오뒤세우스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페넬로페가 오뒤세우스의 거대한 뿔 활과 화살이 가득 든 화살 통을 들고 연회장에 나타났다.

페넬로페 뒤로는 도끼 상자를 든 하녀들이 따라 들어왔다.

페넬로페는 지붕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 앞에 자리 잡고, 도전적인 눈으로 건달들을 내려다보며 선언했다.

"귀족 여러분, 여러분이 이렇듯 우기시니, 나도 여러분 중 한 분과 결혼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나는 여러분 중의 한 분을 뽑되, 시합을 통해서 뽑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중 어느 분이든 이 활에다 시위를 메우고 화살을 쏴, 한 줄로 서 있는 도끼 열두 개의 고리를 무사히 지나가게 하는 분이 있으면 그분을 나의 새 지아비로 삼겠습니다."

테레마코스가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서면서 첫 화살을 쏘는 권리는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만일에 내가 성공하면, 아무도 내 어머니이신 왕비님을 이 궁전에서 차지할 수 없게 됩니다."

왕자 텔레마코스는 겉옷 자락을 여미어 허리에 쿡 찌르고, 삽을 가져오게 해서 흙바닥에다 길고 좁다랗게 고랑을 팠다.

과녁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랑의 한끝이 아버지 오뒤세우스 자리 앞에 이르게 했다.

고랑이 만들어지자 이번에는 그 고랑을 따라 도끼를 세웠다.

그는 정확하게 한 줄로 늘어섰는지 이따금씩 점검하면서 도끼를 세우고는 흙을 메우고 단단히 다졌다.

과녁이 한 줄로 서자 텔레마코스는 활과 화살을 들고, 바닥보다는 비교적 높은 문턱으로 올라갔다.

화살을 쏘려면 먼저 활시위를 활에다 걸어야 했다.

그는 세 차례나 활시위를 활에다 걸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네 번째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힘을 썼다.

어쩌면 활을 굽혀 시위를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거지 노인이 한 손을 움직임으로써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텔레마코스는 활을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힘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이어서 하나씩 차례로 나섰다.

그러나 나서는 족족 실패였다.

열 사람인가 열두 사람인가가 실패하고 물러섰을 때였다.

안티노오스가 나서서 화로에 나무를 더 많이 가져다 넣게 하고는 기름 항아리를 그 위에 올리게 했다.

뜨거운 기름으로 활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사실 활을 쓰지 않고 둔 지가 하도 오래되어 탄력이 없기는 했다.

안티노오스는 활을 불에 쬐고 거기에다 뜨거운 기름을 바르고는 다시 휘어 보았지만 그 활을 굽히지는 못했다.

연회장에서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와 소치기는 똑같은 광경이 되풀이되는 것이 지겨워 거지 노인 곁을 지나 궁전 안마당으로 나갔다.

오뒤세우스가 가만히 일어나 두 사람을 따라 나갔다.

안마당에 이르자 오뒤세우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만일에 그대들의 주인 오뒤세우스가 돌아온다면 오뒤세우스를 편들겠소, 아니면 저 건달들의 편을 들겠소?"

"오뒤세우스 왕의 편을 들지요.“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에우마이오스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신들이 도우셔서 왕께서 오셨으면...너무 늦지 않게, 때맞추어 오셨으면....."

오뒤세우스가 누더기를 걷고 다리의 흉터를 보여 주면서 물었다.

"이 흉터를 알아보겠는가?"

그 흉터를 바라보는 순간 돼지치기와 소치기의 숨이 멎었다.

한동안 흉터를 내려다보고 있던 두 사람은 기쁨의 울음을 터뜨리면서 오뒤세우스에게 달려들어 친형제 껴안듯이 껴안았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두 사람의 손을 떨어내고는 물러서라고 했다.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그렇게 얼싸안고 있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잘 들어라. 이제 나는 연회장으로 들어간다. 에우마이오스, 그대는 나를 따라와서 내 곁에서 기다려라. 내 차례가 되면 그대가 활과 화살을 가져와 내 손에 들려다오. 말들이 많을 것이다만 못 들은 척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그리고 필렉티오스, 그대는 지금 궁전 안뜰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잠가라. 그런 다음에 내 곁에 와서 기다리도록 하라."

오뒤세우스는 다시 왁자지껄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차례를 맞은 건달이 여전히 그 큰 활을 구부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두 번째로 차례를 맞아 문턱 가까이에 온 안티노오스는 시합을 다음 날로 연기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활 구부리기 시합을 하기 전에 활의 신 아폴론에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그때였다.

문턱 가까이 있던 거지 노인이 자기도 힘과 기술을 시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젊은 건달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건달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건달도 있었다.

"꿈도 크다. 저 영감은 여기에서 너무 잘 먹고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임에 분명하다. 배에 태워 에케토스 왕에게 보내버리는 게 좋겠어. 에케토스 왕은 사람 고기를 즐겨 먹는다니까... 저 영감을 쫓을 방법이 그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여전히 기둥 앞에 서 있던 페넬로페가 목청을 높였다.

침착하면서도 냉정한 목소리였다.

페넬로페는 거지 노인도 다른 귀족과 마찬가지로 연회에 초대된 사람인 만큼, 그가 원한다면 똑같은 기회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감이 성공하면, 왕비께서는 영감과 결혼할 건가요?"

건달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좌중은 다시 웃음판이 되었다.

페넬로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 노인이 그것을 기대하고 기회를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에 성공하면 나는 저 노인에게 '새 옷과 좋은 칼, 좋은 창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저 노인이 어디로 가시든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입니다."

그 말을 받아 텔레마코스가 말했다.

"저 노인이 성공하신다면, 그리고 원하신다면, 여기에 있는 아버지의 활을 드릴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활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페넬로페가 그럴 수는 없다고 하자 텔레마코스는 어머니에게 매정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어머니 방으로 돌아가셔서 하녀들과 함께 실이나 감고 베나 짜십시오. 그것이 여성의 일입니다. 무기와 관련된 일은 남자들의 일인 만큼 남자들에게 맡겨 두시고요."

페넬로페는 놀라움을 가누지 못했다.

아들이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페넬로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년티를 벗지 않은 것 같던 아들이 집주인이나 된 것처럼 말하는 데 충격을 받고 말았다.

페넬로페는 하녀들을 데리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연회장에서 에우마이오스는 활을 집어 오뒤세우스 앞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건달들이 활을 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활을 그 자리에 놓을 듯한 몸짓을 했다

텔레마코스가 에우마이오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건달들의 소리보다 훨씬 우렁찼다.

"에우마이오스, 활을 갖다 드려라! 그대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대의 주인이니 마땅히 내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냐!"

에우마이오스는 그 말에 용기를 되찾고 연회장을 가로질러 활과 화살통을 오뒤세우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오뒤세우스가 그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그는 왕실의 늙은 유모 에우뤼클레이아에게 달려가 여자들 방의 문은 모두 잠그라는 말을 전하고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필렉티오스는 안뜰 문을 잠그고, 배에서 쓰는 밧줄로 단단히 동여매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연회장으로 돌아와, 에우마이오스 곁에 자리를 잡았다.

건달들은 거지 노인 오뒤세우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들은 척도 않고 활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상태를 확인했다.

산양의 뿔로 만든 그 활에는 벌레가 슨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활의 상태에 만족한 오뒤세우스는 활의 한쪽 끝을 발치에다 대고 구부리고는 흡사 음유시인이 수금의 줄을 매는 듯한 부드러운 동작으로 시위를 메웠다.

당혹한 나머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연회장 이곳저곳에서 들려 왔다.

그가 활시위를 퉁겨 보았다. 제비가 짝을 찾을 때 내는 것과 비슷한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는 미리 옆에다 끌어다 놓은 화살통에서 화살 한 개를 꺼내어 시위에 걸고는 의자에 앉은 채로 천천히 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깍지 손을 놓았다.

화살은 날아가 도끼 열두 자루의 고리를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그가 텔레마코스에게 소리쳤다.

"텔레마코스 왕자, 이만하면 이 늙은 거지가 그대 부친 활의 명예를 더럽힌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왕의 연회장에서 잔치를 계속하자면 몇 사람 사냥하고 나서 계속해야 하지 않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걸상에서 일어났다.

전투를 앞둔 병사의 어깨가 그렇듯이 그의 어깨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텔레마코스가 연회장을 가로질러 가서 오뒤세우스 곁에 섰다.

텔레마코스는 사냥창을 들고 있었다.

 

 

14. 건달들의 최후

 

오뒤세우스는 서 있던 자리에서 펄쩍 뛰어 문턱 위로 올라섰다.

발치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어 시위에 메운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번에는 다른 과녁을 쏘겠다. 여기에 있는 어떤 궁사도 쏘아 보지 못한 과녁이다."

겨냥을 마친 그가 화살을 쏘아 보냈다.

안티노오스는 황금 술잔을 들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목에 화살을 맞고 뒤로 나자빠졌다.

황금 술잔이 땡그랑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건달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지거리를 해대면서 눈을 부릅뜨고, 벽에 걸려 있던 방패와 창 같은 무기를 찾았다. 그러나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뒤세우스는 또 하나의 화살을 시위에 걸고 외쳤다.

"이 개 같은 자들아! 네놈들은 내가 트로이아에서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네놈들은 내 집 음식을 축내면서 내 아내를 위협했을 것이다. 형편이 네놈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네놈들은 신들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때가 왔다. 네놈들에게 죽을 때가 온 것이다!"

그러자 건달 중 하나인 에우뤼마코스도 건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칼을 뽑아라! 식탁을 방패 삼아 저항하라. 나를 따르라. 저자를 문턱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는 칼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지르면서 오뒤세우스가 서 있는 문턱 쪽으로 달려갔다.

오뒤세우스가 또 하나의 화살을 날려 보냈다.

에우뤼마코스는 청동 가슴가리개를 차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꼬꾸라지면서 식탁 하나를 쓰러트렸다.

그 바람에 몇 개의 포도주잔이 떨어지면서 바닥으로 포도주가 번졌다.

암피노모스도 공격해 왔다. 텔레마코스가 창을 던져 그를 바닥에 내굴렸다.

그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다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에게 창고로 가서 무기를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오뒤세우스는 또 하나의 건달을 쓰러뜨리면서, 아들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다녀오너라. 화살이 떨어지기 전에 다녀와야 한다."

텔레마코스가 전속력으로 내달았다.

잠시 후 텔레마코스가 방패와 창과 투구를 한 아름 안고 왔다.

오뒤세우스와 텔레마코스 자신. 그리고 에우마이오스와 필렉티오스 몫이었다.

그들은 오뒤세우스가 쏘아 보내는 화살의 엄호를 받으면서 투구를 쓰고 무기를 나누었다.

오뒤세우스는 화살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나머지 셋의 엄호를 받으면서 투구를 쓰고 창을 잡았다.

그러나 염소치기 멜란티오스 역시 창고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다.

건달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면 자기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멜란티오스는 창고로 숨어 들어갔다.

잠시 뒤 그는 나귀 짐으로 한 짐은 될 만한 갑옷과 창을 짊어지고 돌아왔다.

건달 무리 속에 무장한 건달이 늘어가고 있는 것을 안 오뒤세우스는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와 소치기 필렉티오스를 불러 무기 창고로 가서 누가 무기를 꺼내와 건달들을 돕고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두 사람이 창고 쪽으로 달렸다.

두 사람은 화물 묶는 밧줄로 멜란티오스를 꽁꽁 동여매고 밧줄의 한쪽 끝을 천장의 들보에다 걸고는 끌어당겼다.

멜란티오스의 몸이 공중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멜란티오스를 그렇게 매달아 놓고는 싸움이 끝난 뒤에 주인 오뒤세우스로 하여금 적당한 벌을 내리게 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오뒤세우스와 텔레마코스가 싸우고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문을 등진 네 사람 대 건달 무리의 싸움은 점점 치열해져 갔다.

아테나 여신이 다시 한번 나타났다.

이번에는 오뒤세우스 왕의 어린 시절 친구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난 아테나 여신은 오뒤세우스에게 힘을 내라고 외쳤다.

흡사 마차 경기에서 마부가 한편인 동료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소리를 지른 아테나 여신은 이번에는 제비로 둔갑하여 연회장 대들보 위에 앉았다.

여신은 연회장 곳곳이 잘 보이는 대들보 위에서 마법으로 오뒤세우스를 도왔다.

안티노오스가 죽고 난 뒤부터 무리를 지휘한 건달은 무리 중에서 힘이 가장 센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아겔라오스였다.

아겔라오스의 지휘 아래 건달들은 한꺼번에 여섯 개씩의 창을 던졌는데 아테나 여신은 이 여섯 개의 창 모두가 과녁에서 빗나가게 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를 비롯한 네 사람의 창은 반드시 건달을 넷씩 쓰러뜨리게 했다.

건달들이 던진 창에 텔레마코스가 상처를 입었다. 긁힌 정도의 아주 가벼운 상처였다.

또 하나의 창은 에우마이오스의 방패에 맞은 뒤 그의 어깨를 찢어 놓고 바닥에 떨어졌다.

문 앞에 버티고 선 오뒤세우스 부자와 두 용사 앞으로 몰려드는 건달들은 수가 워낙 많았다.

따라서 겨냥하지 않고 던져도 반드시 한 둘씩은 쓰러졌다.

던지는 창이 바닥나자 오뒤세우스 일행은 칼을 뽑아 들었다.

오뒤세우스를 선두로 네 사람은 적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면서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대들보에 앉아 있던 아테나 여신은 다시 모습들 바꾸어 이번에는 아이기스 방패를 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이기스 방패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특별한 방패였다.

건달들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은 오뒤세우스의 공격에 맞서는 대신 등에 떼에 쫓기는 가축 떼처럼 구석자리로 쫓겨가 거기에 오구구 모여 섰다.

네 사람은 구석으로 따라 들어가면서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찔렀다.

왕실의 전령 메돈은 건달 편에 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한편, 되도록 왕실에 충성을 다하려고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는 싸움이 계속될 동안 소가죽을 뒤집어쓰고 식탁 밑에 숨어 있다가 기어 나와 텔레마코스의 발치에 몸을 던지면서 자비를 빌었다.

음유시인 페미오스는 수금을 든 채로 오뒤세우스 앞에 무릎을 꿇고는 외쳤다.

"제가 강요에 못 이겨 저들을 위해 노래를 부른 죄밖에 없다는 것은 왕자님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전하를 위해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의 평생소원이었습니다."

오뒤세우스는 두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고는 안뜰로 보내 왕실의 신전 앞에 엎드려 있게 했다.

오뒤세우스 왕은 다시 전투태세를 정비했다. 그러나 싸움은 끝난 뒤였다.

마지막 건달까지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건달들의 시체는 연회장에 쌓여 거대한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흡사 그물로 건져 올려 물가 모래밭에 쌓아 둔 물고기 무더기 같았다.

텔레마코스가 달려가 왕실의 늙은 유모 에우뤼클레이아를 데려왔다.

에우뤼클레이아는 피투성이가 되어 도살자처럼 서 있는 오뒤세우스와 적의 시체 더미를 보고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외마디 소리는 곧 승리를 기뻐하는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오뒤세우스가 그런 유모를 꾸짖었다.

"죽은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환호성을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서 기쁘다고 하는 것은 좋지만, 시체 앞에서는 조용히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뒤세우스는 텔레마코스와 하인들을 시켜 시체를 모조리 안뜰로 끌어내게 했다.

그리고는 하녀들의 우두머리 에우뤼노메의 감독 아래 연회장을 깨끗이 치우게 했다.

하녀들은 바닥의 피를 닦고 벽과 의자와 식탁의 피도 말끔히 씻어냈다.

오뒤세우스는 하인들에게 멜란티오스를 끌어내어 안뜰에서 죽이게 했다.

하인들은 멜란티오스의 피도 말끔히 닦았다.

오뒤세우스는 불에다 유황을 넣어 유황 연기로 연회장을 소독했다.

밖에서 잠그어 두었던 여자들이 지내는 안뜰 문도 활짝 열렸다.

그 문이 열렸을 당시 주위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페넬로페의 하녀들이 횃불을 들고 연회장으로 내려왔다.

하녀들이 옛 주인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녀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오뒤세우스에게 다가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오뒤세우스도 그들 하나하나를 알아보았다.

젊은 하녀들이 아니라, 그가 트로이아로 떠날 당시부터 페넬로페를 보살펴 온 아주 나이 많은 하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페넬로페 자신은 연회장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아테나 여신이 페넬로페를 재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우뤼클레이아는 옛 주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에우뤼클레이아는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면서 페넬로페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뛰어 올라가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내려오셔서 그토록 보고 싶어하시던 광경을 좀 보세요. 오뒤세우스 왕께서 당신의 연회장으로 돌아오셔서 건달들을 모조리 죽이셨답니다."

페넬로페가 일어나 앉아 늙은 유모를 나무랐다.

"유모,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요. 유모는 지금 내 잠을 깨웠어요. 오뒤세우스 왕이 트로이아로 떠난 이래 가장 달콤한 잠이었는데."

유모도 지지 않았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랍니다, 마마. 오뒤세우스 왕께서 연회장에 와 계시다니까요. 건달들로부터 그토록 모욕을 당하던 거지가 바로 오뒤세우스 왕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텔레마코스 왕자님은 벌써부터 아버님을 알고 있었어요. 말씀드리지 않던가요?"

페넬로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늙은 유모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페넬로페에게는 너무나 환상적인 소식, 꿈 같은 소식이었다.

페넬로페는 하도 엄청난 소식이어서 믿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슨 증거로 오뒤세우스 왕이 오셨다고 하는 것이오? 악행을 일삼은 건달들을 치시려고 어느 신께서 그분의 모습을 하고 오신 것이 아니던가요? 아니면 내 지아비가 먼 데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을 아는 어떤 사악한 인간이 오뒤세우스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랍디까?"

"그렇다면 말씀드리지요. 나는 그분의 다리에 나 있는 흉터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어느 신, 어느 인간이 사냥터에서 얻은 그 흉터까지 흉내 낼 수 있답니까?"

유모가 왕비를 향해 소리쳤다.

페넬로페는 믿을 수가 없었다.

페넬로페는 심호흡을 하고는 부르르 떨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려가서 내 아들을 만나 보겠어요. 건달들이 죽었다는 것도 내 눈으로 확인하지요. 그리고 건달들을 죽인 사람도 내 눈으로 확인할 수밖에요……."

페넬로페는 에우뤼클레이아를 거느리고 계단을 지나 연회장으로 내려왔다.

오뒤세우스는 여전히 누더기 차림을 하고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화로 옆 기둥에 들을 기댄 채 서 있었다.

페넬로페는 다가가 화로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화로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불구하고 페넬로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기가 두려웠던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아내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오뒤세우스는 일처리를 계속했다.

하녀를 보내어 음유시인을 불러오게 한 것이었다.

음유시인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안뜰에서 연회장으로 들어오자 오뒤세우스는 그에게 춤곡을 연주하게 했다.

그래야 혹시 건달들의 친척이나 고향 사람들이 궁전 옆을 지나가는 일이 있어도 연회장에 결혼 잔치가 벌어진 줄 알 터였다.

친척이나 고향 사람들은 건달들이 죽은 것을 알면 달려와 복수라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음유시인으로 하여금 춤곡을 연주하게 함으로써 오뒤세우스는 하루라는 시간을 벌고 그동안 숨을 좀 돌리 생각이었다.

춤판이 시작되었다.

그는 하녀들의 우두머리 에우뤼노메에게 자기 몸을 씻기고 기름으로 몸을 문지르게 한 다음 새 옷을 가져오게 했다.

왕답게 차려입은 그는 화롯가에 놓인 왕좌에 앉아 화로 건너편에 앉은 페넬로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페넬로페는 앞에 있는 사람이 남편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페넬로페는 깎아 놓은 나무 인형처럼 앉아 건너편에 있는 남편을 나그네 바라보듯이 했다.

이윽고 오뒤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이자 가장 잔혹한 왕비로군요. 기나긴 세월을 떠나 있다가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나에게 아직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니 말이오."

그리고는 에우뤼클레이아를 향해 이렇게 덧붙였다.

"유모, 나 피곤해요. 어디 구석 자리에 내 잠자리 좀 보아 줘요. 자야겠으니까. 오늘 밤에는 나 혼자 자야 할까 봐요."

그때 페넬로페는 남편을 시험 해보기로 했다.

만일에 앞에 앉아 있는 나그네가 오뒤세우스와 페넬로페 자신만 아는 것. 유모와 하녀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하녀들만 알고 있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의심할 필요는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페넬로페는 이렇게 말했다.

"유모, 시키는 대로 하세요. 잠자리를 보되, 내방에다 보아서는 안 돼요. 침대를 내 방에서 끌어내려 잠자리를 보아 주세요."

오뒤세우스는 페넬로페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았다.

짐짓 그는 화가 난 척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어느 장사가 우리 침대를 방에서 끌어내요? 산 채로 자라는 올리브 나무로 네 개의 기둥을 삼아 내가 손수 만든 침대가 아니던가요? 그 올리브 나무를 자르지 않고 누가 그 침대를 움직일 수 있답니까?"

그 말 한마디에 페넬로페의 의심은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페넬로페는 걸상에서 벌떡 일어나 화로 건너편으로 뛰어갔다.

오뒤세우스 앞에 이르렀을 때 펜레로페는 오뒤세우스의 목을 흰 팔로 감으면서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듯이 끌어안고는 애원했다.

"저에게 화를 내지 마세요. 기나긴 세월,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답니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쉽게 믿는 법입니다. 그래서 두려웠던 겁니다."

오뒤세우스는 페넬로페를 끌어안은 채 화로 옆에 놓인 왕좌에 앉아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어느 곳에서 방랑하든지 아내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한순간도 없었다는 것도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또 떠나야 할 사람이었다.

그는 다시 떠나야 할 때를 대비해서 페넬로페에세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애기를 하지 않으면 그때 페넬로페가 또 슬픔을 겪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저승에 가서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혼령을 만나고 왔어요. 그때 테이레시아스는 내게 그러더군요. 고향 땅에 이르러도 여기에 정착하기 전에 또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요. 노를 어깨에 메고 또 한 차례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말이오. 이번에는 뱃길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땅 위를 방랑해야 합니다. 이 나라 저 나라를 방랑하면서 마침내 배라는 것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땅에 닿아야 합니다. 노를 곡식 까부는 켜로 오해할 만큼 바다에 무지한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그 나라에서 땅을 파고 노를 나무 심듯이 심은 다음에 포세이돈 신께 숫양 한 마리, 황소 한 마리, 멧돼지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 마침내 내가 포세이돈 신의 분노에서 자유로워집니다."

페넬로페가 대답했다.

"신들이 당신을 보호하고 마침내 고향으로 안전하게 되돌아오게만 한다면 내가 슬퍼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요?"

네 개의 귀퉁이 기둥이 살아 있는 올리브 나무로 되어 있는 침대는 새 침대보에 덮인 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진짜 결혼식 잔치라도 되는 듯이 흥겹게 춤추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에우뤼노메가 손에 횃불을 들고 두 사람의 앞길을 밝혔다.

 

 

15. 마침내 찾아온 평화

 

다음 날 아침 오뒤세우스는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그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그가 페넬로페에게 말했다.

"궁전의 여자들은 모두 이 방에 모여 있게 하세요. 내가 나갔다 돌아올 때까지 어떤 사람도 이 방에 들여놓아서는 안 됩니다.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세요."

그는 남자라는 남자는 모두 모아 궁전을 경비하게 했다.

그리고는 텔레마코스와 돼지치기와 소치기를 불러 단단히 중무장하게 했다.

그는 텔레마코스와 두 충성스러운 부하를 데리고는 산속에 있는 왕실농장으로 향했다.

아버지 라에르테스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여러 채의 농장 건물이 보이는 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오뒤세우스는 텔레마코스를 비롯한 세 사람을 미리 농장의 살림집으로 올려보내 시중드는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마련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가파른 과수원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계단식 포도밭이었다.

노인은 비바람에 찌들대로 찌든 옷차림을 하고 거기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무릎에다 가시에 긁히는 것을 막아줄 두꺼운 가죽 가리개를 차고 있었다

노인은 포도나무의 뿌리찜을 파는 데 여념이 없었다. 혼자였다.

하인들은 계단식 포도원에 필요한 돌을 주우러 가고 없었다.

그는 아들이 바로 곁에 다가갔을 때야 고개를 들고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아들이 먼저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는 마침내 오랜 방랑을 끝내고 돌아온 자기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했다.

"아주 열심이시군요, 어르신 이렇게 열심히 일하시니 여기 자라는 나무 중에 어르신께서 잘 모르시는 나무는 없을 테지요. 저는 이렇게 손질이 잘 된 포도 덩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누구의 노예이시지요? 이 훌륭한 포도밭의 주인은 누구시지요?"

라에르테스는 그토록 평화로운 포도밭에 갑옷으로 완전무장하나 나타난 사람을 의아해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는 누구의 노예가 아니라 이 포도밭의 주인이라네. 나는 이래봬도 한때 이타카와 주변의 섬을 다시리던 왕이었다네. 무슨 소리냐고? 내가 바로 라에르테스라네. 내가 바로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저 위대한 오뒤세우스의 아버지라네. 그대가 한 가지 질문을 했으니 나도 한가지 질문을 할 권리가 있네. 나그네여, 그대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오뒤세우스가 대답했다.

"저는 시켈리아 사람입니다. 저는 시켈리아에서 트로이아 전쟁을 끝마치고 귀국하는 아드님을 만난 적이 있지요. 한동안 저희 집에서 손님으로 묵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벌써 5년 전의 일입니다. 벌써 오래전에 고향에 돌아와 있겠거니 하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노인은 포도 덩굴 밑에 주저않아 슬피 울었다.

"5년 전에 시켈리아에 있었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죽은 게 분명할 테지."

오뒤세우스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고는 말했다.

"아버지 겨우 19년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 저를 알아보시지 못하십니까?"

라에르테스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페넬로페가 그랬듯이 그 역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아들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대가 진정으로 나의 아들이라면 증거를 대어 보게.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오뒤세우스는 옷자락을 걷고 왼쪽 다리에 있는 멧돼지 엄니에 입은 상처 흉터를 보여주고는 포도밭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따라와 보세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나무를 보여 드릴게요. 그 나무들이 어렸을 때는 저도 어렸지요. 어린 저는 개들을 데리고 아버지의 발치에서 놀고는 했습니다. 저기 있는 열세 그루의 배나무도 제 것이고 열 그루의 사과나무도 제 것입니다. 마흔 그루의 무화과도 제 것이고요. 그리고 때가 되면 쉰 고랑의 포도밭도 저에게 주시기로 하셨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라에르테스의 무릎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가슴은 너무나 큰 기쁨에 터질 지경이었다.

오뒤세우스가 부축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쓰러졌을 터였다.

라에르테스는 곧 침착을 되찾았다.

그가 아들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경고 같은 것이었다.

"네가 네 집에 도착하면 험악한 일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 말에 오뒤세우스가 대답했다.

"벌써 다녀왔습니다. 험악한 일도 제 손으로 처리했습니다. 아버지, 저의 재산을 축내고 저의 아내를 위협하던 건달들은 모두 처치하고 왔습니다."

노인은 아들의 귀향을 기뻐하면서도 가슴에 밀려드는 불안의 그림자는 감출 수 없었다.

"우리는 수가 적다. 건달들의 가족 친지들이 복수하겠다고 몰려오면 무슨 수로 맞설 수 있겠느냐?"

"그것은 그때 가서 걱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집으로 올라가시지요. 텔레마코스를 먼저 올려보내어 음식을 장만하게 했습니다."

두 사람은 살림집으로 올라갔다. 텔레마코스는 돼지치기와 소치기의 손을 빌려 벌써 불에서 갓 구워낸 고기를 자르고 포도주를 따르고 있었다.

라에르테스는 몸을 씻고, 하인이 가져다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식사를 시작하면서 오뒤세우스가 말했다.

"제가 아버지 연세가 되었을 때도 아버지처럼 건강하고 풍채가 볼 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응수했다.

"내가 네 나이만한 시절만큼 힘이 있어서 어제의 싸움에 함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 참인데, 라에르테스를 돌보던 하녀의 남편 돌리오스와 그의 세 아들이 돌을 모으러 갔다가 시장한 배를 움켜 안고 돌아왔다.

돌리오스 일가족이 돌아온 옛 주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돌리오스와 오뒤세우스는 오래간만에 만난 옛 친구 사이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세 아들은 앞을 다투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모처럼의 화기애애한 점심 자리였다.

그즈음, 오뒤세우스가 돌아왔다는 소식, 그리고 건달들이 모두 궁전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이 온 마을 온 섬으로 퍼져 나갔다.

살해당한 건달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꾸역꾸역 궁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가족들은 시체를 거두어 장례식 준비를 했다.

다른 섬에서 온 가족들은 시체를 배에 실어 고향 섬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마을의 공회당에 모였다.

모두 한자리에 모이자 제일 먼저 오뒤세우스의 화살에 쓰러진 안티노오스의 아버지 에우페이테스가 벌떡 일어나 오뒤세우스를 적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내가 그를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무수한 병사들, 무수한 배를 끌고 갔다가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그는 무수한 이타카의 젊은이들을 죽였습니다. 그가 이타카로 가져온 것이 무엇입니까? 슬픔입니다. 우리의 명예는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가 그자를 뒤쫓아가서 우리 형제와 자식들의 복수를 하지 않으면 우리 이름은 후손들에게 콧방귀 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한 지혜로운 노인은 오뒤세우스 손에 죽은 젊은이들이 죽을 만한 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족 친지들은 무기를 들고 에우페이테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오뒤세우스가 그 날 아침 왕실농장으로 올라갔다는 것을 알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왕실농장의 살림집에서 오뒤세우스 일행이 식사를 막 끝마쳤을 때였다.

문 앞에 서서 망을 보던 돌리오스의 아들 중 하나가 돌아서면서 아무래도 산길에서 창날이 햇빛을 받고 번쩍거리는 것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모두 밖으로 달려나갔다. 오뒤세우스와 텔레마코스, 충직스러운 돼지치기와 소치기, 늙은 돌리오스와 라에르테스, 돌리오스의 아내와 세 아들, 이렇게 열두 사람뿐이었다.

미리 준비해 둔 무기로 무장했다. 농장에서 방어하기보다는 넓은 데서 싸우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한 오뒤세우스는 일행과 함께 농장의 문을 열고 적을 맞기 위해 산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아테나 여신이 다시 한번 그를 도우러 나타났다.

먼저 여신은 다음과 같은 말로 라에르테스의 용기를 북돋았다.

"내 친구 라에르테스여, 제우스 신께 기도하라. 눈빛이 빛나는 아테나 여신에게 기도하라. 그리고는 힘껏 창을 던져라."

무기를 잡아본 지 오래인 노인 라에르테스는 이상한 힘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제우스 신과 아테나 여신에게 기도했다.

기도가 끝났을 때 적의 선두가 창을 던지면 맞을 만한 거리로 접근했다.

그는 창을 잡고 뒤로 힘껏 젖혔다가는 그대로 에우페이테스를 향해 던졌다.

에우페이테스가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그의 갑옷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뒤따라오던 무사는 우두머리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멈칫했다.

오뒤세우스와 텔레마코스가 각기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창을 움켜쥐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아테나 여신이 무리 속에서 양쪽의 무사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타카의 사람들이여, 피를 더 흘리기 전에 이 싸움을 멈추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라."

여신의 음성이 들리자 복수전에 나섰던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공포가 번져 갔다.

그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의 피는 이미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져 있었다.

그는 함성을 지르면서, 들짐승을 쫓는 사냥개처럼 적의 뒤를 덮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제우스 신이 마른번개 하나를 그의 앞으로 던졌다.

아테나 여신이, 신들의 아버지인 벼락의 신 제우스의 화를 돋우기 전에 그 자리에 멈추라고 명령했다.

그 순간 오뒤세우스가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여신의 명에 복종했다.

그의 아버지와 아들과 나머지 사람들도 여신의 명에 복종했다.

그들은 칼을 칼집에다 찔러넣고는 창 자루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는 아들과 형제의 복수를 맹세하고 올라왔다가 도망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아테나 여신은 모두 어울려 잔치를 벌이게 하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게 했다.

이로써 서로 원수로 대하던 두 편을 화해하게 한 것이다.

이타카와 주변의 섬에 마침내 평화가 왔다.